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차
Chapter] 1. 가면
1.
2.
3.
4. (1)
Chapter 1. 가면
1.
타인의 평가에 비하여 이재하는 사실 잘난 것 없는 인생이다.
그 방증으로 그는 지금 제 배우자에게 프러포즈를 했던 호텔 다이닝에서 이혼을 요구할 참이었으니까.
결혼 후 매년 기념일이 되면 이 자리를 예약했었다. 서로의 생일까지 챙기는 단란한 사이는 아니었지만, 결혼기념일의 저녁 정도는 늘 함께했다.
그런 날에 굳이 이혼을 요구해야 하는 처지가 된 걸 보면 남보다 하등 잘난 것이 없는 인생이라는 뜻 아니겠는가.
부부로 산 지 햇수로만 4년이다. 그동안 재하는 자신의 배우자에 대하여 아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누구 좋자고 이혼을 해.”
그러니까 왜 저런 말을 하는지도 모르겠다는 뜻이었다.
기실 이혼을 준비한 것은 순전히 배우자를 위해서였다. 그런데 누구 좋자고 하는 이혼이냐니. 그가 그렇게 묻자 이재하는 도리어 할 말이 없어졌다.
재하가 앉은 테이블 맞은편, 육식동물이 송곳니 대신 나이프를 사용하는 것 같은 이질감이 드는 알파가 앉아 있다.
그는 검지와 중지로만 은도금을 입힌 나이프를 간단히 들어 올렸다. 어린 양의 갈빗살 위로 깨끗한 나이프가 콱 찍혔다.
재하는 그 모습을 보며 저도 모르게 살짝 치솟는 한쪽 눈썹을 내리눌렀다. 맞은편에 앉은 알파의 생각을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는 재하의 의문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질감 좋아 보이는 입술을 열었다. 입꼬리가 살짝 올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분이 좋아 보이지는 않았다.
“이혼이 되면.”
“…….”
“결혼도 안 했을 텐데.”
짐승이 그르렁거리는 듯한 목소리였다. 재하는 당황스러움을 숨기려 최대한 또렷한 목소리를 냈다.
“장 본도 알 겁니다. 이 결혼을 더 유지하는 것은 의미가 없고….”
재하의 말에 장태건이 고개를 갸웃거리듯 모로 젖히며 의자의 등받이에 상체를 기댄다.
느슨하게 앉아 있는 듯싶지만 실상 방 안의 공기는 팽팽해져 있었다. 같은 알파라도 저와는 태생적으로 다른 남자이다.
옅게 깔린 알파의 페로몬은 그가 지금 이 상황을 불쾌하게 여기고 있다는 증거였다. 기분이 나쁘지 않은 상태에서 그에게 나는 알파의 향은 이것과 조금 달랐다. 해안가 암벽에 핀 해당화와 옅은 바다 소금 향이 나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이것을 굳이 비유하자면 폭풍우에 요동치는 파도의 냄새였다. 재하는 쓸려 가지 않기 위해 정신을 차려야 했다.
태건은 그 상태로 웃지도 않고 말했다.
“내가 이재하 씨 본부장입니까? 우리가 같은 회사를 다녔나?”
“…호칭은 지금 중요한 게 아닙니다.”
“그럼 씨발, 뭐가 중요한 건지 도통 이해가 안 가는데.”
결혼 이후 제 앞에서는 욕을 하지 않았던 남자다.
남자의 가업이 미풍양속에 위배되는 험악한 일들이라고 해도 장태건은 단 한 번도 이재하에게 거친 모습을 보여 주지 않았었다.
은연중에 느껴지는 우악스러운 페로몬이 아니라면 말이다.
그의 곁에서 햇수로 4년, 꽉 채운 3년을 지내도 익숙해지지 않는 긴장감이 등골을 울렸다.
지난 몇 년간, 두 사람은 재하의 러트기에만 잠자리를 함께 했다. ‘의료적 처치’와 다를 것이 없는 잠자리였다.
그의 우람한 것을 받아들이기에는 알파의 신체가 넉넉지 않았고, 재하는 공들여 준비를 해야 했다. 준비를 끝낸 채로 방 안에서 멍하니 기다리고 있으면 장태건은 말없이 재하의 뒤편에서 성기를 찔러 넣어 주었다.
그것만으로도 재하의 러트는 가라앉았었다. 어딘가에 삽입된 만족감으로 그 열락의 시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 장태건과의 스킨십 자체로 러트를 가라앉힌 것이다.
그러나 그 외에는 닿은 적이 없다. 그들은 각방을 썼으며 행사 외에는 서로를 찾지 않았고 그런 관계가 몇 년이나 지속되어 왔다.
잠자리조차도 의무에 속하던 그들 사이에 정이라고는 없을 테니, 이혼 요구에 불쾌한 기색을 띠는 것은 아마 이재하가 갖고 있는 권력적 이점이겠지.
재하는 문득 이런 말을 자신의 입으로 해야 한다는 것에 회의감을 느끼면서도 어쩔 수 없이 말문을 열었다.
“…장 본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압니다. 하지만 이제 내가 장 본에게 줄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군요. 유신은 멀쩡한 상태가 아니고 나는 이미 그나마의 끈도 떨어진 형편이니까요.”
태건은 무표정으로 재하를 한동안 응시했다. 재하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와의 혼약을 감행한 것은 이재하의 만용이었다. 이재하는 장태건에게 후사를 약속할 수 없고 혼수랍시고 가져온 것들은 이미 태건의 회사 쪽 지분이 된 지 오래다.
친가인 유신은 한때 계열사를 꽤 갖고 있던 탄탄한 재벌가였지만 재하의 결혼 이후 쇠락의 길을 걸었다.
이제 더는 장태건이 이 결혼으로 얻을 이점이 없다. 무리하여 결혼을 밀어붙인 만큼, 이재하는 장태건에게 늘 부채 의식을 갖고 있었다.
그러니까 놔준다는 거였다. 내가 너에게 줄 것이 떨어졌으니 이제는 자유라도 선사하겠노라고. 이재하의 애정은 그런 식으로 빛을 발하고는 했으니까.
그러나.
“이재하 씨.”
“…….”
“나는 당신이 말 없는 사람인 줄로만 알았지 재미없는 농담에도 재주가 있는 줄은 몰랐네.”
“장 본.”
“그러니까 4년 동안 구멍 맞추고 산 건 난데 어떤 본부장 새끼한테 뒤를 대 줬길래 그 호칭을 못 버려서 야단이야. 이재하 씨 배우자가 납니까, 아니면 길거리에 널린 본부장 새끼들 중 하나입니까.”
…어떻게 길거리에 본부장이 널려 있을 수 있지. 보통 본부장쯤 하려면 회사가 커야 하고, 대한민국에는 대기업이 넘쳐흐르지 않는데.
재하는 멍하니 그런 생각을 했다. 태건이 저에게 내뱉은 온갖 모욕적인 언사보다 그게 먼저였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딱 알겠다는 듯, 장태건은 일어나 재킷의 맨 마지막 단추를 잠그고는 테이블 모서리에 양손을 짚은 채 재하에게로 상체를 기울였다.
태건의 눈빛이 검게 가라앉아 일렁였다. 재하는 문득 장태건이 그런 눈빛으로 저를 바라보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당신이랑 여보, 당신 하고 사는 게 좋아. 다른 생각 하지 마. 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날 거니까 식사 다 하고 오도록 해요.”
…우리가 대체 언제 여보, 당신 하고 살았던 적이 있습니까?
이재하는 그렇게 묻고 싶었지만, 남자는 이미 태산 같은 몸을 돌려 룸의 문을 연 뒤였다.
음식이 든 트레이를 든 채로 노크를 하려던 종업원이 짐짓 놀랐다가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나 태건에게 허리를 굽혔다.
태건이 종업원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저 사람이 음식 남기면 주방장한테 내게 직접 전화하라고 하세요. 돈을 이만큼 처받아 놓고 개죽을 쑨 새끼 목소리라도 들어야겠으니까.”
그러고는 그대로 룸을 나가 버렸다. 재하는 저도 모르게 입이 벌어지려는 것을 간신히 힘주어 막고 있었다.
종업원과 눈이 마주쳤다. 재하는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개죽 아닙니다. 음식들이 맛있네요.”
“…네. 감사합니다.”
그렇게 그날은 난감한 식사와 덧없이 부른 배와 얻지 못한 이혼에 대한 대답을 뒤로한 채 귀가해야 했다.
그로부터 사흘 후, 태건의 조부인 장창식이 유명을 달리했다.
* * *
그날 이재하는 운명과 마주할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집을 나섰다.
굳이 들르지 않아도 될 모임에 나가야 했고, 그것이 재하의 계모이자 동생 재호의 모친인 김란희의 뜻이었기 때문에 빠질 수도 없었다.
김란희는 이재하를 끈질기게 견제했다. 어느 때는 노골적으로, 더러는 에둘러서. 그 끈질김에 감탄할 정도로 말이다.
그러나 조부이신 이원웅의 의지가 확고했다. 지금은 타계하셨지만 아직도 그룹 유신의 정신적인 지주인 만큼 부친 이익형은 새 부인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없었다. 이원웅의 유지를 거스르고 이재하를 완전히 내칠 만큼 새 부인을 사랑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김란희는 쉽게 물러날 여자가 아니었다. 친모의 장례식 후로는 귀찮은 상황 자체가 신물이 나 웬만한 것들은 상대하지 않고 놔두는 편이었지만 오늘은 살짝 짜증이 났다.
모임에 약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수준 낮은 짓거리들을 하는 패거리에 둘러싸여 재하의 격이 떨어지길 바라는 얕은수가 빤히 보였다.
김란희도 알고 있을 것이다. 이재하가 자신의 수를 내다보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그녀는 끊임없이 시도하고 이재하는 피하지 않았다. 오기나 치기로 피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재하는 그저 귀찮을 뿐이었다.
그날도 그런 권태의 나날 중 하루였다. 안 가도 될 자리에 나선 것은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는 김란희를 감당하는 것이 더 귀찮았기 때문이다.
“드실 것도 많은데 왜 술만 드시는지 모르겠네요. 심심하면 떨도 씹고 그러세요.”
“…취미 없습니다.”
누군지 이름도 기억 안 나는 놈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덕분에 약간 느슨해지던 허리에 철판을 댄 듯 바로 서야 했다. 이런 자리에서 약속이라도 한 듯이 모두들 흐트러지는 건 자신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뭇사람들과 이재하는 다른 인물이니까. 자각이 있던 아주 어릴 때부터 지병처럼 따라붙은 권태에는 재하의 주변인들에게 조금씩 책임이 있다. 병처럼 앓는 권태의 원인 인자에는 계모인 김란희의 지분이 가장 많았다.
시도 때도 없이 이런 자리에 불러내어 어떻게든 이재하의 평판을 떨어트리려고 노력하는 그 가상함이 귀찮아 나와 준 참이었다.
친구라고 부를 만한 사람도 없지만 그나마 상대하곤 하는 지인들조차 급이 떨어진다며 참석할 생각조차 하지 않는 그런 모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오로지 재하만이 김란희의 권유에 권태를 앓으면서도 참석한 것이다. 그러니 아는 사람이 있을 리 있나.
상대의 얼굴보다 그 뒤에 있는 기업의 재무제표가 먼저 떠오르는 재하에게 기억에 없는 얼굴이라는 것은 대꾸할 가치가 없는 인간이란 뜻이었지만 불현듯 궁금해졌다.
이 거지 같은 무리 속에 섞이지 못한 채 홀로 있는 두 명. 하나는 재하 그 자신이니, 나머지 하나의 이름이 궁금해지는 것이다.
어중이떠중이, 그것도 약에 취한 덜떨어지는 것들 사이에서 홀로 빛나고 있는 알파의 이름은 뭘까. 그런 궁금증마저 낯설 정도였다.
그리고 옆에서 나불거리던 이는 드디어 제 쓸모를 다하겠다는 듯 재하의 시선을 따라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었다.
“장한건설, 장태건 실장이네요.”
이름을 말해 준 이의 어투에서 이죽거림이 느껴졌다.
장한건설이면 소위 말하는 기업형 조폭이었다. 그렇다고 이제 막 일어선 것은 아니고 종로 뒷골목에서부터 시작하여 3대째인 건설 회사였다.
건설 쪽에서는 나름으로 탄탄하고 입지가 있지만, 그래 봤자 수도권 아파트 건설은 다른 회사에 빼앗기고 또 다른 기업형 조폭 회사를 등쳐 먹으며 명맥을 유지하는 곳이었다.
한국은행이 매년 발표하는 재계 서열 10위 안에 들어가는 유신의 이사인 이재하가 보기에, 여타의 것들과 다를 바 없는 형편없음이라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럼에도 눈이 갔다.
“…….”
“…….”
그때쯤 상대도 이쪽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눈을 피할 시간도 없었다.
시선이 공중에서 얽혔다. 갑작스레 아랫배 어딘가에 불이 지펴진 듯 뜨거운 기운이 올라왔다.
이재하는 놀라 뒷걸음쳤다. 누군가 재하의 이름을 불렀으나 그대로 뒤돌아 그곳을 빠져나왔다.
한 입 축인 것도 술이랍시고 평소에는 부르지도 않는 기사를 불러 뒷좌석에 올라탈 때까지, 이재하는 자신이 왜 도망쳤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그런 도주는 처음이었다. 누군가를 보고 당황한 것 역시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밤, 이재하에게 갑작스러운 러트가 찾아왔다. 그것이 이재하와 장태건의 첫 만남이었다.
* * *
잠들었다고 생각했는데 꿈속을 헤매느라 몸이 묵직했다. 무슨 꿈을 꿨더라.
온갖 그리운 것들로 만들어진 정원에 눕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이재하는 그리워하는 것들이 없으므로 그런 것들은 그저 꿈일 뿐인지도 몰랐다.
“…….”
재하는 침대에 앉아 고요한 방 안을 응시했다.
새벽의 어슴푸레한 기운이 방 안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심해의 한복판에 온 기분이었다.
더 눕고 싶었지만 이런 날 쉬게 되면 죽도 밥도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아예 기다란 몸을 쭉 뻗어 침대 옆 콘솔에 놓여 있던 인터폰을 울렸다.
신호가 가는 동안 재하는 뻐근한 목을 움직였다.
저택에 상주하는 재하의 개인 비서가 바로 전화를 받았다. 주로 사생활적인 것들을 처리하는 비서로, 유신 이사실 전속 비서실 직원들과는 또 달랐다.
- 네, 이사님.
“박 관장님 시간 괜찮으시면 바로 뵙자고 해 주세요.”
- 네, 연락 넣겠습니다.
어젯밤, 시답지 않은 모임에서 장태건을 마주한 후 이재하는 갑작스러운 러트를 겪었다.
열락에 뒤섞인 하체와 온몸을 들뜨게 하는 체열이 뒤섞여 혼곤한 새벽을 만들어 냈다.
그런 일은 드물었다. 아니, 알파로 발현하고는 처음이었다. 우성 알파인지라 시기가 흔들리는 경우도 없었다.
웬만하면 약물 치료로 통제를 하는 편이고, 주치의가 페로몬제의 내성을 경고하는 달에는 오메가를 만나 해소하기는 했지만, 그나마도 상대를 침대로 끌어들이는 과정까지가 무척 지루하고 귀찮았다.
호텔에서 자는 것도 찝찝하고 상대를 집으로 데려오는 것은 더욱 귀찮았다.
본가 저택은 큰 편이고 그중에서도 재하의 방이 있는 별채는 외따로 떨어져 있었지만, 어쨌든 김란희가 아침에 상대를 마주하기라도 하면 바로 결혼시킬 것처럼 굴었다.
그저 하룻밤을 상대한 오메가와 결혼시키려는 이유야 뻔했다. 재하의 혼사에 관여하여 그의 몸값을 후려치고 나아가 후계 구도에 막대한 영향을 주고 싶어서겠지.
그룹을 승계받고 싶어 애가 단 것은 아니었지만 막연하게 제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조부가 그렇게 외치는 장남으로 태어나 우성 알파로 발현했으니, 이왕지사 태어난 김에 이 거대한 피라미드의 가장 위로 올라가는 것이 뭐가 나쁘겠는가.
게다가 제가 그룹을 승계하게 되면 모친이 아픈 틈에 저택으로 살금살금 들어온 상간녀 출신의 김란희와 이재호에게 크나큰 타격이 될 것이다.
그녀를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하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녀를 밀어낼 기회를 포기할 정도로 호인은 되지 못했다.
그 점을 조심하기 위하여 오메가가 아닌 상대를 저택에 들이는 것도 마땅찮은 일이었다.
재하가 아는 알파 중에는 오메가가 아닌 베타나 알파에게 끌린다는 괴식 취향도 꽤 있었다.
그러나 이재하는 내키지 않았다. 정도만을 걸어온 것이 성생활에도 그대로 드러나서 그런 걸까, 그쪽 취향은 전무했다.
그래서 러트기 때마다 모르는 오메가를 유혹하여 침대로 들이는 수밖에는 없었는데 이 부분에 흥미가 동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본격적으로 연애를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했다. 아니, 정확히는 애정이라는 것이 부족했다.
누군가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은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 모친의 뼈가 지하로 돌아간 뒤로는 다 잊은 감정이었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의 복합적인 이유로, 주치의가 정말로 강력하게 경고하지 않는 한 러트는 무조건 알약으로 때웠다.
그러나 어젯밤, 예고 없이 찾아온 러트는 그야말로 갑작스러웠다. 장태건을 본 뒤 발작적으로 러트가 들이닥친 바람에 계모가 요구하는 모임 내 잔존 시간을 무시하고 먼저 그 자리를 빠져나왔다.
자택으로 돌아와서는 억제제를 복용한 뒤 늘 그랬듯이 적당히 수음으로 욕구를 처리한 뒤 잠자리에 들려고 했었다.
그러나 어제는 그것만으로 가라앉지가 않았다. 아무리 손으로 성기를 훑어도 욕구가 해소되지 않아서 이마에 핏대가 솟을 정도였다.
결국 정제 과정이 까다로워 시중에 유통되는 것보다 배는 비싼 억제제가 효과를 발휘했을 무렵은 새벽 4시경. 밤을 꼴딱 새우다시피 한 것이다.
그러한 탓에 아침에 일어나니 온몸이 뻐근했다. 근육통이 있는 날은 가볍게 스트레칭만 하고 넘기는 편이지만, 가라앉지 않은 미열이 짜증 나 아침부터 박 관장을 호출했다.
저택 지하에는 스파링장이 있었다. 재하의 유일한 취미인지라 김란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링을 만들었다.
복싱을 처음 배울 때는 체육관으로 향했었으나 어쩐지 사람들이 자꾸 말을 붙이고 대답해 줘야 하는 것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초보 딱지를 뗀 뒤에는 관장을 아예 집으로 불렀다.
복싱도 무도의 일종이니 스승 격인 관장을 호출하는 것이 마음에 걸리기는 했지만, 누군지 모를 사람들이 대화를 거는 것이 꽤 불편했다.
복싱장에 구비된 샤워실에서 씻는 것도 마뜩지 않았다. 지금처럼 스파링 후 땀이 날 때는 꽤 곤란한 일이었다.
링에서 내려와 한쪽 글러브를 풀고 있는데 박 관장이 다리가 후들거린다며 엄살을 떨었다.
“어쩐 일로 아침부터 험한 운동을 하십니까, 이사님.”
“그러게 말입니다.”
재하는 아직 빼지 않은 쪽 글러브로 박 관장의 글러브를 툭 치고는 입꼬리만 살짝 올렸다.
재하를 오래 본 박 관장은 그가 웬일로 박장대소를 하나 싶어 눈을 깜빡였다.
“뭐 좋은 일 있으신가 봅니다.”
좋은 일? 좋은 일이라고는 없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러트에 다른 부작용은 생각지도 않고 억제제를 복용한 데다가 발정의 기운이 약간 남아 있어 새벽부터 스파링을 하는 기행을 했는데도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외골수에다 융통성이 조금 부족한 자신의 성격을 익히 아는 재하로서는 어제저녁부터 이어진 자신의 감정과 행동들이 이해 가지 않기는 했다.
그런 재하를 흘끗 보고 있던 박 관장이 갸웃거리며 말했다.
“별일입니다. 아침에 운동하는 건 싫어하셨잖아요.”
“…싫어합니다.”
그 외는 별달리 덧붙일 말이 없었다.
그러게. 싫어했는데. 아침에 일어나서 하는 운동도, 그런 자리도, 그렇게 폭력적인 페로몬을 갖고 있는 알파도.
이상하게 뇌리에 남았다. 장태건이라는 이름마저.
* * *
“재하 씨, 나 이거.”
“그거면 돼? 필요한 거 있다며.”
“이게 그거야.”
재하는 오메가가 고른 시계를 바라보았다.
흔하다고는 절대 말할 수 없는 디자인과 가격이었지만 부러 걸음 할 만큼 대단해 보이지는 않았다.
수민이 차고 있는 시계도 지금 고른 것보다 훨씬 고가인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딱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퍼스널 쇼퍼가 따로 붙어 사무실로, 집으로도 오는 삶을 사는 것은 저 오메가도, 이재하도 마찬가지였지만 두 눈으로 다 둘러보고 사고 싶다는 말에 딱히 딴지를 걸지 않았다.
결국 매장을 같이 둘러보고는 있지만 집중하지 않으면 금세 다른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런 미적지근한 태도에도 불구하고 이재하는 제 약혼자에게 꽤 친절한 편이었다.
그 친절이라는 것이 부하 직원이나 저택의 사용인들에게도 공평한 정도의 친절이라는 것이 문제일까.
그러나 수민은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저쪽도 딱히 재하에게 깊은 애정은 없으니 말이다.
“이거 보여 주세요.”
“네.”
수민의 말에 점원이 작게 미소 짓고는 유리 케이스의 문을 열었다.
점원이 흰색의 장갑을 끼고 내놓은 시계를 손목에 대 본 오메가가 재하에게 물었다.
“이거 어때. 나한테 어울릴 것 같아?”
“예쁘네.”
정작 상대방은 재하의 속마음 같은 것은 관심 없어 보이니,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이재하의 오메가는 친일파였던 조부를 필두로 3대째 정치 쪽에서 명맥을 유지하는 일가의 차남이었다.
강남 노른자 땅에서 세 번 당선된 국회의원을 아버지로 두고 있는 김수민은 이재하보다 한 살 위였다.
약혼을 결정지을 겸 같이 유학도 가자고 했었는데, 김란희가 중간에서 둘 다 아직 어리다는 이유로 가로막았다.
정확히는 이재하의 배우자로 두기에는 상대가 너무 훌륭하다는 이유겠지만 말이다.
김란희가 입버릇처럼 ‘우리 재호도 딱 수민이 같은 짝 만나야 할 텐데.’ 하는 말이 신물 날 때쯤, 재하는 홀로 유학길에 나섰었다.
그 이후로 잠깐 흐지부지됐던 약혼이 재하의 상무 자리 승진을 앞두고 다시금 화제로 떠오른 것이다.
그러니까 김수민은 이재하의 약혼자는 아니고 ‘약약혼자’라고 할 수 있었다. 약혼을 약속한 사이이니 말이다.
그런 사이라도 휴일에는 가끔씩 서로의 얼굴을 보며 따분한 인사를 나눠야 했다. 양가 어르신들에게 보여 주기 위한 구실이라도 말이다.
다행히 김수민은 자신처럼 꽉 막힌 인사는 아닌지라 이것저것 시간을 때울 거리를 구해 오기도 했다. 오늘같이 직접 하는 쇼핑이 그러했다.
“이거 끝나고 내 친구 볼래?”
“그래.”
친구 누구? 하는 물음이 가장 먼저였지만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의문이 들었지만 궁금하지 않았다고 하는 게 맞는 말일 것이다.
상위 사람들에게 인간관계란 그 나물에 그 밥이었다. 정, 재계 인사들을 다 아는 것은 아니지만 수민과 재하는 상위 풀에 속했기 때문에 아는 인간들이라고는 거기서 거기였다.
그렇다면 부러 소개해 줄 만한 이라고는 없는데 누굴 말하는 건지 의아했다. 그러나 더 묻지 않았고, 백화점과 연결된 호텔로 들어가는 내내 수민은 말이 없었다.
이재하라고 딱히 말주변이 있는 건 아니었으니 덩달아 입을 다물고 있었다.
약혼을 앞두고 대학 동기라도 소개해 주려나 싶어 아무런 생각 없이 수민이 이끄는 호텔 레스토랑으로 들어갔던 것이 문제였다.
종업원이 안내하는 룸으로 들어갈 때까지만 해도 재하는 다음 날 있을 기획 회의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자연스레 앞서가는 수민의 뒤를 따라 걷던 재하는 종업원이 룸의 문에 대고 노크한 뒤 수민에게 문을 열어 주는 것을 보고 의아했었다.
‘친구가 먼저 와 있나?’
이쯤 되면 쇼핑보다 그 친구라는 사람을 재하에게 소개시켜 주기로 작정하고 만난 것 같은데, 그렇게 중요한 사람이라면 재하가 모를 리가 없었다.
의아한 기색으로 문 앞에 선 재하는, 수민의 어깨 너머로 룸 안 테이블 앞에 앉아 있는 알파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다시 한번 장태건을 마주한 것이다.
“내 애인이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재하의 한쪽 눈썹이 저도 모르게 슬쩍 솟았다.
애인? 애인이라고 하기엔 김수민은 장태건의 옆자리에 앉아서도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것은 사랑하는 이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하는 긴장이 아니라, 맹수를 가둔 우리 옆에서도 안심하지 못해 겁먹은 이의 기색에 가까워 보였다.
재하는 의문을 느꼈지만 이번에도 묻지 않았다. 여타의 자극들이 모두 소멸해 버리고 그저 장태건을 살피는 것에 바빴기 때문이다.
방 안에 앉아 있는 사람은 장태건이 유일한데도 그는 존재감이 태산과 같았다.
실내 금연이 실시된 지 오래인데 장태건은 질감이 좋아 보이는 입술 사이에 담뱃대를 물고 있었다. 불을 붙인 것은 아니었지만 그 상태로 저를 바라보는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없었다.
자신은 서 있고 그는 앉아 있으니 물리적으로 그럴 수가 없는데도 재하는 그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시선은 오래도록 얽혀 있었고 무저갱처럼 끝없던 눈 맞춤을 끝낸 것은 그 알파도 재하도 아닌 그 방의 유일한 오메가였다.
“재하 씨, 왜 그래. 매너 없이 사람을 빤히 보고.”
매너가 없는 것을 따지자면 약혼자인 자신에게 아무런 말도 없이 애인이랍시고 저 알파를 소개해 준 김수민 쪽이 더하겠지만 재하는 그냥 말을 삼켰다.
어차피 이 관계에 애정이 없는 것은 김수민뿐만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수민에게 마음이 생기지는 않았으니까.
그러나 이재하는 약혼과 결혼 후에는 상대에게 충실할 마음 정도는 있었다. 집안 환경이 그러하니, 모친이 괴로워하는 것을 옆에서 보고 자란 덕에 적어도 상대를 기만하지 말자는 다짐 정도는 있었다.
애인은 각자 따로 두자는 상의도 없이 장태건을 제게 소개해 준 것이 이상했다.
그렇다. 그게 다 이상했는데. 따질 것도 많았고 수민과 장태건에게 한마디 할 주제도 됐는데, 어째서 자신은.
“구면이네요.”
남자가 재하의 상념을 무참히 깨트렸다.
커피의 크레마를 크림으로 치워 내는 것 같기도 했고 새벽 내에 내린 비처럼 거세기도 한 목소리였다.
귀에 와 닿는 것은 크림처럼 묵직했는데, 갈비뼈를 쿵쿵 찧는 소리는 장대비와 같았으니 두 표현이 다 맞을 것이다.
구면이라니. 그럼 그 모임에서 장태건도 저를 본 것일까. 상대를 발견한 것은 자신뿐이라는 생각을 했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헛생각들을 하느라 재하는 인사를 돌려주지 못했다. 그대로 굳어 버렸기 때문이다.
“…재하 씨 오늘따라 이상하네…. 약혼하고도 간혹 볼 것 같아서 인사시킨 거란 말이야.”
“…김수민.”
재하는 자신의 목소리가 그렇게 가라앉아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다.
예비 약혼자에게 아무런 말 없이 숨겨 둔 애인을 소개시키는 비양심은 그렇다고 쳐도, 약혼하고도 간혹 볼 사이라니.
특별하게 토악질이 나오는 것은 아니었지만 팔뚝에 소름이 일 정도로 불쾌하기는 했다. 이재하는 낯빛을 굳혔다.
많은 배신감이 느껴지는 건 아니었지만 모멸을 무시할 정도로 기분이 좋은 것도 아니었다. 재하에게 놀라운 건 오히려 수민에 대한 옅은 신뢰가 있었다는 것 자체이다.
김수민은 이재하를 오래 보아 왔다. 이재하가 김수민에게 갑각류 알레르기가 있다는 걸 아는 것처럼, 김수민 역시 이재하에게 인간관계에 있어서 약간의 결벽증이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이재하의 성장 배경은 이쪽 바닥에서 그다지 비밀도 아니었다. 하물며 약혼 얘기가 오간 상대였으니 유신 본가의 숟가락 개수까지 저쪽으로 흘러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이런 짓을 벌이다니. 재하는 수민을 바라보았다. 그의 침잠한 눈동자에 수민이 흠칫 놀랐다. 그는 당황스러워 보였으며 약간은 겁을 먹은 듯하기도 했고 어딘가 억울해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재하는 자신이 들은 말이 사실이냐고 부러 묻지 않았다.
김수민의 위치 정도면 내뱉는 말 한마디에 얼마나 많은 이익 관계가 오고 가는지 모를 수 없었다. 그러니 이게 다 사실이냐 묻는 것은 지금 상황에서 비효율적인 일이 될 것이다.
대신 가만히 기다려 주는 정도는 할 수 있었다.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보라는 듯한 침묵에 수민이 아주 미세한 울상을 지었다.
“재하 씨 나는….”
수민이 입을 달싹이다가 곧 닫아 버렸다. 이재하는 잠시 더 기다려 주었지만, 그 입이 다시 열리는 일은 없었다.
그게 흥미롭다는 듯, 남자가 의자에 등을 기대며 제 단단한 배 위에 손을 깍지 껴 올려 두었다.
표정 없는 얼굴로 저와 수민을 바라보면서도 자신은 정확히 제삼자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게 아니면 저장고에 둔 살아 있는 먹이끼리 사이좋은 꼴을 지켜보는 맹수 같기도 했고.
그의 존재감이 무시할 수 없을 정도로 컸던 터라, 이재하는 지금 이성적인 사고 판단이 불가능했다.
감정을 잘 절제하는 편이고 좋은 것도 싫은 것도 뚜렷하지 않은 무감한 성격 탓에 사람들이 오해하고는 하는데, 어쨌든 이재하 역시 현대판 푸른 피를 타고난 이 중의 하나였다.
압박감이 심한 상황 속에도 재하는 협상에서 우위를 차지하고는 했다. 이 상황도 다를 것이 없었다. 두 사람은 아직 제 당황이 예비 약혼자의 애인의 등장 때문이라고 알고 있었다.
정작 재하는 애인의 등장이 아닌, 그 애인이라는 작자가 장태건이라는 사실이 중요한 건데 말이다.
그러나 그걸 들킬 수는 없었다. 이재하는 간신히 연기했다. 저절로 장태건에게 돌아가려는 시선을 차단하며 말이다.
덕분에 눈가가 조금 붉어졌다. 그것은 꼭 그가 대단히 분노하고 있고, 그 분노를 내리눌러 참는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재하는 서늘하게 말했다.
“수민아, 나는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본 적이 없는데.”
“재, 재하 씨….”
“단란하지는 않아도 어느 정도는 신실하자고 생각했는데 내가 꽤 일방적이었나 보구나.”
“재하 씨, 난 그게 아니라….”
수민은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정확히는 무언가를 부정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때 수민은 장태건 쪽을 흘끗 보고는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무언가가 있었나? 의문이 들어 그쪽을 바라보았지만, 장태건은 표정 없는 얼굴로 제 지포 라이터 뚜껑을 엄지로 달칵거리는 의미 없는 행동을 하고 있을 뿐이었다.
다리를 꼬고 앉아 그 위에 얹어진 손으로는 장난을 치고 있었다. 기세로는 밀린 적이 없는데 같은 육식동물이라도 저쪽이 호랑이나 사자라면 저는 겨우 늑대 정도에서 그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딱히 알파로서의 자긍심도 없고, 그렇다고 그런 유의 자존심이 아예 없기에는 또 너무나 상위의 삶을 살아왔는데 그 압박감이 살짝 짜증 날 정도였다.
제게 그런 식의 호승심이 남아 있다는 것 자체도 놀라웠다.
‘…오메가를 두고 경쟁하는 것 같은 멍청한 상황이라 그런가?’
속으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그를 무시하기가 힘들었다. 계속해서 그쪽으로 시선이 쏠렸다.
머릿속에 경고등이 켜졌다. 뭘 경고하는 건지도 모르겠다는 것이 문제였다.
테이블 위에서 가장 유리한 자리를 선점하지 못한다면, 그 판에는 끼어들지 않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었다.
이성이 파업한 탓에 이재하는 자신에게 급히 경영자의 껍데기를 씌웠다. 다행히 그건 아주 오래도록 입어 온 옷이라 깊은 생각을 하지 않고 행동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판은 텄으니, 자신은 물러나는 게 맞았다. 꼬리 내린 개처럼 보일지 몰라도 차후에 이어질 리스크를 감당하는 것보다는 나았다.
생각하자마자 행동했다. 이재하는 그대로 몸을 돌려 룸을 빠져나왔다.
“재하 씨!”
등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무시했다. 카펫이 깔린 호텔 레스토랑의 복도는 좁은 편도 아닌데 어딘가가 갑갑했다.
방 안에 가득 차 있던 것은 누구의 페로몬이었을까. 해당화와 바다 소금 냄새. 수민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나 야성적이었고 장태건의 것이라기에는 너무도 달았다.
재하는 계단으로 향하다 바로 온 엘리베이터를 발견하고 그대로 올라탔다. 1층 호텔 로비에 내려 출입문을 지나 아예 야외로 나서기까지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주차장에서 너무 멀리 온 후였다. 재킷 주머니에서 핸드폰이 울리고 있었다.
“…….”
재하는 한숨과 함께 걸음을 멈추고 핸드폰을 꺼냈다. 수민일 줄 알았는데 모르는 번호였다.
이재하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 번호가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날 밤부터 시작된 몽정만 아니었다면 낯선 열한 자리의 번호 따위는 잊고 살았겠지.
꿈에서는 장태건이 나왔다. 그는 다 벗은 이재하와 기꺼이 뒹굴어 주었다.
알 수 없는 열락의 시작이었다.
* * *
몽마라는 게 원래 알파의 외형을 띠고 있나?
근래에 이재하는 조금 미칠 지경이었다. 자신과 똑같은 알파의 꿈을 꾸고 그 꿈에서 서로의 살결을 탐하느라 진을 뺐다. 그 결과로 아침마다 제 욕정이 단단한 복근 위에 말라붙어 있는 그런 한심스러운 장면을 목도함과 동시에 잠에서 깨야 했다.
처음에는 부정했다. 그저 일시적이며 지난 러트 때 억제제를 과다 복용한 것이 부작용으로 이어졌을 거라고 생각했다.
주치의와 여러 검사도 해 보고 주치의가 연결해 준 정신과 전문의와 상담도 해 보았다. 그 와중에도 꿈은 계속되었다.
‘박아 주니까 좋다고 울지. 알파 구멍이 이렇게 잘 벌려지는 건 또 처음 보네.’
꿈에서 남자는 늘 저 좋을 대로 지껄였다. 꿈이 계속될수록 이재하는 회의적으로 변했다.
의문이 들 때도 있었다.
‘왜 내가 이 포지션인 건데.’
한 번도 그쪽 포지션으로 성적 판타지를 꿈꿔 온 적이 없었다. 이재하는 알파치고 품고 있는 정염이 적었고 섹스를 귀찮아했다.
그런데 의심할 여지도 없이 박히는 포지션이라니. 제게 이런 취향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꿈속의 알파가 뒤를 쑤셔 줄 때는 이성을 잃고는 했다. 쉽게 끓어오른 흥분은 잠에서 깨어난 뒤에도 가라앉지 않았다.
밤이 잠식당하니 낮이 위태로웠다. 일이야 원체 하던 가락이 있으니 숨 쉬듯 처리할 수 있었지만 그 외에는 멍해지기 일쑤였다.
그저 욕구뿐이었다면 오메가든 베타든 그 남자가 아닌 누구든 유혹하여 하룻밤이라도 치를 텐데 더 큰 게 문제였다.
‘…왜 보고 싶은 거야.’
그렇다. 보고 싶은 것이 문제였다.
입술 사이에 물고 있던 담배, 선이 진한 눈썹, 정갈해 보일 생각도 없다는 듯이 이마를 덮고 있는 앞머리, 육식동물의 턱처럼 강인해 보이는 하악, 두꺼운 목덜미, 어린애의 머리통만 한 손바닥.
‘그 짧은 사이에 자세히도 봤다.’
재하는 신물이 났다. 도망쳐 나온 주제에 그를 복기하는 기술력은 나날이 늘어만 갔다.
날이 갈수록 선명해진 커다란 알파가 UHD의 화질로 머릿속을 돌아다니거나 아예 알몸으로 꿈에 나왔다.
시간이 흐를수록 미칠 것 같았다. 그 룸 안에 가득 찬 해당화꽃의 향기와 옅은 바다 소금 냄새가 그리웠다. 어느 해안가 절벽에 빠져 죽고 싶을 때쯤, 이재하는 위기감을 느꼈다.
자신의 상태가 정상은 아닌 것 같았다. 이런 일들이 반복되자 남은 건 차일피일 미루어 왔던 것을 해내는 것밖에 없었다.
바로 ‘인정’이었다.
“수민아.”
“재하 씨, 내가 설명할게. 그 자리는 그런 게 아니었어. 나도 사실은…!”
결국 세 사람이 같은 자리에 있던 그날로부터 딱 한 달 후, 재하는 그동안 무시해 왔던 수민의 연락을 받고 강북에 있는 한 호텔의 커피숍에 나갔다.
수민은 먼저 기다리고 있었다. 그를 알고 난 뒤로는 처음 있는 일이었다.
정장 상의 맨 마지막 단추를 끄르며, 재하가 자리에 앉자마자 수민이 입을 열었다. 그날에 대한 변명인 것 같았다.
재하는 듣지 않고 차나 커피를 시키라고 말했다. 수민은 고개를 저었지만, 재하가 물러나지 않자 내키지 않는 기색으로 메뉴판을 뒤졌다.
그와 수민이 각자의 메뉴를 말하고 주문한 것이 테이블 위에 놓이는 동안,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재하는 그사이에 창밖을 한 번 바라보았다. 남산 위에 있는 호텔은 서울 시내의 전경과 저 멀리 한강을 발아래 담아내고 있었다.
내키지 않는 말이었다. 인정했으면서도 이런 선택지밖에 없는 자신이 우습기도 했다. 재하의 사랑은 자신을 조소하며 시작되었다.
이재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우리 약혼 그만두자.”
“…뭐?”
김수민은 이재하의 말에 낯빛이 굳더니 그대로 잔에 담긴 것을 재하에게 뿌렸다. 뺨에 질척한 것이 흘러내렸다.
날씨에 맞지 않게 주문된 핫초코는 재하의 얼굴 피부에 그대로 양보해 줄 몫이었나 보다.
오늘따라 유난히 춥다고 했었다. 장마를 앞둔 6월의 날씨는 덥지 않아도 꿉꿉한 습기를 품고 있는데도 말이다.
김수민은 어딘지 공포에 질려 있었고 무언가를 계속해서 설명하고 싶어 했다. 결국 따뜻한 것을 시키라는 재하의 조언에 따른 메뉴였다. 그 핫초코라는 것이.
질척한 단내가 얼굴에 뒤집어씌워진 순간, 멀리 서 있던 비서가 놀라 달려오려고 했다. 재하는 손을 들어 그를 막고는 그냥 냅킨으로 뺨을 대충 닦았다.
김수민은 안절부절못하며 자리에서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김수민이 하기에는 꽤 경망스러운 태도였다.
“미, 미안해, 나는 그게 아니라….”
수민은 제가 먼저 재하에게 아직 다 식지도 않은 것을 부어 놓고는 정작 제가 뒤집어쓴 양 창백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오늘따라 어딘지 모르게 불안정해 보였다. 그러나 이재하에게는 제 일이 먼저였다.
상의 없이 약혼자와의 저녁 식사에 애인을 데려올 정신머리가 있었다면 그 애인을 빼앗기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도 있다는 각오를 했어야 하지 않겠는가.
재하는 아직도 내키지 않는 심정으로 입을 열었다. 벌써 며칠째 꿈에 시달리는지 모른다.
인정을 했다고 해서 꿈이 끝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자신 역시 다음 단계를 준비해야 했다.
내키지 않고 어이도 없지만, 이재하는 자신의 감정에 나름 충실한 편이었다. 그래서 한숨과 함께 입을 열었다.
“약혼은 없던 일로 하고, 나도 장태건, 그 사람한테 관심이 좀 생겼어.”
“…뭐라고?”
수민은 대낮에 무언가에 홀린 듯한 얼굴을 했다. 믿기지 않는다기보다는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지? 하는 경악에 가까워 보였다.
미묘한 그 반응을 지켜보던 재하는 말을 이었다.
“깊은 거 아니면 정리해, 수민아. 나는 그 사람을 애인 자리에 두는 걸로는 만족이 안 될 것 같아.”
“재하 씨, 지금, 지금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는 있는 거야?”
수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가 다시금 붉어졌다. 분노에 달궈진 얼굴이었다. 일말의 미안함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게 왜 그 알파를 그 자리에 데리고 나왔어.
그날이 아니었다면 이재하는 김수민과 무사히 약혼하고 탈 없이 결혼하여 슬하에 오메가 아들과 알파 딸 두엇을 낳고 무리 없이 경영을 승계받았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이재하의 그 계획에 걸림돌이 된 것은 김수민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수민은 자신이 겪게 된 상황에 제 잘못은 하나 없다는 태도로, 마치 충실하던 배우자에게 배신당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하, 씨발, 쌍으로…. 그래, 잘나 빠진 니들끼리 잘해 봐라. 나는 그래도….”
“욕하지 말고.”
“끝까지….”
수민이 화를 내는 것도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됐다.
두 사람 사이는 암묵적이긴 했어도 꽤 오래되었고, 나눈 스킨십이라고는 발목이 약한 수민이 넘어지려고 할 때 손을 잡아 주는 가벼운 접촉뿐이었지만, 어쨌든 세월의 힘이 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입맛이 썼다. 정말 이런 선택지밖에 없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왜 그 알파일까. 왜 그 남자일까. 왜 꼭 장태건이어야만 할까.
꿈을 좀 꾸고 그저 그가 보고 싶었을 뿐 두 사람 사이에는 아직 이렇다 할 접점이 없었다. 그러니 딱 들어맞는 조건의 약혼자와 헤어질 생각까지는 안 해도 좋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재하는 그것이 어려웠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은 채로 그저 몸뚱이뿐이라도 다른 이 옆에 눕는다는 것이. 누군가의 배우자로 불리는 주제에 다른 사람의 꿈을 꾼다는 것이.
그저 짝사랑일지라도, 그저 마음 한 자락일지라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것이었다.
저 이외의 세상 사람 모두가 그렇게 살아도 상관없었다.
모든 사람이 높이뛰기를 잘하고 또 모두가 오이를 먹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재하는 높이뛰기를 꽤 잘했고 가리는 음식도 없었지만, 사랑에 결벽적인 부분이 있을 뿐이었다.
수민은 온갖 모욕을 다 당한 얼굴로 그대로 일어나 커피숍을 나섰다. 그제야 비서가 달려와 손수건을 건넸다.
재하는 무감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이깟 것 좀 얼굴에 묻었다고 큰일은 아니었다. 수민에게 미안하기도 했고. 어쨌거나 끝을 낸 것은 자신이니 말이다.
재하는 들고 있던 냅킨을 보여 주며 말했다.
“묻은 건 다 닦았습니다.”
“…그, 머리카락에 묻으셨습니다.”
비서가 난감한 기색으로 다시금 손수건을 든 손을 뻗어 왔다. 재하는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의아해하며 물었다.
“어디에?”
그리고 그때 불쑥 커다란 손이 다가왔다.
손등 위의 핏줄, 자잘한 상처, 뼈마디가 굵어 꼭 공사장 인부의 것 같다가도 살결이 마냥 거칠지는 않아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하게 만드는 그런 손이었다.
그러나 그것보다 먼저 상대의 페로몬이 끼쳐 왔다.
해당화와 바다 소금의 냄새. 장태건이었다.
“여기, 목덜미에 묻었네요.”
그의 검지가 재하의 목덜미에 닿았다. 빠듯하게 조여 둔 드레스셔츠의 넥칼라 사이로 한 마디 정도가 불쑥 들어와 피부를 스쳤다. 꼭 좁은 구멍에 손가락을 쑤셔 넣는 것처럼.
닿은 곳부터 화상을 입을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장태건의 등장에 놀라 말을 잃은 재하는 멍하게 그를 올려다보았고, 남자는 그 당황한 표정에 화답하듯 희미하게 웃었다.
“안녕하십니까, 이재하 이사님. 장한건설의 장태건이라고 합니다.”
아아, 꿈은 확실히 꿈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근데 구면이라는 소리를 또 해야 하나? 볼 때마다 인사도 못 하게 하니, 자기소개를 언제까지 해야 하는 거야. 아가리 아프네요.”
그 알파가 눈부터 휘며 웃었다. 재하는 숨을 삼켰다.
꿈은 꿈일 뿐이었다. 재생력도 안 좋은 자신의 꿈은 그의 실물을 1할도 담아내지 못했던 것이다.
손끝부터, 열기가 고여 퍼지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