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12)

파르마코스

그로부터 이 년이 흘렀다. 지난 십수 년의 고뇌가 한갓 꿈으로 여겨질 만큼 무미건조한 일상이 계속됐다. 큰형과 작은형의 불륜, 어머니의 실종, 박숙영과 윤선미의 죽음, 작은형의 재판과 수감…. 그 모두가 넘치는 시간에 쓸려 내려갔다.

아버지는 밤낮없이 미싱을 돌렸고 큰형은 P대 입시생들을 상대로 과외를 다녔다. 집안일만으로도 벅찬 큰형이 과외를 시작한 것은 온전히 내 탓이었다. 나는 어느덧 입시생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벌이만으로는 입시 뒷바라지를 하기에도 벅찼기에, 큰형은 내 등록금을 벌기 위해 집을 나섰다.

큰형은 부쩍 피곤해 보였다. 살얼음판처럼 창백하고 건조한 피부. 파르스름한 눈가. 아름답던 입술은 시리게 부르터 있었다. 나는 걱정하면서도 한편으로 그런 큰형의 모습에 염증이 났다. 매일 같이 통장 잔고를 확인하는 아버지도, 유령처럼 시들어가는 큰형도 내게는 과도한 부담이었다. 그들을 볼 때면 나는 어깨가 무거워졌다. 명심해라. 너를 위해 이렇게 희생하고 있어. 절대 잊으면 안 돼. 이 모든 게 오직 한 사람. 너를 위한 거야. 아무도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그런 생각이 들었고, 의도와 상관없이 나는 자꾸만 퉁명스러워졌다. 아버지는 ‘너만은 대학에 보내주겠노라.’며 의기양양했지만 나는 그 얼굴에 침을 뱉고 싶었다. 그렇다. 내게도 때늦은 사춘기가 찾아온 것이다.

나는 습관적으로 혼자가 되려 했다. 아버지와 큰형을 피해 학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를 했고 집에서는 수험 공부를 핑계로 문을 걸어 잠근 채 책을 읽었다. 나는 친구가 적었다. 누군가에게 동질감을 느낀다는 것은 내게 쉽지 않은 일이었다. 숲에 들어와 보지 않은 자는 누구도 숲의 지리를 이해하지 못한다. 나의 인생은 매일 밤 꾸는 악몽과도 같아서 누구에게든 떠들고 싶지만 누구도 완벽하게 공감할 수는 없는 그런 것이었다.

하여 책만이 나의 벗이었다. 나보다 깊고 검은 숲을 거닌 자들. 그들의 속삭임을 듣는 것만이 내 설익은 청춘의 유일한 행복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문학에 꿈을 품었다. 그것은 매우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어렴풋이 나는 글이 쓰고 싶었다. 오븐에서 빵 반죽이 부풀어 오르듯 그 욕망은 한순간에 여러 겹의 형태로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고, 나는 문학으로 진로를 정했다. 아버지는 불만을 표시했고 큰형은 드물게도 환하게 웃으며 기뻐했다.

수험 공부를 하는 틈틈이 나는 책을 읽었고 한 달에 한 번 토, 일요일은 나란히 작은형과 셋째 형의 면회를 갔다. 셋째 형은 운 좋게도 부산의 한 병원으로 이전 배치되어 널널한 군생활을 보내고 있었다. 상관들은 제 자식인 양 셋째 형을 귀여워했다. 아버지를 제외한 어른들은 대부분 셋째 형을 좋아했다. 셋째 형은 그들에게 적당한 아부와 자신의 젊은 날을 추억하게 만드는 다소의 일탈, 간질간질한 농담들을 제공했고 그들은 그런 셋째 형 덕분에 막연히 유쾌해졌다.

이러한 기질은 이후 셋째 형이 도박판에서 ‘불광’이라는 이름으로 오래, 아주 오래 살아남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많은 도박꾼들이 거꾸러지고 뒤통수에 칼을 맞는 동안에도 셋째 형은 여러 어르신들의 비호 아래 지문이 닳도록 화투짝을 비빌 수 있었고 불광 이상훈의 전설은 이후 오래간 부산 호사가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셋째 형은 밥 먹듯이 포상 휴가를 받았지만 집에 들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가끔 몇몇 친구에게서 시내 대폿집에서 너희 형을 보았다는 호기심 섞인 제보를 들을 때마다 ‘아, 또 휴가를 나왔구나.’하고 멋쩍게 지레짐작하는 것이 내가 그에 대해 말할 수 있는 전부였다. 그리고.

단 한 번 어머니를 보았다는 제보가 들어왔다. ‘부산 역전 다방에 번듯한 제복을 입은 남자와 함께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불명의 목소리로 전화가 걸려왔고, 나는 부리나케 부산역으로 향했다. 급박하게 뛰쳐나가느라 전화를 건 상대가 누구인지 확인하지도 못했다. 그건 대체 누구였을까.

그날은 마침 추석이었고 역전은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다. 나는 보따리를 진 사람들을 차례로 밀치며 어머니를 찾았다. 저 멀리 부산 다방에서 붉은 원피스를 입은 여자와 제복을 입은 남자가 나오는 것이 보였다. 하지만 거리가 너무 멀었기에 그녀가 정말 내 어머니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을 향해 다가가고 싶었지만 더욱 촘촘해진 귀성객의 그물을 뚫기엔 역부족이었다. 나는 소리쳐 어머니를 불렀다. 그러나 붉은 원피스는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은 물뱀의 유영처럼 순식간에 미끄러지듯 사라졌고 역전에 홀로 남겨진 나는 맥이 풀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집에 돌아온 내게 큰형은 어딜 다녀왔느냐며 넌지시 물었지만 나는 한마디 대꾸 없이 방에 틀어박혔다. 그 여자는 과연 어머니였을까. 설령 어머니였다고 해도 나는 큰형에게 사실을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어머니와 큰형은 그랬다. 서로 꼬리를 묶인 맹금류처럼 둘 중 하나가 죽지 않는 한 계속해서 투쟁할 그런 존재였기에, 겨우 잠잠해진 큰형의 삶에 부러 큰 파문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날의 일을 아무도 모르게 마음속 깊이 담아두었다. 내 안에는 조그마한 항아리들이 가득 차 있었다. 각자 하나의 비밀을 담은 수백의 항아리들. 그중 가장 구석에 놓인 낡은 항아리에는 윤선미가 죽기 전에 남긴 말도 담겨 있었다.

‘당신도 속고 있어! 이 남자가 당신도 그렇게 속이고 있다고!’

나는 종종 항아리의 뚜껑을 열어 그 말을 꺼내 무릎에 올려놓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큰형은 대체 무엇을 속이고 있을까. 때로는 한나절을 그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실마리조차 잡을 수 없었다. 애초 윤선미는 큰형을 증오했다. 그녀가 큰형에 대해 거짓을 말했을 수도 있다. 아니 그편이 오히려 신빙성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말을 온전히 무시할 수 없었다. 그 말은 마치 부레처럼 아무리 힘주어 잡아 눌러도 천천히 의식 위로 떠올랐고, 그럴 때면 나는 복잡한 마음을 가누지 못해 아버지의 술을 훔쳐 먹곤 했다. 불안했다. 어쩌면 나는 알 것도 같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 대해 조금도 알아서는 안 되었다. 그 의심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끝나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모든 비밀과 의심 위로 묵직한 뚜껑을 덮었다. 아무리 거센 바람이 불어도 열리지 않도록. 수시로 내 항아리들을 단속했다.

작은형은, 뭐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설명해야 좋을지 모를 정도로 그 시절의 작은형은 어려웠다. 면회를 가면 갈수록 우리가 나누는 말은 적어졌다. 당연한 일이었다. 큰형을 제외하면 우리가 공유할 수 있는 것은 극히 적었고, 우리는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그 큰형에 대해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았다. 우리의 대화는 늘 말보다 침묵이 길었다.

큰형은 선포한 대로 단 한 번도 작은형을 보러 가지 않았다. 고작 이런 일로 서로를 외면하다니 역시 그것은 단순한 섹스에 지나지 않았구나. 아아. 인간이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나는 그들을 비웃었다. 경멸했다. 자조했다. 하지만 비참했다. 밤이면 그들의 신음이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매일 밤 끈덕진 모기처럼 내 귓전에서 윙윙거렸다. 나는 귀를 막지도 숫자를 세지도 않았다. 나는 피할 수 없었다. 피해서는 안 됐다. 그것이 내게 남은 일말의 양심이었으므로.

교도소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닌 건지 작은형은 요주의 인물이 되었다. 작은형은 특이하게도 사회에서 저지른 범죄 때문이 아니라 교도소 안에서의 범죄 때문에 부산 건달들에게 눈도장을 찍었다. 이른바 스카우트 전쟁이 벌어졌다. 건달들은 부산에서 가장 외진 곳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우리 집 주변을 서성이며 쌀이며 생필품들을 갖다 주었다. 그들은 살벌하리만치 친절한 표정으로 ‘이상문이 잘 있제? 빵 나오면 동래 행님 함 보자 캐라.’라고 말했다.

그들에게 한 대 맞으면 당장 죽을 정도로 병약한 큰형이었지만, 그는 야멸차게 그들을 거절했다. 큰형은 당장 쌀독이 비었어도 그들의 원조를 거부했고 나에게도 절대 그들이 주는 물건을 받아서는 안 된다며 신신당부를 했다. 저들은 자원 봉사를 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우리가 받는 물건이 다 빚이 되고 결국은 상문이가 그 빚을 다 떠안게 된다. 저 사람들이 우리에게 쓰는 돈은 상문이를 사기 위해 치르는 값이다. 구구절절 옳으신 말씀. 하지만 큰형이 집에 없을 때면 나와 아버지는 그들이 주는 물건들을 순순히 창고로 옮겼다. 아버지는 주문을 외우듯 중얼거렸다. 일단 살고 봐야지. 그럴 때면 건달들은 아주 흡족한 얼굴로 웃었고 나는 머지않아 작은형이 그들 사이에 서게 되리란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래선 안 된다는 걸 알았지만 결국엔 그렇게 될 수밖에 없으리란 것도 알았다. 살인죄를 저지른 중졸의 전과자가 출소 뒤 가는 곳이 최종적으로는 결국 건달의 세계란 것을 나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동래 형님. 서면 형님. 칠성 형님. 대포 형님…. 교도소에 가 있는 동안 작은형에게는 큰형 대신 수많은 형님들이 생겼다.

그렇다고 내가 아버지와 화해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아버지가 창피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질리지도 않고 북에 살던 시절에 대해 이야기했다. 대지주의 아들로 학교에 말을 타고 다녔다는 둥, 열네 살에 체호프를 읽었다는 둥, 나는 정말 배고픈 게 뭔지도 몰랐다는 둥. 두들겨 맞을 각오하고 ‘지겹지도 않아요?’라고 묻고 싶을 정도로 아버지는 그 시절의 이야기를 토씨 하나 빼먹지 않고 되풀이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면 어머니의 이야기를 꺼냈기에 그의 술 상대만큼은 내가 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수시로 터져 나오는 하품을 숨기며 고행하는 심정으로 그 모든 푸념을 받아 주었다.

그러던 어느 날. 시내에서 아버지를 보았다. 나는 몇몇의 친구들과 함께였고 아버지는 미군과 함께 있었다. 우리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아버지가 아닌 미군이었다. 친구들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앞다투어 그에 대한 썰을 풀어놓았다.

“상원이 니, 저 양키 누군지 아나?”

“아니? 누군데?”

“니 뭐하는 놈이고? 부산 놈이 점마 모르는 게 말이 되나?”

“아, 진짜 모른다니까.”

“니 그 가시나 알제? 두들겨 맞아 뒤진 가시나 말이다. 와, 아있나. 죽은 가시나 거시기에서 젓가락이 나와 가, 경찰이 난리 부르스를 안 췄나.”

“응. 알지. 근데 그 미군은 무죄판결 받았다며. 그런데 그게 왜?”

“하이고, 이 답답아. 점마가 바로 그 양키 아이가. 낯짝도 두껍제. 전깃줄로 사람 목 졸라 쥑이 놓고 우째 저래 당당하노.”

“진짜 점마가? 저래 멀쩡하게 생긴 놈이 사람을 쥐깄다고? 몬 믿겠다.”

“잘생긴 놈은 살인도 안 한다 카드나. 글타 치면 상원이네 행님도 멀쩡한 걸로 치면 부산 최고…. 아이고! 상원아, 미안테이. 내 나쁜 맘 묵어가 그런 기 아이고 그냥 갑자기 생각이 나 가…. 용서해도. 잘못했다. 응?”

“됐어. 신경 쓰지 마.”

나는 얼른 화제를 다른 데로 돌리고 싶었다. 그런데 그때. 그 미군 옆에서 나는 아주 익숙한 얼굴을 발견하고 말았다.

“어? 상원아. 저 사람 느이 아부지 아이가?”

자리를 옮기자고 말하려는 찰나, 친구 녀석들이 아버지를 발견하고 말았다. 나는 속이 뒤틀려서 참을 수가 없었다. 끼리끼리 논다더니. 나는 살인범인 작은형보다 아버지가 더 창피했다. 아니, 우리 아버지 아니야. 나는 단호히 아버지를 부정했다.

“무슨 소리 하는 기고. 딱 느이 아부지구마.”

“상원이 아부지 점마랑 아는 사이가? 맞다. 느그 아부지 미군 부대에서 일 받는다켔제. 그러니끼네 저래 친한 거구마.”

“아, 글쎄 아니라니까!”

버럭 화를 내고 말았다. 소리를 질러도 전신에 스멀거리는 불쾌감은 가시질 않았다. 아버지는 키가 두 뼘이나 차이 나는 미군과 힘겹게 어깨동무를 하고 있었다. 아버지가 영어를 할 줄 알았던가? 나는 아버지를 노려보았다. 미군은 친구들의 말마따나 잘생긴 얼굴이었지만 전기톱 같은 눈빛이 과연 살인자다웠다. 저런 인간에게까지 굽실거리는 건가. 나는 땅바닥을 향해 침을 뱉고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기면 기고 아이면 아이제, 와 화를 내고 그라노?”

“단디 보니께 느그 아부지 아닌 것도 같다. 니는 와 아까부터 상원이 화날 소리만 하노. 임마 아부지가 저런 인간쓰레기하고 다닐 리 있겠나.”

“그라게 말이다. 미안타. 대신 오늘은 내가 밥 살 테니까 화 풀어라, 고마.”

“아니야. 나 화 안 났어. 괜히 소리 질러서 미안하다.”

“그래? 역시 이상원이다. 사나이 대장부답다. 아…. 배고파 디지겠다! 밥이나 무러 가자.”

친구들과 우르르 몰려가는 와중에 나는 슬쩍 아버지를 뒤돌아봤다. 아버지는 끝내 나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미군과는 눈이 마주쳤다. 미군은 나를 보더니 송곳니를 드러내며 날카롭게 웃었다. 나도 모르게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잔혹한 표정은 처음이었다. 나는 부러 발걸음을 재촉했다. 다시는 보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행여 꿈에 나올까 두려웠다. 나는 그 남자를 잊으려 했다. 적막한 밤이면 남자의 미소가 떠올랐고 나는 몸서리를 쳤다. 빌어먹을! 무던히 애를 써서 겨우 그 살인마의 얼굴을 희미하게나마 지웠을 즈음.

그 남자가 집으로 찾아왔다.

* * *

“누구세요?”

어떤 일에도 좀처럼 당황하지 않는 큰형은 한적한 일요일 오후 금발의 방문객을 앞에 두고 상당히 놀란 기색을 보였다. 큰형의 질문에 외국인은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남자는 큰형의 어깨 너머로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는 그와 거리에서 마주쳤던 날을 떠올렸다. 그 소름끼치는 얼굴을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이야. 아버지가 그를 집으로 끌어들일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기에 나는 적잖이 충격을 받았다. 그가 계속 나를 응시하자 큰형 역시 그의 시선을 따라 나를 돌아보았고, 나는 하는 수 없이 어정쩡하게 아는 체를 했다.

“아버지 아는 사람. 전에 시내에서 봤어.”

“피트 베이커라고 한다. 이문종의 초대를 받고 왔다.”

“아…. 그러시구나. 들어오세요.”

딱딱한 군대식의 말투. 남자의 한국어는 상당히 능숙했다. 큰형은 여전히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피트라는 남자에게 커피를 건넸다. 가까이서 본 피트는 거리에서 마주쳤을 때보다 훨씬 젊고 건장해 보였다. 금갈색의 짧은 머리칼에는 윤기가 흘렀고 굵은 뱀의 몸뚱이처럼 솟은 팔뚝의 힘줄들은 그러잖아도 진한 수컷의 냄새가 풍기는 그를 한층 더 정력적으로 보이게 만들었다.

큰형은 한눈에 그가 아버지의 숨통을 쥐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간파하고 최대한 살갑게 굴었지만, 동시에 그의 범상치 않은 광기 역시 간파했기에, 그가 불쾌하지 않을 만큼의 벽을 두었다. 긴 세월을 타자의 욕망으로 살았던 큰형이 피트의 야만스러운 본능을 깨닫지 못했을 리 없었다. 그는 다만 모르는 척하는 데 능숙했다. 어느 누구보다도.

“집이 좋군.”

“이젠 그렇지도 않아요. 몇 년 살지 않은 거치곤 허름하죠.”

“네가 첫째인가?”

“네.”

“넌.”

“전 막냅니다.”

“둘뿐인가?”

“일단. 지금은 그래요. 셋째는 군대엘 갔고. 둘째는….”

“그만. 범죄자 이야기는 하고 싶지 않다.”

군인이기 때문일까. 피트의 말 한마디 한마디에는 묘한 위압감이 있었다. 나는 작은형을 여느 범죄자와 똑같이 취급하는 그에게 화가 났지만 감히 대들 수는 없었다. 내가 지그시 인상을 찌푸리자 그와 동시에 피트 팔의 힘줄이 꿈틀거렸다. 큰형은 가만히 내 무릎 위에 손을 얹었다.

“어휴. 먼저 와 계셨네! 워낙 외진 곳이라. 찾기 어려웠지요?”

어색한 침묵이 한없이 이어지던 참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아버지는 피트의 방문을 대단히 기뻐하고 있었다. 피트와 아버지는 형식적으로 -그러나 아주 단단하게- 악수를 하고 서로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그 생소한 방식의 인사를 지켜보며 큰형과 나는 멍하니 앉아 있었고, 아버지는 이미 안면을 튼 우리들을 일으켜 다시 차근차근 소개했다. 피트는 우리들을 위아래로 샅샅이 훑어보았다. 불쾌했다. 몸 구석구석을 주무르는 듯한 시선이었다.

“상윤아. 너 그, 양주 좀 가져와라. 알지? 창고에 까만 병으로 된 거. 안주도 좀 만들고. 여하튼 푸짐하게 좀 차려 봐.”

“알겠어요.”

“상원이 너도 돕고. 얼른!”

“네. 네.”

우리들을 부엌으로 밀려났다. 피트가 시야에서 사라지자 겨우 숨통이 트였다. 큰형은 분주하게 술상을 차렸고 나는 큰형을 도와 컵이나 그릇 등을 옮겼다. 아버지는 자기보다 한참 어린 피트에게 온갖 너스레를 떨며 잘도 굽실거렸다. 나는 그 모습이 너무 꼴사나워 괜스레 큰형에게 투덜거렸다.

“저 양키 말이야. 엄청 나쁜 놈이야. 형은 소문 들은 적 없지?”

“응.”

“사람을 죽였대. 단골 양공주를 피떡이 되도록 만들어서. 시체가 말도 못 하게 끔찍했다더라.”

“그래?”

“저놈 아버지가 군에서 꽤 높은 자리에 있다나 봐. 미국 놈이니까 함부로 건들기도 어렵고. 그래서 그냥 쉬쉬하면서 지나갔대. 아버지는 왜 하필 저런 새끼랑 일하는 거야? 진짜 생각만 해도 소름 끼친다.”

“아버지 알아서 하시겠지….”

큰형은 그에 대해 별로 말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가 찾아오는 바람에 이래저래 군일이 생겨난 것이 영 귀찮은 모양이었다. 큰형은 있는 재료로 안줏거리를 만들어 거실로 들고 나갔다. 아버지와 피트는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 이야기하며 너털웃음을 터트렸고 억지로 그들에게 붙잡힌 큰형은 말없이 비는 잔에 양주를 따랐다.

“아들이 어머니를 닮았군.”

“뭐. 그런 말을 종종 듣긴 합니다만 따지고 보면 그리 닮지도 않았어요.”

피트는 정말 중요한 사람인 모양이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이야기가 나와도 화를 내지 않았다.

“아니. 아주 똑같다.”

“뭐…. 피트가 그렇다면 그런 거겠죠.”

“특히 여기.”

피트는 아무 거리낌 없이 한 손으로 큰형의 얼굴을 감싸 쥐었다. 긴 손가락이 큰형의 눈가를 뜨겁게 어루만졌다. 큰형은 순간적으로 그 손을 내치려 했으나 이내 평정을 되찾고, 형식적으로 웃으며 부드럽게 그의 손을 거두었다. 화가 난 나는 성화를 부려 큰형과 자리를 바꾸어 앉았다. 큰형은 머리를 쓸어 넘기는 척하며 그가 닿은 부분을 털어냈고 피트는 그런 큰형을 흥미롭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어색한 분위기가 이어지자, 아버지는 갑작스레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냈다.

“참. 니들. 공짜로 영어 배울 기회가 생겼다.”

“네?”

“피트가 너희들에게 개인적으로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는구나.”

“네? 난 싫어요!”

나는 순간적으로 빠르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버지는 그러지 말라는 신호를 보냈지만 나는 단호히 거절했다. 친구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도 싫었고 피트에게 맞아 죽는 것도 싫었다. 하지만 내가 대놓고 거절한 탓에 큰형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입장에 처했다. 아버지는 큰형에게 너만은 수락하라는 노골적인 눈치를 보냈고 피트 역시 큰형의 반응에 주목하고 있었다.

“귀찮을 텐데요. 군대 일만도 여간 바쁠 게 아닐 테고.”

“개인 시간은 많아. 아무튼 쓸 만한 통역이 필요하다.”

“피트는 계급이 높아서 그렇게 얽매이지 않아. 피트가 먼저 말을 꺼내긴 했지만 내가 각별히 부탁했다. 앞으로는 영어 하나만 잘해도 먹고 살 수 있는 세상이야. 이런 기회가 또 어디 있냐. 복이 굴러 들어온 게지.”

“딱히 영어 쓸 일도 없고 괜찮은데요.”

“큰형 영어 잘해요. 고등학교 다닐 적에도 제일 잘했잖아요.”

“사방팔방으로 과외 다닌다고 고생 말고 집에서 공부나 해. 너도 번듯한 직장을 가져야 될 거 아니냐.”

“상원이 대학 등록금은 어떡하구요.”

“등록금? 내가 그런 돈도 없을까 봐! 너 지금 이 애빌 무시하는 거냐!”

아버지의 언성이 갑자기 높아졌다. 지뢰를 밟은 것이다. 큰형은 나지막하게 아니라고 대답하고 입을 닫아 버렸다. 아버지의 비겁한 꼴이 지긋지긋해 나는 마음에도 없는 말을 꺼냈다.

“됐어. 나 원래 영어 배우고 싶었으니까 내가 할래. 큰형은 그냥 일해.”

“상원아.”

“나는 어느 쪽이어도 상관없다. 자네가 할 텐가?”

피트가 자연스럽게 내 어깨에 팔을 둘렀다. 피트의 손아귀가 오른쪽 어깻죽지를 아플 정도로 강하게 잡아 눌렀다. 나는 그 순간 치기로 내뱉은 말을 후회했다. 감당하기 힘든 묵직한 불길함이 땀처럼 흘러내렸다. 피트로 말미암아 느끼는 불쾌감의 근원은 바로 그것이었다. 나는 이 남자에게 산 채로 잡아먹힐지도 모른다는 그런 흉포한 예감. 겁에 질린 나를 알아챈 큰형이 피트의 손을 떼어내며 말했다.

“상원이는 봐주세요. 지금은 수험에 전념해야 할 때니까.”

“그럼. 상윤이 너는 하는 거지?”

“…제가 해야죠. 저밖에 더 있나요.”

“진즉에 그럴 것이지. 이놈들이 이래 숫기가 없어요. 이해해주십쇼.”

“그래. 상당히 기대되는군.”

나는 공부할 것이 남았다는 핑계를 대고 피트가 돌아갈 때까지 2층 내 방에 틀어박혀 있었다. 불편한 술자리는 이후로도 두 시간가량 지속되었다. 피트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나는 거실로 뛰어 내려갔다. 아버지는 안주가 거의 남지 않은 상에 혼자 앉아 자신의 잔에 쓸쓸히 술을 따르고 있었다. 끓어오르는 화를 참을 수 없었던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언성을 높였다.

“아버지! 진짜 왜 그래요?”

“너는 왜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저 인간이 어떤 인간인지 빤히 알면서, 어떻게 그래요?”

“어떤 인간이라니. 누가 어떤 인간인데?”

“피트인지 뭔지 하는 저 개새끼 말이에요. 부산 사람들 중에 저 새끼 모르는 사람이 있을라구요! 저놈이 못쓰게 만든 여자가 한둘이에요? 게다가 사람도 죽였다면서요!”

“다 헛소문이다. 그런 말은 믿지 마.”

“믿고 싶지 않은 거겠죠.”

아버지는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랐다.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 취기가 오를 정도로 아주 독한 술이었다. 피트가 곁에 없어서인지 아버지의 표정은 아주 어둡고 참담해 보였다. 도대체 본심이 뭐야.

“보아하니 한국말도 잘하는데 무슨 통역이 필요하대요? 저런 인간이 제대로 된 영어를 가르쳐 줄 리가 없잖아요. 대체 무슨 속셈이에요?”

“속셈 같은 거 없다. 그런데 너 지금 나한테 대드는 거냐?”

“큰형은 어디 갔어요?”

“벌써 날도 어둡고 해서, 피트 가는 길 좀 안내하라고 딸려 보냈다.”

“길을 모를까 봐서요! 낙엽도 다 떨어졌어요. 길을 잃을 리가 없잖아요!”

“이 새끼가…. 닥치지 못해!”

나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아버지가 던진 술잔이 등 뒤의 벽에 부딪혀 산산조각 났다. 나는 등에 튄 파편들을 털어내다 손을 베었다. 하지만 조금의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그런 상처는 고통의 축에도 끼지 못했다.

“네가 뭘 안다고 지껄여! 우리가 누구 덕에 먹고 사는지 알기나 해!”

“쓰레기가 주는 돈 따위, 필요 없어요. 차라리 굶어 죽고 말지.”

“하, 그래? 그럼 네가 벌어먹고 살아 봐, 한번.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금방 알게 될 거다. 배고파 본 적 없는 놈들이 꼭 그런 소릴 하지.”

“왜요? 아들 팔아먹음 그만 아니에요? 윤선미한테 팔아먹으려다 안 되니까 이젠 양키한테 팔아먹으려구요? 참 좋겠어요. 밑천은 두둑하잖아요. 아들이 넷이나 있으니.”

“아니, 영어를 가르쳐 주겠다는데, 대체 무슨 망상을 하는 게야!”

“그럼 얼마나 다행이겠어요, 씨발. 그러기만을 빌게요.”

“이 녀석이 근데….”

참다못한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술에 취한 아버지는 한 손으로 벽을 지탱하고 있는데도 심하게 비틀거렸다. 나는 진심으로 묻고 싶었다. 당신은 어디까지 몰락할 거야? 당신은 대체 어디까지 추락할 거냐고!

“큰형이 그놈한테 맞아 죽으면, 다 아버지 탓이에요.”

“뭐야?”

“큰형이 죽으면 다 아버지 탓이라고요! 책임져요. 책임지라구요!”

나의 말들은 모두 비명에 가까웠다. 한참을 멍하니 서 있던 아버지가 갑자기 키득키득 웃기 시작했다. 몸조차 제대로 가누지 못했지만 그 웃음소리만큼은 고막에 새긴 듯 선명하여 나는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너는…. 조금의 책임도 없다고 생각하냐…?”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그날 밤.”

나는 그가 말하려 하는 바를 금세 깨닫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만해요.”

“상윤이 상문이의 계획을 발설한 건….”

“그만하라니까요!”

“넌 나랑 똑같아. 비겁하지. 겁도 많고.”

“아니….”

“혼자 감당할 수 없었던 게지. 그래서 나에게 떠넘긴 거야. 어떻게든 편해지려고. 이건 정의다, 내가 나쁜 게 아니다, 합리화시키면서 말이야.”

“아니야!”

“공범자! 날 욕해라! 헐뜯고 비난하고 얼마든지 끌어내려. 그래도 소용없을 게다. 넌 나처럼 될 거니까. 꼭 나처럼!”

“…차라리, 차라리! 나도 큰형처럼 아버지 아들이 아니었음 좋겠어!”

“못난 놈!”

아버지의 두터운 손이 뺨에 스쳤다. 휘청거리며 내뻗은 팔의 위력은 형편없었고, 나는 중심을 잃고 내 쪽으로 넘어지는 아버지를 확 떠밀어버렸다. 아버지는 둔탁한 소리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차, 창피한 줄 아세요.”

나는 술에 취한 아버지를 두고 밖으로 뛰쳐나갔다. 막 숲을 빠져나오는 큰형이 나를 발견하고 천천히 손을 흔들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큰형에게 달려갔다. 큰형은 위태로울 만큼 흥분한 나를 보고 걱정스레 물었다.

“무슨 일 있었어?”

“아니….”

“아버지는.”

“죽었어.”

“뭐?”

내 말에 큰형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그 얼굴에는 일말의 다급함도 없었다. 마치 아버지가 언제 죽어도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거짓말이야. 거짓말.”

“그럼 그렇지. 후….”

큰형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안도에도 여러 종류가 있다. 그것은 어떤 종류의 안도였을까. 아니, 안도이긴 했던 걸까. 실망은 아니었을까.

“안 들어갈 거야?”

“형.”

“응?”

“형. 숲에 가지 마.”

“무슨 소리야.”

“혼자 숲에 가지 마.”

“뭐야. 너 술 마셨어?”

“…오면, 작은형이 오면 가….”

온몸의 힘이 빠져버린 나는 쓰러지다시피 큰형을 껴안았다. 이제는 나보다 작은 큰형. 나보다 작은 몸으로 모든 것을 짊어지고 가야 하는 큰형. 나는 감히 그의 짐을 나눌 수 없었다. 나는 힘주어 큰형을 껴안았다. 차라리 큰형이 부서져 버렸으면 했다. 그는 모든 분란의 피해자였지만 또 그 모든 분란의 시초였기에. 나는 그에게 한없는 연민을 품으면서도 한편으로 그가 없었으면 하고 바라곤 했다. 내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큰형은 핀잔 같은 한마디를 던지며 내 등을 토닥였다.

“쓸데없는 걱정 말고 넌 공부나 해.”

공부 같은 게 될 리가 없잖아. 나는 실없이 웃으며 나보다 낮은 어깨에 고개를 파묻었다. 피트의 영어 교습이 시작된 것은 그로부터 한 달 뒤, 겨울의 초입. 부산에 드물게도 함박눈이 내리던 날의 일로.

그날 나는 가족이라는 이름에 종지부를 찍었다.

* * *

그해 겨울 나는 P대 국문과에 합격했다. 내 실력으로는 다소 무리였기에 거의 포기하고 있었는데 운이 좋았다. 뜻밖의 합격 소식에 나는 뛸 듯이 기뻐하며 가족들에게 즉시 그 사실을 알렸다. 합격 소식을 듣자마자 아버지는 평소 잘 만나지 않는 친구들과 당장 술 약속을 잡아 자랑을 하러 나가셨고, 큰형은 저녁상 가득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을 차려주었다. 작은형이 교도소에 들어간 뒤 미소를 잃다시피 한 큰형이 그렇게 환하게 웃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큰형이 합격을 하고도 들어가지 못한 대학이라 더욱 기쁜 모양이었다.

배가 터지도록 저녁을 먹으며 큰형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큰형은 내가 읽는 책이나 공부하고 있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을 귀 기울여 들어주었고, 그럴 때면 나는 더 신이 나서 큰형이 별 관심도 가지지 않을 문예이론서나 대본소에서 나오는 금지 시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장황하게 풀어놓았다. 애초 내가 문학에 강하게 이끌린 계기는 큰형이었다. 노틀담의 꼽추. 그리고 에스메랄다. 어떤 사랑으로도 이방인은 결코 행복해질 수 없다던 그의 잠언. 그것은 세월이 흐르면 흐를수록 나의 폐부로 깊숙이 파고들어 내가 추구하는 문학, 내 전생의 화두가 되었다.

돌이켜보건대 내가 지금껏 살아온 삶은 결국 그러한 것이었다. 나는 이방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방인이 되지 않고자. 나는 얼마나 절실히 몸부림쳤던가.

* * *

휴가를 나온 상훈 형, 그러니까 셋째 형이 그 여자와 함께 집에 왔다. 그 여자는 여전히 볼품없었다. 다른 사람의 외모에 대해 가타부타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녀는 유난했다. 신기했다. 셋째 형을 스쳐 간 여자들 중에는 입이 떡 벌어질 정도의 미인도 많았다. 나는 당연히 그 여자가 금방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실제로 셋째 형은 그 여자를 전혀 소중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 여자는 셋째 형의 세컨드였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퍼스트는 쉴 새 없이 바뀌었으나 -보통은 반대일 텐데- 세컨드는 부동이었다. 나는 항시 그 이유가 궁금했다. 셋째 형은 무엇 때문에 그 여자를 버리지 못하는가. 두 사람이 집에 찾아온 그날 나는 조금이나마 그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어서 와.”

다행히도 아버지가 없는 날이었다. 셋째 형과 그 여자는 거리낌 없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그렇게 가끔 집을 찾으면 어색하기도 하련만 셋째 형은 그런 게 없었다. 나는 큰형을 자리에 앉혀두고 사람 수대로 커피를 탔다.

“옷 벗어야지예.”

“쪼매 덥구마.”

“팔 벌리소.”

셋째 형은 두 팔을 벌리고 허수아비처럼 섰다. 그러자 그 여자는 셋째 형의 목도리를 걷고 겉옷을 벗겨 옷걸이에 정갈히 걸어두더니, 또 얼른 셋째 형이 앉을 자리에 방석을 찾아 깔았다. 셋째 형은 익숙하다는 듯 손 하나 까딱 않고 있다 여자가 준비한 방석에 앉았다. 셋째 형을 상전 모시듯 하는 여자의 태도에 큰형과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 거북했다. 셋째 형이 신이 나서 떠드는 사이에도 여자는 말 한마디 않고 그만 바라보며 무언가 해줄 일은 없는지 필요한 것은 없는지 분주히 눈치를 살폈다. 여자가 자리를 비운 틈을 타 나는 셋째 형에게 물어보았다.

“결혼은 언제 할 거야?”

“무슨 소리고?”

“아니 저 누나랑….”

“하이고. 결혼은 무신 결혼. 자는 그냥 만나는 아 아이가.”

“아니 그래도 같이 살았다며….”

“임마 진짜 순진하네. 같이 살아가 결혼하믄 니도 내랑 결혼할 끼가?”

“아니 우린 남자고….”

내가 우물거리자 큰형이 말을 자르고 들어왔다.

“상훈이가 알아서 하겠지. 넌 가만있어.”

“아니 그래도….”

“상원이 니도 단디 알아두래이. 만난다고 다 결혼하는 기 아이다. 그라믄 세상 남자들 부인이 다 스무 명은 될 끼다. 노는 여자도 있고 사귀는 여자도 있고 결혼하는 여자도 있고 다양한 기라. 니 보아하이 멋모르고 첨 만나는 여시한테 코 끼어가 인생 망칠 기…. 안 봐도 비데오다. 걱정된데이.”

“형 요새도 양다리 걸치는 거야?”

“임마! 말하는 본새하곤…. 양다리가 머꼬? 양다리가….”

“그럼 뭐라고 해야 되는데?”

“동시상영. 양손잽이. 투잡. 좋은 말이 얼매나 많노. 근데 이 가시나는 와 이리 안 오노? 가시나야! 니 머하고 자빠졌노!”

“예예-. 갑니데이-. 와예. 무슨 일입니꺼.”

“내는 니 벤소에 빠져 디진 줄 알았다, 가시나야.”

“물 한 잔 따라 드릴까예?”

“니는 내를 우째 그리 잘 아노. 안 그래도 목구멍이 뻑뻑해죽겠다. 물 한 잔 따라오니라.”

“알겠심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셋째 형은 막상 그 여자가 모습을 보이지 않으면 굉장히 초조하고 불안해 보였다. 그녀와 함께 있으면 셋째 형은 원인 모를 자신감이 불끈불끈 솟는 듯했다. 두 사람을 계속 지켜보던 나는 셋째 형이 그녀에게서 결코 벗어날 수 없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녀는 파악한 것이다. 셋째 형이 무얼 바라는지, 무엇에 굶주려 있는지. 그만을 위한 애정. 그만을 위한 관심. 그만을 위한 헌신. 셋째 형이 가족에게서 구하려 했지만 끝끝내 구하지 못한 것을 그녀는 주고 있었다. 그가 필요로 하는 것을 내어주며 그녀는 셋째 형의 손발을 묶은 것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셋째 형이 손수 집에 데리고 온 여자도 그녀뿐이었다.

“참. 형 영어 배운다꼬?”

“그래.”

“갑자기 무신 영어고? 미국 갈 끼가?”

“그냥, 배워두면 도움이 되잖아.”

“하이고, 형님. 팔자 좋심니더. 언놈은 고등학교도 못 나와가 맨날 미싱이나 돌려싸코 지름 냄시 천지에 사는데 형님은 K고 나와가 양놈에게 영어까지 배워가 대통령 될라꼬예?”

“형, 말이 심한 거 아니야? 형이 잘 몰라서 그래. 큰형이 얼마나 힘든데.”

“내가 머라켔는데? 그냥 마 좋겠다꼬 그라는데 니가 와 난리고.”

“너도 배울래?”

큰형이 엷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예상치 못한 대답에 셋째 형은 살짝 당황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세상에서 공부가 제일 싫다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던 셋째 형이었다. 영어 같은 걸 배우고 싶어 할 리가 없었다.

“가르치는 사람도 둘이면 더 즐거울 테고.”

“형님까지 와이랍니꺼. 내는 군인 아인교. 군인이 무신 영어 공붑니꺼!”

“기회는 언제든지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네가 원하면 언제든 아버지께 말씀드릴게.”

“오케이! 그랍시더, 마. 근데 저녁은 언제 먹는교.”

“상훈 씨. 배고파예? 밥 차릴까예?”

“순미 씨는 그냥 계세요. 제가 할게요.”

“아입니더. 큰 아주버님은 그냥 계시소. 지가 할께예.”

“아주버님?”

그녀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나는 정말 아무런 악의도 없이 쿡쿡 웃어버렸다. 뭐야. 그럼 나는 도련님이야? 어색도 해라.

“그래 불러도 되지예?”

“좋을 대로 하세요.”

“딱 30분만 기다려주이소.”

그녀가 부엌으로 들어가고 셋째 형은 말수가 적어졌다. 나는 셋째 형과 큰형의 관계가 참 묘하다고 생각했다. 작은형에게는 그렇게 직선적으로 대들고 덤비던 셋째 형이 큰형에게는 은근슬쩍 시비를 걸거나 싫은 소리를 하다가도 정작 큰형이 별 의미 없는 말로 대꾸하면 바로 꼬리를 내렸다. 켕기는 곳이 있다고 해야 할까, 지고 들어간다고 해야 할까. 그건 아무래도 셋째 형답지 않았다. 무언가가 분명히 있는 것 같은데 큰형이 입을 열지 않으니 알아낼 도리가 없었다. 비교적 입이 가벼운 셋째 형도 큰형에 대해서는 영 말이 없었다.

아무튼 셋째 형이 큰형에게 수많은 불만을 품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셋째 형은 절대 그 불만을 터트릴 수 없었다. 셋째 형이 입을 떼는 순간 끝나는 것이었다. 지뢰를 밟은 사람이 발을 떼듯이 그 순간 암묵의 거래는 끝나고 숨겨져 있던 무언가가 눈앞에서 푹, 하고 터질 터였다.

우리들은 사는 얘기나 나누며 대충 시간을 보냈다. 셋째 형은 내 대학 입학을 축하하지 않았고, 나는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작은형이 함께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모두가 한 핏줄은 아니었지만 우리들은 각자 비밀을 나누고 있었다. 핏줄은 헤어질 수 있어도 비밀을 나눈 자는 영원히 함께한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형제는 누구보다 단단했다.

* * *

나는 아버지와 함께 지하실의 가구들을 정리했다. 나는 아버지가 구해온 책상과 스탠드를 지하실로 옮겼다. 그러자 지하실도 제법 사람 사는 공간다워졌다. 커다란 옷장과 침대, 책상과 스탠드, 와인 색 카펫, 심지어 냉장고까지. 아버지는 잘 말린 이불을 침대에 깔았다. 침대와 옷장은 불필요했지만 책상에 책을 쌓아두고 나니 나름 공부방 분위기가 났다. 할 수만 있다면 내 서재로 쓰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 더 있으면 안 되겠냐고 묻자 아버지는 열쇠를 맡기고 먼저 1층으로 올라갔다.

지하실의 열쇠는 모두 세 개였다. 두 개는 아버지가 갖고 있었고 -애초 열쇠는 이 두 개뿐이었다- 나머지 하나는 셋째 형이 하우스를 대여할 때 몰래 복사해둔 것이었다. 순간 머릿속에 못된 생각이 번개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나는 두 개의 열쇠 중 하나를 몰래 빼내 철물점에 맡겨 복사를 떴다. 이로써 열쇠는 모두 네 개가 되었고, 나는 지하실의 은밀한 주인이 되었다. 어떤 공간의 소유주가 된다는 것은 특별한 기분이었다. 그 공간이 비밀스럽고 독특한 곳일수록 더욱 그러했다.

우발적으로 저지른 일이었지만 어렴풋이,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그 열쇠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지하실에서는 늘 지하실에서만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일어났다. 내가 기억하건대 그 일들은 대부분 비합법적이었고. 전쟁을 대비해 지어진 공간의 특성답게 지하실에서는 매번 수많은 전쟁이 벌어졌다. 열쇠를 복사하며 나는 잊고 있었던 옛 욕망을 떠올렸다. 수많은 카드와 화투패가 날아다니던 그곳. 아버지가 짐승같이 포효하던 그곳. 피트가 투박한 저음의 목소리로 천천히 혀를 굴릴 그곳. 나는 지하실을 훔쳐보고 싶었다. 그래. 나는 늘 훔쳐보고 싶었다.

* * *

일주일 뒤. 영어 과외가 시작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학교에 갔지만 교실에서 책을 읽어도 운동장에서 공을 차도 신경은 온통 집에 쏠려 있었다. 남자끼리 별일이야 있겠어, 하고 생각하면서도 이미 오래전부터 남자와 별일을 벌여왔던 큰형이기에 완전히 마음을 놓을 수 없었고. 그러다 또. 그거야 뭐 합의 하에 있었던 일이니까, 하고 생각하다 나 자신이 큰형과 작은형의 불륜을 예전만큼 혐오하지 않는다는 점에 놀랐다. 그러나 또 합의 없이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어떡하지, 하는 생각에 시계 초침 소리마저 귀에 거슬릴 정도로 초조해졌다. 이런저런 망상을 제쳐두고서라도 살인자와 큰형을 단둘이 놔둔다는 것이 영 불안했다. 큰형도 남자니까 위험한 상황이 오면 스스로 잘 알아서 대처하겠지, 생각하다가도 몇 년 사이 형편없이 약해진 큰형을 떠올리면 또 걱정이 되는 것이었다.

내내 온갖 잡생각으로 머릿속을 부풀리던 나는 학교가 끝나자마자 집으로 달려갔다. 현관에 피트의 신발이 없는 걸 확인하고 우선 안심했다. 나는 소리 높여 큰형을 불렀다. 큰형은 대답이 없었다. 주, 죽은 거야? 다급해진 나는 신발을 신은 채로 집에 들어가 큰형을 찾았다. 아무리 찾아도 큰형은 없었다. 나는 방문을 발로 차며 애타게 큰형을 불렀다. 돌아오지 않는 대답에 털썩,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아, 작은형이 오면 뭐라고 말하지. 만감이 교차하는데 뒤에서 큰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언제 왔어?”

“형!”

“신발도 안 벗고…. 집이 흙투성이잖아. 지저분하게.”

“형, 어디 갔었어? 내가 얼마나 찾았는데!”

“산주인이 와서 잠시 서류 건네주러 나갔었…. 아야야.”

순간적인 통증에 큰형은 입가를 문질렀다. 왼쪽 입가가 찢어져 피가 굳어 있었다. 큰형은 괜한 것을 들켰다는 듯 시선을 피했다.

“입. 왜 그래?”

“응? 뭐가.”

“입. 찢어졌잖아. 뭐야. 그놈한테 맞은 거야?”

“맞기는…. 요새 날이 워낙 건조하잖아. 피곤하기도 했고.”

그렇게 말하며 웃는 큰형의 입가에는 옅은 멍이 들어 있었다. 나는 따지고 싶었다. 눈에 보이는 거짓말은 그만하라고. 하지만 한편으로 관여하고 싶지 않았다. 파고들면, 늪이다. 굴이다. 빠져나올 수 없다.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이란 사람을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어느 동화에 나오는 바다 마녀처럼 치명적인 진실은 사람을 파멸의 입구로 인도한다. 나는 큰형의 뒤에 도사리고 있는 검은 소용돌이를 보았다. 미소와 회피로 세워둔 출입금지의 팻말을 나는 순순히 지키고 말았다. 내게는 그것을 부술 용기가 없었다.

약이나 발라둬. 적당히 걱정하는 말을 하며 그에게서 등을 돌리고 말았다. 내 책임이 아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야. 나는 나를 위로하듯 중얼거렸다. 주머니 속에서 지하실 열쇠가 찰랑거렸다. 나는 열쇠를 책상 깊숙한 곳에 넣어두었다. 열쇠가 있어도 나는 그 문을 열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었다. 나는 나를 증오했다.

* * *

새벽녘. 두 사람이 다투는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큰형은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있었지만 감정에 복받쳐 종종 큰소리를 냈고 그런 작은 실수가 반복되자 나도 더 이상은 태평하게 누워 있을 수만은 없었다. 일어나 거울을 보니 억지로 잠을 깬 탓에 짜증으로 얼굴이 부어 있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1층으로 내려갔다.

“…저도 할 만큼은 했어요.”

싸늘한 큰형의 목소리에 놀란 나는 계단 중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아버지에게 싫은 소리 한 번 한 적 없는 큰형이었다. 두 사람이 싸우다니. 충격을 넘어 공포가 느껴졌다. 등허리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잠 따위 이미 달아나 버린 지 오래였다.

“그냥 그 사람이 하라는 대로 해라.”

“아버지!”

“자식도 아닌 널 지금까지 먹여주고 재워주고 키워주고 했으면 말이야. 너도 집안을 위해서 뭐라도 해야 하는 거 아니냐? 짐승도 은혜를 갚는다고…. 대체 뭐가 어려워서 그래? 뭐가 문제냐?”

“그래, 난 아버지 자식이 아니죠. 하지만 아버지. 착각하지 마세요.”

“내가 뭘? 뭘 착각하고 있는데?”

“난 어머니가 아니에요.”

차분한 목소리로 정곡을 찔린 아버지는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어머니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나름대로 노력했어요. 하지만 난 어머니가 아니에요. 어머니가 받을 벌을 제가 대신 받을 의무는 없어요.”

“…아니. 넌 그 여자야.”

“아직도 분간이 안 가세요? 전 이상윤이에요. 어머니가 아니라구요!”

“넌 알고 있었어. 네가 내 아들이 아니란 걸 넌 알고 있었다고! 넌 네 친애비가 누군지도 알 거야. 내가 널 내 아들이라고 희희낙락하며 앞세워 자랑하고 귀하게 여길 때 넌 속으로 웃고 있었겠지. 그 여자랑 똑같아. 둘이 작당을 하고 나를 속였어. 그런데 뭐, 네가 죄가 없어? 말해 봐라. 넌 정말 죄가 없냐? 의무가 없어?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해 봐!”

이번엔 큰형이 오래간 침묵했다.

“니 애비를 죽이고 싶다. 하루에도 몇 번씩 그 인간을 찾아가 찢어 죽이고 싶은 걸 꾹꾹 눌러 참고 있어.”

“소용없는 짓인 거 잘 아시잖아요. 인정하세요. 어머니는 없어요. 다시는 돌아오지도 않아요.”

“안다! 아는데! 내가 왜 이러는지 나도 모르겠구나. 난 그냥 참을 수가 없다. 일 초라도 화를 내지 않으면 살 수가 없어! 아직도 그 여자가 내 눈앞에 어른거린다. 널 보면 그 여자가 떠올라. 넌 왜 그 여자를 닮은 거냐? 네 어디 하나 그 여자를 생각나지 않게 하는 곳이 없어. 널 보면 잊고 있던 분노가 떠올라…. 그 여자 때문에 난 인간이 아니게 되어 버렸어. 괴물이 되어버렸다고…. 난 자꾸만 추악해져. 그걸 멈출 수도 없다. 평생 이렇게 사는 수밖에! 넌…. 왜 나를 속였지? 조금이라도 일찍 알았다면 난 좀 덜 괴로웠을지도 모른다. 그 여자를 잡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알아요. 내가 속죄해야 한다는 거. 하지만 내가 속죄해야 하는 대상은 아버지가 아니라-.”

“상문이겠지.”

작은형의 이름에 큰형은 말문이 막혀버렸다. 큰형의 숨소리가 가늘게 떨렸다. 당장에라도 눈물을 쏟아낼 것 같은 숨소리였다.

“대체 어디까지 아시는 겁니까.”

“그 여자는 나를 망치고 너는 상문일 망치고. 더러운 핏줄 같으니라고….”

“대체 어디까지…. 모르는 척하고 있는 거냐구요.”

“그래. 피트가 뭘 어떻게 하려고 했다고?”

그들의 말 한마디 한마디가 살을 아프게 파고들었다. 숨조차 쉴 수 없었다.

“상문이도 말이다. 빨리 꺼내줘야 되지 않겠냐?”

아버지가 날린 결정타는 큰형을 때리고, 나를 때렸다.

“돈만 있으면 꺼낼 수 있는 애를 언제까지 옥살이하게 둘 거냐.”

큰형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신음 섞인 한숨을 내뱉었다.

“어쨌거나 이젠 상문이가 이 집 장남 아니냐. 너도 상문이가 일찍 나오는 게 좋지?”

아버지가 큰형의 양어깨에 손을 올리고 다정하게 말했다.

“피트가 내일, 1시에 다시 온다더라.”

나는 기다시피 해서 겨우 2층으로 올라갔다. 큰형과 작은형의 섹스를 목격했을 때보다 더 큰 충격이 나를 두드렸다. 나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쓰고 누웠다. 십 분 정도가 지나자 계단 오르는 소리가 들렸고 큰형이 방에 들어왔다. 창가에 걸터앉은 큰형은 얼굴을 가린 채 떨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한눈에 알 수 있을 만큼 커다란 진동이었다. 나는 큰형이 울고 있는 것은 아닌가 걱정이 되었다. 하지만 그는 왠지 울지 않을 것 같았다.

심장이 벌렁거려 잠이 오지 않았다. 우리들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어디서부터 시작된 거지. 나는 잔뜩 움츠러든 큰형의 어깨를 바라보았다. 작은형이 있었다면 틀림없이 저 어깨를 끌어안아주었을 텐데. 나는 이불 속에서 팔을 교차하여 내 어깨를 안았다. 따뜻하고 강하게 감싸 안았다. 내 어깨가 마치 그의 어깨인 것처럼. 내가 그에게 줄 수 있는 것은 안타까운 시선밖에 없었기에.

* * *

다음날 1시. 피트가 현관문을 두드렸다. 큰형은 순순히 문을 열어 주었다. 아버지는 나를 데리고 집을 나갔다. 문이 닫힐 때 나는 큰형과 눈이 마주쳤다. 문에 반쯤 가리어진 얼굴은 결연했고 그 눈동자는 나를 옴짝달싹 못하게 묶어버렸다. 비늘처럼 겹겹의 투명한 막으로 싸인 눈동자. 집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눈동자의 형태는 더욱 또렷해졌고 나는 그가 나를 부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숲을 벗어날 무렵 나는 놓고 온 물건이 있다며 집에 되돌아가려 했다. 그것은 마지막 기회였다. 외면하지 않을 기회. 내가 외면하려 했던 것을 목격할 마지막 기회. 하지만 아버지는 한사코 나를 가로막았다. 뭔데? 가는 길에 내가 사주마. 아뇨, 금방 뛰어갔다 올게요. 걱정 마라. 애비 이제 돈 많아. 그래도…. 버스 놓치겠다. 뛰자. 얼른.

아버지의 강인한 팔에 이끌려 나는 숲에서 벗어났다. 앙상하게 서로를 할퀴는 겨울나무들 사이로 집은, 보이지 않았다. 나무들 사이로 얼핏 눈동자가 보였던 것도 같다. 아니. 숲은 눈동자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그를 구할 마지막 기회를 버렸고 나는 좀 더 훔쳐보아도 좋았다.

아버지의 가게 소파에 앉아 작은형에게 엽서를 썼다. 내용은 단 한 줄이어도 좋았다. 형, 어쩌면 금방 나올 수 있을지도 몰라. 나는 아버지 몰래 엽서를 부쳤다. 나는 아무것도 보지 않아도 좋았다.

* * *

반년이 넘도록 피트의 영어 강습은 계속되었다. 그사이 나는 대학에 입학했고 셋째 형처럼 집 밖으로 떠돌았다. 합격 발표 이후 수험 생활의 긴장은 완전히 풀어져 나의 시간은 늘어진 엿가락처럼 한없이 가늘고 여유로웠다. 나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내를 쏘다니며 술, 담배를 배웠고 그토록 원하던 국문과에 들어간 이후 오히려 책과 멀어졌다. 나에게는 단발머리에 미니스커트를 즐겨 입는 여자 친구가 생겼고 학교를 빙자하여 마음껏 외박을 할 자유가 생겼다. 귀엽고 다정한 여자였지만 나는 어째서인지 사랑에 매진할 수 없었다. 통통하게 젖살이 오른 손을 잡아도, 동그란 어깨를 감싸 안아도, 서투른 입술을 부딪쳐도 나는 어떤 만족도 느낄 수 없었다. 그녀가 몸 전부를 내어주었다 하더라도 나는 쓸쓸했을 것이다.

나의 사랑은 들어맞지 않는 칸에 억지로 끼워둔 퍼즐 조각처럼 어설프고 투박했다. 그녀와 함께 있을 때면 난 수없이 훔쳐보았던 큰형과 작은형의 밀회를 떠올렸다. 그들 사이의 농밀한 공기, 안타까운 거리, 스파크를 튀기며 질척이던 두 육체. 그에 비하면 나와 그녀의 만남은 삼시 세끼 먹는 밥처럼 평범하고 밋밋하여 나는 과연 이것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나 있을까, 하는 고뇌에 빠졌다. 나는 젊었고 또 범상치 않은 것을 동경했다.

셋째 형의 연애 행보 역시 계속되었다. 셋째 형이 -미스 P대라 불리는- P대 최고 미녀를 낚아채는 바람에 나는 학교에서 이상원이 아닌 미스 P대의 남자친구 이상훈의 동생으로 불렸다. 어느 날 셋째 형의 그 여자. 순미 씨가 P대로 찾아와 담판을 내면서 셋째 형과 미스 P대의 인연은 끝이 났지만, 호사가들의 입방아에는 언제나 셋째 형의 일화가 빠지지 않고 오르내렸다.

큰형과 마주치는 일도 현저히 줄어들었다. 피트의 수업이 끝나면 큰형은 죽은 듯이 잠을 잤다. 열두 시간, 열네 시간. 심지어 스물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자는 일도 있었다. 큰형이 시체처럼 깊은 잠을 잘 때면 나는 그의 입술에 손을 대고 숨결을 확인했다. 미동도 숨소리도 없이 침묵 같은 잠을 자는 큰형을 보고 있으면 그가 이미 죽어버린 것은 아닌가 하는 기우가 생겼다.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식은땀만이 그런 내게 유일한 위안을 주었다.

나는 창백한 그의 볼을 쓰다듬으며 어머니를 추억했다. 어머니는 지금 어느 하늘 아래 있을까. 이미 죽어 버린 것은 아닐까. 그리움이란 꼭 추억과 비례하는 것만은 아니었는지. 나는 종종 잔인한 어머니가 그리웠다. 아름다움은 사람을 얼마만큼 순순히 용서하게 만드는 것일까. 사랑하지만 증오하는. 증오하지만 아름다운 어머니. 어머니를 떠올릴 때면 두 가지 모순된 감정이 타래처럼 얽혀 나를 태웠다.

대학 생활은 따분하고 또 즐거웠다. 오티니, 엠티니 돈과 시간만 있으면 우르르 몰려서 시끌벅적하게 놀 기회가 널려 있었고 소리를 내지만 않으면 -소리를 내는 녀석들은 모두 어딘가로 끌려갔다- 얼마든지 미워해도 좋을 정부란 대상이 있었고, 도서관에서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있었고, 가족들이 없었다. 학교에 있으면 나는 집을 생각하지 않아도 좋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점점 더 집과 멀어졌다. 대학 친구들과 어울리는 즐거운 시간에도 문득 큰형에 대한 걱정으로 가슴팍이 쿡쿡 쑤셨지만, 내겐 사실을 확인할 자신도 용기도 없었다. 언젠간 작은형이 돌아올 것이다. 작은형이 돌아오면 그들의 관계는 회복되고 큰형도 더는 괴롭지 않을 것이다. 조금만 버티면 된다. 이런 비겁한 생각으로 나는 큰형에게 등을 돌렸다.

가족들 중 그 누구보다도 사랑하는 큰형이었지만 나는 그와 같은 편에 서는 것이 두려웠다. 진실을 확인하게 되면 나는 분명 그를 구하려 들 것이고, 그와 함께 가족의 폭력을 견뎌내야 할 터였다. 큰형의 삶을 감추어진 부분까지 모두 보아버린 내게 그처럼 살라는 것은 무리한 부탁이었다. 나는 강하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평범한 사람이었고. 또 가족이 없는 세상은 너무나 즐거운 곳이었다.

아주 가끔, 마지못해 찾아간 집은 예전의 호사스러움을 회복하고 있었다. 집 외벽의 페인트는 말끔히 다시 칠해졌고 거실 비인 자리마다 고풍스러운 가구가 또각또각 놓였다. 아버지는 더는 밤새워 미싱을 돌리지 않았고 피트는 틈만 나면 집에 찾아와 비싼 양주를 마셨다. 그의 술시중은 고스란히 큰형의 몫이었다. 피트는 가끔 내게도 술을 권했다. 나는 큰형을 조금이나마 쉬게 해주려고 그와 대작을 했고, 누굴 닮았는지 술만은 고래였던 내 앞에서 피트는 매번 의식을 잃고 고꾸라졌다. 나는 큰형과 함께 그를 지하실로 옮겼다. 지하실은 강의실이자, 피트의 별장이었다. 아버지는 아예 지하실 열쇠 하나를 피트에게 넘겨주었고 피트는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우리 집과 지하실을 드나들 수 있었다.

언젠가 방에 들어섰을 때, 큰형이 몰래 숨겨둔 작은형의 소지품들이 어지러이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고 나는 피트가 우리 방까지 드나들고 있음을 확신했다. 큰형은 작은형의 물건을 함부로 펴 보일 사람이 아니었다. 이후 나는 집을 나설 때면 부러 방문을 꼭꼭 잠그고 다녔다. 우둔한 짓이었다. 나 혼자 쓰는 방도 아니었거늘. 나는 집을 지키지도 않는 주제에 유일한 큰형의 안식처마저 차단해버렸던 것이다.

큰형과 아버지는 작은형 문제로 여전히 실랑이를 벌였다. 차일피일 미뤄지는 작은형의 보석 때문이었다. 보석금이 마련된 뒤에도 아버지는 큰형에게 돈이 아직 모자라다, 좀 더 모자라다며 작은형을 방치했다. 한계에 다다른 큰형은 조용히 아버지를 재촉했다.

“이젠 돈도 충분하잖아요. 상문이, 꺼내주세요.”

“충분하긴 무얼. 나 돈 없다.”

“약속하셨잖아요.”

“좀 기다려봐라. 묶인 돈도 있고. 갚아야 할 돈도 있고. 내가 있는 돈 없다고 할까 봐!”

“얼마나 더 기다려야 돼요.”

“잠자코 기다려봐라. 어련히 안 꺼내줄까 봐 그러냐.”

이런 식의 대화가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아버지는 작은형을 꺼내줄 생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아버지가 요청을 기각할 때마다 큰형은 크게 낙담했다. 큰형의 아슬아슬한 외줄타기는 오직 작은형의 귀환이라는 목적을 향한 것이었기에, 그 목적이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힘이 빠진 다리는 후들거렸고, 그는 추락 직전으로 내몰렸다.

하나둘. 큰형의 몸에 내가 모르는 상처들이 늘어갔다. 겨울이 지나도 큰형의 찢어진 입가는 아물 줄 몰랐고 목덜미에는 동물에게 물어뜯긴 듯한 상흔이 이리저리 자리를 옮기며 질기게 연명했다. 봄이 되고 여름이 되어도 큰형은 긴팔 옷을 고수했다. 땀띠 나겠다고, 덥지 않냐고 물으면 큰형은 숲속은 여름이라도 시원하다며 걱정 말라고 고개를 늘어뜨린 채 힘없이 대답했다.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나는 그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고 철저히 그것을 피하려 했지만. 우연히 그의 나신을 본 일을 계기로 나는 더 이상 그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

목욕을 하겠다고 들어간 큰형은 한 시간이 지나도록 욕실에서 나오지 않았다. 여름에도 따뜻한 물로 씻는 큰형이었다. 받아둔 물이 벌써 식어버렸을 텐데, 물을 다시 받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뭐, 큰형이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것까지 간섭할 필요는 없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뒤돌아서는데 문득 불길한 예감이 관자놀이를 짓눌렀다. 그렇다. 그것은 겨우 다시 주어진 기회였다. 뒤돌아서서 욕실 문을 열고 들어가느냐. 아니면 약속한 친구를 만나기 위해 그대로 현관문을 열고 집 밖으로 나가느냐.

나는 선택의 기로에 놓여 있었다. 별것 아닌 선택이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경험으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 괜찮을 거야. 별일 있겠어? 나는 애써 자기합리화를 하며 약속에 늦지 않게 집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아. 하지만 큰형은 너무나도 잠잠했다. 물 찰박거리는 소리라도 났으면 좋으련만. 그럼 나는 안도했을 텐데. 허나 그 어떤 소리도 욕실로부터 들려오지 않았고 나는 돌연 발길을 돌려 노크도 없이 욕실 문을 벌컥 열어젖혔다.

“형!”

욕실 안의 풍경에 나는 저도 모르게 소리를 질렀다. 욕조 안에 큰형이 가라앉아 있었다. 행복한 꿈을 꾸는 듯 평온한 얼굴로. 나는 옷이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큰형을 물 밖으로 끄집어냈다. 큰형의 얼굴은 표백제를 뿌린 듯 창백했고 눈가와 입술에는 검푸른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목이 터져라 큰형을 불렀지만 그는 깨어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뺨을 때리며 그를 흔들었다. 그래도 그는 눈을 뜨지 않았다. 인공호흡을 해야 한다. 나는 그를 바닥에 눕히고 그의 입술에 나의 입술을 가져갔다. 두 입술이 막 닿으려는 찰나 내 몸은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인공호흡일 뿐인데, 단순한 구조 행위일 뿐인데, 심장이 자제력을 잃고 쿵쾅거렸다. 목덜미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내 그의 입술에 도달했다. 죄의식이 총알처럼 몸 곳곳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몸이 터져나가는 듯한 흥분 속에서 나는 차분히 그에게 산소를 공급했다. 그의 점막과 내 점막이 닿을 때마다 나는 작은형을 떠올렸다. 큰형을 통해 작은형과 키스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큰형과의 키스는 상상조차 하기 무서웠다. 그것은 어째서인지 근친상간적인 냄새를 풍겼다. 피가 섞이기는 매한가지인데도 큰형만인 내 몸인 양, 한 몸을 나눈 양, 강렬한 거부감이 들었다.

“…으음….”

물을 토해내며 큰형이 실눈을 떴다. 차가운 손이 뜨겁게 달아오른 내 얼굴을 어루만졌고 두 피부의 극명한 온도차에 그가 닿은 부위가 화상을 입은 것마냥 쓰라렸다.

“형! 형, 괜찮아? 정신이 들어? 나, 누군지 알겠어?”

“그래…. 상원이잖아…. 여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욕실이지…. 형. 왜 이런 짓을 한 거야? 정신 나갔어?”

“이런 짓이라니…?”

“몰라서 물어? 정말. 날 두고 죽으려고 한 거야? 그런 거냐고!”

초점이 흐린 눈으로 큰형은 울먹이는 나를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그 눈에는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나마 읽을 수 있는 것은 그가 다소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잠시…. 잠이 들었나 봐.”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야? 날더러 그걸 믿으라고?”

“정말이야. 믿어줘.”

간절한 큰형의 부탁에 더 이상 추궁할 의지를 상실해버렸다. 사실 내겐 믿고 말고 할 권리도 없었다. 큰형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수건으로 하반신을 가렸다. 잠시 고였던 눈의 물기가 말라붙자 나는 욕실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큰형의 몸을 냉정히 바라볼 수 있었다. 그때 나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얼굴 근육이 모조리 오그라드는 듯한 감각에 나는 저절로 침을 삼켰다. 나도 모르게 목이 메었다. 난자당한 몸. 으깨진 몸. 온갖 흉터로 얼룩진 그 몸을 보는 순간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담뱃불로 지진 상처, 묶인 흔적, 깨물린 자국. 끈으로 때렸는지 대나무 줄기처럼 길쭉길쭉하게 난 붉은 흉터들. 옷으로 꼭꼭 감추고 다녔던 몸은 한 군데도 성한 구석이 없었다.

큰형은 머릿속으로 열심히 둘러댈 말을 찾고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그 어떤 말로도 둘러댈 자신이 없는 듯 보였다. 나는 촉촉이 젖어 든 큰형의 속눈썹을 만지고 싶었다. 그것이 그에게 할 수 있는 유일한 위로인 듯했다. 그가 상처받지 않은 부분은 오직 그 속눈썹뿐인 것만 같았다. 나는 애써 웃는 얼굴로 말했다.

“계단에서 굴렀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이 그의 짐을 하나라도 덜어주는 것이었다. 적어도 어쭙잖은 변명을 찾아내느라 조급해하는 마음은 달랠 수 있을 테니. 내 말에 큰형은 애써 웃다 만 어색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어, 그래. 그랬었지. 맞아. 계단에서 굴렀어.”

나는 방에서 옷을 가져와 그에게 입혀주었다. 따뜻하고 두툼한 옷을 입은 큰형은 줄이 끊어진 마리오네트처럼 이내 깊은 잠에 빠졌다. 이불을 깔고 그를 눕히며 나는 결심했다. 내가 피하려 했던 것과 마주하기로. 내가 그를 몰아넣은 구렁텅이에 직접 걸어 들어가기로.

그가 진심으로 자살하려 했든 그의 말대로 깜빡 잠이 들었든, 그런 것은 내게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어떤 연유로든 그가 자신을 죽음의 길목으로 굴렸다는 사실. 그것이 가슴 아팠다. 무의식중에 죽음으로 다가가는 일은 오히려 의도한 죽음보다 섬뜩했다.

그를 구한다는 발칙한 생각은 하지도 않았다. 나는 다만 내가 알려 하지 않았던 진실의 무게를 실감하기로 했다. 내가 뿌린 씨. 내가 도와 키운 그 풍요로운 밭에 드디어 수확의 계절이 왔고, 만추. 나는 낫을 들고 그들을 베러 가야 했다. 모든 후회를 베고 나면 나는 볼 수 있을 것이다. 척박해진 땅과, 밑동만 남은 내 회피의 흔적들을. 매서운 겨울이 와도 나는 밭 한가운데 허수아비처럼 서 겨울의 진행 과정을 목격해야 한다. 나는 그 밭의 주인은 아니었으나, 나는 참새를 쫓고 어두운 밭을 지키는 파수꾼이었기에. 그 밭에서는 침묵도 죄였으니. 나는 심판의 값진 대가를 받으러 오래된 열쇠를 꺼내 들었다. 열쇠를 들고 나는 후회했다.

그에게 더 깊숙이 입 맞추었으면 좋았을 것을.

이튿날 나는 고등어처럼 통통한 손을 가진 여자친구와 이별했다. 복사해둔 열쇠로 지하실을 따고 들어가 피트의 옷장 속에 숨어들 내게 그녀는 너무 거추장스러웠으므로.

* * *

출석이 위태로워 오랜만에 꾸역꾸역 들어간 수업에서 흥미로운 것을 강의하고 있었다.

…희생양이란 동서양을 막론하고 보여진 인간 사회의 특성이며 흠, 또. 시대를 막론하고 나타난 양상이기도 합니다. 고대 희랍 사회의 파르마코스를 예로 들자면. 사회에 어떤, 감당하지 못할 엄청난 사건이 생겼을 때. 한 남자를 파르마코스로 지정, 사회 구성원이 하나씩 막대를 들고 그의 성기를 때립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재앙이 물러가고 원래의 사회로 복구된다고 그들은 믿고 있었지요. 이 희생양이란 물론 자기 자신은 아무런 잘못도 하지 않았을뿐더러, 단지 선택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변을 당하게 됩니다. 주술 사회에 흔히 등장하는 제물도 이와 같은 개념이라고 볼 수 있겠죠.

파르마코스는 보통 희생을 당하더라도 보복의 위험이 없거나 연고자가 없는 부랑자, 가난한 자, 불구자들 가운데 선택되었는데. 어찌 보면 우리나라의 ‘며느리’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남편 잡아먹은 년, 이라는 말. 모두 알고 있겠죠? 집안을 이을 아들이 죽었을 때 같은 혈통, 혹은 이미 혈통 속에 포함된 자들은 조직의 위기를 외부에서 들어온 ‘며느리’란, 권력이 약한 여성에게 떠넘기죠. 이 역시 감당할 수 없는 사건이나 고통을 무고한 존재에게 뒤집어씌우는 희생양의 한 형태로 볼 수 있겠는데요. 희생양은 보통 약자이거나. 이것은 또 아주 중요한 양상인데 외부에서 유입된 자. 이방인의 경우도 상당합니다. 외부에서 들어온 자가 재앙을 몰고 왔다는 식으로 고통의 근원을 외부로 돌림으로써 본래의 사회 구성원들은 더욱 결속하고, 단단해지게 되는 것입니다.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이나 학대, 혹은 살해는. 이 사회 구성원들에게 동일한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함으로써 이들이 오랫동안 묵혀둔 스트레스를 일시에 해소시켜 줍니다. 희생양에게 가해지는 폭력이 결국, 사회 구성원들의 동질감을 일시에 회복시킴으로써 의식에 당위성을 지니는 것이죠. 희생양의 선정 과정은 다양하고 또, 이것은 일반 가정에서 시작하여 전 사회를 아우르는 심리 효과였기 때문에 딱 무엇, 이라고 한정지을 수는 없지만. 나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진정한 희생양이란 사회에 분란을 일으킬 소지가 있는 자. 사회 구성원이 동시에 욕망하는 자, 가 아니었을까 하고. 즉 모두가 원하는 이를 제거함으로써 그들 사이의 질투, 시기, 욕망들을 동시에 제거했던 것이죠. 어느 시대건 간에 아름다움은 곧 치명적인 것, 위험한 것과 상통합니다. 즉 사회의 극심한 혼란 통에, 보편적 욕망의 대상이 되는 자,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자를 제거했다고 볼 수 있지요. 저는 중세 시대의 마녀도 결국 이러한 군중 심리를 이용한 희생양이 아니었나, 하고 생각합니다.

물론 이것이 모든 경우에 해당하지는 않습니다. 고대로 갈수록 이러한 경향이 더 짙다고 볼 수 있지요. 고대의 희생양은 어디까지나 신에게 바치는 제물이었기 때문에. 아름답고 고결한 것. 더럽혀지지 않은 것을 우선시했습니다. 희생양의 범주에 넣을 수는 없겠지만 이것이 중세, 근대에 와서는 권력과 돈을 위한 것으로 변질되어. 좀 더 복잡한 양상을 띠게 됩니다. 예를 들어….

인문대 건물을 드나들던 4년 중 나의 폐부를 가장 깊숙이 찌르는 수업이었다.

* * *

학교에 다녀오겠다며 집을 나선 나는 수업을 제치고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큰형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창고로 난 창을 넘어 집 안으로 숨어들었다. 큰형은 많이 피곤했는지 거실에 쓰러져 곤히 잠들어있었다. 나는 아버지가 아끼는 카멜색 담요를 꺼내 조심스레 덮어주었다. 담요의 부드러운 촉감과 온기를 느낀 그는 꿈꾸는 와중에도 한 겹의 미소를 지었다. 정오의 볕을 받은 그의 얼굴은 모든 것을 통과시켜 버릴 만큼 투명했다.

그와 멀어진 이후 나는 그를 볼 때마다 겨울의 숲을 떠올렸다. 곤충의 다리 같은 벌거벗은 나뭇가지들 사이로 쏟아지는 찬란하고 장엄한 한겨울의 햇살. 나뭇가지들의 허술한 철망을 뚫고 숲을 비추는 그 햇살을 보지 않은 이는 모를 것이다. 내 모든 기억과 이별을 새하얗게 바래도록 만드는. 나는 겨울 햇살을 좋아했다. 그리고 무엇도 은닉할 수 없는 겨울의 숲. 그곳을 거닐면 잠시 나는 부끄럽지 않은 존재가 되었다.

‘무엇이든 하지 않으면 안 돼.’라는 굳은 의지는 있었으나 실상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모르고 있었다. 순리대로라면 아버지와 부딪쳐야 했다. 하지만 아버지에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버지와 충돌하는 것이 무서웠다. 모든 열쇠는 아버지가 쥐고 있는데도 난 아버지가 있을 미싱사가 아닌 집으로 돌아왔다.

자, 무엇을 해야 할까.

우왕좌왕하던 나는 주머니의 열쇠를 떨어뜨렸다. 꽤 날카로운 금속성이 났는데도 큰형은 깨어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지하실의 열쇠. 그래. 우선은 지하실이다. 나는 비밀 입구를 열고 지하실로 내려갔다.

지하실에 내려가는 것은 아버지와 가구를 옮긴 날 이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사다리를 내려가는 것뿐인데도 심장이 목구멍으로 튀어나올 듯 요동쳤다. 가슴 속에 심장 대신 갓 잡아 올린 잉어가 들어 있는 기분이었다. 물 밖으로 막 던져진 알 굵은 잉어의 몸부림, 내 심장은 정말 그렇게 날뛰고 있었다. 목구멍이 찌릿찌릿 울리며 손에 힘이 풀리더니 나는 그만 사다리 아래로 굴러떨어지고 말았다. 큰소리를 내는 바람에 얼른 위의 기척을 살폈으나, 큰형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나는 아픈 등을 두드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드디어 지하실에 잠입했다. 나는 천천히 방안을 둘러보았다.

지하실은 내가 가구를 옮기던 때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였다. 달라진 점이 있다면 옷장에 피트의 사복이 들어차고, 매주 빨아 넣은 이불이 벌써 눅눅해졌다는 것 정도.

조심스레 침대에 누워보았다. 처음 침대를 들이던 때보다 푹 꺼진 스프링은 몸을 움직일 때마다 끼익, 끼익하고 기괴한 금속성을 냈다. 침대에 누우니 유독 천장이 낮아 보였다. 갑자기 숨이 막히는 듯한 감각에 재빨리 침대에서 일어났다. 바닥을 밟는 순간 무언가가 발에 채였다. 제대로 펼쳐보지도 않은 영어책 두 권이 바닥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그와 함께 바닥에 몇 방울, 오래전 흘린 듯한 핏자국이 보였다. 놀랐지만 또 한편으로는 납득했다. 큰형의 피였다. 큰형의 몸 곳곳에 나 있던 상처들. 그 상처들이 쥐어짜낸 피임이 분명했다.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이를 득득 갈고 있는데 1층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아버지와 셋째 형은 미싱사에. 작은형은 감방에. 그러니까 찾아올 사람은 피트밖에 없었다. 분노로 충만해 있던 나는 문득 피트의 다부진 육체와 살기 띤 눈빛을 떠올리고 이내 공포를 느꼈다. 지하실을 빠져나가기엔 너무 늦었다. 어떻게 하면 좋지. 대체 어떻게 하면!

저벅저벅, 누군가가 지하실로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몸을 숨길 곳은 단 한 군데뿐이었다. 나는 피트의 옷장으로 숨어들었다. 아아, 그가 옷을 갈아입기라도 한다면. 그래서 날 발견이라도 한다면! 나는 그와 맞서 싸울 수 있을까.

나는 옷장의 문틈으로 하나의 연극 무대 같은 지하실을 훔쳐보았다. 한계를 넘긴 공포로 인해 땀구멍이 하나하나 바늘에 찔리는 듯 따가웠지만, 훔쳐본다. 이보다 나를 더 흥분시키는 행위는 없었기에, 나의 동공은 밀려오는 공포만큼이나 팽창해 있었다. 이윽고 피트와 큰형이 그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큰형은 평소보다 더 기력이 없어 보였다. 그는 흐느적흐느적 이불을 정리하고 바닥을 쓸며 피트의 눈치를 살폈다. 피트는 담배에 불을 붙이고 침대에 걸터앉아 큰형의 일거수일투족을 낱낱이 감시했다. 뛰쳐나가야 하는데, 나가서 더는 형을 괴롭히지 말라고 말해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내 몸은 옷장에 붙박인 듯 움직일 줄 몰랐다.

방 정리가 대충 끝나고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이어졌다. 피트는 두 번째 담배에 불을 붙였고 큰형은 그런 그에게 최대한 거리를 두려 구석에 기대 서 있었다. 내일은 꼭 큰형을 병원에 데리고 가봐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피트가 옷장을 향해 다가왔다. 너무 놀란 나머지, 가느다란 비명을 흘리고 말았다. 옷더미 속에 몸을 숨기고 있었지만 피트가 바보가 아닌 이상. 들키기 십상이었다. 제발, 제발!

부들부들 떨며 몸을 최대한 움츠리는데 찢어질 듯한 기침 소리가 났다. 기침 소리에 피트는 옷장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멈추었다.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상한 일이다. 눈을 가늘게 뜨면 그만큼 나도 감추어지는 기분이니- 몸을 최대한 낮추어 다시 밖을 보았다. 큰형이 고통스럽게 기침을 하고 있었다. 듣는 사람마저 가슴이 찢어지는 느낌이 들 정도로 고통스러운 기침이었다.

피트는 뚜벅뚜벅 큰형에게 다가가 주먹으로 그를 때리기 시작했다. 이 부분에 대해 격정적으로, 혹은 충격적으로 서술하지 않는 이유는 이들의 행동이 너무나 일상적이었기 때문이다. 기침을 하면, 당연히 그렇게 때려왔다는 듯한 태도였고 큰형도 이미 수도 없이 맞아왔다는 태도로 매질을 당했다. 피트의 주먹은 큰형의 얼굴과 가슴, 배, 등을 가격했고 큰형이 기침을 멈출 때까지 결코 멈추지 않았다. 억지로 기침을 참아내느라 큰형의 눈에서는 매운 눈물이 흘러내렸고 입술은 타액으로 촉촉이 젖어 들었다.

피트는 겨우 기침이 멎은 큰형을 침대로 내던졌다. 그와 동시에 침대에서 희뿌연 먼지가 피어올랐다. 먼지로 인해 다시 기침이 재발했는지 큰형은 고개를 이불 속에 처박고 경련했다. 피트는 그런 큰형에게 올라타 억지로 옷을 벗기려 들었다. 큰형은 엎드린 채 가당치도 않은 반항을 펼쳤으나 이내 알몸이 되어버렸다. 큰형은 황급히 이불 속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숨겼다. 목욕탕에서 보았던 상처투성이의 몸 그대로였다.

이때까지도 나는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못하고 늘 그래왔듯이 그들을 단지 지켜볼 뿐이었다. 나는 이 시점에서 그를 구해야 했을까. 피트가 나를 때려죽이든 말든 뛰쳐나가서 큰형을 감싸야 했을까. 나는 그러지 못했다. 이건 복수다. 내가, 나 자신에게 하는 복수. 보이지 않는 손이 몇 번이나 들썩이는 몸을 잡아 누르며 속삭였다.

…잘 봐. 네가 저지른 일을. 네 단 한 번의 말실수가 어떤 결과를 초래했는지. 지켜보는 것이 너의 몫이다. 큰형은 너에게 저런 꼴을 보인 걸 알면 어떤 기분이 들겠어. 그냥 잠자코 있어라. 지켜보는 것, 훔쳐보는 것. 너의 맡은 바 소임을 다하도록….

사명감 깃든 목소리가 나를 눌렀고 나는 수간의 현장 한복판에 망부석처럼 자리해 있었다.

피트는 가볍게 이불을 걷어냈다. 큰형은 포기한 듯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허리를 잡아 누르며 그 위에 올라탄 피트는 지저분한 헝겊으로 큰형의 눈을 가리고 손을 묶었다. 이것 역시 아주 자연스러운 일과로 보여졌으며, 피트는 큰형의 다리를 붙잡아 허리 아래를 바닥으로 끌어내렸다. 그러자 눈이 가리어진 큰형의 얼굴은 옷장을 향하게 되어 나는 흠칫 놀랐다. 분명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터. 그러나 나는 그가 나를 응시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자꾸만 고개를 돌렸다.

큰형의 머리채를 잡아 올린 채 피트는 그에게 입 맞추었다. 입맞춤이라고 부르기엔 너무나 야만적이고 거친 행위. 큰형의 혀와 입술이 피트에게 물린 채 딸려나가는 것을 나는 몇 번이나 보았다. 큰형이 조금이라도 고통의 신음을 흘리려 하면 가차 없이 따귀가 날아왔다. 그렇다. 피트는 이 공간에 자신의 것이 아닌 소리가 나는 것을 극히 싫어했다. 그가 어떤 행위를 요구하든 큰형은 그 행위를 거부해선 안 됐고 또 소리를 내어서도 안 되었다. 큰형의 입가는 막 찢긴 상처에서 묻어나온 피와 피트의 타액으로 범벅이 되었다. 큰형의 턱은 두려움으로 덜덜 떨리며 딱딱, 이 부딪치는 소리를 냈고 나는 그 소리가 마치 시계의 초침 소리와 같다고 생각했다. 째깍, 째깍, 째깍. 나는 그와 함께 수를 세었다.

시간은 흐르고 있기나 했던 걸까.

쥐어뜯는 듯한 키스가 끝나자 피트는 어디선가 바셀린 같은 것을 들고 와 큰형의 몸에 뭉개며 펴 발랐다. 등허리와 팔, 엉덩이, 다리 사이까지. 그리고 그는 큰형의 귓가에 대고 무언가를 속삭였다. 그들의 모습이 선명히 보였지만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아 애써 귀 기울여 보았으나. 끝내 그들이 나눈 대화를 들을 수 없었다. 다만 그 짧은 대화에 피트가 격노했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였다. 그는 군화로 큰형의 성기를 걷어찼다. 순간 비명을 지를 뻔한 큰형은 입술을 물어뜯으며 소리를 참았다. 큰형의 안쪽 허벅지에 신발 자국이 선명히 찍혔다.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는지 피트는 바지 벨트를 풀더니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큰형의 허리를 후려갈겼다. 이번에는 큰형도 참지 못하고 가느다란 신음을 흘렸다. 아아. 그러자 벨트가 더 세게 큰형의 등허리로 감겨들었다. 어쩌면 이유 같은 건 없었을지도 모른다. 다만 그에게는 짓밟을 대상이 필요했으리라. 길에서 쉬 채는 돌멩이처럼, 와그작 소리를 내며 찌부러지는 깡통처럼, 습관적으로 파괴할 대상. 짝짝, 매질에 살이 감겨드는 소리를 들으며 나는 생각했다. 만약 우리 집에 큰형이 없었다면 저기 있는 것은 누구일까. 아무리 생각해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단 하나. 다름 아닌 바로 나였다.

벨트가 큰형의 등을 후려칠 때마다 바셀린 덩어리가 쿨럭쿨럭 밀려나갔다. 큰형은 더는 소리도 흘리지 못하고 축 늘어져 있었다. 숨을 쉴 때마다 푸들푸들 경련하는 몸은 무거운 것으로 짓누르기라도 하면 푸직, 소리를 내며 으깨어질 것 같았다. 피트는 큰형의 머리채를 잡아들어 그를 반듯이 눕혔다. 그러나 큰형은 다시 고개를 옷장 쪽으로 돌렸다. 댄서가 턴을 할 때 단 한 곳에 시선을 못 박아두듯이 옷장은 그가 학대당할 때 시선을 묶어두는 장소인 것 같았다. 나를 바라보지 마, 형. 나를 훔쳐보지 마. 그랬다. 나는 꼭 그에게 훔쳐 보여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나는 더 깊이 옷더미 속을 파고들며 더 가늘게 눈을 떴다.

우악스레 벌려진 다리 사이에 선 피트는 도살할 돼지나 소를 보듯 큰형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손에는 담뱃불을 붙일 때 쓴 라이터가 들려 있었다.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저 자식. 라이터를 켜는 소리에 큰형의 몸이 크게 경련했다. 그는 주저 없이 라이터를 큰형의 몸 가까이 가져가 불의 꼬리로 닿을 듯 말 듯 큰형의 피부를 쓸어내렸다. 눈이 가리어진 큰형은 불시에 찾아오는 열기에 더는 참지 못하고 통곡 같은 비명을 질렀다. 나는 이 소리를 어째서 듣지 못했을까. 내 발 밑에서 매일 같이 울려 퍼지던 소리인데. 들을 수 있었는데. 듣고 싶지 않아서. 들리지 않는다고. 못 들은 척하고. 모르는 척하더니. 나는 작은형과 큰형의 정사를 떠올렸다. 이것에 비하면 그것은 그래. 차라리 아름다운 축에 속했다. 이 행위에 비한다면 나는 그들의 섹스를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이제 와서 그런 걸 비교하다니. 나는 내가 한심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피트의 손이 큰형의 다리 사이에서 잠시 멈추었다. 고통이 잦아들자 큰형은 한숨을 토해내며 잠시나마 숨을 돌렸다. 큰형의 숨소리에 뜨거운 습기가 서려 있었다. 안심하는 큰형을 조롱하듯 피트는 라이터에 불을 붙여 다리 사이로 들이밀었다. 혀를 깨물었는지, 귀를 찢는 듯한 비명과 함께 큰형의 입가로 한줄기 피가 묽은 침과 함께 흘러내렸고. 어디선가 타는 냄새가 났다. 불꽃이 닿을 때마다 큰형은 연신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신음했고 그의 혀는 갈 곳을 잃고 방황했다. 그것은 체모가 타들어 가는 냄새였다. 성기를 지지는 냄새였다. 고통을 참지 못하고 큰형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몸부림을 쳤다. 끊어질 듯 그의 숨소리가 간헐적으로 이어졌고, 그럼에도 피트는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백열전구의 빛을 받아 날카롭게 빛났다. 그 순간 나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이제 그만. 그만해. 목청 높여 소리치고 싶었다.

피트는 큰형을 침대 위로 들어 올려 전신이 내 쪽을 향하도록 옆으로 눕힌 뒤 군복 바지를 내렸다. 속옷을 입고 있지 않았던 탓에 지퍼를 내리자마자 묵직한 성기가 스프링처럼 꼿꼿이 튀어 올랐다. 피트는 큰형의 한쪽 다리를 자신의 허리에 접어 감고 조금의 전희도 없이 뒤로 자신의 성기를 쑤셔 넣었다.

그 순간.

큰형의 입에서 엄청난 양의 피가 터져 나왔다. 아무리 혀를 깨물었다고 해도 나올 수 없는 그런 분량의 피였다. 그런데 이 새끼는 멈추기는커녕 낄낄거리며 한층 더 강하게 자신의 성기로 큰형의 몸을 담금질하는 것이었다. 큰형의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침대 가장자리를 적셨다. 큰형은 완전히 의식을 잃은 듯 아무런 소리도 없이 흐느적거렸고, 떨구어진 고개가 침대에 부대낄 때마다 채 마르지 않은 피가 얼굴을 물들였다. 큰형의 오른쪽 얼굴은 자신이 흘린 피로 금세 질척해졌다. 그때까지도 피트는 신나게 허리를 돌리고 있었다. 나는 적나라하게 드러난 큰형의 그을린 몸을 보고 더는 참지 못해 옷장 밖으로 뛰쳐나갔다.

“그만해! 씨발 새끼야!”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피가 튀었다. 내가 두 눈을 질끈 감고 휘두른 철제 의자가 피트의 후두부를 강타했고 그는 언제 폭력을 휘둘렀냐는 듯이 축 늘어져 버렸다. 분을 참지 못한 나는 의자로 몇 번이나 피트의 머리를 내려쳤다. 빠직, 하고 두개골이 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그것은 비단 피트뿐만이 아닌. 모두를 향한 분노였다. 우린 저주받았다.

“허, 헉…. 개, 개새끼…. 죽여 버릴 거야, 씨발! 죽일 거라고…. 씨….”

의자가 구부러지는 바람에 그만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머리가 피범벅이 된 가운데 피트의 손이 꿈틀꿈틀 경련했다. 나는 그 손을 발로 힘껏 짓이기고 머리를 몇 번 더 걷어찬 다음 큰형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그의 몸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나는 그을린 거웃과 불에 덴 사타구니를 애써 외면하며 축축하게 젖은 눈가리개를 풀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된 그의 눈가는 퍼렇게 부어 있었다. 팔을 결박한 끈을 푸는데 제법 시간이 걸렸다. 어찌나 꽁꽁 묶었는지. 끈을 다 풀고 난 큰형의 팔에 선명한 자국이 남았다. 나는 큰형의 볼을 두드리며 애타게 그를 불렀다.

“형. 형, 나야. 나. 정신 차려…. 형!”

큰형은 미동도 없었다. 내가 흔들면 흔드는 대로 그냥 흔들릴 뿐이었다. 그의 숨은 밖으로 새어 나오지도 못하고 입안에서 흩어졌다. 이대로 죽는 건가. 불길한 예감에 나는 더 격렬히 그를 깨웠다.

“형, 일어나 봐. 형! 형…. 죽으면 안 돼. 씨발, 죽지 마! 내가 잘못했어! 내가 잘못했으니까. 형! 제발! 죽지…. 죽지 마!”

소용없었다. 그는 이미 죽은 것처럼 보였다. 나는 큰형을 이불로 감싸 들쳐업고 집 밖으로 뛰쳐나갔다. 어디로, 어디로 가야 하지. 사방이 나무로 막힌 마당에서 나는 잠시 멈칫하다 두 눈을 감고 숲으로 돌진했다. 달리는 내내 숲은 굵은 화살처럼 나를 향해 달려들었고 나는 정신없이 달리다 나무에 머리를 찧고 쓰러졌다. 그러나 나는 약간의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나는 주섬주섬 큰형을 찾았다. 그는 오 미터 전방에 이불과 분리된 채로 쓰러져 있었다. 환한 대낮, 숲 한가운데에 드러난 나신에 나는 귀신이라도 본 양 비명을 질렀다. 얼른 이불로 그의 몸을 둘러싸 다시 등에 업었다. 나는 달리고 또 달렸다. 몇 번이나 다리가 풀리고 수차례 나무에 머리를 찧었지만 멈출 수 없었다. 눈에 보이는 대로 택시를 잡아타고 황급히 병원을 외쳤다. 택시기사는 귀찮은 손님을 태웠다는 듯 투덜거렸고 나는 계속해서 큰형을 어루만지며 그의 이름을 부르다, 작은형의 이름을 불렀다.

그의 이름이라면 큰형도 어둡고 깊은 잠에서 깨어날 것만 같았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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