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1. 가면
4. (2)
5.
6.
7.
Chapter 1. 가면
4. (2)
그들 앞의 두 사람은 간신히 시선을 피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민망함이 가시는 건 아니었다.
그러나 태건이 아직도 제 왼손을 세게 잡고 있었기 때문에 들었던 젓가락을 그대로 내려놓는 것 역시 이상해 보였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며 태건의 입가에 고기를 집은 젓가락을 가져갔다.
차마 시선은 마주하지 못한 채 그의 높다란 절벽 같은 콧대나 응시하는 게 다였다. 그러나 그가 입을 벌려 주지 않아 별수 없이 눈을 마주하는 수밖에 없었다.
저를 뚫어지게 보는 눈매가 살짝 휘어 있었다. 아주 살짝. 재하는 그것이 장태건의 웃음임을 깨달았다.
“…얼른 드십쇼.”
“보채긴.”
태건이 봐준다는 듯 입을 벌려 주었다. 저절로 그 안에 얌전히 있던 새빨간 혀가 시야에 들어왔다.
재하는 그때, 저도 모르게 페로몬을 울컥 내뱉을 뻔했다. 단전이 쑥 내려가는 느낌을 참아 가며 간신히 조절했지만, 귓등이 붉어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공공장소에서, 그것도 밥을 먹던 식당에서 그런 식으로 페로몬이 요동친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자제심이 강한 덕에 알파로 완전하게 발현한 사춘기 때도 이런 일은 없었는데. 당혹스러웠다.
이재하는 자신의 어리숙하고 미성숙한 부분을 지금에 와서야, 그것도 태건 때문에 보게 될 줄은 몰랐다.
그러나 그것을 바로잡을 수는 없었다. 이성이 아닌 감정이 그의 통제력을 틀어쥐고 있는 상황 자체가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이재하에게는 장태건의 모든 것들이 처음이었다. 장태건을 이루는 모든 것들이, 그리고 그를 향한 많은 것들이 재하에게는 태어나 처음 맞이한 세계였다.
“뭐야. 왜 굶은 얼굴이야. 아까 많이 먹고 나왔잖아.”
표정 관리를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미미한 열기를 어떻게 읽은 건지, 태건이 잡고 있던 재하의 손을 끌고 왔다. 두 사람의 어깨가 툭 맞닿았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인 내용이 재하의 피부에 스며드는 듯했다.
“앗, 형부님, 회사에서 뭐 드시고 나오셨는데 식사 제안하신 건니까?”
정길이 감동 어린 얼굴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제가 배고픈 것 같아서…? 하, 이제부터는 형부님도 제 형님이십니다.”
재하는 정길의 오해를 어디서부터 풀어 줘야 할지 몰라 애매하게 입을 다물었다. 태건이 그런 재하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키득거렸다.
“우리 이사님은 마누라 자지 실컷 얻어먹어서 배가 부른 건데. 그쵸?”
“…장 실장님.”
재하는 결국 낮은 목소리로 경고하듯 태건을 부를 수밖에 없었다. 무표정임에도 불구하고 타오를 듯 붉어진 귓등이 아니었다면 꽤 효과가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태건은 그런 재하의 귓등을 검지로 톡 건드리며 웃고는 콜라를 시켰다.
술을 먹지 말라고 했더니 콜라를 시킨 듯했다.
그가 제 손보다 훨씬 작은 콜라 캔을 뭉툭한 손끝으로 따 유리컵에 따랐다. 그걸 본 재하는 굳었던 표정이 스륵 풀어지는 것 같아 제 뺨을 조금 문지르다가 말았다.
주방 근처에서 식당 종업원이 냉면 네 그릇을 올린 쟁반을 들고 오고 있었다. 명순이 얼떨결에 시킨 물냉면이었다.
냉면 그릇이 더해지자 테이블이 꽉 찰 정도였다. 정길이 그릇 둘 자리를 비우려고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가 이쪽 눈치를 흘끔거렸다.
재하는 피식 웃으며 잔을 내밀었다. 중간에 태건이 손을 놔주지 않아 애를 먹었지만 말이다.
“저 한 잔 주세요, 정길 씨.”
왼손을 가볍게 가슴팍에 대고 흔들림 없이 잔을 쥔 손을 내밀었다.
재하의 진지하고 유려한 태도에 정길 역시 약간은 쑥스러운 얼굴로 척추를 바로 세운 채 병을 잡은 손목 아래를 반대 손으로 받쳐 흔들리지 않게 술을 따랐다.
갑자기 정길의 얼굴에 스민 긴장의 기색이 웃기기도 하고 의아하기도 했다.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따라진 소주잔을 입술을 붙이며 고개를 꺾어 입에 털어 넣었다.
그러고는 말없이 정길의 손에 있던 병목을 잡아 술병을 가져갔다.
정길이 흐흐 웃으며 잔을 두 손으로 받쳐 내밀었다. 재하 역시 잔을 받을 때처럼 똑같이 왼손을 가슴팍에 댄 채로 술을 따랐다.
“장 실장님이 앞으로는 이동 시에 명순 씨와 정길 씨 신세를 지라 하시던데, 그렇게 되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헉, 아닙니다. 말씀 낮추십쇼, 형부님.”
정길은 몸 둘 바를 몰라 허둥거렸다. 저보다 살짝 작기는 해도 덩치가 상당한 데다가, 인상이 부드러운 것도 아닌 남자가 황송해하는데도 재하는 굳이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대부분의 알파나 베타 남성들이 재하 앞에서 취하는 태도였기 때문이다.
재하가 직접 접대를 하는 일도 자연스러웠지만, 접대를 받는 건 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 물 흐르듯 유려한 태도에 명순과 정길이 감탄했다. 언뜻 보면 차갑고 냉엄한 인상인 건 태건과 마찬가지인데 어느 순간의 이재하는 놀랍도록 온화한 표정을 하고는 했다.
품위를 잃지 않은 얼굴에 스며 있는, 아랫사람을 향한 부드러운 기색은 힘으로 우위를 정하던 세계에서 살아온 두 남자도 감탄할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렇게 자연스레 술잔을 더 부딪쳤다. 재하는 한 번도 술잔을 물리지 않았고, 더럽진 않더라도 깨끗하지는 않은 가게에 대해 아무런 불평 없이 상 위에 있는 것들을 정갈한 태도로 고루 먹었다.
선이 깨끗한 칼날처럼 깔끔하게 손에 준 젓가락은 소리 없이 움직였고, 간간이 말을 하면서도 씹는 소리조차 나지 않는 테이블 매너에 정길과 명순마저 온순해지는 걸 보던 태건은 혼자 피식 웃었다.
그는 잠시 떨어져 있던 틈이 아쉬웠던 건지 다시금 재하의 손을 깍지 껴 맞잡았다.
그 간단한 스킨십에 놀란 재하가 고개를 잠깐 돌려 태건을 바라보았다. 태건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리며 뻔뻔한 표정을 지었다.
먼저 손을 잡아 놓고 뭘 보냐는 듯한 표정으로 마주 보자, 재하가 약간 의아한 기색으로 고개를 돌려 명순이 묻는 말에 대답했다.
태건은 재하와의 손깍지를 제 무릎 위에 올려 두었다. 재하는 다시 태건을 돌아보지는 않았지만 명순에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조금 느려졌다.
그는 그걸 바라보다가 콜라 잔을 입술에 붙였다. 얌전히 말을 들어줄 생각이었다.
* * *
약간 취기가 돌았다. 주량이 꽤 되는 편인데도 기분 좋게 마셔서 그런지 살짝 기분이 들뜬 것 같았다.
가게 밖 화장실 문을 열고 나오던 재하는 정장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젖은 손을 닦다가 걸음을 느릿하게 멈췄다.
그러고는 골목 맞은편에 있는 편의점을 미련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끊었는데…. 꼭 술만 마시면 생각난단 말이야….’
다른 3세들은 병역을 피하려 탄생부터 외국에서 시작하는데, 재하의 모친은 외조부의 집안이 항일 운동을 했던 가락을 들먹이며 꼭 군대에 가라고 세뇌하듯 말하고는 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공군 비행기 모형을 사 주며 파일럿이 되어도 좋다고 슬쩍 한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모친은 꽉 막힌 듯 유연한 사고방식을 갖고 있었고, 아들에게 장래에 뭐가 되어도 상관없다고 말하는 사람이었다. 사실 그것이 그저 말일 뿐이라는 걸 그녀의 아들도, 그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녀 자신도 있는 집 자식들이 짊어져야 하는 의무를 떠나지 못해 이익형 같은 쓰레기와 결혼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이재하는 파일럿이 될 수 없었다. 그녀가 이재하의 완벽한 방어벽이 되어줄 수 없었던 까닭이다. 그녀는 너무 빨리 영면을 찾았다.
그 때문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하지만, 이재하는 자연스레 입대에 대해 생각했다. 이재호조차 프랑스 국적을 갖고 있어 병역 면제자인데 장남을 군에 보내기가 껄끄러웠는지 이익형이 넌지시 물어본 적이 있었다.
‘빼 주랴?’
재하는 고개만 젓고는 부친의 서재를 나왔다. 굳이 그럴 필요 없었다. 군 생활을 고생스럽다고 여겨본 적 없고, 앞으로 경영하게 될 회사가 뿌리내린 나라의 일원들이 갖고 있는 보편적인 시선을 알고 싶기도 했다. 그중에는 모친이 가장 큰 동기이기도 했다.
그렇게 입대한 군에서는 키가 꽤 커진 바람에 모친의 말대로 전투기 조종사는 되지 못했지만, 운전병으로 지원하여 군 생활 내내 어느 원스타의 차를 몰았다.
제 입으로 집안에 대해 말한 적 없는 데다가 이익형도 의외로 별말 없었는지 군 내에 소문 같은 건 나지 않았다. 자신의 운전병인 일등병이 재벌가 자제일 거라고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한 원스타는 이재하에게 늘 만 원짜리 지폐를 쥐여 주고는 담배 심부름을 시켰다. 두 갑을 사 가면 한 갑은 재하의 몫으로 남았다.
처음에는 사제 담배에 목말라 있는 생활관 동기들에게 던져 주다가 나중에는 한두 개비씩 태우기도 했다.
이재하는 특히 겨울에 담배를 많이 태웠다. 철원은 아니었지만, 나름 최전방이었기 때문에 겨울이면 코로 숨 쉴 때마다 그대로 수증기가 응결하여 콧구멍조차 버석거리고는 했다.
그렇게 추운 날이면 담배를 태워도 그 냄새가 몸에 묻지 않았다. 재하는 그래서 그렇게 추운 날만 골라 담배를 태우다가 전역 후 금연을 이어 왔다.
그러나 절제의 틈을 비집는 효과가 있는 술에 취해 약간 알딸딸한 날은 특히 니코틴이 당기고는 했다. 이성이 채찍질하여 미뤄 두었던 발칙한 중독 증세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오는 것이다.
재하는 결국 편의점에 들어갔다.
“…저 뒤의 파란 거 한 갑 주시면 됩니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원하는 담배를 말한 뒤 정장 상의 안쪽 포켓에 넣어 둔 지갑을 뒤적였다. 카운터에 있던 라이터를 발견하여 집어 들기도 했다.
종업원은 그런 재하를 흘끗 바라보았다. 계산하지 않고 뭐하냐는 듯한 얼굴이었다. 전에는 편의점에서도 카드를 건네주면 알아서 결제해 줬는데 요즘엔 리더기에 꽂는 시스템으로 바뀐 듯했다.
빠릿빠릿하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괜히 이상하게 보는 것 같아 서둘렀다. 계산대 앞을 떠나 딸랑이는 종이 달린 문을 열고 나오니, 저 자신이 약간 한심하단 기분이 들었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충동을 참을 수가 없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몇 년을 근무해 온 이사실에서 섹스는커녕 엇비슷한 생각도 떠올려 본 적이 없는데, 물소 가죽 소파 위에 질펀하게 사정하지를 않나, 소주 몇 잔 마셨다고 담배 태울 생각을 하질 않나.
애초에 잠깐 충동이 일어도 그뿐, 구매까지 해 본 적은 없었다. 재하는 제가 화장실에 들렀다가 들어가려던 길인 것도 잊은 채 담뱃갑의 얇은 포장을 뜯어 엄지 끄트머리로 종이 갑을 툭 쳐 열었다.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는 담배 개비들 중 한 개비를 꺼내어 질감 좋은 입술 사이에 물었다.
불을 붙인 채 볼우물이 팰 정도로 빨아들이자 담배의 꽁지 부분이 새빨갛게 물들며 타들어 갔다.
제대로 불이 붙자 담뱃대를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채 그대로 살짝 빼내기만 했다. 오랜만에 들어간 니코틴 때문에 머리가 멍했다. 살짝 기침이 나오는 걸 굳이 막지 않았다.
담뱃대를 들고 있는 검지와 중지는 멀리 가지도 않고 바로 입술 위를 누르고 있는 참이었다. 약간 어지러워 한쪽 눈만 꾹 감았다 떴다.
그래, 이렇게 니글거리는데 왜 피우고 싶다고 생각했지.
재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입술을 꾹 누르고 있던 손가락의 위치만 살짝 옮겨 다시금 끄트머리를 살짝 물었다. 뺨이 푹 파이도록 담배 연기를 들이마신 뒤, 불투명해진 담배 연기를 살짝씩 내뱉고 있던 차였다.
“저기요.”
누가 부르길래 띵하고 울리는 머리를 깜빡하고 그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다가 잠시 멍해졌다.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는데도 시야가 흐릿했다. 골이 아픈 것 같아 담배를 든 손의 엄지로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 모습이 남들 눈에는 그저 잘생긴 미남자가 숱이 짙은 눈썹 사이를 유려하게 좁히며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재하가 간신히 눈을 떴을 때는 선이 얇은 남자가 살짝 웃으며 일행과 함께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메가인 듯했다.
“저기, 여기 삼영 꼬치집 어디 있는 줄 아세요?”
뭔가 했더니 길을 묻는 모양이다.
재하는 머금었던 연기를 행인에게 닿지 않게끔 고개를 돌려 후, 뱉어낸 뒤 대답했다.
“아, 전 이 골목이 초행입니다.”
그가 고개를 돌릴 때 드러난 굵은 목덜미와 목빗근, 그 위에 포도 줄기처럼 넝쿨진 정맥들을 바라본 오메가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는 제 일행과 키득거렸지만, 오래간만에 흡연으로 머리가 멍해진 이재하는 그들의 들뜬 표정을 발견하지 못했다.
결국 그들 중 처음부터 재하에게 말을 걸었던 남자가 불쑥, 한 발자국 다가오며 물었다.
“저기요, 혼자세요?”
그리고 그 순간 뒤편에서 물 냄새가 확 끼치더니 굵은 팔이 재하의 가슴팍을 쭉 끌어당겼다. 태건이었다.
“아니, 이 사람 유부남인데.”
난데없이 나타난 그가 들고 있던 담뱃대를 앗아 가더니 제 입에 물고는 뭉개진 발음으로 대신 대답했다.
살짝 놀란 재하가 뒤돌아보자 담배를 무느라 도드라진 그의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담뱃대 끄트머리에서 올라오는 연기를 피하려는지 한쪽 눈을 찡그린 채로 말하는 표정은 시큰둥해 보였다.
“유부, 남…. 아, 실례했습니다.”
오메가가 태건을 슬쩍 보더니 고개를 꾸벅이고는 뒤로 물러났다.
옆에 있던 일행이 그런 오메가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찌르며, “야, 왜 그냥 가. 저 사람은 어떠냐고 물어보자.” 하고 태건을 뚫어지게 바라보다가 친구에게 끌려 뒷걸음질 쳤다.
재하는 짧게 헛기침했다. 태건이 그들이 가는 길을 뚫어져라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물어보는 줄 알았는데.”
“누가 뭐래? 내가 길바닥에서 이재하 씨랑 쟤들이랑 떼씹이라도 쳤냐고 물어본 것도 아닌데.”
떼씹…. 재하는 홀로 되뇌다가 아연해 졌다. 그사이에 태건은 아까 재하가 그랬던 것처럼 뺨이 푹 파일 정도로 연기를 들이마시고 있었다.
흉통이 거대한 만큼 폐 용적도 큰 건지 담뱃대가 무섭도록 타올라 종내에는 꽁초만 남아 끝이 빨갰다.
담뱃대가 저를 태우는 불에 저항하지 못하고 담뱃재로 변하는 동안, 재하는 바로 서려고 노력하는 중이었다. 길거리에서 덩치 커다란 알파 둘이서 껴안고 있으니 사람들이 흘끗거리는 듯해 당혹스러웠다.
태건은 놓아주지는 않고 오히려 재하를 품 안에서 빙글 돌려 저를 바라보게 했다.
그때였다. 장태건이 연기를 내뱉지 않고 그대로 입술을 부딪쳐 왔다. 안쪽으로 밀려드는 것은 타르와 니코틴뿐이 아니었다.
말캉한 살덩이가 밀려 들어오더니 재하의 혀를 휘감고는 츠읍, 하는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에 묻은 누군가의 타액을 핥아먹었다.
그걸 내려다보는 장태건의 눈동자가 밤바다처럼 깊게 일렁였다. 왜 저렇게 보는 건지 언뜻 이해 가지 않았다.
태건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하고 싶은 거 다 했어?”
“네?”
태건이 재하의 허리 뒤에서 두 팔의 깍지를 끼며 껴안았다. 틈이 남지 않아 재하의 콧대가 태건의 날카로운 턱에 살짝 부딪힐 것 같기도 했다.
“밥 달라는 개새끼들 밥 사주고, 유부남 주제에 길거리에서 오메가 꼬시고, 안 태우던 담배까지 태웠잖아. 이제 하고 싶은 거 다 했냐고.”
“아니, 꼬신 건 아닙니다.”
“그래요. 우리 이사님은 가만히 있었는데 저 눈깔만 멀쩡한 것들이 들러붙은 거죠?”
“…….”
“알겠으니까, 이젠 집에 좀 가자.”
태건이 그대로 재하를 푹 껴안았다. 그에게는 단 한 번도 싫다 말해 본 적 없는 재하는 쇠 파이프처럼 굵은 쇄골 위에 이마를 살짝 박아야 했다.
재하는 문득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그의 품에 이마를 댄 채로 말했다.
“네, 갑시다.”
태건이 대꾸 없이 가만히 있다가 한 번 더 팔을 조여 오는 기색이 느껴졌다. 재하도 팔을 뒤로 둘러 등을 마주 껴안을까 하다가 그만두었다.
딸랑, 편의점 문 여는 소리가 지척에서 들렸지만, 재하는 부러 그 품을 뿌리치지 않았다.
* * *
술은 입에 대지 않은 명순이 운전대를 잡았다.
정길은 그대로 퇴근하는 것 같았다. 내일 아침은 정길이 재하를 출근시키러 올 것이라고 했다.
단단하게 생긴 만큼 주량도 말술인 정길은, 꽤 술을 잘 마시는 재하를 상대하고도 멀쩡하게 인사했다.
오히려 오래간만에 기분이 좋아 양껏 마신 나머지 살짝 알딸딸해진 건 재하 쪽이었다.
그러나 그 작은 취기마저, 저를 데리러 나온 태건에 의해 삽시에 사라져 버렸다.
그렇게 두 알파는 명순과 정길이 식사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 말없이 담배를 태웠다.
두 번째 담뱃대는 태건이 제 입에 물고 불을 붙인 걸 그대로 재하의 입술에 물려 주었다. 태건의 시선이 제 입술을 배회할 때마다 재하는 목이 마르는 기분이었다.
재하를 데리러 나갔던 태건까지 돌아오지 않자 명순과 정길이 가게 밖으로 나왔고, 두 사람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야외 재떨이에 짧아진 담배를 던져 넣고는 어깨를 붙인 채 차로 향했다.
“살펴 가십쇼, 형님.”
그들이 차에 올라타 문을 닫자, 정길이 차 밖에서 꾸벅거리는 것이 보였다. 창문이 닫혀 있는데도 그러길래 재하가 먼저 그것을 내려 마주 인사했다.
정길이 고개를 빼꼼 내밀고 안을 들여다보며 재하에게 씨익 웃자 말없이 앉아 있던 태건이 그쪽은 쳐다보지도 않고 창문을 올려 버렸다.
결국 두 사람은 나란히 뒷좌석에 붙어 앉은 채로 같이 귀가하는 중이었다.
창밖에는 밤에 잠긴 서울이 스쳐 지나갔다. 영동대교를 지나는 동안 차 안에는 고요가 흘렀다.
“…….”
재하는 넥타이 매듭 부분에 검지를 넣은 채 살짝 당겼다. 약간 답답한 느낌에 창문으로 고개를 돌리자 창에 반사된 태건이 보였다.
“…….”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재하는 문득 그것이 궁금했다. 그러나 태건에게 무슨 생각 중이냐고 직접 묻지는 않았다.
입을 떼지 않은 채로 그대로 귀가했을 뿐이다. 명순이 태건에게 꾸벅 인사를 함과 동시에 부부는 저희의 신혼집으로 들어갔다.
재하는 그때까지 약간 멍한 상태였다. 오래간만에 피운 담배의 후유증이 오래가는 듯했다. 그래도 현관에 도달하자, 그제야 집에 왔다는 안도감이 들었다.
이재하의 인생에서 그런 느낌은 생경했지만 근래에는 종종 겪는 기분 중 하나였다.
태건과 사는 집이 정말 제집 같다는 느낌.
밖에서는 늘 긴장감을 유지한 채 등을 꼿꼿하게 세우고 다니던 재하는 저도 모르게 현관으로 들어서자마자 척추를 살짝 무너트렸다. 그래봤자 다른 이들에게는 티도 안 날 정도의 느슨함이겠지만.
재하가 짧은 한숨을 내쉬는 사이 태건이 그의 엉덩이를 툭 치고 지나갔다.
“빨리 들어와, 샤워 같이하게.”
그러고는 언제 신발을 벗은 건지 실내용 슬리퍼를 끌며 제 방이 있는 2층으로 향했다. 재하는 그런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입술을 말아 물었다.
‘샤워를, 같이….’
가뜩이나 멍한 머리에 열이 확 오르는 느낌이었다. 재하는 태건의 말에 대해 생각하지 않으려 노력하며 드레스 룸으로 들어갔다.
넥타이와 정장 재킷을 옷걸이에 건 뒤 의류 관리기에 넣고 셔츠 단추를 풀어 그건 그대로 세탁용 바구니에 넣었다.
하의도 벗기 위해 벨트에 손을 댔다. 벨크로를 열고 허리띠를 빼내자 뱀이 움직이는 소리처럼 슈륵 거리며 가죽띠 부분이 빠졌다.
그 상태로 버클만 열고 손에 찬 시계를 케이스가 딸린 붙박이장에 넣으려던 참이었다.
“빨리하라니까 또 꾸물거렸지. 마누라 좆 터져 죽는 거 보고 싶어요?”
“아….”
재하는 저도 모르게 짧은 감탄사를 냈다. 드레스 룸 문틀에 기댄 태건은 가운을 조여 매지 않은 채로 그 아래 아무것도 입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저절로 시선이 떨어지려는 것을 끌어 올리며 재하는 태건의 어깨쯤을 바라보았다. 눈도 마주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재하를 보며 태건이 피식 웃었다.
“씹을 몇 번을 떠야 내외하는 거 그만둘래요.”
태건이 어이없다는 듯 다가와 그대로 드레스 룸과 연결된 1층 욕실로 재하를 끌고 들어갔다.
아직 바지도 벗지 못하고 있던 재하는 당황스러웠지만, 그가 끌고 가는 대로 저항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타악, 등 뒤로 욕실 문이 닫히는 것이 느껴졌다.
* * *
녹진하게 풀어진 재하는 저도 모르게 앓으며 침대 시트에 젖은 머리를 비볐다.
‘멍해….’
머리가 멍했다. 습기가 가득했던 욕실에서의 기억이 재하를 뒤흔들었다.
샤워기에서 물이 쏟아지는데도 재하는 태건의 것을 입에 문 채로 뱉을 수 없었다.
귀두 끄트머리를 입술로 핥듯이 문지르면 울컥 튀어나오는 선액의 맛이, 샤워기에서 쏟아진 물에 섞여 알던 것보다 묽어진 것 같았다.
입술 점막으로 부드러운 귀두를 물었다가 혀로 요도구 근처를 핥을 때마다 묽어진 맛이 느껴지면, 재하는 습관처럼 귓등이 약간 붉어졌다.
태건은 턱이 아파 다 담지는 못하고 핥기만 하는 재하를 비웃었었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런 거에 흥분하는 나도 미친 새끼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그의 말이 들리긴 하는데 뇌에서 정보를 처리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멍한 두 눈을 깜빡일 수밖에 없었다. 홍조가 오른 뺨에 물방울이 튀었다.
태건은 그대로 재하를 일으켰다. 꿇어앉았던 무릎이 동그랗게 빨개졌다.
벽을 짚게 하고 골반을 쥔 채로 목덜미에 이를 박아 넣는 숨결이 그대로 느껴져 곤혹스러웠다.
재하는 앓지도 못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사정했다. 태건이 딱 한 번 사정할 동안.
‘기능에… 문제 있는 거 아닐까.’
이쯤 되면 제 기능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 고민하게 된다.
태건이 그렇게 오래 사정을 참는 동안 저는 몇 번이나 극치감에 시달려 덜덜 떨다가 주저앉을 뻔했다.
그가 재하의 허리에 팔을 휘감고 일으켜 주지 않았다면 타일 벽에 코나 이를 박아 앞니가 부러졌을 수도 있다.
그만큼 혼곤한 정사였다. 침실을 놔두고 샤워 부스에서 그런 짓을 하다니. 하다못해 욕조도 있는데 말이다.
재하는 계속해서 나가자고 말해 봤지만, 그것은 뒤에서 쳐올리는 움직임에 맞춰 말도 신음도 되지 못한 채 그대로 뭉개져 흩어져 버렸다.
결국 재하가 풀려난 것은 더는 못 하겠어서 차라리 빨아 주겠다며 다시금 태건의 사타구니 앞에 무릎을 꿇었을 때였다.
그는 다 젖은 재하의 얼굴을 바라보며 알 수 없는 눈을 했다. 그의 성기가 꺼덕이기도 했고, 핏줄이 돋은 아랫배 복근이 움찔거리기도 했다. 우람한 허벅지 근육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그렇게 민감한 곳의 근육들을 움찔거릴 정도로 무언가를 인내하고 있는지도 알 수 없었다. 태건은 봐주겠다는 식으로 재하를 일으켰다.
‘체력 길러 놔. 뭘 얼마나 했다고 벌써 힘이 풀립니까. 억울해 죽겠네.’
그러고는 심드렁한 말투로 짜증을 냈다.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는 수밖에 없었다.
태건이 그를 껴안듯 제게 기대게 하고는 등과 허리, 엉덩이 골 사이까지 거품을 낸 보디워시로 문질러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비누칠만 하는 게 아니라 안마라도 하는 것처럼 근육 이곳저곳들을 주물럭거렸다. 그 손길에 재하는 그대로 잠이 들고 싶었으나 이만저만 민폐인 것이 아니라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태건 역시 강한 알파라고 해도 근 증량을 해 무게를 키운 제 몸을 번쩍 들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며 최대한 허리에 힘을 주려고 노력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그의 품 안에서 일어나려고 하면 할수록 척추기립근이 노곤하게 풀려 계속해서 허우적거리는 것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맞닿은 성기끼리 부딪치자 반쯤 서 있던 태건의 것이 바로 힘을 받았다. 태건은 짜증을 냈다.
‘박지도 못하는데 자꾸 끼 부리지. 정신 안 차려요?’
그 말에 정말 그냥 얌전히 안겨 있는 수밖에 없었다. 결국 재하는 태건의 손에 의지해 샤워를 마무리해야 했다.
혼자 샤워 부스를 걸어 나가려고 했는데 아예 어깨 위에 업힌 채 나와야 했다.
‘…내려 주십쇼.’
‘그러게 왜 자꾸 정신을 못 차려. 누구 수절하는 꼴 만들려고?’
태건은 심드렁하게 말하고 재하 몫으로 벽에 걸려 있던 목욕 가운을 뜯어내듯 잡아챈 뒤, 그대로 욕실의 반대편 문을 열었다.
드레스 룸과 통하는 문의 반대이니 재하의 방으로 가는 문이었다. 그렇게 재하를 내려 준 태건이 목욕 가운을 던진 뒤 다시금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저를 씻기느라 덜 씻었나 하고 멍하니 바라보니, 다리 가운데 것이 우람하게 선 채로 단단한 아랫배에 닿아 철썩거리고 있었다.
‘아, 저걸….’
풀러 가는구나, 하고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태건은 그가 제 것을 홀로 처리하는 상황 자체가 약간 미안한 마음이 들었지만, 술기운에 한 섹스의 여파에 몸이 노곤해져 더는 깨어있기가 힘들었다.
결국 재하는 미안한 마음이 들면서도 가운을 입고는 제 침대에 누워 버렸다.
하루가 유독 길었다. 멍한 머리에는 욕실에서 있었던 일과 같이 저녁을 먹었던 것, 이사실에서 했던 섹스가 차례로 기억났다.
고작 어제까지만 해도 이재하는 삶의 낙이라고는 없는 사람처럼 한숨을 푹푹 쉬며 회사에 출근했었다. 그런데 오늘 별안간 찾아온 태건에 의해 하루가 다른 색으로 점철되는 것 같았다.
무채색에서 아주 그럴듯한 색들로 말이다. 재하는 이마에 올려 둔 제 팔로 눈을 가리며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도는 일들을 밀어내려 애를 썼다.
‘기뻐….’
기뻤다. 뭐가 기쁘냐면 그가 다시금 찾아와 준 것이. 상처를 달고서도 바로 일어나 저에게 와 준 것이, 저에게 화가 났을 법한 일인데도 불구하고 아무런 말 없이 넘어가 준 게 기뻤다.
‘내가 더 잘해야 해….’
재하는 멍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더 잘하고 싶었다. 더 잘해 주고 더 사랑해 주고 싶었다. 태건이 행복했으면 싶었다.
가물거리는 의식 속으로 계속해서 그런 생각을 했다. 누군가 재하의 몸 위로 이불을 덮으며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잡니까? 어이가 없네. 그래요, 주무셔요.”
심드렁한 말투에 재하는 저 혼자 피식 웃었다. 아니, 웃은 것 같았다.
의식이 나락으로 꺼졌다. 꿈에서는 장태건이 나왔다. 그와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같은 곳만 바라보는 그런 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