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어서 오세요.”
방문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주인의 건조한 목소리가 따라 붙었다. 세계 문학상을 받은 소설가의 출신 도시인 탓에 도심 곳곳에는 크고 작은 서점이 즐비했다. 장사할 의지는 있는지 의구심이 드는 서점은 구불구불한 주택가의 골목에 있었다. 좁아터진 서점은 돈 없는 학생들의 독서실이 되었다가, 관광차 들렀다가 길을 잃은 관광객들의 길잡이가 되기도 했다. 중후하게 늙은 작은 서점의 단골 노인은 인사를 빼고는 말 한마디 하지 않는 서점의 주인에게 물었다.
“임대료는 낼 수 있는 거 맞아?”
노인의 질문에 둥그런 안경알 끝이 깨져, 보는 사람이 더 신경이 쓰이는 안경을 낀 마른 남자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네.”
“신간은 어디에 또 처박아뒀어?”
“직진하셔서 오른쪽 구석에요.”
신간을 구석에 아무렇게나 처박아두는 서점은 도시를 통틀어 여기뿐이었다. 할아버지는 툴툴대면서도 남자가 알려준 곳으로 향했다. 몇 안 되는 단골들이 광장에 있는 거대한 서점에 화려하게 깔린 책을 마다하고 도심에서 이십 분을 걸어야 나오는 이 코딱지만 한 서점에 들르는 이유는 이 서점 특유의 분위기 때문일 것이다. 흔한 클래식 하나 흘러나오지 않는 작은 서점 안은 얼핏 보기에는 정돈되어 보이지 않았지만 나름의 규칙을 가지고 정렬되어 있었다. 무엇보다 심드렁한 주인의 태도와 그가 가끔 내는 책장 넘기는 소리가 자꾸 이 작고 볼품없는 서점을 생각나게 했다.
“이거 줘.”
“봉투가 다 떨어졌어요. 어떡하죠.”
읽고 있던 책장 위로 책갈피를 꽂아 넣고 안경을 한번 매만진 주인이 말했다. 중절모를 쓴 노인은 툴툴대며 말했다.
“저번 주에도 그 얘기 했어. 젊은 사람이 정신을 어디에다 두고 살아. 주문, 또 안 했구먼.”
“그렇네요. 봉툿값은 빼 드릴게요.”
“언제는 봉툿값 받았다고?”
말은 툴툴대도 노인은 프레이의 서점이 문을 연 이후 가장 오래된 단골이었다. 프레이는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다.
“들켰네요.”
“안경은 언제 고칠 거야?”
거스름을 건네주며 프레이가 눈을 깜빡였다.
“나중에요.”
노인은 책을 품에 안고 거스름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넣었다. 분명 내일이 돼도, 한 달이 지나도 저 안경은 그대로 알이 깨져있을 것이다.
“안녕히 가세요.”
“그래. 이놈아.”
노인을 배웅한 뒤, 프레이는 다시 책을 집었다. 글자들은 여전히 춤을 추고 있었다. 난독증이 생긴 건 꽤 오래전이었다. 집중하면 아예 못 읽을 정도는 아니지만 책 한 권을 읽으려면 많은 시간과 노력을 들여야 했다. 허름한 골목길 사이에 어울리지 않는 서점을 낸 건 단순한 충동이었다. 집에만 틀어박혀 있으면 자살이라도 할 것 같았다.
사람들이 어떻게 알고 오는지는 몰라도 프레이는 서점을 운영하면서 소소한 재미를 느끼고 있었다. 물론 수익보다 임대료가 더 나갔지만, 아침에 일어나 할 일이 있다는 건 프레이에게 살아있어야 하는 이유가 돼 주었다.
“사장님. 안경 아직도 안 고쳤네요?”
“네.”
서점이 문을 연 지도 2년이 다 되어 가다 보니, 나름의 단골들이 생겼다. 그래서 가끔 이런 사담도 나눴다. 물론 손님들이 말을 걸고 프레이가 짧게 대답하는 식이다.
“그때 말한 잡지는 언제 와요?”
거래처에서 보내온 메모를 뒤적이던 프레이가 말했다.
“내일쯤 올 것 같아요.”
“그럼 모레쯤 올게요. 제발 안경 좀 고쳐요. 사장님.”
프레이는 기계처럼 똑같은 말을 내뱉었다.
“나중에요.”
“나중에요.”
프레이의 대답을 이미 예상했는지 단골은 동시에 똑같은 말을 했다. 프레이는 조금 웃었고, 손님은 능청을 떨면서 서점의 문을 열었다.
“말로만 그러지 말고요. 모레 올게요.”
“안녕히 가세요.”
인사를 건네고 프레이는 휴대폰 액정에 떠오른 시계를 힐끔 쳐다봤다. 그의 서점에는 벽걸이 시계가 없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볼 때마다 중학교 때 페트릭을 몰래 훔쳐보던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프레이는 페트릭에 대한 마음을 천천히 정리하고 있었다. 느린 속도였지만, 아주 조금씩 마음은 빛을 잃고 있었다. 너무도 긴 시간 동안 소중히 가꿔온 마음이라 한순간에 잘라내지 못하는 것이 문제였으나, 누군가 말했듯 시간이 약이 될 날이 올 것이라고 프레이는 생각했다. 그래도 그날, 고백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은 후회를 곱씹는 얼굴은 이제 무덤덤해 보였다.
*
아기를 낳다 몸이 상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두 달에 한 번씩 오던 히트 사이클은 3개월, 5개월 이렇게 대중 없이 오고 있었다. 늘 주머니에 넣고 다니는 억제제를 빼면 프레이는 누가 봐도 베타로 같았다.
“프레이 비셔스 씨?”
“네.”
가게로 찾아온 우체부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우편물이 올 곳이라고는 아무 데도 없어서 조금 의아한 얼굴로 대답하자, 봉투를 건넨 우체부는 가게를 떠났다. 여전히 진도가 나가지 않는 책을 덮어두고 우편물을 가까이 살피던 프레이는 잊고 있었던 이름에 얼굴을 굳혔다.
<발신인: 페트릭 마일드리안.>
누가 질 나쁜 장난을 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가 이런 장난을 칠 수 있는지 생각했다. 그 계약서를 아는 사람이라고는 변호사와 당사자인 두 사람뿐이었다. 봉투를 열고 종이를 꺼내 들자 글자들이 춤을 추기 시작했다. 긴장한 얼굴로 글자를 조합해 읽으려 인상을 쓰던 프레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주 예전에 졸업한 고등학교의 동창회 초대장이었다. 동창회장을 새로 맡았는지는 몰라도 그저 발신인만 그의 이름으로 되어있는 것 같았다.
근데 내가 여기에 서점을 낸 건 어떻게 알았지.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마땅히 알릴 사람도 없었다. 프레이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란 남자와 더 엮이고 싶지 않았다. 잊을 만하다가도 불쑥 나타나는 그의 이름을 피하기 위해서는 이민이라도 가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쓸데없는 생각이지만 페트릭이 이곳으로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망상을 했다.
경멸하는 눈빛과 날카로운 말들이 프레이의 목을 졸랐다. 숨을 헐떡이며 프레이는 2년 동안 대부분의 시간을 보냈던 작은 공간을 둘러보았다. 이곳을 잠시 떠나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폭력적인 섹스가 끝나고 언제 그가 돌아올지 몰라서 설레면서도 벌벌 떨어야 했던 과거처럼 살기는 싫었다. 조금 흔들린 글씨로 이면지에 글을 쓰기 시작한 프레이의 얼굴은 지쳐 있었다.
프레이가 써 붙인 종이는 햇빛에 장시간 노출된 채 색이 바래있었다. 삐뚤삐뚤한 글자를 읽고 있는 남자는 구불구불하고 허름한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차림새였다.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휴업합니다.>
작게 써 붙인 종이를 내려다본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인상을 썼다.
“어디로 숨은 거야? 프레이.”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살벌했다.
*
프레이는 계약서의 내용을 어기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곳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탄산수 한 병만 주세요.”
카트를 끌며 주전부리를 파는 승무원에게 탄산수를 건네받은 프레이는 인상을 작게 찌푸렸다. 오렌지 향이 가미된 탄산수를 손에 들고 숨을 골랐다. 임신했을 때 그토록 먹고 싶어 하던 오렌지는 이제 향조차 맡고 싶지 않았다. 차가운 탄산수를 바닥에 내려두고 눈을 감았다.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기분이었다.
간소하게 꾸린 짐을 들고 기차역에 서 있는 프레이는 퇴근길인 듯 북적이는 인파 속으로 녹아들었다. 무표정한 사람들 속에서 프레이는 우습게도 조금 위안을 받았다. 다들 힘들어 보여서, 자신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못된 생각이 들었다. 남들의 고통 속에서 동질감과 위안을 얻는다는 걸 하늘에 계신 부모님이 아신다면 분명 슬퍼하실 일이었다. 하지만 프레이는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기분을 느꼈다.
내 집같이 느껴지는 싸구려 모텔의 퀴퀴한 냄새는 프레이에게 오랜만에 달콤한 상상을 하게 했다. 자고 일어나면 그동안 겪었던 일들이 다 꿈이 되는 상상을 하면서 프레이가 딱딱한 침대에 몸을 눕혔다. 여태껏 한 번도 울린 적 없는 휴대폰이 울리다가 이내 잠잠해졌다. 배터리가 다 된 모양이었다. 기껏해야 스팸 전화겠지. 속 편하게 생각한 프레이는 모처럼 수면제 없이 쏟아지는 잠이 반가워 눈을 감았다.
엄마, 아빠는 꿈에 언제 나와줄 거예요?
돌아가신 후로 한 번도 나타나지 않는 야속한 부모님이 그리워지는 밤이었다.
*
방음이 잘 안 되는 싸구려 합판으로 만든 모텔의 문이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이 흔들렸다.
“네.”
아마도 대실 시간이 다 돼서 모텔의 직원이 찾아온 것 같았다. 프레이는 잠금을 풀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마자 밀려드는 익숙한 페로몬에 당황하기도 전에 몸이 굳어버렸다. 문 앞에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서 있었다.
“찾았네. 내 동창.”
마치 동창이 남창처럼 들려서 고개를 푹 숙인 채로 프레이가 중얼댔다.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일단 안으로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시끄러운 소리에 복도를 내다보는 투숙객들의 시선이 한둘이 아니었다.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안으로 들였다.
“웬 남자랑 뒹굴고 있을 줄 알았더니.”
“무슨 일이야?”
아무도 없는 침대를 훑던 페트릭에게 프레이는 건조하기만 한 목소리로 다시 물었다. 그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아예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었다. 프레이는 생각보다 훨씬 태연하게 그를 대할 수 있었다.
“편지 못 봤어?”
“동창회 초대장이라면 봤어.”
프레이는 냉장고에 구비된 물병을 꺼내며 대답했다. 페트릭은 아무렇지 않게 자신에게 대답하고 있는 프레이를 보자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좋아 죽을 것 같은 눈을 하고서 쳐다볼 땐 언제고, 지금은 왜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쳐다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프레이가 낳은 아기로 걸레 같은 우성 오메가와의 약혼은 무사히 엎었지만, 문제는 몇 년 뒤 생기기 시작했다. 프레이가 낳은 손자가 퍽 마음에 들었는지 페트릭의 부모님은 아이를 낳았다는 프레이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프레이가 유학을 갔다고 둘러대던 페트릭은 2년쯤 지나자 부모님의 의심을 사고 있었다.
동창회 초대장에 첨부된 편지에는 뻔뻔하게도 추가금을 줄 테니 자신의 부모님과 만나 합의된 말을 해달라는 페트릭의 요구사항이 적혀 있었다. 난독증으로 동창회 초대장을 읽는 것만으로도 눈이 피곤한 프레이는 동봉된 편지 같은 건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모임이 열리는 장소를 알리는 내용이라 생각했고, 페트릭의 부탁을 빙자한 협박 편지는 그대로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지금은 소각장에서 활활 불타며 먼지로 변했을 편지의 잔해가 지구 한 바퀴를 돌고도 남을 시간이 흐른 뒤였다.
“우리 부모님이랑 만나줬으면 하는데.”
“누가?”
프레이는 물병 뚜껑을 비틀어 따며 물었다.
“누구긴. 너지.”
“내가 왜?”
물을 한 모금 마시고 프레이가 뚜껑을 닫았다. 프레이의 무표정한 얼굴이 낯설어서 페트릭은 잠시 말문이 막혔다. 얘가 왜 이래. 뭘 잘못 먹었나.
“할 말은 그게 다야?”
“프레이.”
그가 내뱉는 자신의 이름이 벅찼던 때를 기억한다. 하지만 프레이는 눈앞에 있는 남자, 페트릭 마일드리안을 더 이상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도 싫어하는 것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조금씩 시간이 지날수록 닳아 없어진 마음의 조각들이 사르륵 소리를 내며 마음속에 굴러다녔지만 더 그런 가루들에 상처를 입는 시기는 지났다. 프레이가 침대 옆에 놔두었던 작은 캐리어를 들고 몸을 돌렸을 때, 페트릭이 프레이의 어깨를 붙잡았다.
“잠깐만. 말 다 안 끝났어.”
“나는 할 말 끝났어. 나 먼저 나가볼게.”
차가운 목소리에 페트릭은 어깨를 붙잡았던 손을 내렸다. 달칵하고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나서야 페트릭은 정신을 차렸다. 왜 저러는 거지 갑자기. 갑자기 모든 관심이 사라진 것처럼 구는 프레이가 짜증 났다. 몇 년 전 병실에서 그가 잘 지내라고 마지막으로 건넨 말에는 질척거린다고 비웃었던 주제에 갑자기 모든 감정이 사라진 사람처럼 구는 프레이가 낯설었다.
자신이 먼저 편지를 보내면 남겨둔 연락처로 금방 전화가 와서 하겠다고 매달릴 줄 알았는데 프레이는 일주일이 지나도 연락 하나 없었다. 몸소 찾아간 허름한 서점은 닫혀있었고, 휴대폰 위치추적으로 찾아온 모텔에서 프레이는 페트릭을 잡상인 취급했다. 기분이 왜 더럽지.
발로 침대를 걷어차자 뭔가가 데굴데굴 구르는 소리가 들렸다. 힐끔 쳐다본 바닥엔 탄산수병이 굴러다녔다. 오렌지 그림이 그려진 병을 물끄러미 보던 페트릭은 문득, 프레이가 임신했을 때 방에 혼자 앉아서 오렌지를 까먹던 날을 떠올렸다. 축 처진 마른 등과 느리게 오렌지 껍질을 까는 뒷모습이 자꾸 떠올라서 페트릭은 인상을 썼다.
미쳤나 진짜. 그때는 프레이가 자신의 관심을 받으려고 쇼를 한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돌이켜 보니 왜 그의 마른 등이 외로워 보이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
생각보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을 마주해도 떨리지 않았다. 그를 다시 보게 되면, 상처만 주는 그 사람을 다시 좋아하기라도 할까 봐 매일 밤이 두려웠는데. 다 부질없는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들어서 프레이는 허무하게 웃었다.
중학교 1학년 당시부터 키워온 소중한 감정은 이제는 아주 티끌만 한 먼지처럼 산화해버렸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첫사랑의 종말이었다.
계약서대로 프레이는 그의 아기에게 관심을 가지거나 권리 같은 걸 주장할 생각은 하나도 없었고, 그의 본가가 있는 곳에서 반경 500km 떨어진 곳에서 사는 것도 오히려 반가웠다. 아니, 차라리 다른 나라로 떠나고 싶었다. 어린 시절 두 개쯤 배워두었던 외국어는 시간이 많이 흘러 희미해졌지만, 다시 천천히 배운다면 아예 못 쓸 수준도 아닐 것이다.
다른 나라로 갈까.
프레이는 불쑥 떠오른 충동을 곱씹으며 자신이 지내는 도시로 돌아가고 있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고고한 자존심을 가진 자였다. 그래서 무일푼의 빈털터리에 싸구려 티셔츠를 입은 고등학교 동창에 불과한 거지가 자신을 좋아한다고 고백하자 자신의 자존심에 금이 간 사람처럼 굴었다.
“어서 오세요.”
“다시 여셨네요!”
프레이와 똑같아 보일 정도로 둥글둥글한 안경을 쓰고 수업이 없을 때마다 서점에 와 죽치고 앉아 책을 읽는 학생은 며칠 만에 다시 문을 연 서점에 들렀다.
“네.”
무미건조한 주인의 대답을 하는 주인은 평소와 똑같아 보여서 학생은 익숙함을 느꼈다. 이 서점은 아는 사람들만의 아지트 같은 느낌을 주었다. 처음 이 서점을 발견한 건 우연이었다. 다른 도시에서 대학을 진학한 탓에 지리를 잘 몰랐던 그는 골목을 헤매다 프레이의 서점을 발견했다.
‘어. 무슨 서점이 이런 데 있어.’
작은 입간판도 하나 없이 작은 간판에는 ‘평범한 서점’이라고 적혀 있었다. 평범한 서점이라니…. 엄청난 작명 센스라고 생각했다. 길을 묻기 위해 들어간 것을 시작으로 그는 단골이 되었다.
“사장님.”
학생이 다가와 부스럭거리며 종이봉투를 내밀었다. 프레이가 봉투와 손님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보자, 학생은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조금 수줍은 얼굴을 했다.
“별 건 아니고요. 쿠키 같은 거예요. 책도 잘 안 사는데 죽치고 있기 미안해서요.”
“괜찮은데요.”
“알고 있는데 그래도 제 마음이에요.”
프레이는 아직 앳돼 보이는 남자를 쳐다보며 작게 웃었다.
“잘… 먹을게요.”
“사장님 웃는 건 처음 보네. 아무튼, 저 오늘은 수업이 하나 있어서 나중에 다시 올게요.”
“안녕히 가세요.”
쿠키 전달이 목적이었는지 남자는 서점을 떠났다. 서점 문 앞에는 이 서점과 어울리지 않는 분위기의 잘생긴 남자가 어마어마한 표정을 하고서 서 있었다.
뭐, 뭐야? 당황하는 것도 잠시, 수업시간에 늦지 않으려면 달려야 했고, 학생은 이내 골목을 달리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딸랑거리는 종소리가 나면 문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무미건조하게 건네오는 프레이의 인사가 들린다.
“프레이.”
자신을 불러오는 목소리는 꿈에서 늘 자신에게 욕설과 조롱들을 내뱉던 자신의 첫사랑의 것이었다.
“찾는 책이라도?”
서점에 왔으니, 찾는 책이 있나 싶어서 태연하게 되묻는 눈동자는 2년 전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꿈을 꾸듯 반짝거리는 눈동자가 아니었다. 사무적으로 서점을 찾아온 손님을 대하는 완벽한 타인의 눈동자였다.
“얘기 좀 해.”
“기억 안 나? 나는 할 얘기가 없다고 했어.”
“뭐 잘못 먹었어?”
계산대를 벗어나는 프레이의 손목을 움켜잡던 페트릭은 앙상하게 말라 뼈만 느껴지는 손목과 무표정한 얼굴에 놀라야 했다.
“손, 놔줄래. 아파.”
“그, 그러니까 나랑 얘기 좀 하자고.”
당황해 말을 조금 더듬는 페트릭에게 프레이가 작게 한숨을 쉬었다.
“무슨 이야기. 너의 부모님을 내가 왜 만나야 하는지는 잘 모르겠는데, 만나서 어떻게 하라고?”
“외국에 유학 중인 걸로 둘러댔으니까 조금 더 공부하고 오겠다고. 그렇게만 말해주면…….”
페트릭의 말에 프레이는 헛웃음을 흘렸다. 고작, 이런 남자를 그동안 몰래 좋아했었구나. 생각하니 자신이 너무 비참해졌다. 언제는 돈 받고 조용히 사라지라고 하더니 지금 와서 필요해지니 다시 찾아온 남자가 우스웠다.
“마일드리안.”
페트릭의 성을 부르는 프레이는 어이없는 웃음을 띤 얼굴로 서 있었다.
“난 돈을 받고 아기를 낳아줬고, 너는 아기를 이용했고. 거래는 끝났잖아.”
프레이의 입에서 객관적인 사실들이 흘러나왔다. 정말 눈앞의 이 남자가 자신을 좋아했던 2년 전 그 사람과 동일인물이라는 사실이 맞는지 궁금해졌다. 페트릭은 이상한 감정에 휩싸였다. 뭐야. 프레이 비셔스. 내가 남창처럼 대해도 좋아서 죽겠다는 눈을 했었잖아. 너는 나를 좋아하잖아. 아까 그 어린 새끼랑 눈이라도 맞은 거야?
페트릭은 프레이에게 홀딱 반한 얼굴을 하고서 수줍게 싸구려 모조지에 포장된 봉투를 건네는 놈에게 웃어주는 프레이를 떠올렸다. 걸레 같은 프레이… 여기서 다른 새끼랑 붙어먹으려는 거야? 기르던 강아지가 꼬리를 흔들며 주인을 반기는 것이 귀찮아서 발로 밀어내며 짜증을 내다가 문득 다른 사람에게 꼬리를 흔들어주는 것을 본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까 그 새끼랑 떡이라도 쳤어?”
“마일드리안.”
프레이는 여전히 배려라고는 찾아볼 수 없고 난폭하기만 한 자신의 전 첫사랑을 쳐다봤다.
“좀… 추하다. 너.”
그 한마디에 페트릭은 몸이 뻣뻣하게 굳는 것 같았다.
*
그날 이후로 페트릭은 하루도 빠짐없이 프레이의 서점에 찾아와 프레이를 괴롭혔다.
“어서 오세요.”
“이거 먹어.”
포장된 케이크는 누가 봐도 고급 베이커리의 파티시에가 만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프레이는 가만히 상자를 응시했다.
“그만 와달라고 부탁했잖아.”
“난 네 대답을 들어야겠어.”
무슨 대답인지는 뻔했다. 그의 부모님 앞에서 죽고 못 사는 연인인 척, 연기하고 공부에 더 집중하고 싶으니 유학 간 나라에서 당분간 돌아오지 못할 거라고. 말 같지도 않은 거짓말을 해야 해달라는 요구였다.
“프레이. 돈은 섭섭하지 않게 줄 거니까…….”
“하아…….”
프레이의 희미한 한숨에 페트릭은 몸을 움찔했다.
“네가 곤란한 건 알겠는데, 그냥 아무나 데려다가 시키면 될 일 아니야?”
“그건…….”
말문이 막혀서 페트릭은 입술을 달싹거릴 뿐이었다. 왜 자신은 프레이 비셔스에게 집착하는 걸까. 단순히 완전범죄를 기획하기 위해서? 부모님이 혹시 모르니 유전자 검사라도 하자고 할까 봐? 페트릭은 심각한 표정으로 서 있었고, 프레이는 천천히 책들을 제자리에 꽂아 넣고 있었다.
“그만 나가줄래.”
“…….”
일단 생각할 시간이 페트릭에게 필요했다. 서점을 빠져나가는 페트릭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뭐야. 내가 설마 저 걸레 같은 프레이에 관심이 있는 것 같잖아. 페트릭은 욕설을 삼켰다. 머리가 조금, 이상해진 것 같았다.
*
페트릭과 다시 만난 이후 프레이는 처방받은 수면제를 먹어도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약을 처방해준 의사에게 증상을 호소하는 프레이의 얼굴은 푸석푸석했다. 의사는 더 독한 성분의 약을 처방했다. 프레이가 약에 의존하기 시작하자 점점 희미한 환각이 보이기 시작했다. 환각이 형체를 입고 있는 사람은 늘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었다.
프레이의 잔잔했던 일상생활이 조금씩 삐걱거리기 시작했다. 서점을 다시 닫아야 할 것 같았다. 프레이는 언제인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예전에 한 번 붙여두었던 휴업 안내 문구가 적힌 종이를 찾았다. 환각이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글자들은 더 읽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렀다. 활자들이 춤을 추는 동안, 어렵게 찾아낸 종이에는 얼룩이 져 있었다.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이 없어서 프레이는 서랍 속에서 테이프를 꺼내며 고개를 들었다.
“프레이.”
또 환각이었다. 프레이에게 다정하게 웃어주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오로지 프레이의 환각 속에서만 존재하는 신기루였다. 몇 번이고 꿈에 그리던 광경이었지만 이제 그의 미소를 갈구하는 프레이는 사라졌다. 익숙하게 그의 몸을 통과하자 연기처럼 흩어지는 그의 잔상을 돌아보지 않은 채로 유리문에 종이를 붙이는 손길은 무덤덤했다. 몇 번이고 울렁거리는 글자들을 읽으려 애를 써야 했다.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휴업합니다.>
언제 문을 다시 열 수 있을지는 프레이 본인도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속을 쓰리게 하는 약을 가득 먹고 자고 싶었다. 프레이가 아직 어린 시절 잠이 안 와 칭얼거리면, 그의 부모님은 늘 작은 등을 토닥거려주면서 자장가를 불러주곤 했다. 이제는 희미해져서 멜로디 몇 마디만을 기억하는 게 전부인 자장가가 프레이의 귓가에 들려오고 있었다.
“보고 싶어…….”
부모님이 그리워져서 프레이는 서점의 문을 잠그고 집으로 향했다. 삭막한 세간살이가 사람 사는 집 같지 않았으나 프레이에게는 더없이 안정감을 주는 곳이었다. 저렴한 임대료에 걸맞은 싸구려 벽지는 프레이가 6년 동안 지냈던 싸구려 모텔의 비품실을 연상시켰다. 프레이는 침대에 앉아 과거를 회상했다. 온갖 잡동사니가 가득한 좁은 비품실에서 외롭고 우울했지만 살고 싶은 의지는 있던 과거. 부모님의 유언장이 발견되었을 때, 프레이는 울어야 했다.
사랑하는 우리 아들 프레이. 우리 아들은 행복하게 살길 신께 기도한다.
미안하다는 내용도, 용서하라는 내용도 없이 그냥 저 두 마디가 다였다. 정말 행복하게 살 수는 있는 건지 날마다 의심하면서도 프레이는 부모님의 말씀을 믿고 있었다. 유언장의 내용을 곱씹던 프레이는 약을 입에 털어 넣은 다음 몸을 눕혔다. 쓰린 속보다, 아직도 눈앞에서 자신을 쳐다보며 다정하게 웃는 페트릭의 얼굴이 끔찍했다.
진짜 미쳐가나 봐요. 엄마, 아빠.
프레이는 눈을 감았다.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여유가 없다. 오늘 꿈에는 부모님이 나올지 기대하는 얼굴은 외롭고 지쳐 보였다.
*
고요한 저택을 달리던 프레이는 묘한 데자뷔를 느끼며 방문을 열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문 너머로 목을 매단 부모님의 시체가 보였다. 흔들거리는 몸을 따라 프레이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대로 방을 뛰쳐나와 끝없는 복도를 달리는 프레이가 뒤를 돌아보자, 여전히 축 늘어진 시체가 뒤에 있었다. 이렇게 나와 달란 말이 아니었어요.
프레이는 울면서 눈을 떴다. 헛구역질이 나고 눈앞이 흐려져서 죽을 것 같았다. 침대 위에 앉아 숨만 내쉬며 꿈이라고 거듭 되뇌는 사이 ‘똑똑-’ 하고 노크 소리가 들렸다. 2년 동안 자신의 집을 찾아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환청이 계속되면서 프레이는 울먹였다.
“미치겠네…….”
차라리 미쳐버리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동안 문은 여전히 울리고 있었다. 문 너머로 또 다른 환청이 들려오자 프레이는 고개를 들었다.
“프레이, 문 열어. 나야. 페트릭.”
정말 끔찍한 환청이었다.
*
페트릭은 프레이가 사는 도시의 호텔 스위트룸에 앉아있었다. 복잡한 감정을 정리하려 샤워를 하는 도중에도 욕실에서 울음을 참으면서 자신의 성기를 조여 대는 예전 프레이의 모습이 떠올랐다. 우는 얼굴을 보며 박는 취미가 없다고 하자, 프레이 비셔스는 그 후로 섹스를 할 때 아무리 거칠게 굴어도 울지 않았다. 얼굴과 함께 유일하게 마음에 드는 구석이어서 그가 임신할 때까지 제법 막 대했던 건 사실이었다.
‘돈도 줬는데 섹스할 때 구멍 눈치를 봐야 돼?’
언젠가 조금 살살 해달라고 애원하는 프레이에게 내뱉었던 말이 떠올랐다. 프레이 비셔스는 돈을 주고 산 구멍이었다. 그것도 자신의 아기를 낳을. 물론 중, 고등학교를 같이 나온 동창이었으나, 어디까지나 과거의 이야기였다. 필요에 의해 계약을 맺은 피고용인과 고용주. 그게 프레이 비셔스와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관계였다.
근데 이 더러운 기분은 뭐지.
샤워를 마치고 가운을 입고 나온 페트릭은 언젠가 침대에 앉아 사랑에 빠진 눈동자를 하고서 자신을 올려다보던 프레이의 얼굴을 생각했다. 물이 빠진 연보라색 머리카락과 검은색에 가까운 보라색 눈동자가 반짝이며 자신에게 말했다.
‘페트릭.’
‘응?’
‘…사실, 널 좋아해.’
불쾌하기 짝이 없던 동창의 고백. 섹스하다 불현듯 스친 예감에 프레이를 떠보려 한 달 정도 잘해주자 덥석 고백해 오는 오메가를 페트릭은 비웃었다.
‘그래도 너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페, 페트릭.’
프레이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던 건 그때가 마지막이었다는 생각을 했다. 기억을 뒤적거려도 프레이 비셔스는 늘 자신을 성이나 풀 네임으로 불렀다. 이름으로만 불렀던 건 그 어설프기 짝이 없던 고백을 하던 그날뿐이었다.
“뭐야. 진짜 걔를 좋아하기라도 하는 건가.”
페트릭은 시계를 쳐다보며 혀를 찼다. 거의 몇 시간 동안 프레이의 생각만 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서 그는 옷을 챙겨 입고 재킷을 손에 들었다. 아무래도 생각만으로는 확신할 수 없어서 직접 얼굴이라도 봐야 할 것 같았다. 여전히 썩은 동태 눈깔을 하고 있는지, 잠을 못 자는지, 눈 밑이 검게 변해서 다 죽어가는 얼굴을 하고 있는지. 프레이 비셔스의 얼굴이 보고 싶었다.
<개인 사정으로 당분간 휴업합니다.>
도착한 그의 낡아빠진 서점에서 얼마 전과 똑같은 경험을 하며 발길을 돌린 페트릭은 프레이의 집에 도착했다. 당연히 합법적인 루트가 아닌 곳에서 알아낸 그의 집은 세게 발로 차면 다 가루가 될 것 같은 문짝이 달린 집이었다.
준 돈은 다 어디다 쓰고 이런 데 살아.
불쾌함을 밀어두고 문을 두드렸다. 손에 검댕이 묻어나올 것 같아서 인상을 썼지만, 프레이의 얼굴을 보고 싶은 마음이 더 강렬했다. 한참을 기다렸음에도 문 안에선 인기척만 날 뿐이었다. 문이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아 다시 문을 두드리길 수차례. 페트릭의 입술이 열렸다.
“프레이, 문 열어. 나야. 페트릭.”
이렇게 했는데도 안 나온다 이거야?
페트릭은 문을 두드리며 문이 열리길 기다렸다. 한참을 지나도 열리지 않는 문이 마치 프레이의 마음 같아 보인다는 생각이 들어서 인상을 썼다.
하다 하다 별 말 같지도 않은 생각을…….
페트릭은 발걸음을 돌렸다. 망할 프레이 비셔스. 왜 자꾸 생각나게 구는 거야. 그가 호텔로 돌아가는 와중에도 페트릭의 머릿속에는 볼품없는 안경을 끼고 늘 울음을 참느라 슬퍼 보이는 얼굴을 한 프레이의 얼굴만이 가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