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화 (19/21)

#에필로그

연말의 강남대로는 끔찍하기 짝이 없었다.

“경화증 걸린 동맥 혈관을 비집고 나아가는 혈소판이 된 기분이야.”

어깨동무를 한 채 길을 틀어막고 있던 직장인들 사이를 빠져 나오느라 머리가 다 헝클어진 정훈이 중얼거렸다. 여준은 웃으며 걸음을 빨리 했다. 화재 팀 협동 회식 장소가 늘 가던 먹자골목이 아닌 신논현역 근처로 정해진 데엔 애잔한 사연이 있었다. 높은 분의 갑작스러운 변덕에 난데없는 회식이 잡힌 것까지야 그렇다 쳐도, 한 해의 마지막 날 강남에서 마흔 명에 달하는 인원을 수용할 만한 회식 장소를 급하게 잡으려니 당연히 적당한 가게가 남아 있지 않았다. 그에 하나같이 입을 모아 아쉽다며 혼신의 연기를 하고 있을 때 별안간 정훈 팀의 막내직원이 사명감에 불타 손을 들고 나선 것이다. 친척이 운영하는 고기집이 근처에 있는데 가게를 통째로 빌려줄 수 있다고 답변을 받았다는 거였다.

“여준아…. 당일 회식 장소를 찾을 수가 없을 때 가장 적절한 대처 방안이 뭐라고 생각해?”

“음…. 회식을 미룬다?”

“틀렸어…. 막내의 입을 막는다야….”

“…….”

“진짜 우울해 죽겠네. 애가 나쁜 애는 아닌데 눈치가 없어. 다들 아쉽다 그러니까 그게 진짜로 아쉽다는 뜻인 줄 알고 지네 집안 어른들한테 전화를 쫙 돌려가지고는 장소를 수배해왔는데…. 지 잘하지 않았냐면서 얼굴이 벌게서 히히 웃고 있는 걸 이건 뭐 침도 못 뱉겠고….”

투덜대던 정훈이 얼른 여준의 팔을 잡아 끌어당겼다. 휘청대며 헛걸음질한 여준의 어깨 바로 옆으로 배달 오토바이가 거침없이 지나갔다. 정훈은 혀를 차며 목소리를 한층 높였다.

“환장한다.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인도로 오토바이를 몰면 어떡해?”

“와, 죽을 뻔했네. 고마워.”

“너도 앞 좀 보고 걸…, 아니, 아니다. 내가 말 걸어서 그랬지.”

정훈이 한숨을 푹 쉬었다. 그는 여자 친구와 새해를 맞이하기 위해 반년 전부터 호텔을 잡아 두었다고 했다. 인천 앞바다가 훤히 보이는 스위트룸에서 그의 여자 친구는 잔뜩 토라진 채 가장 비싼 룸서비스를 시켜 먹고 있을 것이다.

“얼굴만 비추고 적당히 빠져나가. 사람 하도 많아서 중간에 사라져도 모르겠더라.”

“어이가 없다, 진심. 자율 참가라고 해 봤자 임원 참석하는 회식에서 누가 빠질 수가 있느냐고. 이런 걸 당일에, 그것도 12월 31일 밤에 잡는 법이 어디 있어? 노동부에 신고해야 돼.”

심지어 정훈의 브리프케이스엔 오늘 여자 친구에게 선물하기 위해 구매한 불가리 커플링이 들어 있었다. 여준은 진심 어린 격려를 담아 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오 전무님 금방 취하시니까 들어가자마자 근처에 앉아서 기분 좀 맞춰 드려. 나중에 찾으셔도 내가 적당히 수습해 줄게.”

“넌 어쩌게? 끝까지 있을 거야?”

“나도 끝까지는 못 있지. 그래도 2차까진 갈 거야. 장소를 우리 팀에서 잡았거든.”

“아니, 그게…. 너는 뭐 일정 없어?”

걸음을 늦춘 정훈이 조심스레 물었다. 멈칫한 여준이 애써 웃었다.

“음…. 나야 뭐.”

“여자 친구는? 오늘 안 만나?”

그러게. 여준은 애매한 대답을 남겨 놓고 어깨를 으쓱였다. 정훈은 눈치껏 그 뒤의 말을 삼키고 여준에게 바짝 따라붙었다.

하루아침에 모든 연차를 소진해 버린 여준이 회사에 복귀했을 때,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의외로 관대하고 따스한 시선이었다. 마침 같은 시기에 돌고 있던 소문에 편승해 ‘여자 친구가 갑자기 사고를 당했다’는 이야기가 된 모양이었다. 대단히 틀린 말도 아니었으므로 여준은 애매한 미소나 몸짓만 덧붙여 오해가 알아서 커지도록 내버려 두었다.

‘성 선임, 좀 나쁜 살 같은 거 껴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소문이 몸피를 키울수록 꺼림칙한 평가도 함께 따라왔다.

‘와이프 그렇게 됐지, 애는 허구한 날 아프다지, 새로 사귄 애인도 사고가 났으면 본인한테 뭐가 있다고 봐야….’

보험 사기나 공갈이 아니라 미신적인 이야기가 된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여준은 픽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하필이면 한파경보가 나온 날이었다. 숨만 쉬어도 구름 같은 입김이 시야를 가렸다.

“저긴가 보다. 앞에들 있네.”

정훈이 턱짓하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드니 건물 입구 앞에 대여섯 명의 신입 사원들이 펭귄무리처럼 모여 있는 모습이 보였다. 하나같이 아직도 뭐가 뭔지 모르겠다는 듯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고 있었다.

“안 들어가고 뭐 해요?”

여준이 넌지시 묻자 한꺼번에 돌아선 그들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안녕하십니까, 하며 넙죽 고개를 숙였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어쩐지 군기 잡는 모양이 된 것 같아 민망해진 여준이 얼른 말을 이었다.

“회식 장소 여기 아니에요? 왜 밖에서들 이러고 있어요.”

“아, 그게….”

신입 사원 무리를 이끌고 있던 남자 직원 하나가 얼른 입을 열었다. 같은 층에서 오며가며 보는 얼굴이었다. 분명 주임이었는데, 이름이 뭐였지. 머리를 굴려 봤지만 도통 떠오르지 않았다.

“여기 맞습니다. 그런데 전무님이 아직 도착하지 않으셔서….”

“그래서 밖에서 기다린다고요?”

“저는 그게 맞지 않을까 했는데….”

“…….”

여준이 잠시 말을 잊고 바라보자 남자는 금방 시선을 피했다. 우물쭈물 시선을 내리는 몸짓이 영 소심해 보였다. 침묵을 깨고 끼어든 것은 이번에도 정훈이었다.

“누가 그래요? 안 그래도 돼요. 들어오시면 바로 일어서서 인사하고 자리 내드리고, 그럼 되는 거예요.”

“아….”

“올라가요. 오늘 영하 10도라는데 이러고 있다가 다 감기 걸리려고.”

양몰이를 하듯 두 손을 휘젓는 정훈의 기세에 결국 신입 사원들이 주춤대며 가게 안으로 들어서기 시작했다. 정훈은 그들이 모두 계단을 오르고 나서야 여준을 돌아보며 핀잔을 주었다.

“야, 좀 모를 수도 있지 사람을 그러고 노려보냐?”

“…내가?”

“너 저 사람한테 아직도 앙금이 안 풀렸어? 그러지 마, 쫄아 있는 거 불쌍하지도 않냐.”

“어?”

“연차가 적어서 그렇지 우리보다 나이도 두 살인가 많을 텐데 너무 그러는 거 아냐. 서로 예의는 지켜야지.”

때 아닌 잔소리 폭격에 어리둥절해진 여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뭘 어쨌다고? 억울함에 어깨를 으쓱이자 정훈은 더욱 더 어이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올해 초에 니가 저 사람 쥐 잡듯이 잡은 적 있었잖아. 기억 안 나?”

“…누군데?”

“와, 이 자식 이거…. 설 주임이잖아. 윤 책임님네.”

“…….”

“1월이었나 2월이었나, 장기 팀 협동 TF 막바지에 엎어졌을 때 설 주임이 파일 하나 잘못 넣었다고 니가 뒤집어엎었었잖아. 윤 책임님 아직도 그때 얘기만 나오면 성여준 그놈이 이쁜 내 새끼 기 다 죽여 놨다고 이를 득득 가는데.”

“아, 음….”

여준의 눈동자가 급속도로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야기를 듣다 보니 어렴풋이 떠오르는 사건이 있었다. 2주 간 꼬박 작업한 약관이 이사회의 한 마디에 공중분해되고, 아이가 아파서 아빠를 찾고 있다는 전화가 오고, 처가에서는 당장 아이를 데려 가겠다 난리를 피우고, 그 와중에 최종 파일이 잘못 들어가 팀장에게 실컷 깨지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날이었다.

회의실을 빠져나와 옆 팀으로 달려가는 내내 어떻게 이 화를 분출할지, 얼마나 독하게 말해야 자신이 분노했다는 사실이 전달될지 생각했다. 따지고 보면 설 주임 하나만의 책임도 아닌 일이었다. 해서는 안 될 초보적인 실수지만, 바로 그 초보적인 실수를 할 수밖에 없도록 사람을 극한까지 몰아붙이는 게 회사였다.

“노려본 거 아니야. 그냥 저렇게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한테 신입들 맡겨놓은 게 어이가 없어서….”

“그게 노려본 거지. 하여간 성낸 놈은 기억도 못한다더니 그 말이 맞네. 설 주임은 너 무서워서 눈도 못 마주치는데 넌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냐.”

“아니, 난 그냥…. 뭐라 말해야 하나 고민돼서 그런 거야. 이 추위에 밖에서 기다리던 사람한테 헛짓이었다고 하기가 좀 그래서.”

심지어 신입들 앞이었고, 그들을 통솔하는 입장이었으니까. 잠시 불러내서 떼어 놓고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뭐라 넉살 좋은 말로 얼버무려야 하는지 고민하는 사이 어색한 침묵이 흐르고 말았다. 정훈은 그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그렇지. 방금 그건 내가 좀 눈치 없었나?”

“분위기 괜찮았는데 뭐. …됐고 우리도 올라가자, 춥다.”

회식 인원이 늘어갈수록 좁은 가게는 빈틈없이 벅적이기 시작했다. 여준은 상석에서 적당히 먼 자리에 앉았다. 정훈은 시작부터 상석 테이블에 들락거리며 술을 따르느라 법석을 부렸다. 높은 분들을 빨리 취하게 만든 뒤에 빠져나갈 심산인 듯했다.

“자리 돌아가면서 앉읍시다. 이참에 신입들 얼굴도 익히고요.”

신이 난 김 대리가 잔을 흔들며 외쳤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이동하는가 싶더니 눈앞으로 익숙한 얼굴이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들며 인사를 건네려던 여준이 멈칫 굳었다.

“…어.”

상대도 마찬가지인지 눈이 둥그러니 크게 뜨여 있었다. 여준은 낮은 헛기침을 하고 술병을 기울였다.

“따라 줄게요.”

“아, 감사합니다.”

두 손으로 술잔을 쥔 설 주임이 머리를 푹 수그렸다. 그때 설 주임 옆으로 앉은 윤 책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턱을 괴었다.

“이거 봐, 이거 봐. 성 선임이 또 우리 애 괴롭히잖아.”

“…아니에요….”

“설우 씨 소주 못 마셔. 맥주로 줘.”

윤 책임은 콧방귀를 뀌며 설 주임의 손에서 소주잔을 빼앗아 갔다. 여준은 순순히 병을 내리고 설 주임을 향해 할 수 있는 한 가장 나긋한 목소리를 냈다.

“말하지 그랬어요. 술 강요하는 거 아닌데.”

“아뇨, 그, 아예 못 마시는 건 아닌….”

설 주임이 어색하게 말꼬리를 흐렸다. 억지미소라도 지을 법한데 그런 기색조차 없이 딱딱한 얼굴이었다. 어지간히 내가 싫은가 보네. 여준은 속으로 씁쓸함을 삼키며 맥주병을 집어 들었다.

“여준 씨 그러는 거 아니다. 우리 설우 씨만큼 어? 일 열심히 하는 애가 어디 있다고.”

“선배는 왜 벌써 취하셨어요….”

“취한 척하는 거야. 안 그러면 너한테 서운했던 거 얘기도 못하니까.”

짐짓 장난스럽게 들리지만 묵직한 진심이 들어 있었다. 설 주임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잔뜩 난처한 얼굴이었다. 여준은 한숨을 내쉬고 옆머리를 긁적였다.

“전에는 미안했어요.”

“아뇨, 아니. 아니, 그게. 아, 진짜, 책임님….”

차분히 내뱉은 사과의 말에 설 주임의 목소리가 벌컥 커졌다. 원망스러운 듯 노려보는 시선에도 윤 책임은 아랑곳없이 어깨를 으쓱했다.

“괜히 그러시는 거예요. 제가 잘못해서 혼난 거 다 아는데 그냥 저 놀리시느라고….”

“설 주임 실수 맞고 잘못한 것도 맞지만 그렇게 벼락같이 화낼 일은 아니었어요. 내가 화풀이한 거 맞죠. 윤 책임님이 말씀하시는 것도 그 부분이고.”

“…….”

“…솔직히 말하면 그런 일 있던 것도 오늘까지 잊고 있었어요. 그래 놓고 사과해 봤자 진정성 없어 보이겠지만….”

“아니에, 아닙니다. 바쁠 때 다들 예민하고 그러니까요.”

체력도 정신력도 한계까지 깎여나가 있을 때, 아주 작은 불씨만으로 폭발하는 게 인간이고 그런 인간을 수백 명 모아 놓은 게 회사라는 장소다. 그런 만큼 바쁠 때 오간 날카로운 언행은 서로 적당히 까고 잊어주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술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높아지는 회식 자리는 그 불문율을 실천하기에 가장 적절한 링이었다.

“책임님이 놀린다고 그러시는 거예요. 정말로….”

여준은 슬그머니 고개를 기울인 채 윤 책임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갓 태어난 새끼강아지를 보는 듯한 얼굴로 설 주임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준은 절로 따라 웃을 뻔한 입술을 꾹 누르고 설 주임에게 아직 여자 친구가 없기만을 윤 책임 대신 빌어 주었다.

“그나저나 여준 씨는 오늘 같은 날 어정어정 회식 따라와도 돼? 여자 친구 안 만나?”

주제넘은 생각을 한 탓인지 순식간에 불똥이 튀었다.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옆자리 사람들의 시선까지 순간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여준은 애써 웃고 고개를 저었다.

“그냥 좀…. 요즘 그럴 상황이 아니네요.”

“왜? 여자 친구 아직 퇴원 안 했어? 그때 많이 다친 거야?”

“네, 뭐 건강 문제도 있고….”

“정말? 아직도? 어떡하니, 몇 달 되지 않았나?”

윤 책임이 안쓰러운 듯 눈썹을 찌푸렸다. 정확히는 지난달의 일이지만 여준은 토 달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이제는 예전처럼 아무래도 상관없는 말들에 일희일비하지 않는다.

“교통사고랬나? 여준 씨가 힘들었겠다.”

그러나 완전히 술 핑계에 맛들인 윤 책임은 순순히 말꼬리를 놓아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여준은 음, 하고 말끝을 늘이며 차곡차곡 정리해 뒀던 거짓 핑계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사고 자체가 크게 난 건 아닌데 원래 몸이 약한 사람이라서요. 이참에 일 쉬면서 요양 좀 하는 게 낫겠다 한 거죠.”

완전히 거짓말도 아니었기에 어렵지는 않았다. 윤 책임은 허어, 하며 입을 벌리더니 곧 묘한 미소를 띠었다.

“결혼하려나 보네?”

“그건 모르겠어요. 제 상황이 영 그렇잖아요. 쉽게 결정할 일이 아니니까.”

남의 입에 오르내리기 쉬운 포지션은 그만큼 편리한 핑곗거리도 되어 주었다. 번드르르하게 쏟아 내는 사회생활용 거짓말에도 충분히 익숙해졌다. 여준은 웃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돌렸다.

“설 주임, 안 먹어요? 입에 안 맞으면 다른 테이블로 가도 돼요.”

“지금 우리 설 주임 쫓아내는 거야?”

“왜 이러세요…. 아까부터 책임님 눈치 보느라 굳어 있는 거 가엾지도 않아요?”

“설우 씨가? 언제? 지금? 설우 씨, 내가 설우 씨 불편하게 해?”

떡밥은 식게 마련이고 새로운 화젯거리는 끝없이 생겨난다. 사실은 진심으로 관심이 있어 오가는 말도 아니라는 걸 이제는 안다. 의미 없는 잡담이 가끔은 즐겁기도 했다.

정훈이 벌인 필사의 공작에 오 전무가 먼저 나가떨어지고, 다른 상사들이 눈치껏 빠지고, 어쩌다보니 2차 장소에는 책임 이하 사원들만 남았다. 끝없이 새로운 술병과 온갖 안주거리가 들어오는 동안에도 정훈은 자리를 뜰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그가 사라질 때쯤 적당한 핑계를 붙여 함께 일어날 셈이었던 여준은 시간이 자정에 가까워진 걸 확인한 후에야 정훈에게 다가가 옆구리를 찔렀다.

“너 안 가?”

“아직 시간 괜찮아.”

“괜찮긴 뭐가 괜찮아? 금방 날짜 바뀌겠는데.”

“어? 그런, 그런가…?”

대답은 잘하면서 술병을 기울이는 손이 멈추지를 않는다. 포기하고 물러서던 여준이 멈칫했다. 재킷 안주머니에서 미약한 진동이 느껴진 탓이었다.

“…….”

슬쩍 주변의 눈이 닿지 않는 곳으로 몸을 숨기고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간결한 메시지가 눈밭의 강아지 발자국처럼 까맣게 떠올라 있었다.

「왜 이렇게 멀리 가 있어요?」

답장을 찍으려다 그대로 전화를 걸었다. 연결음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반가운 목소리가 흘러 나왔다.

- 끝났어요?

“아직, 너 어딘데? 나 데리러 왔어?”

- 뭘 데리러 와. 앤가?

내용은 퉁명스럽지만 말투는 더없이 부드러웠다. 낮게 웃은 여준이 눈을 감고 속삭였다.

“금방 나갈게.”

전파 너머의 목소리도 그만큼 낮게 흘렀다.

- 그래요.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자리로 돌아가 짐을 챙겼다. 가시게요? 여기저기서 아쉬운 듯 붙잡는 목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대충 인사를 나누고 술집을 나섰다. 카운터 쪽에 나와 있던 설 주임이 그를 발견하고 얼른 다가왔다.

“지금 가세요?”

“설 주임도 사람들 더 맛 가기 전에 빨리 빠져요. 저 주당들 사이에서 정신 멀쩡한 상태로 마지막까지 있어 봐야 좋은 꼴 못 봐요.”

장난스레 건넨 말에 설 주임이 배시시 웃었다. 순한 사람이네. 여준은 윤 책임의 마음도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하며 조심조심 계단을 내려서기 시작했다. 바람은 한층 더 매서워져 있었다. 고스란히 노출된 뺨이 금방 따끔따끔 아파 왔다.

따뜻하게 데워놓은 차에서 얌전히 기다리고 있을 얼굴을 생각하면 도저히 속도를 늦출 수가 없었다. 여준은 빙판을 벗어나자마자 고개를 숙이고 입을 꼭 다문 채 걸음을 빨리 했다.

“…선임님!”

노상주차장 간판이 보일 즈음 갑작스레 등 뒤에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돌아보니 설 주임이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고 있었다. 눈을 둥글게 뜬 여준이 얼른 그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왜 그래요?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저…. 책임님이 급하게 좀 모셔오라고, 놓고 가신 게 있다고….”

“놓고 간 거요? 내가요?”

멍하니 중얼거린 여준이 코트 안주머니를 체크했다. 지갑 있고, 핸드폰 있고, 가방 잘 가지고 나왔는데.

“뭐 착각한 거 아니에요?”

“저는 잘 모르겠는데, 얼른 쫓아가서 모셔오라고만 하셔서….”

“…….”

이 사람들이 또 무슨 장난질이지. 한숨을 내쉰 여준이 설 주임에게 손짓했다.

“그래요, 가요. 전화를 하면 되지 이 추운데 사람을 내보내고 그래.”

그제야 설 주임이 안심한 듯 미소 지었다. 시간은 어느 새 자정을 막 지나고 있었다. 주차장에서 기다리고 있을 사람이 신경 쓰였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가게 문에 다가서자마자 심상치 않은 분위기가 감돌았다. 새까맣게 불이 꺼진 주점은 쥐 죽은 듯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역시 장난질이네. 여준이 거침없이 문을 밀고 들어섰다. 뭐든 빨리 받아 주고 돌아가야 했다.

“저 왔어요. 내가 놓고 간 게 뭐….”

불퉁하게 어둠 속을 둘러보며 묻는데 어디선가 혀 꼬부라진 선창이 튀어 나왔다. 정훈의 목소리였다.

“…또 하아-루우-.”

머얼어져간다아-…. 엉망진창으로 뭉개진 합창이 뒤를 이었다. 동시에 불이 들어오더니 다 식어서 눌어붙은 오뎅탕을 든 정훈을 선두로 술에 절어 버린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머물러어 있는 청춘인 주울…. 아랐는데….”

“나이…. 나이를 잊고 가셨어요, 선임님…!”

“매일 이별하며어-! 살고-! 있구나-!”

이어 싸구려 폭죽이 터지고 종이꽃이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화약 냄새며 소음, 음정이 모조리 빗나간 노래에 금방 머리가 어지러웠다. 여준은 질색한 얼굴로 악, 소리를 내며 귀를 막았다.

“우리 성 스타! 대양화재 건립 이래 최고의 꽃미남이 서른이 됐는데…! 어떻게 축하 파티를 안 하고 넘어갈 수가 있어! 어떻게 서른 안 되겠다고 쏠랑 가 버릴 수가 있어!”

“책임 님…. 이딴 시답잖은 짓이나 하려고 사람을 오라 가라 한 거예요? 추워 죽겠는데!”

“한 곡 부르고 가, 노래하기 전엔 집에 못 가! 서른이라니, 우리 여준이가 서른이라니이…. 볼따구 뽀실해서 종종대고 돌아다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서른이라니….”

숟가락을 들이밀던 윤 책임이 고개를 숙이고 흐느끼는 시늉을 했다. 여준은 여기저기서 들러붙는 팔들을 떨쳐 내고 홱 돌아섰다.

“저 가야 돼요. 애인 기다린단 말이에요.”

“누가 기다려! 벌써 서른이 된 우리 여준이를 누가 기다려!”

“그놈의 서른 소리…. 아, 놔요. 가야 된다니까.”

좀비처럼 팔을 뻗고는 있지만 누구 하나 진심으로 붙들거나 힘을 주지는 않았기에 빠져나오는 건 어렵지 않았다. 웃으며 가게를 나선 여준이 다급히 계단을 내려섰다. 뒤따라 나온 설 주임은 미안한 듯 눈썹을 푹 가라앉혔다.

“죄송해요, 선임님. 전 정말로 뭐 놓고 가신 줄 알고….”

“어? 뭐가 미안해요. 사람들 원래 다 이러고 놀아요. 설 주임 팀에서는 이런 장난 안 해요?”

“…….”

무심코 입을 벌리던 설 주임이 이내 난처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안 할 리가 없지. 웃음을 터뜨린 여준이 가게 입구를 향해 손짓했다.

“들어가세요, 추운데.”

“네, 선임님도 조심히 가세요.”

온순하게 고개를 숙여 보이는 그에게 맞절을 하고서야 여준도 돌아섰다. 마음이 급했다. 종종대며 빨라지던 두 발은 이내 지면을 박차고 달리기 시작했다. 미적지근하게 걸려 있던 술기운이 밀려 올라와 입 안이 달았다.

차는 노상주차장의 가장 안쪽 자리에 고요하게 숨어 있었다. 안 그래도 검은 차가 창문까지 시커멓게 가려놓았으니 자칫하다간 못 보고 지나칠 판이었다. 달리기를 멈춘 여준이 비틀비틀 걸어가 조수석 창문을 두드렸다. 검은 창 너머는 고요할 뿐 대답이 없었다. 차 문을 붙들고 열어 보려 했지만 잠겨 있었다.

“사현아-.”

창에 두 손을 댄 여준이 늘어지는 목소리를 냈다.

“문 열어 줘, 추워.”

한 번 더 두드리며 애원하고 나서야 철컥,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히, 웃은 여준이 얼른 차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올라탔다.

“왜요, 아주 아침까지 있지.”

여준이 내뻗는 두 손을 피하며 사현이 퉁명스레 중얼거렸다. 여준은 굴하지 않고 그의 팔을 붙잡아 끌었다.

“중간에 붙잡혀서 뿌리치고 오느라고 그랬어.”

“어련하시겠어요.”

“웃겼어. 자정 지났으니 내가 이제 서른이래. 김광석 노래를 부르면서 무슨 파티를 해야 한다고….”

고개를 기울이던 사현의 손이 여준의 옆머리에 닿았다. 머리카락 틈에 끼어 있던 싸구려 꽃종이가 바스락대며 떨어져 내렸다.

“머리 좀….”

“…….”

“잘라야겠네요.”

어느새 귀 끝을 간지럽힐 만큼 길어 있었다. 사현의 사고 이후로 한 번도 머리를 다듬으러 가지 못했다. 여태 한 소리 듣지 않은 게 용하다고 생각하며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그래야겠다.”

“손은 왜 이리 차요.”

“밖에 추워서….”

아예 몸을 돌려 앉은 사현이 여준의 두 손을 모아 쥐었다. 따뜻하고 딱딱한 손에 감싸이자 양 뺨에 소름이 돋았다. 차가운 손과 팔목을 주무르다 어깨를, 목덜미를 매만지던 손이 셔츠 깃 사이로 쑥 들어왔다.

“아.”

여준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사현의 손이 닿는 자리마다 미지근한 거품이 이는 듯 간지러웠다. 이마를 맞대고 고개를 기울였다. 코끝이 같은 방향으로 스쳤다. 뭐야, 하며 웃음을 터뜨리기도 전에 아랫입술이 살짝 깨물리고 입이 열렸다.

“…응.”

찬 공기를 잔뜩 머금고 있던 입 안으로 밀고 들어온 혀는 따뜻하다 못해 뜨겁게 느껴졌다. 잔뜩 치켜든 턱이 바르르 떨렸다. 사현은 여준의 셔츠 허리춤을 잡고 위로 빼냈다. 판판한 배부터 날씬한 옆구리를 쥐어 문지르다 가슴까지 감싸 올리자 여준이 긴 숨을 토해 내며 입술을 떼었다.

“어디 들어가서 하자.”

붉게 달아오른 얼굴로 수줍게 뱉는 말에 사현이 픽 웃었다.

“밖에서 안 보여요.”

“아는데…. 혹시 회사 사람들 지나갈 수도 있고….”

“회사 사람이 뭐.”

과장되게 미간을 좁힌 사현이 여준의 유두를 콱 쥐었다. 아, 하며 어깨를 움츠린 여준이 옆머리를 시트에 묻다시피 한 채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우리 팀원들, 너 엄청 가녀리고 병약한 미녀인 줄 알아.”

“…….”

“그런데 이렇게 덩치 커다란 미남이 나타나면 놀랄 거 아냐.”

픽 웃은 사현이 결국 손을 떼어 냈다. 여준은 주섬주섬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안전벨트를 잡아 빼며 속삭였다.

“나 내일 출근 안 해.”

사현은 어깨만 한 번 으쓱이고 차를 출발시켰다.

***

근처 호텔은 객실 등급에 상관없이 어디나 만실이었다. 결국 주섬주섬 싸구려 무인 모텔에 차를 댔을 때는 이미 새벽 한 시가 지나 있었다. 침묵 속에 방에 들어서자마자 달큼한 디퓨저 향이 풍겼다. 꽃무늬 벽지에 커다란 침대, 월풀 욕조가 한 공간에 존재하는 기묘한 방이었다.

“나 일단, 샤워….”

잠시 말을 잊고 서 있던 여준이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러자 사현은 그제야 여준이 그 자리에 있는 것을 알았다는 듯 갑작스레 돌아보았다. 노랗고 침침한 조명 속에 검은 눈이 순간 빛났다. 여준은 그 눈에서 이제부터 일어날 일을 예감할 수 있었다. 그는 사현이 자신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벽에 밀어붙여 가두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몸에서 힘을 빼고 섰다.

“…읏….”

끝까지 밀고 들어온 혀가 입천장 안쪽의 부드러운 점막까지 닿았다.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손은 침착했지만 다리 사이로 파고든 무릎은 단단하고 무거웠다. 국부를 누르는 딱딱한 허벅지가 지나치게 자극적이었다. 여준은 간신히 발끝에 힘을 주고 선 채 까딱까딱 날아가는 이성을 붙들어 쥐었다.

“잠깐만…. 나 씻어야 돼. 그래야….”

“괜찮아요.”

“안 괜찮아…! 금방 씻을게, 잠깐…. 아, 진짜 안 된다니까….”

사현은 아랑곳없이 여준의 바지 앞섶을 풀어냈다. 능숙한 손길에 금방 드러난 맨 다리가 추웠다. 여준은 얼른 사현의 어깨를 붙든 채 간절하게 말했다.

“아침에 샤워 못했고…. 회사에서 땀도 좀 흘렸는데…. 불안해서 그래.”

“…….”

그제야 사현이 손을 멈췄다. 가만히 맞춰오는 눈동자엔 초조함이 가득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대신 먼저 한 번 빼 줄게.”

달래듯 속삭이며 사현의 바지 버클을 쥐어 풀어냈다. 검은 브리프 안에서 팽팽하게 부풀어 있던 페니스가 불뚝대며 튀어 나왔다. 바짝 일어선 굵은 핏줄이 뱀처럼 꿈틀거렸다. 안에 모인 것은 축축하고 맹목적인 욕망 그 자체였다. 오로지 제 배 속을 집어삼킬 목적으로 들썩이는 살덩이를 두 손으로 쥔 채, 여준은 기대감에 떨려 오는 입술을 꽉 물었다.

“땀 냄새 안 나요.”

여준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은 사현이 낮게 중얼거렸다. 따뜻한 숨이 쇄골까지 흩어져 오싹오싹 소름이 돋아났다.

“술 냄새는 난다…. 선배 술 마시면 엄청 단내가 나요. 알콜 향 날아가면서 체취랑 섞일 때의 냄새 있거든요. 뭔지 알아요?”

목소리는 낮고, 더없이 차분했다. 아예 여준의 턱 아래에 코끝을 댄 사현이 깊은 숨을 들이쉬었다.

“이게 씻겨 나가는 건 아까운데…. 어차피 내가 선배한테 박고 쑤시면 눈물이고 땀이고 다시 날 텐데 굳이 씻고 와야 하나?”

“…뭐래, 진짜….”

“못 참겠다는 거예요…. 나 좀 봐줘요.”

여준은 결국 웃고 말았다. 칭얼대듯 말끝을 늘리며 이마를 비벼대는 데에는 당할 재간이 없었다. 사현은 기다렸다는 듯 여준의 허리를 감아 번쩍 들어 올렸다. 여준은 어, 하며 얼른 그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허공에 뜬 발끝에서 구두며 바지가 벗겨져 바닥으로 뒹굴었다.

여준을 침대에 내려놓은 사현이 방에 비치된 바구니에서 일회용 젤과 콘돔을 꺼냈다. 그 사이 여준은 얼른 재킷과 셔츠를 벗어 곱게 내려놓았다. 침대로 돌아온 사현은 능숙한 손길로 베개를 끌어오며 손짓했다.

“엎드려요.”

여준은 순순히 그가 건넨 베개를 끌어안고 엎드렸다. 사현은 몸을 낮춰 여준의 등줄기에 키스하며 엉덩이 골 위로 젤을 펴 바르기 시작했다. 미끄러운 액체가 구멍 주변을 간지럽히자 여준의 어깨가 움찔 튀어 올랐다. 사현은 엄지로 구멍 주위를 꼼꼼히 문지르며 짓궂은 목소리를 냈다.

“시작부터 알아서 벌어지는데? 나 없을 때 뒷구멍 써서 자위했어요?”

“너는….”

발끈한 여준이 고개를 들자마자 사현이 손가락 두 개를 손마디가 닿도록 찔러 넣었다. 와르르 조여든 내벽이 단단한 손가락을 조이는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여준은 아, 하며 침대 위로 이마를 파묻었다. 구멍이 움찔대며 조여들 때마다 척추가 찌릿했다. 사현의 손끝은 안쪽 깊은 자리를 누를 듯 스치기만 하고 있었다.

“…장난치지 마….”

“뭐가요?”

느긋하게 대답한 사현이 손끝에 힘을 주어 빙글 돌렸다. 슬금 빠져나갔다가 쭉 밀어 넣을 때마다 배 속을 간지럽게 만들 뿐인 애매하고 심술궂은 자극이었다. 여준은 두 손으로 베개를 꽉 쥔 채 사현을 힐끔 돌아보았다. 사현은 그림 같은 미소를 지은 채 뻔뻔하게 어깨를 으쓱였다.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래요. 누구 씨가 손도 못 대게 한 지가 너무 오래라.”

“내가 나 좋자고 그랬어? 실밥도 안 풀고 덤비는데 피 터질까 봐 겁나서…!”

“네, 네. 그래서 실밥 풀고 왔잖아요. 나도 재활이 필요하니까 좀 참아요.”

“하여튼….”

고개를 돌린 여준이 눈을 꾹 감았다. 사현은 손가락을 빼내더니 여준의 엉덩이 양쪽을 쥐어 주무르며 양쪽으로 벌렸다. 드러난 구멍이 젖은 채 벌어졌다 오므라들길 반복하고 있었다. 마른 입술을 핥아 올린 사현이 둥근 귀두 끝을 구멍에 대고 여준의 허리를 잡아 눌렀다.

“바로 넣을게요. …아프면 말해요.”

“잠까…, 아….”

밑을 벌리고 들어오는 움직임에 여준이 반사적으로 앞으로 기었다. 그 바람에 무릎이 미끄러지고 상체가 푹 가라앉자 결과적으로는 더 도망갈 구석이 없었다. 사현은 침대에 달라붙다시피 엎드린 여준을 몸으로 짓누른 채 좁은 구멍 틈을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아, 읏, 사현…. 사현아.”

잔뜩 수축한 내벽이 빡빡하게 달라붙어 굵은 기둥을 밀어내려 요동쳤다. 사현은 아랑곳없이 안쪽을 비집어 열었다. 치켜 올린 여준이 턱이 바르르 떨렸다. 잔뜩 부푼 채 배 속을 짓누르며 밀고 들어오는 살덩이가 버거웠다.

“안 돼, 천, 읏, 천천히…. 깊어…. 앗….”

상체를 움츠린 여준이 헐떡이며 버둥거렸다. 사현은 여준의 어깨를 살짝 깨물고 핥아 올렸다.

“반도 안 들어갔어요.”

“…응, 싫어…. 너 지금 너…, 무 누르고 있어….”

“일단 끝까지 삼켜요. 그러면 선배 말대로 할게요.”

달래는 말은 달콤했다. 여준은 미심쩍은 눈을 하면서도 애써 발끝의 힘을 빼고 늘어뜨렸다. 발갛게 물든 눈가가 어느새 축축했다.

“잘했어요.”

쪽, 마른 뒷목에 입맞춤이 내리는가 싶더니 구멍을 벌린 성기가 한 순간 뿌리까지 파고들었다. 여준은 소리도 내지 못한 채 짧게 경련했다. 아랫배가 뻐근하게 눌린 감각에 저도 모르게 한 손을 배꼽 아래에 갖다 대었다.

“…-아윽.”

사현은 밑을 빈틈없이 밀착시킨 채 신음하는 여준을 내려다보았다. 젖은 눈동자가 싸구려 조명 아래 유리알처럼 번들거렸다. 눈을 꽉 감았다 떠서 고여 있던 눈물을 흘려 낸 여준이 흐느끼며 볼멘소리를 쏟아 냈다.

“흐읏, 너무 깊…, 깊다고 했잖아….”

“알아요, 미안해요.”

“말은, 매번 잘하…, 아, 앗!”

두 손으로 여준의 허리를 꽉 누른 사현이 천천히 기둥을 빼냈다. 슬슬 안을 긁으며 빠져나가는 살덩이에 여준이 온몸을 떨었다. 사현은 귀두 끝에 달라붙은 내벽을 약 올리듯 슬슬 구명 주변을 문지르더니 다음 순간 철썩 소리가 나도록 몸을 쑤셔 넣었다.

“…! 으읏, 응…!”

아예 하체를 바짝 올려 위에서 내리꽂듯 박는 몸짓이었다. 여준은 발끝을 바짝 세운 채 정신없이 시트를 그러쥐었다. 사현의 관자놀이에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손바닥에 가득 달라붙은 엉덩이 살을 움켜쥐고 기둥의 반을 빼낸 그는 이내 조금 다른 리듬으로 안을 헤집기 시작했다.

“선배, 아까부터 알아서 허리 흔들고 있네요.”

“아, 하아, 으읏, 아….”

“좀 모자라서 그러는 거죠? 쑤셔 줬으면 하는 데가…. 여기여서.”

“…아아, 아!”

한 손으로 여준의 허리를 짚은 사현이 느긋하게 한 자리를 찾아 찔렀다. 동시에 후드득 무너진 여준의 배 속이 뜨겁게 조여들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지더니 온갖 빛깔로 뒤섞이기 시작했다. 베개 아래로 달라붙은 성기가 꼿꼿이 선 채 질금질금 선액을 흘렸다.

“으응, 시, 싫어…. 그만….”

여준이 헐떡이며 도리질 쳤다. 지나친 쾌감은 고통과 닮아 있었다. 사현은 버둥거리는 여준의 무릎을 잡아 올려 똑바로 눕혔다.

“아, 하악…!”

벌어진 다리 사이며 늘어진 성기, 판판한 아랫배까지 온통 정액으로 축축했다. 사현은 사납게 웃고 여준의 두 손목을 그의 머리 양 옆으로 잡아 눌렀다.

“이렇게 많이 싼 거예요? 뒤만 몇 번 쑤셨는데?”

“…흐으, 아, 아, 너무, 빠르….”

퍽, 퍽, 추삽질이 속도를 더해갈 때마다 여준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오로지 당장의 쾌락에 탐닉하기 위한 행위였다. 사현은 길을 들이듯 내벽을 거침없이 헤집으면서도 포인트를 놓치지 않고 찔러 올렸다.

“사현, 사현아…!”

붙들린 손을 움찔대며 여준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사현은 그가 원하는 바를 어렵지 않게 눈치채고 입을 맞췄다. 입 안에 고인 침에서 알코올 향 섞인 단내가 났다. 젖은 입술이 마찰하는 소리, 구멍을 들락거리는 살덩이가 찌걱대는 소리가 좁은 공간을 빈틈없이 채웠다.

“윽…!”

여준이 몸을 크게 휘며 신음했다. 바짝 일어선 성기가 묽은 정액을 뱉어 놓자마자 구멍이 덜컥 조여들었다. 사현의 이마에 가느다란 핏줄이 일어섰다. 미약한 전류가 척추를 타고 오르는 듯한 절정감이었다.

“하아….”

젖은 성기를 빼내자 벌어진 구멍이 아쉬운 듯 벌름거렸다. 사현은 콘돔을 빼내 쓰레기통으로 던져 버리고 여준의 이마에 입 맞췄다. 여준이 기다렸다는 듯 그의 목을 끌어안고 남은 입맞춤을 쏟아 냈다.

“우와…. 가운이 끈적거려.”

샤워를 마치고 습관적으로 가운을 입으려던 여준이 질색하며 몸을 빼냈다. 결국 물기만 닦고 침대로 돌아온 그는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사현의 셔츠를 집어 입었다.

“이런 데가 다 그렇죠, 뭐.”

“진짜? 나 사실 모텔 처음 와 봐.”

“…그거야말로 진짜로요?”

“어, 그것도 무인 모텔 이런 건 완전 처음이야. 그렇구나. 이런 덴 정말 애인끼리 섹스하라고 있는 곳이네. 어메니티에 콘돔이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어.”

바구니에 아직 남아 있던 새 콘돔을 들어 올린 여준이 배시시 웃었다. 사현은 고개를 슬쩍 기울인 채 여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물었다.

“여자 친구 있었을 거 아니에요. 그런데 모텔을 한 번도 안 가 봤다고?”

“아니, 왜 또 그런 얘기를 꺼낸대? 기껏 분위기 좋았는데 하여간 초 치는 재주는 알아 줘야 돼.”

“설마 혼전순결주의였다고는 하지 말아요.”

“몰라, 목말라.”

“거기 자판기 있잖아요.”

냉장고를 찾느라 오만 서랍을 뒤적이던 여준의 손이 멈칫했다. 티포트가 든 선반 옆자리에 자그마한 미니 자판기가 있었다.

“와, 신기하다. 진짜 별 게 다 있네. 이거 어떻게 쓰는 건데?”

“비켜 봐요. 뭐 뽑아 줘요?”

“음…. 나 그거, 파란 거.”

사현이 익숙한 듯 동전을 넣고 이온음료를 뽑아 건넸다. 여준은 음료 뚜껑을 비틀어 열다 말고 은근히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는 너야말로 수상한데? 모텔 사용법에 너무 빠삭한데?”

“선배랑은 다르게 난 어디 밖에서 잘 일이 있으면 모텔 자주 갔거든요. 매번 호텔에 갈 돈이 없어서.”

“거짓말하지 마. 너 돈 많잖아.”

“그만큼 벌기 전에요. 말 돌릴 생각 말고 이실직고해 봐요. 정말 모텔 처음이에요? 괜히 내 앞에서 컨셉 잡는 거 아니고?”

음료수를 한 모금 넘긴 여준이 미간을 깊이 찌푸렸다. 사현은 이런 주제에서 묘하게 집요하게 굴 때가 있었다.

“컨셉은 또 뭐야. 너 좋으라고 내가 지금 순진한 척한다고?”

“여자 친구 없었다고 은근히 흘려 말하는 거 아니냐고요.”

“여자 친구가 없긴 왜 없어? 내가 솔로로 있게 주변에서 가만히 놔뒀을 것 같아?”

능청스레 대답하자 사현이 픽 웃었다. 그는 그대로 조그마한 자판기 앞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은 채 여준을 향해 머리를 기울였다.

“선배는 본인 얼굴이 일반인치곤 되게 괜찮은 편이라고 생각하죠?”

난데없는 질문에 여준이 끙,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아냐? 나 그 정도는 된다고 생각했는데.”

“전혀요.”

“너무하네…. 이제 다 잡은 고기라 이거지.”

“연예인이라 쳐도 엄청난 얼굴이니까 똑바로 알고 살아요. 되도 않는 말로 내 기분 주무를 생각 말고.”

“…….”

간결히 말한 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침대 위로 올라앉는 벗은 등이 누런 조명에 잘게 흔들렸다. 여준은 뒤늦게 웃음을 터뜨리며 그의 곁에 다가갔다.

“갑자기 웬 립서비스? 뭐 갖고 싶은데?”

“립서비스는 무슨….”

“연예인치고는 뭐야, 너 연예인 본 적은 있어?”

“허구한 날 티비에 나오잖아요. 누구 하나 선배보다 나은 인물 없던데요.”

덤덤히 대답하고는 있지만 영 간지러운지 눈동자가 이리저리 흔들렸다. 여준은 사현의 어깨에 바짝 달라붙으며 들고 있던 음료수 병을 쑥 내밀었다.

“얘는? 얘랑 비교하면 어때?”

음료수 라벨에는 은은한 미소를 띤 남자 배우가 프린팅되어 있었다. 사현은 사진을 힐끔 보고는 무심하게 물었다.

“이게 누군데요.”

“주정현이잖아. 박시아 아들.”

“박시아는 또 누구고…. 몰라요. 선배가 낫다니까.”

“와, 진짜 성의 없이 입에 발린 말하는 거 다 티 나거든. 아무리 그래도 내가 얘보다 낫다는 게 말이 돼? 잘 봐봐.”

“알았어요. 걔가 나은가 보죠.”

“뭐? 나에 대한 마음이 그것밖에 안 돼? 그럴 거면 연예인 팬클럽을 하지 왜 나랑 사귀어?”

입을 다문 사현이 눈을 가늘게 뜬 채 돌아보았다. 여준은 기다렸다는 듯이 배실배실 웃었다.

“…어쩌라는 거예요?”

“연애하자는 거야.”

“…….”

“결론도 없고 답도 없고 시시껄렁한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같이 시간 때우는 게 연애야. 우린 그런 과정이 없었잖아. 그러니까 이제라도 많이 하자고.”

등을 기대고 앉은 사현의 옆구리에는 아직도 붉은 기가 가시지 않은 흉터가 선명히 남아 있었다. 여준은 그를 향해 앉은 채 울퉁불퉁한 실밥 자국 위로 조심스레 손을 얹었다.

“나 한동안 악몽 꿨던 거 알아?”

“…무슨 악몽이요.”

“너 갑자기 파상풍 와서 중환자실 들어가는 꿈. 재수 털릴까 봐 어디 가서 말도 못 했어.”

“…….”

“수술할 때 의사가 감염 오면 위험하다고 그랬었거든. 웃긴 게 너 누워 있을 땐 안 그러다가 좀 나아져서 걸어 다닐 즈음 되니까 갑자기 그런 꿈을 꾸더라. 잘 낫고 있다는데도 뭐가 그렇게 불안했는지.”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시선을 가라앉힌 채 여준의 숨이 흩어지는 모양을 쫓을 뿐이었다. 마치 그 숨에 섞인 거짓에 대해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듯이. 그래서 여준도 덧붙이지 않았다. 때로는 서로가 거짓을 말하고 있음을 알면서도 침묵해야 할 때가 있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

마침내 퇴원 허가가 떨어진 날이었다. 창가에 앉아 한참을 망설이던 여준이 억지웃음을 지으며 물었다. 사현은 그 어떤 일에서도 그의 말을 거절할 의사가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였다.

‘영재…, 말이야.’

‘…….’

‘심부름센터 사람이 하는 말이…. 조폭한테 끌려간 거라 아마…. 죽느니만 못 한 꼴을 당할 거라고 그러던데.’

우물쭈물 이어 가는 말끝에 두려움이 어려 있었다. 사현은 어렵지 않게 거짓을 내뱉을 준비를 마치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여준은 그가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눈을 똑바로 맞춰왔다.

‘그냥 내가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물어보는 거야.’

뭘 어쩌려는 게 아니야. 그저 내 생이 이어져온 길, 잘못된 선택, 엇나간 인연이 어떤 결말을 맺었는지 알아야 할 것 같아. 그런 생각이 들어. 횡설수설 내뱉는 말에도 사현은 입가에 건 거짓을 지우지 않았다. 그는 여준을 거부할 수는 없었으나 속일 수는 있었다. 백 번이든 천 번이든.

‘거짓말이에요.’

‘…….’

‘요즘 그런 짓 못 해요. 시대가 어느 땐데…. 기껏해야 뺨이나 몇 대 맞고 빚 독촉 좀 심하게 당하고 그게 다겠죠. 선배가 샌님 같아 보이니까 괜히 더 오버해서 말했나 보네요.’

여준의 깨끗한 눈동자에 유성 같은 희망이 스쳤다. 그러나 눈꺼풀이 닫히고, 기다란 속눈썹이 닦고 올라온 자리엔 또다시 희미한 체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래?’

그 이상의 말은 없었고, 겨울 산에 쌓인 눈 같은 침묵만이 각자의 시선에 깃들었다.

여준은 사현의 병원에 들락거리는 동안 내내 악몽에 시달렸다. 헛소리를 하다 소스라쳐 깨어나 사현과 눈이 마주친 후로는 절대 사현 곁에서 잠들지 않으려 했다. 사현은 그의 꿈에 무엇이 나오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끔찍한 죽음을 맞은 이, 비참한 자멸을 자초한 이, 무엇보다도 아무것도 모른 채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어린아이가 차례로 그를 괴롭혔을 것이다. 애초에 남에게 손 한 번 올린 적 없이 살아온 일반인의 정신력으로 감당할 수 있는 사건들이 아니었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아무렇지 않은 척 농담을 던지고 있지만 두렵지 않을 리가 없었다.

“아까 있잖아.”

멍해진 머릿속으로 여준의 차분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여준은 사현의 팔 하나를 끌어안은 채 팔목을 매만지고 있었다.

“옆 부서…. 아니, 다른 팀 후배 하나를 회식 자리에서 봤는데.”

“남자요? 여자요?”

“…어느 쪽이면 어쩌게…. 아무튼, 후배지만 나보다 두 살이 많대. 내가 남자치고 입사를 되게 빨리 한 편이라서 보통 그렇긴 한데….”

입이 트인 여준이 조곤조곤 말을 이어 나가기 시작했다. 직속후배도 아닌 사람이 저지른 사소한 실수에 지나치게 화를 냈던 일, 그래 놓고 그 사람 자체를 잊고 있었던 일…. 별다른 반응 없이 듣고 있던 사현은 여준이 제 팔을 옆구리에 끼우다시피 끌어안은 뒤에야 덤덤하게 되물었다.

“그게 뭐 어쨌다고요? 그 사람이 실수해서 선배가 깨졌으면 화가 나는 게 당연하죠.”

“옳은 방식이 아니었다는 거지. 내가 우리 팀장 욕할 처지가 아니었어. 난 뭐 그리 특별하고 공정하고 대단한 인간이라고.”

“세상에 그런 인간이 어디 있어. 가끔 보면 당신 목 조르는 사람은 선배 본인이에요.”

“…….”

“난 또 남들 모르는 데서 뺨이라도 때렸다는 줄 알았네. 별 대단치도 않은 일을 가지고.”

싱겁게 말한 사현이 흥, 하며 잡혀 있던 팔을 빼냈다. 여준은 눈가를 살짝 찡그린 채 장난스런 목소리를 냈다.

“내가 너 같은 깡패랑 똑같은 줄 알아?”

“고상하셔서 좋겠네요. 그러게 나 같은 깡패한테 이런 걸 고민이랍시고 털어놓질 말았어야지.”

“말했잖아. 답도 없고 시시콜콜한 이야기나 같이 하고 싶은 거라고.”

“…….”

“그게 다야. 아무 의미도 없어.”

여준이 미소 띤 얼굴로 손을 내밀었다. 사현은 눈앞에 올라온 깨끗한 손바닥에 제 손을 겹쳐 올렸다. 여준은 그제야 만족한 듯 그의 어깨로 옆머리를 기댔다.

“다른 건요?”

벽에는 싸구려 디지털시계가 걸려 있었다. 붉은색의 딱딱한 숫자는 시한폭탄의 카운트다운 표시처럼 보였다.

“다른 거?”

“연애가 하고 싶다면서요. 또 뭘 해야 연애인데요?”

“음….”

눈을 감은 여준이 짐짓 진지한 태도로 입술을 꾹 물었다.

“가람 형이랑 가린이 만날래?”

“…….”

사현은 질렸다는 얼굴로 손을 빼내려 했다. 아, 잠깐잠깐. 여준은 얼른 그런 사현의 팔에 달라붙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다 들어준다며. 연애라는 건 원래 서로 친구들이랑도 만나고 그러는 거야.”

“언제 다 들어준댔어요. 사람 말을 아주 좋을 대로 듣네?”

“네가 그러라며? 남의 말은 그냥 다 내 맘에 맞게 고쳐 들으면서 살라며.”

할 말을 잃은 사현이 입을 다물었다. 여준은 승리감을 감추며 달래듯 물었다.

“왜 만나기 싫은데? 너 불편하게 할까 봐?”

“내가 불편하겠어요? 그 사람들이 불편하겠지.”

순순한 대답에 거짓이나 꾸며낸 기색이라고는 없었다. 여준은 밀려드는 안타까움을 누르고 애써 미소 지었다.

“나 같은 인간이랑 엮여 봤자 그 사람들한테 좋을 거 없고, 중간에 낀 선배한테는 더더욱 좋을 거 없어요.”

“사현아.”

“그냥 지금처럼 지내요. 그러면 되잖아요. 내가 바라는 건 그것뿐이에요.”

단호히 말을 맺은 사현이 손을 떼어 내고 돌아누웠다. 그는 절대 여준의 주변과 섞이려 하지 않았다. 회사 근처에 올 때면 무슨 일이 있어도 차 안에만 있었고, 여준의 집 근처에는 발길조차 꺼렸다. 멀쩡히 비어 있는 집을 지척에 두고 구태여 시내 호텔을 빙빙 돌며 헤맨 것도 그런 이유였다.

“알았어.”

사현의 등에 달라붙어 누운 여준이 가만히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이 얘기는 앞으로 안 할게.”

목덜미에 이마를 부비고 움푹 팬 날개뼈 사이로 입을 맞췄다. 간지러운 숨을 불어 넣자 살짝 흔들리는 기색이 느껴졌다.

“너는?”

“…또 뭐요.”

“하고 싶은 거 없어? 나랑.”

“…….”

“말해 봐. 뭐든 들어줄게. 어디 사는 깡패랑 달리 나는 한 번 뱉은 말 철회하지 않아….”

그 말에 사현이 홱 돌아보았다. 언제나 그렇듯 고요하고 희미한 시선이었다. 부드럽게 열리는 거친 입술, 많은 말을 담은 혀가 붉고 짙었다.

“그럼 아까 하던 말 마저 해 봐요. 정말 모텔 와 본 적 없어요?”

“…어우, 지겨워.”

“학생 때부터 무조건 호텔만 고집했다, 이런 썰렁한 결론은 설마 아니죠?”

“아니야, 아니라고. 몇 번을 말해야 돼. 진짜 무서워서 무슨 말을 못하겠다.”

상체를 일으킨 여준이 사현의 턱을 쥐어 약하게 흔들었다. 사현은 과장되게 고개가 돌아가는 시늉을 하면서도 여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뭐가 억울해서 이래? 궁금한 게 뭔데?”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하니까 집요하게 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뭐가. 누굴 사귀었으면 꼭 모텔 들락거려야 해? 난 별로 그런 타입 아니었어.”

사현의 미간이 움푹 패었다. 가늘어진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여준은 하이고, 한숨을 내쉬며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뭐라고 해야 하나, 별로 재미를 몰랐어. 아니, 재미라고 하니까 말이 이상한데…. 굳이 이런…. 방 잡아가면서까지 그러고 싶지 않았어. 우리 집 자체가 되게 보수적인 분위기기도 했고, 그리고 음….”

“…….”

“그냥…. 잘 없었어. 그렇게 살 부대끼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이.”

마른 입술을 핥은 여준이 시선을 돌렸다. 사현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일 뿐 대답이 없었다.

“…아무튼 그랬다고. 진짜 별 소릴 다 하게 만드네. 넌 가끔 이상한 데서 끈질기게 굴더라.”

“깡패 새끼 하는 짓이 다 그렇죠, 뭐.”

“어련하시겠어….”

여준이 붉어진 뺨에 대고 손부채질을 했다. 사현은 말없이 여준의 허리를 감고 그의 옆구리에 이마를 묻었다. 셔츠 아래로 들어온 손이 척추 뼈마디를 헤아리듯 등을 짚어 올렸다.

“…또 하자고?”

“선배랑 살 부대끼고 싶어서요.”

“내 참….”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을 걸. 여준은 눈을 감고 천천히 몸을 뉘였다. 따뜻하고 단단한 손, 어리고 찰흙 같던 피부는 오랫동안 다치고 굳은살에 덮여 흔적조차 남지 않았다. 지문이 닳아버려 까끌한 손끝이 빈틈없이 달라붙을 때면 힘을 잔뜩 모아 둔 맹수의 발끝에 닿는 기분이 들었다. 언제 날카로운 발톱이 튀어 나올지 몰라 두렵고 소름이 돋았다.

그래서 잊을 수 있었다. 말초적 쾌감과 적나라한 언어 사이에서 현실은 쉽게 잊히고 지워졌으며 악몽은 사치스럽게 여겨졌다. 다리 사이를 파고드는 타인의 살에 취해 열이 오를 때면 머릿속 구석구석 더께로 얹힌 감정의 찌꺼기들이 하나씩 증발되어 사라지는 듯했다.

“…아.”

긴 숨을 토한 여준의 고개가 꺼떡 뒤로 넘어갔다. 어지러운 무늬로 뒤덮인 천장이 흐릿하게 멀어졌다 덜컥 다가오길 반복했다. 감은 눈이 파르르 떨렸다. 불안은 오로지 꿈에 있었다.

***

꿈속의 아이는 갓 태어난 모습 같기도 했고, 이제 막 다섯 살이 된 모습 같기도 했고, 이미 다 커서 품을 떠날 준비가 된 모습 같기도 했다. 동그란 눈에 차갑고 촘촘한 원망이 빈틈없이 어려 있었다. 자그마한 입술이 단호하게 벌어지더니 유치가 듬성듬성 빠진 잇새로 또렷한 말이 흘러 나왔다. 쏟아지는 언어는 여준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잔인하고 날카로운 비난이었다.

여준은 귀를 막지도, 눈을 돌리지도, 걸음을 멈추지도 못한 채 그런 아이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꿈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죄악감은 그토록 얕고 질었다. 아이는 마침내 여준을 등지고 달리기 시작했다. 여준은 그제야 아이를 부르며 따라 달렸다. 아니야, 가지 마. 그렇게 달려가면 위험해….

“여준아. …여준아, 일어나.”

어깨를 잡아 흔드는 손에 여준이 번쩍 눈을 떴다. 동시에 등줄기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손끝을 말아 쥐는 순간 참고 있던 숨이 터졌다. 하아, 덜컥 튀어 오르다 그대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린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여준의 팔을 쥐고 있었다.

“땀 좀 봐…. 무슨 꿈을 꿨길래 이래?”

“…….”

“안 좋아 보여. 괜찮은 거야?”

일어나 앉은 여준이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이삿짐 박스가 군데군데 쌓인 거실은 황량하기 짝이 없었다. 이마를 문지르며 앉아 있자니 금방 한기가 들었다. 가린은 한숨 쉬며 담요를 끌어다 여준의 어깨에 둘러 주었다.

“아….”

뒤늦게 조금씩 정신이 들었다. 이사 준비를 하던 중에 잠깐 소파에 앉았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가린은 제 얼굴을 문지르는 여준을 보다 조심스레 말했다.

“지오 데리고 왔더니 네가 자길래 깨우려다가 담요만 덮어 주고 그냥 뒀거든. 그때 깨울 걸 그랬나 보다.”

“아니, 아냐…. 고마워. 지오는?”

“여자 친구한테 줄 그림 그릴 거니까 보지 말라던데. 어린이집 졸업하면 이제 못 본다고 했더니 자기 얼굴을 그려서 줘야겠대.”

“…….”

조그만 게 벌써부터 여자 친구는 무슨…. 바람 빠지듯 웃은 여준이 몸을 일으켰다. 발끝에 걸린 박스를 밀어 치우는 그의 등에 대고 가린이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데 갑자기 웬 이사야? 민가람한테 너 이사한다고 듣긴 했는데 자세한 얘기를 안 해 줬어.”

“형도 자세한 거 몰라. 말 그대로 갑자기 이렇게 됐거든. 애초에 이 집 명의가 은아 아버지 거라서.”

“…그랬어?”

“응, 은아가 세입자인 걸로 처리를 해 놨더라고. 혹시 얼마 못 가 이혼이라도 하면 나한테 뺏길까봐 그랬던 거겠지.”

“…….”

“원래 은아 죽었을 때 한 번 이사하려고 했었어. 그땐 지오 학군 얘기하면서 못 하게 막더니…. 갑자기 세 주든지 팔아야겠다면서 다른 집 구해 주겠다더라.”

수화기 너머 유남복은 잔뜩 침울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큰돈이 필요해진 사정을 물어 주길 바라는 기색이었지만 여준은 군말 없이 그의 말대로 하겠다 통보하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무엇도 궁금하지 않았고, 어떤 식으로든 엮이고 싶지 않았다.

“그럼 네 장인…, 아, 아니…. 은아 씨 아버지가 구해 주는 집으로 가는 거야?”

“아니, 그래서야 무슨 의미가 있어. O동에 있는 부모님 아파트로 들어가기로 했어.”

“…아, 그러네. 그 집이 있었지.”

“몰랐는데 지금 그 주변 시가가 엄청나게 뛴 상태래. 배꼽보다 큰 상속세 무느니 기한 좀 잡고 증여하는 걸로 처리하자고 하셨어. 마침 세입자 계약 기간 끝나서 다행이었지.”

여준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무렵, 부모님 두 분이 큰마음 먹고 구입한 신축 아파트였다. 여준은 그 집에서 결혼 전까지 살았다. 학창시절의 대부분을 보낸 곳이고, 다른 추억도 많지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언제나 노을 지는 거실에 앉아 있던 사현의 옆모습이었다.

“…근데 여준아. 너 은아 씨 집에서 받은 거 다 돌려줘도 괜찮겠어? 그도 그럴 게 지오는….”

집 안의 가구 역시 모조리 은아가 채워 넣은 물건이었다. 가지고 나갈 것은 지오의 가구와 여준의 물건 정도였다. 1톤 트럭 하나로 해결되는 단출한 이사였다. 여준은 몇 번 써 본 적도 없는 캡슐커피머신의 전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한 사정은 모르겠는데 갑자기 큰돈 필요한 일이 생긴 것 같아. 원래 하는 일이 돈 굴려서 불리는 거였으니 어느 날 갑자기 빚더미에 앉아도 이상할 건 없지.”

“그래? 많이 안 좋대?”

“쌓아 놓은 게 있는데 당장 위험할 정도는 아닐 거야. 그래도 이쯤에서 내가 받은 거라도 깨끗하게 털고 연 끊는 게 나을 것 같아. 어차피 언젠가는 지오한테 떨어질 재산인데 뭐.”

찬장을 열고 무심코 집어든 컵은 은아가 아끼던 앤티크 식기였다. 고민하다 그대로 내려놓은 여준이 아래 찬장에 있던 다른 머그컵을 꺼냈다.

“너는 괜찮아?”

다가와 컵을 빼앗아 든 가린이 물었다. 여준은 질문의 의미를 모르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나? 뭐가?”

“불안하지 않냐고.”

“글쎄…. 근데 이 캡슐 적어도 2년은 지난 건데 먹어도 되나?”

여준이 캡슐 트레이를 들어 말을 돌렸다. 가린은 한숨 쉬며 어깨를 으쓱였다.

“밀봉된 거니까 괜찮지 않을까?”

“먹지 말자. 믹스도 있어.”

물론 그쪽도 오래되기는 마찬가지였다. 먼지 쌓인 찬장을 뒤지느라 부스럭대는 소리만 한동안 휑한 집 안을 울렸다. 개수대에 기대 선 가린은 착잡한 표정으로 아이의 방문을 한 번 곁눈질했다.

“지오가 나중에 너 원망하면 어쩔 거야?”

돌려 묻는 말을 모르는 척하는 데에는 직구밖에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여준의 손이 멈칫했다. 가린은 마른침을 삼키고 한층 더 목소리를 낮췄다.

“당연히 너로서는 그 여자한테 억울한 부분밖에 없는 거 알아. 그런데…. 그렇다 해도, 결국 지오 입장에선…. 임사현 씨는 자기 엄마 죽인 사람이고 너는 그런 임사현 씨랑…. 게다가 사실은 자기 친아빠도 아니라고 하면….”

“…….”

“…여준아. 나는 네가 걱정되는 거야. 그렇게 네 몫 다 내려놓고 정 붙여서 애면글면 키워 놨는데 그런 상황이 오면 네가 감당할 수 있겠어? 견딜 자신 있어?”

가린을 빤히 바라보던 여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무겁지 않은 침묵이 흐르고, 마침내 손끝을 들어 올린 그가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그거다.”

“응?”

“그거였나 보네. 아, 나는 뭐 때문에 애가 쪼그라들어 있나 했어.”

입가에는 개운한 미소마저 번져 있었다. 예상치 못한 반응에 가린은 영문을 몰라 눈썹을 찌푸렸다.

“지금 무슨 소리….”

“이모!”

대화는 아이의 방문이 벌컥 열리면서 끊겼다. 아이는 한 손에 크레파스와 도화지를 든 채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이모! 이모, 이모!”

“이모 닳겠다, 지오야.”

“내 이름 써 줘! 소정이 이름도 써 줘.”

“…왜 소정이야? 서연이는 어디 가고?”

어린이집에서 한참 붙어 다니던 여자아이와는 전혀 다른 이름에 여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아이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식탁에 도화지를 올려놓았다.

“어어, 이렇게 써 줘. ‘소정이를 사랑하는 지오가.’ 그리고 아빠 핸드폰 번호도 써 줘. 그리로 전화하라구.”

“니네 아빠는 하루 종일 회사에 있는데? 차라리 이모 번호를 쓰자.”

“그래! 그래도 돼.”

“…아니, 그러면 안 되지….”

그래 봐야 가린도 아이도 여준의 의견에는 관심이 없었다. 마주 보고 앉은 채 새처럼 꺅꺅대며 그림편지를 완성해가는 모양은 그저 해맑고 즐거워 보였다. 여준은 아이가 그려 놓은 의미 모를 그림을 바라보다 느릿하게 물었다.

“지오, 핸드폰 사 줄까?”

그 말에 지오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크게 뜨인 눈이 쏟아질 듯 반짝거렸다. 당장 이의를 제기한 쪽은 가린이었다.

“아니, 다섯 살짜리한테 무슨 핸드폰을 사 줘?”

“손목에 차는 애들 용 폰이 있더라고. 통화나 위치 전송 정도만 할 수 있게.”

여준이 제 손목을 들어 보이며 미소 지었다. 아이는 이미 새 물건을 손에 넣은 듯 들떠 있었다. 격렬하게 고개를 끄덕이느라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깃털처럼 팔랑거렸다.

“아빠가 쓰는 거랑 같은 건 못 사주지만 소정이랑 통화는 할 수 있어.”

“응! 사 줘, 나 그거 할래.”

“그래, 이사 마치고 사러 가자.”

신이 난 아이가 팔짝팔짝 뛰며 제 방으로 달려 들어갔다. 가린은 아이가 침대에 다이빙하는 뒷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그렇게 볼 거 없어. 쟤 내 스마트폰도 얼마나 잘 다루는데.”

“하긴…. 요즘 애들은 전화기가 원래 네모난 모양인 줄 안다고는 하더라.”

“이사 가서는 유치원 가야하고, 유치원 졸업하면 금방 학교 가고…. 그런 거 생각하면 빠른 것도 아니지, 뭐.”

많이도 키웠지. 제 팔다리가 어디 달린지도 모르는 핏덩이였는데. 여준은 미소 띤 얼굴로 아이가 흘리고 간 크레파스를 주워 들었다.

“그런 거야. 눈 잠깐 감았다 뜨면 자라 있어. 나는 내 나이도 잊고 사는데 쟤는 하루하루가 다이나믹해.”

“…….”

“네 말대로 될 수도 있겠지. 그런데 난 그게 크게 걱정되지는 않네. 뭐랄까…. 물론 나는 최대한 숨길 거고, 이왕이면 평생 동안 지오가 모르게 하고 싶지만, 알게 된다 해도 그게 지오 인생에서 그렇게…, 거대한 부분은 아닐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왜냐하면 저 애는 너무 빠르게 자라고 있잖아. 이 세상에 태어날 때 그랬듯이, 손에 잡히는 모든 걸 입으로 넣고 물기 하나 남지 않도록 빨아들여 몸피를 키우잖아. 키가 크고, 몸무게가 불고, 머리가 굳고 손가락이 여물어가는 속도가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르잖아.

“…그냥 희망사항 아냐?”

가린이 시큰둥하게 반문했다. 말투에 조금이나마 장난기가 묻어 있었다. 여준은 웃으며 시선을 돌렸다. 원래도 생활감이 없던 집이지만, 몇 개 없던 물건들을 죄 상자에 쓸어 넣고 나니 모델하우스처럼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몇 살까지 끼고 살지도 모르는 거고…. 적어도 대학은 해외로 보내고 싶어. 원래는 지오 중학교 들어갈 쯤 되면 싱가포르로 갈 셈이었는데.”

“너희 부모님한테?”

“응. 근데 이젠 그럴 수가 없으니까.”

“왜? 너한테나 지오한테나 그게 낫지 않나?”

“그냥…. 부모님한테 못할 짓이지 싶어서.”

가린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여준도 그 이상 덧붙이지 않았다. 아이가 누구의 핏줄이든 여준에게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러나 부모님에게는 그렇지 못할 것이다.

“비밀로 할 셈이야?”

한참 뒤에야 가린이 물었다.

“그래야지.”

여준은 쉽게 대답했다.

“언제까지?”

“할 수 있는 데까지.”

“그게 될까…?”

“안 되면 안 되는 대로 어쩔 수 없고. 그때 가서 생각하지, 뭐.”

“…….”

“그러니까 너랑 형도 이 문제에 대해서는 잊고 살아 주면 고맙겠는데…. 그게 마음대로 되는 일은 또 아니겠지.”

가린은 대답 없이 입가를 쓸어내렸다. 도통 납득할 수 없다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마음을 충분히 알 것 같았으므로 여준은 초조하지 않았다.

“무턱대고 하는 말이 아니야. 네가 걱정하는 부분은 나도 충분히 생각했고, 솔직히 말하면 악몽도 꿔. 지오가 나한테 별의별 욕을 다 하고 그래.”

“야, 그러면서 무슨….”

“그런데 가린아. 네 생각에 지금 지오한테 최선이 뭐야?”

“…….”

“은아 부모님에게 가는 거? 아니면 누군지도 모르는 친아버지를 찾아내는 거?”

가린이 금방 끙, 하며 고개를 숙였다. 어느 쪽이든 암울해 보였다. 유남복 부처는 곧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였으며, 은아가 한참 호스트클럽을 출입하며 만났던 남자 중에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 인물이 있을 것 같지도 않았다.

“나도 완벽한 아버지가 될 수는 없을 거야.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지오에게 있는 선택지 중 최선은 나야. 양육환경이나 정신적인 면에서 모두.”

“…….”

“그렇다면 내 불안을 이유로 그걸 지오한테서 박탈할 수는 없어. 그게…. 내가 보호자로서 져야 할 최소한의 책임 아닌가 싶어.”

아이에게 상처 줄 수 없다는 변명은 편리하겠지. 아무것도 모르고 자신을 믿고 따르는 아이를 떨어내기에 그만큼 이치에 맞는 핑계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여준은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도 지오를 사랑하니까.”

아이는 태어난 순간부터 여준의 일부였다. 물렁한 머리를 조심히 감싸 품에 안은 순간부터 뼈와 살을 나눈 생명으로 느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돌이킬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언젠가 지오가 모든 걸 알고 상처 받는 순간이 왔을 때, 그 상처가 최소한으로 끝날 수 있을 만큼 행복한 아이로 키워 주는 거 아닐까….”

“…여준아.”

“내가 상처 받을 건 안 무서워. 왜냐하면 나는…. 지금 내가 지오에게 있어 가장 최선의 선택을 했다는 믿음이 있어. 그러니까 언젠가, 너나 형이 걱정하는 최악의 사태가 온다 하더라도 나는 무너지지 않을 거야. 후회할 일이 남아 있지 않을 테니까.”

지오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여준의 말은 느리고 낮았지만 분명한 확신에 가득 차 있었다.

“그게 될 것 같지가 않아.”

가린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여준의 두 눈에 짧은 미소가 번졌다.

“그럼 너랑 형이 나를 도와줘.”

“…….”

“그런 순간이 오더라도 응원하고 지켜봐 줘.”

나의 친구. 오랜 시간을 나누었던 안식처. 여준이 내민 손을 툭 쳐내며 가린은 애써 미소 지었다.

“미워 죽겠어.”

그 외의 말은 필요치 않았다.

***

“그럼 위임 절차는 끝났고요, 지금 챙겨 드린 서류랑 임대차 계약서 가지고 시간 나실 때 세무서 방문하시면 됩니다. 사업자 등록증 나오는 대로 팩스로 보내 주시고요.”

파일을 갈무리해 건네는 직원의 손끝이 조금 떨리고 있었다. 사현은 조용히 건네는 물건을 받아 들고 고개를 까딱 숙여 보였다.

“팩스 번호는요?”

“아, 그러, 그렇지. 명함 드릴게요.”

좁은 사무실 안의 모든 시선이 한 번씩 사현의 옆얼굴을 스치고 지났다. 모자를 깊이 눌러 썼지만 흉터를 완전히 가릴 수는 없었다. 흠집 가득한 시계나 칼자국이 드문드문 새겨진 손도 마찬가지였다.

눈을 마주치는 순간 긴장하고 움츠러드는 반응이야 익숙했다. 사현은 명함까지 챙겨 파일에 끼운 뒤 돌아보지 않고 세무사 사무실을 나섰다.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도로변에 주차해 둔 차에 올라타 조수석으로 파일을 던지듯 내려놓았다. 나온 김에 세무서까지 들를 셈으로 내비게이션을 켜자마자 핸드폰이 울렸다.

「이삿짐 푸는 것 좀 도와줘」

메시지를 확인한 사현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삿짐? 그는 브레이크를 도로 올리고 여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소리예요?”

- 아, 나 오늘 이사해. 옛날에 살던 집으로.

여준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주변이 유독 시끄러웠다. 사현은 제 귀를 의심하며 멍하니 되물었다.

“…네?”

- 짐이 얼마 없어서 트럭만 한 대 불렀거든. 근데 막상 도착해서 보니까 이게 혼자서 어떻게 해 볼 게 아니네.

“아니, 잠깐만…. 그걸 왜 이제 말해요?”

- 왜? 바빠? 못 오면 어쩔 수 없고.

“아니, 가요. 가는데, 이사 얘기부터 처음 들어서 지금….”

- 미안, 미안. 갑자기 결정된 거라 나도 정신이 없었어. 주소 기억 못하지? 현관 비밀번호 같이 보낼 테니까 얼른 와.

주소를 기억 못해? 영문 모를 소리만 남기고 끊어진 전화를 한참 바라보던 사현의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들었다. O동 A아파트 105동 1501호. 딱 한 번, 단 하루였으나 한 순간도 잊어 본 적 없는 시간의 다른 이름이었다.

입구에서 벨을 눌렀지만 응답이 없었다. 고민하던 사현은 결국 여준이 보내 준 비밀번호를 누르고 안으로 들어섰다. 10년 만에 찾아온 집은 익숙한 듯 낯설었다. 으리으리하다 못해 휘황찬란해 보였던 고층 아파트는 서울 시내에서 눈만 돌리면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건물이었고, 반짝반짝 윤이 나던 시설물은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입고 먼지에 덮여 있었다. 엘리베이터는 문이 여닫힐 때마다 불안하게 삐걱거렸다.

현관 앞에서 한 번 더 벨을 눌렀다.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일부러 이러나. 아니면 어디 나간 건가. 전화를 해 볼까. 여러 가지 고민으로 망설이던 사현은 아래층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에 놀라 얼른 현관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혹시 이웃 주민과 마주치는 일이 있어서는 곤란했다.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조심스레 안으로 들어서자 햇빛이 가득 들어찬 거실이 먼저 보였다. 낡았지만 말끔한 집 안의 모든 것이 눈에 익었다. 사현은 한동안 현관에 선 채 오랜 시간을 건너 밀려든 기억을 차곡차곡 씹어 삼켰다.

“…선배.”

조용히 부르며 구두를 벗고 올라섰다. 테이프도 뜯지 않은 채 쌓여 있는 이삿짐 박스를 지나쳐 창 쪽으로 돌아서자 베이지색 소파에 모로 누운 인영이 보였다.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인 여준이 팔걸이에 머리를 대고 잠들어 있었다.

“…….”

사현은 발소리를 죽이고 그 곁에 앉았다. 마구잡이로 쏟아져 들어온 해가 반듯한 얼굴을 가로질러 흰 양탄자 같은 길을 그렸다. 하얗게 빛나는 속눈썹 위로 손을 올려 차양을 만들자 미간이 부드럽게 열린다. 그는 아예 제 몸으로 해를 가리기 위해 소파 끄트머리에 올라앉았다. 깨우지 않으려 최선을 다해 조심히 움직였으나, 그런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여준은 금방 눈을 껌뻑였다.

“…음….”

흐릿해져 있던 눈동자가 이내 사현에게 초점을 맞춰 또렷해졌다. 이어 흰 얼굴이 남아 있던 햇빛을 움켜쥐고 환히 빛났다.

“왔어?”

응석 부리듯 두 손을 뻗어 올리는 움직임이 눈부셨다. 사현은 시선을 피하며 그의 몸 위로 제 몸을 겹쳐 눌렀다. 마른 등을 감싸 쓰다듬자 품에 들어온 어깨가 바르르 떨렸다.

“아, 차거…. 밖에 추웠어?”

“아뇨.”

“그런데 왜 이렇게 손이 차….”

여준은 소름이 돋은 뺨을 사현의 어깨에 묻은 채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 바깥에서 묻혀온 겨울 공기를 가늠하듯이. 사현은 무심히 여준의 티셔츠 아래로 손을 쑥 집어넣었다. 여준은 악, 하고 몸을 뒤틀며 웃음을 터뜨렸다.

“차가워, 차가워. 엄청 차가워.”

“선배는 뜨끈뜨끈하네요. 열 있는 거 아니죠?”

“안 그래도 자면서 좀 더웠어. 아직 커튼을 못 달았더니 해가 뜨겁네.”

사현에게 매달려 몸을 일으킨 여준이 늘어져라 기지개를 켰다. 얇은 눈가가 희미하게 젖어 들었다.

“더 잘래요?”

“그러게. 간만에 좋은 꿈꾸고 있었는데 아깝다.”

“무슨 꿈이요?”

“너 놀러 왔던 날 꿈. 그날 재밌었는데.”

망설임 없이 열어젖히고 들어오는 과거의 이야기가 반가우면서도 당황스러웠다. 사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고개를 기울였다. 여준은 그런 사현에 맞춰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젖히며 장난스런 미소를 지었다.

“사현아.”

“네.”

“나는 요즘 사는 게 재밌어.”

마주친 시선이 너무 분명했기에 눈을 돌릴 수도 없었다. 사현이 멍하니 입을 다물자 여준은 두 손을 모아 내밀었다.

“손.”

“…뭐요.”

“손 달라고. 차갑잖아.”

단순한 명령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여준은 사현이 온순한 개처럼 모아 내민 두 손을 제 손바닥 사이에 감싸 쥔 채 장작에 불을 피우듯 엄지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디서 뭘 하다 왔길래 꽁꽁 얼어서 왔을까? 우리 사현이가.”

“잠이 덜 깼어요? 이상한 말투를 쓰네.”

“예뻐해 주는 거잖아. 얌전히 굴어.”

고개를 숙인 여준이 사현의 찬 손끝에 입 맞췄다. 사현은 몸을 움츠리면서도 손을 빼내지 않고 그가 하고 싶은 대로 내버려 두었다. 가까워진 동그란 정수리에서 햇빛 냄새가 났다.

“…점심은 먹었어요?”

“아침도 굶었어. 배고프다….”

“일단 뭐 좀 먹죠. 해먹을 만한 거 있어요?”

“있으면 만들 수나 있어?”

“간단한 건 할 수 있어요. 저게 냉장고예요?”

사현의 시선 끝을 따라가며 어어, 하던 여준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현은 제 손을 세게 고쳐 쥐며 이마를 묻는 여준을 가만히 바라만 보았다.

“아냐, 하지 마.”

“…안 하면요.”

“아무것도 하지 말고 그냥 있어.”

유난히 매섭고 혹독한 겨울이었다. 매일 아침마다 기록적인 한파라는 보도가 나왔다. 도대체 얼마나 더 추울 거야? 투덜대며 출근하면 텁텁하고 건조한 사무실 공기에 숨이 막혔다.

“오늘 모처럼 영상 기온이잖아. 해도 이렇게 좋고…. 이런 날에 일거리 찾아 움직이는 건 낭비야.”

“일하라고 부른 거 아니었어요?”

“누가 그래? 그냥 보고 싶어서 불렀는데.”

뭐라 받아치려던 사현이 입을 다물었다. 결론 없고 의미 없고 시시콜콜한 대화. 그저 서로의 목소리를, 숨을, 언어를 나누기 위해서만 존재하는 발화. 이런 게 연애야. 잘난 척 지껄이던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새삼스레 가슴을 흔들었다. 사현은 뱃속 어딘가가 간지러워지는 느낌을 잊기 위해 화제를 돌렸다.

“근데 이삿짐이 저게 다예요? 박스…. 다섯 개?”

“응, 저게 다야. 가구는 이 집에도 있고 쓰던 물건이랑 옷이나 가져오면 되는 거라…. 저것도 네 박스는 지오 짐이야.”

“저걸 옮기는데 트럭을 불렀어요? 나 불러서 차에 실었으면 되지.”

“나 지금 차 없어. 사야 돼.”

느릿느릿 대답한 여준이 도로 소파 위로 늘어졌다. 사현은 금방 미간을 찌푸리며 여준에게 얼굴을 가까이 했다. 자세한 설명을 뱉으라는 몸짓이었다.

“사정은 모르겠는데 은아 집이 좀 안 좋아졌나 봐. 그 집 팔든가 월세 줘야겠대서 그러라 했어. 나 타던 차도 은아가 산 거라 돌려줬고.”

“…….”

“진작 그랬어야 맞는 거지, 뭐. 이렇게 홀가분할 수가 없네.”

눈을 가물가물 깜빡이며 여준이 배시시 웃었다. 사현은 소파에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괸 채 커다란 SUV를 몰고 다니던 여준을 떠올렸다.

“같은 걸로 다시 살 거예요?”

여준에게 맞는 차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그에게는 좀 더 날씬한 세단이 어울렸다. 호기심을 담아 묻는 말에 여준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그렇게 비싼 거 못 사지. 그냥 국산 중형 정도로 하려고. 친구가 아는 딜러 있대서 내일 만나보기로 했어. 차는 필요하니까….”

“…국산?”

“응. 뭐 소나타나 K5 이런 거….”

“안 돼요.”

딱 잘라 말한 사현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여준은 의아한 얼굴로 반문했다. 뭐가?

“세단으로 바꾸는 건 그렇다 쳐도 타던 대로 아우디에서 골라요. 내가 사 줄 테니까.”

“뭐? 뭐라는 거야? 뭘 사 줘?”

“그쪽에 아는 딜러 있어요. 약속 잡아 놓을게요.”

여준이 벌떡 일어났다. 사현은 핸드폰을 빼앗으려 달려드는 손을 가볍게 피했다.

“끊어 봐. 걸지 말아봐. 야, 정신 차려, 진정해.”

“말 들어요. 차는 비싼 거 몰고 다녀야 편하다는 거 알잖아요.”

“웃기네. 아우디 끌고 다녀도 시비 걸 놈들은 다 걸더라. 나 너네 동네 갔다가 웬 어린놈들한테 쌍욕 먹은 적도 있어.”

고집스레 전화를 걸기 위해 안간힘을 쓰던 사현이 멈칫했다. 잔뜩 굳은 시선이 파리하게 번뜩였다.

“어떤 놈들요?”

“…들으면 뭐할 건데. 일단 핸드폰 내려놔. 내려놓고 나랑 얘기해.”

마침내 손을 내린 사현이 소파에 털썩 주저앉았다. 여준은 후우, 안도의 한숨을 쉬며 필사적으로 주절거렸다.

“들어봐. 이 집을 내가 상속받게 될 거야. 거기다가 외제차까지 내 명의로 넣어 버리면 세금이 너무 뛰어서 힘들어져. 돈도 돈이지만 그런 문제도….”

“그럼 내가 한 대 살 테니 선배가 끌고 다녀요.”

“…돈 좀 아끼고 살아. 너 지금 있는 돈이 평생 있을 것 같아? 꼴랑 몇 억으로 언제까지 먹고 살 수 있겠냐고. 이렇게 세상 물정 몰라서 어쩌려고 그래.”

“그럼 이것부터 말해 봐요. 누가 욕을 했는데요? 도로에서? 차는 뭐 타고 있었고 인상착의는 어땠어요?”

“아으, 귀찮아. 일어나, 가서 먹을 거 만들어. 밥이나 먹자.”

진저리를 친 여준이 두 손으로 사현의 어깨를 마구 밀기 시작했다. 사현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우선 주방으로 향했다. 그래 봤자 있는 거라곤 라면이나 레토르트식, 아이가 먹을 간식 따위뿐이었다. 사현은 라면 두 봉과 닭가슴살 캔을 늘어놓고는 냄비를 꺼내 헹궈냈다. 여준은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그의 등에 붙어 섰다.

“뭐 하게?”

“냉라면이요.”

“이 날씨에…?”

“자는데 더웠다면서요.”

단호하게 말하고 물을 올리는 움직임이 물 흐르듯 부드러웠다. 여준은 신기한 광경을 보듯 사현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너 요리 좀 해?”

“혼자 먹고 살 만큼은 해요. 항상 밖에서 때울 수도 없었으니까.”

아, 하며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보면 사현은 고등학생 때부터 혼자 살다시피 했었다.

“…아버지는? 연락 안 하고 지내?”

“죽었어요.”

“…….”

“열여덟 생일 전에 전화통화 한 번 하고 끝이었는데…. 그 뒤로 소식을 모르다가 온 게 부고였어요. 건설현장에서 크레인 올리던 게 무너져서 인부들이 다섯 명쯤 죽었다고 하더라고요. 그쪽에서 합동장례에 화장까지 다 하고 나서야 연락을 줬어요. 아들 있는 걸 아무도 몰라서 늦었다고, 유골 찾아가겠느냐고.”

여준으로서는 쉽게 상상하기도, 납득하기도 어려운 죽음이었다. 시선을 느낀 사현이 별 거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볼 거 없어요. 나는 별생각 안 했으니까.”

“아니…. 그러면 너.”

“네?”

“쭉 혼자였어?”

사현이 천천히 눈을 끔벅였다. 손에는 따다 만 캔을 든 채였다. 여준은 머뭇대며 다시 물었다.

“아무도 없었어?”

“…….”

“나 이후로…. 한 명도?”

누구도 너와 함께 있어 주지 않았어? 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여준은 그가 지내 온 삶을 어렴풋이나마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오랜 시간 동안 오롯이 혼자였으리라고는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다. 10년이란 시간을, 그 좁고 습기 찬 방에서 오직 혼자. 여준으로서는 정신이 아득해질 만큼 암울한 상상이었다.

“그렇다고 하면…. 불쌍해요?”

마저 손을 움직이며 사현이 물었다. 여준은 그의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내어 반문했다.

“그렇다고 하면 기분 나빠?”

사현은 고개를 저었다.

“나는 늘 당신이 나를 가엾게 여겨 주길 바랐어요.”

“…….”

“안타까워하며 긍휼을 베풀어 주었으면 했어요.”

“…….”

“…몰라서 물어보는 건데, 혹시 연애를 하면 동정을 구걸하는 일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아도 되나요?”

여준은 대답 대신 두 손을 뻗었다. 그대로 사현의 목을 끌어안고 뺨을 맞대었다. 겹쳐진 귓바퀴가 차가웠다. 살금살금 소름이 올라 목덜미가 간지러웠다. 사현아, 여준이 낮게 속삭이자 사현이 네, 하며 착하게 대답했다.

“그런 식으로 내 앞에서 너 자신을 검열하거나 납득하거나 용서하려 할 필요 없어. 내가 너 대신 너의 모든 걸 용인할 거야. 아무리 어둡고 비뚤어져 있다 해도 부정하거나 고치려 들지 않을 거야.”

소곤소곤 흘려 넣는 목소리가 달콤하게 젖어 들었다. 고요한 확신을 안고 뱉어 내는 밀어는 양초 심지의 불꽃과도 같았다. 불안으로 뭉친 농을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녹여내며 눈앞을 밝힌다. 사현은 밀려드는 섣불리 황홀감에 취하지 않으려 손끝에 힘을 주었다.

“너한테 그 정도는 해 줄 수 있어….”

아무리 이 삶이 비루하고 가진 게 없다 해도.

“그러니까 나에 대해서 걱정하지 마.”

“…….”

“내 삶에서 너를 지우려 하지 마.”

그것만 약속해. 그러면 가진 건 무엇이든 줄게. 다짐을 받아 내는 목소리는 물기 없이 단단하게 마모되어 있었다. 사현은 탄식하며 어깨를 무너뜨렸다. 어째서 희망이란 이토록 질고 축축하고 아름다울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오랫동안 피해왔는데, 한 번도 돌아보지 않았는데, 그 모든 시간을 무용하게 만들어 버리는 언어는 마치 바닷바람 같다. 덜컥 숨을 들이켜는 순간 우리는 소금인형이 되고 말겠지. 파도를 맞고 녹아버리더라도 마지막 순간에 손을 붙들고 있다면 기쁘게 죽을 수 있는.

양념장 하나 없이 싱겁게 만든 냉라면을 깨끗하게 비우고 거실에 누웠다. 짧은 잠에 까무룩 들었다가 깨어나길 반복하는 사이 전면창을 비추던 해는 붉고 노란 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다. 해가 저무는 속도가 너무 빨랐다. 여준은 먼지 쌓인 바닥을 더듬어 사현의 손을 찾아 쥐었다.

“무슨 생각해?”

사현은 대답이 없었다. 잠들었나 싶어 돌아보자 눈이 마주쳤다. 가늘게 뜬 눈자위가 붉고 축축해 보였다. 가지런한 눈썹, 곧게 뻗은 콧등은 맨살이 찢겼던 흔적을 고스란히 끌어안고 거칠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연 사현이 피로에 찌든 말투로 중얼거렸다.

“내일부터 주말이고, 다음 주는 설 연휴인데 세무서는 언제 가나…. 그런 생각요.”

“응? 세무서는 왜?”

“작은 사무실 하나 차리기로 했어요. 심부름센터 비슷한 거.”

여준이 두 눈을 둥글게 떴다. 심부름센터? 되묻자 사현은 음, 하며 말을 골랐다.

“불법적인 일은 아닌데, 그렇다고 완전히 건전한 일도 아닌 그런 거요.”

“아.”

“마냥 놀고먹을 수는 없잖아요. 인생이 얼마나 긴데.”

샐쭉하니 덧붙이는 말에 여준이 낮게 웃었다. 하여간 한 마디도 지고 넘어가는 법이 없지.

“선배는 무슨 생각했어요?”

“임사현은 나를 언제까지 선배라고 부르나, 그런 생각.”

“…그럼 뭐라 그래요.”

“갑자기 나한테 말도 없이 차 뽑아서 끌고 오면 환불은 할 수 있나 그것도 걱정이고.”

“…….”

“인생 참 모르겠다…? 내가 서른이 돼서 너랑 이 집 거실에 나란히 눕는 날이 올 줄 누가 알았겠어. 적어도 나는 상상도 못했어.”

“뭐 그건 나도 그러네요.”

사현이 순순히 동의했다. 맞잡은 손의 온도는 이제 거의 비슷했다. 여준은 사현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속삭였다. 생각해 보면….

“내가 예측할 수 없던 모든 일은 너한테서 나온 것 같아.”

“…….”

“나는…. 살면서 별로 궁금한 게 없었어.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마주하더라도 구태여 파헤쳐 그 내막을 알고 싶다 여긴 적도 없어. 내 삶은 항상 일정한 리듬으로 흘러가고 있었으니까…. 보지 않아도 내 생이 어떻게 마무리될지 알 것 같았어.”

말끝을 거두어 삼키며 여준이 심호흡을 했다. 그것이 평안이라 생각했다. 어떤 동요도 사건도 없이, 매일 같은 일과를 반복하며 배고프거나 춥지 않은 일상을 영위하는 것.

“…그런데 지금은 모르겠어. 도대체 어떤 삶이 이어지게 될지.”

사현이 눈동자가 미약하게 흔들렸다. -나는 요즘 사는 게 재밌어. 반짝이는 눈으로 건네 오던 의미 모를 말이 분명한 언어로 결정화되는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사현아, 너는 내가 만난 유일한 미지未知야.”

“…….”

“그래서 네가 필요해.”

그래서 너로 결정한 거야. 이 삶의 결말을 너와 함께 보기로 한 거야. 사현은 그 말에 담긴 시간의 무게에 그만 아득해졌다. 가늠할 수 없는 규모의 희열이 선사하는 멀미였다. 나무판자 한 장에 올라타 망망대해를 헤맨다 한들 이보다 어지럽지는 않을 것이다.

“선배는….”

그리하여 사현은 눈을 감는다. 이 바다에 잠겨들 날이 멀지 않았기를 바라며.

“늘 나를 죽고 싶게 만들어요.”

잡은 손을 당기자 살결의 미세한 요철이 맞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당신을 마모시키고 싶어. 잠시도 쉬지 않고 바닷바람과 파도를 맞게 하면 언젠가는 누구의 손에도 잡히지 않을 만큼 작고 둥글어지겠지. 그러면 목이 다칠 걸 겁내지 않고 삼킬 수 있을 텐데.

“그런 말은 하지 마.”

여준은 사현이 이끄는 대로 그의 감은 눈에 입술을 대었다. 아랫입술에 닿은 속눈썹이 해초처럼 간지러웠다.

“너 그런 소리 할 때마다 가슴이 너무 뛰어.”

예민하고 나약하고 사랑스러워서.

“앞으로도 가슴 뛰는 순간 있을 때마다 꼭 알려 줘요. 참고할 테니.”

넓게 편 손으로 서로의 뺨을 감쌌다. 미소를 띠어 끝이 올라선 입술이 손금을 깊이 파고든다. 그로써 오로지 숨소리와 피부의 마찰음뿐이었다. 뛰어 오른 맥이 수면을 박차고 햇빛에 부서지는 일련의 움직임, 선명하고 눈부신 생의 인력 앞에 모든 언어는 무용하고 달콤했다.

“사무실은 혼자 하게?”

가만히 잠겨 있다 보면 자칫 현실을 잊게 될 것 같았다. 여준이 멍해진 얼굴로 묻자 사현이 차분히 대답했다.

“쪽새…, 아니, 아는 사람이랑 같이요.”

“남자? 여자?”

“어느 쪽이었으면 좋겠어요?”

“어느 쪽이든 나보다 친한 사람은 아니었으면 좋겠네.”

쉽게 지나가는 시간, 눈 깜빡이면 사라지는 순간. 불안은 악몽에 희석되다 마침내 아무 의미 없는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그 사실을 알기에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올해는 연차 좀 아껴 놨다가 길게 써 봐야겠어. 너도 나한테 휴가 기간 맞춰. 네가 사장이면 그 정돈 할 수 있잖아.”

“직장인 유세 대단하네. 휴가 맞춰서 뭐하게요?”

“여행 가자.”

“…….”

“먼 데, 우연의 우연이라도 아는 사람 절대 만날 일 없을 만큼 멀고 외진 그런 데로.”

사현은 반응하지 않았다. 고개를 끄덕이는 순간 지금 들은 말이 모조리 흩어지기라도 할 것처럼. 받아내지 않은 말은 물비늘인 듯 반짝이며 귓가에 고였다. 찰랑대며 간질이는 애정에 몸이 잠기도록 내버려둔 채 그는 언젠가 꿈에서 본 사막을 떠올렸다.

“사현아.”

여준은 그의 침묵에 안달하지 않았다. 조급해할 이유가 없었다. 결말을 모르는 생, 그러나 당장 이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는 하루하루에 그를 빼곡히 채워나가면 그만이었으므로.

“같이 갈 거지?”

다짐하듯 손을 쥔 손에 살짝 힘을 줄 뿐이었다.

“네.”

온순한 복종의 말 위로 하루의 어둠이 덮였다.

손을 얽어 어깨를 겹치고 서로의 눈을 가렸다. 벌거벗은 몸이 부끄러워 빛이 들지 않는 심해로 숨어든 어린아이들처럼. 어디선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지만 대답하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해야 할 말은 오로지 이제부터 다져갈 새로운 길에 있었다.

“같이 가요.”

그리하여 어둠을 꺼리지 않았다. 안도감을 삼키려 크게 젖힌 목줄기에 긴 아가미가 돋아났다. 다른 이에게 보이지 않게 서로의 손을 덮었다. 말을 담은 손끝이 미끄러웠다. 새카만 바닥을 더듬어 뺨을 감쌌다. 입술을 맞대자 서로가 미소 짓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잠잠한 머리 위로 파도가 덮였다. 흐름이 멈춘 물 속, 어디로도 흘러가지 않는, 그리하여 윤색되거나 퇴색되지 않을 밀어로 짜인 추가 가라앉는 소리가 들렸다.

<가청주파수,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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