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화 (16/21)

#15. 결착

선배는 꼭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굴어요.

열여덟 살이었던 여준이 고개를 들었다. 열일곱 살이었던 사현은 창가에 앉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이고 있었다. 이게 언제였더라? 어린 육체에 갇힌 스물아홉의 여준이 생각했다. 익숙한 거실이었다. 노을을 받은 아이보리색 커튼은 마치 꽃물을 짜서 물들인 것 같았다. 눈을 돌리자 커다란 텔레비전과 가득 쌓인 DVD가 보였다. 아, 그날이구나. 사현을 집으로 초대했던 생일.

‘내가? 언제?’

마음이 철렁했던 것을 기억한다. 사현이 그런 불만을 이야기하리라고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덤덤한 척 되물으면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미움받고 싶지 않았다. 사현이 보여 주는 맹목적인 애정을 잃는다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평소에 말고요.’

‘…응?’

‘꿈속에서요.’

막 오프닝 크레딧이 나오기 시작한 DVD는 타인의 꿈에 침입해 정신적인 충격을 줌으로써 살인을 일삼는 킬러의 이야기였다. 턱을 괸 채 영화에 집중하던 사현은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런다고 사람이 죽어요? 꿈에서 나쁜 일 좀 당한다고? 잘 이해가 안 가는데.’

‘연출이 허술해서 그래. 원작 소설은 재밌는데.’

‘흐음.’

그 뒤로 영화가 끝날 때까지 말이 없었다. 주인공의 자살로 이야기가 끝을 맺고, 지나간 대화를 이미 까맣게 잊은 여준이 다음 DVD를 뒤적거릴 즈음에야 나온 말이었다. 선배는 꼭 내 목소리가 안 들리는 사람처럼 굴어요.

‘선배가 가끔 꿈에 나와요. 근데 오늘처럼 멀쩡히 놀다 말고 갑자기…. 내가 무슨 말을 해도 아무 반응이 없는 거예요. 눈도 안 마주치고.’

‘…….’

‘그러면 아무리 목 터져라 불러도 끝까지 나를 안 봐요. 아무 말도 안 들리는 것처럼, 아니, 애초에 내가 그 자리에 없는 것처럼….’

그 어린 날의 사현은 알고 있었을까? 그가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빠짐없이 사랑 고백이었다는 사실을. 선명한 단어를 피하면 모를 거라 여겼을까? 애매하고 희미한 문장 속에 단단히 뭉쳐 있던 속내가.

‘그런 꿈을 꾸고 일어난 날에는 하루 종일 기분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저것도 말이 영 안 될 건 없네요. 사현은 살짝 미소를 띠었지만 여준은 웃을 수 없었다.

***

“선배.”

어깨를 흔드는 손에 눈을 떴다. 차창 너머로 캄캄하고 익숙한 풍경이 보였다. 아파트 1층 주차장은 오가는 사람 없이 고요했다. 멍하니 현실을 더듬던 여준이 밀려오는 두통에 이마를 감쌌다. 사현은 여준의 안전벨트를 풀어 주다 말고 멈칫했다.

“괜찮아요?”

“…미안. 술이 이제 깨는 것 같아.”

“지하 주차장으로 갈까요?”

“아니야, 여기도 괜찮아…. 그런데 넌 어떻게 돌아가려고?”

선배 차로 데려다줄게요. 그 말에 순순히 차키를 넘기고 조수석에 올라탔던 것까지는 기억이 났다. 항상 제 손에 있던 핸들을 사현이 쥐고 있는 모습을 보고 싶기도 했다. 비록 자리에 앉아 등을 기대자마자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지만.

“택시 타면 돼요. 데리러 오라고 해도 되고.”

“누구한테?”

“누구면요?”

“한 번이라도 순순히 대답을 하는 법이 없어. 비뚤어져 가지고.”

“…….”

“올라왔다가 가. 집에 지오 없어.”

입을 가린 채 하품을 한 여준이 옷매무새를 가다듬었다. 백미러에 비친 얼굴이 창백하고 가칠해 보였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가닥씩 정리하는 여준의 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사현이 물었다.

“왜요?”

“응? 아, 전에 말한 그 선배 집에 가 있어. 내일 무슨 어린이 연극 보러 가고 싶다 했는데 그게 종로고 선배 집도 종로여서 데리고 가 준다고….”

“아뇨, 그런 말이 아니라…. 왜 올라오라고 하는 거냐고요.”

여준의 손이 그대로 굳었다. 사현은 진심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여준은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이다 말고 어…, 하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냥,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으니까…. 커피 한잔하고 가라고?”

“…….”

“바쁘면 어쩔 수 없고…?”

여전히 사현은 말이 없었다. 검은 눈동자는 전에 없이 깊은 의문에 잠겨 있었다. 여준은 생각지 못한 그의 반응에 당황해 아무 말이나 쏟아 내기 시작했다.

“아니, 올라가서 뭘 어쩌라는 게 아니고…. 차 막히는 시간에 여기까지 운전하느라 힘들었을 거 아니야. 이제 또 거기까지 돌아가려면 고생이고, 그러니까 잠깐 올라가서 뭐 좀 마시고 쉬다가…. 그러다가 가라고.”

“…….”

“…싫어서 그래? 억지로 권하는 건 아닌데.”

그나저나 내가 왜 이렇게 껄떡대는 모양새가 됐지. 여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억지로 웃었다. 사현은 여전히 조용하고 짙은 눈으로 그런 여준을 가만히 훑어보았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을 테니까 쉬다 가라….”

복기하는 문장은 여준의 귀에도 낯설게 들렸다.

“선배야말로 피곤하지 않아요? 그런 거 일일이 헤아리고 살려면.”

검은 눈동자가 진심에 대해 묻고 있었다. 여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의 다음 말만 기다렸다.

“그렇게 신경 쓰이는 게 많고, 그렇게 겁이 많고, 그렇게 마음 약해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려고.”

차 한잔하고 가라는 권유가 이런 잔소리를 들을 일인가. 여준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사현은 어깨를 으쓱이고 여준에게 손짓했다.

“아무튼 됐어요. 그냥 갈게요. 닫힌 공간에서 둘만 있는 것도 되도록 피하고 싶고.”

“왜?”

“왜겠어요? 내일 출근 못 하면 그것도 다 내 탓이라 할까 봐 무서워서 그러지.”

여준이 아하하, 맑은 웃음을 터뜨렸다. 사현은 여준의 셔츠 깃을 단단히 여며 주고는 그의 턱을 감싸 얼굴을 살폈다.

“여자 연락처 받은 거 있으면 지워요. 그런 애들이 마음만 먹으면 당신 하나쯤 뼈까지 발라 먹는 건 일도 아니거든요. 그냥 하는 소리 아니니까 한 귀로 흘릴 생각 말아요.”

“연락처 없어. 중간에 사람 하나 끼고 약속 잡고 있고…. 그 사람도 너랑 똑같은 소리 하더라. 내가 그렇게 어리숙해 보이나?”

“남들 평가가 중요해요? 당신 안위가 중요하지.”

목덜미를 감싼 손이 셔츠 깃 아래로 파고들었다. 선명한 멍울이 새겨진 자리에 손가락이 닿자 따끔거렸다. 여준은 어깨를 움츠린 채 시선을 내리깔았다. 부슬비 같은 속눈썹이 깨끗한 뺨으로 긴 그림자를 드리웠다.

“사현아.”

“…….”

“들어왔다 가.”

유혹적인 어조나 몸짓이라곤 조금도 없었다. 오히려 친구와 헤어질 시간에 아쉬워진 어린애의 칭얼거림에 가까운 권유였다. 조금만 더 놀자. 아직 나는 더 놀고 싶어.

“…똑똑한 사람인 줄 알았더니, 나보다 멍청한 것 같아.”

사현이 헛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만하죠, 선배.”

이어 한 점 흔들림 없이 일상적인 어조의 이별 선언이 떨어졌다.

“내가 잘못했어요. 당신한테 내 감정을 쏟아 내서 미안해요. 조금쯤은 그래도 될 줄 알았어요. 내가 아무리 흔들어도 당신은 꼼짝도 안 할 거라고.”

여준이 긴 숨을 삼켰다. 사현의 말대로였다. 그래야만 했고, 그럴 자신이 있었다. 지나온 과오를 어떤 식으로 짊어지고 가야 할지 엄두조차 나지 않았으니까.

“선배가 이런 사람인 걸 잊고 있었어요. 아니, 분명 고등학생 때를 선명히 기억하고 있긴 했지만…. 이제는 아닐 줄 알았어요. 그럴 거라 믿었고….”

사현이 머리를 쓸어 넘겼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여준은 그랬다. 공평하고 다정하며 세심한 사람이었다. 아주 약간의 여지만 던져도 가장 깊은 마음을 물어오곤 하는.

“내가 원하는 건 선배가…. 그냥 좀 잘 사는 거예요. 쓸데없는 생각하지 않고, 이상한 여자 만나지 않고, 위험한 강 건너지 않고 허술한 흔들다리 피해 가면서…. 남들보다 좀 잘, 평화롭고 행복하게.”

“너는 내 삶의 방식을 결정할 수 없어.”

여준이 차분히 말했다. 사현은 금방 뭐라 대답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하아, 깊은 한숨 소리가 동시에 울렸다.

“사현아. 나는…. 이제라도 너를 끊어 내야 할 이유를 열 가지도 넘게 들 수 있어.”

“…….”

“심지어 너도, 나도 함께 납득할 수 있을 정도로 타당하고 합리적인 이유들이야. 다듬어서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누구도 나를 비난할 수 없을 만큼 절박하지. 나는 그 말들을 남들에게, 너에게, 나 자신에게 되뇌며 너를 끊어 낼 수 있어. 네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척 평화롭게 하루를 보내고, 아, 오늘도 참 아무 일도 없는 하루였다, 하면서 잠들 수도 있어.”

“…….”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을 거야. 왜냐면….”

말을 멈춘 여준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달보다 창백해진 얼굴에 많은 망설임이 어려 있었다.

“왜냐면 나는…. 이미 네가 많이 다쳐 있는 걸 알아 버렸잖아.”

“…….”

“그 사실이 어차피 나를 놓아주지 않을 거야. 매 순간, 그놈의 평화나 행복이 느껴질 때마다 나를 찾아올 거야. 나는…. 네 피로 다져 놓은 땅에 발 딛고 제정신으로 살 수 있을 만큼 대범하지 않아.”

끝까지 뱉어 놓고 나서야 짧은 후회가 밀려왔다. 이런 복잡한 말은 그만두고 간단하게 말할 걸 그랬나. 이미 네가 안타깝다고, 너를 외면할 수 없게 되었다고.

“나한테 죄책감 갖지 말아요. 난 선배가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에요.”

우려는 현실이 되었다. 곧장 핀트가 나가 버린 대답에 여준은 답답해졌다.

“선배. 나 나쁜 짓 진짜 많이 하고 살았어요.”

“이제 와서 그딴 소리….”

“처음부터 말했죠. 선배한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거 진심이에요. 선배가 새 여자 만나서 결혼하고 살 비비며 산다고 해도 나는 멀쩡히 지켜볼 수 있어요.”

“…무슨.”

“내가 섹스 중에 하는 말은 귀담아듣지 말아요. 선배도 당연히 여자랑 하는 게 더 좋겠죠. 선배도 내 기분 좋으라고 장단 맞춰 줄 뿐이라는 거 다 알아요.”

여준이 어금니를 꾹 물었다. 움켜쥔 손끝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가슴 한가운데부터 명치까지 순간 뜨거운 피가 돌았다. 뱃속이 한없이 꺼져 드는 듯한 감각의 이름을 기억해 내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치는 않았다.

“…네가…. 그렇게 말하니까…. 너무 서운해.”

“…….”

“난…. 나는 싫을 거야. 너한테 다른 사람 생기면 정말 화가 나고 절망스러울 거야. 그런데 네가, 너는 그렇게 말한다면,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게 된대도 아무렇지 않을 거라니 그건, 나 역시 너에게 그래야 한다는 말이잖아.”

“선배.”

“나는 자신 없어. 솔직하게 말하는 거야. 너 나쁜 사람인 거 알아. 나한테 말도 못 꺼낼 짓 얼마나 많이 저질렀을지 훤히 보여. 그래도 어떡해. 이미 내가…. 나는.”

“…….”

“사현아, 내가 잘못한 게 많아서 그래? 나한테 화가 안 풀려서…. 그런.”

울컥 치민 서러움에 여준은 온 힘을 다해 숨을 삼켰다. 명치에 손을 얹고 꾹꾹 눌러 봤지만 효과는 없었다. 고개 숙인 여준의 목이 길게 늘어졌다. 사현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그의 턱을 감싸 올렸다.

“선배.”

“…잡지 마. 네 얼굴 못 보겠어, 쪽팔려….”

“선배는 안 그래도 돼요. 나한테 아무것도 안 참아도 돼요. 나는 앞으로도 쭉 당신이 하라는 대로 할 거예요. 당신 말고 다른 사람 마음에 담는 일도 없을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일부러 못 알아듣는 척하는 거야?”

“스스로 고삐 물고 묶여 있을 때 가만히 두라는 거예요.”

여준은 그제야 쏟아져 들어오는 시선에 답했다. 미간부터 뺨까지 가로지른 커다란 흉터, 살짝 벌어진 입술, 전에 없이 날카로워진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이 막혔다. 사현은 영역을 침범당한 맹수처럼 굴고 있었다. 새카만 적의를 담고 뻗어오는 손끝에 여준이 놀라 몸을 움츠렸다.

“…선배가 다른 사람 만나도 지켜볼 수 있다는 건 사실이에요. 왜냐하면 선배는 감히 내가 손댈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사람이고…, 그건 선배가 나를 허락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예요.”

오므린 손가락이 눈앞에서 멀어졌다. 여준은 참고 있던 숨을 조금씩 뱉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네가 원하는 게 그런 거야? 나를 그렇게…. 대단한 존재로 만들고 일방적으로 숭배하면서 네 기분을 달래는 거?”

“…….”

“그런 거라면 말해. 해 줄게. 두 번 다시 이런 약한 모습 보이지 않고, 우는 소리 하지 않고, 네가 원하는 모습 그대로 있어 줄게. 그게….”

그게 너에게 위로가 된다면. 네가 진정 원하는 게 그런 거라면. 지금 내가 느끼는 감정, 피부 한 뼘이 절실해서 아려오는 이런 마음이 싫다면 두 번 다시 내비치지 않겠다고. 여준은 붉어진 눈가를 손등으로 누르며 코를 훌쩍였다. 한참 침묵이 흐른 후에야 사현이 한숨 쉬며 내뱉었다.

“그러게 말했죠…. 선배는 하나도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고.”

재킷 안주머니에서 습관적으로 담배를 꺼내던 그가 멈칫했다. 생각해 보니 여준의 차였다. 뒷좌석에는 아이의 카시트도 붙어 있었다. 쯧, 짧게 혀를 찬 사현이 핸들을 툭 내리쳤다.

“선배, 부탁이니까 내 균형을 깨뜨리지 말아요.”

“…균형?”

“자극하지 말라고요. 내가 당신 앞에서 얌전할 수 있는 건 어디까지나 이 균형을 지키고 있기 때문이에요. 나를 향한 당신의 감정은 동정이고, 당신에 대해서 나는 아무런 권리도 없고, 주제 파악 제대로 하지 않으면 지금 이런 시간마저도 가질 수 없게 된다고.”

어리고 예쁜 당신은 필요 없어요. 모두가 원하는 당신이 아니어도 돼요. 그거라면 조금이라도 나눠 받을 수 있나요? 오롯이 진심으로 가득 차 있던 애원이 다시금 여준의 가슴을 찔렀다.

“내 말이 서운하다고 했죠? 내가 돌아서면 화가 날 것 같다고.”

“…….”

“그런데 나는…. 지금 이 균형을 깨뜨리면, 내가 건드릴 수 없는 성여준이 아니라 내가 간섭해도 되는 성여준이 되어 버리면, 그 상태에서 당신이 변심한다면…. 잘 모르겠어요. 내가 대체 무슨 짓을 저지를지.”

핸들에 팔꿈치를 댄 사현이 제 머리를 헝클었다. 멀어진 시선의 끝에 무엇이 걸려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무슨 짓까지 저지를 수 있을지….”

검은 눈동자에 한없이 차갑고 어두운 빛이 지났다.

“별로 알고 싶지 않죠?”

“…….”

“나도 그래요. 평생 모르고 싶어요.”

그러니까 더 이상 흔들지 말아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잖아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말에 여준은 결국 눈물 한 방울을 툭 떨어뜨리고 말았다.

“넌 대체…. 누가 누구더러 생각이 많다는 거야.”

어이없는 웃음도 샜다. 사현은 제 팔을 붙들고 끌어당기는 손에 순순히 상체를 기울여 주었다. 여준은 사현의 머리를 끌어안고 조용히 그의 어깨를 토닥이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 알아. 뭘 걱정하는지 알겠어. 그런데 사현아.”

“…놔요. 애 아니에요.”

“나랑 조율해가면 안 되는 거야?”

어깨를 토닥이던 손이 등을 길게 쓸어내렸다. 정성스레 문지르며 허리 위에 다다르더니 건반 치듯 손가락을 가볍게 찍는다. 무섭도록 상냥한 접촉이었다. 사현은 제 무릎 가에 놓은 두 손을 힘껏 말아 쥐었다.

“너라고 내 모든 면을 받아들일 수는 없을 거야. 그리고 난…. 네가 싫어할 것 같은 내 모습은 되도록 감출 거야. 네 마음이 조금이라도 떠나는 걸 원하지 않으니까.”

너는 그럴 수 없어? 지금 내가 너를 향해 쏟고 있는 이 마음을 계속 받고 싶지 않아? 아니면 내가 그렇게 못 미더운 거야? 묻고 싶은 말은 많았다. 달콤한 말로 꼬드기고 그럴싸한 말로 설득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했다. 몸을 떼어 내고 눈을 마주 본 순간, 사현이 잔뜩 혼란스러운 얼굴로 입술을 달싹이고 있었기에.

“…그런 생각은 안 해 봤어요.”

애초에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고 여겼으니까. 여준은 다급히 그의 기울어진 뺨으로 쫓아들었다. 사현아. 부르며 볼을 맞대고 눈을 감았다. 사현의 피부는 싸늘했고 관자놀이에 닿는 속눈썹은 금방이라도 부스러질 듯 퍼석퍼석했다.

“사현아, 원하는 걸 말해.”

“…….”

“이렇게 살라고 하지 말고, 이렇게 해 달라고 해. 손을 잡고 싶으면 잡자고, 키스하고 싶으면 하자고 해. 그래야 그다음 말을 할 수 있잖아. 아니야?”

사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지도 않았다. 주먹 쥔 손을 움직이지도 않았다. 소리와 동작이 사라진 세계, 호흡하는 순간 발밑이 꺼져 버릴 악몽에 떨어진 사람처럼.

“사현아.”

엔진 소리가 파도 소리처럼 들렸다. 그에 사현은 바다를 향해가는 물고기처럼 두 손을 들어 올렸다. 그대로 여준의 등을 감싸 안고 그의 어깨로 이마를 파묻었다. 가까워진 사현의 머리카락에서 달콤한 나무 향이 났다. 기분이 편안해지는 냄새에 여준이 긴 숨을 쉬었다.

“안 좋은 일 다 그만두자.”

그만두고 나랑 떠나자, 응? 여준이 사현의 귓가에 짧게 키스하며 속삭였다. 사현은 끝까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여준의 등에 갈퀴처럼 걸어 놓은 손끝을 아주 미세하게 떨었을 뿐이다. 그래도 여준은 느낄 수 있었다. 두려움에 흔들리는 어깨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을 수도 있었다. 차 안은 금세 심해처럼 어두워졌다.

***

- 사모님 고등학교 동창들을 몇 명 만나 봤습니다. 알고 계시는지 모르겠는데 사모님이 고등학교 때 전학을 한 번 하셨더라고요. 짐작하셨겠지만 사고가 터져서였고요. 피해자, 목격자, 가담자 나눠서 녹취록 첨부했습니다. 총 다섯 명이었고 각자 제시한 정보료는 하단에 나와 있는 대로니까 직접 입금하시고, 그 돈의 2할은 제게 따로 주셔야 합니다.

파일은 수정이 불가능한 PDF 형식 문서였다. 여준은 노트북 앞에서 잠시 두 손을 마주 잡았다. 몸이 떨려 온 것은 긴장 때문만은 아니었다. 보일러를 가동하지 않은 서재 내부는 뼈가 시리도록 싸늘했다.

파일을 클릭하자 다운로드 창이 떴다. 얄미우리만치 빠르게 여준의 노트북으로 옮겨 온 문서가 곧 모니터 화면을 빼곡하게 채웠다.

파일1. 피해자

김ㅇㅇ 男 고등학교 2학년 때 2층 교실에서 추락, 발목 복합 골절로 인한 CRPS(복합 부위 통증 증후군) 발병, 학업을 이어 갈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자퇴 후 지금까지 자택 생활 중. 잠깐의 외출조차 불가능할 정도의 중증이라 직접 만나기는 불가능했기에 부모와 통화하였음. 이하 모친의 증언.

母: 시작은 남자아이들이 교실에서 장난을 친 거였다. 손을 안 짚고 덤블링에 성공할 수 있다거나, 자기 집 담벼락을 밟고 설 수 있다거나 그런 것. 그러다 우리 아이가 엄마, 그러니까 나 몰래 자기 방에서 탈출했던 경험담을 늘어놓았다. 우리 집은 2층짜리 주택이다. 하지만 천장이 낮아서 2층이라 해도 그렇게 높지 않고, 1층 창문 위 차양을 밟으면 별로 어렵지 않게 벽을 타고 내려올 수 있다.

本: 학교 건물 2층과 비교하면 어떤가?

母: 당연히 학교 건물이 훨씬 위험하다. 교실은 천장이 높고, 창문을 나서면 디딜 곳도 변변히 없다. 그런데 그 나잇대 남자애들이 다 그렇지 않나. 2층에서 뛰어내려도 멀쩡했다는 식으로, 좀 과장을 해서 얘길 했겠지. 그런데 얘기를 듣고 있던 그 쌍년이, 아니, 유은아 씨가.

本: 편한 대로 말씀하셔도 괜찮다.

母: 그럼 지금 한번 뛰어내려 보라고 한 거다. 뛰어내렸는데 멀쩡하면 20만 원을 주겠다고 했단다. 우리 아이는 싫다고 했고, 주변 친구들도 다 말렸다. 그런데 기어코 애를 몰아붙여서 뛰어내리게 만들었다. 그 쌍년의 부모들은 병원에도 한 번 찾아오지 않았다. 그래도 발목만 다치고 끝났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는데, 어느 날 아이가 갑자기 다리가 너무 아프다면서 일주일을 꼬박 잠들지 못했다. 온갖 대학 병원 전전하며 받을 수 있는 검사는 다 받고 나서야 CRPS라는 걸 알았다.

本: 발목 골절 때문에 발병한 게 확실한가?

母: 바로 그 점 때문에 소송도 못 했다. 자기 애가 직접 민 것도 아닐뿐더러, CRPS의 정확한 원인이 의학적으로 규명되지 않았는데 어떻게 자기들에게 책임을 묻냐며 끝까지 뻔뻔한 모습이었다. 심지어 그 쌍년은 우리 애가 자기를 좋아해서 말렸는데도 뛰어내렸다는 둥 헛소리를 했다. 우리 애는 처음부터 그년을 싫어했다. 반에서 일어나는 왕따를 모조리 그년이 주도하고 있다고, 사건 전에도 이상하고 무서운 애가 있다며 몇 번이나 말했었다.

마침표를 보고서야 여준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뻑뻑해진 얼굴을 두 손으로 문지르며 어깨를 늘어뜨리자 등 뒤로 무겁도록 차가운 공기가 내려앉았다.

“…….”

착잡하고 씁쓸한 심경이야 이루 말할 수 있지만, 그 이전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가는 마음이 있었다. 마구잡이로 엉켜 있던 머릿속 타래가 한 올씩 제자리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자신이 알고 있던 은아와 타인이 말하는 은아, 도저히 메울 수 없을 것 같았던 간격이 한 뼘씩 좁아질 때마다 묘한 안도감이 전신을 감쌌다.

스크롤을 내려 다음 파일을 열었다. 제목은 <목격자>였다.

파일2. 목격자

이ㅇㅇ 女 김ㅇㅇ 씨의 사고 당시 현장 목격. 김ㅇㅇ와는 유치원 때부터 친구 사이.

李: 김ㅇㅇ는 뛰어내린 게 아니다. 유은아의 추종 세력이 억지로 끌고 가서 떠밀었다.

本: 그게 정말인가? 자세히 말해 줄 수 있는가?

李: 김ㅇㅇ는 원래 유은아를 싫어했다. 유은아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유은아는 반 남자애들 중 하나라도 자기를 좋아하지 않는 상황을 견디지 못했다. 내가 김ㅇㅇ랑 친하다는 이유로 나 역시 반에서 고립시킬 정도였다.

유은아는 김ㅇㅇ가 2층 자기 방에서 탈출한 적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는 거짓말하지 말라며 비웃었다. 김ㅇㅇ는 발끈해서 그딴 건 아무 일도 아니라고 했고, 유은아는 그럼 우리 교실이 2층이니 여기서 뛰어내려 보라고 했다. 유은아 추종 세력인 일진 남자애들이 달라붙어 어서 해 보라며 아우성을 쳤다.

아저씨도 아시겠지만 남자애들 사이에서 그런 상황이 벌어졌을 때, 제대로 해내지 못하면 남은 학기 내내 비웃음을 당해야 한다. 그래도 김ㅇㅇ는 거절했다. 내가 네 말을 왜 들어야 하는 거냐며 맞섰다. 그러자 유은아는…. 자기를 따라다니는 일진 남자애들 중 가장 힘이 있는 애한테 뭔가를 속삭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일진 남자애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어 김ㅇㅇ를 창문 쪽으로 떠밀고 다리를 들어 올렸다.

本: 명백한 폭력 행위가 있었다는 것 아닌가? 왜 그 사실을 진작 이야기하지 않았나?

李: 김ㅇㅇ가 말하지 말라고 했다. 부모님이 아시면 놀라실 거라고, 까불다 떨어져서 다친 걸로 해 두고 싶다면서. 걔도 아마 발목 골절 하나로 끝날 일이라 생각했겠지.

이ㅇㅇ의 정보료는 ‘김ㅇㅇ의 부모님이 원했던 것만큼, 김ㅇㅇ에게 전달해 달라’고 표기되어 있었다. 여준은 노트북에서 떨어져 굳은 목을 문질렀다. 이하의 증언들은 피해자의 어머니와 목격자가 말한 정황과 다를 것이 없었다. 시점이 조금 바뀌었을 뿐.

의자에 기댄 여준이 천천히 눈을 감았다. 은아야. 생전에도 여러 번 불러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너는 정말로 이런 사람이었구나.”

연인으로서, 부부로서 보았던 은아의 모습 모두가 거짓이라 생각하진 않았다. 분명 다정한 순간이 있었고, 자연스럽게 피어난 애착에 사랑스럽게 여긴 때가 있었다. 그녀가 맞이한 고통스러운 죽음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이 섬뜩해졌다. 하지만 이제는 받아들여야 했다. 일어난 일은 일어난 일로, 다가올 일은 다가올 일로.

여준은 조용히 핸드폰을 들어 올렸다. 몇 시간 전 도착한 문자가 아직도 첫 화면에 떠 있었다.

「생명 존중을 실천하는 기업, 휴먼 연구소에서 요청하신 검사결과 발송안내 드립니다. 금일 우체국 등기를 통해 …」

***

수상쩍은 발송지가 찍힌 서류 봉투에 팀장을 비롯한 사무실 직원들이 한 번씩 궁금한 얼굴을 들어 올렸다. 여준은 입구가 단단히 막힌 봉투를 가만히 내려다보다 그대로 브리프케이스에 집어넣었다. 파티션 너머까지 다가왔던 팀장이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그나저나 여준 씨, 시험 붙었다면서.”

“아…, 네.”

당연히 붙을 거라 예상했기에 결과 자체에는 아무런 감상이 없었다. 한국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기뻤을 뿐이다. 팀장도 어차피 보낼 사람이라 생각했는지, 예의 그 땅 투기 과정이 순조로운 탓인지 쓸데없이 날 세우는 일 없이 시종일관 호의적이었다.

“난 정말 그걸 한 달 공부해서 붙을 줄은 몰랐지. 알았으면 말도 안 했지. 우리 여준 씨 상해 가면 일은 누가 하냐, 일은.”

“팀장님, 저희는 직원 아니고 화분인가요?”

“에이 말을 또 그런 식으로 받아. 불만 있으면 다들 스펙 쌓아 준다 할 때 받아먹읍시다, 응? 대학원도 싸게싸게들 가고.”

사무실 분위기는 어느 때보다 좋았다. 그러나 여준은 봉투를 넣어 놓은 브리프케이스에서 손을 뗄 수 없었다. 입을 꾹 다문 채 침묵하는 그를 보면서도 팀장은 기어코 혼자 궁금했던 것을 소리 내어 입에 담았다.

“근데, 여준 씨. 등기 온 거 뭐야?”

“…….”

“혹시 헤드헌팅 그런 거 아니지? 무슨 연구소 같던데.”

말도 안 되는 소리로 떠보려는 수작이었다. 능글능글한 질문에 여준은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팀장의 머릿속에 팀원의 사생활이라는 개념이 들어 있기는 한 건지 의문스러웠다. 티 내지 않고 미소 지을 수 있었던 건, 등기를 회사 주소로 받기로 한 시점에 당연히 이런 상황도 상상해 보았기 때문이다.

“아니에요. 지오 유전자 검사 받아 봤어요.”

“뭐? 아들 유전자? 왜?”

“요즘 그런 게 있더라고요. 어릴 때 유전자 검사를 자세히 받으면 크면서 걸릴 가능성이 높은 병 같은 걸 미리 알 수 있대요. 곧 외국 나갈지도 모른다고 했더니 아는 선배가 미리 해 보라고 소개해 줘서요.”

“와, 정말? 별 신기한 게 다 있네. 하여튼 세상 좋아졌어.”

아닌 척 귀를 기울이고 있던 팀원들의 얼굴에도 그제야 납득하는 빛이 어렸다.

“해 보면 정말 다 알 수 있어? 우리 애들도 시켜 볼까. 가격은 얼마나 해요?”

“명함 드릴까요? 홈페이지도 있던데.”

“오, 좋지. 좋지.”

팀장이 신이 나서 손을 뻗자 여기저기서 저도요, 하며 다가왔다. 하나같이 아이가 있는 이들이었다. 여준은 팀 내 메신저에 홈페이지 주소를 올려 주기로 하고 그 자리를 마무리했다.

만족한 팀원들이 모두 자리로 돌아가고, 다시 업무에 집중하기 시작한 사무실은 금방 조용해졌다. 가끔 타각 대는 키보드 소리만 들렸다. 여준 역시 벌써 세 번째 수정이 돌아온 약관 파일을 한 글자씩 체크하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집중할 수는 없었다. 숨을 내쉬는 순간마다 무언가 뒷목을 잡아채는 것 같았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받아들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핏줄 같은 건 중요하지 않다고. 연약하게 태어난 핏덩어리를 먹이고 입히고 배설물을 받아가며 기른 시간들, 입을 떼고 혀를 놀리고 제 다리로 서는 아이를 지켜보며 다져온 유대는 그깟 유전자 따위에 부서질 정도로 허약하지 않다고. 하지만 마음을 다질수록 시커먼 의혹이 뱃속을 굴러다녔다. 정말로?

나는 정말로 그렇게 넓은 그릇을 가진 인간인가?

아직도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게 아닐까? 가람의 충고가 자꾸만 떠올랐다. 지금보다 더 힘든 때가 왔을 때, 이 사실이 네 발목을 잡지 않을 거란 보장이 있어? 그 말은 여준이 아닌 아이를 향한 걱정이었다. 가람은 묻고 싶었던 것이다. 너 정말 지오한테 상처 주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고.

어떻게 퇴근 시간까지 버텼는지도 알 수 없었다. 허둥지둥 책상을 정리하고 나서면서도 가슴이 쿵쾅거렸다. 차에 올라타 조수석에 브리프케이스를 던져두고 나서야 앓는 소리가 나왔다. 여준은 핸들에 이마를 묻은 채 한참 움직이지 못했다. 땀에 젖은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목덜미의 맥박이 터질 듯 뛰어올랐다.

아이를 데리러 가야 했다. 그러려면 움직여야 했다. 하지만 손이 떨려 핸들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준은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른 채 어떻게든 마음을 진정시키려 애썼다.

그러자 그 바람에 응답이라도 하듯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사현의 번호를 확인하자마자 받아 들었다. 입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다행히 사현이 먼저 말을 걸어왔다.

- 선배, 어디예요?

여준은 순간 자신의 위치를 잊고 차창 밖을 둘러보았다. 곧바로 깨달은 스스로의 멍청함에 웃음이 났다.

“어…, 아직 회사야. 이제 퇴근하려고.”

- 목소리는 왜 그래요?

“…….”

- 무슨 일 있어요?

여준의 입술이 떨어지다 도로 닫혔다. 하마터면 오늘 받은 서류 봉투에 대해 냉큼 고백할 뻔했다. 간신히 멈추고 아랫입술을 물었다.

“아니, 별일은 아니고…. 회사에서 실수…, 를 좀 한 게 있어서 기분이 안 좋았어.”

- 무슨 실수길래요?

“별 건 아니야. 그냥…. 자신 있던 거라서. 항상 내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을 거라 여겼던 그런 거라서…. 내 생각대로 안 되니까 그게….”

그게 짜증이 났어. 화도 나고. 주절주절 주워섬기는 변명의 반은 진실이고 반은 거짓이었다. 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에 휩싸인 전파에 여준은 뒤늦은 후회를 했다. 약한 모습 보이지 않겠다고 해 놓고서.

“미안, 이런 얘기하려던 게 아니었….”

- 선배는 완벽한 사람이에요.

“…….”

- 이 세상 어디에도 선배보다 좋은 사람은 없어요.

순식간에 부푼 눈물은 걷잡을 틈도 없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 선배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원래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게 되어 있는 일일 거예요.

“뭐야, 그게.”

- 정말이에요.

사현은 살짝 웃은 것 같았다. 여준도 쏟아진 눈물을 훔쳐내고 애써 웃었다.

“그런데 왜 전화했어?”

- 그냥 해 봤어요.

“…그냥?”

-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기쁘면서도 의아한 마음이 들었다. 여준이 멍하니 입술을 달싹이고 있자 사현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 별일 없으면 됐어요. 다시 전화할게요.

“사현….”

- 들어가요. 운전 조심하고.

전화는 미련 없이 끊어졌다. 여준은 핸드폰을 쥔 채 눈을 깜빡이다 곰곰이 머릿속을 더듬기 시작했다. 갑자기 전화해서 어디냐고 물어볼 일이 뭐가 있을까. 그냥 해 봤어요.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아서. 이만큼 사현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없었다.

화면을 쓰다듬던 손끝에 메시지 아이콘이 걸렸다. 무심히 수신된 문자 내역을 훑어 내리던 여준이 멈칫했다. 연구소에서 보낸 발송 안내 메시지에 눈이 걸린 탓이었다.

‘난 당신 핸드폰 데이터를 복사해서 들여다봤어요.’

데이터 복사. 언뜻 들은 바로는 통화 내역과 메시지 내역을 볼 수 있는 거라고 했다. 여준이 마른 입술을 축였다. 아직도 보고 있을까?

“…….”

이 메시지가 의미하는 바도 알았을까? 그래서 걱정이 돼서….

‘선배가 할 수 없는 일이라면 누구도 못 할 거예요.’

위로하기 위해서.

여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한참 후에야 떼어 낸 손은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차분히 가라앉은 눈동자가 손끝을, 조수석을, 가방을 향했다. 여준은 브리프케이스를 들어 무릎에 얹고 천천히 지퍼를 열었다. 대충 쑤셔 넣었던 서류 봉투가 온전한 모습 그대로 들어 있었다.

‘너라고 내 모든 모습을 받아들일 순 없을 거야.’

‘선배는 완벽한 사람이에요.’

자신의 얕고 치졸했던 믿음을 정면으로 비웃는 위로였다. 여준은 눈을 꽉 감은 채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괜찮아. 여러 번 되뇔 필요는 없었다. 사현은 여준이 어떤 결론을 내더라도 묵묵히 받아들여 줄 것이다. 이 세상이 입을 모아 여준을 비난한다 해도 사현만은 그러지 않을 것이다.

너는 내 편이지. 여준이 낮게 속삭였다. 내가 완벽하다 말하는 사람. 나를 믿고, 내 모든 걸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 사람. 내가 네 부모나 아이라 한들 이 정도의 신뢰와 애정을 줄 수 있었을까? 봉투 입구를 여는 손이 점차 다급해졌다.

어떤 결과가 나와도 괜찮아. 다 받아들일 수 있어. 심호흡을 하고 서류를 꺼냈다. 빠르게 글자를 훑어 내린 손이 곧 다음 장을 펼쳤다. 의미 모를 도표의 나열이 이어지고, 마침내 한 줄로 정리된 결론에 이르러서야 여준의 숨이 멈췄다.

한참을 굳어 있던 그는 이내 서류 첫 페이지로 돌아갔다. 타이틀부터 한 글자씩 꼼꼼히 다시 읽었다. 다시 서류를 넘겨 결론에 이르렀을 때, 여준의 두 눈은 새카맣게 가라앉아 있었다.

“…….”

굳은 손에서 서류가 한 장씩 떨어져 내렸다. 그는 말을 잃고 시선을 놓은 채 한참을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창백해진 얼굴로 차가운 그림자가 내렸다.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리는 것 같았다.

***

영재가 전화를 받은 것은 막 씻고 나와 룸서비스 책자를 뒤적대던 때였다.

- 잠깐 보자.

전혀 예상치 못한 목소리에 영재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화면을 확인했다. 다시 봐도 여준의 번호였다. 그는 들리지 않게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아무렇지 않은 척 되물었다.

“이 시간에? 갑자기?”

- 꼭 오늘 아니어도 상관은 없어.

“…그게 내가 요즘 바빠서. 마침 오늘 저녁만 잠깐 비어 있긴 한데.”

- 그럼 오늘 보자. 너 있는 쪽으로 내가 갈 테니까. 어디로 가면 되는지 문자 넣어 줘.

빠르게 용건만 뱉은 여준이 깔끔하게 전화를 끊었다. 영재는 쯧, 혀를 차고는 다급히 옷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백화점에서 마구 사들인 옷과 가방, 구두 따위를 고르던 그가 씨발, 하며 욕설을 뱉어 놓았다.

“시계를 아직 못 받았잖아.”

유명 시계 딜러에게 매달려 예약해 놓은 신형 브라이틀링이 아직 손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비까번쩍한 슈트, 닳은 흔적 하나 없는 구두와 벨트도 중요하지만 마무리는 역시 시계여야 했다. 이야기를 나누며 테이블에 손을 올려놓을 때 드러나는 값비싼 시계, 그것을 힐끔거리는 상대의 반응이 있어야 영재는 만족할 수 있었다.

고민하던 그는 다급히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일곱 시를 막 지난 시간이었다. 여덟 시 반까지 R호텔로 와. 여준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달려 나간 그는 택시를 잡아타고 곧장 백화점으로 향했다.

그러나 당장 값을 치르고 사 올 수 있는 시계는 모조리 몇백만 원 선의 싸구려뿐이었다. 자고로 시계라면 최소 이천부터 시작해야 물건이라고 할 수 있었다. 영재는 초조한 마음에 직원에게 윽박을 지르고 당장 더 좋은 물건을 가져오라 다그쳤다. 소란을 눈치채고 달려온 매니저가 영재를 살살 달래 앉혀 두고는 어디선가 IWC 신형 모델을 가져와 들이밀었다.

통장에는 5천만 원이 있었다. 사현이 준 정보를 팔기도 하고, 직접 땅을 거래하기도 해 가며 만든 돈이었다. 매니저가 가져온 시계를 사면 반액이 날아갈 처지였지만 상관없었다. 일만 생각대로 돌아간다면 5천쯤은 돈도 아니다. 수억, 어쩌면 수십억을 벌 수도 있었다. 거기에 아이와 유남복도 있지 않은가. 지금은 여준을 만나 그의 기를 눌러놓을 아이템을 갖추는 일이 더 중요했다.

호텔로 돌아오자 8시였다. 포장을 풀어 새 시계를 손에 차고 옷을 차려입었다.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반듯하고 부유해 보였다. 만족스럽게 태세를 갖춘 그는 여준에게 통보한 대로 호텔 라운지로 향했다.

저녁 시간을 막 지난 참이라 라운지는 한산했다. 영재는 창가에 자리를 잡고 커피 한 잔을 주문했다. 여준을 찾아가 만났던 때와는 하나부터 열까지 달랐다. 그렇게 구질구질한 카페에 발걸음 할 일은 이제 그의 인생에서 두 번 다시 없을 터였다.

여준은 시간에 딱 맞춰 도착했다. 출퇴근용 슈트에 롱코트 차림이었다. 영재는 그 순간 라운지에 있던 몇 안 되는 이들의 시선이 모조리 여준에게 향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준은 싸늘하리만치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희고 섬세한 이목구비가 더욱 돋보였다. 지나가던 누구라도 한 번쯤은 돌아볼 수밖에 없는 외모, 단정하고 깔끔하지만 하나같이 고급품인 옷과 가방 따위가 하나하나 신경에 거슬렸다.

서버의 안내를 받아 테이블로 다가온 여준이 가만히 그를 내려다보았다. 가늘게 뜨인 눈이 전에 없이 냉정해 보였다. 영재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키고 억지웃음을 지었다.

“뭐 해? 앉아.”

“그래.”

코트도 벗지 않고 자리에 앉은 여준이 브리프케이스를 무릎에 올려 두었다. 코트를 받기 위해 다가왔던 서버가 잠시 머뭇거리다 도로 멀어져 갔다. 여준은 자리에 앉은 뒤에도 한동안 말이 없었다. 눈을 내리깐 채 죽은 듯 고요한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래, 무슨 일로 보자고 했어? 네가 날 부르다니 내일은 해가 안 뜰지도 모르….”

“한 가지만 물어볼게.”

숨 쉴 틈 없이 치고 들어온 질문에 영재의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영재는 처음부터 두 손을 테이블에 올려 두고 있었지만, 여준의 시선이 그의 새 시계에 닿는 일은 없었다.

“지오를 어쩌려고 했어?”

“뭐?”

“은아한테 들은 거지? 지오가 네 아이라고.”

“…그거야 뭐.”

“어쩔 셈이었어? 지오가 네 애라면, 네가 키우고 싶었어?”

시종일관 덤덤하고 차분한 어조였다. 영재는 입을 다문 채 가만히 여준의 얼굴을 살폈다. 여준은 끝까지 그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영재는 슬쩍 미소를 띠었다. 강렬한 승리의 예감이 들었다.

“…어쩌긴? 내 애라면 내가 키워야지. 당연한 거 아니야?”

“…….”

“아, 물론 너한테 미안하게 생각해. 나도 사람인데 당연히 그런 마음 있지. 하지만 너도 알다시피 바람이란 게 혼자 피우는 건 아니잖아? 은아 씨와 내 관계에도 네가 모르는 역사는 있….”

“영재야, 기회를 줄게.”

여전히 낮고 침착하지만 날카로운 목소리였다. 영재는 볼 안쪽을 혀로 누르며 미간을 팍 찌푸렸다. 근데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 아까부터 자꾸 말을 끊네.

“기회?”

“두 번 다시 내게 연락하지 않고, 접근하지 않고, 지오를 가지고 이상한 수작 부리지 않겠다는 각서를 써.”

“…….”

“그렇게 하면 나는 오늘 이후로 네게 아무것도 묻지 않을게. 은아 일에 대해서도, 그간 내게 저지른 일에 대해서도.”

말을 마친 여준이 브리프케이스를 열어 펜과 파일철 하나를 꺼냈다. 파일에는 여준이 말한 내용이 좀 더 법률적이고 전문적인 언어를 빌려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비어 있는 건 짧은 서명란뿐이었다.

“난 지금 이게 뭐 하자는 수작인지 모르겠다?”

서류 끄트머리를 툭 건드린 영재가 한쪽 뺨이 찢어지도록 입술을 올렸다. 여준은 별 반응 없이 펜대를 영재 쪽으로 내밀었다.

“네가 서명하지 않으면, 나는 은아 가족들을 고소할 거야.”

“뭐?”

“너와의 관계를 그 집에서도 다 알고 있었어. 아니, 은아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도 모조리 알았지. 그럼에도 모든 걸 숨기고 나와 결혼시켰어. 사기죄가 성립할지 그건 모르겠어. 하지만 은아 가족들은 망신스러울 테고, 귀찮을 테고, 모든 원흉인 너를 가만히 두지 않겠지.”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야? 그런 짓 벌이면 너는 무사할 것 같아?”

“내 걱정까지 네가 해 줄 필요는 없어.”

여준이 재차 펜을 내밀며 물었다. 어쩔래? 영재는 빠르게 여준의 손과 서류를 번갈아 보고는 어금니를 악물었다. 서명해. 그러지 않으면 네가 귀찮아질 거야. 여준의 협박은 심플한 만큼 위협적이었다. 그러나 고작 이따위 겁박에 굴할 수는 없었다. 그럴 거라면 시작조차 하지 않았을 것이다. 영재는 여준에게 받은 펜을 그대로 테이블에 떨어뜨렸다.

“좆 까.”

“…….”

“그 영감탱이들이 나를 어떻게 건드려? 내가 애 친분데.”

영재가 웩, 하며 토하는 시늉을 했다. 여준은 잠잠히 떨어진 펜을 집어 들었다. 짙은 체념이 묻어나는 동작이었다. 그 모습을 유심히 지켜보던 영재의 머릿속에 순간 불이 번뜩였다.

“…왜? 내 애가 확실하대?”

여준의 손이 멈칫했다. 이미 창백했던 얼굴이 파리하게 물들어갔다.

“왜 갑자기 뭐 마려운 강아지마냥 쪼르르 달려왔나 했더니, 혹시 그거야? 친자 검사라도 해 본 거야? 이제야?”

“…….”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 아이고, 여준아. 이런 거 아무 소용없어. 네가 곱게 자라서 사회고 법이고 좆도 모르나 본데 그래 봤자 우리나라는 친권이 최고야. 네가 백 년을 끼고 키웠어도 씨가 내 거면 그 애는 내 거라고. 알아?”

여준의 뺨이 짧게 경련했다. 눈동자가 빠르게 흔들렸다. 영재는 아예 테이블에 상체를 올리다시피 기댄 채 그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애를 데려다 뭘 어쩔 거냐고?”

“…….”

“뻔한 거 아냐? 내가 키워야지. 왜냐하면 유남복 재산이 최종적으로 상속될 대상이 그 애새끼니까.”

영재가 킬킬 웃었다. 여준은 시선을 내린 채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영재는 여준의 손끝이 시푸르게 질린 것을 똑똑히 볼 수 있었다.

“걱정하지 마, 여준아. 모자란 거 없이 잘 키워 줄게.”

“…….”

“죽어도 못 헤어지겠다면 애 가정 교사라도 할래? 내가 그 정도 호의는 베풀 수 있지.”

소리 내 웃은 영재가 제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일부러 시계를 쓰다듬고 체인을 풀었다 도로 채우는 중에도 여준의 눈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영재야.”

한참 후에야 새어 나온 목소리는 살짝 쉬어 있었다. 때문에 영재는 그가 드디어 마지막 수를 쓸 거라 예상했다. 볼썽사납게 애원하거나, 어쩌면 무릎까지 꿇을지도 모른다. 제발 내가 키우게 해 달라면서. 그럼 선심 쓰는 척 아이를 맡겨 두고 돈을 요구할 생각이었다. 어차피 유남복 부처가 죽으면 넝쿨째 굴러들어올 재산이었다. 구태여 어린아이를 떠맡아 고생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너 은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아니?”

그러나 여준에게서 떨어진 질문은 모든 예상 범위를 빗나가는 것이었다. 뭐? 영재가 불쾌하게 되묻자 여준은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투명하고 잠잠한 눈빛이었다.

“궁금하게 여긴 적은 있었어?”

“…….”

“왜 죽었는지, 어떻게 죽었는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

“너는 장례식에 안 왔었지. 내게 은아 이야기를 꺼낼 때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고.”

영재가 테이블을 쾅 내리쳤다. 멀리서 놀란 서버가 돌아보는 모습이 보였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무슨 소리를 하고 싶은데?”

“내가 너에게 기회를 준 건.”

“이제는 허세야? 밑천 없는 거 씨발 뻔히 보이거든? 아주 내가 호구 같냐?”

“은아가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었는지를 알기 때문이야.”

“…….”

“은아는 분명 나쁜 사람이었지. 세간의 상식을 빌어 평가하자면 그럴 거야. 하지만 내게는…. 내게 한 짓은, 적어도 그 정도로 끔찍한 죽음을 맞아야 할 정도의 잘못은 아니었다고 생각해.”

“…너 아까부터 대체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그러니까 너에게 이 정도 성의는 보일 수도 있다고 생각했어. 넌 은아가 ‘진정’ 사랑했던 사람이잖아.”

영재의 입술이 크게 실룩였다. 밀려 나오는 욕설을 삼킬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고급스러운 장소 탓이었다. 한동안 침묵이 흐르고, 여준이 먼저 움직였다.

“영재야.”

차분한 동작으로 가방을 연 그가 뭔가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 두었다. 서류 봉투였다.

“우리 내기할까?”

“…….”

“은아가 늘 하던 것처럼.”

영재는 한참 후에야 되물을 수 있었다.

“…뭐?”

여준은 처음 라운지에 들어서던 그 표정 그대로였다. 차갑게 굳어 버린 입술, 건드리면 부스러질 듯 새하얘진 뺨이 위태로웠다.

“네 말대로야. 친자 검사를 해 봤어. 이 안에 그 결과가 들어 있고.”

“…….”

“너는 은아와 오래 봤다니 나보다 잘 알겠지.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지 않아?”

영재는 입을 다문 채 서류 봉투만 노려보고 있었다. 여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물었다.

“영재야. 너도 참가해 본 적 있어?”

“…뭘?”

“그 역겨운 게임 말이야. 아빠 맞히기라고 했던가.”

테이블 위로 맞잡고 있던 영재의 손이 움찔 굳었다. 여준은 꼿꼿이 앉은 채 그런 영재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재는 놀란 표정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여준이 은아의 과거를 어느 정도 캐냈을 것까지는 짐작했다. 하지만 이런 일까지 알아냈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여러 사람에게 이야기를 들어봤어. 은아의 학창 시절부터 대학 때, 한창 강남 호스트바를 전전하며 놀러 다닐 때…. 은아를 알고, 겪어 봤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특징이 있었어. 은아는 아마…. 모든 걸 게임으로 생각했던 것 같아.”

“게임…?”

“난 항상 은아가 ‘남편’인 나를 시험하고 있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그것도 그냥 게임이었던 거야. 자기 주변 사람들을 조종해서 나를 공격하게 만드는…. 은아 나름의 게임 룰이었겠지.”

말을 이어 가던 여준은 자연스레 미니를 떠올렸다.

‘유은아는 절대 자기가 움직이지 않았어요. 본인 추종자들을 교묘히 꼬드겨서 나를 괴롭히게 했죠.’

여준 역시 겪어 본 적 있었다. 은아가 내뱉는 은밀한 명령들, 애매하게 숨겨 놓은 악의를 빠짐없이 잡아내 고스란히 복화술 인형 노릇을 하던 처가 식구들.

“아빠 맞히기 게임도 마찬가지야. 은아는 그냥 재밌었던 거야. 자기 명령 하나에 밑바닥 드러내면서 피 튀기고 싸우는 모습을 구경하는 게.”

“그게 뭐?”

울컥한 영재가 되물었다. 여준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래서 뭐 어쨌다고? 여기서 유은아 쌍년이었던 거 모르는 사람도 있어? 그래, 그 미친년이, 그 희대의 사이코 년이 널 두고 나랑 바람피운 게 그렇게 이상해? 그렇게 머리가 돌아 있는 년이어도 감히 성여준을 두고 박영재랑 그럴 리가 없다, 뭐 그런 거야?”

다다다 쏟아져 나온 말에는 짙은 열등감, 비열한 승리감이 꾸덕꾸덕 묻어 있었다. 여준은 처음으로 눈앞의 옛 친구에게 동정심을 느꼈다.

“이해를 못 했구나. 난 지금 너나 나나 은아에겐 똑같았다고 말하는 거야.”

“…뭐?”

“은아는 게임을 한 거야. 너랑 나는 은아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고.”

손을 들어 테이블 위로 놓은 여준이 서류봉투 위를 툭툭 두드렸다. 여기까지 말했는데도 모르겠어? 라고 묻는 듯한 동작이었다.

“은아가 제일 좋아했던 게임이 있잖아.”

“…….”

“아빠 맞히기.”

영재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너는 은아 말을 믿었겠지. 그럴 수밖에 없어. 애 친부가 누군지, 친모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을 테니까.”

“…….”

“그래서 나도 의심하지 않았어. 은아가 그랬다면 확실할 거라고.”

여준의 얼굴에 처음으로 표정이 떠올랐다. 눈가를 잔뜩 찡그린 채 웃는 얼굴은 반쯤 우는 듯 보였다.

“…그럴 리가 없어. 은아는…. 너한테 들키면 안 되니까 어떻게든 해야, 손을 써야 한다고 나한테….”

“그래서 너는 어떻게 하려고 했어?”

“…….”

“조폭들이나 쓰는 수법을 은아에게 알려 줬지. 보험금을 걸어 놓고 죽이면 된다고.”

무심코 대답하려던 영재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어차피 증거 따위는 없을 터였다. 여준의 세 치 혀에 넘어가 괜한 꼬투리를 잡힐 필요는 없었다.

“…난 무슨 소린지 모르겠네.”

“영재야, 그때 은아가 사고를 당하지 않았으면 어떻게 됐을까?”

“난 무슨 소린지 모른다니까!”

“나는 죽고, 너는 살인자가 됐겠지. 오로지 은아가 부추긴 결과로. …그 게임 때문에 그런 일 많았다면서. 온갖 사건 사고는 다 일어났다던데.”

정확히는 살인 교사 죄였겠지만. 여준이 봉투를 살짝 영재 쪽으로 밀었다. 영재는 움찔, 몸을 굳히며 상체를 뒤로 물렸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은아는 멀쩡했을 거야. 조금의 영향도 흔들림도 없이 그저 평온하게…. 본인이 만든 참상을 감상하며 만족스럽게 웃었겠지.”

“…….”

“은아는 그런 사람이야. 아니,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그것도 나보단 네가 더 잘 알겠지만.”

영재가 미간을 깊이 찌푸린 채 입을 다물었다. 여준은 다시 한번 봉투 입구를 톡, 두드렸다.

“우리 지금은 이렇게 됐지만, 한때는 좋은 시간도 많이 보냈지. 그러니까….”

“…….”

“난 네가 이 봉투를 여는 대신…. 내가 내민 각서에 사인하고 그 조항을 지켰으면 해. 진심이야.”

라운지는 점점 더 한산해졌다. 이제 창가 쪽 테이블에 남은 사람은 영재와 여준뿐이었다. 서버들은 하나같이 멀찍이 선 채 때때로 그들의 동향을 살피고 있었다.

“이게 내가 너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양보고, 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최후통첩처럼 내뱉은 말을 끝으로 여준은 입을 다물었다. 등을 꼿꼿이 펴고 앉은 채 시선을 내리깐 얼굴은 전에 없이 평온해 보였다. 영재는 땀이 배어난 손바닥을 허벅지에 문질러 닦으며 여준과 봉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나 참, 보자 보자 하니까 대체….”

아무렇지 않은 척 핀잔을 주려 했지만 목소리가 떨렸다. 영재는 입가에 손을 댄 채 고개를 돌려 창밖을 보았다. 서울 한복판의 초라한 야경이 펼쳐져 있었다. 그는 어떻게 하면 여준을 비웃는 척, 아무렇지 않은 척 보일 수 있을까 고민하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당연히 영재 씨 애지. 기억 안 나? 우리 그날….’

은근히 내뱉어온 은아의 말에 한 점 의심도 품지 않았다. 따로 확인해 볼 생각조차 없었다. 은아가 그렇다면 확실할 테니까. 여준의 말마따나 아이 아빠가 누군지, 아이 엄마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으니까. 무엇보다도 그런 문제를 속일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혹시 여준의 말대로라면? 은아에겐 그 상황마저 게임이었고, 자신과 여준이 추한 질투와 싸움질로 망가지는 모습을 즐기고 싶어 벌인 일이라면? 가능성은 충분했다. 아니, 은아가 진심으로 자신을 사랑했다는 것보다는 차라리 설득력이 있었다.

여준과 달리 영재에게 은아는 그다지 특별한 인간상이 아니었다. 삐끼부터 시작해 호스트 명함을 달았을 때부터 은아 같은 여자는 수도 없이 많이 봤었다. 돈을 주고 타인이 망가지는 모습을 보며 즐기는 인간들은 누구나 기본적으로 비슷하다. 은아가 다른 점이라면 시답잖은 손님들에 비해 돈이 훨씬 많았다는 것뿐이다.

은아를 아는 사람들은 누구나 은아 욕을 한다. 하지만 물장사에 몸 담그고 남의 뒤통수나 치고 다니는 그것들이 은아보다 잘난 점은 또 뭐란 말인가? 영재에게 있어 은아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는 여자였고, 그런 만큼 발밑에 바짝 기며 비위를 맞출 가치가 있는 상대였다. 심지어 은아는 여준이 아닌 영재를 선택하지 않았던가. 그 성여준을 밀어내고 자신과 함께하겠노라 말해 준 유일한 사람이 아니었던가.

다시 시선을 돌렸다. 하얀 서류 봉투는 손때 하나 묻지 않은 듯 깨끗해 보였다. 저 안에 든 결과가 무엇인지 여준은 안다. 알고서도 이 자리에 앉아 ‘내기’를 제안하고 있다.

“…두 가지네.”

영재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네 애라서 당당하든가, 내 애라서 뻥카를 치고 있든가.”

여준은 살며시 웃은 것 같았다. 한층 초조해진 영재가 헛기침을 했다.

“어떤 내기야? 열어 봤는데 내 애가 아니면 내가 지는 거야? 그게 진짜 검사 결과인진 어떻게 알고?”

“보고 못 믿겠으면 따로 확인해 봐도 돼. 뭐든 네가 원하는 방법으로 협조할게.”

“…열어 봤는데, 내 애면?”

“네가 이기는 거지. 네 마음대로 해. 말마따나 한국 같은 친권 우선주의 국가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어.”

“…….”

“그런데 기억해 둬, 영재야. 내가 처음에 한 말.”

열지 말고 각서에 사인해. 두 번 다시 내 곁에 알짱대지 마. 하지만 이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

외줄을 타고 있는 듯한 침묵이 흘렀다. 영재는 눈을 가늘게 뜬 채 생각에 잠겼다. 이쯤 되면 정말로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게 아닐까. 정말로 검사 결과가 원하는 대로 나왔다거나….

아니야, 그럴 리가 없다. 은아는 몇 번이고 말했었다. 당신 아이라고. 성여준과는 혈액형부터 맞지 않아서 어차피 금방 들킬 거라고. 나중에 들켰을 때 여준에게 문책당할 일이 두렵다고 했다. 보나 마나 이혼을, 엄청난 위자료를 요구할 게 뻔하다면서.

‘영재 씨도 알잖아. 여준 씨 우리 집 돈 때문에 나랑 결혼한 거. 처음부터 나 그렇게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도 아니었어. 지금도 회사 핑계로 일주일에 두 번이나 저녁 같이 먹을까….’

‘우리 엄마아빠도 이젠 여준 씨 싫어해. 예전엔 앞에서는 영 아닌 척 콧방귀 껴도 돌아서면 저런 반듯한 사람 잡아서 다행이다 속닥거렸는데, 나한테 하는 얘기 듣고는 건방지다면서.’

은아가 흘리는 모든 말들, 여준과 비교해 자신이 낫다는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달콤하고 중독적이었다.

‘그러니까 잘하면…. 어쩌면, 언젠가 영재 씨 같은 사람이 진국인 걸 알아 주실지도 몰라.’

잘하면, 언젠가, 어쩌면. 불확실한 단어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 때문이었다.

“여준아.”

짓씹어 뱉은 이름에 여준이 시선을 맞춰왔다. 영재는 잠시 가만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머리카락, 희고 깨끗한 피부에 색이 엷고 투명한 눈동자는 언제나 반짝반짝 빛이 돌았다.

“넌 아직도 내가 존나 우스운가 보다.”

아마도 누구에게나 사랑받으며 살아갈 인간과, 그렇지 못할 인간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해져 있을 것이다.

“걔가 정말 니 애새끼라 치자. 은아가 너랑 나를 가지고 놀려고 거짓말한 거라 치자고. 그럼 니가 지금 왜 나랑 이러고 있을까?”

그렇지 않고서야 이토록,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정성스레 빚어진 인간이 있을 이유가 없었다.

“기회를 줘? 양보? 죽은 은아에 대한 예우? 우리 제발 이러지 말자. 사람은 그런 이유로 움직이지 않아. 너나 나나 이제는 그런 거 알 나이도 됐잖아.”

“영재야. 나는 네 훈계 듣고 싶지 않고, 들을 이유도 없어.”

“그래, 어련하시겠어.”

“대답만 해. 열 거야, 말 거야?”

여준의 말끝이 살짝 빨라졌다. 표정에는 처음으로 동요의 빛이 돌았다. 그렇지. 영재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아무리 그럴싸한 공갈을 치고 있다 한들 성여준은 성여준이다.

“너 내가 못 열 거라 생각하지?”

여준은 더 이상 아무 반응도 없었다. 영재는 아무려나 상관없이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아주 정석이네. 은아 얘기 꺼내서 흔들고, 유남복 들먹이며 협박하고, 아쉬울 거 없다는 듯이 패 뒤집고. 어디서 이런 타짜 스킬들을 다 배워 왔어? 많이 발전했다. 그 성여준이 아주 그냥 닳고 닳았어.”

“…….”

“바꿔 말하면 뭔지 알아? 네가 이런 짓을 해야 할 이유가 딱 하나밖에 없다는 거야.”

은아는 나를 선택했어. 영재가 속으로 되뇌었다. 성여준이 아닌 나를. 저 허울 좋은 위선자가 아니라 ‘진짜’인 나를.

“너 나를 단단히 낮잡아 봤어.”

영재가 봉투 입구를 움켜쥐었다. 여준의 어깨가 순간 움찔했다. 그러나 닫힌 봉투를 열고 서류를 꺼내는 일에 많은 시간은 필요치 않았다.

두 손으로 서류를 움켜쥔 영재의 눈이 천천히 글자를 읽어 내리기 시작했다. 여준은 그를 보며 바로 몇 시간 전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리하여 천천히 눈을 감았고, 도로 뜨며 손을 들어 서버를 불렀다.

“커피 한 잔 가져다주세요.”

흔들림 없이 침착한 목소리였다.

어느새 서류 마지막 장을 넘겨 들여다보던 영재의 눈이 점점 크게 뜨였다. 문서에 얼굴을 바짝 가져다 댄 채 멍하니 있던 그는 잠시 여준을 보았다가 다시 서류의 첫 장부터 읽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나 따뜻한 커피가 테이블에 오르고, 연기가 옅어진 후에도 영재는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 않았다. 그저 읽었던 글자를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여준은 재촉하지 않고 커피 한 모금을 머금었다. 씁쓸한 산미가 입 안에 감돌자 뒤늦게 현실감이 들었다.

“…너 이게 대체…. 뭐야?”

체감상 한 시간은 지난 것 같았다. 말을 쥐어 짜낸 영재의 두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여준은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네가 본 대로야.”

“이게 대체, 아니, 이건…. 도대체 이게.”

문서를 놓친 영재가 제 얼굴을 쓸어 올렸다. 여준은 시선을 내려 그의 손 아래서 흩어진 글자들을 눈에 담았다.

샘플 A(성여준, 父)가 샘플B(성지오, 子)의 생물학적 부친일 가능성은 0%이다

다음 장의 문서 내용도 거의 비슷했다.

샘플 C(익명, 父)가 샘플B(성지오, 子)의 생물학적 부친일 가능성은 0%이다

“검사법에 따라 숫자는 좀 다를 수 있대. 원한다면 제출했던 샘플 고스란히 가져다줄게.”

여준이 쓰게 웃었다. 영재는 여전히 다른 가능성을 떠올려 보려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도, 무슨 짓을 해도, ‘부친’ 샘플이 두 개인 이유를 설명할 수 없었다.

“…이, 익명의 샘플 C라는 건….”

“너야. 네 시계에 묻어 있던 피를 좀 썼어. 아 참, 깜빡할 뻔했네.”

주섬주섬 브리프케이스를 연 여준이 롤렉스 케이스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영재가 은아에게서 선물 받았던 것과 동일한 모델이었다.

“이거 변상할게. 진작 줬어야 했는데 한정판이라 매물 찾는 데 시간이 좀 걸렸어.”

“기다려 봐, 이게 뭐야? 설명을 좀 해 봐. 대체 무슨….”

“말 그대로지 뭐겠어. 너도 나도 아니라는 거지.”

여준이 흐릿하게 웃었다. 영재는 점점 알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처음엔 지오랑 내 머리카락만 넣어서 보내려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

“…….”

“이게 정말 은아의 게임이라면 후보가 너무 적은 거 아닌가….”

영재가 제 턱을 움켜쥐었다. 순간 시뻘겋게 달아올랐던 얼굴이 금방 또 창백해졌다.

“그, 그럼…. 그럼 이게 뭐야. 친부는 누구라는 거야?”

“나야 모르지.”

테이블을 내리치며 외치는 영재를 향해 여준이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때 은아가 만나던 수많은 남자 중 하나였겠지. 당연히 찾을 생각도 없고, 무슨 수를 써서든 그쪽에서도 평생 모르게 할 거야.”

“아냐, 이거, 이럴 리 없어. 잘못됐어. 이런 결과가 나올 리….”

“영재야. 은아 정말 대단하지 않니?”

여준이 커피잔을 쥔 채 미소 지었다. 걸리는 부분 없이 상쾌하게까지 보이는 미소였다. 영재만이 혼란스러운 얼굴로 눈을 굴리고 있었다.

“난 이쯤 되니 궁금해져. 그때 그 사고가 아니었다면 판이 대체 어느 정도로 커졌을까?”

“…아니야, 아냐. 아냐, 그럴 리가….”

“너는 은아가 너랑 나를 두고 저울질했다고 생각했겠지. 그러다가 결국 너를 선택한 거라고 믿었을 테고.”

“…….”

“내가 처음부터 말했잖아.”

은아에겐 너나 나나 똑같았다고. 그저 잠깐 심심함을, 잔혹한 호기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손에 쥐고 굴린 말이었을 뿐이라고.

“내가 왜 이러고 있을 필요가 있느냐고 물었지?”

“아니야….”

“가급적 나만 알고 싶었어. 그래, 말해 놓고 보니 네 말마따나 그렇게 배려 깊은 이유는 아니네.”

“아니야, 아니야. 은아가…. 은아가 나한테 이럴 수는….”

“…너를 걱정하는 마음도 아주 약간은 있었어. 이건 정말 진심이야.”

멍하니 중얼대던 영재가 순간 눈알을 희번덕 돌렸다.

“넌 전혀 상관없고?”

비꼬는 말에도 여준은 개의치 않았다. 고개를 살짝 기울인 채 보일 듯 말 듯 끄덕일 뿐이었다.

“나는 괜찮아. 생각보다 아무렇지 않았어. 오히려…. 최악의 상황은 아니지.”

“뭐라고…?”

“가람 형이 그러더라고. 차라리 누구 앤지 모르는 게 낫지 않느냐고. 가만히 생각해 보니 정말 그렇더라.”

“…….”

“은아가 날 어떤 식으로 생각했는지도 짐작하고 있었고, 실제로 그런 취급을 받아왔고…. 무엇보다 나한테 정말 중요한 사람은 따로 있으니까.”

“…….”

“그런데 너한테는 은아가 바로 그 중요한 사람이었잖아. 같은 사안이라도 너와 내가 받아들일 충격이나 무게는 전혀 다르겠지. 그게 당연하지.”

띄엄띄엄 말을 이어 가던 여준이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혹시나 안 열어 보면 어쩌나 했어, 영재야.”

이어 부드러운 입가에 개운한 웃음이 스몄다.

“너에게 주는 기회이자 양보, 마지막 타협이라는 내 말을 믿고 열지 않으면…. 네 안에도 나에 대한 좋은 기억이나 믿음이 아주 조금쯤은 남아 있다는 이야기일 테니까. 나도 그만큼의 미련, 이를테면 우리가 이렇게 되기 전에…. 내가 뭔가 더 해 볼 수 있는 일은 없었을까, 그런 후회라도 안고 살았겠지.”

“잠깐만, 여준아….”

“하지만 이제는 됐어.”

“…….”

“시원해졌어.”

여준이 테이블에 흩어져 있던 서류를 갈무리해 봉투에 넣었다. 느리지만 단호한 동작이었다. 브리프케이스에 봉투를 넣고 일어선 그는 인사조차 없이 돌아섰다. 영재는 한참 후에야 어, 하며 얼른 여준의 뒤로 따라붙었다.

“잠깐, 잠깐만. 여준아. 얘기 좀 더 하고 가. 내…, 내기는 어떻게 되는 건데? 이런 식이면 내기도 무효…. 기다려 봐! 사인, 사인할게. 네가 하라는 대로 할게. 잠깐, 아, 씨발. 잠깐만!”

“건드리지 마.”

여준이 손을 들어 올렸다. 심상찮은 분위기를 느낀 직원 몇몇의 시선이 느껴졌다. 하지만 영재의 머릿속엔 어떻게든 여준에게서 다른 대답을 끌어내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의 계획은 완벽했다. 이미 아이에게 정이 들어 버린 여준의 약점을 잡아 마지막까지 쥐고 흔들다 알짜배기만 빼먹고 내버릴 셈이었다. 당연히 유남복의 재산도 언젠가는 갈취할 수 있을 터였다. 물론 아이가 제 아이라는 전제하에.

여준은 굳어 버린 영재를 두고 홀로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영재는 닫힌 문을 멍하니 바라보다 우선 숨을 골랐다. 다행히도 그는 도박에 익숙했고, 갑자기 큰 판돈을 잃는 상황에서도 금방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아직은 괜찮아. 영재가 중얼거렸다. 아직까지는 괜찮아, 타개책이 있을 거야. 이를테면…. 유남복은 은아가 혼외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 자체를 숨기고 싶을 거야. 이걸로 어느 정도 빼먹고, 그다음엔 어딘가 숨어서…. 땅값이 최고로 치솟을 때를 기다리면 돼.

“…아니, 아니야. 이럴 때가 아니지.”

이렇게 되면 사채 빚을 내서라도 한 평이라도 더 사야 한다. 지금도 긁을 수 있는 돈이란 돈은 모조리 모아다 쓸어 넣었지만 부족했다. 영재는 겨울을 앞둔 산짐승처럼 부지런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살아남으려면 뭐라도 해야 했다. 이대로 침몰할 수는 없었다.

***

차를 어디쯤에 두었는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여준은 어지러운 머리를 짚은 채 아무 데나 대고 리모컨 경적 버튼을 눌렀다. 어디선가 삐- 소리가 들려왔지만 방향을 잡을 수가 없었다. 비틀대며 간신히 주차장 기둥을 잡고 섰다. 입을 열었다간 토할 것 같았다. 명치를 덮어 누른 채 치미는 욕지기를 참았다. 꼴딱꼴딱 신 침이 넘어왔다. 눈물이 고인 것도 순식간의 일이었다.

“…윽.”

사람을 칼로 찌르면 이런 기분일까? 절망에 새까맣게 가라앉던 영재의 눈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이런 게 대체 뭐가 재밌다는 거지? 여준은 마구 떨리는 손을 몇 번이나 힘주어 쥐며 몸을 바로 세우기 위해 애썼다. 영재가 쫓아올지도 모른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기 전에 자리를 떠나야 했다.

다시 경적 버튼을 눌렀다. 삐- 찢어질 듯 요란스러운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그래도 어디로 가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삐, 삐, 삐- 결국 방향을 잡지 못한 여준이 고개를 들고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귀먹었어요?”

목소리는 등 뒤에서 흘러들어왔다.

“사람이 부르는 소리도 못 듣고, 클랙슨도 못 듣고….”

익숙한 나무 향이 풍겼다. 바짝 다가와 여준의 허리를 감싸 쥔 사현이 리모컨을 쥔 그의 손을 덮어 눌렀다. 여준은 아가미가 막 트인 물고기처럼 급한 숨을 쉬었다.

“진정해요.”

“…….”

“운전해 주러 왔어요. 제정신 아니겠지 싶어서.”

여준의 손에서 리모컨을 빼간 사현이 조심스레 그의 어깨를 토닥였다. 여준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고개를 떨어뜨렸다.

“진짜 넋이 나갔네. 왜 이렇게 겁먹었어요? 내가 잡아먹을까 봐?”

“내가 언제….”

“안 잡아먹어요. 봐요. 오늘 얼마나 착한 얼굴인데.”

사현이 씩 웃었다. 10대의 어느 날처럼 순하고 시원스러운 미소였다. 여준은 그 얼굴을 차마 마주 보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현은 두 손으로 여준의 뺨을 감쌌다.

“얼굴 좀 봐요, 선배.”

빨리 보여 줘요. 조르는 목소리는 천진했다. 여준은 알고 있었다. 사현이 이런 말투를 쓰는 때는 오로지 위로하고자 할 때뿐이다.

“괜찮아요.”

봐, 이번에도 그렇잖아. 여준은 눈을 마주치거나 어설픈 말을 찾는 대신 사현의 등을 감싸 안았다. 맞닿은 상체에서 선명한 심장 박동이 느껴지자 마음이 벅찼다.

“괜찮아요, 선배.”

“…….”

“선배는 잘못한 거 없어요.”

뭘 알고 하는 소리야? 웃으며 묻고 싶었지만 눈물이 먼저 터졌기에 그러지 못했다. 그러자 사현은 여준의 머리를 감싸 제 품에 감춘 채 쉼 없이 쓰다듬었다. 악몽에 소스라쳐 깨어난 아이를 달래 재우듯이.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