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이재하는 기시감을 느꼈다. 밤사이 겪은 일에 대해서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새벽 댓바람부터 깨어나는 것이 익숙할 지경이었다.
어쨌든 여명이 밝지도 않은 새벽에 깨고 나니 정신은 맑았다. 몸은 꿉꿉한 구석도 없었다. 누군가 씻겨 놓은 듯 뽀송해진 몸으로 아직 어슴푸레한 빛 사이 창밖에 내리는 비를 바라보았다.
‘장마라고 했던가….’
그랬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기억나지는 않지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자신이 지금 태건의 침대 위에 올라와 있다는 것이었다.
“하….”
뒤를 돌아보기가 무서웠다. 고른 숨소리가 뒤편에서 흐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장태건과 잔 것은 이번이 두 번째다. 변명같이 들리겠지만 첫 관계에서 재하의 기억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다.
태건과 잔 것은 기억나는데 누가 덤빈 것인지, 대체 누가 이런 황당한 짓을 벌이자는 마음을 먹고, 또 둘 중 누가 그 마음을 받아 주었는지가 모호했다.
물론 그날 밤을 이유로 태건과 결혼까지 성공했다. 그렇다고 해도 자신이 이렇게 또 한 번 이성을 잃는 것은 용납하기가 어려웠다.
이재하는 자기애가 적은 편이었다. 사랑할 수 있던 것이 적었기 때문에 저 자신을 사랑할 마음도 적었다. 그것과는 상관없이, 자신에 대한 확신은 있는 편이었다. 자기애보다는 조금 더 객관적인 시각으로 말이다.
그런고로 재하는 자신의 장점 중 하나가 이성적이며 충동적인 결정을 하지 않는다는 것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이 두 번째라면 그 평가를 물려야 할 때가 온 건지도 모르겠다.
“…….”
재하는 용기를 내어 뒤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침대 위에는 태건이 자고 있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이 침대는 그의 것이니 말이다.
지난밤, 재하는 끝없이 파괴되었다가 재조립되는 느낌이었다.
‘흐으, 그만-!’
‘이사님만 싸면 끝입니까? 매너가 개떡이네. 오메가들한테 박아 줄 때도 이랬어요?’
아니라고, 성관계는 드물었고 오히려 저는 불감에 가까워서 끝까지 갈 수 없었노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그의 두껍고 우둘투둘한 성기가 내벽을 잔뜩 긁고 빠져나갔다가 다시 쑤욱 들어와 융기된 안쪽의 돌기를 잔뜩 긁어 댔기 때문이다.
입을 열면 신음밖에 튀어나오지 않았고, 그것은 지난 관계에서 기억나는 것이 그다지 없는 재하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왔다.
제 입에서 그런 소리가 나올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재하의 변명은 재하의 마음속에서만 몰아치다가 성감에 의해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그러나 태건은 딱히 재하의 대답을 듣고 싶어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게 아니라면 무슨 말을 하려 입술을 뻥긋거릴 때마다 성기를 쑤셔 넣어 나오는 것이 신음밖에 없게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재하는 지난밤을 떠올리다가 아찔해진 나머지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왜 갑자기 러트가 온 것일까?
태건이 먼저 러트를 시작했다면, 억제제는 항생제와 함께 복용하지 못하게 되어 있으므로 항생제를 맞은 그가 억제제를 복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시도하려고 했어도 재하가 말렸을 거다. 그의 러트 시기에는 배우자인 제가 어제처럼 욕구를 해소시켜 주는 것이 맞기는 했다.
그러나 저는 대체 왜?
태건의 러트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다. 알파의 러트에 영향을 받은 오메가가 히트 사이클을 일으키는 개념이 아니라, 영역 안의 같은 알파가 러트를 시작하자 몸의 페로몬 체계가 호승심을 가져 덩달아 러트가 올 수도 있다는 것이다.
더 이상한 점은, 페로몬 향의 변화였다. 평소처럼 옅은 나무 냄새가 아닌 영춘화의 향이었다.
비에 젖은 듯 진해진 꽃의 향기가 태건의 페로몬 향과 섞여 침대맡에 묵직이 고여 있었다.
그 향에 둘러싸여 사정하고 안쪽으로 그를 받은 것이다. 알파 주제에 말이다.
“…….”
재하는 짧은 한숨을 억눌러 참았다. 아직도 밑이 얼얼한 데다가 태건을 받느라 벌어졌던 다리 사이 근육통이 심했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처음처럼 아프지가 않았다. 왜일까. 오메가는 그곳이 성기와 같았지만, 알파인 자신은 그렇지 않았다. 타고 태어나기를 그런 관계를 위한 기관이 아니었는데도 욕심껏 삼키는 게 저에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태건이 말한 것과는 달리 알파와 알파 사이에 아이가 태어나는 일은 없었다. 그것은 알파의 신체 기관이 다른 알파를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난밤은 달랐다. 무언가, 무언가가 평소와는 다른…. 재하는 더 생각하기를 포기했다. 머리가 지끈거렸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안 되겠다 싶어 일어나 나가려던 참이었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왜. 또 지난번처럼 따먹고 내빼시게?”
“헉….”
재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그가 일어나 있는지 몰랐기 때문이다.
심드렁하게 말한 알파가 재하의 허리에 팔을 감아 그에게로 끌고 갔다. 이렇다 할 반항을 할 새도 없이, 근육통에 뻐근한 허리 근육을 무너트릴 수밖에 없었다.
풀썩 안긴 터라 남자의 단단한 가슴팍에 뺨을 붙인 꼴이 곤혹스러웠다. 재하는 조금 황망한 심정으로 두 눈을 꾹 감았다 뜨며 말했다.
“…저는 제 방으로 가겠습니다.”
“가요. 누가 뭐래.”
누가 뭐라 하냐 말해 놓고 재하를 놔주지는 않았다. 허리에 감긴 손이 단단하기만 했다.
덕분에 재하는 방으로 돌아가도 된다고 말한 이에게 억지로 들러붙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가라니까 왜 이래요. 딱 달라붙어서.”
태건은 시큰둥하게 말했다. 재하는 끙, 하고 앓으며 다시금 몸을 일으켜 보려고 했지만 쉽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기 위해 지지할 곳도 마땅치 않았고 태건이 강력한 팔 힘으로 끌어안은 허리를 놔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허리에 뱀처럼 감긴 팔이 똬리를 틀 듯 더욱 조여왔다.
“팔을 좀 치워 주시면….”
“무슨 팔.”
태건은 뻔뻔한 얼굴로 재하를 슬쩍 내려 보다가 눈을 감았다. 다시 잠들겠다는 듯이 말이다.
그의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하며 최선을 다해 빠져나오려 했지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 더 바르작거리던 재하는 그냥 힘을 빼 버렸다. 상처 위를 누르지 않는 것만이 최선이었다.
그러나 어쩐지 억울한 마음이 드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재하는 잠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자꾸 반말하십니까?”
“연하가 되바라지게 굴어야 사랑받는다길래.”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어디서 그런 말을 들은 건지도 모르겠고 아까부터 내내 심드렁한 말투 때문에 진심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재하는 그것이 태건이 저를 놀리는 것으로 알아들었다. 아니면, 은연중에 태건을 향한 마음을 들킨 것인지도 모른다.
약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재하는 장태건의 아침 커피 취향도 모르는데 벌써 두 번이나 잠자리를 하고, 그도 모자라 결혼까지 했다.
이래도 되나 싶기는 했다. 이런 게 보통의 결혼 생활인 걸까. 재하에게는 모범적인 결혼 생활을 보여 줄 주변 사례가 부족했다.
모친은 사랑 없이 결혼하여 재하를 낳았지만, 부친의 사랑을 끝없이 거부해 왔다. 부친은 그런 그녀에게 열등과 애증에 뒤범벅된 앙갚음을 했다. 밖에서 살림을 차린 것이다.
자각이 있는 어른이라면 그러지 않았겠지만, 재하의 부모는 안타깝게도 미성숙한 어른들이었다.
가장 가까운 사례가 그렇게 망해 버렸으니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사는지 들어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러니 저에게 닥친 일들도 어디서부터 비상식적이 되어 버린 것인지 짐작이 어려웠다. 이재하는 제게 올라온 수백 가지의 보고들 중 허수와 실수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은 있지만, 어떤 것이 올바른 부부 관계인지 판단할 분별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 떨어질 거면 이대로 자도 되고.”
태건이 재하의 등을 툭툭 두들겼다. 커다란 손바닥이 등을 두들기는 것이 투박하기 그지없었는데도 어느새 눈이 슬쩍 감겼다.
‘마냥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아….’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이 관계를 긍정적으로 판단하게 되는 것이다.
나쁘지 않아 보여, 괜찮을 것 같아, 그런 불확실한 말로 저를 다독여 본 적이 없던 재하는 자신이 낯설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
“…….”
침실에는 두 개의 숨소리가 고르게 섞여 흘렀고 동이 트려면 조금 더 있어야 했다. 아직 완전히 밝아지지 않아 푸르스름한 빛이 미처 쳐 두지 못한 암막 커튼 사이로 끼쳐 들었다.
물속에 잠긴 기분으로, 재하는 잠에 빠져들었다.
내일 깨면 뭔가가 달라져 있을까? 아니면 이렇게 얼렁뚱땅 서로에게 맞춰서 결혼 생활을 유지하게 될까?
둘 다 나쁘지 않았다. 재하는 마음이 약간 편해져 감기는 눈을 뜨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 * *
러트기는 그렇게 지나갔다.
페로몬 향이 변한 것 같았지만 그저 기우인 듯했다. 이상할 정도로 저를 돋웠던 열기들은 아침에 일어나니 씻은 듯 사라져 있었다.
“배고파.”
멍한 정신을 깨운 것은 그 한마디였다. 재하는 흠칫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를 뒤에서 껴안고 잠든 알파가 재하의 목덜미에 고개를 박고선 중얼거렸던 것이다.
“배고파요…?”
“이재하 씨야 내 걸 잔뜩 먹어서 배가 안 고플지도 모르겠지만.”
“…얼른 뭐라도 해 줄게요.”
재하는 태건의 뒷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서둘러 일어섰다. 냉장고에 뭐가 있으려나.
명순이 장을 봐 온 지 얼마 되지 않았고 어제 같이 식사를 하려고 준비해 둔 게 있으니 대충 차려도 꽤 그럴싸한 것이 나오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
저도 모르게 비명을 속으로 삼킨 재하는 그대로 침대 밑으로 고꾸라질 뻔했다. 뒤에서 재하의 허리를 잡아 준 태건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미련한 거야 용기 있는 거야. 어제 얼마나 해 댔는지 기억 안 납니까?”
새벽에도 그러더니 또 그런다고 태건이 어린애를 타박 주듯 혀를 차며 말했다.
재하는 그의 말이 들리지도 않았다. 그저 숨을 훅 들이 삼키기 바빴다. 태건이 뒤에서 저를 당겨 안는 바람에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도 옷은 입지 않은 채였다. 엉덩이 맨살에 닿는 태건의 고간이 여실히 느껴졌다. 반쯤 힘을 받은 것이 볼깃살에 지그시 눌려 있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화르륵 달아올랐다. 붉어진 목덜미와 귓등을 보며 태건이 피식 웃는 기색이 느껴졌다.
그가 웃느라 살짝 흉곽을 부풀린 탓에 그 단단한 가슴팍이 재하의 등에 닿았던 것이다.
아찔했다. 해가 밝은 시간에 맨몸으로 그의 건강한 하체 위에 올라탄 자신이 말이다.
“놔주세요.”
“왜. 아파 죽겠는데 깡패 새끼가 멋모르고 또 박아 댈까 봐?”
“그런, 그런 생각 한 적 없습니다.”
태건의 말에 놀라 황급히 부정하자 재하의 목덜미에 입술을 붙인 그가 킥킥 웃는다. 재하는 그제야 그것이 그의 농담임을 알았다.
…농담도 하는구나. 재하는 터질 것같이 붉어진 귓등도 모르고 저도 모르게 슬그머니 따라 웃었다.
태건은 더 건들 생각은 없었는지 그대로 재하의 허리를 들어 침대 위에 눕혀 주었다. 재하는 밝은 침실이 민망해 이불을 끌어 제 몸을 먼저 가렸다.
그걸 내려다보며 태건은 봐준다는 듯이 말했다.
“그렇게 가리면 가려져?”
“…안 가린 것보다는….”
“열심히 해 봐요. 기특해지려는 참이니까.”
그러더니 재하의 허리 옆에 손을 짚고는 몸을 내려 쇄골을 콱 물었다. 재하가 놀라 “아.” 하고 신음을 내뱉자 그 부위만 혀로 삭 핥아 준 뒤 몸을 일으켰다.
“가만히 누워서 수발 받아요. 얼쩡거리면 식탁에서 하자는 소리로 들을 테니까.”
그 말은 조금 무서웠다.
저도 알파로 태어나 꾸준히 운동을 하고 몸을 가꿨는데도 매번 밤을 보내고 나면 이렇게 탈탈 털어 먹힌 것처럼 체력이 바닥나는 것 같았다.
잔뜩 벌어졌던 허벅지는 오므리는 것도 힘들 정도였다. 말하기 민망한 곳에 아릿하게 느껴지는 둔통이나 태건이 꽉 쥐는 바람에 살짝 멍이 든 볼기도 아팠다.
그래도 아예 누워 있을 수는 없어 한 번 개겨 보았다.
“도와드리고 싶습니다.”
태건은 침대 바닥에 떨어져 있던 홈웨어 팬츠를 주워 입고 있었다.
속옷도 안 입고 바지만 다리에 꿴 상태라 거뭇한 음모와 양감이 두툼한 성기가 어렴풋이 면이 얇은 팬츠 위로 드러났다.
재하는 그곳에서 눈을 돌리려고 애썼다. 노력이 빛을 발한 것인지 태건은 재하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그대로 상체를 숙여 재하의 앞머리를 쓸어 주며 말했다.
“박명순이 살림살이 제대로 준비해 두는지 감시도 해야 하니까 그냥 있어요.”
“…….”
“아니면 내가 냉장고 뒤져 볼 때 이재하 씨는 내 바지 안에 뭐 들었는지 뒤져 봐도 되고.”
…안 들키긴. 다 들켰다. 재하는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태건이 다시 한번 더 피식 웃는 것이 느껴졌다.
손바닥을 떼지 않고 있는 재하의 귀로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방 안에 혼자 남겨진 재하는 그러고 보니 그의 방에서 자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외박했네.”
저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그가 쓰던 물건이라는 걸 생각하니 가슴 언저리가 저며 왔다.
묵직한 명치가 이상했다. 이 감정에 ‘뿌듯하다’보다 훨씬 더 나은 이름을 붙여 주고 싶었는데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았다.
태건의 방은 2층이니 그가 늦은 아침을 준비하는 소리는 침실까지 들리지 않았다.
‘조금만 누워 있다가 방 구경을 몰래 해 보자.’
재하는 꾸벅꾸벅 감기는 눈을 참지 않으며 그렇게 생각했다. 아주 잠시만 눈을 붙이고 있다가 태건이 식사를 준비하기 전에 일어나 태건의 방을 둘러보는 것이다.
휑한 방이지만 그래도 그가 사용하는 곳이니 옅은 바다 소금 냄새와 해당화 향이 여기저기서 느껴졌다.
어쩐지 무척이나 차분해지는 기분이었다. 재하는 까무룩 잠이 들었다.
다시 눈을 뜬 것은 태건이 직접 재하를 깨웠을 때였다. 재하는 그제야 아랫도리에 뭐라도 걸칠 수 있었다. 그가 드디어 옷을 입는 걸 허락해 주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은 그대로 식당으로 내려갔다. 보기에는 형편없지만 먹어 보면 의외로 먹을 만한 것들이 식탁 위에 있었다.
입에만 넣으면 괜찮은 거 아니냐는 뻔뻔한 주방장을 보며 재하는 이제부터 식사는 제가 준비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먹을 만했을 뿐 맛이 있던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에게 직접 한 무언가를 주고 싶은 마음이기도 했다.
재하는 간간이 웃었고 태하는 그런 재하를 앞에 두고도 표정이 없었지만, 여느 때와 다르게 부드러운 분위기를 품고 있었다.
머리를 내린 태건을 보며 처음으로 저보다 어려 보인다는 생각을 잠깐 했다.
무례한 생각을 하고 있던 걸 들켰는지 재하는 아일랜드 식탁 위로 올라가 다리를 벌려야만 했다.
아프니 넣지 않겠다는 말은 들었지만 애무를 멈춰 주지는 않았다. 재하는 차가운 대리석 식탁 위에 상반신을 걸친 채로 뒤에서 나는 물기 젖은 소리를 감내해야 했다.
먹었던 음식 접시 옆에서 뒤가 빨리는 경험은 재하의 무언가를 무너트렸다. 애원하고 싶었는데 신음이 튀어나와 그마저도 요원한 일이 되어 버렸다.
재하는 그날 열기 가득한 뺨이 차가운 대리석 판에 대어지는 느낌을 처음 알았다.
그렇게 강렬한 기억 때문에 재하는 태건의 방을 둘러보지 못했다는 걸 나중에서야 깨달았다.
이재하는 그게 무척이나 아쉬웠다.
그 이후로 그런 기회는 또 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집으로 돌아오지 않는 그를 기다리며 태건의 굳게 닫힌 방문 앞에서 멀거니 바라만 보다가 밤을 새워 버리는 날은 무척이나 많았지만, 다시금 그의 침대 위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재하는 오래도록 그것만이 아쉬웠다.
* * *
그날의 분위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이재하는 이런 걸 행복이라고 부르는구나, 라는 감상에 젖어 있었다.
“상처 좀 보여 주세요.”
“하고 싶어? 벗어 줄까?”
태건은 무표정으로도 느물거리는 재주가 있었다. 함의한 뜻이 민망하기 그지없는 것이라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바라보면 금세 발뺌한다.
“섹스 생각했어? 난 그냥 옷 벗을까 물어본 건데. 치료해 준다며.”
그렇게 뻔뻔하게 말하고는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는 꼴이 야하기 그지없었다.
깊게 파고들지 않았다며 꿰맬 생각이 없어 보이는 태건을 위해 재하는 매일 저녁 그의 상처를 소독했다.
대체 어떻게 된 회복력인지 나날이 아물어 가고 있었지만, 그는 배가 뚫려도 샤워를 건너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감염이 걱정된 재하는 늘 그의 상처를 소독하자며 쫓아다녀야 했다. 문제는 그가 너무 늦은 시간에만 귀가를 한다는 것이다.
오늘도 그가 돌아오는 시간에 맞춰 일어나기 위해 소파에서 잠들었던 재하는 약간 멍한 정신으로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그가 다 씻을 동안에도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한 채 멍한 상태였다. 정신을 차리려 노력하며 재하는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는 젖은 머리의 태건에게 상처를 치료해 주겠노라 말했다.
그 극성에 당해 주겠다는 듯, 태건은 느릿느릿 재하가 구급상자를 준비해 둔 거실 소파로 걸어왔다.
“졸려 보여요.”
“…아닙니다.”
태건의 말에 부정해 봤지만 잠결에 살짝 부은 얼굴과 까치집이 된 머리는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평소라면 그것들을 정리하여 단정한 상태로 매만졌겠지만, 꽤 졸린 상태의 재하는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았다.
벌써 며칠째 새벽에 귀가하는 그를 기다렸다가 상처를 치유하고 잠이 드는 일을 반복했는지 모른다.
그의 일이 바쁜 것이니 인수인계가 거의 마무리되어 가는 재하가 깨어 있는 수밖에 없었다.
바늘 하나 안 들어가게 생겼다는 평을 듣는 이재하는 의외로 잠이 많았다. 어릴 때는 그게 약점처럼 보일까 봐 잠을 줄이려고 일부러 노력했던 적도 있었다.
눈꼬리에 엉겨 붙은 잠이 보이면 가뜩이나 상처 소독을 귀찮아하는 태건이 심드렁한 얼굴로 손을 저을까 봐 재하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했다.
태건이 그런 재하를 소파에 끌어당겨 앉히고는 저 역시 옆에 앉았다.
“해 봐요.”
그러고는 어디까지 까불지 봐 주겠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웃긴 것은 그게 같은 알파로서의 자존심을 전혀 자극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재하는 늘 타인의 우위에 서 왔다. 그곳이 어디건 말이다.
그것은 이재하가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유신에서 우성 알파로 태어나 굳이 남을 짓누를 필요도 없이 자연스레 그들의 머리 위에 구둣발을 올려 둘 수 있었다.
그러나 장태건은 그런 걸 모른다는 듯 행동했다. 아니, 알고는 있지만 무슨 상관이냐는 듯이 말이다.
재하는 태건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남자가 되는 기분이었다. 그게 못 견디게 부끄러운데 한편으로는 좋았다. 자신이 장태건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게. 그가 저를 인간 대 인간으로 대우해 주는 것 같아서.
소파에 등을 기대고 배부른 짐승처럼 늘어져 내리깐 눈매로 저를 지그시 바라보는 태건을 향해 몸을 살짝 숙였다.
그가 샤워하는 동안 다 젖은 붕대를 풀기 위해서였다. 재하는 코끝에 닿는 해당화 향이 물기에 젖어 있다는 걸 깨달았다.
마침 창밖에도 비가 오고 있었다. 재하는 몇 번을 망설이다가 물었다.
“…이런 일이 잦습니까?”
“배에 구멍 뚫리는 일 말입니까?”
태건은 그런 재하에게 느리게 대답했다. 어느새 잠이 깬 재하는 조도가 낮은 거실을 떠돌아다니는 밤의 고즈넉한 기분에 꽉 잠겨 있었다.
거실에는 두 알파뿐이었다. 장태건과 이재하. 그걸 깨닫자 어딘가 간지러운 기분이 들었다.
“모르겠네.”
태건이 생각해 보지 않았다는 투로 말하며 손을 뻗어 재하의 판판한 배를 어루만졌다. 불시에 닿아 온 감촉에 재하가 숨을 들이 삼켰다.
“여기가 깨끗하기만 한 이사님이 보기에는 잦을 거긴 한데, 그래도 신혼이니까 몸 관리 하겠습니다.”
신혼이라는 말에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던 재하는 약간 조급한 마음에 중얼거렸다.
“신혼….”
“신혼 뭐.”
되묻는 태건의 말에서, 어쩐지 재하의 다음 대답을 기대하는 것같은 어조가 묻어 나왔다. 재하는 짐짓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신혼이 아니더라도 몸 관리는 하셔야 합니다.”
태건이 재하의 말에 피식 웃었다.
그러더니 복근을 슬슬 문지르고 있던 손을 더욱 뒤로 뻗어 허리를 받친 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다른 팔로는 재하의 무릎 아래에 손을 넣어 다리를 제 허벅지 위에 올려 두게 했다.
졸지에 재하는 태건의 무릎 위에 앉은 것도 뭣도 아닌 어정쩡한 자세로 안겨야 했다. 아주 어린 시절에도 이처럼 남에게 안겨 본 적이 없던 터라 허리를 잔뜩 세우고 근육을 긴장시켰다.
재하가 그렇게 긴장하는 건 상관없다는 듯이, 장태건은 느슨하게 풀어진 눈매로 재하를 바라보며 그의 허벅지를 찬찬히 쓸었다.
“몸 관리? 나 그런 거 못 해.”
“제 말은 그러니까….”
“평생 쫓아다니면서 챙겨 주든지.”
태건은 그렇게 말하며 재하의 허리를 한 번 더 끌어당겨 안았다. 두 사람 사이에는 틈이라고 부를 만한 것이 남지 않게 되었다.
재하는 그를 살짝 올려다보았다. 태건은 웃고 있었다. 당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뭐에 당한 건지는 모르겠는데 그냥 그런 생각이 들었다. (토 리)대체 누가 사랑을 그렇게 찬미했던가. 지금 저를 울리는 이 감정은 재하의 숨을 앗고 꼼짝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럼 이건 그냥 구속 아닐까. 재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그런 재하에게 태건이 대답을 재촉했다. 피식 웃고 있는 태도가 심장이 두방망이질 치고 있는 재하에 비하여 훨씬 여유로워 보였다.
그가 질감 좋은 입술을 달싹이며 말했다.
“왜 대답을 안 해요. 사람 쫄리게.”
“…챙겨, 주겠습니다.”
“고마워서 어쩔 줄을 모르겠는데 몸으로 갚아도 될까요?”
태건은 그렇게 말하며 재하의 대답은 듣지도 않은 채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말캉한 점막의 감촉에 놀란 재하가 어깨를 움츠리려다가 태건이 불편해할까 봐 겨우 자세를 바로 했다.
“…치료부터 해야 합니다.”
“하라니까. 누가 말린 적 있어요?”
또 그렇게 자연스러운 억지를 부린다. 재하는 그의 위팔을 밀어내려다가 그냥 힘을 풀어 버렸다.
소독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만 멍하게 들 뿐이었다. 귓가에 태건의 숨소리가 몰아쳤다. 창문을 뒤흔드는 집 밖의 태풍 같았다.
재하는 그 태풍이 영원히 지나가지 않기를 바라는 것인지, 그게 아니면 지금 당장이라도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고 싶은 것인지 헷갈리기 시작했다.
“집중해야지, 이사님.”
태건이 재하의 턱을 잡은 뒤 입술에 입술을 묻으며 말했다. 맞닿은 점막 사이로 그의 숨결이 느껴졌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았다. 이미 태풍 속이었다.
* * *
한동안 그렇게 평화로운 신혼 생활이 계속되었다.
그날도 재하는 이재호에게 여러 가지 일들을 설명하던 참이었다. 임원이 바뀐다고 해도 이런 인수인계는 원래 후임으로 올 임원을 담당할 비서진들이 하지만 이재하는 이재호를 신뢰하지 않았다.
“전자에서 왜 제약 쪽을 신경 써야 한다고?”
“…그건 지금 유신제약이 준비하는 가정 보급용 의료 진단 키트에 유신전자의 기술협력이…. 아, 씨발….”
이재호는 짜증이 난 듯 욕을 지껄였다. 이재하는 기분이 상할 것도 없었지만 형식상 한쪽 눈썹을 추켜올리고 페로몬을 살짝 풀어 이재호를 위협했다.
이재호와의 관계에서는 그냥 넘어가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서열을 확실히 해야 두 번 기어오르는 일이 없었다.
딱히 이재호에게 사감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걸어오는 싸움을 피할 정도로 무골호인은 아닌 탓이었다.
바닥에 낮게 깔린 물푸레나무 향이 위협적으로 열성 알파를 압박하자 이재호의 안색이 금세 흐려졌다.
“아, 아니…. 내가 형한테 욕한 게 아니라….”
“이재호 이사보. 엔터 쪽에 있을 때도 이렇게 회사에서 언행 함부로 했나?”
“아, 뭘 또…. 그런 거 아니라고.”
이재호는 싸우다가 교무실에 끌려온 고등학생처럼 투덜거렸다. 재하는 혀를 쯧 찰 수밖에 없었다.
이재호가 고쳐 쓸 수 없을 정도로 모자란 것은 아니었다. 그도 나름으로 유신의 사람으로서 꽤 괜찮은 교육을 받았고, 김란희가 이를 갈고 실무진들을 뽑아 놓은 덕에 실적이 그가 엔터에 있었을 때처럼 개판 나지는 않을 것이다.
엔터에서도 뚜렷한 성과가 없다 뿐이지 작정하고 사고를 치는 건 또 아니었다. 단독으로 투자를 밀어붙였던 영화의 성적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투자가 들어간 영화에 출연한 연예인 몇 명을 건들기는 했지만, 그쪽에서도 이재호를 발판 삼아 배역을 따내려는 속셈이 있었으니 나름 윈윈인 거래였다.
재하는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정신 좀 차리고 해. 너는 시야가 좁으니까 사업 결정할 때는 실무진들이랑 꼭 회의하고. 그것만 빼면 사고 칠 일 없을 테니까.”
“…이건 또 무슨 욕이야.”
이재호의 얼굴이 작게 일그러졌다. 약간 민망한 것 같기도 하고 부정할 구석이 없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재하는 그 모양을 가만히 보다가 쯧, 혀를 찼다.
“아버지가 아직도 골프채 드셔?”
재하의 부친 이익형은 이재하에게 매를 든 적은 없었다.
이재하가 이익형이 사랑했던 재하의 모친의 외양과 닮은 구석이 많기 때문이기도 했고, 재하 자체가 성장하며 단 한 번도 혼날 만한 일을 저지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익형은 이재호에게만은 달랐다. 그는 수시로 이재호를 폭행했다. 아주 어릴 때부터 말이다.
그 탓에 이재호는 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약간 말을 더듬었다. 김란희가 중정 한가운데서 제 목에 칼을 들이밀며 이익형에게 경고하지만 않았어도 어린 이재호는 이익형의 폭력에 의해 뚜렷한 장애가 남았을지도 모른다.
김란희의 자살 협박 이후로 이익형은 뚜렷한 이유가 있을 때만 이재호를 체벌했다. 지금도 사소한 실수 등으로 이재호를 회장실로 불러 9번 아이언으로 때린다는 걸 알고 있다.
물론 이재하도 이재호가 기어오를 때면 묶어 놓고 패기는 한다. 그러나 그것은 경고의 의미로 이익형처럼 마구잡이식의 폭행은 아니었다.
가끔 이재호와 함께 스파링을 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호신술을 배울 거면 복싱을 알려 주겠다는 재하의 말에 이재호는 질색을 하면서도 재하와 같은 체육관을 다녔다.
최근에는 꽤 스파링 실력이 늘어서 오고는 했다. 그래 봤자 아직도 재하에게는 제대로 된 잽을 날리지 못하지만 말이다.
이재호는 재하의 말에 눈시울이 삽시에 붉어졌다가 이글거리는 눈으로 이재하를 노려보았다.
“뭐, 니는 안 맞고 사니까 내가 우스워? 씨발, 같은 알파랑 구멍 맞추고 사는 주제에 개새끼가 나를 무시하고, 씹, 악-!”
재하는 무표정으로 이재호에게 다가가 귀를 잡아당겼다.
“뭐, 뭐 하는 거야! 이거 안 놔?!”
“당황하거나 긴장하면 욕하는 버릇 좀 고쳐. 아버지한테 빌미 주지 말고.”
귀가 떨어져 나갈 것같이 아픈지 이재호는 오만상을 찡그리며 제 귀를 잡고 있는 재하의 손을 떼어 내려 노력하면서도 그 말에 약간은 멍한 눈을 했다.
“난 마음 접었으니까 너라도 잘해 봐야 할 것 아냐. 너 같은 양아치 새끼한테 중요한 걸 맡긴 사람 심정도 생각해 봐.”
재하는 단조롭게 말했다. 이재호가 귀가 아프다고 악악 소리 지르거나 말거나. 할 말을 끝낸 뒤 잡고 있던 것을 놔주자 이재호가 새빨개진 얼굴로 귀를 부여잡았다.
“아오! 그럼 말로 하면 되지, 왜 지랄인데!”
“이재호 이사보. 목소리 낮춰요.”
재하는 다시 서류철로 시선을 돌리며 읊조렸다. 이재호의 성난 숨소리가 씩씩거렸다.
“…나, 나한테 맡긴 게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거라고…?”
“그래. 유신에 내 친모 지분이 꽤 많이 들어갔다는 거 이사보도 아는 내용일 텐데.”
“그, 그건 알지만….”
뭐라 웅얼거리는 재호의 말에 집중하지 않은 채, 재하는 시계로 시선을 돌렸다.
얼추 러시아워 전에 퇴근해야 태건이 오기 전에 저녁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재하는 요즘에 요리 학원도 간간이 다니는 중이었다. 집으로 선생을 불러도 되지만 퇴근길에 들르면 요리한 것을 집으로 가져갈 수가 있어 좋았다.
커다란 알파가 오메가들 사이에서 앞치마를 맨 채 감자 깎는 일에만 익숙해지면 나이가 지긋한 오메가들이 주는 주부 생활 팁 같은 것도 얻을 수 있어서 나쁘지 않았다.
오늘 배울 것은 토란 닭찜이었다. 토란을 넣은 닭찜의 맛이 잘 상상 가지 않아 기대하는 중이었다. 재하가 요리 학원 메뉴에 대해 생각하고 있을 때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이재호가 갑자기 저 혼자 열이 오른 듯 불퉁하게 지껄였다.
“니는 제일 좆같은 게 그런 거야. 누구는 여기 앉으려고 무슨 짓을…. 몇 년을 비켜 주지도 않던 주제에 웬 알파 새끼가 다 버리고 오라니까 단번에 그러겠다고 하질 않나. 넌 이게 다 장난 같지, 씹새끼야.”
…네가 요즘 덜 맞았구나.
재하는 서류철을 내려놓고 배다른 동생의 입버릇을 다시금 바로잡아야겠다 생각하며 일어섰다.
손목을 살짝 털어 손목시계를 내려다본 재하는 남은 시간에 대해 생각했다. 15분 정도의 여유가 있어 보였다. 그가 엄지로 검지를 꽉 눌러 손가락 관절로 뚜둑 소리를 내며 재호에게 향했을 때다.
“야, 야! 때릴 거면 반지라도 빼고….”
결혼한 날 이후부터 결혼반지를 손에서 빼 본 적 없었기 때문에 그런 말은 그냥 무시했다.
주먹을 모양 잡아 쥔 것을 본 이재호가 가드를 올리며 몸을 주춤거릴 때였다. 위잉, 하는 소리와 함께 책상에 올려 두었던 전화기가 울렸다.
재하는 한껏 졸아붙은 이재호를 흘끗 보고는 다시 몸을 돌려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 장창식 회장
액정에는 그다지 달갑지 않은 다섯 글자가 떠 있었다. 재하는 액정이 이재호에게 안 보이게 들어 자신의 재킷 주머니에 넣고는 아직도 가드를 내리지 못하고 있는 이재호를 지나쳤다.
한참 가드를 올려도 공격이 오지 않자 팔을 슬쩍 내려 본 이재호가 등 뒤에서 재하를 불렀다.
“…야! 어디 가! 오늘 같이 저녁 먹자고….”
“혼자 먹어라. 숙제 다 해 놓고.”
그는 망설이지 않고 이사실을 나서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네, 할아버님.”
- 아, 이 이사! 잘 지냈고?
“네. 덕분에 불편한 거 없이 지내고 있습니다.”
장창식은 껄껄 웃기 시작했다. 혼수로 가져온 것들이 꽤 만족스러웠는지 호의가 가득한 목소리였다.
재하는 상대방이 보이지 않는데도 시종일관 공손한 태도로 전화를 받았다. 이사실 비서가 그런 재하를 보고 일어섰다가 다시 앉았다. 재하는 그녀를 흘끗 보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어갔다.
- 바쁘진 않나? 내가 이 이사한테 할 말이 있는데….
뒷말을 뜸 들여 이재하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았다. 난감한 마음으로 이재하는 몇 주 전에 대해 떠올렸다.
장창식의 전화를 받고 나간 자리 이후, 태건은 아주 미묘한 태도로 재하를 대했었다. 그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고 태건은 그에게 어디를 간 것이냐고 따져 물을 수가 없어 내내 마냥 기다려야만 했다.
그를 기다릴 수는 있지만 그가 그렇게 집에 들어오지 않고 제대로 휴식하지 못하는 건 싫었다.
아무래도 집이 편할 텐데 저를 피하느라 굳이 그런 생활을 다시금 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재하는 몇 번 입술을 말아 물다가 단호하게 말했다.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습니다.”
- …장 실장이 시키던가? 내 전화 오면 나가지 말라고.
“아닙니다.”
느리지도 빠르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러나 노인은 그다지 믿는 기색이 아니었다. 재하 역시 상대가 순순히 믿을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었다.
- 음, 장 실장 성격이 좀 모난 구석이 있어 놔서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겠지마는….
“할아버님 일로 저에게 따로 말한 건 없습니다. 그런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다만 오늘은 제가 인수인계 일로 조금 다망한 참이었습니다.”
이재하는 다시금 공손하게 말했다. 잠시간 침묵을 유지하던 장창식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 …그래. 이 이사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음, 다음엔 이 이사 마음 불편하지 않게 거절 안 하게끔 내가 잘해 봐야겠어.
“…제가 잘하겠습니다, 할아버님.”
그래, 하고 사람 좋은 척하는 장창식이 껄껄 웃었다.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 * *
일찍 퇴근한 재하는 그 후 요리 학원에 들러 토란 닭찜이라는 요리를 완성했다. 음식이 식을까 법랑 냄비째로 보자기에 싸 왔다.
집에 온 뒤로는 냄비 위에 보온용 천을 덮어 두고는 솥밥을 하기 위해 작은 무쇠솥을 꺼내 들었다.
손만 씻고 솥밥을 안친 뒤 뜸만 들이면 될 때 샤워를 하고 나왔다.
시간을 보니 벌써 8시였다.
태건이 올 때가 됐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전화를 해 보고 싶었지만, 괜히 재촉하는 것 같아 망설여졌다.
여느 날과 다를 게 없는데 왠지 모르게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엇이 마음에 걸리는지 한참 생각하고 나서야 장창식의 전화를 떠올렸다.
그리고 재하의 직감은 잘 맞는 편이었다. 공교롭게도 그때 현관 쪽에서 소음이 들려왔다.
소파에서 살짝 졸며 오지 않는 태건을 기다리던 재하는 놀라 몸을 일으켰다. 현관 쪽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심상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사님! 이쪽…!”
“장 실장!”
장태건이 현관 복도 벽을 짚고 있던 손을 움직여 새빨갛게 젖은 제 옆구리를 막았다. 박명순이 태건을 부축하고 있었지만, 그의 골격근량이 상당한지 힘들어 보였다.
그러다가 버티기 힘든지 손을 뻗어 복도 벽을 짚었다. 태건은 그대로 주르륵 미끄러졌다.
“장태건 씨!”
재하는 놀라 소리쳤다. 미색의 벽면에 빨간 핏자국이 포물선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이사님, 형님 오른쪽 좀 부축해 주십시오.”
달려가 명순이 부축해 달라는 쪽에서 태건을 받쳐 올렸다. 그의 몸은 몹시 차가웠다. 바지가 검은색이라 몰랐는데 다 피에 젖은 참이었다. 복부에서 흘러내린 피에 젖은 듯했다.
그게 그대로 재하의 홈웨어 팬츠에 묻어 나왔다. 제 바지까지 다 젖을 정도의 출혈량에 대해 떠올리자마자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불안감에 의한 것이었다.
가까이서 본 태건은 눈이 게게 풀려 있었다. 지난번 멀쩡하게 들어와 다 제 피는 아니라며 셔츠를 걷어 보이던 때와는 안색이 완전히 달랐다.
재하는 당황했던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명순에게 물었다. 태건에게서는 일부러 시선을 떼어 냈다. 도저히 그를 보고 있을 수가 없었다.
“…장한에서 고용한 의사가 따로 있습니까?”
명순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오고 있습니다. 일이 이렇게 되어서 이사님께는 면목이….”
“그건 됐습니다. 지혈해야 하니까 구급상자 가져오세요, 명순 씨.”
2층인 태건의 방으로 갈 수는 없어서 재하는 제 방으로 들어왔다. 그를 제 침대에 조심히 눕히며 구급상자를 가져오라 말했다.
명순이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빠져나갔다. 태건은 아직도 눈이 풀려 있었다. 초점을 잃은 듯 허공을 헤매다가 재하를 발견하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재하는 그가 말하기 편하게 침대에 걸터앉은 채 상체를 조심히 기울여 귀를 가져갔다.
곧이어 태건이 작게 속삭였다.
“나 좀 잘 테니까 박명순이랑 바람피우지 말고 얌전히 있어요. 일어나 봤는데 붙어먹고 있으면 명순이 자지 잘라 버릴 거니까.”
“…바람 안 피웁니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그리고 지금 잠들면 안 됩니다. 의식 잃으면 안 돼요.”
재하는 무표정으로 빠르게 말했다. 걱정에 얼굴이 굳어 그 어떤 표정도 짓기가 힘들었다.
명순이 상자를 찾아올 때까지 태건의 손을 치워 내고 자신이 직접 창상 부위를 눌렀다. 멎으려면 꾹 누르고 있어야했는데 장태건은 그냥 대고 있는 수준이었기 때문이다. 피가 멈추지 않아 미칠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어쩌다 이렇게…. 멀쩡하게 말하고 행동했던 지난번과는 다르다는 생각이 떠나가지 않았다.
불안해서 미칠 것 같았다. 이재하는 이런 초조함은 처음 느껴 보았다. 그의 체온이 낮다고 생각하니 토할 것같이 속이 울렁거렸다.
태건의 안색은 점점 창백해져 갔다. 그게 눈에 보일 때마다 상처를 더 세게 눌렀다. 제발 피가 멎기를 바랐다.
그러다 너무 세게 눌렀는지 태건의 입술 사이에서 윽, 하는 신음이 작게 흘렀다.
“나한테 삐졌어? 왜 이렇게 아프게 눌러.”
태건이 그런 재하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가 웃는 기색에 재하는 열이 오를 것 같았다. 눈시울이 저절로 붉어지는 기분이었다.
말로 형용하기 힘든 기분이 들었다. 속 안을 답답하게 누르고 있는 무언가가 그대로 뻥 터져 버릴 것 같기도 했고 그대로 굳어 천년이 지나도 씻겨 내리지 않을 것 같기도 했다.
재하는 목 막힌 음성으로 겨우 대답했다.
“…삐지다뇨, 다친 사람한테 그게 무슨….”
“근데 왜 이렇게 화났어요.”
“…….”
“아닌가. 슬픈 건가.”
눈은 게게 풀려 있는 주제에 정곡을 찌르는 게 어이없었다.
그가 슬쩍 뻗어 오는 손을 잡아 내린 재하는 방문 쪽을 바라보았다. 명순이 가져올 구급상자가 급하기도 했지만 뭔가 말이 튀어나올 것 같아서 참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 감정은 또 처음이었다. 누군가에 대한 걱정 때문에 전신이 덜덜 떨리는 감각. 문득문득 느껴지는 공포심까지.
재하에게는 도무지 익숙하지 않은 감정이었다.
“이사님!”
그때 명순이 구급상자를 가져왔다. 재하는 하얗게 질린 얼굴로 일어나 구급상자를 받아 들고 탈지면을 여러 겹 겹쳤다.
지혈제를 그의 상처 위에 뿌렸다. 소독 같은 걸 할 수도 없었다. 직경 5cm 정도 되는 창상은 지난번보다 그 크기가 작았지만 깊이가 달랐다.
회칼에 쑤셔진 듯했다. 재하는 그 위에 지혈제를 넘치도록 뿌린 채로 탈지면으로 꾹 눌렀다. 손이 다 피에 젖고 침대 시트도 엉망이 되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아파.”
장태건은 무감하게 중얼거렸다. 동공이 확장된 것 같아 걱정스러웠다. 과다 출혈로 인해 그저 복근을 누르고 있음에도 맥박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심장으로 혈액이 돌아오지 않아 맥박 수가 증가하고 교감신경이 흥분한 탓에 동공이 확장된 것일 테다. 기본적인 과다 출혈에 대한 반사 반응을 떠올리며, 이재하는 제가 갖고 있던 보건 상식을 눈앞에서 목도하게 된 것에 대해 끔찍한 감정을 느끼는 중이었다.
여기서 혈압이 더 내려가면 어떻게 되는 건지 상상하기가 싫었다. 어떻게든 조치를 해야 할 텐데 뭘 더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지속적으로 말을 시켜 의식을 잃지 않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속으로는 누구에게 비는지 모르게 계속해서 기도 중이었다.
제발 아무 일 없기를, 어서 누구든 와서 이 알파를 살려내기를 기도했다. 상처를 막고 있는 제 손이 죄다 빨갛게 젖은 게 끔찍해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초인종이 울렸다. 명순이 벼락같이 튀어 나갔다. 곧이어 우당탕거리는 소리와 함께 명순이 의사로 보이는 중년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 들다시피 끌고 들어왔다.
재하는 누르고 있던 손을 떼어 낼 수 없었지만, 누군지도 모르는 남자를 보자마자 저도 모르게 안색이 희미하게 밝아졌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무엇보다 바랐던 것이 태건의 주치의였으니까.
“이것 좀 놔!”
떠밀려 방 안에 들어온 남자가 짜증을 냈다. 재하는 상처 부위를 누르고 있던 손을 떼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서 빨리 태건을 봐주었으면 좋겠는데 그대로 굳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시종일관 급하지 않은 태도였다. 그가 왕진 가방을 침대 위에 올려 두며 중얼거렸다.
“결혼했다더니 괜히 애먼 사람한테 거지 같은 경험이나 하게 하고, 장태건 이 자식은 하여간….”
“선생님, 말씀 좀 조심히 하십시오. 얼른 치료 시작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명순이 낮게 경고하듯 말했다. 그가 그렇게 싸늘하게 말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하려고 하잖아. 이 시간에 개 끌리듯 끌려왔는데 불평도 못 해? 돈도 많은 새끼들이 왜 병원은 안 가고 맨날 나를 부르냐고.”
의사는 짜증을 냈다. 저보다 배는 큰 것 같은 명순을 향해서 화를 내는 게 하루 이틀 일이 아닌 것 같았다.
다 좋으니 장태건의 상태나 어서 봐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그가 다가와 재하가 막고 있던 태건의 창상 부위를 흘끗 보았다.
곧이어 그가 재하의 손을 치워 내고는 가방에서 식염수 통을 꺼냈다. 그러고는 재하를 향해 말했다.
“뭐야, 당신 의사야?”
“…아닙니다.”
“그럼 나가 계셔. 상처 꿰맬 거니까.”
“…….”
그냥 옆에 있겠다고 말하려던 재하는 명순까지 나가 있을 것을 권하자 어쩔 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방문 밖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대로 문밖에서 서성였다. 조금 뒤 명순이 나왔다. 재하는 살짝 열린 방문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의사가 태건의 팔뚝에 링거 바늘을 꽂아 수혈팩과 연결시키고 있었다. 명순이 재하를 향해 고개를 꾸벅였다.
“이사님 놀라셨죠. 앞으로 이런 일은 또 없을 것입니다.”
“…지난번에도 다쳐서 왔어요. 그때 장 실장은 이런 일이 잦을 거라고 했습니다.”
“그게…. 그래도 형님까지 이렇게 되는 일은 정말 드물 겁니다. 형님도 장담하셨습니다.”
재하는 표정을 굳혔다. 아예 없다는 얘기를 하지 않는 게 그가 이렇게 다쳐 온 일이 아직 끝나지 않았거나 진행 중이라는 뜻이라는 걸 깨달은 것이다.
속으로 몇 가지를 가늠해 본 이재하는 명순에게 물었다.
“명원건설 일입니까?”
명원건설은 또 다른 기업형 조폭 회사로 우량 기업이 상장을 성공시키면 그 회사의 대표를 납치하여 협박한 뒤 인수 합병을 하는 식으로 세를 불렸다.
협박에 의한 인수 합병은 전혀 돈이 들지 않으니 명원의 몸집은 공룡처럼 커져가는 중이었다.
장창식은 이 명원건설에 불만이 많은 듯했다. 장한건설의 후발 주자인데 무서운 속도로 성장하고 있는 데다가 장한이 근래에 주춤하자 그 틈을 치고 나오니 그에게 꽤 위협이 된 것 같았다.
재하는 태건과 결혼 전 장한에 대해 조사할 때 명원에 대해서도 알게 되었다. 두 그룹 간의 알력 다툼이 어제오늘 일이 아닌 데다가 명원의 대표는 장창식의 고향 후배라고 했다.
말이 고향 후배지 창식의 밑에서 굴러먹던 놈이 독자적으로 사업을 성공시키고 세를 불리는 것에 성공했다는 뜻이다. 말년으로 갈수록 욕심이 더욱 불어난 장창식이 이를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일촉즉발의 상황 속에서 최근 장창식은 인홍 신도시 건설 경쟁 입찰에 뛰어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명원도 입찰에 참여했다는 것이었다. 다른 곳들은 두 조폭 회사가 경쟁에 뛰어들었다고 하자 더러워서 피한다는 식으로 입찰을 포기했다고 하니, 장창식으로서는 이곳에서 물러나면 후배 조폭 격인 명원에 꼬리를 마는 꼴이 되는 것이다.
욕심이 많은 그가 제 손자에게 무슨 지시를 내렸는지는 뻔했다.
재하는 돌아가는 상황에 대해 찬찬히 생각한 뒤 서늘한 말투로 물었고, 아니나 다를까 명순은 재하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답이 충분하여 재하는 바로 현관으로 향했다. 차 키와 핸드폰만 간단히 챙긴 채였다.
“이사님!”
뒤에서 명순이 그를 불렀지만 뒤돌아보지 않았다. 손을 닦고 나올 걸 그랬다고 후회한 것은 현관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단독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을 때였다.
이미 말라붙은 피 때문에 손가락이 구부러질 때마다 피부가 수축된 듯 땅겨 왔기 때문이다. 핸들을 쥐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지금도 손이 벌벌 떨리는데 운전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 싶었다.
재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고 노력했다. 그가 이렇게 다쳐 오고, 또 다칠 일이 남아 있다면 이재하는 이재하의 방식으로 장태건을 보호해야만 했다.
그것이 이재하가 상대를 사랑하는 방법이었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그의 마음에 와닿은 적 없어 몰랐던. 다소 이기적인 외사랑에서 발화된 행동이었다.
굳은 얼굴로 엘리베이터 계기판의 숫자가 점점 낮아지는 걸 바라보았다. 곧이어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고 주차되어 있던 세단 쪽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이사님.”
“…고 비서님?”
창식의 수족, 고 비서였다. 그는 재하를 향해 정중히 인사하며 아직 시동이 꺼지지 않은 검은 세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회장님이 뵙고 싶어 하십니다. 같이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 말에 재하는 서늘하게 가라앉은 얼굴을 했다. 아예 모시러 오다니. 예상보다 반응이 너무 빨랐다.
비로소 창식이 원하는 바가 명확해졌다. 어쩌면 태건이 그렇게 칼에 찔린 것도 장창식의 계획 안에 있는지도 몰랐다.
이재하가 나설 거라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겠지.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있어요.’
지난번 장태건은 분명히 이재하에게 의사를 밝혔다. 나서지 말라고 그 나름의 친절한 경고까지 곁들여서 말이다.
재하는 장태건 같은 남자를 잘 알았다. 그는 타인에게 두 번째의 기회를 부여하는 이가 아니다. 그는 두 번의 경고를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그건 오늘을 기점으로 그들 사이가 명확하게 변할 거라는 뜻이었다.
다정한 저녁은 앞으로도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러트를 핑계로 몸을 섞는 일도 더 없을 것이다. 다시는 제가 기다리는 집으로 퇴근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그러나 늘 명확했던 눈빛이 게게 풀리고, 심장이 돌아오지 않는 혈액을 부르려 맹렬하게 뛰는데도 점점 핏기를 잃어만 가는 얼굴을 두 번 볼 수는 없었다.
태건이 원하지 않는 일이 이재하에게는 꼭 필요했다. 재하는 그가 자신을 돌아보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했다.
사랑에 빠진 게 처음인 이재하는 아주 바보 같은 짓을 하는 중이었다. 상대가 원하지 않는 걸 들어주려고 고군분투하는 바보 같은 짓을 말이다.
그러나 재하는 그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그의 옆자리에 오래도록 있고 싶은 마음보다 그가 두 번 다시 그런 식으로 복근에 칼이 박히는 일이 없었으면 했다.
장창식은 장태건을 청소부로 쓰고 있다. 제 손자를 아낀다는 말은 말뿐일 것이다. 이재하는 그런 식으로 잔인해질 수 있는 혈연들을 너무 많이 알았다.
그래서 그랬다.
“이사님, 출발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차에 올라탔다. 재하는 잠깐 후회했다. 지난번 그의 방에서 깼던 그 아침, 그날 그 방을 조금 더 둘러볼걸, 하고 말이다.
그가 어떤 식으로 생활하고 어떤 물건과 함께 잠이 드는지 궁금했는데.
“…….”
창밖에는 어둠에 반쯤 잠긴 서울이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인공의 불빛들이 어둠을 헤쳐 놓아 완전하지 않은 밤이었다. 이재하의 후회도 딱 그만큼 흐려지다가 곧 모호해졌다.
그는 아주 사소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날의 일을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