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1화 (11/21)

#10. 비구름 아래서

“8층에서 부르신다.”

열린 문에 대고 노크한 홍게가 짧게 말했다. 사현은 서류 더미를 갈무리하던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었다. 홍게는 대단히 즐거운 작전을 혼자만 알고 있는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었다. 영악한 흥미와 저열한 기대로 가득한 입술이 리드미컬하게 실룩거렸다.

“바로 올라가겠습니다.”

“사현아.”

지체 없이 일어나는 사현을 향해 홍게가 손을 들어 보였다. 사현은 재킷에 팔을 끼우다 말고 뒷말을 기다렸다.

“…새끼 싸가지도 없고 대답도 없고.”

“죄송합니다.”

“너 이번에 아주 큰 작업 들어가는 모양이더라.”

“거기까지 냄새가 풍겼습니까.”

홍게의 눈썹이 사납게 비틀렸다. 그는 사현에게 당한 얼굴뼈 이곳저곳이 완전히 붙은 후에도 종종 부자연스러운 표정을 짓곤 했다.

“그래서, 그거 진짜냐?”

“뭘 물어보시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저는 그냥 시키는 일만 할 뿐이라서요.”

“씹새끼….”

탄식한 홍게가 길을 터 주었다. 시치미를 뗄 정도는 예상했다는 투였다. 사현은 재킷 단추를 잠그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은 뒤 그를 지나쳐 복도로 나섰다.

“그렇게 큰 파이 쥐고 혼자만 재미 볼 건 아니지?”

멀어지는 사현의 뒤통수로 홍게의 말이 날아들었다. 사현은 대답하지 않고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공사 자체는 간단한 거네.”

깡추는 창틀에 앉은 채 담배 두 개비를 한꺼번에 물었다. 사현은 뒷짐을 지고 선 채 짧게 예, 하고 대답했다.

“냄새 흘려서 칼질한 다음에 손 털면 끝이야?”

“그건 사전 작업이고 진짜 목적은 작전인 모양입니다. 전매에 실패한 짝새들까지 끌어들일 계산 같았습니다.”

“아주 뿌리까지 빨아먹겠다 이거구만. 하여간 어르신들은 우리 같은 삼류 양아치랑은 비교가 안 돼. 피도 눈물도 없어.”

“…….”

“그래서, 일 준비는 잘 되어가고?”

사현의 눈가가 미세하게 굳었다.

“…예.”

“기한은?”

“한 달 주셨습니다.”

“한 달이라.”

툭, 툭, 깡추가 옆머리로 창을 두드렸다. 사현은 언젠가 여준의 집에서 함께 보았던 영화의 한 장면을 떠올렸다. 잔뜩 폼을 잡은 악당이 창가에서 잔을 들어 올리다 저격에 머리가 꿰뚫리는 신이 있었다.

“빠듯하지 않겠냐? 공사 마무리되는 것까진 봐야 될 거 아냐. 뭐랑 바꾼 건데.”

“괜찮습니다. 작업 경과야 어떻게든 알 수 있으니까요.”

“하긴….”

깡추가 바닥으로 담배를 뱉었다. 그의 발치로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왔다. 사현은 여준과 함께 보았던 또 다른 영화를 떠올렸다. 토네이도에 휩쓸린 남자가 머리부터 불이 붙은 채 하늘로 솟구치는 장면이었다.

사현이 아는 영화는 그 언젠가 여준의 집에서 본 것들이 다였다. 그 이전에도 이후로도 영화 한 편을 끝까지 본 적이 없었으므로. 덕분에 그에게 있어 영화란 그런 이미지였다. 부수고, 때리고, 찢고, 피를 쏟고, 몽땅 쓸려나가는.

“근데 이게 네가 원하는 그림대로 나온다는 확신은 있는 거야?”

“그 부분은 책임지고 작업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약속 같은 게 무슨 소용…, 아니, 뭐 선불이니까 상관없겠구만.”

말하다 말고 결론을 내린 깡추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현은 묵묵히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 그럼 편하게 지내라. 떽떽대는 애새끼들은 신경 쓰지 말고.”

“예.”

“어차피….”

깡추가 다시 한번 담배 두 개비를 한꺼번에 물었다. 그의 발밑에선 여전히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너야 일 끝나면 두 번 다시 한국 땅 못 밟을 몸인데.”

씩 웃는 입술 새로 깨끗하게 붙여 놓은 라미네이트가 희게 빛났다.

***

‘이 친구가 아마 어르신이 원하시는 인재일 겁니다.’

깡추가 샛장지 너머의 ‘어르신’에게 사현을 소개하며 덧붙인 말이었다. 깡추의 부름을 받고, 그의 차를 타고 P동의 한정식집에 도착해, 발소리 없이 걷는 안내인에게 이끌려 작은 방에 들어설 때까지도 사현은 무엇도 묻지 않았다. ‘쓸모’를 보일 때가 왔겠거니 생각했을 뿐이다.

‘내가 원하는 인재가 무엇인데?’

어르신이 물었다. 깡추는 당황하는 기색도 없이 미소를 띠었다.

‘겁이 없고 말이 통하는 놈을 바라시죠.’

그러자 어르신이 킬킬 웃었다. 그때까지 가장하고 있던 점잖고 고상한 말투와는 생판 다른 울림이었다.

‘그래. 사실 이런 작업 하려면 얼마든지 쉬운 방법이 많다는 걸 나도 알아. 그냥 한국말 모르는 놈 중에서 적당한 놈 갖다 쓰고 버리면 쉽지.’

‘예, 어르신.’

‘하지만 나는 그러기가 싫은 거야. 어떤 일에도 품격은 있어. 내가 그 양반이랑 한두 해 알고 지낸 사이도 아닌데…. 쉽게 말하면 이런 거지. 기르던 개를 잡아먹더라도 몽둥이로 때려죽이는 것과 단칼에 보내는 건 다르잖아.’

‘…….’

‘예우를 해 주고 싶다는 뜻이지. 알아들었나?’

깡추가 한 번 더 예, 하며 고개를 숙였다. 아예 이마가 땅에 닿을 지경이었다. 나도 함께 숙여야 하나, 고민하면서도 사현은 허리를 꼿꼿이 펴고 앉아 있었다.

‘그리고 일단 단순한 애들은 그만큼 기능이 한정적이야. 무조건 모가지를 치면 끝인 줄 알아. 세상에는 굳이 그렇게 끔찍한 짓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방법이 얼마든지 있는데.’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왜 자꾸 그런 놈들 손을 빌리나 몰라. 당장 싼 맛이 눈이 돌아가서….’

어르신이 혀를 끌끌 찼다. 깡추는 열성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럼요, 아무렴요.

‘일이 어려울 건 없어. 각본 나와 있고 배우 다 있고…. 딱 주인공 자리 하나 비어 있던 거니까.’

‘예, 어르신.’

‘믿어도 되는 거지? 확실한 인재라고.’

‘예, 물론입니다.’

깡추의 이마가 드디어 바닥에 닿았다. 그러자 복도로 향하는 문이 열리고 작은 상자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사현은 깡추의 눈짓을 보고 무릎걸음으로 상자에 다가갔다. 뚜껑을 열자 사진과 명함이 한 장씩 들어 있었다.

‘…….’

사현이 느릿한 손길로 명함을 들어 올렸다.

‘보고 외워. 들고 갈 순 없어.’

깡추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명함과 사진을 오래도록 천천히 눈에 새겼다. 사진에 찍힌 것은 으리으리한 차에서 내리는 중년 남자였다. 반백의 머리에 강퍅한 인상이었다. 명함에는 모 건설의 대표 이사라는 직함이 찍혀 있었다.

‘완전히 보낼 필요는 없어. 무슨 뜻인지 알지?’

‘예.’

‘그래. 믿고 기다리겠네.’

샛장지 너머로도 남자의 미소가 보이는 것 같았다. 사현은 조용히 상자 뚜껑을 닫았다.

***

오전부터 날씨가 심상치 않았다. 정오가 되도록 해가 흐린 창밖을 내다본 가람이 장우산 하나를 꺼내 주었다. 나갈 채비를 마친 여준을 향해 아이가 종종대며 걸어왔다.

“아빠, 공부하러 가? 이따 다시 와?”

“응. 이따 데리러 올게.”

“아니, 여기서.”

“…응?”

“어제처럼 여기서, 응?”

아이가 여준의 소맷자락을 쥐고 몸을 비비 꼬았다. 어제처럼 여기서? 여준이 의아한 얼굴을 하자 하품하며 뒤따라 나온 가린이 덧붙였다.

“지오는 여기서 살고 싶대. 그니까 너도 여기서 살래.”

“뭐야, 그게.”

여준이 헛웃음을 지었다. 그러나 아이는 제법 진지해 보였다. 아빠도 좋고, 이 집도 좋으니 이 집에서 아빠랑 같이 살고 싶다는 소리였다. 어쩌면 이렇게도 속없는 소원을 잘도 말할까. 여준은 애써 고개를 저었다.

“지오야, 그럼 아빠랑 지오랑 살던 우리 집은 어떻게 해? 버려?”

“왜 버려. 팔면 되잖아.”

“…우리 집은 아빠랑 지오 돌아오라고 기다리고 있는데?”

“집이 그런 걸 어떻게 알아? 아빤 내가 바본 줄 알아?”

무심코 으하하, 웃음을 터뜨린 가람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가린이 있는 힘껏 그 옆구리를 꼬집은 탓이었다. 그러게, 언제 이렇게 똑똑해졌을까. 여준은 씁쓸한 기색을 감추고 아이를 달래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도 오늘은 집에 가야 돼. 알았지?”

“싫어!”

홱, 여준의 손을 쳐 낸 아이가 가린의 방으로 달려 들어가 버렸다. 휑하니 남은 어른들만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준이 머쓱하게 웃으며 몸을 일으켰다.

“애가 요즘 저래. 벌써 반항기가 왔어. 말은 또 얼마나 잘하는지.”

“여준아….”

어색한 분위기가 흐르자 가린이 애틋한 목소리를 내며 여준의 팔을 붙잡았다.

“난 찬성이야, 여준아.”

“…뭘?”

“지금 너희 집을 팔아서 그 돈 다 우리 주면 내가 너랑 지오 하나 못 맡을 것도….”

“우리 가린이가 잠이 덜 깼네.”

가람이 얼른 가린의 입을 막았다. 덕분에 분위기가 금방 부드러워졌다. 여준은 조금이나마 가벼워진 마음으로 브리프케이스를 고쳐 들었다.

“늦지 않게 올게요. 저녁 전에 끝나니까.”

“그러면 와서 같이 저녁 먹자. 네 핑계로 가린이랑 나도 간만에 특식 좀 먹어야겠다.”

“어…. 그래도 여기 오면 7시는 넘을 것 같은데요.”

“지오는 미리 먹일게. 출발할 때 연락 줘.”

손을 흔들던 가람이 아차, 하더니 제 방으로 달려가 머플러 하나를 꺼내왔다.

“이것도 두르고 가라. 안 그래도 일교차 큰데 비까지 오면 쌀쌀할 거야.”

폭이 넓은 머플러는 여준의 목을 휘감고 어깨까지 덮었다. 금방 땀이 나도록 훈훈해졌다.

“운전 조심하고. 응?”

“예, 아버지….”

“으하핫.”

호탕하게 웃는 가람의 배웅을 받으며 집을 나섰다. 교육 장소로 향하는 내내 체온이 조금씩 오르는 기분이었다.

***

“제일 중요한 건 내가 확실하게 풀 수 있는 문제를 먼저 찾아내는 겁니다. 시험지를 받자마자 문제를 빠르게 훑어본 후에 이 식은 진짜 자신이 있다, 하면 무조건 그것부터 푸세요. 예를 들어 내가 델타헤징은 진짜 죽어라 팠다, 하면 머릿속에 Delta! 딱 입력해두고 매의 눈으로 훑으라는 거죠.”

오후 세 시를 지나자 기어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좁은 강의실 안은 금방 차가운 습기로 가득 찼다. 여준은 펜 끝으로 시험지 모서리를 훑으며 지루함을 상쇄시켰다. 분명 문제풀이를 시작해야 할 강사는 어느샌가 열이 올라 자신의 합격 수기를 푸느라 여념이 없었다.

“여러분 다 평생 공부 잘한다는 소리만 듣고 살던 사람들이고, 찍기나 턱걸이 합격이랑은 관련 없는 삶을 걸어오셨을 거예요. 저는 조금 다릅니다. 스카이 나온 것도 아니고, 해외 대학도 아니고, 그런 제가 여러분 같은 잘난 사람들 앞에서 강사랍시고 이럴 수 있는 건….”

단단히 잘못 걸렸군.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내쉬는데 덜컹, 의자 밀리는 소리가 들렸다. 돌아보니 정훈이 가방을 챙겨 일어서고 있었다.

“…….”

강사는 잠시 당황했지만 이내 아무렇지 않은 척 하던 말을 이어갔다. 여전히 자기 자랑을 그만둘 생각은 없어 보였다. 차고 축축한 공기 속, 아무 가치도 없는 타인의 말을 귀에 쑤셔 넣어야 하는 상황에 진절머리가 난 것은 모두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여준이 펜을 살짝 강하게 쥐었다. 책상에 걸어 놓은 가방도 한 번 내려다보았다. 그러나 그뿐이었다. 그는 결국 수업이 끝날 때까지 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다.

“장난치나, 진짜. 시간 없어 죽겠구만.”

흡연실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던 정훈은 여준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불만을 토해냈다. 여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의자를 빼서 앉았다.

“4시 타임도 그 사람이 한대.”

“뭐?”

“원래 오기로 했던 다른 강사가 못 오게 됐다던데.”

“짜증 나네….”

인상을 찌푸린 정훈이 퉤, 재떨이에 침을 뱉었다.

“한 대 줄까?”

그가 담배 한 개비를 더 꺼내다 말고 물었다. 여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정훈은 두 번 권하지 않고 새 담배에 불을 붙이며 툴툴거렸다.

“난 그냥 빠질란다. 자습하는 게 낫겠네.”

“…….”

“넌 어쩔래?”

은근히 공범자가 되길 청하는 투였다. 여준은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땡땡이를 치고 안 치고는 둘째 치고, 여기서 정훈에게 가담했다간 밤이 늦도록 술자리에 끌려다니게 될 것이 뻔했다.

“자습은 됐고…. 집에 가야겠다. 애랑 놀아 줄 걸 괜히 왔네.”

그러자 정훈이 으엑, 하며 질린 표정을 지었다.

“애 어디 맡겨두고 온 거 아니야?”

“친구 집에 있어. 어제부터 맡긴 거라 되도록 일찍 데리러 가야 해.”

“그러지 말고 빨리 누구 만나라니까. 정시퇴근하는 날도 손에 꼽을 판인데 그나마도 애 때문에 싸그리 저당 잡혀서야 그게 사는 거냐?”

그런가. 여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당연한 소리지만 은아가 있을 땐 육아의 고충에 대해 잘 몰랐다. 지오가 태어난 이후 은아는 쭉 집에 상주하는 베이비시터를 썼다. 그래도 답답하면 친정에 가서 며칠, 몇 주간 지내다 오곤 했다. 여준이 직접 아기를 돌보거나 달랠 일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이제 모든 것은 온전히 여준의 책임이었고, 아이는 점점 자라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말없이 단풍잎 같은 손만 꼼지락거리며 품에 있어 주지 않는다. 머리가 굵어지고, 의지가 생기고, 팔다리가 단단하게 여물며 미운 말을 입에 담는다. 그런 아이를 감당하기 위해 또 여자를 만나야 한다는 말은 이상하게 들렸다.

“됐어…. 이제 결혼이라면 지긋지긋하다.”

여준이 짐짓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결혼을 생각하면 은아가 떠오르고, 꼬리표처럼 영재가 딸려왔다. 바스러진 금장시계와, 여준이 가진 모든 것을 억울해하던 말들과, 머리에서 피를 흘리며 웅크려 떨고 있던 모습이 차례로 스쳐 지날 때면 이루 다 말할 수 없이 비참한 기분이 들었다.

“넌 무슨 마누라가 바람피워서 이혼한 마냥 말을 하냐?”

“…….”

“너무 흘려듣지 마. 재혼하려면 너나 애나 한 살이라도 어릴 때인 게 좋다는 소리니까. 입장 바꿔 생각해서 네가 여자라면 안 그러겠냐.”

“내가 여자라면 사별하고 혼자 애 키우는 남자는 그냥 싫을 것 같은데.”

“글쎄 넌 이게 되잖아, 이게.”

정훈이 손가락을 쫙 펴더니 제 얼굴 위로 휘휘 흔들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조금이라도 젊고 예쁠 때. 그래야만 네가 팔리지.

‘그러니까 혹시 만약에요.’

불현듯 목소리가 들렸다.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찼던 욕실에서 사현이 뱉은 말이었다. 나는 선배 원하지 않아요. 지금처럼 젊고 예쁜 선배는 필요 없어요.

‘선배가 쭈글쭈글 못생기고 등도 다 굽은 할아버지가 돼서…. 돌아봐 줄 사람 하나 없이 볼품없어졌을 때.’

혹시 그때는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누구도 당신을 원하지 않을 때, 아무도 돌아보지 않아 외로울 때, 오롯이 외롭고 추해진 당신이라면 감히 한 번쯤은….

“…….”

여준은 순간 사납게 웃고 싶었다. 지금 그 순간으로 돌아간다면 꼭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사현아, 이 멍청한 자식아. 지금도 나 같은 걸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

운전석에 올라타 핸드폰 전원을 켰다. 가람에게서 메시지가 들어와 있었다. 가득 쌓인 상황보고를 천천히 훑던 여준의 눈이 크게 뜨였다.

「14:40 여준아, 전화 안 받네. 지오가 너 나가고 나서부터 열이 올라서 일단 가린이가 응급실 데리고 갔어. 약국도 다 닫아서 어린이용 해열제 구할 길이 없더라구」

「15:32 연락 왔는데 괜찮대. 그냥 미열인데 우리가 오버했나봐. 약 먹이고 데려와서 재웠어. 걱정하지 말고 천천히 와」

하아, 긴 한숨을 내쉰 여준이 곧장 가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 응, 여준아.

가람은 자못 미안한 말투였다. 여준은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며 최대한 침착하게 말했다.

“죄송해요, 형. 애 맡길 때 비상약도 챙겼어야 하는데 제가 깜빡해서….”

- 아냐, 아냐. 나야말로 미안하다. 애가 이마가 뜨끈해서 늘어져 있으니까 지레 놀라가지고 너한테 전화부터 했네.

“원래 미열은 자주 나요. 토하지는 않죠?”

- 그러진 않았어. 그냥 열 좀 식히면서 쉬게 해 줄 걸 애한테나 너한테나 괜한 스트레스 준 것 같다, 야.

“아녜요, 제가 잘 챙겼어야 하는데…. 지금 수업 끝났으니까 바로 갈게요.”

- 응? 벌써? 여섯 시까지라고 하지 않았어?

“그렇게 됐어요.”

간단한 인사치레를 몇 마디 더 나누고 시동을 걸었다. 내비게이션에 습관적으로 가람의 집 주소를 입력하던 여준의 손끝이 멈칫했다. 가람은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오늘까지 빈손으로 갈 수는 없었다. 그럴싸한 디저트라도 사가야 마음이 덜 불편할 것 같았다.

가람의 집에서 가까운 백화점을 검색하자 N동 소재 지점이 가장 먼저 떴다. 다행히 사현이 살던 곳과는 거리가 있었다. 한참 망설이던 여준이 결국 주소를 찍고 차를 출발시켰다.

몽블랑과 마카롱, 조각 케이크 따위를 고른 뒤 과일도 몇 가지 샀다. 그 사이 가람은 곤히 잠든 아이의 모습을 찍어 보냈다. 얼굴이 발긋하게 물든 채 잠든 아이는 다행히 편안해 보였다. 여준은 한층 안정된 마음으로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거리는 어느새 어두웠다. 추적추적 비가 내리는 하늘이 불길하리만치 검은빛이었다. 좁은 골목이 굽이굽이 이어진 길은 궂은 날씨, 가까워진 퇴근 시간, 버스 차선 합류 등의 악조건이 겹쳐져 꽉 막혀 있었다.

툭, 툭, 핸들을 두드리던 여준이 라디오를 켰다. 앞 유리를 느리게 훑는 와이퍼가 메트로놈처럼 보였다. 라디오 디제이는 날씨를 의식한 듯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로 진행을 이어갔다.

[우리가 걱정하는 문제의 96%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는 말이 있죠. 바꿔 말하자면 정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를 먼저 찾아내는 능력이 필요하다는 뜻입니다….]

기분 탓인지, 시간 낭비만 하고 나온 강의에서 강사가 열변을 토하던 것과 비슷한 말로 들렸다. 풀 수 있는 문제부터 찾으세요. 어차피 풀지 못할 문제에 현혹되지 말고.

[청취자 여러분들이 사연 보내 주셨어요. 정말 머리 아픈 문제가 있을 땐 어떻게 하느냐는 건데요. 닉네임 ‘해피야영원히사랑해’님이 적어 주셨네요. ‘저는 그럴 땐 좋아하는 아이돌 노래를 들어요. 신나게 웃으면서 춤추는 아이돌의 모습을 떠올리면 기분이 좋아지거든요.’ 아, 좋은 말씀이세요. 이분이 좋아하시는 아이돌도 이 사연을 들으면 그만큼 기분이 좋아질 것 같습니다….]

신호는 바뀔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바뀌더라도 줄이 슬쩍 움직이고 끝이었다. 괜히 이쪽으로 왔나. 가린이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이 든 쇼핑백을 슬쩍 훑어본 여준의 손끝이 조금 더 빨라졌다. 툭, 툭.

빗발은 강해졌다 약해지기를 반복했다. 여준이 브레이크에 발을 올린 채 작게 기지개를 켰다. 뒷목이 온통 뻐근했다. 옆머리를 쥐고 꾹꾹 누르듯 돌렸다.

시선이 멈춘 것은 그때였다.

“…….”

왼쪽 창이었다. 4차선 도로 건너편, 빽빽하게 들어선 상가 건물 사이 어둡고 좁은 틈을 본 순간 무언가와 눈이 마주친 것 같았다. 여준은 목을 쥐고 있던 손을 내리고 차창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후두두둑, 동시에 거세진 빗발이 거칠게 앞 유리를 때렸다.

그는 숨을 죽인 야생동물처럼 조용히 벽에 붙어 서 있었다. 언제나처럼 검고 깨끗한 정장 차림이었다. 다시 봐도 사현이었다. 얼굴을 알아보자 문득 궁금해졌다. 저 녀석도 나를 발견했을까. 내 차를 알아보고 저렇게….

“사….”

저렇게 차갑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찢어질 듯 거칠고 날카로운 경적이 울렸다. 퍼뜩 정신을 차린 여준이 앞을 바라보았다. 바뀐 신호를 따라 차를 출발시키면서도 고개가 자꾸만 돌아갔다. 사현은 여전히 그 자리에 붙박인 듯 서 있었다. 여준은 그제야 사현의 관자놀이가 붉게 물든 것을 깨달았다. 벽에 기댄 왼쪽 뺨으로 핏물이 줄줄 흐르고 있었다.

좌회전 신호가 들어왔다. 여준은 무의식적으로 왼쪽 차선으로 끼어들며 핸들을 끝까지 돌렸다. 좁은 차선에서 기예에 가까운 유턴을 하자 곳곳에서 경적이 울렸다. 사현이 서 있던 곳까지는 금방이었다. 차에서 내린 여준이 보도를 가로질러 골목으로 달려들었다.

“…….”

그러나 그 자리에 사현은 없었다. 여준은 그새 빗물에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고 주위를 살폈다. 우산을 쓰고 비좁은 보도를 걷는 사람들은 하나같이 짜증에 젖어 있었다. 헤치고 나아갈 때마다 곳곳에서 욕설이 들렸다.

“임사현!”

마침내 무채색의 우산들 사이로 숨어든 검은 인영이 눈에 들어왔다. 사현은 양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걷고 있었다. 넓고 판판한 등으로 빗물이 사정없이 쏟아져 내렸다.

“임사현…, 사현아!”

자세히 보니 귀도 붉게 젖어 있었다. 분명 목소리가 들릴 거리였지만 사현은 멈춰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걸음을 빨리하거나 달리지도 않았다. 여준은 몇 번이나 미끄러져 가며 마침내 사현의 팔을 붙들 수 있었다. 가까워진 사현에게서 선연한 피 냄새가 풍겼다. 걸음을 멈춘 사현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그 순간 여준의 가슴을 채운 것은 깊은 후회였다.

“…사현아.”

이런 표정을 짓고 있을 줄 알았다면 불러 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여준의 시선을 피하느라 잔뜩 일그러진 눈동자가 핏물에 젖어 붉게 번들거렸다. 꾹 다문 입술은 미세하게 떨렸다. 여준은 하마터면 그에게 다짜고짜 사과의 말부터 내뱉을 뻔했다. 보지 않았어야 할 얼굴이었다.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게 분명한, 어디로도 감추거나 갈무리하지 못할 정도로 거대한 마음이 흘러넘치고 있었다.

사현의 팔을 붙든 여준의 손끝이 움찔 흔들렸다. 그러나 여준은 결국 뱃속에서부터 차오른 충동을 행동으로 옮기지는 않았다. 끌어안았다가는 멈출 자신이 없었다.

***

“반, 반창고 좀 주세요.”

다급하게 뱉어낸 말은 한 번 헛돌고 말았다. 약사는 심드렁한 얼굴로 매대를 가리켰다.

“저쪽에서 고르시면 돼요.”

“아뇨, 그냥 밴드 말고 살이 찢어졌을 때 쓸 수 있는 거요.”

“찢어져요? 얼마나요?”

얼마나? 여준은 눈을 깜빡이며 마른침을 삼켰다. 얼마나 찢어졌더라. 억지로 끌어다 차에 태울 때까지도 자세히 볼 수 없었다.

“모르…, 모르겠어요. 피가 많이 나는데.”

“그럼 병원부터 가시는 게 나을 텐데…. 우선 몇 가지 챙겨드릴게요.”

쥐여 주는 대로 받아들고 빠르게 계산을 마쳤다. 행여 그사이 사현이 어디론가 가 버릴까 초조했다. 여준은 다급한 걸음으로 약국을 빠져나와 차에 올라탔다. 다행히 사현은 여준의 차 조수석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좀 봐봐.”

“뭐 하는 거예요?”

고개를 기울인 사현이 물었다. 절박했던 표정은 간데없이 더없이 차갑고 침착한 눈이었다. 여준은 애써 눈가를 굳히고 목소리에 힘을 주었다.

“뭘 따지고 싶은 건진 알겠는데 나중에 하고 일단 얼굴 좀 보자고. 심한 거면 병원부터 가야 할 거 아냐.”

“내가 혼자선 병원도 못 갈 칠푼이로 보여서 차에 태웠다고요?”

“그래, 그렇게 보여서 태웠어. 얼굴 내놔.”

신경질적으로 내뱉자 사현이 한숨을 푹 쉬었다. 이어 얼굴을 가까이하는 그에게서 진한 비 냄새가 풍겼다. 여준은 긴장된 사현의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평온한 눈썹 끝부터 관자놀이 사이로 손가락 한 마디만큼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

의기양양하게 나서기는 했지만, 막상 피가 철철 솟고 있는 모양을 보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상처 근처를 맴돌던 손을 우선 거둬들인 여준이 하릴없이 약 봉투를 뒤적거렸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사현이 툭 내뱉었다.

“손 떨잖아요.”

“추워서 그래.”

“지금 이게 다 뭐 하자는 거예요? 나 그만 내려도 돼요?”

“안…!”

여준이 저도 모르게 사현의 팔을 덥석 쥐었다. 사현은 눈썹을 잔뜩 찌푸리면서도 그 손을 뿌리치지는 못했다. 하아, 어깨가 들썩이도록 심호흡한 여준이 필사적으로 말을 지어내기 시작했다.

“너 지금 나한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진 알겠는데 못 봤으면 모를까, 사람이 피 칠갑을 하고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모른 척을 해?”

“…….”

“알았어, 그럼 병원에 데려다줄게. 그 정도는 괜찮지?”

“알아서 간다고요, 병원. 내가 운전면허가 없나, 서울에 택시가 없나.”

약 봉투를 내려놓은 여준이 전진 기어를 넣자마자 사현이 문고리를 쥐었다. 다급하게 기어를 원위치시킨 여준이 이번엔 두 손으로 사현을 붙들었다.

“…안 갈 거잖아.”

어쩐지 그런 예감이 들었다.

“여기서 내리면 너 병원 안 갈 거잖아.”

사현의 눈동자가 살짝 흔들렸다. 길은 여전히 빈틈없이 밀리고 있었다. 차를 빼려다 애매하게 멈춰 선 여준을 향해 주차 자리를 노리던 BMW 한 대가 신경질적인 경적을 울렸다.

“…정확히는 못 가는 거예요.”

빠앙, 그래도 차가 움직이지 않자 경적은 한층 크고 날카로워졌다. 여준은 못 들은 척 사현에게 집중했다. 왜 못 가는데? 애석하게도 BMW는 쉽게 포기할 마음이 없어 보였다. 아예 북을 두드리듯 경적을 울려대는 소리에 머리가 다 아파왔다.

“근처 병원에 사람 쫙 깔렸을 텐데 어정어정 기어 들어가면 그게…. 아, 젠장.”

사현이 낮은 욕설을 지껄이더니 순식간에 차 문을 열어젖혔다. 여준은 반사적으로 온 힘을 다해 사현을 끌어당겼다. 휘청, 흔들린 사현이 도로 자리에 앉자마자 차를 출발시켰다. 끼긱, 빗물에 젖은 와중에도 요란한 소리가 났다.

“…….”

“…….”

“…저 새끼 지금 하이빔 켜잖아요.”

“그래서 뭐, 가서 주먹다짐이라도 하려 그랬어? 이마 좀 찢어진 걸론 성에 안 차?”

거침없이 뱉어내는 와중에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사현은 말없이 시트에 몸을 기대앉았다. 그 와중에도 피는 쉼 없이 흘렀다. 한숨을 내쉰 여준이 뒷좌석에 올려두었던 머플러를 끄집어냈다.

“이거라도 써.”

“…어쩌라고요, 이런 걸로.”

“피 좀 멈추게 해 봐! 이 정도 맞는 건 익숙하다며. 응급처치 방법 같은 것도 몰라?”

초조함에 결국 목소리가 높아졌다. 사현은 하아, 들으란 듯 한숨을 쉬더니 결국 스스로 약 봉투를 뒤져 거즈며 반창고를 꺼냈다.

“이마는 원래 조금만 찢어져도 피 많이 나요.”

“거울이나 보고 말해. 너 지금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아. 병원 못 가면 어디로 갈 건데? 너 지내던 호텔? 주소 좀 찍어 봐, 나 지금 기억이….”

“…일단 진정해요. 알았으니까.”

거즈로 이마를 누른 사현이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여준은 그제야 관자놀이며 턱 아래에 가득 밴 식은땀을 훔쳐낼 수 있었다.

“이 동네만 벗어나면 돼요. 아무 데나 내려 주세요.”

“호텔로 가?”

“…네, 뭐. 그래도 되고.”

성의 없는 대답에 여준은 입을 꾹 다물고 속도를 높였다. 그래 봤자 하늘을 날아갈 순 없었기에 이동은 무시무시하게 느렸다. 하아, 핸들을 툭툭 내리치던 여준이 초조한 눈빛으로 사현을 돌아보았다. 그는 상처를 꾹 누른 채 말이 없었다.

“어쩌다 그랬어? 싸웠어?”

“그럼 혼자 어디 처박고 이랬겠어요.”

“비비 꼬지 않으면 대답을 못 해?”

“이거 좀 긁혔다고 당신이 오만 호들갑 다 떨고 있는 게 웃겨서 그래요. 100년이 지나도 두 번은 나 안 볼 거라더니.”

“…….”

“이렇게 쉬운 거였으면 진작 몇 군데 부러뜨리고 선배 앞에 엎어질 걸 그랬네요. 뭐 한다고 구질구질 매달려서 애원했는지.”

“나는…!”

비는 끝없이 내리고, 거리는 부패한 통조림처럼 속에서부터 팽창해 있었다. 여준은 아랫입술을 짓씹으며 짓눌린 목소리를 냈다.

“…그러니까 애먼 시비에 일일이 반응하지 마. 대체 이게 뭐야? 길바닥에서 주먹질하다 이마나 터져서 돌아다니고, 애야?”

“그야 선배는 누가 시비를 걸어도 무시하는 게 최선이겠죠. 그 순간 화가 치미는 걸 참으면 평온하고 안락한 일상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내가 그랬다간 어떤 상황이 벌어질지 상상해 본 적 있어요?”

당연히도 없었다. 여준은 마저 뱉으려던 말을 애써 삼키고 신호에 맞춰 차를 출발시켰다. 차갑고 축축하고 싸늘한 공기에 숨이 막혔다. 어두운 거리, 안개등을 켠 채 꾸역꾸역 들러붙는 자동차의 행렬은 지저분한 상가 건물의 토사물처럼 보였다.

호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기어를 당겼다. 시간은 어느새 여덟 시를 훌쩍 지나고 있었다. 멍하니 전자시계의 숫자를 바라보던 여준의 입이 크게 벌어졌다. 다급히 핸드폰을 꺼내 들자 부재중 전화 다섯 통이라는 메시지가 떴다.

“…아.”

세상에, 어떻게 까맣게 잊고 있었지. 가람과 가린에게서 번갈아 걸려온 전화 내역을 확인하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약속 있었어요?”

사현이 물었다. 차분하고 조용한 목소리였다. 여준은 무심코 핸드폰을 도로 넣으며 고개를 저었다.

“전화하면 돼. 일단 올라가자.”

“올라가요? 어딜?”

“어디긴….”

“방까지 따라오게요? 뭐 하러?”

사현의 입술에 긴 비웃음이 걸렸다. 여준은 울컥 치미는 화를 눌러놓고 차근차근 말했다.

“상태가 어떤지 자세히 봐야 할 거 아니야. 지금도 계속 피 나는데.”

“그러니까 선배가 왜요.”

“그런 꼴을 봤으면 네가 박영재였어도 이 정도는 해. 그만 따지고 내려.”

마지막 말은 제법 설득력이 있던 모양이었다. 픽 웃은 사현이 문고리를 쥐다 말고 말했다.

“로비에 가서 방 하나 잡아줘요.”

“…뭐?”

“쓰던 방은 지난주에 빼서 없어요. 내가 이 꼴로 갔다간 프런트에서 선배만큼 난리 피울 것 같으니까 부탁 좀 할게요.”

말을 마친 사현이 품에서 지갑을 꺼내 여준의 허벅지 위로 던져 놓았다. 사현이 얼굴과 검은 지갑을 번갈아 보던 여준이 황당한 어조로 내뱉었다.

“그럼 왜 이리로 오라고 했어?”

“선배가 하도 들러붙으니까 이쯤에서 떨구려고 그랬죠.”

“지금은 어디서 지내는데? 지낼 곳이 마땅치 않으니까 호텔에 있었던 거 아니야?”

“이쪽에서 하는 일이 있어서 그랬던 거예요. 그 일 끝났으니까 원래 살던 집으로 간 거고.”

원래 살던 집. 여준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현은 아직도 그 집에 있을까. 그토록 외롭고 차갑고 쓸쓸한 공간에.

“…….”

입을 꾹 다문 채 고민하던 여준이 사현의 지갑을 도로 그에게로 던졌다. 이어 거칠게 차를 출발시키는 여준을 보며 사현이 뒤늦게 눈을 끔벅였다.

“어디 가요?”

“시끄러워.”

다행히 정체는 조금이나마 풀려 있었다. 여준이 거침없이 차를 모는 동안 주변 풍경은 사현의 눈에도 제법 익숙한 모습으로 바뀌었다.

길지 않은 시간을 달려 도착한 곳은 여준이 사는 아파트 지하주차장이었다. 사현은 입을 다문 채 여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여준은 안전벨트를 풀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쇼핑백을 주섬주섬 챙겼다.

“뭐 해? 내려.”

“…….”

“빨리.”

한참을 망설이던 사현이 엉거주춤 차에서 내렸다. 여준은 그를 지나쳐 성큼성큼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버튼을 누르자 조용히 따라오고 있던 사현이 물었다.

“몇 층이에요?”

“뭐?”

“난 걸어 올라갈게요. 아는 사람이라도 마주치면 어쩌려고요.”

그 말을 두어 번 곱씹은 후에야 의미를 파악한 여준이 입을 쩍 벌렸다. 저 같은 깡패와 함께 있는 모습을 이웃 주민이 목격해서야 곤란하지 않겠냐는 말이었다.

“넌 대체 나를 뭐로 보….”

울컥해서 따져 묻다 말고 말문이 막혔다. 먼저 사현과 함께 있는 모습을 남들에게 보일까 전전긍긍했던 건 여준 자신이었다. 물론 억울한 부분이 없지는 않았다. 그가 겁을 냈던 것은 어디까지나 처가 때문이었다. 어리고 철없던 시절에도 사현 자체를 꺼리거나 부끄럽게 여긴 적은 없었다.

“…까불지 말고 타.”

“…….”

“빨리.”

재차 다그치자 그제야 사현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그대로 또다시 침묵이었다. 사현은 매사 비아냥거리면서도 결국 여준의 명령을 거절하지 못했다.

이틀 비워뒀을 뿐인데 집 안은 잔뜩 싸늘하고 축축했다. 보일러 온도를 있는 대로 올리고 수건을 꺼내다 사현에게 던졌다. 사현은 신발도 벗지 않고 현관에 가만히 서 있었다.

“들어와.”

“선배.”

“일단 들어와. 몸 좀 녹이고 얘기해.”

여준이 수건 하나를 뒤집어쓴 채 옷장을 뒤적거렸다. 가진 것 중에 가장 품이 큰 티셔츠와 트레이닝복 바지를 골라 들고나올 때까지도 사현은 망부석인 양 미동도 없었다. 하아, 일부러 큰 소리로 한숨을 내쉰 여준이 현관에 옷을 던져 놓았다.

“갈아입어. 다 젖었잖아.”

“대체 왜 이러는 거예요?”

들고 있던 수건마저 바닥에 내려놓은 사현이 물었다. 망설이던 여준이 젖은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겼다.

“…해결할 수 있는 문제부터.”

“네?”

“뭐가 뭔지 모르겠을 땐 해결할 수 있는 문제부터 찾으랬어. 그래서 이러는 거야.”

“…….”

“들어와. 젖은 옷 갈아입고, 상처 치료하고, 그다음에 얘기해. 나도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일방적으로 말을 마친 여준이 안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뒤늦게 조금씩 제정신이 돌아왔다. 심장이 쿵쿵 뛰고 숨이 거칠어졌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지. 젖은 뺨을 꼬집어 봐도 현실은 그대로였다.

“하아….”

우선은 가람에게 전화해야 했다. 축축한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두고 핸드폰을 꺼냈다. 그새 부재중 전화는 세 통이 더 늘어 있었다. 막 전화를 걸려는 순간 핸드폰이 또다시 진동하기 시작했다.

“…여보세요.”

- 여준아! 너 괜찮아? 왜 전화를 안 받아?

금방 머리가 지끈거렸다. 여준이 몇 번이고 입술을 짓씹으며 머리를 굴렸다. 뭐라고 말해야 하지. 뭐라고 해야 이 사태를….

- 사고라도 난 거야? 오늘 여기저기 난리도 아니었다던데.

“아….”

- 어? 진짜 그런 거야? 괜찮아?

눈을 꾹 감았다 뜬 여준이 억지로 입을 열었다. 어떻게든 사태 수습을 해야 했다.

“네…. 그…. 죄송해요.”

- 사고가 어떻게 났는데? 다쳤어?

“그…, 냥 접촉 사고요. 전 멀쩡해요. 별일은 아니…, 아니었어요.”

- 어딘데? 혼자 괜찮겠어?

“괜찮아요. 보험…, 처리하면 돼요. 근데 형, 지오를….”

- 지오 걱정은 하지 마. 어차피 애 아픈데 하루 더 재우라고 말하려고 했어. 오늘 못 데리러 올 것 같아?

여준이 손등으로 이마를 꾹 눌렀다. 날카로운 대바늘로 가슴을 쿡쿡 찌르는 느낌이었다. 이제라도 솔직히 말해야 할까. 하지만 어디서부터 어떻게?

“…부탁…, 드릴게요. 죄송해요.”

- 그래, 일 해결되는 대로 연락 줘. 지오한테는 내가 잘 말할게.

끝까지 다정한 전화를 끊고 나니 한층 더 마음이 무거워졌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여준이 우선 옷을 갈아입고 문을 열었다.

“상처부터 보….”

그러나 현관은 텅 비어 있었다. 파랗게 굳어가던 여준의 눈에 가지런히 놓인 검은 구두가 보였다.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사현은 등을 보인 채 창가에 붙어 서 있었다.

“뭐 해?”

짐짓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사현은 대답 없이 바깥만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언젠가 여준이 그랬던 것처럼.

“…왜 그래? 누가 쫓아와?”

그러자 사현이 덜컥 돌아보았다. 새카맣게 굳은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놀란 여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멎었어요.”

“뭐?”

“피 멎었다고요. 이제 가도 돼요?”

교무실에 끌려온 반항아 같은 말이었다. 여준은 낮은 숨을 내쉬고 사현의 팔을 끌어다 소파에 앉혔다.

“다 젖어요.”

“그러니까 갈아입으라고 했잖아.”

꺼내 준 옷은 여준이 던져 놓은 모양 그대로 걸레짝마냥 나뒹굴고 있었다. 군데군데 먼지 더께가 쌓인 집 안이 이제 와 부끄러웠다. 사현이 대놓은 거즈를 떼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냈다. 벌어진 상처 사이로 맑은 핏물이 고여 있었다.

“뭐에 이런 거야? 깊게 베었는데.”

조심스레 상처 주변을 눌러 떨어진 살을 맞물리게 했다. 사현은 여준이 제 이마를 주물대거나 말거나 속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맥주병이요.”

“…진짜 애도 아니고….”

“던진 건 피했는데 파편이 튀었어요.”

대수로울 것도 없다는 투였다. 여준은 거즈를 길게 접어 상처 위로 댄 채 반창고를 당겨 붙였다.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일단 상처를 가려놓으니 마음은 편했다.

“됐어요?”

눈을 감은 채 가만히 있던 사현이 물었다. 여준은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떼어냈다. 그 모습이 보이기라도 한 것처럼 사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젖은 속눈썹 아래 검고 반질반질한 눈동자가 유순한 빛을 품고 있었다.

“선배.”

“…왜.”

“이제 이런 짓 하지 마요.”

“…….”

“다음부턴 내가 이마가 터져 있어도, 등에 칼이 꽂혀서 죽어가고 있어도 모른 척해요. 그러기로 한 거잖아요.”

여준이 침울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어.”

“뭔데요, 그럼.”

“나는…. 그러니까.”

말을 이어가던 여준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그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너랑…. 예전처럼 될 수는 없다는 뜻이었어. 네가 죽거나 말거나 못 본 척하겠다는 그런 게 아니었다고.”

“예전처럼? 우리가 예전에 어땠는데요?”

사현은 뭐 하나 순순히 넘어갈 생각이 없어 보였다. 비웃음을 함북 담은 입술이 유일하게 생기를 띠었다. 머릿속이 끓는 물처럼 와글거렸다. 이마를 움켜쥔 채 여준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가…. 그렇게 오기 싫었으면 뿌리치고 가 버리지 그랬어. 너도 여기까지 어정어정 따라와 놓고 왜 사람을 취조하듯이 그렇게…!”

“뿌리쳐?”

사현이 시원한 미소를 지었다. 얼굴을 가리고 있던 팔이 붙들린 것도 그때였다. 휘청대는 여준의 팔목을 강하게 움켜쥔 사현이 이를 악물고 뇌까렸다.

“내가 당신 손을 뿌리칠 수 있는 위인이면 애초에 이 꼴이 났겠어요?”

“…….”

“당신이 부르거나 말거나, 내 팔 붙잡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갈 길 갈 수 있었으면 지금 이렇게 됐겠냐고요.”

“…….”

“알아들었으면 선배가 조심해요. 내 쪽에서 먼저 들러붙는 일은 없을 테니까.”

툭, 말을 마친 사현이 여준의 팔을 내던지듯 놓았다. 여준은 얼얼한 팔을 붙든 채 아랫입술을 힘껏 물었다. 당신 손을 뿌리칠 수 있으면 애초에 이 꼴이 났겠어요? 그것은 아주 오래전에 들었어야 했던 질책 같았다.

“…네가…. 그런…, 짓을 저질렀던 게, 내가 생각했던 이유가 아니라는 건 알겠어.”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어느 지점으로 돌아가야 할까. 우울감에 가슴이 짓눌려 잠들 수 없는 밤마다 머릿속을 지배하던 가정이었다. 은아와 결혼하기 전으로, 사현이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던 여름으로, 같잖은 멘토링 따위를 수락하기 전으로…. 하지만 어느 지점에 가더라도 무언가는 잃어야 했다.

“하지만 다시 만나자마자 나를 위협한 건 너였어. 특히 너 지오…, 우리 애를 죽일 듯이 노려보고 있었잖아.”

“…….”

“너는 영재를 해쳤고, 은아를 죽였어. 그때 내가 생각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였어. 그 상황에서 널 경계했다고 해서….”

“내가 당신 애를 해칠까 봐 그랬다고요?”

사현이 슬쩍 웃었다.

“지금은 못 할 것 같아요?”

여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굳었다.

“선배, 정신 차려요. 내가 당신한테 무릎 꿇고 구걸 좀 했다고 아주 병신으로 보여요?”

사나운 미소를 띤 사현이 손바닥으로 여준의 뺨을 툭툭 두드렸다. 여준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턱끝을 떨고 있었다.

“말했죠. 나는 수틀리면 살인도 할 수 있는 인간이고 그게 전부라고. 여태 당신한테 홀려서 정신 못 차리고 있다는 걸 알게 되니까 갑자기 만만해졌어요?”

“…사현아.”

“당신 애새끼를 해칠까 봐 걱정됐다며. 그런데 집 안까지 들이다니 제정신이에요? 나사가 빠져도 정도가 있지.”

씹어 뱉듯 뇌까린 사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무심코 따라 일어선 여준이 다급하게 물었다.

“내 애라서 미운 거야?”

사현은 대답 없이 구두에 발을 꿰었다. 단단하게 붙여 놓은 반창고에 그새 피가 비쳤다.

“그거야말로 나 때문이잖아. 나한테 풀어야 할 감정이잖아. 너는….”

“당신 애라서 밉냐고?”

벌컥 돌아선 사현이 여준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살갗까지 파고드는 싸늘한 체온에 여준이 등을 잔뜩 움츠렸다. 사현의 손은 세밀하게 조형된 석고 같았다. 차갑고 단단하지만 툭 떨어뜨리면 그대로 부서질 듯했다.

“선배, 나는요.”

차게 식은 사현은 거리에서 불러 세웠을 때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그 애가 당신과 눈썹 한 올이라도 닮았다면 그렇게 보지 않았을 거예요.”

“…뭐?”

“선배와 손톱 모양이라도 비슷했다면 선배만큼 중요하게 여겼을 거예요.”

“…….”

“당신이 아끼는 것보다 훨씬 더….”

터진 둑처럼 말을 쏟아내던 사현이 한순간 움직임을 멈췄다. 비를 피한 지는 한참인데 아직도 빗속에 서 있는 것 같았다. 여준은 잔뜩 흔들리는 눈동자로 사현을 마주 본 채 말이 없었다.

“…어쩌면 당신보다 더.”

창밖으로 몰아낸 어둠이 스멀스멀 눈앞을 채운다.

입을 꾹 다문 사현이 돌아섰다. 거칠게 열어젖힌 현관문이 쿵, 소리와 함께 닫히고 여준은 그대로 주저앉았다. 순간 숨이 턱끝까지 차올랐다. 한 손으로 가슴을 누른 채 호흡을 고르다 집 안을 둘러보았다.

있는 대로 불을 켜 놓았는데도 컴컴했다. 비를 피했는데도 축축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피해야 할 예감인지 가늠할 수 없는 것은 그래서였다. 사현의 말이 머릿속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선배와 눈썹 한 올이라도 닮았다면, 손톱 모양이라도 비슷했다면.

‘지금은 못 할 것 같아요?’

“…욱.”

욕지기가 올라와 입을 틀어막았다. 머릿속으로 자꾸만 시커먼 안개가 드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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