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8)

2.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그 호텔의 최고 등급 객실 침대에 앉아, 재하는 멍하니 생각했다.

쏴아아-.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삭막한 서울 시내도 비에 젖으니 꽤 촉촉해 보였다. 물기 젖은 서울은 색다른 장경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창문을 두들기는 빗소리에 샤워기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섞여 들렸다. 객실 내 욕실 쪽에서 나는 소리였다.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재하는 멍한 머리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지난밤에 대해서 떠올렸다.

* * *

수민이 그렇게 간 뒤, 재하는 그 자리에서 장태건과 마주쳤다. 그는 재하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했다.

“여기서는 이사님이 너무 이목을 끄셔서.”

무슨 말인가 했더니 제 셔츠의 목깃을 슥 쓸어내린다. 그곳에 달라붙은 음료의 흔적을 말하는 듯했다.

재하는 얼떨떨하여 답을 하지 못했다. 남자는 애당초 대답은 기대하지 않았다는 듯이 다시 말을 이었다.

“아니면 같이 올라가도 되고.”

한쪽 손은 정장 바지에 찔러 넣고 다른 손의 검지만 추켜올려 위를 가리키는 장태건의 표정이 묘했다. 반말인지 존댓말인지 모호한 말투는 그 무감한 표정의 덤처럼 느껴졌다.

말의 내용은 빈정거리는 것 같은데 어투는 무척이나 건조하고, 또 이렇다 할 표정이 없는지라 사람을 놀리는 건지 구분하기가 어려웠다.

무미하고 무감한 목소리, 말하는 투는 건방진데 표정을 보면 그런 기색을 찾아보기가 어려웠다.

그 오묘한 모순, 친절하지 않은 역설이 장태건이라는 알파를 정확하게 나타내고 있는 것 같았다.

재하는 미간을 살짝 좁히고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가 꿈에 나오고, 그 때문에 수민과의 약혼을 무른다고 한들 이렇게 빠르게 그를 마주할 마음은 없었다.

수민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장태건에게 당장 접근할 생각은 없었다.

파약하고 난 뒤, 수민과 태건의 관계가 정리되면 그때쯤 말이라도 건네 볼까 싶었다.

그사이에 제 마음이 정리되면 더없이 좋은 일이며, 수민과 태건이 이대로 이어진다고 해도 제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남 사이에 끼어드는 짓을 하기도 싫었다.

네 애인이 좋다는 최악의 말로 수민을 상처 입힌 것과는 별개로, 기본적인 예의는 지키고 싶었다. 수민이 저를 원망하는 것과는 별개의 의미였다. 마음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하기도 했다.

“나눌 말이 없습니다.”

그래서 고개를 저었다. 그와 이대로 한 공간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것은 어떤 예감과 같았다. 이재하는 오늘 장태건과 둘만 남게 된다면 반드시 위험해질 것이다. 그것이 어떤 위험인지 예상 가지 않는 게 제일 문제였다.

장태건은 거절 의사를 밝힌 재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홍채와 동공이 구분 가지 않을 정도로 검은 눈동자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어쩐지 등골이 오싹한 기분이었다. 저도 모르게 지난 꿈들이 기억나 난감했다.

재하 본인이 인정하지 않아서 그렇지, 사실 그는 성적으로 약간의 결벽증을 갖고 있었다. 누군가와 닿는 것 자체를 좋아하지 않으니 우성 알파치고 러트 역시 무난하게 지나가고는 했다.

그런데도 그런 문란한 꿈들을 꿔 댄 것이다. 상대는 눈앞의 남자.

제게 그런 섹스 판타지가 있는 줄은 몰랐는데, 온갖 난잡한 짓거리를 해 댄 꿈속의 몽마가 멀쩡한 독일제 정장을 입고 제 앞에 서 있으니 당황스러울 지경이었다.

머릿속에 휘몰아치는 폭풍을 감당하기도 버거운 재하를 향해 남자가 말했다.

“나한테 관심은 있는데 할 말은 없다?”

“…….”

재하의 얼굴이 경악으로 물들었다. 지금까지 들었던 후계자 수업이니 사업적 포커페이스니 하는 것은 깡그리 바닥에 처박힌 뒤였다.

중동 쪽으로 파병된 경력이 있는 용병으로부터 납치 시 행동 강령과 교섭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 공황 상태 시 자신의 감정을 들키지 않는 않도록 연기하는 법을 배운 것이다.

그러니 이재하는 이런 상황에서도 당황을 잃지 않았어야 했다. 그 빌어먹을 용병이 돈을 처받고도 아무짝에 쓸모없는 것들을 알려 준 것이 아니라면 말이다.

하지만 그따위 것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다. 당황한 것을 인지한 채로 얼른 이 공황 상태에서 깨어나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아무런 반응을 할 수가 없었다.

패닉에 멈춰 버린 뇌는 그저 멍하니 장태건이 내뱉은 말을 복기시킬 뿐이었다.

태건이 그런 재하를 향해 고개를 모로 꼬고는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더니 무언가를 발견한 양 말을 이었다.

“이제 좀 할 말이 생겼나 봐.”

그쵸, 이사님?

남자가 재하를 향해 피식 웃었다. 그것이 문제의 시작이었다.

두 알파는 그 후 객실이 있는 최상층으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에서부터 바로 이어진 객실 현관이 있었다.

이야기를 나누기 위해 급하게 잡은 것은 아닌 듯, 지배인이 개인 호텔리어를 보내 주었다.

태건은 굳이 호텔리어가 필요하냐는 듯 객실 문 앞에서 재하를 흘끗 바라보았다. 내리깐 눈에서는 도무지 속을 읽어 낼 수 없었다. 다년간의 경력으로 상대의 수를 읽는 것에 특화되었다고 생각했던 것은 실로 착각일지도 모른다. 그게 아니라면 장태건의 아주 작은 티끌조차 읽을 수 없을 리가.

그 오만한 물음에 재하는 고개를 저었다. 안색은 이미 창백해진 상태였다. 제 얼굴을 보는 이를 한 명이라도 줄이고 싶었다.

호텔리어는 가벼운 묵례와 함께 층을 내려갔다. 두 남자는 말 없이 객실 거실로 향했다.

재하가 거실 한복판에 멍하니 서 있는 동안, 장태건은 제집처럼 재킷을 벗어 소파에 던져 두었다. 재하는 그의 재킷을 흘끔 돌아보았다.

지금 상황과 비슷한 꿈을 꾼 적도 있었다. 객실에 재하가 들어와 있으면 태건이 재킷을 벗으며 들어와….

“브랜디뿐이네요.”

장태건이 객실 내 미니바 앞에서 술병 라벨을 보며 말했다. 상념에서 깨어난 재하가 넥타이 매듭에 검지 끝마디를 욱여넣어 느슨히 풀어냈다.

술을 즐기는 편도 아닌데 목이 말랐다. 갈증이 속을 뒤집어 놓는 기분이었다. 희미하게 알파의 페로몬 향이 났다. 브랜디의 향으로라도 가리고 싶었다.

재하는 다급하게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을 열었다.

“…그걸로도 좋습니다.”

“얼음?”

“…예.”

장태건은 군더더기 없는 손짓으로 꽈득 소리와 함께 브랜디병을 개방하고는 비치된 크리스털 잔에 그것을 따랐다.

잔 하나에는 얼음을 넣고 다른 하나는 넣지 않았다. 얼음이 담긴 나머지 잔에 술을 따르며 넣지 않은 잔은 그대로 입에 털어 넣었다.

술을 따르는 사이 한 잔을 비우고는 다시금 제 잔에 술을 채운 뒤 재하에게 잔을 건넸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동작이었다. 마치 이런 상황이 매번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

재하는 인사 없이 잔을 받아 들었다. 그 역시 얼음이 채 녹기도 전, 단숨에 잔을 비웠다.

그런 재하를 흘끗 본 남자가 말했다.

“잘 마시네. 보기도 좋고.”

또 반말인가 싶어 미간을 살짝 좁히는데 남자는 마치 혼잣말을 했다는 듯이 어느새 예의 그 무감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식도가 탈 것 같은 느낌이 속으로 쑥 내려간 뒤, 재하는 더 기다리지 않고 입을 열었다.

“오해입니다.”

재하의 성마른 표정을 보며 남자가 슬쩍 웃으며 말했다. 비웃음 같기도 하고 재하가 눈치 못 챈 사이 두 사람 사이가 가까워진 것처럼 거리감 없어 보이는 웃음이기도 했다.

“내가 뭘 오해한 사람처럼 보여요?”

남자는 다시금 술을 털어 넣었다. 시선은 여전히 재하를 향한 채였다.

재하는 천천히 생각을 되짚었다.

제 계획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관심이 있다고 밝힌다고 해도 지금 당장은 아니었다.

이재하는 필사적으로 표정을 숨겼다.

“수민이에게는…. 가장 비참한 말로 상대해야 납득할 거 같아 그런 것뿐입니다.”

“그래요? 그쪽이 납득은 했고?”

계속되는 반말과 존댓말의 경계에 기분이 모호해졌다.

가뜩이나 장태건은 근래의 재하에게 있어서 심기를 어지럽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와 시선이 얽히자마자 감정을 품게 되었지만, 그를 다 알지는 못하는 상태였다. 늘 신중했던 이재하에게는 그런 상황 자체가 못 견디게 이질적이었다.

이재하는 장태건을 모르면서도 반했다. 자신이 반한 이가 예의라고는 없는 남자라는 것을 깨달을수록 입맛이 썼다.

장태건은 잔을 내려놓은 뒤 술병의 병목을 잡은 채로 재하에게 다가왔다. 그러나 두 사람 사이에는 여전히 간격이 있었다.

그 물리적으로 확실한 거리에도 불구하고 이재하는 알파로 살아온 평생 동안 경험하지 못한 위협감을 느끼는 중이었다.

“이사님은 구름 위의 분이라서 양아치들 소문은 잘 못 들으셨나 봅니다.”

“…….”

장태건이 한 발자국 더 다가왔다. 고양잇과의 맹수처럼 구둣발이 땅을 디디는 소리도 나지 않았다. 태산처럼 묵직한 존재감이었다.

“깡패를 부려 먹었으면 깽값을 줘야 하는 법이거든.”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거짓말 같은 미소였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입술을 말아 물었다. 표정을 가누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해당화와 바다 소금 냄새가 발목을 휘감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처음 객실로 들어왔을 때 맡았던 희미한 향이 아예 파도처럼 객실 바닥에 깔려 철썩거렸다. 온몸에 소름이 이는 것을 무시하며 재하가 대꾸했다.

“뭘 얼마나 드리면 됩니까?”

“자신 있으시네. 말하는 건 다 줄 수 있어요?”

“터무니없는 게 아니라면….”

한 발자국씩 움직인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지척이었다. 육식 짐승의 사냥감이 된 기분이었다. 그가 재하의 잔에 술을 따라 주었다.

“첫 거래니까 싸게 해 줄게요. 술친구 정도면 족하겠습니다.”

그러고는 담백하게 물러났다. 지금까지의 태도들은 모두 장난이었다는 듯이.

재하는 저도 모르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정도면 저도 적당히 물러날 수 있을 줄 알았다.

그때 방심하지 말았어야 했다.

술이 약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늘 평균을 웃도는 인생이었다.

신장부터 집안, 외모와 갖고 있는 모든 것이 그러했고 능력까지 출중했다. 주량도 이재하가 갖고 있던 잘난 점 중의 하나였다.

그런데 장태건을 이길 수가 없었다. 초반에 목이 타 따르는 술을 가리지 않은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

미니바에 있던 모든 브랜디들이 동나자, 두 알파는 거절했던 개인 호텔리어를 다시 불러 술을 주문했다.

안주라고는 제철 과일과 올리브 절임이 다였다.

뭐라도 준비하겠다는 호텔리어의 말에 괜찮다고 했었다. 그 이후로 별다른 대화도 없던 술자리는 새벽까지 계속 이어졌다.

그 이후로는 기억이 희미했다. 아니, 아예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 편이 좋았을지도 모르겠다.

‘아, 흐으-!’

‘먼저 졸라 놓고 참을성이 별로네. 질질 흘리기나 하고.’

기억나는 것들은 드문드문 끊겨 있었으나, 장태건의 말을 빌려 보면 화간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화간이었을 것이다. 장태건은 제게 마음이 없었고, 흑심이라고 부를 만한 것을 품고 있는 쪽은 자신이었으니까.

잘 기억나지도 않는 정사가 건강한 알파의 몸 위로도 혼곤한 흔적을 새겨 넣을 정도면 꽤 난잡한 섹스였을 것이다. 재하는 침음을 삼켰다.

이재하는 밖에서 내리는 빗소리와 욕실에서 들리는 물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재빨리 바닥에 떨어져 있던 옷을 주워 입으려 했다.

“아윽-!”

허리를 숙이자마자 치골부터 빠개 버릴 듯 울리는 격통만 아니었어도 성공했을 것이다. 무릎이 비틀거리기까지 했다.

“이런 씹….”

안 하던 욕이 다 나왔다. 다리 사이가 질척거렸다.

꿈이라고 착각하고 자신이 먼저 태건을 덮쳤을 수도 있다. 그런 가정을 떠올리자 눈앞이 새하얘졌다.

나가려면 지금뿐이었다. 뒤가 얼얼하고 허벅지 안쪽 근육이 바들바들 떨리는 와중에도 바지를 꿰입고는 셔츠 단추를 잠그지도 않은 채로 객실의 침실을 빠져나왔다.

객실 현관을 향해 사력을 다해 걸으며 단추 몇 개를 잠갔다. 입지도 못하고 팔에 걸쳐 둔 재킷 주머니를 툭툭 치자 지갑과 핸드폰이 들어 있는 듯했다.

남아 있는 것이 그거면 됐다 싶어졌다. 물소리가 끊기기 전에 이재하는 객실을 빠져나왔다. 곧장 로비로 내려가 어떤 여자가 내린 택시에 바로 올라탔다.

본가로 가면 큰일 날 것 같아 회사 근처에 얻어 둔 고급 아파트 주소를 불렀다. 기사가 잠시 룸미러를 통해 재하를 흘끗 바라보았지만 차는 다행히도 아무 일 없이 출발했다.

그러고는 한남대교를 건널 때쯤 의식을 잠깐 잃었다가 택시 기사의 부름에 깨어나 집히는 대로 지폐를 쥐여 주고는 집으로 올라갔다.

다른 이들이 탈까 봐,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지 않고 허리를 바로 세워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역이었다. 엘리베이터가 한 세대에 한 대씩 각각 있는 고급 빌라로 이사를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와 드레스 룸에 들렀는지, 아니면 정장을 그대로 허물처럼 벗어 던졌는지에 대한 기억이 모호하기만 했다. 그사이에도 기억이 드문드문 끊겨 버렸다.

간신히 샤워만 마쳤다. 샤워를 하는 내내 아릿하던 유두와 유륜 부위의 통증,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벅지 안쪽의 근육통, 그리고 뒤쪽 부위에서 일어나는 화끈거림까지. 깊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투성이였다.

그 뒤로는 아무 생각 하지 않고 그냥 쓰러지듯 자 버렸다.

다행히 주말이었고 얼마 전, 투자 협약을 마무리함으로써 급한 불은 끈 터라 아무도 재하를 찾지 않았다.

아니, 아무도 찾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핸드폰은 연신 울려 댔으니까.

그러나 재하는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군지도 확인하지 않은 채 아예 전원을 꺼 버렸다. 그러고는 핸드폰을 거실 소파에 던져 버린 채 침실에 틀어박혀 다시금 잠에 빠져들었다.

깨어난 것은 그로부터 22시간이 지난 일요일 오전이었다.

“제길….”

재하는 드물게 욕과 함께 일어났다. 심각한 상황에서 욕설을 내뱉는 것이 상황 타개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걸 익히 알고 있음에도, 저절로 입이 벌어져 욕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후회와 자기혐오가 재하의 침대 옆을 어슬렁거렸다. 새로 사귄 친구에게 꼬리를 흔들며 말이다.

* * *

섹스 후 허벅지 안쪽이 아픈 것은 처음 느껴 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그것이 관계의 후유증인지도 몰랐다.

생전 아픈 적 없던 곳들이 통증을 호소하는 것에 반쯤 질려 있던 이재하는 걸을 때마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리자 짜증까지 났다.

평소에 운동을 게을리한 적도 없는데 대체 왜 그 부위에 근육통이 있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다리를 벌려 상대를 받으려면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재하는 지난 며칠 동안 저를 괴롭히던 근육통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떠올릴 수 있었다.

‘더 벌려. 박아 달라며. 협조를 잘해야 나도 애쓰고 싶은 마음이 들겠죠?’

그래, 정확히는 그 대사가 기억났다. 벌리라는 것이 다른 건 아닐 테니 다리 사이가 결리는 것은 당연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 생각과 동시에 얼굴이 붉게 타올랐다. 그럼 또 고개를 절레 젓고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식사도 하지 않은 채, 간간이 떠오르는 기억에 끙, 하고 한숨을 내쉬다가 또 까무룩 잠들고는 했다.

그것이 지난 주말 동안 이재하가 반복한 행동들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재하는 재벌도 피해 가지 못하는 월요일 출근을 해야 했다.

“오전에는 실무자들과 미팅이 있습니다. 개발팀 차장부터 참석할 예정입니다.”

재하는 비서의 말에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허리가 아파 제대로 앉아 있을 수가 없었다.

키에 비해 다리가 길고 허리가 짧은 덕에 그동안 요통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통증 자체가 익숙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 낯섦만큼 누군가의 얼굴이 계속해서 반추되는 것이 가장 괴로웠다.

앉아 있는 내내 통증이 저를 괴롭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그런 통증들이 제 몸을 훑고 지나간다는 것이 말이다.

주말 동안 잘 쉬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알파의 신체로 알파를 받은 여파인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기회만 있으면 병든 닭처럼 졸고 싶었다.

간신히 일과를 끝냈을 때, 재하는 수행원에게 본가가 아닌 아파트로 가자고 말했다.

집에 오자마자 샤워를 하고 식사도 하지 않은 채 바로 잠들었다. 일어나 보니 어슴푸레한 새벽이었다.

만 사흘 만에 겨우 피로가 풀리고 이성이 되돌아왔다. 이제야 명료한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딱히 대책이 떠오른 것은 아니었다.

“…어쩌지.”

정말 어쩌지 싶어졌다.

자세한 상황은 기억 안 나지만 어렴풋한 장면과 흔적들을 볼 때 화간, 그도 아니라면 이재하의 일방적인 치근덕거림을 상대방이 받아 준 것이 분명했다.

장태건이 굳이 같은 알파와 하룻밤을 보낼 리도 없는 데다가 재하는 태건의 애인인 수민의 약혼자였다. 한 다리 건너 아는 사이 중 최악의 관계라는 소리였다.

그는 그 방면으로 굶주림 같은 것은 없어 보였고 꽁씹이라고 옳다구나 달려들 위인은 아니었다.

하도 많이 해서 권태를 느낀다면 모를까. 아무튼 저와 같은 알파가 인사불성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덮칠 만큼 궁해 보이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그날의 정사는 8할 정도가 이재하의 몫인 셈이다. 자신이 먼저 매달려 관계를 치르게 된 게 확실한 것 같았다.

관계를 구걸하며 제가 먼저 매달리는 장면은 상상이 잘 가지 않았지만 어쨌든 장태건 쪽이 시작한 건 아닐 것이다.

술에 취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을 하지 못한 채 그에게 맡겨 둔 것처럼 정사를 요구한 게 분명했다.

이재하는 다분히 상식적인 인간이지만, 한 달 내내 난잡한 꿈이 이어졌던 탓에 장태건이 덥다고 와이셔츠 맨 위 단추만 풀어도 그가 제게 드로어즈를 까고 성기를 내보이는 것과 똑같이 보였을 수도 있다.

그 방에는 둘뿐이었으니 더더욱 혼자만의 오해가 깊어졌을 것이다.

게다가 취한 상태가 아니었던가. 주량이 세서 한 번도 필름이 끊길 때까지 마셔 본 적이 없는 터라 정확히 제 주사가 무엇인지도 몰랐다.

서른이 넘어 나온 술버릇이란 게 좋아하는 이에게 매달려 섹스를 조르는 것일 수도 있었다. 제가 그렇게 한심한 인간은 아니라고 믿고 싶었지만, 정황상 그런 한심한 인간이 되어 버렸다.

물론 이재하는 머리가 좋은 편이고 또 위기의 순간일수록 차분해지는 성격이었지만, 불행히도 그는 첫사랑 중이었다.

그래서 제가 지금 뭘 놓치고 있는 건지도 모른 채 일단 자책부터 하기 시작한 것이다. 가정이라고 하는 추론치고 쓸 만한 게 하나도 없다는 것조차 깨닫지 못했다.

애꿎은 땅굴의 종착지는 어딜 파고 들어가도 늘 같았다. 온몸의 호르몬과 페로몬이 들끓듯이 장태건을 찾는 와중에 그와 단둘이서 호텔 방에 틀어박혀 술을 마신 게 문제였다는 것이다.

긴장을 풀고 그에게 오해였노라고, 당신에게 딱히 마음이 없다고 변명할 참으로 시작된 술 한 잔이 너무도 커진 것이었다.

애인의 약혼자, 그것도 알파와의 갑작스러운 잠자리에 장태건 역시 당황했을 것 같아 입맛이 썼다.

재하는 자책이 잔뜩 섞인 후회를 곱씹으며 며칠을 보냈다. 그따위 걸 계속 곱씹느라 입맛이 없어 식사도 거른 채 말이다.

정해진 매뉴얼대로 생활해 온 덕에 늘 부족함이 없던 영양과 수면의 질은 밑바닥을 보이기 시작하고, 깨달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첫사랑이 마음의 평화를 앗아 가는 동안, 이재하는 한평생 친구처럼 지내던 냉정과 이성을 잠시간 잃고야 말았다.

그리하여 일주일 뒤, 제정신의 이재하라면 하지 않을. 아니, 보통의 사람이라도 절대 하지 않을 짓을 저지르고야 만 것이다.

* * *

“네가 미쳤구나?”

계모는 말로만 저를 말렸다.

미쳤냐고 물어보는 말에는 웃음기마저 실린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 됐다, 이제 됐어!’ 그렇게 말하는 듯한 두 눈의 희열이 근래에 유독 되는 일이 없던 재하의 미간을 잠시 찌푸리게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그녀의 말이 맞았다. 자신은 미친 것이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런 일을 벌일 수 없겠지.

재하는 한 번도 들어 올린 적 없는 나이프를 툭 건드려 살짝 비뚤어져 있던 것을 바로 정렬했다. 오늘의 저녁 메뉴는 김란희가 유학 시절 즐겨 먹던 프로방스식 가정식이었다.

이재하로 말할 것 같으면 프렌치보다는 이탈리아 음식이 입에 맞았다. 이런 날은 그냥 저녁을 굶거나 회사에서 해결하고 오지만 오늘은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집에 통보를 해야 했다. 김수민과 헤어졌고 그건 장태건 때문이라고. 수민이 아니라 제 쪽에서 먼저 태건에게 반했다는 통보였다.

식전주로 코냑을 한 잔 마시고 있던 부친은 잠시 무언가를 잘못 들었다는 표정을 짓더니, 보다 근본적인 것을 물었다.

“…장태건이 누구냐?”

“여보…. 그 왜, 장한건설의….”

계모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이재하의 부친, 이익형은 희한한 얼굴을 했다. 단언컨대, 그의 아들로 살았던 생애 그런 얼굴을 본 것은 처음이었다.

원래도 웃음이 많지는 않지만, 가족들 앞에서는 더욱 웃을 일이 적었던 이재하조차 저도 모르게 웃음이 터질 만큼 우스운 얼굴이었다.

그제야 이재하는 자신이 제 부친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하고 싶었음을 깨달았다.

그의 기대를 깨트리고, 그가 당연하게 여기는 자신의 역할을 부수는 것이 이렇게까지 쾌감 있을 줄은 몰랐다.

모친의 죽음 뒤에도 단 한 번도 반항하지 않았던 것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어서였는데, 저 표정을 보자니 알 것 같았다.

자신은 이러고 싶었음을. 그 누구보다 부친의 기대를 맹렬히 배신하고 싶었음을 깨달은 것이다.

그런 재하가 충분히 만족스러울 정도로, 이익형은 점잖은 뺨을 부들부들 떨며 노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알파…? 그것도 깡패 새끼랑 뭘 어쩌겠다고?”

“연애요. 가능하면 결혼도.”

그래서 저질렀다. 수민과의 약혼을 파한 이유에 대해 말하고 자리를 뜰 예정이었던 저녁 식사는 이번에도 입 대신 슈트로 먹을 수밖에 없었다.

생선 요리에 곁들이도록 내온 화이트 와인 잔이 그대로 재하의 가슴팍에 날아든 것이었다.

“여보!”

놀란 계모가 소리쳤다. 그녀의 비명에 묻혀 정작 와인 잔이 몸에 부딪혀 깨지는 소리는 그다지 크지 않았다.

목덜미를 살짝 베인 탓에 피가 났지만, 그 식탁에 둘러앉은 이들 중 그런 자잘한 상처를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재하 본인마저도.

어째 장태건에 대해 말만 하면 주위 사람이 제 몸에 음식물을 뿌리는 것 같았다.

노발대발한 부친의 얼굴을 흘끗 본 재하는 입을 가리고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이 사태를 지켜보던 이복동생을 물끄러미 응시하며 말했다.

“저만 이 집 자식도 아니고. 종마로 쓰실 거면 재호도 나쁘진 않잖습니까.”

“뭐, 뭐?!”

“어머, 얘, 재하야. 너 어떻게 말을 그렇게 하니!”

김란희가 새파랗게 질려 소리쳤다. 연기가 수준급이었다. 계모는 재벌 집 사모님 주제에 오스카나 칸을 목표로 해도 될 만한 연기력을 갖고 있었다.

재하는 눈알만 돌려 그녀를 바라보았다. 우성 알파의 기에 눌린 김란희가 힉, 하고 숨을 집어삼켰다.

그간 김란희를 정면에서 상대하지 않았던 것은 그녀가 무서워서가 아니었다. 귀찮아서였다.

모친을 죽게 만든 것은 저 여자가 아니었다. 그녀는 원래도 우울증이 심했고 늘 제 기다란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저기에라도 목을 맬까 하고 몇 번이나 속으로 고민하는 듯한 표정을 짓곤 했었다.

그러니 복수하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대신에 귀찮고 더러워 피했던 것이지.

“죄송합니다, 어머니. 종마로 쓰기에는 열성 알파는 부족하겠죠. 재호야, 미안하다. 형이 심했나 보구나.”

계모의 얼굴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분노가 섞인 눈이었다. 제 자식의 태생을 모욕하는 것이 그녀 자신을 모욕하는 것과 같다는 눈빛이었다.

재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려 집을 나섰다. 자신에게는 저런 모친마저 없었다. 지키고 싶은 사람도 없었고 저를 지켜 줬으면 하는 이도 없었다.

저렇게 다들 난리인 것을 보니 이제는 제가 한 말을 지키고 싶어졌다. 단념되면 좋고 아니면 나중에 생각하자, 정도로 여겼던 마음은 이제 때늦은 오기에 불타고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식으로 충동적인 선택을 해 본 적이 없는데. 장태건을 만난 뒤부터 이재하는 이재하가 아닌 것 같았다.

그래서 핸드폰 액정을 스와이프하여 발신 기록 밑에 있는, 모르는 번호를 눌렀다.

망설이지 않고 누른 것치고 느린 손길로 핸드폰을 귀 옆으로 가져갔다. 재하는 살짝 인상을 찌푸린 채로 눈을 감았다 떴다.

신호가 갔고, 뚝 소리와 함께 상대방이 전화를 받았다.

- 따먹고 튀니까 좋아요?

묵직한 목소리가 어떠한 인사도 없이 비웃듯이 말했다. 재하는 두 눈을 꾹 감았다 떴다.

“할 말이 있습니다.”

그날, 이재하는 장태건을 향한 프러포즈를 결심했다.

* * *

이재하가 그날 마신 물의 양은 1230mL. 500mL짜리 생수 두 병으로도 모자라 약 반병 정도를 더 마신 상태였다.

그는 긴장하면 물을 많이 마신다는 말을 그날에서야 이해했다. 물은 그렇게나 많이 마신 주제에 골을 울리는 긴장감에 사로잡힌 채 씹어 삼킬 만한 것들은 입 안으로 집어넣지도 못했다.

오찬 회의에서도 물만 삼키는 상사를 보며 비서는 의아한 기색을 띠었지만, 재하로서는 그녀에게 변명할 수 있는 것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오후 일과를 다 마친 뒤 재하는 이사실에 앉아 시계만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서울 시내가 막히기 시작하는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회사를 나설 작정이었다.

분침이 원하는 시각에 멈추자, 재하는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이사실 방 한 켠의 옷걸이에서 제 정장 재킷을 집어 들었다.

“이사님…. 어, 퇴근하십니까?”

재하의 비서인 유진이 태블릿 PC를 들고 들어오다가 놀라 멈칫했다. 재하는 그녀를 흘끔 보고는 유리창에 비친 제 모습을 점검한 뒤 재킷 상의를 툭툭 치면서 얼마 가지도 않은 주름을 지웠다.

“급한 일 있습니까? 나가 봐야 하는데.”

“아니, 그건 아닙니다. 작은 사모님이 오늘은 언제 들어오시냐고 여쭈셨습니다.”

“…오늘은 논현동으로 갈 예정입니다.”

작은 사모님이라 함은 김란희를 말하는 것이다. 내내 들떠 있던 마음이 조금 가라앉았다.

그 난리를 부리고 나온 것이 사흘 전 일인데 벌써 찾는 것을 보니 재하가 했던 말이 사실인지 확인을 받고 싶어 하는 듯했다.

그녀가 얼마나 꿈에 부풀어 있을지, 재하로서는 눈에 그린 듯 선명했다.

수민의 집안이 꽤 괜찮은 데다가, 그이의 부친이자 재하의 예비 장인이 내후년에 있을 대선 후보로 당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대통령 장인을 얻게 된 이재하가 유신의 후계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은 내일도 태양이 동쪽에서 떠오르는 것과 같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런데 그 혼사가 장마 뒤 살구 열매처럼 물러 터져 떨어져 버렸다. 김란희로서는 그 덜 익은 열매를 짓밟은 뒤, 애초에 못 쓸 열매라고 둘러대면 그만이다.

그렇게 되면 재하를 내친 뒤 유신의 후계자 자리를 넘볼 명분이 충분해지는 것이다.

그러니 그게 사실이냐, 대체 언제부터 장태건에게 마음이 있었냐 묻고 싶겠지. 재하의 마음을 떠본 뒤 그것을 기정사실처럼 만들어 이익형에게 재하가 원하는 거래요, 하며 선한 얼굴로 속살거리는 광경이 떠오를 정도였다.

재하는 얼굴이 밀랍처럼 굳어지는 것을 느끼며 유진을 향해 말했다.

“…연락이 또 오면 회의 들어갔다고 하세요.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먼저 퇴근하겠습니다. 임 과장도 오늘은 일찍 퇴근하도록 해요.”

“네, 이사님.”

유진은 무미한 태도로 대답했다. 제 상사가 유신의 안주인인 김란희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그들의 관계만으로 짐작이 가능할 테니까.

부하 직원 앞에서 계모를 향한 적개심을 내비친 적은 없지만 오랫동안 같이 일해 온 사람이니 그녀도 알고는 있을 것이다.

재하는 간단히 차 키와 지갑, 핸드폰만을 챙긴 채로 유진을 향해 수고하란 말을 남기고 회사를 떠났다.

그들은 또 한 번 호텔에서 만나기로 했다.

재하는 공들여 그 호텔의 다이닝을 예약했다. 유진을 통해 예약할 수도 있었겠지만 어쩐지 제가 직접 하고 싶어 부러 전화를 걸었었다.

시간과 날짜를 말한 뒤에 예약 인원을 알려 줘야 하는데 두 명이라는 간단한 단어가 입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그것이 설렘이라는 걸 재하는 간신히 눈치챌 수 있었다. 발끝부터 저린 기분이 들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더라, 재하는 남산에 있는 호텔로 향하는 동안 그동안의 일에 대해 떠올리려고 애를 써야 했다.

시답지 않은 자리에서 그를 처음 만났을 때부터 저는 그 알파에게 무언가를 느꼈던 것 같다. 갑작스레 찾아온 러트가 그 방증이었다.

그다음은 김수민과 함께 그를 보았고, 말로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난잡한 꿈을 꿨었다. 이재하의 부정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다.

온 세상을 제 발밑에 둔, 정상에 선 알파가 같은 알파에게 끌렸다는 것을 인정하기에는 짧았고, 그것이 어떤 감정, 이를테면 사랑과 비슷하다는 것을 인정하기까지는 길었다.

그 혼란스러운 두 시간 속에서 이재하는 다시금 장태건을 마주하기 위해 호텔로 가는 중이었다.

어떤 말을 꺼내야 할지 지난 며칠간 머리가 터지도록 생각했다.

나는 당신이 마음에 듭니다. 당신이 불쾌하지 않다면 교제를 허락받고 싶습니다.

알파가 오메가에게나 할 법한 고백이었지만 평생 알파로 살아온 이재하는 그렇게밖에 생각하지 못했다.

심지어 꽃을 사는 낭만도 부렸다. 그러나 호텔에 도착하고 보니 부끄러워져 결국 빈손으로 차에서 내릴 수밖에 없었다.

이재하는 그날 자신이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 줄로만 알았다. 김수민과 헤어지라고, 자신이 기다리겠다는 말도 준비했었는데.

그러나 그날 이재하는 장태건에게 진심을 말하지 못했다. 그들의 결혼은 성사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사랑은? 하고 묻는다면 글쎄, 하는 애매한 대답이 돌아올 것이다.

“내가 이 이사님과의 결혼에서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입니다.”

“…….”

“유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세요. 그러면 혹시 압니까. 당신이 알파라도 상관없어질지.”

이재하의 프러포즈에 돌아온 장태건의 대답은 ‘Yes’였다.

조건이 붙었기 때문에 감정은 떨어져 나간 청혼 승낙이었다.

* * *

결혼식은 조용히 치러졌다. 한쪽의 출신이 조폭 기업이라고 한들 재벌가의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모자란 부분이 많았다.

이익형이 아들 부부를 마땅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다.

재하는 부친의 예의 없는 태도에도 딱히 아무 관심 없었다. 태건에게 살짝 민망했을 뿐.

그에게 프러포즈를 하러 간 날을 생각하면 지금도 조금 황망해지는 기분이다. 그날 재하는 너무도 떨었고 준비해 왔던 말을 반도 꺼내지 못했다.

“그러니까 나는, 장태건 씨가 나와 결혼하면 내가 장 실장에게 줄 수 있는 게….”

“예물 목록이라도 대 보자는 건가. 당연히 이사님 쪽이 너무 밑지는 장사란 걸 알고 있죠? 이런 것까지 내가 알려 줘야 해요?”

그는 고개를 모로 꼰 채 표정 없는 얼굴로 재하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감정이 얼굴에 드러나지 않는 교육을 오래 받아 온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옅은 수치심, 부끄러움, 상대에게 잘 보이고 싶었다가 대번에 망해 버린 난처함이 드러난 얼굴을 내보일 바에야 죽는 것이 나을 정도였다.

재하는 간신히 말했다.

“나는 그게 아니라….”

“자존심이 상해서 자지가 안 설 것 같은데, 불능이라도 데리고 살아 줄 수 있습니까?”

“…….”

재하는 저도 모르게 태건의 다리 사이에 눈을 내렸다가 놀라 시선을 움직였다. 그가 픽 웃는 것이 느껴졌다.

“좋게 봐줘도 내가 이사님한테 팔려 가는 모양새잖아요. 공밥 먹긴 그렇고, 봉사는 입으로만 해 드려도 되나?”

장태건은 무표정하게 재하를 바라보며 입 앞에 손을 가져다 대고는 혀로 볼을 두어 번 밀며 움직였다. 꼭 구음 시 성기가 볼을 찌르는 것 같은 제스처였다.

재하는 그걸 본 순간부터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생각해 왔던 말이 단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멍해진 이재하를 바라보던 장태건이 피식 웃었다.

“존나 이해가 안 가네.”

“…….”

“내가 좋아요?’

거기서 ‘네.’라고 대답했어야 했다. 그러나 재하는 파인다이닝 내실에 깔린 알파의 페로몬이 분노를 품고 있다는 것에 겁먹었다.

장태건이 무서워서가 아니라, 장태건이 저를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이 두려워서. 누군가의 평가를 두려워해 보기는 처음이었다.

이재하는 평가에 익숙한 위치가 아니었다. 남을 평가하는 일이라면 몰라도.

문득 이런 감정은 그게 누구든 사람을 가난뱅이로 만든다는 생각이 들었다. 피라미드의 정점에서 태어난 자신조차 감정의 상대 앞에 서니, 내밀 것 없이 초라한 알파에 불과했다.

“아니, 아닙니다.”

“…….”

이번에는 장태건이 입을 다물었다.

발목을 감는 페로몬이 더욱 묵직해졌다. 태건이 좀 더 화가 났다는 증거였지만, 재하는 그가 어떤 마음인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왜 화가 난 걸까. 내가 감히 그걸 삭여 줄 수는 없는 걸까. 상대가 허락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부터 어르고 달래 준 뒤 애정을 퍼붓고만 싶어서 애가 달았다. 이재하는 벌써부터 장태건에게 모든 걸 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장태건 역시 사랑에 빠지기 전 자신처럼 바라는 것이 없는 얼굴이었다.

“그럼 잘난 그쪽 집안 공사 치는 데 내가 필요하다는 얘긴데.”

“…….”

“좋아요. 나도 조건을 말해 보죠.”

재하는 그제야 손끝에 피가 좀 도는 기분이었다. 저쪽이 조건을 말한다면 쉬워진다.

이재하는 물질이 넘쳐 나는 세계에 살았다. 어떤 일이 생긴다면 그것을 처리하는 것에 별 수고가 들지 않았다.

장태건이 그것을 원한다면 맞춰 줄 수 있었다. 재하는 자신의 애정을 물질로 내세울 수 있는 기회가 도래하자 화색을 띠었다.

장태건은 그런 이재하의 얼굴을 핥듯이 응시했다. 그는 정장 재킷 안쪽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고는 한 개비를 빼내 입술 사이에 물었다.

재하는 멍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여기는 금연….”

“법 다 지키고 살았어요? 유신도 탈세 많이 하지 않나.”

태건이 표정 없이 중얼거리며 제 라이터를 가져가 담배의 끄트머리를 불로 지졌다. 치이익, 소리가 나며 연초의 끝이 타들어 갔다.

재하는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잘 보이고 싶은데 당최 방법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오메가를 상대하는 것이 수월했다. 마음을 빼앗긴 것이 장태건이라서 말을 잇기가 어려운 것인지, 아니면 장태건 자체가 대화하기에 좋은 상대가 아닌 것인지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고. 재하는 긴장감에 다는 애를 문지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며 표정 없이 테이블에 얹어진 냅킨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다이닝에 와서도 메뉴를 주문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음악도 흐르지 않는 내실에는 저와 장태건, 장태건의 페로몬뿐이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장태건은 종업원을 물렸었다. 그가 다시 부르기 전까지 아무도 이 방에 들어오지 않겠지.

조금 가라앉았던 긴장이 다시금 너울졌다. 해당화와 짙은 바다 소금 향이 재하의 속을 울렁거리게 만들었다.

꼭 배 위에서 바다 한가운데 어느 작은 암초에 핀 해당화꽃을 바라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장태건이 입을 열었다.

“나는 내 밑에서 앙앙거릴 구멍이 뭐 많이 들고 있는 거 안 좋아해.”

노골적인 반말이었다. 여태까지의 무례는 무례 축에도 끼지 못할 언사에, 재하는 아이러니하게도 지금까지 장태건이 제게 ‘예의’를 차리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차피 박고 싸면 끝인데 차려입는 것도 안 좋아하고.”

“…….”

“다 버리고 몸만 올 수 있냐고 묻는 겁니다.”

재하는 숨을 삼켰다. 욕망이 제게 묻는 것과 같았다.

“내가 이 이사님과의 결혼에서 원하는 건 딱 한 가지뿐입니다.”

“…….”

“유신의 모든 것을 버리고 오세요. 그러면 혹시 압니까. 당신이 알파라도 상관없어질지.”

그때 자신이 어떻게 했더라.

고개를 끄덕인 것 같기도 했고. 부질없는 회상이었다.

이재하의 불행은 그런 식으로 시작되었다.

* * *

그러나 그렇게 재주가 많은 이재하 또한 사람인지라 어쩔 수 없는 빈틈이라는 것이 존재했다.

그의 틈은 감정을 이성으로 통제하려는 곳에서 더욱 벌어졌다.

이재하의 사랑법은 다분히 알파적이었다. 그는 가진 것이 많은 사람이었고 평생을 그렇게 재화 속에 둘러싸여 컸기 때문에 그 정도는 장태건이 말한 ‘맨몸’으로 치부하기도 했다.

이제 막 사랑을 깨달은 이재하는 태건에게 무엇이라도 해 주고 싶었다. 그가 받고 싶은지 아닌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다.

아니, 신경을 쓰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다.

“그래요, 나야 이 이사 사람됨 익히 알고 좋아하지마는 사돈 쪽은 우리 장 실장한테 그렇지가 않았을 텐데.”

“…아닙니다.”

장창식은 50전 한 장과 불알 두 쪽으로 장한건설을 세웠다는 말처럼 그 나이를 먹고도 기운이 쟁쟁한 노인이었다.

건달로 시작하여 장한을 대기업으로 키울 때까지의 수많은 고초를 제 손으로 직접 베어 내고 올라온 자에게서 느껴지는 기운이 있었다.

그러나 이재하는 이런 타입을 그렇게 어려워하지 않았다. 장창식 같은 이들은 겉이 거칠지언정 속내가 확실하기 때문이었다.

태건과의 결혼식을 한 달 앞뒀을 무렵이었다. 식은 착착 진행되고 있었다. 식을 준비하는 것에는 태건도 재하도 신경 쓸 것이 없었다.

그런 것쯤이야 각 그룹의 비서진들이 협의하면 되는 일이니까. 게다가 두 사람은 결혼식에 별다른 로망이랄 것이 없었다.

장태건 쪽이 조금 더 심드렁했다. 그는 식장을 장식할 꽃의 꽃말 따위나 부토니에르의 색 같은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흰색 예복을 누가 입을 것이냐, 같은 문제에는 에너지를 쓰고 싶지 않아 했다.

전통적인 알파와 오메가의 식에서 오메가는 남자든 여자든 흰색 예복을 입는다. 이 경우에는 알파와 알파의 결혼이라 애매했던 것이다.

이런 일들은 서로 간, 나아가 집안 간의 자존심 싸움으로 번질 우려가 있었다. 재하는 그가 내키지 않아 한다면 흰색 예복을 입는 쪽은 당연히 자신이라고 생각했었다.

제가 먼저 프러포즈를 했고 승낙해 준 사람은 장태건이니 자신이 양보하는 것이 맞는다고 여긴 것이다.

그러나 웨딩 플래너의 말을 들은 장태건의 반응은 심드렁했다.

‘왼쪽에 설 사람이 누구냐고? 내가 하죠. 부케도 들고 면사포를 써도 좋습니다.’

그는 표정 없는 얼굴로 농담을 했다. …아니, 농담이었을까? 잘 모르겠다.

그를 좋아하기는 하지만 그에 대해서는 잘 아는 것이 없었다. 입이 험한 것은 알겠는데 결혼을 약속한 뒤로부터는 욕설이 무척이나 줄어들었다.

그나마도 재하를 향한 것은 없었다. 입이 건 건 맞는 것 같은데 태도를 조심히 하는 게 느껴지자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매일같이 만나는 것은 아니었지만 주에 세 번 정도는 같이 저녁을 하기도 했다. 그는 가리는 것이 없었으며 잘 먹을뿐더러 식사 예절 또한 깔끔했다.

날씨가 더운 여름이라든지 일신상의 변화로 인해 스트레스가 생기면 무조건 입부터 짧아지는 이재하가 보기에 신기할 정도로 식사량이 많았다.

그렇다고 게걸스레 먹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그런 식사 자리에서 두 사람은 간혹 서로의 이야기를 하고는 했다. 주로 재하가 몇 마디를 하는 정도였지만 태건은 묵묵히 들어 주었다.

‘아, 이런 얘기는 재미없으실 텐데…. 어차피 일 얘기에 불과하고….’

‘말을 흥미로운 데서 끊으셨네요. 더 해 봐요.’

혼자 들떠 너무 떠들었나 싶었던 재하에게 그는 여상한 어조로 대답했다. 아무렇지 않게 답해 주는 것에 마음이 안정되어 주절주절 몇 마디를 더 할 수 있었다.

장태건은 다정하다고는 말할 수 없었지만 냉정한 편도 아니었다. 첫인상과는 확연히 다르다고 할 수 있었다.

그의 그런 변화가 신기해질 무렵 태건의 조부로부터 연락이 왔다. 회사 근처 한정식집에 있으니 시간을 내어 주었으면 고맙겠다고 했다.

재하는 유진에게 회의 두 건과 전화 한 통을 미뤄 두라고 말한 뒤 바로 일어나 한정식집으로 향했다.

논현에 있는 한정식집은 재하도 몇 번 와 본 곳이었다. 주로 나이를 지긋하게 먹은 상대를 접대하기 위함이었다.

장창식은 재하의 그런 접대 상대들 중 가장 나이가 많았고 가장 불편했다. 아무래도 태건의 조부였으니 말이다.

노인은 살날이 얼마 남지 않은 이들 특유의 조바심이라기보다는 그저 화통한 성격인 듯 바로 본론을 꺼냈다.

“사돈들은 우리 장 실장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하던데.”

“…면목이 없습니다.”

‘아닙니다.’라고 하기에는 이재하가 이 결혼을 위해 기업 승계 구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는 지라시가 너무 많이 퍼진 후였다.

게다가 그것은 지라시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모두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태건과의 결혼을 통보한 뒤, 재하는 이복동생인 이재호에게 알짜배기 계열사들의 등기 이사 자리를 물려주기 위해 정리를 하고 있었다.

재하의 조부인 이원웅이 재하에게 개인적으로 증여한 땅과 건물, 주식 등은 그대로 들고 결혼할 예정이지만, 계열사의 이사 자리는 이달 말 안으로 이재호의 수중으로 떨어질 것이다.

그 자리에 그렇게 큰 미련도 없었다. 정상에서 태어났으니 주어진 의무를 숙제하듯 해치웠었다.

부러 모친의 자리를 치고 들어온 계모의 입에 털어 넣을 생각은 없었지만, 악을 쓰며 지킬 정도로 미련이 넘치는 것도 아니었다.

생애 처음으로 욕심나는 것을 갖기 위해 값을 치른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아깝지도 않았다. 그러나 장창식의 생각은 달라 보였다.

“태건이 부친이 재작년에 먼저 갔네. 아비 두고 세상 떠난 게 가장 큰 불효이지마는 벌여 둔 사업 몇 개를 말아먹고 간 탓에 우리 장 실장이 크게 고생하고 있는 것도 이 늙은이를 밤잠 못 자게 하는 것 중 하나지.”

거기까지 듣고 나니 이재하는 장창식이 손자의 배우자 될 사람을 왜 갑작스레 불러냈는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원하는 바가 명확한 사람은 다루기 쉬웠다. 늘 심드렁한 말투에 읽을 것 없이 무감한 얼굴을 떠올리며, 태건과 무척이나 닮았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보다고, 재하는 짧게 생각했다.

“상심이 크시겠습니다, 어르신.”

그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가 바로 장창식을 마주했다.

“안 그래도 장 실장 사업에 보탬이 되었으면 해서 결혼 선물을 준비할 생각이었습니다. 제 딴에는 깜짝 선물이랍시고 생각했던 터라 숨기고 있었는데, 어르신 염려를 미리 덜어 드릴 걸 그랬습니다.”

장창식은 눈에 띄게 얼굴이 밝아졌다. 흡족하게 올라가는 입꼬리를 찻잔을 들어 감추며 말했다.

“이제는 내가 자네 할애비 아닌가. 호칭이 딱딱하니까 거리감이 들어.”

“예, 할아버님.”

이번에도 정답이었는지 장창식은 아예 껄껄 웃기까지 했다. 그날의 점심은 그럭저럭 성공적이라고 생각했다.

잃은 것은 적었고 태건과의 결혼에 있어서 적어도 한쪽 집안의 축복 정도는 얻었으니 말이다.

부친이 반대하는 결혼을 감행하니 태건의 친가 쪽이라도 그들 사이를 나무라지 않았으면 했다.

수많은 개인 재산을 처리하느라 재하의 손에 남은 것은 유신의 주식과 논현에 있는 건물 몇 채밖에는 되지 않았다.

없는 이들이 보기에는 어마어마한 재산이었지만 이재하에게는 단숨에 중산층이 된 기분을 안겨 주었다.

그래도 좋았다. 상관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장창식이 좋아한 만큼 장태건도 만족할 것이라 여겼던 것이 실수였다.

가족과 저의 의사는 전혀 같지 않다는 걸, 제가 제일 잘 알고 있었으면서 말이다.

재하는 이제 막 퇴근하려던 찰나, 이사실에 들어온 유진이 하는 말에 놀라 물었다.

“누가 왔다고?”

“장한건설 장 실장님께서.”

“예비 배우자라고도 말씀해 줘야지.”

그녀의 뒤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들렸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일어서려던 것을 간신히 멈췄다.

베타 여성인 유진에 비해 너무도 큰 남자가 그녀의 뒤에 서니 그림자가 질 정도였다.

방문객을 고하기 위해 들어왔던 유진은 저도 모르게 위를 올려다보았다가 태건과 눈이 마주치고는 기가 질려 히익, 숨을 삼켰다.

그 꼴을 보고 있던 재하는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임 과장, 나가 봐요. 차는….”

“목마르면 다른 거 마시면 됩니다.”

재하의 말에 태건이 대신 대답하며 혀를 내밀어 제 입술을 핥았다.

그 다분히 수상한 어조에 유진의 얼굴에 의아한 기색이 떠오르는 순간, 재하는 저도 모르게 얼굴이 달아올라 손사래를 쳤다.

“아예 퇴근하도록 해요. 수고했어요, 임 과장.”

“아, 네. 내일 뵙겠습니다, 이사님.”

유진이 고개를 꾸벅이고는 문을 닫고 이사실을 빠져나갔다. 재하는 남자를 잠깐 바라보다가 앉으라 권할 생각으로 입을 달싹였지만 그에게 순서를 빼앗겼다.

이사실을 한 바퀴 휙 둘러본 그가 선수를 친 것이다.

“귓구멍 깨끗하고 예쁜데.”

“…네?”

예상하지 못한 태건의 말에 재하는 두 눈을 깜빡였다. 뜬금없는 말을 이해하느라 시간이 필요했다.

그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왜 처막힌 것처럼 말을 못 알아들었을까. 귓구멍 예쁘다고 누가 좆이라도 박아 줬나?”

“…무슨?”

“내가 맨몸으로 오라고 했지.”

압박감이 조금 더 심해졌다. 이재하는 읏, 하고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억지로 내리눌렀다. 그가 저를 바라보는 눈동자에는 감정이 없었다.

그제야 재하는 그가 약속도 잡지 않고 유신의 이사실로 온 이유를 알게 되었다. 장창식과의 일을 추궁하고 있는 것이었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고 머뭇거리다가 이내 오래 버티지 못한 채 대답했다.

“혼수 정도는 해 갈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신에서 수저 한 짝도 챙겨 오지 말란 소리였는데. 얼굴이 예쁘니까 멍청한 건 나더러 참아 달라, 이거야?”

“장 실장.”

그의 입을 막기 위한 호명이었다. 모욕적인 언사에도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이 문제였다. 그러나 이재하는 기분과는 상관없는 삶을 너무도 오래 살아왔다.

누군가 자신을 무시하면 그것이 기업의 이익과 직결되는 일이 많았기 때문에 그냥 넘기지 않았었다.

그런 습관 때문에 경고하듯 그를 호명했지만, 사실 재하는 크게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그저 눈앞에 있는 알파에게 시선과 정신을 빼앗긴 탓이었다.

그는 그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지척으로 다가와 재하를 내려다보았다.

두 알파의 신장은 딱 10cm 정도 차이가 났다. 키가 제법 큰 탓에 누구를 올려다볼 일이 드물었던 재하는 저도 모르게 멍한 얼굴로 강인해 보이는 장태건의 턱선을 훑을 수밖에 없었다.

눈을 가늘게 뜨고 그런 재하를 내려다보던 장태건이 입을 열었다.

“제법 깜찍한 짓을 하네.”

“…….”

“나랑 결혼할 건지 노친네 첩으로 들어오는 건지 확실히 하시길 바랍니다. 후자인 것 같아서 기분이 존나게 더럽거든요.”

“…그런 걸, 의도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는 결혼이 정해진 뒤 한 번도 내뱉지 않은 욕설을 섞어 말했다. 스산한 알파의 페로몬이 재하를 압박했다.

전에 없이 찍어 누르는 듯한 페로몬이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앓았다. 숨이 밭아졌기 때문이다.

그런 그를 보던 태건이 쯧, 하고 혀를 차며 물러났다. 그의 페로몬은 아직도 넘실거리는 중이었다.

분노가 가라앉은 것은 아니었으나 그걸 재하에게 여실히 보여 주는 걸 멈춘 듯싶었다.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있어요.”

그 후로 태건은 결혼식 당일까지 재하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재하는 그제야 제가 실수했음을 인정했다. 그전까지 있었던 만남들은 뚝 끊겼다. 모든 연락은 그쪽 비서와 유진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결혼식 당일도 마찬가지였다. 서약을 나눌 때도 그는 재하를 바라보지 않았고, 서로의 손에 반지를 끼워 줄 때도 태건은 그저 눈을 내리깔고 재하의 약지를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했다.

재하는 꽤 공포심을 느꼈다. 이제 막 싹이 트고 있던 소중한 무언가를 제 손으로 갈아엎은 것 같은 오싹함이 그를 망설이게 했다.

솔직히 말하자면 이재하는 사랑 앞에서 조금 멍청한 타입이었다. 결함 없이 완벽한 인생을 살아온 반면, 사랑이 무엇인지 정의해 주는 관계라는 것이 부재했다.

타고난 천성이 다정하며 저도 모르게 앓고 있는 무기력증에 비하여 꽤 건강한 정신 상태를 갖고 있었지만, 마음을 준 상대에게 거절당해 본 적이 없어 어찌할 바를 몰랐다.

그것이 일거리였다면, 사업이라든지 여타의 경제적 이익과 연관되는 업무에 불과했다면 이재하는 그 문제를 쉽게 타개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이며 처음으로 마음을 빼앗긴 관계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에 재하는 조금 헤맬 수밖에 없었다.

이재하의 결혼 생활은 모래성을 짓는 것처럼 시작부터 흔들렸다.

* * *

그들의 신혼집은 장창식 회장의 사저인 평창동이 아니라 한남동에 있었다. 한강을 바라보는 고급 빌라는 장태건의 소유였다. 애초에 합의가 된 내용이었다.

‘신혼집은 어디로 할까요.’

‘아…. 논현에 아파트가 있는-.’

‘좋아요. 이재하 씨가 내 집으로 들어오는 걸로 합시다.’

왜 물어봤지 싶기는 했지만, 당시에는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재하는 어디든 상관없었다. 태건이 원래 살던 집에 들어간다고 생각하니 그건 그거대로 좋았다. 게다가 신혼집이라는 단어 자체에 넋을 놓은 탓에 다른 생각을 하는 것도 힘들었다.

그 이후로는 장창식을 만나 태건의 빈축을 샀고, 안 그래도 매달리다시피 하여 성사시킨 결혼의 첫 단추가 이상하게 꿰여 버리자 재하는 조금 움츠러든 상태였다.

혼수를 빌미로 들고 왔던 재하의 개인 재산 등은 장창식의 손을 거쳐 장한건설에 흡수되었다. 이재하는 정말 평소 입던 옷들과 물품 등만 간단히 챙겨 태건의 집으로 들어왔다.

결혼식으로부터 약 이틀 후였다. 그동안은 조금 바빠 재하 역시 신혼집에 들어올 수가 없었다.

비서인 임 과장이 신혼집에 재하의 물품들을 가져다 두는 동안에도 재하는 사무실에 앉아 샌드위치로 끼니를 때우며 일을 하던 중이었다.

그렇게 다음 날에야나 재하 역시 그 집으로 퇴근할 수 있었다.

장태건이 원래 살던 집이라고 여겼었는데, 생각 외로 생활감이 없는 집이었다. 재하가 들어오기 전 가구를 새로 들인 것인지 집안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하기도 했다.

임 과장이 어련히 알아서 장한 측 비서실에 재하가 쓸 가구들을 사서 보냈겠지만, 그래도 제가 한 번 들여다볼 걸 그랬다고 나지막한 후회가 들기도 했다.

신혼부부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각방을 사용했다. 재하가 이사 들어온 날 태건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기 때문에 청소를 해 주시는 분의 도움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명순입니다. 말씀 편하게 하시면 됩니다.”

“안녕하세요, 명순 씨.”

그냥 청소를 해 주는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명순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남자는 장태건과 키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커 보였다.

장태건의 골격이 우람하고 비율이 정확한 반면 명순의 것은 영화에 나오는 악당처럼 우악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지만 말이다.

한쪽 뺨에는 광대부터 길게 칼자국이라고밖에 볼 수 없는 상처가 나 있었다.

인상이 험악해 보였는데 재하 앞에서는 어깨를 옹송그린 채 큰 덩치를 잔뜩 구긴 것같이 서 있었다. 그게 묘하게 웃겨 위협이 되지 않았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그를 우러러보며 천장과 그의 정수리 사이의 얼마 없는 틈을 가늠하다가 실례인 것 같아 시선을 돌렸다.

아무리 봐도 그냥 청소부로는 안 보였다. 손등에 있는 기다란 상처와 뺨 위의 칼자국이 그를 더욱 그렇게 보이게 했다.

태건에게는 느껴 본 적 없는 ‘전형적인 느낌’이었다. 그러나 재하를 향한 그의 어투만은 무척이나 정중했다.

“형님이 이사님 편하게 모시라 당부하셨습니다.”

“아….”

형님이라고 하니 확 와닿았다. 그는 아무래도 장태건의 부하 직원인 듯했다.

기업형 조폭들은 아직도 직급으로 안 부르고 직속일수록 형님이라고 한다더니 정말이네, 싶기는 했다.

이렇게 커다란 남자에게 형님이라고 불리는 태건이 신기하기도 했다. 하긴 사람에게서 나오는 기운이 있다면 장태건이 명순보다는 단연코 우위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명순에게서는 재하가 볼 수 없었던 뒷골목 사람들 특유의 거친 느낌이 나기도 했고 신장 차이도 있었지만,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는다면 태건 쪽이 훨씬 묵직한 분위기를 낼 것 같았다.

재하가 상념에 젖어 있는 사이 명순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짐 옮겨 드릴까요?”

“…장 실장님은 어느 방을 사용하시죠?”

“형님께서는 주로 2층 방에 계십니다.”

“그러면… 전 1층에 비는 방이면 됩니다.”

명순은 재하의 짐을 들어 올리다 멈칫하고는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고는 1층의 비어 있는 방으로 짐을 옮긴 뒤 방에 딸려 있는 간이 드레스 룸을 안내해 주었다.

“옷 정리 도와드리겠습니다.”

“…아니, 괜찮아요. 명순 씨 일 보셔도 됩니다.”

재하는 약간 급하다 싶을 정도로 고개부터 저었다. 명순이 들어가기에 드레스 룸이 무척이나 좁았기 때문이다.

평범한 사람이 옷방으로 쓰기에 적절한 크기였지만, 아무래도 침실에 딸린 드레스 룸이라 태건보다 살짝 커 보이는 명순에게는 힘들지 싶었다.

명순은 몇 번이나 머뭇거렸다. 험악한 생김새에 비해 이름처럼 사람이 약간 순했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알파가 아니라 베타 같았는데 그래서 더 무시무시한 체구였다.

신체적 우위는 알파, 베타, 오메가 순이었기 때문에 같은 남성이라고 한들 알파의 골격과 키가 더 건장했다.

알파, 베타 가릴 것 없이 키가 크고 장사 골격인 명순이 솥뚜껑 같은 손으로 제 옷을 개키는 걸 보느니 제가 직접 하는 것이 훨씬 나았다.

집안일에 특별히 재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따로 사는 아파트에 혹시나 김란희 쪽 사람이 올까 봐 가정부를 두지 않고 직접 청소와 빨래를 했었다.

정장이야 비서실을 시켜 세탁을 맡기면 되지만, 실내에서 입는 옷 등은 제가 직접 빨고 건조기에 넣거나 볕이 좋은 날에는 베란다에 널곤 했다.

자주대공포같이 생긴 남자가 제 옷을 개는 상황은 아무리 생각해도 어색하기 그지없었다.

옷을 개고 있는데 방을 나갔던 명순이 다시금 열려 있는 문을 노크했다. 그는 말하기 어려운 화제를 꺼내는 사람처럼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니 무언가 일이 생긴 듯했다.

“저, 이사님. 형님이 오늘은 못 들어오실 것 같습니다. 저도 가 봐야 하는데 괜찮으시겠습니까.”

“그럼요.”

애도 아닌데 집에 혼자 있는 걸 걱정하니 의아해했다가 명순의 표정을 보고 조금 머쓱해졌다.

신혼인데 혼자 있는 것이 괜찮냐는 물음이었던 것이다. 생김에 맞지 않게 섬세한 구석이 있는 명순은 괜찮다는 대답을 다시금 듣고서야 집을 나섰다.

그날, 재하는 태건을 기다렸다. 기다리지 말라고 친절하게 말해 주고 간 명순에게 미안하게도 말이다.

예고처럼 당연하게도, 태건은 집에 오지 않았다. 재하는 그럴 것 같았다고 생각하면서도 여명이 밝아 오는 밖을 바라보며 설핏 잠이 들었다가 깨어 버렸다.

그날 이후로 재하는 약 한 달간 그 집에서 혼자 지내야 했다. 가끔가다 명순이 오기는 했지만, 재하는 몇 번이나 망설이다가 그의 소식을 묻는 것을 관뒀다.

* * *

태건의 집에 들어오고 난 뒤, 재하는 그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장창식과의 만남 이후로 태건은 전에 나누었던 짧은 대화 몇 마디조차 끊어 버렸다. 아예 어긋나 버렸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른 채로, 재하는 나름의 노력을 하는 중이었다. 태건이 집에 들어오지 않는 걸 그가 말하고자 하는 무언의 언어로 여겼던 것이 그 노력 중 하나였다.

재하는 태건이 저를 못마땅해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부러 그의 앞에 나서거나 연락을 하지 않았다.

신혼여행도 가지 않았던 신혼부부는 약 한 달 만에 서로의 얼굴을 마주할 수 있었다.

“…오셨어요.”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재하는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현관문에서 거실로 이어지는 복도의 끄트머리에, 장태건이 말없이 그런 재하를 보며 서 있었다.

결혼 이후로 재하는 이재호에게 맡도 있던 일을 하나씩 넘기고 있었다.

물론 이쪽이 뛰어나고 그쪽이 범재에 지나지 않아 하나하나 인수인계를 해야 하긴 했지만, 지금까지의 업무량에 비교해 보면 수월할 정도였다.

출근 시간은 점점 늦어지고 퇴근 시간은 점차 빨라졌다. 남는 시간에는 책을 읽거나 빌라에 있는 입주민 전용 짐에 들러 운동을 했다.

명순이 장을 봐 오면 그것들을 뒤적거려 재료에 맞춘 레시피를 검색하여 요리를 해 보기도 했다.

아파트에 살 때 역시 집안일은 제가 직접 했지만, 식사 같은 경우에는 고급 음식점에서 도시락을 포장해 오거나 비서실에 재하의 식사를 전담하는 인력을 따로 두고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비서실 인력들도 다 이재호에게 자연스레 넘어가게끔 조치해 둔 터라 끼니 같은 경우에는 직접 챙겨야 했다.

명순은 음식을 아주 잘했지만 그가 식칼을 쥐고 있으면 과도로밖에 보이지 않아 도리어 불안정해 보였기 때문이다.

‘아닙니다, 이사님. 저야 연장 쓰는 게 직업…. 아니 이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재하는 알겠으니 식사는 직접 만들게 해 달라는 부탁과 함께 큰 눈을 데룩 굴리며 변명을 하는 명순을 주방에서 내보냈었다.

그런 날들이 오래 이어지다 보니 재하는 요 근래에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잊고 있었던 것이다.

아니 태건을 향한 마음도 변함이 없고 자신이 결혼을 했다는 것도 잊은 적 없지만, 굳이 따지자면 요컨대 방심한 것에 가까웠다.

그래서 태건이 현관 복도 끄트머리에 서 있는 것을 보며 머릿속이 새하얘진 것이다.

재하가 급히 일어선 터라 무릎에서 책 한 권이 떨어졌다.

장태건의 시선은 집요하게 이재하를 응시 중이었다. 입술을 말아 물고 있던 재하의 머릿속에 갑자기 걱정이 찾아들었다.

그의 집에 너무 편안하게 있었던 걸까 하는 걱정이었다. 천성이 느긋한 데다가 윗머리 중에서도 으뜸이었던 직책 때문에 어딜 가도 주인처럼 구는 기색이 있었다.

전이었으면 신경 쓰지 않았겠지만, 가뜩이나 밉보인 배우자에게 다소 뻔뻔하다는 인식을 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

그러나 장태건은 그를 바라만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결국 불편함에 움직인 것은 재하였다.

“…저녁은 드셨습니까?”

그 말에 장태건은 살짝 고개를 끄덕이더니 그냥 재하를 지나쳐 제 방으로 향했다. 그에게서 옅은 물 냄새와 니치 브랜드에서 나온 보디워시, 샴푸 냄새가 났다.

…호텔이라도 들렀다 온 건가….

재하는 문득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보니 김수민은 어떻게 되었을까. 헤어졌는지 물어보지 못했다.

수민의 성격상 모욕당했다고 생각하여 자존심을 내세우며 저와 태건 둘 모두 앞에 나타나지 않겠지만 혹시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그가 수민과 다시 만난다고 한들 재하가 어쩔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재하는 멍하니 태건이 향한 쪽을 응시하다가 한숨과 함께 책을 주워 들었다.

수민이 아니면 다른 오메가일 수도 있다.

갑작스레 알파와 결혼하게 된 태건이 느끼기에는 베타인 여성과 결혼하는 것보다 훨씬 더 모욕적이었을 수도 있다.

결혼 전, 그에게는 수민 외의 상대는 없는 듯했다. 단발성으로 잠자리를 즐겼는지는 몰라도 꾸준히 만나는 오메가들은 없었다.

그렇다고 베타 여성과 만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태건의 취향이 오메가 여성, 그다음이 오메가 남성, 그리고 베타 여성일 것 같다는 쓸데없는 선입견이 있기는 했다.

알파 주제에 성별이 같은 알파를 마음에 품게 된 자신과는 달라 보였기 때문이다. 알파인 자신보다는 오메가가 그 옆자리에 더욱 잘 어울릴 것 같았다.

그러나 태건을 욕심내어 결혼한 사람은 이재하였다. 다른 오메가나 베타가 아닌 자신이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을 때였다. 잠깐 넋을 놓았다고 생각했는데 시간이 꽤 지난 건지, 태건이 집에서 입는 얇은 니트와 홈웨어 팬츠를 입고 나왔다.

그는 머리를 내린 상태였다. 젖은 앞머리 사이로 태건의 눈이 재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아….”

저도 모르게 좀 멍청한 감탄사가 나왔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고는 책을 든 채로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고는 저도 방으로 향하려고 했다.

태건이 입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박명순 탈모 있습니다.”

“…네?”

“대머리가 취향은 아닐 거 아냐.”

태건은 그렇게만 말한 뒤 재하를 지나쳐 서재로 향했다. 곧이어 서재의 불이 켜지더니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재하는 두 눈을 깜빡이며 무슨 소리를 들은 건지에 대해 생각했다. 박명순? 박명순이 누군데 탈모가 있다고 내게 알려 주는 거지?

그는 한참이고 서서 유신의 재계 라이벌 기업과 장한과 대결 구도에 있는 건설사 대표들 중 박명순이라는 사람이 있나에 대해서 생각해 보았다.

…정치적 약점으로 삼으라는 얘기인가? 대머리 따위가 약점이 되지는 않을 텐데…?

그러다 성을 듣지 못했을 뿐 태건의 수하이자 집안일을 도와주는 이의 이름이 명순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탈모?”

그런데 명순 씨와 탈모가 대체 무슨 상관일까? 재하는 의아했지만 물어볼 용기는 없었다. 이대로 계속 서 있을 수는 없어 재하는 제 방으로 향했다.

방으로 돌아와 책을 콘솔 위에 올려 두고 침대에 올라 한참이나 고민한 후에야 불현듯 무언가를 떠올릴 수 있었다.

“탈모니까 신경 써 달라는 말이구나.”

부하 직원을 꽤 아끼는 듯했다.

‘탈모에는 뭐가 좋더라?’

외가도 그렇고 친가도 그렇고 대머리 유전자는 없는 터라 그쪽에 대해서는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던 재하는 검은콩이 좋다던가? 하는 생각을 하며 눈을 감았다.

이 집 어딘가에 태건이 와 있다는 사실이 묵직하게 전해졌다. 재하는 천천히 방문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그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았다.

* * *

“신혼 재미 좋아?”

“쓸데없는 소리.”

재하는 불쾌감을 담아 미간을 살포시 찌푸렸다. 그러나 이재호는 그런 재하의 반응을 보고 더욱 킬킬거리기 시작했다.

회사에서 인수인계를 받다 언급하기에 좋은 주제도 아니고, 손위 형제와 그의 배우자에게 하기에는 더욱 무례한 언사에 화가 나기보다는 한심하기만 했다.

이재하의 이복형제는 도통 수치심이라고는 몰라 하지 않아도 될 행동을 굳이 하는 양아치에 불과했지만, 이제 자신은 유신의 경영에서 완전히 물러났으니 잘해 주길 바랄 뿐이었다.

가족에게는 애정이 없는 재하라도 회사에는 나름의 애정이 있었다.

유신에는 모친이 이익형과 혼인했을 때 들고 온 외조부의 지분이 그대로 녹아 있었다. 모친은 유약하고 신경질적이었지만 그녀의 방식으로 재하를 사랑했었다.

아프지 않은 날에는 종종 같이 책을 읽기도 하고 전시회를 가기도 하며 시간을 보냈었다.

그녀가 아픈 날에는 짜증이 서린 얼굴로 재하를 밀어내고는 했지만, 나중에는 모친이 아프다 싶으면 그 주위로 가지 않았기 때문에 건강한 날에 밝은 얼굴만 볼 수 있었다.

이렇다 할 행복한 추억은 특별히 없었지만 그렇다고 불행하지도 않았다. 이재하는 그것이 사랑이 주는 온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것이 사랑이 주는 온기였다면 너무나도 미약하고 한껏 끓여 한 김 식힌 물보다 미지근한 것이겠지만 어쨌든 어린 재하는 만족했다. 부모가 자식에게 무용한 것들만 물려주는 경우가 넘치는 세상에서 이재하 정도면 많은 유산을 받은 편이었으니까.

그런 모친이 혼수로 가져온 지분을 생각하면 회사를 막 운영하기가 힘들었다.

그러나 이재호에게는 그런 것이 없을 것이다. 이재호는 김란희의 말에 따라 재하의 모친을 원망하고 모욕하고 싶어 했으니 말이다.

실제로 재하의 모친이 그들 모자에게 무언가 나쁜 짓을 한 것은 아니었다. 그저 친정의 힘을 빌려 밖에서 낳아 온 사생아와 내연 오메가를 집에 들이지 못하게 한 것뿐, 나서서 괴롭히거나 핍박을 가한 일도 없었다.

그나마도 재하를 위해서였다. 모친은 다소 신경질적이었지만 대체로 무심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이익형에게 배신당한 것에 대한 울분도 없을뿐더러 분노하지도 않았었다.

그저 배다른 형제를 갖게 될 재하를 걱정했던 것뿐이다. 이익형에게도 당신이 오죽 못나면 밖에서 애먼 오메가에게 애를 배게 하냐고 대놓고 윽박지르기도 했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애정이 들어 있지 않았고, 그것은 그저 잘잘못을 따지는 말일 뿐이었다.

그것을 못 견뎌 한 것은 의외로 이익형이었다. 이익형은 재하의 모친을 진심으로 사랑했었다.

그러나 그녀는 이익형을 사랑하지 않았고, 보답받지 못한 사랑은 삐뚤어져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어린아이처럼 말썽을 피우는 쪽으로 발현된 것이다.

말도 안 되게 등신 같은 짓거리였지만, 그런 등신짓을 대기업 총수가 하고 있었던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재산에 대한 문젯거리가 여염집보다 훨씬 복잡해지니 말이다.

“-에서 오늘 참여해 주신 내빈 여러분들을 위한….”

단상에는 유신제약의 기획부장이 마이크를 잡고 있었다.

오늘은 나름 큰 행사가 열리는 날이었다. 유신제약 산하 YS바이오부머에서 진단 시약 기업인 메후딘을 인수하는 데 성공한 것에 대한 기념행사였다.

제약 쪽은 CEO가 따로 있지만 총수 일가로서 이재하의 출석은 중요했다. 원래 같았으면 혼자 참석했을 것이지만 지금은 인수인계를 겸하고 있기 때문에 재호를 데려온 것이다.

그런데 기껏 와서는 뻘소리만 늘어놓고 있었다. 언제 정신 차릴 예정인지 모를 제 이복동생을 서늘한 눈으로 바라본 뒤, 워터 고블릿에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기념행사의 식순이 끝나 가고 있었다. 행사가 열린 호텔에서 만찬이 이어질 예정이었는데 재하는 그냥 퇴근하고 싶었다.

어쩐지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평소 같았으면 자리를 지켰겠지만, 이제는 퇴사만을 앞둔 몸이었다.

재호에게 맡기고 저는 그냥 집에 가도 될 것 같았다. 마음먹자마자 재하는 바로 유진을 불렀다.

“바로 퇴근할 겁니다. 임 과장도 그냥 들어가요. 운전 내가 할 테니까.”

“이사님, 그렇지만….”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먼저 간다고 하질 않나 운전도 직접 한다고 하질 않나 삐뚤게 나가자 유진은 당황한 듯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조용히 손을 내밀었더니 어쩔 수 없이 차 키를 건넨다. 일어나 가려는데 제약 쪽 상무가 재하를 붙잡았다.

“이 이사님, 행사도 들러 주시고 저희 쪽에서는 정말 감사해서….”

“안녕하십니까, 박 상무님. 이재호 이사보, 뭐 해요. 어서 인사드리지 않고.”

재하는 슬쩍 이재호의 어깨를 끌어다가 박 상무 쪽으로 밀어 주고는 쑥 빠져나왔다. 식순이 모두 끝나고 케이터링이 준비된 옆 홀로 옮겨 가려던 이재호는 재하에게 허를 찔린 듯 끌려와 박 상무 앞에 멀뚱히 섰다.

재하는 그 틈을 타 아예 홀에서 나와 버렸다. 이제 제가 할 일도 아닌데 누가 인사하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빠져나온 재하가 호텔 로비로 향할 때였다.

“어…?”

재하는 제가 보고 있는 것이 맞나 싶어 두 눈을 깜빡였다.

평일 오후 애매한 시간이라 호텔 로비는 한산했다. 오늘 유신에서 기념행사를 하느라 홀을 대관하였으니 일반 이용객이 드문 것은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그래서 재하는 장태건을 쉽게 발견할 수 있었다.

사실 사람이 꽉 찬 곳에서도 그를 모르고 지나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다른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우뚝 선 남자가 정장 재킷을 입지 않고 어깨 위에 걸친 채로 서 있었다.

재하는 놀라 그쪽으로 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했다. 그의 옆에 오메가로 보이는 늘씬한 남자가 서 있었기 때문이다.

…누구지?

의문이 생겼다. 처음 보는 얼굴이었기 때문에 장태건 밑에서 일하는 부하 직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뭔가 달랐다.

다가가려다가 그냥 몸을 돌렸다. 가뜩이나 장창식 때문에 신혼 초임에도 불구하고 서리만 내리지 않았던가.

더 무언가를 해서 또 한 번 미움을 받느니 아무것도 묻지 않고 제 속이나 썩이는 게 나을 듯싶었다. 이재하에게는 그것이 더 나은 기회비용이었다.

“마누라를 봤으면 알은 척을 해야지, 왜 그냥 가.”

그래서 그 말이 저를 부르는 말인지도 몰랐다. 한 발자국쯤 더 내딛다가 그제야 저에게 하는 말임을 깨닫고 걸음을 멈췄다.

재하는 돌아보면서도 의심스러웠다. 마누라라니. 물론 배우자가 있기는 하지만 장태건을 그렇게 부르기에는 좀, 아니 아주 많이 묘했다.

마침내 재하가 몸을 완전히 돌렸을 때 저를 애타게 찾던 ‘마누라’와 눈이 마주쳤다.

“…장 실장님?”

“유신에서 행사가 있다더니.”

장태건은 재하의 부름에는 대답하지 않은 채 홀이 있는 2층 쪽을 흘끗 보며 걸어왔다.

그의 뒤편에는 명순과 재하보다 약간 작은 키에 몸이 다부진 알파가 하나 있었다. 보이는 기색으로 추정컨대 알파 역시 ‘그쪽’ 사람인 것 같았다.

“네. 장 실장님은 여기 어쩐 일로….”

“나야 가끔 떼인 돈 받으러 다니고 그렇습니다. 언급하신 대로 아직 실장밖에 못 돼 놔서.”

떼인 돈이라고 해도 정말 동네 양아치들처럼 일이천에 움직이는 건 아닐 테고 아마 수백억짜리 공사가 어그러졌거나 그런 일을 처리하러 온 듯했다.

…사람을 찾으러 왔나?

그러나 재하는 더 캐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님, 안녕하십니까.”

가만히 있던 명순이 헤죽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영화에 나올 법한, 판에 박힌 그쪽 계통 외모로 웃으니 긴장감을 조성하기도 했지만 재하는 순순히 명순을 향해 인사했다.

그나마 태건의 일행 중 가장 낯익은 이는 명순이 으뜸일 것이다. 장태건은 집에 잘 들어오지 않으니 말이다.

“예, 안녕하세요. 명순 씨.”

재하가 인사를 돌려주자 어딘지 굳은 얼굴로 뒤편에 서 있던 알파가 저벅저벅 나오더니 팔을 쭉 내밀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사님. 저는 모정길입니다. 태건 형님 모시고 있습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태건의 부하 직원이라는 말에 재하가 반갑게 마주 인사하려던 참이었다.

“깡패 새끼들은 왜 이렇게 다 몰려다니나 몰라.”

그들의 뒤편에서 이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이재호였다.

…언제 나온 거지. 분명히 인사 다 하고 나오라고 했을 텐데.

이사보 주제에 이사가 시킨 일을 제대로 마무리하지 않고 자리를 뜬 것 같아 마땅치 않았다.

그런 재하를 흘끔 본 이재호가 입술을 비죽이며 웃었다. 뒤에 따라오는 수행원들을 믿고 재하가 제게 아무런 말을 못 할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재하는 타인의 눈에 비치는 유신의 이미지를 중요시 여기는 타입이고, 그것은 상당 부분 총수 일가에 대한 사회적인 시선에서 오기도 했기 때문에 웬만하면 밖에서 재호를 나무라거나 김란희를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걸 알고 말을 거는 것이었다. …날 잡고 본가에 들러서 묶어 놓고 팼어야 했는데. 재하는 재호를 보며 후회했다.

이재호가 그 망나니 같은 성격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굵직한 사고들이 없는 이유 중 9할은 이재하가 뒤에서 버티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재호 개인의 불행이라면 그가 약을 하든 사재를 도박에 꼬라박든 상관없을 테지만, 일단 그가 유신의 일원인 이상 멋대로 살게 둘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날 잡아 놓고 팼다. 사고를 치면 패고 사고를 안 쳐도 팼다. 복싱을 오래 해 온 재하의 주먹을, 게다가 열성 알파가 우성 알파를 이길 수는 없었는지, 이재호는 반항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늘 꼴사납게 처맞기만 했다.

재하는 나름 신사적인 성격이지만 그것은 문명인에 한했다. 재하가 생각하기에 이재호는 문명인이 아니었다.

비문명인 이재호에게 한마디 하려고 입을 연 순간이었다.

“너도 깡패 새끼야?”

“…뭐?”

장태건이 이재호를 향해 표정 없이 고개를 모로 꺾은 채로 말했다. 무표정이라기보다는 아예 표정을 지을 줄 모르는 사람처럼 보여 소름이 살짝 돋을 정도였다.

190cm가 넘는 거구의 알파가 기묘한 표정으로 저를 응시하자 이재호는 당황한 듯했다.

“처남도 깡패 새끼시냐고. 줄줄이 몰려왔길래 물어보는 거야.”

또 그 존대인지 반말인지 알 수 없는 말투로 이재호를 향해 물었다. 재호의 뒤쪽에 있던 수행원들에게 턱짓을 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재호는 울컥하여 대답하려다가 제 뒤를 돌아보고 저를 쫓아온 이들을 물렸다.

그 꼴을 다 지켜본 재하는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한심하기 짝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재호 이사보.”

“왜.”

“…….”

“…왜요.”

간단히 대답했다가 재하의 기색이 무시무시하자 존댓말을 냉큼 붙인 이재호가 저와 장태건을 번갈아 힐끔거리고 있었다.

“태도가 왜 그래? 와서 인사드려.”

“…….”

재하의 말에 이재호는 짜증스러운 기색으로 머뭇거리다가 슬금슬금 재하와 이태건을 향해 다가왔다.

우성 알파 두 명이 나란히 서서 저를 바라보고 있자 긴장한 듯 목울대가 울렁거리기도 했다.

이재호가 내키지 않는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안녕하십니까, 형님. 결혼식 이후로는 처음 뵙네요.”

그러나 그의 인사에는 관심이 없다는 듯 장태건이 이재하를 돌아보았다. 입을 열어 재하를 향해 무언가 말하려는 것 같았다.

그때 이재호가 한 번 더 이죽거리듯 말했다.

“근데 형님이라고 하면 이거 좀 애매하지 않나. 내가 그쪽 조직원도 아닌데.”

“…이재호.”

재하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이재호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재호는 말을 건 이후로 계속해서 무시당했던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저 나름대로 강한 척을 해 보이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잖아. 생각해 보니까 존나 웃기네.”

이재호가 질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장태건이 웃기 시작한 것이다.

바지에 손을 찔러 넣은 채로 고개를 살짝 젖혀 꽤 커다랗게 웃는 모습이 이질적이었다. 재하 역시 멍하니 그를 돌아볼 정도였다.

“…왜 웃어요?”

태건의 웃음에 이재호가 천천히 입꼬리를 내리며 물었다. 태건은 순순히 대답해 주었다.

“처남이 농담한 것 같아서 잘 보이려고 웃었는데.”

“…뭐라는….”

“원래 배우자 친가에는 잘 보여야 하는 거 아닌가? 얘, 명순아. 내 말이 틀리냐?”

그 말에 뒤에 있던 명순이 “맞습니다, 형님.” 하고 굵직하게 대꾸했다. 이재호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놀리는 것을 깨달았는지 열받은 듯했다.

장태건이 한 발자국 다가갔다. 이재호는 점점 다가오는 태건 때문에 뒷걸음질 쳐야 했다.

그러나 거기서 거기인 거리인지라 이재호는 금방 따라잡혔다. 태건이 그 꼴을 보고 아무런 감정 없어 보이는 얼굴로 말했다.

“존나 웃기다며.”

“…….”

“근데 왜 나만 웃고 있지? 존나 소외감 느끼게.”

그러고는 이재호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른의 손바닥만 한 송곳니를 갖고 있는 맹수가 코앞에서 저를 들여다보는 느낌에 사로잡힌 이재호의 두 눈이 흔들렸다.

그러나 장태건은 물러나 주지 않았다. 이재호는 할 수 없이 경련하는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하하….”

이재호는 억지웃음을 지었다. 뒤에 있는 수행원들도, 이곳이 호텔 로비 한복판이라는 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거스르면 바로 저 발밑에 눌려 죽을 것 같다는 생각밖에는 안 들었다. 저는 그저 가볍게 재하와 재하의 결혼 상대를 조롱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렇게 상대를 고르고 고르더니 고작 택한 것이 깡패 새끼냐고 묻고 싶었다. 네가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유신은 내가 다 빨아 먹어 줄 것이라고 그렇게 얘기하고 싶었다. 왜 갑작스레 결혼을 하는 거냐고. 재하에게 직접 물어도 될 질문이 입 밖으로 나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조롱에도 값은 치러야 한다는 듯, 남자는 무서울 정도로 까맣고 반질거리는 눈동자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람이라면 얼굴 위로 표정이 떠올라 감정이라는 것이 읽히기 마련인데 그런 것이 없었다. 이재호는 식은땀이 날 지경이었다.

그때 장태건이 이재호의 어깨를 투욱 두들겼다.

“자주 웃고 살아, 처남.”

“…….”

“암 예방에 좋대.”

…제가 지금 건강 걱정을 들은 것일까…? 멍하게 그를 바라보는데 태건은 이미 뒤돌아 재하의 등을 떠밀고 있었다.

이재호가 수치심과 모멸감에 붉으락푸르락해졌을 때는 이미 그 로비에 저와 길게 늘어선 수행원들만이 남았을 뿐이었다.

* * *

“…장 실장님.”

재하는 문득 정신을 차렸다. 등이 떠밀려 호텔 밖으로 나오기는 했으나 약간 당황한 상태였다.

태건이 이재호에게 그런 식으로 대응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가 이재호에게 무례를 저질러서 그런 것이 아니라, 제 짜증을 이해해 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재호의 몰양심과 부재된 예의, 매너, 수준 등에 회의를 느껴 뭐라고 한마디 하기도 전에 장태건이 먼저 나서 그 감정을 해소해 준 것 같았다.

부족한 것 없이 살아온 이재하에게도 결핍은 존재했다. 재하는 단 한 번도 누군가 저를 대변해 준 적이 없었다.

그에게는 날 때부터 고정된 위치가 있었고, 그런 위치를 지킨다는 건 으레 외롭기 마련이었다. 억울한 상황이 생기더라도 혼자서 감내하는 것이 의무와도 같았다.

그런 이재하에게 방금 전 상황은 생소하기 그지없는 일인 것이다.

누군가 저를 대신해 말을 한다는 것 자체가 처음 겪는 일이었다. 물론 이재하에게는 훌륭한 법률 대변인이 있기는 했지만, 그들은 재하의 감정까지 대변해 주지는 않았다.

제 감정을 헤아려 먼저 움직여 준 사람이 처음이라는 뜻이었다. 이재하는 가진 것에 비해 너무 쉽게 감동했다.

그가 그것을 원하는 줄 알았다면 만인이 달려들어 그의 목소리를 대변하려 노력했겠지만, 이재하 역시 자신이 그런 것에 감동받을 줄은 몰랐다.

그것은 뜬금없이 사랑을 유발했다.

그전까지는 그가 갖고만 싶었다면 이제는 그가 사랑스러웠다. 저를 앞서 걷는 태산 같은 어깨가 말이다. 바람결에 옅은 해당화 향이 실려 왔다.

재하는 숨을 흡 들이마시고 태건에게 말했다. 뭔가 이대로 그를 보내면 안 될 것 같았다.

용기를 조금 내고 싶었다. 그가 제 언짢음을 대변하여 이재호를 물리쳐 준 것도 고마웠다.

그 정도는 저 혼자 처리할 수 있지만, 이재하에게는 할 수 있는 일만 존재했기 때문에 할 수 있음에도 저를 위해 나서 준 이가 소중해지는 법이었다.

“저, 장 실장님. 어디 가시는 길입니까?”

그러자 그제야 앞서 걷던 알파가 재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은 마치 ‘아, 그래. 네가 있었지.’ 하는 표정이었다. 그제야 이재하의 존재를 기억해 낸 듯했다. 재하는 약간 멈칫했으나 조금 더 용기를 내 보기로 했다.

그가 장창식과의 뒷거래 때문에 저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오늘은 왠지 다를 것 같았다.

장태건은 걸음을 멈추고 재하에게 물었다.

“왜요. 따라오게?”

“아, 그게 아니라….”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 어떻겠냐고 권유하고 싶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아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지만 그래도 말이라도 한 번 꺼내 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드물게 긴장한 제 모습이 이상할 것 같기도 했다.

재하의 입술이 달싹이는 것을, 장태건은 끈기 있게 기다려 주었다. 아니, 기다려 주는 것 같았다.

심장이 날뛰던 것이 조금 안정된 기분이라 재하가 말을 이으려던 순간이었다.

“저만 두고 가면 어떡해요, 장 실장님.”

아까 그 오메가였다. 그러고 보니 중간부터는 눈에 안 띄었던 것 같아 신경을 끄고 있었는데, 갑작스레 다가와 장태건의 팔뚝을 쥐며 말하는 것을 보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재하는 그러는 제가 교양이 없다고 생각하면서, 저도 모르게 태건의 팔뚝을 꾹 쥐고 있는 오메가의 손을 응시했다.

“왜 들러붙어, 짜증 나게.”

태건이 표정 없이 말했다. 하나도 짜증 나지 않은 것 같았다. 재하는 태건의 얼굴색에서 짜증 난 기색을 터럭이라도 찾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았다.

그는 그저 시종일관 무표정한 얼굴로 제 팔뚝에 붙은 오메가의 손을 떼어 낼 뿐이었다. 그가 다시금 재하를 보며 물었다.

“말을 하다 맙니까. 궁금해 뒈지라고?”

“아, 그건 아니고….”

뒈지라는 뜻은 절대 아니었다. 약간 아연실색한 재하가 고개를 젓고 입술을 달싹였다. 남자가 미간 사이에 살포시 금을 긋더니 이쪽으로 달라붙었다.

그와 재하의 간격이 순식간에 좁혀 들었다. 그보다 먼저 다가온 것이 그의 해당화 향이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조금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런 그를 내려다보며 태건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뭔데? 나 따라오겠다는 것도 아니면서 왜 자꾸 불러.”

아…. 부르면 안 되는 건가. 재하는 그의 향에 취해 살짝 멍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어쩐지 장태건 앞에서는 원래 저와 달리 조금 멍청해지는 기분이었다. 재하는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며 입술을 달싹이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시간 되시면 같이 저녁이라도 하시는 게….”

“좋아요.”

말이 덜 끝났는데 대답을 들었다. 재하는 안 되시겠죠? 하고 물으려다가 혀를 살짝 씹었다.

얼얼한데도 방금 들은 말이 사실인지가 더 중요했다. 놀라 태건을 올려다보자 그가 표정 없는 얼굴로 저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었다.

눈매를 가늘게 좁혀 뜨고 바라보는 것이 꼭 의심하는 것 같았다.

“구라였어요?”

“아, 아닙니다.”

구라라니. 그런 건 절대 아니었다. 당황하여 고개를 젓자 태건이 짧게 끄덕이고는 덧붙였다.

“일정 끝났으면 집에 가서 기다려요. 나도 곧 퇴근할 거니까.”

“…네.”

재하는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도 했다. 그러고 나서도 제가 왜 그런 비효율적인 짓을 했지 하며 혀를 찼다.

대답이나 고개를 끄덕이는 것, 둘 중 하나만 하면 될 일인데 말이다. 그러나 장태건은 그런 재하를 알 수 없는 얼굴로 내려다보더니 흠, 하고 목울음을 냈다.

“얘, 명순아.”

“예, 형님.”

“니네 형부, 댁까지 모셔다드려라. 딴 데로 안 새시게.”

…형부? 저를 말하는 건가. 재하는 약간 희미하게 질려 버렸지만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대꾸했다.

“괜찮습니다, 저도 따라온 수행원들이 있고….”

“그게 뭐. 걔들은 눈 없어?”

아니… 있는데. 그건 왜…? 재하는 의미를 알 수 없는 질문에 두 눈을 깜빡였다.

태건은 재하를 바라보지 않고 품 안에서 담뱃갑을 꺼내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건조해 보이는 손가락에는 자잘한 상처가 나 있었다. 중견 기업 실장의 손가락이라기보다는 공사판 인부나 목수의 손가락 같았다.

오래도록 연장을 쥔. 그것이 하얀 담뱃대의 목을 물었다. 재하는 제 목덜미가 잡힌 것처럼 숨을 삼켰다가 작게 내뱉었다.

내내 뒤에 서 있던 정길이 불쑥 두 손을 뻗었다. 주먹이 커서 안 보였는데, 안에 지포 라이터가 들어 있는 듯했다. 손아귀 안에서 작은 불이 튀어 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이내 담배 꽁지에 불을 붙이더니 볼에 우물이 파일 정도로 빨아 마시고는 연기를 내뱉으며 말했다.

“그래. 눈깔 다 달려 있을 거 아냐. 오늘 특히 예쁘시니까 안전하게 명순이 차 타고 가셔.”

“…네?”

“얌전히 귀가해 계셔요. 마누라 돈 벌러 갑니다.”

뭐가 특히 예쁘다고? 뭐가 예뻐서 명순의 차를 타야 한다고?

재하가 느끼는 의문은 여러 가지였지만 태건은 대답해 주지 않고 등을 돌렸다. 그가 저벅저벅 걸어 나가자 옆에 있던 오메가가 그를 쫓아가며 이쪽을 돌아보았다.

“…….”

“…….”

시선이 얽혔는데 기분이 묘했다. …무슨 사이일까. 그러나 물어보지 못했다.

옆에 서 있던 명순이 순순한 표정과 말투로 “가실까요, 형부님.” 하고 물었기 때문이다.

* * *

그러나 그 2인 가족의 단란한 식사 시간은, 적어도 그날 저녁과는 인연이 없는 듯했다.

“…늦으시네.”

시간은 벌써 10시를 넘기고 있었다. 야참이면 몰라도 저녁밥이라고 부르기에는 애매한 시간이었다.

재하는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들을 돌아보았다. 개중에는 재하가 준비한 것도 있었다.

구절판의 밀전병 같은 것들은 제가 직접 부치기도 했다. 명순이 도와주기도 했지만, 어복쟁반에 들어갈 어만두를 굴리느라 바빠 보여 제게 맡기라고 했었다.

‘그럼 좋은 시간 되십시오, 이사님.’

또 형부님인지 뭔지 하는 괴상한 호칭으로 불리기 전에 얼른 정정해 주었던 탓에 마지막 인사가 이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명순이 그렇게 인사를 하고 집을 떠난 시간으로부터 벌써 세 시간이 흐른 뒤라는 점이었다.

“…….”

전화를 해 볼까 싶어 핸드폰을 뚫어지게 바라보았지만, 아직 거기까지 발전하지 않은 IT 기술력 때문에 시선만으로 전화를 걸 수는 없었다.

쳐다보는 것만으로 전화를 걸 수 없으니 손을 놀려야 했는데, 그것도 시도를 하지 못했다. 용기가 나지 않는 탓이었다.

한 30분 정도만 더 기다려 보고 전화를 걸어야지 마음먹었을 때였다.

현관문이 덜컹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뭐지 싶어 현관으로 향하는 복도 쪽으로 걸어가는데 더듬더듬 비밀번호를 키패드에 입력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장 실장님?”

그가 왔나 싶어 한 발자국 더 다가가려던 순간이었다.

바다 소금 냄새에 쇠 향이 섞여 있었다. 인지하기 전에 끼쳐 오는 불쾌감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명백한 피 냄새였다.

재하는 놀라 입을 열었지만 아무런 말도 뱉을 수가 없었다.

태건의 셔츠가 피에 푹 젖어 있었기 때문이다. 잘 매고 있던 타이는 어디로 치워 버린 건지 셔츠 위에 정장 재킷만 걸친 채였다.

흰색의 드레스셔츠가 어디서 온 건지 알 수 없는 핏물에 푹 절어 있었다. 응고되어 버석해진 핏물도 아니고 아직도 무언가 새어 나오는지, 핏물에 적셔진 셔츠가 그의 몸에 달라붙어 복근의 윤곽을 비추게 했다.

재하는 아연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이게 무슨….”

“다 내 피는 아닙니다.”

장태건은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며 현관 안으로 들어왔다. 실내용 슬리퍼로 갈아 신고는 멍하니 서 있는 재하에게로 다가왔다.

“피, 피가….”

“이것만 내 피라니까.”

그는 셔츠를 슬쩍 들어 올려 상처를 보여 주었다. 굴곡진 복근을 대각선으로 가로지르는 창상이 보였다. 족히 12cm는 되어 보였다.

재하는 숨을 들이 삼켰다. 피는 멈춘 것 같았는데 상처가 워낙 길어 꿰매야 할 것 같았다. 저대로 두었다가 과다 출혈로 인한 쇼크라도 일어나면 어쩌나 싶어진 것이다.

“병원, 병원을 가야….”

재하는 뒤돌아 현관으로 이어지는 복도 끄트머리 콘솔 위에서 자동차 키를 챙겼다. 급해서 아무거나 챙기느라 세단이 아닌 컨버터블 키를 집어 들었지만 깨닫지도 못했다.

시동이라도 걸어 놔야겠다는 생각으로 나가려는데 태건이 그의 손목을 잡아 세웠다.

놀라 돌아보자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짓고 있는 태건이 눈에 들어왔다.

“어디 가는데?”

“병원을….”

“어디 아파요?”

“제가 아니라 장 실장님이-.”

“됐으니까 들어와요. 이제 퇴근했는데 다시 나가라고?”

별일 아닌 것처럼 말하는 태건 때문에 재하는 약간 정신을 차렸다. 상처가 길기만 하고 깊지 않은 편일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장태건은 이미 저를 지나쳐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재하는 하는 수 없이 그의 뒤를 쫓았다.

멀쩡히 걸어가는 그가 신경 쓰여 등 뒤에 대고 말했다.

“소독이라도 해야 합니다.”

“그래요. 해 봐요.”

그럼 어디 네가 해 보라는 말투였다. 재하는 입술을 말아 물고 구급상자를 어디에 뒀는지 떠올렸다.

분명 처음에 입주할 때 명순이 구급상자를 둔 위치를 알려 주었었다. 비상약 외에도 뭐가 가득했는데 자세히 살펴보지 않았었다.

재하는 이제야 명순이 첫날 왜 제게 상자의 위치를 말해 주었는지를 깨달았다. 이런 상황이 있을 수 있음을 안 것이다.

‘정신이 없어….’

이렇게 당황한 적이 드물었다.

이재하가 이사로 재직하는 동안 중국에 있는 공장이 불타기도 하고 노조 시위가 일어나기도 했다. 모종의 이유로 주가가 급락한 때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당황한 적은 없었다. 일을 처리하기 위해 조금 바쁘게 움직였을 뿐 모든 일에 늘 차분히 대처했었다.

이토록 혼비백산한 적은 처음이었다. 볼썽사납게 손이라도 떨까 봐 주먹을 꽉 쥐어야 했다.

상처가 깊지 않다는 것을 알고, 걸어 들어올 정도면 괜찮다는 것을 아는데도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재하는 몇 번을 제자리에서 서성이다가 한참 만에야 구급상자의 위치를 기억해 냈다.

겨우 상자를 갖고 다시 거실로 갔는데 이번에는 장태건이 없었다. 뭔가 싶어 그의 방으로 향했다.

재하는 문틈이 살짝 열려 있는 방 안으로 들어가려다가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결혼 이후 그의 방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명순이 안내해 주지도 않았지만, 의식적으로도 그의 방과 멀리했었다. 그가 집에 돌아오지 않을 때도 말이다.

“…….”

재하는 조금 머뭇거리다가 걸음을 옮겼다. 피가 멎긴 했어도 그냥 두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방 안은 벽 쪽 천장에 매립된 주백색 간접조명만이 켜져 있었다. 따뜻한 색이었지만 침대와 스탠드가 놓인 콘솔만 덜렁 있는 방 안은 재하의 것보다 약간은 황량해 보였다.

그의 드레스 룸도 재하처럼 방과 붙어 있는 채로 따로 마련되어 있으니 옷장이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TV나 책상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기다란 마호가니 장 하나가 있었지만 무엇을 두는지 알 수 없게 닫혀 있었다. 재하는 그것이 금고겠거니 생각했다.

“아….”

걸음을 조금씩 옮기던 재하는 멈칫했다. 발밑에 셔츠와 정장 팬츠가 흩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걸 주워다가 정리하던 재하는 고개를 들었다.

솨아아-.

샤워실 쪽에서 떨어지는 물소리가 났다. 재하는 조금 아연해졌다.

상처가 났는데 샤워를 하는 걸까? 덧나면 어쩌려고….

입술을 말아 물고 서성거리던 재하는 들고 있던 태건의 옷가지들을 방에 딸린 욕실 앞 빨래 바구니에 넣고는 구급상자를 조심스레 침대 위에 올려 두었다.

책상이 있다면 그곳에 올려 둘 텐데 마땅한 곳이 없으니 주인 없는 침대에 올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나니 마치 제가 알몸으로 태건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처럼 황망해졌다. 고작 구급상자 하나를 그 위에 두는 일이 그러했다.

상자를 가져다주었으니 지금이라도 나가야 할까 싶어졌다. 주인 없는 방에서 기다리고 있는 걸 장태건이 보면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는 그냥 거실에서 그를 기다릴까 고민하던 찰나였다.

“상처 치료는 해 봤어요?”

욕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듣지 못했는데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은 장태건이 상의는 입지 않은 홈웨어 팬츠 차림으로 재하를 보고 있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강인한 턱선을 타고 물방울이 톡톡 떨어지는 걸 넋 놓고 보고 있었다.

태건이 표정 없이 지적하지만 않았다면 분명 그곳에서 천년이고 만년이고 멀뚱하니 서 있었을 것이다.

“의외로 열렬하게 보네. 나한테 관심 없는 줄 알았는데.”

“…아니, 아닙니다.”

재하는 놀라 정신을 차리고 중얼거리듯 대답했다. 열렬하게 본다는 말에 일단 부정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의 뒷말에는 신경을 못 썼다.

그러나 장태건은 재하와는 달리 신경을 쓰고 있는 듯했다.

“뭐가 아니야? 나한테 관심 없다고?”

“아, 그게 아니라….”

“더 하면 울겠네. 알겠으니까 이리 와요.”

울겠다니. 재하는 두세 살 정도의 가장 첫 기억 이후로는 울어 본 적이 없었다. 모친의 장례식장에서도 딱 한 방울 흘린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멀거니 서서, ‘저는 울어 본 적이 없습니다.’ 하고 항변하기는 또 이상한 일이라 그냥 입을 다물었다. 그러고는 침대 위에 걸터앉은 태건의 옆에 섰다.

“뭐부터 하면 되는지 알아요?”

수건으로 머리의 물기를 턴 태건이 침대 아래 아무렇게나 그것을 떨어트리자 재하가 주워서 빨래 바구니에 가져다 두었다.

그걸 보며 태건이 팔을 뒤로 짚어 상체를 느슨히 기댄 뒤 물었다. 재하는 답을 못 하고 망설였다.

나른해 보이는 그의 태도와 표정, 말투 등에서 미묘한 분위기를 느꼈기 때문이다. 분명 상처 치료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는지 아느냐고 묻는 것인데도 재하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다.

‘…짐승 새끼.’

재하는 자신을 타박했다. 다친 사람을 상대로 애먼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어이없었다.

알파의 정복욕과 욕구, 욕망 등을 자극하는 상대를 한 번도 만나지 못했기 때문에 몰랐던 것이지, 사실 자신은 제가 아는 것보다 훨씬 더 파렴치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재하는 이미 늦은 시각과 조용한 방 안, 옅은 조도의 주백색 빛이 그의 얼굴 위에 드리워 만들어 낸 명암 등을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빛은 그의 산맥 같은 콧대를 완전히 넘기가 힘들었는지 그대로 주저앉아 얼굴 한 면에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었다.

안광은 형형하여 꼭 눈 덮인 설산에서 범 한 마리가 이쪽을 응시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빛은 그의 콧대를 오르는 것에 실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지를 잃지 않은 것인지 그대로 그의 벗은 상체를 실크처럼 흘러내려 잘 짜여진 근육을 조밀하게 비추고 있었다.

쇠 파이프를 이어 붙인 것같이 단단해 보이는 쇄골, 두꺼운 어깨, 석고에 정을 대고 일일이 조각해 넣은 듯한 근육들, 그가 저를 보는 눈매 등이 재하의 숨을 멈추게 했다.

알파로 태어난 이상 몸을 만드는 것이 어려운 것은 아니다. 여성체든 남성체든 알파에게는 신체를 비약적으로 발전시키는 호르몬이 나오니까.

이재하 역시도 군살 없이 근육으로 짜인 몸이었다. 그러나 눈앞의 알파, 장태건은 그와는 조금 달라 보였다.

돈을 주고 만든 몸이 아니라 바닥을 구르며 쌓아 올린 몸 같았다. 유연하게 움직여 누군가의 근육을 찢고 뼈를 부수고 원하는 것을 쟁취해 온 그런 몸이었다.

자잘한 상처가 많지는 않았지만 굵직하게 몇 군데가 있었다. 장태건에게 그런 상처를 낸 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라는 생각이 잠깐 들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멍하니 서 있는 재하를 향해 남자가 피식 웃었다.

“침 흘리겠네. 이리 오래도.”

“…침은, 안 흘렸습니다.”

“다른 건 흘렸어요?”

재하는 그렇게 말하는 태하의 시선이 제 바지춤을 슬쩍 보는 것을 깨닫고 놀라 몸을 틀었다. 자신답지 않은 격한 반응에 저 역시 놀란 참이었다.

장태건이 그런 재하를 보며 피식 웃으며 말했다.

“꼭 애새끼 따먹는 기분인데.”

“그게 아니라….”

“사실은 내가 더 연하잖아요.”

‘그쵸, 재하 형?’하고 덧붙여 묻는 목소리에 재하의 얼굴이 발갛게 달아올랐다. 무슨 의미로 저런 말을 하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금세 정신 줄을 바짝 잡았다. 지금 장태건의 외모나 분위기에 홀려 넋을 놓을 때가 아니었다.

따뜻한 물이 닿아 주위 혈관이 확장된 건지 상처에서 다시금 피가 배어 나오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군대에 있을 때 간단한 응급처치 정도는 배웠습니다.”

“멋있네. 난 면젠데.”

태건이 입꼬리에 웃음을 지우지 않은 채로 재하에게 해 보라는 듯 구급상자를 툭 밀었다.

재하가 상자를 여는 사이 태건이 침대에서 일어나 벽에 붙은 장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뭔가 했더니 미니바가 달려있는 나무 장이었다. 안쪽 미닫이 서랍 안에는 크리스털 병에 담긴 호박색 액체가 있었고, 여닫이 서랍에는 장의 크기에 딱 알맞은 알코올 셀러가 있었다. 접이식 간이 테이블까지 달려있는 맞춤 제작 가구인 듯했다.

태건은 재하를 바라보며 잔을 들어 올려 허공에 건배라도 하듯 찡긋거렸다. 한잔 들겠냐는 제스처였다.

재하는 조심스레 고개를 저었다. 결혼 전, 그와 함께 술을 마시고 무슨 짓을 벌였는지 잊지 못한 상태였다.

재하는 크리스털 병의 목덜미를 잡고 바카랏 잔에 술을 따르고 있는 태건을 보다가 말했다.

“…술은 웬만하면 드시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소독하는 거잖아요.”

태건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하고는 기어코 잔에 따라진 것을 비워 버렸다. 재하가 입술을 말아 물고 그를 바라보자 태건이 피식 웃으며 잔을 들고 침대로 다가왔다.

오늘따라 그의 웃음이 헤픈 느낌이었다. 알기 전에는 늘 무표정할 거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표정을 굳히고 딱딱하게 대하는 건 자신 쪽이라 신경이 쓰였다.

그러나 그는 재하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관심 없는 것인지 침대에 비스듬히 걸터앉을 뿐이었다.

“나만 벗고 있기 민망하니까 얼른 하든지 아니면 벗든지 해요.”

그 말에 놀라 얼굴을 바라보니 무표정 위로 슬며시 웃는 기색이 눈에 들어왔다. 농담을 하는 건가 싶기도 했다.

저도 표정을 읽을 수 없다는 소리를 많이 듣는 편이지만 장태건은 더했다.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궁금했지만, 부러 묻지 않았다.

재하는 말없이 소독용 약과 탈지면을 꺼냈다.

일일이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입을 꾹 다물었지만, 표정으로 티가 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장태건 앞에서만 유별나게 굴어 민망했다.

마음에 있는 상대 앞에서 어떤 식으로 행동하는지 전혀 몰랐던 탓도 있었다. 도둑질도 해 보던 놈이 한다고 장태건 앞에만 서면 저답지 않게 허둥지둥한다는 걸 알면서도 멈출 수가 없었다.

태건은 그사이, 알 수 없는 앰풀이 든 일회용 주사기 포장을 까더니 그대로 제 팔뚝 안쪽에 찔러 넣었다. 재하는 처음에 저것이 마약인가 싶었다.

그의 눈빛에 서린 의심을 알아보았다는 듯이, 태건이 말했다.

“항생제인데.”

“…그렇습니까.”

“지금 나 약이나 하는 개양아치 새끼로 봤죠?”

“아닙니다….”

재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약간 그랬다는 말은 사실대로 하지 못했다. 장태건은 그렇게 묻는 내내 표정이 없어서 이번에야말로 농담인지 진담인지 헷갈렸다.

당황하여 허둥거리지 않게 짧게 한숨을 내쉬고 탈지면에 소독약을 묻혀 허리를 숙였다. 태건이 잔을 들고 다시금 침대가에 앉은 탓에 저도 허리를 굽혀야 했는데, 상처 부위를 세밀하게 살피기에는 자세가 불편했다.

결국 무릎을 꿇고 상처 부위를 들여다보는데 묘하게 태건이 저를 빤히 바라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싶어 시선을 들어 그를 바라본 재하는 자신이 남자의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는 걸 깨달았다.

“아….”

“경치 나쁘지 않네요.”

태건은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덕분에 기다란 속눈썹에 의해 차양처럼 그림자가 아롱져 있었다. 그 사이로 언뜻 보이는 까만 눈동자는 여전히 홍채와 동공의 구분 없이 검기만 했다.

살짝 가늘게 뜬 눈매로 그가 웃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흔적도 없는데 그것이 어쩐지 웃음 같아 보였다.

바카랏 잔을 유려한 입술 선에 가져다 대고 기울여 입 안으로 쏟아지는 호박색 액체를, 재하가 제 다리 사이에 무릎 꿇고 있는 광경을 안주 삼아 넘기는 것 같기도 했다.

불시에 얼굴이 붉어졌으나 이제는 정말 상처를 소독해야 했다. 피가 배어 나오는 속도가 빨라지는 것처럼 보였다.

재하는 숨을 죽이고 탈지면을 끼운 핀셋을 들어 상처 부위를 살살 적셨다. 아플 텐데도 태건은 재하를 빤히 내려다보며 술만 축였다.

재하는 그 시선이 견디기가 어려웠다. 그걸 눈치챈 것인지 태건이 술을 권했다.

“한 입 정도는 괜찮잖아.”

또 반말.

재하는 술잔을 내미는 그를 바라보다가 한숨을 내쉬며 핀셋을 잡은 반대 손으로 받아 들어 단숨에 털어 넣었다.

들어온 액체의 향을 보아하니 맥아로만 만든 싱글 몰트인 듯했다. 꽤 술맛이 좋았다. 식도에 퍼지는 뜨거운 느낌은 별개로 말이다.

술이 들어가니 긴장이 좀 풀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그의 시선이 뺨 언저리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것 같았지만 확인하지 않았다. 재하는 다시금 소독에 집중했다. 다행히 우려했던 것보다 상처가 깊지 않았다.

안도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다행입니다.”

“그냥 스친 거라니까. 병원 놀이 하고 싶어 하더니, 만족해요?”

재하는 이 알파가 저를 애 취급하는 걸까,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기다란 속눈썹 아래 자리 잡은 눈동자는 밤바다처럼 검기만 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짐작할 수가 없었다. 제 것은 내어 주지 않고 그저 울렁거리게만 만드는 것이 딱 밤바다 같았다.

다시금 치료에 집중했다. 이 정도면 꿰매야 하는 것은 아닐까 싶었는데, 남자는 대수롭지 않게 굴었다.

만약 제가 구급상자를 들고 들어오지 않았다면 마시던 위스키를 상처 부위에 부어 버렸을지도 모른다. 그게 처치의 끝이라는 듯 말이다.

그걸 생각하니 더욱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수밖에 없었다. 다친 곳을 슥 핥고 말아 버리는 이 맹수 같은 남자에게 제대로 된 치유를 선사하고 싶었다. 그것이 제 욕심임을 알고 있는 만큼 조금 더 그런 마음이 들었다.

아프지 않게 해 주고 싶어 집중하다 보니 자세가 민망한 것도 잊어버렸다. 재하는 새로운 탈지면을 지혈제를 뿌린 상처 부위에 대고 붕대를 그 위에 덧댔다.

그러고는 붕대를 풀어 감으려다가 문득 제 자세가 반 무릎을 꿇은 상태에서 몸을 일으켜 태건의 몸통을 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그걸 깨닫자마자 멍청하게 작은 탄성이 터졌다. 귓등이 터질 것처럼 붉어진 게 제게도 느껴질 정도였다.

몸이 훅 달아올랐다. 그래도 붕대를 감는 것을 멈출 수는 없었다. 여기서 손을 떼어 냈다가는 상처 부위에 대었던 탈지면이 그대로 떨어져 버릴 것이다.

재하는 떨리는 손을 억제하려 노력하며 다시금 붕대를 감았다. 작게 웃는 소리가 귓가에 들렸다.

“얼마나 기다렸어요.”

“뭐를…. 뭐를 말입니까.”

“같이 저녁 먹자고 했는데 내가 안 왔잖아. 나 안 기다렸어요?”

아니. 무척 기다렸다. 더없이 고대하기도 했고. 그러나 재하는 말없이 하던 일을 마무리했다.

또 한 번 거기에 대고 장 실장님을 무척이나 기다렸고 오지 않아 걱정하던 참이라고 말할 수가 없었다.

바보짓은 충분히 많이 했다. 제 감정을 다 드러내는 게 어려운 것도 있지만 그런 진심들이 태건에게는 불편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뜩이나 장창식의 일로 점수를 까먹었다. 재하는 정말로 그와 잘 지내보고 싶었다. 그가 저와 같은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봐 주길 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든든한 배우자로서 자리매김하고 싶었다.

그러다 시간이 흐르면 서로의 자리가 자연스러워지길 기대했었다. 그러나 이재하는 방법을 몰랐다.

무수한 교육을 받아 왔지만 이런 때는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 알려 주는 교육 같은 건 없었다.

“안 기다렸나 봐.”

“…….”

“서운해서 배가 다 쑤시네.”

“아픕니까…?”

그 말에 놀라 고개를 들어 올리며 물었다. 재하는 그제야 저를 내려다보며 슬쩍 웃고 있는 알파를 볼 수 있었다.

어디선가 해당화 향과 바다 소금 냄새가 났다. 재하는 제가 멍하게 태건을 바라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향이 점점 더 진해지고 있었다. 무척 다디단 꽃 냄새가 났다. 해안가 절벽, 아주 척박한 돌각에서만 피는 꽃의 향이.

재하는 멍한 머리를 추스르려 애썼다. 붕대는 거의 다 감은 것 같았다. 재하는 이어진 시선을 간신히 끊어 내고는 고정 호크를 꽂아 마무리했다.

그러고는 자리에서 일어서려고 했다. 갑작스러운 현훈이 그를 강타하지 않았다면 말이다. 재하의 몸이 앞쪽으로 기울었다. 부지불식간의 일이었다.

“아….”

“이런.”

태건은 그런 감탄사를 내뱉은 것치고 말투에 묘한 웃음기가 묻어 있었다. 재하의 허리를 잡아채는 팔은 단단한데다가 휘감아 오는 속도가 무척이나 빨랐다.

어…. 이상하다….

재하는 멍한 머리로 더듬더듬 생각했다. 술을 마셔서 그런가. 그러나 목구멍으로 넘긴 술이라고 해봤자 샷 잔 하나보다 양이 조금 적었고 재하의 주량은 그렇게 형편없지 않았다.

무언가 이상했다. 재하는 멍한 두 눈을 깜빡였다.

뭔가 알 수 없는 열기가…. 사고가 인지하지 못한 부분부터 열꽃이 피는 것처럼 뜨거워졌다.

“물푸레나무.”

태건이 재하의 귓가에 속삭였다. 뜬금없는 말에 소름이 돋았다.

“아닌데. 음, 영춘화?”

그것은 재하의 페로몬 향이었으니까.

어디선가, 아주 단 냄새가 났다. 척박한 곳에서만 화려해지는 꽃의 이름. 해당화 향이 났다. 희미한 파도 소리가 들렸다. 짙게 깔린 바다 소금 냄새가 불러온 환청이었다.

재하는 아찔한 두 눈을 감았다.

몸이 이상했다.

러트인가 싶었지만 러트 때도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자글자글 열이 끓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재하는 멍한 머리를 흔들었다. 고꾸라진 상체를 일으키고 싶은데,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태건의 어깨를 안듯이 붙잡은 채로 그 가슴팍에 뺨을 대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것뿐이었다.

남자가 속삭였다. 이 상황이 적어도 한 사람에게는 무척 기꺼워 보일 만큼 웃음기가 스며있는 목소리였다.

“왜 자꾸 안겨.”

“…….”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그게 아니라 잠깐 어지럽다고 이제 방에 가서 쉬어도 되겠냐고, 아프면 저를 부르라고 말한 뒤 이 방에서 나가야 할 것 같았다.

사이렌이 머릿속에서 울렸다. 열기가 범람하듯 재하를 덮쳤다.

왜 이렇게 다 파도 같지? 왜 이렇게 다 바다 같지?

새까맣게 물들어 속을 알 수 없는 장태건의 눈동자, 가시지 않는 바다 소금의 향, 해안가 절벽에 핀 해당화, 그리고 노도와 같이 밀려드는 이 열기.

재하는 그대로 바다에 잠긴 것처럼 몸이 축 처졌다. 결국엔 뺨이 그의 단단한 가슴팍에 닿고 말았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

“그거 알아요?”

이사님은 알파를 동하게 만듭니다.

누군가 그렇게 속삭이는 것 같았는데 그게 누구인지 식별이 어려웠다. 재하는 두 눈이 열기에 좀먹어 가물거리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이성이 적색 경고등을 켰다. 재하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저, 잠, 깐, 이제 가야….”

제 방으로 가겠다고 말하고 싶었다. 품에서 벗어나고 싶었는데 허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계속해서 허우적거렸다.

물에 빠진 사람을 간단히 건져 내는 것처럼 태건이 재하의 허리를 껴안아 제 무릎 위에 올렸다.

“이재하.”

“…네.”

순순한 대답이 나왔다. 저도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재하는 제 이마가 태건의 쇄골에 닿아 비벼지고 있는 것도 몰랐다.

끓어오른 열기가 한 김 식지도 않고 그대로 용암처럼 부글거렸다. 아랫배가 간지러웠다. 동시에 묵직하기도 했다.

러트, 러트가 온 것 같았다.

“아니, 아닌데….”

재하는 꿈과 생시를 구별 못 하고 어린아이처럼 중얼거렸다. 이건 러트가 아니었다. 러트는 이렇게 아무런 행동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열기에 들끓지는 않는다.

누군가를 향한 소유욕, 정복욕, 욕구의 늪에 빠진 것같이 헤어 나올 수 없는 기분이 들기는 했어도 이렇게까지 사람을 좀먹는 간지러운 열기를 품지는 않는다.

그런 재하의 무릎 뒤에 팔을 넣어 추켜올리듯 껴안은 장태건이 말했다.

“누가 내 방에서 발정하래.”

그가 말할 때마다 이마를 대고 있는 쇄골에서 웅웅거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재하는 그게 아니라고 말하고 싶었다. 아무리 배우자라고 해도 별안간 러트로 인해 천지 분간을 못 하고 페로몬을 쏟는 것은 실례였다.

방 안 가득 물푸레나무 향이 가득 차는 것이 느껴졌다. 재하의 페로몬이었다. 그러나 물푸레 냄새만 나는 것은 또 아니었다.

다디단 해당화 향, 바다 소금의 냄새, 폭발하듯 섞여 있는 물푸레 향과 함께 느껴지는 희미한….

“아니야….”

재하는 부정했다. 희미한 영춘화, 쟈스민꽃의 향기가 났다. 꽃을 좋아하는 수민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외우고 있던 영춘화의 꽃말이 떠올랐다.

‘관능적.’

“아니긴. 기억이 어지간히 안 나나 봐?”

“…….”

“박아 줄 때마다 질질 흘리고 다 젖을 정도로 처덕이는데 저는 죽어도 아니라고.”

그리고 ‘당신은 나의 것’ 어째서 그런 꽃말이 뜬금없이 떠올랐는지 모르겠다.

“그럼 자지 터지게 구멍으로 주무르던 건 이재하씨 아니면 누군데.”

“장, 장 실장….”

“실장은 씨발, 재하야. 네 뒷구멍 쑤셔 줄 사람한테 실장이 뭐니.”

밤바다 아래 가라앉아 있던 짐승이 웃었다. 새까매서 구분이 가지 않는 홍채와 동공, 재하는 그 짐승의 눈길을 피했다.

침실에는 이제 아예 영춘화의 향만 만연했다.

‘당신은 나의 것.’

영춘화의 향이 나는 것은 재하 자신인데도, 어쩐지 그 꽃말 속 주인공은 제가 아닌 듯했다. 이재하가 장태건의 것일 수는 있어도 장태건이 이재하의 것일 수는 없었다.

‘당신은 나의 것.’

그렇다면 그 꽃말은 누굴 위한 것일까.

* * *

“아-! 흐….”

열락이 고여 온몸을 뒤흔드는 듯했다.

“하, 지 마아, 흐익….”

제 젖꼭지를 꼬집어 쭉 잡아당기는 손을 떼어 내려 해 봤지만 쉽지 않았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부분이 자극받을 거라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꼬집힌 순간부터 피가 몰려 가려워지는 걸 이해할 수가 없었다.

츠읍, 쩌억, 점성 깊은 무언가에 잔뜩 젖어버린 골이 벌어질 때 나는 소리가 다리 사이에서 울리고 있다는 걸 믿기 힘들었다.

왜 거기가 젖는 것인지 이해할 수도 없었다. 속으로 한없이 부정 중인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장태건이 목울음을 내듯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숭 좀 그만 떨자. 여기도 다 젖었어. 눈에 보이는 게 있는데 입만 살아 가지고.”

재하 형, 하고 사근사근 부를 때는 언제고 장태건은 재하의 볼기짝을 찰싹 때리며 버릇없는 아이를 대하듯 얼렀다.

어릴 때도 얻어맞아 본 적 없는 부위가 새빨갛게 달아올라 얼얼한 느낌과 함께 황망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과 별개로 재하의 성기가 꺼덕거리며 복근에 찰싹 부딪혔다. 귀두가 뭔지 모를 투명한 액들에 젖어 있어 철벅이는 소리가 났다.

“잠, 잠깐, 장 실장….”

뭐라 말릴 새도 없이 무언가가 속으로 들어와 안을 휘저었다. 두꺼운 느낌이 들어 벌써 태건의 성기가 삽입됐나 싶었는데 흘끗 아래를 내려다보니, 그것은 그냥 무서운 기세로 발기해 있을 뿐이었다.

안에 들어와 있는 건 그럼 뭐지…? 재하가 열기에 젖어 멍한 눈을 깜빡이자 태건이 혀를 내밀어 제 아랫입술을 핥으며 친절히 알려 주었다.

“손가락이잖아요. 겨우 두 개도 못 받아먹고 앙살을 부려. 아랫입이 존나 짧네.”

손가락…? 손가락이라기에는 너무 굵었는데…. 재하는 멍한 머리를 가로저어 뒤통수를 침대에 비비며 생각했다.

방 안에는 온갖 향이 휘몰아치고 있었다. 이재하의 페로몬 향은 물푸레나무이다. 단 냄새나 꽃 향이 섞인 적 없는 이슬 젖은 나뭇가지의 향이었다.

그런데 갑작스레 향이 변했다. 방 안에는 쟈스민, 그러니까 영춘화의 향이 짙게 퍼져 있었다.

재하는 열에 의해 멍한 머리로도 이상하다는 생각을 했다. 알파와 오메가는 발현 뒤 고정된 페로몬 향이 바뀌지 않는다. 그것은 유전학적으로 불변하는 형질이었고, 사람의 홍채 색이 시간이 지나 갑자기 변하지 않는 것처럼 페로몬의 향도 그러했다.

그런데 갑자기 제게서 영춘화의 향이 난다니. 혼란스러웠다.

“어쭈, 딴생각도 해.”

상대는 그런 재하가 못마땅한지 마디가 굵은 손가락을 안쪽까지 찔러 넣어 정확히 휘저었다.

내벽 깊숙한 곳, 살짝 융기되어 도드라진 부분에 손톱을 세우지 않고 손가락의 끝마디 부분으로 지그시 문지른 것이다.

둥글게 비벼지는 감촉에 재하는 헉, 숨을 삼킨 채로 온몸을 덜덜 떨어 댔다. 성기 끄트머리에서 무언가 찍, 하고 튀어 오르는 느낌이 났다.

재하는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느낌이 사정과는 무척이나 달라 저도 모르게 아래를 바라보았다.

꺼덕이는 성기 끄트머리에서 투명한 액이 찍찍, 튀어 오르고 있었다.

“분수도 쌀 줄 알아?”

태건이 다시금 엉덩이를 두들겼다. 기특한 아이를 칭찬하듯이 말이다. 재하는 수치심에 몸을 뒤척였다.

제 몸이 이상했다. 러트인 것 같았는데 그보다 훨씬 더 몸 안쪽이 간지럽고 생소한 감각이 들었다.

그러나 러트가 아니라고 치기에는 이 열락에 대해 설명할 길이 없었다. 재하는 결국 태건의 손목을 붙잡고 빌었다.

“모, 몸이 이상합니다…. 러트가 온 것 같은데 억제제라도….”

“우리 이사님 러트기입니까?”

태건의 목소리가 짐짓 다정하게 들렸다. 지금이라도 억제제를 먹으면 될 것 같아 재하는 턱을 끄덕였다.

눈가는 이미 물기에 젖어 있었다. 그는 제 두 눈이 왜 젖어 있는지도 모르고 아이처럼 고갯짓을 했다.

그런 재하를 내려 보는 태건의 눈이 묘했다.

“나도야.”

“무슨….”

“나도 러트기 왔다고. 이사님이 지난번에 나 따먹고 그냥 토껴서 이번에는 안에다 제대로 박아 주려고 억제제 안 먹었습니다.”

뭐…? 그게 무슨…. 재하는 혼란스러운 눈으로 태건을 바라보았다.

그는 러트기를 맞이한 알파 같지가 않았다. 재하 역시 자신을 꽤 이성적인 알파라고 자부했지만, 러트기에는 어떤 철혈의 이성도 흐트러지기 마련이다.

그저 욕구밖에 없는 짐승이 되는 시기라 재하는 그때의 자신이 싫었다. 타인과의 스킨십에 미련이 없는 탓에 억제제로 버텼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은 그 욕망을 제어하기 힘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눈앞의 알파는 그런 번뇌 따위는 모른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재하는 그의 러트가 믿기지 않아 저도 모르게 시선을 떨어트려 자연스레 두껍게 융기해 있는 그의 성기를 응시했다.

“그, 그럼 그건 러트기 때문에….”

성기의 모양이 꼭 노팅을 할 때처럼 끝이 부풀어 있었다. 재하가 저도 모르게 휘둥그레진 눈으로 뚫어지게 응시하자 태건의 성기가 공중에서 꺼덕였다. 요도구에 투명한 물방울이 맺혀있다가 그 움직임에 의해 주륵 흘러내렸다.

재하 역시 알파이니 성기의 두께나 길이가 평범한 편은 아니었다. 그러나 태건의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것은 성기라기보다는 조금 더 원색적인 이름이 필요했다.

“자지에 다마 박은 건 처음 보나?”

그래, 자지라는 이름이 더욱 어울리는…. 아니, 뭐라고? 재하는 대답하지 못한 채 다시금 태건의 것을 살폈다.

다마라니. 태건의 말대로 재하는 거기에 구슬이 박힌 것은 처음 보기는 했다. 그러고 보니 귀두 갓 아랫부분이 살짝 동그랗게 튀어나온 것 같기는 했다.

가뜩이나 성기의 사이즈 자체가 흉흉할 지경인데 구슬을 박아 두니 사람 것으로도, 짐승의 것으로도 보이지 않았다.

재하가 계속 바라보자 태건의 성기 끄트머리가 다시 한번 말갛게 젖어 들기 시작했다. 검불게 물든 귀두가 매끈하게 젖어들자 박혀있는 구슬이 더욱 도드라졌다. 요도구가 크게 벌름거렸는데 그 크기조차 재하의 것과는 달랐다.

울컥하고 튀어나온 선액이 귀두에 진득하게 흘러내리는 것을 본 재하는 저도 모르게 숨을 집어삼켰다. 몸 안쪽 어딘가가 몹시 간지러워졌다.

손을 댄 것도 아니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는데 왜 선액이 나온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태건이 손가락으로 재하의 뒤를 쑤셔 주기는 했지만 그건 재하가 당한 애무이고 저는 태건에게 닿은 적이 없었다.

그만하라고 팔뚝을 잡은 적은 있으나 고작 팔뚝에 손이 닿았다고 성기에서 선액이 줄줄 흐르는 모양새도 이상했다.

그러나 거기에 대고, 왜 이렇게 됐습니까? 하고 묻는 것도 이상한 일이라 입을 다물었다.

남자는 손으로 제 것을 한 번 훑으며 물었다.

“구경 다 했어?”

여상한 말투였다. 재하의 시선에 발기한 것을 꺼덕거린 사람으로 볼 수 없을 만큼 심드렁한 어조였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즉시 온몸의 감각이 다시금 재점화되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읏….’ 하고 터져 나오는 신음을 억눌러야 했다. 태건이 제 성기를 잡고 있던 손을 쭉 뻗어 재하의 것을 휘어잡았다.

아까부터 흥분해 아플 정도로 발기해 있던 것이 태건의 굳은살 박인 손바닥에 쥐어졌다. 손바닥이 살짝 젖어 있었다. 그게 왜 젖은지에 대해 생각하다가 회음부 쪽이 묵직하다 못해 빠질 것 같은 느낌을 자각하고서야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이사님 자지가 이렇게 훌륭한데.”

“…흐으.”

“어쩌나, 이제는 못 쓰겠네.”

안타까워 그렇게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고, 어쩐지 신이 나 보이기도 했다. 그의 손이 천천히 위아래로 움직였다.

굳은살이 박인 터라 손바닥이 거칠 것 같았는데 그도 아니었다. 맨살에 성기가 스치는 감각에 녹아든 재하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제 성기를 감싸 쥔 것이 태건의 손이라는 것이 더욱 흥분케 했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들썩였다. 그 모양새를 태건이 비웃었다.

“어디에 박던 버릇입니까.”

“아, 흐…. 그게 아니라….”

“처신 제대로 하자. 다른 구멍에 박을 거면 이대로 잘라 버려도 될 것 같은데.”

“읏, 잠…. 흐익-!”

“예쁘고 귀엽게 생겨서 종종 이렇게 흔들어 주고 싶으니까 간수 잘하시라고.”

알겠어요, 이사님?

그렇게 묻는 말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사람은 없고 오직 당신뿐이라는 말도 하지 못했다.

그의 엄지가 요도구에 딱 달라붙어 주위를 둥글게 문질렀기 때문이다.

“아, 아…! 놔주, 흐윽….”

처덕거리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렸다. 그게 다 제 성기에서 나온 물기라는 걸 희미하게 깨달았을 때부터, 딱 미칠 것만 같았다.

태건이 그대로 손을 미끄러트리더니 젖은 손가락으로 회음부를 다시금 문질렀다. 재하는 다리를 오므리고 싶었으나 그때마다 허벅지 안쪽을 얻어맞았다.

버릇없는 아이를 대하는 것 같은 손버릇에 왜 흥분하게 되는지 저도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알파가 이렇게 자지 못 먹어서 환장한 구멍처럼 굴어도 돼?”

재하를 모욕하기 위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뭔가 만족스러워 내뱉는 말 같았다. 마치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는 듯이 말이다.

맞는 말이었다. 장태건의 것이 아니었다면 재하도 같은 알파와 관계를 맺기는 싫었을 것이다.

그러나 제 마음을 모두 내보이는 것이 장태건에게는 그저 성가실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에 재하는 터지는 신음 사이로 진심을 숨겼다.

몸이 달아 바르작거리고 있는 재하를 내려다보며 자위라도 하듯, 태건이 그의 다리 사이에 반 무릎을 세운 뒤 제 것을 흔들었다.

태건의 시선이 재하의 여기저기를 훑었다. 그가 꼬집어두어 툭 튀어나온 유두, 하얀 피부에 굴곡진 가슴근육 아래에 진 그림자, 움푹 파인 배꼽과 수영을 즐겨 영구 제모를 한 탓에 민둥해 보이는 사타구니.

“제모는 왜 했습니까? 신혼용이야 아니면 딴 새끼들 눈요깃감이야.”

신혼용이라니. 그런 말은 재하에게 너무 많은 상상을 불러일으켰다. 실제로 그들이 결혼 후 서로의 살갗에 닿은 적은 이번이 처음인데도 말이다.

재하는 몰아치는 감각을 잠시라도 피하려 손바닥에 얼굴을 묻으며 중얼거렸다.

“수, 수영 때문에.”

“수영?”

꽤 보수적인 터라 재하 역시 처음에는 기다란 수영복을 입었었다. 그러나 수영을 배울수록 욕심이 들어 저항을 줄이기 위해 작은 수영복을 입기 시작했다.

그러니 제모가 필수일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보통의 경우에는 호텔 수영장을 통째로 빌려 사용하지만, 선수용 풀도 좋아하기 때문에 다른 이들과 함께 운동하려면 어쩔 수 없었다.

“그럼 이게 내 선물이 아니라 운동용인 거네요?”

이제는 또 존댓말을 한다. 재하는 그 말에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바닥을 떼어 냈다.

장태건이 그의 다리 사이에서 발기한 성기를 살짝 치워 내고는 재하의 눈을 피하지 않은 채로 혀를 내밀어 아랫배를 핥았다.

딱 제모한 자리였다. 알파치고는 체모가 없는 편이기도 했지만 수영을 다니며 늘 깔끔하게 정리해 둔 터라 예민해진 피부 위로 까슬한 혓바닥이 닿았다.

그러나 감촉보다 더 야한 것은 장태건이 저를 바라보는 그 눈빛 자체였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신음했다.

“으, 흐응…!”

그런 소리가 제게서 나올지도 몰랐고 그런 자극에 정액이 튀어나올 줄은 더더욱 몰랐다. 재하는 눈을 감으며 인상을 찌푸렸다.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말이다.

“안, 안 돼….”

속절없이 외치며 팔을 아래로 뻗어 제 성기의 끝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하얀 정액이 손가락 사이로 줄줄 흘러내리는 것은 변하지 않았다.

보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시선이 이미 진득하게 그쪽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떻게 자신을 저런 눈으로 보는 거지, 싶기도 했다.

재하는 온몸이 빨갛게 물든지도 모르고 아직 사정하고 있는 제 성기를 가리며 물었다.

“왜, 왜 그렇게 보는 겁니까….”

“침대 위에서 마누라가 남편 본다는데 그게 나쁜 겁니까?”

그 말에 재하는 읏, 하고 다시 한번 백탁액을 직, 뿜어냈다. 사정의 여운이 거대한 혓바닥 위에 재하의 알몸을 올려 둔 것처럼 질척하게 핥고 지나갔다.

태건이 그의 다리 사이에 완전히 자리 잡은 채 무릎 뒤를 팔로 끼워 제 쪽으로 죽 끌고 왔다. 졸지에 재하는 반항 한 번 못 하고 태건의 허벅지 위에 제 엉덩이를 올려 두어야 했다.

딱딱한 무언가가 회음부를 쿡 찌르다가 퉁, 하고 튕겨 허벅지를 찰싹 때렸다. 두꺼운 방망이 같은 것에 얻어맞은 기분이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고 그것이 장태건의 성기임을 깨달았다.

“이사님은 똑똑하니까 알 수도 있겠네.”

“뭐, 뭐를….”

“알파가 알파한테 박아도 애가 생기는지 말입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흐악-!”

말을 다 끝맺지도 못했는데 재하는 아래를 벌리고 들어오는 무언가에 의해 작살에 꿰인 물짐승처럼 골반을 튕길 수밖에 없었다.

온몸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기분이었다. 이상한 것은 아래쪽이 뭐에 젖었는지 쩍, 하고 찐득한 액체가 묻은 골이 벌어지는 소리가 났다는 거다.

왜 그런 소리가…. 재하는 명멸하는 시야 속에서 초점을 찾으려 노력해 보았지만 쉽지 않았다.

골반을 우악스레 잡은 손은 그의 안으로 무언가 두꺼운 기둥을 삼키라 강요하고 있었다.

“아, 안 들어가….”

“지난번에 해봤잖아. 초짜처럼 굴지 마. 잘 먹는 거 다 아는데 왜 자꾸 내숭이야.”

그런 말을 들을수록 수치스러운 만큼 흥분했다. 성기가 다시금 바짝 서 제 아랫배에 퉁, 하고 튕기는 것이 느껴졌다.

재하는 안을 가르고 들어오는 감각에 사로잡힌 채 내벽이 간지럽다는 생각을 했다.

“흐아…. 간, 지러워….”

“좋아 죽겠다는 얘기를 참 별나게 합니다.”

바다 소금 냄새와 해당화 향이 훅 끼쳐 들었다. 두껍고 우둘투둘한 것이 잔뜩 흥분해 있던 안을 긁어 왔다.

안쪽으로 파고들어 융기되어 있는 곳에 접붙이듯 귀두 갓을 대고 허리를 털어 댔다.

그때마다 태건의 성기에 박힌 구슬이 그 부위에 걸려 깔짝거렸다. 재하는 참을 수 없어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물에 빠진 사람처럼 허우적거리다가 단단한 등을 끌어안아 바짝 깎은 손톱으로 긁어 댔다.

“아아-!”

“…씹.”

그를 잔뜩 껴안은 알파가 귓가에 대고 욕을 지껄였다. 욕하지 마….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재하는 정신을 잃을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바다 냄새에 섞인 꽃향기가 났다. 어지러울 정도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그대로 목을 젖힌 채 간신히 붙잡고 있던 의식의 끈을 놔 버렸다.

접합부에서 지익, 하고 물 터지는 소리가 났다. 태건이 혀를 찼다.

“이제는 뒤로도 줄줄 흘리는구나.”

그런 말 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데 입도 벙긋할 수가 없었다. 재하는 까무러치듯 의식을 잃었다. 암전처럼 수마가 재하를 좀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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