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이재하는 장태건을 만난 호텔에서 조금이라도 더 멀리 떨어지려는 듯 필사적으로 차를 몰았다.
자신의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일단 도망쳤다. 도저히 서울에 남을 수가 없었다. 제가 저지른 짓거리들이 한심했기 때문이다.
호텔방을 잡아 둔 것도 잊은 채 집으로 돌아와 바로 샤워를 해야 했다.
피부에 장태건의 페로몬이 달라붙어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 그대로 두면 무슨 짓이든 할 것만 같았다.
제 몸에서 그의 향이 나는 것이 돌아 버릴 정도로 좋았다. 오래도 아닌 딱 식사 시간. 1시간에서 1시간 30분 남짓한 그 시간 동안 그를 마주한 것만으로, 각인한 오메가처럼 그의 페로몬에 잠식당한 것이 어이가 없었다.
이재하는 자괴감에 휩싸인 채로 샤워기 아래서 성기를 부여잡았다. 끝이 제멋대로 부풀어 있었다. 러트기가 아닌데도 노팅을 기대한 것인지 발갛게 달아오른 게 황당할 정도였다.
그 모양새가 이재하를 끝까지 몰고 갔다. 물에 젖은 발가락이 안쪽으로 구부러들었다. 하복부가 단단해지며 성기에 피가 몰렸다.
발기한 재하의 것은 색이 점점 더 붉어졌다. 뜨거워진 몸이 괴로워 차가운 타일 벽에 붙어 섰다. 성기의 끄트머리가 차가운 곳에 닿자 요의가 몰아쳤다. 참아 보려고 하자마자 요도구가 저 혼자 빠끔거렸다.
색이 연해진 성기는 언젠가부터 조금만 자극을 줘도 새빨갛게 달아오르고는 했다. 빨갛게 변해 버린 귀두 끄트머리에서 요도구가 오물거리듯 작은 입을 벌리면, 색이 좀 더 분홍색으로 바뀌고는 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재하는 타일 벽에 이마를 박은 채 이를 악물고 신음했다. 턱에 힘을 준 탓에 교근이 불뚝 튀어나와 있었다.
저절로 두 눈이 감겼다. 절정은 제 맞은편에 앉은 채로 입을 벌려 썰어 둔 고기를 삼키는 장태건을 떠올리는 순간 맞이했다.
다른 사람이 식사하는 장면을 보고 흥분하다니. 어지간히 미친 게 아니라면 이럴 수 있을까. 재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며 절정의 증거들을 수챗구멍에 흘려 보냈다.
뜨거운 물 아래 계속 서 있느라 더워졌다. 그때부터는 가장 찬물을 틀어 놓은 채, 빨갛게 달아오른 몸을 식히며 멍하니 서 있었다.
피부에 내려앉았던 장태건의 페로몬은 지워진 지 오래일 것이다. 그럼에도 계속 그렇게 있을 수밖에 없었다.
샤워기 아래서 나온 것은 꽤 시간이 지난 후였다. 손에 잡히는 아무 옷이나 꿰입었다. 젖은 머리에서는 물이 뚝뚝 떨어졌다. 유학 시절 다니던 대학교의 것으로 앞판에 크게 학교의 로고가 프린트되어 있는 후드 티에도 물방울이 궤적을 남겼다.
가끔 복싱 갈 때 입는 것으로, 임 과장이 맞춰 오는 정장이 아니면 옷에 신경을 쓰지 않는 재하로서는 벌써 10년 가까이 입어 온 옷이었다. 소매 부분이 날근날근해져 있었지만, 상관없었다. 바지 역시 되는 대로 트레이닝 팬츠만 입은 채 그대로 차 키를 주워들었다. 지갑과 핸드폰만 챙긴 채였다.
별채의 지하 주차장까지 거의 뛰어 내려가다시피 했다. 매일같이 지키고 있던 태건의 부하는 보이지 않았다.
감시가 없어 잘됐다는 생각도 없었다. 아무 생각 없이 바로 서울을 뜨고 싶었다. 언제 돌아올 거라 기약도 하지 않은 채, 재하는 바로 차고의 셔터를 여는 버튼을 누른 후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엔진을 예열할 시간도 없이 사이드 브레이크를 해지하고 기어를 변속했다.
그때부터는 그냥 바로 북부 간선 도로를 타고 구리를 지나 서울 양양 고속도로에 합류했다.
강원도로 가는 밤늦은 시간의 고속도로 위에는 새벽 배송을 하는 탑차, 덤프트럭들이 아니면 재하의 세단뿐이었다. 재하는 멍하니 앞서가는 탑차의 유개 화물칸을 감싸고 있는 유신 운송의 로고를 바라보았다. 신뢰감 있는 얼굴로 종이 박스를 든 채 이쪽을 바라보며 웃고 있는 전속 모델과 눈이 마주치자, 지시등을 켠 뒤 탑차를 추월했다. 가라앉은 기분은 아무리 달려봐도 회복되지 않았다.
운전하는 내내 안전벨트에 가슴팍이 스치면 저 혼자 부풀어 오른 유두가 닿아 간지러워졌다. 둥글게 뭉쳐 피가 몰린 곳이 스칠 때마다 간지러워 운전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결국 손수건을 몇 번 접어 가슴팍과 벨트 사이에 끼워 넣었다. 저절로 욕이 나왔다. 실제로 욕을 뱉지는 않았지만 그런 기분이었다.
주유하기 위해 홍천 휴게소에 들렀을 때는 새벽 1시 23분경이었다. 프랜차이즈 카페들이 모두 닫은 참이라 어쩔 수 없이 편의점에서 대학 때 자주 마시던 캔 커피 하나를 샀다.
병처럼 생긴 알루미늄 캔에 들어 있는 제품인데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유학 전 대학을 다닐 때는 이런 종류의 캔커피를 한 병 사서 도서관으로 향했던 기억이 있었다. 싸구려 커피들이 그러하듯 카페인 함량이 높아 지금의 재하에게는 딱 알맞았다.
재하는 그걸 계산대에 내려놓고는 망설이다가 피곤한 얼굴로 앞에 서 있던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에게 말했다.
“…담배도 한 갑 주세요. 저 뒤에 있는 파란색입니다. …라이터도 계산하겠습니다.”
“7,600원입니다. 앞쪽에 카드 꽂아 주세요.”
재하는 어느 날의 그때처럼 헤매지 않고 바로 카드를 꽂았다. 아르바이트생이 건넨 커피와 담뱃갑, 라이터 등을 한 손에 든 채로 카드를 뽑아 돌아섰다.
차로 돌아온 그는 카드를 입술 사이에 물고는 차 문을 열어 올라탔다.
콘솔 박스에 비닐 포장을 뜯지도 않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올려 둔 채로 캔 커피의 뚜껑을 열었다. 까드득 소리와 함께 알루미늄 재질의 뚜껑이 돌아갔다. 재하는 불 꺼진 차 안에서 커피를 마셨다. 졸린 건 아니었는데 계속 멍했다. 열기는 식은 지 오래였지만 가슴속이 시끄러웠다.
머릿속은 계속해서 장태건을 되새기는 중이었다. 몇 년 전 딱 한 번 그와 함께 잠깐 피웠던 담배가 그리워 담배까지 산 자신이 어이없었다.
결국 주유 건을 들고 담배 한 개비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가, 주유소에서 큰일 날 짓 한다고 옆에서 주유하던 트럭 운전사에게 혼까지 났다. 재하는 불을 붙이지도 않았던 담뱃대의 허리를 분지르며 운전사에게 사과했다. 생전 안 하던 실수에 처음 본 사람에게 혼이 나니 더더욱 자신이 바보 같아졌다.
그렇게 또 차에 올라탄 뒤로는 쉬지 않고 계속해서 운전했다. 모친이 남겨 준 별장 중 한 곳이 강원도에 있지만 그곳에는 가지 않고 설악산 쪽에 있는 유신 계열의 호텔로 향했다.
수영장이 있는 곳이 필요했다. 지배인에게 미리 전화해 둔 참이라 발렛을 맡기는 동시에 카드 키를 받았다.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으로 올라가며 따라오는 버틀러를 만류했다. 엘리베이터로 향하던 재하는 버틀러에게 딱 한 가지만 물었다.
“수영장, 지금 개방됩니까?”
“이용 가능하십니다.”
늦은 시간임에도 안 된다는 말이 없었다. 프레지덴셜 스위트룸의 투숙객을 위한 풀장이 따로 있는 듯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예약하지 않고 방문한 탓에 준비되어 있지 않았을 것이다. 평소 같으면 하지 않을 짓이었다.
재하는 아래 인력들이 저를 위해 쓸데없는 노동을 하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임 과장에게 과도한 영전은 필요 없다고 늘 얘기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다 늦은 시간에, 어쩌면 이익형에게 보고가 올라갈지도 모른다는 걸 알면서, 새벽 근무를 하는 호텔 직원들을 귀찮게 해서라도. 이재하는 뭔가에 매진해야 했다.
이대로는 잠이 오지 않을 것이다. 뭘 하든 몸을 혹사해 미친 듯이 굴린 다음, 내일의 해가 질 때까지 깨어나지 않고 자고 싶었다.
오직 단 한 사람을 위해 늦은 시간 개방한 풀장에 들어서며 이재하는 저 자신을 모두 무너트린 다음 재조립하고 싶다는 충동을 이겨 내야만 했다.
그날은 늦도록 수영을 했다. 통창으로 된 풀장의 한쪽 벽면에서 해가 떠오르는 모양새를 볼 때까지. 이재하는 지쳐서 죽고 싶었다.
소원치고 저렴한 데다, 현실성이 없어 이루어지지 않을 일이었다.
* * *
꿈에서 뭘 봤더라?
사실 이재하는 꿈을 잘 꾸지 않는 편이었다. 꿈꾸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아, 의식적으로 꿈을 거부하고는 했다. 그 거부가 통했는지, 잠이 들면 온통 암흑이었다가 눈이 시려 깨 보면 아침인 경우가 태반이었다.
그러나 기어코 무언가가 밤사이에 그를 찾아왔나 보다. 자고 일어나 눈꺼풀 안쪽에 눈물 한 방울이 고여 있는 걸 보고 짐작한 것일 뿐이지만. 옆으로 누워 잔 탓에 그의 곧은 콧대에 눈물방울이 고여 있었다.
재하가 두 눈을 깜빡일 때마다 눈물이 방울방울 떨어져 내렸다. 대체 무슨 꿈을 꿨길래. 기상과 동시에 저 자신을 한심하게 여겨야 한다니.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침대 옆 콘솔에 놓인 전자시계는 벌써 오후 늦은 시간을 가리키며 깜빡이고 있었다. 꽤 오래 잔 듯싶었다.
재하는 그대로 일어나 룸서비스로 클럽 샌드위치와 갈비 반상 차림, 팟타이와 미트볼 스파게티 등을 주문했다.
꽤 두서없는 메뉴 선택이었다. 곧이어 버틀러가 음식을 올린 트레이를 밀고 초인종을 눌렀다. 거실 입구에 두고 나가라고 했다. 누군가를 마주쳐 말 몇 마디 섞기도 싫었다.
재하는 곧 트레이를 직접 끌고 들어와 객실 거실도 아닌 침실에서 식사를 시작했다. 메뉴 선택을 했던 것처럼 음식의 순서를 따지지 않고 되는대로 퍼먹었다.
갈아입을 옷을 가져오지도 않아 새벽에 편의점에서 사 온 드로어즈 위에 가운만 입은 채로 앞섶을 여미지도 않았다.
맨살이 드러난 허벅지 위에 샌드위치 접시를 올려 두고 흘리거나 말거나 멍하니 먹기만 했다.
미니바에서 콜라도 꺼내 왔다. 탄산을 잘 즐기지 않는데 많은 양의 음식을 식도 아래로 넘기려니 필수적으로 필요했다. 다 먹은 캔은 우그러트렸다.
한눈에 봐도 많아 보이던 양이 차츰 바닥을 드러냈다. 입이 짧은 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토록 많이 먹지도 않았는데 접시들은 어느새 비워져 있었다.
“…….”
그러다가 문득 식욕이 확 사라졌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몇 년을 쏟아부었는데 제자리인 것 같다는 생각이 가시지 않았다. 제가 한 것들이 모두 멍청한 짓거리였으면 어쩌나 하는 불안 때문이었다.
먹던 샌드위치를 그대로 내려 둔 채 속옷을 벗고 수영복을 입었다. 가운 차림으로 다시 한번 풀장으로 내려갔다. 스위트룸에 묵는 투숙객들 전용으로 사용하는 풀장은 벽 하나를 사이로 둔 일반 풀장과 달리 고요했다.
대충 준비 운동을 마친 뒤 풀장 속으로 다이빙해 들어가자 하얀 포말이 재하를 반겼다. 그날은 또 그렇게 내도록 수영만 했다.
돌아와 까무룩 잠들었다. 여전히 머리를 말리지 않은 채였다. 오후 늦게 먹었던 것이 첫 끼이자 마지막 끼니가 되었는데도 상관하지 않았다. 잠이 고팠다. 그대로 늪지대로 빨려 들어가듯, 의식이 침잠했다.
잠을 자면서도 깨어 있는 듯했고, 깨어 있으면서도 잠이 든 듯했다. 의식과 무의식, 선명과 혼돈 속에서 재하는 방 안의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베개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렇게 어딘가로 가라앉듯 잠이 들어 그랬을까, 어렴풋한 여명이 암막 커튼 사이로 끼쳐 들어와 재하의 눈가를 건드린 순간, 헉 하는 숨소리와 함께 의식이 한꺼번에 돌아왔다.
재하는 떠지지 않는 두 눈을 뜨려 노력해야 했다.
“…….”
“…….”
침대 옆 소파에 장태건이 앉아 팔짱을 낀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긴 어떻게.”
말을 내뱉고 나서야, 재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심각하게 가라앉아 있음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갈라진 것이 꽤 심했다.
떠지지 않는 두 눈을 깜빡이자 불 하나 켜져 있지 않은 침실 안에 고요히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이 그제야 자세히 들어왔다.
남자는 상복을 입고 있었다. 어디 상갓집에서 밤이라도 새우다 온 것일까. 향냄새가 배어 있지는 않은데. 재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자기야.”
“…….”
“가출을 강원도까지 하는 사람이 어디 있니. 새벽 운전하느라 명순이 새끼 좆 빠질 뻔했잖아.”
그렇게 말하며 목을 돌리는 장태건에게서 두둑 소리가 났다.
재하는 두 눈만 깜빡이다가 자리에서 천천히 일어났다.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내려가며 헐벗은 어깨와 가슴팍이 모두 드러났다. 그제야 제가 지난밤 아무것도 입지 않고 잠이 들었음을 깨달았다.
원래는 홈 웨어를 입고 자는데 다 귀찮았다. 옷이 없기도 했지만 구해 오라 하면 실크와 면사 등 갖은 소재의 딱 맞는 사이즈의 잠옷을 배달해 줄 텐데 그러기 싫었다. 샤워 가운만 입고 지내며 음식 트레이만 밖에 내어 둔 채 청소도 필요 없다고 버틀러에게 미리 얘기해 둔 참이었다.
당연히 벗고 잘 수밖에 없었다. 그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이재호만 해도 다 벗고 자는 걸 몇 번이나 봤으니까. 이재호까지 갈 필요도 없이 장태건도 매번 상의를 입지 않고 잠이 들지 않았던가. 드문 일이 아닌데도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거렸다. 장태건은 그런 재하가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으며 말했다.
“내가 벗긴 거 아닌데 눈빛이 왜 그래.”
그러더니 무슨 생각을 하는지 미간을 찌푸리며 소파에서 일어나 재하에게로 다가왔다. 방 안은 불빛이라고는 없어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그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아니면 다른 놈이 벗겨 줬어? 누굴까, 그 친절한 친구가.”
그가 또다시 농담한다고 생각한 재하는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여긴 어떻게 오셨습니까.”
“영동 고속도로 타고.”
그걸 묻는 게 아니란 걸 아는 사람이 그러니 재하의 미간도 찌푸려졌다.
장태건의 시점에서 보면 제멋대로인 사람은 자신이겠지만, 재하가 볼 때 장태건만큼 종잡을 수 없는 이가 없었다.
지난 2년간 재하를 향했던 태도는 어디에 둔 건지 친근해 보일 정도의 말투였다.
당장 사흘 전 그에게 이혼을 요구하기 전까지, 이재하는 어림잡아 10개월간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 전에는 또 아홉 달 정도. 그의 얼굴을 1년에 두 번 정도 보면 많이 보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두 번의 만남 동안 대화가 많았던 것도 아니다.
그는 관심 없는 태도로 재하를 대했고, 감정 없는 눈으로 재하를 보았다. 함께 살던 짧은 시간 동안 나누었던 모든 대화는 어디에도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그런 식으로 고착된 관계가 하루 이틀이 아닌데, 저런 격의 없는 표정과 말투는 무어란 말인가. 재하는 태건이 이해 가지 않았다. 그의 그런 태도에 잠시 할 말을 잃은 참이었다.
가타부타 답이 없는 재하를 보던 장태건이 다시금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느리게 기지개를 켰다. 거대한 맹수가 근육을 서서히 늘이는 것처럼 여유로운 몸짓이었다.
“피곤하네.”
장대하게 기지개를 켠 것치고 전혀 피곤해 보이는 목소리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반사적으로 걱정이 들었다. 그의 안색을 살피고 싶은데 방 안이 너무 어두웠다.
장태건은 재하가 더 자신을 살필 시간을 주지 않고 그대로 몸을 움직였다. 전에 와 본 듯 자연스럽게 걸어가더니 어렴풋한 빛에도 막힘 없이 객실 침실의 벽면 쪽에 놓인 트레이 위에서 물 한 잔을 따라 다시금 침대 옆으로 걸어왔다.
보헤미안 커트로 세공된 워터 고블릿에 담긴 물 잔은 그의 손아귀에 쥐어지자 무척이나 나약해 보였다. 그대로 파삭 깨져 버릴 것 같아 곧장 받아 들고는 물을 마셨다.
막상 목구멍으로 물이 흘러 들어가자 몸이 물을 원했던 걸 알 수 있었다. 재하가 물을 다 마시자 대신 잔을 가져간 태건이 그것을 도로 콘솔 위에 내려놓았다.
그에 비해 높이가 낮은 콘솔 때문에, 등이 굽이치듯 굽어지며 기다란 팔이 내려갔다. 어둠 속에서 산맥같이 장대한 이가 움직이는 걸 보던 재하는 눈이라도 부신 것처럼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어두워 그의 표정조차 보지 못해 아쉽다고 생각할 때는 언제고. 이재하는 그를 사랑한 뒤로 늘 자신에게 몰아친 여러 모순을 인내하느라 제정신이 아니었다.
조금이나마 정신을 차리고 눈을 똑바로 떴을 때, 재하는 진짜로 방문한 이유가 뭐냐는 표정을 하고 있었다. 장태건은 저의 이혼 제안을 거절했다. 그것은 그대로 폭풍이 되어 돌아와 재하를 뒤흔들었다.
한 번 더 그에게 이혼을 말할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였다. 당시에도 갖은 유혹을 무릅쓰고 가까스로 입 밖에 꺼낸 것이다. 그와 함께하고 싶다는 욕심, 이대로 장태건의 곁에서 뭉개고 싶다는 이기심. 그걸 다 이겨 내고 말을 꺼냈던 이재하는 패잔병처럼 지쳐 있었다. 다시 한번 그것들과 싸울 용기가 없었다.
장태건이 암막 커튼을 걷으며 말했다. 밖은 예상대로 새벽을 지나 아침 해가 슬슬 떠오르고 있었다.
“같이 올라가자. 당신 차는 명순이더러 끌고 오라 하고, 내 차 타.”
“…….”
“가는 동안 옆에서 코 골면서 자도 뭐라 안 할 테니까. 같이 가자고.”
불현듯 이재하의 안에서 이대로도 괜찮지 않겠냐는 물음이 솟았던 건 그때였다. 장태건이 창가로 들이치는 햇빛을 등지고 웃었다. 재하는 숨이 멎을 듯 그 광경을 바라만 보아야 했다.
불쑥 충동이 치밀었다. 이대로도 괜찮지 않을까. 지난 몇 년간 죽을 듯 힘들었으니 이제는 욕심을 부려도 되지 않을까. 그의 모친의 일은 유감이지만 사실 자신의 죄는 아니었다. 그러니 모두 다 무시하고 이제는 정말로….
“아, 싫어도 가야 해. 다섯 시간 뒤에 영감 장례식이거든.”
치밀던 욕심이 그대로 가라앉아 버렸다. 재하는 숨을 멈춘 채 태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웃고 있지 않았다.
여전히 상복을 입은 채로 말이다.
* * *
당장 다섯 시간 뒤라고 말할 때는 언제고 장태건의 차는 영 다른 곳에 멈춰 섰다.
“아, 배고파. 밥 안 사 주나.”
시큰둥한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사이드 브레이크를 올리는데, 심각했던 것도 잊은 채 재하는 저도 모르게 풋 웃을 뻔했다. 도망치듯 서울을 떠났던 주제에 너무나도 쉽게 말이다.
그러나 잠 한숨 자지 않고 달려왔다는 사람에게 아침 역시 건너뛰자고 할 수 없어, 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밥 먹고 갈까요?”
“그래요. 사 준다는데 얻어먹어야지.”
제발 밥 먹고 가자고 애원한 사람이 되어 버린 재하는 풀어지려는 표정을 가리기 위해 조수석 문을 열어 내렸다.
장태건과 대화조차 나누지 않고 러트기를 보냈을 때와는 분위기가 달랐다. 두 사람 사이의 뭔가가 새벽 이후로 변해 버린 것 같은데 그게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이재하는 이런 방면으로는 아는 것이 별로 없었다. 관계가 적당히 누그러지고 어느 순간 그와 있는 것 외에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올 수도 있다는 걸 몰랐다.
재하는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이곳에 그와 함께 있는 것에 이질감을 느꼈기 때문이다. 아직 해가 완전히 뜨지 않은 강원도의 아침 공기는 청명하기 그지없었다. 상황에 맞지 않는 상쾌한 공기와 이제 막 태어나 여린 햇살이 두 알파 사이를 메웠다.
재하는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밥집에는 ‘아침 식사 됩니다.’라고 쓰여 있는 현판이 크게 붙어 있었다.
차에서 내린 장태건은 손에 들고 있던 담뱃갑의 뒷부분을 툭툭 쳤다. 재하는 그걸 보다 말했다.
“태우고 들어오셔도 됩니다.”
“이거 이재하 씨 건데.”
그 말에 두 눈을 크게 떴다. 사 놓고 객실 어딘가에 처박아 두었던 담뱃갑인 것 같았다. 학생에게 이런저런 훈수를 두다가 정작 자신은 그 말을 하나도 지키지 않는 선생이 된 기분이 들었다.
정작 단 한 번도 장태건에게 담배를 끊으라고 잔소리 해본 적도 없는데 말이다.
“…끊었는데 생각이 나서 사 봤습니다.”
재하는 자신이 왜 그런 변명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와의 식사 후, 이재하는 필사적으로 서울을 떠났다.
사실은 서울이 아니라 장태건에게서 도망쳤다. 그와 더 마주하면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던 걸로 해 달라며 빌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는데. 자신의 종착지는 저 사람이 원하는 복수의 성공이어야 하는데. 재하는 혼란스러웠다.
비 온 뒤 죽순처럼 자라난 욕심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제게 그런 욕망이 있는지도 몰랐던 알파는, 태건을 향한 작은 충동도 견디기가 버거웠다.
그의 표정이 가라앉자, 태건이 심드렁하게 툭 내뱉듯 대꾸했다.
“누가 뭐래요. 밥이나 먹자니까.”
그는 곧이어 저 먼저 밥집 안으로 들어갔다. 키가 큰 탓에 식당 출입문에서 고개를 살짝 숙이고 들어가는 뒷모습이 유난히 선명했다. 멍하게 그걸 보고 있다가 저도 참 중증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장태건의 등만 보면 넋을 잃는 것 좀 그만해야 할 텐데. 그런 생각을 하며, 재하 역시 그를 따라갔다.
그는 벌써 자리에 앉아 기다란 팔을 옆자리 의자에 늘어뜨리듯 걸치고 있었다. 고개를 살짝 젖힌 채로 메뉴판을 보고 있었는데, 걸음을 느리게 하여 그 모습을 오래도록 보고 싶었다.
그러나 입구부터 그가 앉은 자리까지, 꽤 다리가 긴 이재하에게는 몇 걸음 되지 않았다. 무척이나 아쉬웠지만, 자리에 앉을 때는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은 것처럼 표정을 굳히고 메뉴판을 보던 척했다.
태건은 잔에 물을 따랐다. 기다란 검지로 잔의 밑부분을 툭 쳤는데, 무게가 있는 것이 넘어지지도 않고 맞은편에 앉은 재하의 근처까지 미끄러졌다. 어떻게 한 건지 신기할 정도였다.
그의 시선이 재하의 자연스레 내려온 앞머리 위로 슬쩍 스쳤다. 그가 제 몫의 플라스틱 컵에도 물을 따르며 말했다.
“그런 옷 입은 건 또 처음 보네. 콜롬비아, 유학 갔던 곳입니까?”
“아, 네…. 그건 어떻게-.”
뜻밖의 말에 재하가 놀라 되물으려는 순간이었다. 장태건이 비뚤게 놓여 있던 젓가락을 검지로 톡 쳐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다른 말을 했다.
“여기 순두부 정식 맛있습니다.”
“…와 본 적이, 있으십니까?”
너무도 의외라, 재하는 태건이 자신의 유학 시절을 언급했다는 것도 잊고 멈칫할 정도였다. 재하의 물음에 태건은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같이 일하던 잡부들이랑 와 본 곳입니다. 산에 뭘 묻고 내려오는 길이었는데 배가 고프더라고.”
남의 얘기를 하는 것처럼 대수롭지 않은 말투였다. 산에 뭘 묻었을까. 몇 가지를 추려 보다 금세 무언가를 떠올리곤 더 묻지 않았다.
태건은 가게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기둥에 붙여진, 순두부 정식이라 쓰인 푯말을 가리키며 손가락 두 개를 펴 보였다. 남자 사장은 대답도 하지 않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주문하는 이나 받는 이나 딱히 말이 필요하지 않은 듯 보였다.
재하는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어쩐지 장태건이 생각보다 이곳에 자주 왔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평범한 밥집이랑은 어울리지 않는 남자가 자연스레 음식을 주문하는 것이 신기하기도 했다. 재하는 그러는 본인이야말로 백반집에 앉아 있기에는 눈에 띄는 사람이란 걸 몰랐다.
거기서 이야기를 멈추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장태건은 의외로 말을 이어 갔다.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앞이 안 보일 정도였는데 일거리를 처리하다 다치는 바람에 피를 많이 흘렸습니다.”
재하는 그의 말에 숨을 멈췄다. 다쳤다니. 하는 말로 들어 보면 그가 아직 20대 초반일 때의 이야기 같았는데 그때도 그런 험한 일을 했다는 게 안타까웠다.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지는 걸 참느라 곤혹스러웠다.
“장대비가 쏟아지는데 나중엔 비가 내리는 게 차가운 게 아니라 무겁더라고. 시야 확보도 안 돼서 몇 번이나 굴러떨어질 뻔했는데 그대로 쓰러지면 그 새끼들이 그냥 가 버리지 않을까 했습니다.”
“…….”
“그럼 산에 묻힌 그것보다 내 팔자가 더 별로잖아. 그 새끼는 묻혀 있는데 나는 어디 묻히지도 못하고 썩을 거 아냐.”
음식이 나왔다. 하얀 순두부에서는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태건은 말을 멈추고 수저를 들었다. 마주 앉은 재하도 꽉 막힌 것 같은 식도를 무시하며 수저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태건은 금세 밥공기를 비워 냈다. 배가 고픈 건 아닌 것 같고 몇 번 같이 식사 해 본 결과, 원체 먹성이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조용히 음식을 해치우고는 했다. 식사 예절 같은 건 이재하 역시 질리도록 배웠지만, 장태건 역시 그 못지않게 깔끔하게 식사하는 것 같았다.
지금도 밥 한 공기를 비울 때까지 소리 하나 나지 않았다. 재하는 태건의 눈치를 슬쩍 보다가 밥 한 공기를 더 시켰다. 장갑도 끼지 않은 손으로 뜨거운 밥공기를 꺼내 온 사장이 식탁에 내려놓고는 ‘감사합니다.’ 인사하는 재하의 말에는 대꾸도 없이 안쪽으로 사라졌다.
그 공기가 제 몫인 걸 어떻게 안 것인지 장태건이 그릇을 가져가 뚜껑을 열었다. 재하는 그가 뭐라 요구하기도 전에 밥을 챙긴 것이 어쩐지 민망해 젓가락으로 괜히 감자볶음을 집었다가 겨우 한 조각을 입으로 가졌다.
장태건은 공기의 뚜껑을 옆에다 놓으며 말했다.
“죽는 건 문제가 아닌데 모양새가 안 나는 것 같아서 어떻게든 내려왔더니, 잡부 중 하나가 밥 먹고 가자고 하더군요. 그게 여깁니다.”
“…….”
거기까지 말하고는 다시금 식사를 이어 나갔다. 그의 어린 날들이 대신 서러워 재하는 조금 먹먹해졌다. 유신 하나 무너트린 걸로 그에게 보상이 될까 싶어졌다. 뭐라도 더 해 줬어야 했는데. 복수를 해 주든 그에게 보상을 해주든, 그게 무엇이든, 뭐든지 해 줬어야 했는데.
재하가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그는 예의 그 심드렁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표정이 지금 딱 나 동정하는 것 같은데.”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거 아니면 안 돼. 나 비 맞은 개새끼 맞아요. 이재하 씨가 친절하게 보살펴 줘야 하는.”
장태건은 표정 없이 말했다. 지난 몇 년간 얼굴을 잘 보지 못했는데도 그렇게 말하는 그의 얼굴은 또렷이 재하에게 각인되어 있었다. 보지 않을 때는 흐릿하더니, 마주하자 무섭도록 선명하다.
“그럼 장창식 씨 죽인 게 나라도 내 편 들어 줄 거죠.”
잠시 움찔한 재하는 자연스레 젓가락으로 순두부를 갈랐다. 원체 부드러운 것이라 철로 된 젓가락 아래서 저항하지 못하고 그대로 허물어졌다. 재하는 뭉그러진 순두부를 내려다보다가 차분한 어조로 입술을 열었다.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곧이어 젓가락을 내려놓고 물컵을 쥐었다. 재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없어도 상관없고.”
시선을 피한 상태라 그의 표정이 어떤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재하는 어렴풋이 그가 웃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식사는 그렇게 끝났다. 태건은 식당을 빠져나와 차에 타기 전, 조수석 문을 일부러 열어 주었다.
“다음에도 가출할 거면 양평 정도로 해. 너무 멀다, 여기.”
“…….”
대꾸 없이 올라탄 재하는 보조석 문을 닫으려 손을 뻗었다. 태건이 문을 잡고는 허리를 숙여 보조석에 앉은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그가 곧이어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재하는 놀란 눈을 크게 떴다. 그동안 닿지 않았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는 듯, 입맞춤은 갑작스러웠다. 혀가 들어온 것도 아니고 가벼운 장난처럼 쪽,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지만 말이다.
“옷은 꼭 애새끼들처럼 입고.”
“…….”
이 나이 먹고 후드 티를 입은 게 그제야 민망해졌다. 급하게 나오느라 그랬다고 말을 해야 하나 망설이던 찰나에 다시 한번 쪽, 하고 입술이 닿았다.
“꼭 좀 다시 입어 줬으면 좋겠단 소립니다. 대학생 따먹는 기분 나나 궁금해.”
거기까지 말한 장태건은 보조석 문을 닫아 주었다.
그러고는 그대로 보닛을 돌아와 운전석에 타더니,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벨트를 매며 말했다.
“밥값 내가 낸 거 알지.”
계산하려고 했는데 식사를 마치자마자 일어나 어느새 제가 먼저 계산한 주제에, 장태건은 재하에게 생색을 냈다. 재하로서는 억울한 일이었다.
그러나 장태건은 재하의 심정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지 핸들을 쥔 채 검지를 펴 툭툭 두들겼다.
“이재하 씨, 나한테 빚진 겁니다. 집 나간 남편 데리러 와, 밥 사 먹여, 태워다 주기까지 해. 손해 많이 봤네.”
“그건….”
재하가 뭐라 항변하기도 전에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리고 기어를 변속한 태건이 창틀에 팔꿈치를 댄 채 차를 출발시켰다. 재하의 변명 따위는 듣지 않겠다는 듯이. 뭐라 말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장태건은 한동안 그 말도 안 되는 빚지우기를 계속했다. 이미 죽은 장창식의 유일한 장손이 자리를 비워 장례식이 미뤄지고 있는 것 같은데, 나오는 휴게소마다 꼬박꼬박 들러 커피를 사 달라 해 놓고서 또 계산은 직접 했다.
이재하가 서울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의 앞으로 달린 빚만 해도 10만 원어치가 넘었다. 아침을 든든히 먹은 것 같았는데, 안 어울리는 간식까지 사 먹는 모양새가 신기하기도 했다.
덕분에 재하는 생전 처음으로 버터구이 오징어를 먹어 보았다. 운전대를 잡은 장태건이 뻔뻔하게 입을 벌리면 그 안으로 넣어 줘야 했다.
“내가 손이 어디 있어. 당신이 해 줘야지.”
당연하게 요구하는 태도가 지난 몇 년간 다시는 안 볼 것처럼 러트기에만 찾아오던 사람이 맞나 싶어 의아했다.
그러나 그가 제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입에 넣어 달라 조르는 것이 좋아 더 따지지 않았다.
이재하는 모든 것을 유보 중이었다. 객실에 저를 가두고 잔뜩 시킨 룸서비스를 입에 넣던 며칠 전과 나아진 게 없는 상태였다.
그가 이혼을 거절한 걸 저 좋을 대로 해석하는 것도 멈춰 두고, 그렇다고 그를 아예 떠날 결심을 하는 것도 미뤄 두었다.
최대한으로 게으름을 피워 결정을 유보하는 동안, 장태건의 옆자리에 앉아 있는 순간이 소중해 견딜 수 없었다.
장창식의 장례식에 가는 중이라는 것도 잊을 정도였다. 구리 IC라고 적힌 표지판이 보였을 때쯤, 이재하는 제가 얼마나 멍청한 생각을 하던 중이었는지 깨달았다.
도대체 그의 생애 단 한 번이라도 미룰 수 있던 것이 있었던가. 재하는 신물이 날 것 같았다.
남들도 다 이렇게 사랑이 어려울까. 아니면 제 것만 특별할까. 그 특별함까지 사랑스러운 마음이 드는 게 어이없었다.
강동 대교를 건널 때, 한강에 뜬 햇빛이 보였다. 황금처럼 빛나는 그것은 오래도록 바라보기가 힘들었다. 강에 이는 윤슬조차 금빛으로 반짝였다. 눈이 부셔 견딜 수가 없었다.
이재하는 자는 척 두 눈을 감았다. 평창동까지 가는 길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 * *
재하는 고인의 영정을 눈앞에 두고도 지금까지의 결혼 생활을 떠올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떠난 건 고인인데 인생을 반추하고 있는 건 재하 자신이었다.
사람에게는 재능의 차이가 존재하듯, 장창식이 단 한 번도 반성 없이 생을 마감한 것과 다르게 이재하는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중이었다. 사실 어느 정도 필요 없는 되새김이기도 했다.
그래야 했던 것들, 그러면 안 됐던 것들. 그 끝없는 반추의 틈바구니에서 이재하는 무언가를 찾으려 노력했다.
당위성을 찾고 싶었다. 자신이 해온 일들을 후회하지 않게끔 말이다. 그러나 최초의 선택이 있었을 때, 이재하는 그 후회까지 제가 끌어안아야 할 부분이라고 미리 각오해 둔 상태였다.
이재하는 선택해야 했다. 그로 인해 파생된 일들이 너무 많았지만 감내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하고 받아들였다.
세상에는 어쩔 수 없는 일들이 너무 많으니까. 그러나 오늘 이렇게 장창식이 수의에 싸여 국화꽃 뒤에 놓일 줄 알았다면 그날의 선택을 달리했을까?
아니. 이재하는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보다 확실한 방법이 필요했다. 확실하게 장태건을 보호할 방법이.
태건이 그것을 원하든 원하지 않든 중요하지 않을 정도로 명확한 해결법이 말이다. 그러다 문득 회의감이 밀려들곤 했다.
장태건의 의중을 충분히 안다고 생각해 짠 계획들이, 사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저 혼자 저지른 일일까 봐. 후회까지 감내하겠노라 생각했던 자기희생들이 사실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짓거리들일까 봐.
그것은 늘 명확하게만 살아온 이재하의 일생에서 처음 겪는 딜레마였다.
“…….”
그런 생각에 빠진터라 멀거니 장창식의 영정 사진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사진 속 장창식은 갑작스러운 죽음을 대비하지 못한 사람들이 그러하듯 생전보다 젊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영정으로 쓸 만한 사진이 없었기 때문이다.
꽤 나이가 들었는데도 장례식에 쓸 사진 하나 찍어 놓지 않은 걸 보면 영원히 살 수 있을 거라 생각한 듯했다.
흙으로 돌아가는 날까지 욕심이 가득한 인물이었다. 그 방증으로 장례식장에는 장창식의 친족이라고 부를 만한 이들은 아무도 조문 오지 않았다. 혈혈단신으로 상경했다고 하지만 친척 한 명 오지 않는 것이 이질적이었다. 일과 사업으로 얽힌 사람들을 제외하고 고인의 생전을 기억하는 이가 단 한 명도 없는 것이다.
“이 짓거리를 이틀을 더 한다고?”
장태건이 작게 중얼거렸다. 작히나 따분하다는 얼굴이었다. 재하는 제 옆자리에 서서 작게 하품하는 태건의 상주 완장을 슬쩍 보고는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이재하의 배우자는 고아가 된 것치고 너무도 멀쩡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혼 전 부친상을 당하고 이제는 조부상을 당한 데다가, 장창식 자체가 친척들과는 연이 없었던 터라 장태건은 친족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 없이 홀로 빈소를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딱히 거기에 대한 감흥이 묻어 있는 태도와 표정은 아닌지라 재하는 그에게 살짝 몸을 기울인 채로 입을 열었다.
“바깥일 좀 보고 오겠습니다.”
“무슨 일.”
태건은 하품하다가 눈물이 맺혔는지 젖은 눈을 하고 재하를 돌아보았다. 그는 파리 날리는 여관방 카운터 주인보다 더 지겹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장례 절차는 이제 막 시작했고, 빈소 설치도 방금 마친 참이었다.
재하가 후줄근한 후드 티를 벗고 상복으로 갈아입은 뒤 본채에 설치된 빈소로 올 때까지 시간은 겨우 30분 정도 흘렀었다. 그사이에 저렇게 따분한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조문객들이 그의 그런 표정을 볼까 봐 주위를 흘끗 살핀 재하가 다시금 태건에게 말했다.
“…손님들 대접이 어떤지 보고 와야 합니다.”
“네, 다녀오셔요. 난 여기서 어떤 새끼가 영감 시체 훔쳐 가지 않나 감시하고 있을 테니까.”
“…….”
재하는 태건의 그 말에 잠시 아연해졌지만, 곧이어 그냥 자리를 떠났다. 그러고는 걸음을 옮겨 응접실로 향했다.
빈소는 장례식장이 아닌 장창식이 생전에 살던 평창동 본가에 차려졌다. 영정 사진은 찍어 두지 않은 주제에 장례식 장소만은 본가 저택으로 할 것을 유언장에 남겨 두었다. 머물던 평창동 집 주위를 상여가 한 번 순회하고 떠나야 저승 가는 길을 제대로 찾을 수 있다는 게 고인의 생각이었다.
그로인해 재하는 그동안 대외적으로 두문불출하던 몇 년의 세월을 종식하고 장례식 준비를 해야 했다.
“홍어회 무침이랑 편육은 떨어질 일 없게 하세요. 한명관에서 오늘 저녁 늦게까지 음식들 준비해 주기로 했으니까 한 동이쯤 남았다 싶을 때는 바로 연락하시면 됩니다.”
재하의 말에 주방에서 일하던 인력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장창식이 살던 평창동에서 오래 일하던 양평댁이 나와 재하에게 말을 걸었다. 본채 살림을 맡고 있어 별채에 살던 이재하는 몇 번 본 적도 없는데, 그를 향해 호감을 띤 얼굴이 인심 좋게 웃고 있었다.
“이사님, 술도 더 주문해야겠어요.”
“술은 종로에서 올 겁니다. 할아버님 생전에 그 댁 것만 드셨으니까 다른 제품은 상에 올리지 마세요.”
“암요, 이사님이 알아서 해 주셨겠지요.”
양평댁은 이재하를 몹시 신임하는 얼굴로 물러갔다. 재하로서는 벌써 몇 년 전에 그만둔 이사의 직함을 지금도 듣는 것이 웃길 뿐이었다.
그는 손님들이 응접실과 거실에 차려진 상에서 안주와 술을 축내고 있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걸음을 돌렸다.
장창식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던 고 비서가 보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수의는 안동산 삼베가 좋은지, 관은 오동나무가 좋은지 물어봐야 할 사람이 없었다.
그러나 이재하는 늘 그렇듯 이런 일들을 막힘 없이 해냈다. 그에게는 가까운 사람이 먼저 세상을 떠난 경험이 있었다.
아주 어릴 때였기 때문에 그저 슬픔만이 남아 있는 게 정상이겠지만, 이재하에게 장례란 그런 감정적인 것들보다는 제가 준비해야 할 예식 중 하나였다.
그 자신의 결혼식도 그러했으니 남의 장례식은 말할 것도 없었다.
곧이어 정재계 인사들이 속속들이 도착할 것이다. 지금이야 장한이 조직 시절 함께한 건달들이 조문객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해가 질 무렵에는 굵직한 인물들이 도착할 것이다.
정원으로 나간 재하는 흰 국화로 장식된 화환이 들어오는 꼴을 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지난 몇 년간이 꿈같이 아스라했다. 꿈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바로 사흘 전, 재하는 장태건에게 이혼을 요구했다. 그도 그걸 원할 거라 여겼다. 저는 끈 떨어진 뒤웅박 신세이니 말이다.
그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던 때였다.
“이 집에서 일하는 사람이 당신밖에 없어?”
언제 정원으로 나온 것인지 장태건이 짜증을 내며 재하의 어깨를 잡았다. 그가 나온 것도 모르고 상념에 잠겨 있던 재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조문객 맞이는 어쩌고 나오셨습니까.”
“저 인간들 뒈진 영감 보러 온 거 아니라 나 보러 온 겁니다. 그럼 기다려야지.”
태건은 심드렁하게 말하고는 재하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힘이 강한 건 아니었는데 딱히 저항할 수가 없어 그와 함께 정원을 가로질러야 했다.
추위에 석죽은 잔디를 밟고 있는 재하는 상복에 맞춘 검은색 구두 차림이었지만, 태건은 스포츠 브랜드 로고가 박힌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분홍색이었다. 그것도 사이즈가 안 맞아 발뒤꿈치가 삐죽 튀어나온 채였다.
…저런 디자인의 슬리퍼가 장창식의 저택에 있었던가.
재하가 멍하게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둘은 어느새 저택 뒤로 돌아 별관으로 향하는 중이었다.
“장 본, 지금 어디를….”
“본부장 타령 그만하랬어요. 아니면 뭐야. 직책 부르면서 씹 뜨는 거 좋아해? 페티시 있어요?”
“없습니다. 그런 건, 전혀….”
냉큼 대답했지만 장태건의 옆모습은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이재하는 끌려가면서도 그의 말을 부정하려 애를 써야 했다.
“정말 없습니다.”
“왜 이렇게 강조해. 수상하게.”
“…수상한 게 아니라….”
반박하던 재하는 그와 이런 대화를 하고 있는 자신이 이상했다.
그들이 당도한 곳은 별관이었다. 장태건은 아주 익숙한 걸음으로 재하를 끌고 왔다. 지난 몇 년간 재하가 지내고 그가 아주 가끔 찾아오던 그곳이었다.
태건이 재하를 돌아보며 웃었다.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핥으며. 재하는 그의 눈동자에서 알 수 없는 열기를 읽었다.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그의 태도가 별안간 달라진 것이 이상했다. 왜 그러냐고 묻고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가 하는 말을 좀 더 듣고 싶은 마음도 있었다. 너무 오랜만에 그와 간신히 대화라고 부를 수 있는 걸 나누는 중이지 않은가.
이재하의 속이 어떻게 복잡한지 관심 없다는 양, 장태건이 씩 웃으며 말했다.
“페티시 좀 있으면 어때. 나도 있습니다. 그런 거.”
“어, 어떤….”
그 와중에 그게 궁금했다. 지난 시간 동안 그를 만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한번 물꼬를 튼 대화를 굳이 틀어막고 싶지는 않았다.
주제가 조금 이상했지만 이재하는 장태건에게서 나오는 것이라면 뭐든 좋았다. 그의 눈이 살짝 휘어지는 것 같았다. 태건이 재하에게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가 속삭이는 소리를 이해하는 것보다 소름이 이는 게 먼저였다.
그리고 그의 말뜻을 이해했을 때, 재하의 두 눈은 더없이 커졌다.
“방금 그게 무슨….”
“들었잖아. 또 말해 줘요?”
태건이 재하의 귓불을 검지로 툭 건드리며 물었다. 저절로 어깨를 움츠렸던 재하는 이내 화르륵 올라오는 열기를 막을 수 없었다.
재하의 머릿속에서 태건이 했던 말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상주가 상갓집에서 떡 치는 페티시.’
뭐…? 무슨 페티시…? 재하는 두 눈을 깜빡이며 제가 들은 말을 다시금 곱씹었다. 그 한심한 얼굴을 내려다보며 피식 웃은 장태건이 별관 문을 열고는 재하를 밀어 넣었다.
사람이 없어 어두운 별관의 현관 센서 등이 깜빡, 하고 켜졌다.
저는 그가 떠미는 바람에 현관으로 들어와 조도가 낮은 전등 아래 섰지만, 태건은 아직 바깥 빛을 등지고 있어 역광이 드리워 표정을 가늠하기가 힘들었다.
재하는 문득 그의 표정이 어떤지 궁금했다. 웃고 있을까 아니면.
“아니면 나 대신 당신이 곡을 하셔요. 아무 데나 쑤셔도 잘 울었잖아.”
“…말도 안 됩니다. 자리를 지켜야 해요.”
“곡은 소질 있는 사람이 하는 걸로 합시다. 도와줄 테니까 이번에도 잘 울어 보기예요.”
“잠깐….”
재하는 당황스러웠다. 이럴 때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나 장태건은 그가 거부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당신, 영감이랑 친했잖아. 가는 길에 손자 배우자가 곡이라도 들려주면 노친네도 극락왕생하지 않겠어?”
어쩐지 어조에 유감이 가득 실려 있었다. 반사적으로 나오려던 변명이 쏙 들어갔다. 스륵, 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장태건이 실크 소재의 검은색 비단 넥타이를 푸는 소리였다.
재하는 숨을 삼켰다. 노도와 같이 해당화 향이 밀려들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