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12/24)

3.

차가운 겨울바람에 흩날리는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반짝였다. 조금 빨개진 코끝과 반짝이는 눈동자는 누군가를 기다리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지나가는 사람들 중 몇 명이 프레이를 힐끔거렸다. 곱게 자란 도련님의 분위기가 물씬 풍겼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과거에 그러했지만, 프레이는 아직도 제 것이라 부를 만한 것이 없다시피 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아무리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선물을 해도 프레이는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의 물건을 잠시 빌린다는 개념에 가까웠다. 받기만 해서 미안한 마음에 프레이가 선물을 몇 번쯤 거절하자 페트릭이 빌린다고 생각하라는 말을 했다. 그 이후로 프레이의 마음은 한결 편해졌다. 빌린다는 생각을 하니 부담스러움이 조금은 사그라든 탓이었다.

‘조금 늦네.’

중요한 전화라며 1분만 자리를 비우겠다고 한 페트릭은 아직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던 프레이가 눈을 깜빡이며 주위를 힐끔거렸다. 프레이가 페트릭을 기다리는 사이 페트릭은 자신을 대신해 회사의 경영을 맡고 있는 전문경영인에게 신경질을 내고 있었다. 프레이와의 하루하루가 소중한 마당에 회사 같은 사소한 일에 낭비할 시간은 페트릭 마일드리안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경영일선에서 물러난 후, 전문경영인에게 모든 걸 위임했음에도 중요한 결정사항이 있을 때마다 전문경영인은 페트릭에게 연락을 했다. 제아무리 모든 걸 위임받았다 하더라도 혼자 섣불리 결정하지 못하는 사안들이 있기 마련이었다. 누구보다 신중한 선택이었음에도 연인과의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은 페트릭은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종료했다. 페트릭이 프레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아, 저… 애인 있어요.”

당황해하는 목소리는 프레이의 것이었다. 페트릭이 제 오메가의 앞에 얼쩡거리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씹다 버린 정어리 같은 놈이 감히 누굴 넘봐? 이를 갈며 다가오는 페트릭을 발견한 프레이가 웃으며 속삭였다.

“페트릭.”

“응. 오래 기다렸지? 통화가 늦게 끝났어. 미안해.”

페트릭이 프레이의 빨개진 뺨을 손으로 감싸 쥐었다. 치근덕거리던 남자는 위압감을 풍기는 페트릭의 인상에 사라진 후였다.

“추운데 안으로 들어가자.”

“이, 이러고 걸어?”

차가운 바람에 차가워진 볼을 감싸는 손의 온도가 좋았지만 걷기엔 불편한 자세였다. 마주 보고 걸으려면 둘 중 한 명은 뒷걸음질을 쳐야만 했기 때문이다.

“그러게 누가 볼이 차가우래.”

“바람이 차가워서 그런 건데… 내 탓은 아니잖아.”

“그건 맞아.”

페트릭이 프레이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시선을 의식하던 프레이가 페트릭의 손을 떼어냈다. 페트릭은 서운해하는 표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러자 프레이가 자신의 손보다 한참 큰 페트릭의 손에 깍지를 끼면서 살짝 흔들었다.

“이러는 건 어때?”

“좋아.”

프레이는 훌륭한 타협안을 내놓았다. 나란히 걷고 있는 두 사람은 건물 안으로 들어서며 속살거렸다.

“밖에는 오랜만에 나오는 것 같아.”

“좋아할 줄 알았으면 맨날 나오는 건데.”

그동안 프레이는 페트릭의 집에만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프레이를 배부르게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구멍을 조금 즐겁게 해주면 하루가 훌쩍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제대로 된 커플링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페트릭은 홀로 자책해야만 했다.

‘우리 커플링 하는 거 어떻게 생각해?’

잠들기 전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물었다. 프레이는 눈을 깜빡이며 괜찮은 생각이라며 웃었다. 프레이의 허락을 받기 무섭게 그는 유명 디자이너부터 찾았다. 그의 부모님이 끼고 있는 결혼반지를 디자인한 주얼리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맡긴 그는 완성품이 나오려면 시간이 걸린다는 안 좋은 소식을 접했다. 프레이의 손가락에 연인이 있다는 증거를 끼워주고 싶은데 기성품도 아닌 오더메이드가 일찍 나올 리 만무했다.

그렇게 둘은 완성품이 나올 동안 임시로 끼고 있을 반지를 보기 위해 백화점에 도착했다. 프레이는 오랜만의 외출로 조금 들뜬 얼굴이었다.

길거리를 같이 걷고 싶다는 프레이의 말에 차를 호텔에 주차해놓은 페트릭은 호텔과 백화점의 거리를 가늠했다. 그리 먼 거리는 아니었다.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두 사람은 백화점 프라이빗 라운지에 도착했다. 미리 대기 중이던 직원이 다가와 살가운 인사를 건네자, 프레이는 수줍은 듯한 얼굴로 상냥한 인사를 건넸다.

“이쪽으로 오세요.”

개인실로 안내하는 직원의 얼굴엔 의아함이 서려 있었다. 백화점의 오너 일가의 방문으로 예민해져 있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을 정도로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상냥하게 굴었다. 프레이 비셔스의 앞이어서 더욱 그랬다. 안내받은 개인실에 딸린 소파에 앉은 프레이가 답답한지 목도리를 만지작거렸다.

“답답하면 풀고 있자.”

“으응…….”

목도리를 풀어주는 손길이 간지럽기만 했다. 프레이는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페트릭을 올려다보며 살짝 웃었다. 프레이 비셔스가 항상 느끼는 점이 있다면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다정하다는 것이었다. 학창시절 때부터 그랬다. 페트릭은 다정해. 속으로 중얼거리던 프레이가 환하게 웃었다.

“차는 어떤 걸로 준비해드릴까요?”

“뭐 마시고 싶은 거 있어?”

“음… 나는 괜찮아.”

프레이가 고개를 저었다. 낯을 가리는 것 같은 얼굴에 페트릭이 직원을 개인실에서 내보낸다.

“차는 괜찮으니까 나가보세요.”

“알겠습니다.”

직원은 오메가인 것이 분명해 보이는 남자에게 쩔쩔매는 이사의 반응을 믿을 수가 없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까다로운 상사였다. 프레이에게 선물을 사다 바치는 동안 백화점의 직원들은 까탈스럽고 신경질적은 그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위장약을 달고 살 정도였다. 심지어 오메가 직원들은 베타에게 업무교대를 해달라며 로비를 하기도 했다.

그러고 보니 페로몬이 하나도 안 느껴지잖아. 둘이 각인이라도 했나 본데.

우성 오메가인 직원의 눈동자가 불투명한 개인실 유리에 머물렀다. 자신의 추측이 사실이라면 한동안 라운지가 시끌시끌할 것 같았다.

직원이 떠난 개인실에 앉아 프레이가 몸을 녹이는 사이 페트릭이 중얼거렸다.

“몸이 너무 차갑잖아. 프레이.”

마주 잡고 있었던 손은 따뜻했지만, 잡고 있지 않은 다른 쪽 손은 얼음장이었다. 자신의 알파가 심각해진 것도 모른 채 프레이는 의아해하는 기색으로 속삭였다.

“매장에는 안 가는 거야?”

“가고 싶어?”

“매장에 가서 보는 줄 알았는데…….”

프레이가 중얼거렸다. 페트릭이 프레이의 차가운 손을 녹이며 대답했다.

“그럼 손 좀 녹으면 가서 보자.”

“응.”

소파에 나란히 앉은 둘은 시시콜콜한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사실 누구보다 백화점처럼 번잡한 곳을 싫어했다. 페로몬들이 뒤엉킨 공간은 그에게 더없이 끔찍한 장소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프레이 비셔스가 매장에 가고 싶다고 말한 이상 그는 인파를 견뎌내며 무슨 일이 있어도 매장에 갈 것이다. 프레이 비셔스가 그의 기준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차갑기만 하던 작은 손이 미지근해지자 페트릭이 몸을 일으켰다.

“매장에 가보자.”

“응.”

프레이가 자신에게 내밀어진 페트릭의 손을 붙잡았다. 얼음장 같은 손은 이미 흐물흐물 녹아내린 지 오래였다. 마주 잡은 손끝이 간질간질하기만 했다. 개인실에서 나온 두 사람을 기다리고 있던 직원이 따라붙으려 하자, 페트릭이 저지하며 웃어 보였다.

“괜찮아요. 필요하면 부를게요.”

“그럼 대기하겠습니다.”

까칠하던 알파는 어디 가고 봄바람 같은 남자가 그곳에 있었다. 직원이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뒤로 물러나는 사이 페트릭은 엘리베이터에 들어설 때까지 프레이의 허리를 감싸 안고 있었다.

*

오너 일가의 방문에 백화점 직원들은 긴장감이 맴도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명품 주얼리 매장에 소문의 이사가 도착하자 매니저들이 서로 눈빛을 주고받는다.

옆에 누구야? 애인? 그럴걸?

한동안 프레이에게 선물을 주기 위해 백화점을 휩쓸었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었다. 프레이와 함께 방문한 건 처음이라 그런지 페로몬이 뒤엉킨 매장도 천국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매장 안으로 들어서던 페트릭이 프레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보석은 어떤 걸로 할까?”

“글쎄…….”

매니저가 긴장을 숨긴 채 디자인이 다른 상품들을 늘어놓는 사이 프레이가 웅얼거렸다.

“보석은 진짜 아는 게 하나도 없어…….”

시무룩해하는 얼굴이 귀여웠다. 보석에 대해 아는 것이 없다는 프레이의 웅얼거림을 들은 매니저가 상냥한 목소리로 조언했다.

“보통 커플링에는 탄생석을 많이 이용하십니다. 무난한 다이아몬드도 인기가 많습니다.”

“아… 네에.”

매니저의 설명을 듣던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매끄러운 손놀림으로 매니저가 탄생석이 나열된 보석 샘플을 내밀었다. 각 월에 해당하는 보석들이 조명에 반짝거렸다. 페트릭의 생일을 떠올리던 프레이가 말없이 샘플을 쳐다보며 물었다.

“2월 탄생석이 자수정이네…….”

“응. 네 생일은 9월이니까 사파이어하면 되겠다.”

여름에 태어난 프레이.

페트릭은 불현듯 생각 없이 고른 꽃다발을 안겨주며 생일을 축하해주던 과거를 회상했다. 보라색 스카비오사.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 불길한 꽃말을 가진 꽃다발을 품에 안은 프레이가 속삭이던 목소리가 귓가에 들러붙었다.

‘선물… 고마워.’

페트릭은 기억을 떨쳐내려 고개를 작게 흔들었다. 흔들어도 희미하게 꺼질 것 같은 목소리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프레이와 행복하게 지내는 순간에 집중하기 위해 페트릭이 프레이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순간이었다. 프레이 비셔스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자수정, 보라색인데. 괜찮아?”

“보라색?”

목이 졸린 사람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페트릭은 재빨리 헛기침을 가장해 목을 가다듬는다. 과거를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목이 메었다. 갑자기 보라색이 어떻다는 거야.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의아함을 담아 프레이를 응시했다.

“네가 보라색 안 좋아한다고 그랬던 거 같아서…….”

프레이는 차마 중학생 때 네가 그랬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엿들은 기억이었고, 시간이 많이 흐른 지금 그의 취향이 바뀌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랬어?”

“불길한 색이라서 싫다고 했었어.”

어색하게 웃으며 프레이가 대답했다. 이제는 좋아할지도 모르잖아. 보라색을 누구보다 좋아하는 프레이는 보라색을 누구보다 싫어해야만 했다. 자신의 첫사랑이 싫어한다는 색이라는 유치한 이유 때문이었다. 이제는 수줍은 혼자만의 짝사랑이 아닌 서로를 좋아하는 연애를 하게 되었음에도 프레이는 여전히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눈치를 살폈다. 소심한 성격은 그리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프레이의 어색한 웃음을 쳐다보던 페트릭의 눈앞에는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둔 채로 잊으려 했던 순간이 펼쳐지고 있었다.

지금보다 조금 따뜻한 바람이 불던 날. 오후의 정원에서 페트릭이 불쑥 프레이에게 보라색을 왜 싫어하는지 물었다. 별장에 설치된 그네에 앉아 스카비오사 꽃다발을 안아 든 프레이가 지금처럼 이렇게 말했다. 누군가가 보라색은 불길해서 싫어한다고 해서 자신도 싫어한다고 했다. 그 사람이 누구냐는 물음에 프레이가 대답을 얼버무렸다.

‘있었어…. 그런 사람.’

‘그런 사람이 누군데?’

그만해. 제발.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

그건 프레이가 죽기 전 남겼던 유언 같은 마지막 말이었다.

그게 나였구나. 멍청한 새끼. 난 그것도 모르고…….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프레이가 죽기 직전까지 생각하던 사람이 차마 자신일 거란 상상을 하지 않았다. 중학교 때부터 프레이가 자신을 좋아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프레이에게 저지른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다. 결코 용서받을 수 없는 일들이었다.

“페트릭?”

“내가 그랬어? 보라색 같은 거 불길하다고?”

제발 자신이 아니길 바라는 페트릭의 속마음이 들릴 리 없는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중학교 때 그랬어. 기억 안 날 만도 하네.”

프레이는 민망한지 자신의 손만 만지작거렸다. 눈치를 보며 살펴본 페트릭의 얼굴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나 이제 보라색 좋아해. 네 눈동자 색이잖아. 나… 보라색 좋아한다고.”

헐떡이는 숨과 함께 토해낸 변명이 구차했다. 덜덜 떨리는 손이 프레이의 손을 덥석 붙잡는다. 마치 어디론가 사라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처럼.

“응.”

손의 떨림은 진정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페트릭의 손을 천천히 두드리던 프레이는 그저 그가 보라색과 얽힌 안 좋은 추억이 떠올랐구나 어림짐작할 뿐이었다. 다정한 시선과 미지근한 체온을 느끼며 떨림이 멎어들 때쯤, 페트릭이 주제를 돌리기 위해 보석 샘플을 훑었다.

“너는 9월이니까… 사파이어 하면 예쁘겠다. 그치.”

“응. 그러고 보니까 사파이어, 네 눈 색이랑 닮아서 나는 좋아.”

프레이는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화제를 돌리고 싶어 하는 기색이 역력했기 때문이었다. 누구나 한 개쯤 숨기고 싶은 트라우마, 기억들이 있다. 프레이가 흔들리는 모빌을 보지 못하는 것처럼 페트릭에게도 그런 것 한두 개쯤은 있을 수 있었다. 프레이가 환하게 웃었다.

“너는 괜찮아?”

프레이의 상냥한 배려는 페트릭이 감당할 수 없을 것같이 너무 크기만 했다. 숨을 고르던 그는 그저 프레이의 얼굴을 마주 보며 힘없이 웃을 뿐이었다. 늘 다정하고 상냥한 프레이의 손가락에 자신의 눈 색을 닮은 사파이어가 어울릴까. 페트릭은 속으로 울음을 가라앉힌다. 프레이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주고 싶었다.

“응.”

스스로에게 다짐하는 목소리가 각오로 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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