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재회
태영은 좀처럼 과거를 되씹는 인물이 아니었다. 이미 지나간 시간, 돌이킬 수 없는 일 따위는 크게 마음에 두질 않았다. 그건 태영에게 마음의 여유가 없었기 때문일지도 모르지만, 스스로는 그저 자신의 무던함으로 치장하곤 했었다.
다른 사람들과 다르다는 것은 일생에 있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자신이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살 만큼 뻔뻔한 놈이었다면 좀 달랐을까. 하지만 태영은 그런 인물 역시 못되었다. 보이는 것은 보인다고 말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었으니 주변에 사람이 남아 있을 리가 없었다.
‘너 진짜 귀신이 보여?’
호기심 많은 친구들이 그저 흥미본위로 물었다. 그럴 때면 태영은 여지없이 보인다고 답을 했고, 다음부터는 누구도 물어보는 이가 없었다.
‘귀신을 본다’라는 표현은 어느 정도 맞기도 틀리기도 했다. 태영의 눈에 보이는 영체에는 뚜렷한 윤곽이 없었기 때문이다. 대략적인 사람의 형태가 그림자처럼 보일 뿐이었다. 그것들에는 고유의 색이 있고, 그 색이 영체를 구분할 수 있는 일종의 분류라는 것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자신이 남들과 다르다는 것을 알게 된 뒤, 태영은 그 사실을 회피하거나 부정하지 않았다. 도리어 무속, 신앙, 제령과 같은 문화에 더욱 깊이 파고들었다.
관련 도서를 쌓아 둔 채로 읽기도 하고, 용하다는 무당이나 무속인을 찾아가 일을 배우기도 했다. 그러나, 대부분은 가짜였다. 귀신이 보이지 않으면서 보이는 척을 한다거나 신을 모시지 않으면서 신을 모시는 척하는 인간들이 태반이었다.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하고 나서야 태영은 결국 외골수를 선택했다. 마음의 문을 닫았다. 긴 앞머리로 제 시야를 가리고 누구와도 말을 섞지 않았다.
시력은 나쁘지 않았지만 일부러 큰 안경을 꼈고, 똑같은 옷을 여러 벌 구입해서 돌려 입었다. 이런 고전적인 방법으로 사람들의 호감과 관심을 차단하는 데 어느 정도 성공했다.
그런데, 청소년기 내내 써먹어 왔던 그 방법이 성인이 되고는 영 신통치 않았다. 오히려 일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던 것도 모자라―.
‘그냥 학교에서만 모른 척하자고. 이게 어려워? 이걸 굳이 말로 해야 해?’
날카로운 비난의 이유가 되었다.
‘내가 너랑 같이 있는 모습을 다른 새끼들이 이상하게 본다잖아.’
태영의 뇌리에 남은 은재의 말은 꽤 오래 지워지지 않았다.
다시는 눈에 띄지 않겠다고 뒤돌아선 이후로 벌써 한 달 정도 지났을까. 태영은 그사이 학교엔 가는 둥 마는 둥 했다. 학년은 다르지만 같은 학과였고 같은 교정을 다니는 관계였다. 마주치지 않으려면 자신이 피하는 선택지뿐이니 어쩔 도리가 없었다.
당연하게도 연락은 오지 않았고 태영도 연락하지 않았다. 그저 그런 무미건조한 인연이었다. 조금이나마 다른 점은 은재는 태영의 비밀을 알았고 태영도 은재의 비밀을 안다는 것이다. 은재의 그 비밀마저도 근 한 달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까.
‘도, 와 줘.’
전화도 받지 않을 생각이었다.
그가 자신을 절박하게 찾기 전까지는 절대로.
그런데, 결국 받은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나도 떨리고 있어서 태영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지하철역에는 다양한 개체들이 존재한다. 그것들은 대체로 사람이 많이 드나드는 곳을 꺼리는 편이지만 지하철은 달랐다. 땅 밑, 어둡고 습한 곳, 폐쇄적인 데다 밤이 되면 그 많던 사람이 밀물처럼 빠져나가 텅 비어 버리는 장소, 그 4가지 요소가 혼령들을 붙잡아 두는 것이다. 특히나 악의를 가진 놈들은 지하철이 드나드는 통로에 숨곤 했다.
태영은 택시에서 내려 지하철역 앞에 우뚝 섰다. 왜인지 멈칫한 발걸음은 쉽사리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가야 했다. 자신보다 그가 더 두려울 테니까.
태영은 이유 모를 흥분한 마음을 천천히 진정시켰다. 그리고 검은 뱀의 목구멍처럼 내려앉은 지하철 입구에서 겨우 한 발자국을 내디뎠다.
‘승강장이야.’
은재가 말한 승강장에 다다랐지만, 그는 없었다. 태영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가장 끝으로 이동했다. 혹시 다른 방향을 잘못 말한 걸까? 드문드문 선 사람들을 피해 가며 긴 플랫폼을 따라 걷는 도중, 눈에 띄는 흔적을 발견했다.
검고 축축한, 시큼한 악취.
언뜻 웅덩이처럼 보였으나 가까이 다가서면 평범한 바닥이었다. 그 웅덩이에서 빗겨 나간 물방울들이 바닥에 흩어진 듯 한곳으로 길을 내고 있었다.
‘저기구나.’
태영은 지체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물 자국을 따라가자 곧 승강장을 벗어났다. 계단을 올라가 대기석이 있는 너른 공간을 지나니 곧 화장실이 보였다. 동그란 모양의 검은 액체가 화장실 안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선배.”
지하에 있는 공간이니 어두운 것은 당연했다. 그런데, 그 화장실은 유독 더 어두웠다. 음습하고 침침한 기운이 스미는 것처럼 천장을 빼곡하게 수놓은 조명 중 몇 개가 힘을 잃고 깜빡이고 있었다. 특히 특정 칸 위에서 마치 스파크가 튀듯 요란한 소리를 내고 있었다.
태영은 직감적으로 그 화장실 칸의 문을 두드렸다. 주먹이 문에 부딪히며 쾅, 쾅쾅, 쾅! 요란한 파열음을 내었다. 어쩌면 안에 있는 사람이 겁을 먹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미처 하지 못했다.
“선배, 안에 있죠? 문 좀 열어―.”
끼익―.
이음새에 녹이 슬어 쇳소리를 내며 문이 살짝 열렸다. 태영이 틀과 문의 틈 사이에 손을 넣어 간격을 벌리자, 곧 그 안에 있는 사람의 모습이 보였다.
“은……, 재 선배?”
벌겋게 부은 눈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매달린 눈물, 잔뜩 겁에 질린 눈동자가 태영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쩐지 허술한 은재의 옷매무새는 엉망이었다. 물에 젖었는지 축 늘어진 바지는 허벅지 아래까지 내려가 있었고, 은재는 좌변기 위에 다리를 훤히 벌리고 앉은 채였다.
흰 허벅지를 타고 내려간 태영의 시선은 이내 직립한 은재의 성기와 그 아래에서 뻐끔거리는 애널로 직행했다. 붉게 물든 그곳에는 다른 무엇도 아닌, 은재의 손가락이 드나들고 있었다.
* * *
[은재야.]
환청이 들렸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작은 바람이 이는 듯했다. 그리고 그 바람은 금세 하나의 목소리로 변해 갔다.
[은재야, 허은재.]
자신을 괴롭혔던 놈들의 그 지직거리는 주파수가 아닌, 다정하고 달콤한 음성이었다.
은재는 자신의 주위를 맴도는 듯한 그 음성을 들으며 수화기 너머의 태영을 향해 울음을 터트리고야 말았다. 꼴사납게 엉엉 울며 도와달라고 빌었다. 애처롭게 사정했다. 지하철 안에서 벗어나 다른 공간을 맞닥뜨리자 내내 억눌렀던 공포감이 목을 졸라서였다.
은재는 이성을 잃고 목 놓아 울었다. 지나가던 몇몇 사람들조차 고개를 돌릴 정도였다. 태영에게는 긴말을 전할 수가 없었다. 입을 열면 말이 나오기도 전에 울음이 숨을 삼켰으니까.
[선배, 지금 어디예요?]
“여기, 승강, 장이야.”
한 음절을 내뱉는 것조차 버거웠다. 자꾸만 떨려 오는 몸은 어쩐지 싸늘했다. 지독한 감기에 걸린 것처럼, 오한에 든 사람처럼 덜덜덜 떨고 있었다.
턱이 흔들려 이가 부딪치는 소리가 차츰 커져 갈 때, 그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은재야, 허은재.]
은재는 태영에게 대략적인 위치를 설명하고 급하게 전화를 끊었다. 진태영의 목소리와 기묘한 환청이 자꾸 뒤섞였기 때문이다.
조용히 해, 듣고 싶지 않아.
자꾸 귓가를 간지럽히는 그 목소리를 떨쳐 내려 고개를 몇 번 저었던 것도 같았다. 그러나, 진드기처럼 들러붙은 달콤한 음성은 쉬이 사라지질 않았다.
[내가 도와줄게. 걱정하지 마. 나는 방법을 알고 있어.]
상냥하고 다정한 어조였다. 그것은 모든 일의 해답을 알고 있는 듯 말을 걸어왔다. 놈들에게 시달려 넝마가 된 은재의 마음을 어루만지는 것처럼, 따스한 봄바람과도 같은 기운이었다. 놈들의 그 시큼하고 더러운 썩은 내가 아닌 향긋하고 달콤한.
‘……도와준다고.’
[은재를 도와줄 수 있는 건 우리뿐이야.]
‘어떻……, 게?’
[도망치고 싶지? 이곳에서. 긴장을 풀면 돼.]
그 목소리는 은재의 마음을 후비며 다가왔다. 가장 듣고 싶은 말을 이다지도 쉽게 말이다.
겁에 질려 덜덜 떨리던 몸이 서서히 차분해졌다. 평소였다면 경계심을 세웠을 것이다. 그런데, 왜인지 쿵쿵 뛰던 박동이 잦아들고 불안감이 거세되는 듯했다. 그들에게 몸을 맡기면, 그저 긴장을 풀면 모든 악몽이 해결되리라는 확신이 조금씩 차올랐다.
‘화, 장실…….’
떨리던 시선이 멈춘 순간이었다. 은재의 눈동자 안의 희멀건 빛이 자취를 감추었다. 새까맣게 내려앉은 동공에는 어떠한 감정도 남아 있지 않았다. 은재는 그 순간에도 무언가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아채지 못했다.
은재는 바닥에 주저앉았던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마치 누군가의 인도에 따르듯 주저함이 없는 움직임이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명령은 은재의 팔과 다리를 움직이게 했다. 저벅, 저벅. 축축하게 젖은 신발 밑창에 발이 닿으며 철퍽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괜찮아, 은재야. 도와줄게.]
악몽과 달리 마음에 평온함이 스몄다. 은재는 그들의 목소리를 제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하면 이 모든 일이 해결되리라는 믿음이 있었다.
이내 지하철역 안의 화장실에 도착했다. 은재가 그 안에 들어서자 일순 천장의 조명들이 일제히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그 기괴한 광경을 보면서도 은재는 무감각했다.
[괜찮아.]
두려움 가득한 마음을 토닥이듯 전해 오는 그 말은 안락했다. 다시는 헤어 나오지 못할 만큼.
끼익―. 비좁은 화장실 칸의 문이 열렸고, 은재는 무언가에 홀린 듯 좌변기 위에 앉아 문을 잠갔다.
이곳은 배설을 위한 공간이었다. 허은재가 그것을 모를 리 없음에도, 어느새 은재의 안으로 깊숙이 자리를 잡은 그들이 위화감을 제거했다. 느릿하게 끔뻑거리는 은재의 눈꺼풀 너머에는 굳게 닫힌 문이 있었고, 화장실 특유의 암모니아 냄새가 코를 찔렀다.
[은재야.]
은재는 스스로 움직이고 있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았다. 그건 무척이나 생소했다. 의식은 분명히 깨어 있는데 제멋대로 움직이는 팔에는 지시가 닿지 못했다. 연결 고리가 툭 끊어진 듯했다.
분명 원하지 않았는데도 제 손은 제 바지를 풀고 엉덩이를 일으켜 허벅지까지 옷가지를 내렸다. 서늘한 공기 중 맨살이 드러났다. 반쯤 선 성기가 허공에서 움찔 떨렸고 무언가로 축축하게 젖은 애널이 뻐끔댔다.
[걱정하지 마.]
상체가 뒤로 느릿하게 넘어갔다. 변기의 몸통 쪽으로 몸을 비스듬히 기울이자 둔부가 앞으로 살짝 밀렸다. 이미 속옷까지 내려가 낱낱이 드러난 흰 살갗에 솜털이 비죽 섰다. 추워, 서늘해. 몽롱한 얼굴로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았다.
오금에 걸쳐졌던 바지와 속옷이 이내 발목까지 내려졌다. 은재는 바닥에 두었던 양쪽 발을 올리고는 서서히 다리를 벌렸다. 골반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반쯤 선 성기와 그 아래의 음부가 훤히 드러나도록 말이다.
‘……이, 이러면.’
[괜찮아.]
괜찮을 리가 없다. 그런데, 순간 찌릿한 배덕감이 들었다. 해서는 안 될 곳에서 해서는 안 될 짓을 벌이는 상황에 자극적인 성감이 돋은 것이다.
은재는 그들에게 저항하지 못했다. 아니, 저항하지 않았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할지 모른다. 무언가를 기대하듯 움찔거리는 자신의 아래가 허전했다.
넣고 싶어.
아니야. 싫은데, 그런 건…….
놈들에게 유린당한 아래가, 축축하게 젖었던 그곳이 저려 왔다. 그런 더러운 짓을 당했는데도 왜 또 이런 멍청한 짓을 하고 있지? 하는 찰나의 생각은 금세 흩어지고 말았다.
“……으, 윽.”
귓가에서 속살거리던 그들은 어느새 은재의 안에 거의 자리를 잡은 채였다. 정수리 위로 미친 듯이 깜빡거리는 조명등에서 스파크가 튀었다. 그때, 우글거리던 놈 중 하나가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거의 다 됐어, 이제 조금만 더.]
스산하게 흩어지는 놈의 웃음소리는 은재에겐 들리지 않았다.
아래를 맴돌던 은재의 손가락이 뻐끔거리는 구멍을 더듬었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팔을 밀어 넣고 축축하게 젖은 그곳을 손끝으로 어루만졌다.
“흐…….”
흠칫, 어깨가 떨리고 느른한 숨이 터져 나왔다. 이곳에 넣으면 어떻게 되는지 아주 잘 알고 있다. 적어도, 은재는.
“응…….”
낮은 신음성이 퍼짐과 동시에 그 안으로 뭉뚝한 손끝이 들어섰다. 잔뜩 젖은 안은 입구에서부터 질척거렸다. 대체 뭘 싸지른 걸까, 이 안에. 분명 기분 나쁘고 불쾌했던 그 기억이 이제는 색정적인 자극제가 되었다.
왜, 내 안에.
여기에, 이곳에.
배설을 위한 육벽은 누군가의 체액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그 안을 뚫고 들어선 손가락이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찔걱대는 물소리가 새었다. 이미 녹진하게 풀린 내벽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물어 대며 감싸는 것이다.
“흐, 아으. 으응…….”
틈도 없이 좁혀진 안은 마치 거대한 젤리처럼 느껴졌다. 은재는 스스로 제 안을 탐닉하고 있었다. 처음 겪는 감각은 무척이나 생경했다. 그저 손가락 하나가 들어갔을 뿐인데 등골로 오싹, 소름이 돋았다. 두려움과 공포심이 아닌, 곧 다가올 쾌감에 대한 기대감이 선연했다.
[부족하지.]
“……으, 응.”
어느새 손가락의 개수는 두 개까지 늘어난 채였다. 입구만 서성거리던 그것은 금세 과감해졌다. 한 번 느낀 적 있던 극치감을 찾아 스스로 손가락을 놀렸다.
부족해, 조금만 더.
명치 안쪽에서 몸을 숨긴 놈들이 은재를 유인했다. 입을 떡 벌리고 기다리는 덫 안으로.
[은재야, 부족하지. 더 넣어야 하는데.]
“……하아, 읏…….”
[넣어 줄까? 여기 있어.]
“읏, 아니. 아…….”
왜 단박에 싫다고 하지 못했을까. 왜 그들을 밀어내고 쫓아내지 못했던 걸까.
은재는 아직 다 삼켜지지 않은 의식으로 그리 생각했다. 지금이라도 놈들을 몰아낸다면, 저항하고 반항하며 몸부림을 친다면 달라질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이 추잡한 짓거리를 거부할 수가 없는 것인지.
손가락이 하나의 살덩이로 뭉쳐졌다. 몇 개인지도 모르겠다. 그저 더 큰, 더 가득 안이 채워지는 것을 은연중에 바랐다.
“으응, 하…….”
멍하게 풀린 눈동자가 비스듬히 올라갔다. 멍청하게 벌어진 입술 사이로는 달뜬 신음이 흘렀고, 아래를 쑤셔 대는 손가락은 점차 속도를 높여만 갔다. 질걱, 츄걱거리는 습한 소리가 이어지고 안을 채웠던 체액이 손가락을 타고 줄줄 흘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모자라서―.
“흐, 응. 으, 아…….”
[은재야, 부족해?]
“윽, 하아.”
[부족하지? 솔직히 말해도 돼. 우리가 지켜 줄게.]
괜찮지 않을까.
괜찮을지도 몰라.
그들에게 삼켜지지 않은 마지막 남은 의식의 파편마저 휩쓸릴 것처럼 위태로웠다.
[어차피 틀렸잖아, 어차피 더럽혀졌잖아.]
[그냥 솔직해져, 솔직해지자.]
[솔직해져도 괜찮아. 그게 너야, 은재야. 스스로를 창피하게 생각할 필요 없어.]
[우리가 지켜 줄게, 걱정하지 마.]
갓 포장을 연 초콜릿처럼 향기마저도 달콤했다. 그 달콤한 간식이 입안으로 들어오면 기분이 좋아질 것이다. 적어도 지금은, 조금은 괜찮지 않을까. 이미 망가져 버렸는데 아무도 모르는 채 그저 한 번 내주고 나면 이 괴로움도 사라지지 않을까.
“……으, 응. 조, 좋…….”
시커먼 어둠이 목구멍을 채웠다. 콱 졸린 목젖 아래로 숨이 메말랐고 꺽, 소리도 내지 못한 채 동공이 확장되었다.
은재의 눈과 입, 코까지 열린 구멍으로 무언가가 침입하고 있었다. 끝도 없는 파도처럼, 그 아래의 심해처럼 지독한 물결이 호흡을 막았다.
도와달라는 호소조차 늦은 그때.
“선배.”
목소리가 들렸다.
수화기 너머로 들었던 진태영의 목소리가.
요란스레 점멸하던 조명등이 일제히 멈추었다. 언제 그랬냐는 듯 노란 불빛만을 남겨 둔 채로 말이다. 이제 남은 것은 은재가 있는 화장실 칸 위의 단 두 개의 조명뿐이었다.
놈들은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 태영이 몹시 눈엣가시였는지 화풀이하듯 은재의 목을 졸랐다. 기이한 쇳소리가 고막을 찌르며 검은 물에 잠겨 시야가 흐려졌다. 놈들이 기어이 제 안으로 파고드는 묵직한 감각이 내장을 짓눌렀다.
단말마의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은재가 의식을 잃어 가기 직전이었다. 조명에 스파크가 일며 빛의 조각이 튀었다.
쾅, 쾅쾅, 쾅!
요란한 파열음이 났고.
“선배, 안에 있죠?”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그와의 거리가 좁혀졌다. 일전에 말했던 그 기운 덕분인지 목을 졸라 대던 놈들의 압박이 느슨해졌다.
은재는 참아 왔던 숨을 터트리고 떨어트린 팔 한쪽을 겨우 들어 꽉 잠긴 잠금쇠를 털컥 풀어내었다.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터질 것처럼 가빠 왔다.
“문 좀 열어―.”
끼익―.
이음새가 쇳소리를 내었다.
이윽고 열린 문. 은재는 자신의 현재 상태가 어떠한지조차 떠올리지 못했다. 그저 놈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태영이 흔들어 깨운 의식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었다.
그런 은재를 막으려는 듯 고막이 찌릿 울렸다. 형용할 수 없는 비명과 고함이 머리를 관통했다. 열린 문 틈 사이로 태영이 언뜻 보였을 때, 은재의 안에 자리를 잡았던 놈들의 기척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은……, 재 선배?”
직면한 문제는 지금부터였다.
은재는 그제야 자신의 상태를 깨달았다. 발목까지 내려간 옷가지들, 변기 위로 벌어진 다리, 발기한 성기와 그 아래로 움찔거리는 구멍. 그리고, 그 안을 스스로 쑤시고 있는 자신의 손.
의식하지 못한 채 은재는 제 손으로 애널을 벌리고 있었다. 벌겋게 부은 구멍이 압박에 의해 벌어졌고, 축축하게 젖은 안에서 붉게 물든 내벽이 안을 채우고 있던 누군가의 체액이 그 밑으로 뚝뚝, 흘렀다.
“아……, 아니. 이건.”
조금 전까지 서서히 달아오르던 몸이 삽시간에 얼어붙었다. 자신의 앞에 서서 내려다보는 태영의 얼굴에는 당혹감이 서렸다. 그리고 그 얼굴을 마주한 은재의 얼굴에는 핏기가 싹 가셨다.
“으, 아……, 아니.”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다. 눈썹이 아래로 기울고 멍청하게 벌어졌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추잡한 몰골을 보인 것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또 억울해서.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그 안으로 숨고 싶었다. 도와달라고 부를 때는 언제고 또 도망가려고 하는 자신의 나약한 마음이 볼썽사납다는 생각도 들었다.
“선배.”
적잖이 당황했다는 것은 태영의 낯빛으로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덧붙이지 않았다. 그저 잠잠해진 천장을 잠시 바라보았다가 외투를 벗었다. 서늘한 날씨 탓에 차가웠을 겉옷은 어쩐지 따뜻했다.
“일단 걸쳐요.”
마네킹처럼 굳어 버린 은재를 대신해 태영이 사태를 수습했다. 아래로 내려간 팔을 올려 주자 은재가 읏, 신음을 흘리며 몸을 파드득 떨었다.
태영은 그 모습을 애써 모른 척해야 했다. 발목까지 내려간 속옷과 바지를 추켜올려 주고 구겨진 상의를 정리해 주었다. 왜인지 축축하게 젖어 있는 바지는 입혀도 입은 의미가 없어 보였다.
“선배, 아무래도 걷기는 어려울 것 같은데.”
저렇게 젖은 바지를 입고 걸어서 나간다는 건 힘들어 보였다. 게다가 지금 은재의 상태로는 제대로 걸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대체 어떤 가위에 눌린 것인지 넋이 빠져 보였으니까.
태영은 변기에 앉은 은재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아무 맥도 없이 이끌린 은재가 제 몸에 기대며 서자, 태영은 들고 있던 외투로 그의 엉덩이 부근을 감쌌다. 엉덩이부터 허벅지까지 겉옷으로 감싸고 그의 등과 오금에 팔을 대고 한 번에 들어 올렸다.
“아!”
은재의 몸이 기우뚱 기울며 허공으로 들렸다. 놀란 그가 허둥대며 태영의 목에 팔을 둘렀다.
예고도 없이 지척까지 다가온 태영의 낯은 아무래도 어색했다. 얼굴을 본 지 근 한 달만이었다. 마지막에는 자신의 분풀이를 그가 받았을 뿐이었고.
예전이었다면 뭐 하는 거냐며 일갈했겠지만, 은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태영에게 몸을 기댄 채 누구의 눈에도 띄지 않게끔 고개를 최대한 수그렸다.
“일단 씻을 수 있는 곳으로 갈게요.”
태영은 일이 이 지경이 된 원인을 대충 짐작한 눈치였다. 그렇듯, 놈들에게 은재는 아주 쉬운 먹잇감이었다. 이미 한번 가위에 눌린 경험이 있는 사람이 비슷한 기회에서 또 같은 경험을 하듯이 말이다.
태영은 묵묵히 발걸음을 옮겼다. 다 큰 성인 남성이 다 큰 성인 남성을 안아 들고 선 모습은 꽤 우스운 꼴이었으나, 주위의 시선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볼과 귀까지 빨갛게 물든 은재만이 필사적으로 제 얼굴을 가리려 했을 뿐이다.
* * *
은재는 깜빡 잠이 들었다. 태영의 품이 따뜻해서였는지, 아니면 지친 몸과 마음이 결국 방전된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근래에 청했던 잠 중 가장 안락한 순간이 아니었나 싶었다.
얼마나 깊게 잠든 것인지 태영에게 안겨 지하철역을 나오고 근처의 모텔로 들어오기까지의 기억이 전혀 없었다.
그렇게 깊은 수면을 청하는 와중, 은재는 문득 태영과의 일들을 떠올렸다. 그를 처음 만났던 날부터 짧게 이어진 인연, 마지막의 그날까지.
그리 오래 본 낯도 아닌데 은재는 태영에게 꽤 많이 의지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만큼 어려웠다. 태영은 좀처럼 심중을 짐작하기 어려운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깊게 관여하려는 듯 자신을 도와주다가도 밀어내면 너무나 쉽게 사라지곤 했다. 그날도 마찬가지였다. 꺼지라는 말에 그렇게 쉽게 꺼질 거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으니까.
“내가 할게.”
은재는 비척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사실 온몸이 욱신거렸다. 구정물에 젖은 솜처럼 불쾌한 무게감이 가득했다. 제 몸 하나 추스르기 어려울 정도로 시야가 휘청거리고 있었다.
“도와줄게요.”
“괜찮다니까.”
어색한 대치 상황이었다. 욕실 문 앞에서 버티고 선 진태영과 그 안으로 들어가려는 허은재가.
“그러다 쓰러지면 어떡하려고요.”
“안 쓰러져.”
“미안하지만 이번은 양보 못 해요.”
“왜.”
“봐야겠어요, 선배 상태.”
“괜찮다니까.”
“도와달라고 제게 연락한 건, 관여해 달라는 소리 아니었어요?”
태영의 마지막 말에 은재의 입술이 굳었다. 책망처럼 들리기도 했다. 문득 바닥에 떨어진 태영의 외투가 눈에 들어왔다. 찝찝하게 젖어 버린 겉옷이 걸레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이전과는 달리 꽤 단호한 태영의 어조에 먼저 고개를 숙인 건 은재였다.
“……보이고 싶지 않아서 그래.”
제 몸에 고스란히 남았을 흔적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아직도 안쪽에는 배설물이 남은 채였고, 그에게 안겨 이곳으로 오는 와중에도 분명 흘렸을 터였다. 그것을 알기에 태영 역시 물러서지 않는 것일 테고.
“모텔 같은 곳에는 검은 놈들이 많아요.”
그때, 마치 사망 선고를 하듯 태영이 말했다. 그는 안색 하나 바뀌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이전에 한번 말한 적이 있었죠. 어둡고 습한 곳을 좋아한다고. 이런 숙박업소처럼 여러 사람이 드나드는 곳에는 더 많아요. 지금도 제 눈에 보이는 것만…….”
은재의 어깨가 눈에 띄게 떨렸다. 천적을 눈앞에 둔 초식 동물처럼 흠칫 동요하고 있었다.
“그런데, 혼자 씻겠다는 거죠? 문을 닫고. 그래도 괜찮겠어요? 저는 안전하지만 선배는 아닌데.”
다정하고 친절한 말은 아니었다. 오히려 협박조에 가까운 태도였다. 겁을 먹은 은재가 태영을 바라보자, 그는 그제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을 펴며 미소를 지었다.
“그러니까 도울게요.”
짧은 언쟁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끝이 났다.
욕실은 그리 넓지 않았다. 근처에 보이는 아무 곳에나 일단 들어왔기 때문에 시설을 따질 여유가 없었다. 작은 욕조와 샤워 부스, 긴 거울만 있는 단출한 욕실 내부였으나 두 사람이 설 공간은 충분했다.
누군가의 앞에서 옷을 벗는다는 것이 이토록 민망한 일인지 몸소 경험하게 될 줄 몰랐다. 은재는 바짝 타들어 가는 목구멍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아무 말도 없이 저를 바라보고 있는 태영의 눈빛이 다소 노골적으로 느껴져서였다.
우선, 제일 젖어 있는 바지와 양말부터 벗어 내렸다. 속옷은 차마 벗지 못한 채 상의의 니트를 먼저 벗고 안에 입었던 티셔츠를 붙잡은 채 잠시 머뭇거렸다.
“좀……, 고개 돌리면 안 되냐?”
“어차피 볼 건데 뭐 하러요.”
“진짜 어이없네.”
못 본 사이 태영은 더욱 뻔뻔해져 있었다. 불과 한 달 전만 해도 자신이 윽박지르고 화를 내면 쭈뼛거리는 기미라도 보였었는데, 이제는 아무 표정의 변화도 없이 되받아치는 것이다. 그 기세에 눌려 은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다른 방안은 없었다. 침대 위에 내팽개친 핸드폰에는 욕설이 가득한 문자와 부재중 전화가 찍혀 있었다.
예약해 뒀던 곳에 가지 못했으니 그쪽에는 큰 민폐를 끼치고만 것이다. 잠깐의 통화에도 자존심이 대단해 보였었는데, 위약금에 돈을 더 얹어 사과를 건네더라도 별 가망은 없을 터였다. 그러니까 지금 은재의 상태를 가장 잘 봐줄 사람은 진태영이었다.
은재는 입술을 질끈 물었다. 그러곤 잠깐 창피하면 될 일이라며 마음을 다잡았다. 식은땀으로 젖은 흰색 티를 벗어 버리고 태영의 눈치를 살폈다. 이제 남은 것은 속옷뿐인데, 설마 이것까지 벗어야 하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태영은 단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하, 씨발.”
은재는 작게 욕지거리를 내뱉으며 속옷에 손가락을 걸고 주욱 내렸다. 차마 앞을 보이고 싶진 않아서 뒤돌아 발목까지 내린 속옷을 벗어 욕실 한편에 두었다. 그야말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몰골로 고개를 푹 숙였다.
“선배, 뒤돌아요.”
분명 존칭을 쓰고 있는데, ‘선배’라는 호칭도 꼬박꼬박 붙이고 있는데도 어쩐지 명령처럼 느껴졌다. 은재는 그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토를 달지 못했다. 쭈뼛거리며 태영을 향해 돌아섰고 엉거주춤 양팔을 앞으로 내렸다.
내내 팔짱을 끼고 눈동자만 굴리던 태영이 움직인 것은 그때였다. 그의 손이 은재의 골반으로 향했다. 은재가 흠칫 놀라 몸을 뒤로 빼려 했으나, 어느새 태영의 팔이 퇴로를 차단한 채였다.
갑자기 바투 다가온 그의 어깨에 은재의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심장이 쿵쿵거리며 요란스레 뛰기 시작했다.
“야, 잠깐……. 너무 가깝잖아.”
태영은 은재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치 어딘가에 남은 흔적을 찾듯 긴 손가락으로 은재의 몸을 더듬을 뿐이었다. 그의 손끝이 골반을 스치고 욱신거리는 허리 부근을 쥐자, 찌릿한 통증이 일었다.
“윽…….”
욕실 안 샤워 부스에는 전신 거울이 통으로 부착되어 있었다. 태영은 은재의 몸을 그 앞으로 돌려세웠다. 뒤에 선 채 은재의 몸을 낱낱이 살피면서도 거울 앞에서 벗어나지를 않았다.
“여기, 손자국.”
약간의 시간이 흐르자 태영의 얼굴은 점점 굳어 갔다. 그는 은재를 자신과 마주 보게 세우고는 거뭇한 자국이 남은 둔부를 어루만졌다.
시선을 들자 거울과 눈이 마주쳤고 뒤돌아선 은재의 나신이 비추어졌다. 흰 살갗은 얼룩덜룩한 흔적으로 그득했다. 특히 허리, 골반, 엉덩이 부근은 원래 색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였다.
그중 가장 눈에 띈 것은 둔부에 난 손자국이었다. 얼핏 보면 검은 얼룩처럼 보였으나, 태영은 그것이 영체의 장난질이라는 것을 단번에 알아챘다. 게다가 그냥 수작질이 아닌 성적인 희롱이었다는 것 또한.
“선배, 솔직히 말해요.”
“……어?”
“그냥 가위눌린 게 아닌데.”
숨겨 왔던 비밀의 비밀이 탄로 나고야 말았다.
태영에겐 잠을 못 잔다, 악몽을 꾼다, 귀신이 꿈에 나온다고 했으나 사실은 단순히 악몽이 아닌, 말할 수 없이 끔찍한 짓을 당해 왔다는 또 다른 비밀이 결국 밝혀졌다.
은재는 그것이 속 시원하기도, 여전히 알리고 싶지 않기도, 수치스럽기도 했다.
“하아…….”
나직한 한숨이 들렸다. 은재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태영이 스스로 답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작은 욕조에 엉덩이를 기대어 앉은 그가 입을 열었다.
“귀접은 쉬운 문제가 아니라고 들었어요. 한마디로, 골치 아프다는 거죠.”
태영은 욕조 위에 달린 샤워기를 집어 은재에게 건네주었다. 차가운 옷을 걸치고 있던 탓에 몸이 식었을 터였다. 그는 온수 쪽으로 헤드를 조정한 뒤 상대에게 눈짓을 보냈다. 뻣뻣하게 경직된 은재가 미약하게 물을 틀어 몸을 적시기 시작했다.
“진작 알았다면 좋았을 텐데. 몸에 남은 흔적들을 보니 조금 늦은 감이 있어요. 이제 평범한 방법은 통하지 않을 것 같거든요.”
따뜻한 물에 얼굴을 묻고 가볍게 세수를 하자 내내 혼탁했던 머리가 조금 개운해졌다. 은재는 잔뜩 쭈그렸던 어깨를 천천히 폈다.
“방법이……, 있어?”
“없지는 않죠. 그런데, 이제 그 방법들을 쓰기는 틀렸어요. 너무 늦기도 했고 영체들이 손댄 흔적이 너무 많아서요. 가위를 한 번 눌린 사람은 계속 눌리기 쉬워요. 놈들 사이에 말이 돌거든요. 말하자면, 타깃이 되는 거예요.”
순간, 은재의 머릿속에 놈들이 흘렸던 이야기 중 몇몇 대화가 떠올랐다.
‘들었던 대로네. 아니, 그 이상인가?’
그런 말을 했었다.
정신없는 와중에도 무슨 말인지 의아했기에 잊지 않았다. 그럼 이미 놈들에게 자신에 대한 이야기가 돌고 있다는 뜻이었을까?
은재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정말 방법이 없다면 어떡할까. 그래도 근 한 달간은 잘 피해 왔었는데, 다시 태영의 말을 듣는다면 놈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그래도 최근에는 이런 일이 없었어. 오늘 갑자기…….”
“그동안 제가 말한 걸 잘 지켰을 테니까요. 그리고, 마지막에 나눠 준 기운이 꽤 오래 남아 있었던 것 같고. 하지만 그것도 여기까지예요. 같은 방법은 이제 통하지 않을 테니까.”
“왜?”
“정말 몰라서 물어요?”
욕조에 앉아 말을 건네던 태영이 몸을 일으켰다. 무표정한 얼굴에는 냉기가 서려 있었다.
은재는 혹여 그의 옷에 물이 튈까 자신의 몸 쪽으로 샤워기 헤드를 돌렸다.
바투 다가선 태영이 은재를 내려다보았다. 여전히 무미건조한 그 눈동자에는 그저 그림자만 어른거릴 뿐이었다.
태영의 매끈한 손이 은재의 둔부를 더듬은 순간이었다. 은재는 갑작스러운 그의 행동에 놀란 나머지 들고 있던 샤워기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쾅, 하는 소음이 나고 쫄쫄 흐르던 온수가 위며 옆으로 마구 튀었다.
사방으로 흩어지는 물줄기가 결국 태영의 옷자락을 적셨다. 점점이 짙어지는 바지와 물에 젖은 그의 셔츠 아래로 탄탄한 몸 선이 드러났다.
얼굴마저 젖어 들자 태영이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넘겼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이 뒤로 넘어가고 늘 가리고 있었던 이마가 드러났다. 그는 수증기가 뿌옇게 낀 안경을 대강 벗어 욕조에 던졌다.
그가 다시 은재를 향해 고개를 돌렸을 때에는 몇 가닥 내려온 머리카락 아래로 짙은 눈썹과 오뚝한 콧날이 선명하게 드러나 있었다.
“야, 진태―.”
“선배.”
평소 알던 진태영이 아닌 것만 같았다. 훤히 드러난 그의 얼굴이 어쩐지 낯설었다. 한층 더 짙어진 그의 체향에서 예전과는 다른 위압감이 느껴졌다. 은재는 은연중에 그를 무시해 온 걸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태영의 발이 샤워기 헤드를 툭 밀었다. 미끄러운 욕실 바닥을 가로질러 벽에 부딪힌 샤워기에는 여전히 쫄쫄 물이 새고 있었다. 은재의 앞에 선 그가 조명을 가렸고, 그림자가 진 은재의 얼굴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는 시선과 눈이 마주쳤다.
“여기.”
짧은 말이 이어졌고, 그의 곧은 손가락이 은재의 둔부를 쥐었다. 너무나 자연스러운 움직임에 은재는 미처 반항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닿은 촉감을 뿌리치지 못한 사이, 손이 둔부 사이를 파고들었다.
“읏……, 야!”
젖은 은재의 머리카락이 태영의 어깨에 닿았고, 점점 몸이 가까워 오자 그의 품에 안긴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은재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을 들킬까 봐 고개를 푹 숙인 채 태영의 몸을 밀어내려 했다.
“대체 무슨 짓을 당한 거예요?”
“야, 잠깐―!”
태영은 거대한 벽 같았다. 두드리고 밀어내도 꼼짝하지를 않는 것이다. 은재는 점점 안을 파고드는 그의 손가락을 막을 도리가 없었다. 서서히 옥죄어 오는 구속구처럼 태영은 양쪽 손으로 은재의 둔부를 벌려 내었다.
욕실 안의 거울에는 그 모든 모습이 낱낱이 비쳤다. 태영의 품에 안긴 채 고개를 젓는 자신의 뒷모습과 그의 손에 의해 벌어진 둔부 사이로 붉게 물든 애널이 무언가를 원하는 듯 끊임없는 뻐끔대는 모습까지.
“……만지지 말라고!”
“선배, 고개 돌려 봐요. 거울 보이죠?”
퍽퍽 내리치는 주먹에도 태영은 눈썹 한번 움직이질 않았다. 그는 여전히 건조한 말투였다. 이 공간에서 흥분한 것은 오로지 은재뿐이었다. 그 사실이 은재는 몹시도 자존심이 상했다.
“무슨―.”
성을 내고 악을 써도 태영의 태도는 변하지 않을 것이다. 은재는 결국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그의 말을 따랐다.
고개를 돌려 뒤쪽으로 시선을 던지자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보였다. 후배 앞에서 벌거벗은 채로 엉덩이까지 벌려진 스스로가 어찌나 추잡한지 귀까지 열이 확 올랐다.
그러나, 태영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거울 안에서 은재와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애널 안쪽의 육벽이 드러날 정도로 한쪽을 더욱 당겨 벌렸다.
“아, 읏. 야! 진태영!”
이런 상황에서 침착할 수 있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물에 젖은 탓에 태영의 손가락은 미끈거렸다. 꾹 눌러 잡은 둔부가 겨우 벌어지자 안쪽의 허전한 느낌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왔다. 은재는 이 꼴을 하고도 하복부가 재차 욱신거림을 느꼈다. 태영의 앞섶에 닿은 제 성기를 최대한 뒤로 물리려 애를 썼다.
‘젠장, 짜증 나……. 또 나만.’
그럼에도 거울을 향한 시선을 돌릴 수가 없었다. 저 말도 안 되는 광경이 주는 수치심이 은재로 하여금 흥분감이 돌게 했으니까.
“자, 봐요.”
태영의 손가락이 벌려 낸 곳, 그 안은 선홍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스스로 아래를 벌려 안을 본 적이 없었기에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를 깨닫는 데에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여기, 이런 색이 아니었을 텐데 검어졌잖아요.”
답이 없는 은재를 채근하듯 태영이 손가락을 움직였다. 그의 손끝이 예민한 내장을 건드리자 등골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그건 단순한 쾌감과는 또 다른 감각이었다. 그의 손이 닿은 부분에 찌릿한 전기가 일듯 몸이 떨렸다.
“으, 윽!”
“봐요, 선배. 지금은 어때요.”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전기 충격을 받은 듯 그 부근이 저렸다.
은재는 꾹 감았던 눈을 떠 흐릿한 시야를 정돈했다. 여전히 태영의 손가락은 자신의 안쪽을 짚고 있었고, 방금 찌릿한 감각이 전해진 뒤에 제 구멍이 움찔대는 것이 보였다.
“뭐, 뭐가. 좀 놓으라고!”
“방금까지 검었던 색이 조금 옅어졌잖아요. 잘 봐요.”
태영이 이끄는 대로 시선을 던져 보아도 은재는 큰 차이를 알 수가 없었다. 여전히 안쪽은 붉기만 했고 검은 얼룩은 보이지 않았다. 혹시, 그의 눈에만 보이는 흔적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영체들의 찌꺼기가 남은 거예요. 이 안에 대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모르겠지만, 상태를 보니 더 안쪽도 마찬가지일 것 같고요. 이보다 심하면 더 심했겠지. 지금 제 기운이 닿아서 조금은 옅어졌어요. 선배는 안 보일지도 모르지만.”
은재의 입가에서 나직한 숨이 새었다. 자신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자국이었으나 그가 그렇다면 아마도 그런 것일 테니까. 그래서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이대로 두면 며칠이고 상관없이 놈들이 드나들 거예요. 귀문이 문제가 아니라 이미 표적이 된 거라고요. 매일 밤 그놈들을 상대하느라 잠도 자지 못할 거고.”
은재가 내내 상상해 왔던 최악의 시나리오가 태영의 입에서 술술 쏟아지기 시작했다.
“문제는 안쪽까지 흔적이 남으면 빙의되기도 쉽다는 거예요. 아까 화장실에서 선배, 제정신 아니었죠. 무언가가 선배 안쪽에―.”
그 뒤의 말은 잘 들리지 않았다. 귀가 먹먹하게 멀어져만 간다.
‘어떡해야……, 하지.’
다정하고 친절했던 그 목소리들은 은재의 몸을 차지하려고 했다. 만약 태영이 오지 않았다면 그들에게 남김없이 먹혀 어떤 꼴이 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심장이 차갑게 얼어붙는 듯했다.
“……싫어.”
은재는 태영의 말을 툭 잘랐다. 자신의 둔부를 더듬는 그의 손이나 애널 안쪽으로 파고든 손가락 따위는 이제 전혀 신경 쓰이지 않았다. 불안감과 초조함이 목을 졸랐고, 그 외의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하면 되는데?”
“이제 보통의 방법으로는 힘들어요.”
“그러니까, 다른 방법이 있긴 한 거야? 뭐든지.”
은재는 절박했다. 지하철에서 겪었던, 놈들이 자신을 변소처럼 사용했던 일을 다시 한번 겪는다면 그때는 아마 제정신으로 버티지 못할 것이다. 아직도 목구멍을 타고 흘러간 시큼한 악취와 제 내장을 가득 채웠던 미적지근한 액체의 느낌이 선연했다.
싫어, 두 번 다시는 그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아.
산산이 조각난 자존감은 이미 먼지처럼 흩어졌다. 이번에도 은재의 답은 태영뿐이다. 그러니 무슨 짓이든 방법이 있다면 해야만 했다.
결연한 표정을 지은 은재가 물끄러미 보자, 태영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뭐든지 다 할 수 있기는 하고?”
태영의 손가락이 은재의 안쪽을 파고들었다. 그러자 은재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흘렀고, 순간 둔부로 힘이 들어가 태영의 손가락을 꽉 감싸며 수축했다.
“야……, 너.”
“일단 씻고 나와요.”
태영이 순순히 손을 떼었다. 은재를 욕실에 세워 둔 채 등을 돌려 나가며 말을 덧붙였다.
“아, 그리고 안은 씻지 마세요.”
은재는 멍청한 얼굴로 그를 보내 주었다. 욕실 문이 닫히고 오롯이 남게 된 뒤에야 그가 말한 ‘안’이 무엇을 말하는지를 깨달았다.
‘……뭘, 하려고.’
불안감이 치밀었다. 그와 동시에 새빨갛게 달아오른 볼에는 후끈 열이 나고 있었다. 아직 놈들의 흔적이 남아 있는 내벽은 이유 모를 기대감에 가득 차 움찔, 스스로 안을 조여 왔다.
* * *
처음, 그 시선이 느껴진 것은 언제였을까.
정체 모를 목소리들이 들리기 시작하고 놈들이 꿈속에 나타났던 그때부터였던가. 은재는 불현듯 누군가에게 감시당하는 것처럼 끈적끈적하게 들러붙던 그 시선이 떠올랐다.
시작이 언제였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질 않았다. 은재가 아는 것은 불명확했다. 악몽에서 놈들에게 겁간당하던 때에 누군가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직감이 든 것뿐이었다.
실제인지 허상인지도 알 수가 없는, 찝찝하고 불온한 감각. 그건 마치 시커먼 동굴과도 같았다. 끝을 알 수 없는 검고 움푹 팬 시선이 악몽 속에서 은재를 따라다녔다. 어느 때에는 꿈에서 깬 뒤에도 종종 느끼기도 했고, 또 다른 때에는 악몽에서만 느껴지기도 했다.
은재는 생각했다. 그저 과한 신경성 증상이라고. 그런 악몽을 꾸는 와중 제정신일 리가 없으니 너무 예민하게 받아들인 것이라고. 그렇게 말이다.
“읏……!”
그런데 왜 하필 지금, 그 기억이 떠오른 걸까.
그리 오래 지나지는 않았으나 한동안 잊었던 감각이었다. 악몽이 사라지면서 그 시선도 사라졌고, 근 한 달간은 떠올리지 않았었다. 어쩌면 오늘 너무 많은 일을 겪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최대한 다른 생각들을 떠올렸다. 은재는 현재 침대에 엎드려 누운 자세였다. 벌거벗겨진 탓에 맨살이 침대 시트에 닿았고 반쯤 곧추선 성기를 이불로 겨우 가린 채였다.
“정말 괜찮은 거죠?”
“……괜찮을 리가 없지. 그래도 어쩔 수 없잖아.”
은재는 베개에 고개를 푹 묻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된 건지 수치스럽고 창피했다. 그에 비해 태영은 꽤 침착한 태도여서 더욱 비참하게만 느껴졌다.
태영은 씻고 나온 은재에게 한 가지 제안을 건넸다. 이 모든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해결책을.
이마저도 불확실성을 안고 있었으나 은재로서는 뾰족한 수가 없었다. 다시 태영을 끌어들인 것은 자신이었고, 그가 아니라면 기댈 수 있는 곳도 없었다. 막다른 곳에 몰린 생쥐가 선택할 수 있는 결정이란 대개 한 가지뿐이다.
태영의 손바닥이 은재의 허리와 골반 사이의 움푹 들어간 부근을 꾹 눌렀다. 부드러운 압박감이 들자 은재는 자연스레 허리를 더욱 침대에 붙였고 그와 동시에 둔부가 위로 들렸다. 물 흐르듯 이어지는 자세는 노골적이었다. 태영에게 제 둔부 사이를 다 드러낸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
“읏…….”
그 자체만으로도 아래가 찌릿하게 저려 왔다. 은재는 자신이 수치심과 불안감만으로도 앞을 세운다는 사실을 인정할 수 없었다. 내재된 본능인지, 아니면 악몽을 통해 강제된 것인지 알 수는 없었으나 그 사실을 꾸준히 외면해 왔다.
“힘 빼세요.”
“윽!”
내벽 안을 굵고 긴 손가락이 헤집었다. 처음부터 꽤 큰 부피감이 단번에 밀려 들어왔고, 둔부를 올린올리자 은재의 몸이 잠시 휘청거렸다.
말랑한 구멍 안으로 사람의 체온이 들어서니 아랫배가 뻐근하게 울렸다. 놈들과는 전혀 다른 감각, 맥동하는 혈관이 터질 듯 부푸는 것만 같았다. 뜨거워, 너무 뜨거워서 흠칫흠칫 떨리는 몸이 진정되질 않았다.
“역시, 꽤 깊은 곳까지…….”
태영은 좀처럼 흥분이란 것을 하지 않는 걸까. 병명을 진단하는 의사와 같은 태도는 여전했다. 이 꼴을 보면서도 말이다.
“흐, 읏…….”
태영은 은재에게 그간 있었던 일을 낱낱이 들으면서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태영은 은재의 안에 남은 흔적이 놈들의 배설물 탓일 거라고 했다. 수캐가 자신의 영역을 표시하듯 은재의 몸 안에 지독한 표식을 남긴 것이라고.
더불어 흔적이 남아 있는 한 영체라면 누구든 은재의 몸을 드나들 것이고 악몽은 끊이지 않을 것이며 끝내 몸을 빼앗기고 말 것이라고 했다. 차분하게 이어지는 모든 이야기는 최악의 결론이었고, 은재의 눈앞을 캄캄하게 만들었다.
잠시 침묵이 오간 후, 절망에 가득 찬 은재에게 태영이 말을 건네었다. 다정한 어조였다. 은재는 고개를 들고 그를 바라보았다. 태영은 아무렇지도 않게 제안을 했다.
‘그들이 선배의 몸속 깊숙한 곳까지 배설해서 흔적을 남겼어요. 지금처럼 손가락으로 흔적을 지운다고 해도, 안쪽에는 닿지 못하니까 한계가 있는데…….’
태영은 이어 설명했다.
입으로 들어간 배설물은 입안으로 기운을 넣으면 일부 해결되겠지만, 안쪽 깊숙이 퍼진 흔적들은 지우기가 쉽지 않다고. 그러니 더욱 길고 큰 것을 넣거나, 혹은 자신이 은재의 안쪽에 배설하는 방법밖에는 없다고.
‘미친 새끼야!’
은재가 소리쳤다. 정말이지 미친 소리나 다름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은재의 일갈에도 태영은 눈썹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예전에는 조금 수그리기라도 하더니 말이다.
그 짓만은 싫다며 진저리를 치는 은재를 보며 태영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일단 그건 피해 보도록 하죠. 저도 싫어서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은재는 태영의 눈치를 살폈다. 태영 역시 자신과 그런 짓거리를 하는 게 내키지 않을 것이 아닌가.
이 모든 건 순전히 자신 때문에 일어날 일들이었다. 태영은 자신을 돕는 것이고, 만약 그가 이 모든 짓거리가 싫다고 으름장을 놓는다면 은재에겐 마지막 남은 선택지마저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그러니, 고분고분해질 수밖에.
“흐아, 윽……!”
“안은 안 씻으셨네요.”
“읏……. 씻, 지 말라며.”
“네, 잘하셨어요. 그래야 잘 보이니까요.”
베개에 코를 묻었는데도 시큼한 악취가 났다. 은재는 이 악취가 제 몸에서 나는 것이라고 확신했다. 놈들이 토해 낸 배설물이 아직 제 입안과 내장 안에 남아 있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그 더러운 곳을 태영이 손가락으로 헤집어 대고 있었다.
‘……싫겠지.’
그 역시 싫을 것이다. 은재는 숨을 꾹 눌러 참으며 몸이 흔들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선배, 소리 내셔도 돼요. 참기 힘들면.”
“시, 끄러워.”
상냥한 말에 눈물이 핑 돌았다.
‘……젠장, 짜증 나.’
은재는 속에서부터 치미는 욕지기를 겨우 삼킨 후 숨을 진정시켰다.
벌써 꽤 깊게 침입한 손가락의 마디가 안에서 원을 그리며 도는 것이 느껴졌다. 몇 개를 넣은 것인지 하나의 뭉텅이가 된 살갗이 천천히 안으로 파고들었다. 습윤한 내벽이 손가락을 쪽쪽 빨듯 조이며 부드러운 연동 운동을 시작했다. 제멋대로 움직이는 내장의 기척을 은재마저도 눈치챌 정도였다.
“읏……. 아직, 이야?”
“이제 시작인데요. 역시 더 안쪽까지 들어간 것 같아요, 보이진 않지만. 선배, 여기 느낌 어때요?”
태영의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안쪽에 들어찬 손가락이 어느 한 지점을 꾹 눌렀다. 비좁은 내벽을 꽉 채운 부피감이 살짝 굽어지더니 뭉툭한 지점을 뭉근히 짓눌렀다.
“흐아! 아읏! 야! 으……. 아니, 아.”
죽을 맛이었다. 어떻냐니. 남의 성감대를 들쑤시면서 저게 할 소리인가.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은재는 자신이 그곳을 ‘성감대’라고 인식했다는 사실에 다시 한번 소름이 돋았다.
‘……남자인데, 나는.’
정말 어딘가 망가지고 만 것일까. 놈들에 의해서 강제로 개발이라도 된 걸까. 억울함이 울컥 치밀었다.
“어때요? 방금 아프거나 찌릿했어요?”
태연자약하게 묻는 태영의 입을 한 대 때려 주고 싶었다.
“……으응.”
아프지는 않았지만 찌릿했던 건 사실이었다. 은재는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거리며 웅얼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제 기운이 닿아서 그럴 거예요. 한 번으로는 표식이 완전히 지워지지는 않겠지만요. 더 안쪽으로 넣어 볼게요.”
“흐, 아? 야, 더 깊게는 하지……, 으, 으윽……!”
“이것보다 더 깊게 넣어야 하는데.”
태영의 손가락은 이미 은재의 안으로 자취를 감춘 뒤였다.
푸욱 파묻힌 손가락을 꾹 조이며 움찔거리는 애널은 이미 동그란 형태로 벌려져 있었다. 살갗과 살갗이 맞닿아 접합부는 주름 하나 없이 펴졌고, 마치 원래부터 이어진 것처럼 구멍은 들어오는 모든 것을 삼켜 내려 했다.
그 색정적인 움직임을 태영은 검은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더는 안 들어가네요, 잠깐만요.”
곧고 긴 손가락이 마디가 보이지 않도록 박혀 있었다. 태영은 제 손가락을 빼내고는 엄지를 제외한 모든 손가락을 한데로 뭉쳐 애널 부근을 꾸욱 눌렀다. 아까와는 다른 부피감이 밀려 들어와 은재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흐, 아읏. 야, 이건 너무……!”
“더 넣어야 해서요. 조금만 참으세요.”
손가락 하나도 버거웠다. 그런데 이제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압박감이 거세어졌다. 은재의 이마에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위로 치켜든 둔부가 좌우로 휘청거릴 만큼 참아 내기 힘든 자극이었다.
“아, 으……, 흐아.”
배설물로 젖은 안쪽은 거대한 부피감을 천천히 받아들이고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탓에 윤활제가 따로 필요 없었으나 커도 너무 컸다. 어느새 다시 손가락 마디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밀려 들어간 것이 아까보다도 더 깊숙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태영의 손등 일부가 은재의 안으로 감추어졌다.
‘……아파, 이상해, 숨이.’
은재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가까스로 유지한 자세가 흐트러지려 했다. 그때 은재의 뒤에 있던 태영이 무너지는 은재의 몸을 한 팔로 지탱해 주었으나 은재의 애원에도 좀처럼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헉, 허억…….”
기어코 들어갈 수 있는 곳까지 손이 쑤셔졌다. 헉은재는 밭은 숨을 내쉬며 힘을 풀고자 애썼다.
그러나, 될 리가.
안을 가득 채운 부피감은 그 자체만으로도 낯선 쾌감을 주고 있었다. 뜨거운 태영의 체온이 너무나도 고스란히 느껴져서 안이 홧홧했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사정할 것처럼 성기가 부풀었다.
“더는 안 들어가네요. 역시 손가락으로는 무린가.”
“윽, 으헉……. 빼, 빼 줘. 아, 윽. 너무 깊―.”
“선배, 여기도 이상해요?”
움직일 수도 없을 만큼 비좁은 공간을 가득 채운 그것이 빙글, 각도를 틀었다.
“――!”
손가락의 각진 마디가 장벽을 훑으며 지나가자 눈앞에서 별이 튀었다. 은재는 외마디 비명을 지르듯 파드득 몸을 떨며 아래를 조였다. 손가락에 내벽이 찐득하게 들러붙었고, 그 자극이 오히려 은재를 괴롭히고 있었다.
“흐! 흐익, 으아! 이, 이상, 그, 그만 빼, 제발, 으응……!”
“이상하단 이야기는 여기까지도 표식이 있다는 거네요.”
“움직, 이지……, 흐아, 싫, 어.”
“움직이고 있는 건 선배잖아요.”
은재는 고개를 틀어서 태영을 노려보았다. 눈물이 그렁그렁한 붉은 눈가로는 그리 위협적이지는 않을지라도 말이다.
자꾸만 스스로 움직이며 아래를 조이는 그 감각은 제 의지가 아니었다. 더 깊게 박아 달라는 듯 하복부의 근육이 움찔거리며 경련하는 것이 느껴졌다. 태영은 분명히 더 생생하게 느끼고 있을 텐데도 그의 목소리에는 전혀 흥분감이 없었다.
그게 다행인지, 아니면.
“이제 뺄게요. 아무래도 손가락은 의미가 없어요.”
“―읏, 으응.”
태영의 손가락이 쑤욱 빠져나갔고, 안을 그득 채우던 압박감이 사라지자 애널이 뻐끔거리며 확장되었다가 다시 수축했다.
내내 긴장했던 은재의 몸은 그대로 무너졌다. 위로 쳐들었던 둔부를 내리고 쿠퍼액이 질질 새는 성기를 침대 시트에 비비적거렸다. 애매하게 도달한 극치감은 어쩐지 아쉬웠다. 그런 생각이 스쳤다는 것에 모멸감이 들었지만 부정할 수는 없었다.
“선배.”
아까 태영은 더 크고 긴 것을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럼, 그건…….
“넣을게요. 정말 괜찮은 거죠?”
뒤에서 지퍼를 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지익, 이어지는 소리와 달칵거리는 소리가. 무거운 천 자락이 아래로 내려지고 침대가 조금 흔들린 다음, 바닥에 무언가 떨어지는 파열음이 났다.
이건 분명 이상한 일이었다. 결과가 확실히 보장된 방법도 아닌 데다 그 방법이라는 것은 또 성관계와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그러니 평소의 은재라면 기겁했을 터였다. 개새끼, 미친 새끼, 헛소리하지 말라고 악을 쓰며 성질을 냈어야 했다.
그런데 왜인지 태영의 말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 그러기는커녕 뒤에서 기척이 들리자 무너진 몸을 다시 세워 둔부를 위로 올리고 허벅지를 슬슬 벌리고 있었다. 무릎 아래에 끌리는 침대 시트가 양옆으로 벌어지며 사각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흐읏…….”
애널은 녹녹하게 풀려 있었다. 점성을 지닌 액체가 내벽을 촉촉이 적신 뒤로 쭉 그랬다. 그때, 은재의 뒤로 둥근 선단이 툭, 닿았다. 분명 뭉뚝한 살갗의 느낌이었다. 굳게 닫힌 주름 부근을 한 면이 문지르자 내벽이 기껍게 수축했다.
은재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꿈이 아니다, 지금은. 허상도 아니었다. 뒤에서 제 구멍에 지분거리는 저 물건은 허상이 아닌 실제였다. 정말 사람의 성기, 남자의 양물. 그것도 진태영의. 악몽에서 당했던 겁간이 아닌 정말 그의 성기를 제 안에 넣는 짓이었다.
“자, 잠깐!”
생각의 물꼬가 터지자 숨이 턱 막혔다. 은재는 엉덩이를 내리고 몸을 뒤집어 태영과 눈을 맞추었다.
갑작스레 바뀐 시야에는 베개가 아닌 태영의 몸이 담겼다. 그 역시 반쯤 발가벗은 채였다. 은재는 침대 밑에 널브러진 그의 바지와 속옷에 잠시 시선을 두었다가 다시 그를 보았다. 태영의 하복부에는 말도 안 되는 크기의 성기가 자리하고 있었다.
“왜요?”
“아니……. 어, 저기…….”
“네?”
저게 들어가긴 할까? 싶었다. 정말 그의 말대로 더 크고 길고, 게다가 두껍기까지 한 그런 물건이었다.
은재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바람에 눈 둘 곳을 찾지 못해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
“그……. 콘, 돔은?”
“콘돔이요?”
“……응. 설마, 그냥 하게?”
은재는 경험이 없었다. 악몽에서 당했던 일을 ‘경험’이라고 친다면 뒷 경험은 있다고 해야 할까. 실제로 해 본 적은 없지만, 성관계를 할 때에 콘돔이 필요하다는 것 즈음은 알고 있었다.
그런데, 은재의 말에 태영의 고개가 비스듬히 기울었다. 굉장히 의아하다는 표정이 언뜻 스쳤을까, 그가 차분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선배, 저희 섹스하는 거 아니잖아요.”
그 말이 끝이었다.
“……어. 그, 그런가.”
은재는 어쩐지 그에게 설득당하고야 말았다. 쭈뼛거리며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의 손에 이끌려 다시 돌아 엎드렸다.
태영은 매우 능숙하게도 은재의 하복부에 손을 넣어 위로 당겨 올렸고, 은재는 다시 전처럼 둔부를 치켜든 모양새가 되었다.
태영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하지 않았다. 자신의 성기를 스스로 쓰다듬으며 벌름거리는 은재의 애널을 시선으로 좇았다. 재촉하듯 움찔대는 그 모습은 꽤 색정적이었고, 다행히도 태영의 것에도 반응이 있었다. 축 늘어진 양물이 서서히 곧추서며 더욱 모양새를 갖추었다.
성기의 기둥을 쥐고 은재의 구멍에 선단을 맞추었다. 몇 번 바르작거리며 기둥을 비비다가 끝을 겨누고는 그대로 밀어 넣었다.
닫혀 있던 애널이 그 압박감에 못 이겨 서서히 벌어질 때였다.
“으, 으윽, 아!”
비교할 수 없는 고통에 발끝이 곱아들었다. 은재는 살기 위해 다리를 더욱 벌렸다. 그러곤 최대한 무릎을 벌리고 허리를 휘었다. 놈들의 것과는 전혀 다른 무게감이 자신의 안으로 밀려 들어왔기 때문이다.
‘아, 아파……. 이상해…….’
가까스로 선단을 삼켰을 뿐인데 애널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눈물이 핑 돌며 턱이 덜덜 떨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아래가 너덜너덜해질 것만 같은 감각이었다.
“으읏……. 태, 영아, 아파. 너무, 커.”
“하아, 왜 안 들어가지.”
제일 두꺼운 부근을 겨우 삼켜졌을 때, 그만 눈물이 터졌다.
“흐윽, 으, 아, 으으.”
목소리가 떨리며 앓는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움푹 팬 은재의 등골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겨우 지탱하고 있는 허벅지 안쪽이 파르르 경련했다.
태영의 것은 놈들과는 달랐다. 죽은 것이 아닌 산 것의 양물은 너무 뜨거웠고, 감당하기 어려웠다. 시체처럼 썩은 내를 풍기던 서늘하고 축축한 성기가 아닌 맥동하는 뜨거움이었다. 열기가 어린 양물이 차츰 은재의 안을 차지했다. 무작정 밀어 넣는 압박감에 내장이 팽팽하게 부풀며 호흡이 흐트러졌다.
“흐, 하윽……. 으. 아, 안 돼. 역시, 그만…….”
“선배, 아직 조금 더요.”
“흑. 안, 된다고. 아, 으아. 윽, 읏……. 제발.”
“……후.”
겨우 끝부분이 들어갔을 뿐이었다. 태영의 그 무던한 낯빛이 조금은 붉어졌을까, 생각하던 무렵 그가 낮은 신음을 흘리며 은재의 골반을 붙들었다.
태영의 손이 살갗에 닿자, 은재의 구멍 안쪽이 움찔 떨렸다. 꽤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태영은 느른한 숨을 내뱉으며 조금 더 아래에 힘을 주어 당겨 왔다. 은재의 골반을 붙잡은 손을 당기고 자신의 몸은 밀어내면서 압박했더니 들어갈 것 같지 않았던 곳으로 성기가 차츰 채워졌다.
“흐익……. 으, 하으으, 읏. 태, 영아. 아, 흐아……. 아파, 아, 아파…….”
“윽.”
아래를 다물 수가 없었다. 은재는 처음 겪는 감각에 소스라쳤다. 제 의지대로 아래를 조일 수도 없을 만큼 꽉 들어찼다. 정말 어딘가가 망가질 것만 같은 두려움이 용솟음쳤다.
태영의 것이 애널을 가득 벌리고 안에 토해진 점액질의 액체들을 더욱 안쪽으로 밀어내고 있었다. 질척거리는 소리가 나지도 않을 만큼 공간이 양물로 가득 찬 뒤였다.
엎드린 채로 베개에 얼굴을 묻었던 은재가 고개를 돌렸다. 숨이 턱 막히는 통증과 쾌감이 뒤섞여 숨이 부족했다. 애꿎은 침대 시트를 꽉 쥐곤 자꾸만 밀려나는 무릎을 멈추려 애를 썼다.
“……하. 선배, 안에 느낌이 와요?”
태영이 한쪽 손으로 은재의 하복부를 어루만졌다. 이미 곧추선 성기가 은재의 복부에 닿으며 덜렁거리고 있었으나, 그는 그것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조금 더 팽팽해진 하복부를 손바닥으로 천천히 매만지며 조금 힘을 주어 꾸욱 누르자, 은재가 새된 비명을 질렀다.
“윽! 아, 흣. 만지면……, 힉! 느낌, 와, 와아. 그러니까 이제, 그만, 읏……!”
“이 느낌이에요. 제가 선배에게 남은 흔적을 지워 주는 감각. 잊지 마세요.”
정말 지워 주는 게 맞을까.
이 감각이 정말 그 때문인 걸까.
단순히 성감대에 뜨거운 것이 비벼지고 지분거려 날 선 쾌감이 돋는 것이 아닌, 해결책이라는 그의 말이 왜 이토록 반가운 것인지. 은재는 이내 근원적인 의문을 지워 버렸다.
‘그래, 이건 섹스가 아니야.’
나는 지금 문제를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중인 거야.
놈들이 자신에게 말했던 그 말은 사실이 아니다. 은재는 자신이 뒷구멍으로 섹스를 즐기는 천박한 몸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가 없었다.
“아, 으읏. 흐으, 알았……, 알았어.”
“네. 그럼 이제 조금 더.”
“무, 뭐……?”
태영의 말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가득 들어찼던 양물이 더욱 깊숙이 침범했다.
‘더 들어갈 부분이 남았다고?’
강제로 안이 벌어지는 감각은 질리도록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너무나도 달랐다. 정말 죽을 것 같은 두려움이 목을 졸라 은재는 비명을 지르듯 흐느꼈다.
“흐, 히익, 아! 태, 태영아, 아, 안 돼. 더는, 진짜……!”
“윽, 하아, 더 넣어야 하는데. 끝까지 닿아야.”
“으응, 읏. 나, 죽어, 죽어어……. 제발, 그만 넣어, 제발…….”
“으윽. 하……, 선배.”
배 속이 뜨거웠다. 애널에 대고 뜨거운 물을 부은 것처럼 속이 뒤집히는 듯했다. 맥동하는 성기에 우뚝 솟은 혈관까지 배 속에서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였다. 내장이 파헤쳐져 조금이라도 비틀면 어딘가가 끊어질 것만 같았다.
“……싫어, 아파.”
그런데, 이상해.
눈물이 후드득 떨어졌고 은재는 태영에게 애원했다.
귀가 빨개질 정도로 울고 있는 은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던 태영이 곤란하다는 듯 눈썹을 기울이더니 옅은 미소를 입가에 올렸다. 그러다 손을 뻗어 아직 젖어 있는 은재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지고는 답했다.
“더 넣어야 하는데, 안쪽은 어떡하려고요.”
“흐윽……. 으. 괜찮아, 괜찮으니까.”
“또 올 텐데, 그 녀석들.”
“그건, 싫은데, 으, 으읏…….”
“다 안 넣더라도 방법은 있는데. 그렇게라도 할게요, 그럼.”
태영은 은재에게 허락을 구하지 않았다. 일종의 통보였다. 그러나, 은재는 그런 세세한 것을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당장이라도 끊어질 듯 아래를 조이며 흠칫흠칫 떨 뿐이었다.
애처롭게 경련하는 은재의 내벽으로 태영이 허리를 움직였다. 틈도 없이 꽉 들러붙은 성기를 밖으로 빼내자 내벽이 그대로 딸려 나가는 듯 몸이 뒤로 밀렸다. 은재는 그에게 딸려 가지 않도록 허벅지며 종아리에 힘을 주고 버텼으나, 조금씩 뒤로 밀리고 있었다.
“흐익. 으, 아, 으응, 읏, 으으읏!”
울음 섞인 비명이 터졌다. 태영의 성기가 온 장벽을 짓누르며 빠져나간 탓에 은재의 성감대가 뭉개졌다. 한껏 벌어졌던 허벅지 안쪽 살이 긴장하며 수축했다.
통증은 잠깐이었으나, 쾌감은 길었다. 두껍고 긴 양물이 느릿하게 밀려 나가는 마찰감이 너무나도 자극적이었다. 결국, 복부를 두드리던 은재의 성기에서 뿌연 선액이 토해졌고 하복부 아래의 내장 안쪽이 맥동했다.
‘끝났……, 어.’
심장을 쿵쿵 두드리는 극치감에 후희를 즐길 무렵이었다. 분명 빠져나갔다고 생각했던 성기가 다시금 안으로 박혀 왔다. 퍽! 소리와 함께 은재의 몸이 크게 흔들렸고 버티고 있던 다리가 무너졌다.
“으응! 아! 아, 안 돼. 지금, 갔―!”
“윽, 선배, 엉덩이 들어요.”
“싫……, 아! 태, 태영아, 해, 했잖아. 으응, 으. 하아……!”
“후. 다른 방법이라고, 하아…….”
결국, 버티지 못한 다리가 흐느적거렸다. 태영은 은재의 하복부를 받치던 손을 빼내었고, 오히려 은재의 몸을 아래로 짓눌렀다. 세웠던 무릎이 그대로 쭉 뻗어지며 은재는 침대에 완벽히 엎드린 모양새가 되었다.
아직 다 사정하지도 못한 채였다. 몸과 침대 사이에 짓눌린 성기에서 질금거리며 정액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영은 은재의 몸 위로 제 체중을 실어 허리 짓을 시작했다. 성기를 다 넣지 못했기에 삽입부부터 뿌리까지 밖으로 나온 상태였다.
태영이 허리를 뒤로 물러 성기를 선단까지 걸치면, 은재의 안으로 삽입되었던 부근이 알 수 없는 액체로 번들거리는 게 보였다. 시큼하고 오래된 시체의 냄새가 훅 퍼졌다. 태영은 그 불쾌한 냄새도 신경 쓰지 않는지 은재의 안으로 제 것을 박아 넣기에 여념이 없었다.
“흐읏, 윽. 아, 으응! 뜨, 뜨거워. 지금, 가고 있는……. 아, 히윽. 아읏!”
불에 댄 듯 뜨거웠다. 홧홧하게 달아오른 안쪽이 녹아내리는 것만 같았다. 미칠 것 같은 쾌감이 발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삽시간에 퍼졌다. 마치 거대한 불쏘시개로 안을 쑤시는 듯했다.
악몽 속에서 놈들에게 당했던 섹스는 허상이었다. 실제는 이런 것이었다. 예상하지도 못한 쾌감은 어느 때고 찾아왔다.
태영의 성기가 안을 벌리며 찌걱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제멋대로 안을 휘젓는 그것이 은재의 몸을 꿰뚫어 예민한 곳을 몇 번이고 문질러 대었다.
움찔움찔, 은재의 어깨가 떨리고 엉덩이 아래쪽의 근육이 부들부들 경련했다. 구멍이 끊어질 듯 넓혀진 채로는 그의 것을 받아 무는 것이 고작이었다.
“히익, 으, 으응! 아, 으, 으읏. 그, 으만. 흐아. 나, 또, 갈 것 같―.”
“선배. 더 깊이, 해야 하는데.”
“흐윽. 으. 안 돼, 못해. 제발……. 아, 으응. 움직이지, 아―!”
미칠 것만 같았다.
양물이 제 안으로 들이쳤다가 찌걱거리며 빠져나갈 때면 내벽이 주륵 딸려 나갔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이 너무나 생생했다. 안쪽의 온 신경이 태영의 성기에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다가 강제로 떼어지는 것만 같았다. 고통은 더 이상 느껴지지도 않았다. 느껴지는 것은 그저 쾌감뿐이었다.
의지와는 상관없이 몸이 발작했다. 뒤에서 들리는 태영의 거친 숨소리며 천이 쓸리는 소리, 어깨 양옆에 놓인 태영의 손까지. 모든 것이 열을 오르게 했다. 그가 박아 댈 때마다 허벅지부터 앞섶까지가 긴장으로 수축했고, 빠져나갈 때면 둔부가 슬그머니 들렸다.
“흐응. 으, 하, 으응, 아……! 아읏……!”
안쪽의 축축한 물기에 성기 끝이 문질러져 철퍽거렸다. 놈들의 배설한 분비물이 태영의 것에 묻지는 않았을까. 아니면 오히려 더 깊이 문대지는 것은 아닌지. 그런 생각을 떠올리자 어쩐지 아래를 더 조이게 되었다.
“선배. 이제, 하아, 안에.”
“윽, 아. 흐윽, 흣……!”
태영의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처음 들어 보는 그의 떨리는 음성에 은재는 내내 태연하기만 했던 그가 조금은 흐트러진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 자신만 그에게 휘둘리는 것처럼 느껴져 그것이 못내 얄밉던 것이다. 여유가 없는 듯 짧게 흩어지는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계속되는 오르가즘에 쿵쿵거리는 맥동이 귓가에서도 들렸고, 그렇게 은재는 또다시 극점에 도달했다.
“흐―, 윽!”
은재는 짧은 비명을 토해 내며 잘게 경련했다. 파르르 떨리는 내벽은 멈추지 않고 허리 짓을 이어 가는 태영의 성기를 밀어내려는 듯 꿀렁거렸다.
그러나, 태영은 좀처럼 멈출 생각을 않았다. 조금 전보다도 더 부푼 성기가 다시금 은재의 안쪽으로 깊숙이 삽입되었다.
“흐, 응. 흐윽, 으. 태, 영아, 나, 히익, 힘, 들어.”
물기 섞인 은재의 목소리는 이미 잔뜩 갈라진 채였다. 정말 힘들어, 죽을 것 같아. 입 밖으로 내지도 못한 소리는 웅얼거리는 신음으로 치환되었다. 또다시 사정을 이어 가는 은재의 성기 아래로 침대 시트가 짙게 물들었다. 묽은 액체가 복부와 중심에 묻어 축축했다.
잔뜩 예민해진 몸은 이제 태영과 살갗이 스치기만 해도 솜털이 섰다.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자극제처럼 느껴졌고, 겨우 세운 발끝만 애꿎은 이불을 구기고 있었다.
“윽.”
은재가 사정하며 안쪽이 강하게 수축하자 태영 역시 숨을 들이켰다. 아직 다 넣지도 못한 제 성기를 조금은 아쉬운 눈빛으로 내려다보더니 느른한 숨을 천천히 내쉬고는 짧게 말을 했다.
“선배, 안쪽까지.”
그때였다. 은재의 안으로 열기를 띤 체액이 쏟아졌다. 그것만으로도 은재는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흐―, 읏. 아, 흐아. 싫어. 싸, 싸지 마. 안에, 으응…….”
눈가에 매달린 눈물이 기어이 볼을 타고 흘렀다.
오늘만 몇 번째일까, 남의 체액을 몸으로 받아 낸 것이. 태영의 것을 삼키는 감각은 그들보다도 선연했다. 따뜻한 액체가 몸 안에 담겼고, 잔뜩 부푼 성기가 그것들이 빠져나갈 입구를 막은 채였다.
“으읏. 하아, 하. 미친, 안에다가 하면……, 흐윽.”
은재의 등으로 기울었던 태영의 몸이 바로 세워졌다. 여태 박혀 있던 접합부가 어찌나 꽉 맞물렸던지, 그의 몸이 뒤로 빠지자 은재의 둔부가 그를 따라 뒤로 물렸다. 마개가 꽉 닫힌 병처럼 말이다.
“으응. 움, 직이지 말, 라고. 제바알…….”
은재는 이미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겨우 말했다. 이제 애원을 넘어서 간청할 지경에 이르렀다. 온몸에 힘이 빠져 손가락 하나도 까딱할 기운이 없었다. 계속된 오르가즘은 은재의 몸을 걸레짝처럼 만들었다. 온몸이 성감대라도 된 양, 침대 시트에 살이 문질러지는 감각조차도 중심을 세우게 했다.
“선배, 엉덩이 들어요.”
태영의 팔이 은재의 몸 아래로 들어왔다. 그가 축 처진 은재의 오금을 억지로 들어 둔부를 위로 치켜세우게 했다.
허리는 침대에 딱 들러붙은 채로 둔부만 천장 쪽으로 쳐들었다. 아직도 안쪽에 박힌 태영의 것에서는 사정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모두 은재의 안으로 쏟아부은 뒤에야 태영은 제 것을 빼내었다.
그것이 빠져나가는 순간, 은재는 내내 내장을 짓눌렀던 압박감이 사라져 그제야 숨을 토해 낼 수 있었다.
“흐, 아―, 으응.”
“후.”
자꾸만 무너지는 은재의 몸을 태영이 팔로 지탱했다.
“안에 다 젖을 때까지 엉덩이 들어요.”
“으, 으. 싫어, 읏.”
은재의 애널에서부터 이어진 은색 실이 태영의 성기 끝에서 달랑거렸다. 입구에 묻은 체액을 가만히 바라보던 태영이 조용히 미소 지었다. 퍽 만족스러운 웃음이 찰나처럼 스쳤다.
“다 넣진 못해서, 이 정도로는 아직 위험해요.”
태영은 쾌감에 젖어 부들거리는 은재에게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둘만이 있는 이 공간에서 적막을 가르고 들려온 목소리였다. 태영은 나직하게 몇 번이고 다시 말을 꺼내었다.
“선배의 몸 안에 아직 흔적이 너무 많아서 한 번으로는 다 지우지 못할 거예요. 선배도 느꼈죠, 안쪽이 지워지는 감각. 조금 옅어지긴 했지만 완벽하게 지우지는 못했어요.”
태영은 손가락으로 은재의 애널 부근을 문질렀다. 자신의 정액으로 젖은 입구가 번들거렸다. 엄지로 그 부근을 뭉근하게 문지르자 은재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러면서도 하늘로 쳐든 엉덩이는 내리지 않았다. 기특하게도.
“그래서 더 해야 할 거예요. 완벽하게 지워질 때까지. 그렇지 않으면 또 그놈들이 선배에게 찾아와서 안에 그런 짓을 하겠죠. 몸을 차지하려는 놈들도 있을 거고. 그땐 돌이킬 수 없어요. 그러니까―.”
태영이 은재의 엉덩이를 손바닥으로 꾸욱 눌렀다. 내내 버티던 은재의 몸이 평평하게 내려갔고, 태영은 그의 등 위에 제 몸을 기댄 채로 귓가에 입술을 대었다. 몽롱한 얼굴로 흠칫 떨던 은재의 눈동자가 까맣게 내려앉던 순간이었다.
“제가 지켜 줄게요, 선배. 제가 하라는 대로만 해요.”
참으로 다정하고 상냥한, 거부할 수 없는 달콤한 말이었다.
* * *
꿈을 꾸었다. 꿈이라면 이제 질색이었는데, 이번은 놈들이 찾아오는 그 악몽과는 달랐다.
꿈속에서 은재는 사람들의 중심에 있었다. 늘 있는 일이었기에 그 장면에 위화감이 들지는 않았다. 학기가 시작되기 전에 있었던 학과 행사였던가, 모르는 얼굴들이 많았다. 신입생들도 섞여 있는 듯했다.
여느 때처럼 따분하고 지루했다. 그 나이 또래들의 시시콜콜한 연애 이야기, 교수에 대한 험담이나 특정 강의의 족보를 주고받는 대화들, 쓸데없이 자랑하는 주량까지. 하나같이 흥미가 없었다.
술을 즐기지 않는 은재였으나, 꿈속에서는 조금 취했던 것 같았다. 자신을 둘러싼 채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서 바람을 쐰다는 핑계로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둘러앉은 사람들 사이로 조심스레 발을 내디딘 순간, 낯설면서도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진, 태영?’
한쪽 구석에서 고개를 푹 숙인 곰 같은 사내가 보였다. 기묘한 위화감이 들었다. 멍한 눈으로 그쪽을 바라보던 은재는 이어서 생각했다.
‘아, 이건 꿈이지. 내가 진태영을 처음 본 날은 이때보다 훨씬 뒤였는데.’
은재는 납득했다. 이건 꿈이다, 꿈이니까. 불안하게 뛰는 왼쪽 가슴을 애써 무시하며 발걸음을 옮기는데, 줄곧 고개를 숙이고 있던 진태영 같은 놈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꿈속의 은재는 그와 눈이 마주쳤다. 시커멓게 비어 있는 그의 동공은 꼭 동굴 같았다. 아무 감정도 비치지 않는 그저 텅 빈 동굴.
놀란 은재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간 순간.
“―헉!”
꿈에서 깨어났다.
“……선배?”
주위는 어둑했다. 어슴푸레한 새벽의 달빛처럼 주변이 시퍼렜다. 얼마나 잠이 들었던 걸까, 등 뒤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선배, 괜찮아요?”
태영의 목소리가 들렸다. 잔잔한 호수처럼 깊고 낮은 목소리였다.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뿐인데도 요란스럽게 뛰는 심장이 진정되는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꿈속에서 보았던 그 같던 사람의 눈이 너무나 괴상해서 쿵쾅거리는 맥박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은재는 차분히 숨을 고르며 조심스레 눈꺼풀을 다시 열었다.
“괜찮―, 읏!”
일순, 몸이 들썩거렸다. 그와 동시에 아래쪽에서 통증이 일었다. 이물감이 느껴졌다.
‘뭐지, 대체.’
은재는 왜인지 자신의 몸이 잔뜩 긴장한 채라는 것을 곧 알게 되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태영의 눈을 마주했다가 천천히 시야를 아래로 내렸다.
“어……?”
자신의 다리가 양옆으로 활짝 벌어져 있었다. 게다가 다리 사이에는 태영의 나신이 자리해 있었고, 닫히지 못한 애널에는 그의 양물이 가득했다.
은재가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태영이 답을 내놓았다.
“잠깐 기절했었어요, 선배.”
“뭐―? 너, 설마, 아직도 하고 있―, 으! 으윽!”
“아직 멀었어요, 저번에 말했잖아요. 다 지우려면―.”
태영이 허리를 뒤로 물렀다. 내장을 가득 채웠던 것이 빠져나가자 흠칫 몸이 떨렸다. 허전해 아쉽다는 듯 은재가 내벽을 조이며 작은 신음을 흘렸다.
‘아냐. 아쉽다니, 무슨.’
은재는 순간 든 생각을 필사적으로 부정하며 도리질을 쳤다. 시체처럼 늘어진 팔에는 힘이 없었다. 손가락으로 침대 시트를 꾹 쥔 게 다였다.
그때, 문득 지난 저녁에 흔적을 지워야 한다며 시작했던 것이 떠올랐다.
‘……그럼, 그때부터 이 새벽까지.’
그제야 은재는 제 등 뒤를 적신 무언가가 어쩐지 끈적거린다는 걸 깨달았다. 악몽으로 인한 식은땀으로 젖은 줄 알았는데 자신의 정액이었던 것이다. 자세를 바꿔 가며 얼마나 박아 댄 건지 안쪽이 흥건하게 젖은 게 느껴졌다.
“―흐아. 그, 만해, 이제.”
빠져나갔다고 생각한 성기가 다시 박혀 온 것은 그때였다. 은재의 허리가 둥글게 휘었고, 입에선 새된 비명을 질렀다. 넝마가 되었을 내벽은 그 고통에도 다시금 성기를 조여 물었다. 지칠 대로 지쳤음에도 태영이 가하는 자극에 솔직하게 반응하고 있던 것이다.
‘선배, 저희 섹스하는 거 아니잖아요.’
태영은 이것이 섹스가 아니라 했다. 치료의 일종이고, 마지막 남은 해결책이라고. 은재는 그것에 동의했고 그래서 이 짓거리를 몇 번이고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처음의 그 낡은 모텔에서, 옮겨 온 태영의 집에서까지.
“으응. 아, 태영아, 나, 힘드, 윽, 으읏……!”
“선배, 하아. 여기, 건드리면 엄청 좁아져요. 아무래도 이쪽에 많이 남은 것, 아, 같아서요.”
“흐, 으윽! 응, 아아, 거긴, 안, 싫어…….”
“더 해야 돼요, 완전히 지우려면. 읏.”
“으! 으응, 아, 그만, 빼! 아! 거기 문지르지, 으응, 흐익!”
태영의 성기는 일부러 어딘가를 겨누지 않아도 충분했다. 그저 앞뒤로 느릿하게 흔드는 것만으로도 은재의 내벽을 모조리 짓뭉개고 있었으니까.
태영은 정말 치료하듯이 신중했다. 놈들처럼 거칠게 박아 대고 퍽퍽 치대는 것이 아니라 꽤 신중하게 움직였다.
그런데, 오히려 그 느릿한 몸짓이 은재의 쾌감을 더 돋웠다. 긴 기둥이 끝까지 맞물렸다가 온 성감대를 다 짓뭉개며 서서히 빠져나가면 내장 깊은 곳에서부터 어쩌지 못할 오르가즘이 서서히 치솟는 것이었다. 멀리서 물결치는 파도처럼 몰려오는 그것을 은재는 피할 수가 없었다.
“하아, 선배. 다, 넣지를 못해서.”
“흐윽, 으응. 진, 태영, 제발……. 으, 으아. 으응, 이상해. 또 가아……, 가.”
분명 감각이 사라지고 없을 구멍에 전류라도 통한 듯 찌릿한 성감이 섰다. 태영에 의해 성감대가 건드려지자 은재의 내장이 수축하며 끊을 듯 그의 것을 조였다. 은재는 자신의 내장이 그의 것을 쪽쪽 빨아 대며 개폐 운동을 하는 감각을 고스란히 느껴야 했다.
수치스러웠다. 태영은 치료라고 말하는 이 행위를, 자신의 몸은 섹스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것이.
“윽.”
“으응. 아, 읏……!”
직각으로 섰던 은재의 성기에서 체액이 분출되었다. 몇 번이나 간 것인지 잔뜩 젖은 복부는 부분부분 허연색으로 굳어 있기도 했다. 바르르 떨리는 하복부에 그림자가 지고, 움푹 팬 배꼽에는 정액이 그득했다.
“흐아. 그만, 또, 갔어……. 이제 못해, 아, 싫, 태영아, 으응. 하아, 흐윽…….”
“후, 조금만 더요.”
“싫어, 싫어어. 흐윽, 제발……. 으, 아앙! 움직, 이지, 하아으……!”
다 갈라진 목소리는 간밤이 어떠했는지를 알려 주었다. 이제는 목이 다 쉬어 목구멍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팔에는 매가리가 하나도 없었다. 은재는 시트를 구기던 손을 들어 자신의 아래에 박고 있는 태영의 허벅지를 꾸욱 밀었다.
“흐, 으으응……. 그만, 그마안…….”
“다 못했는데.”
“오늘은 이제, 됐잖아. 그만해도, 으읏!”
머리 위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눈앞이 까마득해 은재는 그의 표정까지 읽지는 못했다. 시퍼런 달빛에 비친 태영은 지금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은재는 끝에 끝까지 그의 움직임에 흔들리며 신음을 내질렀다.
“알았어요, 그럼 다음에 또.”
느릿하게 이어지던 허리 짓이 멈추었다. 태영은 반쯤 삽입된 성기를 조금 더 꽉 밀어 넣고는 그대로 안에 분출했다. 꿀렁거리며 이어지는 파정에 태영 역시 미간을 찌푸렸다. 이어진 행위에 몇 번이나 사정했음에도 아직 꽤 많은 양의 정액이 은재의 안을 적셨다.
“―흐아, 읏. 뜨, 거워, 더 못, 들어가.”
“안 돼요, 뱉어 내면. 다 먹어야죠.”
엉덩이를 흔들며 자신의 것을 거부하는 은재를 달래듯 태영이 말했다. 어스름한 달빛에 비친 그의 표정에는 왜인지 옅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거실 쪽에서 고소한 냄새가 났다. 느지막이 일어나 몸을 씻은 은재가 물기 어린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탈탈 털었다. 그러곤 꽤 익숙해진 몸짓으로 침실에 있는 태영의 수납장을 열어 그 안에서 파자마를 꺼내어 입었다.
품이 많이 낙낙한 상의를 입고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렸다. 태영의 것이었다. 커도 너무 커서 꼭 어릴 적에 아버지의 옷을 입은 것만 같았다.
조금 자존심이 상한다고 해야 하나, 같은 또래의 남자인데 뭐가 이렇게 차이가 나는지. 은재도 또래에 비해서 작은 편은 아니었다. 오히려 큰 편에 속했음에도 태영이 커도 너무 큰 탓이었다.
괜스레 조금 짜증이 나서 혼자 툴툴거리며 파자마 바지까지 마저 입었다. 역시나 바짓단도 두어 번 접어 올려야 했다.
“뭐야?”
목소리가 갈라진 바람에 헛기침했다. 거실로 나오자 고소한 밥 냄새가 났다. 주방에 선 태영은 어울리지도 않게 앞치마를 걸치고 있었다.
“선배, 밥 먹어야죠.”
“별로 배 안 고픈데.”
“그래도요. 기가 허하면 귀신들이―.”
“아! 알았어! 알았다고!”
저놈의 귀신 소리. 하루에도 열댓 번은 들어서 귀에 딱지가 앉을 지경이었다. 그럼에도 태영의 말을 듣지 않아서 겪었던 그 일을 떠올리자면 저 잔소리가 마냥 싫지만은 않았다.
정갈한 밑반찬들이 놓인 테이블로 가던 중, 은재는 이제 조금 친숙해진 태영의 집을 돌아보았다. 혼자 살기에는 꽤 큰 집이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는 태영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에 몇 번을 의심했다. 정말 네 집이 맞느냐고 묻기까지 했었으니까.
깨끗하고 흰 가구들에 밝은 우드 톤으로 포인트를 주었다. 따뜻하고 화사한 분위기의 거실은 널찍했다. 방은 여러 개가 있었는데, 침실과 드레스 룸이 따로 있다는 것이 가장 웃겼다. 그도 그럴 게 늘 허름한 옷만 입고 다니는 주제에 웬 드레스 룸인가 싶었으니까.
방은 침실과 드레스 룸, 서재를 제외하고도 하나가 더 있었는데 그 방은 잠긴 채였다. 귀신이나 무속 신앙, 오컬트적인 것을 좋아하는 오타쿠 놈이니 아마 그런 취미의 방이 아닐까 짐작만 했다. 그래서 굳이 열어 보고 싶지도 않았다.
“선배, 물은요?”
“한 잔만.”
은재는 이곳에서 손님 대접을 톡톡히 받았다. 과장을 좀 보태면 손에 물 한 방울 묻히지 않는 귀빈이라고 해야 하나.
아침부터 낮까지 태영은 꽤 헌신적으로 굴었다. 말만 하면 어떻게든 대령해 주곤 했다. 집에 꽤 돈이 있는 것인지 신입생이면서 이런 큰 집에 사는 것도 특이하긴 했다. 대부분은 원룸이나 끽해 봐야 투룸 정도지 않은가.
이곳의 환경이 워낙 쾌적했기 때문에 은재는 비워 둔 자신의 원룸이 그리 그립지는 않았다. 다만, 저녁부터 밤까지는 말이 조금 달라진다. 그때의 태영은 뭐랄까, 위압적이었다. 그의 말을 좀처럼 거부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맛은 어때요? 간은 괜찮아요?”
“응.”
이곳에서 지낸 지도 벌써 몇 주가 되었는데, 그럼에도 태영은 밥을 먹을 때마다 은재의 의사를 물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는 요리에 소질이 있었다. 간도 적당했고 맛도 있었다. 자취하면서 매일 대충 차려 먹었던 끼니에 비하면 호화스러운 수준이었다. 은재에게 끼니는 배고파야 챙기는 것이었는데, 태영과 지내면서 매일 삼시 세끼는 꼬박 먹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조금 살쪘나, 싶기도 했다.
“야, 나 살쪘지 않냐?”
“선배요? 아뇨.”
“아닌데, 살찐 것 같은데. 아무래도 밥을 좀 덜 먹어야겠어.”
“괜찮아요, 선배는 살쪄도 예쁜데.”
맞은편에 앉아 국을 한술 뜨던 태영이 그렇게 말했다. 은재는 그와 눈을 마주치자 어쩐지 좀 뒷골이 간지러워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징그럽게.”
진짜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대체 왜 저런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지 입맛이 뚝 떨어졌다.
은재가 숟가락을 내려놓자, 태영도 국을 뜨다가 말고 수저를 내려 두었다.
“안 먹어?”
“선배도 안 먹잖아요.”
“미친놈아, 지금 협박하냐?”
“협박이 되긴 해요?”
“아……, 씹.”
결국, 은재는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배가 고프기도 했고, 또 괜히 밥을 걸렀다가 이따 저녁에 무슨 꼴을 당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재가 투덜거리면서 다시 숟가락을 들자 태영이 빙긋 웃었다. 다시 달그락, 그릇과 수저가 닿고 음식을 오물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야, 근데 너.”
“네.”
밥을 거의 다 비웠을 때였다. 은재는 이제 밥을 한 숟가락 정도 남겨 둔 채로 태영을 보았다. 눈까지 가린 덥수룩한 앞머리는 여전했다.
“앞머리 좀 잘라. 안 답답해?”
“아, 답답해 보여요?”
“응.”
“선배가 보기에 불편해요?”
“어. 답답해서 멀미할 것 같아. 음식에 머리카락이 안 들어가는 게 신기할 지경인데. 좀 묶던가.”
“앞머리를요? 그랬다가 선배가 진짜 토할까 봐.”
순간, 머리끈으로 앞머리를 묶은 태영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 구역질이 나서 은재는 생각을 그만두었다.
“응, 토할 것 같다.”
“그렇죠?”
지내면 지낼수록 태영은 정말 뻔뻔한 면이 있었다.
‘이전에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은데.’
조금 둔하고 무덤덤한 면은 있었지만, 저런 식으로 대놓고 뻔뻔하지는 않았다. 예전의 진태영은 늘 무관심한 표정, 저를 마치 물건을 보는 듯 감정이 없는 얼굴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꽤 감정을 표현했다. 은재로선 그게 과하다고 느껴질 때도 종종 있었다.
같은 침대에서 자고, 치료라는 명목의 관계를 하고, 아침에 일어나 함께 식사를 한다. 그리고 낮 시간을 함께 보내고, 또 같은 침대에서 자고, 치료라는 명목의 관계를…….
이런 사이클로 하루를 보내게 된 지 몇 주 정도 지나자, 은재는 이 안온함이 주는 안락함에 서서히 젖어 들고 있었다.
은재는 부모님의 허락을 구해 휴학을 결정했고, 자취방인 원룸은 비워 둔 채로 이곳에서 지내고 있었다. 원룸 월세는 알바로 충당하곤 했는데, 귀신이 따라붙을 거라며 알바 금지령이 내려진 탓에 결국 태영에게 도움을 받게 되었다. 자신의 권유로 이 집에서 생활 중이니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다며 말이다.
‘대체 무슨 돈으로.’
보아하니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학교에도 가지 않으나 휴학이라도 했나 싶은데 이렇다 할 말이 없으니 알 수가 없었다.
“다 먹었네요.”
깨끗하게 비운 은재의 그릇을 보고는 태영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은재도 어느새 비워진 제 그릇을 보고는 조금 놀란 눈을 했다.
‘언제 다 먹었지.’
그런데 정말 맛이 있었다. 포만감이 들자 경계심이 다시 풀어진다. 마치 사육당하는 것만 같았다.
“이제 가서 쉬어요, 선배. 제가 치울 테니까.”
“응.”
딱히 무언가를 하지도 않았지만 쉬라고 하는 말에 은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비운 그릇을 들고 싱크대에 넣는 게 다였다. 늘 그랬던 것처럼 나머지는 태영이 정리할 것이다.
은재는 이 편안한 일상이 간혹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곤 했다.
태영의 말처럼 그의 곁에만 있으면 불편한 것은 단 하나도 없었다. 밖에 나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불편일까? 하지만 혼자 살 때에도 외부 활동을 자주 하지는 않았기에 별다른 불편으로 다가오지는 않았다. 그때에는 자의로 나가지 않았다면 지금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나가지 못한다는 게 차이라면 차이였다.
생각하면 할수록 머리가 복잡해졌다. 태영의 말을 듣지 않고 나갔다가 또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까. 그 두려움이 판단을 흐리게 만들었다.
은재는 거실에 있는 널따란 소파에 몸을 기대고 앉았다. 그러곤 옆에 놓인 리모컨으로 괜히 TV를 켠 후 채널만 의미 없이 돌렸다.
거실 테이블 위에 태영이 사다 준 책이 놓여 있었다. 책이나 볼까 싶어 집어 들었다가 그것도 금방 내려 두었다.
은재는 파자마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인터넷을 했다. 포털 메인 사이트를 보다가 주요 이슈 기사를 보는 중이었다.
“선배, 커피 마셔요.”
“으응.”
“식으면 맛없는데, 얼른요.”
핸드폰을 보며 대강 대답하는 은재에게 태영이 말했다. 그의 긴 손가락이 은재의 핸드폰 화면을 가리더니 소파 위로 그것을 내려 두게 유도했다. 은재는 태영을 흘끗 보았다가 그의 의도를 따랐다.
‘……핸드폰, 뭐. 안 보면 그만이지.’
별 대수롭지 않은 생각이 들었다.
은재는 따뜻한 머그잔을 양손으로 감싼 채 TV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듣고 있었다.
어느새 옆에 앉은 태영은 고개를 화면 쪽으로 돌리고 있었지만 곁눈질하며 은재를 힐끔댔다. 그 시선을 모를 리가. 은재가 물끄러미 그를 보다가 말을 걸었다.
“왜.”
“네?”
“왜 자꾸 보냐고.”
“그냥요.”
아무 의미 없는 대화였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자 씁쓰름했고, 또 고소했다. 은재는 잔을 테이블 위에 내려 둔 채 또다시 말을 이었다.
“너, 왜 그렇게 다녀?”
“네?”
툭 나온 말은 불친절했다. 은재의 뜻을 알아채지 못한 태영이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자 그 거슬리는 앞머리가 살짝 옆으로 흩어졌다.
“옷도 그렇고, 머리도 그렇고. 안경도 저번에 보니까 도수 없는 거던데.”
“아, 네.”
학교에서는 줄곧 끼던 안경도 은재와 단둘이 있을 때에는 끼지 않았다. 은재는 태영이 외출할 때만 꼭 안경을 찾던 모습이 떠올랐다.
“옷 방에는 똑같은 옷만 몇 벌씩 있고, 다 후줄근하잖아. 못 사는 편은 아닌 것 같은데 왜 그렇게 돈을 안 써?”
“그렇게 보여요?”
“응.”
“나, 선배한테는 돈 잘 쓰는데.”
“……야, 그건.”
맞는 말이긴 했다. 단순히 수전노라고 하기에는 남의 월세를 턱턱 내주지를 않나, 필요하다고 말만 하면 바로 사다 주질 않나.
“그럼 대체 왜 그러는 건데. 머리도 좀 자르고 옷도 좀 사서 입고. 그 망할 안경도 좀 벗어. 그러면 이상한 말도 안 돌 거고 인기도 뭐……, 제법.”
있을 것 같은데.
그 뒷말은 삼켰다.
“내가 그랬으면 좋겠어요?”
“어? 아니, 이해가 안 돼서 묻는 거야. 뭐라고 하는 건 아니고.”
키도 크고, 덩치도 있고. 보아하니 몸매도 꽤 좋았다. 얼굴이 못난 것도 아니었고. 만약 자신이었다면 오히려 더 꾸미고 다녔을 것이다. 그러면 과에서 이상한 오해를 받을 일도 없었을 거고, 인기도 좋았을 거고. 지금처럼 친구가 없지도 않았을 텐데.
“눈에 띄고 싶지 않아서요.”
“뭐?”
귀찮다거나 혹은 꾸밀 줄을 모른다거나 흥미가 없다거나 하는 답이 돌아올 줄 알았다. 그런데 태영이 내놓은 답은 의외의 것이었다. 이유에 흥미가 돋게 하는 답 말이다.
“왜 눈에 띄는 게 싫어?”
“사람들하고 친해지면 대화를 하게 되잖아요.”
“그렇지, 보통은.”
“대화하다 보면 제 이야기도 하게 될 것 같아서요. 그게 싫어요.”
은재는 그제야 태영이 하는 말의 의미를 대강 알아챘다.
“귀신 보는 것 때문에? 그거 말하기 싫어서? 그냥 모른 척하면 되잖아.”
“그게 잘 안 되니까요.”
“하긴, 오타쿠들은 자기가 아는 주제가 나오면 못 참고 꼭 껴든다더라.”
태영이 눈빛을 흘겼다. 그걸 알면서도 은재는 그냥 모른 척했다.
“그럼, 남들하고 이야기 안 하려고 그러고 다니는 거야?”
“네. 그리고 앞머리로 눈을 가리면 그나마 귀신이 덜 보여서 좋아요.”
“너 귀신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세상에 귀신을 좋아하는 인간이 있겠어요?”
“아니, 뭐……. 귀신 이야기만 나오면 초롱초롱해지기에.”
은재는 간밤에 괴롭힘을 당한 것이 억울해서 괜스레 투덕거렸다. 소파에 두었던 리모콘을 들어 TV 화면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조금 더 줄였다.
“귀신은 언제부터 보였어?”
“어릴 때부터요. 중학교 들어갈 무렵이었나.”
“그럼 그때부터 그 꼴, 아니, 그러고 다닌 거야?”
“……그 꼴이라니, 그렇게 보기 싫어요? 지난번에도―.”
“야! 그건 미, 미안하다고.”
사과는 했었다. 그때 흥분해서 막말했던 건 사실이었으니까. 태영과 재회하고 난 뒤, 처음 아침을 함께 먹던 날이었다.
“미안할 것까지는 없지만요.”
“그런데, 머리를 내리든 올리든 귀신들이 보이는 건 똑같지 않아?”
“똑같죠.”
“그럼 좀 잘라.”
은재는 쉽게 말을 던졌다. 그에 반해 태영의 낯빛에는 곤란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랫동안 지켜 온 본인만의 습관일 테니 갑자기 바꾸는 건 어색할지도 몰랐다.
은재가 지금까지 태영과 짧은 시간 지내 온 동안, 이런 이야기를 나눈 것은 처음이었다.
‘중학교 들어갈 무렵부터 귀신이 보였다니, 도대체 어떤 기분이었을까.’
은재로서는 감히 상상조차 되지를 않았다. 몇 개월간 꿈속에서 귀신에게 이 난리를 겪은 은재로서는 말이다. 중학교 시절부터라면 적어도 여섯 해가 넘도록 그런 광경을 매일같이 봐 왔다는 건데. 어쩌면 태영이 지금 저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 다행인 건 아닐지.
은재는 처음으로 태영에게 잘해 주고 싶다는 마음이 생겼다. 어쩐지 안쓰럽기도 했고, 동질감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래서 그냥 아무 생각 없이 툭, 말을 꺼내고야 말았다.
“머리, 내가 잘라 줄까?”
“네? 선배가요?”
무심결에 내뱉은 말에 태영이 놀란 눈을 했다. 그리고 말을 내뱉은 은재조차 놀라고 말았다.
‘……내가 무슨 말을.’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이렇게 신세를 지고 있는데, 그런 사연까지 들어 놓고 모른 척하기는 양심에 찔리기도 했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 점점 태영에게 친근감이 드는 것 또한 사실이었다.
“응. 너, 미용실 가기 싫은 거잖아. 그리고 나 손재주가 좋은 편이라서 지금도 앞머리 정도는 내가 다듬기도 하고. 전체적으로 잘라 줄 수는 없겠지만, 앞머리 정도면.”
민망해서 은재는 한 문장을 말하고 또 다른 문장을 이어서 말했다. 그렇게 조잘거리고 나서 태영의 얼굴을 보았는데 그는 아직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뭐야, 싫으면 말고.”
“아뇨, 좋아요!”
“야, 씨. 깜짝아!”
그가 파드득거리는 통에 소파가 울렁거렸다. 갑자기 태영이 상체를 은재 쪽으로 기울여 얼굴이 지척까지 다가왔다.
평소에는 볼 수 없었던 상기된 표정이었다. 섹스를, 아니, 치료할 때에 묘한 흥분감이 서린 얼굴과는 또 다른 얼굴이다. 태영은 정말 순수하게 기쁜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좋아?”
“네, 좋아요.”
“그래, 그런데 미용 가위가 있나? 가위랑 몸에 두를 비닐이랑 분무기랑 빗이 필요한데. 하나도 없지?”
“사면 되죠.”
“야, 그게 더 일이다. 그냥 미용실 가서 잘라. 그걸 또 언제 사?”
“금방 사요.”
그 많은 물품을 대체 언제 산다고. 은재는 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고 콧방귀를 꼈다.
“됐다, 됐어. 그 시간에 미용실 다녀와.”
하지만 은재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 정확히 30분 뒤, 초인종이 울렸다. 소파에 누운 은재가 책을 뒤적거릴 무렵이었다. 현관에서 초인종 소리가 들리자마자 태영이 쏜살같이 튀어 나갔다. 은재는 그 모습을 보며 저렇게 행동이 날랜 놈이었나, 하는 생각을 했다.
돌아온 태영의 손에는 보따리가 한 아름 들려 있었다. 아까 은재가 말했던 미용 도구는 물론이고 어제 지나가는 말로 던진 특정 브랜드의 민트 초코 아이스크림까지 있었다.
“뭐냐.”
“선배, 이거 먹고 싶다면서요.”
“아니, 그렇긴 한데.”
“그리고 아까 말한 것도 다 샀는데. 이거 맞아요?”
“어……, 어어.”
어디에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라도 있는 걸까. 아니면, 심부름센터?
‘혹시 이 자식, 무슨 조직폭력배 아들이거나 그런 거 아니야?’
풍채가 상당한 게 정말 힘 꽤 쓰는 집안의 자식이기 때문인 건 아닐까. 갑자기 예전에 태영을 막대했던 기억이 떠올라서 은재는 침을 꿀꺽 삼켰다.
“방금 누구야?”
“아, 일 도와주시는 분이요. 가끔 이런 것도 해 주세요.”
“어어, 어…….”
“돈은 다 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정당한 거래 유무 따위 알 바가 아니고, 제 안위를 걱정했던 것이라고는 구태여 덧붙이지 않았다.
이후, 태영은 간식을 눈앞에 둔 3달 된 강아지처럼 굴었다. 은재가 말로 대강 지시만 해도 본인이 신나서 모든 자리를 세팅했다.
바닥에는 큰 비닐을 깔고 그 위에 나무 의자를 두었다. 옷 방에 있던 전신 거울을 가져다가 그 앞에 놓고 또 다른 비닐에 구멍을 뚫어 자기 목에 걸었다. 이어 바퀴가 달린 트레이 위에 미용 가위와 물을 채운 분무기, 빗을 가지런히 두었다.
마지막으론 의자에 얌전히 앉아 은재를 향해 눈을 빛내는 것이었다.
“신났냐, 진태영. 머리 자르기 싫어하던 거 아니었어?”
은재는 그 모습이 좀 웃기고, 순간 태영이 어려 보이기도 해서 아주 조금 귀엽기도 했다. 그간 맨날 어른스러운 척 굴어서 동생이라는 생각이 조금도 들지 않았으니까. 말끝마다 선배를 붙이기는 했지만.
“얌전히 있을게요.”
“얌전히 있어야 할 거다. 귀 잘리기 싫으면.”
은재는 분무기를 들어 태영의 머리에 물을 뿌렸다. 손질을 안 한 티가 나는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았다가 놓곤 촉촉하게 젖은 머리카락을 빗으로 정갈하게 빗어 길이를 재 보았다.
‘이 정도면 되려나.’
남의 머리를 잘라 준 적은 없었기에 조금 긴장이 되었다.
은재는 한껏 집중한 표정으로 앞에 둔 거울을 보았다. 빗이 머리카락을 가르고 또 다른 길을 내는 느낌이 좋았다.
태영의 덥수룩한 앞머리를 위쪽으로 올리고 길이를 가늠하는데, 언뜻 그의 귀가 눈에 들어왔다. 동그란 귓바퀴 부분이 불에 덴 것처럼 빨갛게 익은 채였다.
그 모습에 동요되는 것은 왜일까.
태영이 드러내는 감정이 자신에게 반가운 이유를 찾지 못했다. 은재는 태영의 귓가에 머물던 시선을 억지로 떼어 내곤 다시 거울을 보았다.
사각사각. 가위가 지나가면 머리카락이 아래로 흩어졌다. 이렇게 오래 태영의 얼굴을 들여다본 적이 있었던가. 빗질하고, 또 분무기를 뿌리고, 다시 가위질하는 동안 은재는 태영의 얼굴을 계속 확인해야 했다. 어디는 삐뚤지 않은지, 또 잘못 잘린 곳은 없는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집중한 은재도, 앉은 채로 귀를 붉힌 태영도. 사각거리는 가위질 소리와 머리카락이 후드득 비닐에 떨어지는 소리 정도가 다였다.
“어, 괜찮은 것 같은데.”
어느 정도 시간이 흘렀을까.
목과 어깨가 뻐근했다. 어느새 비닐을 깔아 둔 바닥에는 검은 머리카락들이 꽤 많이 쌓여 있었다. 은재는 물이 묻은 손으로 태영의 앞머리를 정돈했다. 오른쪽과 왼쪽으로 가르마를 바꿔 보기도 하고 탈탈 털어서 다시 머리카락을 잡아 보기도 했다.
“어때?”
은재의 손길에 쭉 눈을 감고 있던 태영이 슬 눈꺼풀을 열었다. 그는 눈을 다 뜨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마음에 들어요.”
“제대로 보기나 하고 말해…….”
은재는 옆에 있던 휴지를 들어 태영의 앞으로 갔다. 그러곤 그의 목에 둘러진 비닐을 조심스레 빼내고 돌돌 말아 바닥에 깔린 비닐 위에 두었다. 들고 있던 휴지로 그의 얼굴에 묻은 머리카락을 조심스레 털어 주었다. 조각난 머리카락들이 하나둘 떨어졌다.
생각보다 성공적이었다. 코까지 내려왔던 앞머리는 깨끗하게 정리가 되었다. 너무 일자도 아니고 너무 삐뚤빼뚤하지도 않게 말이다. 하지만 조금 더 다듬는 건 역시 전문가의 손길이 필요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그래도, 뭐. 미용실 가서 욕은 안 먹을 거다. 한번 가긴 해야 해. 난 길이만 다듬은 거니까. 뒷머리도 좀 더 손을 봐야 하고.”
“어때요?”
“어?”
태영이 물었다. 은재는 기가 차다는 듯 맞받아쳤다.
“어떻냐고는 내가 묻지 않았냐? 그걸 왜 나한테 물어.”
의자에 앉아 있던 태영이 갑작스레 몸을 일으켰다. 그의 코앞에 섰던 은재가 놀라 몇 걸음 뒷걸음질을 치자, 두꺼운 팔이 쑥 은재의 둔부 아래를 감싸 안았다.
“어? 어어?”
순간 중심을 잃은 은재가 태영의 어깨를 짚자, 기다렸다는 듯 몸이 허공으로 들렸다. 태영이 은재의 둔부를 자신의 양팔에 올리고 그대로 들어 안은 것이다.
“야, 야!”
“어때요?”
“미친놈아, 대체 뭐가! 너 지금 나 가위 든 거 안 보이냐!?”
은재의 겁박은 역시나 통하지 않았다. 태영은 웃고 있었다. 미소를 지은 얼굴로 연신 싱글벙글했다. 이전의 무표정하고 무감각해 보이던 얼굴과는 딴판이었다. 태영은 요즘 은재에게 감정을 숨기지 않았다.
태영에게 들린 은재의 몸이 앞으로 기울었고, 은재가 자연스레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내려놓으라는 말조차 도통 듣지 않던 태영이 이내 은재를 소파에 눕혔다. 그러곤 그 위에 엎드린 채로 또 물었다.
“어때요?”
“아, 씨! 왜 자꾸 나한테 물어!”
“어때요?”
“닥쳐, 제발 좀. 그 ‘어때요’ 소리 좀 그만하라고.”
“선배, 저 어때요?”
저 짜증 나는 입술로 가위를 확 던질까 하다가 꾹 눌러 참았다. 대체 무슨 소리가 듣고 싶은 건지. 한 대 터지고 싶은 거라면 이해를 하겠지만.
미간을 잔뜩 찌푸린 은재의 위로 태영의 얼굴이 드리워졌다. 은재를 내려다보는 태영의 낯에는 아직 다 털지 못한 머리카락들이 묻어 있었다. 적당한 길이로 자른 앞머리가 밑으로 기울자 그의 눈썹이며 미간이 훤히 드러났다. 시원하게 뻗은 콧대 아래로 입술이 둥글게 말린 채였다.
은재는 결국 태영이 원하는 답을 내놓았다. 비록, 시선을 피하기는 했지만.
“……괜찮네.”
“괜찮아요?”
“어, 머리 자른 게 더 나아. 근데 미용실에는 한번 가라.”
어쩐지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기가 어려웠다. 너무 가까웠다. 태영의 검은 눈동자에 방황하는 제 시선이 비추어진 듯했다.
비좁은 거리 탓에 마음껏 숨을 쉬기도 어려운데 태영은 도무지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참다못한 은재가 발로 그의 허벅지를 툭툭 건드렸다.
“비켜, 이제.”
“선배.”
은재의 빗겨 나간 시선을 따라 태영의 고개가 따라왔다. 그는 기어이 은재와 시선을 마주하고는 입을 열었다.
“사람하고 말할 때는 눈을 봐야 된다면서요.”
“어?”
“선배가 그랬잖아요.”
“어, 내―.”
내가 그런 적이 있었나, 이으려던 말은 태영의 입술이 은재의 것을 덮으면서 사라졌다. 부드러운 온기가 입술을 감싸면서 못 다한 말들이 그 안으로 삼켜진 탓이었다.
그저 살갗을 문지르듯 시작한 부드러운 입맞춤은 태영의 고개가 비스듬히 틀어지며 더욱 깊어졌다. 이전에도 몇 번이나 나누었던 행위였다. 태영의 따스한 기운이 은재의 텅 빈 곳을 채우는 목적이 있는 짓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왜 그 느낌이 없을까. 은재는 의아한 기분이 들었다. 그 이유가 아니라면 이건 그저 키스가 아닌가.
태영의 턱선이 유영하듯 움직였다. 무언가를 집어삼키듯 벌어졌다가 다시 다물리면서 벌어진 입술 사이로 빈틈없이 들이차던 살덩이가 맞물렸다.
“하읍, 아…….”
은재는 그의 움직임을 따르기에 급급했다. 축축해진 입가에는 어느새 다 넘기지 못한 타액이 흥건했다. 숨이 모자랄 때면 태영의 팔을 붙들고 힘을 꽉 주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고개를 돌리거나 그를 밀어내지는 않았다.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혀와 그의 혀가 맞닿고 여린 점막을 스쳤다. 서로의 입안을 내주며 깊숙이 맞물린 입술 사이로 뜨거운 숨이 흩어졌다.
은재는 종종 태영이 내뱉는 알 수 없는 말들이 신경 쓰였다. 그가 자신은 기억이 나지 않는 대화들을 언급할 때면 의아하기도 했지만, 이렇게 입술이 맞닿고 몸을 겹칠 때면 어째서인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으, 으음. 그, 하아. 수, 숨…….”
“선배.”
헐렁한 파자마로 가려진 은재의 중심이 살짝 부풀어 있었다. 태영은 그 모습을 웃음기 어린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은재의 다리 사이에 놓인 태영의 허벅지가 점점 간격을 좁혀 왔다. 금세 그곳으로 태영의 허벅지가 닿았다. 꾹 힘을 주자, 은재가 몸을 파드득 떨며 신음을 내질렀다.
“―흐, 으읏.”
“은재 선배, 섰어요?”
“아니, 그……, 윽.”
아직도 뒤가 얼얼했다. 어젯밤 그에게 내내 박혔던 아래는 지금까지도 녹진하게 풀린 채였다. 그런데도 또 흥분해 버리고 마는 스스로가 너무나 수치스러웠다. 은재는 벌겋게 상기된 표정을 숨기려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괜찮아요.”
귀까지 빨갛게 물든 은재에게 태영은 다정한 어조로 말을 건네었다. 그는 아주 편안한 음성으로 은재를 달래곤 했다.
“선배가 이상한 게 아니에요. 그놈들의 흔적이 남아서 그런 거니까, 제가 도와줄게요. 저만 믿으세요. 제가 하라는 대로만.”
얼굴을 가렸던 은재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태영의 그 달콤한 말을 듣고 있자면 이토록 힘이 빠졌다.
가릴 것 없이 드러난 은재의 상기된 얼굴을, 태영의 검은 눈동자가 오롯이 담고 있었다.
그 눈동자 안에 비추는 자신의 모습을, 은재는 초점 없이 흐린 눈동자로 마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