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화 (2/12)

실연[시련]

언젠가 책을 찾으러 큰형의 방에 몰래 잠입했다, 그의 책상 위에 놓인 쪽지를 읽은 기억이 있다. 마치 죽음의 전보처럼 숙연히 놓여 있던 그 검은 쪽지는 책상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었다. 호기심이 동한 나는 쪽지를 조심스레 집어 들었다. 검은 지면 위에 반짝이는 흑연이 구불구불한 길을 내고 있었다. 그렇다. 그것은 글씨라기보다는 그 전체가 하나의 그림 같았다. 그곳에 적혀 있던 말을 나는 지금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당신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당신을 포기해야만 해.

보낸 이의 절실한 마음을 담은 듯 지면 깊숙이 패어 있던 저 문장은 오랫동안 나의 심금을 울렸다. 황홀한 문장의 세계에 심취되어 있던 내게 그 문장은 ‘사랑이란 과연 그러한 것’이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그리고 나는 탄식했다. 내 것이 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어쩌면 그렇게도 아름다운 것일까. 내게 저러한 사랑이 결코 찾아오지 않으리란 것을 어린 나이에도 나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수년이 흐른 뒤 나는 대학 도서관에서 다시 한번 그 문장과 조우하게 된다. 문학서에 반듯한 글씨로 실려 있는 그 문장은 더 이상 나를 감동시키지 못했다. 나를 감동시킨 것은 오직 새까만 종이에 비밀처럼 적혀 있던 그림 같은 문장. 그뿐이었다.

그것은 누구의 진심이었을까.

* * *

큰형이 고등학교 2학년이 되던 해 우리는 이사를 했다. 가난에 완전히 익숙해져 있던 나로서는 굉장히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그즈음 우리 집안의 살림살이는 눈에 띄게 좋아졌는데 아무리 그렇기로서니 우리 집을 가지게 될 줄이야. 그것도 새로 지은 이층집이라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계기는 단순했다. 아버지가 미군에 납품하는 의류사업의 하청을 따냈기 때문이었다. 거짓말처럼 돈이 쏟아져 들어왔다. 아버지의 어깨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으며 셋째 형은 밥상머리에서 현장에서 갓 배운 영어 몇 마디를 조잘거렸다. 그럼에도 나는 가난할 적보다 마음이 더 불안했다. 아예 형편이 좋지 않을 때야 무엇을 잃을지, 얼마나 더 주저앉을지 따위를 걱정할 일이 없었으나 거짓말처럼 집안 살림이 불어나자 나는 언제 다시 주저앉을지 모르는 아버지의 사업을 진심으로 걱정하게 되었다. 아버지의 얼굴에 조그마한 걱정의 기미라도 끼는 날에는 조마조마한 마음에 밤잠을 설칠 정도였다. 갑자기 찾아온 행운이 나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돈이 어느 정도 모이자 아버지는 일생의 염원인 우리 집을 지었다. 아버지는 그 일을 철저히 비밀에 부쳐, 집이 완공될 때까지 우리들은 이사를 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하고 있었다. ‘이삿짐을 싸라.’는 아버지의 통보가 있은 지 이틀 뒤. 아버지는 처음으로 우리들에게 그 집을 공개했다.

원래 살던 동네에서 버스로 세 정거장 정도 떨어진 마을의 산 중턱에 못 보던 집 한 채가 우두커니 세워져 있었다. 잿빛으로 칠해진 그 집은 울창한 숲에 파묻혀 새로 지은 집인데도 불구하고 멀리서 보면 그저 폐가처럼 보였다. 우리들은 숲 사이로 난 길을 따라 걸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그 길도 공사를 하는 인부들이 오가며 새로 터놓은 것이라고 했다. 얼마나 숲을 헤치며 걸었을까. 집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 집은 우리가 세 들어 살던 주택과 비슷한 크기로 가로로 넓은 직사각형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집 주변에는 둥그런 마당이 있었다. 마당이라고 해봐야 나무를 들어내고 붉은 흙을 덮어놓은 것뿐이었지만 사방이 나무로 둘러싸인 그 집에서 마당이 주는 효과는 꽤 컸다. 게다가 어디서 얻어왔는지 그 흙은 벽돌보다 더 선명한 붉은 색을 지녀 잿빛으로 칠해진 외벽과 선명한 대조를 이루었다. 상당히 황량한 외관이었지만 우리 집, 그것도 새집이 생긴다는 기대감에 우리들은 모두 들떠 있었다. 그 침착한 큰형마저도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고 창틀 하나하나를 천천히 어루만지는 것이었다.

그 집은 평범하면서도 매우 독특했다. 그 집을 지나는 사람이라면 십중팔구 그것을 그저 건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구의 뇌리에도 남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이 그 건물을 집이라고 인식하는 순간 그 건물은 도저히 잊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우선적으로 그 집은 입지에 문제가 있었다. 울창한 숲 한가운데에 평생 살 집을 짓는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아버지와 산 소유주가 어떤 관계였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미관을 해치는 증축을 허락한 것은 아마도 아버지가 숲의 관리를 자청했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실제로 아버지는 그 숲을 진심으로 아꼈으며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숲 부근을 돌며 오래된 덫이나 쓰레기들을 거두어오셨다. 여름처럼 나뭇잎이 무성하게 우거지는 때에는 집이 완전히 숲속에 파묻혀 바깥에서는 우리 집을 전혀 목격할 수 없었다. 잎이 지는 겨울에나 겨우 앙상한 나뭇가지 사이로 집의 귀퉁이가 조금 모습을 드러낼 뿐이었다.

폐쇄성은 입지만이 아니라 구조에서도 뚜렷하게 나타났다. 창은 작고 높았으며 그나마도 대부분 방범창이었다. 1층과 2층 각각 단 하나의 출입문을 제외하면 드나들 수 있는 통로가 전혀 없었다. 겁을 먹은 내가 ‘불나면 우린 다 죽는 거예요?’라고 묻자 아버지는 ‘따라와 보면 다 안다.’며 웃으셨다. 아버지는 우리들을 데리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가구를 들이지 않은 집은 텅텅 비어 있었다. 1층에는 방 두 개와 부엌, 창고가 있었다. 우리들은 아버지를 따라 창고로 들어갔다. 창고에는 커다란 항아리가 놓여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서 앉을 수 있을 정도로 크고 넓은 항아리였다.

“너희들. 이게 뭔지 아냐.”

항아리죠, 라고 대답을 하려다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것 같아 입을 다물고 있었더니, 아버지가 항아리를 옆으로 치우며 말씀하셨다.

“이건 통로다. 통로.”

항아리가 있던 자리 아래에 정사각형의 문이 있었다. 바닥에 설치된 문을 열자 사다리가 나타났다. 그것은 지하실로 통하는 입구였다. 어리둥절한 우리들은 아버지가 하는 대로 사다리를 타고 내려갔다. 거실보다 더 넓고 아득한 지하실이 그곳에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지하실에는 이미 모든 가구들이 채워져 있다는 점이었다. 게다가 척 보기에도 꽤 고풍스러운 것들이었다. 손을 탄 흔적들이 역력한 것으로 보아 누군가 쓰던 것을 통째로 얻어온 듯했다. 큰형과 작은형은 소파에 앉았고 셋째 형과 나는 널찍한 침대를 뒹굴었다. 그런 우리들을 보고 흐뭇해하며 아버지는 말문을 여셨다.

“나는 말이다. 전쟁으로 모든 걸 잃었다. 전쟁이 나를 고향과 갈라놓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아버지는 이렇게 살지 않았을 거다. 전쟁이란 건 정말 언제 일어날지 모르는 거다. 그래서 아버지는 항상 생각했다. 집을 지으면 전쟁이 일어나도 절대로 안전할 수 있는 방공호를 만들 거라고. 내 자식들은 전쟁 때문에 집을 잃고 고향과 헤어지는 그런 일은 만들지 않을 거라고. 그래서 이 지하실을 만들었다. 잘 봐라. 이 지하실에는 창문이 없다. 그래도 괜찮아. 다른 곳으로 공기가 통하도록 다 만들어 두었다. 불이 나도 도둑이 들어도 여기만은 끄떡없어. 이 안에는 항상 비상식량을 채워둘 거다. 대신 여기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해서는 안 돼. 알겠냐.”

우리들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는 희망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들 역시 그러했다. 큰형의 출세에만 기대를 걸고 있던 가족에게 그 집은 좀 더 큰 비전을 제시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버지는 그 집을 통해 세상과 격리되고 싶었던 게 아니었나 싶다. 부산에 살면서 아버지의 인생은 보통 사람들의 세계로 끌어내려졌다. 아버지는 천성이 선비 같은 사람이었다. 선비란 넉넉하고 고고한 생활 가운데에서는 참으로 온화하나 천것들의 삶에 섞이는 순간 더없이 비루하고 비참해지는 것이다.

어쨌거나 그즈음 아버지의 눈동자는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열여덟 청년의 것처럼 반짝였고 우리들의 생활은 점점 더 나아졌다. 아버지는 비로소 셈에 밝아졌다. 전과 달리 악착같이 장사에 달려들었다. ‘못살아도 남부끄러운 일은 하면 안 된다.’던 신조는 저 멀리 던져둔 채 부정한 거래도 서슴지 않았다.

나는 그래도 좋았다. 어차피 아버지가 부정한 짓을 하지 않으면, 다른 이가 부정한 짓으로 그 돈을 가로챌 터였다. 부정한 일이란 결코 사라지지 않는다. 매음굴 어느 창부의 방처럼 그저 누가 그곳에 들어가느냐의 문제일 뿐이다. 내가 들어가지 않는다 해서 그 방이 영원히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아버지가 집에 노린내 나는 돈을 가지고 오면서부터 나는 그러한 논리에 해박해졌다. 때문에 나는 심지어 아버지가 남에게 말 못 할 그런 시커먼 거래를 하더라도 더 돈을 많이 벌어왔으면 하고 바라기까지 했던 것이다.

* * *

이사를 한 뒤 우리의 생활은 순조로웠다. 돌이켜보건대 그 집에 이사해서 보낸 처음 일 년간이 우리들의 인생 중 가장 평온했던 한때가 아니었나 싶다. 아버지의 사업은 날이 갈수록 번창했고 나는 돈 걱정 않고 고등학교 진학을 준비할 수 있었다. 나의 목표는 물론 K고였다. 집사람들의 응원 하에 나는 수험에 몰두했다.

작은형과 셋째 형에게는 예전과 같은 나날들이 반복되고 있었다. 아버지의 주머니가 두둑해졌음에도 둘은 다니던 직장에 남아 있었다. 고등학교만큼은 졸업시켜주어도 좋으련만 아버지는 둘에게 영 관심이 없었다.

큰형은 명문대 진학이 확실시된 가운데 차분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다만 추가된 일상이 하나 있다면 숲을 산책하는 일이었다. 큰형은 종종 말없이 집을 나가 근처의 숲을 배회하곤 했다. 큰형은 특히 초저녁 어둑해질 즈음에 산책하는 것을 좋아했다. 걱정이 된 나는 몇 번인가 그를 따라나섰지만 이내 그러기를 그만두었다. 숲을 걸을 때의 큰형은 모르는 사람처럼 웃음도 말도 없이 그저 나무와 나무 사이의 허공을 차갑게 응시할 뿐이어서 함께 걷는 그 시간이 내게는 너무도 답답하게 느껴졌다. 게다가 그곳은 나무들이 철창처럼 촘촘히 들어서 있었기 때문에 동작이 부주의한 나로서는 나무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기 일쑤였다.

그렇게 시간은 흐르고 흘러. 이듬해 가을. 어느 깊은 밤. 잠들어 있던 나는 비가 내리는 기척에 눈을 떴다.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나의 수면은 더욱 희미해지고 있었다. 일로 바쁜 아버지가 뱀을 잡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나는 여전히 뱀의 꿈을 꾸고 있었다. 뒤숭숭한 꿈자리에 한참을 뒤척이다 목이 타서 거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순간 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다. 현관에 어머니가 쓰러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놀라 어머니에게로 달려갔다. 어머니에게서는 지독한 술 냄새가 났다. 자세히 살펴보니 단순히 술에 취해 잠든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바빠지면서부터 어머니는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졌다.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지 때로는 아침 일찍 나가 이튿날 첫새벽에 돌아오는 일도 있었다. 의심의 여지는 다분했으나 우리들 중 누구 하나 어머니에게 잦은 외출의 이유를 묻지 못했다. 그녀의 가시에 찔리면 오래도록 깊이 아플 것이란 사실을 우리들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아버지가 그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기만을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 뿐이었다. 아니, 아버지는 이미 오래전 어머니에 대한 모든 의심을 포기한 듯 보였다. 아마도 그냥 두고 키우기에 그것은 너무도 선명하고 타는 듯 뜨거웠으리라.

혼자 힘으로는 어머니를 옮길 자신이 없어 내버려 두고 부엌에 들어가려는 찰나. 2층에서 사람이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2층에는 큰형이 큰 방에서. 작은형과 셋째 형이 작은 방에서 지내고 있었다. 그날 밤은 작은형과 셋째 형이 모두 외박이었기 때문에 나는 발소리만 듣고도 그것이 큰형임을 알았다. 나는 부엌에 몸을 숨기고 간이벽 너머로 고개를 빠끔히 내밀었다.

계단을 내려오는 큰형의 발걸음은 유독 신중하고 조심스러웠다. 1층에 내려온 큰형은 현관에 쓰러져 있는 어머니를 보고는 잠시 멈추어 서 있었다. 등을 돌리고 있었기에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으나 새까맣게 물든 그의 뒷모습은 어쩐지 스산했다. 어머니의 상태 같은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그는 서둘러 발걸음을 떼었다. 그가 필히 물을 마시러 부엌에 내려온 것이라 생각한 나는 이제 곧 그가 내 쪽으로 오리라 확신하고 더욱 숨을 죽였다. 그런데.

큰형은 부엌을 뒤로한 채 현관을 향해 걸어갔다. 그러더니 장애물 넘듯 어머니를 지나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나는 얼른 거실의 시계를 확인했다. 시침이 새벽 두 시에 막 도달하던 참이었다. 어떤 불길한 예감에 나는 무엇에 홀린 양 신발도 신지 않고 그를 따라나섰다.

밖으로 나서자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 눈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그것은 하나의 거대한 벽이었다. 식은땀이 흐르고 오글오글 소름이 돋았다.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어둠이 거기 있었다.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을 쳤다. 불과 몇 걸음 뒤에 현관문이 있었다. 그리로 들어가기만 하면 공포는 소리 없이 물러가고 목을 할퀴는 갈증도 끝이 날 터였다. 뒤돌아서고 싶은 유혹이 목 끝까지 차올랐다. 사실 모든 것은 간단했다. 마음 한구석에 조금의 의혹만 남겨두면 이 원초적인 공포는 사라진다.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고 있는데 그 의혹만큼이나 실낱같은 불빛이 숲 저편에 스쳤다. 그 빛이 공포를 갈랐다. 나는 이를 악물고 빛줄기가 흔들리는 쪽을 향해 막무가내로 뛰기 시작했다.

얼마나 달렸을까. 빛에 가까이 다가간 나는 곧 그것의 정체를 깨달았다. 빛은 큰형의 손에 들려진 자그마한 랜턴에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사용하는 대형 랜턴과는 달리 내가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이었다.

큰형은 어둠과 나무 사이를 헤치며 일말의 주저도 없이 무언가를 향해 나아가고 있었다. 들키지 않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나는 열심히 그를 추적했다. 소슬비가 내리고 있었지만 울창한 숲 때문인지 빗방울이 몸에 닿는 일은 드물었다. 그러기를 한참. 갑자기 숲 전체에 아스라한 빛이 스며들었다. 그 빛은 물안개와 결합하여 너른 강물처럼 나무 사이사이를 천천히 흐르고 있었다. 푸른색을 띤 그 빛은 산 너머 공장지대에서 넘어 들어온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얼마나 오랫동안 큰형의 뒤를 따랐는지 실감했고 큰형이 얼마나 오랫동안 걸었는지를 실감했다. 아름다웠다. 검은 숲을 가로지르는 푸른 안개, 작은 보석처럼 흩어지는 빗방울들. 나는 그 숲이 이 세상이 아닌, 다른 어떤 곳처럼 느껴졌다. 그곳은 달콤하고 서글펐으며 황홀하고 장엄했다. 숲에 취해버린 나는 한순간 그를 추적하는 현실마저 잊어버리고 그곳에 언제까지나 머물러 있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숨이 턱까지 차올라 비틀거릴 즈음, 큰형이 걸음을 멈추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나는 커다란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불안했다. 큰형은 대체 이런 시간에 이런 곳에서 무엇을 하려는 걸까? 어느 것 하나 짐작되는 바가 없었다. 지칠 대로 지쳐버린 나는 잠자코 그를 주시했다. 공장의 빛과 큰형이 들고 있는 랜턴 덕분에 일거수일투족을 면밀히 관찰할 수 있었다. 그도 나만큼이나 젖어 있었다. 조금 거칠어진 숨 때문에 부들부들 떨리는 입술은 피가 맴돌아 한껏 짙게 물들어 있었다. 큰형은 한 손으로 천천히 셔츠의 단추를 끄르기 시작했다. 마지막까지 다 끄른 다음 가슴에 들러붙은 옷깃을 당겨 털었다. 잔뜩 긴장한 나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꼴사납게 경직했다. 절로 몸이 움찔거렸다. 큰형은 곧게 선 채로 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확신했다. 그는 분명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다. 공간을 잡아당기는 그 시선은 분명 누군가의 부재를 애타게 견디고 있었다. 아아. 그리고 예정된 그가 나타났다.

나무만큼이나 단단하고 쭉 뻗은 육체가 큰형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큰형의 눈이 환희에 물들며 가로로 길어졌다.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작업복 차림 그대로 나타난 그는 다름 아닌. 아니 틀림없는. 나의 작은형이었다. 둔기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머릿속이 혼탁했다. 도대체 왜? 넓고 편한 집을 두고 무엇 때문에? 그러나 눈의 자유를 빼앗긴 죄수처럼 이미 내 시선은 그들에게 묶여 있었다. 어떠한 사고도 불가능했다. 신진대사가 모두 멈추어버린 듯했다. 불시에 습격당한 나는 마치 타인의 밀회를 훔쳐보듯 그들을 관람했다.

큰형도 큰형이었지만 그곳에서의 작은형은 정말 다른 사람 같았다. 뭐라고 해야 할까. 외견상의, 분위기상의 차이가 아니라 그는 정말 홀가분해 보였다. 분노를 응축하고 다니는 듯한 평소와 달리 자유로워 보였고, 그 나이대의 청년이 지니는 매력과 에너지를 마음껏 분출하고 있었다.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자 드러나는 그의 매끈한 이목구비에 나는 저도 모르게 침을 꿀꺽 삼키고 말았다. 그곳에 있는 남자는 독사도, 작은형도 아닌, 그저 매혹적인 한 마리의 수컷이었다.

작은형에게 다가간 큰형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의 상의를 벗겼다. 그리고는 벌어진 입술 사이로 혀끝을 내밀어 작은형의 턱선을 따라 핥았다. 빗물로 젖은 그의 얼굴에 실처럼 가느다란 타액이 흔적을 남겼다. 그는 큰형의 얼굴을 강하게 끌어당겨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억센 팔 힘과 달리 부드럽고 애틋한 동작이었다. 그 입술이 닿는 곳마다 자그마한 꽃잎이 피어날 것만 같은 그런.

입을 맞추는 동안 큰형의 손은 춤을 추듯 그의 등을 오르내렸다. 미끄러지는 듯하다가도 감아올리고 할퀴는 듯하면서도 어루만지는. 그저 손과 팔이 등 위로 움직이고 있을 뿐인데도 그 동작은 보는 이에게 강렬한 성적 욕망을 불러일으켰다. 심지어 내내 가위에 눌려 있던 나의 성욕마저도 꿈틀꿈틀 움직이기 시작해 나는 성기에 서서히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큰형의 오른손이 등에서 분리되어 그의 뺨을 감쌌다. 그는 큰형에게서 잠시 얼굴을 떼어 자신을 바라보는 두 눈동자와 마주했다. 그들이 서로를 바라본 것은 불과 몇 초 정도였으나 내게 그것은 무한의 시간처럼 느껴졌다. 큰형의 입술이 그의 윗입술에 겹쳐지며 기나긴 키스가 시작되었다. 정적의 베일로 감싸인 숲속에서 그들이 마찰하는 소리는 마치 바로 옆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게 들렸다. 젖은 두 입술이 탄력 있게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그의 손이 큰형의 셔츠 안을 파고들자, 큰형은 허리를 떨며 튕겨 나가듯 고개를 뒤로 젖혔다. 허리를 뒤로 젖힌 큰형을 다부지게 안은 채, 그는 큰형의 몸 곳곳에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치미는 격정에 중심을 잡지 못하고 비틀거리던 두 사람은 나무에 몸을 기대기도 하고 미끄러지기도 하며 정신없이 서로를 갈구했다. 그들의 행위는 애무라기보다는 마치 상대방의 육체를 자신 안에 구겨 넣으려는 것처럼 거칠고 격렬했다. 꼬리가 묶인 채 서로를 잡아먹으려 하는 맹금류의 일전과도 같았다.

행위가 소강상태에 이르나 했더니, 그가 큰형을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그것은 매우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몸을 반쯤 나무에 기댄 채로 큰형은 그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큰형 역시 그의 손에 의해 낱낱이 벗겨져 숲속의 두 사람은 완전히 알몸이 되었다. 소슬비라 하여도 계속해서 빗방울은 내리고 있었다. 나는 어느새 이를 딱딱 부딪쳐가며 온몸을 떨고 있었다. 그들의 몸에서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고 있었다. 그러나 추운 기색은 없었다.

큰형은 그의 벗은 몸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그가 거기에 있다는 사실을 부러 확인하듯, 갈라지는 근육의 실루엣 하나까지도 놓치지 않고 전부 쓰다듬었다. 그 섬세한 손가락이 스르륵, 그의 성기를 감아쥐었을 때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러나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외면하고 싶은 마음을 이내 짓눌렀다. 나는 곧 눈을 떴다. 그리고 끝이 뾰족하게 선 혀가 성기의 갈라진 틈을 긁으며 벌어진 입술이 그것을 집어삼키는 광경을 목격했다. 그의 손가락이 젖은 큰형의 머리칼 사이로 파고들며 밭은 숨을 내쉬었다. 희끄무레한 입김이 숲을 관통하는 안개의 흐름에 섞여들었다. 그는 아주 낮게. 억눌린 듯한 신음을 토해냈지만 나는 그 선명한 희열의 소음에 고막이 찢어질 정도였다. 그들의 신음은 확성기라도 갖다 댄 양 나의 고막을 할퀴었다.

다리 사이에서 머리를 뗀 큰형이 다시 길게 눕자 작은형이 그 위로 체중을 실으며 올라탔다. 그의 몸에 의해 벌려진 다리는 비로 인해 미끈거리고 있었다. 큰형의 다리가 허리를 감으며 그를 잡아끌었다. 큰형의 두 손은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그의 어깨를 감아쥐고 있었다. 그는 지체하지 않고 갈라진 큰형의 몸 안으로 자신을 밀어 넣었다. 얻어맞은 사람처럼 큰형은 크게 경련하며 숨을 멈추었다. 일순간 끝까지 말아 올려졌던 눈꺼풀은 이내 쾌감에 젖어 들어 맥없이 풀렸다. 물기로 인해 자꾸만 미끄러지는 몸을 다잡으며 밀착한 두 육체는 격렬하게 삐걱대기 시작했다. 물기가 찰박거리는 소리, 살이 부딪치는 소리, 파도처럼 흩어지는 두 사람의 신음을 들으며 나는 울고 있었다. 내리는 비 때문에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차마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헛구역질이 올라오는 것을 꾸역꾸역 참으며 나는 그들의 정사를 하나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여름 나를 잠 못 들게 한 그 망상은 거짓이 아니었다.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일어나 버렸기 때문에 지울 수 없는 일임에도 나는 지우려 애썼다. 그런데. 그런데! 개만도 못한 새끼들!

눈물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렸다. 시야가 흐릿해 더는 그들을 볼 수 없었다. 나의 눈물이 마를 즈음, 그들의 행위도 절정을 맞이하고 있었다. 그들 사이에는 한마디 말도 없었다. 오직 육체만이 그들의 소통 수단이었다. 단말마의 신음을 함께 내뱉은 두 사람은 하나로 뒤엉킨 채 거친 숨을 토해냈다. 초가을의 을씨년스러운 새벽 비가 끊임없이 그들을 적시고 있었다. 그들은 멀어지는 몸을 더욱 힘주어 껴안았다. 모든 것은 끝났다.

나는 기다시피 그들에게서 멀어진 다음 집을 향해 미친 사람처럼 돌진했다. 몇 번인가 나무에 머리를 찧고 힘이 빠진 무릎이 접히는 바람에 길을 구르며 오로지 집을 향해 뛰었다. 번개를 맞은 사람의 기분이 그러할까. 나는 온몸이 쪼개지는 충격에 완전히 넋이 나가 있었다.

사방 구분도 되지 않는 숲에서 용케 집을 찾은 나는 내 방으로 뛰어들어 가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지만 젖은 몸을 추스를 생각도 들지 않았다. 문득 나는 깨달았다. 큰형의 산책은 작은형이 집에 없는 날에만 이루어졌다는 것을. 아아, 하지만. 하지만! 이것은 정녕 꿈이 아니란 말인가? 나는 막막한 혼란에 휩싸였다. 이미 눈으로 충분히 목격했음에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이것은 현실이 아니다.’라고 귓속말을 하고 있었다. 헛것을 본 거다. 그건 사람이 아니었다. 그건 뱀이었다. 뱀들의 정사였다. 나는 뱀에 홀린 것이다. 그리도 꿈을 꾸더니, 하하. 그 정도로 얼빠진 놈이었나? 오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실타래처럼 엉켜 굴러다니고 있었다. 숨이 막혔다. 어느 순간부터 호흡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었다. 구조를 요청하려 했지만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나는 주먹으로 방바닥을 두들겼다. 내 몸이 부풀어 오르고 있었다. 나는 지친 나머지 그대로 의식을 잃고 말았다. 다시 눈물이.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정오가 훨씬 지나 있었다. 가족들 모두 각자 외출을 나갔는지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잠가둔 문 역시 그대로였다. 불현듯 지난밤의 악몽이 뇌리에 스쳤다. 그래, 꿈이었을 거야. 나는 악몽에는 전문가가 아닌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어 보는데. 엉망진창이 된 바지가 눈에 들어왔다. 빗물이 말라붙어 찐득찐득한 몸. 퉁퉁 부은 눈. 갈라진 발톱 사이에 낀 흙. 그 모든 것이, 지난밤이 부인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일깨워주고 있었다.

나는 욕실로 뛰어들어 가 몸을 씻고 옷을 빨았다. 그들이 돌아오기 전에 흔적을 없애야 한다. 왠지 모르지만 나는 쫓기고 있었다. 빨래에서는 하염없이 흙탕물이 흘러나왔다. 갈색의 액체를 흘려보내며, 나는 또다시 울고 있었다. 눈물은 이제 고작. 시작이었다.

* * *

늦저녁, 기다리던 큰형이 돌아왔다. 예상외로 혼자였다. 지난밤의 일이 송두리째 거짓으로 느껴질 만큼 단아하고 청결한 모습이었다. 공부를 하다 왔는지 손에는 책가방이 들려 있었다. 심장이 평정을 잃고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것은 이상한 경험이었다. 잘못한 것은 분명 그들인데 왜인지 나는 내가 죄를 지은 것처럼 부끄러웠고 그 앞에서 자꾸만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그가 너무도 태연하였기에 더욱 그런 모순에 빠져들었다.

“혀…. 형!”

“응? 왜.”

“그냥….”

“그냥 부르는데 왜 소리를 지르고 그래.”

“그냥….”

“싱겁기는.”

환하게 웃으며 큰형은 나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가 다가왔을 때 나는 저도 모르게 흠칫 몸을 움츠렸으나 그의 손길에 그만 이완되고 말았다. 혼란스러웠다. 말을 해야 하는데 형은 지금 아주 크게 잘못하고 있는 거라고 비난해야 하는데. 부드러운 손길에 그만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랬다. 큰형은 늘 내게 따스한 애정을 쏟아주었다. 형제들 중에서도 나는 각별했다. 나이 차가 제일 많이 나는 막내라서 그런가 보다 하고 무작정 그를 따랐지만 그것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그리고 그 사실은 종종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저기…. 작은형은?”

“상문이는 일 나갔지. 오늘 선박 나가는 날이잖아.”

“작은형. 어제도…. 안 들어오지 않았어?”

“그러게. 그 일이 좀 바빠야지.”

“형.”

“응?”

“요즘도…. 잘 때 많이 더워?”

큰형은 의아하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보았다. 나 역시 의식하지 못하고 그 말을 내뱉었다. 나는 들켜서는 안 되는 물건을 떨어트린 사람처럼 사색이 되어 고개를 떨어뜨렸다. 부끄러움에 얼굴이 붉게 달아오르고 있었다.

“이제 가을인데 뭐. 하나도 안 더워.”

“어어. 맞다. 그렇겠네. 하하….”

“조금만 기다려. 금방 씻고 올게. 같이 밥 먹자.”

“어. 그래. 그래.”

큰형이 욕실로 들어가기 무섭게 나는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큰형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했다. 그것도 아주 태연한 얼굴로. 그러나 나는 그가 나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는 단지 독사에 물린 것뿐이리라. 달콤한 말로 그를 꼬드겨 더러운 범죄에 동참하도록 만들었으리라. 작은형은 본디 우리 가족도 아니었다. 그는 하나의 피로 이어진 우리 가족 내에 침투한 외부인일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죄는 그의 몫이었다.

나는 억지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진실을 그에게 뒤집어씌우려 하고 있었다. 내가 그 일을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으리란 것은 분명했다. 그 일에 대한 파장이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너무 끔찍하고 소름이 끼쳐 그것을 입에 담는 일조차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상원아, 뭐 하고 있어? 전화 좀 받아.”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나는 머리로 그것을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받으려 하지 않았다. 욕실 너머 큰형이 부르지 않았다면 나는 그 전화를 놓쳤으리라. 종종 아버지의 거래처 사람들이 집으로 전화를 걸어 중요한 사항을 전달하는 일이 있었기에 우리들은 전화를 챙겨 받는 일이 습관이 되어 있었다. 전화를 놓치는 것은 곧 거래 하나를 잃는 셈이었다. 나는 황급히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윤이냐?

“아니요, 아버지. 저 상원인데요.”

-집에 다들 있냐?

“큰형하고 저하고 있어요.”

-큰일 났다. 큰일 났어….

“왜 그러시는데요.”

“상원아. 누구 전화야?”

목욕을 마친 큰형이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내 옆에 앉았다. 나는 입 모양만으로 전화를 건 대상이 아버지라는 것을 알렸다.

-너희들 엄마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네? 교통사고요?”

-그래. 지금 병원에 있다. P대 병원 알지? 큰형하고 얼른 와라.

“아, 알겠어요.”

-피가 모자라서 수혈을 해야 된단다.

“네, 지금 바로 갈게요!”

-P대 병원 응급실이다. 둘째랑 셋째도 다 데리고 와. 알았지?

“네! 네!”

거칠게 수화기를 내려놓은 나는 황급히 옷을 꺼내 입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바지에 다리를 끼워 넣는 일조차 서툴러졌다. 마음은 급한데 몸이 그에 따라 움직여주질 않았다.

“무슨 일인데. 교통사고라니. 누가 치인 거야? 누가 치였는데!”

“옷부터 입어!”

“누구야? 상문이? 상훈이? 얼른 말해. 누구냐니까!”

큰형이 갑자기 언성을 높이는 바람에 나는 차분히 가라앉았다. 큰형의 얼굴은 시체처럼 굳어 있었다. 아마도 큰형은 그 사고를 당한 것이 작은형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항구에는 짐을 실은 트럭들이 수시로 다녔기 때문에 밤에 짐을 나르는 일꾼들이 차에 치이거나 깔리는 일이 종종 있었던 것이다. 그의 박력에 기가 눌린 나는 기어들어 가는 듯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어, 엄마.”

“…엄마?

“형들 다 불러서 얼른 오래.”

“…그래.”

어머니라는 대답에 큰형은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것은 안도의 한숨처럼 가벼워 보였으나 그때의 나는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옷을 갖춰 입은 우리들은 작은형과 셋째 형에게 연락을 넣은 다음 병원으로 향했다. 병원으로 가는 내내 큰형은 말이 없었다. 그의 표정은 매우 복잡했으며, 시선은 어둠 저 너머의 것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형장으로 향하는 죄수처럼. 불안함에 가슴이 터져버릴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게 말 한마디 건넬 수 없었다. 그저 얼른 병원에 도착하기만을 애타게 기다렸다.

작은형과 셋째 형이 먼저 병원에 도착해 있었다. 둘은 이미 피검사를 마친 상태였다. 큰형과 나도 서둘러 피검사를 했다. 큰형과 작은형이 어두운 얼굴로 귓속말을 나누는 것을 목격했지만 어머니의 생사 앞에서는 그들의 관계도 나를 흔들어놓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아버지가 있는 대기실로 자리를 옮겼다. 고작 하루 보지 못했을 뿐인데 아버지는 조금 늙어 있었다. 그는 매우 지치고 허약해 보였다. 나는 아버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손을 붙잡았다. 아버지는 힘없이 고개를 들어 우리들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겨우 웃었다.

“마른하늘에 날벼락이라더니….”

“걱정 마세요. 별일 없을 거예요.”

“너희들 엄마 혈액형이 아마도 A일 텐데…. 너희들하고 맞을는지 모르겠다.”

“큰형이 A형 아이가?”

“맞다! 큰형만 A형이지?”

“…응.”

“어쨌든 다행이다. 한 명이라도 어디냐.”

안심한 아버지는 의자에 몸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셋째 형은 대폿집에서 왔는지 술 냄새와 담배 냄새가 진동을 했다. 큰형과 작은형은 둘 다 표정이 어두웠다. 대기실에는 우리들뿐이었다. 누구도 말이 없었고 때문에 그렇지 않아도 휑한 대기실이 더욱 스산하게 느껴졌다. 건조한 침묵이 따갑게 우리를 스치고 있었다. 그렇게 각자 앉아 쉬고 있는데 의사가 아버지를 불렀다.

“혈액형 검사 결과가 나왔습니다.”

“어떻습니까. 큰 아들놈은 수혈할 수 있지요?”

“네?”

의사의 표정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라고 추궁하는 듯했다. 다급한 아버지는 큰형을 끌어다 의사에게 들이밀며 다시 한번 물었다.

“이 녀석은 A형이잖습니까. 되지요?”

“아드님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이상윤. 이상윤입니다.”

“아…. 네. A형이 맞긴 한데….”

“맞는데, 뭐가 문젭니까?”

“으음…. 결론부터 먼저 말씀드리자면. 여기 계신 분 누구도 환자분께 수혈하실 수 없습니다.”

“예?”

이번에는 아버지가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겁니까?’의 표정으로 의사를 쳐다보았다. 잘 빗어 넘긴 머리에 사각 뿔테 안경을 쓴 그는 단정한 겉모습에 어울리지 않게 자꾸 미적지근한 태도로 꾸물거렸다.

“조카가 한 명 있다고 하셨죠?”

“네.”

“그분이 이분입니까?”

의사가 가리킨 것은 작은형이 아니라 큰형이었다. 무엇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잘 모르지만 우리 모두는 불길한 예감에 휘말리고 있었다.

“무슨 소립니까. 얘는 내 아들입니다. 조카는 저 녀석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선생님. 지금 이 상황에서 저랑 농담 따먹기 하자, 이겁니까? 부산에서 알아주는 병원이라 해서 믿었는데. 이거 실망입니다!”

“제 말 잘 들어보십시오. 보호자분 혈액형이 B형 아닙니까.”

“네!”

아버지는 답답함을 이기지 못해 주먹으로 가슴을 퍽퍽 쳤다. 의사는 난처한 기색이 역력했으나 이내 냉정을 되찾고 차근차근,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상윤 씨가 A형. 나머지가 모두 B형이고요.”

“네! 그렇다니까요!”

“환자분 혈액형은 O형이란 말입니다. 그러니 수혈이 불가능하지요.”

“네? A형이 아니고요?”

“환자분이 지금껏 자기 혈액형을 잘못 알고 계셨나 봅니다. 환자분은 틀림없는 O형입니다.”

재빨리 이해가 되지 않아 우리들은 잠시 멈추어 있었다. 어머니가 사실은 A형이 아니라 O형이고 우리들 중 누구도 어머니에게 수혈할 수 없다. O형은 O형이 아닌 피를 수혈받을 수 없으니 이치에 맞는 이야기이다. B형인 아버지와 O형인 어머니 사이에서 B형인 나, B형인 셋째 형. 그리고 A형인 큰형이 태어났다…?

나는 그만 소리를 지를 뻔했다.

“다행히 O형 피를 구했다고 하니 환자분의 생명에는 지장이 없을 겁니다. 외상에 비해 내상이 적어서 수술이 끝나면 금세 회복할 수 있을 겁니다. 들어가 쉬세요.”

의사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대기실 문을 나섰다. 타인인 그의 입으로 발설하기에 진실은 과히 불편한 것이었다. 남겨진 우리들은 망연자실하여 서로 다른 곳을 쳐다볼 뿐이었다. 누구도 시선을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흘끗 곁눈질로 큰형을 살폈다. 큰형은 담담한 시선으로 작은형을 바라보고 있었다. 작은형은 어두운 표정으로 그와 마주하고 있었다. 그들만의 시선에서 나는 깨달았다. 그들은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나는 다시 깨달았다. 그들이 사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남남이라는 것을.

“와들 말이 없노? 뭐가 잘못된 긴데? 말 좀 해봐라. 답답해 돌아삐겠다!”

상황을 파악하지 못한 셋째 형이 짜증을 냄과 동시에 아버지가 뒷목을 붙잡고 뒤로 넘어갔다. 큰형과 작은형이 얼른 그를 부축했으나 아버지는 허공을 할퀴듯 팔을 휘두르며 그들을 거부했다. 아버지의 얼굴은 배신의 충격과 그로 인한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큰형의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배어 있었다. 아버지는 거친 숨을 몰아쉬며 온몸을 떨었다. 셋째 형과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아버지의 등 뒤에서 우왕좌왕했다. 작은형이 다시 아버지에게 다가가 그를 일으켰다.

“니가…. 니가….”

아버지는 큰형을 가리키며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것이 섞인 울렁이는 목소리로 알아듣기 힘든 말을 중얼거렸다. 발음은 부정확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소리를 지를 때마다 아버지의 왜소한 몸이 중심을 잃고 꼴사납게 비틀거렸다. 작은형은 아버지의 팔을 더욱 힘주어 붙들었다. 아버지가 중심을 잃지 않게 도우려는 행동이었지만 내게는 아버지가 큰형에게 다가가지 못하도록 저지하는 것으로 보였다. 만약 그냥 풀어두었다면 아버지는 큰형을 갈기갈기 찢어놓았을지도 모른다. 그때의 아버지라면, 충분히 그러고도 남았으리라.

“니가! 니가! 어떻게 니가!”

“아버지 그만하세요! 큰형도 충격받았다고요! 제발, 진정하세요!”

“니가…. 니가 내 아들이 아니라고?”

“아버지!”

“왜…? 왜 니가? 왜 하필이면 니가…. 내가 널…. 내가 너만은 얼마나…!”

“큰형 나가 있어! 그만 나가!”

더는 두고 볼 수가 없었다. 나는 아버지의 남은 팔 한쪽에 매달려 큰형에게 무작정 나가라고 소리쳤다. 급기야 자리에 주저앉은 아버지는 통곡을 하며 괴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비통한 절규가 빈 대기실을 가득 울렸다. 아니 그 대기실은 아버지의 분노와 슬픔을 받아내기에는 너무나 협소했다. 격렬한 감정의 급류에 휘말린 우리들은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한참을 꼿꼿이 서 있던 큰형은 터덜터덜 뒷걸음질을 치며 대기실을 빠져나갔다. 그랬다. 타인이 되는 순간 큰형은 바로 우리들의 공간에서 추방당했다. 큰형을 안전한 곳으로 보내고 싶었다고 변명해봐야 그가 불편하고 어색해져 밀어냈다는 사실을 부인할 수는 없었다. 작은형이 뒤늦게 그를 따라나섰다. 셋째 형은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며 급히 자리를 떴다. 나만이 아버지 곁에 남겨져 있었다. 나는 순간적으로 어두컴컴하고 습한 공간에 한기를 느꼈다. 그리고 내 옆에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는 아버지로부터 냉혹한 열기를 느꼈다.

아버지의 형형한 안광은 이 세상 사람의 것이라고 생각되지 않을 만큼 귀기가 흐르고 있었다. 복수의 칼날이 가시처럼 아버지의 전신에 돋아 있었다. 어머니는 차라리 죽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회복해 살아난다 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그 순간 바로 다시 죽을 것을. 아버지의 울분은 어딘가 퍼부어 해소되지 않는 한 결코 사라질 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니, 어머니 당사자에게 해소한다 한들 말끔히 사라지는 것은 불가능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에게 퍼부을 분노를 꾸역꾸역 몸 안에 눌러 담고 있었다. 눈앞이 캄캄했다. 앞으로 우리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버지의 성난 칼날은 단 한 번도 어머니에게 스치지 못했다. 비밀을 들킨 어머니는 성치 않은 몸으로 병상을 떠나 그대로 자취를 감추어버렸다. 배 아파 낳은 자식들에게조차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채, 끓는점에 닿기도 전에 증발해버렸다. 간호사의 말에 의하면 처음 보는 남자와 함께 병원 문을 나섰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들은 별도의 설명 없이 깨달았다. 그 남자가 바로. 큰형의 친아버지구나, 하고.

빈 침상을 반납하고, 우리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아버지의 전갈을 받고 서둘러 뛰쳐나갔던 그때 그대로였다. 그러나 그때와는 많은 것이 달라져 있었다. 우리들은 말없이 어수선한 집을 정리했다. 며칠을 굶어 배가 고팠지만 누구도 식탁 주변에 가지 않았다. 그날 밤 아버지는 홀로 지하실에 들어갔다. 우리들은 각자의 방에 처박혀 불러도 오지 않는 잠을 청했다. 어머니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은 어머니의 빈자리를 느낄 수 없었다. 우리들은 어머니 대신 아버지의 갈 곳 잃은 분노와 함께 귀가했다. 그리고 그것이 어머니보다 더한 폭력과 비극을 낳으리란 것을 지하실을 뒤흔드는 아버지의 동물 같은 울음소리가 대신 말해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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