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사죄
눈을 뜨자 하얀 사막이었다. 아니, 사막이 아니다. 희고 고운 입자가 가득 쌓인 허허벌판이라 묘사해야 옳다. 사현은 상체를 일으킨 채 손끝의 감각을 훑었다. 하늘은 멀고 구름은 낮았다. 잿빛 지평선을 바라보다 문득 깨달았다. 세계는 멸망했고 사람이라곤 여준과 사현, 단둘만 남았다.
바닥을 짚고 일어선 사현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준은 그로부터 열 발자국쯤 떨어진 자리에 누워 있었다. 사지를 편하게 늘어뜨린 채 고요히 두 눈을 감은 얼굴이었다. 사현은 이제부터 그가 해야 할 일을 하나씩 되새겼다. 여준이 깨어나기 전에 물과 식량을 구하고, 불을 피우고, 앞으로 지낼 장소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건 아마 꿈이었던가?
별로 중요치 않다. 사현은 벌판을 헤매며 나뭇가지와 돌 따위를 모아 잠든 여준의 곁에 쌓아 올렸다. 모든 것이 사라졌기에 무엇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계산이나 협의 없이 그저 선망하면 되었다. 돌을 옮기던 사현의 손이 멈췄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 무엇으로부터 이 사람을 지키려 하는 것인가?
쿵, 쿵,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지구가 부서지는 소리 같았다.
“오빠!”
차창을 두드리던 여자는 사현이 눈을 뜬 걸 확인하자마자 헤쭉 웃었다. 치렁치렁 늘어뜨린 긴 머리에 몸에 달라붙는 트레이닝복 차림이었다. 사현은 인상을 쓴 채 여자를 한참 노려보고만 있었다. 기억에 없는 얼굴이었다.
“오빠, 잠깐만 열어 봐요.”
여자는 사현을 아는 눈치였다. 아마 깡추가 관리하는 가게의 여자 중 하나일 것이다. 사현은 한숨 쉬며 창문을 내렸다.
“오빠, 여기서 뭐 해요? 왜 차에서 자요?”
“…….”
“혹시 나 기억 안 나요? 미니잖아요. 저번에 봤는데.”
얼굴은 여전히 낯설지만 이름은 기억이 났다. 깡추가 옆구리에 낀 채 쉼 없이 잔인한 말을 쏟아내던 그 여자였다. 사현은 대답 없이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세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어, 오빠. 다쳤어요? 요기.”
미니가 제 관자놀이를 손끝으로 누르며 물었다. 쌍꺼풀이 깊이 진 눈동자가 한순간 반짝 빛났다.
“혹시 어제 우리 가게 오픈 전에 해결사 했던 게 오빠예요? 난 출근 늦어서 못 봤었는데, 언니들이 다 장난 아니었다고 그러던데.”
“용건 말하고 가라.”
“차 좀 얻어 타고 싶어서요. 숍 가려고 나오다가 오빠 차가 딱 보이길래.”
“택시로 보이냐?”
퉁명스러운 대꾸에도 미니는 히힝, 애교 있는 웃음소리를 냈다. 접대 일을 하는 여자들은 누구나 비굴해지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오빠, 진짜 호모예요?”
“지금 좋은 꿈 꾸다 깨서 기분 더러우니까 작작 깐족거려.”
“꿈이요? 귀여운 소릴 다 하네.”
미니가 맑은 웃음소리를 냈다. 별것도 아닌 말에 쉽게, 크게 웃는 것도 접대부들의 직업 노하우 중 하나였다.
“무슨 꿈이었는데요?”
“세계 멸망하는 꿈.”
“그게 좋은 꿈이에요?”
한쪽 눈썹을 찡그린 미니가 과하게 놀라는 시늉을 했다. 다 귀찮아진 사현이 차 문 잠금쇠를 풀었다. 그냥 빨리 태워다주고 치우는 게 나을 것 같았다. 미니는 씩 웃으며 냉큼 조수석에 올라탔다.
“오빤 가만 보면 맘이 약하더라.”
“나한테 끼 부릴 거 없어. 아무것도 안 떨어지니까.”
“알아요. 세계 멸망 기다린다는 사람한테 뭘 바라겠어?”
기다린다고 한 적은 없는데. 담배 한 대를 빼문 사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여자는 신이 나서 목소리를 높여가며 떠들기 시작했다.
“근데 왜 세계가 멸망했으면 좋겠어요? 오빠가 뭐가 아쉬워서?”
“조용히 가자.”
“혹시 오빠도 빚 있어요? 나도 어쩔 땐 그놈의 빚 때문에 확 목매달고 싶던데.”
“밑밥 깔지 마라.”
“아, 진짜. 공사 아니라니까! 오빠 호모라면서요.”
미니가 깔깔 웃으며 주머니에서 손거울을 꺼냈다. 머리카락을 넘기며 요리조리 비춰보는 얼굴이 푸석해 보였다.
“나 옛날엔 하루에 이백씩 벌 때도 있었어요. 쩜오였어, 쩜오.”
“…….”
“왕창 벌어서 3억 모으면 내 가게 차리는 게 목표였는데, 그때 사귀던 가게 오빠가 내 인감 도용해서 마이킹 떼어 갖고 나른 거예요. 그냥 나른 것도 아니고 그 돈 담보로 사채까지 쓴 거야. 그래도 바로 알았으면 어떻게든 됐을 텐데 그 새끼 잠수 타고 반년인가? 지나서 알아가지고 이자가 이미 손을 쓸 수 없는 수준이더라고.”
“…….”
“그거 정리해 주는 조건으로 옮겨왔는데 그냥 더 버텨 볼 걸 그랬나 봐요. 강남에선 그래도 돈이 잘 돌거든요. 근데 이 동네는 돈도 없는 진상들뿐이야. 이래가지고 언제 빚 정리할지 모르겠어요.”
레퍼토리는 정해져 있다. 집안의 빚, 사랑했던 남자의 배신, 아픈 동생, 대학 등록금. 약간의 진실을 섞어 교묘하게 내뱉는 언어 하나하나에 어수룩한 인간들은 지치지도 않고 낚인다. 사현은 그런 행태 자체를 나쁘게 보지는 않았다. 사현 자신이나 홍게 같은 인간이 주먹을 쓰듯 그녀들은 언어를 쓸 뿐이었다. 똑같이 살아남기 위한 수단이라 친다면 당연히 그녀들 쪽이 고단수였다.
“오빤 그래서…. 여자는 진짜 안 돼요? 아예 안 서요?”
여자가 은근히 고개를 기울이며 물었다. 화장기 없는 얼굴은 그녀의 나이를 가늠할 수 없게 했다. 사현은 쯧, 혀를 차며 차를 세웠다.
“내려.”
“오빠아. 미안. 잘못했어요.”
“다 왔잖아. 내려.”
사현이 저를 길 한복판에 버린다고 생각했는지 금방 비굴한 표정을 짓던 미니는 건너편 미용실 간판을 확인하고 머쓱한 미소를 띠었다. 사현은 담배를 빼 물고 한 번 더 턱짓했다. 안 내려?
“문 앞에 내려 줘야죠.”
“…….”
“끝까지 데려다주면 좋은 거 알려 줄게요.”
“지랄을….”
홍게나 깡추 상대로는 감히 이러지 않을 것이다. 깡추가 부리는 여자들은 눈치도 빨라서 덤벼도 되는 상대와 그렇지 않은 상대를 기가 막히게 구분할 줄 안다. 홍게는 종종 사현을 비웃곤 했다. 등신 새끼, 얼마나 만만하게 굴었으면.
“오빠가 죽인 여자요.”
억지로 쫓아낼 계산으로 문을 여는데 미니의 다급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일시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양 멈춰선 사현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미니는 살짝 긴장한 얼굴로 숨을 골랐다.
“이사님이 말해 줬어요. 저번에 술 드시다가.”
“…무슨 수작이야?”
“얘기 듣다 보니까 내가 아는 사람 같아서 슬슬 캐물었거든요.”
“…….”
“안 궁금해요?”
입을 다문 사현이 사이를 두고 문을 닫았다. 타앙, 둔탁한 소리와 함께 침묵이 내려앉았다. 미니는 살짝 고양된 기색이었다.
“그 여자, 어릴 때부터 대단했거든요. 내가 듣기로는 중학생 때부터 호빠에 드나들었댔어. 같이 노는 무리들도 싹 다 지들끼리 붙어먹고 나눠서 붙어먹고…. 그 그룹 여자애들은 애도 여러 번 떼었을 걸.”
별로 놀라울 것도 없는 이야기였다. 유은아의 화려한 과거는 사현이 그녀를 죽인 이유도 아니고 이제 와 중요한 일도 아니다. 그가 별 반응이 없자 미니의 목소리가 한층 높아졌다.
“결혼하고 나서는 발길 뚝 끊었다길래 다들 대단하다 그랬어요. 호빠 없이 살 수 있는 인종이 절대 아니다 싶었는데 진짜 한 번을 안 보이데요. 아, 이런 거 왜 아느냐면 그때 우리 가게 들락거리던 호빠 애들이 진짜 앉기만 하면 그 여자 얘길 했거든요. 살다 살다 그런 사이코는 본 적이 없다고, 매번 기록 경신한다면서.”
“본론 언제 나오냐?”
“이사님이 그랬어요. ‘그렇다고 진짜 저지를 줄은 몰랐다.’고.”
미니가 대단한 비밀을 풀어 놓듯 말했다. 성의 없이 그 말을 곱씹던 사현의 눈가가 점점 굳어졌다.
“…뭐?”
여자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렇게만 말씀하셨어요. 이게 다예요.”
“잠깐….”
“그럼 나중에 봐요, 오빠!”
손 키스를 날린 미니가 상쾌하게 뛰어내렸다. 사현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멍하니 보며 몇 번이고 들은 말을 되새겼다. 그렇다고 진짜 저지를 줄은 몰랐다. 그렇다고….
누가? 무엇을?
모래바람에 뒤덮인 듯 혼란스러웠다. 죽은 듯 고요히 누워 있던 꿈속의 얼굴이 자꾸만 눈앞에 어른거렸다.
***
“성 선임!”
딱, 손가락을 퉁기는 소리에 여준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회의실 안의 모든 시선이 집중되어 있었다. 여준은 아, 하며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팀장이 못마땅한 얼굴로 쏘아붙였다.
“뭐 해? 졸았어?”
“죄송합니다.”
“여준 씨. 나 분명히 말했어요. 여준 씨가 공부한다고 해서 그 편의 따로 봐줄 수 없다고.”
“예…. 죄송합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보인 여준이 한숨 쉬며 자리에 앉았다. 눈이 뻑뻑하고 따가웠다. 미간을 문지르고 허벅지를 꼬집었지만 도통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회의 시간에 졸다니. 순식간에 얼굴에 열이 올랐다. 사현을 집에 데려왔던 날 이후로 도통 잠들 수 없던 이유가 컸다. 눈을 감으면 온갖 의미심장한 말들이 머리에 울렸다.
‘못생겼어요.’
‘그 애가 선배와 눈썹 한 올이라도 닮았다면.’
‘안 닮았어요.’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예요.’
‘그 애가 선배의….’
은아가 혹시…. 영재 만났어? 온갖 질문은 곧 여준 자신이 사현에게 매달려 쏟아냈던 불안한 말로 끝맺어졌다. 은아가 영재 만났어? 그래서 은아 죽였어? 깨진 금장시계에서 멈추려던 생각은 반드시 아이에게로 이어졌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보며 아빠 미워, 외치던 얼굴에 이르면 그날은 아침까지 잠들 수 없었다.
회의가 끝나자마자 화장실로 달려가 얼굴에 찬물을 끼얹었다. 잠을 제대로 못 잔 지는 닷새째였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슬슬 한계였다. 페이퍼타올로 물기를 닦고 나서던 여준이 멈칫했다. 멀찍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있던 여직원들이 여준을 보자마자 일제히 말을 멈춘 탓이었다.
“…….”
심상치 않은 낌새를 느꼈지만 그렇다고 반대 방향으로 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걸어 모퉁이를 돌자 그제야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준의 귀를 피할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솔직히 진짜 짜증 나죠…. 하여튼 남자가 권력이야. 누가 봐도 오 선임님 자린데 그걸 낼름 먹겠다고….”
“그러다 들려.”
“들리면 또 어때서요. 못 할 소리 했나? 일을 아무리 열심히 하면 뭐해요. 그래 봤자 남자들 정치질엔 당할 재간이 없는데. 죽을상 해서 다니는 것도 꼴 보기 싫어. 자기 열심히 하고 있다고 어필하는 거 아니에요?”
여준이 굳은 얼굴로 돌아보았지만 누구도 그와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파견 건을 두고 일어난 기 싸움은 어느새 화재 팀들 간의 갈등으로 번져 있었다. 지긋지긋해…. 여준은 그만 웃고 말았다. 엇갈리던 시선들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자리로 돌아와 앉자마자 머리가 핑 돌았다. 모니터 늘어선 끝없는 숫자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얼마나 더 버텨야 할까.
「여준아 오늘 지오 데려올 거야?」
그때 도착한 메시지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여준은 눈을 빠르게 깜빡이며 날짜를 확인했다. 벌써 금요일이었다. 주말에는 어김없이 오전부터 교육을 받아야 했고, 시터에게 부탁해 봤지만 앞으로는 절대 주말에 근무하지 않겠다고 못 박는 말이 돌아왔을 뿐이었다.
「그래도 될까? 미안해」
「아냐 미안하긴 뭘 돈도 준다 그랬잖아」
가린은 시터 비용을 받아 주지 않으면 도저히 맡길 수가 없다는 여준의 말에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가람이나 가린이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건 아니었다. 다만 아이를 지속적으로 맡는다는 것은 절대 친구로서의 호의만으로 가능한 영역이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럼 출발할 때 연락 줘」
연락을 마친 여준이 의자에 길게 기대었다. 고개를 뒤로 젖히자 갑자기 겪고 있는 모든 일이 꿈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그 거리에서 사현을 만나 집까지 데려간 것도 꿈은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고서야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충동이었으니까.
“…….”
정신을 놓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하루하루가 빡빡하고 날카로웠다.
***
어린이집에 도착하자마자 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허겁지겁 안으로 들어서자 마침 문을 열고 나오던 교사가 난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 왔다.
“오셨어요, 아버님. 그런데 지오가 지금….”
“안녕하세요.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그게 사정이 좀 이상하게 됐네요.”
말을 마친 그녀가 조금 웃었다. 여준은 더 묻지 않고 교실로 들어섰다. 아이는 바닥에 주저앉은 채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버둥거리는 조그마한 발 앞으로 블록 장난감이 아무렇게나 흩어진 모습이 보였다.
“지오야, 왜 그래?”
“아빠 미워!”
아이가 다짜고짜 소리를 질렀다. 여준은 주저앉지 않기 위해 무릎에 힘을 주어야 했다. 일주일 내내 쌓였던 피로가 한꺼번에 머리 위로 쏟아지는 기분이었다.
“…왜, 아빠 늦어서? 저녁 시간에 올 거라고 얘기했잖아.”
“왜 지금 왔어!”
“일어나. 가자. 가린 이모가 기다려.”
“아빠 바보야! 내가 힘들게 해 놨는데!”
인내심을 발휘해가며 어르는 말에도 아이는 언제나 그랬듯 끄떡도 하지 않았다. 뒤따라 들어온 교사가 살짝 웃으며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그게요, 아버님. 지오가 아빠 오면 보여 준다고 성을 멋있게 쌓았거든요. 그런데 아빠 차 소리에 신나서 일어나다가 다 쓰러뜨려서…. 그게 속상해서 우는 거예요.”
“…….”
교사는 아이가 정말 귀엽지 않느냐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듣는 여준으로서는 어이가 없을 뿐이었다. 아이는 여준이 가라앉거나 말거나 블록을 집히는 대로 집어 던지며 소리를 질러대고 있었다. 내가 열심히 만들었는데, 아빠 보여 주려고 했는데…. 여준은 아이를 붙들고 따져 묻고 싶었다. 네가 쓰러뜨린 거잖아. 그게 왜 내 잘못이라는 거야? 다행히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러나 화를 삼키기 위한 침묵은 직접 내뱉는 가시 박힌 말보다도 효과적이었다. 차가워진 분위기에 아이가 점점 울음을 그치며 여준의 눈치를 살폈다.
“…성지오.”
“…….”
“일어나. 블록 정리하고.”
“아빠, 미….”
“나라고 맨날 네가 예쁜 줄 알아? 빨리 정리해!”
벌컥 소리친 목소리에 가장 놀란 것은 여준 자신이었다. 두 눈을 둥글게 뜬 아이가 히끅, 딸꾹질을 했다.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교사가 재빠르게 다가와 부자 사이를 막아섰다.
“아버님, 진정하세요. 지오도, 아빠한테 미운 말하면 안 되지?”
하아, 숨을 몰아쉰 여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지오는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블록을 하나씩 주워 담았다. 딸꾹질을 할 때마다 자그마한 몸이 서럽게 들썩였다. 여준은 더 견디지 못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복도를 쿵쿵 걸어 밖으로 나서자 차가운 공기가 얼굴을 할퀴고 지났다.
“…….”
크게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자기 혐오로 미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사가 우는 아이의 손을 잡고 나왔다. 그녀는 아이를 쓰다듬으며 조곤조곤 말했다.
“저…, 아버님. 화가 나셔도 그렇게 자리를 박차고 나가시면 안 돼요. 애들은 아빠가 그러면 자기 버리고 어디 간다고 생각해요.”
“…죄송합니다.”
“원래 미운 소리 많이 하는 시기예요. 조금만 이해해 주세요.”
말을 마친 그녀가 아이의 손을 여준 쪽으로 끌어당겼다. 아이는 온몸을 들썩이며 울면서도 여준에게로 두 팔을 뻗었다. 여준은 허물어지듯 몸을 낮추며 아이를 안아 들었다.
“죄송합니다, 못 볼 꼴을 보였네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 다만…. 지오가 성 정말 열심히 만들었거든요. 아빠한테 엄청 보여 주고 싶었을 거예요. 그래서 그런 거니까….”
어색하게 말을 마친 교사가 지오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지오 잘 가, 월요일에 봐. 아이는 여준의 목을 끌어안은 채 고개를 끄덕였다.
차 문을 열고 아이를 내려놓았다. 아이는 여준이 카시트를 세팅하는 동안 그의 옷깃을 꼭 쥐고 있었다. 카시트의 고정벨트를 걸고 높이를 조절하던 여준의 눈동자가 희붐하게 부풀었다. 코끝이 시리고 입술이 떨렸다.
화를 내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목소리를 높이고 반박해야 할 때는 지금이 아니었다. 아이는 그저 아이답게 유치했을 뿐이다. 웃으며 머리를 쓰다듬어 주면 되었다. 그랬구나, 아빠 보여 주고 싶었는데 속상했구나, 다음에 다시 만들어 주면 되지. 입에 발린 소리를 하며 달래면 그만이었다.
부당한 일을 당하는 건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부당함으로 쌓인 화를 가장 힘없고 약한 아이에게 내뱉고 마는 스스로를 견딜 수가 없었다. 여준은 자칫 넘칠 뻔한 눈물을 얼른 찍어 눌렀다. 스스로 카시트에 올라가던 아이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빠, 울어?”
“아니야, 안 울어.”
“아빠….”
자그맣고 따뜻한 손이 여준의 팔을 쥐었다. 여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아이를 마주 보았다.
“아빠, 미안해.”
“…….”
“아까도, 아빠 밉다고 하려던 거 아니고, 미안해요 하려고 했는데…. 잘못했어요.”
말을 마친 아이가 다시 눈물을 쏟았다. 여준은 이를 잔뜩 사리문 채 아이를 끌어안고 토닥였다.
‘선배와 손톱 모양이라도 닮았다면.’
저주 같은 목소리였다. 하나도 안 닮았어요. 사현이 바로 곁에서 말하는 것 같았다. 깨진 시계의 초침 소리가 들린다. 종말의 카운트다운처럼.
***
‘아들이래.’
간단히 보고한 은아를 향해 여준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반응은 미소를 띠는 거였다. 잘됐다. 첫째는 아들이었으면 좋겠다고 했잖아. 은아는 입술을 뾰족하게 만든 채 표정으로 물었다. 그게 다야?
‘입덧은 좀 괜찮아? 먹고 싶은 건?’
‘첫아들은 보통 엄마 닮는대.’
‘아…. 잘됐네. 자기 닮은 애면 예쁠 거야.’
‘근데 자기 하나도 안 닮았으면 웃기겠다. 그치.’
은아가 생긋 웃었다. 여준은 어색한 미소를 띤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은아와 대화할 때면 온 신경을 집중해 그녀가 원하는 대답을 찾아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최소 일주일은 사사건건 날카로운 힐난에 시달리기 일쑤였다.
‘그래도 내 얼굴도 있겠지. 자라다 보면 다 나온대.’
‘키는 자기만큼 커야 할 텐데.’
다행히 정답인 모양이었다. 미소 띤 은아를 보며 여준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얘 첫 돌 지나면 바로 둘째 가지고 싶어. 왠지 둘째는 딸일 것 같아.’
‘그건…. 자기 몸 상태 보고 결정하자.’
‘딸은 자기 닮았겠지? 그랬으면 좋겠다.’
배를 감싼 은아가 장난을 궁리하는 어린아이처럼 키득거렸다. 여준은 뭐라 말할 수 없는 기분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왜 배 속의 그 아이는 절대 나를 닮을 수 없다고 확신하는 거야?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은아의 외도를 짐작했었다. 그럼에도 붙잡아 따지거나 화내지 않았다. 시시비비를 따지기 위해 소비할 에너지도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즈음 그녀의 힐난과 투정이 덜해진 원인이 외도라면 굳이 바로잡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있었다. 은아는 바람을 피우는 인간의 전형적인 양상을 보여 주었다. 핸드폰을 감췄고 귀가 시간이 들쭉날쭉했고 평소답지 않게 다정하게 굴었다. 다만 그 모든 게 아이가 태어난 후부터였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지오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품을 이유가 없다고. 지오가 있으니 괜찮다고.
핸들을 움켜쥔 여준이 백미러를 살폈다. 아이는 차가 멈춰 선 후에도 곤히 잠들어 있었다. 둥근 뺨, 속눈썹이 길고 쌍꺼풀이 진 눈, 동그란 콧대 구석구석에서 은아가 보였다.
“…….”
어떤 의심도 품을 이유가 없다고….
“읏….”
정말 그렇게 생각했나?
여준은 핸들에 이마를 박은 채 치미는 욕지기를 삼켰다.
그렇게 믿고 싶었던 게 아니고?
항상 은아가 버거웠다. 그녀는 인력을 가진 행성 같았다. 모든 애정을 빨아들이기만 할 뿐 뱉어낼 줄은 몰랐다. 그래도 노력하면 괜찮아질 거라 애써 믿었다. 아이가 생기면, 가족이 늘어나면….
“우웅….”
아이가 웅얼대며 뒤척였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준이 시동을 끄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는 눈을 비비며 여준에게 업혔다.
“아빠…. 나 쉬….”
“다 왔어. 조금만 참아.”
“응….”
달라붙은 아이는 이제 제법 사람 같은 냄새를 풍겼다. 우유, 베이비파우더, 섬유유연제와 향균 물티슈와 눈물이 섞여 비리고 달큼하고 꿉꿉했다.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디뎠다. 이미 오래전에 함몰된 구덩이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떻게 해야 할까. 이제 어떻게 해야 하지. 누구도 대답해 줄 수 없는 질문만이 모래폭풍처럼 여준을 휘감았다.
***
- 도대체 언제쯤 움직일 거야!
악에 받친 노인의 목소리가 차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렸다. 운전에 집중하던 쪽새까지 깜짝 놀라 돌아볼 정도였다. 사현은 덤덤한 표정으로 핸드폰을 멀리 떼어냈다.
- 듣고 있어? 이 자식아! 당장 내 손자 되찾아오지 않으면 후회하게 만들어 줄 테다! 네놈이 저지른 짓거리 죄다 고발할 거야! 죗값을 치르게 해 줄 거라고!
아무래도 노인은 대낮부터 거나하게 취한 듯했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따위 말을 협박이랍시고 입에 담을 리 없었다. 사현이 지루한 얼굴로 쪽새에게 손짓했다. 저기서 우회전.
“조만간 연락드릴 테니 기다려 주십쇼.”
- 조만간 언제? 그 말만 몇 번째야!
“요즘 바빠서 그렇습니다. 무슨 대양건설 이사인지 뭔지 하는 양반이 어디 땅을 사들여야 된다고 난리라…. 그 지역 용역들이랑 툭하면 싸움이 붙거든요.”
- 지금 네놈이 왜 바쁜지 내가 알 바….
뭐라 더 쏘아붙이려던 노인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사현은 그가 생각할 시간을 주지 않고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사장님도 아시다시피 깡패들 싸움이란 게 지저분하잖습니까. 제 꼴도 요즘 말이 아닙니다.”
- …땅을 왜 사들이고 있는데?
“그거야말로 제가 알 게 뭡니까. 저희 같은 놈들이야 높으신 양반들이 까라면 까고 말라면 마는 건데.”
- …….
“끊겠습니다. 부르는 분이 계셔서.”
- 잠….
미련 없이 통화를 끝낸 사현이 핸드폰을 뒷좌석으로 집어 던졌다. 그때까지 숨을 죽이고 있던 쪽새가 얼른 물었다.
“그 영감탱입니까?”
“정면 봐라.”
“그때 죽은 여자 아버지 맞죠? 그 양반이 형님한테 왜 연락하는 겁니까?”
“너 여자 있냐?”
질문에 질문으로 답하기는 꽤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눈에 띄게 당황한 쪽새가 멍청하게 되물었다.
“…예? 여자요? 갑자기 그런 걸 왜….”
있기는 한 모양이었다. 사현은 픽 웃고 다시 물었다.
“결혼할 거냐?”
“아니, 결혼은…. 네, 뭐 할 때 되면 하겠지만…. 갑자기 그런 거 왜 물어보십니까?”
“할 때라는 게 언제야. 애가 생기면?”
“예에…? 별로 애 생각은 없는데….”
쪽새가 멍하니 옆머리를 긁적였다. 그 얼굴을 보며 사현은 새삼 여준이 얼마나 이른 나이에 결혼했는지 깨달았다. 쪽새는 그저 어리고 철이 없는데, 그와 같은 나이인 여준은 이미 네 살배기의 아버지가 되어 있다.
결혼 따위가 그렇게 급했을까. 그따위 여자와 덥석 해 버릴 만큼.
“넌 말이야. 만약 결혼을 해서 애를 낳았는데…. 애가 남의 애란 게 밝혀지면 어떨 것 같냐?”
“남의 애요? 왜요? 애가 바뀌어서요?”
“아니. 애 아빠가 네가 아니면 어떨 것 같냐고.”
“…아.”
쪽새가 뒤늦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박영재와 유은아 건에 대한 이야기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길게 찢어진 눈이 천천히 감겼다가 희번득 뜨였다. 흰자위가 많은 눈동자가 순식간에 송곳 같은 살의를 담고 번들거렸다.
“조져야죠. 그 쌍년, 쌍년이랑 붙어먹은 새끼, 그 년이 싸질러 놓은 애새끼까지 모조리.”
목소리에서 독기가 뚝뚝 묻어났다. 사현이 의아하게 되물었다.
“애새끼까지?”
“당연한 거 아닙니까. 반병신을 만들어놓을 겁니다. 그딴 연놈 피를 받고 태어난 것도 죄예요. 평생 병신으로 살게 해 줘야 제 속이 편하지 않겠습니까.”
그런가. 사현은 무감한 눈으로 멀리 지나가는 비행기구름을 바라보았다. 쪽새는 철저히 깡패다운 방식으로 말하고 있었다. 나를 건드리는 놈, 우습게 보는 놈은 절대 가만히 두지 않겠다고. 그것은 깡패들이 이 조악한 세계에서 살아남기 위한 유일한 철칙이었다. 얼마나 잔혹한 복수를 얼마나 망설임 없이 할 수 있느냐에 따라 급이 나뉜다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여자들은 좋겠어요. 일단 낳아 놓으면 그게 내 새끼인지 아닌지 의심할 필요는 없잖아요.”
“남자는 검사해 보면 그만이잖아.”
“검사는 뭐 쉽게 합니까? 딱구 형님 아시죠? 그 형님이 애새끼 유전자 검사해 봤다가 형수님한테 들켜서 죽네 사네 난리 났었잖아요. 진짜 너무하지 않아요? 여자들은 그 마음 이해 못 해요. 지들이야 직접 낳았으면 제 새끼니까.”
“…….”
“형수님이 그래, 결과 나오는 거 보자, 니 새끼인 거 확실하면 그날이 너 죽고 나 죽는 날이라고 아주…. 결국 형님 새끼이긴 했는데 그것 때문에 아직까지 지랄 난다잖아요.”
“…….”
“…그러고 보니, 그때 그…. 봉 남편은 아직 모릅니까?”
돌고 돌아 대화의 뿌리를 찾아낸 쪽새가 조심스레 물었다. 어, 사현은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어차피 쪽새를 비롯한 무리들에게 굳이 비밀로 할 이유는 없었다. 평생 성여준과 같은 세계에 발도 못 붙일 인종들이므로.
“근데 당장 몰라도요…. 애 키우다 보면 어떻게든 알게 되지 않겠습니까? 병원 갈 일도 많을 거고, 사람이 촉이라는 게 있는데.”
“병원 허구한 날 데리고 다녀도 모르던데.”
“예? 어떻게요? 혈액형 때문에 뽀록이 안 날 수가 없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성여준의 혈액형이 뭐더라. 곰곰이 떠올려 봤지만 기억이 날 리가 없었다. 여준은 학생 때도 그 흔한 SNS 하나 만들지 않았다. 남들은 전시하지 못해 안달인 본인의 정보를 구태여 먼저 꺼내 놓지 않는 인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안 미치나 보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모르면 그게 병신이죠.”
사현이 눈에 힘을 주고 쪽새를 노려보았다. 의식적으로 한 행동은 아니었다. 다행히 쪽새는 차선 바꾸기에 집중하느라 그 기색을 눈치채지 못 했다.
“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닐까요? 그게 오히려 신빙성 있는데요.”
“모르는 척을 해? 왜?”
“왜냐뇨…. 쪽팔리니까?”
쪽새가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당연하잖아요. 사현은 대답 대신 미간을 살짝 좁혔다. 아이가 제 자식이 아닌 걸 알게 된다면 여준은 어떻게 할까.
‘성여준도 뭐 똑같지 않겠어? 뻐꾸기 짓 당한 거 쪽팔려서 감추려 하지 않겠냐고.’
영재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확신이 없었다. 핏줄도 아닌 아이를 어떻게든 끌어안고 키운다는 선택지 자체가 사현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영역에 있었다. 자기 아이여도 스스럼없이 버리는 인간은 많다. 아내에게 속아 남의 자식을 키웠다는 걸 알게 되었을 때, 모든 사실을 터뜨리고 아이를 버리고 마음껏 동정 받는 이가 오히려 인간답지 않은가.
“저 같으면 저를 속인 연놈 잡아 족치고 애새끼 내다 버리죠. 남들이 듣기만 해도 벌벌 떨 만큼 보복하겠죠. 그런데 멀쩡한 인간들은 그렇게 못 하잖습니까. 그러니까 감추는 거죠. 내가 이렇게 얕보이고 호구 취급당했다는 걸.”
“자존심 문제라는 소리냐?”
“뭐 그렇지 않을까요?”
그렇다면 성여준은 어리석다. 사현은 눈을 감은 채 꿈에서 보았던 하얀 모래사막을 떠올렸다. 그곳에 아이는 없었다. 오로지 여준이 잠들어 있었다. 그래서 아름다운 세계였다.
“그나저나 형님, 요즘 너무 아슬아슬하신 거 아닙니까?”
쪽새가 걱정스레 물었다. 사현은 대답 대신 전방을 턱짓했다.
“왜 이렇게 내일이 없는 사람처럼 구세요? 어제만 해도….”
“세워.”
사현이 짧게 명령했다. 차가 멈춰 선 곳은 강남 대로변의 빌딩 앞이었다. 쪽새는 익숙한 몸짓으로 차 키를 빼서 사현에게 건넸다.
“여기 정차 오래 하면 벌금 쎄게 나옵니다, 형님.”
“가 봐.”
“예, 들어가 보겠습니다.”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쪽새가 차에서 내렸다. 사현은 글로브박스에서 태블릿PC를 꺼냈다. 여준의 핸드폰 메신저를 확인한 결과 오늘 교육 일정은 오후 다섯 시까지였다. 아이는 언제나 그랬듯 고등학교 선배 집에 맡긴 모양이었다.
「여준아 너 강남에서 오는 거면 지오 선물 좀 사와. 가린이가 얘기해 줬는데 그 곰 캐릭터 머그컵도 있다며. 우리 집에 두고 지오 컵으로 쓰자」
사현은 모르는 상대였다. 메시지를 올릴 때마다 비슷한 내용이었다. 아이는 그새 또 아팠다. 툭하면 열이 오르고 토하고 배탈이 난다. 아이들은 다 이런가. 사현은 태블릿PC를 내려놓고 어린 시절을 곰곰이 떠올려 보았다. 별로 기억나는 게 없었다. 아프다고 해서 간호를 받거나 병원에 간 적도 없는 것 같다. 홀로 버려져 알아서 자랐다.
‘민가람’이 아이를 이토록 살뜰히 챙기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준의 아이이기 때문이다. 좋은 집에 사는 것도, 고급 음식을 먹고 비싼 옷을 입는 것도, 아무 모자람 없이 살면서 엄마 하나 없다는 이유로 모든 어른들의 동정과 보살핌을 받는 것도.
“그건 불공정하지….”
중얼거린 사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쓸모없는 생각이었으므로.
‘어차피 알게 되지 않겠어요?’
아이를 여준의 품에 안겨 주면 끝날 줄 알았다. 여준이 원하는 형태를 누구도 건드릴 수 없게 만들면 되는 거라고. 사현은 답답한 마음에 담배를 꺼내다 멈칫했다. 조수석 사이드미러에 익숙한 얼굴이 비친 탓이었다.
여준이 걸어오고 있었다. 회사 동료인 듯한 사람들과 함께였다. 말끔한 사복 차림이었다. 트렌치코트에 머플러를 두르고 있어 얼핏 대학생처럼 보였다. 주변 사람과 이야기하다 간간히 웃기도 했다. 사현은 담배를 도로 넣고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한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점심 먹고 돌아오는 거구나. 거울을 가만히 바라보며 여준의 시선을 쫓았다. 미소 띤 얼굴과 눈이 마주친 것은 그때였다.
“…….”
사현이 반사적으로 차 키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그는 조수석에 앉아 있었고 차를 출발시키려면 운전석으로 건너가야 했다. 설마 건물 밖으로 나올 줄은 몰라서 아무 대비도 하지 않은 터였다.
급히 사이드미러를 보았다. 여준은 함께 있던 이들에게 무언가 말하고는 먼저 가라는 듯 손짓했다. 젠장, 낮게 뇌까린 사현이 얼른 운전석으로 다리 한 짝을 넘겼다. 그래 봤자 멀쩡히 걸어오는 여준이 빨랐다. 똑똑, 조수석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사현은 기어코 깊은 한숨을 쉬었다.
“문 열어 봐.”
차를 바꿨어야 했는데. 뒤늦게 후회했지만 소용없었다.
“있는 거 알아. 잠깐만 열어.”
“…….”
“물어볼 게 있어서 그래.”
머리를 벅벅 긁은 사현이 몸을 일으켜 완전히 운전석으로 건너갔다. 앉아서 옷매무새를 정리한 후에야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익숙한 동작으로 차에 올라탄 여준이 고개를 기울여 사현의 얼굴을 살폈다.
“얼굴 좀 이쪽으로 돌려 봐.”
“…왜요.”
“다친 데 괜찮은지 보게.”
사현은 얼굴로 뻗어오는 여준의 손을 약하게 뿌리쳤다. 여준은 예상했다는 듯 아무렇지 않게 손을 거둬들였다.
“물어볼 게 그거예요?”
“왜 또 여기서 알짱거려? 먼저 나한테 찾아오는 일 없을 거라더니.”
“지나가던 길인데요.”
“…그래, 됐어.”
후우, 여준이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할 말이 있다는 건 사실인 모양이었다. 사현은 애써 여유를 가장하고 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가칠해진 얼굴이 차가워 보였다. 그새 또 여윈 것 같았다.
“…담배 있어?”
한참이 지나서야 떨어진 말은 사현의 모든 예상을 비껴가는 질문이었다. 눈을 둥글게 뜬 채 껌벅이던 사현이 얼떨떨한 동작으로 담뱃갑을 꺼냈다. 여준은 자연스럽게 한 개비를 빼물었다.
“담배 피워요?”
“응.”
“몰랐어요. 피우는 거 본 적 없어서.”
불을 대 주려는 손에서 라이터를 빼간 여준이 또 한숨을 쉬었다.
“잘 안 피워. 간접흡연 안 좋다고 하도 그래서….”
애한테? 생략된 말을 지적할까 말까 고민하던 사현이 픽 웃었다. 여준이 하려는 이야기를 알 것 같았다. 아이 이야기를 꺼낼지 말지 망설이고 있는 것이다.
“할 말 있으면 빨리하고 가요. 나도 바쁜 사람이니까.”
빙글 웃으며 재촉하자 여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반듯한 이마에서 섬세한 콧대로 이어지는 선이 툭 건드리면 부스러질 듯 희미하게 보였다. 침묵 속에 두 눈을 꾹 감았다 뜬 그가 느린 심호흡을 했다. 아주 대단한 결심이라도 하는 사람처럼.
“…너 뭔가 알고 있는 거야?”
이어진 질문은 예상범주 내였다. 사현은 비웃거나 모르는 척 능청 부리는 대신 여준의 손에서 담배를 빼내 제 입에 물었다.
“말을 똑바로 해요. 앞뒤 잘라먹고 사람 떠보지 말고.”
“지오한테…. 정말 무슨 짓 하려는 거야?”
“…….”
“은아한테 그런 것처럼?”
말을 이어가는 여준의 턱끝이 바르르 떨렸다. 상상만으로도 두려운 모양이었다. 사현은 말없이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러지 마.”
“뭘요.”
“아무 짓도 하지 마. 더 이상…. 내 일에 상관하지 말라고.”
여준의 대단한 점이었다. 아내를 죽이고, 아이를 죽일지도 모르는 인물이 눈앞에 앉아 있는데 이따위 설득이 통할 거라 믿는 것이. 어리석고, 순진하고, 그래서 가엾다. 사현은 차분히 여준을 바라보았다.
“선배 애한테 아무 짓 안 해요. 걱정 안 해도.”
“사현아.”
“저번 주 일은 신경 쓰지 말아요. 홧김에 한 소리니까. 내가 선배한테 하는 말은 다 허세예요. 당신도 알잖아요.”
“난 지금 나 때문에 더 이상 네 인생을 망치지 말라고 말하는 거야.”
“…….”
밀폐된 차 안은 금방 매캐한 연기로 가득 찼다. 여준이 잔기침을 뱉자 사현은 운전석 창문을 약간 열고는 손을 저어 연기를 내보냈다.
“네가 뭘 알고 있는 건지는 모르겠어. 모르겠지만….”
“…….”
“그게 뭐든…. 네가 속 끓일 일이 아니야. 네가 나서서 해결해야 할 일도 아니야. 난 너에게 그런 거 바라지 않아.”
“그냥 선배가 알기 싫은 거 아니고요?”
열린 입술 새로 기다렸다는 듯 비아냥이 흘러나왔다. 물론 도로 주워 담을 생각도 없었다. 대번에 날카로워진 사현의 시선에 여준은 괴로운 듯 눈살을 찌푸렸다.
“괜히 호구 짓 한 거 파헤쳐져서 쪽팔릴까 봐 내 생각하는 척 위선 부리는 거 아니에요?”
“사현아.”
“참 사람이 이렇게 한결같기도….”
“…나는 옛날부터 개를 키우고 싶었어.”
여준이 가만히 내뱉은 말에 사현이 입을 다물었다. 멀리서 비행기구름이 한 줄 더 그어졌다.
“어릴 때부터 개 키우는 친구들이 부러워서 틈만 나면 졸랐거든. 그런데 부모님이 절대 허락을 안 하셨어. 성적이 잘 나오면 웬만한 소원은 다 들어주셨는데…. 개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된다고 했어.”
“…….”
“부모님이 맞벌이라서 개를 돌볼 사람이 없다는 이유도 있었고, 생명을 책임지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니까 그렇게 함부로 결정하면 안 된다고도 하고…. 너한테 얘기한 적 있던가. 우리 이모가 개를 키우셨는데 그 개가 우울증에 걸렸었거든. 외로워서.”
기억하고 있었다. 참 사치스러운 삶도 다 있다고 생각했다. 그저 집에서 기다리기만 하면 귀가한 주인에게 마음껏 사랑받고 동정 받을 수 있는데 뭐가 모자라서 우울증씩이나 걸리는지.
“그래서 왠지…. 어른이 되고 나서도 개를 키울 수가 없었어. 동물 책임지는 걸 쉽게 생각하면 안 된다, 함부로 키우면 안 된다…. 귀에 못이 박이도록 듣고 자랐더니 그냥 그렇게 되더라고. 주변 사람들이나 인터넷에서도 다들 똑같은 소리를 했어. 동물 쉽게 키우지 마세요, 끝까지 책임질 수 있는 사람만 키우세요….”
여준이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렸다. 차 안을 울리는 목소리는 맑고 차분했다. 사현은 시트에 몸을 기댄 채 이대로 시간이 흐르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이를 함부로 낳으면 안 된다고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라.”
여준의 목소리는 모난 데 없는 중저음이었다. 말끝이 분명하고 발음이 정확했다. 사현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여준은 상체를 앞으로 기울인 채 어려운 말을 한마디씩 자아내고 있었다.
“집에서 결혼을 좀 재촉했었거든. 부모님이 당신들 은퇴 전에 내가 결혼하길 바라셨어. 그래서 결혼했더니 이번에는 빨리 아이를 낳으라고 하더라고. 어른들뿐만 아니라 직장 사람들도, 고등학교 동창이나 친구들도 하나같이…. 아기는 언제 낳을 거냐고.”
“…….”
“그래서 난 아이라는 게 개보다 키우기 쉬운 건 줄 알았어.”
사현이 픽 웃었다. 여준은 웃지 않았다. 눈썹산이 푹 가라앉은 얼굴로 사현을 마주 볼 뿐이었다.
“어른들이 괜히 애들을 핏덩이라고 부르는 게 아니야. 말 그대로 핏덩이거든. 작고 벌건 게 하루 종일 밤새도록 울어대면서 온갖 분비물을 쏟아내. 툭하면 열이 오르고 토하고 설사하고 뭐 하나 잘못 먹이면 온몸에 발진이 일고…. 난 정말 몰랐어. 사람이란 게 그렇게 약하게 태어나는 줄은. 유리로 만든 인형도 갓난애보다는 튼튼할 거야.”
여준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사현은 잠잠히 먼 하늘만 바라보았다.
“정말 이해가 안 갔어. 나는…. 애를 키운다는 게 그런 지옥을 보는 일인 줄 알았다면 더 신중히 생각했을 거야. 개를 키운다고 할 때 일단 말리는 건, 막상 개를 키워 보니 별로였다며 버리는 사람이 너무 많아서잖아. 그런데…. 그러니까….”
“선배.”
“그런데도 애를 낳으라고, 당연히 낳아서 기르라고 거리낌 없이 말하는 건…. 그런 믿음이 있어서잖아. 자기 자식이니까, 아무리 힘들어도 동물한테 그러듯이 쉽게 버릴 수는 없다고. 적어도 내가 아는 사람, 내 자식은 절대 그런 짓을 저지르지 않는다고.”
“…….”
“나는 버리고 싶었어. 몇 번이나. 은아 친정에, 아니면 내 부모님에게라도.”
말을 쏟아낸 여준의 어깨가 힘없이 허물어졌다. 그런 걸 버린다고 할 수 있나? 어느 쪽에 가더라도 아이는 더없이 안락한 환경에서 자랐을 것이다. 사현은 의아했지만 구태여 반박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렸다.
“지오가 내 아이라고 티끌 한 점의 의심 없이 믿을 때도 그랬어.”
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눈에는 여전히 수많은 말이 담겨 있었다.
“내 아이여도 버릴 수 있다면, 핏줄이라는 게 그렇게 절대적인 게 아니라면….”
“…….”
“그건 당연히, 내 아이가 아니어도 사랑할 수 있다는 뜻 아니야?”
그리하여 사현은 깨달았다. 여준은 스스로를 타이르는 중이라는 걸. 내 아이가 아닐지도 몰라. 아니야, 내 아이가 아니어도 괜찮아. 그렇게 믿기 위해 자신이 아는 세상의 모든 말을 갖다 붙이는 중이라는 걸.
“뭐가 그렇게 불안해요?”
사현이 물었다. 여준은 말을 멈추고 숨을 삼켰다. 낯빛은 희다 못해 푸르스름했다.
“선배.”
“…난.”
“정말로 괜찮아요?”
그 애가 당신 아이가 아니어도. 많은 말을 덧붙일 필요 없이 전해지는 이야기는 금방 여준의 가슴을 찔렀다. 꽉 다문 입술에 경련이 일었다.
“난 당신이 진짜 그 애를 사랑하는지 아닌지가 궁금한 게 아니에요.”
“…….”
“당신이 견딜 수 있을지가 궁금한 거예요.”
감당할 수 있겠어요? 잠들기 전, 어느 날 갑자기 떠오르면 괴롭지 않겠어요? 당신을 배신한 사람이 안겨두고 간 저주처럼 느껴지진 않을까요?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면 클수록 스스로의 목을 죄는 날이 계속되는 건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다고 빼앗아 버리면. 그토록 아끼고 귀애하는 상대를 없애버리면. 마음을 쏟을 대상을 잃은 여준이 어디까지고 침잠할까 두렵다. 그렇다고 평생 숨길 수 있는 문제도 아니다. 사현은 여러 번 입술을 달싹이다 쥐어짜듯 말했다.
“모르겠어요, 난…. 선배는.”
여준이 두 손에 힘을 주었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행복해져요?”
사현은, 이 세상에 무조건 사랑받기 위해 태어나는 인간이 있다면 그건 여준일 거라 생각했었다. 아름답고 총명하며 다정하니까, 어린 시절에 그러했듯이 언제까지고 당연하게 모두의 호의를 누리며 살아갈 거라고.
그렇게 되지 않았을까? 자신과 엮이지만 않았더라면. 언젠가 녹음이 우거진 복도에서 환한 미소를 짓던 그때처럼, 신이 사랑하는 모습 그대로 어른이 되지 않았을까. 그랬다면 지금 이렇게 어둡고 침침한 차 안에서 핼쑥한 얼굴로 절망하고 있지도….
“사현아.”
여준이 사현의 무릎을 짚었다. 두꺼운 천 너머로도 느껴질 만큼 차가운 손이었다.
“너는 내 인생에 책임이 없어.”
이어진 말은 그 손보다도 더 차가웠다.
“그러니 나 때문에 너를 망칠 이유도 없어.”
“…선배.”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야. 그게 뭐든 나는…. 네가 너 자신이나 다른 누군가를 해쳐가면서 나한테 뭔가 해 주는 거 원하지 않아.”
“…….”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다야.”
후우, 긴 한숨을 내쉰 여준이 차 문을 열었다. 사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 한 채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옷자락을 툭툭 털어 낸 여준이 차 안으로 몸을 숙인 채 말했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면, 앞으로도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있다면 전화해.”
“…….”
“기다릴게.”
차 문은 조용히, 그러나 단호하게 닫혔다. 차분히 걸어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사현은 몇 번이고 그의 말을 곱씹었다. 나 때문에 너를 망칠 이유는 없어. 너는 내 인생에 책임이 없어….
덜컥 오한이 들었다. 날카롭게 벼려진 빙하에 꿰뚫린 기분이었다.
***
“아빠! 라이언!”
문을 열자마자 튀어나온 아이가 두 손을 번쩍 올리며 외쳤다. 여준은 픽 새어 나오려던 웃음을 참고 짐짓 엄격한 얼굴로 쇼핑백을 뒤로 숨겼다.
“인사부터 해야지.”
“다녀오셨어요! 라이언은?”
숨 돌릴 틈도 없이 덤벼드는 기세에 따라 나온 가린이 난처한 듯 웃었다. 긴 머리를 하나로 묶어 올린 가린은 유난히 피곤해 보였다. 여준은 미안한 마음에 마주 웃지도 못했다.
“형은?”
“술 없다고 편의점 갔어. 그 인간 큰일이야, 그러다 30대에 알코올중독부터….”
“라이언!”
아이가 팔짝팔짝 뛰며 보채기 시작했다. 여준은 결국 쇼핑백부터 내려놓았다. 허겁지겁 포장을 풀고 캐릭터 머그컵을 손에 쥔 아이가 신이 나서 폴짝거렸다.
“내 거! 내 컵!”
“그러다 깬다. 내려놔.”
“이모! 이거 저기 넣어 줘. 내 컵이니까.”
가린의 옷깃을 붙잡은 아이가 유리 장식장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람이 모아 놓은 게임 캐릭터 모형이나 상패 따위가 들어 있는 공간이었다.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둔 여준이 얼른 아이에게서 컵을 뺏어 들었다.
“이걸 왜 삼촌 장식장에 넣어. 찬장에 넣어야지.”
“위쪽까진 내 손이 안 닿잖아!”
“그래도 안 돼. 이모더러 꺼내 달라고 하면 되잖아.”
단호한 거절에 아이가 금방 울음을 터뜨릴 듯 숨을 들이쉬었다. 뒤늦게 따라온 가린이 얼른 지오를 안아 올렸다.
“울지 마, 울지 마. 이모가 넣어 줄게. 여준아, 여기 둬도 괜찮아.”
“안 돼. 보나 마나 이 핑계로 장식장 열어서 안에 있는 형 피규어 손대려고 그러는 거야.”
“어? 정말? 우리 지오가 그렇게 똑똑한 수를 부렸어?”
가린이 활짝 웃으며 아이의 뺨에 입 맞췄다. 여준은 깊은 한숨을 쉬고 가장 높은 찬장에 컵을 넣어 두었다.
“이런 거 슬슬 교육시켜야 돼. 언제까지 떼쓴다고 다 들어줄 수 없잖아.”
“그래, 그래. 알았어.”
아이가 부루퉁해진 얼굴로 가린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준은 일부러 아이 쪽을 쳐다보지 않고 주방으로 향했다. 남매의 저녁 준비를 하다 멈춘 조리대에는 빛깔 고운 식재료들이 보기 좋게 늘어서 있었다.
“저녁 뭐 하려고? 도울게.”
“그냥 두고 지오랑 좀 놀아 줘. 얘 하루 종일 너만 기다렸어.”
내가 아니라 라이언 컵을 기다렸겠지. 받아치려던 농담을 문득 삼켰다. 아이가 가린의 말을 듣자마자 얼굴을 붉히며 여준을 빤히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막 익은 사과 같은 뺨을 살피던 여준은 문득 궁금해졌다. 아이는 왜 무조건 부모를 사랑하는 걸까.
“아들, 오늘 뭐 하고 놀았….”
애써 다정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순간 여준의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잔뜩 황망한 빛을 띠고 있던 사현의 눈동자였다. 허둥지둥 품을 뒤져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 화면에는 전혀 예상치 못한, 그리하여 더욱 달갑지 않은 이름이 떠 있었다.
“…예, 장모님.”
여준이 가라앉은 인사말을 내뱉자 가린이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는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하고 창가로 향했다. 노인은 언제나 그랬듯 여준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벌컥 소리를 질렀다.
- 자네는 애 떠맡겼을 때 말고는 우리가 죽든지 말든지 관심도 없나?
“무슨 말씀이신지….”
- 다음 주면 추석이잖아! 뭘 어쩔 건지 왜 말이 없어? 꼭 어른이 먼저 전화를 하게 만들어야 속이 시원해?
아…. 낮게 탄식한 여준이 벽에 걸린 달력을 올려다보았다. 주말을 끼워 5일짜리 연휴였다. 작년에는 어떻게 했더라. 아마 처가 식구들을 태우고 은아를 보러 갔을 것이다. 장모는 은아의 납골함 앞에서 울다 졸도했었다. 장인은 멍하니 서 있는 여준을 향해 비아냥거렸다.
‘우리 애가 죽은 지 10년이 됐나, 20년이 됐나. 어쩜 그렇게도 멀쩡해 보이나.’
처가 식구들의 시선이 모두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자네는 은아가 죽은 게 슬프지도 않아?
여준은 묻고 싶었다. 이곳은 내가 슬픔을 내보일 수 있는 자리인가? 아이조차 그 자리에서 울지 못했다. 아이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를 비롯한 늙은 어른들이 저마다 경쟁하듯 큰 소리로 서러움을 터뜨리는 모양을 보며 겁을 먹고 주춤거렸다. 이번에도 그런 형태가 될 거라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연휴 중 하루는 출근해야 하는데 그 일정이 아직 안 나와서 연락을 못 드렸습니다. 월요일에 결재 받고 바로 전화 드리겠습니다.”
- 어련하겠어. 고작 선임 자리 앉아서 회사 일이란 일은 혼자 다 하시는 대단한 양반께서.
“…….”
- 월요일, 알겠네. 그만 끊게.
화면이 전환되자 절로 한숨부터 나왔다. 아이를 의자에 앉혀 둔 채 눈치를 살피던 가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뭐래?”
“아냐, 그냥…. 추석 때 어쩔 거냐고.”
“그 양반들은 왜 이렇게 핑계만 있으면 널 불러들이려 그래? 서로 얼굴 봐서 좋을 게 뭐 있다고.”
여준은 웃으며 검지 하나를 입가에 붙였다. 애 들어. 가린은 볼멘소리를 뚝 멈추고 아이의 뺨을 쓰다듬었다.
“나 보자고 부르는 게 아니잖아. 지오가 보고 싶으신 거지.”
“그래도….”
“형은 왜 이렇게 안 오지? 전화해 볼까?”
애써 화제를 돌리는데 현관문이 열렸다. 양손 가득 편의점 봉투를 든 가람이 반가운 얼굴로 활짝 웃어 보였다.
“우리 사장님 왔네? 밥 금방 되니까 조금만 기다려.”
“사장님은 또 무슨….”
“가린이 일급 주니까 사장님이지. 앉아, 앉아.”
봉투에는 온갖 종류의 술이 들어 있었다. 캔 맥주를 하나씩 꺼내 냉장고에 넣으며 여준은 은아가 잠들어 있는 납골당을 떠올렸다. 가장 비싼 납골함에 담아 가장 비싼 자리에 비치한 뼛가루. 그것을 은아라고 부를 수 있다면.
영재는 은아를 찾은 적이 있을까. 문득 궁금했다.
“내일도 그거야? 연수?”
캔맥주를 양손에 쥔 가람이 물었다. 여준은 그가 차려 놓은 술상을 받아 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래도 일요일은 오후부터예요.”
“맞아. 이 정도는 마실 수 있다는 뜻이지.”
웃으며 캔으로 건배했다. 케이블 채널에서는 철 지난 느와르 영화가 방영되고 있었다. 여준은 맥주를 홀짝이며 화면에 집중했지만 영화 내용은 도통 머리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 저거 재밌겠다.”
영화가 중간에 끊기더니 중간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유명한 소설 원작의 공포 영화가 조만간 개봉한다는 예고였다. 여준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마지막으로 영화관에 간 게 언제였더라. 은아는 영화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보더라도 로맨틱 코미디나 잔잔한 멜로 영화였다. 여준의 취향과는 극과 극이었다.
“너 공포 영화 좋아하지 않던가? 그지?”
“그렇긴 한데 귀신 나오는 건 잘 안 봐요.”
“왜? 귀신이 더 무섭지 않아?”
“비현실적이잖아요. 그래서 봐도 별생각이 안 들어요. 영화 속에나 있는 거니까.”
흐음, 가람은 이해하기 힘들다는 듯 고개를 기울였다. 귀신은 별로 무섭지 않다. 어차피 현실에는 없을 재난이다. 여준을 안도하게 만드는 건 조금 더 직접적인 공포였다.
“갑자기 해일이 와서 사람이 다 쓸려나간다거나…. 길 가다가 미친 살인마를 맞닥뜨려서 끌려간다거나, 그런 게 더 무섭지 않아요?”
“모르겠네. 나는 아무리 생각해도 귀신이 백 배 무서운데.”
“귀신은 다 스토리가 있잖아요. 왜 나타나는지, 뭐 때문에 귀신이 됐는지, 그것만 알고 해결하면 거기서 끝나니까요. 사람이랑은 다르게….”
말을 이어 가던 여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왜 나타나는지, 어째서 귀신이 됐는지, 그것만 알고 해결하면….
“…….”
가람은 지루한 얼굴로 TV 채널을 돌렸다. 영화 채널을 아무리 거슬러 올라가도 볼만한 영화는 좀처럼 걸리지 않았다. 여준은 맥주 한 모금을 삼키고 목을 가다듬었다.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묻기 위해서는 일단 시선을 피해야 했다.
“…영화 얘기하니까 갑자기 생각난 건데요, 형.”
“응?”
“예전에 은아랑 본 영화 중에 그런 내용이 있었거든요. 그러니까 어떤 남, 아니, 여자가…. 어느 날 남편이 살해당해서 그 비밀을 추적하는 건데.”
“응, 응.”
“알고 보니까 이 여자를 옛날부터 좋아하던 남자가 죽인 거였어요. 왜 죽였냐 하면 그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있다는 걸 알아서….”
“으응? 그러니까, 여주인공을 좋아하던 남자가 그 여자 남편을 죽였다고? 그 여자 남편이 바람피우는 걸 알고?”
“…네.”
“왜? 그 여자를 좋아한다며. 남편이 바람피웠으면 좋다구나 일러바치고 이혼하게 만들었으면 될 일 아니야?”
가람이 오징어 다리를 질겅질겅 씹으며 물었다. 잠시 할 말을 잃었던 여준은 애써 정신을 차리고 맥주 한 모금을 더 들이켰다.
“그게요. 그러니까, 음…. 그 남자가 약간…. 뭐라 하지, 어둠의 세계…? 조폭…? 그런 인간이어서….”
“으응…?”
“그리고 예전에 주인공한테 크게 잘못한 일도 있고 해서…. 직접 앞에 나설 수는 없는…. 그런 상황이었던 건데요.”
“그래서 사람을 죽였다고? 내가 좋아하는 여자 두고 바람피웠다는 이유로?”
다급히 기워 놓은 이야기에도 가람은 금방 집중하는 기색이었다. 여준은 식은땀을 훔쳐 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네, 그런데 주인공은…. 어릴 때 좋은 추억도 있고 해서…. 그 남자가 더 이상 죄를 짓는 걸 바라지 않아요. 그래서 남자한테 말을 하는 거예요. 나는 네가 나 때문에 더 이상 네 인생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고…. 내 인생은 다 내가 알아서 하는 거라고 뭐….”
“응. 맞는 말이네. 그래서?”
“그런데 그 말을 듣고 그 남자가….”
여준이 잠시 말을 멈췄다. 눈을 감으면 검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절망을 묻어 놓은 우물 같던 시선이 도무지 잊히지 않았다.
“…정말 당장이라도 목매달고 죽을 것 같은 얼굴로 주인공을 빤히 보는데….”
빠직, 세게 쥔 캔이 찌그러지며 둔탁한 소리를 냈다. 가람은 여전히 여준의 의중을 파악하지 못한 채 어리둥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왜…, 였을까요?”
“어? 뭐가?”
“…….”
“아, 그 말을 듣고 왜 남자가 죽고 싶은 얼굴을 했을 것 같냐고?”
그것은 정말이지 여준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반응이었다. 사현의 차를 발견하고 다가가면서 몇 번이고 준비한 말을 되뇌었다. 더 이상 나쁜 짓 하지 마. 어떤 이유로든 그러지 마. 내 인생에 네 책임이 있다고 여기지 마.
“네 인생을 망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건, 다시 말해서…. 네가 더 다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뜻이잖아요.”
“그런가…?”
가람은 고개를 갸웃하며 애매한 반응을 보였다. TV에서는 이제 철 지난 한국 영화 명작선이 소개되고 있었다.
“무슨 영환데? 이렇게만 들어서는 영 모르겠네.”
“…제목은 기억이 안 나요. 그렇게 집중해서 본 게 아니라. 그냥…. 그 남자 배…, 우 표정이 인상에 남아서….”
얼떨결에 뱉어 놓고도 그럴싸한 변명이었다. 여준이 속으로 가슴을 쓸어내리는 동안 가람은 한층 고민이 깊어진 얼굴을 했다.
“글쎄…. 영화 얘기니까 그러려니 하는 거지, 보통 제정신인 인간이 그런 이유로 사람을 죽이지는 않잖아.”
“…….”
“그래도 굳이 그 남자한테 이입해서 말해 보면, 의미가 없어져서 그런 거 아니야?”
의미? 여준이 눈을 크게 떴다. 가람은 아예 TV를 꺼 버리고 여준 쪽으로 돌아앉았다.
“여자 남편이 바람을 피워서 죽인 거라며? 근데 여자 앞에 나타날 생각은 없고. 그럼 본인 딴에는 여자를 위한답시고 저지른 일일 거 아냐.”
“…그렇겠죠?”
“근데 여자가 내 인생에 상관하지 말라고 말한 거잖아. 얘는 이미 살인까지 저질렀는데.”
“…….”
“다 헛짓했던 건가, 그 생각이 먼저 들지 않겠어?”
“아뇨, 그러니까, 그래서 연락도 하라고 말했는데.”
저도 모르게 반박한 여준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가람은 응? 하며 한쪽 눈썹을 찌푸렸다.
“뭘 하라고 해?”
“…아니, 아니에요. 헛소리했어요.”
여준이 손등으로 미간을 누른 채 숨을 골랐다. 그런가. 역시 오해했던 건가. 하지만 그 이상 어떻게 말해야 했을까. 네가 다치지 않기를 바란다고. 더 이상 위험한 일에 발 담그지 않았으면 한다고….
“근데 진짜로 바람 좀 피웠다고 죽인 거야?”
와작, 가람이 땅콩 한 움큼을 씹으며 물었다. 여준은 힘없이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 외의 이유는 짐작할 수 없었다.
“설정이 좀 과한 것 같은데…. 현실에 있으면 사이코패스지. 그런 캐릭터랑 멜로가 가능하긴 한가?”
“아니…. 너무 좋아해서 그런 거니까요. 그만큼 화가 나서….”
“영화에서 설득력 있게 풀어냈다면 뭐 그럴 수도 있겠지만, 내가 그 여자라면 그것부터 궁금하겠네. 이 자식이 정말 고작 그딴 이유로 내 남편을 죽인 게 맞나?”
“…….”
“생각을 해 봐. 네가 그 여자라면 어떻겠어? 내 남편이 바람을 피웠어. 이미 그런 일이 일어난 시점에서 도달할 수 있는 가장 양호한 결론은 이런 거잖아. 이혼 소송 청구를 해서 위자료를 왕창 뜯어내고 이혼한다. 그리고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마음잡고 새 출발 한다.”
여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그 부분에 대한 의구심을 전혀 갖지 않았던 건 아니다. 다만 사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사현이 보여 준 마음, 혀끝에 담지 않아도 확신을 새겨 주던 그 눈이 있었기에.
“그 남자 입장에서도 그래. 조폭이라며? 굳이 왜 죽여? 데려다가 피떡을 만들어서 으름장만 놔도 원하는 바는 충분히 이룰 텐데 왜 기어코 그런 위험한 강을 건너냐고.”
그 부분에 대한 답은 간단하다. 상대가 은아였으니까. 하지만 가람의 의문 자체는 타당했다. 여준은 손끝을 꼭 말아 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굳이 죽여야 했던 이유가 뭘까…. 나 같으면 그게 제일 먼저 궁금했을 것 같은데.”
“…….”
“넌 안 그래?”
왜 굳이 죽여야 했어?
그렇게 묻지는 않았다. 은아는 이미 죽었고, 일어난 일을 돌이킬 방법은 없었으므로.
‘나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인간이고, 그게 다예요.’
사현의 말도 어렵지 않게 납득했었다. 오랫동안 여준을 지배한 악몽 속 사현은 언제나 피가 들러붙은 야구방망이를 쥔 채 메마른 운동장에 우뚝 서 있었다. 그가 영재를 죽이려 한다는 걸, 진심이라는 걸 알았다.
사현은 그때 영재를 죽이지 않은 게 아니다. 죽이지 못한 것이다. 중간에 방망이가 부러졌기 때문이다. 사람을 해치거나 죽일 수 있는 존재. 10대의 사현은 이미 그 영역에 있었기에 세간의 상식 따위는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여준이 멍하니 중얼거렸다. 두 번째 캔을 따 입에 가져가던 가람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 여자를 너무너무 좋아한다며. 그럼 뻔한 이유 아니겠어? 그 남자를 죽이지 않으면 여자가 위험할 상황이었다든가.”
위험할 상황…. 무심코 중얼거려 봤지만 당연하게도 짚이는 건 없었다. 은아가 자신을 굳이 위협해야 할 마땅한 이유도 떠오르지 않았다. 집 안의 권력은 명백히 은아의 손에 있었다. 가람의 표현을 빌려 구태여 위험한 강을 건널 필요는 없었다.
‘근데 자기 하나도 안 닮았으면 웃기겠다.’
혼란스러운 머릿속으로 맑은 목소리가 빗방울처럼 떨어졌다.
“…….”
사람이 사람을 해쳐야만 하는 이유는 뭐가 있을까. 원한을 품었을 때, 금전적인 이득을 노릴 때, 그리고….
‘첫아들은 보통 엄마 닮는대.’
비밀을 지켜야 할 때.
“물론 사람이라는 게 꼭 합리적으로 움직이는 건 아니지만 이건 영화 얘기잖아. 영화면 관객이 납득할 만한 전개를 보여 줘야지. 그런 면에서는 그렇게 잘 만든 영화가 아닌 것 같네.”
가람이 어깨를 으쓱였다. 여준은 언젠가 보았던 사현의 얼굴을 떠올렸다. 왜 그랬어? 왜 내게 말하지 않았어? 물으며 팔을 붙들었을 때….
그때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지?
“아무튼 영화 제목 생각나면 말해 줘. 네가 멜로 영화를 그렇게 인상 깊게 봤다니 궁금하네.”
“…아…. 네.”
“술 좀 더 가져올게. TV 보고 싶은 걸로 틀어.”
가볍게 일어난 가람이 냉장고로 향했다. 여준은 무심코 리모컨을 쥐었지만 아무 버튼도 누를 수 없었다. 머릿속이 와글거렸다. 사현의 검은 눈동자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
사현은 컨테이너 박스 위에 앉은 채 담배 연기를 깊이 빨아들였다. 아무렇게나 늘어뜨린 발끝에 죽어라 도망가는 인영이 걸렸다. 너 이 새끼 거기 안 서! 쪽새의 찢어지는 목소리도 들렸다.
하늘은 터무니없이 맑고 깨끗했다. 그는 타다 만 담배꽁초를 멀리 던져 버리고 도망자가 사정 범위로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표적은 굽이굽이 휘어진 골목을 달려 마침내 사현이 주저앉은 컨테이너 박스 앞까지 도달했다. 품에는 백과사전만큼 두꺼운 장부를 끌어안은 채였다.
두 다리를 접어 올린 사현이 훌쩍 뛰어내렸다. 표적은 난데없이 허공에서 떨어진 인물에 놀랄 틈도 없이 억 소리를 지르며 나동그라졌다. 사현은 꿈틀대는 표적의 머리를 주저 없이 걷어찼다. 마침내 표적이 놓친 장부를 집어 들어 흙먼지를 턴 후에야 쪽새가 헉헉대며 달려왔다.
“엇, 형님….”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이 지랄이 났어.”
사현이 고저 없이 물었다. 쪽새는 얼른 뒷짐을 지고 선 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이중장부 도난이야 월례 행사 같은 거였다. 처분은 깡추가 내릴 일이다. 사현은 쪽새에게 장부를 건네고 도망자를 향해 몸을 구부렸다.
“경수야.”
도망자는 힉,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얼굴은 코피로 뒤덮여 엉망이었다.
“이걸 어따 팔려고 그래. 네 목숨값보다 비싸게 쳐 준대?”
“혀, 형님….”
“얼마나 험하게 죽고 싶어서 이런 짓을 저질렀어.”
경수는 이제 갓 스무 살이 된 신입이었다. 흔한 일이다. 학창시절 내리 양아치 짓이나 하고 살던 녀석들이 별다른 재주도 없이 깡추의 휘하로 들어온다. 잔뜩 폼을 재고 잘난 체를 하며 돈도 벌 수 있을 거라는 꿈에 가득 차 깡패가 된 녀석들 대다수는 몇 달 버티지 못한다. 생각보다 폼이 안 나고, 생각보다 돈이 안 되므로.
개중에는 한몫 챙겨 튀겠다며 이런 미친 짓을 저지르는 부류도 더러 있었다. 물론 성공하지 못한다. 조금만 머리가 돌아가는 인물이라면 애초에 벌이지 않을 무모한 짓이니 당연했다.
“형님, 살려 주십쇼. 한 번만 묻어 주십쇼. 제가 잠깐 돌아서 그랬습니다. 어머니가 아프신데 수술비가 없어서….”
“좀 신선한 레퍼토리 없어?”
“한 번만 살려 주십쇼. 한 번만, 저 아직 스무 살밖에 안 됐고…, 형님.”
“스무 살이라…. 우리 쪽새가 처음으로 학교 들어갔던 나이네.”
부동자세로 서 있던 쪽새가 픽 웃었다. 사현은 경수의 뺨을 두어 번 두드려 주고 일어섰다. 관성적으로 띠었던 미소가 씻겨 나간 것도 그때였다. 그는 양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채 여전히 기묘하도록 맑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나 때문에 너를 망치지 마.’
저주 같은 말이 귓전에 울릴 때마다 강렬한 충동이 일었다.
‘너는 내 인생에 책임이 없어.’
목을 조르고 싶다. 여준의 목이든, 사현 자신의 목이든.
한 손으로 턱 아래를 받쳤다. 손끝에 힘이 붙을 때마다 욕지기가 올라왔다. 표현할 언어를 알지 못하는 절망이었다. 심장이 지나치게 빨리 뛰었다.
“형님!”
경수를 차에 태운 쪽새가 멀리서 소리쳐 불렀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사현이 걸음을 옮겼다. 경수는 뒷좌석에 처박힌 채 온몸을 떨고 있었다.
“야, 그렇게 쫄 거 없어. 요즘 세상에 너를 죽이겠냐, 태우겠냐.”
쪽새가 혀를 차며 말했다. 글쎄, 차라리 죽여 달라 말할 때까지 몰아붙일 수는 있겠지. 사현은 조수석에 앉아 장부를 훑어 내렸다. 어찌나 알차게 빼먹었는지 한 장, 한 장이 빼곡했다.
“재주도 좋네. 이걸 찾긴 어떻게 찾았냐?”
장부 모서리로 경수의 정수리를 건드린 사현이 물었다. 경수는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그, 그냥…. 우연히요. 사무실 청소하다가….”
“내용 봤어?”
“아뇨, 아뇨…. 저 아무것도 모릅니다. 예전에 본 영화에서 그런 게 돈이 된다고 해서 그만…. 형님, 저 어머니 아프시다는 거 거짓말 아닙니다.”
“알아. 계속 투석 치료하신다며.”
두 눈을 둥글게 뜬 경수가 조수석 시트를 와락 붙들었다. 자못 순진한 빛을 띤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저 잘못되면 저희 어머니 치료 못 받으세요. 저밖에 없어요. 형님, 형님 제발.”
“그걸 아는 놈이 어머니 보험금 빼다가 롤렉스 샀어?”
사현이 미소 띤 얼굴로 경수의 손목을 향해 턱짓했다. 요란한 디자인의 시계가 어두운 차 안에서도 사치스럽게 번뜩였다. 한 손으로 얼른 시계를 가린 경수가 다급히 말했다.
“아닙니다, 형님. 이거 짝퉁이에요. 친구 놈이 홍콩에서 사다 준 거예요.”
“그럼 내놔 봐.”
눈앞으로 다가온 딱딱한 손에 경수의 낯빛이 허옇게 질렸다. 사현은 재촉하듯 한 번 더 손을 흔들었다. 달라고. 짝퉁이라며.
“…….”
시계를 가린 손은 내려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사현은 웃음을 거두고 돌아앉았다. 쪽새는 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사무실 건물로 들어서는 경수의 두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그 모양을 지켜보던 사현이 쪽새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지체 없이 그 손에 담배를 건넨 쪽새가 바로 라이터를 집어 들었다.
“저렇게 뻔한 새끼들밖에 없냐.”
쪽새의 라이터를 물리친 사현이 스스로 불을 붙였다. 쪽새는 예? 하며 상체를 기울였다.
“하나같이 그린 듯한 양아치 새끼들이라고.”
“예, 뭐 그렇죠.”
쓸 만한 놈이 참 없어. 처음 만난 시절부터 깡추가 입버릇처럼 늘어놓던 말을 이제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별을 한다고 해서 데려오는 녀석들도 열 명 중 한 놈이나 건지면 다행이었다.
“그나저나 형님. 전에 그 대학생 기억하십니까? 한준호라고….”
쪽새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현은 대답 대신 쪽새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쪽새는 뒤늦게 자세한 설명을 덧붙였다.
“용역 알바 뛰다가 민생당 사주 받고 프락치 짓 했던 새끼요. 그때 형님이 상황 정리 도와주셨잖습니까.”
사현이 그제야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미련한 짐을 끌어안고 있던 노인과 꼬질꼬질한 어린아이가 있던 낡은 집이었다. 폐가의 부엌에 벌거벗고 앉아 있던 젊은 청년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실은…. 그때 이사님이 마무리 확실하게 하라고 말씀하셔서 제가 애들 끌고 한 번 더 움직였었거든요.”
“그런데?”
“저는 형님이 알아듣게 말씀하셨으니까 괜찮을 거라고 했는데…. 아무튼 정말 겁만 줄 생각이었습니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얌전히만 살면 별일 없을 거라고요. 근데 이 새끼가 지레 놀라서 도망치다가, 그….”
말을 이어 가던 쪽새가 잠시 머뭇거렸다. 한준호는 어디에나 있는 평범한 대학생이었다. 수업이 없는 날이면 인력 사무소에 나가 일당을 벌고, 그렇게 번 돈으로 학자금을 갚고 있는.
“장소가 안 좋았습니다. 알바하는 데로 저희가 찾아간 거라…. 새끼가 그냥 대화 좀 하자고 했는데 갑자기 혼자 달리다가 자빠져 가지고, 거기 있던 대패 기계에 팔이 끼는 바람에요.”
“…….”
“팔꿈치 아래로 절단을 했다더라고요. 단순 사고로 처리되긴 했습니다. 어, 그리고 보험금도 쏠쏠하게 나왔다는 것 같아요.”
쪽새가 허둥지둥 변명을 덧붙였다. 조용히 듣고 있던 사현의 표정이 변한 것도 그때였다.
“그 보험금은 누구 앞으로 돼 있는데?”
갑작스러운 질문에 쪽새가 두 눈을 껌벅였다. 그런 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그야 뭐…. 지가 타갔겠죠?”
“확인해 봐. 아닐 거야.”
“예?”
“보험금이 쏠쏠하게 나왔다는 건 따로 든 게 있었다는 소리지. 막노동판 뛰면서 학교 다니는 놈이 그 비싼 보험료를 어떻게 감당해?”
“…그럼요?”
“오늘 경수가 도장 찍을 사안이랑 비슷한 거였겠지. 사무실에서 보험료 대 줄 테니 손가락 하나만 해 먹자고. 애초에 너는 왜 하필 그 새끼가 공장 일 하고 있을 때 족치러 갔는데?”
뻔한 수법이었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래, 손가락 하나로 끝내고 돈도 좀 나눠 먹을래. 양자택일조차 아닌 선택지 앞에서 모든 인간은 후자를 택하게 되어 있다. 아마 한준호도 팔을 통째로 잃게 될 줄은 몰랐을 것이다.
“저는…. 이사님이 그날 부르시더니 한준호 일하는 곳까지 알려 주셔서….”
“그 새끼도 이사님 지령 받고 거기 있었던 거야. 일부러 기계 앞에서 자빠져서 사고 냈겠지. 끽해야 손가락 한두 개일 줄 알았던 게 재수가 없어서 팔까지 말려들어 간 거고.”
허어, 쪽새가 입을 쩍 벌렸다. 당장 박수라도 치고 싶다는 듯 감동한 표정이었다. 이 새끼도 참 구를 만큼 굴러 놓고 일 돌아가는 생리를 이렇게 몰라서야. 사현은 속으로 혀를 차며 되물었다.
“근데 왜? 한준호가 뭐?”
“…아니, 아닙니다. 그게 새끼가 병원에서 사라졌다는 연락이 와서….”
“사라져?”
“잘린 부위가 썩는 바람에 수술을 꽤 여러 번 받아야 하나 봅니다. 보험금 나온 것도 수술비로 다 나갈 판이라고 울며불며 난리 났었거든요. 그러다가 잠수 탄 거라 혹시 또 허튼 생각하는 거 아닌가 했는데…. 애초에 이사님이 짜신 판이면 그럴 일은 없겠네요.”
그야 타 먹은 보험금 대부분을 갈취당했을 테니 당연한 일이었다. 팔은 잘리고, 수중에 남은 돈도 없는데 그게 다 깡추의 손에 놀아난 결과라면 경찰에도 말할 수 없었을 터다. 쪽새가 걱정하는 바도 이해가 갔다. 독밖에 남은 게 없는 인물은 언제 어느 때건 위험하다.
“혹시 모르니 애들 풀어서 뒤져 봐. 다니던 학교랑 집도 털고.”
“예, 형님.”
멍청한 놈. 세상에 믿을 게 없어서 깡패를 믿나. 헛웃음을 지은 사현이 담배꽁초를 멀리 던졌다. 풀어 줄 때 순순히 벗어났으면 이빨 몇 개로 끝났을 지옥에 기어코 사지를 들이미는 어리석음이 우스웠다. 깡추의 먹잇감이 끊이지 않는 이유였다.
“…….”
풀어 줄 때 벗어나면 끝나는 지옥.
‘너는 내 인생에 책임이 없어.’
여준은 망설였고, 조금 떨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분명했고 말투는 확신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타인을 두려워하지 않는 인간이었다. 용기는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에서 나온다. 평생을 잘난 인간으로 살아온 인물이 시답잖은 주변인들에게 잘못 걸려 몇 년 시달렸다 해서 그 심지를 잃었을 리 없었다.
‘나 때문에 너를 망치지 마.’
여준은 그 말로써 사현의 목줄을 풀어 주었다 여겼을지 모른다.
‘내가 하는 말을 이해했다면, 앞으로도 내 말을 들을 생각이 있다면 전화해.’
고개를 숙인 사현이 멍하니 핸드폰을 만지작거렸다. 여준은 잘못 생각하고 있다. 박영재나 유남복 부처는 그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의 인간이 아니다. 유은아가 그랬듯이.
그러니 전화하지 않을 것이다. 핸드폰을 꾹 쥐어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공기는 차가웠다.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렸다.
***
[입구부터 시작되는 맑은 운하에 곤돌라가 떠 있습니다. 양옆으로는 동화적인 건물들이 가득하고, 스테인드글라스로 장식된 높은 종탑이 보입니다. 마치 이탈리아의 베네치아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듯한 풍경인데요. 사실 이 사진은 프랑스의 모 건설사가 설계한 스트리트 아웃렛의 완성 예상도입니다. 바로 최근까지 이 건설사에 근무했던 한 남성이 본인의 SNS 계정에 실수로 노출한 이미지가 유출되면서 네티즌 사이에 큰 화제가 된….]
“저거 한국에 짓는다면서?”
벽에 걸린 TV를 빤히 보던 팀장이 말했다. 팀원들의 시선이 한순간 TV로 쏠렸다. 여준 역시 그릇에 찌개를 덜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팀원들은 저마다 한마디씩 꺼내 놓기 시작했다.
“저걸요? 한국에?”
“어, 저 양반이 지 인스타에 포 코리아인가 포 서울인가 그런 태그 걸어서 올렸다는데.”
“설마요. 서울에 지금 아웃렛이 몇 갠데 저 큰 걸 또 어디다 지어요.”
“지으려면 어디든 못 짓겠어. 찌라시가 난리도 아니야. 이니셜만 흘러도 그 지역 땅값 장난 아니게 뛸걸.”
땅 투자로 일확천금이라니 먼 세상 이야기였다. 여준은 곧 흥미를 잃고 밥그릇 뚜껑을 열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뭐든 먹어야 했다. 부지런히 입 안으로 밥알을 퍼 넣고 있자 팀장이 구태여 여준을 지목해 물었다.
“여준 씨는 뭐 아는 거 없어? 장인어른이 부동산 쪽 일하신다며.”
쿨럭, 하마터면 씹던 것을 뱉어 낼 뻔한 여준이 얼른 냅킨을 들어 입을 가렸다. 팀장은 두 눈을 반짝반짝 빛내며 여준의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진짜 좋은 물건은 꾼들밖에 모른다잖아. 여준 씨 혹시 이미 살 만큼 사 놓고서 모르는 척하는 거 아니지?”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저거 빠르면 내년 초에 발표날 거라는 썰도 있던데. 여준 씨 내년에 갑자기 사표 내는 거 아냐? 벼락부자 돼서 돈 관리하기도 바쁘다면서.”
팀원들에게서 장난스러운 웃음이 터졌다. 여준도 애써 마주 웃었다. 한편으로는 의아한 생각도 들었다.
“팀장님 말씀대로…. 부동산인데 ‘진짜’ 좋은 물건이면 저렇게 방송 탈 일도 없지 않을까요?”
이렇게 달콤한 건이 방송이며 인터넷으로 소문이 도는 시점에서 이미 꽝이 아니냐는 뜻이었다. 그러나 팀장은 여준의 어깨를 두드리며 힘껏 고개를 저었다.
“아니지, 아니지. 저건 직원이 실수한 거잖아. 그 인스타 올리고 해고되는 바람에 ‘전’ 직원으로 보도되는 거고.”
“음….”
“저 회사도 지금 무조건 노코멘트야. 아무래도 수상한 게 맞아.”
그런가. 여준은 고개를 갸웃한 채 생각에 잠겼다. 팀원들은 이미 저들끼리 아웃렛의 건설지가 어디일지 토론하느라 열을 올리고 있었다. 부동산 업자들 사이엔 이미 소문이 돌 대로 돌았을 것이다, 그러니 땅값이 갑자기 오른 지역을 찾으면 된다…. 개중에는 핸드폰을 들고 열심히 경기도 구석구석의 땅값을 조회하는 팀원도 있었다.
어느 때나 사람들은 달콤한 이야기를 참 쉽게도 믿는구나. 여준은 심드렁하게 식사를 이어 가며 사현의 말을 떠올렸다.
‘듣고 싶은 대로 듣고, 믿고 싶은 대로 믿어요.’
그러자 헛웃음이 났다. 그 와중에도 사현의 목소리를 떠올리고 있는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서였다.
연휴를 앞두고 모처럼 정시 퇴근을 했다. 아이는 아예 어린이집 입구까지 나와 여준을 맞았다. 여준이 차를 세우자 운전석 문을 두드리며 어서 내리라 재촉했다. 여준은 기어를 완전히 바꾸고 잔소리할 준비를 마친 뒤에야 문을 열었다.
“성지오, 아빠가 혼자서 차에 가까이 오면 안 된다고 몇 번이나….”
“아빠! 아빠, 내 블록 봐!”
성화에 못 이겨 따라간 자리엔 얼기설기 쌓아 올린 블록 장난감이 있었다. 선생님에게 들은 말로는 분명 ‘성’이라는 것 같은데, 대체 어느 부분을 어떻게 성으로 인식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모양이었다. 여준은 미간을 좁힌 채 고민하다 조심스레 손가락을 들어 올렸다.
“…여기가 문이야?”
“아니이, 그건 창문이잖아!”
아이가 대번에 서운한 얼굴을 했다. 여준은 난처함에 고민하다 얼른 모범 답안을 찾아냈다.
“아빠는 성에 가 본 적이 없어서 어떻게 생겼는지 몰라. 지오가 설명해 줘.”
“성에 못 가 봤어? 나는 가 봤는데!”
내가 못 가 본 데를 네가 어떻게 갔겠냐. 여준은 속으로만 핀잔하며 슬며시 웃었다. 지오는 여준의 팔을 끌어안은 채 신이 나서 종알종알 떠들어 댔다.
“이게 도개교야. 이렇게 하면 열려.”
“도개교란 말은 어떻게 알아?”
“아빤 그것도 몰라? 봐 봐, 도개교는 이렇게 여는 문이야.”
뭐 하나라도 여준에게 설명할 거리가 생기는 게 즐거운 듯했다. 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장단을 맞춰 주었다. 그렇구나, 대단하네. 성은 이런 거구나. 그러다 보니 점점 아이가 그리는 성의 모습이 보이는 듯싶었다.
“엄청나지? 내 성 진짜 쩔지?”
“…그런 말은 또 어디서 배웠어?”
“아빤 왜 내가 무슨 말만 하면 다 어디서 배웠냐고 물어봐? 아빤 이런 말을 몰라?”
그게 좋은 말이 아니라는 건 또 어떻게 해야 설명할 수 있을까. 고민하던 여준은 우선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이에게 늦은 저녁을 먹여야 할 시간이었다.
“아빠 이제 다 봤으니까 정리하고 집에 가자. 배고프지?”
집에 가서 햄 구워 줄게. 밥 잘 먹으면 아이스크림도 먹게 해 줄게. 여준이 조곤조곤 건넨 말에 아이가 응차, 하며 몸을 일으켰다. 아이는 어느새 여준의 앉은키만큼 자라 있었다. 너무 작아 한 품도 채우지 못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신비로운 일이었다.
아이를 먹이고 씻기고 재우고 나니 저녁 열 시를 향해 가는 시간이었다. 여준은 집 정리를 하다 말고 거실 창에 비친 제 모습을 보고서야 아직 넥타이도 풀어 놓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안방으로 들어가 옷을 가지런히 벗어 놓았다. 편한 티셔츠와 트레이닝 바지를 입고 팬트리로 향했다. 청소 도구를 꺼내 돌아서던 여준의 시야에 굳게 닫힌 서재 문이 걸렸다.
“…….”
한동안 바라본 후에야 밀대를 내려놓고 문고리를 쥘 수 있었다. 힘을 주어 열기까지는 또 한참이 걸렸다. 열린 문 너머는 동굴처럼 어두웠다. 벽을 더듬어 불을 켜자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 그대로인 서재가 고스란히 나타났다.
먼지 쌓인 책장을 지나 책상 의자에 앉았다. 차갑고 부드러운 가죽이 등을 감쌌다. 팔걸이를 쥔 채 의자를 돌렸다. 바닥을 찰 때마다 눈앞으로 책상과 책장, 흰 벽과 창문이 스쳐 지났다.
흔들리던 손끝에 서랍 손잡이가 걸렸다. 그제야 의자를 멈춘 여준이 천천히 상체를 숙였다. 목제 서랍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은 탓에 뻑뻑했다. 큰 소리가 나지 않게 주의하면서 서랍을 하나씩 열어 보았다.
은아의 사십구재가 끝나던 날, 장모는 집으로 쳐들어와 은아의 짐이란 짐은 모조리 빼냈다. 은아의 옷, 귀금속, 가방과 노트북 따위가 마구잡이로 실려 나갔다. 말릴 기력조차 없었다. 여준은 현관에 멍하니 선 채 쓸려 나가는 은아의 흔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서재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준은 서재야말로 진짜 은아의 공간이라는 걸 장모에게 말해 줄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첫 번째 서랍 안에는 간단한 필기구와 노트 따위가 들어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 서랍은 비어 있었다. 여준은 언젠가 이 공간에서 발견했던 시계를 떠올렸다.
‘왜 죽여야만 했을까?’
사람의 행동에 반드시 합리적인 이유가 있는 건 아니다. 그 사실을 알기에 사현의 차갑고 귀신같은 모습과 유순하고 순종적인 모습 모두를 인정할 수 있었다.
‘뻔한 이유 아니겠어? 그 남자를 죽이지 않으면 여자가 위험할 상황이었다든가.’
유은아를 죽이지 않으면 성여준이 위험한 상황. 그 전제 자체가 선뜻 와 닿지 않았다. 빈 서랍을 툭툭 두드리던 여준이 긴 한숨을 쉬었다.
“뭐 하고 있는 건지….”
중얼거린 그가 서랍을 도로 넣기 위해 손잡이를 쥐었다. 힘을 주어 밀어 넣는 순간 덜걱, 서랍 바닥이 흔들렸다. 별생각 없이 마저 힘을 주려던 여준이 멈칫했다.
“……?”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서랍 바닥을 누르자 한 번 더 덜걱, 가볍게 흔들리는 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서랍 안에 손을 댄 채 고개를 옆으로 기울였다. 바닥은 서랍 높이의 반 정도에 걸쳐 있었다.
“어…?”
무심코 중얼거린 여준의 머리 위로 순간 온갖 예감이 쏟아져 내렸다. 쿵, 쿵, 관자놀이의 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그는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서랍 양옆을 쥐어 힘껏 잡아당겼다. 한참 저지레를 하고 나서야 커다란 나무 상자 같은 서랍을 완전히 빼낼 수 있었다.
밝은 빛 아래서 보니 바닥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 나무색과 같은 리본이 살짝 비어져 나와 있었다. 자꾸만 헛도는 손끝에 억지로 힘을 주어 리본을 붙들었다. 위로 당기자 판판한 나무 바닥 한 겹이 분리되어 올라왔다.
“…….”
뒤통수가 싸하게 울렸다. 여준은 몇 번이나 심호흡을 한 뒤에야 눈앞에 드러난 글자를 읽을 수 있었다.
대양화재 가족사랑 정기보험
계약자 : 성여준(9X0710-1******)
피보험자 : 유은아(9X1124-2******) / 계약자와의 관계 : 배우자
모르는 물건은 아니었다. 다만 어째서 이 서류가 이토록 은밀히 감추어져 있어야 하는지 의아했다. 여준은 손끝으로 글자를 한 줄씩 훑어 내렸다. 1년 이후 사망 시 3억 원 일시 지급…. 지나치게 좋은 조건이었고, 당연히 보험료는 턱없이 높았다.
은아가 죽었을 때 찾아온 경찰이 말했다.
‘딱 보험금 지급 가능해진 날짜에 사고가 나서요.’
여준은 대답했다.
‘그건 아이 태어났을 때 서로 앞으로 들어놓은 겁니다.’
자기 회사에서 보험 하나씩 들자. 아이 얼굴에서 핏물이 채 빠지기도 전에 은아가 말했다. 여준은 의아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슨 보험?
‘내 친구네도 아기 낳고 나서 서로 생명보험 하나씩 들었대. 이제 엄마아빠니까 더 책임감 가지고 조심하자는 의미로.’
‘…그래?’
‘나도 하고 싶어. 그러면 왠지 안심이 될 것 같아.’
이해할 수는 없었다. 재산은 충분히 많았다. 아이가 평생 일하지 않는다 해도 상관없을 만큼의 돈을 물려줄 수 있었다. 그래도 그 이상 묻지 않고 은아의 말대로 했다. 출산을 혼자 하게 만든 처지에 그런 사소한 일로 은아의 기분을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사모님 앞으로 3억짜리 보험이 있던데요.’
은아가 죽었을 때 모두가 여준을 의심했다. 경찰은 은근히 떠보는 말을 건넸고, 회사에는 찌라시가 돌았고, 오랜만에 만난 동창들은 위로의 말조차 삼갔다.
여준은 생각했다. 만약 그때 죽은 게 나라면 경찰은 은아를 의심했을까?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고작 3억에 사람을 죽이기엔 은아가 가진 돈이 너무 많았다. 바로 그 은아가 죽었기에 여준은 오랫동안 불길하리만치 고요한 추궁에 시달려야 했다. 여준의 어머니조차 은아에 대한 이야기를 꺼렸다.
그러나 어째서인지.
“헉….”
은아의 처가 사람들은 그러지 않았다.
“…….”
여준이 한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왜 한 번도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장모는 사고 소식을 듣고 달려간 여준의 멱살을 쥐고 욕을 퍼부었다. 내 새끼를 기어코 외로이 죽게 만들었다며 울부짖고 화를 냈다. 하지만 그날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한순간도, 지나가는 말로도 여준이 은아를 죽였다는 의심은 입에 담지 않았다.
처음부터 축하 받지 못한 결혼이었다. 은아의 집안사람들은 누구 하나 빠질 것 없이 여준을 탐탁지 않게 여겼다. 가장 큰 이유는 집안의 재산 차이가 크다는 거였다. 은아만큼 부자가 아니었을 뿐, 살면서 크게 부족함을 느끼지 못했던 여준으로서는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어쨌든 은아의 부모에게 있어 여준은 ‘돈푼 가진 것 없는’ 인간이었다.
그렇다면 은아가 죽었을 때, 그리고 서로에게 보험금이 걸려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들이 보여야 했던 반응은 당연히 격렬한 의심과 추궁이 아니었을까? 멱살을 잡아다 무릎을 꿇리고 억지 자백이라도 받아 내려 했어야 맞는 게 아닐까?
위가 쥐어 짜이는 듯 아팠다. 앉은 채 몸을 웅크린 여준의 뺨으로 난막 같은 식은땀이 배었다.
왜 굳이 죽여야 했을까?
죽이지 않으면 위험하니까.
“우욱….”
헛구역질이 났다. 위험하니까. 누가? 어째서? 은밀하게 잠들어 있던 비밀이 섬뜩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현을 만나고 싶었다. 만나서 그 눈동자를 보고 싶었다. 절망으로 덮어 놓은 우물 같은 눈을.
허겁지겁 서재를 빠져나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땀에 젖어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맥없이 헛돌았다. 몇 번이나 놓칠 뻔한 것을 고쳐 쥐며 크게 숨을 내쉬었다. 사현아. 입 안에서 맴돈 이름은 끝내 소리로 구현되지 못했다.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
꿈인가 싶어 고개를 들었다. 차라리 꿈이기를 바랐다. 어느샌가 잠이 들어 있었던 거야. 그래서 이런 악몽을 꾸던 중에 지오 울음소리에 깨려고…. 핸드폰을 내려놓은 여준이 비척비척 일어섰다. 그때 아빠아아…. 서럽게 부르는 외침에 귀가 번쩍 뜨였다.
“지오야.”
다급히 방문을 열었다. 아이는 여준이 눕혀 줬던 모양 그대로였다. 시뻘게진 얼굴로 눈물을 펑펑 쏟고 있을 뿐이었다.
“지오야, 왜 그래. 무서운 꿈 꿨어?”
“흐으, 아빠아….”
뜨겁고 축축한 손을 끌어당겼다. 아이는 온몸이 들썩이도록 울며 뭐라 웅얼거렸다.
“뭐라고?”
여준이 아이에게 귀를 대며 물었다. 그러자 아이의 목소리는 한층 작아졌고 더욱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우선 안아 들 생각으로 이불을 들췄다. 그러자 코를 찌르는 지린내가 훅 풍겨 나왔다.
“지오야…. 이불에 쉬했어?”
되도록 다정히 물었다. 그러자 고개를 푹 숙인 지오가 딸꾹질을 했다.
“…아빠, 미안….”
“괜찮아, 지오야. 우리 지오는 아직 네 살밖에 안 됐으니까 그럴 수 있어.”
“꿈에서어, 흑, 수영장 가서어….”
“그래, 괜찮아. 이불은 빨면 돼. 지오는 씻고 옷 갈아입으면 되고. 아무 문제도 아니야. 알겠지?”
여준이 지오의 따뜻한 뺨을 감싸 눈물을 훔쳐 내며 속삭였다. 지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쉬이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욕실로 데려갔다. 아이는 등까지 오줌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젖은 옷을 벗겨 세면대에 넣고 따뜻한 물로 아이를 씻겼다. 아이는 온몸이 둥글고 부드러웠다. 여준은 바디 워시를 덜어 거품을 낸 손으로 아이의 어깨, 등, 팔다리를 꼼꼼히 문질러 닦아 주었다. 그동안에도 아이는 좀처럼 울음을 그치지 못했다.
“우리 아들, 왜 이렇게 울지? 괜찮다니까. 이런 건 울 일도 아니야.”
“그래도오….”
“뭐가 그렇게 서러워? 창피해서? 아빠 아무한테도 얘기 안 할게.”
“아니이, 아빠 피곤한데…. 이불 빨려면 힘든데….”
“…….”
“미안하구, 나 바보 같아서….”
아이의 겨드랑이라도 간질여 볼 작정으로 올라가던 손끝이 뚝 멈춰 섰다.
“아빠, 미안…. 나 이불 없이 자도 돼요.”
아이가 일찍 철이 드는 것은, 어른을 힘들게 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바꿔 말하자면 어른이 아이 앞에서 제 인생의 고난을 감추지 못한 탓이다. 여준의 눈가가 금세 붉게 물들었다.
나는 아이를 이렇게 키우고 싶었던 건가? 여준은 그만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아이는 고작 네 살이다. 세상 빛을 본 시간은 그보다 더 짧다. 하루 종일 짜증 내고 떼쓰고 난동 부려야 자연스러운 나이다. 그런데 왜 벌써부터 이토록 어른스러운 말을 입에 담고 있는가.
“아빠?”
아이가 머뭇거리며 여준을 불렀다. 여준은 말없이 아이의 거품투성이 몸을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말랑말랑한 살결이 온몸에 닿았다. 아이는 어리둥절한 채로 여준의 등에 손을 감았다. 여준은 신 침을 여러 번 삼키고 나서야 입을 열 수 있었다.
“우리 지오가 왜 이불 없이 자. 집에 이불이 얼마나 많은데…. 없어도 아빠랑 자면 되는데.”
“진짜?”
아이를 행복하게, 어떤 그늘도 구김도 없이 풍족하게 감싸 키울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미련 없이 보낼 수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어디에도 없기에, 아이는 오로지 여준만이 지킬 수 있는 존재였다.
아이를 처음 보자마자 생긴 마음은 아니었다. 아직도 때때로 버겁기는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핏덩이에 불과했던 아이가 입을 열고, 걸음을 떼고, 어른 같은 말을 하게 되기까지 지켜보는 동안 아이의 삶을 어느새 여준의 일부가 되었다. 아이에게도 그럴 터였다.
“아빠랑 자는 거 좋아.”
내 아이가 아니면 어떻게 하지?
분명한 형태를 띤 두려움이 여준의 머리 위로 내려앉았다. 상상만으로도 눈물부터 왈칵 치솟았다. 이 아이가 내 아이가 아니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이미 이 아이를 이토록 사랑하고 있는데.
사현에게는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잘난 척 떠들어 댔지만 이토록 분명한 암시를 머릿속에서 떨쳐 내기란 불가능했다. 은아와 영재, 처가 사람들과 사현의 얼굴이 차례로 머릿속을 스쳐 가고 가람의 말이 맺혔다.
‘왜 죽여야만 했을까?’
아이를 달래 재우고 명함 케이스를 뒤졌다. 원하는 물건은 찾을 수 없었다. 애초에 명함을 받은 적이 없었던가. 망설이던 여준은 인터넷을 뒤져 알아낸 전화번호를 핸드폰에 찍었다.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사무적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 네, 서초경찰서 교통조사과입니다.
“…….”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여보세요? 말씀하세요. 여준은 한참을 더 망설인 후에야 간신히 한마디를 뱉어 놓았다.
“…오만진 경사님 좀 부탁드립니다.”
***
추석 당일은 아침부터 차가 막혔다. 정장을 입은 아이는 옷이 불편하다고 쉼 없이 칭얼거렸다. 여준이 아이를 달래고 얼러 가며 납골당에 도착했을 땐 정오를 훌쩍 넘긴 뒤였다.
“성 서방 왔나?”
은아의 납골함 앞에는 으레 그랬듯 처가 식구들이 아예 자리를 깔고 앉아 있었다. 다른 조문객들이 불편한 기색으로 그들을 힐끗거렸지만 이제라도 돗자리를 접고 일어날 생각은 없는 듯했다. 북어며 과일, 술 따위를 요란하게 차려 놓은 작은 상을 바라보며 여준은 낮은 한숨을 쉬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할아버지, 안녕하세요.”
졸린 눈을 비비고 있던 아이가 외조부모를 향해 배꼽 인사를 했다. 그러자 장모가 금방 표정을 풀고 아이를 쓰다듬었다.
“아이고, 내 강아지 왔네. 힘들지 않았어?”
“네.”
“우리 강아지. 할머니랑 왔으면 편하게 왔을 텐데 하여간 어린 것만 고생을 시키고….”
언제나 그랬듯 한마디를 그냥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여준은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다 납골당 섹션 입구에 놓인 화로로 향했다. 향에 불을 붙여 잿더미에 꽂아 넣자마자 못마땅한 시선이 쏟아졌다.
“하여튼 싹수가 노래…. 성격이 저리 모나서 회사 생활은 어찌하는지.”
중얼대는 장모 앞에서 아이의 시선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여준은 손을 털고 돌아와 아이의 팔을 끌어다 제 옆으로 붙여 놓았다.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뭐?”
갑작스러운 폭탄선언에 장인까지 합세해 목소리를 높였다. 돗자리에 앉아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던 처가 식구들은 찬물이라도 뒤집어쓴 얼굴로 여준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준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은아 봤으니 가 봐야죠. 내일도 출근이라서 차 막히기 전에 출발해야 할 것 같습니다.”
“뭐라고? 자네 지금 여기 도착한 지 십 분도….”
“저녁 시간에 약속도 있거든요. 은아 사건 조사했던 형사님을 뵙기로 해서요.”
그러자 조금 다른 침묵이 새로이 내려앉았다. 장인도, 장모도, 은아의 이모 두 명과 작은아버지 내외까지도 눈을 부릅뜬 채 여준을 노려보았다.
“…형사?”
“예.”
여준이 두 팔로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순순히 안겨 여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은아 사건 관련해서 제게 해 줄 말이 있다고 하시더군요. 전화로 할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우선 만나 뵙기로 했습니다.”
“아니, 이제 와서 뭘…. 무슨 얘기를 하겠다는 건데?”
“모르겠습니다. 어차피 종결된 사건이라지만 다른 것도 아니고 은아 일인데 대충 넘길 수도 없어서요.”
장인의 눈동자가 마구 흔들렸다. 여준은 그가 자신을 붙들어 앉힐 핑계를 찾고 있음을 직감하고 먼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전화 드리겠습니다.”
돌아서자마자 숨을 크게 들이켰다. 식은땀이 죽 흐르고 손끝이 떨렸다.
“…아빠.”
여준의 목을 끌어안고 있던 아이가 가냘픈 목소리를 냈다.
“아빠 심장 엄청 크게 뛰어.”
그러고는 작은 손으로 여준의 등을 토닥이는 것이었다. 여준은 아무 대답도 못 한 채 걷기만 했다.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지 않는 것만도 힘에 부쳤다.
아이를 카시트에 태우고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거는 내내 뒤통수가 서늘했다. 당장이라도 처가 사람들이 달려와 차를 막아서고 패악을 부릴 것 같았다. 다짜고짜 액셀을 밟자 차가 삐걱거렸다. 놀라 고개를 든 여준은 사이드 브레이크가 아직 내려가 있던 것을 알고서야 숨을 고르게 쉴 수 있었다.
“…후우….”
급히 브레이크를 풀고 차를 출발시켰다. 백미러와 사이드미러를 번갈아 보았지만 누군가 쫓아오는 기색은 없었다. 그러나 여전히 가슴이 쿵쾅거렸다. 심장이 지나치게 세게 뛰어 호흡조차 버거웠다.
***
“해서, 무슨 일이십니까?”
이런 인상이었던가. 여준은 카페 가장 구석진 자리에서 남자를 발견하자마자 고개를 갸웃거렸다. 은아의 사고 당시 사현이 누워 있던 중환자실 앞에서 만난 바로 그 얼굴이긴 했지만 묘하게 느낌이 달랐다.
전화를 받은 오만진은 한참 설명을 늘어놓은 뒤에도 여준을 기억하지 못했다. 교통사고야 숨 쉬듯 일어나는 일이니 그럴 만도 하다고 애써 생각하면서도, 그토록 특이한 사건을 완전히 잊었다는 사실이 잘 믿기지 않았다. 잠깐만 시간 내어 만나 달라는 부탁에는 귀찮은 티가 역력했기에 더욱 그랬다.
그가 약속 자리에 들고나온 사건 관련 서류를 본 뒤에야 ‘기억나지 않는다’는 말의 의미를 알게 되었다. ‘뭐라도 토해내라’는 뜻이었다. 여준은 묵묵히 수표가 든 봉투를 테이블 아래로 건넸다. 오만진은 쯧, 혀를 차고는 봉투를 대충 주머니에 구겨 넣었다.
“종결된 사건 관련 의문점이 있으시면 정식으로 재조사를 요청하시든가 해야죠. 원래는 이런 식으로 개인적인 접촉 시도하시면 안 됩니다. 사정이 너무 급해 보여서 나오긴 했지만….”
“…죄송합니다.”
오만진은 끝까지 불만스러운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여준은 순순히 고개를 숙이고 목을 가다듬었다.
“바쁘신 분인 줄 잘 압니다. 시간 오래 빼앗지 않겠습니다. 꼭 한 가지만 여쭤보고 싶어서 뵙자고 부탁드렸습니다.”
“그런 건 전화로 하시지, 좀…. 이런 일에 일일이 불려 다니려면 제 몸은 대한민국 인구수만큼 있어도 모자라요.”
“정말 죄송합니다. 한 가지만 대답해 주시면 됩니다. 혹시….”
다급해진 여준이 주먹을 꾹 쥐었다. 오만진은 지루한 기색으로 한숨부터 내쉬었다.
“혹시 그때, 제 처가 쪽에서 저를 의심하지는 않았습니까?”
손톱 거스러미를 이로 뜯던 오만진이 멈칫했다. 금방 짙은 의혹이 드리워진 눈동자가 날카로웠다.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고 얼른 말을 이었다.
“형사님은 그때 저를 의심하셨죠. 제가 보험금을 노리고 은아를 죽였을지도 모른다고요.”
“그런 건 그냥 의례적으로 하는 질문이에요.”
“돌려서 말씀하실 필요 없습니다. 저는 단지 그때 일어났던 일을 확인하고 싶은 거예요. 오로지 사실 관계로만요.”
손을 내린 오만진이 자세를 고쳐 앉았다. 굵은 주름이 지기 시작한 눈가가 느릿하게 실룩였다.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에요. 3억 보험금이 걸려 있는 사람이 석연치 않은 사고로 죽었다면 저라도 그 보험금 수령자를 먼저 의심할 겁니다. 형사님이 그러셨고, 제 친구들이 그랬고, 제 회사 사람들이 그랬듯이요.”
“…….”
“그런데 제 처가 식구들, 제 와이프 그렇게 끔찍이 아끼고 사랑했던 분들이 한 번을 그런 적이 없습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사고 일으킨 가해자는 무려 집행 유예를 받았죠. 사고 때문에 망가진 몸 상태가 참작되었다 한들 제 상식선에서 이해할 수 있는 결과는 아닙니다.”
사현을 ‘가해자’로 지칭하는 순간 가슴이 찌릿하게 아팠지만 말을 멈출 수는 없었다. 오만진은 어느새 두 손을 모아 쥔 채 여준에게 집중하고 있었다.
“제가 아는 처가 어른들이라면 그럴 리가 없습니다. 그분들이라면 다소 비합법적인 방법을 써서라도 가해자와 저를 가만두지 않았을 겁니다. 가해자에게는 응분의 보복을 하고, 저에게는 억지 자백이라도 받아 냈어야 사리에 맞습니다.”
“뭘 의심하고 있는 겁니까?”
“형사님 생각은 어떠십니까? 그분들이 저와 가해자를 가만히 내버려 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까요?”
한 손으로 턱을 쥔 오만진이 제 뺨을 톡톡 두드렸다. 그대로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입을 열었다.
“…사실은 같은 이유로, 혹시 사모님 사건 배후에 그 양반들이 있는 건 아닐까 조사하긴 했었습니다.”
여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생각지도 못한 대답이었다. 또 한참을 망설이던 오만진이 물 한 컵을 벌컥 들이켰다.
“은아를 죽인 게 장모님이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이런 얘기 아십니까? 어떤 사고로 아이가 죽었어요. 경찰에서 조사를 하겠죠. 그런데 이때 애 부모가 서로 슬퍼하면서 위로하고 있잖아요? 그럼 일단은 부모를 의심합니다.”
“…….”
“사람이란 게 말이에요. 자식을 잃은 슬픔이 배우자에 대한 우려보다 클 수가 없어요. 물론 초인적인 인내심과 갈고 닦은 인성으로 당장 참아 낼 수는 있겠죠. 하지만 결국 한 번은 상대를 탓하게 돼요. 둘 다 살얼음판 위에 맨발로 선 사람들처럼 예민해져 있는 와중에요. 당연하죠, 멀쩡하던 자식이 어느 날 갑자기 죽는다니. 보통은 인생에서 겪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을 엄청난 비극 아닙니까.”
“…….”
“그러면 끝이에요. 그 부부 관계는 절대로 회복되지 못해요. 그런데 간혹 조사 시작부터 마지막까지 이상하게 평온한 부부가 있어요. 그럼 열 중 여덟은 부모 중 일방, 또는 쌍방 공범인 범행입니다. 죽음의 원인을 누구보다 잘 아니까 놀라지 않고, 놀라지 않았으니 패닉에 빠지지 않고, 패닉에 빠지지 않으니 서로를 탓하지 않는 거죠.”
“제 처가 식구들의 양상이 그와 비슷했다는 말씀이십니까?”
여준이 침착하게 묻자 오만진은 고개를 저었다. 수염이 삐죽하니 올라온 얼굴이 거칠어 보였다.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보셨겠지만 오만 패악이란 패악은 다 부리고 다녔잖아요. 가해자와의 접점도 전혀 찾을 수 없었고 돈이 움직인 내역도 없었어요.”
“그럼….”
“본인이 죽인 건 아니다. 그런데 애먼 사람을 잡지 않는다. 이 사실에서 추론할 수 있는 결론은 하나죠.”
“…….”
“딸이 왜 죽었는지 알고 있다. 하지만 그 이유가 밝혀지길 원하지는 않는다.”
여준이 참고 있던 숨을 한꺼번에 몰아쉬었다. 오만진은 여준의 흰 뺨과 마른 손가락을 차례로 훑어보고는 덤덤하게 덧붙였다.
“…뭐, 이론적으로는 그렇다는 얘깁니다. 아시다시피 사람 마음이란 게 꼭 이치에 맞게 움직이는 건 아니니까요. 방금 말씀드린 자식 잃은 부모들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거예요. 갑자기 자식을 잃어도 절대 서로를 탓하지 않고 지혜롭게 슬픔을 극복하는 사람들도 분명 있습니다.”
주먹을 꼭 쥔 여준은 자연스레 지오를 떠올렸다. 만약 은아가 죽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 같이 평화롭게 살던 중에 지오가 갑자기 죽었다면 나와 은아는 어떻게 됐을까. 아무래도 좋은 결말은 상상할 수 없었다.
“그래서 본인이 의심하는 정황은 뭡니까? 뭐라도 꼬투리 잡은 게 있으니 나랑 보자고 한 걸 텐데.”
어차피 숨기거나 얼버무릴 수도 없는 일이었다. 여준이 손등으로 이마를 한 번 훔쳐 냈다. 손에 쥔 정보를 조금이나마 풀어 놓고 도움을 받아야 한다. 큰맘 먹고 입을 열던 여준이 순간 멈칫했다.
“…….”
오만진의 추리는 여준이 예상한 바와도 얼추 맞아떨어졌다. 그러자 또 새로운 의문점이 생겼다. 은아의 부모는 은아가 여준을 죽이려던 사실을 알고 있었다. 때문에 은아의 석연찮은 사고를 조용히 덮고자 했다.
하지만 만약 은아의 계획 배후에 그녀의 부모가 있었다면, 은아가 죽었을 때 그들은 더더욱 여준을 의심했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그것은 즉, 오만진의 논리에 따르자면- 여준의 짓이 아님을 확증할 방법이 있었기 때문이다.
“…정말 죄송합니다만, 다시 연락드려도 될까요?”
오만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벌떡 일어난 여준은 카페를 달려 나오며 사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연결되지 않았다.
무심히 이어지는 연결음을 들으며 여준은 아픈 머리를 짓눌렀다.
“하나씩…. 천천히.”
우선 하나의 전제를 두자. 은아는 나를 죽이려 했고, 그 사실을 안 사현이 은아를 죽였다. 나를 죽이려 한 이유는 돈보다는 아이 문제일 가능성이 크다. 은아는 끝없이 아이에 대한 암시를 보냈다. 은아는 영재와 내연 관계가 있었다. 은아의 부모는 은아가 나를 죽이려 한 걸 알고 있었다. 영재는 지오가….
‘너는 그게 다 네 건 줄 알지?’
날카로운 목소리가 송곳처럼 귀를 찌른다.
‘선배랑 하나도 안 닮았어요.’
여준은 핸드폰을 꽉 쥔 채 숨을 멈췄다. 영재는…. 영재는 지오가 자신의 아이라고 생각한다.
“…….”
사현도 그 사실을 알고 있다.
‘믿고 싶은 대로 믿어요.’
비틀거리던 여준이 벽을 짚고 섰다. 전화는 여전히 연결되지 않았다. 사현아. 이번에는 말이 되었다. 사현아. 짓눌린 목소리로 부르며 다시 걸었다. 싸늘한 보도블록에 무릎에 닿자 등줄기가 시렸다.
“사현….”
- …몇 번을 거는 거예요?
달칵, 문이 열리고 쏟아진 햇빛 같은 대답에 여준이 두 눈을 꽉 감았다. 마른걸레처럼 딱딱하게 비틀려 있던 마음이 조금씩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하아, 몰아쉰 숨에서 허연 김이 피어올랐다.
- 선배?
사현의 목소리가 대번에 심각해졌다.
- 무슨 일 있어요? 왜 그래요?
“사현아.”
- 네.
“사현아.”
- 네, 듣고 있어요.
“사현아, 나를….”
운을 떼었지만 또 한참이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현은 잠자코 기다리고 있었다. 여준은 벽을 짚은 채 아예 푹 주저앉았다. 지나던 이들이 한 번씩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왔다. 해가 진 거리는 춥고 건조했다.
“나를 좀…. 데리러 와.”
마침내 쥐어 짜낸 목소리엔 축축한 눈물이 섞여 있었다.
“지금 데리러 와, 지금…. 제발.”
- …….
“나 너한테 묻고 싶은 게…. 듣고 싶은 게 너무 많은데 지금 힘이, 힘이 하나도 안 들어가고 네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라서….”
- 어디예요, 지금.
“…….”
- 알려 줘야 가죠.
여준은 뭍에 내던져진 고래처럼 느린 숨을 쉬었다.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아무것도 떠올릴 수 없었다. 여기가 어디였더라. 그 형사와 어디서 만나기로 약속했었지?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자 간신히 맑아진 시야에 도로 표지판이 보였다.
“여기…. 회사 근처에…. 사거리…. W아파트 있는….”
- 가만히 있어요. 움직이거나 운전하지 말고.
“사현아.”
- 갈게요. 간다고요. 갈 테니까 꼼짝하지 말아요.
전화는 뚝 끊겼다. 여준은 검게 물든 액정 화면을 한참 바라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령처럼 걸어 사람의 물결을 헤치고 큰길가로 향했다. 넓은 교차로는 쉼 없이 밀려드는 차들로 북적였다. 헤드라이트의 행렬이 노을 지는 강가의 물비늘처럼 보였다.
그 모습을 바라보며 멍하니 서 있자니 언젠가 사현을 찾아 헤매던 때로 돌아간 것 같았다. 찌라시가 길을 뒤덮은 유흥가, 어디에 있을지도 모르는 얼굴을 한 번이라도 보려 불빛 속을 헤매던 기억도 이제는 모두 꿈만 같다. 10대의 여준은 세상에서 본인이 가장 똑똑하다고 믿는, 그래서 가장 어리석은 소년이었다.
그 거리에서 너를 발견할 수 있을 거라 믿었지. 참으로 막연하게도. 하지만 그토록 좁고 쇠락한 거리에서조차 난 너를 찾아낼 수 없었어. 한참을 헤매다 결국 손에 쥔 것은 애석하도록 나약한 우연이었지….
“선배.”
하지만 사현아.
“성여준.”
그 나약한 우연이라도 붙잡았던 건 결국 나의 의지였는데.
“여준 선배.”
옅은 향수 냄새가 풍겼다. 뻗어 온 것은 딱딱하고 따뜻한 손이었다. 뺨에 닿은 체온에 고개를 들자 사현이 있었다. 눈 아래까지 푹 눌러쓴 모자도 얼굴 한복판을 가로지른 선명한 흉터를 완전히 가려 주진 못했다.
“정신 잡아요. 선배?”
여준이 눈을 깜빡였다. 고여 있던 눈물이 흐를 거라 생각했지만 양 뺨은 가을 낙엽처럼 메말라 있었다. 사현은 두 손으로 여준의 얼굴을 쥔 채 그를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걱정과 의혹으로 가득한 눈동자가 밤보다도 검었다.
아직 그 자리에 남은 10대의 여준이 생각했다. 어쩌면 그날 밤, 나는 이렇게 했어야 하는지도 몰라. 술병을 쥔 채 돌아가는 마른 등을 멍청히 따라갈 게 아니라 말을 걸었어야 해. 사현아, 불러서 돌아본 얼굴에 대고 물었어야 해. 아니, 말했어야 해.
“그때 너 감싸 주지 못해서 미안해….”
여준이 떨리는 두 손으로 사현의 팔을 쥐었다. 사현은 빙하에 갇힌 나비처럼 굳어 버렸다.
“미안해….”
“…….”
“미안했어….”
달은 보이지 않았다. 마천루와 자동차 전조등의 불빛만이 끌어안은 두 인영을 쉴 새 없이 스쳐 지났다. 여준은 사현의 허리를 감싼 손에 힘을 준 채 수없이 후회를 곱씹었다.
수백 명의 학생과 수십 명의 교사가 있는 학교, 그 넓고 황량한 공간에서 오로지 단 한 명, 여준만이 알고 있었다. 사현의 목소리, 다정한 걱정을 품은 눈빛과 부드러운 손짓을.
“나만 할 수 있는 일이었는데….”
뒤늦게 넘친 눈물이 사현의 어깨로 젖어 들었다. 사현은 어떤 말도 꺼내지 못한 채 여준의 등을 쓸어내렸다. 사위가 너무 밝았다. 남은 생이 너무 길었다. 지금 이 순간 지구의 수명을 끝내 버릴 수만 있다면 그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