5.
어차피 원하는 모델을 골라 간 것이었으면서, 장태건은 이재하의 손을 끌고 매장에 전시된 각종 매트리스에 앉아 보았다.
결국 고른 것은 장한 건설의 인테리어 사업부에서 올린 매트리스 리스트 중 상위에 있던 그 제품이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재하는 그런 쓸모없는 행동들까지 다 좋았다. 왜 그렇게 좋은 건지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함께 고른 매트리스는 내일이 돼야 배달될 예정이었다.
시간이 조금 늦어 관계자들 모두 퇴근한 것 같았는데도 바로 배달된다는 직원이 미심쩍었다. 슬쩍 물으니 역시나 물류 창고 직원들은 이미 퇴근할 시간이라고 했다. 재하의 주문 때문에 몇몇이 퇴근 시간을 미뤘을 것이 확실했다.
이재하는 부러 마음 쓰지 말라며 내일 배달해도 괜찮다고 했다. 장태건의 의견도 묻고 싶었지만, 그는 매트리스값을 계산한 뒤부터는 하품만 쩍 하며 그 외의 일에는 관심을 끈 뒤였다.
마감 시간이 다 되어 매장을 찾은 건 재하 쪽인데도, 직원은 연신 사과했다. 재하는 사과할 필요가 없다는 말과 함께 매장을 떠났다.
시간은 뭔가를 먹기에 늦은 감이 없지 않았지만, 둘 다 덩치가 커다란 알파들이라 기초 대사량이 높은 탓에 한 끼만 굶어도 근육이 쭉 빠지는지라 뭐라도 입에 넣어야 했다. 그렇게 늦은 저녁은 한남동 빌라에 차를 세워 둔 뒤 걸어서 갈 수 있을 만한 식당에서 해치웠다.
꽤 괜찮은 식당들이 많이 들어선 한남동이라고 해도 고급 빌라촌과 식당 거리는 떨어져 있는 터라 걷기는 해야 했다. 초겨울의 차가운 밤공기가 두 사람 사이를 에일 듯이 지나가면, 장태건은 이재하가 감기에 걸릴지도 모른다는 핑계를 대며 달라붙었다.
“뭐 하는 거야, 더 붙어. 누가 여기서 뭐 하재? 당신 추우니까 붙어서 가자는 거 아니야.”
“그렇게 춥지는 않습니다.”
“서운한 말만 해서 안 되겠다.”
그러더니 장태건은 이재하의 입을 제 입술로 막아 버리겠다는 듯 달려들어 입을 맞췄다.
입술 표면은 차가운데 그걸 열고 들어온 혀 기둥이 뜨겁기만 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올라간 입꼬리를 내리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그가 허리를 끌어당겨 제 품 안으로 재하를 끌고 들어갔다.
식당가까지 꽤 걸어온 터라 1차에 취해 버린 취객 몇이 길 중간에 서서 입을 맞추고 있는 재하와 태건을 지나치며 휘파람 소리를 냈다. 츱, 하는 소리와 함께 입술이 떨어졌다.
태건은 약간 풀린 눈으로 재하의 입술을 보다가 그대로 다시 고개를 내려 젖은 입술만 빨아 주고는 떨어졌다. 아쉽기 그지없는 태도를 굳이 숨길 생각 없어 보였지만 말이다.
“밥 먹여야 하니까 봐준다.”
쯧, 하고 혀를 차더니 중얼거린 말의 속뜻을 알 수 없었다. 내내 뚫어지게 재하의 얼굴만 들여다보던 장태건은 이윽고 손을 깍지 껴 잡은 뒤 먼저 걸었다.
재하는 조용히 뒤를 따랐다. 태건이 그를 데려간 곳은 살짝 좁은 느낌의 태국 음식점이었다. 외장에 돈을 들이지 않은 것인지 가게는 약간 남루한 듯 허름했다.
테이블이 플라스틱인 것도 그 가게의 분위기에 일조했다. 태건은 익숙한 듯 자리에 앉았고, 재하는 가게를 슬쩍 둘러보다가 그 맞은편에 자리했다.
둘 다 신장이 큰 탓에 벗어 놓은 코트를 플라스틱 의자에 얹자 웬만한 사람이 앉은 만큼 짐의 키가 커졌다.
두 사람은 두건을 쓴 종업원에게 해산물 팟타이 두 그릇과 태국식 돼지고기볶음, 레드 카레와 볶음밥 한 접시, 캐슈너트를 넣은 닭고기 볶음을 시켰다.
웍이 돌아가는 소리가 주방 안쪽부터 둔중하게 들려왔다. 안쪽을 흘끗 보니 웍으로부터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곧이어 불 향이 섞인 볶음면 냄새가 났다. 재하는 그제야 허기를 느꼈다.
그들은 태국 맥주 두 병도 주문했다. 이재하는 계속해서 가게를 둘러보았고, 장태건은 테이블에 올린 팔에 턱을 괸 채 그런 재하를 보고 있었다. 언제 이런 곳을 다 와 봤냐고 묻자 태건은 작게 하품하며 대꾸했다.
“박명순이랑 모정길밖에 더 있나.”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세 사람이 함께 밥을 먹었던 것 같아 고마웠다.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장태건이 마냥 혼자 있던 건 아닌 듯해 기꺼웠다. 이재하 본인은 내내 혼자 지냈으면서 정작 제가 겪었던 일은 다 잊은 뒤였다.
음식이 나오기 시작하자 배가 꽤 고팠던 두 알파는 말없이 테이블 위의 것들을 해치웠다. 음식은 금세 동이 났다. 그사이 맥주를 여섯 번 정도 더 시켰다. 계산은 이번에도 태건이 했다.
재하는 계산대 옆에서 멀뚱하게 서 있다가, 데이트 상대에게 뭘 얻어먹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태건과 외식을 해도 데이트라는 인식 자체가 없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생각했더니 다음에는 제가 태건에게 밥을 사 주고 싶었다.
맥주만 각 여섯 병씩 마셨지만 그 정도에 취할 리는 없는데도, 술이 살짝 올라 더운 기운이 올라왔다. 그러니 가는 길에는 굳이 붙어 걷지 않아도 됐는데, 태건은 이번에도 재하의 허리에 감은 팔을 풀어 주지 않았다.
동네에는 대사관이 꽤 많았다. 차에서 내려 걸어 보는 건 처음이라는 생각에 대사관 현판을 뚫어지게 보자 목덜미에 축축한 입술이 닿았다. 놀라 고개를 돌렸다가 그대로 키스를 당했다.
입술이 떨어지자 장태건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왜. 뭘 봐.”
성희롱범은 뻔뻔하기까지 했다. 키스를 끝낸 재하가 슬쩍 쳐다보자, 뭘 쳐다보냐고 되묻는 것이 어이없었다.
대답하지 않고 걸으려는데 허리를 꽉 잡고 놔주지 않았다. 재하는 다시금 태건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집에 가서 야한 거 할래?”
시큰둥한 얼굴로 묻는다는 게 그런 것이었다. 픽 웃은 재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귓등이 살짝 붉어진 건 추위 탓으로 돌리면 될 것 같았다.
그가 쉽게 고개를 끄덕여 대답하자, 태건은 재하의 옆구리를 손바닥으로 슬쩍 문질렀다. 코트를 입고 있어 둔탁하게 느껴지는 감각에도 착실하게 열이 올랐다.
결국 몇 걸음 못 걷고 또 입을 맞춰야 했다. 이번엔 재하가 먼저 입을 벌렸다. 태건은 재하의 입 속을 들여다보며 입술을 맞부딪치기도 전에 혀를 내밀어 들어왔다. 살짝 까슬한 혀가 입술 점막을 헤집으며 파고들었다.
“음….”
결국 재하는 길거리에서 애먼 소리를 내야 했다. 태건이 좀 더 몸을 밀착했다.
그러나 그게 다였다. 길거리에서 페로몬을 개방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두 사람은 세 걸음에 한 번씩 쪽쪽거리면서도 부지런히 집으로 향해야 했다.
태건은 드물게 말이 없었지만, 맞닿은 어깨나 허리에 감고 있던 팔을 풀고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기둥부터 크게 얽힌 채로 자라난 나무 두 그루처럼 걸었다.
급하긴 했는데 초조한 건 아니었다. 그와의 관계는 늘 열락 같은 구석이 있었는데, 지금은 따뜻한 물에 잠긴 것처럼 안온하면서도 가슴 언저리가 묵직하고 또 간지러운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런가 집에 도착한 이후에도 바로 섹스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현관부터 입술을 비벼 올 거라 생각했던 장태건은 의외로 이재하에게 씻을 시간을 주었다. 그게 무척 의외였는지라, 얼떨떨해 쳐다보았다. 태건이 재하의 그런 표정을 내려다보며 한쪽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뭐. 같이 씻자고?”
재하는 얼른 고개를 저었다. 욕실에서 일을 치르게 될까 봐 두 번 망설이지 않고 제 방에 붙은 욕실로 향했다.
웃긴 건 그가 중간에 들어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는 거다. 재하는 씻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욕실의 문 쪽을 바라보았지만, 의외로 아무 일 없이 잘 씻고 나왔다. 저는 그가 돌아오길 기대했던 것일까? 어쩐지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머리 위에 얹은 수건을 세탁 바구니에 집어넣었다.
거실로 나가 보니 그사이에 다른 욕실에서 씻었는지 머리가 젖은 태건이 반쯤 채워진 바카랏 잔을 내밀었다. 재하의 잔은 얼음을 넣은 온더록스라 표면에 이슬이 맺혀 있었다. 그에게 잔을 건넨 뒤, 태건은 제 잔에 얼음 없이 호박색 액체만 따랐다.
두 알파는 나란히 젖은 머리를 하고 서로를 안주 삼아 목을 축였다. 어디 앉은 것도 아니었고 두 사람 다 아일랜드 식탁 근처에 선 채였다.
이어지는 말은 없었다. 간간이 맞부딪치는 시선 때문에 술기운이 올랐다. 잔을 다 비우자 태건이 호박색 액체가 담긴 크리스털 병을 들어 다시금 잔을 채워 주었다.
얼음이 많이 녹아 있는 상태였다. 재하는 브랜디가 차가워지기도 전에 또 한 번 목을 축였다.
조도가 낮은 조명의 빛이 태건의 콧날을 스치고 있었다. 조용히 저를 응시하는 시선이 집요했다. 목이 타는 것 같았다. 갈증이 아닌 조금 더 다른 느낌이었지만, 목마름 외의 단어로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결국 시선을 피한 재하는 문득 보고 싶었던 것이 떠올랐다. 그는 태건에게 조용히 물었다.
“태건 씨 방 구경 좀 해도 됩니까? 어제는 정신이 없어서….”
“구경? 그러든지.”
심드렁하게 말해 놓고는 재하의 손에서 잔을 뺏더니 제 잔과 함께 한 손으로 들고는 남은 손은 깍지를 껴 맞잡은 후 방으로 끌고 갔다.
손이 커서 그런지 한 손에 잔이 두 개 얹어져 있는데도 안정적이었다. 재하는 그 뒤를 따르며 면으로 된 검은색 민소매에 홈 웨어 팬츠를 입고 있는 장태건의 등을 바라보았다.
민소매의 암홀이 깊어 그의 광배가 언뜻언뜻 보였다. 등에서부터 시작되어 늑간까지 이어진 기다란 흉터도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잡히지 않은 손을 뻗어 태건의 흉터를 만져 보았다.
태건이 그런 재하를 슥, 돌아보더니 어이가 없다는 듯 혀를 찼다.
“방 구경 하자며.”
“네.”
“구경 가다 말고 사람 꼬셔서 어쩌게. 진짜 하고 싶은 게 뭔데.”
시큰둥하게 쏘아 대는 것같이 들려도, 속뜻은 그게 아니라는 걸 천천히 깨달아 가고 있었다. 재하도 나름 태건에게 익숙해진 참이었다. 피식 웃으며 태건의 손에서 잔을 빼 든 재하가 그와 눈이 마주친 채로 바카랏 잔에 입술을 붙였다.
태건의 시선이 브랜디를 삼키느라 위아래로 꿀렁거리는 재하의 목울대에 머물렀다. 잔을 다 비웠을 때는 태건이 재하를 핥듯이 보고 있었다.
이번에도 시선을 피한 채 제가 먼저 태건의 방으로 향했다. 정말 방 구경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건이 다시금 혀를 찼다.
“아주 말려 죽여라.”
무슨 뜻인가 싶었지만 이대로 잡히면 또 이틀은 밤을 새워야 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생전 처음 무언가에 쫓기는 기분이 들어 재하는 목덜미를 긁었다.
다행히 재하는 무사히 태건의 방으로 향할 수 있었다. 외출하는 동안 사용인들에게 방 청소와 매트리스의 수거를 부탁한 터라 침대가 놓여 있던 자리가 휑했다.
아예 프레임도 새로 사 버렸다. 어딘가 이음새가 나간 것인지 밤새 배를 맞춘 뒤 아침쯤에는 움직이기만 해도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기 때문이다.
재하는 그 빈자리를 잠시 바라보다 민망해져 고개를 돌렸다. 뒤따라온 태건은 방에 들어오지 않고 문설주에 기댄 채 방 안의 재하를 보고 있었다. 한 손은 홈 웨어 팬츠의 주머니에 찔러 넣고, 다른 손에 쥔 잔에 담긴 것을 마시고 있었다.
들고 있던 잔을 콘솔 위에 올려 둔 재하는 천천히 그의 방을 둘러보았다. 재하는 궁금하던 것을 물었다.
“양평 아주머니가 말씀하시길 태건 씨가 이 집을 결혼할 때 샀다고 하시던데.”
“…….”
“우리 결혼 전에 말입니다.”
재하의 물음에 태건이 말없이 잔을 비우고는 다가와 그의 허리를 껴안았다. 제 품으로 끌어당기는 손길이 아까와는 다르게 약간 조급했다.
“왜. 안 돼? 당신이 나랑 결혼까지 해 준다는데 집 하나 마련 못 하면 자지 떼야지.”
시큰둥한 말투는 여전한데 목소리가 약간 초조하게 들렸다. 재하는 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은 태건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고는 그를 마주 보았다.
태건은 일렁이는 눈으로 내내 재하를 응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재하는 그의 밤바다 같은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의아함을 느꼈다.
이재하가 장태건과 결혼해 ‘주었다’니? 재하는 제가 할 말이라는 생각하며, 눈매를 좁혔다. 그런 그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던 태건이 성급하게 고개를 내려 재하의 눈꼬리에 입을 맞췄다.
속으로 무언가를 계속해 생각하던 나머지,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렸다. 태건이 신경질적인 손짓으로 그의 턱을 제게로 돌려 다시금 입을 맞췄다. 브랜디 향이 났다. 두꺼운 혀가 밀려들었지만 재하는 이번에도 천천히 그를 밀어냈다.
“이재하.”
태건이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재하는 말없이 그 품에서 빠져나와 방의 한 벽면을 차지한 장으로 다가갔다. 마호가니로 제작된 장은 클래식한 느낌을 주는 동시에 빈티지라기보다는 맞춤 가구 같았다.
그의 방 다른 쪽 벽면에 놓인 미니바를 위한 장롱처럼 말이다. 재하는 조용히 걸어가 유리 케이스 안에 들어 있는 걸 들여다보았다.
만년필이었다. 몇 년 전 이재하가 태건에게 주었던, 모친이 재하에게 선물한 바로 그 만년필.
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믿을 수가 없어 살짝 입이 벌어진 채였다.
“이걸 아직까지 갖고, 있었습니까….”
제 방이면서도 뚝 떨어진 것처럼 재하를 보며 서 있던 태건이 다가와 다시금 그의 허리에 팔을 얽었다. 성마른 눈빛이었다. 그가 고개를 내려 재하의 어깨에 제 이마를 툭 내려놓았다. 태건이 내뱉은 한숨이 재하의 쇄골에 고여 들었다.
재하가 떨리는 손으로 태건의 등을 감싸 안았다. 태건의 입술이 재하의 목덜미에 진하게 비벼졌다. 마호가니 장에 등이 닿았다.
태건이 등과 자신 사이에 끼어 움직일 수 없게 된 재하의 장골쯤에 뭉툭하게 발기한 것을 슬쩍 문질렀다.
그에게서는 페로몬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큼한 해당화의 향이었다. 재하는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서 도리어 묻지 못했다.
꿈일까 봐 두려워졌다. 태건이 계속해서 재하의 뺨에 입을 맞추었다. 소중한 것에 닿듯이 부드러운 감촉이었다. 재하의 눈 앞머리에 툭, 눈물이 맺혔다.
태건이 그의 이마에 제 것을 톡 가져다 대며 말했다.
“야한 거.”
“…….”
“지금 하자.”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너무도 좋았다. 사랑해 미칠 것만 같았다. 가슴이 세차게 뛰어올랐다.
물푸레나무의 향과 쟈스민, 해당화 향과 바다 소금 냄새가 침대도 없는 방에 차올랐다.
부부는 결국 하나 남은 침실로 향해야 했다.
* * *
“으읏, 아-!”
젖꼭지가 당겨졌다. 까슬한 혓바닥이 바짝 선 유두를 입 안에서 쪽 빨아올렸다.
입술 점막 사이에 단단히 물린 젖꼭지는 점점 더 심을 키웠다. 발기하듯 일어난 그것을 기어코 쫓아온 혓바닥이 다시금 짓누르듯 뭉개며 핥아 댔다.
“흐, 잠깐-.”
재하는 저도 모르게 태건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을 집어넣었다. 손가락에 스치는 짧은 머리가 아쉬웠다.
그가 제 가슴을 빨아 줄 때나 다리 사이에 입술을 뭉갤 때마다 앞머리가 내려와 간지러웠는데 오늘은 짧기만 해 금방 헤쳐지는 머리카락이 어쩐지 서운했다.
밑에서는 탁탁 소리가 났다. 장태건이 재하의 유두를 문 채로 자위 중이었다. 허벅지에 태건의 발기한 것이 닿고는 했다. 끝이 젖어 있어서 재하의 허벅지에도 물이 튀었다.
다리 사이에서는 정액이 튀어나왔다. 태건이 싸질러 놓은 것이다. 한 번을 하고도 가라앉지 않았던 탓에 비문에서 제 성기를 뽑아낸 태건이 말했었다.
‘젖 빨면서 딸 칠 테니까 협조해.’
재하가 협조해야 하는 부분은 그에게 양쪽 가슴의 젖꼭지를 내어 주는 일이었다. 가슴이 빨리는 와중에도 꺼덕이는 제 성기에 손을 내려 만지려고 하면 붙잡혀 버리고는 했다. 그러면 벌이라도 주듯 앞니로 젖꼭지를 한 번 잘근거렸다. 재하의 허리가 크게 튀어 올랐다.
“아-! 그만, 아힉, 아….”
츄읍거리는 소리가 연달아 났다. 몸을 바르작거리자 태건이 풀린 눈으로 고개를 들더니 미간을 좁혔다.
“안 되겠다. 열 번만 박자.”
그러더니 재하의 오금 뒤에 손을 넣어 배 쪽으로 꾹 눌렀다. 덕분에 재하는 엉덩이가 달랑 들려 애들 기저귀 갈 때나 하는 자세가 되어 버렸다.
이 자세가 싫다고 해 봤자 듣지도 않은 걸 알아 손바닥으로 민망한 얼굴이나 가렸다. 태건이 그런 재하에게 그르렁거렸다.
“나랑 씹질 하는데 눈은 왜 감아. 다른 새끼 상상하는 것도 아니고.”
재하는 그만 기가 막혔다. 애초에 알파인 자신에게 이런 자세를 시킬 수 있는 건 이 세상에 장태건 단 한 명이었다.
그러나 그걸 말했다가는 이재하의 밝히는 아내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몰라 입만 벙긋거렸다. 태건의 두 눈은 풀린 채였다. 재하의 침실에는 두 알파의 페로몬이 방만하게 떠돌아다녔다.
“집을 왜 나가. 이 방에 당신 페로몬 냄새 다 빠졌잖아. 존나 아까워, 씨발.”
“흐, 아-!”
태건의 이마에는 핏대가 솟아 있었다. 삽입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제 오금 뒤를 붙잡은 채 위에서 아래로 떡방아에 절구를 퍽 박아 넣듯 무자비한 움직임이었다.
접합부에서 정말로 떡 치듯 철퍽이는 소리와 함께 물이 튀었다. 안쪽이 벌어지며 태건의 성기를 쫍 빨아들였다.
내벽이 저절로 움찔 조여들더니 툭 불거진 귀두를 맘껏 주물럭거렸다.
“…하, 아주 좆물이란 좆물은 다 짜내려고, 작정을-.”
“힉, 잠, 안 돼, 아-! 흐응, 히익-!”
안쪽이 제 것을 마구 빨아 대자 열이 받은 태건이 허리를 털 듯이 움직였다. 쑤욱 뽑아 접합부에 귀두만 툭 걸친 상태에서 그대로 크게 박아 넣기도 하고 뿌리 끝까지 삼키게 한 다음 그대로 소변보듯 허리를 탈탈 털어 대기도 했다.
그가 어떤 움직임을 하든 귀두 갓에 박힌 구슬이 재하의 내벽 안쪽 융기된 부분을 사정없이 문질러 댔다. 아예 그곳에 걸쳐 갈짝거리는 느낌에 재하의 두 눈동자가 뒤로 까뒤집어졌다. 그 꼴을 보여 주고 싶지 않아 황급히 두 눈을 감는데도, 기어코 상체를 아래로 내려 쫓아온 태건이 재하의 입 안으로 혀 기둥을 쑤셔 넣었다.
위든 아래든 추삽질에 바빠졌다. 태건은 욕을 삼켰다. 달기 그지없었다. 쟈스민 향이 물씬 풍겨 나오는 애액이 태건의 아랫배와 허벅지에 튀어 번들거리게 만들었다.
구멍에 혀를 박고 다 핥아 내고 싶은데, 자지를 빼는 건 싫었다. 이 상태로 하반신을 모두 처박고 싶어졌다. 안쪽 내벽이 사정없이 태건의 것을 조여 댔다.
다른 이에게는 발기조차 어려운 물건이 재하의 내벽 안쪽에서는 좆물을 질질 흘리면서도 발기가 죽지 않았다.
재하가 힘들어하는 게 눈에 보였다. 알파라 다행이지 그가 오메가였다면 장태건은 하나 있는 남편을 복하사로 보내 버렸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저를 다 받아 주는 그의 몸이 좆 터지게 좋았다. 안쪽에 아예 머리까지 처박고 싶은 심정이었다.
태건은 제 눈이 풀린지도 모른 채, 재하의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하며 허리를 움직여 댔다. 삐걱거리는 소리가 요란한 걸 보니 이재하의 침대도 맛이 가기 시작한 것 같았다.
오늘은 정말로 맛만 보고 끝내려고 했는데. 쫄쫄 굶은 개의 탓인지, 그의 주인이 너무도 맛있는 탓인지, 붙어먹는 강도가 점점 심해져 가고 있었다.
안쪽이 다시금 경련하듯 태건의 성기를 빨아 댔다. 사정을 참아 봐도 요도구가 콱 벌어지며 재하의 내벽 안쪽에 장대하게 선액을 쏟아 냈다. 말캉하게 융기한 곳에 요도구를 붙이고 선액을 쏴 대자 예민한 이재하가 허리를 뒤척이며 앓아 댔다.
못 견디겠는지 태건의 허리를 두 다리로 끌어안고는 내전근을 조여 대는데, 숨이 안 쉬어질 정도였다. 운동을 취미로 삼은 터라 내전근 힘이 장난 아니었다. 재하의 허벅지 옆선으로 강하게 수축한 근육이 일직선으로 드러났다. 그게 죽여주게 느낌이 좋아 그대로 사정해 버렸다.
태건은 미간을 찌푸렸다. 목덜미에 핏대가 솟았다. 울컥울컥 나오는 것들이 안쪽을 더욱 부드럽게 만든 탓에 싸면서도 발기가 죽지 않았다.
“흐아-! 응, 힉, 아-!”
재하가 못 견디겠다는 듯 태건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괘씸해 손목을 붙잡아 만세 자세로 올려 버리고는 젖꼭지를 빨아 줬다.
반쯤 넋이 나간 이재하는 제 뺨이 어떤 색인지도 모르겠지. 오로지 장태건만 이럴 때의 그의 뺨이 어떤 색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다. 김수민인지 뭔지 하는 오메가가 아니라 장태건만이, 이재하에게.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요도구가 또 한 번 발씬거리며 귀두가 안쪽에서 툭 부풀어 오르더니 정액을 소변보듯 싸 댔다.
“아, 씨발 또 쌌네.”
방금 사정을 마친 주제에 위각인한 상대의 내벽에 들어간 성기가 절제를 모르고 또 좆물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예 안쪽에 소변이라도 본 듯 양이 많아 접합부 사이로 질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재하는 이제 앓지도 못하고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장태건은 한숨을 내쉬며 제 성기를 쑤욱 뽑아냈다.
그마저도 느끼는 것인지 이미 사정하여 발기가 반쯤 풀려 있던 재하의 요도구가 툭 벌어지더니 백탁액을 찍 뱉어 냈다. 손을 뻗어 소 젖 짜듯 문질러 주자 몸을 덜덜 떨어 댄다.
“아, 잠, 안 돼, 흐-! 그만, 아, 힉-!”
발름거리는 요도구를 엄지로 집요하게 문질러 주자 재하의 하복근이 경련을 해 대기 시작했다. 제 성기를 훑어 주는 태건의 손을 허벅지 사이로 조이기까지 한다.
“하지, 아읏, 힉…. 그만-!”
엉엉 울 듯이 앓더니 재하가 쏟아 낸 것은 투명한 물이었다. 눈앞이 점멸하듯 보이지 않는 것인지 게게 풀린 양 눈동자가 서로 살짝 다른 곳을 보는 듯했다.
태건은 그 관자놀이쯤에 입술을 붙였다. 아무래도 마사지까지 해 준 다음에 재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조용히 그의 두 오금에 팔을 끼워 넣고 등을 받쳐 안아 올렸다. 아직 제 자지의 발기가 풀리지 않았지만 씻겨 주며 대충 등이나 허벅지, 엉덩이에 대고 문지르면 될 일이다.
침대에 진작 수건 몇 장을 깔아 두어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대로 오늘 밤을 또 보냈다면 새벽에는 둘 다 바닥에서 자는 상황이 일어났을 것이다.
“…태건 씨.”
극치감에 헤매다가 이제야 살짝 정신이 돌아온 것인지 품 안에 얌전히 안겨 있던 장태건의 알파가 바르작거렸다.
“그냥 자. 씻겨 줄 테니까.”
태건이 조용히 속삭였다.
이윽고 두 알파는 욕실로 사라졌다.
* * *
“…내가 운전하면 될 일입니다.”
“알겠어요. 갈 때는 서방님이 하셔요.”
태건이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재하는 그의 왼손에 끼워진 반지와 오른손의 손목시계를 흘끔 보았다.
기어 위에 얹어진 손에는 붕대를 감고 있었다. 사고의 흔적이었다. 재하 미간이 살며시 찌푸려졌다.
그러나 장태건은 정작 제 손의 상처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기서 우회전이던가?”
성북동 언덕 위는 왼쪽으로 꺾으면 누구누구 회장 집, 오른쪽으로 꺾으면 어디 회사 대표 집이 나왔다. 이재하가 나고 자란 본가는 우회전하여 언덕 꼭대기쯤에 있었다. 집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자가용이 있어야만 불편하지 않을 지리적 위치였다.
장태건의 세단이 가파른 언덕길에도 소리 없이 올랐다. 엔진음이 끓어오르듯 높아진 것도 아닌 부드러운 발진이었다. 그들은 이재하의 본가로 향하고 있었다.
굳이 이렇게 빨리 방문할 생각은 없었다. 장례식에 온 김란희의 수작으로 페로몬계의 이상이 생겼지만, 일단은 먼저 검사를 해 보려던 참이었다. 정확히 몸 상태를 아는 게 중요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페로몬 검사는 시간이 소요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것에는 시간이 걸리지 않지만, 이재하가 검진받을 만한 병원을 찾는 게 어려웠다. 보안 문제로 병원을 고르기가 까다로웠다.
아무리 이재하가 기업의 일선에서 내려왔다고 한들 건강에 관련된 이야기가 외부로 새어 나가면 연계된 파장이 어떻게 퍼져 나갈지 알 수가 없었다.
한번 방문했던 병원을 다시 방문하지 않거나 가는 도중 차를 바꿔 타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기 때문에 날짜를 조율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마땅한 병원을 찾아 조만간 진행할 예정이었는데 계획이 다 틀어졌다. 이유는 명확했다. 이번에도 이익형과 김란희 덕택이었다.
오늘 아침, 한남동 빌라로 매트리스가 배달되었다. 예기치 못한 손님과 함께.
간밤에 태건이 씻겨 주자마자 기절하듯 잠들었었던 재하는 무언가 둔탁한 마찰음과 유리가 깨지는 날카로운 소리에 눈을 떴다.
뭐지 싶어 벌떡 일어나다가 근육통에 다시 주저앉았는데, 밖에서 들리는 소리가 점점 더 심상치 않아지는 것 같아 일어나 옷부터 입었다. 밤새 태건이 옷 입는 걸 방해한 덕분에 알몸이었기 때문이다.
제 홈 웨어 팬츠를 아예 치워 놨으면 어쩌나 싶었는데 행어에 얌전히 걸려 있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빠르게 바지만 꿰입은 재하가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을 때,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야외에서나 느껴질 법한 찬 바람이었다.
초겨울의 바깥바람이 거실에 들이닥치고 있었다. 맨살이었던 상체에 차가운 기운이 닿자 이재하는 주저할 것 없이 바로 거실로 박차고 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거실에서는 장태건이 괴한 둘과 대치 중이었다.
창문은 깨져 겨울바람이 들이치고 바닥에는 누구의 것인지 모를 핏방울이 떨어져 있었다. 깨진 테이블의 잔해와 구정물이 묻은 워커 발이 남겨 둔 족적에 거실이 엉망으로 변한 상태였다.
가장 엉망인 것은 한 손으로는 괴한의 목을 조르고 있는 상태에서 남은 손으로는 다른 괴한이 찌른 칼날을 잡고 있는 장태건이었다. 이재하의 등골에 소름이 몰아쳤다.
그러나 그의 이름을 부르는 짓은 하지 않았다. 이쪽을 돌아보느라 괜히 신경이 분산되어 괴한에게 빌미를 줄까 봐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했다.
태건의 손아귀에 목덜미가 짓이겨지고 있는 놈은 이미 전의를 상실한 듯 눈을 까뒤집은 채였다.
태건은 그를 쓰레기 버리듯 던지고는 그대로 제게 칼을 쑤시려던 다른 괴한의 귀를 잡아 뜯어냈다. 맨손으로 말이다. 살점이 떨어져 나가자 남자가 비명을 질렀다.
“으아악-!”
“일어났으면 명순이 좀 불러. 전화번호 있죠?”
괴한의 귀를 뜯어내면서도 심드렁하기만 한 어조로 장태건이 말을 걸었다. 이쪽은 돌아보지도 않았으면서, 기척만으로 재하가 나온 걸 알고 있는 듯했다.
그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시큰둥한 어조에 정신을 차린 재하가 다시금 방으로 돌아가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드레스 룸에서 혁대를 가져왔다.
액정을 스와이프하자마자 전화번호부에서 명순의 이름을 찾아낸 뒤, 전화를 건 재하는 다시 거실로 가 태건이 진작 목울대를 작살낸 남자의 두 손을 뒤로 결박하여 벨트로 묶어 두었다.
그사이, 명순이 전화를 받았다.
- 예, 이사님.
“명순 씨, 지금 한남동 집에 괴한 두 명이 들어왔습니다. 태건 씨가 제압하긴 했는데 일단 사람을 보내 줘야 할 것 같습니다.”
- 바로 가겠습니다.
명순은 가타부타 말도 없이 바로 가겠다는 말과 함께 전화를 끊었다. 재하에게 다친 곳은 없냐 묻지도 않았다. 태건의 안부도 마찬가지였다.
심각하게 다친 곳이 있거나 태건이 잘못되었다면 나름 평온한 어조로 말을 걸지는 못할 거라는 생각을 한 듯했다. 정답이었다. 재하는 두말할 것 없이 끊긴 핸드폰을 내려 두었다.
그런 재하를 흘끔 보던 태건이 괴한에게서 떼어 낸 살점을 바닥에 툭 버렸다. 남자는 뜯어진 쪽을 부여잡고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태건은 그가 놓친 회칼을 잡고 자루와 칼날 부분을 양손으로 잡은 다음 우지끈 부러트렸다.
회칼의 심 부분이 박혀 있던 자루 안에서 부러져 나뭇결이 투둑, 하고 튀어 올랐다. 부러진 칼자루를 쓰러져 있는 남자의 머리에 쓰레기 버리듯 던진 태건이 짜증 난 목소리로 말했다.
“이 새끼들이 하라는 매트리스 배달은 안 하고. 내 침대는 언제 오는 거야, 대체.”
그러더니 가볍게 무릎을 접었다 편 것만으로 귀를 붙잡은 채 쓰러져 있던 남자의 콧날에 발뒤꿈치를 박아 넣었다.
“아악-!”
코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더니 괴한은 이제 코에서도 피를 질질 흘리고 있었다. 더 저항할 여력이 남아 있는 것 같지 않았다.
이미 의식을 잃은 다른 괴한을 제대로 묶어 둔 재하가 한숨을 내쉬며 태건에게로 다가갔다. 손바닥에 낙인처럼 찍힌 상처가 안타까웠다.
인상을 찌푸린 채 태건의 손을 가져가자 칼날을 잡고 있던 걸 괴한들에게서 멀리 툭 던져둔 태건이 얌전히 손을 내밀었다.
“다쳤잖습니까. 그걸 왜 맨손으로 잡아요.”
“내가 이겼는데.”
“봐서 압니다. 그 말이 아니에요. 왜 그걸 맨손으로 잡냐는 얘기잖아요.”
가만히 손을 내주고 있던 태건이 픽 웃었다. 이재하가 조금이라도 화가 났을 때 그런 식으로 대놓고 웃는 사람은 또 처음이었는지라 저절로 한쪽 눈썹이 솟았다.
태건이 그걸 보더니 금세 엄살을 부렸다. 무표정으로 과장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아이고, 너무 아프네.”
“병원부터 갑시다.”
그렇게 아파 보이지도 않았고, 표정 또한 그러해서 농담 섞인 엄살인 걸 알면서도 마음이 급해졌다.
옷을 입고 올 생각에 등을 돌리려는데 태건이 다치지 않은 손을 뻗어 재하를 붙잡았다. 그러더니 씩 웃고는 말을 이었다.
“그 전에 우리 성북동에 점심 먹으러 갑시다.”
성북동은 이재하의 본가였다. 그제야 재하는 걸음을 멈추고 바닥에 쓰러져 앓고 있는 괴한과 아직도 의식을 잃은 채 미동이 없는 남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그럼 이게….”
태건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재하의 핸드폰을 들어 괴한들의 턱을 거세게 움켜잡은 뒤 사진을 찍어 댔다. 그러면서도 재하의 물음에 답했다.
“아버님이 아무래도 당신 짝으로 내가 마음에 안 드시나 본데, 보통은 돈 봉투 주지 않나? 웬 흉악한 것들을 보내, 사람 놀라게.”
그 말에 저절로 숨을 멈췄다. 이익형이라니. 생각해 보면 매트리스를 구매한 것 자체가 유신 계열의 백화점에서였다. 막내 고모가 실권을 잡고 있다고 해도 이익형의 영향력이 아직은 그렇게 축소되지 않은 듯했다.
그쪽으로 소식이 갔을 테니 일꾼 몇에 장난을 치는 것도 쉬울 것이다. 어이가 없었다. 태건이 손쉽게 진압해서 그렇지, 널브러져 있는 괴한 둘은 꽤 전문가처럼 보였다.
귀가 뜯겼는데도 비명을 지르는 것 외에 다른 정보를 불지도, 태건에게 무언가 말을 하지도 않는 걸 보면 전문 인력이라는 얘기였다.
재하는 자신이 꽤 낙심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익형을 상대로 꽤 오랜만에 찾아온 실망감이었다.
장태건과 별거 중이었다고 한들, 이재하와 태건은 부부 사이였다. 그가 혼자 사는 줄 알고 한남동에 괴한을 보낸 것이라도 문제고, 이재하가 이 집에 들어와 있다는 걸 알면서도 괴한을 보냈다면 그것 역시 문제였다.
재하는 천천히 미간을 찌푸린 다음 태건의 손에서 핸드폰을 낚아챘다. 그의 손에 묻은 피가 옮겨 묻었는지 핸드폰이 미끌거렸다.
신경 쓰지 않고 이번에도 전화번호부를 뒤져 전화를 걸었다. 이재호에게 건 전화였다.
- …어.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 전에 받아 놓고 머뭇거리듯 대답하는 이재호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전히 미적지근한 태도라고 생각하며 입을 열었다.
“점심 식사 집에서 하겠다고 말씀드려. 내가 두 분 모두 뵙자 했다고.”
- 뭐? 야,
재하는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태건이 그런 재하를 보며 실실 웃고 있었다.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보다가 이내 한숨을 내뱉고는 손목을 끌어당겼다.
일단 치료부터가 중요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코와 귀를 부여잡고 뒹굴거리는 괴한을 발밑에 둔 채, 두 알파는 손에 난 상처를 치료하며 명순을 기다렸다.
태건은 급격하게 가라앉은 재하의 기분을 알아차렸으면서도 눈치 없는 척을 하며 실실거리는 듯했다.
“붕대 감는 법은 군대에서 배웠다 했지. 그럼 거기서 다른 새끼들이랑 같은 방 쓰고 그랬나?”
당연히 일반병이라 내무반 같은 커다란 방에서 공동생활을 하는 건데, 그런 식으로 말을 하니 이상하게 들렸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고 태건의 손바닥을 가로지르는 상처를 조심히 소독했다.
태건은 의료진에게 작업 거는 건달처럼 건들거리는 목소리로 제 손바닥을 들여다보는 재하에게 말했다.
“흉터 남으면 손금 하나 더 생기는 건데, 결혼 두 번 하지 않게끔 당신이 잘 치료해 줘 봐요.”
잡히지 않은 손으로 재하의 무릎을 슬쩍 문지르는 손길이 은근했다. 재하는 어이가 없어져 무뚝뚝하게 대꾸했다.
“의사도 아닌데 흉터로 남을지 어떻게 알겠습니까. 결혼 두 번 하기 싫으면 다신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네네, 알겠어요. 무서워서 기도 못 펴겠네. 마누라 쥐 잡듯이 잡는 타입이구나, 자기.”
그런 말장난에 끝까지 화를 낼 수는 없어 나지막하게 한숨을 내쉬고는 그를 끌어안았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것이 바로 어제저녁의 일이었다.
일어나 보니 거실 창문은 깨져 찬 바람이 불지, 테이블은 부서져 있지, 더욱이 장태건은 맨손으로 회칼을 잡은 채 누군가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그 꼴을 본 이재하는 순식간에 모든 피가 빠져 발밑에 고여 드는 기분이었다. 그것이 그의 손에서 나온 피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별안간 나타난 싱크홀에 발을 잘못 디딘 것처럼 쑥 빠지는 느낌이 들었던 것이다.
다시는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지 않았다. 그가 너무도 소중했다.
“다 피할 줄 아는 사람이 다치니까 화가 납니다. 칼은 재미로 잡은 거잖아요.”
“밑천 다 들켰네. 나에 대해서 왜 이렇게 잘 알아? 당신 나만 보고 살아?”
그렇다고 대답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그의 품에서 슬쩍 몸을 일으키려 하자, 어허, 어딜 하며 엄한 척을 한다.
어이가 없어도 붕대 감은 손으로 저를 누르니 상처가 터질까 봐 그대로 힘을 풀어 주었다. 태건이 제 품으로 들어온 재하의 등을 토닥이듯 두들기며 아직도 바닥에서 데굴거리던 침입자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눈깔 돌리세요. 아침 댓바람부터 남의 신혼집에 쳐들어온 건 너거든. 내가 내 집에서 애정 행각까지 참아야 해?”
그 말에는 정말 웃음이 나왔다. 속상한데 웃으니 얼굴이 살짝 일그러졌다. 표정이 꼴린다며 태건이 재하의 뺨에 키스했다.
그것이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이재하의 본가 앞에 서 있었다. 재하는 차에서 내려 대문 앞에 개떡같이 주차한 태건의 세단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태건은 이미 차의 트렁크에서 싸 온 것들을 내리고 있는 참이었다. 손바닥을 다친 사람이 무거운 걸 들려고 하길래 저도 얼른 뒤로 돌아가니 트렁크에는 뭐가 많이 들어 있었다.
커다란 박스에 담긴 것도 있었고 보자기에 싸인 기다란 병 같은 것도 있었다. 족히 80cm는 되어 보이는 원기둥 같은 병을 보며 이재하는 의문을 느꼈다.
성북동으로 향하기 전, 괴한들을 끌고 명순과 집을 나섰던 태건은 재하가 사람을 불러 거실 창문을 재시공하기 위한 치수를 재고, 어질러져 있던 것들을 모두 치운 후에야 돌아왔다. 그 잠깐 사이에 준비한 물건인 듯했다.
“…이게 다 뭡니까?”
“명색이 시댁 첫 방문인데 빈손으로 올 수 있나.”
바리바리 싸 온 물건이 하도 많아 재하가 나눠 들려는데 태건이 그걸 만류했다. 들어 준다고 해도 제가 다 들 거라며 몸을 휙 피해 버리는 통에 들어 주지도 못했다.
그걸 다 저 혼자 너끈히 들어 올리는 걸 보면 괜히 걱정했나 싶기도 했다. 그래도 포기하지 못하고 트렁크를 대신 닫고 있자 태건이 픽 웃으며 말했다.
“아주 그냥 마누라 걱정에 숨을 못 쉬네. 그럼 이거나 들어 주든지.”
그가 건넨 것은 비단 보자기에 싸인 찬합이었다. 다른 건 포장이 허술했는데, 찬합만 비단 천에 정성 가득하게 싸여 있었다. 재하는 덩치에 안 맞게 작은 찬합만 달랑 들고는 그의 뒤를 따라가야 했다.
대문 앞에 먼저 도착한 태건이 뭐 하냐는 듯 이쪽을 바라보길래 그제야 그를 지나쳐 초인종을 눌렀다.
- 예.
“선생님. 저예요.”
인터폰을 받은 이는 정미희 선생이었다. 재하의 대답에 인터폰 안쪽에서 작은 함성이 터졌다. 그녀의 밝은 목소리에 재하는 저도 모르게 슬며시 웃는 얼굴이 되었다.
- 어머, 얼른 열어 드릴게요.
띡-. 하는 전자음과 함께 대문이 열렸다.
상대적으로 짐이 단출한 재하가 먼저 들어가 태건에게 문을 열어 주었다. 태건 역시 뒤따라 들어오자마자, 정원석을 밟으며 내려온 정 선생이 재하를 향해 짧게 소리쳤다.
“이사님, 왔어요!”
이사 자리를 내려놓은 지도 오래고 이제 그 이사 자리는 재호의 것이 되었는데도 그녀가 저를 부르는 호칭은 여전했다.
그 호칭은 부르지 말아 달라 부탁드리면 곧바로 도련님이라 부를 걸 알기에 그냥 두었다. 재하와 태건의 반만 한 그녀가 냉큼 이쪽으로 오더니 잘 왔다며 함박웃음을 지었다.
“왜 이렇게 자주 안 왔어요. 반찬거리두 이사님 좋아하는 걸루 매번 다 새로이 해 놨었는데….”
서운하다는 투에 문득 가슴이 둔중하게 아렸다. 그녀가 정말로 저를 그리워한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재하의 모친이 살아 있었다면 딱 그녀의 나이일 것이다. 재하는 그런 정 선생을 보며 웃었다.
“죄송해요. 잘 계셨어요?”
“나야 뭐 그만하죠. 그럼 이분이 우리 이사님 배우자 되시는구나. 아유, 훤칠하시네….”
모친의 젖동무였던 정미희 선생의 성정은 모친과 닮은 구석이 꽤 많았다. 가녀린 오메가의 몸으로도 기죽는 일이 드문 성정이 딱 그랬다. 오늘도 정 선생은 본인의 두세 배는 되어 보이는 태건을 향해 맑게 웃었다. 스스럼없는 미소였다.
태건이 그런 그녀에게 고개 숙여 묵례하더니 입을 열었다. 무표정이었지만 평소와 같은 시큰둥한 얼굴은 아니었다. 게다가 아주 정중한 어투였다. 그의 입에서 그런 말투가 나오는 걸 보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네. 이재하 씨 배우자입니다. 이 사람 말로는 선생님께서 종로에 자주 가는 떡집 있다 하길래 약소하나마 챙겼습니다. 당신, 뭐 해요. 그거 드려요.”
…내가 언제 그런 말을 했어? 재하는 일단 태건이 한 말에 놀랐다가 그의 말투에 2차적으로 충격을 받았다.
고저 없이 부드럽게만 들리는 말투에, 재하는 살짝 놀라 태건을 바라보았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집에서 달려들고 말 안 듣던 반려견이 밖에 나가서는 얌전한 척 산책하는 걸 본 주인의 표정을 했다.
그런 재하의 팔뚝을 스치듯 친 태건이 재하가 들고 있던 것을 가리켰다. 그제야 재하는 그것이 정 선생의 선물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약간 놀란 탓에 말없이 내밀기만 하자 정 선생 역시 놀란 건 마찬가지였는지, ‘어머나….’ 하고 감탄했다.
“이게, 뭐예요, 어머….”
보자기에 싸여 있는 것은 약밥이 든 옻빛 찬합이었다. 약밥은 3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 정 선생의 단골 떡집 작품인 듯했다.
모친과도 입맛이 잘 맞는 정 선생이 새벽같이 나가 떡을 떼어 오면, 입이 까다로운 모친도 화롯불 앞에 앉아 가래떡을 구워 꿀에 찍어 먹고는 했다. 찬합에 담긴 것들은 그 떡집에 예약해야지만 제작해 주는 약밥이었다.
언제 이런 걸 다 준비했을까, 또 그가 이런 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놀라 바라보니, 그가 재하 쪽은 보지 않은 채, 정 선생에게 대답했다.
“저희 모친께서 자주 말씀하셨습니다.”
재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그의 입에서 그런 얘기가 나온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 선생은 조금 달랐는지 살짝 감탄한 음성으로 말했다.
“아아, 자당께서…. 그래요, 그래…. 고마워요, 나는 정말이지 생각도 못 하고….”
정 선생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녀도 태건의 모친을 아는 듯해 의아해졌다.
태건의 모친이 유신과의 혼담이 오고 갔다는 건 알지만, 정 선생은 재하의 모친이 유신에 시집오며 그녀를 따라온 사용인이었다. 태건의 모친과는 만날 기회가 없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했다.
정 선생은 태건이 제게 건넨 선물의 이유를 짐작하겠다는 듯이 말했다.
“아유, 두 분 어머님들이 계셨으면 이건 다 사모님 드리고 그럴 물건인데…. 가약 떡집 약밥 무척 좋아하셨거든…. 이사님 어릴 때 같이 가면 꼭 한 번 갓 뽑은 가래떡 같이 먹고 오구…. 봄에는 또 화전 지짐이 먹기도 하구….”
희미하게 나는 기억이었다. 재하가 아무 말 못 하고 서 있자, 태건이 그의 팔뚝을 팔꿈치로 슬쩍 쳤다.
“거봐, 시댁 올 때 빈손으로 오는 거 아니라니까.”
시큰둥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는데, 재하는 그제야 태건이 챙겨 온 선물의 의미를 알았다.
이 집에 모친을 추억하는 이는 저와 정 선생뿐이니, 모친의 젖동무인 정 선생을 챙기고 싶었던 것 같다.
입이 험해서 그렇지, 마음이 따뜻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그렇게 여긴다는 걸 세상 사람들이 알기라도 하면 모두 놀랄 텐데 말이다.
그러나 세간의 평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살아온 재하는 다른 충동을 견디는 중이었다. 문득 태건에게 입을 맞추고 싶어진 것이다.
아쉽게도, 갑작스런 입맞춤의 충동은 시도해 보지도 못하고 불발로 끝났다. 대문 근처에서의 작은 만남에는 이윽고 불청객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안 들어오고 뭐 하니.”
정원에 우뚝 서 있는 이는 김란희였다. 재하는 살짝 고지대인 정원 쪽을 올려다보았다.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는 백금색의 브레이슬릿만 걸치고 다른 장신구는 하지 않았지만, 여느 때와 다름없이 무척이나 미인이었다.
재하는 고개를 살짝 숙여 인사했다. 내내 어머니 소리를 듣고 살던 오메가는 제게 인사하는 알파의 정수리를 보고도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들 사이에 송곳 같은 침묵이 지나갔다. 재하는 어쩌면 김란희가 때아닌 방문의 이유를 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였다.
“결혼식 때 뵙고 처음 뵙습니다? 효도하고 싶어도 불러 주질 않으시니 올 수가 있나.”
태건의 페로몬이 기색을 부풀리고 있었다. 베타인 정 선생을 제외하고 그 정원에 있는 모두가 노도처럼 넘실거리는 바다 소금의 냄새에 놀란 듯했다.
뒤따라 나왔던 이재호가 우성 알파에게서 모친을 보호하듯 재빨리 그녀를 제 뒤로 숨겼다. 태건은 무표정한 얼굴을 한 채 그들이 있는 곳을 향했다.
“오랜만이야, 처남. 자, 이거 선물.”
“이게 무슨….”
그가 내민 것은 커다란 거치형 콘솔 게임기였다. 이재호의 나이에는 걸맞지 않은 것이었다. 재호가 받지 않자 태건은 그 품에 게임기 박스를 그냥 안겨 버렸다.
그러고는 재호의 어깨를 툭 짚었다.
“갖고 놀다가 어른들 말씀 다 끝나면 그때 나오고.”
제 어깨를 두들기는 커다란 손이 묵직하기 그지없어 이재호는 대답도 하지 못하고 상체가 허물어지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김란희가 놀라 둘을 바라보고 있다가 태건을 향해 소리쳤다.
“자네, 지금 뭐 하는 거야!”
태건이 그제야 ‘아, 이것도 있었지.’ 하는 표정으로 그녀를 흘끗 내려다보더니 빙글 웃으며 김란희의 등을 살짝 밀었다.
“추운데 뭘 나오셨어. 들어가셔요, 절도 받으시고. 받으실 건 다 받으셔야 억울하지 않지.”
“이, 이 본 데 없이 자란 게-!”
“동네 창피하게 왜 정원에서 이래. 들어가자니까요, 어머님.”
심드렁하게 말하며 마치 제집처럼 김란희의 등을 떠미는 꼴을 보다가 재하 역시 정 선생에게 안으로 향할 것을 권했다.
그들이 정원석을 밟으며 지대가 높은 정원에 올라올 때까지 이재호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게임기 박스만 노려보고 있었다.
재하는 그런 그에게 말했다.
“게임 하느라 밤새우지 말고.”
“미쳤냐?! 너나 저 새끼나! 나 저 새끼랑 동갑이거든?!”
발을 구르며 꽥꽥거리는 재호를 흘끗 본 재하가 안으로 들어가며 말했다.
“형수한테 저 새끼가 뭐야.”
뒤에서 재호가 욕을 퍼붓는 소리가 들렸다. 재하는 피식 웃었다.
* * *
식사 자리는 얼음물을 끼얹은 듯 냉한 기운만을 풍기고 있었다.
이익형은 어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퇴원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 같은데 재하가 온다하니, 그 회피성 짙은 비열한 성격에 김란희에게 모든 걸 미뤄둔 채 자리를 피했을 수도 있다. 그 때문에 식탁에는 딱 네 명의 인물만이 자리했다. 김란희의 옆자리에는 이재호가 앉고, 그 맞은편에는 재하와 태건이 나란히 앉은 참이었다.
급하게 받은 연락에도 여러 가지를 정성들여 준비한 건지, 정 선생이 소담한 음식들을 차례로 내왔다. 메밀 반죽으로 구운 구절판과 석박지 동치미, 가평 잣을 갈아 만든 잣국수와 불고기 등이 각자의 몫으로 알맞게 담겨 나왔다.
태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음식이 맛있습니다. 갈 때 싸 주세요. 이 사람 입맛에도 맞을 것 같은데.”
장태건은 음식에 대한 칭찬을 정 선생에게 했다. 물론 만든 이는 정 선생이 맞지만, 그쪽에 대고 칭찬을 건네기에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는데도 싱긋 웃으며 살갑게 말을 붙일 뿐이었다. 표정 없이 있을 때는 조금 살벌한 구석이 있는 미남이 싱글싱글 웃으며 말하자, 정 선생은 놀란 눈을 하고서도 태건을 따라 반사적으로 웃으며 말했다.
“어머, 그럼요. 이사님이 어만두도 좋아하고 그러셔서…. 많이 들어요.”
앞자리에 앉은 김란희의 표정만 점점 더 구겨졌다. 그녀는 연신 물을 들이켜다, 정 선생의 대답에 수려한 미간을 찌푸렸다.
“정 선생, 우리 재호가 이사 자리 앉은 게 언젠데 아직도 재하한테 이사 소리야.”
“작은 이사님한테도 늘 이사님 하는걸요.”
그녀가 정 선생을 향해 쏘아붙이자, 정 선생은 뭐 크게 잘못된 게 있냐는 듯 큰 눈을 깜빡였다.
이 집에 입성한 이래 내내 작은 사모님 소리만 들어 왔던 그녀는 제 아들까지 작은 이사님 소리를 듣자 기분이 단단히 상한 듯했지만, 여기서 더 따지고 들어 봤자 제 흠밖에 안 된다는 걸 아는지라 입을 다문 듯했다.
이재호 역시 불퉁한 얼굴이었는데 이복형의 눈치를 보는 것인지 크게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렇게 애매한 분위기에도 불구하고 그 식탁 앞에는 장태건만이 유일하게 막힘없는 젓가락질을 했다. 그는 매콤하게 조린 병어찜의 살점을 앞접시로 가져가 가시를 바른 뒤, 재하의 몫으로 건네주기까지 했다.
재하가 딱히 거절하지 않자, 장태건은 계속해서 음식들을 그의 앞접시 위로 날랐다. 피망과 소고기를 매콤하게 볶은 요리가 나왔을 때는, 유려한 젓가락질로 소고기만 쏙쏙 골라 재하의 앞접시 위로 얹어 주기도 했다. 가시를 바르는 것처럼 번거로운 일도 아닌데 굳이 유별난 행동을 하기에 그를 바라보자, 태건이 예의 그 시큰둥한 어조로 말했다.
“피망 싫어하잖아. 고기만 먹어.”
“…제가 언제 피망을 싫어했습니까.”
그에게 피망을 싫어한다고 한 적도 없거니와 이재하 역시 그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황당해하니, 다 알고 있다는 듯 무표정으로 재하를 향해 왼쪽 눈만 찡긋거렸다. 그 꼴을 모두 목격한 이재호가 살짝 토 쏠린다는 듯, 제 모친 몰래 헛구역질하는 척을 했다.
그렇게 두 사람에게만 단란하게 진행되던 식사 시간도 어느새 끝이 나고 있었다. 후식으로는 유자 소르베와 따뜻한 매실차가 나왔다. 장태건은 그마저도 입맛에 딱이라는 듯 그릇을 깨끗하게 비웠다. 그러고는 고개를 살짝 주억거리며 무감하게 뱉었다.
“당신이 이런 거 먹고 컸구나.”
그 말은 어감이 조금 묘해 고개를 갸웃거릴 수밖에 없었다. 무언가 기억을 더듬는 것같이 들렸기 때문이다. 단순히 이재하가 먹고 자란 음식에 감탄하는 것이 아니라 어쩐지….
무슨 뜻이냐 물어보려는데, 그제야 생각났다는 듯 태건이 자리에서 일어나 제가 가져왔던 선물 중 하나를 들고 왔다. 기다란 통이 식탁 위로 올려졌다. 높이가 80cm는 족히 넘을 것 같은 원통형의 무언가가 연한 분홍색 보자기에 싸여 있었다.
재하 역시 아까부터 그것의 정체가 궁금하기는 했다. 보자기에 싸인 것이 유리병 같은 건지, 태건이 나름 조심스럽게 들고 오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이 자리에서 그게 뭐냐 묻기에는 늦은 일이라, 그것의 개봉을 기대했다. 그러나 김란희는 아닌 듯했다.
그녀는 파리하게 질린 얼굴로 장태건을 노려보았다. 그 눈빛에는 아무런 타격 없다는 듯, 태건이 식탁 위에 그것을 올려 두었다.
“별건 아니고, 어머님 몸보신 좀 하시라고.”
태건은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그 손짓은 장모의 선물을 챙겨 온 사위의 그것처럼 쑥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는 이내 보자기를 풀어냈다. 부드러운 보자기 천이 유리병을 더듬으며 빠르게 스륵 내려가자 감싸져 있던 병이 드러났다. 노르스름한 액체에 담긴 무언가가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재하는 액체가 주는 굴절 때문에 크게 확대된 비늘을 먼저 보았다.
기다란 병 안에 담긴 것과 눈이 마주친 김란희가 놀라 가슴을 부여잡았다.
“엄마-!”
옆에 앉아 있던 이재호가 김란희의 어깨를 부여잡았다. 재하 역시 약간 놀란 상태였다. 병 안에 있는 것은 술에 담긴 커다란 뱀이었다.
안에 담긴 것은 아직도 살아 있는 것처럼 눈빛이 생생했다. 동공이 세로로 쪽 찢어진 뱀의 눈동자가 누군가를 따라 움직이듯 움찔거리는 것만 같았다. 하얗게 질린 김란희가 손을 휘저었다.
“저리 치우지 못해!”
“저게 뭐야! 얼른 치워!”
이재호 역시 질린 안색으로 놀란 모친을 감싸 안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태건이 씩 웃었다.
“조부 뒈지고 나서 창고에서 슬쩍한 건데 반응이 왜들 그래요. 가져온 사람 섭섭하게.”
태건의 말에 분개한 김란희가 화살을 이재하에게 돌렸다. 핏발이 선 눈으로 그를 노려보며 그녀가 고함을 질렀다.
“이, 이-! 어디서 저런 물건을 배우자라고 데려와서는!”
태건을 데려온 재하에 대한 비난이었다. 결혼한다고 할 때는 온갖 축복을 다 해 줘 놓고 판이 바뀌니 이제는 저런 물건이라 폄훼하는 게 다소 황당했다. 재하는 대꾸 없이 매실차를 홀짝였다.
태건이 검지로 병을 툭툭 치며 말했다.
“이게 페로몬 뱀입니다. 옛날에는 궁중에서 왕위 계승할 향양인한테 먹여서 향음인으로 만들었다는데, 뭐 그건 그냥 다 속설이고, 이 뱀술이 정력에 그렇게 좋아서 아무나 못 먹게 하려고 그런 낭설이 붙여졌다고 하네요? 어머님이랑 이 술이랑 취미가 잘 맞을 것 같아서 가져온 거거든.”
향양인과 향음인이라면 알파와 오메가의 옛식 표현이었다. 그제야 재하도 병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고 보니 뱀의 머리에는 작은 뿔이 두 개 솟아 있었다. 알파와 오메가가 있듯 간혹 인간이 인지할 수 있는 페로몬을 분출하는 동물 종이 있다. 뱀도 그런 아종 중 하나인 듯했다.
김란희가 몸을 부들부들 떨어 댔다. 유리병 뚜껑에 팔을 얹은 채 기대어 있던 장태건이 씩 웃었다.
“아, 뭐 찔리시는 거 있나 봐? 표정이 재미있네.”
그녀가 몸을 너무 떨어 대자 어깨를 껴안고 있던 이재호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김란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그녀는 여전히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떨고 있었다. 이재하는 고요히, 그런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재하 역시 그녀를 가족이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이재하는 너무 어린 나이에 어머니의 장례식을 치렀고, 김란희는 이듬해 들뜬 얼굴로 제 아들의 손을 잡고 이익형의 집으로 들어왔다.
아직 모친의 무덤 봉분으로 덮은 흙이 채 마르지도 않고 그 위로 잡초 한 포기 자라지 않은 때였는데, 그새 새로운 가족이 생겼다는 사실을 어떻게 인정할 수 있을까. 그래서 재하는 그녀를 받아들여야겠다는 노력을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먼저 나서서 그녀를 해하려고 한 적도 없다.
그러나 그녀는 어떻게 했나. 어떤 행동으로 이 자리까지 그 모든 악행을 끌고 왔나. 김란희의 떨리는 시선이 재하의 고요한 눈을 배회했다. 우스운 얘기지만, 그녀는 이제 와 자신의 악의와 적의를 제 수양아들에게 들키기 싫어하는 듯했다.
태건이 그런 그녀의 표정을 보고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어떻게, 우리 처남 한 잔?”
그는 곧 매실차 잔을 들어 입에 홀랑 털어 넣고 커다란 손으로 병의 뚜껑을 열었다. 달큼한 약술의 향이 주방에 퍼졌다. 그 뒤로 따라오는, 생전 처음 맡는 냄새가 있었다. 그것은 그 술병에 담긴 것의 생김과 더불어 모두에게 불쾌감을 일으켰다. 장태건만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병 안에 잔을 담갔다.
페로몬이 나오는 뱀이라는 말이 맞는 듯했다. 술의 향은 식당에 빠르게 퍼졌다. 알파의 것인지, 오메가의 것인지 알 수 없는 페로몬이 지척에 깔렸다. 이재호와 김란희가 동시에 코를 막았다. 향이 지독했기 때문이다. 재하는 찻잔을 내려놓고 그들을 관찰했다. 김란희의 얼굴에서 무언가 읽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장태건이 웃으며 이재호에게 술이 담긴 잔을 내밀었다.
“우리 집 죽은 영감이 직접 담근 거니까…. 음, 한 30년 됐나? 제대로 묵었겠네. 마셔 봐, 처남.”
그 말에 하얗게 질린 안색을 한 김란희가 비단 폭이 찢어지는 듯한 비명을 내지르며 찻잔을 쳐 냈다.
“그만, 그만해! 이 건달 같은 새끼! 원하는 게 뭐야!”
술이 식탁 위로 쏟아지며 찻잔이 바닥에 뒹굴었다. 태건이 바닥에 떨어져 저 혼자 빙글빙글 돌고 있는 찻잔을 바라보았다.
“…….”
“…….”
그가 아무 말 없이 서 있자 묵직한 침묵이 식당을 메웠다. 김란희 역시 입을 다물었다.
태건이 어떤 행동을 한 건 아니었다. 그는 그저 그 자리에 서 있기만 했고, 떨어진 찻잔과 쏟아진 술을 가만히 보고 있었다. 재하 역시 그에게서 위압적인 페로몬을 읽을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는 다분히 위협적이었다. 묵직한 존재감이 식당을 억누르고 있었다. 그가 곧이어 고개를 들더니 혀로 볼 안쪽을 둥글게 밀어내며 눈을 느른하게 감았다 떴다. 이재호가 벌벌 떨면서 제 모친을 등 뒤로 숨겼다. 김란희 역시 새파란 안색으로 그런 아들을 말리지 않았다.
태건이 눈을 가늘게 뜨더니 제 셔츠를 툭툭 털며 말했다.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는데, 웃음치고는 기색이 무척 험악해 보여 마주한 이의 뒷덜미가 쿡쿡 쑤실 지경이었다.
“근데 씨발, 다 튀었잖아. 성질난다고 가만히 있는 사람한테 술 엎어도 돼?”
양손을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고 고개를 살짝 치켜든 채 그들을 내려다보는 극우성 알파로부터 무시할 수 없는 압박감이 느껴졌다. 재하조차 처음 듣는 음색이었다. 거친 어조와 사방에서 조여 오는 듯한 위기감이 느껴지는 음색으로, 태건이 김란희를 향해 천천히 상체를 숙인 채 지껄였다. 어느새 종적을 감춘 웃음 대신 사나운 눈빛이 자리를 메운 채였다.
“그리고, 건달더러 건달 같은 새끼는 또 뭐야. 듣는 건달 기운 빠지게.”
“…….”
김란희는 입을 다물었다. 태건과 마주친 시선을 피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마지막 자존심 같았다.
그러나 곧이어 태건이 다시금 웃었다. 꽤 스스럼없는 웃음이었다. 그는 그대로 숙였던 상체를 바로 세우고는 김란희를 향해 입을 열었다.
“어머니, 저 정말 섭섭합니다.”
그의 말투는 과장된 구석이 있어 더욱 모욕적이었다. 김란희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목덜미가 울긋불긋해지는 것이 꽤 분노하고 있는 듯했다. 태건이 고개를 모로 꼬며 웃었다.
“아니, 그렇잖아요. 우리 이재하 씨한테는 오메가로 형질 변환을 시키는 약 몰래 먹여 놓고, 처남한테는 뱀술 한 잔 못 먹이게 하는 거잖아, 지금.”
그 말에는 재하 역시 살짝 당황했다. 김란희가 했던 짓에 대해 이재호에게까지 알릴 생각은 없었기 때문이다. 이재호가 그런 부모를 만난 것도, 이재하가 그런 부친과 그런 계모를 만난 것도 모두 그들의 잘못은 아니었다.
이 집에서 가족 비슷하게 호칭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첫째가 정 선생, 둘째가 이재호였다. 나머지는 타인보다 못한 이들일 뿐이었다. 재하는 이재호의 성정을 잘 알았다. 그는 굉장히 선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악하지도 못했다.
저를 돌아보지 않는 부친에 대한 애정 결핍과 저 하나만 보고 사는 모친의 숨 막히는 애정의 틈바구니에서 어떻게든 저를 증명하려고 노력하느라 오히려 엇나가고 비뚤어졌을 것이다.
누구나 이재호의 상황에서 이재호처럼 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누구나 이재호보다 결백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재하는 이재호에게 사실을 알리기는 싫었다. 어차피 알려질 사실이긴 했지만 그렇다면 조금 늦게 알려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그게 무슨….”
재하의 예상처럼, 이재호는 낯빛을 굳혔다. 그가 멍한 얼굴로 재하를 돌아보았다. 아니라고 말해 줄 수가 없어 가만히 있자 그가 다시금 제 모친을 돌아보았다.
김란희는 여전히 새파란 얼굴로 이재하를 노려보고 있었다. 마치 너만 없으면 모든 게 잘될 텐데, 하는 원망을 지닌 눈이었다.
그때였다.
“재하, 넌 여기 왜 온 거냐.”
낮고 굵은 중년 알파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익형이었다. 식탁 주위에 있던 네 사람은 일제히 소리가 들려온 쪽을 바라보았다.
식당 입구에 이익형이 서 있었다. 그는 높아진 혈압 때문에 잠시 유신 병원에 입원했다가, 압수 수색이 나올 거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장기 입원으로 전환한 참이었다. 그러나 그는 장기 입원을 하다 온 사람치고는 너무도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익형은 냉정하고 박하게 생긴 얼굴을 풀지 않고 말했다.
“집 안에서 웬 소란이야. 너는 결혼하고 이 집에는 안 돌아올 거라더니, 어디서 저런 물건이랑 기어들어 와. 본 데 없이 나고 자란 걸 내 집 담장에 들여? 제정신이야, 네가?”
부창부수라고 김란희가 했던 말을 고스란히 읊는 이익형을 향해 이재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뭐라 한마디 하기 위해 입을 열려는데 태건이 웃지도 않고 말했다.
“집구석 잘 돌아간다, 씨발.”
“…누가 자네더러 입 열라고 했지. 이재하, 뭐 해. 어서 나가지 않고.”
그 말에 태건이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팍을 두어 번 두들겼다. 담뱃갑을 찾는 듯한 손짓이었다. 정장 재킷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사용인들이 받아 간 참이라, 재하는 그 와중에도 사람을 불러 그의 담뱃갑을 가져오라 해야 할까 짧게 고민했다.
담배가 수중에 없다는 걸 떠올린 태건이 그대로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모로 툭 떨어트리며 말했다.
“아버님, 아들이 아버님 부인이 몰래 탄 약 먹고 오메가 될지도 모른다는데 할 말이 그게 다예요?”
“…집안 문제에 외부인이 왈가왈부할 것 없다. 밖에서 굴러먹다 온 건달 새끼는 저 쓰레기 챙겨서 썩 꺼져.”
이익형이 기다란 술병을 가리켰다. 재하는 더 기다리지 않고 일어나 이재호에게 말했다.
“대답이 좀 돼? 유신이 망해야 하는 이유 물었잖아, 너.”
“너….”
그 말에, 핏발 선 눈으로 재호가 재하를 돌아보았다. 이복형제에게서 시선을 뗀 재하가 장태건의 손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붕대를 감은 쪽 손이었다. 이재호의 시선이 느껴졌다. 재하는 단호한 음색으로 경고했다.
“사람 보내는 짓거리 하지 마세요. 체면 있으셔야 할 거 아닙니까. 그나마 일생 먹고살 만하게 남겨 드렸는데 이제는 안 되겠습니다. 아주 망하게 만들어야 정신 차리실 것 같네요.”
이익형은 분개했다. 이재하의 입장에서는 다소 뻔뻔하고 또 뜬금없는 분노였다.
“오냐, 이제야 네가 실토하는구나. 네 조부 때부터 일군 회사를 저 조폭 새끼한테 가져다 바쳐? 네가 정신이 있는 새끼야? 임자, 내 골프채 가져와.”
이재하가 자라는 내내 단 한 번도 그를 물리적으로 체벌하지 않던 이익형은, 재하가 유신을 조각내어 공중에 흩뿌리기 시작하자 집으로 불러들여 상습적인 폭행을 가했었다.
9번 아이언에 허벅지가 터지도록 맞아도 이재하에게는 이재호처럼 내 아들 더 때리면 콱 죽어 버리겠다며 말려 주는 모친이 없었다. 그는 그저 허벅지와 엉덩이에 든 멍이 러트기와 겹치지 않게 빠져, 그 시기에 저를 찾는 장태건에게 들키지 않기만을 바랐었다. 이익형은 그 이후로도 재하에게 습관적으로 폭력을 행사했고, 그 버릇이 금세 고개를 쳐든 것이다.
그 아수라장의 상황에서, 장태건이 웃으며 말했다.
“어디서 가끔 멍이 들어 오나 했더니.”
그가 목을 두둑 꺾었다. 볼의 안쪽을 뾰족한 혀로 밀어내며 여전히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을 이었다.
“난 또 그새 엉덩이 때려 주는 새끼한테 가버렸나 했잖아? 근데 우리 학부모님께서 직접 패셨다고요.”
장태건이 저벅저벅 걸어 나가더니 곧바로 이익형의 뒷덜미를 한 손에 쥐었다.
“뭐 하는-.”
놀란 음성이 이재호와 김란희에게서 터졌다. 오로지 이재하만이 장태건을 곧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너무도 선명했다.
“이게 무슨 짓거리야!”
“뭐, 뭐 하는 거야! 그거 못 놔?!”
“정 선생! 보안 업체 불러요, 얼른!”
도망치다 붙잡힌 개새끼처럼 뒷덜미가 달랑 들린 이익형과 이재호가 소리치자 김란희가 비명처럼 정 선생을 부르며 밖으로 뛰쳐나갔다.
저택에 상주 중인 보안 업체를 부르려는 모양이었다. 이익형은 장태건에게 뒷덜미가 잡혀 굽힌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대로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짐승처럼 끌려온 이익형이 재하의 앞에 섰다.
“미안합니다, 하세요. 얼른.”
“이거 안 놔?!”
아들의 새파랗게 어린 배우자에게 뒷덜미가 잡혀 그대로 허리를 푹 숙이고 있는 이익형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분노와 모욕감에 치를 떠는 듯했다.
재하는 천천히 이익형에게로 시선을 내렸다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재호가 재하에게 소리쳤다.
“야, 뭐 하냐, 너라도 말려 봐, 좀!”
“뭘 말려, 뭘. 이 가정폭력범이 분명 처남도 팼을 텐데 생각보다 속이 좋나 봐? 저쪽에도 죄송합니다, 하세요, 얼른.”
장태건이 이익형의 뒷덜미를 휙 들어 올리더니 그대로 이재호를 향해 또 허리를 꾸벅 숙이게 했다. 이익형은 윽윽 거리면서도 반항 한번 해 보지 못하고 고개를 푹 숙여야 했다.
아무리 나이 들었다 한들 그 역시 알파임에도 어마어마하게 내리누르는 힘에는 저항할 수 없는 듯했다.
장태건은 그대로 다시금 재하를 향해 뒷머리를 푹푹 눌러 허리를 숙이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고저 없는 어투로 내뱉듯 말했다.
“미안합니다, 하라니까.”
“…이 잡놈의 자식이! 여기가 어디라고…!”
이익형이 발악하듯 소리쳤다. 장태건은 하품이라도 나올 듯한 얼굴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치매야? 성북동이잖아, 여기.”
이익형은 대답하지 않고 저를 누르는 장태건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쉽지 않은 일인지 장태건의 손을 겨우 손톱으로만 긁어 대며 헉헉거렸다.
희끗한 머리 사이로, 안간힘을 쓰느라 새빨갛게 변한 두피를 바라보며 이재하가 느낀 것은 언제나 영원히 저와 어머니, 이재호와 김란희 위에 멋대로 군림할 것 같은 변변찮은 남자의 몰락이었다.
장태건은 여전히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비싼 밥 다 소화되기 전에 그냥 미안하다고 해, 얼른.”
이익형은 종이 인형처럼 장태건의 손아귀에서 빠져나가지 못한 채로 계속해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제힘으로 빠져나오려 했지만 척추기립근과 복근이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을 줘 봐도 몸이 바로 세워지지 않는 듯했다.
이재하는 입을 다문 채 그런 부친의 희끗한 정수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익형은 끝내 미안하다고 말하지 않았지만, 저 자존심에 그걸로도 충분히 모욕감이 되었을 거라 생각하며 그제야 태건을 만류했다.
“됐어요, 이 정도면.”
“됐어? 사과 다 받지 그래. 아님, 다음에 또 해 줘?”
장태건은 작은 벌레를 대신 잡아 주는 것처럼 사소한 걸 해 주겠다는 사람같이 가벼운 말투로 물었다.
그러고는 이익형의 뒷덜미를 위로 휙 들어 올렸다가 그대로 바닥에 메다꽂듯 던져 버렸다.
“어, 윽-!”
이익형이 식당 벽에 부딪히며 미끄러졌다. 여보! 하는 소리와 함께 보안 업체를 부르러 갔던 김란희가 그에게 달려갔다.
“나이 먹고 깡패 새끼한테 험한 짓 안 당하려면 잘 좀 살지 그러셨어요, 아버님. 쪽팔림 쩔어준다, 진짜.”
태건이 낄낄거리며 이익형의 정강이를 툭 찼다. 발치에 굴러다니는 돌멩이를 차는 것처럼 성의 없는 발길질이었다.
태건의 옆으로 조용히 다가간 재하는 쓰레기처럼 구겨진 이익형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다신 사람 보내는 짓거리 하지 마세요. 두 번은 이 사람도 저도 안 참습니다.”
주저앉아 이익형을 살피던 김란희가 핏발 선 눈으로 고개를 치켜들고 소리쳤다.
“너, 너 이, 배은망덕한-!”
재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양심을 도통 찾아볼 수 없는 계모에 대한 경멸이었다.
“어머니도 말씀 좀 가려 하세요. 받은 은혜가 있어야 배신할 은혜도 있을 텐데 배은망덕이라니. 교양 있으신 분이 말 쓰임을 함부로 하시네요.”
재하는 그 말을 끝으로 손을 뻗었다. 장태건이 예의 그 심드렁한 얼굴로 팔을 쭉 뻗어 재하가 내민 손에 깍지를 꼈다.
그들은 그렇게 식당을 나섰다. 그러다 태건이 먼저 걸음을 멈췄다. 그는 재킷 품 안을 뒤적거리더니 명함 한 장을 꺼내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운 것을 휙 튕겨 이익형의 얼굴에 명함을 맞혔다.
“아, 깽값 아쉬워지면 연락해요. 나 부부 보험 들어 놨거든.”
재하는 그 부부 보험이 이런 식의 합의금까지 물어 주진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아무 말 하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이재호가 그들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재하는 뒤돌아보지 않았다. 후련한 마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