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귀접
“야, 허은재! 내 말 듣고 있냐?”
“어?”
“내 말 듣고 있냐고. 왜 또 갑자기 얼이 빠졌어.”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강의실은 이미 텅 비어 있었다. 과제가 어떻고 이번 교수가 어떻고, 왁자지껄 떠드는 무리마저 썰물처럼 빠져나간 뒤였다. 은재는 제 앞에서 한쪽 눈썹을 올린 채 입술을 삐죽이는 현수를 바라보았다.
“무슨 생각 했냐?”
“그냥, 옛날 생각.”
“옛날 생각?”
“어.”
따지고 보면 그리 옛날도 아니지만.
은재는 책상에 놓인 태블릿과 책을 정리해 가방에 넣으며 생각을 이어 갔다.
왜 갑자기 태영을 처음 만났던 날이 떠오르고만 걸까. 그리 좋은 기억도 아니건만. 은재는 자로 잰 듯 똑 맞아떨어지는 가방의 지퍼를 올렸다.
“갑자기 뭔 옛날 생각. 아니, 그것보다 걔 말이야. 진태영.”
‘아, 이 새끼 때문이었구나.’
아마 지난 술자리에서의 일을 캐묻는 의도일 것이다. 은재와 태영에 대해 재미있는 건수를 잡았으니 그 이야기를 여기저기에 풀고 싶은 모양이었다.
은재는 가방을 책상 위에 툭, 내려 두었다. 다소 예민한 신경이 투박한 행동으로 이어져 날카로운 마찰음이 울렸다.
이어 은재는 눈을 치켜떴다. 그러곤 그날을 떠올리게 만든 원흉을 무심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뭐가?”
“아니, 내가 널 알잖냐. 남한테 관심을 가질 놈이 아닌데 진태영에 대해서 아느냐고 물어본 것도 그렇고. 신기해서.”
현수의 말투에는 비아냥거리는 느낌이 다분했다.
“그리고 왜, 저번에 우리 술 먹으러 가다가 너 길바닥에서 주저앉은 날. 그날이 아마 그날이지? 네가 진태영 찾던 날. 그때도 좀 이상했었다고. 멀쩡하게 강의도 잘 들어 놓고 길 가다가 갑자기 사색이 되어서는 바들바들 떨었잖아. 기억나냐? 너 그때 인마, 무슨 바퀴벌레라도 씹은 표정이었어.”
낄낄거리며 웃는 현수 목소리에 그때의 그 저급한 놈들의 음성이 겹쳐졌다.
순간 팔뚝에서부터 소름이 돋았다. 모래알을 넘긴 듯 까슬까슬한 목구멍으로 침이 겨우 넘어갔다. 재수 없는 새끼. 은재는 입 밖으로 튀어나오려던 말을 급히 삼켰다.
“그래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쓸데없는 소리 할 거면 나 간다.”
굳이 상대할 가치도 없었다. 예전 일을 되짚으며 조롱하고 싶을 뿐이겠지. 은재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묵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고 강의실을 나서려던 참이었다.
“인마, 사람 말 아직 안 끝났다고.”
어깨에 현수의 손이 툭, 올라왔다. 불쾌했다. 은재는 그를 향해 몸을 돌리며 제 어깨에 올라온 손을 벌레 쫓듯 떼어 냈다.
“내가 네 말을 끝까지 들어 줘야 할 이유가 있어?”
“하, 허은재 진짜 이 싸가지―.”
소문은 귀찮다. 그러니 만약 불필요한 오해가 생긴다면 어느 정도 풀 의향도 있었다. 하지만, 시종일관 실실 비웃으며 말을 이어 가는 현수와는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도 않았다. 그럴 가치조차 없는 인간이다.
뒤에서 들려오는 욕설을 깨끗이 무시하고는 은재가 등을 돌린 때였다.
“혹시, 첫눈에 반하기라도 했냐?”
의도가 명확한 도발이 이어졌다. 무시했어야 했는데 은재의 발걸음이 그만 덜컥 멈추고 말았다.
“어? 뭐야, 진짜인가 보네. 허은재, 그쪽 취향이었냐? 어쩐지 과 모임도 안 나오고 여자애들한테 관심도 없다고 했다. 이거 다들 깜짝 놀라겠는데?”
현수의 도발은 아주 성공적이었다.
딱딱하게 얼굴을 굳힌 은재가 현수를 향해 천천히 돌아섰다. 지금까지 보인 적 없는 아주 냉담한 표정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찬바람이 쌩 불었다.
그러나, 현수는 멈추지 않았다. 도리어 제 도발이 잘 먹힌 것에 대해 자랑스러워하는 눈치였다.
“아니, 그렇잖아. 너 길바닥에서 덜덜 떨던 그날도 진짜 깜짝 놀랐다고. 우리가 뭐라고 말한들 듣는 척도 안 하더니 진태영이가 나타나서 부축하니까 얼굴에 생기가 돌던데. 우린 안중에도 없고 말이야. 같이 술자리 가기로 했던 것도 까먹었지? 너희끼리 사라져서 그때 나랑 신입생들이랑 얼마나 황당했는지 아냐?”
현수는 조잘조잘 말을 이어 나갔다. 굳게 입을 다문 채 저를 노려보는 은재에게 너스레를 떨어 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아, 맞아. 너 선후배 모임에서도 희한했다니까. 술도 별로 안 마셨는데 병든 닭처럼 졸지를 않나, 눈을 이래 이래 등신같이 뜨고는. 하하하, 그때 진짜 웃겼어. 맨날 완벽한 척 잘난 척 겁나 하더니 완전 깼다니까.”
현수의 비아냥 섞인 말이 계속 이어질수록 은재의 눈은 차갑게 가라앉기만 했다. 은재의 눈빛을 정면으로 바라보며 피식, 입꼬리를 올린 현수가 말을 이었다.
“근데, 기가 막히지? 그날도 네 백마 탄 왕자님이 등장했다는 거 아니냐. 너 그때 걔한테 업혀서 나갔잖아. 진태영이 탁 나타나더니 아주 당연하게 너 데리고 나가더라. 우리가 물어도 대답도 없고. 너희 대체 무슨 사이냐? 그렇게 친했어? 언제부터? 신입생 애들한테 물어보니까 그 진태영이란 놈, 소문 안 좋던데. 애가 좀 덜떨어져 보이더만. 우리 잘난 과탑께서는 그런 덜떨어진 놈이랑은 친구 안 먹잖아. 안 그래?”
대체 어떤 억하심정으로 저리 못난 말만 골라 하는 걸까. 현수는 이미 눈알이 반쯤 돌아가 버린 상태였다. 마치 층층이 쌓아 둔 울분을 모조리 토해 내듯이 끊임없이 말을 쏟아 내었다. 조금의 틈을 보이면 은재가 등을 돌려 나가 버릴까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야, 이현수. 적당히 해라. 무슨 대답을 원하는 건데?”
평소였다면 이런 쓸데없는 언쟁에 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은재는 지금 불안정한 상태였다. 오래 이어진 악몽은 은재 자신에 대한 확신조차 갉아먹고 있었다.
하물며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치부를 현수의 앞에서 일부 보여 주고 말았다. 하필 저 인간이 보고 있을 때 놈들이 찾아온 걸까. 그때를 떠올리자 수치심이 북받쳐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너 혹시 진태영이랑 사귀냐?”
은재는 수준 떨어지는 소리만 늘어놓는 현수를 멸시에 찬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참 나. 하필 골라도 진태영이야. 우리 은재 보는 눈이 너무 없다. 형이 때깔 나는 형님들 좀 소개시켜 줄까? 말만 해.”
“미친 새끼.”
“와, 반응하는 거 보소. 진짜 신기하네.”
“너 나한테 열등감이라도 있어? 하도 같잖아서 무시했던 거야. 네 수준이 거기까지밖에 안 되니까. 하는 짓이라고는 입만 열면 뒷담화에 여자애들 뒤꽁무니나 졸졸 쫓아다니는 네 수준이 더러워서 말도 섞기 싫었거든.”
“이 씨발 새끼가, 방금 뭐라고 했냐?”
일순 분위기가 험악해졌다. 그는 마치 ‘열등감’이라는 단어에 버튼이라도 눌린 듯 굴었다.
현수가 발로 강의실 책상을 꽝 차자, 복도에 있던 학생들의 시선이 강의실 안쪽으로 집중되었다. 당장이라도 싸움이 일어날 듯 공기가 건조하게 메말랐다.
“방금 뭐라고 했냐고, 허은재. 뒤꽁무니? 내가?”
“그래. 남의 사생활 캐기 전에 네 사생활이나 관리 잘해. 넌 365일 그 짓거리지. 아무것도 모르는 신입생들한테 치근거리는 거, 안 쪽팔려? 낯짝도 두껍다, 이 미친 새끼야.”
현수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그는 금방이라도 은재의 얼굴을 후려칠 듯 고압적으로 성큼 다가섰다. 하지만 조금도 밀리지 않고 저를 노려보는 은재의 어깨를 양손으로 거칠게 밀어냈고, 은재의 몸이 뒤로 기우뚱거렸다.
“내가 치근거렸다고? 씨발 새끼야, 말은 똑바로 해. 치근거리는 건 네가 더 잘하지. 신입생인 진태영한테 치근거린 건 너였잖아. 아주 연기 잘하던데? 갑자기 비틀거리면서 안기질 않나. 왜, 한 번 대 주고 싶었어? 매달리고 난리였잖아. 질질 싸던데, 그래서 맛은 봤냐?”
그냥 무시하면 될 말들이었다. 남을 깎아내리기에 급급한 단어들, 비아냥거리는 표정과 어조. 그가 내뱉는 저질스러운 이야기들은 사실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은재의 머릿속에 영 좋지 못한 기억들이 스쳤다.
자신의 자취방에서 태영과 있었던 일들. 그의 손 아래에서 발정했던 자신과 끝끝내 그를 밀어내지 못하고 토해 냈었던 욕정. 키스가 목적이 아닌 입맞춤에서 쉽게 흥분하고 마는 자신과 그런 자신을 무심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는 태영의 얼굴까지.
은재를 두르고 있던 단단한 방어막이 마침내 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마지막 남은 자존감과 우월감마저 조각조각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어? 뭐야, 진짜 맛본 모양인데. 와, 허은재 무섭다. 둘이 잤어?”
현수의 목청이 밖을 의식하며 더욱 커졌다. 복도에서 구경하고 있는 무리에게 들릴 정도였다.
“그래, 진태영이랑 너 잘 어울리더라. 아주 환상의 짝꿍이야. 이제 좋겠네, 허은재. 친구가 생겨서?”
내내 조용한 목소리로 언쟁을 이어 가던 은재의 낯빛이 시커멓게 질렸고 산산이 부서진 자존심은 가루가 되었다.
얌전히 내려가 있던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갔다. 허은재는 난생처음 남에게 주먹을 휘둘렀다. 무방비한 상태로 조잘거리고 있던 현수의 턱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아윽!”
퍽! 파열음이 터지며 그의 몸이 뒤로 넘어갔다. 쿠당탕! 앞 열에 가지런히 놓였던 책상 중 일부가 뒤로 밀리며 요란한 소리를 내었다.
“누가 누구랑 친구라고? 개소리하지 마. 그딴 새끼랑 나랑 엮지 말라고. 존나 기분 나쁘니까!”
손등이 초 단위로 붓고 있었다. 얼얼했다. 손목까지 시큰거렸다. 그놈들만 아니었어도. 모든 일의 원흉인 그들에 대한 원망과 분노가 일었다.
붉게 물든 눈가에 한기가 서린다. 은재의 입에서 고함이 터져 나왔다. 비명과도 가까운 일갈이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꾹 말아 쥔 채로 얼이 빠진 이현수를 노려보았다.
“가만히 있으니까 내가 병신으로 보이지? 앞으로 한 번만 더 나랑 진태영이랑 엮어서 그딴 저급한 헛소문 퍼트려 봐. 그때는 진짜 가만히 안 있을 거니까.”
복도가 웅성거렸다. 싸움을 말리기는커녕 핸드폰을 들고 영상을 찍어 대던 인파들이 일제히 뒤를 돌아보았다.
은재는 떨어진 가방을 들고 부리나케 강의실을 빠져나가려 했다. 뒤에서 쌍욕을 내뱉는 현수를 두고 끊어 내듯 몸을 돌렸다. 아직 가라앉지 않은 화와 울분이 머리 꼭대기에서 빙글 도는 듯했다.
사람들이 모인 강의실 앞문 쪽으로 가던 중, 은재는 무심코 고개를 들었다. 분노로 시뻘게진 시야 너머로 인파들 사이에서 우뚝 솟은 고목이 보였다.
“…….”
진태영이었다. 두꺼운 안경을 코에 걸친 그가 강의실 밖 복도에 서 있었다.
‘……언제부터 있던 거지?’
은재의 낯빛이 사색으로 변했다. 조금 전까지 벌겋게 달아올랐던 피가 한순간에 식어 버린다.
“야. 지, 진태영. 너―.”
“…….”
태영의 얼굴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여전히 두꺼운 안경과 흑색의 머리카락이 눈가를 가리고 있었지만, 은재는 알 수 있었다. 신이 나서 조잘거리던 그의 입술이 철문처럼 굳게 닫혀 있다. 마치, 다시는 열리지 않을 것처럼 단호하게.
둘 사이에 흐르는 숨 막히는 적막은 쉽사리 깨어지지 않았다. 그 주위를 둘러싼 채로 숨을 죽인 다른 이들도 쉽게 웅성거리지 못할 만큼 분위기가 가라앉은 채였다.
은재는 어찌할 바를 몰랐다. 무척이나 당황했다. 설마, 왜 하필, 지금.
“저기―.”
그래서 한마디를 꺼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모두의 시선이 집중된 상황. 진태영은 늘 이런 때에 무언가에 쫓기듯 도망을 쳤다. 은재는 그가 또다시 시선들을 피해 도망칠 것이라고 생각했다. 늘 그랬듯이 말이다.
그러나, 태영은 아직 은재의 앞에 서 있었다. 어쩌면 이어질 말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머릿속이 복잡했다. 뭘,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건지. 왜 마음이 이렇게 불편한 건지 혼란스러웠다.
“야! 허은재!”
그때, 뒤쪽에서 쿵쾅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자리에서 일어난 이현수가 절뚝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은재가 고개를 돌려 바라보자, 징그럽게 일그러진 얼굴의 남자가 성큼 다가서고 있었다.
“너 이 씨발, 날 쳤어?”
갑자기 어그러지는 모든 상황 속에서 시야조차 뭉개졌다. 지금까지 유지해 왔던 제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혹시,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가.
사실 이 모든 게 놈들의 지독한 장난인 건 아닐까. 머리가 핑 도는 느낌에 몸이 살짝 비틀거렸다. 이 잠깐의 간격마저 마치 한 시간처럼 길게 느껴진다.
오래되어 삭은 고무줄이 길게 늘어나듯 모든 시야가 느릿하게 넘실거렸다. 극심한 멀미가 밀려왔다. 속에서부터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핏기가 가셔 창백해진 은재의 코앞으로 현수가 주먹에 맞아 붉게 부은 턱을 매만지며 다가서던 때였다.
황망히 아래에서 흔들리던 팔에 통증이 일었다. 눈앞에 긴 그림자가 졌던 것 같다. 제 몸이 어딘가로 이끌리고 있었다.
제게 무어라 소리치는 이현수의 뒤틀린 입 모양이 점점 멀어졌다. 깊은 물속을 부유하는 감각이 제법 길게 이어졌다. 먹먹한 귓가에 삐이―, 작은 이명이 들렸다.
“……재!”
은재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떴다. 모든 감각이 둔탁했다. 그동안 몇 번의 장면이 바뀌었다. 수풀이 우거진 익숙한 교정에서, 그보다 조금 더 먼 횡단보도 앞에서, 집 근처에 있는 공원으로. 눈이 인식했던세 번의 전경이 바뀌고 나서야 목소리가 들렸다.
“은재 선배!”
“……어, 어?”
태영이 은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안경 뒤에 가려진 그의 눈빛이 어땠는지, 정확히는 알 수 없었던 것 같다. 은재는 멍하니 그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에게 붙들린 은재의 손목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아……, 파.”
귀와 눈의 감각이 돌아오고 이어 촉각이 제자리를 찾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붙잡힌 손목 부근이 얼얼했다. 은재가 나직하게 아프다고 중얼거리자 태영이 그를 순순히 놓아주었다.
“…….”
“…….”
지독한 적막이었다.
은재는 아직도 태영에게 건네야 할 말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가루가 되어 사라진 줄만 알았던 자존심이 아집으로 변질되어 똬리를 틀었다.
“선배.”
먼저 입을 연 것은 태영이었다. 그가 나지막이 은재를 불렀다. 선배, 은재 선배. 어쩐지 조금 애달프게 들린 것은 착각일지 모른다.
은재는 태영이 자신을 추궁하는 것이리라 결론지었다. 조금은 누그러졌던 감정이 확 폭발한다. 고개를 숙였던 얼굴에 미안함 대신 억울한 감정이 휘몰아쳤다.
‘네가 뭔데.’
네가 뭐라고 나한테.
구렁이처럼 가라앉은 아집이 날카로운 입을 연다.
“뭐, 왜. 할 말 있어? 거기서 왜 날 데리고 나와. 무슨 생각이야?”
“……네?”
“걔랑 나랑 하는 말 못 들었어? 그 새끼가 하는 말 못 들었냐고. 네가 이렇게 날 데리고 나오면 이상한 오해만 더 커질 것 아냐. 너, 학교생활 조용히 하고 싶지 않냐? 나는 조용히 하고 싶어. 이제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냥 평범하게 원래 하던 듯이 마무리하고 싶다고.”
“선배.”
은재의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태영에게 먼저 손을 내민 것은 은재였다. 현재 은재에게 태영은 반드시 필요한 존재였다.
확실히 태영을 곁에 둔 후로 놈들이 찾아오는 빈도가 줄었다. 비록 최근에는 그가 제시한 방법이 그다지 효과가 없었으나, 분명히 그보다 나은 방법을 찾아봐 줄 유일한 사람이었다.
“그냥 학교에서만 모른 척하자고. 이게 어려워? 이걸 굳이 말로 해야 해? 적당히 눈치껏 빠져 주면 안 되냐고. 내가 너랑 같이 있는 모습을 다른 새끼들이 이상하게 본다잖아.”
마치 귀신이라도 들린 듯, 은재의 속내 중 가장 시꺼먼 부분만이 까뒤집어졌다. 필요 가치, 태영을 곁에 두는 이유, 셈을 헤아리던 습관.
“내가 씨발, 어쩌다가. 어쩌다가 이렇게 엮여서. 거지 같은 귀신 새끼들만 아니었어도 내 일상이 이렇게 망가질 이유가 없다고. 나는 지금까지처럼 탄탄대로만 걷다가 대학 졸업하고 아무 문제 없이 취업만 하면 됐던 건데.”
태영에 대한 미안함보다 자신의 앞날에 대한 억울함이 더 컸다, 그 순간만큼은. 상대가 태영이기에 토해 낼 수 있는 울분이었다.
태영은 잠자코 그 모든 말을 듣고만 있었다. 그 어떤 말도 덧붙이지 않았고 얹지 않았다. 은재의 모든 분노가 토해지기를 숨죽여 기다리는 듯했다.
“씨발, 뭐라고 말 좀 해!”
오래된 철제 쓰레기통이 끼익, 끽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주위에 있던 비둘기들이 큰 소리에 놀라 파드득 날아올랐다. 평소라면 질겁했을 그 날갯짓 소리에도 은재의 발은 바닥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는.”
길고 긴 침묵 끝에 태영이 입을 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어떠한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고저조차 없었다.
“선배는, 제가 그렇게 싫어요?”
추궁도 원망도 아닌 질문이 되돌아왔다. 태영이 은재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조금의 힘도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가볍게.
답이 없는 은재를 두고 태영은 조금 더 말을 이어 갔다. 그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다.
“저는 선배가 싫지 않았어요.”
은재는 차마 태영을 볼 수 없었다. 그냥 왠지 그랬다. 담담하게 들려오는 그의 어조가 이른 새벽의 라디오 같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의 말에 담긴 과거형의 어미가 왜인지 제 속을 후벼 파는 듯했다.
“선배는 처음부터 제게 다정했었어요. 그리고, 제가 귀신을 보는 걸 알고 나서도 도망가거나 피하지 않았죠. 그래서 돕고 싶었어요.”
차라리 비난하고 힐난했다면 마음은 더 편했을 텐데. 제가 마구잡이로 던진 말들이 부메랑처럼 다시 돌아와 뒤통수를 후려쳤다.
“그동안 고마웠습니다.”
은재의 심장이 쿵, 떨어졌다. 상상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으로 심장이 푹 꺼진 것처럼 느껴졌다.
제 손으로 제 동아줄을 잘라 내고 말았다. 이렇게 멍청한 짓을 하다니.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쉽사리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밤에는 되도록 움직이지 마세요. 어둡고 그늘진 곳도 가지 마시고요. 사람이 너무 많은 곳도 좋지 않아요. 혹시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도 무시하세요. 제가 아니어도 선배는 잘 해낼 수 있을 거예요.”
그와 보냈던 짧은 시간들이 은재의 머릿속에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태영은 칼처럼 단호했다. 조금의 미련도 남지 않은 얼굴로 환자에게 병증을 설명하는 의사처럼 담담할 뿐이었다. 하지만 이전과 달리, 그의 말은 생각보다 금세 끝이 나고야 말았다.
“그리고, 이제 학교에서도 눈에 띄지 않을게요. 아는 척도 하지 않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그럼,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어차피 필요에 의한 관계였다. 은재는 자신이 그어 놓았던 그 필요라는 선을 재차 제 눈으로 확인하고 있었다. 그 선에 돌을 던진 것은 은재였고, 모래가 튀어 흐트러진 선 너머에서 발걸음을 돌린 것은 태영이었다.
“아, 그리고 혹시 모르니까 마지막으로―.”
멍청하게 선 은재에게 태영이 다가왔다. 늘 그랬듯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간격을 좁혀 온다. 그의 상체가 비스듬히 기울고 몸이 살짝 숙여졌다. 태영의 큰 손이 은재의 턱을 가볍게 들어 올렸다.
입술과 입술 사이의 틈으로 혀가 섞어 들었다. 독한 말들을 쏟아 내었던 은재의 혀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태영은 그런 혀뿌리를 감싸며 핥아 올렸다.
마지막일지 모를 따스한 온기가 전해졌다. 은재는 눈을 뜨지도 감지도 못했다. 마구 흔들리는 동공이 태영의 미간과 콧대 사이를 방황했다.
이마가 빗겨 닿으며 태영의 머리카락이 얇게 흩어졌다. 반투명하게 드러난 그의 이마 아래로 짙게 뻗은 눈썹이 보였다. 지그시 감은 눈꺼풀에선 촘촘한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은재는 제게 감겨 오는 그를 뒤늦게 받아들였다.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닫히며 쪽, 소리를 내었다. 잠깐의 틈을 만들어 내고는 다시 하나인 듯 맞물린다. 벌어진 입술 안으로 뜨거운 살덩이가 맞부딪혔다. 은재의 안으로 밀려 들어온 그의 혀에 제 혀를 내주고 타액을 섞는다.
기운이 섞였던 걸까. 넘어오고 있는 걸까. 그가 자신에게 기운을 내주고 있는 걸까. 모든 것은 불완전했고 불명확했다. 그럼에도 은재는 태영의 입맞춤을 거부하지 않았다.
꽤 길게 이어진 입맞춤 끝에 태영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물러났다. 구멍을 막았던 살갗이 떨어지자 은재는 밭은 숨을 내쉬었다. 어느덧 발갛게 달아오른 귓바퀴가 아릿했다.
“괜찮을 거예요.”
그것이 끝이었다.
은재는 꿀 먹은 멍청이처럼 끝끝내 아무 말도 꺼내지 못했다. 망설임 없이 자리를 떠나는 태영의 뒷모습만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 * *
태영의 말대로였다. 은재는 괜찮았다. 괜찮아 보였다. 매일 밤 은재를 괴롭히던 악의는 그날 이후로 찾아오지 않았다. 간혹 서늘하고 스산한 기운이 목덜미를 스칠 땐 있었으나 그뿐이었다. 은재는 태영이 남긴 당부의 말을 철칙처럼 지켰다.
‘밤에는 되도록 움직이지 마세요. 어둡고 그늘진 곳도 가지 마시고요. 사람이 너무 많은 곳도 좋지 않아요. 혹시 이상한 기척이 느껴져도 무시하세요.’
그러자 행동반경이 급격히 좁아졌다. 이전에도 집과 도서관, 학교, 자취방, 간혹 하던 아르바이트 정도가 생활 범위였다면 그중 아르바이트는 그만뒀고 도서관에도 발길을 끊었다.
모든 악몽의 시발점이었던 자취방의 침대도 더는 쓰지 않았다. 멀쩡한 침대를 두고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잠이 들었다. 물론, 밤이든 낮이든 전등은 환하게 켜 둔 상태였다. 어둡고 그늘진 곳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정말 태영의 말을 지킨 것이 효과가 있던 건지, 아니면 그가 나누어 준 기운 덕분인지, 그것도 아니라면 귀신들이 때가 되어 사라진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그날 이후로 사라진 건 그놈들뿐만이 아니었다. 은재는 진태영을 학교에서 마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래도 같은 학교였다. 학년은 다르지만 같은 교정으로 다닐 터였다. 그런데도 그의 머리카락 한 올 보지 못했다.
사람의 흔적이 이렇게 물거품처럼 사라질 수 있을까. 은재에게 남은 건 자신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는 배타적 시선들과 제 뒷담화를 숨 쉬듯이 하고 다니는 현수의 적의밖에 없었다.
“춥네.”
어느덧 초겨울로 접어든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었다. 옷장 속에 잠들어 있던 패딩을 꺼낸 게 엊그제의 일이다. 사람이 많은 곳을 피해야 한다는 강박으로 대중교통조차 제대로 이용하지 못했다. 그러니 두 다리로 걸을 일이 많았다.
‘누군가 그랬는데, 패딩은 교통수단이라고.’
은재는 예전에는 이해하지 못했던 그 말이 생각나 씁쓸히 웃기도 했다.
놈들과 진태영이 사라진 뒤, 은재의 일상은 안온했다. 물론 아직 작은 소리에도 소스라치게 놀라거나 신경질적 반응을 보이기도 했지만, 악몽에 시달리던 때보다는 훨씬 살 만했다.
원래도 예민했던 성격이 더욱 민감해져 최근에는 정신과에 다녀야 하나 고민했던 적도 있다. 그런데 막상 병원에 가려니 덜컥 겁부터 드는 것이다. 드나든 사람이나 혹은 귀신 같은 것들이 얼마나 많을 줄 알고. 선뜻 가기가 두려웠다.
‘신력(神力)이 좋은 사람은 기운이 무척 두터워요. 밖으로 퍼지는 형태인 사람들도 있어요. 그런 분들은 흔히 말하는 무당 중에서도 진짜배기죠.’
은재는 그날 이후, 종종 태영이 했던 말을 떠올려 되짚곤 했다.
그가 말한 ‘기운’이 두터운 사람은 누구일까.
여기저기 수소문도 해 보았으나 이렇다 할 인물은 없었다. 어찌 보면 없는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애당초 저로서는 태영이 말한 ‘기운’이라는 게 실제로 존재하는지도 알 수가 없지 않은가.
물론,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이었다. 그게 정말 진태영의 능력이든 아니면 운이 좋게 맞아떨어진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러나 대체로 ‘고마움’이라는 것은 모든 일이 해결된 뒤에는 쉽게 옅어지기 마련이다. 은재 역시 그랬다. 놈들과 진태영이 사라진 이후, 더는 악몽에 시달리지 않았으니까. 비록 약간의 신경증이 잔흔처럼 남기는 했으나 잠 못 들던 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네, 예약 확인 부탁드립니다. 오늘 오후 네 시로 예약했거든요.”
평일 오후의 지하철은 한산했다. 좌석이 드문드문 비어 있었지만, 은재는 빈 좌석에 앉지 않고 출입문 근처에 서 있었다. 사람들과 좁은 간격으로 붙는 것이 내키지 않아서였다. 진태영의 충고가 꺼림칙했기 때문에 일부러 사람이 없을 시간대를 고른 것이다. 그러니 굳이 인파들과 뒤섞일 필요는 없었다.
은재는 간단한 예약 확인 통화를 하고 난 뒤 핸드폰을 주머니에 꽂았다. 짧은 대화였음에도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무척이나 거만했다. 웬만한 예약은 최소 3개월까지 꽉 차 있다며 운 좋게 평일 오후에 시간이 빈 것을 감사하게 여기라는 소리나 해 댔다.
상대는 목소리만으론 성별을 구분할 수 없을 만큼 기이했다. 기대했던 만큼의 기묘함이었다. 그는 이 바닥에서 꽤 이름이 알려진 무속인으로 특히 사주팔자, 미래를 내다보는 능력뿐만이 아니라 제령(制靈)에 능하다고 했다.
신내림을 받은 지 이제 갓 반년도 채 안 된 신출내기. 하지만, 이 바닥에서는 그런 신출내기들이 도리어 신발이 세다고 어디선가 들었다. 진태영이 말했던가, 기억은 잘 나지 않지만.
‘하나, 둘…….’
도착까지는 이제 열 정거장 정도. 은재는 설렘과 걱정으로 심장이 두근거렸다. 지하철 노선도에 있는 숫자를 하나씩 세며 침을 꿀꺽 삼켰다. 숨통이 트인 지 얼마 되지 않아서일까, 불현듯 불안감이 밀려오곤 했다. 긴장한 탓에 목구멍이 바싹 말랐다.
진태영의 말대로라면, 그의 말을 잘 지킨다면 괜찮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대로 아무 일도 없이 평온한 일상이 계속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그 간극에서 싹트는 불안이 기어코 이 지하철까지 은재를 불러낸 것이다.
[이번 역은, ××역입니다. 내리실 문은――.]
오랜만에 탄 지하철에서는 꿉꿉한 냄새가 났다. 시궁창에서 굴러다니던 걸레를 쥐어짠 듯한 악취가 코를 찔렀다. 미간을 찌푸리고 주위를 둘러보았으나 다른 승객들의 표정은 무덤덤해 보였다. 마치 그들과 은재 사이에 가로막힌 공간이 있는 것처럼 느껴질 만큼.
어딘지 모르게 불쾌했다. 은재는 그저 기분 탓이라고 생각했다. 그간 대중교통을 이용하지 않았으니 제가 괜히 예민해진 것이라고 말이다.
“윽―.”
그런데, 단순한 예민함으로 치부하기에는 그 역한 냄새의 농도가 더욱 짙어지고 있었다. 마치 묽은 구정물이 걸쭉한 점성을 가진 토사물이 되듯, 초 단위로 지독한 기운이 올라왔다.
[찾았다.]
그때, 어긋난 신호가 주파수를 잘못 찾았다.
지직, 칙, 거리는 소음 뒤로 잊었다고 생각했던 소리가 들렸다. 청각을 자극하는 것이 아닌 머릿속에 직접 때려 박는 직접적인 메시지였다. 그리고 은재는 이 소름 끼치는 감각을 알고 있었다. 분명, 그 그날 이후로는 들리지 않았던―.
[찾았다, 허은재.]
온몸이 굳었다.
코를 괴롭히던 악취가 은재의 발끝에 머물렀다. 그것은 마치 형태를 가진 양 발목에 똬리를 틀었다. 한기가 스미는 감각이 발등을 스치고 뱀처럼 미끈거리는 서늘함이 은재의 종아리를 감아쥐었다.
‘……거짓말.’
믿고 싶지 않았다. 왜 하필 지금일까. 진태영의 말을 어겼기 때문일까? 그동안 잠잠하던 놈들이 갑자기 모습을 드러낸 것은.
은재의 주위에는 분명 아무도 없었다. 평일 오후, 밀려드는 인파들도 없는 한적한 시간대. 지하철의 출입문 근처에 선 것은 자신뿐이었다. 그런데, 제 다리 사이를 헤집는 이 손은 대체 뭐란 말인가.
‘윽……!’
소름이 돋는 그 서늘한 감각이 옷자락 안쪽으로 스몄다. 놈들에게 있어 옷 따위는 아무런 방해가 되질 못 했으니까. 숱한 악몽에서 놈들의 장난질을 경험했기에 알 수 있었다.
은재는 눈을 질끈 감았다. 어떻게든 그 손아귀에서 벗어나려 바닥을 발로 굴러 보고 팔을 휘적거리기도 했다.
그런데 분명 머리로는 행동을 지시했으나 몸은 좀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제 다리는 마치 땅에 박힌 듯 뽑히질 않았고, 팔은 얌전히 내려가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이건 그때, 진태영과 조우했던 그 길바닥에서의 감각과 같았다. 황당한 얼굴로 자신을 보던 후배들의 얼굴과 그 앞에서 놈들에게 속절없이 당했던 무력감이 재차 떠올랐다.
‘……싫어. 안 돼.’
쿠궁, 쿠궁. 그 와중에도 지하철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나아가고 있었다. 분명 한 정거장이 지났을 무렵임에도 시간은 느리게만 느껴졌다.
그사이 은재의 다리 사이를 더듬던 손이 엉덩이를 콱 움켜쥐었다. 폭력과도 같은 마찰이 흰 살갗에 붉은 흔적을 새겼다.
[은재야, 보고 싶었어.]
끼긱, 끽, 거리는 소음과 그것이 내는 주파수가 겹쳐졌다. 등골에서부터 올라온 소름이 뒷덜미를 타고 올라가 머리 꼭대기에서 노니는 듯했다.
싫어, 제발.
은재는 그런 말들을 속으로 되뇌었다. 자신의 그런 반응이 놈들에게는 즐거운 유흥거리가 된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음에도, 잊고 있던 감각이 강제로 깨워지자 도무지 숨길 수가 없었다.
[은재야, 어디 갔었어. 응?]
놈의 손이 부드러운 살갗을 움켜쥐거나 할퀴었다. 은재는 따끔거리는 통증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아래로 떨어진 손을 꽉 쥔 채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이따금 튀어나오려 하는 신음을 참기 위해서였다.
[벌써 느끼는 거야, 허은재?]
‘닥, 쳐……!’
이죽거리는 놈의 목소리에는 조소가 걸려 있었다.
놈은 은재의 양쪽 둔부를 쥐어 벌리고는 그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꽉 다물린 메마른 구멍에 놈의 살덩이가 쑤셔졌다. 가느다란 손가락은 차갑고 축축했다. 시체 썩은 내를 풍기며 은재의 안으로 밀려 들어온 것이다.
‘으……, 윽.’
필시 꿈이어야 했다. 이런 게 현실일 리가 없으니까. 그런데, 예전에도 느꼈던 생경한 감각이 금세 고개를 들고야 말았다.
놈의 얇은 손가락이 은재의 안을 침범해 공간을 넓히자, 그 간질거리는 쾌감이 천천히 느껴졌다. 박힌 손가락이 안에서 굽혀지고 내벽 안의 불룩한 부근을 모서리로 짓눌렀다.
‘……!’
찌릿, 전기가 통하듯 허리가 뒤틀리며 은재는 내내 떨어져 있던 팔을 파드득 올리고야 말았다. 하지만 들린 팔로 할 수 있는 거라곤 신음이 튀어 나가지 않도록 스스로의 입을 막는 것뿐이었다.
‘흐읍, 윽……. 하지, 마.’
[창놈 새끼, 이제 하나 넣었는데 좋아 죽지.]
빈정거리는 어조에는 혐오감이 녹아 있었다.
대체 네가 뭔데. 내게 이딴 짓을 하고 있는 너야말로.
은재는 이를 아득 물었다. 입안의 여린 살이 잇새에 찢겨 비릿한 맛이 나는 듯했다. 홧홧한 통증이 둔부에서도 입가에서도 선명했다. 그러나, 아직 놈의 손에 붙들린 채였다.
[은재야, 넌 내가 좋은 거야. 도망가려 하지 마. 받아들여.]
안을 푹 쑤시던 손가락은 어느새 개수가 늘어 있었다. 좁은 내벽을 강제로 벌리며 뭉툭한 손끝이 고스란히 느껴질 정도로 안을 긁어 대었다.
살과 살이 맞닿는 소리가 은재의 귓가에 맴돌았다. 애널 부근의 건조한 살갗과는 달리 습윤하게 젖은 구멍 안은 조금의 자극에도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었다. 나올 리 없는 윤활액이 나온 것처럼 말이다.
‘흐읏, 응. 읏……! 싫, 어……!’
머리카락이 쭈뼛 섰다. 애널 밖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듯 위에서 살을 주욱 당기고 있었다. 그리고 그 안을 쑤시는 놈의 움직임은 너무나도 천박했다. 일말의 배려 없이 제멋대로 손가락을 박아 넣고 흔들어 대고 있었다.
‘응, 으윽……. 그만.’
놈이 팔을 흔드는 대로 은재의 몸이 기울었다. 내내 땅속에 박혀 있던 발이 휘청 흔들린 바람에 은재는 입을 가렸던 손으로 지하철 출입구의 긴 봉을 잡아야 했다. 꽤 눈에 띄는 움직임이었음에도 주변의 사람들은 은재에게 별 관심을 두지 않았다.
누구라도 하나, 이상함을 눈치챈다면.
벌건 대낮의 지하철, 좌석에 앉은 몇몇 사람들. 은재는 그들에게 도움을 청하고 싶기도 했고, 그저 모른 척 이 악몽이 지나가길 바라기도 했다. 공개된 장소에서 아래를 부풀리는 자신에게 수치심이 들었다.
[섰어? 허은재.]
이건 분명 불가항력 때문이었다. 어느덧 꽤 굵어진 부피감은 그저 침입한 자체로도 묘한 쾌감을 주고 있었다.
놈의 손짓에 녹진하게 풀린 구멍은 손가락이 빠져나갈 땐 아쉬운 듯 수축했다. 다시 밀려 들어오면 벌름거리며 안을 내주기도 했다. 은재는 이 모든 것이 제 의지와는 상관없는 행동이라고 여겼다.
[봐. 이래도?]
그때 은재의 속을 읽은 듯 놈이 물었다. 아래로 떨어졌던 고개가 젖혀졌다. 누군가의 손이 은재의 뒷머리를 잡고 휙 당겨 버린 것이다.
지하철 출입문의 작은 차창, 유리로 되어 있는 직사각형의 창문이 눈에 들어왔다. 지하철이 드나드는 통로는 검었고 쿠궁거리는 진동에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검은 차창에는 은재의 얼굴이 비쳤다.
[이게 너야, 허은재.]
양쪽으로 기운 눈썹, 촉촉하게 젖은 눈동자, 벌겋게 상기된 얼굴에 신음을 참느라 붉게 물든 입술까지.
싫다고 놈을 뿌리치는 표정이 아니었다. 도리어 안쪽에서 주는 쾌감을 오롯이 느끼고 있는, 흥분감에 젖은 얼굴이었다.
‘말도, 안 돼……!’
[자, 봐.]
푸욱, 손가락이 재차 안을 벌리고 들어왔다. 가느다란 다발이 하나로 엮여 좁은 공간을 가득 채웠다.
마디의 관절이 부드러운 내벽을 긁는 감각은 여전히 생소했다. 그런데, 놈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몇 번이고 은재의 약한 부근을 콱콱 짓누르는 것이다.
놈은 손가락의 마디가 모두 삼켜지도록 은재의 안에 박아 넣고는 잘게 팔을 흔들었다. 찍, 찌걱, 츠걱거리는 소리가 누군가의 귀에 들릴세라 은재는 저도 모르게 아래를 조여야만 했다.
‘흐아, 응. 으읏……!’
[잘 보라니까, 은재야. 시선 돌리지 말고.]
은재가 시선을 내리려 하자 놈이 더욱 거세게 머리채를 휘어잡았고, 다시 팽팽하게 당겨지며 고개가 휙 들렸다.
검은 차창에 비친 자신은 마치 이런 짓을 기꺼워하는 듯 보였다. 초점을 잃은 눈가는 눈물에 젖어 있었지만, 멍하니 벌어진 입술에서는 옅은 신음성이 흩어졌다. 벌겋게 달아오른 볼은 지나치게 상기되어 있었다. 마치 무언가를 기대하듯이. 구겨졌으리라 생각했던 미간에는 아쉬움이 묻어났고, 더한 것을 바라는 듯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허은재, 솔직히 말해. 기다렸잖아. 뭘 원해, 은재야?]
‘……아니, 아니야. 아니라고. 그런 건 절대.’
보고 싶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아래는 이미 지나친 자극을 견디지 못한 상태였다.
눈을 질끈 감았고, 시야가 어둑해졌다. 그리고 시각이 차단되자 도리어 아래에 꽂히는 자극이 더욱 거세게만 느껴졌다.
‘흐―, 아읏!’
꾹 닫은 입술 사이로, 어쩌면 신음이 새어 나갔을지도 몰랐다. 이어폰을 낀 채로 고개를 숙이던 몇몇 사람들이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설마, 들렸을까.
아냐, 참았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이런 장소에서 자신이 그랬을 리가 없었다.
하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래가 젖어 들어갔다. 은재는 출입문의 봉에 겨우 의지한 채 후들거리는 몸을 기대었다. 벗지도 않은 속옷 안쪽이 축축했다. 조금 전의 자극으로 사정한 탓이었다.
[좋았지?]
하마터면 그렇다고 뻔했다. 좋았다고. 은재는 놈에게 자신의 속내를 들킬까 두려웠다. 놈들이 찾아왔던 이후로 처음 느끼는 종류의 두려움이었다. 공포, 혐오감, 수치심과는 다른 자괴감.
[받아들여, 허은재. 이게 너야. 아무한테나 구멍을 벌리고 박아 달라고 조르는 그런 놈.]
‘……닥쳐, 제발 꺼져.’
[들었던 대로네. 아니, 그 이상인가?]
귓가에 바투 붙은 놈의 목소리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영문을 알 수 없는 말에 눈동자를 굴리던 때, 다른 손이 은재의 턱을 붙잡았다. 이어 또 다른 주파수가 치직, 맞추어졌다.
[은재야, 나도 놀아 줘. 이 구멍은 비었잖아.]
마치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덜컹거리며 속도를 내던 지하철이 서서히 죽어 갔다. 더 이상 어떠한 진동도 소음도 느껴지질 않았다.
찰나가 억만 겁으로 길어지던 순간, 은재는 곁눈질을 했다. 겨우 열린 시야에는 드문드문 앉은 사람들이 보였으나 그들 중 누구도 이 이상한 기척을 눈치채질 못했다. 저쪽과 자신의 공간이 완전히 차단된 느낌이 들었다.
턱을 붙들린 채 고정이 된 은재의 얼굴 뒤편에서는 두툼한 것이 골 사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말캉하고 축축한 살덩이에서는 오랫동안 썩은 듯한 냄새가 났다. 처음, 이 공간에서 맡았던 그 불유쾌한 시궁창 냄새였다.
‘―읍!’
은재의 몸이 크게 흔들린 것은 그때였다. 코가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던 때, 악취의 근원이 은재의 안을 벌리며 밀려 들어왔다.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단번에 들어차는 소름 끼치는 감각에 은재는 숨을 들이켰다.
[하아……. 여전하구나, 우리 은재.]
여전했다. 비어 있던 구멍을 스스럼없이 그득 채우는 양물의 부피감이, 뒤에 바투 붙은 놈의 형태가 주는 서늘함과 딱딱하게 굳은 시체처럼 기묘한 차가움. 그리고, 등골에서부터 일어나는 노골적인 쾌감까지도 말이다.
‘――!’
은재는 필사적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미 넝마가 된 입술에서는 피가 묻어나고 있었다. 이가 닿을 때마다 시큰한 통증이 느껴졌으나, 아래에서 스미는 흥분감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은재의 고개가 아래로 툭 떨어졌다. 그러곤 이 악몽을 부정하듯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뒤에서 그 모습을 비웃는 놈의 목소리가 울렸다.
[오랜만에 오빠가 예뻐해 주니까 좋지?]
‘―읏. 아니, 빼, 빨리……!’
[왜. 이제 막 넣었는데, 하아.]
구토감이 올라왔다. 사람의 것이 아닌 성기에서는 썩은 내가 났고 축축한 진물이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놈은 제멋대로 안을 꿰뚫어 놓고는 허락도 구하지 않고 움직이려 했다. 은재는 저항하고 싶었다. 놈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무슨 짓이라도 할 작정이었다.
[흐, 아아. 은재야, 좋아.]
‘아, 씹. 읏, 아, 으응……!’
하지만 딱딱하게 굳은 몸은 쇠사슬에라도 묶인 양 꼼짝도 하질 않았다. 그사이 놈의 것은 은재의 안을 드나들고 있었다.
미끈거리는 성기가 잔뜩 예민해진 내벽을 자극했다. 기다란 기둥이 굴곡진 안을 모조리 훑으며 지나갔다. 깊숙한 곳까지 박히는 압박감에 은재의 허벅지가 파르르 떨렸다. 그간 학습이라도 된 것처럼 허벅지 안쪽을 조이자 구멍 역시 좁혀들었다.
그 행위가 놈에게 기꺼운 일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아, 역시 이 구멍이, 으윽, 최고야……. 하아, 헉.]
‘싫, 어……. 아, 으응. 그……, 아.’
[신났네, 허은재.]
은재는 서 있는 것이 고작이었다. 놈이 양물을 박아 넣었다가 쑥 빼낼 때마다 하복부가 수축했다. 제 기능을 다하듯 곧장 좁혀 오는 내벽은 금세 다시 벌어지고야 말았다.
선단에 걸친 기둥이 재차 안을 범했고, 그 사이로 퍽퍽, 파열음이 터졌다. 놈의 골반에 부딪히는 둔부가 얼음장처럼 서늘했다. 두려움과 공포, 그보다 더한 성감이 돋았다.
‘흐응, 으읏. 그, 읏, 만……!’
소리를 참을 수가 없었다. 겨우 삼켜 내는 호흡과 달뜬 신음이 금방이라도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은재는 놈에게 애원했다. 그만둬, 제발. 더는 못 참겠다며 무릎이라도 꿇으려 했다. 이 끔찍한 속박에서만 놓아준다면 말이다.
[헉, 허억. 은재야. 소리, 다 들리겠는데. 사실 알리고 싶지? 저 인간들에게도 박히고 싶잖아. 응? 읏, 하아. 그렇게 허리, 흔들어. 더.]
‘아니, 읏, 응……. 제발, 못 참……!’
과한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은 몸을 은재는 지하철 입구의 봉 하나에 의지하고 있었다. 속절없이 흔들리는 허리를 차가운 것이 붙들었다. 놈이 박아 대는 통에 제 몸이 밀려나는 것이 못마땅했던가, 이제는 아예 양손으로 골반을 쥐고 퍽퍽 치대기 시작했다.
‘읏, 응! 으아, 앗……!’
죽고 싶었다. 뱀의 몸통이 배 속을 헤집는 듯했다. 미끈거리는 비늘을 역으로 세워 안을 죄다 긁어내는 것만 같았다. 찌릿한 통증이 내장을 태웠고, 치미는 사정감이 그 자리를 채웠다.
싫었다. 싫은데, 또 갈 것만 같은 극치감이 중심으로 내달렸다. 여기서 또다시 절정을 맞이한다면 그때는 정말 비명이라도 지를 것만 같았다.
[걱정 마, 허은재. 이 구멍은 내가 막아 줄 거니까.]
그때, 전혀 반갑지 않은 음성이 들려왔다.
흥분감에 젖어 헐떡거리는 은재의 턱을 쥐고 있던 놈이 말한 것이었다. 짐짓 다정한 어조였으나 행동은 그렇지 않았다. 마치 기다렸다는 듯 은재의 입이 강제로 벌어졌다. 그러곤 차갑고 축축한 것이 숨을 막았다.
‘―읍! 읏!’
[더 벌려야지. 아직 반이나 남았는데.]
입은 더 벌리지도 못할 만큼 한계까지 벌어진 채였다. 여린 입안의 살들이 찢어질 것만 같았다. 이미 놈들의 희롱에서 벗어나려 반쯤 찢어진 상태나 다름이 없었다. 지끈거리는 통증에 귓가가 움찔거렸다.
어느새 은재의 입안 그득히 물린 놈의 양물에선 비릿한 맛이 났다. 코를 찌르는 누린내와 뒤에서 박히는 악취가 뒤섞여 당장이라도 토하고 싶었다.
그러나, 속을 게워 낼 구멍마저 모두 막힌 뒤였다. 이를 세워서 악물어 보았으나 놈은 그저 웃을 뿐이었다. 그딴 짓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며 비웃기까지 했다.
[헉, 허억. 은, 재야. 좁아, 좁, 헉.]
이 와중에도 뒤에서 박아 대는 놈은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추잡스러운 신음을 토해 내며 은재의 몸을 붙들었다.
무엇을 쏟아 낸 건지 아래에서는 철퍽거리는 물소리가 터지고 있었다. 츠퍽, 퍽, 철퍽대는 정체 모를 액체는 놈의 성기가 빠져나갈 때마다 아래로 후드득 떨어졌다.
[빨아. 뒤에 또 박히기 싫으면.]
‘―흐읍, 읏, 윽……!’
고압적인 말이 이어졌고, 은재의 눈가가 붉게 물들었다.
놈들에게서 벗어나려면 저 말을 들어야 하지 않을까. 고분고분하게 군다고 떠날 존재들은 아니었으나, 시궁창으로 떨어진 은재의 정신은 이미 혼탁했다. 제대로 된 생각을 할 수 없을 정도로.
[헉, 아, 윽. 은……, 아아, 조여. 으으……!]
‘―음, 으읏. 으응……!’
[하, 그래. 목구멍까지.]
손잡이를 꾹 붙든 손은 희게 질린 채였다. 버티기 힘든 만큼 흔들리던 허벅지가 점점 좁혀졌다.
동시에 은재가 상체를 서서히 내렸다. 그러자 자연스레 둔부가 뒤로 물리고 제 안으로 처박히는 놈의 성기가 더욱 깊숙이 쑤셔졌다. 그저 쾌감을 좇는 움직임이었다.
기분, 좋아. 더 깊은 곳.
아……, 싫.
아냐. 거기, 좋아.
입에 가득 물린 양물이 목구멍을 긁자 숨을 쉬기 힘들었다. 밭은 숨을 겨우 몰아쉬며 파르르 떨 때면 뒤에서 내벽이 범해졌다. 사방으로 묶인 사지가 쾌감으로 바르르 떨렸다. 숨을 못 쉬겠는데도, 통증이 이는데도 검게 내려앉은 은재의 눈동자에는 이미 초점이 사라진 뒤였다.
‘―읍, 우움, 응, 으흣……!’
은재는 입이 안 다물릴 만큼 들어찬 성기를 쭉 빨았다. 서툰 놀림으로 목구멍을 좁히고는 축축한 기둥을 혀로 문질렀다. 그러나 놈은 성에 차지 않는지 쯧, 소리를 내곤 은재의 입안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놈에게 붙들린 머리채가, 또 다른 놈에게 내준 허리가. 위도 아래도 모두 고정되어 버티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참을 수 없는 절정이 몇 번이고 이어졌다.
[은재야, 쌌어? 또 갔어? 내 좆이 그렇게 좋아?]
[윗구멍도 아랫구멍도 쓸 만하네, 허은재. 하아, 더 빨아야지.]
[타고났다니까. 이러니 소문이 나지. 은재야, 더 하자. 응? 난 아직이야.]
퉁퉁 부은 눈은 눈물로 얼룩져 있었다. 눈꺼풀을 다 열지도 못한 채 들이치는 쾌감에 다시 눈을 꾹 닫아야 했다. 그러면 내내 고였던 눈물이 볼을 타고 후드득 떨어졌다.
‘읍, 으응. 으, 흐으…….’
짐승에게 물어뜯긴 것처럼 입은 너절해졌고 뒤 역시 흠뻑 젖은 채였다. 옷은 그대로였으나 속옷은 앞도 뒤도 짙은 색으로 물들었고, 묘한 무게감이 느껴졌다. 여전히 안으로 처박히는 놈의 양물은 찔걱대는 소리를 내면서도 좀처럼 쉬지를 않았다. 계속되는 행위에 애널 안쪽 역시 부푼 상태였다.
[헉, 허억, 헉.]
슬며시 낮춘 은재의 허리 뒤로 추잡한 숨소리가 들렸다. 놈이 헐떡거릴 때마다 시체 썩은 내가 풍겨 왔다. 골반이 뒤로 당겨질 때면 여지없이 놈의 하복부가 둔부에 부딪혔고, 그 충격으로 허리까지 얼얼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통증 따위는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오로지 안쪽이 자극당하는 쾌감밖에는 남지 않았기에.
[여기도 집중해야지.]
‘흐읍, 흡……!’
아래를 꾹 조이며 이물감을 받아 내자, 위에서 머리채를 쥔 놈이 섭섭하다는 투로 말했다.
아래에 신경을 쓰면 위가 멈추었다. 이런 짓을 해 본 적이 없으니 당연한 일이었으나, 그들은 은재를 남창 취급했기에 꽤 불만 섞인 어조였다.
놈의 허리가 거칠게 흔들렸다. 턱을 다물지 못해 뚝뚝 흐르는 침이 지하철 바닥에 고일 정도였다. 간헐적으로 치미는 토악질은 금세 놈의 양물에 막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기둥에 혀가 쓸려 홧홧한 감각이 어렸다. 안의 여린 살들에는 피가 새었고, 놈의 성기에는 은재의 타액과 피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그때, 선단이 목구멍 안쪽까지 비집고 들어왔다.
‘우―, 웁!’
[조여, 은재야. 좆 끊어지겠다.]
반사적으로 구역질이 나자 온몸이 수축하면서 아래를 조였다. 뒤에 선 놈은 그것을 마치 재롱이라도 대하듯 기꺼워했다.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지고 이어 잘했다며 축축이 젖은 은재의 성기를 문지르기도 했다.
씹. 기분, 더러워.
마지막 남은 이성의 한 조각이 사납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금세 아래를 차지하는 성기에 허리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자위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간 놈들에 의해 느껴 보았던 극치감이었으나, 오랜만의 감각은 더욱 생생하게만 느껴졌다. 겉의 마찰로 이어지는 절정과는 다른, 안에서부터 솟구치는 절정은 참을 수도 도망갈 수도 없는 종류였다.
[목을 써야지, 그래. 하아, 잘하네.]
[으, 아, 아, 으윽, 으, 헉, 하아.]
‘움, 읏, 으흑……. 흑……, 히윽……!’
이 와중에도 주변의 인물들은 아무 기색도 내비치지 않았다. 정말 공간이 분리된 것처럼 덜컹거리던 지하철은 이내 진동이 멈추었고 시간도 공간도 딴 곳에 와 있는 듯했다. 그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는 알 수 없었다.
놈들에게 유린당하는 중에도 몸은 제 의지대로 움직여 주질 않았다. 어딘가에 꽁꽁 묶인 양, 가위에 눌린 양 조금도 말이다. 그 무력함은 은재를 금세 젖어 들게 했다. 그들이 하는 대로 이끌리며 제 몸을 내주는 것이다.
‘흑, 흐읏, 흡……! 그, 믄, 그읍……!’
[이 세우지 말랬잖아, 이 창놈아.]
은재의 머리채를 붙든 놈이 볼 쪽으로 양물을 박아 넣었다. 점막이 선단에 비벼지며 꽉 눌려 겉으로도 불룩 동그란 원을 그릴 정도였다. 그것의 서늘한 손길이 은재의 볼을 쓰다듬었다.
소름 끼쳐.
놈은 마치 스스로의 것을 애무하듯 대각선으로 허리를 흔들며 은재의 볼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입을 자위 기구처럼 사용하는 행태에 치가 떨렸다.
이를 세워 그것을 꽉 깨물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그럴수록 도리어 날아드는 폭력의 세기가 강해졌다. 침으로 젖은 은재의 턱으로 주먹이 날아들고 찢어질 만큼 벌어진 입술 끝에 놈의 검지가 걸려 죽 당겨졌다. 아프고 고통스러웠다.
[아, 맞으니까 더 조여. 더 때려 봐.]
[빨리 싸고 나와, 나도 박게.]
은재는 하나의 물건이 되었다. 놈들의 성기를 받아 무는 물건이.
뒤에서 허리를 놀리던 놈도 어느새 절정에 다다랐는지 치덕거리는 움직임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더럽게만 느껴지는 그 움직임에 맞추어 자신의 허리가 흔들리는 것은 착각일까? 은재는 더 이상 무엇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악몽이 현실인지 아닌지조차도.
‘흐응, 읍. 으음……. 응, 으읍……!’
[은재도 좋지? 응? 하아, 좋아. 좋대.]
놈들은 마치 짠 듯이 동시에 허리를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놈들의 사이에 낀 것이나 다름없는 은재는 그저 윗구멍도 아랫구멍도 벌린 채로 움찔움찔 받아야만 했다. 온몸이 성감대가 된 듯 뜨겁게 달아올랐고, 이제는 놈들의 것이 제 안을 스치기만 해도 흠칫 떨며 교성을 질렀다.
‘흐으, 으응. 읍, 으음, 으 으흑. 흣……!’
몇 번이고 드나든 탓에 길은 쉽게 벌어졌으나, 또 금세 좁혀졌다. 쓸려 나가는 양물에 촘촘히 붙은 내벽이 온 신경을 자극했다. 거칠게 비벼지는 그 마찰마저 성감대를 짓이기기 충분했다.
흐, 아. 으응, 제……, 발, 아.
입안에 박힌 성기 때문에 말은 새어 나가질 못했다. 어쩌면 그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간다, 가. 아, 쌀 것 같아. 은재야.]
[하아, 입에.]
은재는 이미 몇 번일지도 모를 절정을 맞이했었다. 속옷 안은 온통 정액으로 젖었고 은재의 절정과는 상관없이 놈들은 그저 자신들의 욕정을 채우기에만 급급한 것이다. 은재는 그저 이 악몽이 빨리 끝나기를 바랄 뿐이었다.
[아, 아―!]
곧, 단말마와 같은 신음성이 터졌다. 먼저 입안으로 비릿한 액체가 흘러 들어왔다. 누린내가 나는 성기에서 뿜어진 질척거리는 정액이 목구멍으로 쏟아졌다. 고개를 돌려 뱉어 내고 싶었으나 머리채가 잡혀 있었다. 놈은 은재가 피할세라 머리카락을 잡은 손아귀 힘을 더 강하게 눌렀다.
‘흡. 음, 욱…….’
[후, 다 먹어야지. 어딜 흘리려고. 흘리면 다시 시작이야, 허은재.]
놈의 것으로 벌어진 입안은 금세 놈의 체액으로 젖고 말았다. 가름막 하나 없이 무방비하게 뚫린 목구멍은 꿀꺽거리며 그 더러운 것을 모조리 마셔야만 했다.
눈이 질끈 접히자 눈초리에서 눈물이 떨어졌다. 이제야 끝났다는 안도감과 함께 온몸을 얻어맞은 통증이 밀려왔기 때문이었다.
은재가 목울대를 꿀렁거리며 놈의 성기에서 쏟아진 액체를 남김없이 삼키는 와중에도 아래에서는 철퍽대는 소리가 났다. 벌써 몇 번째인지 모를 삽입을 받아 내며 얼얼해진 구멍해서는 더 이상 통증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헉, 아, 나도. 읏, 은재야, 하아. 안에.]
‘으, 응, 욱, 으, 읏……. 흐으, 응……!’
[다 마셨지. 착하네, 허은재.]
안에는 하지 말라는, 늘 외쳤던 외마디 비명을 내지를 수 없었다. 입안에 틀어박힌 놈의 성기가 아직 빠지지 않았으니까. 분명 사정은 끝났음에도 놈은 허리를 뒤로 무르지 않았다.
‘――!’
이어 큰 충격이 골반으로 전해졌다. 둔중한 파열음이 은재의 둔부와 놈의 하복부 사이에서 터지고, 골반을 잡은 놈의 손아귀 힘이 강해졌다. 깊숙이 들이박힌 성기가 조금 더 크게 부푸는가 싶더니 안에서 서늘한 토사물 같은 것을 토해 내었다.
불쾌한 감각이 들어 밀어내고 싶었다. 그러나, 은재는 놈이 그 액체들을 모조리 토해 낼 때까지 안을 내줘야 했다. 조금이라도 힘을 풀고 엉덩이를 당기려 하면 놈의 손이 골반의 뼈를 꽉 눌렀다. 아마 피멍이 들 만큼의 통증이었다. 그럼 다시 구멍이 수축했고, 그것을 또 놈이 즐기는 것이다.
[하아, 최고였어. 은재야, 좋았지?]
개 같은 소리.
한껏 눈이 풀린 채 허리를 흔들었던 자신의 모습은 벌써 잊었다. 은재는 놈들의 사정이 끝나는 즉시 그 모든 것을 잊으려 애를 썼다. 검은 차창에 비치던 제 얼굴마저도.
‘읍, 읏……, 득, 흐.’
아직 놈의 성기에 막힌 입에서는 제대로 된 욕설도 나오질 못했다. 이제는 턱이 아려 왔다. 은재는 앞에 서 있는 놈을 노려보듯 눈을 치켜떴다. 상기된 볼을 타고 남은 눈물이 마저 흘렀다.
[그런데, 은재야. 그거 알아?]
돌연 놈의 음성이 달라졌다. 흥분감에 젖은 조소에 어린 어조가 아닌 사뭇 진지한 말투로 말이다. 머리에 직접 때려 박는 주파수 같던 것이 깨끗해진 순간이었다. 은재의 입안에 박힌 성기가 더욱 깊숙이 자리를 잡았다. 도무지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사정하고 나면, 오줌이 마렵더라.]
[맞네, 그렇지.]
왜……, 저런 말을.
음험한 호흡이 없는, 신음도 없는 담백한 대화였다. 놈들 사이에 그런 대화가 오고 갔다. 무언가 사인이라도 보내듯이.
은재는 순간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런 일은 상상조차 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내 놈의 말뜻을 이해하고 설마 하며 붉게 물든 눈가를 다시 치켜떴을 때는 이미 늦고 말았다.
[그래서 말인데, 싸도 되지? 오줌.]
[잘됐다, 나도 급한데. 은재 구멍에 쉬해야지.]
형체조차 없는 것들이 그런 배설까지 한다는 걸까.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그저 또 자신을 놀리고 비웃으려는 질 낮은 농담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 으, 으읍!’
놈들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이고 있었다. 은재의 입안으로, 그리고 구멍 안으로 정액과는 다른 액체가 쏟아졌다. 질척하고 찐득한 체액이 아닌 묽고 흥건한 물 같은 것이.
미적지근한 온도에 시큼한 냄새가 나는 액체가 목구멍을 건너 식도를 타고 위로 넘어갔다. 한껏 벌어진 식도로 액체가 삼켜지고 은재의 목구멍 끝까지 박힌 성기는 조금의 오차도 없이 배설을 멈추지 않았다.
[하, 나도. 윽……. 아.]
엉망이었다. 악몽에 불과한 이 상황에 정신이 부서지는 것만 같았다. 은재는 남은 힘을 쥐어짜 제 몸을 흔들어 보았으나 여전히 쇠사슬에 묶인 듯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 사실에 절망했다. 고개조차 돌리지 못한 채 놈의 배설을 제 몸으로 받아 내야 했다.
목울대가 절로 움직이며 놈의 체액을 다 받아 마시는 와중, 뒤에서 움찔거리던 놈이 작은 신음을 내질렀다. 놈이 싸지른 정액으로 그득한 안쪽으로 역시나 미지근한, 기분 나쁜 액체가 쏟아졌다. 축축하게 젖었던 애널 안이 물에 잠기는 듯했다.
싫어, 안 돼. 이 미친, 씨발. 그만해, 제발. 싸지 마, 안에 하지 마. 내 안에…….
은재는 눈물조차 흘리지 못했다. 차라리 울면 나았을까. 위아래로 들이차는 배설물에 온몸이 더럽혀지는 듯했다.
눈물도 나오지 않을 만큼의 큰 충격으로 손끝이 파르르 떨렸다. 사색이 된 얼굴은 창백하게 질렸고 놈들에게 반항조차 못 한 채 온전히 젖어 들고 있었다.
지금까지 갖은 놈들에게 희롱을 당했어도 제 몸에 이런 짓을 한 적은 없었다. 제발 꿈이라면 좋으련만. 그렇다면 제 몸 안에 퍼붓는 악취와 시큼한 냄새 따위가 꿈에서 깨어난 순간 없던 일이 될 테니까.
그러나, 은재는 그간의 숱한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악몽에서 깨어나더라도 제 안을 적신 축축한 느낌이나 맞은 자국, 눌린 흔적은 그대로였다는 것을. 그러니, 이번에도 분명―.
[아쉽지만 이제 놔줘야겠네. 다음에 또 보자.]
부드러운 손길이 은재의 턱을 쓸었다. 입안을 가득 채웠던 양물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티끌만 한 마지막 방울까지 다 토해 낸 뒤였다. 알 수 없는 액체로 흥건히 젖은 목구멍에서 선단이 자취를 감추었다.
휘청, 몸이 비틀거렸다. 내내 단단한 것에 묶인 듯한 전신이 조금은 느슨하게 풀리는 듯했다. 은재는 겨우 팔 한쪽을 들어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당장이라도 토악질이 나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흐, 하아. 은재야. 구멍 조여, 쉬 흘리지 마.]
아직도 뒤에서 치근덕거리던 놈이 낄낄거리며 말했다. 축축한 손바닥이 둔부를 세게 내리치자, 은재는 그만 파드득 몸이 떨려 아래를 꾹 조이고 말았다.
“―윽!”
참지 못한 신음성이 입 밖으로 터졌다. 입술을 가렸던 손바닥도 차마 막지 못할 만큼의 소리였다. 이미 사라진 그놈의 정액이며 분비물로 잔뜩 젖은 물기가 손바닥에 문질러졌다.
토할 것 같아.
은재는 필사적으로 입을 막았다. 그사이 깊숙이 박혀 있던 놈의 성기가 다시 흔들렸고, 은재의 귓가에 놈의 불만 섞인 소리가 들려왔다.
[새끼가, 은재 입을……, 하아, 막아서, 신음도 제대로 못 듣고.]
“응, 읏. 그만, 그……, 아, 미친, 흐앗.”
놈이 허리를 흔들 때마다 아래로 물이 후드득 떨어졌다.
은재의 옷 아래의 허벅지를 타고 미지근한 배설물이 줄줄 흘렀다. 허벅지를 적시고 이내 발목을 타고 내려가 양말과 신발까지 젖어 가는 느낌이 들었다. 어찌나 생생한 감각인지, 놈에게 뒤를 내준 채 고개가 밑으로 떨어졌다. 지하철 바닥에 물웅덩이가 고였다.
[이제……, 하아, 응, 놔줄까?]
끔찍한 시간 중 가장 반가운 소리였다. 내내 이죽거리던 놈의 어조가 차분해졌다. 은재는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지 못했다. 그저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사정할 뿐이었다.
“윽, 놔줘……. 제발, 아, 윽.”
[그래.]
순간, 내내 멈췄던 지하철의 진동이 서서히 살아났다. 오래된 흑백 화면처럼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듯 보였던 주변에도 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쿠, 궁, 쿠구, 쿠궁.
차체가 일정한 박자로 다시 흔들렸다. 코를 찔렀던 불쾌한 냄새가 점점 옅어지며 지하철 안의 평범한 공기가 훅 들어왔다.
은재가 보이지 않는 듯 고개를 숙이고 있던 승객들의 시선이 여러 군데로 흩어졌다. 그때, 은재는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직감했다. 아직 제 안에는 놈의 것이 빠지지 않은 채였다.
[흐……, 아아. 은재는, 보였으면 좋겠지? 저 사람들에게.]
퍽! 큰 마찰과 함께 몸이 크게 흔들렸다. 한 손으로 부여잡았던 지하철 출입문의 봉 쪽으로 상체가 기울었다. 그와 동시에 참지 못한 신음성이 터졌다.
“앗! 읏, 응!”
대부분의 사람들은 귀에 무언가를 꽂고 있었으나 이 정도의 비명이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어리둥절한 얼굴의 몇몇이 은재 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어두운 통로를 지나고 있는 지하철 창문에 그들의 놀란 표정이 비추어졌다.
안, 돼. 저리 꺼져, 제발.
[다음에 또 놀자, 은재야.]
아래를 그득 채웠던 이물감이 홀연히 사라졌다. 마치 그런 일은 처음부터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말이다. 남은 것은 경계하듯 쏟아지는 승객들의 시선과 그 모든 시선을 감내하며 우두커니 선 은재뿐이었다.
이건 정말, 악몽이긴 한 걸까.
놈들에게 당한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얼얼하게 부은 입술이며 붙잡혔던 허리, 그리고 무엇보다 축축하게 젖은 아래까지.
한 발자국 떼기가 두려웠다. 자신의 발밑으로 척척하게 고인 저 물웅덩이가 대체 무엇인지, 누군가 보기라도 한다면…….
[이번 역은, ××역입니다.]
등 뒤로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평일 오후의 지하철 안은 한산하였으나, 몇 없는 승객들의 시선이 한곳으로 모이는 중이었다. 출입문 앞에 선 남자, 어쩐지 짙은 색으로 물든 바지를 입고 아래에는 정체 모를 물웅덩이가 고인 상황이었으니 수상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은재 역시 누구보다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누가 사진 혹은 영상을 찍는다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에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손이 벌벌 떨렸다. 사시나무 떨듯 떨리는 손끝이 지하철 손잡이에 닿아 닥, 다닥 소리를 내었다.
[――내리실 문은, 오른쪽입니다.]
그때, 내내 시간이 멈춘 듯 들리지 않았던 지하철의 안내 방송이 흘러나왔다.
그 소리가 어찌나 반가운지 은재는 푹 숙였던 고개를 들고 차창 너머로 빠르게 스치는 승강장을 시야에 담았다. 빨리, 조금만 더 빨리. 곧 도착할 것이라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되뇌었다.
평소에는 짧았던 그 거리감이 왜 이다지도 길게만 느껴지는지. 홧홧하게 달아오른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혹여 조금이라도 더 흘릴까 봐, 대체 무엇인지는 모를 그 액체가 제 안에서 쏟아져 나올까 봐 두려워 힘을 주기도 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다르게 한껏 들어찼던 이물감이 사라지자 안이 움찔거리며 좁혀드는 감각이 선연했다. 단지 하복부에 힘을 주었을 뿐인데도 찌릿한 쾌감이 흔적처럼 남아 있었다.
이윽고 지하철이 멈춰 섰다. 몇 번의 진동이 이어졌고 익숙한 기계음을 내며 출입문이 활짝 열렸다.
바닥에 못이라도 박힌 듯 우뚝 서 있던 은재가 조심스레 발을 내디뎠다. 어딘가에 묶였던 것처럼 꼼짝도 할 수 없었던 몸이 움직였고, 순간 총알처럼 튀어 나갔다. 그저 여기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끔찍하고 절망스러운 그 기억에서 벗어나려는 듯이.
“허억……, 헉.”
고작 열 발자국도 되지 않을 거리였다, 지하철 내부에서 승강장 밖까지 이어진 거리는. 그런데도 숨이 턱까지 찼다. 저주처럼 들러붙은 흔적이 제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은재는 비척거리며 뒤를 돌았다. 지하철 출입문은 서서히 닫혔고, 그 사이로 믿기 힘든 광경이 눈에 띄었다.
분명 바닥에 고여 있던 그 물웅덩이가 없었다. 그렇다면 축축하게 젖은 자신의 옷가지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마치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시선이 황망하게 흩어졌다.
은재는 사색이 된 얼굴로 조심스레 걸음을 옮겼다. 놈들에게 시달렸던 몸이 성할 리가 없었다. 설령 그것이 단순한 악몽일지라도, 허상일지라도 마찬가지였다. 입안에 남은 시큼한 냄새와 자신의 몸에서 풍기는 썩은 내가 코를 자극했다.
비틀거리는 걸음새로 승강장에 놓인 벤치 근처로 다가섰다. 어딘가에 기대고 싶었다. 도저히 서 있을 힘이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그런데, 섣불리 엉덩이를 대고 앉기가 두려웠다. 은재는 손으로 자신의 둔부 부근을 조심스레 만져 보았다. 역시나 온통 젖은 채였다. 이토록 분명한 흔적이 남았는데도 왜 눈물 한 방울 나질 않을까.
허은재는 생각보다 침착했다. 방금 그 모진 수모를 당한 인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간 겪었던 숱한 일들 때문에 단련이라도 된 것인지.
결국, 은재는 벤치 옆에 서서 벽에 기댄 채로 잠시 몸을 쭈그리고 앉았다. 이 상태로는 어디도 갈 수 없을 터였다. 주머니를 뒤적거려 핸드폰을 꺼냈다.
‘도와줄 사람이……, 없을까.’
전화번호부는 꽤 간결했다. 등록된 이도 몇 없었다. 은재는 몇 번이고 목록을 껐다가 켰다.
“…….”
그러던 중 익숙한 이름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실 그가 아니면 부를 수 있는 사람도 없었다. 이 몰골을 누구에게 보여 준단 말인가. 설명해도 믿지 않을 테고.
은재는 짧은 고민을 했다.
그리고, 고민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네.]
건조한 신호 연결음이 꽤 길게 이어지다, 수화기 너머로 그보다 더욱 건조한 음성이 들렸다.
진태영이었다.
[네, 말씀하세요.]
아는 척도 하지 말라며 쫓아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 다시 연락한 몰염치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래서 차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이번에도 자신의 필요로 인한 연락이었으니까.
[선배.]
뭐라고 말이라도 꺼내야 했다. 그저 뻔뻔하게 도와달라고 하거나 어디냐고 물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좀처럼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오랜만에 듣는 태영의 목소리에는 희미한 고저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감정의 교류를 깊게 나누지는 않았더라도,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은 왜인지.
차라리 통화를 끊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미 끝난 인연이었다. 그에게 이 꼴을 보여 주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제 입으로 다시는 눈에 띄지 말라고 했었는데.
[선배, 무슨 일 있어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던 참이었다. 무미건조하던 말투와는 다른 걱정이 묻어나는 어조였다. 은재가 덕지덕지 쌓아 둔 경계심과 자존심이 그 짧은 한 문장에 엉망으로 허물어졌다.
은재의 입술과 턱이 덜덜 떨렸다. 치아가 서로 부딪혀 딱딱 소리를 냈다. 굳은 팔과 다리에 서늘함이 스민 것도 그때였다.
은재는 깨달았다. 뒤늦게 몰려온 공포에 자신이 떨고 있다는 것을. 쭈그려 앉은 다리에 힘이 풀려 그만 바닥에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은재 선배.]
그리고 그때, 다시 한번 진태영의 목소리가 들리고 나서야.
“도, 와 줘.”
은재는 겨우 입 밖으로 소리를 꺼낼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