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화 (14/21)

가청주파수 3권

#13. 차갑고 빈손

“폰 데이터는 못 뚫었어요. 아예 지구 한 바퀴를 돌려서 찔렀는데도 곧바로 튕겨 나오더라고요. 대신 지난 일주일 행적 빼곡히 베껴 왔습니다.”

“무슨 정치인도 아니고 그걸 왜 못 뚫어?”

“가끔 있어요. 첩 여럿 두면서 대포폰 만들기도 귀찮아서 그냥 폰 보안에다가 돈 부어 놓는 양반들요.”

모자란 의뢰 성과를 추궁당할까 두려웠는지 정보원은 급한 동작으로 온갖 서류를 꺼내 놓았다. 두꺼운 봉투 안에는 표적의 사진, 신체 프로필, 소유한 모든 차종과 넘버, 가족관계와 부동산 목록, 일주일 동안 기록된 하루 일정 등이 빽빽하게 들어 있었다.

“화요일에는 꼭 춘천에 다녀오는데 이것만 유일하게 자차 일정이에요. 그리고 두 달 전에 건강 검진 받은 내역 보니까 당뇨 살짝 있네요.”

“…….”

“난이도는 초급이라고 봐야 할걸요?”

이 정도만 있어도 작업하기엔 충분할 거란 뜻이었다. 정보원이 씩 웃었다. 사현은 말없이 서류를 훑어보았다. 숨겨 놓은 여자가 많은 인물일수록 작업은 편하다. 남에게 숨길 일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빈틈이 생긴다는 뜻이니까. 서류를 챙겨 넣은 사현이 품에서 봉투를 꺼내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금액 확인하고, 마무리는 하던 대로 해.”

“늘 감사합니다.”

정보원은 봉투에 입을 맞추고는 먼저 자리를 떴다. 사현은 모자를 고쳐 쓰며 창가로 눈을 돌렸다. 8차선 도로 저편으로 거대한 건설사 건물이 보였다. 얼마 전 강남 모 지구의 아파트 재건축 사업을 따낸 덕에 내내 축제 분위기인 회사다. 그 중심에 있는 것이 ‘어르신’의 표적, 최 이사였다.

지난 화요일 오후 네 시, 최 이사는 백화점에 들러 명품 핸드백과 코트를 샀다. 그대로 혼자 차를 몰아 춘천으로 향했다. 오후 여섯 시 반, 내연녀의 펜션에 도착해 선물을 전달하고 함께 밤을 보냈다. 다음 날 새벽 다섯 시, 춘천을 출발해 그대로 회사로 향했다….

아주 정정하구만. 픽 웃은 사현이 핸드폰을 쥐었다. 나이 육십에 팔팔하게 첩질하는 양반을 죽지 않게, 그러나 정상적으로 살지도 못하게 만든다. 말은 쉽지만 가장 어려운 주문이었다. 확실한 방법은 잠깐 숨을 끊는 것이다. 심장을 멈추게 만들어 뇌가 괴사하기 시작했을 때 도로 살려 내면 된다.

지도를 띄워 두고 최 이사의 동선을 그려 보는데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새카매진 화면에 ‘박영재’ 세 글자가 떠올랐다. 언제나 그렇듯 타이밍이 나쁜 인간이었다.

- 어떻게 된 거야? 안 사겠다는데?

전화를 받자마자 영재가 다급히 쏘아붙였다. 사현은 핸드폰을 귀에서 살짝 떼어 놓고 지루하게 펜을 굴렸다.

“뭘 말이에요?”

- 내 땅! 처음 거는 다섯 배 값에 팔렸어. 그럼 지금쯤 열 배는 올랐어야 하는 거 아니야? 왜 갑자기 거래가 얼어붙은 거야? 했던 말이랑 다르잖아!

“했던 말이라니. 내가 뭐라고 했기에?”

사현이 웃으며 되묻자 영재는 금방 말문이 막혔다. 식은땀을 흘리고 있을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했다. 사현은 펜을 내려놓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농담이에요, 농담. 원래 땅이라는 게 갑자기 거래량이 올라가면 잠깐 지켜보는 사람들이 나오기 마련이잖아. 선배라면 안 그러겠어요? 주식이랑 똑같아요. 의심병 걸려서 일단 빠지고 보는 개미들이 생겼다는 거지.”

- 그러면….

“잠깐 지켜봐요. 어차피 물건은 선배 손에 있는데 뭐가 급해서 이래요?”

나긋나긋하게 달래는 목소리에도 영재는 영 미심쩍은 기색이었다. 사현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확실한 물건 아니면 나도 손해예요. 알잖아요.”

- 그건…. 그런데.

“그렇죠? 알아들었으면 이런 식으로 쓸데없는 소리 지껄이면서 귀찮게 하지 말아요.”

- …….

“당신 편하라고 터놓은 콜센터 아니거든. 상황파악이 그렇게 안 되나?”

- …미, 미안해. 너무 불안해서 그랬어.

영재가 금방 웅얼대며 사과했다. 박영재 같은 인물에게는 적당히 위협을 섞는 편이 좋다. 너무 달콤한 말만 속삭이면 금방 의심하기 때문이다. 사현은 말없이 전화를 끊고 다시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여전히 차고 맑았다.

***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핸드폰을 내려놓은 여준이 한숨을 푹 쉬었다. 미련한 짓이었다. 몇 번을 걸어 봐야 바뀐 번호를 찾아 연결될 리가 없었으므로. 심란한 얼굴로 모니터를 보는데 파티션 위로 쭈뼛거리는 후배의 얼굴이 삐쭉 올라왔다.

“…선임님, 뭐 안 좋은 일 있으세요?”

여준의 보이콧 아닌 보이콧이 이제야 전달된 모양이었다. 연휴가 끝나도록 조금도 진행되지 않은 새 약관을 두고 책임 소재를 거슬러 올라가다가 마침내 입사 1년 차인 그에게까지 닿은 것이다. 여준은 이쯤에서 훌륭한 선배 행세를 해야 하나 고민하다 우선 고개를 끄덕였다.

“음…. 좀 그래요.”

“무슨 일이세요? 혹시 저 때문….”

“급하게 연락할 일이 있는 상대가 번호 바꾸고 잠수를 타서 곤란하거든.”

“아….”

“약관 밀린 건 신경 쓰지 말아요. 상현 씨 연차에 혼자 일이 안 되는 건 당연하지. 그렇다고 아예 옆으로 밀어 버리는 건 좀 그렇지만….”

“그렇죠, 죄송합니다…. 연휴니까 전화 드리고 그러면 안 될 것 같아서….”

고개를 꾸벅 숙인 그는 한결 편해진 얼굴이었다. 여준도 손을 들어 보이고 모니터에 집중했다. 오늘은 퇴근하자마자 아이를 데리러 가야 한다. 집에 가서 먹이고 씻기고 재운 뒤에 테스트 준비를 해야 하는 빡빡한 일정이었다.

“저기, 선임님.”

제 자리로 향하던 후배가 다시 돌아왔다. 여준이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는 한참을 망설이며 서 있더니 흠, 하며 헛기침을 했다.

“혹시 잠수 타서 곤란하다는 사람이요. 뭐 빚쟁이나 그런 건가요?”

“……?”

“그게요, 음, 이게 원래는 절대 안 되는 거지만…. 아, 그리고 통신사가 같아야 하지만요. 원래 번호를 알면 바뀐 번호 조회할 수 있긴 하거든요. 저희 형이 그쪽 일을 해서….”

여준이 두 눈을 둥글게 떴다. 통신사에 근무하는 지인이라면 여준에게도 많지만, 이런 방법은 생각지도 못해 본 터였다.

“그래서 혹시, 네…. 필요하시면 도와드릴 수 있어요. 아, 오해하지는 마세요. 제가 이걸로 다 퉁치겠다 그런 게 아니고….”

“고마워.”

“네?”

“부탁 좀 할게. 원래 번호를 알면 된다고?”

여준이 지나치게 적극적으로 나오자 후배는 오히려 당황한 기색이었다. 곧장 핸드폰을 켜고 번호를 받아 적은 여준이 얼른 그에게 메모지를 내밀었다.

“언제까지 해 줄 수 있어? 얼마나 기다리면 돼?”

“아, 저기, 그게, 선임님. 말씀드렸듯이 통신사가 일단 같아야 해서 확실한 건….”

“알아. 아무튼 바로 연락 좀 줄래? 진짜 고마워. 덕분에 살았어.”

거듭 인사한 여준이 그의 팔을 붙들어 끌어당겼다. 안도한 얼굴에 매끄러운 미소가 걸렸다.

“참, 의자 가지고 와서 여기 앉아요. 안 그래도 이번 수식 뭐가 잘못된 건지 알려 주려고 했어. 필기할 거 필요해?”

“아, 네, 어….”

“여기부터야. 처음에 요율 매길 때 실수가 있었던 건데 변액으로 적용할 때는 물가상승률이 이런 식으로 가면 안 되고…. 이거 봐, 1년 차랑 5년 차 산출이 어긋나 버리잖아. 그치?”

맑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설명을 이어 가는 여준에게서 전에 없이 밝은 기운이 풍겼다. 사무실 내의 모든 시선이 한순간 그에게로 쏠리더니 이내 낮은 웃음이 터져 나왔다.

“성 선임, 뭐 좋은 일 있어? 그렇게 웃는 거 입사 이래 처음 보는 것 같네.”

팀장의 핀잔 아닌 핀잔에 여준이 멈칫했다. 뒤늦게 한껏 올라간 입꼬리를 내렸지만 이미 훈훈해진 분위기는 어쩔 수 없었다. 흠, 헛기침을 하고 어색한 미소를 짓자 그제야 한껏 딱딱해진 후배의 표정이 눈에 들어왔다.

“…왜? 말이 어려워?”

“아뇨…. 그게 아니라…. 혹시 통신사 다르면 어쩌나 싶어서….”

“…….”

“그럼 제가 진짜 나쁜 놈 될 것 같아서요….”

상현이 아예 얼굴을 감싸고 우는 시늉을 했다. 여준은 그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그는 퇴근 시간 직전, 여준의 메신저로 전화번호 하나를 전송해 왔다. 절대 비밀이라는 당부도 덧붙어 있었다. 여준은 충분히 감사의 말을 전하고 번호 하나하나를 곱씹어 외웠다. 핸드폰에 저장할 수는 없었다. 혹시라도 사현에게 자신이 바뀐 번호를 알아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건 피해야 했다.

차를 몰고 어린이집으로 향하는 내내 번호를 곱씹었다. 다행히 최근에는 종일반 아이들이 몇 명 더 생겼다고 했다. 아이는 아빠가 퇴근할 때까지 같이 블록 놀이를 할 친구가 생겼다며 신나 했다.

“나는 엘사 놀이하기 싫다고 했잖아!”

물론 매일 사이가 좋을 수는 없겠지만.

“넌 맨날 너 하고 싶은 것만 하니?”

놀이방에 가까이 갈수록 아이들의 다툼 소리가 커졌다. 여준이 문을 열자 지오가 씩씩대며 돌아보았다. 아이의 앞에는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공주 드레스를 곱게 차려입은 여자아이가 뾰로통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아빠! 누나가 자꾸 내 얼굴에 크레파스 칠하려고 해!”

혼자만 보호자가 등장한 상황에서 고자질이라니, 어쩌면 이렇게 비겁하고 똑똑할까. 여준은 픽 웃고 아이의 뺨에 묻은 어린이용 화장품 자국을 문질러 닦아 주었다.

“서연이 누나랑 놀고 싶으면 누나가 하고 싶은 놀이도 같이 해 줘야지. 누나는 지오가 블록 쌓고 싶다고 할 때 같이 해 주잖아.”

“맞아요. 근데 지오는 한 번도 안나 역할 안 해 줘요.”

“누나가 맨날 너만 예쁜 거 하잖아!”

“내가 누나야! 반말하지 마!”

아이들의 언성은 낮아질 줄을 몰랐고, 높고 날카롭게 빽빽대는 소리에 금방 머리가 아팠다. 여준은 먼저 지오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렸다. 그만, 그만.

“지오야, 맨날 블록 놀이만 하면 서연 누나는 재미없을 텐데. 누나가 재미없으면 지오랑 놀기 싫어질 거고. 그래도 좋아?”

“블록은 재밌는 거야!”

“누나는 별로 재미없대. 그래도 지오가 하고 싶어 하니까 같이 해 주는 거야. 지오는 누나한테 그 정도 양보도 해 주기 싫어?”

눈물이 방울방울 차오른 얼굴로 한참 히끅대던 아이가 슬그머니 서연의 눈치를 보았다. 서연은 팔짱을 낀 채 새침하게 시선을 돌리고 있었다. 아이는 눈물을 닦고는 기어들어 가는 소리로 말했다.

“누나, 미안…. 내가 안나 할게.”

“…….”

“근데 나는, 아빠 와서 그만 가야 돼서, 내일 해도 돼?”

“그래! 내일은 꼭 할 거지?”

서연이 금방 배시시 웃으며 돌아보았다. 아이들이란 참 단순하고 영리하구나. 여준은 미소 지으며 서연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지오랑 놀아 줘서 고마워, 서연아.”

“뭘요. 동생을 돌봐주는 건 누나의 의무죠.”

이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워서 하는지. 여준은 지오의 손을 잡고 나서며 다음에는 여자아이용 장난감이라도 사 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상할 정도로 기분이 좋았다.

“…….”

어린이집을 나서자마자 거대한 승용차를 마주치기 전까지는.

운전석 문이 열리고 윤 기사가 내렸다. 언제나처럼 험악한 인상이었다. 그는 여준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에서 내린 장모는 때 이른 모피코트 차림이었다. 새하얀 털코트가 지나치게 거대해 보였다. 아이는 여준의 손을 꼭 쥐고는 그에게 몸을 붙였다.

“무슨 일이십니까?”

“내 손자 만나는데 꼭 무슨 일이 있어야 하나?”

“…….”

“…같이 저녁 식사나 하자고 온 거야. 일단 타게. 집으로 가서 얘기하지.”

“연락도 없이 갑자기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완곡한 거절의 말이었지만 당연하게도 그녀는 들을 마음이 없어 보였다. 윤 기사가 조수석 문을 열고 여준에게 눈짓했다. 어린이집에는 아직 담당교사와 아이의 친구들이 남아 있었다. 입구를 틀어막다시피 주차한 차를 멀리 치울 방법도 없었다. 여준은 결국 한숨을 쉬고 아이를 장모의 차 뒷좌석에 태웠다.

“우리 강아지, 잘 있었어요?”

장모는 아이를 보자마자 다정히 품에 안고 입 맞추기 시작했다. 아이도 할머니의 애정표현이 싫지 않은 기색이었다. 쏟아지는 사랑의 이면까지 읽어 내기에는 어린 나이였다.

“오래는 못 있을 겁니다.”

“자네한테 그런 거 기대 안 하네.”

그녀가 냉랭히 말하고 아이를 코트 안으로 감췄다. 아이는 뺨을 간질이는 부드러운 털가죽에 까르르 웃으며 버둥거렸다. 여준은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차는 부드럽게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고급 주택가의 높고 기다란 담장을 지나 정원으로 들어섰다. 전문가의 손길로 깔끔히 정리된 관목들이 일렬로 들어선 모양은 살풍경하기 짝이 없었다. 저택 2층 가운데는 은아의 방이었다. 장미 덩굴이 뒤덮은 창을 올려다볼 때면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은아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아빠한테 조르고 졸라서 심었거든. 정원사는 절대 안 된다고 했어. 꽃 필 때 벌레 엄청 꼬일 거라고. 진짜더라. 매일 창문 틈으로 들어오는 벌레 잡아 죽이는 게 일이었어.’

은아가 떠나고 뿌리를 자른 덩굴은 이제 꽃을 피우지 않는다. 아이는 그저 할머니의 집에 아빠와 함께 왔다는 사실이 신나는 기색이었다. 팔짝팔짝 뛰며 정원을 누비는 아이를 보고 장모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어서 오게.”

현관으로 들어서자 놀랍게도 장인, 유남복이 마중을 나와 있었다. 여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숙이며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이게 다 무슨 일일까. 왜 이러는 걸까. 그를 따라 들어간 식당에는 상이 빽빽하도록 산해진미가 올라 있었다. 여준은 미심쩍은 기색을 굳이 감추지 않고 권하는 자리에 앉았다. 아이의 자리에는 알록달록한 어린이용 돈가스며 망고 푸딩 따위가 차려져 있었다. 유남복은 으흠, 하며 목을 가다듬더니 지나치게 유들유들한 목소리를 냈다.

“혼자 애 키우느라 변변치도 못한 식사만 할 텐데…. 한 번쯤 초대해서 좋은 거 먹여야겠다 했어.”

“…….”

“알아, 알아. 우리가 그간 자네한테 소홀했지. 하지만 자네도 그건 좀 이해해 줄 수 있지 않나. 은아 그렇게 갑자기 보내고 우리가 제정신이었겠느냐고.”

마치 은아가 떠나기 전에는 대단히 다정한 처가였다는 것처럼 들렸다. 여준은 대답 없이 한가득 쌓인 고봉밥을 내려다보았다. 독이라도 탄 건 아니겠지. 그 생각부터 드는 스스로가 우스웠다.

“자네가 추석 때 그렇게 쌩하니 가 버리는 거 보고 우리가…. 처음엔 화도 났는데 점점 부끄러운 마음이 들더라고. 그날 집에 와서 둘이 머리 맞대고 고민해 보니, 그간 은아를 잃어버린 슬픔을 다 자네한테 풀고 있던 건 아닌가, 그 생각이 들더란 말일세.”

“…….”

“미안했네. 미안해서 마련한 자리야. 앞으로는 우리가 조심함세.”

그런 거라면 더 예의를 갖춰 초대했어야 맞는 게 아닐까. 따져 묻고 싶은 부분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여준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이들과 상식적이고 인간적인 소통을 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예전에 버린 지 오래였으므로.

“우리 강아지도 많이 먹어라. 오물오물 이쁘기도 하지. 내년부터 유치원 들어가지?”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여준은 식기를 본 척도 않고 있었지만 장인은 전혀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유치원은 영어 교육하는 데로 보낼 거지?”

“네, 뭐….”

“잘 생각했네. 한국에서 학교 오래 다녀봐야 아무 소용없어. 어차피 중학교 전에는 나가야 되잖나.”

아무렇지 않게 흘러나온 말에 순간 등골이 싸늘해졌다. 혹시 파견 이야기를 알고 이러는 건가? 무슨 수로? 여준이 말이 없자 장인은 능청스레 몇 마디 덧붙였다.

“은아가 출산을 미국 가서 했으면 좋은데 말이야. 자네랑 오래 떨어지기 싫다고 어찌나 고집을 부렸는지…. 그래도 이왕 이리된 거 어쩌겠나. 하루라도 일찍 내보내서 영주권 쥐여 줘야 애 위하는 길 아니겠어?”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건지….”

“아니, 자네는 그럼 애를 군대에 보낼 셈인가? 티브이도 안 봐? 요즘 군대 사건사고 얼마나 무서운데.”

여준의 시큰둥한 반응에 장인이 금방 언성을 높였다. 영주권이니 군대니, 네 살짜리 아이를 앞에 두고 하나같이 급한 소리였다. 뭔가 꿍꿍이가 있을 거란 생각은 했지만 도통 목적을 알 수 없으니 답답해졌다.

“유학은 지오가 원한다면 당연히 어디든 보내 줄 겁니다. 하지만 그게 지금 섣불리 결정할 일은….”

“무슨 소리야? 지금 결정해도 늦지. 다른 집 애들 봐, 두세 살 때 이미 유모 달아서 미국이든 캐나다든 보낸단 말이야.”

“…장인어른.”

“그래서 말인데, 은아 막내 이모가 런던에 있잖아.”

“…….”

“주니어 입학 전에 자기한테 보내면 책임지고 대학까지 돌봐 준다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여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자 아이가 깜짝 놀라 몸을 굳혔다. 어른들 사이에 심상치 않은 기류가 흐를 때면 아이는 늘 입을 다물고 몸을 움츠리곤 했다.

“앉게. 내 얘기 아직 안 끝났어.”

“더 들을 것도 없습니다. 이런 어린애를 어떻게 혼자 외국에 보냅니까.”

“혼자 보내는 게 아니라니까. 자네도 은아한테 얘기 들은 적 있잖나. 런던에서 한인 식당 아주 크게 하는 집이야. 외곽이긴 하지만 시내에 방 네 개짜리 아파트를 갖고 있다고. 매달 지오 생활비랑 교육비는 내가 부칠 거고, 자네는 지오 보고 싶을 때 언제든 가서 만나면 돼.”

“그게 지금 말이 된다고 생각하시….”

함께 언성을 높이던 여준이 무심코 입을 다물었다. 아이를 본인들이 키우겠다는 것도 아니고 그 먼 도시로 보내라니, 그것도 생활비며 교육비까지 운운하면서.

“왜 그렇게까지 하시겠다는 겁니까?”

여준이 의아하게 묻자 유남복의 눈동자가 순간 흔들렸다.

“지오 교육이나 군대 문제라면 저도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름의 해결 방안도 있고요. 그런데 왜 이렇게 급하게…. 그것도 양육비용을 다 부담하면서까지 애를 내보내려고 하시는 겁니까?”

“그게 뭐 어쨌다고? 내 손자 교육에 내가 신경 쓰겠다는 게 이상한 일인가?”

유남복이 결국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는 이제 푸딩을 내려놓고 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작은 발끝이 잔뜩 움츠러든 모양을 본 여준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이는 그제야 고개를 들고는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아빠, 나 쉬….”

여준은 지체 없이 아이를 안아 들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화장실 문을 닫고 아이를 변기에 앉히자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져 나왔다. 하아, 눈을 감고 마른세수를 했다. 한참 그의 눈치를 살피던 아이가 물었다.

“아빠, 할아버지랑 싸워?”

“…아니야. 싸우는 거 아냐. 할아버지가 지오 좋은 데로 여행 보내 준다고 하신 건데, 아빠가 지오랑 떨어지기 싫어서 할아버지한테 대들었어.”

“아빠 화내지 마. 아빠가 싫으면 아무 데도 안 갈게.”

뻗어오는 작은 손에 입 맞춘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착하다. 아무 데도 가지 마. 평생 아빠랑 같이 있어.

“아빠, 우리 집에 가자.”

“응, 가야지. 나가서 인사하고 가자. 근데 지오 푸딩 마저 안 먹어도 돼?”

“집에 가서 우리 거 먹을래….”

잔뜩 시무룩해진 아이의 옷을 입히고 손을 씻기는 내내 후회가 들었다. 아이 앞인데 조금 더 참을 걸 그랬다고. 어른의 쉰소리라 치고 한 귀로 흘리면 그만인데 그게 아직도 힘이 들었다.

아이의 손을 잡고 거실로 나서자 벌써 식탁을 치우기 시작한 도우미가 보였다. 빈말로라도 식사를 더 권할 생각은 없다니 다행이었다. 보이지 않는 장인의 모습을 찾아 두리번거리는데 거실 소파에 앉은 뒷모습이 보였다. 그때 어디선가 전화벨이 울렸다. 소파 건너편, 거대한 TV의 송출 화면에 무심코 눈이 간 것도 그때였다.

처가의 전화기는 은아가 설치한 제품이었다. 도우미가 들락거리긴 하지만 늙은 부모님 두 분만 집에 계시니 이것저것 걱정이 된다고 했다. TV 모니터로 영상 통화를 할 수 있는 기종이라, 전화를 발신하거나 수신할 때에도 모니터에 그 정보가 뜨게 되어 있었다.

“…….”

여준의 입이 조금씩 벌어졌다. 모니터 한편에 또렷하게 뜬 전화번호 열한 자리의 숫자가 낯이 익었던 탓이다. 후배가 편법을 써서 알아낸 번호, 퇴근해서 아이를 데리러 가는 동안 속으로 수없이 되뇌며 외워 놓은 연락처가 눈앞에 있었다.

유남복은 그 번호를 확인하더니, 주위를 잠시 두리번거리고는 전화를 그냥 끊어 버렸다. 벨은 두 번 다시 울리지 않았다. 하지만 부재중 전화를 표시하는 숫자는 여전히 화면에 떠 있었다.

무의식중에 아이의 손을 놓고 걸음을 옮겼다. 유남복의 손에서 멀어진 전화기를 집어 들자 그제야 여준이 가까이 온 걸 눈치챈 그가 눈을 한껏 부릅떴다. 여준은 망설임 없이 수신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유남복이 뒤늦게 전화기를 빼앗으려 들었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 예.

짧은 대답 한 음절이면 충분했다. 사현의 목소리였다. 여준은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끊고 숨을 들이쉬었다.

‘직접 죽인 것은 아니다.’

유남복은 입을 벌린 채 그런 여준을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어째서 죽었는지는 알고 있다.’

다 알고도.

“…뭐, 뭐 하는 건가, 자네?”

다 알고도 그토록 지독하게….

“방금 이거…. 누구 전홥니까?”

딱딱하게 물었지만 장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둡고 날카로운 공기가 넓은 거실 바닥에 스멀스멀 깔리기 시작했다.

“장인어….”

“누구 전화는 누구 전화야! 잘못 걸린 거겠지!”

재차 묻기도 전에 유남복이 벌컥 화를 냈다. 여준은 멍하니 노인의 얼굴을 바라보다 전화기로 시선을 내렸다. 통화 내역을 불러오는 데는 버튼 하나면 충분했다.

끝도 없는 발신내역이 이어졌다. 노인은 그 ‘잘못 걸린 번호’를 향해, 하루 네다섯 번씩 끈질기게 전화를 걸어대고 있었다. 딸을 죽인 범인에게 전화하는 부모, 그뿐이라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겠지만.

“방금 온 전화는 왜 안 받으셨습니까?”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자네!”

“제가 있어서…. 안 받으신 겁니까?”

“…….”

“다 알고 계셨습니까? 은아가 왜 죽었는지….”

당신 딸이 부정을 저지르고, 그를 은폐하기 위해 나를 죽이려 했다는 것을. 그래서 살해당했다는 사실을.

“알고서도 저를….”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그거 내려놔! 정말 정신이 나간 건가? 이렇게 무례할 수가 있어?”

알고서도 나를 그토록 멸시하고, 천대하고, 지오를….

“…….”

지오를 떼어 놓으려 하고, 이상한 유학 이야기까지 들이민 것은.

“지오에 대해서도 다 알고 계셨던 거죠….”

목소리는 의지와 관계없이 새어 나왔다. 유남복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여준은 비틀대며 머리를 감쌌다. 예상은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확인 사살을 당하는 건 다른 문제였다. 이들은, 은아의 가족은 다 알고 있다. 은아가 왜 죽었는지.

갑자기 벌어진 소란에 장모와 도우미까지 거실로 모여들었다. 아이는 홀로 남은 채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울먹이고 있었다. 여준은 조용히 물러서서 아이를 안아 들었다.

“…검사를 해 볼 겁니다.”

아이의 기억에 조금이라도 남을 만한 단어는 피해서 말했다. 그래도 뜻은 충분히 전해졌을 터였다. 먼저 반응한 것은 장모 쪽이었다.

“무슨 검사를 해! 자네 정말 돌았어?”

찢어지게 높은 목소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악독하게 들렸다. 아이가 움찔하며 여준에게 파고들었다. 여준은 아이를 한 번 추어올리고 그녀를 똑바로 노려보았다.

“검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제가 달라질 건 없어요. 하지만 이 집안과의 관계는 예전과 같지 않을 겁니다.”

“자네 아까부터 왜 이러나. 잠깐 앉아.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앉아서 차근차근 얘기하세.”

유남복이 애써 차분한 모양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그들은 지금 상황이 왜 이렇게 돌아가는지 정말 이해하지 못한 기색이었다. 그래서 여준은, 그들이 정말로 사현과 자신의 관계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사현이 단 한 마디도, 어떤 여지도 흘리지 않은 것이다.

“일단 앉아봐, 응?”

“연락드리겠습니다.”

“갈 거면 지오는 놓고 가!”

장모가 유남복의 제지를 뿌리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아이가 기겁을 하며 여준에게로 파고들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아이를 방어적으로 감싸고 물러섰다.

“무슨 검사를 해? 지금 우리 은아를 의심하는 거야? 그러면서 애는 못 놓겠다고? 왜, 돈 때문에?”

“이유는 장모님이 더 잘 아실 겁니다.”

“그래! 내가 잘 알지. 가진 거 쥐뿔 없는 천것 집안 놈이 우리 집안 돈 노리고 결혼해서 내 딸까지 잡아먹었는데, 그 애도 못 놓겠다는 게 어째서인지 내가 모를 리가 있나! 바보가 아니고서야!”

악의로 가득 찬 목소리에 정신이 다 아찔했다. 여준은 눈을 질끈 감았다 뜨고 거칠어진 숨을 골랐다.

“자네 마음대로 해!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선생질이나 하던 게 뭐 대단한 벼슬이라고 고개 빳빳이 들고 있던 자네 부모님 봤을 때 내가 그 자리 엎어야 했어! 그랬으면 우리 은아도 살아있었겠지!”

소리가 사라졌다. 시야가 하얗게 점멸하더니 곧 새빨갛게 물들었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여준은 숨을 멈췄다.

“은아 마음에 드는 남창 하나 정부 삼아 준다 생각하고 앉혀 놨더니, 끝을 모르고 기어올라도 정도가 있지!”

하아, 스스로 내뱉은 숨소리가 폭발음처럼 들렸다. 흔들린 시선 끝에 거실 벽 한가운데를 차지한 가족사진이 걸렸다. 그림처럼 웃고 있는 유남복 부처와 은아가 보였다. 여준이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이들에게, 은아에게 나는 뭐였을까. 같은 인간이긴 했을까?

정부 삼아 준다 생각하고…. 쏟아지는 분노는 잠들어 있던 이성을 깨우고, 그러자 알 것 같았다. 어째서 그토록 비인간적일 수 있었는지. 어쩌면 그렇게까지 잔인할 수 있었는지. 이들에게 있어 여준은 처음부터 그런 존재였다. 말하는 대로 듣고, 때리는 대로 맞고, 지시하는 대로 움직이는 애완동물. 태엽 돌린 대로만 움직여야 하는 장난감.

하아, 배 속의 숨을 끌어모아 토해내고 고개를 돌렸다. 주방이 흐릿하게 비쳤다. 칼도 있고 불도 있는 공간이었다. 머릿속에는 오로지 한 가지 충동밖에 없었다. 복수하고 싶다. 어떻게든 이들에게 피해를 입히고 싶다. 불을 지르고 목을 조르고 싶다. 세상 사람들 모두에게 뭇매 맞게 만들어 주고 싶다. 죽여 버리고 싶다….

“…아빠.”

작고 축축한 손이 뺨에 닿은 것은 그때였다.

“아빠…. 집에 갈래요.”

울먹이는 목소리로 속삭인 아이가 여준의 뺨에 제 이마를 비볐다.

“집에 갈래….”

가장 먼저 소리가 돌아왔다.

“…….”

허옇게 흐려졌던 시야도 점차 또렷해졌다. 유남복 부처는 눈을 부릅뜬 채 여준의 기색을 살피고 있었다. 도우미는 주춤주춤 전화기 근처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여차하면 경찰을 부르겠다는 거였다.

이성을 뿌리부터 살라 먹은 분노는 머릿속을 태우고 차차 목 아래로 내려앉았다. 입을 열면 저주의 말이 쏟아질 것 같았다. 손을 묶어두지 않으면 누구의 목이라도 조르고야 말 듯 했다. 하지만 여준의 입술 앞에 아이의 귀가 있었고, 여준의 두 손에 아이가 안겨 있었다. 내장을 모조리 태워버릴 듯 끓어오르는 화를 눌러 참고 돌아설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그 이유였다.

미련 없이 돌아선 여준이 드넓은 정원을 가로질러 대문 밖으로 나섰다. 쌀쌀한 바람이 들이쳤지만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

“어, 여준아. 잘 왔어, 들어와.”

연락도 없이 무턱대고 벨을 눌렀음에도 가람은 반갑게 문을 열고 맞아주었다. 여준은 아이를 꼭 안은 채 간단한 인사조차 건네지 못했다. 현관에 우뚝 선 여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 가람은 뒤늦게 몸을 낮췄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지오 좀….”

“응?”

“잠깐만 맡아 주세요. 금방 데리러 올게요. 갑자기 죄송….”

“-어…!”

놀라 탄식한 가람이 얼른 손을 뻗어왔다. 여준도 무의식중에 얼굴로 손을 가져갔다. 미지근한 액체가 입술과 턱을 적시고 셔츠 깃까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턱을 훔쳐낸 손을 들어보니 피였다.

“아니, 갑자기 웬 코피를…. 너 괜찮아? 왜 이래?”

가람이 허둥지둥 휴지 갑을 들고 왔다. 부드러운 휴지를 코에 대고 고개를 숙이며 여준은 그만 웃어 버렸다. 사람이 너무 화가 나면 이럴 수도 있구나. 차라리 시원한 기분이 들었다.

“괜찮아요. 멎겠죠. 그보다 지오 잠시만 봐주세요.”

“아니, 지오 봐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닌데 너 이러고 어딜 간다는 건데? 그것도 이 밤중에.”

“부탁 좀 드릴게요.”

고개까지 꾸벅 숙여 보인 여준이 아이의 등을 가람 쪽으로 밀었다. 아이는 망설이면서도 순순히 다른 사람의 품으로 팔을 뻗었다.

“여준아, 잠깐만. 피 좀 멎으면 가.”

“아니에요. 감사합니다. 지오야, 아빠 다녀올게.”

피 묻은 휴지를 내려 둔 여준이 돌아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길이 한없이 길게 느껴졌다.

‘그걸 같이 노려봐서 어쩔 건데? 도로 한복판에서 싸우기라도 할 거야?’

피는 쉬이 멎지 않았다. 어느새 셔츠 깃이며 앞섶이 온통 붉게 물들어 있었다.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봤지만 하필 오늘따라 손수건이 없었다. 여준은 별수 없이 소매로 코를 틀어막은 채 멀리서 달려오는 택시에 손을 흔들었다.

‘내가 널 무서워했으면 좋겠어?’

생전 처음 겪어보는 거대한 분노를 잠재운 것은 아이의 손이었다.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몸을 채우는 충동, 무엇이든 해치고 엎어 버리고 싶은 마음에 몸을 맡겼을 때 어떤 결과가 따라올지.

아이가 없었다면 참을 수 없었을 것이다. 불을 지르고 목을 조르지는 않더라도, 자신의 인생을 망쳐서라도 그들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야 말았으리라. 하지만 여준은 그럴 수 없었다. 어떤 분노가 일더라도 그 자신의 생, 어떤 제재도 없이 반복될 일상만은 건드려서는 안 되었다. 그랬다가는 아이에게까지 영향이 가게 될 테니까. 아이에게 살인범, 방화범, 폭력범 아버지를 남겨 줄 수는 없으니까.

그래서 참을 수 있었다. 분노에 완전히 잡아먹히기 직전에 멈출 수 있었다. 앞으로도 그렇게 살아가게 될 것이다. 자신을 향하는 그 어떤 부조리나 불합리 앞에서도 그는 침묵하거나 회피하거나 수용함으로써 일상의 평화를 지킬 것이다. 아이가 있으니까.

‘못 참으면? 내려서 주먹다짐이라도 할 거야? 어린애처럼?’

그렇다면, 어쩌면 사현은.

‘선배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사현이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은.

“여기 골목 위로는 못 올라가요.”

택시기사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급하게 택시비를 치르고 내리자 한참 환락에 젖어 든 길 건너 유흥가가 보였다. 불이 피어오르듯 우글우글 들썩이는 네온사인의 행렬을 가만히 바라보던 여준이 돌아섰다. 피는 드디어 멎었지만 셔츠 앞섶이며 소매가 엉망이었다.

바닷가 절벽의 따개비처럼 올라선 집들은 예전 그대로였다. 어둠에 잠겨 든 동굴에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하아, 심호흡을 하자 허연 입김이 흩어졌다.

여준은 천천히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시간은 그 어느 때보다 느리게 흘렀다. 서두르지 않으면 달마저 저물어 버릴 것만 같았다. 어디선가 컹! 커다란 개가 짖었다. 사현이 언젠가 말했었다. 이곳의 개들은 서슴없이 태어나 함부로 자라다 어느 순간 사라진다고. 사람이 먹다 남은 찌꺼기를 받아먹고 혹서와 혹한에 상관없이 집을 지키다 금방 다른 개로 대체된다고.

어째서 이 동네로 왔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사현이 아직 이곳에 거취를 두고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10년 전 두어 번 와 본 것이 다인 집을 이제 와 찾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걸었다. 눈에 익은 듯 낯선 골목길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악에 받쳐 알아들을 수 없는 고함 소리도 터져 나왔다. 여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오르막길을 올랐다. 무엇도 두렵지 않았다. 그저 사현을 만나고 싶었다.

어떻게 하면 너를 그 지난하고 지저분한 굴레에서 꺼낼 수가 있을까? 함께 도망치자 말했을 때 사현은 질색했다. 손톱만 한 기대조차 눈에 담지 않았다. 여준이 절대 그럴 수 없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는 듯이.

“하아….”

숨을 내쉬고 멈춰 섰다. 찬바람에 핏물이 금방 말라붙었다. 길게 트인 오른쪽 길을 멍하니 바라보던 여준이 방향을 틀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붉은 벽돌집이 가물가물하게 눈에 엉켜 들었다.

“…….”

열악하고 좁고 어두운 반지하 셋방, 가파른 계단이 건물 오른쪽에 우물처럼 붙은 구조를 기억하고 있었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조심스레 대문을 밀자 저항 없이 열렸다. 불 꺼진 건물 앞은 한 치 앞을 분간하기 힘들만치 어두웠다. 여준은 피가 묻지 않은 소매를 들어 한 번 더 얼굴을 닦고 계단으로 향했다.

핸드폰 불빛으로 발밑을 비췄다. 터무니없이 높고 좁은 계단이었다. 사현은 아주 어릴 적부터 이곳에 살았다고 했었다. 어쩌면 지오만큼 작았을 때도 그는 이 계단을 오르내려야 했을 것이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쿵, 쿵, 두드렸지만 아무 대답도 없었다. 여준은 조심스레 문고리를 쥐어 비틀어 보았다. 끼이익, 성긴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사현아.”

잠겨 있지 않은 문 너머로 조심스레 불렀다. 당연히 대답은 없었다. 후우, 허공을 보고 숨을 들이마신 여준이 단숨에 문을 열었다. 검고 차가운 공간은 아가리를 강제로 벌린 심해의 생물처럼 보였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켰다. 다행히 전기는 들어오는 듯했다. 텅 빈 공간이 형광등 불빛으로 가득 찬 순간이 되어서야 불법 주거 침입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을 스쳤다.

“형사한테는 뇌물 먹이고, 남의 개인정보 강제 열람까지 한 마당에….”

애써 중얼거린 여준이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은 놀랍도록 10년 전 모습 그대로였다. 방구석에는 낡은 매트리스가 놓여 있고, 그 위로 깨끗한 이불이 반듯하게 접혀 있었다. 현관은 비어 있었지만 신발장을 열어 보니 뒤축을 꺾어 신은 흔적이 역력한 스니커즈 한 켤레가 보였다.

구두를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화장실 옆에 붙은 옷장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셔츠 두어 벌, 바지 두어 벌, 코트 한 벌. 최소한의 옷가지가 가지런히 정리된 모양이 깔끔하고 싸늘했다.

그게 다였다.

“…….”

그 외의 무엇도 없었다.

차라리 비워 놓은 집이라고 믿고 싶었다. 여준은 코를 훌쩍이며 필사적으로 다른 흔적을 찾으려 했다. 그러나 주방, 거실, 화장실까지 샅샅이 뒤져도 최소한의 생활을 위한 가재도구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네가 내 말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찾으려 하는 거지.’

‘아뇨, 선배와 내 사고 지점이 어긋나 있는 거죠.’

지금이라면 그 말뜻을 알 수 있다. 여준은 눈을 감고 고개를 숙였다.

‘두고 가라고 하려 했어요.’

현관에 가지런히 벗어 놓은 구두는 입사 당시 부모님이 사준 물건이었다. 첫 구두는 좋은 물건이어야 한다면서 발 사이즈를 꼼꼼히 재서 주문했었다.

‘나는 선배한테 바라는 거 없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예요.’

여준이 천천히 주저앉았다. 텅 비어 버린 방, 바깥 기온과 전혀 다를 바 없이 춥고 싸늘한 공간. 아무것도 갖지 못한 채 무엇도 바라지 않고 고요히 생존해온 깊은 동굴에, 사현은 왜 이제 와 저 같잖은 구두 한 켤레를 가져다 두고 싶었던 걸까.

“아….”

젊고 예쁜 선배가 아니어도 돼요. 아주 먼 훗날, 허리가 굽고 늙고 초라해져서 누구도 찾지 않는 당신이면 돼요.

“…아….”

그때, 딱 한 번만 만나 주면 안 돼요?

사실은 들렸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모든 말을 담은 눈동자, 숨구멍 하나하나에서 스며 나오는 마음을 여과 없이 느낄 수 있었다. 특별히 귀를 기울이거나 주파수를 맞추지 않아도, 눈을 맞추고 말을 거는 순간 고스란히 가슴을 찌르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그때조차 사현은 말하지 않았다. 좋아한다고.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자신을 계속 만나줄 거란 기대조차 비치지 않았다. 어떤 욕심도 없이 묵묵히 마음만을 쏟아냈다. 여준의 말 한마디면 그가 숨처럼 뱉어내는 죄악을 맨발로 짊어지겠다고.

그런 사현이 10년 만에 처음으로 말한 소원이었다. 아주 먼 훗날에, 누구도 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않는 볼품없는 노인이 되었을 때, 그때 한 번만 만나 달라고.

‘난 그럴 수 없어.’

여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이토록 가진 것이 없는데, 이토록 아무것도 없는데, 그래서 이 세상에 공기처럼 가득 찬 악의와 부조리를 무엇 하나 그냥 넘길 수가 없는 너였는데. 물러서는 순간 심해로 추락하는 생, 첨예하고 날카롭게 벼려진 채 벼랑 끝에 선 네가 처음으로 꺼낸 그 소원이 고작 그거였는데.

고작 그게 뭐라고. 다 낡아빠진 자존심이 뭐라고. 저까짓 구두가 뭐라고….

“사현아….”

손가락 사이로 눈물이 젖어 들었다. 이렇게도 가진 게 없었구나. 이렇게도 텅 비어 있었구나. 그래서 너는 어떤 순간에도 너를 멈출 수가 없었구나. 이 비루하고 외로운 삶에서 오로지 나 하나를 열망했는데, 정작 나를 욕심내지 못해서.

주저앉은 채 한참 눈물만 흘리던 여준은 형광등 불빛이 깜빡거릴 즈음이 되어서야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냉기가 들어 손끝이 바들바들 떨렸다. 현관으로 돌아와 벗어 놓은 구두를 가지런히 정리했다. 맨발로 문밖을 나서자 날카로운 바람이 젖은 뺨을 에고 지났다.

터벅, 터벅, 높은 계단을 한 발씩 오를 때마다 사현을 떠올렸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이 선택이 초래할 그 어떤 결과도 두렵지 않았다. 죄로써 끌어안아야 한다면 죄인으로 살면 그만이었다.

끼이익, 대문이 듣기 싫은 소리를 냈다. 젖은 얼굴을 훔쳐내고 핸드폰을 쥐었다. 달달 외워 놓은 번호를 하나씩 찍어 통화 버튼을 눌렀다. 뚜르르르, 뚜르르르, 건조한 신호는 바다로 깊이 침잠하는 잠수함의 엔진 소리처럼 들렸다.

사현은 받지 않았다. 상관없었다. 여준은 침착하게 걸음을 옮겼다. 차갑고 거친 땅이 발바닥을 아무렇게나 할퀴었다. 스스로 어떤 모양일지 상상하니 우스웠다. 눈물 자국과 핏자국으로 범벅이 된 채 어두운 골목을 걷는 맨발의 남자.

- …….

신호음이 끊겼다. 전화가 연결됐지만 사현은 말이 없었다. 여준은 다쳐가는 발끝에 시선을 고정한 채 말을 뱉어내기 위한 숨을 모았다.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았다.

“…선배?”

목소리는 수화기 너머가 아닌, 떨어뜨린 시선 끄트머리에서부터 감겨들었다.

“…….”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사현은 한 손에 핸드폰을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단정한 정장에 검은 코트 차림이었다. 깨끗하고 반질반질한 구두코에 눈이 닿자 웃음이 나왔다.

“선배, 이게 무슨…. 어떻게 여기….”

사현을 본 이래 이 정도로 당황한 얼굴은 처음이었다. 여준은 핸드폰을 내리려다 아예 놓쳐버렸다. 퍽, 시멘트 바닥에 떨어진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그것이 무슨 신호라도 된 듯이 사현이 여준에게 달려들었다.

“선배!”

허물어지는 여준에게서 차가운 피 냄새가 풍겼다. 사현은 그가 바닥에 쓰러지지 않도록 단단히 붙든 채 얼굴을 살피려 했다. 여준은 고개를 젓고 사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괜찮아. 다친 게 아니야.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 없어.

“선배…?”

“사현아.”

“왜 이래요? 왜 피가…. 좀 놔 봐요, 얼굴…!”

“나 알았어. 네가 무슨 말을 했던 건지.”

내 것은 내 것대로 모아 쥐고, 남은 것을 선심 쓰듯 베푸는 그런 꼴같잖은 애정으로는 안 된다는 거지. 그것만으로는 너를 멈출 수가 없는 거지. 왜냐하면 너에게는 나밖에 없으니까. 그러니까 더더욱, 나를 위해 죽을 수는 있어도 살 수는 없는 거야.

“줄게.”

“…선배, 피.”

“원하는 대로 줄게. 이따위…. 아무 대단할 것도 없는 게 네가 원하는 전부라면.”

이런 게 네게 위안이 된다면. 정말 고작 이런 걸로 괜찮다면. 빛나고 아름다웠던 시절은 모조리 잃어버리고 껍데기만 남아 버린 이 생이, 끝없이 불구덩이로 달려가는 너를 멈출 수 있다면.

“피 나잖아요….”

중얼거린 사현이 여준의 등을 감싸 안았다. 뒤통수를 문지르는 손길에 초조함이 묻어났다. 여준은 고개를 젓고 더욱 강하게 안겨들었다. 그딴 건 아무래도 좋아. 아무래도 상관없어….

“나를 줄게, 사현아.”

나라도 줄게. 그래서 네게 손톱만 한 위안이라도 된다면.

사현의 손끝이 조금씩 떨렸다. 여준은 더듬더듬 그의 뺨을 감싸고 눈을 맞췄다. 사현은 진주조개를 캐낸 소년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스스로 쥔 행운의 가치를 가늠하지 못하는 어린 눈동자가 안타깝게 일그러졌다.

“그러니까 너도 멈춰. 다 그만두고….”

“…….”

“나랑 가자. 그럴 수 있잖아. 나를 위해서 살면 되잖아. 나도 그럴 테니까….”

뺨을 맞대고 속삭이는 말은 겨울을 향해가는 바람에 섞여 차고 부드러운 빛을 띠었다. 사현은 아무 말 없이 여준의 어깨로 이마를 떨어뜨렸다. 허공을 올려다보는 여준의 눈동자가 투명하게 부풀었다. 눈을 깜빡이는 순간 뺨을 타고 사라질 슬픔은 더 이상 그의 말을 제어하지 못했다.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네가 나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 사실만은 단 한 번도…. 의심하지 않았어.”

날은 추웠고, 여준은 맨발이었으며 사현은 가진 것이 없었다. 그러니 뺨을 스쳐 입술에 닿는 체온을 거리낄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

방 안은 금방 따뜻해졌다. 보일러 온도를 있는 대로 올려놓은 사현이 집 안에 존재하는 이불과 옷가지를 모조리 끌어다가 여준에게 덮어 놓았기 때문이다. 여준은 이불 세 겹에 사현이 입고 있던 코트까지 뒤집어쓴 채 눈만 데굴데굴 굴리고 있었다. 사현은 그러고도 성에 차지 않는지 티포트에 물을 올리고 찬장을 뒤지느라 부산스러웠다.

“와서 앉아. 나 이제 안 추워.”

“잠깐만요.”

“진짜 안 추워. 됐으니까 얼굴 좀 보자. 어떻게 생겼는지 까먹겠다.”

제일 먼저 꺼내 놓은 전기장판은 델 듯이 뜨거웠다. 여준은 사현이 안 보는 틈을 타 슬쩍 장판의 전원을 꺼버렸다. 사현은 기어코 새로 씻은 머그컵에 정체 모를 차를 끓인 뒤에야 여준 앞으로 돌아왔다.

“…….”

온통 검게 차려입은 사현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먹으로 그려놓은 인간 같았다. 흐트러진 머리카락 사이 드러난 새카만 눈동자도 마찬가지였다. 여준은 사현이 쥐여 준 머그컵에 손을 녹이며 그 눈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때로 돌아간 것 같네.”

“…….”

“이러고 있으니까.”

“양심 있어요? 나이가 몇인데.”

툴툴대는 핀잔이 간지럽다는 표현인 것도 이제는 안다. 여준은 바닥에 컵을 내려놓고 두 손으로 사현의 뺨을 감쌌다. 사현이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

“선배 손 엄청 차가워요.”

“아, 미안. 잡지 말까?”

“…이리 줘 봐요.”

사현은 긴 한숨을 쉬더니 여준의 팔목을 쥐었다. 둥글게 모아 붙인 두 손바닥으로 사현이 입술을 내렸다. 주인이 손으로 뜬 물을 받아먹는 커다란 개처럼.

“…….”

따뜻한 입김이 손바닥 주름 사이사이로 번지자 간지러웠다. 어깨를 움츠린 여준이 살짝 웃었다. 사현은 아랑곳없이 여준이 손을 움직이지 못하도록 붙잡고는 꼼꼼히 더운 숨을 불어 넣었다. 미소를 띤 여준의 얼굴이 비스듬히 기울어졌다.

“귀신인가 했어요.”

사현이 눈을 깜빡일 때마다 여준의 손목굴로 그의 속눈썹이 스쳤다. 간지러운 감각을 놓치지 않으려면 숨조차 멈춰야 했다. 머리를 덮은 사현의 코트에서는 그가 항상 뿌리고 다니는 향수 냄새가 났다.

“귀신?”

“순간적으로 정말 별생각을 다 했다고요. 이 사람이 어디서 죽어서, 귀신이 돼서 날 찾아왔나 하고.”

“그게 뭐야.”

“웃을 일 아니에요. 선배라면 안 그랬겠어요? 사람이 피범벅이 돼가지고 맨발로 허정허정 걸어오는데, 그것도 이 동네에서.”

그 말에 제 모습을 떠올린 여준이 머쓱하게 웃었다. 창백하게 질려 있던 얼굴을 떠올리자 뒤늦게 미안해졌다.

“말 그대로 간 떨어지는 줄 알았어요. 살면서 그렇게 놀란 적이 없어요. 제발 두 번 다시 이러지 마요.”

진심이 절절히 묻어나는 목소리에 여준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알았어, 잘못했어. 이제 안 그럴게. 사현은 쯧, 혀를 차고 여준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래서 이 피는 다 뭐예요? 정말 어디 다친 게 아니에요?”

“아, 이거…. 진짜 괜찮아. 아까 코피가 좀 많이 나가지고….”

“코피요? 갑자기 왜?”

“엄청 열 받는 일이 있었거든. 너무 화가 나서 눈앞이 시뻘게졌었어. 그랬더니 그 자리 벗어나자마자 펑.”

여준의 얼굴이며 목덜미에 남은 핏자국을 살피던 사현의 눈동자가 딱딱하게 굳었다. 금방 다시 맞춰오는 시선에 서슬 퍼런 냉기가 어려 있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데요?”

“…….”

“어떤 새끼냐고요.”

알면 어쩔 건데? 여준은 묻지 않았다. 이제 와 사현의 충성심을 굳이 시험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한 가지만 확인해 두고 싶은데….”

입술 사이로 말라붙은 핏물이 버석대며 부서졌다. 여준은 눈을 가늘게 뜬 채 사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너, 은아 가족들을 협박하고 있는 거야?”

“…….”

“그게 아니면 왜 그 사람들이랑 연락해?”

눈을 크게 뜬 채 숨을 굳힌 사현이 고개를 돌렸다. 머리를 벅벅 긁는 동작에서 갑갑함이 묻어났다. 여준은 재촉하지 않고 사과의 말부터 덧붙였다.

“바뀐 번호 마음대로 조회해 본 건 미안해.”

“그딴 건 신경 쓰지 마요. 난 당신 폰 데이터를 복사해서 들여다봤으니까.”

“…그랬어?”

무심코 되물은 여준의 머릿속으로 그간 사현의 행적들이 쭉 스쳐 갔다. 폰 데이터를 훔쳐봤다고 하니 오히려 시원하게 설명되는 사건이 많았다. 위기의 순간마다 나타났던 일이나, 영재에 대해 알고 있던 것까지. 무심코 뱉어 놓고 사고 친 강아지처럼 딴청을 부리고 있던 사현이 슬그머니 여준을 돌아보았다.

“화 안 내요?”

“네가 말도 없이 번호 바꾼 게 더 화나는데.”

“…….”

“근데 데이터 복사…? 그런 건 어떻게 하는 거야? 범죄 아니야?”

“그딴 짓이 그럼 합법적인 거겠어요?”

사현이 퉁명스레 대답하자 여준이 흐흐, 웃었다. 순진하게 풀어진 얼굴에 10대 시절 모습이 조금씩 묻어 있었다.

“…어디까지 알고 있어요?”

그래서 확인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준의 눈가에서 웃음기가 씻겨 나갔다. 차분히 가라앉는 눈빛에 벌써부터 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일단은…. 은아가 나를 죽이려고 했다는 거.”

“…….”

“은아 가족들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거…? 이건 긴가민가했었는데, 아까 처가에 가 있는데 네가 전화했길래.”

“…아, 젠장.”

사현이 낮은 욕설을 지껄였다. 슬슬 떡밥 던질 시기가 다가와 걸어본 전화였다. 끊기자마자 다시 전화가 오기에 별생각 없이 받았었다. 그조차 금방 끊어졌기에 의아하게 여기긴 했지만 설마 여준이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 했다.

“너랑 병원에서 만났을 때부터 이상했었어. 집행 유예라니, 절대 그 꼴을 두고 볼 사람들이 아닌데.”

“그거 하나로?”

“그땐 그렇게까지 생각 못 했지. 그런데 은아가 나를 죽이려 했다는 걸 알게 되니까…. 다 맞아떨어지더라고. 왜 은아 가족들이 너를 풀어 줬는지, 왜 은아의 죽음에 대해서 한 번도 나를 의심하지 않았는지.”

“…….”

“은아가 나를 죽이려 했고, 은아의 가족들이 그걸 알고 있고…. 그렇다면 그건 또 어떻게 알게 됐을까. 네 쪽에서 은아의 비밀을 들어 그 사람들을 협박했다는 게 그나마 가능성 있지 않겠어?”

말을 마친 여준이 흠, 하며 숨을 내뱉었다. 틀린 말이 있으면 반박해 보라는 듯이. 사현은 입술을 살짝 물었다 놓고는 턱끝을 긁적였다. 초조한 기색이었다.

“담배 피워도 돼.”

“…실례할게요.”

벌떡 일어나 옷장으로 향하던 사현이 금방 돌아왔다. 여준의 머리에 씌워 놓았던 코트 안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낸 그가 다시 바닥에 주저앉았다. 전에 없이 당황한 사현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조금 즐거워졌다. 여준은 입술 끝을 살짝 말아 올린 채 사현에게 손을 내밀었다.

“나도 줘.”

“싫어요.”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온전한 담배 한 개비를 손가락에 끼워 준다. 여준은 필터를 입에 물고 사현에게 얼굴을 내밀었다. 불도.

“사람을 아주 자연스럽게 부려 먹네….”

“그럼 어떡해. 난 라이터가 없는데.”

치익, 부싯돌이 돌아가며 긴 불꽃이 코끝을 스쳤다. 기도를 지나 폐 안쪽까지 내려앉는 묵직하고 매캐한 연기에 피부가 따끔거렸다.

“…일단 사과부터 할게요.”

“뭘?”

“선배를 과소평가한 거요.”

“…….”

“똑똑한 사람인 건 알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에서 통찰력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알았다면 이것저것 더 철저하게 숨겼을 거예요.”

여준은 대답 없이 연기를 뱉어 냈다. 따지자면 오만진이나 가람의 공으로 돌려야 했지만 그 부분을 설명하자고 굳이 사현의 말을 끊을 필요까지는 없어 보였다. 사현은 담배 한 모금을 더 빨아들이고는 하아, 깊은 한숨을 토해 놓았다.

“유남복 협박하고 있는 거 맞아요. 주기적으로 돈 뜯어내고, 일거리 물어오게 하고 있어요.”

“…….”

“내 형량 줄이려고 선배 일 이용한 것도 맞고요. 이건 내가 한 건 아니지만….”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의 이치가 맞아떨어진 지금, 그의 마음속을 휘도는 것은 시원함과 안도감뿐이었다.

“…또 뭐가 궁금해요?”

동시에 타오른 담배 연기가 금방 좁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곰팡이 자국이 남은 벽지에 새카만 흔적이 새겨진다. 여준은 뒤늦게 아, 하며 사현을 돌아보았다.

“너는 어떻게 알았어? 은아가 날 죽이려 한다는 거.”

사현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야 하는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여준은 담배를 필터 끝까지 태우도록 말이 없는 사현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다 알고서 그런 거지?”

“…….”

“영재는 어디까지 관여한 거야?”

하나씩 풀어놓기 위해서는 너무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사현은 다 태운 담배를 눌러 끄고 머리를 마구 흐트러뜨렸다. 아니, 아니다. 말이 길어지는 건 아무래도 좋았다. 다만 여준이 어디까지 관여하고자 내막을 묻는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러웠다.

“알면 뭐 어쩌게요.”

그래서 퉁명스레 되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여준은 제 몸을 겹겹이 덮은 이불을 풀어헤치고 사현의 눈앞으로 내려앉았다.

“사현아. 나를 좀 봐봐.”

“…아, 싫다고요.”

“또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

“애새끼 안 건드린다고 내가 말했죠.”

“지금 지오 얘기하는 게 아니잖아!”

겨울의 초입, 난방을 있는 대로 돌려놓은 방 안은 손끝이 버석버석 굳어질 만큼 건조했다. 목소리를 높이자 금방 코가 마르고 기침이 나왔다. 사현은 콜록대는 여준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아 눌러 껐다.

“후….”

여준이 탄식했다. 사현은 한 손으로 입가를 괸 채 침묵을 지켰다. 무슨 말이든 찾으려는 몸짓이었으나 여준은 기다려 주지 않았다.

“그럼 이것만 대답해 봐. 너, 나랑 뭘 어쩌고 싶어?”

“…….”

사현이 드디어 고개를 돌렸다. 검은 눈동자에 의아함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생전 그런 말을 들어볼 줄은 상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무슨 뜻인지 잘….”

“원하는 게 뭐냐고 묻고 있는 거야. 내가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어?”

“…….”

“뭘 원해서 이렇게까지 했어?”

여준의 시선이 사현의 흉터로 향했다. 크게 찢어졌다 아문 흔적이 형광등 불빛에 유난히 도드라졌다. 여준은 살면서 살갗을 꿰매 본 경험이 없었다. 팔다리가 부러지거나 크게 다친 적도 없었다. 곧은 몸을 감싼 피부는 여전히 요철 없이 매끄러웠다.

그러나 사현의 얼굴은 거칠었다. 사나운 인상이지만 어리고 부드러웠던 고등학생 때와는 결부터가 달랐다. 얼굴뿐만 아니라 온몸이 자잘한 흉터와 수술 자국으로 뒤덮여 있었다. 사고 당시 내출혈 자리를 찾기 위해 몇 번이나 찢고 바늘을 꽂아댄 상체는 절로 눈을 돌리고 싶어질 정도였다.

“두 번째네요.”

한참이 지나서야 사현이 중얼거렸다. 뭐? 여준이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되묻자 들어 올린 얼굴에 아주 옅은 미소가 어렸다.

“뭘 어쩌고 싶은지….”

“…….”

“뭘 좋아하는지.”

“…….”

“그런 걸 누가 나한테 물어본 게.”

여준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첫 번째는 누구였는데?”

무심코 뱉어 놓고 아차 싶었다. 유치한 추궁으로 들렸을까 겁이 났다. 그러나 사현은 고요하고 정제된 시선으로 여준을 마주 볼 뿐이었다.

“어쩌고 싶은지 말하면 들어줄 거예요?”

다시 시선이 내려갔다. 좀처럼 웃지 않는 입술 끝이 살짝 올라가 있었다. 여준은 그 입꼬리의 행적을 놓칠까 전전긍긍하며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뭐든?”

“할 수 있는 거면.”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었던 것은, 사현이 이 시점에서 이상한 심술을 부리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기 때문이다. 심술을 두르지 않은 사현은 언제나 가장 진심과 맞닿은 말을 차분하게 내뱉고는 했기에.

“혹시 내가 죽으면 그 소식이 선배에게 갈 수 있게 해 놔도 돼요?”

그러니 무슨 말을 들어도 일단 알았다고 할 셈이었다. 무심결에 그래, 두 글자를 만들기 위해 입을 벌리던 여준의 혀끝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뭐?”

“당장 말고요. 아주 나중에라도.”

“…….”

“그리고 선배는…. 내가 죽은 날부터 49일 이후에 태어난 개 한 마리를 입양해 줘요.”

“…….”

“아이를 가지면 더 좋고. 그럴 만한 나이라면요.”

침착하고 구체적인 설명 덕분에 단순한 충동이나 심술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여준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빠르게 깜빡였다. 오랫동안 이어진 침묵 끝에 사현이 돌아보았다.

“그런 얼굴 할 거 없어요. 당장 죽겠다는 게 아니라니까.”

“너….”

“알잖아요. 그냥 나는 원체 다칠 일도 많고 또….”

차근차근 설명을 덧붙이던 사현의 얼굴이 순간 굳어졌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가 얼른 여준의 뒤통수를 쥐었다. 여준은 그제야 입가를 타고 흐르는 미지근한 액체를 느끼고 짧은 기침을 했다.

“선배.”

입가를 감싼 두 손에 핏물이 고였다. 눈앞으로 번지는 붉은 빛에 현기증이 났다. 여준이 앉은 채 비틀거리자 사현은 다급히 그의 상체를 끌어안고 뒤로 눕혔다.

“…읏.”

“손 줘 봐요. 여기 잡아요.”

여준은 사현이 이끄는 대로 제 콧날을 쥔 채 숨을 골랐다. 그대로 욕실로 달려간 사현이 얼마 지나지 않아 따뜻한 물에 적신 수건을 가지고 돌아왔다.

“일어나 봐요. 어지러워요?”

“괜찮….”

상체를 일으키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그대로 수건에 코를 박고 엎드린 여준의 등을 쓰다듬으며 사현이 물었다.

“최근에 감기 앓았어요?”

“…응….”

“그때 생긴 염증 때문에 점막이 약해져 있는 거예요. 별일 아니니까 놀랄 거 없어요.”

스스로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어깨에 닿은 사현의 상체에서 선명한 심장박동이 울렸다. 여준의 눈썹이 푹 내려앉았다. 간신히 고개를 들어 눈을 마주치자 잔뜩 걱정스러운 시선이 뱃속을 에고 들어왔다.

“…농담이었어요. 그렇게 보지 마요.”

“…….”

“해 본 소리라고요. 선배가 하도 세상 심각한 척을 하고 있길래 웃겨서.”

수건은 금방 붉게 물들었다. 여준은 손끝을 꽉 말아 쥐며 목에 고인 핏물을 삼켰다. 내가 이토록 나약해서, 이렇게나 쉽게 흔들리고 깨지는 통에- 너는 얼마나 오랜 시간 모든 걸 홀로 삼켜야 했을까.

“그렇게 할게.”

왜 그래야만 했냐니.

“네 말대로 해 줄게.”

어떻게 대답할 수 있었겠어. 당신이 너무나 약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고.

“대신 누구보다 먼저 알려 줘야 해. 이 세상 그 누구도…. 나보다 먼저 아는 일이 있어선 안 돼.”

“…선배.”

“그렇게 할게. 너 죽으면 장례도 성대하게 치러 주고, 그놈의 개도 입양하고, 애도 낳을게. 뭐든 하나는 너겠거니 생각하면서 가진 거 다 퍼 주고 키울게.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가 같이 있었을 때야.”

“…….”

“내가 모르는 데서,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고 이런 건…. 해당 사항 없어. 나도 이것만은 양보 못 해. 왜냐면….”

왜냐면…. 말을 멈춘 여준이 눈을 꾹 감았다. 어떻게 말을 해야 할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무엇을 더 약속해야 사현을 멈출 수 있을까.

“선배.”

마른 두 뺨으로 사현의 손이 닿았다. 딱딱하고 가칠한 살갗에 눈가가 따끔거렸다. 여준은 마음을 꺼낼 말을 찾지 못한 자들이 모두 그러하듯 잔뜩 일그러진 눈동자로 사현을 바라보았다. 사현은 완전히 잠잠해진 얼굴이었다.

“정말 농담이었어요.”

“…….”

“선배가 웃을 줄 알았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고…. 웃으라고 한 말이에요.”

“…….”

“정말이에요.”

입을 다문 여준이 그새 또 목에 고인 핏물을 삼켰다. 그러자 사현이 뒤늦게 휴지를 풀어다 그의 입가에 받쳐주었다.

“삼키지 말고 뱉어요. 코피 너무 먹으면 탈나요.”

“…경험담이야?”

“맘대로 생각해요.”

사현이 픽 웃었다. 피는 천천히 멎어 들었다. 사현은 여준의 무릎에 두 손을 댄 채 그의 상태가 나아지기를 얌전히 기다렸다. 여준은 아무리 애를 써도 자꾸만 입 안에 고이는 피를 남김없이 뱉어내며 욕지기를 참았다.

“애는 어쩌고 왔어요?”

“학교 선배 집에…. 고등학교 때 선배야.”

“믿을 만한 사람이에요?”

사현의 입으로 듣자니 조금 우스운 질문이었다. 여준이 설핏 웃자 사현은 금방 눈썹을 까딱 올렸다.

“왜 웃어요?”

“너보다야 믿을 만하지.”

“선배 애한테 해코지 안 한다니까요.”

“친자 검사를 해 보려고 해.”

농담의 끄트머리에 불쑥 튀어 나간 본심은 잠시 동안 시선 사이로 흐르는 공기를 붙들어 주었다. 입술을 몇 번 달싹이던 사현이 빈 벽으로 눈을 돌렸다.

“네 말이 맞아. 아무것도 모르는 척 묻고 살 수는 없어.”

“…….”

“나는…. 핏줄 그런 건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내가 이만큼 키웠으니 내 아이라고…. 하지만 이번에 알았어. 머릿속으로 막연히 짐작하는 것과, 실제 사실을 받아들이는 건 완전히 다른 문제야.”

사현은 반응이 없었다. 물끄러미 먼 곳을 바라보는 눈에는 아무런 빛도 들어 있지 않았다. 여준은 겨우 피가 멎은 코끝을 수건으로 닦아 내고 숨을 들이켰다.

“어떤 결과가 나오든 나는….”

“검사씩이나 해 볼 필요가 있어요?”

심드렁한 말끝에 짙은 권태가 묻어났다. 여준은 눈을 껌뻑이다 말고 그에게 고개를 기울였다.

“애 엄마가 아니라고 한 거면 확실하잖아요.”

“알아.”

“그만둬요. 어차피 선배 자식이라면서요. 그럼 내 자식이려니 하고 키우면 되지…. 내가 헛소리하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닌데 뭘 그렇게 일일이 새겨듣고 그래요?”

“그래서 더 확인하려는 거야. 극단적인 예를 들어서 지오가 아프기라도 하면? 같은 유전자를 가진 사람의 도움이 필요한 병이라도 걸린다면?”

“…….”

“나는 그럴 때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지오와 은아 가족들의 끈을 유지해야 해. 내 마음만의 문제가 아니야.”

“끔찍한 소리 말아요. 그런 일 생기면 내가 무슨 수를 써서든 당신 애한테 맞는 인간 구해다 눈앞에 던져 줄 테니까.”

답답한 듯 내지르는 말에는 웃을 수도 없었다. 여준은 침착하게 숨을 고르고 사현의 팔을 잡았다.

“사현아. 혹시나 해서 묻는 건데.”

“또 무슨 소리를 하려고….”

“만약 지오가 내 아이라면.”

사현이 불현듯 여준의 손을 뿌리쳤다. 눈동자가 흔들린 것은 아주 잠깐이었다.

“…가능성이 있는 거예요?”

물으면서도 제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여준은 굳은 얼굴을 쓸어 올렸다.

“날짜는 맞아. 그래서 더욱더…. 은아가 어떻게 그렇게까지 확신을 가지고 있었는지 모르겠어.”

“…….”

뭐라 대답하려던 사현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쪽새의 말이 머릿속을 스친 탓이었다.

“혹시 약을 먹었나, 그 생각도 해 봤는데 은아가 굳이 그래야 할 이유가 없고….”

“…혈액형.”

“응?”

“아니….”

심지어 혈액형도 안 맞는다던데요. 쪽새가 전해온 말은 아마도 영재의 입에서, 영재의 말은 또 은아의 입에서 나왔을 것이다.

“혈액형이 뭐?”

여준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망설이던 사현이 손등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여준의 마음에 싹튼 한 떨기 희망을 미리 꺾어 놓는 게 과연 그를 위한 일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혈액형은…, 맞느냐고요. 그거라도 미리 알면….”

“뭐가? 지오랑 나랑?”

“…….”

“당연하지. 둘 다 A형인데?”

사현의 뺨으로 작은 경련이 일었다. 여준은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런 사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현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간신히 한 마디를 뱉어 놓았다.

“잘못 알았을 가능성은….”

“그럴 리가. 내가 애 데리고 병원 다닌 세월이 있는데.”

먼저 표정이 심각해진 것은 여준 쪽이었다. 사현은 입가를 문지르며 머릿속에 마구잡이로 떠오르는 말들을 하나씩 늘어놓았다. 그 여자 완전 사이코였어요. 자긴 그런 게 너무 재밌대요. 자기 마음에 안 드는 애를 다른 사람 손으로 괴롭히는 게….

“확인해 보려는 데엔 그런 이유도 있어. 아무래도 내가, 어떻게든 내 핏줄이라고 믿고 싶은 마음이 있는 것 같아서…. 나도 결국 그 정도 인간이라는 거지.”

“…….”

“그래도 더 이상은 뭉뚱그리거나 피하지 않을 거야. 모든 사실을 알고, 다 받아들이고, 그래야 너와의 문제도….”

“정말 선배 애라면.”

어느 배를 빌렸든 당신의 피를 받아 태어난 아이라면. 그리하여 당신을 구성하는 피와 살, 세포 하나라도 닮았다면.

“나는 그 애를 선배가 아끼듯이 사랑할 수 있어요.”

“…….”

“당신의 일부라도 가진 아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전부 당신인 듯 대할 수 있어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쏟아내는 진심의 무게에 숨이 막혔다. 여준은 할 말을 잃고 사현을 마주 보았다. 이렇게 쉽게 입에 담아서는 안 되는 가정이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으나, 이미 말은 쏟아졌고 줍거나 닦아낼 수 없었다.

“…그래.”

수명을 다해가는 형광등이 거칠게 깜빡였다.

“그래….”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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