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아, 아흐. 페터… 이, 이것 좀 풀어 줘. 응?”
프레이는 침대기둥에 묶인 제 손목을 흔들었다. 프레이의 애원에도 페트릭은 무시할 뿐이었다. 잔뜩 벌어진 다리 사이로 파고든 손가락이 안쪽을 꾹 누르자 발끝이 오므라들었다. 페트릭이 중얼거렸다.
“프레이, 이런 몸을 하고서 그 새끼한테 그렇게 예쁘게 웃어 준 거였네?”
“아…아니야…. 그분 스, 스텔라 같은 반 친구, 흑, 아빠였… 아흐!”
프레이가 신음하며 자신의 둘째 딸, 스텔라의 유치원에 마중을 갔던 몇 시간 전을 떠올렸다.
스텔라 마일드리안.
루시의 동생으로 프레이가 위험을 무릅쓰고 낳은 딸이었다. 루시를 낳고 부쩍 약해진 몸으로 둘째를 임신했을 때 의사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신신당부를 했다.
‘몸이 약하시니까, 예전보다 더 많이 조심하셔야 합니다.’
루시를 임신했던 때와는 많이 달랐다. 늘 먹던 우울증약도 뚝 끊기고, 약해진 몸을 따라 약해진 멘탈은 바람 앞의 촛불 같았다. 흔들흔들 금방이라도 꺼질 것 같은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페트릭은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하고 프레이의 수발을 들었다. 루시 때에 비해 비교적 얌전한 편인 입덧이었지만, 프레이는 제대로 먹지도 못한 채 아기를 낳아야 했다. 페트릭의 지극정성과 신의 축복으로 무사히 태어난 그들의 딸은 루시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무렵 태어났다.
‘엄마!’
프레이를 닮아 라일락 꽃향기가 날 것 같은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풀거렸다. 루시가 졸업한 유치원에 입학한 스텔라는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별님반에 다니고 있었다.
‘뛰면 다쳐. 뛰지 마.’
프레이가 웃으며 자신에게 돌진한 딸을 품에 안았다. 어린이 특유의 따끈따끈한 체온에 프레이가 스텔라의 뺨에 얼굴을 묻었다. 간지러운지 키득거리며 웃는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스텔라! 내일 바!’
이가 빠졌는지 발음이 새는 어린이가 스텔라에게 손을 붕붕 흔들고 있었다. 프레이가 고개를 돌렸다. 프레이도 잘 알고 있는 스텔라의 친구였다.
‘르네. 내일 또 만나!’
스텔라도 마주 손을 흔들면서 방긋 웃었다. 프레이는 아들의 인사가 끝나길 얌전히 기다렸다. 그러다 문득 르네라 불린 스텔라의 반 친구를 덥석 안아 든 남자를 쳐다봤다. 르네는 스텔라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스텔라에게 들어 익히 알고 있는 아이의 부모를 만난 건 처음이라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 프레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남자를 힐끔 쳐다봤다.
페트릭을 닮은 검은 머리카락에 짙은 초록색 눈동자를 가진 남자는 프레이와 눈이 마주치자 작게 목 인사를 건넸다. 얼떨결에 마주 인사를 하는 프레이의 표정이 어색했다. 이제 그만 집에 가자는 스텔라의 재촉에 시선을 내리며 프레이가 웃었다. 르네도 자신의 아빠에게 매달려서 엄마한테 빨리 가자고 조르는 통에 프레이는 학부모들의 어색한 자리를 피할 수 있었다. 문제는 그 장면을 페트릭이 멀리서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 흐윽…. 그 사람 이름도 몰, 몰라…….”
“누구 아빠였는데. 스텔라 반 친구 아빠였다며.”
프레이가 울먹거리기 시작하자 마음이 약해진 그가 구멍을 거칠게 쑤시던 손가락을 물리며 물었다.
“흐, 으응. 르, 르네… 라고… 스텔라 제일 친한 친구…….”
“르네? 르네 베이블린?”
페트릭은 자신의 딸의 가장 친한 친구인 르네의 아버지를 잘 알고 있었다. 우성 알파 모임에서 만나 가끔 술자리를 갖던 남자였다. 각인한 오메가와 잠시 별거 중이라는 이야기가 들려서 페트릭은 더 불안함에 휩싸였다.
“그 새끼도, 우성 알파잖아. 자기야.”
“아, 으응! …페터… 오해야.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헐떡이며 힐끔 올려다본 페트릭의 얼굴은 질투와 오해로 얼룩져 사나웠다. 처음 보는 그의 질투심이 기꺼웠지만, 그의 오해가 깊어질까 봐 덜컥 겁이 났다. 아무리 오해라고 설득해보려 해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을 것 같은 얼굴에 불쑥 서러움이 복받친다.
나는 태어나서 지금까지 페트릭만 좋아하는데…….
서러움이 걷잡을 수 없이 부피를 더하기 무섭게 눈물이 터졌다. 숨소리를 죽여가며 울기 시작하는 프레이의 얼굴을 보며 페트릭이 질투심에 사로잡힌 얼굴로 중얼거렸다.
“운다고 내가 봐줄 줄 알고?”
“흐, 으흐… 나를 그동안 그렇게 생각했었던 거야? 매일 나를 의심하면서 살았어?”
서러움을 토해내는 얼굴이 창백했다. 뒤늦게 페트릭은 프레이가 상처받았다는 걸 깨달았다. 그제야 분노와 질투심에 흐려졌던 시야가 또렷해졌다. 울먹이는 프레이의 얼굴엔 슬픔과 서운함이 적나라하게 떠올라있었다. 페트릭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동안 잠잠했던 독점욕이 고개를 치켜드는 걸 미처 막지 못했다. 매일 프레이의 심장박동수를 세며 아침을 시작하는 그가 눈물에 젖은 뺨에 입을 맞추며 속삭였다.
“…나 버리고 다른 새끼한테 가 버릴까 봐 질투가 나서 그랬어. 울지 마. 잘못했어.”
“흐, 으, 나는 페터… 너밖에 없단 말이야…….”
축축하게 젖은 얼굴이 페트릭의 어깨에 파묻혔다. 묶어두었던 손목을 풀어주자 프레이가 페트릭의 목을 휘감았다.
“끄흐… 내가 아니라고 계속 말했는데 안 믿어주고…….”
“응. 아닌 거 알아. 아는데… 내가 왜 이랬을까. 자기야. 잘못했어.”
“말로만 잘못, 흐… 했다고 그러고… 맨날…….”
프레이가 조금은 진정이 되는지 페트릭의 등을 힘없이 껴안았다. 몸집이 불어난 서러움은 금세 따뜻한 체온에 녹아 없어졌다.
“프레이. 울지 마. 난 네가 우는 모습을 봐도 꼴린단 말이야.”
“진짜….”
프레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생각했다. 어릴 때, 자신의 첫사랑이 이렇게 음란하고 변태인 줄 알았어도 좋아했을까? 진지하게 생각하던 프레이의 정답은 ‘그렇다.’였다. 프레이가 속삭였다.
“그럼, 한 번만 할래?”
“두 번은 안 돼?”
페트릭이 물었다.
“너 하는 거 봐서.”
프레이가 먼저 입술을 겹치며 속삭였다. 행복한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