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맞지 않는 구두
“좀 진정됐어요?”
차로 돌아온 사현의 손에는 편의점 커피가 들려 있었다. 여준은 따뜻한 김이 올라오는 종이컵을 가만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사현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컵홀더에 종이컵을 끼워 넣었다.
“대체 무슨 일이에요? 깜짝 놀랐네.”
사현이 습관적으로 안주머니를 뒤졌다. 그러나 손에 쥔 담배를 입에 물지는 않았다. 여준이 앉은 채 상체를 푹 숙인 탓이었다.
“왜 그래요?”
“…발.”
“네?”
“신발 잠깐 벗어도 돼?”
대시보드에 머리를 기댄 여준이 사현에게로 시선을 향했다. 물기 어린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축축하게 빛났다. 사현은 대답 대신 여준을 똑바로 앉혀놓고 그의 발목을 쥐었다. 딱딱한 구두가 얼어붙은 듯 차가웠다.
“이리 줘요.”
여준이 조용히 사현 쪽으로 돌아앉았다. 사현은 그의 구두 뒤꿈치를 쥐어 조심스레 벗겨 냈다. 얇은 정장 양말 차림이 된 두 발을 모아 쥐자 여준에게서 낮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발끝부터 차갑게 굳어 있었다.
“미안…. 차에 탔더니 갑자기 아파서.”
“추운 데 있다가 들어와서 그럴 거예요. 양말 좀 벗길게요.”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조수석 시트에 모로 기댄 그에게 사현은 컵홀더에 들어 있던 커피를 건넸다. 이번에는 순순히 받아든 여준이 두 손으로 종이컵을 꼭 쥐었다.
사현은 여준의 바짓단을 살짝 걷어 양말을 벗겨 냈다. 곧은 발목, 도드라진 복숭아뼈를 지나 딱딱한 뒤꿈치를 쓸어내렸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발등은 상처 없이 매끈했다. 여준은 시선을 내린 채 사현의 손이 발끝에 닿도록 내버려 두었다.
“옷 좀 따듯하게 입고 다녀요.”
“…….”
“살도 없는 사람이….”
중얼거린 사현이 여준의 발끝을 감쌌다. 발가락 끝으로 손바닥의 가장 말랑한 부분이 닿았다. 따뜻하고 부드러운 찰흙 같았다.
“천천히 다시 얘기해 봐요. 형사가 뭘 어쨌다는 거예요?”
“…….”
“답답해 죽겠네…. 애초에 그 형사는 어떻게 만났어요? 이미 종결된 사건이라 웬만해선 코멘트 절대 안 하려고 할 텐데.”
“돈 먹였어.”
속삭이듯 대답한 여준이 종이컵을 입에 가져다 대었다. 커피는 씁쓸하고 밍밍한 맛이었다. 사현은 정성스레 여준의 발끝을 주무르다 말고 어안이 벙벙한 얼굴을 했다.
“뭘 먹여요?”
“이 핑계 저 핑계 대면서 안 된다고 하길래 나한테 내주는 시간만큼의 사례는 꼭 하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나왔어. 백만 원 주니까 그때 조회했던 장인어른 계좌 내역까지 불러 주던데.”
사현이 멍하니 두 눈을 끔뻑였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을 나는 펭귄을 목격한 생태학자 같은 표정이었다. 여준은 그 얼굴을 재밌다는 듯 바라보다 낮게 물었다.
“그렇게 놀라워?”
“…….”
“네가 그랬잖아. 약게 살라고.”
“막살라는 뜻은 아니었는데….”
“그런 게 막사는 거야? 그깟 게 뭐라고.”
“…….”
“아니면 실망스러워? 네가 좋게 보던…. 그런 모습이 아니어서.”
자조적인 말투는 아니었다. 사현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고 히터 온도를 좀 더 올렸다. 여준은 눈을 감은 채 말을 이었다.
“사현아.”
“…또 왜요.”
“너 지오에 대해서 뭘 알고 있어?”
말은 어느 때보다도 쉽게 떨어졌다. 불시에 파고든 공격에 사현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곧이어 떠오른 것은 그간 여준에게 흘려왔던 암시들이었다. 제발 모르기를, 그러나 눈치채기를 바라며 끝없이 쏘아대던 저주에 가까운 말들.
“내가 그런 걸 어떻게 알아요.”
“영재가….”
“모른다고요.”
“영재가 지오….”
감은 눈이 빠르게 젖어 들었다. 사현은 제 얼굴을 가리는 여준의 손에서 종이컵을 빼앗아 들었다. 뜨거운 커피가 위태롭게 찰랑거렸다.
“너 다 알고 있었지….”
“울지 마요.”
“은아도 다 알았던 거지, 알아서 나를….”
“울지 마!”
여준은 간신히 울지 않았다. 그러나 까딱 눈을 깜빡이는 순간 흘러넘칠 설움이었다. 사현은 종이컵을 뒷좌석에 집어 던지고 여준의 팔을 붙들었다. 얼굴을 가릴 수 없게 된 여준은 이를 악물어 말과 눈물을 함께 참는 수밖에 없었다.
“사실이라 한들 그딴 게 뭐 어쨌다고요. 그게 뭐라고 우는 건데요.”
“…….”
“그 씨발년이, 그 애새끼가 뭐라고. 그딴 소리 하면서 내 앞에서 울지 마요. 나한테 아직까지 이렇게 잔인할 필요 없잖아요.”
악에 받친 목소리가 어두운 차 안을 갈기갈기 찢어 놓았다. 여준은 고개를 꺾어 올린 채 자꾸만 비어져 나오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켰다.
“…난 네 이야기를 하는 거야.”
말을 쥐어 짜낼 수 있게 된 것은 쏟아진 커피의 김이 다 식어 버린 후였다. 마른 팔을 으스러질 듯 움켜쥐고 있던 사현이 이를 악물었다.
“사현아, 나는 지오 버릴 수 없어.”
“아무도 당신한테 그러라고 안 해요.”
“그렇게 될 거야. 이 사실 알려지면 나는 절대 지오 지킬 수 없게 될 거야. 그러니까….”
사현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올 때가 온 거라고 생각했다. 여준이 어떤 말을 하든 듣지 않을 셈이었다.
“그러니까…. 네가 지오를 받아들여.”
멀리 신경질적인 경적이 울렸다. 이어 날카로운 헤드라이트가 차체를 훑고 지났다. 사현은 한참이 지난 후에야 눈을 뜨고 여준을 바라보았다. 여준은 무섭도록 고요하고 차분한 눈을 하고 있었다.
“…뭐라고요?”
그래서 되묻는 수밖에 없었다.
“지오는 내 아이야. 쓸데없는 적개심 갖지 마.”
“지금 무슨….”
“농담으로라도 지오를 해칠 수 있다는 뉘앙스 풍기지 말란 소리야. 네가 그러는 한 나는 절대 너를 완전히 신용할 수 없어. 적어도 지오 문제에 대해서는.”
여준의 생각이 어디까지 건너뛰어 있는지를 알 도리가 없었다. 사현은 모자를 벗어 내려놓고 제 머리칼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선배 흥분하면 말이 중구난방 튀는 거 알아요? 제발 진정하고 하나씩 해요.”
“어려운 이야기 아니야. 내가 하고 싶은 말은 그게 다야. 지오를 미워하지 마.”
“…….”
“지오 미워하지 마, 사현아. 내 아이니까….”
사현은 픽 웃었다. 정말 여준의 아이라면 사현은 두말할 것 없이 아이를 사랑했을 것이다. 여준을 지키듯 아이를 지키고 여준을 아끼듯 아이를 귀애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으로선 그럴 수 없었다.
“무슨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애새끼 안 건드려요.”
“내가 지금 아무 이유도 없이 이런 얘기 하는 것 같아?”
“어쩌라고요, 도대체.”
“사현아.”
나지막이 부르는 목소리에는 이미 여러 가지 말이 섞여 있었다. 사현은 여준의 팔을 놓고 눈을 돌렸다. 그러자 여준이 사현의 팔목을 쥐고 쫓아 들었다.
“너 영재를 어떻게 하려는 거야?”
사현은 하마터면 그 손을 거세게 뿌리칠 뻔했다. 그러나 좁은 차 안에서 여준의 어딘가 잘못 부딪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간신히 멈출 수 있었다.
“영재뿐만이 아니야. 뭔가 꾸미고 있는 거지?”
“…….”
“하지 마. 그거 다 그만둬. 그만두고…. 나랑 같이 떠나자.”
꿈에서도 들어본 적 없는 달콤한 소리였다. 사현은 이제 웃을 수도 없었다. 이토록 유혹적인 제안을 입에 담기 위해 ‘원수의 자식을 사랑하라’는 조건을 붙인 것인가.
“나는 내년에 상해로 갈 거야. 너도 같이 가자. 거기서….”
“제정신이에요?”
“거기서 다시 시작해. 너 그럴 수 있어.”
“내가 그 애새끼를 당신 애라고 믿고 떠받들 수만 있으면?”
“지오는 내 아이야.”
“개소리하지 말아요. 뭐? 날 데려가겠다고? 당장의 감정에 취해 일 후회할 짓 저지르면 안 된다는 간단한 사실을 아직도 모르겠어요?”
여준의 손에서 팔을 빼낸 사현이 이마를 거칠게 쓸어 올렸다. 상처가 아프지는 않을까, 여준은 걱정스럽게 그 모양을 바라보았다.
“날 데려가서 어쩔 건데요? 평생 먹여 살려 주기라도 할 건가?”
“못할 것 같아?”
“네. 못할 것 같은데.”
사현이 쉽게 대답했다. 그에게는 여준의 말을 오래 쳐낼 힘이 없었다.
“…너 진짜 무슨 일을 꾸미고 있긴 한 거구나.”
잠깐의 사이를 두고 여준이 탄식했다. 사현은 그제야 그의 유도에 걸려들었던 것을 알고 두 눈을 크게 떴다. 여준은 두 손으로 이마를 싸쥔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어쩌려는 거야? 무슨 짓을 하려고?”
“…….”
“집행 유예 중이잖아. 뭐라도 걸렸다간 너 그 길로 교도소행이야. 알고는 있는 거야?”
“내가 그걸 모를까 봐 친절히 경고해 주러 온 거예요? 참 고맙네.”
비아냥거리는 말에도 여준은 끄떡없었다. 번쩍 고개를 든 그가 다시 사현의 팔을 쥐었다.
“사현아, 나 좀 봐봐.”
“싫어요.”
“한 번만 봐봐. 응?”
보채는 말끝이 길게 늘어졌다. 어깨를 감싸 끌어당기는 손은 강제성이 없었다. 부드럽고 다정하게 부탁하고 있을 뿐이었다. 얼마든지 뿌리치고 쳐내고 무시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현은 그러지 못했다. 여준 역시 사현이 그러지 못하리란 사실을 알았다.
“…….”
눈이 마주쳤다. 여준은 가장 아끼던 장난감을 잃어버린 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상실감, 서글픔, 후회와 책망이 뒤섞인 눈동자에 새벽빛이 깃들었다. 정성스레 빚은 도자기처럼 매끄러운 뺨이 금방이라도 눈물에 젖어 부스러질까 사현은 덜컥 두려워졌다.
“왜 이래요, 나한테.”
무심코 쏟아낸 무력한 말에 다행히도 여준은 웃었다. 창백한 미소는 그러나 얼마 가지 못해 종잇장처럼 일그러졌다. 고개를 떨어뜨린 여준이 제 다리를 움켜쥐는 것과 동시에 사현의 상체가 벌떡 튀어 올랐다.
“선…!”
“…쥐….”
“…….”
“쥐 났어, 발…. 아….”
여준이 괴로운 듯 어깨를 뒤틀었다. 뻣뻣해진 오른발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현은 하마터면 벌컥 내뱉을 뻔한 욕설을 간신히 삼켰다.
“…놀랐잖아요.”
“미안, 으…. 근데 너무 아픈데….”
“똑바로 앉아요. 발 이리 주고.”
툭 내뱉은 사현이 여준의 종아리를 움켜쥐었다. 다른 손으로 발아치를 받쳐 정강이 쪽으로 밀어 올리자 여준이 펄떡대며 몸을 움츠렸다.
“아, 진짜 아파. 잠깐, 잠깐….”
“참아요. 금방 풀리니까.”
“아야, 아야야. 그만해, 아프다니까.”
사현은 아랑곳없이 그의 발등을 덮어 이번에는 반대로 당겼다. 악, 여준은 아예 비명을 지르며 조수석 시트를 잡아 뜯었다. 무릎까지 긴 바늘이 박힌 듯 뻐근한 통증에 등줄기가 섬뜩했다. 바짝 일어선 발끝이 바르르 떨렸다. 찔끔 배어 나온 눈물을 훔쳐내며 사현을 노려보았지만 그는 이제 여준의 발을 가만가만 주무르는 데 집중하고 있었다.
“혈액 순환이 안 좋은 거 아니에요? 겨울에 자주 이래요?”
무슨 일 있었냐는 듯 덤덤한 말투였다. 여준이 못마땅하게 받아쳤다.
“나이 먹어서 그런가 보지….”
“유난은. 마흔이면 노환으로 드러눕겠네.”
인정사정없이 경직된 근육을 풀어낼 때와는 전혀 다른 손길이었다. 힘을 뺀 손끝으로 스치고 지나는 피부가 남김없이 간지러웠다. 여준은 다시 조수석 시트에 옆머리를 기댄 채 그런 사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내리깔린 속눈썹 아래 반사광 없이 검은 눈동자가 깊은 숲에 잠든 작은 샘 같았다.
“사현아.”
“그만 불러요. 왜요.”
“내가 어떻게 하면 날 믿겠어?”
손을 멈춘 사현이 시선을 들어 올렸다. 잠들어 있던 샘은 이제 풀숲에 숨은 야생동물 같은 빛을 띠고 있었다.
“뭘 해 줄 수 있는데요?”
“다….”
“…….”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면 뭐든.”
“그런 말을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선배의 담력이 부럽네요.”
뭘 시킬 줄 알고. 중얼대며 덧붙인 사현이 여준의 바짓단 아래로 손을 밀어 넣었다. 침입과도 같은 움직임에 여준이 흠칫 놀라 어깨를 좁혔다. 사현은 희미하게 웃고 그의 정강이며 종아리를 천천히 주무르기 시작했다.
“잊었어요? 내가 원하는 게 뭔지.”
“…뭐가? 나랑 섹스하고 싶다는 거?”
설마 그걸 잊었겠어? 여준이 미소 짓자 사현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씻겨 나갔다. 손끝에 힘을 주어 쥐던 움직임도 그대로 멈췄다.
“그것뿐이야? 나한테 바라는 거.”
나른해진 눈으로 여준이 물었다. 그 시선에 깃든 다른 질문들 역시 사현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었다. 네가 원하는 게 나를 엎어뜨리고 네 좆을 쑤셔 박는 거야? 그것만 충족되면 내가 말한 조건을 다 지킬 수 있어? 지금 하려는 일을 그만두고 나와 함께 떠날 수 있어? 내 아이를….
“…….”
사현의 눈동자에 퍼런 불길이 일었다.
“…그 애새끼를 지킬 개가 필요해요? 이렇게까지 해야 할 만큼?”
떨어지는 목소리가 섬뜩했다. 뭐? 여준이 되묻기도 전에 그는 여준의 발을 내던지듯 놓고 운전석에 똑바로 앉았다.
“사현아?”
다짜고짜 기어를 내리고 액셀을 짓밟자 끼이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차가 4차선으로 굴러들었다. 뒤에서 달려오던 차 한 대가 미친 듯이 경적을 누르며 상향등을 껌뻑거렸다. 하마터면 시트 아래로 고꾸라질 뻔한 여준이 간신히 중심을 잡고 앉았다.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입 닥치고 있어요. 이대로 아무 데나 처박아 버리기 전에.”
“…….”
속도계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치솟았다. 입이 막힌 여준은 자연히 사현의 질문을 곱씹었다. 애새끼를 지킬 개가 필요해요? 그제야 그가 갑자기 화를 내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현아, 그런 뜻 아니야.”
“닥치라고 했어요.”
“지오 얘기랑 네 얘기는 별개야! 내가 말하는 건, 네가 지오한테 위해를 가할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은 널….”
“그러니까 내가 그 애새끼한테 꼬리 내리고 배 보이기 전에는 쥐뿔도 없다는 뜻이잖아? 뭘 잘못 이해했다는 건데요?”
삐삐삐삑, 안전벨트 경고등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사현은 주먹을 핸들에 쾅 내리찍으며 숨을 몰아쉬었다.
“아무것도 안 바란다고 했잖아요. 허비되고 마모되는 동안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으면 만족할 수 있다고! 하지만 오로지 당신 하나야.”
“…사현아.”
“당신이 죽으라면 지금 당장 접시 물에 코 처박고 죽을 수 있고, 사지를 잘라서 바치라면 그럴 수 있어. 산 채로 불구덩이에 걸어 들어가라 말해도 그렇게 할 거야!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당신이 사랑하는 걸 나도 같이 사랑할 수는 없어!”
“…….”
“당신도 나한테 그런 걸, 그런 것까지 바랄 수는 없는 거잖아요. 나에 대한 연민이 손톱만큼이라도 있다면!”
비명 같은 질책이 여준의 뺨을 할퀴고 지났다. 죽음보다 낮은 침묵이 감도는 동안 차는 차곡차곡 어둠을 깎아내며 달리고 있었다. 여준은 혀끝까지 치민 수많은 말을 하나씩 삼키고 사현의 팔을 감싸 문질렀다.
“…알았어.”
이제라도 바로잡을 수 있는 일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내가 잘못했어.”
불현듯 머리 위로 떨어진 믿음에 어리석게도 눈이 멀어서.
“그러니까 제발 진정해. 속도 줄여, 사현아.”
사현의 뺨으로 파르스름한 핏줄이 돋았다.
차는 파킹락을 타고 넘을 듯 거칠게 멈춰 섰다. 여준이 허둥지둥 차에서 내렸지만 이미 사현은 엘리베이터 앞까지 닿은 뒤였다. 사현이 늘 머물던 그 호텔이었다.
“또 여기서 지내? 방 뺐다더니.”
“따라오지 마요.”
애써 붙인 말에는 차가운 거절이 돌아왔다. 여준은 못 들은 척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사현은 한숨을 내쉬고는 카드키를 대고 층 번호를 눌렀다.
“경고했어요. 돌아가라고.”
“미안해, 그런 식으로 받아들일 줄 몰랐어. 내가 하려던 말은….”
“알아요. 혼자 열폭한 거 쪽팔려서 이러는 거니까 좋은 말로 할 때 제발 가요.”
“…….”
“방까지 따라오면 무슨 꼴 당할지 보장 못 해요.”
새파랗게 굳은 뺨은 손대면 서리가 묻어날 듯 차가워 보였다. 띵,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여준은 열린 문 너머로 휑하니 가 버리는 사현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정신을 차린 것은 눈앞에서 문이 닫히기 시작했을 때였다. 얼른 문틈으로 팔을 끼워 넣어 빠져나왔다. 이미 복도 끝까지 다다른 사현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뛰어야 했다. 여준이 저릿한 통증이 남은 발을 절뚝이며 사현을 불렀다.
그러면 돌아볼 것을 알고 있었다.
“…….”
언제나처럼 안타깝게 녹아 버린 눈동자가.
“사현아.”
마침내 다다라 손끝이 닿았을 때, 사현은 문을 열었고 그 안으로 여준을 쑤셔 넣었다. 어두운 방 안으로 휘청인 여준의 코앞으로 두꺼운 문이 무겁게 닫혔다. 부딪친 품에서 찬바람에 희석된 향수 냄새가 났다. 코끝으로 편안하게 스며드는 나무 향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읏.”
센서등은 금방 꺼졌다. 여준을 새카만 방 안으로 떠미는 손길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금방 어딘가에 걸려 넘어질 것 같아 여준은 저도 모르게 사현의 팔을 꽉 쥐었다. 방 구조가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잠깐만….”
딱딱하고 거친 손이 여준의 재킷을 벗겨내고 넥타이를 잡아 뺐다. 벌어진 와이셔츠 깃 사이로 박혀 드는 이가 날카로웠다. 아, 하며 주저앉으려던 여준이 그대로 쓰러졌다. 차가운 카펫이 뒷목을 간지럽혔다.
“사현아.”
사현이 다급히 여준의 바지 버클을 풀어냈다. 여준은 어둠을 더듬어 그의 뺨을 쥐고 입술을 가져다 대려 했다. 그러나 바지와 브리프가 한꺼번에 끌어 내려지고 무릎이 덜컥 들린 것이 먼저였다.
“사현아, 잠깐만. 천….”
찬 공기에 드러난 피부가 소름으로 덮였다. 무릎 사이로 사현이 철컥대며 제 바지 버클을 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이를 꾹 문 채 발에 걸려 있던 바지와 브리프를 빼냈다. 그러자 사현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발목을 쥐어 어깨에 걸어 놓고 다짜고짜 밑을 맞추려 했다.
“으…!”
여준이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뻣뻣한 구멍을 억지로 파고들던 살덩이가 엉덩이 골 사이로 미끄러졌다. 그러자 사현은 여준의 골반을 으스러뜨릴 듯 쥐고 허리를 밀어붙였다. 빠듯하게 벌어지는 구멍 주변으로 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여준은 허리를 뒤틀며 사현의 어깨를 마구 밀어내기 시작했다.
“그만, 잠깐만. 이러다…. 흐읏.”
“그만둘까요?”
사현의 목소리에 웃음기가 묻어났다. 말을 잃은 여준의 관자놀이로 눈물 한 방울이 빗물 같은 궤적을 그렸다.
“그만두라면 그만둘게요. 선배가 일어나서 옷 챙겨 입고 나갈 때까지 건드리지 않을 거고요.”
이대로 계속하든지 그만두든지, 둘 중 하나뿐이라는 이야기였다. 사현의 어깨를 쥐고 있던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여준은 맥없이 미끄러진 손을 바닥에 댄 채 눈을 감았다. 사현은 상체를 낮춰 여준의 머리 양옆으로 팔꿈치를 짚고 그의 뒤통수를 감쌌다. 단단히 일어선 기둥이 파고들기 시작하자 여준의 등줄기가 허공으로 떠올랐다.
“…윽….”
피가 몰려 붉어진 뺨에 식은땀이 흠뻑 배었다. 간신히 바닥을 디딘 발부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사현은 여준의 눈가를 핥고 입술을 맞물었다. 벌어진 입 안은 침이 바짝 말라 있었다. 말려 들어간 혀를 끌어내며 입천장을 문질렀다. 밭은 신음성조차 내지 못하고 굳어 버린 몸이 차가웠다.
“아파요?”
여준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조차 할 수 없는 상태라고 봐야 옳을 듯했다. 위태로울 정도로 팽팽하게 벌어진 구멍은 사현이 움직일 때마다 잔뜩 겁을 먹고 조여들었다. 사현이 구멍 주위를 덧그리듯 문질렀다. 그때마다 여준의 아랫배가 움푹 패었다 판판하게 풀어지길 반복했다. 짓눌린 숨만 힘겹게 내쉬던 여준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서워.”
“뭐가요.”
“찌, 찢어질 것 같아.”
“그렇게 쉽게 안 찢어져요. 해 봐서 알잖아요.”
귓전에 키스하며 달랬지만 한 번 가빠진 호흡은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얄팍한 가슴이 거칠게 들썩였다. 사현은 여준의 귓바퀴를 천천히 핥아 올리며 그의 등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하아….”
여준이 천천히 긴 숨을 뱉었다. 바짝 힘이 들어가 있던 양 무릎이 느슨하게 내려앉은 것도 그때였다. 사현은 여준의 귀를 물어뜯으며 한 번에 허리를 박아 넣었다.
“…-!”
바짝 일어선 손끝이 허공을 할퀴었다. 입을 벌린 채 덜컥 고개를 넘긴 여준은 그대로 한참을 소리조차 내지 못한 채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희미한 빛이 스미는 창이 보였다. 빠듯하게 열린 구멍 주위로 닿는 체모 하나하나가 생생했다. 여준이 허우적대며 사현에게 매달렸다. 목을 감싸 안고 이마를 파묻자마자 뱃속에 불씨가 떨어진 듯 열이 올랐다.
“…아…!”
마침내 터져 나온 비명에 사현의 미간도 와락 구겨졌다. 아, 아아, 아! 쭉 밀려 나갔다가 가차 없이 파고든 살덩이는 한 번도 잊은 적 없는 길을 가듯 배 속 가장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왔다. 여준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일어선 페니스 끄트머리가 사현의 복근을 스쳤다.
“아파, 사현아. 너무, 아프…. 흣.”
등줄기가 찌릿하도록 치고 올라오는 쾌감과 두려운 통증이 마구잡이로 뒤섞였다. 바짝 말랐던 혀끝으로 침이 돌았다. 체온이 끝도 없이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땀이 배어난 살결은 말랑하게 풀어져 사현이 닿는 자리마다 그에게 감겨들었다.
“…아아, 응, 그만…. 아!”
송곳니에 긁힌 귓바퀴에 피가 맺혔다. 꽉 감은 눈가까지 화끈거렸다. 두방망이질치는 심장에 가슴이 아플 지경이었다.
“아….”
여준의 손이 사현의 등줄기를 타고 미끄러졌다. 사현은 그가 뒤통수부터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강하게 끌어안았다. 꽉 맞물린 밑이 땀과 체액에 젖어 움찔대며 조여들었다.
“힘 좀 빼요.”
“…흣….”
“선배 다치게 안 해요. 알잖아요.”
“말은….”
뭐라 타박하기도 전에 찢어진 귓바퀴에 따뜻한 혀가 닿았다. 정성스레 핥아 올리는 움직임은 오래 헤어져 있던 충견처럼 애틋했다. 하아, 밭은 숨을 토한 여준이 사현의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복수 겸 물어뜯어 줄 요량이었으나 혀끝에 닿는 거친 피부에 놀라 그조차 할 수 없었다. 그사이 사현은 여준의 허리를 고쳐 안고 느긋한 삽입을 반복했다.
“으응….”
두툼하고 딱딱한 살덩이가 들락거릴 때마다 체온에 눅진해진 구멍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스스로 사현에게 매달리는 느낌에 여준의 뺨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반사작용일 뿐이라고 어디에든 변명하고 싶었지만 피스톤질에 열중한 사현은 들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만 좀 조여요.”
“그게, 지금, 맘…, 대로…. 하앗.”
“착각하잖아요.”
뭘? 여준은 되묻지 못했다. 그저 땀에 젖은 눈을 들어 올려 그를 마주 보았을 뿐이다. 어슴푸레한 빛 정도로는 사현의 표정을 읽을 수 없었다.
“좋아서 이러는 것 같잖아.”
그러나 잔뜩 침울해진 목소리가 들렸다.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는 손끝의 진동을 느낄 수 있었다. 여준은 두 손으로 사현의 뺨을 쥐었다. 뺨 한가운데까지 이어진 흉터가 선명하게 느껴졌다.
“…이딴 게 뭐라고.”
여준이 중얼거렸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그저 섹스일 뿐인데.
“좋으면 안 될 이유는 또 뭐 있어.”
사현의 눈동자에 불이 번뜩였다. 멀쩡히 말을 자아낼 수 있던 것도 그 순간까지였다.
***
세 번까지는 기억이 났다. 등허리가 아파 도저히 견딜 수 없으니 제발 침대에서 마저 하자고 애원했던 것도. 이러다 통째로 잡아먹히는 게 아닌가 싶을 만큼 게걸스러운 침입은 새벽빛이 창가에 비칠 때까지 반복되었다.
“…….”
정신을 차린 것은 따뜻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허벅지 안쪽을 쓸어내렸을 때였다. 번쩍 눈을 뜬 여준이 상체를 일으켰다. 동시에 수건을 들고 있던 사현과 눈이 마주쳤다.
“…아.”
탄식한 여준이 도로 드러누웠다. 사현은 말없이 하던 일에 집중했다. 여준의 오금을 쥔 채 허벅지에 말라붙은 정액을 정성스레 닦아 내는 움직임은 차분하고 고요했다. 끝없이 몰아치던 욕망의 주인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을 만큼.
“너 가끔 진짜 사이코 같아….”
여준이 웅얼거리자 진지하게 손을 놀리던 사현이 픽 웃었다.
“가끔만요? 평가가 후하네.”
“사이코 같다는데 자랑스러워?”
“만만하다는 말보다는 낫네요. 다리 들어 봐요.”
그게 어디가 낫다는 거지. 여준에게 있어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대화로 해결되지 않는 갈등은 피하는 게 답이었다. 쓸데없고 야만적인 자극에 일일이 가시를 세우고 달려드는 사현을 이해할 수 없는 이유였다.
“만만하게 보이는 게 싫어?”
“그런 거 좋아하는 사람도 있어요?”
“나한테도 그러냐는 말이야.”
“…….”
“내가 널 무서워했으면 좋겠어?”
그래서 자꾸 거칠게 구는 거야? 여준이 잠잠한 시선으로 사현을 내려다보았다. 사현은 말없이 일어나 욕실로 향했다. 한참 후에야 새로 적신 수건을 들고 돌아온 그가 여준에게 손을 내밀었다. 팔 줘요.
“선배는 가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질문을 해요.”
“네가 내 말에서 너무 많은 의미를 찾으려 하는 거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는데.”
“아뇨. 선배와 내 사고 지점이 어긋나 있는 거죠. 선배는 전혀 실감하지 못하고 있어요. 내가….”
말은 금방 끊겼다. 입을 다문 채 눈만 깜빡이던 사현은 곧 여준의 팔을 살살 닦아 내기 시작했다. 간지럽고 따뜻한 감각에 잠시 쫓아냈던 잠이 도로 쏟아졌다. 여준은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사현의 말꼬리를 잡아 물었다.
“내가?”
“됐어요.”
“…응?”
“말 안 할래요.”
여준의 시선이 나른하게 가라앉았다. 사현은 수건을 반대로 접어 그의 목덜미와 쇄골, 어깨를 차례로 문질렀다. 마른 상체는 온통 잇자국과 울혈로 뒤덮여 있었다. 수건이 스칠 때마다 여준의 손끝이 움찔대며 튀어 올랐다.
“아파요?”
“좀 따가워….”
“선배 꼴도 웃기네요. 그러게 곱게 말할 때 갔으면 될걸.”
툭 내뱉은 사현이 침대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러지 못한 것은 여준의 손이 그의 팔목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갔으면?”
“…….”
“그 뒤로 다시 볼 수 있긴 한 거였어?”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여준의 손을 떼어 냈다. 여준은 굴하지 않고 다시 그의 팔을 움켜쥐었다.
“상해 이야기 농담 아니야.”
“그만 해요.”
“뭐가 필요해? 어떻게 해야 해? 어떻게 해야 너….”
그 지난하고 지저분한 굴레에서 나올 수 있겠어? 여준의 질문은 끝을 맺지 못했다. 제법 거칠게 그의 손을 뿌리친 사현이 침실을 나가 버린 탓이었다. 어둠 속에 남겨진 채 한숨짓던 여준이 몸을 일으켰다. 쓰라린 몸에 나이트가운을 두르고 나서자 소파에 파묻힌 채 맥주캔을 홀짝이는 사현이 보였다.
“하여간 술이고 담배고 엄청 좋아해….”
중얼거린 여준이 미니바를 열었다. 과일주스와 탄산음료 따위가 가지런히 늘어선 모양을 훑던 손끝이 종이 팩으로 된 망고 주스에서 멈췄다. 종이 팩을 쥔 여준이 그것을 한참 들여다보고 있자 사현이 드디어 말을 건네 왔다.
“필요한 게 없어요?”
“아니…. 그게 아니고, 예전에 여행 가서 먹었던 거라 신기해서.”
웃으며 대답한 여준이 사현을 향해 주스를 흔들어 보였다. 사현은 흥미를 잃은 얼굴로 빈 캔을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희한하네. 이거 대만 편의점에서 파는 건데 어떻게 호텔 미니바에 있지?”
“외국인 먹으라고 넣어 뒀나 보죠.”
“그렇겠지…. 맥주 새 거 하나 줘?”
반사적으로 대답하려던 사현이 천천히 입을 다물었다. 지나치게 일상적인 대화가 순간 낯설게 느껴졌다. 여준은 개의치 않고 캔 하나를 더 꺼내 사현에게 건넸다.
“…….”
무심코 캔 뚜껑에 손을 가져간 사현이 멈칫했다. 받아 들고 보니 사과 주스였다. 보란 듯이 한쪽 눈썹을 찌푸렸지만 여준은 못 본 척 그의 옆자리에 주저앉았다.
“아, 내 허리…. 완전 아작난 것 같은데.”
바닥을 뒹구는 동안 굳어 버린 등허리가 딱딱하고 뻐근했다. 상체를 숙인 채 제 허리를 두드리던 여준이 슬쩍 고개를 들었다. 사현은 주스 캔을 내버려 둔 채 담배를 빼 물고 있었다.
내리깐 시선 끝에 라이터 불이 타올랐다. 매끈한 필터를 부드럽게 물고 빨아들이는 움직임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다. 피어오른 연기가 안개처럼 흩어졌다. 여준은 그 모습에서 눈을 떼지 않으려 소파 등받이에 옆머리를 기댔다. 몇 시간 전의 격정이 모조리 꿈같았다. 이미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듯 느껴졌다. 호텔을 나섰을 때 이미 세상이 멸망해 있다 한들 놀라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대학 다닐 때 학생회를 했었는데.”
컴컴한 입 안에서 도망쳐 나오듯 트인 말이었다. 연기를 뱉던 사현이 느릿하게 돌아보았다.
“입학하자마자 어쩌다보니 과대를 하게 돼서…. 그대로 입회 추천 받고 들어간 거였어. 2학년 때 얼떨결에 부회장으로 출마했는데 당선되는 바람에 1년 그대로 활동했거든.”
“선배답네요.”
“솔직히 너무 힘들더라고. 고등학교 학생회장 일에 비할 게 아니었어. 성적 관리도 해야 하고 자격증 공부도 해야 하는데 매일같이 학생회 출석하면서 온갖 잡일 다 도맡아 하려니까…. 2학기쯤 가서는 이러다 죽겠다 싶더라.”
“…….”
“거의 매일 학교 나갔던 것 같아. 어느 정도였냐면 아예 학회실에서 잘 때가 많았어. 집까지 다녀올 시간이 없는 거야. 그래서 한 번은 술 마시다 말고 그때 학생회장 하던 선배한테 공부할 시간이 너무 부족해서 좀 불안하다고…. 그런 고민 상담을 했는데.”
“…….”
“그 선배가 갑자기 소주병을 깼어.”
갑작스러운 전개에 사현이 두 눈을 둥글게 떴다. 여준은 다시 떠올려도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미간을 깊이 찌푸리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갑자기 병목을 거꾸로 쥐고 벽에다가 내리찍는 거야. 그러면서 하는 말이 뭐라더라, 너는 학자금 빚에 허덕이면서도 불만 없이 학생회 일 전념하는 임원들이 보이지도 않냐 그랬나….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서 깨진 소주병을 휘두르니까 여자애들은 놀라서 울고, 후배들은 어떻게 나서서 말리지도 못하고…. 난리도 아니었어.”
“…왜 그런 건데요?”
“말 그대로야. 집에 돈 있어서 알바도 안 하는 게 그깟 학생회 일 좀 하는 게 뭐 힘들다고 불평이냐 이거지.”
“그게 깨진 병 쥐고 윽박지를 일이에요?”
“아마 평소에 내가 마음에 안 들었던 거겠지. 취한 핑계로 오버해서 기 좀 꺾어 놔야겠다 뭐 그런 거 아니었을까….”
회장은 다음 날 여준에게 두 손을 모아 쥐고 사과했다. 미안하다, 내가 가끔 그렇게 술 들어가면 미칠 때가 있다. 단체 채팅방에도 몇 번이나 사죄의 말을 써 놓았다. 그러자 학생회 사람들은 여준의 반응을 기다리기 시작했다. 사과하잖아. 받아 주고 마무리하자. 다시 평화롭던 그 분위기로 돌아가자.
“이름이 뭔데요?”
생각에 잠긴 와중에 덤덤하게 던져진 질문에 하마터면 여준은 별생각 없이 그의 이름을 입에 올릴 뻔했다. 얼른 되삼키고 노려보자 사현은 어느새 다른 곳을 보고 있었다.
“…알아서 뭐 하게.”
“뭐 어쩐다고요. 그냥 궁금하다는데.”
“몰라. 까먹었어. 대학 때 알던 사람 이름을 어떻게 일일이 기억해.”
“아쉽네.”
어디까지가 농담인지 알 수 없는 반응이었다. 여준은 우유 팩 뚜껑을 쥐고 꼼지락대며 애써 화제를 돌렸다.
“아무튼 그랬었는데, 그해 학생회 임기 끝나기 전에 다 같이 여행을 가게 됐거든.”
“그 사람이랑요?”
“다 같이 말이야. 학생회 임원들끼리 이리저리 날짜 맞추고 보니 여섯 명인가 그랬어.”
“비위도 좋네….”
“어디로 갈까 고민하다가…. 그때 한참 유행하던 여행 프로에 대만 여행이 나왔거든. 다들 그거 보더니 대만 가자, 가서 천등도 날리고 영화 촬영지도 보고 뭐 그러자…. 그렇게 된 거야.”
사실은 가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댈 때마다 회장은 악착같이 여준의 조건을 맞추겠다고 매달렸다. 임원들은 하나같이 추억을 만들고 싶어 했다. 그래야만 지난 1년의 시간이 대단한 가치를 갖게 된다는 듯이.
“그래서 2박 3일 일정을 나름대로 열심히 짰어. 중국어 할 줄 아는 사람도 두 명인가 있었고 다들 영어는 어느 정도 되니까…. 패키지 말고 자유 여행으로 가자고 해서 호텔 잡고 항공권 잡고 급하게 준비했지.”
“그것도 다 혼자 떠맡아 하셨다 이거네.”
“진짜 피곤하더라. 단체 여행에서 가이드 포지션 맡으면 더 이상 여행이 아닌 거 알아? 어디 갈 때마다 다들 주르르 늘어서서 내 얼굴만 쳐다보는데 다 때려치우고 귀국하고 싶더라고.”
여준이 어휴, 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사현은 제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빼내 그에게 내밀었다. 망설이던 여준이 필터 끝을 살짝 물었다.
“그러다가 그래, 그놈의 천등을 날리러 가게 됐는데…. 그게 핑시선이라는 경전철인지 기차인지 뭐 그런 걸 타고 가거든. 루이팡 역에서 징통 행 핑시선을 타고 중간에 내리는데 이 열차 배차 간격이 되게 커서 시간을 잘 맞춰야 해.”
한껏 빨아들인 연기는 밍밍하고 씁쓸한 맛이었다. 여준은 후우, 긴 숨을 토해 놓고 뒤통수를 긁적였다. 사현은 말없이 여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튼 핑시선이 출발하는 루이팡 역까지는 어찌어찌 갔는데, 거기서 회장이 화장실 들르겠다고 가더니 돌아오질 않는 거야. 열차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소식이 없으니까 초조해서 찾으러 갔지. 근데 화장실에도 없고…. 그러다 열차가 왔어. 회장을 못 찾았으니 당연히 출발은 못 할 거라 생각해서 천천히 플랫폼으로 돌아갔지. 근데 내가 뭘 봤는지 알아?”
“말 안 해도 알 것 같네요.”
“그치? 회장을 포함한 일행이 모조리 열차에 올라타서 문밖을 기웃거리는 장면이었어.”
여준은 검지와 중지를 구부려 세운 채 허공을 휘적거렸다. 마치 그 공간에 배은망덕한 인간들이 가득한 열차가 지나가고 있는 듯이.
“날 발견하자마자 빨리 뛰어오라고 소리를 질러 대는데, 문이 이미 닫히고 있는데 그게 말이 돼? 결국 열차는 출발하고 혼자 그 역에 남겨졌어. 다음 열차가 오려면 한 시간 삼십 분이 남았는데.”
“회장이 선배 엿 먹인 거예요?”
“그건 아니고 길이 엇갈린 것 같아. 나중에 변명이랍시고 한 소리가 다른 칸에 내가 타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대. 이러니저러니 해도 그 열차 놓치기가 싫었던 거겠지. 회장이나 임원들이나.”
2학기를 마친 시기였고, 겨울의 낮은 터무니없이 짧았다. 홀로 남은 플랫폼은 곧 어둠에 먹혀들었다. 스물셋의 여준은 홀로 벤치를 차지하고 앉은 채 먼 하늘을 바라보았다.
“사람들한테 계속 문자 오고 전화 오고…. 택시 잡아서 타고 오라면서. 그래도 상관없긴 했을 거야. 그렇게 먼 거리는 아니었거든. 근데 그러기가 싫었어. 허탈하기도 하고, 꼭 가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사람을 그따위로 낙오시키고 가 버린 게 괘씸하기도 하고. 그래서 화가 나서 씩씩대면서 앉아 있었어.”
“…….”
“그 와중에 비까지 오더라. 진짜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였어. 마음은 좀 풀렸지. 비가 이렇게 와서야 천등이고 나발이고 말짱 도루묵이겠다 생각하니까.”
여준이 낮게 소리 내어 웃었다. 담배는 몇 번 태우기도 전에 반 토막이 났다. 손이 데지 않도록 엄지와 검지 끝에 쥔 채 마지막 한 모금을 빨아들였다. 그러자 자연스럽게 다가온 사현이 그의 손에서 담배를 받아 재떨이에 눌러 껐다.
“그래서 그냥…. 비가 와서 택시 안 잡힌다고, 먼저 숙소로 돌아가 있겠다고 했어. 그러고 나서 시내로 가는 열차에 타려고 플랫폼을 건너갔거든. 다음 차가 이십 분 뒤였나…. 근데 이십 분이 지나도, 삼십 분이 지나도 차가 안 왔어. 비 때문에 딜레이된다는 안내 방송만 대여섯 번은 들은 것 같네.”
“지루했겠네요.”
“그게 그렇지가 않았어. 신기하게도.”
말을 멈춘 여준이 다시 망고 주스 팩 따기에 집중했다. 물렁한 종이 팩은 한참을 꼼지락대도 좀처럼 시원하게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보다 못한 사현이 손을 내밀었다. 줘 봐요.
“내가 할 수 있어.”
“해 준다 할 때 줘요.”
빼앗다시피 종이 팩을 가져간 사현이 양 주둥이를 쥐고 힘껏 벌렸다. 종이 팩은 경쾌한 소리를 내며 활짝 열렸다. 동시에 코끝이 찡하도록 단 냄새가 풍겨 올랐다. 차가운 공기, 건조한 온풍기 바람과 담배 연기만이 가득했던 공간에 처음으로 퍼진 생기였다.
“아무튼…. 멍하니 열차 기다리는데 갑자기 배가 고픈 거야. 그래서 별생각 없이 가방을 뒤져 보니까 아침에 편의점에서 사 놓은 이 주스가 있었던 거지.”
“…….”
“의자에 앉아서 홀짝홀짝 마셨어. 해는 완전히 져서 어두운데 비는 엄청나게 내리고…. 신기한 게 그 와중에 하늘이 완전 구름에 가리지는 않아서 달이 보이더라.”
멀리 광산 마을이 있다고 했다. 달빛을 머금은 구름 한 조각이 깃발처럼 걸린 산등성이를 바라보며 저 안에 탄광이 있을까, 그런 생각을 했다. 하루가 끝나가는 시간, 끝없이 내리는 비, 고요하게 가라앉은 기차역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그냥…. 그때.”
“…….”
“편했던 것 같아.”
아는 사람이라곤 없었다. 간혹 스쳐 가는 말은 언어가 달랐다.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공간, 고요한 레일은 어둠에서 뻗어 나와 어둠으로 사라졌다. 주스는 끈적끈적하고 들척지근했다. 그 찜찜한 맛이 아니었다면 꿈이 아닌가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사현을 떠올렸었다.
“…그냥 갑자기 생각나네. 그때 일이.”
타인의 호의를 얻기는 쉬웠다. 하지만 감정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그래서 이거 마실 거예요?”
어렸던 여름날, 사현을 만날 때는 그런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다.
“마셔 볼래?”
“아뇨.”
그의 마음을 의심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나도 안 마실래.”
“뭔데요…. 왜 꺼내 온 거야.”
“너 마시라고. 넌 항상 당분이 부족해 보여.”
“누가 누구더러….”
내미는 주스를 멀찍이 밀어낸 여준이 소파에 모로 드러누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사현은 재떨이며 음료수를 한쪽으로 치워 두고 돌아왔다.
“들어가서 더 자요. 아직 다섯 시밖에 안 됐어요.”
“아냐, 집에 들렀다 나가려면 그만 가야 돼.”
“연휴인데 출근해요? 여기서 가도 되잖아요.”
“그럴 셈으로 왔는데 네가 옷을 다 망쳐 놨잖아.”
슈트 한 벌이 사정없이 구겨진 데다 셔츠 단추는 있는 대로 뜯겨 나갔다. 호텔에서 수습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다. 아무렇게나 걸어 놓은 여준의 옷을 눈짓한 사현이 소리 없는 한숨을 쉬었다.
“후회돼?”
그 모양을 가만히 보던 여준이 물었다. 사현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돌아보았다.
“급하게 굴 거 없었잖아. 얌전히 옷 벗어서 개켜 두고 했으면 이 시간에 푸닥거리 안 해도 되는 건데.”
“그게 귀찮아서 이러는 걸로 보여요?”
“응.”
“…옷이나 입어요. 데려다줄 테니까.”
옷이라고는 해도 엉망이 된 슈트 한 벌과 코트가 다였다. 주섬주섬 껴입고 나니 벌어진 셔츠 앞섶에 목덜미가 휑했다. 차 키를 챙기다 말고 그런 여준을 바라본 사현이 쯧, 소리 나게 혀를 찼다.
“괜찮아. 차 타고 바로 앞에서 내릴 건데, 뭐.”
그의 액션을 편할 대로 이해한 여준이 웃으며 말했다. 사현은 눈에 불을 켜고 옷걸이를 헤집다 말고 물었다.
“넥타이는 어디 있어요? 깃이라도 졸라매고 가면 좀 낫잖아요.”
“난 모르지. 네가 어디다 던져 버렸겠지.”
“…….”
여준이 과장된 동작으로 어깨를 으쓱였다. 사현은 말없이 돌아서 여준의 구두를 들고 왔다. 망설임 없이 제 발치로 몸을 숙이는 사현을 향해 여준의 고개가 점점 기울어졌다.
“신발 사이즈가 좀 작은 거 아니에요?”
사현이 여준의 발 앞에 구두를 한 짝씩 놓으며 물었다. 여준은 두 손을 사현의 어깨에 짚고 상체를 구부렸다.
“아닌데. 맞는 사이즈야.”
“발보다 작아 보이는데…. 한 치수 큰 걸로 사요. 괜히 멋 부리다가 어제처럼 쥐 나지 말고.”
“누가 멋 부린다고 작은 구두를 신어? 바보 같은 소리를 하네.”
구두는 사현의 정수리에 가려 보이지 않았다. 대신 사현이 두 손으로 여준의 발을 감싸 끌어당겼다. 딱딱한 구두 목에 발부리를 넣자 따뜻한 손이 뒤꿈치로 옮겨 왔다. 발등이 내경에 꼭 맞게 들어차고, 이내 뒤꿈치도 부드럽게 내려앉았다. 사현은 그래도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구두 앞축을 꾹꾹 눌렀다.
“맞지?”
여준이 그의 정수리에 대고 물었다. 몸을 움직일 때마다 스치는 옷자락이 하나하나 따끔거렸다.
“그러네요.”
이어 떨어지는 목소리엔 아쉬움이 가득 담겨 있었다.
“왜 갑자기 집착해? 정말 작은 사이즈였으면 뭐 어쩌게?”
“두고 가라고 하려 했어요.”
“…뭐를? 내 구두? 그럼 나는 뭐 신고?”
“내 신발 주려고 했죠.”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말에 여준은 저도 모르게 드레스룸 문 앞을 보았다. 사현의 구두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날씬하고 매끄러운 디자인에, 여준의 신발보다 일 센티가 길었다.
“그럼 너는?”
내 구두는 여기에 두고, 나는 네 구두를 신고, 그러고 나면 너는? 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뭐 그런 당연한 걸 다 묻느냐는 얼굴로.
“난 맨발이어도 돼요.”
이건 농담일까. 웃어야 하는 타이밍이었을까. 그러나 여준은 웃을 수도, 웃지 않을 수도 없었다. 그 전에 사현이 다시 고개를 떨어뜨렸으므로. 아무 대화도 없었던 듯이, 어떤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공간에서 일상적인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처럼.
“됐어요.”
툭툭, 구두를 감싸 두드리는 손길에 여준은 아주 짧은 후회를 했다. 작다고 할 걸 그랬나. 구두가 맞지 않아서 발이 아팠던 게 맞는 것 같다고 말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지금 이렇게 힘없는 손이 아쉽게 떨어져 나가는 모양은 보지 않아도 되었을까….
***
어슴푸레한 새벽을 지나, 몽롱한 정신으로 옷을 차려입고 출근하는 동안 해가 밝아오기 시작했다. 집에서 회사까지 짧은 거리를 운전하는 내내 도시의 빛이 껍질 벗겨지듯 하나씩 나타났다. 반갑지 않은 현실감이었다.
“그거 김포래, 김포.”
여준이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팀장이 명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만면에 미소를 띤 채 달려오는 팀장을 향해 여준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김포요? 뭐가요?”
“왜, 그때 아웃렛 얘기 있잖아. 김포에다 짓는대.”
“네…?”
“이게 심지어 한강에서 배를 타고 들어갈 수가 있대. 청사진 떴던데 볼래?”
여준은 영 미심쩍은 기색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한강에서 배를 타고 아웃렛에 진입한다니, 그런 게 정말 현실성 있는 계획인가? 그러거나 말거나 팀장은 신이 나서 커다란 모니터를 가리켰다. 한강을 따라 여러 개의 선착장을 만들어 놓고 하루에 다섯 번씩 아웃렛 직행 유람선을 운행한다는 듯했다.
“왜, 일본에도 이런 거 있잖아. 도쿄 시내에서 배 타고 오다이바 가고 그러잖아.”
“오다이바는 섬 전체가 유원지 같은 거잖아요. 아웃렛 하나 때문에 이런 대규모 사업을 한다는 건 좀….”
“그러니까 더 가치가 있는 거지! 지금 경기도에 있는 명품 아웃렛들은 하나같이 접근성이 떨어지잖아. 차 없으면 가지를 못해. 근데 이런 시스템을 해 놓으면 접근성이 말도 안 되게 좋아진다고. 안 그래?”
들을수록 지나치게 달콤한 이야기였다. 여준은 옆머리를 긁적이며 생각에 빠졌다. 어쩐지 조짐이 이상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혹시 투자하시려고요?”
“쪼끔만, 쪼끔만. 너무 많이는 말고.”
“전 조심하시는 게 좋을 것 같은데…. 기획부동산 일 터진지도 얼마 안 됐잖아요.”
“이거 봐, 이거 봐. 보험 일 한다는 사람이 이렇게 기본적인 걸 몰라. 하이 리턴의 전제는 하이 리스크 아냐?”
애초에 판돈 높은 도박은 여준의 취향이 아니었다. 그는 덤덤히 고개를 끄덕이고 자리에 앉았다. 어차피 뚜껑 열어보기 전에는 모를 일이고, 이만큼 참견했으면 할 만큼 했다 싶었다.
“근데 여준 씨 귀가 왜 그래? 다쳤어?”
기지개를 켜던 팀장이 난데없이 물었다. 저도 모르게 귀를 감쌀 뻔한 손을 간신히 내린 여준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네, 좀….”
“조심해야지. 요즘 왜 이렇게 여기저기 다쳐서 다녀? 얼마 전에는 얼굴이 팅팅 부어갖고 출근하더니.”
“그러게요. 아홉수라 그런가 봐요.”
적당히 이야기를 넘기는 데는 미신만 한 것이 없었다. 다행히 팀장은 그 이상 캐묻지 않고 넘어가 주었다. 다른 직원들은 출근하지 않는 날이라 사무실은 썰렁했다. 여준의 업무는 연휴 당일에 출근한 후배가 얼개를 잡아 놓은 계산식을 점검하는 일이었다. 엑셀 수식과 계산기를 번갈아 두드리던 여준이 모니터 위로 고개를 길게 뺐다.
“팀장님, 혹시 상현 씨가 어제 보고드릴 때….”
팀장은 의자에 드러누운 채 입을 벌리고 잠들어 있었다. 말을 멈춘 여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차라리 후배에게 직접 전화를 해 보는 게 나을 듯했다.
전체 직원의 1할 정도만 출근한 상황이라 복도는 썰렁했다. 휴게실에 들어가 커피 한 잔을 내리고 핸드폰을 쥐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문자 한 통이 날아들었다.
「제발 한 번만 얼굴 보고 얘기하자 여준아 이게 정말 마지막이니까 한 번만 만나주면 두 번 다시 연락하지 않을게」
여준이 낮게 혀를 찼다. 잠깐 뜸한가 싶더니 또 시작이었다. 지체 없이 차단 처리하고 후배의 전화번호를 찍었다. 전화기가 아예 꺼져 있는지 연결되지 않았다.
하긴, 연휴에 회사 전화 받기 싫겠지. 비록 천만 단위부터 일의 자리가 틀어져 버리는 수식을 짜 놓고 나 몰라라 퇴근했지만 연휴는 연휴인 거지…. 한정 없이 늦어진 자신의 퇴근 시간에 한숨 쉴 틈도 없었다. 곧장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했다. 가람이었다.
“네, 형.”
- 여준아. 바빠?
“오늘 출근했는데 바쁜 상황은 아니에요.”
- 출그은? 야, 느네 회사는 진짜 악덕도 그런 악덕이 없다. 지오는 어떻게 했는데? 어린이집은 쉴 거 아냐.
“시터하고 같이 있죠. 다행히 연휴에 나와 줄 수 있다고 해서요.”
- 우리 집에 맡기지 그랬어. 나나 가린이는 연휴 따로 있는 사람도 아닌데.
여준으로서는 더없이 부러운 일이었다. 재택근무가 가능한 직업을 가졌다면 훨씬 편한 생활을 했을 것 같았다. 아이는 실밥이 다 풀린 럭비공 같은 존재였다. 어디로 튈지도 알 수 없을뿐더러 잘못 튀는 순간 크게 다친다. 마음 같아서는 24시간 품에 두고 싶었다.
- 그럼 내가 가서 지오 데려올까? 너도 우리 집으로 퇴근해라. 내일도 출근해?
“내일은….”
주말을 포함해 남은 나흘의 연휴 동안은 여준도 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이상 가람과 가린을 귀찮게 해도 될까 싶어 망설여졌다.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가람이 말을 이었다.
- 우리가 너무 들이대나? 너 집에서 쉬고 싶으면 지오만 맡겨도 돼.
“아니, 아니에요. 그런 게 아니라 형이랑 가린이도 쉬어야 하니까….”
- 글쎄 우리는 평일이나 연휴나 다를 것도 없다니까. 너 그냥 연휴 동안 우리 집 와 있어. 무슨 공부한다는 것도 있을 거 아냐.
이런 사려 깊은 호의를 익숙하게 받아들이던 시절도 있었다. 고등학교 때부터 가람과 가린을 상대로는 항상 그랬다. 옆머리를 긁적이던 여준이 고개부터 끄덕였다. 어떤 식으로든 갚아 가면 될 일이었다.
“되도록 일찍 퇴근해 볼게요. 지오 아직 카시트 써서 어차피 제가 데려가야 해요.”
- 카시트…. 맞네, 그 문제가 있구나.
“…항상 고마워요, 형.”
전화를 끊고 사무실로 돌아오자 팀장의 자리가 비어 있었다. 대신 모니터에 사내 메신저 알림이 깜빡였다.
난 외근 갔다가 그대로 퇴근할게요 여준 씨도 적당히 하고 들어가 어차피 형식적인 건데
여준이 한숨을 푹 쉬고 자리에 앉았다. 외근은 무슨. 연휴에 외근 갈 데가 어디 있다고. 팔걸이를 쥔 채 빙글빙글 돌고 있자니 금방 어지러웠다. 사무실에 혼자 남는 일은 자주 있었지만, 이렇게 이른 시간에 야근 아닌 야근을 하게 된 건 처음이었다.
데스크는 두 가지 계산기와 서류, 아침에 들고 온 테이크아웃 커피잔과 색색의 펜 따위로 엉망이었다. 다 귀찮아…. 중얼거리며 펜깍지를 끼웠다 빼기를 반복했다. 사람이 없는 사무실은 유난히 썰렁했다. 셔츠 차림으로 있자니 금방 써늘해졌다.
“…….”
가방을 챙겨 일어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시터에게 연락을 넣고, 집에 도착해 갈아입을 옷과 아이의 짐을 꾸려 차에 오르고 나니 오후 두 시를 막 지난 시점이었다. 아이는 가람 삼촌네 집에 가자는 이야기에 손뼉을 치며 좋아했다. 아빠가 자신을 어딘가에 맡길 때마다 울먹이며 눈물을 참던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가람 삼촌이 그렇게 좋아?”
“삼촌이랑 이모랑, 다 좋아.”
“아빠보다 더?”
“으음-.”
아이는 놀랍게도 인상을 쓴 채 고민하기 시작했다. 당연히 곧장 아니, 아빠가 제일 좋지! 하며 꺅꺅거릴 거라 믿었던 여준의 기대를 정면으로 깨부수는 반응이었다. 여준은 충격을 감추려 애써 덤덤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아빠 섭섭한데? 지오는 항상 아빠가 최고랬잖아.”
“아니이, 아빠는 최곤데에.”
“근데?”
“음- 몰라.”
아이가 몸을 꼬며 배시시 웃었다. 여준은 허탈하게 웃어 버리곤 아이의 안전벨트를 조여 주었다. 겨우 네 살인데 벌써부터 이런 기분을 느껴야 하다니.
“지오 거기다 두고 아빠만 혼자 와야겠다. 지오는 아빠보다, 우리 집보다 가람 삼촌 더 좋아하니까.”
“아닌데에, 좋긴 우리 집이 더 좋은데. 왜냐면 우리 집은 크잖아. 삼촌네 집은 엄청 짝아.”
“…그 얘기 삼촌이랑 이모 앞에선 하지 마. 알았지?”
네가 그런 소리 했다간 아빠가 이모한테 집 사 줘야 돼…. 중얼거리며 차를 출발시켰다. 날은 쌀쌀했지만 맑았고, 연휴 중간이라 시내는 텅 비어 있었다.
쾌적한 도로를 달리는 내내 등줄기가 욱신거렸다. 여준은 한 손으로 핸들을 쥔 채 다른 손으로 허리를 두드렸다. 쨍한 하늘이 아직도 낯설었다. 몸 곳곳에 남은 통증만이 지난밤의 증거였다.
‘나는 맨발이어도 돼요.’
지나치게 멀고 아릿한 목소리는 눈앞이 흐려지는 순간마다 머릿속을 헤집곤 했다.
“…지오야, 우리 삼촌이랑 이모한테 줄 선물 사서 갈까?”
애써 의식을 돌리기 위해 아이에게 말을 걸었지만 대답이 없었다. 백미러를 슬쩍 보니 아이는 그새 잠들어 있었다. 오늘은 아직 낮잠을 자기 전이라던 시터의 말이 떠올랐다. 고민하던 여준은 우선 백화점에 들르려던 마음을 고쳐먹고 가람의 집으로 향했다. 선물을 사더라도 아이를 눕혀 재우고 가야 할 것 같았다.
필로티 주차장에 차를 대고 뒷좌석 문을 열었다. 아이는 곯아떨어진 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별수 없이 안아 들자 본능적으로 여준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려왔을 뿐이다. 제법 묵직해진 아이를 안고 서니 무릎이 다 후들거렸다. 몸살이 오려나…. 중얼거린 여준이 차 문을 잠그고 돌아섰을 때였다.
“여준아.”
여준의 일은 계산이었다. 방대한 데이터를 한 가지 조건으로 묶어 ‘적정하다’고 평가받을 만한 금액을 산출해내는 것.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위험을 돈으로 환원하여 최종적으로 회사에 최대한의 수익을 안길 수 있는 식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끝없이 쏟아지는 숫자를 거르고 또 걸러야 했다.
그러니 여준보다 일에 익숙하지 않은 후배가 엉망진창인 수식을 짜서 넘겼다 한들 크게 탓할 일은 아니었다. 성의가 없었다거나 고의라고 볼 수도 없었다. 애초에 그런 사태까지 상정하고 짜인 연휴 근무 순번이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후배의 미숙함에 짜증이 나고, 팀장의 무책임함에 질렸다는 핑계로 일을 미뤄두고 나온 벌을 이런 식으로 받는 것일까. 여준은 이를 꽉 다문 채 주춤대며 물러섰다. 두 팔로는 아이를 빈틈없이 끌어안았다.
“표정이 뭐 그러냐? 귀신이라도 본 것마냥.”
그런 여준을 향해 영재가 웃어 보였다. 서로가 좋기만 하던 때처럼 상쾌한 미소였다.
“…….”
영재는 유난히 더 멀끔한 모습이었다. 깨끗하게 손질한 머리카락은 세련된 스타일로 빗어 넘겼고 피부도 반질반질했다. 진회색 슈트에 테일러 코트, 반짝이는 구두까지 챙겨 신은 모양에서 여유가 물씬 풍겼다. 여준은 눈살을 살짝 찌푸린 채 영재의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영재는 픽 웃더니 주머니에서 흰 봉투를 꺼내 흔들었다.
“아이고, 그렇게 보지 마. 돈 갚으러 왔어, 돈 갚으러.”
“…뭐?”
“자, 이거.”
봉투를 내밀며 다가오는 영재에 여준이 저도 모르게 물러섰다. 아이는 여전히 곤히 잠들어 있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심장 소리 때문에 아이가 깨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다.
“무슨 꿍꿍이야, 너.”
“꿍꿍이라니 말이 심하네. 빌린 돈 갚으러 온 거라니까? 내가 이자도 챙겨 넣었어.”
“…….”
“받아. 이거 받고 우리 찜찜했던 거 다 풀자. 나도 사과하려고 이러는 거야. 아무래도 우리가 그동안 마가 껴도 단단히 꼈던 것 같다.”
응? 영재가 씩 웃자 히쭉 벌어진 입술 사이로 은니가 번뜩였다. 여준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노려보기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아이에게서 조금이라도 손을 떼었다간 상상하고 싶지 않은 일이 벌어질 것만 같았다.
그대로 한참이나 어색한 대치상태가 이어졌다. 먼저 입을 연 것은 영재였다.
“근데…. 걔가 지오야?”
물론 최악의 방식으로.
“야, 많이 컸네. 남의 집 애는 빨리 큰다더니.”
“…….”
“키가 많이 크겠다. 팔다리가 엄청 기네. 너 닮아서 그러나?”
속사포처럼 쏟아지는 말 하나하나가 귀에 거슬렸다. 여준은 아이를 한 번 더 추슬러 안고 숨을 들이쉬었다.
“애 눕히러 가야 되니까 나중에 얘기하자. 내가 전화할게. 아까 문자 왔던 번호로 걸면 돼?”
“와, 그 문자를 봤어? 난 네가 당연히 확인 못 하는 줄 알았지. 뻔히 보면서도 씹는다고 당당히 말할 줄은 몰랐네.”
“시비 걸 거면 그만두고.”
“왜 시비라고 생각해? 하여간 사사건건 꼬아 듣는 버릇이 있어. 옛날에는 안 그러더니.”
더는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초조해진 여준이 뒤를 돌아보았다. 마침 빌라 입구를 밀고 나오는 가람의 모습이 보였다. 양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털레털레 나서던 가람은 곧 여준과 영재를 발견하고 놀란 눈을 했다.
“여준아.”
일부러 높은 목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가람을 보고도 영재는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았다. 여준은 내심 안도의 한숨을 쉬며 아이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출발한다는 문자 보긴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왔네. 좀 더 걸릴 줄 알았더니.”
“길이 안 막혀서요. 그보다 지오가….”
“어어, 너 올라가 봐. 비밀번호 알지?”
가람은 덤덤한 척, 그러나 제법 다급하게 움직였다. 영재는 여전히 여유로운 미소를 띤 채 그들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형, 오랜만이에요. 저번엔 감사했어요.”
“…어. 그래.”
영재가 명랑하게 건네는 인사에 가람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좁은 주차장은 금방 또 긴장 상태에 접어들었다. 영재는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는 여준의 품을 가리켰다.
“인사 중이었어요. 여준이도, 여준이 아들도 오랜만에 봐서.”
“네가 언제 지오를 본 적이 있다고 그래.”
“제가 왜 지오를 본 적이 없어요?”
가람이 냉랭하게 지적하자 영재는 두 눈을 한껏 치떴다. 여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시간을 되돌려 이 자리에 도착하기 전으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어떤 대가든 지불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 여준의 마음은 아무려나 상관없이 영재는 점점 더 제멋대로 나불대기 시작했다.
“저 지오 많이 봤어요. 주로 사진이었지만.”
“흰소리할 거면 그만 가라.”
“지오가 코에 점도 있잖아요. 저랑 똑같은 위치여서 아는데.”
여준이 덜컥 아이를 품에서 떼어 놓았다. 고개가 갑작스레 넘어가자 아이가 깜짝 놀라 눈을 떴다. 작고 동그란 코는 점은커녕 솜털 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다.
“…….”
“…여준아?”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가람이 미간을 좁힌 채 그를 불렀다. 여준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갑작스레 잠이 깬 아이는 여준의 창백한 얼굴을 보고는 곧 울먹이기 시작했다. 히잉, 히이잉, 바람 빠지는 소리처럼 시작된 흐느낌이 금방 서러운 울음으로 번져나갔다.
“여준아, 왜 그래.”
“아….”
“안 되겠다. 너 올라가. 빨리.”
다가온 가람이 아이를 추슬러 안겨 주고는 여준의 등을 떠밀었다. 고개를 돌리기 직전 영재와 눈이 마주쳤다. 영재는 한껏 웃고 있었다.
울음을 그치지 않는 아이를 딱딱하게 앉은 채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문이 닫히자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차라리 정말로 아이에게 점이 있었다면 상관없을 일이었다. 하지만 아이의 코는 깨끗했다. 즉 영재는 알고 있는 것이다.
가장 먼저 머릿속에 떠오른 해결 방안은 돈이었다.
얼마를 바라는 걸까. 얼마를 주면 포기하고 물러날까. 차라리 돈으로 해결이 된다면, 그로써 영원히 이 비밀을 묻어 버릴 수 있다면 전 재산이라도 넘기고 싶었다.
“아빠….”
여준이 아이의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엘리베이터 문이 도로 닫히고 있었다. 얼른 버튼을 누르고 내렸다. 현관문까지 다다랐지만 분명 가람이 가르쳐주었던 비밀번호가 기억나지 않았다. 사시나무처럼 떨리는 손으로 벨을 눌렀다. 다행히 깨어 있던 가린이 금방 문을 열어 주었다.
“우리 지오 어서와!”
그녀가 밝게 웃으며 아이에게 팔을 벌렸다. 아이는 훌쩍이며 여준의 눈치를 볼 뿐 움직이지 않았다. 가린은 그제야 이상한 기류를 느끼고 여준의 얼굴을 살폈다.
“여준아?”
“…….”
“왜 그래? 일단 들어…. 어머, 너 무슨 땀을 이렇게 흘려?”
목덜미며 관자놀이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여준은 간신히 마음을 다잡고 가린에게 아이를 내밀었다. 아이는 그제야 순순히 그녀에게 안겨들었다.
“컨디션이 안 좋아? 아니면 무슨 일 있었어?”
걱정스러운 말도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아이를 놓자마자 쇳덩이를 내려놓은 기분이었다. 여준은 몇 번이고 쓰러질 뻔한 몸을 고쳐 세우며 급한 숨을 몰아쉬었다.
“어머, 어떡해. 여준아, 여준아?”
“…괜찮, 괜찮아. 그보다 지오 좀 눕혀 줄래?”
“네가 먼저 누워야겠는데? 너 지금 얼굴이 새파래. 신발 벗을 수 있어?”
고개를 끄덕이고 구두를 벗었다. 따뜻한 바닥에 발이 닿자 잊고 온몸이 얻어맞은 듯 욱신대기 시작했다. 소파로 걸어가는 내내 가시밭길을 걷고 있는 듯했다. 가린이 아이를 작은 방으로 데려다 놓는 동안 기다시피 소파에 도착한 여준이 무거운 몸을 쓰러뜨렸다. 뇌가 비쩍 말라붙은 것처럼 뻑뻑한 두통이 들이쳤다.
“물 좀 줄까? 머리 아파?”
엎드린 채 머리를 싸쥐고 있는 여준을 보고 가린이 물었다. 그녀의 등 뒤로 작은 방문이 닫혔다. 여준은 힘겹게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지오는?”
“내 침대에 눕혀 놨어. 혼자 잘 수 있대.”
“…다 컸어, 다 컸어.”
그 와중에 농담이 나왔다. 터무니없이 불안한 현실에서 정신을 놓지 않기 위한 방어기제였다. 그래도 떨림은 멈추지 않았다. 바들바들 흔들리는 손끝을 말아 쥐는 여준을 보며 가린이 한껏 인상을 썼다.
“여준아, 너….”
그때 현관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선 가람은 잔뜩 심각한 얼굴이었다. 가린은 그와 여준을 번갈아 보고는 주방으로 향했다.
“두통약 줄게.”
여준이 비척대며 상체를 일으켰다. 한바탕 땀을 빼고 나니 도리어 시원한 것 같기도 했다. 턱 아래를 쓸어 올리고 고개를 들었다. 곁으로 다가온 가람이 여준의 이마를 짚었다.
“머리 아파? 열은 없는데.”
“괜찮아요. 편두통 같아요.”
곧 가린이 약과 물컵을 가지고 돌아왔다. 여준은 순순히 약을 받아먹고 입술을 문질러 닦았다. 아직도 심장이 세게 뛰었다.
“…여준아.”
몸을 낮춘 가람이 여준의 무릎을 짚은 채 바닥에 앉았다. 가만히 올려다보는 시선에 걱정과 우려가 가득했다. 여준은 차마 그 눈을 피하지 못하고 입을 꾹 다물었다.
“너 아까 영재랑 그거 뭐야?”
“…….”
“코에 점이 어쩌고…. 그게 무슨 소리야?”
물컵을 도로 받아들던 가린도 멈칫했다. 여준은 모아 쥔 손으로 이마를 떨어뜨렸다.
“…….”
‘가람 삼촌 좋아. 재밌는 거 많이 보여 줬어요.’
아이가 조잘대며 떠들던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여준아.”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었다. 도움이 필요했다. 여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마를 누르던 손을 입가로 가져갔다. 미세한 떨림이 남은 손끝에 힘을 주었다.
“확실한 건…. 아니에요.”
가린의 표정도 어느 때보다 심각해졌다.
“…형, 영재가 한동안 차고 다니던 시계 기억해요? 금장으로 된….”
“롤렉스? 그거 모를 수가 있나. 무슨 말을 할 때마다 시계 찬 손 들이밀면서 하던데.”
“그거랑 같은 디자인…, 여성용을 은아가 차고 다녔었어요.”
“…….”
여준이 어렵게 쥐어 짜낸 말에 남매는 멍하니 눈만 껌뻑거렸다. 뭘 어쩌고 저째? 여준은 금방 또 축축해진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다시 말하지만 확실한 건….”
“잠깐, 잠깐. 이게 다 무슨 소리야? 그러니까 은아 씨가 영재랑 바람을 피웠을지도 모른다고?”
“…….”
“그럼 그게, 코에 점이 어쩌고 한 게 지금….”
“아까부터 점 얘기는 뭐야? 코에 점이 어쨌다고?”
가린이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끼어들었다. 가람은 미간을 찌푸린 채 입을 벌리고 있느라 그녀의 질문에 답해 주지 못했다.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한 가린이 얼른 여준의 팔을 붙들었다.
“바람 그건 진짜야? 은아 씨가? 박영재랑? 이게 대체 웬 미친 소리야, 그 여자 완전 의부증 환자였잖아?”
“심증만 있어. 영재가 그렇게 말한 것뿐이라….”
“뭐? 박영재가 너한테 그랬어? 지가 은아 씨 내연남이었다고 당당하게?”
당황스러움이 가신 가린의 얼굴이 불같은 분노가 어렸다. 그래, 생각해 보면 전부 미친 소리지. 여준은 허탈하게 웃었다.
“지오가 그러니까….”
허옇게 굳어 있던 가람이 드디어 입을 열었다. 가린과 여준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쏠렸다.
“그러니까 지오가…. 네…, 애가.”
“제 애예요.”
“…….”
“그건 변하지 않아요. 지오 제 아이고, 제가 키울 거고…. 아무것도….”
“여준아, 검사부터 해 봐.”
가람이 단호하게 말했다. 그제야 화제의 방향을 눈치챈 가린이 한 손으로 입을 막았다. 여준은 한참 뒤에야 멍청히 되물었다.
“…네?”
“친자 확인을 먼저 해 보라고.”
“형.”
“확실한 거 아니라며. 그럼 먼저 확실하게 만들어야지. 그래야 다음 일을 생각하잖아.”
토씨 하나 빠짐없이 옳은 소리였다. 그러나 여준은 대답하지 못했다.
“영재가 그렇게 말한 것뿐이잖아. 이렇게 지레 겁먹을 일 아니야. 안 그래?”
지레 겁먹어야 할 일이었다. 이미 은아를 믿을 수 없었다. 아주 조금이라도 다른 가능성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도저히 들지 않았다. 어차피 내정된 결과는 뻔했다.
“뭘 걱정하는지 알아. 혹시나 정말일까 봐 무서운 거지?”
“…….”
“여준아, 그렇다고 평생 모르는 척 살 거야? 내 애일지도 모르고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도 내 애라고 믿고 살겠다, 그게 마음처럼 쉬울 것 같아? 지오 키우면서 지금보다 힘든 순간이 안 올 거란 보장이 있어? 그때 이 문제가 절대 안 떠오를 거라고 어떻게 확신해?”
정곡을 찌르는 말이 괴로웠다. 사현도 비슷한 말을 했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정말로 잊고 살 수 있겠어요?
“검사부터 하자, 여준아. 무슨 결정을 내려도 그다음이야.”
“영재가 지오 뺏어가려 들면요!”
하지만 사현의 말에 이 정도로 가슴이 찢기지는 않았다.
“친자 검사해서 정말 영재 애라고 하면요? 영재가 그거 들어서 지오 내놓으라고 하면 저는 어떡해야 하는데요?”
마음 한구석 어딘가에서 믿고 있었다. 사현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준 자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 거라고. 말로는 안 된다 하겠지만, 후회할 거라며 으름장을 놓겠지만, 그래도 결국은 여준의 곁에 지오를 앉혀줄 것이다. 때문에 그의 말이 두렵지 않았다. 아무것도 무섭지 않았다. 그의 헌신적인 애정이 무조건 자신에게 편리한 방향으로 움직여줄 것을 여준은 알고 있었다.
“여준아….”
그래서 그토록 비열하게 굴 수 있었다.
“…죄송해요, 형. 죄송한데, 지금 이 얘기 비밀로 해 주세요. 절대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제발 부탁….”
두서없이 말을 쏟아내던 여준이 벌떡 일어났다. 작은 방 문을 열자 아이는 그새 곤히 잠들어있었다. 비틀대며 달려가 담요 채로 아이를 안아 올렸다. 놀란 가린이 얼른 쫓아 들어왔다.
“여준아. 기다려 봐. 어디 가려고?”
“가린아. 너한테도 부탁할게. 지금 한 얘기 아무한테도….”
“말 안 해. 절대 말 안 해. 그러니까 진정하고 앉아. 너 이 상태로 운전하려고 그래? 애까지 태우고?”
“…….”
“애 내려놔. 여기 못 있겠으면 너 혼자 나갔다 와. 당연한 거지만 택시 타.”
한 마디씩 단호히 명령한 가린이 기어코 여준의 품에서 아이를 빼앗았다. 아이는 또 갑자기 잠을 깨서 불안한 기색이었다. 멍하니 선 여준을 향해 가린이 손을 내밀었다.
“차 키 내놔.”
침묵은 길지 않았다. 여준은 홀린 듯 주머니에서 차키를 꺼내 그 손에 올려두었다. 그대로 머리칼을 쓸어 올리고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
사과의 말은 다행히 늦지 않게 나왔다.
“나 좀…. 지오랑 같이 쉬어도 될까?”
“진작 그렇게 나왔어야지. 옷만 갈아입고 누워.”
코웃음을 친 가린이 지오를 침대에 내려놓았다. 아이는 잠이 완전히 깬 얼굴로 여준을 살피고 있었다.
“…….”
뒤따라온 가람이 티셔츠와 트레이닝복을 안으로 던져 주었다. 마치 철창에 갇힌 동물에게 먹이를 주는 듯 익살스러운 몸짓이었다. 여준은 웃지도 못한 채 가람의 옷을 소중히 받아들었다.
“죄송해요, 형….”
“자고 일어나서 얘기하자. 한숨 자고 나서. 응?”
생글 웃은 가람이 방문을 닫아주었다. 암막 커튼 사이로 희미한 햇빛이 새는 방은 어둡고 아늑했다. 아이는 담요를 덮어쓴 채로 여준이 옷을 갈아입는 모양을 말똥말똥 바라보고 있었다.
“지오야.”
여준이 그런 아이에게 손을 뻗었다. 아이는 그의 목에 매달리며 얼굴을 폭 파묻었다. 부드러운 뺨에서 따뜻한 우유 냄새가 났다.
“아빠…. 지오 때문에 화났어?”
이어 울먹이는 목소리가 전혀 예상치도 못한 질문을 던져왔다. 깜짝 놀란 여준이 아이의 등을 쓰다듬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우리 지오가 뭘 어쨌다고.”
“내가…. 아빠 제일 좋다고 안 해서….”
“…응?”
“그래서 아빠 화났어?”
아이의 말을 한참 곱씹은 뒤에야 차에서 나누었던 농담이 떠올랐다. 여준은 픽 웃어 버리고 품에 안은 몸을 정성스레 쓰다듬었다.
“아니야. 지오는 아무 잘못도 안 했어. 아빠 잠깐 머리가 아파서 그랬어. 화난 거 아니야.”
“…진짜?”
“진짜. 맹세해.”
여준이 아이의 뺨에 입 맞췄다. 부자는 그대로 꼭 끌어안은 채 침대로 쓰러졌다. 아이는 여준의 팔을 베고 눕고서도 계속 그와 눈을 맞추려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거짓말 아니지?”
“아빤 지오한테 거짓말 안 해.”
“응.”
아이가 배시시 웃었다. 여준은 아이의 뺨을 보듬어 끌어안은 채 눈을 감았다. 그러자 없던 일인 양 사라져버린 지난밤이 떠올랐다. 맨발이어도 좋다던 목소리가 귓가를 간지럽혔다.
사현을 만나고 싶었다.
***
새벽이 되자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온몸을 망치로 작신작신 두드리는 듯 아팠다. 피가 들끓는 고통에 못 이겨 잠에서 깨어날 때마다 아직도 한참 남아 있는 밤이 곱절의 절망을 주었다. 여준은 결국 기다시피 방을 나섰다. 거실에서 잠든 가람을 깨우자 놀란 그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여준아, 옷 입어. 응급실 가자.”
“아니, 전 괜찮아요. 아침에 택시 타고 갈게요. 그게 아니라….”
“어?”
“감기 옮을지도 모르니까 지오 떨어뜨려 놔야 될 것 같아서요. 형이 좀 데리고 주무시….”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천둥 같은 기침이 터져 나왔다. 온몸의 장기가 제멋대로 뒤섞이는 느낌이었다. 혹시 독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여준은 얼른 입을 가린 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 지오 깨워서 손 씻기고 양치…. 부탁….”
“알았어. 알았으니까 말하지 마. 마스크 줄까?”
“네….”
몸살이 오겠거니 생각은 했지만, 이럴 줄 알았다면 지오만 맡겨 두고 집에 가는 건데. 뒤늦은 후회보다 걱정이 먼저였다. 그때 가람이 아차, 하며 돌아보았다.
“아침까지 기다릴 것도 없어. 연휴라 어차피 응급실 가야 하잖아.”
“…아.”
“가린이한테 지오 맡기고, 너는 나랑 병원 가자.”
빠르게 상황을 정리한 가람이 점퍼를 꺼내 여준에게 덮어씌웠다. 가람의 방에서 자고 있던 가린이 비몽사몽 거실로 나왔다. 참으려면 참을 수 있을 만한 상태였지만, 혹 독감이라면 아이와 더 접촉하기 전에 가야 한다는 생각에 여준도 미적미적 일어섰다.
“난리다, 난리.”
차 키를 쥔 가람이 씩 웃었다. 여준도 힘없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독감은 아닌데 열이 너무 높네요. 몇 가지 검사 좀 더 해 보시는 게 좋겠는데요. 폐 사진도 찍으시고요.”
응급실 침대에 누워 진단을 들은 여준이 우선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독감만 아니면 일단은 안심이었다. 가람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기색이었다.
“입원해야 할까요?”
“해열제 다 들어가고 나서도 열이 안 떨어지면요.”
명절 연휴의 응급실은 아수라장이 따로 없었다. 전국의 환자가 모조리 모여든 것 같았다. 40도를 웃도는 체온이 찍히고 나서야 간신히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좁은 침대에 널브러진 여준이 흐린 눈을 깜박거렸다. 가람은 걱정스러운 기색으로 재차 물었다.
“그냥 지금 입원 수속을 하면 안 될까요? 여기 너무 어수선해서 환자가 쉬질 못할 것 같은데….”
“약 들어가고 경과 보고 나서요.”
친절하지만 단호하게 말한 의사가 커튼을 닫고 사라졌다. 가람은 비좁은 공간에 서지도 앉지도 못한 채 여준을 살폈다. 간신히 눈을 뜬 여준이 그런 가람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형, 들어가 계세요. 약 다 맞으려면 세 시간은 걸린대요.”
“너 여기다 두고 내가 어떻게 가냐.”
“상태 보고 제가…, 전화할게요. 형 그러고 계시면 더 못 쉬어요.”
가람은 여준이 한참을 더 설득한 후에야 재킷을 챙겨 일어났다. 전화해, 데리러 올게. 응? 여러 번 다짐을 받고서야 자리를 뜨는 그를 확인하고 여준은 다시 눈을 감았다.
환자는 끝도 없이 밀려들었다. 왜 빨리 진료를 봐주지 않는지 따지는 사람, 아파 죽겠다며 고성을 지르는 사람, 다짜고짜 욕설부터 내뱉는 사람 등등 양상도 다양했다. 그 와중에 어린아이의 숨넘어가는 울음소리가 섬뜩하게 들렸다. 여준은 모로 누운 채 시트를 머리끝까지 뒤집어썼다.
주사를 맞았지만 몸은 조금도 편해지지 않았다. 의사의 말대로 어딘가 문제가 있는지도 모른다. 기침을 할 때마다 갈비뼈가 부서질 듯 아팠다. 산발적인 고통을 견뎌 내며 여준은 내내 사현을 생각했다.
은아는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찢겨 죽었다. 그리고 사현은 온몸의 뼈가 부러지고 장기가 찢긴 채 살아남았다. 은아가 쇼크를 일으켜 죽어 버렸을 정도의 통증을, 사현은 숨이 붙은 채 고스란히 느꼈을 것이다. 그 증거로 혼수상태였던 사현은 몇 번이나 심장이 멈췄었다. 의식이 없는 상태로도 숨이 넘어갈 만큼의 고통이란 도대체 어떤 지옥인지 여준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소음에 시달리며 선잠에 들었다 깨기를 반복했다. 아픔에 못 이겨 깨기 전까지 사현의 꿈을 꿀 수 있었다. 꿈속의 사현은 언제나 그랬듯이 열일곱의 어린아이였다. 식물처럼 고요히 앉아 누구도 묻지 않은 말을 눈에만 담았다. 반딧불이가 가득한 밤의 호수 같았다.
‘선배.’
목소리가 없어도 들려오는 말, 허무하리만치 처절한 외침 속에 담긴 마음을 얼마나 오랫동안 외면했던가. 여름의 끝자락이 그려진 흐린 꿈이 서글펐다. 눈물이 흐른 것은 열 때문만은 아니었다.
“선배.”
차가운 손이 뺨을 감쌌다. 선명한 목소리도 들렸다. 그래도 눈을 뜰 수 없었다. 겨울 파도처럼 들이칠 현실이 두려웠기에.
“선배.”
이번에는 얼굴이 보였다. 흐린 시야 속에서 여준은 자신의 숨소리를 들었다. 색색대는 흡착음이 신경을 갉작거렸다. 깜빡, 깜빡, 눈꺼풀을 움직여 눈물을 흘려 냈다. 교복 하복이 아닌 검은 코트 차림의 사현이 눈앞에 서 있었다.
“…….”
뺨에 닿은 손은 금방 미지근해졌다. 여준은 아쉬운 마음을 감추지 못하고 그의 손목에 이마를 파묻었다. 현실과 꿈의 경계는 지독히도 모호했고 와 닿는 살결은 차고 가칠했다.
“언제 왔어…?”
힘이 빠진 팔목을 쥐고 물었다. 목소리가 도통 나오지 않았다. 사현은 더 이상 아무런 말도 없었다. 아직 찬 기운을 간직한 다른 손을 들어 여준의 이마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을 뿐.
언제까지 있을 거야? 묻고 싶었지만 혀끝이 움직이지 않았다. 여준은 이마와 뺨에 닿는 손에 안주한 채 서서히 깊은 잠으로 빠져들었다. 드디어 편안히 잠들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다시 깨어났을 땐 열이 말끔히 내려 있었다. 죽도록 아팠던 시간이 모조리 거짓말 같았다. 주삿바늘이 꽂혀 있던 자국이 아니면 열에 앓던 시간까지 꿈이었나 했을 것이다. 커튼 바깥은 여전히 어수선했고 침대 근처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준은 멍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다 핸드폰을 쥐었다. 사현이 왔었다. 어떻게 알고 왔는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아예 돌아간 걸까, 잠깐 자리를 비운 걸까. 그것만이 마음에 걸렸다.
맑은 정신으로 얼굴을 보고 싶었다. 비척비척 일어나 응급실을 빠져나왔다. 복도는 치료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그 보호자들로 가득했다. 사현의 번호를 눌러 귀에 가져다 대었다.
-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다시 확인하시고….
짧은 귀울림이 일었다.
“…….”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보았다. 언제나 걸던 그 번호가 맞았다. 끊고 다시 걸었다. 똑같은 안내 멘트가 흘러 나왔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번호이오니….
아직 꿈을 꾸고 있나. 악몽의 시작점일까. 여준은 눈을 감은 채 벽에 기대앉았다. 지금 거신 전화는…. 반복되는 무정한 통보에 귀가 멀 것만 같았다.
지금 거신 전화는 없는….
다시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했다.
***
“우리 싸현이, 멍 때리네?”
단단한 손가락이 부딪쳐 튕기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사현은 어느새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툭 뱉어 내고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 홍게가 느글느글하게 웃었다. 얼굴뼈가 부서졌다 붙은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얼굴은 웃을 때마다 눈가가 기묘하게 일그러졌다.
“왜, 재미없어?”
멀리서 억, 소리와 함께 부러진 각목 쪼가리가 튕겨 올랐다. 사현은 새 담배를 빼 무는 대신 고개를 기울여 홍게의 어깨너머를 보았다. 그때까지 열심히 맞고 있던 놈 하나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며 죽는 소리를 냈다.
“형님, 저 사인할게요! 한다고요!”
폭력은 참으로 간단하고 단순한 해결방법이다. 각목 몇 대에 울며불며 목숨을 갖다 바치겠다는 걸 보면. 사현이 침묵하자 홍게는 더욱 집요하게 말을 걸었다.
“번호는 왜 바꿨냐?”
“일 때문에요.”
“드디어 대답을 하네. 싸가지 없는 새끼.”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놈을 향해 깡추가 두꺼운 서류를 내밀었다. 사현은 지루한 얼굴로 그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리 용을 써 봐야 양아치의 삶이란 고작 저런 것이다. 세상의 빈틈을 노려 서로를 착취하거나 착취당하는.
“저 새낀 죄목이 뭡니까?”
“기집애들 2차 알선해 주다 걸렸어. 한 타임 일오인데 삼만 떼고 나머지 준다고 꼬드겨서 다섯 명인가 붙였더라고.”
“…….”
“씨발년들, 형님이 얼마나 잘해 주시는데 이따위로 뒤통수를 쳐? 싹 다 어선 태워서 밑구멍 빠지도록 돌려 버린다고 하니까 오줌 질질 싸면서 잘못했다고 빌더라. 네가 그 꼴을 봤어야 하는데.”
홍게가 낄낄 웃었다. 사현은 그런 꼴을 보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으므로 황홀한 얼굴로 그 장면을 곱씹는 홍게를 이해할 수 없었다. 홍게는 깡추가 관리하는 여자들에게 한없이 다정하게 굴다가도 한순간 돌변해서 폭력을 휘두르곤 했다. 예쁘다며 쓰다듬다가 예쁘면 다냐면서 뺨을 후려치는 식이었다.
“하여간 낯짝 하나 믿고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년들은 일렬로 묶어서 순번대로 염산 부어야 돼. 예쁜 게 뭐라고. 늙어 빠지면 아무 소용없는 거.”
그런가. 사현은 별 감흥 없이 홍게의 이야기를 흘리며 여준을 떠올렸다. 처음 보았을 때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마주치는 순간 사람을 사로잡는 매력이 오로지 외모의 힘이라면 그 또한 재능이라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심지어 미니 그 쌍년은 진짜…. 형님이 빚 정리를 얼마나 유하게 해 주셨는데 씨발년.”
사현의 눈가가 슬쩍 굳었다. 미니. 술자리마다 깡추가 옆구리에 끼고 놀던 그 여자였다. 넉살 좋게 말을 걸던 얼굴이 떠오르자 자연히 따라오는 기억이 있었다.
‘이사님이 그랬어요. 그렇다고 진짜 저지를 줄은 몰랐다고.’
분명 그런 말을 했었다.
“…그래서 어떻게 됐습니까?”
되도록 감정을 담지 않으려 노력하며 물었다. 다행히 홍게는 별스럽지 않게 대답했다.
“어떻게 되긴, 존나게 처맞았지. 당분간은 손님 못 받고 벌금만 쌓일 거다.”
“…….”
그나마 다른 가게로 팔려 가진 않은 모양이었다. 사현은 말을 아끼고 자리를 뜨려 했다. 한참 서류를 확인하고 있던 깡추가 그런 사현을 발견하고 손짓했다.
“어, 사현이. 사현이 이리 와 봐.”
멈칫한 사현이 걸음을 돌렸다. 깡추는 사람 좋은 미소를 띤 채 사현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어디 가려고? 바쁜 일 있어?”
“가게 둘러보러 가던 참이었습니다. 시키실 일 있으면 남아 있겠습니다.”
“성실해, 성실해. 하여튼 우리 사현이가 제일 성실해. 내 밑에서 밥값 하는 건 너밖에 없어.”
사탕발린 말이 두서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현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의 지시를 기다렸다.
“근데 사현아. 너 일 맡은 거 어떻게 돼 가냐?”
금방 본론이 나왔다. 사현은 목소리를 살짝 낮추고 덤덤히 대답했다.
“판은 다 짰습니다. 다음 주에 바로 진행합니다.”
“어, 그래그래. 몸조심하고. 알지?”
“예.”
“우리 사원들이 다 너 같으면 내가 아무 걱정이 없는데. 내가 정말 너 볼 때마다 먹이고 입혀서 키운 보람을 느낀다. 마지막까지 화이팅하자, 응?”
“예, 이사님.”
정중히 인사하고 공사장을 빠져나왔다. 쌀쌀한 바깥 공기가 폐부에 돌자 참고 있던 욕지기가 치밀어 올랐다. 하아, 긴 한숨을 내쉰 사현이 입가를 문질렀다.
***
장사 시작 전이라 가게 앞은 썰렁했다. 지하로 향하는 계단참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녀석이 사현을 발견하고 얼른 허리를 숙여 보였다.
“형님, 뭐 필요한 거 있으십니까?”
“상황 보러 잠깐 들렀다. 벌방 어디야?”
“벌방이요? 어제 잡힌 애들 말씀하시는 거면 지하 2층입니다, 형님.”
다행히 녀석은 많은 것을 묻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가리켰다. 사현은 그를 지나쳐 계단을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형님, 혹시 싶어서 드리는 말씀인데 애들 지금 건드리시면 안 됩니다.”
“알아.”
가파른 계단을 한참 내려가자 낡은 유리문이 보였다. 열어젖힌 문에 달린 종이 쨍강대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비좁고 어두운 복도 양쪽으로 작은 문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문 너머는 2평 남짓한 작은 방이었다. 한 방에 둘씩 앉아 있던 여자들은 사현이 창 안쪽을 확인할 때마다 토끼 눈을 하고 몸을 움츠렸다.
미니는 세 번째 방에 있었다. 그녀만이 혼자였다. 사현이 문을 열고 손짓하자 웅크린 어깨가 움칫 튀어 올랐다.
“나와.”
간단히 명령하고 돌아섰다. 복도 제일 끝 방은 소위 ‘면담실’로 쓰이는 공간이었다. 미니는 덜덜 떨며 사현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두꺼운 문을 닫고 불을 켜자 낡은 전구가 음산한 빛을 뿜어냈다.
“…….”
희미한 빛 아래서 본 미니의 얼굴은 예상보다 훨씬 엉망이었다. 한쪽 눈은 뜨지도 못할 정도로 부었고 입술이 온통 터져 있었다. 얇은 슬립 하나로 가린 몸도 빠짐없이 멍투성이였다. 사현은 말없이 담배를 빼 물고 미니에게도 한 대를 건넸다. 미니는 사시나무처럼 떨면서도 얌전히 그것을 받아 들었다.
“쫄지 마. 처분 얘기하러 온 거 아니니까.”
“…….”
“내가 하는 말에 제대로 대답해. 그럼 너랑 네 친구들 다 치료 받고 복귀할 수 있게 해 줄게.”
라이터를 대 주자 미니가 눈을 둥글게 떴다. 그제야 사현의 얼굴을 알아본 기색이었다. 불을 댕긴 담배를 허겁지겁 빨아들이는 동작에서 조금이나마 안도의 기운이 묻어났다.
“뭐, 뭔데요?”
“전에 했던 얘기 다시 자세하게 해 봐.”
“어떠, 어, 어떤 거요? 뭐든 말할게요. 제발 여기서 좀 나가게 해 주세요. 진짜 미쳐 버릴 것 같아요. 너무 춥고, 어둡고 무섭고…. 오빠, 나만이라도요. 솔직히 나는 딱 한 번밖에 안 했어요. 근데 상희 그 쌍년이 걸리자마자 내 이름부터 불어서, 씨발년 여기서 나가면 내가 가만히 안 두려고….”
“잡소리 끄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유은아 말이야.”
냉랭한 명령에 미니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어떻게든 사현의 맥락을 잡아 그의 입맛에 맞는 대답을 내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는 모양이었다.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제 담배에 불을 붙였다. 좁고 밀폐된 공간은 금방 담배 연기로 가득 찼다.
“그, 그 걸레 년 왜요? 걔 어떤 거요? 다 말할게요. 난 그년이 따먹은 남자 연예인 명단도 백 명은 댈 수 있어요.”
“나한테 먼저 꺼냈던 말 위주로.”
“어어어떤, 어떤 거요. 내가 뭐라 그랬는데요? 난…. 나 지금 오빠가 뭐 물어보는지….”
불안하게 흔들리던 시선이 멀리 꽂혔다. 사현은 말없이 여자를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미니는 초조하게 담배를 태우고 제 몸을 벅벅 긁다가 울먹이길 반복했다. 사현은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가게에 도착한 지 십오 분이 지나 있었다.
“…오빠, 제발요. 나, 나 이사님 무서워요.”
마침내 미니가 눈물을 터뜨렸다. 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그 사람은 무서운 사람이지. 그걸 이제야 깨달은 너도 참 딱하다고.
“너한테 불똥 튈 일 없어.”
“제가 헛소리했던 거예요. 저 아무것도 몰라요. 그냥 잊어 주면 안 돼요? 오빠, 제발 나 좀 여기서 꺼내 줘요. 나 저 방 너무 싫어요. 자꾸 환청 들린단 말이에요. 오빠아….”
“가만히 있어도 이삼일이면 나갈 수 있어. 선택은 네가 해.”
사현은 급할 것도 없다는 듯 벽에 기대어 섰다. 미니는 당장이라도 펑 터져 버릴 것 같은 얼굴로 제 머리카락을 쥐어뜯었다. 새카맣고 어두운 독실의 진짜 공포는, 언제 문이 열리고 폭력이 들이닥칠지 모른다는 점에 있었다. 이삼일은커녕 하루, 아니 반나절만으로도 사람을 미치게 만들기에 충분한 구조였다.
“…진짜, 진짜로 나한테 불똥 튈 일 없어요? 정말로 보장해 줄 거예요?”
“그래.”
“정말 지나가는 말이었어요. 진짜 별거 아니었어요. 그게, 그러니까 그 여자 얘기를 하다가요. 애들이 다 입을 모아서 그 여자 진짜 사이코라고 욕하다가 나온 소리예요. 그 여자가 호빠 애 하나한테 그런 얘기 했었대요. 자기가 중학생 때, 지 남자 친구한테 꼬리 친 여자애 왕따시켜서 자살하게 만든 적 있다고. 그것도 자기는 손 하나 까딱 안 했대요. 그냥…. 자기 주변 사람들이 모조리 걔를 미워하게 만들었대요. 자기 좋다고 쫓아다니던 남자애한텐 그 여자애가 지 괴롭힌다는 식으로 말해서 남자애들 사이에서도 왕따 되게 하고…. 자긴 그런 게 너무 재밌고 쉽다고 했어요. 자기가 주변 사람들 다 조종해서 사람 하나 씹창 내는 게,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남 인생 씹창 내게 만드는 그게 너무 좋다고요.”
“…….”
“그래서 그 여자 죽었다는 소식 들렸을 때 다들 누가 복수한 건가 보다 했거든요. 그때 이사님이 하신 말씀이에요. 그렇다고 진짜 저지를 줄은 몰랐다, 이거요. 정확히 누구 얘기한 건지도 몰라요. 그냥 오빠한테 관심 끌고 싶어서 들은 대로 나불댔던 거예요. 진짜예요.”
두려움에 북받친 듯 미니가 눈물을 뚝뚝 흘리기 시작했다. 사현은 말없이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깡추는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형님, 애들 상태 보니 슬슬 병원 보내야 되겠습니다.”
- 벌써? 오늘 아침에 들어갔는데?
“애 하나가 거품 물고 발작하고 있어요. 연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사현이 힐끔 눈짓하자 미니는 서슴없이 제 목구멍으로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웨엑, 짐승 같은 소리와 함께 다친 입술에 허연 거품이 부글부글 맺히기 시작했다.
- 지랄 난 애만 빼놔. 숙소에 자물쇠 채우는 거 잊지 말고.
“예.”
- 누군데?
“…모르겠습니다. 이름 물어봐도 대답을 못 해서요.”
- 그래, 알았어.
선선히 대답한 깡추가 전화를 끊었다. 사현은 코트를 벗어 미니에게 건네고 등을 내밀었다. 미니는 머뭇거리다 코트를 덮어쓴 채 그에게 업혔다. 지옥을 빠져나가는 미니를 향해 철창 너머의 시기 어린 시선들이 박혀 들었다.
‘그렇다고 진짜 저지를 줄은 몰랐다.’
유은아의 죽음 앞에서 그 말은 얼마나 많은 의미를 가질 수 있을까. 성인 여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가벼운 미니의 몸을 짊어지고 계단을 오르며 사현은 수없이 유은아의 생을 곱씹었다. 졸부 집안의 어여쁜 외동딸. 한때 성여준의 아내였고 그를 죽이려 한 여자.
‘자긴 그런 게 너무 재밌고 쉽다고 했어요. 자기가 주변 사람들 다 조종해서 사람 하나 씹창 내는 게, 자기 좋다는 사람한테 남 인생 씹창 내게 만드는 그게 너무 좋다고요.’
깡추는 어디까지 알고 있으며, 어느 선까지 관여한 것일까. 계단참을 지키고 있던 똘마니가 잔뜩 놀란 얼굴로 사현을 막아섰다.
“형님, 제가 차 먼저 빼 오겠습니다.”
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만히 섰다. 축 늘어진 시늉을 한 미니의 심장 박동이 지나치게 빨랐다. 그 선명한 생의 약동, 폭력과 죽음이 두려워 극한의 긴장 상태로 돌입한 어느 밑바닥 인간의 목숨도 사현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했다. 그의 관심은 오로지 여준에게 있었다. 모든 것을 다 가지고 태어난 성여준이 어떻게 하면 조금이라도 더 평안한 삶을 영위할 수 있을지에 대해서.
그러자 놀라웠다. 아직도 그에게 바칠 마음이 남아 있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그의 발밑에 깔아 놓을 사랑만이 절실했다. 그를 위해서라면 타인의 목숨 같은 건 조금도 아쉽지도 두렵지도 않았다.
<3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