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1/18)

10.

별채 현관에서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일이 끝났을 때는 무릎이 살짝 얼얼한 만큼 더워졌다. 재하는 상기된 뺨을 문지르려다가 제 손에 정액이 묻어 있음을 깨닫고 그만두었다.

턱이 뻐근했다. 엄지로 하악관절 부근을 꾹꾹 누르면 좀 나으련만 멀쩡한 손이 없었다. 방금 전까지 그 안에 담고 있었던 것의 크기를 생각하면 그런 뻐근함은 당연했다.

그가 정말로 참지 않고 덤빌까 봐 입으로 해 주겠다고 말한 건 자신이었다.

‘윗입이 더 고파요? 아침 잘 먹였는데 희한하네.’

장태건은 킬킬거리며 제 앞에 무릎을 꿇은 재하의 뺨을 손으로 쓸어 주었다. 다정한 손짓에 그렇지 못한 말이 재하의 가슴속 어딘가를 빠르게 불태웠다.

현관 바닥이 차가운 것도 잊고 무릎을 꿇었던 건 그 때문이다. 다시 생각해봐도 미친 짓거리였다. 재하는 열기가 가라앉지 않는 뺨 때문에 살짝 곤혹스러워졌다.

태건이 피식 웃으며 그런 재하의 손을 가져가 풀어 두었던 제 넥타이로 닦아 주었다.

“뭐 묻으면 꼭 인상 찌푸리더라.”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긴. 당신 손수건도 꼬박 챙겨 다니잖아.”

태건의 어조는 드물게 가벼웠다. 웃음이 가시지 않은 얼굴은 무척이나 잘생겨 보였다. 다시 만난 이후로 장태건은 꽤 기분이 좋아 보였다.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도 저렇게 기분 좋아 보인 적이 있었나. 기억을 더듬어 봐도 지금처럼 시도 때도 없이 흥얼거리거나 사심 없이 웃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의 검은색 넥타이에 타액이 섞인 백탁액이 묻었다. 재하의 손을 닦아 준 태건이 그걸 망설임 없이 바닥에 버렸다. 입술 끄트머리가 살짝 찢긴 듯했다. 재하는 흐트러졌던 넥타이를 바로 하며 상기된 안색을 가라앉히려 애를 썼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양 뺨이 붉게 달아오른 데다가, 입술이 온통 젖어 번들거리는 모양새는 도통 상갓집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장태건은 퍼스너를 추켜올리며 흥얼거렸는데, 제 옷매무시를 다듬고는 더 건들 것도 없는 재하의 재킷을 툭툭 털어 주었다. 다정하게 느껴진다기보다는 다 큰 어른이 과장스레 소꿉놀이를 흉내 내는 듯한 모양새라 픽 웃고 말았다.

그의 것을 빨기 위해 꿇었던 무릎이 살짝 얼얼했다. 발기되었던 성기가 조금씩 가라앉고 있었다. 재하는 그의 것을 빨며 흥분했다는 걸 들키지 않았으면 했다.

다시 생각해봐도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서로를 찾지 않았던 지난 시간은 어디에 두고, 사흘 전부터 두 사람은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굴고 있었다.

‘빨아 줄까 아님, 빨아 볼래.’

별채로 들어와 넥타이를 푼 그가 했던 첫마디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지금이 상중이고 사람들이 저와 태건을 찾고 있다는 것도 중요하지 않아졌다.

뭐라고 대답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데 정신 차려 보니 무릎을 꿇고 있었다. 그의 앞섶에 얼굴을 묻을 듯 가까이서. 이성은 뭐 하는 짓거리냐고 경고하는데, 몸 안의 무언가가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제가 원하던 게 바로 그것이었구나 생각될 정도로.

별채 현관에는 두 알파의 페로몬이 흘러넘쳤다. 문을 닫아 두어 환기조차 되지 않는 터라, 가만히 있다간 그 향에 질식할 것 같아 숨을 밭게 몰아쉴 정도였다.

그 때문에 달아오른 얼굴이 쉬 진정되지 않았다. 피부가 하얀 편이라 격렬한 운동을 하고 나면 온몸이 빨갛게 물드는 것이 꽤 신경 쓰였었는데, 따지고 보자면 별다른 신체적 활동을 한 것도 아니면서 뺨의 열기가 가라앉지 않아 곤혹스러웠다.

재하는 넥타이를 만져 준 장태건이 매무시를 다듬어 준다는 명목하에 흑심을 담아 여기저기 더듬는 것도 뿌리치지 못했다. 대신 다른 말을 꺼냈다.

“이제 가 봐야 합니다.”

“그 얼굴로 밖에 나오려고?”

“얼굴이…. 흉합니까?”

“얼굴이 왜 흉해. 가끔 이상한 말 하더라. 상갓집에 뭐 주워 먹으러 온 개떼들은 내가 볼 테니까 여보는 여기 계셔요.”

여보라니. 듣고도 아찔해지는 소리였다. 장태건이 입술 위에 쪽, 하고 가벼운 키스를 남기고는 떨어졌다.

“얼굴 가라앉을 때까지 나오지 마.”

많이 흉해 보이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커다란 손이 이마를 만져 주었다. 그제야 정리해 두었던 머리카락이 흐트러져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다시 한번 알 수 없는 음을 흥얼거린 뒤, 등을 돌리려다가 별안간 허리를 굽혔다. 그러고는 재하의 발목을 살짝 쓰다듬었다. 불현듯 닿은 감촉에 놀란 재하가 물었다.

“무슨…. 뭡니까.”

“당신이 내 상주 완장 밟고 있잖아.”

재하는 소스라치듯 놀라 발을 떼어 냈다. 태건의 말대로 정말 삼베로 된 상주 완장을 밟고 있던 것이다.

태건은 완장을 주워 들고 일어나 그것을 손으로 툭툭 털어 낸 뒤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이 어째 저를 놀리는 것 같아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태건은 그대로 별채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그가 나가자마자, 재하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느라 또 한 번 표정이 무너졌다.

셔츠에 유두가 스치는 느낌이 좋지 못했다. 또 피가 몰려 정점이 부푼 듯했다. 태건과 만나기 전에는 달려 있는지 신경도 쓰지 않던 부위였는데 요즘 따라 더욱 느낌이 이상해졌다.

재하는 한숨을 내쉬다가 그냥 집 안으로 들어섰다. 세수라도 하고 나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손도 제대로 닦고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뭐 묻은 걸 못 견뎌 한다는 태건의 말이 맞는 것 같았다. 그가 어째서 그런 걸 알고 있을까 싶어졌다.

간단히 세수한 뒤, 다시 옷매무새를 점검하고 별채를 나섰다.

본채로 향하는 길은 걸으면 걸을수록 부산스러웠다. 사회생활을 하며 장례식에 조문 갈 기회가 늘어난 뒤부터 느낀 것이지만, 상갓집은 의외로 엄숙하지 못하고 시끌벅적했다.

상을 당한 이가 젊거나 앞날이 창창한 이가 아니라면, 꼭 잔칫집처럼 시끄러웠다. 장창식의 장례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인은 심장마비라고 했던가. 재하가 직접 그의 주치의를 만나 본 것은 아니었다.

여러 가지를 묻기 위해 장창식의 수족인 고 비서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전화를 받지 않았다. 몇 번이나 걸어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왜 하늘같이 모시던 장창식의 장례식에도 나타나지 않는지를 생각하며 걷고 있을 때였다.

“이사님-!”

명순이었다. 반갑다는 듯이 웃고 있는 얼굴이 순해 보였다. 명순 역시 오랜만이라, 재하는 살짝 웃었다가 이내 입꼬리를 내렸다. 상주의 배우자이니 너무 웃는 모습을 보이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오래간만입니다.”

“뵈니 좋습니다, 이사님. 식사는 하셨습니까?”

명순은 가볍게 안부를 물었다. 그 말에 재하가 떠올린 건 다른 것이었다.

‘내 거 많이 먹었으니까 다른 거 주워 먹지 말고 있어.’

태건이 그의 앞섶 앞에 무릎을 꿇었던 재하의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한 말이었다. 왜 그게 생각났는지 모르지만 간신히 달아오르려는 안색을 가라앉힌 재하가 고개를 저었다.

“식사는 안 했습니다. 이따 간단하게 요기하면 됩니다. …장 본부장은 어디 계십니까?”

“잠깐 형사들이랑 말씀 나누고 계십니다.”

그 말에 놀란 재하가 한쪽 눈썹을 올렸다. 재하의 표정을 본 명순이 덤덤하게 말했다.

“별건 아니고, 회장님 사인 때문에 온 듯한데 병원에서 확실하게 심장마비 판정받은 거라 위험할 거리는 없습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완전히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그를 찾아 형사들이 뭘 물었는지 듣고 싶었다. 그가 했던 말이 의미심장하기도 했다.

그를 믿지 못하는 문제가 아니라, 무슨 문제가 생긴다면 제가 해결해 주고 싶었다.

명순이 그 마음을 알았는지 재하를 안내했다. 멀지 않은 본채 마당에 서서, 태건이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얘기 중이었다. 재하는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걸으려 노력하며 그쪽으로 향했다.

차츰 말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야, 몰려온 거 봐라. 아주 상갓집 냄새 기가 막히게 맡죠?”

태건의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렸다. 태건은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고도 제법 또렷하게 발음하고 있었다.

검은 옷을 입고 온 것도 아닌 형사 한 명이 피곤한 얼굴로 태건의 말에 짜증을 내듯 말했다.

“자슥아, 말이 좀 심하다. 안 본 사이에 얼굴 뻔지르르해졌네. 장 본부장아, 너는 딱 감옥에서 나랏밥 먹을 얼굴이야.”

연기가 나지 않는 담뱃대가 그의 중지와 검지 사이에 끼워졌다가 귀 뒤에 꽂혔다. 손이 빈 태건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관상 보고 사람 잡아가면, 형사님 먼저 들어가야 하는 거 아닌가? 못생긴 순으로 공무원 뽑아요?”

그의 말에 처음 말을 나눈 형사 말고 다른 형사가 입을 열었다.

“…외모 지적은 왜 합니까? 우리도 뭐 할 일 없어 나온 건 아니고 형식상으로 필요한 거 하려고 나온 거니까, 협조 좀 합시다.”

태건의 앞에 서 있는 세 명의 형사 중, 좀 더 나이 든 쪽은 태건과 안면이 있는 듯했다.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태건이 못마땅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의 말에 태건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방금 고아 된 사람한테 이게 무슨 짓이야. 꼭 오늘 왔어야 해?”

“오늘 아니면, 장한 건설 본부장님께서 미천한 소인들을 봐주기나 합니까? 그냥 몇 가지 묻고 끝낼 거니까 변호사 부를 필요도-.”

“그러니까 그걸 왜 형사님이 판가름해요. 이럴 때 나 대신 대답하려고 1, 2천은 우습게 변호사한테 꼬라박는 건데.”

장태건은 는지럭거리는 태도로 품에서 라이터를 꺼냈다. 재하가 온 걸 흘끗 본 그가 라이터의 부싯돌을 두어 번 튀긴 뒤 다시금 귀 뒤에 꽂아 놓았던 담뱃대의 허리를 분질렀다.

“진짜 이럴 거야, 장 본부장?”

나이 많은 형사가 허리에 손을 올리며 말하자, 태건이 웃지도 않은 채 시큰둥하게 받아쳤다.

“근데 왜 자꾸 반말이지. 내가 그렇게 동안인가. 사람을 맞먹고 지랄이야, 왜.”

“아니, 우리 본 지가 몇 년인데….”

형사들은 하나같이 다 짜증이 난 표정들이었다. 뭔가 일이 안 풀리는지 들고 있던 볼펜으로 제 뒷머리를 벅벅 긁기도 했다. 심증은 있어 달려왔는데 물증이 없어 고전 중인 듯했다.

태건 역시 그걸 알고 있는 듯 여유로운 태도였다. 재하의 뒤편에 있던 명순이 불쑥 나아가 형사들의 등을 스리슬쩍, 그러나 단단하게 힘을 주어 밀었다.

“형사님들, 그러지 마시고 밥 한술 뜨고 가시면 좋겠습니다. 진도산 대파를 동이째 넣고 끓였더니 육개장 맛이 그만입니다.”

“어어, 이거 왜 이래. 밀지 마!”

남자가 셋인데 뒤에서 미는 명순 하나를 못 이겼다. 그들이 정원을 거슬러 손님들 식사하는 자리로 사라지자,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있던 장태건이 몸을 빙글 돌렸다.

그는 건들거리는 태도로 재하에게 말했다. 툭 내뱉는 말투가 인상적이었다.

“아직 얼굴이 좀 야한데.”

“…자리 오래 비우면 조문객들이 불편해합니다. 상주니까 들어가 계셔야죠.”

뒷말은 태건을 향한 것이었다. 자리를 지켜야 조문객들을 맞이할 텐데 나와 있으니 빈소가 걱정됐다. 태건이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같이 가. 혼자 서 있는 거 재미도 없는데.”

“재미….”

상주 자리가 재미로 하는 건 아니다, 하고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다시 만난 태건에게서는 전에 없던 분위기가 났다.

묘하게 격 없이 웃는다든가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점이 그랬다. 재하는 그게 신기했다. 태건이 갑자기 그러는 이유를 알 듯 말 듯 하다가도 전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쨌든 같이 가 달라고 하는 그의 부탁을 거절할 수 없었다. 재하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자 태건이 턱을 까닥였다. 제 옆으로 와 붙어 걷자는 뜻이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그의 옆에 천천히 섰다. 아직 서리가 완전히 녹지 않아 구둣발 밑에서 사각거리며 밟혔다. 색을 잃은 잔디가 두 사람의 발밑에 깔려 있었다. 재하는 돌고 돌아온 계절을 생각하며 태건을 슬쩍 올려다보았다가, 그만 눈이 마주쳤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겠으나 내내 저를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나 상 당한 거 알고 있죠.”

또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가 장례식에 상주 자리로 참석해야 하지 않았다면 두 사람은 오늘 새벽 강원도에서 만나 서울까지 함께 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의미 모를 물음이라고 생각하며 천천히 대답했다.

“예, 압니다.”

“불쌍하지 않아요? 나 고아 된 거잖아.”

거기에 대해서는 장창식의 영정을 쳐다보며 한참이나 대답을 생각해야다. 불쌍하다고 볼 수는 없었지만, 확실히 이 땅에 핏줄이라고 부를 만한 이가 없는 태건에 대해서.

그러나 자칫하면 동정하는 걸로 보일까 봐 입을 다물고 있자, 태건이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

“불쌍해, 안 불쌍해.”

“…안 불쌍,”

“안 불쌍해? 천애 고아가? 이재하 씨 사이코패스야?”

…사이코패스라니. 그런 말을 면전에서 듣기는 또 처음이라 아연실색한 기색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태건이 제 얼굴을 불쑥 들이밀며 이마가 닿을 것 같은 거리에서 다시 한번 물었다.

“불쌍해, 안 불쌍해.”

원하는 대답이 정해져 있는 듯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태건이 육식 짐승이 상대를 가늠하는 것처럼 속을 알 수 없는 눈을 내려 재하의 입술을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불쌍합니, 다?”

끝에는 물음표를 붙일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은 정답이 아닌 것 같았는데 정답이라는 소리를 들은 모범생처럼, 재하는 의아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태건이 그제야 만족한 듯 재하에게로 불쑥 들이밀었던 고개를 쭉 빼며 씩 웃었다. 입꼬리가 시원하게 올라갔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는 사람이구나 싶어졌다. 아무런 걱정 없이 웃는 건 처음이었다.

그의 웃음에 약간 멍해진 재하가 두 눈을 깜빡이고 있을 때, 태건이 그의 허리를 끌어안아 제 옆구리에 바싹 붙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재하가 주위를 살폈다. 사용인들이 오가는 것은 아니었지만 민망했다. 그사이에도 태건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은 채로 제 품 안의 재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래, 정답이야. 그럼 그 불쌍한 고아에게 어떻게 해야겠어.”

“…뭘.”

“이혼 소리 꺼내지도 마. 상 당했는데 이혼까지 당해 봐. 고아 마음 찢어져요.”

말도 안 되는 논리였다. 재하가 약간 기가 막힌 기색을 했는데도 장태건은 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쓰읍, 하고 겁주듯 말했다.

“당신 사람 맞아? 왜 이렇게 잔인하게 굴어. 그냥 알았다고 해.”

연속으로 평생 들어 본 적 없는 비난을 당한 재하는 두 눈을 살짝 감았다가 뜨고는 그냥 걸었다. 왠지 무시해야 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태건은 쉽게 쫓아와 다시금 재하의 옆에 붙어 원색적인 비난을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심드렁하게 퍼부었다.

비난이 비난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대꾸해 줄 마음이 생기는 것은 아니라 재하는 그대로 본채로 들어갔다. 뒤에서, 장태건이 예의 그 분홍색 슬리퍼를 아무렇게나 벗어 던지면서 쫓아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결국 재하도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빈소에서의 오전은 그렇게 보냈다. 얼얼했던 턱의 통증은 차츰 가라앉았다. 이것저것 조문객 맞을 준비를 하느라 바쁘기도 했다. 활짝 열린 대문으로는 종로에서 들어온 술이 궤짝으로 옮겨졌다.

그걸 챙기다가 태건이 또 저를 찾으러 나올까 봐 가끔 빈소를 들여다보기도 해야 했다. 일하다 말고 돌아와 묵념하고 있는 상주의 옆에 서면, 태건이 그런 재하를 흘끗 보았다.

그러고는 입 모양으로만, ‘졸려 죽겠네.’ 하고 말했다. 새벽을 달려 재하를 찾으러 온 데다가 강원도에서 서울까지 운전하느라 피곤할 법도 했다.

재하 역시 며칠간 호텔에서 내도록 자 놓고도 몸이 나른했다. 약간 미열이 있는 것 같아 태건의 옆에 서 있다가, 그가 하품하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따라 할 것 같아 급하게 고개를 돌려야 했다.

빈소 안에는 근조기가 가득했다. 어느 그룹 아무개 회장, 국회의원 누구, 꽤 이름 있는 인사들의 근조기였다. 뜰에는 화환이 늘어설까 봐 어느 시점 이후로 근조 화환을 받지 않는다는 사양 문구를 장한 건설 홈페이지에 올려야 했다.

조부와 모친의 장례식에서도 볼 수 있는 광경이었지만, 장창식의 출신으로 미루어 보아 고인을 기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장태건 때문에 보낸 근조기인 듯했다.

몇 년 사이에 재계 순위를 30위권까지 올린 알파에게 미리 줄을 대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걸 보니 약간 자랑스럽기도 했다.

정승의 장례식에는 거지도 오지 않지만, 정승이 기르는 강아지가 죽으면 조문객이 벌 떼처럼 모여든다고 했다. 장창식의 장례식이 시작도 전에 근조 화환으로 문전성시를 이루는 것은 장창식이 대단해서가 아니라, 그의 하나뿐인 혈육인 태건의 눈치를 본다는 뜻이었다.

이재하가 장태건과 결혼할 때만 해도, 그는 아무것도 아니었다. 장한 건설의 현장 관리 실장 자리라는 직함은 차라리 없느니만 못했다.

정식으로 입사한 현장 관리실의 실장도 아니었다. 그가 하는 일은 현장을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 현장에 나가는 일이었다.

결혼 후에도 가끔 피가 묻어 돌아오던 꼴을 보면, 장태건의 손아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이후, 장태건은 장한의 실세가 되었다. 그것도 단 4년 만에 말이다. 재하는 가슴우리가 뿌듯한 느낌에 살짝 입꼬리를 올렸다가 그대로 내렸다. 아무리 그래도 상갓집에서 자주 웃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상주에게는 호상인 장례식이라도 말이다.

재하는 태건이 졸린다 말했던 것이 신경 쓰여 작게 속삭였다.

“이따 저녁에 발길이 좀 뜸해지면 별채에서라도 눈 붙이고 오십쇼.”

“팔베개해 준다고?”

영 다른 말로 들리는 듯했다. 재하가 두 눈을 살짝 감고는 고개를 저었다. 태건은 다시 한번 하나뿐인 혈육을 하루아침에 잃은 제 신세타령했다.

그래도 빈소를 지킬 사람은 있어야 했다. 태건이 몇 시간이라도 눈을 붙이려면 그동안은 재하가 자리를 지켜야 했다. 태건은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재하의 귓불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별채? 당신이 쓰던 침대 써도 되나?”

갑작스러운 접촉에 흠칫 놀란 재하가 어물쩍 고개를 끄덕이자 태건이 빙긋 웃으며 다시 속닥거렸다.

“그 침대에서 딸 친 적 있어?”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태건이, “어? 딸 친 적 있냐니까?” 하고 다시 물어도 입술을 꾹 다물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명순이 약간은 당황한 얼굴로 빈소로 들어와 태건과 재하에게 말했다. 낮은 목소리였다.

“…유신, 김란희 사모와 이재호 이사가 조문 왔습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태건을 돌아보았다. 지금까지 누가 뒈졌는지 관심 없다는 표정으로 서 있던 장태건이 빈소 밖을 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김란희는 검은색 비단 두루마기 안에 미색 한복을 입고 쪽머리를 하고 있었다. 단출한 은비녀가 오히려 그이의 오종종한 생김을 더욱 환하게 보이게 했다.

사돈댁 조문을 온지라 뭔가를 바르지 않은 맨 입술이었는데도 무척 고와 보였다. 그 옆에서 이재호가 약간 뻘쭘한 얼굴로 서 있었다. 재하는 그런 재호를 흘끗 보고는 고개를 살짝 숙여 김란희를 향해 인사했다.

“오셨어요.”

“너는 도대체 어떻게 된 애가…. 됐다. 안내해라.”

상주인 장태건은 빈소에서 김란희를 맞이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다. 홀로 마중을 나왔던 재하는 어느새 제 옆에 서 있는 이가 소식을 전해준 명순이 아니라 정길이라는 걸 깨닫고 놀랐다가 표정을 바로 했다.

김란희는 탐탁지 않은 얼굴을 풀지 않고 있었다. 최근 몇 년간 늘 자신만 보면 그런 얼굴이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았다.

아마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런 표정을 짓고 싶었던 것 같다. 다음 대의 우성 알파인 데다가 조부의 신임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재하에게 그런 얼굴을 할 수는 없는지 표정 관리를 해 왔지만, 몇 년 사이에 이익형에게 폭행당할 정도로 재하의 위치가 추락하자 굳이 숨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재하로서는 그러거나 말거나 싶은 일이었다. 그녀가 웃으면 웃는 대로 저를 비웃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는 마당에 표정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다만 혹시나 그녀가 장태건에게 예의에 어긋나는 말이라도 할까봐 걱정이었다. 속으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재하는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으로 그들 모자를 본채 안쪽에 차려진 빈소로 안내했다.

정길은 묵묵히 일행의 뒤를 호위하듯 따라오고 있었다. 이재호가 제 뒤를 흘끔거리는 걸 몇 번 본 재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둘이 친분이 있던가. 어렴풋이 생각이 날 듯 말 듯 했으나 일단 고개를 돌려 걸었다. 일행은 그대로 조용히 빈소로 들어갔다.

장례식 특성상 사람이 없는 이른 오후에 방문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다 망해 버린 유신이라도, 장한 건설과 사돈지간이라는 걸 알리고 싶지 않은 듯했다.

코웃음이 나올 것 같아 재하는 더욱 표정을 굳히며 두 사람을 빈소로 안내했다. 김란희는 딱히 크리스천도 아닌 주제에 영정에 절을 올리지 않고 헌화 후 두 손을 맞잡은 채 기도하는 모양새를 했다.

절을 하려던 이재호는 모친의 그런 모습을 보고 주춤거리다가 저도 헌화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이 코미디 같다고 혀를 찼다. 재하는 두 사람이 빈소를 나와 음식을 먹고 가려나 하는 생각 중이었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아, 정길 씨. 오랜만입니다.”

누군가 조용히 말을 걸길래 돌아보니 정길이 씩 웃으며 서 있었다. 약간 날 선 눈초리는 그대로였다. 그나마 시원하게 웃는 터라 그런 느낌이 상쇄되어 보였다.

“사모님이랑 이재호 이사는 뒤뜰로 모시겠습니다. 거기가 조용합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그러면 되겠다 싶어 고개를 끄덕였다. 정길은 아직 빈소에 있는 재호를 흘끗거리더니 금세 사라졌다. 자리를 준비하러 가는 모양이었다.

상주와 고개 숙여 인사한 김란희의 옆모습이 보였다. 모자는 천천히 빈소를 나섰다. 재하는 기다리고 있다가 그들이 빈소에서 충분히 멀어지자 물었다.

“식사라도 하고 가세요.”

“차나 다오.”

차 정도는 수준에 맞는 걸 끓여 오겠지 하는 눈이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는 얼굴이 미세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원래 이렇게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이재하의 정치적 숙적으로 그렇게 나쁜 상대가 아니었다.

페어플레이를 한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아예 수준 떨어지는 일도 벌이지 않았다. 본인의 프라이드가 굉장히 강하기도 했고, 나름 머리도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유달리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내고 있었다. 재하는 그런 그녀를 흘끗 보다가 본채 뒤뜰로 안내했다.

팔각정 모양으로 생긴 작은 유리온실이 있으니 거기에 다과상을 차리면 될 것 같았다. 정길이 미리 준비해 놓은 건지 온실 안에는 전기스토브와 다과 한 상 차림이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재하는 김란희에게 의자를 빼 주고는 앞자리에 앉았다. 이제껏 입 한 번 떼지 못하고 눈치를 슬금슬금 보던 이재호도 김란희의 옆자리에 앉았다.

“재호는 나가 있어.”

김란희가 그런 이재호를 향해 말했다. 이재호의 몸이 티 나게 떨렸다. 이재하는 그 모양을 보며 다기를 들어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뭔 할 말이 있길래 독대한다고 하는지 짐작 가지 않았다. 지난 해쯤에는 재하를 불러들여 욕이라도 퍼붓더니 그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 소용없는 짓이라고 생각한 건지 조용해졌기 때문이다.

재하는 자리를 뜨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고 있는 이재호를 흘끗 보다가 일어섰다. 정길에게 저택 안내라도 시켜 달라 부탁할 참이었다. 그렇게 온실을 나서서 미처 한 걸음 떼기도 전에 경호하듯 지키고 서 있는 정길을 보았다.

“정길 씨, 이 이사 저택 구경 좀 시켜 주겠습니까?”

“안 될 것 같습니다, 이사님.”

이사직을 관둔 지 오래고, 그 이사 자리에 옆에 있는 사람이 올라가 있는데 민망한 호칭이었다. 게다가, 안 될 것 같다 하는 이유가 짐작 가지 않았다. 설명을 원해 그를 바라보자, 정길이 드물게 표정 없는 얼굴로 말했다.

“본부장님께서 이사님 경호를 말씀하셨습니다. 자리를 이탈할 수 없습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유리온실에 남은 김란희를 돌아보았다. 우성 알파인 저와 여성체 오메가인 김란희를 두고 경호를 명령했다니.

약간 이해 가지 않았지만 그가 하는 일에 그의 부하 직원 앞에서 토를 달고 싶지 않았던 재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재호를 향해 말했다.

“네가 적당히 둘러보다 와야겠다.”

“…알겠어.”

이재호는 굳은 얼굴로 대답하며 정길을 힐끔거렸다. 두 사람 사이의 시선 교환은 없었다.

정길은 딱딱한 얼굴로 앞만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재하는 팔각정의 돌계단을 두어 개쯤 올라가면서도 그런 그들을 돌아보았다.

그렇게 다시금 문을 열었을 때 안색이 창백해진 김란희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 오늘따라 다들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 재하는 그녀의 앞에 다시금 앉으며 짧게 헛기침했다.

“…차가 식으니 먼저 들어라.”

“예.”

재하의 찻잔에는 아직 식지 않은 차가 담겨 있었다. 차를 따른 기억은 없는데 제가 없는 사이 김란희가 부어 준 듯했다.

재하는 그걸 입가로 가져가 마시고 내려놓았다. 날이 추워 김이 올라오는 것과는 다르게 차가 약간 식어 있었다. 온실 밖에서 별 얘기 나누지 않아 시간이 지체된 것도 아닌데 식은 것이 이상하기는 했다. 그러나 더 이상한 건 김란희의 안색이었다. 괜찮냐고 물어야 하나 싶었을 때다.

“…네가 여기를 택한 이유를 알겠어.”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너는 늘 그렇게 생각이 있는 아이였지. 도통 속을 알 수 없고….”

김란희는 오래된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다. 재하는 그녀가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그녀는 파리한 안색으로 다시금 차를 마신 뒤 이마 위에 새파랗게 정맥이 올라붙을 때까지 재하를 노려보았다.

파리한 안색과 다르게 빨갛게 실핏줄이 올라온 두 눈이, 그녀의 아름다운 생김에 뒤섞여 기괴한 느낌을 주었다.

재하는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장한 택한 이유가 이거니? 집안 말아먹고도 너 하나 잘살면 된다고?”

“그 말 하러 오셨군요. 어쩌다 그렇게 싫은 얼굴로도 헌화까지 하시나 싶었습니다.”

다 식은 차를 한 모금 더 마신 재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저는 늘 의문이었습니다, 어머니.”

“…지긋지긋한 놈.”

“그래요. 그 태도가 의문이었습니다. 제가 보았을 때 도둑은 어머니신데 어떻게 그렇게 당당하신 겁니까.”

“뭐?”

“당당하게 슬퍼하고, 당당하게 약자인 척하고, 당당하게 억울해하시지 않았습니까. 저는 어머니 때문에 제 모친을 잃고 안락하게 살던 집까지 내줘야 했는데 말입니다. 가진 게 많다고 제 것 빼앗기고 싶어 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다 뺏으러 들어오셔 놓고 못 뺏었다, 억울하다, 더 훔쳤어야 했는데 억울해하시지 않았습니까.”

“그만…!”

김란희가 찻잔을 그대로 재하에게 던졌다. 잘못하다가는 얼굴에 맞을까 봐 슬쩍 피한 탓에 어깨에 찻물을 뒤집어써야 했다. 굴러떨어진 자기 찻잔이 그대로 깨어졌다.

“너는 천벌을 받을 거다.”

“도둑은 따로 있는데 천벌도 제가 받아야 합니까.”

재하는 정말 의문이 생겨 물었다. 어째서 그녀는 늘 저에게 날을 세우는 걸까. 너만 없었다면 모든 게 내 아들의 것이었는데, 하는 태도가 이해 가지 않았다.

저야말로 김란희와 이재호만 아니었다면 나눠 주지 않아도 될 것들이 많았다. 그들에게 나서서 뭐라 한 적이 없는 이유는 하나였다.

가장 역겨운 이는 제 부친이었으니까. 그래서 굳이 부딪칠 생각을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런 날에는 궁금한 걸 참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김란희는 자리에서 일어서다 말고 비틀거렸다. 탁자가 살짝 밀려 찻잔 깨지는 소리가 또 한 번 들렸다. 이재하는 손을 뻗어 그녀를 부축했다. 김란희의 표정은, 이제 아예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장한에 다 퍼주고, 유신도 네가 망친 거 모를 줄 알아?! 그렇게 동생 주기가 싫었니?”

“제가 아니라고 말하면 믿지도 않으실 텐데 부러 물어보셔 봤자입니다.”

재하는 표정 없는 얼굴로 대꾸했다. 그의 앞에서 악쓰는 사람들이 오히려 열받을 얼굴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이거 놔!”

“…엄마!”

어느새 들어온 이재호가 부축한 이재하를 떼어 내느라 크게 휘청거리는 김란희를 제 품에 보호하다시피 채 갔다.

뭐 한 것도 없이 도둑 취급받지 않나, 시비 건 것은 저쪽인데 패륜아 누명을 쓰질 않나 난감했다. 이재호가 그런 이재하를 흘끗 보더니 고개를 돌렸다.

지난 몇 년간 그를 만나기만 하면 저 눈빛이었다. 애매한 얼굴. 화를 내야 할지, 뭔가를 물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한 표정. 재하는 이복동생이 무르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하고는 팔각정 유리온실의 문을 열어 주었다.

“정길 씨, 어머니 기사한테 지금 가실 거라 말 좀 전해 주십쇼.”

“예, 이사님.”

“…이놈이나 저놈이나. 저 물건이 이사 자리에서 내려온 지가 언젠데.”

정길이 재하를 부르는 호칭을 듣고, 김란희가 난리 통에 흐트러진 머리를 정리하며 중얼거렸다. 잔머리를 쓸어 올리는 그녀의 손가락에는 굵은 은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재하는 그들 모자가 평창동 저택을 떠나는 걸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다 곧이어 저도 몸을 돌려 장태건이 기다리고 있을 본채로 돌아갔다.

장태건은 지루하다 못해 죽겠다는 얼굴로 누군가와 맞절을 하고 있었다. 이왕 자리를 뜬 김에 주방 쪽을 둘러보자 싶었다.

안으로 들어가 사용인들에게 모자란 걸 물어보고 재깍 주문하게 한 다음 다시 빈소로 돌아가 태건의 옆에 섰다. 한참 하품하고 있던 태건이 그런 재하를 슥 보더니 속삭였다.

“피곤해.”

“아침 일찍 운전해서 그렇습니다. 제가 지킬 테니 일단 눈 좀 붙이고 오면-.”

“이재하 씨가 한 번 더 빨아 주면 잠 좀 깰 것 같습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민망했기 때문이다.

“그건 안 됩니다.”

“왜 안 되는데.”

장태건은 그런 민망함을 진작에 눈치챈 건지 낄낄 웃으며 어깨로 재하의 팔을 툭 쳤다. 제 딴에는 살살 친 듯한데 재하가 느끼기에는 묵직한 무게감이었다.

“…아까 해 드렸잖습니까.”

“하루에 두 번은 안 되나 보네. 그럼 내가 이재하 씨 거 빠는 건?”

“전 안 졸립니다.”

필사적으로 피해 보려다가 문득 어이가 없어 남자를 바라보았다. 킥킥 웃는 얼굴이 아무래도 장난이었던 것 같다.

그제야 재하도 맥없이 웃어 버렸다. 그러나 두 사람은 곧이어 물밀듯 닥치는 조문객들에 의해 짬을 낼 시간도 없이 바빠졌다. 일손을 충분히 불렀는데도 조문객이 넘쳤다. 조부와 모친의 장례식도 이랬었던 것 같다는 기억이 어렴풋이 났다.

술은 빠르게 동났고, 음식은 더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한명관에 연락하여 편육과 홍어회 무침을 준비하는 동안, 종로에 시킨 술들이 다시 한번 궤짝으로 배달되었다.

그렇게 조문객들의 발걸음이 조금씩 줄어든 것은 밤이 깊어 갈 즈음이었다. 저녁을 먹지 못한 이재하는 태건에게 밥을 먹일 생각으로 빈소로 향했다. 교대해 주기 위해서였다.

그때 재하는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다. 밑이 축축했기 때문이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젖을 만한 일이 없는 부위가 젖은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확인해 보러 화장실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갑작스레 다시 바빠져 짬을 낼 수가 없었다. 그 후로 또 그러지는 않았기 때문에 완전히 잊고 있었다.

조문객들이 물밀듯 밀려온 덕분에, 태건 역시 바빠 보였다. 아니, 사실은 그렇게 바쁜 것 같지는 않았다.

그는 심드렁한 태도로 사람들과 인사했고, 가끔은 악수했으며, 찾아온 이들에게 대충 맞절했다. 내내 그 시큰둥한 얼굴을 지우지 않은 채 말이다. 재하는 그쪽을 보다가 피식 웃고 다시 일을 봐주러 갔다.

겨우 짬이 났을 때는 자정이 가까울 무렵이었다. 다행히 술이 동나자마자 조문객의 발길이 끊겼다.

아는 얼굴들이 많이 왔다. 정재계 인사들이 대거 참석한 덕분에 재하도 태건의 반대쪽에서 인사를 다니느라 바빴었다. 미열이 있던 몸은 어느새 가라앉아 있었다. 잠깐 컨디션이 안 좋았던 모양이라는 생각을 한 뒤, 재하는 사용인들에게 대충 치우고 들어가 다음 조와 교대하여 쉬게끔 했다.

정리가 어느 정도 일단락되자, 재하는 굳이 교대할 필요 없이 다들 쉬다 오라고 했다. 밤이 늦어 조문객이 더 올 것 같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일에는 한자리에서 오래 서 있는 사람이 곤혹이라는 걸 아는 터라 빈소로 향했다. 태건은 아침에 보았던 그 얼굴 그대로이긴 했으나, 계속해서 잠이 온다 했으니 지금쯤 피로가 더욱 누적되었을지도 몰랐다.

천천히 다가간 재하가 태건에게 물었다.

“교대할까요?”

지겹기 그지없다는 얼굴을 하고 있던 태건이 재하를 돌아보더니 대꾸했다. 기가 막힌다는 투였다.

“하루 종일 일만 한 사람이 누군데 교대 소리를 해.”

장태건은 재하의 손목을 잡은 뒤 바닥에 앉아 저를 따라 앉게 하였다.

버티려면 버틸 수 있겠으나 굳이 그럴 이유를 찾지 못한 재하는 장태건의 옆자리에 순순히 앉아 주었다. 태건의 옆자리에 엉덩이를 붙이고 무릎을 세워 그 위에 팔을 얹은 재하가 그대로 깍지를 낀 채 앞을 바라보았다.

옆에 바짝 붙어 앉으니 오늘따라 태건의 페로몬 향이 진하게 느껴졌다. 평소에는 바다 소금 냄새가 강하다가 해당화 잎이 파도 위에 떨어지듯 옅게 나는 편인데, 오늘은 꼭 침대 위에서 맡았던 것처럼 강하게 다가왔다.

멍한 머리로 이상하다고 여기다가, 혹시 태건이 러트인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를 흘끔 보는데 장태건이 미간을 찌푸린 채로 먼저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의문을 담은 눈으로 쳐다보자 그가 갑자기 고개를 숙여 재하의 목덜미쯤에 얼굴을 묻고 숨을 몰아쉬었다.

“무슨….”

재하는 약간 놀라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장태건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순순히 밀려나 주었다.

그러고는 재하를 빤히 보다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네. 단내가 나는데.”

재하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단 한 번도 제 앞에서 러트에 대한 티를 내지 않았던 배우자를 배려하고 싶은 마음에 조심스러워졌다.

몇 번 입술을 달싹이다가, 작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했다.

“혹시 장, 태건 씨 러트기 아닙니까?”

이름을 말할 때도 멈칫거렸다. 그의 앞에서 이름을 불러 본 지 너무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태건은 그런 재하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시선이 집요했다. 민망한 마음이 들어 눈을 피했다가, 지금쯤이면 다른 곳을 보겠지 하고 돌아보니 아직 저를 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닳는 것도 아닌데 뭐 어떻다고.”

남자는 뻔뻔하게 대꾸했다. 여전히 말투는 심드렁한데 그 눈빛에 무언가 뜨거운 것이 고여 있었다. 그때부터는 도리어 시선을 떨어트릴 수 없었다.

장태건의 시선은 재하의 얼굴 이곳저곳을 배회했다. 하얗게 반짝이는 관자놀이나 깊은 눈매, 남자답게 오뚝한 콧대와 다른 생김에 비해 살짝 앙증맞은 입술에서 그 집요한 것이 멈추었다.

“이재하 씨, 입 벌려 봐.”

태건이 입을 맞춰 왔다. 폭신한 입술에 살짝 눌리자 재하는 두 눈을 크게 떴으나, 사용인들을 교대 전까지 쉬라고 보낸 데다 명순과 정길도 휴식하라고 보냈으니 빈소에 다가오는 이는 없을 거란 걸 깨달았다.

입맞춤은 상갓집에서 몰래 나누고 있는 주제에 꽤 애틋했다. 재하는 서서히 두 눈을 감았다. 태건의 입술은 답지 않게 부드러운 편이었다. 약간 도톰하여 질감 좋아 보이던 입술이 닿으면, 온몸을 푹신한 이불로 감싼 것 같은 나른함과 아랫배를 울리는 긴장감이 함께 들고는 했다.

이른 아침 그가 애들 장난처럼 입을 맞췄던 기억도 떠올랐다. 그 기억이 재하가 입술을 살짝 벌리게 했다.

“흣….”

저도 모르게 신음이 튀어 나갔던 것은, 꽤 정중한 태도로 입을 맞췄던 주제에, 입술을 열어 주자마자 무뢰배처럼 안쪽으로 밀고 들어온 살덩이 때문이었다.

태건이 손을 뻗어 재하의 목뒤를 잡아챘다. 해당화 향이 물씬 났다. 희미한 쟈스민 향이 흘렀다. 그와의 결혼 이후로 미묘하게 변해 버린 향은, 재하의 것이었다.

그러나 이상한 점이 있었다. 향이 변하긴 했어도 그건 그동안 있었던 러트기에만 그러했었다. 그런데 러트기가 가깝지도 않은데 쟈스민 향이 나는 것이다.

다행히도 착각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희미했기 때문에, 그 이상한 느낌은 입맞춤에 밀려 곧 사라졌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허벅지 안쪽을 바짝 조였다. 아래가 또 살짝 축축한 것 같았다.

회음부가 젖는 느낌이라 그곳에 땀이 날 리도 없다는 생각에 위화감이 들었지만, 이번에도 제 입 안을 욕심껏 밀고 들어온 것 때문에 멀쩡하던 사고가 한꺼번에 날아가 버렸다.

츱, 거리는 소리가 났다. 목뒤를 잡은 손이 단단했다. 그 품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도 막지 못할 정도로.

상복을 입은 두 남자는 혀를 섞느라 정신없었다. 재하의 팔은 태건의 허벅지 옆을 짚다가 중심을 잃는 바람에 그의 허벅지를 제대로 짚었다.

하필 수납해 둔 부위를 살짝 건든 바람에 손바닥 아래서 무언가가 벌떡거리는 움직임이 있었다. 놀라 손을 떼어 내자 장태건이 혀를 빼내고는 입술만 붙인 채로 짜증을 냈다.

“하려던 거 해. 왜 멈춰.”

“…뭘 하려던 게 아니, 읍-.”

부정하려 내뱉었던 말은 또 한 번 그대로 태건의 입술에 빨려 들어갔다. 그의 혀가 안으로 들어와 입천장을 긁을 때마다 저도 몰래 고개가 뒤로 젖혀졌다.

그러면 태건은 목뒤를 받친 손아귀의 힘을 단단히 하고는 재하의 입 안에 있던 혀를 맘껏 휘저었다. 삽입하는 것처럼 물에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그의 입술 점막은 장태건답지 않게 부드러웠다.

그 간극이 미칠 것 같았다. 재하는 제 눈가가 붉게 달아오른 것도 모른 채로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다.

장태건이 억지로 손을 잡아 둔 터라 아직도 손바닥 아래에는 단단하게 발기한 그의 것이 눌려 있었다. 닿지 않으려고 애를 쓰다 보니 손가락을 쫙 펴는 바보 같은 짓을 저지르고 말았다. 그만큼 정신이 없었다.

흥분하기 싫었는데 쉽지 않았다. 장창식의 영정이 있는 곳에서 태건과 입을 맞추고 싶지 않았다. 고인을 모독하는 것이 마음에 걸려서가 아니라, 애꿎은 소유욕이 일었기 때문이다.

당신이 그토록 버려두었던 손자는, 죽은 당신 따위는 안중에도 없어. 오늘을 마지막으로, 당신은 영원히 잊힐 거야.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장창식이 지하에서도 태건을 방치하고 학대한 것을 후회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장태건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장창식 따위에게 그런 취급을 받을 이가 아니었다. 원석을 손에 쥐고도 그걸 돌칼 따위로 쓰다니. 저였다면 달랐을 것이다.

태건과의 나이 차이가 크게 나는 편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제가 먼저 태건을 발견했다면 그렇게 두지 않았을 것이다. 재하는 그 시간이 아까웠다. 제가 놓친 사이에 태건의 인생이 객관적으로도 비참하게 굴러갔다는 그 사실이 말이다.

다른 생각을 한다는 걸 알았는지 태건이 재하의 허리를 바짝 당겨 와 아예 제 허벅지 위에 앉혔다. 발기한 성기 위였다.

상복의 정장 바지는 얇은 견사로 된 만큼 그 아래 갇혀 있는 것을 여실히 느끼게 해 주었다. 안 그래도 회음부가 살짝 젖어 든 것이 신경이 쓰였다. 혹시 속옷과 제 바지까지 젖어 그의 허벅지에 자국을 만드는 것은 아닌가 싶었기 때문이다.

어째서 거기가 젖었는지 모르지만 그게 뭐든 태건의 허벅지에 묻는 꼴은 보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대체 어디서 뭐가 나와서 질척거리는 건지 가늠하기도 어려웠다.

재하는 문득 태건과의 관계에서 단 한 번도 젤이나 오일의 도움을 받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게 왜 갑자기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장태건의 정장 바지에 묻힐 수는 없었다. 그 때문에 재하는 저절로 허리를 들썩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러다가도 금세 붙잡혀 와 그의 허벅지 위로 다시 앉혀져야 했다.

곤혹스러운 와중에도 입맞춤은 이어졌다. 태건이 아예 혀를 빼내고 입술을 떼어 낸 채 제 위에 올라앉은 재하의 빗장뼈에 이마를 묻기 전까지 말이다.

그가 재하의 허리를 꽉 껴안았다. 숨 쉴 틈 없는 악력에 짓눌려 힘들었지만, 그보다 허벅지 위에 올라앉은 것이 더 신경 쓰였다. 또 한 번 허리를 들썩일 수밖에 없었다.

“…당신, 진짜 나 호로 새끼 만든다.”

무슨 말을 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왜 그 말이 여기서 나오는지 의아할 때쯤, 태건의 뜨거운 숨이 목덜미에 달라붙었다.

“상갓집에서 떡 치는 페티시 있다고 분명 얘기했는데. 당신은 꼭 내가 한 말은 안 듣더라.”

“…….”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태건의 이마에 핏대가 솟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뭘 참는 것 같았는데 뭘 참는 건지 이해 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물어볼 수는 없는 일이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장태건은 한동안 더 재하의 쇄골에 이마를 기댄 채로 헉헉거렸다. 그의 뜨거운 숨이 너무 가까이서 느껴져 수납해 둔 재하의 것도 힘을 받느라 아래가 뻐근하게 아팠다.

장태건은 이제 아예 재하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고 헉헉거리는 숨을 내뱉고 있었다. 목덜미가 뜨겁게 간지러워졌다. 어깨를 움츠리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다.

“읏, 잠깐….”

재하가 놀라 벌떡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무릎 위에 있던 사람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는데도 태건은 풀린 눈으로 재하를 올려다볼 뿐이었다.

재하는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돌아섰다. 걸음을 빨리해 욕실을 찾아야 했다. 별채에서 생활하는 동안에도 본채에 온 것이 드물어 구조가 익숙하지 않았다.

그래도 금방 찾은 편이지만, 재하에게는 그 시간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가 문부터 잠갔다.

어디에 앉기도 전에 벨트를 풀고 퍼스너를 내렸다. 속옷과 바지를 우뚝 선 자리에서 한꺼번에 벗어 내리자 진득한 것이 은실처럼 이어지더니 허벅지에 뭔가 차가운 것이 흘러내리듯 달라붙었다.

“…이게 무슨….”

재하는 망연하게 중얼거렸다. 제 뒤가 잔뜩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속옷이 질척하게 젖어 색이 진해져 있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리 사이에서는 짙은 쟈스민 향이 새어 나왔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재하는 마른세수를 했다.

그때였다. 똑똑-. 누군가 문을 두들겼다. 재하는 놀라 반사적으로 문 쪽을 바라보았다.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치사하게 혼자 딸 치는 거 아니지.”

재하는 두 눈을 꾹 감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대답했다. 치사하다니. 이 상황에 듣고 싶은 말은 아니었다.

“…아닙니다.”

“그럼 뭔데. 어디 아파요?”

“아니, 아닙니다. 그냥 갑자기 속이 좀 안 좋아서. 얼른 나가 보겠습니다.”

태건은 재하의 그 말 이후 더 대답하지 않았다. 문밖에서 인기척이 사라진 듯해 살짝 안도하며 재하는 세면대 옆 티슈를 여러 장 빼내어 제 다리 사이를 닦았다.

회음부가 잔뜩 젖은 데다가 골 사이가 질척하게 끈적이며 아예 쿨쩍거리는 소리도 났다. 재하는 이게 뭔지 모르겠다는 생각 때문에 제정신이 아니었다.

뒤에서 이런 것이 나올 리가 없는데 이상하기만 했다. 최근 몇 년간은 임 과장이 따로 건강 검진을 챙긴 것도 아니라서 병원을 알아보는 것도 귀찮아 검진을 미뤘었다.

유신 계열의 병원으로 가면 제 검진 결과가 그대로 김란희 손아귀에 떨어질 것이라 그것도 내키지 않았었다. 최근에 페로몬 때문에 방문했던 것이 다였다. 그나마도 알 수 없다는 말을 미적지근하게 할 뿐이었다.

재하는 장례가 끝나면 당장 임 과장을 통해 믿을 수 있는 병원을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자꾸 신세를 지는 것이 미안했지만 그런 유의 관리들은 그룹 비서실을 통해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재하 혼자 하기에는 보안상 사소하게 막히는 부분이 있었다.

혹시 그녀가 장창식의 장례를 신경 쓸까 봐, 지금 말고 발인이 끝나면 당장 연락해야겠다 생각하며 다리 사이를 닦고 옷매무시를 다듬었다.

그사이에 대체 어디서 묻은 것인지 손등에 투명하고 약간 점성이 있는 액체가 떨어져 있었다. 비누로 깨끗하게 씻으면서도 재하는 괜히 민망해졌다.

하필 이럴 때 몸까지 말썽이라니. 한숨이 튀어나왔다. 거울 속에는 파리한 안색의 남자가 몇 번이고 한숨을 내뱉고 있었다.

* * *

재하가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시간이 조금 지난 뒤였다. 욕실 문을 닫던 그는 맞은편 벽면에 기대어 서 있는 인영을 보고 놀라 두 눈을 크게 떴다.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댄 장태건이었다.

“왜…. 그러고 계십니까.”

“나랑 입술 빠는 게 역겨워서 구역질이라도 하나 감시하는 중이었는데.”

그 말에 재하는 흠칫 놀랐다. 역겹다니. 단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었다. 재하는 놀라 태건에게 다가갔다. 제가 빠르게 다가갔다는 자각조차 없었다. 안타까운 얼굴로, 재하는 태건에게 말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오늘 내내 빈속이라 속이 안 좋았을 뿐입니다.”

재하의 다급한 기색을 보며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던 태건이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뭘 또 정색까지 해. 농담이었어요.”

“…정말 그런 거 아닙니다.”

“알겠어. 자지 선 거 부끄러워서 혼자 딸 치러 갔다는 거잖아.”

“…그것도 아닙니다.”

태건이 표정을 굳힌 재하를 내려다보더니 낄낄 웃으며 그의 뺨에 쪽, 하고 입술을 맞췄다. 전처럼 애들 장난 같은 입맞춤이었다.

재하도 표정을 허물 수밖에 없었다. 떠오르는 미소는 간신히 막았으나 무표정에 생기가 도는 걸 말릴 수 없었다.

“밥 먹으러 가자. 나도 안 먹었어.”

“명순 씨더러 끼니 챙겨 달라 부탁했는데 왜 안 드셨습니까.”

이 시간까지 아무것도 안 먹고 있었다니 걱정이 됐다. 살짝 찌푸린 미간을 하고 물었다. 태건은 그런 재하를 흘끗 보다가 씩 웃었다. 그러고는 생전 처음 들어 보는 말투로 는지럭거렸다.

“서방님 한술 뜨시지도 않는데 어떻게 저 혼자 처먹겠습니까. 이 마누라 목구멍에 서방님 자지 말고 아무것도 들어갈 것 같지 않아 그랬습니다.”

“굶으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의 음담패설에 반쯤 질려 몸을 돌렸다. 태건이 낄낄 웃으며 따라붙어 재하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두 알파는 몇 걸음 더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주방은 고요했다. 사용인들에게 진작 쉬라 말한 참이었다. 인파에 부딪히는 곳도 아니고 실내에 단둘뿐인데도, 태건은 재하의 허리를 껴안은 팔을 풀지 않고 그를 주방으로 이끌었다.

조문객들에게 줄 음식들이 남아 있을 줄 알았는데 없었다. 회무침과 굴 무침, 편육 등은 진작 동이 난 듯했다. 한명관에서 마지막 주문을 받았던 것이 아홉 시쯤이니, 자정을 넘긴 지금 남은 음식이라곤 없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과일은 몇 알 굴러다녔으나 우성 알파 둘의 배를 채우기에는 극히 양이 적었다. 뭘 먹여야 하나 고민하던 때, 장태건이 갑자기 찬장을 뒤지더니 라면 네 봉을 꺼내 왔다.

“어디서 나신 겁니까?”

군대에 있을 때를 제외하고 라면을 먹어 본 적 없는 재하가 태건의 손에 들린 것을 빤히 바라보았다.

군대에서는 PX에 흔한 것이 라면이라 꽤 접했지만, 제대 후에는 먹을 일이 극히 드물었다. 아마 이재호는 아직 라면을 한 번도 안 먹어 봤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태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노친네 취향이 고급인 척하고 살아서 그렇지, 입맛이 영 싸구렵니다. 배곯을 때 먹었던 거라고 이거 못 끊었을 것 같았는데 아직 있네.”

그렇게 말한 태건은 능숙하게 찬장에서 법랑 냄비를 꺼냈다. 재하는 약간 커진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물었다.

“라면 끓일 줄 아십니까?”

태건은 이쪽을 보지 않고 무언가를 찾는지 찬장을 뒤지며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짜파게티도 잘 끓여.”

재하는 그의 대답에 피식 웃을 수밖에 없었다.

이 밤에 라면이라니. 군대에서 보초 설 때, 간혹 장교들이 재하의 출신을 알아보고 새벽에 컵라면을 가져다주기도 했지만, 동기들 보기가 민망해 먹지는 않았었다. 장군도 모르는 제 출신이 어디서 샌 것인지 이상하다고 생각하며 조금 더 결벽적으로 굴었었다.

그렇게 생각하면 이런 늦은 시간에 밤참으로 라면을 먹는 것은 또 처음이었다. 인생 처음 먹는 야참 라면을 태건이 끓여 준다고 하니, 어쩐지 알 수 없는 기분이 되었다.

드물게 멍하게 서 있다가 뭔가 돕고 싶어 서성였다. 그러나 정작 자신은 라면에 뭐가 들어가고 뭐가 안 들어가는지 잘 알지 못했다. 재하는 냉장고 앞에서 한참 망설이다가 말했다.

“달걀을, 꺼낼까요?”

“달걀 넣은 거 좋아하는구나. 꺼내요, 그럼.”

장태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투로 말했지만, 재하를 돌아보는 표정은 웃고 있었다. 그의 그런 기호를 알게 된 게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딱히 라면에 대해 기호가 있는 건 아니라서, 재하는 포장지를 흘끗 쳐다보았다.

‘…저기에는 달걀이 들어가 있어서 말해 본 건데.’

라면 포장지의 프린트된 사진에는 가운데에 떡하니 달걀노른자가 올라가 있었다. 다 넣고 끓이는 건 아닌 모양이었다. 재하는 더 내색하지 않고 몸을 돌려 냉장고로 가 허리를 길게 빼고 안을 들여다보았다.

그 순간 엉덩이를 때리는 손바닥에 놀라 허리를 폈다. 두 사람 밖에 없는 주방에서 그런 짓을 할 이는 장태건뿐이었다. 어이가 없어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왜 때립니까.”

“예뻐서 때렸는데. 닳는 것도 아니면서 까칠하네.”

성희롱범의 전형적인 대사였다. 재하는 기가 막혀 웃을 수밖에 없었다. 그 웃음을 본 태건은 곧 등을 돌렸지만, 옆에서 살짝 보이는 뺨이 솟은 걸로 보아, 저도 웃고 있는 듯했다.

그걸 발견하자 또 한 번 웃음이 터졌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호텔에 저를 찾아온 뒤로부터 장태건은 꽤 편안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여유로워 보이기도 했고 약간 들뜬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좋아 보였다. 그 와중에도 재하는 이유를 물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가 여유로워 보이는 것이 가슴이 묵직할 정도로 뿌듯한데도 말이다.

“왜 웃어.”

그렇게 말하는 태건조차 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고 흠, 하고 괜히 헛기침하며 달걀을 꺼냈다.

어느새 뒤에 와서 선 것인지, 냉장고와 저 사이에 재하를 가두어 뒤에서 껴안다시피 한 태건이 안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파도 꺼내 줘.”

묘하게 응석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그런 목소리를 그에게서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도 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라, 재하는 이번에도 대꾸하지 않고 조용히 야채 칸에서 파를 꺼냈다.

양평댁이 다듬어 둔 모양인지 파는 잘 정리된 채로 플라스틱 용기에 담겨 있었다. 그걸 꺼내 주자 장태건이 가위를 꺼냈다. 파를 가위로 자르려는 것 같아 만류한 뒤 식칼과 도마를 꺼냈다.

태건은 쓱 보더니 굳이 그럴 필요 있느냐는 식으로 말했다.

“가위로 하면 간편합니다.”

“네, 압니다.”

알고는 있지만 이재하는 그런 게 잘 되지 않았다. 간편한 방법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데도 정도를 걸어야 속이 편했다. 가위로 자르나 칼로 썰어 내나 고작 라면에 들어갈 것이라 크게 상관없다는 걸 분명 아는데도 말이다.

재하는 조용히 식칼을 움직였고, 도마 위에서는 통통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태건은 법랑 냄비를 올려 둔 스토브 옆에 서서 팔짱을 낀 채로 그런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재하가 파를 다 썬 뒤, 도마와 칼을 정리하고 있을 때쯤 태건이 입을 열었다.

“이재하 씨랑 나는 이런 걸 먼저 알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당신이 요리할 때 가위를 사용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는 거나, 내가 라면 정도는 끓일 줄 안다는 거.”

“…….”

냄비 위에서는 바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전기스토브를 많이 사용하는 요즘 집들과 다르게, 장창식이 기거하던 본채는 아직까지 도시가스를 이용하는 스토브였다.

가스를 원료 삼아 타오르는 불꽃에서는 푸른빛이 났다. 재하는 그걸 바라보다가 장태건이 지금 어떤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

예상과는 다르게 꽤 온순한 눈빛이었다. 그가 그런 눈을 하고 있다는 것이 의외일 정도로. 태건이 팔짱 낀 손을 풀어, 라면 봉투를 집은 뒤 간단하게 포장을 찢어 냈다.

“당신이 젖꼭지만 만져 주면 질질 싼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라면에 달걀 넣는 걸 좋아하는 줄은 몰랐거든.”

“질질…. 그런 적은, 없습니다.”

앞의 말이 약간 어찔할 정도라 재하는 냉큼 부정했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면 태건의 말이 맞았다.

재하가 알고 있는 사정들은 장태건의 입을 통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그가 그 일련의 사건들을 통해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떻게 행동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면 굳이 떠날 필요는 없을 것 같았다.

이혼에 대한 의사는 유신의 마지막까지 긁어모아 태건에게 주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다. 그러나 과연 그게 태건이 원하는 것일까.

바보도 아니고 이른 새벽부터 저를 찾아와 데려오기까지 한 그가 친절히 보여준 것들이 뭔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재하의 마음속에서 가능성이 움텄다. 장태건 역시 자신과 사는 것이 나쁘지 않았을지 모른다는 가정이었다. 그러나 그 가정에는 증거가 부족했다.

이재하는 꽤 단조로운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다. 태건이 자신을 사랑할 리 없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열등의식도 희미해 자신이 누군가에게 사랑받지 못할 거라 여기는 편도 아니다.

대신 감정에도 확실한 증거가 필요한 편이었다. 일단 재하는 이혼에 대한 결정을 잠시 유보하기로 했다.

스토브 앞에 서서 끓어오르는 냄비 안의 것들을 젓가락으로 대충 휘휘 젓고 있는 넓은 등을 보며 내린 결정이었다. 재하는 앞접시를 챙겨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 위에 두었다.

태건이 두 사람 몫의 접시를 준비하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먹는 것이 아니라 전골처럼 냄비 안의 것을 떠먹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재하의 예상이 정답이었는지 태건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냄비 받침 위에 법랑 냄비를 바로 올려 두었다.

“먹어요.”

두 사람은 나란히 앉았다. 냄비에서는 김이 올라왔다. 재하는 손끝이 약간 저린 기분이 들었다. 감격 비슷한 걸 겪는 중이었다.

지난 몇 년간, 인지하지 못했을 뿐이지 꽤 외로웠던 것 같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것이 당연하니 재하는 그런 감정이 들 때마다 자신을 채찍질했었다.

해야만 하는 일을 하는 주제에 후회하지 말라고 윽박지르기도 했다. 그게 제 사랑의 방식이라고 생각했기에 돌아보지 않으려 온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이렇게 마주 보고 앉은 순간,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해 줬다는 것 자체에 성벽처럼 쌓여 있던 노고가 허물어지는 걸 느낀 것이다.

이재하는 자신의 값싼 만족에 웃음이 나왔다. 수지 타산이 맞지 않는 일이었다. 했던 일에 비해 받은 보상이 겨우 라면 한 입이라니. 그래도 좋았다.

“잘 먹을게요, 장태건 씨.”

앞접시 위에 재하의 몫을 퍼주던 태건이 멈칫했다. 그는 알 수 없는 눈으로 재하를 바라보았지만, 냄비에서 올라온 김에 가려져 정확히 어떤 의미가 담긴 눈빛인지 알아내기 어려웠다.

라면을 덜어낸 앞접시를 놔주려는지 태건이 몸을 일으켰다. 감사하다고 말할 참이었다. 폭이 좁은 아일랜드 식탁을 양팔을 넓게 벌려 짚은 장태건이 고개를 숙여 재하의 입술에 쪽, 하고 입을 맞추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이 아침 식사를 하고 나온 뒤 식당 앞에서 했던 것과 같았다. 재하가 뭐냐고 물을 새도 없이 이내 다시 자리에 앉은 장태건이 기다란 손가락으로 젓가락을 집더니 그런다.

“뭐 해. 면 불어.”

뻔뻔스러운 태도였다. 한두 번 보는 것이 아닌 당당한 표정에 웃음이 흘렀다. 그런 재하를 두고 장태건은 라면을 먹기 시작했다.

그의 몫으로 덜어낸 앞접시가 금세 동났는데도 면을 먹을 때 소리가 나지 않았다. 태건은 냄비에 다시금 젓가락을 대더니 말했다.

“그 속도면 이건 내가 다 먹을 거 같은데.”

“아.”

재하는 그제야 저도 먹기 시작했다. 의외로 맛이 좋았다. 달걀을 넣든 넣지 않든 생소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이제 저도 라면을 먹을 때는 꼭 달걀을 넣을 것 같았다.

태건에게 더 빼앗기지 않으려고 꽤 빠르게 먹어 봐도 그는 벌써 세 접시째 먹고 있었다. 그때 양평댁이 주방 안으로 들어오며 놀란 목소리를 냈다.

“아니, 저희 부르시지….”

민망해하는 그녀를 위해 재하가 손을 저었다. 입 안에 있는 것을 삼키지 못해 말을 내뱉기가 어려워 손으로 가린 채 천천히 말했다.

“괜찮습니다. 가서 쉬세요.”

“아이고, 김치도 없이 드시네. 계세요, 제가 갓김치 담근 것 좀 꺼내 올게요.”

그녀는 말릴 새도 없이 김치냉장고를 놓아둔 주방 뒷방으로 후다닥 들어가더니 갓김치를 방짜 유기에 예쁘게 담아 왔다.

냄비만 덜렁 두고 먹던 상 위에 올라오기엔 약간 어울리지 않았지만, 양평댁이 담갔다는 갓김치는 어쩐지 재하의 본가 정 선생이 담근 것과 맛이 비슷해 좋았다.

“본부장님이 이사님 끓여 주셨나 보다.”

그녀는 식탁 위에 차갑게 식힌 결명자차도 놓아주며 말했다. 집에서 오래 일했다는 양평댁은 다른 사용인들보다 태건의 눈치를 약간 덜 보는 것 같았다.

태건 역시 그녀의 말에 딱히 기분이 나빠 보이는 기색은 아니었다. 꽤 스스럼없는 태도로 그녀에게 재하를 고자질한 걸 보면.

“이 사람, 라면 처음 먹는답니다.”

“…처음은, 아닙니다.”

재하는 약간 민망한 듯이 중얼거렸다. 태건이 타인에게 저를 ‘이 사람’이라고 호칭하는 것이 그와 자신이 아직 부부로 엮여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엘리트로 산 콤플렉스가 아주 약간 있었던 터라, 라면을 처음 먹어 본다고 하면 사람들이 보이는 반응이 한결같아 그것도 민망한 참이었다.

다행히 양평댁은 괘념치 않는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으며 말했다.

“더 좋은 거 많은데 굳이 드실 필요가 없으셨겠죠. 두 분 결혼하셔서 본부장님 나가 사시기 전까진 저도 몇 번 얻어먹었지 뭐예요. 본부장님이 라면은 정말 잘 끓이셔서요.”

양평댁은 거기까지 말하고 맛있게 먹으라 한 뒤 그대로 주방을 나섰다. 재하는 의미 없이 앞접시를 휘젓다가 태건을 바라보았다.

양평댁이 따라 주고 간 물 잔을 입으로 가져간 태건은 그런 재하와 눈이 마주치자 한쪽 눈썹을 지그시 올렸다.

왜 쳐다보느냐는 뜻 같아서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무언가 생각난 것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남동 그 집이, 장태건 씨가 원래 살던 집이 아니었던가?’

양평댁의 말로는 꼭 결혼 직전까지 그가 평창동에서 살았던 것 같았다. 그는 분명 결혼 전, 제가 살던 집으로 들어오라고 했었다. 결혼을 위해 매매한 것일까 싶어 아리송해졌다.

갓김치가 상에 오른 뒤, 라면은 더욱더 재빠르게 동났다. 다 먹은 것들을 치우려고 일어났는데, 태건이 한 손에 냄비와 앞접시를 쥐고 재하의 몫까지 빼앗아 갔다.

장태건은 덩치에 비해 손이 작은 편인 재하보다 훨씬 손이 컸다. 그걸 한꺼번에 드는 것이 신기해 재하가 당황한 사이, 싱크대로 다가간 태건은 빠르게 설거지를 시작했다.

라면을 끓일 때부터 셔츠를 걷어붙인 참이라 그의 단단해 보이는 전완근이 움직이는 모양이 잘 보였다. 셔츠가 작은 것도 아닌데,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날개뼈 부근의 셔츠가 팽팽해졌다.

라면을 잘 끓였던 것처럼, 또다시 의외의 면이었다. 설거지하다니. 그러고 보니 그와 같이 살 때도 한두 번 정도는 밥을 얻어먹었었다. 뒷정리가 깨끗하게 되어 있길래 그사이 사용인들이 왔다 갔나 싶었었다.

인제 보니 본인이 직접 뒷정리를 한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가 의아하게 바라보는 걸 느꼈는지 접시 몇 개를 금세 닦은 태건이 뒤를 돌아보았다.

할 말이 있으면 해 보라는 듯한 눈빛에, 재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작게 말했다.

“설거지를 잘하시는 것 같습니다.”

“사무실 막내 생활 오래 했습니다.”

사무실이라고 하면 조폭 사무실인 것 같았다. 장태건은 심드렁한 말투로,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는 아예 조직원들 숙소에서 먹고 자면서 허드렛일을 했다고 했다.

제 손자에게 굳이 그런 일을 시키면서 아예 밖에서 살게 한 장창식이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부친까지 말이다. 재하는 이미 죽은 노인에 대한 분노에 잠시 눈가가 빨개졌다. 열이 끓어오르는 기분이었다.

고작 그릇 몇 개에 냄비 하나라고 식기세척기를 사용하지도 않은 장태건의 상복에는 물방울 몇 개가 튀어 젖어 있었다. 재하는 말없이 다가가 티슈로 그걸 닦아 주었다.

태건이 그런 재하를 내려다보며 싱글거렸다.

“친절하네.”

“…….”

재하가 대답하지 않자 태건이 그런 그의 턱을 살짝 들어 올렸다. 웃음기가 섞인 두 눈이 반짝이며 저를 보고 있었다.

그가 그런 눈을 하는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검은 흑요석을 깨끗하게 흐르는 물에 담가 둔 것처럼 반짝였다.

왜 그런 눈을 할까. 마치 신이 난 아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는 왜 돌연 행복해 보일까. 마침내 오늘로 그의 복수가 완성되어서?

장창식을 제 손으로 죽였다는 말은 농담은 아닐 것이다.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든, 심장마비로 죽은 노인의 발인이 곧이다. 장례식이 마무리되면, 진실은 화장터의 재로 불타오를 것이다. 일가족이자 직계 존속인 장태건이 그의 부검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인은 유언장에 매장 장례를 치러 달라 남겼지만 장태건은 그걸 원하지 않는 것 같았다. 장태건은 조문객 중 장창식의 고문 변호사 하나와 제일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아마 유언장의 내용을 수정했겠지.

그 외에도 어떤 항목은 들어가고 또 어떤 항목은 빠져 영원히 아무도 모르는 비밀로 사장될 것이다. 재하는 그가 원하는 게 뭘까 끊임없이 생각했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재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태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양치하러 가자.”

어린애 달래듯 하는 말에 어이가 없었지만,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상복의 재킷만 벗은 채로 나란히 욕실에 서서 양치했다. 재하의 검은색 넥타이는 셔츠 세 번째와 네 번째 단추 사이에 밀어 넣어졌고, 장태건의 넥타이는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았다.

손님도 오지 않는데 갑갑하다고 아예 풀어 버린 모습에 어쩐지 웃음이 났다. 장태건은 재하가 입을 헹구는 동안 살짝 숙인 허리를 쓸거나 엉덩이에 제 고간을 붙이기도 했다.

묵직한 무게감이 뒤에서 닿을 때마다 놀라 양칫물을 삼킬 뻔했다. 재하가 뒤를 돌아보며 엄중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장태건 씨.”

“미안합니다. 살짝 대보기만 한 거예요. 지금 박을 생각은 없었다니까.”

장태건은 그따위 걸 사과라고 했다. 웃지도 않고 시큰둥한 표정이었는데, 묘하게 불만스러워 보이기까지 했다. 엉덩이에 와 닿던 묵직한 존재감이 그가 이미 발기해 있음을 가리켰다.

황당한 심정이 표정에 드러난 것인지, 장태건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그냥 당신이 참아. 당신한테 발정 난 거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때마다 이렇게 정색할 거야?”

참으로 뻔뻔한 요구였다. 어이없어 대꾸하지 않고 세면대 앞에서 떠났다. 그러나 그대로 손목이 붙들렸다. 그는 욕실에서 나가려는 재하를 붙잡고 입술을 쪽쪽 거리다가 기어코 혀를 넣어 헤집은 뒤 놓아주었다.

“읏, 장태건-.”

뒤의 ‘씨’ 하는 존칭은 그의 두꺼운 혀에 뭉개져 사라졌다. 장태건은 재하가 그의 이름을 부르자 침음 하며 재하의 등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엉덩이를 쥐었다가 풀기도 했다.

재하는 그를 밀어냈다. 이러다 발기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밑이 또 예고 없이 축축해질까 봐 두려웠다.

태건은 그런 재하에게 웬일로 기꺼이 밀려나 주었지만, 눈이 풀린 채로 목덜미에 얼굴을 박고 헉헉거렸다. 숨을 몰아쉬는 동안 재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흥분하지 않으려 온 힘을 기울였는데도 쉽지 않았다.

결국 재하 역시 태건의 허리를 끌어안아 팔을 조였다. 제가 받아 보니 꽤 불편하고 더러는 아픈 일이라 재하는 단 한 번도 태건에게 알파의 형질을 내세울 생각을 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제가 오메가인 것도 아닌데 그를 받고 싶어 죽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밑이 저절로 조여들었다. 그의 성기를 뒤에 품고 있는 것처럼. 그와 한 몸이 되고 싶었다. 지금 당장 그러지 못하는 것이 약간 서운할 정도로.

결국 두 사람은 아직 몸을 쓸 줄 모르는 사춘기 애들처럼 서로 껴안은 채 키스만 했다. 욕실에서 나왔을 때는 입술이 부은 채였다. 재하는 그게 약간 민망했다.

그냥 나가려는데 손깍지가 끼워졌다. 뒤를 바라보니 장태건이 인상을 찌푸렸다.

“왜.”

“…아닙니다.”

드물게 날카롭게 반응하길래 의아했다. 그러면서도 깍지를 풀지 않는 게 이상했다. 두 알파는 결국 손깍지를 낀 채로 다시금 빈소로 향했다.

새벽에는 조문객이 없어 조용했다. 두 사람은 빈소 벽에 등을 댄 채 나란히 앉았다.

“눈 좀 붙여요.”

“그렇게 내가 걱정돼?”

장태건은 재하의 말에 영 다른 소리를 했다. 그러나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태건이 그런 재하를 빤히 바라보았다.

무언가 또 장난스러운 말을 하려나 싶었는데, 그가 먼저 고개를 돌린 채 아무런 말이 없었다. 재하는 그런가 보다 했다. 둘 다 말수가 적은 편이라 이야기가 오가진 않아도 어깨를 붙이고 있는 것이 좋았다.

그러다 깜빡 졸았던 것 같다. 어슴푸레, 창문 사이로 새벽이 오고 있었다. 장례 둘째 날 새벽에 눈을 뜬 재하는 어둠 속에서 태건이 저를 보는 걸 느꼈다.

빈소에는 불을 끌 수 없으니, 재하는 어느새 자신이 침대에 누워 있다는 걸 깨달았다.

장태건은 모로 누운 이재하를 마주 보며 똑같이 옆으로 누워 있었다. 그는 팔짱을 낀 채로 재하를 보고 있었다.

깊은 두 눈이 아주 검은 바다처럼 그 속을 알기 어려웠다. 문득 그를 처음 만났을 무렵 그의 눈동자를 보며 검은 바다 같다고 생각했었던 게 기억났다.

그때의 장태건과 같은 눈빛이었다. 해당화가 핀 절벽에 철썩이는 검은 파도처럼…. 재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왜 쳐다보느냐고 묻고 싶었는데 피곤하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조금만 자고 일어나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한 즉시 수마에 잠겨 버렸다.

* * *

장례 이틀째도 별일 없이 넘어갔다. 밑이 계속 불편하기는 했기 때문에 재하는 이튿날에만 속옷을 세 번 갈아입었다.

태건을 두고 자리를 비울 수 없으니 병원은 장례가 끝나고 나서 임 과장을 통해 예약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이런 데가 불편하면 비뇨 생식기 전문의를 찾아야 하는 건가.’

수족과 같은 사람이라 그녀가 아무리 베타 여성이라 해도 그 부분에 대해 말하기 껄끄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증상을 설명하기가 약간 모호했다.

그냥 제가 직접 예약해야 하나 싶어졌다. 아니면 유신의 입김이 닿지 않는 종합 병원만 연결해 달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어쨌든 이튿날도 바쁘기는 꽤 바빴다. 조문객들이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들은 주로 태건을 보러 왔다가 재하를 발견한 뒤, 역시 이재하 이사의 안목이 틀릴 리 없다며 추켜세웠다.

들었던 말 중 가장 황당한 말이라 대꾸하지 않았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재하의 과묵함과 사람 됨됨이를 칭찬했다. 웃기지도 않았다.

어찌 되었건 태건에게 필요한 사람들이라 생각하면 마주 악수할 정도는 되었다. 살펴 가라며 옅게 미소를 짓는 이재하와 심드렁한 태도로 사람들을 대하는 장태건을 흘끗거리는 조문객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그렇게 장창식의 장례 이튿날이 흘렀다. 그 아무도 상주에게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소리를 하지 않는 그런 장례식이 말이다.

그리고 마지막 날. 발인 날은 날씨가 꽤 추웠다. 가벼운 코트를 입고 나섰던 재하는 장씨 일가 선산에 오르기도 전에 옷을 더 껴입을 걸 그랬나 싶어졌다.

경기도에 있는 이름 모를 산은 오르기 만만치 않았다. 산의 높이가 높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 아무도 관리를 하지 않아 사람이 다니는 길의 폭이 무척이나 좁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화장터에 들렀다가 오는 도중 리무진까지 고장이 났다. 장태건은 예의 그 심드렁한 어투로 말했다.

“죄짓고 간 양반이라 좋은 차로 모시는 건 안 되나 보지. 그냥 트럭에 태워.”

장창식이 죽어 장한 건설의 경영 승계는 당연히 장태건에게로 넘어간 만큼, 그의 말을 거스를 사람은 없어 보였다. 뼛가루를 불용성 쓰레기로 버리라고 한 말은 다들 농담처럼 어색하게 넘겼지만 말이다.

결국 백자 자기에 담긴 장창식의 뼛가루는 선산에 묻히기는 했다. 먼저 간 그의 아들 무덤 옆이었다.

조직원들이 땅을 파자, 장태건은 태우지도 않는 담배를 만지작거리며 서 있었다. 그 역시 코트가 얇아 안 추울까 싶었다.

장태건은 하품을 길게 하더니 말했다. 눈 앞머리에는 눈물까지 고인 채였다.

“선산은 무슨. 쌍놈의 집안에 선산이 어디 있어.”

중얼거린 말이라도 소리가 제법 컸기 때문에, 장례에 따라온 장한 건설의 임원들이 민망한 얼굴들을 했다. 그는 자신의 옆자리에 서 있던 재하에게 물었다.

“아, 혹시 배우자 집안이 뼈대 있는 게 좋아요?”

이번에도 또 황당한 물음이었다. 재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가 그런 재하를 빤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이재하 씨가 봐도 내가 양반집 출신 같지는 않았을 텐데. 이렇게 생겨 먹은 양반이 어디 있겠어. 딱 봐도 백정 피지.”

백정이나 노비 핏줄 중 하나였을 거라고 중얼거리는데 여전히 대꾸할 말을 찾기가 힘들었다. 그건 장한의 임원들도 마찬가지였는지, 추운 날씨에 입이 얼어 버린 듯 다 같이 말이 없었다.

장례식은 그런 식으로 끝났다. 장례가 끝나고 모여서 부조금 나눌 친척들이 있던 것도 아닌지라, 선산에서 내려와 귀가하면 될 일이었다.

내내 만지작거리고 있던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고, 태건이 재하의 손목을 낚아챘다. 산기슭에서 내려오자마자 그에게 붙잡혀야 했다. 태건은 재하를 보지 않고 말했는데 어조가 다소 초조해 보였다. 갑자기 성마르게 저를 끌고 가는 태건이 의아했다.

“별채에 사람 보내서 짐 챙겨 오라고 했으니까 집으로 가자.”

“집이라면-.”

그 집이 어디를 말하는 거냐고 물으려는데, 아침까지 멀쩡하던 밑이 또 젖은 느낌이 확 들었다.

날이 몹시 추운데도 그 사이만 뜨겁게 축축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추위에 얼었던 얼굴로 인상을 찌푸렸다. 그를 끌고 가던 태건이 돌아보고는 물었다.

“어디 불편해요?”

“아, 아닙니다….”

그 때문에 집이 어디냐고 물을 새도 없었다. 재하는 정길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 태건과 함께 올라탔다.

내내 추운 곳에 있다가 따뜻한 차 안에 들어와서 그런가, 갑작스레 열이 올랐다. 몸의 이상을 느낀 재하는 바로 병원에 가야 하나 생각했다.

장례가 끝나기도 했으니 잠깐 들렀다 오는 편이 좋을지도 모른다. 차는 선산 밑에서 출발하여 잠깐 비포장도로를 달리다가, 그대로 국도로 올라탔다. 서울에 도착하면 바로 임 과장을 통해 병원을 예약해야겠다고 생각한 때였다.

“읏….”

밑에서 뭔가 왈칵 새어 나오는 느낌이었다. 골 사이가 척척해질 정도였다. 당황하여 저도 모르게 옆좌석에 앉은 태건을 바라보자, 언제부터 저를 보고 있던 건지 그의 낮게 가라앉은 눈과 마주쳤다. 그 눈을 마주하자, 재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다.

“정길아, 차 세워라.”

그가 이를 악물며 말했다. 정길은 되묻는 것도 없이 지시 등을 켜고 갓길에 정차했다.

차가 완전히 정차하기도 전에, 문을 열어젖힌 태건이 뒷좌석에서 내렸다. 정길 역시 마찬가지였다. 재하는 그동안 멍한 눈을 깜빡였다.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면 창으로 태건이 빠르게 보닛을 돌아오는 것이 보였다. 운전석 문이 다시금 열렸다. 그대로 운전석에 올라타더니 차 문을 거세게 닫으며 말했다.

“안전벨트 매.”

차에는 어느새 쟈스민 향이 심하게 나기 시작했다. 재하는 당황한 눈으로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그런 태건을 바라만 봤다.

태건이 주먹으로 핸들을 내려쳤다. 사람의 주먹으로 내리쳤다기에는 날 수 없는 소리가 났다. 그가 다시금 뒷좌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벨트, 매라고.”

무언가 참는 듯 욕을 짓씹은 목소리였다. 재하는 멍한 정신으로 명령받은 굼뜬 로봇처럼 안전벨트를 찾아 간신히 맸다.

거기까지 지켜본 태건은 말없이 앞을 본 뒤 그대로 기어를 변속 후 차를 출발시켰다. 갑자기 튀어 나간 차 때문에 관성에 의해 목덜미가 살짝 들릴 정도였다.

재하는 뒤를 돌아보았다. 도로 위의 정길이 히치하이킹을 하듯 팔을 뻗은 채 엄지를 추켜들고 있었다. 뒤따라오던 조직원들의 차 중 하나가 갓길에 차를 세웠다. 정길이 그 차에 올라타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곧이어 점처럼 변해 버렸다. 재하가 타고 있는 세단이 너무 빠르게 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차 안에 만개한 쟈스민 향이 흐드러졌다. 재하는 계속해서 무언가가 울컥 새어 나오는 다리 사이가 믿기지 않았다.

왜 이러는 거지. 진작 병원에 갔어야 했다. 그동안 괜히 살이 빠지고 근육량이 줄던 것도 다 무언가의 이상 증세로 여겼어야 했는데 그냥 넘긴 것이 폐단이었다.

장례 첫날 내린 미열이 다시금 오르는 기분이었다. 온몸이 들들 끓는 것 같았다. 러트기 때와는 양상이 전혀 달랐다.

다리 사이가 간지러운 이 감각이 아예 처음인 건 또 아니었지만, 그때는 러트기였었다. 지금의 재하에게서는 물푸레나무의 향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공황 상태에 빠진 재하가 수만 가지의 가설을 세우고 그것들을 일일이 소거하고 있을 때, 앞좌석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김란희랑 만나서 뭐 했어.”

“그냥….”

그냥 차를 마셨다고 말하려던 참이었다. 온몸이 간지럽기 시작하더니 젖꼭지에 피가 몰려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태건 앞에서 그곳을 긁어 댈 수는 없어 저도 모르게 상체를 들썩거려 안전벨트에 그곳이 스치게끔 하면서도, 재하는 제가 지금 무슨 행동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운전석에서 룸미러로 그 꼴을 다 바라보고 있던 태건이 목을 긁듯이 거친 목소리로 말했다.

“똑바로 앉아 있어, 이재하. 혼자서 장난칠 생각 하지 말고.”

단호한 음성에 살짝 정신이 든 재하는 제 뺨이 뜨겁게 달아올라 있다는 걸 깨달았다. 비단 뺨뿐만 아니라 온몸이 뜨거웠다.

미열 정도가 아니었다. 몸살은 아닐 텐데 몸 상태가 영 이상했다. 재하는 병원으로 가자고 하려다가 어느 병원으로 가야 할지를 몰라 막막해졌다.

유신 계열의 병원으로 향하면 그의 행적이 반드시 이익형의 귀에 들어갈 것이다. 장례 마지막 날 병원으로 향했다는 소식이 들리면 이익형이 또 무슨 짓을 할지 몰랐다.

재하는 제가 숨을 거칠게 몰아쉬는지도 모르고 저절로 허벅지 사이를 조였다. 안쪽이 힘을 받으며 또 한 번 물이 툭 터지는 기분이었다.

차가운 차창 문에 뺨을 대고서 재하는 끙, 하고 앓았다. 태건이 여전히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집으로 갈 거야. 참아 봐. 다른 데서 너랑 그럴 생각 없어.”

그럴 생각이란 게 뭔지 묻고 싶었다. 그러나 도중에 이성이 뚝 끊기는 기분이었다. 더는 그 어떤 생각도 하는 것이 힘겨웠다.

입을 여는 즉시 신음이 쏟아질 것 같았다. 아니면 그 어떤 애원이.

‘누가 좀….’

아주 원색적인 애원이 튀어 나갈 것만 같았다.

‘어떻게 좀, 그냥….’

재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의식이 멀어졌다. 짙은 바다 향이 났다. 어디선가 몰려오는 꽃의 향기들. 척박한 곳에서만 피는 꽃.

오히려 양지바른 데서는 자라지 못하는 꽃이라고 했다. 그것이 해당화, 장태건의 향이었다. 재하는 진한 쟈스민 향에 섞인 바다 내음과 해당화 향을 맡을 수 있었다.

의식이 조금 더, 아주 멀어졌다.

“이재하.”

재하야.

누가 저를 부른 것도 같고, 그렇지 않은 것도 같고. 재하는 두 눈을 감았다.

그날, 이재하는 생애 첫 히트 사이클을 맞이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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