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의 종말 IF 외전
1.
정원에는 프레이를 위한 벤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프레이가 컨디션이 조금 좋은 날에는 정원 구경을 즐기는 터라 페트릭이 재빠르게 설치한 벤치였다.
“여기. 꽃다발.”
“고마워. 향기 좋다.”
프레이는 제 앞에 내밀어진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프레이의 눈에는 여러 가지 색이 뭉그러진 무언가로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꽃다발은 싱싱하고 화사한 향기를 내뿜고 있었다. 합병증으로 인해 여전히 시야는 뿌옇기만 했고, 간헐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프레이는 아직도 페트릭의 별장에 있었다.
***
의료진들은 실낱같은 프레이의 생명을 지키기 위해 늘 별장에서 동분서주하며 일했다. 그 결과 아직 프레이는 페트릭의 옆에 존재했다.
존재하는 것 외에 달리 하는 일이 없는지라 프레이는 자신의 곁에서 떨어지지 않는 페트릭과의 대화가 일상의 전부이자 유일한 유흥거리였다.
“기분은 좀 어때?”
페트릭이 묻자 프레이는 그림 같은 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괜찮아. 너랑 이렇게 있으니까 좋아.”
프레이는 페트릭의 손을 더듬거리며 잡았다. 그러자 커다란 손이 깍지를 껴왔다. 프레이가 손에 힘을 주어 그 손을 마주 잡자 살이 내린 하얀 뺨에 페트릭이 입술을 맞췄다.
“눈 수술은 네 체력이 조금 더 회복되면 할 수 있다고 하더라.”
“난 이대로도 괜찮은데….”
“당장 내 얼굴도 안 보이면서.”
“…미안.”
프레이는 고개를 푹 숙이며 속삭였다. 그러자 목의 가운데로 뼈가 선명하게 도드라졌다. 유동식이나 수프 종류를 먹고 있긴 했지만, 절반은 토하는 통에 살이 찔 시간이 없는 프레이의 하얀 얼굴은 곧 다가올 죽음을 늘 대비하듯 담담하고 고요했다.
“페터.”
“응.”
“난 이제 괜찮으니까 가서 일해.”
“프레이. 나는 바쁘지 않아. 솔직히 말하면 나, 일 그만뒀어.”
“…응?”
“일할 시간에 조금이라도 널 더 보고 싶어서 그냥 잠깐 쉬고 있어.”
“페트릭…….”
갈 곳을 잃은 프레이의 손이 페트릭의 얼굴이 있는 곳을 더듬거렸다. 페트릭은 조심스러운 손길을 느끼며 자신이 저질렀던 과오로 인해 망가져 버린 사랑을 조심스럽게 품에 안았다.
“혼낼 거야?”
프레이는 자신을 혼낼 거냐는 페트릭의 말에 눈을 크게 떴다. 자신이 페트릭을 혼내는 장면을 상상하자 웃음이 나왔다. 자그마한 웃음에 페트릭은 뭐가 그렇게 웃긴지 물었다.
“그냥 내가 너랑 있는 것도 꿈같은데 내가 왜 너를 혼내.”
그간 많은 일이 있었지만, 아직도 프레이의 첫사랑은 페트릭이었다. 그건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
“우욱…….”
수프를 삼키던 프레이가 결국 헛구역질을 했다. 한 스푼씩 떠주던 페트릭이 급히 스푼을 내다 던진 뒤, 프레이가 흘린 수프를 손수건으로 닦아냈다.
“괜찮아?”
“미안……. 더 못 먹을 거 같아.”
“치우라고 할게. 괜찮아. 미안해할 것 없어.”
페트릭은 트레이에 담긴 수프와 약간의 빵을 치운 뒤 돌아와 고개를 숙인 채 손가락만 만지작거리는 프레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래도 오늘은 어제보다 많이 먹었어. 잘했어.”
“나 잘했어?”
“응.”
“……다행이다.”
프레이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만지는 페트릭의 페로몬을 느끼며 손톱 끝을 만졌다. 독한 약에 뭉개져 부드러워진 손톱은 죽음이 코앞까지 닥쳤다는 걸 일깨우는 것만 같아 두려웠다. 손톱을 만지는 감각마저도 둔해지고 있었다.
“손톱은 왜 그렇게 못살게 굴어.”
“……그냥.”
프레이는 자신의 감각이 점점 둔해지고 있단 사실을 페트릭에게 숨기고 싶었다. 다 죽어가는 시체 같은 인간과 함께하고 싶은 사람 따윈 없을 테니까.
“예쁜 손톱 다 상했네.”
“예쁘긴…….”
프레이는 페트릭이 잡고 있는 쪽 손을 조심스럽게 빼내며 만성이 된 복부 통증을 최대한 티 내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프레이의 미간이 찌푸려지는 걸 확인한 페트릭이 의료진을 불러오는 게 더 빨랐다. 프레이의 손등에 링거를 연결한 의료진은 진통제를 투여했다.
“아프면 아프다고 말하라고 했잖아.”
“별거 아니었어.”
아픔을 참는 것에도 서서히 내성이 생겼다. 그래서 프레이는 어지간한 아픔에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그건 아픔마저 허락받아야 했던 오랜 시간이 남긴 잔재였고, 무엇보다 프레이는 페트릭이 자신을 버릴까 봐 겁이 났다.
환자를 돌보는 일이 얼마나 지긋지긋하고 지루한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만 하더라도 이렇게 지루한데 그런 자신의 곁에 딱 붙어 있는 페트릭의 심정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심심하지?”
“아니. 너랑 있으면 괜찮아. 심심하지 않아.”
페트릭은 프레이의 뺨을 감싸 쥐며 입술을 맞부딪혔다. 프레이가 습관처럼 입술을 열어주자 촉촉한 혀가 프레이의 혀를 살짝 핥다 빠져나갔다.
고작 몇 초밖에 되지 않는 짧은 키스에도 숨 가빠하는 프레이를 알기에 그는 자신의 욕망을 억눌렀다. 프레이가 숨을 헐떡이며 더듬더듬 페트릭의 손을 마주 잡았다.
“페터. 만약에 내가 더 건강했더라면 우린 어떻게 지냈을까?”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을 거야. 넌 침대에서 내려올 일이 없을걸.”
페트릭이 농담 섞인 진담을 건네자 프레이는 희미한 웃음을 지으며 그의 손을 어루만졌다.
“침대 위에서 뭐 할 건데?”
“당연히 야한 짓이지.”
당당하게 대답해오는 페트릭을 보며 프레이가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지금은 야한 짓 못 해서 어떡해?”
“죽을 맛이야.”
“하하.”
프레이는 어깨를 축 늘어트리며 약한 모습을 보이는 페트릭의 시무룩한 모습에 웃었다. 늘 자신에게 고압적으로 굴던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기침 한 번에도 쩔쩔매고 있었다.
“……내가 힘내 볼게.”
프레이가 자신 없다는 듯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넌 충분히 힘내고 있어. 너무 신경 쓰지 마.”
페트릭이 프레이의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말 그대로 프레이는 충분히 힘을 내고 있었다.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인데도 그는 하루하루를 버텨냈다.
점점 희미해져 가는 코튼향 페로몬을 깊숙이 들이마신 페트릭은 프레이의 입술을 한 번 더 훔친 뒤 뒤로 물러났다.
“오늘 괜찮으면 좀 걸어 볼래?”
“응. 어디까지 가 볼까?”
“정원까지?”
“좋아.”
프레이는 직접 신발을 신겨주는 페트릭을 보며 회상에 잠겼다. 예전엔 이런저런 일들을 해내지 못하면 벌을 받았는데……. 지금은 모든 것들이 다 꿈처럼 느껴졌다.
“다 됐다. 내려올 때 조심해.”
“응…….”
프레이는 페트릭이 내민 손을 잡고 침대에 내려와 위태위태한 걸음으로 방 안을 걸었다. 뻣뻣하게 굳은 다리 근육은 조금만 걸어도 끔찍한 통증을 프레이에게 선사했다. 하지만 프레이는 내색하지 않고 묵묵히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내디뎠다.
“……음.”
“오늘은 그래도 많이 걸었네.”
“아냐. 조금 더 걸을 수 있을 거 같아.”
프레이는 입술을 앙다물고 몇 걸음을 더 옮기더니 뒤를 돌아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페트릭을 불렀다.
“페터…….”
“잘했어.”
페트릭은 성큼성큼 다가와 프레이를 안아 올렸다. 프레이는 익숙하게 페트릭의 목을 감싸 안았다. 페트릭에게 안기는 건 일상이었다. 안정적인 자세로 페트릭의 품에 기댄 프레이가 말했다.
“걷는 것보다 안겨서 옮겨지는 게 익숙해져서 큰일이야.”
“뭐 어때. 평생 내가 안아서 옮겨줄 건데.”
평생을 약속하는 페트릭의 말에 프레이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가늠해 봤다. 그리 길지는 않을 터다. 주기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몸과 점점 말라가는 페로몬 샘으로 인한 부작용들이 점점 그의 생명을 앗아가고 있었다.
“평생 내가 네 옆에 있었으면 좋겠어?”
프레이는 어쩌면 단순하기 그지없을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졌다. 그러자 페트릭이 멈칫하더니 시선을 내려 프레이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평생, 네 옆에 있는 게 싫어?”
그의 물음에 프레이는 자신이 페트릭에게 당했던 취급들을 떠올렸다. 장난감. 오로지 그 단어로만 표현이 가능한 취급을 받았던 기억들이 하나둘 물 위로 떠올랐다.
“나는…….”
프레이가 말을 멈췄다. 페트릭을 만나 그 이후로 지금의 상태가 되었지만, 여전히 그는 빛나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다.
“……싫을 리가 없잖아.”
“내가 했던 짓들 때문에 네가 날 싫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도 너를 만나서 행복했어.”
“지금은?”
“지금도.”
프레이는 자신을 안고 있는 페트릭의 손이 잘게 떨리는 걸 느꼈다.
“고마워.”
페트릭은 어쩌면 불안했는지도 몰랐다. 프레이가 자신을 거절할까 봐. 그는 매일 밤잠을 설치며 프레이의 침대 맡을 지켰다. 수십 번의 발작과 호흡 곤란, 심정지를 곁에서 지켜보면서 자신이 저질렀던 일들을 하나하나 후회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으니 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곁에 남은 프레이에게 속죄하는 일뿐이었다.
“정원에 장미가 아름답게 피어 있어. 정원으로 가 보자.”
“응.”
프레이는 연습한 것처럼 환하게 웃었다.
***
느리지만 프레이의 발작 횟수도 줄어들고, 말라붙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던 페로몬 샘이 조금이나마 치료되면서 경직되어 있던 분위기의 별장에는 뒤늦게 봄바람이 불어왔다. 잘 가꿔진 정원에 난데없이 그네가 설치되자 프레이가 조심스러운 어투로 패트릭에게 물었다.
“저기 있잖아, 페터. 그네는 왜 설치한 거야?”
페트릭이 건네준 사과를 베어 물은 프레이가 물었다.
“동심을 좀 찾아보려고?”
페트릭의 엉뚱한 대답에 프레이는 도무지 영문을 모르겠단 얼굴이었다.
“그거 다 먹고 나면 그네 타러 가자. 어때?”
“좋아.”
프레이는 페트릭의 말에 싫다고 말하지 않는다. 페트릭의 제안을 거절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게 조교된 것도 있지만 프레이는 원래부터 고분고분한 성격이었다.
“따뜻하게 입고 나가면 안 추울 거야.”
“응.”
프레이가 온순하게 고개를 숙였다. 중환자실을 방 안으로 그대로 옮겨 온 듯한 곳에서 온종일 있는 것도 지쳐가던 찰나, 정원에 새로 생긴 그네에 관심이 갔다.
“어떻게 생겼어?”
“벤치처럼 생겼는데, 튼튼한 거로 가져다 놨어.”
“그렇구나.”
프레이는 눈을 감고 그네의 모양을 상상해 보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페트릭은 고용인에게 담요와 목도리를 가져오라고 이르며 프레이의 손을 잡았다.
“나가 보자.”
“……응.”
프레이는 제 어깨 위에 얹힌 담요도 무거워하는 기색이었다. 목도리를 두를 땐 숨을 조금씩 가쁘게 쉬면서 링거 거치대를 움켜쥐었다.
“너무 껴입혔나…….”
페트릭이 혼자 중얼거렸다. 그 소리를 기민하게 알아챈 프레이는 괜찮다며 링거 거치대를 끌었다. 드르륵 소리를 내며 움직이는 거치대를 지지대 삼아 발을 내딛는 프레이는 페트릭이 이끄는 대로 별장을 벗어나 정원에 도착했다.
정원에 나오자 프레이는 쏟아지는 햇빛에 눈살을 찌푸렸다. 줄곧 실내에만 있었던 데다가 시력이 나빠진 탓에 온갖 색의 꽃들이 만개한 정원은 프레이에게 어지럼증을 일으켰다.
“괜찮아?”
“조금 어지러워서.”
“오랜만에 밖에 나와서 그런 모양이다. 다시 안으로 들어갈래?”
페트릭의 부드러운 권유에 프레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방 안에 있는 것도 진력이 났다. 힘없이 침대에 누워 죽을 날짜를 기다리며 커다란 창밖 너머를 바라보는 것도 한계에 부딪힌 것이다.
“그럼 안아서 그네까지 데려다줄게.”
“응…….”
프레이는 손을 뻗어 페트릭의 목덜미를 끌어안았다. 그러자 고용인이 눈치껏 링거 거치대를 끌었다. 페트릭은 성큼성큼 걸으며 정원을 가로질렀다. 그네가 설치된 곳까지 단숨에 도착한 그는 고용인에게 프레이가 앉을 곳에 두툼한 방석을 깔게 했다.
“다 왔어?”
“응. 이제 내려줄게. 흔들리는 게 어지러우면 알려줘.”
“그럴게.”
프레이가 유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페트릭이 방석 위에 도자기 인형을 내려놓듯 조심스럽게 프레이를 내려놓았다. 푹신한 방석 위라 그런지 엉덩이가 딱히 아프지는 않았다.
링거 줄이 꼬이지 않게 그네 옆에 링거 거치대를 가져다 놓은 고용인은 둘만의 시간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걸음을 재촉해 멀리 사라졌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굉장히 까다로운 고용주였고, 그의 품 안에 있는 연인의 일이라면 눈이 돌아갈 정도로 예민하게 굴었기 때문이었다.
프레이 비셔스. 열성 오메가.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싸고도는 연인. 건강이 좋지 않아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일반 고용인들에게 알려진 바는 이게 전부였다.
“담요도 여미고. 착하지. 코코아 한 잔 갖다 달라고 할까?”
페트릭은 프레이의 뺨에 키스하며 물었다. 프레이는 눈을 감은 채 페트릭의 입술이 멀어지는 걸 느꼈다. 조금만 더 입맞춤을 받고 싶었다. 자신에게 허락된 시간이 점점 줄어들고 있단 걸 프레이도 알고 있었다. 그만큼 그와 함께 지내는 시간은 일분일초가 소중했다.
“코코아는 됐고……, 그 대신 조금만 더 뽀뽀해줘.”
평소답지 않게 스킨십을 요구하는 모습에 페트릭은 시선을 내려 프레이의 얼굴을 살폈다. 그답지 않은 응석을 부린 게 부끄러웠는지 얼굴이 발그레했다.
“그래.”
페트릭이 프레이의 양 뺨을 붙잡고 천천히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을 서로 맞댄 채 두 사람은 속삭이며 대화를 나누었다.
“그네 좀 타 볼래?”
“어지러울 것 같은데. 살살 밀어줘야 해.”
“응.”
페트릭은 프레이의 옆에 앉아 천천히 그네를 흔들었다. 부드럽게 흔들리는 그네에 앉은 프레이는 천천히 페트릭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왜 그래? 어디 아픈 거야?”
“아니. 이러고 있는 게 행복해서.”
그렇게 말하는 프레이의 얼굴은 누구보다 행복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