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10/21)

#09. 칼을 삼킨 밤

팀은 정신없이 바빴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누가 봐도 한바탕 싸운 몰골로 출근하자 회사 사람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야 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쉽게 남의 말을 하는 것은 그만큼 관심이 얕아서다. 새로운 씹을 거리는 매일같이 생겨났고 팀원들은 어느새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준을 대했다.

“가 항 3번에 산출 오류가….”

“제가 만들어 놓은 수식 쓴다고 하지 않았나요?”

“파일 정리 맡았던 거 누구예요?”

“도시락 드실 분 메뉴 말씀하세요.”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정 중간에 짬을 내어 가람에게 전화를 걸었다. 영재와 있던 일을 간략히 말하자 가람은 잔뜩 흥분한 목소리로 당장 경찰서에 가자고 길길이 날뛰었다.

- 걔는 도대체 너한테 왜 그러냐? 너 괜찮아? 변호사 만나 보는 게 좋지 않겠어?

“나중에요. 요즘은 시간이 없어요.”

- 그러지 말고 말 들어. 너 이런 일 그냥 넘어가면 안 돼. 폭력 사건이 돼 버렸는데 아무 대처도 안 해 봐. 사람들이 어떤 식으로 말할 것 같아? 뭐 찔리는 게 있으니까 그 꼴을 당하고도 가만히 있는 거겠지, 그런다니까.

가람의 말은 설득력 있게 들렸다. 찔리는 거라. 여준은 허공을 바라보며 깨져 버린 시계를 떠올렸다. 비싼 물건이었겠지. 은아가 샀으니 못 해도 몇천짜리였을 것이다. 그런 것을 그토록 시원하게 깨부숴 버린 사현이 걱정스럽기도 했고, 얼이 빠져 있던 영재를 떠올리면 우습기도 했다.

“영재가 저한테 왜 그러는지는 알아요. 지금 말할 수는 없지만….”

- 말할 수 없어? 왜?

“말할 수 없는 이유도 말할 수가 없어요.”

가람은 미심쩍어하면서도 그 이상 묻지는 않았다.

- …암튼, 걔 진짜 위험한 상탠가 보다. 너 당분간 조심해. 나도 애들한테 좀 더 알아볼게.

“네, 고마워요. 형.”

전화를 끊고 심호흡을 했다. TF룸으로 돌아오니 기다란 데스크에 저마다 엎드려 잠든 팀원들이 보였다. 여준은 소리 나지 않게 조심하면서 노트북을 챙겨 사무실의 제자리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 터무니없는 업무량이었지만 해내지 못할 것도 아니었다.

“여준 씨.”

그때 불쑥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보니 팀장이 책상에 엎드린 채 한 손을 휘적휘적 젓고 있었다.

“네, 팀장님.”

“있잖아…. 여준 씨 혹시 미국 준계리 따놨던가?”

“저 FM까지 했었습니다. 2차 필기요.”

“아, 그랬지. 그랬어.”

으음, 팀장이 앓는 소리를 내며 머리를 벅벅 긁었다. 부석부석한 머리카락이 볏짚처럼 흔들렸다.

“바쁜 와중에 미안한 말인데, 여준 씨 혹시 올해 MFE 패스할 수 있겠어?”

“…올해요? 11월 시험 말씀하시는 건가요?”

“응. 내년 초에 중국 파견 건이 나왔는데 이게 조건이 되게 괜찮아. 상해에 고급 아파트 해 줄 거고, 회사 안에 애들 유치원 있고 퇴근 시간까지 돌봐준대. 여준 씨도 알겠지만 중국이 애들 귀하게 여기잖아. 애 키우면서 회사 다니기엔 환경이 그렇게 좋다더라고.”

“…….”

“문제는 그렇다 보니 경쟁이 붙어서…. 지금 지원자만 일곱 명인데 딱 두 명 뽑거든. 근데 지원자 중 3차 필기, 그러니까 MFE까지 끝낸 사람이 한 명뿐이야. 여준 씨가 3차만 패스하면 거의 확정인 거지. 심지어 여준 씨는 싱글 대디잖아. 그런 환경이 참작될 여지가 커.”

어리둥절해진 여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중국, 상해, 유치원이 있는 근무처…. 그가 선뜻 대답하지 못하자 팀장이 심통스럽게 입을 삐죽였다.

“싫어? 일단 3년 예상한다던데.”

“아뇨, 그게 아니라…. 너무 갑작스러워서요.”

“천천히 생각해 봐. 애가 지금 네 살이었지? 그럼 가서 살다가 돌아올 때쯤엔 사람 손도 좀 덜 탈 거 아니야. 가는 김에 중국어며 영어 공부도 시키고.”

“…….”

“솔직히 나는 내가 여준 씨 다 키워 놓고 남 좋은 일만 시키기 싫은데, 암만 고민해 봐도 성 선임한텐 이게 좋을 것 같아서 우리 애 주겠다고 물어온 거야.”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처럼 여준이 원하던 모든 것이 이루어질 계획이었다. 누구의 간섭도 없는 곳에서 아이를 돌볼 수 있고, 지금보다 나은 환경을 제공해 줄 수 있다.

“…감사합니다.”

“돼야 감사하지, 돼야. 미리 말해 두는 건데 공부할 시간은 따로 못 빼 줘. 여준 씨가 알아서 해야 돼.”

“네, 알겠습니다.”

얼떨떨하게 말한 여준이 머리를 꾸벅 숙였다. 두 번 고민할 것도 없이 좋은 기회였다. 다만 공부할 시간을 낼 수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완전 무리 아니에요?”

이야기를 전해 들은 후배가 정색을 하며 손사래를 쳤다.

“지금부터 한 달 공부해서 MFE를 어떻게 해요? 그게 가능하면 이런 코딱지만 한 회사에 계시면 안 되죠.”

“나 작년 말부터 올해 상반기까지 연수 받았었어. 많이 까먹긴 했는데 한번 해 봐야지, 뭐.”

“솔직히 다들 선임님 사정 알면 양보해야 된다고 봐요. 아빠 혼자서 애 키우는 거 얼마나 힘든 일인데.”

“애는 누가 어떻게 키우든 힘들어.”

예전 같으면 거슬렸을 말도 크게 와 닿지 않았다. 지오와 함께 꾸릴 새 보금자리에 대한 계획이 솔솔 떠오를 뿐이었다. 중국어, 영어 교육이라는 옵션에 혹한 것도 사실이었다.

“근데 중국어 하실 수 있어요?”

“배워야지.”

“오, 자신감.”

여준은 후배를 마주 보며 씩 웃었다.

***

TF는 2주 만에 끝났다. 중간에 엎어지지 않은 것만으로 감사한 결과였다. 온몸이 피로에 푹 절어 있었다. 차에서 내리자마자 은행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완연한 가을이었다.

“지오야.”

현관문을 열고 들어선 여준이 밝은 목소리로 아이의 이름을 불렀다. 시터와 함께 있던 아이는 여준을 보자마자 고개를 홱 돌려 버렸다. 제대로 인사를 나눈 것이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여준은 선물이라도 사 올 걸 그랬다고 후회하면서 허겁지겁 신발을 벗었다.

“우리 아들, 화났어?”

“…….”

“아빠 뽀뽀 안 해 줄 거야? 많이 화나서?”

어깨를 콕 찔렀지만 묵묵부답이었다. 둥근 볼이 잔뜩 부풀어 있었다. 여준은 난처하게 웃는 시터에게 입 모양으로 인사를 건넸다. 수고하셨어요.

“누나 가지 마!”

아이가 빽 소리를 질렀다. 이미 신발을 신은 시터가 여준과 아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여준은 얼른 아이를 끌어안으며 살살 달랬다.

“지오야, 선생님은 집에 가셔야지. 이제 아빠 왔잖아.”

“싫어! 아빠가 가! 지오는 누나랑 있을 거야!”

여준이 입을 헤벌린 채 눈을 깜빡였다. 충격적이기도 했고 우습기도 했다. 그새 또 컸다고 이런 미운 소리도 할 줄 알게 됐구나. 여준은 발버둥 치는 아이를 힘껏 끌어안은 채 시터에게 눈짓했다.

“괜찮아요, 가세요.”

“지오야, 내일 올게. 내일 또 만나.”

“싫어! 아니야! 아니야아악!”

아이가 여준의 팔을 힘껏 내리쳤다. 그것도 주먹이라고 꽤 아팠다. 여준은 힘껏 아이를 안고 얼러보려 했지만 아이는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바닥에 뻗은 채 대성통곡을 했다.

“누나 불러와! 누나!”

“지오야. 아빠가 오면 선생님은 집에 가는 거잖아. 선생님도 쉬셔야지.”

“아빠 싫어! 아빠는 회사 가서 돈이나 벌어!”

“성지오.”

여준이 짐짓 엄격한 목소리를 내며 아이의 어깨를 쥐었다. 아이는 아랑곳없이 그 손을 뿌리치더니 아예 엎어져서 울기 시작했다. 으아아앙, 허어어엉, 높이 찢어지는 울음소리에 금방 귀가 따가워졌다.

“…….”

여준은 고개를 한껏 위로 젖힌 채 고민에 빠졌다. 아직 어리니까 다 받아 줘야 하는 걸까, 아니면 일찍 버릇을 잡아야 하는 걸까. 아무리 생각해도 부모로서의 정답은 후자인 것 같았다.

“성지오, 일어나.”

아이의 팔을 힘주어 들어 올렸다. 아이는 숨넘어갈 듯 딸꾹질을 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에 억울함이 가득했다.

“누가 아빠한테 그런 식으로 말해도 된댔어? 그렇게 못된 말 하면 돼, 안 돼?”

“돼! 그래도 돼!”

이쯤 분위기를 잡았으면 기가 죽을 법도 한데 아이는 당당했다. 여준은 기어코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고 아이의 팔을 잡아끌었다.

“벽에 등 붙이고 서.”

“싫어, 지오는 생각하는 시간 안 할 거야.”

“빨리.”

도망치려는 아이를 억지로 잡아 주방 벽에 똑바로 서게 했다. 아이는 훌쩍이며 죽을힘을 다해 여준을 노려보았다.

“…….”

여준으로서는 한 번도 상상해 본 적이 없는 눈빛이었다. 순간 아이가 낯설게 느껴져 당황스러웠다. 그는 얼른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내고 또박또박 말했다.

“아빠랑 대화 하고 싶으면 불러. 하지만 그러려면 아빠한테 나쁜 말 한 걸 먼저 사과해야 해.”

“…….”

“알았어?”

“안 해! 사과도 안 하고 대화도 안 해!”

“그래, 마음대로 해.”

여준이 미련 없이 일어섰다. 아이는 차마 그 뒤를 쫓아가거나 주저앉지는 못한 채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었다. 여준은 서재에 들어가 문을 닫자마자 아픈 이마를 감싸 쥐었다.

이제 네 살인데 벌써부터 저러면 사춘기에는 어쩌지. 한참 먼 미래를 상상하다 골이 아파 그만두었다.

먼지 쌓인 의자에 앉아 서재를 둘러보았다. 구색을 맞춰 넣어 놓은 책들, 책상 위에 가지런히 놓인 만년필이며 잉크병이 우스웠다. 잉크병 뚜껑을 열어 보니 아니나 다를까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 방도 정리해야겠지. 쓸데없이 고급스러운 양장본 표지를 눈으로 훑으며 생각했다. 집 안의 모든 물건은 은아가 사들인 것이다. 해외 고전문학 시리즈나 백과사전도 마찬가지였다. 서재 책장에는 오로지 표지를 깨끗하게 맞춘 책만 자리할 수 있었다. 여준이 아무 생각 없이 시험 교재를 꽂아 놓았다가 불벼락을 맞은 적도 있었다.

‘여기 나 공부하라고 만든 방 아니야?’

‘아닌데. 누가 서재를 공부하려고 만들어? 전시하려고 만들지.’

손님을 맞을 일이 있을 때면 은아는 반드시 여준에게 서재에 들어가 있으라고 했다. 벨이 울리고 자신이 손님을 맞이하면 그제야 서재 문을 열고 나오라는 주문도 잊지 않았다. 은아에게는 여준조차 전시품이었다.

“…….”

머리가 복잡했다. 아직까지는 은아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영재와의 일을 의심하면서도 서글프거나 화가 나지 않는 것은, 은아가 이미 지나치게 참혹한 결말을 맞아서일까. 여준은 눈가를 문지르며 핸드폰을 꺼냈다.

우선은 가람의 말대로 변호사를 만나 볼 생각이었다. 중국 건이 어떻게 될지는 몰라도, 지오를 데리고 해외로 가겠다고 했을 때 처가에서 가만히 있을지가 미지수였다. 오전부터 꺼져 있던 핸드폰에 충전기를 연결했다.

핸드폰은 전원이 들어오자마자 쉴 새 없이 진동했다. TF 수고했다는 메시지, 회식 일정, 광고 문자와 게임 메시지를 지나던 손끝에 시터가 보낸 동영상 파일이 걸렸다.

“……?”

오전에 들어온 메시지도 그제야 확인할 수 있었다.

「오늘 어린이집 장기자랑 혹시 오실 수 있나요? 지오가 아빠 오기로 했다면서 저는 집에 가도 된다는데 따로 말씀이 없으셨던 것 같아서」

「메시지 확인하시면 전화 주세요」

「우선 제가 데리고 갈게요 오실 수 있으면 바로 전화 주세요」

「햇살어린이집4세반.mp4」

불에 덴 듯 일어선 여준이 서재를 박차고 나갔다. 아이는 그때까지 여준이 세워 준 자리에 얌전히 선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우왕좌왕하던 여준의 눈에 냉장고에 붙여 놓은 달력이 보였다. 오늘 날짜에 여러 번 별 표시가 되어 있었다.

“…아.”

언제였지? 아이는 분명 말했다. 여준이 보는 앞에서 달력에 표시도 했다. 아빠, 보러 올 거지? 나는 나무 역할이야.

“아…. 이런.”

여준이 얼른 아이에게로 달려갔다.

“지오야.”

“…….”

“지오야, 아빠가 미안해. 아빠가 바보야.”

그러자 아이가 흑, 하며 울음을 터뜨렸다. 작은 얼굴이 잘 익은 사과처럼 새빨개졌다. 여준은 아이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쉼 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아빠가 잘못했어. 정말 잘못했어.

“아빠가 바보라서 깜빡했어. 정말 미안해. 똑똑한 지오가 한 번만 용서해 주면 안 될까?”

“싫어.”

“한 번만. 딱 한 번만 용서해 줘. 미안해. 정말 미안해.”

“싫어, 아빠 바보야. 아빠가 제일 바보야!”

아이의 서러운 울음소리에 여준의 코끝도 붉게 물들었다. 아이는 여준의 팔을 밀치고 때리며 울더니, 종내 그의 품에 매달려 목을 끌어안았다. 여준은 아이를 안아 올려 뺨을 맞대고 정성스레 등을 쓸어내렸다.

“아직 화 풀린 거 아니야….”

딸꾹질하던 아이가 중얼거렸다. 여준은 응, 하며 아이의 뺨에 입 맞췄다. 울며 밀쳐 내는 손에 스스럼없이 매달릴 수 있는 것은, 아이가 결국 자신을 받아들이고 용서해 줄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따뜻하고 보드라운 몸을 품에 안은 채 여준은 생각했다. 혹시 나는, 모르던 새에 은아에게 똑같은 짓을 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러자 숨조차 죄스러웠다.

***

아이는 종이로 만든 나무 탈을 쓰고 무대 구석에 서 있었다. 가끔 주인공 역을 맡은 아이가 대사를 읊거나 노래를 부를 때 리듬에 맞춰 두 팔을 흔드는 역할이었다. 아이는 긴장한 얼굴로 주인공을 바라보고 있다가, 제 차례가 올 때면 열심히 나뭇가지 쥔 손을 흔들었다. 화면을 바라보던 여준의 입가에 따스한 미소가 번졌다.

그러나 10분짜리 연극이 막바지에 다다르자 아이는 눈을 굴리며 장내를 둘러보다 침울해지기를 반복했다. 나중엔 아예 무대 앞으로 나와 관객을 살폈다. 그때마다 선생님이 올라가 아이를 원래 자리로 옮겨 놓았고, 무대를 지켜보고 있던 어른들 사이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여준은 굳은 얼굴로 영상을 끝까지 보았다. 곧 커튼콜이 이어졌다. 아이들은 박수를 보내는 관객 앞에서 방실방실 웃으며 준비한 인사를 선보였다. 지오만이 뻣뻣하게 선 채 눈물을 뚝뚝 흘리고 있었다.

“…….”

여준은 이어폰을 뺀 뒤 핸드폰을 멀리 밀어 놓았다. 잠든 아이를 내려다보다 품에 깊이 안았다. ‘화가 풀릴 때까지 아빠 침대에서 함께 자는 것’이 아이가 내건 조건이었다. 선잠이 들었던 아이가 꼼지락대며 여준의 등을 끌어안았다.

“지오야.”

여준이 아이의 귓가에 속삭였다. 아이는 대답 없이 긴 속눈썹을 바르르 떨었다.

“아빠랑 같이…. 다른 나라 갈래?”

한껏 안겨드는 아이를 보듬고 있으려면 사현이 떠올랐다. 고개를 떨어뜨린 채 애원하던 어깨를 끌어안으며 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게 마지막이라고.

“다른 나라…?”

아이가 눈을 비비며 되물었다. 작은 입으로 종알거리는 모양이 어린 새 같았다.

“지오, 중국이 어딘지 알아?”

“중국…. 니하오….”

“그런 것도 알아? 똑똑하네, 우리 아들.”

“할머니랑 할아버지는…. 싱가포르에 있어.”

“맞아. 그리고 싱가포르는 영어랑 중국어를 많이 쓰는 나라거든.”

“응….”

“우리 지오 중국어 배우고 싶어?”

“응…. 배우고 싶어….”

웅얼대던 아이가 입맛을 짭짭 다셨다. 꿈과 구별이 안 가는 모양이었다. 여준은 아이의 입가에 묻은 침을 손등으로 훔쳐 냈다. 아이는 그제야 눈을 끔벅이더니 히쭉 웃었다.

“내가, 중국어 배워서…. 할머니한테 중국어책 읽어 줄 거야.”

“할머니? 어떤 책 읽어 줄 건데?”

“그냥, 아무거나아…. 할머니가 읽어 달라는 거 전부 다아….”

아이가 한 손을 위로 쪽 뻗었다. 이만큼 읽어 줄 거야. 여준은 아이의 뺨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한테도 읽어 줄 거야?”

“아빠한테는….”

“화 풀리면?”

“응, 화 풀리면….”

여준은 품속의 부드러운 체온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누구에게도 설명할 수 없는 충만감이 찾아왔다. 잠들기가 아쉬울 정도로 마음이 벅찼다.

“화 언제 풀리는데?”

아이의 이마에 입 맞추며 물었다. 응? 응? 언제 풀리는데? 아이는 제 얼굴 이곳저곳에 키스를 퍼붓는 어른을 이겨내지 못하고 까르르 웃어 버렸다.

“한 밤? 두 밤?”

“열- 바암-.”

“열 밤은 너무 길어. 아빠 말라 죽으면 어떡해?”

아이는 버거운 존재였다. 어디로 자라날지 모르는 생명이었다. 애가 그렇게 중요해요? 여전히 그 질문의 답은 모른다. 하지만 생의 한 축이 되어 버린 존재를 곁에서 떠나보내고 살아갈 자신이 여준에게는 없었다.

“그럼 다섯 밤…. 다섯 밤만.”

아이를 지켜야 했다.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여준은 눈을 감고 이를 악물었다. 끝없이 떠오르는 사현의 모습을 애써 떨쳐냈다.

***

「無담보 즉시 대출 전화만 주시면 oK –수신 거부 080008」

「여준아 내가 정말 진심으로 사과할게 술 마시고 잠깐 정신이 나갔던 거 같다」

「[Web 발신] 플러스치킨 / 주문 완료 / 퍼피걸즈 브로마이드 증정 행사 중 - 배달지점에 문의하세요」

「문자 보면 꼭 연락 줘 이 번호로 전화주면 된다 만나서 사과하고 싶다」

틱, 틱, 성의 없이 화면을 넘기던 사현의 눈동자가 창밖을 향해 도르르 굴렀다. 한 손에 편의점 봉투와 담배 보루를 든 쪽새가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귓전으로 스미자 뒷목까지 소름이 돋았다.

“형님, 또 필요한 거 없으십니까?”

“됐어.”

간단히 대답하자 쪽새는 옙, 하며 차 주변을 한 바퀴 돌아 운전석으로 올라탔다. 손에는 미리 뜯어 놓은 담뱃갑과 라이터를 든 채였다. 사현은 그가 내민 담배를 얌전히 받아 물고 숨을 깊이 빨아들였다. 타닥, 튀겨 오른 라이터 불씨에 코끝이 뜨끈해졌다.

“근데 아까부터 뭘 보시는 겁니까?”

쪽새가 사현이 든 태블릿PC를 곁눈질하며 물었다. 사현은 담배를 앞니에 문 채 연기를 훅, 뱉어 냈다.

“복사 데이터.”

“네?”

“말 걸지 마라. 스토킹 중이니까.”

쪽새는 두어 번 눈을 깜박이고는 얌전히 시동을 걸었다. 사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채 성의 없이 화면을 넘겼다. 광고, 카드, 대부, 배달 음식 알림뿐인 문자 사이사이에 매번 다른 번호로 박영재의 문자가 찍혀 있었다. 여준이 보자마자 차단하는 모양인지 서로 연락이 오가는 기색은 없었다.

“은근히 칼 같은 인간이야….”

“잘 못 들었습니다, 형님.”

“운전이나 해라. 군대도 안 다녀온 새끼가 이상한 말투 흉내 내지 말고.”

툭 던져 올린 핀잔에 쪽새가 흐흐, 웃었다. 쪽새는 스무 살이 되던 해에 다른 놈이 저지른 강도 살인을 덮어쓰고 교도소에 다녀왔다. 군대 간다 생각하고 인마, 응? 홍게는 그렇게 말하며 솜털도 가시지 않은 쪽새의 뺨을 툭툭 두드렸었다. 열아홉의 사현은 그 모습을 보며 언젠가는 제게 닥칠 일이겠거니 생각했다.

“너 입학 전엔 클린했던가?”

쪽새가 가져온 편의점 봉투 안에는 빵과 삼각김밥, 생수와 군것질거리가 들어 있었다. 밤부터 시작될 일의 대비용이었다.

“저요? 네, 뭐….”

“그렇겠지. 소년원도 쉽게 가는 거 아니던데.”

“…….”

“야구 방망이로 대가리를 깨뜨려도 안 가더라고.”

태블릿PC를 내려놓은 사현이 두 손을 모아 방망이 쥐는 시늉을 했다. 쪽새는 의아한 얼굴로 사현을 힐끔거렸다.

“근데 그런 거 왜 물어보십니까? 혹시 저 벌써…?”

“아냐. 건수 생기더라도 네 차례는 멀었지.”

“그러면 왜….”

“궁금해서 물어봤다, 새끼야. 궁금해서.”

대수롭지 않게 쏘아붙인 사현이 타들어 간 담배꽁초를 생수병 안으로 쑤셔 넣었다. 쪽새는 여전히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웬일로 변덕을 다 부리시고….”

“뒤질 때가 됐나 보지.”

어색한 침묵이 번졌다. 퇴근 시간이 다가온 탓에 도로는 빈틈없이 들어차 있었다. 쪽새는 멈춘 핸들을 쥔 채 한참 손끝만 까딱거리다 다시 사현의 무릎으로 시선을 던졌다. 화면이 까맣게 번진 태블릿PC는 고요할 뿐이었다.

“…그럼요, 형님. 저 진짜 궁금한 게 있는데 하나만 여쭤봐도 됩니까?”

“기어올라라, 그래.”

“그거 진짭니까? 형님이 그…. 뭐냐, 스토킹….”

“…….”

태블릿PC에는 성여준의 핸드폰 복제 데이터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사현은 흠, 하며 한 손으로 기기를 들어 올렸다. 엄지와 검지 사이에 모서리를 걸쳐 놓자 화면이 반짝 빛났다.

「스터디장: 준계리 3차 교육 일정 안내: 토요일 오전 11시~6시 한 시간에 10분 휴식 / 7시까지 석식 후 8시부터 10시까지 토론 수업 있습니다. 미리 배부해드린 유인물 참고하시어 인당 10분 내외 스피치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열심히도 산다….”

“예?”

“너 토요일 오전부터 밤 열 시까지 한자리에 앉아서 공부할 수 있냐? 주중엔 빠짐없이 야근하고.”

“…예? 아니…. 그런 짓을 왜 해야 됩니까?”

쪽새의 낯빛이 조금 창백해졌다. 사현은 그의 얼굴을 보고 픽 웃었다.

“왜, 공부가 그렇게 끔찍해?”

“아뇨…. 형님이 왜 이러시는지…. 그걸 생각하면 끔찍해서….”

“너 입학 차례 아니라니까.”

겁먹지 마. 간 보는 거 아니니까. 간단히 덧붙인 사현이 메신저 기록을 불러냈다. 성여준의 메신저에는 늘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수백 개씩 쌓여 있었다. 초중고 동창부터 스터디 그룹, 같은 팀원들, 회사 내 온갖 모임의 단체 메신저가 수십 개씩 되는 탓이었다. 성여준이 개중 지체 없이 확인하는 건 아이의 베이비시터가 보내는 메시지뿐이었다.

“…….”

가장 최근의 메시지는 아이의 어린이집 장기 자랑 영상이었다. 아이는 나무 분장을 뒤집어쓴 채 무대 구석에서 팔만 살랑살랑 흔들고 있었다. 초라하고 별 볼 일 없는 역할이었다.

“야.”

“네, 형님.”

“얘가 예쁘게 생겼냐?”

사현이 쪽새 쪽으로 화면을 기울였다. 쪽새는 영 미심쩍은 얼굴로 화면과 사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얘가 누군데요…? 형님 앱니까?”

“끔찍한 소리 하지도 마라.”

“…….”

“정답 없으니까 솔직한 감상만 뱉어 봐. 이게 예쁘게 생겼어?”

쪽새가 식은땀을 흘리며 신호를 확인했다. 차라리 차를 얼른 출발시키고 싶은 듯했지만 애석하게도 굳건한 빨간불은 흔들릴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전 애들 얼굴은…. 잘 모르겠는데….”

“…….”

“…근데 보통…. 어, 네…. 보통은, 음…. 이런 얼굴 대체로…. 예쁘다고 하지 않습니까? 눈도 크고, 네….”

흐음…. 느릿한 숨을 내쉰 사현이 화면을 늘렸다. 확대된 아이의 얼굴은 거의 울먹이고 있었다. 찌그러진 눈썹에 커다란 눈, 동글고 작은 코와 통통한 입술. 하나하나 뜯어보면 오밀조밀 예쁜 이목구비지만 그래서 더욱 신경에 거슬렸다.

“얘가 누군데요?”

“이걸 그렇게 예뻐 죽는단 말이지.”

“…누가요?”

“성실한 인간이.”

쪽새는 말없이 신호를 확인하고 액셀을 밟았다. 뒤늦게나마 소통을 포기한 듯했다.

“이것만 치우면 간단한 일인데….”

사현의 손끝이 화면 속 아이의 뺨을 톡톡 건드렸다. 아이는 이제 눈물을 방울방울 흘리며 무대 위를 휘젓고 있었다. 대단히 억울하고 마뜩잖은 기색이었다. 아마 성여준이 이 같잖은 재롱 잔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치워요? 애를요?”

“두 가지 방법이 있어. 애 하나를 치우든가…. 그 외의 모든 걸 치우든가.”

“……?”

“나로서는 되도록 전자로 하고 싶었는데.”

경계심을 가득 담고 날이 바짝 서 있던 눈이 떠올랐다. 그 순간 여준은 분명 사현을 앞에 두고 머리를 굴리고 있었다. 어떻게 해야 이 작자에게서 내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하는.

“어쩌겠어. 없으면 못 살겠다는데.”

사현이 어깨를 으쓱였다. 짧은 해가 멀리 저물고 있었다. 온갖 색깔의 양초를 녹여 섞은 모양으로 물든 하늘에 눈이 다 부셨다.

“그게…. 그…. 형님이 스토킹하시는 사람 앱니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던 쪽새가 가까스로 대화의 맥을 쥐었다. 사현은 대답 대신 창을 반쯤 열었다. 매연 섞인 찬 공기에 온갖 차들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형님 그럼…. 그게 진짭니까? 형님이 10년 전부터 그 나…, 남자 좋아….”

“니 똥구멍에 관심 없으니까 쫄 거 없다.”

“아뇨, 아뇨. 그런 얘기가 아니고요. 그러면 진짜로 고딩 때부터…. 허어….”

저도 모르게 진심 어린 탄식을 내뱉은 쪽새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사현은 별 반응 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다.

“전 깡추 형님이 놀리려고 하시는 말씀인 줄 알았습니다.”

“맞아, 놀리는 거.”

“그 저는….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이해가 안 가서요. 어떻게 10년을….”

사랑이란 건 말이야, 따먹으면 식게 돼 있어. 깡추가 기울인 술잔에 자신만만하게 싣던 말이었다. 내가 저거한테 박아야 하는데, 영역 표시해야 하는데 대 줄 듯 안 대 줄 듯 애를 태우니까 머리가 도는 거지.

일말의 기대가 없었다면 거짓말이다.

“그런가….”

이 뱃속에 잠든 것이 깡추의 말대로 그토록 저급하고 본능적인 열망이라면, 그의 해결책으로 쉽게 해소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툭, 사현이 손마디를 세워 창에 대었다. 완전히 저문 하늘은 물러 터진 사과 같은 빛깔이었다.

“그런데 오늘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차가 멈춰 선 곳은 P동의 고급 한정식집 앞이었다. 사현은 창문을 완전히 닫은 후 조심스레 백미러를 살폈다.

“나 내리고 나면 바로 차 빼라.”

“예? 형님….”

“입단속하고.”

검지를 입가에 붙인 사현은 한참을 더 주위를 살핀 후에야 차 문을 열었다. 쪽새는 여전히 어리둥절한 채로 사현이 하는 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현은 문을 닫자마자 뒤도 돌아보지 않고 식당 대문을 열어젖혔다. 곧바로 차 빠지는 소리가 들렸다.

“안으로 모시겠습니다.”

대문이 닫히자 비단 치마에 액주름포를 차려입은 종업원이 다가왔다. 눈가를 붉게 칠한 여자는 사현의 흉터를 보고도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어르신은?”

“매실로 들라는 말씀이셨습니다.”

사현은 순순히 그녀를 따라 안으로 들어섰다. 넓고 웅장한 복도는 개미 발걸음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듯 고요했다. 복도의 길이에 비해 방 개수는 터무니없이 적었다. 한참을 걸어서야 옥색 명패가 달린 장지문 앞에 멈춰 선 여자가 무릎을 꿇은 채 두 손으로 문을 열었다.

두꺼운 장지문 너머로 나타난 것은 검고 단단한 나무로 된 미닫이문이었다. 사현은 여자를 힐끔 보고는 스스로 문을 열었다.

“…….”

술과 다과가 놓인 4인용 상과 방석 네 개가 보였다. 그는 방을 자세히 둘러볼 것도 없이 곧장 오른쪽 벽으로 향했다. 방과 방 사이에는 샛장지가 이중으로 놓여 있었다. 여자가 했듯 문과 평행으로 선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으로 샛장지 한 장을 열었다. 그제야 옆방의 인기척이 들려왔다.

“그대로 인사 올리게.”

‘어르신’의 목소리였다. 사현은 자신의 그림자가 최대한 비굴한 모양이 되도록 양손으로 바닥을 짚고 목을 둥글게 숙였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음.”

‘어르신’의 정체는 모른다. 정확히는 사현이 알 수 없는 구조로 되어 있다. 깡추가 줄을 대고 있는 건설사의 높으신 양반 나리일 것이라 어렴풋이 짐작할 뿐이었다.

“자네가 내 일을 도와줄 수 있다고 들었는데.”

“예.”

“무슨 일을 할 수 있나?”

“시키시는 일 뭐든 다 할 수 있습니다.”

‘어르신’이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사현은 조용히 귀를 기울였다. 목소리만 들으면 어르신 소리를 들을 만큼 나이 든 인물 같지 않았다.

“고 전무가 교육을 잘 시켰네.”

이런 자들이 번거로운 폼을 잡아 가면서 사람을 부릴 때에는 취향을 잘 맞춰 줄 필요가 있다. 고분고분하되 비굴해서는 안 되고, 똑똑하게 굴되 건방져서는 안 되며, 말을 아끼되 핵심을 짚을 줄 알아야 한다. 머릿속으로 깡추의 목소리가 울렸다.

‘그런 게 가능한 놈이 누굴 것 같냐? 대학 나온 놈? 책 많이 읽는 놈? 아니지.’

겁이 없는 놈이지. 사현은 눈동자만 굴려 바닥을 짚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뭐 자네에게 별로 어려운 일은 아닐 거야…. 입단속하고 서류 작업만 몇 개 해 오면 되는 거니까.”

“예.”

“작업에 드는 비용과 필요한 서류는 그 방에 다 있네.”

사현이 힐끗, 다과가 차려진 상 아래로 시선을 던졌다. 은색 브리프케이스 두 개가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시간은 얼마나 필요하겠나?”

“한 달 내로 완료하겠습니다.”

“좋아.”

말을 마친 ‘어르신’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기척이 들렸다. 동시에 두엇의 발소리가 함께 따라붙었다. 사현은 쭉 고개를 숙인 채 그들이 내는 소리에 정신을 집중했다. 나무 미닫이가 열리고, 장지문이 열리고, 복도에 발소리가 찍히기 직전 다시 문이 닫혔다.

“…….”

사위가 고요해지고도 한참이 지나서야 사현이 몸을 일으켰다. 무릎걸음으로 물러나 샛장지를 닫은 그는 상 앞으로 돌아오자마자 브리프케이스를 끄집어내었다.

첫 번째 케이스에는 두터운 명부와 <경기도 F시 로터스 대형아웃렛단지 조성계획>이라는 수상쩍은 보고서가 들어 있었다. 내용인즉슨 L사가 F시에 아시아 최대 규모의 명품 아웃렛을 짓기로 했으며, 이미 첫 삽을 뜬 것이나 다름없으며, 아웃렛이 생기면 F시에서 서울 중심부까지 30분 내로 이동 가능한 지하철이 연결될 것이라는 허황된 소리였다.

사현은 앉은 자리에서 보고서와 명부를 꼼꼼히 훑어보고, 그것을 도로 케이스에 넣은 뒤에 두 번째 케이스를 열었다. 지폐 다발이 빈틈없이 가득 차 있었다. 빳빳한 지폐 냄새를 삼키자 뒤늦은 한숨을 올라왔다. 후우, 허공을 향해 긴 호흡을 내뱉은 그가 재빠르게 케이스를 도로 닫고 일어섰다.

배웅은 없었다. 사현은 케이스 두 개를 한 손으로 쥔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쪽새는 신호음이 몇 번 가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예, 형님.

“차 대라.”

- 와 있습니다, 형님.

경쾌한 대답에 사현이 우뚝 멈춰 섰다. 열린 대문 너머로 시커멓게 선팅을 해 놓은 세단이 보였다. 저 멍청이. 사현은 짧게 혀를 차고 걸음을 빨리했다.

“언제부터 있었어?”

“방금 왔습니다, 방금. 큰 차 하나 때 빠지길래 나오실 때 됐다 싶어서.”

“…….”

“잘 끝나신 겁니까?”

“우선 몰아.”

조수석이 아닌 뒷좌석에 올라탄 사현이 짧게 명령했다. 쪽새는 두말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근데 정말 뭐 하고 오신 겁니까?”

“…….”

“형님, 혹시 깡추 형님을 배….”

“시나리오 쓰지 말고 앞이나 봐.”

상상력하고는. 사현이 짧게 혀를 찼다. 그제야 조금 기가 죽은 쪽새가 슬그머니 백미러를 살폈다.

“형님…. 저 평화롭게 지내고 싶습니다.”

“네가 몸 사릴 일 없으니까 오버하지 마.”

“정치질엔 관심 없어요. 지금처럼 하루 세끼 챙겨 먹으면서 목숨 부지하고 살 수 있으면 만족합니다. 진짜예요.”

“이 새끼가 근데….”

혼자 움직이겠다는 사현에게 부득불 쪽새를 달고 가라 명령한 건 깡추였다. 쪽새의 이런 성향까지 다 알고 한 일이야 아니겠지만 새삼스레 그의 인재 운용 능력이 감탄스러웠다.

“생각을 좀 해. 내가 그럴 작정이 있으면 널 달고 다니겠냐.”

“…아.”

그것으로 일단락되면 좋았으련만 쪽새는 P동을 빠져나와 사무실로 향하는 내내 불안한 기색이었다.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울상을 짓는 얼굴에 결국 사현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아니, 형님을 의심하는 게 아니구요…. 근데 형님은 저희 사무실에서 유일하게 그…. 쿠데타 질렀던 인물이시잖아요….”

“쿠데타 같은 소리.”

“2년 전 그 일도….”

“…….”

“그런 일…, 일탈? …을 하고도 아무 처벌도 없이 복귀하시는 거 보고 솔직히 저희 같은 놈들은 되게…. 이상했거든요.”

이제 와서는 아무도 입에 올리지 않지만, 덕분에 사현이 깡추의 숨겨 둔 자식이라는 소문도 한바탕 돌았던 모양이었다. 우두머리의 신망과 애정을 갖고 싶어 눈을 까뒤집고 달려드는 집단의 시기와 질투에는 익숙하지만, 그것이 단순한 편애가 아닌 심상찮은 비호에서 비롯되었을 때엔 사현도 적잖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다.

“전에도 말했잖아. 나를 쓸 데가 있으니 비축해 뒀을 뿐이라고.”

“그게 오늘 다녀오신 자리랑 관련 있는 겁니까?”

쪽새는 더 이상 망설이는 기색도 없었다. 깡추의 이해할 수 없는 처사 앞에 꾹꾹 눌러 참았던 호기심이 표면 장력을 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던 사현이 느릿하게 두 눈을 감았다 떴다. 시트에 등을 붙인 채 뚫어져라 백미러를 바라보고 있자니 곧 쪽새와 눈이 마주쳤다.

쪽새는 백미러에 떠오른 시커먼 시선에 흠칫 놀라 어깨를 튕겨 올렸다. 사현은 입을 다문 채 그 눈을 끝까지 쫓았다. 핸들을 쥔 쪽새의 손이 가늘게 떨리기 시작했다. 흘끔, 불안하게 흔들리기 시작한 눈동자가 완전히 패닉을 일으키기 직전, 사현이 시선을 거둬들였다.

“…죄, 죄송합니다.”

바짝 마른 숨을 내쉰 쪽새가 짓눌린 목소리를 냈다. 사현은 별다른 대답 없이 조수석 쪽으로 몸을 굽혔다. 시트에 얌전히 놓여 있던 태블릿PC를 집어 들자 쪽새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였다.

“잘못…, 잘못했습니다, 형님.”

“…….”

“잘못했습니다.”

당장 주먹이나 흉기가 날아올 거라 생각했는지 어깨에 바짝 힘이 들어간 모습이었다. 사현은 말없이 태블릿PC를 켜고 비스듬히 기대앉았다.

별다른 새 소식은 없었다. 여준은 여전히 야근 중인 듯했다. 회사에서는 주로 회사 전용 메신저를 쓰는지 핸드폰 사용 빈도가 극히 낮았다. 조심스럽게 데이터를 넘기던 사현의 손끝이 멈칫했다.

「우리 전에 만났던 너희 집 근처 카페에서 보자 기다릴게」

또 새로운 번호였다. 사현이 저도 모르게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바짝 긴장한 채 운전에 집중하고 있던 쪽새가 흠칫 놀라 어깨를 좁혔다.

“차 돌려.”

“…예? 예, 형님?”

“서초동으로 가.”

쪽새는 더 묻지 않고 곧장 핸들을 틀었다. 뒤따르던 차들이 미친 듯이 경적을 울려 댔다.

“차 키만 내놓고 너는 복귀해. 택시 타고 가라.”

차는 여준의 아파트 정문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사현이 재킷 안주머니를 뒤져 지갑을 꺼내자 쪽새는 얼른 손사래를 쳤다.

“아니, 아닙니다. 저 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말 들어. 곧바로 복귀해서 지체 없이 보고해. 더하거나 뺄 필요 없이 그대로 얘기하면 돼.”

“아….”

“들어가라.”

사현이 내민 지폐를 받아 든 쪽새가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그가 차에서 내려 한참 멀어진 뒤에야 사현은 글로브박스를 열어 검은 야구 모자를 꺼냈다. 넥타이를 풀고 모자를 눌러 쓰자 시야가 금방 컴컴해졌다.

“…….”

아파트 근처는 고요했다. 혹시 벌써 그 카페인지 뭔지에 들어갔다면 곤란했다. 여준의 생활 반경 내에서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여준은 박영재를 철저하게 무시하고 있었다. 매번 바뀌는 번호를 빠짐없이 차단했고 전화는 받자마자 지체 없이 끊어 버렸다. 아마도 성여준 같은 인간이 타인을 배제할 때 할 수 있는 가장 단호한 대처였을 것이다. 문제는 박영재처럼 세상 밑바닥을 볼 만큼 본 인간에게 통할 리 없다는 거였지만.

그러나 인간 대 인간으로 충분히 잔혹하지 못한 것을 부덕이라 부를 순 없었다. 타인에게 잔인할 수 있는 인간은 애초에 정해져 있으므로.

그때 사거리 쪽에서 흐릿한 인영이 떠올랐다. 사현은 미간을 좁힌 채 차에서 내렸다. 인영은 느릿느릿 걸어 성여준이 사는 아파트 입구를 지나고 있었다. 좁은 어깨에 깡마른 팔다리, 밖으로 벌어지는 걸음걸이가 눈에 익었다. 사현은 그가 더 가까워지기 전에 상가 사이 골목으로 몸을 숨겼다.

저녁때가 애매하게 지난 시간이었다. 오가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저벅, 저벅, 가까워지는 발소리에 사현이 숨을 죽였다. 벽에 등을 붙인 채 걸음을 세고 있으려니 지나가는 시간이 한없이 느리게 느껴졌다.

마침내 귓전에서 땅을 밟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어깨가 스칠 듯 가까운 거리에서 코를 찌르는 향수 냄새가 났다. 저벅, 마지막 발소리와 함께 영재의 뒤통수가 보였다. 사현은 망설임 없이 손을 뻗어 그의 뒷목을 움켜쥔 채 검은 구덩이 같은 골목 안으로 마른 몸뚱이를 던져 넣었다.

“억…!”

나동그라진 영재의 비명은 끝을 맺지 못했다. 곧장 뻗어온 사현의 손이 넥타이 매듭 부분을 쥐어 비튼 탓이었다. 꺽, 숨넘어가는 소리를 낸 영재의 두 눈이 한순간 허옇게 뒤집어졌다.

“사…, 사람 살….”

“지금 이 순간부터 내 허락 없이 입 열었다간 여기서 찍소리도 못 뱉고 가는 거야.”

“…….”

“알아들었어?”

영재가 숨을 헐떡이며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창백한 얼굴이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사현은 손에 쥔 넥타이 매듭에서 손가락을 빼내 헐겁게 만들었다. 푸하, 그제야 큰 숨을 내쉰 영재의 팔다리가 벌벌 떨렸다. 힘의 우위가 확연한 상대에게 온몸으로 보내는 굴종의 표시였다. 사현은 그를 사납게 비웃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기 위해 입꼬리에 힘을 주었다.

성여준에겐 죄가 없다. 타인에게 잔혹할 수 있는 사람, 즉 힘의 서열을 매길 줄 아는 자는 어차피 이 세상에 극소수다. 여준마저 이 무의미한 피라미드에 발을 담글 이유가 없었다. 이미 시커멓게 더럽힌 손이 사현의 두 팔에 달려 있었으므로.

“뭐, 뭐야? 왜 이러는데?”

간신히 숨을 돌린 영재가 벌컥 소리부터 질렀다. 사현은 망설임 없이 그의 뺨을 손바닥으로 내리쳤다. 쩍, 단단한 손바닥이 내리꽂히는 소리가 경쾌하게 울리고 영재는 다시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이런, 씹…. 뭐냐고!”

사현은 대답 없이 또 한 번 그의 뺨을 내리쳤다. 영재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맞은 뺨을 감싼 손끝이 모욕감으로 바들바들 떨렸다.

“묻는 말에만 대답해.”

“…….”

“입력됐어?”

영재가 목을 움츠린 채 고개를 끄덕거렸다. 사현은 도로 쪽을 힐긋 살핀 뒤 담배 한 대를 꺼내 물었다.

“너무 겁먹을 거 없어요, 선배. 대화나 좀 하자는 거니까.”

불을 댕기는 사현을 보며 영재가 눈을 커다랗게 떴다. 번들거리는 눈동자 가득 혼란이 박혀 있었다. 사현은 긴 연기를 뱉어 내고 무릎을 굽혀 앉았다.

“유남복이 시킨 일이에요?”

“뭐…, 뭐?”

짝, 다시 한번 사현의 손이 영재의 얼굴을 후려쳤다.

“머리 굴릴 생각하지 말고 똑바로 대답해. 유남복 사주 받고 움직이는 거야?”

“아니, 씨발, 지금 뭔 소리를 하는….”

영재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또 한 번 사현의 손이 떨어졌다. 사현은 집요하리만큼 같은 자리만 노리고 있었다.

“아니야! 씨발, 아니라고! 그런 적 없어!”

재차 치솟았던 손이 허공에서 멈칫했다. 영재는 아예 두 팔로 얼굴을 감싼 채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씨발, 그러니까 그만 때려! 아니라고 했잖아, 이, 씨발….”

후웁, 담배 연기를 폐부까지 빨아들인 사현이 천천히 손을 내렸다.

“그럼 뭘 얻어먹으려고 성여준한테 얼쩡거려?”

답이 없는 양아치를 대화가 가능한 상대로 만드는 건 이토록 쉬운 일이다. 영재는 혹시나 또 손이 날아올까 잔뜩 겁을 먹은 채 성심성의껏 나불대기 시작했다.

“사과하려고 그랬어! 사과하려고! 내가 술 먹고 실수해서….”

“…….”

“악, 때리지 마! 씨발, 그만 때려!”

다섯 번쯤 후려치자 드디어 입술에서 피가 터졌다. 영재는 제 입가를 감싼 채 어깨까지 들썩이며 울먹거렸다.

“씨이발…. 진짜….”

“얼굴뼈 모조리 부숴 버리기 전에 똑바로 말해.”

“…나랑 결혼할 거였어!”

사현의 손이 다시 올라가자마자 영재가 빽 소리를 질렀다. 멈칫한 사현이 눈썹을 한껏 일그러뜨렸다.

“누구랑 뭐를 해?”

“은아랑, 나랑…! 결혼하기로 했었다고!”

사현은 그만 웃고 말았다. 휘어진 눈과 입술 끝에 한껏 잔인한 비웃음이 걸렸다.

“성여준이 죽으면?”

활짝 웃는 사현의 얼굴에 악의라고는 한 점도 묻어 있지 않았다. 그는 처음으로 은아와 대화를 해 보고 싶었다. 언제나 그랬다. 여준을 힘들게 하는 존재들, 그를 사랑하거나 동경하지 않는 모든 인간들은 사현에게 있어 미지의 대상이었다. 박영재와 결혼을 하려 했다고? 성여준을 없애 버리고서? 주저앉은 영재를 위아래로 훑어보던 사현의 눈동자에 새카만 침묵이 걸렸다.

‘남자고 여자고를 떠나서 이해가 안 가서요. 어떻게 10년을….’

사현이야말로 묻고 싶었다.

“글쎄, 그게 무슨 상관인데? 그 여자는 이미 죽고 없는데.”

어떤 결격 사유도 없는 자들, 처음부터 성여준과 같은 세계에서 그의 친구가 될 수 있었던 당신들이 대체 어떻게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 있었느냐고.

“니가….”

덜덜 떨고만 있던 영재가 벌컥 목소리를 높였다. 사현은 미소 띤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네가 죽였잖아, 이 개새끼…!”

그저 이 모든 상황이 우스웠다.

“미친 호모 새끼. 너도 진짜 이러고 싶냐? 성여준은 은아 배경만 보고 덥석 결혼식부터 올린 새끼야. 너 나한테 이러든가 말든가 그 새끼는 모른다고. 아무리 혼자 애써 봐, 그 새끼는 또 예쁘고 돈 많은 여자 나타나면 홀랑 결혼해서 희희낙락 잘 살걸.”

“그거참 듣기 좋은 소리네.”

대수롭지 않게 말한 사현이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를 툭 뱉었다. 영재는 한껏 일그러진 얼굴로 그런 사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얼마까지 뽑으려고 했어, 선배?”

“뭐?”

“그 여자랑 손잡고 성여준 작업해서 기대하는 수익이 어느 정도였냐고. 꼴랑 3억 타자고 그린 그림은 아닐 거 아냐.”

“…….”

“결혼? 당신이 아무리 순진해도 그건 아니지. 유남복이 두 눈 뜨고 그 꼴을 볼 리가 없어. 성여준 스펙도 눈에 안 차서 그 지랄을 떨던 노인네가 무일푼 호스트 나부랭이한테 딸을 재취 보낸다고?”

“…….”

“그렇다고 유은아랑 사랑의 도피라도 할 건 아니었잖아? 유남복 재산이 눈에 어른거려서 발걸음이 안 떨어졌을 텐데.”

영재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우물대는 입술에서 핏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애새끼지?”

사이를 두고 사현이 내뱉듯 물었다. 영재의 관자놀이로 퍼런 핏줄이 섰다.

“유남복 성질에, 지 외손자가 호스트 나부랭이 핏줄인 걸 알게 되면 어떻게든 덮고 무마하려 하겠지. 그리고 성여준은….”

“…….”

“성여준도 뭐…. 비슷하려나? 뻐꾸기 짓 당했다고 쪽팔려서 어디 말이나 하겠어?”

얼마까지 뜯어낼 수 있을지 감도 안 오네. 사현이 빙글빙글 웃으며 덧붙인 말에 영재가 고개를 푹 숙였다. 바닥을 짚은 두 손이 옴짝대는 모양이 꼭 약을 먹은 벌레처럼 보였다.

“결국 돈이잖아요? 선배.”

사현이 간단한 결론을 입에 담았다. 영재는 고집스레 고개를 숙인 채 말이 없었다. 사현은 그를 빤히 바라보다 재킷 앞주머니에서 두 번 접힌 서류를 꺼냈다. 툭, 눈앞으로 떨어진 서류를 보고도 영재는 미심쩍은 시선을 보낼 뿐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높으신 분 일 좀 도와주기로 하고 받은 거예요.”

“…….”

“그런 눈으로 볼 거 없어요. 선택지를 주겠다는 거니까. 어릴 때 선배 머리 깨뜨렸던 일에 대한 사과도 겸해서.”

고저 없이 이어진 말에 영재가 머뭇거리며 서류를 집어 들었다. 주섬주섬 펼친 서류를 눈으로 훑던 그의 입이 금방 헤벌어졌다. 탐욕과 무지에 물든 얼굴이었다. 가만히 그 얼굴을 바라보던 사현의 입술이 느릿하게 달싹였다.

“말하지 말아요, 성여준한테.”

“…어? 뭐?”

“애새끼 얘기.”

“…….”

“하지 말라고요.”

차분히 내뱉은 사현이 서류 윗부분을 툭 두드렸다.

“그것만 약속하면 줄게요.”

“…준다고 해 봤자 내가 이걸….”

“어디든 팔면 되잖아요. 이게 얼마나 비싸게 팔릴 건수인지는 나보다 선배가 더 잘 알지 않나?”

“…….”

“먹고 떨어지라는 소리예요. 간단히 말해서.”

F시 대형 아웃렛 조성 계획. 그럴싸한 사인과 도장이 우르르 찍힌 서류를 훑어 내리는 영재의 두 눈에 조금씩 탐욕이 깃들었다. 물론 한 가닥 이성도 놓치지 않았다.

“내가…. 너를 뭘 믿고 이걸 받아?”

“그 기획서가 진짜인지 아닌지는 인터넷으로 F시 토지거래 추이만 찾아봐도 알 수 있을 텐데.”

“…….”

“이걸로 만족하지 못하겠다면, 굳이 성여준을 괴롭혀서 짜내야만 속이 시원하겠다면…. 그땐 나도 다른 방법을 쓸 수밖에 없지.”

영재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사현은 구태여 ‘다른 방법’이 뭔지 말하지 않았고, 영재 역시 묻지 않았다.

“어떻게 할래요?”

사람을 속이는 건 쉬운 일이다. 인간이란 편리를 추구하는 생물이므로. 달콤한 이야기에 그럴싸한 교환 조건을 붙여 내밀면 그게 뭐든 덥석 믿어 버린다. 머리가 나쁘고 욕심이 많을수록 더욱더.

“잘 생각해서 결정해요. 연락은 이쪽으로 주고.”

서류를 회수한 사현이 품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영재의 손등 위로 떨어뜨렸다. 그는 사현의 명함만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선임님, 오늘 바로 귀가하세요?”

오랜만에 머릿속에 온갖 공식을 쑤셔 넣고 있자니 골이 다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여준은 생수병을 따다 말고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었다. 스물 중반이나 되었을까, 앳된 얼굴의 여사원이 생글생글 웃고 있었다.

“아…. 네. 그럴 예정입니다.”

“왜요? 내일도 일정 있으세요?”

“오후부터 스터디….”

“오후 일정이면 괜찮지 않아요? 저희랑 한잔하시고 가세요.”

살갑게 청하는 말에 금방 난처해졌다. 날 좋은 토요일에 하루 종일 교육에 시달렸으니 놀고 싶은 마음이 동한 건 이해가 갔지만 여준에겐 남은 체력이 없었다.

“다음에 하죠. 오늘은 일찍 들어가 봐야 해서요.”

“왜요? 저희가 마음에 안 드세요? 아니면 혹시 여자 친구?”

노트를 정리해 넣던 여준이 멈칫했다. 둥글게 뜬 눈동자를 반짝반짝 빛내는 얼굴에서 수상쩍은 의도는 찾아볼 수 없었다. 슬쩍 시선을 멀리하자 그녀와 똑같은 얼굴로 눈을 반짝이는 젊은 무리가 보였다. 남녀 합쳐 다섯 명이었고, 아마 입사한 지 얼마 안 된 신입 사원들인 듯했다.

“…내일 오전에 아들이랑 놀아 주기로 약속했거든요.”

“네?”

싱글싱글 웃고 있던 여자의 목소리가 벌컥 높아졌다. 동시에 세미나실에 있던 모든 시선이 여준에게 쏠렸다.

“겨, 결혼하셨어요?”

“네…. 뭐.”

“어머, 어떡해. 죄송해요. 아니, 아니. 제가 뭐 딴마음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구요. 반지를 안 끼고 계셔서 결혼하신 줄은 까맣게 몰라 가지고….”

“괜찮습니다. 아무튼 식사는 다음에 해요. 내일 아침에 늦게 일어나면 진짜로 아들한테 찍힐 판이거든요. 그간 지은 죄가 많아서.”

혹시나 분위기가 지나치게 어색해질까 여준이 얼른 밝은 목소리를 냈다. 세미나실에 모인 이들 중 여준의 사정을 모르는 무리는 그에게 말을 걸어온 신입 사원들뿐이었다. 그녀는 몇 번이나 사과의 말을 덧붙인 뒤 한숨을 쉬며 돌아섰다. 누군가 킥킥대며 등을 찌른 것도 그때였다.

“아, 죄 많은 미남이여.”

“…….”

돌아보니 상해 보험 팀의 정훈이었다. 여준의 입사 동기이자 시험 동기이기도 했다. 여준은 픽 웃고 목소리를 낮췄다.

“그런 소리 하지 마. 저런 새파란 애가 무슨.”

“야, 미남의 희소가치가 얼마나 높은데, 사십 먹은 아저씨도 아니고 나이가 문젤까.”

“애 딸린 홀아비는 안 팔려요.”

“누가 산다고 하면 팔 의향은 있으시고?”

여준은 말없이 웃고 브리프케이스 손잡이를 쥐었다. 이성으로부터 호감을 얻는 일은 익숙했다. 예전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이제는 상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거절하는 법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는 거였다.

“아무튼 그런 소리 하지 마. 괜히 또 이상한 소문날라.”

“진짜 생각 없는 거야? 반지 빼고 다니길래 이제 좀 괜찮아졌나 했더니.”

여준이 무심코 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언제부터 반지를 뺐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어떤 결심을 하고 벗겨 낸 것은 아니다. 어쩌다 빼 둔 뒤로 구태여 다시 찾지 않았다는 말이 정확했다.

“누구라도 만나 볼래? 네 사진 보여 주면 애가 열둘이 딸려 있어도 괜찮다는 여자가 줄을 설 텐데.”

“…나 결혼시켜서 한국 눌러 앉히고 네가 파견 자리 꿰차려고 그러지?”

“들켰어, 들켰어. 우리 성 선임은 너무 똑똑해.”

과장되게 고개를 저은 정훈이 흐흐, 웃었다. 여준은 마주 웃어 주는 대신 그의 어깨를 툭 치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마음이 바빴다. 아이를 하루 종일 가린에게 맡겨 놓고 간신히 참석한 교육이었다. 여준은 세미나실을 나서며 급히 가린의 번호를 눌렀다.

- 응, 여준아.

전화를 받은 사람은 가람이었다. 들리지 않게 옅은 한숨을 내쉰 여준이 걸음을 빨리했다. 시간은 벌써 11시를 향해가고 있었다.

“형, 죄송해요. 교육이 이제 끝났어요.”

- 괜찮아, 괜찮아. 지오랑 가린이 둘 다 자니까 천천히 와. 어차피 너도 여기서 자야겠다.

“그래도….”

- 운전 급하게 하지 말고, 오다가 편의점 들를 수 있으면 술이나 좀 사와. 한잔하면서 영화 보려고 안주 잔뜩 만들었는데 술이 없네.

“…아.”

- 칭따오 두 병만. 없으면 그냥 소주로. 알았지?

“네, 형. 감사해요.”

전화를 끊자마자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누군가에게 아이를 맡기는 건 여전히 가슴 졸이는 일이었다. 아이가 울거나 보채지는 않을지, 갑자기 아프거나 잠투정을 하지는 않을지, 하나하나 짚자면 끝도 없는 걱정이 실시간으로 가슴을 짓누르곤 했다.

아이를 돌본다는 것은 시간을 통째로 빼앗긴다는 뜻이었다. 아예 하루 종일 봐주겠다는 가린에게 손사래를 치면서도 끝까지 거절하지 못했던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가람은 서두르지 말라고 말했지만 신호에 걸릴 때마다 마음이 타들어 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여준은 핸들을 탁탁 두드리며 아이가 부디 얌전히 잠들어 있어 주길 빌었다. 그런 소원이나 빌고 있어야 하는 스스로의 처지가 우스웠다.

***

“엥, 칭따오가 없었어?”

소주병이 든 봉투를 받아 든 가람이 실망스러운 목소리를 냈다. 여준은 미안한 마음에 눈썹을 잔뜩 일그러뜨렸다.

“죄송해요. 알바생한테 물어봤는데 새벽에나 다시 들어온다고….”

“야, 야. 해 본 소리야. 뭘 또 진지하게 그래. 들어와.”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따뜻하고 고소한 냄새가 났다. 거실 TV에선 철 지난 액션 영화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여준은 가람에게 봉투를 건네자마자 안쪽 방을 기웃거렸다. 가린의 방문은 꽉 닫혀 있었다.

“깨우지 말고 그냥 너도 자고 가.”

“아니에요. 형도 쉬셔야죠.”

“야, 그렇게 눈치 보지 마라. 지오가 얼마나 얌전한데. 나는 애가 무슨 화분인 줄 알았어. 하도 조용해서.”

여준은 슬쩍 웃고는 꿋꿋이 가린의 방문 손잡이를 쥐었다. 달려온 가람이 얼른 여준의 뒷목을 잡아끌었다.

“너무 칼같이 그러지 마. 가린이가 말은 안 해도 너한테 서운해해.”

“…네?”

“우리 사이에 좀 서로 돕고 살 수도 있는 거지. 그렇게 매번 빚 계산하면서 벌벌 떨어야 해? 너 나중에 우리가 너한테 뭐 좀 도와 달라 할 때 그런 식으로 할 거야?”

“…….”

“앉아. 내일도 오후에 어디 가야 된다며. 지오 여기 두고 편하게 갔다 와.”

여준의 어깨를 둘러 안은 가람이 그를 질질 끌어다 거실 소파에 앉혀 두었다. 힘없이 주저앉은 여준이 조금씩 상체를 무너뜨렸다. 하루 종일 가시 박힌 듯 갑갑하던 마음이 천천히 녹아내렸다.

가람이 내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오니 막 영화 오프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나 가람이 좋아하는 할리우드 액션물이었다. 멍하니 화면을 보고 있자니 가람이 바쁘게 술상을 내왔다. 어묵탕이며 육포, 땅콩, 과자 따위가 알록달록한 접시에 담겨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너 근데 저녁은 먹었어? 뭘 좀 해 줄까?”

“먹었어요. 교육 중간에 다 같이 고깃집 가서.”

“그 교육이라는 건 같은 회사 사람들끼리 받는 거지? 누구 괜찮은 사람 없든?”

술잔을 채워 주다 말고 기습적으로 던진 질문에 여준이 멈칫했다. 오늘 무슨 마가 끼었나. 표면이 찰랑찰랑하도록 채워진 술을 슬쩍 머금으며 대답을 피했지만 가람은 끄떡없었다.

“너 진짜로 재혼 생각이 아예 없어?”

“형….”

“아니, 네가 아예 홀몸이면 모를까 지오도 키워야 되는데…. 이왕 다시 갈 거면 하루라도 빠른 게 좋겠다 싶어서 그러지.”

“…….”

“내가 좀 알아봐 줄까? 지오는 너무 걱정하지 마. 오히려 어릴 때면 혼란이 적대. 특히 지오는 은아 씨에 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

아이는 때때로 어린이집에 다녀올 때마다 묻고는 했다.

‘근데 아빠, 우리 집은 엄마가 어디 있어?’

“벌써 2년인데 너도 슬슬 네 생활이나 미래 그런 거 생각해야지. 언제까지 지금처럼 살 수는 없는 거잖아.”

“너무 일러요, 형.”

“이르긴 뭐가 일러. 조선 시대 부모상도 3년이면 끝났는데.”

“…아무튼 지금은 별로 그런 생각 안 하고 싶어요. 워낙 바쁘기도 하고…. 상해 파견만 따내면 저도 좀 편해질 테니까.”

방에서 잠든 이들을 깨우지 않기 위해 TV 음량은 최소한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자막 없이는 영화 내용을 도통 파악할 수 없었다. 여준은 술잔을 홀짝이며 아이를 생각했다.

아이는 자신의 상황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엄마가 없다는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였을까. 여준은 육아 서적이나 TV 프로그램을 통해 주워들은 정보를 제 말인 양 아이에게 떠들곤 했다.

엄마랑 다시 만날 수는 없어. 그래도 아빠는 언제까지나 너를 사랑해. 아빠가 엄마 몫까지 너를 지켜 줄게. 그러면 아이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나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일단 봐주겠다는 듯이.

“참, 너 그때 그건 어떻게 됐어?”

여준의 그릇에 어묵탕을 덜어 주며 가람이 물었다. 또 무슨 말을 하려고. 여준이 장난스럽게 눈을 흘겼다.

“왜 그때. 너 고등학교 때 후배가 좀 이상하다고.”

“…….”

“이름이 뭐였더라. 임…, 사현?”

자칫 떨어뜨릴 뻔한 술잔을 얼른 고쳐 쥐었다. 관자놀이의 맥이 벌떡벌떡 뛰어올랐다. 여준은 식은땀이 밴 턱 아래를 손등으로 훑고 긴 한숨을 쉬었다. 몇 모금 마시지도 않은 술이 벌써 올라오는 것 같았다.

“그게…. 그랬죠.”

“응, 별일 없었어? 영재 일이 너무 강렬해서 잠깐 잊고 있었네. 뭐랬더라, 걔가 너 쫓아다니는 것 같다고 그러지 않았나?”

“아, 아뇨, 그…. 제 착각이었더라고요. 그냥…. 우연히 몇 번 마주쳤던 거였어요.”

“…그래?”

가람이 의아한 듯 한쪽 눈썹을 찌그러뜨렸다. 여준은 축축해진 손바닥을 상 아래로 감춘 채 재차 고개를 끄덕였다.

“…네, 한 번 얘기도 했어요. 제 착각이었어요. 다….”

‘10년 전에도 영재 때문에 그런 거였어?’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눈이 아직까지도 여준의 가슴을 무겁게 했다. 그의 침묵이 감당한 바를 모르지 않았다. 애초에 해서는 안 되는 질문이었다.

“전부….”

이제 와 알아서 어쩔 것인가. 세월은 지났고, 일은 벌어졌고, 죄는 생겨났으며 아이는 태어났다. 은아는 살해당했고, 영재는 나락으로 떨어졌으며 사현에겐 지워지지 않을 흉터가 남았다.

이제 와서 일련의 사건 뒤에 무엇이 있었는지를 알게 된다 해도 바꿀 수 있는 일은 무엇도 없다. 평생 엄마 없이 커야 하는 아이를 품에 안은 채 그녀를 죽인 사현을 받아들일 수도 없다.

사현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다. 붙들고 캐물어 모조리 듣고 싶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분명 사현을 동정하게 될 것 같았다.

“전부 다 제가….”

답답함에 가슴을 뜯다 잠드는 밤이면 사현의 꿈을 꾸었다. 사현은 여준의 무릎에 이마를 댄 채 소리 없이 애원하고 있었다. 눈물에 잠겨 든 어깨를 끌어안고 싶은 마음을 눌러 참기 위해서는 후회로 가슴을 채워야 했다. 그날 밤, 너를 찾아가지 말걸. 너에게 잘해 주지 말걸. 너를 만나지 말걸. 그 여름의 복도에서 너를…. 너에게 손을 흔들지 말걸.

“…여준아.”

책임지지 못할 감정에 기뻐 날뛰지 말걸.

“여준아, 여준아?”

오로지 나만이 들을 수 있는 너의 사랑에 취해 저지른 과오가 이토록 무거울 줄 알았다면.

“여준아, 왜 그래? 응? 너 왜 그래?”

술잔을 놓친 여준이 두 손에 얼굴을 파묻었다. 움츠러든 어깨에 짧은 흐느낌이 번졌다. 후드득, 손가락 틈에 고인 눈물이 빗물처럼 떨어졌다. 사진에도 찍히지 않을 만큼 아주 작고 날카로운 칼을 삼킨 것 같았다. 시간이 흐를수록 뱃속을 잘게 찢고 피를 토하게 만들 칼날이었다.

이 생은 얼마나 길게 이어질까. 언제까지 이런 고통이 예고 없이 덮쳐 올까. 들이닥친 통증에 생리적인 눈물을 쏟아 내며 여준은 절망했다.

시커멓고 차가운 물이 가득 찬 동굴로 발을 들이는 기분이었다. 코끝까지 잠긴 채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지른들 사현에게는 닿지 않을 것이다. 그것만이 당장 여준이 가질 수 있는 유일한 위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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