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5화 (15/21)

#14. 우리는 심해로

“우와, 너 꼴이 그게 뭐야?”

문을 열자마자 가람이 소리부터 질렀다. 여준은 얼른 검지를 입에 댄 채 어깨를 움츠렸다. 쉿, 쉿.

“괜찮아. 애들 다 자. 들어와.”

“죄송해요, 형.”

시간은 어느새 새벽 세 시를 지나고 있었다. 다행히 가람은 여태 깨어 있던 듯 쌩쌩해 보였다. 여준은 피투성이가 된 셔츠 단추를 풀어내며 가람을 향해 물었다.

“형, 혹시 셔츠랑 넥타이 좀 빌려주실 수 있어요? 이따 출근해야 해서.”

“빌려줄 수야 있는데, 너 이러고서 회사 가겠냐?”

“괜찮아요. 컨디션은 나쁘지 않아요.”

여준이 피 묻은 셔츠와 넥타이를 아무렇게나 구겨버리자 기겁하며 달려온 가람이 그것을 빼앗아 들었다.

“야, 너는 이 비싼 셔츠를….”

“어차피 다 버려서 못 입어요.”

“못 입긴 왜 못 입어? 피 빼서 드라이하면 돼. 아껴 살아라, 명이 얼마나 길 줄 알고.”

티셔츠 한 장을 여준에게 던진 가람이 욕실 문을 열었다. 그리고는 곧바로 여준의 팔을 끌어다 세면대 앞에 세웠다.

“일단 세수부터 해. 얼굴 꼴이 말이 아니네.”

거울을 보니 말 그대로였다. 닦아냈다고는 하지만 아직도 핏자국이 남은데다 눈자위가 남김없이 벌겋게 물들어 있었다. 정말 귀신 꼴이네. 사현의 말을 떠올리자 바람 빠진 풍선처럼 맥없는 웃음이 샜다.

“대체 어디 갔다 온 거야? 무슨 일이야?”

얼굴을 씻고 옷을 갈아입자마자 가람이 질문세례를 퍼부었다. 여준은 하나하나 대답하는 대신 굳게 닫힌 가린의 방문을 슬쩍 살폈다.

“…형, 친자검사라는 거 어떻게 하는 건지 아세요?”

답답함에 찌푸려져 있던 가람의 얼굴에 짧은 당혹감이 어렸다. 여준이 그랬듯 자연스레 가린의 방문을 한 번 돌아본 그가 목소리를 잔뜩 낮췄다.

“글쎄, 아마 머리카락 잘라다가 어디 연구소 같은 데 보내면 되는 거 아닌가…? 드라마에선 그렇게 하던데.”

“음….”

“검사해 보게?”

가람이 조심스레 물었다. 검사부터 해 봐야 한다며 강경하게 말하던 때와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여준은 소파 등받이에 옆머리를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려고요. 더 늦기 전에.”

“…괜찮겠어?”

“저요?”

고개를 주억거리던 가람이 곧 하아, 짙은 한숨을 뱉어 놓았다.

“아, 골 아파.”

찌푸린 미간을 문지르는 그를 보고 있자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여준은 잔뜩 가라앉은 얼굴로 가람의 어깨를 문질렀다.

“죄송해요. 골 아프게 해서.”

“아니, 내가…. 나야말로 미안하다. 너한테 그렇게 쉽게 말하면 안 되는 문제였는데.”

착한 사람은 미안할 일도 참 많다. 여준은 뺨을 긁적이며 슬쩍 웃었다.

“근데 여준아. 그….”

“……?”

“…아니다. 아냐, 됐어.”

가람이 말을 하다 말고 손을 내저었다. 여준은 대답을 보채는 대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색하게 내려앉은 침묵이 의미하는 바는 명료했다. 먼저 손을 든 것은 당연히 가람이었다.

“…만약에 지오가 네 애가 아니면 말이야. 아니, 무슨 일이 생기든 지오는 네 애지만 그냥 과학적인 의미로….”

“네, 알아요.”

“그러면…. 그런 경우엔 영재 애인 게 확실한 거야?”

질문의 의미가 선뜻 와 닿지 않았다. 여준이 말이 없자 가람은 아예 소리 내어 끙끙대기 시작했다.

“내 말은 그러니까, 은아 씨가 뭘 어쨌다는 게 아니고…. 오해하지 말고 들어봐.”

“오해 안 해요.”

“차라리 친부를 모르는 게 낫지 않나 싶어서 그래. 만약 진짜로 영재 애면, 아, 세상에 그 개새끼…. 진짜 또라이 아니야? 어떻게 그런 짓을 하지?”

혼란스러움에 목소리를 높이던 가람이 제 머리를 탁탁 내리쳤다. 여준은 가만히 시선을 내려 발끝을 보았다. 아직도 사현이 정성스레 매만지던 감각이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 새끼는 그런 짓을 저질러 놓고 너한테 그렇게 당당하게 군 거야? 근데 너는 그 꼴을 당하면서도 가만히 있었어? 맞기까지 했다며!”

“형, 목소리 커요.”

여준이 손을 들어 제 입을 막는 시늉을 했다. 가람은 그래도 분을 삭이지 못하고 어휴, 어휴, 하며 가슴을 툭툭 내리쳤다.

“이제 와 생각해 봤자 소용없잖아요. 앞으로의 일이 중요하지.”

“아니야, 여준아. 형이 너보다 꼴랑 1년 더 살았지만 말이야. 이런 거 묵혀두고 그냥 넘어가면 안 돼. 시간이 지나면 잊힌다, 나아진다 그거 다 거짓말이야. 당했으면 복수해야 돼. 그래야 사람이 제정신으로 살아.”

“괜찮아요, 정말로. 왜냐면….”

절로 떠오르는 것은 유남복 부처의 얼굴이었다. 모든 것을 감추고 있는 눈, 그럼에도 서슴없이 독설을 내뱉는 입. 할 수만 있다면 그들 전부를 물에 빠뜨려 죽이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지오가 그 자리에 없었다면.

“…저도 그냥 넘어갈 생각은 없어요.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게 아니에요.”

“그럼?”

“단지 먼저 해결해야 할…. 더 중요한 일이 있어서 그래요. 지금 당장 어쩔 수 없는 일 때문에 화만 내고 있을 시간이 없어요.”

그 말에는 가람도 조금은 납득한 것 같았다. 간신히 흥분을 가라앉힌 그가 팔짱을 끼고 여준을 바라보았다. 어디 말해 보라는 듯이.

“은아에 대해서 좀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은아 씨? 왜? 영재 때문에?”

“그것도 있고 이래저래…. 제가 너무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시험이 어느새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었다. 계획을 제대로 짜서 빡빡하게 움직여야 할 시기였다. 여준은 세운 무릎에 턱을 괴고 한참 동안 말을 골랐다. 그 모습을 보고 있던 가람이 먼저 몸을 기울이며 물었다.

“흥신소 같은 거 말하는 거야?”

“…음, 그게…. 네.”

어렵게 대답한 여준이 제 이마를 꾹꾹 눌렀다. 막상 입 밖으로 내고 나니 상상만 했을 때보다 더 현실감이 없었다. 흥신소라니, 살면서 평생 그런 곳을 찾을 일은 없을 거라 생각했었다.

“내가 좀 알아봐 줄까? 우리 직원이 얼마 전에 한 번 써 봤다고 했었어.”

“그래 주시면 고마운데…. 흥신소라는 게 정확히 뭐 하는 데예요? 어디까지 조사할 수 있어요?”

“돈만 맞으면 웬만한 건 다 캐다 줄 걸…? 일반인들은 보통 배우자 외도 여부 조사를 많이 맡길 거야. 우리 직원도 그래서 의뢰했던 거고.”

“아….”

“덕분에 남편한테 위자료 왕창 뜯어다가 유럽 일주 갔었어. 아예 회사 그만두고 간다는 걸 장기휴가 주겠다고, 그만두지만 말라고 내가 사정사정을….”

신입 뽑아서 그만큼 일 익히려면 얼마나 오래 걸리는데, 쉽게 놔줄 수가 없지. 사장의 고통을 주절주절 떠들던 가람이 아차, 하며 얼른 원래 화제로 돌아왔다.

“…아무튼, 그랬던 거 보면 실력이 괜찮은 흥신소 아니었을까? 명함 받아다 줄게.”

“고맙습니다.”

“근데 뭐가 궁금해서 그래? 그거야말로 이제 와서 뭘 어쩌려고.”

죽고 없는 사람을. 뒷말은 듣지 않아도 귀에 선했다. 여준은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그 말을 되뇌었다. 그러게, 이제 와서 어쩌려고. 이미 그렇게 끔찍하게 죽은 사람을.

은아가 외도했을지도 모른다고 들었을 때 놀라지 않았다. 마음 한구석에서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여겼으므로. 은아는 항상 외로움에 허덕이고 있었고, 밥 먹듯 변덕을 부렸다. 매일같이 널뛰는 기분, 상승과 추락을 반복하는 정신을 담고 있느라 몸이 축나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외면했었다. 견디기에 힘들고 버거웠으므로. 그저 살살 달래고 기분을 맞춰주며 하루가 조용히 지나가기를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그래서는 안 되었다. 차라리 싸워야 했다. 부서지고 깨지더라도 물러서지 말아야 했다. 그랬다면 최소한 사현의 모습은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생이란, 어쩌면 잘못된 선택을 켜켜이 쌓아 놓은 돌담길인지도 모른다. 여준은 눈을 감은 채 사현의 향수 냄새를 떠올렸다.

***

시험은 무사히 끝났다. 몇 번 전화를 해 봤지만 사현은 받지 않았다. 연수원으로 돌아오니 정훈을 비롯한 시험 동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어, 여준아. 너 갭 옵션 문제 어떻게 했어?”

“미안, 나 바로 가 봐야 돼.”

“하나만, 하나만 맞춰 보고 가. 지금 그게 꼬인 문젠가 안 꼬인 문젠가로 계속….”

“델타값이 있으니까 그냥 편미분 하면 되잖아. 꼬인 거 없었는데? 나 먼저 간다.”

붙드는 손들을 부드럽게 떨쳐내고 가방을 챙겨 일어섰다. 정훈은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시면서도 끝까지 쫓아 나오지는 않았다. 어느새 약속한 시간이 다가와 있었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자마자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 일 끝나셨어요? 사무실로 오실래요, 저희 쪽에서 좀 움직일까요?

말투는 서글서글하지만 목소리 자체는 써늘하기 그지없었다. 여준은 손목시계를 확인하고 우선 차를 출발시켰다.

“사무실 근처로 가겠습니다. 제 차에서 뵙죠.”

- 예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게 시간이 좀 오래 지나서요. 착수금은 진작 적자가 났는데 우리 사장님 믿을 만하신 분이니까….”

서류봉투를 만지작대며 내뱉는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능글능글했다. 여준은 긴장한 티를 내지 않으려 손끝을 꽉 말아 쥐며 고개만 끄덕였다. 남자는 흠, 헛기침을 하더니 봉투에서 사진을 한 장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화질이 좀 안 좋아요. 어두운 데서 핸드폰으로 찍은 거라서요. 이게 그러니까…. 두 분 결혼하시기 몇 달 전에 사모님이 호빠 룸에서 놀다가 찍은 사진이네요.”

“…네?”

사진을 받아들기도 전에 손이 멈췄다. 남자는 여준의 굳은 얼굴을 보고도 당황한 기색 없이 설명을 덧붙였다.

“호스트바요. 모르셨어요? 강남에서 물장사하는 놈들치고 사모님 얼굴 모르는 애가 없던데요.”

“은아가…. 호스트바에 다녔다고요?”

그러자 가람의 말이 떠올랐다. 영재가 호스트 일을 했던 것 같아. 몇 번 동창들을 자기 손님으로 부르려고 했대…. 등골에 싸늘한 소름이 돋았다.

“바람 상대가 호스트잖아요.”

“그건….”

당연히 영재 쪽에서 먼저 은아에게 접근했다고만 생각했다. 자신을 엿먹이기 위해 한 짓일 거라 어렴풋이 짐작도 했다. 혼란스러운 시야로 남자가 다시 한번 사진을 내밀었다.

“여기요, 이놈이잖아요.”

남자의 손가락 끝이 사진을 쿡쿡 찔렀다. 어둡지만 넓은 방이었다. 커다란 테이블에는 샴페인 병이 빼곡히 올라 있고, 테이블을 둥글게 둘러싼 소파의 가장 상석에 은아가 앉아 있었다. 옷차림이며 화장이 한껏 요란한 모양이었다. 그런 그녀의 옆자리에 영재가 있었다. 두 손으로 샴페인 병을 든 채 비굴하게 웃는 얼굴이었다.

“이놈 아녜요? 이름 박영재고, 사장님이랑 고등학교 동창이고 이 빠에서 일하던 놈.”

“…맞긴…. 한데.”

“거의 반년을 사모님 픽스였대요. 와꾸가 후달려서 탑은 못 되고 헬퍼 주로 하던 놈인데, 사모님한테 거의 개처럼 굴었다는 것 같아요. 엄동설한에 팬티만 입고 강남대로에서 인증샷 찍어오라는 건 기본이고, 호스트 애들끼리 서로 좆 빨아 주라고 시키고…. 하여튼 호빠 다니는 사모님들이 다 그렇지만 댁네 사모님은 특히 유난하셨던가 봐. 한 번 뜨면 가게 전체에 비상 걸리는 수준이었대요.”

“…….”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듣고 있는 건 아닐까? 여준은 눈을 찡그린 채 사진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자세히 보니 은아와 영재 주변의 남자들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이었다. 개중에는 제 성기를 붙잡고 열심히 흔들고 있는 인물도 있었다.

“이건 진짜 약한 거예요. 내가 사장님 충격 받으실까 봐 부드러운 걸로만 골라온 거. 출처는 묻지 마세요. 다 룸에 있던 애들이 몰래몰래 찍는 거니까.”

“…몰래요? 이런 걸 왜…?”

“왜겠어요? 이런 데서 노는 애들 중에 정재계나 연예계 애들 많으니까, 그것들 혹시라도 빵 떴을 때 협박거리로 써먹으려고 쟁여 놓는 거지.”

“…….”

“사모님이 이미 고인이셔서 그나마 쉽게 구한 거예요. 그래도 싸지는 않았지만.”

여준이 느릿하게 숨을 골랐다. 떨리는 손을 내밀자 남자는 순순히 다른 사진들도 넘겨주었다. 대체로 첫 번째처럼 어두운 룸에서 찍힌 사진이었다. 은아는 거의 모든 사진에서 유일하게 옷을 똑바로 챙겨 입은 인물이었다. 활짝 웃는 얼굴은 여준이 기억하는 모습과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녀의 테이블에 차려지는 요리가 빠짐없이 끔찍했다.

몸을 섞고 있는 남녀, 항문에 샴페인 병을 꽂은 채 춤을 추는 남자는 차라리 양반이었다. 담배 수십 개를 한꺼번에 입에 문 남자의 허벅지는 담뱃재에 울긋불긋 물들어 있었다. 고문에 가까운 잔혹한 쇼를 감상하는 은아의 얼굴은 한 점 회한도 없이 해맑기만 했다. 담배꽁초가 가득 담긴 맥주 피처를 들이마시는 남자의 사진이 나오자 여준은 더 견디지 못하고 눈을 돌렸다. 배 속이 울렁거려 금방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뭐 보시면 알겠지만 사모님이 그런 분이라, 그거 끝까지 맞춰 줄 인물이 없었던가 봐. 그나마 오래 버틴 게 박영재인 거지. 쉬쉬해서 그렇지 사람도 몇 명 죽어 나가고 그랬대요. 그때마다 유족한테 몇천씩 주고 입막음하고.”

“몇천….”

“그거면 돼요. 호빠 일하는 놈들 집안이 어디 멀쩡한 집안이겠어? 양아치 아들놈 치워 주고 돈까지 쥐여 주는데 마다하는 부모 없어요.”

“…….”

“그러다 어느 날인가, 결혼한다 하더니 발길을 딱 끊었대요. 덕분에 진상 하나 치우긴 했는데 그만큼 매출도 급락하고, 안 그래도 불경긴데 죽겠다 싶던 차에 죽었다는 소식 들리길래 이 여자가 드디어 칼침 맞았나 했다네. 그 여자한테 당하고 반병신 돼서 원한 품은 호스트가 한둘이 아니라더라고.”

점점 더 현실성이 없었다. 여준은 어지러운 머리를 감싸 쥔 채 흩어진 사진을 내려다보았다. 상상조차 해 보지 못한 결과였다. 기껏해야 영재와 언제부터 만났는지, 어떤 경위로 살인 공모를 했는지 따위나 알게 될 거라 생각했었다.

은아는 마음이 약하다. 외로움을 잘 타고 변덕이 심하다. 그런 은아에게 영재가 접근하고, 마음의 틈을 파고들어 유혹하고, 그러다 아이를 가지고, 그래서 무서운 계획을 품고…. 예상했던 모든 시나리오를 비웃으며 전복시키는 현실이 갑작스럽고 뜨거웠다.

은아야. 여준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너는 대체 뭐였을까. 내가 알던 너는.

“이런 거 조사해 달라고 한 거 아니셨어요?”

여준이 한참 말이 없자 남자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제야 분위기를 살피는 기색이었다. 여준은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고개를 들었다.

“아…. 아니에요. 맞습니다. 그냥 좀….”

“알아요, 충격이 크시죠. 근데 남자고 여자고 이런 데서 노는 애들 다 이래요. 특히 어릴 때부터 찌들면 나이 먹을수록 심해지고요. 사모님이 손 끊은 것도 아마 이 박영재라는 놈이 전담으로 다 받아 줘서 가능했을 거예요.”

은아의 변덕, 짜증, 공격적인 욕망이 고스란히 담긴 사진은 그 자체로 시커멓고 불온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잉크 하나하나에 독이 묻어 있는 것 같았다. 여준은 더러운 것을 만지듯 조심스러운 손길로 사진을 내려놓았다.

‘그게 다 네 건 줄 알아? 아무것도 네 거 아니야!’

잔뜩 일그러져 있던 영재의 얼굴이 떠올랐다. 은아가 정말 이런 사람이라면, 그 공격성을 그간 다 받아준 게 영재였다면 억울할 만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뒤늦게 조금 우스웠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구나. 이렇게나 백지상태로, 참 오랜 시간 동안 잘도 다 아는 척, 혼자 잘난 척 살아왔구나….

“어떻게, 더 설명해도 괜찮으시겠어요?”

“…네? 아, 네.”

“사진은 에피타이저도 못 돼요. 아주 어마어마한 분이랑 사셨더라고.”

“…….”

“다음은 룸녀 애들한테서 나온 건데요. 참, 전혀 문외한이신 것 같아서 부연설명 좀 드리자면 호빠나 룸녀들이 서로 고객 돼 주는 경우가 많아요. 호빠새끼들 툭하면 공사 치는 것도 다 룸녀 상대로 하는 거고요. 룸녀들이 장사하면서 쌓인 스트레스를 호빠 가서 풀고 그러거든.”

고개를 끄덕이며 듣고는 있지만 사실 남자가 하는 말의 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여준은 어지러운 얼굴로 마른침을 삼켰다.

“사모님이 가끔 이 자리에 조인을 했대요. 그니까 룸녀들이 호빠 와서 놀고 있을 때, 그 룸을 자기가 먹은 거지. 그럼 룸녀들은 좋아했대요. 일단 그 방 계산은 사모님이 하는 거고, 자기들한테 딱히 나쁘게 대하는 건 없었으니까. 단지…. 이 사모님이 한 번씩 진짜 괴상한 놀이를 하자고 했는데.”

남자가 말을 끊고 입을 우물거렸다. 온갖 끔찍한 사진을 아무렇지 않게 건네주던 그조차 머뭇거릴 만한 썰이 무엇인지 여준은 전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이게 그러니까, 게임 이름이 ‘아빠 맞히기’인데요.”

“…….”

“자원한 룸녀랑 그 자리에 있던 호빠가 한 번씩 그 짓을 해서…. 룸녀가 임신을 하면 양수검사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때 참가한 호빠 중에 친부한테 상금으로 5천만 원을 주겠다고 했대요.”

여준이 저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그래도 치밀어 오르는 욕지기를 삼키기엔 역부족이었다. 궁여지책으로 창문을 열자 차가운 바람이 흘러들어 뺨을 감쌌다.

“당연히 룸녀한테도 5천 주고, 검사랑 낙태 수술 다 해 준다고 하고…. 나머지 애들끼리는 누가 임신시켰을지 내기하고요. 미친 소리 같지만 이 게임이 엄청 인기가 있었다나 봐. 호빠들이야 당연히 쌍수 들고 참가하고, 룸녀들도 애 한 번 떼고 5천이라 하면 일부러 찾아와서 지원하는 애들 꽤 있었대요.”

시작부터 끝까지 역겨운 이야기였다. 무지로 인한 회한은 곧 공포로 바뀌었다. 반년을 연인으로 만났고, 2년을 부부로 함께 살았다. 남들만큼 살가운 관계는 아니었지만 남들보다 덜 가깝다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근데 이게, 다른 것도 아니고 애를 만드는 건데 부작용이 없었겠어요? 낙태 후유증은 예사고, 게임 참가한 호빠가 집에 가는 룸녀 끌고 가서 강간한 적도 있고요. 왜냐면 지 애를 배어야 5천을 받으니까.”

“…….”

“여자애가 임신을 하긴 했는데 게임 참가했던 호빠 중 아무랑도 안 맞는 애여서 그 새끼들한테 린치당한 적도 있고…. 뭐 그러다 한 번은 룸에서 싸움 나서 호빠 하나가 죽었어요. 그 내막도 웃겨. 여자애가 지는 낙태 안 할 거고 낳고 싶다 그랬는데 그 애새끼 친부로 판명 난 호빠가 걔를 걷어차서 넘어뜨렸대. 그랬더니 여자애가 눈이 돌아서 병 깨가지고 그 새끼를 찌른 거예요.”

“…….”

“찌른 자리가 안 좋아서 구급차 부르고 어쩔 틈도 없이 비명횡사를 해 버렸어. 근데 걔는 다른 놈들이랑 달리 집안 멀쩡한 놈이었어요. 가끔 있어, 호기심에 해 봤다가 적성에 맞아서 눌러앉는 놈들. 와꾸 좀 되겠다, 여자랑 자면서 돈도 버니까 꿀이다 싶은 거지…. 아무튼 이전에 하던 것처럼 돈 몇천 털어서 무마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게 된 거예요.”

“…….”

“그 건을 박영재가 수습했대. 자세한 얘긴 못 들었는데 아무튼 사모님한테 불똥 안 튀게, 아주 깔끔하게 마무리를 했다나 봐. 그때부터 사모님이 고이고이 아끼면서 옆구리에 끼고 다녔대요. 당연히 가게에서도 넘버원 찍고 돈도 꽤 벌었다는데, 문제는 버는 만큼 탕진을 해대서 사모님이 호빠 나들이 끊자마자 금방 또 빚쟁이가 됐다는 거지.”

영재는 만날 때마다 모습이 달랐다. 어느 때엔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명품으로 휘감고 있었고, 또 어느 때엔 며칠 바깥에서 지낸 사람처럼 추레한 차림이었다.

“뭐 그래 가지고…. 사장님?”

실컷 주절대던 남자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입을 틀어막은 채 몸을 점점 웅크리던 여준은 찬물을 맞은 사람처럼 깜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괜찮으셔? 어떻게, 여기까지만 할까요?”

남자는 아마 이런 사태에도 익숙한 듯 보였다. 금방 서류를 접고 떠날 채비를 하는 그를 여준이 다급히 막아섰다.

“…괜찮습니다.”

사실은 괜찮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토할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제 와 도로 닫을 수도 없는 상자였다.

“계속해 주세요.”

입을 꾹 다무는 여준의 뺨으로 파르스름한 핏줄이 돋아났다. 남자는 흠, 하며 괜한 뜸을 들이다 못 이긴 척 말을 이었다.

“…아무튼 사모님 댁이 급하게 혼처 물색해서 시집부터 보낸 것도 다 그래서예요. 딸내미가 이런 미친 짓을 허구한 날 벌이고 다니는 통에 갖고 있던 건물 두어 개는 날렸다네. 내버려 뒀다간 전 재산 말아먹겠다 싶어서 이것저것 안 따지고 결혼부터 시킨 거라고.”

이것저것 안 따지고…. 굳어 있던 여준이 픽 웃었다. 남자는 그 모습을 보고서야 아, 하며 얼른 말을 정정했다.

“아니, 아니. 사장님이 이것저것 안 따진 신랑감이었다는 뜻이 아니고요. 무슨 재벌에 의원 아들 노리던 이 양반들치고는 그랬다고요. 이 집안이 생각보다 재산이 어마어마해요. 사장님이 알고 계신 것보다도 대단할 걸?”

“…….”

“근데 웃긴 게 이런 데서 논다고 소문 난 여자들은 절대 같은 수준 집안으로 시집 못 가요. 아들 가진 집에서는 차라리 집안이 좀 딸리더라도 조신하고 물맛 모르는 여자를 원하거든. 지 아들이야 걸레든가 말든가 며느리는 안 된다고.”

그렇구나. 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상대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지 않는 사람들의 사고방식은 다 비슷한가 보다 하며.

은아와 어째서 결혼했을까. 곰곰이 되짚어 보았지만 이제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괜찮은 사람 있는데 만나볼래? 입사한 이래 수도 없이 들은 질문이었다. 동기 중에도 접근해오는 사람이 꽤 있었지만 사내연애는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취직도 했으니 이제 결혼해서 자리 잡으면 되겠다. 부모님을 비롯한 집안 어른들이 얼굴을 마주칠 때마다 말했다. 그렇구나, 이제는 결혼을 해야 하는구나. 여준은 그때마다 그래야죠, 하며 웃었다.

사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았다. 사현이 떠오르는 순간은 우등생의 모습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둘러싸인 그런 때가 아니었다. 주위의 사람이 하나둘 사라지고 깊은 새벽이 되었을 때, 오롯이 혼자 남아 하루를 돌이켜볼 때, 불현듯 사현이 마음을 치고 들어올 때가 있었다. 악몽으로 끝나버린 여름이 폭력의 흔적을 뒤집어쓴 채 악귀처럼 눈을 치뜬 그 운동장으로 돌아갈 때가.

그러면 두려워졌다. 지금의 평안이 모조리 거짓인 듯 여겨졌다. 애써 잊어버리고 잠들었다 눈을 뜨면 다시 평화로운 현실이었다. 고등학교에 갔으니 대학에 가고, 대학에 갔으니 취직을 하고, 취직을 했으니 결혼을 해야 하는.

은아를 처음 만난 곳은 그녀를 소개해 준 친구가 물색한 이탈리안 레스토랑이었다. 그녀는 약속 시간보다 40분 늦게 나왔다. 그럼에도 미안한 기색이라곤 없이 차분하고 평온한 얼굴이었다. 더없이 당당한 태도에 어이없는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 그러자 은아는 미소를 띠며 말했다.

‘맘에 드네요. 웃는 게 예뻐서.’

마치 신붓감 후보 중 하나를 집어낸 일국의 왕자 같았다. 그 독특하고 오만한 태도가 흥미로웠다. 그뿐이었다.

“…….”

조금 특이한 사람일 뿐이라고 여겼다. 늦어서 민망한 마음에 이런 식으로 나오는구나 하고. 물론 그 태도가 한 점 어긋남도 없는 본연의 모습 그대로임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해야 할 결혼이었으니까.

어차피 누구든, 열여덟의 여름에 찾아왔던 그 감정은 아닐 테니까.

“사장님?”

남자가 대시보드를 톡톡 두드렸다.

“계속할까요?”

“…아, 네.”

“힘드시면 말씀을 해 주세요. 전에 의뢰인 한 분이 갑자기 혈압이 올라 쓰러진 적이 있어서, 그다음부턴 제가 이럴 때마다 겁이 나거든요.”

“…….”

“참, 이건 그냥 보너스인데 장인어른 되시는 분이 최근에 땅을 좀 산 거 알고 계세요?”

남자가 서류를 팔락팔락 넘기더니 한 장을 빼서 건넸다. 문서를 가만히 내려다보던 여준의 눈이 둥그러니 크게 뜨였다. 문서 상단에는 이라는 제목이 위풍당당하게 새겨져 있었다.

“최근에 은근히 퍼졌어요. 이 F시라는 데에 대규모 아웃렛이 들어올 거고, 그게 뭐 한강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고….”

“…아.”

“들어본 적 있으시구나?”

팀장이 신이 나서 떠들던 장면이 눈앞을 스쳤다. 나 같은 사람이라고 일확천금 못 노리란 법 있어? 여준 씨는 정말 생각 없어? 이미 그 땅이 될 물건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그에게 여준이 해 줄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예, 들어보긴 했는데…. 장인어른도 손을 대셨을 줄은.”

“이거 배경에 대양건설이 있어요. 게다가 그 양반, 그러니까 사장님 장인어른이 뛰어들었을 정도면 확실하다는 평이 대세거든.”

“…….”

“유남복 씨 유명하잖아요. 투자계 마이더스의 손으로. 뭐 물론 여기저기 돈 먹여서 알짜배기를 알아내니까 가능했던 거지만…. 아무튼 유남복도 샀다더라, 그 소문이 암암리에 돌아서 지금 땅값이 다섯 배로 뛰었어요.”

팀장은 요즘 들어 늘 기분이 좋았다. 혹시 이미 땅을 좀 사놓았던 거라면 그럴 만도 하다고 생각했다. 이러나저러나 여준에게는 별 흥미를 느낄 수 없는 일이었다.

“관심 없으신가 봐? 다섯 배 뛰었다고는 해도 워낙 헐값이던 땅이라 아직 살 만한데.”

“…아뇨, 그다지….”

“그래요? 그럼 본론으로 돌아갈게요. 어디까지 말했더라…. 아, 이것도 어떤 룸녀 증언인데요. 사모님이 학창시절에 괴롭히던 여자애를 룸에서 마주친 적이 있대요. 그러니까, 그 여자애가 룸녀가 됐다는 거지.”

“…….”

“사모님이 걔를 알아보고 신이 나서 용돈까지 쥐여 줬다네. 그러면서 다른 룸녀랑 호빠들 앞에서 자기가 걔를 왜 괴롭혔고 어떻게 괴롭혔는지 줄줄이 읊어 댔다고…. 걔는 끝까지 못 듣고 도망치려 했는데 다른 호빠들 시켜서 억지로 앉혀 놨대.”

“…….”

“그때 그 룸녀가 충격을 먹고 한동안 가게에 못 나오다가, 사귀던 남친이 돈 떼어먹고 튀는 바람에 강남에서 쫓겨나서 지금은 N동으로 흘러 들어갔다나 봐. 급이 확 떨어져 버린 거죠.”

N동. 여준의 눈동자에 흐린 빛이 돌아왔다. 남자를 향해 돌아앉은 그가 얼른 입을 열었다.

“그 사람 좀 만나볼 수 있습니까?”

“누구요? 제보한 사람?”

“아뇨, 그 이야기에 나온…. N동으로 옮겨갔다는 사람요.”

“직접 만나 보신다고요? 뭐하러?”

남자가 의아한 얼굴로 서류를 뒤적였다. 뭐 하러. 어째서. 그 질문에는 여준도 선뜻 대답할 수 없었다. 하지만 반드시 직접 봐야 할 것만 같았다.

“연락처 알아다 드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굳이 그러셔야겠어요? 이런 애들이 사장님 같은 사람 하나 벗겨 먹자고 마음먹으면 순식간이에요.”

“조심하겠습니다. 부탁 좀 드릴게요.”

“뭐 저야 돈만 맞으면 시키는 일 다 하는 사람이지만….”

은아의 학창시절을 아는 사람, 은아에게 상처받고 N동으로 쫓겨난 사람. 여준이 양 주먹을 꽉 쥐었다. 심장이 세게 뛰어 늑골이 아플 지경이었다.

***

- 떨어진 머리카락보다는 생으로 뽑는 게 좋죠. 모근이 붙어 나와야 가장 확실합니다.

오후 내내 시터와 키즈카페에서 놀다 온 아이는 저녁을 먹고 씻자마자 잠이 들었다. 여준은 찬장을 뒤져 족집게를 꺼내 들고 아이의 방문을 열었다. 색색 대는 숨소리가 가습기 돌아가는 소리에 섞여 작은 방 안을 평화롭게 울렸다.

“…….”

마른침을 삼키고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제법 힘이 생긴 머리카락이 손가락 사이로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족집게를 드는 손이 바들바들 떨렸다. 여준은 심호흡을 하고 아이의 머리카락 두어 개를 잡아 조심스레 뽑았다.

“웅….”

따끔한 감각에 아이가 뒤척였다. 얼른 손을 거둬들였지만 다행히 깬 것 같진 않았다. 하아, 참고 있던 숨을 내뱉은 여준이 소리 없이 아이의 방을 빠져나왔다. 준비해 뒀던 지퍼백에 머리카락을 넣고 나서야 온몸에 식은땀이 흘렀다.

“후우….”

테이블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자괴감으로 마음이 무너지는 것만 같았다. 가슴에 손을 댄 채 두 눈을 꽉 감았다. 그래도 해야 할 일이었다. 애써 다짐하고 견출지를 꺼내 드는데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가게로 안 오고 따로 만나려면 낮 시간에 오래요. N동 K오피스텔에서 오후 세 시부터 여섯 시까지 시간당 12. 물론 정보료는 따로고요. 예약은 내가 해드릴 수 있는데 어떡할까요?」

견출지를 내려놓은 여준이 빠르게 답장을 찍었다. 부탁드립니다. 뒤늦게 회사 생각이 났지만 아무래도 좋았다. 지금 이것보다 중요한 일은 없었다.

무슨 핑계를 댔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억지로 반차를 쓰고 N동으로 차를 몰았다. 핸드폰이 여러 번 울렸지만 무시했다.

지하주차장에 차를 대고 엘리베이터에 올라 3층을 눌렀다. 지은 지 오래된 오피스텔은 구석구석 낡아 있었다. 끼이익, 불길한 소리를 내는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지저분한 복도가 보였다.

마른침을 삼키고 305호를 찾았다. 벨을 누르자 얼마 지나지 않아 네에, 하는 명랑한 대답이 들렸다.

“오빠! 어서 와!”

이어 문이 열리고 나타난 여자는 길게 늘어뜨린 생머리에 분홍색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예상과는 사뭇 다른 모습에 여준이 머뭇거리자 여자는 생글생글 웃으며 그의 팔을 잡아 안으로 이끌었다.

“왜요? 생각했던 거랑 좀 달라요?”

문이 닫히자마자 여자가 물었다. 가까이서 봐도 어린 인상이었다. 스물두세 살이나 되었을까, 여준은 신발도 벗지 못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타입이 요즘 인기 있거든요. 너무 술집 여자 삘 나는 차림은 오빠들이 별로 안 좋아해요. 그보단 이렇게…. 일반인 스타일이라 해야 하나? 여친 집에 잠깐 놀러 왔다는 느낌들을 받고 싶어 해서.”

“…….”

“들어와요. 앉아서 얘기해요.”

그 말에 드디어 구두를 벗은 여준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빌트인형 원룸 오피스텔은 정말 여자 혼자 사는 방처럼 그럴싸하게 꾸며져 있었다. 커튼은 아이보리색, 침구는 연핑크색이었고 작은 책꽂이와 노트북 책상도 보였다.

“나 너무 신난다. 이쪽 일한 지가 거의 10년째인데 오빠처럼 잘생긴 사람은 처음 봐요.”

티포트에 물을 올린 여자가 웃으며 말했다. 10년이라니, 대체 몇 살이기에. 혼란스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한 여준이 입술을 달싹였다.

“긴장 풀어요, 안 잡아먹으니까. 커피? 녹차?”

“…녹차로 부탁합니다.”

“오빠, 혹시 연예인이에요? 아니지, 유은아 남편이라 했지, 참.”

여준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 그랬지. 은아의 학교 동창이라 했으니 당연히 여준과도 동년배일 터였다.

“아 참, 내 나이는 비밀이에요. 여기선 스물다섯이라고 하거든.”

녹차 티백을 넣은 머그컵을 테이블에 내려두며 여자가 한쪽 눈을 찡긋했다. 그제야 그녀의 나이가 보이는 듯했다. 눈이 크고 턱이 짧아 어려 보이는 얼굴이지만 눈가가 얇고 힘이 없었다. 스물이라 하면 스물로, 서른이라 하면 서른으로 받아들일 수 있을 듯했다.

“그래서 뭐가 궁금해요? 얼마나 할 말이 많길래 세 타임을 전부 사셨대?”

양반다리를 하고 앉은 그녀가 웃으며 물었다. 습관적인 미소였다.

“은아가….”

“아아, 맞다, 맞다. 유은아 얘기 물어보러 오셨댔지?”

“은아가 그쪽…, 아, 혹시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컵을 입가에 가져가던 여자가 멈칫했다. 잠시 흔들리던 시선이 이내 가까워진다.

“미니라고 불러요.”

“민희요?”

“미니마우스 할 때 미니요. 내가 디즈니를 좋아해서.”

말을 마친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못내 불안한 시선이었다.

“…오빠, 지금 혹시 뭐 녹음하고 있거나 한 건 아니죠?”

“녹음…?”

“그런 거 있으면 당장 치워요. 혹시 나중에라도 들키면 내가 오빠 죽여 버릴 거예요.”

“…….”

“그냥 하는 소리 아니에요. 나 사실 그때 룸에서 있던 일도…. 거기 있던 애들한테 입단속 철저히 시켰거든요. 어디 가서 말했다간 가만두지 않을 거라고. 근데 그 쌍년들이 돈 몇 푼 받았다고 냉큼 불어 버려서…. 그 년들도 언젠가 다 죽여 버릴 거야.”

진심이라는 것은 눈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살기 어린 시선에 여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고민하던 그는 우선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미안해요.”

차를 머금던 미니가 눈썹을 까딱 추켜세웠다.

“안 좋은 기억인 거 알면서도 이렇게 찾아와서 미안합니다. 위로가 될진 모르겠지만 꼭 합당한 정보료를 드릴게요.”

“…….”

싸늘한 시선이 몸을 감쌌다. 미니는 그 뒤로도 한참 차를 홀짝이며 말이 없었다. 좁은 방에는 시계가 많았다. 여기저기서 째깍대는 초침 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두 손을 모아 쥔 채 잠자코 미니의 말을 기다렸다.

“오빠, 왕따 당해 본 적 없죠?”

한참 후에야 미니가 물었다. 여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그의 대답이 중요한 건 아니었는지 그녀가 주절주절 말을 이었다.

“난 그년이 나한테 대체 왜 그랬는지 이유를 몰랐어요. 얼마나 악질적이었냐면 남자애들을 끌어들였거든요. …여자들끼리 하는 왕따는 사실 크게 무서울 게 없어요. 기껏해야 밥 같이 안 먹어 주고, 뒤에서 좀 수군거리고 그게 다니까.”

“…….”

“근데 남자애들이 개입하면 얘기가 달라져요. 진짜 무서운 일이 벌어진다고요.”

미니의 어깨가 부르르 떨렸다. 여준은 여전히 할 말을 찾지 못했다. 따돌림을 당해 보긴커녕 목격한 적도 없었다. 반에서 겉도는 아이들은 어디에나 있었지만 딱히 폭력사태가 벌어지거나 하진 않았으므로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원래는 친했어요. 학기 초부터 같이 다녔거든요. 그러다 어느 날부터 나를 따돌리더니, 남자애들 사이에서 내가 그년 남친을 뺏었다는 소문이 돌았어요. 그것도 정말 더럽고 구체적인 소문이었어. 치마 밑에 팬티를 안 입고서 걔를 만나러 갔다는 둥…. 남자 화장실에서 떡 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둥.”

“…….”

“유은아는 그런 데 천재였어요. 거짓말을 너무 구체적으로 해서, 듣는 사람한테 이게 거짓말일 거라고는 생각을 못 하게 만드는…. 정말 좆같은 재주가 있었죠.”

하아, 미니가 큰 한숨을 쉬었다. 여준은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타인의 입에서 나오는 은아의 인간상이 놀랍도록 일관적인 탓이었다.

“그 얘기를 들은 남자애들이 어떻게 했을 것 같아요? 일단 온 동네에 걸레라고 소문이 났어요. 길을 가다 보면 갑자기 모르는 새끼들이 튀어 나와서 치마를 들치려고 했어요. 정말 노팬티냐고 실실 웃으면서.”

“아….”

“그땐 그냥 무섭기만 했어요. 그쯤 되니까 내가 정말 유은아한테 뭘 잘못한 게 아닌가, 그 생각만 들더라고요. 차라리 잘못한 거였으면 싶었고요. 그럼 싹싹 빌고 화해하면 되니까요.”

미니가 제 이마를 짚은 채 눈을 이리저리 굴렸다. 처음 만났을 때의 여유롭고 명랑하던 모습은 간데없이 불안하고 초조한 기색이었다. 여준은 미안한 마음에 이를 꽉 다물었다. 미니는 한참이나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담배 좀 피울게요.”

“…그러세요.”

재떨이를 꺼내 내려놓는 움직임이 능숙했다. 담배를 찾아 문 그녀는 머리를 틀어 올려 둥글게 묶었다.

“근데 이런 거 왜 물어보고 다니시는 거예요? 유은아 집 재산 때문에?”

전혀 아니었지만 여준은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자세히 설명할 이유도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미니는 담배에 불을 댕기고는 테이블을 툭툭 내리치기 시작했다.

“그런 얘기 많잖아요. 어릴 때 일진 짓 하던 년들 사회에서 다시 만나서 엿 먹이는 썰. 나도 좋아했거든. 몇 번은 인터넷에 유은아 떠올리면서 직접 써 보기도 했어요. 나를 질투해서 왕따시켰던 년이 있는데, 백화점에 갔더니 그 년이 화장품을 팔고 있더라…. 그래서 일부러 진상 부리고 매니저 부르고 난리 피우고 왔다…. 그럼 댓글이 좌라락 달려요. 사이다라고.”

“…….”

“씨발, 근데 다시 만났더니 그년은 여전히 떵떵대면서 그 지랄을 하고 다니고, 오빠처럼 잘생긴 남편도 있었네. 나는 지저분한 새끼들 똥구멍이나 빨아 주고 살았는데….”

동그랗고 커다란 눈동자에 왈칵 눈물이 고였다. 어쩐지 보면 안 될 것 같아 여준은 얼른 고개를 돌렸다. 미니는 킁, 하고 코를 풀더니 재떨이에 가래침을 뱉어 놓았다.

“근데 여기 오고 얼마 안 지나서 그년 죽었다는 소식이 들린 거예요. 얼마나 속이 시원했는지 몰라…. 그때부터는 일부러 그 얘기 떠들고 다녔어요. 왕따 당한 게 나 아닌 척하고.”

“일부러요? 왜…?”

“나도 몰라요. 그냥 그러다 보면 진짜 내 얘기 아니게 될 줄 알았어요. 어차피 그때 룸에 있던 연놈들만 다 죽이면 이제 아무도 모르잖아요.”

울분에 받쳐 아무렇게나 뱉는 소리라기엔 지나치게 섬뜩했다. 여준이 말이 없자 그녀는 입꼬리만 올려 히쭉 웃었다.

“걱정 말아요. 오빠는 돈을 줄 거잖아. 나한테 돈 주는 사람은 안 죽여요.”

“…….”

“하여튼 그래서…. 또 무슨 얘기 할까요? 정확히 뭐가 궁금한 거예요?”

미니가 코를 훌쩍이며 눈가를 닦아냈다. 조금이나마 제정신이 돌아온 기색이었다. 여준은 아, 하며 손바닥에 밴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혹시 은아가 사귀던 호스트에 대해서 뭐 아는 게 있으십니까?”

“박영재요?”

단번에 이름이 나오자 목이 타들어 갔다. 미니는 연기를 깊이 빨아들이더니 반도 채 태우지 않은 담배를 눌러 껐다.

“그 새끼도 유명하죠. 호빠 새끼들 허영심 강한 거야 다 그렇지만 박영재는 유난했어요. 면상 빻은 어좁이 새끼가 무슨 명품은 그렇게 밝히는지, 맨날 유명한 명품 옷 같은 거 새로 사 입고 오는데 어깨선이 다 이만큼 내려와 있고, 웃겼어요.”

미니가 킬킬대며 제 팔뚝에 손날을 대었다. 그러나 여준이 궁금한 것은 영재가 어떤 인간이었는지가 아니었다. 다행히 미니는 금방 여준이 원하는 화제로 넘어가 주었다.

“근데 유은아랑 박영재를 사귀던 거라고 할 수가 있나? 그냥 박영재가 수족 노릇 했던 거라고 봐야 될 걸요. 게다가 유은아 결혼하고 호빠 금지당하면서는 거의 내버렸다고 알고 있는데.”

“내버렸다고요?”

“둘이 그 뒤로도 만나기는 했을 거예요. 근데 예전처럼 완전 스폰 관계는 아니었던 거죠. 유은아가 돈을 잘 안 털어 주니까 박영재가 엄청 초조해했다고 들었어요. 그래서 다른 봉 잡으려고 가게 다시 나가고 한 모양인데, 유은아에 너무 올인하느라 그나마 낚아뒀던 고객도 다 놓쳐서…. 카드값 갚느라 여기서 사채 끌고 저기서 끌고, 그러다 한 번은 제주도로 튀었다고.”

천만 원만 빌려주라, 그게 안 되면 오백이라도. 오밤중에 전화해 애원하던 영재가 떠올랐다. 사채까지 써서 위험한 상황이라며 울먹이던 목소리, 그게 다 은아와 엮인 일이었다니. 그런데도 내게 돈을 빌릴 마음이 들었다니….

사람이 그럴 수가 있을까? 여준은 눈을 꾹 감은 채 밀려드는 혐오감을 내리눌렀다. 사람이라면, 아주 조금의 염치와 일말의 수치심이 있다면 그래서는 안 되는 게 아닐까.

“그래서….”

미니가 새 담배를 빼 들던 순간이었다. 딩동, 현관 차임벨이 울렸다.

“…….”

마주친 시선이 동시에 굳었다. 고개를 먼저 돌린 것은 여준이었다. 현관에 달린 인터폰 화면은 새카맸다. 딩동, 한 번 더 벨이 울렸다.

“가만히 있어요.”

미니가 속삭였다. 동그란 얼굴이 창백하게 굳어 있었다.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숨이 막히도록 고요했다. 여준은 숨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몸을 움츠렸다.

***

“그게 뭐 어쨌다고?”

선잠에 빠져들던 의식이 퍼뜩 튀어 올랐다. 사현은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손에서 막 빠져나가려는 태블릿PC를 고쳐 쥐었다. 쪽새는 사무실 문가에 선 채 목소리를 낮춰 통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니, 알아들었는데 그래서 뭐가 문제라는 거야? 프락치일까 봐?”

태블릿PC 화면에는 표적의 일정표가 띄워져 있었다. 남자는 오늘 저녁 춘천에 가서 내일 새벽 돌아올 예정이었다. 지금은 백화점에 가서 쇼핑 중이라고 했다. 즉 사현은 지금 쪽새의 자잘한 트러블 따위에 관심을 둘 때가 아니었다.

“…세 시간을 다?”

그럼에도 도통 신경을 전환할 수가 없었다. 결국 태블릿PC를 내려놓고 일어선 사현이 쪽새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럼 바로…. 아, 형님.”

쪽새가 얼른 몸을 틀어 핸드폰을 내밀었다. 수화기 너머의 상대는 사현이 전화를 받기도 전에 우렁찬 인사를 건네 왔다.

- 형님! 바쁘신데 죄송합니다.

“됐어. 무슨 일이야?”

-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고요, 그냥 제가 감이…. 좀 찜찜해서요. 기집애 오후 시간을 통째로 산 봉이 있는데, 예약을 갑자기 잡은 것도 그렇고 와꾸도 반반하니 멀쩡한 게 좀…. 쎄하고 그렇습니다.

“프락치 같다고?”

- 확실한 건 아닙니다.

“알았어. 일단 끊어 봐.”

사현은 핸드폰을 던지다시피 쪽새에게 건네고 외투를 집어 들었다. 어리둥절한 채 서 있던 쪽새는 그가 문고리를 잡자마자 놀라서 따라붙었다.

“제가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형님 이따 가실 데 있다고….”

“그걸 어차피 네가 운전해야 하잖아.”

“…아.”

쪽새도 그제야 제 외투를 챙겨 들었다. 오피스텔까지는 차로 5분 거리였고, 도로가 막힐 시간도 아니라 금방이었다. 오피스텔 관리를 맡고 있는 벤찌가 사현의 차를 보자마자 버선발로 달려 나왔다.

“아이고, 형님.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거대한 몸에 뺨이 통통한 벤찌는 그 잠깐 뛰는 것도 힘들었는지 연신 땀을 훔쳐내고 있었다. 사현은 긴말 없이 그를 향해 손짓했다. 안내해.

“그게요, 형님. 방금 방 상황 보러 갔던 녀석이 돌아왔는데 별문제 없었대요. 세 시간이나 산 건…. 어, 뭐라더라. 봉이 완전 숙맥이라 긴장 풀고 술도 먹고 할 시간이 필요했던 거랍니다. 들어가 보니까 기집애가 열심히 술 따라 주면서 분위기 잡고 있었다네요.”

“…….”

“…죄송합니다. 설마 바로 오실 줄은 모르고 저는, 일단 보고부터 해야 할 것 같아서….”

사현이 낮은 한숨을 내쉬었다. 기우였나. 프락치가 술 같은 걸 마실 리 없고, 미니는 여러 번 위험한 강을 건널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별일 아니면 됐어. 그밖에 수상한 점은 없고?”

“예, 뭐…. 근데 미니 년이 완전 헤벌레하고 있는 것 같아요. 봉이 완전 미남이라나 봐요. 무슨 탤런트처럼 생겼대요.”

“…뭐?”

“그년이 남자 얼굴 어지간히 밝히잖아요. 쩜오하던 년이 이런 데까지 기어들어 온 것도 다 그놈의 남자 때문인데 아직 정신을 못 차렸는지….”

남자 얼굴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요, 그쵸? 쫑알대기 시작하는 벤찌의 말을 한 귀로 흘리며 사현은 무심코 주차장 안을 둘러보았다. 구질구질한 동네, 허름한 오피스텔 주차장은 답지 않게 잘 빠진 차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

그 안에서도 한눈에 찾아낼 수 있었다. 진회색 아우디 SUV. 눈을 가늘게 뜬 사현이 천천히 번호판을 훑었다.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가 기억하는 번호였다.

“…먼저 가라.”

차에서 눈을 떼지 않은 사현이 낮게 명령했다. 쪽새와 벤찌 둘 다에게 해당되는 말이었다. 차갑게 가라앉은 분위기에 서로의 눈치를 살피던 그들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사현에게 허리를 숙이고 멀어져갔다. 사현은 그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씹어 뱉듯 중얼거렸다.

“그래서….”

이게 무슨 상황이지? 의문은 가시 돋친 공처럼 머릿속을 굴러다니기 시작했다.

***

“…이제 괜찮은 것 같아요.”

술병을 내려놓은 미니가 제 가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여준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홧홧하게 달아오른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벨이 울리자마자 찬장을 열어젖힌 미니는 호리병처럼 생긴 술병을 꺼내 여준에게 던졌다. 마셔요, 빨리요. 재촉하는 말에 벌컥 들이켜자마자 배 속이 타들어 갈 정도로 독한 술이었다.

‘아니에요, 저 오빠가 이런 데가 처음이래. 긴장부터 풀지 않으면 안 설 것 같다고 오래 잡은 거래요.’

미니는 문밖에 선 남자에게 온갖 아양을 떨며 변명을 했고, 그럼에도 남자는 기어코 집 안으로 들어와 여준의 상태를 살폈다.

‘손님, 실례 좀 하겠습니다. 이 방이 난방이 안 좋아서….’

‘…네.’

‘어떻게, 춥진 않으시고? 어이구, 술을 독한 거 드시네. 그래도 그게 세우는데 직빵이긴 해요.’

남자가 킬킬대며 미니의 머리를 콱 쥐어박았다. 하여간 밝히는 년. 미니는 머리를 맞고도 기분 나쁜 기색 없이 간드러진 목소리를 냈다.

‘몰라아, 미워. 분위기 좋았는데.’

‘간다, 이년아. 간다고. 손님, 실례했습니다. 사과의 의미로 다음 방문하실 땐 디씨 좀 해드릴게요.’

문이 닫히고도 미니는 한참 동안 현관에 선 채 바깥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여준은 따끔따끔 아파오는 목을 가다듬으며 미니가 건네준 술병을 살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전통주였다. <알코올 도수 45도> 표기를 발견했을 땐 머리가 어지러웠다.

“미안해요. 많이 독하죠?”

“…아니에요. 덕분에 살았습니다.”

“집에 갈 때 대리는 오빠가 직접 부르세요. 저 새끼들한테 맡기면 무슨 개수작 부릴지 모르니까.”

그러마고 대답하려 했지만 입을 열자마자 술 냄새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한 손으로 입가를 막은 여준이 한참이나 심호흡을 했다. 그러고 보면 술을 마시지 않은 지가 오래였다. 회식 자리에 가도 건강이나 시험 핑계로 거의 입에 대지 않았었다.

“하여간 징그러운 새끼들, 의심은 많아서….”

“…….”

“…오빠? 괜찮아요? 토할래요?”

여준이 한참 말이 없자 미니가 상체를 숙여 다가왔다. 가까워진 그녀에게서 진득한 향수 냄새가 났다. 알코올 향이 코를 찌르자 두 배로 괴로웠다. 여준은 고개를 젓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미안합니다. 오늘은 그만 가 봐야겠어요.”

“벌써요?”

“정보료는 현금을 준비해 오긴 했는데, 계좌로 넣어 주길 바라면 그렇게….”

“아 참.”

돈 이야기를 꺼내자 미니가 손뼉을 딱 쳤다. 이어 노트북 책상으로 향한 그녀가 서랍에서 작은 쪽지를 찾아 건넸다. 쪽지에는 은행명과 계좌번호, 그리고 낯선 남자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쪽으로 넣어 주세요. 현금은 여기서 못 가지고 나가요. 손님들이 가끔 용돈 주기도 하는데 그것도 독식하면 존나 처맞거든요.”

“예금주가….”

“괜찮아요. 남자친구예요.”

“…….”

돈 들고 나른 남친 때문에 강남에서 쫓겨나 N동으로…. 간략히 들었던 미니의 이력이 떠오르자 묻고 싶었다. 이 남자는 믿을 만한 사람이냐고. 하지만 그 전에 의문이 들었다. 나는 이런 질문을 건넬 자격이 있는 사람인가. 대답은 당연히 ‘아니오’였고 여준은 별수 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나는 6시까지 쉬어도 되죠?”

“네, 그럼요.”

“다행이다. 잘 가요, 오빠. 또 필요한 거 있으면 연락하구요.”

미니가 웃으며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처음 이 방에 왔을 때 본 것처럼 발랄하고 상냥한 모습이었다. 여준은 씁쓸히 인사하고 방을 나섰다. 문을 열자 차가운 공기가 뺨을 감싸왔음에도 한 번 오른 열이 도통 진정되지 않았다.

“후우….”

다행히 몇 걸음 걷자 들끓던 속은 조금씩 가라앉았다. 비틀대며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 여준이 시멘트벽에 이마를 기대고 섰다. 한두 달 안 마셨다고 이렇게 약해져 있었을 줄이야, 역시 나이는 못 속이나….

실없는 생각을 하는데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무심결에 고개를 든 여준의 눈이 천천히 크게 뜨였다. 열린 문 너머, 좁고 허름한 공간에 거기 있어서는 안 되는 인물이 서 있었다.

“…….”

얼마 전 사현이 했던 말의 의미를 알 것 같았다. 귀신인 줄 알았어요. 여기 있을 리 없는 사람이니까. 여준의 심정이 딱 그랬다. 지하에 멈춰 있던 엘리베이터를 불러올렸으니 당연히 아무도 안 타고 있을 거라 생각했던 거야 차치하더라도, 자신과 눈이 마주치고도 놀란 기색이라곤 없이 손을 뻗어오는 사현의 모습이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다.

“어떻….”

“입 다물어요.”

팔이 붙들리자 힘없이 끌려들어 갈 수밖에 없었다. 사현은 휘청대는 여준을 억지로 잡아 세우고는 신경질적으로 5층 버튼을 눌렀다. 취해서 헛것을 보나. 어안이 벙벙해진 여준이 눈동자만 이리저리 굴리는 사이 엘리베이터는 순조롭게 5층에 도착했다. 문이 열리자 사현은 아예 여준의 멱살을 틀어쥐고 뛰다시피 걷기 시작했다.

“잠깐만, 이거 놓고…!”

“입 다물라고 말했어요.”

그는 망설임 없이 복도 끝에 위치한 방을 열고 여준을 쑤셔 넣었다. 미니의 방과 달리 휑하니 비어 있는 공간이었다. 창문에 커튼조차 달려 있지 않았다. 방향이 좋지 않은지 오후 네 시도 안 된 시간임에도 어두침침하게 그늘이 져 있었다.

“…사현아.”

하아, 목소리 끝에 흩어지는 숨에서 아직도 술 냄새가 났다. 사현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여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여준은 제가 어떤 꼴을 하고 있는지도 모르는 얼굴이었다. 붙들려 끌려오느라 흐트러진 차림에, 붉게 익은 얼굴은 식은땀으로 축축한 모양새가 가관이었다.

“뭐 하는 거예요?”

“잠깐만, 천천히 설명을….”

“뭐야, 대체. 여기서 무슨 짓을 한 거냐고!”

사현도 당연히 알고는 있었다. 여준이 여자를, 그것도 하필이면 지극히 공교롭게도 미니를 만나 돈 주고 섹스를 하기 위해 이곳까지 왔을 리가 없다는 사실을. 아마도 유은아에 관련된 일일 거라는 짐작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생각이 당장 술에 취해 흐트러진 모습으로 이곳에 있는 여준에 대한 당혹감과 분노를 가라앉혀 주지는 않았다.

“설명할게. 그러니까 일단 진정….”

“여기가 뭐 하는 곳인지는 알고 온 거예요?”

“알아. 알지만 네가 상상하는 그런 일 절대 없었고-.”

“내가 상상하는 일이 뭔데. 당신 같은 직장인이 하루에도 수백 번 들락거리면서 하는 그런 짓 말하는 건가?”

사현의 목소리가 높아질수록 여준의 호흡은 가빠지고 눈가는 잘게 떨렸다. 벌어진 셔츠 앞섶 사이로 드러난 쇄골과 어깨까지 온통 붉었다. 따뜻하고 축축해 보이는 피부였다. 사현이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눈을 돌렸다.

“…하아….”

뻐근한 눈가를 쓸어 올리자 짧은 두통이 일었다. 고개를 숙이고 신음하는 사현에 여준은 조심스레 그의 팔을 붙잡았다.

“사현아. 그런…, 그런 거 아냐.”

“…….”

“정말이야. 어떻게 해야 믿….”

애써 말을 이어가던 여준의 허리가 푹 꺾였다. 갑작스러운 현기증이 올라온 탓이었다. 미끄러지듯 주저앉는 그를 사현이 다급히 끌어안았다.

“…뭘 얼마나 마셨길래 이래요?”

“얼마 안…, 마셨는데, 마신 것도 그때 변명거리가 필요했고, 술이 너무…. 세서…. 취한 건 아니야, 아닌데…. 자꾸 어지러워서….”

“횡설수설하는 거 보니 취했구만….”

그나마 식었던 머리에 다시 열이 올랐다. 들으란 듯 혀를 찬 사현이 여준의 넥타이를 죽 당겨 풀어냈다.

“도대체가…. 이런 데서 남이 주는 걸 그렇게 덥석 받아먹으면 어쩌자는 거예요? 그 애가 그렇게 마음에 들었어요?”

“아니야, 그런 거 아니라니까….”

“아니면, 여자 맛이 그리웠어요? 전처럼 여자 몸이나 더듬으면서 평범하게 좆질하던 시절로 돌아가고 싶어요? 그런 거면 말해요. 지금도 안 늦었어요.”

“임사현!”

여준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어쩌다 또 이렇게 꼬여 버렸을까. 안 그래도 어지러운데 머리까지 복잡해지니 미칠 지경이었다. 열 오른 이마를 짚은 채 한참 입술만 달싹이던 여준은 이내 사현의 팔을 밀어내고 물었다.

“…어떻게 하라는 거야?”

어떻게 하면 이 무의미한 추궁을 멈추고 내 이야기를 들어줄 거야? 사현은 픽, 바람 빠지는 웃음소리를 내더니 여준에게 턱짓했다.

“확인시켜 줘요.”

“…….”

“정말 아무 일도 없었다면.”

방 안은 바깥과 다를 바 없이 싸늘했다. 여준은 한숨을 쉬고 이미 반쯤 풀어져 있던 넥타이를 목에서 벗겨냈다. 셔츠 단추를 하나둘씩 푸는 손가락이 차갑게 식어 있었다. 사현은 벽에 기대앉은 채 그런 여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코트와 재킷을 가지런히 접어두고 셔츠 앞을 완전히 열자 드러난 상체에 찬 소름이 오소소 솟아났다. 훌쩍, 코를 들이켠 여준이 셔츠 소매에서 팔을 빼냈다. 긁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어깨와 날씬한 배, 곧은 등줄기를 하나하나 살피던 사현이 덤덤히 말했다.

“젖꼭지 서 있는데요.”

흠칫, 여준의 어깨가 튀어 올랐다. 수치심은 사현의 손가락이 유두를 비틀어 쥔 후에야 찾아왔다.

“…이건 추, 워서….”

“그런 것치고는 아까부터 서 있었던 것 같은데.”

“읏….”

“셔츠 위로 다 보였어요. 몰랐어요?”

딱딱해진 돌기를 엄지와 검지로 집어 비비고 문지르는 손길에는 거침이 없었다. 몸을 잔뜩 움츠린 여준이 그 손을 떼어내려 해 봤지만 허사였다. 사현은 여준의 허리를 감아 제 위로 앉혀놓고는 마음껏 그의 몸을 주무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허리부터 늑골을 짚어 올라 판판한 가슴을 지분대더니 아예 한쪽 젖꼭지를 삼키고 한껏 이를 세웠다.

“…응, 읏!”

따끔한 통증에 여준이 움찔거렸다. 고개를 뒤로 넘기자 커튼 없이 휑한 창과 가까이 붙은 건물이 눈에 보였다. 어두운 현관에서 웅크린 모습이 보일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불안감이 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만해, 이제…. 충분히 봤잖아. 아무 흔적도 없잖아.”

여준이 애써 침착하게 말하며 사현의 머리통을 힘껏 밀었다. 사현은 떨어져 나가는 대신 제 잇자국이 새겨진 자리를 길게 핥아 올렸다. 간질간질한 느낌에 등줄기가 오싹했다. 몸속 어딘가가 찌릿찌릿 간지러웠다.

“알아요.”

그때 여준의 품에서 고개를 든 사현이 중얼거렸다.

“다 아는데 그냥 화가 난 거예요.”

“…….”

“모르겠어요. 아무것도 참을 수가 없고…. 병신이 된 것 같아.”

시무룩한 고백에 여준의 기분까지 가라앉았다. 이거 뭐지, 내가 잘못한 건가? 불쑥 드는 생각에는 헛웃음이 다 나왔다. 고민하던 여준이 천천히 사현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놀랐을 거 알아. 미안해.”

“…….”

“은아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었어. 그러다 정보원이 그 사람 이야기를 해 줘서…. 대화를 하려고 온 거였어.”

“…….”

“장소가 장소인 만큼 너한테 들킬 수도 있다는 생각은 했어. 이렇게 빨리 걸릴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나중에라도 다 설명할 생각이었어.”

조곤조곤 이어지는 설명에 허점은 없었다. 사현은 눈을 감은 채 여준의 등허리를 천천히 쓸어내렸다. 붉게 물든 피부는 전혀 따뜻하지 않았다. 오히려 방을 가득 채운 찬 공기에 조금씩 식어가고 있었다.

“정말이야. 정말로…. 너한테 말 못 할 짓 같은 건 안 했어.”

그것은 대단히 달콤하고 만족스러운 해명이었다. 내용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자신이 여준에게 있어 이런 문제에 대해 진심으로 변명해야 할 대상이라는 점이 두렵도록 기쁠 뿐이었다.

순진한 인간. 이런 건 그냥 심술일 뿐이야. 저열하고 유치한 욕망에 지나지 않아. 심지어 나는 이 모든 속성을 거리낌 없이 취할 수 있는 사람이지. 사현은 사납게 웃으며 여준의 입술을 물어뜯었다.

“으응, 읏….”

상체가 밀착되고 여준의 무릎이 무너지자 바싹 달라붙은 하반신에서 열기가 느껴졌다. 여준은 몇 겹의 천 너머로도 선명하게 느껴지는 딱딱한 살덩이에 놀라 힉, 소리를 냈다. 창밖이 지나치게 환했다. 땀이 금방금방 식어 금세 오한이 들었다. 사현의 몸에 달라붙어야 할 핑계는 지천에 널려 있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방심했다간 공격적인 욕정으로 가득 찬 살덩이가 곧장 몸을 가르고 들어올 것만 같았다.

“그만, 안, 안 돼. 여기선….”

“여기선?”

“밖에서 다…, 보일 거야. 건물이 너무 가깝…, 고, 흣!”

사현이 다시금 여준의 젖꼭지를 콱 깨물었다. 작은 돌기를 잇새에 가둔 채 혀끝으로 찌를 때마다 여준의 등허리가 움찔대며 튀어 올랐다. 본의 아니게 사현 위에서 허리를 놀리는 모양이 되자 두 배로 미칠 것 같았다. 사현은 슬쩍 웃으며 여준의 엉덩이를 쥐어 제 몸 위로 눌렀다.

“…읏, 그만….”

계속되는 자극에 성기가 속옷 안에서 부풀기 시작하자 허벅지가 뻐근하게 저려왔다. 고개를 숙인 여준이 이를 악문 채 잘게 떨었다. 사현은 그의 가슴팍에 하나둘 씩 멍울을 남기며 조금씩 허리를 쳐올리는 시늉을 했다. 여준이 견디다 못해 턱을 높이 들었고, 사현은 기다렸다는 듯 눈앞의 길고 깨끗한 목에 이를 세웠다.

“-…아!”

목에서 어깨로 이어지는 부드러운 피부에 갑작스레 피가 몰렸다. 사현의 허벅지를 짚고 있던 여준의 두 손이 바르르 경련했다. 아아, 하앗, 불규칙한 호흡마다 얄팍한 가슴이 한껏 들썩였다. 사현은 입에 문 살점을 한참이나 잘근대고 빨아들여 큼직한 멍울을 만든 후에야 먹잇감의 절명을 확인한 짐승처럼 입을 벌렸다.

“하…. 으읏….”

입을 벌린 여준이 간절하게 헐떡였다. 감은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들었다. 가지런한 잇새에 걸린 붉은 혀가 뜨겁게 달아 있었다. 사현은 그 혀를 낚아채 입을 맞추었다. 고분고분 열린 입 안에서 미지근한 단내가 났다.

“너, 넣….”

키스에 정신이 팔린 여준은 한참 후에야 사현이 제 바지 버클을 풀어낸 것을 깨달았다. 사현은 이미 흥건히 젖은 여준의 브리프 밴드를 쥔 채 눈썹을 까딱였다.

“넣을, 넣…, 넣을 거야?”

여준이 물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반쯤 뜨인 눈동자는 기묘한 고양감으로 가득했다. 사현은 느릿하게 어깨를 으쓱 올렸다.

“…여기서, 넣…. 응, 넣으면, 흣….”

사현이 한 손을 브리프 안으로 쑥 넣었다. 손가락을 위로 해 기둥부터 고환, 회음부를 간지럽히는 장난스러운 동작에 여준이 입술을 꽉 물었다 놓았다. 한껏 일어선 기둥 끝에서 벌써부터 프리컴이 질금질금 새고 있었다.

“정말 아무 짓도 안 했나 보네. 이만큼 쌓인 걸 보면.”

“…아까부터 그렇, 다고 했…. 으응….”

“자위도 안 했어요? 평소에 안 해요?”

“싫어, 손, 그만….”

“할 때는 무슨 생각 해요? 여자한테 박는 상상? 아니면 나한테 박히는 상상?”

“…하앗.”

사현의 중지 끝이 입구에 닿았다. 그러자 구멍은 기다렸다는 듯 벌어졌다 오므라들길 반복했다. 마치 그 손가락을 한시라도 빨리 몸속으로 끌어들일 것처럼.

“나는 자위할 때 당신 생각해요. 현실의 당신한테는 절대 못 할 짓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으니까 편하거든요. 예를 들면….”

“그만….”

“선배 회사 사람들, 예를 들면 전화 목소리가 예뻤던 그 여자 앞에 선배를 엎어 두고 박는 거예요. 선배는 처음에야 반항하겠죠. 수치스러워서 어쩔 줄을 모를 거예요. 하지만 여기….”

구멍이 벌어진 틈을 다 손가락 하나가 마디 끝까지 들어왔다. 아읏, 낮은 비명을 내지른 여준이 사현의 어깨로 얼굴을 파묻었다. 사현은 느긋하게 고개를 돌려 여준의 귓가에 속삭였다.

“손가락 하나만 물고도 좋아서 어쩔 줄 모르는 이 구멍이요. 안쪽까지 꽉 채워서 빡빡하게 쑤셔 주면 얼마 안 가 앞을 세우고 질질 싸겠죠. 지금처럼.”

“…흣, 그만, 빼 줘, 빨리 빼….”

“기분 좋았던 거 기억나죠? 선배가 아예 자지러지는 시점이 있잖아요. 몇 발 빼서 한참 몸이 유연해졌을 때, 허리 세운 상태로 뒤에서부터 끝까지 박아 주면….”

그때 움찔, 여준의 몸이 크게 들썩였다. 잠시 굳어 있던 사현이 여준과 제 몸 사이로 손을 넣었다. 미지근하고 끈적한 액체가 손마디를 타고 흘러내렸다.

“…….”

여준은 하얗게 굳은 채 말이 없었다. 사현은 다정히 그의 뒷목을 쥐어 떼어내며 눈을 맞췄다. 하아, 긴 숨을 뱉어낸 여준의 시선이 차차 밑으로 내려갔다. 그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손등으로 눈을 비비기까지 했다. 그러나 축 늘어진 제 성기와 엉망으로 젖은 사현의 셔츠가 의미하는 바가 이제 와 달라질 리는 없었다.

“…내 얘기 상상하다가 싼 거예요? 손도 안 댔는데?”

사현이 슬그머니 웃으며 물었다. 그 말이 기폭제라도 된 듯이 여준의 얼굴이 화르륵 타올랐다.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냅다 붙잡아 앉히며 사현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어떻게 해 줄까요?”

“…어떻, 게, 어떻게라니. 나는, 난….”

“박아 달라면 박아 주고, 빨아 달라면 빨아 줄게요. 몸에 손톱만 한 틈도 남지 않을 때까지 핥아 달라면 그렇게 할게요.”

“아, 하읏, 읏….”

“명령을 해요, 선배. 개 한 마리 부린다 치고 지금 제일 원하는 걸 말해 봐요.”

사현이 여준의 뺨과 턱, 목으로 쉼 없이 입술을 내리눌렀다. 그때마다 힘없이 흔들리면서도 여준의 시선은 한 지점으로 향했다. 주저앉은 다리 사이, 팽팽하게 일어선 앞섶에 닿을 때마다 몸속이 간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줘….”

“네?”

“이, 거 이걸…, 이걸로….”

미친 짓이야. 이런 곳에서, 아무 준비도 없이. 하지만 이성적인 이유를 찾으려 할 때마다 머릿속에 작은 폭죽이 터지는 것 같았다. 온몸이 갈려 나가는 듯한 쾌감 앞에서 현실적인 제재 따윈 모조리 헛짓인 듯 느껴졌다.

“이걸로….”

마침내 여준의 손이 제 다리 사이에 닿았을 때, 사현은 살짝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지금?”

“…지금….”

“여기서?”

“…….”

여준은 붉은 과육 같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팍까지 벌겋게 물든 피부에서 미미한 열이 피어올랐다. 사현은 그제야 입술을 한껏 열고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읏.”

손 아래서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중심의 감각이 버거웠다. 여준은 후들후들 떨리는 어깨를 잔뜩 좁힌 채 사현을 바라보았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는 타액이 매달렸다. 어떻게 좀 해 줘. 이 들끓는 충동을, 머릿속을 태우는 욕심을.

“화장실에 콘돔 있어요.”

사현이 느긋하게 속삭였다. 여준은 필사적으로 고개를 흔들고픈 충동을 내리눌렀다. 잠깐이라도 떨어지고 싶지 않았다. 피부가 닿는 면적이 줄어들 때마다 온몸이 저리도록 안달이 났다.

“선배가 가져올래요? 아니면….”

“…흐읏, 읏, 손 좀…. 손 그만….”

“내가 가져올 때까지 얌전히 기다릴래요?”

그딴 건 됐으니까 하던 거나 마저 해. 당장이라도 혀끝을 옭아맬 기세로 치미는 말을 어떻게 도로 삼킬 수 있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여준은 눈을 감고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사현의 어깨를 밀어 몸을 떼어냈다. 사현은 웃으며 순순히 그를 놓아주었다. 떨어져 나간 손가락 끝이 여준의 체액으로 온통 질척거렸다.

“혼자 만지지 말아요. 내가 돌아오기 전에 한 번이라도 싸면 그대로 두고 나가 버릴 거예요.”

젖은 손가락을 핥은 사현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준은 무릎을 대고 엎드린 채 두 손을 꽉 쥐었다. 온몸이 간지러워 숨을 내쉴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뻑뻑하고 날카로운 끈으로 척추를 휘감아 죄고 있는 듯했다. 답답하고 어지러웠다.

“으읏, 흐….”

당장이라도 앞을 쥐고 흔들어 체액을 분출하고 싶었다. 새카만 열에 들뜬 몸에 오로지 하나 남은 충동이었다. 작정하고 약 올리듯 느릿한 걸음으로 화장실 문을 연 사현은 한참 뒤적이는 소리를 낼 뿐 나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현아.”

“기다려요. 찾고 있으니까.”

“사…, 현.”

웅크린 등이 움찔대며 튀어 올랐다. 부스럭, 좁고 어둡고 고요한 방에 울리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후우, 깊이 숨을 들이쉰 여준이 힘겹게 바닥을 짚고 일어섰다. 현관부터 화장실 문까지의 몇 걸음이 억겁처럼 느껴졌다.

“찾고 있다니까요.”

콘돔 포장지를 잇새에 물고 있던 사현이 픽 웃었다.

“그새를 못 참겠어요?”

여준은 말없이 턱에 맺힌 땀방울을 훔쳐냈다. 누런빛 싸구려 전구 아래 선 사현은 어두운 현관에서 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하아, 뻑뻑한 숨에서 코가 찡하도록 독한 알코올 향이 풍겼다.

“…여긴, 여기서는…. 밖에서 안 보이니까….”

주워섬기는 변명은 스스로의 귀에도 궁색하게 들렸다. 사현은 흐음, 하며 변기 커버를 내리고 그 위에 주저앉았다.

“가까이 와요.”

“…….”

여준은 홀린 듯 그에게 다가갔다. 자연스레 몸을 낮추자 곧 차가운 타일 바닥이 무릎에 닿았다. 사현은 여준의 손에 콘돔을 쥐여 주고는 제 바지 지퍼를 열었다.

“끼워 줘요.”

“사현….”

“할 줄 몰라요? 그럴 리가 없을 텐데.”

젤에 적셔진 콘돔은 금방 손에서 미끄러졌다. 얼른 다시 잡은 여준이 사현의 허벅지 위로 이마를 묻었다. 사현아아. 애원하듯 말끝을 늘이며 이마를 힘주어 미는 여준에 사현이 두 눈을 가늘게 떴다.

“뭐 하는 거예요?”

“사현아…. 제발.”

“내가 뭐 어려운 일 시켰어요? 당신 뒷구멍에 들어갈 좆에다 콘돔 하나 씌우라 한 게 다인데?”

“몰라…. 손에 힘 하나도 안 들어가…. 너 진짜 싫어….”

울먹이는 목소리에 사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맨발로 골목을 헤매다 마주쳤던 그 날 이후, 여준은 때때로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굴곤 했다.

“못하겠으면 그만둬도 돼요. 그만둘까요?”

“왜 자꾸….”

“어려운 거 하나도 없어요. 콘돔 하나만 씌우면 돼요. 그럼 선배가 목이 쉴 때까지 박아 줄게요.”

은근히 내뱉는 유혹의 말에 밀어다운 구석이라곤 하나도 없었다. 시종일관 직설적이고 분명한 언어에 휘말려 여준은 결국 얼마 남지 않은 기력을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 내야 했다. 콘돔을 오른손에 쥔 채 왼손으로 사현의 브리프 밴드를 당기자, 빳빳하게 서 있던 기둥이 툭 튀어 올라 뺨을 스쳤다.

“하아….”

여준이 눈을 감았다. 은밀한 살 냄새에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뒤로 두 손을 짚었다. 자연스레 벌어진 다리 사이로 여준의 상체가 파고들었다. 차갑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귀두에 닿자 사현의 숨결도 조금씩 거칠어졌다.

“흐읏….”

돌돌 말린 콘돔을 기둥 끝에 댄 채 조금씩 풀어 내리는 동작은 조심스럽고 정성스러웠다. 그러나 지독히도 느린 탓에 중간까지도 좀처럼 닿지 못했다. 사현은 한 손을 들어 여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물었다.

“오늘 내로 할 수 있겠어요?”

“이거 젤이 금방 말라서…. 뻑뻑하단 말이야.”

“그럼 적셔가면서 해요.”

무덤덤한 권유에 여준이 멈칫했다. 굵은 기둥이 눈앞에서 보란 듯이 꺼덕거렸다.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고 고개를 기울였다. 이제는 뭐든 아무래도 좋았다.

“선배.”

농담, 까지 자아냈던 사현의 입이 덜컥 닫혔다. 여준은 말린 콘돔 아래 살갗을 드러낸 기둥에 입을 가져다 대고 살금살금 핥기 시작했다. 한 손으로는 조금씩 콘돔을 내리며. 사현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입질에 열중한 동그란 머리통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으응….”

여준이 목 막힌 소리를 냈다. 혀를 내어 할짝일 때마다 빳빳한 음모가 입술을 간질였다. 간신히 기둥 끝까지 콘돔을 씌웠을 땐 입술이 새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그때 사현이 두 손으로 여준의 얼굴을 쥐었다. 엄지로 부은 입술을 문질러 사이를 틔우고는 곧바로 잇새를 벌리는 움직임이 다급했다. 여준은 본능적으로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저항하지 않은 것은 순간 마주친 눈동자에 깃든 열기를 본 탓이었다.

“…우웁…!”

다리 사이로 얼굴이 처박히고 뜨거운 살덩이가 밀려들어 왔다. 얇은 고무막 너머로도 딱딱한 기둥의 모양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좁은 입 안을 꽉 채우고 목구멍을 찌르는 기둥에 여준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혀가 말려들었다.

“우웅, 웁, 흐윽…!”

“코로 숨 쉬어요.”

“후으읏, 흣, 으읍.”

“천천히요. 괜찮아요. 천천히 하면 돼요.”

여준이 사현의 허벅지를 탁탁 내리쳤다. 새빨개진 관자놀이로 가느다란 핏줄이 불거졌다. 사현은 아랑곳없이 여준의 머리통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선배 입은 뒷구멍이랑 비슷하네요. 살짝만 쑤셔도 신이 나서 물고 오물거리는 게.”

“…으읏-…. 읍.”

마구잡이로 들어온 기둥이 입 안을 샅샅이 훑고 비비는 감각에 머릿속이 멍해졌다. 질질 샌 침이 턱을 적시고 사현의 다리 사이로 뚝뚝 흘렀다. 여준은 맺힌 눈물을 여과 없이 흘려내며 비린 고무막을 성심껏 핥았다.

“필사적이네. 그렇게 뒤가 간지러워요? 당장 박아 줬으면 좋겠어요?”

“흡….”

입에 채 머금지 못한 기둥을 양손으로 쥔 여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간절한 빛이 담긴 눈동자가 잔뜩 젖어 있었다. 사현은 입술 끝에 짓궂은 웃음을 매단 채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벽 보고 서서 엉덩이 벌려요.”

“…….”

“바지랑 팬티는 스스로 벗고.”

여준의 입술이 사현의 다리 사이에서 떨어져 나갔다. 숨이 어찌나 거칠어졌는지 벗은 어깨가 눈에 띄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부들부들 떠느라 자꾸만 헛도는 손으로 간신히 하의를 벗은 여준이 벽을 향해 섰다. 사현은 그의 가는 목과 부드러운 등, 모양 좋게 올라붙은 엉덩이를 눈으로 훑으며 재차 명령했다.

“구멍이 안 보이는데.”

흠칫, 몸을 굳힌 여준이 다리를 살짝 벌렸다. 그러나 늘어뜨린 두 손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현은 말없이 일어서 여준의 뒤에 붙어 섰다. 여준의 숨을 들이켜자 날개뼈가 크게 도드라졌다.

“한 번 더 말할까요?”

“…아, 하아.”

침으로 축축하게 젖은 기둥 끝이 여준의 엉덩이 골을 깊이 문질렀다. 미끄러운 살덩이가 가까워질 때마다 이미 잔뜩 젖은 구멍이 한껏 벌렁거렸다. 비틀, 흔들린 여준이 벽을 짚고 기대섰다. 사현은 말없이 제 기둥을 쥐어 구멍 위를 톡톡 두드렸다.

“아읏….”

허리가 뒤로 빠지자 가슴이 차가운 타일 벽에 밀착했다. 젖꼭지가 딱딱하게 일어서고 더는 견딜 수 없었다. 제발, 탄식하듯 속삭인 여준이 벽에 뺨을 댄 채 돌아보았다.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붉은 얼굴 위로 어지럽게 흐트러졌다.

“사현아, 제발….”

“…….”

“제발 나 좀 어떻…, 게, 아!”

순식간에 여준의 옆구리를 움켜쥔 사현이 좁은 구멍을 힘껏 찔러 올렸다. 아래에서 위로 쳐올리는 힘에 여준의 양쪽 발부리가 바짝 일어섰다. 벽으로 짓눌린 몸에 눈 깜짝할 사이 무시무시한 사정감이 덮쳐들었다.

“-…아! 아앗…!”

벽타일 위로 진득한 액체가 후드득 흩어졌다. 여준의 눈동자가 새카맣게 가라앉았다가 느릿하게 젖어 들었다. 주름 하나 남지 않도록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 안쪽이 와르르 녹아내리듯 사현의 페니스를 집어삼켰다.

“끊어먹을 셈이에요?”

사현이 웃으며 속삭였지만 여준은 웃을 수도 없었다. 진득한 사정감이 전신을 휘감아 온몸의 감각이 예민하게 돋쳐 있었다. 찬 벽에 비벼지는 젖꼭지와 페니스는 물론,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과 사현이 파고든 내벽의 모양까지 눈에 보이는 듯했다.

“으웃, 으…. 흐읏….”

섹스라는 건 원래 이런 건가? 이렇게까지 이성이 날아갈 듯한 쾌락이 동반되는 행위인가? 여준이 알기로는 그렇지 않았다. 이토록 미칠 것 같은, 머리가 터지고 내장이 뒤집힐 듯한 감각은 사현이 아니고서는 얻을 수 없었다. 또한 그것은 당연하게도- 사현의 모든 행위가 오로지 여준을 자극하기 위해 이어지는 탓이었다.

“아, 하악…!”

뿌리 끝까지 박혀든 기둥이 안쪽을 짙게 문지르며 빠져나갔다. 여준의 허리가 깊이 휘어지자 구멍이 빠듯하게 조여들었다. 읏, 낮은 신음을 흘린 사현이 눈앞의 목덜미를 잘근 물었다.

“작작 조여요. 빼야 또 박을 거 아니에요.”

“…아, 싫, 싫어….”

“빼는 게 싫어요?”

“흐으읏, 응, 흐응….”

흘러내린 정액과 뒤섞인 타액에 엉망이 된 구멍 주변으로 흰 거품이 피어올랐다. 덕분에 잔뜩 젖은 기둥이 들락거릴 때마다 찔꺽대는 소리가 좁은 화장실을 가득 울렸다. 사현은 느릿하게 피스톤질을 이어가며 여준의 상체와 벽 사이로 손을 밀어 넣었다. 따뜻한 손바닥이 판판한 가슴을 문지르다 돌기를 잡아 비틀자 여준이 흐윽, 우는 소리를 내며 고개를 뒤로 젖혔다.

“거기 그, 그만….”

“거기가 어딘데요. 젖꼭지?”

“…으응, 흣.”

“아무리 졸라 봤자 좆은 절대 안 만져 줄 거예요. 물론 선배도 못 만져요.”

그 말에 여준의 미간이 푹 패었다. 그새 또 잔뜩 일어선 앞이 못 견디게 뻐근했다. 지금 가슴을 문지르고 있는 이 크고 따뜻한 손이 꽉 쥐어 비벼준다면 당장 해소될 갈증이었다. 사현은 바로 그 점을 누구보다 잘 안다는 듯 얄밉도록 집요하게 젖꼭지만 문지르며 농락하고 있었다.

“상관없잖아요, 아까는 나한테 박히는 상상만으로 쌌으면서. 지금은 심지어 진짜로 박고 있는데.”

“…너무 차, 가워서…, 하윽!”

말이 끝나기도 전에 사현이 힘껏 허리를 쳐올렸다. 발끝으로 버티고 선 채 숫제 벽에 달라붙은 여준이 부들부들 떨기 시작했다. 반쯤 일어선 기둥에 고환까지 싸늘한 벽에 짓눌리자 등줄기가 바짝바짝 조여들었다. 후우, 더운 숨을 입에 문 사현이 여준의 엉덩이 살을 움켜쥔 손에 힘을 주었다.

“선배, 내가 박아 주면 좋아요?”

퍽, 퍽, 사현이 허리를 움직일 때마다 여준이 힘없이 들썩였다. 기울어진 이마에 붉은 열이 피어 있었다.

“대답해 봐요. 내가…. 이렇게, 박으면, …좋냐고.”

“…아, 으읏, 흣, 읏.”

“응? 선배.”

여준의 가슴을 더듬어 올라간 사현의 손이 그의 어깨를 감싸 꽉 눌렀다. 그 순간 끝까지 쑤시고 들어온 기둥이 배 속을 짓누르고 여준이 덜컥 경련했다.

“…-아, 하앗!”

찌릿, 전류가 척추를 타고 오른 듯했다. 이명이 일더니 타일 벽으로 울컥, 정액이 흘러내렸다.

“하, 아으, 읏….”

오금이 마비된 듯 저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스파크가 튀었다. 여준은 벽에 손톱을 세운 채 눈물을 쏟았다. 사현은 다시 그의 허리를 쥔 채 페니스를 빼내기 시작했다. 여준이 저도 모르게 도리질을 쳤다. 몸속 어딘가가 미칠 듯이 간지러웠다. 한 번 빠져나간 사현이 그 자리를 다시 찾아내지 못할까 봐 겁이 날 정도로.

“이런 사람이 어떻게 여자랑 살겠다고….”

사현이 비웃는 소리도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여준은 가까스로 버티고 선 그대로 보채듯 사현을 끌어당겼다.

“거기…, 거기 이상해….”

“알아요, 그래서요?”

“…읏, 빨리….”

“이상해서 뭘 어쩌라고? 마저 하라고, 그만하라고?”

윽, 하며 여준이 이를 악물었다. 사현은 급할 것도 없다는 듯 느릿하게 허릿짓을 이어가고 있었다.

“다시…, 다시 해 줘.”

“말을 똑바로 해야 알아듣지요?”

“…그 자리, 다시 박, 박아…, 줘.”

“…….”

“빨리, 제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돌아본 순간이었다. 검은 눈동자에 벌건 불길이 이는 모양을 본 것 같았다. 여준이 멍하니 입을 벌리자 사현은 그의 귀를 물어뜯으며 단번에 뿌리 끝까지 박아 올렸다.

“…-!”

여준의 한쪽 발끝이 허공으로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아, 비명은 한 박자 늦게 새어 나왔다. 배 속에서 끓는 물이 터진 듯했다. 혈관을 휘돌아 구석구석 퍼져나가는 뜨거운 기운에 온몸이 덴 듯이 쓰라렸다.

“…아! 으흣, 읏…!”

사현의 손이 여준의 앞을 쥐었다. 덜컥 일어선 페니스는 지치지도 않고 선액을 쏟아내고 있었다. 그는 그대로 여준을 꼼짝하지 못하게 짓누른 채 같은 자리를 쾅쾅 찍어 올리기 시작했다. 여준은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며 버둥거렸고, 사현은 그런 여준의 목과 어깨를 게걸스럽게 물어뜯었다.

“으흣, 아아….”

쿵, 몸부림치다 이마를 세게 부딪쳤지만 통증도 느껴지지 않았다. 여준을 힘껏 끌어안은 사현의 몸이 부르르 떨렸다. 여준도 움찔, 튀어 오르며 묽은 정액을 흘렸다.

“…….”

고개를 돌리자 자연스럽게 눈이 마주치고 입술이 맞물렸다. 섞여드는 숨에서 차가운 비린내가 났다. 맞닿은 이마가 땀으로 미끈거렸다.

***

창밖은 어느새 깜깜하게 저물어 있었다. 사현은 불을 켜지 않은 방 한가운데에 이불을 깔고 여준을 눕혀놓았다. 젖은 수건을 이마에 얹은 채 한참 죽은 듯 누워 있던 여준이 중얼거렸다.

“몸이 남아나질 않겠어….”

바깥 불빛에 의지해 티포트를 찾던 사현이 슬쩍 웃었다.

“웃을 일 아니야…. 몸살이 또 온 것 같아.”

“당신 지금 열도 없고 멀쩡해요. 엄살 부리지 말아요.”

“미쳤던 걸까…. 잠깐 돌았던 게 틀림없어….”

여준이 끙끙대며 돌아누웠다. 사현은 차 끓이기를 포기하고 여준의 곁으로 돌아가 주저앉았다. 여준은 툴툴대면서도 가까이 온 사현의 팔을 쥐고 끌어당겼다.

“사현아, 너 있잖아.”

“…무슨 말을 하려고 또.”

“혹시 좀…. 그런 취향이야? 왜 그…. 사디스트라고 하나?”

“…….”

사현이 한쪽 입꼬리를 삐죽 올렸다. 별다른 대꾸 없이도 명백히 전해지는 비웃음에 여준이 안절부절못하며 말을 이었다.

“나 지금 제정신 돌아오고 보니까 갑자기 무섭거든…. 저번만 해도 그냥 화가 나서 그런다고 생각했는데, 혹시 원래 그게 네 취향이면….”

“취향이면?”

“…미리 말을 해 줘. 마음의 준비라도 하게.”

여준은 대단히 중대한 결심이라도 한 듯한 표정이었다. 사현은 실없이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고 그의 손에 깍지를 꼈다.

“왜요? 내가 선배를 채찍으로 때리기라도 할까 봐? 때리면 맞아 주긴 할 거고?”

“…그…, 렇게까지 구체적으로는 생각 안 해 봤는데.”

“걱정 말아요. 그런 취향 없으니까. 난 그냥 선배를 몰아붙이는 게 좋을 뿐이에요.”

“…….”

“힐난하고, 애태우고, 살짝 아프게 할수록 선배가 빨리 흥분하더라고요. 생각 같아선 다정하게만 하고 싶은데 나도 마음이 아파요.”

가슴에 손을 얹고 말하는 모양새가 천연덕스러웠다. 여준은 코웃음을 치고 깍지 낀 손에 이마를 묻었다.

“…그래서, 화는 풀렸어?”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이 얼마 없는 광원을 붙들고 반짝였다. 사현은 가만히 그 눈을 내려다보다 엄지로 여준의 코끝을 툭 건드렸다.

“고등학교 때는….”

“…….”

“이럴 수는 없었겠죠?”

어떤 식으로든, 어떻게 해서든 지금 같은 순간을 만들 수 없었겠지. 여준은 대답 없이 눈을 깜빡였다. 고등학교 때 그 사건들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 시간에 영재가 없었다면.

“…….”

불안하지 않고, 모자라지 않은 열여덟의 나는 과연 너를 마음에 담았을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결국 사현은 제 곁을 떠났을 거란 확신이 들었다. 그 시절, 인생에서 가장 분별없는 시기에도 한 번을 입에 담지 않았던 마음이니까.

“고등학교 때 이런 걸 알았으면 절대 대학 못 갔어.”

“…….”

“그건 참 다행이지?”

여준이 과장된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사현의 눈가로 부드러운 미소가 번졌다. 깍지 낀 손을 유지한 채 천천히 몸을 낮춘 그가 이내 여준을 마주 보고 누웠다. 창가를 등진 사현의 얼굴은 까맣게 그림자가 져 있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낮게 쉰 목소리, 차분하고 상냥한 어조로 자아내는 문장은 방 안의 고요와 닮아 있었다.

“그런 상상을 자주 했어요. 과거로 돌아간다면, 열일곱 살에…. 담임이 멘토 신청서를 나눠 줬던 그 순간이 다시 온다면.”

“…….”

“그 자리에서 찢어 버리고 두 번 돌아보지 않을 거라고.”

여준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었다. 나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만 아니었다면 너는 분명 지금보다 나은 모습이었겠지. 얼굴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흉터도 없었을지 모르지.

“하지만…. 그때도 분명 그럴 수 없었을 거예요.”

어둠에 익은 눈에 점점 표정이 보였다. 사현은 눈을 살짝 내리깐 채로 말을 이었다. 시선의 끝에는 꽉 마주 잡은 손이 있었다.

“이미 선배가 있는 시간을 봐 버린 이상….”

“…….”

“몇 번을 돌이킨다 해도…. 나는 이 길밖에 선택할 수 없어요.”

고통은 환희의 이면이며, 고통을 이유로 포기하기엔 내 삶에 비친 환희가 당신뿐이었으니까. 이 차갑고 딱딱한 세상의 유일한 빛, 드넓은 우주의 수십억 생명체 중 나를 돌아본 오직 한 사람.

“신이나 악마가 기회를 준다 해도,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나를 그날 그 시간으로 돌려놓는다 해도….”

“…….”

“나는 몇 번이든 똑같이 할 거고…. 몇백 번이든 변함없이 선배를 찾을 거예요.”

빠앙, 조용하던 창밖에서 처음으로 긴 경적이 울렸다. 여준은 말없이 빈손으로 사현의 이마를 쓸어 넘겼다. 사현은 아이처럼 유순한 눈을 하고 있었다.

“…….”

그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다. 한 번 더 다른 생을 갖게 된다면, 그런 참혹한 사고와는 관련 없는 삶을 선택하라고. 누구도 해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상처 입지 않는 생을 꿈꾸지 못할 이유는 또 무엇이냐고.

하지만 말할 수 없었다. 사현의 깊이 모를 애정 앞에서 여준의 모든 말은 언제나 무용해졌다. 때때로 그는 바닥이 관측된 적 없는 심해로 거리낌 없이 뛰어드는 다이버 같았다. 수심이 너무나 깊어 새카맣게 보이는 물속으로, 마치 그 물 아래에서 태어났다는 듯이.

“그러니까 더 이상 선배는.”

그러면 여준은 지켜봐야 할 것이다. 발등을 간질이는 물결에 놀라 창백하게 질린 채.

“쓸데없는 생각하지 말아요.”

툭, 사현이 가칠한 손으로 여준의 뺨을 감쌌다. 여준은 그 손이 아직 어리고 부드럽던 때를 떠올리려 애썼다. 차가운 찰흙 같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눈을 감았다. 사현에게 돌려주지 못한 대답을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나는 그러지 않을 거야. 그때로 돌아간다면 너에게 말을 걸지 않을 거야. 왜냐하면 그때의 너는 너무나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존재였으니까. 그런 네가 이토록 상처 받고 마모되어 버린 현실 같은 건 몇백 번이라도 포기할 수 있어….

왜 우는 거예요? 언뜻 목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여준은 말없이 사현을 끌어안고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머릿속 어딘가에서 경적 같은 목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어차피 과거로 돌아갈 수는 없어. 다가오는 시간을 살아갈 수밖에 없어. 그렇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너와 함께 그 끝 모를 바다로 뛰어드는 것뿐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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