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9/21)

#08. 100년이 지나도

“몸 상태는 어때요?”

차트를 넘겨보던 의사가 물었다. 사현은 잠시 대답 없이 제 팔뚝을 내려다보았다. 주삿바늘 자국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팔오금은 죽은 식물의 껍질 같았다.

“괜찮습니다.”

“왼팔은?”

“별 이상 없습니다.”

의사는 흐음, 하며 안경을 추어올렸다. 그럴 리가 없는데, 하듯이.

“그래도 술담배 꼭 자제하시고, 격한 운동은 안 되고요. 아시죠?”

“예.”

“네, 물리 치료 받고 가시면 됩니다.”

갈기갈기 찢어진 몸뚱이가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수복되기까지는 오랜 시간과 절차가 필요했다. 사현은 진료실을 나와 왼쪽 어깨를 슬쩍 돌려 보았다. 곧장 척추까지 뻐근해졌다.

“괜찮으십니까?”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쪽새가 물었다. 사현은 대답 대신 쪽새에게 손끝을 까딱였다. 곧장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내민 쪽새가 불을 댕겨 주었다.

“괜찮고 말고 할 게 뭐 있어. 만날 똑같지.”

“아….”

“홍게 형님은?”

“자정 전에 오시겠다고 했습니다. 저, 그런데….”

망설이며 뜸 들이는 쪽새에 사현의 시선이 살짝 가라앉았다. 쪽새는 재촉하지 않는 사현에 오히려 초조함을 느끼고 입을 열었다.

“깡추 형님, 아니, 이사님이…. 형님께 오늘은 굳이 올 거 없다고 전하라고….”

사현이 담배 연기를 길게 뱉어 냈다. 쪽새는 양손으로 핸들을 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사현은 담배 한 대를 끝까지 태우고 나서야 쪽새를 돌아보았다.

“동훈아.”

“…네? 어, 네?”

“네 눈엔 깡추 형님, 아니지, 그래. 이사님이 나를 싸고도는 걸로 보이냐?”

“…….”

“아님 먹이는 걸로 보이냐?”

당연하게도 쪽새는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입술을 깨물며 망설이다 시선을 피해 버릴 뿐이었다. 사현이 현장에 복귀한 후로 대놓고 겉돌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다만 깡추의 언행에서 아직까지도 사현에 대한 집착 또는 애정이 비쳤기에 다들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저, 저는…. 이사님께서 형님 많이 아끼신다고 생각합니다. 저뿐만이 아니라….”

“그 사람은 그렇게 감정적인 인물이 아니야.”

“예?”

“나한테 정들어서 싸고돌거나, 배신감 느껴서 엿 먹일 만큼 온정 있는 양반이 아니라고.”

“그게 무슨….”

“그 사람이 나를 살려내서 이 자리로 돌려놓을 이유는 하나뿐이야. 나를 써먹을 데가 있는 거지.”

“…….”

“써먹을 시기가 아직 오지 않았을 뿐이고.”

쪽새가 느릿하게 두 눈을 껌벅였다.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사현은 그 이상 부연하지 않고 시트에 등을 기댔다.

***

“성 선임, 괜찮아? 위염이라며?”

죽 반 그릇을 간신히 넘기고 약을 챙겨 먹던 여준에게 팀장이 다가와 물었다. 여준은 얼른 물을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심각한 건 아닙니다.”

“무슨 소리야. 위염이 왜 심각한 게 아니야. 컨디션 관리 잘해, 응? 어디 안 좋으면 바로바로 얘기하고.”

“…네.”

“이번 주말까진 야근 없어요. 퇴근하면 잘 쉬고, 주말에도 푹 쉬고, 다음 주부터 화이팅합시다. 알았지?”

팀장이 씩씩하게 자리를 뜨자마자 팀원들 사이에서 깊은 한숨이 돌았다.

“다음 주엔 얄짤없다는 거구나….”

다들 여준만큼이나 팀장의 화법에 익숙해져 있었다.

“선임님, 정말 괜찮으세요? 안색이 너무 안 좋아요.”

“괜찮아요.”

“회사란 게 뭔지 모르겠어요. 아 참, 혹시 아침에 돈 거 보셨어요?”

옆자리로 다가온 후배가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준의 손끝이 멈칫 굳었다. 그가 다니는 회사에는 대양기업의 각종 계열사에서 일어나는 사건사고에 대한 소식통이 있었다. 익명 제보로 시작되는 소위 ‘찌라시’는 사원들의 단체 채팅방으로, 사내 익명 게시판으로 두서없이 퍼지곤 했다.

“증권 쪽인데요. 이번에 과장 승진한 여자 하나가 레즈비언이래요. 근데 회사에서 남자랑 사내연애하다 애인한테 들켜가지고 그 애인이 회사 찾아와 깽판을 쳤다더라고요.”

“…….”

“남녀 양다리라니 엄청나지 않아요? 난리도 아니었대요. 사진도 있어요.”

후배가 보여 준 채팅방에는 <증권 A과장(여) 양성애자 로비 치정 싸움>이라는 키워드와 함께 핸드폰으로 찍은 싸움 현장 사진이 올라와 있었다. 여준은 굳은 눈으로 그의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다 고개를 돌리고 일어섰다. 어리둥절해진 후배가 여준과 제 핸드폰을 번갈아 보았다.

여준은 사무실을 나서자마자 걸음을 빨리했다. 넥타이가 갑갑해 가슴이 뻐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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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2년 전, 은아의 장례식을 마치고 위로 문자가 쏟아지던 여준의 메신저에 갑작스레 떠오른 키워드였다. 다른 채팅방으로 찌라시를 퍼뜨리려던 팀원 하나가 실수로 여준이 있는 채팅방에 붙여 넣어 버린 거였다. 당황한 팀원들이 얼른 밀어 올리려 했지만 허사였다.

해당 팀원은 그로부터 일주일 뒤, 유학을 가겠다며 회사를 그만두었다. 마지막까지 사과 한마디 없었다.

“…….”

여준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닫혔다. 욕이라도 뱉고 싶었지만 무슨 욕을 입에 담아도 스스로 어색하게 느껴질 게 뻔했다.

사현에게선 연락이 없었다. 검은 차가 뒤를 따라다니지도 않았다. 컴컴해지기 전에 집에 도착한 게 얼마 만인지 속으로 헤아리며 여준은 아파트 입구로 들어섰다. 아이는 시터와 함께 놀이카페에 가 있다고 했다.

아이가 돌아오기 전에 간단히 청소하고 간식거리를 사다 둘 생각이었다. 여준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아이 방문부터 열었다. 늘어놓은 장난감을 정리하고 먼지를 한바탕 떨어냈다. 아이의 침대에는 새 라이언 인형이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다. 설핏 웃고 이불을 걷어 탈탈 털었다.

집에서 하는 살림이라곤 청소와 아이 식사 챙기기 정도가 다인데도 쓰레기는 증식이라도 하듯 늘어났다. 한가득 쌓인 재활용 쓰레기를 양손 가득 챙겨 든 여준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거울 속에는 간만에 밝은 얼굴이 비쳤다.

‘없으면 죽어도 못 살겠어요?’

사현의 말이 문득 스쳤다. 여준은 엘리베이터 벽에 어깨를 기댄 채 그의 질문을 되뇌어 보았다. 지오가 없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변함없이 회사에 다니고 있었을 것이다. 애초에 돈이 궁해서 그만두지 못한 것도 아니니까. 그저 아무 할 일이 없는 하루를 견딜 자신이 없었을 뿐이다. 은아가 죽고, 이상한 소문이 돌고, 경찰 조사를 받고 회사에서 쥐어짜이는 와중에 지오마저 없었다면.

“…….”

버티기는 했을 것이다. 그러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고통스러웠을 것이다. 지금보다 배는 더.

쓰레기를 하나하나 분류해 버리고 손을 탁탁 털었다. 이제 마트에 가서 아이가 좋아하는 과일과 젤리 따위를 사 오면 씻고 쉴 일만 남은 금요일 저녁이었다. 간만에 가뿐한 기분이었다. 주말에는 뭘 할까. 아이를 데리고 동물원이라도 갈까…. 이런저런 계획을 떠올리던 여준이 한순간 표정을 굳혔다.

‘정말로 사고였어요.’

부정하려야 그럴 수가 없었다.

‘선배랑은 아무 상관 없는 일이었어요.’

그 말을 들은 이후로 놀랍도록 마음이 가벼워졌다는 사실을.

원래 그럴 수 있는 인간. 아무렇지 않게 사람에게 폭력을 쓰고 심지어 죽일 수도 있는. 어떤 이유도 배경도 없이 그저 원래 그런 거여서, 사현의 말마따나 ‘미친개한테 잘못 물린’ 거여서 일어난 일일 뿐이라면. 영재도, 은아도.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고, 우연히 가해자가 사현이었고, 우연히 피해자가 은아였다.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인가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할 수도 없었다.

“아니지….”

어쩌면 그렇게 믿고 싶을 뿐이다. 비겁한 도피일지도 모른다. 여준은 이마를 쓸어 넘기며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믿지 않으면 또 어쩔 것인가. 뭘 위해서.

‘선배는 잘못한 게 없어요.’

뭘 위해서….

망설이던 여준이 핸드폰을 쥐었다. 저장하지 않은 사현의 번호를 드문드문 훑어 내리며 흔적을 찾았다. 엄지 끝이 몇 번이나 통화 아이콘에 걸쳤다가 돌아왔다.

“…….”

이대로는 아무것도 납득할 수 없고, 납득해서도 안 된다는 강한 예감이 들었다. 용기 내어 전화를 걸려던 그 순간, 여준의 귓전으로 익숙한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성여준?”

여준이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가장 먼저 보인 것은 두꺼운 금장시계였다. 좀 더 시선을 올리니 매끈한 슈트를 갖춰 입은 남자가 보였다. 영재였다.

“…어….”

어안이 벙벙해진 여준이 두 눈을 깜빡였다. 가린의 집에서 어색하게 마주쳤을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화려하게 빼입은 영재는 여준의 결혼식에서 마주쳤던 그 모습 같았다. 순간 현실성이 없어 꿈인가 싶었다. 난데없이 동네에서 영재를 보게 된 건 둘째 치고, 너무나 아무렇지 않게 말을 걸어온 상황에 어이가 없어서였다.

“여준이 맞구나. 웬일이야? 너 이 동네 살았던가?”

‘요즘도 박영재랑 연락해요?’

카랑카랑한 영재의 목소리 위로 사현의 질문이 겹쳐 들린 듯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사현의 모습도, 모든 창을 검게 칠해 놓은 차도 보이지 않았다.

“여준아?”

“너는…. 무슨 일로.”

무심코 되묻던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말을 섞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들었다. 그러나 영재는 이미 신이 나서 떠벌이고 있었다.

“아, 나 사업차 미팅 때문에. 아는 형이 새로운 사업 하나 할 건데 꼭 와 달라고 사정사정을 하더라고. 사무실이 이 근처라서 지나가다가….”

대본을 줄줄 읊는 듯 막힘없이 쏟아지는 말이 미심쩍었다. 여준은 한쪽 눈썹을 찌푸린 채 영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네가 보이길래. 어디 가던 길이야? 잠깐 얘기 좀 하자.”

“…….”

“우리 아직 해결하지 못한 문제 있잖아. 쌓인 오해도 있고. 나 너랑 안 좋게 보기 싫어서 그래. 응?”

“지금은 시간 없어. 금방 애 데리러 가야 돼.”

“오래 안 걸려. 아주 잠깐만. 응? 진짜로 잠깐만.”

달갑지 않은 만남이었다. 마주 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여준은 한숨을 내쉬며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아이가 돌아오기까지는 삼십 분가량 남아 있었다.

“…15분밖에 못 내.”

“어, 충분하지. 가자, 가자.”

“여기서 얘기하면….”

“야, 그래도 우리 얼마 만인데 길바닥에서 때우냐. 진짜 너 매정한 건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웃으며 내뱉은 영재가 다짜고짜 앞장섰다. 그가 들어선 곳은 근처 상가의 개인 카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종업원에게 파르페를 주문한 영재가 여준을 보며 물었다.

“너는? 뭐 마실래?”

“아메리카노 주세요.”

영재 대신 종업원에게 대답한 여준이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영재는 종업원이 사라지자마자 테이블에 양 팔꿈치를 얹더니 상체를 바짝 기울였다.

“내가 제수씨 장례식도 못 가 보고, 미안하다.”

여준이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그때 서로 오해가 있었잖아.”

“오해?”

“그래도 내가 일부러 안 갔던 건 아니야. 사정이 있었어. 그때 좀…. 사업에 차질이 생겨서 외국에 나가 있었거든. 너도 알겠지만 나 그때 많이 안 좋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사채업자들한테 시달리는데 그 와중에 네가 진짜 하나뿐인 친구라고 믿고 어렵게 도움 청한 거였어.”

“…….”

“근데 네가 그런 식으로 나오니까 나도 많이 섭섭했어. 이런 말까지는 안 하려고 했지만, 우리 고등학교 때 일 생각했다면 네가 나한테 그러지는 못했을 거야.”

여준의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그 일은 꿈에서도 잊은 적이 없었다. 어찌나 충격적인 사건이었는지, 그 전까지 영재와 있었던 일은 모조리 기억에서 사라졌을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우리가 같이 아는 사람들 입장 생각해서 너한테 연락해 보려고 했는데…. 너 혹시 가람 형한테 나 안 보고 싶다 그랬냐?”

“…뭐라고?”

“내가 가람 형한테 네 연락처 좀 알려 줄 수 없냐고 물어봤었거든. 그랬더니 형이 너한테 한 번 물어봐 주긴 하겠는데 네가 요즘 바빠서 통 연락 안 된다고, 급한 일이면 용건만 따로 전해 주겠다고 하더라고.”

“…….”

“나 무슨 가람 형이 니 비서인 줄 알았다. 아니지, 매니저? 너 뭐 얼마나 바쁘길래 그러냐? 그래 봤자 월급쟁이가.”

빙글빙글 웃음을 띤 영재의 시선이 여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여준은 헐렁한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바쁘시다는 양반이 참 편하고 한가해 보이시네?’ 그렇게 말하는 듯한 시선에 여준의 표정이 차갑게 굳어졌다.

“내 연락처는 왜?”

까끌까끌해진 목소리로 묻자마자 주문한 메뉴가 나왔다. 여준의 앞에는 머그잔에 담긴 커피가, 영재의 앞에는 거대한 파르페가 놓였다. 이곳저곳 때가 타고 커피 얼룩이 물든 머그잔이었다. 여준은 두 손을 허벅지 위에 가만히 둔 채 영재의 답을 기다렸다.

“뭐 들었어? 오해 풀려고 그랬다니까.”

“내가 뭘 오해한 건데?”

“어?”

“네가 아까부터 한 말은 그때 내가 너한테 잘못했다는 것뿐이야. 그럼 서로 오해한 건 없는 거 아냐? 그냥 내가 잘못해서 틀어진 게 다잖아.”

영재의 눈빛도 순식간에 싸늘해졌다. 그는 가늘게 뜬 눈으로 여준을 노려보며 파르페에 꽂힌 막대 과자를 뽑아 입으로 가져갔다. 와그작, 와그작. 위협적인 얼굴로 과자를 씹어 먹던 그가 난데없이 씩 웃었다.

“에이, 성여준. 삐쳤냐? 꼴랑 그거 갖고 또?”

여준은 두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아무 말도 덧붙이고 싶지 않았다.

“야, 야. 알았어. 돈 갚을게. 그 돈 갚으면 되잖아.”

팔을 쭉 뻗은 영재가 여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여준의 몸이 힘없이 흔들렸다.

“내가 돈 좀 늦게 갚는다고 여태 꽁해 있는 거지? 맞지?”

“영재야.”

“너도 참 너다. 내가 너만큼 갖고 살면 친구 어렵다고 할 때 너처럼은 안 한다. 세상천지에 물어봐라, 강남에서 X아파트 살면서 아우디 모는 놈이 학창시절에 지 대신 피떡이 됐던 친구한테 준 500만 원이 아까워서 2년을 삐쳐 있는 게 말이 되냐?”

“더 할 말 없으면 나는 일어날게.”

“어? 벌써 15분이 다 됐어?”

영재가 요란한 동작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번쩍거리는 시계에 눈이 다 부실 지경이었다. 여준은 계산서를 들고 먼저 일어서며 맥없이 말했다.

“그 돈 안 갚아도 돼. 고등학교 때 일은…. 그래. 네가 우리 어머니께 이게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말해서 치료비에 위로금까지 천만 원쯤 받아갔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이 그러니까 내가 계속 미안한 마음 가져야 맞겠지.”

조곤조곤한 목소리에 영재의 눈썹이 점점 일그러졌다. 여준은 관자놀이를 짚은 채 잠시 몰려오는 두통을 참았다.

“그깟 500만 원…. 그래, 나한테는 큰돈 아니야. 주고 잊으려면 그럴 수 있어. 네가 처음부터 돈이 없으니까 도와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면 당연히 그렇게 했을 거야.”

“…….”

“그런데 너는 사채업자한테 쫓기고 있다, 하지만 곧 해결할 수 있고 바로 갚겠다고 하더니 갑자기 연락이 끊어졌잖아. 혹시 일이 꼬여서 해코지라도 당한 건가 걱정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 안 하니?”

영재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여준은 깊은 한숨을 쉬고 말을 이었다.

“너한테 계속 전화했던 이유는 그것뿐이야. 우리 사이에 오해가 있었다면 그거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

“…….”

“갈게. 이제 볼 일 없었으면 좋겠다.”

돌아선 여준은 빠르게 계산을 마치고 카페 밖으로 나섰다. 영재가 쫓아와서 말을 얹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빠른 걸음으로 마트에 들러 아이의 간식거리를 샀다. 평소에는 거의 사 주지 않던 불량식품도 몇 개 담았다.

아이가 오기 전에 저녁을 차려 놓고 싶었다. 바쁘게 집으로 돌아가던 여준의 눈에 아파트 명패가 걸렸다. 서초 X 아파트. 문득 걸음을 멈춘 여준이 헛숨을 들이쉬었다.

‘너 이 동네 살았던가?’

분명 그렇게 말을 걸지 않았나?

‘서초 X아파트 살면서 아우디 모는 놈이….’

핸드폰을 손에 쥐고 가람의 번호를 찾았다. 다행히 가람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형, 혹시 영재한테 제 주소 알려 주셨어요?”

인사도 없이 다짜고짜 묻는 말에 가람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였다. 어? 뭐? 얼떨떨하게 되묻던 그가 얼른 소리를 높였다.

- 아니야, 그런 적 없어. 왜? 영재가 너 찾아갔어?

“…….”

- 무슨 일이야? 천천히 말해 봐.

머리가 아팠다. 여준은 마트 봉투를 든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죄송해요, 난데없이.”

- 괜찮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형이 그러실 리가 없는데 제가…. 잠깐 정신이 나갔나 봐요. 요즘 가끔 이러는데….”

- 여준아, 괜찮아. 나 신경 안 써. 너 어디야? 형이 갈까?

또 속이 따끔거렸다. 여준은 고개를 젓다 말고 전화인 것을 깨닫고 얼른 입을 열었다.

“곧 지오 와요. 시터가 키즈 카페 데려갔는데 일곱 시까지 온댔거든요.”

- 뭐 어때. 형이 가서 맛있는 거 해 줄게.

“아니에요. 저 위염 치료 중이라 죽만 먹고 살아요. 지오만 먹이면 되니까 제가….”

- 뭐? 위염? 야, 그런 건 형한테 연락을 해야지. 지금 갈 테니까 딱 기다려 봐.

“혀….”

전화는 거침없이 끊어졌다. 여준은 뒤늦게 제가 내뱉은 말의 역효과를 깨닫고 이마를 쳤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벼락같이 가린의 메시지가 도착했던 것이다.

「민남매 출발! ㄴ(ㅇㅅㅇㄱ) 슝슝!」

귀여운 이모티콘에 그만 웃음이 샜다. 요동치던 심란함이 그나마 가라앉는 것 같았다. 여준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진정시켰다.

지나친 생각인지 모른다. 아파트 입구에서 나오는 걸 봤으면서 못 본 척 건넨 인사라면 설명이 된다. 차종도 결혼식 때 봤으니 알겠지. 하지만 한 번 가슴을 찌른 불안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장 본 것들을 정리하고 집 안을 둘러보았다. 방 세 개짜리 아파트. 처음 집을 구했을 때 제일 작은 방을 여준의 서재로 꾸몄지만 그 안을 들여다보는 일은 거의 없었다.

심란함에 부려 본 변덕이었다. 여준이 조심스레 방문을 열었다. 고급스러운 맞춤 책장과 넓은 책상, 몇 번 열어 보지도 않은 노트북이 그대로 자리 잡고 있었다. 3년 전 그대로 시간이 멈춘 것만 같았다.

그 방을 살펴보던 여준이 문득 생각했다. 이사를 할까.

아니면…. 떠날까.

“…….”

주말이 지나면 팀은 본격 프로젝트 준비에 돌입한다. 팀장은 이번에야말로 상품 출시를 선점해야 한다는 의욕으로 불타고 있었다. 물론 그것은 여준을 비롯한 팀원들을 쥐어짠다고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높으신 분들이 팀의 기획서를 성의 있게 읽어 주어야 하고, 중간에 변덕 부리지 말아야 하고, 금감원 양반들의 심기를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하지만 팀장은 팀원들의 모든 시간과 기력과 생명을 사무실에서 쥐어짜야만 그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고 믿을 것이다.

삑, 삑. 도어락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서재 문을 닫고 현관으로 향했다. 달려 들어온 아이가 여준을 발견하자마자 활짝 웃으며 소리쳤다.

“아빠다!”

달려와 안기는 아이를 버겁게 들어 올리며 여준은 아이와 함께 웃어야 할지, 신발부터 벗으라고 야단쳐야 할지 고민했다. 가까워진 아이의 살에서 부드러운 우유 냄새가 났다.

“우리 아들, 재밌었어?”

말랑한 뺨에 입 맞추며 묻자 아이는 조잘조잘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지는 반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공놀이도 했고, 미끄럼틀도 탔고, 어린이집 친구도 만났다는 것 같았다. 여준은 우선 아이의 신발을 벗기고 그때까지 현관에 서 있던 시터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선생님 안녕히 가세요, 해야지.”

“누나 가야 돼?”

“누나가 아니라 선생님이라니까. 버릇없이.”

“아니야, 누나야. 아기 없으면 누나. 어린이집 선생님이 그랬는데.”

그 말에 돌아갈 채비를 하고 있던 시터가 소리 내 웃었다. 여준은 으이구, 하며 아이를 억지로 인사시킨 뒤에야 그녀를 배웅할 수 있었다.

“저녁 뭐 먹고 싶어?”

악의 없고 엉뚱한 말에 헛웃음이 터지는 순간이 얼마나 소중한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에게 아무리 설명해 봐야 이해하지 못한다.

“저녁, 나 젤리 주스요.”

“그건 밥 잘 먹으면 간식.”

아이는 에이, 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여준은 뒤늦게 편한 숨을 내쉬었다. 속이 한결 부드러워지자 살 것 같았다.

가람과 가린은 지오가 밥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젤리 주스를 얻어 TV 앞에 앉은 뒤에야 도착했다. 양손 가득 장바구니를 들고서였다. 가린의 짐을 얼른 받아들며 여준이 난처하게 웃었다.

“뭘 또 이렇게 잔뜩 사 왔어.”

“누나는 정말 섭섭하다, 여준아. 어떻게 네가 그런 중병을 앓고 있단 사실을 이 화상한테서 전해 듣게 할 수가 있니?”

“별거 아닌데…. 맵고 짠 거 조심하고 약만 챙겨 먹으면 된댔어.”

여준이 얼른 설명했지만 가린에게는 들리지 않는 것 같았다. 주방으로 들이닥쳐 온갖 식재료를 풀어 놓은 그녀는 식탁 앞에 선 채 당당하게 외쳤다.

“자, 이제 만들어.”

물론 가람을 향해서였다.

“어머, 근데 이게 누구야. 너 지오니? 어머, 세상에. 못 본 새에 사람 다 됐네?”

슬금슬금 곁으로 다가와 있던 지오는 가린이 알은체를 하자 아예 여준의 등 뒤로 쏙 숨어 버렸다. 머리가 좀 굵어졌다고 낯도 가릴 줄 아는 게 신기했다. 여준은 아이의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였다.

“가린이 이모잖아. 기억 안 나? 이모가 지오한테 라이언 담요도 사 줬었는데.”

“…….”

아이는 몸을 배배 꼬며 고개를 푹 숙일 뿐이었다. 가린은 아이를 재촉하는 대신 히, 웃으며 물러섰다.

“냅둬, 익숙해지겠지. 너는 아직 저녁 안 먹었지?”

“그렇긴 한데…. 밖에서 사 먹어도 되는데 미안하게.”

“애 보면서 먹으려면 집이 낫지. 우린 쉬고 있자. 쟤가 맛있게 해 줄 거야.”

씩씩하게 말한 가린이 여준의 등을 떠밀었다. 가람은 어느새 능숙한 손놀림으로 식재료를 정리하고 냄비를 올리고 있었다. 손님에게 주방을 맡기고 소파에 앉으려니 민망했지만 가린은 막무가내였다.

“야, 리모컨에 먼지 쌓인 거 봐라. 너 이 TV 보긴 하니? 아주 영화관처럼 해 놓고는.”

가린이 TV를 켜자 지오에게 맞춰 둔 어린이 채널이 나왔다. 귀여운 캐릭터들이 영어 대화를 하고 있었다. 주제는 <부모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 보아요>였다.

[따라 해 보세요~ 아이 러브 맘!]

순간 한 공간에 존재하는 모든 어른이 하나뿐인 아이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지오는 가린이 가져온 라이언 피규어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내쉰 가린이 채널을 돌렸다. 이번에는 어린이용 애니메이션이었다. 그제야 리모컨에서 손을 뗀 그녀는 여준을 보며 슬쩍 미소 지었다.

“너 피곤해 보인다.”

“응?”

“잠깐 쉬어. 저거 하려면 좀 걸려.”

걱정이 되어서 급하게 달려왔으면서 아무것도 묻지 않아 주어 고마웠다. 여준은 대답 대신 소파 팔걸이에 상체를 기댄 채 고개를 끄덕였다. 피곤한 건 사실이었다. 팔오금에 머리를 묻자 별수 없이 영재가 떠올랐다.

좋았던 기억이 없는 건 아니다. 영재는 말이 많고 예민하지만 그만큼 눈치가 빨랐다. 여준에게 어떤 악의도 내비치지 않을 때는 세상 어디에도 없을 섬세한 조력자처럼 굴었다.

특히 사현과의 사건이 있었던 후에는 틀어지기 전으로 돌아간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지내다 졸업하고 보니 다시 만났을 땐 반갑기만 했다. 그러나 돈 문제가 엮이면서 떠오르고 말았다. 영재가 어떤 식으로 자신을 불편하게 하는 인물이었는지.

“이모, 있잖아요.”

반쯤 누워 있으려니 기다렸다는 듯 잠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어디에든 머리만 대면 잠들기 시작한 지도 오래였다. 흐려지는 의식 속으로 아이의 침울한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그게요, 이모가요, 지오한테요.”

“응, 이모가 지오한테?”

“담요 줬잖아요. 라이언 담요요. 지오는 그걸 진짜 좋아했는데요.”

지오는 말이 일찍 트인 편이었다. 남자아이인 걸 감안하면 특히 그랬다. 하루가 멀다 하고 늘어나는 어휘에 매일이 감탄이었다.

“어, 아빠가 어린이집엔 갖고 가면 안 된다고 했는데요. 왜냐면 더러워진다고요.”

“그랬어? 니네 아빠는 좀 쪼잔한 데가 있어.”

“근데요, 지오는 라이언이랑 자고 싶어서…. 아빠 몰래 가지구 갔거든요. 근데요….”

아, 그렇구나. 잠겨 드는 의식 속에 여준은 어렴풋 웃었다. 지오가 말하려는 바를 알 것 같았다. 아이가 제 가방에 담요를 숨겨 어린이집에 간 날이었다. 빵빵하게 부푼 작은 가방을 보며 여준은 아들의 꿍꿍이를 짐작했지만 그냥 내버려 두었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라이언 담요는 하루 만에 옆자리 아이의 오줌과 담요를 탐낸 아이들의 침 범벅이 되어 돌아왔다. 세탁을 해 봤지만 아이가 처음 선물 받았을 때의 보송보송하고 동그란 라이언 얼굴은 되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요, 이모가 화났으면 미안해요.”

“이모가 왜 화가 나?”

“왜냐면요, 이모가 준 건데 쉬 묻어서….”

가린이 깔깔 웃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여준은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상어가 된 기분이었다. 포근했으며 두렵지 않았다.

***

꿈을 꾸었다. 구불구불 이어지는 골목길, 가장 높고 가파른 판자촌 어귀에 서 있었다. 검고 높은 하늘에는 둥근달이 뜨고, 어디선가 소독약 냄새가 났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딘가에 사현이 있을 것 같았다.

익숙한 길을 달렸다. 어제 왔던 것처럼 눈에 훤히 보였다. 낯익은 대문을 열고 위험천만한 계단을 달려 내려갔다. 아귀가 잘 맞지 않는 현관문을 억지로 비틀어 열면 사현의 방이었다. 여준이 살면서 만났던 중 가장 열악하고 외로운 집의 형태.

교복을 입은 열일곱의 사현이 먼지투성이 매트리스 위에 모로 누워 있었다. 여준은 거리낌 없이 다가가 그의 곁에 앉았다. 사현은 눈을 가느다랗게 뜬 채 여준을 올려다보았다. 웅크린 사현은 맹수의 어린 새끼처럼 보였다. 포식자로 태어났으나, 아직 손톱도 송곳니도 여물지 않아 개미 새끼 한 마리 해칠 수 없는.

‘선배는 잘못한 게 없어요.’

사현이 중얼거렸다. 여준은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기만이다. 무엇이든 잘못했을 것이다. 그게 아니고서야 그런 결과가 나왔을 리 없다.

사현의 마음을 알고 있었다. 한 번도 분명한 언어로 말한 적은 없었지만 들렸다. 온 우주에서 오로지 여준만이 들을 수 있는 마음이었다.

그러니 내 잘못이 없다고 하지 마. 내가 무엇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그토록 어그러질 마음이었다고는 말하지 마. 나를 위로했던 너의 무구함이 모조리 착각이었고, 들려왔던 목소리도 그저 내 망상일 뿐이었다고는 제발.

‘선배.’

제발.

***

“여준아.”

어깨를 흔드는 손에 퍼뜩 눈을 떴다. 잔뜩 걱정스럽게 일그러진 가린의 얼굴이 보였다.

“괜찮아? 좀 더 자게 두려다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끙끙대길래….”

“…아.”

“어머.”

가린이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여준은 그제야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것이 땀이 아니라 눈물임을 깨달았다. 재빠르게 훔쳐내고 코를 훌쩍였다. 가린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여준의 어깨를 토닥였다.

“저녁 먹어. 다 됐어.”

“응, 고마워.”

부스스 일어난 여준의 시야에 소파 카우치 위에서 잠든 아이가 들어왔다. 너덜너덜해진 라이언 담요를 덮고 있었다. 여준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걸렸다.

아이를 안아다 침대에 뉘이고 방문을 닫았다. 집 안 가득 고소한 냄새가 풍겼다. 정신이 돌아오자 짧은 꿈이 우스웠다. 아무리 꿈이라지만 무슨 헛소리를 한 건지. 옆머리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흔들었다. 나약한 새끼 짐승처럼 웅크리고 있던 사현의 잔상이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한 입만 먹어 보면 깜짝 놀랄 거다. 민가람 특제 새우 참치 죽.”

근사한 그릇에 멋들어지게 담긴 보얀 죽에 손질한 새우 살이 얹혀 있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와, 탄성을 흘리며 자리에 앉았다. 죽이라면 물릴 대로 물린 상태였음에도 구미가 당길 만큼 황홀한 냄새와 비주얼이었다.

“그나저나 웬 위염이야? 스트레스성?”

“너무 사 먹기만 해서 그런가?”

건너편에 앉은 남매가 번갈아 물었다. 여준은 숟가락에 담은 죽을 후후 불다 말고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게요. 일주일 정도 약 먹으면 나을 정도라고는 했어요.”

“약 먹으려면 밥을 잘 먹어야지. 어여 먹어, 어여.”

가람이 재차 권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숟가락을 입으로 가져가던 여준이 멈칫했다. 허연 쌀죽 사이로 노르스름한 빛이 섞여든 게 보였다.

“…….”

여준은 조심스레 죽을 깊이 퍼서 뒤집어 보았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가람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 너무 뜨거워?”

“…아.”

여준이 머뭇거리며 가람과 가린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그때 여준과 죽 그릇을 번갈아 보던 가린이 아, 하며 가람의 등짝을 철썩 내리쳤다.

“못 살아, 웬수야! 계란!”

그제야 가람도 아차, 하며 입을 벌렸다.

“헉, 맞다, 아이고, 미치겠네.”

“형…. 정말 죄송하….”

“아냐, 아냐, 사과하지 마. 내가 미안해. 어우, 나 치매 오나 보다. 그걸 까먹네.”

“죄송해요, 예전만큼 심한 건 아닌데 제가 요즘 몸 상태가 안 좋다 보니까 조심해야 해서….”

“아니야, 아니야. 진짜 내가 미안해. 잠깐만 기다려 봐, 다시 만들게.”

가람이 벌떡 일어섰다. 여준도 얼른 일어서서 곧장 인덕션 전원을 켜려는 그를 뜯어말렸다.

“괜찮아요. 냉장고에 죽 있으니까 저는 그거 데워 먹으면 돼요.”

“그래도 너 맛있는 거 먹이자고 들이닥쳤는데….”

“앉아서 드세요, 제발. 형이 자꾸 이러시면 저 너무 죄송해서 아무것도 못 먹어요.”

가람을 간신히 앉혀 두고 얼려 놓은 죽을 꺼냈다. 그릇을 꺼내 전자레인지에 돌리는 동안 가람은 잔뜩 시무룩한 얼굴로 여준의 죽 그릇을 옆으로 치워 놓았다.

“아니, 진짜 음식 해 주러 오면서 그걸 까먹냐. 십 년 전부터 알고 있던걸.”

“그럴 수도 있죠. 누가 남들 알레르기 체질 같은 거 일일이 기억하고 살아요. 저만 안 까먹으면 되지.”

여준이 웃으며 데운 죽을 꺼냈다. 골고루 데워지지 않은 죽은 눅눅하고 거칠어 보였다.

“저희 아버지도 가끔 저 먹으라면서 계란빵 이런 거 사 오고 그러셨는데….”

말을 이어가던 여준이 멈칫했다. 가람은 민망함을 감추려는 듯 짐짓 장난스럽게 대답했다.

“그치, 남들 음식 취향은 진짜 이상하게 안 외워지더라. 나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가린이가 돼지고기를 좋아한다고 생각했거든. 근데 얘는 정색을 하고 아니라는 거야. 지는 태어날 때부터 소고기 파였다고.”

“돼지고기는 오빠가 좋아하지. 허구한 날 돼지고기만 구워 대니 그것만 먹어야지 별수 있냐?”

누가 남들 알레르기 체질을 일일이 기억해. 음식 취향 같은 건 진짜 안 외워지더라…. 여준은 언젠가 사현이 묵는 호텔 방에서 깨어났던 때를 떠올렸다.

‘계란 빼라는 말은 전달했어?’

사현은 그때 여준이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아예 넣지 말라고 해. 조리 과정에서 계란 비슷한 것도 못 들어가게 하라고.’

못 들을 거라 생각했기에 뱉은 말이 틀림없었다.

‘선배 특기잖아요. 보기 싫은 거, 듣기 싫은 건 안 보이고 안 들리는 데로 치워 놓고 처음부터 없었던 척 시치미 떼는 거.’

‘선배는 항상 그랬어요. 비열하고, 치사하고, 위선적이고 자기밖에 모르죠.’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랬는데.’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사현은 뭐라고 말했더라. 여준이 머리를 감싼 채 눈을 끔뻑였다.

‘선배에 대해서 다 잊고 살았어요.’

그럴 리가 없다. 사현은 모든 것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낟알 같은 오류조차 없이 완벽하게 여준의 과거를 말했다.

‘선배는 아무 잘못 없어요.’

왜 그날따라 이상했을까.

‘선배가 힘들어 보이면….’

사실은 무슨 말을 하고 싶었을까.

‘그게 다 내 잘못 같아요.’

믿고 싶은 대로 믿으라는 말로밖에는 들리지 않았다.

“여준아?”

전자레인지가 한 번 더 삑 소리를 냈다. 여준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고 식탁으로 돌아왔다. 가람과 가린이 잔뜩 조마조마한 얼굴로 여준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저기, 여준아.”

가람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며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여준은 행여 걱정의 말이 나올까 재빠르게 죽을 입 안으로 퍼 넣었다.

“혹시 영재가 너 찾아왔어?”

“아.”

그제야 애초에 가람과 가린이 왜 쳐들어오게 되었는지가 떠올랐다.

“그게…, 네. 아까요. 잠깐 얘기하고 갔어요.”

“뭐라 그래? 걔가 여긴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겠네.”

“별 얘기는 아니었고 그냥 예전 일 때문에요.”

가람의 어조에서 미묘한 적대감을 읽은 여준이 고개를 들었다. 가린의 표정도 심상치 않았다. 영재가 서울에 연고가 없다 하니 집으로 불러서 재워 주려고까지 했던 이들이었다.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건 여준도 눈치챌 수 있었다.

“…아 참, 너 일단 그거 마저 먹어라. 내가 성격이 급해서 또 이러네.”

“먹으면서 들을게요. 무슨 일 있으셨어요?”

생각해 보면 전화했을 때부터 반응이 이상했다. 연락처 요청을 중간에 잘랐다는 거야 여준의 입장을 배려했다고 쳐도, 가람에게 여준과 영재는 똑같이 친했던 학교 후배다. 여준이 왜 이렇게 예민하게 구는지 의아할 법도 한데 가람에게선 그런 기색이 전혀 없었다.

“그…. 저번에 가린이가 너 저녁 초대하려고 했잖아.”

“네? 네.”

“그게 사실은 할 얘기가 있어서 그랬어. 지난주인가, 사흘 정도 영재를 재워 줬는데 애가 너무 집요하게 네 연락처나 주소 이런 걸 물어보더라고.”

“…….”

“난 너네 둘 싸운 걸 아니까 알려 주기 전에 너한테 먼저 물어봐야 된다고 생각했거든. 그래서 처음엔 뭐 대충…. 나도 연락 잘 안 되는데 중요한 용건이면 문자라도 대신 보내 주겠다고 했어. 그랬더니 아니래, 꼭 자기가 연락을 해야 된대. 해서 알았다, 근데 내 마음대로 알려 주는 건 좀 아닌 것 같고 여준이한테 먼저 물어보겠다고 했지.”

어쩐지 마지막까지 듣지 않아도 영재의 반응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흔들리는 시선을 들키지 않으려 먼 곳을 바라보았을 것이다. 여준 앞에서 여러 번 그러했듯이.

“그때 걔가 하는 소리가 이상했어. 아니래, 됐대. 그냥 자기가 물어봤다는 것도 말하지 말라는 거야.”

‘요즘도 박영재랑 연락해요?’

사현은 왜 그런 걸 물어봤을까. 진작 가져야 했던 의문이 뒤늦게 가슴 속에 떠올랐다.

“그런데…. 내가 자다가 목이 말라서 깼는데, 깬 김에 인스타 좀 보려고 핸드폰을 찾으니까 없는 거야. 항상 머리맡에 두고 자는데.”

그 대목에 이르러서는 가린의 표정도 함께 어두워졌다.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며 가람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이게 사람이 촉이라는 게 있잖아. 나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게 되더라. 살금살금 걸어서 거실로 나갔더니…. 영재가 내 핸드폰을 들고 있다가 후다닥 일어나더라고.”

“…….”

“지금 뭐 하는 거냐고 물어보니까 횡설수설하면서 뭐 핸드폰이 똑같아서 착각했다는 둥…. 말이 되냐? 내 핸드폰은 내 방에 있었는데.”

“비밀번호는….”

“안 걸어 놓지. 만날 집에서만 일하니까.”

말을 마친 가람이 쩝, 하며 입맛을 다셨다. 여준은 그제야 가람이 안절부절못하며 달려온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러나 가람이 책임을 느낄 필요는 조금도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내가 진짜 너한테 말을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망설였던 건데.”

팔짱을 낀 채 한참 고민하던 가람이 무겁게 운을 떼었다. 그러나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보다 못한 가린이 한숨을 내쉬며 끼어들었다.

“영재 있잖아. 좀 안 좋은 일을 했던가 봐.”

“안 좋은 일…?”

“핸드폰 얘기 듣고 영 찜찜해서 내가 연락망 좀 돌려 봤거든. 근데 여자애 중에 이상한 제의를 받은 애들이 있었더라고. 뭐 말은 이리저리 돌려서 하는데…. 까놓고 말해서 걔가 포주 짓을 하려고 했던 것 같대.”

“…뭐?!”

여준이 불현듯 큰 소리를 냈다. 가람과 가린은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듯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너 아진이 기억해? 우리 학생회 서기 했던 후배.”

“어…. 응.”

“걔가 말해 준 건데 뭐라더라, 처음엔 자기 아는 선배가 무슨 에이전시를 하는데 모델해 보지 않겠냐고 말을 텄대. 그것도 악질인 게 스타 만들어 주겠다느니 이런 허황된 얘기를 한 게 아니고, 그냥 광고 같은 거 찍을 때 연예인 뒤에서 스쳐 가는 역할 같은 거 시켜 준다고 했대. 그래도 보통 알바보다는 월등히 많이 받을 수 있고, 당일에 현금 지급이고, 연예인 실컷 볼 수 있고, 거기서 혹시 관계자 눈에 들면 더 좋은 활동도 할 수 있다…. 대충 그렇게 꼬셨나 봐.”

“영재가…?”

“그렇다니까. 그때가 아진이 대학 졸업반일 때였대. 취업 준비하고 학원 다니고 하느라 돈은 필요한데 그런 꿀알바 있다니까 혹한 거지.”

말을 이어가던 가린이 씩씩대며 물 한 컵을 들이켰다. 다시 떠올려도 화가 치솟는 모양이었다.

“그러고 나서 일주일 뒤인가, 애한테 에이전시 사장 소개해 준다면서 어디 어디 식당으로 오라고 주소를 띡 보냈대. 근데 아진이가 그때 좀 쎄하더라는 거야. 왜냐면 주소가 진짜 이상했나 봐. 혹시 싶어서 로드맵 찍어 보니까 지하철역이고 정류장이고 엄청 멀고, 작은 골목 하나에 아저씨들이나 다니는 대포집 몇 개 있고, 그 골목 뒤로 몽땅 모텔이더래.”

여준이 저도 모르게 머리를 감싸 쥐었다. 영재가 차고 다니던 비싼 시계와 손에 든 명품 가방, 번쩍번쩍한 슈트 따위가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아무리 세상 물정 몰라도 이건 좀 이상하다 싶었대. 그도 그럴 게 애초에 에이전시 사장이 일일 알바나 하러 오겠다는 애를 따로 만나서 식사하자는 것도 웃기잖아. 그 자리에 나올 인물이 정말로 에이전시인지 나발인지 관계자는 맞을까? 그 의심이 들어서 갖은 핑계 다 대고 안 나갔는데 이런 일 당한 애가 한둘이 아닌가 봐.”

“졸업반이면 못 해도 몇 년 된 일이라는 거 아냐? 그게 정말 그런…. 나쁜 짓이었으면 어떻게 아무도 몰랐던 거야?”

“당한 애들이 어디다 말을 못한 거지. 특히 아진이는 결국 그거 걷어찼으니까 진짜 이상한 수작이었는지 아닌지 모르잖아. 혹시 말 잘못했다가 괜한 사람 잡는 거 아닌가…. 그 생각 들어서 비밀로 했대. 그런데….”

쉼 없이 쏘아 대던 가린이 물 한 잔을 더 삼켰다. 갸름한 얼굴에 홧홧하게 열이 올라 있었다.

“내가 이번에 민가람 핸드폰 때문에 여기저기 캐묻고 다니니까 하나둘 입을 연 거지. 그 오빠 혹시 뭐 사고 쳤냐고. 그러면서 나온 말이….”

가람은 차마 못 듣겠다는 듯 먼 곳만 보고 있었다.

“영재 있잖아…. 호스트 일 했었대.”

여준이 망가진 인형처럼 뻣뻣하게 눈을 깜빡였다. 호…, 뭐? 멍청하게 되묻기까지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호스트…? 접대부 말하는 거야?”

“그래. 이건 또 어떻게 퍼진 줄 알아? 졸업한 여자 선배들한테 연락을 해서 자기 가게에 오라고 했대.”

“…뭐?”

“이것도 당연히 호스트바라는 말은 안 하고, 지가 분위기 좋은 칵테일 바 매니저가 됐네 어쩌네 개소리를 했나 봐. 눈치채고 안 간 사람들이 훨씬 많긴 했는데 순진하게 오라는 대로 갔다가 가게 입구에서 유턴한 사람들도 있었던 거지.”

제정신인가? 한 가지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제정신으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 있지? 아무리 궁리해 봤자 여준은 모를 일이었다.

“잠깐만, 나 너무 이해가 안 가서….”

“그쯤 되니까 민가람이랑 나도 심각해진 거야. 멀쩡하던 애가 못 보던 새 갑자기 인간쓰레기 되어 있는 부분은 어리둥절하지만 일단 넘어가고, 중요한 건 걔가 왜 갑자기 목이 메어라 성여준을 찾냐 이거였으니까.”

“아….”

“거 때문에 너 불러다 뭐라도 먹이면서 진지하게 얘기 좀 해 보려 한 건데…. 네가 워낙 바빠서 시간을 못 냈잖아. 그러다 아까 네 전화 받고 둘 다 식겁해서 날아온 거지.”

이야기를 마친 가린이 고개를 들고 긴 한숨을 토해 냈다.

“나도 이게 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여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쓰게 웃었다.

“그래서…. 진짜 영재가 뭐라 그래?”

죽 그릇을 치운 여준이 티포트에 물을 올렸다. 손님이 드나들지 않은 지가 한참이라 변변히 대접할 만한 차도 없었다. 별수 없이 시터를 위해 사 놓은 믹스 커피를 꺼내 잔에 풀었다.

“별말 안 했어. 전에 그 돈 문제 때문에 오해 풀고 싶다고 하더라고.”

“돈? 너한테 빌려 갔던 거?”

“나한테 서운했대. 그 정도는 자기한테 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니었냐고.”

가린이 입을 쩍 벌렸다.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가람도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말 듣고 나니까 더 얘기하고 싶은 기분이 안 들어서…. 그만 가라고 했어.”

“잘했어. 와, 진짜 너무 황당하네. 걔 왜 그렇게 된 거지?”

멀쩡하던 애가 다시 만나 보니 이상하게 변해 있더라. 가람과 가린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지만 여준의 생각은 달랐다. 여준이 기억하기로 영재가 이상해진 것은 10년도 전의 일이었다.

‘집이 망해서 아버지가 야반도주를 했대….’

그런 게 이유가 될 수 있을까? 문득 궁금해졌다. 영재가 집안 사정을 들키고 싶지 않아 초조하고 다급해진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내몰렸을 때 비치는 모습이야말로 진심이라고 봐야 맞는 건 아닐까?

“뭔가 사정이 있었나? 애가 양상이 이상해. 항상 돈에 쫓기고 있는데 입는 건 다 명품이잖아. 시계도 비싼 거 차고 다니고.”

“호스트라서 그런 거 아냐? 근데 딴 세상 얘기 같다, 호스트라니. 그 박영재가.”

가람이 헛웃음을 지었다. 현실감이 없기는 여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존재는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오는 줄 알았다. 언젠가 은아와 함께 보았던 호스트 영화가 떠올랐다. 주인공은 소위 ‘공사’를 위해 여자 앞에서 깡패들에게 쫓기고 맞는 시늉을 한다. 놀란 여자는 얼마가 필요하냐며 울고, 남자를 때리지 말라 사정하고….

‘사채? 너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야?’

물 한 모금을 머금은 여준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가린아, 혹시….”

“응?”

“영재가 너한테도 그런 얘기한 적 있어? 돈 좀 해 달라거나, 사채업자한테 쫓기고 있다거나.”

“사채업자?”

가린이 토끼 눈을 한 채 목소리를 높였다. 여준은 관자놀이를 꾹 누르고 열심히 말을 골랐다.

“나한테는 그때 그런 식으로 말했어. 자기가 당장 돈을 때우지 않으면 사채 써야 할 상황이고 어쩌고….”

“어머, 세상에.”

“혹시 이번에도 그런 문제로 나 찾아온 거 아닌가 싶어서.”

고개를 끄덕인 건 가람이었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듯이.

“하긴, 그게 제일 설득력 있네.”

“…….”

“여준아,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완전히 철벽 쳐야 하는 거 알지? 애가 한 번 그렇게 나쁜 물을 들였으면 절대 못 빠져나와.”

가람의 진지한 말에 여준이 픽 웃었다.

“형, 우리 엄마 같은 소리를 하네요.”

어릴 땐 어머니의 그런 말이 싫었다. 여준의 어머니는 여준이 만나는 친구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캐내고 품평하기를 좋아했다. 누구는 좋은 집안 아이니 가깝게 지내라거나, 누구는 눈빛이 나쁘니 멀리하라거나.

그때는 어머니가 속물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를 키워 보니 알 것 같았다. 언젠가는 세상의 불합리함을 알게 되더라도, 최대한 나중의 일이었으면 했다. 할 수만 있다면 평생을 유리 온실에서 키우고 싶었다. 어머니의 방식은 세련되거나 성숙하지는 못했을지언정 애정이었다.

“나도 내가 뭐 하는 건가 싶다. 근데 영재를 도와줄 땐 도와주더라도 이런 방식은 아닌 거잖아. 그치.”

“네….”

“그리고…. 내가 특히 걱정하는 건.”

“…….”

“…아니, 아니야. 아니다.”

“은아 보험금이요?”

여준이 덤덤하게 물었다. 가람은 끄응, 앓는 소리를 내며 옆머리를 벅벅 긁었다.

“그건 걱정하실 거 없어요. 변호사 끼고 지오 앞으로 신탁 걸어 놔서 저도 못 건드려요.”

“…내가 참 어쩌다 너한테 이런 말까지 하고 있는지….”

“저 걱정해 주는 게 형이랑 가린이밖에 없다는 거죠, 뭐.”

여준은 진심이었지만 가람의 귀에는 자조의 말로 들린 듯했다. 금방 표정을 굳힌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안 그래, 너 걱정하는 사람이 왜 우리뿐이야. 다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은아 씨 그렇고 되고 나서 모이기만 하면 너 괜찮냐고, 애들 다 그거부터 물었어.”

“…….”

“섣불리 참견하고 위로하기도 무서울 만큼 큰일이었잖아. 네 입장에선 그것도 서운했겠지만….”

“…아니에요. 안 서운해요. 저도 다 알아요.”

“말 나온 김에 너, 이번 연말에 송년회 하면 나올 거야? 작년에도 애들 다 너 부르고 싶어 했는데 차마 초대를 못 하겠더라고.”

조심스러운 요청에 여준이 픽 웃어 버렸다. 송년회라니. 먼 듯 가깝게 느껴지는 말이었다.

“봐서요. 12월에 거의 야근이라 확답을 못 드리겠네요.”

“그 정도야? 진짜 너네 회사 심하다.”

“모르죠. 그때쯤엔 그만뒀을지도.”

덤덤하게 뱉은 말에 눈을 반짝인 건 가린이었다.

“그만두게?”

“고민 중이야. 이직 알아볼까 싶기도 하고…. 미국이나 싱가포르로 갈까 그 생각도 하고 있어.”

어디든 멀리 뜨고 싶은 마음이 크기는 했다. 한국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 지오를 안전하게 키울 수만 있다면.

“너 그럼 민가람 회사에서 일할래?”

“야, 나는 쟤 연봉 감당 못 해!”

가린이 아무렇지 않게 뱉은 말에 가람이 펄쩍 뛰었다. 참으로 가린과 가람다운 대화였다. 살짝 웃은 여준이 능청스럽게 대답했다.

“저 생각보다 안 비싸요. 일단 불러 보세요.”

“어이고, 큰일 날 소리 한다. 하여간 이것들 세상 물정 쥐뿔 모르고….”

두통은 어느새 잊혔다. 여준은 물을 달게 마시며 오랜 친구를 따라 웃었다. 불안도 두려움도 그때만은 느껴지지 않았다.

***

사현은 여전히 연락이 없었다. 여준은 짬이 날 때마다 사현의 번호 위로 가져갔던 손가락을 거둬들이기를 반복했다. 정말 이제 나타나지 않을 셈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안심이 되다가도 찜찜해졌다.

회사는 본격적인 전시 체제에 돌입했다. TF 팀이 꾸려지는 과정에서 몇 번 고성이 오갔다. 갈등의 주제는 매번 똑같았다. 결국 폭탄 돌리기였다.

“난 자살 보험금이란 걸 약관에서 없애야 한다고 봐.”

팀장이 핼쑥해진 얼굴로 중얼거렸다.

“교통사고 후유증은 이쯤 되면 민간 신앙 같지 않냐? 전에는 있잖아. 술 먹고 길 가던 아저씨가 발이 꼬여서 가만히 서 있던 차 보닛에 부딪친 거야. 그걸 가지고 이것도 교통사곤데 후유증 오면 어쩌냐면서 사람을 달달 볶더라니까.”

팀원들이 웃으며 저마다 한마디씩 덧붙였다. 맞아요, 맞아. 직업이 직업이다 보니 매일 듣게 되는 것이 돈과 사람을 맞바꾸는 이야기였다. 여준은 문득 2년 전의 찌라시를 떠올리고 우울해졌지만 애써 감추고 함께 웃었다.

“아무튼 내일부터 다들 힘냅시다. 오늘 회식은 꽃등심 먹을 건데 갈 사람?”

“꽃등심! 제주도까지도 따라갑니다!”

팀원들이 저마다 손을 들며 활기차게 외쳤다. 여준은 말없이 모니터를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따라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되도록이면 일찍 집에 가고 싶었다.

“성 선임은 어떻게 할래? 아직 속이 안 좋지?”

팀장이 그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물었다. 깜짝 놀란 여준이 얼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여준 씨는 일찍 들어가. 앞에서는 한우 굽고 있는데 몇 점 먹지도 못 하면 그게 얼마나 잔인한 짓이야.”

“아…. 감사합니다.”

배가 따끔따끔 아프고 헛구역질이 나던 증상은 많이 나아져 있었다. 편두통도 견딜 만한 수준이었다. 사현의 연락이 끊어진 뒤로 그의 일상은 놀랍도록 평안했다. 영재 문제만 해결되면 완전히 괜찮아질 것 같았다.

영재는 끝없이 쓸데없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아침부터 날씨가 좋다든가, 이런 날은 막걸리가 당긴다든가 하는 식이었다. 답장 없이 무시해도 막무가내였다. 차단하면 그만이지만 꿍꿍이를 모르니 섣불리 그럴 수도 없었다.

「나 일 있어서 너희 회사 근처에 와있는데 잠깐만 볼 수 없냐?」

물론 그래봤자 궁극적으로 원하는 건 돈이겠지. 여준은 한숨을 내쉬고 답장을 찍었다. 계속 피해 다닐 수도, 가람과 가린에게까지 피해를 줄 수도 없었다.

「6시 반 퇴근이야」

영재는 빠른 회신을 보내왔다. 가게 주소를 첨부한 메시지였다.

「이리로 와」

***

월요일 저녁의 강남대로는 언제나 그렇듯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지나는 사람과 어깨가 닿을 때마다 여준이 한껏 몸을 움츠렸다. 건물 사이로 부는 칼바람에 목덜미가 써늘했다. 슬슬 목도리를 챙겨 다닐 때가 된 것 같았다.

영재가 찍어 준 주소는 회사 뒤편의 먹자골목 한복판이었다. 어렵지 않게 걸음을 옮기던 여준이 문득 멈춰 섰다. 3층 규모의 고깃집이 있던 자리가 통째로 체인점 카페로 바뀌어 있었다.

“…….”

그렇게 잘 되던 고깃집도 망하는구나. 입사 이후 가장 많이 찾은 회식 장소였다. 특히 신입 때는 얼마나 먹고 거절해야 하는지를 몰라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취한 적도 많았다. 한 번은 가게를 나오자마자 필름이 끊겨 집에서 눈을 떴을 정도였다.

당연히 은아는 잔뜩 성이 나 있었다. 여준은 은아의 화를 풀어 주기 위해 내리 사흘을 빌어야 했다. 마침내 은아가 못 이긴 척 마음을 풀자 뒤늦게 궁금해졌다. 집까지는 어떻게 온 걸까. 집 주소가 그렇게 익숙하던 시기도 아니었는데.

‘그때? 누가 업고 왔어. 회사 사람이냐고 물어보니까 맞다길래 그런가 보다 했는데?’

그 말에 팀원들에게 물어보았지만 모른다는 대답만이 돌아왔다.

‘여준 씨 혼자 갈 수 있다고 가던데. 왜요? 무슨 일 있었어요?’

이상하다고 생각한 것도 잠시, 곧장 밀어닥친 신입 교육과 업무에 금방 잊어버린 일이었다. 어차피 이제 와서 은아에게 다시 물어보거나 확인할 도리도 없었다. 여준은 생각을 멈추고 발걸음을 돌렸다.

도착해 보니 일본식 선술집이었다. 이미 정종과 몇 가지 안줏거리를 시켜 놓고 기다리고 있던 영재가 짐짓 활발하게 손을 흔들었다. 여준은 재킷을 벗어 걸어 두고 자리에 앉았다. 완전히 룸식은 아니지만 자리마다 칸막이가 있어 어느 정도 독립된 느낌이 들었다.

“야, 얼굴 보기 힘들다. 성여준.”

영재는 변함없이 화려한 차림이었다. 옷도 구두도 뭐 하나 명품 아닌 물건이 없었다. 특히 커다란 금장시계가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일단 먹어. 저녁 아직이지?”

커다란 오코노미야키, 나가사키 짬뽕, 야끼소바까지 모조리 기름진 음식이었다. 눈으로만 봐도 속이 울렁거렸다. 여준은 당장 정종을 따라 주려는 영재의 손을 거절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 위염 치료 중이라 술이나 기름진 음식은 못 먹어. 그냥 얘기만 하고 갈게.”

술병을 기어코 기울이려던 영재의 표정이 확 굳어졌다.

“뭐? 그런 건 진작 말을 해야지.”

“말할 틈이 없었잖아.”

“야, 너는…. 사람이 이렇게 정성스럽게 준비하고 기다렸는데 꼭 초를 쳐야 되냐? 어이없네, 이걸 나 혼자 다 먹으라고?”

“…….”

“여기 엄청 비싼데. 이게 다 얼마친데….”

불만스럽게 중얼거린 영재가 오코노미야키를 뜯어내 입으로 밀어 넣었다. 한가득 물고 우물거리는 입술이 기름기에 번들번들 젖어 들었다.

“전혀 못 먹어? 위염 그냥 약 먹으면 낫는 거 아냐?”

후루룩, 짬뽕 국물을 삼키고 쩝쩝대는 소리가 귀에 거슬렸다. 여준은 한숨을 쉬지 않기 위해 29년간 쌓아 온 모든 인내심을 끌어올려야 했다.

“이번 주까지는 조심하라고 해서.”

“알았어. 그럼 나 빨리 먹을 테니 자리 옮기자.”

“그럴 거 없어. 여기서 말해.”

“그보다 너네 회사 건물 으리으리하더라. 그 건물이 통째로 회사 거야?”

휙휙 바뀌는 화제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준은 반쯤 포기하고 순순히 입을 열었다.

“아마 그럴 거야. 10층까지는 임대 나가지만.”

“너 진짜 운 좋은 편인가 보다. 대양화재면 화재 쪽에서는 완전 탑이라던데. 솔직히 너 스펙이라 할 만한 게 서울대밖에 없잖아. 아니지, 해외 대학 나온 것도 아니고, 요즘 서연고는 스펙도 아니지 않나?”

“…….”

“역시 사람은 외모도 중요해. 남자도 다 얼굴 본다더니, 너 보니까 진짜 그런 것 같네.”

영재가 히쭉 웃었다. 잇새에 고춧가루가 한가득 끼어 있었다. 여준은 낮은 숨을 삼켰다. 그제야 결심이 섰다. 어서 이 자리를 끝내고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그러면 모든 일이 잘 풀릴 것 같았다.

“영재야.”

술잔을 가득 채우던 영재가 응? 하며 고개를 들었다.

“일단 얘기해 봐. 내가 뭘 해 주길 바라는지.”

“…뭘?”

“내가 생각하기에 네가 나한테 요구할 만한 수준이고, 내가 들어줄 수 있을 것 같으면 해 줄게. 그러니까….”

“…….”

“그걸로 우리 서로 유감없는 걸로 하고, 이제 보지 말자.”

영재가 느릿하게 눈을 껌뻑였다. 흰자위가 양서류의 눈처럼 번들거렸다.

“무슨 소리야?”

날카롭고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섬뜩하게 울렸다.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고 재차 말했다.

“그러니까, 나한테 원하는 게 있으면 지금 말을 하고….”

“원하는 거? 여준아, 너 아까부터 말 되게 좆같이 한다.”

“…뭐?”

“내가 씨발 지금 너한테 구걸이라도 하고 있다는 거야?”

발밑이 싸늘해졌다. 갑작스레 얼음판 뒤로 내던져진 기분이었다. 영재는 얼굴을 있는 대로 일그러뜨린 채 독기 서린 욕설을 내뱉었다.

“아이, 씨빨. 좆같네, 진짜.”

“영재야.”

“어, 여준아. 너 내가 살살 어르면서 봐주니까 좆밥같냐?”

여준은 할 말을 잃은 채 눈앞의 옛 친구를 바라보았다. 살면서 이토록 원색적인 욕설과 겁박을 들은 일은 없었다. 사현조차 이런 식으로 말하지는 않았다.

“너…. 지금 무슨 말을 하는지 아는 거야?”

“지굼 무순 마룰 하눈쥐 아능 고야-?”

영재가 잔뜩 혀 꼬부라진 목소리로 여준의 말을 따라 했다. 어이가 없을 정도로 수준 낮은 조롱이었다. 여준은 고개를 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하자. 더 얘기해 봐야 소용없을 것 같네.”

“야.”

영재가 다급하게 따라 일어섰다. 여준이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렸다. 영재는 테이블을 두 손으로 짚은 채 우물쭈물하다 벌컥 소리쳤다.

“계산하고 가.”

“…뭐?”

“너 먹으라고 시켜 놓은 건데 안 먹었잖아. 원래 네가 먹어야 되는 거잖아!”

영재의 손끝이 계산서에 걸려 있었다. 여준은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온 한숨을 기어코 내뱉고야 말았다.

하아…. 건조한 숨소리에 영재의 눈썹이 꿈틀 일그러졌다. 여준은 묵묵히 계산서를 들고 카운터로 향했다. 직원은 여준의 한숨만큼이나 감정 없는 목소리로 통보했다. 21만 5천 원입니다.

“영수증 버려 주세요.”

여준이 재킷 안주머니에 지갑을 넣고 돌아섰다. 또다시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가람과 한 번 더 상의를 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거리엔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아직 저녁 식사 시간이니 당연한 일이었다. 어둑해진 거리에 찬바람이 분다. 여준은 큰길로 나가 택시를 잡을 생각으로 좁은 골목길에 들어섰다. 회사 근처 골목을 누비고 다니며 나름대로 머리에 새겨 둔 지름길이었다.

뒷덜미가 붙잡힌 것은 그때였다.

우악스런 힘이 셔츠 깃을 움켜쥐었다. 중심을 잃고 휘청인 여준을 사정없이 벽에 처박은 상대에게서 역한 술 냄새가 풍겼다. 여준의 눈이 튀어나올 듯 크게 뜨였다.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영재가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야…. 씨발, 여준아.”

“왜 이래? 무슨 짓…!”

“와이프 목숨값으로 호의호식하다 보니 뵈는 게 없냐? 그게 다 처음부터 니 꺼였던 것 같고 그래?”

여준이 숨을 멈췄다. 뱃속으로 무거운 추가 쿵 떨어진 것 같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고 식은땀이 흘렀다.

“…너 취했다. 후회할 짓 하지 말고 그만해.”

“니 꺼 아니야, 여준아.”

“일단 이거 놔. 놓고 말해.”

“니 꺼 아니라고. 아니라고, 씨발! 하나도 니 꺼 아니라고!”

영재가 버럭버럭 소리 지르며 몸부림을 쳤다. 여준은 제 멱살을 틀어쥔 영재의 손을 떼어내려 안간힘을 써 봤으나 허사였다.

“넌 뭐가 잘났는데? 네가 나랑 다른 건 하나뿐이야. 너는 돈 많은 마누라를 낚았고 나는 아니었다는 거.”

“박영재.”

“개새끼야, 넌 내가 어떤 심정으로 그 꼴을 본 줄 알기나…!”

“알았으니 놓고 말해. 얼마가 필요한 건데.”

여준은 그저 집에 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려면 영재를 진정시켜 보내야 했다. 진정시키려면 그가 원하는 바를 이루어 줘야 했다. 그 이상의 악의는 없었다.

그러나 영재는 다르게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순간 골목 안의 기온이 내려간 듯했다. 여준이 아차 싶어 입을 열고, 영재가 주먹을 치켜든 것은 동시였다.

불덩어리가 얼굴에 떨어진 듯했다. 돌아간 시야에 터진 쓰레기봉투가 걸렸다. 여준은 억 소리도 내지 못 하고 휘청였다. 몸을 웅크리자 어깨로 발길질이 날아왔다. 중심을 잡을 틈도 없이 쓰러진 여준을 타고 앉은 영재는 완전히 새카맣게 가라앉은 눈을 하고 있었다.

“이 씹새끼…. 내가 오늘 너 죽여 버리고 만다.”

몇 번이나 주먹이 떨어졌는지 헤아릴 수도 없었다. 입 안에서 피가 튀고 눈앞이 흐려졌다. 기도로 흘러 들어간 핏물에 숨이 덜컥 막혔다. 쿨럭, 거센 기침을 내뱉은 여준이 죽을힘을 짜내어 영재의 팔을 밀쳤다.

“옛날부터 그랬어. 넌 원래 이런 새끼였어. 지밖에 모르는 새끼, 말은 듣기 좋게 살살 굴려 하면서 뚜껑 까 보면 다 위선이지!”

‘선배는 항상 그랬어요. 비열하고, 치사하고 이기적이고 자기밖에 모르죠.’

“계속 벼르고 있었어. 내가 기회만 되면 제일 먼저 목 졸라 죽이고 싶은 게 너였어!”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에 여준의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투명하게 부푼 눈동자로 가느다란 핏물이 스며들었다.

“내가 오늘 너랑 끝장을 보고…!”

칼날 같은 목소리가 뚝 끊기고, 눈앞에서 영재가 뭔가에 밀쳐져 바닥으로 나동그라지는 동안에도 여준은 멍하니 허공만 바라보고 있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눈물이 핏물을 씻어 내렸다.

“뭐, 뭐야? 뭐야, 너!”

영재가 비명을 질렀다.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그제야 여준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온몸에 감각이 없었다. 물에 잠긴 듯 소리가 뚝뚝 끊겼다.

“뭐 하는 거야! 내 시계 내놔!”

눈을 깜빡여 가물가물한 시야에 와이퍼질을 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번쩍거리는 손목시계였다. 등 뒤로 한껏 치켜든 주먹, 손가락 마디에 두꺼운 금속 시계가 둘둘 감겨 있었다.

“악!”

뻐억, 검은 인영이 주먹을 휘두르자 엄청난 소리가 났다. 여준은 바닥을 짚고 일어서려 했으나 무릎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입을 벌렸지만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불러야 할 이름은 똑똑히 알고 있었다. 다시 한번 목소리를 쥐어짜 냈다.

“…사현아.”

돌아본 얼굴이 익숙했다. 꿈에서 본 그 모습이었다. 웅크린 채 보살핌을 기다리던 나약한 새끼짐승.

“사현아.”

재차 부른 여준이 손을 뻗었다. 사현은 잠시 머뭇거리다 다시 영재 쪽으로 몸을 돌렸다. 영재는 벽에 기대어 주저앉은 채 양팔을 들어 머리를 가리고 있었다.

“손 내려.”

짧게 명령한 사현이 영재의 팔꿈치를 걷어찼다. 영재는 억, 소리를 내며 쓰러지면서도 끝끝내 팔을 풀지 않았다. 사현아, 여준이 바닥을 기어 사현에게로 다가갔다.

“내려.”

사현은 이번에는 옆구리를 걷어찼다. 영재는 온몸으로 튕겨 오르며 아악, 악! 요란한 비명 소리를 냈다. 여준은 그제야 골목길 입구에 몰려든 인파를 볼 수 있었다. 핸드폰을 꺼내 어딘가로 전화를 거는 사람도 있었고 흥미로운 듯 카메라를 들이대는 사람도 있었다. 쯧, 혀를 찬 사현이 여준을 막아선 채 재킷을 벗었다.

“사현….”

“이름 부르지 말아요.”

냉랭한 목소리에서 꿈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여준은 멍하니 제 머리 위로 떨어진 사현의 재킷을 손으로 붙들었다.

“손 내려. 이 자리에서 십이지장까지 토하고 뒤지고 싶은 거 아니면.”

짧고 강한 경고였다. 영재의 어깨가 움찔 흔들렸다. 천천히 내리는 두 팔이 부들부들 떨렸다. 잔뜩 겁먹은 얼굴이 시뻘겋게 일그러져 있었다. 사현은 깨진 시계를 한 칸 더 당겨 손마디에 둘렀다. 그가 무슨 짓을 하려는지 짐작한 여준이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그만해. 하지 마.”

“가만히 있어요.”

“하지 마! 주변이 안 보여? 길 한복판이야. 경찰에 끌려가고 싶어?”

그 말에 사현이 픽 웃었다.

“경찰?”

고작 그게 무서울까 봐? 여준의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그는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하지 마. 아무튼 부탁이니까 하지 마…. 제발.”

무엇도 바라지 않았다. 영재를 똑같이 때려 주고 싶다거나, 그에게 받은 모욕을 고스란히 돌려주고 싶은 게 아니었다. 사현이 해결사로 나서는 상황은 더더욱 바라지 않았다. 여준이 원하는 바는 오로지 영재와의 연을 끊는 것뿐이었다.

“가자. 응? 다른 데 가서 나랑 얘기해.”

“…….”

“응?”

여준이 사현의 팔을 끌어당기며 애원했다. 그동안에도 영재는 거친 숨을 내쉬며 여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사현의 시선을 느끼고 곧장 고개를 돌리기 전까지.

“사현아. 제발.”

반복된 간청에 사현이 마침내 발걸음을 옮겼다. 여준은 그대로 사람들이 모여든 길을 등지고 큰길로 향했다. 다행히 바로 앞이 택시 정류장이었다. 택시 기사는 난데없이 차에 들이닥친 피투성이 남자와 얼굴 가득 커다란 흉터가 그어진 남자를 보고 안색이 새파랗게 질렸다.

“…소, 손님. 어떻게, 병원으로 갈까요?”

“죄송합니다. 차 더럽히지 않을게요. 역삼동 K호텔까지 부탁드립니다.”

최대한 정중하게 말한 여준이 안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입을 막았다. 입 안이 온통 축축하고 따가웠다. 뒤늦게 몰려드는 통증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사현은 허옇게 굳은 얼굴로 운전석 시트만 노려보고 있었다. 차 안은 숨 막히는 침묵으로 빈틈없이 들어찼다.

***

사현의 방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와 다르지 않은 모습이었다. 고급스럽고, 깔끔하고, 지나치게 밀폐되어 있었다. 여준은 방문이 닫힌 뒤에야 내내 쥐고 있던 손수건을 얼굴에서 떼어 냈다. 스며든 핏물에서 비린내가 났다.

“앉아요.”

깨진 시계를 풀어 내려 둔 사현이 자리를 청했다. 딱딱하고 냉랭한 말투였다. 여준은 잠시 머뭇거리다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밝은 조명 아래서 보니 온몸에 성한 곳이 없었다. 옷은 흙먼지로 뒤덮였고 손날도 온통 바닥에 쓸려 피가 맺혀 있었다. 특히 입 안이 구석구석 욱신거리고 따가웠다. 놀란 마음이 가라앉자 한순간 통증이 몰려들었다.

“윽….”

부은 뺨에 손을 대자마자 여준이 짧게 신음했다. 그러자 그때까지 뒤돌아 있던 사현이 벼락같이 돌아보았다. 한걸음에 달려온 그가 여준 앞에 무릎을 대고 앉았다.

“나 봐요.”

“…….”

“입 벌려 봐요. 어서.”

조심스러운 손끝이 턱끝에 닿자마자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눈물이 찔끔 나올 정도로 쓰라렸다.

“이 나갔으면 바로 응급실 가야 해요.”

“그 정도는….”

“벌려 봐요. 천천히.”

차가운 엄지가 여준의 아랫입술에 닿았다. 여준은 시선을 내리깐 채로 천천히 입을 열었다. 미간을 찌푸린 채 여준의 턱을 받치고 있던 사현이 긴 한숨을 쉬었다.

“이 흔들리는 것 같아요? 어금니 물어봐요.”

시키는 대로 하려 했지만 붓기 시작한 입 안에 어금니를 똑바로 맞추기도 쉽지 않았다. 몇 번을 시도하던 여준이 포기하고 고개를 저었다. 못 하겠어, 너무 아파.

“…다른 데는 괜찮아요?”

사현이 차분하게 물었다. 영재를 향해 있던 살의가 깨끗한 거짓말인 듯 전에 없이 고요한 모습이었다. 여준은 한 손으로 뺨을 감싼 채 숨을 골랐다.

“괜찮아. 별거…. 별거 아니었어.”

되도록 똑똑히 말하고 싶었지만 아픈 입 안에 자꾸만 발음이 뭉그러졌다. 목덜미로 찐득한 땀이 배어들었다. 스스로가 바보 같아 자꾸만 열이 올랐다.

“너는 어떻게 거기 있었어? 또 나 쫓아다녔어?”

“난 선배 쫓아다닌 적 없어요.”

“웃기지 마. 스토킹을 한 게 아니고서야 어떻게 매번….”

“내가 계속 경고했었잖아요.”

“…….”

“물어봤잖아요. 이상한 일 없는지.”

짓씹어 뱉던 사현의 고개가 점차 아래로 떨어졌다. 그제야 여준은 그가 자신을 책망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러자 궁금해졌다. 무엇에 대한 원망인지.

“기어코 이 꼴을 당하니 속이 시원해요?”

“사현아.”

“왜 죽여 버리지도 못하게 해? 내가 그 새끼 배를 터뜨려서 죽여 주겠다는데 왜 뜯어말리는데?”

“…그런 소리 좀 하지 마. 듣는 것만으로 소름 끼쳐.”

여준이 미간을 가늘게 찌푸렸다. 뭐라 더 말하려던 사현이 이를 꽉 악물었다. 움푹 팬 뺨이 바르르 떨렸다.

“그래서 넌….”

뺨부터 뜨거운 열이 퍼졌다.

“뭘…. 알고 있는 거야?”

머릿속이 와글와글 끓어오른다. 사현은 대답 없이 일어나더니 룸 전화를 집어 들었다.

“얼음 좀 부탁합니다.”

‘그거 네 거 아니야.’

영재가 악에 받쳐 외치던 말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게 처음부터 네 거였는 줄 알지? 아니야.’

“사현아.”

“말 걸지 말아요. 대답할 기분 아니니까.”

“나 그 시계 어디서 봤는지 기억났어.”

영재가 보란 듯이 차고 다니던 금장 롤렉스는 전면이 깨지고 피로 범벅이 된 채 사현의 호텔 방 테이블에 놓여 있었다. 사현이 영재를 때려눕혀 놓고 그의 손목에서 풀어내 제 손마디에 채운 것이었다. 영재의 얼굴을 가장 효과적으로 아작 내기 위해서.

영재가 찾아왔을 때부터 유난히 눈에 띄었다. 뒤늦게야 떠올랐다. 시계는 신혼집을 꾸민 후로 몇 번 들여다보지도 않았던 서재, 특별 주문한 원목책상의 가장 아래 서랍에 들어 있었다. 남녀 한 쌍으로 맞춘 금장시계였다. 지오의 첫 돌을 얼마 앞둔 무렵이었기에, 여준은 은아가 아이의 첫 생일을 자축하기 위해 준비한 선물일 거라 짐작했다. 못 본 척 있던 자리에 넣어 두고 은아에게 줄 목걸이를 샀다.

그리고 다음 날, 은아의 손목에는 여준이 보았던 그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시계 샀어? 묻자 은아는 픽 웃었다.

‘웬일로 나한테 관심을 다 가지셔?’

어쩐지 그 뒤로 서재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사모님께 내연 상대가 있었을 가능성은….’

형사의 말에도 놀라지 않았다.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네, 또. 사는 거 바쁘다고….”

여준이 조심스레 시계를 들어 올렸다. 깨진 시계에서 낙엽이 바스라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사현은 아무 말 없이 그런 여준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너 다 알고 있었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는데요.”

“은아가…. 혹시…. 영재 만났어?”

사현은 침묵할 뿐이었다. 충분한 대답이었다.

“어떻게 알았어? 말 좀 해 줘 봐…. 궁금해서 그래.”

“선배.”

“너 혹시…. 그거 때문에 은아 죽였어?”

‘와이프 목숨값으로 호의호식하다 보니 뵈는 게 없냐?’

그 말은 억울했다. 그 돈에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으므로.

‘그게 다 처음부터 니 꺼였던 것 같아?’

그 말에는 그런가, 싶었다. 강남 한복판의 신축 아파트와 커다란 외제 차는 여준의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은아가 죽은 뒤에도 당연하게 누렸다. 아이에게 혼란을 줄 수 없다는 편리한 핑계를 스스로에게 되뇌어가며.

언제부터였을까. 여준은 머리를 감싼 채 밀려드는 열을 견뎠다.

“자의식 과잉이 좀 지나친 거 아니에요?”

사현이 거침없이 찬물을 끼얹었다. 여준은 웃거나 화내는 대신 가만히 사현을 올려다보았다.

“당신 와이프가 그 새끼랑 붙어먹었는지 어쨌는지는 내가 알 수도 없고 알 바도 아닌데요. 설령 그렇다 한들 그게 왜 내가 그 여자를 죽일 이유가 되는 건데요?”

“…….”

“감히 성여준을 두고 바람을 피우다니, 뭐 이런 거? 내가 고작 그런 일로 자살 특공대 짓을 했다고요? 당신을 너무 사랑해서?”

시원스러운 입매에 사정없는 비웃음이 걸린다. 그래도 여준은 동요하지 않고 사현을 바라보았다. 터무니없는 비약이라는 건 스스로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면 영재의 말과, 집착과, 은아의 비극적인 결말이 달리 어떻게 연결될 수 있단 말인가.

“그거 병이에요. 고쳐요. 나중에 제정신 차리고 나서 후회하지 말고요.”

“사현아.”

“당신 지금 아드레날린이 갑자기 분비돼서 잠깐 맛이 간 거예요. 사람이 너무 놀라면 그럴 수 있어요. 살면서 이 정도로 맞아 본 것도 처음일 테고.”

“…넌 자주 있었어? 이 정도로 맞아 본 적.”

여준이 아픈 뺨을 누르며 씩 웃었다. 자고 일어나면 얼굴이 어떤 꼴일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여준을 마주 보던 사현이 이를 꾹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

“아니라고 했어요. 제발 그만하고 정신 좀 차려요.”

“언제부터 알고 있었어?”

“…….”

“…정말로 이거 다 헛소리야? 그래, 그럴 수도 있지….”

애써 웃던 여준의 눈이 붉게 젖어 들었다. 핏물이 말라붙은 속눈썹이 금방 축축하게 녹았다. 여준은 고개를 떨군 채 밀려올라 오는 울음을 참았다.

“정말로 아니야?”

무엇을 바라 캐묻고 있는지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여준은 어느새 언젠가 사현의 손을 잡고 걷던 판자촌 골목길을 떠올리고 있었다. 어둡고 가파른 길이었지만 사현이 곁에 있어 두렵지 않았다.

사현과 함께 있을 때면 언제나 들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똑바로 마주하는 시선은 티끌 하나 없이 오롯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애정이 한순간 변질된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 믿고 싶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여준 스스로를 탓하는 것이었다. 내가 뭔가 잘못했겠지. 날것 같은 욕망에 두려움을 느끼고 도망친 일에 상처를 받았겠지. 그래서 실수한 거겠지. 그러니까 용서해 주자. 한 번만 사과한다면,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말한다면….

하지만 사실은, 단 한 번도 변질되었던 게 아니라면. 오히려 상상 이상으로 깊어졌기에 벌어진 일이었다면.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면. 이를 테면….

“10년 전에도 혹시…. 영재 때문에 저지른 일이었어?”

열여덟의 여준은 준비가 되어 있었다. 언제든 사현의 죄를 사하고 이전 같은 관계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믿었다. 사현의 말 한마디면 가능한 일이었다.

열이 손끝까지 퍼졌다. 입 안에 고이는 피를 삼키느라 목이 따가웠다. 사현은 여준의 무릎에 시선을 맞춘 채 죽음 같은 침묵을 지켰다. 여준은 더운 숨을 길게 뱉어 내고 사현의 양 뺨을 쥐었다. 힘을 주어 끌어당겼지만 사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사현아.”

“…만약에.”

“…….”

“정말 만약에요. 정말로…. 만에 하나.”

여준이 고개를 끄덕였다. 응, 정말로 만에 하나….

“만에 하나 선배 말이 다 맞다고 한다면….”

응, 여준이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어떻게 할 건데요?”

“…….”

“용서할 수 있어요?”

당신 아내를 죽인 나를.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들어 올리는 사현은 세례를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보였다. 여준은 포도주를 머금은 신부 같은 얼굴을 하고 사현의 눈가를 쓰다듬었다. 검고 반질반질한 눈동자. 옛날부터 그랬다. 하나하나 뜯어 보면 어리고 순한 얼굴이었다. 세월이 지나 딱딱하게 여물고, 얼굴 한가운데엔 커다란 흉터까지 그어졌지만 마찬가지였다.

“…….”

여준의 뺨을 타고 굵은 눈물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아니.”

떨리는 대답을 성체처럼 받아먹으며 사현은 미소 지었다.

“다행이네요.”

여준에게서 서러운 울음이 터지고, 몸을 일으킨 사현은 그런 여준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선배.”

사현의 목소리는 오래전의 여름에서 그대로 건져 온 듯 조심스럽고 다정했다. 여준은 사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오래 울었다.

“왜…. 나한테 먼저 말하지 않았어?”

“잊어버려요.”

“그런 짓을 하면 뭐가 나아질 거라 생각했어? 은아가 그런 식으로 죽으면 나는 발 뻗고 살 것 같았어? 어떻게 그럴 수가 있겠어. 어떻게….”

“다 잊어버려요.”

“나는…. 네가 그런 인간인 거 받아들일 수 있었어. 분명히 그랬어. 그때는, 그땐 정말 그랬단 말이야.”

“알아요.”

여준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사현은 전에 없이 서글프고 처연한 얼굴이었다.

“내가….”

“…….”

“내가 그렇게 못 미더웠어…?”

눈물이 끝없이 흘렀다. 공기 중의 모든 수분이 여준에게 빨려 들어가는 듯했다. 해를 받으면 무지개도 필 것 같았다.

“나한테 말했어야지. 알게 됐다면 그랬어야지.”

“네.”

“왜 그랬어? 내가 널 못 믿을 것 같았어? 그럼 설명했어야지, 그때라도 전부….”

“…….”

“그랬으면….”

그랬으면 너를 용서할 수 있었는데. 모든 게 없던 일인 양 받아들일 수도 있었는데. 여준은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하염없이 곱씹었다.

“이젠 그럴 수가 없잖아….”

은아가 죽었다. 사현이 죽였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반드시 한 가지 결론으로 귀결되어야 한다.

“이젠….”

이건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일이다.

“선배.”

사현이 여준의 무릎에 두 손을 올렸다. 온순하고 충성스러운 동작이었다. 여준은 벌겋게 부은 눈으로 사현의 매끄러운 시선을 마주해야 했다.

“나는 선배 원하지 않아요.”

나긋나긋한 고백이 무겁고 저렸다.

“그러니까 아무것도 고민할 필요 없어요.”

툭, 툭, 소나기 같은 눈물이 사현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처음부터 그랬어요. 선배를 처음 본 날부터 나는…. 한 번도 그런 거 원한 적 없었어요. 당신이랑 뭘 어쩌고 싶다거나, 당신이 뭘 어떻게 해 줬으면 좋겠다거나.”

“…….”

“애초에 선배는 나한테 그럴 수 있는 사람도 아니었어요. 태어날 때부터 나랑은 다르잖아요.”

사현의 손등이 여준의 눈가를 스쳤다. 물론 눈물을 훔쳐 내기엔 역부족이었다. 여준은 고개를 젓고 사현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그렇게 생각 안 했어.”

“알아요. 당신은 공정한 사람이니까.”

“공정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야.”

“그런 문제예요. 그래서 비열하게 느껴진 거죠. 사실은 나 같은 사람이 넘볼 수도 없는 건데, 보란 듯이 전시해 두고 누구에게든 내줄 것처럼 굴었으니까.”

“…….”

“어리석었던 건 나예요.”

여준이 할 말을 찾으려 입을 달싹이는 사이 벨이 울렸다. 여준의 무릎을 짚고 일어선 사현이 문을 열고 아이스 버킷을 받아들었다. 그는 수건에 얼음을 담아 끝을 오므려 잡고는 여준의 곁으로 돌아왔다.

“눈 감아요.”

여준은 순순히 그의 말을 따랐다. 깊이 감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사현은 조심스러운 손길로 여준의 앞머리를 쓸어 넘기고 이마부터 눈가, 뺨과 코끝 순서로 찜질을 해 주었다. 차가운 수건이 닿을 때마다 온몸을 휘돌던 열이 조금씩 내려가는 듯했다.

“다 잊어버려요. 쉬운 일은 아니겠지만.”

그 말에 여준이 천천히 눈을 떴다. 갈색 눈동자가 희붐하게 흐려져 있었다.

“다른 사람 말은 듣고 싶은 대로 들어요. 내 말도 마찬가지예요. 믿고 싶은 대로 골라서 믿으면 돼요.”

“…….”

“약게 살아요.”

“…….”

“제발 부탁이니까.”

작별의 순간이 차곡차곡 쌓여 가는 소리가 들렸다.

욕실 안은 따뜻한 공기로 가득 찼다. 피와 흙먼지로 더러워진 옷을 벗자 어깨며 등에 멍이 든 몸이 거울에 비쳤다. 다가온 사현이 혀를 차며 여준을 살폈다. 팔을 쥐고 돌려가며 훑는 시선에 여준은 슬쩍 웃었다.

더운물로 땀과 피를 씻어내고 젖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동안 사현은 욕조에 물을 받고 입욕제를 풀었다. 여준이 있는 샤워 부스 안까지 달큼한 유자 향이 풍겼다.

“들어가요.”

사현이 손을 툭툭 털며 말했다. 여준은 조금 망설이다 그가 이끄는 대로 욕조 안으로 들어가 앉았다. 손끝 발끝까지 따뜻하게 녹아내렸다. 곁으로 다가온 사현이 욕조에 팔을 살짝 담갔다. 팔꿈치 위까지 걷어 올린 소맷자락이 젖을 듯 말 듯 아슬아슬했다.

“온도 괜찮아요?”

“응.”

“잠깐 앉아 있어요. 나가서 약 좀 사 올 테니까.”

미련 없이 일어서는 사현을 향해 여준이 무심코 손을 뻗었다. 당연히 본 척도 않고 나갈 줄 알았던 사현이 멈칫했다.

“…왜요?”

다시 무릎을 굽힌 그가 물었다. 조심스럽고 상냥한 목소리였다. 여준은 가까워진 팔에 손을 얹고 한참을 망설였다.

“방에는 약 없어?”

“상비약이야 있는데 선배 지금 상태가 심각하잖아요.”

“있는 거면 됐어, 그러니까….”

나가지 마. 마지막이니까. 차마 뱉지 못한 말이 입 안을 휘돌았다.

“알았어요.”

그 말이 들리기라도 한 것처럼 사현은 순순히 주저앉았다. 그대로 욕조에 팔을 올린 사현이 제 팔오금에 옆머리를 묻었다. 빤히 바라보는 시선에 여준은 뒤늦게 부끄러워졌다.

“뭘 그렇게 봐.”

“그냥요.”

“…….”

“하나도 안 변했다 싶어서….”

부드럽고 상냥한 침묵이 이어졌다. 여준도 무릎을 끌어안은 채 사현을 바라보았다.

“선배.”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사현이 입을 열었다.

“아까도 말한 거지만 나는 선배한테 바라는 게 없어요. 평생 그럴 거예요.”

“…….”

“그러니까 선배는 뜻대로 하면 돼요. 나를 용서하거나 이해하려 할 필요 없단 거예요. 내가 선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상관없어요. 어느 쪽이든 내가…. 원래 이런 인간이란 사실이 변하지는 않으니까….”

“…….”

“…걱정 말아요.”

약게 살아요. 사현의 말은 언제나 한 가지 결론으로 끝났다.

“그런데요…. 선배.”

또 한참의 침묵이 지난 후에야 사현이 중얼거렸다.

“이것도 정말 만약의 이야긴데요. 어차피 우리…. 오늘 이후로는 안 만날 거잖아요.”

여준의 눈가가 희게 굳어졌다. 사현은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리더니 겹쳐 놓은 팔 사이로 이마부터 푹 파묻었다.

“두 번 다시 나 안 볼 거라서 잘해 주는 거잖아요, 아까부터.”

고개를 끄덕였지만 사현에게는 보이지 않았을 터였다.

“그러니까 혹시…. 만약에요.”

“…응.”

“10년…. 아니, 30년. 그것도 빠르다면 40년, 50년….”

“…….”

“선배가 쭈글쭈글 못생기고 등도 다 굽은 할아버지가 돼서…. 돌아봐 줄 사람 하나 없이 볼품없어졌을 때.”

여준의 손끝이 사현의 머리카락에 닿았다. 검고 결 좋은 머리였다.

“혹시 그때는 한 번쯤 다시 만날 수 있어요?”

빈틈없이 깎이고 다치고 경화된 사현에게서 유일하게 부드러운 부분이었다.

“시키는 대로 다 할 테니까….”

애원하는 목소리조차 거칠게 쉬어 있었기에.

“정말 한 번이면 되는데.”

여준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몸을 일으켜 사현을 꽉 끌어안는 것뿐이었다.

***

응급처치를 잘한 덕분인지 얼굴 상태는 생각보다 심각하지 않았다. 입 안의 상처 탓에 뺨이 벌겋게 부어 있었지만 얼핏 봐서는 잘 모를 정도였다. 이 정도면 구내염 때문이라고 대충 속일 수 있지 않을까. 마음이 한결 가벼워진 여준이 옅은 한숨을 쉬었다.

“입고 가요.”

가운 차림의 여준에게 다가온 사현이 깨끗한 셔츠와 블랙 진을 건넸다.

“선배 옷은 세탁 맡겼어요. 나중에 집으로 보낼게요.”

“아…. 고마워.”

품이 컸지만 우스꽝스러울 정도는 아니었다. 셔츠 깃에서 사현이 쓰는 향수 냄새가 났다.

“그럼 이 옷은….”

“안 돌려줘도 돼요. 어차피 안 입는 거예요.”

시간은 새벽 두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여준은 커프스 버튼까지 채우고 나서야 자리에 앉았다. 소파 팔걸이에 기대앉아 있던 사현이 여준의 모습을 위아래로 훑었다.

“좀 추우려나.”

“어?”

“기다려 봐요.”

그대로 침실로 향한 사현이 드레스룸 서랍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애초에 옷가지가 많이 없는지 변변한 물건이 보이지 않았다. 여준은 그제야 사현의 의도를 깨닫고 그의 팔을 잡아당겼다.

“괜찮아. 택시 타고 갈 건데 뭐.”

“그럼 데려다줄게요. 요즘 새벽엔 쌀쌀해서 그러고 다니면 추워요.”

“아니….”

“가요.”

더 말릴 틈도 없이 사현이 차 키를 집어 들었다. 망설이던 여준은 결국 짐을 챙겨 그를 따라나섰다.

지하 주차장부터 한기가 느껴졌다. 여준이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을 본 사현은 시동을 걸자마자 난방 온도부터 올렸다. 쏟아져 나오는 더운 바람에 금방 답답해졌다.

“그런데 시터가 이 시간까지 애를 봐줘요?”

차를 출발시킨 사현이 물었다. 내일도 볼 사이처럼 일상적이고 부드러운 대화였다. 여준은 조수석 시트를 살짝 눕히며 대답했다.

“원래 애 하원 시키고 저녁까지만 봐주는 건데…. 보다시피 제시간에 퇴근하는 일이 거의 없지.”

“돈도 장난 아니게 나가겠네요.”

“돈이 문제가 아냐. 이렇게 시간 유동적으로 쓸 수 있는 시터 구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거든. 남들 받는 돈 두 배 주고서라도 붙들어 놔야 돼.”

새벽의 도로는 고요했다. 가로등 불빛만이 줄지어 스쳐 갈 뿐이었다. 여준은 일렬로 이어지는 빛의 행렬에 시선을 고정한 채 입을 열었다.

“사현아.”

“네.”

그러나 그 이상 아무 말도 꺼낼 수 없었다. 그 순간 자신의 침대 위에서 깨어나게 될 것 같았다. 현실의 실낱같은 실감, 몸 이곳저곳에 남은 통증만이 위안이었다.

“선배.”

“…….”

“…….”

거리는 지나치게 한산하고, 집은 말도 안 되게 가까웠다.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갑자기 초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뒷말을 재촉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자신이 듣고 싶은 말은 아닐 것 같았다. 사현 역시 부연하지 않았다.

“사현아.”

마무리가 제 몫으로 넘어왔다는 신호였다. 여준은 깊은숨을 들이쉬었다.

“나는…. 이 세상에는 돌이킬 수 없고, 돌이켜서도 안 되는 일이 분명 존재한다고 생각해.”

“…….”

“그러니까….”

은아는 죽었다.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아이는 평생 엄마라는 존재에 대해 모르고 자라야 한다. 겪어 본 적 없는 일이었으나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가 말문이 트이기도 전에 얻은 결핍은 여준이 아무리 노력해도 메울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여준은 바로 그 아이를 평생 지켜봐야 한다.

“…그러니까 50년이 아니라 100년이 지나도.”

사현은 단두대를 올려다보는 죄수 같은 모습이었다. 차분하게 가라앉은 눈빛에 깊은 체념이 담겨 있었다.

“그래도…. 그럴 수 없어.”

이어진 말에는 가만히 눈물 한 방울을 떨어뜨렸다.

“다행이네요.”

진심 어린 대답을 입술에 걸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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