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루시 마일드리안.
페트릭 마일드리안과 프레이 비셔스 사이에 태어난 말썽꾸러기가 칭얼거렸다.
“아빠가 잘못했잖아! 엄마한테 다 말할 거야!”
“어디서 큰 소리야. 엄마 자니까 조용히 하랬지.”
때아닌 전쟁통에 페트릭은 프레이가 깰까 봐 안절부절못했다. 유치원에서 돌아온 루시는 페트릭과 함께 싸우는 중이었다. 이유는 루시가 공작 시간에 만든 장난감을 페트릭이 조금 부숴 먹었기 때문이다. 애초에 장난감인지 쓰레기인지 알 수가 없는데 조금 부서진 거 가지고 큰소리야. 페트릭의 인상이 찌푸려졌지만 그뿐이었다. 프레이의 총애를 듬뿍 받고 있는 아들에게 밉보였다간 큰일이다. 프레이의 눈총을 받을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그건 죽어도 싫었다.
“이거 엄마한테 보여주지도 못하고… 히잉…….”
루시는 보라색 눈동자에 눈물을 주렁주렁 매단 채 바닥에 엎어졌다. 왕관처럼 보이는 쓰레기를 끌어안고 엉엉 우는 아들의 등을 페트릭이 어색하게 토닥이던 순간이었다. 잠에서 깬 프레이가 비틀거리며 거실로 나오며 물었다.
“루시. 왜 울어? 응?”
약 기운에 취한 몽롱한 얼굴이 바닥에 엎어진 자신의 가족을 빤히 응시했다. 페터. 무슨 일이야? 아니, 그게…. 둘의 시선이 오갔다.
“엄마…. 아빠가요, 내 꺼 부쉈어요…….”
루시가 프레이의 몸에 매미처럼 매달린 채 칭얼거렸다. 손에는 재활용품 같은 쓰레기가 들려있었다.
“페터, 왜 아들 꺼 부수고 그래.”
“아니. 루시가 허술하게 만든 건데. 아…….”
페트릭은 억울한 표정으로 난감한 표정이었다. 억울함이 묻어나오는 목소리가 시무룩하다. 프레이의 타박에 이렇다 할 변명도 제대로 해보지 못한 페트릭이 프레이의 다리에 매달린 아들을 쳐다봤다. 아빠 바보. 루시가 혀를 내밀었다. 저게 진짜……. 우는 것도 연기였던 모양이었다.
프레이는 아무것도 모른 채 그저 아들의 우울함을 달래주기 위해 쪼그려 앉았다.
“어디 보자. 용사님이 어디 다쳤을까? 치료해볼까?”
프레이는 루시의 손에 들린 장난감을 진지하게 들여다보는 중이었다. 페트릭은 프레이의 손에 들린 쓰레기를 쳐다보며 생각했다. 도대체 어딜 봐서 용사라는 거야. 도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여기…, 여기요. 왕자님이었다가 악당 때려 부수는 용사님인데…. 왕관이 없어졌어요…….”
아. 왕자였어?
그제야 그는 이상하게 생긴 쓰레기의 정체를 깨달았다. 깨달음을 얻은 아버지의 표정은 퍽 충격적인 얼굴이었다. 어느새 세 명이 머리를 맞댄 채 용사님의 왕관 재건 수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다 찢어진 왕관을 복구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루시의 표정이 심각했다. 처음엔 그저 연기였는데, 열심히 만든 장난감이 부서진 모습을 보고 있자니 감정이 복받친 모양이었다. 루시가 훌쩍거리기 시작하자 프레이와 페트릭은 점점 심각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운을 뗀 건 프레이였다.
“루시. 왕자 용사님이 왕관은 무거워서 싫대. 그래서 아빠가, 음, 도와준 거래.”
프레이는 거짓말을 할 때 눈동자가 흔들린다. 거짓말이 분명했지만 그것 외에는 아들을 달랠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어설픈 거짓말로 위로하려는 엄마의 노력이 가상했는지 루시는 입을 꾹 다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거였어요? 미리 말을 해주지.”
루시가 칭얼거리며 프레이에게 폭 안겼다. 하지만 페트릭을 노려보는 시선은 여전했다. 봐줄게요. 그래, 고맙다. 부자의 시선 교환이 끝나고, 부부의 시선 교환이 이루어진다. 프레이가 어느새 바닥에 놓인 장난감을 힐끔거렸다. 더 망가지기 전에 치우라는 뜻이었다. 페트릭이 고개를 끄덕이며 장난감을 주워들었다.
“아…….”
장난감을 테이블 위에 올리던 페트릭이 탄식을 흘렸다. 후드득- 하고 요구르트 병이며 병뚜껑들이 분리되어 바닥을 나뒹굴기 시작했다. 당황한 프레이가 루시를 번쩍 안아들었다.
“루시. 옷 갈아입자. 목에 손 해야지.”
“응!”
다행스럽게도 루시는 용사의 최후를 목격하지 않을 수 있었다. 프레이가 휘청거리며 아들을 안고 드레스룸으로 걸어가는 사이, 페트릭은 바닥에 널브러진 잔해를 주웠다. 아들의 장난감을 줍는 아버지의 얼굴은 긴장감이 가득했다. 루시가 알면 끝장이다. 젠장. 어떻게 생겼었지. 프레이가 최대한 시간을 버는 사이, 쓰레기 같은 장난감을 원상 복구시켜야 하는 의무가 있는 페트릭이 중얼거렸다.
“접착제. 어디 있지.”
*
페트릭이 장난감을 고치는 사이 프레이는 루시의 갈아입을 옷을 하나하나 고르는 척을 하고 있었다.
“오늘은 뭐 입을래?”
“저는 아무거나 다 좋아요!”
프레이가 초조한 얼굴로 드레스 룸 바깥을 힐끔거렸다. 페터, 잘하고 있는 거겠지? 가끔 텔레파시라도 통하면 좋을 텐데. 프레이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어떻게 하면 시간을 끌 수 있을지 고민하는 프레이에게 루시가 물었다.
“엄마. 오늘 같이 자도 돼요?”
“같이 자고 싶어?”
“네!”
루시가 신나서 대답했다. 프레이는 페트릭을 닮아 반짝반짝 빛나는 아들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쓰다듬으면서 웃었다.
“오늘 그럼, 안 울겠다고 약속하면 같이 자자.”
“약속해요! 빨리!”
루시가 조그마한 손가락을 내밀며 방방 뛰기 시작했다. 방금까지 제 손에 들려있던 장난감은 관심에서 사라진 지 오래였다. 프레이는 새끼손가락을 걸면서 방긋 웃었다. 내 아들이지만 너무 귀여워.
“약속.”
“약속!”
루시가 신나서 대답했다.
“오늘 루시는 뭐가 입고 싶을까?”
어린이용 옷걸이를 뒤적이던 프레이가 힐끔 드레스룸 바깥을 살폈다. 페터가 잘 복구해놔야 할 텐데…. 걱정스러운 얼굴이었다. 시간을 끄는 것도 한계에 부딪힌 프레이가 루시의 옷을 갈아입히고 거실로 나갔을 때, 페트릭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어디 갔어?”
프레이는 페트릭이 장난감 용사의 심폐소생술에 실패했음을 직감했다.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루시가 바닥 구석에 떨어진 빨대를 주워들었다. 그리고 뒤늦게 장난감 용사의 행방을 찾기 시작했다.
“어디 갔지. 용사님.”
“글, 쎄……?”
페트릭. 나보고 어떻게 하라고……. 프레이가 루시의 눈치를 살피며 페트릭을 찾던 그때였다.
“으윽!”
어디선가 과장된 발연기가 시작되고 있었다. 프레이가 한숨을 쉬었다.
“엄마, 아빠 목소리 아니에요?”
“가볼까……?”
프레이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루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페트릭의 목소리가 나는 곳에 도착한 프레이가 눈을 감았다. 페트릭이 반쯤 복구가 되다 만 쓰레기와 함께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아빠!”
루시가 바닥에 같이 쓰러져 있는 페트릭에게 다가가며 소리쳤다. 페터… 절반은 그래도… 비슷하게 붙이긴 했구나. 프레이가 바닥에 나뒹구는 접착제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아무래도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집어던진 모양이었다.
“용사님!”
루시가 처참한 몰골의 쓰레기를 손에 주워든 채로 소리쳤다. 그러자 페트릭은 장난감 용사가 얼마나 용감하게 악당과 싸웠는지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결론은 다쳐버려서 그 꼴이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루시는 악당은 어디 있냐고 물었다. 페트릭이 얼버무렸다.
“멀…리 도망갔지.”
루시가 갑자기 한숨을 쉬었다. 손에 들린 쓰레기를 바닥에 내려놓은 루시가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페트릭에게 다가갔다.
“아빠.”
“왜.”
페트릭이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연기 되게 못한다.”
“이게 진짜…….”
루시는 바닥에 널브러진 병뚜껑을 주워들더니 페트릭의 손에 쥐여주며 웃었다.
“오늘 저랑 엄마랑 자기로 했어요. 아빠.”
“뭐?”
페트릭이 손에 든 병뚜껑을 우그러트리며 되물었다. 루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승자의 미소를 얼굴에 걸친 채 웃을 뿐이었다. 페트릭이 바닥에서 몸을 벌떡 일으키며 프레이를 쳐다봤다.
루시가 그럼 울 거 같은데 어떡해?
아니, 프레이… 널 탓하는 건 아니고…….
페트릭이 한숨을 쉬는 동안, 루시가 바닥을 힐끔 쳐다보더니 페트릭에게 툴툴거린다.
“자기가 어지른 건 자기가 치워야 된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제 말이 맞죠?”
“저 땅콩만 한 게…….”
페트릭은 자신의 아들을 보면서 웃었다. 바닥에 굴러다니는 색종이들을 줍는 아빠에게 루시가 일침을 날린다.
“이렇게 큰 땅콩이 어디 있어요? 아빠 바보예요?”
참고 있던 프레이의 웃음이 터졌다. 아무래도 오늘은 셋이 함께 자야 할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