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2. 개
4.
5.
6.
외전
1. 개들의 오후
Chapter 2. 개
4.
예약하고 가야 할 것 같아서 전화하니, 재하의 머리를 오래도록 담당했던 미용사는 흔쾌히 시간을 비워 두겠다고 말했다.
시간은 오후 5시. 빨라진 일몰 시각 때문에 집 안에는 온통 금색의 햇빛이 들어차 있었다.
거실만 걸어도 길게 늘어지는 제 그림자를 밟은 재하는 미용실에서 근처 백화점에 가는 동선을 생각하고 있었다. 내비게이션을 잘 켜지 않는 습관 때문에 늘 길을 외워서 다니는 터라 주행 전에 머릿속으로 목적지까지 가는 길을 한 번 그려 봐야 했다. 동선 확인 전에 먼저 옷부터 입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무슨 생각 중인지 알기라도 한 듯, 태건이 툭 말을 걸었다.
“나 입을 옷 골라 줘.”
표정과 말투 모두 또 심드렁하다. 정말 골라 줘도 입을 것 같지 않은 얼굴에 시큰둥한 어조. 그러나 그가 아무리 그런 식으로 말한다고 해도, 그는 재하가 고른 옷을 불평 없이 입을 것이다. 재하도 이제는 그걸 깨달아 가는 중이었다. 그가 저에게 증명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를 말이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그가 제 손목을 끌고 드레스 룸으로 가는 걸 열심히 따라가 주었다. 잘 따라오고 있나 확인이라도 하듯 뒤를 흘끔 바라본 태건이 재하와 눈을 마주치며 말했다.
“…오늘부터 내 방에서 자. 옆구리 시려 죽겠어.”
장태건의 그런 말투가 약간 특이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그가 직설적으로 내뱉는 요구들은 더없이 마음에 들었다. 혹여나 그가 취소한다고 할까 봐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그러겠노라, 약속했다.
매트리스가 바로 배달 올까 싶긴 했지만, 유신 계열의 백화점으로 가면 무리인 일은 아니었다.
썩어도 준치라고 경쟁 회사에 업계 1위 자리를 내준 유신 백화점은 매출이 바닥을 찍다가 이제 겨우 업계 4위로 회복한 실정이었다. 그래도 여전히 입점 매장들이 꽤 되었다.
원래는 김란희의 친정 동생이 차지하고 있던 백화점 대표 자리는 육촌 고모 중 막내 고모가 차지했다. 이재하는 고모들과의 거래에 신뢰성을 더하기 위해 굵직한 협상 전에 백화점을 먼저 막내 고모에게 넘겼다.
막내 고모는 유학 시절 파슨스 스쿨을 졸업한 터라 유행 감각과 시류를 읽는 업계에 꽤 재능이 있었다. 경영난으로 부진을 이기지 못했던 유신 백화점은 그녀의 취임 이후로 업계 4위까지 올라갔다.
나름 괜찮은 경영 방식을 고수하는 막내 고모 덕에 봐 두었던 매트리스의 매장이 입점해 있으니 크게 상관없을 듯했다.
사야 할 매트리스 브랜드는 의외로 태건이 골랐다. 소비해 봤자 세단이나 컨버터블, 요트 등 주로 탈것만 사는 재하로서는 가구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유통을 담당한 것도 아니라 더 문외한이기도 했다.
번거로워도 임 과장에게 전화해 부탁할 생각이었는데, 태건이 심드렁한 얼굴로 무슨 브랜드의 어떤 모델을 사면 된다 말하길래 놀랐다. 태건은 그런 재하의 콧방울을 검지로 툭 치며 말했었다.
‘인테리어 사업부 애들이 뽑아 온 가구 리스트에 다 있는 내용인데 뭘 놀라요.’
그는 간단하게 말했지만, 윗사람으로 오래 있었던 재하는 그가 담당하는 부서도 아닌데 일일이 보고서를 살피는 것이 꽤 번거로운 일이라는 걸 알고 있다. 그의 전공은 토목 쪽이었으니 말이다. 확실히 태건은 장한의 모든 부서를 아우르고 있었다. 그가 그렇게 역량을 펼치는 것이 무척 기꺼웠다.
어쨌든 같이 무언가를 사러 나가는 건 처음이라 기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옷을 골라 주는 것 정도는 당연히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더한 것도 해 주고 싶으니 그 정도는 아주 쉬운 축에 속했다.
쉽게 생각했던 재하는 자신이 옷에 관련된 감각은 없다는 걸 깨닫곤 잠시 멈칫했다. 그는 이내 어쩔 수 없다는 심정으로 그 점을 솔직하게 고하였다.
“…그런데 저는 옷 고를 줄 모릅니다. 사복 같은 것도 다 임 과장이 골라 줘서….”
“누구, 그 베타? 경쟁심 드네. 그럼 앞장서. 당신 옷부터 고르게.”
태건은 재하의 양쪽 어깨를 잡고 몸을 빙글 돌려 버렸다. 그 장난스러운 움직임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두 사람이 함께 재하의 드레스 룸으로 향하다가 문득 깨달았다.
“아직 짐 정리를 못 했습니다. 태건 씨 옷 갈아입고 나오면 그때 제 옷도 골라 줘요.”
“아, 결과물을 봐야 나를 신뢰하시겠다?”
그런 뜻은 아니었지만, 또 표정 없이 농담하는 게 기꺼워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이 다시 한번 재하를 뚫어지게 내려다보더니 고개를 내려 얼른 입술을 맞췄다.
츠읍,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진 것도 금방이었지만, 무표정하던 얼굴에 살짝 만족감이 스며들어 있었다.
“그래요, 그럼. 벗기기만 했지, 입히는 건 또 처음이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뒤돌아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잠시 헤어진 게 아쉬워 그의 뒷모습을 빤히 응시하던 재하는 태건이 룸으로 향하며 입고 있던 상의를 벗는 걸 볼 수 있었다.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커다란 상처는, 그가 움직일 때마다 물결치듯 요동치며 뱀처럼 감겨 있었다. 상의를 벗은 뒤라 정리하지 않은 뒷머리가 살짝 흐트러져 있었다. 그가 여전히 재하에게서 등을 돌린 채로 말했다.
“야하게 입어서 유부남 또 꼬셔 먹어야지.”
그 유부남이라는 게 누군데. 놀란 재하가 반사적으로 한 발자국 내딛자마자 어떻게 알았는지 뒤돌아본 태건이 피식 웃으며 말을 이었다.
“형, 혹시 마누라 있어요? 나는 어때? 나도 자지 큰데.”
그 말에 재하는 저도 모르게 웃으며 고개를 절레 저었다. 유부남 이재하는 대꾸하지 않고 제 몫의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태건이 뒤에서, “어디 가. 내 건 액세서리도 달렸는데 정말 안 볼 거야?” 하며 소리쳤지만, 이번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드레스 룸으로 들어온 재하는 명순이 가져온 캐리어들을 열어 바닥에 펼쳐 두었다. 지금은 바로 나갈 거라 정리할 시간이 없겠지만, 옷을 꺼내려면 어디에 뭐가 있는지 알아야 했다.
그러다가 커다란 캐리어 속, 어른 주먹만 한 정육면체의 상자를 보고 멈칫했다. 그건 오래전 사 둔 것으로, 간단한 리본이 묶인 시계 케이스였다.
재하는 이걸 사던 날을 어제처럼 떠올릴 수 있었다.
태건의 본부장 승진 기념 선물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예물로 맞춘 시계는 절대 차지 않는 것을 보고 불편해 그러나 싶어 조금 더 캐주얼하지만 격이 떨어지지 않는 시계로 골랐었다.
클래식 취향의 베젤이라 나름 그 브랜드의 대표 격인 모델로서 언젠가 이재호가 생일 선물로 사 달라고 조른 적이 있었다. 귀찮아 카드만 주고 말았기 때문에 이복동생이 실제로 그걸 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굳이 그걸 고른 이유는 그 브랜드에서 가장 값비싼 모델이기도 했고, 세련되지만 유행 타지 않는 디자인이 장태건과 어울릴 것 같았기 때문이다.
시곗줄이 가죽인 것도 마음에 들었다. 비슷한 모델을 재하도 소장하고 있기에, 언뜻 보면 한 쌍의 시계 같아 보이기도 했다. …물론 그것이 이 시계를 택한 가장 큰 이유이기도 했다.
사심이 잔뜩 들어간 선물이어서 그런가, 재하는 끝내 그 시계를 장태건에게 주지 못했었다. 그렇게 계속 저 혼자만 간직할 물건이라 여겼었는데….
검지로 상자를 툭 건든 순간이었다.
“그건 뭐야.”
“…아.”
드레스 룸 문틀에 기댄 장태건이 팔짱을 낀 채로 비스듬히 서서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장태건은 얇은 직물로 된 검은색 니트를 입고 있었다. 목을 반쯤 덮는 디자인이었는데, 폴라의 길이가 짧아서가 아니라 그의 목이 길어서 그런 것 같았다.
호두 알처럼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폴라에 반쯤 가려진 채로도 윤곽이 선명했다. 캐시미어 소재의 얇은 니트는 장태건의 무기 같은 어깨라든가 철봉처럼 일직선인 쇄골, 두꺼운 가슴팍을 여지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니트는 옷을 입고 꿰맨 듯이 딱 맞는 탓에 오히려 군신처럼 탄탄한 몸을 여과 없이 보여 주고 있었다. 견사로 된 검은색 슬랙스도 그의 허벅지 근육을 감싸다 지친 듯 윤곽이 적나라했다.
그런 차림을 한 건 또 처음이었다. 장태건은 보통 검은색 정장에 흰 셔츠를 입거나 검은 셔츠의 검은 정장을 입었다. 피가 튀어도 티가 잘 안 나는 색이라는 걸 정길이 말해 준 적 있다.
이번에도 검은색 일색인 건 마찬가지인데 묘하게 야해 보였다. 그의 장담처럼 그 방에 있던 유부남은 지금 장태건에게 다시 반한 상태였다. 그걸 아는지 태건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꼴려도 참으셔요. 떡 치려면 침대부터 사러 가야 하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재하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아 있어 그다지 신빙성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문득 쥐고 있던 상자를 떠올린 재하는 반사적으로 그의 손목에 시계가 채워져 있는지를 바라보았다.
왼쪽 손목에 은색 체인의 시계를 차고 있었다. 저도 모르게 맥이 탁 빠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태건이 다시 물었다.
“그건 뭐냐니까?”
재하는 그제야 상자를 살짝 숨겼다. 그러다가 이미 들킨 마당에 소용없음을 깨닫고 다시 손에 쥔 채로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섰다.
갑작스레 손에 땀이 나기 시작했다.
이걸 사던 때와, 그에게 건네지 못한 채로 멀어지던 등을 바라보던 순간이 교차해 가며 떠올랐다.
선물을 준비했을 때는 장태건이 막 본부장으로 승진한 시점이었다. 재하는 그가 본부장이 되었을 때 무척 기뻤다. 어느 정도 지위에 올랐으니 다시는 험한 일을 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를 떠나 물밑으로 애를 쓴 이유 중에는 그가 안전한 곳에서 일하기를 바랐기 때문도 있었다. 그러나 장태건은 여전히 사냥개 노릇을 하고 있었다.
거기에 옅은 절망을 느꼈었다. 자신이 하고 있는 짓들이 모두 쓸모없어지는 것만 같았다. 그와 멀어져 장창식의 집으로 들어오고, 표면적으로는 칩거하는 흉내를 내며 유신을 조각조각 낼 준비를 하던 노력이 헛수고 같아 보였다.
게다가 결혼 초의 장태건이 너무도 그리웠다. 재하의 그런 그리움을 더욱 깊어지게 만들 수 있다는 듯,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당시의 두 사람은 재하의 러트기를 맞이하여 아무런 말 없이 몸을 섞었었다. 결혼 초와 비교해 보면 이루 말할 수 없이 차가운 잠자리였다. 혼자서 흥분한 것 같아 수치심이 일기도 했었다.
그러나 그를 기억하는 몸은 쉽게 쾌감을 반추시켰고 장태건은 볼일을 본 뒤 화장실을 떠나는 사람처럼, 아직 여운에 헐떡거리는 재하를 두고 아무런 말 없이 침대에서 일어섰다.
그때는 아주 약간 비참하기도 했었다. 지난 며칠 사이 그와 지내며 놀랍도록 흐려진 감정이지만 말이다.
이재하는 자신이 사랑에 있어서는 꽤 단순한 인간이라는 걸 자각했다. 그는 장태건이 웃어 주면 기뻤고, 장태건을 행복하게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당시에 장태건은 웃지도, 행복하지도 않아 보였다. 그렇다면 그것이 그 비참한 느낌의 근원일까?
가슴 언저리가 살짝 묵직했다. 강원도 호텔에 처박혀 내내 수영하다가 음식을 퍼먹던 때의 기분이 다시 살아난 것 같았다.
그때였다. 언제 다가왔는지 모르게, 태건이 재하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표정이 왜 그래.”
그런 말을 하는 장태건이야말로 정작 미간이 살짝 찌푸려져 있었다. 늘 심드렁한 얼굴이니, 그의 그런 표정을 본 사람은 몇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는 그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장태건이 재하의 허리 뒤에 손을 두른 뒤 살짝 쓰다듬었다. 꼭 달래 주는 듯했다.
“내가 그거 삥 뜯어 갈까 봐?”
그의 연이은 물음에, 이번에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를 홀로 사랑했던 시간이 나름 길었던 것 같다.
보답받지 못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 것과 다르게, 이재하는 사실 그가 자신을 바라봐 주었으면 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천천히 상자의 리본을 풀고 포장을 벗겨 가죽이 덧대어진 정육면체의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새것처럼 보이는 시계가 들어 있었다.
어느새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를 의식하며, 재하가 입을 열었다.
“이건…, 태건 씨 승진 기념 선물입니다.”
“승진?”
그가 한쪽 눈썹을 슬며시 올리며 대꾸했다. 그럴 만도 했다. 그가 본부장으로 승진한 것은 벌써 몇 년 전이니 말이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다시금 대답했다.
“그때 정말로 축하하고 싶었습니다. 본부장 승진 축하한다고…. 이름도, 부르고 싶었는데 몇 번 시도하다가 계속 실패해서….”
별 얘기가 아닌데도 재하의 목덜미가 불긋해졌다. 귓등도 마찬가지였다.
가진 게 얼마가 되든, 자신이 알파이든 오메가이든, 우성이든 열성이든 상관없이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뭔가를 고백하는 건 미치도록 떨리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는 제 손이 살짝 떨리고 있음을 인지했지만, 그저 인지할 뿐 그걸 시정할 수가 없었다. 첫 출근, 첫 거래, 생애 모든 중요한 자리에서 이만큼 긴장한 적이 있던가.
그는 제 배우자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장태건은 알 수 없는 눈으로 재하를 응시 중이었다.
밤바다 같은 눈, 밀려오는 파도 같은 페로몬 향, 달게 퍼지는 해당화의 냄새. 재하는 천천히 웃었다. 꼴사납게 빨개진 얼굴은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상자에서 시계를 빼낸 재하는 버클을 연 뒤 태건의 왼쪽 손목을 잡았다. 그는 여전히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제 손목으로 무얼 하나 살피지도 않고 재하만을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눈을 마주할 용기가 부족한 자신을 탓하며, 그의 손목에 채워져 있던 시계를 빼내었다. 그러고는 들고 있던 시계를 채워 주었다. 태건이 가만히 손목을 내밀고 있었다.
재하는 짧은 숨을 내쉬었다. 생애 모든 중요한 자리에서 이만큼 긴장한 적이 있었을까. 아니, 있었다. 이렇게 척추를 타고 오르락거리는 긴장감을 느낀 적이 과거에도 있었다. 재하는 손쉽게 기억 하나를 반추해 냈다.
버클의 탱을 반대편 시곗줄의 홀에 끼워 넣어 고정했다. 어느새 손까지 붉어진 재하는 살짝 떨리는 손을 무시하며 그 기억 속에서 자신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장태건 씨.”
‘영원히 함께할 것을.’
“사랑합니다.”
‘맹세합니다.’
결혼식 날 그의 약지에 반지를 끼워 주며 했던 바로 그 말이었다.
이재하는 찬란하게 웃었다. 손을 뻗어 태건의 뺨을 감싼 뒤 입술을 부딪쳤다. 입맞춤을 위해 서서히 감기려는 시야 사이로 장태건이 살짝 멍한 얼굴을 하고 있는 걸 볼 수 있었다.
그의 입술에 입술이 닿았는데도 웃음이 멈추지 않았던 건, 아마 그가 놀란 표정을 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 *
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지난 결혼 생활 동안 개가 한 일이라고는 꼬리 칠 준비를 한 게 다였다. 그러니까 그 말인즉 꼬리 칠 준비만 오지게 하다가 시간을 다 보냈다는 뜻과 같았다.
거울 안의 미용사가 웃으며 이재하에게 말했다.
“이번에는 어떻게 해 드릴까요, 전처럼?”
“네. 하던 대로 해 주시면 됩니다.”
…존나 요망하네. 그러고 나가서 저렇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머리나 깎는다고?
태건은 테이블에 얹어 놓은 팔을 베고 눕듯이 턱을 괸 채로 이재하의 동그란 뒤통수를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단정하게 올리고 다녀 잘생긴 이마가 드러나던 평소와 달리, 머리를 자르기 위해 물을 묻힌 앞머리가 이마를 덮고 있었다.
그게 죽여주게 청순했다. 검은색 이발보를 뒤집어쓰고도 이재하의 생김은 기죽은 곳 하나 없었다.
같은 선생에게 머리를 맡길 생각으로 기다리고 있던 태건은 입구 쪽에 앉아 있던 오메가들과 베타 여자 몇몇이 이재하 쪽을 힐끔거리며 슬쩍슬쩍 웃는 꼴을 바라보았다.
짧은 한숨이 튀어나왔다.
“그래요, 니들도 저렇게 생긴 건 처음 볼 텐데.”
“…예, 예?”
태건의 중얼거림에 그의 앞에 음료를 놔 주던 미용실 직원이 놀라 움칠거렸다. 태건은 직원의 의문에 대답하지 않은 채로 혀로 볼을 굴리며 마땅치 않은 감정을 인내하는 중이었다.
무엇보다 주인의 옆에 있을 때의 개는 들개로 태어난 태생을 숨긴 채 잘 훈련된 사냥개 흉내를 내고는 했으니, 누가 이재하를 쳐다보든 선을 넘지 않는 이상 먼저 달려들어 물어뜯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거슬리는 것을 그냥 넘긴 장태건은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쓸며 이번엔 팔짱을 낀 채로 소파에 등을 기댔다. 느슨해진 척추에 한가해진 뇌가 이때다 싶었는지 아까 전 기억을 다시금 반추시켰다.
‘장태건 씨, …사랑합니다.’
…씨발. 아직도 자지가 얼얼했다. 그러고는 제게 입을 맞추는데, 멍하니 있다가 혀를 섞을 기회도 놓쳤다.
혀를 내밀어 그 입 안으로 들어가려는 순간 배시시 웃더니 입술을 떼어 낸 것이다. 덕분에 장태건의 혀만 입술 밖으로 삐쭉 튀어나온 채였다. 눈까지 풀려 죽여주게 멍청한 표정이었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소리로 장태건의 영혼에 지진을 일으킨 이재하는 금세 떨어져 여전히 찬란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런데 옷 정리가 쉽지 않네요. 그냥 아무거나 입고 나가야겠습니다.’
그러더니 입고 나온 옷이 그 빌어먹을 후드티였다. 담쟁이덩굴 안쪽에 세워진 학교 이름이 떡하니 프린트되어 있는, 소매가 살짝 해진 바로 그 옷.
장태건이 주제도 모르는 위각인을 떼어 보겠답시고 난리를 치던 그때, 이재하는 지구 반대편에서 저렇게 청순하게 머리를 내린 채로 저 옷을 입고 돌아다녔을 것이다. 배알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정장을 입고 머리를 올리면 틈 하나 없이 단정해 보이는 사람이 저 개 같은 옷만 입으면 순하고 착해 보이는 게 거슬렸다. 장태건은 중앙 도서관에서 나오던 20대 초반의 이재하를 떠올렸다. 두꺼운 전공 책 두세 권을 한 손에 든 채로 누군가와 전화 통화를 하며 차 문을 열던 대학생 이재하.
그대로 달려가 뒷좌석에 던져 놓고 뒤에서부터 박아 버리고 싶은 걸 참느라 숙소로 돌아오면 턱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이재하를 데리러 갔던 강원도에서도 살짝 붉은 눈가를 하고 저 요망한 옷을 입고 있었다. 마치 장태건의 지난 세월을 보답하듯이, 예전에 놓쳤던 것들을 이제는 마음껏 해 보라는 유혹같이 보였다.
그때의 장태건은 희열에 차 있었다. 온 생을 걸쳐 쫓던 사냥감의 발목을 물어 도주로를 끊고, 넘어진 사냥감의 목덜미에 송곳니를 박아 넣었었다. 집요한 턱 힘으로 끝내 숨통을 끊어 놓기까지 했다. 그 고양감이 아직도 배 속에 웅크리고 있는 채였다.
한마디로 장태건은 칭찬받고 싶었던 것이다. 드디어 사냥에 성공한 개가 당연히 받아야 할 칭찬을.
그리고 저 옷은 이재하가 그때 입었던 바로 그 옷이다. 위에는 후드 티를 입은 채 아래는 아무것도 입지 않고 제 위에 올라타던 꿈까지 꿨을 정도로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바로 그 옷.
뭘 알고 저런 옷을 입었을 리가 없다. 개의 주인은 개가 어디에 발정하는지 모른다.
생각하다 보니 다시금 뻐근해졌다. 장태건은 두 눈을 감고 목을 돌렸다. 근육과 인대가 맞부딪치며 뚜두둑, 하는 소리가 났다.
…지금이라도 한 발 빼고 올까.
묵직하고 얼얼한 게 아까부터 딱 죽을 맛이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발기했는데 그 매끈한 뺨에 비벼 볼 시간도 없었다.
들었던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이었는지 되새기는 것에 바빴다가,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이재하가 운전하는 차의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 사이 기억은 희미하기만 했다. 이재하가 그 말을 한 뒤로 장태건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딱 한 가지의 의문만 떠올랐기 때문이다.
‘아직 꼬리도 다 못 쳤는데 왜?’
그랬다. 장태건은 지난 몇 년간 이재하를 향해 꼬리 칠 준비만 좆 빠져라 하다가, 드디어 노친네를 처리했다.
개에게 있어서 그동안은 꼬리나 치고 있을 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나는 사업가입니다. 꽤 괜찮은 거래를 한 적이 대부분이지만, …어느 때는 실패하기도 했습니다.’
실패 사업이 된 탓이기도 했다. 열이 뻗쳐도 어쩌겠는가. 장태건 인생의 유일한 갑께서 실패라 단언하시는데. 그래서 이재하의 말에 대문을 뻥 차고 나가 한동안 또 사냥에 빠져 살았다. 뭐라도 결과를 물고 돌아가 제가 잡아 온 사냥감이라 자랑한 뒤 쓰다듬을 받고 싶었다.
그의 애견이 되려면 적어도 실패한 사업이라는 평은 듣지 말아야 했다. 그 전부터 이미 좆뺑이를 치고 있었지만 그 이후에는 더 치열하게 살았다.
이재하의 납치를 도모한 것들 중 반 이상이 이미 인천항에서 빠져나가 서해안에 가라앉은 후였다. 그게 아니면 어느 야산에 시멘트와 함께 굳혀지든가.
그러나 가장 큰 대가리를 치지 못하고 있었다. 이빨을 다 뽑아 놨더니 아직 발톱이 남았다며 덤벼드는 늑대 새끼가 따로 없었다.
내일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늙은 주제에 그 많은 건 다 싸 짊어지고 가려는지, 영감은 마지막까지 발악을 일삼았다. 명원을 통해 이재하를 납치하고 제 뒤통수를 쳐 놓고선 뻔뻔하기는.
그러나 곧이라고 생각했다. 백일 붉은 꽃은 없다. 장태건은 제게도 기회가 올 것을 알았다. 영감 밑에서 굴렀던 이유는 그저 틈을 노렸던 것뿐이었다.
장한용 역시 그 틈에 당했었다. 물론 경찰도 모르게 처리한 일이니, 장창식이 아들의 죽음에 짐작한 바 없는 게 당연했지만, 바로 옆에 그런 훌륭한 예시를 두고도 방심하는 그 멍청함이 이해되지 않았다.
장한용에 비해 장창식은 예리한 구석이 있는 노인이었다. 50전으로 사업을 일으킨 건달은 해를 묵을수록 노련해졌다. 그러나 그 역시 끝은 방심으로 인한 비명횡사였다.
장창식의 패인은 그것이었다. 그의 조손이 아직도 혁대에 얻어맞고 쉰밥이나 구걸하던 새끼 개인 줄 알았다는 것.
하여간 모자란 종자들. 패서 키울 거면 아예 다리 정도는 분질러 놓을 것이지 애매하게 팬 덕에 독만 바짝 오른 채로 자라나 버리지 않았나. 장창식 역시 손자 교육 실패로 인해 늙은이 말년에 깽값을 거하게 물고 가느라 관짝을 짜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얌전히 있었다면 정해진 명대로 살려 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명원에 입김을 넣어 이재하를 납치시킨 통에 몇 년이나 저를 독수공방시킨 점이 심하게 괘씸했다.
덕분에 노친네도 결국은 제 5분의 1만 한 백자기에 갇힌 채로 지하로 돌아갔다. 장태건에게는 거리낄 것이 없어졌다.
주인도 아닌 것들의 밑에 묶여 있느라 찌뿌둥해진 몸을 풀고 진짜 제 주인을 만나러 가기 위해 강원도로 향하던 길은 못 견디게 짜릿했다.
또 한 번 실패한 사업이다 뭐다 하는 소리를 한다면, 제 좆 위에 앉혀 두고 몸이라도 따먹으며 지내 달라고 바짓가랑이를 붙잡을 계획이었다.
줄 게 없으니 자지라도 드려야지. 그에게 제 쓸모에 대해 증명하고 싶었다. 그게 물건을 벅벅 닦아 향수까지 뿌려 둔 채로 이제나저제나 호출만을 기다리는 호스트 바 선수 새끼들과 다를 바 없는 일이라 해도 말이다.
그것 외에도 여러 가지 계획이 있었다. 계획 A가 실패하면 계획 B도 있었다. 대처 방안은 넘쳤다. 이재하에게 장태건이 실패한 사업이라면, 장태건에게 이재하를 얻는 일은 온 생을 다 바친 사업이었다.
그러니 급할 게 없다고 생각했다. 제일 중요한 것들은 진정시켜 둔 상태고, 두 사람은 아직 부부 사이였다. 그 법적, 사회적 인정받은 운명 공동체를 들먹이며 이제부터 맹렬히 꼬리를 흔들어 예쁨받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대뜸 사랑이라니.
“길이 어떠세요?”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이재하의 단장이 끝났다.
거울을 통해 미용사가 이재하를 향해 물었다. 그를 보며 흡족한 듯 웃고 있는 모습이 거슬렸지만, 딱히 이성적인 접근이 아니라 잘 나와 준 제 작품을 보는 듯한 뿌듯함이라 봐줬다.
미용사는 베타에 애 엄마라고 했다. 그렇다고 주인 지키는 개가 경계심을 허물 수는 없는 얘기지만, 재하에게 친절한 여자들은 비단 저 미용사 하나뿐이 아니었다. 이재하는 가정이 있고 다복한 집의 유부녀들에게 애정을 받는 타입 같았다.
임 과장인지 하는 베타도 그렇고 장창식의 집안일을 돕는 양평댁도 그랬다. 가만히 있으면 냉정해 보이는데 말 몇 마디만 나눠도 다정하고 귀티가 나 계속 챙겨 주고 싶은 인상이라는 평이었다.
반짝거리고 고귀하단 거지. 원래 그런 건 오메가들이나 베타 여성들이 더 잘 알아본다. 그들은 귀하게 자란 것들을 귀신같이 알아차렸다. 겉껍데기가 훌륭한 것은 이쪽도 마찬가지인데, 장태건의 주위로는 물웅덩이 피해 가는 개미 떼처럼 쩍 갈라지는 것만 봐도 그랬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기회가 없을 것이다. 이재하는 유부남이고 그의 다정은 장태건만을 향할 것이다. 그가 직접 본인의 입으로 증명했다. 단 아홉 글자로 말이다.
장태건은 여전히 팔짱을 풀지 않은 채로 느른한 눈을 떴다. 아무래도 한 발 빼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수납해 둔 허벅지 부근 바지 안쪽이 습했다. 얼마 정도 선액이 나온 듯했다.
찝찝하니 그냥 둘 수 없어 자리에서 느릿하게 일어나려던 참이었다. 어느새 이발보를 치운 이재하가 반짝이는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미용사도 마찬가지였다.
“태건 씨 차롑니다.”
그러고는 살짝 웃는데 딱 한 가지 생각밖에는 들지 않았다.
‘저게 누굴 말려 죽이려고.’
알고 저러는 것도 문제지만 모르고 저런 행동을 한다는 게 가장 큰 문제였다. 짧게 한숨을 내쉰 장태건이 그들을 향해 걸어가 방금까지 재하가 앉았던 의자에 앉았다.
여전히 발기해 있는 상태라 바지 한쪽만 불뚝하게 튀어나와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대로 사정을 참아 내는 것밖에는 도리가 없었다.
이재하와 관계를 맺은 뒤 서서히 옅어지던 위각인은 아직도 그 명맥을 유지했다. 지독한 새끼였다.
혼자 맺은 각인이 아직도 떨어지지 않는 바람에 장태건은 아직도 이재하의 이름 석 자만 보면 좆물을 쌀 것 같다가도 그의 안에 박은 채 영원히 사정하고 싶지 않았다. 조루와 지루의 경계선에 선 애매한 성 기능 하자 물품이 되어 버린 것이다. 그러니 장소를 불문하고 벌떡벌떡 단단해지지.
다행히 우람하게 두꺼워졌던 것은 미용사가 자리에 앉은 태건의 머리를 몇 번 만지작거리자마자 식어 버렸다.
그것도 위각인의 증상 중 하나였다. 이재하 외에는 발기가 잘 되지 않는 것이다. 하자 물품인 걸 속이고 결혼했지만, 다행히 이재하의 뒤 경험은 장태건이 처음이었다.
어떻게 잘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원래 이렇게 잘 싸는 것이다, 네 안이 내 좆물을 빨아 먹으려고 욕심을 부려서 그런 거다, 푸지게 싸고도 바로 단단해지면 된 거 아니냐 뻔뻔하게 우기면 선한 눈매로 저를 보다가 고개를 끄덕거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상하기는 했다. 부하 직원에게 다정하다고 한들 이재하 역시 우성 알파 특유의 냉엄함을 아주 버리지는 못했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1/3을 먹여 살리는 기업체를 손수 운영하지 않았던가.
그런 사람이 장태건의 뻔뻔한 구라에는 잘도 꿀떡 속아 넘어갔다. 원래 의심이 없는 타입인 것이 아니라 장태건을 믿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가 제게 사랑을 속삭이던 두 눈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추측에 신빙성이 더해졌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다시 한번 한쪽 허벅지 바지춤이 팽팽해졌다. 그때였다.
“저는 여기까지 좀 짧은 게…. 태건 씨 처음 만났을 때 길이가 그랬던 것 같은데.”
어느새 다가온 재하가 태건의 전면에 놓인 거울을 바라보며 그의 목덜미와 귀 옆을 만지작거렸다.
살짝 벌어진 입술로 거울을 집중해 바라보고 있는 것이 태건의 지난 머리 길이를 떠올리는 것 같았다. 미용사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의 머리 길이를 두고 저희끼리 아주 다른 세상이었다.
아, 씨발-.
기어코 살짝 사정한 것 같았다. 태건은 살짝 고개를 젖혀 제 귀 옆을 쓰다듬던 재하의 손 위로 뺨을 비비적거렸다. 재하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미용사가 그걸 보고 어머, 하고 작은 소리를 냈다.
장태건은 거울을 통해 재하의 두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채였다. 존나 요망해. 그런 말을 해 놓고 날 이런 데 끌고 와? 마누라 좆 터져 죽는 꼴 보고 싶은가 보지. 무언의 비난을 섞은 채로.
그걸 알아들은 건지 재하의 귓등이 조금 붉어졌다. 그는 서서히 손을 떼어 내려다가 태건의 뺨을 한 번 더 문질러 준 뒤 등을 돌려 태건이 있던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
“음, 적당히 잘라 주세요. 다 어울려서….”
태건은 그런 재하의 뒷모습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가 태건에게서 등을 돌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태건의 음료수를 마시는 모습까지.
태건은 이내 픽 웃으며 그의 등 뒤에 대고 말했다.
“그거 내 건데. 간접 키스했네, 우리.”
재하의 어깨가 크게 들썩이더니 헛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사레도 저처럼 조용하게 들리는 것이 신기했다. 그걸 보며 낄낄 웃는데 미용사가 옆에서 뻘쭘하게 서 있다가 어떻게 잘라 드리냐, 말을 걸었다. 태건은 고개를 바로 하며 말했다.
“우리 남편이 시원하게 치랍니다.”
재하가 못 참고 쿨럭거렸다. 아예 그 빌어먹을 후드 티에 쏟은 모양인지 테이블 위의 티슈를 더듬더듬 뽑아내기까지 했다.
장태건은 피식 웃었다. 제가 적신 것은 바지춤이지만, 상의를 적신 걸 보며 쌤쌤으로 쳐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태건이 운전하겠다고 하자, 이재하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이거… 부부 보험 들어 놓은 차입니다. 지난번에 강원도에서도 태건 씨가 운전했으니까. …태건 씨 차에도 부부 보험 들어 놓았으면 좋겠습니다. 여차하면 저도 탈 수 있게….”
저나 태건이나 주로 남들이 운전하는 차를 타는 주제에 평범한 부부 사이처럼 자동차 보험을 부부 보험으로 들어 놓잔다.
사고가 난다고 해도 보험이 필요할 정도로 현금이 모자라는 일은 없을 텐데, 부부 보험 운운하는 걸 보는 게 기꺼웠다.
짧아진 머리에 차가운 바람이 스치는 걸 느끼면서, 장태건은 대답하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그런 태건 대신 재하가 미용실 주차장의 발렛 직원에게 꾸벅 인사를 하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태건은 벨트 매라는 소리도 없이 그가 앉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재하가 약간 머쓱한 표정을 했다. 이렇다 할 대답을 들려주지 않았더니 민망한 듯했다.
달래 줄 시간이 없었다. 이미 팬츠 허벅지 부근에 동그란 얼룩이 묻어 있었다. 이재하가 ‘부부’라는 단어를 조음하자마자 또 한 번 성기가 쿡 쑤셨다. 내내 발기만 하고 손대어 풀어 주지 않은 지 몇 시간째라 욱신거릴 지경이었다.
어쩔까 하다가 안전벨트를 막 채우고 있던 이재하의 뒷덜미를 잡아채듯 끌어왔다.
“아-.”
놀랐는지 살짝 벌어지는 입술에 닿기 전에 먼저 혀부터 쏙 빼놓은 태건은 그 틈새에 제 것을 쑤셔 넣었다.
“…음.”
살짝 앓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혀끝을 꼿꼿하게 세워 입천장을 긁어 주니 재하가 움찔 허리를 떨었다.
이재하의 혀뿌리를 끌어당겨 그 밑에 고인 침을 쪽 빨아 먹을 생각으로 옆면을 스치듯 들어가 지분거렸을 때였다.
빵-.
뒤에서 클랙슨 소리가 들렸다. 미용실 상가 건물에서 나오고 있던 다른 차가 출발하지 않는 태건의 세단에 대고 클랙슨을 연속해 울리고 있었다.
틈이 없는 건 아닌지라 나오면 될 텐데도 연신 빵빵거렸다. 그 와중에도 태건은 재하의 혀를 놓아주지 않았다.
“읍, 뒤에, 아-.”
재하가 태건의 가슴팍을 살짝 밀며 뒤에 오는 차가 있다 말하려다가 페로몬을 확 풀어 주자 눈빛이 흐리멍덩해졌다. 태건은 그의 귓불을 살살 만져 주었다.
연속해서 클랙슨을 울려 대던 뒤차가 아예 태건의 세단 옆에 서더니, 이번에는 아예 클랙슨을 길게 누르고는 창문을 열어 뭐라 욕설을 지껄였다.
태건은 그제야 입술을 떼어 내고 맞붙어 있던 입술 사이로 흐르던 타액을 쫍 빨아 삼켜 준 뒤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려 창문을 열었다.
그때다 싶었는지 옆자리에 선 차주가 열린 창문을 통해 욕을 퍼부었다.
“야이, 씨빨놈들아. 길 막고 쪽쪽 거리고 싶냐? 바빠 죽겠는데 지랄들을 하고 자빠졌-.”
빠아앙-.
태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클랙슨을 누른 손을 떼어 내지 않았다. 건너편 차주가 지껄이던 욕설은 길게 울리는 클랙슨 소리에 막혀 버렸다.
상대가 내뱉던 욕이 그 긴 경적에 가려져 버린 것이다. 건너편 차주는 30대 남자로 꽤 건장한 체격이었는데, 그 점을 자신했던 건지 헛웃음을 치며 말했다.
“아니, 이게 진짜 미쳤나-.”
태건이 왼쪽 어깨를 창문 밖으로 빼낸 뒤 운전석 차 문을 툭툭 쳤다. 철에 주먹을 박아 탕탕 튕기는 소리에 남자는 또 한 번 하려던 욕을 멈추는 수밖에 없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선생님, 왜 욕을 하고 그래요. 무서워서 살겠나.”
“뭐라는 거야, 씹새끼가. 네가 먼저 길 막고 개지랄을 떠니까 그런 거 아니야!”
붉으락푸르락해진 남자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태건이 재하를 향해 잠시 고개를 돌리더니 킬킬거리며 말했다.
“여보, 봤지. 못생기면 성격도 더럽다?”
재하는 잠시 그 말에 대답해야 하는 건가 하는 얼빠진 생각을 했다. 그가 저를 두고 여보, 라고 지칭하는 건 흔하지 않은 일이라 그 상황에서도 귓등이 조금 붉어졌다.
그러나 길거리에서 싸움이 붙은 상황에서 한심한 생각이나 하고 있을 수는 없었기에 표정을 가라앉히려 노력했다. 저 멀리서 발렛 파킹 직원들이 웅성거리길래 보조석 창문을 열어 손을 흔들었다. 괜찮다는 제스처였다.
그 손짓과 평온한 표정의 재하를 보고 달려오려던 발렛 직원들이 멈칫했다. 그러나 그런 신뢰 가득한 표정도 상대 차주에게는 통하지 않았나 보다.
그는 더없이 화난 얼굴로 태건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일그러진 표정에는 언뜻 모멸감도 섞여 있었다.
상대 차주의 세단은 재하가 끌고 나왔던 차와 같은 차종이었지만, 한 단계 낮은 클래스였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시비를 건 것일 수도 있겠다. 남자는 다시 한번 더 소리쳤다.
“뭐라는 거야, 미친 새끼가!”
“근데 무슨 배짱으로 미친 새끼인 거 알면서 안 피해 가. 미친놈 보면 피해야 한다고 부모님이 안 알려 주디?”
“뭐? 어어, 야-! 뭐 하는-!”
창문으로 왼쪽 어깨의 반을 내민 태건이 그대로 남자의 차 오른쪽 사이드 미러를 손날로 내리쳤다. 퍼억, 하는 소리와 함께 무언가 우지끈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별달리 힘을 주지도 않은 것 같았는데, 두부 으깨지듯 사이드 미러의 이음새가 툭, 하고 부러지더니 연결된 전선에 매달린 채로 대롱거렸다.
그 꼴을 본 남자는 숫제 비명을 질렀다. 얼굴이 경악에 물든 채였다.
“뭐 하는 거야! 미친 새끼 아니야?!”
“네, 미친 새끼 맞아요. 자, 이리로 연락하세요. 미친놈 연락첩니다.”
태건이 중지와 검지 사이에 낀 명함을 상대의 창문을 통해 휙 날렸다. 일자로 날아간 빳빳한 명함이 상대의 뺨에 툭 맞고 떨어졌다.
남자는 어이가 없는지 말을 잃었고, 그제야 기어를 변속한 세단이 부드럽게 도로로 향했다.
태건은 사이드 미러를 통해 멍하니 서 있는 차를 흘끗 보더니 재하에게 씩 웃으며 말했다.
“부부 보험 된다며.”
재하는 한동안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문득 웃음이 나왔다. 어이가 없어 웃음이 터진 것이다. 장태건은 재하의 웃음을 보더니 저도 실실 웃으며 말을 이었다.
“그거 받으려면 보험사에 전화해서 이재하 씨랑 나랑 부부라는 걸 증명해야 하지 않나? 어떻게, 오늘 바로 섹스 테이프라도 찍어서 보내?”
“…가족 증명서 보내면 될 겁니다.”
재하의 그 말에 태건이 가만히 있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거리며 중얼거렸다. 답지 않게 순순해 보이는 몸짓이었다.
“가족 증명서, 가족….”
재하는 그의 입에서 나오는 가족 소리가 좋았다. 그의 손에 끼워진 반지를 눈으로 훑기도 했다.
마침 신호 대기에 걸린 태건이 그런 재하의 시선을 슥 보더니 그의 손을 가져가 기어 위에 올려 두고는 그 위에 제 손을 얹었다. 손등에 얹어진 그 감촉에 재하는 슬쩍 입을 열었다.
“뺑소니 신고 들어오면 어떡합니까.”
“글쎄. 당신이 아는 변호사 있을 거 아냐.”
있기는 하지만 기업 소송 전문 변호사에게 교통사고 사건을 담당해 달라고 하는 것도 웃겼다. 집안의 자잘한 일들을 처리해 주는 로펌을 떠올리고 있을 때 태건이 다시금 툭 내뱉었다.
“아님 뭐야. 나 감방 보내고 다른 놈이랑 살림 차리게?”
“그건 아닙니다.”
“당연히 아니지. 무슨 소릴 하고 있어, 사람 놀라게.”
태건은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제가 먼저 말을 꺼내 놓고는 재하의 탓을 하는 게 웃겼다. 재하는 또 피식 웃었다.
그의 농담이 꽤 취향에 맞는 것이 희한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 제 주위에는 단 한 명도 태건처럼 말하는 이가 없었는데도 말이다.
재하가 그런 것들을 떠올리는 동안, 차 안은 자연스럽게 침묵에 잠겼다.
재하는 태건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그러다가 문득 그의 왼손에 채워 준 시계가 오른 손목으로 옮겨져 있는 걸 보았다.
“…양손잡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젓가락질은 오른손으로 했는데 펜은 오른손으로 잡는 걸까? 의문이 들었다. 태건이 좌회전 지시등을 켜며 심드렁한 어조로 말했다.
“왼손에는 결혼반지 꼈잖아. 수갑은 양손에 차는 거야. 자기는 모범 시민으로 살아서 그런 거 모르는구나.”
그의 입에서 나온 자기 소리가 낯간지러웠다. 그러다가 수갑이라고 말하는 것에 의문이 들었다.
“수갑, 은 딱히 아닌데. 그냥 선물입니다. 구속하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씹, 구속 아니면 뭔데. 좋다 말았네.”
괜히 답답하게 여길까 봐 그렇게 말했던 재하는, 태건의 대답에 본인도 자각하지 못한 사이 표정이 허물어졌다. 태건이 그런 그를 흘끗 보더니 마침 걸린 신호 대기가 기껍다는 듯 고개를 쭉 빼 뺨에 쪽 입을 맞췄다.
그러고는 손을 뻗어 재하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수납해 둔 것의 윤곽을 더듬기도 하고 그 안으로 손을 넣어 다리 사이를 꾹꾹 누르기도 했다.
재하는 살짝 얼굴을 붉혔다. 파란불이 켜지자 재하는 태건의 손목을 잡아 다시 기어 위에 올려 두었다. 그가 쯧, 하고 혀를 차며 말했다.
“난 또 당신이 나 구속하고 묶어 두고 따먹을 거라고 경고하는 줄 알았잖아. 자지 닦고 기다릴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그 말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반사적으로 아깝게 장태건 씨를 아까워서 어떻게 묶습니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민망함은 오로지 제 몫이 될 것 같아 참았다.
차는 부지런히 백화점으로 향하고 있었다. 이미 해가 졌는데도 아직 8시가 넘지 않았다. 봐 둔 모델이 있기도 하고 더 늦어진다 싶으면 해당 매장만 운영하게 해 달라고 지점장에게 요청할 생각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전 직원이 퇴근하지 않고 기다릴 때가 많았기 때문이다. 그런 번거로운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 태건의 운전 실력이 제법 괜찮은 데다가 미용실이 백화점의 지근거리에 있는지라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은 VIP 전용 주차장에 내려 발렛을 맡기고 매장 안으로 향했다.
문을 열어 준 직원에게 꾸벅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데 태건이 그런 재하의 손을 깍지 껴 잡았다. 표정은 심드렁한데 제 팬츠 주머니에 깍지 낀 손을 쑤셔 넣기 시작했다.
주먹이 두꺼운 알파 둘의 맞잡은 손을 버텨 낸 주머니가 팽팽해졌다. 손이 시려 그러나 싶어 가만히 태건을 보는데 손등에 닿는 것이 있어 저절로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단단하다고 하기엔 살짝 물컹하고, 그렇다고 완전히 물컹하다고 하기엔 살짝 단단한 것이었다.
이재하도 같은 것이 달려 있으니 잘 아는 감촉이었다. 완전한 발기를 이루기 전의 성기가 태건의 허벅지쯤에 수납되어 있느라 그의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재하에게까지 느껴진 것이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손을 쭉 뺐다.
“어허, 가만히 좀 있어 봐. 누가 문질러 달래?”
물론 태건이 놓아주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가 실실 웃으며 재하에게 속삭였다. 귓불에 입술을 붙이고 호흡과 함께 말 몇 마디를 밀어 넣었다.
“아까부터 이 상태인데 매트리스 배달 올 때까지 호텔 갈까?”
“장태건 씨.”
“이름 부르지 마. 곧 싸겠다.”
재하는 어이가 없어 고개를 절레 저었다. 결국 팽팽한 바지 주머니에 깍지 낀 손을 처박은 채로 걸을 수밖에 없었다. 무슨 짓을 해도 태건이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동안 손등에 살짝살짝 부딪힌 그의 것은 점점 더 단단해지고 있었다. 재하는 정말 그가 말한 것처럼 될까 봐 주머니 속에서 손의 움직임을 최소화하려고 했다.
태건이 그걸 느낀 건지 킥킥거렸다. 그래도 다 웃은 후에는 얼어 있는 재하의 손을 주머니에서 빼내 주었다. 풀린 손이 살짝 아쉬웠는데 이번에는 재하의 허리를 끌어당겨 껴안았다.
백화점의 지점장인 상무 이사가 엘리베이터 앞으로 직접 인사를 나왔길래 간단하게 악수하려는데, 태건이 잡은 허리를 풀어 주지 않아 자세가 약간 애매해졌다.
그러나 재하는 태건에게 놔달라 말하지 않았다. 하고 싶은 대로 하게끔 두고 싶었다.
“원하는 모델이 있으셨으면 저희 직원이 직접 방문해도 될 일인데, 발걸음 하게 해 드려 송구하네요.”
“아닙니다. 상무님도 이만 일 보셔도 되겠습니다. 이 사람이랑 같이 고를 거라서요.”
재하가 부드럽게 웃으며 지점장에게 태건을 소개했다. 태건은 여전히 재하의 허리를 감고 있는 팔을 풀지 않은 채였고, 그 때문에 악수를 위해 남아 있는 손은 왼손뿐이었다.
태건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나머지 손을 제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은 뒤 말했다.
“아, 손이 없네. 나중에 악수하자고요. 장태건입니다. 이쪽 분 와이프 되는 사람이에요.”
지점장은 어벙한 표정을 했다. 와이프라고 불리기에는 장태건의 체격이 너무도 건장했기 때문이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직접 엘리베이터의 버튼을 눌렀다.
약간 뻘쭘하게 서 있던 지점장은 재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가려는 모양이었다. 재하도 마주 인사를 했다.
그가 곧 뒤돌아 가 버리자 태건이 재하에게 속삭였다.
“엘리베이터 타면 입술 빨아도 돼? 저 변태 새끼가 CCTV 훔쳐보는 거 아니겠지?”
…백화점 엘리베이터에서 키스하는 쪽이 더 변태 같다고 대답해야 할까? 재하는 태건을 바라보다가 그가 그 정도쯤은 알고 있는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대신 단정하게 대답했다.
“안 됩니다.”
태건이 재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나직하게 숨을 내쉬었다. 뭔가 말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한숨만 내쉬었을 뿐인데 불쑥 열이 오르는 느낌이었다. 그런데도 밀어낼 수 없어 약간 곤란했다.
때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다행이란 생각을 하며 먼저 타려고 하자 태건이 더 붙잡지 않고 허리를 놔주었다. 재하가 손을 내밀며 말했다.
“가요.”
태건이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두 알파는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손을 맞잡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