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2. 개
1.
개로 태어났다.
우리에 갇혀 살았는데도 그 취급은 들개와 같았다. 사냥해 올 줄 알았으니 사냥개일지도.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었다. 장태건이 개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너는 이름이 뭐야?”
개로 태어난 장태건의 주위에는 그의 이름을 그런 식으로 묻는 이가 없었다. 태건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 역시도 개의 이름이 중요하지는 않을 것이다.
상대는 좋은 집에 살고 있었다. 태건이 사육되는 집도 나쁘지는 않지만, 훨씬 더 대궐 같다고 생각했다.
상대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희미한 물푸레나무의 향기. 장태건은 그날을 잊지 못한다. 그가 제게 이름을 묻고, 자신은 대답해야 할 이유를 찾지 못했던 바로 그날을.
그러나 개는 도리어 상대의 이름을 기억했다.
모친이 데려간 자리였다. 언니라 부른 사람과 껴안고 울길래 또 시작이구나 싶었는데 그 뒤에서 살짝 웃는 남자애가 있었다.
“어른들끼리 말씀 중이시니까 너는 나랑 놀자.”
개는 그런 식으로 말하는 인간은 처음 보았다. 굴러다니는 책을 펼쳐 보면 볼 수 있는 말씨였다.
개의 현실에서는 그런 말투를 구사하는 인간은 찾아볼 수 없었기에, 개는 그것이 책에서만 나오는 사장된 언어인 줄로만 알았다.
오직 한 사람, 모친이 그와 비슷한 말투를 쓰기는 했지만, 그랬기 때문에 그런 말투를 쓰는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개의 우리에서는 모친 역시 개와 다름없었으니까.
“나는 이재하야.”
남자아이는 자연스레 저를 소개했다. 장태건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이름만큼은 수십 번 되새겼다.
이재하.
이재하.
재하.
장태건은 속으로 연신 그의 이름을 읊조렸다. 문제는 그때까지 말을 잘할 줄 몰랐다는 것이다. 괜히 짧은 혀로 지껄여 봤자 좋은 꼴을 보지 못했다. 얻어맞느니 입을 다무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는데, 그러고 보니 눈앞의 남자아이가 저를 때릴 것 같지는 않았다.
몇 가지 단어들은 말할 줄 안다 해도 그래봤자 비속어였다. 보고 자란 것이 그따위밖에 없는 태생이었음에도, 어쩐지 그날은 그 애가 자신의 그런 말투를 몰랐으면 했다.
그 애는 장태건에게 수치를 가르쳤다. 충격 같은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의 장태건은 뻔뻔한 구석이 있었다. 수치와 부끄러움을 알아도 그것이 장태건을 뒤흔들지는 못했다. 그저 어떻게 하면 개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가를 고민했다.
그러느라 태건은 그날 그의 이름을 부르지 못한 채로 그가 사는 거대한 집을 나서야 했다.
모친의 마른 손을 잡고 그 집의 대문을 나서면서도, 장태건은 연신 뒤를 돌아보았다. 놓고 가는 것이 있는 사람처럼.
“…때리지 마세요, …우리 태건이 때리지 마세요…. 엄마가 미안해, 태건아, 미안해.”
그날 밤, 장한용 몰래 외출했던 모친은 5cm의 문틈 사이에서 장한용의 발에 짓밟히고 있는 태건에게 속삭였다. 소리 내어 말한 것은 아니고, 입 모양으로만.
그러다 말소리가 들리면 장한용의 관심이 제게 쏟아질까 봐 두려운 듯이 말이다.
“야 이, 버러지만도 못한 것들아. 거기가 어디라고 기어가. 왜, 네 어미가 데려가디? 그 대궐 같은 집에 시집갈 수 있었는데, 고작 깡패 만나 결혼했다고 또 질질 짰냐 이 말이야!”
장한용은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패악을 떨었다. 유신으로 혼처 자리가 정해져 있던 부인을 향한 열등감이었다.
장태건은 개로 태어났을지언정 꼬리로 태어난 심정을 알지 못하여, 장한용이 시달리는 열등감에 대해서는 심드렁하기만 했다.
그렇게 자지가 후달리면 접싯물에 코 박고 뒈질 것이지, 가만히 있는 나는 왜 때려. 맞으면서도 매번 그런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러나 유약한 모친의 뺨은 척척하게 젖어 있었다.
태건은 그걸 무감하게 바라보았다. 울기도 잘 울어. 태건은 피식 웃었다. 웃음을 발견한 장한용이 분노하여 그를 더 개 패듯 때렸다.
오전에는 그에게 이름을 물어 사람 대우를 해주는 이를 만났는데, 저녁엔 바로 개가 되다니. 신세가 약간 비참하기는 했다.
개는 고심했다. 어떻게 하면 정말 사람이 될 수 있는지를 말이다.
“야, 막내야. 너 공부 좀 한다대?”
돌파구로 찾은 게 고작 공부였다. 그 정도는 해야 사람 구실을 하는 기본은 갖추지 않을까 싶었다.
모친은 결국 신경 쇠약을 이기지 못하고 젊은 나이에 가 버렸다. 이미 다 죽어 가는 몸으로 목을 맸는데, 태건은 그것이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냥 둬 봤자 어차피 그 달을 못 넘길 목숨이었다. 대신 모친은 태건에게 자신의 복수를 다짐시켰다. 파들거리는 손을 들어 태건의 뺨을 연신 쓰다듬으며 버짐이 핀 입술을 달싹거려 통한 같은 설움을 쏟아 냈다. 글로도 남겨지지 않는 유서였다.
‘태건아, 엄마 부탁 좀 들어줘. 엄마 죽어서는 숨 좀 쉴 수 있게….’
‘알았으니까, 그만 짜.’
태건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모친은 이제 막 자라기 시작한 소년의 어깨에 기대어 오열했다. 겨울날이라 바깥에서 들리는 바람 소리와 다를 바 없는 귀곡성이었다.
태건은 아직까지 여자가 우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조직을 먹고 난 뒤 룸살롱 형태의 성매매 업소를 가장 먼저 뒤엎은 것도 그 때문이었다.
그는 나름으로 그녀를 사랑했다. 그러니 마지막 유언인지 신경 쇠약에 걸린 나머지 아들에게 해서는 안 될 부탁을 한 것인지 모를 황당한 소원을 들어주려 했겠지.
“놔둬야, 그 왜, 형수님이 공부 쪼까 하셨다 하지 않았어. 쟈가 닮았는 갑지.”
왼쪽 눈에 의안을 박은 사무실 소장의 별명은 개 눈깔이었다. 동생들은 개눈 형님이라고 부르고 위의 사람들은 어이, 눈깔이, 라고 불렀다. 태건만이 그를 직책으로 불렀다.
모시는 형님의 핏줄이라고는 하나, 그 취급이 개와 다를 바 없었다는 게 알려졌는데도 소장은 태건을 꽤 예뻐했다.
그는 태건이 공부를 하는 것이 좋은지 간혹 문제집 같은 것들을 구해다 주기도 했는데, 태건이 풀기에는 너무 쉬운 것들이었다.
태건은 그때마다 심드렁하게 말했다.
“이걸 누가 풀어. 소장님 대가리에나 이게 문제지. 너무 쉽다니까.”
“자슥이, 말본새가 남달러. 아나, 이걸루 너 맞는 거 사다 풀어야.”
주는 돈은 거절하지 않고 차곡차곡 모았다. 어차피 학교에 잘 가지도 못하지만, 갈 때마다 공부하는 척만 하는 새끼들 중 몇몇 놈들의 문제집을 빌려 보면 될 일이었다. 돌려주지는 않았으나 그들이 빌려준다 했으니 그런 게 아니겠는가.
학교는 드문드문 나갔기 때문에 담임은 어디서 이딴 게 머리는 좋아 성적을 잘 받느냐며 짜증을 냈다.
- 부모님 바꿔라. 넌 결석 너무 많이 해서 제적이다.
그런 전화가 왔을 때는 알겠다고 했다. 순순히 알겠다고만 한 건 아니었다.
“대철아, 반 학생이 고아인 것도 모르니. 상처받아서 학교 안 나갈 거니까 너나 좆 빠지게 다니세요.”
수화기를 타고 담임이 고래고래 욕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그냥 끊어 버렸다. 태건은 바로 검정고시를 알아보았다.
공부를 그만두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그냥 그래야 할 것 같아서. 다음에 만나면 이름 정도는 제 입으로 말해 주고 싶었다. 어릴 때처럼 모자라지 않다는 걸 보여 주고 싶기도 했고, 그 애의 입으로 발음하는 제 이름 석 자가 궁금하기도 했다.
또렷하고 올곧은 발음으로 제 이름을 발음하면 무슨 감정이 들까. 지금도 그때처럼 옅게 웃는지 궁금했다.
그때쯤의 태건은 계속해서 그 애에 대해 떠올리는 것이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그 집도 엄마가 죽었다던데. 뉴스에 나올 정도로 크게 장례식을 하는 걸 본 적 있다.
개의 모친은 봉분만 간신히 있는 곳에 묻혔다. 집에서 기르던 개가 죽었을 때 마당 한구석에 묻는 것처럼 말이다.
누구는 뉴스에 나올 정도로 장례식이 화려하던데. 태생이 다르니 다가갈 수가 있나. 간극을 메우고 싶은데 그럴 방법이라고는 공부뿐이었다.
어느 정도 자격이 있어야지만 그 애에게 말을 걸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개가 짖는다고 해서 다 대답해 주는 인간은 없다. 적어도 사람처럼 보이고 싶었다.
그 애는 장태건의 결함이자 수치의 집약체였다. 학대받고 자란 기억과 가장 극명한 존재.
그래서 계속 생각이 났을까? 어느 날에는 꿈을 꾸기도 했다.
다 자란 그 애가 말없이 웃고 있는 꿈을 꾼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아니, 옷을 벗었었나, 양말 한 짝만 벗었나. 기억나지 않는 그것이 장태건의 첫 몽정이었다.
“태, 태건아. 이거 그 형 다니는 학원 이름….”
학교에서 알아 둔 놈이 꽤 산다길래 하굣길에 따라붙어 이름 하나를 알려 주었었다. 다니는 학원을 알아 오라 말하자 공포에 떠는 눈을 했지만, 솔직히 태건은 어이가 없었다. 돈을 빼앗은 것도 아니고 친구 사이에 할 수 있는 부탁 아니겠는가. 물론 우정을 쌓았다기엔 친구의 이름도 모르지만.
어찌 되었건, 태건의 친구는 꽤 금방 그 애가 다니던 학원의 이름을 알아 왔다.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압구정, 대치동, 강남 이런 곳이 아니라 그냥 평범한 동네의 학원 중 한 곳이었다.
그 애는 모르지만, 장태건은 자라는 내내 그 애와 같은 지역구의 학교에 다녔다.
그때는 장창식이 종로에서 살 때였다. 성북동에 본가가 있는 그 애와는 멀지 않았다. 그쯤 되면 다니는 학원이 많을 거로 생각했는데 그도 아니었다.
다니는 고등학교에서는 늘 전교 1등이라고 했다. 태건은 그게 신기했다. 개로 태어나 아침부터 일어나 조폭들이 지난밤 갈겨 둔 토사물과 이름 모를 오메가를 끌어들여 남겨 둔 정사의 흔적을 치워야만 하루가 시작되는 자신과는 다른 삶.
모든 평행선의 끝에, 그 애가 있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도 진학하지 못했다. 다니다 며칠 만에 때려치웠다. 새벽 용역 현장에서 건설 노조원들을 쥐어패고 끌려간 장태건을 받아 줄 학교가 없었다.
소년원에 가지 않는 게 다행이었다. 장창식의 입김이 있기도 했다. 수능과 고등 검정고시를 한꺼번에 준비했다. 어느 날은 새끼발가락이 잘렸다. 금세 봉합했지만, 덕분에 군 면제를 얻었다.
장창식이 의외로 대학 입학을 허락해 주었다. 장한용도 문턱을 넘지 못한 지성의 보고를, 검정고시 출신이 갔다고 하니 꽤 기특했던 모양이다.
이재하가 다니던 대학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의 수도권에 있는 대학의 토목학과였다. 입학을 앞둔 어느 날, 소장이 밥을 사 주겠다며 나섰다. 문신집에 들렀다 가자고 했다. 아직 등에 계신 천수 관세음보살님이 완성되지 않았다고 했다.
소장이 태건의 어깨에 얹은 손으로 살짝 목을 조르며 물었다.
“아야, 너 고래는 잡았냐?”
“짜증 나게. 소장님, 성희롱으로 콩밥 먹고 싶어?”
수능이 끝났는데도 키가 컸다. 당시 장태건의 키는 180cm 후반대였다. 소장에게 목이 졸리려면 무릎까지 굽혀 줘야 했다. 귀찮았지만 간혹 굽혀 주면 소장은 히히 웃으며 금니를 박은 앞니를 보였었다.
“자슥이, 아직 아랫도리도 덜 컸구마잉.”
장태건은 쓸데없는 말에는 잘 대답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품이나 쩍, 했다.
“야, 있냐. 가운데 다리가 예뻐야 사랑받는다 안 허냐. 튜닝도 허야 알파 오메가 상관없이 묵고 다니제.”
그 말에는 꽤 흥미가 돋았다. 업소에는 정신 나간 알파가 도박 빚에 제 몸을 팔기도 했다. 뒤가 뻑뻑해 잘 풀어지지 않는 걸 구슬 박은 걸로 쑤셔 주면 침을 질질 흘린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사무실 놈들이 공중에 대고 허리 짓을 하며 빠구리 뜨는 흉내를 내는 걸 몇 번 본 적 있다.
“구라치지 말고. …진짜야?”
“니는 소장님한테 구라가 므여.”
장한용이 개 취급하는 친아들이니, 조직원들도 괜히 지랄하는 경우가 잦았다. 한 날은 애새끼가 문신 하나 없다고 시비를 걸길래 소장과 문신집에 가서 국부에 구슬을 박고 왔다.
조폭들 좆에 구슬 박아 주는 베타 문신쟁이는 알파 좆에 환장한 건지 태건의 자지를 이리저리 주물럭거리고 싶은 눈치였다.
소장이 옆에 서서 ‘제대로 해라, 안 허냐.’ 하는 협박을 하지 않았다면 구슬 말고 제 뒤에 박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다.
“우리 형, 이거 튜닝 끝내면 죽여주겠다. 지금도 이렇게 큰데….”
“어허이, 봉삼식이, 눈독 들이덜 말어.”
“누가 봉삼식이야! 시크라고 부르랬잖아!”
“침 튀기지 말고. 애 자지 썩으면 네가 책임질거여?”
“내 침 튀었다고 썩니?”
소장과 문신쟁이 새끼는 만담이라도 하는 게 틀림없었다. 태건은 마취도 하지 않고 고량주를 마신 뒤에 아래에 구슬을 박았다. 소장이 오만상을 찌푸리며 ‘징허고 독헌 놈.’ 하고 중얼거렸다.
문신 바늘이 잉크에 젖어 뒹구는 수술대 위에서 거기에 구슬을 박는 건 그다지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소독이나 제대로 했을까. 위생 상태가 걱정스러울 지경이었지만 소장이 말하길, 어려서 금세 아물 거라 했다.
오는 길에는 짜장면을 먹었다. 뭘 먹어야 아문다며 소장이 탕수육을 사 줬다. 젓가락질하다 말고 장태건은 고량주를 더 시켰다. 술이 깨어 가기 시작하니 아래가 얼얼했다.
예쁨 받지도 못하고 자지 터져 죽겠구나. 다리 사이에 그 애 얼굴이 떡하니 떠올랐다. 소장은 속도 모르고 짜장면집에서 훌렁 등을 까 관세음보살님을 보여 주었다.
“아야, 봐라. 여 천수 관세음보살님. 이런 거 새기라니까 무슨 자지에 튜닝을 하고 있어.”
“소장님, 나 자지 아파 죽겠어. 좀 닥쳐 봐요. 고자 되는 거 아닌가 존나 후회 되니까.”
“말은 꼭, 자슥이-.”
소장은 고량주를 마셔 벌게진 얼굴로 낄낄거리며 웃었다. 그는 그날로부터 8일째 되는 날 밤, 장한용 대신 칼에 맞아 죽었다.
괜히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닌 장한용을 담그려고 다른 조직에서 필리핀 청부업자를 보낸 것 같은데, 옆에서 호위하던 소장이 장한용을 껴안고 대신 칼에 찔렸다고 했다. 안쪽에 있던 창자들이 다 삐져나와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다.
장례는 간단했고 소장의 자리는 금세 채워졌다. 장태건이 수능을 치른 다음 해의 일이었다. 이재하가 군에 갔다는 소식을 들었다.
* * *
새로운 소장은 장태건을 그다지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다.
“눈빛이 쎄해.”
“소장님보다 잘생기면 다 쎄하다고 하더라.”
어디서 굴러먹다 온 남창 하나를 끼고 나타났는데, 사무소 경리를 볼 거라고 했다.
남창은 웃기지도 않는다는 듯 소장의 말에 반박했다. 소장은 얼굴을 벌겋게 물들였지만 장태건 앞에서 사람을 팰 수는 없는지 금세 조용해졌다. 그 사무소의 진정한 웃대가리가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그러나 장태건은 그 후로도 한동안 사육장을 청소하는 신세를 면치 못했다. 빗자루 끄트머리는 늘 핏물에 절여져 있었다. 맞지도 않는 흰색 쪼리를 대충 끌고 밤낮없이 그걸 쓸어 냈다.
간혹가다 살점이 붙은 어금니나 손가락, 발가락들이 같이 쓸리기도 했는데, 그런 건 주워다 따로 처리해야 해서 여간 귀찮은 것이 아니었다.
그렇게 겨울이 다시금 오고 있었다. 아침에 출근하기 전 달력을 보니 이재하가 상병쯤 달았겠다 싶은 날이었다.
“군대 갔을 때 총각 딱지 떼잖아. 소대장이 애들 데리고 단체로 빡촌 데려가 주는데.”
타일 벽에 낀 핏덩어리를 칫솔로 닦고 있는데 덩치 중 한 놈이 그런 말을 하면서 허공에 허리짓을 하길래 그대로 대가리를 깨 줬다. 소장이 대체 왜 싸운 거냐고 묻길래 못생겨서 팼다고 구라쳤다.
소장은 장태건을 때릴 생각은 하지 못했다. 대신 슬리퍼 차림으로 한겨울에 빌라 복도에서 자야 했다.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서 머리 식히고 오라는데, 머리는 너나 식히세요, 하려다가 대머리인 게 불쌍해서 봐줬다. 정수리가 늘 식어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은 미약하게 열이 났다. 감기도 잘 걸리지 않는 체질이라 트레이닝복을 입고 겨울날 쫓겨난 것 때문은 아닌 듯한데, 그렇다고 또 러트기가 온 것 같지도 않았다. 우성임에도 장태건은 러트가 드물었다.
열도 나겠다, 추운 건 둘째치고 발가락에 동상 들 것 같길래 김 원장을 찾아갔다.
김 원장은 뒷골목 조폭 새끼들 사이에서 불법 진료를 하는 무면허 의사였다. 사람 몇 죽이고 실형 살다 나와 면허를 뺏겼다고 들었다. 전공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아는 게 꽤 많았다.
“너, 각인했냐?”
“웬 각인. 나 새삥인데.”
각인은커녕 누군가와 관계조차 잘 맺지 않았다. 안 하고 싶어서 안 한 게 아니라 발기가 잘 되지 않았다.
이재하 생각을 하면 그게 굳이 야한 생각이 아니더라도 잘 섰지만, 그 외의 곳에서 쓸 때는 죽은 채로 도무지 부름에 응하지를 않았다.
“Pseudo-Imprinting, 위각인 증상인데 이거.”
“그게 뭔데.”
상대의 동의 없이 저 혼자 맺은 각인이라는 뜻이었다.
우성임에도 주기가 심하게 긴 러트기, 심인성 발기 부전. 상대의 동의를 얻어야 치를 수 있는 각인을 저 혼자 억지로 맺은 양심 없는 짓거리에 대한 부작용이었다.
그러나 어떻게? 위각인에 반쪽짜리에 불과해도, 접촉이 있어야 할 것 아니겠는가. 접촉은커녕 이재하를 가까이서 만난 경우가 드물었다.
그러고 보니 처음 러트기가 왔을 때는 나름 규칙적이었다. 장태건은 김 원장의 말에 볼 안쪽을 혀로 밀며 생각에 잠겼다.
언제부터 시기가 불규칙해지고 꼴리는 걸 봐도 다리 사이가 잠잠했는지에 대해.
검정고시에 합격한 날이었나. 기념으로 장태건은 재하를 찾아갔었다.
이름은 기억도 안 나는 친구가 친절히 알려 준 재하의 학원 앞이었다.
이재하는 한쪽 어깨에 가방을 멘 채 하복 아래 흰색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주로 혼자 다니는 듯했는데 옆에 누가 있어도 무표정인 건 마찬가지였다. 서늘한 생김새에 하얀 피부가 작열하는 여름의 태양 아래 반짝이며 빛나고 있었다.
‘지나갈게요.’
재하는 간단하게 말하며 태건을 스쳐 지나갔다.
학원이 끝났나 싶어 기웃거리던 때였다. 그때도 그냥 근처 골목에서 담배나 주야장천 태우다가 얼굴이나 보고 가려고 했었다. 그렇게 마주칠 줄은 몰랐다.
서로의 팔뚝이 잠시 스쳤다. 놀라 숨을 삼켰던 당시의 장태건은 이재하보다 키가 작았다. 물푸레나무 향이 다가오자마자 흩어졌었다.
그게 다였는데. 아, 씨발, 쪽팔리네. 그게 다였는데 저 혼자 각인을 하고 생쇼를 했다고? 장태건은 계속해서 볼 안쪽을 혀로 찔렀다.
“그냥 두면 풀릴 거야. 냅둬. 몇 년 안 가니까.”
김 원장은 돌팔이가 따로 없었다. 그 이후로도 꽤 몇 년을 위각인이라는 것에 시달려야 했기 때문이다.
이 바닥에서는 섹스도 권력인지라 훌륭한 물건을 달고도 불능이라고 한다면 개지랄 떨 것들이 많았기 때문에 대충 덩치가 비슷한 남창과 시도를 하기는 했다.
그러나 고량주 두 병을 비운 뒤 간신히 발기시킨 좆은 사정이 잘 되지 않아 애먼 남창들 사이에서 소문만 더럽게 났었다. 신경 쓸 일은 아니었지만, 꽤 귀찮은 일이긴 했다.
그때부터 룸살롱에 출근하는 남창들 사이에서 한 번 대 주려면 죽을 때까지 박혀 줘야 하는 놈이라고 소문이 났었다. 누가 먹여준대? 좆 줄 생각은 하지도 않았는데 방아들 찢는 솜씨가 아랫도리보다 더 상냥한 것이 싹 맘에 안 들었다.
업장 관리를 하러 갔다가 잠시 마주치면 제 아랫도리를 슬쩍 쳐다보며 입맛을 다시는 시선들을 볼 때마다 지랄들 한다고 생각했었다.
발기가 아예 안 되는 건 또 아니었다. 그쯤에는 이재하의 꿈을 많이 꿨는데 나오자마자 좆을 빨아대는 통에 꼴려서 윽윽 거리다 보면 사정하고는 했다. 정액양이 유달리 많아 푹 젖은 이불을 보며 아침마다 짜증을 낼 수밖에 없었다. 저야말로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허공에 방아질하는 게 요란했다. 콱 다 죽이고 죽어버릴까. 그런 생각도 잠깐 했다.
그렇게 또 한 해가 갔다.
스물둘의 장태건은 박명순을 만났다. 덩치 커다란 놈이 동네 폭주족한테 처맞고 있는 게 웃겼다.
구역 청소 도중 나타난 폭주족을 저 혼자 저지하다 끌려가 다굴을 맞았다는데 사무소 놈들 중 아무도 구해 주러 가지 않길래 가스통을 들고 찾아갔었다.
아지트들을 모조리 불 지르고 가스 밸브를 연 채로 라이터를 들이민 장태건의 얼굴은 심드렁했다. 개로 자라지 않은 것들은 금세 꽁무니를 뺐다. 거기서 박명순을 빼 왔다.
덩치 큰 대머리는 굳은 얼굴로 땅에 이마를 박으며 말했다.
“평생 모시겠습니다.”
“이야, 비장하다. 모시는 김에 빙빙 좀 사 와 봐. 헷갈리지 말고. 비비빅 사오기만 해, 아주.”
얻어터진 놈이 피 섞인 침을 질질 흘리며 무릎을 꿇길래 아이스크림을 사 오라 했다. 불 지르느라 약간 더워졌기 때문이다.
원하던 아이스크림을 냉큼 사 왔길래 머리는 원래 대머리냐고 물어봤다. 매일 면도하듯 머리를 민다는데 원래 대머리 새끼들이 자주 하는 변명이라고 믿어 주지 않았다. 명순은 다 얻어터진 얼굴로 억울한 표정을 지었다.
소장은 그 일로 다른 조직에게 주목을 받은 두 사람을 외부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다른 놈들한테 칼 맞아 죽길 바라는 듯했다.
그 시기에 장한용은 장창식 몰래 대부업을 시작했다. 이제 막 기업을 키우고 싶어 하던 장창식은 상장을 준비하고 있어 예민했다.
꼬리를 밟자, 몇 번이고 장한용을 회장실로 불러 따귀를 때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그들 부자 사이에 미세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틈새에 끼어 장한용에게 건더기를 좀 받아먹고 싶었던 건지, 소장은 장태건에게 대부업 사업 중 일부를 넘겼다.
말이 넘긴 것이지 돈 떼어먹히면 장태건의 사비에서 메워야 했다. 낮에는 빚쟁이들 쫓아다니고 저녁에는 유치권 행사하는 다른 조폭 새끼들의 대가리를 깨 유치권을 이전받아야 했다.
그러다 가끔 생각이 나면 제대한 이재하의 대학으로 갔다.
“형님, 안 피곤하십니까.”
“…….”
명순이 어쩔 줄 모르는 얼굴로 물었다. 그때의 명순은 장태건이 누굴 기다리고 있는지 몰랐다. 뺨에는 피가 말라붙은 채로 한군데만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는 장태건이 이상하기만 했을 거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위각인인지 뭔지 때문에 괜히 골이 아프고 쑤셨다. 러트기가 드문 건 편한데 너무 오래 상대를 보지 않으면 골이 빠개질 것만 같았다.
김 원장을 찾아갔더니 징하다는 표정을 지었었다.
‘돌팔이 아냐? 골 오지게 쑤신다고는 왜 말 안 했어.’
‘내가 페로몬 전공의도 아닌데 어떻게 알아.’
김 원장은 아는 거 없다고 말한 주제에 설명은 길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위각인이 옅어지지 않은 상태로 벌써 몇 년이 흘렀기 때문에 고착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럼 정말 각인에 의한 증상처럼 상대를 보지 못하면 두통과 이명에 시달릴 수 있다는 것이다. 위각인 상대와 성관계를 맺어야 위각인을 끊을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장태건의 존재를 모르는 이재하를 잡아다가 나랑 자자고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장태건은 이재하가 자신의 세계로 내려오는 것이 싫었다. 아등바등 제가 그 위로 향하면 모를까 이 시궁창으로 그를 끌어당기고 싶진 않았다.
‘하여간 죽는 건 아니란 거지.’
‘뭐, 죽을 만큼 괴로울 수는 있겠지만.’
김 원장은 태건을 향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태건 역시 심드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고통이 뭐 별거겠나 싶었었다.
그러나 고질적인 두통은 꽤 끈덕지게 장태건을 괴롭혔다. 지난달에는 잠깐 어지러웠던 찰나에 회칼 든 놈한테 등이 긁히는 일이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얼굴이라도 보면 그 거지 같은 골 울림이 좀 나아진다는 것이다.
위각인의 후유증을 홀로 겪는다는 것은 꽤 괴로운 일이었다. 통증에 무딘 것이 그나마 다행일 정도로.
깨질 듯한 두통 때문에 수면 장애까지 심해 잠을 자는 것보다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나았기 때문에 가끔 그 주차장에 차를 세울 수밖에 없었다. 도박장을 지키다가 개싸움을 끝낸 몰골로 기다리다 보면, 이재하가 나왔다.
품이 큰 검은색 면 셔츠를 입고 안에는 흰 면티를 받쳐 입은 채 전공 책을 들고 있었다. 전공 책의 윗면에는 작게 학번이 쓰여 있었다.
그럼 그걸 보고 저도 등교했다. 딱 유급당하지 않을 만큼만 출석했다. 모자란 잠은 강의실에서 잤다.
이재하를 만나고 온 뒤에는 폭면하다시피 잠이 쏟아졌다.
학교 벤치에 누워 자다 일어나 보면 배나 가슴팍 위에 페로몬 향수가 뿌려진 종이들이 후드득 떨어졌다. 다 누군가의 전화번호였다. 그대로 앉아 하품을 쩍 하다가 일어나 다시금 사무소로 출근하는 것이 일상이었다.
매번 자퇴만 한 덕에 학교는 꽤 오랜만에 다녀 보는데도 이렇다 할 느낌이 없었다.
그때쯤 장한용을 골로 보냈다. 아예 뒈질 것이지, 쓰레기 같은 새끼.
아무 데나 오줌 누고 손도 안 닦는 새끼가 매번 룸살롱에서 일하는 오메가나 베타들에게 성병만 옮기는 게 좆같이 꼴 보기 싫었었다. 별 쪼다 같은 새끼일수록 명줄이 길다는 생각을 했다. 뒤를 딸 만해서 딴 것뿐인데 웬 빡빡이 새끼가 한 명 더 늘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모정길이라고 합니다!”
“얘, 명순아. 네 친구들은 다 빡빡이니?”
모정길은 명순의 보육원 동기라고 했다.
옛날 소장님과 좀 닮은 구석이 있어 나쁘지 않았다. 정길이 장한용의 손에 맞아 죽을 걸 빼 준 건 그 이유도 있었다.
처맞고 있는 얼굴이 꽤 닮아, ‘아, 그러고 보니까 소장님 복수를 못 해 드렸네.’ 하는 생각이 났던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마자 열이 뻗쳤었다.
벌써 몇 명이나 그 개자식 손에 보냈는지 모르겠다. 모친이 목을 맸을 때, 진작 술에 취해 처자고 있던 쓰레기 새끼의 숨통을 눌러 죽였어야 했는데.
장태건이 생각해봐도 그때의 저는 아직 어려 순진하고 여리긴 했다. 사람 죽일 줄을 몰라 식칼만 든 채로 놈의 방문 앞을 서성거리기만 했으니까.
멍이 들어 시퍼런 눈을 하고 새벽 내내 왔다 갔다 하다 보면, 눈물에 젖은 뺨을 하고 모친이 다가와 태건을 껴안고는 했었다. 그럼 또 질질 짜네 싶어 달래 주려고 식칼을 손에서 놔야 했다. 그때 그 방법을 포기하고 개자식 처먹는 밥에 락스라도 탔어야 했다.
어쨌거나 장한용을 태운 차는 그대로 우그러져 버렸다. 대뇌피질이 손상된 터라 회복이 힘들다고 했다. 그 소식을 들은 날은 소장님 있는 납골당과 모친에게 들렀었다.
“봤어? 조만간 아예 올려보낼게. 둘이서 뒈지게 패.”
모친은 무덤이 있어 소주를 뿌렸는데 소장님은 납골당인지라 술을 가져가도 소용이 없었다. 가져간 걸 제가 다 마시는 수밖에 없었다.
소장님 몫으로는 고량주를 가져갔었다. 안주 없이 먹으려니 살짝 알딸딸했지만 납골당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한숨 푸지게 자고 일어나니 또 살 만했다.
그날만큼은 위각인으로 인한 두통 때문에 기분이 좆 같지도 않고 잠이 잘 왔었다. 아마 아주 약간의 원수를 갚아서일지도 몰랐다.
짧은 인사를 끝내고 서울로 올라온 태건은 꽤 바쁘게 살았다. 장한용이 벌여 놓은 일을 수습하느라 정신없기도 했고, 하루아침에 애지중지하던 장남이 식물인간으로 돌아온 장창식이 미쳐 날뛰는 걸 감시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학교 강의는 어머니가 안 계신다는 점과 아버지가 식물인간이 되었다는 병원 입원 증명서를 떼어 가서 출결을 합의봤다. 입만 열지 않으면 멀쩡한 얼굴을 한 태건을 동정하는 교수들이 많았다.
그러나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조금 더 지나자 조폭이라는 게 알려져 교수들도 태건을 피해 다녔다. 소문이 꽤 늦게 났다는 감상 뿐이었다.
그런 경력에도, 다니면서 F 학점을 맞은 것은 두 번뿐이다. 그 중 한 번은 베타 여자 교수님의 강의였는데, 냉정한 얼굴로 태건의 면전에 대고 학생 자격이 없다고 했다. 알파나 베타 남성 교수들도 태건과는 눈도 못 맞추는데도 그녀는 거침없었다.
지성의 보고에서 너 같은 사람은 다른 학생들에게 피해만 준다고 꾸짖는 엄중한 얼굴 앞에서, 태건은 고개를 꾸벅이고 나왔다. 보는 눈이 탁월하시다는 감탄뿐이었다.
나머지는 C나 D 중 하나였다. 다들 장태건을 다시 볼까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시험은 늘 성실하게 쳤으니 그 정도의 성적이라도 받을 수 있었다.
그것도 성적이라고 졸업이 되었다. 그쯤 이재하의 유학 소식을 들었다. 약혼자와 함께라고 했다.
장태건은 그 소식을 들은 날 이재하의 대학 주차장에서 한참을 있다가 왔다. 그러다가 문득 지루해졌다.
상간녀가 뻔뻔하게 아이를 데리고 본가로 들어온 나머지 이재하의 모친은 병을 이기지 못하고 일찍 타계했다고 했나.
가정생활에 충실하지 못한 어느 씹새끼 밑에서 자란 터라, 이재하 성격에는 바람을 피우는 걸 혐오하고 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저랑은 약혼은커녕 바람도 피워 줄 것 같지 않았다.
지루하네, 씨발.
태건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다가 명순에게 시동을 켜게 했다. 명순은 뭘 잘못 먹었는지 쓸데없는 소리를 했다.
“안 따라가 보십니까, 형님.”
“징그러운 소리 하네. 가, 빨리. 씻고 좀 쉬자.”
태건은 지금까지 제가 누굴 기다리고 있었는지 까먹었다는 듯 명순의 핸들을 주먹으로 퍽퍽 쳐 차를 출발하게끔 했다.
창가로 고개를 틀었다. 이재하는 더는 보이지 않았다. 문득 장창식으로부터 조직 일을 뒤치다꺼리하라며 지금 타고 있는 세단을 받았던 날이 기억났다.
꽤 좋은 세단이라 이재하네 대학에 끌고 가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정작 그 차를 타고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네 본 적 없으면서도 말이다.
아직도 이재하는 장태건의 이름을 모를 것이다.
장태건은 자신이 모친의 치마 뒷자락에서 이재하의 반듯한 얼굴을 핥듯이 쳐다보던 그날로부터 단 한 발자국도 나아진 게 없는 인생을 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하늘 위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을 만큼 기다란 계단 끝에 있는 무언가를 찾아 오르고 또 올랐는데도 여전히 제자리였던 것이다. 닿을 수 없었던 것은, 아직도 닿을 수 없는 자리에 있었다.
그때부터는 위각인을 끊어 내 보려고 약물 치료를 시작했다. 약값은 더럽게 비쌌지만, 효과는 꽤 좋았다.
홀가분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애초에 오르지 못할 나무였다. 그렇다고 제 위치에서 잘살고 있는 사람을 끌어내리는 짓거리를 할 수는 없었다.
개로 태어나 개로 살았지만, 하늘에 대고 짓기나 하는 것이 다였지 정작 하늘에서 사는 사람의 발목을 물어 끌어내리고 싶지는 않았다.
한동안은 그냥 그렇게 살았다. 모친이 제발 복수해 달라고 애원하던 그녀의 기일이 되면 아, 맞다 싶기는 했다. 그녀가 원하던 복수의 대상은 장한용 한 명은 아닐 것이다.
할 짓도 없는데 슬슬 준비나 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태건의 복수는, 그의 무료함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일단 사무소들부터 장악했다. 제가 소속된 곳을 맨 마지막에 두었다. 몇 년 사이에, 사육장에 근무하는 덩치들은 모조리 장태건의 사람들이 되었다.
장한용을 식물인간으로 만든 뒤에는 일이 더욱 쉬워졌다. 눈을 피해 뭔가를 할 필요가 없으니 훨씬 자유로웠다. 돈도 좀 굴렸다. 장한용이 운영하던 도박장을 축소해 나가며 업장을 다른 업자에 팔았던 것이다.
무료함 속에서도 태건은 착실히 세를 불려 나갔다.
그렇게 또 몇 년이 흘렀다. 그사이 장한에도 입사했다. 평사원으로 입사했는데 현장 뛰다가 셔츠 소매에 피를 묻히고 와도 아무도 뭐라 하지 않았다.
피 묻은 뺨을 닦지도 않은 채로 이 고물 새끼 왜 안 되느냐고 복사기를 패는 날건달에게 뭐라 할 사람은 없었다.
어느 날은 넥타이를 맨 채로 출근해 사람을 패고, 어느 날은 푸줏간에서나 입는 트레이닝복을 입고 회사에 갔다. 피 묻은 와이셔츠 소매를 가릴 생각도 하지 않고 토목 공사 견적서를 뽑았다.
그렇다고 사무소로 출근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장창식이 현장 사무소들을 정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자잘한 건축 사무소로 알려진 것들은 죄다 깡패 새끼들의 집합소였다.
“혀엉.”
“누가 네 형이야, 누가. 이거 아주 미쳐 가지고.”
정길이 웬 오메가의 뒤통수를 후려 깠다.
그때쯤 소장은 애인을 갈아 치웠다. 못생겼는데 재주도 좋다고 정길이 혀를 찼다.
소장의 새로운 애인인 그 오메가는 약쟁이라고 했다. 그의 토끼 좆으로는 만족을 못 하는지 가끔 태건에게 껄떡거리고는 했다. 조루와 지루의 대결이란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그냥 두면 태건 손에 찢겨 죽을까 봐, 정길이나 명순이 나서서 저지하고는 했다. 태건은 딱히 말리지 않았다. 누굴 깡패 조폭 새끼로 보나. 가끔 어이가 없어도 그냥 뒀다.
그때쯤에는 태건의 세력이 크게 부풀었다. 명순과 정길까지 셋이서 좆 빠지도록 노력한 결과였다.
* * *
태건이 장한용이 몰던 세단의 브레이크 선을 끊어 놓기 전, 장한용은 아예 약 유통에까지 손을 대기 시작하며 뒷주머니를 찼었다.
장창식은 아들이 병원에서 식물인간이 되어 누워 있을 때까지 그 사실을 속속들이 알지는 못했다. 당시에 화를 내긴 했어도, 그저 다 큰 아들의 용돈벌이 정도로 여겨 더 캐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장한용이 치밀해서가 아니라 태건이 그와 같은 사실을 요긴하게 써먹을 요량으로 묵혀 두었기 때문이다.
장남의 약장사가 동네 레벨 정도인 줄 알고 있던 영감은 머리가 굵어질 대로 굵어져 곧 환갑이 다 되는 아들이 아직도 제 말 한마디면 무서워 배를 까고 뒤집어지는 줄 알았다.
그렇게 장창식의 방심과 장한용의 만용, 장태건의 은닉까지. 3대가 합심하듯 만들어 낸 동굴 속에서, 온갖 향정신성 약물의 거래가 이루어졌다.
장태건은 급할 게 없었다. 그저 증거를 모아 두기만 했다. 당장 터트려 봤자 장창식은 그래도 장남이라며 싸고돌 것이다.
게다가 그 장남이 병원에 있지 않은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던 장남이 식물인간이 된 바람에 장창식은 몇 년 사이 10년은 늙어 버렸다.
그럼에도 보통 노인보다는 젊어 보였다. 매일같이 좋은 것만 처먹는 습관도 여전했다. 끼니마다 돌솥 밥만 쳐해드시니 뒈질 날이 요원해 보였다.
종로 출신의 진시황을 보며, 장태건은 내가 죽이기 전까지는 늙어 죽지 않을 노친네라고 생각했다.
“형, 형 밑에 다마 박았다며? 나 구경 한 번만 시켜 주면 안 돼?”
오메가가 겁도 없이 도면을 보고 있던 태건의 무릎 위에 올라탔다. 다음 달에 건설 부지 하나를 입찰받게 되었다.
낮에는 회사에 출근하고 밤에는 사무실에서 약 유통을 감시하는 나날들이 이어졌다.
대리로 승진했다. 그날은 명순이 숙소로 삼겹살을 사 왔다. 덩치에 안 맞게 곰살맞은 짓을 꽤 했다. 고기는 정길이 다 처먹었다. 소주를 빨다가 어이가 없어서 정길의 엉덩이를 발로 찼다. 씩 웃으며 쌈을 싸는 얼굴이 웃겼다. 그때쯤 정길은 대머리 듀오에서 벗어나 머리를 기르고 있었다.
계속 크던 키는 대학 졸업 전에 멈췄다. 명순이 새끼처럼 지붕에 닿을 듯 커지면 어쩌나 했는데 간신히 문짝만 한 곳에서 멈췄다.
이재하의 키는 얼마였더라. 도서관 앞에서 서 있던 걸 떠올리며 속으로 가늠해 봤자 정확하진 않았다.
이재하는 키가 크고 늘씬한데도 덩치가 살짝 있는 편이었다. 잘 웃지는 않는데, 모르는 이가 말을 걸어도 친절하게 대답해 주는 것 같았다. 주위에 사람이 많아도 저 때문에 사람이 모인 걸 인식하지 못하는 얼굴을 하고는 했다.
그걸 빤히 바라보다가 퍼석한 빵을 씹고 일터로 돌아가던 날들이 갑자기 떠올랐다. 태건은 짜증을 내며 오메가를 밀쳤다.
“야, 내려가. 무거워.”
허벅지에 멍 자국을 가득 달고 있는 꼴이 약을 못 끊었나 싶었다.
비단 그 오메가뿐만 아니었다. 사무소에서 허드렛일을 하는 새끼 조폭들까지 약에 손을 대고 있었다. 장한용의 약 유통 루트는 그가 식물인간이 된 뒤 아랫놈들의 이권 싸움에 끼어 더 치밀해지고 있었다.
그때쯤, 장한용이 직접 관리하던 사무소 중 한 군데에서, 밑의 놈들이 삥을 치다 걸렸다. 당연히 뒷수습은 태건이 해야 했다.
약에 전 상태로 태건이 누군지도 못 알아보고 회칼을 잡은 채 덤비는데, 두들겨 패도 제정신이 아니니 굴복시키기가 쉽지 않았다. 명순은 옆구리까지 따였다.
어금니 네댓 개를 뽑고 나서야 정신 차린 놈들에게 얼음물을 부었다. 어흐흐, 떠는 놈의 머리채를 붙잡고 삥땅 친 돈은 어디 있냐고 물었었다.
“약은 어디서 나서 팔았어.”
“기, 기술자 하나가….”
기술자 하나를 만나 그 자식을 협박해 만들게 했다고 한다. 그놈도 정상 놈은 아닌 게 자연 과학대 화학과를 멀쩡하게 다니다가 약 제조에 손을 댔다고 한다.
생리학을 복수 전공한 놈은 오메가가 발현 시에 나오는 페로몬을 생합성하는 데 성공했다고 했다.
물론 조악하기 그지없는 물질이었지만, 장기 복용 시 알파를 오메가로 변환시키는 것도 가능하다는 것이 그들의 설명이었다.
그들은 그걸 돼지 발정제처럼 데이트 강간 약물로 팔았다. 알파도 무너트리는 마성의 약이라고 선전해 클럽이나 술집 근처에서 소개로만 팔았다는데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 봤자 사 가는 놈들은 거기서 거기인데 놈들이 해 먹은 돈은 꽤 컸다. 어디에 팔았느냐고 송곳니를 뽑고 다시 물었다. 눈물을 질질 흘리며 놈들이 구매자의 이름을 자백했다.
그 이름이 낯익어 뒤져 보니, 올해 초 떼어먹었던 빚을 갑자기 청산한 놈이었다.
꽤 오래 빚을 달고 있었던 데다가, 정선에서 올라올 차비도 없어 카지노 주위를 전전하며 소주병을 판다고 했는데 이상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놈의 이름이 나오자마자, 명순이 바로 놈을 잡아 왔다. 놈의 설명은 황당했다.
“아이고, 저는 그냥 명의만 빌려준 것뿐입니다. 대포 통장으로 쓰려고 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다 불게요. 다 말씀드리겠습니다.”
놈은 옆에 나란히 쓰러져 있는 조직원 두 명과 그들의 어금니였던 것을 본 건지 한껏 졸아붙어 묻지도 않은 것까지 이실직고했다.
그의 이름을 빌려 간 사람은 제이앤컴퍼니 대표 이사 김상호, 유신의 후처 자리로 들어간 김란희의 친정 오빠 중 하나였다.
장태건은 그제야 문득 정신이 들었다.
그는 명순을 돌아보았다. 명순 역시 놈의 말을 심각하게 듣고 있다가 초조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지난해 초에 귀국하셨습니다.”
태건이 약물 치료를 시작한 뒤, 명순과 정길은 저희들끼리 이재하의 소식을 알고는 있어도 태건에게 부러 말하지 않았다.
이가 바득 갈렸다. 그 개 같은 집안을 그냥 둔 게 문제였다. 모친의 복수에는 그곳도 끼워져 있을 텐데, 한 맺혀 죽은 사람의 유언을 허투루 들은 잘못이 컸다.
장한용 하나 골로 보낸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깡그리 쓸어버렸어야 했는데.
이미 팔아넘긴 약을 되돌릴 힘이 없었다. 장태건은 그제야 제가 너무 안일하게 굴었다는 걸 깨달았다. 개 주제에 언감생심 넘볼 것을 넘보자 싶어 단념한다 어쩐다 지랄을 떤 것도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가 그렇게 주제에 맞지도 않는 고민을 하는 사이, 이재하의 식탁 위에 뱀같이 독을 품은 것들이 오를지도 모르는데 말이다. 알파를 오메가로 형질 변환시키는 약물이 김란희에게 들어갔다면 분명히 그것은 이재하를 위한 끼니에 사용될 것이다.
유신은 보수적인 회사였고, 재계 순위에 오른 국내 기업 중 오메가 임원의 수가 가장 적은 그룹이었다.
이재하가 오메가가 된다면 경영 승계는 포기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최대의 수혜자는 누가 될까. 김란희와 그의 모자란 아들일 것이다.
꾸준히 친정 오빠의 명의로 약을 사들였다는 건 아주 은밀하게 가장 치사한 방법으로 이재하의 경영 승계를 방해하고 있다는 증거나 다름없었다.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그해, 장태건은 조직 내 약 유통에 관련된 장부를 긁어모았다.
장한용이 고꾸라지고 장창식이 비칠비칠하는 동안 약을 판 돈으로 조직 내 세력을 불리고 있는 것들이 있었다. 장태건은 그것들의 머리채를 잡아 하나하나 목을 땄다. 옆 동네 명원까지 장태건을 주시할 정도였다.
피를 묻히지 않는 날이 없었다. 개는 정말 개답게 행동했다. 그가 태어난 의의에 맞게끔, 사냥하고 주인을 지키기 위해 온 정성을 쏟기 위해 태어난 것처럼.
손톱 끝에 남의 피로 된 딱지가 빠지지 않아 늘 거무죽죽한 손끝으로 다니기를 몇 개월간, 장창식이 드디어 장태건을 제 친족으로 인정했다.
“내가 진작 나 닮은 핏줄이 태건인 걸 못 알아보고.”
태건이 들쑤시고 다니느라 약과 관련된 자금줄들이 기업의 지하로 흘러 들어가고 있다는 걸 알게 된 장창식은 태건을 자신의 충실한 개로 여기는 듯했다.
독니를 품은 채로 꼬리를 마는 개는 없다. 장태건은 조부의 개가 아니었다. 그러나 당분간 그런 척하기로 했다.
그사이 태건의 거처가 정길과 명순이 함께 지내던 골방에서 평창동 본가로 바뀌고 타고 다니던 차가 두 번 변했다. 명함도 새로 파였다. 장한 건설 현장 관리부 실장 장태건. 유신 전자에 입사한 이재하의 직책이 뭐였더라.
그래 봤자 유신에 비하면 구멍가게 건축 사무소의 실장 나부랭이였지만 그런 생각이 드는 걸 멈출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고기 파티를 하지 않았다. 꽤 괜찮은 일식당에서 밥을 사 먹였더니 정길이 새끼가 술 취해서 처울었다.
그러나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그 시간에도 이재하의 입으로 독액이 떨어지고 있을지 몰랐다. 다행히 김란희가 받아 간 약은 임상적 효과가 검증되지 않아, 아주 오래 복용하지 않는 이상은 효과가 미미했다.
열성 알파를 오메가로 만들 수는 있어도 우성 알파를 오메가로 형질 변환시킬 수는 없는 듯했다.
장태건은 나머지 약들을 김 원장에게 가져다주었다. 김 원장은 한참 후에야 결과를 가져다주었다. 약 성분의 임상적 효과를 검증하느라 오래 걸렸다는 개소리만 하길래 주둥이를 찢어 놓으려다가 참았다.
“친구 놈 연구소에 보내 봤는데, 10년 동안 장기 복용하지 않는 이상은 괜찮을 것 같은데…. 문제는 제약 회사 하나가 냄새를 맡았나 봐. 연구 시작했다던데? 그거 때문에 그 바닥 난리 났잖아.”
“…제약 회사 어디.”
김 원장은 태건의 기색을 보다가 주춤 물러섰다. 김 원장은 이 바닥에서 오래 굴러먹은 만큼 눈치가 좋았다. 그는 태건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유신 제약.”
씨발. 저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좆 같은 것들. 멀쩡히 살아 있는 아내를 두고 바람을 피운 이익형이라는 씨발 새끼나 뻔뻔하게 개 같은 집구석으로 기어들어가 되는대로 도둑질하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김란희 같은 것들은 지금이라도 당장 도끼로 내려치면 죽을 목숨이었다.
시퍼렇게 갈아 둔 칼날 앞에서는 똑같이 무른 목숨이면서 감히 누구한테. 장태건은 이를 박박 갈았다. 개 같은 새끼들을 다 죽여버리겠다고 생각하며, 태건은 김 원장이 내밀었던 보고서를 살폈다.
보고서를 요약해 보자면, 형질 변환 약물의 효과는 미미했다. 장기 복용을 했다고 하더라도 나름의 해결책이 존재했다.
알파가 오메가로 변환해 가는 과정이 심화될 때, 그러니까 장기간 약을 복용한 해당 알파가 러트기 때문에 온몸 페로몬 체계에 변화가 올 때, 다른 우성 알파의 페로몬으로 오메가 페로몬을 누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여기 이 부분 설명해 봐.”
태건이 내뿜는 살기에 질려 구석에 박혀 소주를 마시고 있던 김 원장의 목덜미를 끌어다가 보고서를 들이밀었다. 김 원장은 지문이 묻은 안경을 몇 번이나 닦은 뒤 더듬더듬 말했다.
“…그러니까 같은 우성 알파의 페로몬을 약을 복용한 알파의 러트기마다 페로몬 샤워시켜 주라는 소리 같은데…. 그렇게 하려면.”
“그렇게 하려면.”
장태건은 김 원장의 말을 친절히 따라 해 주었다. 어서 그 빌어먹을 아가리로 뒷말을 내뱉어 보란 친절이었다.
김 원장은 안경알 너머로 태건을 슬쩍 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눈빛이었다.
“알파와 알파 간의 성관계를 통해야 한다, 라고 되어 있네.”
하, 씨발.
저절로 입꼬리가 올라가려는 걸 간신히 붙잡았다.
어쩌지, 이재하. 너는 기어코 나 같은 개새끼에게 발목이 물릴 운명이었나 보다.
오목한 아킬레스건 옆 청순하게 돋아난 복사뼈를 보고 딸 쳐 달라며 좆 대가리가 벌떡 설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그것에 내가 물어도 될 발목이라는 걸 깨달았어야 했는데.
드디어 십 몇 년 존나게 버틴 끝에 이재하의 옆자리에 나란히 설 구실이 생긴 것이다.
* * *
살짝 억울한 걸 말해 보자면, 김수민은 원래도 약쟁이였다.
그렇기 때문에 접근이 쉬웠다는 건 인정하지만, 태건이 나서서 약에 중독되게끔 한 것은 아니었다.
장태건에게는 정의가 있었다. 의와 도를 꼬박꼬박 지키며 산다는 뜻이 아니라, 개의 주인이 정의를 지키고 사니 개도 일정 부분 정의롭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재하는 깔끔한 남자였다. 결벽적일 정도로 질 나쁜 것을 혐오하고 큰 사업체를 굴리면서도 도를 넘는 짓은 하지 않았다.
장태건은 그의 주인이 인식하지 못한 아주 옛날부터 그의 개였기 때문에 이재하의 정의가 곧 장태건의 정의인 셈이었다.
사실 장태건으로서는 그딴 약쟁이 새끼 하나쯤이야 잡아다 빡촌에 처박아 둬도 상관없었지만, 이재하가 원하지 않을 것 같아 부러 간접적으로 접근했던 것이다.
납치해 멱을 따기보다 훨씬 까다로운 일이었다. 몇 선 국회의원의 사랑스러운 오메가 아들? 국회의원 아들도 모가지는 하나였다.
그러나 나중에 혹시라도 이재하가 사실을 알게 되면 골치 아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뒤끝 없는 걸로 골라 와. 중독성 심하지 않은 것 중에, 뽕쟁이들 환장할 만한 걸로.”
얼마 지나지 않아 명순이 구해 온 것은 단연코 품질이 좋았다. 태건은 그날부터 김수민이 가는 모든 모임에 그 약을 슬쩍 뿌리기 시작했다. 수량은 적게, 그러나 모임의 구성원이 한 번씩은 모두 그 약을 경험할 수 있게끔.
약쟁이들의 모임에서 왕 노릇을 즐기는 김수민의 수중에 가장 먼저 그 약이 들어가게끔 말이다.
오래 걸리지도 않았다. 새로운 게 있다는 말에 눈을 번뜩인 것은 김수민 쪽이었으니까. 돈을 먹은 놈은 몇 번 권하지도 않았단다.
그렇게 돈 먹인 놈을 통해 약을 김수민에게 전달하다가, 어느 날 약을 뚝 끊어 버렸다.
그런 뒤에는 소문이 돌게 했다.
장한의 장태건 실장이 새로운 약 유통 경로를 뚫으려 한다.
비즈니스를 굳히기 위해 새로운 약을 푼다는데, 그걸 조직원 몇이 빼돌려 미리 시장에 나왔다는 얘기였다.
김수민은 당연하게도 태건을 찾아왔다. 겁도 없지. 이재하의 취향일 수도 있다. 겁은 장태건도 없는 편이었다.
이재하의 오메가는 고고한 얼굴을 하고 태건에게 명령하듯 말했다.
“나한테 팔아요.”
“맡겨 놨어? 당당하시고 지랄이야, 사람 헷갈리게.”
그날은 유독 기분이 나쁘지 않은 날이었다. 새벽 여섯 시부터 공사를 시작하는 건설 현장에 들러 현장 토목과와 얘기한 뒤 함바집에서 간단히 아침을 먹고 있었는데 뉴스에 이재하가 나왔었다.
경영 승계를 앞둔 재벌 3세들에 대한 기획 뉴스였는데, 뉴스에 나온 나머지 떨거지 두 명보다 단연코 빛나는 얼굴이었다.
솔직히 나머지 것들은 어떻게 생겼는지 보자마자 까먹었다. 넙치와 곰치를 닮았던 것도 같고. 장태건은 밥알을 느리게 씹으며 뉴스에 집중했다.
단점이 없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는 말이 아나운서의 입을 통해 나왔다. 두부조림을 숟가락으로 퍼먹다가 뉴스 채널을 돌리려는 새끼에게 그대로 숟가락을 집어 던졌었다.
지난달 말경, 유신 전자의 행사에 참석한 이재하의 모습이 화면을 통해 나오고 있었다. 베이지색 정장이 죽여주게 야했다. 저러고 다니다가 발기 부전에 고통받던 회사 영감들까지 죄다 세우면 그 복지를 어쩌려고 그러는지 이해할 수 없기도 했다.
그렇게 아침을 활기차게 열어 준 뉴스를 접한 장태건은 정길이 모는 세단에 올라탔다가 장창식의 건강 검진 결과를 메일로 받았다.
고위험군이라고 뜬 사항들이 꽤 많았다. 의사에게 돈을 먹여 혈압을 조절하는 약을 비타민제로 바꾼 지 꽤 되었다.
나름 효자라고 생각했다. 당장 극약을 먹여 죽일 수 있는데 이렇게 느린 죽음을 선사하려 애를 쓰다니. 아직은 살려 두는 편이 좋긴 했다. 조손의 인생 단 한 번쯤은 영감도 쓸모가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쨌든 의사와의 전화 통화를 통해 검사 항목들이 꽤 괜찮게 나온 점에 대해 칭찬한 뒤 장창식의 수족인 고 비서에게 수치를 조작해 보낼 것을 다시 한번 당부했다.
“정길아, 의사 새끼들 딴 주머니 잘 찬다. 혹시 모르니까 눈 하나 달아 놔.”
“예, 형님.”
진료실에 감시 카메라를 달라고 말하고 보니 일이 꽤 잘 풀려 간다고 여기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다음 회사에 출근한 것인데 손님이 와 있단다. 누군가 했더니 김수민이었다. 일진이 최상이었다. 그 때문에 시건방진 태도도 많이 봐준 편이었다.
놈은 정길과 명순이 김수민의 건방진 말투에 살기를 내뿜고 있는데도, 둔한 건지 아니면 누가 저를 해할 것이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는 것인지 유유자적했다.
태건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이 말을 하기까지 꽤 오래 걸렸다고 생각하며.
“조건은 하나. 이재하 이사와의 자리 주선.”
김수민은 오묘한 표정을 짓더니 그다음에는 열이 받은 듯 얼굴이 빨개져 소리쳤다.
“너 미쳤어? 깡패 새끼 주제에 날 뭐로 보고!”
“싫음 말지 왜 소리를 질러. 난청 오겠네, 씨발.”
파르르 떨며 욕을 하길래 바로 보냈다. 아쉬울 건 없었다. 약의 수급을 완전히 끊어 두라 지시한 참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수민은 또 한 번 태건을 찾았다.
이번에는 좀 더 고분고분한 태도였다. 기가 죽어 나타났는데도 곱게 보이지 않았다. 이재하를 두고 약 같은 게 필요할까? 개는 그것이 의문이었다.
“그거 말고, 그거 말고 다 할 테니까….”
“어휴, 지겨워. 수민 씨는 왜 그렇게 자신감이 넘쳐? 본인이 뭐 한다고 하면 남들이 넙죽 예, 그러세요. 할 것 같지.”
“난 그게 아니라… 그냥 재하 씨 만나는 것만 빼고 다….”
아, 좀 열받네.
꼴에 이재하가 소중하긴 한가 보다. 뒤에서 몰래 호박씨 까듯 굴러먹던 주제에 들키기 싫다는 걸까, 아니면 저도 남자라고 이재하를 보호하겠다는 걸까. 둘 다 기분이 꽤 좆 같았다.
“그럼 쟤 좆이라도 빨아 볼래?”
태건은 지겨움에 하품하며 그들의 뒤에 기립해 있던 정길의 아랫도리를 가리켰다.
수민이 모멸에 젖은 얼굴로 망설였다. 그럼 그렇지, 씨발. 귀한 보석을 손에 쥐고도 딴짓하느라 제정신이 아니던 약쟁이 새끼의 결심이란 거기서 거기였다.
누군 뼈를 깎는 시간을 보내며 간신히 이 자리까지 미친 듯 올라왔는데, 노력 없이 얻어 놓고 지킬 생각도 없어 보였다.
태건이 저를 비웃는 걸 안 건지, 수민은 무릎걸음으로 기어 정길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걸 구둣발로 막았다.
이재하의 약혼 상대가 꽤 괜찮은 인격이면 골 아프겠다고 생각했었는데, 김수민은 예상 그대로였다.
“사상이 씹창 걸레셔요. 어딜 사까시 한 번에 약값 벌려고. 본인 입구멍이 그렇게 비쌀 것 같으세요? 하여간 쪼다 새끼. 정길아, 손님 가신단다. 고추 따먹히기 전에 얼른 보내 드려라.”
수민은 울면서 나갔다. 정말로 정길의 좆을 빤 것도 아니면서 왜 우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정길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정길이 이 새끼야, 곱게 보내 드리랬더니 나가자마자 저분 드셨어요?”
“아닙니다, 형님.”
정길이 정색했다. 자기도 취향이 있단다. 근데 왜 지랄이야. 태건은 어깨를 으쓱이고는 담배를 물었다.
수민은 그 이후로도 몇 번을 더 찾아오다가, 태건의 요구가 정말 단 한 가지라는 걸 알고는 한동안 발길을 끊었다.
그래 봤자 한두 달이었다. 약쟁이는 부모를 팔아서라도 약하는 새끼들을 두고 약쟁이라 부르는 것이다. 태건은 김수민의 부모를 살 생각 없으니, 그는 결국 제 약혼자를 팔았다.
“조, 조건이 있어.”
“씨, 씨불여 봐.”
말 더듬는 것을 흉내 내자 김수민의 얼굴이 모욕감에 일그러졌다. 여기까지 와서 약을 구걸하고 있는 주제에 곧 죽어도 깡패 새끼에게 반말하겠다는 고고한 자존심은 어디서 나오는 걸까. 개로 태어난 태건은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그 사람은 건들지 마.”
그러나 그 말만은 정말 열이 받았다. 한 번 참아 준 것만으로 제 딴에는 꽤 관용을 베풀었는데 몰라주니 서운했다. 서운한 마음을 참을 수 없었던 장태건은 앉아 있던 소파 옆 콘솔 위 스탠드를 집어 들고 일어섰다. 별안간 뽑힌 전선이 장력을 이기지 못하고 끊긴 터라 스파크가 일렁였다.
태건은 친절하게 다시 물어보았다.
“야, 이 씹걸레야. 내가 지금 너한테 훈수 둬 달라고 부탁하는 것 같아?”
약혼자 팔아 약 사러 온 주제에 건드리지 말라느니 주제넘은 말을 하는 게 같잖았다.
장태건은 제 열등감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저는 다시 태어나지 않는 이상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약에 전 김수민은 날 때부터 가진 것이었다.
개로 태어난 장태건은 적어도 그의 옆에서 짖을 수 있는 발판이 필요했다. 누가 사람 시켜 달래? 목줄 묶인 개새끼 한다잖아. 그러나 다 가진 이재하에게는 그 자리조차 만석이었다.
살기가 넘실거렸다. 놀라 달려온 명순과 정길이 온몸으로 장태건을 말렸다. 정길과 명순의 살기는 알아보지도 못했던 김수민은 놀란 것인지 오줌까지 지렸다. 힉힉거리며 숨이 모자랄 때까지 훌쩍거리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정길과 명순이 달려들어 매달렸다.
“형님, 조금만 더 하면 됩니다….”
“다 왔습니다, 형님!”
그들은 스탠드를 들고 가만히 서 있는 태건의 앞에 무릎을 꿇고 이마를 바닥에 찧어 댔다. 태건은 한숨을 내쉬며 스탠드를 집어 던졌다.
“지랄들 그만하고 일어나세요.”
충격에 어긋난 스탠드의 필라멘트가 치직 소리를 내며 한 번 더 스파크를 튀겼다.
김수민은 바들바들 떨며 숨을 힉, 집어 먹었다. 장태건은 바닥을 기는 김수민의 앞에 쪼그려 앉아 담배를 집어 물었다.
“김수민 씨.”
“흐, 흐윽….”
“처울지 말고 대답해, 걸레 새끼야.”
“네, 네…, 힉, 흑….”
“도련님 보시기에 내가 참을성이 좋아 보여요?”
수민은 눈물에 잔뜩 젖은 얼굴을 한 채 대답하지 못하고 있었다. 질질 짜는 것들은 질색이었다.
태건은 눈썹 끄트머리를 엄지로 슥슥 긁다가 최대한 상냥하게 말했다.
“어차피 김수민 씨는 나한테 약 받아 갈 거고, 이재하 이사도 소개해 주게 될 건데 대체 왜 그딴 말을 지껄여요, 사람 속 뒤집어지게.”
“흑, 흐윽, 힉….”
“날짜, 장소 정해서 연락할 테니까 딴말하지 말고 기다려. 집안 백 믿고 개지랄 떨 생각도 하지 맙시다. 국회의원도 모가지는 하나예요. 친절하게 알려 드렸으니까 외우세요.”
수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은 물고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인 뒤 명순을 향해 턱짓했다. 이 물건 좀 그만 치우라는 사인이었다.
그런 다음에는 또 기다림의 연속이었다. 우리의 약쟁이께서는 갖은 핑계를 다 대가며 약속을 미뤘다.
“경고를 한 번 더 해야 할까요?”
달이 넘어가자 제가 다 초조한 낯으로 정길이 말했다.
“왜 오버야.”
태건의 시큰둥한 대답을 듣고 정길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말한 적도 없는데 장태건의 숙원 사업을 완벽하게 이해한 그 둘이 어이가 없었다.
그사이 모임 하나가 잡혔다. 슬슬 얼굴을 알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재하 정도의 급은 부러 나오지 않을 자리였지만, 김란희가 밀어붙였는지 참석 의사를 표했다고 했다.
장태건 역시 그 자리에 참석했다. 어중이떠중이들의 모임이었다. 통성명만 할 생각이었다. 안면만 튼 채로 나중에 김수민과 마주할 때를 기다리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장태건은 이재하가 걸어 들어오자마자 느껴지는 한 톨의 페로몬에도 제 두통이 석죽는 것을 인지할 수밖에 없었다.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짓씹은 욕이 잇새로 튀어나오기 전에 장태건은 표정을 굳혔다.
이재하는 웬 베타와 말을 섞는 중이었다. 들고 있는 잔은 올리브 대신 레몬 껍질이 들어간 마티니였다. 한 잔을 단숨에 털어 넣더니 이번엔 싱글 몰트를 온더록스로 시킨 듯했다.
바에 기대어 있는 몸은 적당히 단련되어 단단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뉴스에서 송출해 준 베이지색 정장은 아니었다. 단정한 짙은 회색의 정장이었는데도 비슷하게 야한 느낌이 들었다.
이재하를 보며 그런 느낌을 받는 건 장태건이 유일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옆에 있는 베타는 이재하의 관심을 끌고 싶은지 계속해서 그와 같은 술을 주문했다. 그러나 이재하는 아무래도 좋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곧은 눈썹뼈 밑으로 오뚝하게 떨어진 콧날, 질감 좋아 보이는 입술, 메스로 저민 것 같은 섬세한 눈꺼풀에 감싸진 권태로운 눈동자. 의외로 색이 옅은 다갈색의 머리카락, 같은 색의 속눈썹.
어두운데 자세히도 보인다는 게 우스울 정도였다. 장태건 역시 싱글 몰트를 샷으로 들이켰다. 목이 탔다. 독주가 목구멍을 긁고 내려가는 감각만이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케 했다.
옆에 있던 베타가 이재하에게 뭐라 속삭이는 것이 보였다. …꽤 가깝네. 그 둘 사이의 거리감이 별로 없어 거슬리던 참이었다.
“…….”
“…….”
그리고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을 아주 오랫동안 기다려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태건은 그날 그 한순간을 고대하며 온 생을 보내온 걸지도 모른다.
그가 모르는 사이에도, 그가 인지하고 있는 그 시간 틈에도.
그날 그곳에서, 그 눈 마주침 한 번으로 깨닫고야 만 것이다.
* * *
세간에 예비 약혼자라고 알려진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이 생긴 듯했다. 그게 아니라면 삼자대면 후 김수민이 약속대로 공급받은 약을 들고 늘 가던 회원제 클럽에 올 리가 없으니까.
두 사람 사이가 풀어졌다면 약간의 결벽증이 있는 이재하의 눈치를 살피느라 당분간은 행동을 조심할 테니 말이다.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를 않는다길래 밑의 놈 중 하나를 붙여 놨었다. 김수민 성격상 이재하를 만나 개소리를 늘어놓고도 남았기 때문이다. 며칠 조용히 지낸다고 해도 언젠가는 이재하를 만나려 들 것이 분명했다.
태건은 기본적으로 약쟁이 새끼들을 믿지 않았다. 이성이라고는 없는 족속이니까.
물론 김수민이 이재하에게 접촉한 이유도 얼추 짐작이 갔다. 억울하겠지, 미칠 것 같겠지. 저는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 이재하고 세상이고 저에게 너무한 것만 같겠지.
원래 양심 없는 것들이 생각하는 것이야 뻔했다.
그리고 정말로 며칠 후, 김수민에게 붙여 둔 꼬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장태건은 갖고 있던 것 중 가장 좋은 정장을 걸치고 호텔에 미리 최고 객실을 예약해 뒀다.
지난번처럼 놓칠 생각은 없었으니까. 그러나 일이 그렇게 되었을 때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개가 주제에 맞지 않는 욕심을 내는 건데도 이재하에게 가는 길은 묘하게 운이 좋기만 했다.
술에 취한 이재하가 뭘 착각한 건지, 장태건에게 먼저 입을 맞춰 온 것이다.
룸 거실에 있는 소파에 앉은 것도 아니고 그 아래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두 알파는 셔츠 위 단추들을 푼 채로 다리를 길게 뻗었다.
장태건의 셔츠 소매는 걷어 올려진 채였고, 길게 뻗어 주름 없이 팽팽해진 정장 팬츠 아래 발목은 양말을 신지 않아 훤히 드러난 채였다. 이재하는 그보다 아주 조금 더 단정했을 뿐이다. 그러나 그조차 눈이 풀린 지 오래였다.
안주라고는 올리브 절임이 다였다. 새벽까지 이어진 술자리의 끝은 위스키의 젖은 입술을 안주 대신 무는 것으로 소강을 맞이했다.
장태건은 이재하가 제게 몸을 기울이느라 허벅지 옆을 손으로 짚은 걸 물끄러미 보다가 입술을 쪽 빨았다. 이재하가 묻혀 둔 위스키가 제 입술에 묻었기 때문이다.
“…뭐 하자는 건데.”
장태건의 목소리는 심하게 낮아져 있었다. 말을 내뱉는 순간에도 태건의 시선은 재하의 얼굴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존나 꼴리게 생겼어. 따먹고 싶다. 향도 좋아, 씨발. 산발적인 생각에 잠식될 지경이었다.
“오늘은 바로 안 하고 말도 하네.”
이재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혼잣말을 하듯 무람없는 말투가 신기했다. 어떤 새끼랑 착각 중일까. 너는 어떤 새끼랑 이렇게 맛있는 짓거리를 또 했을까. 네가 나로 만족해 줄까.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바닥에 앉은 태건을 들여다보는 재하의 두 눈이 살짝 풀려 있었다. 그가 곧이어 좀 더 상체를 기울여 태건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숨을 내쉬었다.
“우리 맨날 섹스하지 않았습니까.”
장태건은 팔을 뻗어 바카랏 잔을 움켜쥐었다. 그 와중에 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재하가 불편할까 봐 한쪽 어깨의 움직임을 굳힌 채로 말이다.
“어쭈, 떡은 다른 놈이랑 쳐 놓고 기대기는 왜 또 기대. 저리 가요, 성희롱으로 신고하기 전에.”
어이가 없어 잔에 담긴 술을 몽땅 털어 넣었다. 김수민이랑은 몸을 섞은 것 같지는 않던데. 두 사람 사이에는 몸 정이 싹튼 특유의 끈적한 기색이 없었다.
어떤 씹새끼와 저를 헷갈리는 걸까. 그 새끼한테도 이렇게 나긋하게 굴어 줬을까? 그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희미한 쟈스민 향이 났다.
장태건의 것은 더러운 기분에도 불구하고 단단하게 커진 참이었다. 기분과는 별개의 문제라는 듯이. 너 하나 보고 자지에 튜닝까지 마쳤는데. 이쪽도 딱히 수절하며 산 것은 아니지만 속이 뒤집어졌다.
그때 이재하가 그의 목덜미에 묻은 고개를 두어 번 저어 파고들듯 굴더니 웅얼거리며 말했다.
“아니, 장 실장이랑 했잖습니까. 우리 둘이….”
그 말에 안 그래도 한쪽 허벅지를 팽팽하게 만들던 것이 꺼덕이다가 조여 오는 바지 천에 막혀 멈췄다. 아플 지경이라 태건은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고는 다시금 이재하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가라안다 못해 갈라지기 시작했다.
“…우리가, 뭘 했는데.”
“그러니까 우리 둘이서….”
재하가 고개를 들고는 태건에게 다시금 입을 맞췄다. 이번에는 그가 먼저 태건의 입 안에 남아 있던 술을 빨아 갔다.
신경이 다 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심장이 갈비뼈를 부수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태건은 제게 입을 맞추느라 눈을 감은 재하의 얼굴을 샅샅이 훑었다.
아마 술에 취해 착각한 것이겠지. 그와 저는 이제 딱 세 번째 만났을 뿐이다.
그 세 번 동안 장태건은 머릿속으로 무수히 많이 이재하를 범했지만, 단 한 번도 실행에 옮긴 적은 없었다.
어디서 웬 놈이랑 친 떡을 술김에 자신과 친 것이라 구분하지 못하고 있거나, 그게 아니면 뭔가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이재하의 숨에서는 위스키와 브랜디가 섞인 오묘한 단내가 났다.
장태건은 딱 저와 같이 모범생처럼 입을 맞추는 이재하를 바라보다가 그의 뒷덜미를 손으로 쥐어 끌어당겼다.
…섰으면 하고 아니면 오늘은 놔준다.
장태건은 이재하의 허리를 번쩍 들어 제 허벅지 위에 앉히며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당장 따먹고 싶지만, 이재하가 취중이라는 점을 감안 하기로 했다. 장태건은 천천히 손을 뻗어 그의 앞섶을 문질렀다.
그리고 이재하는.
“이런, 씨발-.”
바지 앞섶이 살짝 젖어 있었다. 안쪽에서 물이라도 흘린 듯이. 장태건은 신음처럼 욕을 내뱉었다.
그는 그날, 이재하 없이 저는 죽은 목숨과 다름없다는 걸 다시금 되새길 뿐이었다.
몸속 어딘가에 남겨진 위각인이 웅웅 우는 소리가 났다. 그것은 섹스 한 번으로는 떨어지지 않을 생각인지 묘하게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태건은 그날 여러 번 사정했다. 모두 이재하의 안쪽에. 그가 가장 잘 느끼는 곳에 귀두를 붙이고 요도구를 벌름거리며 구슬로 안쪽을 후벼 파 줬다.
맨살이 닿아 있다는 게 미치도록 기뻤다. 얼마나 바랐던 일인지 말로 설명도 못 할 정도였으니까.
포기하기는 뭘 포기해. 양심 없는 새끼. 저 자신에게 욕을 퍼붓는 순간에도 행복함에 사정했다. 어떻게든 이걸 빌미로 당신을 벌려 들어가 저를 새기겠노라고 다짐했다.
이대로는 도저히 이재하를 놓아줄 수 없었다. 그의 살맛을 보고 그의 피부가 저에게 어떤 느낌을 주는지 모두 알아 버렸으니, 그를 갖지 못하느니 죽는 것이 나았다.
그때부터는 눈이 붉어져 이재하를 가질 궁리에 더욱 골몰했다. 점점 더 깊은 구덩이를 파 그를 위한 함정을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의외로 함정은 무용지물이 되어 버렸다. 장태건이 뜻밖의 프러포즈를 받은 것이다.
사실 저는 운이 좋은 편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 두 번째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