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청주파수 외전
가청 주파수
“제정신이에요?”
핸드폰을 손에 쥔 사현이 멍하니 물었다.
- 나?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천연덕스럽기 짝이 없었다.
- 왜, 바빠? 안 되겠어?
“아니, 바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라….”
- 너희 사무실에서 가까워. 내비 찍어 보면 아마 10분 정도 걸린다고 나올 거야.
“…아무래도 잘못 들은 거 아닌가 싶어서 그러는데, 다시 말해 봐요. 뭘 해 달라고요?”
한창 키보드를 두드리던 쪽새가 의아한 눈길로 사현 쪽을 힐끔거렸다. 사현은 주름진 미간을 손바닥으로 꽉꽉 누르며 재차 들이닥칠 재난에 대비했다.
- 지오 좀 데려다가 같이 있어 달라구.
불행히도 환청이나 짧은 꿈은 아니었다.
“피곤하면 잠을 자요. 실없이 전화해서 헛소리하지 말고.”
- 지금 사정이 정말 급해서 그래. 시터가 갑자기 어머니가 아프셔서 못 온다는데 가람 형이랑 가린이도 여행 가서 없고….
“…….”
- 유치원에서 다섯 시까지는 데리고 있어 줄 수 있다는데 내가 퇴근하고 곧장 출발해도 일곱 시는 돼야 가거든. 시간이 뜨는데 어디 부탁할 사람이 없어.
무의식중에 벽시계로 시선이 향했다. 시간은 막 오후 네 시 반을 지나고 있었다. 사현이 알기로 아이의 하원 시간은 오후 세 시였다. 그렇다면 여준이 아이를 맡길 사람을 찾기 시작한 것은 최소 한 시간 반 전부터일 터였다.
-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지금이라도 반차 내고 가면 될 거야.
속이 까맣게 타들어 갔을 것이 뻔하건만 목소리는 멀쩡하다 못해 명랑하기까지 하다. 회사에서 어떻게든 나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진작 그렇게 했을 사람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경으로 자신에게 전화를 걸면서도 혹여 거절하기 어렵지 않도록 목을 가다듬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사현은 이마 짚은 손을 책상에 괸 채로 소리 없이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서 뭐라고 하면 되는데요?”
- …갈 수 있어?
“가라면서요.”
댁이 하명하시는데 내게 무슨 선택권이 있어요. 차 키를 챙겨 들고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현을 따라 쪽새의 시선이 불안하게 움직였다.
- 내가 연락해 놓을게. 지오 데리러 왔다고 하면 알 거야.
여준은 얼핏 듣기에도 대단히 안도한 기색이었다. 사현은 복잡해진 심경을 감추려 볼 안쪽을 혀로 꾹 눌렀다.
“선배.”
- 응?
“급하다니 시키는 대로 하긴 하는데 후폭풍은 책임 안 져요. 거기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입방아 찧어 댈지 뻔한 거 알죠?”
- 입방아? 뭘? 너를 두고?
여준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끔뻑이는 표정이 눈에 선했다.
- 아, 웬 깡패 같은 사람이 지오 데리러 왔다고?
잠시 후에야 돌아온 물음에 맑은 웃음이 묻어 있었다.
- 잘됐네. 지오 유치원 생활 편해지겠어.
“농담하자는 게 아니라….”
- 걱정하지 마. 우리 사현이 괴롭히는 사람은 형이 다 혼내 줄게.
“…이 인간이 진짜.”
- 정말로.
“…….”
- 누가 괴롭히면 말해. 내가 다 가만 안 둘 거야.
그러니까 겁내지 말고 가. 어르고 달래는 목소리에 어이가 없었다. 전화를 끊은 사현이 한숨을 푹푹 쉬며 서 있자 쪽새는 기어코 골똘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저, 형님. 괜찮으신 겁니까?”
“뭐가.”
“아까부터 계속 실실 웃고 계신데….”
“…….”
머리가 괜찮은지 묻는 거였다. 사현은 대답 없이 미간에 힘을 준 채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날은 징그럽게도 맑고 따스했다.
3월, 여준은 상해 파견을 포기하는 대신 팀을 옮겼다. 사실상 책임 업무를 맡게 되었으나 직급은 그대로라 연봉도 동결이라며 장난스레 웃는 얼굴이 개운해 보였다.
‘입사 때부터 나 예뻐해 주던 책임님 계시는 팀이거든. 팀장님도 좋은 분이고, 쓸데없이 신경 긁히는 일 없는 것만으로도 살 만해.’
기뻐할 것만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에나 일장일단이 있는 법이다. 원래도 회사에 매여 살다시피 하는 여준이었지만 새 팀에 간 후로는 아주 잠깐 얼굴 보기도 어려울 지경이었다. 제시간에 퇴근하는 날이 손에 꼽았고, 주말에도 쉬는 날이 거의 없었다. 그때마다 여준은 자세한 일정을 알려 주었지만 아무리 말이 길어도 결론은 같았다. 오늘은 못 본다는 것.
‘미안해. 자리 잡느라 그런 거니까 두어 달만 지나면 좀 괜찮아질 거야.’
‘두어 달, 좋네. 말라 죽어 재가 되기에 아주 충분한 시간이네요.’
괜히 퉁명스레 쏘아붙이면 여준은 에이, 하며 사현의 팔을 붙들고 늘어졌다. 화났어? 다정하게 물으며 눈썹을 가라앉혔다. 그 얼굴이 보고 싶어서 자꾸만 꼬인 말을 내뱉게 되었다. 자신이 얼마나 유치해질 수 있는지 알아 가는 과정은 생경하고 당황스러웠다.
멀리 유치원 간판이 보였다. 출퇴근하는 길에 자주 지나는 장소였다. 사현은 입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심호흡을 했다. 여준의 말에 따르면 유치원에 남아 있는 사람은 교사들과 아이 하나뿐이었다.
고민하던 사현이 글로브 박스를 열었다. 반으로 구겨 넣어 놓은 야구 모자 챙을 쥐었다가 놓으며 한참을 망설이는 동안 시간은 한없이 5시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고민하던 그는 결국 백미러에 얼굴을 비추며 앞머리를 흩어 내렸다. 그래 봤자 얼굴의 반을 차지한 흉터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천천히 걸어 안으로 들어서는 내내 후회가 밀려왔다. 거절했어야 하는데. 하다못해 다른 사람을 보낼 것을. 그러나 제일 먼저 떠오른 인물이 쪽새라는 점에서 금방 암울해졌다. 쪽새는 사현이 사무실을 열자마자 머리를 연보라색으로 염색했다. 늘 걷어붙이고 다니는 팔뚝에는 커다란 연꽃 문신까지 있었다.
정문은 활짝 열린 채였다. 안에서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키 낮은 신발장 옆에 선 채 사현은 한참이나 입을 떼지 못했다.
“저….”
마침내 마음을 굳게 먹고 입을 여는 것과 동시에 복도 안쪽 문에서 앞치마를 두른 여자가 불쑥 튀어나왔다. 그리고는 사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헉,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우려하던 사태 그대로였다. 사현은 어떻게 하면 자신이 아무런 범죄 의도 없이 그저 아이를 데리러 온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다는 사실을 짧고 간결하게 전할 수 있을지 고민했으나 무리한 일이었다. 다행히 여자는 입을 벌린 채 굳어 버린 사현의 얼굴을 한 번 살피더니 곧 제 가슴에 손을 얹고 한숨을 쉬었다.
“어머, 죄송해요. 사람 있을 줄 모르고 깜짝 놀라서…. 언제부터 거기 계셨어요?”
“…방금 왔습니다. 놀라게 해 드려 죄송….”
“아뇨, 아니에요. 지오 데리러 오신 거죠? 아버님한테 연락받았어요.”
아버님. 여준을 칭하는 호칭 중에 그만큼 적응 안 되는 단어가 없었다. 사현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잠깐 기다리라는 듯 손짓하더니 종종걸음으로 사라졌다. 혼자 남겨진 사현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여자는 얼마 지나지 않아 아이의 손을 잡고 나타났다. 아이는 사현을 보고는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낯설어하고 있었지만 겁내는 기색은 아니었다.
“이거 원아 수첩이구요. 집에 가셔서 혹시 열 오르지 않는지 지켜봐 주셔야 될 것 같아요. 지오가 오늘 좀 기운이 없었거든요.”
“…네.”
그래 봤자 초면이었다. 사현은 난처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아이는 어느새 제 신발을 다 신고 사현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었다.
“우리 집 알아요?”
“뭐?”
“나는 주소 외울 수 있어요. 내가 데리고 가 줄게요.”
씩씩하게 말한 아이가 한 손을 내밀었다. 다섯 손가락을 좍 펼치고도 갓 맺힌 사과보다 작은 손이었다. 여준의 아파트는 유치원에서 차로 5분 거리였다. 제가 무슨 수로 어른을 데리고 거기까지 돌아가겠다는 건지. 사현은 절로 멀어지는 시선을 애써 잡아 둔 채 아이를 지나쳐 먼저 나섰다.
“손 안 잡구 가요?”
눈을 끔벅이며 서 있던 아이가 금방 쪼르르 따라붙었다. 사현은 양 주머니에 손을 단단히 꽂은 채 성의 없이 돌아보았다.
“차 타고 갈 거니까 안 잡아도 돼.”
“아닌데. 아빠가 밖에서는 어른 손을 꼭 잡구 다녀야 된댔는데.”
“…….”
“특히 차도가 있으면 꼭 그래야 한댔는데.”
절대 두 번 다시 이런 짓은 하지 말아야지. 성여준이 뭐라 하든 흔들리지 않을 것이다. 사현은 재차 다짐하며 걸음을 멈췄다. 돌아보지 않은 채 한 손을 뒤로 뻗어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 자그맣고 따스한 손이 덥석 안겨 왔다. 체중을 온통 실어 사현의 손에 매달린 아이가 젖내 나는 얼굴로 히히, 소리 내 웃었다.
“아저씨, 우리 아빠 친구예요?”
“…그래.”
“멋있다아.”
대체 뭐가. 낯가림도 없이 처음 본 사람에게 덥석덥석 안겨 대는 모양이 사현으로서는 황당하기 짝이 없었다. 그 속을 알 리 없는 아이는 지치지도 않고 조잘조잘 떠들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어, 키도 엄청 크구요. 나도 아저씨만큼 클까요?”
“글쎄다….”
“그리구, 어, 까매서 멋있어요. 불꽃전사에요, 블랙이랑 똑같아요.”
사현은 무심코 제 차림새를 내려다보았다. 언제나 그랬듯 검은 정장 차림이었다. 그저 가장 몸에 맞고 편해서 매번 하는 옷차림에 지나지 않았다.
“가린이 이모가요, 키 많이 크려면요, 브로콜리도 먹고 시금치도 먹어야 한댔는데요. 아저씨도 브로콜리랑 시금치요, 많이 먹었어요?”
차는 왜 이리 멀리 세워 뒀는지, 고작 다섯 살짜리가 무슨 말을 이렇게 잘하는지. 사현은 아픈 미간을 꾹 누르고는 조수석 문을 열었다. 아이는 익숙한 듯 냉큼 올라타더니 사현을 향해 말했다.
“벨트 채워 주세요. 저는 손에 힘이 모자라서 어른들 벨트를 못 당겨요.”
“…그래.”
“고맙습니다.”
아이가 두 손을 제 배꼽에 댄 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사현은 말없이 조수석 문을 닫고 운전석으로 향했다. 이제 여준의 아파트로 가서 그가 퇴근할 때까지만 있어 주면 될 일이었다. 그 몇 시간이 벌써부터 하염없이 길게 느껴졌다.
집에 가자마자 재울 수는 없으려나? 애들은 뭘 해야 잠이 들지? 운전대를 쥔 사현이 골똘히 고민에 빠졌다. 아이는 그런 사현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다 물었다.
“아저씨, 내가 주소 불러 줄까요?”
“…….”
“안내도 할 수 있어요. 우리 집은요, 조기 사거리에서 오른손 방향으로 돌면 있거든요.”
너희 집 그 방향 아니야…. 사현은 반박하고 싶은 말을 입 안으로 삼키고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아이는 처음 타 보는 차가 마냥 신기한지 앉은 채 두리번거리느라 정신이 없었다.
“지금 집은요. 전에 살던 집보다 좁은데요. 그래도 난 좋아요. 왜냐면요, 어, 가린이 이모 집이랑 더 가까워서요.”
“…….”
“아저씨 차는 크네요. 아빠 차도 원래는 컸는데, 지금은 작아요.”
“너희 아빠가 내 말을 안 들어서 그래.”
“아저씨 말요? 아저씨가 뭐라고 그랬는데요?”
모르는 화제를 덥석 문 아이의 눈이 과하게 반짝였다. 몇 마디 나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이가 내뱉는 말, 사람의 얼굴을 보고 짓는 표정마다 여준이 묻어 있었다. 사현은 애써 그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아저씨, 근데요, 우리 집 이 방향 아닌 것 같아요.”
“이 방향 맞아….”
“아닌데. 아빠는 반대쪽으로 갔는데.”
“너희 아빠가 잘못 간 거야….”
아닌데, 아닌 것 같은데. 못내 미심쩍은 기색으로 갸웃대던 아이는 멀리 아파트 입구가 보이기 시작하자 눈을 방울처럼 뜬 채 입을 쩍 벌렸다.
“어떻게 여기루 왔어요?”
“너희 아빠랑 달리 제대로 된 길을 알거든.”
“어떻게 온 거지? 신기하다, 신기하다아.”
아이는 그저 되는 대로 지껄일 수 있다면 무슨 말이든 좋은 듯했다. 신나게 목소리를 높여 조잘대는 모양이 갓 태어난 병아리 같았다. 사현은 조심히 주차를 마치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는 사현이 조수석 문을 열고 벨트를 풀어 줄 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었다.
“아저씨, 우리 집 와 본 적 있어요?”
현관으로 쪼르르 달려가며 아이가 물었다. 사현은 대답 없이 차 문부터 잠갔다. 아주 잠깐이었다. 걸음을 멈추고, 차를 돌아본 채로 리모컨의 버튼 하나를 누르는 짧은 순간일 뿐이었다.
“아!”
몇 걸음 앞서간 아이가 갑자기 큰 소리를 냈다. 놀라 돌아본 사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아파트 입구로 향하는 계단 중간에 엎어진 아이의 등이었다. 무심코 발부터 떨어졌다. 덜컥 달려들어 안아 일으키자 잔뜩 놀라 창백해진 얼굴이 딸려 올라왔다. 아이는 사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얼굴을 일그러뜨리더니 곧 으앙, 울음을 터뜨렸다.
“허엉, 무릎, 나 무릎 아파요.”
금방 차오른 눈물이 뚝뚝 방울져 흐르기 시작했다. 사현의 뒷덜미로 식은땀이 배었다. 그는 얼른 아이를 세워 둔 채 몸 이곳저곳을 살폈다. 바짓단을 걷어 올리자 발갛게 물든 무릎이 드러났다.
“…….”
이럴 땐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언뜻 보기에도 굳이 유난을 떨 상처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어린아이니까 우선 병원에 가야 하는 걸까? 사현이 멍하니 굳은 채 말이 없자 아이의 울음소리도 곧 잦아들었다.
“…아저씨?”
아이가 훌쩍이며 사현의 눈치를 살폈다. 사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우리 집에요, 어, 연고랑 반창고 있어요.”
딸꾹질에 섞인 말이 뒤늦게 귀에 들렸다. 어…, 하며 엉거주춤 일어서는 사현을 향해 아이가 두 손을 뻗어 올렸다. 안아 달라는 뜻 같았다. 고민하던 사현은 결국 몸을 낮춰 아이를 안아 들었다. 두 팔로 사현의 목을 꼭 끌어안고 뺨을 비벼 오는 아이는 믿을 수 없을 만큼 가벼웠다.
이렇게 작고 가벼운데 그냥 진작 안아서 갈걸. 그랬다면 넘어지지 않았을 텐데. 묵직한 후회가 바늘처럼 머릿속을 콕콕 찔렀다. 아이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집으로 향하는 내내 사현에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여준은 7시가 조금 지난 후에야 집에 도착했다. 혼자 손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간식까지 야무지게 챙겨 먹은 뒤 텔레비전에 빠져 있던 아이는 현관문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자마자 씩씩하게 달려 나갔다.
“아빠! 아빠, 아빠, 아빠!”
폴짝대며 뛰어 오르는 모양이 어린 강아지 같았다. 여준은 아이를 안아 들고 여러 번 입을 맞추더니 사현을 향해 살짝 눈짓했다.
“미안해. 힘들었지?”
“…….”
“…왜? 무슨 일 있었어?”
사현의 심장이 덜컹했던 일이 무색하게도 아이는 팔팔했다. 여준은 아이를 내려놓고 넥타이를 풀어내며 재차 물었다.
“표정이 왜 그래? 괜찮아?”
“넘어졌어요.”
어렵게 뱉은 말에 여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어? 넘어졌어? 왜? 언제?”
“아까 집에 오다가….”
“그래서? 다쳤어? 어디 봐, 괜찮아?”
당황한 쪽은 사현이었다. 훌쩍 다가온 여준이 사현의 팔을 붙들고 몸 이곳저곳을 살피기 시작했던 것이다. 사현은 뒤늦게 그가 오해하고 있음을 깨닫고 얼른 손을 내저었다.
“…나 말고요.”
“응? 아…. 뭐야, 지오가 넘어졌다고?”
“…….”
“난 또 뭐라고. 깜짝 놀랐네.”
별것도 아니라는 듯 웃은 여준이 아이를 향해 몸을 낮춰 물었다.
“지오, 넘어졌어? 그래서 막 아가처럼 울었어?”
“아니? 나 안 넘어졌는데? 안 울었는데?”
뻔뻔스레 나오는 대답에 기가 막혔다. 사현이 눈썹을 찡그리자 여준은 큭큭대며 웃었다.
“애들 원래 그래. 툭하면 넘어지고 기억도 못 해.”
“…….”
“머리 부딪친 거 아니면 괜찮아. 걱정하지 마.”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아이를 살피는 눈은 섬세하기 짝이 없었다. 옅게 푸른 멍이 잡힌 무릎을 한 번 쓸어 준 여준이 곧 요놈, 하며 아이를 붙들고 옆구리며 겨드랑이를 간질였다. 아이가 꺅 소리를 지르며 자지러지게 웃었다. 사현은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다 지나가듯 중얼거렸다.
“열나는지 살펴보라던데요.”
“지오?”
“네, 유치원에서.”
말을 마치자마자 여준이 아이의 이마에 제 이마를 가져다 대었다. 아이는 익숙한지 얌전히 이마를 댄 채 방실방실 웃었다.
“괜찮아. 열 없어.”
여준은 쪽, 소리 나게 아이에게 입을 맞추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이는 여준의 손에서 벗어나자마자 사현을 향해 쪼르르 달려가 매달렸다. 사현이 당황할 틈도 없이 여준이 금방 아이의 겨드랑이에 손을 끼워 그에게서 떼어 냈다.
“어허, 삼촌 힘들게 하지 마.”
“이잉.”
“착하지? 방에 가서 그림책 골라. 혼자 잘 준비 다 하면 아빠가 요구르트에 초코 타 줄게.”
그 말에 아이의 얼굴에 금방 화색이 돌았다. 여준은 열심히 제 방으로 달려간 아이가 문 너머로 쏙 사라지자마자 사현의 허리에 손을 감고 어깨로 얼굴을 묻었다.
“…….”
목덜미에 이마를 꾹 누른 뒤 들어 올린 얼굴이 미안한 빛으로 가득했다. 난처한 듯 끝이 푹 가라앉은 눈썹, 물비늘 같은 빛이 어린 눈동자, 웃음기 없이 조용해진 입술이 하나하나 사랑스러웠다. 사현은 그를 만나면 쏘아 주려던 말들, 두 번 다시 이런 부탁은 들어주지 않겠다는 선언 하나하나를 고이 접어 뱃속으로 삼켰다.
“미안해. 이제 이런 일 없을 거야.”
“…됐어요.”
“지오 넘어져서 놀랐어? 엄청 요란하게 울었지?”
“됐다니까…. 별일도 아니었는데.”
“그래도 너 후회는 안 할걸. 내가 준비한 선물 보면.”
사현이 한풀 꺾인 것을 확인한 여준의 말끝에 서서히 장난기가 묻어났다. 여준은 아이의 방문을 한 번 살피고는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사현에게 내밀었다.
“뭔데요…. 당신 핸드폰 가지라고요?”
“아니, 화면을 보라구.”
성화에 못 이긴 척 핸드폰을 받아 들었다. 내려다보니 항공사 애플리케이션 화면이 떠 있었다. 이미 결제가 끝난 항공권의 탑승자 정보를 입력하는 페이지였다.
“…….”
날짜는 딱 2주 뒤였다. 고개를 들자마자 눈이 마주친 여준이 히, 소리를 내며 웃었다.
“내가 이 연차 쓰려고 얼마나 불나게 일했는지 알면 너 감동해서 눈물 흘릴 거야.”
“…….”
“3박 5일 일정이고, 리조트도 잡아 놨어. 오늘도 이것 때문에 도저히 회사 나올 수가 없었어. 휴가 가기 전까지는 어떻게든 자리 지키고 있어야 면이 서서.”
“…….”
“아, 너 여권 유효 기간 괜찮지? 혹시 출국 금지 걸려 있다거나 그런 거 아니지?”
그럼 안 돼, 항공권도 리조트도 이제 와서 취소하려면 위약금 엄청나게 물어야 돼. 이어지는 설명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현은 그저 얼떨떨한 얼굴로 금방 불이 꺼진 핸드폰 화면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여행 가자. 아주 먼 데로.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으로. 여준은 분명 그렇게 약속했지만, 이토록 빨리 지킬 줄은 몰랐다. 축 가라앉은 사현이 아무 말이 없자 여준이 뒤늦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왜? 별로야? 푸껫 싫어? 나도 좀 더 멀리 가고 싶었는데 그랬다간 이동하다가 휴가 다 쓸 것 같아서….”
“꿈이….”
“응?”
“아닌가 싶어서요.”
아무도 우리를 모르는 곳. 누구의 방해도 없는 장소. 한동안은 꿈에서나 볼 수 있을 거라 여겼다. 여준은 쓰게 웃더니 사현의 어깨를 툭 쳤다.
“이깟 게 뭐라고 꿈이겠어. 연차 모아서 쓰는 거 어렵지 않아.”
“둘만 가는 거죠?”
“말이라고 해? 거기 나와 있잖아. 탑승객 총 2인 중 1인.”
“가면…. 둘이서만 있는 거죠?”
사현은 혼자만 좋은 선물을 받은 어린아이처럼 소리 죽여 물었다. 이런 걸 정말 나 혼자 가져도 되는 건가요? 아무에게도 나눠 주지 않아도 되나요? 여준은 곧 그가 정말 묻고 싶은 말이 뭔지 눈치챘다.
당신을 내가 독점해도 되는 거죠?
“응.”
순서를 기다리거나 참을 필요 없이?
“맞아.”
사현의 입가에 느릿한 안도가 번졌다. 여준은 안타까운 마음을 입 밖으로 내는 대신 그의 팔목을 감싸 쥐고 입 맞췄다.
“미안해.”
“또 뭐가요.”
“항상, 그냥 다.”
“…알았으니까 입술 비비지 말아요.”
잡힌 손으로 여준의 뺨을 감싼 사현이 그의 입술을 약하게 쥐었다 놓았다. 여준은 배시시 웃고는 사현의 손바닥에 입가를 묻은 채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맨날 기다리기만 하니까 지치지?”
딱딱하고 거친 손에서는 언제나 그렇듯 약한 향수 냄새가 났다. 그 향을 입가에 머금은 여준이 가만히 사현을 올려다보았다. 사현은 한참 후에야 그 얼굴에 대고 한숨 쉬듯 속삭였다.
“난 원래 기다리는 거 제일 잘해요….”
여준은 결국 아하하, 소리 내 웃음을 터뜨렸다.
“애는 어쩌고요?”
아이는 그림책을 어지간히 신중하게 고르는지 한참 소식이 없었다. 조용한 아이의 방문을 곁눈질한 사현이 묻자 여준은 의기양양한 미소를 띠었다.
“가람 형이랑 가린이가 왜 하필 오늘 여행 가고 없는 것 같아?”
“…….”
“내가 풀세트로 끊어 줬어. 지금쯤 특급 호텔 스파에서 마사지 받고 있을걸.”
이 여행 하나를 위해 내가 얼마나 준비했는지, 돈이 얼마나 깨졌는지 알면 너 감동해서 눈물 흘린다니까. 신이 나서 흥얼대는 여준을 보며 사현이 천천히 고개를 기울였다.
“…오늘 못 잘 것 같아요.”
그때 방문이 벌컥 열리더니 그림책을 한 아름 껴안은 아이가 나타났다.
“아빠! 나 이거!”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거실을 가득 울렸다. 여준은 몸을 돌려 아이에게 향하며 가볍게 핀잔을 주었다.
“하나만 고르라니까, 또 말 안 듣지.”
“잉, 그럼 두 개만.”
“어디 보자, 그래. 두 개 골라.”
그 말에 아이가 그림책을 우르르 내려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틈에 다시 사현과 눈을 맞춘 여준이 입술을 벙긋거렸다. 소리는 없었지만 사현은 어렵지 않게 그 말을 읽을 수 있었다.
‘나도 그래.’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흘렀다. 여준은 틈이 날 때마다 예약해 놓은 리조트며 투어 정보 따위를 메시지로 보내왔다. 덕분에 매일 아침 눈을 떠 메시지 함을 열어 보는 것만으로 꿈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었다.
“불안한데….”
무심코 흐른 말이 좁은 사무실 바닥에 툭 떨어져 굴렀다. 쪽새는 고개를 들긴 했지만 반응해도 좋을지 갈피를 잡지 못한 표정이었다.
“뭐가 말입니까?”
불행히도 이미 솟은 호기심을 이기지는 못한 듯했다. 사현은 그대로 입을 다물까 고민하다 의자에 푹 기대앉았다.
“너 운수 좋은 날이라는 소설 아냐?”
“성질 더러운 틀딱이 아픈 마누라 패면서 지가 사 온 설렁탕 왜 안 처먹냐고 깽판 치는 그거요?”
“…….”
“…왜 그러고 보십니까? 아니에요?”
“아니, 너 같은 새끼도 알 정도면 한국인 중에 모르는 인간이 없겠다 싶어서.”
꿈과 희망만 가지고 자라나도 모자랄 아이들에게 분수에 넘치는 운은 반드시 그에 비례하는 불운을 동반한다는 미신적 믿음을 심어 준 소설이 지금 이 순간 사현의 머릿속에 강렬히 맴돌고 있었다. 이렇게 잘 풀릴 리가 없다. 하다못해 맡은 일이 뭔가 틀어져서 머리라도 깼어야 계산이 맞다. 여행 날짜는 다가오고, 의뢰인들은 재깍재깍 입금하고, 날은 따뜻하고 여준은 기분이 좋고 아이가 아프거나 다쳤다는 소식도 없다.
대체 얼마나 큰 불운이 닥치려고 이러냐는 말이지. 이러다 여행 당일에 뭐라도 터지는 게 아닐까. 비행기에 타기 직전에 여준의 회사에서 전화가 온다거나 아이가 열이 들끓어 응급실에 실려 간다거나….
‘이깟 게 뭐라고 꿈이겠어.’
여준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사흘이 넘는 시간을 온전히 둘이서만 보내는 건 처음이었다. 외국에 가 본 것도 거의 도피를 위해서였다. 주로 배를 타고 열악한 방에서 몇 날 며칠 버텨 가며 건너가 지저분한 아파트를 전전하며 지냈다. 반면 여준이 예약한 항공편은 푸껫 직항 비즈니스 클래스였고 리조트는 6성급 풀 빌라였다. 사현은 이마를 괸 채 짓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이번 주 내로 거하게 액땜할 만한 건수 좀 없냐?”
“아니, 뭐 그런 걸 일부러 찾아서 하려고 그러세요…. 진짜 무슨 일 있으십니까?”
“있으면 올려 보내.”
간단히 명령한 사현이 핸드폰을 쥐고 일어섰다. 쪽새는 그가 복도로 나서는 모양을 보며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 응, 사현아.
여준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사현은 복도 벽에 기대선 채 긴 한숨을 쉬었다. 평소엔 거의 연결되지 않는 시간대였다. 이마저도 불길한 징조로 느껴졌다.
“…별일 없어요?”
- 별일?
“그냥요, 아무 일이나.”
- 또 뭐가 궁금해서 이러지? 아무 일 없어. 왜, 누가 나 바람이라도 핀대?
장난스러운 반문에 사현은 입을 벌린 채 굳고 말았다. 성여준의 바람? 그거야말로 이 넘치는 행운에 종지부를 찍기에 너무나 적절한 불운이다.
“죽일 거예요….”
- 어우, 무서워.
“진심이에요.”
- 나? 나 죽인다고?
“선배만 빼고 누구든.”
- …알았으니까 이쯤 하고, 왜 그래? 악몽 꾸다 깬 똥강아지처럼.
가까이 있었다면 뺨을 쓰다듬고 머리를 매만져 주었을 테지. 그만큼 부드럽게 녹아내리는 목소리였다.
- 말을 안 하면 뭐가 문젠지 모르잖아.
“아직은 아무 문제 없어요.”
- 조만간 생겨?
“…모르겠어요.”
안 그러길 바라요. 후에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좋으니까, 당장은 이 행운이 무사히 왔으면 좋겠어요. 사현이 말없이 눈을 감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잠시 침묵하던 여준이 이내 다정한 어조로 물었다.
- 이따 잠깐 사무실 들를까? 오늘 정시 퇴근할 수 있는데.
“…….”
- 어떻게 할까? 얼른 대답해. 나 칼퇴하려면 당장 들어가서 열심히 일하는 척 해야 돼.
“…끊어요, 그럼.”
- 아, 진짜 귀여워 죽겠어.
전파를 타고 온 웃음소리가 귀를 간질였다. 사현은 전화가 끊어진 뒤에도 한참을 그 자리에 선 채 한 손으로 귀를 막고 있었다. 되도록 오랫동안 담아 두고 싶었다.
쪽새를 내쫓다시피 퇴근시키고 서류를 뒤적였지만 무엇 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수상쩍은 심부름센터에 찾아오는 것은 하나같이 뻔한 사연으로 뒤가 구린 인간들뿐이다. 배우자가 바람피운 증거를 잡아 달라는 의뢰는 개중 건강한 요청에 속했다. 쪽새가 찍어 나른 사진들을 인화 폼에 걸어 놓은 사현이 담배 한 대를 빼물었다. 동시에 머릿속으로 청량한 목소리가 들어찼다.
‘끊으라고는 안 하겠는데 조금이라도 줄여 봐.’
라이터를 찾던 손이 멈칫했다. 사현은 결국 빈 담배를 문 채 의자 등받이로 몸을 넘겼다. 끼익, 낡은 스프링이 위태로운 소리를 냈다. 슬쩍 내려다본 책상 위 재떨이가 꽁초로 빼곡했다. 여준이 도착하기 전에 치우고 환기를 해야겠다고 다짐한 순간 똑똑,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
문 너머 나타난 여준은 언제나 그렇듯 반듯한 정장에 가벼운 코트 차림이었다. 사현은 입에는 담배를 물고, 한 손은 재떨이에 뻗은 그대로 그와 눈을 맞췄다. 인사를 건네려 벌어지던 여준의 입술이 이내 툭 다물리더니 묘한 미소가 번졌다. 딱 걸렸어, 하는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그새를 못 참아, 그새를.”
“…불 안 붙였잖아요.”
“말대답해?”
“잘못했습니다.”
순순히 사죄한 사현이 입술에서 담배를 빼냈다. 여준은 등 뒤로 문을 닫고는 사무실을 가로질러 사현의 책상까지 다가왔다. 가방을 내려놓고 한 손을 짚는 모양이 학생의 비행을 발견한 초임 교사 같았다. 사현은 그가 미간을 찌푸리기 전에 얼른 선수를 쳤다.
“불안해서 그래요.”
“뭐가?”
입을 다문 사현이 옆머리를 긁적였다. 여준은 몸을 낮춰 그를 살피다 사현을 마주 본 채 책상에 걸터앉았다.
“말 안 하면 모른다니까.”
착하게 고개를 드는 사현의 눈동자는 호수에 가라앉은 유리병처럼 보였다. 여준은 엄지 끝으로 그의 입술을 쓸다 살짝 입 맞췄다. 당장 감겨 오려는 혀끝을 피해 얼른 얼굴을 떼어 내자 아쉬움 가득한 눈빛이 따라붙었다.
“너 분리 불안증 걸린 강아지 같아.”
여준이 사현의 눈가를 쓸어 내며 씩 웃었다. 사현은 말없이 여준의 허리를 힘주어 끌어안았다.
“알면 안아 줘요.”
그대로 상체가 밀착되며 입술이 맞물렸다. 여준은 사현이 이끄는 대로 그의 무릎에 앉아 발끝으로 바닥을 디뎠다. 재킷을 열고 파고드는 손끝이 단단하고 가칠했다.
“흣….”
판판한 가슴을 거슬러 오른 손이 셔츠 자락을 잡아 올렸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사현의 팔을 잡아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 벗기지 마.”
“…왜요.”
“여기 네 사무실이고 문도 안 잠갔는데…. 키스만, 아.”
지극히 상식적인 만류에도 아랑곳없이 사현이 여준의 몸을 깊이 끌어당겼다. 다리 사이로 빠듯하게 느껴지는 압박감에 여준이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안 벗기고 만지는 건 괜찮아요?”
“…자꾸 이럴래?”
“난 상관없어요.”
사현은 쉽게 대답하고는 여준의 셔츠 자락을 판판히 잡아 내렸다. 이어 따뜻한 손이 얇은 면 위를 넓게 덮어 문지르기 시작했다. 날개뼈부터 쓸어 내 늑골을 타고 건너오더니 돌기 주위를 약 올리듯 덧그린다. 여준은 간지러움을 참지 못하고 응, 하며 허리를 들썩였다. 그때마다 다리 사이로 자리 잡은 살덩이가 점차 단단해지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여기선 안, 된다니까….”
“아무도 안 와요.”
“진짜 안 돼, 너 한 번만 하고 끝낼 것도 아니잖아….”
“한 번으로 끝내면 선배가 서운해하잖아요.”
“…덮어씌우는 거 봐. 어이가 없어서.”
“시험해 볼까요? 선배가 조르는지 아닌지?”
사현이 여준의 목덜미로 이를 세웠다. 여준은 얼른 고개를 뒤로 빼며 고민에 빠졌다. 이러다간 여준 자신의 자제력이 먼저 떨어질 것이 뻔했다. 그는 궁여지책으로 사현의 얼굴을 쥐고 진지하게 물었다.
“입으로 해 줄 테니까 좀 참으면 안 될까?”
“…….”
“봐주라. 오늘 진짜 피곤해.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다간 내일 회사에서 나 죽어.”
다정한 애원에 짧은 입맞춤을 곁들이자 사현의 얼굴에 금방 치열한 갈등이 떠올랐다. 피곤하다는 사람을 쉬게 해 줘야 한다는 이성과 귀에 꽂힌 달콤한 유혹 사이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표정이었다. 여준은 사현의 고민이 길어지지 않도록 잽싸게 그의 무릎 사이로 내려앉았다.
“…선배.”
사현이 뒤늦게 여준의 어깨로 손을 뻗었다.
“장난이었어요. 피곤하면 그만둬요.”
여준은 아랑곳없이 눈앞의 버클을 풀고 지퍼를 끌어 내렸다. 검은 브리프 안을 그득히 채운 살덩이가 팽팽히 부푼 모양에 절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볼 때마다 신기해.”
“…뭐가요.”
“이게 어떻게 들어가는지.”
뭐라 말하려던 사현이 입을 다물고 이마를 짚었다. 여준은 브리프 위로 입술을 대고 살금살금 핥으며 양손으로 밴드를 쥐었다. 하아, 느릿하게 탄식한 사현이 여준의 뒷머리를 한 손으로 감쌌다. 동그란 머리통에 맞춤하게 덮인 손가락 사이로 부드러운 머리카락이 흩어져 살랑거렸다.
“한다…?”
살짝 내린 밴드 틈으로 꼿꼿이 선 기둥이 툭 튀어나왔다. 여준은 두 손으로 그것을 조심스레 쥔 채 끄트머리를 슬쩍 물었다. 입술을 오므려 빨아들이며 혀로 핥아 낼 때마다 비릿한 살냄새가 났다. 빈틈없이 몸을 겹치고 체액을 내보내는 순간이면 맡을 수 있는 특유의 체향이었다.
“선….”
서서히 받아들인 살덩이가 입 안을 빈틈없이 채우며 들어왔다. 입천장과 혀가 위아래로 짓눌리는 느낌에 여준이 다급히 헐떡였다. 어디까지 삼킬 수 있을까, 고민할 틈도 없이 금방 귀두 끝이 목젖을 스쳤다.
“…으응.”
잔뜩 고인 침을 삼키느라 여준의 목울대가 출렁였다. 입안이 수축되자 뒷머리를 감싼 사현의 손에도 힘이 들어간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뜨거운 살덩이는 입 안의 가장 연한 곳을 툭툭 찌르며 더 깊고 은밀한 구멍을 열어 주길 요구하고 있었다.
“으욱, 응, 으응…!”
사현의 허벅지를 짚은 두 손끝이 바짝 일어섰다. 잠시 물러났다 삼킬 때마다 단단한 살덩이는 점점 더 안쪽을 찌르고 들어왔다. 꾹 감긴 여준의 눈가가 바르르 떨렸다. 숨이 막혀 몸을 떼어 내려 하면 뒤통수를 감싼 손에 도로 짓눌렸다. 채 삼키지 못한 타액이 방울져 떨어졌다.
“욱, 흐윽, 읏….”
마침내 목구멍까지 꽉 채워 닿은 살덩이에 여준이 젖은 눈을 들어 올렸다. 눈이 마주치는가 싶었지만 잠깐이었다. 사현은 아예 두 손으로 여준의 머리를 쥐고 제 다리 사이로 꽉 눌러 버렸다.
“……!”
허공에 뜬 여준의 손이 짧게 경련했다. 동시에 사현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고개를 들어 올린 여준이 하아, 다급한 숨을 내쉬었다. 숨구멍을 막을 기세로 파고들다가 한순간 쑥 빠져나간 자리가 참을 수 없이 간지러웠다. 아쉬움을 느낄 새는 없었다. 옆머리를 단단히 잡은 손이 또 다시 여준을 짓누르듯 끌어당겼기 때문이다.
“으욱, 아….”
제 의지인지, 사현의 의지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끝없이 삼키다가 배 속까지 꿰뚫릴까 두려웠다. 여준은 다급히 입 안의 살덩이를 핥고 조이면서도 혹시 너무 빨리 끝나 버릴까 조바심을 냈다. 두려움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과 목 안쪽 어딘가의 갈증이 해소되길 바라는 마음이 어느 한쪽으로 쉬이 기울어지지 않았다.
그때 사현의 손끝이 바짝 일어섰다. 이어 머리를 미는 힘이 느껴졌다. 여준은 반사적으로 목에 힘을 주고 버텼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입 안으로 미지근하고 진득한 액체가 덜컥 차올랐다.
“…….”
코끝이 찡하도록 강한 향이 났다. 콜록, 기침하며 고개를 숙인 여준에게 사현이 다급히 두 손을 뻗었다.
“뭐 하는 거예요? 그걸 왜 버텨요?”
“…그러게, 내가 왜 그랬지….”
여준이 코를 훌쩍이며 입가를 닦아 냈다. 흘러내린 눈물이며 침과 정액 따위로 온 얼굴이 엉망이었다. 하아, 들으란 듯 한숨 쉬며 제 머리를 흐트러뜨리던 사현의 시선이 문득 여준의 다리 사이로 향했다.
“쌌어요?”
“어?”
여준이 흠칫 놀라 시선을 내렸다. 뻐근하도록 부풀었던 앞이 잠잠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제야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축축한 액체가 느껴졌다. 입을 가린 채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여준의 뺨이 서서히 붉게 타오르기 시작했다. 사현은 그 모습을 보며 기가 막히다는 듯 픽 웃었다.
“어디 봐요.”
“보, 보긴 뭘….”
“좀 너무한 거 아니에요? 어떻게 남자 좆을 입으로 물고 빨면서 혼자 세운 것도 모자라 질질 싸기까지 해요?”
“아, 싫어, 건드리지….”
앉은 채 엉덩이를 뒤로 밀어 봤지만 금방 책상 서랍에 가로막히고 말았다. 여유롭게 따라붙은 사현의 손이 여준의 바지 앞섶을 하나씩 열어 젖혔다.
“허….”
지퍼를 열자마자 잔뜩 젖은 브리프가 드러났다. 사현은 짓궂은 손짓으로 밴드 끝을 쥐어 죽 끌어당겼다. 여준이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움찔했다. 물렁하게 늘어진 살덩이 주변이 온통 정액으로 흥건했다.
“선배는 항상 옷을 버리는 게 다 내 탓이라고 하지만….”
“…으.”
“눈이 있으면 봐요. 이런 것까지 내 탓이에요? 난 손끝 하나 안 댔는데.”
꾹 내려앉은 여준의 턱 끝이 가늘게 떨렸다. 붉게 달아오른 뺨이 긴 숨에 둥글게 부풀었다 가라앉길 반복했다.
“너…, 때문이잖아.”
여준이 짓눌린 목소리를 내며 사현의 팔목을 쥐어 밀어냈다. 사현은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 올렸다.
“그런 식으로 움직이니까, 상상이 돼서….”
“상상? 내 좆을 입으로 삼키면서 이렇게 될 정도의 상상이 대체 뭔데요? 구체적으로 말해 봐요.”
“…….”
“어서요. 말 안 해 주면 궁금해서 잠도 못 잘 것 같은데.”
“…못됐어, 불쌍한 척 사람 살살 꼬여 내더니 이럴 줄 알았어….”
여준이 벌게진 눈자위로 사현을 흘겨보았다. 사현은 그제야 슬쩍 웃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됐어, 아깝게. 그냥 휴지로….”
“가만히 있어요.”
만류하는 여준의 손을 부드럽게 잡아 낸 사현이 손가락 사이사이 깍지를 꼈다. 가슴을 휘돌던 묵직한 불안과 찜찜함은 어느새 잊힌 뒤였다. 희고 마른 손가락 마디마다 입술을 누르는 사현의 머리꼭지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여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싫은 건 아니지?”
“뭐가요?”
“내가 이래서….”
속삭이는 말끝이 낮게 갈라졌다. 사현은 여준의 손등 마디 위로 입술을 누르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애인이 밝히는 거 싫어할 사람도 있어요?”
그 말에 여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지나치게 익숙하고, 진부하고, 그래서 더 감격스러운 호칭이었다. 귀까지 뜨겁게 달아오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도로 얼굴을 내린 사현이 여준의 손등에 입술을 댄 채 웅얼거렸다.
“밝히는 데 비해 너무 몸을 사려서 그게 문제지.”
“…그건 완벽하게 네 탓이야. 다른 건 다 네 탓 아니어도 그건 진짜 완전히 네 탓이야. 너도 인정해야 돼. 사람을 오죽 진이 빠지게 만들어야-.”
“알아요. 내 탓이에요. 선배가 내 탓이라 하는 거, 아니라고 하는 거, 뭐 하나 빠짐없이 전부 내 탓 맞아요.”
쪽, 쪽, 입술이 살갗에 가볍게 맞붙었다 떨어지는 소리가 간지러웠다. 여준은 붉어진 얼굴을 한껏 감추며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래도 여행 가면….”
중얼중얼 내뱉은 말끝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흐리게 뭉그러졌다. 사현의 입술에 느릿한 미소가 걸렸다. 여준은 잠시 넋을 잃고 그의 검은 눈동자를 들여다보았다. 어두운 밤, 반딧불이가 가득 달라붙은 숲이 꼭 이런 빛을 띠고 있을 것이다.
“…섬 투어 취소할까?”
“좋은 생각이네요.”
단숨에 대답한 사현이 여준의 눈가에 입 맞췄다. 콧잔등과 입술, 턱과 목덜미로 이어지는 키스에 점차 뒤로 넘어가던 시야에 문득 늦은 시간을 가리키는 탁상시계가 걸렸다. 집에 가야 하는데. 실낱같은 이성을 혀끝으로 불러오려 할 때마다 기다렸다는 듯 깊은 입맞춤이 이어졌다. 여준은 결국 제 몸 위로 올라타는 사현의 목덜미에 팔을 감으며 합리화를 시작했다. 한 번쯤은 괜찮지 않을까? 딱 한 번이니까.
***
“선임님, 혹시 휴가 어디로 가신댔죠?”
화면에 집중하던 여준이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파티션 위로 올라와 있던 설 주임이 더 놀란 듯 숨을 삼켰다. 여준은 아, 하며 얼른 표정을 풀고 밝은 목소리를 냈다.
“태국에요. 왜요?”
“…아, 그럼 저…. 괜찮으시면 이거 쓰실래요?”
설 주임이 조심스레 내민 것은 자잘한 태국 지폐 여러 장이었다. 여준은 두 눈을 둥글게 뜬 채 지폐와 설 주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는 머쓱한 기색으로 묻지 않은 설명을 주절주절 덧붙이기 시작했다.
“한국 돈으로는 3만 원 좀 안 되는데요. 제가 작년에 휴가 다녀오면서 오후 출근해서 책상 서랍에 넣어 놓고 잊어버렸었거든요. 잔돈이라 도착해서 바로 쓰시기 편할 거예요.”
“그러네, 고마워요. 그럼 오늘 환율로 계산해서 돈….”
“아니, 아니에요. 그냥 나중에 점심이나 한 끼 사 주세요. 둬 봤자 저는 두 번 쓸 일도 없는 건데요.”
“왜요? 태국 다신 안 가려고요? 별로였어요?”
별생각 없이 되물은 말에 설 주임의 표정이 금방 어두워졌다. 시선 둘 곳을 찾지 못 한 채 할 말을 고르는 그를 보던 여준의 고개가 갸웃 기울어졌다.
“말하기 곤란하면 괜찮아요.”
“그, 아뇨, 그런 게 아니라…. 태국은 좋았어요. 근데 같이 간 일행이 태국 음식에 적응을 못해서요. 향신료 때문에 도저히 못 먹겠다고.”
“아….”
“그것도 이틀째 돼서 알았어요. 제가 너무 잘 먹어서 말을 못 했다고 하더라고요.”
대화를 이어 가던 여준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남았다. 같이 간 친구가 음식에 적응을 못 했다고 보통 그 여행지를 두 번 다시 안 갈 결심을 하나? 의아했으나 같은 팀이 된 처지에 조금 더 친해져 보려는 제스처라면 구태여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그래요. 선물 사 올게요. 다녀와서 점심도 맛있는 거 먹어요.”
“네, 오늘 반차 내고 가시는 거죠?”
“그러려고요. 마침 직항 스케줄이 저녁 비행기밖에 없길래.”
“그때는 비 그쳤으면 좋겠네요.”
지나가듯 덧붙인 걱정 어린 말에 여준의 시선이 문득 창밖을 향했다. 아침부터 날이 안 좋더라니 부슬부슬 안개 같은 봄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가 거세어질 기미는 없지만 조금 걱정스러운 것도 사실이었다.
“그치겠죠. 안 그쳐도 뭐, 운항에 지장 줄 정도의 비는 아니니까….”
“네, 그런 것 같아요.”
“아무튼 이거 고마워요, 설우 씨.”
지폐를 지갑에 챙겨 넣은 여준이 씩 웃었다. 설 주임도 그제야 웃고 자리로 돌아갔다. 순발력은 좀 떨어지지만 끈기 있고 차분한 사람이라 가르쳐 가며 일하기엔 편했다. 근무 시간 내내 빈둥거리다 아무것도 모르는 후배에게 일을 몰아넣고 퇴근하는 주제에 회식 자리만 가면 세상 제일가는 성실파 샐러리맨으로 변신하는 인간들을 오래 겪다 보니 이만하면 감지덕지하게 여겨졌다. 그런 후배의 부담을 최대한 덜어 줄 생각으로 다시 화면에 집중하는데 이번에는 윤 책임의 얼굴이 쑥 올라왔다.
“성 선임, 우리 팀 선물 뭐 사 올 거야?”
“호랑이파스로 통일입니다.”
“그러지 말고 나는 이것 좀 사다 주라. 응? 방콕 면세점에서 파는 스파 크림인데 두 개만. 돈 줄게.”
“비행기 푸껫에서 타는데요.”
“푸껫? 푸껫 가는 거였어? 어우 세상에, 나 부러워서 일 못 해. 나도 데려가.”
파티션에 이마를 내리찍다시피 붙인 윤 책임이 한참 우는 소리를 냈다. 여준은 그녀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다.
“푸껫 진짜 좋다던데. 천국이라던데. 나는 이렇게 개같이 벌어서 천국도 못 가고….”
“언젠 백화점이 책임님의 천국이라면서요.”
“사람이 꼭 한 길로만 극락왕생을 꿈꾸리란 법은 없어.”
“…메신저로 제품 사진이랑 브랜드 이름 보내 주세요. 있으면 사다 드릴게요.”
원하는 대답을 얻어 낸 윤 책임이 흐흐, 웃으며 자리로 돌아갔다. 그사이 계산기는 여준의 수식이 오차 없이 완벽한 그림을 그렸다고 확인해 주었다. 좋아, 경쾌하게 마우스를 놓은 여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 퇴근합니다.”
“안 돼!”
“어딜 가, 못 가!”
“날 데려가라!”
곳곳에서 부러움 섞인 원성이 터졌다. 여준은 들은 체도 않고 능숙한 손길로 짐을 챙겼다.
“여준 씨 얼굴 핀 거 보게, 누가 여권 좀 뺏어 봐.”
“그러지 마세요. 제가 여기서 주저앉아 엉엉 우는 꼴 보고 싶지 않으시면.”
“저 그거 좀 보고 싶습니다.”
장난스러운 손길이 브리프케이스로 뻗쳐 왔다. 여준은 흥, 코웃음을 치며 가방을 끌어안고 사무실을 빠져나왔다. 차 트렁크에는 밤새도록 챙긴 짐이, 뒷좌석에는 편한 옷과 운동화, 크로스백이 있었다. 멀리 떠날 시간이었다.
차에서 옷을 갈아입고 곧장 사현의 사무실로 향했다. N동에 도착했을 땐 빗줄기가 조금 굵어져 있었다. 전화를 하자마자 내려온 사현은 언제나 그렇듯 검은 정장 차림에 보스턴백 하나를 덜렁 메고 있었다. 여준은 조수석 문을 열어 주며 눈을 휘둥그레 떴다.
“너 짐이 그게 다야?”
트렁크에 실어 놓은 자신의 거대한 캐리어백이 생각나 민망한 기분으로 던진 질문에도 사현은 반응이 없었다. 경직된 얼굴로 여준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왜 그래?”
사현은 그제야 한숨을 푹 내쉬고는 여준을 향해 손을 까딱였다.
“운전 내가 할게요.”
“응? 괜찮은데….”
뒷말은 듣지도 않고 뒷좌석에 보스턴백을 던져 넣은 사현이 다짜고짜 운전석 문을 열었다. 얼떨결에 조수석으로 옮겨 타며 여준은 저도 모르게 그의 눈치를 살폈다. 옆모습이 유난히 날카로워 보였다.
“무슨 일 있어?”
“올 게 왔구나 싶어서요.”
“응…?”
“너무 잘 풀린다 했지.”
낮게 읊조린 사현이 능숙하게 차를 출발시켰다. 여준은 의아함에 두 눈을 껌뻑이며 사현과 창밖을 번갈아 보았다. 안개가 끼기 시작해 시야가 좋지 않았다.
“왜 그러는데? 무슨 문제 있어?”
“뉴스 나오던데요. 영종 대교에 안개 껴서 5중 추돌 사고 났다고.”
“어? 진짜?”
“서울 방향이라고는 하는데 꽤 위험한 상탠가 봐요.”
신호에 걸려 차를 세우자마자 사현이 상향등과 안개등을 있는 대로 올렸다 도로 껐다. 여준은 급히 핸드폰으로 인터넷 뉴스를 뒤적이다 멈칫하고 물었다.
“…그래서 운전 네가 한다고 한 거야? 내 운전은 불안해서?”
“선배 방향치잖아요.”
“뭐? 누가 그래? 아닌데?”
“당신 아들이 그러던데요. 유치원에서 집으로 가는데 여기서 오른쪽으로 돌더라고.”
“…….”
핸드폰을 쥐고 있던 여준의 손끝이 살짝 굳었다.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고 나서야 아이를 처음 유치원에 데리고 갔던 날의 기억이 되살아났다.
“…그거는, 초행길이라 내가 좌회전할 사거리를 착각해서 차선을 잘못 타 가지고 어쩔 수 없이…. 아니, 정말 딱 한 번이었는데?”
“쪼끄만 게 나더러 길 잘못 들었다고 어찌나 훈수를 두는지. 어디 사는 성여준이 애 태우고 얼마나 헤매고 다녔으면.”
“아니, 한 번 그랬다니까? 나 방향치 아냐, 길치도 아냐!”
“알았어요. 정신 사나우니까 좀 조용히 해요.”
쉽게 대답한 사현이 여준의 뒷머리를 감싸 쓰다듬었다. 여준은 못마땅한 기색으로 입을 다문 채 다시 핸드폰 화면으로 눈을 돌렸다. 20분 전 속보로 추돌 사고 뉴스가 떠 있었다. 서행 중에 일어난 사고라 다행히 사망자나 심각한 부상자는 없지만 서울 방향 도로가 반 이상 통제된 상태였다.
“이래 갖고 비행기 뜨려나? 빗발이 약해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무심코 내뱉은 말에 뒷머리에 닿아 있던 사현의 손이 힘껏 굳어졌다. 놀라 돌아보니 전방만 뚫어져라 바라보는 옆얼굴이 싸늘했다. 여준은 그제야 아하, 하며 짓궂은 미소를 띠었다.
“여행 못 갈까 봐 불안했어?”
“…….”
“학교 다닐 때 너 같은 애 하나씩 있었는데. 수학여행 너무 기대하다가 당일에 몸살 나는 애들.”
“비행기 결항되면 어떻게 할 거예요?”
놀리는 말에도 사현은 끄떡없었다. 차분히 되묻는 말에 여준이 음, 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어쩔까…. 항공권이야 환불될 테지만 리조트 진짜 비쌌는데.”
“…….”
“뭐, 국제선은 웬만하면 결항 안 돼. 너무 걱정하지 마.”
“집으로 갈 거예요?”
“응?”
“결항되면 바로 집에 돌아갈 거냐고요.”
“…나?”
차창을 때리는 빗소리가 잔잔하게 이어졌다. 침묵에 휩싸인 좁은 공간에서 여준은 아주 뒤늦게야 사현이 진정 걱정하는 바가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비행기 안 뜨면 내가 너 내버려 두고 혼자 집에 갈까 봐? 그 소리야, 지금?”
“6성급 리조트고 뭐고 아무려나 상관없어요.”
“…….”
“어디서든 그냥…. 선배랑 오래 있고 싶고, 그것만 가능하면 다른 건 다 뭐든….”
띄엄띄엄 이어 가던 말끝이 빗소리와 함께 사그라들었다. 빗물로 흐려진 창 너머로 깜빡이는 신호등이 비친다. 여준은 주황색 신호가 점멸하는 모양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음….
“결항되면, 새 숙소를 잡아야겠지? 리조트야 뭐 위약금 좀 물고 취소하면 되고.”
“…….”
“아니면 너희 집으로 갈까? 웃기겠다. 여행 간다던 사람이 지척 거리에 숨어 있으면.”
“우리 집은 너무 낡아서 안 돼요.”
“그러게 이사하라니까.”
반지하는 건강에 안 좋다고 했잖아. 주절주절 다른 말을 늘어놓으며 슬쩍 보니 사현의 입가가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여준은 씩 웃고 의자에 기대앉았다.
“나 여행 간다니까 회사 사람들이 푸껫 완전 천국 아니냐고, 다 배 아파 죽으려고 하던데.”
“몰라요, 안 가 봐서.”
“다 필요 없어? 그냥 나만 있으면 돼?”
“모른다니까….”
빗발은 점점 약해졌다. 여준은 살짝 해가 비치는 구름 사이를 눈으로 좇으며 즐거운 상상을 했다. 따뜻한 나라, 누구도 우리를 모르는 곳에서 아무도 방해하지 않을 시간을 보낼 수만 있다면.
다행히 해가 질 즈음엔 안개도 걷혀 있었다. 비행기는 아무 문제 없이 정시에 출발했다. 여준은 다 먹은 기내식을 치우자마자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사현은 제 담요까지 뜯어 여준에게 덮어 두고 오랫동안 창밖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구름이 덮어 버린 지상은 이미 멀고 상관없는 세상처럼 느껴졌다.
여준은 젖힌 좌석에 모로 누운 채 짧은 꿈을 꾸었다. 교복을 입은 열일곱의 사현을 데리고 바다에 가는 꿈이었다. 사현은 앞장서 걷고 있었다. 반소매 셔츠 아래로 곧고 단단한 팔이 보였다. 해가 완전히 지고 나면 저 팔을 끌어당겨 돌아가야 했다. 그것이 아쉽고 서운해서 도저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 다 왔어요. 일어나요.”
어깨를 흔드는 손에 눈이 번쩍 뜨였다. 다급히 입가를 닦고 고개를 들던 여준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보니 핸들이 오른쪽에 달린 택시 안이었다. 여준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 어디….”
“리조트요. 다 왔으니까 내려요.”
“…….”
그제야 비몽사몽 비행기에서 내려 택시를 잡던 일이 떠올랐다. 졸음이 가시지 않아 비틀대고 있자니 사현이 알아서 흥정을 마치고 짐을 싣던 모습도. 여준은 아, 하며 이마를 마구 비비고 차에서 내렸다.
“와, 미치겠네…. 미안해. 어제 잠을 거의 못 잤더니.”
“왜요? 수학여행 앞둔 애들마냥 흥분해서?”
“…뒤끝 봐.”
사현은 어깨에 보스턴백을 메고, 같은 손으로 여준의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는 앞장섰다. 여준이 뒤늦게 따라붙어 가방을 받으려 하자 빈손을 내밀었다. 여준은 슬쩍 웃고 뻗어 온 손을 맞잡았다.
자정에 가까운 시간이라 로비에는 직원 한 명만 나와 있었다. 여준은 인쇄해 간 바우처와 여권을 내밀며 긴 하품을 내뱉었다. 제법 깊은 잠을 잤는데도 도저히 피로가 풀리지 않았다. 빨리 깨끗하게 씻고 드러누워 잠들고픈 마음뿐이었다.
그때 직원이 여준을 향해 빠른 영어를 뱉어 놓았다. 정신이 없어 여러 말을 놓쳤지만 아마 웰컴 드링크를 가져다줄 테니 기다리라는 뜻 같았다. 여준은 고개를 저으며 빨리 방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식당으로 향하던 직원이 머리 위로 물음표를 달고 멈춰 섰다. 내 말이 이상했나? 여준은 얼른 머릿속을 뒤져 적당한 단어를 찾아내기 시작했다.
“음, 그러니까…. 뭐라고 해야 하지….”
“적어도 영어로 말해야 알아듣지 않을까요?”
지켜보고 있던 사현이 불쑥 끼어들었다. 여준은 그제야 사현을 돌아보고 눈을 껌뻑였다.
“나 방금 한국어 했어?”
“…비켜 봐요.”
가방을 내려놓은 사현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는 직원을 향해 낮은 목소리로 낯선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직원은 눈을 크게 뜨더니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대화가 두어 번 더 오간 후에야 여준은 그가 태국어로 말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베개랑 장식할 꽃 고르래서 아무거나 괜찮다고, 그냥 빨리 방으로 안내해 달라고 했어요.”
“…너 태국어 할 줄 알아?”
“들어 본 말 흉내 내는 정도만 해요.”
“와, 세상에. 나 태국어 할 줄 아는 사람 처음 봐.”
“할 줄 아는 거 아니라니까요. 방금 한 정도가 다예요.”
어떻게 알아? 배웠어? 어쩌다가? 궁금한 질문을 마구잡이로 쏟아 내기 전에 직원이 카드 키를 들고 앞장섰다. 독채로 지어진 방들을 지나 풀 빌라가 모여 있는 커다란 건물로 향하는 내내 직원은 사현을 향해 이것저것 말을 걸었고, 그때마다 사현은 짧게 대답하며 여준에게 간단히 통역을 해 주었다. 어디서 왔냐고 그러네요, 좋은 레스토랑을 추천해 주겠대요, 해안가는 공사 중이니까 바다 구경을 하고 싶으면 택시 타고 좀 나가는 게 낫대요….
“그리고….”
방문 앞에 다다라 직원이 웃으며 건넨 말에 사현이 멈칫 굳었다. 망설임이 담긴 입가를 굳힌 채 힐긋 던져 오는 시선에 여준이 의아한 눈으로 응답했다.
“왜?”
“…….”
“뭐라 그러는데?”
“…아녜요.”
대충 얼버무린 사현이 직원에게서 카드 키를 받아 들었다. 직원은 여준을 향해 영어로 방 내부를 설명해 주겠다고 했지만 사양하고 돌려보내기로 했다. 빨리 쉬고 싶은 마음만이 가득했다.
“뭐라 그런 거야? 안 좋은 말이었어?”
그러나 사현이 잠깐 보인 표정만은 대충 넘길 수 없었다. 문을 닫자마자 사현의 팔을 붙들고 묻자 그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닌데….”
“근데 표정이 왜 그래. 나한테 일러. 기분 상하게 하는 말이면 내가 가서 혼내 줄….”
“허니문이냐던데요.”
“…….”
말을 멈춘 여준이 느릿느릿 두 눈을 깜빡였다. 응? 멍청히 되묻자 사현은 무안한 듯 시선을 돌렸다.
“…허니문이냐고 물어봤다구요.”
“우리?”
여준의 손끝이 사현과 자신을 번갈아 가리켰다. 사현은 옆머리를 긁적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멍하니 굳어 있던 여준이 픽, 헛웃음을 터뜨렸다.
“근데 왜 가만히 있었어? 맞다고 하지, 샴페인 한 병이라도 갖다줄지 누가 알아?”
“샴페인 마시고 싶어요?”
“있으면 분위기 나고 좋지. 와, 그나저나 깜짝 놀랐네. 생각지도 못한 질문이었어.”
한 손을 가슴에 얹은 여준이 소르르 한숨을 쉬었다. 사현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였다.
“그게 뭐라고 표정이 그랬어. 그런 말 듣기 싫어?”
“아뇨, 그게 아니라…. 선배가 곤란할까 봐.”
“곤란하긴, 우리 그런 사이인 거 감춰서 뭐 할 건데? 어차피 며칠 지내면 다 알 텐데.”
웃으며 묻는 말에 사현의 눈이 슬쩍 빛났다. 여준은 그의 허리에 손을 감으며 턱 끝에 슬슬 입 맞추었다.
“신기하다.”
“뭐가요.”
“한국에선 아무도 우리더러 애인 사이냐고 묻지 않잖아. 속으로야 무슨 생각을 할지 몰라도 입 밖으로는 절대 말 안 하지.”
“…….”
“그런데 여기서는 보자마자 신혼여행 중이냐고 묻네. 이런 게 당연할 수 있다는 게 신기하고 이상해. 우리 나중에 은퇴하고 나면 여기 와서 살까?”
“너무 환상 갖지 말아요. 저 사람도 우리가 외국인이라 편하게 물어본 걸 테니까.”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눈빛이 부드럽게 풀려 있었다. 사현은 여준의 이마에 입 맞추고 짐을 2층으로 옮겼다. 계단을 올라서자 커다란 침대가 보였다. 오른쪽에 위치한 미닫이문 너머는 통째로 욕실이었다.
“너 근데 정말 태국어 어떻게 알아?”
사현의 뒤로 따라붙은 여준이 호기심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사현은 욕조에 물을 받으며 덤덤히 대답했다.
“태국 오갈 일이 몇 번 있어서 주워들었어요.”
“깜짝 놀랐어. 보통 성조 있는 언어들은 억양이 센 느낌이잖아. 근데 네 말투로 하니까 엄청 차분하게 들리네. 너 왠지 중국어나 독일어도 잘할 것 같아.”
“…제대로 배운 게 아니라 그런 건 몰라요. 그냥 흉내만 내는 거라니까.”
“헤….”
“가서 좀 쉬고 있어요. 다 되면 부를게요.”
고개를 돌린 사현이 내쫓듯 손을 휘저었다. 여준은 웃으며 욕실을 빠져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빨려 들어갈 듯 푹신한 이불이 손끝부터 휘감겨 왔다.
“…….”
늘어져라 하품을 하고 모로 누웠다. 시계 방향으로 뒤집어진 사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팔꿈치까지 걷어 올린 셔츠 소매 아래로 곧게 뻗은 팔은 자잘한 흉터로 얼룩져 있었다. 꿈속에서 보았던 매끈하게 마른 팔과는 달랐다.
“사현아.”
스스로의 귀에도 들릴 듯 말 듯 작은 부름이었지만 사현은 돌아보았다. 짙고 유순한 눈동자였다. 여준은 반쯤 침대에 파묻힌 채 느릿한 미소를 지었다.
“큰일 났다. 나 누웠더니 못 일어나겠는데.”
“…….”
사현도 조금 웃은 것 같았다. 몸을 일으킨 그는 수도꼭지를 잠그더니 타월을 들어 손을 닦았다. 저벅, 저벅, 고요한 방에 발걸음 소리만이 부드럽게 울렸다.
“그럼 제대로 누워서 자요.”
“꼼짝도 못하겠어….”
“어쩌라는 건지, 내 참.”
몸을 숙인 사현이 여준의 무릎 아래를 들어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슬리퍼를 벗기고 이불을 뒤집어 덮자 여준은 금방 고치에 둘둘 싸인 애벌레 모양이 되었다.
“내 담배 가지고 잔소리할 시간에 선배나 운동 좀 해요.”
“수면 부족이라니까….”
꾸물꾸물 이불에서 팔을 빼낸 여준이 사현을 끌어당겼다. 사현은 침대 끄트머리에 걸리다시피 누운 채 여준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이 넓은 침대에서 꼭 이렇게 구석에 붙어야 해요?”
“도망 못 가게 하려고 그러지.”
여준은 흐흐, 웃고는 사현의 목덜미로 이마를 묻었다. 방 곳곳을 장식한 열대 꽃의 향이 어느새 서로의 살에 배어 있었다.
“선배, 옷이라도 벗고 자요.”
“응….”
“대답만 하지 말고.”
“알았다니까….”
머리를 쓰다듬고 관자놀이에 입술을 누르는 동작 어디에서도 정말로 잠을 깨우려는 의도는 느껴지지 않았다. 덕분에 여준은 깊은 안도감과 함께 눈을 감을 수 있었다. 무거운 눈꺼풀 아래로 깊은 수마가 출렁였다.
어디선가 파도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흐린 눈을 껌뻑여 남아 있던 꿈을 떨어내자 그것이 빗소리임을 알 수 있었다. 여준은 이불에 둘둘 말려 모로 누운 채 한참이나 현실과 꿈의 경계를 오갔다. 몸을 일으키게 한 것은 짙게 밀려든 허기였다. 그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켰다.
푹신한 이불이 흘러내리자 벗은 어깨가 드러나 써늘했다. 입고 왔던 옷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앉은 채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사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사현아?”
창밖은 우중충했다. 넓게 트인 창 너머로 빗물을 받아 내는 개인 풀이 보였다. 손등으로 부은 눈을 꾹꾹 누르던 여준은 우선 사현을 찾기로 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욕실로 향하는 미닫이문을 열자마자 창가 욕조에 드러누운 사현을 발견할 수 있었다.
“…….”
긴 다리를 겹쳐 올린 채 몸을 담그고 있던 사현이 여준을 발견하고 미소 지었다. 무심코 다가서려던 여준이 멈춰 섰다. 머리는 뻗치고, 눈은 퉁퉁 부은 얼굴이 거울에 비친 탓이었다. 그는 머쓱한 얼굴로 우선 칫솔을 집어 들었다. 눈으로만 여준을 좇으며 사현이 물었다.
“잘 잤어요?”
“…응. 몇 시야?”
“지금 아침 일곱 시쯤 됐을걸요.”
미치겠네, 왜 이리 민망하지. 여준은 치약 묻힌 칫솔을 입에 문 채 사현의 시선을 피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식으로 아침을 함께 맞이하기는 처음이었다. 브리프 한 장 차림으로 자다 깬 얼굴을 보이는 것도. 여준은 양치를 하며 눈에 보이는 문을 있는 대로 열어 보기 시작했다. 가운을 찾기 위해서였다.
“그냥 선배도 들어와요.”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사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준은 못 들은 척 자꾸만 위로 뜨는 머리카락을 물 묻힌 손으로 눌렀다.
“선배.”
“…….”
“성여준 씨.”
“…뭐래.”
양칫물을 뱉은 여준이 소리 내 웃었다. 사현은 욕조 단에 두 팔을 괸 채 비아냥거렸다.
“왜요? 언제쯤 그놈의 선배 소리 치울 거냐더니 막상 맞먹으니 화가 나시나?”
“그게 맞먹은 거야? 누가 봐도 거리감이 이만큼 벌어졌는데? 생전 초면인 사람이나 나더러 성여준 씨, 그러는데?”
“그럼 여준아.”
“…….”
“안 들어오고 뭐 해?”
여준이 한 손에 물컵을 쥔 그대로 굳었다. 눈을 끔뻑이며 한참이나 쳐다봐도 사현은 미소 띤 얼굴 그대로 끄떡도 없었다.
“…너 지금 기분 되게 좋구나?”
입 안을 두어 번 헹군 뒤에야 찾아온 깨달음이었다.
“그런가 봐요.”
고개를 기울인 사현이 순순히 인정했다. 여준은 웃으며 브리프를 벗어 두고 욕조 안으로 들어섰다. 사현은 여준을 제 허벅지 위로 앉히며 그의 목덜미며 어깨로 더운물을 끼얹었다. 차갑게 식어 있던 피부에 따뜻한 물과 체온이 닿자 뺨까지 소름이 돋았다.
“뭐가 그렇게 좋아?”
여준이 사현의 목에 팔을 감으며 물었다. 사현은 음, 하며 여준의 턱 끝에 입 맞추었다.
“웃겼어요. 선배 머리가 까치집이 돼서 어정어정 들어오는 게.”
“뭐야, 비웃는 거였어?”
“귀엽더라고요.”
쪽, 뺨을 지나 입가에 닿은 입술이 부드럽고 따스했다. 여준은 어깨를 움츠리며 간지러운 웃음을 터뜨렸다.
“따가워…. 너 면도해야겠다.”
“안 그래도 하려는데 선배가 깼어요.”
어깨를 으쓱인 사현이 욕조 단에 올려 둔 일회용 면도기와 쉐이빙 폼을 가리켰다. 여준은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해 줄까?”
“네.”
기다렸다는 듯 냉큼 받아먹는 대답에 어이가 없었다. 여준이 사현의 어깨 너머로 손을 뻗어 쉐이빙 폼을 집어 들었다. 사현은 가까워진 여준의 상체를 한 손으로 감은 채 그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하지 마, 면도부터 하고.”
“아무 짓도 안 해요.”
천연덕스럽게 대답한 사현의 손가락이 등허리를 깊이 쓸어내렸다. 여준은 못마땅한 얼굴로 쉐이빙 폼을 흔들어 손에 짜냈다. 그 사이 사현의 두 손은 여준의 허벅지 양쪽을 잡아 슬슬 누르고 있었다.
“잠깐만, 바보야. 나 칼 들었잖아.”
여준이 보란 듯이 면도날 쪽을 들어 보였다. 사현은 뭐가 문제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서서히 일어서기 시작한 페니스가 여준의 회음부를 누르고 엉덩이 사이를 찌르고 있었다.
“아, 좀….”
“계속해요.”
눈을 감은 사현이 얼굴을 내밀었다. 여준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그의 얼굴에 쉐이빙 폼을 펴 발랐다. 몸이 살짝 흔들릴 때마다 손끝이 불안하게 움츠러들었다. 사현은 두 손으로 여준의 골반을 쥐어 누른 채 느릿하게 허리를 밀어 올렸다.
“…응.”
여준의 입술에서 축축한 탄식이 흘러나왔다. 고환 뒤쪽부터 구멍이 있는 자리까지를 짙게 비비는 감각에 바짝 휘어진 등허리가 바르르 떨렸다. 젖은 눈가가 이내 붉게 물들었다. 사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턱을 슬쩍 들어 올렸다.
“뭐 해요? 해 준다더니.”
“…아침부터 진짜 너무하네.”
“여행만 오면 끝장을 보게 해 주겠다고 호언장담한 게 어디 사는 누구였더라? 지키지도 못할 공수표 남발하는 쪽이 훨씬 너무한 거 아닌가.”
“내가 언제 말을 그렇…, 아.”
바짝 일어선 선단이 구멍 위를 찔러 올리다 그대로 미끄러졌다. 여준은 사현의 턱 끝까지 가져갔던 손을 그대로 물리며 밭은 숨을 토했다.
“…위험, 하다니까.”
“그럼 넣어도 돼요?”
“뭘 들은 거야, 이 똥강아지가….”
“넣게 해 줘요. 선배가 도착하자마자 나만 내버려 두고 자 버렸잖아요.”
“이거랑 그게 무슨 상관…. 응!”
웅얼대던 여준이 짧은 비명을 내질렀다. 허벅지 안쪽을 문지르던 손이 반쯤 일어선 여준의 것을 꽉 움켜쥔 탓이었다. 여준이 움찔대며 잔뜩 원망스러운 눈을 했다. 사현은 웃으며 그의 팔을 쥐어 제 얼굴에 가져다 대었다.
“계속해 줘요.”
“…상처 나도 난 몰라.”
“네.”
착하게 대답하고 눈을 감는 얼굴이 더없이 온순해 보였다. 여준은 평정심을 유지하려 애쓰며 반듯한 뺨 위로 면도날을 가져다 대었다. 조심조심 쓸어내리는 동안에도 사현은 손에 쥔 기둥을 정성스레 문지르고 있었다. 허벅지에 바짝 힘이 들어갔다. 진득한 기대감으로 벌어졌다 오므라들길 반복하는 구멍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
숨을 고른 여준이 젖은 손으로 사현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왼쪽 뺨을 쓸어 내고 코끝으로 시선을 맞췄다. 흉터는 각진 이마 선부터 시작해 눈썹 뼈 중앙을 지나 뺨 한가운데까지 이어져 있었다. 갈라졌다 붙은 자국이 선명한 자리를 하나하나 눈에 새기며 인중과 턱 끝까지 쓸어 내렸다. 물을 묻혀 닦아 내자 말끔해진 입가만이 다친 자국 없이 깨끗했다.
“…아!”
달그락, 일회용 면도기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허리가 붙들렸다. 물속에서 구멍 주위를 한가득 움킨 채 당기는 손이 다급했다. 여준은 눈앞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버티던 힘을 풀었다.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에 달라붙듯 몸피를 불리며 파고드는 뜨거운 살덩이에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으응, 아…. 아읏….”
고개를 뒤로 넘긴 여준의 목덜미가 길게 늘어졌다. 가쁜 숨에 오르내리는 가슴팍까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사현은 그의 허리를 붙들어 조금씩 제 쪽으로 누르며 벌게진 쇄골 위를 슬쩍 깨물었다.
“…읏, 천천히…. 천천히 넣어, 사현아.”
“허리 세워 봐요. 젖꼭지 빨아 줄 테니까.”
“아, 싫어…. 간지럽….”
빳빳해진 돌기 주위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사현은 여준의 등을 꽉 눌러 감은 채 부드러운 유륜 주위를 혀로 덧그리다 살금살금 빨아들였다. 여준이 움찔대며 빠르게 숨을 쉬었다. 사현은 제 어깨에 있던 여준의 양손을 하나씩 잡아 내려 깍지를 꼈다.
“움직여 봐요.”
“아….”
고개를 들어 올린 여준이 눈을 꽉 감았다. 깍지 낀 손에 힘을 주어 엉덩이를 들어 올렸다가 헐떡이며 내려앉는 모양새가 어설프기 짝이 없었다. 그래도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그가 제 몸 위에서 들썩이는 모습을 느긋하게 감상했다. 아직은 남아 있는 시간이 더 길었다.
“아, 읏, 으응, 아, 하아….”
여준의 목소리가 점차 젖어 들었다. 사현은 여준이 제 몸 위에 올라타는 자세를 좋아했지만 여준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아무리 스스로 허리를 흔들어도 사현이 작정하고 박아 줄 때만큼 좋은 자리를 찾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 힘이 들고 갈증이 날 뿐 무엇 하나 시원스레 해소되지 않았다.
“…으윽, 응, 사현아, 아.”
사현에게도 이 행위는 일종의 전희에 지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참을 더 애쓴 후에야 고개를 떨어뜨린 여준이 숨을 몰아쉬며 사현과 눈을 맞췄다. 아직 모자라? 묻는 시선에도 그는 짓궂은 미소를 띨 뿐이었다. 여준은 결국 눈썹을 일그러뜨리며 따져 물었다.
“넌 그냥 내가 안달 내는 게 좋은 거지….”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니 똑똑하던 성여준도 다 옛말이네요.”
“흣….”
“이러고 있을 때 선배 엄청 귀여워요. 안절부절못하면서 어떻게든 더 깊이 넣으려고 헛짓하는 게, 사람들이 왜 머리 나쁜 애완동물을 굳이 기르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아, 앗, 제발, 이제….”
“무작정 누르기만 하면 뭐 해요? 제대로 넣을 생각을 해야지.”
깍지 낀 손을 푼 사현이 여준의 오금에 팔꿈치를 끼워 들어 올렸다. 순식간에 다리가 활짝 벌어지고 뒤로 쓰러질 위치에 처한 여준은 허겁지겁 사현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목덜미까지 더운물이 찰랑였다. 사현은 여준을 기울어진 욕조 벽에 눕힌 채 상체를 밀착했다. 순식간에 사현의 몸과 욕조 벽 사이에 짓눌린 여준은 한순간 밑을 열고 끝까지 파고드는 살덩이를 남김없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
허공에 뜬 발끝이 바짝 오그라들었다. 꽉 조였다가 와르르 녹아내리는 내벽에 사현의 잇새로 짓눌린 신음이 터졌다. 젖은 입술을 둥글게 벌린 여준이 하아, 한숨 쉬며 바르르 떨었다. 달라붙은 상체 사이에 끼워진 여준의 페니스 끄트머리에서 후드득, 묽은 정액이 떨어졌다. 사현은 저열한 만족감이 달라붙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선배.”
“…아아, 하, 흐윽….”
“선배는 이제 돌이킬 수가 없겠네요. 입으로든 뒷구멍으로든 내 좆만 물면 못 참고 싸 버리잖아요.”
“아, 하아, 아, 아!”
“아무도 선배가 이런 사람인 건 모를 거예요. 그렇죠? 그 누가 상상할 수 있겠어요. 그 잘나고 단정한 성여준이 이렇게 남자 좆에 환장하는 인간이란 걸.”
허리를 박는 움직임이 거세질수록 철벅대는 물소리가 커졌다. 여준은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사현에게 단단히 매달린 채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게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에요? 눈이 있으면….”
“…남, 남자 좆이 중요한 게 아니라.”
“…….”
“너여야, 네가 박아 줘야…. 그래야 이렇게, 아, 되는….”
움찔, 들썩인 여준이 사현의 어깻죽지에 이마를 묻었다. 가까워진 살결에서 따뜻한 향기가 풍겼다. 하아, 숨을 고르며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맺혀 있던 눈물이 관자놀이를 타고 흘렀다. 깜빡여 떨어낸 시야에 멍하니 굳은 사현의 얼굴이 보였다. 여준은 그의 얼굴을 감싸 문지르다 짧게 입을 맞췄다.
“그건 맞아…. 너밖에 몰라.”
“…….”
“너 외의 누가 알 수 있겠어. 평생 아무도 모를 거야.”
그때 허리를 누른 손에 덜컥 힘이 들어갔다. 여준은 절정을 예감하고 숨을 삼켰다. 고개를 기울여 여준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사현의 관자놀이로 시퍼런 핏줄이 섰다. 가장 깊은 곳에 흔적을 남긴 살덩이가 느릿하게 물러나자 소름이 돋았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눈앞의 어깨를 꼭 끌어안으며 속삭였다.
“…그 말도 맞네.”
“…….”
“내가 자꾸 조르게 될 거라고.”
사현의 눈동자가 만족스럽게 빛났다.
***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창을 때리며 들이치던 비는 거짓말처럼 그치고 해가 중천에 떠 있었다. 여준은 건전지가 끊긴 장난감처럼 늘어진 채 힘없이 들썩였다. 손끝에 아무렇게나 던져둔 콘돔 포장지가 닿았다.
“배고파….”
무심코 중얼거린 말에 사현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여준은 기운 없는 손을 들어 보란 듯이 홀쭉하게 달라붙은 아랫배에 얹었다.
“아무리 그래도 밥 한 끼를 안 먹고 이러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 안 하니….”
“…바로 룸서비스 시킬게요.”
몸을 일으킨 사현이 주섬주섬 침대 위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여준은 끝도 없이 쓰레기통 안으로 쏟아지는 콘돔 포장지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슬쩍 내려다본 몸이 말라붙은 정액으로 엉망이었다.
“기다려 봐. 샤워 좀 하고.”
“2층에서 씻어요. 내가 1층 가서 씻고 시켜 놓을 테니까.”
빠릿빠릿하게 정리를 마친 사현이 미처 부를 틈도 없이 계단 아래로 사라졌다. 여준은 힘겹게 몸을 일으켜 욕실로 들어섰다. 거울에 비친 모습은 가관이었다. 온몸에 빈틈없이 자리 잡은 멍울이며 잇자국이 새삼스레 쓰라렸다.
“부추긴 내 죄지 누굴 탓하냐….”
픽 웃은 여준이 비틀비틀 샤워 부스로 들어섰다. 따뜻한 물을 틀어 몸을 씻어 내는 동안 창밖에서는 새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창 앞으로 심어 놓은 커다란 나뭇잎 사이사이로 해가 비치고 있었다. 다분히 비현실적인 광경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벌써 오후가 되었을까?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최대한 느리게 흘렀으면 했다. 그러자 사현의 말마따나 리조트에 도착하자마자 곯아떨어져 버린 시간이 이제 와 아쉽게 느껴졌다.
가운을 두르고 머리를 대충 말린 뒤 1층으로 내려가자 이미 테이블에 각종 음식이 차려져 있었다. 여준은 사현이 가리키는 방향의 의자를 끌어다 앉으며 의아하게 물었다.
“엄청 빨리 왔네.”
“곧장 갖다줄 수 있는 게 뭔지 물어보고 시켰어요. 마침 점심시간이라.”
“아.”
그제야 벽에 매달린 시계로 시선이 갔다. 이제 막 정오를 지나고 있었다. 모양 좋게 차려진 연어 샐러드와 팟타이, 토스트 따위를 훑어보던 여준이 픽 웃었다.
“메뉴 통일성이 이렇게 없어도 되나?”
“일단 먹어요. 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지금 시킬 테니까.”
“됐어, 충분하네. 너도 앉아.”
그러자 테이블로 다가온 사현이 연어 한 점을 찍어 여준의 입가로 들이밀었다. 여준은 간지럽게 웃으며 입을 벌렸다. 부드럽고 싱싱한 살점이 혀를 감싸자 잠시 잊고 있던 허기가 배 속을 푹 꺼뜨렸다.
“아, 너무 배고팠어.”
“진작 말하지 그랬어요.”
“넌 배가 안 고파? 그보다 어제 자긴 했어? 무슨 사람이 잠도 안 자고 먹지도 않아?”
“선배가 너무 연비가 나쁜 것 같은데…. 아무 말 없길래 괜찮은 줄 알았죠.”
차분히 대답하고 있지만 음식을 찍어 여준의 입가로 나르는 손이 쉴 줄을 몰랐다. 여준은 볼이 미어져라 들어온 샐러드를 우물대며 사현의 손에서 포크를 빼앗아 들었다.
“너도 먹으라니까.”
“난 천천히 먹어도 되니까 선배나 많이 먹고 건강 관리 좀 해요. 운동하기 힘들면 살이라도 찌든지.”
퉁명스레 말한 사현이 여준의 젖은 머리칼을 넘겨 주었다. 여준은 입을 가린 채 한참 우물대다 뒤늦게 밀려든 머쓱함에 괜히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몰라서 그래. 나 처음 주임 달고 한참 일 몰아칠 때 그 일을 다 해내면서 아프지도 않는다고 팀에서 별명이 철인….”
“알았다고요. 시비 안 걸 테니까 얼른 먹어요.”
탄식한 사현이 아예 모든 접시를 여준 앞으로 밀어 놓았다. 급한 허기가 가시자 뒤늦게 민망해졌다.
“…내가 너무 분위기 깼나?”
여준이 잘게 잘라 놓은 토스트를 입에 넣으며 웅얼거렸다. 사현은 느릿한 한숨을 쉬고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내가 워낙 좀 그래요. 잘 시간이 있으면 자고 먹을 게 있으면 먹고.”
“…….”
“그러니까 힘들면 빨리 말해 줘요. 난 다른 사람 페이스 맞추는 법을 잘 모르니까.”
여준이 포크를 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사현은 그제야 토스트 조각 하나를 집어 입에 넣었다. 잠시 말없이 이어지는 식사 중간중간 새소리가 섞여 들었다. 여준은 그때마다 창밖을 기웃대다 사현에게 물었다.
“우리 이러다 여행 마지막 날까지 저 문 밖으로 한 번을 안 나가는 거 아니야?”
“난 그럴 생각인데요.”
“…시내 구경은 잠깐 갈까 했는데. 팀원들 선물도 사야 하고.”
“사지 마요.”
그새 또 연어 한 점을 찍어 내밀며 사현이 단호하게 말했다. 여준은 그것을 덥석 받아먹고 눈을 가늘게 떴다.
“윤 책임님이 무슨 크림 사다 달라면서 사진까지 보냈거든. 빠통 시내에 가면 찾을 수 있다던데.”
“나를 멀뚱히 세워 두고 딴 여자 선물을 사시겠다?”
“…선물 아니고 구매 대행. 대행 뜻 뭔지 알지?”
“뭐든 사지 마요. 선배가 다른 사람 줄 물건 사는 꼴 보기 싫어요.”
하도 진지하게 말하니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식사에 흥미를 잃고 몸을 기울인 여준의 시야에 문득 대리석으로 된 아일랜드 바가 걸렸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바우처와 카드 키, 여권 두 개를 아무렇게나 던져둔 자리였다.
“나 저거 줘 봐.”
“뭐요?”
“네 여권.”
아일랜드 바 위로 손을 뻗던 사현이 멈칫했지만 잠깐이었다. 그는 곧 두 개의 여권 중 제 것을 찾아 여준에게 건넸다.
진녹색 여권은 표지부터 너덜너덜했다. 손끝으로 단단히 쥐고 페이지를 넘기던 여준의 눈동자가 사현의 증명사진에서 멈췄다.
“…….”
사진 속 사현은 표정 없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애티가 고스란히 남은 얼굴이 흉 없이 깨끗했다. 여준은 엄지 끝에 걸린 뺨을 가만히 쓸다 슬쩍 웃었다.
“귀엽다. 몇 살 때 찍은 거야?”
“한 7년 전일걸요.”
“보니까 생각나네. 고등학교 때 이렇게 생겼었지.”
얼굴선은 하나같이 단단하고 날카롭지만 눈동자가 검고 커서 묘한 인상이었다. 여준은 사진을 이리저리 뜯어보다 고개를 들었다. 턱을 괸 사현이 가만히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선배는 똑같아요.”
이어지는 목소리는 달고 부드러웠다.
“그때나 지금이나….”
여준은 대답 없이 그 시선을 마주한 채 가슴이 뻐근하도록 차오르는 아쉬움을 꼼꼼히 씹어 삼켰다.
눈앞을 채우는 풍경이 이보다 좋을 수 없었다. 사현이 커피를 내리는 동안 여준은 소파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았다. 벽 하나를 통째로 터놓은 커다란 창 너머, 빽빽이 심어 놓은 커다란 나무 그림자가 작은 풀장 위로 너울너울 얼룩졌다.
“돈이 좋은 거야….”
속물적인 감상에 커피 잔을 들고 오던 사현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이런 데는 하루에 얼마나 줘요?”
“알아서 뭐 하게. 어차피 내가 쓴 돈인데.”
“나더러는 돈 아껴 쓰라더니….”
“넌 아껴 써. 내가 나중에 늙고 가난해지면 네가 책임져야 하니까.”
사현은 대답 없이 테이블 위로 커피 잔을 올렸다. 향긋한 캡슐 커피 향이 은은하게 피어올랐다. 여준은 반쯤 드러누운 채 고개를 홱 돌려 사현을 보았다.
“왜 말이 없어? 나 늙고 병들면 내버리려고?”
“제 핏줄도 아닌 자식 하나 다 키워 놓고 의탁할 데도 없어 나한테 오겠다니 안쓰러워서요.”
“자식은 원래 키워서 내보내면 거기서 끝인 거야. 얼마 남지도 않았어. 갓 태어나 눈도 못 뜨던 핏덩이가 이젠 나랑 같이 자겠다는 말도 안 해.”
“…….”
“지오한테 나는 정류장이야. 진짜 자기 인생으로 가기 위해 잠깐 머물러 쉬는 의자 같은 거.”
사현은 또 말이 없었다. 그저 여준의 옆자리로 옮겨 앉을 뿐이었다. 여준은 몸을 돌려 사현의 무릎 위로 두 다리를 올렸다. 팔을 뻗자 얌전히 안겨 드는 머리를 감싸 쓰다듬었다. 사현은 여준의 목덜미에 코를 묻은 채 낮게 중얼거렸다.
“선배.”
“응.”
“난 당신과 친한 사람들 만나고 싶지 않아요.”
“…….”
“아이는 괜찮아요. 그 애는 너무 어리고, 약하고…. 그래서 당신의 시한부적인 보호가 필요하다는 거 이해했어요. 하지만 그 외의 누구든…. 당신이 조금이라도 챙기고 신경 쓰는 모습 내 눈으로 보고 싶지 않아요.”
여준이 눈을 감았다. 듣는 것만으로 입 안에 침이 고이도록 다디단 투정이었다.
“선배.”
나만 사랑해 주세요.
“불쌍하다고 해 주세요.”
나에겐 당신밖에 없으니까.
“…….”
여준은 조용히 제 뺨과 사현의 뺨을 맞대었다.
“예뻐라.”
귓가에 속삭인 말에 사현이 잠시 숨을 멈췄다.
“그거 알아? 예쁘다는 말이랑 가엾다는 말은 어원이 같대.”
“…….”
“분간이 안 돼서일까? 누군가를 볼 때 마음이 울리는 게 가여워서인지, 예뻐서인지…. 옛날 사람들도 잘 몰라서.”
사현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여준은 그의 눈가를 손끝으로 꾹꾹 눌러 문지르며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걱정하지 않아도 나한테 남아 있는 시간들은 다 너 줄 거야.”
“회사 다니고 남는 시간이겠지….”
“분위기 깰래? 너랑 달리 난 월급쟁이야. 평생 일할 수 있는 직장도 아니고, 벌 수 있을 때 벌어 놔야 퇴직해도 먹고살 거 아니야.”
“방금 전엔 돈 없이 올 테니 나더러 먹여 살리라면서요.”
흥, 콧방귀를 뀐 사현이 고개를 돌렸다. 여준은 그의 턱을 감싸 억지로 바로 놓은 채 히쭉 웃었다.
“또 삐쳤네, 요 똥강아지가.”
“알면 풀어 줘 봐요.”
“음…. 나중에 어디에 살고 싶어?”
상쾌하게 물은 여준이 사현의 뺨에 짧게 입 맞추었다. 사현은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우리 어머니가 그러셨거든. 더운 나라에 사니까 시간이 가는 걸 모르겠대. 왜, 한국에 살면 계절마다 옷차림이 바뀌잖아. 그러다 보면 한 해가 흐르는 걸 느끼고…. 그런데 더운 나라에선 사계절 입는 옷이 같으니까 정신 차려 보면 몇 년 지나 있고 그렇다고.”
“…….”
“그 얘길 들었을 때는 별로겠다 싶었거든. 나도 모르는 새 흐르는 시간이란 건 좀 무섭지 않을까 싶었어. 그런데 너랑 여기 와 보니까 그것도 좋을 것 같아. 나 아까부터 시간 가는 게 아까워서 딴생각을 못 하고 있거든.”
여준이 과장되게 초조한 표정을 지었다. 사현도 그제야 느릿한 미소를 띠었다.
“선배.”
“응.”
“여준 선배.”
“그래, 나도 사랑해.”
장난스레 내뱉으며 입술을 맞물었다. 사현은 여준의 등을 감싼 손끝이 바짝 일어서도록 힘을 주었다.
“사현아, 내 이름 더 불러 봐.”
“여준.”
“더.”
“성여준.”
내가 지어 준 이름이면 좋았을 텐데. 내게서 나온 이름이라면 좋을 텐데. 나 외의 누구도 부를 수 없게 하고 싶은데.
“착해라….”
끌어안고 입술을 쫓았다. 소리를 지어 내뱉는 숨결을 놓치는 게 아쉬웠다. 이끄는 대로 몸을 붙이고, 늑골이 울리도록 세게 뛰는 심장 박동을 서서히 맞췄다. 사현은 조급해하지 않았다. 여준 역시 재촉하지 않았다. 해는 아직 높이 떠 있었고, 함께 보낼 밤은 남은 생의 날짜만큼 남아 있었으므로.
“여준아.”
달콤한 부름에 대한 답은 입맞춤으로 충분했다.
파도 소리가 들린다. 멀지 않은 곳에 바다가 있었다. 여준은 해가 지면 사현을 데리고 해변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바다를 향해 걸어가는 뒷모습을 바라보고 싶었다. 그 등 뒤로 따라붙어 자신을 향해 돌려세우고 싶었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손을 갑작스레 잡아도 사현은 놀라지 않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평생을 기다려 온 접촉일 테니까.
“응.”
그 순간을 위해서 흐르는 시간이라면 아쉽지 않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