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1. 가면
8.
9.
10.
Chapter 2. 개
1.
2.
3.
Chapter 1. 가면
8.
- 몇 년 뒤
‘유신 화재가 해성 생명에 매각되었습니다. 유신 화재 보험은 높은 예정 이율을 보장하는 저축성 보험을 상품화하며 대규모의 이차 역마진을 막지 못했고, 주식, 부동산 관련 대출, 해외 유가 증권 등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며 고위험 투자로 인한 손실을 회복하지 못했습니다. 전문가들은 유신 화재 몰락의 원인으로 자산 운용 능력의 부재를 손꼽았습니다. 이상, 김현진 기자입니다.’
‘유신 전자, 밀레니얼 뉴딜 사업 유치 실패.’
‘2 거래일 만에 또…. 유신 전자 신저가 경신.’
‘왕가의 몰락, 유신에서 우수수 빠져나가는 개미 투자자들.’
비슷한 뉴스들이 떠돌았다.
그러나 그런 뉴스들이 화제였던 것도 작년쯤 일로,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심각해졌다.
만인을 수용할 수 있는 군함이라는 평이 자자했던 대기업 유신은 옛말이 되었다. 승선해 있던 사원들이 줄줄이 퇴직금을 받고 먼저 뛰어내리고 나서야 경영진들은 뒤늦게 위기를 실감하고 허둥거렸다.
실로 멍청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네가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어-!’
‘…이재하. 꼭 이래야 했냐?’
김란희의 비명과 이재호의 원망이 바람 소리처럼 스쳐 지나갔다. 본가로 불려 가 물벼락을 맞기도 했고 이복동생으로부터 싸늘한 눈초리를 받기도 했었다.
이재하는 그때마다 김란희의 작은 어깨에 얹어진 이재호의 손을 보다가 돌아 나왔었다.
이익형으로부터 따귀를 맞은 적도 있었다. 이익형이 직접적으로 이재하에게 손찌검을 한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그 이후, 이익형은 이재하를 수시로 불렀다. 서재에 엎드려 있으면, 분을 이기지 못한 부친이 들어와 10번 아이언으로 재하의 엉덩이를 내리쳤다.
반항하는 것이 귀찮아 그저 감내했다. 부르면 두말하지 않고 달려가 매를 맞고 돌아왔다. 여러 말 하는 게 귀찮아 몸으로 때우는 것에 가까웠다.
노후 대비로 조 단위의 재산을 은닉하려던 부친의 뒤통수를 거나하게 친 대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어쨌든 이익형이 화풀이할 곳을 찾지 못한다면, 같이 사는 이재호나 김란희, 어쩌면 장태건에게까지 손을 뻗칠지도 모른다는 계산이 있었다.
이익형은 복잡한 속내를 가진 것처럼 굴어도 꽤 단순하게 저열한 인간이라 당장의 분노를 풀 곳만 있으면 그만인 족속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재하에게 몇 번 매타작을 한 이후로는 술독에 빠져 살았다. 가끔 불려 가긴 했지만 전보다 빈도가 확실히 줄어들었다. 누구를 때리는 것도 성실해야 하는 것이다. 이익형은 여러모로 부족한 인간이었다.
그는 알코올 중독자처럼 취한 상태에서도 어떻게든 상황을 타개해 보려고 했던 것인지, 옛 처가에까지 도움을 요청했지만, 재하의 모친인 한희영이 그렇게 된 이후부터 연을 끊고 살다시피 했던 터라 쉽지 않은 일이었다.
이재하 본인이 요청한 도움도 아니었기 때문에 재하의 외가에서는 이익형의 부탁을 묵살했다. 김란희의 친정은 꽤 사는 집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비틀거리는 대기업을 도울 만큼 자산의 규모가 크지 않았다.
유신은 그렇게 천천히 무너졌다. 그러나 확실하게.
원체 몸집이 컸던지라, 아직도 유신이라는 배는 출항할 수 있을 정도는 된다. 그러나 배의 밑바닥에는 물이 새고, 갑판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금 해체하여 아직 썩지 않은 목재만 떼어다가 나룻배로 만든다면 모를까, 이대로는 그저 거대할 뿐인 폐선으로 전락할 것이다. 침몰하지 않으면 그것만으로도 다행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유신을 그렇게 만든 이재하가 이룬 것은 초라한 승리였다. 어디에 자랑할 곳도 없는.
별거 후 몇 년은 러트기가 꼬박꼬박 다섯 달 만에 찾아오고는 했다. 그러나 최근 2년간, 이재하의 러트기는 단 두 번뿐이었다. 그것도 하루는 열이 좀 끓더니 말아 버렸다.
페로몬이 나오는 것 같지도 않았다. 나중에서야 그게 러트기였음을 깨달았다.
병원에 가 볼까 생각했지만, 최근 무기력증이 심해진 터라, 일 외에는 신경 쓰이는 것이 없었다. 유신의 몰락을 위해 부렸던 인력들을 하나하나 해체하고 있는 터라 더 바쁘기도 했다.
줄어든 러트기는 오히려 편리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장태건이 이재하를 찾아오는 일이 드물어졌기 때문이다.
‘장한 건설, 협력사와 동반 성장 가능한 경영 실천’
‘장한 건설, 역세권 단지 <장한 큐브 시티 제너럴 파크> 계약 중’
‘장한 건설의 <스마트 건설> 행보 가속화’
나름의 전리품도 얻었다. 장한이 이제 막 제대로 된 기업의 반열에 오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본부장으로 취임한 장태건은 활약이 대단했다. 애초에 왜 그런 사람을 깡패 짓이나 하고 돌아다니게끔 놔둔 건지 이해 가지 않을 만큼.
또 소소한 수확이 이어졌다. 이익형이 높은 혈압을 견디지 못하고 유신 종합 병원으로 실려 간 것이다.
기사에는 나지 않았지만, 이재하의 정보통에 의하면 성북동 자가에서 21시 03분에 앰뷸런스가 빠져나갔다고 했다. 제게는 승보와 같은 부친의 비보를 들으며 재하는 바카랏 잔에 술을 따라 마셨다.
그날, 모르는 번호로 전화 한 통이 왔다.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던 상대방은 20초를 넘기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아마 이재호일 것이다. 재하는 다시금 전화를 거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들에게는 물증이 없다. 이재하가 유신을 무너트렸다는 물증이.
당연한 일이다. 재하는 지난 몇 년간 유신을 위협하는 걸 모두 장태건 산하 건설 사업 본부의 공으로 돌아갈 수 있게끔 애를 써 왔다.
유신 물산의 건설 부문이 유치했어야 할 강서구 주공 단지의 재건축 사업을 장한 쪽에서 수주할 수 있도록 하거나, 김해 국제 공항의 지반 개량 공사 수주를 빼돌려 장한의 몫으로 돌렸다.
건설 부문뿐만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재하가 유신 전자에 있을 무렵, 그의 결재를 받아 개발 중이던 기술이 현재 유신의 경영난으로 인해 무산되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재하는 무산되었던 기술을 기반으로 아파트 단지의 자동화 시스템에 도입할 수 있게끔 정보를 흘렸다. 이 부분에서 기술 자문을 구해야 했다. 동문의 소개로 같은 대학 공대 출신인 연구자를 초빙하여 비밀 유지 각서를 쓰게 한 뒤, 해당 기술을 공개하고 그를 기반으로 법적 하자가 없는 베이스를 추출하게끔 했다.
그렇게 기본적인 소스 형태로만 남은 기술을 장한 쪽에 흘려 넣었다. 장태건은 이재하의 의도를 정확히 따라와 주었다.
장한 건설 기술 개발팀이 단지 내의 자동화 시스템을 보다 확장함과 동시에 세밀화시키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그 결과, 장한 건설의 아파트 브랜드인 ‘연비채’가 국가 고객 만족도에서 1위를 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정보를 흘려 유신 물산의 주식을 장한이 소유할 수 있게끔 물밑 작업을 했다.
장태건은 이재하가 쳐둔 가이드라인을 차근히 밟고 있었다. 재하는 그것이 즐거웠다. 벌써 꽤 오래 목소리조차 듣지 못한 그와 저 사이의 유대라고 생각했다. 다소 일방적이지만 이재하는 그걸로도 만족하는 사랑을 다져 왔다.
바라는 것은 하나였다. 그가 자신의 손으로 유신을 무너트렸다고 생각하는 것. 그렇게 만들기 위해서 부렸던 인력들은 따로따로 단편적인 일들만 맡긴 터라 자신들이 뭘 하고 있는지 유추하지 못했다.
그들이 긁어모은 정보를 통합하는 건 오로지 이재하 혼자뿐이었다.
그렇게, 유신에서 훔친 것들을 장한에 뿌려 자양분으로 삼을 수 있도록 유도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유신의 내부를 흔들었다. 이재하의 이사 재직 시절, 그를 따르던 임원들을 만나고 로비하여 조직의 안쪽부터 뒤흔들어 놓은 것이다. 재하는 그들에게 주식을 매도하게끔 하였다.
또 오촌 고모들도 따로 만났다. 조부의 형제들 밑에서 태어난 그들은 우성 알파임에도 방계라는 이유만으로 이익형에게 유신의 수장 자리를 빼앗겼다.
그들은 늘 칼을 갈고 살았다. 준비된 살수에게 때가 왔음을 알리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그녀들은 곧 재하의 육촌 명의 로그가 물밑 작업을 해 둔 임원들의 주식을 사 모았다.
전부 유신의 알짜배기 계열사들이었다. 그게 벌써 작년 일이니, 올해쯤에는 경영에 참견할 정도로 힘을 키웠을 것이다.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지만, 이재하가 보기에 유신은 나락을 걷고 있었다. 거기서 일어나기는 힘들 것이다.
113개에 달하던 계열사 수는 현저하게 줄어들어 현재는 34개에 불과하다. 그나마도 오촌 고모들이 벌 떼처럼 들고 일어선 탓에 조각조각 흩어지고 있었다.
알파로 태어난 고모들은 저보다 나을 것 없는 이익형이 기업의 알짜배기 계열사를 승계받고 회장이 된 것에 분개했다.
조부가 인심 쓰듯 내려 주었던 자잘한 사업을 맡아 지금까지 키워 낸 참이니 오히려 이익형보다는 경영 수완이 좋을 것이다.
34개의 계열사도 많은 편이긴 했지만, 조부 시절 유신이 계열사 62개로도 탄탄한 제국을 설립했던 때와는 달랐다. 애초에 이익형의 무리한 사업 확장이 가장 큰 약점이기도 했다.
이재하는 긁어 줘야 할 부분을 긁었을 뿐이다. 망설이지 않고.
어느 날 찾아온 이재호는 재하를 붙들고 울먹거리다가 아무런 말 없이 가 버렸다. 이재하에게 왜 그랬냐고 묻지도 않았다.
심증은 있는데 물증은 없으니 의심하는 말을 하고 싶지 않은 듯했다. 이재하는 속으로 혀를 차며 물러 터졌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었다. 이재하는 자신의 손으로 집안을 말아먹은 것에 대한 후회도 감상도 없었다. 해야 할 일을 해치웠다는 아주 작은 후련함마저도.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내일은 어느덧 장태건과 이재하가 부부로서 시작한 지 만 3년째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예약 좀 하겠습니다.”
그러나 불행히도, 내일은 그들의 마지막 기념일이 될 것이다.
이재하는 직접 전화를 걸어 레스토랑을 예약했다. 그에게 결혼해 달라고 말했던 바로 그 자리였다.
재하의 번호가 뜨자, 지배인은 자연스럽게 전화를 연결했다. 그는 친절한 어투로 재하에게 시간과 명수, 알레르기의 유무 등을 물었다. 그는 망설이다가 대답했다.
“가리는 건 없고, …두 명이 갈 겁니다.”
지배인이 곧 웃으며, ‘네, 두 명이요.’ 하고 복기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상대에게 보일 리도 없는데 말이다.
사실, 그렇게 예약하면서도 기대가 없었다. 사이가 완전히 어그러진 지 꽤 된 때라, 당연하게 태건이 오지 않을 거라 여겼다. 예약 명수를 2인으로 말하면서도 머쓱한 기분이 들었던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원래도 없던 욕심이 거세당한 것처럼 아예 종적을 감추었다. 수술실에 들어갔다 나온 것처럼 마음 한편에서 도려내진 것이다.
그러니 그 자리에도 나와 줄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해도 말을 하지 않을 수는 없어서, 명순을 통해 약속 장소와 시간을 고지했다.
태건이 오지 않더라도 지난 일들을 추억하며 하룻밤 머물다 갈 용의도 있었다. 방을 잡지는 않았지만, VIP용으로 빼 둔 스위트룸이나 고급 객실이 있을 것이다.
어찌 되었건 이재하의 승리였다. 그걸 기념하고 싶었다. 거인의 발목을 자르는 데 성공했으니, 그 거인의 목을 베어 내는 것은 장태건의 몫이었다.
그가 다치지 않게끔 최대한 유신의 힘을 빼놓는 것이 지난 몇 년간 이재하의 목표였다. 그가 오지 않아도 좋았다. 저 혼자서 승리를 축하해도 모자라지 않을 듯했다.
저녁 식사를 홀로 마무리한 뒤 하룻밤 정도 그 위에서 지내다가 다음 날 체크아웃한 후 평창동을 나와 지낼 집을 알아볼 작정이었다.
당연한 일이지만, 명순으로부터 답장은 오지 않았다. 그러면 그렇지, 하고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애써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집을 나섰다.
꼭 이 계절만 되면 마음이 스산해진다. 비슷한 계절을 몇 번이나 겪어도 그러했다.
예약한 레스토랑에 도착해 발렛을 맡긴 재하는, 꽃을 사 갈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호텔방에 꽃다발을 들고 혼자 묵고 나오는 알파는 영 수상해 보일 것 같았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기자 몇이 따라붙고 있어서 조심하는 게 나을지도 몰랐다. 뭘 캐내려는지는 모르겠지만 저나 장태건에게 좋은 일은 아닐 것이다. 저는 그렇다 쳐도 태건에게는 이 시기가 매우 중요했기 때문에 잡음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다.
지난해 장한 건설의 재계 순위가 32위로 뛰어올랐다. 100위권 안에 들지도 못하던 때를 생각하면 태건이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걸 혼자라도 축하하고 싶어서 레스토랑 측에 샴페인을 준비하도록 요청했다. 결혼식에서 먹었던 품종이었다.
헉 소리가 나올 정도로 비싼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모양이 빠지는 것도 아니어서 혼자 마시기에 꽤 적절할 것 같았다.
엘리베이터 벽면에 비친 제 모습은 꽤 나쁘지 않았다. 살이 점점 빠지고 있어 전보다 인상이 조금 날카로워 보이면 어쩌나 했는데 묘하게 선이 가늘어진 느낌이 전부였다.
저야 맨날 보는 얼굴이니 잘 모르다가도 이렇게 밖에 나와 거울을 볼 때면 새삼스레 느끼는 부분이 많았다.
근육량이 빠진 것은 아닌데 허리둘레가 준 것이나, 유두의 색과 성기의 색이 눈에 띌 정도로 변화한 걸 봐서는 뭔가 호르몬이나 페로몬 영향 같은데 확실치가 않았다.
그것도 병원에서 검사해 봐야 할 텐데, 어디서 소문을 들은 건지 기자들이 따라붙어 내원이 쉽지 않을뿐더러 무엇보다 정말 귀찮았다.
이러면 어떻고 저러면 어때 싶은 마음이었다. 당장 죽을병에 걸렸다면, 그렇다면 죽으면 그만인 일이었다. 지난 몇 년간, 이재하는 지금처럼 수면 아래에 가라앉은 채로 좋거나 싫은 게 흐릿해진 기분이었다.
재하는 어느 날부터 다소 둔한 감정 상태를 지속하고 있었다. 웃어도 웃는 것 같지 않았고, 슬퍼도 슬픈 것 같지 않았다.
멍하니 호텔 엘리베이터 벽면 속 제 모습을 보고 있는데, 문이 열리더니 오메가 하나가 멈칫하다 올라탔다. 재하가 자리를 비켜 주자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 죄송합니다.”
“괜찮습니다.”
오메가에게서는 달큼한 냄새가 났다. 얌전히 엘리베이터 벽면에 기대어 있던 재하는 그 향을 맡고 전에 없던 불쾌감이 들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었는데 미간이 살짝 팰 정도로 거슬리기는 했다.
이를테면 이재호가 뽀뽀하자며 뺨에 입술을 붙이려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뭐라 말로 할 수 없는 혐오감이었다. 어릴 적, 재하의 외모를 보고 오메가로 오인한 알파로부터 추파를 받았을 때도 엇비슷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었다.
동족에게서 느낄 수 있는 꺼림칙함과 비슷한 기분이었다. 생전 처음 보는 오메가와 저를 왜 동족이라는 동일 선상에 뒀는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모르는 이에게 대놓고 혐오감을 내색할 수 없는 일이라 살포시 찌푸려졌던 미간 사이를 엄지로 꾹 누르고는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문이 열리고 레스토랑 층에서 내린 재하는 그대로 걸어 나갔다. 뒤에서 저를 부르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는.
“…저기요!”
“…저 말입니까?”
재하는 지그시 고개를 돌려 턱 밑에 검지를 가져다 댔다. 저를 불렀냐는 제스처였다.
그 부드러운 동작에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꾹 누르고 있던 오메가가 입술을 달싹이더니 말했다.
“저기, 혹시 교제하시는-”
그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였다.
웬 덩치 큰 남자가 그들 사이를 가로막더니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그대로 손을 뻗어 닫힘 버튼을 누르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열려 있던 문이 그대로 닫혔다. 오메가가 멍한 얼굴로 방금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덩치 큰 남자를 올려다보는 게 닫히는 문 사이로 보였다.
“…뭐야.”
재하는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나타나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간 남자의 뒷모습이 무척이나 익숙했기 때문이다.
고개를 갸웃거린 재하가 다시금 복도의 부드러운 카펫을 밟으며 걸었다.
레스토랑 입구에는 직원이 나와 있었다. 레스토랑의 지배인이었다. 재하가 이름을 말하기 전에 얼굴을 알아본 지배인이 조용히 인사한 뒤 자리를 안내했다.
예약해 둔 프라이빗 룸은 몇 년 전 바로 그 자리였다. 레스토랑의 서비스가 만족스러웠다. 살짝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어도 이 자리에 다시 한번 앉고 싶었기 때문이다. 태건도 오지 않을 건데 뭐 어떠랴 싶기도 했다.
지배인은 늘 그래 왔다는 듯 자연스러운 태도로 재하의 트렌치코트를 받아 갔다. 재하는 짧게 감사의 인사를 했다. 그의 말수가 적다는 걸 알고 있는 지배인은 더 말 붙이지 않은 채 의자를 빼 주고는 방을 떠났다.
조금씩 두근거리는 마음이 들었다. 재하는 그 두근거림을 유지해 기분을 돋우려 애를 썼다. 메뉴를 미리 골라 두기는 했다. 그날 그와 먹었던 바로 그 정찬 코스였다.
당시 무척이나 긴장했기 때문에 맛이 기억나지 않았다. 태평한 심정으로, 재하는 그날 먹었던 게 어떤 맛인지 오늘 겪어 보기로 마음먹었다.
아뮤즈 부쉬로 무엇이 나왔더라, 하고 떠올려 보기도 했다. 정찬 코스만 골랐을 뿐이지 어떤 것들이 나오는지는 지배인으로부터 설명을 듣지 못한 터라 저 혼자 기억하려 애를 써 보기도 했다.
그러나 세상은 언제나 우리의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다.
똑똑-.
지배인이 다시금 문을 두들긴 순간, 재하는 갑작스러운 긴장감이 들었다. 그의 고개가 천천히 노크 소리가 들린 문 쪽을 향했다. 그 시간이 영겁처럼 느리기만 했다.
그저 식전 빵을 내오려는 접객원의 노크일 수도 있는데 자꾸 가슴속에서 무언가 부풀어 올라 터지는 기분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의 이재하는 알지 못했다. 그 문밖에 누가 있는지. 별다른 기대조차 없었다. 그의 사랑에는 그런 기대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느낀 것이다. 그 문 뒤에 있는 것이 누구인지. 접시를 들고 돌아온 종업원이 아니라는 걸.
그리하여 운명은 의미를 갖는 것일 수도 있다.
저벅, 카펫 위에 부드럽게 울려 퍼지는 발소리와 함께 해당화 향이 노도처럼 밀려들었다. 가파른 절벽에 몰아치는 파도가 떨어진 해당화 꽃잎을 건네주듯이.
“좀 늦었어요. 웬 파리 하나 잡고 오느라.”
이재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뒤따라 들어온 지배인에게 유려한 태도로 코트를 건네주는 이는 분명.
“근데 초대해 놓고 표정이 왜 또 그래. 나 그냥 갈까?”
장태건이었다.
* * *
그가 들어온 순간, 숨이 잠깐 멎었다.
온 세포에 차 있던 의식들이 쑥 빠져나갔다가 돌아오는 것이 느껴졌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제정신을 차려야겠다는 생각이 돌아왔다.
이재하가 생각을 정리하는 동안, 장태건은 아무렇지 않은 태도로 정장 재킷의 맨 아래 단추를 풀고는 재하의 맞은편에 앉았다.
따라 들어온 지배인이 즐거운 시간 보내라는 말과 함께 태건의 코트를 받아 나가는 그 짧은 몇 초 사이에 반드시 정신을 차려야 했다.
머릿속에서 생각이 폭발할 것만 같았다. 그는 장태건이 이곳에 온 이유에 대해서도 생각해 내야 했다.
지난 2년간, 이재하의 러트는 단 두 번뿐이었다. 그와는 딱 두 번 만났다는 얘기다. 그중 한 번은 러트 같지도 않았기 때문에 두 사람이 나눈 정사는 짧기만 했다.
그동안 장태건은 이재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정확히 러트의 열기만 가라앉히는 행위들이었다.
그것은 일방적으로, 이재하의 러트기에만 있던 일이다. 재하는 장태건의 러트기가 어떻게 흘러갔는지 알지 못한다.
장태건은 단 한 번도 제 입으로 말한 적 없지만, 재하는 그가 극우성 알파임을 알고 있다. 극우성의 러트기는 더욱 지독하다고 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하는 장태건이 어떤 식으로 러트기를 해소했는지에 대해 아는 것이 없었다.
계약을 들먹여 이재하의 러트를 단속했던 이가 자신의 러트기에는 재하를 찾아오지 않았었다. 혹시나 하였던 마음은 거기서 매번 단서를 잃고 헤매고는 했다.
그로 인해 이재하는 지금 당장 이 자리에서 그가 자신의 러트기를 주시했던 이유와 이 테이블 앞에 앉은 이유에 대해서 떠올려야 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자연스레 멈췄다.
오늘은 어쩌면, 그가 자신에게 이혼을 말할 수도 있겠다고.
이 사태에 대해 예상하지 못했던 재하의 얼굴색이 삽시에 창백해졌다. 부드러운 카펫이 깔린 레스토랑의 바닥이 저를 향해 위로 올라와 덮치는 기분이었다. 재하는 욕지기를 눌러 삼켰다.
그때였다.
“상태가 왜 이래.”
옅은 해당화와 파도 냄새와 함께 장태건이 팔을 뻗어 왔다.
그가 재하의 턱 아래 손을 넣어 살짝 들어 올렸다. 테이블을 짚은 채 자신에게로 상체를 숙이고 있는 그에게서, 재하는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었다.
늘 쓰고 다니던 가면도 쓸 수 없을진대, 상대의 마음을 읽는 건 더더욱 무리였다. 재하는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이어 표정을 바로 한 뒤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닙니다.”
“아픈데 나온 겁니까?”
그 목소리에 어쩐지 걱정이 스며 있는 것 같아 재하는 저도 모르게 터져 나오려는 비웃음을 눌러 참아야 했다. 저 자신을 향한 조소였다.
다행히 재하가 무언가 변명을 지어내서라도 그에게 답해야 하는 시간이 찾아오기 전, 노크 소리와 함께 종업원이 들어왔다.
“식전주로는 스페인산 셰리입니다. 진한 호두 향이 특징입니다.”
종업원은 고저 없는 목소리와 부드러운 말투로 설명한 뒤 두 사람의 잔에 셰리를 따른 뒤 물러났다.
테이블에는 프로슈트 햄과 살라미 등 간단히 입맛을 돋울 수 있는 것들이 놓여 있었다. 재하는 곁들여져 나온 카르파치오를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술을 들이켰다.
장태건은 그런 재하를 바라보며 잔에 입술을 붙였다. 여전히 집요한 시선이었다. 그러나 재하는 시선을 피했다. 누군가 피식 웃는 소리가 났다. 장태건일 것이다.
…왜 웃는 걸까. 말초 신경이 타들어 가는 느낌이었다. 손가락 끝이 저릿한 느낌에 테이블 밑으로 손을 내려 주먹을 쥐었다 펴야 했다.
시간이 꽤 흐르고 서버가 다음 요리를 내올 때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룸 안은 살짝 덥기까지 했다. 셰리의 도수가 꽤 셌던 걸까. 술이 약하지 않은데도 열기가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종업원은 유려한 태도로 빈 잔을 채우고 아뮤즈 부쉬에 어울리는 와인을 위한 새 잔을 놓았다.
“울릉도 소라와 정종으로 만든 에멀전을 곁들여 맛을 살린 연어알입니다.”
룸에는 또 한 번, 커트러리가 딸깍이는 소리만 가득해졌다. 갓 구운 빵의 향이 나는 화이트와인을 잔에 따라 준 종업원이 밖으로 나가자 재하는 체할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술이라도 마시자 싶어 와인 잔에 손을 뻗으니 태건이 재하의 잔을 슬쩍 제 쪽으로 끌고 왔다.
“술 마시고 체하면 어떻게 되는지 모르지.”
어린애 다루는 듯한 말투였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쉽게 발끈하지 않는 성격인데 저도 모르게 울컥했던 것이다. 그러나 재하는 곧이어 아무렇지 않게 와인 잔을 들어, 잔의 주둥이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보란 듯이 행동하고도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뒤를 따랐다. 저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입술을 향해 잔을 기울이다가 멈칫했다. 그 매끄럽지 않은 움직임을 들키지 않길 바랐다.
입술 끝을 도는 와인에서는 구운 빵의 고소한 향이 났다. 아직 아뮤즈 부쉬가 끝나지 않아 식욕을 끌어올릴 용도인 듯했다.
좀 더 도수가 강한 술이 필요한 것 같기도 했다. 다음 차례에 종업원이 들어오면 사과주를 증류한 브랜디를 가져다 달라고 말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요. 오래간만에 말 안 듣는 거 보니까 좋네.”
그런 재하를 보며 태건이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곁 시야에 살짝 올라간 그의 입꼬리가 보였다.
재하는 그곳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으려 꽤 노력해야만 했다. 동요하는 게 보이지 않기를 바랐다. 실패한 듯했지만 말이다.
장태건은 이 자리에 대체 무슨 생각으로 온 것일까. 혹시 정말 이혼을 생각한다면… 그렇다면 이재하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좀 더 그의 곁에서 해 줄 일이 있었다. 견고한 성이던 유신의 성벽이 허물어졌다고 해도, 그 성이 완전히 모래바람에 휩쓸려 사라진 것은 아니지 않은가. 아직 할 일이 있을 것이다. 제가 장태건의 옆에서 할 일이….
거기까지 생각한 재하는 자신이 필사적으로 태건의 옆에 머물 명분을 찾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두 사람의 별거는 그들의 결혼 생활만큼이나 오래되어 왔다. 결혼식 후 석 달 정도를 제외하고 이재하는 장태건을 쭉 떠나와 있었다. 그런데 옆에 머물기 위해 이렇게 집착하다니. 사실은 그의 옆자리에 있었던 적도 없으면서. 재하는 헛웃음이 나왔다.
그때 맞은편에서 툭 내던지는 듯한 어조의 목소리가 들렸다.
“같이 웃으면 안 되나.”
장태건이 크림색 테이블보 위를 검지로 톡 쳤다.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고 턱을 괸 채로 저를 보고 있었다.
이재하가 알고 있는 모든 테이블 매너에 명백히 위배되는 모습이었다. 그 모습이, 아플 정도로 명확하게 망막에 새겨지는 기분이었다. 재하는 어렵사리 입술을 떼어 냈다.
“…시간이 되시는 줄은 몰랐습니다.”
“사람 불러 놓고 그게 무슨 소리야.”
장태건은 시큰둥하게 대답하며 마침 들어온 종업원에게 따뜻한 물을 부탁했다. 복도로 나갔던 종업원이 다시금 은주전자를 들고 들어와 워터 고블릿에 따뜻한 물을 채워 주자, 그걸 그대로 밀어 재하의 앞에 두었다.
잔 받침대에 테이블보가 살짝 밀린 것이 보였다. 재하는 그것만 뚫어지게 보다가 잔에는 손대지 않았다.
대신 충동적으로 다짐했던 브랜디 한 잔은 포기했다. 별것도 아닌 일에 반항심이 들었다가 물 한 잔에 누그러지는 이유는 뭘까. 문득 이 모든 것들이 저답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계속 저릿한 손을 다시 한번 쥐었다 펴며, 재하는 음식에 손을 댔다. 식사에 집중하고 있으니 말을 걸지 말라는 일종의 언어였다.
메인이 아닌데도 육류가 나왔다. 청둥오리 꽁피였다. 바삭한 껍질을 나이프로 긁으면 갉작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나 이재하는 이번에도, 그 요리들이 대체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래서야 청혼했던 그날과 똑같지 않나. 재하는 문득 자신이 눈앞의 알파를 얼마나 사랑하는지를 깨달았다. 그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무료한 것도 모르던 삶이다. 다른 이들보다 주어진 게 월등하기에 자잘한 건 포기하는 것이 올바른 삶이라 여겼었다.
그런 이재하에게 장태건은 얼마나 자극적이었던가. 그가 제 인생으로 들어와 행한 모든 일들이 짧게나마 찬란하기만 했다. 받은 게 있으면 보답해 줘야 한다. 눈앞의 남자는 이재하의 일생 동안 만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못했던 존재이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주겠노라고 결심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이재하의 생애 의미가 있는 일은 그런 것들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결심과 맞물려 메인 요리가 등장했다.
“어린 양의 갈빗살 스테이크입니다. 레몬 베르블랑 소스로 상큼한 맛을 더한 것으로, 스테이크 아래쪽에 치킨스톡으로 조리한 대파를 곁들여 드시면 되겠습니다.”
종업원은 유려한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접시를 치우고 오븐에 살짝 구워 데운 접시를 올려 두었다. 양의 갈빗살 스테이크였다.
“맛있게 드십시오.”
종업원은 여전히 고저 없는 목소리로 정중하게 말한 뒤 살짝 허리를 숙이고는 그대로 룸을 나가 버렸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리지도 않았는데 이 방 안에 장태건과 둘만 남았다는 생각이 여실하게 들었다. 재하는 떨어진 식욕에도 나이프를 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는 결심을 굳혔다. 지금 말하지 않으면 영원히 입밖으로 내뱉지 못할 것 같았다. 어쩌면 이재하의 사랑은 장태건을 놓아줌으로써 완성되는 걸지도 모른다.
타인의 평가에 비하여, 이재하는 사실 잘난 것 없는 인생이다. 그 방증으로 그는 지금 제 배우자에게 프러포즈했던 호텔 다이닝에서 이혼을 요구할 참이었으니까.
주문해 두었던 샴페인이 무색한 참이었다. 무얼 축하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결혼기념일이 이혼 기념일이 되겠다는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식도로 넘겼던 오리 꽁피가 그대로 콱 틀어막힌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그때도 그러더니.”
장태건의 말이 불쑥 들렸다. 그때가 언제일까. 그 역시 이곳에서 자신이 처음 청혼하던 날을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러나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홀가분한 마음이었다. 유신은 바람 앞의 등불이었고, 장태건은 소기의 목적을 이룰 것이다. 이재하의 사랑은 장태건의 바람을 이루어 주는 것만으로도 나쁘지 않은 끝을 맞이하고 있었다.
가진 것 없이 껍데기만 남은 채로 그의 옆을 억지로 지키는 것보다, 이제는 그만해야 함이 옳았다.
“먹고 있습니다. 장 본도… 들어요.”
재하는 작게 고개를 젓고는 은도금한 포크를 다시금 들어 올렸지만, 이내 의욕이 꺾여 다시금 술만 홀짝였다. 뭐라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겠다. 끝을 말하려는 순간이 이렇게 빨리 다가올지 몰랐는데.
사실, 지난 몇 년간 공들였던 계획의 완결에는 두 사람의 이혼이 필요했다. 이재하는 두 사람 사이의 이혼으로 장태건이 얻게 될 것들을 계산했다. 그걸로 위로를 삼으려는 듯이 말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떠올렸음에도 말이 쉬 나가지 않았다. 그는 몇 번이나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이제, …이만하면 된 것 같습니다.”
재하의 목소리에 조용하지만 간간이 식기 부딪치는 소리가 나던 룸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와인 잔에 입술을 붙이던 장태건이 상체를 뒤로 물려 등받이에 기댔다. 한쪽 손은 여전히 테이블에 올려 둔 채로, 검지로 크림색 테이블보를 툭툭 두들겼다. 요원하던 사이, 손등 위의 상처가 늘어난 건 아닐까, 저도 모르게 유심히 바라보게 되었다.
장태건은 이재하의 시선이 어디를 배회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듯, 일말의 감정을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입에 뭘 댄 것 같지도 않으니까 식사 마치자는 얘기는 아닐 거고.”
“…….”
“그럼 뭐가 이만하면 됐을까.”
장태건이 유려한 입매를 올려 웃었다. 재하는 더 시선을 피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어 그를 마주했다. 아주 익숙한 가면을 쓴 채 말이다.
호텔 다이닝의 프라이빗 룸은 변한 듯 변하지 않은 채로 제자리였다. 때문에 재하는 지난 몇 년간과 저 자신에 대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결혼 후 매년 기념일이 되면 이 자리를 예약했었다. 서로의 생일까지 챙기는 단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결혼기념일의 저녁 정도는 늘 함께했었다.
그런 날에 굳이 이혼을 요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걸 보면 남보다 하등 잘난 게 없는 인생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차라리 가진 것이 적었다면 말하기가 수월했을지도 모른다.
사랑한다는 말이 장태건에게 직선으로 날아가 닿는 상상은 쉬웠다. 그것은 그저 상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세계는 끊임없는 물질로 되어 있다. 상상 따위는 무의미한 세계인 것이다. 그런고로 재하는 장태건에게 다 버리고 제게 와 달라는 말을 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그런 말을 하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여기서 끝내는 것이 맞았다.
“우리의 결혼.”
“…….”
“이만하면 됐다는 말입니다.”
말을 내뱉고 나니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무너지는 기분도 없었다. 당장 내일 어떻게 될지는 모를 일이나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크게 흔들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쓰고 있던 가면이 깨어지는 일도 없었다.
재하는 다시금 술로 목을 축였다. 맞은편에 앉은 장태건에게서는 대답이 없었다. 그를 바라보자, 장태건이 리넨 냅킨으로 입가를 닦으며 씩 웃었다. 웃음의 질이 썩 좋지 못했다.
그 웃음에 움찔 치솟으려는 한쪽 눈썹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며 끈기 있게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누구 좋자고 이혼을 해.”
부부로 산 지 햇수로만 4년이다. 그런데도 재하는 자신의 배우자에 대하여 아는 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한쪽 눈매를 가늘게 뜬 채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그게 그가 담배를 태울 때마다 짓는 습관이라는 걸 아는지라, 장태건이 지금 담배를 태우고 싶어 하는구나, 하고 불현듯 깨달았다.
생각해 보니 제게 보였던 사소한 습관 같은 것들은 아는데, 그가 뭘 좋아하고 뭐에 웃는지는 몰랐다.
그러니까 왜 저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현 상황에 이혼이 도움 되는 것은 장태건이다.
유신은 현재 아득바득 이를 간 이익형의 사촌 형제들에게 해체될 일만 남아 있다. 그들은 아주 잘 드는 칼을 쥔 정형사들처럼 기업을 조각조각 나눌 작정에 불타오르고 있다.
그러니 지금이 이혼의 적정 타이밍이었다. 합의 이혼이 성사되면 장태건은 이익형을 비롯한 유신의 떨거지들이 절대 갖지 못할 이재하의 상속분들을 협의 이혼의 당사자로서 나눠 가질 권리를 갖게 된다.
그중에는 유신 주식의 다수가 있다. 재하는 그걸 태건에게 주고 싶었다. 사실상 이 계획의 끝은 이혼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득 장태건이 원하는 것은 다른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에 대한 말을 들은 장태건의 페로몬이 크게 울렁였기 때문이다.
‘그의 계획에 나와의 이혼이 없었나?’
그럴 리가 없는데.
장태건의 행보는 명확했다. 유신의 뒤를 봐 주는 국회 의원 몇몇을 공략하고, 그들에게 뒷돈을 대 주던 건설 회사들을 흡수 통합하여 세력을 불렸다.
유신으로 들어가는 직간접적 자금과 권력 줄을 모두 끊어 버린 것이다. 이재하 역시 태건의 그런 행보에 맞춰 알맞은 정보를 흘려 도움을 주고는 했었다.
물론 재하 또한 태건의 의중을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아니다. 그가 자신과 결혼한 이유가 당연히 복수 때문이라고 생각했지만, 확실히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또 다른 가능성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무리 뒤져 보아도, 장태건이 이재하의 청혼을 승낙할 만한 이유가 그것 외에는 없었다.
이재하가 맹렬히 여러 가지의 가설을 떠올린 뒤 삭제시키는 동안에도, 테이블 맞은편에는 육식 동물이 송곳니 대신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 같은 이질감이 드는 알파가 앉아 있었다.
그는 재하에게 경고하듯 말했다.
“대가리 잘 굴리는 거 알아. 그게 매력 있기도 하고.”
아까부터 말이 심하다는 생각을 하며 그를 고요히 바라보자, 태건이 피식 웃는다.
“그 좋은 머리로 생각해 낸 게 고작 도망이야?”
누가 도망을 친다는 거야.
재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이 몇 년간 공을 들였던 것은 도망이 아닌 매듭이다. 정말 도망을 쳤다면, 지금 이 자리는 정말로 샴페인이 어울리는 자리가 되었겠지.
재하가 약간의 모멸감을 버티고 있는 동안, 장태건은 검지와 중지로만 은도금을 입힌 나이프를 간단히 들어 올렸다.
“이혼이 되면.”
어린 양의 갈빗살 위로 깨끗한 나이프가 콱 찍혔다.
“결혼도 안 했을 텐데.”
재하는 달싹이던 입술을 겨우 열었다.
“장 본도 알 겁니다. 이 결혼을 더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태건은 그 상태로 웃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이재하 씨 본부장입니까? 우리가 같은 회사를 다녔나?”
“…호칭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씨발, 뭐가 중요한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
아까부터 옅게 깔려 있던 알파의 페로몬이 점점 더 흉포한 기색을 띠었다. 폭풍우에 요동치는 파도 냄새가 재하의 정강이까지 감싸는 기분이었다.
점점 더 이 상황 자체를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이재하는 자신이 혹시 처음부터 가설을 잘못 세웠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장태건이 원하는 것은 유신의 몰락이 맞았다. 유신이 몰락하기 위한 마지막 방점은 이재하와의 이혼을 통해 장태건이 분할받을 유신의 주식이다.
그런데 왜 그가 이혼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일까. 장태건은 유신의 몰락을 원하는 동시에 이재하와의 이혼을 원하지는 않고 있었다.
그러니까 왜. 재하는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문득 그 안에서 희망이 움텄다. 혹시 아직까지 제가 할 역할이 있는 걸까.
그러나 동시다발적으로 지금까지의 정사들이 떠올랐다. 아무런 애정도 없던 그 관계들이, 준비를 끝낸 채로 방 안에서 멍하니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 시간이 말이다.
그들은 각방을 썼으며 행사 외에는 서로를 찾지 않았고 그런 관계가 몇 년이나 지속되어 왔다.
잠자리조차도 의무에 속하던 그들 사이에 정이라고는 없을 테니, 이혼 요구에 불쾌한 기색을 띠는 것은 아마 이재하가 갖고 있는 권력적 이점 때문이겠지.
재하는 문득 이런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문을 열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에 대한 회의가 아니었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 줄 것이 얼마 남아 있지 않아 느끼는 회의감이었다.
“…장 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장 본에게 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군요. 유신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고 나는 이미 그마저 있던 끈도 떨어진 형편이니까요.”
태건은 무표정으로 재하를 한동안 응시했다. 재하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이재하 씨.”
“…….”
“나는 당신이 말이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재미없는 농담에도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장 본.”
“그러니까 4년 동안 구멍 맞추고 산 건 난데 어떤 본부장 새끼한테 뒤를 대 줬길래 그 호칭을 못 버려서 야단이야. 이재하 씨 배우자가 납니까, 아니면 길거리에 널린 본부장 새끼들 중 하나입니까.”
혼란스러웠다. 이 와중에도 저를 휩쓸어 갈 듯 사나웠던 페로몬이 임을 기다리다 늦게 져 버린 해당화처럼 흐무러진 향을 내고 있었다.
장태건은 일어나 재킷의 맨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는 테이블 모서리에 양손을 짚은 채 재하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태건의 눈빛이 검게 가라앉아 일렁였다. 재하는 문득 장태건이 그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당신이랑 여보, 당신 하고 사는 게 좋아. 다른 생각 하지 마.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 거니까 식사 다 하고 오도록 해요.”
재하는 그를 붙잡고 싶었다. 그가 들은 말들의 저의를 묻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이미 태산 같은 몸을 돌려 룸의 문을 연 뒤였다.
뭐라 잡을 새도 없이, 장태건은 룸을 나서 버렸다.
그렇게 그날은 난감한 식사와 덧없이 부른 배와, 얻지 못한 이혼에 대한 대답을 뒤로한 채 귀가해야 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태건의 조부인 장창식이 유명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