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적란운
“…멀미 나.”
여준이 무심코 중얼거렸다. 사현은 그 말의 울림이 사라지기도 전에 액셀에서 발을 떼고 창문을 살짝 내렸다. 속도가 줄어든 차는 한밤중 올림픽대로의 빡빡한 흐름을 유연하게 빠져나가 곧장 한강공원으로 향했다. 여준은 점점 눈앞으로 다가오는 시커먼 강물을 멀리 바라보다 느릿하게 웃었다.
“무슨 말을 못 하겠어.”
“…….”
“너 가끔 애 같아. 앞에선 찬물도 못 마시는….”
사현은 들은 체 만 체 주차장에 차를 세웠다. 늦은 시간이라 간간히 산책하는 이들을 제외하면 인적 없이 고요했다.
“토할 것 같으면 말해요.”
“어쩌게? 문밖으로 던져 줄 거야?”
“손으로 받아 주게요.”
농인지 진인지 구분할 수 없는 말이었다. 여준은 늘어진 안전벨트에 머리를 기댄 채 사현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빛없이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 곧 시선을 맞춰왔다.
“사현아.”
“누가 보면 선배가 내 이름 지어 준 줄 알겠어요. 닳도록 부르네.”
“그러게. 내가 지어 준 이름이면 좋았을 텐데.”
“…….”
“가까이 와 봐. 여기까지.”
여준이 왼팔을 들어 올렸다. 힘이 빠져나간 손끝은 정확히 사현과 여준의 중간지점에 멈춰 섰다. 사현은 흰 손끝을 잠시 바라보다 고개를 숙였다. 마치 그러기로 약속했던 것처럼 여준의 손바닥에 제 뺨을 맞추는 움직임은 고요하고 순종적이었다.
“선배.”
“…….”
“왜 떨고 있어요?”
여준은 그제야 후들거리는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러자 등줄기가 뻣뻣하게 굳어졌다. 뱃속에 똬리를 틀고 있던 불안과 긴장이 온몸의 숨구멍으로 빠져나갈 때의 감각이었다.
“너는…. 내가 뭐가 그렇게 좋았어?”
나는 너한테 딱히 해 준 것도 없어. 뭐 그렇게 좋은 걸 준 적도 없어. 그런데 너는 대체 왜. 많은 말을 함축한 질문이 닿은 피부를 타고 사현에게로 건너갔다. 사현은 제게 온 수많은 ‘왜’를 설탕처럼 받아먹었다.
“나한테 준 모든 것이 선배한테는 그냥 아무것도 아닌 일이고…. 무엇 하나 특별할 것도 없는 거라서.”
“…….”
“그래서요. 그런 사람이라서.”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비가 안 오면 식물은 죽잖아요. 그렇다고 해서 비를 내리는 게 구름에게 대단히 특별하고 의미 있는 일은 아니죠. 지상에 있는 식물 하나하나를 살펴보고 하는 일도 아닐 테고.”
“…….”
“그런 거예요.”
더 모르겠어. 여준은 엄지로 사현의 입가를 쓸며 픽 웃었다.
“난 네가 갑자기 말을 잘하게 된 줄만 알았는데….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원래 너는 그랬던 것 같아. 묻지 않은 말은 거의 안 해서 그렇지, 한 번 입을 열면 망설이거나 더듬거리거나 했던 말을 정정하는 법이 없었어.”
“내가요?”
“물집 얘기 기억해? 네가 그랬잖아. 스스로 눈물을 멈추지 못하는 건 불에 데었을 때 물집이 잡히는 거랑 똑같다고.”
사현이 여준의 손바닥을 밀듯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요? 같은 말로 되묻는 표정이 무구했다.
“…좀 부끄러운데, 나한테 그 말이 되게 인상 깊었었나 봐. 학교 다닐 때…. 술자리에서 갑자기 어떤 여자 선배가 울기 시작한 거야. 근데 나도 술이 들어갔고…. 그 선배가 자기도 자기가 왜 우는지 모르겠다고, 울음이 안 멈추니까 너무 당황스럽다고 하소연을 하길래…. 나도 모르게 그 얘기를 했거든.”
“물집 어쩌고 하는 얘기요?”
“와…. 진짜. 나 살면서 그렇게 민망해 본 적 처음이었어. 순식간에 테이블 분위기가 싸해져서 다들 뭘 어떻게 반응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남의 말 갖다 쓰다 벌 받았네. 내가 봤어야 하는데.”
“그러니까.”
여준이 흐흐, 소리를 내며 사현의 뺨을 살짝 쥐었다 놓았다.
“그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이런 말이 통하려면 서로 비슷하게 쌓아 놓은 게 있어야 하는구나…. 왜냐면 나는 네가 그 얘기를 해 줬을 때 정말 큰 위로를 받았거든.”
“…….”
“비유적인 말들…. 사람의 깊은 감정을 들여다보고 건드리는 위로가 통하려면 그래, 이를테면 주파수 같은 걸 먼저 맞춰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사현은 한 마디 추임새 없이 듣고만 있었다. 여준은 열심히 말을 자아내다 말고 사현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은 말은….”
“…….”
“나도…. 그때 알았다는 거야. 나도 너만큼이나…. 어쩌면 너보다도 더.”
그 순간, 그 습하고 초연했던 밤. 미움 받았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가슴이 터지도록 부풀어 올랐던 열여덟의 여름에.
“나도 너를 그만큼 생각하고 있었다고….”
그러자 사현이 눈을 깜빡였다.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차갑고 고요한 밤, 서로의 숨과 말 외에는 어떤 소리조차 없는 공간에서 여준은 사현의 속눈썹이 겹쳐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사박, 하며 눈꺼풀이 맞물리는 찰나의 시간. 손바닥을 간질이는 얼굴 표면의 미세한 진동.
“그런 말 하지 말아요.”
차분히 만류한 사현이 여준의 손에 입술을 묻었다. 여준은 장난스레 눈가를 찡그렸다.
“말은 나더러 하지 말라면서 왜 네 입을 막아?”
“쓸데없는 소리 뱉을까 봐서요.”
“뭐 얼마나 대단한 소릴 하려고, 겁나게.”
“안 하니까 이대로 두세요.”
이대로 두세요. 여준은 그 말을 머릿속으로 되뇌며 눈을 감았다. 사현에게도 자신의 눈꺼풀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을까 궁금했다. 지금 이 순간, 신이든 천사든 악마든 뭐라도 나타난다면 그 손을 붙들고야 말 것 같았다. 어디로든 보내 달라고. 이 세상이 끝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좋으니까.
***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책상에 놓인 택배박스 하나가 눈에 띄었다. 사현은 쪽새의 인사를 무시하고 박스 테이프를 죽 뜯었다. 5만 원짜리 헌 지폐 다발이 정갈히 쌓인 모양에 실소가 새어 나왔다.
“세상 좋아졌지. 5만 원 지폐 없을 땐 돈 옮기는 것도 일이었는데 이젠 이게 박스 하나면 해결이 되네.”
“…형님.”
“이거 들고 좀 따라와.”
엉거주춤 다가온 쪽새가 읏차, 하며 박스를 들어 올렸다. 깡추의 사무실은 건물 맨 꼭대기 층에 있었다. 쪽새는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머뭇대는 기색도 없이 물었다.
“형님, 대체 무슨 일을 하신 겁니까…? 뭘 하셨길래 이런 돈이….”
“별일 아니야. 아무나 다 할 수 있는 거지.”
사현은 진심이었으나 쪽새는 경고로 알아듣고 입을 다물었다. 깡추의 사무실 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입구에 서서 문을 두드리자 사현의 기척을 뻔히 눈치채고도 모른 척하고 있던 깡추가 씩 웃으며 고개를 들었다.
“이사님 책상에 올려.”
사현이 쪽새를 향해 명령했다. 머뭇대며 안으로 들어선 쪽새가 돈다발이 든 택배박스를 깡추의 책상에 올려두었다. 깡추는 박스와 쪽새를 한 번씩 보고는 사현 쪽을 향해 의문이 담긴 시선을 보냈다.
“나가 봐.”
쪽새는 허리를 꾸벅 숙이고는 얌전히 문을 닫고 사라졌다. 사현은 뒷짐을 지고 선 채 박스 안쪽을 눈짓했다.
“뭐냐?”
택배박스를 툭 건드린 깡추가 물었다.
“이번 일 보수입니다.”
“돈인 건 나도 알아. 내 몫 떼고 너한테 갖다 놓은 거니까. 그걸 나한테 왜 들고 왔냐고.”
“그동안 벌었던 것도 다 드리겠습니다. 보통 한 건 처리하면 저한테 떨어지는 게 최소 2억이었고 그 작업 몇 번이나 있었는지는 저보다 형님이 더 잘 아실 테고….”
“…….”
“제 병원비에 재활비용으로 한 5천 쓰긴 했지만, 그거 제외해도 섭섭하실 금액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섭섭할지 안 할지 네가 어떻게 알아?”
깡추가 웃으며 담배를 빼 물었다. 한 대? 담뱃갑을 내밀며 묻는 말에 사현은 고개를 저었다.
“뭔데, 시위하는 거야? 일 잘해 놓고 왜? 어르신이 아주 만족하셔서 보너스도…. 아, 그래. 내가 그건 삥땅 좀 쳤다. 그거 알고 이러는 거지, 지금?”
“지금 알았지만 상관없습니다.”
일은 어이없으리만치 쉬웠다. 사람을 어느 정도로 다치게 해야 숨만 붙은 시체로 만들 수 있는지, 그 정도로 다치게 하려면 어떤 판을 짜야 하는지 사현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었다. 사현은 얕은 강에 가라앉은 타겟의 차를 확인하고 초시계를 눌렀다. 한 손에는 119를 찍어 놓은 대포폰을 든 채로.
“뭐, 설마 아예 그만두고 싶다고?”
깡추가 긴 연기를 뱉어 냈다. 시답잖은 농담을 주고받을 때처럼 평온한 몸짓이었다. 사현은 묵묵히 뒷짐 진 손만 한 번 고쳐 쥐었다.
“야, 사현아. 피곤해서 쉬고 싶으면 그렇게 말을 해. 내가 그 정도도 이해를 못 해 줄까 봐?”
“모자라다면 말씀하신 만큼 채울 때까지 더 받아서 하겠습니다.”
“…….”
사무실 안을 흐르는 공기가 뒤늦게 날카로워졌다. 깡추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소매를 한 번 접어 올렸다. 벌건 흉터로 남은 칼자국들이 빼곡히 박힌 팔이었다. 이제 와 저런 게 먹힐 거라 생각하는 걸까. 아니면 그저 임전 태세에 들어갈 때의 습관일까. 어느 쪽이든 사현에게는 중요치 않았다.
“물어나 보자.”
장초를 책상에 비벼 끈 깡추가 입을 열었다.
“그만두면 너 뭐 먹고 살게? 당분간 몸도 숨겨야 되는데 돈도 없이 어쩌려고 그래.”
근원적인 질문이었다. 사현은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우습게도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언젠가 헛되이 내뱉던 망상이었다.
“글쎄요…. 지방 내려가서 중장비 기사 자격증이라도 딸까….”
“허?”
“별생각은 없습니다. 당장 뭘 어쩔 것도 아니고요.”
나랑 같이 상해에 가자. 여준은 쉽게 말했고, 사현은 그 달콤한 말이 얼마나 무용한 울림을 가지고 있는지 그에게 굳이 설명해 줄 생각은 없었다. 여준은 움직이고 있었고, 스스로 주변을 정리하고 있었으므로.
“중장비? 뭐, 포클레인 끌고 지게차 운전하고 그런 거?”
“네, 뭐 비슷한 거.”
“이건 좀 웃겼네. 사현아, 답답한 자식아. 한 달 들여 판 짜면 3억씩 벌던 놈이 노가다나 뛰고 살겠다고? 내가 장담하는데 너 일주일도 못 버티고 다시 온다.”
“그럼 그냥 보내주셔도 되지 않습니까? 어차피 일주일 만에 돌아올 테니까요.”
“…….”
“이사님께는 남는 장사네요. 돈도 남고, 저도 남고.”
사현이 씩 웃었다. 깡추는 사현을 빤히 바라보다 제 머리를 벅벅 긁었다. 거친 뺨에 울룩불룩 핏줄이 솟아나기 시작했다.
“…야, 사현아. 너 한국 땅 다시 못 밟을 거니 어쩌니 그거 내가 겁준 거야. 그만큼 일 똑바로 하란 소리였어. 알잖아.”
“예, 압니다.”
“그래. 나도 다 알지. 작업 하나 하고 나며 뭐 중국이나 태국 이런 데 가서…. 멀쩡한 집도 못 잡고 구질구질한 아파트 옮겨 다니며 몇 달 개기다가 돌아와야 하고 그런 거 싫겠지. 나라도 싫어.”
“…….”
“네 생각에 불합리하게 느껴질 수 있어. 고생하는 건 난데, 저 새끼는 뭔데 따뜻한 사무실에 엉덩이 붙이고 반이나 처먹나…. 네 입장에선 그럴 수 있지. 내가 모르는 게 아니라니까.”
사현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깡추는 벌떡 일어나더니 척척 걸어 사현에게 다가왔다.
“우리 금액 부분은 다시 조정해 보자. 너도 알다시피 내가 그 돈을 그냥 먹는 게 아니야. 그런 일을 물어오기까지 밑 작업 경비가 다 포함된 거야. 그래도 네가 정 납득을 못하겠다면….”
“이사님.”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응? 저거 도로 가져가고. 사람 겁나게 왜 이래.”
“형님.”
“나가라고 했다.”
냉랭하게 내뱉은 깡추가 직접 문을 열었다. 사현은 한숨을 쉬고 우선 돌아섰다. 쉽게 해결될 일이라고는 애초에 생각하지 않았다.
“사현아.”
돌아선 등에 깡추의 부름이 떨어졌다. 내가 지어 준 이름이면 좋았을 텐데. 여준은 그렇게 말했지만 기실 사현의 인생에서 그의 이름을 가장 많이 부른 사람은 깡추였다.
“나는 황금알 낳는 거위 배를 굳이 가르지 않을 정도의 분별력은 있는 사람이야.”
창으로 해가 들고 있었다. 깡추의 전면에 그림자가 졌다. 새카만 어둠에 잠긴 얼굴에서 붉은 혀가 날름거렸다.
“하지만 그 거위를 두 눈 뜨고 놓치느니 목을 쳐버릴 사람이기도 하지. 어차피 놓칠 짐승이라면 남의 손에 가는 꼴도 못 봐.”
사현은 덤덤한 얼굴로 거의 겁박을 귀에 담았다. 깡추 역시 그가 겁먹거나 주춤하기를 기대했던 기색은 아니었다.
“그래, 나가 봐. 나가서 다시 한번 잘 생각해 봐.”
“…….”
“우리가 해오던 거래가 누구에게 이득이었는지, 그 정도 판단할 머리는 너한테 있는 줄 알았는데.”
그 말에 사현은 설핏 웃었다. 깡추가 이제 와서 내뱉는 틀에 박힌 말이 우습게 들린 탓이었다. 그러나 바꿔 말하자면 깡추에게 지금 이건 그 정도의 일이라는 뜻이었다. 뻔하고 우스운 레퍼토리 하나로 극복 가능한 정도의 가벼운 해프닝.
“알겠습니다.”
생각해 보죠. 사현도 가볍게 받아치고 사무실을 나섰다.
사람 백정이나 할 짓이지. 언젠가 홍게가 술에 취해 중얼거린 말이었다. 우리는 결국 사람을 잡아 파는 거야. 개돼지 때려잡아 사골까지 우려내서 남김없이 파는 도축업자나 똑같은 거라고. 그 말을 하며 홍게는 쓰게 웃었다. 사현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설마 그걸 여태 몰랐다는 말인가.
지겹지 않냐? 판을 스쳐 간 대부분의 이들이 물었고 사현도 누군가에게 쉽게 물었다. 어제와 다르지 않은 지위에 안심해야 하는 이 삶이, 도축되지 않은 하루에 안주해 내일의 불안을 잊어야 하는 생이 정말 만족스럽냐고.
“뭐 그래도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인간도 있는 거지….”
운전석 시트를 뒤로 젖힌 사현이 중얼거렸다. 어차피 모든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으리라 기대하진 않았다. 그는 핸들에 두 발을 올린 채 핸드폰을 들고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기본 배경화면에 ‘박영재’ 세 글자가 떠올랐다.
***
“…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참 만에 한숨부터 토해 놓은 가람이 중얼거렸다. 가린은 제 머리를 감싼 채 말이 없었다. 여준만이 초연한 얼굴로 서류를 도로 정리해 넣었다.
“뭐….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어요. 혹시 이렇지 않을까 하고.”
“야, 걔는…. 진짜 뭐 그런….”
“이쯤 되니 더 놀랄 것도 없더라고요. 애초에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의 사람이 아니었던 것 같아요.”
그러자 듣고만 있던 가린이 바닥을 탕, 내리쳤다.
“넌 화도 안 나? 진짜 뭐 이런 게 다 있어? 지는 그렇게 오만 남자 다 만나고 다녔으면서 너한테는 내 번호까지 차단하라고 그 지랄을 했단 말이야?”
은아는 여준의 핸드폰에 여자 번호가 있는 꼴을 두 눈 뜨고 보지 못했다. 메신저에 떠 있는 여자 이름에 일일이 말을 걸어 신경질을 부린 일도 있었다. 당연히 가린도 예외가 아니었고, 은아는 눈만 마주치면 알지도 못하는 가린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곤 했다.
“그때 일은 미안해.”
“그런 말 들으려고 하는 소리가 아니라! 난 정말….”
“알아. 그래도 미안해. 내가 잘못 선택한 탓에 너무 많은 사람이 피해를 봤어.”
습관적으로 입에 담은 미소는 혀가 아리도록 쓴맛이 났다. 여준은 서류봉투를 갈무리해 가방에 넣고 후우, 심호흡을 했다.
“형이랑 너는 알 권리가 있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말하는 거야. 어차피 지오한테도 평생 숨길 수 있는 일은 아니니까….”
그 말에 가람과 가린이 동시에 뭐? 하며 고개를 들었다.
“지오! …한테 말하게?”
“말할 거야?”
가린의 방에 지오가 잠들어 있었다. 여준이 검지를 입에 대고 나서야 세 어른은 동시에 목소리를 낮췄다.
“당장 그러겠다는 건 아니고 뭐 은아 유산 정리할 때나…. 지오 성인 되고 나서 말이야.”
“아니, 그래도….”
“죽을 때까지 숨길 수 있으면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게 뻔하잖아.”
여준이 어깨를 으쓱였다. 입을 벌린 채 한참 말이 없던 가린은 곧 가슴을 치며 일어섰다.
“나 담배 한 대만 피고 올게. 답답해서 못 있겠다.”
외투를 챙겨 입고 휑하니 나가 버리는 그녀를 붙잡을 수도 없었다. 여준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슬그머니 가람의 눈치를 보았다. 가람 역시 당장 뛰쳐나가 담배를 빼 물고 싶은 얼굴이었다.
째깍, 째깍, 초침 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사람 간의 침묵이 깨어진 것은 분침이 한 칸 움직이고 난 후였다.
“…그렇다는 건, 지오를 계속 네가 키울 거라는 뜻이지?”
예상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 질문이었다. 여준은 손등으로 턱을 누른 채 입꼬리를 올렸다.
“아니면요?”
“그게, 나는…. 여준아. 이런 말을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너무 싫기는 한데….”
“…….”
“은아 씨 집으로 보내는 게 맞다고 본다. 당연히 그 집에도 다 얘기하고.”
가람과 가린의 집은 필로티 구조의 투룸 빌라였다. 창이 작고 내부가 좁은 탓에 집 안에서 내는 소리는 유독 크게 울렸다. 여준은 가만히 가람을 바라보았고, 그 시선에 주춤했던 가람은 이내 마음을 다잡은 듯 단호한 목소리를 냈다.
“나도 지오 예쁘지. 내 조카처럼 생각해. 하지만 아닌 건 아닌 거야. 네가 감당해야 할 일이 아니라고.”
“왜요?”
“왜냐니. 너 은아 씨 유산도 모조리 지오 주겠다면서? 그럼 대체 너한테 남는 게 뭔데? 애가 성인이 될 때까지? 그래, 그게 딱 스물이라 쳐도 16년이야. 그 세월 지나면 네 나이가 몇인데, 네 애도 아닌 애 붙들고 키우느라 좋은 시절 다 보내겠다고?”
“…….”
“은아 씨 친정이 돈이 없는 집도 아니고, 애를 함부로 대할 것도 아니고…. 뭐, 애한테 감정적일 때가 있다고? 그건 애 키우는 사람은 누구나 그래. 너도 그랬잖아.”
정곡을 찌르는 말에는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여준은 제 뺨을 쓰다듬다 말고 음, 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얼굴은 또 사현뿐이었다. 선배가 죽으라면 죽을 수 있어요. 그렇기 때문에, 당신이 사랑하는 걸 함께 사랑할 수는 없어요….
그럼에도 지오를 안겨 주었다. 필요하다는 말에. 곁에 두고 싶다는 한 마디에. 사실은 가장 그러고 싶지 않았을 텐데.
“너 부모님은 어쩔 건데. 어머니가 아시면 뭐라고 하실 것 같은데? 그분들도 속일 거야?”
가람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어머니와 아버지. 이제는 가끔 얼굴도 가물가물했다. 이 사실을 안다면, 아들이 사실은 처음부터 아내에게 속았고 제 핏줄도 아닌 아이를 키우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집에는 숨길 수 있는 데까지 숨겨 볼 거예요. 어쩌다 알게 되신다면…. 뭐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야죠.”
“여준아.”
“형, 은아가 나한테 가르쳐 준 게 있어요.”
“…….”
“나는 정말 하등 특별할 게 없는 사람이라는 거예요.”
소파에 어깨를 기댄 여준이 설핏 웃으며 말했다. 가람은 머리 위로 물음표를 매단 채 눈썹을 찌푸렸다. 뭐?
“그렇게 생각하지 마. 은아 씨가 뭐라고 네가….”
“자학하는 게 아니에요. 제 말은 그러니까…. 저도 머리로는 알고 있었어요. 내가 뭐 대단한 사람 아니라는 거. 하지만 이렇게 대놓고 확인 사살 당해 본 건 처음이거든요.”
부족할 것 없이 살아왔다. 운 좋게 타고난 얼굴 덕에 어디서나 쉽게 호의를 얻었고 혜택을 누렸다. 아무리 마음을 다잡아도 별수 없이 가슴 한구석에 박힌 특권의식이 있었다. 손에 쥐는 모든 것은 애초에 내가 가져 마땅한 것이었다고.
“이제는 알겠어요. 세상 어딘가에는 있겠죠. 정말 특별하고, 모든 걸 가져 마땅한 사람이. 하지만 그게 나는 아니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
“그렇기 때문에, 나를 특별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 사람을 어떻게든 붙잡고 있어야 돼요.”
힘주어 내뱉은 여준이 길게 숨을 골랐다. 좁은 공간은 또다시 침묵으로 가득 찼다. 가람의 눈동자에 점점 미심쩍은 빛이 어렸다. 그는 두 손을 바닥에 짚은 채 고개를 기울이더니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너 이거 지오 얘기 아니지?”
여준은 대답 대신 웃어 버렸다. 하여튼 진짜 눈치는 빨라서.
“웃지 말고 말을 해 봐. 누군데? 내가 아는 사람이야?”
“형, 이 얘기는 좀 나중에….”
“설마…. 가린이는 아니지?”
가람의 얼굴이 잔뜩 심각해졌다. 여준은 내젓던 손을 멈춘 채 그와 눈을 맞췄다. 가람은 뱉어 놓고 아차 싶었는지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이내 헛기침을 했다.
“아니, 내 말은 가린이면 뭐가 어떻다는 게 아니라….”
“알아요. 아니니까 걱정 마세요, 형.”
“…….”
“가린이가 들으면 화내요. 걔랑 저는 애초에 한 번도 서로 그런 식으로 본 적 없는데.”
“인마, 그건 네 생각이고.”
딱 잘라 말한 가람이 한숨을 푹 쉬었다. 여준은 영문을 몰라 고개를 갸웃했다.
“너한테야 가린이가 그냥 친구겠지만 내가 보기에 가린이는 옛날부터 너 좋아했었어. 그래서 순간 이 녀석이 아직도…, 하고 내가 놀라가지고.”
“네? 아니라니까요. 가린이가 뭐가 아쉬워서….”
“너 고등학교 때 사귀는 애 있었지? 2학년 여름쯤에.”
여준이 멈칫, 입을 다물었다. 가람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때 가린이가 얼마나 엄마를 들들 볶았는지 내가 날짜를 다 기억한다. 너희가 다녔던 학원이 입원시험도 보고 들어가야 하는 그런 데였잖아. 가린이 그 학원 가려고 과외까지 받았어. 무슨 학원 하나 들어가자고 과외를 해, 참나.”
“…그건 그 학원이 유명했으니까, 다들 다니고 싶어 하던….”
“그래, 근데 그렇게 힘들게 들어간 학원인데 네가 툭하면 빠졌다며. 그런 소문이 돌았대. 성여준이 웬 연상녀한테 코 꿰여서 학원도 빼먹고 수업도 안 듣고, 그러다 성적이 곤두박질쳤다고.”
“성적은 답안지 밀려 써서 그랬던 건데….”
여준으로선 전혀 모르고 있던 소문이었다. 웬 연상녀에게 코가 꿰여서…. 사현을 대입하자 픽, 웃음이 샜다. 가람은 혀를 차고는 여준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하여튼 집에만 오면 엄마 붙들고서 엄마, 여준이 여자 친구 있다는 거 진짠가 봐. 엄마, 여준이 여자 친구 예쁠까? 엄마, 여준이 오늘도 학원 안 왔어. 어찌나 조잘대는지 아주 그냥 네 이름만 들어도 내가 귀에서 진물이 날 것 같았어.”
“…….”
“남녀 사이에 친구가 어딨냐는 말 나도 안 좋아하지만, 그거 바꿔 말하자면 이런 거잖아. ‘친구’라는 건 기본적으로 서로에게 인간적인 호감이 있어야 가능한 관계 아냐? 그런데 그 대상이 친구 이상 관계로 발전이 가능한 상대라면 뭐라도 될 확률이 월등히 높다 이거지.”
여준의 시선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맹세컨대 한 번도 가린을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가린 역시 여준에게 티 나게 행동한 적 없었다. 분위기가 가라앉자 가람은 또 금방 목소리 톤을 높였다.
“아니, 그렇다고 가린이가 뭐 너한테 죽고 못 살았다는 얘기가 아니고 어릴 때, 잠깐 그랬다는 소리야.”
“…아.”
“그래도 너 생각을 해 봐라. 걔가 지오를 그렇게 물고 빤 데에는…. …아니다, 이건 또 너무 갔네.”
“…….”
“됐다, 내가 괜한 소리 했어. 잊어버려. 가린이가 알면 나 뺨 맞을 판이다.”
“말 안 해요. 걱정 마세요.”
여준이 애써 밝은 표정으로 가람을 보았다. 가람은 어린 후배의 얼굴을 빤히 보다 말고 아, 하며 제 이마를 손바닥으로 때렸다.
“…미안하다, 여준아. 상처 받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안 받아요. 진짜 괜찮아요, 형.”
한 번 더 제 이마를 때리려는 가람의 손을 잡아 내리며 여준이 조곤조곤 말을 이었다.
“저 회사에서 만날 겪는 일이에요. 신입 철만 됐다 하면 병아리 같은 여자애들이 우르르 몰려와서 친한 척을 하다가, 소문 한번 돌고 나면 슬금슬금 멀어지고 그러는데….”
“아니, 나는.”
“가끔 자기는 그런 거 상관없다면서 혼자 비장해지는 사람 있거든요. 그쪽이 훨씬 무섭지.”
여준은 소리 내 웃었지만 가람은 웃지 못했다. 그의 뱃속에 휘돌고 있을 후회를 어떻게 해야 조금이라도 중화시킬 수 있을까, 여준이 고민하는 동안 다행히 문이 열리고 가린이 돌아왔다.
“어우, 추워. 이제 진짜 가을 끝났나 봐.”
발을 동동 구르며 들어서는 그녀는 잠옷에 야상 재킷 차림이었다. 여준은 혀를 차며 소파에 걸려 있던 담요를 내밀었다.
“추우면 얼른 들어오지, 그걸 또 부득불 피고 왔어?”
“불 댕기고 나서야 추워졌는데 그럼 어떡해. 장초를 버릴 수는 없잖아.”
담요를 어깨에 두른 가린이 냉큼 소파에 올라앉았다. 몸을 웅크린 채 눈을 둥글게 뜬 그녀는 먹이 저장을 끝낸 다람쥐 같았다.
“무슨 얘기하고 있었어?”
“별 얘기 안 했어. 당장 어쩔 수 있는 일도 아니니까.”
그건 그렇지, 하며 가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준은 가람의 눈치를 흘긋 보고는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조만간 누구 하나 소개해 줄게.”
가람과 가린의 시선이 동시에 여준에게 꽂혔다.
“뭐? 누굴? 너 설마 만나는 사람 있어?”
다다다 되물은 가린의 얼굴에 금방 미심쩍은 빛이 어렸다.
“누군데? 프로필만 대충 읊어 봐. 도대체 너 여자 보는 눈을 믿을 수가 있어야지.”
“나중에. 그쪽도 준비되고 나서.”
“내가 아는 사람이야?”
“…글쎄, 안다면 알고 모른다면 모를….”
“아, 답답해. 뭔데?”
가린이 다그치기 시작했지만 당장은 더 이상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여준은 대놓고 대화를 얼버무리려 가람에게 고개를 돌렸다.
“형, 우리 라면 끓여 먹을까요?”
“그럴까?”
“아, 좀!”
안주가 떨어지면 안주를 만들고, 술이 떨어지면 술을 꺼내며 온갖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다 판이 끝났을 때는 이미 새벽 두 시를 향해가는 시간이었다. 소파에 드러누워 잠든 가린에게 이불을 덮어 준 가람이 조심스레 작은 방을 가리켰다.
“주무세요, 형.”
인사를 건넨 여준이 가린의 방문을 열었다. 아이는 침대 끄트머리까지 굴러가 벽에 얼굴을 파묻다시피 한 채 잠들어 있었다. 여준은 이불을 끌어다 아이의 목까지 덮어 주었다. 작고 부드러운 뺨이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났다.
“…….”
평생 자라지 않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는 언젠가 다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언제가 될지는 누구도 모른다. 터지는 순간 마음을 조각내 버릴 시한폭탄이었다. 아이의 어깨를 쓸어내리던 여준의 손이 바르르 떨렸다.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미어질 듯 두려웠다.
“웅….”
그때 아이가 눈을 비비며 돌아누웠다. 둥근 뺨이 볼록하게 눌린 채 입을 벌리고 있던 아이가 어, 하며 배시시 웃었다.
“아빠다.”
눈도 채 뜨지 못한 채 품으로 파고드는 아이에게서 포근한 분내가 풍겼다. 여준은 아이의 머리를 감싸 안은 채 치미는 눈물을 참았다. 아이는 이제 여준에게 남은 단 하나의 죄악이었다.
***
「기회의 땅 F시, 당신의 미래 가치는 이곳에 있습니다! 지금 바로 전화 연결!」
수상쩍은 문자 메시지를 길게 눌러 지운 사현이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사기 수법은 웬만해서는 변하지 않는다. 매번 똑같은 레퍼토리에 매번 새로운 봉이 걸려들기 때문이다.
“근데 저희가 이 돈 다시 받을 수는 있는 겁니까?”
윤 실장이 못내 불만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사현은 담배 한 대를 빼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말했잖아. 유남복 엮여 있다고.”
“그 양반 뒷배도 예전 같지는 않다던데….”
“유남복 재산이 국내에만 있을 건 아닐 텐데. 마음먹고 털면 그쯤은 간단히 빼내실 분들이 왜 약한 소리를 할까?”
수수료가 모자라서? 사현이 웃으며 묻자 윤 실장은 하아, 들으란 듯 한숨 쉬며 손에 쥔 서류를 내려놓았다.
“애초에 이 판에 걸려들었다는 것부터가 유남복이 예전만 못하다는 소리 아닙니까. 저는 그 양반 벌써 노망이라도 왔나 했다니까요.”
“그건 어려울 게 없어. 정보 출처가 대양 임원이야. 유남복은 자기가 그 양반 약점을 잡고 있다고 생각하거든. 한배를 탄 사이에 이런 단순한 수로 자기 뒤통수를 칠 리가 없다고 믿겠지. 바로 그 점까지 계산하는 게 이런 양반들인 건 까맣게 모르고.”
“그래도….”
“쉽게 생각해. 그냥 하던 일 하면 되는 거야. 돈 빌려 달라 하면 빌려주고, 받을 때 되면 받고. 내가 언제 윤 실장 손해 보게 한 적 있었어?”
“아니 뭐, 임 팀장님 믿을 만한 분이신 건 제가 알지만 이 바닥이 꼭 신뢰 관계로만 돌아가는 건 아니니까요….”
웅얼거리던 윤 실장이 제 머리를 벅벅 긁기 시작했다. 반듯하게 넘겨 놓은 머리에서 굳은 젤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저희라고 뭐 좋아서 돈 안 갚는 새끼들 손톱 뽑고 다리 분지르고 그러겠습니까? 빌려준 돈 이자 잘 붙여서 갚고 웃는 얼굴로 바이바이하면 저희도 그게 좋아요. 무슨 사이코에 사디스트라서 이 뽑은 자리에 압정 박는 게 아니라고요. 소리 지르고 울면 얼마나 마음이 아픈데요.”
“알아. 그래서 부탁하는 거잖아.”
“전 몰라요. 여차하면 중국 애들한테 팔아 버릴 겁니다. 그 뒤에 무슨 일이 벌어질지는 장담 못 해요.”
손을 내저은 윤 실장이 가방을 챙겨 일어났다. 그러든지. 사현은 가볍게 대답하고 그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투덜대며 자리를 뜨고 있지만 그는 결국 사현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될 것이었다.
너는 설계에 재능이 있어. 어떻게 해야 남들이 네 계산대로 움직일지 잘 알지. 심지어 그걸 직접 실행할 배짱까지 가졌어. 네가 아무리 싸가지 없이 굴어도 봐주는 건 그래서야. 너는 내가 이 바닥에서 뽑아냈던 인재 중에 제일 쓸 만한 새끼니까.
깡추가 술에 취해 주절대던 말이 이제야 맴돌았다. 사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다. 타인을 원하는 대로 움직이고자 한다면 그가 욕망하는 바를 알면 된다. 깡추가 언제나 입에 달고 살던 말이 아니었던가.
핸드폰을 들고 시간을 확인했다. 토요일 밤 9시를 막 넘긴 때였다. 몇 개 없는 발신 기록에서 여준의 번호를 찾아 누르자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바빠요?”
뺨과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 물었다. 대답 없이 부스럭대는 소리만 들려왔다.
“선배?”
- 어? 아, 뭐야. 전화 온 거였네.
모르는 남자의 목소리였다. 사현은 금방 신경이 곤두선 채로 입을 다물었다.
- 잠시만요. 선임님, 전화 왔는데요. 죄송해요, 모르고 받아 버렸어요.
- 전화? 아….
핸드폰이 오가고 있는지 여기저기서 시끄러운 목소리가 들렸다. 아마 술자리인 것 같았다. 사현이 잠잠히 기다리는 동안 소음은 점점 줄어들더니 이내 여준이 여보세요, 하며 낮게 웃었다.
“왜 남의 손에 핸드폰을 맡겨 놔요?”
- 아하하, 번호 돌리고 있었어. 연말에 새로 단기 프로젝트 들어가는데 처음 본 팀원도 있고 해서.
끝이 살짝 뭉그러지는 것이 술기운이 묻은 말투였다. 사현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잠시 생각에 잠겼다. 이런 목소리를 앞으로 몇 번이나 더 들을 수 있을까.
- 웬일이야? 나 보고 싶어서?
“잠깐 전해 줄 게 있어서요. 언제 끝나요?”
- 회식? 글쎄…? 이제 막 분위기 탔는데.
분명 그럴 만한 시간이었다. 사현은 두 번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에 봐요, 그럼.”
- 다음에 언제…? 급한 거야?
“별로 급할 건 없어요.”
- 언제 끝나냐고 물어서 멀었다고 한 거야. 나오라고 하면 나갈 수 있어.
넉살 좋은 말에 사현이 픽 웃었다. 살짝 술기운 오른 얼굴로 어딘가에 기대 서 있을 여준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그럼 나와요. 데리러 갈 테니까.”
- 그래. 나 술 깨기 전에 빨리 와.
유혹적인 말과 함께 전화는 뚝 끊어졌다. 사현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외투를 챙겨 일어났다.
토요일 밤 강남대로의 사람 물결을 헤치고 왔음에도 여준은 멀쩡한 모습이었다. 뺨이 살짝 붉어졌을 뿐, 옷이며 머리는 흐트러진 데 없이 가지런했다. 사현은 아쉬운 마음을 입 안으로 삼키고 조수석 문을 열었다. 냉큼 올라탄 여준이 고개를 기울인 채 씩 웃었다.
“뭘 주려고 이 시간에 태우러 왔어? 기대되게.”
“실컷 기대해요. 좋은 거니까.”
여준은 그래- 하며 시트에 몸을 파묻었다. 목도리에 코 아래까지 파묻은 모양이 어린 소년처럼 보였다.
강남을 빠져나간 차가 향하는 방향을 유심히 보던 여준이 아, 하며 입을 벌렸다. 사현이 사는 동네로 향하는 길이었다. 스쳐 가는 익숙한 표지판을 한 글자씩 헤아리던 눈동자에 도시의 불빛들이 산란하며 스며들었다.
사현의 집 앞까지는 차가 올라갈 수 없었다. 언덕길 아래쪽 주차장에 차를 대고 내리자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한 걸음 앞서 올라가는 사현의 등을 쫓으며 되살아나는 기억을 한 뼘씩 갈무리해 담았다.
“이런 식으로 가는 건 처음이네.”
여준이 중얼거린 말에 사현이 돌아보았다. 사현의 집에서 함께 나온 적은 있어도 나란히 들어간 적은 없었다.
“그러네요.”
“처음 왔을 땐 왜 그렇게 멀게 느껴졌던 건지 모르겠어. 별로 멀지도 않은데…. 여름이라 힘들어서 그랬나?”
아니면 그때의 걸음이 지금보다 작았던 걸까.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고 그들은 묵묵히 낡은 대문 앞까지 걸었다. 사현은 잠겨 있지 않은 대문을 툭 걷어차 열고는 핸드폰 불빛으로 여준의 발밑을 비춰 주었다.
“천천히 내려와요. 계단에 등 달아야겠다 생각은 매번 하는데 매번 까먹어서.”
“집주인한테 달아 달라고 해야 하는 거 아니야?”
“지금 집주인 나예요. 1층이랑 2층은 세 주고 있고.”
“…….”
여준은 저도 모르게 건물을 휙 둘러보았다. 집값이 비싼 지역이 아니라고는 하지만 서울 소재 2층 주택인데, 이걸 샀다고? 사현은 그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양 내뱉었다.
“집주인이 보수 하나도 안 하는 대신에 싸게 넘겼어요. 아예 헐고 다시 지을까 생각도 했는데 그러려면 이것저것 복잡하길래.”
“아….”
“들어와요.”
반지하 방은 언제나 그랬듯 새카만 어둠에 잠겨 있었다. 여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신발을 벗으며 물음표를 띄웠다.
“그럼 2층에 살든가 하지, 왜 아직도 이 방에 살아?”
“1, 2층 전부 방 세 개짜리예요. 혼자 살기엔 크잖아요.”
그래도 보통 집주인이 가장 높은 층에 살지 않나…? 머리를 긁적이는 여준을 뒤로 한 채 사현은 휑하니 주방으로 가 버렸다. 주방이라고 해 봐야 방 한구석에 개수대를 갖다 놓은 게 다였지만. 어디든 앉아서 기다릴 셈으로 여준이 방을 둘러보는데 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선배, 이쪽으로 와 봐요.”
마악 몸을 낮추던 여준이 얼른 주방으로 향했다. 사현은 어디선가 사다리를 끌어다 놓고는 그 위에 올라서 있었다.
“뭐 해?”
“잘 봐요. 여기 찬장 입구 맞물리는 부분에서 일직선으로 내려오면 돼요.”
“…어?”
손끝으로 천장을 훑어 내리던 사현이 찬장에 닿은 도배지 끝을 붙잡고 주욱 뜯어냈다. 여준은 눈을 크게 뜬 채 천장에 붙은 네모난 환풍구를 올려다보았다.
“여기 원래 세 주는 방이 두 개였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 단속이 뜨면서 가벽 헐고 화장실 하나도 없앴는데 이것만 남은 거예요.”
“응? 그런데 그걸 뜯으면 어떡해.”
“이렇게…. 위로 밀면 열려요.”
사현이 팔을 뻗어 네모난 뚜껑을 들어 올렸다. 작은 동굴 같은 공간이 드러나자 여준은 점점 더 어리둥절해졌다.
“뭐 하는 거야?”
“찬장 보고 선 상태로 오른쪽이에요.”
환풍구 구멍 안으로 손을 넣은 사현이 무언가를 잡아 빼냈다. 검고 긴 보스턴백이었다. 쿵, 아래로 떨어진 가방이 묵직한 소리를 냈다. 손을 털고 사다리에서 내려온 사현이 가방 앞에 한쪽 무릎을 대고 앉았다. 여준도 조금 떨어진 자리에 앉아 가방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뭐 토막 난 시체라도 들어 있는 건 아니지?”
“그렇게까지 대단한 걸 기대했어요? 응해 주지 못해서 미안하네.”
낮게 웃은 사현이 가방 지퍼를 한 번에 열었다. 배를 갈린 생선처럼 늘어진 가방 속에는 100달러 지폐 뭉치가 빼곡히 차 있었다.
“…….”
눈을 껌뻑이며 그 모양을 내려다보던 여준이 손을 들어 미간을 문질렀다. 꿈이라도 꾸나. 그러나 다시 봐도 돈이었다. 그것도 어지간히 여러 사람의 손을 탄 듯 꼬질꼬질하게 헌 지폐였다.
“…이게 뭐야?”
“이거 한…. 40만 달러쯤 될 거예요.”
“아니, 돈인 건 아는데….”
“세탁 깔끔하게 끝내서 안전한 돈이니까 걱정할 거 없어요. 이 안에 여기 집문서도 들어 있는데…. 아, 이거.”
보스턴백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낸 사현이 여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받아요. 여준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사현의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 방 열쇠예요.”
“기다려 봐. 이거 지금 나한테 왜 보여 주는 거야? 어쩌라고?”
여준은 그나마 있던 취기마저 싹 날려 버린 얼굴이었다. 음, 하며 제 볼 안쪽을 혀로 누른 사현이 차분히 대답했다.
“가지라고요. 이런 거 보여 주는 데 다른 이유가 있겠어요?”
“그러니까, 이걸 왜 주는데?”
“줄 만한 게 이런 것뿐이라서요.”
“…….”
“더 많이 주고 싶었는데, 몰래 빼돌리려면 이 정도가 한계였어요. 선배한테 이 정도는 뭐 돈도 아닐지도 모르지만…. 자요.”
사현이 열쇠 쥔 손을 재차 내밀었다. 여준은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잡아 내렸다.
“사현아. 나 지금 장난하자는 거 아니야.”
“나는 장난하는 것처럼 보여요?”
“뭐 하자는 거야? 지금 이게 다 뭔데?”
다그치는 말에 사현은 금방 입을 다물어 버렸다. 여준은 답답한 마음에 가방을 멀리 밀쳐 버리려 했지만 어찌나 무거운지 웬만큼 밀어서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초조함만 더해지자 울컥 짜증이 솟았다.
“너 왜 이래? 왜 갑자기 이런 짓을 해? 무슨 유산 정리하는 사람처럼.”
“선배.”
“나 이런 거 필요 없어. 내가 전에 했던 말 때문에 그래? 내 돈 같은 거 없어도 너 충분히 먹고산다고, 그 얘기 하고 싶은 거야? 그런 거면 말로 해! 말로 해도 알아듣잖아!”
“선배, 내 얘기 잘 들어요.”
단호히 내뱉은 사현의 여준의 팔을 쥐었다. 여준은 발작적으로 팔을 빼려 몸을 뒤틀었지만 사현의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나는 선배랑 같이 못 가요.”
침착하고, 덤덤하지만 냉랭한 목소리였다. 여준의 뺨이 석고처럼 새하얗게 굳었다. 갑작스러운 멀미가 닥쳐올 때처럼 현기증이 일었다.
“선배가 원하는 대로 해 줄 수 없어요.”
“…….”
“그러니까…. 이런 거라도 주고 싶은 거예요.”
긴 이명이 울렸다. 여준은 로프 하나 달랑 쥔 채 벼랑 끝에 선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창백하게 굳은 뺨으로 공포와 불안, 서툰 희망 따위가 산발적으로 떠올랐다.
“…왜?”
혀끝에서 놓쳐 버린 말은 눈물과 함께 쏟아져 나왔다. 사현은 말없이 여준의 팔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가까워진 품에서 찬바람이 흘렀다. 여준이 두 눈을 꽉 감았다.
물기 없이 단단한 침묵이 동굴 같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손목시계 초침 소리마저 들릴 지경이었다. 그 죽음 같은 고요 속에서 여준은 천천히 울음을 삼켰다. 눈을 꾹 감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놓고, 손끝부터 말아 쥔 주먹을 꼼꼼히 여며 바닥을 짚은 채 온몸에 힘을 주었다. 불에 덴 듯 속이 끓어오르는 고통을 인내함으로써 그가 얻고자 한 것은 시간이었다. 뱃속이 타들어 가는 통증을 꾸역꾸역 삼켜내 마침내 고개를 들었을 때, 여준의 얼굴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이유를 말해 봐.”
벌어진 입술은 떨렸지만 목소리는 지극히 차분했다. 사현은 대답 없이 시선을 피했다. 여준은 재촉하거나 다그치는 대신 같은 말을 다른 언어로 반복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믿을 테니까.”
이번에는 사현에게 시간이 필요했다. 먼 곳으로 향한 눈동자는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믿고 말고 할 게 뭐가 있어요.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건데.”
한참 만에 나온 대답에 여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무슨 상식? 너 그런 거 따지고 사는 사람이었어?”
“선배는 내 인생 감당 못 해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잖아요.”
“너는? 넌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아?”
“말꼬리나 잡고 싶은 게 아니면 그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요.”
뭐라 받아치려던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내리뜬 눈자위가 붉게 물들어 건드리면 툭 터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뭐가 문제야? 조직에서 발을 빼기 어렵다거나…. 그런 거야?”
“조직….”
사현이 픽, 바람 새는 웃음을 터뜨렸다. 그런 삼류 양아치 집단이 조직은 무슨. 여준은 대놓고 비협조적으로 나오는 사현에게 기죽지 않고 말끝에 힘을 주었다.
“나한테 얘기해 봐.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 있을지도 모르….”
“내가 그러기 싫어요.”
“사현아.”
“선배, 세상엔 이렇게 사는 사람도 있는 거예요. 모든 사람에게 선배처럼 고아한 삶이 준비되어 있지는 않아요. 도저히 좁힐 수 없는 강이 보인다면 포기할 줄도 알아야죠.”
사현이 성의 없는 손짓으로 보스턴백을 툭 건드렸다. 여준은 찢긴 내장처럼 가득 찬 지폐 뭉치를 바라보다 긴말을 뱉기 위한 숨을 삼켰다.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그 정도는 아니라는 거지?”
사현은 대답이 없었다.
“그럼 그렇게 말해, 사현아.”
“…….”
“같이 갈 수 없다고 하지 말고, 같이 가기 싫다고 해. 너한테 내가 그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다고 분명히 말해. 그럼 이깟 돈…. 이런 모욕적인 선물 없어도 깨끗하게 포기할게.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을게.”
명징하고 차분한 목소리가 힘 있는 울림을 남겼다. 사현은 여전히 시선을 피한 채 말이 없었다.
“사현아.”
“…….”
“임사현.”
“못 해요.”
낮고, 작고, 차가운 목소리였지만 칼에 찔린 짐승이 뱉어 낸 단말마처럼 선명하게 들렸다.
“그런 말은 안 나와요.”
“…….”
“해야 된다는 거 알아도, 머리로는 백 번 천 번 되새겨도…. 입 밖으로는 도저히 못….”
사현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그는 아주 높고 가파른 허공에서 팔 벌려 추락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가장 어둡고 낮은 반지하 단칸방에서 무릎을 대고 앉아 있음에도.
“선배.”
그가 썩은 동아줄에 매달리듯 여준의 팔을 쥐었다. 여준은 끈 떨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사현의 영역으로 몸을 넘겼다.
“나는 선배한테 실수한 거 없어요.”
“…….”
“실수라는 말로 덮고 싶지 않아요. 그건 내 충동 그 자체였어요. 매일 밤 꿈에서 선배를 그렇게 만들고 있었어요.”
여준은 뒤늦게 그가 그날의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어둡고 습했던 밤, 무력하게 짓눌린 채 끈적한 절망에 잡아먹히던 순간이 생생하게 되살아나고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사현은 순식간에 굳어 버린 여준의 어깨를 놓아주며 쓰게 웃었다.
“그런 건 실수가 아니에요. 실수라는 건 더…. 가볍고 덜 해로운 걸 말하는 거죠. 찻잔을 엎었다거나, 의자를 넘어뜨렸다거나…. 그런 게 실수예요. 적어도 나처럼 사람을 다치게 했을 때 쓰는 말은 아닐 거예요.”
“난 아무 데도 다치지….”
“정말 내게 일말의 악의도 없었고 오로지 실수였다면, 내가 그 정도로…. 최소한의 염치가 있는 인간이었다면 지금 이 순간이라도 선배한테 말해야 하잖아요. 당신 나한테 그 정도 아니니까 가라고.”
“…….”
“그런데 지금 이게 다 뭐냐고요. 선배 못 따라가겠다 했을 때 선배가 그래, 하고 물러날 리가 없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알아요. 아는데도 이런 쇼를 하고 있어요. 차갑게 대했을 때 선배가 상처 받고 우는 꼴이 보고 싶어서.”
사현이 거칠게 제 머리를 쓸어 넘겼다. 여준은 고개를 저으며 사현의 옷소매를 쥐었다.
“아니야, 사현아. 너는…. 나를 못 믿는 것뿐이야.”
“그런 게 아니라-.”
“불안한 거지. 나랑 같이 간다는 게 너무 불안하고 막막한 거야. 왜냐하면 내가…. 너무 오랫동안 너를 외롭게 했으니까.”
“…….”
“확인하고 싶은 거잖아. 두 번 다시 너를 배신하지 않을지.”
“선배는 나 배신한 적 없어요.”
“아니야. 배신했어. 몇 번이나 그랬어. 너도 사실은 다 알잖아.”
너를 향한 마음이 얼마나 시혜적인 형태를 띠고 있었는지, 그 시선이 어떤 형태로 네 마음을 좀먹어갔는지.
“사현아…. 원하는 걸 말해.”
여준이 두 손으로 사현의 얼굴을 감쌌다. 사현은 서럽도록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허공을 떠도는 시선에 짙은 당혹감이 어렸다.
“내게 원하는 걸 말해. 너는 그럴 자격이 있어.”
바스러질 듯 서서히 올라온 사현의 손끝이 여준의 손등을 더듬었다. 차갑게 식어 버린 손은 딱딱하고 가칠했다. 낡은 형광등이 껌벅대며 점멸했다. 마음이 딱딱하게 뭉쳐 버린 혀끝은 자꾸만 입 안에서 뒷걸음질 쳤다. 동굴 같은 가슴속, 오래도록 잠들어 있던 소원은 시랍화된 동물의 사체처럼 온전하기에 끔찍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나는.”
온몸이 고통으로 들끓던 때가 있었다. 부러진 뼈가 몸 안을 돌아다니며 장기를 찢어대던 밤, 온 얼굴의 구멍에서 피를 쏟으며 차라리 죽음을 바라던 그 밤이 사현에게는 구원이었다. 진통제조차 받지 못하고 열에 시달리며 지새야 하는 새벽이면 어느샌가 저울추가 눈에 보였다. 공포에 질려 떨고 있던 여준이 건너편 저울에 오른 채 가만히 사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네 고통이 언제쯤 내 추보다 무거워질지 지켜보겠다는 듯이.
“나는 선배가….”
사현은 맹세코 여준을 탓한 적이 없었다. 탓할 이유가 없었다. 여준이 초능력자가 아닌 이상 그가 어찌할 수 없는 일뿐이었다. 그럼에도 여준은 그에게 용서를 구하고 있었다. 감싸 주지 못 해서 미안하다고. 배신했던 죄를 인정한다고.
“…….”
그러니 이 정도 소원은 말할 수 있지 않을까.
“…도움, 이 필요할 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라…. 정말 사소한 거, 누구에게든 청할 수 있는 그런 거라도….”
“응.”
“나한테 말했으면 좋겠어요.”
“…….”
“선배가, 살다가…. 자주는 아니더라도, 아주 가끔이라도…. 뭐 하고 지내나 궁금해하고, 한 번쯤은 만나서…. 살아온 이야기 하고, 듣고….”
“…….”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
“선배가…. 내가 선배를, 정말 사랑한다는 걸 알아도….”
“…….”
“선배를 사랑하도록…. 그냥 내버려 둘 수 있는….”
품으로 끌어당기는 손은 차분하고 잠잠했다. 여준은 사현의 머리를 가득 안고 그의 옆머리에 뺨을 붙였다. 검은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코끝을 간질였다. 사현은 여준의 등에 손을 올린 채 오랫동안 숨을 골랐다.
“선배.”
“…응.”
“나는 선배 괴롭게 하고 싶지 않아요.”
“알아.”
“나는 썩은 숲에서 자란 나무예요. 스스로 뿌리를 자르고 기어나갈 수는 있어요. 하지만 나한테 묻어 있는 썩은 숲의 잔해가 선배의 숲까지 망칠 거예요. 그걸 뻔히 알면서 어떻게 당신을 따라갈 수가 있겠어요.”
“…….”
“나는 여기서 살아도 돼요. 당장 선배 갖지 못해도 돼요. 그냥 가끔만 만나줘요. 그 정도는 해 줄 거잖아요. 평생 안 보겠다더니, 이만하면 선배도 충분히 양보하고 타협한 거 아니에요? 난 이 정도도 충분히 고맙고 황송해요. 진심이에요.”
여준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런 건 아무런 의미도 없어.
“사현아, 내가 널 갖고 싶은 거야.”
그래서 다 끌어안고 가기로 한 거야. 몸을 떼어 낸 여준이 사현의 뺨을 엄지로 훔쳐냈다. 눈물을 닦아 주는 듯한 동작이었지만 사현은 울고 있지 않았다.
“너는 내가 대단히 특별하고 빛나는 사람인 줄 알지. 내 숲이 무슨 청정 지역이라도 된다고 생각하지. 지금은 아니야, 아니…. 옛날에도 아니었어.”
여준의 손끝을 따라 사현의 눈동자도 함께 흔들렸다. 하아, 무거운 숨을 뱉는 여준의 입술이 잘게 떨렸다.
“함께 썩어가는 미래밖에 없을 것 같아? 그래도 뭐 어쩌겠어….”
“…….”
“네가 살아갈 방법이 그것뿐이라면 괜찮아.”
다 오염시켜. 썩은 뿌리를 내리고 같은 날을 살자. 속삭이는 말이 터무니없는 유혹이라도 된다는 듯이 사현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나 이마가 닿고, 가까워진 입술이 맞물리고, 서로의 몸을 붙든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까지 막지는 못했다.
“…읏.”
여준의 감긴 속눈썹이 바르르 떨렸다. 허리에 힘이 풀려 무너진 팔이 낡은 장판을 긁었다. 사현은 기울어진 여준의 등을 감싼 채 그의 재킷을 열고 넥타이를 당겨 내렸다. 그러고는 한 손으로 셔츠 단추를 풀어내는 그를 보던 여준이 낮은 웃음을 터뜨렸다.
“나한테 벗으라고 하면 되지, 그걸 또 그렇게 일일이 풀고 있어….”
여준이 사현의 손을 밀어내고 일어나 앉았다. 단추를 남김없이 풀어내 셔츠에서 팔을 빼는 동안에도 그는 키득키득 웃고 있었다. 사현은 못마땅한 얼굴로 여준에게서 받아 든 코트와 재킷을 가지런히 접어 내려놓았다.
“옷 망치지 말라면서요.”
“그래, 옷은 좀 봐줘. 단추 하나도 없는 꼴로 길거리 배회하는 건 이제 그만하고 싶네.”
“당신을 망치는 건?”
바지 버클을 풀어내던 여준이 멈칫했다. 사현은 세운 무릎에 턱을 괸 채 여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감당할 수 있어요?”
뻔한 시험의 말이었다. 알면서도 여준은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시선을 피한 채 망설이는 모습에 사현은 흐릿하게 웃었다.
“…그, 있잖아.”
한참 후에야 입을 연 여준은 눈썹을 푹 가라앉힌 채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럼 나 일단 샤워부터 하면 안 돼?”
“…….”
“지금 생각해 보니 오늘 하루 종일 밖에 있었고, 회식도 고깃집이어서 냄새….”
사현은 말없이 여준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었다. 쇄골부터 이어진 목줄기에 이를 세우자 달큼한 알코올 향이 희미하게 풍겼다. 움칫, 짧게 경련한 여준이 사현의 어깨에 팔을 감았다. 차가운 공기에 닿은 벗은 상체에 오돌토돌 소름이 돋아 있었다.
“아무 냄새 안 나요.”
“그래도….”
“씻는 척하고 도망치려 해도 소용없어요. 욕실에 창문 없으니까.”
진담 같은 농담에도 여준은 쉽게 웃었다. 편안해진 분위기에 어두운 방이 알맞게 조여들었다. 몇 걸음 앞에 매트리스를 두고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도 여준은 아무 말이 없었다. 사현은 창백해진 그의 어깨를 손끝으로 쓸어내다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는 싫어요?”
여준의 눈동자가 순간 약하게 흔들렸다.
“아….”
당장 주워섬길 변명조차 찾지 못한 반응이었다. 사현은 제 목에 닿은 여준의 손끝이 떨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몸속을 흐르던 욕망이 슬금슬금 가라앉았다. 죄악감에 젖어 드는 그의 뺨으로 여준의 손이 흘러내렸다.
“그래, 나 그게 계속 궁금했는데….”
“……?”
“그날…. 뭐였어? 술 때문이었어?”
시선을 맞춰오는 여준의 눈동자는 밝고 명료했다. 누구라도 그 앞에서는 거짓을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사현은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 뜨고는 고개를 저었다.
“약 같은 게 들어 있었던 모양이에요. 실수로 저한테 준 건데….”
“…약?”
“그러니까, 사람을…. 잠깐 정신이 나가게 하는…. 그런 거예요.”
“…….”
“조금 먹었더니 맛이 이상해서 버렸는데…. 깨 보니 선배가 있길래, 그게 현실일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하고.”
말을 띄엄띄엄 이어 가던 사현이 이마를 문질렀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입술이 파리하게 질려 있었다. 여준은 가만히 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잡아 내렸다. 촉, 입술을 가볍게 맞대고 떨어지는 키스는 빈집을 향한 노크 같았다.
“변명하고 싶은 게 아니에요. 그….”
“너는?”
“……?”
“너는 괜찮았어? 그때…. 그런 이상한 약을 먹었는데.”
조심스레 묻는 말에 사현이 눈을 껌벅였다. 여준의 말뜻을 잘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여준은 망설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그때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은 했어. 너 그렇게 두고 나오면서도 걱정이 됐어. 그런데 당장 내가 놀란 것 때문에 경황이 없어서….”
“…….”
“미안해…. 좀 살펴보고 얘기를 들어볼 걸, 아니, 애초에 그렇게 소리 없이 쫓아가지 말고 말을 걸었으면….”
어쩌면 그렇게도 어리석었을까. 그냥 이름 불러 돌려세웠으면 될 일이었는데. 너를 보고 싶었다고, 네 얘기를 듣고 싶었다고 말했다면 됐을 텐데. 그깟 알량한 자존심이 뭐라고 널 찾아 헤맸다는 말 한마디가 안 나와서….
“나 그때 계속 너 찾아다녔었어. 매일 학원도 빼먹고 너희 동네에 가서…. 고등학생이 아르바이트할 만한 가게는 다 뒤지고 다녔어.”
“…왜 그런 위험한-.”
“근데 막상 너를 발견하니까 말을 걸 수가 없었어. 집까지 가도록 한 번을 안 돌아보는 네가 야속하고…. 혼자서도 멀쩡한 네 모습 보는 게 싫었어.”
“…….”
“나는 너랑 있으면 편안했어. 그 어떤 순간보다도 위안이 됐어…. 그래서….”
눈을 감은 여준이 사현의 팔을 붙들었다. 다시 눈을 뜨면 그가 사라져 있기라도 할 것처럼 절박한 동작이었다.
“…사현아, 나는 이제 두 번 다시 그러기 싫어.”
네가 사라진 자리를 돌아보며 후회하고 싶지 않아. 조용히 뇌까리는 말끝이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형광등이 껌뻑이며 어둠이 핥고 지나간 눈가에 흐릿한 눈물이 맺혀 있었다.
“허리 아프다. 옮길까?”
웃으며 묻는 말에는 사현도 웃을 수밖에 없었다.
“…으응….”
뭉툭한 귀두가 구멍 주위를 맴돌다 엉덩이 골 사이로 미끄러졌다. 여준은 후들후들 떨리는 무릎에 힘을 주어 다시 몸을 일으켰다. 벽에 기대어 앉은 사현은 급할 것도 없다는 듯이 여준의 상체를 손끝으로 쓸어 내렸다. 살 없는 가슴을 쥐어 유두를 비틀자 빳빳하게 굳어 있던 돌기가 바짝 일어섰다.
“그거…, 하지 마….”
여준이 헐떡이며 만류했다. 사현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다른 손으로 그의 앞을 쥐었다. 고환을 손바닥에 감싸 쥔 채 회음부를 살살 문지르자 여준이 금방 앞으로 무너질 듯 휘청였다.
“혼자만 재미 보지 말고 힘 좀 써 봐요. 오늘 내로 넣을 수는 있어요?”
“…하고 있는데 네가, 자꾸 그렇게 장난….”
“기세 좋게 올라탈 땐 언제고 약한 소리나 하고.”
이죽대는 말에 여준의 눈썹이 얇게 찌푸려졌다. 발끈한 기색이 무색하게도 밑을 맞추기만 하면 꽉 오므라드는 구멍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여준은 콘돔에 문제가 있네, 젤이 너무 빨리 마르네, 등등 온갖 변명을 주워섬기면서도 못 하겠다는 말은 죽어도 안 할 모양이었다. 결국 손끝을 뻗어 구멍 주위를 덧그리던 사현이 한숨 쉬며 입을 열었다.
“넣기만 해요. 그다음엔 내가 알아서 박아 줄 테니까.”
“…그….”
“선배가 혼자 넣을 때 어디를 비비는지 알고 싶어서 그래요. 거기가 제일 기분 좋다는 뜻일 거 아녜요.”
붉게 달아오른 이마에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혔다. 바르르 떨며 몸을 일으킨 여준이 손을 뒤로 뻗어 사현의 것을 감싸 쥐었다. 자연스레 허리를 휜 자세로 다리를 벌린 여준의 뺨이 수치심으로 붉게 물들었다.
“맞아요, 그렇게 힘 빼고…. 천천히 앉아요.”
“…으, 으읏….”
“벌어지는 것 같은데? 들어가잖아요.”
“아읏, 으, 흐-….”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 안으로 딱딱하고 뭉툭한 살덩이가 파고들기 시작했다. 토할 것 같은 압박감에 삽입을 멈춘 여준이 다급하게 심호흡했다. 바짝 올라붙은 아랫배가 금방 벌겋게 물들었다. 어설프게 버티고 선 허벅지가 뻐근하게 아려왔다.
“움, 움직이지 마….”
“안 움직여요. 봐요.”
“너무…. 아, 힘들어. 너무 크….”
몸을 웅크린 여준이 두 손으로 사현의 어깨를 짚었다. 사현은 그의 허리를 문지르며 조곤조곤 속삭였다.
“힘을 주고 있어서 그래요. 안 죽으니까 걱정 말고 마저 넣어요.”
“…아냐, 이건 죽을 거야. 왜 이렇게…. 아!”
사현이 여준의 허리를 아래로 밀며 그의 젖꼭지를 살짝 깨물었다. 딱딱해진 돌기를 혀로 찌르고 입 안으로 굴리는 동작이 한없이 정성스러웠다. 굳어 있던 등줄기에서 힘이 풀려나가고 부드러운 자극이 허벅지까지 퍼졌다. 맥이 풀려 휘청대던 여준이 순간 아, 하며 온몸을 바짝 세웠다. 그러나 이미 반쯤 삼켜 버린 기둥이 몸속을 파고드는 감각만 선연해질 뿐이었다.
“…후우….”
뜨거운 내벽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사현은 당장 여준을 뒤집어 놓고 뿌리 끝까지 박아 넣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손끝이 희게 질리도록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떨어뜨린 여준의 시선 끝에 사현의 아랫배에 피어오른 핏줄이 걸렸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그 위로 손을 올렸다. 어쩐지 맥이 느껴질 것 같은 모양이었지만 기대와는 다르게 잠잠했다.
“뭐 해요?”
사현이 픽 웃었다. 여준은 방금 느낀 감각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저었다. 배 속을 꼼꼼히 채우며 파고드는 살덩이가 남기는 마찰이 버겁도록 간지러웠다. 마침내 뿌리 끝까지 삼켜내자 눈앞이 꺼멓게 멀어졌다 허옇게 번졌다.
“…아.”
툭, 여준의 코끝에 맺힌 땀방울이 사현의 어깨로 떨어졌다. 큼직한 양감이 잡혀 자잘한 근육으로 모양 좋게 채워진 상체는 굳은 흙처럼 따뜻하고 딱딱했다. 여준은 그 어깨에 이마를 묻은 채 천천히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몸 안쪽이 빠짐없이 뜨거웠다. 타인의 몸 일부가 가장 은밀한 곳의 점막을 핥아내는 감각은 얼핏 제정신으로 버티기 힘들 만큼 자극적이었다.
“으응, 읏…. 흐으….”
애매하게 꼼지락대면서도 여준은 착실히 사현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가장 내밀한 배 속까지 그를 받아들이기 위해 힘을 풀고 움직이는 허리가 유연하게 휘어졌다. 초점이 흐려진 눈동자는 붉어진 눈꺼풀에 감춰졌다 나타나길 반복했다. 바짝 일어서 사현의 배를 찌르는 페니스 끝에서 선액이 질금질금 새고 있었다.
“…읏! 아….”
슬쩍 빠져나간 살덩이가 배 속을 긁는 감각에 여준의 뒤가 바짝 조여들었다. 그게 신호라도 된 듯 사현이 여준을 덜컥 뒤로 쓰러뜨렸다.
“아…!”
풀썩, 매트리스 위로 떨어지며 떠오른 양 무릎은 곧바로 사현의 손아귀에 잡혔다. 그림자 진 사현의 얼굴에서 두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
단번에 뿌리까지 처박은 욕망이 여준의 몸을 반으로 쪼갤 듯 매서운 기세로 파고들었다.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입을 뻐끔대던 여준이 본능적으로 사현의 어깨를 밀어내기 시작했다. 땀에 젖은 손은 하릴없이 미끄러질 뿐이었다. -아, 마침내 소리가 트이자 발가락 끝이 딱딱하게 오그라들었다.
“아, 흐으…. 아…, 파. 잠깐….”
사현은 말없이 한 손으로 여준의 아랫배를 덮어 누른 채 몸을 점점 더 밀어 올렸다. 안 그래도 빠듯한 배 속이 약간의 틈도 없이 사현에게 달라붙기 시작했다. 하아, 밭은 숨을 토한 여준의 가슴팍이 거칠게 오르내렸다. 뒤늦게 사현이 뭘 하려는지 눈치챘지만 이미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마, 아-.”
뎅강 잘린 말끝이 허공으로 나뒹굴었다. 몸속 가장 깊은 곳, 모든 자극이 한 점으로 모인 자리를 곧장 짓누르는 감각에 온몸에서 피가 빠져나간 듯했다.
“거, 거기 싫어. 싫…!”
사현은 아랑곳없이 바르작대는 여준의 몸을 감싸 눌렀다. 그 바람에 밀착된 상체 사이에 끼인 여준의 페니스가 왈칵 정액을 토해 놓았다. 아, 하며 여준이 낮은 비명을 지르자 내벽이 움찔대며 조여들었다. 사현의 관자놀이에도 굵은 땀방울이 맺혔다.
“…하아….”
여준이 힘없이 몸을 늘어뜨렸다. 사현은 여전히 그에게 몸을 묻은 채 잠잠히 기다렸다. 여준은 온몸을 들썩이던 숨이 조금이나마 가라앉은 후에야 사현의 뺨을 쥐고 느릿하게 미소 지었다.
“사현아.”
톡톡, 손끝만 움직여 부드럽게 두드리는 움직임은 더없이 다정했다.
“사현아.”
내가 지어 준 이름이면 좋았을 텐데. 진심으로 안타깝게 속삭이던 목소리는 언제든 방금 들은 듯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었다. 사현은 여준의 손이 떨어지지 않도록 살짝, 그러나 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는 10년이 걸려서…. 나한테 돌아온 거야.”
“…….”
“이번에도 그렇게 하면 돼….”
가물대며 깜빡이던 여준의 눈동자가 완전히 어둠에 잠겨 들었다. 사현은 이를 악문 채 여준의 뺨 위로 제 뺨을 맞대었다. 여준은 정신을 반쯤 잃은 와중에도 그의 등을 감싸 토닥였다.
나한테 와. 아무리 긴 시간, 아무리 먼 길을 돌아서라도. 어디서든 언제까지든 기다릴 수 있으니까. 빚지 못한 약속이 소리 없이 내려앉는 어두운 방에서 사현은 소리 없는 울음을 삼켰다.
***
그러나 폭풍은 예고 없이 찾아오는 법이다.
“선임님, 커피 드실래요?”
“괜찮….”
반사적으로 사양하며 고개를 들던 여준은 막내 직원이 쟁반 가득 종이컵을 받쳐 들고 온 모양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바로 지난주에 팀 이동을 해온, 이제 1년 차 파릇한 신입이었다.
“고마워요. 그런데 막내라고 일부러 타온 거면 다음부턴 안 그래도 돼요. 우리 팀은 기본적으로 다 셀프니까.”
“아, 정말요? 그래도 제 커피 마시는데 혼자 마시려면 눈치 보여서요.”
“괜찮아요. 그래도 타 준 건 고맙게 마실게요.”
당장 연말이 닥쳐오는데 충원해 준 인력이 1년 차라니. 처음엔 암담했지만 어쨌든 한고비만 넘기면 끝날 일이었다. 연말에 펼쳐질 지옥도 내년의 산뜻한 이별을 위한 마지막 시련이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힘이 솟았다.
기다렸다는 듯 날벼락이 떨어진 건 그때였다.
“성 선임, 요즘 너무 정신 빼놓고 일하네. 얼마 안 남은 한국 생활이라고 아주 회사가 편해?”
이 양반이 이제 독심술을 하나. 커피를 받아 들던 여준이 눈을 둥글게 떴다. 영문을 모르기는 모든 팀원이 마찬가지였다. 순식간에 싸해진 분위기는 아랑곳없이 팀장이 한층 목소리를 높였다.
“약관 오늘까지 수정해서 올린대 놓고 왜 여태 말이 없어요? 그리고 커피는 좀 알아서 타 먹어. 시대가 어느 땐데 막내 여직원한테 커피 심부름을 시켜?”
“팀장님, 이거 선임님이 시키신 게 아니라 제 거 타는 김에 선배님들 거 다 가져온….”
“그럼 나는 왜 안 줘!”
“팀장님 커피 제일 먼저 드렸는데…. 책상에 두라고 하셨잖아요.”
막내 직원이 금방 울 것처럼 뺨을 일그러뜨렸다. 팀을 옮긴 이래 늘 기분 좋은 팀장만 봐왔던 사람이니 놀라는 것도 무리도 아니었다. 여준은 커피를 내려놓고 그녀에게 슬쩍 눈짓했다.
“수정안 지금 교정 중입니다. 세 시 전까지는 드리려고….”
“오늘 검토해야 되는 안을 퇴근 시간 다 돼서 주면 나는 야근하나? 선임은 칼퇴하고 팀장은 야근하고 팀 꼬라지 잘 돌아가네. 재밌네. 여준 씨 요즘 빠져도 너무 빠졌어. 팀 회식을 아주 멋대로 박차고 나가질 않나….”
그거였구만. 다행히 팀장은 제법 단순한 인간이었다. 이유 없는 짜증처럼 보여도 반드시 원인을 첨부해 놓는 말본새는 친절하게까지 느껴졌다. 여준은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고 최대한 애석한 표정을 지었다.
“지난주 일은 죄송했습니다.”
“아니, 내가 지금 회식 빠진 거 가지고 뭐라 하는 게 아니잖아. 왜 이렇게 회사 생활 좋을 대로 하냔 말이지. 이러면 후배들이 뭘 보고 배우며, 여준 씨 추천한 내 입장은 뭐가 돼?”
“예, 죄송합니다. 시정하겠습니다.”
여준은 회사 일정에 차질을 준 바가 맹세코 없었으나, 순순히 굽히면 끝날 트집이었다. 알맹이 없는 훈계는 어차피 길게 이어지지 않는 법이다. 무슨 말에도 여준이 항변하지 않자 팀장은 못마땅한 얼굴을 하면서도 곧 물러섰다.
“…어이없다, 진짜. 입만 열면 여직원이 어쩌네 저쩌네 하는 게 누군데.”
팀장이 휴게실로 사라지자마자 윤 책임이 중얼거렸다. 여준은 그녀를 향해 쉿, 하며 씩 웃었다.
“책임님이랑 신영 씨만 괜히 불똥 맞으셨네요. 미안해요, 내가 갑자기 회식 빠지는 바람에.”
“불똥 맞은 건 성 선임이죠. 세 시에 올린다는데 무슨 야근이야. 지는 맨날 퇴근하면서 일 뿌리고 가는 인간이.”
“목소리 너무 커요.”
“재수 없어서 그래요. 아주 말로는 세상에 저런 페미니스트가 없어. 그놈의 커피 가지고 입바른 소리 한 번 하면 여직원이 따른 술 아니면 안 먹는다고 진상 부리다가 징계 먹은 과거가 사라지나?”
“…….”
“성 선임만 들으니까 하는 소리예요. 다른 남자 직원들 앞에선 이런 말 못 하죠.”
흥, 하며 콧방귀를 뀐 윤 책임이 막내 직원에게서 쟁반을 빼앗아 들었다.
“신영 씨도 다음부터 이런 거 하지 말아요. 안 그래도 성 선임 중국 가면 이 팀 꼬라지 어떻게 돌아갈지 불안해 죽겠는데…. 하여간 팀장님 하는 일은 뭐 하나 마음에 드는 게 없어.”
어떻게 하고 많은 인간 중에 제일 쓸 만한 사람 골라서 물 건너보내 버리겠다 그래. 투덜거리는 윤 책임을 향해 여준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저 중국 간다고 해서 섭섭하셨어요?”
“안 섭섭하게 생겼어요? 여기서 성 선임 사라진다고 생각해 봐요. 점심시간 끝난 지가 30분이 지났는데 그놈의 식후 땡 한다고 여태 코빼기도 안 비치는 인간만 세 명이에요. 솔직히 성 선임도 그래요. 지금 이 팀에서 성 선임 빠지면 그 뒷감당을 누가 하라고요.”
“립서비스 해 주시는 거예요? 볼 날 얼마 안 남았다고….”
“이게 지금 금칠해 주는 소리로 들려요? 원망하는 건데. 어떻게 혼자만 잘 살겠다고 팀이야 나 몰라라 쏙 빠지나 하고.”
그렇게까지 말하니 또 할 말이 없었다. 머쓱해진 여준이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윤 책임은 혼자 화를 삭이는 듯 한숨을 푹푹 내쉬더니 이내 헛기침을 했다.
“…미안해요. 나까지 이게 웬 진상 짓인지.”
“아, 아니에요. 상해 가고 싶어서 가는 건 맞으니까…. 그런데 제가 빠지면 아마 다른 팀에서 대체 인원 올 거예요. 저보다 스펙도 훨씬 좋은 사람일 테니 그 점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팀장님 저러는 것도 성 선임 탓 아니에요. 오늘 아침 뉴스 안 봤죠?”
뉴스요? 여준이 눈을 껌벅이자 윤 책임이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을 내밀었다. 클릭 수가 높지 않은 기사 화면에는 <싱가포르에 아시아 최대 명품 아웃렛 들어선다 … 대양건설이 주도>라는 타이틀이 떠 있었다. 꼼꼼히 읽고도 여전히 팀장이나 윤 책임이 화가 난 이유와 연결시킬 수는 없었다.
“이게 왜요?”
“그 아웃렛이잖아요. F시에 배 타고 들어가네 어쩌네 하던.”
“…아.”
“거기 사진에 나온 게 유출됐던 청사진이라고요. 심지어 특정됐던 땅이 지금 개발 제한 걸린다는 소리가 있어서 오전에 난리도 아니었어요. 단톡방에서 다 한강 물 따뜻하냐 소리만 하고.”
“혹시 책임님도 이거….”
“나뿐만이 아니에요. 팀장님이 사방팔방 들쑤시고 다니면서 꼬셔서 이 층에만 지금…. 그나마 나는 소액이라 속 좀 쓰리고 마는데 위험한 사람도 한둘 아닐걸요.”
“…….”
“나만 해도 천이 날아갔어요, 천이. 팀장님 얼굴 보자마자 뺨 때리고 싶은 거 참느라 죽는 줄 알았다고요.”
울분을 감추지 못하는 윤 책임에 뭐라 말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여준은 혀를 차며 핸드폰을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도박과 투기는 안 된다. 없이 살더라도 그건 아니다. 어릴 적부터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들었던 아버지의 훈계에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보통 일이 아니네요.”
“진짜로요. 아까 김 대리랑 점심 먹으면서 얘기 들어보니까 팀장님 지금 집이고 차고 다 팔아야 할 판이래요. 한참 최고가 찍었을 때 추가로 매입한 게 뼈아픈가 봐요.”
정말이지 보통 일이 아니었다. 여준은 걱정스러운 마음에 재차 물었다.
“이거 공중파에도 나왔던 건이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잠잠한 거예요?”
“시끄러울 건 뭐 있어요. 걔네가 이거 F시에 생기는 겁니다- 한 것도 아닌데.”
“아니, 그러니까 더욱…. 사기 아니에요?”
그 말에 윤 책임의 얼굴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눈치만 보고 있던 막내 직원이 그제야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역시 그렇죠? 이런 게 사기 맞죠?”
“…….”
“뭣도 모르고 투자했다 쪽박 찬 게 아니라 그냥…. 사기를 당한 거죠? 아, 어이없네….”
고개를 떨어뜨린 윤 책임이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여준은 차분히 그녀를 살피며 목소리를 낮췄다.
“개발 제한 얘기는 언제 나온 거예요? 혹시 그 건을 알고서 계획적으로 벌인 일이라면 명백한 사기 맞아요. 기획부동산 수법이랑 똑같잖아요.”
“아, 씨…. 듣고 보니 그러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피해액을 완전히 회복하긴 어렵겠지만 그냥 넘어갈 일도 아닌 것 같은데…. 피해 입은 사람들끼리 모여서 좀 알아봐야 하지 않아요?”
“내가 미쳤지. 뉴스 보면서 맨날 어떤 멍청한 새끼가 저런 거에 걸리나 욕하고 그랬는데 내가 바로 그 멍청한 새끼였네….”
윤 책임은 아예 책상 위에 엎드려 버렸다. 더 이상 대화를 이어 갈 상태가 아닌 듯했다.
회사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도 어수선했다. 비단 여준의 팀뿐만 아니라 건물 전체가 술렁이고 있었다. 안 그래도 곧 바빠질 시기인데. 여준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창밖을 보았다. 하늘은 한낮의 시간이 무색하게 어두웠다. 아무래도 한바탕 쏟아질 모양새였다.
사현은 또 연락이 없었다.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았고, 메시지를 남겨도 답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생겼나, 문득 불안해질 때면 낡은 보스턴백에 한가득 들어 있던 지폐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 녀석 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거야? 뭘 하고 살길래 그 나이에 그런 돈이 있지? 생각할수록 의문은 더해가고 불안은 깊어졌다. 번듯한 집과 차는 여준도 가지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은아 집안의 재산이었다. 여준이 아무리 높은 연봉을 받는다 해도 스물아홉의 나이에 스스로의 힘으로 가질 수 있는 것들은 아니었다. 더군다나 사현은 완벽한 홀몸이 아닌가.
조폭이란 게 원래 그렇게 돈을 잘 버는 건가. 그런데 조폭은 어떻게 돈을 벌지? 갈취? 폭력? 머리를 싸매 보아도 여준이 아는 조폭의 행태는 영화나 드라마에서 본 게 다였다. 심지어 보면서도 그래서 저들이 펑펑 쓰는 돈은 어디서 오는 건가 의문스러웠던 기억뿐이다.
“…….”
뭐가 됐든 절대 합법적인 건 아니겠지. 사현에게 대놓고 물어볼까 싶기도 했지만 제대로 대답해 줄 리가 없었다. 무엇보다 괜히 그 부분을 건드렸다가 또 꽁꽁 싸매고 숨어 버릴까 걱정스러웠다.
‘나에 대해 모르잖아요.’
말은 잘하지. 항상 나만 쳐다보면 다 어떻게든 될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으면서.
“근데요, 성 선임. 나 정신 놓은 김에 진짜 궁금했던 거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마음대로 하세요. 정신 놓은 사람이 뭘 먼저 묻기까지.”
“애인 생겼어요?”
커피를 막 내려놓은 참이라 다행이었다. 손끝이 튀어 오르도록 놀란 여준이 삐걱대며 윤 책임을 돌아보았다. 그녀는 역시, 하는 얼굴이었다.
“의외다, 진짜. 애인 생기면 엄청 티 내는 타입이었네.”
“…아, 그…. 저기.”
“소문 안 낼게요. 근데 내가 말 안 한다고 사람들이 모르지는 않을걸요. 성 선임 지난주에 회식 중간에 빠져나가서 전화 받을 때 이를 어쩌나, 마침 담배 피우러 나가 있던 김 대리가 다 봤대요. 아주 꿀 떨어지는 통화를 하고 있더라고.”
“아니, 그게….”
“비단 그 일 때문만이 아니라도 눈치 빠른 사람들은 다 진작 알았어요. 성 선임 요즘 따라 눈이 반짝반짝하지 않느냐고. 처음엔 한국 뜨는 게 어지간히 좋아서 저러나 했는데, 몇 년을 죽상으로 다니던 사람이 갑자기 활력이 넘치는 게 비단 그 이유만은 아니겠지 싶어서.”
“하여튼 이놈의 회사엔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없네요.”
“누굴 탓해요? 그러게 회식 중간에 그러지 말았어야지.”
“그것도 또 맞는 말이고….”
여준이 커피 한 모금을 머금으며 픽 웃었다. 윤 책임은 파티션에 머리를 기댄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들이 성 선임한테 유난히 관심이 많은 것도 맞긴 하죠. 불쾌했어요?”
“아뇨, 괜찮아요. 애인 있는 건 사실이니까.”
덤덤히 말하자 윤 책임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질러 놓고 나니 아차 싶었지만 이런 화제로 그녀가 날린 돈을 잠시나마 잊게 해 줄 수 있다면 나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정할 줄은 몰랐네. 그럼 상해 갈 땐 어떻게 해요? 같이 가려고?”
“전 그러고 싶은데, 한국에서 하던 일 있는 사람이라 의논 중이에요.”
“아예 결혼해서 가요. 그럼 집도 좀 큰 게 나올 텐데. 지금은 단독 부임에 애 하나 딸려 가는 모양으로 얘기된 거 아니에요?”
“뭐 결혼이 제가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일단 한국에서나 중국에서나 법으로 금지돼 있고. 뒷말을 속으로 삼키며 여준이 미소를 띠었다.
“책임님 말씀대로면 별 소용없겠지만 일단은 비밀로 해 주세요.”
“그렇게 한다니까요. 그나저나 오늘이 마감 아닌가? 파견 지원서.”
“네, 아마 팀장님이 어제 제출하셨을….”
“한 번 확인해 봐요. 팀장님 상태 저래가지고 또 괜한 심술부리면 어떡해.”
뭐 설마 그러기야 하겠는가 싶으면서도, 집이며 차가 날아갔다는 이야기에 우려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검산을 빨리 끝내야 확인이든 뭐든 할 수 있었다.
***
「연락 안 되네 시간 날 때 전화 줘」
차분한 메시지에서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사현은 사진을 찍듯 눈을 깜빡여 글자 하나씩을 새겨 넣고 나서야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눈앞에는 백지장처럼 새하얗게 질린 박영재가 씩씩대며 서 있었다.
“설명해 봐.”
뭘? 하며 되묻는 대신 사현은 그가 내려놓은 서류를 쓱 흘겨보았다.
“이게 왜…. 왜 일이 이렇게 되는 거야? 너 이 새끼, 니가 나 엿 먹인 거야?”
“무슨 말인지 모르겠는데요.”
“씹새끼야! 이게 평당 얼마까지 뛰었었는지 알아? 그게 하루아침에 쓰레기가 돼 버렸어! 내가…, 내가 지금 여기 부은 돈이 얼만데…!”
영재가 왈칵 눈물을 쏟았다. 금방 시뻘게진 얼굴이 터질 듯 부풀어 있었다. 사현은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선배 볼 때마다 참 신기하다고 생각했어요.”
“…뭐?”
“어쩌면 이렇게 겁이 없을까. 뭘 믿고 나한테 매번 바락바락 대드는 걸까…. 험한 꼴을 안 본 것도 아닌데.”
“…….”
“내 경고를 지킨 적이 없었죠. 맞을 때는 죽은 듯이 기다가도 멍 좀 가시고 나면 언제 그랬느냐는 듯이…. 지금처럼.”
사현이 한 손가락을 들어 영재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다. 그는 진회색 슈트에 롱코트 차림이었다. 여준이 늘 입고 다니는 것처럼.
“그래서 생각해 본 건데, 당신 혹시 본인이 성여준이랑 동급이라고 생각해요?”
“뭐가 어째?”
“내가 당신을 어떻게도 못 할 것 같아요? 성여준한테 그러듯이?”
의자에 몸을 기댄 사현이 입꼬리를 올렸다. 영재는 그제야 주춤, 발을 헛디뎌 물러섰다. 얼굴의 구멍이란 구멍은 있는 대로 벌린 채 온몸을 떠는 모양이 애석했다. 사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짐짓 밝은 목소리를 냈다.
“또 그렇게까지 쫄 건 없는데. 선배 생각이 맞아요. 내가 당신을 뭐 죽이겠어요, 태우겠어요.”
“…난, 나는.”
“그래서 어떻게 해 달라고요? 투기하다 뻑 난 것까지 나더러 책임지라는 소리는 아닐 테고.”
영재는 입을 다문 채 말이 없었다.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한참 만에 입을 연 그는 대단히 큰맘 먹고 양보한다는 듯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니…, 니가 빌려준 돈은 없던 일로 하자.”
사현이 한쪽 눈썹을 까딱 올렸다.
“돈?”
“저번에…. 내가 필요하다니까 융통해 준 거 말이야!”
“아, 그거요. 얼마였지, 5천이었나?”
5천만 해 줘. 그럼 네 말대로 두 번 다시 성여준한테 접근하지 않을게. 호텔 주차장에 있던 사현에게 걸려 온 전화의 용건이었다. 사현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엘리베이터에서 막 내리는 여준을 지켜보고 있었다.
‘해 주는 건 그렇다 치고, 어떻게 갚으려고요?’
‘한탕만 더 하고 손 뗄 거야. 이런 건 원래 끝까지 가는 게 아냐. 금방 털 거라고.’
‘그건 당신 생각이고, 나한테도 5천이 적은 돈은 아닌데….’
‘갚는다니까! 갚는다고! 당장 급하게 돈 빌릴 수 있는 데가 너밖에 없어서 그래. 너 이거 확실하니까 나한테 권한 거라며? 그런데 억도 아니고 5천을 못 주는 게 말이 돼?’
빠앙, 멀리서 경적이 들렸다. 여준은 차 리모컨을 손에 든 채 비틀대며 걷고 있었다. 저러다 쓰러지겠는데. 사현은 혀를 차며 날카롭게 말했다.
‘일단 알았어요. 다시 전화 줄게요.’
여준이 경적 버튼을 연신 누르며 불안하게 두리번거렸다. 성큼 다가간 사현이 그의 허리를 감싸며 손을 덮어 눌렀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든 여준의 눈은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귀먹었어요? 사람이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사현이 씩 웃었다. 여준은 사냥꾼에게 쫓기다 동굴로 숨어든 초식 동물 같은 얼굴이었다. 나약해서 더욱 사랑스러운 모습에 들뜬 마음을 숨길 길이 없었다.
“당장 갚겠다면서 싹싹 빌어 빌려 갈 땐 언제고 없던 일로 하자니, 무슨 일이 그렇게 쉬워요?”
사현이 비웃자 영재는 아으, 하며 제 머리를 쥐어뜯기 시작했다. 번들대는 눈동자에 광기가 어렸다.
“너…. 너 때문에 내가 지금 어떤 처지가 됐는지 알기나 해? 네 돈 없던 일로 치더라도 무일푼이야. 다시 시작해야 돼. 완전히 제로에서, 나는….”
물론 사현에게는 익숙하고 지루한 광기였다.
“제로라니 무슨 소리예요. 남의 돈 해먹은 시점에서 마이너스지.”
차분히 서랍을 연 사현이 서류 한 장을 꺼내 놓았다. 책상을 넘어 제 쪽으로 내밀어진 서류에 영재의 표정이 잔뜩 일그러졌다.
“호텔 라운지에서 당신 만나고 나온 날에 성여준이 어떤 상태였는지 알아요?”
“…….”
“제대로 걷질 못하더라고. 본인이 당신한테 어지간히 큰 충격을 줬을 거라 생각했나 봐. 보통 처음으로 사람 골로 보내 본 인간들이 그렇게 돼요.”
“…….”
“정작 박영재 씨 머릿속은 아직도 이렇게 꽃밭인데, 성여준도 참 순진하기는.”
“…순진해? 그 새끼가?”
영재가 금방 표정을 굳히고 으르렁거렸다. 여준의 이름만 나오면 유달리 예민하게 구는 모양을 한두 번 본 것도 아니다. 사현은 지루한 얼굴로 서류 끄트머리를 톡톡 두드렸다.
“나도 바쁜 사람이라…. 선배랑은 그만 놀아 줘야 할 것 같네요.”
“웃기지 마, 내가 그냥 넘어갈 줄 알아?”
“서류부터 확인해 보세요. 내가 마침 지난주에 자잘한 채권들을 한꺼번에 팔아서요.”
그 말에 영재가 온몸을 굳혔다. 마구 흔들리던 눈동자가 천천히 책상 위로 내려앉았다.
“선배 옛날에 온세캐시 돈 떼어먹고 튄 적 있다면서요. 불량 채권일 거 뻔하다고 아무도 안 사려고 해서 얼마나 힘들었는데요.”
“…너, 너 이거….”
“아, 거기 맨 처음에 이름 올린 해피캐시가 온세캐시 운영하던 윤 실장이 새로 만든 회사예요. 어차피 떠맡아야 하는 거면 쌓인 울분이나 풀겠다고 잔뜩 벼르고 계시던데….”
“이 새끼, 네가 지금 나를 조폭한테 판 거야? 처음부터 이럴 셈이었어?”
영재가 빽 질러 올린 목소리 끝이 갈기갈기 찢어졌다. 사현은 귀를 막는 시늉을 하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돈 빌려준 사람이 본인 채권 정리하는 게 뭐가 문제라고 이래요?”
“아니, 아냐! 법적으로 이거, 이거 이런 식으로 팔아넘길 수가 없어! 난 어디까지나 너한테, 네, 네가 낮은 이자로 빌려주겠다고 약속을 해서….”
“법적으로…. 지금 무슨 은행에서 대출받은 줄 아시나.”
사현이 마침내 소리 내 웃었다. 그래도 영재는 닥쳐온 현실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듯했다.
“선배, 나는 선배한테 기회를 꽤 여러 번 줬다고 생각해요.”
“…….”
“나랑 엮이지 말라고. 그러려면 성여준한테 접근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협박하고, 회유하고…. 뭐 할 수 있는 일은 다 해 봤지 싶은데.”
“난, 나는….”
“그래도 말을 안 듣는다면, 당신한테 나는 약발이 안 먹히는 존재니까 다른 수를 써야겠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겠어요?”
“…….”
“이 얘기 물어다 주면서 말했죠. 성여준한테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당신이 그것만 지켰다면 나는 이번 공사 와꾸가 드러나기 전에 다 얘기하고 빠져나오게 만들어 줄 셈이었어요. 믿거나 말거나 진심이에요. 어쨌든 당신이 사지 무사하고 정신 멀쩡한 상태로 어디선가 잘 사는 게 성여준 멘탈에도 나을 거라 생각했고.”
“…….”
“자기 입으로 싫은 소리 몇 마디 했다고 그 충격 못 이겨서 몸도 못 가누는 사람인데, 비극적이고 잔혹한 소식은 되도록 들을 일 없이 사는 게 좋잖아요.”
안 그래요? 말을 맺은 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영재는 못 박힌 듯 자리에 선 채 눈만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개할 방책을 찾는 얼굴이었으나 사현은 더 이상 그의 이야기를 들어줄 마음이 없었다.
“잠시, 잠시만….”
“미안한데 가 봐야 해요. 우리 이사님이 부르셔서요.”
곁을 지나치는 사현을 따라 돌아서던 영재가 풀썩 주저앉았다. 사현은 문고리를 쥔 채 그를 힐끗 돌아보았다. 낯빛은 창백해졌지만 눈에는 아직도 독기가 남아 있었다. 이걸로 끝날 일은 아니겠군. 그는 문밖에서 기다리던 쪽새에게 눈짓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우르릉, 하늘이 찌그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밖은 한밤중인 양 어두웠다. 띵, 좁고 침침한 복도에 기계음이 울리고 엘리베이터 문이 악어 주둥이 같은 입을 벌렸다. 사현은 한동안 걸음을 옮기지 못한 채 당장 비가 쏟아질 듯한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
“여준 씨, 오늘 퇴근하고 면담 좀 해야겠는데 괜찮겠어요?”
돌아온 팀장은 조금이나마 차분해진 모습이었다. 여준은 쥐고 있던 계산기를 내려놓으며 네, 하고 일어섰다.
“파견 때문입니까?”
“그것도 있고, 전 상무님이 한번 보자 그러시네.”
“상무님께서요? 저를 왜….”
의아하게 되묻자 바짝 다가온 팀장이 파티션 안쪽으로 몸을 낮췄다. 이래 봤자 이 좁은 사무실에서 안 들릴 리가 없는데. 불안해진 여준이 어깨를 움츠리자 팀장이 에헤이, 하며 그의 등을 두드렸다.
“뭘 쫄고 그래요? 내가 아까 마감 때문에 뭐라 해서?”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여준 씨 아버님이 상무님 은사시라면서. 왜 얘기 안 했어?”
“……?”
갑작스럽고 영문 모를 소리였다. 여준이 눈만 끔벅이고 있자 팀장이 더욱 과장되게 웃는 표정을 지었다.
“아버님이 H고에서 근무하셨지? 30년 전쯤에.”
“저는 그렇게 예전 일은 잘…. 지금은 퇴직하시기도 했고요.”
“이상하다? 상무님은 아시던데. 아버님이랑 따로 식사도 하셨었대. 여준 씨한텐 말씀을 안 하셨던가 보네.”
“…….”
“뭘 그렇게 경계해? 여준 씨 입사 과정 깨끗한 건 누구보다 내가 잘 아는데. 학벌 좋지, 계리 있지, 영어 점수 완벽하지, 요거 죽여주지.”
팀장은 ‘요거’ 대목에서 손바닥으로 제 얼굴 위를 쓱쓱 훑었다. 여준은 밀려드는 불쾌함을 굳이 감출 생각이 없었지만, 팀장은 그의 얼굴에 떠오른 미묘한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나한테 일부러 숨긴 건 아니었나 보네. 나는 또 얘기 듣고 하여튼 깍쟁이처럼 군다 했더니.”
“몰랐지만…. 알았어도 따로 말씀드리진 않았을 것 같은데요.”
“거봐, 거봐. 내가 사람 보는 눈이 틀리질 않아.”
여준은 절로 올라오는 한숨을 간신히 되삼키고 파티션 너머를 곁눈질했다. 팀원들이 힐끗힐끗 쳐다보는 기색이 느껴졌다.
“팀장님, 잠시….”
양해를 구하고 휴게실로 향하자 팀장도 금방 따라붙었다. 여준은 마시지도 않을 커피를 내리고, 수면실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입을 뗐다.
“저는 정말 몰랐습니다. 처음 듣는 이야기예요.”
“누가 뭐래? 하는 소리지, 여준 씨는 하여간 남의 말을 너무 일일이 새겨듣는 경향이 있어.”
“그런데 상무님께서 이번 파견 건과 무슨 상관이 있으신 겁니까? 왜 저를 따로 보자고….”
“무슨 상관이 있긴? 여준 씨 상해 보내라고 말씀하신 게 상무님인데.”
팀장은 쉽게 대답하며 여준의 손에서 커피를 빼앗아 갔다. 빈손을 든 채 멍하니 굳어 있던 여준이 뒤늦게 되물었다.
“…예?”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하면 뭐 해요. 그래 봤자 남자들 정치질엔 당할 재간이 없는데.’
언젠가 여준과 마주친 여직원 하나가 들으란 듯 쏘아댄 말이었다.
‘하여튼 남자가 권력이야. 누가 봐도 오 선임님 자리였는데 그걸 날름 먹겠다고….’
친한 직원이 파견 순위에서 밀려나 심술을 부린다고만 생각했다. 누구나 원하는 자리에 항상 따라붙는 시기와 견제일 거라고.
“원래 오 선임이 거의 내정이었어. 그쪽도 싱글 맘이라, 작년부터 그 자리 하나 보고 온갖 궂은 일 처리 다 하던 사람이거든. 근데 상무님이 갑자기 나랑 심 팀장 불러 놓고서 그러더라고. 성 선임이 남자 혼자 애 키우느라 고생이 많다던데, 상해 근무 가면 좀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고.”
“…팀장님이 하신 말씀이잖아요. 저한테 좋을 거라고….”
“그러니까 그게 상무님 말씀이라니까. 하달이지, 하달. 그리고 여준 씨는 사별이지만 오 선임은 이혼이잖아. 육아 복지 강조하려면 스토리나 모양새 상으로도 여준 씨가 낫지 않냐, 뭐 그렇게 된 거지.”
“…….”
“그렇다 해도 상무님이 이런 사정 어떻게 일일이 알고 계신가 했는데 아까 말씀하시더라고. 여준 씨 아버님이 상무님 고등학교 시절 은사시라 지금도 가끔 연락하신다고.”
머리가 핑 돌았다. 여준이 굳어 버린 채 말이 없자 팀장은 그제야 말을 멈추고 그의 눈치를 살피기 시작했다.
“놀랐어? 아니 뭐, 그게 전부였다는 건 아니야. 스펙상으로도 여준 씨가 쪼끔 더 유리했어. 미국 계리도 있고, 오 선임은 중국어도 되긴 하지만 말이야 뭐 배우면 되는 거고 어차피 근무할 땐 영어 쓸 텐데….”
“…….”
“정색할 일 아니라니까? 표정이 왜 이래? 내가 뭐 못 할 소리 한 것 같네.”
종이컵을 우아하게 흔든 팀장이 소리 내 웃었다. 여준은 웃을 수 없었다. 덜 굳은 아스팔트 위를 밟은 듯 발밑이 진득하고 물컹거렸다. 창백해진 여준을 이리저리 살피던 팀장이 그를 달래려 목소리를 굴렸다.
“아니, 진짜로 상무님 아니었어도 여준 씨가 됐을 자리야. 부당하게 새치기한 그런 거 아냐.”
하지만 지원할 수 없었을 것이다. 팀장이 그렇게 내버려 두지 않았을 테니까. 여준은 그를 잘 알았다. 그는 부하 직원의 안위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할 위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 고맙게 생각했었다. 그런 사람이 내가 힘들어하는 걸 보고 이런 수를 내줬구나. 사실은 팀장으로서, 선배로서 나를 지켜보는 마음이 있었구나…. 평소에 날카롭게 구는 것도 어디까지나 팀을 위해서고 속내는 따뜻한 사람이라고.
“…….”
대화를 어떻게 마무리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여준은 후배에게 담뱃갑을 빌려 그대로 건물을 빠져나왔다. 흡연 구역은 웬일로 텅 비어 있었다. 사무실을 빠져나올 핑계가 필요했을 뿐, 담배를 피우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한참 망설이던 여준이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국제 전화 연결 안내 멘트가 흘러나왔다.
- 여준아? 웬일이니? 무슨 일 있어?
금방 연결된 전화 너머에서 어머니가 다급하게 물었다. 여준은 흡, 숨을 들이마셨다가 그대로 삼켰다. 부모님과는 가끔, 지오를 데리고 화상 통화를 하는 게 다였다. 국제 전화를 거는 건 은아가 죽었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아무 일 없어요. 어머니도 별일 없으셨어요?”
- 급한 거 아니면 메일로 보내지, 전화비 얼마나 비싼데. 괜히 심장만 덜컹했네.
“…….”
- 정말 무슨 일 있는 건 아니고?
조금이라도 대답이 늦거나 목소리에 힘이 없으면 곧바로 걱정스러운 말이 따라온다. 여준은 손끝을 꼼지락대며 할 말을 찾았지만 쉬이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 여준아? 왜 그러니? 왜 그러는데?
그사이 어머니의 목소리는 점점 다급해졌다. 이대로 전화를 끊어 봤자 어머니가 며칠을 뜬눈으로 지새우게 만들 뿐이리라. 여준은 주머니에 넣어 놓은 담뱃갑을 만지작거리다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저, 어머니…. 어머니도 혹시 전태원 상무님 아세요?”
- 전 상무님? 그럼. 너희 회사 임원분이시잖아. 너 입사할 때도 그분이 힘 많이 써 주셨어.
아무렇지 않게 돌아온 대답에 입 안이 바짝 말랐다. 여준은 결국 담배 한 대를 빼내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코끝에 화기가 닿자 써늘한 날씨가 그제야 손끝을 찔렀다. 오한이 들어 몸을 움츠리는데 어머니가 얼른 뒷말을 덧붙였다.
- 오해하지는 말고. 서류만 올려 주신 거야, 서류만. 그 정도는 임직원 자녀들 지원할 때 다 해 주는 거래.
“…저는 임직원 자녀가 아니잖아요.”
- 얘는, 임원 추천 받는 게 뭐 일이라고 그런 걸 따져. 왜? 전 상무님이 뭐라 그러시니?
인생이 어렵다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여준에게 있어 사람의 호감을 얻고 주어진 과제를 해내는 건 숨 쉬듯 자연스럽고 쉬운 일이었다. 가장 입결이 높다는 대학에 가서도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고, 착실히 ‘스펙’을 쌓았고, 7학기 만에 졸업해 내로라하는 대기업에 들어갔다.
- 답답해라. 왜 그러는데? 너 상해 가는 일이 뭐가 잘 안 된 거니? 그래?
청구될 전화비가 올라가는 속도와 어머니의 속이 타들어 가는 속도는 대충 비례하는 듯했다. 담배 연기를 한껏 빨아들여 삼킨 여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것도…. 아버지가 부탁하신 거예요?”
- 으응?
“저 상해로 가게 해 달라고, 아버지가 상무님께 따로 부탁하셨던 거냐고요.”
- 아니, 너 그렇게 말할 게 아니야. 아버지는 그냥 네가 한국에서 혼자 고생하는 게 안쓰럽다, 그 얘길 하신 거고 상무님은 도와줄 수 있는 방법을 찾으신 거지.
시기 어린 소문이나 영문 모를 시비에 휘말린 적도 많았다. 그때마다 겸손을 가장해 상황을 가라앉히기 위해 애쓰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억울하게 생각했다. 그럼 너희도 열심히 했으면 되잖아. 나보다 더 공부하고 노력했으면 되는 거잖아.
- 전 상무님이 너희 아버지 첫 제자야. 그때 상무님 집안이 빚 때문에 힘든 상황이어서 매일 도시락도 못 싸 들고 다녔대. 그래서 네 아버지가 매일 도시락을 두 개 싸 갖고 다녔어. 주말마다 집에 불러서 맛있는 것도 먹이고, 공부도 봐주고 용기 될 말도 많이 해 주고…. 그래서 상무님이 너희 아버지라면 끔찍하게 생각하고….
“…….”
- 여준아, 이런 거 이상한 일 아니야. 네 아버지가 쌓은 은덕 네가 받는 거야. 전 상무님 입장에서 네 아버지가 얼마나 고맙겠니? 그 보답 너한테 대신 좀 한다는 것뿐이야. 그게 다야.
‘모든 사람에게 선배 같은 고아한 인생이 준비되어 있진 않아요.’
여준은 그만 웃어 버렸다. 머금고만 있던 담배 연기가 고장 난 자동차의 매연처럼 툭툭 떨어져 나왔다.
“그런 거면 저한테 먼저 소개를 해 주셨으면 되잖아요.”
- 너 어릴 때 본 적 있어. 너한테 장난감도 많이 사 주셨었어.
혼자 알아서 잘해 온 줄만 알았다.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토록 얄팍한 성이 발밑에 있었을 줄은.
- 여준아, 대체 무슨 일이야? 상무님이 뭐라 하셨니?
“아니에요. 뭐라 하시기는…. 아직 뵌 적도 없는데.”
- 그럼 너한테 뭐 나쁘게 하는 사람 있어? 너 그거 아버지한테 다 얘기해. 뭐든 아버지가 해결해 주실 수 있어.
내가 다 알아서 할게. 다 책임져 줄게. 재를 떨어내며 여준은 쓰게 웃었다.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그냥….”
아, 사현아. 네 눈에 내가 얼마나 우스웠을까. 그저 만들어 준 레일에 올라타 편히 걸어온 내가, 오로지 혼자였던 네 손길을 그토록 무시하고, 아무것도 아닌 양 폄하하고, 내 인생은 내가 알아서 하겠다며 잘난 척 떠들고….
“…제가 참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생각이 드네요.”
너는 다 알고 있었는데. 내가 얼마나 별거 아닌 인간인지. 얼마나 텅 빈 껍데기인지.
“들어가세요. 전 괜찮아요.”
다 알고도 나를 사랑한 거였는데.
***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창밖은 아예 컴컴하게 물들었다. 고층 빌딩의 유리창 너머로 본 서울 시내는 먹구름을 이고 앉은 거대한 심해어 같았다. -어, 비 온다. 누군가 중얼거리자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창가로 향했다. 툭, 툭, 창을 때리는 굵은 빗방울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우산 없는데…. 못 살아. 또 비닐우산 사게 생겼네.”
“편의점 비닐우산 진짜 싫지 않아요? 자리는 엄청 차지하고, 들고 다니다 보면 잃어버리겠지 하고 막 들고 다니는데 그런 건 또 죽어도 안 잃어버리더라.”
“맞아, 맨날 마음먹고 산 예쁜 우산만 잃어버리지.”
날씨가 궂어도 일단 다가온 퇴근이 기쁜 듯, 팀원들은 하나같이 웃고 있었다. 그때 옆 부서로 향하던 김 대리가 불쑥 달려오더니 양손에 포장된 핫팩 하나씩을 들고 섰다.
“여자 친구 없이 지낸 지 반년이 되어 버린 김 대리에게 소개팅 주선해 주실 은인 두 분께 선착순으로 핫팩 쏘겠습니다….”
“웬 핫팩? 그런 건 어디서 났어요?”
“우산 사러 간 김에 샀어요. 후회하지 않으실 겁니다. 지금 진짜 대박 춥거든요. 비가 무슨 얼음물 같아.”
김 대리가 양손으로 제 몸을 감싼 채 으으, 하며 몸 떠는 시늉을 했다. 벌써 11월이니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여준은 할 일이 끝난 모니터 앞에서 핸드폰을 들고 사현의 번호를 찾았다.
새 메시지를 적다가 도로 지웠다. 전화는 어쩐지 연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우산 따위를 챙겨 들고 다닐 녀석이 아닌데, 어디서 찬비 맞고 다니면 어쩌지…. 멍하니 고민하는데 팀장이 파티션을 톡톡 두드렸다.
“여준 씨, 가지.”
“…아…, 네.”
엉거주춤 일어난 여준이 코트에 팔을 꿰었다. 팀장은 싱글벙글 웃으며 묻지도 않은 말을 늘어놓았다.
“장충동으로 갈 거야. 상무님이 호텔 한식당 예약해 놨다고 하시더라고. 여준 씨 덕에 비싼 밥 먹겠네.”
“…….”
“근데 여준 씨도 차 가져왔죠? 어쩔래? 끝나고 내가 다시 이리로 데려다줄까?”
“아닙니다. 택시 타고 오면 되니까요.”
“그래요, 그럼. 하긴 여준 씨는 집이 강남이었지? 어차피 이리로 와야 하네.”
호의를 잽싸게 철회한 팀장이 차 키를 들고 앞장섰다. 여준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내내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어쩐지 사현이 비를 맞고 다닐 것만 같았다. 당장 불러내 어떻게든 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애는 어떻게 했어? 시터가 봐주나?”
“…예?”
“아들 말야, 아들. 왜 이렇게 혼을 빼놓고 있어?”
“아들, 아, 네…. 시터가 늦게까지 있어 줍니다.”
“그것도 참 못 할 짓이야, 그치? 자고로 애는 엄마 손에 커야 하는데. 나도 첫애 낳자마자 와이프 억지로 일 그만두게 했잖아. 요즘 다 맞벌이라고 하지만 우리 같은 사람들 입장에서야 전업주부가 좋지. 안 그래요?”
주절주절 늘어놓는 말 하나하나가 귀에 거슬렸다. 여준의 마음이 점점 더 차갑게 가라앉았다. 그는 고개를 돌려 팀장의 얼굴을 똑바로 보았다. 그래,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이지. 은 주임에게 그랬고, 수많은 팀원들에게 그랬듯이- 강한 상대에게는 한없이 약하고 힘없는 상대에게는 더없이 악했다.
“그래도 상해만 가면 여준 씨 고생도 끝이야. 괜히들 그 자리 잡겠다고 난리였던 게 아니라니까. 여자들이 그렇게 이기적인 데가 있어. 솔직히 자기들은 언제든지 일 그만둬도 되잖아. 근데 지 욕심에 회사 다니는 거면서 여준 씨처럼 꼭 필요한 사람 제쳐 놓으려고….”
“팀장님, 이번에 손해 많이 보셨다면서요.”
왜 이런 사람에게까지 억지로 좋은 점을 찾아보려 했을까. 그렇게도 믿고 싶었던가. 때때로 인생에 간섭해 오는 불공정한 호의의 정체는 오로지 개인의 선의라고.
“…어?”
말을 멈춘 팀장의 눈가가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여준은 모르는 척 그림 같은 미소를 띠었다.
“부동산 투자는 역시 너무 위험해요. 아까 낮에 사람들 얘기 나누는 거 들어 보니까 팀장님 말씀만 믿고 뛰어 들었다가 돈 날린 사람이 한두 명도 아니라는 것 같더라고요.”
“아니, 그걸 내 말을 믿고 뛰어들었다고 표현을 하면….”
“팀장님이 크게 손해 보셔서 다행이지, 아니었으면 위험하실 뻔했어요. 이런 거 잘못 걸리면 기망죄로 징역도 산다더라고요.”
“…….”
“불행 중 다행이죠? 큰돈 잃은 와중에 회사까지 잘렸으면 정말 막막했을 텐데.”
팀장은 드디어 입을 다물었다. 여준은 조용해진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음껏 다른 생각에 빠질 수 있었다. 어차피 파견 지원을 철회한다고 마무리될 문제는 아니었다. 당장 궁리해야 할 것은 이 무의미하고 어색한 식사 자리를 어떤 식으로 끝내야 하는지였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마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팀장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제 차로 가 버렸고, 여준은 멈춰 선 채 액정화면에 뜬 <발신 번호 표시 제한> 표시를 읽어 내렸다.
“…….”
여전히, 사현이 비를 맞고 있을 것만 같았다.
“…여보세요.”
조심히 받아 들자 치직, 전파 튀는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다시 물어도 상대는 대답이 없었다. 여준은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다시 확인했지만 통화는 연결된 상태였다.
“전화 거신 분 누구십니까? 말씀 없으시면 끊겠….”
- 내가 이대로 물러날 것 같아?
세상 어딘가에 악의로 가득 찬 구덩이가 있다면, 그 구덩이의 가장 깊은 곳에서 길어 낸 말이 꼭 이런 음색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뒷목으로 오싹, 소름이 끼쳤다. 여준은 식은땀이 밴 손을 닦고 핸드폰을 바꿔 들었다.
“…영재?”
- 이제 알겠네…. 너도 한패였어. 그 새끼랑 너랑 씨발, 작정하고 나를 묻으려고 판을 짠 거야.
“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이게 뭐 하는 짓이야?”
- 어차피 이판사판이야. 가만있어도 죽을 목숨이라면 니들 목도 따고 갈 거야. 이 씹새끼야, 좆같은 호모 새끼야. 너 임사현이랑 씹질 하지? 내가 너 하나는 꼭 매장시키고 뒈진다. 알아들었어? 넌 씨발, 임사현 모가지 딴 거 끌어안고 니 애비 좆이나 빨게 될 거야.
와르르 쏟아지는,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욕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여준은 눈을 크게 뜬 채 이마를 짚었다. 빠앙, 차에 올라탄 팀장이 신경질적인 경적을 울렸다.
“성 선임! 안 타? 내가 아주 운전기사야? 대기시켜 놓고 통화나 하고, 팔자 좋네?”
- 니들 실수한 거야. 나를 이렇게 벼랑 끝으로 몰면 안 됐어. 잠자는 사자의 코털을 건드린 거야. 이 씹새끼들, 개좆같은 더러운 호모 새끼들. 두고 봐, 어떻게 될지!
“영재야, 박영….”
전화는 뚝 끊겼다. 여준은 화면이 새카맣게 물든 핸드폰을 쥔 채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거지?
“성 선임!”
비가 온다. 전에 없이 추운 날이다. 사현은 우산이 없을 것이 분명하고, 영재는 이유 모를 분노를 내뿜고 있고, 아이는 시터가 돌보고 있으며 장충동 고급 호텔에서는 아버지의 제자라는 회사 임원이 기다리고, 팀장은 여준이 긁은 말에 잔뜩 뿔이 난 상태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땐 할 수 있는 일을 하세요.
언젠가 들었던 시험 노하우가 번뜩였다. 여준은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차 키를 꺼냈다. 주차장 맨 구석, 직원용 스페이스에 들어가 있던 진회색 SUV가 보였다.
“뭐야? 성 선임, 어디 가?”
한 번 걸음을 내딛자 다음은 쉬웠다. 여준은 팀장의 세단을 지나쳐 자신의 차를 향해 달렸다. 사현에겐 우산이 없다. 우산 같은 걸 챙겨서 다닐 리가 없다. 그 사실만이 머릿속을 쾅쾅 울렸다.
***
낡은 유리창이 쏟아지는 비를 이기지 못하고 덜걱거렸다. 사현은 문을 등지고 선 채 깡추의 사무실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깡추는 책상에 걸터앉은 채 담배를 물고 있었다. 그런 깡추의 발치에 미니가 무릎을 꿇고 앉아 발발 떠는 모습이 보였다. 사현은 두 손을 뒤로 모아 쥔 채 정중한 목소리를 냈다.
“왜 또 애를 잡고 계십니까.”
“어, 우리 사현이 어서 와.”
미니는 이미 한바탕 얻어맞은 듯했다. 옆얼굴이 온통 부어올라 알아보기도 힘들 지경이었다. 사현은 슬그머니 고개를 드는 불길한 예감에 어금니를 꾹 물었다 놓았다.
“참 이상한 일이야.”
담배에 불일 붙인 깡추가 볼멘소리를 냈다.
“난 내가 인간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해. 누구를 상대하든 일단은 니도 좋고 내도 좋은 거래 하자고 많이 노력해 왔으니까. 근데 나랑 거래하는 애들은 그게 아닌가 봐. 조금이라도 봐주고, 좋게좋게 하자고 하면 일단 눈이 벌게져서 아, 이 새끼는 만만한 새낀가 보다…. 그래 버리는 것 같아.”
깡추가 쿵, 뒤꿈치로 책상을 내리쳤다. 몸을 웅크리고 있던 미니가 히익, 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깡추는 침착하게 으름장을 놓았다.
“울지 마, 이 쌍년아. 바닥에 뭐라도 흘리면 다 니가 핥아 먹어야 될 줄 알아.”
“…흑, 잘못, 잘못했어요….”
“씨발년. 대가리가 나쁘면 마음이라도 착해야지, 둘 다 아니어서 너도 참 세상 살기 힘들겠다.”
쯧, 혀를 찬 깡추가 책상에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미니는 고개를 숙인 채 끅끅대며 울음을 참고 있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어서 부르신 줄 알았는데요.”
“어, 맞아. 앉아.”
“…….”
“뭐, 얘 때문에? 신경 꺼. 내일이면 태평양 한가운데 있을 애니까.”
바닷속일지 배 위일지 그것까진 몰라도. 비웃는 말에 흐억, 숨을 들이켠 미니가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사현은 그녀의 멍든 어깨를 흘끗 보고 침착하게 되물었다.
“애를 저 보라고 여기 갖다 놓으셨으면 그만한 이유가….”
“그래, 얘기 시작하기 전에 하나만 물어보자.”
“……?”
“너 왜 박영재 안 죽이냐?”
너무나 태연하게 던져온 질문에 사현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깡추는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이마에 주름을 잔뜩 잡고 있었다.
“…윤 실장 돈 떼어먹고 튄 전적이 있다길래, 알아서 하라고 넘겨줬습니다.”
“아니, 그걸 물어보는 게 아니잖아. 왜 네 손으로 숨통을 안 끊느냐고.”
“…….”
“정말 몰라? 뭐가 궁금해서 이러는지.”
깡추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유난히 흰 앞니 두 개가 형광등 불빛에 반짝 빛났다. 사현은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들키지 않으려 주먹을 꽉 쥐었다.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굳이 손댈 필요를 못 느꼈을 뿐인데요.”
매끄러운 무표정을 띠고 침착하게 대답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깡추는 허어, 하며 입을 벌리고는 곧 킬킬 웃었다.
“하여튼 우리 사현이, 입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 참 잘해.”
“…….”
“그런 잡스러운 호스트 새끼 하나 골로 보내는 게 너한테 일이야? 아니잖아. 왜 굳이 윤 실장 손까지 빌려 가면서 남한테 처리를 맡기느냐고. 윤 실장 그 새끼가 이 빚을 얼마로 내놓으라 할 줄 알고.”
“…….”
“솔직하게 말해 봐. 너 박영재 죽이기 싫지?”
사현의 눈썹이 꿈틀, 튀어 올랐다.
“네가 어릴 때 박영재 대가리 아예 박살 내 놨어 봐. 박영재는 골로 가고, 너는 소년원 가고, 두 번 다시 성여준이랑 엮일 일도 없었잖아.”
“…….”
“근데 그 새끼가 살아 있었던 덕에 성여준이 인생 씹창 나고, 덕분에 너랑 다시 보고, 너는 멋지게 짠 나타나서 성여준이 살살 꼬드기고…. 벌써 씹질도 했냐? 박아 보니 어떻데? 그 새끼 곱상하게 생겨서 뒷구멍도 쫀득할 것 같다고 옛날부터 침 흘리는 놈들 한둘이 아니었는데.”
사현은 대답 없이 주먹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만약 총을 쥐고 있었다면 망설임 없이 깡추의 입을 향해 쐈을 것이다. 눈을 부릅뜬 채 굳어 버린 그를 보면서도 깡추는 웃음을 지우지 않았다.
“사현아, 형님이 왜 이런 거 전부 알고 있을 것 같냐? 미니 이년은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 것 같아? 응?”
깡추가 턱짓으로 미니를 가리켰다. 사현은 조용히 미니에게 시선을 주었다. 그녀는 당장 사현의 눈을 피했다.
“무슨 말씀하시는지 모르겠지만 그게 뭐든 잘못 짚으신 겁니다.”
“진짜? 근데 왜 미니는 나한테 널 팔러 왔을까?”
“…….”
“너랑 성여준이가 내 뒤를 캐고 다닌다고, 중간에서 프락치 행세할 테니 빚 좀 까 달라던데.”
“…….”
“멍청한 년. 대체 임사현이 내 뒤를 캘 이유가 뭐가 있어? 지가 입을 턴 게 아니고서야.”
콱 그냥, 하며 깡추가 손을 치켜들었다. 미니는 잔악한 어린애의 손에 잘못 걸린 콩 벌레 같았다.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깡추의 흥미가 빨리 제게서 옮겨 가기를 비는 것뿐이었다.
“오해하신 겁니다. 성여준이 캐고 다닌 건 죽은 와이프 일이에요. 지 와이프가 얼마나 유명한 쌍년인지 혼자만 몰랐던 게 억울했겠죠.”
“네가 나 캐고 다닌 건 오해 아니고?”
“예, 그건 오해 아닙니다.”
사현이 덤덤하게 대답했다. 깡추는 허, 웃고는 책상에서 내려왔다. 몸을 구부린 그가 책상 아래서 꺼내 든 것은 사냥용 공기총 케이스였다. 내용물을 확인한 미니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사현이 넌 처음 보지? 홍게가 구해다 준 건데 규격 맞춘 사냥총이라 총탄 위력이 영 후져. 그래도 급소에 잘 맞히면 사슴 정도는 잡을 수 있다더라.”
“…….”
“쏠 줄 알아? 쏴 본 적 있어?”
사현은 뒷짐 진 손을 풀지 않은 채 깡추가 든 총을 천천히 살폈다. 소총과 원리가 비슷할 테니 쏠 수야 있을 것이다. 그가 대답이 없자 깡추는 잇몸까지 드러내며 헤벌쭉 웃었다.
“사현아, 쫄 거 없다니까. 나 지금 너 해코지하려고 부른 거 아니야.”
“압니다.”
“네가 죽이거나 태운다고 눈 하나 깜짝할 놈이냐. 그건 너 여기까지 키워 놓은 내가 더 잘 알지. 그러니까….”
철컥, 총을 내려놓은 깡추가 두 손을 들어 올렸다.
“일 그만두고 싶으면 그만둬. 나가서 너 좋을 대로 살아. 절대 잡지도, 쫓지도, 너 해코지하지도 않을게.”
사현은 발끝에 조금씩 힘을 주었다.
“그 대신 이렇게 하자. 니가 그 문 나서는 순간 내가 성여준이 씹창 내서 죽이는 걸로.”
깡추는 말을 끝내자마자 잽싸게 총을 쥐었다. 덕분에 사현은 당장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몸을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멈춰 세울 수 있었다. 명치 아래서부터 열이 올라와 새카만 식은땀이 흘렀다. 두 눈이 튀어나올 듯 뻐근해졌다.
“그치, 너도 그건 싫지? 별로 보고 싶지 않잖아. 성여준이가 어디까지 추락할 수 있는지.”
“…….”
“봐줬다. 사현아, 내가 성여준이 안 건드릴게. 두 번 다시 이상한 수작질도 안 한다. 너 그냥 하던 일 하면서 걔랑 연애도 하고 씹질도 하고 그래. 응? 내 마음 같아선 너 괜찮은 여자 붙여서 결혼하고 애도 낳고 살게 해 주고 싶었는데 남자 아니면 좆이 안 선다는 데야 수가 없으니….”
“…이상한 수작질?”
“그래, 미니한테 다 들었다며. 박영재한테 성여준이 작업하라고 꼬드긴 게 나잖아.”
당당히 선언한 깡추가 총구를 들어 제 턱 끝을 가리켰다.
“너 그거 아냐? 박영재 대학 등록금을 성여준이 부모가 대줬어. 그 외에도 야금야금 돈 뜯어낸 적이 많았던가 보더라. 임사현이라는 양아치가 성여준이랑 친한 자기를 질투해서 그런 짓을 한 거라고, 둘이 씹질 한 게 틀림없다면서.”
“…….”
“성여준이 부모가 무슨 심정이었겠냐. 반신반의하면서도 혹시 이상한 말 돌까 봐 그 돈을 다 뜯겨 주고 있었던 거야. 그래서 하루빨리 결혼시키고 애도 낳게 해서 그 의혹을 불식시키려 눈에 불을 켠 거지. 박영재는 거기다가 냉큼 유은아를 들이밀었고.”
이제 좀 전후 관계가 보여? 깡추가 빙글대며 총신을 쓰다듬었다. 사현은 이미 건물을 빠져나갔을 영재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그 녀석 안 죽여? 그때 죽였으면 이런 일이 없었잖아.
“사현아, 너는 일을 참 이상하게 처리해. 기회는 항상 있는데 한 번을 안 잡는 거야.”
“…저는.”
사현이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낮은 목소리가 쓸데없이 호화로운 사무실을 날카롭게 울렸다.
“저는 이사님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나?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성여준한테 이 정도로 신경 쓰셔야 할 이유가 없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무슨 소리야. 난 성여준이 너랑 씹질을 하든 어디 가서 후장을 팔든 아무 관심 없어. 내가 찜찜한 건 어디까지나 네 태도라니까.”
“…….”
“하나씩 짚어 보자. 네가 10년 전에 성여준이를 강간하고 박영재를 죽였다고 쳐 봐. 이건 아무 문제가 없어. 소년원 다녀와서 일 배우고, 성여준이 씹창 내서 갖고 놀다가 싫증 나면 버리고, 그렇게 끝났을 거야. 근데 너 안 그랬잖아. 그 결과 어떻게 됐냐? 박영재가 애매하게 살아서 성여준이 피만 말리는 상황이 됐지. 그러다 아예 조질 계획까지 짜고 나서야 네가 짠 나타나서 자폭을 해 버렸단 말이야.”
“…….”
“홍게도 그래. 아예 골로 보내든지 하지 왜 살려 놨어? 그 새끼가 앙심 품고 성여준이한테 뭐라도 할지 모른다는 생각을 정말 못했어?”
미니가 딸꾹질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사현과 깡추를 번갈아 보는 눈동자에 영문 모를 의구심이 깃들어 있었다. 사현은 한숨을 내쉬고 시선을 내리깔았다.
“대체 무슨 말씀을 하고 싶으신 겁니까.”
“네가 만약 오늘 이 방을 조용히 나간다면, 너는 또 똑같은 일을 겪게 될 거라는 거야.”
깡추의 말은 덤덤했고, 사현의 뱃속에는 불길이 일었다.
“그게 바로 내가 말하는 성여준이 인생 씹창 나는 길이야.”
기회가 왔을 때 죽였어야지. 깨끗하게 뿌리를 뽑아 후환을 없앴어야지. 박영재도, 홍게도. 그랬더라면 성여준의 오늘은 평화로웠겠지. 어떤 위험도 위기도 없이 안온한 나날을 보내고 있겠지.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에 넌 또 똑같은 실수를 할 거야. 왜냐하면…. 사실은 너도 그걸 바라고 있으니까.”
“…바라지 않습니다.”
“아닐걸. 앞으로도 성여준이의 인생이 딱 네가 손 써 줄 수 있을 만큼만 좆같았으면 싶을걸. 그게 네가 박영재를 죽이지 않았던 진짜 이유잖아.”
그때 우웅, 재킷 안주머니에 넣어 놓은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낮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울림이 심장을 쿵쿵 두드렸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여준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받아, 괜찮아.”
“아닙니다.”
사현이 재킷 안으로 손을 넣어 진동을 껐다. 깡추는 어깨를 으쓱이고는 방아쇠에 손가락을 걸었다 빼길 반복했다.
“네 마음이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냐. 그 정도 장치도 없어서야 니가 그런 온실 속 화초랑 어떻게 엮여 볼 건덕지가 있었겠냐. 공사 수법 다 그렇지 뭐.”
“성여준 다시 만날 생각 없습니다.”
“뭐래? 그럼 일은 왜 그만두겠다는 건데?”
깡추가 요란하게 코웃음을 쳤다. 그러게. 왜 굳이 이래야 할까. 사현은 시선을 멀리 던졌다가 흐릿하게 중얼거렸다.
“그냥요.”
“…….”
“다 지겨워서요….”
열일곱, 어리고 서투른 채 몸만 자라 버렸던 그 여름. 사현은 모든 게 이미 늦었다고 생각했다. 여준을 너무 늦게 알았으니 어쩔 수 없다고. 깡추가 사 준 밥을 먹어 버렸고, 덤벼드는 놈들에게 주먹을 날려 버렸고, 축구공을 걷어찼던 녀석의 피를 보고야 말았으니까.
‘함께 썩어 가는 미래밖에 없을 것 같아?’
다정한 사람인 걸 알고 있었다. 본인은 숨처럼 호의를 뱉고 다니면서, 남에게 받은 건 무엇 하나 잊지 않았다. 사현이 품은 마음을 예민하게 눈치챘고, 낯설어 당황하면서도 소중히 여겼다.
‘그래도 뭐 어쩌겠어.’
깡추는 틀렸다. 박영재 따위의 장치는 필요하지 않았다. 여준은 사현을 사랑했을 것이다. 사현이 여준을 사랑하는 한 언젠가는 반드시.
“조용히 그만두게 해 주십시오. 어디 지방이나…. 제주도라도 가서 죽은 듯이 살다가 찍소리 않고 죽겠습니다.”
“…진심이야?”
“진심입니다. 아무것도 손에 쥘 생각 없어요.”
흐음, 발을 늘어뜨린 깡추가 개머리판으로 미니의 정수리를 툭툭 내리쳤다. 미니는 움찔대며 놀라면서도 피할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사현아, 내가 이만큼 양보했잖아. 성여준 만나라니까. 그렇게 끔찍하고 중요하면 내가 이제라도 걔 카바 쳐 줄게. 진짜야.”
“두 번 볼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습니다.”
“아니, 글쎄 난 성여준이 마음에 안 드는 게 아니라고. 걔랑 엮이기만 하면 니가 맛이 간 짓을 하니까 그걸 좀 교정 하고 싶었던 것뿐이야. 니가 나한테 성여준이랑 안락한 씹질만 보장해 달라, 그럼 아무 문제 없다고 말했으면 내가 걔 아킬레스건을 끊어다가 니 방에 넣어 줬을 거야.”
“…….”
“성여준이가 마음에 안 들 이유는 없지. 니가 걔 후장 냄새 쫓아다닐 때부터 우리 애들 다 하던 소리가 사현이가 빨리 그년 따먹고 질렸으면 좋겠다 이거였는데. 특히 홍게가 침을 한 바가지는 흘렸다. 넌 인마, 우리한테 감사해야 돼. 순서대로 했다면 우리가 먼저 한 번 돌려먹고 너 줬어야 맞는 건데.”
“…….”
“내가 널 얼마나 아꼈는지 알겠냐? 얼마나 극진한 대접을 해 가며 고이고이 키웠는지 감이 오냐고. 그런데 씨발, 이제 와서 내 통수를 갈기겠단 소리를 당당하게 해?”
깡추가 개머리판을 거세게 휘둘렀다. 몸을 움츠리며 피한 미니가 악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굴렀다.
“씨발년 보게, 피해?”
허옇게 눈을 부릅뜬 깡추가 미니의 어깨를 걷어찼다. 미니는 울며 바닥을 기어 사현 쪽으로 손을 뻗었다. 사현은 무표정한 눈으로 그녀가 내미는 구조 요청을 훑어 내렸다. 무엇을 바라고 하는 행동인지 알 수 없었다.
“나를 팔아넘긴 건 그렇다 쳐도….”
“헉, 오빠, 나 이러다 주, 죽어요. 진짜 죽….”
“굳이 성여준은 왜 들먹였어? 너한테 뭘 나쁘게 했다고.”
사현의 말에 허옇게 굳은 미니가 손을 내렸다. 나쁘게 하지 않았을 거야. 누구한테건 그럴 사람이 아니니까. 안타까운 선의로 가득 차 있었을 거야. 나를 처음 봤을 때 그랬듯이.
“…오빠, 잘못, 잘못했어요. 나 살려 주세요. 나 팔지 말라고 말 좀 해 주세요. 나, 나를 중국 어선에다 판대요. 거기 가면 사람 꼴로 못 사는 거 알잖아요. 오빠, 제발….”
“쇼를 한다, 미친년아. 걔한테 빈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사납게 웃은 깡추가 미니의 관자놀이를 향해 총구를 들이밀었다. 그러자 미니는 덜컥 총을 향해 돌아앉았다. 번득, 이채를 띤 눈에 깡추가 주춤했다.
“그래, 차라리 쏴! 씨발, 그 꼴을 보느니 지금 뒤지고 말지. 쏘라고! 쏴!”
“…어쭈?”
“니들은 씨발, 매일 하는 일이 나 같은 년들 사고파는 거면서 나는 니 새끼들 좀 팔면 왜 안 돼? 니들이랑 내가 다를 게 뭔데, 다를 게 뭔데에에!”
사현이 픽, 헛웃음을 뱉었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지막 독기 한 방울을 잊지 않는 미니가 존경스러웠다. 지옥에서 살아가려면 팔팔하게 살아 날뛰는 악의의 화신이 될 수밖에 없다. 미니에게는 소질이 있었다. 이런 곳에서 죽기는 아까울 정도로.
뻑, 개머리판에 관자놀이를 정통으로 맞은 미니가 바닥에 쓰러졌다. 축 늘어진 그녀를 보고도 분이 풀리지 않은 깡추는 몇 번을 더 발길질을 한 후에야 씩씩대며 총을 던지다시피 내려놓았다.
“씨발년, 하여튼 독해 가지고….”
씨근대며 돌아선 깡추가 사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사현은 이 길고 지난했던 생의 마무리를 지어야 할 때가 다가옴을 느꼈다.
“형님. 아니…, 이사님.”
시답잖은 깡패들의 종착역은 언제나 비슷했다. 번듯한 회사를 세워 떵떵대며 살고 싶어 한다. 유남복이 정재계 인사들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니는 이유와 매한가지였다.
“조용히 보내 주십쇼. 모아 놨던 돈 전부 두고 갈 거고, 조용히 없는 사람처럼 살 겁니다. 성여준 만나지 않을 거고 다른 회사로 가는 일도 없을 겁니다.”
사현은 깡추가 그 ‘번듯한’ 인생을 얻기 위해 공들여 갈아 온 칼이었다.
“사지 멀쩡히 보내는 게 마음에 걸리신다면 병신 만들어도 상관없습니다. 팔 하나쯤 놓고 가라면 그렇게 하겠습니다.”
“너 실수하는 거야.”
깡추가 척척 걸어 다가왔다. 그는 사현보다 머리 하나만큼 키가 작았다. 눈을 잔뜩 홉뜨고 올려다보는 얼굴은 마치 먹이를 코앞에서 놓친 하이에나 같았다.
“성여준 안 보고 산다고? 그럴 수 없을걸. 내가 행여나 무슨 짓이라도 할까 봐 얼마나 쫄리겠어. 나는 박영재나 홍게 같은 등신이 아냐. 그 새끼 자근자근 씹창 내 주겠다는 게 없는 말 같아?”
그때 죽였어야지. 타오르듯 뜨겁던 운동장에서. 야구 방망이가 부서졌다면 목을 졸라서라도 완전히 보냈어야지. 충분히 그럴 수 있었는데.
아니야, 아니지. 여준이 말을 걸어왔을 때, 싫다면 다른 멘토를 연결해 주겠다며 웃을 때, 그래, 당신은 싫으니 다른 사람으로 해 달라고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면. 열여덟의 성여준은 갓 구워낸 도자기처럼 때 없이 연약했으니 그 말 한마디면 충분히 상처 받고 떨어져 나갔을 텐데.
“아니지….”
되짚어 보자면 끝도 없다. 태어나지를 말았어야 한다. 결말을 알아도, 그리하여 수십, 수백 번 돌이킬 기회가 주어진다 해도 사현은 쓰지 못했을 것이다. 성여준이 이 세상에 존재하는 한 어떻게든 그를 찾아내 사랑했을 테니까.
“지금 여기서 나 죽이고 가지 않으면, 너는 언젠가 육 등분 된 성여준 시체 찾느라 전국을 훑게 될 거야.”
깡추를 죽이는 일은 어렵지 않다. 사현은 당장 그의 숨을 멎게 할 방법을 수십 개는 더 댈 수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해치우든, 미수에 그치든 실행한 순간 그는 이 건물에서 한 발짝도 나갈 수 없게 될 것이다.
“죽은 듯 살아? 좆 까고 있네. 세상이 뒤집어져도 내가 그 꼴은 못 보지.”
당장이 아니어도 좋았다. 아주 먼 훗날이어도 되었다. 누구도 탐내지 않고 아무도 원하지 않는, 늙고 힘없이 쪼그라든 성여준이어도 상관없었다. 그러니 참을 수 있었다. 누구도 모르는 땅에서 평화롭게 살다가 마지막의 마지막 순간, 함께했던 순간을 짧게라도 떠올려 준다면.
하지만 그마저도 욕심이었던가. 너무 많은 죄를 지어 왔다. 그런 기다림조차 허용되지 않을 만큼.
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깡추를 제압해 목을 조르기까지의 동선이 이미 해 본 일인 듯 머릿속에 선명하게 그려졌다. 어려운 일은 아닐 것이다. 깡추를 죽이고, 홍게를 죽이면 위험은 사라진다. 잡스러운 놈들은 돈과 회사 지분을 넘겨주며 구워삶으면 된다. 사현은 교도소행을 피할 수 없겠지만 외국으로 떠난 여준은 평화로운 삶을 이어 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하자. 여기서 전부 죽이고 깨끗하게 정리하자. 한 번 결심이 서니 망설였던 시간들이 무색하도록 마음이 차분해졌다. 진작 이랬어야 한다는 후회마저 들었다. 사현은 뒷짐 진 손을 풀어 축 늘어뜨렸다.
사현의 태세가 변하자 깡추가 뒷걸음질 쳤다. 손으로는 총을 내려놓은 자리를 더듬고 있었다. 위력이 강하지는 않다지만 가까이서 안 좋은 자리에 맞으면 치명적일지도 모른다. 완전히 손에 들기 전에 팔 하나는 부러뜨려야 안전했다. 어차피 깡추도 사현을 죽일 마음은 없을 터였다. 그가 원하는 건 어디까지나 사현이 자유롭게 이 건물을 빠져나가지 못할 상황일 테니.
시간이 느려진 듯했다. 이명이 울렸다. 사현은 자연스레 여준을 떠올렸다. 뺨을 부드럽게 감싸오던 손끝, 소리를 죽일 때면 허스키하게 갈라지던 목소리, 한순간도 다정하지 않은 적 없던 눈동자, 그 따스하고 상냥한 시선.
두 번 다시 보지 못해도 좋았다. 이제는 진심이었다.
“이런, 씨발…!”
깡추가 벌컥 외쳤다.
그에 응답하듯 타앙, 요란한 총소리가 허공을 찢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