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감정의 종말 외전: The blue (8/24)

감정의 종말 외전: The blue

“프레이. 어디 가?”

“아무래도 온실에 가봐야 할 것 같아.”

더운 여름이었다. 하복을 입었지만 더운 건 여전했다. 프레이는 길게 한숨을 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있으나 마나 한 서클 활동을 제일 열심히 하는 사람을 뽑는다면 아마도 프레이 비셔스가 1등일 것이다. 꽃들 속에 파묻혀있는 프레이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해 보였다.

프레이는 갑자기 더워진 날씨 때문에 이제 막 봉오리를 틔운 꽃들이 걱정이었다. 더위에 약한 품종도, 그렇지 않은 품종들도 섞여 있는 바람에 신경이 더 쓰였다. 복도에 들어서자 한데 뒤섞인 페로몬들로 숨이 막혔다. 사춘기에 접어든 알파와 오메가들이 내뿜는 페로몬은 강렬했다. 프레이는 여름을 실감하며 인상을 찌푸렸다. 온실로 연결된 복도의 모퉁이를 돌던 순간, 누군가와 부딪힌 프레이가 중얼댔다.

“아… 미안해.”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한 건 상대방이었지만, 사과를 한 쪽은 프레이였다. 프레이는 상대방의 가슴팍에 부딪힌 얼굴을 살짝 만지면서 고개를 들었다.

“괜찮아?”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었다. 운동을 하고 왔는지 반짝반짝한 머리칼이 이마에 들러붙어 있는 페트릭은 자신과 부딪힌 오메가의 페로몬을 들이마셨다. 열성인가 보네. 그가 속으로 생각하는 사이 프레이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응.”

페트릭을 가까이에서 마주친 건 꽤 오랜만이었다. 자세히 보고 싶은 마음에 힐끔 다시 위를 쳐다보자 여전히 페트릭은 프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시선이 얽혀들기 무섭게 프레이의 심장은 쿵쿵 뛰기 시작했다. 소리가 다 들릴 것 같아. 프레이는 당황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몸을 움직였다. 페트릭을 뒤로 한 채 온실로 가는 동안 작은 얼굴은 벌겋게 익었다. 굳이 거울을 보지 않아도 열사병에 걸린 것 같은 얼굴을 애써 식히려 손을 열심히 파닥거렸지만 역부족이었다. 누가 볼세라 다급한 걸음으로 온실 안에 도착하고 나서야 프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내 얼굴이 빨개진 거, 마일드리안이 봤을까? 못 봤겠지?

프레이는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려 자신이 가꾸고 있는 화분 앞에 쪼그려 앉았다. 당황한 마음도 잠시, 프레이는 꽃잎을 살피며 작게 웃었다. 온도가 일정한 온실 안에서 자라는 꽃들은 급작스럽게 찾아온 더위에도 끄떡없었다.

너네는 갑자기 더워져도 괜찮아서 좋겠다. 나는 얼굴에 티가 나서 곤란하거든.

여러 색이 뒤섞인 오묘한 꽃잎을 쳐다보며 프레이는 조금 전 복도에서 마주친 첫사랑의 페로몬을 떠올렸다.

우성이라 그런가? 마일드리안 페로몬은 내가 처음 맡는 향이었어. 나는 흔해 빠진 코튼인데…….

열성 오메가의 페로몬은 희미했다. 심지어 페로몬을 조절하기도 어려워서 프레이는 늘 울적했다. 한참이나 꽃 앞에 쪼그려 앉아있는 프레이에게 원예부의 고문 교사가 다가왔다.

“프레이. 이번 주에 꽃꽂이할 모티브는 정했니?”

며칠 뒤 서클활동으로 꽃꽂이를 할 예정이었지만, 프레이는 모티브를 정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며칠 동안 망설이던 모티브가 떠올라서 환하게 웃었다.

“네. 정했어요.”

프레이의 대답에 교사는 카탈로그를 건넸다. 주문을 해야 하니 원하는 꽃에 체크를 하라는 말에 프레이는 정원에 딸린 테이블에 앉아 신중히 카탈로그를 넘겼다.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체크를 하고 있는 프레이를 쳐다보던 교사가 웃었다.

“프레이. 날씨가 꽤 더웠나 보구나?”

“네?”

교사가 빤히 쳐다보는 카탈로그로 시선을 내린 프레이는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자신이 체크한 꽃들은 죄다 온통 파란색 계열뿐이었다.

그런 게 아니라…. 자신의 첫사랑의 눈동자 색을 생각하며 골랐다는 말은 죽어도 할 수 없는 프레이는 ‘네. 갑자기 덥네요….’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교사의 시선을 피해 시계를 보자 어느새 수업이 다시 시작될 시간이 코앞이었다.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난 프레이는 꽃꽂이 시간이 기대돼서 마음이 두근거렸다. 분명, 예쁜 작품이 완성될 것 같은 확신이 들었다.

*

“역시 손재주가 있구나, 프레이. 너무 예쁘다.”

유명 플로리스트이기도 한 교사가 프레이의 완성작을 보며 감탄했다. 원예부에 이름만 부원인 학생들을 제외하고, 주말 꽃꽂이 수업에 참석한 아이들도 한마디씩 거들고 있었다. 온통 칭찬 일색이라 프레이의 귓가가 발그레했다.

“여름에 너무 어울리는 작품이야. 프레이 너만 괜찮다면 학교 중앙 계단 쪽에 장식해놓는 건 어떨까?”

“저는 좋아요. 선생님.”

지나가다 페트릭이 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평소라면 쑥스러워 거절했을 프레이는 흔쾌히 교사의 제안을 수락했다. 국내외대회에서 학생들이 수상한 상패나 트로피들이 진열된 중앙 계단에 장식된 프레이의 꽃꽂이는 중앙 계단을 오가는 학생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어떻게 알았는지 꽃꽂이를 잘 봤다는 교사들의 인사치레에 프레이는 부끄러워 어쩔 줄 몰라했다. 꽃꽂이가 생기를 잃었을 때쯤이었다. 하교를 하려던 프레이는 자신의 꽃꽂이를 쳐다보며 서 있는 마일드리안의 뒷모습을 발견했다. 프레이는 페트릭의 반응이 알고 싶어 몸을 숨겼다. 누군가를 기다리는지 한참이나 꽃꽂이의 앞에 서 있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대수롭지 않게 중얼거렸다.

“다 시들었네.”

그 한마디에 프레이는 심장이 바닥에 처박히는 기분이었다. 그저 꽃이 시들었다는 짧은 말 한마디였다. 하지만 자신의 존재가 부정당한 것 같았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객관적인 사실이었는데도 우울해하는 소심한 자신이 싫었다. 프레이는 학교를 도망치듯 빠져나갔다. 한참이나 걸으면서 마음을 정리했지만, 집에 도착해서도 우울함은 사라지지 않았다. 평소처럼 프레이를 맞이하던 그의 아버지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우리 아들. 무슨 일 있었어?”

“아뇨. 그냥 조금 더워서요…….”

프레이는 어색한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오래된 꽃꽂이를 보며 누군가가 시들었다고 감상평을 남겼을 뿐이다. 그 누군가가 자신이 짝사랑하는 사람이었다는 점이 문제였지만. 정말 아무 일도 아니었다.

좀 더 생생했을 때 보고 싶다는 말이었을 수도 있잖아.

프레이는 자신의 방으로 향하며 자신의 마음을 다독였다.

마일드리안은 내가 듣고 있었는지도 몰랐고… 거지 같다고 욕한 것도 아니잖아. 소심하게 굴지 말자. 프레이 비셔스.

씻는 동안 몇 번이나 자기 자신을 타이른 프레이가 욕실에서 나오자,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가 요란하게 들렸다. 거실로 터덜거리며 들어서자 신이 나 있는 프레이의 아버지가 손짓했다.

“어서 이리 와 보렴.”

“세상에. 색이 이게 뭐야?”

기겁을 하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프레이가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형형색색의 옷들을 쳐다봤다. 포장지들 사이로 알록달록한 티셔츠를 손에 들고 프레이의 어머니는 질색을 했다. 그런 그녀의 반응에 괜찮지 않냐고 프레이의 아버지가 우기고 있었다.

“자기는 뭘 몰라. 자, 우리 아들은 귀여우니까 노란색.”

“네……?”

얼떨결에 아버지에게 건네받은 노란색 티셔츠를 손에 쥔 프레이는 눈만 깜빡였다. 자세히 살펴보니 티셔츠들은 크기와 색만 다를 뿐이다.

“가족 티셔츠 같은 거예요?”

“그렇지. 여보. 프레이도 좋아하잖아요. 색도 여보 닮은 색으로 골라온 건데.”

“아니, 그렇긴 한데…….”

서로 투닥거리는 부모님의 대화를 듣던 프레이가 웃어버렸다. 늘 조금 부족한 센스 탓에 매번 혼나면서도 배우자에게 지극정성인 아버지, 그런 아버지를 구박하면서도 늘 져주며 결국에는 장단을 맞춰주고 마는 어머니. 프레이는 자신의 부모님을 보며 어른이 되면 부모님처럼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우울한 마음은 온데간데없어졌다.

등 떠밀리듯 티셔츠를 갈아입고 거실에 서서 폴라로이드로 가족사진을 찍은 프레이는 어느새 페트릭의 말 한마디에 우울해하던 것도 잊은 채로 환하게 웃었다. 프레이의 부모가 거실에 목을 매달고 시체로 발견되기 6개월 전의 어느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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