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 이방인의 노래 (11/12)

외전 - 이방인의 노래

불쾌한 꿈이다.

불쾌한 것은 무엇도 등장하지 않지만 무척이나 불쾌하다. 종종 이런 꿈을 꾼다. 불현듯 스치는 저녁의 바람처럼 꿈은 아무런 예고 없이 나를 방문한다. 색도 냄새도 소리도 없는 꿈. 그 꿈에는 수많은 것들이 결여되어 있다. 꿈속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꿈은 존재한다.

그 꿈의 끄트머리. 나는 그의 기척을 느낀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도화지에 점을 찍듯 그는 내 의식의 귀퉁이를 찢고 들어온다. 잠들어 있는 동안 그는 쭉 내 곁에 있다. 나는 그의 가슴팍에 기대어 그의 체취를 맡으며 그의 체온에 이완되어 잠든다. 그러나 잠들고 나면 나는 완벽히 혼자다. 그러나 괴로워하지 않는다. 나는 감정의 진공 상태에 놓여 있다. 무의식이 한 몸으로 뒤엉켜 있는 그와 나 사이를 갈라놓는다.

사방이 새하얀 벽으로 둘러싸인 어떤 방.

그는 없고 나는 망연자실 주저앉아 있다. 방은 어디서 본 듯 눈에 익고, 밀가루 입자만큼이나 건조하다. 그러나 나는 녹아내린다. 방은 색(色)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림자조차 흡수해버리는 새하얀 공간은 나를 구성하고 있는 수많은 색을 모조리 빨아들인다. 이윽고 나는 방과 다를 바 없이 투명해진다. 주위를 둘러보아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산 정상에 쌓인 만년설처럼 한 점 티끌도 허용하지 않는 순백뿐. 나의 시계(視界)가 하얗게 바랜다.

그 벽에 희미하게 그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 이윽고 벽 한가운데를 뚫고 튀어나온 그의 손이 잠든 내 얼굴에 닿는다. 그의 검지가 부드럽게 내 눈꺼풀을 쓰다듬는다. 그윽한 향기가 난다. 마른 종이가 불에 타들어 갈 때 나는 고동색의 냄새. 그의 냄새다. 그의 손가락이 저공비행하는 비행기처럼 내 얼굴 위를 떠다닌다. 불을 지른 손. 내 몸 깊숙한 곳을 떠도는 손. 내 수면의 장막을 활활 불태우는 손이다. 나는 철봉에 매달리듯 그의 손목을 붙든다. 그는 커다란 손으로 내 두 눈을 가리고 잠긴 새벽의 목소리로 속삭인다.

“아직 다섯 시야.”

가늘게 눈을 떠 보지만 시야가 어둡다. 아직 그의 그림자 속이다. 손가락의 미세한 틈으로 그의 얼굴이 오려낸 사진처럼 나를 향하고 있다.

“더 자.”

그로부터 평온한 수면이 시작된다. 그의 목소리는 물기 없는 고운 모래로 변하여 나의 비인 틈으로 스며들고 완만한 파도처럼 잠이 밀려온다. 꿈속으로 완전히 침투하지 못한 그는 파도에 이끌려 사라진다. 파도는 꿈마저도 쓸어가 버리고, 나는 꿈이 없는 잠 속으로 도래한다. 눈을 뜨면 그가 있다. 그 믿음이 없다면 나는 과연 잠들 수 있을까. 아무도 모르게 축조한 불면의 시간들. 그가 아니면 누가 나의 구조를 알겠는가. 그가 눈을 떴을 때 나는 없다. 그는 벽 너머에 있다. 그는 나보다 고독하다. 꿈속에서 나는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만을 위한 노래를.

* * *

아침부터 집이 시끄럽다. 도둑이 든 것이다. 빨래 도둑이었다. 상훈이 월급을 모아 큰맘 먹고 산 캔톤 청바지를 한 번 입고 빨아 널어둔 사이 누군가 훔쳐갔다. 색이 기가 막히게 빠진 그 비싼 청바지는 이제 다른 이의 유행이 되겠지. 나는 묵묵히 식사를 한다. 사람의 집념이란 무서운 것이다. 청바지 한 벌을 훔치기 위해 도둑은 한밤의 숲을 뚫고 이 집에 당도하여 어둠 속을 헤매었을 것이다. 그는 타는 목마름으로 쫓았으리라. 캔톤 청바지를. 초가을의 깃발처럼 펄럭이는 바짓단을. 그는 도대체 몇 겹의 어둠을 헤쳤을까. 타인의 집념에 진절머리가 난다.

어머니는 그깟 청바지 따위는 관심 없다는 듯한 얼굴로 거울을 들여다보며 립스틱을 칠하고 있고 아버지는 못마땅한 눈으로 상훈을 흘겨보고 있다. 상원인 그저 먹는 일에 몰두하고 있고 그는 나갈 준비를 마쳤다. 그는 최근에 양복을 입는 일이 잦아졌다. 용역뿐 아니라 영업 쪽에도 돌려지고 있는 모양이다.

양복을 입은 그는 외화 속의 남자 주인공만큼이나 근사하다. 체격도 좋거니와 함부로 타인의 틈입을 허용하지 않는 차가운 분위기가 치밀하게 재단된 양복의 실루엣과 딱 맞아 떨어진다. 넥타이를 맨 그는 다분히 금욕적이고 어른스럽다. 그에 비해 고등학교 교복을 입은 나는 왠지 미성숙한 존재로 느껴진다. 나는 괜스레 교복 모자를 눌러쓰며, 챙에 가려진 눈으로 양복 아래 감추어져 있을 그의 몸을 그린다. 지난밤 내가 수없이 어루만진 몸. 오래전 내가 유혹한 몸. 내가 다시 만든 몸이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 밥알을 씹어 넘긴다.

지난밤, 누군가 몰래 내 방에 들어왔다. 익숙한 방문이었다. 침입자는 몇 년 전부터 심심찮게 내 방을 드나들고 있었다. 나는 그 불청객이 언제 처음 내 방에 몰래 다녀갔는지 정확히 알고 있다. 초심자의 허술한 습성을 그대로 보여주듯, 그는 바닥에 책 한 권을 떨어뜨린 채 도망갔다. 이후 침입자는 점점 숙련되어 티끌만한 흔적도 남기지 않을 만큼 신중해졌지만, 나는 직감으로 알 수 있었다. 그는 무엇 하나 흐트러트리지 않는 법을 몸에 익혔으나 의혹을 추스르는 법은 배우지 못했다. 그가 잠입한 날이면 방 곳곳에 스민 짙은 의혹의 냄새가 코를 쑤셨다. 누군지 짐작이 가고도 남았지만 화를 내지는 않았다. 익숙한 일이다. 누구든 나를 들여다보고 싶어 한다. 누구든 나를 부수고 싶어 한다. 둘 중 어느 감정에도 흔들리지 않고 조용히 걸어 들어 온 것은 오직 그뿐이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니. 왜. 더 먹지 않고.”

아들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은 아버지의 얼굴이 거북스럽다. 그의 사랑은 걱정이란 형태로 치환되어 표출된다. 나는 그가 나를 걱정하지 않았으면 싶다. 그는 혈연의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고 있으나 나는 사실 혈연의 권리조차 지니고 있지 않으므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그의 애정은 내 안에 누적되지 못하고 외부로 주룩주룩 흘러내린다. 나는 애써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배불러요.”

“살이 좀 붙어야 할 텐데….”

“체질이에요. 당신. 상윤이 일에 자질구레하게 신경 좀 쓰지 마요.”

야멸찬 어머니의 말이 길게 늘어지는 아버지 애정의 꼬리를 자른다. 어머니와 나는 잠시간 서로를 마주 본다. 둘 중 누가 먼저 눈을 피할 때까지 우리들의 씨름은 계속된다. 나는 항시 나를 의심한다. 내가 적의 배를 통해 태어났기 때문이다. 우리들은 끝내 누구도 눈을 피하지 않았다.

“그만 나가자.”

그의 부름에 팽팽히 유지되던 찰나의 대립이 끝을 맺는다.

“형. 잘 갔다 와.”

“그래. 너도 공부 잘하고.”

수저를 든 채로 손을 흔드는 상원에게 나는 가볍게 웃어 주었다. 상문은 간결한 목례로 인사를 대신한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다. 그의 얼굴은 굳어 있는 시간이 더 많다. 그가 문을 여는 동안 나는 과묵한 등을 바라보고 있다. 말은 불필요하다. 침묵이 담요처럼 나를 덮는다. 친밀한 침묵이 담요처럼 포근하다.

“쌀쌀하다.”

집을 나서자 비로소 그의 말문이 트인다. 아침의 서늘한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그와 나 사이로 훅 밀려들었다. 멀리서 새소리가 들린다. 새의 노랫소리는 흡사 떨어뜨린 동전들이 내는 청량한 마찰음을 닮았다. 갑자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이것은 버릇이다. 문을 통과할 때마다 -들어설 때든 나설 때든- 심장이 주저앉는 것만 같다. 문은 경계다. 나는 경계에 짓눌리는 것이다. 그는 그런 나를 잘 알고 있다. 그는 가만히 나를 부축한다. 고작 몇 초 안 되는 시간이지만 우리들은 멈추어 있다.

“누가 훔쳐갔을까?”

나는 관심도 없는 말을 띄워본다.

“글쎄.”

“대단하지 않아? 그거 하나 훔치겠다고 이 구석진 곳까지 오다니.”

“그 정도로 열망했던 거겠지.”

“고작 바지 하나에?”

“무엇이든.”

“끔찍하다….”

나는 상훈의 비통한 얼굴을 떠올리고 인상을 찌푸린다. 누군가의 강한 열망이 결국 다른 이에게 상실의 고통을 안겨주었다. 누구든 얼마쯤은 상실의 지분을 소유하고 있다. 무서운 것은 자신의 구멍을 막기 위해 다른 이를 가차 없이 뜯는다는 점이다. 다른 이의 구멍을 더욱 크게 확장시킨다는 점이다. 모두 함께 차오를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상훈에게 있어 옷은 나의 잠과도 같다. 우리들은 모두 도피처가 필요한 것이다. 그의 도피처는 어디일까. 나는 문득 궁금해진다.

“앞으로 그 바지 입은 사람만 보면 의심하게 될 거 같아. 저거 상훈이 바지 아닌가, 하고.”

“그렇겠지. 의혹이 생겨 버렸으니.”

엄준한 배치를 어기고 책을 흐트러뜨린 자 역시 나를 보는 순간마다 불현듯 온갖 의심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평정을 가장하고 대한다 한들 모를 리 없다. 홍채의 미세한 균열 틈으로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는 의혹의 심지가 빤히 보인다. 그것이 지옥불인지도 모르고 불씨를 키웠겠지. 가엾게도.

미숙한 내 동생. 너는 아직 어리구나.

“저녁때. 잠깐 보자.”

“밖에서?”

“그래. 월급날이야. 외식이라도 하게.”

“알았어. 회사로 갈게.”

나는 장난스레 교복 모자를 그에게 씌워본다. 그는 모자를 벗어 내 머리에 단정히 씌운다. 그의 손가락이 모자의 각을 잡고, 가슴팍에 달린 명함을 훑는다. 그의 입술이 미세하게 이, 상, 윤, 하고 읊조리는 것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피차 비슷한 이름이면서.”

“난 네 이름이 더 좋아.”

“왜?”

대답 대신 무거운 입꼬리가 부드럽게 들린다.

“네 이름이니까.”

불가사의하다. 거짓의 반석 위에 세워진 관계일 뿐인데. 종종 그의 아무것도 아닌 말이 나의 이파리들을 울창하게 틔우고 생동하게 한다.

“갈게.”

어깨에 닿은 손이 천천히 나와 분리된다. 서둘러야 하는 시간인데도 잠시 그의 뒷모습을 바라본다. 나는 그의 등에 기인 손톱자국을 내고 싶다고 생각한다. 좀 더 그의 깊숙한 곳으로, 그의 원초적인 곳으로 파고들고 싶다. 그를 다 가졌다고 생각하는 순간에도 그의 속내를 다 벗겨내지 못했다는 불안이 밀려든다. 저 껍질 너머 그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상문.”

뒤늦게 그를 불러보지만, 늦었다. 북적이는 인파가 그를 휩쓸어간다. 그는 떠내려가고 나는 남는다. 매번 아슬아슬하게 그의 손을 놓친다. 그가 떠나고 나면 나는 언제나 아무도 없는 해변에 홀로 남겨진 어린아이 같은 심정이 된다. 그럴 때면 나는 소설 ‘롤리타’의 한 장면을 떠올린다. 영어본을 구해 어렵게 번역해가며 읽은 소설. 소설 초반에 주인공 험버트의 어린 시절에 관한 이야기가 나온다. 어린 험버트와 그의 첫사랑…. 이름이 뭐였더라. 젖빛 무릎의 소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미칠 듯이, 어색하게, 부끄러워하지도 않고, 고통스럽게 사랑에 빠졌다. 마치 누구들처럼.

소녀의 이름보다도 선명한 장면. 험버트와 그의 어린 연인이 인적이 드문 해변에서 한참 서투르게 서로를 애무할 때, 그들을 바라보고 있는 버려진 선글라스. 그리고 소녀는 어떻게 되었더라? 티푸스로 죽었던가…. 기억난다. 소녀의 이름은 애너벨. 그래. 그녀는 죽었다. 이오카스테, 카르멘, 에스메랄다도 죽었다. 욕망의 대상은 대부분 죽음을 맞이한다. 글자 속에서. 다행이다. 나는 아직 인생 속이니.

* * *

학교는 야구부의 청룡기 출전 소식으로 떠들썩했다. 야구부가 꽤나 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스트라이크와 볼의 차이점을 모르는 녀석들까지 죄다 야구 얘기로 들떠 있다. 군중 심리란 무서운 것이다. 편하게 휩쓸려 가는 대신, 자신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른 채 웃고 있다.

“올해는 J고 누를 수 있것제?”

“J고 새끼들 거들먹거리는 꼬라지 두 눈 뜨고 못 보겠데이.”

“결승 진출하믄 무조건 서울행이다! 알것나!”

나는 무리에 섞여 그들이 좋아 떠드는 대로 적당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의 노력으로 학교에서의 인간관계는 원만히 유지된다. 일일이 맞장구를 치며 적극적으로 끼어들기보다는, 부드러운 침묵을 지키는 쪽이 적당하다. 입은 영혼을 흘려보내는 배수구다. 내가 별생각 없이 내뱉는 말들에도 내 검은 영혼의 얼룩이 군데군데 묻어 있으리라.

사담이 길어진다 생각될 즈음, 노령의 수학 선생이 교실 안에 들어왔다. 교실이 순식간에 조용해진다. 나는 이 순간을 좋아한다. 무질서한 것들이 질서정연해지고 소음으로 꽉 차 있던 공간이 텅 비어 버리는 순간. 투명한 찰나, 나는 잠시나마 나 자신을 풀어놓는다.

선생은 엉뚱하게도 윤심덕의 이야기로 수업을 시작했다.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이야기였다. 아내가 있는 남성과 현해탄을 건너던 도중 동반으로 투신자살을 한 성악가. 노래 역시 들어본 적 있었다. 성악이라고 부르기 무색할 정도로 창가의 창법이 잔뜩 묻어나는 그녀의 노래는 그래서 기괴하고 비틀린 설움을 지니고 있었다. 선생은 자신이 윤심덕의 팬이라며 자신도 한때 성악에 뜻을 품은 적이 있었다고 고백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그는 학생들 앞에서 ‘사의 찬미’를 불렀다. 노래가 진행될수록 그의 목소리는 벅차올랐다. 나는 노래의 가사에 집중했다.

…광막한 광야에 달리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데이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웃는 저 꽃과 우는 저 새들이 그 운명이 모두 다 같구나 삶에 열중한 가련한 인생아 너는 칼 우에 춤추는 자도다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허무….

선생도 한때는 윤심덕 같은 치명적인 사랑을 꿈꾸는 청년이었을 것이다. 그의 눈동자가 청춘의 한때로 잠겨 들고 있었다. 지나가 버린 꿈. 허망하기 때문에 아름다운 나날들. 그러나 다시 되돌아간다 해도 그는 비극의 주인공은 되지 못했으리라. 비극은 완전히 선하지도 완전히 악하지도 않은 사람들의 이야기다. 선한 의도를 지닌 이들의 행위가 부르는 파멸의 서사. 그것이 비극인 것이다.

선생은 마냥 착한 사람이었다. 선생을 볼 때면 나는 왼쪽 가슴팍이 따끔따끔 저려오는 것을 느꼈다. 비극을 동경하는 자는 결국 비극에 입문할 수 없는 자와 동일하다. 나는 비극을 동경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비극을 읽는 것은 그와 같은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한 연습이었다. 그가 나를 원한 그 순간부터 종종 나는 강렬한 비극의 예감이 휩싸이곤 했다.

* * *

그날 밤은 무언가에 농락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준비된 세트 위에서 주어진 연기를 마친 듯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선가 박수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날. 부모님은 하필이면 상훈이와 상원이만 데리고 친척집을 방문했을까. 갓 소년을 졸업한 우리들에게 새로운 체험을 시키기 위해서였을까. 집을 비워도 되는 상황인데도 부모님은 그와 나만을 집에 남겨 두었다. 우리들은 오도카니 남아 있었다. 멀리 떨어져 앉아 있어도 팽팽히 조여진 긴장의 끈이 몸을 옥죄었다. 흡사 줄다리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그즈음. 나는 악몽을 되풀이해 꾸고 있었다. 그의 타는 듯한 시선을 의식했기 때문이리라. 꿈속에서 나는 그와 손을 맞잡고서 둘만이 있을 수 있는 공간을 찾아 뛰어다닌다. 우리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욕정한 상태로, 어디든 사람이 없는 곳이면 부둥켜안고 옷을 벗어 던진다. 그가 물어 씹을 듯 나를 애무하고 나는 그의 귓가에 입김인지 귓속말인지 모를 뜨거운 덩어리를 불어 넣는다. 그의 귀는 나의 욕망을 흘려보내는 수챗구멍이다. 입을 맞출 때마다 스치는 그의 콧날에 나의 시선은 난자당하고, 격렬한 애무에 우리들의 피부는 빨갛게 물들기 시작한다. 나는 길게 누운 채로 그를 향해 스스로 다리를 벌린다. 허벅지의 여린 살들이 곧 출격할 그의 욕망을 기다리며 떤다. 그는 철창 사이로 혀를 날름거리는 불길처럼 다리 사이를 통과하여 내게 도달한다. 붉은 살덩어리가 서로의 입천장을 할퀸다. 그를 삼키고 싶다. 그런 열망에 내 몸은 실룩거리고 그 역시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의 성기를 비좁은 입구로 들이민다. 성기의 끄트머리가 조심스레 진입하고 드디어 몸이 활짝 열리려는 순간.

시선이 느껴진다.

나는 황급히 그를 밀어내고 주위를 둘러본다. 주변은 암흑 속이다.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는다. 그러나 시선이 느껴진다. 반딧불처럼 허공을 떠돌며 반짝이는 시선. 잡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 시선들이다. 여기선 안 되겠어. 나는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는 나의 팔을 잡아 이끌어 또 다른 장소로 숨어든다. 그는 다시 삽입을 시도한다. 그러나 나는 또다시 시선을 느낀다. 우리들은 계속 도망한다. 세계가 우릴 지켜보고 있다. 나의 해변엔 수백 개의 선글라스가. 달아오른 욕망은 꺼질 줄 모르고. 어느덧 불지옥 속이다.

꿈을 꾸고 나면 내 몸은 흥건히 젖어 있다. 땀을 별로 흘리지 않는 체질인데도 흠뻑. 꿈은 나를 질책한다. 그가 나를 그런 눈으로 보는 것은 온전히 네 탓이라고. 무의식이 해석한다. 그는 너를 보고 있지만 그것은 네가 유도한 시선, 네가 촉발시킨 욕망, 그러므로 꿈을 부르는 것은 바로 너 자신이라고. 은밀히 바라오던 너의 경악할 소망이라고.

그래. 나는 결국 욕망을 이기지 못했다. 나는 그의 피 끓는 시선을 받을 때마다 몸이 달아올랐다. 부러 귓가나 드러난 어깨를 스치며 그의 감촉을 즐겼다. 그의 눈동자색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그 와중에 가족은 집을 비웠다. 우리들은 묵묵히 함께 밥을 먹고 묵묵히 함께 몸을 씻었다. 형제들은 우글우글 함께 몸을 씻어 왔기에, 둘이 몸을 씻는 일 따위 유별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돌연 내게 입을 맞추었다. 눈에 비눗물이 들어가 얼굴을 찡그리고 있는 사이 그의 입술이 허술한 틈을 파고들었다. 물에 젖은 입술은 맛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밍밍했으나 선명히 뜨거웠고, 나는 입술만으로는 참을 수 없었다. 나는 도망치듯 교묘히 그의 입술을 열었다. 기다렸다는 듯 혀가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자연스레 눈을 감았다. 눈앞에서 오색찬란한 스파크가 터지고 있었다. 나는 그의 몸을 기어오르려는 손을 억지로 내리누르며 시치미를 떼고 있었다. 그러나 빈틈없이 반응하는 혀와 입술이 나를 배신했다.

놀란 듯 그는 잠시 고개를 떼어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뺨을 때렸다. 그것은 나로 인한 수치심에서 기인한 동작이었으나, 그는 그제야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몸도 닦지 않은 채로 방으로 뛰어들어가 이불에 몸을 숨겼다. 나는 일부러 문을 걸어 잠그지 않았다. 이윽고 그의 발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그를 외면했다. 천천히 문고리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찰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그는 한참 동안 말없이 내가 누운 자리 옆에 서 있었다. 그의 시선이 작살처럼 내려와 꽂혔다. 그리고 그가 겨우 내뱉은 말은.

‘미안하다.’

였다. 나는 한쪽 이불을 들춰 그를 불러들였다. 그는 천천히 내가 숨은 곳으로 들어왔다. 한번 발을 들이면 다시는 빠져나갈 수 없는 은신처. 나는 막 여물기 시작한 그의 몸을 끌어안았다. 그에게서 갓 태어난 수컷의 냄새가 났다. 나를 만지는 그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가 닿을 때마다 울컥 목이 메었다. 물 밖에 내던져진 물고기처럼 나는 숨을 틔우기 위해 몸을 이리저리 비틀었다. 쫓고 쫓기는 행위에 몸을 덮고 있던 이불이 서서히 밀려났다. 이윽고 우리들의 몸은 흐릿한 불빛 아래 남김없이 드러나고 말았다. 불빛에 눈이 시린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나는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고개를 돌리고 읊조렸다.

‘널…. 먹어버리고 싶어.’

그는 가만히 손을 치우고 눈을 뜨라 속삭였다. 나는 가늘게 눈을 뜨고 여전히 잡혀 있는 손으로 그의 얼굴을 어루만졌다. 짙은 눈썹, 고독한 눈매, 고집스레 우뚝 선 콧날과 화난 듯 울먹이는 듯 뜨겁게 떨리는 입술. 그의 눈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나는 엄지로 그의 눈가를 훔쳤다. 손에 닿는 순간 증발해버릴 정도로 미미한 습기였다. 나는 내 손을 붙들고 있는 그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었다. 힘이 빠진 그의 어깨가 나를 놓쳤다.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의 손가락 사이 깊숙하고 여린 살을 혀끝으로 농락했다. 그의 목울대를 적시며 흘러나오는 신음이 나는 즐거웠다. 즐거운 나머지 그만 웃음소리를 흘리고 말았다. 그 순간 내 손목을 쥔 그의 팔에 거칠게 힘이 들어갔다. 그가 억눌린 목소리로 명령했다.

‘장난하지 마.’

온몸이 얼어붙는 듯한 감각에 나는 몸을 떨었다. 그때였다. 주도권이 그에게로 완전히 넘어가 버린 것은. 그 많던 여유는 어디로 가고, 나는 그에게 제압당한 채 그가 바라는 대로 몸을 헝클었다. 그는 뼈를 부러트릴 듯한 기세로 거칠게 나를 안았다. 우리들은 짚더미 속에 갇힌 두 마리 뱀처럼 몸을 그슬렸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뱀들도 혼자가 아니었다면 그토록 고통스럽지는 않았을 텐데.

나는 타는 듯한 행복감에 도취되어 신음을 안으로 삼켰다. 아니, 삼키려다, 내뱉었다. 그가 나를 삼켰기 때문이었다. 그는 이미 한 번 사정을 마치고 축 늘어진 성기를 서슴없이 입에 물었다. 벌려진 다리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그의 머리, 그 머리칼 속으로 나는 손가락을 깊숙이 집어넣었다. 손톱을 세워 그를 찔렀다. 찌를 때마다 내가 아팠다. 단단한 송곳니의 첨단이 어린 성기의 측면을 긁으며 오르내릴 때마다 내 입에서 목울대가 쪼개지는 듯한 신음이 거침없이 터져나왔다. 비명 같은 신음은 방을 울리고 벽에 부딪쳐 다시 내 귀에 돌아와 꽂혔다. 위로하듯 건조한 혀가 붉게 달아오른 자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격정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연안을 떠다니는 해파리처럼 나는 반쯤 감긴 눈으로 부드러운 물결에 몸을 맡겼다. 그 순간. 의식이 몽롱해진 틈을 타 그가 나를 뚫었다. 목구멍이 꽉 막혀버리는 듯한 감각에 나는 비명 대신, 한줄기 눈물을 흘렸다.

그는 내 안에 들어온 뒤 잠시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찢어질 듯한 고통을 삭였다. 온몸의 신경이 그가 뚫고 들어온 곳에 집중되어 욱신거렸다. 그는 내 어깨에 고개를 파묻은 채로 뜨거운 숨을 토해냈다. 그의 호흡을 따라 몸속 깊숙한 곳이 근질거렸다. 나는 축축한 그의 볼에 얼굴을 비비며 바짝 타들어 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왜 가만있는 거야?’

‘모르겠어. 그냥 아까워.’

나는 그의 어깨를 거칠게 물어뜯었다. 그러자 억지로 이완 상태를 유지하고 있던 그의 성기에 꼿꼿이 힘이 들어갔다. 그는 내 안에서, 나를 찢을 듯, 거침없이 부피를 확장하고 있었다. 그는 한 손으로 나의 가슴을 내리누르며 격렬하게 몸을 움직였다. 이불이 밀려나고 땀에 젖은 등이 바닥에 아프게 마찰했다. 등의 피부가 장판에 닿았다 떨어질 때마다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살이 뜯기는 감각에 나는 축여도 축여지지 않는 입술을 혀로 핥았고, 그는 심장을 꺼낼 듯 나의 가슴을 힘차게 짓눌렀다. 그의 성기는 나를 뚫고, 내 안으로 치솟아, 내 심장을 두드리고 있었다. 그는 곧 내 심장을 터트려버릴 것만 같았고, 심장은 파열 당하지 않으려 근근이 그를 밀어내고 있었다.

거센 충돌 속에서 나는 그보다 한발 앞서 절정을 맞이했다. 심장이 수백 개의 조각이 되어 흩어졌다. 찢겨져 나간 자리를 치유하듯 그가 내 안에 사정했다. 뜨거운 열기가 새로 태어난 세포 속으로 스며들었다. 나는 까무라쳤다. 차단된 의식 속에서 나는 내 몸 안에 흘러들어 온 그를 따라 떠내려갔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는 채 나는 흘러가고 있었다. 그대로 영원히 어디까지고 흘러가도 좋을 거란 생각을 하는데, 그의 손이 빠른 속도로 떠내려가는 날 잽싸게 낚아챘다.

‘정신이 들어?’

‘…어떻게 된 거야.’

‘잠시 의식을 잃었어. 잠시만. 지금 뺄 테니까….’

차분해진 그의 성기가 질척이는 내부에서 뒷걸음질 쳤다. 나는 나도 모르게 그의 팔목을 힘껏 잡았다.

‘빼지 마.’

‘…아프지 않아?’

‘아파. 그런데 아까워.’

그는 무어라 대답하려다 말고 입을 닫아버렸다. 뜨거웠던 순간과 달리 늘어진 시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비현실적이었다. 그는 뒤에서 나를 껴안은 채 잠이 들었다. 그의 무게를 실감하며 나는 거친 한숨을 내쉬었다. 찐득한 두 육체에서 들큼한 냄새가 났다. 나는 내 몸 안에 들어와 있는 살덩어리를 가늠하며 그에게 몸을 기댔다. 고요한 그의 숨소리에 맞춰 나도 잠이 들었다. 의식과 수면이 반쯤 뒤엉켜 있는 상태에서 나는 그가 내 몸을 빠져나가는 것을 느꼈다. 꿈속으로 허옇고 붉은 액체가 쏟아졌다. 젖은 다리 사이가 무척이나 시렸다. 그가 떠난 자리는 한참 동안 벌어져 있었다. 그를 가진 순간 내 안에 다시 새로운 비인 틈이 생겼다.

이후 며칠간 나는 하혈을 했다. 그가 내 몸 안에 들어오는 순간 나는 무언가가 푹, 하고 터지는 소리를 들었다. 몸 안에 고여 있던 검은 멍울이 그의 틈입으로 터져 버린 것이다. 서투른 섹스는 내 몸에 많은 상흔을 남겼다. 그러나 나는 한 번도 그를 거절하지 않았다. 그가 내 안을 휘저을 때마다 나는 새살이 돋아나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착각인 줄 알면서도 믿었다. 잡아먹으려다 잡아먹혔다는 걸 깨달았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그는 아프게 자라 나의 버팀목이 되었고 나는 붉게 익어 그의 과실이 되었다.

* * *

수업이 끝나고 나는 몇몇 학우들을 따라 뒷산의 별채로 갔다. 학교는 산으로 둘러져 있었는데, 별채는 얕은 언덕배기 무성한 풀숲 한가운데 숨겨져 있었다. 별채는 몇몇 선택받은 학생들만 사용할 수 있는 특별한 공간이었다. 말하자면 서울대 및 명문대를 지망하는 학생들의 공부방이었다. K고 졸업생인 성공한 사업가가 사비를 들여 건축한 그곳은 선생들도 감히 드나들지 않았다. 그래서 별채를 이용할 수 없는 학생들은 별채를 이용하는 학생들에게 부탁하여 담배를 그곳에 숨기곤 했다. 별채의 인간들 역시 골초가 많았다. 나는 종종 그들이 생각 없이 건네주는 담배를 피웠다. 애연가는 아니었으나 가슴이 답답할 때면 담배 생각이 났다. 담배를 피우고 있으면 가끔 그 연기가 담배로부터가 아닌, 나로부터 흘러나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혼탁한 과거. 불투명한 미래. 흔들리는 근원. 아슬아슬한 모든 것.

그러나 현재는 소스라칠 만큼 선명하다.

“공부 잘되가나?”

친구, 라고 불리는 동급생이 말을 건다.

“그럭저럭.”

“니는 으데 갈 끼고?”

“글쎄. 어디든.”

무관한 것에 대한 관심만큼이나 무용한 것도 드물 것이다.

“서울대 안 갈 끼가? 니 정도면 충분히 가능하다 아이가.”

그러나 나는 진심을 흘린다.

“서울대는 아니어도, 서울이라면 꼭 가고 싶어.”

“와.”

“사람이 많으니까.”

“그기 머가 좋은데?”

“가장 깊숙이 숨을 수 있거든.”

얼결에 내 진심의 얼룩을 묻히는 자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이 얼룩이라는 사실조차 모른다.

“싱거븐 시키…. 아. 맞다! 니 저녁때 문현동 안 갈래?”

“미안. 저녁엔 약속이 있어서.”

“후회할 낀데?”

“무슨 일인데.”

“옆 반 동구가 찐한 거 왕창 구해왔다 아이가. 서양 거라든데, 이런 기회 흔치 않데이.”

“난 괜찮아.”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로 거절한다.

“담엔 안 부를 기다. 그래도 괜찮나?”

“응.”

“히안한 놈이로고…. 니는 그래 쑥맥이어가 우얄래?”

실소가 터지려는 것을 꾹 눌러 참는다. 그는 상상도 못 할 것이다. 눈앞에 선 희멀건 남자가 한 꺼풀 들추고 나면 매일 밤 쾌락에 몸을 떨며 허리를 굴리고 있다는 사실. 그토록 열망하는 섹스를 ‘숙맥 같은 놈’은 이미 몸소 체험해 버렸다는 사실.

나는 그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싶었다. 그들이 성기를 곧추세우고 혈관을 확장시키며 바라는 섹스란 것이 얼마나 아프고 쓰라린 것인지 낱낱이 까발리고 싶었다. 쾌락의 지점들은 모두 숨긴 채 저주를 내리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제멋대로 나를 청결하고 고매한 인간으로 분류해두었을 것이다. 부러 환상을 망가뜨릴 필요는 없다. 그도 부러 나를 들추어 보려 하지 않을 것이므로.

포르노에 대한 기대로 들떠 있는 그를 뒤로하고 항구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차창에 어렴풋이 내 얼굴이 비친다. 어머니를 닮은 얼굴이다. 군데군데 그 남자를 닮은 구석도 있다. 아무도 없을 때면 어머니는 하염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며 취한 듯 웃었다. 내 얼굴에서 그 남자의 흔적을 찾는 것이다.

술에 취한 어머니는 그런 말을 했다. 여러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어 주었다면, 그들에게 배신 또한 동일하게 주어야 한다고. 나는 모두에게 균등히 나를 배분해 주었다고. 어머니의 말에 나의 팽팽한 미간이 살풋 구겨진다. 난 누구도 배신하지 않을 겁니다, 내가 말하자 어머니는 숨이 넘어가도록 웃으며 지껄였다. 넌 이미 네 아버지를 배신하고 있지 않니. 어머니를 생각하면 속이 쓰리다. 그러나 생각하지 않을 수도 없다. 매일 아침 일어나 거울을 볼 때면 그 안에 어머니가 있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만다. 나는 그녀의 쌍둥이라고.

* * *

어머니와 나는 그. 이상문으로 인해 더욱 복잡하게 얽히게 되었다. 어머니가 지은 죄가 그를 나에게 인도했으나, 그를 가진 것은 나의 죄였다. 어머니는 가끔 그를 넋 놓고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넌 니 애비보다 백배는 더 낫구나. 그러면서 바로 그 애비와 비교하듯 그의 전신을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보았다. 촉수를 지닌 듯한 시선. 은근히 관능을 품은 시선이다. 그녀와 나는 분리되는 순간부터 적이었으나, 우리들의 관계가 실질적인 파국을 맞이한 것은 그와 내가 통하면서부터였다. 알토란 같은 양자를 빼앗긴 그녀와 그 양자를 취득한 나 사이에는 야만적 투쟁의 기류가 흘렀다. 나의 혈액형이 그녀가 부정한 증거가 되지 않았더라도 우리들은 아마, 조금의 덜함도 없이 대립했을 것이다. 어머니와 내가 달랐기 때문이 아니었다. 하나의 기질을 동일하게 나누어 가지고 있었기에 우리들은 동족혐오의 감정으로 서로를 기피했던 것이다.

어머니는 아버지가 없을 때면 집 전화로 그 남자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른 형제들은 그 대상이 어머니 쪽 친척인 줄 알았으나, 그렇지 않았다. 그 남자였다. 종종 학교 앞에 외제차를 세워두고 나를 기다리던 남자. 창피한 줄도 모르고 웃는 낯으로 나를 대하던 남자. 어머니와 남자가 나누는 대화는 너무나 일상적이고 무덤덤해서 아무도 어머니를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가 전화 도중 갑자기 나를 불렀다.

‘왜요.’

‘전화 좀 받아 봐.’

상대방이 그 남자란 것을 눈치챈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요.’

‘받아 보라니까. 어서.’

‘됐습니다.’

‘너랑 얘기 좀 하고 싶다잖아. 얼른 안 받을래!’

어머니는 무턱대고 나를 붙잡고 수화기를 내밀었다. 나는 마지못해 받으려 손을 뻗다, 수화기를 든 어머니의 손을 세게 내려쳤다. 어머니의 손을 떠난 수화기가 바닥을 굴렀다. 수화기는 자신이 갈 수 있는 만큼 최대한 멀리 떨어졌다, 본체와 연결된 구불구불 말린 선에 의해 우리 쪽으로 되돌아 왔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수화기를 주워 제자리에 돌려놓고, 내 뺨을 때렸다. 아주 빠른 동작으로 세 번이나 후려쳤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전화기를 통째로 들어 올려 바닥에 내던졌다. 어찌나 세게 던졌는지 전화기의 플라스틱 몸체가 박살이 났다. 나는 조용히 주저앉아 부서진 전화기의 파편을 하나하나 주워 담았다. 어머니는 웅크린 나의 등을 발로 차며 욕설을 퍼부었다.

‘망할 것.’

‘말조심하세요.’

‘어쨌든 네 친아버지야. 지 새끼 예뻐서 뭐든 해주려고 하는 사람한테 왜 그따위로 굴어?’

‘그 사람 친절 따위 필요 없어요.’

‘순진한 척하지 마. 내가 널 몰라? 만족 같은 소리 하고 앉아 있네.’

‘어머니가 연락하시건 말건 거기까지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하지만 내게 강요하지 마세요! 난 그 사람과 연관되고 싶지 않아요.’

‘하, 그래봤자 니가 그 사람 핏줄이지. 별수 있을 거 같아? 어차피 너 스스로 찾아가게 돼 있어.’

‘그건 당신의 소망이겠죠. 이 집에서 내가 사라지는 거. 그거야말로 어머니가 가장 원하는 거잖아요. 내가 어머니의 소망을 들어줄 것 같습니까? 천만에요. 꿈도 꾸지 마세요!’

‘어디서 눈을 치켜뜨고…. 니가 뭔데? 니가 뭘 그리 잘났는데? 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조마조마하게 사는지 알기나 해? 너 뭐야? 도대체. 나에게 대적하려고 태어났니? 오질나게 재수 없는 것! 망할 것!’

나는 수차례 따귀를 맞는다. 나는 어머니를 때리지 못한다. 나를 때리는 그녀의 손은 그녀 자신을 때리는 손이고, 그녀를 때리지 못하는 내 손은 차마 자신을 때리지 못하는 나의 손이다.

뺨이 부풀어 오르며 뜨거운 열기가 스몄다. 현기증을 느끼고 휘청이는데 다시 한번 어머니의 손이 올라갔다. 이번에 맞으면 정말 쓰러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는데 뒤에서. 어느새 나타난 그가 어머니의 손을 거칠게 낚아챘다.

‘무슨 짓입니까.’

어머니의 손목을 쥔 그의 팔은 분노로 끓어오르는 힘을 자제하느라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제야 부어오른 뺨에 손을 갖다 댔다. 흉흉한 열기가 지끈지끈 솟아올랐다.

‘넌 저리 가 있어. 상윤이 교육시키는 중이니까. 얼른!’

‘이게 교육입니까?’

‘이 손 못 놔? 왜 네가 나서서 난리야?’

‘못 놓습니다.’

빨갛게 부어 엉망이 된 내 얼굴을 본 그는 자제력을 잃고 어머니의 손목을 부러트릴 기세로 움켜쥐었다. 뜨악한 고통에 어머니는 고개를 수그리며 비명을 질렀다. 그는 붙잡은 팔을 등 뒤로 꺾어 어머니가 옴짝달싹 못 하도록 제압했다. 나는 한 손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 모든 광경을 그저 지켜보고 있었다.

‘한 번만 더 상윤이한테 손대면 가만 안 있을 겁니다.’

‘아악! 놔! 놓으라고! 아야야! 미친놈…! 놓으라니까!’

어머니의 비명이 경쾌하다.

‘약속하세요.’

‘약속할게, 할 테니까 제발! 팔이 부러질 것 같아!’

그는 어머니의 손을 놓고 나에게로 다가온다. 악력의 전율이 남아 있는 손이 얼얼한 내 뺨을 감싼다. 나는 그 자리에 못박혀 움직이지 못한다. 일렁이는 불길 같은 그 손의 떨림이 내 전신에 옮겨붙는다. 나는 나도 모르게 뺨을 감싸고 있는 그의 팔목을 힘주어 잡았다.

‘이것들이 작당을 하고!’

악에 받친 어머니가 다시 내게로 달려들어 머리채를 휘어잡는다. 그닥 길지 않은 머리칼은 손에서 자꾸 빠져나가고, 그에 약이 오른 어머니는 두피에 생채기를 내면서까지 우악스럽게 날 붙들고 늘어진다.

‘그만하라니까!’

그가 어머니를 벽에 집어 던진다. 어머니가 날아간다. 슬로 모션으로. 어머니가 벽에 부딪친다. 어머니가 땅에 떨어진다. 어머니가 벽에 기대어 몸을 일으킨다. 그의 주먹이 어머니를 비껴서 벽에 박힌다. 주먹과 벽의 충돌이 방 전체를 울린다.

‘다시 한번 이상윤에게 손끝이라도 대 봐. 그땐 당신이 죽어.’

‘너, 너, 정말…. 아야. 어, 어깨가…!’

‘지금까지 참아왔어. 하지만 이젠 아니야. 절대 용서하지 않아. 정말, 죽여 버릴 거야. 알겠어?’

그의 주먹이 다시 한번 벽을 친다. 어머니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어머니는 비명조차 조심스레 흘린다. 어머니를 노려보는 그의 눈동자에 광폭한 살기가 흘러넘친다. 나는 그의 등 뒤에서 어머니를 본다. 가늘게 눈을 뜨고 어머니를 비웃는다. 이제 막 완성된 나의 수컷을 자랑한다. 어머니의 패색 짙은 얼굴을 보며 나는 찢어진 입술로 웃었다. 웃을 때마다 찢어진 부위가 더 크게 벌어졌지만 웃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그는 아연실색한 어머니를 내버려 두고 나에게 왔다. 나는 어머니가 보란 듯이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가 손등으로 내 입가에 흘러내린 피를 닦는다. 나는 그의 부축을 받으며 방을 나섰다. 나서는 순간까지 나는 어머니와 시선을 맞추고 있었다. 문이 닫히고 나는 그에게서 천천히 몸을 떼었다. 온몸이 아팠다. 그것은 어머니의 전신을 아우르는 고통이었다. 뒤늦게 돌아온 가족들이 박살 난 전화기에 대해 물었으나 우리들은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이튿날 그는 새 전화기를 사 놓았고, 어머니는 크게 다친 곳도 없으면서 괜스레 침술사를 찾아다녔다.

* * *

도심으로 향할수록 버스 안은 북적거렸다. 내가 앉은 자리 주변에 중학생 남자아이들 한 무리가 우글우글 몸을 부대끼고 있었다. 땀을 흘리는 소년들에게서 개의 오줌 냄새가 났다. 젖내를 삭힌 냄새, 막 태동하려 하는 수컷의 냄새다. 나는 손등으로 살며시 코를 막고 책을 펼쳐 든다. 최근 줄기차게 읽고 있는 블라디미르 나보코프의 ‘롤리타’. 나는 밑줄 친 문장을 소리 내지 않고 읽었다. 그에게 보내고 싶은 문장이다.

롤리타, 내 삶의 빛이요, 내 생명의 불꽃. 나의 죄, 나의 영혼. 롤-리-타. 세 번 입천장에서 이를 톡톡 치며 세 단계의 여행을 하는 혀끝. 롤.리.타….

우리들이 종종 주고받는 편지는 그런 것이었다. 우리들은 자신의 언어가 아닌, 어디선가 훔쳐온 말들로 서로의 기분을 전했다. 그것은 단 한 줄일 때도 있었다. 우리들의 편지는 대체로 간소했지만 -흐릿한 두 줄의 문장이라도- 백 줄의 구차한 설명보다 더 깊은 감상을 전달했다. 이름도 구체적인 내용도 없는 편지는 우리들의 키워드였다. 나는 그를 열기 위해 그 안에 얼마나 많은 문장들을 대입해 보았던가.

날이 막 어둑해질 즈음 항구에 도착했다. 거세게 부는 바닷바람에 그만 교복 모자가 날아가 버렸다. 모자는 새로운 부두를 만드는 공사장 근처에 떨어졌다. 나는 모자를 쫓아 뛰었다. 관리 책임자가 모래 더미에 떨어진 모자를 주워 건넸다. 나는 모자를 깨끗이 털어 쓰고 그가 있는 곳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바람에 섞인 짠내가 자석에 달라붙는 철가루마냥 피부에 밀착한다. 나는 그의 귀 언저리에 배어있던 소금내를 기억한다. 혀끝을 대면 은근히 짭조름한 맛이 나던 그의 귓가. 바닷바람처럼 시원하고 싱그러운 맛. 그를 빨리 만나고 싶다. 나는 일부러 걸음을 재촉한다.

“안녕하세요.”

“어, 상윤이구나. 상문이 만나러 왔어?”

“네. 지금 없나요?”

“컨테이너 체크하러 갔다. 안에서 기다릴래?”

“밖에서 기다릴게요.”

“참. 아버지는 잘 계시지?”

당연한 소리.

“그럼요.”

잘 계시지 않으면 이쪽이 곤란하다. 나는 깍듯이 인사를 하고 나와 빈 부두에 걸터앉았다. 수평선에 대여섯 척의 배들이 음표처럼 걸려 있었다. 그들 사이로 저녁놀의 붉은 기운이 스멀스멀 차오르고 있었다. 태양은 바닷속으로 침몰할 때 그 어느 때보다도 강렬한 빛을 뿜어댄다. 자신의 부피만큼이나 거대한 빛이다. 말 그대로, 눈이 부셨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빛의 홍수 속에 잠겨 있었다. 곧 소멸할 것들만이 지니는 찬연함. 그에 도취되어 멍하니 앉아 있는데, 익숙한 무게를 지닌 손이 어깨 위에 놓였다.

“언제 왔어.”

“좀 전에. 일은 다 끝난 거야?”

“그럭저럭.”

그가 내 옆자리에 털썩 앉는다. 아침의 단정했던 차림과는 달리 넥타이가 없고, 셔츠 단추가 풀어진 상태이다.

“넥타이는?”

“갑갑해서 풀어버렸어. 몸 쓰는 일이 아주 없는 건 아니니까.”

“줘 봐. 다시 매 줄게.”

“괜찮은데.”

“아버지한테 한소리 들을걸? 옷에 좀 엄격하셔야지.”

그는 마지못해 주머니 속에 넣어 두었던 넥타이를 꺼냈다. 나는 공들여 그의 넥타이를 맨다. 내 시선은 넥타이에 고정되어 있지만 나는 느낀다. 그의 시선이 눈앞의 나에게 고정되어 있다는 것을.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며 부러 천천히 매듭을 짓는다. 그의 시선이 독이 되어 나의 마른 목구멍을 타고 넘어간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뻔뻔한 어긋남이 주는 야릇한 쾌감에, 나는 혀로 마르지도 않은 입술을 축인다. 짜릿한 전율이 자꾸만 손끝을 더디게 한다.

“먹고 싶은 거 있어?”

“딱히. 너는?”

“나도 딱히…. 참. 낮에 상훈이 잠깐 만났다.”

“상훈이를?”

“아버지 심부름으로 회사에 왔어. 새 청바지 입고.”

“또 살 돈이 있었대?”

“아니.”

“그럼?”

“남의 집 빨랫줄에 걸린 걸 홧김에 훔쳤다더라. 사이즈는 자기가 알아서 줄이고. 일부러 그 바지로 갈아입고 왔더군.”

놀랐지만 의외는 아니었다. 자신의 물건을 빼앗기고 가만히 분을 삭일 상훈이 아니었다. 누군가 자신의 억울하게 빼앗긴 자리를 납득하지 않는 한 이러한 분풀이는 계속되겠지. 사소한 욕망의 과오가 얼마나 많은 상실을 부르는지. 무릇 남에게서 빼앗은 물건은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 법. 상훈의 새로운 청바지는 소멸을 맞이한 하루해의 저 장렬한 침몰만큼이나, 한층 더 아름답게 펄럭일 것이다.

“나가자.”

그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우리들은 항구를 빠져나가 시내로 향하는 버스를 탔다. 퇴근 시간이라 버스 안은 사람들로 꽉 차 있다. 나는 그와 좌석 사이에 꼼짝없이 끼어 있었다. 버스의 진동에 시야가 타닥타닥 흔들린다. 휘청대는 나의 허리를 그의 팔이 가만히 휘어 감는다. 나는 더 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나는 내 발밑으로 굵은 뿌리가 내리는 것을 느낀다. 그것은 아주 단단하고 견고하다. 나는 소리 내지 않고 소망한다. 누구든 밑동만 남겨놓고 나를 잘라가지 않기를. 뽑아가려거든 나를 뿌리까지 뽑아가기를. 서글픈 소망을 들었는지 그가 나의 허리를 더욱더 단단히 끌어안는다.

평일인데도 시내는 번잡했다. 딱히 입맛이 당기는 게 없어 결국 자주 찾는 함경 면옥에 들어갔다. 함경 면옥은 아버지의 단골 가게였다. 아버지는 여름이고 겨울이고 냉면을 입에 달고 살았다. 아버지는 함흥냉면을 이만큼 비슷하게 만들어내는 곳은 없다며 함경 면옥을 극찬했고 종종 우리들을 데리고 가셨다. 냉면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우리들이었지만 저도 모르는 와중에 그 맛이 입에 익어버린 모양이었다. 냉면 두 그릇을 시키고 앉아 있는데 옆 테이블의 중년 여성이 대뜸 말을 걸었다.

“어머, 형제끼리 냉면 먹으러 왔나 보네. 사이가 아주 좋은가 봐.”

그녀의 말에 나는 인상을 찌푸리며 대답한다.

“아니요. 친굽니다.”

“그래? 닮았는데.”

나는 실소를 터트리고, 그는 고소(苦笑)를 짓는다. 그런가. 같이 살다 보면 피가 통하지 않아도 닮는 법일까. 냉면 가락을 풀어 놓으며 나는 그의 얼굴을 훑어본다. 우리는, 과연 닮아 있나.

“공부는 잘 되어가?”

“그냥 그렇지 뭐.”

“생각해 둔 대학은.”

“P대. 여건이 되면 서울대 치고 싶고.”

“무리하지 마.”

“되도록 서울로 가고 싶어. 약속했잖아.”

“…약속했었지.”

우리들은 짧게 시선을 교환한다. 들을 사람도 없고 듣는다 해도 무관하지만 우리들은 말을 아낀다. 서울. 그곳은 막연한 우리들의 도피처였다. 우리들은 종종 집에서 도망치는 상상을 했다. 도망의 방법은 매번 달랐지만 최후의 은신처는 늘 서울이었다. 내 유년의 기억이 남아 있는 곳이라 그런가. 산골 깊숙한 곳에 숨어들 생각도 해보았으나 결국 이끌린 곳은 서울이었다. 스무 살이 되면 서울로 가자고 약속한 건, 언제인지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지만. 떠나겠다고 한 약속만은 아무리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았고, 나는 그 사실을 수시로 상기했다.

“아버진 어떻게 이걸 매일 드시지….”

“그리운 맛이니까.”

우리가 매일같이 서로를 탐하듯이.

“냉면이 아니라 함흥을 드시는 거겠지.”

그렇다면.

“…너는?”

불쑥 튀어나온 질문에 그는 묵묵부답이었다. 나 역시 질문을 던져놓고 딴청을 피웠다. 냉면 그릇을 비운 우리들은 가게를 나와 국제 시장을 걸어 다녔다. 비좁은 거리 한복판에 사람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호기심이 동해 다가가 보았더니, 화려하게 개점한 가게 앞에서 품바 공연이 한창이었다. 그리고 그 거리의 귀퉁이에서 한 노인이 색소폰을 불고 있었다. 흥겨운 품바들의 노랫소리에 색소폰으로 부는 베사메무초가 한데 엉켜 들었다. 그와 나는 걸음을 멈추고 잠시 그들을 구경하였다. 신명 나는 품바들의 소리도, 색소폰의 소리도 하나같이 서글펐다.

언젠가 그런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방인들의 노래에는 공통적으로 몇 가지 음이 결여되어 있다고. 하지만 그 결핍이 완벽한 음계로는 만들 수 없는 짙은 애수를 만들어 낸다고. 단지 몇 개의 음이 모자랄 뿐이지만. 욕망은 결핍의 다른 이름이란 말도 있듯이. 결국 이방인의 노래를 애잔하게 만드는 것은 그들의 욕망 때문이리라. 무엇이든 한번 가진 것을 잃어버린 자는 본능처럼 끝없이 욕망할 수밖에 없는 법이니까.

“그만 돌아갈까?”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남몰래 그의 손가락을 붙들었다. 거리는 사람들로 만들어지는 하나의 숲. 숲은 언제나 우리를 감추어준다. 나는 인파를 헤치고 전진하는 그를 따라 걸었다. 손가락만으로는 자꾸만 그를 놓쳐 아예 손을 깍지 껴 잡았다. 나는 거리가 좀 더 번잡해지기를 바랐다. 숲이 좀 더 촘촘해지기를 바랐다. 그랬다면 나는 좀 더 그의 손을 단단히 붙잡을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다시 한번 그의 손을 놓쳤다. 어떻게 잡아야 놓치지 않을 수 있을까. 아무리 되풀이해도 방법을 알 수 없었다. 그저 끈질기게 미끄러지는 손을 다잡을 수밖에. 거리를 벗어나는 동안 우리는 수차례 이별하고 다시 만났다. 그것은 아주 익숙한 일이었다.

* * *

집 근처 버스 정류장에 도착할 즈음 가랑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빗줄기는 서서히 굵어져, 숲의 입구에 도착했을 때는 그도 나도 흠뻑 젖어 있었다. 우리들은 말없이 비 내리는 숲을 걸었다. 이상하게도 걸으면 걸을수록, 자꾸만 뒷걸음질 치고 싶은 기분이 들었다. 그 역시 평소답지 않게 걸음을 천천히 옮기고 있었다. 비는 이내 폭우로 변하여 굵직한 빗발이 우리들의 몸을 따갑게 쏘았다. 시야가 차단될 정도로 거세고 힘찬 비였다. 그는 젖은 양복 상의로나마 미약하게 나를 가려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론 역부족이었다. 그때. 마침 생각난 장소가 있어 그의 손목을 잡아 이끌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숲에서 가장 굵고 오래된 고목들이 모여 있는 자리. 활엽수의 무성한 잎들이 몇 겹으로 뭉쳐있기 때문에 햇빛이 거의 통과하지 않아 잡초마저 미미한 곳이었다. 거센 빗방울도 여러 그루의 나무가 만든 촘촘한 그물을 완벽히 통과하지는 못했다. 우리들은 젖은 윗옷을 벗어던지고 자리에 털썩 누워버렸다. 첨단의 물방울들이 날카로운 끝을 세운 채 나를 향해 추락하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불시에 떨어지는 빗방울은 공포에 가까웠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의 옆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는 눈을 감은 채 편안한 숨을 내쉬고 있었다. 젖은 얼굴에 조심스레 손을 대어 보았다. 그의 속눈썹 끝에 걸려 있던 물방울이 손톱에 찔려 또르르 굴러 내렸다. 나는 그가 눈을 감는 순간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눈을 감으면 칼에 베인 눈꺼풀의 상처가 더 선명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새 살이 차오르지 않는 그의 흉터를 볼 때면 흉포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 기분이 들 때면 평정도 거짓도 유지가 불가능했다. 칼을 든 것은 박숙영이었지만 그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낸 것은 결국 나였다. 갑자기 견딜 수 없는 불안이 밀려들었다. 나는 충동적으로 그의 위에 올라탔다. 그가 반사적으로 눈을 떴다.

“무슨 일 있어?”

내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그가 물었다.

“아니.”

“그런데 왜.”

“모르겠어. 아무 이유도 없이 이래. 갑자기 불안이 차올라, 숨이 막히고 손끝이 떨려. 눈앞에 있는데도 네가 내 것이 아닌 것 같고, 네가 갑자기 사라져 버릴 것 같고. 한심한 줄 알면서도 그런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

“나를 못 믿겠어?”

나는 웃으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나를 못 믿겠어.”

“이리 와.”

그가 천천히 내 고개를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빗물에 젖은 두 입술이 서로에게 정착하지 못하고 자꾸만 미끄러진다. 매끄러운 마찰에 차갑게 식은 두 몸이 은근한 열기를 품고 달아오르기 시작한다. 나는 그에게서 떨어져 혀로 젖은 입술을 핥는다. 나는 웃으며 실없이 투덜거린다.

“맛없어.”

“빗물 냄새가 난다.”

그도 웃는다. 나는 그의 가슴에 고개를 기대고 묵직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지난밤의 시련을 고백한다.

“…기분 나쁜 꿈을 꿨어.”

“어떤 꿈인데.”

“너도 없고. 나도 없는 꿈.”

입으로 옮기는 순간 지독한 슬픔이 되어버리는 말.

“숲이 텅 비어버리는 꿈.”

그의 기다란 손가락이 젖은 머리카락 속을 파고든다. 그는 손톱을 세우지 않는다.

“무서웠어?”

“아니. 외롭더라.”

“그런 꿈은 잊어버려. 그런 일이 일어날 리 없잖아.”

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겠지….”

그래야겠지.

나는 눈을 감고 그의 심장 박동 소리에 집중한다. 그 소리에 뿌리째 흔들리던 마음들이 지친 가지를 내리고 평온을 되찾는다. 그는 오래간 침묵한다. 말하지 않는 시간 동안 그의 심장 박동이 더욱 거세진다. 심장 박동이 나의 관자놀이를 두드린다. 나는 조용히 눈을 감는다. 그가 침묵으로 다진 맹세를 신중하게 입 밖으로 꺼낸다.

“평생 같이 있자.”

어디까지고 울려퍼질 듯한 목소리. 나는 믿을 수 없는 말에 반문한다.

“평생?”

“평생.”

그 목소리가 견고한 장막이 되어 나를 감싼다. 나의 정 한가운데를 뚫는 그의 눈동자. 그 안에 담겨진 것은 모두가 진심이다. 그 치밀한 진심 한가운데 내가 있다. 거짓으로 들어찬 내가. 그 앞에서 베일을 벗는 내가. 그의 불투명한 검은 눈동자 속에 잠들어 있다.

그의 손가락이 애잔하게 나의 머리칼을 쓸어내린다. 어린아이를 재우는 듯한 그 손놀림에 몸속 깊은 곳에 웅크리고 있던 수면욕이 슬그머니 고개를 든다. 그가 나에게 무어라 속삭인다. 그러나 바로 곁에 있는데도 그의 목소리는 아득히 먼 곳에서 울린다. 빗방울이 그의 목소리가 오는 길을 굴절시키고 있다. 따스하게 달아오른 그의 몸 때문일까. 눈꺼풀은 자꾸만 무겁게 내려앉고 있었다.

“졸려….”

“좀 자 둬. 비 그칠 때까지만이라도.”

“그럴까.”

그의 어깨에 목을 기대고 눈꺼풀을 완전히 닫아버린다. 그는 자신의 몸 위에 걸친 내가 떨어지지 않도록 두 팔로 나를 단단히 끌어안는다. 잠의 초입. 그가 속삭이는 소리가 닫히기 직전인 의식의 문틈으로 새어 들어온다.

“…이상윤.”

그리고 차단된다. 그와. 세계와. 그의 목소리가 총총히 멀어진다. 다시 꿈. 나는 새하얀 방 한가운데 떨어진다. 꿈속에는 아무것도 없다. 전면이 새하얗게 발린 방은 기시감이 든다. 이미 어디에서 본 듯하다. 꿈의 경계에 절단된 그의 목소리가 후드득 떨어진다. 사, 랑, 하, 고, 있, 어, 라는 여섯 개의 글자는 앞뒤 배열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흩어져 있다. 나는 그것을 주워 모아 가슴에 안는다. 나는 그 단어를 아무도 모르게 주머니에 쑤셔 넣는다. 누가 볼까 두려워 숨겨 버린다. 나는 꿈속에서도 그의 고백에 대답하지 못한다.

대신 나는 백색의 방 한구석에 앉아 노래를 읊조린다. 노래를 부르며 나는 소망한다. 그가 꿈을 찢고 들어오기를. 내게로 찾아오기를. 텅 빈 공간에 수많은 노랫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것은 제각기 다른 방에 갇힌 이방인들의 노랫소리다. 나는 새하얀 공간 속에 축 늘어져 있다. 백색의 단면이 나의 색을 빨아들이려 뾰족한 촉수를 세우는데.

그가 꿈을 찢고 들어온다.

나는 무작정 달려가 그를 부둥켜안는다. 그가 찢고 들어온 벽의 구멍으로 바닷물이 쏟아져 들어온다. 발목, 무릎, 허리…. 물은 빠른 속도로 차오른다. 차오른 물이 귓불을 스칠 즈음 그가 귓가에 대고 차마 전하지 못한 말을 다시 한번 속삭인다. 잘리지 않은 고백. 순서가 바른 고백. 내가 스스로 금지시킨 말이다.

이윽고 물은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공간을 떠돌던 노랫가락도 넘실거리는 바닷물에 밀려 공간 밖으로 밀려난다. 이윽고 방은 한 점 남김없이 바닷물로 가득 찬다. 부둥켜안은 우리들의 몸이 서서히 떠오른다. 물속은 고요하다. 아무런 소리도 없다. 나는 그의 목에 매달려 적막 속에서만 겨우 전할 수 있는 말을 속삭여본다. 소리가 전해지지 않는 세계 속에서 고백한다. 입 모양만으로 드러낸다. 그나마도 가장 중요한 말머리를 흐리며. 나는 노래한다.

…하고 있어.

두 개의 음절이 결핍된 나의 노래는 그윽한 애수를 품고 그의 주변을 맴돈다. 행성처럼 그의 주변을 떠돌지만 결코 그에게 닿지 못하는 고백. 그러므로 꿈속에서나마, 나는 그를 위해 노래를 부른다.

그만을 위한 노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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