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프레이는 다가올 죽음을 대비하고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호전되고 있는 몸 상태에 일말의 희망을 걸고 있었다. 어쩌면 중환자실 같은 이 별장에서 벗어나 지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
“프레이. 그동안 여기서 지내기 불편했지?”
페트릭이 침대맡에 앉아 프레이의 뺨을 어루만졌다. 순간 프레이는 연습한 듯 웃으며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아니야. 그런데 나…… 어디 가?”
“몸 상태도 이 정도면 예전보다 훨씬 많이 나아졌고, 눈 수술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해서. 많이 겁나겠지만 내가 옆에 있을 거니까…….”
“눈 수술……?”
“응.”
프레이는 무뎌진 손끝으로 눈가를 어루만졌다. 합병증으로 뿌옇게 변한 눈을 치료받을 수 있을 만큼 건강이 회복될 줄은 몰랐다.
“잘 됐으면 좋겠다. 네 얼굴 볼 수 있게.”
“전신 마취하고 하는 거라고 하니까 너무 걱정하지 마.”
“응. 걱정 안 해.”
프레이는 확신에 찬 듯 속삭였다. 페트릭이 걱정하지 말라고 했기 때문에. 그래서 프레이는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일 별장에서 병원으로 갈 거야.”
“응.”
“불안하진 않아?”
“……네가 있잖아. 불안하지 않아.”
프레이는 맹목적인 신뢰를 보내며 페트릭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말과는 달리 페트릭의 손을 잡은 그의 손은 미미하게 떨리고 있었다.
***
수술은 전신 마취를 한 후 진행되었다. 프레이의 상황을 잘 아는 노련한 의사가 집도했다. 수술실의 불이 켜진 후 페트릭은 수술실 밖의 의자에 앉아 초조하게 수술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나 예정된 수술 시간이 한참 지났음에도 ‘수술 중’에 들어와 있는 불빛은 꺼질 줄을 몰랐다.
“신이시여, 제발…….”
페트릭은 믿지도 않는 신에게 기도하며 프레이가 자신에게 돌아오길 바랐다. 하지만 그걸 비웃기라도 하듯 수술실의 불은 그로부터 한참 동안 꺼지지 않았다.
***
페트릭은 1인용 VIP 병실에 누워 잠들어 있는 프레이의 머리맡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프레이는 좀처럼 눈을 뜨지 못하고 있었다. 전신 마취를 하고 깨어나야 할 예정일은 이미 오래전에 지났다. 기초 체력이 부족한데 수술할 체력이 되자마자 수술한 케이스라 회복이 다소 더딘 편이라고 의사는 설명했다.
물론 페트릭은 의사의 멱살을 잡았고, 최고의 의료진이 수시로 프레이의 바이탈을 체크하고 있었다.
“프레이. 돌아오면 해줄 말이 많아.”
페트릭이 뼈만 남은 프레이의 손을 주물러 주었다. 뻣뻣하게 굳어버린 작은 손의 주인이 자신을 버리고 죽어버릴까 봐 페트릭은 불쑥 겁이 났다.
“보여줄 것도 많아. 그러니까 어서 돌아와…….”
페트릭은 침대맡에 이마를 대고 중얼거렸다. 그때였다. 페트릭이 잡고 있는 손이 꿈틀거리며 작게 움직였다.
그 미세한 움직임에 페트릭은 의료진을 불렀고 달려온 의료진들이 급히 프레이의 상태를 확인했다. 이 주 동안 의식이 없던 프레이가 돌아온 순간이었다.
***
프레이는 느리지만 착실하게 재활 중이었다. 처음에는 난간이나 링거 거치대를 잡고 걷던 프레이는 이제 난간 없이도 꽤 먼 거리를 스스로 걸을 수 있었고, 수프에 들어간 자잘한 야채도 소화할 수 있었다.
“불편한 건 없어?”
페트릭이 묻자, 프레이는 한참을 머뭇거리다 이렇게 중얼거렸다.
“수프 말인데……. 너무 먹어서 솔직히 좀 질려.”
“그럼 내일은 다른 수프 해오라고 할게.”
“응. 고마워.”
“고맙긴.”
페트릭은 살이 조금 오른 프레이의 붉은 뺨을 엄지로 쓸었다. 그러자 프레이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너무 좋다.”
“나 같은 새끼가 뭐가 그리 좋다고.”
페트릭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그러자 프레이가 눈을 깜빡이며 속상한 표정을 지었다.
“왜 그렇게 말해.”
“맞잖아. 솔직히…….”
페트릭은 프레이의 마른 손을 바라보았다. 건강이 호전되었으나 이미 독한 약물에 빠지고 물러져 버린 손톱이 가슴을 할퀴고 지나가는 듯한 통증을 일으켰다.
“나랑 같이 있는 거 싫지는 않아?”
페트릭은 조그맣게 변해버린 프레이의 손톱을 소중히 어루만지며 물었다. 그러자 프레이는 입술을 작게 벌렸다가 다물었다. 뭐라고 대답해야 그의 심기가 상하지 않을지 걱정부터 앞섰다.
“나는…….”
프레이가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여전히 네가 좋은데…….”
시력을 회복한 지 얼마 되지 않은 눈동자는 갈 곳을 잃어버린 채 결국 페트릭에게로 향했다.
“……이런 내 마음이 너에게 부담이 돼?”
프레이는 드디어 페트릭이 자신에게 질렸다고 생각했다. 거치대 없이는 몇 미터도 혼자 걷지 못하는 데다가 먹는 것도 토해버리기 일쑤인 환자를 그동안 사랑으로 보살펴 준 것만으로도 고마웠다.
프레이는 눈물을 글썽이며 자신의 첫사랑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두 눈으로 보고 싶었다. 그때였다.
“아냐. 프레이. 그런 의도로 물어본 게 아니었어.”
페트릭이 프레이를 세게 껴안았다. 메마른 등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껴안은 채 페트릭은 프레이의 귓가에 몇 번이고 사랑한다고 속삭였다.
“사랑해. 정말이야. 프레이.”
“……나도 사랑해.”
페트릭의 사랑 고백에 안심한 프레이는 눈물을 떨궈내며 눈을 감았다. 페트릭이 지금까지 자신을 버리지 않았음에 감사했다. 눈을 감으면 여전히 장난감 취급을 받던 날들도 떠올랐지만, 이제는 자신의 곁에서 병간호하는 날들이 더욱더 많이 떠올랐다.
“너만 괜찮다면, 루시를 소개해 주고 싶어. 너의 기억에는 없지만, 너와 나의 아들이니까.”
페트릭이 이제 혼자 곧잘 걸어 다니는 자신과 프레이의 아들을 떠올렸다. 비록 옛날에 자신이 프레이에게서 친권과 양육권 모두 빼앗아버리긴 했지만, 프레이가 낳은 아들이라는 건 명백한 사실이었다.
“루시라면… 그때 사진 보여줬었던 아이를 말하는 거야?”
“응.”
“……내가 아이를 낳았다는 게 안 믿겨.”
“직접 보면 믿어질 거야. 너와 나를 반씩 닮았으니까.”
프레이는 루시를 보겠냐는 페트릭의 제안에 잠시 머뭇거렸다. 기억에도 없는 아들이 있다는 것도 당황스러웠지만, 아직 눈으로 직접 볼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하지만 대답은 하나로 정해져 있다는 걸 프레이는 잘 알았다.
“그럴게.”
프레이 비셔스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제안을 거절하지 않는다. 그건 깊게 각인된 습관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