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화 (1/24)

1.

프레이 비셔스의 별명은 ‘거절 못 하는 프레이’였다.

곤란한 부탁을 해도 고개를 끄덕이면서 들어주기 때문이었다. 유복한 사업가 부부의 외동아들로 태어난 프레이는 사립 중학교에 진학했다. 그곳에서 프레이는 자신의 첫사랑을 만났다.

페트릭 마일드리안. 그가 프레이의 옆이 되었을 때, 프레이는 첫 몽정을 했다. 페트릭에게 말을 거는 것도 부끄러워서 프레이는 수업시간이 얼마나 남았는지 궁리하는 척, 시계를 힐끔거렸다. 그러면서 자신의 옆자리에 앉아있는 페트릭을 몰래 훔쳐봤다. 소심한 짝사랑의 시작이었다.

‘시계, 되게 많이 보네.’

툭 하고 던져진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한마디에 프레이는 뻣뻣하게 몸을 굳혔다. 마치 자신이 그를 좋아하고 있다는 사실을 들킨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날 이후 프레이는 다시 시계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또 만났네. 프레이.’

‘응.’

고등학교 입학식 날이었다. 페트릭이 자신의 이름으로 불러줘서 기쁜데도 프레이는 저 한마디를 내뱉는 것이 고작이었다. 프레이는 그날 설레는 마음으로 밤새 잠을 설쳐야 했다. 고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프레이는 열성 오메가로 발현했고 페트릭은 우성 알파로 발현했다. 스치듯 그의 형질에 대해 전해 들었을 때 프레이는 그와 너무나 잘 어울리는 형질이라고 생각했다.

불행하게도 고등학교에 다니는 3년 동안 프레이는 그와 다른 반이었다. 프레이는 복도를 오가며 종종 페트릭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해야만 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프레이의 짝사랑은 점점 크기를 더해갔다. 프레이의 마음속에서 점점 부피를 더해가는 페트릭을 향한 감정들은 프레이 비셔스라는 인간을 구성하는 하나의 필수요소가 되어 버렸다.

‘어, 엄마… 아빠…….’

유독 고요한 아침이었다. 평소와 똑같은 집이었지만, 알 수 없는 불안함을 느낀 프레이는 뛰어가듯 도착한 거실에서 목을 매단 자신의 부모님의 시체 앞에서 구역질했다. 하루아침에 부모님의 사업실패로 인해 생긴 거액의 빚, 그리고 부모님의 시체가 프레이의 몫이 되었다. 도저히 빚을 갚을 수가 없어서 상속 포기 절차를 밟은 프레이는 몇 벌의 옷이 들어있는 낡은 트렁크와 함께 길거리를 떠돌아야 했다.

*

“오랜만이네.”

“응.”

프레이는 과거 회상을 접으며 긴장으로 땀이 배어 나온 손을 꾹 말아 쥐었다. 지금은 그런 과거를 곱씹으며 자기연민에 빠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앞에 고등학교 졸업 후 6년 만에 만난 자신의 첫사랑이 서 있었고, 자신은 낡아빠진 싸구려 모텔의 카운터에 서 있다. 며칠 전, 우연히 길거리에서 다시 만난 페트릭은 프레이의 얼굴을 용케도 알아보고서 아는 척을 해왔었다.

‘프레이 비셔스?’

‘…마일드리안.’

이름으로 부를 만한 사이도 아니어서 프레이는 잠시 고민하다 페트릭의 성을 입에 담았다. 페트릭의 뒤에 서 있던 그의 비서는 프레이를 노골적인 시선으로 훑어 내렸다. 물이 다 빠진 걸레 같은 노란색 옷을 입고, 깨진 안경을 낀 남자와 최고급 맞춤 정장을 입은 자신의 상사가 무슨 관계인지 탐색하는 눈빛이 적나라했다.

‘졸업하고 어떻게 지내?’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나의 근황을 묻는다는 사실이 꿈같아서 프레이는 습관처럼 주먹을 쥐었다. 여린 손바닥을 파고든 손톱이 따끔한 통증을 일게 했다. 그제야 프레이는 현실임을 인정했다.

‘체이닝 스트리트 쪽에 있는 모텔 카운터에서 일해.’

자신의 현실을 첫사랑에게 고백하는 건 비참했다. 하지만 프레이는 거짓말을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무덤덤한 대답에 페트릭은 고개를 끄덕이며 만나서 반가웠다며 악수를 청했다. 손을 잡을까 말까 짧게 고민하는 사이, 페트릭의 뒤에 서 있던 비서는 손목시계를 힐끔 쳐다보며 프레이를 노려봤다.

시간이 없다는 이야기겠지.

프레이는 빠르게 자신에게 내민 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나도 만나서 반가웠다는 말을 남기고 그에게서 도망치듯 먼저 자리를 떴다. 첫사랑과의 재회는 그렇게 끝이 났다고 생각했다.

“여긴, 무슨 일이야?”

어렵게 운을 뗀 프레이는 모텔의 내부를 무덤덤한 시선으로 훑었다. 빗물이 새서 노랗게 얼룩진 싸구려 벽지, 촌스럽고 요란한 인테리어의 모텔과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정말 어울리지 않는 조합이었다. 호화로운 고급 호텔과 어울리는 그가 이곳에 찾아온 이유가 가늠이 되지 않았다.

“오랜만에 만난 사이에 대뜸 이런 말 하기 좀 그렇긴 한데.”

“응.”

프레이는 침을 삼키며 이어질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괜찮으면 너, 내 아기 낳아볼래?”

그의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아서 대답도 하지 못한 채, 프레이는 눈을 느리게 깜박이며 생각했다. 내가 무슨 소리를 들은 거야?

“뭐?”

“돈은 넉넉하게 줄게.”

얼굴을 빤히 쳐다보는 짙고 푸른 눈동자를 올려다보자 훅하고 현실감이 밀려들었다. 지금, 6년 만에 다시 만난 첫사랑은 돈을 준다고 하며 대뜸 아기를 낳아달라고 하고 있었다.

*

뻑뻑한 눈을 깜빡이며 프레이는 자신 앞에 놓인 서류를 보고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단어들의 나열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며 조항들을 읽는 얼굴은 조금 피곤해 보였다. 피고용인은 고용인의 아기를 낳는 조건으로 계약금을 받고, 고용인의 아기를 임신, 출산한다. 피고용인은 관련된 사실을 영원히 함구해야 한다.

고용인은 물론 페트릭 마일드리안, 피고용인은 프레이 비셔스였다. 건조하기만 한 내용이 인쇄된 종이를 물끄러미 프레이가 보고 있는 사이, 페트릭은 입을 열었다.

“너도 잘 알겠지만, 우리는 보통 정략결혼을 하잖아.”

페트릭은 프레이의 앞으로 개설된 계좌의 잔액은 거의 없는 수준이고, 그가 사는 곳은 오래 머물면 온갖 성병들이 전염될 것 같아 보이는 비위생적인 싸구려 모텔의 비품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페트릭 마일드리안은 프레이와 자신을 ‘우리’라 지칭했다.

프레이는 그 말에 수긍하지 않았다. 그와 자신이 ‘우리’라고 지칭될 수 있었던 건, 6년 전이 끝이었다. 화목한 가족, 부유한 생활, 즐거운 학교생활과 설레던 첫사랑에 대한 기억들. 과거를 잠시 회상하던 프레이는 그저 그가 왜 자신에게 이런 제안을 하는지 알고 싶었다.

“그런데?”

의아함이 묻어나는 목소리에 페트릭은 눈앞에 앉아있는 동창의 별명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냈다.

‘거절 못 하는 프레이.’

온갖 귀찮은 부탁을 해도 싫은 소리 없이 해주던 소문 난 호구.

회의 참석을 위해 도착한 지방 도시의 길거리에서 우연히 만난 동창에게 대뜸 아기를 낳아달라는 부탁을 한 건, 페트릭의 충동으로 일어난 일이었다. 우성 알파인 그는 사생활이 난잡하다고 소문이 자자하지만, 집안만큼은 무시 못 하는 우성 오메가와 정략결혼을 추진하는 부모님 때문에 골치가 아팠다. 어떻게 해야 약혼을 깨트릴 수 있을지 고민하는 페트릭의 앞에 프레이 비셔스가 나타났다.

물이 군데군데 빠져있는 낡아빠진 노란색 티셔츠를 입고, 금이 간 안경을 대충 얼굴에 걸치고 있는 고등학교 동창. 졸업 후 정기적으로 모이는 고등학교 동창 중에 연락이 안 되는 사람은 프레이 비셔스뿐이었다. 페트릭은 누군가 술자리에서 프레이의 부모님이 자살했고, 회사가 망해버렸다는 이야기를 안주 삼아 꺼냈을 때도 그저 그래서 나오지 않았구나 하고 잊어버렸을 뿐이었다.

“약혼자가 소문난 걸레라서.”

질 낮은 단어에 프레이는 인상을 찌푸렸다. 우아하고 단정해 보이는 그의 입에서 나온 단어라고는 믿기지 않아서 입을 다물었다.

“약혼을 파기할 만한 핑계를 찾고 있었거든. 고등학교 때부터 만난 오메가한테 애가 생겨서 약혼은 못 할 것 같습니다. 어때? 어설프긴 해도 약혼을 깰 이유로는 그럭저럭 쓸 만하지 않아?”

프레이는 자신의 눈앞에 앉아있는 자신의 첫사랑을 쳐다봤다. 여전히 잘생겼고,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고 있는 페트릭은 마치 새로 발견한 장난감을 보는 듯한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저 프레이는 그가 자신을 보고 웃는다는 사실이 좋았다. 프레이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계속 쳐다보고 있으면 바보처럼 얼굴이 붉어질 것 같았다. 테이블 위에는 그의 사인이 되어있는 계약서가 올려져 있고, 자신의 서명을 기다리는 빈칸이 유독 눈에 띄었다. 저 빈칸에 내가 사인하면 마일드리안의 아기를 낳을 수 있어. 프레이는 계약서의 내용을 상기하며 자신과 페트릭의 유전자를 가진 아기의 모습을 상상했다.

어쩌면… 아기를 낳고 나서도 가끔 서로 얼굴을 볼 수 있지 않을까?

불쑥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프레이는 여전히 망설였다. 타인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는 성격이었고, 심지어 부탁을 해오고 있는 상대는 프레이가 중학교 때부터 짝사랑해온, 아직도 좋아하고 있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었다. 작은 입술이 달싹거렸다.

“난, 열성 오메간데. 그래도 괜찮아?”

그가 자신의 형질을 착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마음에 되묻는 프레이의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페트릭은 어깨를 으쓱이며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대답했다.

“뭐 그런 게 상관있겠어? 그래서, 프레이. 사인할 거야?”

“너만 괜찮다면… 할게.”

프레이는 무언가에 홀린 것처럼, 앞에 놓인 펜을 집어 들었다. 눈이 별로 좋지 않은지 상체를 가득 숙여 또박또박 이름을 적는 머리를 내려다보면서 페트릭은 그의 별명을 다시 상기했다.

‘뭐야. 싱겁게.’

*

병원에 들러 정밀 신체검사를 받은 뒤에야 페트릭의 집에 살게 된 프레이는 같은 공간에 페트릭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설레기 시작했다. 열성 오메가의 임신 확률은 높은 수준이 아니었다. 조금이라도 임신이 될 확률을 높이려면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에 알파는 노팅까지 해야 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워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상식을 곱씹던 프레이의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다. 아직 누군가와 성적인 접촉을 한 적이 없는 프레이는 자신의 첫 경험의 상대가 첫사랑이란 사실에 종종 숨 쉬는 것도 잊었다.

페트릭의 부모는 페트릭의 예상보다 더 빠른 속도로 약혼을 성사시키려 했다. 정말 몇 명에게 박혔는지 셀 수 없다는 소문의 오메가에게 제 좆을 박아야 한다니. 고고한 자존심의 페트릭에게 있어서 더없이 끔찍한 일이었다. 그가 급하게 알아본 바에 따르면 프레이 비셔스는 거지같이 살았을 지는 몰랐으나 적어도 몸을 팔지는 않았다.

그 걸레와 약혼하느니 걔가 낫겠지.

그렇게 생각한 페트릭은 자신이 건넨 계약서에 프레이가 사인하고 사흘도 지나지 않은 오늘, 섹스하자고 했다.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을 앞당기는 약물을 손에 든 그가 프레이가 기다리고 있는 방으로 향했다.

“프레이.”

“마일드리안.”

뻣뻣하게 굳어있는 몸이 침대 위에 앉아있는 걸 보며 페트릭은 속으로 조소했다.

목석도 쟤보단 부드럽겠네.

비웃음을 얼굴에 걸치고 페트릭이 프레이에게 다가갔다. 프레이는 자신에게 다가오는 첫사랑의 손에 들려 있는 주사기를 보며 인위적으로 맞이하게 될 히트 사이클을 상상했다. 하지만 이내 코앞까지 다가온 페트릭의 페로몬으로 눈앞이 흐려졌다. 예고도 없이 팔뚝에 따끔한 통증이 느껴져 작은 입술 사이로 희미한 신음이 흘렀다.

“흣.”

온몸이 뻐근해져 숨을 헐떡거리는 프레이는 자신의 팔뚝을 문지르며 자신을 내려다보는 페트릭의 시선을 회피했다. 억지로 히트 사이클을 앞당기는 약이 순할 리 없다. 눈 깜짝할 사이 몸에 퍼진 약물은 끔찍한 두통과 함께 히트 사이클을 가져왔다.

“토할 것 같아?”

퍽 상냥한 말투였다. 하지만 페트릭에게서 새어 나오는 페로몬으로 인해 프레이는 숨이 막혀 끅끅거렸다. 대답도 못하고 헐떡거리는 열성 오메가의 몸에선 화답이라도 하듯 달짝지근한 페로몬이 질질 샜다.

“페로몬, 코튼이야?”

“…흐, 으응.”

헐떡거리면서도 고분고분 대답하는 얼굴이 봐줄 만했다. 페트릭은 가운을 벗기 시작했다. 적절한 운동으로 만들어진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는 반쯤 발기한 성기가 꺼떡거렸다. 페트릭은 침대 위에 걸터앉아 있는 고등학교 동창의 몸을 반쯤 뒤로 눕힌 뒤, 제 성기를 입에 물려주었다.

“우선 좀, 빨아봐.”

“우읍.”

페트릭이 거칠게 프레이의 머리채를 잡고 입안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입안에 들어온 살덩어리가 페트릭의 성기라고 생각하자 정신이 아찔해진 프레이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안 빨고 뭐 하냐는 얼굴을 한 페트릭이 허리를 흔들었다.

“펠라는 처음 해봐?”

“응.”

혼이라도 나는 것 같아 고개를 끄덕이는 프레이의 얼굴이 뻣뻣하게 굳었다.

“아쉽네. 그럼 다리 벌려.”

프레이가 어설프게 물고 있던 성기가 빠져나갔다. 숨을 몰아쉬던 프레이에게 페트릭은 단호하게 명령했다. 우성 알파의 페로몬에 급성으로 중독된 오메가의 몸이 마구잡이로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몸을 가누지도 못하는 오메가가 수치심을 견뎌내며 다리를 벌리자, 다리 사이로 반쯤 발기한 성기가 보였다.

“박히다가 먼저 싸버리면 흥이 안 나거든.”

페트릭은 침대 옆으로 걸어가더니 서랍에서 쓸 만한 장난감을 꺼냈다. 사정 방지 링을 집어 들고 온 페트릭이 침대 위로 올라왔을 때, 프레이는 다리를 오므리고 있었다.

“뭐 해. 다리 안 벌리고.”

“그, 그건 어디에 쓸 거야?”

“어디에 쓸 것 같아?”

후들거리는 다리를 능숙하게 잡아 벌리고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은 페트릭이 웃었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가 프레이의 성기에 링을 끼웠을 때, 프레이는 울고 있었다. 첫사랑에게 안긴다는 설렘도 잠시였다. 남창을 대하는 듯한 태도에 프레이는 뒤늦게 자신의 처지를 직시했다. 남창처럼 돈을 받고, 계약으로 그의 아기를 낳아야 하는 피고용인. 돈을 받고 몸을 파는 남창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남창이었다. 뒤늦게 후회가 밀려들었다. 내가 다 망쳐버린 거야. 내가 다 잘못한 거야.

“밑에 질척거리네.”

“흐, 흐윽.”

훌쩍거리는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정돈되지 않은 지저분한 연보라색 머리카락이 뺨에 들러붙어 있는 프레이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페트릭은 인상을 썼다. 질질 짜고 있는 얼굴을 보고 있자니 강간이라도 하는 기분이었다.

“우니까 내가 너, 강간하는 것 같잖아.”

“…흐… 미안, 미안해.”

프레이가 눈물을 허겁지겁 닦아내며 사과했다. 작은 손으로 열심히 눈물을 닦아냈지만 여전히 서러워서 계속 눈물이 질질 흘렀다. 그 꼴을 지켜보던 페트릭은 혀를 차더니 프레이의 엉덩이를 툭하고 쳤다. 우는 얼굴을 보며 좆을 쑤시기에는 그의 기분이 별로였다. 좋아서 우는 것도 아니고. 뭐야?

“엎드려. 질질 짜는 얼굴 보면서 박는 취미 없으니까.”

차갑게 쏘아붙이는 목소리에 프레이의 몸이 움찔거렸다. 움찔한 몸과는 별개로 알파의 고압적인 페로몬에 반응한 프레이의 구멍은 애액으로 축축했다. 구멍을 반사적으로 움찔거리며 프레이가 엉거주춤 엎드리자, 다리를 더 벌리라는 듯 페트릭이 하얀 허벅지를 우악스럽게 붙잡았다. 결국, 다리를 잔뜩 벌린 채로 엎드린 자세가 된 프레이는 부끄러워 죽을 것 같았다. 색이 연한 구멍이 움찔거리는 광경이 적나라했다. 그 흔한 전희도, 예고도 없이 페트릭은 성기부터 쑤셔 넣었다. 훌쩍거리던 울음이 고통스러운 신음으로 변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악! 흐…….”

배려 없이 다짜고짜 밀어 넣은 탓에 구멍이 찢어졌는지 추삽질을 할 때마다 페트릭의 성기에 피가 묻어 나왔다. 뒤늦게 프레이가 동정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페트릭은 허리를 더 거칠게 움직이며 성기를 조이는 내벽을 들쑤실 뿐이었다.

동정이든 뭐든 무슨 상관이야. 돈도 줬고 다 본인이 승낙한 일인데.

상대방의 몸을 돈으로 사버린 남자와 그런 남자를 짝사랑하는 남자의 첫날밤은 그렇게 시작되었다.

*

프레이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낯선 곳에서 느껴지던 이물감 때문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들로 축축하다 못해 질퍽거리던 침대 시트는 오늘 새벽과는 다르게 보송보송했다. 프레이는 형편없이 떨리는 손으로 엉덩이 사이를 더듬었다. 손가락 끝에 차가운 금속이 만져지자 눈앞이 하얗게 변했다. 뒤늦은 후회가 작은 얼굴을 야금야금 갉아 먹었다. 기껏 싸준 정액이 흐르면 아깝다며 애널 스토퍼를 자신의 아래에 거칠게 쑤셔 넣던 첫사랑의 얼굴이 떠올라서, 숨이 턱 막혔다.

내가 내 주제도 모르고 좋아해서 그래. 분명히 나는 지금 벌 받는 거야. 남창 취급을 받아도 싸. 다 내가 잘못한 거야. 그런 거야.

“흐으…….”

자책하는 프레이의 굳게 다물린 입술 사이로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피가 났는지 아래는 여전히 따가웠고, 배 속은 더부룩했으며 구멍에서 느껴지는 이물감 때문에 허리가 덜덜 떨렸다. 한참을 울고 기절하듯 프레이가 잠들었지만 페트릭은 나타나지 않았다. 프레이가 방치된 지 3일째 되던 날 밤, 페트릭은 만취한 상태로 다시 프레이의 방을 찾았다.

“벗어.”

아직 찢어진 아래가 아물지도 않았지만 그런 건 페트릭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늦은 새벽, 잠에 취해있는 몽롱한 눈을 비비던 프레이에게 위협적인 페로몬이 협박하듯 훅 밀려들었다.

“아학…….”

열성 오메가에게는 숨 쉬기도 버거운 양의 페로몬이었다. 프레이가 목을 움켜쥐고 숨을 끅끅거리자 혀를 차는 목소리는 냉랭했다.

“쯧. 빌빌대지 마.”

아주 조금이지만 누그러진 페로몬이 고마워서, 프레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자란 숨을 몰아쉬는 동안에도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 눈물이 창백한 뺨을 적셨다. 서랍을 뒤적이던 페트릭은 침대 위로 링을 집어 던지며 중얼거렸다.

“앞으로 나랑 하기 전에 이거부터 해. 난 오메가가 먼저 싸는 거 싫어해.”

“…끄흐.”

아직도 숨을 헐떡거리느라 빌빌거리는 프레이의 머리채를 움켜쥔 그가 속삭였다.

“알아들었냐고.”

“응… 으응. 알았어. 할게…….”

머리카락은 뽑힐 것 같고, 숨이 막힐 것 같은 와중에도 눈앞에 다가온 페트릭의 얼굴이 너무 반가웠다. 눈도 깜빡이지 않고 프레이는 첫사랑의 얼굴을 허겁지겁 눈에 담았다. 며칠 만에 보는 얼굴은 여전히 수려했다. 날카로운 시선에 눈치를 보면서 시트에 덩그러니 놓인 링을 주워들고 제 성기에 링을 끼우는 순간이 끔찍했다.

프레이는 그가 끼워두었던 기억을 더듬어 어설픈 손놀림으로 링을 끼웠다. 그리고 다시 눈치를 보며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마치 칭찬이라도 해달라는 것 같은 행동에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페트릭이 웃었다.

“잘했어.”

장난감을 물어온 강아지를 칭찬하는 말투였다. 그의 칭찬에 프레이의 얼굴은 금세 달아올랐다. 다정함을 구걸하는 얼굴을 향해 페트릭이 경고했다.

“오늘도 울 거면 엎드려. 내가 오늘 기분이 안 좋거든.”

“…안 울게.”

프레이는 개처럼 엎드린 자세로 페트릭의 좆을 품기 싫었다. 몸짓이 다정하지 않아도 그의 얼굴을 마주 보며 안기고 싶은 욕심이 들었다.

“그래.”

술 냄새가 나는 얼굴이 가까워지는 순간, 프레이는 당황한 나머지 몸을 굳혔다. 다급하게 패트릭의 혀가 입안으로 침범했다. 독한 술 냄새와 뒤섞인 알파의 페로몬 때문에 시야가 어지러워서 프레이는 눈을 감았다. 앙상한 허벅지가 벌어졌고, 여전히 예고 없는 허릿짓이 시작됐다.

“흐윽.”

그 흔한 애무는 전무한 잠자리였다. 애무 비슷한 것도 없었다. 프레이의 유일한 도피처는 속이 타버릴 것같이 독한 술 냄새가 나는 페트릭의 입술뿐이었다. 축축한 혀가 맞닿을 때면 프레이는 정말 그와 섹스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할 수 있었다. 구멍을 들쑤시는 움직임이 점점 빨라지기 시작하자, 프레이는 페트릭의 목 뒤로 손을 감았다. 그러자 페트릭은 제 목을 감싸고 있던 작은 손을 뿌리쳤다.

“내 몸에 손대지 마.”

“아… 미안해. 싫어하는 줄 몰, 몰랐어.”

뿌리쳐진 손이 얼얼했다. 그저 손이 거절당한 것뿐인데 존재 자체가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됐으니까 움직여.”

“아, 아윽. 응… 미안.”

페트릭은 제 말에 허리를 어설프게 흔드는 프레이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얘는 왜 눈만 마주쳐도 얼굴을 붉히지?

불쑥 고개를 들이민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생각해보면 프레이 비셔스는 자신을 바라볼 때마다 얼굴을 붉혔던 것 같았다. 마치 자신을 좋아하는 것처럼. 좋아하는 감정이야 온전히 개인의 것이다. 하지만 그 감정이 향하고 있는 대상이 자신이라고 생각하자 갑자기 불쾌해졌다. 다 망한 집안 출신 고아. 그것도 가진 건 몸뚱이 하나밖에 없는 불우한 고등학교 동창이 자신을 좋아한다는 가정에 다다랐다. 그 순간,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고고한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그렇게 만만해 보였나.

불쾌해진 마음을 대변하는 듯, 페트릭의 몸짓이 격렬해지는 사이 프레이는 금방이라도 터질 것 같은 울음을 참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숨이 모자라서 시야는 흐릿했다. 또 노팅을 하려는 듯 점점 부피를 더하는 페트릭의 성기에 아물고 있던 상처가 다시 터졌는지 쓰라린 통증만이 선명했다.

“아, 아파…….”

엉망진창이 된 얼굴로 울먹거리는 프레이의 안에 노팅 하던 페트릭은 정액을 들이붓고 있었다. 양이 너무 많아 마치 안에 소변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흘리지 마.”

“응…….”

프레이는 위압적인 목소리에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었다. 정액으로 출렁거릴 것만 같은 내부를 들쑤시며 한참이나 후희를 즐기던 페트릭이 성기를 뽑아냈다. 결국 구멍이 다시 찢어져서 뽑아낸 살 기둥은 피가 섞인 정액으로 번들거렸다. 뻐끔거리는 구멍 사이로 정액이 질질 흐르고 있었다. 서랍을 열어 며칠 전 프레이의 구멍에 꽂았던 플러그보다 더 큰 사이즈의 플러그를 찾아낸 페트릭이 프레이의 눈앞에 던졌다.

“자. 꽂아.”

“…안, 안 들어갈 것 같…….”

“무슨 소리야. 네 구멍 완전 너덜너덜한데.”

비웃음이 섞인 페트릭의 말에 프레이의 억지로 참고 있던 눈물이 터졌다.

“왜. 구멍이 너덜너덜하다고 하니까 서러워?”

조롱이 가득한 말이었지만 뒤통수를 쓰다듬는 손길만은 다정했다. 프레이는 손길에 머리를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귀엽네.”

페트릭은 어쩌면 자신의 가정이 아주 헛소리는 아닐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알았으니까 넣으라고.”

“…흣. 으응.”

머뭇거리는 손으로 집어 든 플러그의 무게에 프레이가 놀란 나머지 눈을 크게 뜨자, 눈가에 고여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우는 걸 싫어한다던 그의 말이 떠올랐다. 다급해 보이는 손놀림으로 눈물을 훔쳐낸 프레이가 끔찍하게 아프기만 한 구멍에 머뭇거리며 플러그를 가져가던 순간이었다.

“어느 세월에 넣을 거야?”

“아, 아악!”

손잡이 부분을 손으로 힘껏 밀자 벌름대고 있던 구멍으로 플러그가 쑥 밀려 들어갔다. 정액과 애액으로 젖은 내부는 수월하게 집어삼켰지만 찢어진 구멍은 얼얼한 통증만이 가득했다. 엉덩이 사이에 튀어나온 플러그의 손잡이에는 손가락을 걸 수 있는 동그란 고리가 있었다. 아마 고리 때문에 제대로 앉아있기 어려울 것이다. 눈물에 젖어 축축하기만 한 뺨을 엄지로 쓸며 눈물을 닦아주는 페트릭이 달콤하게 속삭였다.

“내가 빼라고 할 때까지, 하는 거야. 알았어?”

“흐, 으읏. 응…….”

프레이는 통증이 느껴지는 아래를 조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난폭하게 구는 그가 미워지다가도 이렇게 다정한 손길을 받으면 프레이는 다정함을 갈구하는 얼굴을 했다. 페트릭은 아직도 성성하게 서 있는 성기와 훌쩍이는 작은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봤다.

“좀 깨끗하게 빨아봐.”

“흐, 응.”

프레이의 성기는 아직도 링 때문에 사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아플 텐데도 프레이는 풀린 눈을 한 채로 자신의 피가 섞인 정액으로 번들거리는 페트릭의 성기를 혀로 핥았다.

“밑에도 핥아야지.”

마치 어릴 때 기르던 개처럼 헥헥거리면서 자신의 좆을 핥는 프레이가 하찮아서 페트릭이 작게 웃었다.

“프레이. 그렇게 좋아?”

자신의 머리 위로 떨어진 그의 말에 프레이는 자신의 마음이 들킨 것 같아 눈앞이 아찔했다. 마음의 동요가 그대로 드러난 눈동자를 쳐다보던 페트릭은 직감했다. 프레이 비셔스는 자신을 좋아한다. 페트릭은 불쾌한 표정을 숨기며 그의 본심을 알아내기 위해 머리를 굴렸다.

정말 이 거지 동창이 자신을 좋아하면 어떻게 해야 하지?

페트릭이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프레이는 열심히 페트릭의 성기와 불알을 핥았다. 자신의 피가 섞인 페트릭의 정액 맛이 끔찍할 뿐이었다.

*

힘들어서 그만하고 싶을 때쯤. 프레이는 페트릭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초기에는 관계를 피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반가웠다. 이제 더 이상 울음을 삼켜가며 페트릭의 성기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된다는 점은 프레이에게 큰 위안이 되었다.

“먹을래?”

프레이는 자신에게 과일을 건네는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낯설기만 했다. 포크를 쥐고 있는 손을 가만히 응시하자 페트릭의 잘 정리된 손톱이 보였다. 손끝까지 정리하는 성격을 가진 페트릭에게 자신의 존재는 새하얀 천 조각을 물들인 지저분한 얼룩 같았다. 지저분하던 프레이의 머리카락은 헤어 디자이너의 손에 보기 좋게 정돈되어 있었지만, 외형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페트릭에게 이상한 소문이라도 날까 봐 프레이는 방 밖으로는 나가지도 않았다.

“내가 먹을게.”

달그락거리는 소리를 내며 프레이가 포크를 집어 들었다. 사과를 포크로 찍어 입가로 가져가려 하는 순간, 손에 들린 포크를 조심스럽게 낚아챈 페트릭은 억지로 입에 사과를 물리고 있었다. 페트릭은 변덕이 심한 남자였다. 그가 변덕스럽고 오만한 남자라는 사실을 프레이는 뒤늦게 깨달았다. 그런 남자를 짝사랑하는 건 괴로운 일이다. 하지만 오랜 기간 소중히 가꿔온 마음을 버리기엔 프레이의 마음은 너무 커져버린 상태였다. 프레이는 페트릭이 자신을 다정하게 대할 때마다 싹트는 기대를 일부러 발로 밟았다.

착각하지 마. 프레이 비셔스. 마일드리안이 왜 날 좋아하겠어. 그럴 리가 없잖아.

“프레이, 안 먹어?”

“먹을 거야.”

똑같은 과육이 더 달게 느껴지는 건, 그가 먹여줬기 때문일지도 몰랐다. 사과를 씹으면서 프레이는 아무리 밟아도 꾸역꾸역 고개를 드는 가정을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얼굴을 마주할 수록 그를 보는 것이 힘들었다. 정말 이러다간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고백해버릴 것 같았다. 프레이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충동을 억누를 때마다 페트릭은 뭔가를 탐색하는 얼굴로 프레이를 빤히 쳐다보면서 이렇게 물었다.

‘나한테 할 말 없어?’

마치 고백을 기다리는 사춘기 청소년처럼. 기대마저 깃들어있는 푸른 눈을 보면 프레이는 충동적으로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오랜 짝사랑을 고백하고 싶어졌다.

정말 어쩌면… 페트릭도 날…….

그때마다 입술을 달싹이다가도 밑바닥을 치는 자존감은 자신을 비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누가 널 좋아한다고? 프레이 비셔스. 네 주제 파악이나 해. 정신차려.

‘아니. 없는데.’

페트릭은 프레이가 이렇게 대답할 때마다 웃으며 매번 똑같은 말을 덧붙였다.

‘기다리고 있으니까, 말하고 싶으면 그때 말해줘.’

무슨 말을 기다리는 거야? 정말 내가 자신을 좋아하는 걸 알고 있는 걸까? 프레이는 그때마다 고백하고 싶어서 굳게 다잡은 마음이 흔들렸다. 하지만 자신의 마음이 거절당할까 봐 겁이 났다. 고백은 무슨. 나 같은 게.

*

임신은 벌써 5개월에 접어들었다. 종종 가벼운 페팅을 하긴 했어도 페트릭은 프레이의 몸에 흥미가 떨어졌는지 삽입 섹스를 더 요구하지 않았다. 아직도 배 속에 있는지 종종 의심스러운 그의 아기는 종종 이상한 걸 먹고 싶게 만들었다. 그때마다 페트릭을 귀찮게 만들기 싫어서, 늘 참기만 하는 프레이는 침대에 기대어 잠깐 조는 사이 꿈을 꾸고 있었다.

‘프레이. 널 좋아해.’

꿈이란 걸 알았지만 숨이 막혔다. 다정한 목소리로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자신에게 고백하는 꿈이라니. 잠에서 깨고 난 후에도 여전히 생생한 꿈에 프레이는 멍하게 앉아있었다.

너무 생생하잖아. 괜히 설레게…….

프레이가 생생한 꿈을 기억하기 위해 한참 동안 곱씹고 있는 사이 방문이 열렸다.

“잘 잤어?”

다정한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졌다. 아직도 잠에 취해 있는 프레이의 눈동자가 마구잡이로 흔들렸다. 페트릭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던 프레이는 꿈속에서 고백하던 그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얼굴에 당황했다. 꿈의 여운에 벗어나지 못한 몽롱한 상태로 프레이는 결국 내뱉어선 안 되는, 끝까지 숨겨야만 했던 자신의 속마음을 고백했다.

“페트릭.”

“응?”

“…나 사실, 너 좋아해.”

그 말에 페트릭은 환하게 웃으며 눈꼬리를 가득 휘었다. 찰나의 순간, 프레이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어쩌면… 꿈에서처럼 페트릭도 날 좋아하는 건 아닐까?

헛된 기대가 다시 싹트려 하는 순간, 웃고 있던 페트릭의 얼굴이 순식간에 사나워졌다.

“그래도 너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줄 알았더니.”

“…페, 페트릭.”

프레이는 겨우 두 번 입에 담았을 뿐인 그의 이름이 불쑥 두려워졌다.

“너도 별 볼 일 없는 오메가였네.”

그의 말 한마디에 한동안 잠잠했던 또 하나의 자신이 숨이 넘어갈 정도로 자신을 비웃기 시작했다. 내가 뭐랬어? 주제 파악 잘하라고 그랬지. 머저리 같은 프레이 비셔스. 꼴 좋다. 그래도 프레이는 합리화를 하려 애썼다. 그, 그래도… 내가 싫다고는 안 했잖아. 괜찮아. 괜찮으니까…….

“너 같은 거지를 누가 좋아할 것 같아? 프레이. 정신 차려야지. 돈 받고 임신한 건데 설마 진짜 연애라도 하는 줄 알았어?”

억지로 끌어안으려던 마음들이 다시 바람에 흩날렸다. 붙잡을 수도 없이 산산조각 난 마음은 이어 붙일 수도 없었다. 유리가 깨져도 유리 조각은 남듯, 프레이의 마음속에도 페트릭을 향한 설렘, 행복한 기억 같은 것이 먼지처럼 엉겨 붙어 있었다. 덩그러니 홀로 남겨진 몸을 웅크렸다.

내가 잘못한 거야. 주제 파악을 왜 못했지. 왜 그랬어. 멍청한 프레이 비셔스. 괜찮아…. 괜찮아…….

홀로 되뇌는 얼굴은 엉망진창이었다.

*

어설프기만 한 첫 고백은 악몽으로 돌아왔다. 프레이는 페트릭이 자신의 뺨을 치는 꿈을 꿨다. 어떤 날에는 그가 자신의 얼굴에 침을 뱉는 꿈도 꿨다. 너무도 생생한 나머지 잠에서 깬 프레이가 자신의 뺨을 더듬어볼 정도였다. 반복되는 악몽 중에서 페트릭이 나도 좋아한다고, 네가 그 말을 해주길 기다렸다고 말해주는 꿈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날이 지날수록 프레이는 잠드는 순간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부모님의 자살 이후 생긴 우울증과 불면증은 점점 심해질 뿐이었다. 임신 후 생겨버린 입덧 때문에 제대로 먹지 못하는 상황이 계속되자, 의사가 페트릭에게 보고하기에 이르렀다.

“너 지금 나한테 시위해?”

“…아니야.”

거의 한 달 만에 나타난 페트릭은 프레이의 얼굴을 힐끔 쳐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왜. 남편 흉내라도 내줄까? 먹고 싶은 거 사다주면 돼?”

“그런 거 아니라고 했잖아…….”

지쳐 보이는 목소리가 듣기 싫어서 페트릭은 두 달만 기다리면 아기를 낳을, 한때는 자신의 고등학교 동창이었으나 지금은 빈털터리가 되어 자신의 아기를 임신한 남자를 쳐다봤다.

“너도 좋다고 사인해놓고 왜 이제 와서 강간당한 새끼처럼 굴어?”

“…….”

프레이는 아직도 그의 날카로운 말에 따끔따끔 통증이 이는 가슴을 진정시키면서 흐느끼지 않기 위해 입술을 앙다물었다. 뚜벅거리는 구둣발 소리가 들렸다. 페트릭이 고개를 푹 숙이고 있는 프레이의 턱을 잡아 올렸다.

“아니면 왜 이래? 애새끼랑 같이 굶어 죽기라도 하게?”

“입맛이 없어서 그랬어. 잘 먹을 테니까 이 손 놔.”

프레이가 용기를 내 턱을 쥐고 있는 손을 떼내자, 머리 위로 어이없어 하는 웃음소리가 떨어져 내렸다.

나 좋아한다고 할 땐 언제고, 이제 와서 내숭 떠는 거야 뭐야?

페트릭은 조금 핼쑥해진 얼굴을 쳐다보며 비웃음을 지었다. 아직도 자신을 보면 귓가가 조금 붉어지는 얼굴을 보니, 자신의 얼굴이라도 한 번 더 보려고 일부러 벌이는 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기 낳을 때까지는 네 같잖은 쇼에 장단 맞춰줄 테니까, 뒤질 생각 같은 건 안 하는 게 좋을 거야. 우리 부모님 진짜 믿기 시작했거든.”

프레이는 자신이 아무리 부정해도 그가 믿어줄 것 같지 않아서 그냥 입을 다물었다. 배 속의 아기가 몸을 움직이는지 배가 조금 욱신거렸다. 프레이는 이를 살짝 악물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오랜만에 보는 페트릭의 얼굴에 여전히 프레이의 심장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거의 조건반사 같은 수준의 반응에 프레이는 체념해버렸다.

“그래서, 프레이. 뭐가 먹고 싶은데?”

거지에게 적선하는 듯한 말투였다. 페트릭은 작게 고개를 가로젓는 작은 머리통을 가만히 쳐다봤다. 짜증이 역력한 얼굴로 그가 천천히 되물었다.

“나는 뭐가 먹고 싶냐고 물었어.”

프레이는 위협적으로 몸에 스며드는 알파의 페로몬에 손을 달달 떨었다. 볼품없이 떨리는 손을 꼭 움켜쥔 프레이는 늘 먹고 싶다고 생각만 하던 과일의 이름을 내뱉었다.

“오렌지… 먹고 싶어.”

울음을 삼키며 프레이가 대답했다. 비 맞은 개처럼 몸을 덜덜 떨기 시작하자, 페트릭은 그제야 자신의 페로몬을 갈무리했다. 몸을 돌린 페트릭은 어딘가로 전화를 걸며 작게 중얼거렸다.

“여러 가지 하네. 진짜.”

프레이는 그의 조롱을 들으며 눈을 감았다. 할 수만 있다면 계약서에 사인하기 전의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만이 간절했다. 그가 방을 나간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오렌지가 든 바구니는 고용인의 손에 들려 왔다. ‘까 드릴까요?’ 하고 묻는 고용인에게 괜찮다고 대답한 프레이는 바구니가 너무 무거워 한참이나 문 앞에 서 있었다. 조용한 방 안에 혼자 앉아 프레이는 작은 커터로 천천히 오렌지 껍질을 깠다. 우울한 속도 모르고 오렌지의 향기는 상큼하기만 했다. 한참이나 오렌지를 까던 프레이는 손끝에 느껴지는 따끔한 통증에 눈을 깜빡였다. 멍한 시선 끝에는 피가 새어 나오기 시작한 손가락이 있었다. 두리번거리며 티슈를 찾던 프레이가 비틀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섹스를 하고 나면 늘 몸에는 이런저런 상처가 생겼다. 언제부턴가 방 안에 놓여 있던 구급상자를 찾으려 몸을 돌렸을 때였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이 문 옆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빤히 쳐다보는 차가운 시선에 프레이는 몸을 굳혔다.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알 수 없어 눈치를 보며 눈을 내리깐 프레이에게 그가 물었다.

“뭐 해?”

“껍질… 까고 있었어.”

손을 천천히 말아쥐며 상처를 숨긴 프레이가 대답했다. 계속 안 까고 뭐 하냐는 듯 턱짓으로 바구니를 가리키는 페트릭의 행동에 결국 프레이는 다시 의자에 앉았다. 피가 방울져 손가락을 타고 흘러내렸다. 몰래 옷에 피를 닦은 뒤, 내려놓았던 오렌지를 들었다. 그러자 등 뒤에서 그가 방을 빠져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멍하게 껍질이 반쯤 까진 오렌지를 쳐다보던 프레이는 과육 하나를 떼어내 입에 밀어 넣었다. 피가 묻어 있는 오렌지는 달기는커녕 쓰기만 했다.

오렌지가 써서… 그래서 눈물이 나는 거야.

자기합리화를 하는 프레이는 그러면서도 눈가를 매만졌다. 울면 안 돼. 우는 거 마일드리안이 질색하잖아. 울지 마. 제발. 부탁이니까. 자신에게 부탁하는 프레이의 짓밟힌 마음 위로 눈치 없게도 페트릭을 좋아하는 마음이 다시 싹트고 있었다. 프레이는 아직도 페트릭을 좋아하는 자신이 싫어서 죽고 싶어졌다.

*

출산을 앞두고 병원에 입원한 프레이의 눈앞에 불쑥 하얀 종이가 나타났다. 의아한 표정으로 가만히 종이에 인쇄된 글자들의 조합을 읽고 있는 프레이의 안색이 창백했다. 시력이 안 좋아서 인상을 찌푸리며 느리게 읽는 동안 건조한 눈알이 금방이라도 빠질 것 같았다.

어려운 단어들이 나열되어 있었으나 요약하자면, 피고용인 프레이 비셔스는 출산 이후 계약서에 관련된 모든 내용을 함구하고 불문에 부쳐야 할 것을 동의하며, 태어난 아기에 대한 어떤 권리도 주장하지 말아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출산 후 몸이 회복되는 대로 고용인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본가가 위치한 세프리 주 근처 반경 500km 내에 있는 주에는 거주할 수 없다는 것에 동의한다는 글자 아래에 위치한 페트릭의 서명란에는 이미 그의 사인이 되어있었다.

“서명하세요.”

사무적인 목소리와 함께 고급 만년필이 건네졌다. 프레이는 변호사가 내민 만년필을 붙잡았다. 눈이 시려서 인상을 살짝 찌푸리자, 변호사는 서명란을 손가락으로 짚으며 서명을 재촉했다. 사인하기 위해 상체를 앞으로 조금 숙이자 부를 대로 불러있는 배가 압박되는 바람에 숨이 가빠졌다. 후들거리는 손으로 휘갈기듯 사인한 프레이가 펜을 떼기 무섭게 변호사는 인사도 없이 서류와 볼펜을 낚아채어 병실을 빠져나갔다. 프레이는 홀로 남은 병실에서 숨을 색색 내뱉으며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진통이 시작되고 있었다.

*

프레이가 마취에 깨어나 정신을 차렸을 땐, 해가 져 버린 늦은 저녁이었다. 상태를 체크하러 병실에 들어온 간호사는 프레이에게 아들이라며 환하게 웃었다. 아기를 한 번쯤은 보고 싶어서 프레이가 머뭇거리다 간호사에게 물었다.

“혹시 아기, 제가 볼 수 있어요?”

“그럼요. 잠시만요.”

프레이는 간호사의 긍정에 희미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켜 앉았다. 하얗게 질린 얼굴은 아이의 외모를 상상하느라 조금 붉어졌다. 프레이가 아기를 상상하며 기다리는 병실 안으로 아이를 안아 든 간호사 대신 냉랭한 얼굴의 페트릭이 들어왔다.

“네가 아기를 왜 봐. 프레이.”

“…….”

프레이는 그가 화가 났다는 걸 깨달았다. 입을 다문 채로 대답이 없는 프레이의 얼굴은 누가 봐도 수척해서 페트릭은 인상을 썼다. 평생 써도 남을 돈도 줬겠다, 섹스도 해줬고 동정도 떼줬는데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프레이 비셔스.

이러다가 조만간 결혼이라도 하자고 덤빌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페트릭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계약서대로 서로 좋게 끝내자. 이러니저러니 해도 우리 고등학교 동창이잖아. 프레이.”

“…응.”

끝까지 처연한 척하는 모습이 꼴 보기 싫어서 페트릭은 프레이의 어깨를 툭툭 치며 몸을 돌렸다. 프레이는 그가 이대로 나가면 다시는 보지 못할 거란 직감이 들었다. 페트릭의 등 뒤로 다 죽어가는 듯이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 왔다.

“몸 낫는 대로 떠날 테니까… 잘 지내.”

“너도.”

페트릭은 문을 닫고 나오면서 조소했다. 끝까지 질척거리고 있네.

*

프레이는 퇴원한 뒤, 제일 먼저 항공권을 예매해야 했다. 감시가 목적인 듯, 병원에서부터 경호를 위장한 감시를 하는 남자가 불편했다. 페트릭 마일드리안의 본가에서 500km 떨어진 주는 몇 개 되지 않았다.

프레이는 가장 빨리 출발하는 항공권을 예매했다. 제법 추운 지방이었지만 더 이상 페트릭에게 이상한 오해를 받기도 싫었다. 오히려 그의 요구대로 멀리 떨어져서 죽은 듯이 살고 싶다. 그가 자신을 다시 찾을 일도 없겠지만, 잠적하는 것이 그의 말대로 서로에게 좋을 것 같았다.

“같이 가세요?”

게이트의 앞에서 프레이는 자신의 뒤에 서 있는 남자에게 물었다.

“아닙니다. 공항까지만 함께하라는 지시가 있었습니다.”

“수고하셨어요.”

친절히 자신의 신분증을 돌려주고 공항까지 운전해 준 남자에게 프레이가 인사했다. 무표정한 얼굴의 경호원은 고개만 살짝 끄덕이며 마네킹처럼 서 있었다. 프레이는 그렇게 떠났다.

*

공항 밖에 나오자 날씨는 프레이의 걱정과는 달리 조금 쌀쌀할 뿐이었다. 프레이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춥다고 소문이 나서 조금 걱정했는데. 프레이는 공항 밖에 놓인 의자에 앉아서 휴대폰을 켰다. 충동적으로 도착한 도시에 대해 아는 거라곤 세계적인 상을 받은 소설가가 태어난 곳이라는 것뿐이었다.

우선 모텔에라도 가야겠다 싶어서 주머니에 손을 넣고 대기 중이던 택시에 올라탔다. 어디로 가냐는 말에 조금 전, 검색으로 알게 된 이곳의 번화가를 말하며 시트에 몸을 기댔다. 잠깐 잠이 들었는지 자신을 깨우는 기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요금을 지불하고 낯선 번화가에 내린 프레이는 모텔이 있을 법한 곳을 찾아다녔다. 요란한 네온사인의 절반은 불이 나가서 제 기능을 다 하지 못하는 모텔에 들어선 프레이는 익숙한 편안함을 느꼈다. 비가 새서 누렇게 물든 벽지와 촌스러운 인테리어. 심드렁한 프런트의 직원. 마치 페트릭 마일드리안과 마주치기 전의 평화롭고 우울한 자신의 일상이 시작되고 끝나던 곳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모텔에 들어선 프레이는 불쑥 떠오르는 그의 이름에 얼굴을 찡그렸다.

“대실? 투숙?”

성의 없는 직원의 목소리는 프레이가 울고 있는 것엔 관심도 없다는 듯 심드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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