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1)
그날로부터 며칠이 지나도, 이재하는 그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 채 거리를 떠도는 개처럼 헤매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종잇장처럼 얇게 저민 복어회가 올라와 있었다. 상대가 그걸 몇 점씩 집어 우걱우걱 먹는 동안 이재하는 테이블 아래로 눈을 깔고 제 왼손 약지를 내려다보았다.
“웬일이야, 이 이사가 나를 다 찾아 주고.”
출혈이 심한 창상 부위를 틀어막아 지혈하느라 결혼반지에까지 태건의 피가 엉겨 붙어 지저분하게 변했었다.
임 과장에게 맡겨 세척을 해 오라고 했는데, 그걸 비서실 막내 직원이 듣고는 제가 해결해 보겠다고 나섰었다. 결혼반지를 맞췄던 하이엔드 브랜드에 맡길 필요 없이 안경을 닦는 초음파 세척기로도 깨끗해진다고 했다.
임 과장은 막내 직원을 철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이재하처럼 정상에서 태어나 내려와 본 적 없이 그곳에서만 지낸 이들은 그게 무엇이든 최고만 요구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비서실 직원이 쓰던 초음파 세척기에 반지를 넣는 걸 마땅치 않아 할 거라 여긴 듯했다.
그러나 이재하는 그 반지가 자신을 오래 떠나있어야 하는 게 더 마음에 걸렸었다.
그래서 직원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직원이 제 책상에 놓인 휴대용 세척기를 가동시키는 동안 그이의 책상 옆에 가만히 서 있기도 했다.
비서실 직원들이 당황한 표정을 짓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졸업 후 바로 취업에 성공했다는 막내 비서는 해맑은 얼굴로 주얼리 제품을 닦는 천이 있다며 초음파 세척을 끝낸 재하의 결혼반지를 잘 닦아 돌려주었다.
브랜드에 직접 맡기면 며칠이 지나야 그걸 돌려받을 수 있는 걸까 고민했었다. 결혼식 이후로 한 번도 손에서 빼 본 적 없는 물건이었다.
고 비서의 차에 올라탔던 그 날 이후로 장태건을 볼 수 없었다. 바쁘기도 했고 연락할 용기가 나지 않아서 미뤄 두었다.
무언가가 두려워 미뤄 두다니. 이재하는 근래의 자신이 너무 많은 것들을 새로이 경험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연락을 해야겠다는 생각만으로도 어쩐지 가슴이 선득거려 쉽지 않았다. 연락을 할 수 없으니 당연하게도 상대의 행방이 묘연했다.
아마 장태건은 이재하가 밖에서 벌이고 있는 허튼짓을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얌전히 있어 달라는 말은 표면이 거칠게 느껴질지언정 부탁이었다. 부탁을 해 온 상대에게 마음이 오롯이 가 있는 이재하로서는 그걸 꼭 들어주고 싶지만 쉽지 않았다.
장태건이 그날 그렇게 피범벅이 되어 귀가하지만 않았어도 해야 할 인수인계를 마무리하여 지금쯤이면 온전히 이사직을 내려놓았을지도 모르겠다.
지금 이 시간이면 장태건의 퇴근을 기다리며 책을 보거나 집에서 할 수 있는 취미를 기르기 위해 원예법을 찾아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들을 제물 삼아 바꾼다고 해도 이재하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그러니 그때까지 장태건을 보지 못함은 당연한 일이었다. 지금부터는 그저 장태건이 저를 다시 한번 더 용서해 주길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
그는 다른 이에게 두 번의 기회를 용납하는 알파가 아니었으니 재하에게도 그런 기회는 오지 않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기다리는 동안에는 반지를 몸에서 떨어뜨리는 순간이 길지 않았으면 했다.
그것이 다 마음 대신인 양 굴었다. 장태건을 보고 싶은 마음, 그에게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 그의 침대 위에 고여 있던 바다 내음. 손가락으로 반지를 문지르는 그 행동 하나로 보상받으려는 것처럼 내도록 반지를 쓰다듬었다. 그러니 몸에서 떼어 내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막내 직원이 반지의 세척을 5분 만에 해결해 준 것을 임 과장은 기업 내 임원 의전 수칙상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었지만 재하의 생각은 달랐다.
바로 받을 수 있어서 좋았다. 게다가 반지는 서로의 예복을 맞추던 날 함께 고른 것이다.
‘나는 아직 연장을 씁니다. 내 위치가 그것밖에는 못 돼 놔서 이사님한테는 미안하지만, 사실은 사실이니까.’
장태건은 샘플로 나온 반지를 열 손가락에 다 끼워 보고는 욕심 많은 공작새처럼 손을 반짝반짝 돌렸다.
손가락이 길쭉해도 굵은 편이라 한마디에도 들어가지 않는 반지들을 억지로 끼운 채 뭐가 더 예쁘냐고 재하에게 묻기도 했었다.
그의 얼굴에 홀려 손은 보고 있지도 않던 재하는 당황했었다. 재하가 당황한 것을 제 말뜻을 이해 못 해서 그러는 줄 알았는지 한쪽 눈썹을 살짝 올린 장태건이 말을 덧붙였다.
‘반지가 조금 굵거나 디자인이 복잡한 건 연장에 걸려 흠집 나기 쉽다는 얘기입니다.’
‘아….’
그제야 그가 말하는 바를 깨달았다. 기업형 조폭의 3세도 조폭은 조폭인 것이다. 장창식은 종로 바닥의 현금은 다 쥐고 있으면서도 손자를 굴려 그걸 불리는 일은 손에서 놓지 못하는 듯했다.
욕심이 많은 노인이었다. 그러니 이 사달이 난 거지만.
그러나 당시의 이재하가 생각했던 것은 단 한 가지였다. 일할 때도 자신과 맞춘 결혼반지를 빼지 않을 거란 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욕심껏 밀어붙인 결혼에 제가 내세울 것은 조건밖에 없었다. 그런데 배우자 될 사람이 일할 때도 반지를 빼놓지 않을 것이라 말하다니.
만족감이 피부밑에서 자글자글 끓어 뻥 터져 버리는 순간이 오지 않을까 걱정될 지경이었다.
‘얇은 디자인으로 하자고. 내 돈 쓰면서 살게 하고 싶으니까 일단 돈을 많이 벌어 와야 할 거 아냐. 그때까지 당분간은 연장 쥐어야 합니다.’
장태건은 시큰둥하게 말하며 제게 끼워져 있던 반지를 빼내어 재하의 약지에 끼워 주었다. 엄지로 그 반지 위의 다이아몬드를 덧그리다가 재하의 약지도 같이 문지르는 얼굴에는 표정이 없었다.
그게 심장을 아프게 조일 정도로 좋았다.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말이다. 결국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는 당시의 말을 그냥 넘겼던 걸 후회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물어봤어야 했는데.
그가 하는 일이 대체 어떤 것들이며 그에게 얼마나 위험한지에 대해서 말이다.
재하는 미련이 끈덕진 손길로 약지의 반지를 같은 손 엄지로 문지르다가 빙긋 웃었다.
“지검장님 뵙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할아버님 생전엔 집에도 자주 오시더니 근래에 자주 못 뵈어 섭섭할 따름입니다.”
“원, 사람도…. 그거야 내가 익형이랑은 사이가 그닥이니까….”
서울지검 지검장은 사람 좋게 웃었다.
재벌인 이원웅, 조부의 후원을 오래도록 받아 놓고도 청렴을 표방하는 지검장 취임사가 무척 인상적이었던 이다. 지검장실에 배달된 유신의 이름이 적힌 화환을 어떻게 무시했는지 궁금할 정도로.
재하의 부친인 이익형과는 대학 동문 사이로 이원웅이 오동나무 관에 안치되자마자 불법 증여 혐의로 유신에 시비를 걸기도 했다. 무혐의로 풀려난 이익형은 그날 만취 상태로 이재호 앞에서 골프채를 들었다.
김란희가 울며 달려와 말려 달라고 사정을 하는 통에 잠이 덜 깬 상태로 그의 골프채를 뺏었던 기억이 있다.
요컨대 받을 건 다 받아 놓고 거기에 대한 일말의 양심 가책도 느끼지 않는 뻔뻔한 인간상이라는 얘기였다. 이재하가 숨 쉬는 것보다 쉽게 다루는 이들은 이런 사람들이었다.
‘뭘 봐요. 반지 고르라니까 왜 내 얼굴만 보고 있어. 아무거나 고르기 전에 집중하세요.’
하트 모양으로 세공된 핑크 다이아몬드 반지, 그것도 여성용을 재하의 새끼손가락 끝마디에 끼워 주며 심드렁하게 말하던 그런 사람이 아니라, 눈앞의 지검장 같은 이들을 다루는 것이 이재하에게는 훨씬 쉬운 일이었다.
재하는 조금이라도 속내를 들킬 만한 웃음은 술잔으로 가려 버렸다. 비웃는 걸 들켜서야 일 얘기에 방해만 될 뿐이다.
데운 정종 위에 해풍에 말린 도미 꼬리를 띄운 술은 그냥저냥 먹을 만했다. 식욕이 없는 게 문제지만 말이다.
상대는 공복에도 남산만큼 부른 탐욕의 배를 채우는 데에 열중하던 걸 어느 정도 만족했는지 그제야 젓가락을 놓고 술로 입을 헹군 뒤 말했다.
“그나저나 왜 보자고 했는지는 내가 대략 알고 있는데 말이야.”
“지검장님께서 짐작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재하는 다시금 빙긋 웃었다. 그린 듯한 웃음이었다. 떠보는 꼴이 같잖았지만 그도 내색하지 않았다.
소위 개천 용에다가 그의 검사 인생 내내 재벌가의 후원을 받았다는 미명을 떨칠 수가 없었을 테니, 이런 기회에 그 열등감을 어느 정도 받아 줘야지만 이쪽이 원하는 걸 후려칠 수 있는 것이다.
대학 동문인 이익형에 대한 열등감, 사법고시 합격 이후 연수원부터 따라붙던 재벌가 후원에 대한 꼬리표.
그게 싫었으면 다른 이들처럼 도서관을 나서 최루탄이라도 던졌으면 될 일인데, 얻어먹을 건 다 얻어먹고 저 나이에 아직까지 열등감을 풀 기회를 놓치지 않고 진상을 부리는 것이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그러나 사람은 이렇게 생기면 이렇게 생긴 대로, 저렇게 생기면 또 저렇게 생긴 대로 쓸모 있는 말이 되어 주고는 한다. 이재하 앞에 놓인 바둑판에서는 그런 일들이 으레 일어나고는 했다.
“옛말에 결혼을 해야 어른이 된다고, 그래도 그렇게 서두를 필요는 없었는데. 역시 잡음이 살짝 나오는 모양이야?”
지검장은 조폭 나부랭이와 결혼할 바에는 혼자 사는 게 낫지 않았냐는 말을 돌려 하고 있었다.
이재하의 한쪽 눈썹이 잠깐 꿈틀거렸다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그 자리로 돌아갔다. 여러 말 듣고 싶지도 않아 그만 본론을 꺼냈다.
“…해서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이 이사 조부장께서 어떻게 해 주셨는데 내가 당연히 도와야지.”
지검장은 여전히 복어회 두세 점을 한꺼번에 집어 들어 입에 넣고 있었다. 이재하는 식욕이 가신 얼굴을 들킬 수 없어 술만 홀짝이고 있는 형편이었다.
“감사합니다. 조부님께서도 어려운 일이 있으면 늘 검사장님을 찾으라 하셨습니다.”
“그으래. 내가 우리 이 이사를 도와야지 누굴 돕겠어.”
-말은. 재하는 입꼬리만 살짝 올리며 다시금 술을 홀짝였다.
술잔에는 바다의 권속이었던 것이 가라앉아 있었다. 술잔에서 흘러넘치는 것과 닮은 향을 몸서리치게 알고 있다.
“다시 한번 감사합니다, 지검장님.”
결국 나오지 않는 감사 인사를 억지로 마무리했다. 자존심이 상해서 나오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해야만 하는 일에 권태를 느끼는 바람에 입이 턱 막힌 것이었다.
이재하는 그냥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어디로?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바다가 보고 싶은 것인지 아니면 다른 것이 그리운 건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재하의 감사 인사에 기분 좋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지검장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보통 복어회는 낮에 먹는 게 맞거든. 저녁에 자다가 혹시나 남아 있는 복어 독에 당하면 안 되니까.”
“…….”
테이블 아래서 습관처럼 반지를 만지작거리던 이재하는 경청하는 척을 했다.
“근데 난 저녁에 먹는 게 좋아. 밤이 깊을 때 말이야. 어릴 때나 부리던 객기를 이런 걸로 푸는 느낌이거든.”
“…….”
노모의 쌈짓돈으로 학비를 보태고 나아가 재벌가의 개가 된 주제에 객기는 무슨. 학우들이 학생 운동에 나가 최루탄을 마시며 눈물 쏟을 때 책상머리에 앉아 안정을 취한 주제에 종로 바닥 전전하던 김두환이라도 된 양 주름잡는 것이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이재하는 딱히 티 내지 않고 한숨처럼 반지를 만졌다. 엄지 지문에 다이아몬드가 걸렸다. 영원을 약속하는 보석이었다.
“원래 가진 사람일수록 위험한 일에 중독이 되는 법이지 않나. 내가 이 나이 먹고 약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를 수는 없으니까 말이야.”
요컨대 이재하의 결혼을 재벌가 도련님의 일탈 정도로 알고 있겠다는 말이었다. 지겨움에 한숨이 튀어나오려는 걸 꾹 눌러 참았다. 장태건도 이런 걸 다 참고 살까?
‘주례 한 번 존나 지루하네. 빠구리 뜰 때도 저럴까.’
전 한국은행장이 주례를 섰던 결혼식이다. 재단사는 차마 태산 마냥 덩치가 큰 장태건에게 오메가 예복을 입힐 수는 없었는지 크림색 비단으로 재단한 턱시도를 제작했다.
그건 장태건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렸다. 아무렇게나 내리고 다니던 머리를 깔끔하게 넘긴 채로 정중하게 손을 모으고 있었지만, 재하를 향해 속삭이던 말은 천둥처럼 크게 들렸다.
재하가 두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을 때였다. 주례에 집중하지 않는 신혼부부를 의식한 것인지 전 행장이 헛기침을 했다.
재하는 고개를 바로 했고 옆에서는 태건이 작게 킥킥거리는 소리가 났다. 재하 역시 입술을 말아 물어 입꼬리가 올라가는 것을 숨기려 애를 써야 했다.
그런 것들을 떠올려 보면 장태건은 무언가를 인내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니 이런 지리멸렬한 짓거리들은 이재하의 몫이 되는 게 맞는다.
부부란 그런 것이지 않은가. 장태건이 그저 필부였다면 벌레 잡는 것도 두려워 이재하를 불렀을 수도 있다. 그러면 저는 기쁜 마음으로 다가가 그를 놀라게 한 미물을 잡아 주었겠지.
그러나 장태건을 위한 건 조금 더 사이즈가 큰일들이었다. 그러니 남이 뭐라고 생각하든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재하는 상대의 기분을 적당히 맞춰 주는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이해해 주시니 마음이 놓입니다. 지검장님도 아시다시피 일탈과 거리가 멀게만 살았습니다. 어쨌든 결혼을 했으니, 배우자가 원하는 걸 들어주고 싶습니다. 큰소리도 쳐 놨고요.”
거짓말이다. 이건 장태건을 위한 것이지, 장태건 본인이 원한 것은 아니었다. 지금도 그럴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야 하는 일이라 여겼다.
“그래, 나야 그 마음 잘 알지. 그래서… 명원이라고 했었나?”
지검장이 술잔을 입에 붙이며 웃었다. 웃느라 좁혀진 눈매 사이로 희번덕거리는 눈알이 재하를 바라보고 있었다.
지긋지긋한 작자. 작은 일 하나 해 주면서 유신의 재하에게 빚을 지웠다는 계산을 하고 있겠지. 그러니까 빵빵한 후원까지 받아 놓고 그 나이 되도록 지검장밖에 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재하는 긍휼을 담아 마주 웃어 주었다. 그것이 이재하가 가장 잘하는 일이었으니까.
태건의 옆자리에 붙어 전전긍긍한 마음으로 늘 그의 복부를 꿰뚫은 상처를 걱정해 주기보다 이쪽이 적성에 맞았다.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가 결혼 전에 말했던 걸 지켜 주지 못해서. 재하는 웃는 얼굴로 다시금 술잔을 잡았다. 그 식탁 위에는 복어회를 비롯하여 아무것도 먹을 만한 것이 없었다.
* * *
- …검찰은 오늘 명원건설 최고위 임원 네 명을 소환했습니다. 이에 검찰은 명원건설이 지난해 맡은 인홍 신도시 입찰 건에 대한 심사의 대가성 뇌물 혐의를 추적했노라 밝혔습니다….
TV에는 명원건설의 뇌물 혐의를 다룬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멍하게 있는 것이 익숙하지 않아 그냥 켜 둔 것인데, 익숙한 뉴스가 방송되고 있었다. 어제저녁 방송사를 따로 갖고 있는 신문사의 대표로 있는 동창에게서 넘겨받았던 내용이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은 채 헤드라인 그대로 방송되고 있었다.
‘기사 괜찮아? 이대로 넘길게. 근데 웬일로 명원 일에 신경을 쓰냐? 네가 신경 쓰기에는 사이즈가 좀….’
사립초를 같이 나왔던 이들은 대학에 들어갈 때쯤 한 번 더 동문이 되고는 했다. 이재하는 중간에 유학을 가긴 했지만 거기서도 마주칠 일은 많았다.
친하진 않더라도 서로의 성격을 아는 것이다. 동창의 의문은 타당했다. 3세들 사이에서는 이재하 정도 되는 인물이 구멍가게에 들렀다는 것 자체가 화제가 된 듯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관없는 일이었다.
나중에 말해 준다며 대충 대답하자 상대는 꼭 말해 줘, 하고 한 번 더 강조했다. 종종 연락하라고 찡찡거리는 것이 이재호를 떠올리게 했다.
재하의 주변에는 유독 이재호같이 생떼를 쓰는 이들이 많았다. 그러나 그것도 한때이지 이번 일이 끝나면 정말로 조용히 살 생각인 재하는 그들이 더 이상 저를 찾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무튼 명원건설에 대한 내용은 제 침대 위에 선혈이 잔뜩 묻어 넘칠 것 같았던 바로 그날로부터 딱 일주일이 지난 오늘 아침 보도되었다.
엊그제 지검장에게 저녁을 사 주었는데 결과는 오늘에서야 나온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린 것도 빠르게 해결된 편도 아니었다.
지검장이 아직 이재하의 위치를 간 보고 있는 듯했다. 결혼 이후 갑작스러운 이사직 인수인계를 시작한 재하의 행보를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라지. 이제는 저와 상관없는 일이었다.
“야, 너 요즘 맨날 왜 여기로 퇴근하냐…?”
제 방이 있는 2층 거실에 앉아 있는데 이재호가 슬쩍 오더니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며 물었다. 신문사 동창 녀석이 생각났다. 말투가 비슷해서 두 사람이 따로 어울린 적이 있나 싶었다.
그러나 그 동창 역시 부친의 혼외자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기에 재하와 나이 차이가 많지 않은 이복동생인 이재호와는 사이가 데면데면할 것이다. 그런데도 묘하게 말투가 닮은 것이 이상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이재호가 한 번 더 대답을 재촉했다.
“왜 맨날 오냐니까. 그 새, 아니 형님인지 형 놈인지랑 싸웠냐…?”
“숙제 다 했어?”
재하는 고개도 돌리지 않고 물었다. 옆에서 뜨끔하는 기색이 느껴졌다.
“에이 씨, 내가 고3이야? 이 나이에 숙제나 하고 있게?”
“그래서. 안 했어?”
“…했어.”
그 대답에 이재호를 흘끗 바라보았다. 민망한지 제 뒤통수를 긁던 놈은 잠시 뒤 억울한 얼굴로 꽥 소리를 지른다.
“아, 대답이나 해! 왜 집으로 퇴근하냐고!”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임유진 과장은 해고시키지 말고 그대로 둬. 보탬 많이 될 테니까.”
“그건 내가 알아서 할…. 알겠어, 씨발. 야리기는….”
말 몇 마디를 나눠도 저에게서 원하는 것은 전부 얻어 내지 못하고 있는데, 저걸 이사랍시고 앉힐 생각을 하니 한숨이 나오기는 했다.
생각해 보니 이재호와 장태건은 동갑이었다. …그래서 태건에게 형님이라고 부르는 걸 자존심 상해 했었나.
재하는 열이 뻗친 듯 씩씩거리는 이재호를 쳐다보지 않고 그런 생각을 했다. 채널을 돌리자 다음 달 초에 개봉하는 영화 홍보가 흘러나왔다.
이재호가 갑자기 신난 아이처럼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저거 내가 투자하자고 한 거거든? 아, 저거 존나 잘될 삘인데. 아깝네. 결과 보고 하라고 해야지.”
그러고는 한동안 감독은 어떻다느니, 시나리오 작가가 이혼하더니 미술 감독이랑 재혼할 삘이라니 하는 소리를 해 댔다.
주인공 배우의 몸매와 얼굴 평가로 이어질 때쯤 이재하는 몹시 곤하여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그때까지 신나게 떠들던 이재호가 뭔가 이상한 걸 깨달은 듯 재하를 바라보았다. 있어서는 안 될 것을 본 사람처럼 희한한 표정을 한 채였다.
“근데 너…. 오늘 오메가 만나고 왔냐?”
개소리에는 대답하지 않는 주의였다. 제가 그런 주의를 갖고 있다는 것도 잊고 장태건의 개소리에는 매번 놀라 영구 박 터지는 소리를 냈던 걸 떠올리니 살짝 아연해졌지만 말이다.
재하가 대답 없이 멍하니 거실의 매립 등을 바라보는데도 이재호는 굴하지 않았다.
“누구? 수민이 형? 걔는 이런 냄새 아니었는데. 야씨, 너 바람피워? 시발, 이재하 존나 알파 새끼다. 장난 아닌데?”
이재호는 충격받은 것 같기도 했고 살짝 배신당한 얼굴을 하기도 했다. 저랑 결혼한 것도 아닌데 배신당한 얼굴은 무엇이며 존나 알파 새끼는 또 무슨 뜻인가.
이것저것 따져 네 할 일이나 제대로 하고 살라고 야단쳐야 하는데 다 귀찮았다. 오메가를 만났냐니 말이 되지 않는 소리였다.
…그러고 보니까 그때 호텔에서 만난 오메가와 무슨 사이냐고 묻지 못했다.
‘장 실장님’, 하고 나긋하게 그를 부르며 따라오던 그 오메가와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었는데.
그러나 다시금 기회가 온다고 해도 자신은 묻지 않을 것이다. 장태건의 자유를 꺾어 결혼했으니까.
이재하는 거래의 기본을 알았다. 자신이 얻은 바가 있으니 계약 상대의 이득도 존중해 줘야 한다. 제가 그 오메가의 정체를 묻는 것은 계약 사항 외의 것일 테다.
그러니 영원히 물을 수 없겠지.
“어? 사라졌다. 뭐야…. 잘못 맡았나.”
상념에 젖어 있는데 재하의 주변을 킁킁거리며 귀찮게 하던 이재호가 머리를 긁적였다.
재하는 한심해하기도 귀찮아 이재호의 이마를 손바닥으로 쭉 밀어냈다. TV에 시선을 돌렸다가 문득 생각나는 걸 말했다.
“연예인 그만 사귀어라. 작년처럼 놀다가 호구 잡히지 말고. 뒤치다꺼리 귀찮아.”
“뭐, 뭐…?! 내가 언제!”
“읊어 줘?”
“…씨발, 넌 그걸 다 외우고 있냐?”
이재호가 씩씩거리는 걸 무시하고 있는데 밑에서 사용인 하나가 올라와 이익형의 귀가를 알렸다. 이재호가 저도 모르게 벌떡 일어났다가 민망한지 이재하를 재촉했다.
“뭐 해. 인사 가자.”
“나 출가외인이다. 혼자 가.”
“뭐? 야…. 그래도 같이 가야지….”
저 나이 때까지 아버지에게 졸아붙은 녀석이 어이없어 무시하고 그냥 방으로 들어갔다. 이재호가 뒤에서, 야! 좀 같이 가자! 하고 소리쳤지만 대꾸하지 않았다.
어쩐지 몸이 무거웠다. 침대에 눕자마자 바다에 잠긴 듯 하염없이 빨려 들어가는 기분이었다.
꿈에서는 장태건이 나왔다.
‘내 부케 못 봤어요?’
재하에게도 태건에게도 들게 하는 것이 민망했던지 웨딩 플래너가 처음부터 준비하지도 않았던 부케를 당일 식장에서, 그것도 버진로드 위에서 찾았다.
재하는 머뭇거리다가 준비를 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때 그건 농담 아니었나? 정말로 부케를 들고 싶었던 걸까.
완벽하지 못한 결혼식이니 어떻게 해서든 원하는 걸 구해다 주고 싶었다. 그러자 장태건이 재하의 귓가에 입술을 붙인 채 속삭였다.
‘그거 던져야 애 많이 낳는 거 아닌가?’
…그건 폐백인데. 부케도 그런 의미가 있던가. 재하는 약간 아연한 얼굴이 되었다. 그의 안색을 보던 장태건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또 넋을 놓았었다. 그렇게 가까이서 그가 웃는 걸 보는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짙은 눈썹 끝이 휙 휘어진 눈꼬리와 함께 쳐지자 늘 짙게 일렁거리던 눈동자가 반쯤 가려져 반짝거리는 흑요석처럼 보이게 했다. 재하는 멍하니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이 내 오른편에 선 사람이라니 믿기지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꿈 같던 결혼식도 그가 부케를 던지지 않아서일까.
나중에 찾아본 부케의 의미는 행운과 보호였다. 부케의 부재 때문인지 그들의 결혼 생활에는 행운이 없었으며 보호받지 못한 채 이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래서 이재하는 꿈을 꾸는 내내 부케를 찾아다녔다. 그가 원했으니 주고 싶었다. 우리의 결혼에도 행운과 보호가 있다는 걸 보여 주고 싶었다.
그러나 한참을 헤매 보아도 부케를 구할 수는 없었고 이재하는 몹시 낙담한 채 태건에게 면목 없는 얼굴로 부케를 구하지 못했노라 실토했다.
그러자 장태건은 예의 그 심드렁한 얼굴로 대꾸했다.
‘내가 언제 그걸 원했습니까.’
아, 그랬나.
당신은 그런 것들은 필요 없었을까. 이재하는 막연해졌다. 제가 들고 있는 모든 것들이 초라해졌다.
저는 주고 싶은 것이 많았는데, 장태건은 그 모든 것들이 필요 없어 보였다. 그게 슬펐다. 아침에 일어난 이재하의 눈가는 버석했다.
눈물을 흘렸나 했더니 그도 아니었다. 슬픔의 흔적이 없어 행복도 그와 마찬가지로 덧없어 보였다.
* * *
“너는 언제까지 여기 있을 거냐.”
“여기 제집입니다.”
이익형의 말에 이재하는 사실을 말했다.
근래의 재하는 점차 예의와는 먼 인간이 되는 듯했다. 안쪽부터 썩어 들어간 나무껍질처럼 버석하게 대꾸하는 것조차 에너지가 필요했다.
그러니 이익형의 말에 제대로 된 대꾸가 나갈 리가 없었다. 애초에 이곳 본가는 재하의 외조부가 증여한 성북동 땅 위에 건축한 집이니까.
“뭐? 그래서 나가란 거냐? 다 말리는 결혼을 할 때는 언제고 본가로 들어와서 지내니까 대체 무슨 짓거리인지 모르겠어서 묻는 거 아니야!”
“다 말리다뇨. 어머니께서는 무척이나 축복해 주셨는데. 안 그렇습니까?”
이재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김란희에게 이익형의 모든 공격을 떠넘겼다. 말없이 수저를 놀리던 김란희가 또 시작이라는 듯 눈을 질끈 감으며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이재호는 눈알을 굴리며 국을 뒤적이고 있었다. 이익형은 김란희의 그런 반응을 보다가 쯧, 혀를 찼다.
밥상머리에서 혀를 차다니. 가정교육이 덜된 부친을 보자니 입맛이 떨어졌다. 이재하는 계속해서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근래에는 그런 표정이 얼굴에 아예 붙어 버렸는지 이재호가 물을 정도였다.
‘너 근데 요즘 표정이 왜 그따위야? 그런 표정 하지 마. 그 깡패 같아.’
진저리까지 치면서 말할 정도였다. 그 말을 듣고, 이재호 앞에서는 애초에 당황할 일을 만들지 않던 것도 다 잊어버려 표정이 허물어질 뻔했었다.
오늘로 열흘째. 장태건의 소식을 알지 못하는 이재하는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명원건설 다지기에만 희망을 걸고 있었다.
빈손으로 돌아갈 수는 없는 노릇이니 결과라도 가져가서 빌어 보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당신이 다치는 게 싫었습니다. 그렇게 제대로 말한 뒤 정공법으로 사과할 생각이었다.
관계가 예전 같아질 수는 없어도 태건이 불쾌해할 만한 것은 사과하는 게 맞는다고 생각했다. 그가 저를 용서해 준다면 무척이나 기쁠 것이다.
그러다가 이재하는 자신이 꽤 용서를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가 저를 용서해 주지 않더라도 일단 일을 저지르고 보자 생각했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양심이 없는 줄은 몰랐는데…. 저 남자를 닮았나.’
재하는 상석에 앉은 부친을 흘끗 보고는 이내 까끌까끌한 입 안으로 밥알을 밀어 넣었다.
이젠 밥도 맛이 없었다. 재하의 본가에서 집안 살림을 책임지는 정미희 선생은 모친의 젖동무였다.
나이가 모친보다는 많지만, 재하의 외갓집에서 일을 하던 식부의 딸이었다. 그이가 모친의 언니 격이라 챙겨 주고 싶어 모친이 시집올 때도 함께 성북동으로 들어왔다가 모친의 장례 후에도 그녀를 많이 닮은 재하 때문에 머물러 있는 형국이었다.
돈 때문에 일하는 사람이 아닌지라 이익형과 김란희는 물론이고 이재호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사용인이었다.
재하는 정 선생의 밥을 먹고 자랐다. 약 열흘간 내내 성북동에서 지냈기 때문에 정 선생은 재하가 돌아온 것이 기쁜지 먹는 것에 신경을 많이 썼다.
온통 재하가 잘 먹는 반찬 위주로 차린 마음이 안쓰러워 뭐라도 넣어 보고 싶은데 입이 까슬거려 밥 한 공기를 다 비우는 것도 어려웠다.
결국 아침이라 입맛이 없는 탓을 하며 먼저 출근하려 일어설 때였다.
“적당히 살다가 돌아와. 쉬지도 못하고 살았으니 반항하는 건 알겠는데, 그걸 꼭 그 날건달 소굴에서 할 필요는 없다. 다시 전자 쪽 맡기가 그러면 유통에서 2년 정도 일하다가 전자 맡으면 되니까-.”
“이재호 이사보, 곧 승진 기념행사 있다고 말씀 안 드렸어? 어머니, 재호 승진합니다. 축하한다, 재호야.”
이재하는 이번에도 김란희에게 이익형의 화살을 넘겨 버렸다.
그러나 이번 것은 그녀가 바라 마지않던 것이라 아침 식사 내내 보기 싫은 재하의 얼굴을 견디느라, 죽이고픈 남편의 얼굴을 인내하느라 안색이 파리하던 고운 얼굴에 꽃이 확 피었다.
재하는 그런 그녀를 바라보며 이재호의 어깨를 두들겼다.
“어머니가 저렇게 기뻐하시는데 이사보도 잘해야지. 형이 미안하다. 너라도 꼭 부모님 원하시는 좋은 댁 자제분과 혼례 올리도록 하고.”
반쯤은 진심이었기 때문에 말투는 진중했다. 김란희도 그걸 알았는지 전에 없이 감명받은 표정을 했다.
그 꼴이 우습기도 하고 귀찮기도 해서 그냥 자리를 떠나 홀로 출근길에 올랐다. 차고지에서 결혼 전에 몰던 세컨드 카를 꺼내는 일은 새삼스러웠다.
이재하는 그녀가 모친을 말려 죽이려고 악의를 품었던 때를 잊지 않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한 번씩 져 주는 이유는 이재호에게는 그렇게 큰 잘못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 사사로운 포용력조차 장남의 도리라고 여기는 것이 이재하의 가치관이었다. 조부의 손에서 자라 다소 보수적인 편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김란희의 제1차 방어선은 재하의 그런 성격이었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자식을 방패로 쓰다니. 그 자식을 최극점의 자리에 올려 두고 싶어 하면서도 저를 방어할 때는 제 새끼를 방어막으로 쓰는 인간들을 이재하는 너무 많이 알고 있다.
‘알파랑 결혼한 것이 차라리 다행인지도 몰라.’
자신의 어딘가에 이익형의 비열하고 치졸한 유전자가 묻어 있다. 발현하지 않았을 뿐 존재하지 않는 건 아닐 테다.
그렇다면 자식을 낳지 않는 편이 나았다. 문제는 장태건이지.
‘…다른 곳에서 아이를 데려오면…. 그를 닮았으면 잘 키울 수 있을 것 같아.’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을 테니 그가 어딘가에서 낳아 올 수밖에 없는데, 또 생각을 해 보니 아이가 그를 닮았다면 나쁘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겠지.’
장태건이 그런 짓을 할 정도로 비겁해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가 이재하에게 마음이 없으므로 밖에서 아이를 낳는다면 아이의 친모와 재혼할 것이다.
그때 버려지는 건 자신이 될 것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야. 각오했던 일이기도 하고.’
그렇다. 이재하는 그 모든 것들을 각오했었다. 각오했기 때문에 턱이 아프도록 이를 꽉 깨물면서 그에게 프러포즈했다.
이재하는 결혼에서 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대비한 채 장태건과 부부가 되었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모든 일들에 더하여 불행한 가정이 감내해야만 하는 것까지 포함한다.
장태건의 배신, 무시, 폭언 등 감내할 수 있는 것들의 범위는 끝이 없었다. 대신에 이재하는 그에게 바라는 것이 없었다.
“…….”
습관처럼 왼손 약지의 반지를 엄지로 문질렀다. 아직 그곳에 그게 끼워져 있다는 사실이 재하를 안심시켰다.
차 시동을 걸고 기어를 변속시켰다. 일단 오늘의 할 일부터 처리하는 게 우선이었다. 그에게 사과라도 하기 위해서는 결과가 필요했다.
지난 열흘간 이재하는 그것을 위해서만 살았다.
* * *
“명원파크 건 어떻게 됐어요?”
“그쪽 자료는 전략실에서 넘겨받은 게 있습니다. 언론 보도 자료도 만들었는데 그보다는 인터넷에 1차로 뿌리는 게 나을 것 같다는 게 전략실 판단입니다.”
“그럼 그렇게 하시고 관련 자료는 저한테 한 번 더 보내 주세요.”
이재하는 지겹다는 생각을 하며 임 과장에게 오늘의 할 일을 전달했다.
말려 죽이는 김에 뿌리까지 뒤흔들어 놓겠다고 다짐했다.
장태건의 복부에 구멍을 뚫어 놓은 작자들이다. 그걸 그의 배우자인 자신이 용서해 줘야 할까? 이재하는 이재하만의 사냥 방식이 있었다.
이왕 목덜미를 물었으니 싱겁게 송곳니를 감추기보다는 아예 경동맥을 끊어 놓고 싶었다. 이재하의 방식은 일격필살이 아니었다.
그는 상대가 누구든 서서히 말려 죽이는 걸 주특기로 삼았다. 깔끔한 성격과 번듯한 외양에 맞지 않는 지저분한 습관이라 부계 유전이라 여기는 것 중 하나였다.
출근하자마자 아예 비서실로 찾아가 물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커피나 내려 먹을까 싶었다. 입맛이 없어서 아침 식사는 아예 굶은 게 낫다 싶을 만큼 깨작거렸지만, 카페인과 입맛은 상관없는 얘기였다.
임 과장이 먼저 일어서 저가 타다 준다며 설치기 전에 조용히 탕비실로 가려는데 뒤에서 그녀가 재하를 붙잡았다.
“이사님.”
“…네.”
재하는 무표정으로 대답하면서도 뜨끔했다. 도대체 왜 손수 커피를 내려 마시냐고 잔소리를 몇 번 들었기 때문이다.
이재하는 본가에서 일하는 정미희 선생이나 임유진 과장 같은 이들에게는 약한 편이었다.
그녀들은 진심으로 재하를 대했고 정해진 교육을 통해 사람을 사귀고 교제하는 것에만 익숙했던 재하에게는 그런 관심과 애정에 대해 반응하는 것이 조금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진은 재하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말을 꺼냈다.
“…그게, 이사실에 손님이 와 계십니다.”
“손님?”
이 시간에 올 사람이 없는데. 신문사 동창이 밥 한번 사라고 어제도 연락해 왔던 걸 떠올리다가 백수처럼 이 아침부터 찾아올 리는 없다는 생각을 할 때였다.
무심코 이사실 출입문으로 시선을 돌렸던 이재하는 천천히 굳어 버렸다.
심플한 철제 문틀에 기댄 알파가 그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부부 사이 좆같이 돈독하죠? 꼭 직접 찾아와야지만 얼굴 보여 주고.”
그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낮게 깔린 목소리 사이로 절그럭거리는 소리가 들린다고 생각했는데 볼 안쪽에 레몬색 알사탕이 들어 있었다.
재하는 작금의 상황도 잊은 채로 그걸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을 눈치챘는지 장태건이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팔꿈치를 접어 제 뒤의 이사실 안쪽을 가리켰다.
“테이블 위에 사탕 바구니 있길래 먹은 건데. 왜요, 돈 내고 먹어야 하나?”
“…아닙니다.”
재하는 일단 그 말부터 부정했다. 그까짓 사탕이야 공장째 사 줄 수 있었다.
아까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 이 순간조차 손님용으로 사다 둔 사탕을 빨고 있는 태건의 취향을 알게 되어서 기쁜 것이 어이없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가 그렇게 부정한 순간, 장태건이 성큼성큼 다가와 재하의 팔목을 잡고 으르렁거리듯 말했다.
“그래? 사탕은 공짜랬으니까 다른 걸로 값을 치러 볼까? 집 나간 남편 찾느라고 좆 빠지게 굴러먹고 다닌 내 시간과 성의를 당신이 꼭 좀 알아줬으면 싶은데 말이야.”
그는 그렇게만 말한 뒤 재하를 이사실로 끌고 갔다.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임 과장이 닫히는 이사실 문으로 얼핏 보였다.
눈앞에는 장태건이 있고 등 뒤로는 이사실 문이 닫혔다. 이재하는 지금 진퇴양난이 무엇인지 몸소 느끼고 있는 중이었다.
도망갈 곳 없는 이사실 곳곳에 태건의 페로몬이 차오르고 있었다. 정작 본인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재하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바닥에 깔린 페로몬이 무척이나 날 서 있었다.
두 사람의 신장 차이는 약 10cm 안팎으로 평소에는 티가 잘 나지 않다가 지금처럼 가까이 붙으면 그 차이가 명확했다.
이재하가 고개를 살짝만 숙여도 그 이마가 태건의 쇄골쯤에 닿을 것이다. 그 어떤 오메가에게도 얻을 수 없었던 느낌이었다.
장태건은 그의 성격만큼이나 오만한 콧대에 그림자가 질 만큼 재하에게 가까이 붙었다. 짙은 해당화 향이 풍겨 왔다. 그 꽃잎의 냄새가 달큼할수록 태건이 화가 난 상태라는 걸 유추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좋았다. 열흘 만에 얼굴을 보는지라 복부의 상처는 다 나았는지부터 궁금해졌다.
살짝 볼우물이 파인 뺨이 그의 힘겨웠던 며칠을 보여 주는 듯해 마음이 선득하기도 했다. 상처가 깊고 출혈량이 많아 아무리 그가 장사라고 한들 깨어나는 것에만 시간을 꽤 허비했을 터였다.
이제는 괜찮냐고 묻고 싶었다. 그의 안부를 묻는 말이 꽉 다문 입술 사이를 통과하지 못하고 그대로 입 안에 주저앉아 버렸다.
재하가 무슨 생각을 하든 상관없다는 듯이, 태건은 입 안에 들어 있던 사탕을 꽈드득 깨물어 씹으며 물었다.
살짝 단내와 함께 옅은 레몬 향이 났다. …레몬 사탕을 좋아하나. 다음에도 그것만 사 둬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태건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또 딴생각하지. 골 때린다. 집 나가, 말 씹어, 찾아왔더니 무시해. 나 같은 개자식들 꼴리게 하는 법을 아주 제대로 알고 있네.”
“…….”
“아니면 뭐야. 건달 새끼 자지만 골라 잡숴 봤어? 어떻게 이렇게 꼴릴 짓을 제대로 하는지 궁금하거든. 나 이런 거에 환장하는데 어떻게 알았어요, 티 나요?”
그가 지척에서 으르렁거렸다. 비속어가 너무 많고 대부분 모욕적인 언사뿐이라 알아듣기가 힘들었다.
재하로서는 태건이 화를 내고 있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그는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았다.
사탕을 핥다 나온 혀는 끈적하게 젖어 있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그걸 응시하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이 상황에서도 태건의 입술이나 바라보고 있는 제가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재하의 시선은 눈치채지 못한 듯 태건이 다시금 짓씹듯 말했다.
“이사님, 나 꼴리다 못해 자지가 다 아프다. 열이 존나게 뻗쳐서. 배 뚫린 인간 두고 도망칠 생각을 다 하고. 순진하게 생겨서 사람을 살살 발라 먹네, 씨발.”
…순진하게 생겨? 누가? 재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보다 배 뚫렸다는 말에 주목했다.
안 그래도 평소보다 창백해 보이던 참이었다. 상처가 꽤 깊었는데 어떻게 회복했는지 궁금했다. 그 정도 상처면 열도 꽤 났을 텐데. 궁금한 게 많은데 괜히 번거로울까 봐 나가는 물음은 딱 한 줄뿐이었다.
“…상처는 괜찮습니까?”
“아니. 열받아서 뱃가죽 다 찢어질 것 같아.”
“피, 라도 나는 것 같습니까? 병원부터 갑시다.”
놀라 묻자 태건이 피식 웃었다. 좋아서 웃거나 웃겨서 웃는 게 아니라, ‘이것 봐라’ 싶은 웃음이었다.
“이보세요. 그렇게 걱정이 됐으면 착하게 옆에 딱 달라붙어서 입술도 빨아 주고 이사님 좋아하는 소독도 해 주고 할 일이지, 왜 집을 나가냐고 사람 열 처받게.”
“…사정이 있었습니다.”
“무슨 사정. 명원 새끼들 뒤 딴 거?”
장태건은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으로 돌아와 재하의 허리를 끌어안으며 물었다.
이곳이 이사실인 게 생각난 재하가 저도 모르게 바르작거렸다. 공적인 공간에서 너무도 사적인 이득을 취하는 느낌이었다.
그러자 장태건이 재하를 안고 있던 팔을 조여 오며 어린아이를 어르듯 어허, 하는 소리를 냈다.
“가만히 계셔요. 꿰매 놓은 거 터지기 전에.”
“…….”
그 말에 재하는 몸을 굳혔다. 한동안 재하를 가만히 안고만 있던 태건이 뭔가를 가늠하듯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근데 그건 왜 건드렸어. 마누라 복수라도 해 주려고?”
그의 품 안이라서, 태건이 말할 때마다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뼈를 타고 전해지는 목소리의 진동에 재하는 몸과 마음이 다 녹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직은 방심할 때가 아니었다. 태건이 명확한 이유를 아직 묻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가만히 재하를 안고만 있던 태건이 몸을 조금 떼어 낸 뒤 재하를 내려다보며 물었다.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우리 이사님, 명원에 개인적 원한이라도 있었나?”
재하는 그 물음에 그를 올려다보던 시선을 바로 했다. 잘 대답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이재하에게는 작금의 상황을 몇 번이고 상상하고 모의실험을 해 볼 시간이 있었다. 그대로만 대답하면 될 것이다.
문득 그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날이 떠올랐다. 결혼해 달라는 재하의 말에 그가 뭐라고 대답했던가.
‘존나 이해가 안 가네.’
‘….’
‘내가 좋아요?’
그날 이재하는 ‘네.’라는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때는 그냥 자신이 장태건에게 보여 줄 수 있는 것이 중요했다. 태건이 제 프러포즈를 받아 줘야 할 근거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제 조건을 내세울 생각밖에는 하지 않았다. 나는 뭐를 갖고 있고 너에게 어떤 것들을 해 줄 수 있고 결혼 시 당신이 얻게 될 이득은 이러하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러면 태건이 제 진심을 알아줄 것 같았다. 당신의 옆에 내가 있어야 하는 당위성을 설명하고 싶었으나 실상 입에서 터져 나오는 것은 이재하가 갖고 있는 재력과 권력의 나열밖에는 되지 않았다.
그게 문제였던 것 같다. 장태건은 핵심을 짚었다.
‘그러니까 내가 받을 거 말고. 이사님이 얻는 거나 말해 보셔요.’
그때 말을 했어야 했을까. 내가 원하는 건 장태건이라는 알파 그 자체라고. 그것 때문에 약혼자의 애인에게 말도 안 되는 프러포즈 중이라고.
‘나 좋지도 않다며. 그럼 뭘 보고 결혼하자는 건데. 이사님 관상 볼 줄 압니까? 뭘 믿고 깡패 새끼한테 인생 맡기려 하냐고.’
‘…그런 거 아닙니다.’
‘아니면 뭔데. 뭐 믿고 결혼이 쉬운 것처럼 굴어.’
장태건은 허리를 느슨하게 기대고 앉아 인생을 듬성듬성 사는 사람에게 충고를 하듯 혀를 쯧, 찼다. 그 자연스러운 태도에 재하는 자신이 그의 연상이며, 지금 말하고 있는 것이 그와의 결혼이라는 것도 잊어버릴 뻔했다.
그러나 그 말만은 귓가에 와 박혔다. 결혼이 쉽냐니. 모든 결혼이 쉬워도 당신과 하는 것만은 어렵기 그지없을 것이다.
애초에 결혼이 쉬운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상대를 설득할 생각만 했지 제가 결혼을 해야 하는 이유를 물을 거라곤 꿈에도 몰랐던 재하는 마른 입술을 달싹거렸다.
‘내가 얻는 건….’
그 자리에서 태건을 좋아하노라고, 첫 만남 이후로 당신에 대한 생각을 지워 본 적이 없다고, 꿈에서도 당신이 나왔는데 나는 그게 뭔지도 몰랐다고 말할 수가 없었다.
약혼자의 애인인 사람을 그에게서 먼저 빼앗아 선점하고 싶어 몸이 달았었단 걸 털어놓을 용기도 없었다.
장태건이 저를 이상하게 여길 것 같았다. 설사 말을 한다 한들 제 마음을 믿을 것 같지도 않았다.
비단 그 말에 신뢰도가 없는 건 장태건의 문제도 아니었다. 그에 대한 마음을 자각한 순간부터 자신 역시 그 감정에 대한 신뢰를 갖기가 힘들었다.
고작 두어 번 마주쳤을 뿐이다. 처음 그를 본 순간에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날 밤 러트가 왔었기 때문에 그 이상한 마음이 요동치는 페로몬 때문에 일어난 변화라고 생각했었다.
그다음은 약혼자의 애인 자리에 앉은 장태건이었다. 이재하의 상식으로는 말이 되지 않는 얘기였다.
상대와 끝나지 않았는데 다른 상대를 만나다니. 정략을 위한 약혼이나 수민이 장태건과 얼마나 깊게 교제했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약혼자에게 사랑은 없었지만 신뢰는 있었다. 먼저 그것을 깨 버린 건 수민 쪽이었다 해도 평소의 이재하라면 적어도 시간 차이를 두고 태건에게 다가섰을 것이다.
항상 일의 옳고 그름을 판별할 이성쯤은 있었다. 수민이 그날 제 애인이라고 데려온 상대가 태건만 아니었다면 재하는 평소 하던 것처럼 이성적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아무리 약혼자의 애인이 좋다고 해도 파약한 뒤, 얼마간의 정리 기간을 가진 후 그에게 연락했을 것이란 소리였다. 아니, 애초에 약혼자의 애인이 좋아질 리도 없지만 말이다.
그런데 그게 안 됐다.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알아차릴 새도 없이 태건에게 열중했다.
시야를 가린 경주마 같았다. 이재하 인생에 있어서 그런 경험은 처음이었다. 제 마음이 뭔지도 모른 채 내달리던 모든 감정들. 아찔했다. 멈출 수 없다는 게 더욱더.
그래서 태건을 설득할 자신도 없었다. 이재하가 겪는 것은 그 자신이 일생 동안 부정하며 살던 바로 그 감정이다.
사랑이 있다면, 사랑이라는 것이 있다면 모친이 그렇게 괴롭지는 않았을 거라고 막연하게 여겨 왔다.
책이나 영상물에서 본 것들은 그런 게 아니었으니까. 질척하고 끈적거리는, 더러는 음습하고 대부분은 음울한. 이재하는 그게 사랑의 이면이라는 걸 한평생 부정해 왔다.
그러니 장태건을 향한 욕망에 그날까지 살아왔던 습관이나 관념들을 모조리 수몰당해 놓고도 깨닫지 못했던 것이다.
저조차도 막연하기 그지없는 감정. 옳고 그른 것, 0과 1, 명과 암의 극명한 차이들을 신뢰하던 성격은 제 감정을 재단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장태건을 설득할 자신이 없었다. 일단 저조차 자신이 이해 가지 않는데 어떻게 저 태산 같은 남자를 설득시켜 결혼 승낙을 얻어 내겠는가. 막막하기만 한 일이었다.
고작 하루 만에 너를 좋아했노라고, 그날부터 네 꿈을 꾸고 그때부터 너를 사랑했노라고 고백하고 그걸 인정받을 자신이 없었다.
이재하에게 제 마음은 근거가 빈약하기 그지없는 사업 계획서와 다를 바가 없었다.
눈앞의 상대는 자신에게 가장 중요해진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에게 그렇게 엉망진창인 걸 진상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럴 때면 약간의 거짓이 나은 법이다. 이재하는 얼굴을 굳히고 바이어를 상대할 때나 짓는 표정으로 제 의견을 피력했다. 오래된 습관처럼 굳어진 표정이었다.
‘…장 실장과의 결혼은 내게 있어서 도피입니다. 지난 시간 동안 노력하여 살았지만 이제는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장 실장과의 결혼은 그런 내 의사의 직간접적인 표현이 될 겁니다.’
‘아니지, 이재하 씨.’
태건은 그 얄팍한 근거를 단번에 잘라 내 버렸다. 뒤에 존칭이 붙었는데도 멸칭같이 느껴지는 호명이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장태건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저를 살라 먹을 듯 바라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들킨 걸까. 사실은 태건도 이미 재하의 마음을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이 바닥은 물질이 오고 가는 혼사는 있어도 마음이 오고 가는 혼사는 신뢰성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에게 들키지 않기만을 바랐다. 자신의 마음이 어떤지, 제가 어떤 눈으로 태건을 보고 있는지 말이다.
재하의 발목을 감쌀 정도로 낮게 깔린 페로몬이 그 주인의 분노를 대신 표출하고 있었다.
‘그런 선택지들은 나 말고도 많을 거야. 대한민국에 양아치가 나밖에 없으려고.’
태건은 화가 난 듯했다. 그의 페로몬조차 말해 주고 있었다. …왜 화가 났을까? 재하는 막연하게 생각했던 것 같다.
‘왜 나랑 결혼하자는 건지 제대로 말해. 길바닥에 널린 깡패 새끼들 중에 왜 나여야만 하는지.’
장태건이 저를 바라보는 눈빛에 그대로 타들어 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재하는 결국 고문에 굴복한 변절자처럼 입을 열 수밖에 없었다.
‘…장 실장이 김수민과 교제하지 않았습니까.’
‘누구? …아 그 오메가.’
한쪽 눈썹이 올라간 채로 뭔가를 가늠하던 장태건이 이내 피식 웃으며 혀로 볼 안쪽을 밀어냈다.
그 부분만 둥글게 솟은 한쪽 뺨에서 문득 야성이 느껴졌다. 이재하의 주변 인물 중에는 태건 같은 이가 드물었다.
‘나 또 이렇게 설레는 대답은 처음 듣네. 그래서. 내가 그 오메가 첩이라도 될까 봐 아예 엿 먹이려고 나랑 결혼하겠다 이겁니까?’
페로몬이 한꺼번에 범람하듯 일렁였다. 그의 페로몬이 갑작스레 날카로워진 것이 의아했다. 장태건은 짓씹듯이 말을 내뱉었다.
‘이건 씨발, 누굴 질투해서 이따위 깜찍한 일을 생각한 거지? 자세히 말해 봐요. 기분이 지금 좆같아지려고 하거든?’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김수민과 교제했던 알파와 결혼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집안에서 저를 포기할 겁니다. 제가 원하는 건 집안으로부터의 자유입니다.’
아니다. 한 번도 자유 같은 건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3세들은 그런 말을 지껄이고는 했다. 나도 자유롭게 살아 보고 싶다고.
이재호조차 그런 말을 지껄이고는 했다. 그러니 제가 말하는 자유 타령도 이상하게 들리지는 않겠지. 재하는 처음으로 전력을 다해 상대를 설득시키려 하고 있었다. 손바닥 밑에 땀이 고일 지경이었다.
태건의 눈매가 재하의 말의 진위 여부를 판가름하는 듯 다시금 가늘어졌다. 그의 그 서늘한 시선에 심장이 튀어나올 것처럼 뛰었다.
다른 변명 두어 가지를 더 생각해 뒀지만 어쨌든 이 결혼이 재하에게 이득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어야 했다.
태건의 의심을 지워 그에게 줄 수 있는 것들을 조금이라도 늘려야 했다. 사실은 그가 욕심나서 결혼하는 건 맞지만 그 욕심에는 태건이 바라는 건 다 이뤄 주고 싶은 마음도 존재했다.
그러니 이 결혼이 자신의 이득 때문이고, 태건이 받을 것들은 정당한 대가라는 걸 인지시켜야 했다. 단 한 가지의 뚜렷한 이유인 제 마음을 제외하고 말이다.
‘내가 이 이사님과의 결혼에서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입니다.’
‘유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세요. 그러면 혹시 압니까. 당신이 알파라도 상관없어질지.’
그러나 장태건이 돌려준 대답은 모호하기만 했다. 모든 걸 버리고 오라니. 그게 아니면 난 너에게 줄 것이 없는데.
이 결혼은 장태건이 받을 건 넘치고 제가 받을 건 장태건 하나이면 되는 그런 결혼이었다.
그러니까 재하는 오늘도 태건이 이유를 묻는다면 똑같이 대답해야 했다. 제 감정을 말해서는 안 된다.
그는 납득하지 못할 것이다. 무람한 말투로 ‘이사님, 그런 아기자기한 것도 합니까?’ 하고 비웃을 수도 있다.
그를 사랑해서가 아니라 명원을 처리할 명확한 이유가 있는 것처럼 대답해야 했다. 재하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제 말이 진실처럼 들리기를 바라며 겨우 말을 꺼냈다.
“…명원 쪽에서 유신의 쇼핑센터 시공에 입찰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관련 임원들에게 뇌물 수수 및 청탁을 주도했고, 이를 빌미 삼아 해당 임원을 협박하다가 그 임원이 자살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임원의 조카가 이재호, 제 이복동생입니다.”
사실은 사실이었다. 자살은 아니었고 도박 빚에 시달려 알코올 중독까지 갔다가 실족사했을 뿐이다.
김란희의 사촌 오빠 정도 되는 인물이었다. 그 모자란 이를 그곳에 앉힌 김란희를 이익형이 힐난하기도 했었다.
이재호로서는 얼굴도 몇 번 보지 못한 외종숙일 테지만, 재하는 이런 일에 있어서 유독 동생의 이름을 팔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몇 번이고 써먹었던 핑계 중 하나라 지극히 사실처럼 보이기도 했다. 말썽을 피우지 않는 성격이지만 그나마 작은 실수조차 이재호의 몫으로 돌려놓을 때가 많았다.
이재호는 아직도 제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에 거실에서 뛰어놀다가 조부인 이원웅이 아끼던 조선백자를 깨 먹은 줄 안다. 이재하가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조심하지 그랬냐고 단정한 얼굴로 나무라는 이복형을 보며 울먹이기까지 했었다.
그러나 그것들을 다 합치더라도 이재하가 이재호의 갖은 실수들을 처리해 주는 빈도수가 훨씬 높았기 때문에 괜찮았다.
“…처남이랑 그렇게 사이가 좋았었나? 의외인데.”
장태건이 무언가를 가늠하는 표정으로 재하를 바라보았다. 이재하는 가만히 그 시선을 견뎌 내고 있었다.
속으로 시간을 세다가 그가 믿을 만한 거짓말을 하나 더 보탰다.
“게다가… 할아버님의 부탁도 있으셨습니다.”
제가 그런 이유 때문에 명원을 수술한 것이 거짓이지 장창식이 그런 부탁을 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거짓에 진실을 섞어야만 완벽한 거짓말이 되는 법이다. 이재하는 교묘히 감춰 둔 제 진심의 꼬투리가 튀어나오지는 않았는지 속으로만 열심히 살펴본 뒤 장태건의 반응을 기다렸다.
그가 화낸다고 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장창식의 부탁을 무시하라고 여러 번 말했는데 듣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태건은 재하의 말을 듣고도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을 지우지 않고 있었다.
대신 재하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여전히 서로의 거리를 벌리지 않은 채였다.
닿지 않은 곳보다 맞닿아 있는 곳이 많았다. 재하는 제 얼굴 위로 쏟아지는 태건의 시선을 감내하며 그가 꺼낼 말을 기다렸다.
“하, 얼마 남지도 않은 명을 씹어 먹겠다 이거지.”
태건은 턱을 악물며 말했지만 그게 재하를 향하는 것은 아니었다. 다물린 턱 때문에 도드라진 하악과 교근을 밑에서 올려다보며 멍하게 있던 재하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유 없이 한 건 아닙니다.”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사실 가장 큰 이유는 네가 다쳐 열이 받았다. 사춘기 중학생도 아니고 눈이 뒤집혀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던 게 컸다.
그러니까 이유가 있는 것이 맞았다. 재하에게는 내뱉을 수 없는 이유지만 말이다.
“그래요?”
태건이 되물었다. 이번에도 맞닿은 틈을 통해 그의 목소리가 진동처럼 전해졌다.
그게 무척이나 좋았다. 이 와중에도 말이다. 태건은 흠, 하고 목을 울리더니 말했다.
“이해가 안 가는데.”
“…뭐가 말입니까?”
“난 이사님이 나 예뻐서 그 새끼들 복수해 준 건지 알았지.”
장태건이 심드렁하게 말하며 재하를 조금 더 껴안았다. 그건 좋았는데 그의 상처에 닿을까 염려됐다.
“상처가….”
“장가 잘 간 덕에 일 해결돼서 봉사하러 온 겁니다. 목욕도 하고 향수도 뿌리고 콘돔도 챙기고.”
“…네?”
“내숭이야, 정말 못 알아듣는 거야. 애교 떨러 왔다니까.”
장태건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재하는 아연한 얼굴을 했지만 상대는 굴하지 않고 제 할 말만 지껄였다.
“여기 방음 잘돼?”
* * *
“아….”
재하는 저도 모르게 두 눈을 깜빡였다.
두 눈의 초점이 서로 맞지 않았다. 한쪽 눈 먼저 뒤로 휙 돌아갈 것 같아 급하게 두 눈을 꾹 감았다.
처덕거리는 소리가 났다. 물기 젖은 곳에 물기 젖은 것을 쑤셔 넣는 소리였다. 접합부에는 자꾸만 물이 튀었다.
참을 수가 없어 손가락이 곱았다. 소파의 등받이 부분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래도 성감에서는 벗어날 수가 없었다. 너무 조인다고 엉덩이를 얻어맞아야 했다.
“굶고 살았나 보네. 아무거나 안 먹고 착하긴 한데, 아랫입이 허전하면 집으로 빨리 기어 들어올 것이지 왜 처굶고 있어요. 쑤셔 주는 사람 마음 아프게.”
“아, 흐…! 아-!”
대답하지도 못하고 앓고 있는 재하를 향해, 그의 알파가 피식 웃었다.
“밖의 사람들한테 다 들리겠다. 이럴 거면 아예 문 열어 놓고 씹 뜨자. 내가 형 마누라인 거 소문나게.”
형이라니. 그의 두꺼운 허벅지와 단단하기 짝이 없는 아랫배가 볼기에 찰싹 와 닿는 이 상황에서 듣기에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대명사였다.
재하는 허물어지듯 인상을 찌푸렸다. 성감을 견디기도 힘든데 박아 올 때마다 계속해서 상스러운 말을 지껄이니 안 그러려고 해도 자지가 절로 꺼덕였다.
우성에 알파이기까지 하니 이재하의 성기도 작지 않은 편이다. 평균보다 웃도는 사이즈의 성기가 잔뜩 발기하여 이사실의 물소 가죽 소파에 잔뜩 문질러졌다.
…이재호가 나중에 쓸 방인데 어쩌면 좋을까 싶기도 했다. 아무래도 소파를 새로 구매해야지.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는지 귀신같이 알아챈 이재하의 마누라는 그를 그냥 놓아주지 않았다.
“자지는 내 거 먹으면서 무슨 생각을 그렇게 바쁘게 해. 원래 하던 대로 삼키세요. 내가 더한 거 해 달래?”
“흐-! 잠, 깐, 아…!”
“아, 맞다. 나 봉사하러 온 건데 또 게걸스럽게 처먹고 있었네. 미안합니다. 가정교육이 형편없었던 게 씹질에도 티가 나나 보네요.”
안에 잔뜩 쑤셔 박고 허리를 빙글 돌리는 바람에 안쪽 내벽에서 그의 귀두 갓 아래 박혀 있던 구슬이 융기해 있던 곳을 마구 긁었다.
말캉하게 부풀어 올라 성감이 오를수록 그곳도 볼록 튀어나와 있었는데 개가 흘레붙듯 뒤에서 박아 대더니 기어코 거기에 구슬을 대고 탈탈 터는 통에 이재하는 숨도 못 쉬고 꺽꺽거리는 중이었다.
앞으로 팔을 쭉 뻗더니 드레스셔츠 아래 얌전히 들어 있던 젖꼭지를 쭉 긁고 미끄러진다. 제 성감대가 거기에도 있는 줄 몰랐던 재하는 바들바들 떨어 대는 중이었다.
다른 손은 이미 재하의 성기를 잡고 있었다.
“물이 왜 이렇게 많아.”
그건 심지어 놀리는 투도 아니고 감탄하는 듯한 어조라 더 부끄러웠다. 대답하지 못한 채로 손을 내려 제 성기에 달라붙은 손바닥을 떼어 내려고 했다.
뒤에서 박는 것만 해도 미치겠는데 앞쪽까지 자극되니 눈알이 돌아갈 지경이었다. 이재하가 알고 있는 섹스 중 이런 것들은 없었다.
그는 늘 미온수 같은 관계를 했었다. 오메가가 만족할 만한 애무 뒤 적당한 삽입, 사정이 느린 편이라 그들의 체력이 깎이지 않게끔 조절하여 빨리 사정할 수 있도록 했었다.
그런데 장태건과의 관계는 전혀 달랐다. 질척거리고, 성기에서는 온갖 물이 다 나오고, 예민한 곳에 몰아치는 근육통과 미끌거리는 감각까지 느껴졌다.
이재하는 이런 관계를 알지 못한다. 이토록 집요하게 저를 털어 먹는 관계도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장태건의 것은 알파의 신체 중 급소임에도 불구하고 연약해 보이기는커녕 그 자체로도 무기 같았다.
귀두 갓에 박힌 구슬을 제외하고도 그 굵기나 모양이 흉포했던 것이다. 그러나 귀두와 성기 기둥을 덮은 피부만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그걸 보면 왠지 모르게 뒤가 젖어 들었다. 저는 오메가도 아닌데.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래가지는 않았다.
뒤를 쑤셔 대는 두꺼운 귀두가 이내 안쪽에 볼록 솟아오른 곳을 질척하게 문질러 댔기 때문이다.
“아, 흑, 안 돼…. 태건, 흐-!”
“와, 이름을 이럴 때만 불러 준다고? 자지로 봉사해야만? 그래요, 씨발. 제 몸만 빨아 드세요.”
장태건은 무언가 억울하다는 듯이 투덜거렸다. 평소의 심드렁한 기색이 아니라 정말 억울하다는 투여서 이재하는 그것이 신경 쓰였다.
뭐가 억울하냐고, 무엇이 마음에 걸리냐고 묻고 싶었지만 입을 열어 봤자 나오는 것은 꺽꺽거리는 신음뿐이었다.
바깥에 있는 비서실 사람들이 제 목소리를 듣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휘발된 지 오래였다.
애초에 그게 무서웠으면 정신 나간 새끼처럼 바지만 벗은 채 소파에 엎드려 배우자의 성기를 뒤로 받지는 않았겠지.
그가 봉사를 해 준다고 했을 때 저도 모르게 반쯤 발기했었다. 평상시에는 성욕이 강하지 않은 편이었는데 왜 그런 말을 듣고 흥분했는지 모르겠다.
다리 사이에서 고개를 움직이는 장태건을 상상했을지도 모른다. 봉사라는 그 단어 하나에 말이다. 저도 어쩔 수 없는 알파인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욕망하는, 그것도 최대한 더러운 방식으로.
제 욕심이 뭐든 장태건은 지금 그 이상으로 이재하를 만족시키는 중이었다. 젖꼭지가 셔츠에 쓸려 간지러웠다.
왜 그런 곳이 간지러울까. 왜 내벽을 쑤셔 줄 때마다 태건의 말처럼 자지를 뒤로 삼키지 못해 안달 난 사람처럼 굴게 될까.
재하는 자신이 낯설었다.
“이사님.”
성감의 늪에 젖은 채 상념에 관통당해 있던 이재하를, 장태건은 손쉽게 건져 올렸다.
하으…. 앓는 소리를 내자 골반을 부여잡은 손을 풀어 성기를 쓰다듬어 준다. 아주 다정한 손길이었다. 연약한 것을 만지듯 하는 손길이 민망하다.
어떤 오메가는 재하의 것을 빨기도 하고 어떤 오메가는 그것을 문질러 주기도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가 그들에게 줄 쾌락이 기대되어서였다.
그러나 장태건은 그답지 않게 재하의 성기를 소중하다는 듯 쓰다듬고 있었다. 귀두경을 엄지로 둥글게 문지르며, 연장을 다뤄 굳은살이 박인 손으로도 말이다.
“뭐야, 쌌어?”
그리고 이재하는 저도 모르게 사정하고 말았다. 그가 제 성기를 잡고 있는 손, 그러니까 그의 약지에 끼워져 있는 것을 보자 저도 모르게 그렇게 됐다.
“결혼반지….”
“반지 뭐. 유부남이 끼고 있는 게 뭐가 이상해.”
재하의 것과 같은 디자인이었다. 지난 열흘간 한 번도 빼놓은 적 없는. 엉겨 붙은 얼룩들을 세척하기 위해 의뢰하는 시간도 아까워 막내 직원의 안경 세척기를 빌렸던 바로 그 반지.
같은 디자인의 반지가 장태건에게도 끼워져 있는 것이다. 그 역시 지난 열흘간 그 반지를 끼고 있었다.
그것만으로도 사정했다. 재하는 희열에 들떠 뒤를 조였다. 하, 하는 숨소리가 들렸다. 장태건이 고개를 내려 재하의 드레스셔츠 날개뼈 부근에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킥 웃는 소리가 났다.
“근데 난 아직 안 끝났는데.”
“아….”
멍한 정신으로 재하는 그럼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그가 사정하지 못한 게 미안했다. 저 혼자 가 버려 검은색 물소 가죽 소파에 묻은 백탁액이 민망하기까지 했다.
장태건이 피식 웃으며 재하의 골반을 휙 들어 올려 돌렸다. 그러더니 제가 소파 위에 앉고는 그 무릎 위에 재하를 올렸다.
당연히.
“흐아-! 아, 잠-!”
여전히 결합한 채로 말이다.
그가 재하의 귓가에 한 번 더 속삭였다.
“이제는 이사님이 봉사 좀 해 봐. 허리 흔들 수 있지?”
재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열락이 고여 제가 몇 년 동안 근무해 온 집무실을 뒤흔들어 놓기 전에 말이다.
누군가의 안으로 들어가는 입장일 때는 상상도 못 할 감각이 휘몰아쳤다.
삽입이 주는 느낌은 생각보다 강력했다. 숨겨져 있어 제게도 낯선 곳을 굵고 두꺼운 성기가 잔뜩 헤집어 쑥 쑤시는 감각에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그것은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서도 마찬가지였다.
“움직여 봐요.”
마주 본 장태건의 얼굴은 성감에 달아올라 있었다. 저를 올려다보는 눈가가 붉게 물든 것이 미치게 예뻤다. 그의 그런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 요도구가 조여들었다.
벌름거리던 요도구가 찍, 하고 액을 뱉어 냈다. 그게 태건의 셔츠 위로 튀어 버렸다. 재하는 곤혹스러웠다.
“잠, 깐…. 옷에….”
“어. 누가 뭐냐고 물어보면 이재하 씨 씹물이라고 해 줄게.”
“그런, 안, 아-! 흐….”
안 된다고 해야 하는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어서 움직이라는 듯이 태건이 아래서 위로 허리를 쳐올렸다.
또 그 구슬이 안쪽을 세차게 긁고 지나갔다. 움직이지 않을 때도 귀두경이 안쪽에 콩알처럼 부푼 곳에 딱 맞아떨어져 간지럽기 그지없으니 태건의 성기가 작정하고 내벽을 쓸어 줄 때면 미칠 것 같아지는 거다.
재하는 그 감각을 참으려 태건의 어깨를 쥐어뜯듯 잡다가 놀라 힘을 풀었다. 알파의 악력에 의해 태건의 정장 상의에 구김이 갔다.
그가 피식 웃었다.
“전에 할 때는 한동안 씻을 때마다 따가워서.”
“아, 읏…. 그게, 무슨….”
“이재하 씨가 등을 죄다 긁어 놨잖아. 기억 안 나?”
재하는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의 등에 상처를 냈을 줄은 몰랐다. 놀란 나머지 엉덩이를 반쯤 띄우기도 했다.
태건이 그의 골반을 잡아 그대로 주저앉혔다. 접합부에서 진득한 것이 뚝뚝 떨어지는 느낌이 났다. 재하는 고개를 젖힌 채 바르르 떨고 있었다. 사정하지도 않았는데 가볍게 간 것이다.
극치감의 커다란 혓바닥이 재하의 온몸을 휘감듯 핥아 올렸다.
“하, 씨발-.”
그가 낮게 욕을 읊조렸다. 아랫입술을 혀로 핥으며 재하를 껴안았다. 흉통이 조여 와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골반을 둥글게 굴렸다. 잔뜩 흥분해 울퉁불퉁해진 알파의 좆이 내벽을 긁을 때마다 안쪽이 저절로 조여 왔다.
제 몸에 존재하기는 해도 인지해 본 적 없는 점막의 기관에 굵고 부드러운 것이 들어와 움직이는 감각은 이재하에게 있어서 영혼을 해체했다가 다시 조립하는 과정과 같았다.
그가 그동안 지녀 왔던 무언가가 와르르 무너져 내리고 완전히 새로 태어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게 약간은 두려운데 또 완전히 무섭지는 않았다. 낯선 감각이 주는 극치감. 지난번부터 그와 관계만 하면 뒤가 푹 젖는 게 이상했다.
그러나 재하의 안쪽만 젖은 건 또 아니었다. 태건의 성기 역시 계속해서 내벽 안에서 꺼덕이고 있었다.
사정은 아니고 선액을 내뱉는 것 같은데 안쪽이 살짝 뜨거워졌다 가라앉고는 하는 감각들은 콘돔에 가로막혀 완전히 느껴지지는 않았다.
“환장하겠네. 다음엔 그냥 할래? 안에 싸고 싶어요.”
마지막에는 어쩐 일인지 애교라도 부리는 투다. 재하는 그 말투에 안달이 나 골반을 들썩거렸다.
원하는 건 다 해 주고 싶었다. 고개를 끄덕였다. 장태건이 재하의 열 오른 눈을 들여다보더니 피식 웃었다.
“큰일 날 사람이네. 건달 새끼 뭘 믿고 고개를 끄덕여. 해 달라는 거 다 해 줄 기세야.”
“흐, 으, 그래도…. 아-!”
그래도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턱을 악문 장태건이 아래서 위로 골반을 털어 진동하듯 박아 넣지만 않았어도 말이다.
재하는 더 견디지 못하고 그의 어깨에 이마를 박고 엉엉 앓았다.
눈물이 고인 것같이 눈이 뜨거웠다. 그의 숨소리가 귓가에 휘몰아쳤다. 이재하 생애 둘 없는 가장 강력한 태풍의 소리였다.
“내가 뭘 해 달라고 할 줄 알고.”
그는 낮게 읊조렸다. 웃음기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이재하는 그것이 장태건의 욕정임을 조금 늦게 깨달았다.
* * *
“음, 찢어졌네.”
장태건이 살짝 부어오른 밀부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가 말할 때마다 여린 살 부위에 입김이 와 닿았다.
콘돔 얘기였다.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던 장태건이 이재하의 허리를 꽉 껴안고 그의 목덜미에 이를 박았을 무렵이다. 내벽 안쪽에서 무언가 팍 터진 느낌이 들기는 했었다.
더 깊숙한 곳으로 흘러드는 기분이라 위화감에 허리가 떨렸었으니까. 사무실이라 콘돔을 쓴 것인데 의미가 없어졌다.
“왜 이렇게 움찔거려.”
그가 제 뒤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통에 민망해서 몸을 뒤척이다가 쯧, 혀를 차는 소리를 듣고 움직임을 멈춰야 했다.
태건은 의외로 관계 후 뒤처리를 손수 챙겨 주었다. 지난번에도 깨끗한 몸으로 눈을 떴던 기억이 났다. 아찔한 회상이었다.
“안에 고여 있는 거 잠깐 둘까요? 오므리고 있을 수 있겠어?”
빼 달라고 하고 싶은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신음을 참느라 다물고 있던 턱이 얼얼할 지경이었다.
장태건은 불뚝 솟은 재하의 교근에 입을 맞췄다. 그 작은 접촉에 요도구에 고여 있던 마지막 정액이 선액과 섞여 주르륵 흘러내렸다.
어디에 박은 적도 없으면서 애액이 가득한 곳에 쑤셔 박다 나온 것처럼 이재하의 성기는 질척하게 젖어 있었다. 예쁜 과일에 설탕 시럽을 뿌린 것 같기도 했고.
장태건은 이사실 한편에 놓여 있던 티슈 갑을 가져와 그것들을 닦아 주었다. 작게 흥얼거리면서.
…화났던 건 조금 가라앉은 걸까.
분명히 장태건은 이사실로 저를 끌어들인 그때까지는 화가 나 있었다. 그와 나눴던 대화 중에도 태건은 여전히 화가 나 있었다.
그의 표정은 변화가 없었다. 페로몬이 말해 줄 뿐. 장태건이나 이재하나 둘 다 우성 알파이니 페로몬 조절에 실패할 리는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감정을 페로몬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은 이재하의 페로몬 민감도가 선천적으로 높기 때문이다.
섹스 때문에 화를 풀어 준 걸까.
이재하는 뜬금없이 위험한 생각을 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장태건을 정말로 양아치 새끼로 본다는 말과 같다는 걸 모른 채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처음인 이재하는 당연히 다른 감정에 대해서도 둔감한 타입이었다.
그는 타인에게 쉽게 화가 나거나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가 없을뿐더러 누군가 제게 시비를 걸어도 그 시비가 타당하다면 넘어가는 편이었다.
그의 감정은 대부분 상식에 입각하여 흘러갔다. 도의와 상식에서 위배될 것이 없다면 분노할 것도 없었다.
반대로 도의와 상식에 어긋난다면 화나지 않더라도 화난 척을 해야 했다. 그는 상벌이 확실한 상사로 보여야 할 필요가 있었다.
웬만해서는 우울하지도 않았다. 이재하의 일상은 평온했고 일생은 단조로웠다. 그가 얼마나 불우한 가정에서 자랐고 어떤 환경에서 지냈는지는 중요하지 않은 얘기였다.
그러다 보니 다른 이들의 감정을 살피는 것에도 다소 둔감한 구석이 있었다. 일머리가 좋아 눈치는 뛰어나도 그것이 사생활과 연결되면 자주 헤매고는 했다.
교제를 안 해 본 것은 아니지만 보통 재하의 상대들은 알 수 없는 이유로 화를 내다가 그가 반응해 주지 않으면 갑작스레 스킨십을 요구하고는 했었다.
안아 달라, 입을 맞춰 달라 등등. 그때마다 이재하는 딱히 거절하지 않았다. 그 방법이 손쉽다고도 여겼다.
장태건도 스킨십을 좋아하는 걸까? 그와 맞닿는 부분이 많을수록 기쁜 쪽은 자신이었기 때문에 그 정도로 그의 화가 풀린다면 관계 후 찾아오는 격통이나 탈력감 등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어째 또 쓸데없는 생각 중인 것 같네.”
태건이 재하의 다리 사이에서 몸을 일으켰다.
허벅지 안쪽에 진득하게 달라붙어 있던 정사의 흔적들을 닦은 티슈를 뭉쳐 휴지통에 버리는 걸 살짝 아찔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이 방을 정리해 주는 분이 누구였지. 이재하는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포기한 뒤 소파 아래 떨어져 있던 정장 바지를 집어 들어 발목부터 꿰었다.
벨트가 달려 있어 묵직했다. 약간 민망한 마음에 빨리 꿰입고 싶어 서두르자 벨크로가 부딪치며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장태건은 그 꼴을 보며 피식 웃고는 허리를 굽혀 무언가를 주워 들었다. 재하의 복서 팬티였다.
“털도 없어, 빤스도 안 입어. 음탕하기가 아주…. 한 판 더 하자고 꼬시는 거예요?”
“…아닙니다.”
재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뜨고는 손을 뻗어 태건이 주워 든 제 검은색 속옷을 받아 갔다.
눈에는 장난기가 가득한 주제에 별말 않고 돌려주었다. 입고 있던 바지를 벗고 속옷부터 다시 입었다.
허리를 살짝 숙였다가 밴드를 올리려는데 장태건이 그걸 뚫어지게 바라보며 아랫입술을 혀로 핥았다.
새빨간 혀가 나와 입술 점막을 핥자 번들거리는 것이 보였다. 그의 눈빛 역시 딱 그만큼 젖어 있었다.
이재하로서는 자신을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상대가 익숙하지 않았다. 180cm가 넘는 거구의 우성 알파를 대체 누가 발라 먹을 듯 바라보겠는가.
그가 화났을 때 몸으로 풀어 주는 해법이 있다는 걸 깨달았지만 지금 당장 다시 시작하는 것은 약간 곤란했다. 재하는 입술을 달싹이다 말했다.
“…오늘은 더 안 됩니다.”
“누가 뭐래요?”
장태건은 눈빛은 형형한 주제에 예의 그 시큰둥한 표정을 짓고는 직접 다가와 뒤에서 이재하를 끌어안았다.
그러고는 팔을 앞으로 둘러 아직 추켜올리지 않는 퍼스너를 잠가 주고 벨트를 조여 벨크로로 고정해 주었다.
근육 층이 두꺼운 만큼 흉통도 큰 편인 재하를 뒤에서 끌어안고도 복부 쪽에 있는 벨트를 조절해 줄 정도로 팔이 긴 것이 신기했다.
“감사합니다….”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민망한 건 역시 어쩔 수 없었다.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닌데 옷매무새를 남이 단장해 주다니.
그의 단단한 흉곽과 가슴근육이 껴안긴 등을 통해 느껴졌다. 해당화 향과 바다 소금 냄새의 페로몬이 기분 좋게 일렁이는 게 느껴졌다.
‘처음 맡았을 때는 무척 달다고 느꼈었지.’
수민과 만났던 자리에서 그의 향을 처음으로 맡을 수 있었다. 수민의 것이라기에는 묵직하고 그 옆에 앉은 알파의 것이라 하기에는 달큼한 향이라고 생각했었다.
‘지금도….’
그 생각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풍성한 해당화의 향이 바다 내음에 섞여 비강을 밀고 들어왔다. 폭력적으로 후각세포를 자극한 주제에 끝은 달큼하다니.
이재하는 저도 모르게 제 뒤통수가 태건의 쇄골 위에 툭 닿는 것도 모르고 몸을 늘어트렸다.
장태건이 그런 재하의 귓가에 날카롭게 읊조렸다.
“몇 살인데 페로몬 조절도 못 하고 늘어져. 밖에 오메가라도 있으면 어쩌려고.”
“아….”
나른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이사실 안은 물푸레나무 향으로 꽉 차 버렸다.
재하의 페로몬이었다. 싱싱한 영춘화의 향도 옅게 맴돌았다. 재하는 서둘러 페로몬을 갈무리하며 끙 앓았다.
“쯧, 기대. 빨리.”
갑작스러운 페로몬 이완에 또 급격히 빠른 속도로 갈무리한 탓에 약한 현기증이 일었다. 장태건은 그런 재하의 상태를 어떻게 알았는지 제게 기대게 만들었다.
여러모로 아찔한 경험이 한꺼번에 일어난 터라 이재하는 약간 포기한 상태로 힘을 빼고 그에게 온전히 기댈 수밖에 없었다.
체력이 없는 편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다리 사이가 살짝씩 떨려 정신이 없는 것도 한몫했다.
‘받는 쪽 체력이 이렇게 소모될 줄은….’
따로 운동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장태건은 정력적이었고 그와의 관계에서 나눌 수 있는 온기는 즐거웠다. 그러니 체력 방비를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와 나누는 온기가 좋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섹스에는 그저 서로의 체온만 딸려 오지는 않는다. 그가 주었던 쾌락이 부지불식간에 떠올랐다.
쾌락은…. 글쎄, 그 어마어마한 쾌락이 좋다고는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탕이 너무 달아도 혀에는 통각을 줄 뿐이다.
태건과의 관계가 그러했다. 재하는 자신이 그런 곳으로도 느낄 수 있다는 걸 몰랐다. 그건 우성 알파로 일생을 살아와 고착된 이재하의 고정관념까지 뚫고 들어오는 쾌감이었다.
이대로 있다가는 제 안의 무언가가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감각이었다.
그러나 이재하가 그 와중에도 태건을 밀어내지 않고 등을 끌어안고서 어깨에 얼굴을 묻었던 것은 와 닿는 온기가 몹시도 기꺼웠기 때문이다.
장태건의 살과 골격은 재하의 것과는 또 달랐다. 신체를 단련한 점은 같았지만, 자신이 석고 같은 단단함을 갖고도 어딘가 약점이 존재한다면 장태건의 것은 쇠와 같았다.
그에게 매달리는 건 한 번도 누군가에게 등을 기대어 본 적 없는 재하에게 위안을 주었다.
막상 그가 기대어 보라고 어깨를 툭툭 쳐도 그럴 생각은 없는 주제에, 재하는 그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위로를 얻는 것이었다.
“얌전해. 예뻐.”
벨트를 채워 주는 것이 민망하기 그지없어 한쪽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재하는 그가 대견하다는 듯 칭찬하고는 떨어지자 다시 한번 얼굴이 달아올랐다.
이재하의 옷을 단장해 주는 걸 끝낸 장태건은 그의 엉덩이까지 툭툭 두들겼다. 모친에게도 받아 본 적 없는 처사에 이재하의 얼굴이 잠시간 하얗게 질렸지만 아무 말 하지 않았다.
저에게서 떨어진 그가 이사실 여기저기를 둘러보는 걸 보았기 때문이다. 재하는 왠지 약간 머쓱한 기분으로 어정쩡하게 서 있었다.
그가 어쩐지 무척 흥미로운 표정으로 이사실에 놓인 가구 등을 살폈기 때문이다. 책상으로 다가간 그가 책상의 모서리 부근을 살짝 쓸었다. 책상 위에 놓인 물건들을 유심히 훑기도 했다.
“이건 뭡니까. 취향 신기하네.”
비취를 깎아 만든 거북이 모양 문진은 조부로부터 받은 물건이었다. 장태건은 기다란 엄지로 한층 짙은 색으로 만든 비취 보주를 물고 있는 거북이의 대가리를 툭 건들며 중얼거렸다.
…그가 그렇게 말한 걸 듣고 보니 너무 노친네 취향이긴 했다.
재하로서는 그것이 가끔 올라오는 조감도 등을 고정하기 편하여 쓰는 것이지 한 번도 모양이나 재질에 대해 신경 쓰지 않았던 터라 당황스러웠다.
“그건 그냥….”
뭐라 말하려는 사이 태건은 또 다른 걸 보고 있었다. 만년필을 보는 듯했다. 끄트머리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는 그것은 모친이 중학교 졸업 선물로 사 준 것이었다.
장태건이 만년필을 톡 쳐 굴리며 말했다.
“뭔 펜에 다이아가 박혀 있어.”
“…드릴까요?”
말을 내뱉고 나서 후회했다. 장태건이 재력이 없는 것도 아니고 작은 재물을 탐하는 성격도 아닌데 갑자기 나서서 너 가질래? 묻다니.
다른 의미가 있는 건 아니었고, 그 만년필이 저에게 나름 의미 있는 물건이라 그가 갖게 된다면 좋을 것 같았다. 어머니가 주신 선물들은 다 간직하고 있지만 그만큼 옆에 끼고 사용한 물건은 드물었다.
제가 좋아하는 사람이 선물한 걸 제가 좋아하는 사람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갑자기 들었던 것이다. 그래서 급하게 묻는 바람에 목소리 끝이 갈라지기도 했다.
재하는 민망함에 귓등이 붉어졌다. 그러나 다행히도 태건은 재하를 보지 않고 펜을 유심히 보고 있었다.
“이사님 이름 쓰여 있는데?”
“네…. 그럴 겁니다.”
“근데 나 주겠다고?”
아무리 그 끝에 다이아몬드가 박혀 있다고 한들 중학교 때 받은 것이니 벌써 십수 년간 사용한 물건이다.
권유받은 태건도 어이없겠다는 생각을 하자 대답이 잘 나오지 않았다. 실언했다고 말하려던 찰나였다. 장태건은 고개를 돌려 그런 재하를 바라보며 픽 웃었다.
“좋아. 나 줘.”
“…네?”
“그냥 해 본 말이야? 왜 놀라요.”
“아니, 아닙니다.”
그는 만년필을 집어 들어 제 재킷 주머니 안쪽에 쑥 찔러 넣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었다. 다시 생각해 보니 쓰던 물건을 주는 건 상대에게 실례 같았다.
“…그냥 새 걸로 선물해 드리겠습니다. 돌려주세요.”
“줬다 뺏네. 이사님 깡패야?”
소중한 걸 품은 사람처럼 커다란 손바닥으로 상의 안쪽에 찔러 둔 만년필 위를 덮고는 재하를 바라보는 시선이 마치 남의 것을 탐내는 무뢰배를 보는 듯했다.
재하는 약간 말문이 막혔다.
“깡패는 아닌….”
“아닌데 왜 달라고 해. 남의 거 뺏고 그러는 건 깡패 새끼들이나 하는 거야. 아시겠어요?”
어린아이에게 도덕을 알려 주듯 또박또박 내뱉는 목소리에 재하는 할 말을 잃고 고개를 살짝 끄덕일 뻔하다가 한심해서 그만두었다.
한낮에, 그것도 몇 년을 일해 온 공간에서 정사를 치른 이재하는 제가 허물 벗은 가재처럼 희멀겋게 연약한 안색을 하고 있다는 것도 몰랐다.
반 친구를 집에 처음 데려온 초등학생처럼 안절부절못하기도 했다. 재하가 그러거나 말거나 이사실을 충분히 둘러본 태건이 이재하 이사라고 쓰인 크리스털 명패를 손바닥으로 쓸어 먼지를 제거해 주더니 입을 연다.
“오늘부터 퇴근 혼자 하지 마요. 명순이 달아 줄 테니까 귀찮아도 같이 다니고.”
“…이제 도망 안 갑니다. 집으로 바로 갈 거예요.”
장태건이 피식 웃었다. 재하의 책상에 엉덩이를 살짝 걸치고 앉아 팔짱을 끼고는 그를 바라보았다.
재하는 사실 그가 이 방의 주인이고 자신은 객이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는 검지로 제 눈썹 산을 느릿하게 훑으며 말했다.
살짝 인상을 찌푸렸는데 가당치 않은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도망갔다는 자각은 있었다 이거지. 난 또 나 먹여 살리려고 불철주야 일하는 남편 흉내 내나 했는데.”
“…….”
“그래서. 왜 도망갔던 건데.”
이재하 역시 부지불식간에 나온 제 진심에 다소 놀란 참이었다.
도망이라기보다는 회피에 가까웠다. 그가 눈에 초점이 사라지도록 다친 걸 옆에서 마주한 채 버티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밖으로 나가 뭐라도 해야 했다. 그를 그렇게 만든 놈들을 가만두지 않거나, 일의 진상을 밝히거나 아무튼 활동해야 할 것들이 필요했다.
“할 말 없어? 넘어가 줘?”
“…….”
재하가 대답 없이 그를 바라보자 시선을 마주한 태건이 흠, 하고 목울음을 냈다.
“뭐, 그래요. 아무튼 오늘부터 차도 혼자 타지 말고.”
“그건 왜….”
“이유는 왜 물어. 나도 할 말 없어. 미인계 쓰면서 대답도 안 할 때는 언제고, 뻔뻔하긴.”
장태건이 반쯤 앉았던 몸을 바로 세우고는 재하를 지나쳐 걸었다. 재하는 서둘러 시계를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 무렵이었다.
“…어디 가십니까.”
“어디 가는 것 같은데요. 차 혼자 타지 말라니까. 빨리 옆구리에 붙어요. 퇴근하게.”
그제야 재하는 걸음을 살짝 빨리하여 그의 뒤를 쫓았다.
그 꼴을 보던 태건이 뒤로 돌아 이사실 문을 열었다. 비스듬히 대각선 뒤에서 그를 바라보는데 살짝 웃는 것 같기도 했다.
확실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 * *
살짝 정신이 없기는 했다.
“그래 가지고 대가리부터 꼬라박는 걸 명순이 이 씹새끼가, 아니 죄송합니다. 형부님도 계신 자리에 말을 가려 해야 하는데, 제가 걸레를 물어서….”
“아닙니다.”
재하는 일단 아니라고 대답했지만 정길이 제게 건넨 사과에 대한 사양인지 아니면 그가 저를 지칭한 ‘형부님’에 대한 거절인지 말하고도 애매함을 느꼈다.
형부면 형부지 형부님은 또 뭘까. 다시 들어도 아찔한 호칭에 재하는 물 잔을 집었다.
흘끗 둥그런 테이블 옆에 앉은 태건을 보니 말없이 소주잔을 입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고깃집 원형 테이블은 가운데에 화로를 놓을 수 있게 테이블 기둥이 두꺼웠는데, 다리가 길어 불편한지 벌린 채였다.
재하 역시 자꾸 무릎이 닿아 다리를 꼰 참이었다. 테이블이 좁고 키가 큰 장정 넷이 둘러앉은 참이라 무릎이 테이블에 자꾸 부딪혔다. 그걸 피하려고 다리를 꼬아 보았는데 무릎이 태건의 허벅지에 닿아 있었다.
닿는 것이 불편할까 봐 옆으로 움직이자 그대로 잡고 누른다. 제 무릎에 올라온 커다란 손에 놀라 그를 바라보니 옆에 있던 명순이 따라 주는 잔을 받고 있을 뿐, 이쪽은 보지도 않고 있었다.
퇴근길에 식사를 하자는 제안을 했었다. 용기를 낸 것이 조금 늦어 지하 주차장에 자신들의 형님을 모시러 온 정길과 명순을 마주한 다음에야 그 권유를 입 밖으로 뱉을 수 있었다.
‘식사, 하고 가실까요.’
그 말에 태건이 뭐라 답하기도 전이었다. 재하와 태건을 향해 인사하기 위해 허리를 굽혔던 정길의 배에서 빈속이 요란히 움직이는 소리가 난 것이다.
그제야 제가 명순과 정길 앞에서 태건에게 데이트 신청 비슷한 걸 했다는 자각이 든 재하는 빠르게 뒷말을 붙였다.
‘명순 씨랑 정길 씨도 같이 갑시다.’
‘헉, 정말이십니까?’
정길이 반짝 눈을 빛냈다. 재하와 키가 비슷한 편인 정길은 재하보다는 얄쌍한 타입으로 쌍꺼풀 없이 날카로운 눈매를 갖고 있었다.
어디 밖에서 보면 꽤 인상이 있는 타입이구나, 생각할 뻔한 생김새인데도 입꼬리가 위로 쭉 찢어지니 다소 순진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명순이 옆에서 손사래를 치며 정길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푹 찌르더니 대답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형님이랑 이사님 두 분이서 오붓하게-.’
‘니들 처굶고 살까 봐 걱정되신다잖아. 쪼개지 말고 차 문이나 열어.’
태건은 그대로 세단을 향해 몸을 휙 돌렸다. 재하는 그래서 그의 표정을 확인할 수가 없었다.
정길이 후다닥 뛰어가 태건이 세단에 오를 수 있게끔 차 문을 열어 주었다. 태건은 차에 올라타기 전에 정길의 뒤통수를 살짝 후려쳤다.
정길은 아, 소리도 내지 않았다. 그저 뒷머리를 벅벅 긁고는 고작 차 문을 모시듯이 조심스레 닫더니 재하를 향해 히히 웃었었다. 얼른 가자는 뜻이라는 걸 알고 재하도 따라 탔다.
그러고 보니 태건의 차는 처음 타 본다는 생각에 입술을 말아 물었다. 미리 타 있던 태건은 차창 틀에 팔꿈치를 올려 두고는 턱을 괴고 있었다. 예의 그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명순이 운전대를 잡고 정길이 보조석에 타서는 안전벨트를 매며 뒷좌석을 향해 희희낙락 웃으며 물었다.
‘어디로 가실까요?’
‘배 속에 거지 든 새끼가 처먹고 싶은 거 처드세요.’
분명히 갈구는 말투였는데 정길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으럼, 뒷고깃집 가실까요?’ 하며 붙임성 좋게 떠들었다.
재하는 그들의 편한 분위기가 좋았다. 태건과 가장 가까이서 일하는 사이니 밥을 먹자고 한 게 잘한 것 같기도 했다.
앞좌석에서 낄낄거리는 정길 덕분에 저도 모르게 슬쩍 웃다가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렸다. 태건이 그를 빤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올라갔던 입꼬리가 조금 떨어진 참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쳐 긴장한 탓이다.
빤히 보던 태건이 손을 뻗어 재하의 뒷덜미를 잡아끌어 오더니 입술을 쪽 맞추고 떨어졌다. 살짝 젖은 점막끼리 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났다.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입맞춤에 놀랐다가 퍼뜩 정신을 차리고 앞좌석 룸미러를 바라보았다.
명순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그게 그가 방금 그 장면을 보지 못해서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눈치 좋게 모른 척하고 있을 뿐이라는 건 재하가 더 잘았다. 재하는 약간 귓등이 붉어졌다가 제 색을 찾았다.
뒷좌석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건 태건의 부하들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꼴은 저는 물론이거니와 태건에게도 좋지 못할 것 같았다.
알파들의 세계는 다분히 수직적이고 태건은 저들의 충성을 받아야 하니 괜히 제가 나서서 걸림돌이 되는 상황은 없었으면 했다.
상대하는 사람들이 달라서 그렇지, 재하 역시 조직의 정점에 선 이였으니 이런 자잘한 상황들이 맞물릴 때 하극상이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오메가나 베타 여성들은 사고방식 자체가 수평적이고 이성적이라 이치와 도리에 맞게 설명하면 되지만 알파나 베타 남성들은 그렇지 못했다.
서열이 확실한 알파들 사이에서는 힘으로 눌러 줘야 말을 듣는 상황이 빈번했다.
그것은 대기업 전략회의실부터 뒷골목 양아치들까지 하나로 일맥상통하는 개념이었다. 그러니 그들의 분위기가 편하고 좋다 해도 아예 풀어지는 모습은 보여 주지 않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거기까지 생각한 재하가 삽시에 표정을 갈무리하고 바로 앉자 태건이 옆에서 피식 웃었다. 재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겠다는 듯이.
‘존나 멋있어서 자지가 땅길 지경이네.’
‘….’
물론 이재하는 그의 그 성희롱에 가까운 뒷말도 태연히 모른 척했다. 차는 얼마 지나지 않아 빌딩 숲 뒤편으로 들어갔다. 재하로서는 지명만 알고 와 본 적은 없는 곳이었다.
정길은 한참이나 가게에 대해 떠들어 댔다. 막상 가자고는 했는데 재하가 재벌 집에서 태어나 자랐다는 것이 걸리는 듯했다.
모친이 조금 까다로운 편이긴 했지만 어릴 때 돌아가신 터라 재하는 오히려 바깥 음식이 편했다. 정 선생이 차려 주지 않는 이상 집에서 끼니를 챙기는 일은 드물었었다.
유학 전 대학을 다닐 때도 마찬가지였다. 관악구 이곳저곳에는 대학생들을 위한 저렴한 가게들이 많았고, 과 동기들은 출신을 말하지 않는 재하를 제법 여기저기 끌고 다녔었다.
그러니 이런 곳이 마냥 불편한 건 아니었다. 귀국 후 노포집들을 찾는 일이 드물어서 그렇지.
어쨌든 차는 부드럽게 멈췄다. 내비게이션도 켜지 않고 운전하는 명순을 보며 재하는 지금 가는 곳이 그들이 자주 찾는 가게임을 깨달았다.
기대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장태건의 일상을 단면이라도 엿보는 기분이 된 것이다.
그리고 당도한 게 이곳 가게였다. 그들은 익숙하게 자리에 앉았다.
자주 방문하여 지정석까지 있는 느낌이었다. 메뉴 주문도 쉬웠다. 음식은 금방 나왔고 재하는 쉽게 분위기에 섞여 들 수 있었다.
원래도 같은 알파들을 상대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무리에 우성 알파가 드물어서이기도 했지만, 같은 우성이라고 해도 대부분 재하에게는 호감을 품었다. 상대가 재하보다 나이가 적으면 그를 우러러보았고, 나이가 많으면 대견하게 여겼다.
그건 명순과 정길도 마찬가지인 듯했다. 그들은 말없이 팔짱을 끼고 앉은 제 상사를 대신하여 재하에게 이것저것 권유하며 말을 시키기도 했다.
재하는 그들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궁금한 걸 묻기도 하며 불판 위 고기가 익기를 기다렸다.
“이제 다 익었나 봅니다.”
명순이 집게로 고기를 뒤집으며 말했다. 가게는 사람이 꽉 차 있어 정신없이 굴러가는 듯했다.
빌딩 숲 뒷골목에 이와 같은 가게가 있는지 몰랐던 재하는 차분하게 젓가락을 들어 잘 익은 갈매기살을 집어 입에 넣었다.
그러자 명순이 헤죽 웃는다.
“이사님, 입에 좀 맞으십니까? 저희야 맨날 오는 데가 이런 곳이라….”
“저도 좋아합니다. 직원들 회식 때 몇 번 와 봤기도 하고…. 뒷고깃집은 잘 없다고 들었는데 명순 씨가 맛집을 알고 계시네요.”
재하는 순순하게 웃으며 명순에게 대답했다. 태건이 술잔을 내려놓았다. 소주잔에 맺힌 이슬방울이 그대로 미끄러져 테이블 위로 떨어졌다.
여전히 그의 다른 손은 재하의 무릎 위에 있었다. 태건이 주먹을 쥐더니 재하의 무릎을 가볍게 툭 치고는 그대로 손을 뻗어 제가 때린 자리를 쓸어 주며 입을 열었다.
“마누라 옆에 끼고 연애해? 내가 쟤 탈모랬지.”
“탈모는 아니고 그냥 빡빡입니다.”
명순이 오해를 살 수는 없다는 양 큰 몸을 옹송그린 채 냉큼 대답했다. 재하는 태건을 한 번 보다가 그런 명순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탈모인 걸 믿지 않겠다는 뜻이었으나 명순은 아무리 생각해도 억울한지 ‘매일 면도하듯 머리 밀어서 빡빡이인 겁니다.’ 하고 변명을 덧붙였다.
재하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아까부터 묻고 싶은 걸 아무렇지 않게 입 밖으로 꺼내 보았다.
“…장 실장님도 여기 자주 오십니까?”
장태건은 정길이 따라 준 소주를 입에 털어 넣더니 테이블 위에 올려 두고 재하를 흘끗 바라보았다.
나란히 앉았는데도 태건의 시선이 조금 더 위쪽에 있었다. 그가 눈매를 가늘게 뜬 채 저를 내려다만 봐도 어쩐지 애가 달았다.
“옛날에.”
“옛날이면 언제입니까?”
“궁금해요?”
재하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명순이 태건의 잔에 소주를 따르려길래 팔을 뻗어 잔의 입구를 손바닥으로 막았다. 병을 쥔 명순의 손이 공중에서 멈췄다.
태건이 잔 입구를 막고 있는 재하의 손등을 검지로 톡톡 쳤다. 뭐냐고 묻는 듯했다.
“아직 상처가 다 낫지 않았는데 술 더 드시면 안 됩니다.”
“제법 종알종알 잔소리도 하고.”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올린 태건이 턱을 괸 채로 재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러나 재하는 드물게 단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잔소리가 아니라 사실이었다. 복부에 큰 상처가 난 지 열흘밖에 되지 않은 사람이 술을 마시다니. 첫 잔부터 먹지 말라고 하고 싶었는데, 그의 부하 직원들 앞에서 이래라저래라하기가 좀 꺼려졌었다.
그 단호한 표정을 본 태건이 제 술잔 위에 얹어진 재하의 손을 잡아 내리며 깍지를 꼈다.
재하가 놀라 바라보는데 이번엔 태건이 고개를 돌린 채였다. 왼편에 앉아 있던 태건은 재하와 잡고 있던 손을 꾹 누르더니 말했다.
“나 오른손잡인데.”
“네. 알고 있습니다.”
재하는 고개를 슬쩍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가 오른손잡이인 건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결혼식 날 제 손을 가져가 왼손에 반지를 끼워 주던 손도 그의 오른손이었다.
재하가 간단하게 답하자 태건은 시큰둥한 얼굴로 팔에 괴고 있던 턱을 까딱여 불판 위 고기를 가리켰다.
“뭐 해. 먹여 줘야지. 이사님이 내 손 붙잡고 안 놓고 있잖아.”
…내가 안 놓는 건 아니었는데.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먹여 달라 하니 배가 고픈가 싶어 젓가락을 들었다. 잘 익은 고기 한 점을 집어 들어 뜨거울세라 살짝 불고 있는데 시선이 느껴졌다.
“…….”
“…그, 음…. 냉, 냉면 먹자. 명순이 이 새끼야, 좀 시켜 봐라.”
“어, 어. 여기 물냉 네 개요.”
정길과 명순이 갑작스레 재하의 시선을 피하며 말했다. 재하는 고기를 집어 든 채로 굳어 버렸다.
<2권에서 계속>
개의 가면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