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악몽 (2/7)

1. 악몽

‘컥, 허억……!’

입안 가득 고인 숨이 터져 나왔다. 콱 막힌 둑이 무너지듯, 한 번 트인 호흡은 좀처럼 잦아들지 못했다. 허억, 헉. 뜨거운 숨이 가슴께를 두드리자, 식은땀이 흘러 내려온 이마를 적셨다.

몽롱한 의식은 제자리를 찾지 못했고,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감각만이 차차 몸 안으로 스며들었다.

저리던 손끝이 움찔, 떨리는 것을 시작으로―.

‘아, 읏! 가, 그마―, 안……!’

신음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필시 목구멍에서 터져 나왔을 그 소리는 귓가에 닿지 못했다. 그렇기에 은재는 알 수 있었다. 이 모든 것이 그저 지독한 악몽임을.

[―좋아, 하아. 은재야, 허은재.]

불투명한 그림자가 습한 목소리를 내뱉었다. 욕정으로 점철된 음성이 은재의 이름을 연이어 부르짖었다. 제멋대로 벌어진 은재의 다리 사이로 시꺼먼 것이 드나들 때마다 말이다.

그러나, 은재는 그가 누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윤곽은 그저 검을 뿐이고 목소리는 글씨로만 인식되었다. 도무지 하나의 생명체로는 느낄 수가 없었다.

‘이, 개―. 아! 저리, 아파, 그만, 하지……!’

비집고 들어온 두꺼운 성기가 살갗을 벌려 내었다. 은재는 그것에게서 벗어나려 둔부를 뒤로 밀어냈지만, 그것은 그만큼 따라붙을 뿐이다.

커다란 손이 은재의 엉덩이를 쥐고 아래로 훅 당기자 몸이 쉽게 끌려갔다. 이미 엉망이 된 안쪽으로 다시금 성기가 짓쳐들어왔다. 조금의 허락도 구하지 않은 행위가 폭력적으로 이어진다.

‘흐윽, 윽……!’

[좋아, 좋아, 거기 좋아.]

안쪽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빠듯하게 물린 살덩이가 내벽을 찢는 듯했다.

‘하으, 아, 악……!’

강하게 밀어 올린 성기가 내장을 가득 채우자 은재의 발끝이 파르르 떨렸다. 어느새 축축하게 젖은 애널에서 성기가 미끄러지듯 빠져나왔다가 다시 처박혔다.

은재는 안을 적신 것이 그것의 체액인지 아니면 다른 것인지 알지 못했다. 다만, 명백한 한 가지는 그가 주는 고통 안에서 참을 수 없는 쾌감을 느낀다는 것이었다.

[은재야, 좆 끊어질 것 같아. 너무 좋아. 허은재, 더 박아 줄까? 응?]

기분 나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송곳으로 유리창을 긁는 듯한 끼긱, 끽, 거리는 소음 같기도 했다. 그것은 낄낄거리며 웃은 걸지도 모른다. 제 아래에서 허덕거리며 발버둥을 치는 은재를 조소하면서.

은재는 이를 짓씹었다. 부디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를 희망하며 자꾸만 터지는 신음을 억누른 채로 겨우 입술을 열었다.

‘개……, 같은. 아, 윽, 씹, 하아, 아아, 읏!’

하지만 그것을 향한 욕설은 허망하게도 외마디 비명이 되어 흩어졌다.

질펀하게 달라붙던 아래가 더욱 집요하게 굴기 시작했다. 안으로 파고들며 은재의 내벽을 벌리던 성기가 천천히 빠져나가더니 다시 퍽, 소리와 함께 박히기 시작했다.

척, 처벅, 츠업.

은재의 둔부와 그것의 앞섶이 거칠게 비벼진다. 회초리질을 하듯 철썩거리며 맞부딪치자 흔들거리던 은재의 다리가 더욱 벌어졌다.

[하아, 아, 좋아. 은재야, 우리 은재 배부르겠다. 이만큼, 아, 먹여 줬으니까.]

‘흐아! 아! 으윽! 으……, 그만!’

[아직 배고파? 배고파? 더 먹여 줄게, 내 자지도 먹어.]

‘더, 넣지, 아! 너무 기, 깊―.’

그것의 성기가 더욱 깊은 곳까지 뚫고 들어오자, 반사적으로 하복부에 힘이 들어갔다. 아래가 저릿저릿하게 떨리며 긴장으로 인해 한껏 수축한다.

은재는 기다렸다는 듯 그것의 성기에 달라붙는 제 몸이 야속했다. 시체처럼 늘어진 양팔은 어딘가에 묶인 양 꼼짝도 할 수가 없었다. 철퍽거리며 안으로 처박히는 성기와 접합부 사이로 주르륵, 점성 있는 액체가 흘러내렸다.

[맛, 있다. 아, 기분, 좋아.]

‘씹, 안에……, 이 미친, 아! 히읏! 그, 만!’

[좋아, 좋아. 아, 아, 아, 악, 아, 맛있어맛있어맛있어.]

그것의 몸과 은재의 복부가 맞닿았다. 마치 하나처럼 겹쳐진 몸 위로 그것이 덜컹거리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잘게 파고드는 허리 짓이 첩, 첩 물소리를 내자, 축축하게 젖은 성기가 순식간에 은재의 안을 찍어 누르고 다시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두껍고 기다란 것이 내벽을 가르고 이어 빠져나갈 때면 성기에 달라붙은 장기가 밖으로 뽑히는 것만 같았다. 무어라 표현할 수 없는 성감이 자극되어 은재는 밭은 숨을 내몰 뿐이었다.

‘하아. 아, 으, 아, 아아! 아, 싫, 이제―, 아, 으윽! 힉!’

순간, 소름 끼치는 감각이 온몸을 감싸는가 싶더니 그것의 앞섶에 부딪히던 은재의 성기에서 후드둑, 체액이 흘러나왔다.

멀건 액체가 복부를 적신다. 미지근한 온도가 점점이 퍼져 나가며 불쾌한 감정이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무엇인지도 모를 존재에게 또다시 안을 내줬다는 분노와 이 끔찍한 행위에서 참지 못할 쾌감을 느꼈다는 수치심이 뒤섞인다.

엉망이었다.

[나―, 도, 가, 아, 여기, 안에, 꽉.]

‘안, 돼, 아! 지금 막……, 하지, 움직이면―.’

[할래, 나도 할래. 나도나도나도나도.]

막무가내로 매달리는 그것을 뿌리치지 못했다. 거머리처럼 들러붙은 검은 그것이 헐떡거리며 비명을 내질렀다.

은재는 순간 그것이 인간도 무엇도 아닌 기이한 존재라는 것을 새삼 느끼고야 말았다. 대체 저런 괴상망측한 것과 무엇을 하고 있는 걸까. 처음 저것과 마주했을 때의 공포가 스멀스멀 휘몰아쳤다.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서 몸이 차갑게 식는 듯했다. 그것은 아직도 괴이한 소리를 질러 대며 붉은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때, 그나마 육신의 형태를 가졌던 그림자가 흐물흐물 녹아내리는가 싶더니 은재의 몸을 짓누르던 무게가 다소 가벼워졌다.

‘흑, 으―!’

기회는 지금뿐이었다.

은재는 그것에게 깔려 있던 몸을 일으켜 물렁물렁해진 그것을 발로 걷어찼다. 안에 처박혀 있던 것이 함께 빠져나가는 감각에 지끈 눈꺼풀을 감았다. 그와 동시에 어딘가에 붙잡힌 것 같던 양팔에도 압박감이 사라졌다.

[끼끽―, 끼이키익!]

은재는 바들바들 떨리는 다리로 내달리기 시작했다. 뒤에서 그것이 내뱉는 기묘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제발, 제발…….

은재는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암흑 속을 내달리며 빌고 또 빌었다. 제발 이 악몽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고.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할 정도로 절박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비틀거리며 도망치는 은재에게 알 수 없는 시선이 달라붙었다. 검은 동굴처럼 깊은 눈동자가 자신을 응시하는 듯한 공포와 함께 저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매초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사사사삭, 사사사삭.

미끈한 무언가가 지면을 스치며 빠르게 다가오는 소리가 은재의 뒤통수에 닿을 때 즈음.

“은재 선배.”

악몽에서 깨어났다.

* * *

오늘은 학과 행사가 있는 날이었다. 매 학기 과의 선후배들이 한자리에 모여 스펙 관련 정보를 공유하거나 취업한 선배들을 초청해 업계의 동향을 듣는 친목회 겸 세미나였다.

곧 졸업을 앞둔 은재도 학과 행사에는 빠질 수 없었다. 대학에서 다져 놓은 인맥이 동종 업계의 취업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선배들의 잔소리 때문이다.

일부 맞는 소리이긴 하지만, 은재에게는 사실 인맥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풀어 말하자면 그런 것에 목을 맬 만큼 아쉬운 수준이 아니란 뜻이다.

“이번 과탑도 허은재라며?”

“응. 참 징그럽게 대단하지 않냐. 벌써 오퍼도 받았다던데.”

“개부럽다. 누군 서류 넣는 족족 광탈이구만.”

“야, 너랑 허를 비교하면 허가 너무 억울하지 않겠냐?”

“이 새끼가.”

그때, 삼삼오오 모인 무리의 시선이 한 방향으로 돌아갔다. 세미나실의 문이 열리고 허은재가 들어섰기 때문이다. 평소와 다름없이 무심하게 둘러멘 가방과 군더더기 없는 옷차림에 매끈한 외모도 여전했다.

다만, 어째 힘이 없는지 가볍게 건네는 눈인사조차 제대로 받질 못하고 비척거렸다.

“은재야, 너 괜찮냐?”

평소 참견하길 좋아하는 동기가 물었다. 은재는 순간 입의 침이 말라 입안이 거칠어졌지만, 자리를 잡고 앉아 그를 보며 대강 답했다.

“응. 왜?”

……괜찮을 리가.

통 잠들지 못해 눈앞은 뿌옇고 머리는 핑핑 돌았다. 지독한 몸살감기에 걸린 듯 온몸이 욱신거렸다. 그렇지만 입이 가볍기로 유명한 그에게 ‘밤마다 귀신하고 섹스를 하는데 기가 빨리고 무서워서 죽겠다’고는 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아니, 어디 아픈 놈 같아 보여서.”

“어제 늦게 자서 그런가. 걱정해 줘서 고맙다.”

“그러게 좀 적당히 해라. 이제 곧 졸업인데……, 살살 해.”

그가 눈을 찡긋거리며 피식 웃었다.

어젯밤 그 귀신보다 못난 낯가죽이었다. 은재는 마치 못 볼 것을 본 듯 속이 울렁거리는 바람에 결국 대답도 못 했다. 급히 시야를 돌리며 입을 다물 뿐이었다.

* * *

친목회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말이다. 쓸모 있는 대화는 잠깐이었고 쓸모없는 회식은 길게 이어졌다.

은재는 음주에 취미가 없는 데다 술자리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중간 즈음에 빠져나오려 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실패했다. 그를 보러 온 선배들이 놓아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은재 취했나.”

“얼마 마시지도 않았는데? 얌마, 눈 좀 떠 봐.”

누군가가 어깨를 툭툭 치는 것이 느껴졌다. 은재는 몽롱한 의식 속에서 무거운 눈꺼풀을 애써 끔뻑거렸다.

술을 못 마시긴 해도 이 정도까지는 아니었는데.

귀신을 만날까 두려워 잠들지 않고 꼬박 밤새거나 깊이 잠들지 못한 날들이 길게 이어진 탓에 체력이 많이 떨어졌기 때문일까. 자꾸만 닫히는 시야 너머로 동기와 선배들의 면상이 어른거렸다.

‘안 돼, 잠들면. 잠들면…….’

그러나, 의지와는 다르게 고개가 고꾸라졌다.

목이 부러진 허수아비처럼 흔들거리던 찰나, 따뜻한 손이 목덜미에 닿았다.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를 가진 남자가 부드럽게 목을 받쳐 주자 모두의 시선이 그가 있는 방향으로 돌아가는 듯했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람들의 고개가 한쪽을 향하고 있는 걸 보면.

“쟤, 걔 아니야?”

“누구?”

물속에서 부유하는 것처럼 시각도 촉각도 멀게만 느껴졌다. 수군거리는 주위의 소란은 은재의 귓가에 닿지 못했다.

어느새 반쯤 감긴 은재의 시야에 휘둥그레진 그들의 눈빛이 느릿하게 반사될 때.

“은재 선배.”

누군가가 말했다.

* * *

부러울 것 없는 인생이었다. 하고자 마음먹은 것은 반드시 해냈고 남들은 어렵다고 말하는 목표도 은재에게는 코를 푸는 것보다 쉬운 일이었다.

그렇기에 자신은 타고난 수준이 다르다고 생각해 왔다. 그러니 저와 급이 다른 인간들과 쉬이 어울릴 수 있을 리가 없다고.

‘……으응…….’

당연히 남에게 아쉬운 소리 한번 해 본 적 없었다. 허은재는 무엇이든 스스로 완성하는 부류였다.

[여기다, 여기야.]

[여기야?]

[여기다여기다여기다여기다여기다.]

적어도, 이 악몽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소, 손님 왔다.]

[손님 받아라.]

[으, 으, 은재야. 손님 받아야지.]

귓가에 끼긱, 기키긱거리는 소음이 울렸다. 스피커가 찢어지는 듯한 파열음이 이어진다. 은재는 신경질적으로 눈썹을 꿈틀거렸다.

‘……손님?’

무슨 손님을 말하는 거지.

은재의 생각을 읽은 양 비죽대며 킬킬거리는 놈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은재, 안 일어난다. 안 일어나, 안 일어나, 안 일어나.]

[손님 왔는데.]

[소, 소, 손―.]

그것 중 하나가 말을 더듬었다. 처음 듣는 말투였다. 기이하게 말을 반복하거나 끼긱거리는 놈들은 몇 번 있었지만 말을 더듬는 놈은 없었다. 어떤 것들이든 불쾌하기 짝이 없는 일이긴 하지만.

‘……꿈인가? 언제 잠이 들었지.’

기억이 나질 않았다.

회식 자리에 갔던 건 알겠는데 술을 얼마나 마시고 잠이 들었던 걸까. 이 기분 나쁜 것들의 소리가 들리는 걸 보면 또다시 악몽을 꾸는 듯했다.

‘한시라도 빨리 깨어나야만 해.’

스산함에 목이 바짝 말랐다. 그러나, 은재의 마음과는 달리 몸의 감각은 안갯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은재는 미간을 찌푸린 채 손가락 끝에 힘을 주려 노력했다. 조금만, 조금이라도 움직일 수 있다면 이 거지 같은 꿈에서 깰 수 있을 텐데.

[그, 그, 그만.]

하지만 마치 어딘가에 묶이기라도 한 양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온몸에 납덩이를 두른 느낌이었다. 발목에 추를 달고 깊은 물 속으로 버려진 시체처럼 말이다.

[그, 그, 그만, 어차피, 너, 넌, 못 깨어나.]

귓가에 서슬 퍼런 칼날이 닿은 듯 소름이 돋았다. 놈의 목소리는 어그러진 주파수가 내는 기이한 소음과도 같았다.

놈은 은재의 가까이 있었다. 놈의 기척이 귓바퀴를 타고 귓불 아래로 떨어진다. 이어 차갑고 서늘한 바람이 목덜미를 타고 서서히 내려갔다. 이내 전신의 솜털이 쭈뼛 서며 발가락 끝에서부터 찌릿한 감각이 터졌다.

[그 녀석도, 지금 여기, 어, 없거든. 포, 포기하고 이, 이리 와.]

달래는 듯한 투에 모골이 송연했다.

놈의 기척이 아까보다 가까운 거리에서 느껴졌다. 은재의 몸 위로 더해지는 무게감이 놈의 존재를 더욱 확실히 알리고 있었다. 거대한 구렁이를 몸 위에 얹은 듯 불쾌한 촉각이 더해진다.

‘……읏!’

혼란스러운 와중에 아래로 무언가가 닿았다. 기다란 손가락이 은재의 음부를 훑으며 희롱했다.

‘흐, 윽…….’

꿈이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만큼 선명한 감각이었다. 아니, 현실보다도 더 세밀하게 느껴졌다.

분명하게 다른 온도가, 습하고 차가운 기운이 은재의 아래를 매만졌다. 마치 당연한 수순이라는 듯 놈은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으읍……!’

벌어진 입술 사이로 놈의 혀가 섞여 들었다. 인간의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스산함이 입술에 들러붙는다. 놈은 축 처진 은재의 성기를 손으로 쥐고 흔들어 대기 시작했다. 꼼짝없이 눌어붙은 몸은 놈이 하는 대로 흔들릴 뿐이다.

‘하, 아악……. 시, 싫……!’

꿈이라기에는 너무나 선명한 감각이 위와 아래로 전해졌다. 서늘하고 말캉한 것이 은재의 입안을 훑고 뻣뻣하게 굳은 혀뿌리를 얽었다. 분명 꿈속이고 악몽일 뿐인데 제 입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현실과 다를 바 없었다.

서서히 달아오르는 몸을 부정하고 싶었으나, 놈은 마치 은재의 몸에 대해 속속들이 알고 있는 듯 굴었다. 결국, 은재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숨을 터트렸다.

[조, 좋아? 여, 여기 좋아하잖아, 은재야.]

‘읏……, 닥, 쳐.’

[거, 거짓말. 이렇게 해 주면, 조, 좋아하면서.]

은재의 성기 위에서 노닐던 놈의 손가락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서느런 촉각이 선단을 타자 신경이 곤두선다. 은재는 쉴 새 없이 맞물리는 놈의 입술을 떼어 낼 여유도 없이 차츰 은밀한 곳으로 향하는 손길을 고스란히 느껴야만 했다.

‘……흐읏, 윽…….’

시야가 캄캄했다. 망망대해 한가운데에 버려진 듯 말이다. 또, 그만큼 고독하고 두려웠다. 앞선 행위로 점점 곧추서는 제 중심이 느껴지자 말할 수 없이 참담했다. 동시에 덜컥 겁도 들었다.

집에는 제대로 도착한 건가? 설마, 술자리에서 기절한 채로 남들이 다 보는 앞에서 추잡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건 아닐까?

정말이지 최악이었다.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것도 모자라 이런 꼴이라니. 차갑게 식은 머릿속과는 달리 점점 부풀어 오르는 아래는 뜨거워지기만 했다.

그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모습이다.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술을 마시는 게 아니었는데. 아니, 그 자리에 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적어도 진태영에게는 알리고 나갔어야…….

[드, 드, 들어갔다, 여기.]

이어지는 상념에 은재가 정신을 빼앗길 즈음, 이물감이 느껴졌다. 꾸물거리며 좁은 구멍을 벌리려는 감각이 말이다. 놈은 제 투박한 손가락으로 은재의 아래를 더듬고 있었다. 메마른 음부에 두툼한 손가락이 닿자, 흠칫 몸이 떨렸다.

이어질 행위에 제 허락은 조금도 구하지 않을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은재의 눈썹이 팔(八)자가 되어 찌푸려졌다. 어두운 눈앞이 일순 파도처럼 일렁거리는 듯했다.

촉촉하게 젖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릴 때, 은재의 입안을 탐하던 놈의 타액이 목구멍으로 넘어갔다.

‘……윽, 으읏……!’

그 끔찍하고도 괴상한 감각에 인상을 찌푸리기도 잠시, 은재의 아래를 더듬거리던 손가락이 좁은 구멍 안으로 고개를 들이밀었다. 바싹 메말라 그저 좁기만 한 안쪽으로 건조한 살갗이 비벼졌다. 까칠한 거죽이 부드러운 내벽을 스치며 푹 쑤셔진다.

아팠다. 은재는 고통에 낮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그러나, 몸 위에 자리 잡은 묵직한 놈이 온몸을 짓누른 채 놓아주지 않았다.

‘아, 아파. 그만…….’

[처, 천천히, 즐기자, 응? 나, 나랑. 내가, 외롭지 아, 않게 해 줄게.]

개 같은 새끼.

놈의 말에 이를 짓씹으며 답하려는 찰나였다. 별안간 쑤셔 박던 것이 쑤욱 빠지더니 무언가 아래에 닿았다. 습윤한 촉감을 가진 두툼한 것이 제 끝을 은재의 음부에 겨누고 있었다.

‘자, 잠깐……! 아윽!’

은재가 말을 마치기도 전에 촘촘히 닫힌 공간으로 양물이 가득 들어찼다.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그 끝을 겨우 머금은 안쪽으로 두꺼운 기둥이 파고들었다. 생살을 가르는 격통에 고개가 뒤로 젖혀진다. 은재의 목울대가 바르르 떨리며 넘실거렸다.

‘윽―! 하아.’

은재는 그저 짧은 숨을 토해 낼 뿐 안으로 침입한 것을 막아 낼 순 없었다.

[조, 조, 좋아. 조여, 조인다.]

‘……씹, 개, 자식이……!’

[으, 은재야, 소, 손님한테, 그런, 말 하면 아, 안 돼.]

‘손, 님은 무슨. 으, 앗……!’

조금의 빈틈도 없이 맞물린 접합부가 서서히 틀어졌다. 내장 안으로 처박힌 선단이 놈의 허리 짓을 따라 밖으로 빠져나간다. 그러자 한결 나아지는 듯했다. 숨이 턱 막히던 압박감이 옅어지자, 저도 모르게 허리가 들썩거렸다.

[이, 거 조, 좋아서 허, 허리 흔드는 것 봐. 너, 너는 역시, 차, 창놈 새끼네.]

놈이 이죽거렸다. 허은재의 인생과는 조금도 연관이 없던 저급한 단어를 입에 올리면서.

생애 처음으로 은재는 놈에 의해 저급한 새끼로 명명된 것이다. 저딴 정체도 모를 놈에게 유린당할 만큼 쉬운 인간으로. 반발심과 더불어 절망감과 분노가 치밀었다.

‘당장 내려와. 당장 내 꿈에서 나가라고!’

[시, 싫어. 은재는 손님, 받아야지. 나, 소, 손님이야.]

‘더러운 새끼, 이 개 같은……!’

[네가 초, 초대했잖아. 아, 안 그래?]

벌어진 다리 사이로 놈의 양물이 재차 밀려 들어왔다. 무엇이 묻은 것인지 질척거리기까지 했다. 불유쾌한 감각이 이어지며 허리 부근으로 강한 힘이 느껴진다.

놈은 은재의 허리를 붙들고 막무가내로 몰아붙이기 시작했다. 발정 난 개처럼 은재의 몸에 붙어 허리를 들썩거렸다. 퍽, 퍽, 츠걱, 츄걱. 살과 살이 문대지며 은재의 자극점에 놈의 기둥이 파고들었다.

‘……읏, 아윽!’

피할 수도 없는 쾌감이 머리끝까지 전해졌다. 발가락부터 찌릿한 감각이 온몸을 타고 올라간다. 은재는 알고 있었다. 이전의 숱한 악몽에서 겪었던 것처럼 말이다. 놈들은 이런 식으로 꿈속에 찾아와 무자비하게 은재를 범했다.

[헉, 하아, 허억, 헉.]

‘그, 만, 아, 아앗!’

허리가 끊어질 듯했다. 놈의 양손에 붙들린 허리에 새까만 손자국이 날 만큼 짓눌리고 있었다.

은재의 몸에 매달리다시피 체중을 실은 놈이 거칠게 허리를 놀렸다. 퍽, 퍼억, 퍽. 둔덕과 중심이 부딪치며 마찰음이 퍼진다. 놈의 성기는 어느새 미끈거리는 점액질로 덮여 있었다. 그 질척거리는 촉각이 은재의 내부로 파고들며 저급한 소리를 낸다.

‘아, 으응, 시……, 싫어, 제발, 그, 하윽!’

[헉, 헉, 차, 창, 놈 새끼가, 헉, 허억, 조, 좋아, 좋―.]

절로 허리가 들썩거렸다. 굳게 닫혔던 안이 놈의 성기에 꿰뚫리며 한계까지 벌어졌다.

이 모든 것은 그저 꿈이다. 그러니 매일 밤 시달릴지라도 제 몸이 실제로 달라질 리는 없었다. 그런데도 은재는 왜인지 불안했다. 이 모든 감각이 소름 끼칠 만큼 선명했기 때문에.

‘흐윽, 아……!’

복부 아래로 가득 들어찬 성기가 꾸물거리며 은재의 안으로 깊이 박혔다. 길고 두꺼운 것이 내장을 뒤집자 구토감과 함께 묵직한 쾌감이 올라왔다.

어디로도 피할 수 없는 과한 쾌감은 고통과 닮아 있었다. 몸을 뒤틀어도, 소리를 지르고 신음을 토해 내도 소용이 없었다. 놈이 은재의 몸 위에서 허리를 흔들 때면 자극점이 짓뭉개져 발끝이 곱아들었다.

‘하, 윽, 아……, 아! 아, 제, 아, 안 돼……, 아!’

[다, 다리, 더, 벌, 려. 아, 윽, 하, 허억, 헉.]

이런 관계가 기쁠 리 없다. 애당초 은재는 남자와의 관계를 바란 적도 없었다. 혐오스럽고 더러웠다. 시큼한 냄새가 나는 놈의 성기가 제 몸을 드나드는데 어떻게 기쁠 수 있을까. 전신이 시궁창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그런데도.

[조, 조여. 헉, 허억, 좋지? 응? 여, 여기, 좋아?]

‘윽……. 아, 아니, 아!’

놈의 성기가 깊숙이 박혔다가 빠르게 빠져나갈 때면, 쾌감을 띤 신음이 터져 나왔다.

성기가 내장의 온 신경을 다 긁고 단번에 빠져나가자 구멍이 절로 조여졌다. 마치 아쉬운 것처럼, 선단을 오물거리며 물고 빨듯이 말이다.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었다. 은재는 자꾸만 얽혀 들어오는 놈의 혀를 뱉어 내며 고개를 흔들었다. 싫어, 싫었다. 제 것인 양 제 몸을 희롱하는 저놈이. 그리고, 놈에 휩쓸려 허리를 흔들고 있는 자신이.

[헉, 허억, 가, 갈, 것 같아. 아―.]

붉게 부어 오른 은재의 애널이 재차 놈의 것을 삼켰다. 더해지는 압박감에 내장이 강하게 수축한다. 선단이 안쪽을 짓누르며 마구잡이로 쑤셔 대자 은재의 중심부에서 맑은 액이 쏟아져 나왔다.

‘―아! 아윽, 읏.’

동시에 둔덕으로 힘이 들어갔다. 갈라진 그 사이로 시커먼 성기가 빠르게 박혔다가 빠져나오길 반복했다.

뻑뻑했던 안쪽은 어느새 놈의 체액으로 가득해진 지 오래였던 것 같다. 찌극거리는 습윤한 소리가 귓가를 자극하자 은재는 모멸감이 치밀었다. 놈의 기둥이 제 안으로 밀려 들어가고 빠져나올 때면 선홍색의 내벽이 그것을 따라 밖으로 꺼내지는 듯했다.

[갔, 네, 먼저 가면, 아, 간다, 아!]

‘윽……. 싫, 아! 지금 막, 아, 으윽. 멈, 춰!’

[은재야, 소, 손님 씨 받아야지, 응?]

마치 하나의 몸인 것처럼 완벽하게 접합된 은재의 몸속으로 씨물이 터져 나왔다. 축축하게 쏟아진 체액은 금세 은재의 안을 적셨다.

놈에게서 벗어나려, 그것만큼은 피하려고 몸을 뒤틀어 보았지만 거기까지였다. 마치 거머리처럼 달라붙은 놈의 영체가 은재를 놓아주지 않았다.

놈은 이죽거리며 허리를 들썩였다. 마치 처음 사정을 경험한 들개처럼 제 아래에 깔린 은재를 시커먼 눈으로 내려다보며 제 정액을 양껏 쏟아부었다.

[허억, 헉, 좋아, 좋아―.]

사정하느라 초점을 잃은 놈의 동공이 조각조각 흩어지는 듯했다. 씨물을 토해 내는 와중에도 잘게 치대는 허리 짓이 은재의 안을 자극하고 있었다. 쳐벅, 처벅. 구정물에 발을 처박는 것처럼 질척거리는 소리가 아래에서 새었다.

‘씹, 저리……, 읏, 움직이지, 하―.’

[은, 재는 창놈, 이지? 이, 이렇게 좋아, 하는데. 며, 몇 놈이나, 바, 받았어?]

토정한 지 얼마 되지 않은 탓에 아직 온몸이 예민하게 달궈져 있었다.

그래도, 아무리 그렇다 하더라도 은재는 놈의 행위에 일일이 반응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럽게 느껴졌다. 그저 꿈일 뿐이라 되뇌어 보았으나 소스라치게 뚜렷한 쾌감은 속일 수가 없다.

은재의 위에서 파르르 경련하는 놈의 몸은 시체처럼 서늘했다. 온도를 느끼는 감각마저 너무나도 생생해서 더욱 끔찍했다. 놈은 사정의 여운을 즐기고 있었다. 체액을 토해 낸 뒤에도 후희를 즐기며 은재를 겁간했다.

그런데 순간 놈이 멈칫했다. 어딘가에 묶인 듯 누운 은재의 정수리 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그러자 헐떡거리던 놈의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더니 이내 멈추는 것이었다.

[내, 내일, 또, 올게, 으, 은재, 우리 애기 생길, 때까지.]

퍽! 놈의 성기가 안을 쳐올리며 들어서자 몸이 강하게 흔들렸다. 가라앉지 않은 극치감이 다시 고개를 들며 다리가 절로 벌어진다. 격통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놈이 주는 색정적인 자극이 모든 것을 집어삼킨 뒤였다.

은재는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눈을 질끈 감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숨만 내몰았다.

제발, 이제, 그만.

눈가로 눈물이 흩어진다. 참지 못한 울음에 입술이 파르르 떨리던 그때, 다시 소리가 들렸다.

“선배!”

* * *

시작은 그저 낯선 손길이었다.

어느 날부터인가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고, 때로는 꿈을 꾸면서도 이게 꿈이라는 걸 자각하는 때도 있었다. 조금 피곤하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았다. 스트레스 때문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은재가 조금 심각하게 고민하게 된 것은 어떤 손길을 느낀 뒤였다.

여느 때처럼 자각몽을 꾸었고 ‘아, 내가 지금 꿈을 꾸고 있구나’ 하며 생각한 때였다. 평소처럼 자연히 깨어날 줄 알았는데 그날따라 쉽지가 않았다. 전신이 빳빳하게 굳은 채로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발가락 하나 굽이는 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리기 시작했다.

그때, 갑자기 ‘자신’의 것이 아닌 낯선 감촉이 느껴졌다.

처음은 손이었다. 손등 위로 서늘한 촉각이 닿자 온 신경이 곤두섰다. 그때도 은재는 그저 착각이리라 생각했다. 시험과 과제가 밀려 있던 상태였고, 그래서 과한 스트레스 탓에 환각이 일어난 것뿐이라고.

그러나, 그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 은재의 손등에만 머물렀던 감촉이 서서히 위로 올라왔다. 가슴께를 문지르며 장난을 치더니 이어 희롱하듯 목덜미를 더듬었다.

마침내 은재의 입술까지 올라온 그 무언가는 손가락 끝의 동그란 지문이 느껴질 만큼 세게 비비고 문대었다. 은재는 그제야 이 모든 상황이 그저 착각이 아님을 깨달았다.

그렇게 불현듯이 찾아온 손은 이후로 매일같이 은재의 꿈속에 드나들었다. 하나둘, 어쩌면 그 정도가 아니었던 것도 같다. 잠이 들면 매우 높은 확률로 꿈을 꾸게 되었고, 그 꿈에는 반드시 놈들이 찾아왔다.

매일 그 지경이었으니 하루라도 깊이 잠드는 날이 없었다. 안온했던 일상은 깨어진 지 오래였고 가장 안전해야 할 집이, 제 침대가 가장 두려운 공간이 되고 말았다.

물론, 그들에게서 벗어날 방법을 강구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터가 안 좋아.

―네?

하루는 용하다는 무속인을 찾아갔다. 은재는 평소 귀신, 유령, 점, 사주, 이런 어쭙잖은 것들은 믿지 않았으나 도리가 없었다. 반신반의. 아니, 반도 아닌 그저 실낱같은 희망으로 찾아간 곳이었다.

색색의 한복을 차려입은 무속인은 은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를 지껄이며 이사를 권유했다. 침대도 버리고 이불도 베갯잇도 버리라 했다. 이미 귀신의 흔적이 묻었다나. 예전의 은재라면 코웃음을 치고 나왔겠으나 그럴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무속인이 권유한 대로 이사한 것이 벌써 한 달 전의 일이다. 하지만, 상황은 전혀 나아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은재의 꿈속에 찾아왔고, 잠을 자지 못하는 날들은 늘어만 갔다.

미끈했던 피부는 사막의 모래알처럼 푸석해졌다. 또랑또랑했던 눈동자엔 빛이 바랬고, 눈 밑에는 검은 그림자가 진 지 오래였다. 거울 앞의 제 모습을 보고 있자면 고작 두 달 전과는 전혀 다른 인물처럼 보이는 것이다.

암담했다, 모든 것이.

그 후로도 은재는 이곳저곳을 찾아다녔다. 무엇이든 방법을 찾아야만 했으니까.

어떤 곳은 귀신이 붙어 있다며 굿을 하라 했고, 부적을 쓰라 했다. 또 주변에서는 하루가 다르게 수척해지는 은재를 보곤 기가 허한 것 같으니 한약이라도 지어 보라고 했다. 그래서 했다. 하라는 것은 모조리 다.

‘그런 방법들이 효과가 있었다면, 지금의 내가 이런 꼴이 되진 않았겠지.’

은재는 이 상황이 웃기기까지 했다. 지금까지 오르막길 하나 없었던 제 앞길에 이토록 푹 꺼진 구덩이가 생길 줄은 상상도 못 했으니까.

“은재 선배.”

‘……아, 그렇지.’

진태영을 알게 된 것이 그즈음이었다.

굿도 하고 부적도 쓰고 한약도 지어 먹었던 그때. 별 방법을 다 써도 빠져나올 수 없던 깊숙한 구렁텅이에서 허우적거리던 그때. 몇 날 며칠 잠들지 못해 제정신이 아니던, 딱 그때였다.

같은 학과인 줄도 몰랐던 데다 단 한 번도 대화해 본 적 없는 그런 인간이었다. 은재의 인생이 평탄하게 흘러갔다면 결코 엮일 일도 없었을 그런 인간.

‘첫인상은 어찌나 곰 같았는지.’

눈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앞머리가 긴 데다 커다란 안경 때문에 도무지 얼굴을 알아볼 수도 없었다. 음침하고 우울하고, 도통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지 알기 어려운…….

“선배.”

그때, 몸이 흔들렸다. 사지가 굳은 것처럼 뻣뻣했던 감각이 느른하게 돌아온다. 저 멀리서 들리던 소리가 점점 가까워졌다.

“선배, 일어났어요?”

“…….”

은재는 발가락부터 움직였다. 엄지부터 새끼까지 천천히 힘을 주었다. 그러자, 꼼짝도 하지 않았던 몸이 원하는 대로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제야 은재는 꾹 감았던 눈을 떴다. 내내 흘린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가 흔적으로 남아 있었다.

“……진태영.”

눈앞에는 그가 있었다. 걱정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진태영이. 눈의 반을 가리고 있는 저 거슬리는 앞머리도 여전했다.

“네, 선배.”

음역대가 낮은 굵직한 음성이 울렸다. 귀신의 것이 아닌 사람의 목소리였다.

은재는 순간 긴장의 끈이 풀리는 걸 느꼈다. 반쯤 뜬 눈동자가 태영에게 머물곤 이내 천장으로 향했다.

집이었다. 은재의 자취방.

눈을 뜬 곳이 자신의 공간임을 인식하자 맥이 더 풀리고야 말았다. 은재는 팔을 올려 제 얼굴을 가렸다. 그 상태로 조금은 더 울었던 것 같다. 이미 말랐을 눈가가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진태영은 물론이고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았던 얼굴이다. 은재는 손등으로 눈가를 덮은 채로 숨을 골랐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어떻게 된 거야, 설명해.”

검은 눈동자를 굴리던 태영이 은재의 말에 답했다.

“집에 가려는데 선배가 술자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서요. 걱정돼서 보러 갔어요.”

“……그래서?”

“제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잠든 상태여서, 우선 업고 이리로 왔죠.”

“하…….”

은재의 입에서 한숨이 나왔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했을까. 저 곰 같은 새끼의 등에 업힌 자신의 모습을.

학과에 그 흔한 친구 한 명도 두지 않는 허은재였다. 그런데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수상한 신입생과 함께 사라졌으니 남은 사람들이 얼마나 입방아를 찧었을지 뻔했다.

게다가 그 자리에는 진태영과 처음 만났을 때 함께 있었던 인물들도 있었다. 당시 제정신이 아닌 상황이었기에 제대로 수습도 못 했었다. 아마 그 일까지 엮어서 말도 안 되는 소문을 만들어 내었을지도 모른다.

‘괜한 오해를 받는 것이 싫어서 평소 학교에서는 아는 척도 안 했었는데.’

은재의 입에서 실소가 터져 나왔다.

“사람들 눈에 안 띄게 데려올 수는 없었냐?”

“없었죠. 그런 방법은.”

“다 쳐다봤을 거 아냐.”

“네.”

“하…….”

절로 눈썹이 찌푸려진다.

불쾌했다.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등과 제 정액으로 더럽혀진 속옷 안이 느껴져서일까. 아니, 그것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제 마지막 이성이 끊어지기 직전인 탓이었다.

“잠든 지 얼마나 된 거야.”

“글쎄요. 얼마 안 됐을 텐데. 선배를 집에 데려다 놓고 술 깨는 음료 사러 다녀왔으니까.”

침대 옆 탁자 위에 숙취 해소제가 놓여 있었다. 은재는 그쪽으로 잠깐 눈길을 던진 뒤, 다시 태영을 바라보았다.

자신의 상태를 누구보다 잘 아는 그였다. 그런데도 저런 무신경한 말을 내뱉다니. 태영에게는 얼마 되지 않는 시간이었을지라도 은재에게는 억만 겁의 시간이나 다름이 없었다.

은재는 평소처럼 무심하고 무신경한 태영을 원망 섞인 시선으로 응시했다. 날카로운 적막이 방 안에 내려앉자, 그가 쭈뼛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차라리 무슨 말이라도 해 줬으면 했다. 괜찮은지, 또 가위에 눌린 것인지. 상황이 상황인 만큼 할 말은 해변에 깔린 모래알처럼 많지 않은가. 그러나, 태영은 묵묵부답이었다.

“……효과가 없잖아.”

“효과가 없었어요?”

“어.”

“이상하네요. 지난번까지는 잘 들었는데.”

“알아. 그런데……, 점점 유지되는 시간이 짧아지는 것 같다고.”

“그럼 다시 한번 해 볼까요? 어쩌면 접촉한 시간이 짧아서 그런 걸지도 몰라요. 확실히 기운이 사라지긴 했네요. 내성 같은 게 생기진 않을 텐데. 선배 같은 경우는 처음이라 계속 시도해 보는 수밖에 없어요.”

태영의 말에 은재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만 같았다. 마치 자신을 실험실 표본처럼 다루는 듯하여 비참했다.

태영이 은재를 대하는 태도와 은재가 태영을 대하는 마음은 전혀 달랐다. 은재에게 태영은 실낱같은 희망이자 의지할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었다. 그러한 제 속내를 인정하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이 있었는지 그는 알까.

‘이 끔찍한 악몽만 아니었다면, 볼일도 없었을 텐데.’

여러 생각에 속이 뒤집힌다. 은재는 덤덤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태영에게 베개를 집어 던졌다. 퍽! 푹신한 파열음이 터졌다.

“……이 변태 오타쿠 새끼야. 넌 지금 즐거워, 이 상황이? 아주 흥미로워 죽겠지?”

태영이 곁에 있었다면 그 악몽에서 진작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았더라도 깨웠으면 되었을 텐데, 그랬다면 그 끔찍한 꼴을 당하지 않고도 일어날 수 있었을 터였다.

자신이 그런 몹쓸 짓을 당하고 있는데도 저 태연자약한 얼굴로 지켜만 보고 있었던 걸까. 분명 괴로워했을 테다. 꿈속에서 무슨 짓을 당하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더라도 가위에 눌린다는 사실은 그도 알고 있었다.

태영이 귀신을 볼 수 있고, 귀신을 쫓을 수 있다는 오직 그 이유만으로 곁에 두었다. 그 외엔 아무 이유도 없었다.

그런데, 남의 속은 뒤집혀 문드러지는데도 저런 태평한 얼굴이라니.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꼭지가 도는 듯했다.

“재미있냐고, 이 새끼야! 왜 말이 없어. ……너, 설마 일부러 안 깨운 거냐?”

은재는 옆에 있던 베개를 하나 더 집어 들어 태영에게 던졌다.

이번에도 태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벌겋게 달아오른 은재의 얼굴을 고요히 바라볼 뿐이었다. 그의 검은 눈동자에 은재가 담겼다. 파문 하나 없는 호수의 밑바닥처럼 검고 검었다.

“……아뇨. 선배, 죄송해요.”

은재의 일갈에 태영이 꺼낸 말은 겨우 그게 다였다. 덩치는 산만 하면서 늘 저렇게 겁에 질린 곰처럼 군다.

귀신이나 혼령 같은 이야기에는 눈을 빛내며 조잘조잘 잘도 떠들어 대지만, 평소에는 저런 식이었다. 이번에도 역시나 고함 한 번에 기가 팍 죽어 버렸다. 태영은 쭈뼛거리며 입술을 꾹 깨물고는 금세 고개를 숙였다.

“내가 너한테 내 집 비밀번호까지 알려 준 이유를 몰라?”

“알아요.”

“집에 옮겼으면 다야?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았으면 깨웠어야지. 넌 귀신 볼 수 있다며.”

“죄송해요.”

“이 등신아, 죄송하다고만 하지 말고! 이 방법이 안 통하면 다른 방법을 찾든가 해야 할 거 아니야. 난 진짜 죽고 싶다고, 알아?!”

목소리가 떨렸다. 어쩌면 태영이 눈치챘을지도 모른다. 지금의 은재가 제정신이 아니라는 것을.

태영에게 화풀이하면서도 아직 놈의 촉감이 선연한 은재의 손등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그 끈적끈적하고 차가운, 불유쾌한 감각이 온몸의 곳곳에 남아 있다. 놈에게 부여 잡힌 허리가 욱신거렸고 또 마음대로 희롱당한 아래가 뜨거웠다.

“아, 알았냐고!”

은재는 자꾸만 떨리는 손끝을 감추려 이불을 움켜잡았다. 그리고 목소리가 떨리지 않도록 부러 크게 소리쳤다.

“…….”

그러나, 눈앞의 남자는 답이 없었다. 그저 알 수 없는 눈빛으로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 태영이 입을 연 것은 은재가 한 번 더 소리를 지르기 직전이었다.

“선배, 잠깐만요.”

태영의 커다란 손이 은재의 목덜미로 쑥 들어왔다.

평소와는 다르게 행동이 재빨랐다. 예상하지 못한 그의 손짓에 은재는 일순 겁을 집어먹었다. 분명 눈에 띄게 움찔거렸을 터였다. 은재는 자존심이 상해 미간을 구기며 입술을 비죽 내밀었다.

“……뭐, 뭔데.”

긴장으로 경직된 은재의 어깨 위로 손길이 닿았다. 원을 그리듯 어루만지던 온기가 서서히 위로 올라붙는다. 태영은 속내를 짐작할 수 없는 얼굴로 은재의 뒷덜미를 매만졌다.

“있어서요.”

묵직한 목소리가 방 안을 울렸다.

담백한 투가 건조한 가을바람처럼 차게 느껴졌다. 은재는 심장이 쿵, 아래로 떨어지는 듯했다. 미련한 곰처럼 굴던 태영의 눈빛이 일순 돌변했기 때문이다.

“……뭐, 뭐가?”

태영은 답이 없었다. 볼썽사납게 떨리고 있는 은재의 목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그는 꽤 오랜 시간 동안 허공을 노려보았다. 몇 초. 아니, 몇 분이나 흘렀을까. 은재로서는 째깍거리는 시곗바늘 소리가 이어질수록 목구멍이 쪼그라드는 듯했다.

“선배.”

은재의 목덜미를 뒤덮은 손바닥이 천천히 떨어졌다.

“이제 갔어요.”

실로 덤덤한 투였다. 마치 별것도 아닌 일이라는 듯, 벌레 한 마리 쫓아낸 것처럼 가볍게 말했다.

“은재 선배, 괜찮아요?”

허옇게 질린 은재를 보며 태영이 물었다.

이불을 부여잡은 은재의 손등이 사시나무처럼 떨리고 있었다. 태영의 손이 은재의 손등 위로 올라왔다. 맞닿은 온기가 점점 사이로 퍼진다. 은재는 그제야 물기가 어린 눈을 치켜떴다.

“……참 빨리도 묻는다.”

괜찮을 리가 있을까. 저 미련 곰탱이 같은 놈은 지금 저걸 질문이라고 하는 건가.

은재는 눈썹을 찌푸렸다. 꿈인 것이 믿기지 않을 만큼 속이 아렸다. 화끈거리는 아래의 감각도 여전했다.

그렇지만 솔직하게 다 털어놓을 수는 없었다. 자신이 무슨 꿈을 꾸는지, 꿈속에서 그들에게 어떠한 일을 당하는지 말이다.

“집에 갈 거야?”

“네, 이제 가야죠.”

침대에 걸터앉았던 태영이 몸을 일으켰다. 그리 좁은 방은 아닌데 그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천장이 낮아 보였다. 태영의 두툼한 어깨에 반쯤 가려진 벽시계의 시침은 자정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래, 꺼져.”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건 죽어도 싫었다. 아쉬운 소리가 혀뿌리에서 턱 걸려 도무지 나가질 않는다. 그런 성격이었다, 허은재란 인간은.

“선배, 혹시……. 안 무섭겠어요?”

태영이 문을 향해 가던 몸을 돌렸다. 이미 외투를 입고 가방까지 멘 주제에 그리 묻는다. 무표정한 얼굴에서는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다.

“시끄러워, 무슨 상관이야.”

“아뇨. 혹시나 해서요. ……한 번 더 할까요?”

“아, 됐다고! 어차피 소용도 없는데! 불 끄고 빨리 가기나 해.”

은재는 신경질적으로 짜증을 부렸다. 눈썹을 찡그리더니 침대에 널브러진 이불을 잡고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분명 더 불안해질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태영이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그래도요, 선배.”

끼익, 매트리스가 한쪽으로 기울었다. 태영의 무게에 못 이겨 비명을 지르는 듯했다.

태영의 낮은 음성이 잔흔을 남기며 기척이 가까워졌고, 은재를 가리고 있던 이불이 천천히 내려갔다. 어느새 이불을 꾹 쥐었던 힘이 풀린 은재가 그를 가만히 응시했다.

“얼른요.”

짐짓 다정한 어조였다. 무신경하고 덤덤하고 귀신 이야기에만 흥미를 보이는 주제에 어느 날은 또 완전히 달랐다. 도통 알 수가 없는 놈이다.

“시끄―.”

태영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그의 앞머리가 은재의 이마에 닿았다. 사각거리는 감촉이 싫지 않았던 것 같다.

비스듬히 기운 고개 탓에 태영의 다부진 턱선이 드러났다. 곧, 따스한 촉각이 입술에서부터 퍼졌다. 은재는 살며시 눈꺼풀을 닫았다. 완전히 가려진 시야 너머로 부드러운 것이 뒤섞이고 있었다.

혀뿌리에 감겨드는 말캉한 것이 입안을 휘저었다. 겨우 벌어진 입술 사이로 발간 살덩이가 맞물린다. 숨이 턱 막힐 만큼 뜨거웠다. 악몽에서처럼 차갑고 불쾌한 감각과는 전혀 달랐다. 은재는 부드럽게 쏟아지는 태영의 혀를 헐떡이며 받아 물었다.

태영이 은재의 턱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왼쪽으로 기울었던 고개가 곧 오른쪽으로 비틀어졌다. 맞닿았던 면이 떨어졌다가 다시금 맞물린다. 그 사이로 축축하고 습윤한 소리가 새었다. 은재의 귓가가 홧홧하게 달아오른 순간이었다.

“읍, 으음―.”

점점 숨이 부족했다. 은재가 그의 어깨에 손을 올리자, 태영이 부드럽게 움직이며 은재가 숨 쉴 공간을 내주었다.

곤두섰던 신경이 점차 느른하게 풀렸다. 정말 태영의 말대로 그의 기운이 제게로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입가에서 퍼진 열기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 아래로, 또 아래로 퍼진다.

“―하아, 읏.”

은재는 자꾸만 감겨 오는 태영을 겨우 밀어내었다. 더 이상은 위험하다, 순간적인 판단이 들어서였다. 조금 떨어진 틈 사이로 태영의 숨결이 느껴졌다. 쿵쿵, 요란하게 뛰는 은재의 심장과는 달리 다소 흐트러진 정도의 호흡이었다.

‘……짜증 나.’

이번에도 은재의 자존심이 팍 상하고 말았다.

“됐……, 어. 이제.”

“아직 부족한데요. 조금 더 채워야 해요.”

아무 변화도 없는 무표정한 얼굴을 한 주제에 그리 말하며 다시 얽혀드는 것이다. 재차 다가오며 자신의 허리에 손을 감는 그를 은재가 팍 밀어내었다.

“아, 됐다고. 이 정도면 충분해.”

“……알았어요, 그럼.”

태영이 순순히 떨어졌다. 침대 아래로 내려 뒀던 가방을 손에 들고 방문으로 향했다. 은재는 차마 그와 눈을 맞출 수가 없어 애꿎은 이불만 노려보고 있었다.

“혹시 무슨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그래.”

“갈게요.”

곧 달칵, 소리와 함께 시야가 암전되었다. 이어 문을 여닫는 소리가 들렸다. 태영의 기척은 사라졌고, 자취방 안에 은재 홀로 남게 되었다.

은재는 까마득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침대에서 일어나 조명을 켰다. 그리고 되뇌었다.

‘괜찮아, 괜찮아…….’

태영의 기운이 내게로 넘어왔을 테니까. 설령 이번에도 그 방법이 효과가 없을지라도 잠들지만 않으면 된다.

은재는 가방을 뒤적이다가 문득 거울 앞에 섰다. 시커멓게 내려앉은 눈두덩이 보였다. 수척해진 제 얼굴을 보고 있자니 속이 쓰렸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안색이었다.

태영이 가지 않았다면 조금은 깊게 잠들 수 있었을까. 그러나, 어쩔 수 없다. 그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을 수는 없는 일이다. 귀신에게 그런 짓을 당한다는 말도, 무서우니 제발 곁에 있어 달라는 솔직한 부탁조차 입이 찢어져도 말할 수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이 끔찍한 악몽에서 벗어날 수 있는, 다른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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