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8/21)

가청주파수 2권

#07. 동정

“뭐 때문에 소란스러워?”

아침부터 사무실이 시끌벅적했다. 쪽새에게 차 키를 건넨 사현이 지나가듯 묻자 핸드폰, 태블릿PC, 수화기 따위를 들고 저마다 분주하던 직원들이 눈치를 보며 슬슬 물러섰다.

“신경 쓰실 만한 건 아닙니다.”

“그거 네가 결정할 일이야?”

“…정말 별일 아닙니다. 그냥 저기…. 어제 풀어놓은 개떼에서 앵꼬 하나 났다 합니다. 바로 수습하겠습니다.”

“글쎄 용역 하나 나가떨어진 게 왜 이 꼬라지가 날 일이냐고.”

“…….”

“대답 안 해?”

쪽새의 옆얼굴 가득 식은땀이 맺혔다. 좁고 낡은 사무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이리저리 눈알을 굴리며 궁리하던 쪽새가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무슨 청년단 활동한다는 쁘락치 새끼더라고요. 몸에 카메라까지 붙이고 왔던 것 같아요. 지가 찍고 녹음한 거 방송사랑 신문사에 쫙 뿌리겠다면서….”

“어제 어디 갔는데?”

“H동 갔었습니다. 왜 얼마 전에 큰형님, 아니 사장님이 받아 오신 대양건설….”

“프락치는?”

“잡아 뒀습니다. 데이터 뱉으면 보내 주겠다고 했는데 거, 새끼가 독종이데요.”

“운전해.”

벗어 둔 재킷을 도로 집어 든 사현이 짧게 명령했다. 쪽새는 사현과 제 손에 쥔 차 키를 한 번씩 번갈아 보더니 입을 쩍 벌렸다.

“직접 가시게요? 뭐 하러….”

“부연 설명 더 필요해?”

“아, 아닙니다.”

얼른 고개를 숙인 쪽새가 앞장섰다. 하늘이 유독 파랗고 높았다. 사현은 조수석 시트를 끝까지 젖힌 채 드러누웠다. 온몸의 관절이 마찰하는 느낌이었다. 절로 앓는 소리가 샜다.

“형님, 괜찮으신 겁니까? 아직 험한 일 하실 몸 상태는 아니라고 홍게 형님이….”

시동을 건 쪽새가 조심스레 물었다. 사현은 대답 없이 글로브박스 위로 두 발을 겹쳐 올렸다.

“어쩌다 그런 새끼가 붙었어?”

사현이 재킷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자 쪽새가 라이터를 가져다 대었다.

“인력소 짬이 좀 있는 새낍니다. 사무소 나온 지 벌써 반년은 됐다는데요. 송 사장한테 형님, 형님 그러더라고요.”

“반년을 굴러? 무슨 판을 짰길래 그 수고를 했대?”

“제 생각이지만요. 이 새끼가 처음부터 뭘 노리고 시작한 짓은 아니고, 이쪽 일하면서 왜…. 아시잖습니까, 뭐 이렇게까지 돈 벌어 먹고살아야 하나 싶고…. 그러던 와중에 민생당 쪽 청년당원인지 뭐시긴가가 애를 꼬드긴 거 같아요. 다음 선거에 민족당 족치려고 대양건설 파고 있다더라고요.”

하아, 절로 한숨이 흐른다. 사현은 담배 연기를 깊이 삼키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걸 파서 뭐 하려고. 철거 용역 쓰는 게 대양건설밖에 없는 것도 아닌데.”

“그러니까 드라마 하나 찍으려고 한 거죠. 어제 간 게 또 하필이면 노인네랑 애새끼 둘이 사는 집이어서…. 그림이 영 그랬던 것 같습니다.”

N동을 빠져나와서도 한참을 달려 도착한 곳은 서울 외곽의 재개발 지구였다. 프락치는 바로 어제 쪽새가 알바들을 끌고 방문했던 그 집에 감금되어 있었다. 벽이며 바닥을 있는 대로 뜯고 허물어 놓은 부엌은 황량하기 그지없었다. 빠루를 대어 닫히지 않게 해 놓은 방문 너머로 퀭한 눈을 한 노인과 예닐곱 살 가량의 어린 소년이 보였다.

프락치는 시멘트 바닥에 팬티 바람으로 무릎을 꿇은 상태였다. 세입자를 쫓아낼 때 부엌과 화장실부터 못 쓰게 만드는 것은 용역들의 오랜 노하우다. 인간다운 생활을 할 수 없는 집에서는 누구도 오래 버티지 못한다. 사현은 어슬렁어슬렁 개수대로 걸어갔다. 수도와 가스를 끊어 놓은 부엌은 당장이라도 주저앉을 듯 허술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잘 도망가지 그랬어.”

개수대에 담배를 비벼 끈 사현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중얼거렸다. 프락치가 피 묻은 얼굴을 들어 올렸다. 20대 초반 즈음으로 보였다. 어리지만 삶에 찌든 눈이었다.

“어쩌자고 학교에 갔어? 무슨 생각으로.”

프락치는 태평하게도 학교에 나갔다가 강의실 한가운데서 머리채를 잡혀 끌려 나왔다. 당연히 그 난장판을 본 누군가가 경찰에 신고했겠지만, 그들이 이 장소를 찾아냈을 즈음엔 이미 모든 상황이 끝나 있을 터였다.

“그런 짓을 저질렀으면 어디 외국으로 튀든가 했어야지. 설마 아무 일도 안 일어날 줄 알았어?”

“으웁, 읍….”

프락치의 무릎 앞에는 그의 지갑과 핸드폰, 신분증이 열 맞춰 놓여 있었다. 느린 걸음으로 다가간 사현이 반질반질한 신분증을 주워들었다. 이름은 한준호. 갓 스물에 접어든 어린애였다.

“입 열어 봐.”

사현이 한준호의 신분증 끄트머리를 그의 턱끝에 가져다 대었다. 한준호가 바들바들 떨며 입을 벌렸다. 위아래 앞니가 모조리 빠져 피가 질질 흐르고 있었다. 사현이 슬쩍 눈썹을 찌푸렸다.

“형님, 그거 저희 애들이 한 게 아니고요. 이 새끼가 반항하다가 혼자 자빠져서 그렇게 된 겁니다.”

쪽새가 묻지도 않은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았다. 사현은 못 들은 척 한준호의 입을 도로 닫아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부터 한 가지 제안을 할 테니까 잘 듣고 판단해. 결정은 네 몫이야.”

“…….”

“우선 네가 여기서 찍은 데이터, 그게 저 방에 있는 노인네랑 애새끼가 아무리 불쌍하게 빽빽대는 동영상이라 해도 아무 소용없어. 유튜브에 백날 올려 봤자 아무 일도 안 일어나. 그래도 끝끝내 올바른 사회 정의 구현을 꿈꾸며 투사 노릇을 하겠다면 안 말릴 테니까 뜻대로 해.”

“…….”

“…뭐 이러고 끝날 일이었으면 지금 너한테 이 지랄도 안 떨었겠지. 물론 너 혼자 올려서는 아무 일 안 일어나겠지만…. 높으신 분들이 작정하고 밀어 버리면 그건 우리도 꽤 골치 아프거든.”

“…….”

“이 정도 했으면 오래 버텼잖아. 적당히 챙길 거 챙기고 집에 가서 쉬고 싶지?”

그때 와장창,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돌아보니 두 손으로 야구 배트를 꼭 쥔 소년이 숨을 몰아쉬며 서 있었다.

“형 괴롭히지 마!”

얼씨구. 쪽새를 비롯한 패거리에게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사현은 쪼그려 앉은 채 소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를 훑어 내렸다. 얼른 달려 나온 노인이 소년을 붙들어 품으로 감춰 놓았다. 소년은 벌벌 떨면서도 끝까지 사현을 노려보았다.

“그런 말은 형 이빨이 이렇게 되기 전에 좀 해 주지 그랬어.”

사현이 툭 던지듯 내뱉자 작은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욕하면서 때리는 아저씨들만 있을 땐 잘 숨어 있더니, 차근차근 말하는 사람 오니까 잠깐 센 척해 봐도 될 것 같았어?”

패거리들이 더욱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한준호는 점점 고개를 떨어뜨렸다. 사현은 한 손에 턱을 괸 채 소년과, 한준호와, 패거리들을 한 명씩 훑어보았다. 천천히 돌리는 시선과 검은 눈동자가 한없이 무감했기에 웃음소리는 금방 잦아들었다.

“니들은.”

싸늘하고 축축한 공간은.

“뭐가 그렇게 웃기냐?”

언제나 그 반지하 방을 떠올리게 했다.

***

“데이터 받았습니다. USB 갖고 있던 새끼도 잡았다고 하고요. 오늘 내로 마무리될 겁니다.”

쪽새의 말마따나 애초에 사현까지 달려올 일이 아니었다. 그는 쪽새가 내민 캔 커피를 한 손으로 받아 들며 담배 필터를 잘근잘근 씹었다.

“그런데 저희가 잡은 새끼는…. 정말 이대로 보내실 겁니까?”

“데이터 받았고, 공범도 불었는데 안 보내면 뭐 어쩌게.”

“그래도요. 왠지 찝찝하잖습니까.”

한준호가 개수작을 부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앞니 네 개로는 부족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사현은 대답 없이 다 허물어져 가는 주택을 바라보았다. 노인은 얼마 있지도 않은 가재도구를 바리바리 짊어지고 나와 보자기로 하나씩 싸는 중이었다.

그 뒤를 따라 나온 소년이 노인의 곁에 쪼그려 앉았다. 다 낡은 민소매 셔츠에 새파란 반바지 차림이었다. 보나 마나 시장 가판에서 무게를 달아 파는 옷을 아무렇게나 사다 입혔을 것이다. 정돈되지 않은 머리, 때가 타서 꼬질꼬질한 손발, 눈동자에 가득 찬 의심과 독기는 가난하기에 험한 일을 겪는 자들의 특성이었다.

“사무실로 다시 가실 겁니까?”

시간은 점심때를 막 지나고 있었다. 사현은 아예 마당에 주저앉은 아이의 등을 빤히 보다 말고 쪽새를 향해 물었다.

“너희 집은 처음부터 개판이었냐?”

갑작스러운 질문에 쪽새가 두 눈을 둥글게 떴다. 저 말입니까? 표정으로 되물은 그가 옆머리를 긁적였다.

“뭐…. 그렇죠?”

“얼마나 개판인데?”

“그냥 남들만큼 그래요. 애비란 놈은 허구한 날 패고, 애미란 년은 허구한 날 남자 갈아치우고…. 아, 제가 중학생 땐가. 형이 차를 훔쳐서 타고 나갔다가 가드레일 꼬라박고 죽었거든요. 그 차에 타고 있던 형 친구 놈들까지 싹 다.”

“…….”

“그때 딱 한 번 봤어요. 엄마아빠 단합하는 거. 어떻게든 보험사에서 한 푼이라도 더 타내야 된다고 둘이서 머리를 맞대고 밤새도록 끙끙거리는데…. 웃긴 건 장례식장 가니까 다른 부모들도 다 그러고 있더라고요. 하긴, 모조리 쓰레기에 양아치 놈들이었으니 뭐.”

소년은 이제 노인이 건네는 짐을 하나씩 받아 리어카에 싣고 있었다. 하나같이 소년이 들기에는 버거워 보이는 짐이었다. 저딴 것도 재산이라고 손에서 놓지 못하는 노인이 답답하고 한심하게 느껴졌다. 사현은 드러누운 채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근데 그런 건 갑자기 왜 물어보세요?”

“왜, 말하기 싫었냐?”

“아뇨. 이게 뭐라고 싫을 것까지야…. 그냥 저에 대해서 뭐 궁금해하신 적 없었으니까요.”

하늘이 높다. 바람은 선선하다. 나들이하기엔 최고의 날씨였다. 열어 놓은 창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사현의 미간을 훑고 지났다.

“억울한 적은 없었어?”

“뭐가요?”

“왜 나만 이런 집에서 태어났는지, 그런 거.”

성여준과 저 아이의 차이는 뭘까. 나열하자면 끝도 없었다. 성여준은 유복한 교사 집안에서 태어났고, 수려한 용모와 뛰어난 지능을 갖추었다. 대기업에 다니고, 강남 한복판의 새로 지은 아파트에 살고, 커다란 외제 차를 몬다. 삶의 터전을 잃을 위기도, 인간성을 짓밟히고 가차 없는 폭력에 노출될 위험도 없이.

“졸라 억울하죠. 저 학교 다닐 때 취미가 좀 산다는 새끼들 족치는 거였어요.”

“…….”

“재수 없잖아요. 부모 좀 잘 만났다고 비싼 패딩 입고, 비싼 밥 처먹고. 그런 거 다 눈꼴 시려서 보이는 대로 잡아 뜯었어요.”

쪽새가 킬킬 웃었다. 노인과 아이의 이제 리어카를 끌고 멀어져가고 있었다.

“근데 뭐, 어쩌겠어요. 그러려니 해야지.”

“그러려니….”

“나랑은 다른가 보다. 다른 인생 살게 태어났나 보다…. 그러는 거죠.”

하늘이 지나치게 높았다.

사현은 사무실에 들러 쪽새를 올려 보낸 뒤 그대로 차를 몰아 강남으로 향했다. 어린이집 입구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 차를 세우고 시동을 완전히 꺼뜨리자 기묘하리만치 고요한 침묵이 찾아왔다. 조용하고 깨끗한 거리였다.

곧 어린이집이 마칠 시간인지 입구 근처로 몇 대의 차가 더 들어왔다. 단정하지만 고급스러운 차림의 주부들이 하나둘씩 내리더니 자기 아이의 손을 잡고 돌아왔다. 사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그들의 모습을 빤히 지켜보았다. 여준의 아이, 지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더 가까이 가서 살펴보고 싶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얼굴 한가운데를 가로지르는 커다란 흉터 탓에 눈만 마주쳐도 지레 겁먹고 소란을 피우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다. 사고 당시 이마부터 핸들에 처박으며 크게 찢어진 자국이었다.

‘너 실려 왔을 때 의사들이 다 그랬댄다. 얼굴 가죽이 벗겨진 것 같은데 신원 확인이 되겠냐고.’

사경을 헤매다 눈을 떴을 때, 깡추가 가장 먼저 건넨 말이었다.

‘나중에 거울 보고 너무 놀라지나 마라.’

웃음기 하나 없는 경고에도 사현의 머릿속을 지배했던 것은, 어째서 살아났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끝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해방이었다. 지겹고 신물 나는 인생에서, 성여준으로부터. 숭고하고 가련한 희생에 취해 미련 없이 내던진 목숨이었다.

점멸하는 의식 속, 선명한 것은 고통뿐이었다. 지옥에 떨어진 거라고 생각했다. 온몸의 뼈가 조각나고 내장이 몽땅 찢겨 피범벅이 된 배 속은 주기적으로 온 신경을 쥐어짜며 어디까지 버틸 수 있는지 보겠다는 듯 가장 극한의 통증을 끓여 냈다.

다시 찾은 목숨을 단 한 번도 기쁘게 여길 수가 없었다. 아이의 존재를 알기 전까지는.

“…….”

사현이 고개를 들었다. 비교적 수수한 차림의 젊은 여자가 어린아이의 손을 잡고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지오였다.

조사한 바에 따르면 아이의 일과는 다음과 같았다. 여준이 아이를 어린이집에 데려다 놓고 출근하면 오후에 베이비시터가 데리러 온다. 시터는 여준이 퇴근할 때까지 아이를 돌보고, 가끔 자고 가기도 한다. 주말에는 여준이 하루 종일 붙어 있다. 아이가 혼자 있는 시간은 없다고 봐야 했다. 가끔 여준의 처가 사람들이 난동을 피우지 않는 한.

아이는 시터에게 끝없이 종알종알 말을 걸고 있었다. 시터는 대충 말을 받아 주며 걸음을 빨리했다. 여준의 집은 아이의 어린이집에서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었다. 아이의 느린 걸음을 감안해도 이십 분이면 도착할 것이다. 사현은 조용히 차를 출발시켰다. 아무 일 없다는 듯 시터와 아이를 지나쳐 아파트를 향해 달렸다.

아파트 입구 건너편에 차를 세우고 핸들에 팔을 얹었다. 톡, 톡, 검지 끝으로 팔꿈치를 두드리며 기다린 지 한참이 지나서야 멀리서 여자와 아이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이는 한껏 느려진 걸음으로 시터를 보채고 있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마트에서 뭔가를 사 달라고 조르는 듯했다. 시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젓고는 아이의 손을 질질 잡아끌었다. 사현은 그들이 가까워지기를 기다려 조심스레 운전석 창문을 열었다.

“아이스, 크리임. 아빠가 한 개는 괜찮댔는데.”

“집에 있다니까. 집에 가서 줄게.”

“아니야아! 집에 있는 거 말고, 저기서 사는 거! 망고 맛 나는 거!”

“집에 있는 게 망고 아이스크림이야. 아빠가 사 두셨잖아.”

“그거 아니야. 그거 말고, 그거 아니라니까!”

아이가 결국 빽 소리를 질렀다. 시터는 잔뜩 피곤한 얼굴로 몸을 낮추고 아이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마트에서 파는 건 화학물질 잔뜩 들어간 거, 안 좋은 거야. 그래서 아빠가 일부러 좋은 아이스크림 사다 놓으신 거잖아. 지오 먹으라고.”

“아니야아, 아닌데에.”

“자꾸 그러면 집에 있는 건 누나가 다 먹어 버린다? 그래도 돼?”

시터가 등을 돌리고 앉은 틈을 타 사현은 아이의 모습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깨끗하게 손질된 머리, 먼지 하나 없이 말끔한 손톱과 부드러운 분홍빛 뺨. 걸치고 있는 것은 하나같이 고급품이다. 아이의 몸에 딱 맞게 입힌 카디건에는 명품 로고가 붙어 있고 운동화는 눈처럼 새하얗다.

사현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철거촌의 어린 소년이었다. 몸에 맞지도 않는, 그나마도 다 낡아 버린 옷을 얼기설기 주워 입고 지저분한 손을 아무 데나 문질러 닦던 아이.

‘그러려니 해야죠. 나랑은 다른 거라고.’

“아니야! 아니야! 아니라고! 마트에서 먹어야 돼!”

아이가 소리를 빽 지르더니 그대로 주저앉았다. 시터는 익숙한 일인 듯 가벼운 한숨만 한 번 내쉬었다.

“우리 지오 또 떼쓰네. 아빠한테 전화해야겠다.”

“아니야! 아냐! 바보야! 아니야아!”

어찌나 애지중지 아끼며 키우는지, 아이는 같은 옷을 두 번 입을 때가 거의 없었다. 무엇 하나 고급품이 아닌 것도 없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는 아이. 운 좋게 성여준의 아이로 태어나, 모든 것을 누리며 살아갈.

“…진짜 아들이라면 말이지.”

사현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동그란 눈, 부드러운 뺨, 귀 모양부터 입술 형태까지 무엇 하나 여준과 닮은 구석이라고는 없는 아이였다. 2년 전, 반파된 차에서 제 어미와 함께 죽었어야 했던 아이이기도 했다.

그러려니 할 수 있었다. 그런 행운을 타고나는 생명도 있는 거라고. 몇십 억 인구 중에 성여준의 아이로 살아가는 기적과도 같은 축복을- 어차피 누군가는 누리게 되어 있으니까. 하지만 그게 저 아이여서는 안 된다. 사현은 눈을 가늘게 뜬 채 핸들을 툭툭 두드렸다.

“누나 바보야! 누나 싫어! 집에 가! 가아!”

주저앉은 아이가 발버둥을 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목청이 어찌나 큰지 한 번 울음소리를 낼 때마다 귓속을 달군 바늘로 지지는 느낌이 들었다. 창문을 도로 올린 사현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시터는 아이를 달래느라 함께 주저앉아 있었다.

왜 살아났을까. 왜 한 번 내버린 생이 부득불 다시 손안으로 돌아왔을까. 대답을 얻는 일엔 긴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직 정리되지 않은 것이 너무나 많아서였다. 툭, 손가락을 내리칠 때마다 이름 하나씩을 떠올렸다. 떠오른 모든 이름의 음절을 나누어 한 줄로 길게 늘였다. 그것은 마치 성여준의 평안까지 남은 거리처럼 느껴졌다.

***

사람을 엿먹이고 싶으면 말이야.

정확히 언제였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느 때와 같이 지저분한 술자리에서, 여느 때보다 더 격앙된 목소리로 깡추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그 새끼가 젤루 무서워하는 게 뭔지 알아내면 돼.

그의 말뜻을 이해할 생각도 없는 접대부들이 맞아, 맞아 하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러자 깡추는 대뜸 제 옆의 여자에게 물었다. 야, 미니야. 너는 뭐가 제일 무섭냐? 속옷을 벗고 테이블로 올라갈 준비를 하던 ‘미니’가 우웅, 하며 애교 섞인 소리를 냈다.

‘나는…. 실장 오빠?’

‘아니, 씨바, 그런 거 말고 이 계집애야. 니 인생에서 진짜, 이것만은 못 견디겠다 하는 거 있잖아. 너는 고작 포주한테 싸다구 몇 대 맞는 게 인생에서 제일 무서운 일이야?’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갑자기 물어보니까 모르겠어요.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이런 건 어때? 네가 주말에 갑자기 튀김이 막 존나 처먹고 싶었어. 그래서 튀김을 만들려고 기름을 끓였어. 근데 발이 미끄러져서 자빠지는 바람에 끓는 기름을 뒤집어쓰고 얼굴이 씹창난 거야!’

깡추의 목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제가 뱉는 잔인한 상상에 지레 발정한 듯 좁은 얼굴이 기묘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미니는 테이블에 한쪽 발을 올리다 말고 눈썹을 잔뜩 찌푸렸다.

‘그럼 어떨 것 같아? 응? 응? 너 그러고도 멀쩡히 살 수 있어?’

‘오빠, 그만 해요. 무서워….’

‘그렇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무섭지? 씨바 막 입에 올리면 부정 탈까 봐 말도 하기 싫지!’

여자를 향해 양껏 삿대질을 하던 깡추가 홱 돌아보았다. 사현은 그 방에서 유일하게 의복 일체를 갖춰 입은 사람이었다. 닫힌 문 앞에 뒷짐 지고 선 그를 향해 깡추가 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이런 걸 찾아야 된다고.’

‘…….’

‘양놈들이 염산 테러 많이 하지? 그거 왜 많이 하는 것 같아? 졸라 끔찍하고 단순하니까 그래. 그냥 내가 인터넷에서 띠딕 결제해서 물건 받아다가 씨팔년 면상에 부어 버리면 그 년 인생 완전 씹창나니까. 양놈이 양년 면상에 염산을 부으면, 양년은 어떻게 하지? 시팔 양놈 자지를 자르잖아. 재워 놓고 자르든가, 불알을 터뜨리든가, 하여간 자지를 존나 공격하잖아. 왜? 자지가 씹창나면 그 새끼 인생도 씹창나니까.’

‘…….’

‘이런 걸 찾아, 사현아. 이 모자란 새끼야. 뭐하러 자폭을 해?’

‘…….’

‘내가 너였으면, 내가 그 연놈을 엿먹이고 싶었으면, 나는 양놈 자지를 잘라서 양년 보지에 넣고 꿰맸을 거야. 그런 게 응징인 거야.’

그 일장연설에 담긴 저열함, 비틀림, 비인간적 잔혹성 저변에 깔린 것이 사현에 대한 애정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만큼 눈치 없는 인물은 아무도 없었다. 저보다 스무 살은 어린 접대부를 열심히 물고 빨던 홍게도 어느샌가 굳은 눈으로 사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감히 깡추를 노려볼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사현은 홍게를 비웃고 싶은 마음과 사람의 체액이 뒤섞여 비릿한 냄새로 가득 찬 공간을 빠져나가고 싶은 마음 사이에서 언제나 하던 방식대로 대처하기로 했다. 즉 다 알아들은 척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러자 깡추는 만족한 듯 그때까지 굳어 있던 접대부에게 다시 살갑게 굴었다.

‘있잖냐, 미니야. 저 오빠가 아주 지고지순한 호모거든. 무려 십 년을! 응? 십 년을 한 놈만 짝사랑해서 스토커 짓을 했어요.’

‘네? 호모요? 진짜…?’

‘그래, 그래서 내가 여기 억지로 안 앉히잖아. 쟤는 남자 똥구멍에만 좆이 서거든.’

‘어머…. 그래도 멋있다. 순정파시네. 요즘 뭐, 그런 거 차별하는 시대 아니잖아요.’

미니가 넉살 좋게 깡추의 이야기를 받았다. 험악한 선문답보다는 남의 사생활 이야기가 낫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룸 안은 사현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그의 과거사로 한참 동안 화기애애했다. 사현은 그 방에서 유일하게 깨끗한 곳, 테이블 아래 반질반질한 바닥에 시선을 고정한 채 깡추의 말을 곱씹었다.

상대가 가장 두려워하는 걸 알아내. 그걸 실현시켜 줘. 인생을 씹창내라는 게 무슨 뜻인지 알아? 숨 쉬는 일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거야. 차라리 다음 생이 있을 거라 믿고 뛰어들고 싶어지게, 그렇게 사람을 벼랑 끝까지 몰아가는 거야.

그러자 웃음이 나왔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사현 자신의 인생은 이미 여준과 틀어졌던 그 여름에 ‘씹창나’ 있었다.

그 상태로 십 년을 버텼다. 그때 ‘유은아’가 사탕처럼 굴러들어왔다. 죽음을 결심하고, 철저히 방을 치우고 흔적을 지우면서도 여준이 끝까지 모를 거라고는 믿지 않았다. 언젠가, 아주 먼 훗날이라도 여준이 알게 됐으면 하는 마음이 분명히 있었다. 당신을 위험에서 구해내기 위해, 임사현이 그토록 숭고한 희생을 하였노라고. 그러면 여준이 후회할 것 같았다. 눈물을 흘리며 서글퍼하고 애도하고 새벽마다 소스라쳐 깨어나지 않을까 싶었다. 사현 자신이 아무 말 없이 죽어도 일이 알아서 그렇게 흘러갔으면 했다.

어쩌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지 못한 것은, 바로 그런 치졸한 도취에 신이 분노해서가 아닐까? 성여준을 너무나 사랑하는 신이, 너처럼 속이 시커멓고 졸렬한 인간이 성여준에게 그런 존재가 되도록 내버려 두지는 않겠다고 내쳐버린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 사현은 깨닫고야 만 것이다.

‘…….’

말없이 죽어 성여준에게 후회로 남는다. 그것이 바로 임사현이 가장 효율적으로 성여준의 인생을 ‘씹창내는’ 방법이었다는 사실을.

- 아홉 시까지는 못 가.

수화기 너머 여준의 잔뜩 지친 목소리가 들렸다. 사현은 룸서비스 메뉴를 눈으로 훑으며 심드렁하게 대답해요. 왜요.

- 그때까지 일이 안 끝날 것 같아.

“그럼 내가 선배 회사로 갈까요.”

- …….

“어떻게 할래요?”

잠시 대답이 없더니 문 닫히는 소리가 났다. 자리를 옮긴 듯했다. 여준이 한층 낮아진 목소리로 속삭이듯 쏘아붙였다.

- 대체 왜 이래? 네가 원하는 게 내가 회사에서 잘리는 거야?

“어차피 그만둘 생각 아니셨던가?”

- 그만두더라도 아무 문제 없는 상태로 떳떳하게 그만둘 거야!

“소망은 잘 알겠는데 내가 협조해야 할 의무 있어요?”

수화기 너머가 다시 잠잠해졌다. 눈앞으로 표정이 그려지는 듯했다. 얇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눈을 꾹 감고 있을 것이다. 아랫입술을 깨물었을지도 모른다. 스트레스로 창백해진 관자놀이에 식은땀이 맺히고….

- 너는….

짓눌린 목소리로 원망의 말을….

- 말을 참 잘하게 됐네.

…내뱉었어야 하는데.

“…….”

예상치 못한 반응에 사현이 굳어 버리자 여준은 들으란 듯 한숨까지 쉬었다.

- 나는 갈수록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도 모르는…. 그런 반편이가 되어가는데.

“…….”

- 너는 참 말을 잘하게 됐어. 그게 너무 이상해. 너는 원래는…. 그런….

원래는 그런 애가 아니었잖아. 그가 하고 싶었을 말을 어렵지 않게 떠올린 사현의 가슴이 뻐근해졌다. 그 뻐근함이 입을 막아 버리기 전에 재빨리 혀를 놀려야 했다.

“선배는 본인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모르는 게 아니에요.”

- 뭐라고?

“나를 상대로는 별로 기승전결 갖춰 똑바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 …….

“내가 시간을 지정하고 불렀는데 회사 일이 안 끝날 것 같아서 못 오겠다니. 이게 그렇게 일방적으로 통보하고 조정해도 될 약속 같아요?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됐나?”

- …….

“나는 당신 사정, 당신 회사 생활 궁금하지 않아요. 아홉 시예요. 지금부터 한 시간 뒤.”

사현은 여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룸서비스 책자는 멀리 던져버렸다. 시계를 보니 정확히 53분이 남아 있었다. 여준의 회사에서 사현이 묵는 호텔까지는 차로 대략 15분 거리였다.

그때 곧바로 핸드폰이 울렸다. 당연히 여준일 거라 생각하고 들어 올린 사현의 표정이 금방 굳어졌다.

- 일이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카랑카랑한 노인의 목소리가 쏟아져 나왔다. 사현은 잠시 핸드폰을 멀리 떼었다가 다시 얼굴로 붙였다.

- 한 달 내로 한국 땅 뜨게 만들어 준다고 했잖나!

“그렇게 말씀드린 적은 없습니다만.”

- 없다니! 자네 지금 그걸 말이라고…! 지오는 언제 데려올 거야? 자네 지금 뭐 손발을 놀리고 있긴 한 거야?

다른 의미로 놀리고 있지. 흐느적 소파에 드러누운 사현이 지루하게 두 눈을 껌뻑였다.

- 좋게 말할 때 싸게 처리하는 게 좋을 거야. 나는 자네 같은 버러지랑 말 섞는 것만으로 불쾌한 사람이야!

“그보다 또 저한테 전화 넣은 걸 여사님께 들키면 곤란하시지 않겠습니까?”

- 자네가 상관할 일 아니네!

벌컥 외친 노인이 쾅 소리가 나도록 전화를 끊었다. 아직도 전화선이 연결된 구식 전화를 쓰는 노인만이 부릴 수 있는 허세였다. 하여간 한결같이 시끄럽고 요란한 집안이야. 사현은 핸드폰을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유은아의 부친, 성지오의 외조부인 유남복으로 말할 것 같으면 젊은 시절 명동에서 일수판을 벌이며 모은 돈으로 부지런히 정부 고위관계자에게 술과 여자를 바쳐 얻어낸 정보를 쥐고 재개발 브로커 판에 뛰어든 인물이었다. 하청의 하청으로 루트를 꼬아 놓고 리베이트 알선하는 일을 주로 했으며 당연히 그 자신도 부지런히 중간 뇌물을 받아 챙겼다. 직접 모 지구 재개발 조합장 자리를 꿰찬 후에는 저항하는 원주민들을 밀어 버리기 위해 가장 질 나쁜 깡패들로만 구성되어 있다는 용역을 찾아 투입하는 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깡추의 회사도 그중 한 곳이었다.

더러운 돈을 벌어들인 더러운 양반들이 평생 더러운 졸부 자리에 만족한다면 무슨 잡음이 있으련만, 어떤 법칙이라도 있는 것처럼 더러운 졸부들은 하나같이 제 인생의 묵은 때를 벗고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부자가 되길 원했다. 유남복도 당연히 그랬다. 그래서 딸을 부지런히 다듬어가며 키웠다. 그 딸을 잃은 것이다. 잘 키워서 정계, 혹은 재계, 하다못해 법조계라도 엮어 보기 위해 애지중지 키운 딸을.

사현이 일어나 앉을 수 있을 만큼 회복했을 땐 이미 깡추가 모든 상황을 정리한 후였다. 쪽새에게 사현이 그날 아침 먹은 음료수 종류까지 보고받은 깡추는 유남복 내외를 찾아가 쪽새가 쥐고 있던 소스를 모조리 펼쳐 놓았다. 당신들의 어여쁜 외손주는 따님이 미쳐 있는 호스트의 아들이며, 따님은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해 남편을 죽이고 보험금까지 타내려 했다. 으리으리한 집 안을 휙 둘러보며 한 마디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런 대궐 같은 집에 사시던 공주님께서 그깟 3억이 뭐라고. 그쵸?’

유남복 내외는 마른 풀에 불길이라도 일으킬 수 있을 듯한 눈으로 깡추를 노려보고 있을 뿐이었다.

‘근데 참 이상해요. 왜 그 차에 따님이 타고 계셨을까. 저희 애는 그게 당연히 남편…. 그러니까 사위분이 운전하는 차인 줄 알고 갖다 박았다는데요. 아주 확실히 죽여드릴라고, 예? 정면에서 액셀을 꾸아악 밟아가지고 콰앙!’

‘…….’

‘비극이야, 비극. 저희 애는 의뢰를 충실히 이행하려고 한 것뿐인데. 정작 죽은 건 의뢰인에 저희 애는 생사를 오락가락하고 있으니.’

그것은 깡추가 사고 경위를 전해 들은 순간부터 머릿속에 떠올린 겁박 시나리오였다. 사람의 약점을 잡아 급소를 지지고 꿰매는 응징에 특화된 깡추의 단순한 작전은 충분히 효과적이었다.

‘이렇게 하시죠, 사장님.’

깡추는 자신이 가진 소스로 유남복 내외에 얼마나 좆같은 일을 겪게 해 줄 수 있는지, 어떤 ‘씹창’을 내줄 수 있는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얌전하고 매너 있는 단어로 충분히 설명한 후에 협상을 걸었다.

‘저희가 다 덮어드리겠습니다. 이 건도, 외손주 분 일도요. 향후에도 뭐 저희 같은 놈들 손 필요하실 때 있다 하면 언제라도 저희가 달려오겠습니다. 대신….’

‘…….’

‘사장님도 저희에 대한 신뢰를 딱 그만큼…. 아니, 반의반만큼만 보여 주시면 됩니다. 저희 일 안 끊기게 하는 거, 사장님 같은 분께는 어려운 거 아니잖습니까.’

깡추가 싱긋 웃었다. 라미네이트를 붙여 놓은 앞니가 매끈하게 빛났다. 유남복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깡추를 쫓아냈다. 깡추는 순순히 물러나 돌아왔다. 유남복이 다시 깡추에게 연락을 넣은 것은 그로부터 정확히 사흘 뒤였다.

‘일단 애를 성가 놈한테서 빼 와야 해. 그래야 자네들과 무슨 일을 해도 할 수 있지.’

사람을 엿먹이고 싶으면 그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을 알아내라. 그의 지침은 당연하게도, 엿먹이고 싶을 때만이 아니라 이용하고 싶을 때도 지대한 효과를 발휘했다.

***

“늦었잖아요.”

툭 내뱉은 사현의 눈가가 살짝 굳어졌다. 열린 문 너머로 나타난 것은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여준이었다. 여준은 젖은 머리카락을 대충 쓸어 넘긴 채 거친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사현이 흘끗 눈을 돌려 창밖을 살폈다. 그제야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가 눈에 들어왔다. 바깥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아 눈치채지 못한 이변이었다.

“웬 비를 다 맞고 왔어요? 시위해요?”

“…….”

“그러고 오면 내가 좀 미안해할 것 같아서?”

“비 때문에 호텔 입구에 택시 줄이 늘어서 있었어. 늦을까 봐 내려서 뛰어오는 동안 젖은 거야.”

차분하게 설명한 여준이 사현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사현은 어깨를 한 번 으쓱이고 욕실에서 큰 수건을 꺼내 내밀었다. 여준은 그 손을 무시하고 직접 수건을 가져다 머리에 얹었다.

“시간 많이 못 내. 집에 놓고 온 서류 있다 하고 나왔어.”

“그러게요. 그따위 구닥다리 핑계에는 당신 아들도 안 속겠네.”

“네 비아냥 들어주고 있을 시간 없단 뜻이야.”

“그럼 들어오자마자 벗었어야죠. 괜히 한 마디씩 얹느라 시간 낭비하고 있는 게 어느 쪽인데?”

여준의 젖은 얼굴이 창백하게 굳었다. 빗물에 가닥가닥 갈라진 속눈썹이 내려앉은 뺨이 차차 벌겋게 달아오른다. 실내는 금방 축축하고 갑갑해졌다. 그들 모두의 악몽 속 그 공간처럼.

“…….”

한참을 말없이 입술만 물어뜯고 있던 여준이 재킷을 벗었다. 젖은 옷이 달라붙어 쉽지 않은지 가느다란 눈썹이 금방 일그러졌다. 사현은 팔짱을 낀 채로 느긋하게 그 모습을 훑어 내렸다. 넥타이를 풀고, 셔츠 단추를 풀고, 마침내 벨트 버클을 잡은 여준의 손이 잠시 머뭇거렸다.

“그래 갖고 오늘 내로 다 벗겠어요?”

기다렸다는 듯 사현이 이기죽거리자 여준의 볼이 움푹 팼다. 어금니를 악문 채 기어코 벨트를 푸는 손끝이 경련하고 있었다.

바지를 벗고, 브리프 밴드에 손을 가져간 여준이 또 한 번 멈칫했다. 사현이 콘솔 서랍에서 꺼낸 젤과 콘돔을 보고서였다. 사현은 능숙하게 제 성기에 콘돔을 씌우고 젤을 바른 뒤 여준에게 손짓했다.

“마저 벗고 엎드려요.”

사현이 가리킨 곳은 소파였다. 침묵하던 여준이 마침내 한 장 남았던 브리프에서 다리를 빼냈다. 사현은 급할 것도 없다는 듯 여준의 나신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여준은 사현에게서 시선을 피한 채 소파 팔걸이에 팔꿈치를 대고 엎드렸다. 곧은 어깨 아래로 판판한 날개뼈가 도드라졌다. 사현은 서슴없이 여준의 등에 몸을 붙이고 뒷목에 입술을 파묻었다. 여준의 상체가 흠칫 흔들렸다. 비 냄새에 섞인 살 내음에서 어렴풋이 아이 냄새가 났다. 설탕물을 먹인 솜처럼 끈적하고 무겁고 달큼한 냄새. 돌봄과 관용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어린 동물이 보호색처럼 풍겨대는 젖 냄새.

“…으욱….”

여준의 상체가 크게 일렁이는가 싶더니 악문 입술 새로 고통스러운 신음성이 새어 나왔다. 사현은 여준이 벗어나지 못하도록 그의 목덜미를 팔로 두른 채 반쯤 벌어진 구멍에 귀두를 쑤셔 넣기 시작했다. 주름이 팽팽해지도록 빠듯하게 벌어진 구멍을 조금씩 파고들 때마다 여준의 온몸이 후들후들 떨렸다.

“윽…, 으흣, 흣….”

사현이 허리를 가볍게 쳐올리며 젤을 듬뿍 짜냈다. 잔뜩 경직된 구멍 주위로 흐른 젤이 남아 있던 물기에 섞여 흐물흐물 흘러내렸다. 여준의 허벅지를 타고 흐르는 젤을 손바닥으로 훔쳐낸 사현이 그대로 여준의 앞을 쥔 채 퍽, 소리가 나도록 좆을 박아 넣었다.

“…-!”

여준은 입을 크게 벌렸지만 어떤 소리도 내지 못했다. 벌컥 뜨인 눈이 시뻘겋게 젖어 들었을 뿐이었다. 까슬한 음모가 엉덩이 살에 닿았을 정도로 깊은 삽입이었다. 뒤늦게 사현의 팔을 쥔 여준이 뭐라 말하려 했지만 사현은 모르는 척 슬쩍 빼낸 허리를 곧장 끝까지 박아 넣었다.

“으…! 윽! 흐읏….”

여준의 발부리가 바짝 일어섰다. 잔뜩 경직된 허벅지 안쪽 살이 짧게 경련하며 구멍 안쪽까지 한껏 조여들었다. 사현의 미간에 굵은 땀이 맺혔다. 쿡, 쿡, 짧은 호흡으로 가장 깊은 곳까지 추삽질 하는 움직임은 개가 흘레붙는 모양새에 가까웠다. 배 속이 꿰뚫릴 때마다 여준은 온몸의 마디마디를 굳히며 날카로운 신음성을 흘렸다. 사현은 여준의 목에 이를 세웠다. 한 움큼 물어 핥으며 빨아들였다. 목덜미 한복판에 짙은 울혈이 맺히거나 말거나 여준은 그저 사현의 움직임을 견디느라 정신이 없었다. 추삽질은 점점 격렬해졌다. 살이 부딪치는 순간마다 여준의 머리가 크게 꺼덕거렸다.

“그만…. 제발….”

비 냄새, 아이의 냄새, 샤워코롱 냄새에 희미하게 밴 담배 냄새는 사현의 것이었다. 그 사실이 사현에게는 순간 참을 수 없을 정도로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지상에서 높이 떨어진 방, 창밖으로는 비가 내리고, 영겁처럼 느껴지는 시간 동안 닫힌 공간을 채운 것은 살끼리 마찰하는 소리와 여준의 고통스러운 신음뿐이었다.

“…욱-!”

퍽, 여준을 찌그러뜨릴 듯이 격렬한 움직임은 사현이 낮은 숨을 길게 토해내며 마침내 끝이 났다. 여준은 팔걸이에 얼굴을 파묻은 채 밭은 숨을 흘리고 있었다. 웅크린 등과 무릎 사이로 반쯤 일어선 성기가 보였다. 사현은 잠시 고민하다 그의 다리 사이로 손을 뻗었다. 그러나 축축한 기둥을 감싸 쥐기 직전 그의 손을 매섭게 밀쳐 낸 여준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여준은 그대로 한마디 말도 없이 욕실로 들어섰다. 곧이어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사현은 다 쓴 콘돔을 버리고, 젖은 수건으로 소파를 대충 닦았다. 그리고 할 일을 끝냈으니 다음 일을 한다는 듯, 무던하고 덤덤한 동작으로 욕실 문을 열어젖혔다.

“뭐 하는….”

노인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애를 데려와라. 당연히 깡추는 반문했다. 애 아빠가 멀쩡히 살아있는데 무슨 수로요? 노인은 벌컥 역정을 냈다. 그런 건 자네들이 알아서 할 일이잖아!

알겠어? 지금 그 노인네한테 제일 무서운 건 말이야. 내 딸 죽인 새끼가 멀쩡히 살아 돌아다니는 현실이 아냐. 내 딸이 저지른 부정이 밝혀져서 나의 야망이 저지될 그 사태가 제일 끔찍하고 좆같은 거야. 기껏 온갖 놈들 똥꼬 빨아가며 손에 넣은 지금의 지위가 무너지는 거. 그게 바로 그 노인네의 씹창인 거야.

의기양양하게 설명한 깡추가 히죽대며 덧붙였다.

그래서 애새끼한테 그렇게 집착하는 거지. 애 데려다가 그 인간들이 제일 먼저 할 짓이 뭐겠냐? 사람 붙여서 지구 반대편으로 유학 보내는 거야. 영원히.

애를 데려와라. 단 성여준이 저항할 수 없는 방법으로. 이 두 가지 조건이 요구하는 바가 무엇인지 모를 만큼 덜 낡은 인재는 깡추의 산하에 단 한 명도 없었다.

“뭐 하는 거야, 나가!”

여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불쾌감을 위장한 불안이 가득 서린 얼굴이었다. 사현은 말없이 여준의 눈을 바라보다 두 손을 뻗었다. 관심 없는 전시회에서 아무 데나 손을 대보는 어린아이처럼 무구하되 유해한 동작이었다. 여준이 어깨를 움츠렸다. 뒷걸음질했지만 곧바로 벽이었다. 여준은 제 뺨을 두 손으로 감싸는 사현의 얼굴을 무력하게 올려다보았다.

“…….”

뜨거운 물줄기가 머리 위로 쏟아졌다. 빗물, 땀, 눈물, 정액, 아침에 묻힌 코롱의 잔여물과 아이의 흔적까지 말끔히 씻어 내릴 듯 맹렬한 기세였다. 사현과 시선을 마주치는 순간 아주 중요한 걸 잃어버릴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으나, 그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는 떠올릴 수 없었기에 여준은 결국 눈앞의 검은 눈동자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았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사현은 손끝이 희게 붇고 나서야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내지 않았지만 여준은 그의 분명한 입술 모양을 읽을 수 있었다.

불쌍한 인간.

그리고 손이 떨어져 나갔다. 사현이 욕실 문을 닫은 것과 동시에 여준이 미끄러지듯 주저앉았다. 뱃속에서 뜨거운 물이 끓어올랐다. 꽉 들어찬 더운 공기가 숨통을 막았다. 여준은 가슴팍을 누른 채 눈물을 참았다. 으드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악물며 몇 번이고 숨을 멈췄다. 그러면 이 모든 게 없던 일이 될 거라고 믿는 사람처럼.

***

부서질 것 같은 몸을 이끌고 운전대를 잡은 여준은 자정을 넘기기 전 간신히 귀가할 수 있었다. 아이 방에서 자고 있던 시터는 짜증스러운 얼굴로 인사 없이 돌아갔다. 택시비를 쥐여 줘야 했지만 누구와도 어떤 말도 섞고 싶지 않았다. 그는 비틀비틀 걸어 주방으로 향했다. 배 속이 얼얼하도록 찬물을 마시고 싶었다. 그러나 냉장고에 든 것은 바닥을 드러낸 생수병과 아이가 좋아하는 달짝지근한 음료수뿐이었다. 반 모금도 남지 않은 생수로 간신히 입술을 축이자 등줄기를 타고 오른 열이 눈앞을 가렸다. 여준은 왈칵 구겨 버린 생수병을 집어 던지기 위해 높이 치켜들었다. 동시에 작은 방에서 잠들었을 아이가 눈 앞을 스쳤다.

“…….”

팔을 내린 여준이 냉장고 문에 이마를 쿵 박았다.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어디든 부수거나 찢어서 피를 내고 싶었다. 그러면 몸속에 도는 화도 빠져나갈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한참 후에야 구긴 생수병을 내려놓고 돌아섰다. 힘겹게 옮기는 걸음마다 무력감이 내려앉았다.

새벽 내내 악몽을 꾸었다. 소스라쳐 깨어날 때면 고작 두어 시간이 지난 뒤였다. 식은땀에 축축하게 젖은 이불이 무겁고 걸리적거렸다. 새카만 방으로 공해에 가까운 가로등 불빛이 스몄다. 그 빛의 궤적을 따라가다 보면 반드시 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입 모양으로 읽었을 뿐 직접 들은 적은 없는 그 말이.

- 불쌍한 인간.

여준은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상체를 한껏 웅크렸다. 기억과 꿈과 현실이 자꾸만 모호해졌다. 잊고 싶은 기억을 끝없이 되뇌다 보면 반드시 후회가 찾아왔다. 그 병원에 가지 않았더라면. 아이를 잘 돌봐서 아플 일이 없게 했다면. 은아를 외롭게 하지 않았다면. 은아와 결혼하지 않았다면. 십 년 전 여름, 사현의 집에 찾아가지 않았다면, 사현을 만나지 않았다면….

온몸이 끈적거렸다. 안방 욕실로 들어선 여준은 불을 켜자마자 그대로 굳어 버렸다. 눈 밑이 푹 꺼져 초췌한 얼굴 때문만은 아니었다. 목덜미 한복판에 선명한 잇자국과 울혈이 맺혀 있었다.

“이런….”

손끝을 가져다 대자 뒤늦게 따가웠다. 누구에게도 대충 변명하거나 둘러댈 수 없을 만큼 분명한 자국이었다. 셔츠 깃으로 가려질 위치도 아니었다. 순식간에 피가 식었다. 홀린 듯 욕실을 나선 여준이 서랍장을 있는 대로 열어젖혔다. 같잖은 비상약과 거즈 따위를 뒤적이던 손은 넓적한 밴드 상자에 이르러서야 멈췄다.

- 자기야, 오는 길에 습포 좀 사다 줘. 큰 걸로.

아이의 백일잔치를 며칠 앞둔 무렵이었다. 파티 준비로 한참 분주하던 시기에 일어난 일이라 기억하고 있었다. 덤덤히 걸려 온 전화에 여준은 퇴근 준비를 하다 말고 눈을 둥글게 떴다.

‘왜? 지오가 어디 다쳤어?’

- 아니, 내가.

‘당신이? 어딜? 병원은?’

- 애 데리고 병원을 어떻게 가. 그냥 밴드만 사다 줘. 별거 아니야.

전화는 금방 끊겼다. 차분한 목소리에 말 그대로 별거 아니겠지, 생각하면서도 절로 걸음이 빨라졌다. 은아의 주문대로 직사각형 모양의 상처 밴드를 사서 집에 돌아갔을 때,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아이를 등에 업은 채 팔에 수건을 두른 은아였다.

‘내가 택배 뜯다가 깜빡하고 커터칼을 바닥에 뒀는데 지오가 그걸 입에 넣으려 하는 거야. 식겁해서 뺏다가 긁혔어.’

상처는 깊지는 않았지만 충분히 컸다. 은아가 닦는다고 닦은 후였는데도 이곳저곳에 핏자국도 남아 있었다. 제일 큰 밴드를 사 왔는데도 상처를 다 덮을 수 없었다.

‘이러지 말고 병원 다녀와. 지오 내가 보고 있을게.’

‘이런 걸로 뭐 병원을 가. 살짝 긁힌 건데.’

‘그래도….’

‘걱정 말고 씻고 나와. 간만에 일찍 온대서 내가 소고기 전골 해 놨어. 자기 이거 좋아하잖아.’

은아는 본래 정성스레 가꿔 놓은 손톱 끝이 살짝 깨지기만 해도 하루 종일 짜증을 내는 여자였다. 성격이 불같고 기복이 심했다. 그래서 여준은 짐작했다. 내가 일찍 온 게 너무 좋은 거구나. 이깟 상처 따위로 망치고 싶지 않을 정도로 지금…. 은아의 기분이 좋은 거구나.

“…….”

툭, 툭, 비상약 박스 위로 굵은 눈물이 떨어졌다. 결혼을 목적으로 만나 오래 알지도 못했을 때 혼인 신고서에 도장을 찍었다. 부모님이 퇴직하시기 전에 결혼을 해서 안심시켜드리고 싶었고, 아이도 어차피 낳을 거라면 빨리 가지고 싶었다. 그렇게 쉽게 결정한 결혼이고 육아였다.

은아는 누군가에게 소개할 때 장점을 많이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매사에 예민했고 쉽게 우울감에 빠졌으며 그 모든 감정을 여준에게 쏟아부었다. 의심하고, 시험하고, 여준의 반응이 조금이라도 그녀 자신이 그린 이상적인 답안에서 벗어나면 분이 풀릴 때까지 그를 몰아세웠다. 당연히 지치고, 때론 진절머리가 났다.

그러나 그토록 절실하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은, 그만큼 필요로 한다는 뜻이었다. 나는 자기 없으면 못 살아. 은아가 메시지를 보낼 때마다 꼭 덧붙이는 말이었다.

은아가 어떤 의심도 힐난도 없이 여준과의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있음을 드러낼 때마다 여준은 믿고 싶어졌다. 그녀는 외롭고 서투를 뿐이라고. 은아는 항상 주변 사람을 힘들게 했고, 그 탓에 친구 한 명 없었다. 외로움을 풀고 싶을 때면 친정이나 백화점에 갔다. 하지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적어도 제 뼈에 배 속이 찢겨 고통스럽게 죽어 갈 만큼 잘못한 일은 하나도 없었다.

여준은 비상약 상자를 쥔 채로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꼼짝하지 못했다.

***

“여준 씨…. 무슨 일 있어?”

출근하자마자 눈이 마주친 팀장이 심상치 않은 얼굴로 물었다. 흠칫 놀란 여준이 팀장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팀장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채 한 걸음 더 다가왔다.

“눈이 퉁퉁 부었는데. 목은 또 왜 그래? 싸움이라도 했어?”

“…….”

“다친 거야? 병원은….”

“…지오, 아니, 애가.”

무심코 튀어나온 말에 누구보다 놀란 것은 여준이었다. 크게 뜨인 눈동자가 미세하게 흔들렸다. 팀장은 눈을 껌뻑이며 여준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애가 할퀴었는데, 흉이 질 것 같아서…. 붙여 놨습니다.”

밴드 위를 손으로 누른 여준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아직까지도 벌겋게 물든 눈자위에 대해서는 더 변명할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저 목에 남은 흔적이 끔찍했다. 죽은 아내를 위해 사 놓았던 물건으로 가리고, 아이 핑계를 대야 하는 상황이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역겨웠다.

“뭐 괜찮다면 다행인데 성 선임 요즘 이상하네. 생전 안 그러던 사람이.”

“죄송합니다.”

“사과하라고 하는 말이 아니고 걱정돼서 그래. 사내 상담이라도 받을래요? 우리 바빠지기 전에.”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걱정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대충 자리를 수습한 여준이 가방을 놓고 돌아섰다. 물이라도 마실 셈이었지만 사무실을 나서자 자연스레 걸음이 화장실로 향했다. 먹은 것도 없이 배 속이 울렁거렸다. 화장실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 양변기 칸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웅크린 채 헛구역질을 해 봤지만 시원스레 쏟아져 나오는 건 없었다.

“하아….”

눈을 감은 여준이 화장실 벽에 옆머리를 기댔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오늘 저녁 먹으러 올래?」

잔뜩 굳어서 확인한 메시지의 발신자는 다행히도 가린이었다. 답장을 찍으려 했지만 손끝에 힘이 잘 들어가지 않았다. 별수 없이 화장실을 나온 여준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어, 바로 거네? 회사 아니야?

수화기 너머 가린의 목소리는 명랑했다. 여준은 소리 없이 목을 가다듬고 짐짓 멀쩡한 목소리를 냈다.

“잠깐 나왔어. 갑자기 웬 저녁이야?”

- 어젯밤에 오빠가 무슨 베트남 요리 레시피 배웠다고 재료를 사 왔는데, 알고 보니까 이게 10인분은 되는 거야. 누구든 불러서 먹어 없애려고.

“글쎄…. 나 오늘도 아마 야근일 것 같은데.”

“아냐, 아냐. 성 선임 정시에 퇴근해.”

불쑥 들려온 팀장의 목소리가 여준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팀장은 복도 벽에 기대선 채 세상 좋은 상사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성 선임 이번 주 내내 야근했잖아. 오늘은 안 남아도 돼.”

“그게 토요일까지 저희 약관….”

“괜찮아, 괜찮아. 내가 알아서 할게.”

뭘 어떻게 알아서 하겠다는 것인가. 그래 봤자 자신이 해야 할 일인데. 여준은 헛웃음을 참고 고개를 숙여 보였다. 잠잠히 기다리고 있던 가린이 조심스레 물었다.

- 괜찮아? 통화한다고 혼났어?

“아, 아니야. 근데 나 정말 일이 바빠.”

- 잠깐 들러서 저녁 먹고 다시 들어가는 것도 안 돼? 오빠더러 데리러 가고 데려다주라고 할게.

“미안해. 멀리 가질 못할 것 같아.”

거듭 거절해야 하는 상황도 편치는 않았다. 다행히 가린도 더 이상 권하지 않고 인사치레를 몇 마디 건넨 뒤 전화를 끊었다. 후우, 한숨을 내쉰 여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선임님, 어디 아프세요?”

팔려 가는 소처럼 사무실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마자 후배가 물었다. 모든 관심이 귀찮았다. 여준은 순간 치민 짜증을 간신히 감추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괜찮아. 왜?”

“얼굴이 엄청 벌건데요. 열 있으신 거 아니에요?”

“…….”

여준이 무심코 손등을 이마에 가져다 대었다. 미열이 느껴졌지만 대단한 수준은 아니었다.

“조심하세요. 저번 주인가, 실비 팀에 한바탕 감기 돌아서 난리 났었대요. 오다가다 옮았을 수도 있잖아요.”

“어…. 알았어.”

“특히 우리같이 야근 많이 하는 직장인들이 갑자기 훅 간대요. 원래도 항상 컨디션이 나쁘니까 몸 상태에 오히려 둔해진다나.”

그럴싸한 말로 들렸다. 고개를 주억거린 여준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고 보니 목이 살짝 따끔거렸다. 감기몸살이 온대도 이상할 건 없었다. 차라리 앓아눕고 싶은 심정이었다.

왜 남들 하는 운동은 또 빠짐없이 해 놔서…. 여준이 웅얼거리자 후배가 의아한 듯 얼굴을 가까이 붙여왔다. 여준은 눈치채지 못한 척 모니터만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팀 일정이 지나치게 빡빡할 때면 반드시 한두 명은 앓아눕거나 쓰러지곤 했다. 당연히 그들이 지고 있던 일은 고스란히 덜 소모된 사람들 앞으로 떨어졌다. 결국 한 번도 나가떨어지지 못한 죄로 여준은 현재 같은 사무실에 있는 이들의 몫을 많이도 떠안았었다. 그리고 그들 중 여준이 은아와 지오의 일로 자리를 비울 때 그를 격려하거나 비호해 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손해다, 손해….”

중얼거리던 여준이 픽 웃었다. 혼잣말이 늘어난 스스로가 낯설었다.

***

“근데 여준 씨, 나 전부터 궁금했는데 있잖아. 계란을 못 먹으면 영양소에 문제없어? 단백질이 부족해진다거나.”

점심시간, 사무실로 배달시킨 도시락을 하나씩 나눠 주며 팀장이 물었다. 지나가던 팀원들이 보일 듯 말 듯 한숨을 쉬었다. 팀장은 기억하지 못하지만 그는 회식 자리에서 술에 취해 여준을 걸고넘어질 때마다 반드시 알레르기 이야기를 했었다. 이 친구, 계란을 못 먹는대. 영양소가 부족하지 않을까? 여준 씨, 안 그래?

“그렇진 않습니다. 다른 음식으로 대체하면 되니까요.”

“그래? 근데, 계란을 못 먹으면 빵이나 케이크도 못 먹어? 생일 케이크 한 번도 못 썰어 봤어?”

“네, 지금은 좀 덜한데 어릴 때는 꽤 심해서….”

“어휴, 불쌍하다. 계란 들어가는 음식 중에 맛있는 게 얼마나 많은데, 그거 전혀 모르고 산다는 거잖아. 불쌍해, 불쌍해.”

불쌍하다…. 예전과는 다른 무게로 다가오는 말이었다. 그런가. 나는 어느새 불쌍한 인간이 되었나. 여준은 웃거나 얼버무리는 대신 표정을 굳히고 돌아섰다. 그래도 이번엔 맨정신에 물어봤으니 기억을 하겠지. 애써 긍정적인 방향으로 생각하면서.

자리에 앉아 아무 맛도 나지 않는 도시락을 꾸역꾸역 씹어 넘겼다. 일을 하려면 먹어야 했고, 먹기 위해서는 씹어야 했다. 몸에 영양소를 공급해 움직이고, 움직여서 생산을 하고, 생산해서 재화를 받고 그 재화로 또 먹을 것을 사고….

“…….”

순간적으로 명치를 찌르는 통증이 왔다. 마지막 한 숟갈을 입에 넣고 한참을 우물대던 여준이 그대로 굳었다. 손으로 입을 막은 채 비틀대며 일어서자 사무실 안의 시선들이 집중되는 게 느껴졌다.

“선임님? 왜 그러세요?”

입을 열면 물고 있던 것을 모조리 뱉어낼 것 같았다. 대답 없이 목을 움츠린 여준이 그대로 화장실로 달려갔다. 발을 디딜 때마다 명치가 쥐어짜이듯 아팠다. 폭발하는 욕지기에 눈물이 다 맺혔다. 제발, 제발 잠깐만. 간신히 화장실에 도착해 변기 위로 엎드리자마자 배 속이 와르르 쏟아져 나왔다.

“우욱….”

미간이 깨질 듯 아팠다. 콜록, 기침을 내뱉자마자 또 멀건 속을 게워 냈다. 세네 번쯤 토하고 나니 더는 나올 것도 없었다. 역류한 위액에 목이 따끔거렸다.

“선임님, 괜찮으세요?”

따라온 남자 후배가 문을 두드렸다. 여준은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된 얼굴을 소매에 문질러 닦고 물을 내렸다.

“선임님. 선임님?”

“괜찮아.”

여준이 짧게 대답하고 문을 열었다. 세면대로 다가가 입 안을 헹구는 동안 후배는 계속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주변을 맴돌았다.

“정말 괜찮으세요? 갑자기 왜 그러지? 도시락이 상했나?”

“…….”

도시락. 당연히 여준의 머릿속에 먼저 떠오른 것은 알레르기였다. 일부러 계란이 들어가지 않는 메뉴로 시켰고, 여태 먹으면서 문제가 생긴 적은 없었다. 그러자 포장된 도시락을 건네며 능글맞게 웃던 팀장의 얼굴이 떠올랐다. 계란 그거, 못 먹으면 단백질 부족 같은 문제 없나?

여준의 눈가가 창백하게 굳었다. 언젠가 회식 자리에서 팀장이 끈질기게 북엇국을 권한 적이 있었다. 여준은 계란을 넣고 끓인 국은 먹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그러자 팀장은 영 미심쩍다는 얼굴이었다.

‘계란 알레르기라는 게 진짜 있어? 그냥 내 숟가락 들어갔던 국 먹기 싫어서 핑계 대는 거 아냐?’

왜 굳이 도시락을 건네면서 알레르기 이야기를 또 꺼냈지? 불이 붙은 의혹은 순식간에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혹시 팀장이 뭔가 수작을 부린 게 아닐까? 나를 엿 먹이고 싶어서, 내 도시락에 일부러….

“병원 안 가셔도 되겠어요?”

후배가 물었다. 여준은 순간 그가 조금 웃었다고 느꼈다. 홱 돌아보았지만 마주친 것은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뿐이었다.

“…….”

여준은 그대로 사무실로 돌아가 지갑과 휴대폰을 챙겼다. 아무 말도 없는 그 대신 뒤따라온 후배가 변명을 늘어놓았다. 병원에 좀 다녀오셔야 할 것 같대요. 그러자 누군가 수군거린 것 같았다. 좋겠다, 조퇴도 하고….

***

“위염 같네요.”

덤덤한 진단에 여준이 두 눈을 끔뻑였다.

“위염요? 알레르기가 아니라?”

“알레르기? 왜 그렇게 생각하셨어요?”

“도시락을 먹자마자 토했는데, 제가 계란 알레르기가 있어서….”

“그런 징후는 안 보이는데…. 지금 다른 증상이 있다거나 그래요?”

두 손을 내려다보던 여준이 뒤늦게 고개를 저었다. 속은 여전히 아프지만 발진 등의 증상은 없었다. 의사는 바쁘게 차트에 뭔가 입력하더니 고개를 저었다.

“정확한 건 내시경 해 봐야 알지만요. 위염이 맞는다면 토할 때까지 증상이 좀 있으셨을 텐데, 어디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

“배 속이 따끔거린다거나, 식욕이 없다거나, 헛구역질이 난다거나.”

“항상 어느 정도는 그래서….”

“언제부터요?”

언제부터였지. 곰곰이 되짚어 봤지만 떠오르는 게 없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보다 안 좋은 날이 월등히 많았다. 은아가 죽은 뒤로는 늘 그랬다.

“일단 내시경 검사 일정 잡으시는 게 좋을 것 같구요. 오늘은 어떻게…. 영양제라도 맞으실래요?”

“…아, 아뇨. 회사 다시 들어가 봐야 합니다.”

짧게 대화를 마친 여준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수납을 마치고 병원을 나서자 청명하고 시원스런 하늘이 보였다. 그는 고개를 숙인 채 관자놀이를 여러 번 짓눌렀다. 사현에게서 전화가 걸려 온 것도 그때였다.

멍하니 액정 화면을 들여다보고 있던 여준이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대었다. 뚝, 소리와 함께 고요한 질문이 떨어졌다.

- 어디 아파요?

이제는 놀랍지도 않았다. 여준은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았다. 길 건너편, 멀찍이 주차된 새카만 차가 눈에 들어왔다. 선팅을 어찌나 꼼꼼히 했는지 안이 전혀 보이지 않는 중형 세단이었다.

“사현아.”

입을 떼자마자 목에서 피비린내가 새는 듯했다. 동시에 배 속이 긴 바늘에 쑤셔지는 듯 따끔거렸다.

“이 지긋지긋한 스토커 새끼야.”

사현은 말이 없었다.

“네가 성공했어. 기어코 내가 미친 것 같아.”

- …….

“알레르기 있다는 팀원한테 일부러 엿 먹으라고 그 요리를 준다니, 그게 가당키나 한 소리야? 무슨 사이코패스도 아니고. 근데 순간 진심으로 그렇게 믿었어. 다 나를 엿 먹이려는 것 같고, 다 나를 비웃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 같고….”

- 선배.

“그런 사람까진 아닌데. 진상에 꼰대에 사람을 사축으로 만들지만 그렇다고 그런 짓까지 할 리가 없는데 나는….”

- 어디가 아픈 거냐고요.

“그만 좀 해, 차라리 나까지 차로 받아 버려! 이딴 식으로 피 말리지 말고! 어차피 네가 진짜로 죽이고 싶었던 건 은아가 아니라 나잖아!”

지나던 이들의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이번엔 착각이 아니었다. 여준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얼굴을 감쌌다.

- 거기 가만히 있어요.

짧게 내뱉은 사현이 전화를 끊었다. 동시에 끼기긱, 급발진한 차가 아스팔트 바닥과 마찰하는 소리가 들렸다. 검은 세단은 신호등도 없는 4차선 도로에 올라서자마자 방향을 꺾었다. 순식간에 여준의 눈앞에 멈춰 선 차에서 내린 것은 검은 야구모자를 깊이 눌러쓴 사현이었다.

“…….”

모자를 코끝에 닿을 만큼 내려쓴 모양이 우스웠다. 사현은 순간 굳어 버린 여준의 팔을 쥐더니 다짜고짜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안전벨트 해요.”

운전석으로 돌아온 사현이 짧게 명령했다. 여준은 못 들은 척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바깥 풍경도 잘 보이지 않았다. 사현은 자리에 앉자마자 모자를 벗어 뒷좌석으로 던져 버리고 액셀을 밟았다.

“…저건 뭐야.”

조금이나마 제정신이 돌아온 여준이 뒷좌석을 눈짓하며 내뱉었다. 사현은 흘러내린 앞머리를 훌쩍 쓸어 넘겼다.

“얼굴 안 가리고 돌아다니면 경찰 조사받을 때가 많아서요.”

“…….”

“벨트 매요.”

차는 금방 시내를 빠져나와 올림픽대로로 올라섰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여준이 마른세수를 했다.

“회사 들어가야 해.”

“병원은 왜 갔어요?”

“무슨 상관이야. 왜 갔으면 어쩔 건데.”

“그 건물에 병원 많던데. 어딜 갔던 거예요? 내과, 정형외과, 피부과, 치과 중에.”

“…….”

정상적인 대화는 이번에도 불가능했다. 여준은 입을 다문 채 조수석 시트에 몸을 기댔다. 약국에 들렀어야 했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올랐다. 따끔거리는 명치에 손을 올린 채 숨을 고르고 있으려니 그 모습을 힐끔대던 사현이 물었다.

“배 아파요?”

“제발 신경 좀 꺼….”

“아까는 왜 그런 소릴 했어요?”

무심코 뭐가, 하고 받아치려던 여준이 멈칫했다. 전화를 받자마자 지껄인 헛소리 중에 사현이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은 하나도 없었을 것이다.

선배는 말을 제대로 못 하는 게 아니에요. 나한테 똑바로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는 거지.

사현이 덤덤히 읊조렸던 말이 여준의 입을 막았다. 차선 합류 지점이 다가오자 도로가 꽉 들어찼다. 멈춘 차 안에서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번에도 사현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적 없어요.”

“…….”

“선배를 죽이고 싶다고 생각한 적 없다고요.”

돌아보는 사현에게서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소독약 냄새도 함께였다. 여준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창밖의 하늘은 너무나 높고 푸른데 시커멓게 칠한 창 탓에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내가 원하는 건 선배가 오래오래 사는 거예요.”

“…….”

“지금까지 그래 온 것처럼.”

“…….”

“벨트 매요.”

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여준은 끝내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사현의 옆모습만 뚫어져라 바라보다 고개를 돌렸다.

도로 정체는 좀처럼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끼어들려는 차들과 끼워 주지 않으려는 차들 사이에서 요란한 경적이 오갔다. 시끄러운 소리에 귀가 아팠다.

“전화 오잖아요.”

사현의 말을 듣고서야 온갖 소음 속에 미약하게 섞인 진동 소리가 들렸다. 한숨을 내쉰 여준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팀장이었다.

“예, 팀장님.”

- 성 선임, 괜찮아? 병원에서 뭐래?

부드러운 걱정이 잔뜩 묻은 목소리였다. 여준은 짐짓 멀쩡한 목소리로 차분하게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내시경을 한 번 받아 보기로 했어요.”

- 그래요. 오늘은 반차 처리할 테니까 집에 가서 쉬어. 내가 요즘 성 선임 볼 때마다 불안불안했어.

“아닙니다. 복귀할 수 있….”

- 우리 이번 프로젝트 중요한 거 알지? 이번에야말로 선수 놓치면 안 돼. 다음 주 수요일에 딱 책상 잡고 들어갈 거니까 그때까지 몸 관리 잘해야 돼요.

“…….”

- 알았지? 믿는다, 성 선임.

전화를 끊은 여준이 옅게 웃었다. 그러니까, 고작 일주일 안에 그 지옥 같은 태스크포스 스케줄을 감당할 몸 상태를 만들어 오라는 뜻이다. 아마 진행 중 여준이 조금이라도 피곤해하거나 쉬겠다고 하면 본인이 쉬라고 등 떠밀 때 뭐 했냐며 오만 짜증을 부릴 것이다.

“내시경 받기로 했어요?”

아무렇지 않게 통화 내용을 끌어온 사현이 물었다. 여준은 대답 없이 쌓여 있는 메시지를 확인했다. 지오의 시터에게서 문자 한 통이 와 있었다.

「지오가 아빠랑 통화하고 싶어 해요 시간 되실 때 잠깐만 전화 주세요」

메시지 위로 손가락이 멈칫했지만 사현이 있는 공간에서 걸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한 차들이 창밖을 스쳐 가는 모양을 보다 여준이 낮게 중얼거렸다.

“호텔 이쪽 아니잖아.”

“네?”

“어디로 가려고 그래?”

“어디라니….”

사현이 느릿하게 눈을 껌벅거렸다. 얼굴을 가로지른 흉터 주변은 나무껍질처럼 경화되어 있었다. 그래서 더욱 위태로워 보였다. 손끝으로 살짝만 할퀴어도 처음 다쳤을 때처럼 많은 피가 솟을 것 같았다.

“그 짓…. 할 거면 어디든 들어가서 빨리 해. 집에 가서 쉬고 싶으니까.”

“그 짓?”

이번에는 조금 웃는다. 시원스레 벌어진 입술 사이로 가지런한 이가 드러났다. 또다시 시작된 정체 구간에 차를 세운 사현이 여준을 돌아보았다.

“그 짓이 뭔데요?”

“…….”

“섹스? 씹질? 빠구리?”

여준이 드러내 놓고 한숨을 내쉬었다. 명치가 여전히 따끔따끔 아팠다.

“선배 고상한 사람인 건 십 년 전부터 알았지만 나이 스물아홉에도 섹스라는 말을 못 할 줄은 몰랐네요.”

“네가 나랑 하는 게 섹스야?”

“구멍에 좆 박는 짓이 섹스가 아니면 뭔데요.”

“…….”

“뭐, 강간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니면 섹스라는 건 사랑하는 사이에 하는 아름다운 행위여서 나 같은 놈이랑은 도저히….”

“그만해, 머리 아파.”

그냥 하는 말은 아니었다. 정말로 옆머리가 지끈지끈 아팠다. 크고 뭉툭한 못이 두개골 안을 마구 휘젓고 다니는 것 같았다. 잔뜩 찌푸린 여준의 옆얼굴을 살피던 사현이 날카로운 비웃음을 흘렸다.

“왜 자꾸 나를 자극해요? 또 하고 싶어서?”

“개소리하지 마.”

“은근 적성에 맞는 거 아녜요? 한참 박힐 때 당신이 어떤 소리 내는지 알아요? 온갖 조르는 신음 소리 다 내면서 내 좆을 뿌리까지 조이던데.”

“임사현.”

“선배는 재능 있어요.”

침묵은 잠시였다. 긴 경적이 울렸다. 앞차들은 이미 멀찍이 사라진 뒤였으나 사현은 꼼짝도 하지 않고 여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여준은 눈을 크게 뜬 채 이를 악문 얼굴로 온몸을 떨었다. 갈색 눈동자가 부윰하게 젖어 들었다.

“…….”

후드득, 장대비 같은 눈물이 쏟아짐과 동시에 여준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사현도 그제야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사현의 차 뒤에서 경적을 울리고 있던 트럭 한 대가 왼쪽 차선으로 밀고 들어오며 다시 한번 큰 소리를 냈다.

“야, 이 씹새야! 도로 한가운데서 뭐 하는 거야!”

사현은 별 반응 없이 창문을 내렸다. 그리고 고래고래 욕을 하고 있던 트럭 운전수와 눈을 마주쳤다. 당장 차에서 뛰어내려 달려들 기세였던 운전수는 사현의 얼굴을 보자마자 얼른 입을 다물었다.

“…가, 빨리.”

여준이 젖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현은 눈을 부릅뜬 채 운전수를 노려보았다. 한껏 창백해진 운전수의 목소리가 한순간에 누그러졌다. 아니, 내 말은, 도로 한복판에 차를 세우고 있으면 어쩌냐 그거지….

“가라고.”

재촉한 여준이 사현의 팔목을 끌어다 기어 스틱 위로 올려놓았다. 그제야 창문을 닫은 사현이 부드럽게 차를 출발시켰다. 트럭도 주춤주춤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아예 제일 끝 차선으로 사라져 버렸다.

“그걸 같이 노려봐서 어쩔 건데? 차 세우고 내려서 주먹질이라도 할 거야?”

젖은 얼굴을 훔쳐 낸 여준이 따져 물었다. 사현은 헛웃음을 내뱉었다.

“주먹질? 내가요?”

“네 특기잖아. 수틀리면 손 올리고 사람 곤죽으로 만드는 거.”

“그랬어요? 몰랐네.”

“…….”

“다음부턴 힘들게 주먹질할 것 없이 차로 박아 버릴게요.”

여준이 불에 덴 듯 사현을 돌아보았다. 사현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정면만 바라보고 있었다. 무릎에 올려둔 양 주먹이 덜덜 떨렸다.

“…은아도 그렇게 죽였어?”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너는…. 은아가 어떻게 죽었는지 알아?”

“…….”

“갈비뼈가 모조리 부러졌어. 부러진 뼈에 장기가 다 찢어져서 죽었어. 배 속이 피로 가득 차서…. 숨도 제대로 못 쉬고 한참을 괴로워하다가 죽었어.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의 고통이 아니었을 거래. 그래서 쇼크가 와서 죽은 거래.”

“…….”

“은아가 왜 그렇게 죽어야 했어? 뭘 잘못해서?”

“잘못한 거 없어요.”

사현이 덤덤하게 말했다. 차는 전용 도로를 빠져나와 시내로 진입하고 있었다. 하늘은 여전히 푸르고, 멀리 보이는 한강 둔치는 평화로웠다.

“말했잖아요. 사고였다고. 그 말 그대로예요.”

비아냥이 빠진 사현의 목소리는 버려진 성당의 오르골 연주 같았다.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상냥함으로 무장한.

“내가 술 처먹고 운전대 잡았다가 역주행했고, 선배 와이프가 재수 없게 말려들어 죽은 거예요. 선배 결혼했다는 것도 조사 받으면서 알았어요. 아니, 정확하게는…. 선배에 대해서 그때까지 완전히 잊고 살았어요.”

조곤조곤 이어지는 설명은 연극 대사처럼 들렸다. ‘옛날 옛적 어느 곳에’로 시작해 극이 시작되기까지의 배경을 다이제스트로 설명하는 바람잡이 같았다.

“믿기 힘들겠지만 사실이 그래요. 악연이라는 게 이런 거겠죠.”

악연. 여준은 조용히 그 단어를 곱씹어 보았다. 도저히 와 닿지 않는 말이었다.

“선배 처가에 우리의 과거를 알리니 마니 한 건…. 그냥 장난이었어요. 하도 정색하고 사람을 스토커 취급하길래 발끈해서.”

여준의 가슴속으로 큰 돌덩이가 내려앉았다. 차 안은 시퍼런 침묵으로 가득 찼다. 사현은 아무렇게나 차선을 넘어 한강 공원 주차장에 들어선 뒤에야 차를 세웠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 이들에게서 맑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장난…, 이었다고?”

“네. 장난.”

“장난으로…. 그 일을 들먹이면서 날 협박했다고? 내 아내를 죽여 놓고, 그걸로 나를….”

“피차일반이라고 쳐도 되지 않나? 결국 선배도 와이프 복수보단 선배 체면이 중요했던 거잖아요.”

“…….”

“정말 와이프의 원통함을 풀어 주고 싶었다면 당장 경찰서로 달려갔어야죠. 사고 낸 새끼, 십 년 전부터 날 좋아하던 호모 새끼다. 그 새끼가 일부러 내 와이프 죽인 게 틀림없다. 그럼 경찰도 좀 더 철저히 수사했겠죠.”

“…….”

“왜 그러지 않았어요? 따지고 보면 선배는 잘못한 것도 없는데.”

“내가 잘못한 게 왜 없어?”

여준이 왈칵 소리쳤다. 사현은 담배를 빼 문 채 창문을 내리다 말고 그를 돌아보았다.

“뭘 잘못했는데요?”

“난….”

“선배는 그냥 미친개한테 물린 거예요. 그때나, 지금이나.”

멀리서 어린애들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는 먹이를 조르는 어린 새들의 울음소리 같다. 생에서 가장 나약한 시기의 어린 짐승이 내는 소리, 멀리 있는 부모에게도 들리도록 날카롭게 설정된 요란한 소리….

“그렇게 생각해요. 살면서 한두 번쯤 그런 일 있을 수도 있는 거잖아요.”

“너 아까부터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복잡할 거 없다는 말이에요. 나는 아무렇지 않게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를 수 있고, 당신 절친의 머리통을 깨 버릴 수 있고, 사람을 죽여 놓고 그 일을 농담거리로 삼을 수 있어요. 그게 다예요.”

“…….”

“그럴 수 있는 인간이라서 그렇게 하는 거예요. 거기엔 어떤 이유도 배경도 없어요.”

“…….”

“나한테 물린 사람이 당신이 아니라 그 누구였더라도 마찬가지예요.”

왜 그랬을까? 그것은 사현을 처음 만난 여름에 생겨난 여준의 의문이었다. 왜 그런 소문이 났을까.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왜 어떤 변명도 하지 않았을까.

그때 여준의 핸드폰이 길게 울렸다. 시터의 번호가 떠 있었다. 아이가 어지간히 떼를 쓰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망설이는 여준을 보며 사현이 말없이 손짓했다. 조용히 있을 테니 받으라는 듯이.

“…여보세요.”

- 아빠!

울며불며 떼를 쓰고 있을 거란 예상과는 반대로 아이는 발랄했다.

“응, 지오야. 아빠 찾았어?”

- 아빠, 있잖아. 아빠가 응, 선물 사 준다고 했잖아.

여준은 은연중에 픽 웃고 말았다. 곧장 사현을 의식하고 표정을 굳히긴 했지만 녹을 듯 부드러워진 목소리만큼은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아빠가 그랬어? 언제?”

- 어…. 근데 아빠, 라이언이 애긴데, 응…. 애기여서 턱받이도 하구우.

“라이언? 인형?”

- 으응, 인형인데, 근데 나는 이제 다 컸으니까 인형은 사면 안 되지?

“어떤 건데? 아빠가 사 가야 돼?”

- 아니, 지오가 아빠 카드 쓰면 된다구 했는데, 누나가 그러려면 아빠가 지오한테 어, 선물해 줘야 되는 거래서, 그럼 선물 달라고 하려구 전화했어요….

용건을 끝마친 목소리가 점점 기어들어 갔다. 안 된다고 하면 어쩌나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여준은 짐짓 고민하는 척 음, 하며 말끝을 길게 늘였다. 내리 아프던 속이 거짓말처럼 멀쩡해졌다. 아주 달콤하고 부드러운 우유를 삼킨 느낌이었다.

“아빠가 라이언 인형 선물로 주면, 우리 지오는 아빠한테 뭐 해 줄 건데?”

- 어, 나는, 어…. 밥을 잘 먹을 거야.

“또?”

- 그리고…. 음…. 누나 말도 잘 들을 거구….

“또?”

- 에이…. 아빤 바라는 게 너무 많아.

여준은 결국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아빠의 목소리에서 긍정적인 분위기를 읽은 아이가 한껏 우렁차게 물었다.

- 사도 돼?

“그래, 사. 한 개만이다. 알았지?”

- 응!

신나는 대답과 함께 전화는 뚝 끊어졌다. 원하는 걸 얻어 냈으니 볼일 없다는 투였다. 여준은 여전히 미소가 가시지 않은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

동시에 담배꽁초를 눌러 끄던 사현과 눈이 마주쳤다. 무겁고 어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흠, 헛기침을 한 여준이 애써 시선을 돌렸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았다.

“애가 예뻐요?”

사현의 질문에 진득한 담배 냄새가 묻어 있었다. 여준은 질문의 뜻을 되묻는 대신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사현은 그런 여준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무심히 중얼거렸다.

“못생겼던데.”

“…뭐라고?”

“당신 아들요. 못생겼다고.”

어안이 벙벙해진 여준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사현은 오늘따라 확실히 이상했다.

“너 대체….”

“희한한 일이죠. 선배 유전자를 가지고 그런 얼굴이 나오다니.”

지오는 자랄수록 은아를 닮아 갔다. 희고 볼록한 이마, 동그란 눈, 작은 코와 사랑스러운 뺨까지. 여준은 사현의 무례한 말을 대체 어디부터 부정하고 받아쳐야 할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그래도 예뻐요?”

“대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야?”

“당신이랑 닮은 구석이라고는 눈썹 한 올 없는데도 예쁘냐고요. 그렇게 멍청한 얼굴로 실실거리고 있을 만큼.”

“…….”

“없으면 못 살겠고 그래요?”

지오 없으면 못 살겠어? 그것은 은아가 죽은 뒤로 모든 이가 형태만 바꿔 여준에게 물은 말이었다. 처가에 보내. 아니면 싱가포르에 계신 너희 부모님께 맡겨. 혼자서 직장 다니면서 애를 어떻게 키워? 왜 그런 고집을 부려?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애가 뭐라고 그렇게 소중하게 싸쥐고 있나 해서.”

“지금 그러니까, 나한테 지오가 중요한지 아닌지 그걸 묻는 거야?”

“강박 관념 같은 거예요? 내 애니까, 내 핏줄이니까 당연히 내가 책임지고 사랑해야 한다. 그래서 그 고생을 하면서 삽질하는 거?”

“그런 말이 어딨어? 원래….”

자기 아이를 사랑하고 책임지는 건 당연한 거잖아. 누구나 아는 말을 입에 담으려던 여준이 멈칫했다. 오래전 들었던 사현의 이야기가 떠오른 탓이었다. 어머니는 가출했고, 아버지는 얼굴조차 볼 수 없고, 누구도 사랑해 주거나 도와주지 않아서 차가운 반지하 단칸방에 외로이 앉아 있던.

“…….”

그러자 무슨 말로도 사현을 납득시킬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여준 자신이 아는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이가 지겨웠던 적은 많았다. 견딜 수가 없어 처가에 넘겨줘 버릴까 하는 생각도 안 해 본 게 아니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떼를 쓰느라 하루 종일 우는 아이를 보다가 이성이 날아갈 뻔한 적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쩔 땐 아이가 다 알고 일부러 자신을 괴롭히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였다.

하지만 다 잊혔다. 잠든 뺨이 보드랍게 부푼 모양을 볼 때, 단풍잎 같은 손가락이 꼬물꼬물 제 나이를 셀 때, 어린이집에서 배웠다는 율동을 하며 칭찬해 달라는 듯 눈을 반짝일 때면.

“그….”

아이는 작고 부드러운 나약함이며, 존재 자체의 위안이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한데.”

도저히 사현에게 말할 수는 없었지만.

사현은 어깨만 한 번 으쓱였다. 그래, 까짓거 하나도 중요하지 않다는 듯이.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고 다시 아파 오는 명치에 손을 얹었다. 사현 앞에서 전화를 받은 일이 뒤늦게 후회스러웠다.

“뭐 그렇게 곧 죽어도 애 없이는 못 살겠다 정도는 아닌가 봐요?”

발끈해서 당장 부정하려던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놀이터에서 지오를 싸늘히 바라보고 있던 사현의 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어떻게 대답해야 하는 걸까. 헛소리 말고 애한테 관심 끄라고? 손가락 하나라도 댔다가는 죽여 버리겠다고? 하지만 여준은 그동안의 일을 통해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사현은 당기면 당길수록 더 큰 힘으로 뿌리치고 가 버리는 인간이었다. 아이를 싸고돌며 예민하게 굴면 괜히 자극할지도 모른다.

“…뭐 그런 사람이 얼마나 되겠어. 다들….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렇게 사는 거겠지.”

“아, 그래서 장모 운전기사한테 그 굴욕을 당하면서 애 내놓으라고 징징 짜시고.”

“…….”

“재밌네. 나름대로 머리 쓰는 거예요?”

핸들에 팔을 올린 사현이 옆머리를 기댔다. 여준을 바라보는 눈꼬리가 살짝 휘어져 있었다.

“많이 약아졌네요, 선배.”

입술에는 미소가 걸렸다.

“보기 좋네.”

여준은 아무 말도 못 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정말로 사고였어요.”

한참이 지난 후에야 사현이 중얼거렸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낮고 조용한 어조였다. 제가 하는 말의 뜻 같은 건 모른다는 듯, 순진하고 깨끗한 단어로 아무렇지 않게 사랑을 말하던 어린 날 같았다.

“선배랑은 아무 상관도 없었어요.”

“…….”

“그냥 심술부렸을 뿐이에요. 옛날 일도 생각나고 그래서.”

그제야 여준은, 오늘따라 사현이 이상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때 선배가 엄청 미웠거든요. 그렇게 잘해 주더니, 집까지 찾아와서 샐샐거리더니 사람을 강간범 취급하고 내빼길래.”

사현은 뭔가를 마무리하려 하고 있었다.

“선배가 이해해요. 어렸잖아요. 애정 결핍에 욕구불만에 결손가정에…. 내 처지가 그렇게 불쌍했는데 선배처럼 다 가진 사람이 좀 이해해 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사….”

“섹스도 뭐, 좋은 경험 했다고 생각해요. 닳는 것도 아니고, 다치게 한 것도 아니고. 선배도 그렇게 기분 나쁘기만 한 건 아니었잖아요.”

사현의 손이 여준의 목덜미로 닿았다. 여준이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렸지만 좁은 차 안에는 도망갈 구석조차 없었다. 마른 목에 붙은 반창고는 지나치게 눈에 띄었다. 사현이 손톱을 세워 밴드 끄트머리를 살살 긁어냈다. 여준의 뺨으로 촘촘한 소름이 돋았다.

“뭐 하는….”

“멍 많이 들었나 보게요.”

결국 완전히 떨어져 나간 밴드 아래로 붉은 자국이 드러났다. 여준은 입술을 짓씹으며 한껏 몸을 피했다. 어쩐지 사현 앞에서 전라로 엎드렸을 때보다도 창피했다.

“그거 알아요?”

“…뭘.”

“선배 등에는 이런 자국 열 개도 넘게 있어요.”

사현의 손끝이 울혈 진 피부 위를 살짝 긁어내렸다. 여준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그만해.”

사현은 순순히 손을 떼어 냈다. 한숨을 길게 내쉰 여준이 식은땀이 난 이마를 쓸어 올렸다.

“그냥 알려 주는 거예요. 혹시 남들 앞에서 옷 벗을 일 있으면 조심하라고.”

“…….”

“선배한테는 회사 생활이 중요하다면서요.”

걱정인지 비웃음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관두자…. 너랑 얘기하다 보면 머리가 이상해지는 것 같아.”

슬쩍 입꼬리를 올린 사현이 아무렇지 않게 제안했다.

“밥 먹고 가요.”

“뭐…?”

“근처에 맛있는 집 있어요. 복어 요리.”

여준은 어떻게 해야 자신이 느끼는 황당함을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사현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고민했지만, 그런 일에 머리를 쓸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됐어. 집에 갈 거야. 어차피 위염이라 아무것도 못 먹어.”

“그렇구나, 위염이라.”

사현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가 아파요? 끈질기게 묻던 말이 떠올라 여준은 순간 사현의 옆모습에 시선을 주었다.

“그럼 집으로 데려다줄게요.”

놀랍도록 쉽게 대답한 사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대로 또다시 정적이 찾아왔다. 차가 왔던 길을 거슬러 강남으로 진입하고, 너무나 익숙하게 여준의 아파트 입구에 설 때까지 둘 사이엔 한 마디도 오가지 않았다.

“다 왔어요.”

사현이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마주친 눈동자는 검고 깊었다. 여준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아무렇지 않은 척 물었다.

“오늘 대체 뭐야?”

왜 갑자기 사람을 차에 태우고 이상한 이야기를 지껄였어? 생략된 질문에도 사현은 쉽게 대답했다.

“데려가서 밥이나 먹이려고 했어요. 피죽도 못 먹은 꼴을 하고 있길래.”

“…….”

“근데 위염 환자한텐 뭘 먹여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서.”

또 잠깐의 침묵이었다. 여준은 문고리를 잡은 채 이 문을 열기 위해서 작별 인사가 필요한가에 대해 생각했다. 더불어 사현과 만나거나 헤어질 때 인사 같은 인사를 나눈 적이 없음을 깨달았다.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말없이 문을 열고 내렸다. 사현도 그 이상 어떤 말도 건네지 않았다. 여준이 문을 닫자마자 차는 출발했고,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

여준은 한 번 떼었다 붙인 밴드가 잘 붙어 있는지 몇 번이나 확인하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아이와 시터는 아직 돌아오지 않은 듯했다. 안방으로 들어가 재킷을 벗자마자 파도 같은 피로가 밀려들었다. 그는 옷을 대충 벗어 아무 곳에나 던져두고 욕실로 향했다.

불을 켜고 거울 앞에 섰다. 목에 붙은 밴드를 떼어 내자 아직도 선명하게 새겨진 자국이 보였다. 그 위를 손끝으로 훑던 여준이 천천히 돌아섰다. 고개를 기울인 채 거울 쪽으로 등을 보이고 섰다.

“…….”

거울에 비친 것은 의심스러운 눈동자와 점 하나 없이 깨끗한 등뿐이었다.

‘선배랑은 아무 상관 없어요.’

눈을 씻고 살펴봐도 사현의 흔적이 남은 곳은 목뿐이었다.

‘다 잊어버려요. 미친개한테 물렸다 치고.’

여준은 목덜미의 상처에 손을 얹은 채 한참을 거울만 바라보았다.

‘정말로 사고였어요.’

여전히 뱃속이 울렁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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