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1화 (21/21)

가청주파수 외전 2

가청주파수 외전

“뭐라고요?”

사현이 되물었다. 뭔가 잘못 들었을 거라 믿으며.

“접근 금지라고, 너!”

돌아온 것은 그의 기대를 가차 없이 걷어차 꺾어 버리는 명징한 목소리였다. 사현은 결국 또 한 번 멍청하게 반문할 수밖에 없었다.

“접근…. 뭐?”

“못 들었어? 다시 말해 줘?”

“…….”

“이 시간 이후로 내가 됐다고 할 때까지 가까이 오지 마. 내 손끝 하나 건드리지 마! 알았어? 딱 지금 거리 이상 접근 금지야!”

사현과 여준은 팔을 쭉 뻗으면 상대의 어깨에 아슬아슬하게 손가락이 닿을 정도의 거리를 두고 서 있었다. 이 이상 접근 금지라니, 그게 의미가 있나? 사현은 무심코 여준을 향해 들어 올렸던 손을 거둬들여 이마에 얹었다. 까끌까끌한 반창고가 만져졌다.

“연락은요?”

“뭐?”

“연락도 하지 말아요?”

“…….”

“…….”

“…안부 인사만 해.”

“나 참.”

약속이나 용건에 관계없이 아침저녁으로 주고받는 메시지는 이제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여준은 때로 친구나 연인보다는 학부모처럼 굴 때가 있었다. 어쩌다 일이 꼬여 연락이 늦어지는 날이면 서운함 담긴 책망의 말이 시무룩한 이모티콘과 함께 날아왔다. 살면서 겪어 본 적 없는 애정 어린 간섭이 낯설었지만 당연하게도 싫지는 않았다.

그러나 섬세한 관심일수록 반작용도 큰 법이다. 여준은 전에 없이 단단히 화가 나 있었다.

“입원 수속해 놨으니까 오늘은 병원에 있어.”

여준이 제 짐을 챙겨 들며 말했다. 뜻밖의 명령에 사현은 눈을 둥글게 뜬 채 헛웃음을 지었다.

“이런 걸로 무슨 입원을….”

“머리가 깨졌는데 하루는 지켜봐야 할 거 아냐. 됐으니까 말 들어.”

“…….”

“내일 차 끌고 데리러 올 테니 얌전히 있어. 알았어?”

말을 마친 여준이 홱 돌아섰다. 아쉬운 작별의 인사 따위는 깔끔하게 생략한 외면이었다. 같은 차에 태울 거면서 접근 금지는 왜 거는 건데? 사현은 당연하게 떠오른 의문을 애써 삼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녁 먹고 가요.”

“싫어. 난 집에 가서 맛있는 거 먹을 거야. 넌 여기 얌전히 앉아서 맛없는 환자식이나 먹어.”

“와…. 너무하네.”

“진짜 너무한 꼴 보고 싶어?”

“…아뇨.”

노려보는 눈빛이 매섭기 짝이 없었다. 사현은 그쯤에서 순순히 백기를 들었다. 여준은 그제야 한결 누그러진 표정으로 사현을 살피더니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내가 너 때문에 늙어.”

올해 막 서른이 된 남자 입에서 나올 말은 아니다. 더군다나 사현의 눈에 비친 여준은 처음 만났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니 문고리를 쥔 여준이 울컥 돌아보았다.

“난 가끔 정말 네가….”

“…….”

“…됐어. 말해 봐야 입만 아프지.”

탁, 병실 문이 가볍게 닫혔다. 그 와중에 큰소리는 안 내는 것도 여준다웠다. 따라 나가 봐야 하나 고민했지만 사현은 우선 얌전히 있기로 했다. 잘못 건드렸다가 이 이상 화나게 만들까 덜컥 겁이 난 탓이었다.

난 가끔 정말 네가.

여준이 잇지 않은 말을 궁리해 보았다. 마땅히 떠오르는 건 없었지만 긍정적인 언사가 아니었음은 분명했다. 사현은 침대에 걸터앉은 채 시선을 돌렸다.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인 제 모습이 어둠이 내리기 시작한 창에 비쳤다. 볼품없다면 볼품없고, 험악하다면 험악해 보였다.

관자놀이부터 한쪽 이마까지 길게 찢어진 상처였다. 여준이 화를 내는 이유를 알지만, 사현으로서는 억울한 면이 없지 않았다. 이 사태를 피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은 했기 때문이다.

‘형님, 이거 아무래도 쨀 각인데요.’

쪽새가 명료하지만 반갑지 않은 보고를 올린 것이 오후 네 시쯤의 일이었다. 장장 두 달을 작업한 건이었기에 사현은 하던 일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입금 질질 미루는 게 쎄해서 SNS 털어 봤더니 장기 출장 어쩌고 하고 있어요.’

‘줘 봐.’

마흔 중반의 회사원인 남자는 두 달 전, 아내의 외도 증거를 잡아 달라는 의뢰를 했다. 아내는 어느 부동산 재력가의 고명딸이라 했다. 남자보다 일곱 살이 어렸지만 그 사실을 감안해도 지나치게 젊어 보였다.

어리고 아름다운 아내의 외도를 의심하는 남자는 발에 채이도록 많다. 더군다나 처가가 부자라면 아무 짚이는 것 없이도 일단 외도를 들먹이는 경우가 제법 있었다.

남자가 건넨 거액의 선수금을 쥐고 한 달간 조사에 착수했지만 여자가 바람을 피웠다는 증거는 전혀 찾지 못했다. 그녀는 SNS도 하지 않았고, 동네 친구를 만나거나 필라테스 교습을 받을 때 외에는 외출하는 일도 거의 없었다. 사현은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외도 흔적은 찾을 수 없다고 보고했다. 그러자 남자는 그럴 리가 없다며 펄쩍 뛰었다.

‘분명 남자가 있다니까요! 젊은 남자를 만날 때가 있을 겁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는 한 달만 더 조사해 주면 미리 약속한 잔금의 두 배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연히 계약서도 새로 받았다. 그러나 기간을 채울 때까지 끈질기게 미행하고도 그가 바라는 증거는 찾을 수 없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확신하는 모습에 사현은 따로 짚이는 게 있느냐고 다시 물었다. 남자는 그런 건 아니라며 말끝을 흐렸다.

‘아무튼 알겠습니다.’

그러고서는 이런저런 핑계를 들어 잔금 지급을 미루다가 해외로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현은 쯧, 혀를 차며 담배를 빼 물었다.

‘회사 앞으로 한 번 가야 하나.’

‘전화부터 해 보겠습니다, 형님.’

말을 마친 쪽새가 사무실 전화를 들고 스피커폰을 눌렀다. 뚜르르르, 건조한 연결음이 좁은 사무실을 가득 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남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 왜 또 전화를…. 자꾸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아이, 사장님. 곤란한 건 저희죠. 사장님이 약속하신 금액을 안 주시면 저희는 내일부터 길바닥에 나앉아야 하는데요.’

- 아니 그런데…. 증거는 하나도 못 잡아 놓고 그 돈을 다 달라고 하면….

‘사장님. 저희가 증거 안 나온다고 보고 올리고 끝내려고 할 때 조사 연장해 달라고 한 거 사장님이시죠? 그렇게 하면 잔금 더블로 주겠다고 한 것도 사장님이시죠? 우리 정식으로 계약서 썼고, 사장님 도장 찍혀 있고, 그죠?’

- 뭐 어차피 합법적인 장사도 아니면서…. 이 정도만 합시다. 선금도 충분히 많이 줬잖아요.

담배 연기를 뱉어 내며 듣고만 있던 사현이 손날을 허공에 휘둘러 끊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말로는 해결이 안 될 모양이었다. 쪽새는 말없이 전화를 끊고 서랍을 뒤져 남자의 명함을 찾아냈다.

여준에게서 메시지가 온 것도 그때였다.

「나 오늘 일찍 끝날 것 같아 저녁 같이 먹자」

힐끗, 시간을 확인한 사현은 대충 그러자는 답장을 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일 자체는 수월하게 해결되었다. 남자가 퇴근길에 버티고 선 사현과 쪽새를 보자마자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달려왔기 때문이다. 그는 경찰을 부르겠다고 했고, 쪽새는 부르라며 싱글싱글 웃었다.

‘사장님, 저희 아무 짓도 안 해요. 그냥 매일 찾아와서 사장님 출퇴근하시는 것만 빠아안히 보다가 갈 겁니다. 그것도 무슨 법에 걸리나?’

‘다, 당신들 내가 고발할 거야! 스토커라고…!’

‘아이, 그러세요. 마음대로 하시고 일단 돈은 주세요.’

시종일관 사람 좋은 웃음을 짓고 있는 보라색 머리 양아치, 그 뒤에 묵묵히 버티고 선 - 얼굴에 큰 흉터가 있는 남자. 누구나 힐끔대며 피해 갈 수밖에 없는 조합이 풍기는 위압감은 말로 다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남자는 결국 핸드폰을 쥐고 약속했던 금액을 송금했다.

‘아이구, 감사합니다. 사장님. 원래 여기까지 온 출장 비용도 청구해야 하는데, 첫날 주셨으니 그건 깎아 드릴게요.’

‘개소리하고 있네. 빨리 꺼져, 이 양아치 새끼들아!’

‘예, 예. 꺼지겠습니다.’

‘니들 이러는 거 협박죄야! 알아, 몰라?’

‘아유, 그런 무서운 말씀하지 마세요. 아무튼 돈 받았으니 갑니다. 네, 수고하세요.’

쪽새가 능청을 부리는 동안에도 사현은 눈썹 한 번 까딱하지 않았다. 돈 떼어먹으려던 놈이 잘났다고 큰소리를 치는 것도 얌전히 들어 주었다. 여준이 늘 하던 말을 마음에 새겼기 때문이다. 제발 쓸데없이 싸우지 마. 피할 수 있는 싸움은 피하고 살아. 그럴 수 있잖아.

입금액을 확인하고 차에 올라타려던 순간이었다. 형님! 쪽새가 다급한 목소리를 내질렀다. 동시에 뜨거운 바늘로 이마를 긁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뜨끈한 피가 번진 관자놀이를 감싸 쥐고 돌아보니 웬 깡마른 남자 하나가 각목을 들고 씩씩대며 서 있었다.

냅다 달려온 쪽새가 남자의 명치로 발을 내질렀다.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진 그의 주변으로 작은 소란이 일었다.

경위는 대충 이랬다. 의뢰인에게 내연녀가 생겼다. 같은 회사에 다니는 여직원이라 했다. 그는 아내와 이혼하고 내연녀와 결혼할 계획을 세웠다. 그 와중에 처가에서 해 준 집은 가지고 싶었다. 그런 그에게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내던 친구가 심부름센터를 이용하면 된다고 알려 주었다.

‘글쎄, 왜 아무 증거도 없이 그런 의뢰를 했느냐고.’

‘증거야 만들려고 했고요….’

새카만 골목에 나란히 꿇어앉은 의뢰인과 그의 친구가 꼴사납게 울먹였다. 그가 철석같이 믿고 따르던 친구는 제 말로는 이 동네에서 꽤 위세가 대단한 깡패라고 했다. 그러니 심부름센터의 시답잖은 직원들 따위는 무섭지 않았던 모양이다.

‘시, 실은 제가 아는 호빠 놈 하나한테 제수씨를 유혹하게 해서 그 현장을 잡으려고 했는데요….’

동네 깡패가 공손히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쪽새에게 맞아 나가떨어지고도 양팔을 걷어붙여 문신을 보이는 등 최선을 다했지만 오래 버티지는 못했다.

‘호빠 놈이 선금만 먹고 튀어서… 다른 놈 섭외하는 사이에 계약 기간이 끝나고 그래서….’

‘이번에는 우리 돈을 떼먹고 튀어도 괜찮다고 조언을 하셨다?’

‘잘못했습니다….’

‘이 새끼야, 다 좋다 치고 각목은 왜 휘둘러? 우리 사장님 이마 찢어진 거 어쩔 거야? 저 잘생긴 얼굴에 스크래치 난 거 어떻게 보상할 거냐고, 어?’

깡패의 시선이 조심스레 사현을 향했다. 사현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누르고 서 있었다. 상처는 깊지 않았지만 피가 계속 흘러 어쩔 수 없었다. 깡패는 그 손수건 아래로 깊이 그어진 흉터를 보고는 짐짓 능글맞게 웃으려 들었다.

‘에이, 저기다가 요만큼 더 그은 게 뭐 대단한 상처라고….’

쪽새가 깡패의 옆머리를 걷어찼다. 깡패는 억, 소리를 내며 지저분한 골목 위를 뒹굴었다. 쪽새는 주먹을 다시 쥐며 물었다.

‘위자료 얼마 낼 거야?’

‘죄송, 죄송합니다. 때리지 마세요. 위자료 드리겠습니다.’

‘얼마 낼 거냐고.’

‘마, 많이, 많이 드릴게요. 때리지 마세요. 잘못했습니다.’

그러니 억울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좋게 해결할 수 있던 모든 일을 그르친 건 의뢰인과 동네 깡패고, 사현은 잘못한 게 없었다. 심지어 이마가 찢어지고도 가만히 있지 않았나.

사정이 생겨 오늘은 만날 수 없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자 여준은 당장 전화를 걸어왔다. 무슨 일 있어? 부드럽고 다정한, 그러나 순순히 물러서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고스란히 느껴지는 질문에 거짓말로 답할 수는 없었다.

- 근데 왜 병원 안 가고 그러고 있어? 병원부터 가! 나도 지금 갈 테니까!

그리하여 무려 접근 금지 명령이 떨어지고 말았던 것이다.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사현이 반창고 끝을 조금 뜯었다. 여준은 머리가 찢어졌다는 말에 온갖 검사를 다 해 봐야 한다며 난리를 피웠지만 사실은 휘두르는 각목 모서리에 이마가 살짝 스쳤을 뿐이다. 스테이플러로 고정한 상처는 사현에게 별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깡패가 했던 말마따나 이 정도 흉이 새삼스레 눈에 띌 리가 없었다.

그런데도 여준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사현이 아무 데도 다친 적 없던 사람인 것처럼 굴었다. 긁힌 상처 하나에도 눈썹을 찌푸리고 한참 속상해했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사현도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다. 폭력을 써야 할 모든 순간을 쪽새에게 위임한다든가.

‘난 가끔 정말 네가….’

사현이 시선이 멀리 기울어졌다. 무슨 말이 하고 싶었을까.

여준은 반차를 내고 사현을 데리러 왔다. 아무 핑계나 들어 괜히 핀잔이라도 날려 볼까 싶었지만, 그가 병원 입구에 차를 세우고는 앞만 노려보고 있었기에 얌전히 올라탈 수밖에 없었다. 사현이 조수석 문을 열자 드디어 돌아본 여준이 냉랭하게 쏘아붙였다.

“뭐 해?”

“네?”

“어제 한 말 잊었어? 뒤에 타.”

“…….”

대각선 방향으로 뒷좌석에 앉으니 과연 약속했던 접근 금지 거리만큼 벌어졌다. 사현은 안전벨트를 매며 지나가는 말처럼 물었다.

“말은 걸어도 되죠?”

여준이 대답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RPM 올라가는 소리가 꼭 살얼음 깨지는 소리 같았다. 사현은 느릿하게 백미러로 시선을 옮겼다. 여준은 여전히 앞만 보고 있었다.

“선배.”

“…….”

“오늘은 나랑 저녁 먹을 거예요?”

그제야 거울 너머로 시선이 마주쳤다. 슬쩍 째려보는가 싶더니 다시 멀어진다. 차는 곧 시내를 빠져나가 N동 주택가로 향했다.

계단을 내려간 여준이 미리 꺼내 둔 열쇠로 문을 열었다. 사현은 오랫동안 혼자 살아온 집을 제집인 양 드나드는 여준의 모습이 싫지 않았다. 그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준은 휑한 단칸방 한가운데 외로이 자리 잡은 이케아 테이블 위에 약 봉투를 올려 두며 사무적으로 중얼거렸다.

“약 받아 온 거 여기 둘 테니까 밥 먹고 나서 잊지 말고 먹어.”

“가려고요?”

사현이 놀라 묻자 여준은 또 대답 없이 핸드폰을 들었다. 그러고는 제 핸드폰에 연결된 공기청정기와 제습기와 로봇청소기를 작동시켰다. 해 없는 곳에 파묻힌 작은 방은 금방 각종 기계 소음으로 가득 찼다. 여준은 그것으로 제 할 일은 끝났다는 듯 지체 없이 구두를 신었다.

“선배.”

현관까지 따라 나간 사현이 문고리를 쥐었다. 여준이 그제야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

이쯤 되니 일의 심각성을 실감하지 못하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사현은 그가 갑자기 나가지 못하도록 문을 막고 섰다. 여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사현이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약 한 번만 발라 주고 가요.”

한참 고민하다 쥐어 짜낸 말에 여준이 얕은 한숨을 쉬었다. 도로 구두를 벗는 그를 앞질러 방으로 들어선 사현은 온갖 소음을 내뿜는 기계들부터 하나씩 껐다.

‘진짜 이사 안 할 거야? 하다못해 해는 드는 집에 살면 좋잖아.’

평생 살아온 집이었기에 새삼스레 불편을 느낀 적도 없었다. 여준의 권유에 적당히 둘러대길 두어 번, 여준은 그 이상 이사 이야기를 꺼내는 대신 몇 가지 가전이며 가구를 사현의 집으로 배달시켰다.

황량했던 반지하 방에 테이블과 행어, 침대와 식기 따위가 생겨 제법 사람 사는 집 같아졌지만 여준은 아직 불만스러운 눈치였다. 사현은 그의 말을 좀 더 귀담아듣지 않았던 것을 처음으로 후회했다. 여준이 지금 이렇게까지 화가 나 있는 데에는 이 집의 꼴이 여전히 군색한 탓도 있지 않을까 싶었던 것이다.

“앉아.”

턱짓으로 의자를 가리킨 여준이 자신도 의자를 끌어와 앉았다. 병원에서 받아 온 소독약을 꺼내 놓은 그는 일회용 장갑까지 착용하고 나서야 사현의 반창고를 살살 떼어 냈다.

“…….”

반창고가 벌어질수록 여준의 미간이 형편없이 좁아졌다. 약을 발라 주는 동안에는 계속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사현은 무력한 침묵을 지키며 그의 눈치만 살폈다.

짧은 소독이 끝나고 새 반창고를 꺼내는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얼굴도 처음보다 한층 창백해진 것 같았다. 사현은 결국 여준의 손목을 잡아 눌렀다.

“내가 할게요.”

멈칫한 여준이 반창고를 놓고 일어났다. 손을 놓아주지 않자 시선을 맞춰 왔지만 여전히 입은 열지 않았다.

“접근 금지 이제 풀린 거예요?”

일단은 슬쩍 떠보려는 의도였다. 평소 같으면 이쯤에서 여준도 표정을 풀고 잔소리를 시작할 타이밍이었다.

“사현아.”

그러나 예상대로 오늘의 여준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화내는 게 장난 같아?”

“아뇨.”

“…….”

“아닌 것 같아서 정말 무서워요. 그만했으면 좋겠어요.”

약한 소리에 마침내 여준의 눈빛이 누그러졌다. 입술을 꾹 물고 내려다보던 시선이 사현의 이마에서 멈췄다. 마른 손가락이 앞머리에 닿자 사현은 조용히 눈을 감았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손끝을 무뎌진 감각으로 쫓으며 눈앞의 허리를 감싸 끌어안았다. 여준은 멈칫대면서도 이끄는 대로 사현의 허벅지에 올라앉았다. 행여 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세라 가득 끌어안고 힘을 주자 품 안의 여준이 움찔, 몸을 비틀었다.

“좀 놔….”

“그만 화내면 안 될까요?”

“…….”

“응?”

눈을 뜨자 여준의 턱 끝이 가까웠다. 사현은 고개를 틀어 올려 부드러운 입술을 찾아 물었다. 허리가 붙들린 여준이 꼼짝 못하는 틈을 노리긴 했지만, 여준도 그 이상 적극적으로 피하지는 않았다.

“읏….”

여러 말을 참고 있는 탓인지 여준의 혀끝에서 옅은 쇠 맛이 났다. 움츠러든 혀를 휘감아 깊이 빨아들이자 여준이 사현의 어깨를 짚었다. 그대로 꽉 눌러 쥔 채 중간중간 숨을 뱉는 모습이 힘겨워 보였다.

“잠깐, 그만….”

고개를 비튼 여준이 사현의 팔을 밀어냈다. 사현은 조금 고민하다 그를 놓아주었다. 여준은 기다렸다는 듯 몸을 떼어 내며 테이블을 짚고 섰다.

“…….”

살짝 달아오른 얼굴을 쓸어내리던 여준이 곧 시선을 돌렸다. 사현은 복잡한 표정으로 돌아선 그를 향해 나지막이 물었다.

“어제 하려던 말 뭐였어요?”

“뭐?”

걸음을 멈춘 여준이 의아한 듯 되물었다. 기억하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사현은 뭐라 더 말하려다 그냥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아무것도.”

전화할게요. 덤덤히 덧붙이자 여준은 시선을 피한 채 말을 이었다.

“…약 먹는 거 잊지 마. 소독도.”

“네.”

“접근 금지는 아직 안 풀렸어. 방금은 약 발라 주려 한 거니까 예외야.”

“알았어요.”

“그리고….”

입술을 달싹인 여준이 이내 살짝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나중에 얘기하자.”

“…….”

“나오지 마.”

간단히 대화를 마친 그가 문을 열고 나갔다. 탕, 낡은 현관문은 아무리 살살 닫아도 거친 소리를 내곤 했다. 사현은 닫힌 문을 가만히 바라보다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여준이 코딱지만 한 세단에 어떻게든 욱여넣어 사 온 조립식 테이블이었다. 커다란 박스를 뜯어 부품을 늘어놓은 여준은 집중해서 설명서를 읽었다. 사현이 테이블 다리로 추정되는 쇠막대를 집어 올리자 깜짝 놀라 만류하기도 했다.

‘어, 내려놔. 순서대로 배열한 거야.’

‘대충 저 판때기에 이걸 달면 되는 거 아니에요?’

‘기다려 보라니까. 그렇게 쉬운 거면 이런 긴 설명서가 왜 있어.’

결국 설명서를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 여준은 한참 후에야 씩, 소년 같은 미소를 지었다.

‘네 말이 맞네. 판때기에 다리 달면 된대.’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설명서에는 드라이버로 철제 다리 홈에 나사를 끼워 테이블 판에 고정하면 된다고 쓰여 있었지만, 아무리 봐도 전동 드릴이 필요한 작업이었다.

‘집에 전동 드릴 없어? 챙겨 올 걸 그랬네.’

‘그거야 철물점 가서 사면 되긴 하는데….’

‘사러 가자, 그럼.’

그날 여준은 얇은 니트에 청바지 차림이었다. 머리도 편하게 내리니 많이 쳐 줘도 대학생처럼 보였다. 주말 오후였고, 이른 해가 저물고 있었다. 언덕 어귀에 달라붙은 낡은 철물점으로 들어선 그는 주인을 향해 안녕하세요, 명랑한 인사말을 건넸다.

‘아니, 이 동네에 이렇게 잘생긴 학생이 살았나? 내가 왜 몰랐지?’

평소 동네 주민에게 살가운 표정 한 번 짓는 일 없는 철물점 주인이 손주라도 만난 노인처럼 환하게 웃었다. 여준도 따라 웃으며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전동 드릴 있나요?’

‘있지. 세 종류 중에 골라. 좋은 거, 그냥 그런 거, 후진 거.’

‘좋은 거여야 되나? 테이블 조립할 건데요.’

‘그 정도는 후진 거여도 돼. 이만 원인데 만 오천 원만 줘.’

‘와, 고맙습니다.’

여준이 싱글대며 주머니에서 지폐를 꺼내 내밀었다. 사현은 똑같은 전동 드릴이 이미 만 오천 원 가격표를 달고 진열대에 있다는 사실을 굳이 지적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또 와요.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싸게 줄게.’

먼지가 풀풀 날리는 전동 드릴 박스를 옆구리에 끼고, 노을이 지기 시작한 언덕을 오르며 여준은 콧노래를 불렀다. 뭐가 그렇게 신나요? 사현이 묻자 붉은 그림자가 진 얼굴로 배시시 웃었다.

‘이런 거 재밌지 않아?’

‘이런 거?’

‘신혼집 꾸미는 거 같고.’

뭐라고 대답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어쨌든 테이블은 무사히 완성되었다. 수평이 맞지 않아 나사를 한 번 풀었다 다시 조이긴 했지만 대단한 시행착오는 아니었다.

‘됐다.’

낡은 집, 낡은 주방, 낡은 전등 아래 새로 자리 잡은 테이블은 쇼룸에서 뚝 떼어 온 소품처럼 이질적이었다. 여준은 둥근 테이블을 탁탁 내리치며 영 아쉽다는 얼굴을 했다.

‘사실 더 좋은 거 사고 싶었는데.’

‘이 집에 이거보다 좋은 게 있어서 뭐 하게요.’

‘그러니까 말이야.’

사현은 자신의 집에 테이블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애초에 집에서 식사도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테이블뿐 아니라 여준이 권하는 것, 사 주는 것, 챙겨 주는 것 중 사현이 평소 원하던 것은 없었다.

그럼에도 테이블은 유용하게 쓰였다. 여준이 짐을 올려놓을 때, 간단한 식사를 함께할 때, 헤어지기 싫은 하루의 끝에 아쉬운 대화를 나눌 때…. 여준이 주는 건 모두 그런 것들이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새 일상에 스며 있었다. 없었던 때가 기억나지 않았다.

“집은….”

문제가 아니지. 여준이 채워 놓은 세간을 가만히 둘러보던 사현이 중얼거렸다. 여준은 한 번도 사현에게 권유 이상의 요구를 한 적이 없었다. 생각해서 꺼낸 말이어도 사현이 시큰둥하면 거기서 끝이었다.

사현은 문득 천장에 달라붙은 작은 창을 바라보았다. 때로 여준이 찾아올 때면 그의 두 발이 스치는 창이었다. 여준이 덧입혀 놓은 기억들은 사현에게 늘 비슷한 착각을 심어 주었다. 언제나 여준과 함께 살아왔던 것만 같다고.

‘내가 지금 화내는 게 장난 같아?’

장난으로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지. 사현은 앉은 채 고개를 뒤로 길게 늘어뜨렸다. 막막해졌다. 여준을 입힌 곳에서 여준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었다.

사현이 아는 문제 해결법은 많지 않았다. 메시지를 보내자니 여준의 답이 짧고, 전화를 걸자니 잘 연결되지 않았다. 퇴근길에 찾아갈까 생각했지만 행여 그의 회사 동료나 친구와 마주칠지 몰라 그만두었다.

결국 그는 여준의 아파트 근처에서 기다리기로 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인적이 드문 골목을 찾아 조용히 섰다. 오늘 몇 시쯤 퇴근해요? 메시지를 보냈지만 여준은 확인하지 않았다.

해가 완전히 저문 후에도 여준은 돌아올 기미가 없었다. 사현은 사위가 캄캄해진 것을 확인하고 아파트 정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여준의 집은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동이었다. 층을 헤아려 창에 불이 들어오지 않은 것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을 들었다.

전화를 걸어 봤지만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야근 중이거나 회식 중일 것이다. 알면서도 당장 확인할 수 없다는 게 답답했다. 끊긴 전화를 내려다보던 사현이 화면을 넘겼다. 몇 개 되지 않는 연락처 끄트머리에 한 번도 써 본 적 없는 번호가 잡혔다.

‘번호 알려 줄래요?’

핸드폰을 내밀며 어색하게 웃던 남자는 여준의 고등학교 시절 선배라고 했다. 계획적으로 성사된 만남은 아니었다. 두 달 전, 이 집에서 저녁 식사를 하고 있을 때 남자가 갑자기 반찬거리를 싸 들고 벨을 눌렀다.

‘어? 형, 연락도 없이 웬일이에요?’

여준은 문을 열고도 당황스러워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의외의 상황에 놀란 건 남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사현을 보고는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억지 미소를 지었다.

‘미안, 손님 있을 줄 모르고… 이거 아침에 만든 건데 구절판이거든. 아, 지단은 안 들어갔어. 잘 됐다. 손님이랑 같이 먹어.’

‘구절판? 웬일로 이렇게 거한 걸 했어요? 형도 들어오세요. 같이 먹어요.’

남자는 몇 번 사양했지만 여준은 기어코 그의 팔목을 붙들어 안으로 끌어들였다. 여준의 성격상 당연한 일이었다. 그는 여준이 반찬을 정리하는 새 사현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반가워요. 여준이 후배 맞죠? 나도 K고 나왔는데…. 민가람이에요.’

‘…임사현입니다.’

사현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가람은 주방 안쪽으로 들어간 여준의 기색을 한 번 살피더니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저기, 말 놔도 돼요?’

‘…….’

‘안 되면 말고, 번호 좀 알려 줄래요?’

쑥 내민 핸드폰을 얼떨결에 받아들었다. 남자는 사현의 핸드폰에도 제 이름을 야무지게 저장한 후에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친하게 지내요. 종종 볼 텐데.’

사현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렇게 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그 자리가 끝난 뒤 ‘민가람’ 과 개인적으로 연락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

“…….”

여준은 아이 문제로 종종 가람의 집에 신세를 진다. 오늘도 아이가 그의 집에 가 있다면, 여준도 함께 있을 가능성이 높다. 사현은 통화 아이콘까지 가져갔던 손을 도로 거둬들였다. 일단은 조금 더 기다려 보기로 했다.

날이 선선했기에 밖에서 시간을 죽이는 건 전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밤 9시가 지나고 10시를 향해 갈 즈음에는 슬슬 걱정이 되었다. 밝은 달이 뜬 하늘을 멍하니 바라보다 결국 다시 가람의 연락처 화면을 불러냈을 때였다.

택시 한 대가 아파트 정문 앞에 섰다. 기다리는 동안 수없이 본 광경이지만 어쩐지 여준일 거란 확신이 들었다. 모자를 고쳐 쓴 사현이 걸음을 옮겼다. 아니나 다를까, 뒷좌석 문이 열리고 익숙한 인영이 비틀대며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감사합니다. 살펴 가세요….”

뭉그러진 말끝에서 벌써 술 냄새가 풍겼다. 사현은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다가갔지만 여준은 한 번 돌아보지도 않고 집으로 향했다. 별수 없이 그 뒤로 따라붙은 사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선배.”

우뚝, 고장 난 기계처럼 멈춰 선 여준이 홱 돌아보았다. 크게 뜬 눈에 입도 벌어져 있었다. 사현을 발견하고는 숨을 삼켰다가, 위아래로 훑어본 그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너 여기서 뭐 해?!”

밤으로 접어든 아파트 단지가 쩌렁쩌렁 울렸다. 사현은 저도 모르게 검지를 입가에 대며 여준을 말렸다.

“조용히 해요. 밤이에요.”

“뭐 하냐고, 너! 언제부터 여기 있었어?”

“얼마 안 됐어요. 선배, 목소리 너무 크….”

“약은? 먹고 나온 거야?”

미간을 일그러뜨린 여준이 다급히 물었다. 약? 뜬금없는 질문에 사현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소독은?”

“…….”

“상처… 오늘 소독 잘 했….”

말끝이 흐려지는가 싶더니 손으로 입을 막는다. 그대로 한참 가만히 서 있던 그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나 토할 것 같아….”

“…일단 들어가죠.”

사현이 여준의 허리를 감싸 부축했다. 몸을 기댄 여준에게서 옮겨붙는 술 냄새에 자칫하면 같이 취할 것 같았다.

외투를 벗기고 소파에 앉히자마자 여준이 스르르 미끄러졌다. 사현은 모로 누운 여준을 조심히 일으켰다.

“옷 구겨져요.”

“응….”

“얼마나 마셨길래 이 시간에 벌써 술에 절었어요.”

“시끄러…. 너 때문이야….”

넥타이를 당겨 풀어내던 사현의 손이 멈칫했다. 여준은 등받이에 파묻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불만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체 얼마나 그러고 있었던 거야….”

“얼마 안 기다렸어요.”

“전화를 해야지. 이마는 다 깨져 가지고….”

“했는데 안 받던데요.”

그 말에 여준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고는 벗어 놓은 코트 주머니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한참이 흘러도 그의 핸드폰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잃어버렸어요?”

“아니…. 회사에 두고 왔나 봐….”

사현은 알 만하다는 듯 여준의 손에서 코트를 빼냈다. 눈을 가늘게 뜬 여준이 다시 팔걸이를 베고 누웠다. 사현은 그의 머리맡을 짚고 바닥에 앉았다. 얼추 비슷해진 눈높이에 발갛게 익은 얼굴이 보였다.

“선배.”

부르며 옷소매를 살짝 잡아당겼다. 여준은 그제야 뭔가 생각난 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놈의 접근 금지 명령이 재차 떨어질 모양이었다.

“원래 하려던 말이 뭐였어요?”

선수 쳐 묻자 눈을 한 번 끔벅인다. 무슨 말? 되묻는 말투가 느릿느릿했다.

“가끔 정말 네가….”

“…….”

“다음에 뭐였어요? 감이 안 와서.”

여준은 대답이 없었다. 사현은 끈기 있게 기다렸다. 별말 아니라 기억하지 못하는 거라면 다행이고, 별말이라면 취한 틈에 들어 없던 일로 만들 셈이었다.

“…아.”

한참 후에야 짧게 탄식한 여준이 시선을 맞춰 왔다. 둥글고 검은 눈동자에 희미한 원망이 서렸다.

“너 밉다고….”

야비한 계획을 한 방에 무너뜨리는 충격 발언이었다. 차라리 접근 금지 명령이 나았겠다. 사현은 시무룩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고개를 기울였다.

“왜요?”

그러자 여준이 하아,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는 팔걸이를 짚고 축 처진 몸을 일으켰다. 앉아서도 한참 비틀대던 그는 별안간 고개를 치켜들며 날카롭게 되뇌었다.

“왜요?”

“…….”

“왜- 요-?”

이어 손을 들어 올리더니 사현의 어깨를 툭, 내리쳤다.

“왜요- 라고 그랬어, 지금?”

“…선배?”

“너 하는 짓이 왜 미운지 모르겠다고? 어?”

툭, 툭, 내리치는 강도는 점점 거세졌지만 그래 봐야 물 먹은 솜방망이질이었다. 양껏 하라는 듯 가만히 맞아 주고 있자 여준이 별안간 목소리를 높였다.

“너…!”

동시에 찌푸려진 눈가에 울컥, 눈물이 고였다. 놀란 사현이 숨을 들이켰다. 여준은 그를 내리치려던 손으로 눈가를 훔쳤지만 이미 떨어지기 시작한 눈물을 막을 수는 없었다.

“선….”

“너 왜 나한테 사과 안 해!”

억울한 말끝이 잔뜩 갈라졌다. 여준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바쁘게 눈물을 훔쳤다. 마른 어깨가 위태롭게 들썩이고 있었다. 사현은 그의 팔을 부드럽게 쥐어 제 쪽으로 당겼다.

“선배.”

“놔, 진짜…. 꼴사나워 죽겠네….”

사과를 안 했다고? 사현은 바닥에 무릎을 대고 상체를 일으키며 다급히 여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눈물에 젖은 얼굴을 제 어깨에 누르자 여준이 그제야 힘을 풀고 머리를 기댔다.

“선배.”

“…….”

“선배, 미안해요. 당연히 미안하게 생각하….”

“사현아, 나는.”

여준이 울먹일 때마다 어깻죽지가 따뜻하게 젖어 들었다. 사현은 입을 다물고 그의 목소리에 온 신경을 기울였다.

“나는 가끔 내가 너한테 아무 자격도 없는 사람 같아….”

“…선배.”

“근데 알아. 아무 자격 없는 게 맞아. 내가 무슨 염치로 너한테 이래라저래라 할 수 있겠어. 아는데….”

“선배, 잠깐만요.”

“아는데 그래도, 다쳤으면…. 그래서 사람 놀라게 만들었으면 너…. 사과는 해야 할 거 아니야….”

여준이 조금씩 몸을 떼어 냈다. 술기운에 눈물까지 더해져 새빨개진 얼굴이 꼭 야단맞은 어린아이 같았다.

“사현아.”

사현은 고개를 끄덕이며 조심스레 여준의 얼굴을 훔쳤다. 축축한 눈물이 손금 마디마디에 스며들었다.

“난 네가 싸운다고…. 거칠게 산다고, 누구 때리거나 다친다고 화가 나는 게 아니야.”

“…….”

“물론 너 다치는 거 싫어. 그럴 일 없었으면 좋겠어. 그러니까 웬만하면 싸우지 말았으면 하는 거지, 네 삶이… 네 방식이 잘못됐다고 말하고 싶은 게 아냐.”

이전에도 여준은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다. 절대 너를 부정하지 않을 거라고. 자신이 겪으며 살아온 좁은 틀에 너를 끼워 맞추려 하지 않겠다고.

“내가 화가 나는 건, 사현아…. 네가 조금도 내 걱정을… 흑, 안 해서야.”

입에 담는 것만으로 서러운지 다시 왈칵, 눈물이 넘쳤다. 사현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허둥지둥 손끝만 움직였다.

“너 다칠 때마다 내가 무슨 생각하는지 알아? 어디 잘못되면 어쩌나 하면서도 부정 탈까 봐 말도 못해. 이번에도 너 입원시켜 놓고서 한숨도 못 잤어. 안 그래도 성한 데 없는 애가 각목으로 머리를 맞았대서….”

“…….”

“…나는, 너 주, 죽으면 어떡하나 싶은데, 그럼 나는 어떻게 사나 싶은데….”

“…….”

“근데 너는, 너 하나 죽든 말든 나랑 상관도 없는 일이라는 듯이….”

여준이 주는 건 대체로 그런 것들이었다. 필요하다고 생각조차 해 본 일이 없는 것. 황량한 집 안을 채우는 테이블, 커다란 공기 정화기, 싸구려 전동 드릴, 푹신한 침구, 두 벌씩 맞춘 식기, 새로 산 컵과 코스터….

당연한 관심, 세심한 배려, 선을 지키려 애쓰는 애정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쑥 흘러넘치는 마음.

사실은 사현도 알고 있다. 철물점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의 노을이 아름답게 보인 건, 원하는 물건을 손에 넣은 여준이 환하게 웃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 풍경을 볼 수 있었던 건, 여준이 사현을 제 자리로 끌어당기는 대신 사현의 삶에 내려앉아서다.

“선배.”

그래서 여준의 삶에 섞이지 않으려 했다. 그래야 여준이 언제든 이 텅 비어 버린 삶에서 벗어나 원래 자리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준에게 어울리는 건 그와 닮은 것들이었다. 깨끗한 집, 정돈된 테이블, 세상의 악의를 모르는 아이, 한눈에도 질이 안 좋아 보이는 이에게 스스럼없이 말을 거는 그의 선배처럼.

“머리 맞은 거 아니에요. 피했는데 살짝 스친 거예요. 전혀 심각한 거라 생각 안 해서…. 그래서 그랬어요.”

“…….”

“선배가 그렇게 생각할지 몰랐어요. 미안해요. …제발 울지 마요.”

방울진 눈물이 툭툭 떨어질 때마다 칼날로 속이 베이는 것 같았다. 애원하며 쓰다듬자 여준이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심각한 거 아니었으니까 미안할 일도 아니었다 이거야?”

“…잘못했어요. 시키는 대로 말할 테니 한 번만 봐줘요.”

여준의 가늘어진 시선이 사현의 이마에 닿았다. 가장된 냉랭함은 사라지고 안타까운 물기가 어렸다. 다가온 마른 손가락이 부드러운 머리칼을 헤집고 다친 관자놀이에 스쳤다.

“걱정 끼쳐서 미안하다고 해.”

딱딱하게 굳은 미간의 흉터는 상한 적 없는 피부와는 결부터 달랐다. 누군가 만져도 감각이 거의 없었다. 때문에 사현은 제 얼굴 위에서 여준의 손끝을 쫓을 수 없게 될 때마다 그가 자신의 상처를 매만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걱정 끼쳐서 미안해요.”

“꼭 싸워서 그런 거 아니어도… 어쩌다 긁힌 상처 하나만 나도, 내 얼굴 보면 일단 미안하다고 해.”

“그럴게요.”

“…너 진짜 정신 차리고 살아. 알았어?”

“네, 정신 차리고 살게요.”

그러니 이제 그만 화 풀어 주세요. 온순한 항복에 여준의 시선이 드디어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사현은 제 머리를 끌어안는 여준의 품에 코끝을 대며 오랫동안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하루를 보내고 돌아온 여준에게선 늘 비슷한 향이 났다. 정갈하게 단장한 그의 피부 올올이 새겨진 흔적을 숨으로 쫓다 보면 태어난 이래 한 번도 떨어진 적 없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러면 하루라도 더 살고 싶었다. 살아만 있으면 내일도 같은 순간이 올 테니까.

낡았지만 깨끗한 욕조에 더운 물을 채우자 좁은 욕실이 금방 훈훈한 공기로 가득 찼다. 이끄는 대로 물에 들어간 여준이 손끝을 움츠리며 눈을 꽉 감았다. 갑자기 체온이 올라가 힘든 모양이었다. 사현은 그의 손을 잡아 부드럽게 주물러 주었다.

“애는 그 선배네 맡겼어요?”

“그 선배? 아…. 가람 형?”

찬기가 가신 손을 물에 넣고 오른발을 잡아 올렸다. 여준은 멈칫대면서도 사현이 제 발을 감싸 문지르게 내버려 두었다.

“아니, 형네는 아니고… 영어 캠프 갔어. 내일 올 거야.”

“애만 가서 자고 오는 거예요?”

“응…. 나도 걱정 엄청 하면서 보냈는데 잘하고 있나 봐. 낮에 메일로 동영상 왔거든. 아주 신나게 놀고 있던데.”

백열등 불빛에 비친 여준의 발은 가늘고 창백했다. 발등에 뻗친 푸르스름한 핏줄을 눈으로 쫓던 사현의 고개가 점점 기울어졌다. 쪽, 도드라진 복사뼈에 입 맞추자 여준이 픽 웃었다.

“뭐 해, 발에다가….”

“그냥요.”

발목을 잘근대며 종아리를 길게 쓸어 올렸다. 오금에 손이 닿자 발끝이 움츠러드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선배 발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천천히 옮겨 간 사현의 입술이 발바닥의 오목한 곳에 닿았다. 아치가 깊이 휘어지도록 누르자 여준이 발을 빼려 들었다. 사현은 그의 무릎을 덮어 제 쪽으로 누르며 입 맞추던 지점을 짙게 핥았다.

“바, 발을 왜 그러….”

여준이 벌게진 얼굴로 주절거렸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참방대는 소리가 났다.

“하지 마, 간지러워….”

“그런데 왜 접근 금지였어요?”

살금살금 핥아 올라가던 혀끝이 발가락이 시작되는 부분에 닿았다. 여준은 재차 질색하며 제 무릎에 얽힌 사현의 손을 풀어내려 했다.

“하지 말라니까, 더럽게.”

“몸속도 핥는데 발 정도로 뭘.”

“…으.”

“대답해 줘요. 왜 접근 금지였어요? 그래야 내가 피 마를 것 같아서?”

새끼발가락을 살짝 깨물자 여준이 손에 쥔 사현의 옷소매를 한껏 우그러뜨렸다. 핏기가 돌아온 아랫입술이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사현은 축축하게 흐려진 시선을 놓치지 않으려 눈을 똑바로 맞춘 채 상체를 들어 올렸다. 욕조 쪽으로 몸을 기울인 채 여준의 무릎에 얹었던 손을 깊이 쓸어내리자 미끄러운 허벅지 안쪽 피부가 잡혔다.

“계속 화내고 싶어서….”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에 사현의 손이 멈칫했다. 여준은 고개를 숙인 채 눈동자만 들어 사현을 살피고 있었다.

“…너무 화가 나는데, 너랑 닿으면 기분이 좋으니까…. 어영부영 풀어지고 끝날까 봐.”

“…….”

“그래서 닿지를 말아야겠다 한 거지….”

여준이 붉은 얼굴을 쓸어 내며 코를 훌쩍였다. 사현은 말없이 욕조 안으로 팔을 짚었다. 따뜻한 물이 셔츠 소매를 타고 올라왔다. 코끝이 가까워지자 여준의 고개가 조금 기울어졌다. 맞문 입술 새로 청량한 향이 흘렀다. 여준이 사현의 집에 채워 놓은 치약과 같은 향이었다.

“어떻게 닿을 때 제일 좋아요?”

아랫입술을 스쳐 잇새를 벌리게 하며 물었다. 여준은 사현의 어깨를 쥐고 으응, 코 먹은 소리를 냈다.

“그냥 뭐든….”

“뭐든?”

“응, 그런… 데, 나 내일 출근….”

“꼬박 며칠을 손가락 하나 못 대게 해 놓고 이젠 출근 핑계라….”

못마땅한 말에 여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누구 탓인데, 따지고 싶은 기색이었지만 그는 마음 가는 대로 하는 대신 어른스러운 대응을 택했다.

“…한 번만이야.”

귓전을 간질이는 속삭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현은 결국 못 이긴 척 웃어 버렸다.

침실로 들어서자마자 여준은 문부터 꼼꼼히 닫았다. 아무도 없는 집이어도 아이 방이 보이면 신경이 쓰이는 듯했다.

“이쪽.”

사현의 팔을 이끌어 침대에 앉힌 여준이 그의 발치에서 무릎을 꿇었다. 사현은 곧 그의 의도를 눈치채고 시선을 내렸다. 사현의 가운 앞섶을 열고 자연스레 다가온 입술이 굵은 핏줄이 일어선 복근에 닿았다.

“이거 한 번으로 쳐요?”

둥근 머리통을 감싸며 묻자 여준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배꼽 근처로 더운 숨을 퍼뜨리던 그의 얼굴이 점점 더 깊이 파묻혔다. 이미 반쯤 일어선 성기 끝을 물어 츄웁, 소리가 나도록 빨더니 조금씩 입 안으로 삼키기 시작했다.

“…….”

여준이 숨을 들이쉬는 순간마다 좁은 입안이 축축하게 조여들었다. 사현은 그의 머리를 감싼 손에 힘을 주지 않게 조심하면서 방 안을 슬쩍 훑어보았다. 그러고 보면 이 집에서는 처음이었다. 이 집에 오는 일 자체도 많지 않았지만, 오더라도 아이가 집에 있거나 곧 돌아올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선배.”

부르자 정성껏 성기를 삼키던 여준이 멈칫했다. 굵은 기둥을 가득 물고 올려다보는 모양이 힘에 부쳐 보였다. 사현은 그의 머리칼 사이로 손을 얽으며 느릿하게 물었다.

“입으로 할 때 제일 좋아요?”

여준이 약하게 고개를 저었다. 살덩이를 가득 문 입술 새로 으응, 먹먹한 목소리가 샜다. 사현은 그의 젖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다시 물었다.

“입보다 더 좋은 데가 어딘데요?”

“…응, 흐….”

“어딜 만져 주면 그렇게… 치솟았던 화도 다 잊어버릴 만큼 기분이 좋아요?”

작은 머리통을 훑어내려 마른 목을 쥐었다. 도드라진 경추를 문지르다 날개뼈 사이로 미끄러뜨리자 흰 어깨가 움찔대며 튀어 올랐다. 여준은 한참 후에야 입에 물었던 것을 두 손으로 쥐고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말 안 해 줄 거야.”

사현이 웃으며 여준의 상체를 안아 일으켰다. 여준은 그의 허벅지에 올라앉으며 눈앞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몸에 걸쳐 놓았던 가운이 스르르 미끄러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으응….”

팽팽하게 발기한 성기가 회음부를 찌르다 엉덩이 골 사이로 미끄러졌다. 고개를 떨어뜨린 여준이 작게 헐떡였다. 어두운 방, 창문 너머로 스민 불빛이 더운 숨을 담고 들썩이는 나신을 희미하게 비췄다. 사현은 여준의 골반을 붙들어 제 쪽으로 누른 채 멍하니 그 모습을 올려다보았다.

“선배.”

“응, 왜….”

“난 가끔 선배를….”

빼앗고 싶은 생각이 들어요. 사현은 뒷말을 잇는 대신 눈앞의 목을 움켜 물었다. 송곳니를 세우고 혀를 내어 거세게 빨아들이자 여준이 진저리를 치며 신음했다.

“흐으, 그만…. 아파.”

여준의 삶에 섞이고 싶지 않았다. 그의 모든 것을 그대로 두고 싶었다. 그래야 여준이 언제까지고 안전할 것 같았다.

“흐읏, 응, 사, 현아….”

그러나 사현은 그 바람의 이면 역시 알고 있다. 사실은 빼앗고 싶어. 당신을 구성하는 삶에서 오롯이 당신 하나만을 꺼내 내 곁에 두고 싶어.

“앗….”

그랬다간 당신을 해치게 될 걸 알지만.

몸을 일으킨 사현이 여준을 침대 위로 내리눌렀다. 푹신한 침구에 추락하다시피 누운 여준이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다리가 벌어지고 밑이 맞붙었다.

“잠깐….”

허공에 뜬 무릎이 사현의 어깨에 걸렸다. 여준은 온몸이 둥글게 말려 짓눌리는 감각에 무력한 비명을 내지르며 사현의 팔을 긁어내렸다.

“…잠, 까… 안, 하으…!”

두꺼운 귀두가 불시에 파고들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등줄기가 식은땀에 젖어 드는 느낌이 섬뜩했다. 숨이 턱 막히는 기분에 고개를 흔들던 여준이 다급히 사현에게 매달렸다.

“그… 렇게 바로, 는 안… 들어가….”

“…….”

“…잠깐만, 잠깐만 기다려…. 응?”

사현이 그제야 움직임을 멈췄다. 코끝에 맺혀 있던 땀방울이 여준의 뺨으로 떨어졌다. 여준은 사현을 달래듯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앉아 봐. 괜찮으니까.”

쪽, 미소 띤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사현은 결국 여준이 시키는 대로 침대 헤드에 등을 대고 앉았다. 얼마 후 작은 병을 쥐고 돌아온 여준은 처음 그랬던 것처럼 사현의 허벅지를 타고 앉았다.

“…응….”

그러고는 병에서 젤을 덜어 내 제 엉덩이 사이로 가져갔다. 사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그가 하는 양을 빤히 지켜보았다. 여준은 얼굴을 붉힌 채 손가락을 하나씩 구멍 안쪽으로 밀어 넣고 있었다.

“아, 으응….”

젖은 입술 새로 탄식 같은 신음이 밀려 나왔다. 사현은 여준의 허벅지를 쥐며 짓궂은 목소리로 물었다.

“이제 알려 주는 거예요?”

“으응, 뭐, 를….”

“어디 만지면 기분 좋은지.”

“읏, 아, 니야….”

억울한 기색이 역력한 대답이 무색하지는 않아 보였다. 여준의 손가락은 입구를 애매하게 적시는 데 그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래 봐야 무슨 의미가 있나. 여준이 서툴게 안달을 내는 모양을 보다 오히려 여유를 되찾은 사현은 느긋하게 눈앞의 몸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그럼 힌트만 줘요. 몸 안이에요, 밖이에요?”

“흣…. 뭐라는 거야….”

“밖이면 이런 데일 거고.”

“…으읏, 응…!”

꼿꼿이 선 젖꼭지를 비틀어 쥐자 가느다란 허리가 부드럽게 요동쳤다. 사현은 판판한 가슴을 주무르던 손으로 그의 상체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아니면 여기?”

아랫배를 지나 꼿꼿이 선 성기를 감쌌다. 여준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예쁜 각을 그리는 어깨가 후들후들 떨렸다. 그 와중에도 손은 쉬지 않고 있었다.

“안쪽이면 입이거나….”

손바닥 가득 성기를 문지르며 회음을 지났다. 다리 사이 가장 깊숙한 곳을 향해 가던 손끝이 그때까지 홀로 애쓰던 여준의 손가락과 얽혔다. 사현은 여준이 손을 빼지 못하도록 손마디를 누른 그대로 제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었다.

“…-아, 흑!”

긴 손가락이 거침없이 파고들자 여준이 놀라 온몸을 떨었다.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며 배 속 깊은 곳부터 입구까지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힘 좀 빼 봐요.”

“아, 못 하겠어…. 너무, 오랜만….”

“이래 가지고 어느 세월에 좆을 넣어요?”

“그런, 말 좀… 으응, 그냥….”

단단히 얽힌 손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쩔쩔매던 여준이 아랫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았다. 그러고는 짧은 고민 끝에 낮게 중얼거렸다.

“…어.”

“뭐라고요?”

“이제 그냥, 넣… 어….”

사현이 그제야 여준의 손을 놓아주었다. 부대낀 살갗 사이에 고여 있던 젤이 흰 허벅지를 타고 흘렀다. 사현은 병에 남아 있던 젤을 한꺼번에 짜내 제 성기에 바른 뒤 여준의 무릎 아래로 팔을 넣었다.

“…어…!”

휘청, 중심을 잃은 여준이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사현은 처음에 그랬듯 온몸으로 여준을 짓누른 채 밑을 맞추자마자 허리를 밀어 넣었다.

“아, 아흐윽…-.”

푹, 잠겨 든 살덩이가 순식간에 배 속 깊은 곳까지 파고들었다. 여준은 빠르게 두 눈을 깜빡이며 갇힌 몸을 버둥거렸다. 목 아래까지 채워진 기분에 마른기침이 튀어나왔다.

“선배.”

움직임을 멈춘 사현이 몸을 낮춰 여준을 살폈다. 그 바람에 삽입이 깊어져 한 번 더 콜록거린 여준이 애써 숨을 골랐다.

“힘들어요?”

듣자마자 고개를 저었다. 동시에 생리적인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힘들다고 하면 그만둘 것 같았다. 몇 번을 해도 익숙해지지는 않는 행위였지만, 그만두고 싶지도 않았다.

“아냐, 이제 괜… 찮아….”

“괜찮다고만 하지 말고요.”

“일단, 다 들어가면, 괜찮아져….”

“…아직 다 안 들어갔는데요.”

여준의 눈동자에 놀란 빛이 어렸다. 사현은 낮은 한숨을 쉬며 그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천천히 할게요.”

무릎을 깊이 짚은 사현이 조금씩 허리를 밀어 올렸다. 여준은 배 속이 채워지는 순간마다 몸을 움츠리면서도 온 신경을 집중해 사현과 호흡을 맞췄다.

“…사, 현아.”

마침내 가장 내밀한 곳까지 닿았을 때, 한참을 헐떡이던 여준이 사현의 등에 얽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아까 거짓말, 한 거야.”

“어떤 거요?”

“밉다고 한 거….”

“…….”

“고작 이런 일로 너…. 안 미워해.”

아주 잠깐 화가 난 거야. 그래서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한 거야. 더듬대며 이어 가는 말에도 사현은 대답할 수 없었다.

“절대 안 미워해….”

흠 있는 사람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주 자그마한, 타인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점 하나면 충분했다. 티끌만 한 틈이라도 발견하는 순간 사현은 그것이 여준의 전부인 양 매도해 어두운 반지하 방으로 끌어들일 자신이 있었다.

그러지 못했던 것은, 정작 여준이 사현의 본질을 두려워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언제든 제 발목을 잡아채 시커먼 굴로 끌어들일 수 있는 인물임을 알면서도 피하거나 도망치지 않았다. 그렇게 해도 원망하지 않겠다는 얼굴로 얌전히 발목을 내어 줄 뿐이었다.

사현은 깊은 물속으로 잠겨 들듯 여준의 어깻죽지에 얼굴을 묻었다.

새벽은 유난히 느리게 찾아왔다. 사현은 모로 누운 여준의 허리를 끌어안은 채 그의 숨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여준은 때때로 선잠에서 깰 때마다 제 몸에 감긴 사현의 팔을 토닥였다. 막연한 악몽에 잠들지 못하는 어린아이를 달래듯이.

“선배.”

달조차 진 후에야 부르자 응…, 느릿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사현은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나 이사할까요.”

멈칫, 여준의 손끝이 사현의 팔목을 감싸다 말고 그대로 굳었다. 천천히 돌아보는 얼굴을 피해 고개를 숙이자 여준이 아예 사현 쪽으로 돌아누웠다.

“어디로?”

“…….”

“응? 어디로?”

톡, 톡, 장난스러운 손짓이 다친 이마를 스쳤다. 사현은 그제야 못 이긴 척 입을 열었다.

“이 동네…. 적당한 빌라 아무 데나요.”

“그러지 말고 아예 이 아파트로 와.”

“아파트는 비싸서 못 사요.”

“뻥치지 마. 돈 많으면서.”

눈을 마주친 여준이 배시시 웃었다. 말은 그렇게 해도 상상만으로도 즐거운 기색이었다.

“어떤 집으로 이사할 건데?”

“일단 반지하는 아닌 데로 할게요.”

“와, 잘 생각했다. 진짜 장족의 발전이다.”

“집 앞에 주차도 가능한 데로.”

지금은 집 앞 골목이 워낙 가파르고 좁아 주차가 불가능했다. 언덕 아래 공영 주차장에 차를 대고 한참 걸어 올라가는 식이었다. 여준은 그에 대한 불만은 말한 적이 없지만, 매번 뭐라도 사 들고 오느라 여름이면 땀범벅이 되곤 하는 그를 볼 때마다 마음이 불편했었다.

“또?”

“…또?”

“또 어떤 집이었으면 좋겠어? 같이 찾아보게.”

예상치 못한 질문에 사현이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또 어떤 집을 원하는가 하면….

환기가 잘 되는 집이었으면 좋겠다. 집에 오래 있다 보면 여준이 꼭 기침을 하니까. 따뜻한 물도 잘 나왔으면 좋겠다. 여준이 추위를 타니까. 함께 조립한 이케아 테이블과 어울리는 주방이 있었으면 좋겠다. 여준이 기뻐할 것 같으니까.

“선배 마음에 드는 집이요.”

모든 바람을 절충한 대답에 여준이 슬쩍 웃었다. 미소 띤 입가가 부드럽게 빛났다.

“주말에 부동산 가 볼게. 우리 단지에 적당한 매물 있는지.”

“아파트는 비싸다니까….”

“형아 못 믿어? 형아도 돈 있어.”

“있어서 좋겠네요. 아껴 쓰세요.”

여준이 요게, 하며 사현의 머리카락을 슬쩍 당겼다. 그러고는 사현의 콧잔등에 쪽, 쪽, 여러 번 입을 맞췄다.

“왜 갑자기 그런 기특한 생각을 했어? 백 번 말해도 귓등으로도 안 듣더니.”

“백 번 말 안 했잖아요. 두세 번 하고 끝이었으면서.”

“그래? 백 번 말하면 들을 거라 이거지? 다음부턴 꼭 그렇게 해야겠네.”

사현의 목을 끌어안고 이마를 맞댄 여준이 흐흐, 소리 내 웃었다. 사현은 조금 복잡한 심경으로 그의 등을 마주 안았다.

“그렇게 좋아요?”

“좋지, 그럼. 아…. 진짜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너희 집 가는 거 너무 힘들었어. 말은 안 했었는데 겨울에 빙판 밟고 넘어진 적도 있어.”

“…그랬어요?”

“근데 그럴 때마다…. 내가 다니기 불편한 것도 불편한 건데, 너도 이렇게 넘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그게….”

“…….”

“마음 같아선 우리 집 들어와 살라고 하고 싶은데 그랬다간 겁먹고 도망갈 것 같아서 그러지도 못하고…. 진짜 너 때문에 오만 생각을 다 하고 살아.”

여준이 못마땅하게 중얼거렸다. 사현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깨만 으쓱였다. 여준은 그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 마음에 드는 집이라고 했지?”

“뭐…. 네.”

“나중에 딴말하지 마.”

“…물어나 볼게요. 어떤 집을 원하는데요?”

행여나 난데없이 이 집의 방 하나를 비울 테니 들어와 살라 명령하면 곤란했다. 아무리 그래도 아이와 한집에 살 자신은 없었다. 살짝 경계하며 묻자 여준이 음, 목 울리는 소리를 냈다.

“일단 해가 잘 들고…. 바람도 잘 통해야 돼. 그러려면 남향에 창이 커야겠지. 너처럼 어두컴컴한 거 좋아하는 사람한테는 부담스러우려나? 침실에는 암막 커튼 달아 줄 테니 걱정하지 마.”

“그래요…. 참 고맙네요.”

“넌 정장이 많으니까 붙박이장이나 드레스 룸이 있는 집으로 찾는 게 좋겠어. 가전제품은 웬만한 건 옵션이 있는 게 편할 거야. 그리고….”

“…….”

“그리고 또….”

말이 느려지는가 싶더니 여준이 느린 하품을 했다. 눈가를 비비는 그를 가만히 보던 사현이 고개를 숙여 이마를 맞대었다.

“졸리면 자요. 내일 또 얘기하면 되지.”

“내일 되면 너 맘 바꿀까 봐….”

안 그래요, 무심코 대답하려던 사현이 멈칫했다. 여준이 아, 하며 눈을 번쩍 떴기 때문이다.

“제일 중요한 거 까먹었다.”

“……?”

“가까워야 돼. 나랑 가까운 집. 조금이라도 더 가까운 집. 그게 내가 원하는 거야.”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준은 그제야 만족한 듯 눈을 감고 사현의 품에 파고들었다. 곱게 감은 속눈썹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빈틈없이 맞붙는 몸을 힘껏 끌어안자 여준이 킥킥대는 소리가 들렸다. 숨 막혀….

가장 먼저 체온이 섞인 몸통의 안쪽, 쿵쿵 뛰는 심장에서부터 뻐근한 감각이 번져 나갔다. 그리하여 사현은 내일이 오리라는 사실을 알았다. 어제와 그리 다르지 않은 날이리라는 것도.

그러자 조립한 테이블에 처음으로 마주 앉았던 날이 떠올랐다. 가져 본 적이 없어 원하는 줄도 모르고 살았던 마음이 숨에 섞여 버린 밤이었다. 깨달아 버린 이상 돌이킬 수 없었다. 사현은 이제 내일을 원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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