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알람 소리가 요란했다. 죽은 듯이 자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몸을 일으켰다. 새벽녘의 방 안 공기는 차갑기만 했다. 페트릭이 손가락 끝으로 시트를 더듬는다. 습관이 된 몸짓이었다. 점점 희미해지다 결국 사라져버린 프레이의 페로몬이 남아있던 시트의 감촉이 아님에 몸을 일으키는 몸짓이 다급했다.
그가 힐끔 내려다본 손목이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다. 손목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그었던 것이 꿈인지, 지금 이곳이 꿈속인지 알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시선이 뒤늦게 방 안을 맴돌았다. 생각을 방해하는 시끄러운 알람을 끄고, 아직도 생생한 꿈속의 대화를 곱씹었다.
‘잘 있어. 마일드리안.’
악몽으로 치부하기엔 더없이 반가운 얼굴이었다. 얼굴을 쓸어내린 페트릭은 침대 밖으로 나서며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상체를 훤히 드러낸 잘빠진 몸이 딱딱하게 굳었다. 어둠이 내려앉은 도시를 밝게 빛내는 빌딩들의 불빛이 어지러웠고, 아직도 잠들어 있는 페트릭을 깨우려는 듯 다시 휴대폰이 시끄럽게 울렸다. 소리가 들리는 곳을 향해 고개를 돌린 페트릭은 여전히 혼란스러운 표정이었다.
뭐야?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은 그가 인상을 찌푸렸다.
[이사님.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 7시 30분 이륙 예정이던 항공편이 지연되어 로벨라에서 열리는 회의가 미뤄졌습니다. 그래서 우선…….]
“러셀?”
상대방의 목소리가 익숙하면서도 낯설다. 이미 페트릭의 비서직에서 오래전에 물러난 남자의 목소리였다. 평소답지 않게 얼빠진 페트릭의 대꾸에 늘 기계처럼 업무를 수행하던 냉철한 비서가 대답했다.
[또 수면제 드셨습니까? 일단 제가 자택으로 가고 있으니 직접 보고드리겠습니다. 십 분 내로 도착합니다.]
전화가 먼저 끊겼다. 상황파악이 되지 않는 눈동자가 응시한 곳에는 뜻밖의 날짜가 떠올라있다. 페트릭이 숨을 들이마셨다. 이게 꿈이라면 지독한 악몽이라고 생각했다.
*
공항에 무슨 정신으로 도착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당황한 비서를 공항에 버려둔 채 페트릭은 미리 준비된 차를 직접 몰았다. 기억을 더듬어 도착한 골목엔 싸구려 모텔의 간판들이 불길하게 깜빡인다. 차에서 내린 페트릭은 초조한 기색을 숨기지 못한 채 모텔의 입구로 들어섰다. 그리고 입술을 깨물며 웃었다.
그럼 그렇지. 이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병신같이…….
페트릭의 시선이 머문 곳엔 요란한 옷차림의 남자가 앉아있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투숙? 대실?”
인상을 찌푸린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모텔 내부를 훑었다. 자신의 기억이 틀림없다면 프레이가 일하던 모텔은 이곳이 분명했다. 하지만 프레이 비셔스는 없다. 수없이 반복된 끔찍한 악몽과 똑같았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매번 프레이 비셔스를 찾아가는 꿈을 꾼다. 프레이가 일하던 모텔을 찾아갈 때도 있었고, 프레이의 서점으로 찾아가는 날도 있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그곳에 존재하지 않았다. 더 이상 페트릭의 옆에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꿈속에서조차 나타나지 않았다. 프레이가 죽은 이후 페트릭은 늘 악몽 속에서 살았다. 아마도 프레이의 부재를 죽을 때까지 이기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도대체 이 지독한 악몽은 언제쯤 끝이 나는 거지.
인상을 쓴 후 페트릭이 모텔의 로비를 벗어나려던 때였다.
“아, 죄송합니다.”
페트릭과 부딪힌 남자가 작게 중얼거렸다. 둔탁한 소리를 내며 사과가 바닥에 나뒹굴었다. 사과 봉투를 품에 든 남자는 몸을 숙이며 바닥에 떨어진 사과를 주웠다. 남자를 힐끔 쳐다보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왜 이렇게 늦어? 나 대신 프론트 좀 맡아줘!”
“응. 다녀와.”
성의 없는 대답을 하는 남자의 몸이 가냘팠다. 남자는 사과를 줍느라 굽혔던 상체를 일으키며 앓는 소리를 냈다. 페트릭의 눈앞에서 물 빠진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살랑거렸고 그리운 페로몬이 코끝에 맴돌았다.
“…하느님.”
싸구려 모텔에서 느닷없이 신을 찾는 남자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던 남자가 눈을 깜빡였다. 단 한 번도 신의 존재를 믿지 않았던 페트릭이 제 눈앞에 서 있는 남자를 껴안았다.
“프레이.”
“…마일드리안?”
페트릭의 품 안에 안겨있는 프레이 비셔스의 뺨이 순식간에 붉게 물들고 있었다.
*
프레이는 6년 만에 보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어색해서 시선을 피했다. 우연처럼 모텔에서 만난 첫사랑은 여전히 수려했고, 우아했지만 어딘지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프레이는 자신에게 달짝지근한 냄새가 가득한 디저트 박스를 내미는 페트릭을 보며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단 거 싫어해?”
“…아니.”
머뭇거리던 작은 손이 디저트 박스의 포장을 풀어냈다. 검게 그을린 낡은 카운터와 어울리지 않는 포장이 이질적이다. 프레이는 박스에 담긴 케이크를 보며 눈을 조금 크게 떴다. 아름답게 장식된 케이크는 하나의 예술품에 가까웠고, 자신이 받아도 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침을 몰래 삼킨 프레이가 다시 박스를 닫고 있을 때였다.
“또 보네요.”
모텔의 주인인 제임스가 휘파람을 불며 다가왔다. 그는 페트릭이 입고 있는 옷을 노골적으로 훑어내리며 값어치를 가늠했다. 시계만 갖다 팔아도 이 건물을 사고도 남겠는데. 제임스는 빈정거림을 드러낸 얼굴로 카운터로 향했다. 페트릭은 제임스가 안중에도 없는 것처럼 굴며 프레이에게 물었다.
“내가 한 말은 생각해봤어?”
“아… 응. 그거…….”
프레이는 자신의 첫사랑이 며칠 전 건넨 말을 떠올렸다. 기억을 회상하는 것만으로도 얼굴이 홧홧해져서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귓가에는 아직도 첫사랑의 목소리가 선명했다.
‘프레이. 나랑 연애할래?’
로맨틱하지도 않았고 감동적이지도 않은 고백이었다. 하지만 페트릭 마일드리안에게 있어서는 최선인 고백이었다. 그는 사실 조금 더 멋진 고백을 준비했다. 하지만 할 수 없었다. 진심을 담아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고백하면 꿈에서처럼 프레이가 다시 사라질까 봐 겁이 나기 시작했다. 지레 겁을 먹은 알파는 프레이 비셔스가 언젠가 내뱉었던 고백처럼 볼품없는 고백을 토해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그마저도 프레이가 사라지는 것이 무서워 가는 팔뚝을 꼭 붙들고 헐떡여야만 했다.
프레이를 다시 만난 후 며칠이 지났지만, 그는 시간을 되돌아왔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기어이 미쳐버렸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아무렴 좋았다. 죽었던 프레이 비셔스는 버젓이 살아있었고, 영양 상태가 걱정되긴 했지만 자신이 기억하던 마지막 모습에 비하면 건강해 보이기까지 했다. 상념에 빠져있는 페트릭의 시선이 작게 벌어진 입술을 향했을 때였다.
“그게…….”
얌전히 대답을 기다리는 첫사랑에게 프레이가 웅얼거렸다. 뭐라고 대답해야 하지? 아직도 대답을 결정하지 못한 채 방황하는 시선이 갈팡질팡하고 있었다. 애꿎은 안경만 매만지며 프레이는 페트릭의 눈치를 살폈다. 대답을 강요하진 않았지만 페트릭이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이 들자 부담스러움에 입안이 바싹 마르기 시작했다.
묘한 기류가 흐르는 두 사람의 대화를 지켜보던 제임스가 보다 못했는지 잡상인을 쫓듯이 손을 크게 휘저으며 소리쳤다.
“아. 카운터에서 이럴 거면 나가요. 둘 다.”
제임스의 행동에도 프레이는 좀처럼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결국 제임스가 힘을 주어 멀뚱거리며 서 있는 프레이를 카운터 밖으로 밀었다. 종잇장처럼 휘청거리는 몸이 카운터 밖으로 떠밀려져 나왔을 때, 날카로운 목소리가 제임스에게 날아들었다.
“뭐 하자는 거야?”
날이 선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순식간에 아랫배가 싸해졌다. 제임스는 침을 꿀꺽 삼켰다. 품에 안겨있는 프레이의 멍한 얼굴을 보니 페로몬은 온전히 자신에게만 위협적인 모양이었다. 와. 씨발. 프레이 이 새끼……. 위험한 새끼한테 잘못 걸린 것 같은데. 제임스는 흉흉하게 날이 선 시선을 피하며 프레이의 안위를 걱정했다. 남들이 보기에 행동은 거친 제임스는 프레이가 맨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거리를 헤맬 때 모텔의 비품실을 내어주며 일자리를 마련해준 남자였다. 자신의 몸을 잘 돌보지 않는 프레이를 챙겨주는 가족 같은 사람이었다.
본인은 인지하지 못하는 눈치였지만, 예쁘장한 프레이의 얼굴을 보고 껄떡거리는 알파들을 사전에 방지하기 위해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알이 깨진 안경들을 억지로 씌워주는 친절을 베풀기도 했다. 프레이는 맞지도 않는 안경을 끼면서도 제임스의 배려가 고마워서 싫은 내색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래… 마일드리안.”
이상해진 분위기에 프레이가 어색하게 웃으며 쳐다보며 속삭였다. 그제야 페로몬을 갈무리하는 페트릭이 프레이의 머리를 살짝 어루만졌다.
“다칠 수도 있었잖아.”
“안 다쳤으니까…. 제임스는 원래 툴툴대는 성격이야.”
“변호사 납셨네. 됐으니까 나가서 떠들어. 분위기 흉흉해서 떡 치러 오려는 인간들 다 도망가게 생겼네.”
제임스는 애써 태연한 척 손을 휘휘 내저었다. 중간에서 입장이 난처해진 프레이가 입을 꾹 다문 채로 페트릭을 모텔 밖으로 이끌었다.
“여기서 이러지 말고 나가자. 마일드리안.”
“저 새끼는 제임슨데 왜 난 마일드리안이야?”
이미 기분이 상한 지 오래인 페트릭이 투덜댄다. 거지같이 생긴 스킨헤드 놈은 꼬박꼬박 제임스, 제임스 하며 친근하게 부르면서 왜 나만 성으로 부르는데? 거리감이 느껴지는 호칭에 괜히 애새끼처럼 서운함이 치밀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당황한 프레이가 멈춰 서서 눈을 깜빡였다.
“그… 그럼 뭐라고 불러.”
모텔을 빠져나온 두 사람은 가로등 아래에 서 있었다. 낙후된 동네에 걸맞는 가로등은 불규칙적으로 깜빡였다. 가로등을 등진 채 서 있는 페트릭의 얼굴엔 짙은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힐끔 쳐다본 첫사랑의 얼굴은 다시 만난 날보다 수척했지만, 오히려 오묘한 분위기를 자아내며 프레이의 심장을 설레게 했다.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프레이는 애꿎은 손가락만 움켜잡았다. 무려 첫사랑이 사귀자고 고백한 뒤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상황이었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았다. 작은 손을 파닥거리며 웅얼거리는 목소리가 희미했다.
“조금 덥네.”
애꿎은 날씨 탓을 하며 시선을 회피하는 프레이의 앞으로 페트릭이 성큼 다가갔다.
“뭐라고 부르냐고 물었지?”
“응.”
고개를 작게 끄덕이는 프레이에게 페트릭이 웃으며 속삭였다.
“페트릭. 페터. 자기. 여보. 달링. 많이 있잖아.”
“뭐…….”
프레이는 흡사 외계어라도 들은 것 같은 반응이었다. 첫사랑의 말이 이해되지 않아 눈만 깜빡거리는 프레이의 눈동자가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한 채 바닥으로 처박혔다.
“프레이. 대답은 언제 해줄 거야? 나는 언제까지 기다리면 돼? 일주일? 한 달, 아니면 평생?”
조바심이 난 듯한 재촉이 쏟아졌다. 마치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프레이의 대답을 갈구하는 그의 얼굴이 긴장으로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수면이 부족한 탓에 시야가 일렁였다. 고개를 살짝 흔들며 쏟아지는 잠을 이겨낸 페트릭이 침을 삼켰다. 요란한 알람 소리에 눈을 뜨던 그 날 이후, 하루하루가 프레이가 죽던 그 날을 사는 기분이었다. 악몽과 닮아있는 기적으로 과거를 되풀이하게 된 그는 기절하듯 잠깐 눈을 붙이다가도 깜짝 놀라며 눈을 떴다. 깊게 잠들었다가 눈을 떴을 때 현실로 돌아갈까 봐 겁이 나서였다. 제대로 된 유언 하나 남기지 못하고 죽은 프레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미래. 그는 제 손으로 만들어낸 결과를 애써 부정한 탓에 미쳐버렸다 해도 상관없었다. 눈앞에 살아있는 프레이가 있으면 그거면 충분했다.
여전히 대답을 망설이며 입술을 달싹이는 프레이에게 그가 애원하듯 속삭였다.
“내가 정말 잘해줄게…. 무릎 꿇고 고백, 다시 할까?”
“그, 그런 건 됐어…….”
담배꽁초와 쓰레기가 나뒹구는 길바닥에 무릎을 꿇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는 광경을 떠올리려던 프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혼란스러움에 갈팡질팡하는 보라색 눈동자는 자신이 원한다면 무릎이라도 꿇겠다는 첫사랑을 눈에 담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페트릭의 얼굴이 서서히 다가왔음에도 프레이는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언제 나에게 답을 줄 생각이야?”
“마, 마일드리안.”
제대로 느껴본 적 없는 페로몬이 시야를 흐릿하게 만들었다. 기억 속에서 선명하던 페트릭의 페로몬이었다. 위협적이지 않았지만 숨을 헐떡이게 만들기엔 충분한 양이었고, 프레이는 고개를 뒤로 물리며 숨을 골랐다. 하지만 더 가까워지는 첫사랑의 얼굴은 여전히 잘생기기만 했다. 프레이는 침을 꿀꺽 삼킨 뒤 아랫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입술이라도 깨물지 않으면 제멋대로 날뛰는 심장이 입 밖으로 나와 버릴 기세였다.
“넌 모르겠지만 넌 입술을 자주 깨무는 버릇이 있어.”
“읏.”
다물린 작은 입술을 비집고 엄지를 밀어 넣은 페트릭이 중얼거렸다. 피 나면 어쩌려고 그래. 꾸짖는 듯한 목소리가 다정하기만 해서 프레이는 눈을 감아버렸다. 적응 안 돼. 몇 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은 도무지 속내를 알 수 없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감긴 눈꺼풀이 파르르 떨릴 때마다 페트릭은 갈증이 치밀었다.
프레이가 죽던 날에도 눈은 얌전히 감겨있었다. 습관적으로 프레이의 호흡을 세던 페트릭은 보드라운 뺨을 감싸 쥐었다. 조금 뜨거울 정도의 체온이 그의 불안함을 녹이고 있었지만, 온전히 없애기엔 역부족이었다.
“프레이.”
페트릭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눈꺼풀을 들어 올린 프레이의 눈동자가 불빛에 반짝였다. 알이 다 깨진 안경을 벗기는 페트릭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의미 없이 얼굴에 걸쳐있는 안경이 사라지자 프레이는 마치 옷이라도 벗겨진 것 같은 감각에 사로잡혔다. 늘 멀리서 지켜본 것이 전부였던 첫사랑을 맨눈으로 보기에는 프레이 비셔스의 소심함이 걸림돌이었다.
“응?”
다정해 보이는 미소를 지어주는 페트릭이 낯설면서도 좋아서 프레이가 입술을 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왠지 고백을 거절하면 상처받은 얼굴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소심한 오메가는 일생일대의 용기를 쥐어 짜내며 속삭였다.
“알았어…….”
어지간히도 쑥스러운지 긍정의 대답을 내놓은 얼굴이 벌겋게 익어있었다. 페트릭은 자신이 들은 대답을 곱씹으며 되물었다.
“사귀자고 한 거 맞아?”
“응.”
프레이의 수긍에 페트릭이 비로소 환하게 웃었다. 갈무리하지 못한 페로몬이 흘러나와 그의 감정적인 동요를 어렴풋하게나마 짐작케 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얼굴이 가까이 다가오자 프레이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소중하다는 듯 뺨을 어루만지고 있던 손이 가느다란 목덜미를 감쌌고, 프레이의 입술 위로 잘게 떨리는 페트릭의 입술이 내려앉았다. 두근거리는 맥이 느껴지는 부드러운 입술을 할짝이는 혀는 물기 어린 소리를 냈다.
첫사랑과의 첫 키스에 취해있는 프레이는 숨을 고르지 못한 채 색색거렸다. 프레이의 호흡이 진정되는 기미가 보이기 무섭게 페트릭은 다시 프레이의 입술을 먹어치울 듯이 빨았다. 혀끼리 부딪칠 때마다 느껴지는 프레이의 페로몬이 더없이 환상적이었다. 프레이의 입술을 정성 들여 탐하던 혀가 아쉬워하며 떨어졌다. 숨이 막히는지 프레이가 작은 손으로 페트릭의 등을 두드린 탓이었다.
“프레이.”
“응…….”
프레이는 부끄러운지 아직도 눈을 감고 있었다. 곱게 감겨있는 눈꺼풀 위로 입을 맞추며 페트릭이 프레이를 끌어안았다. 품 안에 얌전히 안겨있는 프레이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그토록 그리워했던 페로몬을 내어주고 있었다.
“프레이. 이제 정말 잘해줄게. 정말이야. 약속할게.”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 같은 속삭임이었다. 프레이가 갈 곳을 잃은 채 움찔거리던 자신의 두 손을 어색하게 그의 등 위로 얹으면서 대답했다.
“알았으니까…….”
페트릭이 고개를 파묻은 작은 어깨가 축축했다. 프레이는 어설픈 손놀림으로 울고 있는 페트릭을 위로했다.
“울지 마. 페트릭.”
수명이 다해 가는지 깜빡거리는 가로등 아래에서 다시 만난 두 사람은 한참 동안 그렇게 껴안고 있었다.
*
예전처럼 페트릭의 부모님은 사생활이 난잡한 오메가와의 정략결혼을 추진 중이었다. 반갑지 않은 부모님의 연락을 받은 페트릭이 인상을 찌푸렸다. 생각해보면 모든 사건의 발단은 그 정략결혼에서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정략결혼이 아니었다면 거리에서 프레이를 만났을 때도 그저 반가웠다며 인사를 나눈 뒤 기억에서 잊어버렸을 것이고, 아기를 운운하며 계약서 같은 걸 건네지도 않았다. 좆같은 결혼. 프레이 비셔스가 아닌 상대와 결혼을 한다니. 상상만으로도 구역질이 나는 그는 잠든 프레이의 얼굴을 쳐다봤다.
페트릭의 억지로 모텔을 그만두게 된 프레이가 페트릭의 집에 같이 살게 된 이후로 그는 집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회사 같은 건 어떻게 되든 상관없었다. 페트릭은 모든 일을 뒤로 미룬 채 프레이의 곁에 있었다.
처음엔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던 프레이는 시간이 지날수록 아주 느리지만 조금씩 페트릭에게 익숙해지고 있었다. 허름한 모텔 가로등 아래에서 프레이의 입술만 한 번 훔친 게 다인 페트릭은 한숨을 삼켰다. 함부로 만지기라도 하면 신기루처럼 사라질까 봐 프레이를 제대로 만지지도 못하고, 뚫어져라 빤히 쳐다만 보는 심정은 참담했다. 하지만 두 번 다시 프레이가 없는 끔찍한 시간을 견뎌야 하는 건 싫었다.
페트릭의 부모는 페트릭이 연락을 피하자 조금 전 당장 집으로 오지 않으면 약혼이 아니라 결혼식을 해야 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았다. 그는 자신의 부모님에게 설득을 빙자한 협박을 하기 위해 자신의 본가로 가야만 했다. 하지만 좀처럼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곤한 표정으로 자고 있는 프레이가 걱정돼서였다.
오랜 우울증과 불면증을 앓고 있는 프레이는 병원에서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고 단잠에 빠져있었다. 시트 밖으로 조금 삐져나온 작은 발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그가 몸을 일으켰다.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페트릭의 손에 들린 작은 상자엔 발찌가 들어있었다. 프레이에게 온갖 장신구며 선물들을 바치는 그는 조금 전 비서의 손에 들려온 발찌를 꺼내 들며 초조한 얼굴을 드러냈다.
프레이에게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 안달이 난 그가 작고 보드라운 발을 움켜쥐었다. 한때는 침대 위에서 도망가려 할 때마다 부러트렸던 발목이었다. 뼈가 제대로 붙었음에도 종종 다리를 절던 프레이의 모습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때와 같은 실수를 되풀이하고 싶지 않았다. 잠들어 있는 연인 몰래 집착의 증거를 남기는 페트릭이 프레이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었다. 잠결에도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손길이 기분 좋은지 얼굴을 살짝 비비던 프레이는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금방 다녀올게.”
페트릭이 빠르게 방에서 벗어나 건물 밑에서 대기 중인 차에 올라탔다. 다정하게 프레이를 쳐다보던 표정은 온데간데없었다. 흉흉한 얼굴로 기사에게 출발하라며 재촉하는 동안에도 페트릭은 초조함에 숨이 막혔다. 색색거리며 곤히 자고있는 프레이가 갑자기 사라질까 봐 두려웠다. 감당하기 어려운 크기의 감정이 넘실거리며 금방이라도 자신을 집어삼킬 것만 같았다.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빠르게 지나가는 창밖을 응시하는 표정이 살벌했다. 그의 재촉이 효과가 있었는지 평소보다 일찍 도착한 저택에서 페트릭은 자신을 반기는 고용인들의 인사도 무시한 채로 응접실의 문을 열었다. 페트릭을 기다리고 있던 그의 부모가 웃으며 제 아들을 반겼다.
“어서 오렴.”
“그 약혼, 안 합니다.”
소파에 앉기도 전에 용건을 내뱉는 아들의 얼굴이 평소와 달랐다. 차를 마시고 있던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아버지가 물었다.
“페터. 갑자기 그게 무슨 말이냐.”
“제 결혼은 제가 결정하겠습니다. 그 걸레 같은 새끼랑 죽어도 결혼 못 하니까 그렇게 아세요.”
늘 예의를 지키던 아들이 내뱉은 말에 충격을 받은 모양인지 부부는 말이 없었다. 그들에게 있어서 언제나 자랑스러운 아들이었다. 우성 알파로 발현한 뒤로는 더 그랬다. 사생활이 난잡하긴 했어도 흠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으며, 내로라하는 집안에서 탐내는 사윗감이기도 했다. 한 번도 자신들에게 실망을 안겨 준 적이 없는 아들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섬뜩했다.
“페터. 그러지 말고 자세히 이야기를…….”
“가보겠습니다. 약혼은 없었던 일로 하세요.”
하지도 않을 약혼으로 불필요한 입씨름을 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잠든 프레이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은 그가 등을 돌려 방을 나서려는 순간 노성이 터져 나왔다.
“페트릭!”
“저는 분명히 말씀드렸습니다. 결혼, 안 한다고.”
등을 돌려 제 부모를 노려보는 눈동자가 광기로 번들거렸다. 본능적으로 그의 부모는 제 아들의 진심을 인지했다. 어릴 때부터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자신이 정한 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해내는 인간이었다. 집중력과 끈기로 포장된 비틀린 집착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두 사람은 침묵했다.
제 부모의 체념을 뒤로한 채 페트릭은 빠른 걸음으로 저택을 벗어났다. 집으로 돌아가는 억겁과도 같은 시간 동안 그의 불안함을 억누르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프레이 비셔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유일했다. 땀으로 인해 몇 번이나 미끄러진 그의 휴대폰이 깜빡였다.
[페트릭?]
잠에 취한 몽롱한 목소리에 그제야 숨통이 트인 페트릭이 숨을 헐떡거리며 제 연인의 이름을 되뇌었다.
“프레이.”
[…응.]
짧은 대답이 끝나고 잔기침이 이어지는 소리에 페트릭의 낯빛이 퍼렇게 질렸다. 시한부 선고를 받은 뒤 프레이는 목이 부어 말을 잘하지 못하는 날이 많았다. 페트릭의 귓가에는 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힘겹게 자신을 찾는 목소리가 어른거렸다.
‘페터. 어디 있어?’
‘가지 마. 내 옆에 있는 거지…. 응?’
합병증으로 시력이 나빠진 이후 부쩍 겁이 많아진 프레이는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페트릭을 찾았다. 페로몬 샘이 망가진 뒤엔 페로몬을 제대로 느끼지 못해 의료진을 페트릭이라 착각하며 속삭이기도 했다. 환청을 떨쳐내려는 듯 고개를 저은 페트릭이 물었다.
“어디 아파?”
페트릭이 다급하게 차에 올라타며 기사에게 손짓했다.
[아니, 자다 일어나서 목이 잠겼나 봐…….]
휴대폰 너머로 목소리를 가다듬는 소리가 작게 들렸다. 페트릭은 자다 일어났을 프레이의 모습을 상상하며 웃었다. 프레이의 기침 소리 너머로 희미한 방울 소리가 파묻혔다.
[응?]
“왜 그래?”
의아한 반응을 담은 속삭임에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초조함에 사로잡혔다.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건가? 찰나의 순간 동안 온갖 생각들이 뇌 속에 가득 차올라 그의 숨통을 틀어막는다.
[이거… 네가 준 거야?]
“어떤 걸 말하는 거야?”
그가 프레이에게 선물한 것들은 하나하나 기억하기도 힘들 정도였다. 값비싼 장신구며 옷, 신발, 심지어 운전도 하지 못하는 프레이의 명의로 된 자동차까지. 프레이는 부담스러움을 이기지 못하고 거절을 했다. 하지만 프레이가 거절할 때마다 페트릭이 더 많은 것들을 안겨주는 바람에 포기하고 말았다.
[방울? 이런 걸 뭐라고 부르지…….]
프레이는 침대에 앉아 발을 흔들었다. 자기 전엔 이런 거 없었는데. 짤랑거리는 소리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작은 발이 연신 흔들린다.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방울 소리에 그제야 페트릭은 자신의 집착의 산물을 떠올리며 중얼거렸다.
“아. 싫으면 당장 갖다 버려. 프레이. 멋대로 굴어서 미안해.”
운전 중인 기사는 브레이크 페달 대신 액셀러레이터를 밟을 뻔했다. 그가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운전기사로 근무한 지도 3년이었다. 단 한 번도 누군가에게 사과의 말을 내뱉은 적이 없는 고용주였고, 오만하기만 한 남자가 내뱉은 사과의 말이 믿기지 않았다. 애써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며 기사가 룸미러로 힐끔거린 페트릭의 얼굴은 초조함으로 얼룩진 상태였다.
[으응. 그런 거 아니야. 자꾸 받기만 하니까 미안해서 그렇지.]
프레이는 창밖을 내다보며 중얼거렸다. 창밖엔 어느새 비가 내리고 있었다. 같이 지낸 지 며칠 되지도 않았음에도 그의 부재가 크게 다가왔다. 방 안에는 그의 페로몬이 남아있었지만, 부재를 대신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머뭇거리던 프레이가 속삭였다.
[근데, 페트릭. 언제 와?]
페트릭이 기사를 쳐다보자, 눈치 빠른 기사가 대답했다.
“20분이면 도착합니다.”
기사의 대답에 페트릭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프레이를 상상하니 초조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말 한마디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는 삶이 낯설었음에도 그는 모든 것이 기꺼웠다.
“10분 안에 갈게.”
저 한마디로 운전 기사에게 새로운 임무가 주어지고 말았다. 무슨 일이 있어도 복잡한 도로 사정을 무시한 채 차로 20분 거리를 단 10분 만에 주파해야 했다. 핸들을 쥔 기사의 손에는 땀이 배어 나왔다. 운전기사는 페로몬에 영향을 받지 않는 베타였음에도 질식할 것 같은 기분을 느껴야 했다.
[조심해서 와…….]
“응.”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풍경을 의미 없이 눈에 담았다. 고급 세단은 빠르게 달렸다. 먼저 통화를 끊었는지 조용한 휴대폰을 귓가에서 떼어낸 페트릭이 액정을 살펴보려던 순간이었다.
[기다릴게.]
수줍기만 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통화가 끊겼음을 알리는 액정이 반짝였고, 페트릭은 숨을 골라야 했다. 프레이가 자신을 기다린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모든 불안함을 이겨 낼 수 있었다.
*
프레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있던 몸을 일으켰다. 다급해 보이는 발소리가 가까워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 쪽으로 걸을 때마다 가는 발목에서 딸랑-하고 방울 소리가 울렸다. 뭔가 고양이 방울 같기도 하고…. 프레이가 잠깐 멈춰선 채로 발목을 힐끔 응시하는 사이 방문이 벌컥 열렸다.
“프레이.”
흐트러진 프레이의 잠옷을 눈으로 살피던 페트릭이 흐트러진 숨을 갈무리했다.
“나 마중 나온 거야?”
“발소리가 나길래, 네가 오는구나 싶어서…….”
잠을 눈가에 덕지덕지 매단 채로 자신의 발소리에 마중을 나왔다는 말에 페트릭이 충동을 억누르지 못한 채, 입술을 머금었다.
“흐, 응. 페트릭… 잠, 잠깐만.”
순식간에 달아오른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아직도 자신의 첫사랑과의 연애를 좀처럼 실감하지 못했다. 아침마다 그의 집에서 눈을 뜨면서도 꿈인지 의심부터 하는 프레이에게 다가온 두 번째 키스는 혼이 쏙 나갈 만큼 질척거렸다.
페트릭은 프레이가 무의식에 흘린 페로몬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불안한 그의 마음을 대변하듯 페로몬이 비집고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틀어막는다. 열성 오메가인 프레이에게 자신의 페로몬은 오래 노출되어봤자 좋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급성 페로몬 중독으로 안색이 허옇게 질린 프레이의 얼굴이 아직도 눈에 어른거렸다.
그는 프레이에게 더 아픔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고, 충동을 억누르기 위해 얼굴을 떼어내야 했다. 하지만 프레이의 페로몬과 자신의 셔츠를 꼭 움켜쥔 작은 손을 보고 나자 다시 충동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흐…….”
부드러운 잠옷 안으로 손이 침범했다. 부드럽기만 한 살결을 살짝 쓰다듬자 프레이는 감고 있던 눈을 떴다. 당황스럽기만 한 눈동자에 비친 첫사랑의 얼굴이 난폭했다. 마치 사냥감을 눈앞에 놔둔 야생동물의 눈이었다. 늘 다정한 미소만 지어주던 얼굴을 떠올려보려던 프레이는 자신에게 몸을 바싹 붙인 채 서 있는 애인의 이름을 속삭였다.
“…페, 페트릭…….”
“왜 그래?”
조금씩 뒤로 밀리는 프레이는 뒤를 힐끔거렸다. 침대가 바로 뒤에 있었다. 대답을 망설이는 사이 정신을 차려보니 침대 위였다. 제 위로 올라탄 페트릭을 올려다보는 프레이가 헐떡거렸다. 제아무리 성적인 경험이 없는 동정이라도 성적인 분위기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긴장으로 침을 삼키는 소리가 방안에 적나라했다.
“있잖아. 프레이.”
지독히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떨어졌다. 목이라도 졸리는 기분이었다. 페트릭에게서 흘러나오는 페로몬은 느껴지지 않았는데도 프레이는 몸을 흠칫 떨었다.
“나는, 네가 준비될 때까지 기다릴 생각이었어.”
“아…….”
당황한 신음이 흩어졌다. 무슨 준비? 프레이가 버둥거리며 생각했다. 이내 바지 속으로 파고든 손길에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어버렸지만.
“흐으, 잠깐만…….”
“겨우 참고 있는 사람한테 너무 가혹하잖아.”
그런 웃음은. 작게 덧붙여진 말에 프레이는 눈을 감았다. 노골적인 손길이 조금씩 단단해지고 있는 성기를 능숙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가늘기만 한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페트릭이 프레이의 흐트러진 잠옷을 벗겨내는 동안 프레이는 붉어진 얼굴을 손으로 가리기에 급급했다.
“부, 부끄러워.”
손가락 사이로 내려다본 자신의 알몸이 믿기지 않았다. 알몸인 자신과 달리 페트릭은 잘 갖춰 입은 정장 차림 그대로여서 수치심이 배가 될 뿐이었다.
“싫으면 안 할게. 프레이. 나 같은 새끼랑 사귀어주는 것만으로도 난 정말 만족할 수 있어.”
말과 행동이 따로 노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입고 있던 옷을 벗기 시작했다. 금세 옷을 벗어 던진 그가 다시 몸을 겹치며 프레이의 성기를 입에 물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제대로 된 자위도 해본 적이 몇 번 없는 프레이가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감각들이 쏟아졌다. 페트릭의 뜨겁고 축축한 혓바닥이 제 것을 할짝대는 모습을 지켜볼 엄두가 나지 않았고, 도망치듯 프레이가 눈을 감았다. 몸을 버둥거렸지만 허리가 붙들려 있는 탓에 무의미한 몸짓이었다. 페트릭이 기둥을 빨아올리기 시작하자 프레이는 수치심과 흥분감, 미세하게 달아오르는 감각에서 도망치려 헐떡거렸다. 쥐어 짜낸 용기를 모조리 꺼내어 프레이가 페트릭의 손을 붙잡았다.
“그만… 창피해.”
“창피하기만 해?”
“흣, 그건…….”
프레이가 대답을 망설였다. 입안에 든 성기를 뱉어낸 페트릭이 상체를 일으키며 속삭였다.
“좋아하는 사람이랑 섹스하는 게 왜 창피해.”
프레이는 페트릭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말을 할 때마다 신을 찾았다. 모텔에서 재회했을 때도, 고백을 받았을 때도. 그리고 지금처럼.
말도 안 돼. 하느님, 이건 꿈인가요?
프레이는 양손으로 고개를 가린 채 몸을 움찔댔다. 얼마나 부끄러워하는지 귀가 벌게져 있었다. 파르르 떨리는 허벅지를 조심스럽게 좌우로 벌리자 프레이는 저항 없이 순순히 다리를 벌려주었다.
“하으…….”
페트릭의 고백으로 아직도 심장이 진정되지 않았는데, 하반신에서 올라오는 쾌감에 기어이 프레이가 울먹거렸다. 다리 사이에 고개를 파묻고 있던 페트릭이 다정한 목소리로 달래기 시작했다.
“프레이. 겁먹지 마.”
“그, 그렇지만…, 우으…….”
눈물이 맺힌 프레이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일부러 혀를 내밀어 성기 끝을 할짝대다 페트릭의 얼굴을 더 이상 볼 자신이 없는지 눈을 감으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아아, 읏… 나올 것 같아.”
이미 단단하게 서 있는 유두를 문지르자 교성을 지른 프레이는 페트릭의 입안에 결국 정액을 쏟아냈다.
“흣…….”
물기에 젖은 속눈썹이 깜빡거릴 때마다 눈물이 후드득 쏟아졌다. 입안에 사정했단 사실이 적잖은 충격이었는지 빨간 입술이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당황으로 물든 프레이의 뺨을 손으로 쓰다듬던 페트릭은 고민했다. 입안에 든 정액을 뱉을지 삼킬지 고민하던 그가 피식 웃었다.
“울지 마. 괜찮아.”
코까지 빨개진 프레이의 얼굴은 이미 벌겋게 익어버린 뒤였다. 사과 같네. 페트릭은 속으로 웃고 말았다. 긴장으로 움찔대는 작은 엉덩이를 톡톡 두드리며 페트릭이 속살거렸다.
“다리 좀 벌려볼래?”
“응…….”
불쑥 허리에 들어온 베개가 불편하기보단 엉덩이가 들린 자세가 창피했다. 머뭇거리면서도 프레이는 다리를 살짝 벌리며 눈을 질끈 감았다. 보기 좋게 들려진 엉덩이 사이는 이미 축축했다.
“젤 같은 거 안 써도 되겠는데…….”
축축한 회음을 어루만지자 프레이의 다리가 버둥거렸다.
“흐, 페, 페트릭… 거긴 왜……?”
“구멍을 풀어야지. 그냥 넣으면 피 날걸.”
단호함마저 느껴지는 대답에 프레이는 그가 진심이란 걸 깨달았다. 옷까지 다 벗은 상태였음에도 좀처럼 실감이 나지 않는 것이다. 첫사랑과의 첫 경험이라니. 숙맥인 프레이 비셔스가 꿈에서도 생각해 본 적 없는 일이 현실이 되는 중이었다.
“아프게 안고 싶지 않으니까… 조금 이상해도 참아 볼래?”
“아아… 응, 흐으….”
한 번도 누구의 손길이 닿았던 적이 없는 곳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처음 겪는 감각이 낯설고 무섭기만 하다가도 자신을 내려다보는 얼굴을 보면 마음이 설레었다. 하지만 손가락이 세 개쯤 파고들었을 땐, 설렘보다 두려움이 커져 버려 멎은 줄 알았던 흐느낌이 샜다. 좁은 곳을 넓히던 손가락을 빼낸 페트릭이 겁을 먹어 바르르 떨리는 뺨에 입술을 눌렀다.
“아픈 거 아니야. 처음엔 조금 아픈데…. 금방 좋아질 거야.”
“응…….”
다정한 속삭임과 다정한 페로몬이 불안함을 녹여낸다. 흐물흐물 녹아내린 표정이 귀여워서 짓궂은 장난을 치고 싶어진 페트릭이 손가락을 하나 더 집어넣었다.
“아!”
“…프레이. 힘 좀 빼볼래?”
이러다 내 꺼 못 넣어. 장난기 가득한 타박에 프레이가 입술을 달싹였다. 못하겠다는 얼굴이었다.
“페트릭… 흐… 나 못, 못하겠어.”
끝내 창피함이 작은 몸을 지배하고 말았다. 생소한 곳에서 피어나는 미묘한 쾌감이 두려웠다.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미지의 감각을 본능적으로 거부하고 있는 프레이가 페트릭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따뜻한 체온과 위로하는 듯한 다정한 페로몬은 프레이의 울먹거림을 진정시키기엔 역부족인 것 같았다. 이렇게 겁이 많았는데…. 페트릭이 눈을 감았다.
과거의 프레이는 정말 참을 수 없는 고통이 아니면 울음을 참으며 다리를 벌렸다. 아직도 선명한 과거의 기억이 페트릭에게 날카로운 상흔을 남긴다. 뒤늦은 후회로 일그러진 얼굴을 한 그가 자신의 몸에 매달린 작은 몸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그만할까? 나중에 다시 해볼래?”
그는 울먹거리는 프레이를 몰아붙여 안고 싶지 않았다. 두 번 다시는.
“으…….”
프레이는 다정하게 웃어주는 제 연인이 된 첫사랑을 올려다봤다. 6년 만의 재회 이후 소중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그의 태도에 홀딱 반해버린 뇌가 속살거렸다.
마일드리안에게 안기는 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람이잖아. 사실은 끝까지 하고 싶잖아.
프레이가 대답을 생각하는 사이 페트릭은 자신을 조소하며 생각했다.
강간하는 것도 아니고. 그만하자. 병신 새끼야.
본능에 휘말려 프레이에게 달려든 자신이 한심했다.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는 머저리 같은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프레이의 머뭇거림에서 느껴지는 거부. 어쩌면 당연한 반응이었다. 다짜고짜 옷을 벗긴 자신을 영원히 보고 싶지 않다고 해도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페트릭이 어색하게 웃으며 몸을 뒤로 물렸다. 그러자 머뭇거리던 작은 손이 페트릭의 목을 끌어안았다.
“…페, 페트릭.”
상체를 아래로 살짝 잡아당기는 미약하기 그지없는 손길이었다. 하지만 페트릭은 중력에 이끌리듯, 상체를 숙였다. 혹시나 하는 기대로 반짝이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눈동자가 달싹거리는 빨간 입술을 응시했다. 억겁과도 같은 찰나가 지났을까. 눈을 꼭 감은 채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하, 하자……. 계속.”
거부할 수 없는 주인의 명령 같은 속삭임이었다. 목표물을 향해 달려나간 사냥개처럼 페트릭은 프레이의 입술을 집어삼켰다. 빠듯한 구멍을 비집고 단단하게 발기한 알파의 성기가 파고들었다. 충분한 전희 없이 이루어진 삽입이었다. 축축하긴 했지만 첫 경험인 오메가의 속살은 성기를 쥐어 짜낼 듯한 압박감을 선사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가 중얼거렸다.
“프레이. 이러면 너만, 힘들어.”
“아, 아파…….”
통증을 호소하는 속삭임에 페트릭이 제 성기를 품고 있는 구멍을 어루만지자, 프레이가 숨을 헐떡거렸다.
“아, 안 돼… 만지지 마.”
“숨 쉬어야지. 프레이.”
프레이가 적응하는 걸 기다리다가는 좆이 터질 것 같았다. 프레이의 다리를 접어 올린 그가 허리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찔걱이는 소리와 함께 밀려든 살덩이가 프레이의 축축한 속살을 짓이겼다. 페트릭이 결국 조절하지 못한 페로몬을 질질 흘려대기 시작했다. 프레이는 발끝을 오므리며 구멍에 힘을 빼보려 끙끙거렸다. 뒤늦게 정신을 차렸을 때, 방 안은 온통 우성 알파가 뿜어낸 페로몬으로 가득했다.
“프레이. 괜찮아?”
“응…. 아니, 안 괜찮은 것 같은데…….”
부끄러운지 프레이가 어색하게 웃었다. 페트릭에게 남아있던 실낱같은 이성이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단번에 깊은 곳을 파고드는 성기에 프레이가 버둥거렸다.
“아…. 싫… 싫어. 이상해.”
“프레이.”
이게 꿈이라고 해도 페트릭은 죽어도 깨고 싶지 않았다. 자신을 감싸오는 프레이의 페로몬과, 사랑스럽기만 한 구멍. 울먹이면서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면 창피해서 시선을 먼저 돌리고 마는 예쁜 얼굴. 프레이가 보여주는 모습은 그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는 프레이의 새로운 모습이었다. 자신이 소중하게 대해줬다면 볼 수 있었을 프레이 비셔스의 모습과 진심.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중얼거렸다.
“너는 내가 널 얼마나 좋아하는지… 모를 거야.”
통증을 뒤덮을 만큼 크기를 더해가는 쾌감에 잠겨버린 신음이 흩어졌다. 첫 경험에 뒤로 오르가즘을 느끼며 사정하는 오메가의 가냘픈 몸이 덜덜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각인시켜서 집에 가둬두고 싶은데.”
“아, 아아… 안쪽, 에… 으… 싫어…….”
본인조차 생소하기만 한 깊은 곳을 파고드는 성기에 프레이가 거부감이 드는지 다리를 마구 흔들었다. 딸랑딸랑- 귓가를 간지럽히는 요란한 방울 소리가 울렸다.
“프레이. 나 봐.”
“으흑, 읏… 페트릭…….”
얼굴은 다정하고 상냥한 페트릭이 분명했다. 하지만 거칠게 아래를 비집고 성기를 처박고 있는 아래가 낯설고 무섭기만 했다. 입술이라도 겹쳐야 무서움을 조금 떨쳐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프레이가 고개를 들며 속삭였다.
“입 맞춰줘.”
프레이가 키스해달라고 조르는 건 처음이었다. 숨이 막힐 것 같은 감정이 범람했다. 고개를 숙이고 아주 느리게 혀끝을 갖다 대자 신음이 흩어졌다.
“흐, 으응.”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눈을 깜박이며 자신을 응시하는 맑은 보라색 눈동자가 그곳에 있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숨을 들이마셨다. 섹스할 때 어쩌다 마주친 프레이의 눈동자는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약물과 마약을 쓰던 때는 아예 눈을 제대로 뜨지도 못할 때도 있었다. 뒤늦은 자기혐오가 치밀었다. 병신 새끼. 제대로 된 애정표현 하나 하지 못해 좋아하는 사람을 망가트려 버린 자신을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자살을 시도했고, 자살은 실패했다. 그 대신 꿈인지 알 수 없는 과거를 다시 살고 있었다.
하지만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프레이 비셔스를 포기할 수 없었다. 그는 비틀린 집착과 소유욕을 버리고, 온전히 자신을 프레이 비셔스에게 종속시킬 수만 있다면 모든 걸 바칠 수 있었다. 키스하는 동안 조금 잠잠했던 허릿짓이 격해졌다.
“프레이. 너한테 노팅하고 싶어.”
“아…….”
프레이는 헐떡거리며 페트릭을 쳐다봤다.
“해도 된다고 허락해 줄래?”
“학… 아아… 읏.”
귀두까지 빠져나간 성기가 다시 단번에 끝까지 박혔다. 채 삼키지 못한 침이 입가에 질질 샜다. 어떻게든 적응해보려 아래를 조였음에도 이물감은 여전했고,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 같은 알파의 성기가 익숙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프레이가 울먹거리며 헐떡이자 페트릭이 프레이의 성기를 움켜잡았다. 지나친 쾌감으로 뻐끔거리는 오메가의 성기 끝에선 정액이 질질 새는 중이었다.
“잠, 잠깐만.”
“응? 대답부터 해줘.”
노골적으로 성기 끝을 자극하는 손길에 프레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 해도 돼… 그러니까, 손 좀… 흑.”
억지로 받아낸 프레이의 허락이었지만 페트릭은 근사한 웃음을 얼굴에 걸쳤다. 알파의 성기가 서서히 부풀었다. 더없이 만족스러운 감각에 그가 나른하게 웃었다.
“고마워.”
난데없는 감사 인사에 프레이는 허리를 덜덜 떨면서도 그에게 되물었다.
“흐, 뭐, 뭐가?”
눈물인지 침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어있는 예쁜 얼굴을 어루만지던 페트릭이 말없이 웃었다.
“아흐…….”
사정의 여운을 느끼는 나른한 얼굴이 다가오자 프레이는 반사적으로 눈을 감는다. 숙맥은 몇 번의 키스와 한 번의 섹스로 이제 그가 언제 자신에게 입을 맞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짓무른 발간 눈가 위에 키스하면서 페트릭이 뒤늦게 대답했다.
“그냥, 너한테 전부 다 고마워.”
“무슨 소리야…….”
프레이는 작게 웃으며 페트릭의 넓은 등을 껴안았다. 따끈따끈한 손이 자신의 등에 얹혀있는 감각이 낯설기만 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에 손대는 걸 싫어하던 그는 더없이 기쁜 표정을 하고서 속삭였다.
“무슨 소리긴. 내가 널 좋아한다는 소리야.”
귓가에 속살거리는 목소리가 프레이에게 녹아들었다. 귀까지 붉어진 예쁜 얼굴이 품 안을 파고들었다. 부끄러운지 가슴팍에 고개를 비비적거리던 프레이가 중얼거렸다.
“나도 너 좋아해…….”
수줍은 고백이 오가는 침실은 후텁지근했고, 서로의 페로몬이 뒤엉켜있었다. 터질 것 같은 심장 고동 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 둘은 이 순간만큼은 서로의 마음이 똑같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모든 걸 잊어버릴 수 있었다.
*
프레이의 몸에 남겨진 키스 마크가 페트릭을 더없이 뿌듯하게 만들었다. 정사의 여운이 남아있는 몸은 피곤한지 페트릭의 품에 안겨 작게 숨을 쉬는 것이 전부였다. 프레이를 꼭 끌어안고 있던 페트릭이 물었다.
“졸려?”
부들부들한 머리카락 끝에 입을 맞추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다정했다. 잠에 취한 프레이는 아직도 이물감이 선명한 아래를 느끼면서 그제야 자신이 첫사랑과 섹스를 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페트릭은 잠자리에서 집요한 스타일이었고, 프레이는 금세 지쳐버렸다.
“피곤하긴 한데… 졸리진 않아.”
“그렇구나.”
프레이의 작은 숨소리 하나까지 집중해서 듣고 있는 페트릭의 안색은 창백했다. 그는 프레이와 재회한 이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잠을 자지 못했다. 기절하듯 자는 몇 분간의 수면으로 그럭저럭 버티고 있었으나 사실 그는 이미 오래전부터 한계에 도달했다. 하지만 그는 견딜 수 있었다. 프레이 비셔스가 자신의 눈앞에 있으니까.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그는 펄펄 끓는 지옥 불 위를 맨발로 기꺼이 걸을 수 있었다. 피곤함에 잠식된 페트릭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프레이가 생각에 잠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같이 살게 된 이후 그가 제대로 잠을 자는 모습을 본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불면증이 있는 걸까?
묻고 싶지만 주제넘은 참견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사귀는 사이였지만 서로에 대해 아는 것이 거의 없는 사이였다. 연인에게도 말하고 싶지 않은 사실들은 분명히 존재했다. 그 선을 프레이는 지키고 싶었다. 하지만 페트릭이 자신을 보며 가끔 짓는 불안한 표정을 볼 때마다 욕심이 생겨났고 묻고 싶었다.
너도 불안한 게 있어? 그래서 못 자는 거야?
프레이는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하는 중증 불면증 환자였다. 죽은 부모님의 시체를 보았던 그 날이 꿈에 나올까 두려워 잠을 자지 못했다. 하지만 꿈속에서라도 부모님을 보고 싶은 모순된 감정이 프레이의 마음을 병들게 했다.
“페트릭.”
“응?”
프레이가 천천히 페트릭의 얼굴을 만지작거렸다. 페트릭 마일드리안. 내가 제일 좋아하는 사람. 나의 애인. 프레이는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얼굴이 환하게 빛나던 시절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좋아하는 색깔, 좋아하는 소설 작가, 좋아하는 나라. 알음알음 모은 그에 대한 사소한 정보들은 프레이를 재구성했다. 언제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프레이의 기준이었다. 너에 대한 걸 더 알고 싶어.
손끝에 만져지는 페트릭의 얼굴은 조금 푸석했다. 프레이는 작게 속삭이며 물었다.
“혹시 불면증 있어?”
나처럼?
프레이가 생략한 뒷말이 들려오는 것 같았다. 페트릭은 조금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침묵했다. 프레이가 그를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쳐다봤다.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인 페트릭이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눈만 깜박였다.
나 같은 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난 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쳐버린 마음 한구석에서 투정을 부리고 싶은 이기적인 욕심이 피어났다. 힘들어. 하루하루가 행복하고 믿기지 않는데, 눈을 감았다 뜨고 나면 네가 없는 그 별장일까 봐 무서워. 죽고 싶어.
하지만 페트릭은 속마음을 털어내지 않았다. 아니 털어낼 수 없었다. 그가 겪는 불안함과 초조함, 불면 같은 것들은 온전히 자신이 감내해야 할 죗값이었다. 프레이 비셔스를 죽게 만든 자신의 행동들의 대가. 누구에게도 전가할 수도, 전가해서도 안 되는 페트릭 마일드리안 혼자 겪어야 하는 형벌이었다. 페트릭이 꾸며낸 미소를 지으며 프레이의 머리를 쓰다듬던 순간이었다.
“아니라면 다행이지만… 걱정이 돼서.”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던 프레이는 대답이 없는 페트릭의 눈치를 보며 물었다.
“주제넘은 물음이었을까?”
대답이 없는 반응에 민망했는지 프레이의 뺨이 발그레했다.
“그런 거 아니야. 사실은… 프레이.”
페트릭이 머뭇거렸다. 그는 언젠가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 꿈속에서도 프레이는 자신의 품에 안겨서 따뜻하게 살아 숨 쉬고 있었다. 지금처럼 수줍게 웃어주기도 했다. 하지만 자신이 그동안 단 한 번도 건네지 못했던 속마음을 고백하자 흔적도 없이 사라져버렸다.
프레이가 다시 사라지면?
만약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차마 소리 내 말할 수 없는 속마음들이 차곡차곡 쌓여 목을 조르는 것만 같았다.
“페트릭. 괜찮아?”
스카비오사 꽃잎이 흩날리는 곳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페트릭은 자신을 쳐다보는 프레이가 사라질세라 세게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자고 눈을 뜨면…….”
잔뜩 갈라진 목소리에 프레이가 귀를 기울였다. 어설픈 위로를 하려는 듯 넓은 등을 토닥이는 작은 손이 분주했다. 어설픈 토닥거림을 느끼며 페트릭이 고백했다.
“프레이 네가 다시 흔적도 없이 사라졌을까 봐 잠을 잘 수가 없어.”
“페트릭.”
프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프레이의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은 페트릭이 숨을 헐떡이며 작은 몸에 매달렸다.
“나 이번엔 정말 잘할 테니까, 흐, 어디 가지 마… 제발.”
두서없이 쏟아내는 말들의 무게가 무거웠다. 두려움과 고통이 덕지덕지 매달려있는 어두운 감정들을 프레이는 기꺼이 떠안았다.
“울지 마. 페트릭.”
페트릭은 다정하기만 한 프레이의 목소리에 구원받는 기분이었다. 프레이는 자신의 연인을 괴롭히는 감정을 희석시킬 수 있는 방법이 자신이 그의 곁에 남아있는 것이라면 기쁜 마음으로 그렇게 해줄 수 있었다.
“네가 싫다고 할 때까지 네 옆에 있을 테니까…….”
믿을 수 없는 대답에 페트릭이 고개를 들었다. 프레이는 손을 들어 페트릭의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그만 울어.”
“응. 그럴게.”
네가 지옥에 떨어지라고 해도 그렇게 할게.
페트릭은 프레이의 목덜미에 다시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나 그리워하던 프레이의 페로몬이 위로하듯 지친 그의 몸을 감싸 안는 기분이었다. 페트릭은 처음으로 깊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
프레이는 아침마다 자신을 꼭 끌어안고 얼굴을 만져보며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는 얼굴이 익숙했다.
“좋은 아침이네.”
“응. 진짜 좋은 아침이야. 하…….”
아침마다 늘 기적을 마주하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오늘도 프레이의 얼굴을 보며 웃었다. 페트릭이 처음으로 마음 놓고 자던 그 날, 잠을 자고 일어나니 하루가 훌쩍 지나 있었다. 죽은 듯 미동도 없이 잠을 자고 있는 페트릭이 걱정된 프레이가 주치의를 불러야 할 것 같다고 고용인을 찾을 정도였다. 그동안 부족했던 수면을 몰아서 취하고 눈을 떴을 때, 그가 처음으로 마주한 건 프레이의 자는 얼굴이었다. 새벽인 듯, 어두운 창밖 풍경을 인지하기도 전에 습관처럼 프레이의 호흡수를 세던 페트릭은 뒤척이는 프레이를 반사적으로 토닥거렸다.
‘으응.’
정말 프레이가 아직도 내 옆에 있어. 진작 이렇게 아껴줄걸.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이렇게 행복할 수 있었는데 왜 그땐 몰랐지.
페트릭은 프레이를 볼 때마다 행복했다. 하지만 행복한 것도 잠시, 자신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하고 벌벌 떨며 바닥을 기어 다니던 프레이가 생각날 때마다 죄책감에 죽고 싶어졌다.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는 일들이 모두 자신의 망상이었든 자신이 정말 시간을 되돌아왔든 이제 상관이 없다.
“잘 잤어?”
자신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잘 잤냐고 물어주는 프레이 비셔스가 있다. 그거면 충분했다. 자신과 똑같은 샴푸 냄새가 나는 머리에 쪽 하고 키스를 하면서 페트릭은 웃으며 대답한다.
“응. 잘 잤어. 프레이.”
끔찍한 악몽은 이제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