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는 먼 곳에서 운다
여기가 어디더라. 무슨 이름의 나이트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가라고 해서 왔고, 싸우라 해서 싸웠다. 죽이라곤 했던가? 기억나지 않지만 죽였다. 죽인 것 같다.
흐릿한 감각을 다잡고 발밑에서 벌어지는 수라장을 목도한다. 선혈을 뒤집어쓴 채 서로를 물어뜯고 있는 아귀들. 이곳에서 생과 사는 당장의 확인이 불가능한 명제다. 마치 ‘슈뢰딩거의 고양이’와 같다. 그것은 싸움이 완전히 끝나고, 이곳에 빛이 깃들어, 모두의 윤곽이 잘 발린 뼈처럼 명징하게 드러날 때 결정될 문제다.
“씨팔…! 뒤지라 고마!”
한 덩어리로 뒤엉킨 사내들이 소금에 씻겨지는 미꾸라지처럼 몸부림을 친다. 구둣발의 뒤축이 핏물을 이리저리 가르며 수 겹의 원호를 그린다. 살육의 올무에서 누구 하나 이탈하지 못하도록, 서로의 손을 꽉 잡고 추는 춤. 죽음의 원무(圓舞)다. 한번 발을 들이면 누구도 거기서 벗어날 수 없다. 죽이려는 의지와 살려는 의지에 겹겹이 짓눌려, 그들은 서서히 압사당한다. 죽인다고 믿으며 죽어간다. 나는 그것을 보고 있다.
죽이려는 의지도.
살려는 의지도 없이.
싸움은 정전, 혹은 종전 상태에 접어들었다. 나는 잠시 긴장을 누그러트리고, 어둠과 피비린내가 뒤엉킨 전장을 바라보았다. 몸을 가누고 있는 인영은 몇 발견되지 않았다. 대부분의 인영은 어둠의 발밑에 쌓여 있었다. 곧 불태워질 땔감들처럼. 혹은 곧 갈려 나갈 미꾸라지들처럼.
긴장이 느슨해지자, 조금 전까지 수족처럼 부리던 장검의 무게가 새삼 묵직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을 내려놓을 생각은 하지 못했다. 문득 칼이 내 몸에서 자라난 불필요한 살덩이처럼 느껴졌다. 칼이란 이름의 여섯 번째 손가락. 너로 인해 자라난, 너로 인해 살을 찢고 나온, 은색의 뼈. 뼈가 되어버린 흉기.
식칼 한 자루를 쥐고 공장에 숨어든 그 소년처럼, 나는 나이트클럽 한복판에서 숨을 골랐다. 겨울바람 소리만 윙윙 울리던 그 허름한 공장과 달리 이곳은 멍들고 찢어진 소리로 충만하다. 그러나 그 소리마저 사위어가고 있었다. 나는 칼끝을 질질 끌면서 걸었다. 예리한 첨단이 엉겨 붙은 핏물의 껍질을 찢고, 물렁한 속을 끄집어 내놓는다. 이미 충분히 마셨음에도 여전히 조갈이 난다는 듯 새롭게 목을 축인다.
생각해보면 참 어린 나이에 처음 칼을 쥐었다. 나는 칼을 쥐기 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을 제 몸처럼 휘두르는 법을. 절대 손에서 놓치지 않는 법을. 배우지 않고도 알 수 있었다. 마치 신경이라도 연결되어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네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때에는 언제나, 칼을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불이야!”
익숙한 냄새가 난다고 생각했더니, 파열음과 함께 등 뒤로 아뜩한 열기가 쏟아졌다. 이제 막 태어나 울부짖는 빛의 덩어리가 제게 집중된 눈동자들을 사납게 물들인다. 난무하는 칼춤에도 겁먹지 않던 사내들의 얼굴에 일순 공포가 번진다. 출구가 봉쇄되다시피 한 지하 공간, 적들과 남겨진 상황에서 불까지 피해야 하다니. 그야말로 사면초가였다.
불길은 기세가 열렬했다. 누군가 일부러 기름을 붓고 불을 붙인 모양이었다. 불길이 날름대는 자리마다 어둠이 벗겨지며 유혈 낭자한 현장이 그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나는 걸리적거리는 살덩이들을 치우며 불 쪽으로 다가갔다. 내 사랑하는 ‘불의 기억’이 담요처럼 어깨를 감싸고, 침대처럼 지친 육신을 불러들였다. 기묘한 안락감. 기묘한 흥분.
불이 내게 주었던.
나는 한참을 불 앞에 서 있었다. 아니, 한참이란 건 착각이었을 것이다. 시공의 감각이 붕괴된 상황이었다. 불길은 그 붕괴의 현장으로 사정없이 들이닥쳤고, 여전히 악랄하게 아름다웠다. 내 부모, 내 가족, 내 유년기를 살라 먹은 그 불길처럼. 그리고.
불길이 세운 철창 너머로 한 소년의 눈동자가, 불길보다 더 위험하고 아름다운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었다. 검고 긴 속눈썹이 드리워진, 눈을 깜빡이는 것만으로 내 잠든 심장을 두드리던, 소년의 얼굴이 찬연한 불꽃에 의해 한 획씩 되살아나고 있었다. 나는 쓰디쓴 미소를 지으며 소년의 이름을 불렀다.
상윤아.
꿈에서도 볼 수 없는 얼굴이었다. 나는 불에 바짝 다가서며 네 쪽으로 손을 뻗었다. 행여 네가 흩어져 버리기라도 할까 봐 감히 닿을 수는 없었다. 나는 네 유년의 유령 앞에서 주먹을 움켜쥐었다. 너 대신 허공을 움켜쥐었다. 빈 주먹이 더없이 초라했다. 나는 독을 뱉는 심정으로 다시 한번 네 이름을 불렀다.
이상윤.
그러자 너는 고개를 저으며 오른쪽으로 곁눈을 주었다. 네 시선을 뒤따르니, 젖먹던 힘까지 쥐어 짜내며 나를 향해 기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모르는 얼굴이었다. 눈이 마주치자 남자의 얼굴이 사색으로 뒤덮였다. 그럼에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제 발로 죽음을 찾아가겠단 의지가 전해져 왔다. 나는 무심코 칼을 고쳐 쥐었다. 잠에서 깨어난 듯 칼자루가 손 안에서 꿈틀거렸다. 나는 답을 알면서도 물었다.
어떡할까.
너는 죽여도 괜찮다는 듯 천천히, 눈을 깜빡여주었다. 꼭 다물린 입술 역시 같은 명령을 담고 있었다. 나는 네가 시키는 대로 했다. 그건 가장 쉬운 일이었다.
칼을 거두고 다시 불길을 보았을 때 너는 없었다. ‘나도 너와 같다.’고 ‘너하고 똑같다.’고 말해줄 너는 이미 없었다. 나는 불길에 몸을 던지고 싶은 욕망을 간신히 억누르고 발길을 돌렸다. 울컥울컥 쏟아지는 빛으로, 나이트클럽의 참상이 적나라하게 보였다. 고양이가 든 상자의 뚜껑이 열리고, 생과 사는 비로소 결정되었다. 어느 쪽으로도 결정되지 않은 것은 나뿐이었다.
나는 산 자의 그것도, 망자의 그것도 아닌 걸음으로 시체 사이를 걸으며 핏물을 튀겼다. 그러면서 이곳의 이름을 다시 한번 기억해보려 했으나 실패했다. 그저 싸우라 해서 싸웠고, 이기고 돌아오라 했으니 돌아갈 뿐이었다. 명령을 따르는 건 쉬운 일이었다. 적어도 방향도 목적도 모두 잃은 나에게는 그랬다.
나는 사냥을 끝낸 개처럼, 주인이 부르는 휘파람 소리에 이끌려 나이트클럽의 비상구로 향했다. 나오기 전 한 번 불길을 뒤돌아보았으나, 그것은 어째서인지 벌써 사위어 있었다. 너를 홀로 남겨두고 가는 듯하여 마음이 좋지 않았다. 적군인지 아군인지 모를 누군가의 손가락을 밟은 채로 그렇게, 나는 잠시간 문간에 서 있었다.
* * *
나는 들개로 태어났다.
이상한 일이지. 나는 분명 부모님의 자식이었는데, 친부모인데도, 그들에게 동질감이나 소속감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나는 내가 그들의 육신을 빌려 태어난 짐승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어릴 때부터 말을 아꼈다. 들키고 싶지 않았다. 무엇을 들키고 싶지 않은지 알지도 못하면서 숨기는 법을 먼저 배웠다.
나는 가능한 집 밖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아이들의 세계는 동물적이었다. 짐승으로 태어난 내게는 유리한 환경이었다. 나는 또래 아이들을 보호색처럼 두르고, 그들 사이에서 우두머리로 군림하며, 내 안의 불온한 충동들을 다스렸다. 능숙하게 잘해나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버지의 가게에 불을 지르기 전까지는.
네게 닿기 전까지는.
우리는 어려서부터 형제처럼 자랐다. 아마도 갓난쟁이 시절부터 함께했을 테다. 전쟁으로 모든 걸 잃은 내 아버지와 네 아버지는 서로가 유일한 재산인 듯 그렇게 서로를 아까워하고 가까이했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가 기억하기 이전부터 함께한 셈이다. 나를 파헤쳐보면 무의식의 영역에도 네가 자리하고 있을 것이다. 나는 때로 그게 내 유일한 재산처럼 느껴지곤 했다.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를 그 어리고 어리숙한 시절부터 나는 네가 눈에 밟혔고, 너와 같아지고 싶었다. 나는 네게 일방적인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너 역시 아름다우나 결국은 짐승이었기에. 너 역시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였으므로. 이끌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그러나 내가 느끼는 동질감이 상호적인 것이 되리라고는 기대하지 못했다. 내가 불을 지르지 않았다면, 네가 나를 구해내지 않았다면, 우리는 영원히 평행선이었을지도 모른다. 여느 사촌들이 평생을 그렇게 흘려보내듯. 한때는 가까워졌다 한때는 멀어지며. 먼 북소리처럼 서로에게서 희미해졌으리라.
어쩌면 그 정도의 거리감으로 함께하는 것이 네게는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불가능했으리란 걸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가끔은 하고 만다.
내가 내 아버지와 네 어머니의 정사를 목격하고 홀린 듯 불을 질렀을 때.
너는 거기 있었다. 내가 불러들인 것일까. 네가 이끌린 것일까. 성큼성큼 제 키를 키워가는 불길 너머로 네가 나를 보고 있었다.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아직 무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내 열망이 혼란한 와중에 빚어낸 환영인 줄 알았다. 불길이 일렁이는 눈동자, 무어라 말을 걸어오는 입술, 네게 서린 어떤 절박함, 그 모두가 잘 짜인 거짓 같았다.
그래서 보고도 못 본 척했다. 어쩌면 이것이 내가 네게 보인 처음이자 마지막 저항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너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저지른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지도 않았다. 모르는 채 끝나고 싶었다.
그런 내 유약함을 꿰뚫어 본 듯 네가 나를 불길 속에서 끄집어냈다. 안간힘을 다해 나를 잡아당기는 너는 명백한 현실이었다. 더는 저항할 수 없었다. 저항을 하며 시간을 끌다가는 너마저 위험해질 수 있었기에. 나는 목줄이 매인 개처럼 순순히 너를 따랐다.
너는 나를 가게 뒤편의 공터로 데려갔다. 얼마 걷지도 못하고 다리가 풀려, 우리는 제풀에 나동그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부려놓은 짐짝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외상은 없었으나 불은 그 존재만으로 우리를 손상시켰다.
연기를 마셨기 때문일까. 속이 울렁거렸다. 눈앞이 캄캄하고 사방이 적막했다. 숨을 몰아쉬는데 내 소리도, 네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치 감각의 일부를 그 불길 속에 두고 나온 듯했다.
그러나 불이 생동하고 성장하는 감각만은 확실하게 느껴져서, 여전히 그 속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 착각 속에 머물고 싶어서 차라리 눈을 감아버렸다. 그러자 네가 멱살을 틀어쥐고 날 일으켜 세웠다. 자꾸 까부라지는 날 붙잡아 기어코 너를 보게 했다.
“이상문, 날 봐. 날 보라고….”
죄의 무게에 짓눌린 눈꺼풀을 가까스로 들어 올렸다. 네 말간 얼굴 곳곳에 검댕이 묻어 있었다. 뺨은 발갛게 달아올라 있었고,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었다. 엉망이 된 얼굴과 달리 나를 두드리는 시선은 더없이 간결하고 또렷했다. 우리는 다른 종을 처음 본 짐승처럼, 혹은 처음으로 동족을 만난 짐승처럼 서로를 쳐다보았다. ‘아버지와 몸을 섞은 사람’과 빼닮았기 때문일까. 문득 네가 공범처럼 느껴졌다. 기꺼이 공범이 되어주겠다는 듯, 너는 고개를 끄덕이며 길게 눈을 깜박여주었다. 나는 목줄이 당겨진 개처럼 네게 사로잡혔다.
네가 주인의 이름을 새기듯 물어왔다.
“내가 누군지 알겠어? 내가 누구야…? 응?”
나는 더듬더듬 네 이름을 말했다. 그러나 그것은 소리로 완성되지 못하고 입 안에서 흩어졌다. 너는 참을성 있게 나를 기다려주었다. 마치 어린 짐승에게 처음으로 무언가를 가르치듯이.
내가 다시 너의 이름을 부르려 했을 때.
폭발음과 함께 건물의 일부가 무너져 내렸다. 불길이 순식간에 네 발치까지 쏟아져 나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너를 낚아채 흙바닥을 몇 바퀴나 굴렀다. 흙먼지로 더욱 엉망이 되었지만 너는 무사했다. 바라지 않았지만, 나 역시 무사했다. 어쩐지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네가 내 얼굴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괜찮아…. 상문아. 괜찮아.”
갑자기 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무섭지 않았는데, 후회하지도 않았는데, 몸이 제멋대로 겁을 집어먹었다. 어쩌면 몸은 짐승의 육감으로 이 방화가 불러올 비극을 이미 예감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런 나를 달래듯 너는 반쯤 죽음에 물든 내 얼굴을 계속해서 쓰다듬었다. 네 손에 묻어나는 검댕으로 나 역시 적잖이 그을렸음을 겨우 알아차렸다. 그 따습고 야무진 손길에 붙들려 내 눈은 다시 너를 찾았다. 네 눈동자 안에서는 여전히 불길이 일렁이고 있었다. 내가 지른 불이 네게 스미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네가 나를 원하고 있음을 알았다.
불지옥에서 살아나오고 나니 기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네 두 손을 꽉 붙잡고 다그치듯, 혹은 추궁하듯 너와 눈을 마주쳤다. 서로를 밀어내는 같은 극의 자석처럼 우리의 시선은 계속해서 엇갈렸으나, 결국 그 혼란의 장력을 걷어내고 서로를 꿰뚫었다.
나는 소리 없이 물었다. 정말로 원하느냐고. 이런 나를. 이런 나라도. 너에겐 필요하냐고. 그러자 너는 꿈결 같은 미소를 지어 보이며 나를 부드럽게 당겨 안았다. 네가 밭은 숨을 몰아쉬며 마른 입술로 속삭였다.
“괜찮아. 나는…. 괜찮아.”
네 숨결이, 네 입술이, 내 뺨에 닿거나, 내 뺨에 닿을 듯하며, 내 깊은 곳을 헤집어 놓았다. 불길이 더욱 치솟아 등이 터질 듯 뜨거웠으나 나는 곧 그것을 잊었다. 네 손이 그 열기를 참아내며 등을 어루만져주고 있었기 때문에. 너는 그 목련꽃 같은 손으로 나를 어르고 있었다. 거기 가지 말라고.
나에게 돌아오라고.
나는 벼랑 끝에 선 사람처럼 절박하게 너를 끌어안았다. 얼굴을 맞대고 있으니 서로의 땀이 섞이고 검댕이 번졌다. 볼썽사나웠으나 아무도 웃지 않았다.
한참을 그렇게 끌어안고 있으니 불안정하게 엇갈리던 호흡이 같은 높낮이로 출렁였다. 불길 속에 두고 나왔다고 생각한 감각들이 하나둘 복귀했다. 나는 네 어깨에 고개를 묻고 짐승 같은 소리를 냈다. 그것은 사실 울음이어야 했다. 그러나 신음에 그치고 말았다.
등 뒤로 쏟아지는 열기를 감내하며 나는 생각했다. 너를 위해서라면 타 죽을 수도 있다고. 너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다고. 그랬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불의 기억.
수없이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를.
너를 유린한 이들에게 기름을 끼얹고. 불을 붙이고.
모조리 불태워버리는 상상.
나마저도 불타버리는 상상.
그게 옳았을까. 그러면 너는 행복했을까.
아프지도 않고. 다치지도 않고.
왜 나는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후회로 곪고 후회로 병드는 이 시간을 너는 몰랐으면 한다. 오지 않을 너를 기다리면서도 한편으로는 네가 절대 몰랐으면 했던 교도소에서의 나날들처럼.
돌이켜보면 교도소는 고아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저 좀 더 크고 험악한 고아원으로 돌려보내진 느낌이었다. ‘나도 너와 같다.’고, ‘너하고 똑같다.’고 말해주며 나를 데리러 올 네가 없을 뿐이었다. 그것만으로 그곳은 지옥이 되었다.
나는 나만 지옥을 사는 줄 알았다. 너 역시 나 없이 지옥을 살아내고 있는 것을 그때는 왜 몰랐을까. 네가 없는 곳에서 너무 오래 투쟁하느라 정작 너를 헤아리지 못했다.
충동에 떠밀려 저지른 방화로 나는 가족을 모두 잃었다. 그 당시 나는 죄책감 외에는 감정이란 걸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너와 살게 된 기쁨, 너와 이어진 기쁨으로 잊었다.
짐승만도 못했으나 인간일 때보다 행복했다.
* * *
부산 조직폭력배의 지형이 새로 개편되려 하는 시기였다.
부산에서 ‘깡패’라 하면 사람들은 으레 고만고만한 이름들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완월동을 중심으로 사창가와 유흥업소를 관리하던 동래파. 국제시장을 중심으로 마약을 밀수, 유통하던 용두파. 정치권과 야합하여 다양한 사업권에 영향력을 행사하던 오성파.
언론은 이들을 한데 묶어 ‘부산 3대 폭력 조직’이라 칭했다.
실질적으로 부산을 장악하고 있는 것은 오성파였다. 오성파는 정치 폭력배로 이름을 날리던 양 씨가 일군 조직으로, 그가 5성 장군에게까지 줄이 닿는다는 소문에서 착안해 경찰 측에서 붙인 조직명이었다. 양 씨는 정부 여당을 등에 업고 단박에 부산 암흑가의 신흥 강자로 떠올랐다. 토착 세력인 동래파와 용두파가 아무리 난다 긴다 해도 뒷배가 든든한 오성파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러나 너무 오래 유착한 탓일까.
양 씨와 정부 여당 간에 내홍이 일어났다. 양 씨는 뒷돈을 수도 없이 갖다 바치면서도 마냥 종노릇을 해야 하는 상황에 염증을 느꼈고, 정부 여당은 자신들의 치부를 속속들이 꿰고 있는 양 씨가 점점 거북살스러운 존재로 느껴졌다.
그 와중에 여권 주요 인사의 운전사가 양 씨가 심어놓은 심복임이 밝혀졌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양 씨가 자신에게 사주한 일과, 자신을 통해 빼낸 정보를 낱낱이 고해바쳤다. 그는 곁눈으로나마 이미 정계의 민낯을 본 사람이었다. 정치인 운전사 노릇을 하며 깨우친 감으로 그는 자신이 살길을 정확히 짚어냈다.
대한민국에 깡패는 많았고, 손 씻는 데 사용할 깡패가 꼭 오성파여야 할 이유도 없었다. 정부 여당은 결국 ‘사회정화’라 불리는 깡패 척결 사업으로 오성파를 일망타진해버렸다. 소문의 5성 장군은 끝내 등판하지 않았고, 행방불명된 양 씨는 수개월 뒤 야산에서 발견되었다. 공식적인 사인은 실족사였다.
그리하여 부산을 장악하고 있던 정치 폭력배들이 한 방에 쓸려나가고. 당연한 수순으로 동래파와 용두파의 운명을 건 한판 승부가 시작되었다. 두 조직에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빠칭코 사업권까지 개입하면서 피 묻힌 욕망은 더더욱 그 몸집을 키워나갔다. 모두를 가지거나 모두를 잃게 될 판. 군웅할거의 시대. 그들만이 아는 난세였다.
승리는 영웅이 아니라, 악귀의 것이 되리라.
“누가 이길까요?”
담뱃불을 붙이며 박창현이 남의 일처럼 물어왔다. 희끄무레한 연기가 음영 짙은 얼굴 위를 어른거렸다.
“글쎄.”
“관심 좀 가져주시죠. 아랫놈들은 하나같이 ‘부두목 님’만 우러러보고 있는데.”
반농담조로 하는 말이었으나, 그 얼굴에 드리워진 미소에는 농담의 파편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애초에 감정이란 것이 개입할 여지가 없는 얼굴이었다. 악의 밀도가 지나치게 치밀하여 대부분의 표정은 그의 표면을 겨우 한 겹 칠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한쪽에 소속되어 있으면서 누가 이길까, 라….”
“아, 무조건 우리가 이긴다고 자신해야 하는 겁니까?”
“그런 건 아니지만.”
나는 성가신 티를 내며 말을 이었다.
“…너도 관심 없잖아?”
박창현은 하, 하고 기막힌 웃음을 흘리며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이런 식으로 불쑥 도발인지 진심인지 모를 말을 꺼내고, 상대를 건드리는 척을 하며, 종국에는 자신을 건드리게 만들었다. 그건 특별한 의도가 깔려 있기보다는, 그저 오래되어 인이 박인 습관인 듯했다. 그 역시 숨기는 법을 먼저 배운 아이였으리라. 나는 짐작했다.
“관심은 있죠.”
“그래?”
“관심의 목적이 다를 뿐이지.”
박창현은 두목이 직접 뽑은 남자였다.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부산에 나타나, 미친개처럼 유흥가를 들쑤시고 다녔다. 남다른 잔인성과 과감성으로 그는 금세 이름을 떨쳤다. 그리고 어느새 우리 조직의 일원이 되어 있었다.
박창현에 대해 알려진 사실은 몇 되지 않았다. 박창현이 본명이 아니라는 것, 그의 아버지가 대통령조차 쥐락펴락하는 대한민국의 흑막 ‘마마 박경립’이라는 것 정도. 이마저도 두목과 나, 둘만 아는 사실이었다. 두목은 박창현을 운 좋게 입수한 조커 카드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정도 남자가 왜 자기 밑에 굽히고 들어와 행동대장 나부랭이를 하고 있는지는 의심하지 못하고.
“아, 아해는 잘 지내고 있습니까?”
아해의 이름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나는 그가 아해를 입에 담는 게 몹시 불쾌했다. 그 사실을 알면서 건드린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잘 지내지.”
“가족 놀이가 꽤 즐거운가 보네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박창현은 기민하게 내 반응을 살피며 말을 이었다.
“나는 질색이었는데.”
“또 형 이야기인가.”
“가족이, 뭐가 좋죠? 떡도 못 치는 사이가.”
가족, 이란 말에 나는 너를 떠올린다. 저런 불경한 말에도 너를 떠올리고 만다.
“…쳤잖아.”
“어? 어떻게 아시나. 제가 말했던가요.”
박창현은 돌연 눈을 빛내며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 표정만큼은 진짜였다. 애초에 냉소와 조소 이외에는 제대로 된 소통이 불가능한 남자였다. 그러나 적어도 그에게 모순은 없었다. 그 한결같은 악의가 나는 때로 편하게 느껴졌다.
“네가 가만뒀을 리 없지.”
“그래도 제 인생 최대의 인내심을 발휘했습니다. 거의 이십 년을 참았는데요.”
박창현의 정확한 나이는 알지 못하나, 이십 해를 오래 넘겨 살지 않았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태어나면서부터 발정했나 보군.”
그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
“비슷하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사람, 살아는 있으려나. 박창현의 살벌한 사랑을 받으며 버텨낼 자가 몇이나 있을까.
또 하나 미루어 짐작해보는 것. 박창현이 ‘그 사람’ 때문에 조직폭력배가 되었고, 조직폭력배로서 무언가를 이루려 한다는 것. 이것은 추측에 불과했으나 나에게는 어떤 확신이 있었다. 사랑에 미친 남자들이 공유하는 어떤 광기, 어떤 목적성을 알지 못할 수가 없으므로.
다만 그 방식은 첨예하게 달랐다. 박창현은 다른 누군가를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그 사랑을 뒤쫓았고, 우리는 우리 자신을 희생시키는 방식으로 그 사랑으로부터 멀어졌다. 박창현과 내가 서로를 염탐하고 들추어 보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서로에 대한 호감은 전무했으나, 그와 나는 모종의 연대감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나 나나 멸종 직전의 짐승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그와 내가 공유하는 것이 몇 남지 않은 동족에게마저 이를 드러내는, 맹목적인 잔인성일지라도.
그가 에둘러 물어왔다.
“형님은요?”
나는 모르는 척 되물었다.
“뭐가.”
나는 박창현에게 네 이야기를 한 적이 없었으나, 그는 그 영민한 머리와 야만에 가까운 육감으로 네 존재를 하나하나 짚어가고 있었다. 너를 보고 싶어 하는 듯도 했다. 나조차 보지 못하는 사람을 무슨 수로 보여주겠냐마는. 보여줄 수 있다 한들 너를 그와 같이 위험한 남자 앞에 내어놓고 싶지 않았다. 그는 지독하리만치 향기로운 꽃이었으나, 나는 때로 그가 역귀나 역병처럼 느껴졌다. ‘마마(媽媽)’라 불리는 그의 아버지처럼. 그렇기에 그를 골라 곁에 두었고, 너는 모르게 하고 싶었다.
박창현이 다 안다는 표정으로 다시금 물어왔다.
“언제부터인데요.”
나는 멍하니 담배 연기를 내뿜다 귀신처럼 대답했다.
“…불의 기억으로부터.”
부연 설명도 없는, 누수에 가까운 혼잣말.
그 모호한 대답에도 박창현은 더 이상 물어오지 않았다. 불쑥 들이닥치되 필히 물러나야 할 때를 아는 남자였다. 우리는 공존할 수 없지만 당연히 서로를 이해한다. 그에게서도 불의 냄새가 난다. 불을 피워본 자의 냄새가 난다. 영혼을 맨 밑바닥까지 그을린. 몸 어딘가에 거대한 화상을 숨긴. 외곬의 남자들.
그 역시 자신만의 ‘불의 기억’을 소환해냈는지, 장난기를 싹 지우고 영혼이란 게 존재하지 않는 듯한 얼굴로 생각에 골몰했다. 그렇게 우리는 각자의 미친 사랑으로 복귀하고, 복무한다. 침묵이 다 식은 커피처럼 둘 사이에 놓여 있었다. 우리는 묵묵히 그것을 마셨다.
* * *
그렇게 대답했지만 사실 나는 불의 기억 이전부터 너를 사랑했다. 내게 감각과 사고란 것이 생기고 나서 너를 보았을 때. 나는 아름답다는 말을 알지 못해서. 네가 가진 매혹을 뭐라 표현해야 할지 알 수 없어서. 그런 말을 했었다.
너는 꼭 외계인 같다고.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온 것 같다고.
욕인지 칭찬인지 모를 그 말을 듣고 너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그것이 부정보다는 긍정에 가깝게 느껴졌다. 그저 내 희망이었으리라.
너는 물어오지 않았지만 나는 고백하고 싶었다. 사실 나도 그렇다고. 나 역시 내가 모르는, 아주 먼 곳에서 온 것 같다고. 그러나 내 ‘먼 곳’은 너와는 다른 곳이며, 감히 너와 나를 같은 곳에 둘 생각은 없다고.
아무튼 넌 그만큼 이질적이었다. 네 가족 안에서도. 아니, 세상 누구와 섞어놓아도 그랬을 것이다.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놀면서도 내 시선은 늘 너를 따랐다. 나는 들개로 태어났지만, 네게는 늘 내 목줄을 쥐여 주고 싶었다. 인간 무리를 떠나지 않고 머물러 ‘개’가 된 최초의 늑대처럼 말이다.
너희 집에서 온종일 놀다 집에 돌아갈 시간이 되면 혼자 더 있다 가겠다고, 여기서 자고 가겠다고 강짜를 부렸던 일. 모두 네가 원인이었다. 여간해서는 그런 식으로 고집을 부리지 않는 터라 부모님은 내게 쉽게 져주었다. 모처럼 애답게 구는 내 모습에 오히려 안심하기까지 하는 눈치였다.
집이 비좁았기에 너와 나, 상훈은 다 같이 한방에서 잠들어야 했다. 나는 아닌 척 슬그머니 네 옆자리를 차지하곤 했다. 너는 아마도 눈치를 채고 있었을 것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누군가의 욕망이, 절로 달라붙는 데에는 어려서부터 이골이 나 있었을 테니.
그러나 너는 또다시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제 목줄을 입에 문 채, 네 곁을 맴도는 나를, 빌린 물건처럼 손대지 않고 바라볼 뿐이었다. 너는 서둘러 목줄을 낚아채지도 않으면서 관심의 부스러기 같은 것을 내 발치에 놓아두었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그 줄을 손에 쥘 수 있는 도도한 주인처럼. 너는 나를 시험했다. 내 사나움도, 내 독살스러움도 너에겐 하찮고 무력한 것이었나 보다.
너희들이 살던 그 방은 천장이 낮고 무척이나 어두웠다. 우리는 말리려고 널어둔 생선처럼 나란히 누워 밖에서 묻혀온 땀을 식혔다. 가장 먼저 잠드는 것은 언제나 상훈이었다. 상훈이는 무시로 잠꼬대를 하곤 했다. 잠꼬대의 대상은 언제나 아버지, 어머니였다. 상훈이는 깨어 있을 때는 별말도 붙이지 못하면서 잠꼬대만 하면 그렇게 부모님을 찾았다. 한 번도 부모를 가져보지 못한 아이처럼. 가져보았으나 일찍이 버림받은 아이처럼. 애달픈 목소리로. 꿈에서나마.
반면 너는 눈도 감지 않고 누워 있었다. 네가 차갑게 허공을 보고 있으면 나는 예의상 노크를 하듯 뻔한 질문을 던졌다.
“자?”
“아니.”
그렇게 네가 잠들 때까지 질리지도 않고 몇 번이나 같은 말을 되물었다. 네가 얼른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네가 정말 잠들었나 확인하려는 집요함으로. 한편으론 내 졸음을 쫓기 위한 악착같음으로.
거듭 묻다 보면 네 대답이 흐려지다 못해 사라지는 지점이 왔다. 그러면 나는 네가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계속해서 자세를 바꾸어 자는 상훈과 달리 너는 시체처럼 고요했다. 나는 무심코 네 얼굴 가까이 손을 가져갔다. 고르게 내쉬는 숨이 네가 이미 잠들었음을, 그리고 당연히 살아 있음을 입증해주었다.
그러면.
나는 잠들지 못하고 밤새 널 지켜보고 또 지켜봤다. 그때의 나는 아까워서 너를 만지지도 못했다. 그렇게 원 없이 널 볼 수 있는 시간조차 가끔 허락되는 사치였다. 나는 그때부터 이미 너와 함께 살고 싶었다. 어린애가 실현시킬 수 없는 소망이었기에, 네가 동의할 소망인지 알 수 없었기에, 왠지 모르게 부끄러운 소망이었기에, 입 밖에 내지 않았을 뿐.
너는 달빛이 어울리는 얼굴이었다. 창백한 빛과 찬 그림자가 네 얼굴 위에서 춤추듯 계속해서 영역을 바꾸면, 마치 밤이 너를 어루만지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네 잠든 얼굴에서 유독 도드라지는 것은 속눈썹이었다. 원래 속눈썹이란 것은 눈을 감았을 때 훨씬 눈에 잘 띄는 부위이기도 했다. 너는 속눈썹이 유난히 검고 길었다. 검은 새의 꽁지깃처럼 풍성하고 윤이 나는 그 속눈썹을, 나는 그 수를 다 헤아릴 것처럼 면밀히 바라보곤 했다. 그러면 아직 온도를 갖추지 못한 열망과 속 깊은 죄책감에 저절로 목이 메었다.
한번은 참지 못하고 거기 몰래 입 맞추어 본 적이 있다. 네가 눈을 뜰까 두려웠지만, 한편으론 눈을 뜨길 바랐던 것 같기도 하다. 그 눈꺼풀이 열리면, 총 맞은 것처럼 사랑에 빠질 것임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언젠가. 너는 정말로 눈을 떴다. 다행히 입 맞춘 날은 아니었다. 언제나처럼 마르고 닳도록 그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돌풍이 불어오듯 네 눈꺼풀이 말려 올라갔다. 나는 놀라지도 않았던 것 같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였다. 너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태연히 나를 바라보다 생긋 미소 지었다. 짐작했던 대로 그 미소는 내 심장을 정확히 겨누어 맞췄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술을 떨었다. 깊은 밤의 황홀이 전신을 훑고 지나갔다. 검은 새의 날갯짓이 내 가슴을 간질였다. 나는 가져보지도 못한 그 새를 잡아 가두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네가 쏘아 올린 미소로. 나는 어쩔 수 없이 쏟아내기 시작했다. 정체도 모르고 배가 터지도록 삼켜낸 너를 향한 감정을. 그날의 상처는 지금까지 한 번도 닫힌 적 없다. 네가 아물게 해주지도, 내가 아물게 하려고 한 적도 없기에.
바람이 사위듯 너는 다시 눈을 감았다. 왜냐고 묻지도 않았고, 함께 깨어 있으려 하지도 않았다. 모르겠다. 나는 그게 일종의 허락 같았다. 그저 내 희망이었을까.
어쨌든 나는 멈추지 않았다. 네가 그만하라 했으면 그만했을 것이다. 네가 명령했으면 들었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그걸 기다렸으니까. 네가 길들이기도 전에 길들여졌으니까. 들개인데도 평생 네 명령만 듣고 살고 싶었으니까. 그러니까.
나는 한 번도 너에게 강자인 적 없었다. 난 언제나 네게 약자였다. 아니, 약자이고 싶었다.
그게 잘못이었을까.
* * *
항구에서 일전이 있었다. 나이트클럽에서의 학살 이후 하루가 멀다 하고 살육전이 벌어졌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복수전에 부산 일대가 마비될 지경이었다. 오성파를 척결하느라 전력이 축난 경찰도 당장은 제 역할을 하지 못했다.
복수는 칼춤을 추기 위한 명분일 뿐이었다. 칼춤을 추는 자들조차 자신이 복수를 하기 위해 싸우는지, 복수를 당하기 위해 싸우는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복수의 대상이 사라지거나, 복수의 행위자가 사라질 때까지 계속될. 죽음의 원무. 그건 내가 살아 배우게 될 유일한 춤이기도 했다.
경황이 없어 피 칠갑을 하고 집에 돌아왔다. 늦도록 기다린 아해가 내 꼴을 보자마자 아연실색을 했다. 하지만 험하게 살아온 아이답게 비명을 지르거나 다리가 풀려 주저앉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옷을 더럽혀 온 애를 나무라듯 미간을 찌푸리며, 겉옷을 받아들 뿐이었다. 확실히 여느 아이의 담력은 아니었다.
“꼴이 이게 뭐야…. 다친 데는 없어요?”
“큰 상처는 없어.”
“형한테 큰 상처가 있기는 하고요?”
앙칼지게 노려보는 눈이 제법 살벌했다. 잔뜩 약이 오른 소동물을 보는 듯했다. 내가 반응이 없자 아해는 답답하다는 듯 피땀에 젖은 등을 떠밀었다.
“빨래 돌려놓을게. 씻고 나와요. 얼른.”
욕실에 들어가니 아해가 받아놓은 목욕물이 차게 식어 있었다. 그마저도 귀가가 늦어져서 몇 번을 다시 받은 물일 거였다. 그 마음을 애써 외면하며 물을 흘려보냈다.
젖어 감치는 옷을 하나둘 벗어 내다 무심코 거울을 보았다. 곳곳에 난 칼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오래된 상처를 차례로 더듬다 오늘 생긴 상처에서 손이 멈추었다. 하마터면 죽을 뻔했다. 반사 신경이 조금이라도 늦게 작동했다면 목을 베여 즉사했을 것이다. 죽지 못해, 혹은 죽기 위해 살고 있는데. 그럼에도 육신은 살기 위해 충실히 작동하고 있었다.
뜨거운 물을 뒤집어쓰니 절로 기인 한숨이 터져 나왔다. 쏟아지는 물살에 긴장과 피로가 벗겨지며, 몸 깊숙이 심어진 통증들이 기다렸다는 듯 아우성을 쳤다. 온몸을 흠씬 두들기는 감각에 아이러니하게도. 그 어느 때보다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실감이 들었다.
발아래에서는 핏물이 욕조를 벌겋게 물들이며 배수구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다리 사이로 힘없이 흐르는 핏물이 마치 누군가가 흘리는 눈물처럼 느껴졌다. 나는 욕조에서 핏기가 다 빠질 때까지 발밑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것이 사라지는 게 적이 아쉽기도 했다.
몸을 씻고 나오는데 아해가 문 앞에 바짝 붙어 서 있어서 순간 멈칫했다. 아해는 내가 벗어둔 옷가지들을 갓난쟁이라도 되는 양 소중히 끌어안고 있었다. 대답을 구하듯 물끄러미 바라보자, 아해는 야무진 손으로 나를 밀어내며 말했다.
“손빨래해야 될 것 같아서요.”
“아아.”
“어, 물 뺐어요? 목욕물 받아놓은 걸로 하려고 했는데. 아깝다.”
유난히 알뜰한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생각해보면 박창현과 트러블이 생긴 것도 바로 그 ‘알뜰함’ 때문이었다.
아해는 태어나자마자 고아원에 버려져, 평생을 길거리에서 살아온 아이였다. 고아원에서 아해는 유명한 트러블 메이커였다. 다른 아이들은 알지 못하거나, 알아도 모른 척하는 고아원의 부정부패를 사사건건 트집 잡고 들이받았던 것이다. 호된 매질과 뻔한 괴롭힘에도 절대 물러서지 않아 독종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결국 ‘독종’은 도둑질을 했다는 누명을 뒤집어쓰고 성인이 되기도 전에 고아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앵벌이를 하게 되었는데. 박창현이 우리 조직에 들어와 처음 맡은 일이 바로 앵벌이들의 관리였다. 사실 조직에서는 말단이나 할 법한 허드렛일이었다. 두목 나름대로는 한때 제가 머리를 조아려야 했던 ‘박경립의 아들’을 한번 꺾어보려는 심산이었으리라. 박창현은 두목의 심중을 이내 간파하고 굴욕적인 처사에 일절 토를 달지 않았다.
다른 앵벌이 아이들은 박창현을 보고는 지레 겁에 질려 알아서 고분고분해졌다. 그 특유의 첨예한 광기도 한몫했지만 아이들이 진짜 두려워하는 건 그의 또 다른 면모였다. 이를테면 주먹들 사이에서는 접하기 힘든 미형의 외모나, 귀족의 품격이 느껴지는 태도 같은 것들. 혹은 한 세계의 꼭대기에서 살아온 자가 당연히 취득한, 왕관 같은 카리스마.
여기 있을 리 없는 존재가 태연히 여기 존재하는 부조리함에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공포를 느꼈다. 그건 두목이 잃지 않았어야 할 본능이기도 했다.
그러나 아해는 달랐다. 아해는 애초에 박창현에겐 관심조차 없었다. 아해를 분노케 한 것은 박창현이 아니라 과도한 상납금을 떼어가는 조직이었다. 아해는 왜 제가 구걸한 돈을 조직이 날로 먹으려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그 돈을 빼돌리다 사달이 났다.
덜미를 잡혀 박창현 앞에 무릎 꿇려진 뒤에도 아해는 기가 죽지 않았다. 그저 고집스럽게 반복해 말할 뿐이었다. 그건 내가 번, 내 돈이라고. 그러니까 도둑질 같은 게 아니라고.
앵벌이 친구가 싹싹 빌 것을 종용해도, 아랫놈들이 겁박하고 발길질을 해도, 아해는 끝내 굽히지 않았다. 두들겨 맞는 걸 겁내 하지 않는 데는 도리가 없었다. 몇 놈은 억지로 머리를 조아리게 하려다 아해에게 물어뜯겨 살점이 떨어져 나갔다.
상황을 지켜보던 박창현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물었다.
“별명이 독종이라 그랬나?”
아무도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박창현은 사로잡은 포로의 처분을 고민하듯 아해의 주위를 느릿느릿 걸었다. 긴 간격을 두고 들려오는 구두 굽 소리가 선득한 긴장감을 형성했다.
박창현은 뒷주머니에 꽂아두었던 단도를 꺼내, 서슴없이 아해의 눈가에 들이밀었다. 누군가를 위협하거나 공격할 때 눈을 노리는 것은 그 특유의 습성이었다. 칼에 얼굴을 짓눌리면서도 아해는 부릅뜬 눈을 거두지 않았다. 아랫놈이 머리를 뒤로 잡아 젖히자, 전구의 불빛을 직격으로 맞은 아해의 얼굴이 죽은 물고기의 배처럼 하얗게 떠올랐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는지, 박창현은 부하를 시켜 랜턴을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아해의 얼굴 가까이 불빛을 쏘았다. 아해는 처음에는 오만상을 찌푸리다 이내 이를 악물고, 있는 힘을 다해 눈을 치떴다. 박창현은 그 얼굴을 세상 신기하다는 듯 들여다보다 산뜻하게 말했다.
“재밌네.”
그리고 아해는 생니를 뽑혔다. 극단에 이르는 고통에 아해는 곧바로 굴복했다. 독종의 저항은 무참히 진압당했다. 고장 난 기계처럼 벌어진 입에서는 계속해서 피가 흘러내렸다. 까무러치지 않는 게 용할 정도였다.
박창현은 아해를 죽일 생각이었다. 그보다 강력한 경고는 없으므로. 그에게 개인적인 감정은 없었다. 그저 본보기로 삼을 누군가가 필요했을 뿐.
실제로 아해에게 가해지는 린치를 목격한 몇몇 아이들은 저도 모르게 오줌을 지렸다. 별의별 폭력을 다 겪어본 아랫놈들조차 보다 못해 눈을 돌렸다. ‘본보기’ 덕분에 박창현은 조직의 하층부를 단숨에 장악할 수 있었다. 정확히 그가 목적하던 바였다.
박창현은 아해의 피를 휘장처럼 두르고서 말했다.
공포는 때때로 전시되어야만 해.
전시되어야만 제힘을 발휘하는 공포가 있단 말이야.
그 순간 그는 마치 제 아버지에게 빙의된 듯했다. 그건 이 세상을 공포로 다스리는 그의 아버지나 할 법한 말이었다. 나는 지체 없이 박창현에게 손을 올렸다. 도를 넘은 그를 체벌하기 위한 행동이었지만, 광기로부터 깨어나게 하는 것이기도 했다.
박창현은 뺨을 세게 얻어맞고도 한참을 사물처럼 서 있더니 하, 하고 기막힌 웃음을 흘렸다. 그는 피범벅이 된 제 손을 남의 것처럼 바라보다 얼굴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는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 집요하게 그 냄새를 맡았다. 피 냄새 이외의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그러는 동안 아무도 감히 자리를 뜨지 못했다.
나는 그 모두를 내버려 두고 아해를 병원으로 데려갔다. 병실 침대에 누워 있는 아해를 보며 조금 울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너를 닮았단 걸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나는 아해에게 별 관심이 없었다. 그 사실이 불쾌해 일부러 멀리하고 쌀쌀맞게 군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입에서 융단처럼 핏줄기가 쏟아지는 순간. 나는 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너를 닮은 얼굴로. 각혈하는 너처럼 피를 쏟아내는 그 아이를. 내가 어찌 구하지 않을 수 있었을까.
아해가 겨우 눈을 뜨던 순간. 앞니도 없이 날 부르며 울먹이던 순간.
나는 네가 아님을 분명히 알면서도, 그 아이를 보호하고 보살피기로 마음먹었다. 순전히 내 욕심이었다. 너를 닮은 아이가 만신창이가 되는 꼴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만신창이가 된 너를 다시 보는 것 같아 내 마음이 견뎌내질 못했다. 만신창이가 되기 전에 깨달았으면 좋았겠지만, 그래도 아해에게는 아직 재생과 부활의 기회가 남아 있었다. 아해는 그렇게 내게로 왔다. 인간에게 버림받은 개가 멋모르고 사나운 들개의 뒤를 따르듯.
박창현의 린치는 아해에게 거대한 트라우마를 남겼다. 아해는 그래도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리 알뜰하면서 정작 자기 자신에겐 알뜰하지 못한 아이였다. 아해는 병따개만 보면 발작을 일으키면서도 언젠가는 그 트라우마까지 극복해내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박창현이 자신에게 한 짓을 꼭 되갚아주겠다고도 말했다.
객기라고 해야 할까. 용기라고 해야 할까. 아해에게는 그런 것이 있었다. 그게 부족한 것은 오히려 내 쪽인지도 모른다. 텅 빈 삶의 터전에. 널 닮은 허수아비를 세우고. 까마귀처럼 날아드는 죽음을 내쫓으며. 아니, 내쫓는 척을 하며. 그래도 살려고 하고 있다고. 살아보고자 애쓰고 있다고. 어딘가 먼 곳에 있을 너를 안심시키려. 속임수처럼 살아가고 있으니.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너에게로 복귀한다. 나는 혼탁한 한숨을 내쉰 다음 홀린 듯이 전화기 앞에 섰다. 수화기를 집어 드는데, 심적인 부담 때문인지 그 무게가 묵직하게 느껴졌다. 나는 천천히 다이얼을 돌렸다. 살육의 현장에 있을 때보다 초조하고 긴장이 되었다.
이윽고 통화 대기음이 들렸다. 기분 탓일까. 그 소리가 네가 있는 먼 곳까지 내달렸다, 이곳으로 되돌아오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소리를 반복해서 듣고 있는 게 기나긴 여정처럼 느껴졌다.
받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딸깍, 하고 전화 받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눈을 감고 잠시 심호흡을 했다. 눈을 감으니 여기가 어디인지 흐릿해졌다. 그건 내가 원하는 바였다.
너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처음 걸었을 때는 ‘여보세요?’ 하고 말을 건네왔지만, 밤늦은 시간에 걸려오는 전화가 나라는 걸 알아챈 다음부터는 그 말도 아꼈다. 나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말라 죽어버렸다고 생각한 내 안의 소년이 조심스럽게 기지개를 켰다.
우리는 한참을 말없이 수화기만 붙들고 있었다. 아마도 너는 전화선을 만지고 있었을 것이다. 너도 모르는, 네 버릇이었으니까. 침묵의 틈을 비집고 네 숨소리가 전달되었다. 창밖으로 들려오는 파도 소리처럼 그것은 언제나 내게로 밀려왔고, 미련 없이 내게서 떠나갔다. 나는 밀물과 썰물처럼 귓가를 오가는 그 소리에 집중했다. 너 역시 그랬을까.
너 역시 그랬으리라.
욕실에서 나던 물소리가 끊어지고, 아해가 빨래 더미를 안고서 욕실을 나왔다. 나는 가만히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너에게 ‘이쪽’의 소리를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나는 텔레비전을 켜는 척하며 소파에 앉았다. 아해가 날랜 손놀림으로 빨래를 착착 널며 말했다.
“커피 마실래요?”
“그럴까?”
“설탕은?”
“안 넣는 거 알잖아.”
아해는 입을 삐죽하고는 설탕을 넣지 않은 내 커피와, 설탕을 잔뜩 넣은 제 커피를 함께 타서 가져왔다. 나는 아해의 커피를 보는 것만으로 얼굴이 찡그려졌다.
아해가 조심성 없이 풀썩, 소파에 앉으며 심통스럽게 말했다.
“설탕도 안 넣고 무슨 맛으로 먹는담.”
“커피 맛으로 먹지.”
“왜 그렇게 단 걸 싫어해요?”
“싫어하는 게 아니야. 잃어버린 거야.”
“뭘요?”
“단맛을.”
자초지종을 묻고 싶어 하는 얼굴이었으나, 아해는 끝내 물어오지 않았다. 아해가 시무룩한 표정을 지으며 중얼거렸다.
“…설탕 잔뜩 넣어 먹어도 커피, 별로 맛없어요.”
“그럼 왜 먹는데.”
“커피를 잘하면 좀 어른 같아 보일 거 같아서요.”
발육이 나쁜 데다 워낙 동안이라, 어려 보이는 데 콤플렉스가 있는 아해였다. 하지만 소주를 물처럼 마시면서도 피할 수 없었던 ‘애 취급’을 커피로 피할 수 있을까. 어이가 없어서 피식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해가 입 안으로만 우물거리던 질문을 툭 던져놓았다.
“아까 또 전화했죠?”
추궁이나 닦달의 의미는 아니었다. 오히려 쭈뼛쭈뼛 눈치를 보며 하는 말이었다. 나는 무심히 아해를 바라보았다. 길거리를 구르며 산전수전 다 겪어본 아이라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무엇보다 숨겨야 할 이유도 없었다.
“들켰나.”
“이해가 안 돼.”
아해가 딱하다는 듯 날 올려다보았다.
“난 사랑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는 안 할 거예요.”
나를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넌 그렇게 하지 마.”
“아무도 그렇겐 안 할걸요.”
나는 쓰디쓴 커피를 삼키며 뇌까렸다.
“미련하고. 미련 많은 사람들이라 그래.”
우리. 미련을 유혈처럼 덕지덕지 묻힌.
피로에 짓눌려 소파에서 그대로 잠이 들었다, 누군가가 숨죽여 우는 소리에 잠을 깨었다. 우선 옆방으로 가 아해의 동정을 살폈으나, 아해는 종일 뛰어놀다 곯아떨어진 개처럼 평온한 잠을 자고 있었다. 사실 누구의 울음소리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매번, 확인하게 된다.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열어젖히고 담뱃불을 붙였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밀려드는 탓에 불을 붙이는 게 쉽지 않았다. 베란다 창문에 부딪쳐 뭉개지던 파도 소리가 여과 없이 귓전을 때렸다. 때로는 허물어지듯 때로는 우릉대는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여지없이 네가 생각났다. 마치 네가 우는 소리처럼. 듣지 않으려 해도 들려오고야 만다. 한참을 파도 소리에 정신을 내맡기고 나면, 네가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것 같아서 시공이 절로 아득해졌다. 그건 정확히 내가 원하던 바였다.
아마도 그 때문일 것이다. 다대포 바다의 파도 소리는 숲의 바람 소리를 닮았다. 수풀이 부딪치는 소리. 숲이 우리를 향해 쏟아져 내리는 소리. 그 소리를 너무나 닮아 있기에. 나를 잠 설치게 하고, 가슴 떨게 하는 것이다.
형제들이 연어처럼 돌아오는 곳. 그립고도 끔찍한 우리들의 검은 숲.
그래.
내 영혼은 아직도 거기에 있다.
* * *
피난민촌에 살던 시절, 볕 좋은 날이면 동네 아낙들은 소일거리를 들고나와 부지런히 손을 놀리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대부분 주근깨가 그대로 올라온 맨얼굴이었다. 찬란히 쏟아져 내리는 오후의 볕만이 그들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치장이었다. 그건 그들이 공평하게 누릴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쁨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그사이에 꿔다 놓은 보릿자루처럼 끼어 앉아 있었다. 이야기가 길어지면 어머니는 종종 담배를 꺼내 들었는데. 담배 연기에 찡그려지는 얼굴들을 꿋꿋이 모른 체하곤 했다. 누구든 나서서 뭐라 한마디 할 법도 했지만, 일전에 어머니가 자신을 못마땅히 여기던 옆집 사람과 무섭게 드잡이하는 걸 목격하고는 다들 입을 다물게 됐다.
한번은 그런 이야기가 오갔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는 말은 다 거짓이라면서. 같은 자식이어도 분명 더 예쁘고 더 눈에 밟히는 자식이 있다고. 한 명씩 자기 이야기를 하다 종국에는 어머니 차례가 되었다. 옆자리에 앉은 새댁이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물었다.
“언니는 어떤 아들이 제일 예쁘나?”
어머니는 ‘누구 엄마’라고 불리는 것을 치 떨리게 싫어해서 통칭 ‘언니’로 불렸다. 비교적 늦게 결혼을 한 편이었기에 실제로 가장 연장자이기도 했다. 어머니는 질문을 받고도 멍한 표정으로 허공만 응시했다. 어느 순간부터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새댁이 옆구리를 쿡쿡 찌르며 다시 묻자 어머니는 덧없는 목소리로 읊조렸다.
“…아무도.”
그건 대답이 아니라 혼잣말에 가까웠다. 새댁은 어머니가 질문을 잘못 이해했다고 생각했는지, 아까보다는 다소 주눅 든 목소리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너이 아들 중에 누가 제일 예쁘나?”
어머니는 불쾌한 낯빛을 하고서 그 대화에 종지부를 찍었다.
“아무도 낳고 싶지 않았어.”
새댁은 도대체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 그저 입만 뻐끔대었다. 다른 아낙들은 귀신이라도 본 듯한 표정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누군가는 넌더리를 냈고, 누군가는 미친 사람을 표현할 때 으레 그러하듯 관자놀이 부근에 손가락을 대고 빙빙 돌렸다.
그러든가 말든가. 어머니는 자신의 무정함을 철회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녀는 마당에 키우는 양귀비를 우리 형제들보다 더 아꼈다. 양귀비는 언제든 버리고 떠나도 되는 존재였으니까. 그녀에게 정착이나 희생을 요구하지도 않았으니까.
네 친아버지가 걸어온 전화로 너와 어머니가 크게 다투고, 내가 처음으로 어머니를 무자비하게 제압한 이후. 어머니와 나는 한동안 서로를 피해 다녔다. 그것은 비단 서로의 밑바닥을 들춰보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 일로 나는 그녀가 우리의 관계를 눈치챘다고 생각했다. 사실에 가까울 만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까지는 짐작을 하게 되었으리라고. 그로 인한 거북스러움이 우리 사이에 자리했던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우리 관계를 철저히 모른 척했다. 평소에는 별것 아닌 일에도 가시를 세우고, 아무렇지 않게 남의 가슴에 비수를 내리꽂으면서, 그 엄청난 일에는 정작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것이었다. 어머니는 여러 의미로 비범한 사람이었다. 범인이었으면 거품을 물고 쓰러질 진실을 그녀는 잘도 무감각하게 씹어 삼켰다.
그로부터 한 달 즈음이 지난 어느 날.
공교롭게도 어머니와 나 단둘이 집에 남게 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내가 잠들어 있는 사이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 구성원들이 모두 외출을 했던 것이다. 잠에서 깨어 무심코 거실로 나간 나는 어머니 홀로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는 풍경에 -티는 내지 않았지만- 적잖이 당황했다.
어머니는 인기척을 느끼고 비스듬히 뒤를 돌아보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에 흰 실내복을 입은 모습이 새삼 낯설었다. 정오의 건강하고 따사로운 볕이 쏟아지고 있는데도, 그 볕에 파묻힌 어머니는 그 어느 때보다 초라하고 투명해 보였다. 마치 벌거벗겨진 사람처럼.
어머니는 곁눈으로 나를 보며 어딘가 가칫한 목소리로 말을 붙여왔다.
“잘 잤니.”
“…네.”
어머니는 다시 마당으로 시선을 던졌다. 마당이라 부르는 게 민망할 정도로 협소한 공간이었고, 그나마도 우리 소유는 아니었다. 그 한구석에 어머니의 양귀비 화분이 있었다. 무색무취한 공간에서 자신의 붉음과 요사스러움을 자랑하던 그 양귀비는, 어머니의 분신이자 어머니 그 자체였다. 어머니는 남자들에게 발목이 묶인 자신 대신 그것을 양껏 꽃피우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스스로, 타고난 불길함을 다스려보고자 했는지도.
더는 할 말이 없어 걸음을 돌리려는데, 어머니가 마당에 시선을 던져둔 채로 뜻밖의 말을 꺼냈다.
“북에서 내려올 때 말이야.”
“…네?”
“기차를 타고 내려왔어.”
“네.”
나는 무슨 사물처럼 거실 한복판에 서 있었다. 그녀는 뒤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말을 이었다.
“전쟁이 터지기 전에 큰 개를 키웠어. 아주 황소만 했지. 나를 엄청 잘 따랐어. 새끼 때부터 내가 돌봤거든. 한번은 큰 병에 걸려서 죽네 사네 하길래 계속해서 북어를 끓여 먹였어. 그게 통했는지 씩씩하게 나아서는…. 나라면 죽고 못 살았지. 밖에 나갔다가도 내가 부르면 단숨에 집까지 내달려 왔어. 아주, 아주 멀리 있다가도 말이야. 반대로 산에서 부르면 집에 있다가도 용케 알고 찾아 뛰어왔지.”
어머니가 옛날 일을 이야기하는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나는 자리를 피할 수 없었다. 무슨 주문에라도 걸린 듯했다.
“피난을 간다고 나 혼자 기차를 탔어. 부모님은 나중에 오시기로 하고 나부터 태워 보냈지. 기차 끝에, 밖에 나가서 서 있을 수 있는 자리가 있는데. 객실이 꽉 차서 난 거기까지 밀려났어. 바람이 어찌나 매섭던지. 얼굴이 벌겋게 텄지. 그런데 저 멀리서 뭐가 죽어라 기차를 쫓아 오고 있는 거야. 뭐지…. 별생각 없이 보다가 화들짝 놀랐어. 내가 키우던, 그 개였거든.”
“개가 기차를요?”
“기차가 출발한 지 얼마 안 됐을 때였으니까. 개가 숨을 헐떡이면서 뛰어오는데, 갑자기 막 눈물이 흘러내리는 거야. 당연히 데려가고 싶었지. 근데 사람도 다 못 태우는 기차에 개를 어떻게 태우냔 말이야. 난 개의 이름을 부르며 외쳤어. 돌아가! 돌아가라고! 개는 혀를 이만치 빼고도 계속 기차를, 나를 쫓아왔어. 솔직히 뛰어내릴 생각도 했어. 그러다 개가 죽을까 봐. 정말 지쳐 죽을 때까지 따라올 것 같아서.”
그녀는 담배를 비벼끄고는 몇 차례 기침을 했다. 실내복 안으로 비쳐 보이는 가녀린 몸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사람은 어떤 방식으로 행복해질 수 있을까.
어떤 행복이어야만 밑 빠진 독 같은 저 사람을 가득 채울 수 있을까.
“…기차는 점점 빠르게 달렸고. 겁이 나서 뛰어내린다는 생각마저도 못 하게 되었지. 개는 점점 멀어졌어. 그러다 결국은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 살면서 그렇게 가슴이 아팠던 적은 없었어. 부모님은 어영부영하다 피난을 오지 못하고 북에 남았지. 개 소식도 전해 듣지 못했어. 집으로 돌아갔을까? 전쟁통에 잡아먹혔을 수도 있겠지. 어디 야산에 들어가 들개가 되었을 수도 있고.”
어머니는 새로운 담배에 불을 붙였다. 담배 연기가 양귀비 화분으로 가 달라붙었다. 묵은 먼지처럼 토해진 그녀의 진심과 함께.
“몇 번이고 그 기차에서 뛰어내리려는 꿈을 꿨어. 꿈에서조차 한 번도 뛰어내리진 못했지만 말이야. 가끔…. 그런 생각이 들어. 내가 진실로 사랑한 건, 나를 진실로 사랑한 건 그 개밖에 없다고.”
그건 어머니가 자기 인생에 내리는 선고였다. 나는 어머니가 영원히 행복해질 수 없으리란 걸 알았다.
“나는 우리 개가 들개가 되었으면 좋겠어. 산에 들어가서 많은 개들을 거느리고, 자유롭게 사는 거야. 자기 마음대로. 야성으로 살았으면. 다른 사람이 불러도 다가가거나 따라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 말곤, 아무도.”
나는 그제야 어머니 옆자리에 놓여 있는 술병을 발견했다. 그녀는 그것을 들어 올렸다, 안이 텅 비어 있는 걸 확인하고는 실망스럽게 내려놓았다. 취기가 올랐는지 목덜미가 불그죽죽하게 달아올라 있었다.
“항상 너 같은 남자를 좋아했어.”
순간 흠칫했으나, 말투나 목소리의 온도로 미루어 볼 때 특별한 의미는 없는 듯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내가 가지고 싶어 했던 남자들은 날 멸시했지. 너처럼. 그런데 말이야. 우습게도 내가 멸시하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날 가지고 싶어 했어. 다 어울려줬지. 춤을 추자고 내밀어지는 손은 일단 다 잡고 보는 사람처럼…. 하지만 춤을 추면서 상대를 본 적은 한 번도 없어. 항상 다른 곳을 봤지. 다른 곳에 도달하면 또 다른 곳을 봤어.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새 내가 나를 멸시하고 있더라.”
어머니는 재가 길게 늘어진 담배에 손을 데고는 낮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북 억양의 진득한 사투리였다. 그러나 그녀는 이내 그것을 수습했다.
“애한테 무슨 얘길 하는 건지.”
“…멸시하지 않습니다.”
그 말에 어머니는 대뜸 내 쪽을 돌아보았다. 자신 안의 무언가를 게워냈기 때문일까. 그녀는 더 투명해져 있었고, 더 느슨해져 있었다.
“멸시하지 않아요.”
“그럼…?”
한쪽 어깨가 기울어진 위태로운 자세로 헤실거리며 어머니가 물어왔다. 아까보다 취기가 한층 묵직해져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그녀에게 물 한 잔을 가져다주고 방으로 돌아왔다. 너는 어디로 간다 말도 없이 사라졌고, 나는 그런 네가 몹시도 보고 싶었다.
어머니는 너를 자신의 약점으로, 너는 어머니를 자신의 오점으로 생각했다. 나는 네가 가진 어떤 독성을 그녀를 통해 이해하려고 나름 노력했다. 나를 슬프게 하는 너의 어떤 지점들을 그녀에게서 발견할 때면 그녀도 슬퍼졌다.
그저 맞지 않는 삶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와 너에게 주어진 삶이, 너희 두 사람에겐 맞지 않는 신발처럼 고통스러웠을 거라고. 내 눈에 어머니는 항상 가족이란 이름의 기차에서 뛰어내리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그녀는 그렇게 했다.
어머니가 우리를 떠나 네 친아버지에게 갔을 때. 난 어머니가 그 남자로부터도 떠나게 될 것을 알았다. 어머니는 자신을 배신하는 선택만을 했으니까. 그리고 그 사실은 내게 재앙 같은 불안감을 안겨주었다. 그렇게 떠도는 어머니처럼, 너 역시 어디에도 정착하지 못할까 봐. 평생을 떠돌게 될까 봐. 그게 그렇게 두려웠다.
분홍신을 신은 어머니는 남편과 아들들을 잘라내고 떠나갔다. 너 역시 그 신을 나눠 신은 사람이었다. 너는 그 신을 벗기 위해 무엇을 잘라낼까. 아마도. 내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면 나는 네가 연유 없이 무서워졌다. 언젠가 너는 내게 말했다.
나는 배신으로 태어났다고.
그러므로 누구도 배신하지 않고 살겠다고.
정 배신해야 한다면 자기 자신을 배신하겠다고.
그리고 너 역시 그렇게 했다.
비극은 그렇게 태동했다.
* * *
용두파의 두목 하성룡은 원래 밀수 사업을 하던 사람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여수 출신으로, 일본 무역선으로 밀수의 길을 개척한 밀수 1세대라 할 수 있었다. 그러다 국제항의 주도권이 여수에서 부산으로 넘어오면서 그 역시 자연스럽게 삶의 터전을 바꾸었다. 그의 사업은 부산에서 더욱 번창했고, 다각화된 밀수 사업은 이후 아들 하성룡이 고스란히 물려받게 되었다.
하성룡은 부산의 시류를 파악하고 신생 조직과 결착하여 용두파를 만들었다. 그는 원래 고문의 자리에 머물렀는데, 조직의 우두머리가 갑자기 암살을 당하는 바람에 두목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러니까 그는 굳이 따지고 들자면 ‘성골’ 주먹은 아니었다. 그의 정체성은 어디까지나 밀수꾼, 장사치였고 그 역시 자신을 사업가로 소개했다.
조직 내에서도 하성룡은 두목이라기보단 막후 세력가에 가까웠다. 용두파의 하급 조직원들은 두목의 이름조차 알지 못했다. 그는 조직폭력배 수장으로서의 자신은 철저히 감추고, 거물 사업가로서 정치권에 줄을 대려 부단히 노력했다. 정계와의 유착. 그건 그의 아버지가 끝내 이루지 못한 숙원의 사업이었다.
하성룡은 충성보다는 돈을 믿었고, 폭력보다는 권력에 이끌리는 자였다. 그에게는 주먹 하나로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자의 카리스마나 흡인력은 없었지만, 사업을 부풀리는 재주만은 특출났다. 하성룡이 두목으로서 내세울 수 있는 자질은, 조직원들에게 돈 벌 기회를 폭넓게 제공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건 조직원을 늘릴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기도 했다.
하성룡은 주먹이 신화였던 건 ‘호랑이 담배 피울 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주먹으로 출세한 이들이 가지는 특유의 반골 기질이 그에게는 없었다. 그는 자신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진 이에게, 혹은 더 막강한 권력을 가진 이에게 허리를 숙이는 데 반감을 느끼지 않았다.
하지만 아랫놈들에게는 여전히 주먹 하나로 이룬 성공에 존경을 표하는, 철없는 낭만이 남아 있었다. 출세에 목매지 않는 것만으로,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만으로, 그들에겐 최고로 매력적인 인물이 될 수 있었다. 불행하게도, 그게 그들이 나를 우러러보는 이유였다.
우리 구역에서 미쳐 날뛰는 박창현을 붙잡아 그 앞에 대령했을 때.
하성룡은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다리가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그가 무언가를 붙잡을 새도, 누가 그를 붙잡을 새도 없었다.
오히려 태연한 것은 박창현 쪽이었다. 박창현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서 오랜만에 만난 하인을 대하듯 고아하게 그를 내려다보았다. 하성룡은 그의 얼굴을 확인하고 또 확인한 다음에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다. 그의 입에서 처음 나온 소리는 ‘도련님’이었다. 그 말을 하는 그는 몹시 비굴하고 초라해 보였다.
하성룡은 아버지를 따라 박경립의 저택을 방문했을 때 박창현을 보았다고 했다. 그때는 성이 달랐다고 했다. 원래 성에 대해서는 나에게조차 함구했다. 박창현은 가명으로도 본명으로도 경찰의 수사 선상에 오르지 않았다. 그의 존재가 어느 선에서 봉쇄되었는지 알아내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박창현은 저택을 떠나 그 앞에 서게 된 과정을 설명하지 않았다. 하성룡도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하성룡은 그 자리에서 박창현을 조직의 일원으로 받아들였다. 앞뒤 사정 같은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박경립의 아들’을 곁에 둘 수 있단 사실이, 그로 인해 열리게 될 정계의 문이, 그의 이성을 마비시켰다. 그의 눈에는 박창현이 제 발로 굴러들어온 금덩어리로 보였으리라. 마음 같아서는 절이라도 올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은혜로움도 잠시.
하성룡은 권력의 전복에 도취되어 박창현을 진짜 제 부하로 여기기 시작했다. 때로는 고문처럼, 때로는 수족처럼, 때로는 무기처럼 그를 부리며 자신이 ‘박경립의 아들’을 사용할 수 있음에 감탄했고, 그를 사용하는 자신의 권력에 감복했다. 하성룡은 자아도취의 감각을 알게 해준 박창현을 절대적으로 신뢰했다. 간언도 경고도 소용없었다.
박창현이 용두파를 고른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좀 더 목을 따기 쉬운 두목이 있는 쪽에 적을 두려는 심산. 그가 내 측근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그런 이유였을 것이다. 두목보다 더 처치 곤란한 부두목 곁에 붙어 목을 딸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려고.
그럼 두목은 식은 죽 먹기이니.
나는 박창현의 목적이 단순히 조직 내 권력자가 되는 데 그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가 되려는 것은 누군가의 왼팔도 오른팔도 아니었다. 그의 목적은 누군가의 왼팔과 오른팔을 잘라내고, 목까지 잘라낸 다음, 그 몸뚱이 위에 올라서서 새로운 왕관을 쓰는 것이었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가만히 지켜보면 누구나 알 수 있었을 테다. 단, 그에게 홀리지만 않는다면. 그러나 그것은 무척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하성룡은 사업체를 여럿 소유하고 있었으나 -지역 신문사까지 소유하고 있었다- 핵심 사업은 어디까지나 마약 밀수였다. 처음에는 아버지를 따라 선박 밀수만 하다, 사업을 확장하며 항공편 마약 밀수에도 손을 뻗쳤다. 항공편 밀수는 일본 지역 명주를 담는 도자기에 약을 숨겨 반입하는 방식이었는데, 술은 버리고 술 무게만큼의 약을 담아왔다. 그래서 하성룡은 수입 주류사도 소유하고 있었다.
마약 관리의 총책임자는 나였으나 실질적 관리자는 박창현이었다. 그는 마약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며 거리낌 없이 즐기기도 했다. 그는 약을 주기적으로 빼돌렸는데, 극히 소량이었고 간부가 그 정도 양을 빼돌리는 건 별문제가 되지 않았기에. 나는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것은 그 약이 최음제라는 점이었다. 일부 의미심장한 발언이나, 최고급 최음제를 엄선하는 행동에서 나는 그가 약을 ‘그 사람’에게 사용하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억지로 갈취하는 관계이기에 그런 게 필요한 걸까. 나는 그가 사랑하는 방식이 놀라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존경스러웠다. 사랑하는 상대에게도 폭력을 마다하지 않고, 상대를 망가트리면서까지 탐닉하는 그의 사랑에. 얼굴도 알지 못하는 ‘그 사람’이 못내 궁금해지기도 했다.
내가 약에 손을 댄 것도 박창현이 계기였다. 너를 떠나온 이후 꿈에서라도 너를 만나고 싶었는데, 나는 원래부터 꿈을 거의 꾸지 않는 편이었다. 도대체 너를 만날 통로가 없었다.
꿈을 좀 꿨으면 좋겠다는,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박창현은 당장 약을 권했다. 독하지 않은 것이었고, 나도 가끔은 제정신을 좀 내려놓고 싶었기에 권하는 걸 거절 없이 받아들었다. 중독 수준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네가 못 견디게 그리운 날이면 나는 약을 찾았다. 그러면 어설프게나마 꿈의 형태로 네가 찾아왔다. 내 심신이 유일하게 이완되는 순간이었다.
약을 하면 온몸이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깊은 잠을 자면서도, 잠이 들기 전까지는 몹시도 괴로웠다. 네가 아니면 안 되는데. 약만 하면 네 몸이 그리워서. 내 몸이 앓았다. 묵직하게 힘이 들어간 성기를 쥐고 흔들어보아도 쾌감은 없었다. 가라앉기만을 기다려야 하는 고통이, 약이 선사하는 황홀감만큼이나 지독했다. 마치 환상통 같았다.
그럴 때면 나는 흉터와 상처로 얼룩진 네 몸을 떠올렸다. 차마 가질 수도 없는 그 몸을 떠올리면 지난한 내 욕망도 마지못해 가라앉는 듯했다.
약 때문일까. 아니면 너로부터 분리되었기 때문일까. 숲을 떠나온 이후의 기억은 곳곳이 흐릿하게 뭉개져 있다. 신기한 일이다. 나는 우리들의 그 숲을 이파리 한 조각, 바람 한 오라기까지도 낱낱이 기억하는데. 그곳을 떠나온 이후 내 심신은 점멸하고 있다. 건전지가 다한 시계의 초침처럼 같은 자리를 맴돌고 있다.
그러나 너의 기억만은 혈관을 타고 흐르는 약 기운만큼이나 또렷하다.
너는 몸이 약해 자주 감기에 걸렸다. 감기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환경이기도 했다. 수시로 불어닥치는 바닷바람은 구석방까지 한기를 심어놓았다. 변소는 공동으로 사용했으며, 합판을 허술하게 덧댄 간이 목욕실에서 사시사철 몸을 씻어야 했다. 어찌 보면 감기에 걸리지 않는 게 용한 환경이었다. 다른 형제들의 면역력이 남달랐다고밖에는 설명할 도리가 없다.
감기에 걸리면 너는 무섭게 열이 올랐다. 39도, 40도까지 오르는 게 예사였으나, 병원에 가는 게 여의치 않은 형편이라 약과 죽으로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열이 오르면 너는 두통과 함께 오한을 호소했다. 그렇게 열이 펄펄 끓어오르는데도 온몸을 바들바들 떨며 다 죽어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추워…. 너무 추워….”
네가 견디다 못해 온 집의 이불을 다 끌어모아 덮고 있으면, 어머니는 야멸차게 그걸 싹 걷어가며 냉담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열부터 내려야 돼. 이불 덮고 있으면 안 내린다. 그냥 참아.”
일리가 있는 이야기였으나 내겐 그게 학대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어머니는 감기에 걸리는 김에 네가 죽어버리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억측일 수도 있으나, 그런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너는 입으나 마나 한 얇은 옷을 걸친 채 몸을 잔뜩 옹송그리고서 제 어깨를 끌어안고 있었다. 턱이 떨려 이가 딱딱 부딪치는 소리가 들렸다. 너는 너무 연약하고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네가 어떻게 될까 두려워 이불을 되찾아오려 했으나, 그새 어찌나 단단히 숨겼는지 도통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사이 네 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네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날 붙잡고 애원했다.
“나 좀…. 나 좀 어떻게 해줘. 너무 춥고…. 아파.”
붙잡힌 자리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항상 보통 사람보다 몸이 찬 너였는데, 나는 네 안을 달구는 고통의 온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네가 그렇게 아파하니 어느덧 내 몸도 욱신대고 있었다. 나는 가능한 다정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어떻게 아픈데.”
“바늘로 온몸을 막 찔러대는 것 같아…. 옷이 닿는 것도 쓰라려….”
그 말에 나는 너를 향해 뻗던 손을 거두었다. 어떻게든 해주고 싶은데 어떻게 해줘야 할지 알 수 없어서 진땀이 났다. 그러다 자꾸 작게 말려드는 몸을 더는 두고 볼 수 없어, 무작정 널 뒤에서 끌어안았다. 병든 열기가 훅 밀려들었다.
내 몸이 널 이불처럼 감싸자 너는 흐느끼듯 앓는 소리를 내었다. 예민해진 감각이 내 존재마저 고통으로 인식하는 모양이었다. 나는 힘없이 바동거리는 널 더 힘주어 끌어안았다. 너는 처음에는 뼈가 쑤신다며 칭얼대었지만, 몸이 빈틈없이 맞붙고 체온이 스며들기 시작하니 이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으면 너는 무릎을 굽혀 습기 찬 발바닥을 내 다리 위에 올려놓았다. 그럼 난 그 발아래로 뿌리가 내려, 내 살 속으로 파고드는 상상을 했다. 네가 내 곳곳에 뿌리를 내려 우리가 하나로 뒤섞이는 상상. 그렇게 하면 우리가 절대로 흔들리지도, 분리되지도 않을 거라는. 어리고 어리숙한 상상.
너는 실낱같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따뜻해….”
약 기운이 돌았는지 너는 이내 잠이 들었다. 그러자 몸의 떨림이 한결 잦아들었다. 나는 네 창백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땀이 베어 축축한 피부에 단내가 감돌았다. 그 냄새가 좋아서 목덜미에 콧등을 비볐다. 그건 내가 살면서 가져본 가장 달콤한 것이었다. 그걸 놓아주고 싶지 않아서, 네가 열이 내리고 거동을 할 수 있게 된 뒤에도 나는, 이런저런 핑계를 대며 널 뒤로 끌어안고 잠들곤 했다.
네가 나에게서 앗아간 게 무엇인지 너는 알까.
나는 평생 단 게 필요 없었다. 단 걸 찾아 나선 적이 없었다. 네가 달아서. 네가 혀끝에 돌아서. 너 말고는 누구에게서도 그 맛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내겐 이제 빛조차 쓰다. 네게서 떨어져나온 이후로.
* * *
K고에 합격하고. 처음으로 그 자랑스러운 교복을 입은 날. 너는 내게 말했다.
“너도 보내줄게.”
딱히 학문에 열망이 있었던 적이 없어서, 나는 그저 물끄러미 너를 바라보았다. 너는 내가 일찍 학업을 마치는 걸 무척이나 안타까워했다. 그것은 일종의 죄책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네가 가져 마땅한 죄책감은 아니었다.
“대학 졸업하고 일자리 잡아서, 너도 대학 보내줄게. 내가 해줄게.”
“난 그런 건 필요 없어. 그런 건 아무렇지도 않아.”
“내가 싫어.”
네 고집을 꺾어 놓으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내뱉었다.
“가방끈 짧은 남자는 별로인 건가.”
예상대로 너는 곧장 발끈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어울린다.”
나는 조금 비뚤어진 교모를 바로잡아 주었다. 그런 다음 한자로 새겨진 이름표를 조심스럽게 어루만졌다. 李常奫. 항상 상. 물 깊고 넓을 윤. 나는 그 한자가 너와 어울린다고도, 어울리지 않는다고도 생각했다. 내 이름에 쓰인 한자는 제대로 기억조차 하려 하지 않으면서.
“너도 써 봐.”
너는 훌쩍 모자를 벗어 내게 씌웠다. 나는 네가 하는 대로 가만히 내버려 두었다. 네가 장난기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교복도 입혀 보고 싶은데, 작을 거 같아서. 모자만.”
“…너 공부할 때 좋았어.”
“응?”
“너 손에 종이 독 올랐을 때. 밥 떠먹여 주고, 몸 씻겨주고, 옷도 입혀주고. 네 일거수일투족을 다 내가 책임졌을 때. 좋았어.”
“시중드는 게 좋아?”
너는 실없는 사람을 보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너한테 꼭 필요한 사람처럼 느껴졌으니까.”
그래서.
“네가 아플 때도 비슷한 기분이었고.”
“이상문.”
개를 어르듯 네가 내 턱을 간지럽히며 말을 이었다.
“나한텐 너밖에, 너한텐 나밖에 없어. 우리를 이해하는 건 우리밖에 없어.”
목줄을 단단히 매어두듯이 너는 당연한 사실을 힘주어 말했다. 네 얼굴의 장난기는 어느새 시들어 있었다. 대신 스스로를 찌르는 열기 같은 것이 그 안에서 모질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네가 조금은 무더워진 목소리로 종지부를 찍었다.
“나는 네가 필요해.”
모자를 다시 네 머리 위로 옮겨놓으며 나는 맹세했다.
“그거면 충분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자 너는 다시 입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K고는 명실상부한 부산의 명문고였고 졸업생 대부분이 일류 대학에 진학했기에, 집안의 기대도 그만큼 높아져 있었다. 너는 아버지를 실망시키지 않기 위해 부단히도 노력했다. 다만 예전처럼 손에 종이 독이 오르게 내버려 두는 미련한 짓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금, 아쉽기도 했다.
공부에 매진해야 하는 것을 알기에 나는 애써 너를 멀리했다. 살이 맞닿고 싶은, 네 안을 파고들고 싶은 욕망을 다스릴 자신이 없어 일부러 회사에서 자고 오는 일도 있었다. 회사 사무실은 항구 컨테이너에 있었는데. 거기 낡은 소파에 누워 잠을 청하면 외풍에 몸이 으슬으슬 떨려오곤 했다.
너는 내 어설픈 수작을 진작에 눈치채고는, 그 바쁘고 지치는 와중에도 나를 유혹해오곤 했다. 그럴 필요 없다고 마지못해 만류하면 너는 내 바지를 끌어 내리며 이렇게 말했다.
“나도 스트레스 해소는 해야지.”
내 것을 빨아주는데 왜 네 스트레스가 해소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의문을 제기하기도 전에 너는 혀로 입술을 가볍게 축이며 선뜻 내 것을 머금었다. 오랜만의 자극에 나는 찬 숨을 집어삼키며 네 머리칼을 어루만졌다. 너는 선단을 입술로 감싸고 문지르듯 입술을 움직였다. 그렇게 하면 그 매끈한 살덩어리가 녹아버리기라도 하듯이. 제 입술을 뭉개며. 내장과 가장 가까운 피부로 내 은밀한 부위를 감쌌다. 마치 속살을 끄집어내 내 것에 밀착시키는 느낌이었다. 그러면 나는 어쩔 수 없이 내 몸에 스미도록 섞어온 네 진짜 속살을 떠올리고 입맛을 다셨다.
내 것이 타액에 젖어 마찰이 줄어들자, 너는 더 거침없이 입술을 움직였다. 자극이 너무 강해 눈을 질끈 감으니 젖은 소리가 고막에 출렁였다. 내가 흘린 선액까지 보태져 소리는 한층 천박하고 색정적인 것으로 변했다.
가까스로 눈을 뜨자, 나를 목마르게 올려다보고 있는 너와 눈이 마주쳤다. 이윽고 너는 입술 너머까지 젖어갔다. 나는 자제심을 잃어버리고 목 안 깊숙한 곳까지 나를 처박았다. 너는 힘들어하면서도 미쳐 날뛰는 내 욕망을 고스란히 받아냈다. 선단이 목 안 비좁은 곳에 끼워져 강하게 압박을 당할 때마다 사정감이 커져 갔다. 나는 결국 네게 뿌리를 잡혀 빼지도 못하고 입 안에 내 걸 흩뿌렸다. 독을 빨리는 듯한 쾌감에 모골이 송연했다.
사정이 완전히 끝나고 난 뒤, 너는 일부러 정액을 줄줄 흘리며 손바닥에 뱉어냈다. 입술부터 턱까지를 흠씬 적시며 느릿느릿 뱉어내는 그 모습에 다시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나는 그걸 감추며 표면이 거칠어진 목소리로 말했다.
“이건…. 나만 좋은 거잖아.”
“누가 너만 좋게 해준대?”
너는 내 위로 올라타며 나긋한 미소를 지었다.
“나도 스트레스 풀어야지.”
너는 바지를 벗어 던지고 전희도 없이 내 것을 아래로 물어 삼켰다. 네가 미리 준비하기도 했거니와, 네가 묻힌 것과 내가 뱉은 것이 그대로 남아 있어 삽입은 수월했다. 네가 허리를 천천히 내리자 뜨겁게 달아오른 속살이 터지듯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네 안이 내가 살아 환영받는 유일한 장소처럼 느껴졌다. 유일한 장소였으면 했다.
너는 뭉근하게 허리를 돌리며 내 머리통을 어루만졌다. 값비싼 도자기의 표면을 어루만지는 듯한 손놀림이었다. 욕망의 부산물들로 적셔진 입술을 내 귀에 처박고 네가 말했다.
“…내 거야.”
흥분에 갈라진 목소리가 심장 안쪽을 긁어내렸다. 나는 순순히 대답했다.
“맞아. 네 거야. 네가 만들고, 네가 없앨 거야.”
그러자 너는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대답만으로 네가 만족스러워한다는 게 기쁘고 안심이 되었다.
“너 그거 알아?”
느끼는 지점을 건드렸는지, 네가 얼굴을 찡그리며 흐드러지게 말했다.
“그게 얼마나…. 날…. 불안하고 짜릿하게 만드는지.”
“그게 왜 불안해….”
그러나 너는 정말로 불안한 얼굴로 매달려오며, 거절을 각오한 사람처럼 고백했다.
“네 순정이, 네 순종이 나를 살게 해.”
나는 뿌리 깊은 나무처럼 대답했다.
“알아.”
“네가 어떻게 알아.”
“…모르고는 살 수가 없으니까.”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겨주며, 나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허리를 꽉 붙잡고 있는 힘껏 쳐올릴 때마다 너는 점성이 묻어나는 신음을 흘리며 내 허벅지 위로 엉덩이를 붙였다 뗐다. 땀이 차오른 살덩어리가 끈적하게 들러붙는 감각에 입 안이 절로 달아졌다. 그 맛을 나누듯 네 입을 벌려 혀를 섞었다. 나는 더는 단맛이 느껴지지 않을 때까지 네 혀를 빨고 싶었다. 영원히 그걸 빨고 싶었다는 말이다.
등을 단단히 받쳐 너를 눕히고 사정없이 네 안을 찔러댔다. 그렇게 하면 언젠가는 네 가장 깊숙한 곳에 닿을 수 있기라도 한 것처럼. 내 우악스러움에 네 안이 점점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은 이윽고 다시 닫힐 거였다. 나는 내가 벌린 공간이 영영 닫히지 않았으면 했다. 그 빈 자리, 그 상실감으로 네가 나를 영영 떠날 수 없도록.
* * *
고3 막바지.
너는 고심 끝에 P대로 마음을 굳히고도 서울대에 남은 일말의 미련을 떨쳐내지 못해, 2박 3일 일정으로 서울에 다녀왔다. 너 혼자 올려보내는 게 아무래도 걱정스러웠는지 아버지는 나를 동행으로 붙였다. 그건 내가 아버지에게 감사하는 몇 안 되는 일 중 하나였다.
네게는 간만의 서울행이었지만, 내게는 첫 서울행이었다. 애초에 여행이란 걸 가 보는 게 처음이었다. 나는 언제나 뿌리내리고 싶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여행을 희망한 적 없었으나, 너와 함께라면 어디든 좋았다. 너와 함께라면 그건 여행이 아니었다. 뿌리를 잠시 이동시키는 일이었을 뿐.
우리는 부산역에서부터 들떠 있었다. 기차 안에서도 몇 마디 말은 나누지 않았지만, 나란히 앉느라 자연스레 겹쳐지는 몸이 흡족했고, 그로 인해 저절로 나누어지는 온기에 행복했다. 나는 차창 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생경한 풍경과, 매일 보아도 생경하게 아름다운 네 얼굴을 번갈아 보느라 소리 없이 바빴다.
서울에 가까워질수록 빈자리가 늘어갔다. 주변 자리가 얼추 다 비었을 즈음 너는 눈을 빛내더니 짧게 입을 맞추어 왔다. 너는 종종 짓궂게 굴며 나를 곤란하게 만들곤 했다. 내가 반응이 희박한 인간인데도 질리지도 않고 그걸 즐겼다.
너는 그런 식으로 조금이나마 우리 관계를 가벼운 것으로 만들려고 했다. 때로는 그에 어울려 나도 가벼워지곤 했다. 나는 주변을 한 번 더 엄중히 확인한 다음 네 입술을 부드럽게 핥았다. 너는 어디고 언제나 내게 달았다. 그 단맛을 상기할 때면 어떤 형체 없는 감동 같은 것이 머리를 저릿하게 울리곤 했다.
나는 네 어깨를 감싸 안으며 차창에 비친 우리의 모습을 보았다. 우리가 누구의 눈에도 보이지 않았으면, 우리의 모습이 어디에도 비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 짧게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목적지가 얼마 남지 않았다. 나는 기차에서 내리고 싶지 않았던 것도 같다.
서울에서는 네가 나를 이끌었다. 그건 내가 항상 바라던 일이었다. 너를 따라. 네 발이 향하는 데로 가보는 것. 네 욕망을 따라 내 뿌리를 키우는 것.
서울에서 너는 덜 친절하고 덜 어른스럽고 더 장난스러웠으며 더없이 솔직했다. 그게 네 본연의 모습이었다. 어린 시절 일 년에 두 번씩 올라와 생활하던 곳이라 그런가. 너는 서울을 낯설어하지도, 어려워하지도 않았다. 그저 고향에 돌아온 듯 상기된 얼굴로 가벼운 걸음을 내디딜 뿐이었다.
그런 너와 달리 나는 소금기 없는 바람이 낯설었고, 때가 덜 탄 건물들이 낯설었다. 항구 도시 특유의 눅눅함과 부산함이 그곳에는 없었다. 도로나 건물의 색깔도 묘하게 달랐다. 그제야 나 역시 설렜다. 그건 타향을 처음으로 겪어보는 자의 설렘이었다.
우리는 서울대가 있는 동숭동으로 향했다. 문리과 대학 교사를 방문할 예정이었다. 문리대의 상징인 마로니에 나무나 시계탑 앞에서 사진도 찍어볼 생각이었다. 너는 학림다방이란 곳에도 가 보고 싶다고 했다. 지망 대학을 견학하는 건데 어째 소풍을 가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서울대는 우리가 기대한 것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었다. 데모가 예정되어 전투경찰이 출동한 탓에 분위기가 흉흉했던 것이다. 그래도 서울까지 올라왔는데 교정이라도 거닐어보자 싶어 정문을 통과했다. 다행히 제지당하지 않았다.
문리대 교정은 나무가 울창하여 산책하기 알맞았다. 부산보다 이르게 찾아온 가을에, 뒷산은 물론 교정의 나무들까지 단풍으로 물들어 있었다. 너는 태연한 얼굴로 대학의 정경을 눈에 담았다. 그렇게 와 보고 싶어 한 것치고 너는 서울대를 대단히 흥미로워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는 괜한 질문을 던졌다.
“재미가 없나.”
“아니? 왜 그렇게 생각해.”
“열심히 보는 거 같지 않아서.”
“대학이 다 비슷하지, 뭐. 뉴스에서 본 적도 있고.”
“그럼 왜….”
너는 떨어지는 단풍잎을 향해 손을 뻗으며 심상히 대답했다.
“핑계지.”
“핑계?”
“서울 와보고 싶었거든. 너하고.”
나는 단풍잎을 움켜쥐려 하는 손을 잡아채, 잠시 너를 끌어안았다. 산 쪽에서 급풍이 불어와 나뭇잎들이 눈발처럼 허공에 휘몰아쳤다. 예기치 못한 연막. 낯선 곳에서 재현하는 숲의 시간이었다. 나는 바람이 그치기 전에 너를 놓아주었다.
네가 내 손을 잡아끌며 말했다.
“가자.”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일촉즉발의 긴장감이 곳곳에 심어져 있었다. 배부른 사자 떼처럼 학생들이 한가로이 누워 있는 잔디밭에도 전투경찰이 배치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학생들은 그곳에서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그 불협화음에 그러잖아도 생소한 공간이 더욱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삼엄한 분위기 속에서도 우리는 나름 계획한 대로 교정을 구석구석 누비고 있었다. 데모란 것을 텔레비전으로만 봐와서 그게 실제로 어떻게 일어나는지 실감이 나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도서관 건물을 구경하려 하는데, 정문 쪽에서 신호탄이 터졌다.
데모가 시작된 것이다.
학생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정문 쪽으로 달려갔다. 어떤 거대한 힘이 그들을 휩쓸고 있는 듯했다. 그중 몇몇은 전방을 살필 겨를도 없는지 아슬아슬하게 우리를 비껴갔다. 유유히 견학 같은 걸 하고 있을 상황이 아니었다. 나는 정문 외 통로를 알아보려 했는데, 너는 정문으로 가보자고 했다. 서울대에 왔으니 데모도 한번 구경해보고 싶다고.
내키지 않았지만 네 말을 따랐다.
정문 앞에서는 전투경찰과 학생들이 대치 중이었다. 정문으로 이어지는 다리에는 화염병이 줄지어 놓여 있었고, 그 밑을 흐르는 개천에는 잘못 뿌려진 전단지가 떠다니고 있었다. 학생들은 한목소리로 구호를 외쳐댔다. 대충 누구를 살려내라는 내용이었다. 몇몇 학생들은 누군가의 사진을 붙들고 뜨겁게 울고 있었다.
전투경찰이 방패로 바닥을 치며 전진하자 발밑이 울렸다. 학생들은 흐트러짐 없이 구호를 외치면서도 몸을 움찔거렸다. 구호 소리가 커질수록 그들 사이의 긴장감은 팽팽해졌고, 나는 충돌이 머지않았음을 직감했다. 나는 새끼를 보호하는 짐승처럼 너를 품 안에 가두었다. 나는 오로지 너를 지키는 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내겐 그 모두가 적으로 느껴졌다.
반면 너는 홀린 듯 대치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그걸 피하고 싶은 생각이 없어 보였다. 오히려 그쪽으로 건너가 보고 싶은 듯했다. 너는 무의식중에 나를 밀어내며 자꾸만 앞으로 나아가려 했다. 그 순간 너는 내 존재를 완전히 잊어버린 것 같았다.
“…를 살려내라! 살려내라…!”
다리 너머로 화염병이 던져지고 불이 피어올랐다. 나는 더 단단히 너를 가두고, 팔을 높이 올려 가능한 네가 그쪽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러자 너는 까치발을 들고 내 팔에 매달리면서까지 그 너머를 보려 했다. 내가 놓아주었다면 너는 결국 휩쓸려 갔을 것이다. 급류에 휩쓸리듯이. 바람에 휩쓸려 나무를 떠나는 꽃잎처럼. 뭐가 뭔지도 모르는 사이 떠내려갔으리라.
전투경찰이 계속 전진해오자 한 학생이 맨몸으로 방패 앞에 뛰어들었다. 그것이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은 일제히 방패에 몸을 던지기 시작했다. 흙먼지가 피어오르고 곳곳에서 악 소리가 터져 나왔다. 학교 안에 배치되어 있던 전투경찰이 합세하면서 학생들은 하나둘 거꾸러져 갔다. 누군가가 놓쳐버린 사진에 이편과 저편의 발자국이 구별 없이 찍혔다.
너를 납치하다시피 해서 아비규환의 현장으로부터 벗어났다. 평소라면 네게 가하지 않을 강한 힘으로 널 잡아끌었다. 너는 끌려오는 와중에도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대체 무엇이 너를 끌어당기는지는 알 수 없었으나, 너는 비명과 통곡이 뒤섞인 그곳에 정신을 쏟았다. 네가 위험한 것들을 위험하게 대하지 않을 때. 그것들을 기어코 들여다보려 할 때. 나는 불현듯 네가 무서워졌다.
다사다난했던 서울대 견학을 마치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하던 중.
너는 대뜸 이모님 댁에 가 보자는 말을 꺼냈다. 나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모님은 이미 돌아가셨기 때문이었다. 내 속내를 읽어낸 네가 선수를 쳤다.
“그냥. 그 집이 보고 싶어서.”
다른 일정도 없었고 마다할 이유도 없었기에 네가 원하는 대로 했다. 이모님 댁은 동숭동에서 그리 멀지 않은 데에 있었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너는 남몰래 내 손등을 간질였다. 서울에 올라온 이후 우리의 조심성은 크게 고장 나 있었다. 마치 우주로 보내져 중력을 벗어난 듯 우리는 가벼워졌고, 작은 충동에도 나풀나풀 서로에게 몸을 부딪쳤다. 그것은 보통의 연인이 당연히 누리는 일상이기도 했다. 그게 우리에겐 우주만큼이나 까마득한 별세계였던 것이다.
버스는 마을 어귀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너는 옛 기억에 의지하여 그 집을 찾아냈다.
나는 조금은 불편한 마음으로 그 집 앞에 섰다. 어린 시절 네가 서울로 올려보내질 때마다 나는, 네가 그 집에 양자로 보내질까 봐, 그대로 영영 돌아오지 않을까 봐, 노심초사했다.
너를 빼앗겼으면. 그랬으면 나는. 공장이 아니라 그 집 앞에서 식칼을 들고 서 있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들이 선량한 사람들인 것은 중요치 않았다. 이건 그들과는 무관한 내 사악함이었다.
하지만 이제 와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때 너를 양자로 보내주는 게 맞았다. 어른이 되어 서울로 너를 찾아갔으면 됐는데. 영영 헤어지는 게 아니었는데.
그랬으면 너는 얼마나 많은 일들을 겪지 않아도 되었을까.
“감나무는 없어졌구나….”
담이 그리 높지 않아 집 안을 어렵지 않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마당에는 목련과 벚나무가 몇 그루 심어져 있었다. 본채는 양옥과 한옥이 적당히 섞인 형태였는데, 긴 대청마루가 눈을 끌었다.
네가 대청마루를 가리키며 목소리를 높였다.
“어, 대청마루는 아직 남아 있네.”
“집은 건드리지 않았나 보다.”
“여름엔 종일 저기서 삐댔는데. 수박도 먹고 아이스크림도 먹고. 개랑도 놀고.”
“개?”
“응. 예전엔 커다란 셰퍼드가 있었어.”
네가 허리께를 가리키며 말했다.
“키가 이렇게나 컸어.”
그러고 보니 개 이야기를 들은 것도 같았다.
“이모님 부부가 자식이 없었잖아. 그래서 개를 자식처럼 키운 거야. 그 개, 이모님 부부랑 밥도 같이 먹고 잠도 같이 자고 그랬어.”
“그랬구나.”
“예쁜 짓도 많이 했지. 이모부님이 퇴근하면 개가 도시락을 받아서 부엌까지 물고 갔거든. 이거 가져와라, 저거 가져와라 하면 척척 물어다 주고. 걔는 아마 자기가 사람인 줄 알았을 거야.”
“똑똑하네.”
“걘 날 별로 안 반겼어. 내가 없을 땐 이모님 부부한테 자기가 1등인데. 내가 올라오면 내가 1등이었으니까. 아무리 개라도 싫었겠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걔를 그렇게 괴롭혔어. 종일 만져대고, 심심하면 올라타고. 그러다 밤이 되면 너 대신 걔 끌어안고 자고 그랬지.”
네 눈이 아득한 그리움으로 젖어 들었다. 너는 문득 생각난 듯 말했다.
“널 닮았었어.”
“…응?”
“그 셰퍼드 말이야. 너 닮았었어.”
“질투하려고 했는데. 닮았다고 하니까 못 하겠다.”
“너처럼 커다랗고 뜨겁고 강했지.”
“네 말도 잘 따르고?”
“이모부님이 미군 부대에 다녔잖아. 그래서 맛있는 걸 많이 가지고 오셨어. 아무 데서나 못 구하는 그런 주전부리들 말이야. 기억나? 내가 부산에도 싸 갖고 가고 그랬는데.”
“안 먹었어.”
“응?”
“네가 서울에서 가져오는 거. 난 한 번도 입에 안 댔어.”
“…그랬나.”
그 고독하고 고집스런 소년을 달래듯, 네가 내 등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무튼…. 난 이모부님이 퇴근하는 게 내심 기다려졌어. 개도 마찬가지였겠지. 이모부님은 집에 오면 우선 나한테 먹을 걸 주고, 개한테도 먹을 걸 줬어. 그 개가 얼마나 약았냐면, 제 걸 나한테 뺏길까 봐, 받는 즉시 대청마루 밑에 들어가서 그거 다 먹을 때까지 안 나왔어. 이모님이 날 애지중지하는 걸 아니까. 내가 달라고 하면 제 걸 내줘야 하는 걸 알았던 거야.”
그 개가 아직 거기 있기라도 한 듯, 너는 대청마루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정말 숨도 안 쉬고 먹어 치우더라. 그러다 포장지까지 삼킨 적도 있다니까.”
“그건 나 안 닮았네.”
“응?”
“난 네가 달라면 그냥 줬을걸.”
“닮은 구석도 있지.”
“…어떤.”
너는 야릇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스쳐보았다. 그건 좋지 못한 징조였다.
“너도 어두운 데서 몰래 나 벗겨 먹잖아.”
생각지도 못한 일격에 말문이 막혀버렸다. 너는 부끄럼도 없이 천진하게 말을 이었다.
“한번 들어오면 잘 안 나가려고 하고.”
이건 아무리 무감각한 나라도 얼굴이 붉어지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네가 또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자, 나는 급히 그 입을 틀어막았다. 내 손 안에서 네가 간지럼을 피우듯 속살대었다.
“…아니다. 내가 너를 벗겨 먹는 건가?”
나는 침묵으로 응대했다. 장난을 더 이어갈 마음이 없는지 너 역시 입을 닫아버렸다.
골목은 씻어낸 듯 적요했다. 멀리서 아이들이 재잘대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그뿐이었다. 바람이 차가워지고 해가 조금씩 기울어가는 게 느껴졌다. 너는 담을 뒤덮은 담쟁이덩굴을 만지작거리다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참 이상하지….”
너는 단숨에 표정이 가라앉았다. 마치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듯했다. 나는 불안함을 감추고 대꾸했다.
“뭐가.”
“우리 어렸을 때 아버지, 고작 스물 몇 살이었단 말이야.”
“그렇지.”
“그렇게 생각하면 이상해. 너무 어려서.”
“우리도 곧 그 나이가 되겠지.”
“너무 이상해서. 불쌍해.”
어떤 예감으로, 어떤 결기로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불쌍해지지 말자.”
어떤 기적으로, 어떤 배신으로 그 대답을 실현시킬 수 있었을까.
“그 말도. 이상해.”
너는 내 고질적인 불안을 질책하듯 말을 끊었다. 그러나 너 역시 타성처럼 불안해하고 있음을 나는 알아차렸다.
네 불안을 들쑤시는 대신 말을 돌렸다.
“집 좋다. 오래되었어도.”
나는 막연히 그런 집에서 너와 단둘이 살고 싶다고 생각했다. 담은 좀 더 높은 게 좋을 것이다. 대청마루는 그대로 두고. 네가 원하면 개를 키워도 좋겠지. 또, 정원이 비좁아지더라도 여러 그루의 나무를 심고 싶었다. 나무들은 허술하게나마 우리를 가려줄 것이다. 오랫동안 연막이 되어준, 우리들의 그 숲처럼.
하지만 그것만으론 부족하므로. 창문에는 커튼을 달 것이다. 거센 바람에도 나풀대지 않을 만큼 무거운. 우연으로라도 우리를 목격할 수 없을 만큼 두꺼운. 그런 커튼을. 창문마다. 빠짐없이.
허나 그러한 생각을 말로 전하지는 않았다. 그건 말이 아니라 현실로 이루고 싶었기 때문에. 아직 포장하지 않은 선물을 감추듯, 나는 그 목가적인 꿈을 목구멍 너머로 집어삼켰다.
“배고프다.”
“그만 갈까?”
“서울에선 뭘 먹어야 하나…. 뭘 먹었다고 해야 또 상훈이가 배가 아파서 데굴데굴 구르려나.”
나는 뜬금없이 상훈이의 머리채를 잡는 네가 우스웠다. 막상 부산에 돌아가면, 상훈이가 물어오기 전에는 아무 이야기도 먼저 꺼내놓지 않을 거면서.
나는 언제나처럼 대답했다.
“뭐든. 너 좋은 걸로.”
우리는 이모님 댁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해결했다. 자잘하게 종류가 많아 주문을 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 음식을 기다리며 손장난을 치는데, 가게 아주머니가 반찬을 내오며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말을 걸어왔다.
“너네 어디서 왔니?”
“네?”
“서울 사람 아니지?”
사투리를 쓰는 것도 아닌데. 그녀는 단박에 우리가 타지 사람임을 알아보았다.
“아…. 네.”
“사투리도 안 쓰는데 어떻게 아셨어요?”
의아하다는 듯 네가 캐물었다.
“사투리 안 써도 티가 나. 억양이 은근히 배어 있어.”
부산에서는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말이었다. 어릴 땐 공연히 서울에서 전학 왔냐는 의심을 받았는데. 역시 티가 나는 걸까. 우리는 변장을 들킨 사람처럼 적이 당황했다. 아닌 척해도 우리는 서울에서 이방인이었다. 부산에서도 크게 다르진 않았던 것 같다.
“둘이 형제인가?”
형제라는 말에 너는 야릇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애인인데.”
“으응?”
되지도 않는 말에 아주머니는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너는 거듭 주장했다.
“형제 아니고. 애인이라고요.”
“아유, 농담도 잘하네.”
“애도 있는데.”
“예쁜 총각이 싱겁기는!”
아주머니는 네 어깨를 툭 치고는 헛웃음을 흘리며 자리를 떴다. 한쪽만 모르는 줄다리기가 겨우 끝이 났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생긋 웃으며 네가 말했다.
“먹자.”
식사를 마치고 번화가에 있는 큰 서점에 들렀다. 부산에서는 구하기 힘든 책이 많아 너는 몹시 즐거워했다. 나도 네 옆에서 몇 권의 책을 뒤적거렸다.
문학은 네가 사랑하기에, 나도 자연히 사랑하게 된 것 중 하나였다. 너는 그 세계의 아름다움을 하나도 빠짐없이 알려주려 했다. 나는 네가 주는 것 이상을 알려 한 적 없었다. 그 증거로 나는 너를 떠나온 이후 책이란 걸 손에 쥐어본 일이 없었다.
나는 가족 없는 시간이, 원래도 그러했듯 너무나 익숙했다. 그들의 부재가 조금도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이대로 서울에 자리를 잡고 살면 어떨까. 내겐 너 하나쯤은 먹여 살릴 자신이 있었다.
하지만 너는 어떨까. 너는, 나 하나로 가능할까. 네가 그렇게 비좁은 사람일 거란 자신이 없었다. 네가 먼저 원하지 않는 한 나는 네게서 가족을 빼앗을 수 없었다.
그건 ‘네’ 가족이었으므로.
볼일을 다 보고 서울역 근처 여인숙에 방을 잡았다. 어두컴컴한 골목 구석진 데 있는 여인숙이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허름하고 불결해 보였지만, 책을 과소비하는 바람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문을 닫고, 허술하기 짝이 없는 잠금장치를 잠그자마자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듯 입을 맞췄다. 서로의 입 안을 침투하지 못해 좀이 쑤셔 하던 두 혀가 어지러이 얽혔다. 우리는 서로의 옷을 벗기고, 씻지도 않은 몸을 더듬어 만졌다. 날것에 가까운 체취가 후각과 미각을 달뜨게 했다. 붉은 조명이 아직 어디에도 물들지 않은 욕망에 색을 입혔다.
나는 너를 벽에 밀어붙이고 가느다란 몸을 구속했다. 가만히 벌어진 다리 사이로 내 무릎이 들어갔다. 너는 까치발을 세우며 아슬아슬하게 내게 매달렸다. 네가 피곤과 흥분이 뒤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긴 들킬 위험이 없네.”
그랬다.
대청마루에 숨어든 그 개처럼, 우리는 서로를 입에 물고 서울 가장 어둑한 곳에 숨어들었다. 너무 몰두한 나머지 간식의 포장지까지 삼켜버린 그 개처럼, 우리는 허겁지겁 서로를 벗겨 먹었다.
우리는 질리지도 않고 몸을 섞었다. 네 말대로, 들킬 위험이 없기 때문일까. 나는 그곳에서 모처럼 내 안의 짐승을 풀어놓았다. 네 숨이 끊어질 듯 가빠지고, 절정에 시달린 다리가 나를 밀어내는데도, 나는 너를 놓아주지 않았다. 어지간해서는 그러지 않는 네게서 그만해달라고, 애원의 말이 나오는데도 나는 발정을 멈추지 못했다. 네 안에 내 가장 농밀한 것을 흩뿌리고 싶어서 나는 몇 번이나 사정감을 참아냈다. 마침내 사정을 하는데, 굳은 핏덩이를 토해내는 듯했다.
시계는 물론 창문조차 제대로 달려 있지 않은 그 방에서는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다. 나는 그 방이 어떤 짐승이 파놓은 굴처럼 느껴졌다. 인간의 출입을 불허하는, 짐승들만의 은신처. 그래서였을까. 폐허 같은 그 방이 집보다도 안락했다.
우리는 정사를 끝낸 뒤에도 오랫동안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내 것을 여전히 네 안에 묻어둔 채였다. 더께가 앉아 흐릿한 알전구의 불빛이 네 얼굴을 불온하게 비추었다. 그럼에도 남은 갈증이 먼지처럼 허공을 떠다녔다.
네가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대며 탈진한 목소리로 말했다.
“…너한테서 이불 냄새 나.”
그 말을 못 들은 체하며, 개처럼 네 목을 핥아 올렸다. 내 것이 다시금 단단해지자 네가 귓불을 꼬집으며 말했다.
“이것 봐. 잘 안 나가잖아.”
너는 내 얼굴을 들어 올려 구슬리듯 입을 맞추었다. 절정의 젖은 냄새가 서로의 입 안을 오갔다. 나는 채 마르지 않은 손으로 네 것을 감싸 쥐며, 재촉하듯 혀를 빨아들였다. 너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다리를 내 허리에 걸치며 희미하게 앓는 소리를 냈다. 체념에 가까운 허락이었다.
2박 3일의 일정이었지만, 우리는 남은 시간을 온전히 그 방에서 소진했다. 우리는 서로를 다 먹어 치울 때까지 그곳을 나오지 않았다. 다 먹어 치웠다고 생각한 순간에도 허기가 졌다. 그만큼이나 굶주려 있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나는 종종 그 방에서 보낸 날들을 반추했다. 지금도 또렷하게 그려낼 수 있다. 들뜬 장판. 척척한 이불. 녹슨 걸쇠 하나로 우리를 지켜주던. 깊고 어두운 굴. 그곳은 우리에게 더없이 친절한 장소였다. 돌이켜보면 나는 항상 그곳에 돌아가고 싶었던 것 같다.
* * *
숲의 집을 떠나 깡패로 살면서 이따금 서울을 방문할 일이 있었다. 두목의 호위로 동행하기도 했고, 마약 거래차 상경하기도 했다. 어느 쪽이든 종국에는 거나한 술판이 벌어졌다.
아랫놈들은 이때다 싶어 부어라 마셔라 했다. 나는 혈기 왕성한 놈들을 한곳에 몰아넣고, 따로 술을 마셨다. 아랫놈들은 처음 한두 번은 멋모르고 여자를 채워 넣으려 했으나, 내가 진심으로 혼자 있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더는 그 시간을 훼방 놓지 않았다.
늦가을의 어느 새벽으로 기억한다.
널찍한 룸에서 여느 때처럼 혼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유흥업소답지 않게 분위기가 고풍스러운 곳이었다. 두목 말로는 큰손님을 끌기 위해 내부 인테리어를 전부 외제로 처발랐다고 했다. 그곳에서는 이쑤시개 통까지도 돈 냄새를 풍겼다.
휘황찬란한 공간에서 거듭 술잔을 기울이는데, 어쩐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 들었다. 상아로 만든 우리에 갇혀 있는 기분이었다. 무언가에 이끌리듯 충동적으로 그곳을 빠져나왔다. 아랫놈 하나가 허둥거리며 뒤를 따랐다.
“행님, 어데 가실라고예!”
“…다녀올 곳이 있어.”
나는 목적지를 정해둔 사람처럼 말하고 있었다.
“어덴데예. 지가 모시겠심니더.”
“동이 트기 전에는 돌아올 거야. 들어가 있어.”
“그래도….”
“어서.”
그는 석연찮아하면서도 마지못해 명령에 따랐다. 이권 다툼이 없는 서울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부산이었으면 명령에 불복하더라도 끝끝내 호위를 자청했으리라.
나는 무작정 택시를 잡아탔다.
“어디로 갈까요?”
목적지를 물어오는 말에 한참을 대꾸하지 못했다. 도리어 내 쪽에서 묻고 싶은 심정이었다. ‘오발탄’의 대사처럼 가자, 고 외치는 목소리만이 텅 빈 머릿속에 메아리치고 있었다.
만취객이라 생각했는지 기사가 떨떠름한 목소리로 날 불렀다.
“손님…?”
“아…. 네.”
“어디 가실 거냐고.”
그 순간, 오래간 금기시해온 지명이 입 밖으로 튀어나왔다.
“서울역.”
실언(失言)이었으나 정정하지는 않았다. 그건 실수한 말이라기보다는 잃어버린 말에 가까웠다. 나는 아무것도 되찾을 수 없음을 알면서도 그곳에 갔다.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내가 그곳을 호명한 게 아니라, 그곳이 날 호명한 거였다. 나는 끌려가는 심정으로 눈을 감았다.
삼십 분 정도를 달려 서울역에 도착했다.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싸구려 숙박 시설이 모여 있는 뒷골목으로 향했다. 그곳은 더 남루하고 더 난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흡사 어둠으로 지어진 미로 같았다.
나는 처음에는 신중하게 길을 더듬다, 이내 미친 사람처럼 내달리기 시작했다. 내가 필사적이 될수록 길들은 비슷한 얼굴을 갖추었다. 추억이, 그리움이, 철저하게 날 농락하고 있었다.
나는 끝내 우리가 묵었던 그 여인숙을 찾아내지 못했다. 기억력을 총동원하여 여인숙이 있던 자리로 추정되는 곳은 찾아냈으나, 그곳에는 마사지 업소가 들어서 있었다. 나는 홀린 듯 그 앞에 멈춰 섰다. 이모님 댁은 허물어졌고, 서울대마저도 이전하여 동숭동에는 기념비만 남아 있었다. 세월이 흘렀고, 세상은 변했다. 그러니 당연한 일이었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해일 같은 상실감이 나를 덮쳤다.
나는 꼼짝도 못 하고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개미굴 같은 뒷골목. 산란하게 가지 친 그 길들로. 잃어버렸다고 생각한. 혹은 내다 버렸다고 생각한 감정들이 무섭게 밀려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담배를 꺼냈다. 그러나 담배에 불을 붙이기도 전에 주저앉고 말았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독주에 젖은 탄식을 내뱉었다. 그리고 비로소 깨달았다. 나는 여인숙의 존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간 게 아니었다. 나는 여인숙의 부재를 확인하기 위해 그곳에 갔다.
돌아갈 데가 없음을 인정하고. 생애 가장 행복했던 기억에 장례를 치르며. 나는 더욱더 절망하고 싶었다. 그리하여 몰락에 가속도를 내고 싶었다. 시체처럼 무뎌지고 싶었다. 그러나 사방에서 덮쳐오는 감정들은 끝내 날 주저앉히고 말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는데 발치로 물방울이 떨어져 내렸다. 잠시 눈물인가 했지만, 빗방울이었다. 을씨년스러운 가을비가 골목을 무성의하게 적시고 있었다. 나는 이를 악물고 만신창이가 된 심신을 일으켜 세웠다. 돌아가고픈 곳은 없지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비를 맞으며 길을 되짚어갔다. 고장 난 가로등이 무언가를 경고하듯 위태롭게 깜빡거렸다. 허파에 구멍이 난 사람처럼 계속해서 웃음이 나왔다. 그럴 때마다 정신이 아득해졌다.
빗발이 점점 거세어졌다. 나는 거칠게 머리를 흐트러트렸다. 그러다 어디를, 누구를 향하는지도 모르는 채 짐승처럼 포효했다. 핏대를 세우며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고 나니 내가 지금 어디에, 누구 없이 존재하는지 분명해졌다. 그러나 내 안에 화석처럼 축적된 울음만은 조금도 게워지지 않았다.
큰길로 나가기 전 다시 한번 골목을 돌아보았다. 넘쳐흐르는 빗물이 사람에 찌든 거리를 씻어내고 있었다. 그 빗물이 우리의 흔적마저 씻어내리는 것 같아 마음이 무너져 내렸다. 아직도 남아 있었다. 무너져 내릴 마음이란 게. 마음은 계속해서 남아 있었다. 계속해서 무너져 내리면서.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몸을 싣자마자 눈을 감아버렸다. 나는 그곳으로 가는 길도, 그곳을 떠나오는 길도 무엇 하나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감은 눈으로 동이 터오는 게 느껴졌다. 멍이 번지듯 시야가 푸르게 물들었다. 팔을 들어 올려 아예 눈을 가려버렸다. 그럼에도 밝아오는 아침이 나는 쓰라렸다.
* * *
업장 관리 문제로 성인 게임장에 들렀다.
음지로만 다니기 때문일까. 뉴스에 이름과 얼굴이 공개되었지만 아직까지 운신에 이렇다 할 제약은 없었다. 막내의 결혼식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포위망이 좁혀져도, 막내의 결혼식장만큼은 경찰이 출몰하지 못할 것임을 나는 알고 있었다. 친아들의 결혼식이 난장판이 되는 걸 그 사람, 김철형이 용납할 리 없으니.
포커룸에서 우연히 상훈일 만났다.
거기서 거기인 바닥이라 한 번은 마주칠 거라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시기가 늦어졌다. 상훈인 날 발견하고는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카드를 쥔 손끝이 떨리는 게 어렴풋이 보였다. 무슨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했다.
혼란한 상태를 감추려는 듯 상훈인 담배를 힘주어 빨았다. 그는 살이 더 많이 빠져 있었고, 줄곧 잠을 설친 사람처럼 눈 밑이 그늘져 있었다. 패가 돌려질 때마다 애써 추임새를 넣는 그를 뒤로하고 나는 포커룸을 나왔다. 다른 사람들 앞에서 그를 흩트려 놓고 싶지 않았다.
잠깐 화장실에 들렀다 나오는데, 상훈이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복도를 얼쩡대는 게 보였다. 곧장 뒤따라 나온 모양이었다. 그는 나를 발견하고는 다시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나를 찾아다니고 있었음에도, 나와 마주하는 게 두려운 모양이었다.
나는 비품 창고 쪽을 가리키며 턱짓을 했다. 그는 바로 눈치를 채고 터덜터덜 걸음을 옮겼다.
창고 문이 닫힌 뒤에도 상훈인 쉬 입을 떼지 못하고 발끝만 쳐다보았다. 내가 먼저 말을 걸어주길 바라는 눈치였다. 그러나 나는 잠자코 기다렸다. 봉합은 그로부터 시작되어야 했다. 내겐 어떤 확신이 있었다.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결국 그가 먼저 입을 떼었다.
“…오랜만이라.”
한눈에 보기에도 그는 기가 많이 죽어 있었다. 그러나 억지로 기세등등하던 지난날보다 도리어 편해 보이기도 했다.
“게임은 어떡하고.”
“적당히 잃어주고 나왔제.”
어렵사리 말문을 열고도 우리는 다시 한참을 침묵했다. 우리의 마지막, 그 야만의 밤이 너무나도 끔찍했기에. 그 기억을 건너뛰기 위해서는 침묵이란 이름의 완충 지대가 불가피했다.
이번엔 내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아…. 그래. 막내 결혼한다더라.”
미끼처럼 던져진 화제에 상훈은 반색을 하며 달려들었다.
“금마가? 누구랑?”
“하숙하던 집 딸이랑.”
“이야…. 금마 능력 좋네. 얌전한 괭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 카디.”
“안 올 거냐.”
“뭐이.”
“결혼식.”
“씨발, 내가 거길 우예 가노?”
“못 하겠냐.”
“똥구멍을 디비까는 것도 그보단 안 부끄럽겠소.”
노골적으로 싫은 티를 낸 뒤, 그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물어왔다.
“금마가 내더러 오라 카드나?”
“힘들 거 같다고 말해두긴 했다.”
“이상원이 그거 막내라, 지삐 몰라.”
상훈은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민망함에서 비롯된 웃음이었는지 목 뒤에서부터 귓불까지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다시 침묵.
상훈은 초조한 손놀림으로 주머니를 뒤적여 담배를 꺼냈다. 그는 구겨진 담배를 입에 물고 다시 주머니를 뒤적였다. 룸에 두고 나왔는지 라이터가 손에 잡히지 않자 그는 짜증 섞인 욕설을 내뱉었다. 보다 못한 내가 대신 불을 붙여주었다.
답답한 속을 게워내듯 연기를 길게 뿜어내며 상훈이 말했다.
“…아가 들어섰소. 둘이나.”
“그래.”
아이 이야기에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밤을 떠올렸다.
욕망이 화살이 되어 꽂히고, 비밀이 폭죽처럼 터져나가던 그 밤.
짐짝처럼 던져진 한 여자와, 사물처럼 끝나버린 한 생명에까지 생각이 닿자 때늦은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자식 생기는 거, 무서븐 일이대…. 안 믿겠지만 내는 단디 피임했다. 우째 아가 생겼나 모르것다.”
“운명이겠지. 의지이거나.”
아이가 생겼다고 말하는 상훈은 잔뜩 겁에 질려 있었다. 그는 줄기차게 외면해온 인생의 대가를 한꺼번에 떠안은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모처럼 형 같은 말을 지껄였다.
“가족도 생겼겠다. 도박, 그만둬라.”
“어이쿠?”
“위험해. 좋게 끝나는 걸 본 적이 없어.”
“도박 아이 한다고 내 인생이 좋게 끝날 거 같나.”
“이상훈.”
“내가 왜 도박을 하는지 아나?”
물어 봐주길 바라는 것 같아서, 내키지 않는 물음을 쥐여주었다.
“왜 하는데.”
“잃을 기 없는 놈이라 그렇다.”
“무슨….”
“내는 잃을 기 아무것도 없다.”
상훈인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동의를 구하는 듯이. 혹은 반박의 말을 구걸하듯이.
나는 더는 그의 밑바닥을 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언제까지 계속하려고.”
“마, 손목 날아갈 때까진 안 하것나.”
“그런 말 하지 마. 말이 씨가 된다.”
“행님아, 내는 잃을 기 없다니까요? 니나 조심하소. 그쪽 엔간히 시끄럽다 들었소. 오성파 나가리 되고 개싸움 났다매. 지대로 피바람이 불 거라 카던데.”
“피바람이야 이미 불고 있지.”
“이번엔 진짜 끝장을 본다 카던데. 한쪽이 다 뒤지뿔 때까지.”
“알아.”
“안다꼬? 알믄서….”
“피바람이 불면 피를 흘려야지.”
“지정신이가?”
이번에는 내가 자조했다.
“우리 집에 제정신인 놈이 어디 있다고.”
상훈인 그걸 농담으로 알아듣고 키득거렸다. 차라리 농담이면 좋을 이야기였다.
“맞다. 형, 아 하나 키운다면서.”
상훈은 갑자기 아해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그 사실에 일말의 배신감을 느끼는 듯했다.
“애비 노릇 할 수 있것나. 배운 기 없는데.”
곧바로 빈정대는 것이 그 증거였다.
“그냥 데리고 있을 뿐이지. 아버지 노릇은 못 해.”
“그럼 뭐 할라꼬 델꼬 있노.”
“굳이 따지자면 아버지 노릇보단…. 연습이지.”
“무신 연습.”
“인간 연습.”
마지막으로 해보는.
“내는 그거 몬해 묵겠던데.”
별다른 설명 없이도 상훈인 내 말을 알아들었다. 그래서 그 이상 아해를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인자 하는 말인데, 내는 형 니가 제일 가까웠다.”
어리광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원망도 적잖이 묻어 있는 듯했다.
“니가 큰형한테만 목매고 있으니까. 부아가 나서 더 지랄한 기다.”
“핑계 대기는.”
“진짜래이.”
“…네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뭐이 다르노. 형은 목맬 만한 걸 찾았고, 내는 끝까지 못 찾았을 뿐이제.”
“그걸 피해 다닌 건 아니고?”
“뭐라꼬.”
“내가 본 너는…. 그랬다. 무언가에 진심이 될까 봐 두려워하는 사람 같았어. 진심이어도 못 가질 것 같으니까. 욕심내다 망신만 당할 것 같아서. 세상만사에 관심 있는 척. 뭐든 다 가지고 싶은 척. 가짜 욕심을 잔뜩 쌓아 놓고 진심을 숨기려는 것처럼 보였어.”
나는 그의 약점을 겨누고서 방아쇠를 당겼다.
“아닌가?”
“…이상문이, 집 나가더니 말이 마이 길어졌네.”
약점을 찔린 상훈은 암흑가에 적을 두고 살아온 남자답게 독기와 사나움을 일시에 내뿜었다. 싸늘해진 눈빛에서 그가 느끼는 낭패감의 깊이가 전해졌다. 금이 간 가면을 지켜내려고 그는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냈다. 그래. 상훈의 말마따나 우리는 닮아 있었다. 그 또한 들개였다. 인간에게 낳아졌으나, 인간 세상 바깥으로 버려진. 그래서 그는 가장 천하고 비정한 곳으로 숨어들었다. 그게 그가 파고든 굴이었고, 그게 우리의 동질감이었다.
“내가 형 니하고 제일 가깝다 느낀 게 언젠지 아나?”
내가 당연히 모를 거라 생각했는지, 상훈은 스스로 답을 내어놓았다.
“둘이 똑같이 고등학교 못 갔을 때랑…. 형이 교도소에서 날라다닌단 얘기 들었을 때라.”
“…그거였군.”
뭐 대단한 게 있나 했더니. 나는 모처럼 여과 없이 웃었다.
“그래 웃는 거 처음 보는 거 같데이. 안 하던 짓 하면 일찍 죽는다 카던데.”
상훈은 살살 눈웃음을 치다 표정을 싹 지우더니, 불시에 내 약점을 겨눴다.
“죽지 마소.”
허하고 쓸쓸한 얼굴.
도박의 세계에서 다져온 육감으로 그는 이미 아는 듯싶었다. 이것이 마지막 만남이라는 것을.
그래서였을까. 상훈은 기어이 그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날 이후로 사는 거 같지가 않소.”
그는 꺼져가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바람이 바뀌뿌딴 생각이 들어. 그날 이후로. 운의 바람이라고 해야 카나. 내 인생의 바람이라고 해야 카나. 뭐가 끝나뿐 거 같은데. 그게 뭔지도 몰르겠고. 몰라서 너무 무십고….”
마치 어린 날의 셋째를 보는 듯했다. 가족 안에서 제자리를 찾지 못해 밖으로 나돌고. 꿈에서나 겨우 부모를 호명하던. 가려지고 지워진 아이. 평생을 떠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어머니의 아들이었다. 나는 그도 위독함을 알았다.
꿈에서 깨어난 듯 상훈이 말했다.
“슬슬 드가 봐야겠소.”
“그래.”
상훈은 여전히 어딘가 찌그러진 채로 포커룸으로 향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다 문득 그를 불러세웠다.
“이상훈.”
“와요.”
“…죽지 마라.”
“하이고 씨발.”
그는 나를 한심하다는 듯 흘겨보더니, 바닥에 침을 뱉고는 룸 안으로 사라져버렸다. 그에겐 아직 숨어들 곳이 남아 있었다. 그곳이 비록 그 같은 짐승을 꾀어 잡는 덫일지라도. 갈 수밖에 없는 것이다.
숨어들지 않고는 숨을 쉴 수 없는.
그와 나. 날것의 사람들.
각기 다른 의미로 벌거벗은 남자들.
* * *
막내의 결혼식에는 박창현이 따라붙었다. 두목의 명령이었다고는 하나 내 가족이, 무엇보다 네가 궁금해 따라붙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다. 그러나 말리지는 않았다. 내가 그가 하는 미친 사랑의 ‘끝장’을 궁금해하는 것처럼, 그 역시 나를 ‘끝장’낸 사랑의 정체를 궁금해할 권리가 있었다.
박창현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날이 몹시 궂었다. 재앙처럼 내려앉은 먹구름과, 체벌하듯 차체를 때리는 빗줄기가 우리 형제의 집결을 예고하고 있었다.
호기심을 숨기지 못하고 눈을 빛내는 박창현과 달리 나는 혼란했다. 너를 다시 보는 게 옳은 일인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너를 압살하고도 남을 과거에, 지금의 나를 더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머지않아 그 모두가 유품이 될 터인데.
너는 병색을 최대한 갈무리한 상태로 식장에 와 있었다. 나 역시 내 안의 혼란을 단단히 여미고서 너에게 갔다. 아직 격식을 차릴 여유가 남아 있음을 입증하기 위해 옷차림에도 신경을 썼다. 속을 내보이지 않으려고 생전 안 끼던 안경까지 꼈다.
너는 나를 발견하고는 산뜻하게 미소 지었다. 그 미소는 네가 모처럼 갖춰 입은 양복처럼 꼼꼼히 다려져 있었다. 마치 어떠한 감정의 구김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나는 여느 친척들처럼 너와 악수를 나누었다. 너는 잠시 망설이는 듯했으나 이내 손을 내밀었다. 네 차고 섬약한 손을 맞잡는 순간, 너와 함께 암매장되었던 감정들이 지뢰처럼 터져 나왔다. 그건 강제로 뿌리를 뜯기는 자의 고통이었다. 아니, 뿌리가 뜯겨나간 자리를 확인하는 고통이었다. 모두가 웃고 떠드는 결혼식장에서 나만이 뜨겁게 작열하고 있었다.
둘이 하나됨을 축복하는 그 공간이 내겐 세상의 끝처럼 느껴졌다. 마주 서 있는데, 수화기 너머로 침묵할 때보다 네가 멀게 느껴졌다. 너와 악수를 하는데, 여전히 칼을 쥐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너와 단절된 고통이 너를 보는 환희를 압도하고 있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서울역 뒷골목을 헤매던 그 새벽처럼. 나는 다시 버려지기 위해, 그래서 더욱더 절망하기 위해 거기 있었다. 몰락이, 가속도를 내고 있었다.
“먼저 들어가 있을게.”
네게 오래 머물지 않고 식장에 들어갔다. 나는 신랑의 가족이기 이전에 부산을 떠들썩하게 만든 깡패였고, 살인자였다. 신랑 옆에서 손님을 맞이할 계제가 못 되었다. 가능한 사람들의 눈을 피해야 했다.
나는 가족석에 착석한 뒤에도 틈틈이 너를 훔쳐보았다. 그러고 있으니 네 잠든 모습을 훔쳐보던 어린 시절이 생각났다. 먼 길을 돌고 돌아 우리는 다시 그만큼, 아니 그보다 더 멀어져 있었다. 너를 볼 때의 울림과 떨림은 달라진 게 없었으나, 정작 우리는 너무나 달라져 있었다. 검은 새는 날개를 모두 잘렸고, 독사는 독니를 제 몸에 박아 넣고 있었다.
그래서였을까.
네 모습을 눈에 담는데 서서히 죽어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때는 삶을 견인했던 사랑이 이제는 죽음을 견인하고 있었다. 우리는 하나의 수갑을 나눠 차고 급류에 내던져졌다. 함께 휩쓸려 가다 함께 가라앉고 말 뿐. 내게도, 네게도, 한 손으로 헤엄쳐 서로를 구원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를 돌아보았다. 어리석게도 뒤를 돌아보고 만 오르페우스처럼. 그리고 언젠가 나를 두고 그와 같다 한 박창현 역시 너를 보고 있었다.
그는 아예 몸을 젖히고 노골적으로 너를 관찰하고 있었다. 네 어딘가에 비극의 단초가 남아 있기라도 한 듯, 집요하게 너를 읽어내려 했다. 너를 발가벗기고 해체하려는 그 시선에 내 안의 독사가 건드려졌다. 나는 내 영역을 침범하려 드는 그를 참아내지 못하고 경고의 말을 내뱉었다.
“적당히 하지.”
오래전 거세당했다고 생각한 독점욕이 빳빳하게 고개를 들었다.
“죽고 싶은 거 아니면.”
자제한다고 했는데 서슬 푸른 목소리가 나와버렸다. 아마 얼굴은 더했으리라.
박창현은 어깨를 으쓱하고는 마지못해 몸을 돌려세웠다. 호기심에 들썩이던 것치고 그는 별로 개운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불길한 예언을 들은 사람처럼 심사가 뒤틀려 보였다. 그는 돌연 얼음장 같은 얼굴로 자신의 생각에 골몰했다. 예상치 못한 반응이었다.
이윽고 식이 시작되었다.
나는 결혼식 풍경이 무척이나 낯설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결혼식이란 걸 보는 것 자체가 처음이었으니까. 나는 내가 보통 사람들의 삶에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 새삼 실감했다. 네가 있는 한 나는 그쪽으로 갈 수 없었다. 그러나 네가 없었더라도 그쪽으로 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건 인간사의 영역이었고, 나는 그게 전혀 탐이 나지 않았다.
나는 결혼식을 지켜보다 불현듯 방화의 충동을 느꼈다. 더 두고 볼 것 없이 우리를 그곳에서 끝장내고 싶었다. 너와 나, 막내, 심지어 박창현까지도 모두 불살라 잿개비로 만들고 싶었다. 결혼식장을 장식한 순백을 검댕으로 뒤덮어, 그곳을 장례식장으로 바꿔버리고 싶었다. 그리하여 불의 기억으로 마쳐지고 싶었다. 그 어린 날, 아버지의 가게와 함께 산화되고 싶었던 것처럼.
반면 너는 인형극을 관람하듯 결혼식을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잘 포장된 모습으로 자신을 속이고 있었으나 나까지 속여 넘기지는 못했다. 내게는 보이고 들렸다. 너의 시듦과, 이 삶이 지겨워 견딜 수 없어 하는 네 속내까지. 나는 너도 위독함을 알았다.
너의 태생은 어둠이었으나 너는 언제나 작정한 듯 반짝였다. 너는 그 빛으로 내가 파고든 굴을 밝게 비춰주곤 했다. 기차를 따라 뛰던 그 개처럼 나는 줄곧 너를 뒤쫓았다. 그러나 네 빛은 이제 꺼지고 없었다. 보이지 않게 된 기차처럼 마지막 한 줄기조차 스러지고 말았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너를 쫓고 있었다. 혀를 길게 빼고서. 기진맥진하여. 아마도 죽는 날까지.
우리 네 형제 중 온전히 살아 있는 이는 막내뿐이었다. 나머지 셋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무덤을 쫓고 있었다. 너는 두 팔 벌려 기다렸고, 나는 손수 터를 다졌으며, 상훈인 제가 그것을 찾아다니고 있는지도 모른 채 떠돌았다. 막내는 우리 셋 무덤의 파수꾼이 될 터였다.
그리고 영원히 형제들의 묘지를 떠나지 못하리라.
식이 끝나고 우리는 식장 입구에 모여들었다. 사람들의 눈이 적어진 터라 나는 뒤늦게 가족의 역할을 수행했다. 그럴듯한 말. 그럴듯한 태도. 네 산뜻한 미소처럼, 미리 준비해 챙겨온 것들.
사려 깊은 형을 연기하고 있는데, 네가 잔기침을 하며 화장실로 들어가는 게 보였다. 혹시나 또 각혈을 하나 싶어 내 처지를 잊고 뒤따를 뻔했다. 그런데 박창현이 한발 앞서 네 뒤를 따라붙었다. 막내 부부가 자꾸 말을 걸어와 제지할 틈이 없었다.
“…돌아가신 아버님이 굉장하신 분이었나 보네요….”
잠시 후 돌아온 너는 눈에 띄게 안색이 창백해져 있었다. 무슨 저승사자라도 만난 듯했다. 뒤이어 박창현이 돌아왔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가 말했다.
“형님. 돌아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애초 식이 끝나기 전에 자리를 뜨려 했던지라 더는 지체할 수 없었다. 경찰이 뒤늦게 출동할 가능성도 있었다. 도망치듯 떠나야 했기에, 네게 연유를 물을 수 없었다. 묻는다 하여 답해줄 너도 아니었다. 나는 어렵사리 걸음을 떼었다. 오랜만에, 독하고 사나운 감정들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박창현과 항구에 있는 사무실로 돌아왔다. 기밀 자료를 취급하는 곳이라 거기에는 간부만 출입할 수 있었다. 나는 소파에 앉자마자 넥타이와 안경을 탁자 위로 내던졌다. 안경알이 깨지는 소리가 났지만 박창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나는 거두절미하고 물었다.
“뭐라고 했어.”
주전자에 물을 끓이던 박창현이 세상 천진한 얼굴로 내 쪽을 돌아보았다.
“네?”
모르쇠로 발뺌하려 했으나 그 눈동자 안에선 이미 불티가 튀고 있었다. 그건 그가 누군가를 짓밟았을 때 번지는 그릇된 환희의 파편이었다. 그걸 알기에,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그는 명백히 내 분노를 즐기고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침묵으로 눌러 앉혔을 텐데, 내 안에서도 불티가 휘몰아치고 있어서 그리할 수 없었다. 나는 이를 사리물고 그의 가짜 이름을 호명했다.
“박창현.”
그러자 그는 다른 방식으로 발뺌했다.
“별 얘기 안 했습니다.”
이 줄다리기마저도 그에겐 놀이에 불과했다. 나는 서둘러 그 놀이에 종언을 고했다.
“그건 내가 판단해.”
박창현은 커피잔에 물을 따르며 남의 일처럼 말했다.
“저더러 버릇없는 개라고 하더군요.”
“뭐?”
“주인의 목을 물려 한다고.”
나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결혼식장에서 틈틈이 박창현을 엿보던 네 모습이 떠올랐다. 누구보다 예민하고 영리한 너였다. 너는 박창현이란 표지 하나로 내가 지금 어디 서 있는지, 결국엔 어디로 가려 하는지 간파해버리고 말았다.
나는 참담한 기분에 젖어 들었다.
“…그래서.”
“주인이 물리고 싶어 하는데 어쩌냐고 그랬죠.”
“그게 다인가.”
“네.”
송곳 같은 실소가 터져 나왔다.
“그것뿐일 리가.”
나는 그가 그 정도 도발에서 멈추지 않았음을 알고 있었다. 정도를 모르는 악의는 그의 천성이었고, 너는 그가 줄곧 알고 싶어 하던 나의 약점이었다. 그런 그가, 그런 너를, 물어뜯지 않았을 리 없었다. 그 악의에 노출된 널 상상하는 것만으로, 나는 그를 죽일 수도 있을 듯싶었다. 모처럼 내 안에 살기가 운집하고 있었다.
나는 명령했다.
“개수작 부리지 말고. 토씨 하나까지 빼놓지 말고 말해.”
박창현은 녹아드는 커피를 내려보다 불현듯 나를 쳐다보았다. 불티는 간데없고, 그 눈동자는 다시 순도 높은 어둠으로 채워져 있었다. 그는 암막을 치듯 눈을 길게 감았다 뜬 뒤 불과 한 시간여 전의 자신을 재현해냈다.
빙의라도 된 듯. 말투와 억양까지 생생하게.
“개는 그쪽이지. 이상문 냄새라도 맡아 보려고 목을 빼고 킁킁거리고 있잖아. 두려움에 떠밀려, 내 앞에서 겁에 질린 개처럼 짖고 있는 건 당신 아닌가.”
그는 설탕을 넣지 않은 커피를 건네며 말을 이었다.
“…라고 했습니다.”
“미친 새끼….”
나는 커피잔을 험악하게 내팽개치고 냅다 그의 턱을 갈겼다.
“경고했을 텐데.”
“잘못했습니다.”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즐거워서 견딜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드디어 나를 뒤흔들어 놓았다는 만족감에 그는 전율하고 있었다. 나는 분노로 묵직해진 몸을 일으켜 가차 없이 그를 짓밟았다. 내가 휘두르는 폭력에는 박창현을 향한 분노는 물론, 결혼식장에서 누적된 환멸도 섞여 있었다. 나는 그 모두를 남김없이 쏟아부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괴롭혀오던 파괴 충동이 극에 달해 있었다. 팔다리가 잘린 짐승인 척 숨죽이고 있었으나 그것은 여전히 내 안에 잔존해 있었다.
최소한의 방어만 할 뿐, 박창현은 저항 없이 내 분노를 고스란히 받아내고 있었다. 너를 건드린 보상으로 저를 내어주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래서였을까. 어느 순간부터 그를 때리고 있는데, 나를 때리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겨우 정신을 차리고 그를 보았다. 박창현은 어딘지 모르게 흥분되어 보였다. 그는 타고난 사디스트였으나 때로는 짓밟히는 행위에서도 쾌감을 느끼는 듯했다. 한 번도 짓밟혀보지 않았기 때문에 느끼는 쾌감인 듯했다.
박창현이 갑자기 내 다리를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러면 화가 좀 풀리실까요.”
그리고 그는 개가 주인의 손을 핥듯, 스스럼없이 구두의 앞코를 핥아 올렸다. 애무를 하는 듯한 혀 놀림이었다. 그는 흥분에 달궈진 눈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 비정상적인 희열과 맞닥뜨린 순간, 나를 담금질하던 분노가 일시에 휘발되었다.
마지막으로 그 얼굴을 세게 걷어찬 다음 소파에 앉았다. 격분의 여파로 가슴이 크게 들썩거렸다. 땀에 젖은 옷이 성난 근육에 휘감겼다. 나는 피 묻은 주먹을 옷에 문질러 닦았다. 슬프게도 개운했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가고 우리는 부러진 나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그제야 항구의 파도 소리가 들려왔다. 박창현은 천천히 혀를 굴리며 입 안에 남은 피를 음미했다. 그리고 혀를 씻어내듯 커피를 들이마셨다. 나는 무심코 텔레비전을 틀었다. 마침 뉴스 시간이었다. 용두파에 관련된 보도가 나올까 싶어 우리는 망연히 그것을 바라보았다.
뉴스에서는 지명 수배자에 대한 알림이 나오고 있었다. 대부분이 정치범이었고, 대학생이었다. 나라는 언제나 뒤숭숭했기에 색다른 이슈는 아니었다.
뉴스는 그중 한 청년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었다. 청년은 열에 아홉은 호감을 가질 만한 얼굴로, 증명사진만으로 그의 맑고 선한 성정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런 청년이 세간의 지탄을 받는 게 보기 거북해 채널을 돌리려는데, 박창현이 불현듯 나를 저지했다.
“잠시 두시죠.”
박창현은 불에 덴 사람처럼 텔레비전을 응시하고 있었다. 맞아서 불긋해진 자리가 얼핏 불에 덴 상처처럼 보였다. 평소 그는 타인에게 상처를 입히는 남자였는데, 그 순간만큼은 그 자신이 상처 입은 남자처럼 보였다. 심지어 평정을 가장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았다. 폭우로 인해 속엣것이 떠오른 물웅덩이처럼, 날것의 감정이 그의 얼굴 전면에 드러나 있었다. 드물게도.
박창현이 어느 지점에서 불씨를 집어삼켰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전에 없던 방식으로 타오르고 있다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그는 여느 때처럼 타고난 광기가 아니라 암담한 두려움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에게도 두려움은 존재하고 있었다. 두려움마저도 학살의 대상이었을 뿐.
박창현이 텔레비전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을 걸어왔다.
“…형님.”
“왜.”
“제가 죽이고 싶어 안달 난 얼굴이라 선택했다는 말.”
그답지 않게 초조한 목소리였다.
“아직도 유효합니까?”
박창현. 내 자살의 조력자. 혹은 실행자. 내겐 그를 독려할 의무가 있었다.
“유효하지.”
그는 대답을 듣고 미약하게나마 슬픈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그 슬픔마저도 독이 올라 있었다.
“나는 당신 같은 남자들이 싫습니다.”
“남자‘들’…이라.”
“닮아서 불쾌하다고 해야 할지. 불쾌한데 닮았다고 해야 할지.”
“아아, 날 닮았다던…. 그 신명우란 남자 말인가.”
신명우란 이름에 그의 슬픔이 더욱 유독해졌다. 나는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말을 꺼냈다. 드물게도.
“뭐가 그렇게 불쾌한데.”
“질 것 같아서요.”
생각지도 못한 말이었다. 박창현은 유예된 패배감에 치를 떨며 본심을 토해 놓았다.
“내 손으로 죽여도, 진 것 같은 기분이 들 거 같아서.”
살벌한 말인데도 어딘가 어린애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실낱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러나 이내 패배감에 젖어 말했다.
“다 가질 수는 없지.”
하나도 가질 수 없는 비극도 있지만.
“저는 다 가지고 싶습니다. 아니, 다 이기고 싶습니다.”
“지치지 않을 수 있겠어?”
주어도 부연 설명도 없는 말을 박창현은 잘도 주워 삼켰다.
“미친 사람들의 특징이 뭔지 아십니까?”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그 안에 답이 숨겨져 있기라도 한 듯.
“지치질 않는다는 겁니다. 아니…. 지쳐도 멈추지를 못한다는 거. 마음대로 지치지조차 못한다는 거.”
“…그렇군.”
그는 낮게 욕설을 내뱉은 뒤 맹세하듯 말했다.
“나는 다를 겁니다.”
확신의 멱살을 틀어쥔 그는 그 어느 때보다 고독하고 지쳐 보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패퇴를 결단코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다시 한번 힘주어 말했다.
“우린, 다르게 끝날 겁니다.”
나는 그에게서 분홍신을 벗지 않고, 제 발목을 자르지도 않고, 지쳐 쓰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끝끝내 춤추겠단 의지를 느꼈다. 그도 언젠가는 알게 되리라. 그가 신을 신고 있는 게 아니라, 신이 그를 신고 있음을. 우리는 그저 운명과 충동에 휩쓸리는 자임을.
하지만 나는 그만은 끝까지, 그 신이 명하는 대로 광기의 춤을 추기를 기원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광기가 나를 벨 것을 알면서도. 이미 나는 그에게 내 발목을 자른 도끼를 건네주었으므로.
* * *
우리가 지극히 비밀스럽고 깊숙했던 시절. 나는 마음을 전할 방도가 없어 너에게 편지를 쓰곤 했다. 내 언어가 아니라 남의 언어를 빌려서. 우리의 관계가 우리 이외의 무언가에 새겨지기를 바라서.
나는 언제나 검은 종이에 두꺼운 흑연으로 편지를 썼다. 흰 종이처럼 무구한 것에는 써지면 안 될 듯싶었기 때문에. 낮에는 보이지 않는 별처럼. 내 새까만 진심을 바탕색에 숨겨 보냈다.
보내는 사람의 이름은 적지 않았다. 검은 지면이 내 이름표나 다름없었으므로.
너는 창가에 걸터앉아 담배를 피울 때 그 편지들을 태워 없애곤 했다. 그것들은 재가 되어 연어가 회귀하듯 숲으로 흘러들어 갔다. 너는 일말의 미련도 보이지 않았다. 이미 그 언어들을 다 머금은 듯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으면 그 편지들이 내 안에 켜켜이 쌓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네가 머금은 것들은 결국 내게 돌아오기 마련이었으므로.
나는 창밖으로 숲을 내다보는 습관이 있었는데, 가끔 숲의 이파리들이 흩날릴 때면 그게 내가 보낸 편지들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숲 한가득 재가 된 내 마음이 흩날리고 있다고 생각하면, 숲은 더없이 아름답고 낭만적인 공간이 되었다. 우리가 만들어낸 황홀경이었다.
그랬다.
나는 숲이 늘 우리 두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로부터 우리가 잉태되었으며 우리 역시 숲의 구성원이라고. 그러니 내 수명 짧은 연서들도 숲의 어둠을 구성하고 있을 거였다. 그 검은 편지들은 내가 가질 수 있는 몇 안 되는 향기였다. 우리가 아니면 재현할 수 없는 서글프고 농밀한 향기이기도 했다.
* * *
동래파 집단 살인의 파장이 커지자 두목의 부름이 있었다. 부르는 이유를 알고도 남음이었지만 군소리 없이 명령에 따랐다. 약속 장소는 부산 외곽, 간판을 내린 중국집이었다. 야음을 틈타 그곳으로 향했다.
두목은 안쪽 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탁자에는 꽁초가 쌓인 재떨이와 고량주 여러 병이 놓여 있었다. 그는 원래 풍채가 좋고 살집이 있는 편이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그는 강도 높은 노역에 시달린 사람처럼 초췌해져 있었다. 나는 자욱한 담배 연기를 헤치고 그 앞에 섰다.
“저 왔습니다.”
그는 심기 불편한 얼굴로 나를 흘겨보고는 앉으라는 손짓을 했다. 내가 칠이 벗겨진 의자를 당겨 앉자 그는 대뜸 봉투를 내밀었다.
“뭡니까.”
뻔히 알면서도 굳이 물었다. 거절의 전조였다.
“긴말할 거 없고, 멀리 나가서 좀 쉬다 와라.”
“멀리라면….”
“일본이 만만하지. 아예 동남아도 괜찮고.”
그는 대단한 아량을 베푸는 양 기세가 등등했다. 나는 에둘러 그 제안을 거절했다.
“지금은 쉴 때가 아닌 것 같은데요.”
고량주를 독처럼 삼키고서 그가 말했다.
“네가 깠냐?”
“뭘 말입니까.”
“내 이름 말이야.”
나는 오연히 그를 바라보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벌어지던 살육전에 그는 없었다. 그는 수라장을 설계하고 축조하되 절대로 그곳에 등장하지 않는 남자였다. 그는 어떤 범죄의 기록에도 이름을 남긴 적이 없었다. 그런데 무려 텔레비전 뉴스에 그 존재가 노출되었으니. 그로서는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으리라. 그러나 그가 아니면 살육전도 없었다. 모든 명령은 그로부터 비롯되었으니까.
나는 멸시를 감추고 차분히 대답했다.
“전 아닙니다.”
“너 아니면 누가….”
“두목을 까서 제가 얻는 게 뭡니까. 저도 이름이 까였는데요.”
맹점을 찔린 그는 괜한 헛기침을 했다. 물밑 작업만 해왔기 때문일까. 생각보다 위기에 취약한 남자였다.
“깐다고 까일 분도 아니지 않습니까.”
“염병할….”
그는 술잔을 쥔 손으로 탁자를 거듭 내리치며 울분을 터트렸다. 술이 사방으로 튀어 내 얼굴에까지 묻었다.
“그 새끼 죽었을 때도 안 까인 이름이 도대체 왜 까였느냔 말이야!”
‘그 새끼’는 암살을 당했다던 전 두목을 지칭하는 말이었다. ‘죽었을 때’가 ‘죽였을 때’로 들린 건 과연 나만의 착각이었을까.
“아니야…. 돈 받아 처먹은 놈들이 어디 한둘인가. 그놈들 일렬종대로 줄 세우면 저기 대마도까지 갈걸. 별문제 없을 거야. 나한테 약점 잡힌 게 얼만데…! 염병, 동래파 것들 시체는 왜 떠올라 가지고….”
“운명이겠죠. 의지이거나.”
내가 돌려줄 수 있는 말은 그것밖에 없었다. 의지를 압도하는 운명도, 운명을 압도하는 의지도 가져본 적 없는 그에게는 그저 개소리로 들렸겠지만.
두목은 제 안의 환란을 다스리려는 듯 연신 고량주를 털어 넣었다. 독주가 삼켜질 때마다 숱 많은 회색 눈썹이 요란하게 꿈틀거렸다. 나는 아랫놈을 시켜 같은 술을 가져오게 했다. 고량주 특유의, 속이 타들어 가는 듯한 감각이 못내 그리웠다.
내가 한 병을 비우는 사이 그는 가까스로 흥분을 가라앉혔다. 그는 단전에서부터 끌어올린 한숨을 내뱉고는 본론으로 돌아갔다.
“일이 이렇게 된 이상 누구 하나는 책임을 져야 돼.”
침묵으로 응수하자 그가 시비조로 말했다.
“내가 지랴?”
그는 내가 두려워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니, 두려워하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처럼.
나는 천천히 운을 떼었다.
“책임 지우십시오.”
“뭐?”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의 얼굴에 반색의 기미가 번지기 전에 뒷말을 붙였다.
“쉬러 갈 생각도 없고요.”
“너 이 새끼….”
“저는 여기 있을 겁니다.”
“교수대에서 인생 종 치려고?”
“그렇다 하더라도.”
“그렇다 하더라도?”
두목은 화가 머리끝까지 나서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나는 움츠러들지도, 그것을 피하려 들지도 않았다. 재떨이는 어깻죽지를 강타한 다음 몇 개의 꽁초를 흘리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재떨이가 요란하게 바닥을 나뒹구는 소리가 어깨의 통증보다 신경을 거슬렀다.
그가 술잔에 담배를 비벼끄며 말했다.
“말이 많이 짧아졌네, 이상문이.”
상훈인 말이 길어졌다고 시비더니. 어느 장단에 춤추어야 하나. 나는 습관처럼 자조했다.
“그러다 짜바리한테 걸리면 어쩔 건데? 니가 입 잘못 놀리면 좆되는 게 누군데? 너를 뭘 믿고 한국에 풀어 놓는다냐. 말 같지도 않은 소리 걷어치우고.”
그는 다시 한번 봉투를 내밀었다. 나는 그 안에 든 걸 확인조차 하지 않았다.
“깔끔하게 다녀오자. 밀수 왕 하성룡이 사람 하나 밀항 못 시킬까 봐?”
“저는 한국을 떠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대체 왜!”
“차라리 아랫놈들 시켜서 절 쑤시라 하시죠.”
두목은 의자를 박차고 일어나 내 멱살을 틀어쥐었다. 나보다 작고 늙은 남자라 대단한 위협은 되지 못했다. 나는 허리를 숙여 그의 명분 없는 화풀이에 적극 협조했다. 우격다짐을 당하면서도 나는 물결 없는 호수처럼 평온했다. 그게 그의 화를 더 돋운다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아랫것들이 부두목 님, 부두목 님, 하면서 떠받드니까 눈에 뵈는 게 없나….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준다는데 닥치고 시키는 대로 할 것이지, 어디서 뻗대고 지랄이야…! 이번 일 아니어도 내가 너는 뽑아버리려고 했어. 속이 시꺼매 가지고, 언제 뒤통수를 칠지 알 수가 있나….”
“저는 누구의 뒤통수에도 관심이 없습니다.”
“얼씨구.”
“하지만 박창현은 다르겠죠.”
두목은 멱살을 풀고 날 밀쳐냈다. 하지만 내가 밀려나지 않았기에 그가 튕겨 나간 꼴이 되고 말았다. 그가 땀으로 흥건한 이마를 훔치며 말했다.
“박창현은 다르지. 이용 가치부터 달라. 동래파는 저절로 와해될 거야. 부산을 평정하고 나면 박창현의 인맥으로 정권에 줄을 댈 수 있겠지. 그러니까 이번 일은 박창현 빼고, 네가 안고 가야 돼.”
“어차피 박창현은 못 건드리지 않습니까. 누가 ‘박경립’의 아들에게 죄를 묻죠?”
곧 잡을 돼지를 살찌우듯, 두목에게는 입속의 혀처럼 굴어온 박창현이었다. 내게는 박창현에 의해 결정될 그의 최후가 보였다. 그러나 그것도 그의 운명, 그 몫의 비극이었다. 내게는 그를 구원할 의무가 없었다. 무엇보다 그 최후에 나는 이미 없을 터이니.
“그래서, 정 못 나가시겠다?”
“죄송합니다.”
“어디에 어떻게 숨어 있을 작정인데?”
“알아서 하겠습니다.”
“혹시라도 배신하면…. 네 가족의 안전은 보장할 수 없어. 아해, 그놈은 말할 것도 없고.”
배신할 생각은 애초에 없었으나 더더욱 그럴 생각이 없어졌다. 나는 홀가분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저는 가족이 없습니다.”
“호구 조사 끝낸 지가 언젠데….”
“그런 건, 가족이 아니에요.”
“얼씨구.”
“나는 가족을 죽이지 못해서 두목 밑에 들어온 겁니다. 그러니까.”
“미친놈의 새끼….”
“배신은 걱정하지 마십시오.”
깍듯이 인사를 올리고 룸을 나오려는데, 두목이 황급히 나를 돌려세웠다. 화가 다 식어버린 그는 몹시 혼란스러워 보였다. 마치 거대한 덫에 걸려든 초로의 맹수 같았다. 한 번도 걸려들어 본 적 없기에, 그는 덫의 실체를 가늠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대고만 있었다.
두목은 다시 한번 내 멱살을 틀어쥐었으나, 아까와는 그 기세가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이건 멱살잡이라기보단 답을 구하며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나를 몰아세웠다. 인간의 발소리가 가까워지기라도 한 듯. 공포에 질려.
“애초에 목적이 뭐였어…. 이 바닥에 들어온 진짜 목적이 뭐였냐고!”
나는 흐릿한 눈으로 그를 내려보다 처음으로 진심을 내비쳤다.
“가장 잔인한 형태로 죽을 수 있을 것 같아서.”
“…허.”
“그런 식으로라도 기억되어야 할 사람이 있으니까.”
나는 완력을 써서 다소 거칠게 그를 떼어냈다.
“말이 또 짧았네요. 공교롭게도.”
나는 피차 살아 마지막인 두목의 얼굴을 뒤로하고 룸을 나왔다. 뒤이어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와 다급히 다이얼을 돌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두목이 누구에게 전화를 거는지 알고 있었다. 그에게 어떤 명령을 내릴지도. 벌써부터 불의 냄새가, 불을 피워본 자의 냄새가 진동했다.
두목은 끝내 박창현의 실체를 알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배신을 인지할 겨를조차 없을지도 모른다. 그는 이미 타인이 설계하고 축조한 수라장에 들어와 있었다. 태생을 맹신한 것, 배신을 자신의 전유물로 생각한 것, 그게 그의 패착이었다.
중국집 옆 후미진 골목에 들어가 담배를 꺼내는데, 아랫놈 하나가 득달같이 쫓아와 불을 붙여주었다. 한때 내 밑에서 일을 배우던 녀석이었다. 요즈음에는 두목의 경호원 노릇을 하고 있었다.
그냥 담배 시중을 들러 온 줄 알았는데, 험악한 인상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리는 게 어째 낌새가 이상했다. 그는 담뱃불을 붙이는 와중에도 결의에 찬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불기운처럼 일렁이는 눈빛에 얼굴이 따끔거릴 지경이었다.
나는 찬물을 끼얹듯 말했다.
“두목 옆에 붙어 있어야 되는 거 아닌가.”
“지가 와 그래야 됩니꺼?”
그는 무람없이 불쾌한 기색을 드러냈다. 나는 연기를 길게 내뿜으며 일갈했다.
“명령이니까.”
“누구 명령인데예.”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그가 먼저 쏘아붙였다.
“지는 부두목 님 명령만 들을 겁니더.”
그는 두목을 새로 부임한 고아원 원장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듯했다. 어처구니가 없어서 웃음이 나왔다.
그가 다소 억울하다는 뉘앙스로, 그러나 굽히지 않고 말을 더했다.
“지는 두목이란 사람 뉴스에서 처음 봤는데예. 그런 사람한테 우째 충성합니꺼.”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곳은 애초에 바른말이 통용되는 세계가 아니었다. 깡패질로 출세를 꿈꾸면서 충성에는 순정을 따지는 아이러니. 그 역시 철없는 낭만을 버리지 못한 남자였다. 갑자기 피로감이 밀려들었다.
“두목이고 자시고, 행님께 무슨 일 생기면 내사 가만 안 둘 깁니더. 박창현이 금마도 마찬가지고예.”
그는 당장에라도 누군가를 죽여 없앨 듯 이를 갈았다. 그에게서 풋내 나는 살기가 뿜어져 나왔다. 마치 불구덩이에 달려들려고 날갯짓을 하는 불나방 같았다. 그의 열기, 그의 열망에 나는 도리어 차가워졌다.
“…병신 같은 새끼.”
“행님?”
그 얄팍한 낭만을 깨부수듯 있는 힘껏 그의 턱을 후려갈겼다. 그는 완전히 중심을 잃고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빳빳하게 다린 양복바지가 오물로 얼룩졌다. 그는 잠시간 신음하다 충격받은 얼굴로 날 올려다보았다. 찢어진 입가로 피가 흘러내렸다.
“너 후까시 잡으려고 깡패질 하고 있어? 착각하지 마. 그러다 뒤지면 누가 알아주기나 할 것 같아?”
냉랭한 일침에 그는 상처받은 표정을 지었다. 마치 충성이 아니라 사랑을 거절당한 사람 같았다.
“행님…!”
미련 없이 돌아서자, 그는 오물을 짚고 일어서면서까지 나를 따라나서려 했다. 두목이 그를 찾고 있을 거였다. 나는 그가 그토록 원하던 ‘명령’을 내려주었다.
“따라오지 마.”
잘 훈련된 군인처럼 그는 곧바로 움직임을 멈추었다. 그러나 쉽게 자리를 뜨지는 못했다. 마치 그다음 명령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나는 그의 충정에 강제로 종지부를 찍었다.
“우리는 모르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가 불을 붙여준 담배를 성가시다는 듯 내던지고 자리를 떴다. 내 명령에 따르고 따르지 않고는 이제 그의 선택이다. 그가 복수를 실행한다면 그건 나를 위한 충정이 아니라, 자신의 충성에 도취된 결과이리라.
무언가에 도취되지 않고는 살아갈 수 없는 남자들이 있다. 나는 그런 남자들이 싫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남자들이 속절없이 무너지고, 스스로 붕괴되는 과정은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그들이 내 무덤을 덮을 흙이 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다.
* * *
우리는 굶주린 짐승처럼, 혹은 쫓기는 짐승처럼 어디서고 붙어먹었다. 마음 편히 몸 누일 곳이 어디에도 없어서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혹은 훗날 이르게 서로를 만지지 못하게 될 것을 알았는지도.
너는 참 말랐었다. 아무리 챙겨 먹여도 도통 살이 붙지 않아서, 한번은 아버지가 녹용으로 약을 지어왔다. 입이 짧은 너는 쓰디쓴 약을 삼켜내느라 고역을 치렀지만, 약은 전혀 효과가 없었다. 어머니의 체질을 물려받은 탓이었다.
우리가 몸을 겹칠 때면 너는 두 다리로 내 허리를 옭아매곤 했다. 주먹을 쥐어 수중에 든 것을 확인하듯 내 온도, 내 존재, 내 형태를 그런 방식으로 확인하려 했다. 하지만 허벅지에 살이 너무 없어서 네 속박은 자꾸만 헐거워졌다.
그럼에도 너는 미끄러지는 다리를 거듭 감아오며 필사적으로 날 끌어당겼다. 내가 생명줄이라도 되는 양, 너는 나를 놓치려 하지 않았다. 그 어딘가 야무지지 못한 구속력, 연약하지만 끈질긴 소유욕이 나는 기뻤다. 적어도 너에게 욕심이 나는 남자이고 싶었으므로.
너는 꼭 하나로 뒤엉키는 와중에 뜬금없이 무언가를 물어왔다. 이를테면 내가 눈이 돌아 너를 거칠게 몰아붙일 때라든지, 사정감을 참아내며 질척이는 네 안에서 숨을 고를 때. 그럴 때. 가느다란 허벅지로 날 옥죄며 일종의 괴롭힘처럼 입술을 달싹였다.
“날, 사랑해…?”
너는 내 고백의 온기가 채 가시기도 전에, 사랑에 목마른 사람처럼, 한 번도 그 말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처럼, 태연하고 애처롭게 물어왔다.
확신범. 나는 그런 네가 밉지 않았다.
“얼마나, 아…. 사랑하는지…. 말해 봐.”
눈이 풀리고 몸이 휘늘어진 상태에서도 어디 그럴 정신이 있었는지, 접합되어 들락날락하는 내 것을 감아쥐며 너는 대답을 종용했다.
“이거 말고.”
너는 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어 당겼다 놓아준 뒤 입술이 스치는 거리에서 속삭거렸다.
“이걸로 해 봐.”
너는 내 입에 뭘 물리면 효과적인지 아는 주인이었다. 내게 꼬리가 있었다면 그건 아마도 24시간 너를 향해 흔들리고 있었을 거다. 심지어 잠을 자는 동안에도.
“사랑해.”
조금은 되받아치고 싶은 기분이 들어, 더는 처박을 수 없는 데까지 단번에 나를 다 처박은 다음 네 턱을 움켜쥐고 말했다.
“…너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들이 이해가 안 돼.”
너는 물리적 충격과 중독된 쾌감에 몸을 떨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내가 아니면 건드려지지 않는 곳이 간질거려 견딜 수 없다는 듯, 애타게 입을 맞춰왔다. 부풀어 오른 속살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내 것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래도 사랑해달라는 듯이. 그보다 더 사랑해달라는 듯이.
그러면 너는 숨이 고갈된 목소리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를…. 그렇게까지 사랑하는 네가…. 이해가 안 돼.”
하지만 난 알고 있었다. 너 역시 날 그렇게까지 사랑하고 있다는 걸. 나는 내가 널 사랑하는 것보다, 네가 날 더 사랑하길 바란 적이 없었다. 그런 건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그건 엄연한 월권이었다. 사실 넌 날 사랑할 필요도 없었다. 그랬으면 오히려 좋았을 것이다.
사랑을 배불리 알고 나서, 이렇게나 굶주릴 줄 알았다면.
* * *
아버지의 제사를 지내느라 자정을 넘겨 귀가했다. 집에는 아직 불이 켜져 있었다. 사방이 암막한 가운데 포근히 번지는 불빛이 흡사 등대 같았다. 돌아오라고 아직은 손짓하는 불빛에 가까스로 걸음을 떼었다. 길 잃은 파도 소리가 뒤를 따랐다.
초인종을 누르자 아해가 맨발로 뛰어나와 나를 반겼다. 아해는 취조하듯 내가 무사한 것을 확인하고서는 커피를 내왔다. 이삿짐을 꾸려놓은 터라 집이 어수선했다. 등이 다 되었는지 불을 켜두었는데도 어둑한 느낌이 들었다.
내일이면 버려질 소파에 나란히 앉았다. 아해가 소파 여기저기를 만지며 투덜대었다.
“완전 새 건데. 이거 주워가는 사람은 땡잡은 거다, 그쵸?”
궁지에 내몰린 상황에서도 알뜰하게 구는 아해가 우습기도 하고, 한편으론 대견하기도 했다. 나는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래도 중고는 중고 아닐까.”
“이럴 줄 알았음 어디 내다 팔기라도 할걸. 아까워 죽겠어요.”
“…죽진 말고.”
두목의 경고 때문일까. 아무 의미 없이 하는 말에 신경이 곤두섰다.
“우린 이제 어디로 가요?”
“글쎄.”
“나 안 버릴 거죠?”
“아해야.”
“형 따라갈래요.”
눈치가 빠른 아이답게 선수를 쳤다. 예상하지 못한 바는 아니었다. 나는 대답을 유예하고 커피를 마셨다. 아해는 전에 없이 얌전했다. 대답을 재촉하지도, 원망을 표출하지도 않았다. 그저 바른 자세로 앉아 의연한 태도로 날 기다릴 뿐이었다.
그러나 그 눈에는 정작 불안이 넘쳐 흘렀다. 여느 아이라면 불안을 눈물로 치환해 울며불며 매달렸을 것이다. 돈과 먹을거리를 구걸하며 살아왔으나, 사람에게 애정을 구걸하지는 않는 아이였다. 어쩌면 그것까지 구걸할 여력이 없었는지도 모른다. 그러다 습관이 되어버렸는지도.
나는 체념하듯 말했다.
“…좋은 꼴은 못 볼 거야.”
“난 괜찮아요. 언제는 좋은 꼴 보고 살았나?”
그제야 긴장이 풀렸는지, 아해는 소파 깊숙이 몸을 묻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산만하게 종아리를 까딱거리며 말했다.
“아, 목마르다.”
아해는 내 커피를 가져가 한 모금 삼키더니 곧장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안이 거의 비워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왔다. 아해는 그걸 벌컥벌컥 마신 뒤 돌연 생각에 잠겼다. 문득 불그스름한 머리칼이 눈에 들어와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었다. 아해는 가만히 그 손길을 받아내다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만약에 말이에요.”
“응?”
“과거를 딱 하나만 바꿀 수 있다면, 형은 뭘 바꾸고 싶어요?”
불쑥 들어온 질문에 가슴 언저리가 뻐근해졌다. ‘만약’은 내게 너무 치명적이었다. 나는 차마 ‘만약’을 가정해 보지도 못했다. ‘만약’을 허락하면 그게 암세포처럼 증식해 날 무너트릴까 봐. 우리 가족의 역사, 너와 나의 내력은 지울 수 없는 것으로 써 내려진 것 같아서. 문신처럼 한 땀 한 땀 몸 전체에 새겨진 듯해서.
그래서였을까. ‘만약’을 가정하려 하면 살이 뜯겨 나가는 듯 몸이 아파 왔다. 나는 모처럼 그 아픔을 자처했다.
“…내가 목줄을 쥘 거야.”
“네?”
“그 사람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끌려가지 않고, 내가 끌고 가 보고 싶어.”
“왜 못 그랬는데요?”
“너무 말 잘 듣는 개였거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아해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이요?”
“혀를 깨물어가며 그랬지.”
“아니, 왜….”
“그런 게 사랑인 줄 알았어.”
“잘못 배웠네요.”
“정확히 말하면 배운 적이 없었지. 우리 둘 다.”
나는 마른침을 삼킨 다음 말을 이었다.
“그런데도, 그렇게 하고 싶었어. 그게.”
내 회한이 커피보다 쓰게 느껴졌는지 아해는 아까보다 더 깊게 미간을 찌푸렸다. 나는 습관처럼 자조했다. 자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남아 있지 않았다.
“우스운 이야기지.”
“하나도 안 웃긴 얼굴인데요. 그냥 바보 멍청이 같아요.”
나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아해는 원래 입이 험한 아이였고 ‘바보 멍청이’ 같은 말은 애교나 어리광에 가깝다는 걸 알기에, 혼을 낼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런데.
“제가 기어오르면 혼 좀 내주세요. 혼조차 안 내주면 진짜 서운하다고요.”
“아해야…. 김아해.”
아해에게 해준 게 많지는 않지만 그래도 남기고 싶은 말이 있었다.
“니체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했어.”
“니…. 뭐요?”
“괴물과 싸우는 사람은 그 싸움 속에서 스스로도 괴물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괴물의 심연을 오랫동안 들여다본다면 그 심연 또한 우리를 들여다보게 될 것이다.”
“흐응.”
“괴물과 싸우려고 하지 마. 괴물과 싸우려다, 괴물이 되지 마라.”
“박창현 이야기인가요?”
“그래. 나는 네가 평범하고 행복하게 살아주었으면 좋겠어.”
정신이 아찔할 정도로 달달한 그 커피처럼, 그만은 세상의 모든 즐거움을 만끽하길. 나는 진심으로 기원했다.
그러나 돌아온 것은 뜻밖에도 가시 돋친 말이었다.
“당신이 그러지 못해서요? 아니, 당신들이 그러지 못해서?”
아해는 내 거짓 애정을 진작에 간파하고 있었다. 그러나 아해가 그마저도 아쉬워 나를 놓지 못한다는 사실을 나 역시 간파하고 있었다. 그 역시 굶주린 개였기에. 목을 물릴지 모르는 들개에게라도 의지하여 삶을 구가하는.
아해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말했다.
“괴물이 되면 어때서요…? 괴물이 되면 왜 안 되는데요!”
둔기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나는 문득 네게 묻고 싶어졌다.
왜 우리는 인간이려 했을까. 어째서 그것까지 욕심냈을까.
그게 우리의 패착이었다.
“난 내가 하고 싶으면 해요. 그래서 돈도 삥땅쳤고. 괴물이 되고 싶으면 괴물이 될 거예요. 이래라저래라 하지 마세요. 나 끝까지 책임져 줄 거 아니면. 어차피 형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아해가 쏘아붙였다.
“이미 죽은 사람이라면서요.”
설마하니 그 말을 주워들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위로하듯 손을 내뻗었으나 이내 스스로 거두어들였다. 섣부른 위로는 슬픔의 무게만 더할 뿐이었다.
아해는 악착같이 눈물을 참아내며, 그러나 눈물겨운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 형님한테는 건방을 떨었지만…. 사실은 나 매달리고 싶어요. 나 때문에라도 죽지 말라고. 아니, 누구 때문에라도…. 무엇 때문에라도 죽지 말라고….”
“…내가 너를 잘못 거뒀구나.”
“그러니까, 그런 점이 제일 못됐다고요!”
아해는 분통을 터트리면서도 그 이상 나를 몰아세우지 않았다. 지나치게 눈치 빠른 그 아이가 나는 때로 못 견디게 안쓰러웠다. 눈치를 핑계 삼아, 포기를 정당화하는 듯해서.
“어? 꺼지려고 하네.”
조도가 낮아진 등이 기어이 가물거렸다. 아해가 이삿짐을 뒤적여 초를 찾아왔다. 불을 밝히려고 라이터를 켜는데, 오래된 기억 하나가 불현듯 머릿속에 점화되었다.
“어릴 때…. 아버지가 뱀을 잡아 와 짚단에 가두면, 내가 거기 불을 놓았어. 불 작업은 꼭 날 시켰지. 뱀이 다 구워지면 우리 형제는 그것을 나누어 먹었다.”
“으…! 뱀을 먹었단 말이에요? 내가 앵벌이 하면서 안 먹어본 게 없는데, 그래도 뱀은 없네요.”
“내 별명은 독사였다. 독이 들어찬 이 몸뚱이로 무고하고 유고한 사람들을 희생시켜 왔지…. 이제 나는 지쳤어. 더 타오를 데가 없어. 불씨를 뒤적거릴 힘도 없는 지금에서야 나는 인정한다. 이번에 잡아먹힐 뱀은 독사, 이상문이라고.”
“혀엉.”
“내가 만든 짚단 속으로, 내가 걸어 들어가는 거야.”
“차라리 괴물이 되지 그랬어요….”
나는 비리게 웃으며 말했다.
“좀 더 빨리 알려주지 그랬어.”
아해를 다독이며, 나는 내가 박창현에게 품고 있던 감정을 비로소 이해했다. 나는 ‘괴물이 되길 두려워하지 않는 자’의 여정이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인간이기를 포기했을 때 나아갔을 어떤 길을, 그를 통해 걸어 보고 싶었던 것이다.
돌이켜 보면 우리의 선택은 언제나 위선과 위악으로 점철되어 있었다. 우리는 그것밖에 선택할 줄 몰랐다.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는 줄 알았다. 그게 어른의 선택이라 믿었다. 기실 우리는 지독한 겁쟁이일 뿐이었다. 그런 주제에 세상에서 가장 겁나는 사랑에 몸을 던졌고, 겁 없이 그 사랑에 몰두했다.
언젠가 너에게 보낸 연서에 나는 이렇게 적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포기해야만 해.
포기한 줄 알았다. 그러나 포기한 적 없었다.
우리의 관계에 종지부를 찍던 날. 나는 네게 말했다.
우리 평생. 다시는 만나지 말자.
죽어서도 만나지 말자는 말은 할 수 없었다.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다음 생애까진 포기할 수 없어서. 사후세계를 믿은 적 없지만, 그 실낱같은 가능성을 잘라버릴 용기가 내겐 없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죽어서라도 잊고 싶었다. 나는 두려웠다. 어쩌면 죽은 줄도 모르고 계속해서 널 기다리는 건 아닐까. 버려진 줄도 모르고 한 자리에서 주인을 기다리는 개처럼. 평생을 그렇게 살아온 것은 아닐까.
아해를 들여보내고 불 꺼진 거실에 홀로 남아 술을 마셨다. 무겁게 차오른 달이, 완만히 물결치는 수면 위로 상아색 빛줄기를 흘리고 있었다. 그 빛줄기가 밤의 어둠으로 재워진 바다를 반으로 가르고 있었다. 그 움푹한 빛이 밤의 속살처럼 느껴졌다.
거듭되는 파도 소리를 안주 삼아 술잔을 기울였다. 나는 그 소리에 불안을 느끼면서도, 그게 들리지 않으면 다른 방식으로 불안해졌다.
숲의 소리. 파도의 소리.
사랑하는 이의 심박처럼. 계속해서 말을 걸어오는 원시의 소리들.
나는 언제나 그것들에 귀 기울여 왔다. 외계에서 온 듯 너라는 사람이, 너만의 아름다움이, 내겐 불가해했으므로. 불가해한 영역의 부름에 귀 기울여 왔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관계가 이 세상보다는 야만에서 이해되는 것이어서 그랬는지도.
한 병을 다 비우고 나는 어느새 전화기 앞에 서 있었다. 나는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사람처럼 다이얼을 돌렸다. 수차례 통화 대기음이 오가고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는 언제나처럼 침묵했다. 까마득한 너와의 거리에 이미 어두운 세상이 더욱 어둑해졌다. 나는 침묵이 끼어들기 전에 다급히 말했다.
“끊지 마.”
침묵.
어둠이 내 어깨에 손을 올리고 등을 떠밀었다.
마지막 기회인 걸까.
“보고 싶다. 보고 나니까 더 보고 싶어.”
다시 침묵.
나는 멈추지 않았다.
“언제나 그랬다. 너를 향한 갈증이 채워진 적 없어. 함께하던 시절에도 그걸 알았다. 죽을 때까지. 죽어서도 목말라하리란 걸 알고 있었다. 알면서도 시작했고, 알면서도 끝냈다.”
침묵 속에 한숨 소리. 숨을 집어삼키는 소리.
“답지 않게 말이 길었다.”
침묵 속에 흐느끼는 소리. 그걸 참는 소리.
네가 울고 있다. 먼 곳에서. 혼자.
어쩌면 내가 전화를 걸 때마다 그랬는지도 모른다.
너는 언제나 숨기는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너는 아직 나를 사랑한다.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고.
나는 아직 너를 사랑한다. 차라리 미쳐버린 사람처럼. 그러나.
“안녕.”
우리는 거듭 이별한다.
이게 생의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너는 알까.
옹알이 같은 고백을 쏟아내고 나는 수치심을 느꼈다. 어둠 속에 발가벗겨진 기분이었다. 그랬다. 이제 나는 더 이상 삶이라는 너덜너덜한 옷을 주워입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참 오랫동안 알몸인 채로 너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젠 그마저도 그만두어야 할 때다. 상윤아.
이상윤.
널 사랑하면서 발밑이 존재했던 적 없었다. 그러나 넌 그 추락마저도 황홀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파도 소리와 함께 네 눈물이 밀려든다. 그러나 그것은 내 영혼의 그림자만을 적시고 이내 뒷걸음질을 친다. 나는 눈먼 사람처럼 파도 소리에 섞인 네 울음을 더듬었다. 울고 싶었으나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울기에 나는 너무 지쳐 있었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에 고장 나 있었다.
* * *
돌이켜보면 너와 나의 행복했던 시간은 대부분 붉은색으로 점철되어 있다.
서울대의 단풍. 여인숙의 붉은 조명.
그리고 항구의 석양까지.
너는 종종 내가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항구로 찾아오곤 했다. 내가 일을 마치고 나오면, 너는 부둣가에 앉아 바다를 구경하고 있었다. 나는 교복을 입은 단정한 뒷모습을 충분히 감상한 뒤 네 옆에 앉았다. 그럼 너는 당연한 절차처럼 교모를 벗어 내 무릎 위에 올려놓곤 했다.
네가 석양빛을 듬뿍 머금은 얼굴로 나를 반겼다.
“늦었네.”
네 얼굴은 사금이 떠다니는 강물처럼 반짝이고 있었다. 네 안에 가라앉아 있던 금빛 영혼이 일순 표면으로 떠오른 듯했다. 그 반짝임의 온도를 확인하듯 네 뺨에 손을 대었다. 너는 상아색 솜털을 가진 어린 새처럼 보드랍고 따뜻했다.
“많이 기다렸지.”
내 말에 너는 가뿐하게 웃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빛이 스며드는 정도에 따라 네 눈동자의 농담이 달라졌다. 보석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한 그 눈동자에, 그 야릇한 아름다움에, 나는 가슴이 뭉클해졌다. 그을린 마음의 밑바닥이 너로 인해 젖어 드는 느낌이었다. 그런 내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너는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것 좀 봐.”
저녁뜸이었을까. 바다가 잔잔했다. 그 완만한 수면 위로 태양은 원혼 같은 빛의 무리를 펼쳐 놓았다. 나는 저녁의 포문을 여는 붉은빛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왜일까. 석양으로 뒤덮인 바다를 보고 있으면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추락의 공포를 모르는 짐승처럼, 거기서 뛰어내리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나는 네 손을 더듬어 깍지 껴 잡고 교모로 그 위를 덮었다. 그러면 불안은 썰물처럼 물러가고, 네 존재만이 남아 나를 지탱했다. 그랬다.
내게는 황혼마저도 너였다.
해는 빠르게 저물어 갔다. 석양빛이 스치는 자리마다 항구는 낮의 활력을 잃고 검붉게 녹슬어 갔다. 정박한 배들도, 기립한 크레인들도, 그 앞에서는 밤을 맞이하는 야생 동물들처럼 숙연해졌다. 태양은 늘어진 빛들의 머리채를 휘감아 질질 끌고 갔고, 바다는 우리의 발밑에서부터 검게 멍들어 갔다. 우릉우릉 소리를 내지르는 듯한 빛의 침몰 앞에서 너는 다소 경건해 보였다.
한껏 벅차오른 목소리로 네가 말했다.
“언제 봐도…. 가슴이 먹먹해진단 말이야.”
“기분이 묘하지.”
“저 너머엔 뭐가 있지? 일본인가?”
“일본도 있고, 더 나아가면 다른 나라들도 있겠지.”
“신기하지? 항구에만 오면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져.”
부산을 떠나지 못해 대학도 P대로 정해놓고는, 아무튼 말은 잘했다. 너는 가능 여부를 따져 보지도 않고 꿈같은 소리를 했다.
“미국에 가서 살면 어떨까?”
나는 건성으로 대답했다.
“미국을 가도 좋겠지.”
“거기선 우리도 평범해질 수 있을까?”
뜻밖의 말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너는 여전히 낙조를 응시하고 있었으나, 그 자체로 서글퍼 보였다. 황혼은 그런 시간이었다. 아직 저물어 보지 않은 이들도, 이미 저물어 가는 것들의 애수를 알아차리는.
너는 나를 기다리지 않고 스스로 답을 내어놓았다.
“우린 참 이상하지.”
너는 어떤 그늘도 어떤 사사로움도 없이 환히 웃었다. 석양빛이 엉겨 붙은 속눈썹이 잔물결처럼 반짝였다. 너는 항구에서 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그곳에서는 너도 떠날 수 있는 이였기 때문이리라.
나는 항구에서 너와 함께하는 시간을 좋아했다. 나는 그곳에서 직업을 가지고, 내 몸 하나로 돈을 벌고 있었다. 그건 나를 어른으로 느껴지게 했다. 또, 항구에 있으면 나는 네가 때로 동생처럼 여겨졌다. 나는 양복을 입는데 너는 교복을 입어서였을까. 너 역시 학교와는 다른 그 생업의 공간에서 조금은 위축되고, 조금은 철모르게 행동했다. 그 관계의 전도가 나는 꽤 흥미로웠다.
항구는 숲의 폐쇄성과 반대되는, 개방성으로 만들어진 장소였다. 내가 암흑가에 입성할 때 용두파를 고른 이유도 조직의 기반이 항구에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어디로든 돌아가고 싶었다. 네가 없으면, 네가 머물렀던 자리에라도.
대화는 잠시뿐, 해넘이를 보고 있으면 우리는 점점 말이 없어졌다. 해가 수평선에 아슬아슬하게 걸리면 너는 꼭 내 어깨에 머리를 기대왔다. 나는 배를 단단히 정박시키듯 네 손을 힘주어 잡아끌었다. 그 손은 교모를 떨어트리며 내 심장 위에 안착했다.
낙조의 시간 내내 너는 내게 온전히 기대어 있었다. 만성 통증이 된 불안과, 그럼에도 감미로운 사랑과, 그때까지만 해도 달콤했던 슬픔을 우리는 공유하고 있었다. 우리는 황혼을 낭만으로 바라보았다. 그게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핏빛 미래의 전조인지도 모르고.
해가 넘어가는 만큼 목이 메어왔다. 너 몰래 삼킨 고독이 목 언저리에서 꿈틀대었다. 나는 기도하듯 네 손등에 길게 입을 맞추었다. 다시 거칠어지는 파도 위로, 얼마 남지 않은 우리 생의 환희가 반짝이고 있었다.
* * *
다대포의 집에서 보내는 마지막 날.
베란다로 나가 황혼 녘의 바다를 내다보았다. 퇴거를 앞둔 하루의 빛이 어깃장을 부리며 천지를 핏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달구어지는 철처럼, 바다가 뜨겁게 출렁이고 있었다. 그 장려한 풍광을 보고 있으니 수많은 회한이 밀려왔다. 불살라지는 하늘도, 나도, 어느덧 황혼이었다.
거대한 불구덩이 같은 태양이 또 다른 불의 기억을 소환해냈다. 피난민촌에서 피워지던 불. 짚단에 끼어 죽어가던 뱀들. 나는 뱀들의 최후를 지켜보며 생각했다. 우리는 저렇게 끝나지 않을 거라고. 그처럼 세상에 압살당한다 하더라도, 적어도 함께일 거라고.
그랬는데.
그마저도 아니 될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우리는 각자 포획되어 각자 잡아먹힐 운명이었다. 벼랑 끝에 선 지금에서야 그것을 안다.
나는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오랫동안 지갑에 넣어 다녀서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된, 그 옛날 기차표였다. 나는 담배를 꺼내 물고 불을 붙인 다음 기차표에도 불을 붙였다. 망설임이 없었던 것은 아니나 결국은 그렇게 했다.
기차표는 이내 재가 되어 핏빛 허공으로 흩날렸다. 나는 잘려나간 신체의 일부를 보듯, 재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나는 신음 같은 웃음을 흘렸다. 그래. 우리는 이미 타버린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이제는 재가 되어 흩날릴 때다. 내가 네게 보냈던 그 수명 짧은 연서들처럼.
그러니까 이건, 너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다.
멀지 않은 날, 나는 죽는다. 내가 그걸 선택했기 때문에. 죽음을 목적으로 이 길을 걸어왔기 때문에. 지금의 삶이, 삶의 흉내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나는 이제 완전히 실패해보려 한다. 그리고 이것은 아마 처음으로 너를 고려하지 않은 선택이 될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아.
단 한 번 우리 함께 서울에 간 적이 있었지. 나는 그곳이 우리의 정착지라고 생각했다. 사람이 숲을 이루고 시선이 벽을 쌓는 그곳이라면, 우리의 은신처, 너와 나의 보호색이 되어줄 거라고. 나는 거기서 너와 함께 사는 꿈을 꾸었다. 그건 내가 유일하게 가져본 꿈이었다. 그리고 영원히 내 소유의 꿈으로 남았다.
그러나 너는 언제나 비극이 도사리는 또 다른 숲으로 갔다. 비극에도 인력이란 것이 있다면 너는 명백히 그에 이끌리는 사람이었다. 숲에서 울려 퍼지는 비명을 들으면서도, 숲속에서 피어오르는 그을린 살 냄새를 맡으면서도, 너는 홀린 듯 발걸음을 옮겼다. 내게는 비명이 들리는데.
네 비명이 들려오는데.
네게는 들리지 않는 건지.
너는 항상 이끌린 듯 거기로 갔다. 그 숲에 이끌리는 것이 너인지 너의 운명인지 나는 알 수 없었다. 정답은 언제나 네 손에 쥐어져 있었다. 내 심장과 함께.
사랑하는 사람아.
나는 들개로 태어났다. 그러나 나는 너의 개로 살고 싶었다. 네게 뼛속까지 길들여지고 싶었다. 그래서 너에게 목줄을 물어 갖다 바쳤다. 너는 손쉽게 나를 길들였다. 나는 네가 키우고, 너를 따르는 개였다.
그러나 주인을 잃고 나는 다시 들개로 살았다. 그럼에도 내 목줄은 네가 쥐고 있었다. 네가 멀어질수록 이 목줄이 내 숨통을 조여오는 걸 너는 알까. 그리고 종국에는 숨통을 끊어놓겠지.
내가 줄을 당기면 너는 끌려올까. 줄을 끊고 떠나갈까. 내가 줄을 당겨 가는 곳은 죽음일 텐데.
결국 나는 들개로 죽을 것이다.
네가 있는 곳을 향해 머리를 두고서.
파도 소리가 들려온다.
네 울음소리가 밀려온다.
겹겹이 쌓인 숲의 기억이,
잿더미가 된 숲의 시간이 덮쳐온다.
급류가 되어버린 비극이 숲을 떠나 우릴 뒤쫓고 있다.
시작과 끝이 같은 숲.
검은 숲.
출구가 없는 숲.
그 숲으로 너를 불러들인다.
이번엔 네가 내 등을 보겠구나.
사랑하는 사람아.
너는 먼 곳에서 운다.
그리고 난 울지도 못하고 그걸 듣고 있어.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