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가청주파수
폭발음 같은 경적이 귀를 쑤시고 들어왔다. 백미러에 비친 상향등이 엄청난 기세로 번뜩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여준은 그제야 파란불로 옮겨 간 신호등을 눈치챘다. 허둥지둥 기어를 바꾸고 액셀을 밟았지만 뒤따르던 차의 불만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끈질기게 달라붙어 상향등을 쏘아대는 기세에 눈이 아팠다. 잠깐 신호를 놓쳤다고 이렇게까지 할 일인가, 울컥 화가 치밀었지만 여준은 차를 멈추거나 창밖으로 중지 든 손을 내미는 대신 비상등 버튼을 눌렀다.
“하아….”
드디어 경적이 끊겼다. 상향등 테러도 멈추는가 싶더니 다음 신호에 걸리자마자 새빨간 형체가 여준의 차 왼쪽을 비집고 달라붙었다. 날씬한 쿠페 조수석에 타고 있던 남자는 창문을 내린 채 온갖 욕설을 지껄이기 시작했다.
“씨팔새끼야! 도로 한복판에서 쳐 잘 거면 집에 가서 니 에미 젖탱이나 빨아!”
여준은 못 들은 척 와이퍼 속도를 올렸다. 빗줄기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무작정 N동으로 차를 몰았지만 사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영재가 걸어왔던 모든 번호로 재다이얼을 돌려 봐도 마찬가지였다.
“귓구멍에 좆 박았냐, 이 새끼야! 야!”
도로는 퇴근 러시아워로 번잡했다. 이런 곳에서 설마 무슨 짓을 저지르지는 않을 터였다. 여준은 끝까지 모르는 척 전방에 집중했다. 쿠페에 타고 있던 남자들은 끈질기게 여준을 조롱하다 신호가 바뀐 후에야 자리를 떠났다.
후우, 가슴이 뻐근해지며 긴 한숨이 나왔다. 이유 모를 적의와 저열한 조롱에 대처하는 최선의 방법은 무시라는 사실을 여준은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화가 쌓이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늘은 새카맣게 어두웠다. 바깥 기온은 영상 4도까지 내려갔다. 하늘이 뚫린 듯 비가 쏟아지고 영재나 사현의 소식은 알 길이 없었다. 여준은 속도를 늦추며 차를 댈 만한 곳을 찾았다. 그러나 좁은 4차선 도로의 양쪽은 이미 빽빽하게 늘어선 차들로 만석이었다.
입술을 짓씹으며 핸드폰을 쥐었다. 통화 기록을 훑으며 아직 걸어 보지 않은 영재의 번호를 찾았다. 그러다 문득 가람이 떠올랐다. 고민하거나 지체할 시간은 없었다.
- 응, 여준아.
“…형.”
- 오늘 늦는다지 않았어? 우리 지금 지오 데리고 외식 나왔는데.
“형, 영재…. 박영재 현재 연락처 알아요? 아니면 알 만한 사람이라도요.”
안부를 물을 틈도 물론 없었다. 가람은 당황한 듯 잠시 침묵하다가 잠깐만, 하며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 무슨 일이야? 영재가 또 무슨 짓 했어?
“설명할 시간이 없어요. 당장 연락해 봐야 돼요. 뭔가…. 정말 안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아요.”
- 알았으니까 일단 진정해. …가린아, 영재 연락처 알 만한 사람 누구 없어?
- 박영재? 걔를 갑자기 왜?
흘러가는 시간이 초조해 침이 말랐다. 제발 무엇도 묻거나 궁금해하지 말고 원하는 답만 전해 줬으면 했다. 여준은 때마침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 앞에 브레이크를 밟고 선 채 핸들에 이마를 파묻었다.
“형, 제발…. 빨리요.”
- 여준아, 뭔진 모르겠지만 침착해. 연락처 알아보긴 하겠지만 시간이 걸려. 그사이에 당장 할 수 있는 건 없어?
“…….”
- 경찰에 신고한다든가, 응?
경찰…. 중얼거리던 여준의 머릿속에 퍼뜩 오만진, 세 글자가 스쳤다. 그는 어디까지 도와줄 수 있을까? 무엇을 할 수 있는 사람일까? 마음이 급해지니 생각이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뻗어 나가기 시작했다.
- 아니면 그 사람 연락해 보는 건? 내가 소개해 준 심부름센터.
“…아.”
-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보다는 도움이 될 거야. 돈 좀 들어도 괜찮으면 그쪽이….
“고마워요, 형.”
마침 보도 옆에 정차해 있던 차 한 대가 빠져나가는 것이 보였다. 여준은 망설임 없이 그 차가 빠져나간 자리로 달려들었다. 무리한 차선 변경에 여기저기서 경적이 울렸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좁은 자리를 비집고 차를 세우자마자 두 손으로 핸드폰을 붙들고 빠르게 전화번호부를 뒤졌다.
한참 동안 연결음만 울렸다. 여준은 핸들을 탁탁 치며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끊고 다시 걸어 볼까 고민하던 찰나 달칵, 하며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여보세요?
“당장 사람 하나 찾아 주실 수 있습니까?”
- 예? 여보세요?
“이름은 박영재고, 은아와 내연 관계에 있던 호스트입니다. 미리 조사해 주셨던 파일에 나와 있는 그 인물입니다.”
남자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여준은 재촉하고 싶어 꿈틀대는 혀를 잇새로 꽉 누른 채 발끝만 툭툭 내리쳤다. 한참 후에야 드디어 반가운 대답이 돌아왔다.
- 예, 한 15분이면 수배 가능한데 어떻게 해드릴까요?
“어디에 있는지, 뭘 하고 있는지 알려 주세요. 그리고 가능하다면-.”
- 저희는 직접 손대는 건 못 해요. 그런 거 하려면 사람 연결해서 써야 하는 데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들고요.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뭔가 저지르려고 하는 것 같아서 그래요. 그걸 못 하게만 막아 주셔도 됩니다. 어디로든 제가 금방 갈 테니까….”
어휴, 남자가 다 들리게 한숨을 쉬었다. 그 역시 향후 교섭을 위한 액션이란 사실 정도는 여준도 훤히 알고 있었다.
- 일단 알겠습니다. 수배부터 해 보고 다시 전화 드릴게요.
간단명료하기에 더욱 믿음직스러운 답변이었다. 미련 없이 끊어진 전화를 붙든 채 여준은 드디어 어깨를 늘어뜨렸다. 비는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앞 유리를 때리는 소리가 시끄러울 지경이었다.
기다림은 지옥처럼 길었다. 여준은 새카맣게 젖어 든 지저분한 거리를 바라보며 사현이 걸어왔을 길을 생각했다. 이유 없는 악의와 저열한 조롱으로부터 한순간도 자유롭지 못했을 삶을 떠올렸다.
그러자 언젠가 이모가 개를 잃어버렸다며 집으로 찾아왔을 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이모는 집에서만 키우던 어린 개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있을 것만 생각하면 물조차 마실 수가 없다고 했다. 어머니는 그깟 짐승이 뭐라고 미련을 떤다며 혀를 찼다. 화가 난 이모는 여준이가 없어졌다고 생각해 보라며 울었다. 어머니는 재수 없는 소리를 한다고 언성을 높이면서도 그제야 조금 알 것 같은 얼굴을 했다.
사랑이라는 건, 상대의 비참함을 견딜 수 없게 되는 마음을 일컫는지도 모른다. 매 순간 모든 생명이 다치고 꺼져가는 이 냉랭한 세상에서 단 하나, 나의 비참함을 나 대신 못 견뎌 할 누군가를 찾는 일인지도 모른다.
“아….”
사현아, 나도 못 참겠어. 이제는 견딜 수가 없어. 내가 없는 시간, 나 없는 공간에서 네가 다칠지도 모른다는 상상만으로 뱃속이 모조리 녹아내리는 것 같아.
여준은 두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차게 식은 숨을 감췄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이 고통이 사랑이라면 섣불리 숨결에 섞어 없던 마음인 듯 뱉어 놓을 수는 없었다.
***
딸그락, 청량한 소리가 울렸다. 또르르르, 바닥을 구른 탄피가 책상 밑으로 사라졌다. 사현은 한 손을 허공에 뻗고, 한 발을 내디딘 상태 그대로 굳어 있었다.
그는 깡추의 목적을 잘 알았다. 사람의 신경을 긁어 흥분하게 만들고, 이성을 잃고 덤벼드는 순간 짓누르는 것이다. 이 방식의 무서운 점은 속내를 안다고 해서 피하거나 대처할 수 없다는 점에 있었다. 깡패의 업이란 누구든 꼬투리를 잡아 넘어뜨리는 일이다. 넘어진 발목을 붙들고 버티며 다시 일어서 걷고 싶거든 뭐라도 내놓으라고 억지를 쓰는 것이다. 다리가 붙잡힌 상황이 아무리 불합리하고 억울하다 해도,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다면 요구하는 바를 들어줄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마도 깡추가 방심한 원인일 터였다. 그는 단 한 번도 실패한 적이 없었으니까. 이번에도 자신을 죽이려 달려드는 사현에게서 벗어나, 그에게 반역 혐의를 씌울 수 있을 거라 믿었을 테니까.
영원같이 느껴지는 찰나, 사현은 미니가 몸을 일으키는 것을 보았다. 산발이 되어 쏟아진 머리카락 사이로 번득이며 굴러가는 눈동자도. 그 시선 끝에 총이 있었다. 깡추가 감히 자신에게 대드는 미니에게 열이 받은 나머지 손에서 놔 버린 그의 무기가.
깡추는 아마도 이 방에 미니를 들이지 말았어야 했을 것이다. 사현을 겁먹게 할 수 없을 바에야 방해 요소는 없는 것이 좋았을 테니. 그럼에도 방에 들였고, 짓밟았고, 그녀가 무엇도 할 수 없을 거라 판단했고, 존재 자체를 무시했으며, 그 결과 소리를 지르며 눈을 부라리는 그녀에게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미니는 아마도 쏠 생각은 없었을 것이다. 애초에 총을 쏘는 방법도 몰랐던 게 틀림없었다. 그 증거로 그녀는 지금 어깨가 빠진 채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그럼에도 총은 손에서 놓지 않았다. 깡추를 향한 시선도 거두지 않았다. 벼랑 끝에 몰려 이를 드러낸 피식자의 독기가 공기를 얼려놓았다.
사현은 천천히 손을 거두었다. 미니를 향해 있던 시선을 밀어내듯 고개를 돌렸다. 그녀에게 달려가다 말고 멈춰 선 깡추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눈을 부릅뜬 채 입을 크게 벌린 얼굴이었다.
“…어.”
쉬익,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깡추가 제 목을 짚었다. 사현은 벌컥 피가 솟은 지점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턱 아래, 관통하지 못한 총알에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터진 풍선처럼 푸시식 주저앉은 깡추의 몸이 덜렁 뒤로 넘어갔다.
“…….”
깡추가 팔다리를 꿈틀대며 튀어 올랐다. 동시에 문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사현은 문고리를 꽉 눌러 쥔 채 미니를 향해 빠르게 말했다.
“변호사 구해 줄 테니 조용히 들어가. 네 상황 참작되면 길어 봐야 5년이고, 잘하면 그보다 빨리 나올 수도 있어.”
“…….”
“얌전히 형기 마치고 나와. 그럼 어디든 멀리 가서 살 기반 마련해 줄게.”
“…왜, 왜요?”
듣고만 있던 미니가 얼떨떨하게 물었다. 왜 나한테 그런 걸 해 줘요? 사현은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되물었다.
“붙들려서 보복당하는 게 낫겠어, 교도소 가서 몸 숨기는 게 낫겠어?”
“주, 죽었잖아요. 그것도 총으로 쐈잖아요. 5년이요? 턱도 없는 소리…. 무기 징역이나 안 받으면…. 씨발, 이러나저러나 내 인생 좆된 건….”
“아직 안 죽었어.”
단호하게 말한 사현이 핸드폰을 쥐었다. 119를 찍어 귀에 가져다 대는 움직임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살려 놓으면 돼. 숨만 붙은 시체로 만들면 그만이야.”
“그런,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저래 가지고 어떻게 살아요!”
“나는 알아.”
죽어 가는 사람이라면 수도 없이 봤으니까. 전화가 연결됨과 동시에 문이 열리고 쪽새가 들이닥쳤다. 숨을 몰아쉬며 사무실 안을 둘러보던 그는 곧 경악한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 사현은 우선 전화를 끊은 뒤 앞으로 튀어 나가려는 쪽새의 몸을 막아섰다.
“저 씨발년이…!”
“입 닥쳐.”
사현이 낮게 명령하자 쪽새가 멈칫했다. 사현은 그의 뒷덜미를 잡아 누른 채 명료한 목소리로 말했다.
“구급차 불러야 해. 경찰도 올 거야.”
“경찰이요? 형님! 저 쌍년이 이사님을 쐈는데 그걸 짭새 새끼들한테 줘 버리면…!”
“상황 파악 안 돼? 총 안 보여? 저거 잘못 걸리면 우리까지 싸그리 엮여 들어가.”
“…….”
“저년이 이사님 담그려고 지 혼자 구해 온 총인 거야. 그래야 우리가 살아. 무슨 뜻인지 이해됐어?”
쪽새는 못내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사현은 차분히 구급차를 불렀다. 머릿속은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침착했다.
미니는 말이 없었다. 아직까지도 꿈틀대는 깡추를 바라보며 멍하니 입을 벌릴 뿐이었다. 쪽새의 뒤를 따라 우르르 달려온 직원들은 저마다 제가 아는 가장 참신하고 강도 높은 욕을 뱉어 놓으며 안절부절못했다. 사현은 그들을 향해 천천히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임원들한테 연락 돌리고 전부 퇴근해. 전후 관계 한 번만 설명할 테니 헷갈리지 말고 전부 똑같이 진술하고, 알았어?”
“예, 형님.”
사현은 순식간에 머릿속에 떠오른 시나리오를 차근차근, 분명하게 늘어놓기 시작했다. 깡추의 처사에 불만을 품은 미니가 미리 사무실에 숨겨 놓았던 총을 들고 반격에 나섰고, 마침 깡추의 부름을 받은 쪽새가 그 장면을 가장 먼저 목격했고, 어떻게든 막아 보려 했지만 소용없었고, 참다못한 깡추가 달려들자 미니가 발포해 버렸다는 스토리였다.
진실과 거짓을 반씩 섞은 이야기를 거침없이 내뱉는 도중 창밖에서 구급차 사이렌이 울리기 시작했다. 사현은 구급대원 마중 역 겸 최초 목격자 역할로 쪽새를 보내고 돌아섰다. 미니는 빠진 어깨를 늘어뜨린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너 기반 마련해 준다는 거 거짓말 아니야.”
“…흑.”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어. 어디까지나 내 일을 쉽게 만들어 준 데 대한 보답이니까 믿어도 돼.”
코를 훌쩍이던 미니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헛된 희망에 젖은 눈이 형광등 불빛에 애처롭게 빛났다.
“고맙다.”
“…….”
“내가 할 일이었는데.”
사이렌 소리가 점차 가까워졌다. 깡추는 미동이 없었다. 불안하게 그 모양을 내려다보던 미니가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서, 성여준인가…. 나 그 사람 얘기하려고 한 거 아니에요.”
“상관없어.”
“정말이에요. 그냥, 그, 나는…. 이사님이 자꾸 나더러 프락치 엮었냐고 윽박질러서 그런 거 아니라고, 그 얘, 얘기한 건데, 듣지도 않고 나를 마, 막 때리더니 어, 어선에 팔아서 윽, 내장 다 뽑게 만, 만들어 주겠다면서….”
“…….”
“실컷 갖고 놀다가 산 채로 고깃덩이를 만들어서 물고기 밥으로 줄 거랬어요. 나, 나는 그 꼴을 당하느니 차라리 이 새끼 죽이고 나도 주, 죽으려고 그 생각에….”
허어어엉, 미니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모습을 보며 사현은 다시 한번 생각했다. 깡추는 미니를 그토록 무시해서는 안 되었다고.
“그만 울고 대답해. 내가 한 말 이해했어? 네가 뭘 해야 하는지 알겠어?”
“…네, 윽, 알, 흑, 알겠어요. 이해했어요.”
“좋아. 경찰서 가면 제일 먼저 이 번호로 변호사 불러 달라고 해. 내 이름 대면 도와줄 거야.”
사현이 명함 한 장을 꺼내 미니에게 건넸다. 미니는 떨리는 손으로 명함을 움켜쥐고 고개를 끄덕였다.
창을 두드리는 빗줄기가 굵었다. 말소리는 사라졌지만 완전한 고요는 찾아오지 않았다. 미니는 제 손에 쥔 총과 드러누운 깡추를 번갈아 보았다. 초점이 또렷해진 눈이 이내 슬쩍 휘어졌다.
“흐….”
고개를 떨어뜨린 그녀가 헛웃음을 흘렸다. 흐, 흐흐흐. 중얼대듯 뱉어 내는 웃음소리가 섬뜩했다. 사현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이제 와서 미쳐 버리면 곤란했다. 다행히 미니는 금방 그와 시선을 맞췄다.
“…아니, 아, 씨발 갑자기 웃기네…. 교도소에 설마 지 포주를 총으로 쏘고 들어온 년은 없을 거야, 그죠?”
“…….”
“씨발, 어떤 년들이 차 있든 모조리 좆밥일 게 뻔하네…. 시답잖은 년이 덤비면 대가리에 총알 박아 주겠다고 지랄해야지….”
책상에 옆머리를 기댄 그녀가 킬킬 웃었다. 사현은 한숨을 쉬고 1층에서 움직이기 시작한 엘리베이터 표시등을 바라보았다.
현장은 일사천리로 정리되었다. 깡추가 실려 나가고, 경찰이 들이닥쳐 미니를 연행했다. 미니는 별다른 저항 없이 그들을 따라갔다. 사현은 비상계단으로 빠져나와 건물 뒤쪽으로 나섰다.
건물 차양 밑에 선 채 핸드폰을 열어 보니 여준에게서 온 전화가 빼곡히 차 있었다. 마음이 울렁거렸지만 그는 우선 다른 주머니에서 선불폰을 꺼내어 변호사에게 전화를 걸었다.
“…예, 여자애가 하나 전화할 테니까 편의 좀 봐주시고, 제 중국 계좌 터서 그걸로 수감 생활 동안….”
부스럭, 발소리가 들렸다. 말을 멎은 사현이 곧바로 고개를 들었다.
“…….”
이상한 일이었다. 뒷골목이라고는 하지만 발소리 따위가 들리기엔 빗소리가 지나치게 거셌다. 천천히 눈동자를 흘려 양쪽을 확인해 봐도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가장 먼저 여준이 떠올랐다. 기분 탓이 아닐까, 현실적인 추론도 이어졌다. 그러나 여준이 굳이 몸을 숨기고 있을 이유가 없었고, 기분 탓이라기엔 피부가 따끔거릴 정도의 적의가 느껴졌다.
사현은 빠르게 통화를 끝내고 슬그머니 돌아보았다. 정문에는 이미 경찰이 빼곡하게 깔려 있었다. 상대가 누구든 여기서 소란을 피울 수는 없었다. 그는 주변을 충분히 경계하며 차가운 빗속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차박, 차박, 깊이 고인 물웅덩이는 하나하나가 우물처럼 보였다. 방심했다간 금방 머리끝까지 빠져 버릴 것 같았다. 우선은 집에 돌아가야 했다. 감춰 둔 돈을 꺼내 떠날 셈이었다. 그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누구라도 될 수 있었다.
8차선 도로를 건너 언덕을 올라가면 금방 집이었다. 사현은 주변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걸음을 빨리했다. 누군가 쫓아오고 있다는 건 확실했지만 그게 누구든 크게 염려하지는 않았다.
그때 차고 굵은 빗방울이 눈에 스미고.
“…아.”
걸음을 멈춘 사현의 시간이 순간 느리게 흘렀다.
사현이 외부의 자극을 제 나름대로 해석할 수 있는 나이가 됐을 때, N동은 이미 이런 형태로 완성된 동네였다. 따개비처럼 어둠 속에 달라붙은 낡은 주택들, 그 앞으로 질러놓은 매끈한 도로 너머에는 가지각색의 빛깔로 발광하는 건물들. 사현은 매일 언덕 가장 높은 곳에 올라 도시의 빛이 산란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럴 때면 별빛이 무수히 잠겨 든 바다를 멀리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암벽의 이끼가 된 기분이었다.
당신은 태양. 나는 가장 먼 행성의 그림자 면에 뒹구는 먼지 구덩이. 쏟아지는 빗속, 어디선가 번쩍이는 네온사인 빛이 오로라처럼 흐른다. 그렇구나, 하며 사현은 눈을 비비던 손을 내려놓았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순간 당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게 만들어진 거였어.
시야가 흐렸다. 눈을 깜빡여 고인 빗물을 털어 냈다. 골목 사이로 스며든 헤드라이트 불빛이 짧게 드리워졌다.
“…….”
불빛에 누운 그림자가 두 개라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사현은 돌아섰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어디선가 찢어지는 경적이 울렸다.
***
- 그 새끼 지금 찾을 수가 없겠는데요.
정확히 15분 만에 전화를 걸어온 남자가 말했다. 여준은 아직 돌려주지 않았던 후배의 담뱃갑을 구겨 쥔 채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 이게 온세캐시라고…. 조폭 끄나풀들이 차린 대부업체 있는데 완전 막 나가는 사채예요. 우리 사장님 놀라실까 자세한 말씀은 못 드리겠고 하여튼 진짜 악질인 새끼들이거든요.
“사채요?”
- 박영재가 여기서 돈을 해 먹고 잠수를 탔어요. 그것 때문에 어제부터 이미 수배 떴었나 봐요. 모르긴 몰라도 지금쯤 이미 잡혔을 겁니다. 대한민국 땅에 붙어 있기만 하면 이 새끼들이 못 찾을 사람 없어요.
“…….”
- 박영재가 뭔 짓 저지를까 걱정돼서 찾는다고 하셨죠? 그럴 걱정 절대 없다고 말씀드리고 싶네요. 아직 살아나 있으면 다행인데요. …아.
짧은 탄식을 내뱉은 남자가 잠시 수화기에서 멀어졌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엄지손톱을 뜯으며 눈을 꽉 감았다. 남자는 누군가와 낮게 대화를 나누더니 다시 목소리를 높였다.
- 찾았답니다. 아니, 정확히는 저희가 찾은 건 아니지만.
“예?”
- 30분 전쯤에 N동에서 어슬렁거리다가 붙잡혀 끌려가는 걸 누가 봤나 봐요. 모르긴 몰라도 사지 멀쩡히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겁니다.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는 소식이었다. 여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가 하아, 덜컥 내뱉었다. 복잡한 건 나중에 생각하면 된다. 영재의 소식을 알았으니 이제 사현을 찾아야 했다.
“저, 혹시 근처에 이런 사람 있었는지는 알 수 없을까요? 키가 크고…. 정장 차림에 얼굴에 아주 큰 흉터가 있어요.”
- 그렇게 갑자기 말씀하시면 모르죠.
“알아봐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아마 N동이나 집….”
말을 이어 가던 여준이 멈칫했다. 사현의 집. 그 집의 환풍구에 돈이 든 가방이 있다. 사현이 뭘 어쩔 셈이든 일단은 그 돈을 가지러 돌아가지 않을까? 뒤늦게 든 판단에 머릿속으로 불꽃이 튀었다.
“연락 주세요. 일단 끊겠습니다.”
- 아니, 저….
끊긴 전화를 조수석에 던져 넣은 여준이 덜컥 액셀을 밟았다. 비에 젖은 도로는 어떤 소음도 없이 그의 진입을 허락했다. 속도를 높이는 내내 등줄기가 써늘했다. 걷잡을 수 없이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구급차 같이 타고 간 놈한테서 연락이 왔는데.”
철벅, 구둣발에 밟힌 물웅덩이가 빗물을 삼키며 튀어 올랐다. 사현은 고요히 뒤돌아섰다. 검은 골프 우산을 받쳐 쓴 홍게는 흰 셔츠에 검은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막 장례식에서 나온 사람처럼.
“총알 박힌 자리가 졸라 절묘한가 봐. 경추가 뽀개진 것 같다는데?”
“그렇습니까.”
“안 놀라네. 그럴 줄 알고 있었던 양.”
“상태를 봤으니까요. 목숨이라도 건졌으니 다행이겠죠.”
“목숨 건질 건 어떻게 알아?”
“호흡이 멈춘 지 얼마 안 돼서 구급차가 왔잖습니까. 제대로 처치만 받는다면 괜찮으실 겁니다.”
사현은 차분히 대답하며 홍게를 살폈다. 한 손으로는 우산을 들고, 다른 한 손은 주머니에 꽂은 채였다. 흉기 따위를 숨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눈빛은 또렷했고 온몸을 편안히 늘어뜨린 모습이었다.
“괜찮을 거라….”
“…….”
“목숨만 붙어 있으면 그게 괜찮은 건가? 평생을 손 하나 까딱 못 해서 기저귀 차고 살아야 해도?”
그래도 살아 있어야 한다. 그래야 미니의 형기가 조금이라도 줄어들 테니까. 당연한 생각을 떠올린 사현은 느릿한 미소를 지었다. 그는 여태껏 여준 외 누군가의 안위에 대해 이토록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었다.
“차라리 아주 보내지…. 깡추 형님이 너한테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그렇게까지 했냐?”
홍게가 물었다. 평이하고 일상적인 말투였다. 사현 역시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가 쏜 게 아닙니다.”
“…….”
“제 손에 총이 들어오도록 가만히 계셨을 리가 없잖습니까.”
그게 아니라도 깡추의 의식이 돌아오면 끝날 일이었다. 고개를 숙인 홍게가 쯧, 혀를 찼다.
“그래, 알어. 확인 차 물어본 거야.”
“예.”
“넌 어디로 갈 거냐?”
어디로. 그것은 가장 황망하고 어려운 질문이었다. 그는 어디로든 갈 수 있었고, 어디로도 가고 싶지 않았다.
“멀리 가야죠.”
그래도 가야 했다.
“일단은 태국으로 건너갈까 합니다. 중국 쪽은 단속이 심해져서.”
“중국으로 갈 모양이네,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그럴 수도 있고요.”
능청스러운 대답에 홍게가 픽 웃었다. 사현은 끝까지 긴장을 풀지 않고 그의 기색을 살폈다. 홍게는 태연해 보였으나, 길을 나설 때부터 피부에 와 닿던 출처 모를 적의가 못내 마음에 걸렸다.
“사현아.”
“예.”
“넌 네가 어디 가서든 잘 살 것 같지?”
차가운 비가 뼛속까지 스며들었다. 사현은 대답 없이 홍게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우리가 다 네 짐 같고, 우리만 없었으면 아무 문제도 없었을 것 같고…. 너는 싸가지가 항상 그랬어. 나나 형님 볼 때마다 꼭 돈 없이 늙고 병든 부모 보듯이 그렇게.”
“…….”
“내가 이 시간 이후로 너를 못 본 척한다면 이유는 그것뿐이야. 넌 절대 네가 원하는 대로 못 살아.”
담담하고 부드러운 저주였다. 이어붙인 흔적을 고스란히 남긴 채 웃을 때마다 일그러지는 얼굴이 오늘따라 선명했다. 사현은 젖은 머리카락을 느릿하게 쓸어 넘겼다. 홍게는 한쪽 입꼬리를 있는 대로 올리고는 간악한 목소리를 냈다.
“그도 그럴 게 네 낯짝 좀 봐, 이 병신 새끼야.”
마음속을 읽힌 듯한 말에 사현은 하마터면 웃을 뻔했다. 다행히 홍게는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차라리 팔다리가 없는 게 낫지. 얼굴이 그래서야 어디 가서 정상적인 일을 하겠어? 인생이 얼마나 긴데, 새파랗게 어린 새끼가 그 몰골로 깡패 그만두고 뭘 하겠다고.”
마치 인정 어린 걱정처럼 들렸다. 하지만 사현은 홍게를 잘 알았다. 그는 말의 이면에 온정을 두는 사람이 아니다.
“뭣도 모르는 새끼가…. 니가 여태 좆대로 살아올 수 있었던 게 누구 덕 같아? 다 그만둬? 그만두면 니가 뭐가 되는데? 넌 새끼야, 우리 없으면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약 달고 사는 병신일 뿐이야. 심지어 면상에는 존나 큰 흉터도 있지.”
그런 네가 어디에 가서 멀쩡하게 살 수 있겠어? 뭘 믿고 가겠다는 거야? 홍게의 비난 지점은 놀랍도록 깡추와 정반대의 지점에 있었다.
그러나 사현이 꿈꾸는 것은 여준과 함께 하는 삶도, ‘정상적’인 삶도 아니었으므로 흔들릴 기조도 없었다. 그는 다만 여준의 인생에서 그 자신을, 그리고 스스로에게 달린 이 암적 존재들을 없애고 싶을 뿐이었다.
“약은 끊은 지 오래됐는데…. 새파랗게 어려서 회복도 빠르거든요.”
때문에 모든 힐난을 가소롭게 넘길 수 있었다. 홍게는 한순간 눈을 치켜떴지만 이내 어깨를 늘어뜨렸다. 사현은 지갑에서 변호사 명함 한 장을 더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이사님께 돌려드리기로 했던 돈입니다. 형님이 가셔도 찾을 수 있을 겁니다.”
“…….”
“앞으로는 직접 운용하셔야 할 테니까요.”
홍게는 미심쩍은 얼굴로 명함을 받아 들었다. 사현은 깡추와 홍게에 대해 잘 알았다. 둘 다 똑같은 쓰레기였지만 어느 한 집단을 맡아 통솔할 만한 머리는 깡추에게만 있었다. 홍게는 돈과 권력을 손에 쥐는 순간 깡추가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삽시간에 말아먹을 것이다. 그 과정만은 확인해야 했기에 지나치게 멀리 갈 수는 없었다.
“이걸 조건 없이 주겠다고?”
“말씀드렸잖아요. 이사님이 다치셨으니 형님 드릴 수밖에 없다고.”
“…….”
“필요 없으십니까?”
슬쩍, 손을 거둬들이는 시늉을 하자 홍게의 눈에 불이 붙었다. 사현은 명함이 젖지 않도록 손등을 위로 한 채 차분히 그의 반응을 기다렸다. 홍게 같은 인물을 대할 때는 먼저 조건을 걸어서는 안 된다. 머리가 나쁘고 성미가 급한 자는 언제나 타인의 말을 꼬아 들음으로써 그 자신이 멍청하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너 미니 년이랑 잤냐?”
한참 후에야 홍게가 물었다. 녹슨 머리를 열심히 굴려 도출해낸 결론이 기특하기까지 했다.
“그년 편의 봐 달라고 이러는 거야, 지금?”
“처분은 형님이 알아서 하실 문제죠. 제가 왈가왈부할 계제가 아닙니다.”
“…….”
“아니면 이사님이 회복하신 후에 논의하시면 되지 않겠습니까.”
회복할 리가 없다. 경추가 부러졌고, 5분 넘게 호흡이 멈췄다.
“그래, 뭐.”
홍게가 코웃음을 치고 명함을 받아 들었다. 사현에게 뭔가 꿍꿍이가 있음은 짐작했으나, 그 의심 하나로 놓치기엔 지나치게 달콤한 떡밥이었을 것이다.
“참, 너 윤 실장한테 영재 팔았다며?”
드디어 끝나는가 싶었던 대화가 반갑지 않은 맥을 잡고 이어졌다. 사현은 대답 대신 고개만 한 번 까딱여 보였다.
“독한 새끼. 차라리 칼빵 쑤시고 튀는 놈들이 인간적이지, 너 같은 새끼는 지옥에도 못 갈 거다. 영재는 또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윤 실장을 끌어들여?”
“박영재를 걱정하셨습니까?”
“소름이 끼친다는 거야. 넌 도대체 복수하는 것 같지가 않아. 그냥 해야 될 일이니까 하는 걸로 보여.”
틀린 말은 아니었다. 사현은 깡추나 박영재에 대해 엄청난 유감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이 저지른 모든 짓이 여준에게 어떤 의미도 없었으므로 당연한 일이었다.
깡추나 영재가 단 한 순간이라도 여준에게 유의미했다면, 그에게 털끝만 한 생채기라도 남겼다면 이미 오래전에 상황이 정리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현은 이미 보았다. 쌓인 피로와 오해를 걷어내자 바늘구멍만 한 흉터조차 없이 고스란히 남아 있던 10대의 여준을.
“그게 중요합니까?”
당장 손에 넣은 이 행운보다도? 대화의 끝을 향해 가는 질문에 홍게는 군침을 삼켰다.
“…안 중요하지.”
홍게가 씩 웃었다. 사현은 그의 파멸이 너무 이르지도, 너무 늦지도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숙여 보였다.
“우산 가져갈래?”
“괜찮습니다.”
“그래, 해 본 소리야.”
킬킬대는 홍게에게서 등을 돌린 사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빗줄기가 조금 잦아든 것도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차가운 비였다. 손끝에 이미 감각이 없었다.
걸음을 옮길 때마다 몸에서 무언가 떨어져 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어깨에, 팔에, 다리에 매달려 있던 시커멓고 무거운 무언가가. 해방감이 느껴졌다. 이제 다 되어간다. 조금만 더 가면 목적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고.
골목을 빠져나오자 도로 너머로 작은 섬 같은 주택가가 보였다. 횡단보도는 마침 파란불로 바뀌었다. 사현은 느릿한 걸음으로 희고 검은 징검다리를 건넜다. 건너편에서 오던 여자는 우산 너머로 사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흠칫하며 물러섰다. 익숙한 일이었다.
남은 일은 많지 않았다. 집에 가서 약간의 돈과 미리 만들어둔 위조여권을 챙기고, 정보원에게 배편을 수배해 달라 연락하면 끝이었다. 여준에게는 따로 돈을 찾아가라는 메시지를 보낼 참이었다. 여준이 그 말을 따라줄지 말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대로 헤어져 두 번 다시 만나지 않는다는 결론만은 확고했으므로.
성여준과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정상적으로 살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럼 대체 뭔데? 깡추와 홍게의 지당한 질문은 사현의 발목을 잡지 못했다. 그는 기다릴 수 있었다.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날 때까지. 여준과 그 자신의 삶이 똑같이 노쇠하고 빛바래어 그 누구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초라해질 때까지.
살아만 있다면. 어딘가에서 숨을 이어가며 언젠가의 재회를 말할 수만 있다면. 그토록 어둡고 상처 난 이별조차 건너와 지금이었으니까, 미래가 어떤 형태로 일그러져 있다 한들 당신은 또 그토록….
“…….”
생각이 멈췄다. 빗소리가 끊긴 듯했다.
사현은 멈춰 섰다. 길을 건너 골목 초입이었다. 도시의 빛이 끊기고, 가장 높은 곳에 사는 가장 낮은 자들의 탄식이 시작되는 그림자의 시작선.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고, 오가는 차들의 소음이 컸고, 머릿속은 잡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럼에도 평소의 사현이었다면 일이 벌어지기 전에 어떤 대처라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홍게를 마주치기 전 느꼈던 악의를 염두에 두고 약간이라도 긴장하고 있었다면.
‘그나저나 형님, 전에 그 대학생 기억하십니까? 한준호라고, 민생당 사주 받고 프락치 짓 했던 새끼요.’
혹은 쪽새의 경고를 한 귀로 흘려듣지 않았다면.
‘저희가 한 번 더 손봐 주러 갔었는데 재수 없게 그 새끼 팔이 기계에 끼어서…. 팔꿈치 아래로 절단을 했다더라고요.’
하지만 그 순간, 사현은 체크리스트를 한꺼번에 해제한 달력처럼 텅 비어 있었다. 옆구리를 파고든 날붙이가 배 속을 찢도록 내버려 둘 수밖에 없던 것은 그래서였다. 턱, 흔들린 몸을 바로 세우려 발끝에 힘을 싣자마자 몸을 세로로 쪼개는 듯한 통증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헉….”
사현이 비틀대며 몸에 박힌 칼을 내려다보았다. 기다란 식칼 손잡이를 쥐고 있는 손이 벌벌 떨리는 게 보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잘려나간 오른손 대신 익숙지 않은 왼손을 써야 했으니까. 한준호는 제 왼손과 식칼 손잡이를 청테이프로 동여매 놓은 채였다.
“…흐으, 허.”
한준호가 짓눌린 숨소리를 냈다. 얼굴이 새카맣게 말라 있었다. 늘어진 오른팔은 과연 팔꿈치 아래가 잘려나가고 없었다. 사현은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악문 채 전신을 쥐어짜는 고통을 있는 힘껏 삭였다.
“후우….”
아이러니하게도 차가운 공기와 얼음장 같은 비가 도움이 되었다. 그는 감각이 거의 사라진 손을 들어 둘둘 말린 청테이프 위로 얹어 놓았다. 놀란 한준호의 어깨가 툭 튀어 올랐다.
“…어쩔 거야. 계속 쑤실 거야, 뽑을 거야?”
사현이 갈라진 목소리로 물었다. 한준호는 얼굴을 한껏 일그러뜨리더니 이내 턱이 딱딱 부딪치도록 떨기 시작했다.
“윽…, 흑, 히발, 이 히발핵기….”
앞니가 모조리 사라진 입 안이 시커멓게 비어 있었다. 짓뭉개진 발음을 듣고 있자니 차차 기억이 났다. 다 부서져 가는 재개발 지역 셋방에서 이가 빠져 떨고 있던 얼굴.
‘병원에서 사라졌다고 하더라고요. 허튼짓 하려는 건 아닌가 싶어서….’
쪽새는 분명히 경고했었고 사현은 금방 잊었다. 한준호가 자신을 위협할 수 있을 만한 인물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깡추가 미니를 두고 그랬듯이.
“질질 짜지 말고 결정해. 마저 담그든지 꺼….”
덜컥, 헛숨이 돌았다. 기침을 뱉을 때마다 배 속을 달군 쇠막대로 쑤시는 것 같았다. 고개를 숙인 사현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흘렸다. 한준호는 당장이라도 도망치고 싶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러려면 사현의 몸에서 칼을 뽑아야 했다.
“…어쩔 거냐고.”
“어윽, 흑…. 흐윽.”
“뽑을 거면 최대한…. 찌른 모양 그대로 빼. 괜히 영화에서 본 거 흉내 낸다고 비틀어대다가 잘못 걸리면 안 뽑힌다.”
“우욱, 윽, 끅….”
“정신 좀 차려. 이미 저질렀으면 수습할 생각을 해야지.”
사현이 청테이프 위를 툭툭 두드렸다. 뼈가 갈리는 고통에 이미 정신적인 한계가 오고 있었다. 설상가상 칼이 뽑혀 나가고 나면 피가 줄줄 쏟아질 게 뻔했다.
조금만 더 걸어가면 집인데 재수도 없지. 사현은 헛웃음을 지으며 손끝에 힘을 주었다. 한준호는 비명인지 신음인지 구분할 수 없는 소리를 마구잡이로 내뱉기 시작했다.
***
대문은 언제나처럼 열려 있었다. 계단은 새카만 어둠에 잠겨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았다. 여준은 접은 우산을 옆구리에 낀 채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우물 같은 계단 아래로 내려섰다.
“…….”
어둡고 미끄러워 걸음 하나하나가 위태로웠다. 잡을 만한 난간도 없었다. 비여서 망정이지, 눈이었다면 얼마나 위험할까. 어떻게 이런 계단을 매일같이 오르내리며 살았을까…. 잡념이 서린 발끝에서 긴장이 빠져 나갔다. 무릎이 풀썩 꺾이고 중심을 잃은 것은 순식간이었다.
쿵, 어깨부터 고꾸라진 여준이 그대로 현관문까지 굴러떨어졌다. 등허리가 철문에 처박히자 눈앞으로 불이 번쩍였다. 웅크린 채 한참을 꼼짝하지 못하던 그는 계단 중간에 떨어진 핸드폰이 깜박이는 모양을 보고서야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윽….”
손으로 바닥을 짚자마자 온몸이 욱신거렸다. 살갗이 까진 손등이 말도 못 하게 쓰라렸다. 여준은 핸드폰을 포기하고 눈앞의 현관문을 비틀어 열었다. 역시 잠겨 있지 않았다.
남은 힘을 모조리 짜내어 불을 켰다. 텅 빈 집 안은 언제나 그랬듯 차갑고 휑했다. 여준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섰다. 비척대며 벽을 짚은 손끝에서 부러져 덜렁대는 손톱이 그제야 눈에 보였다.
“아….”
눈을 질끈 감아 외면하고 주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올려다본 천장은 벽지가 울퉁불퉁하게 붙은 채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미 돈을 챙겨서 떠났다면 굳이 천장을 원상 복구하고 가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사현이 아직 들르지 않은 것은 확실했다.
“어디 있는 거야, 그럼….”
중얼거린 여준이 다시 집 밖으로 나섰다. 빗줄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우산 없이 견디기엔 촘촘한 비였다. 열어젖힌 문 너머로 새어 나온 형광등 빛에 의지해 기다시피 계단을 올랐다. 중간에 회수한 핸드폰은 액정이 완전히 깨져 있었다. 아무리 버튼을 눌러도 반응하지 않았다. 원래도 여러 번 떨어뜨려 멀쩡한 물건은 아니었지만 이번에야말로 완전히 맛이 가버린 것 같았다.
“씨발….”
욕설을 지껄이며 고철이 되어 버린 핸드폰을 바닥으로 집어 던졌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무엇이라도 걸 수 있었다. 누군가 사현을 데려다 놓을 테니 무얼 주겠느냐 묻는다면, 여준은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 주겠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한 번 움직인 마음에 생겨난 집착이 두려웠다. 그 집착을 버릴 마음조차 들지 않는 스스로가 무서웠다.
열린 대문 앞에 쭈그려 앉은 채 한참이나 눈물을 참았다. 온몸이 아파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식은땀이 흐를 정도의 통증이 자꾸만 수렁으로 빠지는 마음을 건져 올려주었다.
“…….”
이런 마음으로 이 집을 떠나던 순간이 있었다. 입술에서는 피가 흐르고, 팔목에는 멍이 들고, 옷은 이곳저곳 뜯겨 엉망이 된 채로. 어떻게 집까지 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망가진 옷이나 얼굴의 상처를 어떻게 변명했는지도. 그저 잊으려 했다. 일어난 일을, 짓눌린 감각을, 절망스러운 무력감을.
사현의 상태가 이상하다는 건 알고 있었다. 말을 맺지 못하고 쓰러지는 모습에 덜컥 겁도 났었다. 그러나 돌아보지 않고 도망쳤다. 덮어 놓고 들여다보지 않으려 했다.
그래도 말할 수 있을까? 사현에 대한 일말의 불신조차 없었다고. 떠도는 소문들에 전혀 휘둘리지 않았다고.
“흣….”
어쩌면 사현도 다 알지 않았을까? 이 얕고 가소로운 위선을.
그래서 떠나려는 게 아닐까….
이를 꽉 다문 여준이 머리를 감싸 쥐었다. 심호흡을 하고 무릎에 힘을 주었다. 주저앉아 자학할 때가 아니었다. 우선 사현부터 찾아야 했다. 모든 것은 그다음에 생각할 문제였다.
망가진 핸드폰을 주워 주머니에 넣고 일어섰다. 바로 가람의 집으로 달려가 도움을 청할 셈이었다. 필요하다면 유남복 부부에게라도 무릎을 꿇을 각오가 되어 있었다. 그 간절한 기원 하나로 몸을 일으키고 고개를 돌린 순간이었다.
“…….”
여준에게 만약 종교가 있었다면, 그는 다시 한번 신의 종으로 살아갈 것은 맹세했을 것이다.
“…어….”
헛것이 아닌가 싶어 눈을 비볐다. 그러나 멀리, 꺾어진 골목 틈으로 비틀대며 나타난 인영은 다시 봐도 사현이었다.
“어어….”
어슴푸레한 가로등 불빛이 새카만 어깨 위로 떨어지고 있었다. 사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손으로 반대쪽 옆구리를 감싸 짚은 모습이었다. 다쳤나? 번뜩인 생각에 상체부터 앞으로 쏠렸다. 여준은 넘어질 뻔한 몸을 간신히 일으켜 달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다친 손이 쓰리고 저렸다.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가 영원인 듯 느껴졌다. 사현은 아직 여준의 존재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걸음걸이만으로도 힘에 부쳐 보였다.
“…사현아.”
여준이 입을 열었다. 굳은 혀를 움직여 쏘아낸 목소리는 초라하고 힘이 없었다.
“사현아.”
그럼에도 사현은 고개를 들었다.
“…….”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로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한순간 빛이 돌았던 시선은 이내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여준은 천천히 사현에게 다가가며 손을 뻗었다. 그러면서도 그가 다친 자리를 짚은 손을 떼어내 자신에게 뻗을까 두려워졌다.
다행히 사현은 그러지 않았다. 여준을 가만히 바라보며 천천히 몸을 낮출 뿐이었다. 양 무릎을 대고 앉은 그는 살처분을 기다리는 병든 개처럼 보였다. 올려다보는 두 눈이 온순하고 고요했다.
여준은 이내 그에게 닿았다. 닳아빠진 시멘트 바닥에 한쪽 무릎을 대고 몸을 낮췄다. 사현아. 일찍 만나지 못한 이유로 지어줄 수 없었던 이름이 몇 번이고 혀끝에서 고꾸라졌다.
“선배.”
사현이 눈을 깜빡였다. 여준은 조용히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감쌌다.
“…난 정말 당신에게 바라는 게 없었어요.”
“…….”
“그러니까 두고 갈 수도 있었던 거예요.”
여준은 고개를 기울인 채 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지금이 아니어도 괜찮았어요. 더 오랜 뒤에…. 선배나 나나 늙고 초라해졌을 때…. 그때까지 기다리려 했고, 기다릴 수 있었을 거예요.”
여준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사현의 자리를 만들어 그를 주저앉혀 놓고 싶었다.
“그런데 내가 잘못 생각했던 것 같아요.”
사현은 무섭도록 창백했고, 닿은 손이 떨어져 나갈 듯 차가웠다. 여준은 온몸을 두드리던 통증도 잊고 정성스레 그의 뺨을 매만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차갑지. 비를 얼마나 맞았기에.
“이렇게 보니까…. 선배는 빛바래지 않을 것 같아요.”
“…사현아.”
“몇 년이 지나든, 몇 살이 되어서도…. 죽는 날까지 한순간도.”
여준은 말없이 사현과 이마를 맞대었다. 섬뜩하리만치 체온이 느껴지지 않았다. 어서 어디로든 데려가야 하는데, 다쳤다면 치료하고 언 몸을 녹여야 할 텐데.
“선….”
여준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점점 더 차가워지는 사현 때문에 애가 탔다. 어떻게 해야 따뜻하게 해 줄 수 있을까. 여준은 무의식중에 그때까지 맞닿았던 이마 위로 입을 맞췄다.
“…….”
말은 소리 없이 빠져나갔다. 흉터가 말라붙어 거칠고 딱딱한 피부로 부드럽고 축축한 숨이 닿았다. 사현은 멍하니 여준의 어깨너머를 바라보았다. 가까워진 품에서는 부드러운 비 냄새가 났다. 눈가가 따뜻하게 달아올랐다. 참거나 감출 이유를 찾지 못한 눈물은 비에 섞여 흘러내리고, 이윽고 새카만 핏물이 무릎을 적시기 시작했다.
거짓말처럼 빗소리가 그쳤다.
사현은 구멍 난 부표처럼 서서히 가라앉았다. 바다에 뚫린 거대한 공동은 그를 삼키기 위해 아가리를 벌리고 있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기울어지는 사현의 몸을 받아 든 채 두 눈을 치떴다.
“…사현아?”
등을 끌어안고 이름을 불렀다. 사현은 여준의 어깨에 턱을 얹고 늘어진 채 대답이 없었다.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몸은 무겁고 딱딱하고 차가웠다.
“사현, 사현아….”
여준은 떨리는 손으로 사현을 추어올리려 했지만 어림도 없었다. 뒤로 쓰러지지 않도록 버티는 것만으로 힘에 부쳤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단어가 떠올랐다. 구급차, 경찰, 핸드폰…. 그중 여준의 핸드폰은 부서진 채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었다.
“사현아, 정…, 정신 차려 봐. 사현아?”
얼음장 같은 몸을 마구 쓰다듬으며 간절히 불렀다.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지? 어떻게 해야 하지? 앉은 채 두리번거리던 여준의 시선이 새카만 바닥에서 멈춰 섰다.
“…….”
사현이 앉아 있던 자리가 온통 검었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 빗물을 털어 내고 나서야 그것이 피 웅덩이임을 알 수 있었다. 머릿속이 허옇게 번졌다가 새빨갛게 터져 올랐다. 여준은 숨을 몰아쉬며 사현의 몸을 옆으로 뉘어 놓았다. 툭, 힘없이 나자빠진 손끝은 부서질 듯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어….”
허겁지겁 재킷을 풀어 헤쳤다. 피는 옆구리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찢어진 셔츠 자락 사이로 일자로 벌어진 상처가 보였다. 어, 어…. 여준은 멍청히 중얼거리며 두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손바닥 안으로 맥동하는 핏물이 느껴지자 섬뜩했다.
구급차. 한 가지 생각만이 등대처럼 번득였다.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골목은 텅 비어 있었다. 어디 하나 불 켜진 집도 보이지 않았다.
“도와, 도와주세…. 누가….”
제발 좀…. 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어느 집이라도 두드려볼 생각으로 몸을 일으키던 여준이 멈칫했다. 동아줄을 잡는 심정으로 사현의 재킷 주머니를 뒤졌다. 안주머니에 고이 들어 있던 핸드폰을 찾아내자 눈물이 터졌다.
119를 눌러 손에 든 채 다른 손으로 상처를 막아 눌렀다. 침착해야 해.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해. 후드득 쏟아진 눈물이 손등을 적셨다.
“…사람이 다쳤습니다. 의식이 없고 출혈이 많아요.”
침착하게, 한 글자씩 똑바로 전하기 위해 여준은 치솟는 눈물을 그대로 두었다. 비처럼 쏟아지게 내버려 둔 채 할 수 있는 가장 딱딱한 말투로 상황을 말했다.
“주소, 는…. N동…. 가현 거리 건너편 주택가입니다. 자세한 주소, 아, 명패…. 정수로 7번길…. 네, 네, 언덕길 맞아요…. 빨리 좀….”
제발 어서 빨리.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가는 동안에도 사현의 맥이 약해져 가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입 안이 타들어 가고 등줄기가 후들거렸다.
오늘은 아니야. 여준은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중얼 내뱉었다. 오늘은 안 돼.
‘내가 죽는다면, 죽은 지 49일이 지나서 태어난 개를 한 마리 입양해 줘요.’
그게 나라고 믿고 죽을 때까지 잘 돌봐 주세요. 여준은 그 말의 의미를 안다. 환생이나 영혼 따위의 이야기는 어차피 살아남은 자들의 위안이다. 사현은 언제나 죽음과 가장 가까이에 있었다. 허구한 날 위험한 짓을 벌이고 다녔고 모든 자극에 날카롭게 반응했다.
그래서 말한 것이다. 자신이 언젠가 예기치 못하게 죽더라도 슬퍼하지 말라고.
하지만 나는 그런 위안 따위는 필요 없어. 여준은 눈을 감은 채 흐느끼기 시작했다. 네 환생 같은 건 믿지 않아. 이 넓은 지구, 이 좁은 세상에서 우리는 각자의 육체를 입고 만났잖아. 기적 같은 확률로 마주쳐, 누구에게도 보여 준 적 없는 마음을 알아보았잖아.
“사현아.”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올지도 모르지. 벼락같은 이별에 손조차 뻗어보지 못하고 나자빠져야 할 때가. 하지만….
“사현아, 오늘은 아니야.”
아니어야 해. 왜냐하면 오늘은 너무 춥잖아. 여준은 코트를 벗어 사현의 어깨 위로 덮었다. 식어 가는 몸을 끌어안고 부지런히 주물렀다. 이별하더라도, 떠나더라도 오늘 같은 날에는 아닌 거잖아. 가더라도 하늘이 맑고 따뜻한 날이어야지. 그래야 가는 길을 걱정하지 않지.
아, 하는 비명이 터졌다. 자꾸만 치솟는 나쁜 예감을 도저히 떨쳐 낼 수가 없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여준은 스스로도 알아듣지 못할 소리를 지르며 끝없이 무너졌다. 구급차는 언제 오는 거지? 왜 아무도 구해 주러 오지 않지? 언젠가 뱃속에 숨겨 놓았던 날카로운 칼날이 가슴을 헤집고 다니기 시작했다. 피가 들끓어 올랐다. 꿈이라면 스스로 목을 졸라서라도 깨어나고 싶었다.
***
가람이 병원에 도착했을 땐 밤 10시를 막 넘긴 시간이었다. 여준은 수술실 앞 보호자 대기실의 벤치에 멍하니 앉아 있었다. 출퇴근용 슈트 차림에, 손에는 코트를 구겨 든 채였다.
“여준아.”
다가간 가람이 몸을 낮춰 여준을 살폈다. 여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췄다. 비에 젖어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 새빨갛게 물든 눈자위에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가람은 그의 손에서 코트를 받아 들자마자 깜짝 놀랐다. 셔츠 소매까지 온통 얼룩덜룩한 핏자국으로 덮여 있었다.
“이게 뭐야? 너 다쳤어?”
“…….”
“헉, 손톱이 다 나갔잖아.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치료부터 해야….”
“…형.”
간신히 뱉어 낸 말은 잔뜩 쉬어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가람은 여준의 손을 쥔 채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요. 전화할 만한 데가…. 생각나는 사람이 형밖에 없었어요.”
여준의 한쪽 눈에서 눈물이 툭 흘러내렸다. 동시에 그는 온몸을 바들바들 떨기 시작했다. 가람은 얼른 여준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였다.
“뭐가 미안해. 그런 식으로 말하면 서운하다고 했지.”
“형, 어떠…, 어떡하죠?”
가람에게까지 진동이 올 정도의 떨림이었다. 여준은 창백한 턱을 딱딱 부딪치며 가장 무서운 가정을 이야기했다.
“죽으면…. 죽으면 어떡하죠? 이대로 죽어 버리면….”
가람은 우선 몸을 떼어 냈다. 여준은 초점 없는 눈으로 눈물만 쏟아 내고 있었다. 이미 그 무서운 일을 겪고 있는 사람처럼.
“왜 그런 말을 해. 괜찮아. 수술 잘 끝날 거야.”
“형, 나…. 아무 말도 못 했어요.”
“…….”
“걔는 나한테 좋은 말만 했는데, 아주 오랜 후에도 내가…. 여전히 좋은 모습일 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그게 마지, 마지막 말이었으면 너무…. 허무하고 불쌍하잖아요.”
차라리 원망을 하지. 당신 때문에 내 인생이 이렇게 꼬였다며 욕이라도 할 것이지. 그랬다면 다음이 있을 거란 생각도 들었을 텐데.
“너무 가엾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못 가져 보고 가는 건….”
여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부러져 덜렁대는 손톱 아래로 새로운 핏물이 고여 들었다. 가람은 여준의 손을 잡아 내리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여준아, 수술 끝나려면 앞으로 세 시간은 더 걸린대. 그동안 일단 치료하고, 씻고 옷 갈아입고 오자.”
“…….”
“너 이러고 있다가는 병나. 아침에 경찰 조사도 받아야 한다며. 병원 앞에 호텔 잡아 놨고, 갈아입을 옷도 가져왔어. 응? 말 들어, 너 지금 체온이 하나도 안 느껴져.”
“…….”
“입원 수속도 내가 알아서 할게. 아무 걱정 말고….”
“…그건…. 해 놨어요.”
쉰 목소리로 대답한 여준이 고개를 들었다. 수술 현황 모니터에 한 글자가 가려진 사현의 이름이 보였다. 그 뒤로 ‘수술 중’ 표시가 낙인처럼 따라붙었다.
“…….”
은아가 죽었을 때도 이 병원에 왔었다. 그때 사현은 이미 긴급 수술을 끝내고 중환자실에 들어간 뒤였다. 차갑고 두꺼운 문 너머로 간절히 기도했었다. 깨어나지 마. 두 번 다시 눈 뜨지 마. 그대로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줘.
“여준아?”
“형.”
손은 아프지 않았다. 춥지도 않았다. 어떤 감각도 없이 그저 서글펐다.
“나 벌 받는 것 같아요….”
공기가 무겁다. 진흙탕에 잠겨 있는 듯했다.
빗물을 씻어 내고 가람이 가져온 새 셔츠와 바지를 꺼내 입었다. 가람은 조금 자다가 병원으로 가자고 했지만 도저히 잠이 오지 않았다. 여준은 결국 뜬눈으로 돌아와 다시 모니터 앞에 앉았다. 자정이 지나 예정된 시간을 한참 넘기고 나서야 회복실로 이동했다는 표시가 떴다. 여준은 허둥지둥 대기실을 나와 담당 의사에게 달려갔다. 의사는 잔뜩 피곤에 절어 눈 밑이 검게 가라앉아 있었다.
“급한 대로 출혈 지점 찾아서 봉합하는 수술이었어요. 일단 눈에 보이는 건 다 잡았습니다. 수혈도 들어갔고 잘만 회복한다면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잠시 뜸을 들인 의사가 긴 한숨을 쉬었다.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붕대 감은 손끝을 꾹 말아 쥐었다.
“몇 가지 변수가 생길 수 있어요. 미처 못 본 출혈 지점이 있었다든가, 봉합한 자리가 터진다든가…. 제일 위험한 건 감염인데, 뭐에 찔렸는지를 모르는 이상 감염 위험을 완벽히 차단하는 건 불가능합니다. 어쩌다 다친 건지는 못 봤다고 하셨죠?”
“…예.”
“아무튼 우선 의식이 돌아오는지 확인하고, 입원 기간 동안 신중히 살펴보는 걸로 하지요.”
“예, 감사…. 감사합니다.”
여준이 어영부영 고개를 숙였다. 푹 꺾은 허리를 들어 올리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어느새 곁에 다가와 있던 가람이 한참이나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여준은 후들거리는 무릎을 짚고 선 채 이마에 밴 식은땀을 닦았다.
“여준아, 병원에 내가 있을게. 너 가서 좀 자고 와.”
“아니에요, 형부터 가서 쉬세요. 저 대기실에 있으면….”
“나 저녁때 일어나서 아직 쌩쌩해. 무슨 일 있으면 바로 호텔로 연락할 테니까 말 좀 들어라.”
“…….”
“가린이도 아침에 지오 데리고 오겠대. 애가 아빠 왜 안 오냐고 풀이 잔뜩 죽었어.”
“아….”
이마를 감싼 여준이 낮게 탄식했다. 가람의 집에 지오를 맡겨둔 지 벌써 사흘째였다. 아이를 안심하고 맡길 장소가 있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처리해야 할 일이 쌓였을 때, 적어도 아이 하나는 그 리스트에서 빼놓을 수 있게 된다는 것.
“죄송해요. 형이랑 가린이한테 너무 신세를….”
“그래, 알면 가서 자. 너부터 사람 꼴을 만들어 놔야 내가 쉴 거 아냐. 상황 파악이 돼?”
“그래도….”
“방에 가서 난방 올리고, 이불 덮고 한숨 자. 일어나면 회사에 출근 못 하겠다고 전화하고, 그다음에 다시 병원으로 와. 할 수 있지?”
“…….”
다그치는 말에 여준이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은 그런 여준의 뺨을 툭툭 두드리며 덧붙였다.
“저 사람 일어나고 나면 다 설명해 줘. 그 정도는 할 거지?”
“…네.”
“그래, 날 이렇게 놀라게 했으면 그래야지. 이제 계산 끝났어. 가서 자.”
호텔은 병원 정문에서 도보 5분 거리에 있었다. 좁고 길쭉한 건물에 들어선 비즈니스호텔이었다. 여준은 가람이 쥐여 준 카드 키를 든 채 터벅터벅 길을 건너 호텔로 향했다. 새벽이 시작되지 않은 거리는 어두웠고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텅 빈 로비를 지나 엘리베이터를 타고 최상층으로 가는 동안에도 사람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다.
침대 하나 덜렁 놓은 방은 좁고 써늘했다. 여준은 힘없이 걸어가 침대 위로 쓰러지다시피 누웠다. 젖은 모래에 갇힌 듯 가슴이 답답하고 어깨가 무거웠지만 잠은 오지 않았다. 그는 뻑뻑하게 굳어 버린 눈을 반쯤 뜬 채 하나둘 깨어나기 시작한 감각을 견뎌 냈다.
다친 손이 쓰라리고, 계단에서 구를 때 멍든 등이 욱신거렸다. 비대해진 불안에 짓눌려 잊고 있던 통증이었다. 눈물이 찔끔 나오도록 아팠다. 여준은 떨리는 손을 들어 손바닥을 바라보았다. 사현의 피가 가득 묻었던 손이었다. 그는 바로 이 방의 욕실에서 더운물을 틀어 놓은 채 그 손을 씻어 냈다. 씻겨 나간 핏물은 여준의 발끝에 고였다가 배수구로 빨려 들어갔다.
“…….”
씻어 내지 말걸. 왈칵 치민 눈물을 흘리며 여준은 후회에 잠겼다. 지금 이 순간 사현이 흘린 피라도 손에 쥐고 있었다면, 이 치졸한 통증 따위가 머릿속을 헤집을 틈은 없었을 텐데.
잠이 오지 않았다. 잠들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생 이 어둡고 고통스러운 불안에 짓눌려 뜬눈으로 밤을 새워야 할지 모른다. 사현이 깨어나지 않는다면.
***
사막이었다. 아니, 사막이 아닐지도 모른다. 발밑에 깔려 있는 이것이 모래가 아니라면. 여준은 발밑에서 부서지는 흰 땅을 내려다보다 고개를 들었다. 창백한 사막은 끝도 없이 이어져 있었고, 지평선에 닿은 하늘은 그보다 어두운 잿빛이었다.
여준은 어쩐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 것 같았다. 세계는 멸망했고 그는 홀로 남아 있었다. 아무리 걸어도 무엇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죽음보다 깊은 고요만이 남은 세상, 홀로 살아내야 할 무한한 세월 앞에서 현실의 고민은 무의미했다. 여준은 우선 사현을 떠올리기로 했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눈 앞에 펼쳐진 것은 새하얀 백지나 다름없었기에.
‘선배는 꼭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굴어요.’
해가 지기 시작한 시간, 여준이 살던 집의 거실이었다. 부모가 부재한 집에, 어머니가 모르는 사람을 초대한 일은 어쩐지 그 자체로 가슴 뛰는 일탈처럼 느껴졌다. 이유도 모른 채 은밀했고 설명할 수 없는 이유로 두근거렸다.
‘그럴 때 참 서운해요.’
사랑을 제외한 모든 단어로 사랑을 말하며, 사현은 그 마음을 여준이 알아 줄 필요가 없다고 여겼는지도 모른다. 제 마음이 여준에게 닿는 것은 지극히 온당한 일이라고.
그리하여 여준은 오래 후회했다. 스스로가 그만큼 특별한 인간이라는 착각에서 벗어나는 일에 터무니없이 긴 시간을 써야 했다.
다시 눈을 떴다. 그는 어느새 모래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꽃향기가 나는 듯했다. 둘러보니 관이었다. 가지각색의 꽃가지가 관 모양으로 그의 몸을 감싸고 있었다.
사현이 온 게 틀림없었다. 멸망한 세상, 잿빛 하늘과 백색 모래뿐인 이 사막까지 자신을 찾으러 올 사람은 사현밖에 없었다. 이제는 멀리 가지 않았을 사현을 기다릴 때였다. 그가 돌아온다면 끌어안고 입을 맞추리라. 두 번 다시 어디에도 가지 않는다고 맹세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을 것이다. 이 죽음 같은 고요가 그 순간을 위한 침묵이라면, 스스로 숨을 멈추고 혀를 뽑아서라도 녹아들 각오가 되어 있었다.
“여준아.”
어깨를 건드리는 손에 여준이 소스라쳐 경련했다. 놀란 가린이 걱정스러운 듯 미간을 찌푸렸다. 여준은 숨을 몰아쉬며 눈을 여러 번 깜빡이고 나서야 간신히 가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무슨 일.”
“없어. 아무 일 없었어. 미안해, 더 자게 두려고 했는데 가위눌리는 것 같아서….”
“…….”
“물 좀 줄까? 목마르지 않아?”
여준이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가린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여준의 몸 위로 이불을 끌어다 덮어 놓았다. 여준은 떨리는 몸을 진정시키려 여러 번 침을 삼켰다. 뒤늦게 추위가 몰려왔다. 차가운 손끝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지오는…?”
“너 자는 거 보고 민가람이랑 밥 먹으러 갔어. 아빠 피곤하니까 깨우지 말라던데.”
“…….”
“나보다 어른이야. 모르는 게 없는 것 같아.”
가린이 슬쩍 웃었다. 여준은 웃을 수 없었다. 가람과 가린이 없었다면 지금 이 순간 어떤 사달이 났을지 상상만으로도 아찔해졌다.
“고마워….”
“알아. 근데 이게 대체 다 무슨 일이야?”
“모르겠어. 나도…. 왜 갑자기 그렇게, 그런 꼴로…. 어디서 그렇게 됐는지….”
눈을 감은 여준이 이를 힘껏 악물었다. 가린은 이불 덮은 여준의 어깨를 조심히 문질러 주었다.
“오늘 경찰서도 다녀와야 한다며. 괜찮겠어?”
“응….”
“민가람이랑 같이 가. 내가 지오 데리고 병원에 있을게…. 여준아, 아무 일 없을 거야.”
따뜻한 위로도 마음에 닿지 않았다. 그저 초조하고 불안했다. 이게 다 무슨 일이야? 왜 이렇게 된 거야? 누구에게, 뭐에 찔려서 그렇게….
“…….”
눈을 뜬 여준이 불현듯 몸을 일으켰다.
“…영재.”
“뭐?”
“영재가 그런 거야. 분명히…. 그래서….”
‘좆같은 호모 새끼들, 가만히 두지 않을 거야.’
펄펄 끓어오르던 목소리가 다시 한번 머릿속에 울렸다. 여준은 허겁지겁 이불을 걷고 바닥으로 내려섰다. 어리둥절한 가린이 얼른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무슨 소리야? 너 갑자기 왜 이래?”
“영재 찾아야 돼. 잡아서 물어봐야 돼. 무슨 짓을 한 거냐고, 그래서, 흉기도 찾아서 균 검사…. 잘못하면 패혈증 온다고 했어. 그거 막으려면….”
“지금 갑자기 영재를 어디서 찾아? 일단 진정해, 어차피 경찰서로 가기로 했다면서. 경찰에 얘기하면 되잖아.”
왜 그 생각을 못 했지? 영재가 경고했고, 사현이 다쳐서 나타났는데. 마구잡이로 생각의 가지를 뻗느라 안절부절못하던 여준이 멈칫했다. 어째서 영재를 곧바로 떠올리지 않았는지, 그 이유도 기억이 났던 탓이었다.
‘30분 전에 N동에서 어슬렁거리다 온세캐시 놈들한테 붙들려 끌려갔다고 합니다. 모르긴 몰라도 사지 멀쩡히 빠져나올 수는 없을 겁니다.’
멍청히 굳어 있던 여준이 풀썩 주저앉았다. 놀라 달려온 가린이 얼른 그의 몸을 감싸 일으키려 했다.
“여준아? 여준아, 너 왜 이래.”
“…그럼.”
“뭐?”
“그럼 누구야, 대체…. 어떤 새끼냐고….”
몸담고 있던 조직 사람일까? 그만두겠다고 말했다가 해코지를 당한 걸까? 가장 떠올리고 싶지 않았던 결론에 이르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그건 내 탓일까? 그런 일은 그만두라고 해서, 그만두고 함께 가자고 해서….
“가린아, 나 때문인가 봐. 내가….”
“…여준아.”
“내가 멍청했어. 그러지 말걸. 이래라저래라 말하지 말걸. 무슨 자격으로 그랬을까. 그냥 큰 욕심 안 내고 같이 있었으면 되는데 왜.”
네가 아무리 나쁜 사람이어도 상관없다고 말했으면서. 그럼 아무래도 좋았잖아. 이미 나쁘게 굳어 버린 말투, 행동, 환경까지도 받아들였으면 되는 건데.
“그 애가 죽는다면 나 때문이야. 나랑은 달리 그 애는…. 내 꼴같잖은 위선까지 받아들였기 때문에 죽는 거야. 난, 나는….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하지?”
여준이 울먹이며 가린의 팔에 매달렸다. 가린은 그 앞에 함께 주저앉은 채 여준의 어깨를 끌어안아 달래기 시작했다.
“아니야. 안 그래. 그럴 일 없어. 왜 자꾸 재수 없는 소리를 해, 너답지 않게.”
“피가 너무 많이 났어.”
“곧바로 병원 왔다며. 수술도 잘 됐잖아. 괜찮을 거야.”
“너무 차갑고 새하얬어. 나는 그런…. 그런 모습은 처음 봐서, 그래서….”
가슴이 터질 듯 세게 뛰었다. 숨이 가빠왔다. 여준은 가린의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
“…가린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너무 무서워.”
“여준아….”
“나쁜 일이 벌어지면 어떡하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으면, 그러면 나는…. 도대체 이 죗값을 뭘로 치러야 하는 걸까….”
목에서 치민 흐느낌을 뱉었지만 눈물은 더 이상 흐르지 않았다. 머릿속에 긴 바늘을 쑤셔 넣은 듯한 편두통이 몰려왔을 뿐이다. 가린은 한 손으로 여준의 머리를 감싼 채 그의 등을 토닥였다.
“아무 일 없을 거야, 여준아. 정말이야.”
“…….”
“그리고 무슨 일이 일어난다 한들 네 탓 아니야. 왜 그런 생각을 해….”
그 말을 믿고 싶었다. 한편으로 이런 위로를 가만히 받고 앉아 있는 스스로가 경멸스러웠다. 여준은 눈을 꽉 감은 채 괴로운 숨을 넘겼다. 사현에겐 이런 말을 해 줄 사람이 있었을까?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무엇도 네 탓이 아니라고.
내가 해 줬어야 하는데. 나만이 너를 위로할 수 있었는데. 사랑 외의 모든 단어를 말하는 너를 위해, 내가 준비했어야 하는 말이 있었을 텐데.
***
다시, 그 하얀 사막이었다.
사현은 검게 메마른 장작더미를 품에 안은 채 멈춰 섰다. 물끄러미 돌아보던 눈동자가 잿빛으로 번졌다. 사막에는 구름도 노을도 비도 안개도 없었다. 채도가 아닌 명도만이 구분된 세계. 내려다본 두 손은 석고처럼 새하얬다.
그는 오래 걷지 않아도 되었다. 시선이 닿는 곳에 원하는 풍경을 불러낼 수 있었다. 모로 누워 편안히 잠든 여준이 바로 눈앞에 있듯이.
사현은 입을 떼지 않고 몸을 낮췄다. 장작더미를 모아 모닥불 모양으로 쌓아 올리고 불을 붙였다. 타오른 불꽃이 여준의 뺨으로 잘 구운 크림색 그림자를 드리웠다. 편안히 잠든 얼굴에서 고요한 숨결이 느껴졌지만, 그는 여준이 언제까지고 깨어나지 않을 것을 알고 있었다.
이곳에는 무엇도 없다. 그의 가족도 친구도 고뇌도. 그저 잠들어 있다. 원한다면 언제까지고 이 모습으로 있어 주겠다는 듯이.
사현은 온도가 느껴지지 않는 모닥불 옆에 주저앉은 채 오래도록 여준을 내려다보았다. 해가 지지 않는 사막, 시간이 멎어 바람조차 없는 허허벌판은 영원의 약속만큼이나 허황되고 달콤했다.
***
“범인 잡혔습니다.”
여준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형사는 그다지 호의적이지도, 쓸데없이 적대적이지도 않은 태도로 그에게 사진 한 장을 건넸다.
“본 적 있으세요? 이 학생.”
형사가 건넨 사진에는 두꺼운 안경을 쓴 청년의 무뚝뚝한 얼굴이 찍혀 있었다. 순한 인상이지만 눈동자가 새카맸다. 여준은 한참을 주의 깊게 바라보다 신중히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아뇨, 모르겠습니다.”
“피해자랑은 고등학교 선후배라고 하셨죠? 이 친구도 그 학교 나오긴 했던데, 나이 차이가 있으니 같이 다니지는 않았겠지만.”
“…….”
“어제 좀 사건사고가 많았어요. 일단 피해…, 아니, 임사현 씨 회사. 이게 분류는 인력회산데 쉽게 말해서 깡패예요. 돈 받고 사람 패고 깽판 놓고, 공갈, 갈취, 자해사기, 보험사기 등등…. 온갖 시답잖은 짓은 다 하는 전형적인 양아치 조직.”
여준은 대답 없이 사진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다시 봐도 기억에 없었다. 사현과는 아는 사이였을까. 직접 만나서 물어보고 싶었다. 왜 그런 짓을 했느냐고.
“아무튼 거기 대가리, 깡추라고 하는 놈 있어요. 그 새끼가 어제 지 사무실에서 총을 맞아서 지금 혼수상태예요.”
“…예?”
“그랬는데 깡추 오른팔인 임사현이가 집에 가다 말고 칼빵을 당한 거예요. 무슨 상황인지 이해되시죠?”
“…….”
“N동 먹고 있던 대가리랑 오른팔이 한 번에 당했는데 범인이랍시고 끌려 나온 게 걔네가 데리고 있던 여자에 꿘짓하던 대학생인 게 말이 안 된다는 거죠. 그래서 우리는 이거 2인자가 쿠데타 일으켜서 숙청 시작한 게 아닌가 그 의심을 하고 있는 건데….”
“흉기는요?”
“예?”
“칼로 찌른 거라면서요. 그 칼은 발견됐습니까? 검사는요?”
패혈증에 대비하려면 흉기를 조사해야 한다던 의사의 말이 먼저 떠올랐다. 형사는 제 질문에 집중하지 않는 여준에게 짜증이 난 듯 거칠게 옆머리를 긁었다.
“그건 경찰이 알아서 할 문제고…. 정말 이 학생 본 적 없어요? 이름 한준호고, 본인은 임사현이 때문에 팔 잘라 먹어서 그 원한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모릅니다. 한 번도 본 적 없어요.”
“비협조적으로 나오실 상황이 아니에요. 2년 전에 사모님이랑 사별하셨죠?”
“…….”
“그 사고 일으킨 게 임사현이고, 그 뒤에 있는 게 깡추인데, 선생님이 지금 그 임사현이가 칼 맞아 죽어가던 걸 우연히 발견했다는 거잖아요. 이게 어디서부터 맞아떨어진 아다리인지 모르면 앞으로도 계속 귀찮아지신다니까요?”
걱정을 위장한 협박이 뻔하고 투명했다. 여준은 미간을 찌푸린 채 날카롭게 되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게 취조라는 겁니까?”
“아니, 내가 또 언제 말을 그렇게 했다고….”
“참고인 조사라고 하셔서 혼자 온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이제라도 변호사 부를 테니 분명하게 말씀해 주세요. 취조입니까?”
“아…. 하여튼 그놈의 형사 드라마가 인간들 다 망쳐 놔서…. 저기요, 생각해서 해 주는 말 일일이 꼬아 들어서 그쪽한테 좋을 거 하나도 없어요.”
그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가람에게 급한 대로 빌려 온 그의 업무용 전화였다. 발신자를 보니 가린이었다.
“잠시 전화 좀 받겠습니다.”
형사는 한숨 쉬며 손만 까딱였다. 여준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목소리를 낮췄다.
“응, 가린아.”
- 아직 안 끝났어? 오래 걸릴 것 같아?
“아니야. 이제 갈 거야. 무슨 일 있어?”
- 지오가 어린이집 가고 싶다는데 내가 데려다줘도 되나 해서. 계속 못 나갔더니 친구들 보고 싶대.
“…….”
여준이 까마득 흐려진 이마를 짚었다. 후회하거나 죄책감을 곱씹을 틈이 없었다. 그는 옷매무새를 다듬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데려다줄게. 안 그래도 차도 가져와야 하고 지오한테 설명도 해 줘야 하고….”
- 그러다가 어느 세월에 와. 내가 데려다주고 올게. 지금 가도 오후 몇 시간밖에 못 놀 텐데.
“가린아, 아니…. 아니다, 잠깐 지오 좀 바꿔 줄래?”
그래, 산뜻한 대답과 함께 전화기가 넘어갔다. 아빠! 높은 데시벨로 튀어 나온 아이의 목소리에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오야, 미안해. 아빠가 어린이집도 못 데려다주고.”
- 아니, 아빠. 지오는 어, 공부하러는 안 가도 괜찮은데, 근데 성 만들기 스티커 하던 거 마저 붙여야 해서 그거 하고 싶어.
“성 만들기? 전에 아빠가 서점에서 사다 준 거 말하는 거야?”
- 응, 그건데 내가 사물함에 놓구 왔어. 마저 하려면 어린이집 가야 돼.
그러니까 이모 차 타고 가도 돼? 조마조마하게 물어보는 목소리에 굳어 있던 가슴이 눅진하게 풀어지는 듯했다. 여준은 고개를 숙인 채 미소를 머금었다.
“지오야, 그럼 아빠가 스티커 북 새 걸로 사다 주면 어린이집 조금만 참을 수 있어?”
- 새 거? 몇 개?
“두 개 사 줄게. 이모랑도 같이 하고 아빠랑도 같이 할 수 있는 걸로. 그렇게 하면 오늘은 어린이집 안 가도 괜찮아?”
아이는 음, 하며 짐짓 고민하는 흉내를 냈다. 한 개쯤 더 사달라고 졸라볼 수도 있지 않을까 머리를 굴리는 게 틀림없었다. 조그만 손가락을 관자놀이에 콕 찍어 놓았을 모양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라이언 스티커도 사 줄게. 아빠 한 번만 봐주라.”
- 라이언! 그래, 내가 아빠 봐줄게!
힘껏 소리 지른 아이가 까르르 웃었다. 여준은 전화를 끊자마자 가까운 대형서점을 검색했다. 다행히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죄송합니다. 아이가 전화를 해서.”
자리로 돌아간 여준이 형사를 향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형사는 한결 고분고분해진 여준의 태도에 흠흠, 헛기침을 했다.
“한준호라는 사람은 정말 모릅니다. 임사현이 어떤 일을 했는지에 대해서도 아는 바가 없었고요. 최근 연락을 주고받았던 건 2년 전 사고에 대한 재조사를 요청할 생각이었기 때문입니다.”
“재조사요?”
“서초경찰서 교통조사과 오만진 형사님께 확인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사고가 난 경위나 후속처리 과정에 납득할 수 없는 점이 많아서 은아…, 죽은 와이프 인간관계 중심으로 좀 알아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사고 낸 본인과도 연락을 했던 거고요.”
흐으음…. 미심쩍은 기색으로 사진을 두드리던 형사는 이내 선심 쓴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일단 알겠습니다. 너무 불쾌하게 생각지는 마세요. 겪어 봐서 아시겠지만 저희가 뭘 나쁘게 하려고 꼬치꼬치 캐묻는 게 아니에요.”
“…예, 저도 죄송했습니다.”
여준이 순순히 사과의 말을 건넸다. 이곳저곳에 자존심을 세울 때가 아니었다. 평안한 일상을 되찾으려면 몇 번이고 참고 넘겨야 할 상황이었다.
정중한 작별인사와 함께 명함을 건네고 경찰서를 나섰다. 머금고 있던 비구름을 모조리 털어낸 하늘은 어이가 없을 만큼 새파랗고 맑았다. 간만에 미세먼지도 없이 깨끗한 빛이었다.
아이가 좋아하는 스티커 북과 자동차 미니어처를 집어 든 여준이 서점 안을 둘러보았다. 평일 오전인데도 매장은 손님들로 북적였다. 책장 사이에 앉아 책을 읽는 남자, 그림책 코너에 몰려든 아이들, 아이돌 음반을 뒤적이는 교복 입은 학생들까지 모양도 다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회복실에 누워 있을 사현의 상황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본인은 임사현이 때문에 팔 잘라 먹어서 그 원한으로 저지른 짓이라고 주장하고 있거든요.’
형사의 말에 의하면 한준호는 공장에서 일하던 중 사고로 팔을 잃은 대학생이라고 했다. 오른팔이 없어진 탓에 왼손에 테이프로 칼을 동여매고 찔렀다고 한다. 문제는 오른손이 없으니 테이프를 다시 떼어낼 방법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 꼴로 헤매고 다녔다면 금방 잡힌 것도 당연했다. 피투성이 칼을 손에 붙인 채 넋이 나가 배회하던 그는 꼭 피터 팬을 살해한 후크 선장처럼 보이지 않았을까.
“…기요.”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일이 생길까?
“저기요?”
툭, 어깨를 건드린 손에 여준이 숨을 들이켰다. 돌아보니 말끔한 정장 차림의 여자가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여준은 한참 그 얼굴을 들여다본 후에야 머릿속에 있던 호칭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은 주임?”
그제야 여자도 활짝 웃었다.
“와, 진짜 선임님이네. 어떻게 여기서 보네요? 근무 시간 아니세요?”
“그러는 은 주임이야말로 왜 여기….”
“저 취업 준비 중이라서요.”
여준이 입을 벌린 채 눈을 껌뻑였다. 그의 기억에 따르면 은 주임은 지금쯤 한참 영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다. 시선에 담긴 의미를 눈치챈 은 주임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처음에 제의 받았을 때야 좋았는데…. 막상 가려니 겁이 덜컥 나더라고요. 거긴 정말 엘리트 중의 엘리트들만 모이는 곳인데 그런 데 가서 적응할 자신도 없고.”
“…아.”
“그래도 연차 채워 놔서 오라는 데는 좀 있어요. 신입 대우로 시작해야 하지만 그게 어디에요. 오늘도 임원 면접 보고 나오다가 간만에 책이나 볼까 하고 와 본 건데, 안 하던 짓을 했더니 선임님을 딱 마주치네요.”
시원하게 웃는 얼굴이 편안해 보였다. 덕분에 여준도 여유로운 미소를 띨 수 있었다.
“뭐 하느라 연락도 없나 했더니, 불쌍한 취준생들 자리를 뺏고 있었어요? 못 쓸 사람이네.”
“대신 대양화재 한 자리 비워 줬잖아요. 걔네도 감사하게 여길 거예요.”
그녀가 흥, 코웃음을 쳤다. 여준은 손에 든 물건들을 고쳐 쥐며 뒤늦게 물었다.
“그런데 재취업이라니…. 가능한 곳이 있어요? 화재로는 못 가잖아요.”
“꼼수 좀 쓰고 있죠. 잘 될 것 같아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그녀는 그렇게 말했지만 여준은 도저히 희망적인 관측을 입에 담을 수 없었다. 상사에 대한 불만으로 퇴사한 사람을 두 팔 벌려 환영할 회사가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러기엔 일자리를 원하는 뛰어난 인재가 지나치게 많았다. 그러나 진지한 걱정이나 우려는 입 안으로 삼켰다. 어차피 남의 일, 지나갈 인연이었으므로.
“도와줄 수 있는 일 있으면 연락해요. 번호 그대로니까.”
이 정도 입에 발린 말로 끝낼 수 있는 정도의.
“선임님은…. 요즘 괜찮으세요?”
그런 마음 정리가 무색하게도 은 주임은 걱정의 말을 입에 담았다. 진심 어린 눈동자는 순간 여준을 의아하게 만들었다.
“저요?”
“네, 한참 팀 분위기 안 좋기도 했고…. 선임님 그때 많이 힘들어 보이셨거든요.”
입사한 이래 힘들지 않은 날은 하루도 없었다. 오늘 아침, 팀장은 친구가 입원해서 월차를 내야겠다는 여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
‘마음대로 해요. 여준 씨가 언제는 회사 진지하게 다니는 사람이었나?’
여준은 성의 없이 침묵했다. 이제 그에게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회사도, 팀장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업무도.
“방금 전에도 가만히 서 계시는데 뭔가….”
“괜찮아요.”
“안 괜찮아 보이셨어요. 진짜 무슨 일 있으세요?”
괜찮다는 말은 언제부터 입에 달고 살았던가. 누군가의 걱정을 듣는 일이 어느새 일상이 되어 있었다. 기분이 나빠 보인다. 컨디션이 안 좋아 보인다. 피곤해 보인다. 힘들어 보인다…. 매일같이 감정하듯 쏟아지는 시선에서 벗어나려면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괜찮아요. 정말 괜찮으니까 말 걸지 말고 제발 좀 내버려 둬.
“…가 볼게요. 애가 기다리고 있어서.”
틀린 말은 아니었으나 가슴이 따끔거렸다. 다행히 은 주임은 금방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연락 드려도 돼요?”
계산대로 향하는 발걸음에 질문이 따라붙었다. 그녀가 말하는 ‘연락’의 의미가 다르다는 정도는 이제 여준도 알 수 있었다. 대답하지 않은 것은 그래서였다.
포장한 선물을 손에 쥐고 택시를 잡았다. 병원으로 향하는 길이 지나온 일생처럼 멀었다. 사현아. 여준은 창가에 옆머리를 기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양아치, 깡패 집단. 갈취와 폭력을 일삼는 사회의 암적 존재들. 멀쩡한 대학생이 팔을 잃고 살인미수를 저지르게 만드는 생은 그 얼마나 잔혹하고 무거운 빛을 띠고 있는지.
앞으로 몇 번이나 더 이런 일이 생길까. 누군가 또 사현을 해치려 하지 않을까. 형사는 사현의 조직 내에서 숙청이 일어나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사현은 지금도 위험한 상황인가. 그 위험을 없애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떻게….
날카로운 진동음이 멀어지던 의식을 불러들였다. 깜짝 놀라 받아보니 가람이었다.
- 여준아, 아직 멀었어?
“아뇨, 조사는 끝났는데 지오 물건 좀 사느라고…. 거의 다 왔어요. 무슨 일 있어요?”
- 아무 일 없어. 그냥 상태 안정돼서 입원실로 옮기기로 했어. 근데 너 뭐 이렇게 호사스러운 입원실을 잡아놨어? 이게 대체 하루에 얼마….
“안정됐다고요? 깨어났어요?”
벌컥 소리친 여준이 다급히 창밖을 둘러보았다. 병원까지는 이제 금방이었지만 도통 신호가 바뀔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가람이 당황한 목소리로 얼른 말을 이었다.
- 아니, 의식은 아직 안 돌아왔어. 근데 호흡에 문제없고 바이탈? 뭐 그것도 정상이라고 그냥 자고 있는 걸로 생각하면 된대.
“…아….”
- 갑자기 상태 나빠지면 다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말랬어. 그나저나 이 사람 부자야? 입원실 장난 아니네. 무슨 호텔 방 같다. 이거 정말 감당할 수 있는 거야?
“네, 뭐…. 그럼요. 걱정 안 하셔도 돼요. …네.”
전화를 끊은 여준이 고개를 푹 숙였다. 수술도 무사히 끝났고, 의사 소견에 따라 입원실로 옮겼다. 모든 게 나아지고 있는 데도 불안함에 손이 떨렸다. 가슴이 뛰는 속도가 점점 빨라지는 것 같았다.
“누가 아파요?”
통화하는 여준을 힐끗대며 보고 있던 택시기사가 물었다. 여준은 대답 없이 쓴웃음만 지어 보였다. 더 이상 캐묻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액션이었지만 불행히도 전달되지 않은 듯했다.
“젊은 친구가 마음고생이 많겠네. 너무 걱정 말아요. 사람이 살다 보면 원래 아프고 다치고 그러다 낫고 하는 거지.”
“…….”
“나도 마누라가 사십 대에 풍으로 쓰러져서 여태 병구완을 하고 있어요. 원래 학교 선생까지 하던 여잔데 지금은 말도 제대로 못 해. 그래도 살아 있어 줘서 그것만도 고맙지….”
안타깝고 아름다운 사연이었지만 가슴에 와 닿지는 않았다. 그래 봐야 남의 일인 것이다. 여준은 백미러에 비친 택시기사의 주름 진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생각했다. 사현의 일도 누군가에게는 그럴 것이다. 그의 불행도, 온몸에 새겨진 상처도, 배 속이 찢겨 깊은 잠에 빠져 있는 지금의 상황도 누군가에게는 그거참 안 됐네, 한 마디 내뱉고 잊어버릴 타인의 생에 지나지 않는다.
괜찮아? 그것은 결국 타인에게 던지는 질문이었다. 당신과 나의 인간관계가 양호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내가 당신을 걱정했고 당신이 응답했다는 기록을 남기기 위해. 당신이 나에게 고통을 전가시키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있어 건넬 수 있는.
이를 악문 여준이 고개를 숙였다. 마주 쥔 손에 이마를 댄 채 밀려드는 눈물을 참았다. 사현아. 입 밖으로 내지 못한 이름이 가슴을 엔다. 우리는 서로에게 괜찮냐고 묻지 않는 사람이 되자. 괜찮다는 대답을 기다리지 않는 대화를 하자. 네가 독을 내뿜어야만 숨을 쉴 수 있다면, 나는 네 독을 쌓는 그릇이 될 테니.
사현은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가, 반쯤 스민 햇빛 아래 잠들어 있었다. 가만히 누운 채 편안히 눈을 감은 얼굴은 긴 여행을 끝마친 사람처럼 평화로워 보였다. 여준은 그 곁에 오래도록 앉아 있었다. 심장박동을 세는 기계음이 메트로놈처럼 일정하게 울렸다. 사현이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말을 건네고 싶었다. 그 소원 하나에 매여 창밖이 붉게 저물고 검게 물들도록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사현은 눈을 뜨지 않았다. 시침이 한 바퀴 돌아 날짜가 바뀌고, 새벽이 피어올린 차가운 안개가 발밑에 감돌 때까지도.
***
모래는 오랫동안 빻은 밀가루처럼 곱고 부드러웠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빠져나가는 땅을 헤쳐 도랑 같은 길을 파던 사현은 문득 손을 멈췄다. 고개를 들어보니 열여덟의 여준이 입가에 피를 묻힌 채 누워 있었다. 눈을 깜빡이자 어두운 반지하 방이었다. 스프링이 다 나가 버린 낡은 매트리스는 무게를 실을 때마다 삐걱대며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사현은 여준의 곁에 무릎을 대고 그의 뺨을 두 손으로 감쌌다. 벌어진 입술이 형편없이 터져 있었다.
왜 또 이곳이지? 미간을 찌푸린 사현이 축 늘어진 여준의 몸을 품에 안았다. 여준은 숨을 쉬고 있었지만 체온이 없었다.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린 손은 이곳저곳 긁히고 손톱이 들려 엉망이었다. 아, 안타까운 탄식을 내뱉은 사현이 얼른 그 손을 잡아 올렸다. 핏물이 흐르는 손끝에 입을 맞춰 봐도 달라지는 건 없었다.
그때 쿵,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
쿵, 쿵, 일정한 소리가 이어졌지만 문고리를 비틀거나 미는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먼저 열어 주길 기다리겠다는 거였다. 사현은 품에 안은 여준을 내려다보았다. 열여덟의 여준은 지나치게 어리고 약해 보였다. 방문자를 불러들여 도움을 받고 싶었지만, 행여나 여준을 영영 떠나보내는 일이 될까 두려웠다.
고민은 길지 않았다. 결국 그는 여준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채 귀를 닫고 웅크렸다. 머릿속을 울리는 소리를 모른 척 지워버리려 안간힘을 썼다. 그것은 아주 쉬운 일이었다. 맞닿은 체온, 이어지는 숨에 집중하면 되었다. 눈을 감았다. 어둠이 찾아오자 어디선가 찬바람의 냄새가 났다.
***
“너무 걱정하실 건 없어요. 자가 호흡 잘 되고 있고, 출혈 징후 없고…. 그냥 좀 오래 자는 거니까요.”
“사람이 꼬박 이틀을 잔다고요? 아무 이상도 없는데?”
스스로 내뱉은 날카로운 반문에 가장 놀란 것은 여준이었다. 얼른 입을 다문 그가 눈을 꽉 감았다 떴다. 간호사는 이 정도는 익숙한 일이라는 듯 새 링거팩을 걸며 대답했다.
“이런 경우가 가끔 있어요. 어떤 분은 직장에서 쓰러져서 실려 왔다가 사흘을 주무신 적도 있는데요.”
“…….”
“수술 자체가 몸에 부담이 크니까요. 원래 컨디션이 안 좋은 상태로 긴급수술 들어가게 되면 의식 회복하는 데 오래 걸리는 게 당연하죠.”
“네…. 죄송합니다.”
고개를 끄덕인 여준이 느릿한 사과의 말을 덧붙였다. 간호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제 일을 마치고 병실에서 나갔다. 가람은 문이 완전히 닫힌 후에야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어제 한숨도 못 잤지?”
“아니에요. 좀 잤어요.”
“눈 밑이 새카만데 또 아무렇게나 말하고 그래. 내가 보고 있을 테니까 좀 자. 어서.”
여준을 밀어낸 가람이 보호자용 침대를 꺼냈다. 여준은 그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앉으며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형.”
“그래, 왜.”
“못 자겠어요. 잠들면…. 자꾸 사막이 보여요.”
중얼거린 여준이 무릎 사이로 고개를 떨어뜨렸다. 가람은 미간을 한껏 찌푸린 채 몸을 낮추며 여준의 어깨를 짚었다.
“사막? 무슨 소리야? 악몽 꾼다고?”
“아무도 없는 사막이에요. 처음엔 분명 있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못 찾겠어요.”
“…뭘?”
“사현이요. 거기 있다는 거 알았는데…. 분명 그랬는데, 이제는 없어졌어요. 아무리 찾아봐도 없어서…. 놀라서 깨고 나면 저러고 있으니까 너무 불안해서….”
횡설수설 이어가는 목소리에 힘이 없었다. 그런 여준을 가만히 바라보던 가람의 눈가가 점점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석연찮은 시선으로 여준과 사현을 한 번 번갈아 보고는 한참을 머뭇대다 입을 열었다.
“그런데 여준아, 너…. 이러고 있어도 괜찮아?”
“…….”
“그…. 연락해야 하지 않겠어? 여자 친구…, 한테?”
누구 생겼다고 했잖아, 그치? 여준은 제 어깨를 쥔 가람의 손에 힘이 들어간 것을 느끼고 천천히 시선을 들어 올렸다. 어렴풋한 조명 하나만 켜놓은 병실 안은 간신히 서로의 얼굴을 식별할 수 있을 정도로 어두웠다.
“응? 전화 안…, 해도 돼?”
원하는 대답을 내놓으라 재촉하는 말이었다. 의혹과 불신이 엉켜 든 눈동자는 태풍을 담은 찻잔처럼 요란하게 출렁였다.
“안 해도 돼요.”
여준은 망설임 없이 미소 지었다. 죄책감은 없었다.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다 여기 있어요.”
그 말에 가람의 손이 떨어져 나갔다. 벌떡 일어선 그는 성큼성큼 창가로 걸어가더니 아, 하며 제 머리를 마구 쓸어 올렸다.
“너 미쳤….”
여준은 벌컥 터져 나온 큰 소리를 도로 삼켜낸 그의 인내심을 칭찬하고 싶었다.
“…너 설마, 아니, 설마 그런 게…. 나 지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형한테는 다 얘기하려 했어요.”
“아니야, 됐어. 아니…. 나 그런 거 별로 안 듣고 싶네.”
“…….”
“내가 지금 뭐…. 오해하고 있는 거 아니지? 제대로 알아들은 거지? 그런 거면 이걸 대체 뭐…. 어디서부터 어떻게….”
“…….”
“…나 집에 다녀올게. 지오…. 지오는 걱정하지 마. 그런데 너 이거…. …아니다, 됐다. 나중에 얘기하자.”
다급히 말을 맺은 가람이 외투를 집어 들었다. 인사도 없이 휑하니 나가 버리는 그의 뒷모습을 끝까지 눈으로 좇으면서도 여준은 전혀 불안하거나 걱정스럽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는 것이 더 이상 두렵지 않았다. 모든 것을 손에 쥘 수는 없고, 가장 먼저 지켜야 할 것은 눈앞에 있었으므로.
사흘째 아침,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움켜쥐던 여준이 멈칫했다. 토요일, 세 글자가 먼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멍하니 시간을 확인하고 도로 내려놓았다.
연차는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바쁜 시기도 아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결근이 이어져서야 잘리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무엇보다도 팀장의 심기를 그렇게 긁어 놓았으니.
“그러든지 말든지….”
중얼거린 여준이 몸을 일으켰다. 간단한 샤워를 마치고 나올 때까지도 사현은 미동조차 없었다. 여전히 평화로운 기계음만 울렸다. 침대 쪽으로 몸을 기울여 사현의 코끝으로 손등을 가져다 대었다. 미약하지만 안정적인 숨결이 느껴졌다.
가람은 전화를 받지 않았지만 가린에게 걸자 연결되었다. 그녀는 받자마자 명랑한 목소리로 물었다.
- 여준아, 색칠 책이라는 게 뭐야?
아이가 또 뭔가 떼를 부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여준은 창틀에 걸터앉은 채 조용히 속삭였다.
“아, 그거 집에 있을 텐데…. 내가 새 걸로 사다 줄게.”
- 아냐, 너 병원에 있어야지. 뭔지 알려 주면 내가 지오 데리고 가서 살게.
“…미안해.”
- 또 그러네. 돈 받고 하는 건데 이게 일이겠어? 신경 쓰지 마.
반응을 보니 가린은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듯했다. 여준은 고개를 기울인 채 혀끝에 맴도는 말을 밀어냈다 삼키기를 반복했다. 직접 말해야 할까. 길지 않은 고민이 이어지는 동안 가린은 조용히 기다릴 뿐이었다.
- 저기, 여준아.
삑, 건조한 기계음만이 병실을 울렸다.
- 어제 민가람이 진상 부렸다며.
“…….”
- 미안해서 네 전화를 못 받겠대. 안 그래도 힘든 애한테 못 볼 꼴 보이고 온 것 같다고.
“…아니.”
얼른 입을 연 여준이 주먹 쥔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아냐, 그런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야….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에 가린이 낮게 웃었다.
- 여준아, 그냥 한 가지만 알고 있어. 나랑 민가람은 네 편이야.
“…….”
- 아니, 뭐 민가람 속까지야 내가 다 모르지만…. 나는 그래. 알지?
다 알고도 하는 말일까. 아무것도 모르고 적당히 꾸며서 전하는 말일까.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여준은 눈을 감은 채 응,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알면 너무 혼자 끙끙 앓지 마. 너 기억 나? 나 재수할 때 네가 공짜로 과외 해 줬었잖아. 그것도 매주 주말마다.
“그게 무슨 과외야…. 그냥 둘이 같이 공부한 거지.”
- 네 공부는 하나도 못 했으면 과외지. 오죽했으면 우리 엄마가 너 좀 그만 괴롭히라 그랬어. 그러면서도 너한테 배워서 성적 오르는 거 보이니까 도서관 가지 말란 말은 못 하고.
“그만큼 아줌마가 많이 챙겨 주셨잖아.”
- 민가람이 친구랑 술 먹다가 패싸움 휘말렸을 때도 그래. 네가 별로 친하지도 않은 대학 선배한테 부탁해서 변호사 소개해 줬었잖아. 너 그때 일 때문에 그 선배 부탁 거절 못 하고 괜히 학생회 끌려다니느라 개고생하고.
“몇 번을 말해. 그거 아니라니까…. 별로 고생한 것도 없고, 학생회는 스펙 쌓으려고 한 거고. 명함 하나 받아다 준 게 뭐 대단하다고 몇 년을 그 소리야.”
- 그래, 나도 똑같아. 이게 뭐 일이라고 매번 인사치레야. 너한테 잘해 주고 싶어서 하는 거고, 나나 민가람한테 하나도 대단한 일 아니야.
“…….”
- 그러니까 지레 포기하고 죄인처럼 굴지 마. 난 그냥 너한테 받은 만큼 하는 거야. 네가 나한테 얼마나 잘해 줬는데….
- 아빠!
차분히 이어지던 가린의 말끝에 아이가 쑥 튀어 올랐다. 여준은 얼른 목소리를 가다듬고 애써 웃었다.
“응, 지오야. 오늘은 색칠 놀이가 하고 싶었어? 이모 너무 힘들게 하지 마.”
- 아니야, 없어도 괜찮은데, 이모가 공주하고 내가 마왕 하려고 그랬어.
“…마왕? 왕자 아니고?”
그 질문이 기폭제라도 된 듯 아이는 신이 나서 조잘대기 시작했다. 집에서 가지고 놀던 색칠 공부 책에 가린과 닮은 공주 캐릭터가 있어서 보여주고 싶다는 거였다. 아이에게서 도로 핸드폰을 가져간 가린이 거 보란 듯 말했다.
- 그렇게 됐네. 현관 비밀번호 좀 보내 봐. 이왕이면 네 통장이랑 집문서 위치도.
낮게 웃은 여준이 군말 없이 가린에게 집 비밀번호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었다. 통장과 집문서는 침실 옷장에 있다고 문자도 보낼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어쩐지 가린이라면 정말로 찾아들고 나올 것 같았다.
“…….”
창틀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두 손을 늘어뜨렸다. 반창고를 감아 놓은 손끝이 블라인드 그림자에 가려졌다. 눈을 감았다 뜨며 고개를 돌렸다. 사현은 여전히 고요한 잠에 빠져 있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곁으로 다가갔다. 의자를 가까이 끌어다 앉으며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가지런한 옆얼굴이 차분한 숨결마다 미세하게 약동했다. 여준은 두 손으로 사현의 손목을 쥐고 조심히 쓸어내렸다. 가칠한 피부 결이 고스란히 느껴져 묘한 기분이었다.
“언제까지 자는 거야?”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언제쯤 일어날 거야?”
바라고 묻는 것도 아니었다.
톡, 톡. 고개를 숙인 여준이 엄지로 사현의 손등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핸드폰을 쥐고 문자를 쓸 때처럼 도드라진 손등뼈와 단단한 손가락, 엄지와 검지 사이의 물갈퀴 같은 피부까지 꼼꼼히 어루만졌다. 모양과 감촉을 빠짐없이 마음에 새겨 넣으려는 듯이.
“너한테 소개해 줄 사람이 참 많아….”
전부 나눠줄게. 가진 것도, 아는 것도. 나눌 수 없는 거라면 몽땅 쥐여 줄게.
그러니까 돌아와. 그 쓸쓸한 무채색 사막에 혼자 있지 마. 여준은 어떤 의식처럼 사현의 손등 위로 이마를 묻었다. 기도의 말이 떠오르지 않는 시간은 그저 무력하게 흘렀다.
***
소리가 멈췄다. 사현은 이제 넓고 푹신한 소파에 기대앉아 있었다. 암막 기능이 없는 커튼은 노을빛에 고스란히 물들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스태프 롤이 어지러웠다. 새카만 화면에 모르는 글자로 모르는 이름이 흘렀다. 눈을 돌리자 옆자리에 편안히 앉은 여준이 보였다.
…….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 여준도 사현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고 미소가 번졌다. 사현은 그제야 이 꿈의 시작을 기억해냈다. 언젠가 차 안에서 졸며 보았던 사막이었다. 세상이 모조리 사라지고 둘만 남은 잿빛의 세상.
그러자 알 수 있었다. 이건 여준이 좋아하는 재난영화의 세계관 중 하나였다. 무인도에서 배구공에 말을 걸며 미쳐가는 남자나, 멸망한 세상에 혼자만 살아남아 마네킹과 춤추는 남자가 나오는. 여타 재난영화와는 다르게 화려한 그래픽도, 진땀 흐르는 액션도 없지만 여준은 어느 때보다도 집중해서 화면을 들여다보곤 했다.
저런 게 부러워요?
그렇게 물은 건 꿈속이었던가, 현실이었던가. 여준의 대답이 기억나지 않는 걸 보면 꿈속이었던 것 같다. 꿈에서 만나는 여준은 대체로 차갑고 무심했다. 그림 같은 미소를 띨 뿐 어떤 말에도 대답해 주지 않았다. 자신의 빈약한 상상력 탓인 것을 아는데도 깨어날 때마다 가슴이 저리도록 서운했다.
좋을 것 같지 않아?
차분한 반문이 울렸다. 사현의 눈이 크게 뜨였다. 어깨가 닿도록 가까이 다가온 여준이 눈을 휘어 웃고 있었다.
네가 좋다면 나는 좋아.
무책임하고 달콤한 속삭임이 간지러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여준이 어디론가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현도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창가로 스며들던 노을이 사라지고 다시 새하얀 사막이었다. 타다 만 장작처럼 탁한 하늘, 언제까지고 이어질 듯했던 길은 지평선을 세 걸음 앞두고 멈췄다.
아니, 당연히 지평선이 아니다. 깎아내린 듯 가파른 절벽이었다. 사현은 지면이 끝나는 지점에 발을 걸치고 낭떠러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새카맣게 깊어 끝이 보이지 않았다.
여기에 있자. 여준이 속삭였다. 여기엔 아무것도 없으니까. 사현은 웃었다. 자신의 한심하고 기박한 망상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 오랜 시간을 건너와 바라는 게 고작 이런 거라니. 이따위 멍청한 위안에 갇혀 끝나버릴 삶을 위해 지나온 모든 밤을 피로 물들였단 말인가.
하지만 방법이 없었다. 눈앞에 여준이 있고, 그 목소리가 들리는 이상 뻗어오는 손을 뿌리치기는 불가능했다. 시간이 흐르지 않는 사막에서 서로를 바라보다 죽어가는 상상만으로도 눈물이 맺힐 만큼 마음이 벅찼다.
…….
사현은 천천히 다가오는 그의 손끝에 맞추어 제 손을 뻗었다.
쿵.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린 것도 그때였다.
쿵, 쿵.
소리는 절벽 아래서 올라오고 있었다.
…….
손을 멈추고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쿵, 쿵. 일정하고 둔탁한 울림이 비처럼 이어졌다. 절벽 아래서 거인이 주먹을 내리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었다. 그는 어느새 벼랑 끝에 쭈그려 앉은 채 소리의 근원을 찾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사현은 마침내 그 정체를 깨달았다. 가만히 손을 들어 가슴에 대었다. 쿵, 손바닥을 때리는 심장 박동이 있었다. 피를 펌프질해 올리는 생명의 약동. 낭떠러지 밑에 파묻혀 그를 부르고 있는 것은 누군가의 맥박이었다.
…….
사현은 나뭇가지가 싹을 틔울 때보다 느린 속도로 여준이 있던 자리를 돌아보았다. 여준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고, 어떤 말도 없이 옅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사현의 상상 속 그는 언제나 그랬다. 절대 한순간도 나쁜 모습을 하지 않았다. 떠나는 그를 구태여 붙잡거나 모질게 타박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눈을 마주치면 가슴이 뛰었다. 그래서 사현은 절벽 아래서 올라오는 박동이 제 것이 아님을 알았다. 손아래서 펄떡이는 속도가 조금 더 빨랐다. 그렇다면 저건 누구의 숨일까. 이토록 가깝고도 먼 곳에서 간절히 부르는 소리는.
몸을 일으켰다.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웃고 있는 여준과 눈을 마주친 그대로 사현은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뒤꿈치가 허공에 뜨고 몸이 기울어졌다. 반사적으로 허우적댈 뻔했지만 그러기 전에 남은 발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안녕.
눈앞이 잿빛으로 뒤덮이더니 허옇게 번졌다.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이었다. 새카맣고 무겁고 거대한 질량이 덮쳐왔다. 갑갑하거나 두렵지는 않았다. 이 추락의 끝에서 기다리고 있을 이를 의심하지 않았으므로.
***
삑, 날카로운 기계음이 먼저 들렸다. 이어 굳은 손끝이 튀어 올랐다. 사현은 동면에서 깨어나는 산짐승처럼 몸의 세포를 하나씩 깨웠다. 가장 먼저 배 속을 뒤트는 통증이 덮쳐들었다. 어금니를 악물었지만 이미 숨에 섞여 나간 고통을 온전히 잡아챌 순 없었다.
“윽….”
아픈 자리를 짚고 싶었으나 오른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힘을 주려 할 때마다 압박감이 더해질 뿐이었다. 손도 어딘가 잘못됐나. 몸이 뜻대로 되지 않는 답답함에 미간을 한껏 찌푸린 사현이 힘겹게 눈을 떴다.
하얀 격자무늬 천장이 보였다. 목에 힘을 넣자마자 허리가 끊어질 것 같았다. 사현은 몸을 일으키기를 포기하고 다시 손끝을 움직이는 데 집중했다. 손등이 뭔가에 눌려 있었다. 팔목과 손가락을 감싼 체온도 느껴졌다.
“…….”
삭막한 기계음만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는 곧 손등에 닿는 일정한 울림을 느낄 수 있었다. 왼손을 움직여 펜스를 쥐고 안간힘을 다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배 속이 찢어지는 듯 아팠지만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익숙한 뒤통수가 보였다. 여준이 사현의 오른손등에 옆머리를 댄 채 엎드려 있었다. 그의 관자놀이에서 뛰는 맥이었다.
“…선배.”
남의 손을 이렇게 베고 자면 어떻게 해. 피가 안 통하잖아. 사현은 웃으며 손끝을 꿈틀거렸다. 선배. 재차 부르며 손마디를 구부리자 가지런한 코끝이 스쳤다. 동시에 엎드려 있던 몸이 화들짝 튀어 올랐다.
“헉…!”
우당탕,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준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당황한 사현이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시도와 동시에 심상치 않은 통증이 배 속을 할퀴었다.
“선….”
“아, 아야…. 아, 깜짝이야….”
다행히 여준은 금방 침대를 짚고 일어섰다. 머리는 부스스하고 옷은 흐트러졌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이곳저곳 반창고를 감아 놓은 두 손을 제외하고는.
“사현아.”
탄식하듯 내뱉은 여준이 얼른 몸을 기울였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소독약 냄새가 났다. 여준은 넋이 나간 얼굴로 사현을 이곳저곳 살피더니 다급히 너스 콜을 향해 손을 뻗었다.
“간호사 부르지 말아요.”
잠기고 갈라진 목소리를 억지로 말로 만들어 내뱉자 목이 아팠다. 하려던 행동을 저지당한 여준은 잠시 고장 난 장난감처럼 굳어 있었다. 사현은 저림이 가시지 않은 손으로 그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선배, 진정해요.”
“…어?”
“진정하라구요. 정신 차려요.”
“어, 정신…? 아, 나 진정했어. 아니, 난 확인을 하려고….”
두서없이 중얼대던 여준이 침대 펜스를 쥔 채 바닥으로 주저앉았다. 다친 손이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사현은 끙끙대며 간신히 그의 손목을 쥘 수 있었다.
“힘들겠지만 다시 서 봐요.”
“…미안해, 노, 놀라서.”
“아직 꿈인지 아닌지 모르겠어서 그래요. 얼굴 좀 보여줘요.”
여준은 한참을 더 꿈지럭대고 나서야 몸을 일으켰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이 눈물범벅이었다. 소리 없이 흐른 눈물과 불안과 환희가 점액질처럼 뒤엉킨 뺨이 따뜻하고 부드러웠다.
“꿈 아닌가 보네.”
“…….”
“우는 거 보니까.”
꿈에서는 울고 있는 여준을 본 적이 없었다. 꿈에서도 그런 모습은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눈을 감은 여준이 아이처럼 흐느끼기 시작했다.
“너 사흘을 잤어….”
“어쩐지 뻐근하더라.”
“진짜 가만히 안 둘 거야. 언젠가 복수할 거야. 얼마나 놀랐는지 알기나 해….”
여준이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사현은 침대 위로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방울을 눈으로 좇으며 속삭였다.
“나 선배한테 돌아갈 생각 없었어요.”
그러니 이 정도는 봐 달라는 듯이.
“정말 멀리 가려고 했는데.”
“…….”
“이래서야 꼼짝도 못 하겠네.”
입만 벙긋해도 옆구리가 뻐근했다. 여준은 눈물 젖은 뺨을 훔쳐내며 아랫입술을 꽉 물었다.
“간호사 부를게. 너 일어나면 부르라고 했어. 어디 아픈 데는 없어?”
“아프기야 온몸이 다 아파요. 선배가 베개로 썼던 손도 저리고.”
“…진통제 들어가고 있을 텐데, 그래도 아파?”
“칼 맞으면 원래 그래요.”
장난 섞인 말에도 여준은 그저 심각했다. 사현은 그의 안절부절못하는 손끝을 쥐어 눈앞으로 당겼다.
“선배는 손을 왜 이랬어요.”
“…….”
“아팠겠다….”
그 말에 여준이 울컥 치민 숨을 참았다. 꾹 눌러 담지 않았다면 큰 소리를 내고 말았을 것이다. 지금 이깟 게 문제야? 다행히 사현은 그가 하고 싶은 말도 이미 알고 있는 듯했다. 붉은 딱지가 진 여준의 손등에 입술을 누른 걸 보면.
“간호사 불러 줘요. 진통제 양 좀 늘려 달라는 말도 해 주고.”
“네가 말해. 일일이 부려먹으려 드네.”
“말 한마디 할 때마다 목이 아파서 그래요.”
“…그럼 그 얘기를 먼저 해!”
결국 소리를 높인 여준이 너스 콜을 눌렀다. 사현은 낮게 웃으며 편히 누웠다. 여준은 금방 안달을 내며 그의 팔을 쥐고 흔들었다.
“자려고? 그만 자.”
“안 자요. 목에 힘주면 아파서 그래요.”
“아….”
“안 잘 테니까 선배도 누워요. 누가 보면 선배가 환자라고 하겠네.”
당연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여준은 소매에 얼굴을 눌러 닦고는 의자를 끌어다 앉았다. 사현은 고개만 돌려 그와 눈을 마주쳤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간호사가 들어왔다. 몇 마디 말이 오가고, 주치의가 찾아오고, 몸에 달려 있던 관을 뽑고 링거 내용물이 바뀌는 동안 사현은 한순간도 여준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다른 곳을 보면 그가 사라지기라도 할 것처럼.
***
전화를 받은 가람이 갈아입을 옷가지를 챙겨 달려와 주었다. 어색한 분위기는 어찌할 수 없었지만 적대감은 느껴지지 않았다. 병실에 들어오려 하지 않는 가람에게서 넘겨받은 쇼핑백에는 속옷과 트레이닝복, 보온병에 담은 전복죽 따위가 들어 있었다.
“너 먹으라고 주는 거야, 너. 얼굴 상한 거 봐라.”
웃으며 인사하고 돌아오니 사현은 불 꺼진 입원실에서 편안히 잠들어 있었다. 여준은 쇼핑백을 내려놓고 보호자용 침대에 웅크린 채 모로 누웠다.
꿈은 꾸지 않았다. 그저 끝없이 깊이 빠져드는 잠이었다. 눈을 뜨자 어슴푸레 창가에 스민 새벽빛이 보였다. 벽에 걸린 시계가 새벽 네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두어 시간을 간신히 잠들었다가 소스라쳐 깨던 때에 비하면 간만에 평화로운 잠이었다.
한결 개운해진 몸을 일으켜 가벼운 스트레칭을 했다. 날짜는 일요일로 바뀌었고, 내일이면 회사에 나가야 했다. 고개를 숙인 채 긴 하품을 내뱉은 여준이 입맛을 다시며 몸을 일으켰다. 손발이 굳은 것도 그때였다.
“…….”
사현의 침대가 텅 비어 있었다.
“어….”
주춤대며 주위를 둘러보던 여준이 돌아섰다. 화장실과 샤워실을 차례로 열어젖혀 봐도 사현은 없었다. 눈꺼풀이 짧게 경련했다. 무작정 문을 열고 나섰다. 멀리 너스 스테이션의 불빛이 보였지만 그뿐이었다. 텅 빈 복도는 죽음처럼 고요했고 사현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선배한테 돌아갈 생각 없었어요.’
떠나려고 했던 것은 알고 있었다. 아픈 이마를 감싼 여준이 발소리를 죽여 복도를 달리기 시작했다. 너스 스테이션을 지키고 있던 당직 간호사가 그런 여준을 발견하고 의아한 얼굴을 했다. 여준은 더 따져 볼 것도 없이 얼른 데스크로 달려들었다.
“저, 2003호 환자, 혹시 무슨 일….”
“선배?”
목소리는 등 뒤에서 들렸다. 벼락 맞은 사람처럼 돌아보니 휠체어에 앉은 사현이 멀뚱한 얼굴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여준은 하마터면 푹 꺾일 뻔한 무릎에 간신히 힘을 주고 섰다.
“…놀랐잖아.”
사현은 희미하게 웃었다. 여준은 벌렁대는 가슴을 한 손으로 누른 채 침착하게 물었다.
“어디 갔었어?”
“휴게실에요. 조금씩이라도 움직이라고 하길래.”
“나 깨우지….”
“뭐 하러요. 혼자 할 만해서 나온 건데.”
병실로 가요. 눈짓한 사현이 능숙하게 방향을 돌려 휠체어를 몰기 시작했다. 여준은 그 뒤를 멍하니 따라가며 생각했다. 보통 뒤에서 밀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시선에 담긴 의문을 읽기라도 한 듯 사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나 휠체어 잘 다뤄요. 거의 반년을 타고 다녔었으니까.”
“…….”
“그거 알아요? 몇 달 누워서 지내면 처음엔 똑바로 앉기만 해도 현기증이 나요. 내내 머리에 몰려 있던 피가 갑자기 내려가서.”
손날을 들어 보인 사현이 제 머리에서 가슴까지 훑어 내리는 시늉을 했다. 여준은 고개를 저었다. 당연히 모른다. 그 순간에 여준은 그의 곁에 없었으므로.
“블라인드 좀 올려 줄래요?”
스스로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사현이 부탁했다. 여준은 말없이 창가로 다가가 블라인드 줄을 잡아당겼다. 삭막한 건물들이 다닥다닥 붙어 선 모양은 살풍경하기 짝이 없었다.
“사현아.”
휠체어를 창 가까이 붙이고도 사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사현….”
“멀쩡히 걸어 다니려면 한 달은 걸릴 거예요.”
“…….”
“그 시간이면 충분하겠어요?”
질문을 마친 사현이 물끄러미 시선을 던져 올렸다. 푸르스름한 빛이 도는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이 막혔다. 여준은 그의 말을 한참 곱씹고 나서야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형사가 내민 사진을 한참 들여다보았을 때처럼 신중한 대답이었다. 사현은 이제 웃고 있지 않았다.
“그럼 어떻게 하고 싶어요?”
“네가 원하는 대로 하고 싶어.”
“…….”
“사현아.”
여준이 두 손을 내밀었다. 사현은 순순히 그의 마른 손바닥 위로 제 손등을 얹었다. 천천히 쪼그려 앉은 여준은 세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언젠가 사현이 여준 앞에서 그러했듯이.
“우리 한 번도 그런 얘기는 안 했었잖아. 이제부터 어떻게 할지.”
“필요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은 어때? 아직도 네게는 필요하지 않아?”
“…선배는 이 사달을 겪고도 그런 말이 나와요?”
사현이 픽 웃었다. 여준은 웃지 않았다. 실없이 흘려보낼 시간이 없었다.
“나도 알아, 사현아. 같이 있어도…. 그 시간은 우리가 상상했던 것보다 멋지거나 절실한 게 아닐지도 몰라.”
“…….”
“나도 너에게 그런 걸 바라는 게 아니야. 모든 시간이 거창하고 화사하길 원하는 것도 아니야. 그냥…. 네가 내게 바랐던 거, 그 정도를 말하는 거야.”
힘든 일이 있을 때 부를 사람이 나였으면 좋겠어요. 딱 그 정도만 멀쩡한 인생을 살고 싶어요.
“아니, 아니야. 어쩌면 너는…. 너한테는 다를지도 모르지. 네가 원하는 건 더 대단한 거고, 나는 그걸 하나도 못 줄 수도 있어. 하지만, 그래도…. 시도조차 못 해 볼 이유는 없잖아.”
“선배.”
“가지 마….”
“…….”
“가지 마, 사현아…. 같이 있자.”
요란하고 드라마틱한 미래가 아니어도 돼. 그저 매일 똑같이 지나가는 하루, 나 자신이 얼마나 특별하지 않은지 절실하게 느껴지는 순간에 네 이름을 부를 수만 있다면. 억지로 평안을 가장하지 않고, 만들어진 미소를 띠지 않고, 서두가 필요 없는 감정을 서로의 몸에 쌓아갈 수만 있다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언제든 헤어질 수 있어.”
그러니까 그게 꼭 지금일 필요는 없어.
“같이 있자. 한 번만 시도해 보자. 우리가 가질 수 있는 미래가 그렇게 나쁘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고…. 한 번은 믿어볼 수도 있는 거잖아.”
혹시 나쁘다 해도 괜찮아. 무엇도 가져보지 못하고 끝나는 삶보다는 의미가 있을 테니까. 온 마음을 쏟아낸 애원은 유치하고, 직설적이고, 그리하여 무거웠다. 여준은 두 손으로 사현의 팔목을 쥐었다. 툭툭 떨어지는 마음을 갈무리할 방법은 몰랐지만, 지금 이 순간 존재하는 그를 붙잡을 수는 있었다.
“후회할 거예요.”
한참 후에야 사현이 짓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할 만큼 했어요.”
“응.”
“선배가 이런…. 잘못된 선택을 하지 않게, 그럴 수 있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 했어요.”
“맞아.”
“나는 마음껏 비열해질 수 있어요. 내 경고를 모조리 무시하고 여기까지 온 건 선배니까.”
여준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말이 다 맞아.
“나는….”
“…….”
“나….”
툭, 여준의 다친 손끝으로 굵은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고개를 들자 괴로운 듯 눈가를 찌푸린 사현이 보였다. 여준은 두 손을 들어 사현의 어깨를 둥글게 감쌌다. 상처를 건드릴까 두려워 그 이상 기댈 수 없음에 애가 탔다.
“…모르겠어요. 선배에 대해서는 나는 항상…. 아는 게 없어요.”
“…….”
“어떤 단어를, 어떻게 엮어서 뭐라고 뱉어야…. 이 속이 다 쏟아져 나오는 건지 전혀….”
아, 하며 여준은 눈물 어린 눈으로 웃었다. 그래서였구나. 너는 그래서 사랑 외의 모든 단어를 말했구나. 어떻게 말해야 할지를 몰라서.
“말 안 해도 돼.”
처음 본 순간부터 그랬어.
“다 들려….”
한 시도 의심한 적 없었어.
사현의 몸이 달처럼 기울어졌다. 여준은 바닥에 앉아 사현의 무릎으로 머리를 내렸다. 지나온 시간은 언젠가 불어난 업보를 짊어지고 부러진 손톱 아래로 파고들 것이다. 그때 버티기 위해서 쌓아야 할 마음이 있었다. 어려울 건 없었다. 살결을 맞대고 숨을 나누면 되었다.
“계속 들렸어.”
어떤 말도 필요하지 않았다.
모래바람 소리가 들린다. 잿빛의 하늘, 백색의 모래, 검은 낭떠러지. 어느 곳이라도 발길이 닿는다면 꽃이 피겠지.
여준은 눈을 감았다. 기다리는 것은 끝나지 않을 새벽이었다. 무릎가에 고운 모래가 출렁였다. 무의미한 말을 삼키느라 단단해진 혀끝은 부레 잃은 물고기처럼 고요히 가라앉았다. 파도보다 거대하고 요란한 침묵은 닳고 닳은 언어를 손쉽게 사멸시켰다.
손을 뻗어 서로의 등을 감쌌다. 둥글고 단단한 허리뼈를 손금에 맞추어 쥐자 깊고 어두운 물속으로 침몰하는 기분이 들었다. 두렵지는 않았다. 지평선을 찾아 오르면 언젠가 함께 있었던 새하얀 사막일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