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7/18)

6.

“골프들 다녀오셨어?”

태건은 녹슨 철제 의자에 앉은 채, 오른손으로 왼쪽 가슴팍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그는 곧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입이 막힌 사람들의 신음과 꽉 막힌 비명이 계속해서 들렸다.

일렬로 바닥에 엎드려뻗쳐 있는 인간들은 죄다 속옷 차림이었다. 가릴 부분만 가린 주제에 손목에는 번쩍이는 시계를 차고 있었다.

노년의 몸들은 일렬로 붙어 와들와들 떨어 댔다. 덩치 하나가 그들에게서 벗긴 골프복 따위를 드럼통에 쏟아 넣고 그 위에 휘발유를 붓고 있었다.

“나가서 태워라, 냄새난다.”

태건의 말에 명순이 덩치에게 조용히 문밖을 가리켰다. 덩치가 “예, 형님.” 하며 대답한 뒤 드럼통을 안아 들고 폐창고 밖으로 나갔다.

태건은 담배 끄트머리에 불을 붙였다. 딱 한 모금 빤 것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워 꼬고 있던 다리의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그러고는 담뱃대를 끼운 손가락으로 무릎을 툭툭 두들겼다.

바닥에는 핏물이 군데군데 번져 있었다. 덩치 몇몇이 플라스틱 빗자루로 핏물을 쓸고 닦았다.

뒤쪽에 있던 정길이 다리를 살짝 절며 다가와 골프 백을 태건의 옆에 내려놓았다. 태건이 그런 정길을 슬쩍 보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집에 있지 왜 또 나왔어.”

“뼈도 다 붙었습니다. 괜찮습니다.”

정길이 무감하게 대꾸했다. 정신 못 차리고 이재하를 위험에 빠트렸던 걸 정강이뼈 하나에 감면받았는데 양심 없이 마냥 쉴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날 이후로 이재하와의 사이가 확연히 틀어졌는데도 태건은 정길의 경골을 깔끔하게 부러트린 것 외에는 어떤 문책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걸 견디지 못하고 나와서 일을 했던 건 정길 자신이었다.

그러다 보니 뼈가 붙는 속도가 느렸다. 염증이 있는데 계속 돌아다닌 탓에 열이 오르기도 했지만, 형님 하시는 일에 폐를 끼쳤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었다.

“고집 작작 부려. 얘, 명순아. 내가 모정길 뼈 다 붙을 때까지 묶어 두라고 했지.”

태건이 한 손으로는 담뱃재를 튕기고, 다른 한 손으로는 정길이 가져온 골프 백을 뒤적거리며 말했다. 표정이 없어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되지 않는 것은 태건의 오랜 특징이었다.

그러나 수족처럼 지내 온 두 사람이라 그저 형님 기분이 오늘은 그럭저럭 괜찮으신가 보다, 할 뿐이다. 지난 몇 달간 잠도 자지 않고 명원의 잔당과 그와 결탁한 것들을 개박살 내던 때에 비하면 오늘은 그냥저냥인 편이었다.

기어코 아이언 하나를 골라 꺼낸 태건이 채의 프레임 부분으로 제 손바닥을 툭툭 두들겼다. 그런 다음 입에 담뱃대를 물고 정확하지 않은 발음으로 중얼거리듯 말했다.

“홀인원 날린 분은 빼 드려요.”

청테이프로 입이 막힌 중년의 남자들이 일제히 읍읍 거렸다. 장태건이 심드렁하게 말했다.

“뭐야, 없어? 실력이 별로면 빠따라도 맞아야지.”

그러고는 일렬로 늘어선 남자들의 둔부를 골프채로 가격했다. 아이언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매서웠다. 퍽, 하고 근육만을 내리친 골프채는 몇 명을 더 거치자 휘어지기 시작했다.

매를 맞은 남자들은 몸을 달달 떨어 댔다. 그대로 넘어지려는 걸 정길이 발로 깐 다음 다시 일어서라며 윽박질렀다.

태건은 입에 물고 있던 담뱃대를 꺼내 재를 털었다.

“우리 영감님들 그러니까 내가 진작에 빨리 움직이라고 했지. 지금 골프나 칠 때야? 장창식 씨 밑에 있으면 뭐, 더 남은 게 있어 보였어요?”

“으, 흐윽, 읍….”

여기저기서 흐느낌이 들렸다. 그들은 장창식의 동생뻘이었다. 장태건이 각각 중조부, 숙조부 등으로 부르던 이들이다.

그들이 한창 젊었을 시절, 장태건은 장창식의 집에서 키우는 개와 다름없었다. 그러니 태건의 작은할아버지랍시고 호칭을 일러 주던 그들이라고 다를 바가 있겠는가.

무릇 학대받고 큰 짐승은 크나 작으나 유년기의 기억을 잊지 못하는 법이다. 영혼에 달라붙은 상처로 인해 반드시 한 군데 티가 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장태건에게는 그것이 없었다. 트라우마라고 부를 만한 게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집에서 기르는 어린 가축 취급했는데도 그들에게 이렇게 막힘 없이, 또는 사감 없이 골프채를 휘두를 수도 있는 것이다.

저를 짐승 취급하던 이들을 내리치면서도 장태건의 얼굴에는 이렇다 할 표정 변화가 없어 보였다. 그저 할 일을 하는 사람 특유의 무감한 얼굴이었다.

“숙조부님들이 보시기에 제가 싸가지가 있어 뵈든가요? 말 안 들으면 이렇게 잡아 와서 개 패듯 팰 거라고 경고도 했는데 말년에 이게 무슨 꼴입니까.”

사이좋게 각각 몇 대씩 맞은 남자들은 쓰러진 채로 윽윽거리고 있었다. 그래 봤자 기가 막히게 근육층만 골라 때린 터라 뼈에는 금이 가지 않았을 것이다.

태건은 엄살이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담배를 손으로 튕겨 버렸다. 바닥에 닿은 것은 고여 있던 핏물 위에 떨어져 치익, 하고 남은 불꽃을 토해 낸 뒤 그냥 죽어 버렸다.

“아, 재미없다.”

골프 백에 골프채를 꽂아 넣으며 태건이 심드렁한 말투로 말했다.

그러고는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금 털썩 앉아 다리를 꼬았다. 품을 뒤적거려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낸 뒤 입에 물고는 등받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젖혔다.

드러난 목덜미가 굵고 길어 꼭 짐승의 것 같았다. 하악뼈에 자잘하게 붙은 근육들은 목으로 칼이 들어와도 침입을 허용하지 않을 것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 상태로 불을 붙이고 몇 모금 또 빠금거리던 장태건이 고개를 바로 하고는 다리를 풀어 양 무릎 위에 팔꿈치를 내려놓고 상체를 앞으로 숙였다.

꼭 어물전에 내놓은 생선들을 들여다보듯 말이다.

“창식 씨가 뭐 찔러 주던가요. 영감님들 의리도 본인들 좆대가리처럼 발기부전일 텐데 포장하지 마세요. 나 안 속습니다.”

시큰둥한 어조로 다시금 담뱃대의 끄트머리를 빨아 물며 눈을 가늘게 뜨는 얼굴 위에는 감정이 보이지 않았다.

그런 태건 대신 명순이 저벅저벅 엎어진 남자들에게로 다가갔다. 바들바들 떠는 꼴이 볼 만했다. 오물이 묻은 뺨이 눈물과 땀에 젖어 질척거렸다.

명순은 그들의 입에 붙어 있는 청테이프를 떼어 냈다. 여기저기서 산발적으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장, 장 실장, 이러지 말고 우리 이성적으로….”

“뭐, 그럼 내가 지금 이성을 잃었다는 거야 뭐야. 멀쩡한 사람 미친 새끼 취급하네.”

“그, 그게 아니라…!”

태건은 담뱃대를 끼운 손의 엄지 끄트머리로 눈썹뼈를 꾹꾹 눌렀다. 근래 들어 장태건의 불면증이 다시금 도진 터라 정길과 명순은 그런 태건의 얼굴을 흘깃 바라보았다.

내내 못 주무시는 게 명확한데 다음 날이면 멀쩡한 얼굴로 집 앞에 마중 온 명순의 차에 올라타고는 했다. 태건의 불면이 언제부터 찾아든 것인지, 정길과 명순은 확연히 알고 있다.

그의 손에 끼워진 담뱃대 끄트머리에서는 담뱃재가 간신히 매달려 있었다. 정말로 모든 흥미가 떨어졌다는 양, 태건이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숙조부들 중에 명원에 말 흘린 새끼 있는 거 다 압니다. 빨리 누군지 불어, 선착순 한 명은 맞을 매 깎아 줄게.”

삽시에 좌중이 조용해졌다. 그러다 그들 중 한 명이 뭍에 건져 올려진 물고기처럼 펄떡거리며 소리를 질렀다.

“자, 장 실장! 다 말할게, 다 말할 거니까…!”

한 명이 물꼬를 트자, 너도나도 꽥꽥거리기 시작했다. 장태건은 몇 모금 빨지도 않은 담배를 이번에도 바닥에 툭 던졌다.

“명순아, 뭐 하냐. 맨 처음 분은 멱따 버려. 의리가 씨발, 으리으리하네.”

“네, 형님.”

“장 실장, 그게 무슨, 무슨 말이야! 나가게 해 준다며!”

“내가 언제. 맞을 매 줄여서 먼저 보내 드린단 소리였지. 나머지분들은 똑똑히 보셔요. 잘못 불었다가는 저 꼴 나는 겁니다.”

정장 바지 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으며 대충 지껄인 태건이 명순을 향해 손을 휘휘 저었다.

“먼저 차에 가 있을 테니까 처리하고 와.”

정길이 살짝 절뚝이며 다가와 빠르게 고개를 숙여 말했다.

“형님, 제가 맡겠습니다. 먼저 들어가 보십쇼.”

“다리 부러진 게 어딜.”

“애들도 있고 괜찮습니다. 명순아, 얼른 형님 모셔라.”

피 묻은 회칼을 쥐고 있던 명순이 그걸 옆의 동생에게 넘기고는 금세 따라붙었다. 아직도 꾸벅 숙이고 있는 정길의 정수리를 흘끗 본 태건이 그대로 발걸음을 옮겨 폐창고 밖으로 나섰다.

이재하가 납치되었던 그 창고였다. 연관된 놈들을 하나하나씩 끌고 와서 사지를 도륙 내는 일은 부지런히 해도 반년이 걸렸다.

조직원 몇이 태건의 등 뒤에 대고 꾸벅 인사를 한 뒤 창고의 문을 닫았다. 뒤편에서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벽에 부딪힌 채로 뻗어나가지 못해 조금 둔중해졌다.

명순이 살짝 뒤에 와 서자, 태건은 지나가듯 물었다.

“오늘은 뭐 하디.”

“조대철 의원 후원 모임에 참석하셨습니다. 저녁 내내 머무르시다가 한 시간 전에 귀가하셨다고 합니다.”

“…….”

태건은 대답 없이 걸음을 옮겼다. 발걸음이 세워 둔 차 쪽으로 향하자 눈치껏 따라붙은 명순이 먼저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몸을 내려 올라탄 태건이 문을 닫아 주려던 명순에게 말했다.

“평창동으로 가자.”

“…좀 주무셔야 합니다, 형님.”

“누가 날밤 깐대? 그냥 보고만 올 거야.”

태건은 그 말을 끝으로 좌석에 등을 기댄 뒤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명순은 곤란한 얼굴로 문을 닫은 뒤 운전석에 올라탔다.

마음에 걸려 어물쩍거리는 게 느껴졌는지 태건이 운전석을 발로 툭 쳤다.

“가자고, 좀.”

“…네, 형님.”

오늘도 밤새 그 앞에만 서 있을 것이 뻔했다. 태건을 하루라도 쉬게 하고 싶었던 명순이 머뭇거리자 태건이 어이없는 기색으로 혀를 찼다. 더 망설일 수는 없는 일이라, 명순은 액셀을 밟았다.

* * *

지리멸렬한 시간들이었다.

“…도와는 드리는데 저는 가끔 이사님이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임 과장한테는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임유진은 의뭉스럽다는 듯이 재하를 바라보다가, 그가 그렇게 말하자 이내 한숨을 크게 내쉬었다.

“걸리면 저 잘리는 건 아시죠?”

“이재호 이사 핑계 대시면 됩니다.”

“…이재하 이사님 핑계가 아니라요?”

“난 이제 이사가 아닙니다. 호칭도 슬슬 바꾸도록 하세요.”

“그렇게 말씀하셔도…. 에휴, 아닙니다. 말씀하신 건 그게 답니다.”

은근슬쩍 이재호에게 책임을 전가한 재하를 바라보는 유진의 두 눈이 갸름해졌다가 이내 푹 풀어지며 한숨을 내뱉었다.

재하는 뻔뻔한 표정으로 유진이 건네준 것을 받아 들었다.

손에 쥔 것은 이재하가 본사 경영전략실에 따로 소속된 회계팀들과 불철주야 화장을 해 뒀던 유신의 치부책이었다.

연루된 부정 회계가 벌써 5년째 이어지고 있고, 가상 거래 규모 또한 2500억 원이 넘었다. 실체 없이 장부상으로만 이루어지는 거래치고는 큰 액수였다.

유신전자는 연결 자회사인 유신 유비쿼터스의 부정 회계에 다수의 전자업계 기업들을 연루시킨 뒤, 지속적으로 빈 상자들을 상품으로 둔갑시켜 대금을 받는 등의 거래를 자행해 왔다.

복수의 비상장 회사들이 장기간에 걸쳐 그저 상자만 찍어 내는 가공 매출을 반복해 온 것이다. 이런 가상 거래를 회계에 반영하도록 지시한 것은 이익형이었다.

이재하가 이를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 버린 터라, 오래된 화장이 지워져 덧칠하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때는 그것이 이재하의 일거리 중 하나였다. 이재하는 외부 전문가를 조사위원회에 참여시켜 이 가짜 거래를 조사케 하였다.

전략실 소속 회계팀들이 에너지 드링크 캔을 비워 가며 만들어 낸 이중장부를 말이다.

뒤로는 김란희의 이름으로 조사위원회에 돈을 찔러 넣어 줬다. 제 이름으로 하지 않더라도 뒤에 이재하가 있다는 것을 그들도, 저도 익히 아는 사실이었지만 이재하는 부러 알은체하지 않았다. 간간이 이익형의 이름을 넣기도 했다.

여차하면 제가 숨고자 했던 것이 아니라 모친과 외조부가 남겨 준 자본으로 이딴 짓까지 하고 있는 것이 열받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저를 끌어들여 뒤를 닦아 달라고 하는 이익형이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넣었던 이름이다. 어차피 수면 위로 드러나기 쉽지도 않고, 드러난다고 해도 수액 링거 폴대가 걸린 휠체어를 타고 무릎에는 모직 담요를 걸친 채 검찰 조사에 응하는 것으로 일을 무마시킬 수 있을 것이다.

기업의 이미지가 실추되겠지만 이익형은 자신이 가장 중요한 인간이니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김란희를 팽하든지.

어느 쪽이든 엿 정도는 먹일 수 있겠다 싶어 했던 행동들이었다. 이익형은 이재하가 딱히 반항심도 없고 하라는 대로 하는 타입인 줄로만 알지만, 외조부인 한원용은 이재하를 바로 볼 줄 알았다.

꼴통이니 조심해서 키우라는 말을 모친에게도 한 것 같은데, 문제는 그렇게 감시해 줄 사람 없이 이재하는 반쪽짜리 고아가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꼴통 짓도 쓸데가 있는 법이다.

“이사님, 그거 어디에 쓰시려고 그러세요.”

“이사 아니라니까요. 정 부르기 뭣하면 어이, 정도로 부르면 될 것 같습니다.”

“…저더러 이사님을 어이, 라고 부르라고요?”

유진은 황당하다는 듯 되묻고는 입을 다물었다. 재하가 더 대답해 줄 생각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엄지는 좀 어떠세요.”

“재활 끝나서 다 나았습니다. 깁스 푼 지도 꽤 됐잖아요.”

재하는 별일 아니라는 식으로 말했다. 유진은 인상을 잠깐 찌푸렸다. 잔소리가 시작되려는 것 같길래 뜨끔한 재하가 유진에게 먼저 수고했다는 말을 건넸다.

“몸조심 좀 하세요, 이사님.”

“어이, 몸조심해, 라고 하면 생각해 볼게요.”

재하가 아무렇지도 않게 농담을 건네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인 임 과장은, 그 말을 듣더니 여전히 미간에는 골이 팬 채로 찡그리듯 웃었다.

별수 없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재하 역시 피식 웃으며 의자에 뒀던 봉투를 테이블 위로 올렸다. 회사와는 꽤 떨어진 어느 개인 카페에서 만난 참이었다.

이재하는 의외로 폐쇄 회로 카메라 관리에 허술한 개인 카페들을 꽤 알고 있다. 재벌 출신이라고 해도 이익형의 아들로 태어난 바람에 웬만한 회사 부장도 안 할 짓을 직접 무마하고 돌아다니고는 했기 때문이다.

이익형은 이재하의 손을 거치지 않은 것들을 무척이나 두려워했다. 그런 것치고 사표 수리는 잘 받아 준 게 의외였지만 말이다.

어찌 되었건 인적이 드문 카페에서 만난 두 사람은 서로의 것을 주고받았다. 아니, 받았기에 제 것을 주려고 하던 참이었다.

“이사님, 지금 저한테 뇌물 주신 겁니까? 저 이거 못 받아요! 간 떨린다고요!”

유진이 사색이 된 얼굴로 재하를 만류했다. 소곤거리는 목소리가 다급하기까지 했다.

재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먹고 간다고 말했는데도 테이크아웃 컵에 음료를 준 카페를 흘끗 돌아보며 말했다.

“그거 엽산입니다. 임신부에게 좋다길래.”

“…아. 전 또….”

유진이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내더니 재하가 내민 종이 가방 안을 슬쩍 들여다보았다.

프랑스산 엽산으로 원료를 좋게 쓰기로 유명한 비싼 제품이긴 했지만, 기대했던 것보다는 가격이 확 낮아지긴 했다.

머쓱한 얼굴을 하는 유진을 보다가 테이크아웃 컵을 톡, 친 재하는 지나가는 말로 물었다. 미간을 살짝 찌푸린 상태였는데, 그건 지금 꺼낼 화제 때문이 아니라 정부 지침과 상관없이 일회용 잔에 내준 가게에 대한 미미한 불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장한 쪽은 내가 보고는 있지만, 혹시 모르니 임 과장이 한 번 더 체크를 해 주세요. 명원 일 이후로 회장님이나 어머니가 섣불리 움직일 리는 없지만, 장한과는 덩치 게임이 되기 힘들 겁니다.”

“안 그러셔도 저도 쭉 지켜보긴 했습니다. …이건 회장실 쪽에서 나온 얘기인데, 이사님 사건 이후로 회장님이 저희 쪽 계열사로 장한건설을 흡수, 통합시키자는 말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욕심 많은 인간이 기어코.

아들이 납치 사건에 연루되었는데도 눈 하나 깜빡 않고 명원을 먹어 버린 장한을 다시 삼킬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아니면 장한건설을 재하의 혼수 예물 정도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어쨌거나 제 몫으로 여기는 태도를 보이는 것 같았다.

속이야 뻔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장남의 혼사 대신 그 상대의 것이라도 꿀꺽하겠다는 속셈이었다.

‘쉽지는 않을 텐데….’

물론 이익형의 생각대로 흘러가진 않을 것이다. 태건의 의도를 아는 이상, 그건 확신에 가까웠다. 일단 그가 단기간에 이룬 성과가 어마어마하다는 것이 방증이었다.

그는 이재하와의 결혼 이후 명원을 먹었다. 같은 기업형 조폭이라고 한들, 명원건설은 신도시 입찰 경쟁에서 몇 번이나 승리한 저력이 있는 회사였다.

이익형은 그것을 우연이라고 생각하는 게 틀림없었다. 세상에 그런 우연이 어디에 있다고.

게다가 장태건에게는 이재하가 있다. 장태건 그 자신도 짐작지 못한 아군이지만 말이다.

거기까지 생각한 재하는 무감한 얼굴로 식은 커피를 들이켰다. 임 과장의 출산 휴가가 다가오고 있었다.

이 일을 끝으로 더는 임 과장을 귀찮게 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종이 가방에는 엽산 말고도 다른 것이 들어 있기도 했다. 상당한 액수의 암호 화폐 키워드였다. 대기업 과장급의 퇴직금을 훨씬 웃도는 액수였다.

곧 유진의 아이가 태어나니 삼촌 정도 되는 아저씨의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는 건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물론 유진이 동의하지 않을 테니 재하는 다음 약속이 있는 사람처럼 슬슬 마무리 짓자고 말했다.

“다음 연락은 없을 겁니다. 육아 휴직 들어가잖아요, 임 과장.”

“그렇긴 합니다. 그래도… 자잘한 게 필요하다 싶으시면 연락하세요, 이사님.”

유진의 얼굴에는 직장 상사가 아닌 정말 친한 지인을 걱정하는 듯한 염려가 스며들어 있었다. 이사로 승진하기 전부터 같은 팀에서 일하던 사람이다.

재하를 위해 부서를 바꾸고, 업무 관련 자격증도 딸 정도로 충성심이 높기도 했다. 그 과정을 지켜본 재하는 그녀의 염려 섞인 시선이 다른 이들의 것보다 조금은 더 불편했다.

내내 추위에 떨던 이가 뜨거운 물에 들어간 것 같은 느낌이었다.

“얼굴이 많이 상하셨어요. 무슨 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몸 관리 잘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사님.”

“이사 아니라니까요. 어이가 싫으면 금귤이 삼촌이라고 부르든지 해요.”

금귤은 유진의 아이 태명이었다. 농담은 꼭 무표정으로 하는 상사를 익히 알고 있는 유진도 그제야 픽 웃었다.

“그럼 들어가세요.”

“네. 임 과장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담백한 인사 끝에 두 사람은 카페를 나섰다.

바람이 몹시 찼다. 살짝 두꺼운 트렌치코트를 정장 위에 입고 있던 재하조차 앞섶을 여밀 정도로 말이다.

서울 외곽까지 나온 참이라 카페 건물 바로 앞에 일렬로 늘어선 노상 주차장에 주차해 뒀었다. 차로 걸어가며 재하는 한 번 더 유진을 돌아보았다.

달수가 꽤 찬 상태라 몸이 무거운지 허리를 짚은 채 걷는 것이 보였다.

…태워다 준다고 할 걸 그랬나. 택시비를 줘 봤자 받지 않으니 소용이 없고, 태워다 주고 싶은데 남들의 이목이 곤란했다.

할 수 있는 게 없어 쯧, 혀를 찬 재하가 고개를 돌려 제 차 쪽으로 가려던 때였다. 시선이 느껴졌다. 덜컥 긴장이 몸을 울렸다.

“…….”

돌아본 곳에는 법에 위촉될 만큼 짙게 선팅을 한 검은색 세단이 주차선을 무시한 채로 서 있었다. 깜빡이를 켜지 않았는데도 헤드라이트가 희붐하게 밝았다.

안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재하는 운전석 문을 열다 말고 못이 박힌 듯 그 차를 응시했다. 어쩐지 그냥 넘기기가 힘들었다.

장태건이 저를 감시하는 것은 알고 있었다. 반대의 경우라면 재하는 아예 태건의 전담반까지 꾸려 그의 집에서 나오는 일반용 쓰레기봉투까지 뒤지게 했을 것이다.

타이밍이 공교로웠기 때문이다. 명원의 몰락과 납치 후 이재하는 태건에게 남처럼 살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곧이어 이익형이 욕심을 드러냈다.

그들이 그날 어떤 눈빛으로 어떤 대화를 나누었건, 이익형의 욕심이 수면 위로 드러난 이상, 재하의 그때 그 말은 미리 준비된 말처럼 변모했을 것이다.

마치 이재하가 장태건의 뒤통수를 치기 위해 그의 집에서 나와 장창식의 집으로 들어간 걸로 보였을 거란 소리다.

그러니 이 정도의 감시는 참을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트라우마 때문에 간혹 긴장이 되긴 했지만, 그다지 거슬리지도 않았다. 저것도 관심이라고 희미하게 기쁘기까지 했다.

물론 본인이 직접 재하를 감시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도 제 하루의 일과가 장태건에게도 들어가고 있다고 생각하면 흉골이 뻐근해지는 감각이 들었다.

제 행동이 수상해 보일 거라 생각하면서도 그런 감정을 느끼는 것은 별개의 일이었다.

그러나 오늘은 좀 다른 것 같았다. 저 차 안에 앉아 있는 이가 재하를 감시하기 위한 그의 조직원이 아니라…. 조금 더 다른….

“아….”

재하는 저도 모르게 살짝 탄성음을 냈다. 세단이 망설이지도 않고 출발해 버린 것이다. 저를 감시하는 시선조차 아니었다.

약간 머쓱해진 마음으로 재하는 차 문을 열었다. 올라타 핸들을 잡았지만, 운전을 할 수도 없을 만큼 마음이 수런거렸다. 한참을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있다가 시동을 걸어야 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재하는 제게서 열이 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날, 예기치 못한 재하의 러트가 시작되었다.

핸드폰으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낯익은, 또는 아주 그리운 목소리였다.

- H 호텔, 1204호.

그게 다였다. 재하는 멍하니 열이 오른 이마를 핸들에 기댄 채 이미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신호가 바뀐지라 뒤편에서 클랙슨 소리가 요란했다.

문득 차 안에 쟈스민 향이 요란히 떠돌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무슨 정신으로 호텔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

재하는 뛰어내리듯 운전석을 나오고도 어지러워 차체를 잡은 채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손님, 괜찮으십니까?”

발렛 직원이 다가와 물었다. 재하는 멀미라도 하듯이 입을 틀어막았다가 간신히 대답했다.

“괜찮, 습니다.”

재하가 내뱉을 수 있는 말은 그것이 다였다. 그 뒤로는 비틀거리지 않기 위해 사력을 다하여 한 발자국씩 내디뎠다.

구두 뒷굽이 대리석 바닥에 닿을 때마다 정수리까지 울려 댔다. 양쪽 귀의 바로 옆에서 누군가 두께가 두껍고 크기가 집채만 한 종을 쳐 대는 느낌이었다.

징징 울리는 듯한 이명에 재하는 미간을 찌푸렸다.

해당 호실은 전용 엘리베이터가 따로 있는 스위트룸이었다.

호실로 가는 카드키가 없음에도 호텔리어 중 하나가 재하의 얼굴을 알아보고는, 미리 언질을 받은 것인지 엘리베이터 문을 열어 직접 해당 층을 눌러 주었다.

재하는 그에게 고개를 까딱이는 인사조차 잊었다. 기본적인 매너를 지키고 사는 유신의 이재하답지 않은 행동이었다.

올라탄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자마자, 허리를 앞으로 꺾은 재하는 구역질이 올라왔다. 간신히 이성을 차리는 것이 한계였다.

속이 무척 울렁거렸다. 평소에는 미미하게 느껴지던 엘리베이터의 중력이 배 속을 헤집는 것 같았다.

그게 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아….”

하얗게 질린 손이 엘리베이터의 벽면을 붙잡았다. 속이 뒤집힐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묘하게….

“읏….”

아랫배가 단단하게 뭉치는 기분이었다. 재하는 엘리베이터에 퍼진 쟈스민의 향이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왜 이런 향이 나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자신의 페로몬은 물푸레나무의 마른 가지 냄새가 나고는 했다.

러트 때라고 해도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비 온 뒤 젖은 물푸레나무의 밑동 향이 나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물푸레나무의 향인 게 변하지는 않았는데, 이토록 진한 쟈스민 향이라니.

생화보다는 꽃을 그대로 압출하여 오일로 만든 딱 그 한 방울의 진한 향이었다.

재하는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서 간신히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막았다.

태건과의 관계에서 느낄 수 있었던 향과는 또 달랐다. 엘리베이터는 장태건이 호수를 말했던 스위트룸 전용이고 따라서 타고 있는 사람은 저밖에 없으니 이것은 분명 이재하, 자신의 페로몬 향일 것이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멀미가 났다. 알파인 저에게 이런 향이 난다니 믿기지 않았다.

제 페로몬인데도 이렇게 향을 진하게 맡을 수 있다면, 다른 알파들은 더할 것이다. 재하는 생전 처음으로 발가벗은 채 거리 한복판에 있는 듯한 수치심과 위기의식을 느꼈다.

그렇다. 그것은 위기의식이었다. 늘 상위에서 포식자로만 살아온 이재하의 인생에서 단연코 처음 겪는 일인 것이다.

‘…왜 여기에 왔더라.’

재하는 엘리베이터 벽에 고개를 대고는 두 눈을 감았다.

이쯤 되니 생각해 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제가 왜 이곳에 있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유진을 만나 이익형이 저지른 수많은 것 중 일부의 증거를 받은 뒤, 집에 가려고 차에 오르려 했다. 그때 누군가가 지켜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었다. 그리고….

재하의 사고가 고장 난 텅스텐 전구처럼 깜빡였다. 아랫배가 묵직하다고 생각했는데 평소에는 느낌도 없던 부위가 이상하게 간지러웠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앓으며 재킷 상의를 젖혀 가슴팍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왜….”

평소에도 셔츠 안에 속옷을 입지 않는 매너를 따르기 때문에 가슴의 정점이 그대로 노출되어 있었다.

툭 튀어나온 것이 셔츠 자락을 밀어낸 탓에 그 부분의 옷감이 팽팽해져 있었다. 재하는 당황스러웠다.

추위에 꼿꼿하게 일어선 것처럼 제 주장을 하는 부위가 오늘따라 낯설었기 때문이다.

어지러웠던 감각들이 모두 지나간 뒤, 재하를 잠식시키고 있는 것은 뭐라 말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들이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곳이 간지럽다거나 샅으로 이어지는 복근 부위에 정맥이 불툭 튀어나오는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했다.

“…….”

아주 부드러운 미세모들로 온몸을 문지르는 기분이었다. 옷에 스칠 때마다 점점 더 감각이 날카로워져만 갔다.

재하는 터져 나올 것 같은 신음을 겨우 억누른 채로 엘리베이터의 계기판을 올려다보았다.

위로 올라가는 중이라는 표시로 계기판 위의 빨간 삼각형이 점멸했다. 띵, 하는 맑은 음과 함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

“…….”

재하는 열이 오른 눈으로 얇은 소재의 목폴라 니트와 정장 팬츠를 입은 채로 엘리베이터 입구 쪽 벽에 기대어 있는 장태건을 바라보았다.

엘리베이터와 스위트룸을 바로 연결해 주는 복도에 홀로 서 있는 장태건은 아무것도 신지 않은 맨발 차림이었다.

재하는 그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저를 기다렸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침묵도 잠시였다. 망설임 없이 저벅 다가온 장태건이 재하의 손목을 잡아 엘리베이터에서 끌어낸 것이다.

코를 틀어막고 있던 손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져 구둣발에 짓이겨졌으나 그 가벼운 무게만큼이나 쉽게 잊혔다.

그의 손목을 잡고 있던 이의 태산 같은 존재감에 비하면 너무도 미미했기 때문이다.

“…장 실장,”

“오늘쯤일 거라고 생각은 했거든.”

“…….”

“근데 정말이네. 이렇게 내 예상을 비껴 나가지를 않는 주제에.”

장태건이 재하를 끌어당겨 제 옆구리에 딱 붙도록 품에 안았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끓어오르는 무언가에 무릎이 꺾일 정도였다. 헉하고 숨을 내쉴 수도 없었다.

다리의 힘이 풀려 주저앉으려는 순간, 태건의 손바닥이 재하의 가슴팍을 짚었다. 그 부위에서부터 미친 듯이 열이 솟았다.

“아….”

“이재하 씨, 남처럼 살자고 했었죠.”

재하는 흐리멍덩한 눈으로 저를 부르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꿈결에서 들었던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짙은 해당화 향이 몰려와 재하의 피부 위로 내렸다. 옷을 입고 있는 게 안타까울 정도였다.

장태건의 페로몬을 받고 싶었다. 입술의 점막을 부딪치고 타액을 넘겨받고 그의 혀 기둥이 제 입 안을 쑤셔 주길 바랐다.

메마른 듯 거친 손바닥이 꼿꼿하게 올라온 곳들을 속속들이 만져 주길 원했다.

그의 다리가 제 두 다리 사이로 들어와 엉겨 붙기를 원했다. 창상이 그대로 굳어져 오돌토돌하게 만져지는 너른 등의 흉을 지문 사이에 샅샅이 매만져 제 안에 그를 새기고 싶었다.

그 욕구와 열망들은 모두 어디에서 온 것일까. 재하는 열에 들뜬 머리로 한참이나 생각해 보았지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그저 눈앞의 남자가 저를 어떻게 좀 해 주기를 원하는 수밖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가 없었다. 장태건을 떠나온 것은 이재하였으니까.

그러나 당장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아래가 묵직하고 골 사이가 질척하게 젖어 걸을 때마다 미끌거리는 게 느껴졌다.

재하는 아찔한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이것이 꿈이기를 바랐으나, 장태건의 페로몬이 공기 중에 섞여 비강에 달라붙는 순간부터 산불이 일듯 속 안에서 욕구가 뒤흔들렸다.

지척이 울리는 듯한 목마름이었다. 재하는 입을 열면 애원만 튀어나올 것 같아 아예 입을 다물었다.

그런 그를 알고 있는 것인지, 장태건은 피식 웃을 뿐이었다.

그의 비웃음이 재하의 정수리 위로 내렸다. 아직도 그의 손바닥은 재하의 가슴팍에 닿아 있었다.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를 그 역시 느끼고 있을 것이다.

재하는 한 번 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상황을 모면해야 한다.

애초에 이곳에 온 게 이상한 일이었다. 그가 부른다고 꽁지에 불붙은 개처럼 바로 달려올 것이 아니라 전화를 끊고 가지 않겠다고 메시지를 남겼으면 될 일이었다.

그런데도 재하는 저도 모르게 태건이 말한 그 호텔로 차를 몰았다.

몸 안에 어떤 명령이 도사리고 있는 듯했다. 이재하는 오늘 꼭 장태건을 봐야 한다는 그런 명령이.

그때 장태건이 재하의 턱을 잡아 들어 올렸다. 그 손길은 질척이는 것이라고는 전혀 없이 담백했다.

눈을 마주하고 싶은데 재하의 고개가 처져 들어 올리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도도 없어 보였다.

재하는 절로 허물어지려는 눈매를 바로 하고 태건과 시선을 마주했다.

그는 웃고 있었다.

“임신부랑도 씹 떠?”

“…그게 무슨.”

“남남으로 살자길래 그새 딴 살림 차렸나 취향 조사 중이잖아. 말해 봐. 임신부면 더 꼴리냐니까.”

“…임 과장을 말하는 거면….”

“어디 가서 애를 배어 올 수도 없고 억울해 죽겠네.”

장태건은 진심으로 짜증이 나 보였다. 좁힌 미간과 낮게 가라앉은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분노가 일렁였다.

…왜 화를 내는 거지.

재하의 멍한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장태건은 그런 재하를 기다려 주지 않고 다시금 말했다.

“와 봐. 혼 좀 나 보자.”

“무, 슨….”

장태건이 재하의 손목을 끌어당겼다. 닿은 부분이면 어디나, 이를테면 손목과 가슴팍 모두에서 열이 들들 끓는 기분이었다.

고급 객실 안은 태건의 향으로 가득했다. 페로몬이라는 것은 향에 집중된 측면이 많겠지만, 사실은 코의 비강보다 상대의 피부에 흡수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리하여 오메가와 알파의 체액은 각각 서로를 흥분시키는 최고의 최음제가 되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오메가끼리, 또는 같은 알파끼리는 비강으로 페로몬의 향 분자만 느낄 뿐 피부로 흡수되는 것이 없다.

다시 말해 알파가 같은 알파의 페로몬이 주는 위협감, 심리적인 상태에 대해서 어렴풋이 느낄 수는 있어도 성적인 흥분을 느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런데 왜….’

재하는 물밀듯 밀려오는 해당화와 바다 소금 향에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대로 바다에 뛰어든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아예 잠식당한 것처럼 향이 느껴지지는 않을 것만 같았다.

게다가 태건의 페로몬은 아까부터 무척이나 날이 서 있었다. 꼭 제 오메가를 건드리는 걸 두 눈으로 목격한 알파의 페로몬처럼 말이다.

‘그새 다른 상대가 생겼나….’

재하는 열이 올라 멍한 정신에도 그렇다면 조금 서운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장태건에 대한 생각과 열망으로 하루를 망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닌데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장태건이 확인 사살한 것처럼, 두 사람은 남남으로 지내기로 했다. 더욱이 지금 당장은 몸이 절절 끓어올라 무언가 다른 말을 내뱉기가 힘들었다.

잡힌 손목도, 장태건이 짚고 있던 제 가슴팍도 무척이나 달아올랐다.

그 손은 그냥 재하가 넘어지지 않게 가슴팍을 짚고 있던 것뿐이다. 고작 사람 체온의 손이니, 못 견디겠다 싶을 정도로 뜨거울 리 없는데도 뜨거웠다.

하아, 숨을 내뱉자마자 장태건이 그런 재하를 향해 비웃듯 말했다.

“남처럼 살자…. 남처럼 살자고?”

그는 마치 질긴 고깃덩이를 넓적한 엄니로 여러 번 짓이기는 육식 짐승처럼 재하가 했던 말을 곱씹었다.

그의 목덜미 부근에서 한 번 더 해당화 향이 훅 피어올랐다. 재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피부에 달라붙은 장태건의 페로몬이 집요하게 그를 공격하는 중이었다.

지금 당장 옷을 벗고 싶었다. 맨몸으로 얼음물이 가득 찬 욕조에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았다. 그게 아니면….

멍한 머리는 사고 회로에 퓨즈라도 나간 것처럼 깜빡거렸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했다.

“저는, 집에, 가 볼…. 이만….”

간단한 몇 마디를 입 밖으로 내뱉기가 무척이나 힘들었다. 차라리 그냥 나서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

운전은커녕 걷기도 어려울 정도로 몸이 끓고 있지만, 이 방을 나서면 모든 것이 해결될 것만 같았다.

그냥 해당화 향의 페로몬이 꽉 찬 이 방만 나선다면…. 재하는 고개를 흔들었다.

허리를 세워 일어서고 싶었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한 순간, 도리어 그의 품에 고개를 박은 꼴이 되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은 채 다시금 정신을 차리려 했다. 고개를 흔들며 짚이는 것을 지탱하여 허리를 바로 하려고 했는데, 문제는 제 옆에 있는 이라고는 장태건이 전부이니 몸 여기저기를 더듬는 꼴이 되어 버렸다.

“아, 미안, 합니다….”

“…….”

사과를 내뱉는 순간조차 온몸에서 열이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다리 사이가 묵직했다.

갈무리해 두었던 성기가 바지춤 안쪽에서 팽팽해지는 기분이었다. 이미 발기하여 팽팽해진 정장 바지 앞섶에 단단해진 귀두의 모양이 고스란히 찍혀 있었다.

그걸 상대에게 들키지 않아야겠다는 생각과 더워 죽겠으니 그냥 이곳에서 옷을 벗어 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교차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몸을 바로 세우려는 걸 포기하지 않아, 계속해서 태건의 가슴팍과 팔뚝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허우적거리다가 단단한 가슴팍에 고개를 비비고 허리를 껴안기도 했다. 상대에게 실례인 걸 알면서도 똑바로 서기가 쉽지 않았다.

그때 잡고 있던 팔뚝의 주인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를 냈다.

“…이재하 씨.”

그것은 호명하는 것보다는 경고의 어조였다. 낮게 가라앉은 음색에서 재하는 자신이 다른 알파 수컷의 영역에 들어왔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것도 제 오메가를 보호 중인 알파의 영역 안에.

‘이곳에서 오메가의 페로몬은… 느낄 수 없었는데 이상하다….’

재하는 더위에 녹은 비디오테이프가 늘어지듯 눅진해진 뇌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이곳이 제 오메가를 지키려는 어떤 알파의 영역인 것은 알겠는데, 그 오메가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었다.

이곳에서 나는 페로몬 향이라고는 해당화와 바다 소금 향이 전부였다. 그것은 달큼하게 느껴져도 명백하게 알파의 것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재하의 살갗을 찌를 듯 다가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저는 그저 우연히 이 영역 안으로 들어온 것뿐이었다. 애초에 자신이 왜 이곳에 있는지도 이제 아예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영역을 침범당해 화가 나 있는 알파와 대치전을 벌일 생각에 안 그래도 멍한 머리가 지끈거릴 뿐이었다.

본능이 경고했다. 우위를 빼앗기지 말라고. 재하가 이 성가신 신경질을 어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고 생각했던 것과는 별개의 문제였다.

늘 서열에 무관심하게 살아왔지만, 그것은 이재하가 강하기 때문이다. 강한 만큼 다른 알파의 영역에 관심 갖지 않아서이기도 했다.

이재하는 알파치고 드물게 오메가에 관심이 없었고, 그렇다고 재미 삼아 베타를 만나는 것도 아니었다. 성적으로 담백하기만 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제 오메가의 주위를 경계하는 알파의 영역권 안으로 들어와 본 적이 없던 것이다.

제 오메가를 지키려는 알파의 행동 중 하나는 이런 식으로 노골적인 페로몬을 도포 하는 것이다.

재하는 그걸 옆에서 멍청히 맞고 싶지 않았다. 가뜩이나 지금 어떤 알파의 페로몬 때문에 가슴팍이 간지럽고 셔츠에 자꾸만 유두가 스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잠시만.

알파의 페로몬 때문에 이렇게 온몸이 들끓듯 간지러운 거라고?

재하는 저도 모르게 부지불식간에 무언가를 깨달았다. 멍한 머리를 누군가 내려치듯 띵한 감각이었다.

두 눈을 깜빡이는데 내내 제게로 쏟아져 가슴팍에 얼굴을 비비던 재하를 떼어 낸 알파가 말했다.

“너는 이게 남이야?”

“…….”

무슨 질문을 하는 걸까? 뭐라고 대답해 주고 싶은데 머리가 멍해 아무런 생각이 나지를 않았다.

알파는 재하의 손목에 하얀 손자국이 날 정도로 세게 쥐었다가 곧이어 느슨하게 힘을 풀었다.

그러고는 재하의 턱 밑을 검지로 톡 쳐올려 젖혔다.

“말해 봐, 이재하.”

“…….”

그 순간, 재하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이곳에 와 있는 이유, 제 눈앞에 있는 상대, 상대가 재하에게 그런 식으로 물어 온 저의 등이 멍한 눈으로 서 있던 재하를 뒤흔들어 깨워 주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차렸다.

숨이 거칠게 몰아쉬어진다. 재하는 호흡수를 조절하며 두 눈을 깜빡이지 않으려 노력했다.

상대가 믿게 해야 한다. 오롯이 제 타당성을 입증해야만 했다.

그래야 말이 된다. 그게 아니면 지난 몇 달간 이재하가 장태건을 위해 쌓아 올렸던 모든 것들은 한낱 물거품이 되어 버린다.

재하는 태건에게 잡혔던 손을 빼내어 혈관이 돋은 이마를 두어 번 문지른 뒤, 늘 단정하게 넘겼던 머리를 다시 한번 정리했다.

그런 다음 태건을 마주했다. 제정신으로 말해야 했다.

“…아니면요.”

“…….”

“남이 아니면 우리가 뭘 할 수 있습니까.”

그 말을 끝으로 무언가, 노도처럼 밀려왔다. 재하는 갑작스러운 파도에 휘말려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

그것은 재하를 강렬하게 두어 번 괴롭히고는 금세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장태건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목소리에 색이 있다면 그 몇 마디는 무조건 무저갱 같은 검은색일 것이다.

“…그래?”

“…….”

“그럼 해 볼까? 우리가 남 아니면 뭐가 될 수 있는지.”

장태건은 이번에도 웃었다. 재하는 숨을 삼켰다.

* * *

“으, 흣….”

신음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해야 했다.

그러나 밀고 들어오는 성기의 감촉은 내벽을 꿰뚫는 것에만 사력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착실히 이재하를 흥분시켰다.

“…….”

장태건이 작게 내뱉는 숨소리가 났다. 재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두 사람은 아무런 전희 없이 한 사람은 테이블 위에 엎드려 있고 다른 한 사람은 드러난 골 사이에 성기를 박고 있을 뿐이었다.

그 어떤 애무도 없었다. 앞을 달래 주지도 않았고, 최초의 진입 역시 메마른 곳에 욱여넣는 침입이나 매한가지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하는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참아야 했다. 그래야 두 사람 사이의 관계가 증명되니까.

‘이재하 씨랑 내가 아무리 남이라고 해도, 당신 러트기는 내가 챙길 겁니다. 그 이유는 그 고매한 집에서 태어난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

재하는 고개를 살짝 끄덕였었다. 장태건이 한 말은 모두 맞았다.

계약 결혼으로 혼인을 한 이상, 서로의 신뢰를 위하여 다른 이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를 데려오는 것은 명백한 계약 위반 사항이었다.

그런고로 재계에서 일어지는 혼례들은 보통 이런 성생활까지 변호사의 손을 거친다. 공증을 받는 것이다.

- 장태건과 이재하는 러트기 동안 부부 외 다른 이와 접촉할 수 없다.

그것은 계약서에 명시되어 있는 사항이었다. 그러니 재하는 지금 남이 되어 버린 제 부인에게 뒤를 내어 줘야 하는 형편인 것이다.

아무런 애무 없이, 또는 어떠한 다정한 손길 없이 그저 성기와 구멍 사이에 이루어져야 하는 일들이, 지금 이 호텔의 최고급 객실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재하는 흐려지는 두 눈을 감았다. 애석하게도 그런 건조한 관계임에도 불구하고 이재하는 너무도 느끼고 있었다.

이유를 모르겠지만, 이재하는 오늘도 뒤가 잔뜩 젖어 있었다.

스위트룸에 딸린 거실 테이블에 상체를 숙인 채, 열이 오른 뺨을 마호가니 테이블 위에 붙인 재하는 쿨쩍이는 소리가 날 때마다 수치스러움에 싸여 인상을 찌푸렸다.

“하…! 으….”

“…….”

장태건은 억눌린 듯한 숨소리를 냈지만, 그 외에는 아예 입을 다물고 있었다.

정사 중에는 늘 재하가 도망치고 싶을 만큼 욕구 가득한 말을 내뱉곤 했는데, 오늘은 단 한 번도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아예 아무런 말이 없이 성기를 쑤셔 박기만 하는 통에, 재하는 되레 초조함이 일었다.

그는 그저 재하의 상체가 올라오지 못하게끔 척추 가운데를 지그시 누른 채로 허리를 흔들어 댔다.

그러나 재하는 그가 그런 태도를 보이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애써서 구하러 와 준 이에게 이렇게 살기 싫다며 남처럼 살자는 말을 한 배우자의 러트를 챙겨야 한다니. 그를 이해할 수밖에 없는 요소였다.

문제는 이재하, 자신이었다. 그런 단순한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누구보다 느끼고 있는 자신 말이다.

“흐으….”

찔꺽이는 소리가 났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뒤가 푹 젖어 있었다. 재하는 발갛게 달아오른 뺨이 대리석 테이블에 비벼질 때마다 알파도 그런 곳이 젖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생각했다.

귀두 부근이 사과 알처럼 부푼 것이 그대로 쑤욱 밀고 들어왔다.

달궈져 있던 내벽을 스칠 때마다 재하의 자지가 꺼덕여 테이블에 닿을 정도였는데 안쪽 어딘가에 그것을 붙인 채 살살 털어 대자 발가락이 곱아들어 견디기가 힘들었다.

“흐, 아, 윽….”

입술을 깨무는 것도 한두 번인지라 신음을 참기가 고역이었다. 형벌처럼 내려진, 아주 건조한 정사임에도 불구하고 회음부가 묵직하게 부풀었다.

접합부에서는 젖은 구멍을 막대로 쑤시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장태건의 성기는 크기가 우람하기도 했지만, 모양이 균일하게 생기지 않은 편이었다.

귀두 갓 밑은 툭 빠져 있어 기둥 가운데가 부풀 듯 두꺼웠고, 음모와 이어진 부분은 그보다는 조금 얇았다. 귀두 갓 밑에 고랑이 뚜렷하게 팬 만큼 사과 알처럼 부푼 귀두 끝에는 알이 박혀 있었다.

가뜩이나 큰 것에 장식까지 한 모양새라 내벽을 쑤실 때마다 아주 깊은 곳에 있는 극치점까지 자극하기 모자라지 않았다. 넘치면 몰라도 말이다.

물도 많은 편이라 내벽이 조여질 때마다 안쪽에 대고 찍, 선액을 싸기도 했는데 정액이 아님에도 양이 많아 접합부로 질질 흘러나올 때도 있었다.

그럼 그 물은 모두 뒤에서 나온 애액에 뒤섞여 심이 선 재하의 허벅지 기둥을 타고 흘러내리거나 엉덩이에 묻어 태건의 고간에 물을 튀기고는 했다.

찰박거리고 찔걱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는 뜻이다. 재하는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혼곤해졌다.

“흐으….”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장태건의 성기에 박힌 구슬이 재하의 극치점을 마구 긁어 댔다. 아예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소변을 보는 것처럼 털 때도 있었다. 그때마다 짓뭉개진 극치점이 재하에게 극상의 쾌감을 선사했다.

문제는 이전처럼 마음이 편하지 않아 가슴이 서늘하다는 것이다. 약간 슬픈 것 같기도 했다.

장태건은 이재하의 모든 노력을 몰라야 한다. 그것은 이재하가 이재하로 태어난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장태건의 모친은 유신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장태건은 원수와 결혼하면서도 딱 한 가지만을 요구했다. 이재하가 유신의 모든 힘을 놓고 오기를 말이다.

그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재하는 그것이 장태건의 희미한 친절임을 알았다.

그가 유신에게 사감이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니, 그의 목적은 아마도 유신을 무너트리는 것일 테다.

그러니 제게 결혼을 조른 재하에게 유신의 힘을 두고 오라 말한 것이겠지.

그것은 무너지는 성에서 아등바등 버티지 말라는 의미이기도 했다.

일말의 사건에 대한 진상을 알아보라 시킨 사람은 다른 보고를 했었다. 경영인을 잃은 유신이 쉽게 몰락할 것이니, 재하로 하여금 경영에서 손을 떼게 한 것이라고.

틀린 말은 아닐 거다. 그러나 그 속에 친절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적어도 재하는 그렇게 여겼다. 그의 그런 친절을 생각할 때마다, 재하는 자신이 정말로 장태건에게 마음을 받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곤 했다.

그럴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태건이 자신에게 애정이 있는 것만 같았다.

그래서 재하는 그를 위한답시고 유신의 내부를 뒤흔드는 것이 자기만족이라고 생각했다.

자기만족에 불과한 일을 그에게 내세울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일방적인 감정 표출은 상대의 불쾌를 유발할 뿐이다.

그러나 이런 자세로, 그저 정략결혼의 계약서에 쓰인 사항을 지키기 위한 관계를 버틴다고 생각하니 아주 조금 기분이 가라앉았다.

잡힌 골반이 아팠다. 볼기에 부딪히는 단단한 허벅지는 전처럼 제동을 걸어 주지 않았다. 골반과 꼬리뼈가 부서질 것 같았다. 신체 구조상 알파의 몸은 뒤로 무언가를 받는 것이 적합지 않다.

그 태생적인 아픔이 재하를 뒤흔들었다. 많이는 말고 딱 울적할 정도로만 말이다. 그러나 이재하는 견뎠다. 이렇게라도 닿으니 기쁘다는 생각에 성기가 꺼덕였다.

제가 생각해도 자신은 구제 불능인 것 같았다. 신음을 참으며 다시금 대리석 테이블 위를 손톱 밑이 하얗게 될 정도로 긁어 댔다. 두 눈을 뜨고 있는데도 극치감에 눈앞이 새하얗기만 했다. 입술을 깨물 수밖에 없었다.

“읏, 흐….”

“…….”

장태건의 페로몬은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기분이 좋지 않아 보였다. 그가 왜 화가 났는지는 완벽하게 알 수가 없었다. 다만 짐작할 뿐이었다.

재하는 곧 그들이 결혼한 지 1년이 다 되어 간다는 걸 깨달았다. 다음 주 목요일쯤이 그들의 결혼 1주년이었다.

그날, 이재하는 태건에게 작은 선물을 주고 싶었다. 선물은 지금쯤 서울중앙지검의 어느 검사실에서 맛있게 무르익고 있을 것이다.

제가 준비했다는 걸 말할 수는 없었지만, 어찌 되었건 그것은 기념일을 맞이하여 태건에게 건넬 수 있는 유일한 선물이었다.

그전까지는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몸 상태가 너무도 이상했다. 재하는 계약서에 그런 조항을 넣지 말 걸 그랬다며 후회했다.

그저 변호사가 혼전 계약서에 들어가는 필수 조항이라는 설명을 했기 때문에 아무런 생각 없이 사인했던 것뿐이었다.

자신은 장태건 외의 상대가 필요하지 않았고, 장태건이 그 조항을 위배해도 상관없었다.

이재하의 사랑은 때로 꽤 맹목적으로 이기적인 편이라 그저 자신이 장태건을 사랑할 수만 있다면 장태건이 뭘 하고 돌아다니건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재하는 자신의 그런 모순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었고, 그것은 오늘날 이런 식의 패착으로 돌아왔다. 재하는 흐무러지는 성감에 비음을 눌러 참으면서도 그것에 대해 생각했다.

“재하야.”

그때 태건이 제 뒤에 성기를 쑤셔 박은 이후 처음으로 제게 말을 걸었다. 재하는 그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저도 모르게 뒤를 조였다.

무슨 말이든 더 해 달라는 듯이 말이다. 재하는 제 마음이 그런 식으로 표출된 것이 미친 듯이 민망해 목덜미부터 붉어졌다. 당황하니 밑 부근에 더욱더 힘이 들어갔다.

장태건이 쯧, 하고 혀를 찼다.

“…이재하 씨 속 안에 들어가 있는데도 그 머리통으로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어.”

“흐, 아….”

“이재하.”

태건이 몸을 내리고 재하의 목덜미를 물어뜯었다. 셔츠 깃까지 물린 터라 반쪽은 둔중한 느낌이, 다른 반쪽은 날카로운 느낌이 났다.

안쪽에서 태건의 성기가 꺼덕이는 것이 느껴졌다. 내벽 어딘가에 또 물이 튀었다. 사정액이 아닌데도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굵은 것이 아래를 무자비하게 후벼 파는 바람에 복강이 눌려 요의가 찾아왔다. 재하는 자신이 눈을 뒤집고 있는 것도 모른 채 꺽꺽거렸다.

“흐, 잠, 깐…. 히익, 아…!”

“잠깐 뭐. 무슨 부탁 하려고. 복장은 다 뒤집어 놓고 뻔뻔하게.”

“안, 안 돼, 흐…. 흐응, 힉…!”

“그러니까 뭐가 안 돼. 말해 봐.”

응? 재하야. 말해 봐. 뭐가 안 되는지. 아니면 뭐가 되는지 말 좀 해 봐.

그가 재하의 귓불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재하는 극치감에 시달려 제정신이 아닌 상태였다.

성기가 저절로 부풀어 둥글게 뭉쳐 있었다. 러트기인 만큼 노팅을 준비하려는 것 같았다. 그러나 어디론가 들어가지 못한 채 허공에서 꺼덕이는 귀두는 부풀어 봤자였다.

재하는 손을 내려 제 성기를 잡으려 했다. 처음 러트기를 겪은 뒤부터는 늘 의무적으로 그것을 주물러 열기를 빼내고는 했다. 그 습관이 저도 모르게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불발에 그친 시도로 끝났다. 태건이 재하의 손목을 붙든 탓이다.

“내가 이재하 씨 뒤 쑤시는 딜도야? 어딜 마누라 두고 혼자 해결하려고.”

“흐, 제발, 아흐, 응, 히익…. 아-!”

“제발 좋아하네. 내가 당신 잡아먹겠대?”

태건이 재하의 골반을 세게 그러쥔 채 다시금 성기를 처박았다. 내벽에 부풀어 있던 극치점이 그대로 자극받아 둥글게 융기되어 있었다.

약간은 말캉하고 통통한 것을 구슬로 긁어 주자 재하는 입도 다물지 못한 채로 앓아 댔다. 숨까지 밭게 쉬며 허리를 흔들었다. 마치 어딘가에 제 성기를 박아 넣으려는 것처럼.

태건의 손이 앞으로 쑥 들어와 재하의 것을 확인하듯 더듬었다. 애정이라고는 없는, 그저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손짓에 지나지 않았다.

재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눈이 까뒤집혀지는 걸 참을 수가 없던 것이다.

“노팅 하려고? 어디에? 아까 그 베타한테 애 배게 한 게 당신이야?”

“흐, 아, 아니, 흐아…. 힉…. 아닌,”

“그럼 이건 뭔데.”

성기를 잡아챈 채, 소 젖이라도 짜내듯 움직여 대는 손짓에 재하의 무릎이 푹푹 꺾였다.

장태건은 봐주지 않고 골반을 틀어쥔 뒤 아예 제가 들어 올린 상태에서 하반신을 무자비로 박아 넣었다.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장태건의 성기로 이어지는 아랫배에는 혈관이 흉흉하게 돋아나 있었다.

“끝까지, 말을 안 하네.”

“아응, 흐읏, 아…!”

성기에 붙은 손을 떼어 내고 싶은데 손끝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짧게 깎은 재하의 손톱이 장태건의 손등에서 주룩 미끄러졌다.

그가 한 번 더 크게 박아 넣고는 허리를 탈탈 털어 댔다. 안쪽에 융기된 것이 귀두 갓에 끼인 채로 그대로 털어 대는 성기의 움직임 때문에 수없이 짓뭉개졌다.

재하는 입을 벌리고 숨조차 내쉬지 못한 채로 꺽꺽거렸다. 방 안에는 쟈스민 향과 해당화 향이 흐무러지듯 피어난 꽃처럼 뒤엉켰다.

멀리서, 파도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모두 이재하의 착각이겠지만 말이다.

* * *

“일어나 봐요. 밥 먹고 자.”

누군가 저를 깨웠다. 손길은 투박할지언정 거칠지 않았다. 재하는 부은 듯 밀어내기 힘든 눈꺼풀을 겨우 밀어 떼어 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호텔 룸의 매립 등이 내뱉는 주백색 광선이었다. 재하는 점멸하는 정신을 깨워 보려 노력했다.

누군가 커다란 등을 돌려 방 안을 나가고 있었다. 누구지…? 재하는 멍한 정신으로 생각하다 놀라 상체를 일으켰다.

“윽….”

그러다 기립근과 골반 안쪽의 자잘한 근육에 쥐가 나듯 아무런 힘도 들어가지 않아 그대로 옆으로 고꾸라졌다. 재하는 베개에 얼굴을 묻은 채 헉헉거렸다.

골반이 쪼개지는 듯한 고통이었다. 회음부와 뒷부분이 화끈거렸다.

그제야 재하는 자신에게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반사적으로 침대 옆 콘솔 위에 있던 전자시계로 고개를 돌렸다. 새벽 4시 8분. 재하는 아찔한 두 눈을 감았다.

그는 샤워 가운을 하나 걸치고 있었을 뿐이다. 자신은 입은 기억이 없으니 아마 장태건이 입힌 것이겠지. 몸이 꿉꿉하지 않은 걸 보아 그가 직접 씻기기도 한 듯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그때 태건이 트레이를 밀고 들어왔다. 건성건성 미는데도 희한하게 그 위에 있던 식기가 덜컹이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구운 고기와 버터 향을 맡고서야 재하는 허기를 느꼈다.

“…….”

재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태건은 그런 재하에게 관심 없는 듯한 표정으로 트레이를 끌고 와 침대 옆에 붙인 뒤 방 안의 의자 역시 그 옆에 두고는 제가 앉았다.

“먹어요.”

“…….”

장태건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재하는 그의 표정을 흘끗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시큰둥한 표정이었다.

권태와 무관심이 적절하게 섞여 있는 얼굴이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혀를 내밀어 아랫입술을 초조하게 핥았다.

“먹으라니까.”

“…네. 장 실장님은….”

“나도 먹을 겁니다. 이게 우리 결혼기념일 식사니까.”

은으로 도금된 포크를 쥐려던 이재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기념일은 다음 주인데 하는 생각이 듦과 동시에 소름이 돋아 등 뒤가 뻐근했다. 결혼기념일 식사라니. 그런 걸 기억할 줄은 몰랐다.

장태건은 나이프로 적당한 크기의 미트볼을 찍더니 그대로 입가에 가져가 우물거렸다.

정장 팬츠만 입은 채 버클은 열고 있어서 그의 검은색 드로어즈와 허벅지 쪽으로 융기되어 있는 성기의 윤곽이 여실하게 보였다. 발은 맨발인 채였다.

재하는 잠시 목이 타 가만히 있다가 입을 다물었다. 뭐라 물을 수가 없었다.

그때 태건이 다시금 심드렁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집 나간 건 좋은데.”

“…….”

“러트기는 나랑 보내.”

“…….”

“내년에도 기념일에는 이런 식으로 식사 정도는 할 겁니다. 다음 주에는 내가 일이 있어서 오늘밖에 안 돼요. 주방 닫았다는 거 이재하 씨 이름 팔아서 식사 차리게 한 거니까 다 먹어.”

“아….”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그래서…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입술을 말아 물자 뭔가 못마땅하다는 듯 장태건이 짜증스레 말했다.

“원하는 거 말해 보라고 해도 입 꾹 다물고 있길래 이거라도 장단 맞춰 주는 거야.”

“…….”

“그 집에 뭐 염병할 정도로 좋은 게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적당히 하고 돌아와.”

경고하듯 내뱉는 음성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재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고개조차 끄덕이지 않는 재하를 두고 장태건이 다시금 말했다.

“대답은 내년에 들려줄 작정이고?”

“…저는 돌아가지 않겠다고 이미 말했습니다.”

장태건이 나이프를 트레이에 툭 던졌다. 끝부분이 장식된 것이 던져지며 사기그릇에 부딪히자 육중한 소리가 났다.

“말한 게 뭐. 이재하 씨가 말하면 내가 다 들어드려야 해? 얌전히 서방님 모시고 살 새끼로는 안 보일 텐데 희한하네.”

“러트기는 염려 마십쇼. 제가 알아서 할 수 있는 문제-.”

“아, 근데 알아서 하시는 게 제 마음에 안 든다니까요, 서방님.”

또 한 번 방 안에 무겁게 바다 소금 향이 퍼졌다. 해당화 향이 묻어있지도 않은 순수한 파도의 냄새였다. 그것도 폭우와 맞닿은 듯한.

무겁게 저를 짓누르는 페로몬에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입을 열었다.

“기념일은, 남들 보는 눈도 있으니 챙기는 게 좋겠습니다. 어쨌든 저도 당분간은 이혼을 원하지-.”

“당분간? 웃기지 마셔요. 정 하고 싶으면 내 오른손 잘라 가서 이혼 서류에 지장 찍어 보든지.”

“…장 실장.”

재하는 뭔가 말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장태건을 설득할 수 있는 그런 말을. 그러나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그가 기념일이랍시고 한 끼 밥을 권한 이 순간이 미치도록 소중하면서도 제가 가져서는 안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는 어떻게 제게 이럴 수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의 모자가 불행하게 산 것은 유신 때문이었다. 그런데 어떻게 제게 이런 식으로….

재하는 쥐고 있던 커트러리를 트레이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는 입과 턱을 감쌌다. 아예 얼굴을 가리고 싶었지만, 그것이 한계였다.

그런 재하를 보던 태건이 짧게 한숨을 내뱉었다.

“더 먹어.”

“…….”

“드셔요. 바짓가랑이는 이따 잡을 테니까.”

장태건이 먼저 제 몫의 포크를 집어 음식을 아무렇게나 들어 올리며 말했다. 재하는 가만히 그걸 보다가 저도 다시금 포크를 집었다.

새벽 4시의 호텔 방에서는 그 이후로도 잠시간 식기들이 달칵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외의 말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말이다.

침묵 속에서 기념일을 위한 식사가 이어졌다.

그렇게 들떴던 열기는 썰물 빠지듯 가라앉아 있었다. 재하는 가벼우면서도 살짝 나른한 몸 상태가 어이없으면서도 입맛이 썼다.

러트기를 그와 보낸, 앞으로 있을 모든 러트기 또한 그와 보내게 될 것이 참혹하면서도 만족스러웠다. 이중적인 감정이 재하의 머리를 어지럽혔다.

지혜열을 앓는 것처럼 머리가 뜨끈했다. 재하는 천천히 식기를 내려놓았다.

상체를 벗은 채 정장 팬츠의 버클은 풀어 헤친 남자가 커다란 흉터가 길게 난 등을 구부려 콘솔 위 담뱃갑을 집어 올렸다.

맹수가 조용히 움직이는 듯한 모양새였다. 재하는 그가 뒤로 돈 틈을 타 그의 등을 마음껏 훔쳐보았다.

평소 같은 관계였다면 재하 역시 남자의 등을 끌어안을 수 있었을 것이다. 삽입이 서로의 거리를 좁히고, 남자와 저 사이에 아무런 틈도 남지 않게 되면 그때부터 재하는 마치 매달릴 것이 그의 등뿐이라 공교롭다는 핑계로 그를 끌어안을 수 있었을 텐데.

아쉽고 아쉬웠지만 원래 제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덤덤해지기는 했다.

시간이 가기 전에 망막에 조금이라도 더 새겨 넣자는 생각으로 다시금 그의 넓은 등을 주시했다. 산맥 같은 등이 구부러진 광경은 재하의 마음속, 어느 한구석을 자극했다.

남자의 몸에는 보통 조직원들이 한둘은 있을 법한 문신이 없었다. 대신 오른쪽 견갑골에서부터 왼쪽 갈비뼈까지 대각선으로 길게 난 흉터가 있을 뿐이다.

신혼 초에 다쳐온 복근 위 상처는 남지 않은 듯했지만, 등에는 여전히 오래된 상처가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흉터들이 많았다. 재하의 러트 주기는 다섯 달 정도이고, 태건의 러트는 언제인지 알지 못했다. 그러니 그다음 기회까지 저 기다란 흉터를 볼 기회는 더 없을 것이다.

그때 남자가 입술 사이에 하얀 담뱃대를 물고 등을 돌렸다. 재하는 다른 쪽 테이블에 얌전히 놓인 금연 표식을 흘끗 바라보았다.

“물고만 있는 거야, 물고만. 잔소리는.”

“…아무 소리 안 했습니다.”

재하는 어쩔 수 없는 심정으로 부정했다.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걸 길고도 투박한 손가락으로 잡아 내린 남자가 재하를 보며 피식 웃었다.

“아닙니다. 양아치 새끼가 또 본데없이 나댔네. 잔소리도 좋으니까 뭐라도 말해 봐요.”

“양아치라니….”

재하는 뭘 부정하면 좋을지 알 수 없어서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다시금 입을 다물었다.

팔짱을 끼고 그런 재하를 바라보던 태건의 손에는 담뱃대가 두 동강 난 채였다. 재하는 그걸 흘끔 보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 봐야겠습니다.”

“…….”

태건은 말이 없었다. 재하는 가운의 앞섶을 여민 채 침대에서 일어섰다. 두 발을 땅에 딛자 그대로 둔통이 올라왔다.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일어서 방을 나서려는데, 등 뒤에서 태건이 짧게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그가 성큼 다가와 재하의 손목을 잡아챘다. 잡힌 손목이 뜨거웠다.

“데려다줄 테니까 됐다, 싫다, 필요 없다. 이런 말 하기만 해 봐. 그대로 가둬 두고 전용 구멍으로 쓸 거니까.”

“…….”

“그 죽이게 예쁜 머리통에서 무슨 쓸데없는 생각을 하든 상관 안 하고 정액으로 꽉꽉 채워 줄 거니까 한마디만 더 해 보자. 아니, 오히려 우리 그렇게 단란하게 사는 건 어때요.”

재하는 손목을 빼내려 했다. 잡힌 손목에는 배려 없는 악력이 달려 있었다. 한 번도 장태건으로부터 이런 식의 물리적 억압을 당한 적은 없었다.

같은 알파인데도 완력의 차이가 느껴졌다. 재하는 약간 충격을 받은 상태였다. 단순하게 힘을 겨루면 비슷하거나 그가 조금 더 강할 것이라 여겼는데, 아예 팔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붙잡힌 손목이 시큰거릴뿐더러 손끝에 피가 통하지 않아 하얗게 질려 버렸다.

“…장 실장님.”

그러나 그는 말과는 다르게 재하가 그를 부르자 그대로 손아귀의 힘을 풀어 손목을 놔주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며 반대 손으로 잡혔던 손목을 문질렀다. 둔한 감각이 느껴졌다. 억세게 붙잡힌 결과였다.

장태건은 그대로 재하를 지나쳐 먼저 방을 나서려는 듯했다.

“어디 같이 지옥 가자는 거 아니고 이재하 씨 바래다준다는 거잖아. 그냥 좀 옷이나 입고 나와.”

그러고는 아예 방을 나가 버렸다. 재하는 남겨진 상태로 멀거니 두 눈만 깜빡였다. 지쳤을까? 지친 태도였다.

재하는 질리고 지친 사람들이 얼마나 무서워지는지 제 모친을 통해 배웠다. 더러는 저 자신조차 모친처럼 행동하기도 했다.

질리고 지친 사람들은 상대를 신경 쓰지 않는다. 상대의 상처도, 슬픔도, 행복과 기쁨까지도 모두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행동한다.

그러면 상대에게까지 그 질림과 지침이 전염되는 것이다. 재하는 태건이 그런 상태일까 봐 숨을 삼킨 채 잠시간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었다.

바보 같은 일이었다. 먼저 그에게 별거를 말한 것은 자신이면서.

그러나 재하는 내심 그때의 태건이 자신에게 마뜩잖은 기색을 보였다는 것에 기뻐했었다. 지금처럼 러트를 챙기는 것에 계약 사항을 들먹이는 것도 말이다.

하지만 이 관계에서 이재하는 저의 행복보다 우선시할 것이 있었다. 그건 어느 순간부터 절대 명제가 되었다.

제 발밑의 왕국을 조각조각 해체하여 그의 발밑에 주단 대신 깔아 주는 것. 자신의 행복보다 그걸 더 원했다.

결국 재하는 넝마를 주워 입는 것 같은 느낌으로 이태리제 정장 팬츠를 걸쳤다. 여명은 아직 소식이 없었고 거실에 나가 있는 남자에게서는 아무런 소음도 들리지 않았다.

재하는 문득 홀로 거실에 나간 그가 무얼 하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그러나 곧이어 그런 궁금증은 제게 허락된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입맛이 몹시도 썼다. 돌 틈에 낀 이끼처럼 아주 적은 양의 햇빛으로도 광합성을 하는 미물인 양 오늘의 식사를 기뻐하는 동시에 말이다.

모순이 재하를 갈랐다. 몸이 반쯤 갈린 채로 그 위에 정장 셔츠를 걸쳐 멀쩡한 척을 했다.

당분간은 이것이 이재하의 가면이었다.

* * *

차 안은 조용했다.

독일제 세단은 쓰레기 수거 차량과 몇 대의 택시만 다니는 새벽의 서울을 막힘없이 지나고 있었다.

엔진음조차 들리지 않는 세단의 실내에서, 재하는 대시보드 불빛이 내려앉은 장태건의 콧대를 슬쩍 바라보다가 눈을 돌렸다.

호텔 자체가 강북 쪽인 터라 평창동인 장창식의 저택까지 가는 길이 짧기만 했다. 재하는 한숨을 삼켰다.

태건은 아까부터 말이 없었다. 호텔을 나올 때, 먼저 내리라는 듯이 엘리베이터의 문을 잡아 주기는 했지만, 시선은 재하를 보지 않고 있었다.

그를 지나쳐 내리며 괜히 헛기침을 했다. 재하는 그제야 제 몸에서 태건의 페로몬 향이 희미하게 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내내 붙어 있던 제게도 희미하게 날 정도이니, 민감한 알파와 오메가는 알파면서 알파의 페로몬을 묻히고 다니는 재하를 이상하게 볼 것이 뻔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하는 그게 좋았다.

“…….”

재하는 다시금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 어둠 속이라 제 시선의 방향을 들키지 않을 것 같았다. 얌전히 허벅지에 올려 둔 두 손이 살짝 굳어 있었다.

도둑 시선으로 훔쳐보며, 재하는 태건에게서도 제 페로몬 향이 날까 궁금해졌다. 그러고 보니 최근 몇 번의 주기 동안 페로몬 향이 바뀌었는데도 이렇다 할 검사를 받지 않았었다.

여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되는 대로 유신의 주치의나 재단 병원과 상관없는 곳을 방문하여 검사를 진행해 봐야겠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그리고 시간은 야속하게도 그 잠깐 동안 상념조차 기다려 주지 않았다. 세단이 벌써 장창식 저택의 대문 앞에 다다른 것이다.

“내려.”

“…….”

장태건은 재하를 바라보지 않고 말했다. 기어 위에 올려 둔 그의 손등 위에는 푸른 정맥이 돋아 있었다.

그 정맥의 흔적 위로는 또 여러 개의 칼자국들이 강한 철에 묻은 흠집처럼 그어져 있었다.

아직까지, 그의 왼손 약지에는 결혼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걸 보고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르겠다.

재하는 입술을 몇 번 달싹였다. 태워 줘서 고맙다고 말하고 싶었는데, 괜히 그런 인사를 꺼냈다가 미련이 남을 것 같았다.

근래 들어 이재하의 가장 친한 벗인 미련을 또다시 발목에 매달고 귀가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이내 입을 다문 채 차 문고리에 손가락을 걸었다.

그런 뒤 재킷의 아랫단추를 채우며 차에서 내렸다. 씻고 바로 출근할 예정이니 정장 재킷 따위는 벗겠지만 몸에 익은 습관 같은 것이었다.

단정하게 내린 이재하는 뒤를 돌아보지 않으려 노력하며 강하지도 약하지도 않게 차 문을 닫고는 그대로 대문 안으로 들어서려 했다.

그때 뒤쪽에서 차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재하는 어쩔 수 없이 멈춰 섰다.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도 몸이 저절로 걸음을 멈췄다.

저벅저벅. 뒤쪽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재하의 등이 소름이라도 돋은 양 한꺼번에 따끔거렸다.

몸의 정확히 반절에 소름이 돋았다. 마치 그 작은 양만큼이라도 장태건에게 향하고 싶다는 것처럼. 재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도저히 이해가 안 가는데.”

“…….”

“나 이런 새끼인 거, 내 주변이 다 이렇게 씹창 났다는 거 모르고 결혼했어?”

“…….”

재하는 숨을 들이켰다. 그가 다시 한번 이유를 묻고 있었다.

제 마음도 아직 다 납득을 못 한 채 밤마다 지병처럼 다 닳은 미련을 기워 내는데 장태건이라고 묻고 싶지 않을까.

그 두 몫을 다 저 혼자 설득해야 하는 것이 속 아팠다.

“좀 씨불여 보셔요. 입 닫고 있지 말고.”

“…장 실장,”

“어, 말 계속해. 왜 아직까지 그 좆같은 실장 소리 하는 건지, 왜 네가 저 빌어먹을 집구석으로 기어들어 가는 건지.”

“…….”

그가 재하의 몸을 돌려 저를 보게 했다. 고개를 내리자 턱을 들어 올렸다. 시선을 내리자 아래턱을 아프게 쥐어 온다. 그래도 재하는 그를 보지 않았다.

태건이 혀끝으로 한쪽 뺨을 둥글게 밀어내는 것이 곁눈에 걸렸다. 그가 하, 하고 헛웃음을 지었다. 그 소리가 재하의 가슴을 가로질러 갔다.

“내가 이재하 씨 생각보다 양아치야? 나 사는 게 이재하 씨 생각보다 훨씬 시궁창이야?”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면.”

“…….”

“아니면 재하야, 그게 아니면 내가 왜 호명 기다리는 선수 새끼처럼 네 눈치만 실실 봐야 하는데.”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표정을 굳혔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날 것 같지 않았다.

피곤한 듯 얼굴을 굳히고 미간을 좁힌 채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실은 주인을 반기는 개처럼 꼬리를 치고 싶으면서, 재하는 딱딱한 가면을 뒤집어썼다.

그것이 저의 최선이라는 양. 그가 속아 줄까? 속아 주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생각 때문에 창자가 다 끊어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가면을 쓴 이상 얼굴 위로는 티가 나지 않아 이재하는 아무렇지 않게 말할 수 있었다.

“나는 사업가입니다.”

“…….”

“꽤 괜찮은 거래를 한 적이 대부분이지만, …어느 때는 실패할 수도 있는 법입니다.”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소낙비처럼 내렸다. 그만큼 무겁고 시끄러운 정적이었다.

재하는 제 표정이 허물어지고, 지금이라도 그에게 매달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술을 다물었다.

묵직한 페로몬이 느껴졌다. 장태건에게서, 색으로 본다면 아주 시퍼렇게 독이 오른 것 같은 그런 페로몬이.

그러나 그것은 재하에게 닿아 위협이 되기도 전에 스러졌다. 그저 장태건의 온몸을 갑옷처럼 두르고만 있었다.

“그러니까 내가.”

“…….”

“이사님 실패 사업이란 소리네.”

그 말이 아니었다. 그런 말이 아니었다.

당신이 어떻게 내 실패가 될 수 있겠어.

재하는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그의 물음에 침묵한 나머지 그것이 대답이 되어 버렸다.

장태건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알고 난 뒤 처음 듣는 듯한 목소리였다.

“그럼 부도 처리 하지 왜 봐주고 있어, 뭐 볼 것도 없는 깡패 새끼를.”

“…….”

“사업은 무슨 씨발, 구세군이네.”

그전까지는 그가 제 입으로 무슨 말을 하든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태생으로 타고난 오만, 겉을 둘러싼 단단한 껍질, 강철 같은 뼈를 가진 자에게서만 나올 수 있는 여유로움. 그가 아무리 자신을 양아치, 건달에 비유한다 한들, 그 자신조차 그를 폄훼할 수 없는 자신감을 온몸 가득 두르고 있었다.

그러나 그 말은, 재하가 방금 들은 그 몇 마디에는 그것이 없었다. 아주 미세한 회한이, 그를 유심히 살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느낄 수 없는 자조가 섞여 있었다.

“태건….”

재하는 달싹이던 입을 열었다. 아니라고 부정하기 위해서.

그러나 그는 이미 등을 돌린 뒤였다. 후미등이 켜진 세단의 뒤를 돌아 운전석 문을 열어 버린 후였다. 재하의 작은 부름은 들리지도 않는 것 같았다.

재하는 작게 전진했다. 아주 미미하여 그 자신조차 그것이 태건을 향한 발자국인지도 모를 만큼.

곧이어 타악, 소리가 들렸고. 세단은 거대한 짐승이 우는 소리를 내며 그대로 평창동의 고급 주택이 늘어선 골목을 빠져나가 버렸다. 남겨진 재하는 이미 멀어진 자동차의 후미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떨궜다.

동쪽으로부터 푸르스름한 여명이 밝아 오고 있었다.

이재하가 겪은 대단한 이별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이. 다 싫고 원망스러운데도 이재하는 그냥 걸어 아직은 어두운 저택의 대문 안으로 들어갔다.

해야 할 의무만 남은 자의 발걸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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