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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의 종말 외전: Nightmare (9/24)

감정의 종말 외전: Nightmare

빗물이 새서 누렇게 얼룩이 진 모텔 벽지는 금방이라도 곰팡이가 필 것처럼 너저분했다. 허름한 모텔의 안으로 들어선 남자는 초조함에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뛰느라 거칠어진 호흡을 가다듬지도 못한 남자는 고개를 들어 모텔의 카운터부터 살폈다. 얼룩덜룩한 카운터의 뒤에 앉아있는 남자는 다 깨진 안경을 쓰고 있었다. 무기력해 보이는 남자가 기계적인 인사를 건넸다.

“어서 오세요.”

프레이는 사과를 밀어두고 고개를 들었다. 손님이 서 있어야 할 곳은 휑하기만 해서 두리번거리던 순간이었다. 구둣발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린 프레이는 카운터의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낯선 남자를 저지했다.

“안으로 들어오시면 안 되는데…….”

고개를 들어 얼굴을 보려던 프레이는 다짜고짜 자신을 끌어안는 남자의 행동에 몸을 뻣뻣하게 굳혔다.

“왜, 왜 이러세요.”

자신을 꼭 끌어안은 남자에게서 시원한 향이 새어나와 프레이가 눈을 깜빡이며 눈을 데굴데굴 굴렸다. 적어도 술에 취한 주정뱅이는 아니었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남자는 적어도 이런 허름한 모텔에 올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프레이. 프레이…….”

“누구… 우읍.”

다짜고짜 자신의 이름을 부른 남자가 입술을 겹쳤다는 사실에 프레이가 몸부림을 쳤다. 거칠게 발버둥을 쳤음에도 남자는 좀처럼 떨어질 것 같지 않았다. 결국 프레이가 남자의 입술을 깨물었다. 입술이 깨물린 남자는 그제야 뒤로 물러났다. 경찰에 신고를 하기 위해 얼굴을 올려다본 프레이는 눈을 크게 떴다.

“…….”

“프레이. 나야.”

남자는 다름 아닌 자신의 첫사랑,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었다.

*

페트릭은 자신의 눈앞에 프레이가 앉아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거듭 확인을 하기 위해 손을 뻗어 작은 뺨과 코, 눈가를 매만지는 손길은 조심스럽고, 애틋하기까지 했다. 프레이는 얌전히 페트릭의 맞은 편에 앉아있었다. 아무 말없이 그에게 얼굴을 내어주고 지금 이 상황을 정리해보려는 얼굴은 발그레했다.

정말 마일드리안이잖아.

졸업 후 6년 만에 만난 자신의 첫사랑은 여전히 근사해서 프레이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자신을 애틋하게 쳐다보는 시선이 그저 좋았으나, 묘한 침묵이 계속될수록 프레이는 이 상황이 점점 불편해졌다.

“저, 저기… 마일드리안.”

작은 입술을 손가락으로 지분거리는 손길이 노골적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긴장감을 깨고 프레이가 조심스럽게 그를 불렀을 때, 페트릭은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응. 왜 그래?”

“손… 손 좀 떼고 말해주면 안 될까?”

페트릭은 프레이의 입술을 습관처럼 만지던 손을 떼내며 속삭였다.

“미안.”

둘이 앉아있는 허름한 비품실 안은 다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리는 침묵이 버거웠다. 프레이가 다시 용기를 내어 바짝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여긴 왜 왔어?”

페트릭 마일드리안과 싸구려 모텔은 어울리지 않았다. 숙박이나 대실을 하기 위해 온 것 같지도 않아. 생각이 꼬리를 물수록 프레이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서렸다. 반짝이는 보라색 눈동자가 오로지 자신만을 쳐다보는 것이 얼마 만인지 가늠해보던 페트릭이 대답했다.

“너 찾으러 왔어. 프레이.”

자신을 찾으러 왔단 그의 말에 프레이는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금방이라도 눈앞에서 사라질 것 같은 신기루 같은 프레이를 조금이라도 더 많이 눈에 담으려 페트릭은 눈조차 깜빡일 수 없었다.

마일드리안이 왜 날 찾으러 왔다는 거지. 프레이는 페트릭의 대답이 믿기지가 않았다. 습관처럼 프레이는 주먹을 세게 쥐었다. 짧게 잘린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어 따끔한 통증을 주던 순간이었다. 페트릭은 프레이가 쥐고 있는 주먹을 억지로 펴고 있었다. 작은 손바닥을 쳐다보는 얼굴 위로 속상함이 떠올랐다.

얼마나 세게 쥐었는지, 손톱이 파고든 여린 손바닥엔 빨간 자국이 선명했다. 살갗이 조금 까진 곳에는 핏방울이 맺혀 있었다. 페트릭이 고개를 숙여 조심스럽게 손바닥을 핥았다. 손바닥을 느리게 핥는 혀의 까끌까끌하고 물컹거리는 감촉이 지나치게 자극적이어서 프레이는 정신이 몽롱했다. 모든 상황이 어색해서 숨이 막혔지만, 프레이는 자리를 벗어날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손바닥을 핥으면서도 자신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집요한 시선에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흣.”

농후한 알파의 페로몬에 서서히 중독되어버린 오메가는 질척이는 혀가 상처 위를 핥자, 신음을 흘렸다. 신음을 흘린 뒤 당황한 얼굴로 프레이는 다급하게 입술을 앙다물었다.

“프레이. 손은 왜 세게 쥔 거야. 상처가 났잖아.”

“아, 그게… 마일드리안. 잠깐만.”

손바닥에 배어난 피가 멎었지만 페트릭은 여전히 작고 말랑말랑한 손바닥을 할짝거렸다. 붉고 조금 따뜻한 혀가 손가락 끝에 닿는 순간, 프레이는 손을 뒤로 빼며 숨을 헐떡였다.

“몸 안 좋아? 또 어지러워?”

페트릭은 습관처럼 프레이에게 캐물었다. 페트릭에게 모든 행동을 하나하나 허락받아야 할 수 있었던 시절부터 프레이는 자신의 감정, 상태들을 숨겼다.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죽을 것 같이 힘들어도 행복한 척 웃어야 페트릭의 변덕에도 별다른 탈 없이 넘어갈 수 있었다. 뒤늦은 후회를 하기 시작한 페트릭은 늘 프레이의 상태를 살피며 혼자만의 탐색전을 벌였다. 다정한 물음에 프레이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아픈 건 아니지만 조, 조금 당황해서… 우리가 이럴 사이는 아니잖아.”

프레이의 목소리에 페트릭은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놀랐겠다. 내가 너무 조급했어. 네가 다시 사라질까 봐… 미안. 프레이. 지금 내가 무슨 말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지?”

프레이는 조금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며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페트릭은 당황으로 얼룩진 프레이의 얼굴을 쳐다보며 도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한숨을 쉬었다. 아직도 꿈을 꾸는 것 같았다. 하지만 비록 이 순간이 꿈이라고 해도 좋았다. 오랜만에 꿈에 나와준 프레이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눈에 담고, 따뜻한 체온을 다시 한 번 더 느끼고 싶었다.

“잠깐만 안아봐도 될까?”

“응?”

프레이가 눈을 크게 뜨며 되물었다. 대답을 머뭇거리는 입술이 달싹이자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프레이의 허락을 갈구하는 걸인처럼 매달렸다.

“한 번만. 응?”

초조함에 잔뜩 일그러진 모습은 그와 어울리지 않았다. 프레이가 붉어진 얼굴을 위아래로 끄덕였을 때, 페트릭이 몸을 일으켰다. 페트릭의 품에 안겨있는 프레이가 속삭였다.

“진짜 괜찮아?”

프레이는 점점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6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은 불안과 초조로 얼룩진 얼굴이었다. 늘 당당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었다.

“나 걱정해주는 거야? 응?”

페트릭은 프레이가 자신을 생각해주고 있다는 사실이 그저 좋았다. 그는 조금 붉어진 프레이의 눈가에 살며시 키스했다. 부드러운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떨어지자 조금 잠잠했던 프레이의 심장이 요동쳤다. 요란한 심장 소리가 그에게 들릴까 봐 겁이 났는지 프레이가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학교 다닐 때 이름만 아, 아는 사이였는데… 갑자기 찾아와서 이러는 거 누가 봐도 이상하니까…….”

품에서 벗어나고 싶은지 프레이는 페트릭의 품 안에서 꼬물거렸다. 조심스럽게 몸을 떼낸 페트릭이 물었다.

“부담이 돼?”

그답지 않게 기죽은 목소리였다.

“그, 그런 의미는 아니야…….”

프레이가 고개를 저으며 말끝을 흐렸다. 이 상황이 당황스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는 표정을 쳐다보며 페트릭은 자신의 주먹을 세게 쥐었다. 긴장으로 땀이 배어 나온 주먹이 미세하게 떨렸다.

“프레이. 진짜 이상한 말이라는 거 나도 아는데… 들어줄래?”

“응. 뭔데?”

페트릭이 도대체 무슨 말을 할지 가늠해보는 얼굴은 고통이나 슬픔은 더 이상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예쁘기만 한 얼굴 위로 천천히 페트릭이 제 입술을 가져갔다. 페트릭은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는 이름 모를 신에게 빌었다. 제발. 꿈이어도 되니까 조금만 더 볼 수 있게 해 주세요. 부탁할게요.

“갑자기 찾아와서 다짜고짜 이런 말 하는 내가 이상한 새끼인 거 나도 아는데…. 널 다시 만나면 꼭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어. 그래서 매일 기다렸는데 넌 그날 이후로 내 꿈에는 나와주지도 않아서… 빌어먹을… 그래서, 그러니까… 내가 할 말은…….”

술에 취한 사람처럼 두서없이 늘어놓는 페트릭의 목소리에 결국, 울음이 섞여들기 시작했다. 영문모를 말들을 하는 그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프레이는 자신의 어깨에 고개를 파묻고 있는 첫사랑의 등을 토닥였다. 울음을 참고 있는지 페트릭이 거친 숨을 몰아쉴 때마다 손끝이 저릿해질 정도로 페로몬이 흘러나왔다. 프레이는 조금 흐릿해진 시야를 깜빡거리며 속삭였다.

“응. 나 기다릴 테니까 천천히 말해줘.”

걱정이 가득 담겨있는 다정한 목소리에 결국 참고 있던 페트릭의 눈물이 터졌다. 뿌옇게 번진 시야로 프레이를 눈에 가득 담은 그가 헐떡였다.

프레이에게 해주고 싶은 말은 흔해빠진 말이었다. 페트릭은 누군가는 습관처럼 지껄이는 그 흔한 말을 한마디 해주지 못했다는 것이 뼈저리게 후회됐다. 살아있을 때 왜 잘해주지 못했을까. 다시 꿈에 나와주기만 한다면 꼭 말해줘야지. 매일 밤 페트릭이 다짐하며 잠들었지만 꿈을 꿀 때마다 프레이는 나오지 않았다. 빌어먹을 스카비오사 꽃잎이 팔랑거리는 폐허를 떠도는 꿈을 꾸던 페트릭은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프레이를 끌어안았다.

“나… 너 사랑해… 진심이야. 나 아직도 너 좋아해. 프레이.”

그가 고백하는 순간, 주위가 아지랑이처럼 흐려지기 시작했다. 프레이마저 사라질까 봐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자 손목이 욱신거렸다. 페트릭은 끔찍한 통증에 인상을 찌푸릴 수조차 없었다. 스카비오사 꽃다발을 품에 안고 그네 위에 앉아 몸을 기댄 채로 영원한 잠에 빠져버린 그날처럼, 품 안의 미미한 온기는 온데간데없었다. 더듬더듬 작은 몸을 만지던 페트릭이 흐느꼈다.

“프레이. 가지 마. 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

마지막으로 그와 눈이 마주친 프레이는 수줍은 듯 웃었다. 차갑게 식어버린 몸을 끌어안은 페트릭에게 프레이가 작게 속삭이는 순간, 작은 몸은 언제 그의 품에 안겨있었냐는 듯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잘 지내. 마일드리안.’

더할 나위 없이 끔찍하고 지독한 악몽이었다.

감정의 종말 외전 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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