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8/18)

7.

“짖지 마, 좀, 어?”

태건이 미간을 좁혔다. 그의 뒤에 얌전히 서 있던 정길이 명순을 돌아보았다.

명순이 큰 눈을 질끈 감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형님 심기가 무척이나 사나우니 건들지 말라는 소리였다.

들고 있던 빠루로 뜬장을 툭툭 칠 때마다 안에 들어 있는 것이 낑낑거리듯 웅얼댔다.

“니, 니들 이러고도, 어? 무사할, 어? 내가…. 누군지-.”

“그런 대사는 오줌 지리기 전에 하셨어야지. 얘, 명순아, 읊어 봐라.”

“예, 형님.”

뜬장에 갇힌 남자는 속옷도 없이 맨몸이라 얇은 철창 밖으로 살이 비죽비죽 삐져나와 있었다. 철창을 움켜쥔 손가락에도 살이 쪄 투실투실한 모양새가 보기에 별로였다.

근래 들어 기분이 좋은 적 없던 장태건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뜬장 앞에 놓인 간이 의자에 다리를 꼬고 앉았다.

그의 옆으로 나온 명순이 저승사자가 죽은 이의 이름을 호명하듯 스산한 목소리로 종이에 쓰인 것을 읊었다.

“박장원은 모월 모일 모시, 자신의 정치인 계정에 잘못했다는 한마디의 사과문을 올린다. 이후 박장원은 유신제약 산하 YS바이오부머가 진단 시약 기업인 메후딘을 합병하는 데에 규제를 날치기 완화한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에 출석한다. 중앙지검에는 자차로 이동한다.”

“누, 누가! 내가 왜 그래야 하는데!”

박장원이라는 것은 뜬장에 갇힌 남자의 이름으로, 그의 직업은 국회의원이었다. 주로 날치기 법안들을 통과시켜 대기업을 살리고 소상공인과 중소기업의 부도를 도모하는 것에 최선을 다하는 인물이었다.

그는 오늘 오전 6시경, 새벽 라운딩을 가다가 괴한에게 납치되었다. 그를 납치한 남자는 트렁크에 박장원을 태운 채로 여러 번 차를 바꿔 이동했다.

그사이에 진이 빠진 중년의 박장원은 경기도 외곽의 웬 폐창고로 들어온 뒤로는 아예 도망칠 생각을 하지 못했다.

여러 차량의 각양각색의 트렁크에 갇히는 동안 전정기관이 망가지기라도 한 것인지 가만히 있어도 멀미와 구토감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바닥에 쓰러져 헥헥 거리는 박장원에게 물이 뿌려진 것은 두 시간 전, 이제 막 서리가 내리기 시작한 날씨에 젖은 옷을 입고 있을 수 없었던 박장원은 자진해서 옷을 벗어야만 했다.

그렇게 나체 사진이 찍힌 것은 또 한 시간 48분 전이었다. 그러나 박장원이 뜬장에 갇히게 된 것은 순전히 자업자득이었다.

그를 납치한 남자는 조직의 일인자도, 이인자도 아닌 그저 밑의 놈들 같았는데, 상황 파악이 덜 끝난 탓에 그들에게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기 때문이다.

‘니들 대가리 누구야! 내가 누군 줄 알아?!’

덩치들은 제각각 어깨를 으쓱였다. 누군지 모르고 데려왔다는 뜻이었다. 황당한 나머지 박장원은 그들에게 욕을 퍼부었고, 놈들 중 한 놈이 시끄럽다며 그를 뜬장에 가둔 것이다.

그렇게 박장원이 창고로 들어오는 장태건을 마주한 것이 바로 17분 전. 박장원은 또 한 번의 실수를 한다.

‘너, 이 씹…! 너 내가 유신의 이 이사랑 아는 사이인 거 몰라?! 나한테 이런 짓 하면 이 이사가 가만둘 것 같아?!’

박장원은 그저 너 같은 깡패 새끼와 결혼한 이재하의 인생이 불쌍하며, 이런 식으로 본데없이 나대는 걸 이재하가 알게 되면 너 같은 건달 새끼를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했을 뿐이다.

그건 사실이었다. 박장원과 유신은 밀접한 연관이 있었고, 그 연결 고리는 이재하, 이익형도 아닌 타개한 이원웅 유신 전(前) 회장부터 이어지는 긴밀한 것이었다.

박장원은 이원웅이 운영하던 장학재단의 장학생이었다. 어느 지검의 검사장처럼 학비가 모자란 것은 아니었고, 정치인 집안을 후원하기 위한 이원웅의 그럴듯한 수였을 뿐이다.

그렇게 유신의 돈을 먹고 자란 돈나무인 박장원은 자신이 대기업 유신에 혁혁한 공을 세웠음을 자랑스럽게 여기고는 했다. 그러니 유신의 이재하 이사와 결혼한 장태건도 자신을 그렇게 여겨야 함이 맞았다.

그런데 이런 식으로 사람을 납치해 협박하다니. 박장원은 장태건이 지금 크나큰 실수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 착각은 다리를 꼬고 무료한 얼굴로 담뱃대를 톡톡 부러트리고 있는 장태건의 입에서 나온 말에 의해 산산조각이 났다.

“네가 씨발, 우리 남편 기둥서방이야?”

“…뭐?”

“이재하 눈 높은 거 몰라? 왜 구멍이라도 대 준 것처럼 나대냐고.”

“그게 무슨….”

장태건은 내내 부러트리던 담뱃대들의 시체를 구둣발로 밟은 채 자리에서 일어서 다시금 담배를 꺼내 이번에는 입술 사이에 제대로 물었다.

옆에 있던 정길이 라이터를 켜 불을 대려고 하자 짜증을 냈다.

“정길이 이 새끼야, 그런 것 좀 하지 말라고. 형이 내일 죽니? 손가락 하나 못 움직이게? 직접 할 거니까 내놔.”

“예, 형님.”

내미는 태건의 손바닥 위에 금색의 지포 라이터가 얌전히 올라갔다. 박장원은 입을 멍청하게 벌리고 그 꼴을 다 보고 있었다. 헐벗은 몸이 추위에 벌벌 떨렸다.

창고 구석에서 덩치 중 하나가 켜 둔 전기난로에 손을 뻗으며 해죽해죽 박장원을 비웃고 있었다. 박장원은 수를 바꿔 이제는 애원하듯이 말했다.

“제발, 그럼 이 이사랑 전화 한 통만 하게 해 줘. 무슨 오해가 있었던 것 같은데-.”

“야.”

뜬장과 장태건 사이에는 한 발자국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장태건의 음산한 목소리가 박장원을 불렀다. 멸시와 무시가 가득 들어 있는 어조였다.

울컥, 기분이 나쁘기도 전에 뜬장의 얇은 철장 사이로 비죽 내려와 있던 박장원의 사타구니 부근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아쳤다.

“으아악-!”

지이익, 하는 소리와 함께 단백질 타는 소리가 났다. 박장원은 눈을 까뒤집으며 거품 침을 흘렸다. 담뱃불이 창살 사이로 튀어나온 박장원의 고환을 지지고 있었다.

뜬장의 창살을 잡은 채로 박장원이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철제 창살이 철컹거리는 소리가 폐창고를 요란하게 울렸다.

“좆도 아닌 새끼가 선량하게 살고 싶은 사람 꽤 자극하네. 내가 너랑 유신이랑 붙어먹은 거 불랬지, 남의 남편 찾아 대면서 다 불어 터진 쉰 좆 덜렁거리래?”

“아악, 으아-! 왜, 무슨, 왜 이러는-!”

평생을 기름진 것만 처먹고 살아온 목구멍에서 쥐어짜진 비명은 듣기에 고역이었다. 장태건은 딱 그런 표정으로 고환에 지져 끈 담뱃대를 바닥에 툭 던져 버리고는 귀를 후볐다.

“명순아. 뭐 하니, 너는. 다 읊어 봐, 좀.”

“예, 형님.”

그의 뒤에서 가만히 시립해 있던 명순이 다음 계획을 읊었다.

“박장원은 정치 인생을 은퇴하겠다는 자필 편지를 보좌관에게 전달 후, 낙향한다. 갖고 있던 유신의 주식들은 SNS 계정에 사과문을 올리기 전 처분하여도 좋다.”

장태건은 다시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았다. 그러고는 어린아이처럼 여전히 담뱃대를 톡톡 부러트리는 손장난을 했다.

한 갑을 비우면 다음 갑의 담뱃대들을 꺼내 다시금 톡톡 부러트리다가 입을 열었다. 박장원이 화상 입은 고환이 창살에 닿을까 움찔거리느라 뜬장의 이음새 사이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아, 이 부분이 참 그런데 말이야…. 그래, 뭐, 우리 장원 씨도 말년에 깡통 찰 일 생기면 서럽겠지. 그동안 국민들 혈세 쪽쪽 빨아먹느라 재미 좋으셨을 텐데, 그 구멍 막히면 어떡해. 난 또 사람이 독기 가득해지는 건 별로 안 좋아하거든. 우리 장원 씨 숨 쉴 구멍은 있어야 할 거 아냐.”

장태건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말한 뒤 혼자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입꼬리만 올려 웃음 같지도 않은 표정을 짓더니 말했다.

“그럼 우리 어떻게, 비즈니스 마무리된 거죠?”

“무, 무슨 소리야 그게에….”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내내 끌려다니다가 찬물 세례에 급소에 화상까지 입은 박장원이 눈물을 질질 흘리며 읍소했다.

그러자마자 뜬장 위로 그림자가 진다 싶더니 창살 사이로 회칼이 들어와 박장원의 허벅지를 푹 찔렀다.

“으아악-!”

칼은 여러 번 창살 사이를 오갔다. 지방층이 두꺼워도 꼴에 남자라고 근육에 잡힌 칼날이 잘 빠지지 않자 정길은 표정 없이 창살을 잡고 칼을 빼냈다.

그럴 때마다 그의 검은색 셔츠에 피가 튀겼다. 오물이 묻어도 묻은 티가 나지 않기 때문에 검은 셔츠가 좋았다. 한창 열중하는 정길을 향해 태건이 손을 휘휘 저었다.

“야, 정길이 이 새끼야. 박 의원님 소변 지리시잖아. 한 번만 쑤셔, 한 번만. 저분이 개야? 한 번 쑤셔도 다 알아들으신다고.”

“죄송합니다, 형님.”

장태건이 바짓단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피를 쏟는 창상들 사이로 허벅지의 노란 지방세포가 드러났다.

정길은 회칼 뒷부분으로 득득 머리를 긁고 있었다. 너무 쑤셨나 민망해하는 표정이었다. 명순이 태건의 뒤편에서 한심하단 표정을 지었다.

근래에 밝은 적 없던 태건의 기분을 맞춘다는 게 꽤 오버를 한 듯싶어진 것이다. 장태건은 표정 없이 이번에는 부러지지 않은 담뱃대를 입술 사이에 물고 웅얼거리듯 말했다. 손에는 명순에게서 넘겨받은 박장원의 다음 계획표가 있었다.

“박 의원님, 너무 걱정 마세요. 내일은 거기서 나가실 거예요. 하루 정도는 고기를 재워 둬야 다음 날 야들야들해지지 않겠어요? 사람 일도 똑같거든요. 제가 바로 박 의원님 편의 봐준답시고 풀어 드려도, 아직 길이 덜 들어서 또 이런 식으로 저희끼리 얼굴 한 번 더 봐야 할 수도 있어요.”

“끄으으…. 흐으-.”

“나가자마자 경찰에 찌르고 검찰에 찌르고, 힘없는 저 같은 조폭 새끼 잡겠다고 공권력의 철퇴 휘두르고. 그럼 얼굴 또 봬야 하잖아요. 저는 박 의원님 생긴 게 좆 같아서 또 뵙고 싶지 않거든요.”

박장원은 그때쯤 들리는 것이 별로 없었다. 정길이 허벅지 위로 지혈제를 뿌려 대서 상처에 어마어마한 격통이 몰아쳤기 때문이다.

비명을 질러 대는 박장원을 보며 장태건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불이 붙지도 않은 담뱃대가 입술에 물린 채로 위아래로 까닥거렸다.

“그리고 씨발, 아까 뭐라 하셨더라? 이 이사한테 전화 한 통화만 하게 해 달라고? 니가 뭔데 남의 집 유부남한테 밤중에 전화를 거세요.”

“…끄윽, 살, 살려 줘…. 흐으억….”

“아, 누가 죽인대?”

태건이 들고 있던 종이를 다시금 명순에게 넘겨주고는 한쪽 구석에서 500mL 생수병으로 손에 묻은 피를 닦고 있던 정길에게 말했다.

“갈 거니까 박 의원님 오늘 재우지 마. 저대로 자면 얼어 뒤지실라.”

“예, 형님.”

“수고해라.”

정길이 허리를 꾸벅 숙이자 태건이 창고를 나섰다. 입술에 물려 있던 담뱃대는 그새 검지와 중지 사이에 잡혀 허리가 반으로 분질러졌다.

명순이 따라와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자 몸을 숙여 차 위에 오르던 맹수가 여전히 한 발은 땅에 걸친 채 물었다.

“근데 저 새끼 하는 얘기 뭐야.”

“…그게, 근래에 이사님께서 유신이 박 의원 쪽으로 찔러 준 뇌물을 역추적하고 계신 것 같습니다.”

“…….”

장태건의 미간이 살짝 좁혀졌다. 의아할 때 나오는 표정이라는 걸 아는 명순이 바로 고개를 숙여 형님의 고민을 엿보는 걸 멈췄다.

곧이어 명순의 시야에 걸쳐져 있던 흙 위의 구둣발이 세단으로 마저 들어갔다. 명순은 입술을 말아 물며 문을 닫았다.

트렁크를 돌아 운전석에 올라탔는데도 차 안은 고요했다. 명순은 시동을 켜고 가만히 있다가 룸미러를 흘끗 보며 물었다.

“평창동, 가실까요?”

뒷좌석에서는 침묵만 던져졌다. 명순이 일단 서울로 향해야겠다고 기어에 손을 올렸을 때다.

“명순아.”

“예, 형님.”

“…….”

그러고는 다시금 침묵이었다. 명순은 그 침묵에서 몇 년 전 어느 날을 떠올렸다.

하늘이 무척 맑은 날이었다. 장창식의 호출을 받고 밤새 피와 오물을 뒤집어써야 했던 두 짐승은 차에 올라 늘 가던 곳으로 향했다.

어느 대학의 야외 주차장이었다. 중앙도서관이 있는 맞은편에 차를 대고 진하게 칠한 선팅을 신뢰하며 두 짐승은 말없이 퍼석한 편의점 빵으로 끼니를 때웠다.

세단은 장창식이 조직 일을 볼 때 쓰라고 준 것이라 무척 고가의 것이었지만, 경비는 사비로 충당해야 했다.

그것은 명순의 옆자리에 탄 장태건도 마찬가지였다. 핏자국이 말라붙은 뺨을 움직여 빵을 먹으며 장태건은 중앙도서관의 입구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누군가 나와 어디론가 향하는 걸 보면, 그제야 명순에게 시동을 켜게 했다.

‘…안 따라가 보십니까, 형님.’

‘징그러운 소리 하네. 가, 빨리. 씻고 좀 쉬자.’

태건은 지금까지 제가 누굴 기다리고 있었는지 까먹었다는 듯 명순이 잡고 있는 핸들을 주먹으로 퍽퍽 쳐 차를 출발하게끔 했다.

하루를 꼬박 새운 두 짐승에게 정오의 햇빛은 따가운 편이었다.

중앙도서관을 지나 한쪽에는 차 키를 들고 다른 손에는 전공 책을 든 누군가가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장태건은 그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두 짐승의 세단이 그대로 야외 주차장을 벗어나면, 그들이 한참 기다리던 그는 제 차 지붕에 전공 책을 올려 둔 채 통화를 했다.

명순에게는 그게 룸미러로 다 보였으나, 태건은 이미 창가로 고개를 틀고 있었다. 그쪽 사이드미러에 그 모습이 비쳤는지는 알 수 없었다.

명순은 오늘따라 그런 날들이 생각났다. 태건이 그때처럼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냥 있을 수 없는 일이라, 명순은 마침내 기어를 변속했다.

두 짐승의 세단은 오늘도 그때 주차장에 두고 온 이와 반대편으로 향했다.

* * *

골이 흔들릴 정도의 쾌감이었다.

“흐윽-!”

재하의 무릎은 이미 벌겋게 그슬렸을 것이다. 뒤에서 치받는 힘에 무릎이 무너지지 않게끔 지탱하느라 침대 시트에 닿은 무릎이 쓸려 따가워졌다.

그러나 그런 아픔들은 오히려 정신을 지탱하는 데에 도움을 주고는 했다.

뒤를 쑤시는 성기가 주는 감각이 잔뜩 발기해 넣을 곳 없이 꺼덕이던 알파의 자지 끄트머리에서 투명한 액을 쏟게 만들었다.

무릎이 쓸리는 따가움은 그 느낌을 아주 조금이나마 상쇄시켜 주었다. 그게 아니라면 버티지 못했을 것이다.

아무런 애무 없이 그저 성기가 삽입되는 것만으로 자지에서 물을 뚝뚝 흘리는 알파라니. 이재하는 제 꼴이 우스워졌다.

유신은 거인이었다. 쓰러트리기가 꽤 까다로운.

그러나 두 달 전, 드디어 실마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박장원 의원이 YS바이오부머가 메후딘을 합병하는 데 일시적으로 규제를 완화하는 법안을 날치기 통과시켰다는 혐의를 인정하고 검찰에 출석했을 때였다.

당시 박 의원을 치고 나아가 유신의 임원들의 결속을 뒤흔들려던 이재하는 준비 없이 이른 행운을 맞이했다.

어릴 때부터 알던 사람을 뒤에서 치려니 영 내키지 않았는데, 박 의원이 제 손으로 오랏줄을 동여맨 것이다.

이유가 뭘까. 재하는 온몸을 강타하는 쾌감에 빠진 채로도 그런 생각을 했다. 아니, 오히려 다리 사이에서 오는 감각을 잊으려 일부러 떠올린 것이다.

지난 몇 달 동안 박 의원에게 흘러간 돈을 역추적하느라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전처럼 유신의 인력을 부릴 수도 없는 노릇이라 조용히 사비로 고용한 사람들에게 일일이 지시해야 했는데, 그나마도 마땅치 않아 제가 직접 건드려야 하는 부분이 많았다.

임유진 과장처럼 각개전투가 가능한 이가 비서로 있었으면 훨씬 수월했을 터였다. 그러나 그를 비서로 불러오기에 이재하는 지금 제가 한평생 갖고 있던 것들과 싸우는 중이기에 너무도 위험했다.

인력이 부족해도 작업은 꽤 공들여 진행 중이었다. 박 의원의 비자금 행방을 알아내기도 하고, 그가 보좌관 남동생의 명의로 받은 상당수의 금액 출처를 추적하기도 했다.

언론보다는 해외 계정으로 만들어 둔 사이버 렉카 채널에 올린 뒤 검찰 반응을 보려고 했던 일이었다.

그런데 돌연 박장원이 검찰에 자신의 뇌물 수수를 자수한 것이다. YS바이오부머의 전무이사로부터 받은 대가성 뇌물에 대한 증거가 연일 대서특필 되었었다.

그물을 치고 준비하던 박 의원이 저 혼자 걸려 넘어지자, 재하는 그 이후 새로운 전략을 짜느라 분주해졌다. 그 일이 유신에 타격이 될 수 있도록 미세한 사항들을 조절하느라 바빠진 것이다.

박 의원은 누군가의 협박을 받았을 것이다. 적이야 많겠지만 3선 의원, 그것도 강남 3구에서 세 번이나 당선된 굵직한 정치인을 고작 협박으로 나락으로 내던지다니. 상대가 누구인지 짐작 가지 않아 찜찜했다.

박 의원이 무저갱으로 추락하면 누가 이득을 볼까? 아니, 이 경우에는 누가 피해를 볼지를 따져야 할까.

멍한 머리로 이유를 생각하고 있는데, 다른 생각에 빠진 걸 눈치챈 상대가 좁혀 든 내벽에 잔뜩 발기한 성기를 마구잡이로 쑤셔 넣었다. 그 충격에 재하는 저도 모르게 뒤를 조였다. 회음부 근육에 힘이 들어가자 반사적으로 재하의 성기가 꺼덕였다.

그 끄트머리에서 정액도 소변도 아닌 투명한 액체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점액성은 없는데 투명해 꼭 요실을 한 것 같았다. 시트가 점점이 물들고 있었다.

어떨 때는 갑자기 점성이 생긴 것인지 요도구에서 이어진 선액이 시트로 떨어지다가 먼저 만들어 둔 웅덩이와 은실로 이어지고는 했다.

침대에 고개를 박고 있다가 다리 사이에서 꺼덕이는 제 성기를 볼 때마다 수치심에 눈가가 빨갛게 물들었다.

“하….”

낮은 한숨 소리 다음으로 숨겨진 것은 짧은 욕설이었다. 그가 제게 성기를 박아 넣을 때마다 뇌까리는 욕설에 신경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물기 가득한 좁은 틈을 굵은 막대로 쑤셔 대는 소리가 침실을 장대하게 울렸다. 재하는 제 엉덩이에 와 닿는 태건의 고간에 시트를 잡아 뜯었다.

이제는 몸이 장태건을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쾌감을 주는 것이 반갑다는 듯 안쪽이 저절로 융기하여 장태건의 두꺼운 귀두와 툭 튀어나온 귀두에 긁히는 걸 좋아하고 있었다.

무언가 맛있는 걸 삼킬 때 타액을 흘리는 것처럼, 뒷구멍이 애액을 찍, 내뱉으며 갑자기 좁혀 들었다. 그 움직임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손바닥이 재하의 볼기를 내리쳤다.

“……!”

그 바람에 엉덩이에 우물이 파일 정도로 힘을 주자 엎드린 이재하의 뒤에서 개가 교접하듯 박아 대던 알파가 쯧, 하고 혀를 찼다.

재하는 그 조용하고 뚜렷한 타박에 발가락이 저절로 곱아드는 것이 수치심 때문인지 아니면 극치의 만족감 때문인지 알 수가 없어졌다.

열이 올라 뜨끈한 뺨을 시트에 비볐다. 격한 정사에도 불구하고 이재하가 피가 날 정도로 입술을 꾹 깨물어 다물고 있는 터라 방 안에는 물기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 외에는 옅은 숨소리뿐이었다. 그게 괴로워졌다.

재하가 들어온 평창동 별관에는 사람이 아주 드물게 오갔다.

머물고 있는 사람이 조용한 것을 좋아하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모두 누군가의 눈치를 보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이빨이 다 빠진 장창식의 눈치를 보는 것은 아닐 테니 그들이 눈치 보는 사람이야 뻔했다. 권력은 착실히 장태건을 향해 이동 중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났는데 아랫배가 묵직한 감각이 가시지 않았다.

덮고 있던 이불을 내려 잠옷을 들여다보자 재하의 성기는 아침이면 반사적으로 발기하는 모양새가 아닌, 러트기의 양상을 띠고 있었다. 귀두 부근이 두툼해지고 색이 무척이나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다.

재하는 그 꼴을 보자 자괴감에 한숨을 흘리며 이불을 뒤집어썼었다. 저녁이면 장태건이 방문할 것을 생각하자 머리가 아프고 가슴이 두근거렸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이곳에서 늘 조용히만 지내는데 날은 너무도 빨리 지나가고 있었다.

그와 마지막으로 한 관계는 다섯 달쯤 전이었다.

그때 이재하는 러트기였고, 별관을 관리해 주는 사용인 중 하나가 그의 러트를 알아채고는 태건에게 연락을 넣었었다.

태건은 다섯 달 만에 재하를 찾았다. 재하는 그게 싫어 러트가 온 걸 숨기려고 노력해 보았지만 처방받아 놨던 억제제가 듣지 않았다.

‘음…. 페로몬 주기에 변화가 온 것 같은데 원인을 소명하려면 다음 러트기 때 다시 한번 병원에 방문해 주셔야 합니다. 페로몬 향이 바뀐 것도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는데, 보통 스트레스 때문이니 너무 유념하지는 마시고…. 일단 억제제를 새로 처방해 드리겠습니다.’

유신의 주치의와 김란희 사이의 커넥션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어 다른 도시까지 가서 받은 진료였다. 서울 내 500병상 이상의 종합병원 중 이재하가 믿을 만한 곳은 없었다.

알파 판정을 받고 첫 러트기를 겪었던 때부터 저를 담당해 온 주치의의 실력을 믿지만, 그의 결백을 신뢰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그렇게 다른 도시의 나름 저명한 페로몬 전문의를 찾았던 건데, 금방 페로몬 향이 변한 원인을 들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확답을 들을 수 없었다.

러트기에 다시 내원해 달라는 요구가 있었지만, 이재하는 그 병원에 다시 방문할 수 없었다.

러트기 때마다 장태건이 평창동 집으로 찾아왔기 때문이다. 그가 방문한 다음이면 여지없이 열락 같았던 그 시기가 별안간 끝나 버리고는 했다.

그의 성기에 뒤가 쑤셔진 것만으로 러트기가 끝나는 걸 기가 막힌 심정으로 견디는 수밖에 없었다.

러트기의 페로몬은 우성 알파라고 해도 숨길 수가 없는 일이다. 자제력과 억제력이 강하며 있는 집 자식이었던지라 어릴 때부터 페로몬을 조절하는 교육을 받아 온 이재하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우성이라고 한들 러트를 숨길 수는 없었다. 별채 담당 사용인은 베타였지만 공기 중에 도포된, 페로몬을 검사하는 시트지로 재하의 상태를 체크하는 듯했다.

그렇게 그가 태건에게 연락을 넣으면 태건이 평창동에 방문하는 식이었다. 사용인을 고용하는 건 이재하의 몫이 아니었기 때문에 불만을 표해 봤자 바뀌는 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연락받으면, 그는 별관으로 와 재하에게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끔 담배를 태우기도 했는데 한 대 이상 태우는 일은 없었다.

찬장에 가만히 잠들어 있던 브랜디나 위스키를 꺼내 잔에 따라 마시기도 했다. 그것도 딱 한 잔뿐이었다.

이재하는 그걸 바라보지 않고 침실에 들어가 준비해야 했다. 그 전까지는 그가 오는 것이 몸서리치게 싫다가도 태건을 보는 순간 말없이 뒤돌아 옷을 벗고 개처럼 엎드렸다.

장태건은 이재하가 러트기를 혼자 버티게 두지 않았다. 억제제나 다른 약물 요법을 사용하게 두지도 않았다.

그는 직접 찾아와 재하의 페로몬을 안정시켰다. 성관계를 통해서 말이다. 관계는 러트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되었다.

재하는 열에 들뜬 뺨을 침대 시트에 비비적거리면서도 신음조차 낼 수 없었다.

태건이 말없이 제게 박아 넣는 행위가 정사라기보다는 의무 같았기 때문에 저만 흥분한 걸 보여 주기 민망했다.

태건은 아무런 마음이 없는데 저 혼자 좋아하여 그와의 결혼을 서두르고, 저 혼자 들떠 그가 받고 싶지 않던 것들을 떠넘길 때처럼, 이재하는 민망에 잠겨 목이 졸리는 기분이었다.

그래서 러트기를 겪을 때마다 알몸으로 침대에 엎드린 이재하에게 주어진 갑옷이라고는 인내뿐이었다. 그는 방 안을 넘실거리는 재하의 페로몬을 맡고도 단 한 번도 제 페로몬을 푼 적이 없었다.

그전까지의 관계에서 맡을 수 있었던 해당화 향이나 바다 소금의 냄새는 기억 속에서만 존재했다.

그 방에 성기를 세우고 있는 알파는 둘인데 흥분한 것은 저 혼자라니. 짝사랑과 다름없는 정사였다. 그걸 확인받는 그 행위가 싫었다.

그러나 거절할 마음도 들지 않았었다. 이재하에게는 그것이 태건과의 유일한 접점이었으니 말이다.

이게 끝나면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본부장으로 승진했다 들었는데 일은 잘하고 있는지, 끼니는 거르지 않는지 물어야지 생각했었다.

성감에 달아오른 정신이 깜빡깜빡 그 질문들을 지우개처럼 지워 내도 다시금 기억해 내며 꼭 물어야지 마음먹었었다.

그럴 때마다 다른 생각을 품고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태건의 추삽질이 격해지고는 했다. 그가 잡고 있는 골반에는 또 손자국이 들 것이다. 파랗게 멍이 들면 그게 지워질 때까지 소중히 들여다보고는 했다.

이재하에게 남는 거라고는 그런 멍 자국이 전부였다. 그러니 꼭 물어야 했다. 요즘은 어떻게 지내는지 단 한마디라도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러트기가 소강을 맞을 무렵이면 언젠가의 그날처럼 내렸던 퍼스너만 올린 채로 방을 떠났다.

오메가의 페로몬 없이 러트를 버텨 낸 재하의 정신은 태건이 방을 떠날 때쯤이면 빗물에 한지가 녹듯 삭아 들기 일쑤였다. 쓰러지듯 잠든 재하는 늘 혼자 깨어났다.

다섯 달에 한 번. 재하의 러트기마다 그런 일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그것은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아, 흑-!”

입술을 짓씹어 봐도 터져 나오는 신음을 막을 수는 없었다. 재하는 속절없이 쾌감에 잠식당했다.

그러나 같은 극치의 쾌감인데도 기분이 달랐다. 안쪽에 퍼지는 것이 주는 극도의 쾌감은 같은데도 가슴이 서늘하기만 했다.

전에 겪었던 그와의 관계에서, 절정에 오르면 진득한 쾌감의 혓바닥이 제 온몸을 쓸어 올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이후로는 깊은 안정감이 재하를 끌어안고는 했다.

그게 좋았었다. 그의 묵직한 체중이 저를 덮치듯 눌러 올 때면 온몸의 면면이 그와 닿는 듯했다. 정사 중 혼몽을 틈타 그의 등에 손을 올리면 아예 팔을 더 끌어당겨 자신을 더 안게 이끌곤 했다.

그의 상체가 주는 두께감이 좋았었다. 커다란 제 팔이 가득 끌어안아도 다 채워지지 않는 장태건의 넓은 등이 애달프고 사랑스러웠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다리 사이에 온갖 체액이 범벅된 것은 똑같은데도 이재하는 그 질척임이 주는 느낌이 현저하게 다를 수 있다는 걸 차근차근 깨닫는 중이었다.

온몸을 자글자글 끓게 만들던 극치감, 황금을 개어 넣은 물에 천천히 잠기듯 만족스럽던 황홀감은 언제 그랬냐는 듯 수챗구멍에 빨려 나가는 오물처럼 재하의 몸에서 썰물처럼 빠져 버렸다.

“…윽, 흐-.”

“…….”

정사를 끝낸 장태건은 사정 했음에도 가라앉지 않은 제 성기를 단번에 빼 버렸다. 부풀어 올랐던 귀두 갓 부근의 구슬이 내벽을 긁고 나가자 재하는 저도 모르게 몸서리를 쳤다.

다 쓴 콘돔처럼 다물린 곳에서 정액을 흘리며, 이재하는 침대 위에 버려졌다. 의식이 깜빡거렸다.

요즘에는 신경 쓸 것이 많아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재하는 그럴 때마다 잠이 들려는 노력을 하지 않은 채로 그냥 일어나 해야 할 일들을 했다.

거대할수록 숨겨진 비리가 많은 법이다. 재하는 그중 가장 치명적인 것들을 손안에서 주사위처럼 굴리며 공개할 타이밍을 노리는 중이었다. 주가가 떨어질 수밖에 없는 시기가 올 것이다.

악재에 악재가 겹친다면 아무리 거인이라도 쓰러질 날이 올 것이다. 이재하는 그걸 기다리며 숨죽였다. 그러니 남들 다 잠든 밤에 잠이 올 리가 있겠는가.

그렇게 잠을 잊은 지 오래라 무리한 몸에 러트기가 독약이 되었는지 의식이 까무룩 멀어졌다.

…잠들면 안 되는데. 몇 달 전, 장태건은 장한건설 개발사업본부장으로 승진했다. 그가 이룬 쾌거가 기뻤다.

사이가 애매한 상태이지만 축하한다는 말은 생판 남도 할 수 있는 인사라는 걸 생각하며 그에게 몇 마디 말을 걸고 싶었다.

그냥 축하 인사만 건넬 수 있다면 상관없었다. 이재하에게는 몇 개의 가면이 있고, 그중 하나를 꺼내 쓴 뒤 자연스러운 인사를 건네면 될 일이다.

그런데 너무 졸렸다. 의식이 나락으로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까라지는 의식 사이로 침대 한편이 푹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가물가물한 시선 자락에 침대 위로 올라온 장태건의 무릎이 들어왔다. 재하는 입술을 달싹였다.

승진 축하합니다.

그 말을 건네고 싶었다. 입술이 몇 번 달싹거리다 말았다. 축하 선물을 따로 사 두기는 했지만 건넬 수 없다는 걸 안다. 그렇다면 말이라도 하고 싶었다.

장태건이 재하에게로 몸을 기울였다. 무게를 지탱하기 위해 재하의 고개 옆에 짚은 손에 의해 매트리스가 푹 꺼지는 기분이 들었다.

재하는 그가 제 말을 들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그는 아무런 말 없이 다시금 기울였던 상체를 일으켜 제 셔츠를 벗는 것 같았다.

이제 완전히 닫히려 하는 눈꺼풀 사이로, 장태건이 제 벨트 버클을 풀고 퍼스너를 내리는 것이 들어왔다. 조였던 벨트를 풀기 위해 한쪽 끝을 잡아당기는 팔뚝 위 정맥을 만져 보고 싶었다.

왜 옷을 벗고 있을까. 이재하는 그게 궁금했지만, 직접 물을 수 없었다. 그다음에는 정말로 의식을 잃었기 때문이다.

간간이 의식을 차릴 때마다 재하는 제 아래에 치받는 감각에 휘둘려 허리를 비틀어야 했다.

골반을 꽉 쥔 손에서 열기와 집착이 느껴졌다. 재하는 제 몸을 탐하는 이가 누군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생시인지 꿈인지 모를 그 감각이 어쩌면 장태건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감각이 여실함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꿈이라고 여겼던 이유가 있다.

별거 이후 러트기가 올 때마다 몸을 섞어도 단 한 번도 옷을 벗지 않았던 장태건이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맨몸으로 저를 껴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땀에 젖은 상체가 부딪칠 때마다 이재하의 유두가 단단한 가슴팍에 쓸렸다. 의식과 무의식, 혼몽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성감이 물밀듯 밀려왔다.

비명 같은 신음을 질렀던 것 같기도 했다. 그의 등을 끌어안고 짧게 깎은 손톱을 박아 넣었던 것 같기도 하다.

이것이 꿈이라면 굳이 밀어낼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자, 재하는 전에 없이 다리를 잔뜩 벌렸다. 제 다리 사이에 들어온 단단한 몸이 기꺼웠다.

비문이 잔뜩 벌어질 정도로 처박느라 틈이 없어진 걸 알면서도 제 안으로 더 들어와 주기를 바라며 그의 엉덩이를 쥐었다.

장태건이 귓가에서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거친 숨이 잔뜩 섞인 채였다.

‘어느 놈이 박고 있는 줄이나 알아? 넌 네가 얼마나 못되고 야한 줄 모르지?’

‘흐, 아-! 읏…!’

‘너랑 씹질하다가 이대로 그냥 뒤졌으면 좋겠어. 시체한테 따먹히기 싫으면, 내 장례식은 올 생각 하지 마.’

재하는 그것이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하지 못했다.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할 수도 없었다.

한쪽에는 수마가 재하의 발목을 잡은 채 저 깊고 깊은 안락의 바닥으로 헤엄쳐 내려가는 것 같았고, 또 한쪽에는 쾌감의 짜릿함이 손목을 붙잡은 채로 의식의 수면 위로 그를 끌어 올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재하는 그 사이에서 벗어날 수 없는 자신을 느꼈다. 누군가 귓가에 밀어와 같은 사랑을 속삭였다.

이재하.

재하야.

이재하.

아니었다. 그저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는데. 그걸 왜 사랑 고백이라고 착각했을까.

누군가 이재하의 머릿결을 쓸어 주었다. 그에게 껴안긴 품에서는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심장의 박동 소리가 느껴졌다.

재하는 다시금 정신을 잃었다. 누군가 저를 깨워 끌어안은 채로 입가에 물을 흘려 주었다. 목말라 죽기 직전 흘러든 수분이 기꺼워 막힘 없이 목구멍 뒤로 넘겼다. 물은 금세 동이 난 듯했다.

더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 차갑게 식힌 살덩이가 입술을 벌리고 밀고 들어왔다. 옅은 해당화 향이 났다.

아니던가. 바다 냄새 같기도 하고.

또 한 번 수마가 재하의 몸을 밀어 무의식의 절벽 아래로 추락시켰다.

암전이었다.

* * *

아침에 일어나니, 침대는 저 외에 아무도 누운 흔적이 없었다. 차갑게 식은 시트를 어루만지다가, 재하는 그대로 몸을 일으켰다.

옆자리에 아무도 없는 것이 당연한데도 지난밤 꾸었던 꿈을 떠올리니 가슴이 무지근하게 아렸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꿈에서는 오히려 그가 이재하를 너무도 사랑해서 원망스러운 것처럼 말했다. 틈 없이 붙어 서로의 체온을 공유하며, 그의 단단한 품에 안겨 서로의 성기를 비볐었다. 쾌락을 위한 것보다는 상대가 저를 떠날까 봐 절박하게 서로를 껴안는 행위에 가까웠다.

아무런 말 없던 침대 위가 사무쳐서? 넣고 박고 흔드는 것만으로도 제 의무를 다한 듯, 끝난 뒤에는 소변기 앞에서 떠나는 것처럼 퍼스너를 올리는 것만으로 저와 단절해 버린 장태건이 원망스러워서?

그러나 이재하는 딱히 바라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견딜 수 있었다.

뭘 바라고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실망한 자만이 원망도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게 치면 이재하의 원망에는 원인이 없었다.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그대로 일어났다. 허리가 특히 뻐근했지만, 아예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리며 천천히 걸어 욕실로 향했다.

아직 씻지 않았는데도 피부 위는 거슬리는 곳 없이 개운했다. …장태건이 뒤처리를 해 준 걸까. 그런 기대는 하면 안 되는데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어쩌면 사용인 중 하나에게 대충 처리를 시킨 것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면 찜찜한 걸 참지 못하는 이재하의 무의식이 간밤에 그를 침대에서 일으켜 씻게 만들었을 수도 있고.

러트와 피곤에 전 몸이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가설이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태건은 어제도 침대 위에 이재하를 버려두고 이 집을 나섰을 것이다. 지난 러트기 동안 늘 그래 왔듯이.

재하는 더 생각하기를 그만두고 샤워 부스로 들어갔다. 쏴아-. 머리 위의 샤워기에서는 비가 내리는 것과는 조금 다른 물소리가 들렸다.

내리는 물은 천천히 재하의 많은 생각들을 씻어 주었다. 멍하게 그 밑에 서 있다가 약간 느린 움직임으로 몸을 씻고 면도를 해야 하나 가늠해 봤다.

러트기를 거친 뒤라 페로몬과 호르몬의 영향으로 턱에 돋은 것이 있나 싶었는데 매끈하기만 했다. 근래에 면도를 한 것이 언제더라. 재하는 날짜를 가늠하다가 포기해 버렸다.

어느 날 이후로, 재하는 자잘한 걸 신경 쓰지 않고 놓아 버렸다. 안 그래도 생각이 많아 머리가 터질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대로 샤워기를 끄고 나와 거울 앞에서 물기를 닦았다. 건식 욕실에 맨발 형태로 물 자국이 찍히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는 그런 걸 싫어했었던 것 같다. 부스에서 나오기 전에 대충 물기를 닦고 샤워 가운을 챙겨 입었는데, 근래에는 그런 자잘한 부분들을 다 신경 쓰고 살기가 힘들어졌다.

결국 샤워 가운도 앞섶을 여미지 않은 채로 대충 걸쳐 입고 세면대 거울 앞에 섰다.

피곤한 얼굴의 창백한 남자가 물에 젖은 채로 재하를 쏘아보고 있었다. 재하는 흘러내리는 물기들을 닦으며 그 시선을 피했다.

머리를 털어 말리고 드라이어를 꺼내 정리했다. 오늘은 쉴 계획이었다.

박 의원이 나선 이유를 아직 알지 못하지만, 그를 기점으로 유신이 천천히 무너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유가 조금 생겼다.

쉰다고 해서 특별한 게 있는 건 아니고 그냥 방에 틀어박혀 있을 계획이었다. 그러다가 체육관에 다녀오는 게 낫겠다 싶었다.

괜히 씻었다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그러나 그 몰골을 하고 밖을 나가는 짓거리를 해낼 자신이 없었다.

재하는 박 관장에게 연락해 체육관으로 가겠다고 말했다. 샤워실을 혼자 쓰지 못하는 것이 불편해 집으로 부르고는 했지만, 여긴 이재하의 집도, 장태건의 집도 아닌 장창식의 저택이라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렇게 오전에는 체육관으로 향했다.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오전에는 붐빌 거라 예상했는데, 막상 가 보니 박 관장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기 때문이다.

“한산하네요.”

“아…. 네, 오늘따라 유독 그렇네요.”

박 관장이 재하의 말에 약간 어색한 태도로 웃으며 말했다. 이상하다고 여기면서도, 재하는 두 번 묻지 않았다. 그냥 고개를 짧게 끄덕인 후 텅 빈 샤워실에서 씻고 난 뒤 귀가했다.

인사치레 건넨 말일 뿐 이유 따위야 아무래도 좋았다. 전에도 그렇게 남에게 관심이 많은 성격은 아니었지만, 언젠가의 그날을 기점으로 그런 점이 더 심해졌다.

이제 아예 바로 옆에서 누가 죽어 간다고 해도 시계나 쳐다보며 다음 일정을 준비하기 위해 자리를 뜰 것만 같았다.

그러나 이재하는 제 그런 점을 굳이 고칠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런 변화가 좋다거나 마음에 들어서가 아니라, 고칠 여유가 없었다는 게 맞을 것이다.

마음이 부산했다. 생각이 시끄럽고 늘 소음에 갇혀 있는 기분이 들었다. 조용한 밤에도 이재하의 베갯잇에는 소란이 묻어 나왔다.

덕분에 잠을 못 잔 나날이다. 재하는 약간의 현기증을 느꼈다. 체육관을 나오니 해가 쨍했다. 햇빛 때문에 일어난 현기증에 멍하게 두 눈을 깜빡이다가 차에 올라탔다.

부드럽게 출발한 차는 평창동으로 향했다. 그날은 그렇게 러트기 다음 날의 후유증을 운동으로 털어버렸다.

귀가한 이재하는 계속 멍한 상태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창밖을 보니 그토록 쨍했던 해가 노을의 흔적만을 남긴 채 지고 있었다.

끼니를 챙길 생각은 없었는데 목이 말랐다. 주방으로 가 물을 꺼내 마셨을 때다. 왠지 모르게 뺨이 축축했다. 시야가 일렁거려 뭔가 싶던 순간이었다.

곧이어 그것이 눈물이라는 걸 알았다. 주방의 아일랜드 식탁을 짚은 채로 이재하는 물병을 든 손으로 뺨을 조금 훔치다가 말아 버렸다.

눈물이 끊임없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제 눈물인데도 왜 우는 건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나중에는 그냥 눈물이 나오거나 말거나 할 일을 했다. 손수건 하나가 푹 젖을 정도로 울고 나자 눈이 빨갛게 충혈되고 눈두덩이 조금 부어 있는 걸 발견했다.

“…붓는구나.”

모친의 장례식에서도 한 방울 뚝 흘리고 말았던 눈물이라 제가 그렇게 많이 울 수 있는지도 몰랐었다.

그러니 그렇게 울고 난 뒤의 변화 또한 몰랐다. 울면 눈이 붓는 체질이라는 걸 이번 일로 기억해 두었다.

다음에 또 울면 붓지 않게끔 조치를 취해 놔야 할 것 같았다. 골격이 장대하고 무표정 외에는 잘 어울리지도 않는 알파가 울어 부은 눈으로 돌아다니면 그 꼴이 해괴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이스팩을 얇은 면으로 감싸 눈에 가져다 댄 뒤 그대로 거실 소파에 누워 버렸다. 판판한 배 위에 양손 깍지를 껴 올려 둔 다음 아주 조금 더 울어 버렸다.

눈물이 나오니 시원하기는 한데 기분이 좋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이재하.

재하야.

이재하.

누군가의 음성이 계속해서 재하의 주변을 떠돌았다. 빌어먹을. 욕이 나왔다.

승진 축하 인사를 건네지 못했다. 딱 한 마디를 생각하느라 나흘 내내 잠을 설쳤었는데.

아쉽기도 하고 섭섭하기도 했다. 웃기는 일이었다. 섭섭하다니 대체 왜. 바라는 게 없다며. 원하는 것도 없고 그저 다 해 주고만 싶다며.

이재하는 제 몰양심을 비웃었다. 아이스팩에 가려진 두 눈에서는 뜨거운 눈물방울이 솟았다. 입꼬리는 저 자신을 비웃느라 잔뜩 올린 채였다.

지금 바로 이 꼴이야말로 해괴하기 그지없없었다. 저를 비웃는 것으로 지난밤을 반추하지 않으려 최선을 다했다.

닭의 목을 비틀어도 새벽은 온다는 걸 철저히 부정해 봤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이재하 하나가 지금 죽을 듯 힘들고 아파도, 지구는 자전하고 중력의 무게는 여전히 9.8N이다. 저에게만 모든 무게가 과부하 걸린 것 같다는 느낌이 드는 건 착각에 불과했다.

여전한 세계 때문에, 이재하는 중력에 눌려 죽었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버려야만 했다. 저 하나에게만 그 힘이 강해진 게 아니라니. 이 고통이 남들에게는 특별하지 않다니. 이렇게도 저를 찢어죽일 듯 구는데도 말이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흉골이 뻐근할까. 누가 짓누르듯 심장이 아플까.

이재하를 이곳에 묶어 두는 중력 때문에 아픈 게 아니라면, 대체 그 고통들은 어디서 오는 걸까.

“…….”

거기까지 생각한 재하는 그냥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눈 위에 올려 두었던 아이스팩이 그대로 바닥에 떨어졌다.

꼴 보기 싫어 줍지도 않고 서재로 들어가 버렸다. 일이나 해야지. 불면이 긴 꼬리를 늘어트리며 재하의 서재로 따라올 기세였다.

말리지 않았다. 혼자인 이재하 곁에 오늘 밤 내내 함께 있어 줄 이는 그것뿐이었으니까.

* * *

“이, 가증스러운 자식!”

비단 폭이 쪽 찢기는 듯한 목소리였다. 김란희가 신경질적인 비명과 함께 현관에 들어서던 재하의 뺨을 내리쳤다.

“엄마!”

이재호가 달려와 김란희의 손목을 잡았다. 그녀의 두 눈에서 시퍼런 아귀 불이 번뜩였다. 그녀는 손목을 빼내어 이재호의 등짝도 후려갈겼다.

“정신 차려! 너 보고도 모르겠어! 저게 지금 회사 집어삼키려는 거 아니야!”

그 소란 속에서 이익형은 보이지 않았다. 집으로 부르길래 왔더니 없는 걸로 봐서 김란희가 이익형을 통해 저를 부른 것이 아니면 이익형이 김란희 뒤로 숨어 제게 하고 싶은 말을 하는 걸 수도 있겠다.

두 가지 가설 중 추가 기울어지는 쪽을 가늠해 보려 노력하며 이재하는 악다구니를 쓰는 김란희를 바라보았다.

“너! 이, 배은망덕한! 내가 너한테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우리 재호한테 해를 못 끼쳐서 안달이야!”

“엄마, 그만하라니까!”

이재호가 김란희의 어깨를 붙들며 말리고 있었다. 웃기지도 않는 촌극 앞에 서서 이재하는 잠시 무언가를 생각해 보았다.

이재호한테 해를 끼쳤다고? 말이 이상했다. 제가 건든 것은 이재호가 있는 전자 쪽도 아니었다.

아무리 뒤로 공격해 들어간다고 해도, 유신의 자금줄인 회사 몇 개를 흔들어 놓는 일을 들키지 않을 수는 없었다.

꼬리가 잡힐 만큼 허술하게 일을 처리하지는 않아도, 김란희라면 이재하가 그런 건 아닐까 하는 심증 정도는 있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분노를 가장하여 뺨을 올려붙인 뒤 이재하의 반응을 떠보는 것이겠지. 그러나 그것이 바로 이재하가 원하던 거였다.

장태건이 유신을 뿌리째 흔들어 놓고 싶어 한다는 걸 이익형과 김란희가 몰랐으면 했다. 저에게로 주의를 돌린다면 장태건의 행동들은 시간이 지나 돌이킬 수 없는 시점에서 발각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저로서는 딱히 억울하지 않은 일이었다. 개중에는 제가 한 일들도 더러 있었기 때문이다. 이재하가 원하는 것은 장태건이 원하는 걸 이루어 주는 것이다.

거기에 유신의 몰락이 있을 뿐이었다.

“아버지는 자리 비우셨나요?”

“너, 너…! 여기서 할 말이 지금 그게 다야?!”

김란희가 파들거리며 화를 냈다. 이재하는 김란희의 서슬 퍼런 두 눈에 속지 않았다. 김란희는 지금 연기를 하는 중이었다.

뺨을 올려붙이고 그를 원색적으로 비난한 뒤, 이재하의 얼굴에 떠오른 실마리를 읽어 내 정말 그가 벌인 짓인지를 알아보려는 것이다.

아주 얕은수지만 연기 하나는 수준급이었기 때문에 웬만한 이들은 모두 속수무책으로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가 간과한 것이 있다. 이재하 역시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밑에서 자란 그녀의 ‘아들’ 중 하나라는 것이다.

그녀의 성격과 행동의 이유에 대해서 같은 집에서 살아온 세월이 긴 만큼 유추할 수 있는 근거가 풍부했다.

이재하가 그녀를 잘 알기에 연기라는 걸 눈치챈 것이지, 차라리 배우가 되었으면 대성했을 정도의 실력이었다. 그로 인해 다소 눈치가 부족한 진짜 아들, 이재호 쪽은 그녀에게 끔뻑 속아 넘어간 것 같았다.

“엄마, 이러다 쓰러져. 큰일 나. 들어가 계세요. 내가 얘기할게.”

이재호는 짐짓 모친을 무척이나 아끼는 효자 아들 노릇을 하고 있었다. 김란희는 그런 제 친아들을 아주 짧게 흘겨보았다. 이재호가 그렇게 말한 이상 연기가 아니라면 들어가지 않고 버틸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아들의 등쌀에 밀린 김란희가 제 방으로 들어가는 동안 이재하는 멀거니 벽면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시간 낭비 같았기 때문이다.

정작 저를 부른 이익형은 보이지도 않는 것이 어이없기도 했고.

이익형이 집에 없는 이유야 뻔했다. 김란희를 통해 이재하의 생각을 떠본 뒤, 그게 진짜라면 제가 그랬던 것처럼 이재하의 뒤를 칠 준비를 할 것이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부 이원웅의 비상한 머리는 이익형보다는 이재하에게로 대물림되었다. 살아생전 조부가 이익형을 신뢰하지 않고 이재하에게만 애정을 쏟았던 것도 그 때문이다.

덕분에 이익형이 배후에 펼칠 진 정도는 파악이 가능할 것이다. 그래서 덤빈 것이기도 했다.

목표에 집중하기는 하지만 가능성이 없으면 몸을 움직이지 않는 성격인지라 유신을 무너트리는 것이 아예 불가능했다면, 차라리 장태건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빌고 그 앞에서 참회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깟 말 한마디는 모친을 잃고 장한에서 들개처럼 묶여 자란 장태건에게 위로가 되지 못할 거라 생각했다.

유신을 흔들 수 있는 방법이 있고, 그럴 힘이 있다면 차라리 거인의 발목을 베어 내어 그에게 바치는 편이 훨씬 나았다.

진심이라는 건 상대에게 들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효용이 있는 것이다. 그저 미안하다고 목 터져라 외치는 것만으로 용서받을 수 있을 거라 낙관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재하는 이 모든 것이 제 청혼 선물이라고 여겼다. 장태건은 결혼할 때 가져간 예물 시계를 단 한 번도 손목에 차고 나가지 않았다.

막연하게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렇다면 원하는 걸 주고 싶었다. 그리고 유신은, 장태건이 정말로 원하는 것일 테다.

다 망한 결혼 생활이지만 선물 정도는 제대로 하고 싶은 것이 이재하의 마음이었다. 상대가 이재하의 고생을 알든 모르든 상관없었다.

어떤 알파가 배우자의 손에 끼워 줄 다이아 반지를 얼마나 고생해서 구했는지 상대가 알길 원하겠는가. 오히려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재하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사이, 김란희가 방으로 들어간 걸 확인한 이재호가 낯빛을 굳히고 이재하의 팔뚝을 잡아끌어 현관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가만히 끌려 나와 주긴 했지만, 정원 잔디밭까지 끌고 가자 슬슬 짜증이 났다. 이재하는 이복동생에게 잡힌 팔목을 빼내며 물었다.

“왜.”

“야, 너는 오란다고 오냐? 요즘 너 때문에 집안 꼴 말 아니거든?”

이재호는 금방이라도 모친이 뛰어 내려와 저를 나무라면 어쩌지, 하는 얼굴로 뒤를 흘끗거리면서도 재하에게 뭔가 말을 하고 싶은 듯했다. 작금의 상황이 어쩐 일인지 파악하려는 투는 아니었다.

아마 이재하가 유신을 쓰러트리고 싶다고 지금 말한다고 해도 이재호는 별 상관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것이 김란희의 불행한 점이었다. 그녀가 원하는 것을, 그녀의 아들은 원하지 않는 것이다.

어찌 되었건 지금 중요한 것은 오늘 싸움은 뺨 한 대를 내주고도 이재하의 승리로 돌아갔다는 점이다.

김란희가 부단한 노력 끝에도 이재하의 심중을 파악하지 못한 것과 반대로, 이재하는 김란희의 수를 읽었다. 그녀가 이재하를 떠본 것 자체가 아직 일이 돌아가는 정황에 대해 완전히 파악하지 못했다는 뜻이다.

아직은 완전히 들킨 것은 아닌 듯했다. 차후는 몰라도 지금 당장은 이익형까지 상대하며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재하는 자잘하게 주름이 생긴 재킷의 팔뚝 부근을 툭툭 쳐 정리하며 이익형 일가가 사는 집을 흘끗 바라보았다.

집이 아깝긴 했다. 조부가 모친을 위해 선사한 땅에 지어진 집이니까. 그녀를 추억할 수 있는 것들이 별로 없어 아쉬웠다.

나중에라도 집 정도는 제 명의로 해 둘까 싶어졌다. 이익형과 김란희를 내쫓는 상상을 해 봤지만 마음에 딱 내키는 것은 아니었다.

이재호가 다시금 인상을 찌푸리며 말했다.

“너 진짜 요즘 뭐 하고 돌아다니는데. 나한테만 말해 봐. 소문 안 낼게.”

널찍한 시선으로 저택을 훑고 있던 재하는 스륵 눈알만 굴려 그런 동생을 바라본 뒤 입을 열었다.

“너 아직도 연예인 쫓아다니냐.”

“뭐? 아니거든! 아, 그냥 투자한 영화 괜찮게 풀렸길래 축하 파티 몇 번 나간 정도라고….”

이재호는 억울하다는 얼굴을 했지만 찔리지 않은 기색은 아니었다. 잘하라고 오랜 시간을 인수인계에 할애했던 전자는 팽개치고 영화 쪽에 한 발을 걸치고 있는 걸 들켜 민망하단 얼굴이었다.

재하는 시큰둥하게 말했다.

“투자자 붙여 줄 테니까, 엔터 쪽 회사 하나 차려 봐.”

“…뭐?”

“알아들었잖아. 간다.”

“뭐? 야!”

그대로 돌아서 대문으로 향하는데, 이재호가 그게 무슨 말이냐고 재하의 등 뒤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쳤다. 대꾸해 주지도 않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로 그대로 집을 떠났다.

투자자를 붙여 준다는 건 결국 이재하 본인이 투자자가 되겠다는 소리였다. 이재호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전자 쪽에 흥미도 없는 듯하고, 본인 하던 엔터 쪽에는 꽤 보는 눈이 있는 듯하니 아예 정말 제 회사로 꾸려 주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재호의 성격상 영화사보다는 에이전트 쪽이 나을 것이다. 감독보다는 배우 보는 눈이 또렷하다는 게 이재호에 대한 평이었다.

유신이 굴리기에는 아무리 대형 기획사라고 해도 중소기업이나 다름없어 얼쩡거리지 못한 듯했다.

이재호가 감독을 보고 투자한 영화는 망하는데, 배우를 보고 투자한 영화는 성공 확률이 높았다. 그럼 아예 에이전트를 차려 주는 게 나을 성싶었다.

이재호의 사이즈는 딱 그만한 회사이니, 줄줄이 적자가 나고 있는 전자 쪽을 맡는 것보다 나을 것이다.

아직은 몸뚱이가 제일 큰 전자를 건들 수는 없는 일이라 자금줄부터 흔들고 있는데, 때가 되면 김란희의 오빠나 이익형의 멍청한 사촌, 즉 재하의 숙부 중 하나에게 전자를 맡기고 그때부터 비리를 털면 될 것 같았다.

이재호에게는 그 전에 기획사를 차려 줄 계획이었다. 이재호도 불만은 없을 것이다. 애초에 모친의 욕심이 문제지 그릇과 꿈 자체가 소박한 성격이었다.

이재하가 유신에게 애증을 갖는 것처럼 이재호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건 따로 말하지 않아도 공유되는 형제의 정서와 같았다.

어찌 되었건 아직은 조금 먼 일이었다. 대문을 걸어 내려온 재하는 높이 12m는 되는 기다란 담벼락 아래 주차된 제 차의 문을 열었다.

김란희의 뒤에 숨어 이재하를 떠본 이익형이 어이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시동 버튼을 눌렀다. 세단이 우웅, 하고 묵직한 엔진음을 내며 헤드라이트를 깜빡였다.

차는 그대로 길을 따라 미끄러져 내렸다. 밤늦은 성북동은 조용했다. 언덕을 내려가는 길엔 할아버지 한 분이 뒷짐을 지고 산책하듯 길을 오르고 있었다.

투박한 차림과 걸음이었지만 기업의 회장 정도라도 이 동네에서는 저렇게 친숙한 분위기를 내고는 했다. 재하는 문득 제가 있는 곳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장태건이 걸어왔던 길에 대해 생각했다. 기업형 조폭이라도 어쨌든 재계 서열 안으로 들어온 이상 유복하게 지내도 이상할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런 이가 피죽도 못 얻어먹은 들개 꼴로 자랐다는 사실을 이재하가 알고 있다는 걸, 장태건 본인은 몰랐으면 했다.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이유 중 하나였다. 눈알이 뻑뻑했다. 지난번 시원하게 운 뒤로 눈물이 또 나오지는 않았다.

복싱을 한 뒤 어깨의 열을 식히려 얼려 두었던 아이스팩을 눈 위에 올려 두었던 그날은 홍수가 난 듯 쏟아지더니, 이제는 수문 잠근 댐처럼 단 한 방울도 스며 나오지 않고 있다.

어떻게 하면 또 울 수 있을까. 그때는 무척 시원했었는데. 이재하가 그런 생각을 할 무렵이었다. 전화가 오길래 핸들의 버튼을 눌러 아무 생각 없이 전화를 연결했다.

“여보세-.”

- 이사님!

정길의 목소리였다. 놀란 재하는 저도 모르게 브레이크를 밟았다. 빠앙-! 뒤편에서 노란색 컨버터블이 창문을 내리고 중지를 치켜들며 지나갔다.

재하는 마른 입술을 핥으며 물었다.

“무슨 일 있습니까, 정길 씨.”

- 아, 그게…. 아니, 아닙니다. 전화 받으시는 거 확인했으니 됐습니다.

정길은 드물게 당황한 말투였다. 옆에서 누군가 정길더러 미쳤냐고 소리를 치는 것이 들렸다. 목소리가 무척이나 굵은 것을 보아 명순인 듯했다.

재하는 깜빡이를 틀고 2차선 갓길에 정차한 뒤 다시금 물었다.

“무슨 일인지 저도 알고 싶습니다, 정길 씨.”

후미에서 오던 차량이 갑자기 멈춰 선 재하에게 빵빵거리며 옆 차선으로 이동하는 것이 보였다. 그다음 차도 마찬가지였다. 재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원래라면 아무 데나 주정차를 하지도 않는다. 이재하는 다분히 상식적인 인간이었고, 애초에 자잘한 법규를 지키지 않아 언론에 떡밥을 주는 짓거리에 환멸을 느끼는 재벌 3세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나머지 있는 집 자식들이 어떻게 사는지는 알 바 아니지만, 이재하는 그러했다.

그가 그렇게 뚝심 있게 기다리는 동안, 머뭇거리던 정길이 겨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어진 말은 심장이 뚝 떨어질 것 같은 소리였다.

- 그게…. 형님께서 많이 다치셨습니다.

‘미친 새끼야, 이사님 걱정하신다.’ 통화감이 조금 먼 곳에서 명순이 버럭 소리 지르는 것이 들렸다. 그러자 정길이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갔다.

- 아, 많이는 아니고…. 다치신 건 맞는데 병원 가자는 거 싫다하시더니 지금 혼자 차 끌고 사라지셔서, 혹시나 싶어 연락드렸습니다.

삐이- 하는 이명이 귓가에 몰아치는 기분이었다. 이재하는 두 번 생각하지 않고 기어를 변속했다.

차가 움직일 준비를 마치지 않았는데도 액셀을 세게 밟는 바람에 엔진이 공회전을 하며 큰 소리를 내다가 그대로 빠르게 튀어 나갔다. 제로백이 빠른 기종이라 그런지 재하의 차는 막힘없이 앞으로 치고 나갔다.

운전도 정석대로 하는 편인지라,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칼치기까지 해가며 차를 몰았다. 정길이 제게 전화한 이유가 있을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재하는 20분 정도의 거리인 성북동과 평창동 사이를 단 5분 만에 주파했다. 그 짧은 거리에 위반한 신호와 규정 속도만 해도 어마어마할 것이다.

마지막 장창식의 저택으로 올라가는 언덕배기에서는 굳이 할 필요 없는 기어까지 변속한 뒤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그러고는 대문 앞에 차를 버리듯 주차한 뒤 바로 뛰어 올라갔다. 격한 움직임에 늘 깔끔하게 넘겨 둔 머리가 살짝 흐트러졌지만 인지하지 못한 상태였다.

별채로 향하는 동안 이재하의 구둣발 아래 서리 맺힌 잔디들이 서걱서걱 밟혔다. 별채로 들어온 지도 벌써 여러 계절이 지나 다시 처음 이곳에 들어왔던 계절로 회귀하고 있었다.

속 안에서 폭풍이 이는 기분이었다. 본부장으로 승진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제일 기뻤던 것은, 장태건이 오늘과 같은 상황에 놓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현장 일과는 멀어지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데 다쳤다니.

‘내가 뭐 때문에, 왜 이런 짓까지 하고 있는데.’

오래간만에 화가 끓어올랐다. 그렇게 만든 새끼들이 누구든 상관없이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사회에서 매장시켜 줄 것이다.

감히 누굴 건드려. 아까워서 말 한마디 없이 옆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그런 사람을 아직도 진창에서 구르게 만들다니.

이재하는 장창식을 그냥 둬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했다. 태건의 조부이고, 맺힌 일이 있다면 태건이 직접 풀어내는 것이 그의 복수에도 좋을 거라 생각해 건들지 않았었는데 오판이었다. 진작 작살내 놓을 걸 하는 후회가 들었다.

정길의 말로는 이쪽으로 향한 듯한데, 오지 않았으면 어쩌나 싶었다. 재하는 그대로 뛰어 들어가 현관문을 잡아 뜯듯이 열어젖혔다. 집 안에서는 아무런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별채를 관리하는 사용인들은 보통 오후 4시에 퇴근하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하….”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희미해졌던 이성이 돌아오자, 장태건이 굳이 이 집으로 올 리는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가 한 가지 머리를 스치는 것이 있었다. …장창식을 찾아간 것일까. 부상 당한 이유가 장창식과 연관이 있다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별채부터 뒤져 볼 것이 아니었다. 다친 사람이 굳이 제가 머무는 곳으로 올 리가 없는데 착각한 것이 민망하기도 했다.

문을 닫고 등을 돌려 장창식이 기거하는 저택의 본채로 가려던 참이었다. 뒤쪽에서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

별채 저택의 후미는 담벼락과 맞닿아 있어 그 틈이 좁았다. 성인 남성 하나 정도는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지만 조경을 따로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그냥 비워 둔 곳이었다.

별안간 소리가 들리기에는 수상한 곳이라는 뜻이다. 이재하는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무언가 둔탁한 것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재하는 벽에 붙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장 실장!”

장태건이었다. 담벼락과 별채의 벽을 양손으로 짚은 채 발밑에 있는 것을 죽어라 밟고 있는 이는.

재하는 놀라 그를 불러 놓고도 다가가지 못한 채 주춤거렸다. 그러는 사이 장태건은 제 밑에 납작 엎드린 이의 머리채를 잡고 질질 끌고 나왔다.

이미 꽤 맞았는지 얼굴이 벌써 부풀어 올라 있었다. 누군지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장태건은 재하의 부름에는 대답 없이 계속해서 상대를 곤죽 내는 중이었다.

아예 멱살을 잡고 끌어 올린 뒤 반대쪽 팔을 위로 뻗어 크게 선회하여 따귀를 갈겼는데, 그 속도와 소리가 어마어마했다.

그 밑에 깔린 이의 덩치가 작은 편도 아니고, 오히려 재하와 엇비슷하거나 조금 작아 보였는데도 어린아이와 어른의 싸움처럼 보였다.

기다란 팔을 추켜올린 뒤 연타로 따귀를 갈기는데, 철썩 소리가 나는 것이 아니라 퍽, 하고 주먹에 맞은 소리가 났다. 아마도 고막은 한참 전에 터졌으리라.

그러나 상대는 이미 의식을 잃은 지 한참은 된 듯싶었다. 검은색 점프슈트를 입고 있는 데다가 남의 집 담벼락 사이에서 발견되었으니 맞아도 싼 일을 당한 것 같기는 했다.

재하는 그걸 가만히 보다가 정길에게 태건이 여기에 있다는 메시지를 남겼다. 그러고 난 뒤 핸드폰을 홀드시키려던 순간이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다가가 태건의 어깨를 잡았다.

“…피 나잖습니까.”

“아, 귀가하셨어요? 좀도둑 하나 잡는다는 게.”

장태건은 그제야 이재하를 발견했다는 듯이 말했다. 주먹에는 피가 잔뜩 묻어 있었는데 장태건 본인의 것 같지는 않았다. 대신 언젠가의 그날처럼 하얀색 드레스셔츠가 핏물에 푹 젖어 달라붙어 있었다.

피라는 것이 단백질이 많이 섞여 있어 물보다 빨리 마르고는 한다. 마른다기보다 혈액 성분 때문에 쉽게 응고되는 것인데, 아직까지 저렇게 젖은 채로 복부에 달라붙어 있다는 얘기는 출혈이 계속된다는 소리다.

이재하는 저도 모르게 표정이 허물어질 것 같은 걸 꾹 참았다. 심적으로 크게 동요한 나머지 장태건에게 제 마음을 들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낯빛을 굳힌 채로 예의 그 가면을 쓴 재하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문이 막혔다. 또다시 다친 몰골을 보니 속이 울렁거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태건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 피 묻은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정길이한테 나 여기 있다고 그새 일렀어? 전화 오고 지랄인데, 지금.”

다시 들어 보니 그의 품 안에서 진동음이 옅게 들렸다. 재하의 메시지를 받고 정길이 태건에게 연락하고 있는 듯했다.

재하는 얼른 들어가서 치료를 하자고 해야 할지 병원으로 안내부터 해야 할지 알 수 없어 망설였다.

지금 그에게 치료를 권하는 것이 표면적인 부부 사이에 할 수 있는 걱정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제 파리한 안색을 이상하게 볼까 염려스러웠다.

그사이 장태건은 쓰러진 남자의 의식을 깨우려는 건지 정원 한편에 있던 물 호스를 끌고 와 레버를 돌린 뒤 호스 끄트머리를 반쯤 막은 채로 압력을 가하여 남자의 얼굴에 세찬 물을 쏟아부었다.

“야, 변태 새끼야. 일어나 봐.”

“…흐억-! 헉…!”

세찬 기침과 함께 일어난 남자는 정신을 못 차리고 물에 젖어 어푸푸거렸다. 이재하는 지금이라도 당장 장태건을 끌고 상처를 보자 재촉하고 싶은 걸 참느라 주먹에 짧은 손톱이 박힐 정도였다.

“다 주무셨어? 왜 남의 집 담벼락은 기어 올라간 건지 말할 기분이 좀, 나?”

“흐, 흐익, 허억-.”

“좀도둑 새끼가 사람 말을 씹네.”

피 묻은 한 손에는 물 호스를 들고, 다른 손에는 담뱃갑을 꺼내 갑의 뒷부분을 가슴팍에 툭툭 쳐 한 개비를 올린 장태건이 그걸 입에 문 순간, 이재하의 인내심도 끊겨 버렸다.

“치료부터 합시다.”

다가가 호스를 잡았다. 물이 팍 튀며 이재하의 뺨에도 물방울 몇 개가 묻었지만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장태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담배를 문 채 제 손에서 호스를 뺏어 간 재하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였다.

“나 아직 퇴근 전이라 좀 바쁜데.”

그렇게 말하는 장태건은 무표정이었다. 전처럼 표정이 없는 가운데 알 수 없는 장난기나 웃음을 감추는 느낌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것도 읽을 수 없는 무표정이었다.

재하는 초조함에 입술을 달싹거렸다. 시간을 더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았다. 저도 모르게 한 발자국 다가가자, 태건이 한쪽 눈썹을 슬며시 올렸다.

“정길 씨 이쪽으로 불러서 저 사람 처리하게 하고 장 실장은 나랑 치료부터….”

“모정길 이름이 왜 그렇게 애틋해. 둘이 붙어먹는 사이야? 이야, 나도 끼워 주라.”

무슨 소리를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되지 않아 가만히 말을 멈추고 그를 바라보자, 물고만 있던 담배에 불을 붙이며 담뱃대를 검지와 중지 사이로 쥔다.

그의 질감 좋은 입술이 그 검지와 중지에 의해 살포시 눌렸다. 태건은 볼우물이 팰 정도로 빨아들이느라 한쪽 눈이 가늘어진 채로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빛에서 알 수 없는 무언가를 읽을 수 있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뒷걸음치려던 걸 간신히 멈췄다. 왜 거기에 들어차 있는지 알 수 없을 만큼 음습하고 어두운 빛이었다.

“왜. 우리 사이에, 치료는 되고 떼씹은 안 돼?”

“…….”

“남남으로 살자며. 내가 이사님이랑 생판 남인데도, 치료만 해 주고 씹 뜨는 데는 안 끼워 줄 거라며.”

입술 한쪽을 일그러트린 장태건은 재하가 있는 곳의 반대쪽으로 연기를 뱉더니 이내 한쪽 손으로 입술에 물려 있던 것을 빼냈다. 그러고는 다시금 담뱃대를 입에 무는 행위를 반복하고 있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그런 그의 복부에 여전히 질척하게 젖어 있는 흔적을 바라보았다.

그의 피 묻은 구두, 바지 밑단에 튄 검은 자국, 그의 뒤편에서 피와 물에 젖어 발작하듯 떨고 있는 남자. 담배 연기와 장태건. 이재하는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정길, 모정길 씨랑은 그런 게 아닌…. 남이라고 해도 다친 사람 치료해 주는 건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자 그가 피식 웃었다. 정말 웃기는 말을 들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글쎄. 난 반대인데.”

“…….”

“생판 남이랑은 씹도 뜨고 할 거 다 해도.”

“…….”

“치료는 안 돼.”

거기까지 말한 장태건이 그대로 몸을 돌리더니 축 늘어져 벌벌 떨고 있던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일으킨 다음 뺨에 담뱃불을 뭉갰다.

“으아악-!”

“아저씨, 조용히 좀 해. 이웃 신고 들어오면 아저씨가 집집마다 떡 돌리면서 사과할 거야?”

심드렁하게 지껄인 장태건은 남자의 머리채를 그대로 끌고 나갔다. 대문 쪽으로 향하려는 듯해 놀란 이재하가 그 뒤를 따랐을 때였다.

저 멀리 본채 테라스에서 누군가 그들을 보고 있었다. 장창식이었다. 재하는 낯빛을 굳혔다. 장태건도 그쪽을 발견한 듯했다.

장태건이 크게 소리쳤다. 짐승이 우는 듯한 목소리였다.

“아저씨, 저기 봐. 웬 영감도 시끄러워서 깼잖아. 빨리 죄송합니다, 해야지.”

머리채가 잡힌 채로 바닥에 질질 끌려가며 잔디에 파인 홈을 만들어 내던 남자의 뒷덜미를 잡고 쑥 일으킨 장태건이 그의 뒤통수를 푹 눌러 장창식을 향해 인사하게끔 만들었다.

머리 뒤에서 어마어마한 힘으로 누르자 버티기 힘들었던 건지 남자는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져 고통을 호소했다. 덜덜 떨며 바지 사이 색이 진해지는 걸로 봐서 실금이라도 한 듯했다.

그때 별채 대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명순이 정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는 이재하를 보고는 난감한 얼굴을 하더니 고개를 꾸벅였다. 재하 역시 말없이 고개를 살짝 까딱였다.

“형님,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명순은 곧장 다가와 장태건의 발밑에 엎드려 있던 남자의 겨드랑이 밑에 손을 넣어 일으킨 뒤 끌고 나갔다.

꽤 키가 크고 덩치가 있는 남자를 장태건이고 명순이고 무라도 뽑듯 아무렇지 않게 일으키는 것이 이상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명순이 남자를 데리고 나가자, 가만히 본채 저택 2층 테라스에서 그걸 보고 있던 장창식이 등을 돌려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였다.

장태건은 그쪽을 보다가 고개를 돌려 이재하를 바라보았다.

“아직도 이런 일은 못 견디겠어?”

“…….”

그가 무얼 말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는, 이런 일은 두 번 더 못 견딜 것 같네요.’

그렇게 말하던 제 목소리가 재하에게도 뚜렷했다. 다 버리고 한 가지만 보자고 다짐했던 날이었다.

재하가 대답 없이 정원 위의 나무처럼 서 있자 장태건이 담배 한 대를 더 꺼내 입에 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장 실장.”

“안 견뎌도 되게 만들면 되지.”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 미간을 작게 찌푸렸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태건 쪽으로 반 발자국을 옮겼다.

무슨 뜻이냐고 묻고 싶었다. 치료를 꼭 받으라는 말도 하고 싶었다. 장태건은 기회를 주지 않고 등을 돌려 걸어 나갔다. 맺힌 것도, 머뭇거릴 것도 없는 듯 보이는 발걸음이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그 뒤를 쫓았다. 명순이 왔으니 태건도 상처를 치료하긴 할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그의 뒤를 더는 쫓으면 안 될 일인데도 발이 저절로 움직였다.

그때였다. 그대로 정원을 내려가 대문으로 향하던 장태건이 갑자기 멈춰 섰다. 재하는 움찔 놀라 그 자리에 서 버렸다.

가만히 서 있는 장태건의 등은 무얼 말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고요해 보이기도 하고 적막한 동시에 무척 시끄러워 보이기도 했다. 한쪽 손을 바지춤에 찔러 넣은 채로 가만히 서 있던 장태건은 갑작스레 대문을 쾅 걷어찼다.

반동에 튀긴 철제 대문이 부딪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곧이어 소음이 멎자, 장태건은 짐승이 그르렁거리듯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실장은, 씨발….”

“…….”

“승진한 지가 언젠데.”

그러더니 그대로 큰 키를 살짝 숙여 대문에 닿지 않게끔 나가 버렸다. 대문이 아무리 커도 덩치가 있으니 습관처럼 굳어진 자세인 듯했다.

“…….”

그가 나가 버린 독일제 대문의 목재로 된 부분이 우그러져 있었다. 이재하는 그 흔적을 한참이나 바라보았다.

대문 밖, 사륜차의 엔진음이 멀어질 때까지 말이다.

* * *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정길과 명순은 태건이 대문 밖으로 나오자 뒷좌석 문을 열어 준 다음 저희들도 올라탔다. 그러고는 차마 출발하지 못한 채 가만히 있었다.

“여기서 노숙할 거야? 가, 빨리.”

태건이 그런 그들을 향해 고저 없이 말했다. 얼핏 들어서는 감정을 파악할 수 없는 목소리였지만, 오랫동안 그를 모신 명순과 정길은 장태건의 기분이 그다지 좋지 않다는 걸 바로 알 수 있었다.

트렁크에 기절한 남자를 쑤셔 넣듯 태웠던 명순이 손에 묻었던 핏물을 물티슈로 닦으며 정길을 흘끗 보았다. 정길 역시 룸미러로 뒷좌석을 바라보다가 그런 명순과 눈이 마주쳤다.

뒷좌석에서 태건의 짜증 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눈알 굴리지 말고 출발하세요, 들.”

“…예, 형님.”

정길이 대답하며 기어를 변속했다. 차는 그대로 쭉 뻗어 나아갔다. 정길은 혹시나 사이드미러에 재하의 모습이 걸릴까 연신 흘끔거렸지만 높다란 담장 아래로 툭 튀어나온 인영은 없었다.

가뜩이나 덩치가 꽤 있는 남자 셋이 탄 터라 차가 묵직한데, 때아닌 무거운 침묵까지 더해지자 좋은 차 주제에 엔진이 제힘을 못 내는 듯했다.

평창동 언덕을 내려오면서 차 안에는 그런 엔진음 외에는 들리지 않았다. 룸미러로 감히 뒤돌아볼 수도 없어 정길은 뒷유리가 막힌 냉동 탑차처럼 사이드미러만 보며 운전했다.

그러나 우직한 명순은 더 참을 수 없는지 입을 열었다.

“형님, 병원 가셔야 합니다.”

말을 꺼내고도 명순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잠시간 대답이 없던 태건이 툭 내던지듯 말했다.

“영감 불러. 앵알거리면 출장비 더 준다 하고.”

태건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무감하게 말했다. 여전히 어투에 고저가 없어 감정을 읽기 어려웠다. 이럴 때야말로 조심해야 한다는 걸, 명순과 정길은 뼈저리게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부르는 왕진 의사, 김 원장의 전화번호를 검색하며 명순은 짧게 대답한 뒤 메시지를 보냈다.

태건의 상처가 해결되었으니 차는 더 막힘 없이 나아가 장태건이 이재하와 신혼을 보내려고 사 둔 한남동의 고급 빌라 주차장에 멈춰 섰다.

태건은 별말 없이 내렸다. 얼른 벨트를 풀어낸 정길이 따라 내리며 다급하게 말했다.

“저 새끼는 저희가 단도리 하겠습니다. 김 원장님 금방 온다고 하니 조금만 기다리시면….”

“바가지 좀 그만 긁고, 가.”

태건이 무표정한 얼굴로 손을 휘휘 저었다. 명순과 정길은 이미 등을 돌린 그의 뒤에 대고 허리를 숙였다.

빌라의 주차장 현관 보안을 해제한 장태건은 느릿하게 걸어 안쪽으로 사라졌다. 현관 쪽을 흘끗 보던 두 사람은 나지막이 한숨을 내쉬었다.

“또 까이셨나 본데.”

“말조심 좀 해라.”

명순이 정길을 향해 인상을 찌푸렸다. 정길은 쩝, 입맛을 다시며 차 뒤를 돌아 운전석으로 향하다 말고 트렁크를 주먹으로 툭 내려쳤다. 꽤 큰 소리가 지하 주차장을 울렸다.

트렁크 안쪽에서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트렁크 뚜껑 위에 팔을 올려 둔 채로 정길은 명순을 향해 말했다.

“근데 이 새끼 이거, 아까 보니까 오줌 갈겼던데 또 세차해야 하잖아. 요즘 애들은 왜 좀 처맞았다고 질질 싸냐? 야, 명순아. 나는 아무 데나 소변 갈기는 새끼들이 제일 싫다.”

“…저 새끼가 이사님 집 숨어든 거 보통 일 아닐 텐데, 회장님 댁 담벼락 CCTV는 확보했어?”

“했지. 회장님이 친절히 열어 주셨던데. 형님 배 쑤시고 토껴서 이사님 인질로 붙잡고 뭐라도 해 보려고 한 것 같은데, 그게 쉽겠냐고.”

트렁크에 실려 있는 남자는 장창식의 마지막 발악이었다.

제 손으로 이룩한 왕국이라 해도 영생을 살 수 없다면 선위함이 옳을진대 장창식은 인류의 모든 왕이 그러했듯 권력을 놓기 싫어했다.

회장직을 내려놓아야 할 시기가 오자 장창식은 마지막으로 짖어 보고 싶었던 것인지 칼잡이 둘을 고용하여 태건에게 보냈다.

이 바닥 놈들은 아니고 전문적으로 칼을 잡는 놈들 같았다.

좀 더 뒤져 봐야 알겠지만 저런 놈들은 보통 러시아 쪽 여권이나 중국 쪽 여권을 소지하고 있다. 진짜 국적이 그쪽은 아니고, 신분을 사 밀입국한 놈들일 것이다. 돈만 받으면 전문적으로 사람을 쑤셔 주는 선수들이었다.

일이 벌어진 것은 오늘 늦은 저녁때였다. 혼자 차를 타고 나가기 위해 회사 주차장으로 내려오던 태건은 하마터면 변을 당할 뻔했다.

놈들은 태건이 지하 주차장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를 노렸다. 그가 나오자마자 뒤에서 덮친 한 놈이 태건의 팔을 잡고 다른 놈이 회칼로 복부를 쑤신 것이다.

복부를 그대로 내어 준 태건이 칼자루를 쥔 손목을 꺾고 놈을 끌어당겨 넘어트린 다음, 제 팔을 붙잡고 있던 놈의 뒷덜미를 잡아 그대로 업어치기 해 견관절을 탈구시켰다. 놈의 비명이 주차장을 장렬하게 울렸다.

태건이 지하 주차장 한편에 있던 소방 도구함에서 소화기를 꺼내 한 놈의 대가리를 부수는 동안, 나머지 놈은 도주했다.

박명순과 모정길이 태건의 지시하에 건설 하청 업체를 방문한 사이에 벌어진 일이다.

원래 한 명 정도는 운전기사 겸 비서로 붙어 다니는데 오늘은 유독 바빠 둘 다 외부로 나가야 했었다.

어디서 일정이 샌 건지 지하 주차장에 있던 녀석들이 태건을 습격할 동안, 퇴근길을 배행하려던 정길이 돌아온 것이다.

놀란 정길이 차에서 내리자마자, 장태건은 정길이 내린 차의 운전석에 올라탄 뒤 도주한 놈을 쫓았다.

딱 봐도 복부가 깊게 찔렸는데 상관없이 바로 출발해 버린 터라 말릴 틈도 없었다. 장태건이 도주한 놈이 갈 만한 곳을 떠올린 것처럼, 정길도 곧바로 재하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태건을 담그는 것에 실패한 놈은 당연히 다음 타깃으로 이재하를 생각했을 것이다. 그게 장창식의 요구였을 테니까.

뒤쫓아 온 명순과 함께 소화기에 머리가 깨져 쓰러져 있는 놈을 뒤처리한 다음, 평창동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장창식의 짓인 게 분명했다.

“빌어먹을 회장님, 뒤지실 때 재산 싸 가지고 묫자리 들어갈 건가. 왜 그렇게 욕심이 많은 거야.”

차에 올라탄 정길은 품 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형님 차인데 냄새 밴다는 잔소리와 함께 명순이 정길의 입술에 걸쳐져 있던 담뱃대를 부러트렸다.

두 사람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각자 생각하는 것이 깊어졌기 때문이다. 차는 그렇게 그 자리에서 오래도록 출발하지 못하고 있었다.

* * *

정길이 태건을 형님으로 모시기 시작한 것은 태건이 스물셋쯤 됐을 무렵이었다.

고아였던 정길과 명순은 군 면제라 남는 시간 동안 조직에 들어와 허드렛일을 하다가 이제 막 작은 사무소 하나를 맡은 참이었다.

인력 사무실로 위장한 곳은 장한이 작게 돈놀이를 하기에 적당했다. 당시의 장한은 아직 상장하기도 전이었기 때문에 최대한 자금을 당기기 위해 죄 없는 사람들 돈을 걸터먹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사무소의 소장으로 있던 정길은 맡은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사무소에 새로운 소장이 올 거라는 말을 들었다. 하루아침에 부소장 신세가 된 것이 얼마나 억울했던가.

당시의 장한은 건설 회사라기보다는 뒤로 버는 돈이 많았는데, 주로 오피스텔을 개조해 만든 고급 프라이빗 룸살롱을 운영하거나, 다 지은 건물에 유치권 행사를 함으로써 소유주를 장한건설 쪽으로 돌리는 식의 전형적인 건달 집단이었다.

그 사무소 역시 그런 일들을 처리하는 곳 중 하나였다.

장태건의 부친이자 장한식의 장남 장한용은 이렇다 할 실적을 못 내던 처지로, 종로 바닥에서 50전짜리 몇 장으로 장한을 이룩한 부친의 위명에 가려 기를 못 펴던 전형적인 소인배였다.

하는 일이라고는 집안의 폭군으로 군림하는 일뿐이라, 폭력에 시달린 사모님이 목을 맸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새로 온다는 소장은 그런 장한용의 아들로, 명순과는 진작 안면이 있다고 했다.

“다르다니까.”

“달라봤자 도련님이지.”

당시의 명순은 정길을 보며 쯧, 혀를 찼다. 제가 하는 말을 믿지 않는 정길이 마뜩잖은 듯했다.

정길은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고아 출신으로 조직 밑바닥부터 구른 두 사람에게 이제 갓 스물을 넘긴 놈이 형님이랍시고 머리 위에 앉은 꼴이 고까웠다.

명순은 그렇지 않은 듯싶었다. 박명순이 관상을 볼 줄 알아 그러는 건 아니고,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작년 말 박명순의 대가리가 터진 일이 있었는데, 그 일을 수습해 준 것이 도련님이라고 했다.

시내에 폭주족을 구심으로 한 점조직이 생성됐는데, 새벽에 명순이 하청 업체에서 받은 리베이트 자금들을 배달하다가 습격을 당한 것이었다.

일부러 차의 사이드미러를 치고 지나간 뒤, 명순이 차에서 내리자 뒤통수를 가격하고 돈 가방을 들고 튄 모양인데 이걸 그 도련님이 잡아 왔단다.

“점조직을 어떻게 잡냐. 도련님이 형사도 아니고. 그걸 혼자서? 어, 존나 믿겨져. 존나 현실감 쩔어.”

“걔네 아지트 하나하나 다 불 지르고 다니셨단다. 본인 찾아오게끔.”

그렇게 찾아온 폭주족들을 상대할 때는 등을 벽에 붙인 채로 자루가 기다란 도끼만 휘둘렀다는데 등을 빼앗기지 않으니 일 대 다수도 붙을 만했나 보다.

팔뚝 등에 상처가 나기는 했지만 오래갈 상처는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은 것 같아 보였다고 했다.

죽을 수도 있는데 대체 무슨 생각이었냐고 명순이 물어보니, 대답이 간단했단다.

‘영화 보니까 효율적인 것 같던데.’

표정 없는 얼굴에 무감한 어투로 대가리 깨진 명순의 병실까지 찾아온 태건이, 콘솔 위에 오렌지 과즙 100%의 주스 병을 내려놓으며 내놓은 대답이었다.

그날 잃어버린 돈 가방까지 찾아와 명순이 퇴원하자마자 매달아 죽여 버릴 거라고 엄포를 놓던 장한용에게 주었다고 하니, 명순으로서는 큰 은인인 셈이었다.

당시 정길은 장한용의 쓸데없는 지시로 정선 카지노에 빚쟁이 새끼들 몇을 잡으러 간 참이라 나중에야 그 소식을 들었다. 돌아와 보니 고아원 동기인 명순의 대가리가 터져 있었다.

어찌 된 일이냐 물으며 냉장고에 있던 오렌지주스를 꺼내 마시다가 뒤통수를 얻어맞고 말았다. 대가리 터진 놈이 남의 대가리 소중한 줄 모른다고 불평하자 꺼낸 얘기였다. 그 주스란 것도 도련님이 사 온 병문안 선물이라고 했다.

병문안 선물? 고아로 태어나 길바닥에서 자란 정길과 명순에게는 그런 예의라는 것이 없었다. 값싸도 빈손으로 오지 않는 정성 같은 것들을 배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정길은 약간 소름이 돋은 팔을 득득 긁으며, 역시 도련님이라고 생각했었다.

도끼 한 자루로 그 많은 폭주족 새끼들을 와사바리 걸었다고? 정길은 반만 믿었다. 장창식에 장한용. 그 핏줄은 다 그 나물에 그 밥들이었다. 개천에서 용 난다는 얘기는 믿지도 않고, 못난 부모 밑에 잘난 자식 나온다는 건 더더욱 믿지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고아로 자란 모정길이 왜 아직도 그 시궁창에서 썩고 있겠는가. 그러나 장태건은 달랐다.

“너 이 새끼, 한 푼 두 푼 삥땅 칠 때부터 알아봤어. 도둑놈의 새끼.”

장한용은 혁대를 풀어 정길의 뺨을 갈겼다. 제 부인 패던 습관이 부하 직원 처벌할 때도 그대로 나오는 것이었다.

주먹으로 치는 것도 아니고 하다못해 따귀를 때리는 것도 아니고 혁대를 풀어 때리다니. 깡패에도 급이 있고 건달에도 도가 있는 법인데, 장한용은 장창식도 아는 바를 몰랐다.

장창식은 오히려 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타입이었다. 한 번 영역 안에 들이면 신뢰를 주기도 했다. 그러나 장한용은 달랐다. 믿는 법이 없었으며 그렇게 똑똑하지도 않은 주제에 제가 모두의 머리 위에 앉아 있다고 생각하는 타입이었다.

그날은 장한용이 장창식에게 공개 망신을 당한 날로, 장창식이 장한용이 뒤로 몰래몰래 하는 약 놀음을 눈치채고 그를 행사장 한가운데서 따귀 세 대를 때린 날이었다.

장창식이 그동안 애를 써 오던 신도시 아파트 건설 입찰을 따낸 기념행사였다. 오래된 조직의 동생들을 데리고 축하 행사를 하던 장창식은 술에 취한 장남이 뒷구멍으로 마약 유통을 건드리고 있다는 걸 알고 크게 노했다.

약은 건드리지 말라는 고고한 이유에서가 아니라, 저 모르게 딴 주머니를 찼다는 순수한 분노에서였다.

공개적으로 망신당한 장한용은 행사장에서 사라져 술을 떡이 되도록 마신 뒤 정길의 사무소로 왔다. 정길로서는 그저 재수 없게 걸린 것뿐이었다.

그런 식으로 운영하는 사무소가 꽤 많은데 하필이면 행사장이 정길의 사무소와 가까웠던 것이다.

곧 있으면 사무소장 자리에서 물러나 부소장 자리로 내려가야 한다길래 괜히 억울한 마음에 사무소에 남아 밑의 놈 두엇이랑 점 내기 화투를 치던 참이었다. 화투패를 이마에 붙인 채로 정길은 억울하게 처맞아야 했다. 그것도 자지 새끼 혁대에.

들어올 때부터 거나하게 취해 있던 장한용은 정길에게 무슨 돈으로 도박을 하는 거냐며 사무소 자금 횡령을 들먹였다.

정길이 아무리 아니라고 말해도 술에 취한 미친놈은 들어 주지 않았다. 제 버릇 개 못 준 꼴이었다.

결국 정길은 같이 화투를 치던 밑의 놈들에게 지하실로 끌려가 천장에 거꾸로 묶인 다음 아킬레스건이 따일 운명에 처하고 말았다.

거기서 밤새도록 피가 흘러나오게끔 살짝씩 베어 내 온몸의 피를 빼내 죽이는 방법이었다.

이미 죽도록 맞은 데다가, 술 취한 장한용이 혁대 푼 김에 정길의 위로 오줌발까지 갈긴 다음이었다. 밑의 놈들은 죄 터진 채로 오물을 뒤집어쓴 정길의 얼굴을 감히 쳐다보지 못했다.

“뭐 해, 새끼들아. 안 묶어? 아, 의리 있다 이거지. 그럼 니들이 이 새끼 대신 뒤질 거야? 지랄 말고 빨리 묶어. 술 깨기 전에 피 좀 보게.”

상변태 새끼라더니 피에 흥분하는지 정길의 발목을 따지 못해 야단이었다. 장한용에게 죄 터진 상태에서도 정길은 어쩌면 사모님이란 오메가가 목을 맨 것이 아니라 살해당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했다.

정길의 부하 직원들은 덩칫값은 다했는지 손을 덜덜 떨며 발목을 묶었다. 그때의 정길은 반쯤 포기한 상태였다. 그래, 니들이 뭔 죄가 있겠냐 싶었다.

정길 역시 그들과 같은 상황이라면 함께 지낸 형님의 발목을 묶었을 것이다. 발목만 묶었겠는가, 손목은 그냥 놔두십니까요? 하고 불알을 딸랑거리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게 지하실로 끌려 내려간 정길은 꼼짝없이 죽을 운명이었다. 참 지루한 인생이었다. 정길은 따분한 얼굴로 생각했다. 터져 부은 얼굴이라 표정이 티 나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모정길은 구사일생으로 살아났다. 지하실에 먼저 들어가 있던 객 덕분이었다.

“…네가 여긴 웬일이냐.”

장한용은 다소간 술이 깬 얼굴로 지하실 바닥을 쓸고 있던 장태건에게 물었다.

웃통을 벗은 채 바닥에 고인 핏물을 쓸고 있던 장태건은 무심한 눈을 들어 부친의 말에 대꾸하는 대신 나머지 놈들에게 대신 물었다.

“전무님 약주 잡쉈냐?”

밑의 놈들이 얼떨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듣자 장태건은 또다시 빗자루를 움직였다. 초록색 플라스틱 빗자루 밑은 시뻘건 핏물에 물들어 있었다.

장태건은 쓸다 말고 물 호스를 구석에 뿌렸다. 그럼 또 희석된 핏물이 고인 그곳을 하염없이 쓸어 냈다.

누군가 방금 이곳에서 죽어 나간 것이 틀림없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하얀 돌멩이가 정말 돌인지 누군가의 어금니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돌멩이는 무슨, 살점이 붙어 있는 것을 보니 완벽한 어금니였다.

고문실 따위로 쓰이는 지하실을 할로겐 등이 비추고 있었다. 텅스텐 필라멘트가 승화하며 나오는 샛노란 전구 색 불빛에 비친 장태건의 등은 장엄했다.

이제 막 스물셋이 된 놈이 어디서 저런 상처들을 훈장처럼 얻은 것인지, 단단해 보이는 광배와 톱니바퀴처럼 맞물린 전거근 사이사이로 흉터들이 덕지덕지 끼어 있었다.

그가 팔을 움직일 때마다 그 장대한 근육들이 짜임새 있게 움직였다. 명순도 기골이 거대한 편에 장태건보다 키가 컸지만 저렇게 위협적인 근육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빗자루를 쥔 팔뚝에는 정맥이 덩굴처럼 감겨 있었다. 두 눈이 다 부어 실눈을 뜨기도 어려울 만큼 얻어터진 정길조차 저건 건들면 안 되는 놈이다, 라는 감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아비인 장한용 눈에는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부인과 하나 있는 아들 패기를 밥 먹듯이 하고 살았으니 다 큰 아들을 두고도 제 장난감처럼 여겼음이 틀림없었다.

장한용은 킬킬거리며 말했다.

“회장님이 푸줏간 청소라도 시키든? 왜 여기서 궁상이야.”

“내일부터 일할 거라 미리 가서 익혀 두라 하셨습니다.”

장태건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말 자체는 무례하지 않은데 어조 때문에 무척이나 건방지게 들렸다. 취한 장한용은 두 눈을 끔뻑이다가 장창식이 시켰다는 소리에 입맛을 쩝 다셨다.

여기서 다시 한번 문제를 일으켰다간 공개 행사 자리에서 뺨을 맞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지, 술 취한 사람 특유의 발음으로 웅얼거렸다.

“에이, 씨부랄, 재미없게 됐네…. 영감은 왜 저 새끼만 보면…. 야, 너. 네가 운전해. 빡촌이나 갈란다.”

장한용은 멍하게 서 있던 밑의 놈 중 하나의 가슴팍을 꾹 찌른 뒤 차 키를 던졌다. 얼결에 차 키를 받아 든 놈이 알겠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장한용이 딸꾹질을 해 가며 말했다.

“가만히 있어 봐, 담배 한 대만 댕기고 가게. 야, 시동 걸기 전에 담배 한 갑 사 와. 물 빼고 있을 테니까 그 안에 튀어 갔다 와.”

“예, 예. 전무님.”

키를 받아 들었던 놈이 잽싸게 튀어 나갔다. 나머지 놈도 뻘쭘하게 있다가 심부름을 따라가려는 듯 나가 버렸다. 장한용 역시 트림을 길게 하며 지하실을 나갔다. 화장실을 가는 듯했다.

술 취한 걸음이 지하실 계단을 타고 사라지는 걸 보던 장태건이 바닥에 엎어져 있던 정길에게 물었다.

“저 드러운 새끼, 너한테 오줌 갈겼냐?”

“…예, 예?”

정길은 부은 눈을 깜빡거렸다. 눈이 부어서 티는 안 났지만 말이다. 그걸로 대답이 됐는지 빗자루를 한쪽에 고요히 세워 둔 장태건이 테이블 위에 둔 클램프 펜치를 집어 들었다. 주로 앞니를 뽑을 때 쓰는 것이었다.

그는 그대로 슬리퍼를 끌며 지하실 한쪽 문을 열었다. 주차장으로 통하는 문이었다. 태건은 저벅저적 걸어 나갔다.

손에 쥔 클램프 펜치의 금속 부분이 유난히 반짝거렸다.

정길은 묶인 채로 애벌레처럼 기어가 문을 통해 그가 주차장에서 뭘 하는지 바라보았다. 그는 무언가를 찾는 듯싶더니 주머니에서 키를 꺼내어 장한용의 세단 운전석 문을 열었다.

그걸 바라보던 정길이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저건.”

키는 분명히 담배를 사러 간 놈이 가져갔다. 부친의 자가용 스페어 키를 갖고 다닐 만큼, 장태건은 다정한 성격이 아닌 것 같았는데 제 착각이었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 기어코 운전석에 앉은 태건이 핸들 밑 박스를 땄다. 그 안을 기다란 손가락으로 뒤적거리더니 딸려 나온 와이어 중 검은색의 와이어를 클램프 펜치로 살짝 끊어 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 없는 것처럼 박스를 닫은 뒤 문을 닫고 차 키를 눌러 문을 잠갔다.

그리고 또 그 슬리퍼를 직직 끌며 돌아왔다. 흰색의 고무로 된 쪼리였는데, 대체 어느 놈 걸 훔쳐 신은 건지 맞지도 않아 뒤꿈치가 땅에 닿을 정도였다.

그는 문을 닫고 들어와 저를 멍하게 바라보는 정길에게 말했다.

“저 새끼 너한테 오줌 싸고 또 손 안 닦았지? 공중 보건을 위협하는 씹새끼들은 다 죽어야지, 흑사병 일으키기 전에. 안 그래?”

“…….”

그날 거기서, 정길은 차마 고개를 저을 수가 없었다. 장태건의 말투에는 어떠한 악감정도 없었다.

저를 오랜 시간 학대해 온 부친을 향한 혐오나 원망, 애증 따위를 보기 힘들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심드렁하게 해충은 박멸해야 한다는 당연한 소리를 지껄인 듯 평온해 보였다.

지하실을 청소하는 김에 튀어나온 바퀴벌레를 눌러 죽인 것같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이었다. 그는 그대로 청소 도구함을 정리해 둔 뒤 지하실 한편의 간이 의자에 앉아 담배를 피웠다.

땀에 젖은 상체가 텅스텐 조명을 받아 빛나고 있었다. 앞머리를 걷어 내며 담배를 빨던 장태건은, 지하실 밖 주차장에서 시동 거는 소리가 나자 피식 웃었다.

마치 담배 한 대를 태우며 그 상황을 즐기는 듯한 웃음이었다.

장한용은 그날, 자택으로 가는 길에 크게 사고를 당했다.

엔진이 과열되며 배터리가 터졌다는데 놀란 운전사가 핸들을 오른쪽으로 꺾는 바람에 가로수에 조수석 쪽 뒷좌석이 아예 눌려 버렸다.

머리를 크게 부딪혀 대뇌피질이 손상되었다고 했다. 그대로 식물인간이 된 것이다.

장한용은 그렇게 생을 가느다랗게 유지하다가 장태건이 이재하와 결혼식을 올리기 3년 전에 죽었다.

생명 유지 장치가 빠진 걸 당직의와 간호사가 발견하지 못했다고 한다. 식물인간이라도 가끔 발작이 오는 환자들이 있는데, 저도 모르게 발작 시 호흡기를 치워 낸 것이 아닌가 추정 중이라고 했다.

모정길이나 박명순은 장한용 죽음의 실제 원인을 잘 알고 있지만 말이다.

정길은 아직도 장태건이 그날의 일들을 오랫동안 계획하에 실행한 것인지, 아니면 그저 지하실을 청소한 김에 나머지 바퀴벌레도 눌러 죽이자 갑작스레 마음을 먹었던 것인지 구분하지 못한다.

어찌 되었건 정길은 그날부터 저보다 나이가 어린 장태건을 형님으로 모셨다. 사람이 대범하고 깡이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목숨까지 신세 졌다. 그런 이를 두고 도련님이네 뭐네 무시할 수는 없었다.

모정길의 목숨을 구한 사람을 도련님이 아니라 형님으로 모시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게 됐다는 정길의 말에 명순은 쯧, 혀를 찼다.

“내가 다르다고 했지.”

굳이 잘난 척을 하는 걸 들어 주며 정길은 그때부터 태건과 지내 왔다. 그리고 그때부터 형님의 심중에 누가 있는지 대충 눈치를 채기 시작했다.

장태건이 나서서 말한 적은 없다. 정길과 명순이 그냥 눈치로 어림짐작한 것이지. 사실 장태건이 그 대단하다던 알파에게 가진 마음이 뭔지 두 사람은 알지 못한다.

“오늘도 거기 갔다 왔냐?”

“입 좀 여물어라. 넌 그게 문제야.”

“응, 그래, 명순아. 네 착한 친구가 너 먹으라고 볶음밥 시켜 놨다.”

사무소에 들어온 명순을 보며 묻자 주의하라는 듯 인상을 찌푸린다. 정길은 어깨를 으쓱이며 짜장면의 포장을 깠다.

신문지를 반 접어 접은 면을 반원으로 오린 다음 머리에 뒤집어써 목에 걸친 정길은 짜장면을 섞어 가며 다시금 명순에게 물었다.

“웬 오메가랑 유학 간다 안 하셨냐?”

“몰라. 혼자 가신다는데. 다행인지 뭔지.”

명순이 정길 옆에 앉아 볶음밥 포장을 깠다. 얼마 전, 장태건은 대학교 앞으로 찾아가 내도록 있다 오는 일을 그만뒀다.

상대를 포기한 게 아니라, 상대가 대학을 졸업했기 때문이다. 형님은 재계에 도는 약혼설을 알려 드리자 가만히 담뱃대 허리를 톡톡 부러트리기만 하셨다.

그걸 보며 정길은 정길대로, 명순은 명순대로 착잡했다. 오메가도 아니고 알파다. 게다가 재벌 집. 더하여 그냥 재벌 집도 아닌 유신의.

멀어도 너무 먼 상대에게 눈이 멀어 버린 것 같은 형님을 보는 그들의 마음도 좋지는 않았다.

다행인 건 약혼 예정인 상대와 유학길에 오르지는 않을 것 같다는 거다. 정길은 명순의 볶음밥을 뺏어 먹으며 말했다.

“그 오메가를 담그면 안 되나?”

“국회의원 아들이라는데 그러다 걸리면 너랑 나만 작살나겠어?”

“원, 약혼도 딱 수준에 맞게 하시네.”

두 사람은 입맛을 쩝 다셨다. 그렇게 대단한 상대와 약혼 얘기가 오가는 알파는 얼마나 대단하다는 얘기겠는가.

그의 대학 시절 내내 가끔 주차장에 앉아 도서관에서 나오는 모습을 바라보기만 하던 장태건에게는 기회가 없을지도 모른다.

정길과 명순은 자연스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몇 년 뒤, 상황이 달라졌다. 그쪽에서 장태건에게 먼저 접근한 것이다.

두 사람은 그때 정말로 ‘됐다.’고 생각했다. 그게 일의 완결이 아니라는 것도 모른 채.

정길과 명순은 장태건이 그들의 신혼집을 계약하러 가던 날의 기억이 선명했다. 이재하는 그게 태건이 원래 갖고 있던 집인 줄 아는 듯했다.

한 사람은 알고 한 사람은 모르는 일들이 장태건과 이재하 사이에 켜켜이 쌓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은 흘렀다. 그사이 많은 것들이 변했다.

어느 날 오후, 박명순은 이재하로부터 메시지 하나를 받았다. 두 사람, 아니 태건이 익히 알고 있는 호텔의 레스토랑과 그 예약 시간이었다.

- 명순 씨만 알고 있어도 좋고, 그 사람에게 말해 줘도 상관없습니다.

정길과 명순은 태건에게 보고 전, 메시지에 적힌 예약 날짜를 보며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날은 형님의 결혼기념일이었다. 장태건이 이재하와 결혼한 지 꽉 채운 3년째의 일이었다.

<3권에서 계속>

개의 가면 2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