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4/24)

5.

고개를 아래로 떨구던 프레이가 작게 하품했다. 아슬아슬하게 어깨에 걸친 카디건의 단추를 잠가 주던 페트릭은 자그마한 정수리에 뽀뽀하며 웃는다.

“잠꾸러기. 요즘 잠만 늘었네.”

“흐응… 내가 자는 거 아니고, 루시가 자는 거야.”

페트릭에게 툴툴대면서 새침하게 굴고 있는 프레이는 지금 임신 중이었다.

*

“뭐 먹고 싶은 거 없어?”

“나 돼지 아니야. 페트릭…….”

자신의 배 속에 아기가 있어 많이 먹어야 한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래도 삼십 분 간격으로 묻는 건 심하잖아. 속으로 프레이가 툴툴거렸다.

“이렇게 예쁜 돼지가 어딨어.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면 안 돼. 루시가 듣잖아.”

“약간 혼나는 기분이야…….”

“혼내는 거 맞아.”

혼낸다는 사람의 목소리가 봄바람 같다. 프레이는 웃고 말았다. 페트릭이 자신에게 농담을 건넬 때마다 늘 가슴께가 늘 몽글몽글 간지럽다. 살을 섞고 이제는 서로의 배우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프레이는 페트릭을 볼 때마다 매일매일 사랑에 빠졌다. 길었던 짝사랑은 끝이 났지만, 둘의 마음의 크기는 달랐다. 아마도 우열을 가리지 못할 것 같았다. 서로에 대한 감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 중이었고, 아마도 그 감정의 크기들은 엎치락뒤치락 하며 죽을 때까지 서로를 생각할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소파에 등을 기댄 프레이는 잠이 오는지 작게 하품을 했다. 페트릭은 익숙하게 책을 펼쳐 들었다. 자신에게 천천히 머리를 기대던 프레이의 어깨를 감싼 그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옛날에 아기 돼지 삼 형제가 살고 있었습니다.”

“뭐야. 왜 돼지가 나와……?”

질문을 하는 프레이의 목소리가 뾰족했다. 임신을 한 이후로 살이 찌기 시작한 프레이는 부쩍 토실토실해진 뺨을 볼 때마다 우울한 표정을 지었다. 페트릭의 앞에서는 아닌 척, 씩씩한 척을 했지만 몰래 동그랗게 부풀어 오른 배를 보며 울상을 지을 정도였다.

‘찐빵 같아.’

언젠가 거울을 쳐다보며 중얼거린 프레이의 혼잣말에 페트릭이 가만히 대답했다.

‘찐빵은 맛있는데…….’

화들짝 놀란 프레이는 잡아먹힐까 봐 방 안으로 후다닥 도망가기 일쑤였다. 넘어질까 봐 초조한 페트릭이 다급하게 뛰지 말라고 소리쳐도 그때뿐이었다. 프레이가 페트릭의 손에서 동화책을 가져가더니 제목을 보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아, 뭐야. 너 일부러 돼지 이야기했어! 진짜…….”

“미안. 자기가 귀여워서 놀리고 싶잖아.”

장난기 가득한 웃음을 지으며 페트릭이 책을 건네받았다.

“내가 읽을래. 그냥.”

“미안해. 내가 다시 읽어줄게. 졸린데 자야지. 우리 자기.”

미안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연인에게 도무지 이길 수가 없다. 프레이는 입술을 삐죽이면서도 다시 머리를 기대며 속삭였다.

“이번엔 장난치면 안 돼…….”

“응. 제대로 읽어줄게. 정말이야.”

프레이의 귓가에 속삭이며 볼을 스치는 입술의 온도가 봄바람 같았다.

*

“프레이?”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상체를 다급하게 일으켰다. 주위를 둘러보니 프레이와 함께 조금 전 잠들었던 침실이었다. 습관처럼 옆을 더듬었지만 온기가 조금 남아있는 시트가 만져질 뿐이었다. 침실 안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 프레이의 모습에 그동안 잠잠했던 불안감이 몸을 잠식한 건 순식간이었다.

설마 어디로 또 사라져버린 건 아니겠지.

불안으로 떨리는 손이 제 손에 위치한 반지를 어루만졌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이 불안함을 진정시켰지만, 역부족이었다. 방을 나선 그의 눈에 제일 먼저 들어 온 건, 담요를 어깨에 두른 프레이의 뒷모습이었다. 프레이는 주방 의자에 홀로 앉아 꼬물거리고 있었다.

“프레이. 여기서 뭐 하고 있어?”

“아, 페트릭… 일어났어?”

프레이가 고개를 돌리며 눈을 깜빡거렸다. 조금 당황했는지 페트릭을 쳐다보는 얼굴이 발그레했다.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 불안함이 희석되기 시작했다. 동그란 어깨를 감싼 담요를 힐끔 쳐다보던 페트릭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었다. 작은 손에 들린 과일 때문이었다. 페트릭의 시선을 느꼈는지 프레이가 속살거렸다.

“자다 일어났는데 갑자기 오렌지가 먹고 싶어서. 너 피곤하게 자길래 몰래 나왔는데…. 혹시 나 때문에 깬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근데 왜 혼자 먹고 있어. 먹고 싶은 게 있으면 나 깨워서 갖다 달라고 하랬잖아.”

의자를 빼내고 프레이의 옆으로 끌고 온 페트릭이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먹고 싶은 거 갖다 달라고 자는 사람을 어떻게 깨워…….”

프레이는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페트릭에게 자신의 손을 건넸다.

“손은 또 왜 이렇게 차가워.”

“혼낼 거야?”

프레이의 손에 들린 오렌지를 가져가던 페트릭이 중얼거렸다.

“내가 감히?”

페트릭의 얼굴은 온통 죄책감으로 얼룩져있었다. 하지만 이내 그림 같은 미소를 지었다. 그는 프레이에게 자신의 어두운 감정을 전염시키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오랜 정신병으로 인한 망상이었든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나 과거를 다시 사는 것이든 지금의 프레이는 오로지 행복함, 즐거움, 기쁨 같은 즐거운 감정들만을 알아야 했다.

“혼 같은 거 안 낼 거야. 혼낼 곳이 어디 있다고 혼을 내.”

오렌지 껍질을 벗겨내던 페트릭이 힘없이 중얼거렸다. 감히 누가 누구를 혼낸다는 거야. 페트릭이 시선을 들어 응시한 곳에는 환하게 웃는 프레이가 있었다.

“루시. 아빠가 되게 자상하다. 그치?”

이제 조금 임신한 태가 나는 배를 쓰다듬는 손이 꼼지락거렸다. 페트릭은 입꼬리를 올려 웃어 보였지만 속은 뭉개져 있었다. 오렌지를 떼어 낸 다음 작은 입술에 물려주자 머뭇거리면서도 프레이는 잘도 받아먹었다.

“어때?”

입덧이 심한 편인 프레이는 방금 전까지 먹고 싶었던 음식이라 하더라도 입에만 넣으면 곧잘 뱉어내기 일쑤였다. 그의 긴장과 달리 프레이는 예쁘게 웃기만 했다.

“맛있어.”

“다행이다.”

페트릭은 오물거리는 프레이의 부들부들한 머리카락을 정리했다.

“잘 먹네. 우리 여보.”

“콜록!”

예상치도 못한 호칭에 프레이가 콜록거렸다. 사레라도 들린 것인지 얼굴이 빨개져 있었다.

“괜찮아? 뱉어봐. 어디 또 안 좋아?”

입안에 씹고 있던 오렌지를 제 손에 뱉으라고 페트릭이 난리였다. 천천히 등을 두드려주는 페트릭에게 프레이가 횡설수설했다.

“아,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그게 아니면 왜…. 한참이나 고민하던 페트릭이 자신의 우울함의 근원인 오렌지를 밀어두며 씨익 웃었다. 결혼도 했고 임신까지 한 사이에 설마. 혹시나 하는 마음에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며 그가 프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그럼 왜 그러는데. 여보.”

“힉.”

프레이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뒤로 물렸다. 아. 심장에 너무 안 좋아. 하느님. 살려주세요. 콩닥콩닥 뛰는 심장 소리가 들릴까 봐 프레이는 작게 헛기침을 했다. 눈에 빤히 보이는 꼬물거림이었다. 프레이의 반응에 페트릭이 프레이를 덥석 끌어안으며 웃었다.

“맨날 부끄러워하네. 도대체 언제 익숙해질래?”

“언, 언젠가는……?”

프레이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심장이 또 튀어나올 것 같았다. 프레이가 숨을 몰아쉴 때마다 페로몬과 오렌지 향이 뒤섞인 향기가 났다.

“그래서 오렌지, 더 먹을 거지?”

“으응.”

프레이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페트릭은 머뭇거리면서도 오렌지를 다시 집어 들었다. 입술에 와 닿은 차가운 오렌지는 달기만 해서 프레이는 웃었다. 아까 혼자 까먹을 땐 조금 별로였는데 왜 지금은 맛있지? 고개를 기울이며 고민해보는 얼굴은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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