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6/18)

5.

그날 밤, 저와 무슨 하고 싶은 얘기라도 있었던 거냐고 묻고 싶었다. 어설피 잠이 들었던 재하의 기억으로는 자신이 잠든 걸 못마땅해하는 듯했다.

아니, 아쉬워했다고 해야 하나. 그 남자에게 그런 표현은 어울리지 않아 보였지만 말이다.

그러나 그 이후로는 태건이 무척이나 바빠 보였다. 집에 들어오지 않는 날도 많았다.

귀가할 때도 있었지만, 잠결에 답답해 뒤척이다 보면 저를 뒤에서부터 끌어안고 잠들어 있는 모습만 보는 날도 많았다.

그러면 이재하는 한동안 그의 품에 안겨 잠에 빠진 무의식 상태에서도 인상이 강해 보이는 짙은 눈썹 따위를 열없이 훑었다. 손대는 것도 아까워 오로지 시선으로만. 그의 잠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늘 그런 식이니 대화다운 대화를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바쁜 사람에게 대고 제 용건만 중요시할 수는 없는 일이라 재하는 인내 중이었다.

인내는 자신이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으니까.

“…야, 왜 요즘은 체육관 안 오냐?”

회사에서 들려서는 안 될 반말에 살짝 치솟았던 재하의 한쪽 눈썹이 그냥 가라앉았다.

이재호가 잘못을 하면 자신이 의무처럼 처벌하는 것도 지겨웠다.

게다가 체육관이라니. 재하는 원래 체육관에는 자주 방문하지 않았다. 관장을 집으로 호출하는 걸 더 선호하는데 결혼 후 태건의 집에는 스파링 장이 없어 복싱을 잠시 그만둔 참이었다.

그걸 다 설명하기 귀찮아 대꾸 없이 가만히 있자 재호가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 바쁜 것도 아니잖아. 근데 관장님도 너 요즘 운동 안 한다고….”

“근래에 체육관 자주 가나 보네.”

운동은 신체를 단련시키고 단련된 신체는 정신을 무장시킨다. 이재호에게는 그런 것들이 필요했다.

애초에 열성 알파라 체능이 재하보다 좋은 것도 아니었다. 타고난 근골격량도 재하보다는 뒤질 것이다.

그러면 운동이라도 해야 하는데 이재호는 의외로 움직이는 걸 싫어했다.

일단 체적 능력을 향상시켜 아버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길러 주고 싶었는데, 다행히도 복싱에 취미가 붙은 듯했다.

그게 의외라 피식 웃었다. 재호의 귓등이 빨개졌다.

“이, 씨발. 왜 웃어….”

“이사보, 회사에서는 욕 좀 줄여. 언어 습관은 아랫사람들이 이사보를 판단할 때 가장 먼저 보이는 것 중 하나야.”

“그게 아니라…. 아니, 난 그냥 너 요즘 왜 체육관 안 오나 하고…. 왜, 그 형님이란 놈이 너 막 못 나가게 해? 막 가둬 둬?”

막 가둬 두는 건 어떻게 가둬 두는 걸까. 어린애 같은 말투에 이재하는 고개를 설레 저었다.

재호는 그런 재하의 눈치를 흘끗 보면서도 대답을 듣기 전까지 물러나기 싫은 듯했다.

결국 재하는 재호의 물음에 처음으로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었다.

“최근에는 좀 바빴고, 다음이라면 괜찮아. 너 언제 또 나가는데. 스파링할 상대 구하는 거면 날짜 맞춰 보고.”

최근 들어 일을 점점 줄이고 있어 여유 시간이 많았다. 이재하의 개인적 스케줄이라는 것도 요리 학원에 가는 게 다였다.

같은 반 어머님들이 재하를 보고 알파인데 요리도 잘한다는 이상한 칭찬과 함께, 같이 식칼을 고르러 가자고 권했었다.

임 과장에게 물어보니 원래 학원 친구들과는 사이좋게 지내는 거라길래 유신의 차를 따로 대절하여 어머님들을 모셨었다.

요리 상가에서 함께 도구 등을 고른 뒤 같이 눈여겨보았던 한정식집에 가기도 하고, 어머님들이 직접 담근 토마토 장아찌나 무청 피클 등을 얻어 오기도 했다. 그것 외엔 쓸 만한 법랑 냄비를 구매한 것에 약간 뿌듯한 마음이 들었던 게 요즘의 일상이자 일정의 전부였다.

문제는 이재호가 바쁘다는 것이다. 이재하의 일 중 태반이 재호에게 넘겨진 상태였다.

이익형은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지만, 장한과 혼인한 이재하가 실권을 쥐고 있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하는지 별말은 없었다.

허울뿐인 총수 자리에서 몇 년을 버티며 자식에게 용돈을 타 쓰는 기분이 들었는지 재호의 이사 취임을 말리지 않았다.

그러한 사항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일이 빠르게 진행되었기 때문에, 서둘렀던 인수인계는 이제 막바지 단계에 다다르고 있었다. 늘 한량처럼 놀기만 하던 이재호가 무척 바빠질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어, 나 내일, 내일 저녁에 되는데.”

재하의 날짜를 맞춰 보자는 말에, 재호는 반색을 하며 바로 대답했다.

이재하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로 그런 재호를 빤히 보다가, 팔을 뻗어 내선 버튼을 누른 뒤 수화기를 들었다.

- 네, 이사님.

“이재호 이사보 내일 저녁 스케줄 비는 거 맞습니까.”

- 아, 네. 맞습니다.

임 과장이 깔끔한 목소리로 답했다. 재하는 전화를 끊었다. 옆에 있던 이재호가 억울한 눈을 했다.

“야! 왜 사람 말을 못 믿어! 내가 저녁에 시간 빈다고 했잖아.”

“이사보 같으면 이사보를 믿겠습니까?”

“…못 믿지.”

이재호의 가장 훌륭한 점은 의외로 주제 파악이 능란하다는 것이다.

그가 금세 꼬리를 내리자 어이가 없었던 이재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그런 재하를 흘끗 보던 재호가 다시금 물었다.

“…근데 요즘 그쪽엔 별일 없대?”

그쪽? 너무 포괄적인 말이었다. 의미가 모호한 것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재하는 미간 사이에 옅은 실금을 만들었다.

무얼 묻는 건지 정확히 설명하라는 눈으로 가만히 바라보자 이재호가 습관처럼 뒤통수를 긁적이더니 말을 이었다.

“아니…. 명원 작살나고 나서 기업형 조폭 애들 피바람 분다는데. 명원 시체 뜯어먹으려고 모인다고 하길래…. 형님인지 뭔지는 괜찮나 하고….”

“…그런 소리가 있어?”

재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그런 식으로 한 조직이 무너지면 그 주위 패권은 또 다른 기업형 조폭들이 나눠 갖는다는 말을 듣기는 했다.

이제는 대가리가 커진 조폭들이 검경도 무시한 채, 서로 회칼을 휘둘러 영역 싸움에 들어가는 것이다.

아니면 아예 연줄이 닿은 지방 검찰청, 경찰청을 충분히 돈으로 적신 다음, 저들의 일에서 시선을 돌려주기를 종용했다.

이재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바빴나….”

“어? 뭐라고?”

“너 그건 어디서 들었어?”

되묻는 것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로, 재하가 낯빛을 굳히고 재호에게 다시금 질문했다.

재호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숨기고 싶은 것이 있을 때 하는 버릇이었는데, 빤히 바라보자 이내 포기했는지 더듬더듬 말했다.

“…아니, 그냥 요즘 바빠서 안 놀려고 했는데 효석이 새끼가 자꾸 놀자고, 놀자고….”

“결론만.”

“아, 그래서 같이 클럽 갔는데 얘가 가던 곳 말고 다른 데 가자길래 문득 궁금한 거야. 원래 명원이 맡고 있던 회원제 클럽 자주 다녔거든. 근처 갔는데 불도 다 꺼져 있고…. 그래서 물어봤더니 효석이 새끼가 말해 준 거야. 영역 싸움 중이라 그냥 다른 데 가는 게 낫다고….”

“…….”

“거기 일대가 다 회원제 클럽이긴 한데, 우리 같은 애들은 오히려 가정집 개조해서 만든 곳이 편하잖아. 난 그냥 호텔 바도 나쁘진 않은데 효석이가 그런 데 좋아했거든. 죽돌이 새끼가 왜 거기는 안 가냐고 했더니, 요즘 같은 때 그런 데 갔다가는 털린다는 거야. 거기 일대도 다 영역 싸움 중이라고.”

이재호의 말은 일리 있었다. 기업형 조직폭력배들은 상장한 뒤에도 물장사하던 버릇을 고치지 못했다.

지하경제로 어마어마한 돈이 돌고 있으니 발 걸쳤던 가락을 잊지 못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탈세를 하기도 하고 아예 비공식적으로 운영하며 접대를 하기도 했다.

명원도 그중 하나였다. 아예 주변 타운을 건설하여 가정집으로 위조, 그날마다 돌아가며 룸살롱이 열리는 호수를 바꾸어 단속을 피하는 형식을 고안한 것이다.

홀 매니저가 단골에게 그날의 호수를 보안 문자로 안내하여 접객하는 방식이었다. 스캔들을 두려워하는 정치인들이나 연예인들이 주로 찾는 룸살롱이었다.

이재하는 접대를 하거나 받을 때도 그런 곳을 방문하는 걸 싫어했다. 애초에 그런 곳에 방문하는 이유는 딱 하나였다.

같이 추잡한 꼴을 공유했으니 서로 배신하지 말자는 거짓된 맹약.

재하로서는 굳이 그런 맹약이 필요 없는 위치였다.

명원이 그런 큰 고물을 떨어트린 채 망해 버렸으니 주변의 개떼들이 그걸 가만히 놔둘 리 없었다.

장태건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의 성격상 남이 흘린 떡고물을 줍는 것에 크게 관심은 없겠지만 장창식은 다를 것이다.

젊었을 적 미명이 늙은 날을 지배하는 노인들은 황금기는 모두 과거에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그때로 돌아가고 싶다 염불을 외워 대고는 한다.

검버섯이 핀 늙은 손을 뻗어 봐도 전처럼 날쌔지는 않을 테고, 몇 번 그런 식으로 노화에 의한 실패를 하다 보면 제가 기억하던 젊은 날의 영광보다 다소 조잡한 것을 쟁취하는 데에 급급해지기 마련이다.

그러니 장창식은 장태건을 움직이게 할 것이다.

“…그 주변이 어디인데.”

“어? 가게?”

재호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재하의 외모는 외탁을 많이 하고, 재호는 오히려 이익형을 닮았다.

아버지와 비슷한 생김인데도 좀 더 순해 보이는 건 왜일까. 두 눈을 크게 뜬 이재호에게 답을 재촉했다.

“아니…. 거기 요즘 위험할 텐데.”

“내가 갈 거 아니야.”

재하가 직접 갈 것은 아니었다. 아직 비서실 인력 정도는 이재하의 실권 아래에 있었다.

인수인계를 받는 이재호가 이재하의 수족들을 자를 생각이 없었기 때문이다. 본사는 아직도 이재호의 이사 취임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다.

본사에는 이익형보다 재하의 조부나 외조부의 위명을 기억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그들은 김란희가 어떤 식으로 유신의 본가를 차지했는지 알고 있다.

그것은 충성심이라기보다는 밖에다 상간녀를 만들어 놓고 저는 쏙 빠져나간 이익형의 협작질에 대한 반발감과, 친가와 외가의 비호가 단단했던 이재하에 대한 기대감이 합쳐진 결과였다.

그들은 아주 세밀하게 저울질 후 김란희 모자보다는 이재하에게 실권이 갈 것을 점친 것이다.

절반은 맞았다. 실제로 이제까지 유신의 모든 실권은 이재하가 쥐고 있었으니까.

아직 나이가 맞지 않아 상무, 전무 직함을 달지 않았다 뿐이지 유신의 실권자는 이재하였다. 그 많은 계열사에 고모, 고모부, 백부, 백모를 앉혀 두어도 이재하의 결재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로 인해 지금도 부릴 수 있는 인력은 많았다. 괜히 주변을 얼쩡거리다가 태건에게 들키고 싶지도 않았고, 무엇보다 제가 거기에 신경 쓰고 있다는 걸 태건이 알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재하는 무언가를 가늠하다가 걸터앉았던 책상에서 몸을 일으켰다. 재호가 저를 흘끗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더 반응하지 않았다.

* * *

“안 자고 있었네.”

분명 물음일 텐데 끄트머리가 툭 떨어져 감탄같이 들렸다.

재하는 읽던 책을 소파에 두고 이제 막 들어오던 태건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내리고 다니던 앞머리는 웬일로 걷어 넘긴 채로 고정한 상태였다. 오히려 미형의 이마가 드러나자 평소의 야생성이 약간은 가라앉은 느낌이었다.

거친 분위기가 가시자 섬세한 이목구비가 평소보다 훨씬 잘 보였다. 콘크리트 벽에 틀어박혀 일하는 자신과는 다르게 현장도 다니는 사람이라 그런지 까무잡잡한 피부가 그 섬세한 생김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머리를 단정히 걷어 올리니 전과는 다른 분위기가 났다. 여전히 콘크리트 숲을 배회하는 짐승 같은 기분이 들기는 했지만 말이다.

재하는 태건의 새로운 모습을 흘끗거리다가, 약간 나른해 보이는 그를 향해 대답했다.

“요 며칠 얼굴을 못 뵌 것 같아서….”

장태건은 재하의 말에 피식 웃었다. 정장 재킷은 어디에 뒀는지 셔츠 차림이었다. 넥타이는 손에 쥐고 있었는데 무언가 묻은 듯 젖어 있었다.

물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검은색이라 티가 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드레스셔츠 칼라 끄트머리에 적갈색 얼룩이 묻어 있는 걸 보고 그것이 피라는 걸 알았다. 장태건은 재하의 시선이 자신의 셔츠 칼라에 향한 것을 보고 입을 열었다.

“상갓집에서 싸움이 나서.”

“…….”

“원래 상갓집에서는 싸움이 잘 납니다. 그리고 내가 이겼어요.”

그 말에 피식 웃음이 날 수밖에 없었다. 지난번 칼에 찔려 왔던 것은 정말 특수한 경우인 듯했다. 명순이 넌지시 말해 주기도 했다.

‘실장님 나오시면 다른 놈들이 꼼짝 못 합니다. 일단은 현장의 기가 달라지거든요. 원체 강하시기도 하고…. 저같이 큰 놈들 상대로도 땀 한 방울 흘리신 적 없습니다.’

그럼 어째서 칼에 맞아 온 거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너무 그의 일에 참견하는 것같이 보이고 싶지는 않았다.

정작 열이 올라 명원을 뿌리째 흔들어 놓은 건 이재하 그 자신이면서도 모른 척을 했던 것이다.

오로지 그런 사소한 것들을 참견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그가 제 노력을 가상하게 여겨 주길 바라는 게 어이없을 지경이었다.

재하가 잠깐 말이 없자 태건이 그를 들여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왜 조르는 얼굴이지? 이재하 씨 구멍이 마누라 찾던가요?”

어투는 단조롭고 목소리는 진중하기까지 했다. 옅게 펴져 있는 다정이 말꼬리에 묻은 채 재하의 청각을 자극했다.

그 희롱에 가까운 언사가 늦은 시간에 잠들지 않고 저를 기다렸냐고 다정하게 묻는 말투처럼 들렸다는 얘기다.

그래서 그가 무슨 말을 한 것인지 완벽히 이해한 무렵에는 말이 나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그게 무슨…. 아니, 아닙니다.”

“아니야?”

태건이 확인하듯 다시 물었다. 완전히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고 생각하자마자, 귓등부터 붉어졌다.

재하의 두 눈을 응시하던 시선이 약간 비껴 나가 붉어진 귓등을 바라보는 듯했다. 손을 들어 그걸 보지 못하게 막고 싶은 충동을 내리눌러야 했다.

장태건 앞에만 서면 첫 상대 앞에서 심하게 긴장한 나머지 콘돔 껍질도 제대로 까지 못하는 동정처럼 구는 자신이 한심했다.

게다가 상대는 재호와 나이가 같았다. 같이 스파링 가자고 말 한마디 하기가 어려워 씨발씨발 거리는 철없는 이복동생을 대하다가 태건을 보면, 저절로 말문이 막혔다.

이재하는 오로지 장태건 앞에서만 긴장했다. 그런 자신을 알면서도 말이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그러지 않으려고 수천 번 노력한 뒤에야 그의 물음에 대답할 수 있었다.

“그건 아니지만….”

“그럼 뭔데요.”

“장 실장을 찾았던 건 맞습니다. 오래도록 얼굴을 보지 못해서….”

그리웠노라는 다음 말은 태건의 입술에 의해 막혀 버렸다.

살짝 아랫입술만 빨았다 놓는 느낌은, 그곳이 어디든 제 영역권이라는 듯 어슬렁거리는 짐승치고 꽤 아기자기한 감촉이었다.

재하는 그가 닿았던 모든 순간의 강렬함이 그저 신경계가 주는 흥분 때문이 아님을 깨달았다. 어린애들 장난 같은 입맞춤으로도 아랫배가 몹시 묵직해진 것이다.

대신 그가 그런 식으로 옅은 스킨십을 하는 이유가 궁금하기는 했다. 그것이 표정에 드러난 건지 장태건이 살짝 내렸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말했다.

“손을 못 닦았어.”

보니까 두 주먹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뒷덜미를 강하게 부여잡고 혀를 쑤셔 넣는 평소와 같은 입맞춤을 하기에는 무리였던 것 같다.

“이사님 더러운 거 싫어하잖아.”

“…제가 언제-.”

“까탈스러워서 귀엽단 얘긴데.”

그렇게 말하며 태건이 재하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을 보며, 이재하는 짧게 앓았다. 어쩌면 좋을까.

당신과 함께라면 오물 속에서 자글자글 끓여져도 좋다는 이 마음을 어떻게 말해야 할까.

규칙적인 것을 좋아하는 성정에 모순적이게도, 이재하는 언어를 사랑했다. 그것이 갖는 모호함과 어순을 어겨 가며 부르짖는 모든 묘사를 좋아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좋아하던 것들이 오히려 제 마음을 한정 지을까 봐.

“…제 손은 깨끗합니다.”

재하는 다른 말은 붙이지 않은 채로 그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뒷머리에 손가락을 찔러 넣고는 제게 당겨 와 입술을 물었다.

이렇게 터질 것 같은 마음을 몇 가지의 단어들로 표현하는 즉시 테두리에 그것들을 욱여넣을 때마다 남은 곁가지들이 툭툭 잘려 나갈까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 때문에 재하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온 마음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제가 하면 됩니다. 장 실장이 어려운 게 있다면 그건 제가 할 수 있게 해 주세요.”

당신이 하기 곤란한 모든 것들은 내가 하면 된다. 그런 말과도 같았다.

이재하는 제 진심을 그렇게밖에 토로하지 못하는 비겁한 자신이 신물 나면서도 태건의 입술을 바라보는 시선을 치우지 못했다.

넘쳐흐르는 이 감정을 어떻게 당신에게 이해시킬 수 있을까. 전달은 포기한 채로 그를 사랑하는 것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그러자 짐승이 화답했다.

“이럴 때, 내가 뭘 시킬 줄 아냐고, 겁이 없다고 되묻는 친절한 새끼랑 결혼하지 그랬어요.”

“…….”

“안타깝네. 이사님 마누라는 좀….”

양심이 없거든.

그가 재하의 팔목을 끌어당겼다. 아, 하는 탄성조차 내뱉을 틈이 없었다.

* * *

보통, 그런 곳이 젖는 게 맞을까?

“흐, 아-.”

재하는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심했기 때문이었다.

물기로 가득 찼음에도 틈 없이 조여진 곳 사이로 무언가 두꺼운 것이 그대로 밀고 들어오느라 그런 소리가 나는 듯했다.

그저 두꺼울 뿐만 아니라 단단하여 한없이 조여드는 내벽을 그대로 짓이기는 기분이었다. 우람한 성기에 돋은 혈관들이 떠올랐다. 그와 동시에 저도 모르게 밑이 조여들었다. 회음부가 얼얼할 정도였다.

“잠, 깐,”

그 애원에 재하를 덮고 있는 남자가 피식 웃었다. 그렇게 두껍고 무거운 사람을 제 위에 올려 둔 적이 없었다.

근육량이 많아 묵직한 상체가 재하를 짓눌렀다. 짐승에게 먹히는 기분이었다.

안쪽을 박아 올리는데 침대와 재하가 같이 삐걱거렸다. 거기서 그런 소리가 나면 안 되는 가구였다.

고가이기도 했고 매트리스와 침대 하부 구조가 탄탄하다고 이름난 브랜드였다. 그러나 위에서 작정하고 박아 내리는 움직임에는 별수 없는 듯했다.

재하의 사정 역시 그 침대와 마찬가지였다. 골반뼈가 시큰거릴 정도였다. 억지로 벌린 다리 사이로 처박는 것 때문에 미칠 것 같았다.

잔뜩 발기한 성기가 짐승의 허리 짓 때문에 단단한 복부에 닿아 철썩거렸다. 끄트머리가 잔뜩 젖어 있었기 때문에 그런 소리가 나는 듯했다.

요도구가 빠끔거리며 선액을 줄줄 흘려 댔다. 잔뜩 젖어 기둥이 투명하게 반짝이는 것이 민망했다. 재하는 몸서리쳤지만 장태건은 움직임을 멈춰 주지 않았다.

“…나는, 구두로 한 약속도 알뜰하게 받아 내는 실력 좋은 빚쟁이입니다.”

“아, 흐, 안…. 안 돼, 흑….”

귀두갓 끄트머리에 달린 구슬이 재하의 내벽 안쪽 강낭콩만 하게 융기한 부분을 쉼 없이 긁어내렸다.

유두 끄트머리에 피가 몰려 가슴이 간지러웠다. 그런 감각은 처음 경험해 보는 것이라 당황스러운데 그걸 태건에게 들키기까지 하자 더 당황스러웠다.

“젖꼭지 빨아 줘?”

그의 원색적인 말도. 그리고 동시에 진하게 웃으며 내려온 입술이 유륜째 삼키는 것도 말이다.

재하는 목을 뒤로 젖힌 채 바들바들 떨었다. 어째서 이런 느낌이 드는 걸까. 삽입을 당한 것이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그렇게 우람한 걸 받는데 잘 늘어나고 잘 조이기만 했다.

이상한 일이었다. 자신의 신체는 같은 알파를 품는 용도로 쓰기에는 알맞지 않았다. 기능적인 측면에서 말이다.

그런데도 이렇게….

“흐, 잠, 아, 아-!”

까슬한 혀가 잔뜩 발기한 젖꼭지를 스치는 감각에 재하는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강인한 악력으로 움켜쥐는 것만으로도 천이 죄 뜯겨 나갔다. 너덜거리는 시트를 바라보며 장태건이 피식 웃었다.

“살림 다 부셔라. 그렇게 좋아?”

그는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의 시선이 제가 빨아 두어 빨갛게 젖은 채로 부푼 유두, 자지에서 흐른 선액이 흩뿌려진 재하의 단단한 복근, 꺼덕이는 성기와 살짝 색이 진해진 회음부, 그리고 연결된 접합부를 훑는 것이 느껴졌다.

재하는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손을 내려 제 성기와 회음부를 가리려고 노력했다.

제모를 한 덕에 매끈한 자신과는 다르게 장태건의 무성한 수풀에는 누구 것인지 모를 투명한 애액이 방울져 매달려 있었다.

그것이 제 것임을 금세 알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장태건 역시 그것을 알고 있는 듯했다. 손을 뻗어 재하의 성기를 움켜잡았기 때문이다.

“안 돼, 흐아-! 아, 흐…!”

“재하야. 뭐가 안 돼. 말해 봐. 이거 싫어?”

다정한 목소리. 아이를 어르는 것 같은 말투 속에서 재하는 그가 제 성기를 부여잡고 흔드는 손목에 매달려 빌 수밖에 없었다.

발끝이 다 곱아들 정도로 괴로웠다. 뒤꿈치로 바닥을 득득 긁는데도 피식 웃으며 놔주지 않았다.

쿨쩍거리는 소리가 났다. 언제부터 그렇게 젖어 있던 것인지 미끌거리는 선액에 잔뜩 젖은 자지는 시럽을 뿌린 기다란 사탕 같기도 했다.

그의 엄지가 사정없이 요도구를 후벼 팠다. 그저 아프기만 했으면 이 죽을 것 같은 성감이 가라앉기라도 할 텐데, 그가 그럴 때마다 미친 듯이 간지러운 동시에 회음부 저 안쪽 어딘가에서 뭔가가 툭 터질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감각을 간신히 버티고 있는데도 봐주지 않고 허리를 밀어붙이는 통에 혈관이 바드득 돋은 우람한 성기가 내벽을 쑤시는 감각이 같이 밀고 들어왔다.

요의가 심하게 느껴졌다. 재하는 목을 뒤로 젖힌 채 아무런 신음도 내지 못하고 바들바들 떨었다.

손만 간신히 뻗어 마디 끄트머리로 태건의 손을 밀어내려고 해 봤지만 허사였다. 조가비 같은 손톱 끝이 하얗게 변했다. 태건이 그 가여운 꼴을 보고 웃었다.

“잠, 잠깐만, 안 될 것, 흐, 아-! 안 될 것 같, 아, 아-! 흐…. 안,”

자지 기둥의 근원부가 살짝 부풀었다. 요의를 참느라 생긴 융기의 흔적이었다. 태건은 그 맛있게 생긴 걸 빨아 주고 싶다가도 안쪽에 처박는 것이 즐거워 인내해야 했다.

재하가 더 거세게 빌었다. 제발 손을 떼어 달라고 더 참을 수가 없다고. 태건은 들어주지 않았다.

그 무자비함이 성기에 다닥다닥 붙어, 오로지 감각으로만 치환됐다. 이윽고 더 견디지 못한 재하의 요도구가 입을 쩍 벌렸다가 힘없이 오므린 뒤 다시금 툭 벌어졌다.

“아, 아…! 아흐, 아-!”

무언가 투명한 액체가 요도구를 밀고 나왔다. 재하는 그 액체가 요도를 타고 나오는 느낌이 여실한 탓에 안쪽이 잔뜩 조여지는 것도 모른 채 볼기에 우물이 팰 정도로 힘을 주었다.

허벅지 안쪽 근육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허리가 휜 탓에 매트리스와 그의 등 사이에 둥근 공간이 생겼다.

쪼르륵거리는 소리와 함께 투명한 액체가 재하의 복근과 가슴팍에 그대로 튀어 버렸다.

나중에는 색 자체가 백탁액처럼 흐려졌는데, 살짝 사정한 것인지 정액이 섞여 나오는 듯했다.

태건은 그의 골반을 들어 올려 제 허벅지에 올려 둔 뒤에 재하의 두 무릎 아래를 잡아 위에서 아래로 내리눌렀다.

그러는 동안에도 내벽에 들어 있는 우람한 것과 어딘가 안쪽의 구조물이 잔뜩 짓눌린 것인지 재하의 요도구에서 한 번 더 물이 튀었다.

두 눈이 뒤로 휙 돌아갈 것 같아 급히 두 눈을 감았는데도, 속도가 맞지 않아 눈의 흰자가 다 드러났다. 태건은 그 꼴을 보며 아이들 기저귀라도 채워 주듯 재하의 엉덩이를 바닥에서 들어 올렸다.

무릎 뒤 오금이 잡힌 채로 엉덩이가 치솟아 오르자 정말로 기저귀 가는 자세가 되었다. 기억하지도 못하는 아주 옛날을 제외하고는 이렇게 음부와 뒷구멍이 남에게 적나라하게 보여지는 자세는 처음이었다.

성기에서는 아직도 물이 튀기고 있는데 재하는 그 자세가 제일 마음에 걸렸다. 이건 아닌 것 같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태건이 위에서 아래로 기둥을 박아 넣듯 성기를 구멍에 쑤시기 시작하는 게 아닌가.

“아! 흐, 안, 아…! 잠, 흐익, 싫, 힉-!”

젖은 살덩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났다. 장태건은 말없이 성기를 박아 주는 것에만 집중하면서도 그 시선은 내내 재하의 얼굴을 헤맸다.

자신이 주는 감각을 이재하가 잘 받아먹고 있는지, 욕심 많은 구멍이 잔뜩 성기를 삼키다가도 혹시 그 감각을 어디에 흘려보내는 것은 아닌지 감시하는 눈이었다.

재하는 아랫입술을 깨물기도 하고 도리질도 쳐 봤지만, 감각 자체를 아예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잔뜩 부푼 내벽 안쪽에는 강낭콩만 한 둔덕이 융기해 있다가 계속된 자극 탓에 더욱 발기한 듯했다.

태건의 성기는 귀두 갓 바로 밑 고랑 부근이 뚜렷하게 파여 있었다. 이 부분이 계속해서 안쪽에 융기된 부분에 걸려 자극이 심했다.

무언가를 사정한 뒤에도 발기가 풀리지 않아 재하는 자신이 실금을 한 줄 알았다.

전에도 이렇게 물이 많이 나온 적은 있지만 이번에는 양이 상당했다. 도저히 다른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당황으로 물든 얼굴에 아찔한 절망이 스쳐 지나갔다.

태건이 그런 그를 달래 주었다. 다정한 음색이었다.

“오줌 싼 거 아니고 씹물입니다.”

다정한 것은 음색뿐이었지만 말이다. 재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초점이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경계를 다 털어먹듯 절절 끓는 성감이 재하의 시야를 어룽지게 만든 것이다.

“이런 거 처음 싸 보나 봐.”

“흐…. 아….”

“앞으로 종종 있을 일입니다. 그때마다 이렇게 놀랄 거야?”

놀리듯이 말하는 음색은 기뻐 보이기까지 했다. 재하는 더 견디기 힘들어 짧게 앓았다.

태건이 상체를 내렸다. 그만큼 그의 성기가 더욱 안쪽을 짓눌렀다. 그가 재하의 귓불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너무 야하고도 견디기 힘든 말이라 재하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재하가 그렇게 막을 수 없는 청각 대신 시야라도 차단하자 태건이 낄낄거리며 웃는 것이 느껴졌다. 안쪽에서 그의 성기가 툭 꺼덕이는 감각이 적나라했다.

그는 아직 사정하지 않았다는 것이 가장 괴로운 것 중 하나였다.

* * *

밖은 새벽인 듯했다. 재하는 떠지지 않는 두 눈을 깜빡였다. 방 안이 어두웠는데도 그 미약한 불빛만으로도 두 눈이 찌를 듯 아팠다.

마지막에는 엉엉 울다시피 했던 것이 기억난다.

서러워서 운 것이 아니라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었다. 온몸의 모든 구멍이 투명한 액을 쏟아 내는 것같이 괴로웠다.

잠이 든 것도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중간에 정신을 잃은 듯했다. 몸은 찝찝하지 않았다. 혼절하듯 잠든 저를 씻겼을 태건을 생각하니 잠시 아찔해졌다.

“더 자.”

끝없이 잠긴 목소리였다.

재하는 그 목소리와 함께 밀려드는 해안가 절벽의 해당화 향을 맡을 수 있었다.

페로몬이란 후각으로 맡는 것이 아니라 모든 피부에 달라붙는 걸 후각세포가 제일 먼저 인지하는 것뿐이라, 재하는 지금 자신이 태건의 페로몬에 잠겨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알파들은 보통 저 외의 다른 알파의 페로몬을 경계할 수밖에 없다. 그것은 그들이 문명을 사는 현대인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그 본능의 영역은 식욕을 느끼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재하 역시 다른 알파들의 페로몬을 불쾌히 여겨 왔다.

그들의 페로몬은 늘 호전적이었고 재하가 우성 알파임을 알면서도 틈을 보이면 바로 전복시켜 보려는 욕구가 있었다. 그 주제 모르는 정복욕이 제게 들러붙을 때면 짜증이 났다.

이재하는 자신이 우위임을 뽐내는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대의 건방짐을 참는 편은 아니었다.

오로지 이성적인 판단만으로 얕보이는 것이 좋지 않은 일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장태건의 페로몬은 어딘가 달랐다. 그것은 하늘과 바다밖에 없는 곳에 잠긴 기분을 선사했다.

몸 전체가 아니라 그저 표면에 둥둥 뜬 기분. 그 바다는 저를 삼킬 수도 있고 폐에 남은 공기를 모두 앗은 뒤 첨단까지 물거품을 밀어 넣어 숨을 멎게 할 수도 있지만, 가만히 재하를 그 위에 띄워 주듯 얌전히 굴고 있는 느낌이었다.

어째서일까. 왜 태건의 페로몬은 이재하를 봐주고 있을까. 궁금해졌다. 재하는 입을 달싹이다가 겨우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제, 페로몬은…. 장 실장에게는 어떻게, 느껴집니까?”

그 한마디를 묻는데도 목이 아팠다. 평소에는 말을 많이 하지 않고 사는데도 불구하고 소리를 지르듯 꺽꺽거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아니면 신음이 터져 나가는 걸 막으려다가 기도와 성대의 틈새로 공기가 빠져나가는 바람에 죄 긁힌 걸 수도 있었다. 어쨌든 평소와는 다르게 목소리가 심하게 갈라진 상태였다.

태건은 재하의 물음에 답을 하는 대신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뒤에서 끌어안긴 상태였으니 그런 자세가 되는 게 당연한 순서라는 것처럼.

재하는 제 허리춤을 바싹 당겨 안은 그의 팔뚝의 무게를 느끼는 중이었다. 묵직하고 답답해도 뚜렷한 체온이 느껴졌다. 천장에 달린 에어컨이 가동되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그는 대답해 주지 않을 것 같았다. 답을 기다리던 재하는 기대를 내려놓았다. 그가 벌써 잠에 빠져들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곧이어 그는 아직도 뒷덜미에 입술을 붙인 채로 말을 이었다. 그의 질감 좋은 입술을 가르고 나온 음파가 제일 튀어나온 경추 부근에 붙어 진동을 일으키는 것이 소리보다 먼저 느껴졌다. 이재하의 촉각이 청각을 대신했다. 장태건이 처음 일깨운 감각이었다.

“이재하 씨 페로몬은 여기에서 제일 진하게 맡을 수 있는데.”

태건이 손을 뻗어 재하의 성기를 지나쳐 음낭 아래 부근을 꾹 눌렀다. 회음부였다. 재하는 그제야 자신이 속옷도 입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골 사이에 닿는 묵직한 것이 느껴졌다.

뼈같이 단단하고 두꺼운데도 골 사이를 파고들고 싶어 안달이 난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살짝 뜨겁기까지 했다.

재하는 뒤척이려다가 움직임을 멈추고 숨을 죽였다. 태건이 피식 웃는 게 느껴졌다.

“더 안 건드려. 곧 나가야 하는데 지금 다시 박았다가는 이재하 씨 씹구멍이 나를 놔줄 것 같지도 않고.”

“그건….”

그건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는데 더 말이 나오지 않았다.

손을 들어 그 바닥에 얼굴을 파묻었다. 컴컴한 방 안이라 제 얼굴색이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페로몬, 글쎄. 그것도 지금 말했다가는 자지가 안 가라앉을 것 같은데.”

“…….”

“명순이한테 운전시키고 난 뒤에서 딸근 세워도 됩니다. 마누라가 밖에서 자지 까고 돌아다니는 게 좋으면 말해 주고.”

“아니, 아닙니다.”

명순이 운전하는 차 뒷좌석에서 수음을 하겠다는 말에 놀란 재하는 듣고 싶었던 것도 금세 휘발되었다. 놀라 대답을 빨리하느라 목소리 끝이 더 심하게 가라앉았다.

“괜히 들쑤시지 말고 그냥 자요. 재워 줄 때, 자. 재워 줄 때.”

꽤 봐주고 있는데 까분다는 말투였다. 그는 가끔 이재하를 멋모르는 애 취급할 때가 있었다. 사실은 재호와 동갑인 주제에 말이다. 재하는 작게 웃음이 나와 어깨를 들썩였다.

뒤에서 어쭈, 하는 목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살짝 물었다 놓는 것이 느껴졌다.

섹스를 험악하게 해서 그렇지 장태건은 셔츠 칼라로 가려지지 않는 곳들은 절대 건들지 않았다. 재하가 아직 출근해야 한다는 걸 명심하고 있는 듯이. 그런 작은 다정들이 좋았다.

가물가물한 눈 사이로 어슴푸레 방안 풍경이 비쳤다. 졸음이 장막처럼 덮어졌다. 재하는 잠시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다.

밝은 빛이 거슬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침이라는 걸 깨달았다. 요즘에 늘 재하의 방에서 자는 태건은 주인 없는 욕실 안쪽에서 간단히 씻는 듯했다.

재하는 허리를 일으켜 침대 밖을 나오다가 죄 알몸인 걸 깨닫고 저도 모르게 아래를 가렸다가 부질없어 치워 버렸다.

허벅지 안쪽에 자잘한 쪼가리 흔적들이 너무도 많았다. 그걸 가리려던 제 행동이 어이가 없어졌다.

재하는 그냥 얼른 트랙 팬츠를 주워 입었다. 간이 행어에 걸어 둔 티셔츠가 보이지 않길래 그대로 방을 나섰다.

시계를 보니 아침 6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재하는 그대로 기지개를 켜 근육을 늘이며 주방으로 갔다. 뭘 먹여 내보내고 싶었던 것이다.

냉장고를 연 채로 멍한 머리를 깨우려고 노력했다.

허벅지 안쪽이 아릿했다. 잔뜩 벌린 지난밤의 후폭풍이 서서히 밀려드는 듯했다. 아직 젖산이 쌓이기에는 이른 시간일 것이다. 새벽 늦게까지 관계를 했으니 말이다.

재하가 냉장고 문에 기대어 안쪽을 들여다보는 걸로 잠에 취해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깨우려는데 뒤쪽에서 소리가 들렸다.

“들어가서 살겠네.”

“아….”

놀라 돌아보다가 허리가 뻐근해 짧게 앓았다. 그러는 사이 태건이 성큼 다가와 재하의 유두를 꼬집었다. 잇자국이 남아 있는 쪽이었다.

쓰라릴 정도로 마찰 당했던 곳은 꽤 강하게 꼬집히고도 야릇한 아픔을 냈다. 살아생전 관심도 없던 기관이 이토록 이상한 감각을 줄 줄은 꿈에도 몰랐다.

“읏….”

“왜 내놓고 있어. 빨아 달라 이거야?”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라는데도 그는 재하의 말을 무시하고 팔을 쭉 뻗어 냉장고 선반에 있는 생수병을 꺼내며 말했다.

“나도 바빠요. 마누라가 돈도 안 벌고 아침부터 이재하 씨 젖에 매달려서 정신 못 차리면 좋겠어?”

젖… 에 매달리는 건 아니라도, 그가 출근하지 않고 저와 시간을 보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할 수는 없으니 머뭇거리느라 대답하지 못한 사이, 태건이 재하의 뒤쪽으로 팔을 쭉 뻗어 냉장고 선반에 있는 생수병을 꺼냈다.

거의 껴안듯이 뻗은 팔 때문에 서로의 가슴팍이 살짝 붙었다가 떨어졌다.

태건이 재하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수병 뚜껑을 까득 따 버린 다음 시선을 떼지 않은 채로 주둥이에 입술을 붙이고 물을 마셨다.

목줄기가 갈라지며 울대가 벌컥거리는 걸 바라보던 재하는 제가 그를 빤히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닫고 입술을 말아 문 채로 시선을 흐렸다.

그런 그를 보고 태건이 피식 웃었다.

“침 흐르겠다.”

그 말에는 간신히 속지 않았다. 놀림당한 게 살짝 억울해 살포시 금이 간 미간에 태건이 젖은 입술을 부딪치고는 등을 돌렸다.

몇 걸음 현관을 향해 가더니 뭔가 생각났다는 듯이 등을 돌렸다.

“어디 갈 때는 명순이나 정길이 운전하는 차 타세요.”

“아, 네. 지금도 그러고 있습니다.”

“착하네. 마누라 돈 벌고 올 테니까 얌전히 기다려요. 어젯밤에 싼 거 오늘도 나오나 보자.”

“…….”

재하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입술을 꾹 다물었다. 태건이 낄낄거리며 현관으로 향했다. 쫓아가 배웅하려다가 상의를 입지 않고 있다는 걸 깨닫고 관뒀다.

곧이어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 * *

“이사님 나오셨습니까!”

회사 앞이라 그런지, 정길은 그 이상한 형부님 칭호를 붙이지 않았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제가 우스워, 재하는 피식 웃으며 그에게 마주 인사를 했다.

“예, 정길 씨. 좋은 저녁입니다.”

“오늘은 동생분과 체육관에 가신다고 들었습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재호가 스파링을 함께 하고 싶어 하는 눈치길래 그러자고 했었다.

약속만 해 두고 해 주지 않으면 3박 4일은 쫓아다니며 찡찡거리는 것이 더 귀찮아 이럴 때는 그냥 가 주는 것이 나았다.

정길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재하가 탈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임원용 지하 주차장에는 아직 차가 꽤 많이 들어차 있었다. 이른 시간이라 퇴근하는 사람이 저뿐인 듯했다.

막 차에 오르려는데 웃고 있던 정길이 어딘가를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은 굳어 있고 눈매는 벼려진 칼날처럼 섬뜩한 느낌이 났다.

그는 가늘게 뜬 눈매로 주차장 구석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본사 건물 부지가 꽤 넓은 편이라 주차장 또한 넓었다. 그 때문에 재하의 차가 주차되어있는 곳에서 벽까지 멀고도 멀었는데도, 그 벽을 뚫고 어딘가를 주시하는 느낌이었다.

“뭐가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살짝.”

정길은 그 이후로 더 대답하지 않았다. 재하는 그가 더 말하지 않는 걸 캐묻지 않고 차에 올라탔다.

정길이 차 문을 닫아 주었다. 그가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타기 전, 재하 역시 정길이 방금까지 바라보았던 곳을 응시했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컴컴한 구석이 있기는 했지만, 지하 주차장은 본사 건물답게 조명이 비치지 않는 곳이 없는 편이었다.

‘뭘 봤던 걸까.’

잠깐 의문이 들었지만, 정길이 차에 올라타 출발하겠습니다! 하고 발랄하게 말하자 그 의문은 곧이어 사라졌다.

차는 그대로 주차장을 부드럽게 미끄러져 빠져나갔다.

* * *

장태건의 인생은 보잘것없었다.

그것은 그의 손등을 뒤덮은 자잘한 상처들이 방증한다. 번듯하게 살았다면 그런 상처들은 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미 다 아문 흉터들 위로 튀어 있는 핏자국도 그의 인생을 증명하는 것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장태건은 손에 묻은 피에 담뱃대가 물드는 것도 신경 쓰지 않고 끄트머리를 문 다음 볼우물이 팰 정도로 필터를 빨았다.

새빨간 불씨가 타들어 갈 때마다 태건의 눈썹 사이가 습관처럼 좁혀 들었다. 할로겐 등이 비추고 있는 방 안에는 누군가 흘린 피가 흥건했다.

태건은 철제로 된 접이식 의자를 끌어다 앉고는 핏물에 담배꽁초를 던졌다.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불씨가 꺼졌다.

다 죽고 살아남은 남자 하나가 벌써부터 잔뜩 부어 버린 눈을 뜨지도 못하고 핏물 섞인 침을 질질 흘리고 있었다. 더 한 건 어떻게 견디려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기는 했다. 동정심이나 연민이 아니라, 아직 목적지까지는 멀었는데 들고 있던 종이봉투가 벌써 뜯어질 것 같아 고민이 생긴 것에 가까웠다.

태건은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어 피를 닦아 냈다. 이미 찐득하게 말라붙어 잘 닦이지도 않았지만, 손수건은 이미 더러워진 후였다. 태건은 그것도 꽁초 위에 툭 버렸다.

이재하가 들고 다니길래 저도 몇 장 사 와 써 봤는데 그저 일회용처럼 한 번 쓰고 버리게 된다.

다음엔 남편 것을 훔쳐 들고 다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한 번 쓰고 버릴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명순아, 그거 가져와 봐라.”

뒤에서 기립하고 있던 명순이 품 안에서 서류철을 꺼냈다. 받아 든 태건은 다리를 꼬고 앉아 저승사자가 망인의 이름을 세 번 호명하는 것처럼 읊었다.

“갑월 갑일, 병월 병일, 모월 모일. 총 세 차례 명원 카지노 방문한 최철호 씨.”

“장, 장 실장, 내 말 좀 들어 봐. 그건 그냥 회장님 지시 사항으로….”

남자가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태건의 바지춤을 잡으려 했지만, 시도는 불발에 그쳤다.

“악!”

명순이 거대한 손바닥으로 귀와 볼이 이어지는 부분을 사정없이 내려쳐 피와 오물이 가득한 바닥에 철퍽 엎어진 것이다.

남자는 한동안 초점을 잃고 일어나지 못했다. 헉헉거리는 소리가 났다. 장태건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어 입술에 물고는 시계를 바라보았다.

불은 붙이지 않고 지포 라이터 뚜껑만 깔짝였다. 흠, 목울음을 낸 태건이 명순을 흘끗 보며 물었다.

“복싱장을 갔다고?”

“예. 방금 들어가셨답니다.”

“자지들한테 인기 많은 거 존나 거슬리는데. 우리 명순이도 앞에만 가면 실실 쪼개고 있고. 그치?”

“아닙니다. 전 그냥 두 분이 보기 좋아서….”

“말은 잘해요. 우리 둘이 좋으면 뭐. 네가 나 낳았어? 장가간 아들 보듯 뿌듯해하고 지랄이야.”

태건이 심드렁한 어투로 말하자 명순이 흐흐 웃고 만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는 순순한 웃음이었다.

바닥에 엎어져 아직도 끙끙거리던 남자는, 그런 명순의 따귀 한 대에 턱관절이 아탈구되어 눈물을 쏟고 있었다.

태건은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고는 허리를 숙였다. 그러자 명순이 다가와 남자의 머리채를 잡아 똑바로 앉게 한다.

“으, 으…. 장 실장….”

“그래요. 불렀으면 말을 하셔요.”

“자, 장 실장….”

“근데 왜 또 이렇게 애틋하게 불러, 임자 있는 사람 소름 돋게.”

태건은 남자의 입에 담배를 물려 주고는 지포 라이터의 뚜껑을 열었다. 꽤 오래 쓴 흔적이 남아 있는 라이터는 특유의 옻칠을 한 본체와 금장을 입힌 테두리에 상처가 살짝 새겨져 있었다.

퐁, 하고 열리는 맑은 소리에 부싯돌 돌아가는 소리가 치익, 하고 들렸다.

남자는 담배도 거절하지 못하고 오므려지지도 않는 입술에 담배를 물고는 흑흑 울다가 다시 끄트머리를 빨아들여 담뱃불을 붙였다.

불이 붙자 태건은 곧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시 서류철을 뒤적였다.

“명원 애들이 카지노로 싹 빨아 준 돈 처먹고 그쪽에 뭐 불었는지 나한테도 나불거려 보셔요.”

“장 실장, 나는 정말…. 난 정말 아니야….”

남자는 손을 모아 싹싹 빌다가 물려 준 담배도 툭 떨어트렸다.

핏물이 고인 바닥에 떨어진 담배가 아까 전 버린 꽁초처럼 치익, 하는 소리와 함께 잦아들었다.

손을 모아 빌다가 안 될 것 같은지 남자는 끅끅거리며 팔을 뻗어 다시금 태건의 바지춤에 매달렸다. 다 뭉개진 발음을 자세히 들어 보면 살려 달라는 말밖에는 없었다.

“명순아, 철호 씨 불알부터 끊어라. 임자 있다는데 왜 자꾸 엉겨 붙어. 철호 씨 치한이야?”

명순이 “예, 형님.” 하고 줄톱을 챙겨 들자, 남자가 발작하듯이 놀라더니 머리를 바닥에 쾅쾅 찧었다.

“장 실, 장 실장, 내가 진짜로, 으흑…. 나, 나 혼자 한 건 아니야. 진짜로 믿어 줘, 응?”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있던 태건이 느슨히 풀어져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엄지 끄트머리로 제 눈썹산을 슥 긁으며 웃었다.

남자 나이 마흔을 넘어가면 그동안의 것들이 연륜으로 굳어져 실제로는 좆도 없으면서 떵떵거리며 소리를 키우는 것을 당연하게 여긴다. 여기 있는 최철호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창식의 막냇동생쯤 되는 위치였다. 친동생은 아니고 조직 동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건설사 지부장인 최철호는 모종의 이유로 오늘 장태건에게 뒷덜미를 잡혀 끌려왔다.

최철호 역시 호락호락하지 않은 장태건을 예상하여 경호 인력을 늘렸겠지만 그래 봐야 칼은 잡아 본 적도 없는 말랑한 근육들이었다.

원래는 명순 혼자서도 처리할 수 있는 일이다. 현장에 저를 안 데려갔다고 정길이 지랄해댈 것이 뻔했지만 명순은 형님까지 오실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최철호는 해가 다 지기도 전에 장태건 앞에 무릎이 꿇려졌다.

그때까지는 또 기세가 등등하다 몇 대 맞고, 주위에 제 방어벽으로 끌고 온 것들이 다 회칼에 쑤셔져 고깃덩어리로도 안 보이는 꼴이 되면, 그제야 이렇게 제정신을 잃고 임자 있는 알파의 바짓가랑이라도 잡는 것이다.

“뭐야. 난 우리 철호 형님 독고다이 뛴 줄 알고 여지껏 뺑이 쳤잖아.”

태건은 정말 서운하다는 투였다. 무감한 얼굴에는 아무런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주제에 말투와 어조만은 정말 그러했다.

최철호는 태건의 그런 표정이 진짜라는 걸 알고 있다.

장창식의 아들인 장한용, 태건의 부친조차 갑작스러운 죽음이었다. 그것이 누구 때문인지 최철호 역시 알고 있었다. 장한용은 모르는 긴가민가하는 듯했지만, 그가 무언가를 조금씩 눈치채던 시점에서는 이미 장태건으로 권력 이동이 꽤 진행된 편이라 저울질하는 조직 간부들에 의해 사실이 숨겨졌다.

그게 폐단이었다. 그때 바로 장창식에게 고했어야 했는데.

우습게 볼 상대가 아니라는 걸 그때부터 알았기 때문에 대비했었다. 그러나 단 한 순간의 방심이라 말하기에는 장태건은 너무도 손쉽게 최철호를 찾았고, 겁박했다. 하품도 나오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제 부친을 골로 가게 만든 것도 그저 상어 새끼라 태생은 못 속이는구나 싶었지 더 심각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장창식의 명령을 넙죽 받아먹었던 것뿐이다.

“내, 내가 다 줄게, 내가 그러니까 회장님이랑, 응…?”

“철호 형님.”

“으, 응, 장 실장…. 내가, 내가 회장님이랑은….”

이쯤 되면 아는 걸 불고 손목 하나 정도는 포기하더라도 살아남는 것이 우선이다 싶었다. 이미 와이프와 애들은 출국한 뒤이니 저만 살아나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장창식을 배신하는 꼴이 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범의 아가리에서 무사히 빠져나가는 게 더 중요할 것 같았다.

최철호의 결심한 눈동자를 보고, 태건이 피식 웃었다.

“조손 사이 존나 돈독한데 왜 갈라놓으려고 해. 그러니까 명원이랑 짬짜미 먹은 게 철호씨가 아니라 회장님이다, 이거예요?”

최철호는 무섭게 고개를 끄덕였다. 장창식이 장태건을 견제하여 밖으로만 뺑이 치듯 돌린다는 건 장한건설 사람이면 모두가 알고 있다.

도면 볼 눈 키운답시고 수도권의 꽤 이름난 대학 토목과를 나온 인재다. 그런 남자를 학생 때부터 현장 끌고 다니며 펜보다는 파이프와 빠루를 쥐게 했다.

회칼이 난무하는 그 밑바닥에서 칼 한 자루 쥐여 주지 않고 되는대로 싸우게끔 만들었다. 그리고 장태건은 그 밑바닥에서부터 아등바등 기어 올라온 짐승이었다.

아직도 조부 뒤치다꺼리를 하며 구역 정리나 유치권 행사 같은 자잘한 일에 불려 다니지만, 뒤로는 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는 걸 장한 사람이면 모르지 않았다.

최철호 역시 알고는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 코앞에 마주하게 될 줄은 몰랐다. 경계가 너무 늦은 것이다.

고아를 주워다 기른 것도 아닌데 하나뿐인 핏줄이면서, 그것도 우성 알파이면서 대접을 못 받는 장태건을 보며, 그의 소문은 과장된 것이고 어린애가 뭘 할 줄 아냐고 현장을 더 굴러야 한다며 술잔과 휘휘 섞어 먹는 안줏거리 삼아 떠들고는 했었다.

최철호뿐만 아니었다. 장창식이 세운 왕국이다. 그 왕국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을 먹고사는 사람들은 모두 장태건을 얕봤다.

문득 뒤를 돌아보니 그 짐승이 집채만 해진 걸 보고도 아직은 줄에 묶여 있다며 방심하고 낄낄거렸다.

저 짐승은 집에 들어오지 못해. 그러도록 교육받았잖아.

방심은 그런 식으로 시작됐다. 그 짐승이 학대와 섞인 교육을 받고도 단 한 번도 안광을 꺼트린 적이 없는 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최철호의 입에서 장창식 이름이 나오자 태건은 피식 웃었다.

…왜 웃는 걸까. 자신은 살아나갈 수 있을까. 혹시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일까, 아니면 아직 몰랐던 내용일까.

우습게만 생각하고 들여다본 적이 없으니 짐승이 어떤 식으로 사유하고 어떤 식의 사냥 방법을 좋아하는지 아는 것이 없었다.

최철호는 살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짐승은 고개를 모로 꼬더니 영 다른 말을 한다.

“그래서 그 복싱은 언제 끝난대.”

뒤에 있던 명순이 한 발자국 앞으로 나와 대답했다.

“곧 끝나실 것 같습니다. 정길이가 복싱 중이신 거 사진 찍어 보내냐는데 어떻게 할까요?”

“뭘 어떻게 해. 명순아, 형이 그걸로 딸이라도 칠까? 사진 찍으면 정길이 눈알 뽑아 버린다고 전해.”

장태건은 기가 막힌다는 투로 대답한 뒤, 하품을 쩍, 했다. 눈물까지 고이는지 엄지로 눈꼬리 부근을 쓸고는 그러고 보니 아직 일이 안 끝났지, 하고 깨달은 것처럼 최철호를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씨익 웃는다.

“제가 신혼이라 요즘은 일찍 퇴근하려고 노력 중입니다. 명순이도 저랑 가야 하니까 형님은 쟤랑 얘기하세요.”

그는 의자에서 천천히 일어나 베스트 밑 단추를 잠그며 뒤편에 기립해 있던 조직원을 불렀다.

그들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다가와 최철호를 끌어냈다.

당황한 최철호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누군가 시멘트와 물을 드럼통 안에 붓고는 각목으로 그것을 개고 있었다.

“자, 장 실장.”

“명순아, 뭐 하냐. 시동 좀 먼저 걸어라, 어?”

“네, 형님.”

태건이 한심하다는 듯 재촉하자 대기하고 있던 명순이 먼저 빠른 걸음으로 폐창고를 떠나 바깥에 주차해 둔 세단으로 향했다.

살펴 가십시오, 형님, 하는 소리가 산발적으로 터졌다.

창고 안에 있던 할로겐 등이 모두 최철호를 비추고 있던 탓에 눈이 부셔 구석에 있는 상대들을 볼 수가 없었는데, 들리는 목소리로는 네댓 명이 그 안에 있는 듯했다.

최철호의 안색이 희게 질렸다. 장태건이 나가는 뒷모습은 그 와중에도 뚜렷하게 최철호의 망막에 새겨졌다.

“장, 장 실장!”

상대는 대답하지 않고 실내를 나섰고 문은 그대로 닫혀 버렸다.

닫힌 폐창고 안에서는 절규가 들리다가 곧, 멎었다.

* * *

“안녕하십니까, 동생님! 모정길이라고 합니다!”

“뭐야, 이 건달은? 어휴, 네, 안녕하세요. 말 걸지 마세요. 존나 무섭게 생겼어.”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워 두고 체육관으로 올라가는 길인데, 문이 열리길래 뭔가 했더니 이재호가 1층에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재하는 눈썹을 살짝 올렸다가 내렸다. 주차장 자리는 여유로웠는데, 대중교통이랑은 연이 없는 놈이 1층에서 나타나니 이상했다.

‘어? 먼저 왔네?’ 하는 재호에게 이렇다 할 대꾸도 없었는데, 닮은 구석도 없는 두 사람 사이를 어떻게 알아본 것인지 정길이 재호에게 90도로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오려던 재호는 그런 정길에게 놀라 움찔거렸다. ‘아, 씨, 깜짝이야….’ 하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이 진짜 놀란 듯했다.

재하는 두 사람에게는 관심을 두지 않고 숫자가 올라가는 계기판을 바라보았다.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먼저 내리는데 재호가 아직도 질색을 하고 있었다.

날아온 말벌이라도 피하듯 후다닥 다가와 재하의 옆에 찰싹 붙더니 그답지 않게 목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야, 야. 쟤는 뭐야. 왜 데리고 다니는 애도 심상치가 않냐. 뭔데 정체가. 그리고 쟤 쫌 눈이…. 어? 야, 쟤 봐 봐. 쟤 왜 나를 저렇게 봐? 이상하잖아.”

“친절하게 대해. 형수 직장 동료시니까.”

“뭐어? 혀엉수우?”

뭐라 뭐라 불평하던 재호의 턱이 쑥 빠질 것처럼 크게 벌려졌다. 재하는 그 꼴이 우스워 피식 웃었다.

뒤에서 정길이, ‘동생분도 복싱 잘하십니까? 형제분들끼리 아주 멋지십니다.’ 하는 이상한 칭찬을 하고 있었다.

안 따라오길래 뒤를 돌아보니 재호가 말한 것처럼 정길이 재호를 보는 눈이 조금 이상했다. 뭐랄까….

‘음, 좀 번들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좋게 말하면 반짝거리는 것 같은데 도저히 좋게 말할 수가 없었다.

반질반질한 유리알이 시종일관 번쩍거리는 것처럼 재호를 바라보는데 빈말로도 그냥 반가워서 그런가 보지, 할 수가 없던 것이다.

가만히 멈춰 서서 그들을 바라보자 재호는 소름이 끼친다며 팔뚝을 쓸고 저 먼저 체육관으로 홀랑 들어가 버렸다.

재하는 정길을 돌아보았다. 정길은 예의 그 해죽거리는 웃음으로 재호가 들어간 출입문을 응시 중이었다.

‘…정말 상태가 좀….’

재하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정길이 재하에게 불쑥 물었다. 여전히 출입문에 눈을 고정한 채로 말이다.

“동생분은 애인 없으시겠죠? 없으셔야 할 텐데.”

“음, 저도 잘 모릅니다.”

몰라서 모른다고 대답은 했지만 어째 약간 이상해, 재하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시간을 더 지체할 수 없어 저도 체육관 안으로 들어갔다.

오래간만에 본다며 꽤 서운해하는 관장을 향해 대충 인사한 재하는 정길에게 먼저 자리를 안내했다.

“정길 씨가 보기에는 스파링 같은 게 꽤 어린애 장난 같을 수도 있겠습니다. 커피라도 한잔하고 오겠어요?”

“아뇨. 전 여기서 두 분 하시는 거 구경하겠습니다.”

정길이 입을 헤벌쭉 벌리고 웃으며 대답했다.

눈매가 날카로워 그렇지, 입만 다물면 단정한 인상인데 헤벌쭉 웃으니 얼굴과 웃음의 조화가 상당히 괴상했다.

재하는 그런 정길을 흘끔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격투기 팬인가 싶기도 했다. 언뜻 쥔 주먹도 차돌처럼 단단해 보이는 것이 싸움에는 이골이 났을 것 같은데 의외다 싶었다.

본인이 현장 나가서 구르는 것과 복싱 경기를 보는 걸 좋아하는 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며 재하는 링 위에 올랐다.

탈의실에서 먼저 나왔던 재호가 글러브를 조이며 물었다.

“아니, 쟤는 그냥 저기서 계속 우리 쳐다보는 거야…? 쟤 눈 이상하다니까?”

“다른 사람한테 눈 이상하다가 뭐야.”

버릇없는 초등학생을 어르는 것처럼 어조 없이 대꾸한 재하 역시 글러브를 조였다. 관장이 다가와 4라운드라고 설명하는 동안 두 사람은 헤드기어를 썼다.

첫 라운드는 재하의 승이었다. 가볍게 먹인 잽에 재호의 자세가 흔들린 것이다. 그 이후로부터는 연달아 훅을 날려 점수를 얻었다.

두 번째 라운드는 재호의 승이었는데 앉아 있던 정길이 갑자기 일어나 박수를 쳐 댔다.

장대하고 우렁찬 박수라 마우스피스를 끼고 씩 웃던 재호도 놀라 그쪽을 바라보고는 맹맹한 발음으로, ‘머야, 미칭럼 아냐?’ 하고 중얼거렸다.

잇단 라운드들은 모두 재하의 승리였다. 그러나 관장은 재호를 칭찬했다.

“재호 씨가 이제는 형한테 라운드도 뺏고 일취월장하셨으니 이사님도 긴장하셔야겠습니다.”

“그러게요.”

재하가 기어를 벗으며 웃자 옆에 있던 재호가 말없이 얼굴을 붉혔다.

말썽쟁이 초등학생이 학부모 참관 날에 부모님 앞에서 선생님 칭찬을 받는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게 웃겨 피식 웃으며 네트에 걸어 두었던 수건을 찾는데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이야, 두 분 다 정말 멋지십니다.”

정길이 수건을 건네주며 감탄했다. 분명 두 분 다, 라고 말하면서도 시선은 재호에게 고정한 채였다.

이쯤 되면 모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의아해졌다.

여성 오메가인데도 키가 크고 늘씬한 타입인 재하의 모친과는 달리, 김란희는 좀 더 여리여리한 타입이었다. 체구도 작고 생김새 또한 오종종한 미인이었다.

그 때문에 이재호 역시 알파인 것치고는 체구가 작고 낭창한 구석이 있었다. 그렇다고 해도 오메가로 보이지는 않았다.

열성이긴 해도 알파의 유전자가 주는 체구적 우세함이 완전히 가려지지는 않는 것이다.

정길 역시 알파였다. 그것도 우성인 듯했다. 확인해 본 적이 없으니 100퍼센트 확신할 수는 없지만 뚜렷한 우성의 흔적을 갖고 있었다.

키는 재하보다 작은데도 그가 웃기 전까지는 넘실거리는 기운이 있었다. 웃으면 곧 눈이 휙, 하고 휘어져 순진하게 보이면서도 입을 다물고 있으면 그가 생활해 온 거리가 짐작이 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니 오메가일 리가 없는데 어쩌다 재호에게 관심이 생긴 것인지 의아해졌다.

저도 알파에게 빠졌던 것은 떠올리지 못한 재하는, 물어보는 건 실례라고 생각해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었다. 재호에게 수건을 건네는 정길의 눈빛이 웃기기도 했다.

‘눈이 빛나는 것 같아.’

약간 번들거리는 것 같다고 표현했던 쪽이 오히려 실례일 수도 있겠다. 재호를 보는 정길의 두 눈은 반짝이고 있었다. 재하는 그걸 보며 혼자 웃었다.

그사이에도 두 사람은 투덕거리고 있었다.

“저기, 아저씨. 미안한데 말 걸지 말래요?”

“넵. 일단 이걸로 땀부터 닦으십쇼, 동생분.”

말 걸지 말라는 말에 그러겠노라고 대답한 것치고는 꽤 허물없어 보이기는 했다. 그건 재호도 마찬가지였는지 표정이 희한해졌다.

더 놔뒀다가는 입버릇 안 좋은 이재호가 뭐라 욕이라도 할까 싶어 그를 잡아끌었다.

“씻고 가서 오늘 바로 자. 자기 전에 얼음찜질 꼭 하고.”

“…내가 애냐.”

재호는 투덜거리면서도 재하가 네트 줄을 잡아 준 틈새로 쑥 빠져나갔다. 두 사람은 탈의실로 들어가 옷을 벗고 간단한 샤워를 했다.

이재하가 관장의 편의와 제 편의의 중간 단계를 신경 써 아예 그를 집으로 부르는 반면, 이재호는 체육관을 통째로 빌리는 쪽이었다.

결혼 전이면 이용객들 불편하게 무슨 짓이냐 나무랐겠지만, 괜히 스파링장이 있는 본가로 갔다가 김란희라도 마주치면 귀찮기 짝이 없어 체육관을 빌리겠다는 재하에게 더 말을 얹지 않았다.

덕분에 샤워실에는 두 사람뿐이었다. 중간에 이재호가 물을 뿌리는 장난을 쳐 댔지만, 재하는 반응하지 않고 빠르게 몸을 씻었다. 정길과 관장을 얼른 퇴근시켜 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두 사람은 같이 샤워실에 입장했음에도 재하의 샤워가 훨씬 빨리 끝났다.

“야, 치사하게 같이 나가지!”

같이 나가는 것과 치사한 게 무슨 상관일까 싶어 불퉁한 재호의 말에 대답하지 않은 재하가 먼저 나가 옷을 갈아입고 머리를 대충 털었다.

포마드로 단정하게 넘기고 다니던 앞머리가 머리를 감은 탓에 물에 젖어 얌전히 이마를 덮자 거울 속의 알파는 제 나이보다 살짝 어려 보이기도 했다.

젖은 머리를 하고 입고 왔던 정장을 다시 입는다는 것이 이상하기는 했지만 재하는 커프스까지 단정하게 채웠다. 잠시 뒤 재호 역시 후다닥 나왔다.

“빨리 입어. 다들 기다리시잖아.”

“…아니, 내가 내 돈 주고 여기 하루 빌린 건데 샤워도 마음껏 못 하냐…?”

재하는 대꾸하지 않았다. 이재호의 말을 듣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정길의 말로는 태건은 오늘도 늦는다고 했으니 집에 가면 얼추 퇴근 시간이 비슷하지 않을까 싶었다.

눈으로 다시 한번 더 이재호를 재촉하자 성질을 내면서도 옷을 갈아입었다.

재호의 머리에서 물이 뚝뚝 흐르길래 수건을 얹어 주고 저는 시계를 찬 뒤 밖으로 나섰다.

옆에 서서 관장과 얘기를 나누고 있던 정길이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원래도 약간 도베르만이 생각나는 생김새였는데 귀를 쫑긋거리는 것 같았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호는 아직 갈아입는 중입니다. 곧 나올 겁니다.”

“아니, 여기 이분이 재호 씨 권투 실력에 반하셨나 봅니다. 아까부터 계속 재호 씨 얘기만 하시네. 훅은 이사님이 더 묵직하신데.”

관장이 의아하다는 듯이 정길을 바라보며 말했다. 재하는 그냥 싱긋 웃고는 그들과 함께 재호를 기다렸다. 곧이어 이재호가 나오자 세 남자는 나란히 체육관을 빠져나왔다.

정길이 함께 엘리베이터에 오르자 그를 경계하던 재호는 저 먼저 내린다고 1층 버튼을 연타로 눌러 댔다. 운동 끝나면 맥주 한잔하자고 징징거리던 게 군말 없이 귀가하겠다는 속내가 짐작 가 재하는 막지 않았다.

그렇게 정길과 함께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갔을 무렵이다. 재호에게 전화가 걸려 왔다. 재하는 약간 의아해하며 액정을 스와이프했다.

“왜.”

- 아이 씨, 나 차 견인 당한 것 같은데. 내일 찾으러 오래. 나 본가에 떨궈 주라.

“또 대로변에 차 세워 뒀었어?”

- 아니 그게…. 아, 태워 줄 거야 말 거야.

“일단 내려와.”

재하는 차를 뺀 정길이 내려 뒷좌석 문 옆에 서는 걸 보며 말했다.

통화 상대가 재호인 걸 눈치챈 건지 과묵하고 단정하게 생겼던 얼굴이 또 괴상하게 해죽거리고 있었다. 웃지 않는 편이 나은 사람도 있다는 걸 재하는 처음 알았다.

“동생을 본가에 내려 줘야 할 것 같습니다.”

“저야 감사하죠.”

…왜 감사하다는 걸까.

재하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는 사이,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얼굴이 살짝 붉어진 재호가 내려왔다.

재호는 내리자마자 주섬주섬 변명을 집어삼켰다.

“아니, 난 그냥 잠깐만 대려고…. 다들 거기에 주차한단 말이야….”

재하는 낯빛을 굳히고 배다른 동생을 돌아보았다. 그 눈빛에 이재호가 움찔거렸다. 감정의 고저 없는 목소리로 이재호에게 물었다.

“작년에 또 한 번 이러면 어떻게 한다고 했어?”

“차 키 다 뺏고 기사 딸려 보낸다고….”

작년 초, 신년이라 들뜬 사람들 사이에서 화제가 되었던 사진이 있었다. 어느 재벌 집 막내 알파의 스포츠카가 견인되는 장면이었다.

술에 취한 이재호가 차를 아무 데나 세워 둔 채 견인 당하자 되레 뻔뻔하게 굴었던 사건이었다.

사진을 본 사람들은 처음에 그가 누군지 모르다가 유신의 이재호라는 걸 알아보기 시작했다.

압구정 한복판, 그것도 주정차 금지 구역에 떡하니 세워 둔 람보르기니가 단속 나온 견인 트럭에 끌려가는 걸 보며 차주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고 있는 영상도 있었다.

SNS를 뜨겁게 달군 영상이었다. 당시의 유신 본사 전략실에는 그 사진을 내리느라 비상이 걸렸다.

신사업 관련 정부의 규제 완화를 위해 이재하가 여의도 밑바닥에 돈을 뿌리고 다니던 때였다.

이대로 잡음만 없으면 완화된 규제로 신사업을 무사히 일으킬 수 있는 기회였는데, 그걸 이재호의 6기통 컨버터블이 날려 먹은 것이다.

이재하는 이재호에게 외출 금지를 내리고 다시 또 이와 같은 일이 있으면 차 키를 몰수해 어디를 가든 기사를 딸려 보내겠다고 으름장을 놨었다.

나중에는 김란희가 재하에게 직접 너무 심한 것 아니냐고, 인제 그만 용서해 달라는 식으로 재호 대신 사과하기까지 했었다.

그때 생각이 나는지 오만상을 찡그린 이재호가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이 씨, 거기 그냥 다 세워 두는 데란 말이야. 관장 아저씨도 급할 때는 학원 차 거기에 그냥 댄다고 했어! 주정차 단속이 나오는 데도 아니란 말이야!”

그런 변명에는 일일이 확인해 보는 이재하의 성격을 아는 이재호가 일부러 거짓을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재하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어쨌건 지금은 시간이 늦었으니 내일 사람을 시켜 찾아오라고 하면 될 일이었다.

“일단 타.”

“예, 타십쇼. 어떤 씹새, 아니 어떤 공무원 선생님들이 그렇게 일을 잘하시는지…. 속상하셨겠습니다.”

정길이 재호를 살살 달랬다. 어린애 같은 구석을 버리지 못하는 터라 그전까지 경계했던 것도 잊고 정길의 한마디에 ‘씨이….’ 하며 뒷좌석에 올라탄다.

그 와중에도 정길이 문 열어 주는 건 당연하게 여기는 행동이 영락없는 부잣집 도련님이었다.

저 물건을 이사 자리에 앉혀 둘 생각을 하니 약간은 막막해진 재하는 정길이 트렁크를 돌아 반대편 문을 열어 주자 살짝 고개를 꾸벅이고는 올라탔다.

곧이어 정길이 운전석에 올라탄 이후 차가 지하 주차장을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본가는 강북에 있으니 다리를 건너야 했다.

가양대교를 타려는 모양인지 정길이 차선을 바꿨을 무렵이다. 그가 룸미러를 살피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재호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의전 받는 것이 익숙한 이재호로서는 운전기사가 핸드폰을 사용하는 상황 자체가 이해 가지 않는 듯했다.

그러나 이재하는 무언가 이상한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보았다. 그때 정길이 마침 전화를 받은 상대를 향해 말했다.

“가양대교 타려는데 꼬리가 붙은 것 같습니다. 일단은 강북 쪽으로 갈 예정입니다.”

“뭐? 뭐가 붙었대?”

재호가 재하에게 물었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고 계속해서 차의 뒷유리를 통해 후미를 응시했다.

서울은 밤이라도 어둡지 않은 데다가 비가 내리는 것도 아닌데 뒤 차량이 상향등을 켜고 있었다.

LED 전조등이 너무나 밝아 번호판이 보이지도 않았다. 개조 차량, 그것도 8인승 승합차인 것 같았다.

그새 통화를 끝낸 정길이 재하를 향해 말했다.

“이사님,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일단은 강북 쪽으로 가겠습니다.”

“…네.”

“뭐야, 뭔데….”

이재호는 재하가 그랬던 것처럼 뒤를 바라보다가 앞좌석 헤드레스트를 쥐고 여기저기 두리번거렸지만, 이상한 점은 찾지 못한 듯했다.

그때 룸미러를 통해 강한 빛이 쏟아졌다. 뒤쪽에 있던 승합차 뒤로 두 대의 세단이 튀어나오더니 차선 세 개를 다 차지한 채로 정길이 모는 세단 뒤로 바짝 따라붙은 것이다.

룸미러로 뒤를 흘끗 바라보던 정길이 인상을 찌푸렸다.

인상 쓴 것은 처음 보는데 사나워 보이지는 않고 오히려 잘 제련된 칼날처럼 날카로운 구석이 있었다. 태건이 묵직하고 커다란 장도라면 정길은 칼등에 이빨이 박힌 군용 나이프 같았다.

“음, 강북 쪽으로는 못 가겠습니다. 강변북로로 빠지는 게 나을 것 같네요. 두 분 다 벨트는 매셨죠?”

정길이 씩 웃으며 물었다. 재하는 벨트를 채운 채 아직도 무슨 일이냐 시끄럽게 묻고 있는 재호에게 제 가슴팍 앞 벨트를 톡톡 두드렸다.

“뭐, 뭔데…. 저 사람들 누군데, 응?”

재호 역시 그걸 보고 벨트를 맸다. 무슨 일이냐 묻는 얼굴에 불안이 스며들어 있었다. 재하가 짧게 한숨을 내쉬며 정길을 향해 말했다.

“견인 당한 것도 우연은 아니겠네요.”

“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정길의 대답에 재호의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뭐?! 그럼 내 차 어디 간 건데! 그거 엄마가 회사 열심히 다닌다고 뽑아 준 차란 말이야!”

재호가 이를 아득 갈며 말했다. 내 차! 하고 비명을 지르는 것이 상황과 맞지 않아 우스울 지경이었다.

그사이, 그들이 타고 있던 세단은 다른 차들 틈새로 추월하여 강변북로로 빠졌다.

경기 북부 방향으로 향하는 차들이 많지 않아 회전 도로를 빠져나오자마자 정길이 액셀을 신나게 밟았다.

이재호의 6기통 컨버터블까지는 아니더라도 재하가 쓰던 차이기 때문에 엔진이 꽤 좋았다. 우웅 거리는 짐승 울음을 낸 검은색 세단이 강변북로를 달렸다.

늦은 시간이라 차는 많지 않은 게 다행이지만, 문제는 뒤의 놈들이 쫓아오기도 좋았다는 거다.

차들 사이로 칼같이 차선 변경을 시도하던 정길은 구석 차선으로 향하더니 아예 기어를 변속하고 그대로 후진했다.

“어, 어?!”

이재호가 놀라 뒤를 바라보았다. 재하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 뒤에는 아무런 차도 오지 않고 있었다.

옆 차선에서 그들을 쫓던 승합차와 세단들이 당황했는지 브레이크를 밟았다. 그들 뒤를 쫓던 차들이 빵빵거리는 소리가 났다.

정길은 아예 보조석 헤드레스트에 오른쪽 팔을 뻗고 뒤로 돈 다음 왼쪽 손으로만 핸들을 쥔 채 후면 유리를 응시했다.

그 와중에 재호와 눈이 마주친 정길이 윙크를 했다. 그걸 본 이재호가 기겁했다.

“미, 미, 미친 새끼 아냐?!”

해당 차선에서 운전하던 차가 뒤로 후진하는 세단을 보고 당황했는지 옆 차선으로 빠졌다. 그러나 바로 뒤쫓던 차는 재하의 세단을 보지 못한 것인지 당황하여 클랙슨을 강하게 눌렀다.

앞으로 직진하던 차는 급하게 브레이크를 밟아 보았지만 여의치 않은 듯했다. 두 차 사이의 간격이 채 한 뼘을 남기지 못하고 무척이나 좁아졌을 때였다. 상대 차가 한 번 더 클랙슨을 눌렀다.

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경적 사이에서 정길은 그대로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었다.

재하와 재호의 몸이 왼쪽으로 강하게 쏠렸다. 재호의 목이 급하게 꺾이지 않게끔, 재하가 그의 목덜미를 받쳤다.

차는 그대로 서울 외곽 지역으로 빠져나가는 출구 도로에 올라탔다. 다시금 우웅 거리는 소리와 함께 차가 폭발적으로 나아갔다.

“헉, 씨발, 헉, 나 심장이, 허억-!”

뒤를 바라보고 있다가 오는 차에 부딪힐 뻔한 걸 모두 본 재호가 놀라 헉헉거렸다. 재하 역시 손에 땀이 나기는 마찬가지였다.

정길은 휘파람을 불었다. 뒷좌석이 그렇게 흔들리는데도 정길은 여유만만하게 낄낄거렸다. 어느 정도 거리를 벌렸다고 생각한 건지 핸들을 돌리는 손놀림이 부드럽기까지 했다.

정길이 룸미러를 통해 눈을 찡긋거리며 말했다.

“제가 운전을 18년을 했거든요. 두 분 다 긴장 푸셔도 됩니다.”

이재호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두 눈을 가늘게 뜨다가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

“…당신 몇 살인데.”

“올해로 서른둘입니다.”

재호는 뭐라 더 입을 달싹이다가 기가 막힌지 허옇게 뜬 얼굴로 입을 다물어 버렸다. 재하는 뒤를 한 번 돌아보고는 정길에게 물었다.

“…방금 그건 뭡니까?”

“아,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형님이 이런 일 있을 거라고 이사님 옆에 저랑 명순이 새끼 붙여 둔 거라서. 일단 형님께도 보고 올라갔고요.”

정길이 너무 별일 아니라는 투로 말한 탓에 재하 역시 그런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 외곽 지역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예 경기 북부로 진입한 듯했다.

신도시 주변인지라 도로만 깔리고 개발이 덜 된 탓에 거리에 개미 한 마리 없었다.

정길은 이제 귀가시켜 드리겠노라고 재호를 돌아보며 다시 윙크했다. 이재호는 정길에게 제발 앞 좀 보라며 고함을 질렀다.

그 소란 속에서도 재하는 핸드폰을 꺼내 액정을 문지르다가 이윽고 태건의 이름을 눌렀다.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그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 오는 중이에요?

묵직한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처음 들었던 순간이 떠올랐다. 세차게 내리는 비와 같다고 생각했었던 그 순간이.

오는 중이냐고 묻는 간단한 물음에도 이재하는 제게도 돌아갈 집이 생긴 것 같아 가슴속 어딘가가 울리는 느낌이었다.

그동안에도 집은 있었다. 저를 아끼던 조부와 사랑해 주던 모친이 살던 집이. 그러나 그들은 너무도 빨리 이재하의 곁을 떠났다. 그렇게 치면 그곳은 오래전부터 집이 아닌 것만 같았다.

그런데 이제야 이재하에게도 돌아갈 곳이 생긴 것이다. 그게 가슴속 어딘가를 툭 건드렸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가 순순히 대답했다. 그 짧은 사이에 잠겨 버린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 노력하며.

“…네.”

- 모정길 운전 개같이 하면 바로 말해요. 병뚜껑에 이마 박고 엎드려뻗쳐 시킬 테니까.

“아니, 아닙니다. 아주 잘하고 계세요.”

당황한 재하가 황급히 대답했다. 저도 모르게 룸미러를 바라보자, 제 상사가 무슨 말을 했는지 꿈에도 모르는 정길이 순순한 얼굴로 해죽 웃었다.

괜히 엎드려뻗쳐 시킬 수는 없다는 생각에 재하는 화제를 돌렸다.

“장 실장님은, 괜찮은 겁니까.”

- 집 오니까 바깥양반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꼴이 딱 소박맞았는데 뭐가 괜찮아요.

심드렁한 어투와 저를 바깥양반이라고 지칭하는 게 웃겨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 웃음을 들었는지 수화기 속 상대가 ‘웃어?’ 하고 되물었다. 간질거리는 느낌이 나서 입술을 말아 물게 된다. 재하는 겨우 말했다.

“얼른 가겠습니다. 정길 씨가 운전을 아주 잘하고 있으니까….”

- 네. 얼른 오셔요. 늦으면 1분에 한 대씩 정길이 빠따 추가할 테니까.

“으악, 형님! 100으로 달려도 거기까지 40분은 걸립니다!”

마지막 말은 정길에게도 들렸는지 놀란 정길이 꽥 소리를 질렀다. 중간에 재호도 내려 주고 가야 하니 당황한 듯했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돌리다가 이재호가 그의 옆자리에서 ‘지랄 났다.’ 하는 표정으로 저를 보고 있길래 헛기침을 하며 슬쩍 입꼬리를 내렸다.

“피곤하면 주무시고 계세요.”

- 귀가하시면 바로 떡칠 준비 해 두라고? 예, 서방님.

시큰둥한 말투에 그렇지 못한 대화 내용이 저의 긴장을 풀어 주려는 것 같아 재하는 그냥 웃길 뿐이었다. 대답 없이 웃자 태건 역시 가만히 있다가 얼른 오라고 한마디를 덧붙인다.

그 한마디를 재하는 곱씹어 삼켜 보았다. 그 후 전화는 끊어졌지만, 재하는 자신이 웃고 있는지도 몰랐다.

“저기요, 이재하 이사님, 지금 너무 쪼개고 계시거든요? 개무섭네. 1년에 한두 번 웃을까 말까 한 인간이.”

재호의 말에 재하는 창틀에 팔을 올려 둔 채 입가를 슬쩍 가렸다.

그때였다. 룸미러에 반짝이는 게 스친 것이다.

“음, 존나게 끈질기네요. 그쵸?”

정길 역시 눈치챘는지 낄낄 웃으며 말했다. 재호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전과는 차종이 다른 승합차였다. 뒤따라오는 세단 두 대도 마찬가지였다.

구역을 달리하여 잠복하고 있다가 정길이 외곽 도로로 빠지자 가장 가까이 있던 놈들이 따라붙은 듯했다. 놈들은 작정한 것 같았다.

“…명원 쪽입니까?”

“죄송합니다. 이사님, 자세한 건 오늘 귀가하시면 형님께서 설명해 주실 겁니다.”

정길이 말할 수 있는 건 아니라는 뜻이었다. 재하는 대답 없이 다시금 뒤를 바라보았다.

거리를 벌려 둔 덕에 헤드라이트 불빛이 저 멀리서 보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까처럼 빠질 외곽 도로도 없었다.

한밤중 도로는 한산한 편이었다. 이 시간에는 차도 다니지 않는지 세 칸짜리 신호등들은 황색등을 깜빡일 뿐이었다.

차가 다니지 않는 곳을 행인이 다닐 리 만무했다. 인도가 있지만 그나마도 드문드문 끊겨 있는 4차선 도로였다.

잘못하면 목격자도 없이 그대로 골로 갈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예감을 정길도 느낀 것인지 rpm 올라가는 소리가 심하게 들렸다.

좋은 차라 엔진 돌아가는 속도가 올라가도 차체에는 진동이 없는 편인데, 너무 급박하게 가속한 터라 좌석까지 미세한 떨림이 전해졌다.

“두 분 꽉 잡으십쇼.”

정길은 아까보다는 빠르게, 다소 여유 없이 내뱉었다. 이재호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뒷좌석 창문 위 손잡이를 꽉 잡는 것이 보였다. 재하 역시 창틀을 움켜쥐었다.

뒤따라오던 차들도 가속하기 시작했다. 국도도 아닌 일반 도로에서 낼 법한 속도가 아니었음에도 정길은 멈추지 않았다.

그렇게 약 5km쯤 멈추지 않고 직선으로만 달리자 드디어 사거리가 보였다.

이대로 직진하면 제2 자유로였다. 차라리 목격자라도 확보할 수 있는 일반 도로로 달리는 것이 나을 것이다.

정길은 이번에도 속임수를 쓸 생각인 것 같았다. 룸미러를 통해 추격 차량과의 거리를 가늠하던 정길은 급브레이크를 밟아 우회전하려는 것처럼 보인 뒤 다시금 직진했다.

액셀을 밟아 가속하는 바람에 재호의 상체가 앞으로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재하가 팔을 뻗어 그걸 막고는 뒤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이런 씹창-.”

정길이 드물게 날이 선 목소리로 욕을 짓씹었다.

그저 속력을 강하게 하고 달리던 세단은 사거리에서 신호를 위반한 좌회전 트럭이 이쪽의 직진 운행을 보지 못하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돌진하고 있던 것이다.

정길은 핸들을 강하게 틀었다. 그 와중에도 뒷좌석에 피해가 없게끔 핸들을 오른쪽으로 틀어 운전석이 먼저 중앙 분리대를 들이받았다. 차체가 크게 흔들렸다.

끼이익, 하며 스키드마크가 새겨지는 소리가 났다. 재하는 이재호 쪽으로 뻗은 팔에 힘을 주어 그의 상체가 완전히 튀어 나가지 않게 방비했다.

뒤쪽에서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몸이 심하게 흔들렸다. 뒤쫓아 오던 승합차가 그들을 박은 것이다. 간신히 멈추려던 차량은 뒤 범퍼에 가해진 충격으로 제자리에서 급하게 헛돌기 시작했다.

꽤 높은 속력으로 질주하던 세단은 팔자를 그리며 회전하다가 인도 쪽 방어석을 그대로 뛰어넘어 가로수를 박고 멈췄다. 가로수는 운전석 쪽 사이드미러를 부수고 바퀴 위 펜더를 찌그러트렸다.

유리창에 이마를 박을 것 같아 그 사이에 팔을 빠르게 끼워 넣었던 재하가 제일 먼저 정신을 차렸다. 앞좌석을 보니 에어백이 터져 있었다. 정길은 정신을 잃은 듯했다.

놀란 트럭 역시 멈추는 소리가 났지만, 그보다 먼저 뒤쪽 차들에서 시커먼 놈들이 차례로 내리는 것이 보였다.

깡, 깡, 하며 알루미늄 배트가 아스팔트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놀라 트럭에서 내렸던 운전사를 향해 놈들 중 하나가 손을 휘저었다. 그걸 쳐다보며 재하는 손을 뻗어 이재호의 뺨을 두들겼다.

“이재호, 재호야.”

“으윽, 아….”

재호도 잠깐 정신을 잃었던 것 같다. 재하는 가능한 그를 흔들어 깨우지 않으려고 했지만, 남자들이 다가오기 시작하자 마음이 조급해진 탓에 저도 모르게 재호를 흔들었다.

다행히 다친 곳은 없는지 재호는 금세 정신을 차렸다.

“뭐, 이게 무슨, 씹…. 아야….”

“정신 차려 이재호.”

재하의 감정 없는 목소리에 재호는 천천히 정신을 차리는 듯했다. 화가 난 이복형이 어떤 목소리를 내는지 이재호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재하가 벨트를 푸는 소리가 났다. 놀란 이재호는 밖을 바라보았다. 승합차에서 내린 이들이 여섯 명, 세단에서 내린 놈들이 각각 네 명, 총 열네 명이었다.

재호는 숨을 삼켰다.

“어, 어떻게 하게…!”

“…이게 방탄유리도 아니니까 나올 때까지 창을 때리겠지.”

이재하는 그렇게 말한 뒤 빠르게 바닥에서 핸드폰을 찾았다. 장태건과의 통화 후 온기를 더듬듯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있었다.

정장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놨다면 이 난리 통에 핸드폰이 바닥에 떨어져 찾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재하는 바닥을 손끝으로 더듬으며 재호에게는 경찰에 신고하라고 했다.

재호는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들어 빠르게 112를 눌렀다.

“어, 여, 여기 건널산 터널 앞, 대로…. 아, 씨발, 그러면 아무 일도 안 났는데 전화했겠어요?! 여기 조폭 새끼들 쫙 깔렸다니까요? 지금 야구 배트 들고 막….”

재호가 상황을 설명하던 바로 그때였다. 차가 뒤로 기우뚱 기울더니 누군가 범퍼를 밟고 트렁크와 차 천장에 올라탄 다음 전면 유리를 위에서 아래로 두들겨 까기 시작한 것이다.

쾅, 콰앙-. 유리가 쩌적, 하고 금 가는 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놀란 재호는 핸드폰까지 떨어트렸다.

재하는 태건의 전화번호 뒷자리를 기억해 보려고 노력했다. 외우지도 않았던 번호가 유달리 선명한데도 마지막 끝자리 몇 개가 기억하기 쉽지 않았다.

그때 쨍, 하는 소리와 함께 재호 쪽 뒷좌석 유리창이 퍼석 깨졌다.

선팅지에 매달린 깨진 유리가 너덜거렸다. 남자가 그대로 한 번 더 배트로 가격하더니 구멍이 뚫린 아래로 손을 넣어 손잡이를 당겼다.

닫힌 문을 두 번 더 열자 잠금쇠가 아예 풀려 버렸다. 손잡이를 두 번 당기면 차 문이 열리는 것은 옵션 중 하나였다.

다음에는 앞좌석 원격 버튼을 누르지 않는 이상 잠금이 풀리지 않는 차를 사야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으악-!”

재호가 그대로 열린 차 문을 통해 괴한에 의해 끌려 나갔다. 속으로만 욕을 짓씹은 재하가 끌려 나간 재호를 쫓아 그쪽 차 문을 통해 뛰어내리기도 전이었다.

재하 쪽 차 문도 열리더니 그대로 뒷덜미가 잡혔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하체부터 땅으로 처박혔다.

그러고는 질질 끌려져 내려야 했다. 이재하는 구둣발 뒤축으로 땅을 득득 긁어 저항해 보았으나 소용없었다. 목덜미를 쥔 상대는 위치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다른 누군가 운전석 쪽으로 다가가더니 다 우그러진 차 문을 힘주어 열었다. 끼익, 하고 구부러진 철이 다시 한번 더 구겨지는 소리가 났다. 괴한은 정신 잃은 정길의 벨트를 풀러 그를 끌어 내렸다.

거기까지 본 재하는 그대로 제 뒷덜미를 잡은 팔을 잡고는 골반을 뒤로 접어 왼발로 상대의 옆 목덜미를 가격했다.

“악-!”

빠각, 하는 소리가 나며 상대는 그대로 툭 무릎이 꺾였다. 눈이 돌아간 걸로 봐서 의식을 잃은 듯했다.

더 망설이지 않고 그대로 튀어 나가 이재호를 끌고 가던 놈에게 다가가 아래턱에 훅을 먹였다.

아마추어 선수까지 권유받았던 실력이다. 놈들이 프로긴 해도 자신도 만만치는 않았다. 아래턱이 흔들리면 가벼운 뇌진탕이 온다. 재호를 끌고 가던 놈 역시 그대로 녹다운 당했다.

“으악, 무거-!”

무릎이 툭 꺾여 주저앉은 놈이 재호의 위로 풀썩 쓰러졌다. 이재호가 놀라 정신 잃은 놈을 굴려 옆으로 치운 뒤 헐레벌떡 일어났다.

재하는 뒤를 돌아보지도 않고 놈들의 수를 다시 헤아렸다. 정길을 끌고 가던 놈이 이쪽을 돌아보고 있었다.

상대는 아직도 열두 명이었다. 이제 막 세단에서 내려 연장을 챙기고 있던 놈들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정길 씨 챙겨.”

“혀, 형은?”

급할 때만 형이라고 부르는 습관은 여전했다. 재하는 정장 재킷을 벗어 던지고는 넥타이를 끌어 내렸다. 뱀 움직이는 것처럼 스륵 소리가 나며 풀린 넥타이를 손등에 단단히 조여 맸다.

“정길 씨 재킷에 핸드폰 있을 거야. 장 실장한테 연락해.”

“여, 연락….”

재호는 덜덜 떨다가도 저도 어설프게나마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연장을 쥔 놈들을 다 상대할 수는 없어도 맞기만 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 대 다수이니 다구리가 정답이라는 듯이 놈들이 달려들기 시작한 것이다.

재하는 기다리지 않고 먼저 발을 뻗었다. 구둣발이 아스팔트에 긁히며 매끄럽지 않은 소리가 났다. 체육관에 갔을 때 신었던 복싱화를 갈아신지 말 걸 그랬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래도 정장 상의를 벗은 탓에 주먹이 더 매끄럽게 뻗어 나갔다. 응축시킨 광배근의 힘이 어깨, 상완, 전완, 손목과 주먹을 통해 상대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주먹을 빠르게 복귀시키는 힘은 대흉근과 소흉근이 맡았다. 긴장이 되어 작게 훅, 하고 숨을 내뱉는 순간 상대는 눈을 까뒤집고 그대로 넘어가 버렸다.

“이 새끼가-!”

동료들 셋이 연달아 당한 걸 본 놈들은 흥분하기 시작했다. 복싱장부터 따라왔던 건 그쪽이면서 이재하의 취미를 그저 부잣집 도련님의 허세라고 생각한 듯했다.

이재하는 적당히 하는 걸 잘 못 견뎌 했다. 한 번 하면 죽어라 팠다. 공부든 사업이든 수영이든 복싱이든, 그는 적당히 멈출 시점을 알지 못했다.

덕분에 그게 무엇이든 평균 이상으로 해내는 것이다. 근래에는 그것이 장태건을 향한 사랑이었던 게 문제였다.

적당히 해야 이성을 잃지 않고 추해 보이지 않을 감정들이 도를 넘었다. 한곳에 몰두하는 외골수적인 성격은 사랑에는 그다지 좋은 면모가 아닌 듯했다.

그러나 그런 식의 집중력은 복싱과는 꽤 상성이 잘 맞는 것 같았다. 지금도 이렇게 바로 실전 응용이 가능하니 말이다.

“새끼들아, 배트 뒀다 뭐 할래! 그냥 쳐, 빨리!”

놈들 중에도 용기는 없지만, 머리는 어느 정도 있는 놈이 따로 있는지 맞는 말만 지껄였다. 동료 세 명이 연달아 당하자 충격에 굳어 버렸던 놈들은 일 대 다수에 저희들 손에는 배트까지 쥐어져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은 듯했다.

그러나 재하를 향해 내려오는 배트는 프로 선수의 주먹보다 빠른 일이 없었다. 허리를 중심축으로 자세를 낮게 세웠다가 일어난 재하가 빠르게 팔을 뻗어 상대의 하악을 가격했다.

한쪽 하악 관절만 가격하면 턱뼈가 아탈구되며 어지럼증이 인다. 이재하는 당분간은 그 기술만 쓸 예정이었다. 가장 빠르게 상대의 의식을 뺏는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복싱 챔피언인 관장이 무에타이도 해 보라며 같은 체육관의 무에타이 선수도 붙여 줬었는데 복싱보다는 성격에 맞지 않아 관뒀었다. 같은 격투기라도 권투의 매너가 이재하에게는 더 잘 맞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몇 달 하다 만 것치고 죽을 위기에 닥치니 저절로 킥이 나왔다. 앞 놈의 턱을 가격하고 뒤로 돌아 바로 다리를 뻗어 다른 상대의 쇄골을 내리찍으면 빠각, 하는 소리와 함께 상대는 정신을 잃었다.

“아, 씨발, 뭐 이딴-!”

금세 한 자릿수만 남은 놈들이 배트를 다시 쥐었다. 책상 인사에 재벌가 출신 도련님이라고 방심했던 것이 틀림없었다.

그들의 방심은 재하에게는 나름의 방어구가 되었다. 얼른 놈들의 수를 줄여야 했다.

재하는 다시 한번 더 복싱 스텝을 밟았다. 뒤를 노리는 놈들은 다리를 뒤로 뻗어 큰 신장을 이용하여 목덜미와 쇄골 사이 급소를 가격했다.

“으억-!”

몇몇은 비명을 지르며 무너졌고 몇몇은 말도 하지 못한 채 그대로 녹다운이 되었다. 순식간에 넷을 더 해치웠다. 저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희미하게 들리기 시작했다.

놈들은 초조한지 배트를 꾹 말아 쥐었다. 재호 쪽을 흘끗 보자 정신을 잃은 정길의 재킷을 뒤지고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는 걸 보고 다시 달려드는 상대의 턱에 주먹을 날리고 무게중심을 복귀시키는데 재호의 뒤에 배트를 치켜든 누군가 다가가는 것이 보였다.

핸드폰 잠금을 해제하느라 정신없어 보이는 이재호는 제 등 뒤에 누군가 선 것도 모르는 듯했다.

“……!”

입을 꾹 다물고 그쪽으로 달려갔다. 피하라는 말 대신 몸을 움직이는 것이 빠를 것이라 판단한 재하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날렸다.

배트가 재호의 머리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정길과 재호의 위로 감싸 안듯 팔을 두르는데 빠각, 하는 소리가 났다. 남의 뼈를 취한 것같이 이질감이 들었다.

“형-!”

급할 때만 형이라고 부르는 게 또 한 번 거슬렸다. 묵직한 통증이 내려앉기도 전에, 이재하는 의식을 잃었다.

* * *

이재하는 자신이 꿈을 꾸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것이 아니라면 저 그리운 사람이 재하의 앞에서 멀쩡하게 웃고 있을 리가 없으니까.

“재하야, 이리 와 봐.”

모친은 백합의 줄기처럼 가느다란 손가락을 흔들었다. 그 위에 끼워진 다이아몬드 반지는 캐럿 수가 꽤 나가는 걸 자랑이라도 하듯 옆으로 휙 돌아가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다이아몬드의 무게 때문만은 아니었다. 모친은 또 살이 빠진 것이다.

재하는 다이아몬드조차 견디지 못하고 툭 부러질 것 같은 얇은 손가락에 그걸 꼭 끼고 외출하라 종용하는 이익형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재하의 부모는 툭하면 싸워 댔다. 주로 이익형의 고성과 지친 모친의 한숨 소리만 이어지는 다툼이었지만 말이다.

이익형은 모친에게 무언가를 강요하고, 평화를 빼앗으려 들고, 그녀가 안온한 꼴을 참지 못하는 사람처럼 굴었다.

집기를 던지고, 소파를 밀치고, 조명을 깨트렸다. 그러나 그런 파괴의 파편들은 모친의 치마 끝자락을 감히 스치지 못했다. 이익형의 폭력은 그녀에게 직접적으로 닿지 않는 방식이었다.

이재하는 방문 틈 사이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모친은 이재하에게 방문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했고 말을 잘 듣는 재하는 가만히 그들을 지켜볼 뿐이지만, 혹시나 이익형이 그녀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바로 나설 참이었다.

그 문틈 사이로 모자는 자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이익형이 자신을 보지 않은 채 파괴에만 몰두한 틈을 타 재하에게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지어 주고는 했다.

주로 여기가 지겨워 죽을 것 같아, 하는 표정이었다. 목을 부여잡고는 혀를 쭉 내뺀 채 ‘깰고닥’ 하고 소리를 낼 것 같은 표정.

이재하는 웃기지도 않으면서 모친의 노력에 마음이 풀려 씩 웃고는 했었다.

그 찰나의 평화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양, 집안의 폭군 이익형은 그녀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럼 그녀는 또 한 번 유리 케이스 안에서 그대로 말라 죽는 백합 한 송이처럼 조용한 표정을 하고 눈을 내리 깔 뿐이었다.

모자는 그 시간을 인내하는 방법을 체득했다. 이익형은 모친의 모든 걸 파괴할 것처럼 굴면서도 정작 그녀에게 손을 대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그가 인의를 아는 사람이라는 걸 뜻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는 쓰레기였기에 자신이 고통받는 걸 참지 못했다.

모친의 고통은 이익형의 절망이었다. 즉, 이익형은 상처받을 자신을 동정하여 그녀에게 손찌검을 하지 않는 것이었다.

대신에 모친이 아끼던 스탠드, 협탁과 소파 등을 부쉈다. 모친의 자랑거리들을 부수고 깨트렸다.

재하가 이제 막 몇 가지 단어를 말할 수 있던 어린 날에 함께 연말을 보내기 위해 갔던 동유럽 플리마켓에서 사 온 스테인드글라스 스탠드와 앤티크 가구 등이 주로 희생당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게 이익형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파괴의 현장에서 도망치듯 떠나 버리면, 그들의 어린 아들과 모친은 그곳을 대충 정리했다.

그 후에는 모자끼리 집을 나서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압구정에만 파는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러 가거나, 갤러리아를 떠돌며 쇼핑을 즐기는 걸로 그들이 받았던 스트레스를 풀고는 했다.

그래서 재하는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라고 여겼다. 모친이 자신을 불렀을 때 말이다.

재하가 다가가 앙상히 마른 그녀 옆에 서자, 그녀만큼 마른 여자가 서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네가 재하니? 희영 언니한테 말 많이 들었어.”

“안녕하세요, 이재하입니다.”

그녀는 모친만큼 아름다웠고 모친만큼 시들어 보였다. 재하는 그녀에게 예의 바르게 인사하면서도 의문이 들었다.

모친의 친우 중 그녀의 이름을 그렇게 막역하게 부를 수 있는 이는 없었다. 그러니 저도 한 번쯤은 얼굴을 봤어야 하는데 이재하는 그날 그녀를 처음 보았다.

모친과 그녀는 한동안 정원에 서서 말을 나눴다. 키가 크고 늘씬한 모친이 시들어 버린 백합의 우울한 정취를 자아낸다면, 그녀는 물에 잔뜩 젖은 물망초의 가련한 모습을 떠올리게 했다.

재하는 그녀들이 말을 나누는 것이 어쩐지 싫었다. 싫다기보다는 슬펐다. 져 버릴 날만 고대하고 있는 꽃들의 모임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때 정원 한구석에서 깡마른 남자아이가 튀어나왔다. 계절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아이는 재하와 눈을 마주친 채 그를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머, 어릴 때 보고는 처음이네.”

모친이 먼저 아이를 보고 반색을 했다. 모친이 저 아이의 어릴 적을 알고 있다는 게 이질감이 들었다. 재하는 저를 뚫어져라 바라보는 남자아이가 오늘 처음 본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던 중이었다. 모친은 그들을 어디서 본 걸까?

그 애는 남의 집 정원 구석에서 튀어나온 주제에 묘한 눈을 한 채 이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아이답지 않은 형형한 두 눈이 재하를 끈질기게 응시하고 있었다.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아이는 아무래도 모친을 희영 언니라 부른 그녀의 아들인 듯했다.

그녀는 아이를 저나 모친에게 소개하지는 않고 그저 가만히 바라보더니, 아이가 제 옆에 서자 살짝 웃을 뿐이었다. 물에 푹 젖어 힘을 잃은 물망초처럼 말이다.

재하는 그런 그녀를 보다가 다시금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아직도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까만 피부, 갈까마귀의 새끼처럼 볼품없이 깡마른 아이는 재하보다 두 뼘은 작아 보였다.

몇 살인지 묻고 싶었다. 재하는 한동안 아이와 눈을 마주하다가 모친에게 말했다.

“제 방을 구경시켜 줘도 돼요?”

“그럼. 엄마는 이모랑 차 한잔하고 있을 테니까 둘이 놀다가 심심해지면 나오렴.”

모친이 그런 재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재하는 오늘 처음 생긴 이모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고는 아이에게 손을 내밀었다.

아이는 제 손을 빤히 보다가 앞장서 걸었다. 그 애는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재하의 말에 대답하지도 않았다.

재하는 그냥 손을 내렸다. 아이 취급 받기를 싫어하는 아이들은 많다.

그 뒤를 따라 걷는데 등 뒤에서 오늘 처음 생긴 이모가 말하는 것이 들렸다.

“언니, 재하는 정말 의젓하다. 우리 …는….”

“울지 마, …야. 너나 나나, 참….”

재하는 모친의 뒷말을 듣지 않은 채 앞서가는 아이의 성마른 등을 따라 걸었다. 모친이 행복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친의 맞은편 탁자에 앉은 그녀 역시 말이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저도 모르게 두 눈이 번쩍 떠졌다.

“윽….”

처음 느껴진 건 뒷덜미를 짓누르는 듯한 묵직한 통증, 그다음은 옅은 피비린내, 그걸 다 덮을 정도로 깊게 퍼진 곰팡이 슨 시멘트벽의 냄새.

이재하는 어느 폐창고에서 자신이 의자에 묶인 채 의식을 차렸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는 단단한 철제 의자에 팔이 뒤로 젖혀진 채로 두 손목이 하나로 묶여 있었다.

재하는 현훈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뒷덜미가 욱신거리며 두통이 몰아쳤다.

꿈과 현실을 잠깐 혼동하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곳이 어린 시절 겪었던 일과는 전혀 상관없는 폐창고라는 걸 완전히 깨달았다.

그 뒤로는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눌렀다. 납치 상대에게 자신이 깨어난 걸 들키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어릴적부터 용병 출신의 경호원에게 납치 시 행동 요령을 자세하게 교육받았다. 그걸 정말 사용하게 될 줄 몰랐지만 말이다.

재하는 일단 아직 정신이 깨어나지 않은 척을 하며 납치범들이 하는 얘기를 들어 둘 생각이었다.

주변의 소리, 냄새, 범인의 음성들을 기억하며 말이다. 피랍 장소에 대한 정보는 기절한 뒤 도착한 터라 알 수 없으니 할 수 있는 한 최대로 정보를 모아 두어야 했다.

다행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방 안에는 재하뿐인 듯했다. 등 뒤에 기척이 들리지 않자 재하는 다시 눈을 뜨고 주변을 바라보았다.

냄새로 알 수 있었던 것처럼 어느 폐창고인 듯했다. 10평 남짓으로 크기가 크다고 할 수는 없었고 사방의 벽면이 시멘트로 되어 있는 걸 봐서는 조립식 건물도 아니었다.

작은 창문을 바라보며 시골의 곡식 창고일지도 모른다고 추측했다. 바닥에 낱알과 거스러미들이 쓸려 다녔기 때문이다.

최초 정신을 잃었을 때 등 뒤에서 가격당한 뒷덜미를 제외하고는 아픈 곳도 없었다. 손목에 채워진 것은 의외로 노끈이나 클리어타이, 동아줄 같은 것들이 아닌 수갑이었다.

성능이 완벽한 사제 수갑은 돈깨나 줘야 했다. 그러니 납치를 계획한 이들의 자금줄이 꽤 튼튼하다는 말이었다.

그렇게 많은 인원으로 밀고 들어왔으니 당연한 걸 수도 있었다. 문제는 이곳에 온 게 자신뿐이냐는 것이다.

재호나 정길을 찾을 수 없었다. 창고는 방이 하나로 되어 있는 것 같기는 했다. 외부로 나갈 수 있는 통로는 한 군데로, 철제문 두 짝으로 된 걸로 보아 다른 방으로 통하는 것이 아닌 바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문인 듯했다.

게다가 부러 납치 대상들을 다른 곳에 둘 리가 없었다. 납치범의 인원이 많지 않은 이상, 피랍자들을 관리하기가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하는 뒷덜미에 배트를 맞기 전에 놈들의 수를 꽤 줄여 놓았다.

그들의 목적이 처음부터 재하 혼자만이었다면 굳이 재호와 정신 잃은 정길을 또 데려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축 늘어진 거구의 자신과 주위 동료들을 챙기는 것만으로도 성가신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안심이 됐다.

납치의 행동 요령 중 가장 중요한 것은 100%의 확신이 없다면 탈출을 노리지 말라는 것에 있었다.

‘당신이 강하다고 한들, 피랍 장소에 있는 당신은 적의 영역에 들어간 셈입니다. 납치 전에 탈출하는 데 실패했다면 뭔가를 시도하려 하지 마십쇼. 그냥도 불리한 싸움인데 그들의 영역 안에서 괜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닙니다.’

용병의 말을 기억해 내며 재하는 가만히 숨을 죽였다. 이재호와 정길이 있었다면 탈출을 노렸을 것이다.

두 사람을 그냥 둘 리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저들의 목적이 저 혼자라면 이곳에서 죽을 일은 없었다.

그때 바깥쪽으로부터 무언가 소리가 들렸다. 재하는 자연스레 두 눈을 감았다.

“히야, 이 오빠 아직도 안 깼네?”

껄렁거리는 음성이었다. 막힘없이 걷는 발소리 하나와 그 뒤를 조용히 따라오는 발소리를 들었다. 더 뒤따르는 발소리는 없었다.

아마 감시역인 듯했다. 저를 납치하러 왔던 건 꽤 여러 명이었으니 말이다. 두 개 조로 나눠 부상당한 놈들은 다른 곳으로 갔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다음 말에 의해 조금 수정해야 했다.

“어떻게 눈 감고 있는데도 잘생겼냐. 뒤에서 군침 흐르는 기분이야.”

“…역겨운 새끼. 일하는 중이다.”

“누가 지금 바로 이 오빠 따먹겠대? 난 그냥 궁금하다는 거지. 명원이 무슨 배짱으로 유신을 건드린 건지.”

유신이라고 짚어 말한 것을 보면 정말 목적이 재하 혼자인 것은 맞는 듯했다.

세간에서 이재호에 대한 평가는 미미하기만 했다. 첩살이를 하다가 본처가 된 계모와 그의 아들은 바깥에서 더욱 모자란 취급을 받고는 했으니까.

유신을 건드릴 생각을 했다는 말은 그들이 애초부터 이재호가 아닌 이재하 혼자만을 노렸다는 뜻이 될 것이다.

재하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도저히 이재호까지 구출해서 나갈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두 목소리 중 나이가 들어 보이는 쪽이 말을 이었다.

“때 되면 실행에나 잘 옮겨.”

“무슨 실행. 강간 비디오 찍는 거? 근데 그걸 어디에 보낼 생각이라는데?”

“내가 알아, 이 남창 새끼야? 그냥 저 인간 두고두고 협박할 용도로 쓰려는 모양이지.”

“이잉, 나는 박는 것보다 박히는 게 더 좋은데. 이 오빠가 그 전에 깨면 내가 박히는 걸로 하면 안 되나?”

“개소리하지 마. 의뢰인이 말한 내용 들었잖아.”

이재하는 속으로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납치에 대한 입막음용으로 강간 필름을 찍을 계획인 듯했다. 유신이 뒤늦게 덤비지 않게끔 말이다.

그러나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을 텐데 이상했다. 이런 협박용 필름을 제작하기 위해 놈들은 인력을 따로 쓴 듯했다. ‘의뢰인’이라고 말한 건 그 뜻일 것이다.

자신이 목적이라면 굳이 이런 번거로운 짓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저 재하에게 일대일로 원하는 것을 요구하거나 이익형에게 연락을 하면 될 것이다.

그런 다음 후환에 대한 약속까지 마치면 그만이다. 굳이 협박용 필름을 따로 찍겠다는 얘기는 유신에 어떠한 요구를 하려 하는 게 아니라거나, 유신 외에도 요구할 상대가 또 있다는 뜻이었다.

재하는 납치범들이 조금 더 떠들어 주길 원하며 푹 수그린 고개를 들지 않았다.

그사이 경박스러운 음색의 남자가 조금 흥얼거리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말투로 물었다.

“근데 명원은 무슨 배짱으로 간이 그렇게 크대? 이 오빠 장태건 실장이랑 결혼한 알파잖아.”

원하던 화제가 드디어 나왔다. 재하는 이 뜬금없는 납치의 이유가 궁금했다. 무언가를 준비 중이던 다른 한 남자는 쯧, 혀를 차며 대답했다.

“저 새끼가 명원 작살내 놓은 이유를 명원에서도 아는 거지. 장태건 때문이라잖아.”

“오, 그럼 이 오빠가 사랑꾼이라 이 모양으로 나한테 따먹힐 처지에 놓인 거라고?”

…예상치 못하게 얼굴이 화끈거리는 주제가 나왔다.

사랑꾼이라니. 그런 말은 처음 들어 보았다. 이재하는 자신이 강간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것보다 그 말이 조금 더 견디기 어려웠다.

“장태건한테는 따로 협박하고 있을걸. 장태건이 저 새끼한테 공사 쳐서 결혼한 거 이 바닥에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어.”

…그 말은 의외였다.

공사를 쳤다니. 재하는 움찔거릴 뻔한 몸을 억누르느라 혀까지 살짝 깨물어야 할 정도였다. 경박한 목소리가 깔깔 웃으며 대꾸했다.

“왜? 약이라도 먹였대? 장 실장네 약, 뒤집어지게 기분 좋잖아.”

약? 그가 제게 무언가를 먹인 적은 없었다. 약 때문에 정신을 잃고 결혼까지 갈 만한 짓을 저지른 적도….

아니다. 있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둘만 있는 객실에서 술을 진탕 퍼마셨었다.

그러나 그건 술에 취했던 것일 뿐 약 같은 걸 먹었을 때 겪어야 할 부작용이 없었다.

기억이 완전히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건 화간에 가까웠다. 적어도 제가 장태건을 억지로 덮친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글쎄. 그건 모르겠고 장태건네 엄마가 원래 유신에 시집갈 오메가로 길러졌었잖아.”

재하는 그대로 굳었다. 귀에서 삐, 하는 이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재하가 아직도 정신을 잃고 있는 줄로만 아는 남자들은 대화를 지속했다.

“장 실장네 엄마가 원래는 재벌 집 오메가 딸이었어. 결혼 시장에 내놓으려고 곱게 기른. 유신 쪽으로 시집갈 날까지 다 받아 놨는데, 그쪽 집 가풍이 매일 새벽마다 산에 있는 암자로 유신을 위한 공양 다니면서 신부 수업 준비하는 거였단 말이야.”

꽤 과묵해 보이던 남자는 제가 아는 내용이 나왔는지 신나게 입을 놀려 댔다.

“근데 매일 새벽 기도 올리러 산으로 다니는 오메가를 누가 눈여겨본 거지. 웬 개자식이 질질 끌고 가서 좀 만지고 그랬나 봐. 넣기 직전에 그 오메가가 자지를 앞니로 씹고 도망쳤다는데, 뭐 미수라고 해도 유신 쪽에서는 하자품으로 생각한 거지.”

“오, 나 이거 예감이 와. 완전 막장 스토리일 것 같은데.”

“유신에 시집보내려고 고이 길렀는데 파혼당한 걸 보고 그 오메가 부친이 열받아서 장한건설에 돈 받고 팔다시피 결혼시킨 거지. 밑바닥 굴러먹던 장창식이 보기에는 성추행당한 오메가도 자기 아들이랑 결혼시키기에는 양갓집 규수랑 다름없게 여겼다는데, 그 아들은 아니었나 봐. 결혼한 다음부터는 거의 노예처럼 살았다는데…. 아무튼 그 사이에 태어난 자식이 장태건이잖아.”

“헐! 그래서 그 오메가는 어떻게 됐는데?”

“우울증 못 이기고 자살했잖아. 장태건이 어릴 때 가장 먼저 발견했을걸.”

이명이 점점 더 심해졌다.

이재하는 제 몸이 떨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대화에 심취한 두 남자에게는 느껴지지 않았겠지만 말이다.

두 사람은 그 후로도 대화를 지속했다. 모친이 죽은 뒤 앙심을 품은 장태건이 유신과 장한건설을 둘 다 쓸어버리려고 의도적으로 이재하에게 접근했다는 말과, 병신 같은 이재하는 그것도 모르고 제 배우자를 위해 명원을 대신 쓸어 주었다가 악만 남은 명원 쪽 대표에 의해 납치당했다는 얘기들이었다.

이재하는 저절로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노력하며 이대로 있으면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결심을 굳힌 그는 훅 숨을 내뱉은 뒤, 왼쪽 엄지를 다른 손으로 강하게 쥐어 잡고는 바깥쪽 관절 부위를 아래로 툭 꺾어 엄지 골두를 탈구시켰다. 그러고는 나머지 손가락으로 탈구 부위를 접다시피 꽉 움켜잡은 뒤 수갑에서 천천히 손을 빼내었다.

손이 큰 편이었지만 엄지뼈를 탈구시킨 터라 수갑 구멍에서는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명원에서 이재하 노린 것도 장태건 술수 알고 있어서 그러는 거지. 나도 좆 됐으니까 너도 좆 돼 봐라 아니겠어? 그쪽으로 이재하 강간 비디오 보내면 유신에서 장태건을 가만히 두겠냐고. 아직 다 먹지도 못했는데 숟가락 들고 유신 담벼락에서 쫓겨나는 거지. 장태건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게 만들고, 저 자식도 우성 알파 같던데 여기서 뒤가 따이면, 명원 쪽 오야들 나름으로는 복수를 한 셈이잖아. 솔직히 이재하가 조폭이랑 결혼했을 뿐이지 조폭은 아닌데 멀쩡한 알파 새끼로 살다가 강간당해 봐라. 미치는 꼴 보여 주겠다는 거지.”

이재하는 피식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지금 저의 정신을 무너트린 것은 고작 그런 일 따위가 아니었으니까.

‘그냥도 불리한 싸움인데 그들의 영역 안에서 괜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은 현명한 행동이 아닙니다.’

용병이 거듭 강조했던 말이 생각났다. 그러나 그는 이재하가 현명하지 못할 경우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았다. 수천 달러를 들여 진행한 교육이 쓰레기 조각과 다름없어지는 순간이었다.

이재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남자들은 카메라를 조작하고 바닥에 매트를 까느라 모두 재하에게서 등을 돌리고 있었다.

재하는 바로 그중 좀 더 젊은 쪽을 공략했다. 뒤에서 목을 껴안듯이 팔을 두른 뒤 오른손에 아직 남아 있는 수갑을 왼손으로 당겨 목울대를 짓눌렀다.

“어억, 컥-!”

“뭐야, 너 이 새끼-!”

카메라를 들고 있던 나이 많은 남자가 놀라 일어섰다. 재하는 손 아래 사정을 두지 않고 그대로 힘을 더 들였다.

경박한 목소리의 남자가 다리를 버둥거리며 저항했다. 재하의 손등 위에 손톱을 박기도 했다. 재하는 아랑곳하지 않고 힘을 더 짜냈다.

그리고 이재하는 그 격투 사이에서 무언가를 완전히 이해해가는 중이었다.

장태건이 제게 의도를 갖고 접근했다. 유신과 장한건설을 무너트리기 위해서.

지금까지 그의 의뭉스러웠던 점들이 모두 납득갔다.

재하는 그대로 목을 짓누르는 손에 힘을 더했다. 수갑 역시 재하의 팔목을 짓눌러 피가 배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힘을 풀지는 않았다.

나이 많은 남자는 회칼을 들고 제게 겨누고 있었다. 당황한 기색을 빠르게 누르고 자세를 갖추고 있는 걸로 봐서 젊은 남자를 선공격한 것이 옳은 판단 같았다.

더 전문적인 쪽은 나이가 많은 남자였던 것이다.

“너 이 새끼, 그거 안 놔?”

“왜. 딱히 동료라고 생각하지도 않았으면서.”

재하는 서늘하게 대꾸하며 다시 한번 놈의 목을 짓눌렀다. 팔을 긁고 있던 손이 툭 떨어졌다. 눈알이 뒤로 휙 돌아가며 의식을 잃은 듯했다. 재하는 그대로 남자를 놔 버렸다.

쿵, 하는 소리와 함께 꽤 장신인 남자가 쓰러졌다. 강간 정도는 상관없었다. 납치범들이 원하는 것을 해 줄 생각이었다.

조금 골치 아프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비디오를 찾는 일 정도는 해커를 사든 명원을 권력과 무력으로 제압하든 까다로울 뿐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재하는 이곳에서 자신이 살아 나가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들의 말을 듣는 순간 그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강제로 추행당한 우울증에 먼저 세상을 떠난 모친이 있는 장태건. 그에게 똑같은 일을 보여 줄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을 이용하려고 접근한 것보다 그것이 먼저였다. 어차피 이재하는 장태건을 완전히 믿지 않았다.

그를 사랑하고 그를 사랑하기를 원했을 뿐, 그가 자신을 사랑할 것이라고는 단 한 번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이재하는 사랑을 믿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태건을 사랑하게 되었으니 제 감정을 부정하지 않을 뿐이었다.

오히려 이제야 마음이 놓였다. 그가 자신에게 접근한 이유를 명확히 알 수 있어서 말이다.

* * *

이재호는 사위가 조용하여 오히려 소스라치게 일어났다.

종전까지 겪던 소란들이 거짓인 듯 조용하였기 때문에, 그 이질감에 도리어 놀라 깨 버린 것이다.

“헉-!”

“가만히 계세요, 동생분. 어디 골절된 곳 있을지 모릅니다.”

투박하고 거친 손이 재호의 가슴팍을 지그시 내리눌렀다. 낯선 목소리였다. 아니 낯설다고 생각했는데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모정길의 목소리였다.

재호는 운전석을 바라보며 말을 더듬었다. 여러 가지 의문들이 산발적으로 튀어나왔다.

“너, 너….”

정길은 운전대를 쥐고 있었다. 초조한 옆얼굴에는 피가 흐른 채 말라붙어 있었다. 창밖의 가로등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정길의 얼굴 위에 빛이 사선으로 그어졌다.

가로등의 간격은 꽤 넓은 편이니 그게 저렇게 빠르게 지나가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즈음이었다. 이재호는 벼락처럼 무언가를 깨달았다.

“형은?!”

“…지금 추적 중입니다.”

그러고 보니 모르는 차를 타고 있었다. 재호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가누며 마지막 기억을 반추했다.

이재하가 모정길과 제 위를 가로막으며 쓰러진 뒤, 정길과 재호 역시 놈들에 의해 끌려갈 뻔했다.

정신을 잃은 재하를 승합차에 욱여넣다시피 태운 다음 그들을 돌아보던 놈들의 수는 처음보다 많이 줄어 있었다. 재하 덕분이었다.

재호는 이재하를 구출하기 위해 나름으로 애를 썼다. 땅에 떨어진 놈들의 배트를 들어 그들에게 휘두르려고 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재하를 구해 내려고 한 것인데, 나중에는 제 한 몸 지키기도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핀치에 몰려 두들겨 맞을 수밖에 없었다. 몸을 옹송그려 봤지만, 매를 버티는 건 쉽지 않았다.

괴물 같은 이재하나 복싱 조금 배웠다고 바로 실전에 써먹는 거지, 저로서는 몇 놈 두들겨 깐 것만 해도 나름 선방했다고 할 수 있었다.

이대로 진짜 어떻게 되는 거 아니야? 라고 생각했을 때였다. 바로 그때 정길이 기적처럼 두 눈을 떴다.

자리에서 스산하게 일어난 정길은 재호를 둘러싼 채 압박하던 놈들을 차례로 쓰러트렸다.

이재하마저도 나름의 집중력과 공격력을 모두 퍼부어 상대하던 놈들은 정길이 몇 번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픽픽 쓰러졌다. 프로는 프로다 싶기도 했다.

품 안에 있던 군용 나이프를 꺼내 휘두르는 것 같았다. 칼날 부분이 아닌 칼자루의 끝부분으로 놈들의 관자놀이나 뒷덜미를 가격해 바로 기절시키는 듯했다.

재호로서는 ‘그런 게 있었단 말이야?’ 하는 생각밖에는 나지 않았다. 저 나이프 하나 없어서 제가 당한 것 같은 억울함이 들었다. 연장이 없어 맞기만 한 게 아님에도 말이다.

몇 놈이 정길의 구둣발에 의해 뼈 부러지는 소리가 나자, 승합차에 탄 놈들은 그대로 도주해 버렸다.

사이렌 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고 재호도 보탬이 되어 보겠다고 주먹을 휘두르다가 배트에 머리를 맞고 잠깐 기절했던 것 같다.

그리고 깨어 보니 모정길이 운전하는 차였다. 재호는 차의 전면 유리를 바라보았다. 재하를 태운 승합차는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도로를 달리고 있는 것 같았다.

두 사람이 탄 차는 놈들의 차 중 하나인 것 같았다. 내장이 재하의 차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그때 모정길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예, 형님.”

“…….”

“네, 지금 가고 있습니다.”

모정길은 전에 없이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불빛이 희미한 차 안에서 그의 안광이 유난히 퍼렇게 빛난다고 생각했다. 재호는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봤다.

형님이라는 건 장태건을 말하는 것 같았다. 이재하는 어떻게 된 거냐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려던 마음이 쑥 가라앉았다.

통화는 별다른 말 없이 종료되었다. 재호는 입을 다물었다.

텅 빈 도로인데 무얼 추격하고 있는 것이냐고 묻지 못했다. 교근이 불뚝 튀어나오도록 어금니를 꽉 깨문 정길이 전방만 주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 * *

물론 장태건은 재하에게 늘 다정했다.

그와 몸을 겹치기만 해도 알 수 있었다. 장태건은 최선을 다해 이재하를 대우해 주었다. 그의 배우자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대우였다.

그러니 자신도 그를 위해서 최악의 꼴이 되지는 말아야 했다.

둘 중 나이 많은 쪽이 더 강해 보여 만만한 상대를 먼저 해치우고 가는 것이 낫겠다 싶기도 했지만, 괜히 껄렁거리는 놈의 기력을 남겨 두었다가 안 좋은 꼴을 당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그 때문이다.

이재하는 놀랍도록 이성적인 상태였다. 장태건이 저를 구하러 올 것이라는 확신마저 있었다.

장태건은 반드시 자신을 찾아낼 것이다. 재하는 그 점에 대해서는 어떠한 의심도 하지 않았다. 자신은 그가 오기 전까지 버티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한쪽이 풀려나 덜렁거리는 수갑을 오른손에 너클처럼 쥔 채로 재하는 자세를 가다듬었다.

저쪽이 회칼로 공격해 올 테니 미력하나마 수갑이라도 쥐고 있어야 했다. 창고에는 별다른 쇠붙이가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남자는 그런 재하를 비웃었다.

“마냥 부잣집 샌님은 아닌갑네?”

남자의 말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재하는 유추한 것을 단정 짓듯 내뱉었다.

“너희뿐이군.”

그의 말에 남자가 몸을 움찔거렸다. 일행 중 한 명이 당했는데도 소리를 치지 않는 걸 봐서 창고는 물론이거니와 주변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납치해 온 것은 명원의 조직원들이지만 더러운 일은 외부인에게 의뢰한 듯했다. 아마 밀입국한 신분을 사용 중이겠지.

재하는 혹시 싶어 일단 말해 봤다.

“내가 두 배를 더 주지.”

남자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람 짜증 나게 하네.”

“세 배.”

그는 재하보다 키가 작았지만, 다가가 함부로 공격했다가는 그게 어디든 베일 것 같은 느낌이 왔다.

관장은 재하의 운동신경은 물론이거니와 공격이 올 자리에 대한 감이 좋다고 했다. 프로가 칭찬했던 감이란 것은 위기 상황을 맞이하여 더없이 빛을 발하는 중이었다.

재하는 이대로 주먹을 뻗었다가는 팔이 베일 것이라는 걸 예감했다. 남자는 재하가 공격해 오지 않자 해죽 웃었다.

“꼴에 꽤 예리해.”

“…….”

“세 배 주면 뭐. 바로 배신하고 네 신발 밑창이라도 핥아 드릴 것 같으세요? 이 바닥에서 신뢰를 잃었다가는 굶어 죽는다고. 누굴 뭐로 보고…. 내가 이래서 있는 집 새끼들이 싫어요.”

남자는 납치범 주제에 파시스트에 빙의라도 한 건지 갑작스레 분노를 불태웠다.

그에게 악감정을 씌운 것은 이재하가 아닌 다른 부자인데, 피해는 자신이 보겠다는 생각이 들어 짧게 한숨이 나왔다.

칼을 고쳐 쥔 남자가 말했다. 그전보다 더 험악해진 기세였다.

“나는 박는 취미는 없지만 내 좆이 아니더라도 박을 건 많아. 기대해, 칼이라도 쑤셔 줄 테니까.”

무슨 기대를 하라는 건지 이해되지 않아 그의 말을 무시한 재하는 다가오는 남자의 명치를 짧게 무릎으로 찍었다.

신장의 우위가 있으니 접근전보다는 킥으로 공격하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명치에 제대로 먹힌 로킥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대가 물러날 때 칼을 휘두른 것 때문에 재하 역시 타격을 입을 수밖에 없었다.

급하게 올린 가드 덕분에 얼굴에 상처를 입지는 않았지만 전완부의 드레스셔츠 소매가 잘려 나가며 양팔에 칼로 그은 창상을 입었다.

주룩, 뜨거운 것이 팔을 타고 흘러내리다가 차가워진 느낌이 났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명치를 완벽하게 가격했다고 생각했는데, 남자는 그 부위를 손바닥으로 슥 문대는 것만으로 회복했는지 이내 자세를 고쳐 잡았다.

재하는 짧게 한숨이 나왔다. 나름 필살의 일격인지라 실망스러웠기 때문이다. 남자는 정말로 화가 난 듯했다.

“어디서 돈 주고 배운 잔재주 가지고.”

“정당하게 돈 주고 배운 걸 왜 비난하는지 모르겠군.”

저절로 튀어 나간 제 말에 남자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변하며 헝클어졌다.

그는 정말로 열이 받은 듯했다. 재하는 남자를 괜히 도발했다고 생각하며 목을 두둑 꺾었다.

뒷덜미가 조금 욱신거리긴 했지만 참을 만했다. 양쪽 팔에 입은 창상은 근육을 베고 나간 것은 아닌지 그저 쓰라릴 뿐이었다.

재하는 다시금 수갑을 고쳐 쥐었다. 그때 남자가 예고 없이 달려들었다. 마구 칼을 휘두르는 것 같아도 일정한 박자가 존재했고, 다 피하기에는 버거웠다.

정장 재킷을 벗지 말 걸 그랬나. 견사가 함유되어 부드럽기 그지없는 드레스셔츠는 회칼에 저항하지 못한 채로 그대로 잘려 나가 맨살을 드러나게 했다.

입으나 마나 한 셔츠보다는 정장 재킷 쪽이 날카로운 것에 더 저항성이 있을 것 같았다.

스리피스의 베스트를 입고 있기는 했지만, 그것도 마찬가지였다. 가슴 아래를 일직선으로 스치는 칼날을 완전히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시원해지는 기분이 나며 곧 뜨끈해졌다. 거기에도 피가 난 듯했다.

그러나 아래를 내려다볼 시간이 없었다. 재하는 바로 주먹을 뻗어 남자의 쇄골을 노렸다.

쇄골을 부서트려 상완 신경을 마비시키고 한쪽 팔을 들어 올리지 못하게 만들 의도였다.

그러나 남자는 살짝 어깨를 비틀었고 주먹이 먹히기는 했으나 유의미한 타격이 되지는 못했다.

뼈나 근육에 치명상을 입히지 못한 채 그저 살을 베어 내는 것에 그친 건지, 남자는 살짝 인상만 쓴 뒤 곧바로 칼 등으로 재하의 흉골을 가격했다.

빠악, 하는 소리가 났지만, 다행히 뼈에는 이상이 없는 것 같았다. 눈물 나게 아프기는 했다. 그러나 그대로 물러날 수는 없었다.

허리를 회전시켜 단단한 근육들에 둘러싸인 날카로운 팔꿈치로 놈의 관자놀이를 가격했다.

이번에도 노련하게 피하는 바람에 타격이 완벽히 먹혀들지는 않았지만 비틀거릴 정도는 되어 보였다.

“윽….”

재하는 그 틈을 노렸다. 다시금 너클을 낀 것처럼 수갑을 꽉 쥔 주먹을 뻗었을 때였다. 남자가 펜싱이라도 하듯 팔을 일직선으로 곧게 뻗었다.

마치 창과 창의 대결 같았다. 재하의 신장이 훨씬 컸으니 팔 길이 때문에 주먹은 남자의 관자놀이를 정확히 가격했다. 탈구되었던 엄지가 같이 울려 말도 못 하게 뻐근했다.

그러나 회칼을 쥔 남자의 팔 길이 역시 재하의 품을 파고들기에는 모자라지 않았다. 대흉근에 칼이 박혔다.

재하는 피가 터지는 것도 모르고 입술을 물어뜯었다.

“윽.”

재하가 억눌린 신음을 내는 사이 남자 역시 머리가 어지러운지 비틀거렸다. 그러나 놈 역시 틈을 놓칠 수는 없는지 꽂힌 칼을 그대로 빙글 돌렸다.

“으윽-!”

생전 처음 겪는 격통이었다. 꾸준히 단련해 온 대흉근은 근육이 단단한 편인 데다가 지금도 힘을 주고 있어 칼날이 깊게 박히지 못하는 거지, 이런 날카로운 것을 배에 박고도 멀쩡한 얼굴로 담배나 태우던 장태건을 생각하니 이해할 수가 없어졌다.

재하는 그대로 제 왼쪽 가슴을 움켜쥐며 무릎을 꿇었다. 어마어마한 격통에 따로 반항할 수가 없었다.

사실 여기까지 싸움을 끌고 온 것도 나름으로 대단한 편이었다. 어쨌든 재하는 상대와 같은 프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남자도 저도, 둘 모두가 재하의 끝을 짐작했다. 남자는 기어코 재하를 기절시킬 요량인지 대흉근에 박혀 있던 칼을 무자비하게 뽑아냈다.

“윽-!”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보다 먼저 핏줄기가 쏟아지듯 가슴에서 흘러내렸다. 재하는 제 온몸이 땀에 젖어 있는 것을 깨달았다.

남자가 다가와 칼 손잡이 부분을 높이 치켜들었다. 위치적 우위를 선점한 남자의 얼굴에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그는 사형 집행인처럼 엄숙해 보였다. 재하는 관자놀이쯤을 가격당하겠거니 생각하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리고 그때였다. 쾅, 하는 소리가 나며 창고의 문이 벌컥 열렸다.

“눈은 왜 감아. 이 새끼 좆이라도 빨아 주려고?”

빠악, 소리가 나며 재하의 앞에 서 있던 남자가 날아가다시피 창고의 벽에 처박혔다. 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장태건이었다. 그는 상대가 일어설 틈을 주지 않은 채 그대로 구두 뒤축으로 턱을 박살 냈다. 뇌진탕이 온 건지 일어서려다 도로 거꾸러지는 상대의 명치를 다시금 발로 걷어찼다.

“이거 생각보다 열받네.”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벽 쪽으로 몰린 놈을 짓밟는 몸짓이 가차 없었다. 놈은 윽윽 거리면서도 일어나려 최선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서늘한 얼굴의 장태건은 아예 의식을 잃은 상대를 한 번 더 발로 깐 뒤 이마를 쓸어 내려온 앞머리를 정돈하고 이쪽을 바라보았다.

재하는 놀라 쓰러진 놈의 상태를 보고 있었다. 죽기 전에 말려야 할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누군가의 부드러운 힘이 턱에 닿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장태건이 재하의 턱을 쥔 채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재하는 말을 잃었다.

“왜 그런 표정을 했냐니까. 내가 올 거 알았잖아.”

장태건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듯이 말했다. 그제야 재하는 그의 얼굴을 자세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살짝 땀에 젖은 앞머리, 흐트러진 정장, 씨근덕거리는 가슴팍 등이 그의 냉정한 표정과 냉엄한 목소리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이재하는 장태건이 자신을 위해 최선을 다해 달려온 걸 느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끌어내-!”

“여기 한 놈 더 있습니다!”

말없이 재하의 대답을 기다리는 태건의 뒤로 처음 보는 조직원들 몇이 폐창고 안으로 들어와 기절한 놈들을 끌어냈다.

“기스가 왜 이렇게 많이 났어.”

태건이 욕을 짓씹으며 제 재킷을 벗어 재하의 어깨 위를 덮어 주고는 손수건을 꺼내어 피가 제일 많이 나오는 흉근을 꽉 눌러 지혈했다.

“윽-.”

“…좀 참아. 피부터 멈추게.”

장태건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재하는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무언가를 안타까워하는 듯한 표정.

그러나 재하는 확신이 없었다. 납치범들이 중얼거린 말이 계속해서 재하의 귓가를 울리고 있었다.

창고 문이 열린 틈으로 자동차 여러 대의 헤드라이트 빛이 끼쳤다.

그 아찔한 빛 속에서도 세상이 암흑이었다. 누군가 소리치는 것과 자동차의 엔진음, 둔탁한 무언가가 부딪히는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이재하는 충분히 절망했다. 그리고 그 절망의 끝자락에서 마음을 굳혔다.

“장태건 씨.”

그것은 장태건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이름을 부른 것은 실로 오랜만이라, 재하는 자신의 가슴팍을 꾹 누르고 있는 손길이 살짝 움찔거린 걸 느낄 수 있었다.

재하는 하나도 아깝지가 않았다.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는 오히려 태건이 안쓰러웠다.

그래서 그에게 말하는 것이 어렵지 않았다. 아쉽지 않았다. 내가 줄 수 있는 건 다 주겠다고 했잖아. 이재하의 사랑은 오늘 이 자리에서 완성되어 가는 중이었다.

“우리 남남으로 삽시다.”

“…….”

“나는, 이런 일은 두 번 더 못 견딜 것 같네요.”

당신에게 모든 걸 주고 싶어. 재하는 제 마음을 삼키고 전혀 다른 말로 낯빛을 굳혀 진심이 아닌 것을 꺼내 보였다.

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하지만 저는 그를 납득시킬 자신이 있었다.

* * *

‘그들이 말한 바가 영 뜬 소문은 아닌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 시기에 장태건 실장의 모친이 자살…, 을 하기도 했고 이사님 결혼 직전부터 장한건설 내 장태건 실장의 세력이 늘어나기도 했습니다.’

샤워를 아주 오래 해야 했다.

‘결혼 요구로 유신의 것들을 지참하지 말라 했던 건 다시 말해 이사님의 영향력을 유신과 단절시키기 위함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전 회장님, 그러니까 이사님의 조부님 사망 이후 유신의 실질적 경영은 이사님께서 도맡지 않으셨습니까. 일단 선장을 가둬 두면, 아무리 큰 전함이라고 할지라도 침몰시키기 쉬우니까요.’

미망에서 깨어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무의식중이라 물 온도 조절을 잊은 것인지 몸이 차가웠다. 쯧,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멍하니 물길 아래 서 있는 일이 잦아 때를 놓칠까 싶어 맞춰 둔 욕실 안 시계의 알람에 의해 정신을 차렸다.

삑삑거리는 전자음을 내는 시계는 습기에 강한 제품이었다. 재하는 또 그걸 멍하게 보다가 겨우 알람을 끄고는 샤워를 끝마쳤다.

아침이라 그런지 다쳤던 엄지가 살짝 뻑뻑했다. 뜨거운 물에 오래 샤워를 한 뒤 얼음 마사지를 해 줘야 하는데 그냥 건너뛰었다.

면도해야 할까 싶어 턱을 쓸어 보니 거슬리는 것이 없었다.

옛날에는 하루에 한 번은 꼬박 했던 것 같은데 빈도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수영 때문에 영구 제모를 한 음모와 겨드랑이를 제외하고도 다른 부분의 체모들이 옅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것도 스트레스 때문인가.’

그렇다면 이해가 되었다. 딱히 중요한 일은 아니었고, 면도하지 않으면 시간이 절약되기 때문에 편하게만 느껴졌다.

물기가 묻은 몸 위에 샤워 가운을 걸치고 드레스 룸으로 들어가려다가 앞섶을 여미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언젠가의 그가 생각났다. 창상이 가득한 나신 위에 그저 걸치기만 한 가운은 제가 봐도 되나 싶을 만큼 아름다운 몸이었다.

이제 막 아물어 가는, 그의 복근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조차도 말이다. 어느 문명이 조각해 둔 군신의 석고상 같은 모습에 숨이 멎을 것 같았던 적이 있었다.

재하는 그냥 말없이 제 앞을 여미고 옷을 골랐다. 알파용 향수를 뿌릴까 하다가 그냥 두었다.

시계는 가죽 줄로 된 것을 골랐다. 중요한 날 차고 나간 적이 있던 그것을, 재하는 요즘 매일같이 착용한다.

넥타이는 그냥 평범하게 윈저 노트로 맸다. 색은 튀지 않는 것으로 정장 재킷의 색보다 살짝 진한 것을 선택했다.

커프스단추도 마찬가지였다. 흑요석으로 된 걸 골라 매며 거울에 비친 자신을 바라보지도 않고 브리프 케이스를 들었다.

그러고는 별채를 나섰다. 아예 나가기 전에 들러야 할 곳이 있었다. 이제는 약간 쌀쌀해진 터라 구둣발에 서리와 비슷한 것들이 걸렸다.

잔디는 아직 푸릇한데 서리가 내리니 당황스러워 보였다. 이른 추위를 맞이한 식물들은 고요히 움츠렸다. 꼭 자신처럼.

재하는 잔디를 피해 정원석을 밟았다. 그 미물들에게 닥친 고난은 그저 날씨뿐이었으면 했다.

본채의 현관문을 열고 중문 안으로 들어가자 캐멀색 카디건을 입은 채 자세를 꼿꼿하게 세운 노인이 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말했다.

“오늘은 일찍 나가는구나.”

“네, 할아버님.”

이재하는 장창식에게 고개를 꾸벅였다. 장창식은 제 날카로운 송곳니와 널찍하던 엄니가 영원하기를 바랐던 늙은 늑대처럼 질척한 욕심의 눈으로 이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이 집에 들어와서 산 지도 벌써 두 계절이다. 그 말은 이재하가 명원의 세력에 납치당했던 일도 어느새 반년이 지났다는 소리였다.

“…그래. 오늘은 저녁이라도 함께 하자꾸나.”

“죄송합니다, 할아버님. 오늘은 따로 선약이 있어서요.”

노인이 재빠르게 노기를 숨겼다. 재하는 그를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어쩔 수 없는 약속이겠지?”

그렇다는 말 대신 재하가 택한 것은 침묵이었다. 애초에 장창식이 사는 본가의 별채에서 지내는 이재하로서는 장창식과 오래 마주할 일은 없었다.

숙식은 늘 별채에서 해결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렇게 식사를 하자는 말을 꺼내는 이유는 뻔했다.

장창식의 상황이 사면초가이기 때문이다.

‘장 실장님께서 조직 개편을 시작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재하는 어느 정도 안도했다. 그때의 사건을 그가 신경 쓰지 않기를 바랐기 때문이다.

다소 늦은 감이 있는 움직임이기는 했다. 재하는 그가 그것보다 훨씬 빨리 움직일 것이라고 예상했던 터였다.

그러나 그는 끝내 움직여 주었고, 재하는 그날 홀로 잠깐 기뻐했다. 다음 날은 또 표정을 굳힌 채 서늘한 침대에서 일어났지만 말이다.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비서를 따로 두지는 않아서 혼자 운전해야 했다. 차고지로 연결된 계단을 향해 걷는데 말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십니까, 명순 형님.”

“음, 이사님은 나와 계시냐.”

“아뇨, 이제 곧 나오실 것 같습니다.”

재하가 장창식의 저택으로 들어온 뒤, 그의 본가는 장태건의 사람들로 채워졌다. 별채에 들어 청소하는 인력까지도 말이다.

아마 저를 감시하고 있는 듯했다. 이재하로서는 달갑지 않은 일이었다. 저는 아직 해야 할 일이 많았고, 작업은 천천히 진행해 가고 있었다.

만나는 사람이 많은 것은 아니지만 오늘처럼 미룰 수 없는 약속도 있는 법이다. 이재하는 지검장까지 지냈다가 이제는 3선 의원이 된 조부의 피후견인을 만나야 했다.

피후견인들은 그게 누구이든 이익형과의 관계가 그다지 좋지 못했다. 조부는 제 직계 자손이 이재하밖에 없다는 듯이 굴었기 때문에, 조부의 돈으로 자란 피후견인들 역시 그런 생각을 갖고 있는 듯했다.

그것이 지금에 와서 장점이 될 줄은 몰랐다. 재하는 잠시 벽 뒤에 선 채로 한숨을 쉬며 명순이 오늘치 보고를 듣고 차고를 나갈 때까지 기다렸다.

명순에게 형님이라 칭한 이는 조직원 중 하나였다. 이름은 모른다. 소개받은 적이 없으니까. 그는 재하와 작은 대화조차 나누지 않았다. 운전기사 노릇을 하는 것도 아니고 옛날의 명순처럼 별채의 살림을 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재하가 하는 일의 대부분을 알고 있었다. 덕분에 침실 외에 감시 카메라가 있을 거라 유추할 수 있었다.

장태건은 카메라의 존재를 숨길 생각이 없는 듯했다. 저 역시 그 존재를 안다고 해도 장태건에게 그 일을 묻거나 따질 생각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곧 명순의 검은색 세단이 사라지는 게 열려 있는 차고의 문을 통해 보였다. 속으로 대충 셋까지 세고 느릿한 걸음으로 계단을 마저 내려갔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네. 좋은 아침입니다.”

조직원과는 형식상의 인사를 나누었다. 재하는 차고 안에 있던 차 중 가장 요란한 2인승 컨버터블 카의 운전석 문을 열었다.

납치 사건 이후 엔진이 좋고 눈에 띄는 차를 타기 위해 새로 구매한 차였다. 재하의 경우에는 차 욕심이 적어 늘 소음이 적은 차를 구매하고는 했었다.

그러나 차라리 눈에 띄는 쪽이 나을 것이라는 경호 업체의 조언에 따라 구매한 것이 이탈리아 브랜드의 빨간색 컨버터블이었다.

시끄럽고 뚜껑까지 열리는 차를 선호하지 않는 재하로서는 탈 때마다 미간이 좁혀지는 차지만 어쩔 수 없었다.

납치 사건이 세간에 알려진 것은 아니지만, 알 만한 사람들은 알고 있으니 재발 방지를 위해 이목을 끄는 편이 좋았다.

한 번 피랍된 이후에는 알게 모르게 경계가 훅 느슨해지는 순간이 있다. 경비가 삼엄해지기 직전에는 늘 그렇다. 피랍 이후로 체계가 자리 잡기에 어수선한 탓도 있었다.

사람인지라 정신없는 틈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애먼 놈들이 그 틈을 파고들 엄두를 내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라도 경호 업체의 조언을 듣는 것이 나았다.

재하는 출근도 전에 답답해진 상태로 차에 올라탔다. 하루가 아주 지리멸렬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 * *

‘다행히 우리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고….’

그 말을 내뱉었을 때는 숨이 그대로 멎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딱히 그렇지도 않았다. 이재하는 여전히 숨을 쉬는 중이었고, 초침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지구는 자전 중이었다. 멸망은 요원해 보였다.

그러니까 그것은, 이재하 개인의 불행이었다. 그러나 장태건은 이재하의 불행을 몰라야 했다.

재하의 알파는 전에 없이 사나운 기색으로 말했다. 항상 차분하게 타오르는 것 같던 불꽃이 산불처럼 번지는 기세였다.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처럼, 그가 짓씹듯이 말했다.

‘그럼 씨발, 그건 다 뭐였는데.’

‘…욕은 삼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재하는 아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이외의 어떤 말을 해야 좋을지 모르겠어서.

이명이 지천을 울리는 것만 같았다. 지척에서 땅이 일어나는 기분이었다. 도처에 지진이 범람하여 그대로 땅 밑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이재하는 그만큼 그 말을 내뱉기 힘들었다. 장태건에게 남처럼 살자는 그 말이. 그러나 쏜 화살처럼 입 밖으로 나간 말은 주워 담을 수 없는 일이다.

후회는 없었다. 하지만 이런 순간이 올 것 같았는데, 하필 이때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재하는 낯빛을 석고처럼 굳혔다. 당신과 나 사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말이다.

‘말 돌리지 맙시다. 나 꽤 열받았거든.’

‘…….’

‘내가 묻잖아. 이재하 씨가 나한테 보여 줬던 게 다 뭐였냐고.’

장태건은 전에 없이 분노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시퍼런 안광에서는 알 수 없는 진득한 것이 스멀스멀 기어 나오고 있었다. 재하는 시선을 피할 수가 없었다.

‘깡패 새끼 우습게 봤나 본데.

‘…….’

‘내가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이래요. 나는 이재하 씨 앞에서 신사답게 행동할 생각이 없는데. 특히 이런 경우에는.’

해당화 향이 거의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찬 파도의 냄새가 났다.

살기마저 느껴지는 터라,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장태건이 저의 사지 중 한 군데를 분질러 방에 가두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럴 리 없지 않은가. 그가 그렇게 번거로운 일을 할 이유가 없었다. 그들 사이에서 감정을 느낀 쪽은 이재하뿐이고, 장태건은 그저 나름으로 다정을 선보였을 뿐이다.

그러나 제가 베푼 다정을 거절당한 면구스러움으로 보기에, 그의 분노는 거셌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이 쇠사슬처럼 재하를 옭맸다. 폭풍우가 몰아치는 해안가 절벽에 선 심정으로 이재하는 낯빛을 굳혔었다.

할 말은 해야 했다. 결심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 이재하는 어떤 것도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이런 말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재하는 아는 것을 모른 척하는 삶을 살아온 적이 없다. 장태건의 일로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저는 답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사실이었다. 이재하가 할 수 있는 말은 극히 적었다. 내뱉고 싶은 말들은 수없이 많은데 할 수 있는 말은 적으니, 그냥 입을 다무는 것이 나을 지경이었다.

‘그럼 장태건 씨는 뭐였습니까.’

이름을 불러 달라고 몇 번 말했던 것 같다. 당시에는 그저 쑥스러워 애꿎은 그의 직함을 붙여 불렀었다.

태건 씨, 하고 불러 본 적도 없는데, 이름을 부르는 것이 하필이면 그런 상황이라 속이 녹듯이 쓰렸다.

‘하나 내가 아는 건… 우리 사이에 별다른 건 없었다는 겁니다.’

그 말을 했을 때 그의 표정이 어땠더라.

유난히 선명한 그날이다. 이재하는 마지막처럼 장태건의 얼굴을 눈으로 샅샅이 훑었었다.

이 비가 그치면 다시는 물 한 방울 못 얻어먹을 것을 아는 사람처럼 마른 목구멍을 벌리는 다급함과 같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보고 싶었다. 조금 더 담고 싶었다. 그가 말하는 토씨 하나까지 기억하기를. 또 어딘가에 새겨 가져갈 수만 있다면.

그러나 이재하가 그 말을 내뱉던 순간의 그의 얼굴만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여기는 다 미국 와인을 가져다 놓나 봐.”

재하는 제 옆에 다가와 대리석을 얹은 기다란 테이블 위에 와인 잔을 올려 두는 알파 덕분에 상념에서 깨어났다.

무언가를 깊이 되새기느라 먹먹했던 청각이 일제히 돌아와 주위의 소란스러움이 노도처럼 밀려왔다.

그 감각에 짧게 눈을 감았다 떴다. 요즘에는 이런 일들이 잦았다. 제자리에 선 상태에서도 정신을 잃은 듯 어딘가를 헤매다 돌아오기 일쑤였다.

차분히 현실 감각을 뒤쫓아, 재하는 상대가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템포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작년 프랑스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스트 1위 제품이라는데, 아무래도 미 대륙 토지가 포도 생산에는 좋으니까요.”

입꼬리만 슬쩍 올렸다. 눈은 웃고 있지 않았지만, 그 정도만 해도 되는 자리였다. 상대는 아무것도 못 느낀 듯 혼자 무언가를 생각하다가 말했다.

“이 이사는 신혼이라고 하지 않았나? 굳이 이런 행사를 다 쫓아오고.”

“…일해야죠.”

짓궂은 농담에 대처하듯 간단하게 대답하면서도 입맛이 썼다. 실제로 신혼의 단꿈에 젖어 있기는 했었다. 저와는 다 상관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말투에 옅은 비웃음이 있는 걸 보니 장태건과의 결혼을 비꼴 생각인 듯했다. 학교 선배인 눈앞의 알파는 작년 총선에서 아주 적은 표 차이로 간신히 초선에 성공한 국회의원이었다.

중요하지는 않은 인맥이었지만, 오늘 이 자리는 조부의 피후견인이 주최한 자리라 빠지기가 그랬다.

제 용건은 오찬과 함께 전달을 끝낸 참인데 하루 종일 끌려다니고 있었다.

어려울 건 없지만 성가셨다. 자신과의 친분을 강조하여 유신이라는 대기업이 자신의 뒷배가 되어 주고 있다는 걸 공고히 인식시키고 싶은 모양이었다.

부친인 이익형과는 사이가 좋지 않으니 차세대 주자로 유력한 재하를 통하는 것이다. 이사직을 내려놓았다고 한들, 이재하는 여전히 대외 활동에서 이사라는 직함으로 불렸다.

예전 같았으면 부러 말렸을지도 모르겠으나 지금은 아니었다. 이재하에게는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일은 대한민국에서 이 이사, 혼자만 하나. 나는 그냥 궁금해서. 전 약혼자도 와 있는 곳을 뭐 하러 왔나 싶기도 하고.”

선배라는 작자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재하는 그를 빤히 보다가 그의 뒤편 바에 기대어 있는 낭창한 인상의 오메가를 잠깐 훑었다. 오랜만에 보는 김수민이었다.

“혼자서 말을 거시기엔 마땅찮아 그러십니까? 제가 있어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재하는 약간 심드렁한 태도로 말했다. 왜 시비를 거나 했더니 김수민의 뒤를 쫓던 이력 때문인 듯했다.

조부의 피후견인이 직접 주최한 모임이고, 그 모임에 들어가는 비용은 전부 유신에서 나왔다. 그러니 김수민이 이곳을 모르고 왔을 리가 없다.

눈앞의 알파는 덕분에 애가 단 듯했다. 혹시라도 김수민과 이재하 사이에 남은 불꽃이 있을까 봐.

결혼한 지도 시간이 좀 흐른 편이지만, 장태건과 별거한 지도 꽤 오래되었다. 첫 결혼기념일이 코앞인데 아직도 김수민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저를 귀찮게 하다니.

사랑에 빠진 머저리에게 동병상련을 느끼는 동시에 지긋지긋해졌다. 근래 들어 재하를 끈질기게 따라오는 권태가 이번에도 여지없이 구두 뒤축에 달라붙어 등을 타고 올라왔다.

그러면 여지없이 반추 동물처럼 곱씹게 되는 것이다.

‘우리 사이에, 뭐 …별다른 게 없어?’

되묻던 음성이 다시금 떠올랐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아도 목소리만은 또렷했다. 다분히 노기가 스며들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그러나 그것은 그저 재하의 착각일 수도 있다. 분노 따위는 없고 그저 황당한 마음이었을 수도 있다. 의무감에 달려와 살려놨더니 이혼을 말하는 되바라짐에 분노를 느꼈을 수도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이재하의 감정과 같지는 않겠지.

…어쨌거나 지나간 일이다. 더 기억하는 것은 무리였다.

“뭐? 난 그게 아니라….”

“얘기 좀 해.”

알파가 목덜미까지 붉어진 얼굴로 무언가 말하려던 때였다. 김수민이 불쑥 들어오더니 재하의 손목을 잡았다.

늘 예민한 상태로 있는지라 저도 모르게 잡아 위로 휙 꺾을 뻔했던 재하는 인상을 찌푸렸다.

“김수민 씨, 왜 이럽니까.”

“하, 끝까지…. 장태건, 아니 장한 장 실장 일로 말할 게 있다고.”

옆에 있던 알파는 수민을 보고 넥타이를 다듬다가 그가 원하는 것이 이재하와의 대화라는 걸 깨닫자 김샌 얼굴을 했다.

김수민 정도면 초선 의원의 결혼 상대로는 넘쳤다. 언감생심 꿈꾸기에는 꽤 버거울 텐데도 기대하는 얼굴이었다가 그가 재하에게 말을 걸자 모욕당한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네가 왜. 그러니까 너도 왜. 이재하가 그 두 사람 모두에게 느끼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일단은 사람이 많은 자리라 김수민과 실랑이를 더 벌일 수가 없었다. 재하는 아까의 그 지긋지긋한 감정을 털어 내지 못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배, 잠깐 얘기 좀 하고 올 테니까 의원님 오시면 끽연하러 갔다고 하세요.”

“뭐? 내가 네 메신저냐, 내가 그 말을 왜,”

알파가 뭐라 더 떠들려는 것도 듣기 귀찮은지라 바로 등을 돌렸다. 김수민은 그래 봬도 꽤 행실이 나쁘지 않아 거리를 벌린 채 먼저 자리를 뜨고 있었다.

하긴 결혼한 알파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행사장에서 사라졌다는 소문이 돌면 피곤해지는 건 오메가 쪽이었다. 현명한 판단에 뒤를 느릿하게 쫓았다.

김수민은 얼마 가지 않아 멈춰 섰다. 호텔의 대연회장 옆에는 작게 쉴 수 있는 프라이빗한 공간들이 더러 있었다. 그중 하나로 들어가는 김수민을 바라보던 재하는 내키지 않는 걸음을 내디뎠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연회장보다는 밝은 조명 아래 선 수민을 볼 수 있었다.

“…….”

그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피곤과 피로, 육체적인 고달픔 때문이 아니라….

“걱정 마. 재활 중이니까.”

수민의 말에 재하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 출입문 옆 벽에 등을 기댄 채 팔짱을 꼈다.

여차하면 이 방을 나설 것이고, 너와 깊게 나눌 이야기가 없다는 제스처에 상대가 인상을 찌푸렸다.

자존심이 상한 듯, 수민의 얇은 얼굴이 파르르 떨렸다.

“기가 막히네. 나는 지금 재하 씨 도와주려는 거야.”

“…….”

“내 얼굴이 왜 이런지 알아? 장태건네 약 때문에 이렇게 된 거라고.”

놀라운 얘기는 아니었다. 수민은 약혼 시절에도 약을 끊지 못했으니까. 재하로서는 김란희 귀에만 들어가지 않으면 상관없었다.

수민 역시 결혼 후에는 완전히 약을 끊을 생각인 듯했다. 그거면 됐다고 생각했다. 흠도 아닌지라 이익형 부부만 모르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양도 그렇게 많지 않은 데다가 빈도 역시 잦지 않아 중독 수준은 아니었다. 하는 약도 대마처럼 신경 안정제와 비등한 등급일 뿐.

그러나 지금의 안색은 예전과 달랐다. 누가 봐도 뽕쟁이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퀭한 눈매와 움푹 팬 볼우물. 김수민쯤 되는 집안에서 그걸 가만히 둘 리도 없는데 저 정도라는 것은 훨씬 더 심각했다는 뜻이다.

수민은 재하의 눈앞에서 제 소매를 걷었다. 정맥 줄기를 따라 주사 자국이 가득했다. 허벅지에도 엇비슷한 것이 가득할 것 같았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그 약이 장한에서 나온 것이라는 게 걸렸다.

“하려는 말이 뭐야?”

“이게 무슨 조건으로 받은 약인지나 알아?”

김수민은 소매를 내리며 피식 웃었다. 약간의 우월감에 찬 눈빛이었다. 재하는 대답하지 않았다.

“장 실장에게 당신 한 번 만나게 해 주는 조건으로 받은 약이야.”

“…….”

“나도 이렇게 강한 약 쓰고 싶지 않았어. 모임에서 만난 놈이 억지로 먹이는 통에…. 씨발, 나도 그러고 싶지 않았다고.”

…근래에는 그러고 싶지 않았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인간들을 너무 많이 만나는 것 같았다.

그 인간들 중 하나인 이재하로서는 딱히 감흥 없는 얘기였다. 질감 좋은 입술을 열기 전에, 재하는 수민 모르게 슬쩍 손목의 시계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감이 예민한 수민은 재하의 그런 행동들을 기민하게 눈치채고는 했다.

그건 약혼 시절에도 익히 있었던 일이다. 수민은 약간은 상처받은 눈으로, 또 분노에 차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재하는 감정 없이 내뱉었다.

“그래서.”

“그래서? 반응이 그게 다야?! 장태건 그 개자식이 당신한테 의도적으로 접근한 거라고!”

익히 아는 얘기, 아무런 감흥 없는 말들이었다.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민아.”

“…….”

이름이 불린 김수민은 어깨를 잠시 떨었다. 무언가를 떠올리듯이 눈빛이 살짝 몽롱해지다가 물기에 젖어 들었다.

재하는 더 봐주지 않고 말을 이었다.

“그건 그때 말했어야지.”

그건 이재하 자신에게 하는 말과 같았다. 하지 못한 말은 안 하느니만 못하다. 김수민과 저는 어쩌면 그런 부분이 닮은 건지도 모른다.

수민은 무너진 얼굴을 했다. 제가 들은 걸 부정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재하 씨, 끝까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원망하고 싶어 하는 것 같길래 속이라도 편하라고 입을 열었다. 서늘한 태도로 말이다.

“아니면 약 몇 알에 나를 팔지 말았어야지. 포주 노릇 할 때는 언제고 억울한 태도야, 수민아.”

“뭐? 지금, 그게 무슨….”

수민은 분노에 떨고 있었다. 설움 같기도 했다.

김수민이 느끼기에는 이 세상에 자신을 이해해 줄 사람이 없어 그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이재하는 김수민을 완전히 이해하고 있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일들, 해야만 했던 일들, 저를 망칠 것이 뻔한데도 뛰어들어 온몸을 불태우는 그런 욕망들.

약에 취한 김수민이나 어떤 존재에 빠진 이재하나 다를 것이 없었다. 둘은 너무 닮아 파혼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이재하는 그 방에 수민을 두고 홀로 빠져나왔다.

적갈색의 카펫 위를 몇 걸음 더 걷는데 복도 끄트머리에서 누군가 저를 흘끗 보는 게 느껴졌다. 재하의 온몸이 긴장감에 굳어졌다. 납치 이후로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지기만 해도 간혹 이렇게 몸이 굳었다.

극도의 긴장감에 휩싸인 채 등골을 울리다가, 이재하는 저도 모르게 힘을 턱 놔 버렸다. 태건의 조직원이었다. 아침에 분명 인사하고 집을 나섰는데, 여기서 저를 살피는 걸로 봐서 오후 보고 할 거리를 찾는 것 같기도 했다.

재하는 그냥 그쪽을 향해 고개를 꾸벅이고는 여상한 걸음으로 다시금 대연회장으로 향했다.

자신의 일거리는 아직 남아 있었다. 그러기 위해 참석한 자리이니 완벽할 필요가 있었다. 재하는 망설임 없이 대연회장의 문을 열었다.

조부의 피후견인이 아들이라도 맞이하는 것인 양 밝은 안색으로 제게 양팔을 활짝 벌리고 있었다.

“이 이사, 어디 다녀와!”

“잠시 실례했습니다. 무슨 말씀들 나누고 계셨습니까.”

재하는 그린 듯한 미소를 입꼬리에 걸었다. 가면의 세계. 저는 할 수 있는 걸 할 뿐이다. 잘할 수 있으니 그의 곁을 떠난 것 아니겠는가.

그러니까 저는.

‘재하 씨, 끝까지…. 나한테 어떻게 이래.’

온몸으로 진실되게 원망하는 김수민 같아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사람에게는 각자의 자리가 있다.

이재하의 무덤은 이곳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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