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자가호흡이 불가능해진 프레이는 산소호흡기를 달고 있었지만, 평온한 얼굴이었다. 프레이가 누워있는 침대 근처에는 페트릭이 충동적으로 사 온 다음 아무렇게나 쌓아둔 선물들이 가득했다. 그는 프레이의 빛바랜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꼭 닮은 꽃다발을 사 오기도 했고, 또 어느 날은 프레이가 예전에 먹고 싶다던 오렌지를 사 오기도 했다.
“안 일어날 거야?”
잠든 얼굴을 향해 몇 번이나 묻는 얼굴에서 광기라고는 이제 찾아볼 수 없다. 의사가 마음의 준비를 하라고 했을 때, 페트릭은 의사의 멱살을 잡았다.
프레이의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유산을 모두 지켜본 의사는 프레이의 몸을 검사하며 잠든 얼굴을 가만히 쳐다봤다. 미인박명이라는 옛말이 더할 나위 없이 어울리는 남자였다.
몇 달째 감겨있는 눈꺼풀 아래로 늘어진 속눈썹이며 오밀조밀 예쁘게도 생긴 얼굴은 지금 당장 숨이 멎어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상대를 잘못 만나 팔자를 망친 사람들을 많이 봤지만 눈앞의 남자처럼 기구한 인생을 가진 사람도 드물었다. 발목에 남아있던 추적장치는 프레이의 생명 유지를 위해 사용되는 장치들에게 혼선을 줄 수 있어 제거된 상태였다. 의사로서가 아닌 비슷한 또래의 아이를 가진 한 아이의 아버지로서, 의사는 알파의 비틀린 집착을 견디지 못하고 영원한 수면으로 도망간 오메가가 지금은 평온한지 그저 그것이 궁금해졌다.
“상태는 어때요.”
조금은 지친 목소리에 상념으로부터 벗어난 의사는 프레이의 검사 결과를 힐끔 쳐다보며 말을 골랐다. 상태라고 해봐야 똑같았다. 길어야 1년. 짧으면 1달. 아니, 당장 지금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오메가의 상태를 설명하는 의사는 식은땀을 흘렸다.
“저번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호전될 가능성은 낮은 편이라 지금부터라도 마음의…….”
“나가요.”
페트릭은 더 듣기 싫다는 듯 인상을 썼다. 마음의 준비라니. 그런 건 개나 주라지.
자신은 프레이에게 죽어도 좋다는 허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날 분명 프레이는 자신의 허락 없이는 죽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다. 프레이는 다 망가진 몸을 하고서라도 일어날 것이 분명했다. 그가 아는 프레이 비셔스는 그런 남자였다.
페트릭은 프레이의 손을 붙들며 제 손에 깍지를 꼈다. 차가운 프레이의 손가락은 뻣뻣하게 굳어 잘 구부러지지 않았다. 페트릭은 제 손으로 직접 구부려 마주 잡은 손을 들어 마른 손등에 입술을 가져갔다.
“빨리 일어나. 프레이. 지금 일어나면 용서해줄 테니까…….”
혼자 중얼거리던 페트릭은 프레이가 금방이라도 눈을 뜨고서 자신에게 대답해주는 상상을 했다. 기대감으로 프레이의 얼굴을 쳐다보던 시야가 뿌옇게 변하기 시작했다.
“젠장…….”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태어나 지금까지 좋아하는 사람이라고 스스로 인정한 건 프레이 비셔스가 유일했다. 그의 사생활은 남들의 생각보다 난잡했다. 하지만 그는 상대의 몸만 탐하는 성격이었다. 그가 굳이 구애를 하지 않아도 주위에는 그의 애정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늘 인간관계에 있어서 감정적 우위에 서 있는 건 페트릭이었다.
일방적인 구애와 사랑을 받아보기는 했어도 누군가에게 사랑을 고백해보거나 표현해본 적도 없어서 그는 감정표현에 서툰 어린아이처럼 굴었다. 자신이 처음으로 좋아한다고 인정한 상대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비루한 열성 오메가라는 사실에 고고한 자존심에 금이 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더욱 프레이를 벼랑 끝으로 내몰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너 때문에 내가 우스워졌어.
모든 걸 다 가진 우성 알파인 자신이 거지가 된 열성 오메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니. 동창들이며 자신의 지인들이 알면 코웃음을 칠 게 뻔했다. 그래서 프레이를 물건처럼 소유하려 했다. 물건에 집착하면 우스워지진 않겠지. 누구나 다들 집착하는 물건 하나쯤은 있으니까. 막연히 그렇게 생각한 그는 프레이가 자신의 행동에 버텨내지 못하고 결국 망가진 후에야 뒤늦게 후회했다. 뒤늦게 깨달은 후회의 깊이는 깊어져만 갔지만 후회를 만회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신은 이렇게 고통스러운데 여전히 눈을 뜨지 않는 프레이의 얼굴은 어딘가 행복해 보이기까지 해서 페트릭은 욕설을 내뱉으며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했다고…. 그러니까 좀 일어나… 제발…….”
잠들어 있는 예쁜 얼굴은 대답 없이 금방이라도 멎을 것 같아서 두려웠다.
*
여전히 평온한 얼굴로 누워있는 작은 몸에서 났던 페로몬은 점점 약 냄새에 희석되어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의사는 매번 멱살을 잡힐 각오를 한 채로 마음의 준비니, 이 이상의 치료는 불필요하다는 둥 불길한 소리만 지껄였다. 페트릭은 후회와 자기혐오로 얼룩진 얼굴을 숨긴 채로 오늘도 프레이의 침대 옆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눈을 뜨지 않는 프레이에게 수십 번의 고해성사와 협박, 애원을 반복하던 페트릭은 난독증으로 책을 잘 읽지 못하던 프레이가 떠올라 책을 읽고 있었다.
느릿느릿 문장을 읽던 페트릭은 금방이라도 일어날 것 같은 프레이의 얼굴을 응시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감겨있는 눈꺼풀은 미동도 없었다. 느리게 들썩이는 가슴을 물끄러미 쳐다본 그가 천천히 다시 책을 읽어나갔다.
“…길 잃은 배들을 인도하는 등대의 불빛이 빛난다.”
페트릭은 믿지도 않던 신에게 묻고 싶었다. 프레이가 자신에게 돌아오는 길을 비춰주는 불빛이 있는지, 프레이가 자신에게 돌아올 수는 있는지. 염치없다는 건 누구보다 페트릭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페트릭은 더 이상 프레이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미래를 상상하기 싫었다. 자신이 부르면 딸랑거리는 방울 소리를 내며 쪼르르 달려오던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내 사과받아줄 때까지 기다릴 거니까… 늦어도 되니까, 돌아와. 프레이.”
페트릭은 점점 흐려지는 프레이의 페로몬을 붙잡으려 침대 위에 놓인 손을 붙잡았다. 저번 주보다 더 말라있는 손은 죽은 나무껍질처럼 버석하고 차갑기만 해서 몇 번이고 쓰다듬으며 온기를 덧씌워야 했다. 온기가 전해지면 조금이라도 프레이가 빨리 돌아올 것만 같아서 한참 동안 손을 마주 잡는 페트릭의 얼굴은 온통 후회로 얼룩져 있었다.
*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회색 공간에 웅크린 채로 프레이는 한참 동안 혼자였다. 늘 잠이 부족했던 몸을 눕힌 채로 자고 일어나도 여전히 뿌옇기만 한 공간 속에서 여기가 어딘지, 자신은 뭘 하고 있는지 생각하던 프레이는 멀리서 반짝이는 불빛을 멍하니 응시했다. 무채색으로 가득한 공간에 유일하게 반짝이는 불빛을 따라가면 다시 눈을 뜰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었지만 프레이는 움직이지 않았다.
난 여기가 좋아. 눈을 뜨면 다시 힘들기만 할 거야. 아프고, 또 아프고… 아플 게 뻔해.
무기력한 몸을 억지로 움직여 누군가의 지시에 따라야 하는 생활은 끔찍했다. 허락 없이는 울지도 못하고, 화장실도 갈 수 없고 잠조차 잘 수 없던 생활로 돌아갈 바에는 조금 무섭지만 고요한 이곳이 좋았다. 프레이는 몸을 작게 웅크리며 눈을 감았다.
‘기다릴 거니까, 늦어도 돼. 제발 돌아와. 프레이.’
남자가 작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프레이는 귀를 막았다.
안 가. 이제 싫어. 난 여기가 좋아.
한참을 웅크리고 귀를 막고 있으면 끔찍한 고요가 내려앉았다. 얼마나 웅크리고 있었는지 가늠이 되지 않을 때쯤, 다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프레이. 명령이야. 돌아와. 허락도 없이 잠든 거 용서해줄 테니까… 당장 눈 떠.’
무의식에 깊게 새겨진 그의 화난 목소리에 웅크린 프레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페… 페터 목소리…. 돌아가야 하는데…. 혼나는데…….
프레이는 웅크린 몸을 억지로 일으켰다. 일어날 힘이 없어서 두 손을 바닥에 짚고 엎드린 프레이는 다시 들려오는 목소리에 두려워서 울기 시작했다
‘더 늦으면 진짜 화낼 거니까…. 나한테 와야지. 빨리.’
질척한 늪과 같은 바닥이 몸을 아래로 잡아당기는 것만 같아서 몸을 덜덜 떠는 프레이가 울면서 바닥을 기었다. 페트릭에게 또 벌을 받을까 봐 조금씩 가까워지는 빛을 향해 열심히 바닥을 기어가는 프레이는 무거워만 지는 몸을 억지로 질질 끌며 생각했다.
갈게…. 페터. 나 가고 있어…. 제발 부탁이니까 화내지 말아 줘.
평화롭던 휴식은 끝이 났다는 사실을 뒤늦게 프레이는 깨닫고 말았다.
*
페트릭은 프레이가 잠든 이후로 매일, 매시간, 아니 틈만 나면 프레이가 곱게 감고 있는 눈꺼풀을 뜨고 자신과 눈을 마주치는 상상을 했다. 어느 날은 일어나면 사랑한다고 속삭이고 싶었고, 어느 날은 누구 마음대로 멋대로 잠을 잤냐고 프레이에게 겁을 주고 싶었다.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이나 상상했던 일이 현실로 일어나자 페트릭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저 멍청하게 눈을 깜빡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눈이 부신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지만, 분명 프레이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몽롱한 보라색 눈동자와 한참이나 시선을 교환한 페트릭이 속삭였다.
“…프레이.”
주인 없이 허공에 몇백 번이나 흩어졌던 이름이 드디어 주인에게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프레이의 눈꺼풀이 다시 느리게 감겼다. 페트릭은 다급하게 의료진을 부른 뒤, 프레이의 손을 붙잡았다.
“프레이. 잠깐만.”
붙잡은 손은 여전히 차가웠다. 의료진들의 다급한 발소리들이 가까워지고 있었지만 금방이라도 프레이가 죽어버릴 것 같아서 페트릭은 초조했다. 의료진에게 자리를 내어준 페트릭은 불길한 기계음에 고개를 돌렸다. 일정한 곡선을 그리며 움직이던 기계가 다급한 경고음을 토해내고, 의료진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소리를 질렀다. 페트릭은 못이라도 박힌 듯 제자리에 서서 축 늘어진 프레이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조금 전까지 시선이 오갔던 것이 거짓말 같았다. 정말 죽는 거야? 페트릭은 심장이 바닥에 처박힌 것 같았다.
*
늦은 새벽, 공기가 차가워진 어느 날이었다. 힘겹게 눈을 뜬 프레이는 자신을 한참 동안이나 쳐다보고 있는 페트릭을 보며 마른 입술을 달싹였다.
“…나… 늦… 었어?”
늦게 일어난 건 아닌지 겁이 나 숨이 막혔다. 빨라지는 프레이의 심장박동에 기계가 요란한 소리를 냈다. 페트릭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아니야. 안 늦었어. 잘했어. 프레이.”
똑같은 말을 몇 번이나 반복하는 페트릭의 얼굴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프레이는 안도하는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희미하게 웃었다. 눈을 뜬 지 1분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 피곤했다.
“나 조금만… 더 자도 돼……?”
눈꺼풀을 밀어 올리는 것도 힘들어 보이는 프레이는 오랜 코마 상태에서 깨어난 이후에도 여전히 그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다시 일어난다고 나랑 약속하면.”
“…응.”
페트릭의 손가락과 얽혀있는 뻣뻣한 약지가 잘 구부러지지 않아 프레이는 그저 웃었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 기분은 묘했다. 피곤해 보이는 눈이 감기는 순간까지도 프레이는 페트릭이 화를 내지 않아서 다행이라 생각했다. 다음에 눈을 뜨면, 멋대로 잤다고 혼낼 것 같지는 않았다. 허락받은 거니까 괜찮아. 괜찮을 거야. 자신을 다독이며 다시 깊은 잠에 빠진 프레이의 얼굴은 편안했다.
거짓말처럼 일어났던 프레이는 다시 잠들었다. 며칠에 한 번씩, 몇 주에 한 번씩 눈을 뜰 때마다 페트릭의 눈치를 보는 얼굴은 점점 편해졌다.
내가 늦게 일어나도 왜 화를 안 내지…….
쓰러지기 전까지 프레이는 늘 잠이 모자라서 밥을 먹거나 섹스를 하다가도 꾸벅꾸벅 졸았다. 약해진 몸은 점점 더 많은 수면을 요구했었지만 페트릭의 오락가락하는 변덕에 잘 맞춰야 몇 시간 자는 걸 허락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덕분에 프레이의 수면의 질은 터무니없이 나빴다. 페트릭에게 겨우 허락받은 몇 시간도 기절하듯 누워있는 게 다였기 때문에 상태는 더 악화되었지만 페트릭은 그런 걸 신경 쓸 만큼 프레이를 살피지 않았다.
자신의 뺨을 어루만지는 손길이 낯설었다. 늘 뺨을 때리거나 머리채를 잡고 흔들기만 하던 손가락이 자신의 입술을 만지작거리자 프레이는 그의 손가락을 빨아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입술을 벌려 손가락을 물려 하자 손가락이 떨어져 나갔다.
“빨라고 만졌던 게 아니야.”
“미, 미안해.”
프레이는 겁에 질려 몸을 웅크렸다. 두려움은 어둠을 몰고 왔다. 프레이가 서 있는 곳은 매캐한 연기가 자욱한 폐허였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중독되어 세뇌된 오메가의 불안정한 멘탈의 종착역은 감정의 소각장이었다. 설렘, 행복, 즐거움, 기쁨들은 모두 타버리고 남은 재만 가득한 폐허 위에 서 있는 프레이는 타다 남은 감정들을 억지로 끌어안고 있었다.
두려움, 공포, 불안함, 아픔, 슬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프레이 비셔스에게 억지로 떠안겨준 감정들을 색으로 표현하자면 칙칙하고 음울한 어두운 빛깔이었다. 어둡고 부정적인 감정들만 잔뜩 안은 채로 낭떠러지 끝에 발을 걸친 프레이는 눈을 뜰 때마다 점점 낭떠러지로 조금씩 가까워졌다.
“그것보다, 기분은 좀 어때?”
“괜찮아.”
프레이는 눈을 뜰 때마다 조금씩 의식을 오래 유지했다. 프레이는 자신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페트릭의 얼굴을 조금이라도 더 보고 싶었다. 비록 눈을 오래 보고 있으면 금방이라도 자신을 때리거나 모욕을 줄 것 같아 두려웠지만, 그래도 첫사랑이란 그런 것이었다. 좋아하는 감정은 이미 표백되어 사라졌으나 여전히 중학생 시절에 머물러있는 과거의 잔재들이 프레이의 마음을 괴롭혔다. 조금만 더 보면 안 돼? 앳된 얼굴의 과거의 자신이 칭얼거리면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았어. 과거의 자신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프레이는 뿌옇게 흐려진 눈을 의미 없이 깜빡거렸다.
“너 심심할까 봐 책 읽어주려고 가져왔는데.”
페트릭이 책 커버를 손으로 쓸면서 작게 웃었다. 그의 말에 프레이가 천천히 고개를 아래로 숙였다. 커버에 적혀있는 글자를 눈에 담았지만 잘 보이지 않았다. 인상을 찌푸려 글자를 읽어보려 했지만 글자들이 춤을 추고 있었다.
“…무슨 책인지 물어봐도 돼?”
자신의 눈치를 보는 수척한 얼굴을 보던 페트릭은 최대한 다정한 웃음을 꾸며냈다.
“그런 거 허락 안 받아도 된다고 했는데, 또 까먹었지.”
제 딴엔 농담조로 건넨 말 한마디였으나 프레이는 두려워하며 몸을 웅크렸다.
“…미, 미안해.”
“혼내는 거 아니야.”
“…….”
대답없는 프레이를 쳐다보던 페트릭이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어루만졌다. 불현듯 한 손에 다 가려질 것 같은 프레이의 얼굴을 후려치던 기억이 떠올랐다. 때릴 곳이 어디 있다고 때렸을까. 뒤늦은 후회를 삼킨 그가 속삭였다.
“책 읽어줄게. 재밌을 거야.”
페트릭이 책을 집어들었다. 조용한 병실 안은 다시 잠이 든 프레이의 미약한 숨소리와 느릿느릿 책을 읽는 페트릭의 목소리가 전부였다. 책이라도 읽지 않으면 끔찍한 침묵에 질식될 것 같아서 페트릭은 책의 마지막 문장을 읽을 때까지 한참이나 홀로 중얼거려야 했다.
*
하루 간격으로 일어나기도 하던 프레이는 이틀, 사흘, 일주일…, 점점 더 눈을 뜨기까지 자는 기간이 늘었다. 페트릭이 마지막으로 프레이와 함께 대화를 나눴던 날이 벌써 2주일 전이었다.
“프레이. 다음 내용, 안 궁금해?”
새근거리며 잠든 얼굴을 쳐다보던 페트릭은 2주일 전 프레이와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대화를 떠올렸다.
그가 책을 읽어주면 프레이는 눈을 감고 있거나, 링거가 꽂혀 있는 자신의 손끝만 쳐다볼 뿐이었다. 이야기를 귀담아듣고 있는지조차 의문이었지만, 정신을 차리는 것 자체가 기적에 가깝다는 사실을 페트릭은 잘 알고 있었다. 그때도 여전히 프레이에게 책을 읽어주던 페트릭이 책을 읽다 말고 프레이가 다시 잠들었을까 봐 고개를 들어 얼굴을 살피던 순간이었다. 프레이는 드물게도 페트릭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었다. 예기치 못한 시선에 책을 읽던 목소리가 뚝 하고 끊겼다. 조용한 병실에는 적막이 내려앉았다.
‘…그다음은?’
‘응?’
프레이가 뒤 내용을 묻자, 페트릭은 바람 빠진 풍선 같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프레이는 정말 오랜만에 페트릭을 보며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아야 알 수 있는 작은 웃음을 지었다.
‘다음 내용… 궁금한데.’
‘아.’
페트릭은 다시 책을 읽었다. 프레이가 자신을 보며 아주 희미하게나마 미소를 지었을 때, 페트릭의 심장은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몇 번이고 단어를 더듬었고, 같은 문장을 여러 번 읽던 페트릭은 버릇처럼 다시 프레이를 힐끔 쳐다봤다. 언제 다시 잠들었는지 푹 꺼져있는 베개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은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또 금방 일어날 거지?”
조금 푸석푸석해진 프레이의 얼굴을 제대로 쓰다듬지도 못하는 손길이 떨어졌다. 프레이가 작게 웃어주었던 그 날 이후로 펼쳐지지 않은 책 위엔 먼지가 쌓이고 있었다.
*
“…잘 잤어?”
다 갈라진 목소리로 인사를 건네는 페트릭의 옷은 어느새 가벼워져 있었다. 제법 쌀쌀하던 계절은 어느새 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계절이 되었다. 병실에만 누워 있었던 프레이는 마지막 보았던 페트릭의 모습과 지금 그의 모습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시간이 많이 흐른 것 같았다.
“프레이. 생일 축하해.”
난데없는 그의 축하인사에 프레이는 눈을 깜박였다. 고개를 돌릴 힘이 없어서 눈동자를 살짝 움직여 병실을 둘러보던 프레이가 중얼거렸다.
“생일……?”
“네 생일이잖아. 오늘.”
페트릭은 꽃다발을 프레이의 품에 안겨주면서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프레이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보라색 꽃송이를 바라봤다. 흐릿하게 보이는 꽃잎들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듯 보던 프레이가 수줍게 웃었다.
“예쁘다.”
꽃다발을 선물 받은 건 중학교 졸업식 이후로 처음이었다.
“선물… 고마워. 기뻐…….”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다발을 품에 안은 프레이는 미간을 찡그리며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프레이.”
신경질적으로 의료진을 호출하는 벨을 누른 페트릭이 프레이의 안색을 살폈다. 세게 쥐면 부러질 것 같은 손을 붙든 그가 숨을 헐떡였다.
“나 너한테 할 말 있어. 자면 안 돼.”
“…이 꽃, 꽃말이 뭔지 알아?”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보라색 눈동자는 다시 자취를 감췄다. 호출에 달려온 의료진이 도착해 상태를 체크하는 사이 페트릭은 바닥에 널브러진 보라색 꽃다발을 응시했다.
무슨 꽃말. 그냥 나는 너의 눈동자 색이랑 비슷해서 고른 것뿐이란 말이야…….
병실 밖으로 등이 떠밀린 페트릭은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를 받았다. 프레이의 생일을 뒤늦게 알아챈 페트릭이 꽃다발을 살 때까지 회의라도 하고 가라며 그의 뒤에 붙어 있었던 그의 비서였다.
[이사님.]
“내가 오늘 산 꽃… 꽃말이 뭔지 알아?”
어딘가 넋이 나간 목소리에 비서는 잠시 침묵했다. 페트릭이 산 보라색 꽃을 포장하던 주인의 설명을 떠올린 비서가 운을 뗐다.
[꽃 이름이 스카비오사가 맞다면…….]
검색이라도 하는지 키보드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페트릭은 불투명한 유리창 너머로 분주한 그림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그 순간 비서의 머뭇거리는 목소리가 들렸다.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이라는데요.]
‘…이 꽃, 꽃말이 뭔지 알아?’
프레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렸다. 프레이는 페트릭이 자신에게 선물한 꽃의 이름도, 꽃말도 알고 있었다. 그 나름대로 신경을 써 보라색의 꽃다발을 골랐겠지만, 꽃말까지 챙길 성격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프레이가 더 잘 알았다.
비서와의 통화가 끝난 뒤, 페트릭은 꽃잎 하나하나를 뜯어보듯 응시하던 보라색 눈동자를 떠올렸다.
‘선물… 고마워. 기뻐…….’
고맙다고, 기쁘다고 속삭이던 프레이의 다 꺼져가는 목소리가 고막에 들러붙어서 떨어지지 않을 것만 같았다.
꽃다발을 선물받은 그날 이후, 프레이는 하루가 지날수록 누구보다 빠르게 죽음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난 그 순간, 죽음을 향하는 인생을 산다. 죽음을 향하는 인생을 살면서 자신의 결말에 수긍하는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는 생각지도 못하게 눈앞에 도착한 죽음의 문턱에서 발버둥을 치기도 한다. 프레이는 천천히 자신의 고단한 인생의 결말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를 했다.
오랜만에 다시 의식을 회복했을 때, 프레이는 아무도 없는 병실에 혼자 누워있었다. 희미한 소독약 냄새가 느껴졌지만 이내 후각이 마비라도 된 듯 그마저도 사라졌다. 호흡기에 의존해 오랜 시간 동안 누워있던 몸은 잘 움직여지지 않았다. 눈을 깜빡거릴 때마다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다. 슬퍼서 우는 것도 아닌데 프레이는 마음 한구석이 저릿했다. 자신이 왜 슬픈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생각해보던 프레이는 늘 눈을 뜨던 순간마다 언제나 자신의 옆에 있던 남자의 부재를 알아챘다.
페트릭 마일드리안. 자신의 첫사랑. 그가 주는 감정들이 버거워서 항상 허우적거리다 결국 발버둥을 포기한 순간부터, 감정들의 찌꺼기들이 엉겨 붙은 늪은 프레이의 몸을 집어삼켰다. 프레이는 잠을 자는 동안 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주던 기억들에 빠진 채로 허우적거렸다.
너무 힘들어서 죽고 싶을 때마다 불쑥 튀어나온 페트릭의 다정함이 프레이를 이승에 붙들어놓고 있었다. 열이 나서 숨도 잘 쉬지 못할 때, 의사가 오기 전까지 임시방편으로 해열제를 직접 입에 머금고 입술을 겹쳐 먹여주던 기억부터 종종 기분이 좋으면 흥얼거리며 불러주던 콧노래가 귓가에 맴돌았다. 프레이가 머무는 삭막하고 무채색이 가득한 공간에 가느다란 보라색 꽃잎들이 날아다니기 시작한 건 페트릭이 생일을 축하한다며 프레이에게 보라색 스카비오사 꽃다발을 안겨주던 그날 이후부터였다.
‘꽃말 같은 거 관심 없어.’
프레이와 페트릭이 중학생이던 어느 날이었다. 학교 정원에 앉아 쉬는 시간을 보내던 프레이는 페트릭에게 꽃말을 아냐고 말을 걸며 다가가던 동급생과 대화를 나누던 그의 말을 기억했다. 프레이는 꽃꽂이와 정원을 가꾸는 취미가 있는 어머니와 보내는 시간이 좋아서 꽃말이나 개화 시기 같은 것들에 관심이 있었다.
꽃 같은 거 별로 안 좋아하는구나.
프레이가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기계음이 전부인 병실로 들어오는 페트릭과 눈이 마주쳤다.
“프레이.”
다급해 보이는 구둣발 소리가 가까워졌다. 프레이는 잘 움직여지지 않는 손가락을 움찔거리며 페트릭의 손을 살짝 건드렸다.
“…인사… 하려고…….”
프레이는 호흡이 모자라서 뚝뚝 끊기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페트릭은 프레이가 정말 모든 걸 내려놓고 죽을까 봐 허옇게 질린 얼굴을 하고서 울고 있었다.
“프레이. 나는 있잖아. 누굴 진심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어. 늘 누가 날 좋아한다, 사랑한다고 안겨들기만 해서… 그래서 너한테 고백하는 게 자존심 상했어.”
두서없이 늘어놓는 말들이 프레이에게 쏟아졌다.
“그래서, 그래서 널 더 괴롭혔어. 내 알량한 자존심부터 살리려고. 프레이. 나 아직 너한테 해줄 말 더 있어. 고백도 다시 할 거고… 프레이. 제발… 부탁할게… 죽지 마. 무릎 꿇고 빌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프레이는 흐린 눈동자로 힘겹게 그를 눈에 담았다. 합병증이 생기기 시작한 이후로 나빠진 시력은 페트릭의 이목구비를 흐릿하게 담아내기에도 버거웠다. 죽지 말라고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점점 멀어졌다.
“…노력해볼게… 미안해.”
프레이의 몸을 흔드는 페트릭은 창백한 프레이의 얼굴 위로 눈물을 떨궜다.
“자면 안 돼. 나랑 약속해. 제발… 프레이. 제발… 하느님.”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에 눈을 뜬 프레이가 페트릭의 손을 더듬었다. 프레이의 손은 잘게 떨리고 있었다.
“왜 울어?”
나 같은 거 때문에.
작게 덧붙여진 프레이의 말의 무게가 무거워서 페트릭은 숨이 막혔다. 늘 물건 취급을 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크기를 헤아릴 수 없는 후회에 허우적거리며 페트릭은 숨을 헐떡거렸다.
“프레이. 너 없으면 안 된단 말이야. 진짜야… 이제 소리도 안 지를게. 해달라는 거 다해 줄 테니까…….”
고고한 자존심마저 내던진 그가 걸인처럼 매달렸다. 하지만 프레이의 얼굴 위에 떠오르는 감정은 아무것도 없었다. 시선이 서로 얽혔음에도 프레이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지 않은 것 같았다.
“…아빠.”
프레이는 허공을 보더니 눈을 감았다.
*
“프레이. 우리 아들.”
“엄마… 아빠…….”
프레이는 부모님에게 달려가며 품에 안겼다. 마주 안아주는 체온이 따뜻해서 프레이는 그대로 녹아내리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엄청 슬픈 꿈을 꿨어요.”
“그랬니. 다 잊어버리렴.”
다정한 아버지의 커다란 손이 프레이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고개를 끄덕이던 프레이는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몸을 돌렸다.
“프레이!”
교복을 입고 서 있는 페트릭은 아직 앳돼 보이는 얼굴로 울고 있었다. 프레이는 왜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자신을 저렇게 부르며 울고 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아서 아버지의 품에 안겨 눈을 깜빡거렸다.
“이리 와…. 내 곁에 있겠다고 했잖아. 내 허락 없이는 어디에도 안 간다고 약속했잖아.”
코앞까지 다가온 페트릭은 어느새 어른이 되어 있었다. 마일드리안은 어른이 되어도 잘생겼구나. 프레이가 살짝 웃던 그 순간이었다. 단단하게 자신을 안아주던 아버지가 멀어졌다.
“아… 아빠! 엄마!”
프레이가 당황한 목소리로 외치며 손을 뻗었다. 커다란 손이 다가와 부모님을 향해 손을 뻗는 프레이의 손을 낚아채 품 안으로 안았다.
“잡았다. 프레이.”
“잠, 잠깐만…….”
프레이는 자신을 껴안고 있는 페트릭에게 몸이 얽매이는 것 같은 감각에 몸을 떨었다. 시야가 흔들리고 정신이 들었을 때 부모님은 온데간데없었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었다. 구역질이 나 입을 틀어막으려 손을 들었지만 여의치 않았다. 관절이 삐걱거리는 감각이 끔찍했다. 부모님과의 재회가 전부 꿈이었단 생각이 들자 눈물이 왈칵 터졌다.
끔찍한 고통이 기다리는 현실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자각하기 무섭게, 감각들이 느리게나마 돌아왔다. 목덜미가 따가워 눈을 찌푸리며 프레이가 눈을 떴다. 눈을 뜨자 자신의 코앞엔 입가에 피가 묻어있는 페트릭의 얼굴이 있었다.
“…후으.”
프레이가 단 한 번도 느껴본 적 없던 짙은 농도의 페로몬이었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이 온몸을 기어 다녔다. 신음하던 프레이가 덜덜 떨리는 손으로 페트릭의 셔츠 자락을 붙들었다.
“나는 너 포기 못 해… 이건 용서 안 구할 거야.”
“흣…….”
뿌연 시야였지만 페트릭의 흉흉한 눈빛만은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프레이는 절망했다. 도대체 얼마나 더 힘들어야 하지. 그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물음과 함께 의식이 가라앉았다.
*
알파와 오메가의 각인은 본능적인 신체활동의 일부였다. 죽음과 삶의 기로에 서 있던 오메가는 각인된 알파의 페로몬에 이끌려 죽음의 문턱에서 뒤로 물러났다. 미치지 않고서야 사경을 헤매는 환자의 목덜미를 물어뜯어 강제로 각인을 할 리가 없다. 의료진들은 페트릭의 무모함과 광기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고,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결과 프레이는 이승에 더 머무르게 되었다.
“프레이.”
“…응.”
각인의 효과인지 아니면 페트릭의 애절한 고백과 같은 협박이 통했는지는 모르겠으나 프레이는 자주 깨어났고, 의식을 되찾는 시간이 늘고 있었다.
“퇴원하면 그때 네가 말한 버닐에서 지낼까?”
“버닐?”
프레이는 어린 시절에 지내던 별장이 있는 곳에 집을 구하려다가 결국 사고가 나는 바람에 물거품이 되어버린 이사를 떠올렸다.
“그래.”
프레이는 언제 퇴원을 할 수 있는지도 모르면서 페트릭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페트릭은 프레이의 웃음을 보며 마주 웃었다.
“얼굴 보고 이야기도 하니까 좋네.”
“…재미없잖아.”
심드렁한 대답과 함께 프레이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대꾸도 잘 안 하는데 뭐가 그렇게 좋은 거지. 공감이 잘 안 되는지, 의아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 살짝 기울었다. 핏기가 없는 얼굴을 어루만지던 페트릭이 제 속내를 털어놨다.
“그냥 내 옆에 있는 거 하나만으로도 행복해. 무엇보다 나 싫다고 꺼지라고 안 해줘서 고맙고.”
프레이는 페트릭의 날 것 그대로의 본심을 들으며 그의 눈치를 살폈다. 페트릭에게 억지로 각인 당해 눈을 뜬 이후로 페트릭은 믿을 수 없을 만큼 상냥하게 굴었다. 책도 다시 읽어주고, 가끔 손과 발을 주물러주기도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낯설고 거부감마저 들었다. 페트릭이 다정하게 굴 때마다 프레이는 매번 몸을 뒤로 물며 싫다고 혼자 중얼거렸다.
“이상해.”
프레이는 혼자 중얼거렸다.
“맞아. 나 이상한 새끼야.”
페트릭은 뼈만 남은 앙상한 손을 들었다. 희미한 약 냄새가 나는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춘 그는 누구보다 행복하게 웃었다. 프레이가 그저 입술에 맞닿은 손가락 끝을 움츠릴 뿐이었다.
*
프레이의 진료를 담당하는 의료진들은 삼삼오오 모여 수군댔다. 프레이에게 주어진 시간은 길어야 몇 년이었다. 누군가는 한 달이라고 했고, 다른 누군가는 일주일이라고 했다. 저마다의 의견은 조금 상이했지만 공통된 의견은 하나였다. 더 이상의 치료는 무의미했다.
일부에선 차라리 자가 호흡이 가능하고 의식이 많이 돌아오는 지금, 호스피스 병동이나 자택으로 옮기는 것이 차라리 불안정한 멘탈에 그나마 도움이 될 것이라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낼 정도였다.
장시간의 비행은 불가능하단 이야기였다. 결국 버닐에서 단둘이 지내기로 한 계획을 수정한 페트릭은 프레이에게 미안한 얼굴로 사과했다. 프레이는 괜찮다고 말하면서도 조금 아쉬운 얼굴이었다. 도시 외곽에 있는 부지에 별장으로 향한 페트릭은 품에 안겨있는 프레이를 꼭 끌어안았다.
“내가 전에 말했던 그네도 있고… 연못도 있어. 기대해도 좋을 거야.”
“응.”
스무 걸음을 걷기도 전에 온몸의 통증을 호소하며 울먹거리는 탓에 프레이는 페트릭에게 안겨 다녔다. 페트릭의 별장에는 전문 의료진들이 상주하고 있었다. 전문 의료기기들이 구비되어 있어서 사실상 중환자실이나 다름없는 곳으로 향하는 페트릭의 얼굴은 복잡했다. 페트릭의 품에 얌전히 안긴 프레이는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가을 장미들을 보며 눈을 깜빡거렸다. 흐릿한 시력으로도 만개한 장미들이 내뿜는 색채들을 느낄 수 있었다. 페트릭의 목에 감겨있는 손에 힘을 살짝 주던 프레이가 물었다.
“…가까이 가서 봐도 돼?”
“당연하지.”
페트릭이 장미 덩굴에 다가갈수록 프레이는 진해지는 장미 향에 몽롱한 표정을 지었다. 인상을 찡그린 보라색 눈동자는 말없이 한참이나 장미를 쳐다봤다. 어릴 때 지내던 자신의 집 정원에 잔뜩 피어있던 보라색 장미를 떠올린 프레이가 죽어버린 자신의 부모님과의 추억을 회상했다. 한 번쯤은 다시 보고 싶었는데. 잘 됐다. 프레이는 조심스럽게 페트릭에게 속삭였다.
“만져도 돼?”
“가시가 뾰족하니까 조심해.”
습관처럼 페트릭의 허락을 받은 프레이가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둔해진 촉각이었지만 장미 꽃잎은 부드러웠다.
“근데 왜 보라색… 아…….”
프레이는 자꾸 페트릭에게 물어보면 그가 귀찮아할까 봐 작게 중얼거렸다. 뒤늦게 뭔가를 깨달은 듯 작게 신음했다. 자신에게 선물하는 장신구들이며 꽃다발들이 죄다 보라색이 도는 것을 잠시 떠올리던 프레이는 페트릭의 단순한 발상에 어색하게 웃었다.
“페터, 있잖아.”
“응?”
프레이가 귓가에 속삭이며 운을 떼자 프레이의 입술 근처로 고개를 기울였다.
“나도… 보라색 안 좋아해.”
“뭐…….”
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뻣뻣하게 굳은 페트릭이 프레이를 꼭 안았다. 충격으로 프레이를 떨어트릴 것 같았다.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가는 페트릭에게 안긴 프레이는 괜히 말했나 하는 후회를 했다.
*
삭막한 병실 대신 포근해 보이는 방 안에서 지낸 이후로 프레이는 느리지만 조금씩 나아지는 것 같았다. 페트릭은 모든 걸 내팽개친 채로 프레이의 곁에 있었다. 페트릭의 기대와는 달리 의료진은 프레이가 신의 은총을 받아도 길어야 몇 년이라는 선고를 바꾸지 않았다.
굳어버리기 일쑤인 프레이의 다리를 마사지하는 페트릭의 손길이 제법 능숙했다. 종종 경련이 오는 다리를 주물러 혈액순환을 시키지 않으면, 다리를 절게 된다는 의사의 말에 페트릭은 하루에 두 번 프레이의 다리 마사지를 해줬다. 그때마다 프레이는 저릿한 통증에 울먹거리기 일쑤였다.
“…아파.”
“아파도 조금만 참아봐.”
“응…….”
프레이는 시트를 꼭 쥐고서 눈을 감았다. 조심스러웠지만 다리를 꾹꾹 누르는 악력이 야속하기만 해서 부들대던 프레이가 숨이 가쁜지 헐떡였다.
“천천히 숨 내뱉고… 잘했어.”
“하으… 오늘은 그만하면 안 돼?”
도저히 더 이상은 못 참겠는지 프레이가 드물게 페트릭에게 매달려 애원했다. 하루 종일 페트릭이 먹으라는 대로 먹었다. 심지어 오늘은 평소보다 주사도 몇 대나 더 맞아야 했고, 약간의 재활운동도 했다.
“많이 힘들어?”
머리를 쓰다듬는 커다란 손의 온기가 다정하다고 느끼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늘 머리를 쓰다듬는 손길에 뻣뻣하게 몸을 굳혔던 프레이였지만 오늘은 정말 피곤한지 손길에 얼굴을 내어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늘 말 잘 들었잖아.”
“그럼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눈가에 입술을 내리던 페트릭은 프레이의 얼굴을 자세히 살폈다. 늘 어딘가 조금이라도 아프면 말하라고 수시로 말했지만 프레이는 아픈 걸 숨기기에 급급했다. 페트릭 혼자만의 탐색전은 늘 긴장감이 가득했다.
“열이 좀 있는 것 같은데…….”
아파서 상기된 것치고는 양 볼이 발그레했다. 체온계를 찾던 페트릭은 느리게 몸을 꾸물거리는 프레이의 작은 몸 위로 시트를 덮었다.
“체온계 가져올 테니까 졸리면 먼저 자. 금방 올게.”
“으응.”
프레이는 이제 자도 되냐는 질문은 하지 않았지만 늘 페트릭의 눈치를 보며 초조한 얼굴을 했다. 그때마다 페트릭은 속죄하는 마음으로 프레이의 불안을 잠재우듯 먼저 자도 된다거나 허락 없이 뭔가를 해도 좋다고 프레이를 안심시켰다. 거실을 오가던 의료진에게 받아 든 체온계를 받아 들고 침실로 향했을 때, 프레이는 아직도 깨어 있었다.
“요새도 잠이 안 와?”
“응…….”
불면증을 호소하는 프레이의 얼굴 위로 걱정스러운 시선이 내려앉았다. 잠을 자는 것 대신 프레이는 기절을 했다. 프레이가 푹 자는 것을 본 게 언제였는지 기억이 잘 나지 않았다. 조용히 체온을 재던 체온계에서 삑-하고 알람이 울렸다. 걱정과 달리 액정에 표시된 체온은 정상 체온을 조금 웃도는 정도였다. 프레이는 자신을 안아주는 품에 머리를 기댔다.
이틀 만에 정신이 든 프레이를 살살 달래 가며 치료와 재활을 권유한 페트릭은 너무 많은 걸 강요했나 싶어서 기억을 더듬었다. 그래 봤자 고작 부축을 받아 정원을 10분 정도 걷고, 몇 개의 수액과 주사를 맞는 게 전부였는데도 프레이는 쉽게 지쳤다. 의사의 말대로 하루하루 프레이가 죽어가는 것이 눈에 훤히 드러나고 있었다.
“오늘 고생했네.”
“…힘들어.”
프레이는 답지 않게 투정을 부렸다. 눈치를 보는 것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사그라드는 것 같아서 페트릭이 프레이의 투정에 웃으며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은은하게 느껴지는 프레이의 페로몬은 각인 전에는 거의 느껴지지도 않았었다. 희미한 약 냄새와 소독약 냄새가 뒤섞인 페로몬이 사라진 미래에 과연 자신이 잘 버텨낼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길어야 몇 년이라는 시한부를 사는 자신의 오메가를 끌어안으며 페트릭이 몇 번째인지 모를 고백을 속삭였다.
“좋아해… 프레이. 내 옆에 있어 줘서 고마워.”
뒤척거리던 프레이는 귓가에 맴도는 그의 고백에 머뭇거리다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였다. 나도 네가 좋다는 대답을 그에게 돌려주지 못해 프레이는 마음이 불편했다. 고작 그의 말을 듣고 있다는 대답을 하는 것이 다였다.
“응.”
늘 프레이가 잠들었을 때 페트릭이 홀로 건네던 고백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 고백에 대답해주는 목소리가 있었다. 페트릭은 자신이 프레이를 품에 안을 수 있는 날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가늠해보다 그만두었다. 그 누구도 확답할 수 없는 질문이었다. 누군가는 한 달이라고 했고, 누군가는 몇 년이라고 했다. 당장 내일 아침 해가 떴을 때 신의 품에 안길지도 모르는 몸이 꾸물거리며 자신의 품을 파고들자 페트릭이 조금 잠긴 목소리로 다정하게 속삭였다.
“잘 자. 잘 때까지 옆에 있을게.”
“너도 잘 자…….”
프레이는 몸을 감싸는 미미한 알파의 페로몬에 서서히 의식이 흐려졌다. 내일은 눈을 뜰 수 있을까? 홀로 제 마지막을 가늠하는 얼굴은 처연했다.
*
일상이 된 경련이 찾아왔다. 고통을 호소하는 프레이에게 투여된 마약성 진통제는 프레이에게서 고통을 앗아가는 대신 횡설수설하게 만들었다.
“페터. 지금 내 기분 되게 이상한 거 알아?”
자신의 품에 폭 안겨있는 몸은 금방이라도 흩어질 것 같았다.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지만 소독약 냄새가 전부였다. 각인한 알파조차 느낄 수 없는 페로몬이라니. 페트릭은 멍하게 자신의 품에 껴안긴 프레이를 세게 안았다.
“너는 뭐가 그렇게 다 이상해?”
“그냥, 모든 게 다…. 너랑 이러고 있는 것도 이상하고…….”
웅얼거리던 프레이의 호흡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페트릭은 당황으로 얼룩진 얼굴로 의사를 불렀다. 대기 중이던 의사는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을 어떻게 억제해야 하는지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방금 주사한 마약성 진통제와 히트 사이클 억제제는 같이 쓸 수가 없습니다. 쇼크가 올 수도 있어서…….”
“그럼 어떻게 하라고. 지금 헐떡이는 거 안 보여?”
의사의 멱살을 잡은 페트릭은 히트 사이클이 왔음에도 희미하기만 한 페로몬을 느끼며 윽박을 질렀다.
“일단 조심스럽게 관계를 하는 것 외에는… 절대 노팅은 안됩니다. 달리 그것밖에는 방법이 없습니다. 대기할 테니까 환자분 상태가 안 좋으면 평소처럼 호출하시고…….”
의사의 말에 인상을 찌푸리면서 페트릭은 방문을 나가는 뒷모습을 노려봤다. 비싼 돈을 들이부으며 고용한 의사는 제대로 된 처방도 없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프레이와 섹스를 하라고만 하고 있었다.
“…하으…….”
온몸에 돌고 있던 진통제를 태울 듯이 달아오른 체온에 붉게 물든 하얀 몸이 침대 위에서 허리를 뒤틀면서 헐떡거렸다.
“프레이.”
“페터… 몸이 이상해… 아프고… 아래가…….”
울먹거리는 눈동자는 초점도 없었다. 허공을 응시하며 애타게 자신을 찾는 손길이 애처롭기만 했다. 페트릭에게 붙들린 하얀 손은 땀으로 젖어 축축했다. 입술을 맞대고 질척하게 혀를 섞기 시작하자 프레이는 어설프게 혀를 비벼오기 시작했다.
“흐응… 읏.”
“히트 사이클이 와서, 널 안아야 할 것 같은데…….”
금방이라도 부러지거나 바스러질 것 같은 프레이의 몸이 안쓰러웠지만 히트 사이클을 계기로 작은 구멍을 파고들 생각을 하자 성기가 발기해버린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페트릭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아… 어떻게든… 아흐…….”
다리를 스스로 벌리며 고개를 뒤로 꺾어가며 신음하는 프레이의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간 페트릭은 의료용 젤을 들어 손에 짜냈다. 질척한 젤로 범벅이 된 손가락을 구멍에 살짝 밀어 넣자, 다물려있는 작은 주름들이 달싹거리며 그의 손가락을 집어삼켰다.
“응, 흐읏…….”
“아파?”
겨우 손가락 하나가 박혀 든 구멍은 빡빡하고 조여서 페트릭은 이마에 땀이 맺히고 있었다. 다리를 벌리고 있는 것도 버거워 보이는 하체를 편하게 해 주려 가느다란 프레이의 허리 아래로 베개를 집어넣고 허리를 들게 했다.
“아… 페터… 잠시만…….”
“어디 불편해? 응? 프레이.”
프레이의 움찔거리는 구멍에 박혀 든 손가락을 빼면서 페트릭은 다급한 목소리였다. 열에 들떠 고통과 뒤섞인 감각이 온몸을 뒤덮고 있는 프레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면서 울기 바빴다.
“페, 페터… 아… 나 이상해…….”
아픔과 두려움이 뒤섞인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는 페트릭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 안달이 난 것 같았다. 페트릭은 눈물을 혀로 쓸어주면서 축축한 구멍을 손가락으로 어루만지며 프레이의 긴장을 풀려 했다.
“…아, 아…….”
고통뿐인 신음이 안타까워 구멍을 어서 풀어주고 히트 사이클을 달랜 뒤 치료를 재개시켜야겠단 생각뿐인 페트릭은 한 번도 다정하게 프레이의 아래를 제대로 풀어준 적이 없단 사실을 깨달았다. 젠장. 늘 거칠게 처박기만 해서 찢어진 아래로 성기를 받아내야 하거나 손가락 몇 개로 장난을 치다 무작정 장난감을 넣어놓고 이거 하나 못 받아먹냐고 수치를 주는 말들을 했었던 기억들 속에서 프레이는 울음을 꾹 참거나 아파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참고 미안하다고 빌고 있었다.
“아흐… 나 벌… 받는 거야? 내가 허락 없이 발정 나서?”
제대로 구멍을 풀고 페트릭의 성기를 품었던 적이 없는 프레이가 구멍을 벌리며 손가락으로 내벽이 부드러워질 때까지 움직이는 행위가 낯설기만 해서 중얼거렸다.
“내가 왜 너를 혼내. 벌 같은 거 아니야. 바로 넣으면 너 아프잖아.”
페트릭은 어색한 변명을 하며 긴장으로 굳은 마른 몸을 가볍게 쓸었다. 프레이는 이렇게 오랜 시간 공들여 애무를 하고 아래가 천천히 풀어질 때까지 자신을 안지 않는 페트릭이 어색해서 칭얼거렸다.
“그냥… 넣어주면 안 돼?”
“아플 거야. 프레이.”
프레이는 싫은지 고개를 흔들면서 할딱대는 숨을 토하면서 잘 벌려지지 않는 가랑이를 스스로 벌렸다. 예쁘게 굴어야 페트릭이 화내지 않으니까. 좆을 조르는 음란한 말을 해서 예쁨을 받아야 해. 고통으로 하얗게 탈색된 머릿속으로 그에게 예쁨받기 위해 몇 번이고 홀로 되뇌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프레이가 속삭였다.
“구… 구멍에 넣어주면… 잘 조일게… 응?”
늘 프레이를 안을 때마다 허락 없이 우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헐렁대는 아랫입이라는 둥, 사실 외국에 도망갔을 때 뒷구멍을 팔았던 건 아니었냐고 하며 프레이의 수치심을 자극했던 기억이 페트릭의 뒤통수를 후려쳤다.
“프레이. 미안해.”
“아… 으흐!”
흉흉하게 발기한 성기의 두툼한 귀두가 축축하고 좁은 곳에 파고들자 아래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화끈해서 프레이의 발그레한 뺨에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아학… 응, 읏…….”
프레이가 아픈지 고통만 가득해 보이는 신음을 참으려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무는 모습이 익숙해 보였다. 페트릭의 기분이 좋지 않은 날에 아프다고 실수로 칭얼거리기라도 하면 그날은 하루 내내 괴로웠기 때문에 프레이는 빨리 이 아픔이 희미해지기만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프레이의 구멍을 빠듯하게 메우는 살 기둥은 금방이라도 정액을 쏟아낼 듯이 맥동하고 있었다. 정말 얼마 만에 안는 프레이의 몸인지 가늠하던 페트릭은 기어이 피가 터진 프레이의 입술을 발견하고서 허리를 조금 뒤로 물렸다.
“하윽… 페터…….”
“피 나. 왜 깨물고 그래.”
“후응… 읍…….”
입술을 깨물지 못하게 제 손가락을 물려준 페트릭은 느리게 허리를 움직였다. 구멍에서 빠져나갈 때마다 경련해대는 내벽은 찰지게 달라붙었다. 사정감을 고조시키기 위해 거칠게 허리를 놀리자 프레이는 미미한 쾌감을 느끼며 정액을 후드득 쏟아냈다. 사정을 하고 난 이후라 민감한 온몸의 감각이 온통 고간에 쏠린 것만 같았다. 프레이가 구멍을 찢을 듯이 박혀 드는 패트릭의 좆을 학습된 대로 조이고 풀면서 끅끅거렸다. 손가락을 깨물 수가 없어서 질질 흐르는 침을 삼키지도 못한 얼굴은 쾌감과 동시에 몸을 덮치는 통증으로 일그러졌다.
“하아…….”
늘 불임이었던 프레이의 몸에 습관처럼 다시 배려 없는 노팅을 할 뻔한 페트릭은 정액을 쏟아낸 성기를 빼내면서 프레이의 몸을 살폈다. 모자란 숨을 채우느라 숨을 내쉬는 입에 물린 손가락을 빼내려 하자 다급하게 쪽쪽 빠는 입술의 감촉에 페트릭은 프레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파의 정액으로 히트 사이클의 증상이 한풀 꺾인 오메가는 뒤늦게 몸을 덮치는 통증에 몸을 떨었다.
“…아, 아파… 어지럽고…….”
페트릭은 하얀 나신을 시트로 덮어주며 의료진을 호출했다. 정사 직후의 분위기가 가득한 침실로 들어서며 의료진들은 아파서 허옇게 질린 오메가의 바이탈을 체크했다.
“진통제 다시 가져와요.”
“네!”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 속에 파묻혀있는 작은 몸을 쳐다보자 프레이는 페트릭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헐떡거렸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 다물린 작은 입술엔 신음을 참느라 깨문 탓에 배어 나온 피가 묻어 있었다.
“…페터…….”
희미한 목소리로 부르는 목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페트릭은 침대로 다가가 프레이의 손을 붙잡으며 대답했다.
“프레이.”
“…나… 무서워…….”
두려움에 가득 질린 얼굴을 하고 있는 프레이는 진통제를 주사하기 위해 바늘이 꽂힌 팔이 아픈지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
약효가 들 때까지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페트릭은 여전히 고통, 두려움, 공포로 얼룩진 작은 뺨을 쓸면서 상냥하게 되물었다. 약효가 들기를 기다리던 프레이는 뒤죽박죽 얽혀있는 생각을 어렵게 입 밖으로 처음 고백하며 눈을 감았다.
“…너랑 한 약속… 못 지킬까 봐… 그게 무서워…….”
프레이의 말에 페트릭은 숨이 다 막혔다.
*
정원에 설치된 나무 그네에 앉아있는 몸은 느리게 흔들거렸다. 페트릭의 옆에 앉아있는 프레이의 품 안에는 보라색 꽃잎이 잔뜩 벌어져 향기를 내뿜고 있는 스카비오사 꽃다발이 안겨있었다. 거지 같은 꽃말을 알게 된 이후로 페트릭은 스카비오사와 닮아있는 꽃들이라면 질색을 했다. 하지만 프레이는 그에게서 처음 받은 꽃을 다시 한번 더 보고 싶었다.
어렴풋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제일 먼저 보라색 꽃잎이 생각났다. 그가 자신에게 처음으로 선물한 꽃이기도 했지만, 그냥 꽃이 가지고 있는 꽃말이 지금의 상황과 너무나도 어울렸다.
꽃을 보고 싶다고 하기 무섭게 품에 안겨진 꽃다발은 더없이 아름다웠지만 프레이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었다. 꽃다발에 얼굴을 처박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들여다봐야 윤곽을 겨우 알아볼 수 있었다. 꽃다발을 품에 안아 든 프레이는 분명 예쁠 것이 분명한 꽃다발을 상상했다. 반짝거리기만 한 과거를 회상하던 프레이가 속삭였다.
“예전에 학교 정원에서 네가 그랬어.”
프레이는 아직도 중학생 시절이 어제처럼 선명했다.
“내가 뭐라고 했는데?”
중학생이던 시절이 흐릿하기만 한 페트릭이 묻자 프레이는 작게 웃었다.
“꽃말 같은 거 관심 없다고 했어.”
“내가… 좀 그랬지.”
페트릭은 당장에라도 프레이의 작은 품 안에 안겨있는 꽃다발을 빼앗아 집어던지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좆 같은 꽃말. 왜 그런 재수 없는 꽃말을 여기에 붙인 거야. 페트릭은 이를 악물고 프레이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사실… 처음에 말이야. 네가 이 꽃다발을 줬을 때…….”
숨이 가빠져서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가던 프레이가 잠시 말을 멈췄다. 호흡을 고르는데도 여전히 숨을 들이마시고 내뱉는 속도는 느리기만 했다. 프레이의 한마디를 놓칠까 봐 숨조차 멈춘 그는 희미한 목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져버릴 것 같아 두려웠다. 숨을 정리했는지 프레이의 속삭임이 이어졌다.
“…조금 많이 기뻤었어. 엄마, 아빠를 빼고 나한테 꽃다발을 준 건 네가 처음이었거든.”
프레이가 좋아할 줄 알았다면 진작에 주는 거였는데. 페트릭은 프레이의 호흡을 세고 있었다. 마약성 진통제의 부작용은 호흡 저하를 동반했다. 일 분에 10회 이하로 떨어지면 위험하다는 의료진의 경고에 페트릭은 늘 프레이의 호흡을 세는 버릇이 생겼다. 수척해 보였지만 여전히 예쁜 얼굴은 꽃다발에 파묻힐 기세였다.
‘싫어하는 보라색 일색인 꽃다발이 그렇게 좋은 건가.’
페트릭이 프레이에게 속삭였다.
“보라색은 싫다며.”
“응.”
페트릭은 문득 프레이가 왜 보라색을 싫어하는지 궁금해졌다.
“보라색은 근데 왜 싫어하는 거야?”
그의 물음에 프레이는 한참이나 침묵하더니 느리게 말꼬리를 늘어트렸다.
“…보라색 같은 거 불길해서 싫어한다고… 그래서.”
“누가?”
페트릭은 프레이를 닮아 예쁘기만 한 보라색을 불길하다고 말한 새끼가 누구인지 속으로 이를 갈면서 되물었다. 프레이는 어느 날의 수업이 끝난 쉬는 시간을 떠올렸다.
‘페트릭. 넌 무슨 색 좋아하냐? 우리 회사에서 새로 나온 운동화 있는데 하나 줄게.’
그의 환심을 사려는 남자애 하나가 프레이의 옆자리에 앉아있던 페트릭에게 껄렁거리며 물었다. 프레이는 귀를 기울이면서 수학 문제를 푸느라 집중한 척, 문제집에 얼굴을 파묻고서 그의 대답을 기다렸다.
‘보라색 빼고 다. 왠지 보라색은 우울하고 불길하잖아.’
그의 대수롭지 않은 대답에 프레이는 쿵-하고 심장이 땅바닥에 처박혔다. 그때는 지금보다 더 선명했던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선명하게 반짝이던 보라색 눈동자가 우울함으로 얼룩졌다.
보라색… 싫어하는구나. 나는 보라색 좋은데.
그 당시 프레이는 그와의 공통점을 하나라도 더 만들려 애쓰던 사춘기 청소년이었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공통점을 갖고 싶다는 이유로 프레이는 자신을 떠올리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색깔을 가장 싫어하게 되었다.
“있었어… 그런 사람.”
프레이는 차마 그 사람이 페트릭, 너라고 말해주기가 어색해서 말을 얼버무렸다. 바람은 차가웠지만 프레이는 더 이상 추위나 통증을 느끼지 못했다.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스카비오사 꽃다발은 미지근한 프레이의 체온을 공유하며 조용히 눈을 감는 작은 몸의 마지막을 장식했다. 가볍기만 몸이 옆으로 기울었다. 프레이가 제 품에 머리를 기댈 수 있게 자세를 고쳐앉은 페트릭이 물었다.
“그런 사람이 누군데?”
조용히 자신의 품에 안겨있는 프레이의 대답을 기다리는 페트릭은 설마 그게 본인은 아니길 빌었다. 프레이의 푸석하기만 한 머리카락을 흩날리는 차가운 늦가을의 바람이 불던 순간이었다. 프레이는 페트릭의 품 안에서 고개를 들어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눈에 담으려 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금 아쉬운 마음이 들었다. 바람을 타고 희미하게 꺼져가는 목소리로 프레이가 속삭였다.
“내가 많이 좋아했던 사람.”
*
정원의 그네에 앉아있는 프레이는 페트릭이 자신에게 처음 선물해준 꽃다발을 안아 들고 잠들어있었다. 고요한 얼굴엔 고통이나 슬픔, 두려움은 보이지 않았다. 페트릭은 품 안에 기대어 앉아있는 프레이의 숨을 습관처럼 세려다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프레이?”
어깨를 붙든 손에는 힘이 제법 들어갔음에도 프레이는 조용했다.
“추운데, 안에 들어갈래?”
마음속 깊은 곳에 처박아두고 애써 외면하고 있던 불길한 상상을 떠올린 페트릭은 얌전히 품에 안겨 잠들어있는 프레이의 예쁜 얼굴을 쳐다봤다.
“프레이…….”
‘응.’ 하고 금방이라도 대답해올 것 같은 얼굴은 아픔도 고통도 잊은 채로 행복한 추억을 회상하는 듯 웃고 있었다.
“좋은 꿈… 꾸나 보네.”
페트릭은 프레이의 식어버린 차가운 뺨을 쓸면서 울고 있었다.
*
프레이의 장례식이 열리는 날, 하루 종일 하늘에서 비가 내렸다.
‘…나 사실, 너 좋아해.’
자신의 아이를 낳기 위해 다리를 벌리라고 하면 벌리고, 구멍을 조이라고 하면 조이던 시절 프레이가 속삭이던 고백이 페트릭의 고막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고개를 흔들며 힘겹게 프레이의 목소리를 떨궈 내면 어디선가 다시 희미하게 프레이의 수줍은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사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아기를 임신했거든요…….’
페트릭이 얼마나 만지작거렸는지 끝 부분이 닳아있는 종이를 가만히 쳐다봤다.
<제가 사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 페트릭 마일드리안이라고 저희 중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애예요.>
몇 번이나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해 오던 프레이의 진심을 짓밟은 건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죽기 전 품에 꼭 끌어안고 있던 보라색 스카비오사의 꽃송이들로 장식된 관에 누워있는 프레이는 금방이라도 일어나서 안아달라고 칭얼댈 것 같았다. 조문객이라고 해봤자 페트릭 단 한 명뿐인 프레이의 초라한 장례식은 그렇게 끝이 나버렸다.
프레이가 떠난 이후 페트릭은 평소처럼 지냈다. 내팽개쳐 두었던 회사에 다시 출근하고 적은 양이지만 식사도 빠짐없이 챙겼다. 일을 마치고 페트릭은 프레이의 페로몬이 희미하게 남아있는 침대 위로 몸을 눕히며 눈을 감았다.
‘페터… 나 자도 돼?’
품 안에서 꼼지락거리며 자신의 허락을 구하던 작은 목소리가 들려오는 착각이 들어서 페트릭은 중얼거렸다.
“응. 프레이. 잘 자.”
어두운 방 안을 홀로 밝히는 조명의 그림자 아래로 피곤한 얼굴이 눈을 감고 있었다.
*
“먼저 가면 어떡해.”
프레이는 자신을 뒤에서 끌어안는 남자의 이름을 잘 알고 있었다.
“페트릭?”
가만히 자신을 끌어안는 단단한 팔을 살짝 붙잡은 프레이는 익숙한 페로몬을 느끼면서 환하게 웃었다.
“어떻게 온 거야?”
페트릭이 품 안에 안겨있는 작은 몸을 돌려 얼굴을 쳐다보자 프레이는 배시시 마주 웃어주었다.
“혼자 있으면 무서워서 울고 있을까 봐 걱정돼서 왔어.”
발그레한 뺨을 쓸어주며 페트릭이 어색하게 웃자 프레이는 예쁘게 웃었다.
“나 이제 안 울어. 엄마랑 아빠랑도 만났고…….”
“나는? 나 없어서 무섭진 않았어?”
페트릭이 이제는 환하게 웃고 있는 프레이를 보며 초조하게 되물었다. 프레이는 입술을 살짝 달싹거리다가 웃음으로 얼버무리려는 듯 다시 웃었다.
“이만 갈게.”
“잠, 잠깐만… 가지 마. 프레이.”
페트릭은 품 안에서 벗어나 어느새 저 앞까지 멀어지고 있는 프레이의 작은 뒷모습을 쳐다봤다. 숨이 목 끝까지 차올라서 폐가 터질 것 같은데도 페트릭은 프레이의 뒤를 쫓으며 달리고 또 달리고 있었다. 프레이의 뒷모습이 겨우 가까워졌을 때 갑자기 프레이가 뒤를 돌았다.
“나랑 같이 있어. 응?”
작은 몸을 껴안으려 한 발자국 다가가자 프레이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뒤로 몸을 물렸다.
“생각해보니까 너한테 이 말을 못 해줬던 것 같아서…….”
페트릭은 고개를 저으며 점점 희미해지는 프레이를 쳐다보며 울기 시작했다. 페트릭의 눈물을 살짝 닦아내는 프레이의 손가락이 투명해지는 순간, 페트릭은 프레이의 말을 한마디라도 더 듣고 싶어서 끅끅거리면서 물었다.
“무슨, 무슨 말.”
프레이는 단 한 번도 페트릭에게 지어준 적 없던 환한 웃음을 지으면서 사라지는 순간 희미한 목소리로 그에게 속삭였다.
“사실 나 너 진짜 많이 좋아했었다고…….”
그 말이 하고 싶었어. 다 타버린 감정의 잿더미 속에서 프레이는 페트릭에게 정말 마지막이 될 작별인사를 고했다. 프레이가 페트릭을 뒤로 밀어내며 입 모양으로 속삭였다.
잘 가. 내 첫사랑.
감정의 종말 본편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