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은 뱀의 숲
큰형의 분골을 들고 막 집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아내가 우편물을 갖고 들어왔다. 그중에는 내 앞으로 온 편지도 있었다. 발신자는 큰형의 하숙집 주인이었다. 잡다한 돈 문제려니 하는 생각에 당장은 뜯어 볼 생각이 들지 않아 양복 안주머니에 넣어 두었다. 나는 비장한 표정으로 집을 나섰다. 어째서일까. 옛집을 방문하는 것뿐인데 그들을 배신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숲에 도착하기까지의 기억은 전무하다. 집을 나서는 순간 나는 바로 숲에 도착해 있었다. 우리들의 집은 흔적조차 없었다. 숲은 우리 가족이 만든 구멍을 메워 비로소 하나의 세계로 완성되었다. 숲에는 이제 희미한 불빛, 흐릿한 인간의 표지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나는 나무 사이로 걸으며 한 줌, 한 줌 큰형을 뿌렸다. 숲은 꽤나 황폐해져 있었다. 딱히 관리를 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울창했던 숲의 계절은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나는 삽을 빌려 가장 오래된 나무 아래 구멍을 팠다. 분골을 담아왔던 상자를 묻기 위해서였다. 잠시 삽질을 했을 뿐인데도 전신에 땀이 흘렀다. 열을 식힐 겸 양복 재킷을 벗었다. 별생각 없이 옷을 나뭇가지에 걸어 놓는데, 주머니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새하얀 편지 봉투가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정말 무슨 용건일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편지를 뜯어보았다. 봉투 안에는 편지지 한 장과 지저분한 종이 쪼가리 같은 것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나는 볼펜 똥이 잔뜩 묻어 있는 편지를 먼저 꺼냈다. 용건은 아주 간단했다.
죽은 이 씨가 손에 쥐고 있던 물건.
정신이 없어 미처 건네지 못했음.
도착하면 연락 바람.
나는 봉투 안에 남아 있는 종이를 꺼냈다. 피에 흥건히 젖어 한눈에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그것은. 기차표였다. 십여 년 전의 어느 날. 부산발 서울행 기차표.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나는 그것을 알아볼 수 있었다. 큰형은 얼마나 오랫동안 이것을 간직해온 것일까. 지키지 못한 약속을 펼쳐놓고 그는 얼마나 많은 밤들을 아파했을까. 기차표는 손을 타서 네 모서리가 모두 닳은 와중에도 절취선만큼은 깔끔하게 절단되어 있었다. 뜯긴 자국이 분명히 남아 있는 걸로 봐서 그는 죽기 직전에 표를 자른 듯했다. 그는 비로소, 그를 향해 떠난 것이다. 나는 그의 어리석음을 원망했다. 그는 틀렸다. 작은형은 결국 그로 인해 사람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았다. 자신으로는 작은형을 구원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단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들은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두려워했다. 그 두 사람이 서로를 사랑하는 것만큼의 십 분의 일이라도 자기 자신을 사랑했더라면 그들은 조금 다른 결말을 맺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것은 우리 모두가 관여한 비극이며 또 누구도 책임질 수 없는 비극이기도 하다.
나는 상자 안에 기차표를 넣고 그 위에 흙을 덮었다. 스산한 바람이 기묘한 울음소리를 내며 숲의 마른 가지들을 흔들어 놓았다. 나는 지난여름, 바람을 따라 춤추듯 흩날리던 울창한 숲의 잎새들을 떠올렸다. 그들의 군무를 보고 있으면 나는 여러 방향으로 부는 바람의 실체를 느낄 수 있었다.
그 기억.
나는 상자를 묻은 곳에 나뭇가지를 꽂았다. 가지 끝에 매달린 마지막 잎새가 바람결을 따라 깃발처럼 흔들렸다. 나는 나뭇잎의 뾰족한 끝을 손톱으로 건드려 보았다. 생명을 머금고 퉁겨지는 연록의 깃발…. 그래, 그는 깃발이었다. 하얗게 나부끼는 그의 육체. 깃발이 바람 부는 방향을 알려주듯이 우리들은 그의 존재로 인해 비로소 우리들 욕망이 향하는 바를 깨달았다.
그가 죽어 흘린 것은 피가 아니었다. 그것은 붉게 농익은, 지난 이십여 년간 우리가 그에게 억지로 채워 넣은 욕망이었다. 그를 가지지 못해 우리들은 그 몸에 불을 붙였다. 까맣게 타들어 가는 그의 육체는 하나의 심지였다. 그를 자신의 가슴에 꽂고자 한 자들은 모두 촛농처럼 녹아 사라졌다. 숲은 불모의 역사를 시작했고, 다시 살아야 할 때. 나는 그곳에 그들을 버리고 왔다.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내 형제의 부름이었다. 나는 목 안으로 나지막이 개 짖는 소리를 냈다.
가족이란 이름 아래 다섯 마리의 수컷이 살았다.
* * *
나는 매일 밤 꿈속에서 그 숲을 거닌다. 숲은 끊임없이 이어져 있다. 아무리 걸어도 집은 나타나지 않는다. 집은 젖빛 안개 속에 묻혀 있다. 나는 안개 속에서 약간의 소금기와 탄내를 맛본다. 숲은 무한히 이어져 있는 것이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숲 한가운데 서서 지나온 세월의 소리를 듣는다. 나는 문득 시간이 내 몸에 스며드는 것을 느낀다. 나는 이미 늙은 것이다. 메마른 잎새들이 그 몸을 장엄히 떨굴 때마다 숲의 곳곳에서 그들이 소곤대는 소리가 새어 나온다. 바람결에 속삭이는 그들의 영혼. 그러나 그들은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차가운 세계에 홀로 존재한다. 숲은 옛집의 외벽을 닮은 짙은 회색이다. 어둠을 무너뜨린 색이다. 나는 조용히 그들을 불러보지만 그들은 물론 대답이 없다. 나는 문득 홀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숲의 나뭇가지들 사이로 죽어간 뱀들이 안광을 내뿜으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러면 나는 무언가에 홀린 듯이 숲에 불을 놓는다. 불은 금세 숲 전체로 옮겨붙는다. 불길은 뱀의 눈과 같은 색을 띠고 있다. 나는 미처 숲을 빠져나가지 못하고 불길에 휩싸여 새까맣게 타들어 간다. 그리고 차차 부스러진다.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면 나는 눈을 뜬다. 내 옆에서는 아내가 세상모르고 잠들어 있다. 문 너머로 딸아이가 잠결에 칭얼대는 소리가 들려온다. 내 몸은 식은땀으로 찌들어 있다. 그리고 나는 겨우 깨닫는다. 그들은 여기 없다고. 그들은 이미 없다고. 나는 그들을 잃었다고. 나는 이제 더 이상 숲을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숲을 방문하지 않는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죽은 이들을, 떠나간 이들을 추억하며 눈을 감았다. 이제 그들이 나를 추억할 시간이다.
이제 그 숲에는 아무도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