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4/24)

4.

프레이는 눈을 뜨자마자 자신의 아랫배부터 만졌다.

이 안에 마일드리안의 아기가 있는 거야.

점점 과거로 기억이 퇴행하던 프레이는 자신이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아기를 임신했다는 것이 어지간히도 기뻤는지 자신의 임신 사실을 용케도 기억하고 있었다. 유산된 줄은 꿈에도 모른 채로 자신이 좋아하는 사람의 아기가 배 속에 있다는 생각에 프레이는 엉망진창인 몸을 일으켰다.

프레이는 자신을 가졌을 때 그렇게 체리가 먹고 싶었다고 웃으며 말해주던 자신을 닮은 엄마를 떠올렸다. 하지만 버석거리는 입안은 뭔가 먹을 상태도 아니었고, 아무것도 먹고 싶지 않아서 프레이는 얌전히 앉아서 생각했다. 뚝뚝 끊어져 제대로 사고를 하지 못하는 머리는 임신했을 때, 흥미도 없는 만화영화를 봤다며 웃던 기억에 다다랐다. 할머니를 닮아 배 속의 아기도 만화가 보고 싶을지도 모른다고 프레이는 생각했다.

누군가에게 맞은 듯 아직도 멍이 든 뺨을 어색하게 쓸면서 바닥에 다리를 내딛자 몸이 휘청거렸다. 바닥으로 엎어진 프레이가 엉금엉금 기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프레이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리모컨을 발견하고 리모컨을 집어 들었다. 삑 하고 전원이 켜지고 어설프게 채널을 돌리는 몇 번의 시도 끝에 프레이는 어린이 만화 채널을 찾아냈다. 바닥에 앉아서 아기가 심심하지 않도록 열심히 형형색색의 캐릭터들이 움직이는 장면을 멍하게 눈으로 담았다.

만화 좋아하니. 아기야? 나는 좋아했었던 것 같은데.

샤워를 마치고 방 안에 들어선 페트릭은 화면이 켜져 있는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며 울리는 티브이가 눈에 들어왔다. 바닥에 엎어진 채로 초점 없는 눈으로 아동용 애니메이션을 쳐다보는 프레이의 상태가 조금 이상해 보인 건 그때부터였다.

“뭐 하자는 거야, 지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자, 프레이는 눈을 깜빡이며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잘 생기긴 했는데 어딘지 모르게 조금 무서운 남자에게 프레이가 작게 속삭였다.

“아기가 심심할까 봐… 만화 보고 있어요.”

“무슨 개소리야.”

애새끼 같은 건 진작에 유산된 지가 언젠데. 페트릭은 프레이가 자신을 낯설게 쳐다보며 존댓말을 썼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무슨 애?”

지금 자신에게 유산했다고 시위라도 하는 거로 생각하며 차갑게 비웃자, 프레이는 비밀이라도 몰래 말해주는 것처럼 입가에 손바닥을 대고서 속살거렸다.

“제가 사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의 아기를 임신했거든요. 잘은 기억 안 나는데… 누가 저한테 알려줬어요.”

페트릭은 프레이가 마치 꿈이라도 꾸는지 몽롱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면서 배시시 웃는 모습에 그제야 이상함을 눈치챘다.

“프레이 비셔스. 너 지금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네? 그냥… 물어보시니까 대답해 드린 건데…….”

프레이는 기가 죽은 듯 시선을 내리깔고 손만 만지작거렸다. 아무래도 연기가 아닌 것 같았다. 프레이에게 페트릭이 다가가서 물었다.

“내가 누구야?”

“그걸 왜 저한테 물어보세요…….”

프레이는 정말 자신을 처음 본다는 얼굴로 울먹였다. 페트릭은 뭐가 어떻게 된 건지 혼란스러웠다.

*

기억 퇴행. 정신과 의사가 내린 진단이었다. 극도의 고문이나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은 사람들에게서 드물게 나타나기도 하는 증상이며, 프레이에게 먹이던 마약의 부작용이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와 대화하는 프레이의 영상을 보던 페트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중학생이라고요.”

“네…. 더블리지 중학교에 다녀요.”

프레이는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낯설어서 눈을 피한 채로 속삭였다.

엄마랑 아빠는 언제 오지?

병원에 와있는데도 평소 같았으면 달려와 안아줬을 부모님이 오지 않아 프레이는 조금 불안해하고 있었다.

“임신했다는 이야기도 들었는데, 이야기해줄 수 있나요?”

“아. 그게… 부모님 오시고 나서 말하면 안 될까요?”

불안해하는 눈동자를 하고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는 화면 속 프레이의 얼굴을 보던 페트릭은 얼굴을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프레이의 부모님은 이미 10년 전 사망했다. 정말 중학교 시절의 기억에 멈춰있는 것 같았다.

“병원에 더 있어도 괜찮으면 나중에 말해줘도 되고요.”

의사에 말에 입술을 달싹이던 프레이는 결국 작게 소곤거렸다.

“잘… 기억은 안 나는데요. 누가 저에게 임신했다고 말해줬어요.”

“누구의 아기예요?”

의사에 말에 입을 꾹 다물고 있는 프레이는 한참이나 침묵했다. 정지화면 같던 화면이 얼마나 지났을까. 프레이의 작은 손이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메모를 적었다.

“그렇군요. 좋은 일이네요.”

“네. 정말 꿈같아요.”

페트릭은 환하게 웃는 화면 속 프레이의 얼굴에서 제 손에 들린 쪽지로 시선을 옮겼다. 하얀 종이에는 단정한 글씨로 이렇게 적혀있었다.

<제가 사실 제일 좋아하는 사람인데. 페트릭 마일드리안이라고 저희 중학교에서 제일 잘생긴 애예요.>

*

프레이는 질리지도 않는지 아침마다 동화책을 읽고 있었다. 일주일 내내 동화책을 읽는 프레이는 매일 일어날 때마다 똑같은 동화책을 고르며 똑같은 말을 했다.

“오늘은 이거 읽어줄게.”

어제 읽었던 기억도 나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다 망가진 몸을 하고서 바닥에 앉아서 동화책을 읽는 프레이는 행복해 보였다. 난독증이 다시 생긴 프레이는 아주 동화책을 뚫어져라 노려도 보고 멀리 떨어트려서 보기도 하면서 느리게 읽고 있었다.

“옛날 옛… 적에… 산속에는… 토끼와 호랑이가 살고… 있었어요.”

몇 십 번이나 읽었던 동화책을 읽는 목소리는 행복해 보였다.

*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프레이는 자신이 중학생인 줄 알고 있었다. 페트릭은 정신과 의사의 진단을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자신도 못 알아보고 누구냐고 물으며 집에 가고 싶다는 프레이를 보며 진짜 프레이가 중학생 시절의 기억만 남았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일말의 죄책감은 있는 것인지, 페트릭은 질리지도 않고 매번 똑같은 동화책을 읽는 프레이가 자신을 부를 때마다 말했다.

“다른 거 읽어.”

“아직 안 읽었어요…….”

프레이는 동화책을 잡고 난감한 얼굴을 했다. 아기한테 읽어줄 건데……. 페트릭은 프레이가 이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따끔거렸다. 병신 같은 오메가라고 욕하면서도 아이를 유산하고 이제 정말 임신조차 불가능하게 된 프레이가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하자 짜증이 났다.

프레이에게서 맡을 수 있었던 오메가 페로몬은 자취를 감춰버렸다. 페로몬 샘은 기능을 멈췄으며, 그로 인해 프레이의 오메가로서의 신체기능은 영원히 정지되었다. 베타나 다름없는 프레이는 어제도 물었던 질문을 또 하고 있었다.

“근데요. 진짜 마일드리안의 사촌 형이에요?”

며칠 전, 페트릭은 자신을 못 알아보는 프레이에게 충동적으로 자신을 있지도 않은 사촌 형이라고 소개했다. 그러자 프레이는 놀란 눈을 하고서 조금 들뜬 기색으로 ‘마일드리안한테 사촌 형이 있구나….’ 하고 엄청난 비밀이라고 알게 된 것처럼 좋아했다.

뒤늦게 알게 된 사실이었지만 프레이 비셔스는 우습게도 중학교 때부터 자신을 좋아하고 있었다. 의사에게 적어준 쪽지로 알고는 있었지만, 본인의 입에서 직접 듣는 이야기들은 페트릭의 마음은 심란하기만 했다.

“맞다고. 사촌이라 닮았다고 몇 번을 말해.”

“네에.”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몇 번인지도 모를 수긍을 다시 입에 담았다.

“형, 저 언제 집에 갈 수 있어요? 엄마 아빠 출장은 아직이에요?”

페트릭은 프레이에게 똑같은 거짓말을 몇 번이나 더 해야 하는지 생각했다. 이제 거짓말이라면 신물이 날 것 같았다.

“일이 바쁘시대.”

세다가 포기해버릴 정도로 반복된 거짓말을 건네는 페트릭은 인상을 찌푸렸다. 프레이는 그의 대답을 처음 듣는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아무것도 없는 배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린다.

“아기야. 너도 할머니, 할아버지 보고 싶어?”

페트릭은 프레이의 몸을 잡아 일으켰다. 온갖 마약의 부작용으로 망가진 몸은 금방 멍이 들고 상처가 났다. 온몸에 멍이 가득한 작은 몸은 힘없이 비틀거렸다. 프레이는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남자를 쳐다보며 눈을 깜빡였다. 마일드리안과 묘하게 닮은 그의 사촌 형. 왜 그가 자신을 데리고 있는지 생각하던 프레이가 더듬거리며 운을 뗐다.

“형. 혹시… 아, 아니에요.”

프레이는 마일드리안의 안부를 물으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는 침대에 걸터앉아 땅바닥만 쳐다봤다.

난 중학생인데… 어떻게 임신을 한 거지? 내가 페트릭 마일드리안을 꼬셨나 봐. 그런 게 아니면 이런 일이 일어날 리 없어. 어떡하면 좋지. 마일드리안이 화가 나서 얼굴도 안 보여주는 건가 봐…….

한참이나 침묵하던 프레이가 웅얼거렸다.

“형. 역시 마일드리안은 화가 났겠죠?”

시무룩한 목소리였다. 페트릭은 자신을 마일드리안의 사촌 형이라고 굳게 믿고 있는 오메가의 힘없이 축 처진 뒤통수를 쳐다보며 물었다.

“왜 걔가 화났을 것 같은데?”

“…제가 멋대로 임신해서요.”

프레이의 말에 페트릭은 숨이 막힐 것 같았다.

“…페트릭 그 새끼, 어디가 그렇게 좋은데?”

“네?”

프레이는 양 볼이 다 붉어져서 페트릭의 사촌 형이라는 남자를 올려다보며 말을 더듬었다. 사촌이지만 가족인데 그런 걸 어떻게 말해…. 입술만 달싹거리던 프레이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누가 봐도 당황한 얼굴이었다.

“말해주면, 페트릭이 화가 났는지 안 났는지 알아봐 줄게.”

“…정말요?”

프레이는 그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는지 머뭇거리면서도 자신이 소중하게 간직해온 기억들을 조금 꺼내기 시작했다.

“일단… 마일, 드리안은요. 친절해요. 제가 수업시간에 샤프를 떨어트렸는데 주워줬어요.”

페트릭은 인상을 찌푸리면서 다른 이유를 재촉하듯 고개를 까딱거렸다.

“또… 공부도 잘해요. 수학 시간에 제가 모르는 문제가 있었는데 알려줬었어요. 한, 한 번뿐이었지만.”

프레이는 예쁘게 웃으면서 수줍게 혼자 간직한 기억들을 속살거렸다.

“프레이.”

“네?”

“…아니야.”

어차피 말해도 내일이면 프레이는 오늘 들고 있던 동화책을 처음 보는 듯이 집어 들고, 정말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사촌 형이냐며 물어올 것이다. 입술을 달싹이던 프레이가 용기를 쥐어짜 내어 그에게 매달렸다.

“마, 마일드리안이 화났으면 사과해야 하니까요. 꼭 알려주세요. 형.”

“…….”

“네?”

초조해하면서 자신에게 매달리는 꼴을 보고 있자니 페트릭은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뭐 하자는 거지, 지금.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는 그의 반응에 초조했는지 옷자락을 붙들려던 작은 손이 허공에서 멈칫거렸다.

‘몸에 손대는 거, 별로 안 좋아해.’

누가 말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억 속의 단호한 말이 뇌리를 스쳤다. 페트릭의 셔츠 자락을 움켜쥐고 있던 손이 다급하게 떨어졌다.

“왜 그래?”

또 발작이라도 일으킬까 싶어 걱정이었다.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쳐다본 프레이의 눈동자는 초점이 없이 흐리멍덩했다. 아. 또 시작이네. 페트릭이 인상을 쓰던 순간이었다.

“근데… 형은 누구예요……?”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묻고 있는 프레이는 처음 보는 남자가 낯설어서 몸을 웅크렸다. 작은 몸이 움츠러든 모습을 말없이 쳐다보던 페트릭은 자신이 프레이에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과라도 해야 불편한 마음이 사라질 것 같았다. 그러나 사과를 받아줄 프레이는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겁에 질린 눈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프레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눈앞의 프레이 비셔스는 과거의 자신을 좋아하는 15살 중학생일 뿐이었다.

*

페트릭은 하루하루가 죽을 맛이었다. 주사기만 보면 있지도 않은 아기가 잘못된다고 기절할 때까지 우는 프레이를 보고 있을 자신이 없었다. 몸과 정신이 다 망가진 프레이를 보고 나서야 페트릭은 프레이에게 잘해줄 걸. 하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있지도 않은 아기를 빌미로 식사를 권유해야 겨우 먹는 프레이는 치료가 시급한 몸이었다. 기절하듯이 잠든 틈을 타 항생제와 영양제를 투여받은 몸에는 온갖 멍이 가득이었다.

아직도 프레이는 종종 하혈했고, 그때마다 아기가 잘못된 거 아니냐고 울면서도 자신과 눈을 마주치면 눈물을 소매로 박박 닦아냈다. 페트릭은 프레이에게 언젠가 했던 말이 떠올라서 인상을 구겨야 했다.

‘질질 짜는 거 싫다고 했잖아.’

대부분을 다 잊어버린 프레이의 무의식 속에 남아있는 말들은 프레이가 잊지 않기 위해 몇 년 전 몇 번이고 곱씹었던 내용이었다. 우는 걸 싫어하고, 먼저 사정하는 것도 안 좋아하고, 몸에 손대는 것도 싫어하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비위를 맞추면서 살아야 했던 프레이의 끊임없는 자기 최면이 그의 몸에 남아있었다.

울지도 말고, 몸에 먼저 손대지도 말고.

하라는 대로 해야 했던 계약 기간은 끝이 났지만, 프레이는 그 사실만 잊어버렸다.

“혀, 형.”

“프레이.”

링거를 다 맞고 죽은 듯이 누워 자던 프레이의 옆에 앉아있던 페트릭이 이름을 부르자 프레이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 학교에 가면 안 돼요? 안 가면 선생님한테 혼나요.”

“제발… 그만해.”

페트릭이 토해내 듯 한마디를 내뱉자 프레이는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몰래 눈물을 닦으면서 숨을 몰아쉬는 프레이가 자신을 자책했다. 왜 떼를 썼지. 다 생각이 있으니까 나를 보살펴주는 걸 텐데…. 근데 엄마랑 아빠는 왜 안 오는 거야…….

프레이는 울음을 꾹 참으면서 눈만 깜빡거렸다. 마일드리안의 아기도 임신했는데 부모님과 마일드리안의 얼굴은 보지도 못하니 다 자신이 잘못한 것 같은 기분만 들었다.

아침에 눈을 뜨면 늘 프레이는 만화영화를 봤다. 바닥에 주저앉아서 멍하게 화면 속 영상을 응시한 채로 앉아있으면 어디서 갑자기 나타난 페트릭이 그를 안아 들고 소파에 앉혔다.

“형.”

“프레이. 내 얼굴 자세히 봐.”

매일 아침 자신을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형이라고 삼십 번쯤 소개하던 페트릭의 인내심은 드디어 한계였다. 자신을 형이라고 부르며 몽롱한 눈으로 바라보는 프레이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얼굴을 고정시킨 페트릭이 속삭였다.

“내가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잖아. 그 빌어먹을 애도 네 배 속에 없고 너는 더 이상 중학생도 아니라고. 제발. 어?”

“애… 애기가 없, 없어요……?”

프레이는 페트릭의 말에 납작한 자신의 배를 만졌다. 아닌데. 누가 나한테 배 속에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아기가 있다고 그랬는데… 누가 그랬더라…. 혼란으로 흔들리는 눈동자는 눈앞의 남자의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서늘한 인상에 날카로운 눈매는 자신이 알고 있는 페트릭 마일드리안과 비슷한 것 같으면서도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형이 정말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에요?”

“형 아니라고. 프레이.”

페트릭은 프레이의 눈동자를 쳐다보며 뒤늦은 후회를 곱씹었다. 페로몬 샘이 말라버려서 각인까지 풀린 프레이는 두 번 다시는 임신하지도, 미미한 페로몬도 내보내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 마약에 중독된 몸은 프레이가 자는 동안 맞는 약물들로 조금씩 나았지만, 정신적인 문제는 나빠지기만 할 뿐이었다.

“엄마, 아빠는요?”

“사고로 돌아가셨잖아. 프레이.”

“거짓말이야. 거짓말이죠?”

프레이는 부모님의 사망 소식을 전하는 페트릭의 손을 떼며 울 것 같은 얼굴로 물었다. 우리 엄마 아빠가 날 놔두고 돌아가셨을 리가 없잖아.

늘 페트릭의 앞에서 울더라도 금방 눈물을 닦아내고, 먼저 손을 뻗어 만진 적도 없던 프레이는 지금 서럽게 울면서 페트릭의 손을 쳐내고 있었다.

“왜… 왜 나쁜 거짓말해요? …우리 엄마랑 아빠한테 그런 일 일어날 리가 없잖아요…….”

“프레이.”

얼마나 서럽게 우는지 숨이 다 넘어갈 것 같이 울던 프레이는 자신을 페트릭 마일드리안이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물었다.

“누구예요? 누군데 그런 거짓말을 나한테 하는 거예요?”

“…하. 빌어먹을.”

페트릭은 맛이 가버린 프레이의 얼굴을 보며 윽박질렀다.

“애는 유산됐고, 네 부모님은 이제 안 계시고. 내 이름은 페트릭 마일드리안이라고! 알아듣겠냐고!”

윽박지르는 남자가 자신의 기억 속에서 늘 반짝반짝 빛이 나던 그 페트릭과 동일인물이라는 말에 프레이는 울면서 훌쩍거렸다.

“아니야… 아니잖아. 나 집에 보내줘요. 여기 안 있을래요.”

프레이는 울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테이블 위에 놓인 전화기에 다가가더니 익숙한 번호를 누르고 수화기를 들어 자상한 아빠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프레이에게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아… 아빠 휴대폰 번호가 맞는데…….”

분명히 자신의 아빠가 쓰는 휴대폰 번호가 확실했다. 수화기 너머로 전화를 받은 여성이 프레이의 기억에 생생한 번호를 말해주며 이쪽으로 건 번호가 맞냐고 묻는 소리가 들려 왔다.

“맞아요… 저희 아빠 번호가 맞…….”

프레이의 손에 들려있던 수화기를 빼앗은 페트릭이 짧게 전화기에 대고 말했다.

“잘못 걸었습니다.”

탁-하고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는 소리에 프레이는 어깨를 움츠렸다.

“그래서 네 아버지가 전화 받으셨어? 프레이.”

“…아니. 우리 아빠 번호가 맞는데… 진짠데…….”

“15년 전에나 맞았겠지.”

페트릭의 차가운 말에 프레이가 울먹였다.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어…….”

“제발 정신 차려. 몇 달 뒤면 우리 30살이야. 도대체 언제까지 중학생으로 지낼 거야. 프레이 비셔스.”

프레이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비틀거렸다. 페트릭의 눈치를 보며 침대에 걸터앉은 프레이가 몸을 웅크렸다.

“미안. 미안한데… 나중에 얘기해.”

“…….”

지쳐있는 목소리에 페트릭은 프레이에게 생각할 시간을 주기로 했다. 어차피 다음 날이 되면 잊을 것이 분명했지만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는 것에 이골이 났다. 상황을 받아들이기 힘들어 보이는 프레이에게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지 고민하던 페트릭은 방을 빠져나가며 전화를 걸었다.

“난데. 프레이 비셔스의 부모 사망 진단서 좀 가져와.”

페트릭은 하루아침에 집과 부모님이 사라져버린 프레이의 기분 따윈 신경 쓰지 않았다.

*

그저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이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끔찍한 걸 본 것처럼 인상을 찡그렸다. 이게 뭐야. 뭐라고 적혀 있는 거지? 모르겠어. 정말 엄마, 아빠가 돌아가셨단 말이야?

프레이의 혼란스러운 눈동자에 물기가 어리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페트릭이 건넨 종이를 한참이나 부여잡고 있던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이거 뭐야?”

“뭐긴. 네 부모님의 사망 진단서.”

프레이가 부들부들 떨고 있는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본 페트릭이 물었다.

“이제 믿을 거야?”

“…….”

프레이는 침묵할 뿐이었다. 프레이는 몇 번이고 자신의 부모님의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다정한 부모님의 목소리 대신, 신경질적인 타인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로 쩌렁쩌렁했다.

‘도대체 몇 번을 말해요. 그쪽 부모 아니라니까!’

상대방이 먼저 전화를 끊으면 프레이는 끈 떨어진 인형처럼 자리에 주저앉아 울었다.

“정말 돌아가신 거야?”

프레이의 목소리는 무덤덤해 보였다.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 모양이었다. 페트릭이 단호한 목소리로 못 박았다.

“그래. 돌아가셨어. 그것도 아주 오래전에.”

페트릭은 일말의 동정심은 남아있는지, 부러 프레이의 부모가 목을 매달고 자살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프레이는 말을 잃은 사람처럼 침묵했다. 페트릭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랐을 때쯤 작은 목소리가 속삭였다.

“그렇구나.”

부모님의 사망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프레이가 한참이나 손에 든 종이를 읽고, 또 읽었다. 매끄러운 종이에 적혀있는 단어들이 흔들흔들 춤을 추듯 흔들렸다.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 그것도 자살이었다. 프레이는 자신의 부모님의 자살을 증명하는 종이가 무거웠다. 고작 몇 그램도 되지 않는 종이일 뿐인데 납덩이를 들고 있는 기분이었다.

“…진짜 안 계시는구나.”

페트릭은 프레이의 혼잣말을 들으며 한숨을 쉬었다. 내일은 부디 프레이의 기억이 온전하길 바라는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페트릭이 방 안을 빠져나갈 때까지 프레이는 글자들이 일렁거리는 종이를 들여다볼 뿐이었다.

*

아무래도 프레이에게 보여준 사망진단서가 효과적으로 작용한 것 같았다. 프레이는 자신에게 닥친 비극적인 현실을 그대로 기억해냈다. 상실의 슬픔에 잠겨있는 프레이가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마일드리안. 근데 아기 이야기는 뭐였어?”

“아기…. 그건 내가 말실수한 거야. 아기 같은 거 없었어.”

부모의 자살 소식에 충격을 받은 프레이에게 유산이란 사실을 알렸다간 정말 일이 복잡해질 것 같았다. 페트릭은 유산 사실은 비밀로 묻어두기로 했다.

“그럼, 아기도 없는 거네…….”

프레이는 자신의 가족은 한 명도 없다는 사실이 무서웠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기분은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아기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은 이후, 프레이는 더 이상 만화영화를 넋 놓고 바라보지도 않았다. 몇십 번이나 읽은 동화책을 쳐다볼 생각도 없었다. 글자를 보면 속이 울렁거렸다. 글자들의 조합은 금방이라도 부모님의 사망진단서로 돌변할 것 같았다.

프레이의 하루 일과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멍하게 앉아있는 것이 전부였다. 식사도 거의 하지 않고, 넋을 놓은 모습을 보자 페트릭은 프레이가 죽어버릴 것 같아서 겁이 났다.

“프레이.”

“…….”

옆에 앉아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자 그제야 자신을 바라보는 보라색 눈동자는 우울함과 깊은 상실감에 허우적거리고 있었다.

“왜?”

“아니야.”

다 갈라진 프레이의 목소리엔 아무런 감정이 담겨있지 않아서 페트릭은 소름이 끼쳤다. 프레이 비셔스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에게 있어 그저 장난감이었다. 돈을 주고 산 동창의 몸에 미미하게 욕정한다는 사실을 부정한 그는 페트릭이 해외에서 돌아왔을 때, 존재하지도 않는 알파와 각인이라도 한 줄 알고 질투심에 각인을 할 정도였다.

하지만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자존심은 그를 정말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부정했다. 다 망한 집의 하나 남은 혈육에 가진 건 오메가 페로몬도 점점 희미해지는 불임의 몸뚱이뿐인 프레이 비셔스를 자신이 좋아한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프레이의 몸과 마음이 다 박살이 난 지금, 그는 자신의 마음을 인정했다.

나는 프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야.

프레이를 좋아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정한 뒤, 페트릭은 후회의 늪에 빠져 허우적거렸다. 계약기간 동안 프레이에게 퍼부었던 폭언부터 섹스토이 취급하던 최근까지 프레이에게 상처가 될 만한 행동을 하지 않았던 날이 없었다.

“프레이. 있잖아. 내가 너 좋아한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래?”

프레이는 무덤덤한 얼굴로 되물었다. 분명 과거의 자신이라면 숨 쉬는 것도 잊을 만큼 기뻐했을 말이었겠지만 어쩐지 지금은 기쁘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페트릭의 얼굴을 넋 놓고 쳐다보던 얼굴은 이제 건조한 시선으로 그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예전엔 가까이에서 보면 설렜는데…….

왜 지금은 아무 느낌이 들지 않는지, 자신은 왜 기억을 잃었는지 프레이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머리가 이상해진 것 같았다. 무덤덤한 반응에 페트릭은 말을 더 붙여 볼 엄두가 나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두 사람의 목을 조르고 있었다. 프레이는 자신의 첫사랑의 집에 얹혀 지내는 상황이 불편해서, 페트릭은 뒤늦게 인정한 자신의 오메가를 다 망가트린 것이 자신이라는 죄책감에 숨을 쉴 수가 없었다.

*

“저기… 마일드리안.”

살이 좀 쪄서 해골은 겨우 면한 프레이의 얼굴을 보던 페트릭은 자신을 부르는 프레이의 목소리에 답지 않게 상냥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다 먹었는데.”

프레이의 앞에 놓인 접시를 내려다보니 샐러드에 약간 손을 댄 것이 전부였고 오렌지는 아예 스테이크로 덮어놓았다.

“오렌지는?”

“…그냥 먹기 싫어.”

페트릭은 불쑥 프레이가 임신했을 때 기억이 떠올랐다. 혼자 방에 앉아서 오렌지를 천천히 까먹던, 외로워 보이는 등을 보면서 왜 그때 꼴값을 떤다고 생각했을까. 뒤늦게 후회해보았자 지금은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다. 우습게도 페트릭은 지금 프레이에게 간이라도 빼줄 기세로 굴고 있었다. 이유는 프레이가 전혀 기억해내지 못하는 것들이었다. 프레이는 왜 갑자기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중학교 동창에 불과한 자신에게 지극정성으로 구는지 알 수 없었다.

프레이의 기억은 영원히 되찾을 수 없게 되었다. 마약의 과다복용으로 뇌 일부가 많이 손상된 것이 큰 이유였다. 일반적인 복용법이 아니라 알코올과 섞어서 점막으로 흡수된 그것은 오메가에게는 특히 안 좋은 마약이었던 탓에 결국 프레이의 몸에 영원히 치료되지 못할 장애를 남겼다.

불임과 감정표현의 장애. 난독증과 불안장애를 동반한 우울증. 몸도 마음도 피폐하게 만들게 한 원인은 전부 페트릭 마일드리안 한 명이었다.

“글자들은 아직도 그래?”

고등학교를 졸업했으나 프레이의 기억은 중학교 2학년에 머물러있었기 때문에 기초적인 교육 과정을 다시 알려주려 했었다. 하지만 난독증으로 인해 동화책을 세 시간 동안 읽는 프레이에게 필수교과과목들은 버겁기 그지없는 상태였다.

“응.”

가만히 앉아 힘없이 중얼거리는 프레이는 의욕이 하나도 없는 사람처럼 보였다. 자고 일어나서 눈을 뜨니 부모님은 돌아가셨고 집안은 망했으며, 오메가였던 몸은 불임이 되어 영원히 임신을 못 하는 몸이 되었다는 사실은 아직 15살에 머물러있는 프레이에게 너무 잔혹하기만 했다.

뇌의 문제로 감정표현들이 점점 단조로워지는 프레이는 잘 울거나 웃지도 않았다. 웃을 일은 애초에 드물었지만, 울먹거리기 일쑤이던 예전과 다르게 늘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거나 좌우로 젓는 것이 감정표현 전부였다.

“집에는 언제 갈 수 있어?”

“혼자 지낼 수 있겠어?”

후회로 얼룩진 아침을 시작으로 늦은 밤 수면제를 먹고 자는 프레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는 새벽이 일과가 된 페트릭은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후회를 하고 있었다. 사과를 받아줄 당사자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피폐해져 살아있는 송장 같은 수준이었다.

“혼자 못 지낼 건 뭐야.”

감정 없는 목소리는 무미건조한 대답을 늘어놓았다. 페트릭은 더 이상 프레이를 붙잡을 만한 이유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각인을 거들먹거리기에는 이미 오래전 각인은 풀려버렸고,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루시로 회유하기에는 프레이는 아기를 낳은 기억조차 없었다. 알파들이 오메가를 꼬실 때 쓰는 그 흔한 ‘히트 사이클이 와서 걱정된다’라는 이유조차 프레이에게는 더 이상 해당 사항이 없었다.

“내가 너 더 보고 싶어서 그러는데… 안 돼?”

고등학교 시절 프레이의 별명을 떠올리면서 페트릭이 속삭이자, 프레이의 흐리멍덩한 시선이 그를 향했다.

“네가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여기 더 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어?”

순수하게 물어보는 질문에 페트릭은 말문이 턱 막혔다.

*

“마일드리안. 안 가?”

프레이는 자신의 뒤에 서서 초조해하는 낯을 하는 중학교 동창이자 자신의 첫사랑을 향해 말했다.

“아프면 연락해야 하는 거 알지.”

“아프면 병원에 가야지.”

프레이는 자신의 명의로 임대된 낡은 아파트 문에 서서 어색하게 웃었다. 이런 곳에서 살았었구나. 나는. 아직도 안 갈 생각인지 서 있는 중학교 동창을 내버려 둔 채로 어색한 손길로 잠긴 문을 열고 있는 프레이에게 페트릭이 더듬거리면서 말을 건넸다.

“가끔 찾아와도 돼?”

“…왜?”

프레이는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남자가 귀찮아지고 있었다. 몸은 늘 나른하고 잠을 원하는데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집에 있을 때마다 페트릭은 자신을 괴롭혔다. 약을 먹어야 한다는 둥, 머리카락을 손질해야 한다는 둥 온갖 핑계를 대며 자신의 수발을 들고 싶어 안달이라도 난 사람처럼 굴었다. 프레이는 속으로 생각했다.

나를 동정하나 봐.

사고로 기억을 잃어 자신을 중학생인 줄로만 착각하던 30살이 다 된 동창. 심지어 불임에 부모님의 부고 소식조차 잊어버려 뒤늦게 사실을 알고 꼴사납게 질질 짜던 모습은 동정심을 사기에는 충분해 보였다. 더군다나 자신의 몰골이라면 충분히 가산점을 얻을 만했다. 다 말라비틀어진 손목과 멍든 팔과 다리. 누가 보면 전염병에라도 걸린 사람인 줄 알 것이다.

“네가 생각날 때만이라도…….”

“괜찮아. 그동안 도와준 거면 충분해. 고마워.”

프레이가 객관적으로 생각했을 때 자신은 더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을 좋아하지 않는 것 같았다. 봐도 설레지 않고 두근거리지 않으며, 과거의 기억들 속 자신이 느끼는 감정들이 더 이상 그를 보면 느껴지지 않았다. 과거의 첫사랑과 이상한 일로 엮이고 싶지 않았다. 눈앞의 페트릭 마일드리안에 대한 감정보다도 늘 함께했던 부모님의 부재를 받아들이는 시간이 프레이에게는 절실했다.

“프레이.”

“잘 가.”

검댕이 묻어나올 것 같은 문은 페트릭의 눈앞에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며 단호하게 닫혔다. 페트릭은 뒤늦게 프레이가 자신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는다는 걸 느꼈다. 기억을 잃고 자신을 처음 제대로 인지하던 날에도 조금 희미하게 웃을 뿐 예전처럼 환하게 웃어주지도 않았다.

‘마일드리안. 아직도 착각하는 거 같은데, 나는 너 안 좋아해.’

서점에서 그를 좋아한다고 가벼운 마음으로 고백했을 때 차갑게 일갈하던 프레이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페트릭은 부모님에게 걸려오는 휴대폰의 액정을 빤히 쳐다보다 전화를 받았다.

“네.”

[루시 오늘 생일인 건 알고 있니?]

프레이가 낳은 자기 아들의 생일이라는 말에 페트릭은 얼굴을 구겼다. 지금은 루시라는 이름을 가진 남자 아기를 낳고 처음으로 정신이 든 프레이가 간호사에게 아기를 보고 싶다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그때 자신이 병실에서 프레이에게 뱉었던 독설과 흐릿한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했다.

프레이에게 수치심을 안겨주기 위해 거론한 계약서와 마치 부하직원을 격려하듯 말라서 뼈밖에 안 느껴지던 마른 어깨를 두드리던 손의 감촉이 느껴지는 것 같아서 인상을 쓰던 페트릭이 짧게 대답했다.

“지금 공항으로 갈 거예요.”

[루시 낳은 애랑은 화해해 본다더니 어떻게 되어 가?]

페트릭은 아들을 낳은 프레이를 찾는 부모님의 성화에 못 이겨 프레이를 다시 찾았으나 거절당한 이후로 부모님에게 성격 차이로 헤어졌다고, 그만 찾으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었다.

“제가… 좀 잘못한 게 많아서요.”

[네가 뭘 얼마나 잘못했는데 지금까지 자기 아들도 한 번도 안 봐?]

페트릭은 입을 다물었다. 강간에 유산을 시키는 것도 모자라 마약을 먹인 후유증으로 기억 퇴행이 와서 중학생 때의 기억이 전부가 된 남자는 지금 뇌에 문제가 생겨 감정도 잘 느끼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그 모든 일의 원인이 자신이라는 사실을 부모님에게 차마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빨리 오너라. 루시가 아빠 언제 오냐고 칭얼거리는구나.]

전화가 끊기고 페트릭은 공항으로 향하기 위해 허름한 아파트를 빠져나갔다.

창문으로 페트릭이 빠져나가는 뒷모습을 바라보던 프레이는 먼지가 가득 앉아있는 침대를 응시하다 바닥에 앉아 무릎을 끌어안았다.

“…….”

제 손에 들린 지갑 속에는 자신의 신분증과 처음 보는 카드들, 영수증들뿐이었다. 처음 보는 집, 처음 보는 가구, 처음 보는 자신의 얼굴과 처음 보는 첫사랑의 어른이 된 얼굴. 익숙한 것들은 아무것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집에서는 괜찮은 척, 받아들인 척 무덤덤하게 굴었지만 프레이는 전혀 괜찮지도 않았고 상황을 온전히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무거운 공기가 가득한 집에서 홀로 앉아 눈물 한 방울 나오지 않는 건조한 얼굴로 한참이나 웅크려 앉아있던 프레이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웅크리고 바닥에 몇 시간이나 앉아있는다고 달라질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 씻고 싶었고, 잠을 좀 자고 싶었다. 수면제를 얼마나 들고 왔나 고민하며 욕실이 어디 있는지 서성대며 찾는 프레이의 발걸음이 무거워 보였다.

*

프레이는 진지한 얼굴로 이사를 고민하는 중이었다. 처음 보는 사람들이 인사를 건네오며 서점에 관해 묻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기억을 잃기 전에 자신은 서점을 운영했었던 것 같았다. 아는 사람도 아무도 없는 추운 지역에 살게 된 이유를 잠깐 고민했지만 텅 비어버린 15년의 공백은 쉽게 메워지지 않을 것이 분명했다. 프레이는 자신을 알아보는 사람이 없는 곳으로 떠나고 싶었다. 옷상자 몇 개를 제외하면 가진 것이라고는 이상한 골목길 사이에 위치한 서점이었는데, 다행히 누군가 인수하고 싶다는 편지를 서점 문 안으로 밀어 넣어두었던 것을 발견했다. 서점에 도착해있던 우편물들을 읽고 분류하는 데 꼬박 3일이 걸린 프레이는 서점을 정리했다.

약간의 시행착오는 있었지만 인수자는 좋은 사람이었다. 조금 어리숙해 보이는 프레이의 행동에도 먼저 하나하나 열심히 알려주기도 했었다. 프레이는 어릴 적 여름마다 지내던 작은 별장이 있는 곳으로 집을 보러 갈 예정이었다. 날은 제법 쌀쌀해져서 늘 학교에 갈 때면 엄마가 직접 매 주던 목도리와 비슷한 색의 목도리도 챙겼다. 여벌의 옷이 든 작은 캐리어를 들고 문을 닫고 나오자 생각하지도 않은 사람이 서 있었다.

“어디 가?”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었다.

“안녕.”

“…그래. 안녕.”

얼굴을 한번 힐끔 올려다보고 짧게 인사를 건넨 프레이는 열쇠로 절그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집 문을 잠그고 있었다. 페트릭이 지난 몇 주간 경영수업과 내팽개쳐둔 자질구레한 일들을 처리하는 동안, 프레이에게서의 연락은 단 한 번도 오지 않았다. 알람이 울릴 때마다 기대를 하며 휴대폰을 확인하며 점점 얼굴이 살벌해지다가, 결국 다시 비행기에 올라탄 페트릭은 어디로 떠나는지 캐리어를 든 프레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다 죽어가는 몰골은 조금 나아지긴 했으나 감정을 알 수 없는 무표정은 여전히 낯설었다.

“비켜줄래. 복도가 좁아서… 좀 지나갈게.”

자신을 보러 왔다고 생각하지 않는 것이 분명해 보이는 말투에는 명백한 귀찮음이 잔뜩 묻어 나왔다. 프레이는 앞을 가로막고 서 있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을 천천히 올려다보았다.

“마일드리안, 듣고 있어?”

“프레이. 너 어디가?”

프레이는 제 손에 들려있던 캐리어를 대신 들어주며 보기 좋게 웃는 페트릭에게 대답했다.

“버닐에 가보려고.”

“버닐?”

비행기로 꼬박 5시간 거리의 이 나라 최남단의 휴양지로 떠난다는 프레이의 말에 눈썹을 씰룩이는 페트릭은 천천히 되물었다.

“좀 쉬려고?”

“집 좀 보려고. 캐리어 이리 줘.”

프레이가 작은 손을 뻗으며 힐끔 올려다보자, 머리카락이 살랑이며 희미하게 흔한 꽃향기가 배합되어 있는 샴푸 냄새가 났다. 은은하게 나던 코튼 향은 종적을 감추고 말았다. 페트릭은 프레이가 뻗고 있는 손을 부드럽게 잡으면서 어색하게 웃었다.

“나도 버닐에 볼 일이 있었는데 잘됐네. 몇 시 비행기야?”

“7시 10분이었나…….”

페트릭은 웃으며 프레이에게 말했다.

“나랑 같은 비행기 타면 신기하겠다. 그렇지?”

“그런가?”

프레이는 뭐가 신기한지 고개를 살짝 기울이며 잠깐 생각에 잠기다 이내 고개를 살짝 흔들었다. 예전부터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크고 작은 친절함이 몸에 배어있는 사람이었다. 무거운 걸 들고 가는 사람의 물건을 좀 덜어서 들어준다거나, 모르는 수학 문제를 친하지 않은 반 친구가 물어도 흔쾌히 알려주는 사람이었다.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하다 싶어 프레이는 그에게 잡힌 자신의 볼품없는 손을 꼼지락거렸다.

“놔…….”

“손이 차가워.”

혈액순환이 잘 안 되는 몸이라 프레이에게 겨울은 상극이었다. 손이 조금 따듯하게 녹아 그럭저럭 움직일 만해질 때까지 페트릭은 프레이의 손을 잡고 있었다.

“약은 잘 먹고 있어? 병원은?”

“알아서 잘하고 있어. 여전히 친절하네. 마일드리안.”

프레이는 대충 대답하면서 목도리에 얼굴을 파묻었다.

“내 차에 타. 공항까지 같이 가자.”

“운전면허가 있어?”

프레이가 멍하게 툭 내뱉고 나서 뒤늦게 아차 싶은 표정을 지었다. 더 이상 자신과 페트릭은 중학교 2학년의 청소년이 아니었다. 20살보다는 30살이 훨씬 더 가까운 나이였고, 아마 아기를 낳은 사람도 있을 법한 나이였다. 프레이는 조용히 페트릭이 열어준 차의 조수석에 앉았다. 캐리어는 트렁크에 실리고, 보닛을 돌아 운전석에 앉은 페트릭은 멀뚱거리며 안전벨트를 하지도 않고 앉아있는 프레이의 앞으로 몸을 기울였다.

“벨트, 해야지.”

얼굴이 가까워졌음에도 프레이는 숨을 멈추거나 홀린 눈으로 바라보지 않고 그저 벨트를 잊어서 아차 하는 얼굴뿐이었다.

“고마워.”

프레이는 굳은 얼굴로 멀어지려던 페트릭의 얼굴이 다시 가까이 다가오자 눈을 깜빡깜빡 느리게 감았다 뜨고 있었다.

입술이 닿더니 작은 입술을 벌리며 축축하고 뜨거운 혀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과 자신이 키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에 프레이의 머리가 하얗게 변해버렸다. 능숙한 혀 놀림에 프레이가 미미한 비음을 흘리며 당황한 손으로 페트릭의 옷자락을 움켜잡았다.

“…흐.”

페트릭은 눈꺼풀을 예쁘게 감은 채로 입술을 내어준 프레이를 내려다보았다. 혀를 일부러 노골적으로 비비자 제 옷깃을 붙잡은 손이 어쩔 줄 모르고 작게 부들거리는 게 귀엽기만 해서 그는 속으로 피식 웃었다. 마치 프레이와 자신이 처음 키스를 하던 때가 생각났다. 술을 마시고 프레이를 안았던 날이었다. 머리채를 잡고서 사정 방지 링을 끼우라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괜히 조금 미안한 마음에 입술을 떼며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자 프레이는 얼굴이 붉어진 채로 숨을 할딱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프레이. 이러지 말고 우리 사귈래?”

“…응?”

프레이가 눈꺼풀을 느리게 밀어 올리며 아직도 제 눈앞에 있는 페트릭의 얼굴을 응시했다.

“잘해줄게.”

타액으로 번들거리는 입술을 엄지로 살짝 만지던 페트릭이 초조한 얼굴로 프레이의 대답을 기다렸다. 프레이는 자신에게는 며칠 전 일처럼 선명하지만 사실은 15년도 더 된 기억 속의 자신이 느끼던 감정이 낯설게 느껴졌었다. 운동장에서 달리는 페트릭을 몰래 쳐다보면서 두근거리던 설렘. 복도에서 오가다 자신과 우연히 눈이 마주친 페트릭이 보기 좋게 눈꼬리를 접어서 웃어주던 날에는 죽어도 좋다고 생각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모든 감정들은 프레이에게 더 이상 낯설기만 했다.

도시에 돌아와 찾은 병원에서 한참 동안 프레이의 말을 경청해주던 의사는 진료기록을 보더니 뇌의 특정 부분이 손상되어 그렇게 느껴지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과 함께 있으면 예전과 같은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갑자기 프레이는 그게 궁금해졌다.

“난 널 보면 설레지도 않는데 그래도 괜찮아?”

페트릭은 몇 년 전 자신이 우연히 만난 프레이에게 아기를 낳아줄 것을 제안하고 계약서를 내밀었던 날이 떠올랐다. 그때도 프레이는 이렇게 말했다.

‘난, 열성 오메간데. 그래도 괜찮아?’

페트릭은 더 이상 자신을 보면 설레지 않는다는 프레이의 대답에 쓴웃음을 지으며 대답했다.

“응. 괜찮아.”

프레이는 시선을 내리깐 채로 한참이나 침묵을 유지했다. 기억을 잃은 동안 보살펴줬던 동창을 이용하는 것 같아서 마음이 좋지 않았다.

“그래도 아닌 것 같아. 좋아하지도 않는데 사귀는 건…….”

“프레이. 제발. 응?”

거절의 의사를 내비치자 페트릭은 프레이의 눈을 쳐다보며 애원하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페트릭은 지금 자신의 자존심은 접어두었다. 지금은 오로지 프레이를 자신의 연인으로 붙들어두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언젠가 자신의 감정이 식을 때까지는 프레이를 보면서 자신의 마음속에 가득 찬 후회를 덮어버릴 만큼의 속죄를 해야 제 속이 후련해질 것 같았다. 프레이가 기억을 하든 하지 못하든 페트릭 자신만 편해지기 위한 이기적인 결정이었고 일방적인 선고였다.

프레이는 입을 달싹였다.

“네가 괜찮으면… 나도 괜찮을 것 같아.”

“진짜 잘해줄게. 프레이.”

다시 찾아든 입술은 머뭇거리다 이내 어색하게 벌어졌다. 급하게 혀를 섞으면서 목 뒤를 부드럽게 감싸자 흠칫 떨리는 프레이의 작은 몸이 사랑스럽기만 해서 페트릭은 자신이 드디어 미쳐간다고 생각했다. 미쳤든 미치지 않았든 페트릭은 프레이를 향한 마음이 식을 때까지는 그동안 마음을 인정하지 못해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실컷 해줄 생각이었다. 프레이가 자신의 감정을 다시 느껴보기 위해 페트릭을 이용하기로 한 것처럼 페트릭도 자신의 만족을 위해서 프레이를 이용하기로 했다.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두 사람의 연애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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