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작열
당신은 내 뱃속을 태운다.
기억의 시작은 축구공이다. 닳아빠진 축구공이 내 얼굴을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왔다. 코가 부러진 게 아닐까 싶었다. 눈물이 줄줄 흘러 앞을 볼 수 없었고 코피며 침으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다. 공을 찬 녀석은 깔깔대고 웃으며 나를 향해 손가락질했다. 나는 더러운 소매로 얼굴을 문질러 닦고 녀석에게로 달려들었다. 목을 붙들고 넘어진 뒤 얼굴을 마구 할퀴고 내리쳤다. 내가 흘린 피만큼 내고 나서야 끝날 싸움이었다. 아이들의 비명 소리가 들렸고 어른의 손에 뒷덜미가 붙들려 바닥으로 내쳐졌다. 구태여 다시 일어섰다. 마지막 순간에 울지 않고 서 있는 자가 승리자라는 것을 나는 그때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게 승리했다. 그 뒤로 누구도 내게 함부로 덤비거나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공을 차지 않았다.
그것은 내가 경험한 최초의 자극이었다. 내게 덤벼 오르는 도전자를 곤죽으로 만들어 바닥에 눕히고 홀로 서 있을 때의 쾌감. 이 자극만으로도 평생을 즐겁게 살아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자극에는 관성이 따른다. 누구에게도 먼저 시비를 걸지 않는 나를 두고 애석한 낭만을 갖다 붙인 녀석들도 적지 않은 모양이었으나 그건 단순히 내 방아쇠가 ‘반격’에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상대보다 강할 거라는 자신감, 원인 모를 분노, 승리자가 되고 싶은 욕망 등으로 복잡하게 뒤섞인 10대란 하나같이 애잔하고 가소로운 존재들이지만 개중에도 간혹 죽기 살기로 덤벼드는 물건은 있었다. 그런 녀석들은 내게 축구공 사건의 쾌감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온 성의를 다해 그들을 때려눕히고 팔다리를 꺾어 놓았다.
“너 임씨냐?”
깡추를 만난 것은 그렇게 의미 없는 싸움질에 취해 지내던 중학교 3학년 여름이었다.
“나도 임씬데. 종파가 어디여?”
“모르는데.”
깡추는 이십 대 초반의 조폭 끄나풀이었다. 내가 초등학교 때쯤 발발한 재개발 패권 싸움으로 밀고 들어온 용역들이 구시가 뒷골목을 나와바리로 잡으면서 그대로 눌러앉은 세력이라고 했다. 그는 시시때때로 나를 앉혀 놓고 그네들의 세계가 얼마나 심오한 세력 줄타기를 하고 있는지 설명했지만 관심이 없었기에 귀담아듣진 않았다.
“새끼가 말이 짧아?”
“요.”
“…….”
“모른다고요.”
별명은 ‘깡마른 추남’의 줄임말이라고 했다. 깡추는 펄쩍 뛰며 ‘깡 센 추남’이라고 정정했지만 알 바 아니었다. 어쨌든 추남이라는 거였으니까. 깡추의 훌쩍 마른 몸뚱이는 단단한 근육질이었고 윗입술이 들리도록 튀어나온 뻐드렁니는 하나가 빠지고 없었다. 하지만 눈은 매우 동그랗고 쌍꺼풀이 짙었는데, 어머니가 베트남 사람이라 그렇다고 했다.
“하관까지 엄마 닮았으면 마, 내가 여기서 이러고 안 살아. 테레비 나가서 연예인하지.”
“형님은 키가 작아서 연예인 못 해요.”
“왜 못 해? 요즘 아이돌? 어? 그거 하는 애들 다 땅바닥에 붙어 다니던데.”
모두가 깡추를 싫어했다. 그와 함께 구시가를 돌아다니고 있노라면 가게 주인들이 하나같이 인상을 쓰고 피하거나 돌아서 침을 뱉었다. 내 눈에 보이는 게 깡추 눈에 안 보일 리 없건만 그는 별로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덤비지도 않는 놈한테는 유감없어.”
그런 면에서 나는 깡추와 통하는 면이 있었다. 깡추도 그래서 나를 마음에 들어 했는지도 모른다.
깡추의 주특기는 자해 공갈이었다. 그는 늘 뒷주머니에 면도날을 넣어 놓고 다니다 누군가 시비를 걸 때면 빠진 이를 드러내고 씩 웃으며 면도날로 제 팔뚝을 길게 긋곤 했다.
깡추는 문신이 없었다. 메마른 팔뚝을 가득 채운 것은 오로지 칼로 그은 수많은 흉터였다. 담이 약한 녀석들은 깡추가 소매를 걷기만 해도 오줌을 지리며 물러났다. 나는 주로 깡추의 뒤에서 그의 싸움을 구경하거나 망을 보는 역할이었다. 교복을 입고 다닐 때가 많았기 때문에 소문은 금방 퍼졌지만 학교에서 제재를 받는 일은 없었다. 학생들끼리 싸운 게 아닌 이상 괜히 벌집을 건드릴 필요는 없다고 판단한 것 같았다.
“니 이제 고등학교 가든가? 학교 어디로 가나?”
내 중학교 졸업식에 찾아온 사람도 깡추뿐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릴 때 사라졌고, 아버지는 지방을 도는 트럭 기사라 1년에 두어 번이나 볼까 말까 했다. 깡추는 교문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가 스테이크를 사 주었다. 아기자기한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나는 누가 봐도 깡패인 깡추와 앙증맞은 스테이크를 썰어 먹었다.
“K고요.”
“K고? 완전 명문 아녀? 서울대 막 보내는 데잖아.”
“요즘은 뺑뺑이예요. 성적 상관없고.”
스테이크는 질기고 뻑뻑하고 무슨 맛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 주제에 한 덩이에 삼만 원이나 했다. 깡추는 영수증을 받아 들고 왐마, 사기꾼 새끼들, 하며 험악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주저 없이 카드를 꺼내 계산을 마쳤다.
어린 마음에도 어렴풋 알고는 있었다. 한 따까리 한다는 조폭 끄나풀이 나를 이 정도로 싸고도는 데에는 그에게도 계산이 있어서일 거라는 걸. 세력 싸움이 인생의 업인 조폭들은 언제나 인력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다. 어디 좀 쓸 만한 새끼 없나, 깡추와 그의 똘마니들이 입에 달고 사는 말이었다.
깡추는 내가 ‘쓸 만한 새끼’라고 판단해서 나를 싸안고 다닌다. 그러니 ‘쓸 만한 새끼’인 내가 다른 놈들에게 붙어 버리면 그 즉시 밟으려 들 것이다. 어차피 되는 대로 흘러가는 인생이었고, 깡추 밑에서 안주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고 여겼기에 불만은 없었다.
“그래, 학교 조용히 다니고, 시답잖은 새끼들이랑 어울리지 말고.”
박하사탕을 입에 넣고 굴리며 깡추가 말했다. 그가 걱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으므로 나는 두어 번 고개만 주억거렸다.
“이래 보니 우리 싸현이 키 많이 컸네. 지금 몇이나 되나?”
“안 재 봐서 모르겠는데…. 형님보단 커지지 않았을까요.”
“뭐? 야, 그건 아니다, 진짜 아니다. 내 키가 몇인데…. 딱 서 봐, 신발 벗고.”
고등학교만 졸업해라, 요즘은 이것도 사업이라서 고졸 딱지도 못 붙인 애들은 출세를 못 해…. 와서 자리 좀 잡고 나면 대학도 갈 수 있어. 깡추의 사탕발림이 달게 들리지는 않았다.
재차 말하지만 자극에는 관성이 따른다. 나는 그저 모든 것이 지루했다. 처음 봤을 때는 놀랐던 깡추의 팔뚝 상처도 애들 장난처럼 보였다. 고작 피부 좀 찢어 놨을 뿐인데 얼굴이 허옇게 질려 도망치는 한심한 놈들도 짜증스러웠다.
고등학교에 대해서도 전혀 기대하지 않았다. 중학교가 그랬듯이 지루한 공간이겠거니 했다. 나를 학교에 보내는 아버지의 머릿속은 깡추와 크게 다를 것도 없었다. 그래도 고등학교는 나와야지. 고졸 딱지는 붙어야 사람 같으니까.
입학식 날은 뒤늦은 강추위가 밀어닥친 날이었다. 그 와중에 체육관이 공사 중이라 운동장에서 입학식을 진행한다고 했다. 괜히 왔다 싶었지만 조용히 지내라는 깡추의 말을 떠올리고 묵묵히 서 있었다. 칼바람을 맞은 피부는 떨어져 나갈 듯 쓰리고 손가락은 있는 대로 곱아들었다. 여기저기서 원성이 새어 나왔지만 단상 위에 오른 어른들은 온갖 훈계와 잔소리를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이상은 견딜 수가 없었다.
“씨팔…. 진짜 개춥네.”
그때, 짜증으로 가득 찬 속을 달래기 위해 무심코 뱉은 욕설에 응답이라도 하듯.
“다음으로 재학생 환영 인사가 있겠습니다. 2학년 대표 성여준.”
앳된 얼굴의 상급생이 단상에 올라왔다.
“…….”
순간적으로 모두의 시선이 단상으로 쏠렸다. 특히 여자애들의 반응이 뜨거웠다. 곳곳에서 웃음소리와 환호성, 잘생겼다는 탄성 따위가 쏟아졌다.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덜덜 떨며 서 있는 1학년들을 쭉 둘러보고는 활짝 웃었다.
“안녕하세요, 2학년 대표 성여준입니다. 제가 여기 나온 거는 음, 물론 학생 대표라는 이유도 있는데…. 이 학교 2학년 중에 신입생 제일 보고 싶어 하는 게 저라서 제가 나왔습니다.”
옆줄에 서 있던 녀석이 우와, 하며 탄식하고는 그를 좀 더 잘 보기 위해 고개를 쭉 빼 들었다. 나 역시 잠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작은 얼굴에 알맞게 들어찬 눈 코 입 하나하나가 부드러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반짝이는 눈에 내려앉은 미소는 이 황량하고 추운 공간에 단 하나 허락된 불씨처럼 보였다.
“여러분, 춥죠? 아, 오늘 너무 춥다. 그쵸.”
추위에 지쳐 죽어 가던 신입생들이 큰 소리로 네에, 하며 그의 말에 호응을 보냈다. 그는 양손으로 제 팔뚝을 쓸더니 반응 좋다, 하며 히쭉 웃었다.
“어떡해, 귀엽다.”
“여자 친구 있겠지?”
옆줄에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짜증스러웠다. 마이크를 통해 들려오는 음성조차 부드러웠다. 잡음이 섞이지 않은 상태로 듣고 싶었다.
“네, 제가…, 큼, 환영 인사를 준비하래서 어제…. 새벽 두 시까지 이걸 썼거든요. 아침에 와서 선생님한테 검사도 받고, 근데…. 보니까 제가 하는 환영사가 입학식 마지막 순서더라고요? 그래서 순서 기다리는 동안 막 입고 얼고 손도 얼고…. 근데 전 선생님들 앞에 피워 놓은 난로 앞에 있었는데도 이렇게 추운데 여러분은 얼마나 추울까 싶어서요.”
그가 소매를 끌어 쥔 채 코를 훌쩍이는 모습에 아이들이 앓는 소리를 냈다. 그쯤 되니 신비로웠다. 보는 사람의 눈을 끌어당기는 힘, 다정하고 조용한 몸짓 하나에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매력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네, 그래서 이거 A4 세 장 분량인데 다 생략하고요. 아, 혹시 뭐라고 썼는지 궁금하신 분들은 나중에 2학년 9반으로 오면 알려드릴게요. 이 말로 끝내겠습니다. 신입생 여러분, 모두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활기찬 인사에 신입생들은 운동장이 터져 나갈 듯한 환성으로 답했다. 모두가 그에게 소리를 지르고 휘파람을 불며 호감을 표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대담한 돌발 행동이었음에도 선생들 역시 그가 귀엽다는 듯 웃었다. 나만이 우두커니 멈춰 선 채였다.
그의 존재는 내게 의문을 던졌다. …아니, 아니다. 그것은 의문이라는 단어로는 간단히 설명되지 않는 것이다.
그동안 나는 내 생에 큰 의구심을 가져 본 일이 없었다. 처음으로 남을 때린 것은 축구공 때문이었지만, 그 뒤로 남을 때린 것은 모두 반사작용에 지나지 않았다. 욕설과 무기가 동반된 폭력이 나를 때리면 나도 똑같이, 아니 그 두 배로 갚아 상대를 밟고 서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그는, 성여준의 존재는 그게 아니었다. 그는 다만 제 할 일을 하며 손을 흔들고 미소 지었을 뿐이다. 그 모습이 순간 마음을 뒤흔드는 자극으로 다가왔다. 그 전까지 내 인생을 떠밀어 왔던 자극과 다른 점은, 그에게 내가 받은 자극을 되갚거나 표현할 방법을 알 수 없었다는 것뿐이다.
그것은 작열과도 같았다. 난데없이 태양 가장 가까운 곳으로 떠밀린 느낌이었다. 멍하니 헤벌린 입으로 쑤시고 들어온 직사광선이 뱃속을 태우고 모르는 일이라는 듯 유유히 사라진 것이다.
뱃속이 뜨겁고 욱신거렸다. 혼란 사이로 강렬한 열망이 파고들었다. 타인에게 이토록 큰 작열을 심고, 그럼에도 저토록 안전하고 화사한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사람이란 도대체 뭘까. 어떤 위험부담도 없이, 누구의 방해도 없이, 무엇도 잃지 않고 모든 것을 가질 수 있는 저 비열하고 불공정한 삶을 손에 넣으려면 어떤 인간으로 태어났어야 하는 걸까.
그것을 알고 싶었다, 그리고, 가능하다면….
…그렇게 되고 싶었다.
***
“아무리 그래도 너무 조용하네.”
깡추가 지루한 얼굴로 툭 내뱉었다. 나는 그의 발치에 주저앉아 숙제로 나온 프린트를 푸는 중이었다.
“뭐가요?”
“니 말이야, 니. 학교 들어가자마자 온갖 놈들이랑 다 시비 붙고 다닐 줄 알았더니.”
“제가 왜요.”
“왜긴, 슬슬 좀이 쑤실 때잖냐. 니네 학교에는 뭐, 한가락 하는 후배들 털고 다니는 그런 놈도 없냐? 진짜 범생이 학교야?”
숙제는 터무니없이 어려웠다. 모르겠다는 답변을 세 개째 써 내려가며 생각에 빠졌다. 깡추의 말은 일리가 있다. 중학교 때도 사실 가장 자주 싸운 건 1학년 때였다. 어디나 처음 들어가면 제일 큰 위협은 상급자다.
“…그런가 봐요. 딱히 형님이 찾으실 만한 인재는 없네요.”
“에효, 재미없게. 니랑 피 터뜨리고 싸울 만한 새끼면 확실한데.”
곧이어 성여준의 얼굴이 머리를 스쳤다.
짐작했던 대로 그의 인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온갖 시답잖은 기념일마다 가방이 터질 만큼 많은 선물을 받고 하교하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당연히 그와 사귀고 싶어 하는 여자애들도 많았지만 공부에 집중해야 한다며 모두 거절하고 있다 했다. 학교에 가면 한두 마디 간신히 하고 돌아오는 내 귀에도 들어왔을 정도니, 거의 전교생이 매일 그의 이름을 떠들고 있는 게 틀림없었다.
전교 1등, 잘생긴 학생회장. 누구의 인사나 웃으며 받아 주고, 도움을 청하면 뭐든 들어준다. 그런 사람이니 학교라는 좁은 사회에서 독보적인 존재로 비치는 것도 당연했다.
“뭐 그렇게까지 잘생겼나?”
물론 그런 존재에겐 언제나.
“성여준, 성여준. 이름만 들어도 지겨워 죽겠네.”
시답잖은 찌끄러기들도 달라붙게 되어 있다.
“딱 봐도 가식이잖아. 앞에선 실실 웃고 공정한 척해도 어차피 노는 건 잘나가는 사람이랑만 놀고.”
“그니까. 여자들은 멍청해서 얼굴이면 다 된다고 생각하지.”
놈들은 굳이 분류하자면 나 같은 부류였다. 고등학교 배정이 추첨으로 바뀌기 전에는 죽어도 이런 명문고 문턱에 발도 못 들여 봤을 어중이떠중이. 거친 생김새에 입은 더럽고 그 와중에 열등감은 가득해서 하루 종일 불평불만만 지껄인다.
이런 열외 인간들이 진심으로 그를 질투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우스웠다. 주제도 모르나? 픽 웃자 그걸 또 예민하게 알아챈 녀석들이 따가운 시선을 보내왔다. 조용히 마주 보자 금방 숨을 씨근거린다.
“너 지금 나 보고 쪼갰냐?”
“어.”
쉽게 대답하자 녀석은 금방 말문이 막힌 얼굴을 했다.
“너 보고 쪼갰는데.”
“…….”
“뭐.”
아예 몸을 숙이자 놈이 흠칫 물러났다. 기가 막혀서 말을 더 섞을 기분도 들지 않았다. 조용히 살아. 농담 반 진담 반이었을 깡추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학교에서 성여준을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지나는 이들의 시선이 모이는 자리를 찾으면 되었다. 어디에서나 중심에 있었고, 누구나 그의 말에 집중하고 있었다. 웃으며 한마디를 하면 백 마디의 찬사가 돌아오는 삶.
마치 신이 된 기분 아닐까.
“어, 사현아. 임사현.”
등 뒤에서 카랑카랑한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돌아보니 담임이었다. 폭 좁은 치마를 입고 종종걸음으로 뛰어온 그녀가 다짜고짜 프린트 한 장을 건넸다.
“그거 읽어 보고, 내일까지 신청서 제출해.”
“…예?”
“신청한다고 다 되는 건 아니고 심사를 거치기는 할 거야. 되도록 잘 써야 해. 알았지?”
설명은 그게 끝이었다. 어안이 벙벙해서 내려다보니 <학업 증진과 선후배 관계 향상을 위한 멘토 시스템 시범 시행>이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무슨 뜻인지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두어 번을 더 읽고 나서야 대충 맥락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한 학년 위의 선배와 마주 앉아 어색한 침묵을 견디면 생활에 보탬이 될 장학금을 지원해 주겠다는 이야기였다.
미쳤냐, 이딴 걸 누가 해. 바로 구겨서 쓰레기통에 넣고 돌아섰다. 담임은 내 집 주소와 아버지 직업을 확인하고는 때때로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떨어진 생필품은 없는지 물었지만 그의 염려와 다르게 내 생활은 그리 궁색하지 않았다. 데리고 다니며 삼시 세끼를 먹여 주는 깡추 덕분이었다.
“아 참, 그거 신청하든 안 하든 교무실 가서 2학년 주임 선생님한테 얘기해! 알았지?”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들었다. 아, 씨발. 이를 갈고 돌아보았지만 담임의 모습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멘토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누가 그딴 짓을 하겠대. 귀찮음을 꾹 참고 교무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창밖으로 드리워진 새파란 나뭇잎에 눈이 멀 것 같았다. 어느새 여름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름이 싫었다. 덥고 습한 날씨가 반복되다 보면 간신히 닦아 놓은 곰팡이가 기다렸다는 듯 되살아나 반지하 골방을 뒤덮곤 했다. 그런 날씨에 알지도 못하는 상급생과 마주 앉아서 멘토가 어쩌니 하는 이야기나 나눠야 한다니, 상상만 해도 답답해져 넥타이를 살짝 풀었다.
복도에는 이상할 정도로 사람이 없었다. 덕분에 드르륵, 미닫이문을 여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열린 창으로 늦봄의 바람이 불었다. 퍼렇게 익은 나뭇잎들이 하나둘 창문에 달라붙고, 그 사이로 비친 녹색 햇빛을 고스란히 받으며 나타난 것은 성여준이었다.
“…….”
한국이 일찍부터 천주교 국가였다면, 유명한 예술가의 천장화에 그려진 천사들이 딱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도 모르게 멈춰 선 채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교무실 안쪽을 향해 공손히 인사하고 문을 닫더니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로 스쳐 갈 거라 생각했다. 그는 이 공간을 주무르는 신적 존재고, 나는 그와 눈만 마주쳐도 뱃속이 타 버릴 만큼 하찮은 추종자니까.
“안녕.”
그런데 그가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눈부시도록 화사한 미소도 짓고 있었다. 하마터면 마주 인사할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착각이겠지. 내 뒤에서 그의 친구가 걸어오고 있을 게 틀림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나는 이런 어설픈 트릭에 걸려들 만큼 멍청하지 않다.
“너 사현이지? 임사현.”
그래서 그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는.
“멘티 때문에 온 거야?”
꿈이라고 생각했다.
“아, 나는 성여준이야. 2학년.”
“…알아요.”
이 학교에 그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다. 하다못해 한 달에 한 번 들르는 청소회사 직원들도 그의 이름이 성여준이라는 사실은 알 것 같았다.
“응, 너 멘토 내가 하기로 했어. 다음 주부터.”
그러니 이건 아무래도 꿈인 게 틀림없다. 그게 아니고서야 이토록 환상적인 이야기가 귀에 들려올 리 없지 않은가. 나는 마른침을 삼키며 그의 얼굴을 좀 더 유심히 살펴보았다. 꿈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고.
가까이서 보니 눈동자가 연갈색이었다. 속눈썹이 긴데도 전혀 무거워 보이지 않아 신기했다. 학교 최고의 꽃미남 칭호를 달고 있지만, 뜯어볼수록 잘생겼다기보단 예쁜 얼굴이었다. 사람의 얼굴은 단순한 척 매우 복잡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목구비며 얼굴형이 어디 하나 모난 데 없이 부드럽게 어우러져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매혹적이었다.
“왜? 나 마음에 안 들어?”
한참을 바라보는데 눈썹을 살짝 가라앉힌 그가 물었다. 묘하게 애교 섞인 목소리라 그만 진심으로 당황하고 말았다.
“…예?”
“바꿔 달라고 할까? 나 싫으면 다른 애로 해도 돼.”
살짝 눈을 접어 웃는 모습조차 비현실적이었다. 얼른 고개를 저으면서도 혼란스러웠다.
이 사람은 알까. 내가 어떤 인간인지. 성여준과 나는 사는 세계 자체가 다르다. 그는 세상의 중심, 나는 태양계 밖으로 밀려난 먼지 구덩이.
“…래서 말인데 내가 해 줬으면 하는 거 있어? 공부 봐주면 좋겠다거나.”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말을 놓쳤다. 뭘 해 줘? 봐준다고? 공부를?
“아, 아뇨….”
질문에는 답을 해야 한다. 강렬한 의무감으로 입을 열었지만 흘러나온 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한 소리였다. 도와주겠다는데, 뭐라도 해 준다는데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한 거야, 내가. 자괴감에 빠져 딱 죽기 직전에 되었을 때 성여준이 아아, 하며 입을 열었다.
“그럼 생각해 놔, 다음 주까지.”
동시에 손이 뻗어 왔다. 순간 심장이 벌컥 뛰었다. 나도 모르게 물러서자 그는 허공에 홀로 남은 손을 어렵지 않게 거둬들였다.
“그래, 그럼. 들어가 봐.”
“…예?”
“교무실에 볼일 있어서 온 거 아니야?”
그가 교무실 문을 가리켰다. 나도 모르게 그 시선을 따라갔다가 고개를 저었다. 볼일이 있었지,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어설프게 인사를 건네고 돌아서서 달렸다. 교실로 돌아왔을 땐 숨이 턱까지 차올라 있었다.
지나던 녀석들은 난데없이 쓰레기통을 뒤지는 나를 미친놈 보듯이 힐끔거렸다. 다행히 구겨서 넣어 놓은 멘티 활동 신청서는 그대로였다. 재빨리 책상으로 돌아가 있는 대로 힘주어 펴고 또박또박 이름을 써넣었다. 임, 사, 현.
목소리가 좋았다. 부드럽고 알아듣기 쉬웠다. 다시 한번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가 애국가만 4절까지 줄줄 읊는다 해도 집중해서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뭐냐아, 징그럽게.”
깡추는 내 이야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침부터 칵 뱉었다. 신이 나서 떠들다 말고 흥이 식어 버린 나는 묵묵히 그가 사다 준 음료수를 들이켰다.
“너 호모야? 뭔 사내새끼보고 천사 같네 뭐네….”
“아니거든요….”
“웨엑, 호모 존나 싫어. 너 이 시간 이후로 나한테 들러붙지 마라.”
이어진 말에는 진심으로 어이가 없었다. 이 인간은 설마 성여준과 자신이 내 눈에 동등한 대상으로 보인다고 여기는 걸까, 그것도 좆 하나 불알 두 쪽 달렸다는 이유만으로.
“그 선배랑 형님은 다른데요.”
“뭐가 달라? 너 호모라며, 호모면 남자한테 좆 세우잖아. 막 똥구멍에 처박고 어? 쑤컹쑤컹하고 어? 그러다 똥독 오르면 에이즈 걸려 뒈지고.”
깡추가 낄낄 웃었다. 제가 내뱉는 천박한 말과 그에 질려 버린 내 모습이 마음에 든 것 같았다. 그가 웃을 때면 빠진 잇새로 형용하기 힘들 만큼 지독한 입 냄새가 났다.
그 전에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던 것들이다. 수준 낮고 저열한 욕설, 씻지 않아 냄새나는 몸, 날씨가 추울 때면 울긋불긋하게 얼룩져 한층 기괴해 보이는 흉터와 위협적으로 보이기 위해 과하게 치켜뜬 눈동자 따위.
“아니면 니가 뚫리고 싶냐? 야, 관둬라. 말년에 고생 오지게 한다. 젊어서 뒷구멍 굴리고 다니던 형님들 지금 다 요실금 팬티 차고 다녀. 차 트렁크에 기저귀가 박스로다가….”
“…아니라니까요, 그런 거!”
벌컥 소리치자 흥겹게 말을 이어 가던 깡추가 입을 꾹 다물었다. 순식간에 싸늘해진 분위기에 숨이 막혔다.
“아니라고요.”
말하면서도 확신은 없었다. 다만 더 이상 깡추 입에서 성여준의 이야기가 나오는 걸 원하지 않았다. 두 번 다시 그에게 성여준에 대해 말할 마음도 없었다.
깡추는 혀를 딱, 하고 차더니 슬그머니 제 소매를 걷어 올렸다. 싸울 태세를 갖추는 몸짓이었지만 모르는 척 외면했다. 그와 나 사이에 있는 단 하나 분명한 것은 서열뿐이었다. 나는 깡추가 돌봐 주며 키우고 있는 ‘쓸 만한 새끼’에 지나지 않았으므로, 원래대로라면 감히 그에게 큰 소리를 내서는 안 되었다.
“싸현아.”
“…….”
“야구에는 쓰리아웃 제도가 있지. 한국인은 삼세번이라고 하고.”
“…….”
“처음 봤을 때 말 잘라먹고 싸가지 없이 군 거, 그리고 방금 지랄 맞게 눈 부라린 거. 카운트 이상 없지?”
절로 벌어지는 입을 억지로 다물었다. 당장 깡추의 심기를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사실 정도는 나도 알고 있었다.
“원 아웃 남았네, 그치?”
어차피 답은 정해져 있다. 한참을 망설이다 예, 하며 고개를 숙였다. 내게는 깡추를 거역할 방법이 없었고, 있다 해도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깡추는 이미 나의 보호자였다. 그가 없으면 내게는 당장 하루 끼니를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아버지가 보내 주는 돈으로는 반지하 단칸방의 월세를 치르는 게 고작이었다.
“잘못했습니다.”
깡추는 나의 비굴한 사과를 기꺼이 받아들였다.
***
“그럼 우리 멘토링 장소는 어디로 할까?”
성여준이 볼펜을 돌리며 물었다. 예? 한 박자 늦게 고개를 들자 그가 몸을 살짝 낮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나랑 있는 거 재미없어? 계속 딴생각하네.”
“…….”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렇게까지 서슴없이 들이대는지 모를 일이었다. 흠, 헛기침을 하고 그가 건네준 프린트를 성의껏 훑어보았다. 성여준이 직접 작성해 온 설문지였다. 1번, 멘토링 장소. 2번, 멘토링 과정에서 집중적으로 도움 받고 싶은 것, 등등…. 화려한 약력에서 짐작은 했지만 참으로 성실한 인간이었다.
“나는…. 특히 수학이 자신 있거든. 그 외 과목들도 1학년 과정은 어느 정도 다 괜찮아.”
“…….”
“어떤 거 위주로 하면 좋을까?”
나는 입학 이래 도서관에 발을 들인 것이 처음이었다. 성여준은 나를 창가 쪽 자리에 앉혀 놓고 본인은 건너편에 앉았다. 햇빛이 부스러지는 말끔한 이마 위로 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공부는…. 괜찮은데요.”
“응? 아, 혼자서도 충분히 잘해서?”
성여준이 볼펜 끄트머리를 제 아랫입술에 꾹 누른 채 웃었다. 미치겠네. 나는 꼴깍, 침을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별로 관심이 없어서요.”
“왜? 진학할 생각이 없어?”
그는 기본적으로 말귀가 빨랐다. 별달리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금방 말의 의도를 알아채고 다음 화제를 던져 주곤 했다. 똑똑한 사람이라 그런가. 감탄하며 아랫입술을 혀로 축였다.
“예, 별로….”
“가고 싶은 학교가 없어서? 아니면 다른 문제 때문에?”
“…….”
대학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둘 다 문제지만, 굳이 정답을 고르자면 전자였다. 가고 싶은 학교도 없고, 이제 와 생각하기도 귀찮고. 그러나 내 입에서는 어쩐지 지나치게 비굴한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학비가…. 저희 집 사정으로는….”
“으음-.”
턱을 괸 성여준이 골똘한 얼굴을 했다. 뱉어 놓고 스스로 우스웠다. 뭘 바라서 이런 말을 했지. 동정을 사고 싶었나?
“그래도, 사현아. 대학에 전혀 흥미가 없는 게 아니라 가고는 싶은데 여건이 안 되는 거면…. 잘 찾아보면 방법은 있거든.”
잠시 고민하던 그가 다정한 말을 건네기 시작했다.
“어디 가고 싶은데? 무슨 과?”
“…아….”
“제일 좋은 건 공부를 엄청 열심히 해서 장학금을 받고 입학하는 건데 이건 꽤 하향 지원을 해야 한다는 문제가 있고, 국가장학금이라는 것도 있는데 신청이 좀 복잡하긴 해도 잘만 쓰면 유용하고…. 음, 나도 그렇게 잘 아는 건 아닌데, 선생님한테 한번 여쭤봐 줄까?”
그의 친절이 어디까지나 선배 또는 멘토로서 나오는 거란 사실 정도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차피 한 달 시한부니까 이 정도는 누려도 되지 않을까. 책상 밑으로 모아 둔 손끝을 꼼지락대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거짓말이에요.”
“응?”
“별로 흥미 없어요. 대학….”
방과 후의 도서실에는 그와 나 둘뿐이었다. 가지런한 눈을 느릿하게 깜빡이던 성여준이 곧 장난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그래?”
그러고는 바리바리 가져온 프린트며 문제집을 옆으로 슥 밀어 치워 버리는 것이었다.
“그럼 우리 이제 뭐 할까?”
“…….”
“너 뭐 좋아해? 난 영화나 소설 좋아해. 만화도 많이 봤었는데 작년부터 엄마가 만화책 금지해서 요즘 뭐가 인기 있는지는 잘 몰라.”
뭘 좋아해? 그런 질문을 받아 본 건 생전 처음이었다. 누구도 내게 뭘 좋아하느냐고 묻지 않았다. 깡추가 사 주는 밥은 거의 당장 그 자신이 먹고 싶은 것들이었고, 아버지가 가끔 사서 보내는 옷이나 자기계발서 따위는 한 번 들여다보지도 않고 박스에 처박아 둘 정도로 고리타분한 것들뿐이었다.
“맞다, 컵밥은?”
“…네?”
“컵밥 좋아하냐고. 뒷문에서 파는 거. 난 그거 치킨마요 완전 맛있던데 내 친구들은 별로래. 먹어 본 적 있어?”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설레설레 고개를 젓자 성여준이 벌떡 일어났다.
“먹으러 가자.”
“……?”
“내가 사 줄게. 가자.”
한 달뿐이니까…. 속으로 다시 한번 되뇌었다. 한 달이면 끝날 관계다. 이 시간이 지나면 성여준은 다시 그가 살던 찬연한 세계로 돌아갈 테고, 나는 두 번 다시 그와 인사 나누는 일 없이 깡추의 시다바리로 밑바닥 인생을 살게 될 것이다.
처음부터 그 이상은 바란 적이 없었다.
컵밥은 정말 이상한 맛이었다.
***
“야, 호모.”
깡추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뒤통수부터 내리쳤다. 울컥했지만 그가 내뱉었던 경고를 되새기고 묵묵히 고개를 숙였다. 깡추는 만족한 듯 히쭉 웃었다. 날이 더워지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민소매 티셔츠를 고집했다. 덕분에 그의 어깨까지 그어진 온갖 칼자국들이 한층 괴상하게 보였다.
“잘돼 가냐? 짝사랑 상대랑.”
“그런 거 아닙니다….”
“따먹었어? 그런 거 일단 따먹고 보는 거야. 남자한테 쑤시는 법 알려 줘?”
손가락으로 천박한 모양을 만들어 보인 깡추가 어금니까지 드러내고 낄낄거렸다. 더 반박하고 싶은 마음조차 없어 입을 다물었다. 그런 내 모습이 깡추에게는 다른 의미로 비친 모양이었다.
“알고 싶은가 보네? 잘 들어 봐, 똥구멍을 따먹는다는 건 말이지, 그 새끼를 내 좆집으로 만든다는 거야. 한 번 좆집 노릇을 해 본 새끼는 두 번 다시 남자한테 기어오르지 못해. 완전 먹이사슬 최하위로 떨어지는 거지.”
“…….”
“그도 그럴 게 당하다 보면 지도 즐기게 되거든. 똥구멍 한 번 따먹혀 본 새끼들은, 씨이바, 그 감각을 못 잊어. 그러면 괄약근이 다 풀어질 때까지 좆 박아 줄 놈 찾아 헤매게 돼 있어. 박는 놈들이야 별식으로 하는 짓이라지만 박히는 년들은 진짜 걸레짝이야. 아무리 멀쩡해 뵈는 새끼라도 요령 좋게 쑤셔서 돌게 만드는 거 일도 아니라니까?”
“…….”
“어? 그러니까 니가 좋아한다는 그 새끼를, 응? 일단 집으로 끌어들여. 그다음에 뭐 술이든 약이든 먹여서 일단 정신이 빠지게 만들어. 물 한 잔에 요거, 한 세 방울 타면 회까닥 죽었다가…. 한 삼십 분 지나면 깨거든? 근데 깨고 나서도 정신이나 멀쩡하지 팔다리는 꼼짝을 못한단 말이야.”
깡추가 뒷주머니에서 갈색 병 하나를 빼 들어 보여 주었다. 깡추 패거리들이라면 다 한 병씩 들고 다니는 강간용 약물이었다.
“그 새끼도 그럴 거야. 비몽사몽 해서 몸도 제대로 못 가누고 흐느적거린다고. 아, 옷은 미리 벗겨 놔. 관장도 하면 좋은데 뭐 귀찮으면 콘돔만 껴. 자지에 똥독 오르면 안 되니까.”
“…형님. 이제 그만….”
“그 담에 침대에 엎어 놓고 뒷목을 이렇게 꽉 눌러.”
콱, 손을 뻗은 깡추가 누군가의 목을 잡아 누르는 시늉을 했다. 나도 모르게 눈이 벌게져서 그의 손끝을 바라보았다. 깡추의 손 아래로 짓눌린 성여준의 뒤통수가 보였다. 눈을 깜빡여 애써 털어 내려 해 봤지만 허사였다.
“어차피 애는 못 움직이니까 여유롭게 해도 돼. 뒷구멍에 오일 발라 주면 그때부터 이미 좋아서 질질 싸는 새끼들 꼭 있어. 똥구멍도 성감대거든.”
“형님.”
“오일만 바르면 절대 안 찢어지니까 그때부터는 막 박아. 똥구멍 찢어지는 건 아무것도 안 바르고 했을 때 마찰 때문에 상처 나는 거야. 쾅쾅 들이박다 보면 애가 점점 좆이 일어설 텐데 그때부턴 엉덩이도 좀 때려 주면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얼굴에 열이 올라 더는 들어줄 수가 없었다. 말을 멈춘 깡추는 여전히 진한 비웃음을 띤 채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죄송한데 그만 가 보겠습니다. 숙…, 제 있어서.”
설마 이 정도를 아웃으로 치진 않을 거야.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인사를 했다. 다행히 깡추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어, 그래. 숙제. 숙제는 해야지.”
“…….”
“가 봐.”
깡추가 시야에서 멀어지자마자 숨을 참고 달렸다. 잠시도 멈출 수 없었다. 다행히 그가 주로 죽치는 골목은 우리 집과 가까웠다. 이 동네에 깡추의 가게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많기 때문이었다.
굴러떨어질 기세로 계단을 내려가 문을 잠그고 커튼도 쳤다. 반지하 단칸방은 금세 밤처럼 어둑해졌다. 그 와중에도 먼지 쌓인 침대, 아니 덜렁 놓인 매트리스는 선명하게 보였다.
“…….”
‘우선 정신을 빼놔, 그다음에 엎어 놓고 뒷목을 눌러.’
눈을 감자 더러운 매트리스 위로 엎어진 채 숨을 몰아쉬는 성여준이 나타났다. 아랫배로 피가 몰리기 시작했다. 어찌나 선명하고 생생했는지 혹시 현실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나는 엎드린 그의 허리를 쥔 채 벌어진 구멍 위로 내 좆대가리를 맞추었다. 움찔대는 구멍에 귀두가 닿자 성여준의 등허리가 크게 출렁였다.
‘아, 사현아….’
달콤한 목소리가 살금살금 귀를 간지럽히고, 다음 순간 나는 좁은 구멍 안으로 발기한 좆을 쑤셔 넣었다. 구멍 안쪽은 따뜻했고 눅진하게 젖어 있었다. 아무 저항 없이 나를 받아들여 부드럽게, 하지만 강하게 조이는 감각이 황홀했다. 마른 허리를 짓누른 채 끝까지 밀어 넣자 성여준의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눈물을 매달고 돌아보는 얼굴에 뱃속이 따끔거렸다.
‘응, 안 돼….’
느른하게 깊이 파묻자 가지런한 어깨가 파드득 튕겨 올랐다. 손을 앞으로 가져가 보니 성여준도 좆을 바짝 세우고 있었다. 저열한 안도감이 쾌락보다 더 큰 자극으로 다가왔다.
‘선배, 쌀 거 같아요?’
귀에 대고 묻자 그가 도리질을 쳤다. 귀까지 터질 듯 벌겠다. 나는 숨을 몰아쉬며 추삽질에 박차를 가했다. 좆을 빼냈다가 힘껏 처박을 때마다 성여준이 뒷구멍을 조였다. 물컹하고 뜨거운 구멍 안쪽이 오물대며 달라붙고, 머릿속에서 번득번득 번개가 튀었다.
‘흐으, 사현, 사현아. 안 돼…. 그만….’
먼지와 곰팡이로 가득 찬 방, 냄새 나는 매트리스에 처박힌 채 내 좆에 꿰뚫린 성여준. 어쩌면 이 행위가 그를 오염시킬 수 있을까? 그의 뱃속에 손톱만 한 불씨라도 남길 수 있을까?
그러자 스스로도 놀랄 만큼 공격적인 욕망이 마음을 지져 놓기 시작했다. 성여준을 이 방으로 데려오고 싶다. 꼼짝 못 하게 눌러 놓고 그의 구멍에 내 좆을 처박고 싶다. 울며 애원하든, 화내며 발버둥 치든 상관없이 그 뱃속에 불을 댕기고 싶다.
“…읏.”
망상은 곧 절정에 달했다. 퍽, 소리와 함께 성여준이 새된 비명을 내질렀다. 축축한 피로감이 전신을 감싸고 머릿속이 순식간에 명료해졌다.
“…….”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내 정액으로 범벅이 된 손과.
“…….”
여전히 텅 비어 고요한 방이었다.
“…씨발.”
이어 떠오른 것은 맛이 이상한 컵밥을 건네주며 소리 내 웃던 얼굴. 한 입 먹자마자 미간을 찌푸리는 나를 보며 탄식하던 입술, 길게 휘어진 눈꼬리와….
“씨발….”
그럼 잘 가, 하며 흔들어 주던 손.
“씨발, 등신, 등신 새끼…. 씨발….”
제정신이 들고 제일 먼저 몰려든 것은 당연하게도 죄악감이었다. 웅크린 채 한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눈을 감고 울며 빌었다. 내일 아침에 눈을 뜨지 않게 해 달라고. 이대로 이 더럽고 어두운 지하 단칸방에서 아무도 찾지 않는 시체가 될 수 있게 해 달라고.
***
“어, 사현아.”
성여준은 멀리 서 있다가도 나를 발견하면 꼭 손을 흔들며 인사를 건넸다. 한 번쯤 못 본 척 지나갈 수 있을 만한 거리여도 반드시 그랬다. 그러면 나는 묵묵히 고개를 숙여 인사하고 돌아섰다. 성여준이 내게 말을 걸 때면 그의 곁에 있던 친구들이 하나같이 얼굴을 찡그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불쾌한 기색을 감출 마음도 없어 보였다.
무리는 아니지. 성여준만큼은 아니어도 그들 역시 학교의 상위 계층들이다. 인기가 있거나, 돈이 있거나, 성적이 좋다. 어찌 보면 저놈들이 똑똑한 거고, 성여준은….
…성여준은…. 착한 거고.
“…….”
물론 성여준과 함께 다니는 녀석들 모두가 그런 건 아니었다. 성여준이 나를 알은체하거나 말거나 묵묵히 제 할 일만 하는 경우도 있었다. 성여준과 가장 긴 시간을 붙어 다니는, 코 옆에 큰 사마귀가 있는 녀석이 그 축에 속했다. 나를 볼 때면 명백하게 의식하긴 하지만 불필요하게 인상을 쓰거나 싫은 티를 내지는 않았다.
우습게도 그 사실만으로 호감이 생겼다. 정말 인정하기 싫지만 나는, 성여준뿐만 아니라 그의 친구들에게도 밉보이고 싶지 않았다. 태어나서 그런 식으로 타인의 눈치를 보는 건 처음이었다.
“근데 사현이 넌 어디 살아?”
치킨마요 컵밥을 손에 든 성여준이 물었다. 그가 좋아하는 컵밥에서는 놀랍게도 비누 맛이 났다. 물론 비누를 먹어 본 적은 없다. 그냥 딱 먹었을 때 비누에선 이런 맛이 나겠구나 싶은 그런 거였다.
“저 N동이요.”
“진짜? 멀리서 다니네. 뺑뺑이 운이 안 좋았구나.”
“네, 뭐….”
그럴 리가. 성여준이 있는 학교에 떨어진 건 아마 내 인생을 통틀어 가장 큰 행운이었을 것이다.
“나는 O동 살아. 저기, 아파트 보이지.”
그가 가리킨 방향에는 몇 년 전 새로 지은 대단지 아파트가 늘어서 있었다. 이 거지 같은 동네에서 빛나는 게 있다면 저 아파트와 성여준 단둘이었다.
“다음 주에 놀러 올래? 부모님 여행 가셔서 주말에 혼자 있거든.”
“…네?”
너무나 뜻밖의 제안에 어안이 다 벙벙해졌다. 그도 그럴 것이 멘토링은 이번 주까지였다. 다음 주에도 성여준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거라는 기대는 하지 않았다.
“다음…, 주에요?”
“응, 토요일쯤? 나 그날 하루 종일 영화 볼 거거든. 엄마 없으니까, 그동안 못 봤던 DVD 싹 다 빌려서 집에서 볼 거야.”
“…….”
“일요일까지 집에 나 혼자야. 편하게 놀러 와도 돼.”
그래서 알았다. 성여준이 날짜를 착각하고 있는 게 아니라면…, 아니, 아니. 성여준처럼 똑똑하고 성실한 인간이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다. 그는 그저…. 다음 주에도 나를 볼 생각인 것이다. 한 달이 끝난 후에도, 앞으로도, 계속….
“…….”
머릿속을 스쳐 간 것은.
“왜? 약속 있어?”
깡추가 개소리를 한 후로 매일 밤 꿈에 나타나는 성여준이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니고.”
잠이 들 때면 나는 성여준을 만난다. 그는 대체로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내 매트리스에 엎드려 있다. 부드러운 구멍에 내 좆을 밀어 넣고 몇 번이나, 몇 번이나…. 잠에서 깨어나면 팬티 속은 정액으로 흥건하고, 해가 떠도 어두운 방 안에서 나는 되뇌었다. 한 달뿐이니까, 곧 끝나니까, 그 뒤로는 어차피 말도 못 섞을 사람이니까….
“그냥…. 아는 사람 집에 가 본 적이 없어서….”
딱 잘라 거절해야 한다. 시답잖은 멘토질 끝났으니 아는 척하지 말라고 잘라 버리고 내 갈 길을 가야 한다. 그게 성여준을 위해서나 나 자신을 위해서나 좋다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하지만 묻고 싶다. 도대체 누가 그럴 수 있느냐고. 세상 어떤 성인(聖人)이 그토록 고아하고 고통스러운 선택을 하는 거냐고. 나는 너무 나쁜 놈이고, 너는 너무 빛나니까 내가 널 놓아줄게? 그딴 건 상대를 감당할 자신이 없거나 지겨워진 거면서 본인 스스로를 성스럽게 포장하고 싶은 등신들이 지어낸 개소리다.
“에엥? 아는 사람? 나 너한테 고작 아는 사람이야?”
나는 밀려난 행성, 가장 그늘진 먼지 구덩이. 성여준에겐 태양이 묻어 있다. 내 뱃속에는 날카롭게 메마른 낙엽이 가득하고, 그리하여 나는 성여준이 내민 호의 한 조각을 삼키는 순간 남김없이 타 버린다.
고통스러운 작열, 이어지는 재생. 분명한 기한을 가지고 있었기에 간신히 버텨 냈던 자극의 불길은 그 순간 분명한 형태를 띠고 내 손끝에, 입술에, 좆대가리 끄트머리에 구석구석 들어차기 시작했다.
“서운하다, 진짜. 그렇게 잘해 줬는데 ‘아는 사람’이 뭐야. 하다못해 친한 형이라고 해야지.”
“…친한….”
“어, 우리 안 친한가? 나만 친하다고 생각했나?”
“…….”
“그런 거 좀 상호 합의 하에 해야 되는 말이긴 해, 그치.”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싶지 않았다.
“혹시 내가 좀 부담스럽게 했어? 나 그런 면 있기는 해. 영재가 가끔 짜증 내는데 아, 영재 누군지 모르지. 코에 점 있는 앤데, 미녀 점.”
착각하게 될 게 뻔했으니까.
제 코 옆을 손끝으로 찍으며 배시시 웃던 성여준이 멈춰 섰다. 곧이어 표정이 이상하게 일그러지더니 잘 먹던 컵밥도 내려놓고 내게 다가왔다. 가까워진 얼굴에서 비누 향이 났다.
“왜 그래? 왜 울려고 그래?”
나는 울지 않았다. 축구공에 맞아 눈물이며 코피를 있는 대로 쏟았던 그날 이후로 누구 앞에서도 울어 본 적이 없었다.
“…안 우는데요.”
“안 울긴, 너 눈이 엄청 빨간데. 왜? 뭐 때문에 그러는데? 내가 뭐 안 좋은 얘기 했어?”
“아니에요, 우는 거 아니고…. 꽃가루 알레르기 있어서….”
“꽃가루…?”
스스로의 귀에도 궁색하게 들렸다. 그도 그럴 게 이미 장마가 다가온 시점이었다. 손등으로 눈을 벅벅 문질러 닦았다. 다행히 금방 정신이 들어 그 이상의 추태는 피할 수 있었다.
“괜찮아? 약국이라도 갈까?”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는지 성여준이 재차 물었다. 화제를 돌려야 했다. 코를 훌쩍이고 억지로 말을 짜냈다.
“…어떤 영화 보실 건데요?”
“응?”
“다음 주에….”
어떤 영화든 상관은 없었다. 나를 앉혀 두고 온갖 종교의 간증 영상만 24시간을 틀어 준대도 그가 원한다면 모든 대사를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외울 수 있을 때까지 볼 용의가 있었다. 그제야 활짝 웃은 성여준이 조금 쑥스러운 얼굴로 말했다.
“그게 음, 맞다, 나 영화 취향이 좀…. 그런데.”
“…왜요?”
“그런 거 좋아하거든, 음…. 막…. 좀 잔인하고…. 스플래터 무비라고 하나…. 막…. 사람 죽이고 자르고 그런 내용 있잖아.”
“…….”
“그래서 우리 엄마가 나 영화 보는 거 별로 안 좋아해. 근데 너 그런 거 싫어하면….”
말 그대로 의외였지만, 말했듯이 나는 그가 보여 주는 거라면 호러 영화가 아니라 스너프 필름이라도 눈 하나 깜짝 않고 볼 자신이 있었다.
“아뇨…. 그런 영화 많이 본 건 아닌데 괜찮을 것 같아요.”
“아, 진짜? 재난 영화는? 난 재난 영화도 좋아해.”
“…그것도 괜찮아요.”
“다행이다. 그럼 내가 보고 싶은 거 다 빌려 놔도 돼? 몇 시쯤 올 수 있어? 자고 가도 되는데.”
해맑은 권유에 정신이 다 아찔해졌다. 아무리 그래도 이 제안은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무턱대고 고개를 저으려다 마음을 다잡고 입을 열었다.
“…그날 보고요.”
“그래, 그럼 그날 연락하자.”
“네.”
밝게 인사한 성여준이 손을 흔들며 멀어져 갔다. 그는 매일 입시 학원에 다녔다. 학교에서는 학생회장 일을 하느라 바쁘고, 방과 후에는 학원에 가고, 학원이 끝나면 독서실에서 자습. 그 와중에도 하루에 한두 시간씩은 꼭 나와 어울려 주었다.
이런 게 책임감만으로 가능한 일일까? 자연스레 차오른 의구심이 섣부른 희망과 연결되려는 순간은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언제나 그의 곁에 모여드는 수많은 이들을 바라보고 있자면 참을 수 있었다. 내가 특별해서가 아니야. 나여서 해 주는 게 아니야. 그냥 저런 사람이라서….
나는 그저 운이…. 운이 좋았던 거야.
멘토링 기간은 무사히 끝났다. 담당 교사는 성여준이 써낸 멘토링 보고서를 내게 보여 주었다. 보고서 맨 마지막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 있었다.
부족한 점이 많은 멘토였을 텐데도 임사현 후배는 매우 성실하게 멘토링에 임해 주었으며, 그 과정에서 오히려 제가 멘티인 그에게 배우는 점이 많았습니다. 즐거웠던 시간이었고, 앞으로도 임사현 후배와 좋은 관계를 이어 가고 싶습니다.
가져가도 되냐고 묻자 담당 교사는 복사를 해 주었다. 나는 화장실에 숨었다. 복제된 그의 필적을 손으로 훑으며 오래 울었다.
***
주말까지 남은 시간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느리게 흘렀다.
“저기…. 임, 임사현.”
지루한 점심시간을 견디는데 벌벌 떠는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드니 자그맣고 마른 녀석이 나와 눈도 못 마주치고 서 있었다.
“그게, 있잖아…. 너 혹시…. 여준 선배랑 친해?”
“…….”
한 번쯤은 이런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싶었지만, 정말로 말을 붙여온 경우는 처음이었다. 교실 안의 모든 신경이 집중되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뭐?”
“어? 아니, 너 여준 선배랑 친….”
“친하면 뭐, 어쩌라고.”
무뚝뚝하게 반문하자 작고 하얀 얼굴이 금세 새파랗게 질렸다. 선생들은 굳이 나를 건드리지 않지만, 깡추와 붙어 다니며 흐른 소문이 퍼질 대로 퍼져 있다는 사실 정도는 안다.
설마 저를 해코지하지는 않겠지 싶어 용기를 낸 건가. 발발 떨고 있는 여자애는 과연 너무 작고 연약해서 머리카락 한 올 건드리지 못할 모양을 하고 있기는 했다.
“…그게 고, 곧 여준 선배가, 생일이거든. 그래서…. 학생회 사람들이…. 깜짝 파티를 할 건데.”
편지 좀 전해 줘, 선물도 전해 줘, 이왕이면 내가 좋아한다는 말도 해 줘. 등등의 레퍼토리를 떠올리고 차게 식어 있던 머릿속으로 정확히 파고드는 한마디였다. 여준 선배 생일.
“우리가 부르면, 음…. 그러니까 선배가 눈치챌 거 같아서. 왜냐면 작년에도 학생회에서 서프라이즈 파티 했었대서….”
“…….”
“너 선배랑 그거…. 멘토링? 한 거라며. 그거 때문에 선생님이 부르셨다고 그러고…. 선배 좀 학생회실로 데려와 줄 수 있어?”
웃기지도 않는 장단에 어울려 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성여준의 생일이 언제인지는 알고 싶었다. 한참을 머뭇거리다 짐짓 태연한 척 물었다.
“…언젠데?”
“…응?”
“언제냐고. 파티…, 아니, 그 선배 생일이.”
되도록 친하지 않은 것처럼 들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녀석은 내 말을 듣자마자 언제 벌벌대고 있었냐는 듯 얼굴이 밝아졌다.
“도와줄 거야?”
“봐서.”
“어려울 거 없어, 진짜 그냥 학생회실로 데려와 주기만 하면 돼. 언제냐면…. 아, 이번 주 토요일이야.”
“…….”
듣자마자 피가 식는 것 같았다. 토요일이라니. 성여준이 나를 집으로 초대한 날이다. 애초에 학교에 오는 날도 아니고. 내가 의아한 얼굴을 하자 녀석은 금방 부연 설명을 붙였다.
“원래 그래서 금요일에 하려 그랬는데, 아무리 그래도 당일에 축하받는 게 좋잖아. 니가 잘 말해서 좀 데리고 와줘.”
“…토요일에 무슨 핑계로 사람을 학교까지 데려오라고.”
“좀 억지스러워도 괜찮아. 네가 말하면 미심쩍다 싶어도 의심은 안 할 거 아니야.”
그건 맞는 말이다. 설마 내가 끌고 간 자리에 이런 미지근하고 간지러운 파티가 기다리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 하겠지. 어쩌면 성여준은 기뻐할지도 모른다. 내가 학교에서 매일 겉돌고 있는 걸 염려스러워했으니까. 애들이랑 친해진 거야? 물으며 환히 웃을지도.
“너무 억지잖아…. 그런 말주변 없어. 그냥 금요일에 해.”
“안 돼, 꼭 당일에 해야 돼. 미리 하는 생일파티가 무슨 의미가 있어?”
“그렇다고 쉬는 날에 사람을 굳이 학교까지 불러내?”
나도 모르게 말끝이 날카로워졌다. 부모님 없는 집에서 하루 종일 보고 싶었던 영화나 볼 거라고 들떠 있던 성여준을 생각하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짜증스러웠다.
“…웃겨, 왜 지가 난리야? 누가 너보고 오랬어?”
한참 씨근대고 서 있던 녀석이 팩 쏘아붙였다.
“됐어, 알았어. 우리가 알아서 할 거니까 신경 쓰지 마. 귀찮게 해서 미안해.”
아마도 그 말을 하기 위해 평생 가지고 있던 용기를 다 쥐어짠 것 같았다. 다다다 내뱉자마자 돌아서서 달려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 와중에 날짜는 머리에 남았다. 여름에 태어났구나. 태양이 가장 가까운 여름에.
***
복잡해진 내 마음은 아랑곳없다는 듯 토요일 아침은 여지없이 밝아왔다.
집을 나서는데 이상하게 모퉁이를 돌 때마다 빵집이 보였다. 이 동네에 빵가게가 이렇게 많았나. 심지어 저마다 짠 것처럼 쇼윈도에 알록달록한 케이크를 전시해 두고 있었다. 몇 번이나 발걸음이 멈췄다. 케이크 하나 살 돈 정도는 있었다. 다만 생일이라는 사실을 어떻게 알았는지 설명하자니 막막했다.
“…….”
하얀 생크림에 딸기가 촘촘히 올라간 케이크를 한참 내려다보고 있자니 어디선가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깡추와 그 패거리들이었다. 나도 모르게 얼른 골목으로 숨었다. 지금 마주쳤다간 귀찮아질 게 뻔했다.
“…래서 순정이는 어쩌실 거예요? 형님.”
“어쩌기는 뭐를 어째, 배 붓기 전에 계단에서 한 번 떠밀든가 해야지….”
패거리들은 언제나 하던 이야기를 떠들고 있었다. 함부로 건드리다 임신시킨 여자를 병원에 데리고 다니는 것은 그들의 월례 행사였다. 간혹 낙태를 거부하는 여자도 있었지만 결말은 대체로 좋지 않았다.
몸과 정신이 망가진 여자들은 간신히 숨만 붙은 모양이 되어 깡추의 나와바리, 그러니까 내가 사는 동네의 판잣집 어딘가에 처박혔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적지 않았다.
그런 곳이었다. 동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성여준처럼 흠결 없는 인간이 승리자의 인생을 걸어가는 사이 이곳에서는 가장 약한 존재들이 가장 비참한 방법으로 하루가 멀게 죽어 갔다. 죽지 않으려면 반격해야 했다. 나를 자극하는 상대에게 두 배로 갚아 주고 세 배로 엿을 먹여야만 내가 안전할 수 있었다.
“요즘 그 애새끼 안 보이네요?”
패거리 중 하나가 물었다. 평소 늘 나를 흰 눈 뜨고 보던 놈 중 하나인 ‘홍게’였다. 그들은 언제 깡추에게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추한 질투와 견제를 서슴지 않았다.
“누구? 아, 싸현이? 걔 바빠. 짝사랑 중이라서.”
“짜악사라앙? 새끼, 좆대가리도 팔팔한 게 안 어울리는 짓을 하네.”
“냅둬. 조만간 자빠뜨려서 몇 번 따먹고 나면 것도 식을 거야. 애새끼들 다 겪는 일이지.”
“그런 겁니까?”
“따먹지를 못하니까 대단해 보이는 거야. 홀딱 벗겨서 쑤셔다가 좆물 싸지르고 나면 그때부턴 좆집밖에 더 돼? 지금이야 고상한 척해도 조만간 발정 식어서 돌아온다. 두고 봐. 어쩌면 걔가 지금 쫓아다니는 년이 그때 가서는 한 번만 더 박아 달라고 쫓아올 수도 있어. 그러면….”
“그러면?”
“우리가 살살 구슬려서 돌려 먹어야지.”
손끝에서부터 피가 빠져나갔다. 패거리들에게서 잔악한 웃음이 터졌다. 심장이 쾅쾅 뛰고 무릎이 후들거렸다. 무슨 소리야, 지금…. 무슨 개소리를 하는 거야, 도대체.
“와, 저는 여고생은 오랜만인데. 언제쯤 먹게 해 주실 겁니까?”
“그게 고딩은 고딩인데 여고딩이 아니란다.”
“예? 그 새끼 호모였습니까? 남자는 좀….”
“그것도 다 나름이지. 사진 볼래?”
깡추가 낄낄대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더 놀랄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성여준의 사진을 가지고 있단 말인가? 깡추가?
“…와, 이거 꽤….”
대체 왜?
“사내놈이 이거 희한하게 생겼네요. 이쁘장한 게 야시시하니….”
“그치? 나도 말만 듣고서는 애새끼가 뭐에 씌어서 이러나 했는데, 직접 보니까 이해가 가더라고.”
직접 봤다니, 언제, 어디서, 어떻게. 갑자기 들이닥친 위기의식이 감당하기 힘들 만큼 숨통을 조여 왔다. 자칫하면 내 심장 소리가 깡추에게까지 들릴 것 같아 한 손으로 가슴을 꾹 눌렀다.
“얘는 영상만 찍어도 비싸게 팔리겠는데요. 아다는 어차피 사현이가 먹을 테지만, 뒷구멍 아직 쫀득할 때 회장님 한 번 대 드리고 애들한테도 돌리고 비디오 쫘악 찍으면….”
안 돼, 나도 모르게 소리를 지를 뻔했다. 참을 수 있었던 것은 깡추가 별안간 제 입가에 검지를 대고 쉿, 하며 패거리를 조용히 시킨 덕분이었다.
“너무 침 흘리지 마라, 새끼야. 어디까지나 사현이가 계속 그 지랄할 때 얘기니까.”
“에이….”
“혹시 따먹고도 정신 못 차리면 애새끼 조만간 업소 한 번 데려가서 정신 교육 시켜야겠어. 좆집은 좆집일 뿐이라고.”
나는 ‘쓸 만한 새끼’다. 깡추는 내가 한 대를 맞으면 그 한 대를 기필코 갚아 줄 때까지 덤벼드는 점이 좋다고 했다. 타인에게 관심이 없고 명성에 집착하지 않아 멋지다고 했다.
예전과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저 깡추가 원하는 ‘쓸 만한 새끼’의 인재상에 부합하지 않는 내 모습이 드러났을 뿐이다. 성여준으로 인해서.
나는 그의 인재상에 앞으로도 나 자신을 맞춰 가야 한다. 깡추가 제일 처음 내게 사 준 밥은 순대국밥이었다. 먹여 준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으므로 앉은 자리에서 꾸역꾸역 처먹어 다 비웠다. 그 뒤로 1년, 찾아가면 밥을 먹여 주고 용돈을 쥐여 주고 싸움 자리에 데려가 주었다.
“…욱.”
욕지기가 올라왔다. 주저앉아 꺽꺽거렸지만 오래전에 소화시킨 밥들이 이제 와 고스란한 형태를 띠고 떨어질 리 없었다. 코끝만 매웠다. 눈물만 흘렀다. 성여준에게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고, 그냥 하루에 한 번 대화를 나눌 수만 있어도 좋다고 말한다 한들 깡추가 믿어 줄까? 그의 패거리가 믿어 줄까? 꿈만으로 족하다는 이 마음을 나조차도 믿을 수가 없는데.
***
“얼굴이 왜 그래?”
문을 열자마자 성여준이 토끼 눈을 하고 물었다. 그는 반팔 티셔츠에 트레이닝 바지 차림이었다. 처음 보는 사복 차림이 낯설어 나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알레르기요.”
“그거 아직도 심각해? 큰일이네, 벌써 한여름인데.”
넓고 햇살이 잘 드는 집이었다. 쭈뼛거리며 서 있자니 그가 얼른 나를 불러들였다.
“들어와, 찾아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
“아뇨, 별로….”
“점심 안 먹었지?”
거실에는 커다란 텔레비전과 스피커가 위용을 뽐내고, 그 앞에는 산더미 같은 DVD가 쌓여 있었다. 슬쩍 보니 과연 그의 말대로 온갖 호러와 재난 장르였다. 배달 책자를 펼쳐 놓고 고심하던 그가 머쓱한 미소를 지었다.
“난 거의 다 봤던 거긴 한데…. 보고 싶은 거 있으면 골라 봐.”
“봤던 걸 또 보는 거예요?”
“응, 다시 봐도 재밌거든. 치킨, 피자, 짜장면, 돈가스, 냉면. 뭐 먹을래?”
입맛은 없었지만 그가 펼친 페이지에서 아무거나 골랐다. 그러고도 성여준은 한참을 고심하더니 비장하게 전화기를 들었다.
“네, 여기 A아파트 105동 1501호인데요, 울면에 계란 노른자 들어가나요? …아, 그럼 계란을 아예 빼고 만들어 주실 수 있어요? 네…. 네, 감사합니다. 그럼 울면이랑, 삼선짜장이랑…. 음…. 탕수육 작은 것도 하나요.”
“…너무 많이 시키신 거 아니에요?”
전화를 끊은 성여준을 향해 묻자 그가 또 배시시 웃었다.
“나 원래 많이 먹어. 탕수육 별로야?”
“아뇨….”
“영화 보고 있자. 어디…. 이거 고른 거야?”
성여준이 내가 쥐고 있던 DVD를 가져갔다. 제목이 뭔지도 모르고 의미 없이 들고 있던 물건이었다. 그는 뭐라 말할 틈도 없이 영화를 틀고는 재빨리 소파에 올라앉아 제 옆자리를 툭툭 쳤다.
“여기 앉아.”
소파는 부드럽고 푹신했다. 깡추의 사무실이나 학교 교무실에 있는 싸구려 인조가죽 소파와는 질이 달랐다. 그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천천히 집 안을 둘러보았다. 새 아파트, 세련된 인테리어, 하얀 대리석 바닥과 실크 벽지와 비싸 보이는 가전제품들.
그리고 이 집에는 성여준과 나 단둘뿐.
‘서프라이즈 파티를 준비할 거야. 토요일이 여준 선배 생일이거든.’
와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깡추와 패거리의 모습이 사라지고, 한참을 더 울면서 몇 번이고 다짐했다. 집으로 돌아가자고. 약속이고 뭐고 내팽개치고 두 번 다시 만나지 않으면, 인사해도 받아 주지 않으면….
“헉.”
그때 성여준이 숨 막히는 소리를 냈다. 깜짝 놀라 돌아보니 그는 무릎을 끌어안은 채 잔뜩 굳은 얼굴로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DVD는 막 살인마가 건장한 남자의 팔다리 힘줄을 자르는 장면을 재생하는 중이었다.
“…….”
이런 걸 좋아한다길래 재밌게 보는 줄 알았더니, 성여준은 온몸을 오그린 채 인상을 잔뜩 쓰고 있었다. 저렇게 긴장하면서 왜 보는 거지? 의아한 마음에 입을 여는 찰나 배달 음식이 도착하고 영화는 끊겼다.
해가 어둑해질 때 즈음 되어서야 조금 궁금해졌다. 그놈의 서프라이즈 파티를 쉽게 포기할 것 같지는 않던데, 성여준은 아무 연락도 못 받은 건가. 혹시 이렇게 있다가 갑자기 불려 나가면 어쩌지. 힐끗 살폈지만 그는 아무런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다음엔 이거 볼까?”
세 번째 영화를 넣으며 성여준이 기운차게 물었다. 지금 이 상황이 제법 즐거워 보여 나도 안심이 되었다.
이번에는 재난 영화였다. 전대미문의 토네이도가 오는 바람에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고 있던 주인공과 그의 친구들이 신을 부르짖으며 재앙에 휩쓸린다. 영화의 마지막에 가서야 주인공은, 결국 내 목숨을 구하는 건 신이 아닌 나의 의지라면서 제힘으로 달려 토네이도의 피해 궤도에서 벗어난다.
손에 땀을 쥐고 시청하고 있던 성여준은 주인공이 무사히 가족의 품에 안기는 장면까지 나오고 나서야 휴우우, 하며 긴 숨을 내쉬었다. 날은 이제 완전히 깜깜해져 있었다.
“아, 재밌다. 다음엔 뭐 보지?”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기운이 좀 빠졌는지 소파에 푹 기대 버린다. 그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물었다.
“이런 영화는 왜 보는 거예요?”
성여준이 뜻밖에 놀란 얼굴로 돌아보았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힐난하는 말투로 들렸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제 말은, 영화가 나쁘다는 게 아니고…. 그게, 선배 계속 엄청…. 무서워하고 긴장하면서 보잖아요. 그러니까 좋아서 보는 게 아닌 것 같아서….”
그제야 그가 아아, 하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깜짝 놀랐어. 싫은데 여태 억지로 보고 있었나 하고.”
“…아뇨, 그런 건 아닌데.”
“이런 거 왜 좋아하냐면….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팔짱을 낀 성여준이 제 입술을 혀로 축였다. 붉은 혀가 슬쩍 비쳤다 금방 사라졌다.
“안심…, 이 돼서?”
“네?”
“재난이나 살인마나 귀신이나…. 결국 다 영화 속 얘기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무서운 장면을 보고 있어도 사실 나는 안전하잖아.”
“…….”
“근데 보면서 무섭기는 무서우니까…. 다 보고 나면 아…. 진짜 내가 이렇게 안전한 집에서 무사히 잠드는 건 운이 좋아서구나…. 그런 식으로…. 우울한 게 좀 없어진다고 해야 되나?”
그건 상당히 예상외의 말이었다.
“…우울했어요?”
그 지점에서. 내 반문에 멈칫한 성여준이 곧 음, 하며 옆머리를 긁적였다.
“요즘 좀…. 그랬어. 성적도 떨어지고.”
“성적….”
“학생회 애들이랑도 싸우고…. 아니, 싸운 건 아니고, 영재가 나한테 뭐가 불만이 있는 것 같은데…. 그거 잘 풀기가 쉽지가 않네.”
코 옆에 사마귀가 있는 성여준의 친구. 얼굴이 떠오르자 살짝 울적해졌다. 친구랑 싸워서, 주말에 만날 사람이 없어서 날 초대한 건가.
“일종의 스트레스 해소법…? 인 것 같아. 전에 영재한테도 한 번 얘기한 적 있는데 영재는 이해가 안 간다고 그랬어. 걘 이런 영화 진짜 싫어해. 아무리 영화 캐릭터라도 사람 힘들어하는 거 잘 못 보겠다고, 내가 싸패 같대.”
“…싸패가 뭔데요?”
“사이코패스. 공감 능력 같은 게 없는 사람.”
그건 우스운 말이었다. 이 세상에 공감 능력 올림피아드가 있다면 성여준은 태어난 햇수만큼 챔피언 자리를 지키고 있을 인간이었으므로. 나보다 더 가까운 친구면서 모를 리도 없는데 왜 그런 식으로 말을 했을까. 많이 친해서?
“성적…. 떨어진 건 혹시 저 때문이에요? 저 때문에 시간 많이 써서….”
“어? 아냐, 아냐. 이런저런 일 때문에 얼빠져 있다가 과탐을 망쳤어. 모의고사였으니까 괜찮긴 한데…. 그런 실수한 것도 처음이라 좀 충격 먹었나 봐.”
안심되기도 하고 살짝 섭섭하기도 하고, 기분 복잡해지는 답변이었다. 내가 축 처져 있으려니 성여준은 괜찮다니까, 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진짜 너 때문 아니야. 그날 점심때 실수로 계란 먹어서 컨디션이 안 좋았어.”
“…네?”
“왜 급식에 동그랑땡 나왔잖아. 그거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가…. 오후 내내 온몸이 간지러워서 혼났어.”
“아….”
“진짜 조금 먹었던 거라 학교 끝나기 전에 가라앉긴 했는데 정신이 쏙 빠졌지, 뭐.”
그가 제 팔을 여러 번 쓸어 올렸다. 다시 생각해도 섬뜩하다는 듯이. 마른 팔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
마른 몸. 사람을 때리거나 힘으로 우격다짐을 해 본 경험이라곤 없을 성여준의 팔. 깡추가 내게 쥐여 주지 못해 안달인 약 따위가 없어도 아마 나는 간단히 성여준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는…. 내가 크게 소리를 지르거나 팔뚝을 세게 움켜쥐기만 해도 놀라서 주저앉고 말 테니까.
겪어 본 적 없는, 일어나지도 않을 현실의 재난을 진심으로 공포스럽게 지켜보고, 영화가 끝난 뒤 아직 자신의 삶이 안락하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성여준. 이토록 나약한 위안이라니. 나와 같은 자리에서 태어나 똑같은 환경에 있었다면 그는 제 손가락이 열 개라는 사실을 알기도 전에 먹이사슬 최하위에 던져져 가장 비참한 결말을 맞이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으니까. 이렇게 깨끗한 집에서 태어나, 뒷골목에 어떤 사람이 살고 얼마나 썩어 빠진 속내들을 가지고 사는지 알 기회가 없었으니까…. 그래서 그토록 서슴없이 내게 다가와 친절을 베풀었을 테니까.
“…지금은.”
이쯤에서 만족하고 물러나야지.
“괜찮아요?”
이 안락함을 해치지 않도록.
“응? 괜찮은데? 아까 먹은 건 계란 빼고 갖다 달라고 했잖아.”
당신은 내 뱃속을 태웠으나.
“다행이네요.”
덕분에 나는 내 생명보다 강렬한 열을 얻게 되었으니.
***
“싸현이, 요즘 자주 보이네?”
깡추의 패거리 중 하나가 내 뒤통수를 밀치며 말했다. 꺾였던 고개를 제자리로 돌려놓으며 나는 언젠가 그를 밟을 계산을 해야 옳을지, 그의 밑에서 안주해야 옳을지 고민했다.
“깡추 형님이 너 요새 열 내는 가시나 있다던데.”
깡추와 둘이서 신나게 남자 뒷구멍에 박는 재미에 대해 논하던 놈이 모르는 척 붙이는 말에 어이가 없었다. 섣불리 부정했다간 불만 붙이게 될 것 같아 신중히 말을 골랐다.
“가시나 아니고요. 열 내고 뭐고 한 것도 아니에요. 밥 사 주니까 들러붙어 있었던 거지.”
“깡추 형님한테 그런 것처럼?”
“아니요. 깡추 형님은 제 형님이고, 그 사람은 학교에서 잘나가고 돈도 많으니까 대충 떡고물이나 얻어먹으러 쫓아다닌 거죠.”
다행히 모범 답안이었던 모양이다. 눈썹을 살짝 추켜세운 패거리가 흐응, 하며 웃더니 팔짱을 꼈다.
“이거, 식은 걸 보니까 아다 땄나 본데?”
“…예?”
“짜샤, 남자가 어? 사랑을 하다가 팍 식는 거는 한 가지 경우밖에 없어. 자빠뜨려서 아다 따고 별 볼 일 없어졌을 때.”
“그런 거 아니었다니까요. 애초에 전 호모도 아니고, 남의 똥구멍에 좆 박고 싶은 마음도 없어요. 더럽게….”
“야, 똥구멍이 별로면 입보지에 박으면 되지. 무릎 꿇려 놓고, 어? 머리채 꽉 쥐고 이렇게 파파팍!”
패거리가 두 손으로 사람의 머리통을 쥐고 제 좆을 쑤셔 박는 시늉을 했다. 대체 왜 이 인간들 머릿속에는 제 다리 사이에 매달린 살덩이를 어디에든 처박고 싶다는 욕구밖에 없는 걸까. 나는 성여준을 알기 전까진….
“…….”
누구에게든 그런 짓을 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는데.
“아무튼 아니에요. 어차피 멘토 기간도 끝났고…. 이제 인사도 안 해요.”
“멘토? 그건 뭐야?”
“그냥…. 학교에서 공부 잘하는 2학년더러 1학년 하나씩 데리고 다니면서 돌봐 주라고 했던 거예요. 그 프로그램 참가하면 장학금 준다 그래서 했던 거고요. 그것뿐이에요.”
학교에서는 일부러 성여준을 피해 다녔다. 그의 모습을 쫓던 때와 마찬가지로 그건 아주 쉬운 일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모이는 자리가 보일 때마다 등을 돌리면 그만이었으므로.
핸드폰은 일부러 변기에 빠뜨렸다. 연락하던 사람이라곤 깡추와 성여준뿐이었으니 당장 없어져도 아쉬울 건 없었다.
다만 내 돈을 좀 가져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아르바이트 자리를 알아보기로 했다. 깡추에게는 고장 난 핸드폰을 살 돈이 필요하니 알바를 하겠다고 말했고, 그는 순순히 삐끼 자리 하나를 알선해 주었다.
“잘됐네. 너도 이 바닥 일 차근차근 시작하면 좋지.”
나는 어차피 깡추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저기, 편의점 두 개 붙은 사거리 보이지. 그 건너로는 가지 마. 양동이 애들 구역이니까.”
“네.”
“단속 나오면 곧바로 튀고, 잡히더라도 아무 말도 하지 말고 버텨. 변호사고 부모고 없다고 해. 어차피 미자는 오래 못 데리고 있으니까 금방 훈방될 거야.”
성여준이 나를 찾은 적이 있을까? 그와 나는 주로 문자로 연락하고 만날 시간을 정했다. 핸드폰도 없애고 일주일을 꼬박 피해 다녔더니 신기할 정도로 마주치지 않았다. 어쩌면 성여준은 안도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드디어 귀찮은 녀석을 떨어냈다며 사마귀 놈과 웃을지도 모르지.
“…….”
나이트 전단지를 손에 든 채 헛숨을 쉬었다. 애써 씹어뱉는 말이 하나같이 내 귀에도 설득력이 없었다. 처음 만난 이래 성여준이 단 한 번이라도 나를 비웃거나 밀어낸 적이 있던가.
스스럼없이 인사하고, 격 없이 말을 걸고, 내가 원하는 걸 묻고, 맛있는 걸 먹여 주고, 자신이 좋아하는 영화를 보여 주었는데.
그럼에도 왜 나는 자꾸만 성여준의 약점을 찾고 싶을까. 왜 그가 조금이라도 까만 속내를 지녔기를 바라는 걸까. 나는…. 나는 왜.
***
“너 슬슬 들어가라. 아무래도 오늘 단속 뜰 삘이다.”
오후 열한 시를 막 넘긴 시각, 깡추가 내 손에서 전단지를 뺏어 들고 등을 떠밀었다. 이제 막 사람이 다닐 시간이었기에 망설였지만 그는 재차 내게 손을 휘저었다.
“우리 싸현이, 요즘 정신 차린 것 같아서 형님 기분이 좋네.”
“…….”
“내일 시간 맞춰 나오고, 알지?”
“…예.”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다. 그는 일당이라며 지폐 몇 장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일당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하고 혹사당하던 다른 시다바리들이 질투 섞인 시선을 보내왔다. 깡추의 이런 편애에 우월감을 느낀 적도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내 남은 생을 잡아먹을 절망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밤이 되니 제법 선선했다. 주머니에 양손을 꽂은 채 터벅터벅 걸었다. 내가 사는 골목은 언제나 그랬듯이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둡고 습했다. 곳곳에서 개가 짖고, 애가 울고, 고성으로 싸우는 소리가 들린다. 가난한 이들은 매일이 각박했다. 상대를 보살피고 사랑할 마음 같은 건 누구에게도 남아 있지 않았다.
“오빠아, 오빠. 순정이랑 결혼할 거잖아, 응? 오빠아….”
그 와중에 다 쉬어 버린 목소리가 귀에 꽂혀 들었다. 아마 약과 술과 낙태 수술로 만신창이가 되어 이 거리에 버려진 여자 중 하나일 것이다. 여자는 누군가의 팔에 매달려 있는 대로 손톱을 세우고 있었다. 붙들린 남자는 난처한 듯 여자를 달래며 자신은 그녀가 찾는 사람이 아님을 열심히 설명했지만 미친 사람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오빠, 우리 애기 이름 지어 줘. 우리 애기는, 누구냐면, 순이야.”
“저, 죄송한데 저는 정말로 그쪽을 모르….”
잠깐 지랄하다 말겠지. 무심히 지나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췄다. 소리가 난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자 그도 인기척을 느끼고 나를 돌아보았다.
“…….”
타이밍 좋게 구름이 걷히고 달빛에 하얀 얼굴이 드러났다.
“……?”
모로 보고 다시 봐도 이곳에 있을 리가 없는 사람이었다. 성여준. 얼떨떨한 심경으로 내 뺨을 꼬집었다. 그러나 내게 있어 성여준이 나오는 꿈이라고는 전부 그렇고 그런 내용뿐이었다. 이토록 멀쩡하게 옷을 다 갖춰 입은 성여준이 나오는 일은 없었다.
“…선배?”
“사현아, 어, 사현이 맞지? 이분이 사람을 잘못 보신 것 같은, 악…!”
온몸으로 매달린 여자가 행여 쓰러질까 열심히 받치고 서 있던 그가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무심결에 달려들어 여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떼어 놓았다. 약에 절어 버린 여자는 지나치게 가볍고 힘이 없었다. 쿵,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은 그녀가 내 얼굴을 보자마자 히익, 하며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어, 어…?”
“다쳤어요? 봐 봐요.”
“아니, 난 괜찮은데 저분….”
“미친년이니까 신경 쓰지 마요. 왜 소리 질렀어요? 어디 다쳤어요? 저 미친년이 뭘 어쩐 거예요? 아니….”
“사현아, 잠깐 진정하고….”
“왜 여기 있어요? 여기서 지금 뭐 하는 거예요?”
벌컥 소리를 지르자 눈을 크게 뜨고 굳어 버린다. 예상대로였다. 고작 이런 자극에도 견디지 못할 만큼 유약한 인간이다. 그는 이런 곳에 와선 안 된다.
“…나, 나는 그…. 요즘 네가 계속…. 연락도 안 되고, 저기…. 학교도…. 안, 안 나오는 것 같아서.”
성여준이 한참 숨을 고른 후에야 한마디씩 내뱉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 충실히 나가고 있었다. 다만 절대 성여준과 마주치지 않도록 요령 있게 피해 다녔을 뿐이다.
“그래, 서 그, 그게 나는, 혹시 내가 뭘 잘…, 못해서, 네가 나한테 뭐가 화…, 화가 나서….”
더듬더듬 말을 이어 가던 성여준이 흡, 하며 숨을 들이켰다. 달빛 때문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고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뒤 그의 팔목을 잡아끌었다.
“…사현아.”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해요.”
“…….”
묵묵히 내 뒤를 따라오며 성여준은 한 번씩 딸꾹질을 했다. 히끅, 하는 소리가 들릴 때마다 붙든 팔이 미세하게 경련했다. 부드럽고 가벼운 팔이었다.
“부모님은…. 집에 안 계셔? 갑자기 가도 괜찮아…?”
“그런 게 걱정되는 사람이 이 시간에 찾아왔어요?”
“…학원 끝나고 바로 온 건데 중간에…. 길 헤매다가….”
계단을 내려가 문을 열었다. 불을 켜자 언제나처럼 휑하니 먼지 쌓인 초라한 단칸방이 모습을 드러냈다. 힐끗 성여준을 곁눈질했다. 분명 당장 돌아가고 싶은 표정을 하고 있겠거니 했는데, 그는 조심스레 방 안을 둘러볼 뿐이었다.
“저뿐이에요. 들어와도 돼요.”
“어? 응, 그럼 실례할게….”
방바닥에 뽀얗게 앉은 먼지는 보이지도 않는지, 벗은 신발을 가지런히 놓고 올라선 성여준이 쭈뼛대며 내 눈치를 살폈다. 세워 놓고 생각할수록 섬뜩했다. 깡추가 갑작스러운 변덕으로 일찍 보내 주지 않았다면, 원래 일정대로 새벽까지 전단지나 나르고 있었다면 어떻게 됐을까.
“앉아요. 아니, 앉을 데가…. 마실 거….”
“아냐, 괜찮아. 그보다 사현아.”
성여준이 분주히 돌아서던 내 팔을 붙잡았다. 그제야 그의 팔뚝에 길게 그어진 손톱자국이 보였다. 쯧, 혀를 차고 부엌 찬장을 들어 엎었다. 간신히 오래된 연고 하나를 찾아낼 수 있었다.
“앉아 봐요.”
매트리스에 그를 앉혀 두고 팔을 끌어당겼다. 오른 팔목에 긴 손톱자국이 세 줄 그어져 있었다. 붉게 부어올라 살짝 피까지 맺혔다. 아랫입술을 짓씹다 쯧, 혀를 찼다. 성여준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미안해, 갑자기 찾아와서 화났어?”
“…….”
“근데 너랑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반 애들한테 물어봐도 모르겠다고만 하고, 내가 뭐 실수한 것 같은데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잘 모르겠고…. 그래서. 아, 주소는 멘토링 담당 선생님이 알려 주셨는데….”
말을 이어 가는 성여준의 입술이 가늘게 떨렸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그는 이런 동네에 와 본 것도, 미친 사람을 만난 것도 생전 처음일 테니까.
“…뭐 그렇게 애를 썼어요. 연락이 안 되면 안 되나보다 하면 되지.”
애석함 반, 미안함 반으로 내뱉자 그의 눈썹이 금방 일그러졌다. 내 말이 서운해서 어쩔 줄을 모르겠다는 기색이었다. 나야말로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그냥 성여준이 나를 일방적으로 돌봐 주고 있었을 뿐인데.
“나 괜한 짓 한 거야?”
“괜한 짓이라는 게 아니라….”
“요즘 왜 자꾸 이런 일만 생기는지 모르겠어. 내가 뭘 잘못하고 있는 건지….”
성여준이 울먹이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나는 그대로 피가 얼어붙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울다니. 어쩔 줄을 모르고 손끝을 옴짝거리는데 그가 얼른 손등으로 눈가를 훔쳤다.
“…사현아, 내가 너한테 뭐 실수했어?”
“아뇨…. 그런 게….”
“근데 그렇다 해도…. 내가 뭘 몰라서 너 섭섭하게 했어도, 나랑 먼저 얘기할 수 있는 거잖아. 이런 식으로 갑자기 생까는 게 어딨어. 그러면….”
“…….”
“그러면 상처받잖아….”
코를 훌쩍인 성여준이 아예 제 어깻죽지에 얼굴을 닦아 냈다. 그 얼굴을 가만히 보다 어렵게 입을 열었다.
“…핸드폰…. 변기에 빠뜨려서 고장 났어요.”
“…….”
“학교에서는…. 그냥 타이밍 안 맞아서 못 본 것 같고…. 그리고 음…. 저는 이제 멘토링 기간도 끝났으니까, 선배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진짜야?”
아무렇게나 주워섬기던 변명을 잘라먹고 그가 물었다. 어느새 또렷해진 시선에 그만 절로 입이 다물어졌다. 충혈된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말 그게 네 진심이야?”
진지한 표정에서 직감했다. 이 사람 무슨 일이 있는 거구나. 아마도 내가 아닌, 같은 ‘급’의 친구들과. 그리고 나에게서 위안 받으려 하는구나.
“…그렇다니까요. 다른 이유가 뭐가 있어요.”
“…….”
“일어나요. 정류장까지 데려다줄게요.”
하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덕분에 한 번 더 만날 수 있었으니까.
“이 동네엔 오지 말아요. 밤에 위험해요.”
어두운 골목이라는 핑계로 손을 잡았다. 성여준의 손은 차갑고 축축했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핀잔을 던졌다.
“너는 여기 살잖아.”
“저야 어릴 때부터 살았으니까 익숙한데 선배는 아니잖아요.”
“핸드폰은 그래서 어떻게 했어? 수리 맡겼어?”
“완전 죽었어요. 다시 사려고 알바하고 있어요.”
“알바? 그럼 언제 다시 살 수 있는데?”
“모르죠. 돈 다 모으면 사겠죠.”
일부러 성의 없이 대답하는 동안 어느새 큰길이었다. 평소엔 내려오는 데만 한나절 걸리는 것 같더니 빠르기도 하다. 정류장까지 와서야 손을 놓았다. 성여준이 뭔가 말하고 싶은 듯 몇 번이나 입을 달싹였다. 아직 놀란 마음이 가시지 않았는지 이마가 퍼렜다.
“…….”
선배, 하고 부르려던 입을 다물었다. 다행히 성여준은 보지 못한 것 같았다. 멀리서 버스가 오고 있었다. 성여준은 주머니에서 교통 카드를 꺼내며 애써 웃었다.
“그럼 나 갈게.”
“…….”
“학교에서 보자.”
손을 흔드는 그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이윽고 버스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버스에 오르는 성여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잘 가요.”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그는 돌아보았다. 한결 안심이 된 얼굴로 미소 지었다. 문이 닫히고, 떠나는 버스를 향해 나는 한 번 더 중얼거렸다.
“…잘 가요.”
이제 이렇게 대화할 일도 없겠지.
버스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돌아섰다. 언제나처럼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시커멓게 느껴졌다. 길은 머리가 아닌 몸으로 기억하고 있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아도 상관없었다.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집으로 돌아가는데 아직도 골목 담벼락에 주저앉은 여자의 모습이 보였다.
“…….”
여자는 팔다리를 늘어뜨리고 눕다시피 앉아 있었다. 멈춰 서서 한참 바라보다 몸을 낮췄다. 그녀가 눈알만 굴려 나를 보더니 입이 찢어져라 헤쭉 웃었다.
“오빠.”
몇 번 본 적이 있다.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깡추의 가게에서 몸을 팔았다고 했다. 깡추가 데리고 있는 여자들은 대체로 그랬다. 집에서 도저히 살 수가 없어 거리로 나온 어린 여자들. 어린애한테만 좆을 세우는 변태 새끼들에게 몸을 팔며 살다가 몇 번인가 애를 떼고, 나이를 먹어 상품 가치가 떨어지면 약에 빠진다. 처음에는 공짜였던 약값은 사람을 완전히 절여 놓은 후에 감당 못 할 빚으로 떨어진다.
그러면 이렇게 된다. 이 지경에 빠지면 보통은 일부러라도 정신을 놓는다. 눈을 떠봤자 도저히 제정신으로는 버틸 수 없는 현실만 남아 있으므로.
“오빠, 나아아.”
“일어나요.”
“결혼할까? 음…. 결혼.”
“집에 데려다줄 테니까 일어나요. 춥잖아요.”
손을 내밀었지만 여자는 고개를 꺼덕대며 알아듣지 못할 말을 중얼거릴 뿐이었다. 힘으로라도 일으켜야 하나. 고민하는데 어디선가 발소리가 들렸다.
“……?”
돌아보자 가로등 아래에 서 있던 남자가 화들짝 놀라 물러서는 모습이 보였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우리 학교 교복을 입고 있었다. 얼굴도 익숙했다. 특히 어두운 와중에도 못 볼 수가 없는, 코 옆의 커다란 사마귀가.
“…….”
성여준의 친구다. 순간적으로 별생각이 다 들었다. 성여준과 같이 왔나? 그랬으면 그가 혼자 돌아갔을 리 없는데. 성여준처럼 길을 잃었나? 구불구불한 언덕에 집들이 제멋대로 들어선 곳이라 그러기는 쉽다. 하지만 뭐 때문에?
“…어.”
이유는 모르겠지만 길을 헤매느라 저러고 있는 거면 도와줘야 하나…. 성여준 친구니까. 여자를 잠시 떼어 내고 몸을 일으켰다. 말을 걸어야 할 것 같아 한 걸음 다가섰다. 그러자 그는 한 번 더 놀라더니 돌아서서 다짜고짜 달리기 시작했다.
“…잠깐.”
저러면 위험한데. 점점 더 길을 잃어버릴 텐데. 경고해 주려 했지만 그의 모습은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동시에 제 손가락을 빨고 있던 여자가 옆으로 풀썩 쓰러졌다.
“아…. 젠장.”
여자를 수습하며 돌아봤을 땐 가로등 불빛조차 희미해져 있었다. 별수 없이 몸을 낮춰 쓰러진 여자를 들어 올렸다. 대충 아무 집이나 두드려 물어보면 그녀의 집이 어딘지는 알아낼 수 있을 터였다.
***
그 뒤로 며칠간은 꿈에 성여준이 나오지 않았다. 덕분에 평소보다 늦잠을 잤다. 일어나서 시계를 보자마자 그냥 쨀까, 고민했지만 깡추의 말을 되새기고 묵묵히 학교로 향했다. 도착했을 땐 1교시 예비종이 울리고 있었다.
아슬아슬하게 지각은 아니었다. 안도하고 뒷문을 열었다. 벌컥, 유난히 문소리가 크게 들렸다. 다음 순간 들이닥친 것은 숨 막히는 침묵이었다.
“……?”
분명 예비종이었는데. 의아함에 칠판 위에 달린 시계를 보았지만 다시 봐도 아직 수업 시작 전이었다.
“…….”
교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반 아이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그 시선을 숨길 생각조차 없어 보였다.
뭐야? 의아했지만 그런 질문을 건넬 만큼 가까운 녀석도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고민하다 우선 생각을 멈추고 내 자리로 향했다. 녀석들은 내가 움직이는 모습을 보며 하나둘씩 시선을 돌리더니 저들끼리 뭐라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맨 먼저 머릿속을 스친 것은 삐끼 아르바이트였다. 혹시 그 모습을 누군가 봤다면….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내 소문은 원래부터 좋지 않다. 밤에 나이트 전단지 좀 뿌리고 다닌다 해서 이제 와 이 정도의 반응이 나오지는 않을 것이다.
다행히 의문의 구렁텅이에 던져져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1교시 시작 직전 들어온 학생주임이 내게 손짓했던 것이다.
“임사현이, 잠깐 지도실로 와라.”
처음으로 그 얼굴이 반가웠다.
“지금 좀 희한한 소문이 돌더라.”
어렵게 꺼낸 첫마디치고는 아무 정보값도 없는 말이었다. 내가 고개만 까딱이자 학생주임이 의외라는 표정을 지었다.
“너도 알고 있냐?”
“…….”
“그래서 그게 사실이야?”
대화가 뚝 끊겼다. 도대체 뭐가 사실이냐는 건지.
“무슨 소문이 도는지는 모릅니다.”
“뭐? 그럼 진작 그렇게 말을 해. 왜 입을 꾹 다물고 있어?”
한숨 쉬며 대답하자 그가 답답한 듯 언성을 높였다.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생각이 났다. 깡추나 성여준 외의 사람과 대화하는 건 거의 항상 이런 느낌이었다. 피곤하고, 번거롭고, 성가시다.
“…그래, 됐고. 너 우리 학교 애들이 쓰는 인터넷 카페 있다던데 알고 있냐?”
그딴 걸 알 리가 없다. 고개를 젓자 그가 들으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거기에 익명으로 글이 하나 올라왔는데…. 오늘 아침에 교무실로 이런 것도 들어왔어. 직접 봐라.”
아마 돌려 말하기도 귀찮은 모양이었다. 나는 순순히 그가 내민 프린트를 받아 들었다. 인터넷에 올라온 게시물을 그대로 인쇄한 종이였다.
제목: 여학생들 조심하세요….
글쓴이: 익명
쓸까 말까 오래 고민하다가 씁니다. 혹시 익명이 밝혀질까 쓰면서도 두려워서 손이 벌벌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미래의 어머니, 학교의 꽃인 여학생들이 악랄한 마수에 빠져 소중한 몸을 망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 결국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중략) …평소 조폭과 어울려 다니는 그 학생에 대한 소문이 학교 내에서도 암암리에 돌았던 걸로 압니다. 다만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 측이 방관해 온 것이지요. 그러는 사이 무럭무럭 싹을 틔운 그의 악의는 마침내 가장 약하고 가장 상냥한 존재에게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중략) …여성은 가장 보호되어야 할 존재, 가장 소중히 여겨져야 할 존재라는 것을 저를 비롯한 보통의 남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여학생 여러분도 언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중략) …그 학생은 퇴폐업소에 드나들며 수많은 여자들을 건드렸고 개중에는 그 학생의 강요에 억지로 아이를 떼고 폐인이 된 사람도 적지 않고…
(중략) …그런 위험한 인물을 계속 학급에 둬도 되는 걸까요? 아니요,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같은 학급에서 한 공기를 마시는 미래의 어머니들, 가장 연약하고 가장 소중한 여학생들이 위기에 빠져 있으며…
구구절절한 대서사시를 읽다가 그만 웃음이 터질 뻔했다. 내 표정을 유심히 보고 있던 학생주임이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
“뭘 웃어, 마.”
“아뇨…. 이런 역작을 써 놓고 익명에 만족하겠다는 겸손함에 감명 받아서요.”
“뭐?”
“그래서요? 이 글이 저랑 무슨 상관입니까?”
종이뭉치를 내려놓고 물었다. 그는 입을 떡 벌린 채 잠시 말이 없었다.
“글에 제 이름이 나온 것도 아니고, 명백하게 저를 지목한 것도 아닌데 제가 왜 해명을 해야 하죠?”
“…마! 거기 보면 조폭이랑 어울려 다니고 어쩌고…. 써 있잖아!”
“제가 조폭과 어울려 다닌다고는 누가 그러던가요? 근거 있는 이야깁니까?”
사실을 말하자면 이런 소문이 돌거나 말거나, 여자들이 나를 쓰레기로 보며 피하거나 말거나 전혀 상관없었다. 단 한 가지 걱정되는 것은 성여준의 평판이었다. ‘조폭과 어울려 다닌다’와 ‘여자를 함부로 건드리고 낙태시켰다.’는 그 소문의 질부터가 다르다. 전자라면 성여준이 착해서 같이 어울려 준 것뿐이라 퉁칠 수 있겠지만 후자라면 그런 인간과 가까이 지낸 성여준 자체도 똑같은 인간이라는 오해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이런 사실 없습니다. 그러니까 설명드릴 것도 없고요.”
“자식아, 그럼 이 글을 보자마자 모든 애들이 다 널 떠올린 걸 어떻게 설명할 거야?”
“…….”
“그럼 그것도 니 잘못인 거야. 니 평판이 그 정도인 거라고. 책임을 져야 맞는 거야!”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대답할 기력조차 없었다. 그의 얼굴을 빤히 보다 느리게 물었다.
“제가 뭘 어떻게 하면 되는 겁니까?”
묻자 학생주임이 흠, 헛기침을 했다.
“…일단 당분간 자숙하고 있어. 학교 측에서도 알아보고 연락을 할 테니까.”
“정학입니까?”
“…….”
“저는 이런 사실 없습니다.”
“…….”
“정말로 이런 적 없….”
“알았다고! 알아들었어!”
그가 벌컥 소리치며 손을 휘저었다. 파리 따위를 급하게 내쫓는 동작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다 돌아섰다. 차라리 잘된 건지도 모른다. 정학을 받고 집에만 있다 보면 자연스레 성여준과도 만나지 못할 테고, 돈이나 벌면서 차근차근 내 할 일을 하면 된다.
“…성여준 선배는.”
문고리를 잡고 돌아보았다. 내 뒤통수를 보고 있던 학생주임이 화들짝 놀랐다.
“선배는 그냥 잘해 주신 겁니다.”
“뭐?”
“제 소문 같은 건 전혀 모르시는 것 같았습니다.”
그가 눈을 크게 껌벅거렸다. 곧이어 얼굴이 벌게지더니 왈칵 목소리를 높였다.
“당연하지, 인마! 당연히 여준이는 너 같은 놈이랑 다르지!”
그래, 그렇지.
안심하고 지도실에서 나왔다. 1교시가 진행 중인 교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서자 모두가 놀라 돌아보았다. 묵묵히 가방을 챙겨 학교에서 나왔다.
내가 학교에서 보낸 마지막 날이었다.
***
한동안은 집에서 지냈다. 어두운 방에 누워 성여준 생각을 하다가 밤이 되면 아르바이트를 하러 나갔다. 술에 취해 행패 부리는 손님을 끌어내다 보면 내가 다 취하는 것 같았다.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돌아가다 단속에 걸릴 뻔한 적도 있었다.
어떤 새끼가 글을 썼는지는 별로 궁금하지 않았다. 그따위 변화구로는 마음이 움직이지 않는다고 말하는 편이 정확할 것이다. 아무려나 상관없었다. 알고 싶은 건 성여준의 마음뿐이었다.
소문을 믿었을까. 믿었다면 실망했을까. 실망했다면 이제 두 번 다시 나를 보고 싶지 않다고 할까…. 평생, 언제 어디서 어떤 식으로 마주치더라도.
이제 인사할 수 없을까.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결과를 맞고 싶지 않다면 내가 똑바로 살아야 했다. 깡추와 어울리지 말아야 했다. 축구공을 맞았을 때 울며 주저앉았어야 했다. 누가 건드리면 피하고, 때리면 맞으면서 피식자로 살아야 했다.
그렇게 살았을 것이다. 내 인생의 언젠가에 성여준을 만날 거란 사실을 미리 알았더라면.
네 시간 동안 전단지를 뿌리고 손님을 물어 오면 깡추는 일당으로 만 원을 주었다. 그렇게 지폐를 한 장씩 받아다 차곡차곡 쌓아 놓는 동안 담임은 한 번도 연락을 주지 않았다. 밤공기가 차츰 식어가고 있었다.
쌀쌀한 날씨에 목이 추웠다. 장롱에 있던 아버지의 점퍼는 다 낡고 헤져 바람을 조금도 막아 주지 않았다. 땅만 보며 걷는데 어디선가 두런두런 말소리가 들렸다. 순간 발소리를 낮췄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는 아니다.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씨팔새끼야, 나랑 지금 소꿉장난이라도 하자는 거야?”
익숙한 목소리다. 깡추의 패거리 중 하나였다. 이 시간에 여긴 왜 왔지. 의아함에 귀를 기울이자 잔뜩 겁먹은 목소리가 이어 들려왔다.
“…아니요, 그런 게 아니고….”
패거리는 교복 입은 녀석 하나를 무릎 꿇린 채 낮은 목소리로 윽박지르고 있었다. 저건 또 무슨 상황인가. 발소리를 완전히 죽이고 골목 사이로 눈을 내밀었다.
“남의 돈을 갖다 썼으면 갚아야 될 거 아니야. 내가 지금 너한테 없는 돈 내놓으라 그래?”
“…그런, 그런 건 아니지만, 저는 딱 십만 원 빌렸는데, 그거 이미 다 갚았는데….”
“이 씨팔새끼가 그걸 말이라고 지껄여? 야, 이자를 내기 싫은데 남의 돈을 왜 갖다 써?”
또 시작이군…. 상황을 다 파악하기도 전에 한숨부터 나왔다. 깡추와 그의 패거리는 이런 점에서 특히 질이 나빴다. 수완이 없어 손대는 사업마다 말아먹으니 온갖 곳에 다 시비를 걸고 수작을 부리는 것이다.
“제가 버, 벌써 이십만 워…, 원이나, 드렸잖아요….”
꿇어앉아 있던 녀석이 기어코 울음을 터뜨렸다. 패거리는 허, 하며 웃더니 녀석의 머리를 마구 내리치기 시작했다.
“새끼가, 짜기는, 왜 짜고 지랄이야. 어?”
“악! 때리, 때리지 마세요. 아악!”
“이 새끼 사람 꼴 우습게 만드네? 빌려 달래서 빌려줬지, 억지로 쥐여 줬어? 이자 하루에 만 원씩 붙는다고 내가, 말했어? 안 했어? 어? 이 거지새끼야.”
저러다 애 잡겠군. 물론 그 역시 내 알 바는 아니었다. 이 동네에 살면서 깡추 패거리의 눈 밖에 나면 삶이 고달플 수밖에 없었다. 무시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던 순간이었다.
“…….”
뭔가 마음에 걸려 돌아보았다. 선뜻 설명하기 어려운 위화감이었다. 내가 천천히 다가가는 와중에도 패거리는 열심히 눈앞의 녀석을 패고 있었다.
“형님.”
부르자 한 템포 늦게 고개를 든다. 숨을 몰아쉬고 있던 놈이 금방 미간을 찌푸렸다. 왜 굳이 와서 알은체를 하는지 모르겠다는 얼굴이었다.
“너 왜….”
“알바 다녀오는데 계시길래, 인사하려고요.”
주머니에서 손을 빼고 허리를 꾸벅 숙였다. 놈은 내가 공손히 굴자 흠흠, 하며 옷매무시를 가다듬었다. 하긴, 새파랗게 어린 끄나풀에게 고등학생 삥이나 뜯는 꼴을 들켰으니 누구라도 쪽팔릴 일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니, 일은 무슨. 됐으니 가던 길 가라.”
놈이 나를 향해 손을 휘저었다. 나는 물러서는 척, 그때까지 놈에게 맞고 있던 녀석을 힐끔 내려다보았다. 온몸을 웅크리고 있던 녀석도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눈이 마주치자 서로 놀랐다. 놈이 급하게 시선을 피했지만 덕분에 그의 코 옆에 있는 사마귀를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뭔데? 아는 사이냐?”
패거리가 다소 누그러진 어조로 물었다. 나는 말 없이 필사적으로 눈을 피하는 녀석을 뚫어져라 내려다보았다.
착각일 리 없다. 다시 봐도 성여준의 친구라는 놈이었다. 학교의 최상위 계층. 인기가 많거나, 돈이 많거나, 공부를 잘하거나. 어쨌든 이런 동네와는 인연이 없어야 하는 사람이었다.
“…아뇨.”
전에 이 동네에서 본 것도 우연이 아니었나. 여러 가지 생각이 스쳐 갔지만 우선은 자리를 피하는 게 맞을 듯했다.
“그냥 교복 보니까…. 저랑 같은 학교여서요.”
“뭐? 아, 그래? 너 다니는 학교 여기서 꽤 멀지 않던가?”
“…예, 그렇죠.”
“근데 너 이제 짤렸다며. 그럼 같은 학교도 아니지.”
패거리가 낄낄 웃더니 내 등을 떠밀었다. 가 봐라, 형님한테 안부 전해 드리고. 웃으며 말하는 그에게 대충 인사하고 돌아섰다. 사마귀는 마지막까지 나와 시선을 맞추지 않았다.
***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날, 깡추는 여느 때와 같이 퇴근하는 나에게 선물이라며 먹다 남은 위스키 한 병을 내밀었다. 선뜻 받아 들지 않고 머뭇거리자 씩 웃으며 아예 내 품으로 떠밀었다.
“괜찮아, 인마. 집에 두고 잠 안 올 때 한 모금씩 마셔. 좋은 술이야.”
“전 이런 거 마셔 본 적이 없어서….”
“그래서 주는 거야. 평생 안 마시고 살 것도 아니고, 챙겨 줄 때 받아먹어.”
고개를 꾸벅 숙이고 병목을 쥐었다. 찰랑대는 위스키는 유난히 색이 짙어 보였다. 깡추가 주는 선물을 거부한다는 선택지는 어차피 없었다. 빚으로 돌아올 걸 알아도 일단은 받아야 했다.
성여준을 생각하지 않은지는 꽤 오래였다. 꿈에서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나는 차근차근, 그러나 순조롭게 깡추의 조직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의 패거리들도 예전보다는 나를 호의적으로 대해 주었다. 깡추의 편애를 업고도 잘난 척하지 않는 점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버지와 연락이 되지 않은지도 오래였다. 깡추에게 이야기했더니 그는 일당을 이만 원으로 올려 주었다. 반지하 단칸방에 살기 위해서는 방값 십오만 원과 관리비 삼만 원이 필요했다. 방값을 내고 남은 돈은 찬장에 모아 두었다.
풀썩, 매트리스에 주저앉자 먼지가 피어올랐다. 방은 전등을 켜 놓아도 어두웠다. 불이 깜빡이는 형광등을 올려다보다 문득 깨달았다.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고, 이 방에서 나는 언제까지나 홀로 잠들게 되리라는 사실을.
“…….”
그러자 꿈에서라도 성여준이 보고 싶었다.
멀뚱한 눈을 이리저리 굴리다 문득 신발장에 올려 둔 위스키병을 보았다. 잠 안 올 때 한 모금씩 마셔. 병을 쥐고 뚜껑을 열었다. 정신이 아찔해지도록 독한 술 냄새가 났다.
병 입구에 입을 대고 한 모금을 머금었다. 코끝이 찡하니 매워지더니 왈칵 기침이 솟았다. 입을 막고 억지로 삼키자 목부터 뱃속까지가 통째로 타들어 가는 것 같았다.
“…씨발, 뭐야 이게.”
물을 마셔야겠다 싶었다. 병을 내려놓고 일어섰다. 동시에 머리가 핑 돌았다. 도로 매트리스에 주저앉아 아픈 머리를 쥐어 쌌다. 바닥이 빙빙 돌아가는 듯했다.
이딴 걸 마시라고? 그것도 잠이 안 올 때? 모로 누운 채 어지러움을 달래 봤지만 허사였다. 속이 울렁대는가 싶더니 눈앞이 껌뻑껌뻑 점멸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의아해졌다. 아무리 독한 술이라도 단 한 모금에, 순식간에 이렇게 되는 게 말이 되나? 정말 독이라도 탄 게 아니고서야. 눈앞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덜컥 겁이 났지만 그래 봤자 이미 꺼져 가는 의식을 되살릴 방법은 없었다.
매트리스 아래, 차가운 철골까지 가라앉는 듯한 밤이었다.
사현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뺨이며 어깨에 닿는 손도 느껴졌다. 깜빡, 깜빡. 형광등 불빛이 나갈 듯 말 듯 흔들렸다. 억지로 눈을 뜨자 보인 것은 그리운 얼굴이었다. 잔뜩 걱정스러운 표정을 지은 성여준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오랜만이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꿈에서라도 보고 싶다 했다고 정말 나올 줄은 몰랐다. 꿈속에서도 머리가 아픈 걸 보니 깡추가 준 술이 뭔가 이상했던 것은 틀림없지만, 덕분에 성여준을 보는 거라면 고맙기까지 했다.
사현아, 괜찮아? 희미한 목소리가 들린다. 꿈속의 성여준은 언제나 그랬듯이 유난히 더 상냥하고 부드럽다. 정신이 없는 와중에도 역시, 깡추가 술에 무슨 약이라도 타서 준 건가 싶었다. 만약 그렇다면 내가 깡추에게 뭔가 밉보였다는 뜻이다. 그는 마음에 든 끄나풀에겐 절대로 약을 권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어쩌면, 깡추는 나를 쳐 낼 생각인지도 모른다. 내가 생각보다 쓸모가 없었다거나 다른 더 좋은 ‘쓸 만한 새끼’가 생겼다거나. 그런 거라면 좋을 텐데. 매일 일당을 챙겨 줘야 하는 내가 이제 와서 귀찮아진 거라면, 그래서 떨어내고 싶은 거라면…. 나는 기꺼이 깡추의 눈이 닿지 않는 먼 곳까지 떨려 나서….
…그곳에서 새로 시작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막노동이라도 하면서 돈을 버는 거야. 언젠가 패거리에게 들은 말로는 공사판에서 일하는 중장비 기사들이 그렇게 일당이 높다고 했었다. 막노동해서 모은 돈으로 자격증도 따고 장비도 사서 커다란 포클레인을 운전해야지. 그렇게 살다 보면 내가 이런 쓰레기였던 걸 잊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대단히 괜찮은 인간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성여준이 살면서 두어 번쯤은 만나 줄 수 있을 만큼 멀쩡한….
…그런 인간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르니까, 그때, 그때가 되면….
“…-하지 마!”
쇠기둥끼리 강하게 부딪치는 듯 묵직하고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눈앞이 까맣게 번졌다. 흐릿하게, 물에 잠긴 낱말처럼 어슴푸레하게 떠오르던 미래의 조각들이 한순간 파도에 쓸려 나가고 나는 새카만 단칸방 매트리스 위에 앉아 있었다.
“…….”
눈을 깜빡이는 데 이미 억겁의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상황을 파악하는 데는 그보다 좀 더 긴 시간이 필요했다. 어둠에 완전히 익은 눈에 제일 먼저 보인 것은 등이었다. 익숙한 교복 셔츠를 입은 등. 이어 내 손이 보였다. 뜨겁고 딱딱하고, 핏줄이 있는 대로 일어서 흉측한 손. 나는 그 험한 손으로 희고 마른 팔을 꺾어 누르고 있었다. 피가 통하지 않아 파랗게 질린 팔뚝이 위태로워 보였다.
“…어…?”
멍하니 내뱉자 내 몸에 짓눌려 있던 등이 움찔 튀어 올랐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은 깜깜했다. 방금 들은 큰 소리는 형광등이 완전히 터지면서 낸 소음인 듯했다.
“…사현아. 제발….”
이어 흐느끼는 목소리가 들렸다.
“놔…, 놔줘, 제발….”
잔뜩 겁먹어 울먹이는 목소리. 거친 숨에 홀쭉해진 뺨은 땀과 눈물로 엉망이었다. 이건 또 어떤 악몽의 연장선인가. 천천히 손을 놓았다. 그래 봤자 성여준은 일어서지 못했다. 나는 매트리스에 엎어진 그의 허벅지를 타고 앉아 있었다. 식은땀으로 척척해진 성여준의 어깨며 목덜미 곳곳에 잇자국이 보였다. 나는 그의 반쯤 벗겨진 바지 위로 잔뜩 발기한 좆대가리를 대고 온몸으로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
악몽이라 여겼던 것은, 내 꿈에서 성여준은 단 한 번도 나를 거부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꿈이니까.
“…선.”
그러니 이건 악몽이다. 악몽일 뿐이다. 깨어나면 모두 없던 일이 될 거야. 입을 여는 순간 스스로도 믿기 어려울 만큼 음산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동시에 성여준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리기 시작했다.
“선배, 이건…. 이….”
“…아악!”
손을 뻗으려는 순간 그가 내 어깨를 밀쳤다. 너무나 갑작스러운 물리적인 접촉에 온몸의 힘이 빠져나가는 듯했다. 나는 뒤로 자빠졌고, 성여준은 바닥을 기어 내게서 도망쳤다. 엉망진창으로 벗겨진 옷을 채 추스르지도 못한 채 현관문으로 달려든 그가 온몸으로 문을 밀어젖히기 시작했다. 덜컹, 덜컹, 문고리가 여러 번 헛돌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문, 그렇게 밀기만 해서는…. 안 열려요. 문고리를 아래로 밀면서…. 돌리면서…. 천천히 해야 돼요. 그래야 열려요. 그래야 선배가 도망갈 수 있어요. 문장들은 음절 단위로 분해되어 머릿속을 떠다니고, 입을 여는 것보다 몸을 일으키는 것이 쉬웠다. 바닥을 짚고 머리를 들었다. 그런 나를 돌아본 성여준의 낯빛은 숫제 보랏빛이 되었다.
“…선배.”
“오지 마…!”
벌컥 소리친 성여준이 문고리를 놓치고 주저앉았다. 벌벌 떨리는 손으로 셔츠 앞깃을 쥐고 있지만 단추가 있는 대로 뜯겨 나간 옷은 좀체 그의 의지대로 몸을 가려 주지 않았다.
“문….”
“…흣.”
“열어 줄게요, 문….”
“…….”
“…옷도, 내 거…. 크겠지만…. 그거라도….”
눈앞이 흐렸다. 눈꺼풀이 무겁고 공기가 찐득하다. 멍청한 소리만 줄줄이 내뱉다가 자빠진 것은 그런 이유였다.
바닥에 얼굴을 처박고 누운 채 얼마나 지났는지 알 수 없었다. 희미해진 머릿속으로 철컥대며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이어 쿵, 강하게 닫히고 계단을 뛰어 올라가는 발소리. 도망쳤구나. 문을 잘 열고.
“…….”
다행이다.
***
“야, 사현아, 너 내가 어제 준 술 어떻게 했냐?”
눈을 떴을 때, 당연한 소리지만 성여준은 없었다. 하지만 열린 현관문이며 매트리스며 바닥에 떨어진 핏방울이 꿈이 아니었음을 알려 주었다. 차차 선명해진 머릿속으로 입술에서 피를 흘리고 있던 성여준의 얼굴이 밀려들었다.
“…예?”
“손 안 댔지? 응? 아니, 내가 분명히 너 주려고 따로 빼 둔 술이었는데 애새끼들이 모르고 거기다 장난을 쳤던 것 같아서…. 아직 안 마셨지, 응?”
깡추는 전에 없이 다급해 보였다. 가만히 그의 얼굴을 마주 보았다. 깡추는 이제 나보다 머리 하나는 작았다.
“왜 말이 없어? 설마 마셨냐?”
깡추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당연하지만 나를 걱정해서가 아니다. 깡추의 패거리들이 타 놓은 약이 아까워 이러는 것이다.
“아뇨…. 냄새만 맡아 봤는데 너무 독해서…. 그대로 뒀습니다.”
“아아, 그래그래, 잘했다. 내일 고대로 다시 가져와. 알겠지?”
“예.”
“너한테 그런 술은 아직 일러. 어젠 내가 뭐에 씌었는지 참….”
내 어깨를 두드리며 웃은 깡추가 미련 없이 멀어져 갔다. 나는 전단지를 들고 멍하니 선 채 성여준을 생각했다. 창백하게 질려 있던 얼굴과, 공포로 축축하게 일그러진 눈동자, 터진 입술과 잇자국 난 어깨와 감전된 사람처럼 떨고 있던 두 손….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지러이 널린 전깃줄 아래 다 낡은 건물의 깨진 창. 벽을 기어올라 머리부터 떨어지는 상상을 했다. 척추가 부러지고 눈알이 튀어나오고 온몸의 뼈가 산산조각난 내 모습을 떠올렸다. 조금도 시원해지지 않았다. 더더욱 무엇도 욕심낼 수 없게 되었다.
나는 태양계 바깥으로 밀려난 먼지 구덩이. 바람에 마모되어 날카롭게 벼려진 채 죽을 날만 기다리는 우주의 잔여물이다.
야구 모자를 코 위까지 눌러쓰고 아버지가 처박아 둔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아는 사람을 마주치지 않게 조심하면서 학교 근처를 맴돌았다. 성여준이 걱정스러웠다. 학교에 멀쩡히 나왔는지만이라도 확인하고 싶었다.
교문에서 멀찍이 떨어진 골목에 몸을 웅크렸다. 오가는 학생들이 면봉보다 작게 보였지만 성여준은 알아볼 자신이 있었다.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하교 종이 흐르고 똑같은 교복을 입은 인간들이 우르르 몰려 나왔다.
오래 기다릴 필요도 없었다. 찾느라 애를 쓸 이유도 없었다. 성여준은 언제나 그랬듯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인 채 웃으며 교문을 나서고 있었다. 얼굴도 멀끔해 보였다. 입술 상태가 어떤지는 너무 멀어 보이지 않았지만 움직임이 불편한 기색은 없었다.
“…….”
한숨을 쉬고 얼굴을 쓸어 올렸다. 다행이다. 안도하자 뒤늦은 의구심이 들었다. 우리 집까지는 또 왜 왔던 걸까. 소문을 들어서? 확인하기 위해서? 비난하기 위해서? 아니면….
“…….”
아니면 내 이야기를 들어 보기 위해서….
“…윽.”
목 아래서 뭔가 치밀어 올랐다. 재빨리 내 뺨을 내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은 걸 봤으니 됐어. 이제 두 번 다시 날 찾아올 리 없을 테니 그것도 됐어. 이걸로 정말 끝일 테니까…. 다 괜찮다고.
침을 뱉고 돌아섰다. 그러려고 했다. 그러나 순간 눈에 걸린 것이 있었다.
“……?”
성여준과 인사를 나누고 돌아서는 녀석이었다. 코 옆에 사마귀가 있는 녀석. 성여준은 분명 그의 이름이 ‘영재’라고 했었다. 가장 친한 친구이며, 마음이 약하고 좋은 녀석이라고.
사마귀는 N동 방향으로 가는 버스에 오르고 있었다. 저 녀석 정말 우리 동네에 사나? 그 구질구질하고 각박한 판자촌에? 아니면 혹시, 아직까지도 깡추 패거리에게 시달리고 있나?
그러려니 돌아설 수도 있는 일이었다. 별로 신경 쓸 가치도 없는 지나침이었다. 하지만 어쩐지 그럴 수가 없었다. 미묘한 찜찜함이 발가락 사이사이로 들러붙어 발목까지 휘감았다. 눈을 가늘게 뜬 채 그의 뒷모습을 쫓다가 도로로 나섰다.
깡추의 패거리에게 봉변을 당하고 있는 사마귀의 모습을 모른 척 지나쳤던 것은, 놈이 나를 알아보면 쪽팔려 할 거라 생각해서였다. 그가 누구인지 모르는 척해 주는 게 도와주는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이제 나는 성여준과 두 번 다시 만날 일도 없고, 성여준이 나를 찾을 일도 없으니까. 사마귀가 계속 깡추 패거리에게 시달린다면 언젠가는 성여준에게 피해가 갈지도 모르니까. 그러니까 이제는 괜찮지 않나? 성여준이 내게 인사를 건넬 때마다 무심히 눈을 피하던, 싫은 티 내지 않고 조용히 제 할 일을 하던 유일한 사람이니까, 이 정도는 도와줄 수 있는 문제 아닐까.
돌이켜 생각해 보건대 치졸한 심리였다. 내가 N동에서 가지고 있는 유리함을 이용해 성여준의 친구에게 은혜를 베풀면, 성여준에게 저지른 죄도 조금쯤은 상쇄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가 성여준에게 내가 도와줬다는 이야기를 전해 주지 않을까 하는 은근한 기대도 있었다. 그토록 유치하고 초라한 마음으로 쫓아간 자리에는.
“…….”
당연하게도 지나치게 좆같은 결과가 기다리고 있었다.
“…러니까 십만 원만 더…. 아, 씨. 그럼 어쩌란 말이야.”
사마귀의 모습을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덕지덕지 기워 놓은 판자촌에서 그의 모습은 놀라울 만큼 이질적이었다. 놈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투덜거리며 오르막길을 걷고 있었다.
“나 그럼 어떻게 해? 그 새끼들한테 맞다가 뒤져? 그럼 엄마 속이 시원하겠어?”
복잡한 골목 사이사이를 누비는 발놀림이 능숙해 보였다. 들키지 않도록 조심조심 따라가는데 놈이 문득 걸음을 멈췄다. 얼른 몸을 감추자 잠시 끊겼던 말소리가 한층 낮아졌다.
“…아들 목숨보다 돈이 더 중요해? 그럼 시체 치우는 수밖에 더 있어? 오늘까지 안 가져오면 진짜 죽인다고 했다니까!”
은밀하게 속삭이는 목소리엔 사람의 신경을 집중시키는 힘이 있다. 가만히 귀를 기울이자 유난히 주변이 고요한 듯 느껴졌다. 사마귀는 담벼락에 기대선 채 통화를 이어 가고 있었다.
“여준이 얘기는 왜 해? 무슨 상관이라고.”
순간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이름만 들어도 가슴이 뜨끔하다. 존재 자체로 죄악감이 되어 버린 불꽃이었다.
“…내가 여준이한테 돈을 왜 빌려! 엄마 진짜 이럴 거야? 정말 나 죽는 꼴 보고 싶어? …엄마!”
전화는 그대로 끊긴 듯했다. 핸드폰을 쥔 채 한참을 씨근대던 사마귀는 온갖 욕설을 늘어놓으며 다시 골목을 오르기 시작했다. 그가 향한 곳은 우리 집보다도 높고 깊은 지대였다. 갈수록 길이 좁아지는 통에 들키지 않고 쫓아가려면 안간힘을 써야 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멍청한 짓 세 가지를 꼽으라면 다음과 같다. 깡패에게 돈 빌리기, 깡패의 여자 건드리기, 깡패와 친구 하기. 애석하게도 그 1단계를 이미 밟아 버린 사마귀가 깡추 패거리의 마수에서 빠져나올 방법은 없다. 터무니없이 높은 일수를 매겨 돈을 빌려주고 백 배, 천 배로 받아 낼 때까지 사람을 쥐어짜며 괴롭히는 족속들이다.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하며 쫓아가는데 사마귀가 마침내 걸음을 멈췄다. 그가 들어선 곳은 골목 거의 꼭대기의 자그마한 판잣집이었다. 이딴 것도 방이라고 월세를 받겠지. 슬레이트 두 칸이나 될까 말까 싶은 집을 멀찍이서 살펴보다 우선 물러섰다.
깡추의 패거리들은 일찍부터 룸에서 떡이 되어 있었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그들은 취해 있을 때 가장 관대하다. 공손히 허리를 숙여 인사하고 무릎걸음으로 다가갔다.
“어, 사현이 왔냐.”
다행히 깡추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나는 늘어져 있는 인간들 하나하나에게 인사한 뒤 그날 밤, 사마귀를 겁박하고 있던 홍게에게 말을 건넸다.
“저, 형님…. 잠깐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홍게가 술을 따르다 말고 눈을 둥글게 떴다. 의아한 기색이었다.
“무슨 일인데?”
룸을 나와 복도에 선 홍게가 담배 한 대를 빼물었다. 나는 두 손을 모으고 선 채 머릿속으로 생각한 말들을 최대한 차근차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게…. 예전에 그…. 수금하고 계시던…. 저 다니던 학교 선배 이야깁니다.”
“뭐? 그거 왜? 아는 사이 아니라며?”
우르르 쏟아진 반문에 마른침을 삼켰다. 자칫하면 지대한 반항 행위로 찍힐 수도 있는 짓이었다.
“그때는 그…. 선배가 쪽팔려 할까 봐 모른 척을 했는데….”
“했는데? 아는 놈이라고?”
“…예, 그래서 저….”
“아, 씨발. 그래, 알았다.”
담뱃재를 툭 떨어낸 홍게가 거칠게 손을 흔들었다. 말뜻이 얼른 와 닿지 않아 눈을 둥글게 뜨자 그가 한 번 더 손을 휘저었다.
“알았다고, 냅둘게. 그때 말했으면 진작 손 뗐잖아.”
“…아.”
뒤늦게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모 아니면 도라고 각오하고 왔건만, 이렇게 쉽게 해결될 줄은 몰랐다. 제 머리를 벅벅 긁던 홍게가 금방 내게 눈을 부라렸다.
“대신 너 이거 깡추 형님한테 말하면 안 된다. 알지?”
“…예, 정말 감사합니다.”
“너 입 무거운 새낀 거 아니까 봐주는 거야. 딴 놈 같으면 어림도 없었어.”
“예, 형님. 감사합니다.”
똑바로 선 채 허리를 꾸벅 숙였다. 아마 홍게는 내 저자세를 흡족하게 여긴 듯했다. 흠, 헛기침을 한 그가 짐짓 잘난 척 말을 이었다.
“근데 어떻게 아는 사인데? 그 새끼 이 구역 온 지 얼마 안 됐는데.”
“…그리 가까운 사이는 아니라서…. 형님은 잘 아십니까?”
별수 없이 궁금했던 일이기는 했다. 성여준의 친구, 그와 비슷한 위치에 있어야 할 인물이 왜 이런 구질구질한 동네에서 이런 삼류 깡패에게 시달리고 있나 하고.
“아, 몰랐냐? 그 새끼 애비가 양동이 구역에서 장사하다가 폭탄 맞고 튀었거든.”
“…예?”
“원래 노래빠를 크게 했었어. 꽤 잘나갔었나 본데, 몇 달 전에 빵꾸 난 장부 빼돌리다 걸려서 그대로 야반도주했어. 뭐 여차저차해서 중간 구역에서 싸움 났던 거 덮는 대신에 구역별 채권 정리할 겸 우리한테 넘어온 게 저번 달이야. 에미가 애새끼 고등학교는 졸업하게 해 달라고 사정사정해서 그렇게 됐다는데.”
잠시 뭐라 할 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성여준은 종종 내게 사마귀 이야기를 했었다. 영재랑은 고등학교 입학식 때 만나서 친해졌어. 영재 엄청 밝고 착해. 영재가, 영재는, 영재의….
“야, 미리 말해 두는 건데 내가 고딩 푼돈이나 뜯자고 그 짓 한 거 아니다? 무슨 말인지 알지?”
사정을 몰랐다면 개소리라 생각했겠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갔다. 갑작스레 유입된 ‘주민’과의 서열 정리 과정이었던 것이다.
“예, 알죠. 필요하니까 하신 일인 거 압니다.”
“그래, 그래. 우리 사현이, 요즘은 말도 잘하고 착하게 굴고…. 참 이쁘단 말이지.”
“…돌봐 주신 덕분입니다.”
“말 나온 김에 상 줄까? 어떠냐?”
홍게가 새끼손가락을 슥 치켜 올렸다. 깡추와 그의 패거리들은 유독 나를 업소에 데려가지 못해 안달이었다.
“저는 그런 건….”
“알아, 알아. 너 호모잖아. 취향 맞춰 준단 소리야.”
“…아닙니다.”
“한참 열 올리던 걔는? 이제 아니야? 여준인가 요준인가 하는.”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눈을 크게 뜨고 올려다보자 홍게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추켜세웠다.
“왜?”
“…갑자기.”
“엉?”
“왜…. 또 갑자기 그….”
왜 또 갑자기 성여준을 물고 늘어지지? 별생각 없이 꺼낸 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심장이 벌컥벌컥 뛰어 올랐다.
“그야 조만간 영재가 걔 낚아 올 테니까.”
이어 홍게의 입에서 새어 나온 건 믿을 수도 없고 믿고 싶지도 않은 말이었다.
“…예?”
멍하니 되묻자 홍게가 한숨을 푹 쉬었다. 슬슬 이 대화가 귀찮아진 기색이었다.
“아니, 너 걔가 애초에 돈을 왜 긁고 다녔는지는 아냐?”
“…아뇨.”
“무슨 옷 사려고 그랬단다. 오십만 원짜리 바람막이에다가 뭐라더라, 에어 어쩌고? 하는 이십만 원짜리 운동화랑….”
“…….”
“예전 습관을 못 버린 거지. 그 판자 쪽방에 살면서도 아직도 지가 그런 걸 누려야 마땅하다고 여기는 거야. 지 에미는 애비가 놓고 튄 빚 건사하느라 낮에는 마트 캐셔하고 밤에는 방석집에서 술 따르는데.”
“…….”
“그런 새끼들은 판자 쪽방이 아니라 서울역 대합실에서 나뒹구는 한이 있어도 그 허세 못 버려. 한 번 남의 돈 빌려다 쓸 수 있다는 걸 알았으니 더더욱. 이제부터는 친구가 아니라 부모에 형제라도 팔아다가 지 옷, 신발, 가방으로 바꾸려 들 거다.”
“…그래서 성여준을…. 엮을 거란 말씀이십니까? 그 자식이?”
“그렇지. 아, 다시 말하는데 나는 손 뗄 거야. 근데 내가 뗀다고 끝나는 문제 아니라는 소리야.”
홍게가 어깨를 한 번 으쓱였다. 그 말은 아마 사실일 터였다. 깡패에게 목숨보다 중요한 게 있다면 자존심이다. 한 번 길을 들면 끝까지 가야만 하는 만큼, 어느 정도 이 바닥 물을 먹은 놈들일수록 웬만하면 귀찮은 일을 만들지 않으려는 경향이 있었다. 홍게가 내 말을 순순히 들어 준 것도 그까짓 푼돈 때문에 나와 마찰을 일으켜 깡추의 비위를 거스를 이유는 없었기 때문이다.
“뭐 아직 미자라서 법적인 보증인 그딴 건 물론 안 되겠지만, 듣자 하니 그 성여준이란 애 부모가 둘 다 교사라며? 그런 양반들이 지 애가 남의 돈 떼어먹어서 큰일이 났다 하면 어떡하겠냐? 얼마가 됐든 현금으로 내주고 조용히 넘어가려 들겠지. 그럼 꿀 바른 봉 하나 탄생하는 거지.”
성여준의 부모님이 어떤 사람인지 나는 모른다. 궁금해한 적도 없었다.
“…….”
오로지 그 순간 머릿속을 스친 것은.
“…사진.”
중얼거리자 홍게가 뭐? 하며 눈살을 찌푸렸다.
“사진…. 가져왔던 것도 그 새낍니까?”
“사진? 무슨 사진?”
“…….”
“…엉? 아아, 성여준 사진? 너 그건 어떻게 아냐?”
눈을 둥글게 뜬 얼굴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성여준의 가장 친한 친구, 항상 옆에 붙어 다니는 녀석. 집이 하루아침에 망하는 바람에 안락한 아파트에서 이 동네 쪽방촌으로 쫓겨 왔다면 그래, 백번 양보해 아직 현실 파악이 안 된 상태일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성여준을 팔아넘길 계산을 했단 말인가. 그것도 이런 삼류 양아치에게. 이런 부류와 엮이면 어떤 꼴을 당하는지 충분히 겪어 봤을 텐데도 어떻게.
“야, 그건 너 오해하지 마라. 우린 그냥 니가 열 내는 녀…, 아니, 인물 있다길래 궁금했던 거야. 알지?”
“…….”
“…눈알에 힘 들어갔네, 사현이?”
홍게가 웃으며 내 뺨을 가볍게 두드렸다. 당장 그 팔을 쳐 내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주먹을 있는 힘껏 쥐었다.
“…말씀….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여준은 멍청하다. 공부를 잘하면 뭐 하나. 전교 1등을 놓친 적이 없는 수재면 뭐 하나. 그래 봤자 멍청이 머저리 등신이다. 그러니까 나 같은 놈과 그렇게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저를 팔아 푼돈이나 쥐려는 새끼를 가장 친한 친구라 믿으며 속앓이를 했던 거다.
곤죽이 된 전단지가 빼곡히 깔린 아스팔트 바닥을 뛰다시피 걸었다. 누군가와 어깨가 부딪칠 때마다 비명이나 욕설이 튀어나왔지만 쫓아와 시비를 거는 놈은 없었다.
태풍에 시달리는 영화 속 캐릭터를 바라보며 손에 땀을 쥐던 옆모습이 떠오른다. 마침내 클라이맥스가 지나고 맑은 하늘이 나타났을 때 안도의 빛이 스미던 눈동자도.
시작은 축구공이었다. 정확히 걷어찬 공에 코를 얻어맞고 눈물과 콧물과 침과 피를 쏟으며 달려들던 그때. 어쩌면 나는 주저앉아 울고만 있어야 했다. 혹은 아무 어른에게나 달려가 애원하며 매달려야 했다. 나를 상처 입힌 저 녀석을 혼내 달라 호소하고 나는 물러섰어야 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스스로 생존하는 길을 택했다. 썩은 낙엽으로 가득한 뱃속에 부싯돌을 놓았다. 불씨를 댕겨 상대를 때려눕히는 법을 배웠다.
날이 밝았다. 차마 닦지 못한 현관의 핏자국을 밟고 넘어가며 나는, 어느새 나의 불씨가 내 뱃속이 아닌 성여준에게로 옮겨 가 있던 것을 알게 되었다.
***
학교로 향하는 길 어딘가에 야구 배트가 버려져 있기에 주웠다. 손에 쥐고 천천히 교문으로 향하는 동안 많은 생각을 했다. 떠오르는 것은 당연하지만 주로 성여준의 얼굴이었다.
모니터 속의 재난이 자신의 삶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할 때, 미약한 안도감이 내려앉아 있던 그 입술.
“…어?”
먼저 나를 발견한 것은 언젠가 내게 성여준의 생일 파티를 도와 달라 말했던 작은 여자애였다.
“어, 어…?”
그 다음으로 성여준과 가장 가까운 곳에 서 있던 녀석이 돌아보았다. 코 옆에 선명한 검은 사마귀가 보였다. 나는 걸음을 빨리해 놈의 멱살을 틀어쥔 채 정강이를 걷어차 넘어뜨렸다. 놈이 억 소리도 내지 못하고 엎어지자마자 머리를 노리고 야구 배트를 내리쳤다.
주위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선생님, 부르며 달려가는 녀석도 보였다. 상관없었다. 누가 오기 전에 죽여 버릴 자신이 있었다. 몇 대나 내리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사마귀는 버둥거리며 두 팔로 머리를 막고 있었다.
“…-임사현!”
익숙한 목소리가 귀를 찢고 들어왔지만 멈추지 않았다. 성여준은 필사적으로 내 팔에 매달리려 들었다. 어깨를 잡아 간단히 떼어 놓고 다시 한번 사마귀의 머리 위로 배트를 내리쳤다. 뻐억,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러나 부러진 건 놈의 사마귀의 머리뼈가 아닌 배트였다.
“…….”
산산조각 난 배트를 내던졌다. 웅크려 있던 사마귀가 히익, 하며 온몸을 떨었다. 주저앉아 있던 성여준이 기다렸다는 듯 나와 사마귀 사이로 뛰어들었다.
“비켜요.”
“너….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한 발 다가서자 흠칫 놀라면서도 물러서지 않는다. 그는 아예 사마귀를 끌어안다시피 덮은 채 필사적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갑작스러운 재난에 공포로 일그러진 눈동자가 축축했다.
“비켜.”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벌컥 소리치는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마음이 조급해졌다. 죽여 놔야 하는데. 그래야 두 번 다시 성여준에게 접근하지 못할 텐데.
끓어오르는 것은 없었다. 할 일을 할 뿐이었다. 누구도 건드리게 두지 않을 것이다. 이것은 자극의 반작용. 불씨를 심은 상대에게 고스란히 돌려줘야 할 새카만 업이다.
“저 새끼가 선배를….”
깡패에게 팔아넘기려 했어요. 당신을 걸어 놓고 더러운 돈을 빼다가 제 허영이나 채우려는 속셈이에요. 끝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은, 순간 성여준의 뒤에 숨은 사마귀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다.
“…….”
놈이나 나나 머리끝까지 아드레날린이 치솟은 상태였다. 아마 그 덕분이었을 것이다. 피투성이가 된 얼굴, 간절한 눈빛이 무엇을 말하는지 그 순간 나는 알 수 있었다. 놈은 내게 애원하는 중이었다. 제발 살려 달라고. 두 번 다시 성여준을 두고 허튼짓하지 않을 테니, 살려 달라고.
“…….”
성여준을 보았다. 공포와 스트레스로 허옇게 질린 얼굴이 식은땀으로 온통 축축했다. 짓씹은 입술은 군데군데 피딱지가 앉아 엉망이었고 사마귀를 끌어안은 팔은 후들후들 떨리고 있었다.
“…너.”
어떤 모습을 보아도 흔들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정말이었다.
“제발 부탁이니까….”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뒤이어 누군가 내게 달려들어 팔을 꺾었다. 아이들의 부름에 달려 나온 교사들과 경비원이었다.
“선배.”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고개를 들었지만 성여준은 사마귀를 끌어안은 채 내게 등을 돌리고 있었다. 마른 등. 항상 저 등을 바라보고 싶었다. 돌아보며 미소 지을 얼굴을 기대하는 그 순간이 가장 행복했으니까.
“선배.”
한 번만 봐 줘요. 마지막이니까. 오늘 이후로는 절대로 두 번 다시…. 다시는 찾지 않을 테니까.
***
그 뒤의 일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소년원도 그리 쉽게 가는 곳은 아닌 모양이었다. 아마 깡추와 홍게가 사마귀를 잘 구워삶았을 것이다. 훈방 조치를 받고 나온 나를 세워 두고 깡추는 무심하게 중얼거렸다.
“파울.”
아웃은 아니라니 다행이었다.
학교 쪽으로는 두 번 다시 발걸음도 하지 않았다. 사마귀도 조용히 지냈다. 나는 검정고시를 준비하다 금방 때려치웠다. 세상은 무미건조하고, 어떤 자극도 없이 흘러갔다.
깡추는 내가 스무 살이 되자마자 골목 하나를 통째로 밀어주고 관리를 맡겼다. 당연히 홍게를 비롯한 패거리의 마음을 상하게 한 처사였다.
하루는 홍게가 이상한 트집을 잡아 나를 불러냈다. 온갖 욕설을 내뱉고 발로 차는 홍게를 앞에 두고도 화는 나지 않았다. 그저 언제나 하던 계산을 굴렸을 뿐이다. 찌그러질 것인가, 밟을 것인가.
깡추의 의중을 생각해 보았다. 그는 내가 욕심을 부리지 않는 면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여기서 홍게와 맞서면, 이후로도 깡추는 내가 언제든 자신까지 밟으러 올라올까 봐 신경을 곤두세울 것이다. 그건 상당히 귀찮은 전개 같았다.
“어? 호모 새끼야. 그때 네가 빨던 년도 내가 다 따먹었어.”
그러니까 홍게는 그런 말까진 하지 말아야 했다.
자극에는 관성이 따른다. 나는 어느새 내 생이 지루해졌다. 나를 건드리는 그 무엇도 되갚아야 할 자극으로 다가오지 않았다. 불씨는 오로지 성여준에게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평온하고 따뜻한 집에서 깨끗한 이불에 파묻혀 있을 성여준. 텔레비전 속의 재난, 글로벌 뉴스 속의 전쟁, 삼류 깡패의 하찮은 자존심 싸움과는 털끝만큼도 관계없이, 그저 아름답고 평화로우며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는 집에서 평온하게 잠들어 있을 성여준만이.
내 뱃속에 고요히 내려앉은 불씨의 주인이었다.
홍게는 얼굴 뼈 세 개가 골절되어 입원했다. 깡추는 나를 작신작신 패서 꿇려 놓은 뒤 품에서 서류 몇 장을 꺼내 던져두었다.
“홍게가 관리하던 가게까지 네가 맡아.”
“…….”
“저 꼴로 만들어 놨으면 책임을 져야지.”
깡추는 지루하지 않을까? 처음으로 궁금해졌다. 깡패의 업이라 함은 결국 나보다 약한 자를 이용하고 겁박하고 착취하는 일이었다. 착취당한 약한 자는 착취당할 돈을 더 약한 자에게서 착취하는 구조. 피라미드형 먹이사슬의 가장 애매한 지점에 선 채, 그 자리라도 지키기 위해 매일같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등바등 버티는 삶.
그런 삶에 갇혀 보내는 나날은 마치 성여준을 해친 죗값 같았다.
내가 스물여섯이 되던 해, 서른 중반에 접어든 깡추는 완전히 N동의 실세로 자리 잡았다. 내게도 적당한 직함을 나눠 주었는데 팀장인지 실장인지 매번 말이 달랐다. 매일이 같은 일상이었다. 주는 돈을 받아다 위로 전달하고, 술주정뱅이를 겁박해 내쫓고, 엮이고 엮인 착취 관계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내가 받아먹을 하루에 안주했다.
성여준에 대해서는 거의 생각하지 않았다. 가끔은 이름조차 가물가물했다. 학창시절 내내 쌓았던 명성에 걸맞게 일류대에 진학했다는 소식만 들었다.
같은 서울 땅에 있긴 하지만 나는 N동을 거의 떠나지 않았으므로 그 뒤로 성여준이 어쩌고 사는지 알 방법은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구태여 알려 하지 않았다. 잘 살고 있겠지. 그거면 충분하다고.
“가서 인사드리고 서류 하나 받아와.”
어느 날 깡추가 호두과자 상자 하나를 내밀었다. 도착지가 번듯한 보험회사 건물이니, 내용물이야 열어 보지 않아도 뻔한 거였다. 묵묵히 받아 들고 차를 몰았다.
으리으리한 대기업 건물들이 늘어선 도로를 달리며 은근히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스물일곱의 성여준이 이 거리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른다고. 당연하지만 우연히라도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의 이름을 다시 들은 것은 그로부터 반년 후였다.
“쩌기, 실장님. 저 토요일에 강남 좀 다녀와도 되겠습니까?”
홍게의 끄나풀인 쪽새가 쭈뼛대며 말을 걸었다. 뭔 소리야, 하며 담배를 문 채 돌아보자 놈이 얼른 라이터를 대 주었다.
“네가 강남을 가든 말든 내 허락을 왜 받아?”
“아니요, 그게…. 제 친구 놈 하나가 지금 공사 준비하는 게 있다는데 그걸 좀 도와 달라 해서….”
“뭐?”
일부러 사나운 표정을 짓자 놈이 얼른 고개를 숙였다. 인력 대여야 아무래도 상관없는 문제지만, 다른 지역의 호스트 나부랭이와 엮였다가 일이 꼬이면 수습하기 귀찮아진다. 놈도 잘 알고 있다는 듯 여러 번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니 정말로, 별거 아닙니다. 금방 끝날 일입니다.”
“홍게 형님은 뭐라시는데?”
“…홍게 형님은…. 실장님이 허락하시면 마음대로 하라고….”
홍게의 얼굴에는 여러 개의 수술 자국이 생겼다. 서열은 명백히 바뀌었으나 나는 표면적인 예의나마 차리고 있었다. 깡추의 비위를 이 이상 거스르고 싶지 않았다.
“내 손까지 필요하냐? 무슨 공사길래.”
“아, 아뇨, 아닙니다. 혼자 다녀오겠습니다. 원래 홍게 형님이 도와주신다고 한 거였는데…. 오늘 갑자기 이런 건 실장님께 먼저 말씀드리는 게 순서 같다고 하시면서….”
순간 불길한 예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났다. 홍게가 조용히 지내고는 있다지만 나에 대한 원한이 사라졌을 리 없다. 제가 키우는 끄나풀이 부리는 수작질에 나를 끌어들이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터였다.
“…내용이 뭐냐고.”
재차 묻자 쪽새가 긴장한 듯 헛기침을 했다.
“정말 별거 아닙니다. 가볍게 접촉 사고만 내주면 된다고 해서….”
“그래, 그것만 들으면 정말 별거 아니네.”
“…정말로 그게 답니다. 조수석 쪽으로 슬쩍 갖다 박기만 하면 차가 알아서 터질 거라던데요.”
“…….”
이런 거였나. 한숨이 푹 나왔다.
“봉 남편 차를?”
“…예, 뭐.”
“차에 뭐 장치를 한 거면, 갖다 박는 쪽에서는 안 위험하고?”
“예, 그런 위험은 없습니다. 잘은 모르겠는데, 조수석 범퍼 쪽에 충격을 받으면 브레이크가 나가는 장치를 해 놨답니다.”
하여간 수법들도 점점 발전하는군. 브레이크 고장이라면 운전자의 생명 보험금에 더해서 자동차 회사의 배상금까지도 노릴 수 있다. 일개 호스트 따위가 혼자 알아서 생각했을 일은 아니다. 호스트의 뒤를 봐주는 놈들이 획책질을 한 게 틀림없었다.
그래서 이 건을 나한테 물어다 놓는 홍게의 속셈이 뭘까. 단순하게 보자면 역시 배후일 것이다. 강남 쪽 놈들과 나쁘게 엮이게 만들 셈이라면 다소 약하긴 해도 납득은 간다. 하지만 그렇게 빤히 보이는 수를 쓸까?
“형님이 이거 나한테 물어보라 하면서 다른 말씀은 없으셨고?”
“예? 예…. 다른 건 전혀….”
“일을 네가 할 거야?”
“아뇨, 조선족 애 하나 구해 놨습니다. 어차피 박고 바로 튀어 버리면 되는 거고 차도 대포라서 문제는 없을 테지만….”
“…….”
“생보 3억짜리 하나 있구요. 모르는 새에 들어 놓은 상해도 몇 개 있답니다. 토요일이 딱 보험금 수령 가능해지는 날이라서 바로 진행한다고 하네요.”
“이거 안 돼, 물러.”
“예?”
단호히 말하자 쪽새가 두 눈을 크게 떴다. 안 된다는 말이 나올 거라곤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등신 새끼야. 이런 사이즈 일을 그깟 호스트 나부랭이가 혼자 짰을 것 같아? 괜히 끼어들었다가 구역 간 분쟁 되면 어쩔 거야?”
“아, 아닙니다. 정말 그 녀석 혼자 하는 일 맞습니다. 제가 그 점부터 확실히 해야 한다고 분명히 얘기했습니다. 그리고 보험이 끝이 아니고요, 과정 하나하나 다 기록해 놓고 나중에 봉네 가족한테까지 뜯을 거랍니다. 못 해도 총 10억은 나올 거라고 얘기했습니다.”
“…봉네 가족한테 뜯어? 당신들 딸내미가 호스트한테 미쳐서 남편한테 보험금 걸어 놓고 죽였다, 뭐 그런 걸로?”
“예에, 봉 집안이 엄청 자산가랍니다. 남편, 그러니까 공사 타깃도 교사 집안에다가 S대 나온 대기업 사원이어서 쉽게 넘어가지는 못할 거라고….”
“이 새끼가, 그딴 걸 지금 말이라고 하고 있어? 어디서 개소리를 듣고 와서….”
반사적으로 욕설을 내뱉다 말고 머릿속이 불이 번뜩 튀었다. 교사 집안. S대 출신. 그리 특이한 이력도 아니다. 하지만.
“…자료 따로 받은 거 있어?”
하지만 몸피를 키우는 확신이 있었다. 홍게가 이런 어설픈 일을 굳이 물어 온 이유. 구태여 내 앞까지 올려 보낸 이유. 홍게는 내 방아쇠를 안다. 내가 어떤 때에 이성을 잃고 사고를 치는지, 어떻게 해야 날 자극해서 엿 먹일 수 있는지를. 이 패거리 안에서 오직 홍게만이 알고 있다.
“…….”
외제 차의 번호판 사진이 가장 먼저 나왔다. 생명 보험 가입서류의 사본도 들어 있었다. 한참을 바라보다 우선 쪽새를 내보냈다. 문을 잠그고 돌아와 서류 사본을 한 장씩 넘겼다.
계약자 : 성여준(9X0710-1******)
피보험자 : 유은아(9X1124-2******) / 계약자와의 관계 : 배우자
교사 집안, S대 출신, 7월 10일생인 스물일곱 살의 성여준이 서울에 두 명이나 있을까. 그러기를 바라지만, 그럴 리가 없었다. 한 장을 더 넘기자 나타난 것은 목에 사원증을 걸고 강남대로를 걷고 있는 성여준의 옆모습이었다.
“…….”
성여준은 같은 색의 사원증을 건 동료들과 함께였다. 조금 피곤해 보이지만 입가에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항상 그랬듯 많은 이들에게 둘러싸여 순탄한 인생을 걸어가고 있는 것이다. 못 만난 지가 벌써 10년이 되어 가는데 놀랍도록 변한 게 없었다.
그 와중에 사람 보는 눈이 없는 것까지 옛날 그대로였다. 헛웃음이 다 나왔다. 호스트한테 빠져 남편을 죽이는 여자라니. 어쩌다 이런 여자와 결혼까지 했을까. 마음을 진정시키고 쪽새를 도로 불렀다.
“너 친구라는 새끼 좀 자세히 읊어 봐.”
“…예?”
“애초에 봉 집안에 돈이 많다며? 근데 왜 굳이 위험한 강 건너는 건데?”
“아…. 그, 그게….”
사실 쪽새 따위와 이러고 있을 일도 아니었다. 깡추에게 홍게가 개수작을 하는 것 같다고 슬쩍 말을 흘리면 거기서 끝날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거였다. 홍게는 내가 그렇게 하지 못하리란 것을 알고 있다는 거니까. 그 확신이 어디서 나오는 건지 알아야 하니까.
“…그, 뭐냐, 그게…. 봉이 얼마 전에 애를 낳았는데요.”
“…….”
“애가, 그…. 유전자…. 감식인가 뭔가를 해 봤는데, 네….”
“…….”
“…네, 그래서 제 친구가 먼저 꼬신 게 아니고요, 봉이 어떻게든 해 달라고 한 거랍니다. 진짜예요. 그 여자가 애 낳자마자 검사부터 해 봤는데 그…, 애비가 남편이 아니어서, 그래서 언젠간 들킬 거라고, 지금 어떻게든 해 줬으면 좋겠다면서…. 심지어 혈액형도 안 맞는다던데요.”
담배는 금방 필터까지 타들어 갔다. 대단하다, 성여준. 잠시 못 본 사이에 호스트에 미친 와이프한테 암살당할 처지가 된 걸로 모자라서 생명 보험금으로 그것들 배나 불려 줄 운명에 처해 있다니. 새 담배를 빼 물자 쪽새가 습관처럼 라이터를 들이밀었지만 손으로 물리쳤다.
“그 여자가 원래부터 유명한 여자래요. 10대 때부터 호빠 드나들던 인물이랍니다. 완전 VVIP라서 혹시 뭔 일 생기더라도 강남 쪽 마담들이 목숨 걸고 커버 쳐 줄 거라고 했어요.”
“그 친구 놈은.”
“예?”
“이번 일 계획한 놈. 어떻게 아는 사이야? 무슨 친군데?”
“…어…. 그냥…. 원래 이 동네 살던 놈인데요, 돈 필요하대서 제가 그…. 가게 알아봐 줬습니다. 얼굴에 손 좀 대야겠대서 그것도 해 주고…. 근데 호빠라는 게 형님, 아, 아니 실장님도 아시겠지만 어디 빚이 깎이는 일입니까. 소개비에 성형 비용만 해도 얼마인데요. 그래서 좀 쪼들리다가…. 그 생각을 한 모양인데, 네. 진짜 원래 나쁜 놈은 아니고요.”
“신상 명세 가지고 와 봐. 뒤가 정말 깨끗한지 먼저 봐야겠으니까.”
쪽새는 어안이 벙벙한 기색을 하면서도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용해진 사무실 안에서 서류에 첨부된 성여준을 읽고 또 읽었다. 성여준. 27세. 대양화재 장기보험계획 팀. 가족관계는 와이프에 곧 돌을 앞둔 아들 하나….
좋은 대학을 나와, 대기업에 들어가, 자산가의 딸과 결혼하고 아이를 낳았다. 프로필만 두고 보면 내가 상상하던 성여준의 인생 그대로였다. 좋은 동네에 살며 외제 차를 몰고, 집에 돌아가면 아름다운 아내와 귀여운 아이가 있는 삶. 서류를 넘기자 성여준의 결혼사진이 나왔다. 말쑥한 턱시도를 차려입은 성여준과 오밀조밀 예쁘게 생긴 여자가 영화의 한 장면처럼 로맨틱한 포즈를 잡고 있었다.
여자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커다란 눈과 작은 입술과 마른 목 따위가 건드리면 당장 깨질 듯 연약해 보였다. 청순하고 상냥한 미소를 짓고, 남편의 손을 꼭 붙든 여자의 전신 어디에서도 그런 무지막지한 계획은 읽어 낼 수 없었다.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다섯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답답한 마음을 가라앉힐 길이 없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차장으로 달려가 차에 올라타면서도 무슨 정신인지 모를 일이었다.
***
저녁나절의 강남대로는 인간과 차와 장사꾼으로 발 디딜 틈조차 없었다. 아무 주차장에나 차를 세우고 대양화재 본사 건물로 향했다. 아직 퇴근 시간 전인지 사원들이 나오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넓게 트인 건물 앞을 지나쳐 광고판 뒤에 몸을 숨긴 채 담배를 빼 물었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꿈같기도 하고 현실 같기도 했다. N동의 내 사무실에서 차를 타고 이십 분. 대로 한복판에 자리 잡은 거대한 빌딩에 성여준이 있다는 사실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그날로부터 딱 9년째였다. 어떤 자극도 변화도 없이 똑같은 매일, 한심하고 구태의연한 서열 정리에 열중해 사는 동안 내게 성여준은 이미 과거가 되어 있었다. 사진을 보았을 때도, 당장 죽을 지경이라는 걸 알았을 때도 예전처럼 갑자기 머리가 돌아 버리는 일은 없었다. 그저….
그저 성여준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왜 그런 여자를 만나서, 어쩌다 그런 꼴이 되어 있나 하고.
성여준은 잘 살고 있을 거라 믿었다. 누구보다 더 당당하고 자연스럽게, 승리자의 인생을 걸어가고 있으리라고. 그것이 내가….
“…….”
진정 열망했던 성여준이니까.
담배 한 갑을 몽땅 태우고 나서야 기다리던 얼굴을 찾을 수 있었다. 시계를 보니 밤 아홉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정장 차림의 직장인 네다섯 명이 우르르 빠져나왔다. 성여준의 얼굴은 한 번에 알아보았다. 사진에서 봤던 것처럼 다소 피곤한 기색으로 웃고 있었다. 그대로 인사하고 헤어질 거라 생각했는데, 그들이 향한 곳은 빌딩 뒤쪽의 술집 거리였다.
담뱃재 묻은 손을 털고 뒤를 따랐다. 사람이 슬슬 적어진 무렵이라 뒤를 밟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성여준은 무리의 뒤쪽에서 걸으며 때때로 소리 내어 웃었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들은 그대로 2층 규모의 고깃집으로 들어갔다. 이 시간에 퇴근했으면서 곧바로 회식인가. 건물 입구가 보이는 위치에 선 채 핸드폰을 확인했다. 쪽새의 연락은 없었다.
성여준의 일행은 새벽 한 시가 되어서야 고깃집을 나섰다. 하나같이 거나하게 취한 모습이었다. 서로를 부축한 채 2차를 외치는 놈, 그만 집에 가 봐야겠다며 점잔을 빼는 놈으로 파가 갈렸다. 그 와중에 성여준은 동료의 부축을 받은 채 고개를 푹 떨어뜨리고 있었다.
“팀장님, 여준 씨가 뻗었는데…. 어어!”
그를 부축하고 있던 동료가 크게 휘청대며 앓는 소리를 했다. 그제야 팀장이란 남자가 어쩔 수 없다는 듯 해산을 명했다.
“그럼 내일 다들 늦지 말고…. 세 번 복창! 장기 팀 화이팅!”
“에이, 팀장님. 시간도 늦었고….”
“복창하기 전까지 못 가! 장기 팀 화이팅! 화이티잉!”
“네, 네. 화이팅, 화이팅. 택시 불렀습니다, 택시.”
자리가 간신히 수습된 것은 그로부터 십 분이 더 지난 후였다. 그사이 동료가 사다 준 음료수를 마시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성여준이 동료들을 향해 꾸벅꾸벅 인사를 올렸다. 하긴, 대학을 졸업하고 곧바로 입사했대도 연차는 기껏해야 1, 2년쯤 되었을 것이다. 아직까지 사무실에서 막내 위치에 있는 듯했다.
“여준 씨, 조심해서 들어가요. 택시 태워 줄까?”
“아, 아니,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괜찮….”
중얼대던 성여준이 또 한 번 휘청거렸다. 부축하려 뻗어 오는 손을 하나하나 예의 바르게 물리치더니 기어코 혼자 큰길로 향한다. 당연히 그 뒤를 쫓을 줄 알았던 그의 동료들은 이미 등을 돌리고 제 갈 길을 가기 바빴다.
그래 봤자 이 시간에 강남에서 택시가 잡힐 리 없었다. 더군다나 몸도 못 가눌 만큼 취한 채 비틀거리는 강남 거주민이 무슨 수로. 한참을 지켜보다 다가가려는 찰나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하기 시작했다. 쪽새였다.
- 형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괜찮아. 왜.”
- 저, 아까 말씀하신 거 있잖습니까…. 더 자세한 얘기 가져오라고 하셔서….
성여준은 여전히 멈춰 줄 생각이 없는 택시를 향해 깃발처럼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래, 읊어 봐.”
- 감사합니다, 형님. 어…. 우선 이 호스트, 그러니까 제 친구 놈 이름은 박영재고요.
“…….”
- 나이는 스물일곱인데 호빠 일한 지는 이제 3년쯤 됐습니다. 애초부터 제가 줄 대서 들어간 거고 뒤 봐주는 다른 조직은 없습니다. 말씀하셨던 부분은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스물일곱 살의 박영재는 서울에 몇 명이나 있을까. 셀 수도 없을 정도겠지. 섣불리 판단할 단계는 아니다.
- 이번 일에 대해서는…. 어…. 정말로 괜찮다고 했습니다. 애초부터 봉 집안에서 사위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답니다.
“…왜?”
- 예?
“왜 안 좋아하냐고, 사위를.”
그 얼굴에, 그 학력에, 그 직장 가진 성여준이 제깟 놈들 눈에 안 찰 이유가 뭐냐고. 많은 말이 생략된 질문이었지만 쪽새는 더 묻지 않고 순순히 대답을 늘어놓았다.
- 아, 예, 그러니까…. 봉 집안에서는 더 좋은 집안을 원했던 거죠. 근데 봉이 어릴 때부터 워낙 화려하게 놀다 보니까…. 봉 집안이 눈독 들이던 정재계 쪽까지 소문이…. 이게 소문이 안 날 수가 없는 게 그 집 아들들도 다 같은 물에서 놀고 다녀요. 근데 지 아들은 걸레여도 며느리는 안 된다 이거죠.
“…….”
- 그래서 막상 결혼 시장 내놓을 나이가 되니까 보낼 수 있는 데가 없는 거예요. 그러다가 제 친구, 그러니까 영재가 자기 친구 중에 괜찮은 놈 있다고 만나 보겠냐고 해서…. 몇 사람 거쳐서 소개를 해 줬답니다. 그래서 그 남편은 지 와이프가 그냥 곱게 자란 부잣집 딸인 줄로 안대요. 제 친구 놈이 엮어 줬다는 것도 모르고요.
“…….”
- 근데 봉 집안 입장에선 어떻겠어요. 딸자식 반반하게 잘 키워서 더 큰 몫 잡아 보려 이를 갈고 있었는데 변변찮은 호스트가 갖다 붙인 놈이랑 결혼시켜 버린 거잖아요. 사위 얼굴 볼 때마다 자기 딸 아까워서 천불이 난다고…. 뭐 그런 상태랍니다. 작업하는 과정에서 다소 삐끗하더라도 봉 집안이 어떻게든 할 거니까 진짜 안전하다고 했습니다.
아마 쪽새는 말하면서도 의아했을 것이다. 이깟 일이 뭐라고 이런 보고까지 해야 하는지. 나는 성여준의 뒷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 신경을 집중하며 쪽새가 내놓은 정보를 되새기고 있었다. 스물일곱 살, N동 출신, 성여준과 아는 사이인 박영재는 서울에 몇 명이나 있을까.
“…하나만 더 물어보자.”
- 예?
“네 친구라는 새끼 그 가게에 붙여 준 거, 홍게 형님은 알고 계셨냐?”
- …예? 그야…. 애초에 그놈을 저한테 소개해 주신 게 홍게 형님인데요.
“…….”
- 같은 동네 출신이고…. 언젠간 도움 될 인재니까 어려운 일 있으면 도와주고 그러라면서….
어두운 사무실에서 사납게 웃고 있을 홍게의 얼굴이 머리를 스친다. 나는 소리 내 웃고 싶은 충동을 참고 전화를 끊었다. 성여준은 보도블록에 주저앉은 채 머리를 떨구고 있었다.
홍게를 친 지 딱 5년째였다. 평생 가만히 있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큰 그림을 그리고 엿을 처먹일 줄은 몰랐다. 존경심마저 들었다.
다만 내가 아직도 성여준 이름 석 자에 머리가 돌아 앞뒤 분간 못 하고 날뛰는 애새끼일 거라 여겼다면 그건 홍게의 오산이다. 9년이면 경애도 죄악감도 처음부터 없었던 듯 흐려지기에 충분한 세월이었다. 심지어 그 순간 내 가슴을 채운 것은 성여준에 대한 실망감이었다. 이대로라면 성여준이 개죽음을 당하거나 말거나 무시하고 내 갈 길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 지금 저 등에 다가가서는 안 된다고.
…마음속 어디선가 경종이 울렸다.
“…….”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고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심장이 조금씩 뛰기 시작했다. 아직은 괜찮다. 없었던 일인 양 잊고 지나갈 수 있다. 무슨 일이라도 벌어지기를 기대하는 홍게를 비웃어 주고 나의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다. 일상….
“…….”
주먹을 쥐는 순간, 성여준이 돌아보았다.
“…어?”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것 같았다.
“어….”
달라진 게 없는 얼굴, 언제나 꿈에서 보았던 그 눈이 나를 발견하고 살짝 일그러진다. 골똘한 눈썹에 맺힌 말이 뭔지 듣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내 얼굴을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어, 너….”
희게 튼 입술이 벌어지고 붉은 혀가 말을 짓는다. 휘어져 올라가는 입꼬리와 가늘어진 눈. 축축한 눈동자가 깨질 듯 빛났다.
“너…. 사현이네.”
그 순간 우습게도 나는 홍게를 떠올렸다.
깡추도 성여준도 아닌 홍게였다. 나를 건드렸다가 얼굴뼈 세 개가 부러졌던 홍게. 죽을 둥 살 둥 확보해 놨던 영역을 모조리 내게 빼앗기고 병원 침대에서 발광하던 홍게. 언젠가는 복수해 주겠다며 이를 갈던 홍게.
나는 그때 홍게를 죽였어야 한다. 열일곱의 여름날에 박영재를 죽였어야 했던 것처럼.
“오랜만이네, 사현아.”
그래야 지금 이 순간 성여준이 평안했을 텐데.
다정하게 중얼거린 성여준이 씩 웃었다. 그 얼굴만 봐도 제정신이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수습하지 못했던 불씨들이 하나둘 발목을 잡아 조만간 거꾸러뜨릴 생을 끌어안은 미소가 위태로웠다.
“…일어나요.”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일으켜 세웠다. 열여덟이었던 그때보다 더 마른 것 같았다. 둘러업고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 하나도 힘들지 않았다.
조수석에 태우고 안전벨트를 채웠다. 성여준은 반쯤 정신을 놓은 채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어지간히 인생이 재미있는 모양이었다.
“집 주소 불러 봐요.”
“어-. 나, 택시.”
“…알았어요. 이거 택시니까 집 주소 부르라고요.”
“주소…. 우리 집 주소 뭐더라…. …아.”
“정신 좀 차려요. 아니, 지금 정신 차려도 큰일이지….”
“…O동 A아파트….”
“…….”
“…어…. 몇 동 몇 호였지….”
중얼대던 성여준이 고개를 픽 떨궜다. 내비게이션을 찍으려던 손을 꾹 쥐어 거둬들였다. 당연히 그건 성여준의 현재 주소가 아니다. 9년 전 우리가 함께 있었던 그의 집이다. 온갖 잔인하고 요란한 내용의 DVD를 잔뜩 빌려다 놓고 낮부터 밤까지 함께 있었던 그 집.
“…….”
나는 밀려난 행성. 가장 어둡고 습한 그늘에 숨어 존재조차 잊혀 가던 먼지 덩어리. 핸들에 이마를 파묻고 숨을 참았다.
모르는 척한다고? 없던 일인 셈 치고 내 일상으로 돌아간다고?
“…윽.”
내 일상이 뭔데? 숨이 답답해 넥타이를 풀었다. 짧은 잠을 제외한 매 순간마다 먹이사슬의 어설픈 위치에 안주하는 삶. 서열을 확인하고 뒤통수를 살펴 가며 폭력의 강도를 재는 이 생의 반복에 무슨 의미가 있어서.
처음으로 만났던, 아니 처음으로 보았던 날을 떠올렸다. 새파랗도록 시리고 춥고 메말랐던 운동장. 단상 위에 서서 상냥한 말을 건네던 모습을. 태양은 먹구름에 가려져 있었다. 흐린 날씨에도 그늘지지 않는 눈을 보며 나는 내가 얼마나 외로웠는지 알게 되었다.
또한 지금 이 순간, 빼도 박도 못 하게 깨닫는 것이다. 사실은 하루도 그리워하지 않은 날이 없다는 것을. 내 인생의 찰나를 스쳐 갔던 그 여름의 찬연함을.
나의 삶은 태양 아래로 나온 적이 없었다. 나는 누구도 기다리지 않는 세상에 태어난 죄로 평생을 곰팡이 핀 반지하에 살았다. 좋은 것을 가져 본 적이 없어 꿈에서 그리워할 것도 없었다. 성여준을 만나기 전까지는.
차 안은 축축한 침묵에 휩싸였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옆모습을 바라보며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홍게에게 직접 전화를 거는 건 처음이었다.
- 해가 뭐 다른 방향에서 떴나?
홍게는 신호가 몇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언제부터 알고 계셨습니까?”
최대한 목소리를 낮추고 물었다. 무게를 잡으려는 건 아니다. 성여준이 깰까 걱정되어서였다.
- 뭐를?
“어디부터 알고 하신 일인지 여쭤보는 겁니다.”
- 내가 말했었잖아. 친구고 나발이고 부모형제라도 팔아다가 제 잇속 채울 새끼라고.
“…….”
- 난 알려 줬었잖냐, 사현아. 이 꼴을 보기 싫었으면 네가 그때 죽여 놨어야지.
우습게도 맞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금 알고 싶은 건 그따위, 누구라도 다 아는 이야기가 아니다.
- 너 파울이 세 갠가 그렇더라.
“…….”
- 지금 쓸데없는 짓 저지르면 완벽하게 아웃이겠지. 근데…. 믿기지는 않겠지만 난 그런 걸 원하는 건 아니야.
쉰 목소리를 듣고 있자니 이상하게 마음이 편안해졌다. 의자에 몸을 기대고 창밖을 내다보았다. 상가 건물들에 가려 하늘은 보이지 않았다.
- 모르는 척해라, 사현아.
“…….”
- 네가 뿌린 씨로 그렇게 끝나 버리게 내버려 둬. 그러라고 알려 준 거야. 난 네가 앞으로도 깡추 형님 밑에서 제대로 크길 바라거든.
아마 이 통화는 깨끗하게 녹음되어 언젠가 깡추의 손에 들어갈 것이다.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으나 어떻게든 참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니 홍게에게도 귀여운 면이 있었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깡추에게 잘 보일 생각밖에 없다니. 깡추는 바로 홍게의 이런 점이 마음에 안 드는 걸 텐데.
“형님. 옛날에 저한테 쓰던 핸드폰 주신 적 있었죠.”
삐끼 알바를 백날 해 봤자 핸드폰을 살 돈 같은 건 모을 수 없었다. 아버지의 연락도 원조도 완벽하게 끊긴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끼니는 깡추를 따라다니며 해결한다 쳐도 방값은 모아야 했다. 연락이 바로 안 되니 불편하다며 쓰던 핸드폰을 공기계로 만들어 건네준 건 홍게였다.
“저한테 아무 조건 없이 뭔가 준 사람은 형님이 세 번째였습니다.”
- …….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그때 주신 것도…. 지금 이 상황도.”
다 잊은 줄 알고 살았다. 여름을 향해 가던 계절, 나뭇잎 사이로 들이친 진녹색 햇빛을 눈동자에 담고 미소 짓던 얼굴. 뱃속에 불길이 차올라 잠들 수 없었던 장마. 재생을 불러오는 작열. 세포 단위로 불타 해체된 마음이 아침이면 온전히 살아나 혈관을 흐르던, 그 어렸던 여름날에.
성여준이 축축하고 그늘진 지하 셋방까지 나를 만나러 와 주었던 그날에.
“…감사했습니다.”
이미 이 생의 주인은 바뀌어 있었던 것을.
전화를 끊고 핸드폰을 초기화시켰다. 심 카드를 꺼내 박살 낸 뒤 차에 두었던 대포폰을 꺼냈다. 쪽새가 건넨 서류에 있던 여자의 사진과 차 번호판을 핸드폰 카메라로 찍었다. 수배해 둔 차가 어디 있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 모든 가구를 들어내고 구석구석을 물걸레로 닦았다. 운전면허증을 태우고 옷가지를 내다 버리는 일은 뭔가의 의식 같았다. 당장 입고 나갈 옷 한 벌과 구두 한 켤레만을 남겨 두고 모조리 없앴다. 노트북에 있던 자료들은 하나로 묶어 홍게에게 보냈다. 노트북은 자판에 물을 끼얹고 반으로 쪼개 버렸다.
이걸로 내 신분이 빨리 드러날 일은 없을 것이다.
“형님, 영재가 오늘 봉이랑 만난다고는 하는데…. 어쩌시려고요?”
쪽새가 영 미심쩍은 표정으로 물어 왔다. 나는 짐짓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놈에게 손을 내밀었다.
“발신기나 내놔 봐.”
“직…, 접 뭐 어쩌시려는 건 아니죠?”
“내가 총 맞았냐. 확인할 게 있어서 그래.”
봉의 차에는 박영재가 붙여 놓은 추적기가 있었다. 작은 단말기를 받아 들자 한남동에 우뚝 선 좌표가 보였다.
“지금 만나고 있다는 거야?”
“예? 예, 아마도….”
“여기서 강남 쪽으로 움직이면 내려 주러 가는 거겠네?”
“그렇…, 지 않을까요? 예, 맞을 겁니다.”
“애는?”
“…예?”
“애도 같이 있냐고.”
쪽새가 멍하니 입을 달싹거렸다. 여기까지겠군. 말없이 단말기를 주머니에 넣고 돌아섰다. 뭔가 꼬투리가 잡힐지도 모르지만 이것만은 가지고 있어야 했다.
“저, 형님. 어쩌시려고….”
“아무것도 안 해.”
“형님.”
“지금 이 대화는 잊어버려.”
쪽새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도 굳이 다짐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다. 깡추에게 들를까 고민하다 그만두었다. 굳이 마지막 인사까지 건넬 만한 정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버지는 오래전에 연락이 끊겼다. 깡추는 내가 없어진 걸 알더라도, 내 시체가 나오더라도 나를 안다고 나서지 않을 것이다. 몇 시간 후면 나는 이 세상에 없던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게 되어야 한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었다. 속도제한을 지켜 가며 도로를 달렸다. 두 번 다시 맞지 못할 여름이 아쉬웠으나 상관없었다. 내 생의 모든 순간은 열일곱의 그 짧은 계절에 두고 왔기에.
도로에 올라선 채로 여자의 차가 진입하기를 기다리던 때였다. 아무도 번호를 모를 대포폰이 조용히 울렸다. 번호는 뜨지 않았지만 누가 걸었는지는 뻔했다.
- 너 이 새끼, 돌았어?
잔뜩 성이 난 깡추가 독하게 소리를 질렀다. 귀가 다 울릴 지경이었다. 갓길에 차를 세워 둔 채 담배를 빼 물었다. 담배를 가르쳐 준 것도 깡추였다.
- 차는 왜 끌고 나갔어? 너 뭐 하려는 거야?
“형님.”
- 당장 안 돌아와? 이 씹새끼가, 여태 먹이고 키워 준 은혜를 이따위로 갚아?
“제 사무실 책상 제일 아래 칸에 그동안 정산해 주셨던 돈 그대로 들어 있습니다. 자물쇠 비밀번호는 동서남북 세 번 반복하면 되구요.”
- …….
“이자까지 갚지 못하는 건 용서해 주십쇼. 그래도 형님 제가 시다짓 하느라 애 많이 썼잖습니까.”
깡추는 좋은 어른이 아니다. 욕설을 내뱉고 폭력을 휘두르는 건 일상다반사였고 그 대상은 철저히 자신보다 약한 자로 한정되어 있었다. 깡추의 패거리도 마찬가지다. 모두가 사회 가장 밑바닥, 가장 더럽고 진득한 진창에 처박혀야 마땅할 쓰레기들이다.
하지만 내게 말이라도 걸어 준 것은, 데리고 다니며 밥이라도 먹여 준 것은 피가 이어진 아버지가 아닌 그들이었다.
- 일단 들어와.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이런 식으로 해결할 필요 없어. 내가 어떻게든 해 준다고. 어?
“안 된다는 거 저보다도 형님이 더 잘 아시잖습니까.”
내가 최소한의 염치나마 있는 인간이라면 이런 선택은 하지 않겠지. 성여준 따위는 잊어버리고 앞으로도 충실한 깡추의 종으로 살았겠지.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가 없다. 이미 뱃속이 타오르는 감각을 알아 버려서, 잊었다 생각했던 사랑을 고스란히 기억해 내 버려서.
“이 일에 개입하시는 순간, 홍게 형님이 깡추 형님을 칠 겁니다.”
- …….
“처음부터 저따위를 시험해 보는 게 아니었어요. 홍게 형님은, 제가 이 지랄을 냈을 때 형님이 어떤 식으로 나올지 확인하려는 겁니다.”
그리고 나는 그런 홍게를 이해한다. 내 그릇의 크기를 가뿐히 뛰어넘는 동경이 어떤 식으로 사람을 깎아 먹는지 누구보다 내가 잘 안다.
“그러니 제가 일을 벌이지 않는 게 최선이겠죠.”
- 그걸 아는 새끼가 지금.
“죄송합니다, 형님.”
- …….
“죄송합니다.”
전화를 끊고 창문을 열었다. 도로를 지나는 차들의 바퀴와 아스팔트 지면이 마찰하는 소리에 귀가 따갑다.
‘너는 뭘 좋아해?’
어린 성여준이 건넸던 질문에 나는 뭐라고 대답했더라. 손끝으로 핸들을 톡톡 내리치며 시간의 흐름을 가늠해 본다. 그는 해사하게 웃는 얼굴로 끝없이 주절거렸다. 나는 소설도 좋아하고, 영화랑 만화도 좋아하고, 그리고….
‘동물도 좋아해. 강아지 엄청 키우고 싶은데 부모님이 맞벌이라 돌봐 줄 사람이 없어서 못 키우고 있어.’
눈을 감자, 나는 열일곱의 여름으로 돌아가 있었다. 이상한 맛이 나는 컵밥을 손에 든 성여준이 보였다.
‘돌봐 줄 사람요?’
내가 의아하게 되묻자 성여준도 눈가에 물음표를 매달았다.
‘개를 돌봐 줄 사람이 필요하다는 게 무슨 소리예요? 개는 빈집 지키라고 키우는 거 아니에요?’
적어도 내가 나고 자란 동네에서는 그랬다. 주민들은 개가 새끼를 낳을 때마다 아직 개가 없는 이웃집에 나눠 주곤 했다. 어린 강아지들은 음식 잔반을 먹고 무럭무럭 자라나 누추한 마당을 지키다 짖지 못할 만큼 늙은 뒤엔 개장수에게 팔렸다.
‘엥? 아니야. 개들 외로움 엄청 타. 아무도 없는 집에 오래 두면 우울증 걸린대.’
‘우울증요? 무슨 개가….’
‘정말이야. 우리 이모네 강아지가 외롭다고 밥도 안 먹어서 한동안 병원 데리고 다니셨어.’
그렇다고 우울증이라니, 개들의 삶도 정말 사치스럽구나. 나는 평생을 아무도 없는 골방에서 혼자 살았지만 누구도 나를 이런 식으로 염려한 적 없었는데. 신기하기도 하고 아니꼽기도 했다. 내가 눈만 껌뻑이고 있자 성여준은 답답하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개들도 사람이랑 똑같대. 혼자 있으면 외롭고, 안 놀아 주면 심심해하고…. 나 얼마 전에 강아지 나오는 다큐멘터리 보다가 엄청 울었어.’
‘울었다고요? 외로워하는 강아지가 불쌍해서?’
‘아아니이. 그게 유기견 얘기였거든. 사람들이, 개는 밖에서도 잘 산다면서 막 버리잖아. 근데 그럼 어떻게 되냐면…. 개가 버려진 장소에서 계속 주인을 기다린대.’
‘왜요?’
‘자기가 버려진 걸 몰라서. 그냥 자기 두고 잠깐 어디 간 거니까 기다리고 있으면 다시 올 거라고 믿는대. 불쌍하지.’
어이없는 소리로 들렸다. 개가 그러고 있는 게 무슨 생각으로 하는 짓인지 인간이 어떻게 안단 말인가. 버리는 것도 인간, 버려진 개를 보며 멋대로 꾸며 생각하는 것도 인간, 잘 포장한 신파를 팔아먹는 것도 인간일 뿐.
하긴 이 세상에 나 같은 인간보다 성여준 같은 인간이 많다면 꽤 괜찮은 장사인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자 어쩐지 마음이 온순해졌다. 성여준 같은 인간이 많은 세상이라니, 말만 들어도 아름답지 않은가.
눈을 떴다. 나는 다시 차가운 도로 위에 있었다. 달 같은 가로등 불빛이 보닛을 스쳤다. 기다렸다는 듯이 발신기가 울렸다.
“…….”
표적의 차가 도로에 진입했다는 신호였다.
시간은 자정을 막 지나가고 있었다. 도로는 한적하고 달빛은 없다. 여자의 차는 고맙게도 쭉 1차선을 타고 달리는 중이었다.
갓길을 벗어나 오른쪽 차선을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발신 위치가 점점 가까워진다. 1차선은 오랫동안 쭉 비어 있었다. 개는 버려져도 버려진 줄을 모른대. 가엾지. 입 안에서 한 번 되새기고 나서야 조금 알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성여준이 긍휼히 여기는 존재가 되고 싶었다. 나를 동정하고 돌봐 주기를 바랐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외치고 싶었다. 이토록 불행한 나를, 이토록 가진 게 없는 나를, 한 번이라도 돌아보고 바라보고 안타깝게 여기다가….
…아주 잠깐이라도 사랑해 달라고.
“…여준.”
이대로 죽으면 당신의 개로 태어날 수 있을까.
“성여준.”
그저 따뜻한 집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기만 해도 가엾다고 여겨 줄까.
표적이 아주 근거리까지 진입했다는 신호가 울렸다. 도로에 다른 차가 없는 것을 확인하고 핸들을 왼쪽으로 꺾었다. 끼이이익, 찢어지는 소리와 함께 거꾸로 돌아간 차를 똑바로 세우자마자 액셀을 끝까지 밟았다.
차가 가까워진 것은 순식간의 일이었다. 끝까지 올려놓은 상향등이 표적의 번호판을 정확히 비췄다. 외워 놓은 번호 그대로였다. 내가 죽여 놓지 못한 남자와, 내가 죽여야 할 여자가 함께 타고 있는 차였다.
가장 먼저 소리가 사라졌다.
목이 덜컥 빠져나간 듯했다. 온몸의 뼈가 마디마디 떨어진다. 잠깐의 정적을 찢고 굉음이 들이닥친다. 팔다리는 의지를 잃고 펄럭이고, 발밑으로 핏물이 흥건하게 젖어 든다.
통증은 없었다. 그저 뜨거웠다. 불이 붙은 게 아닌가 싶었다. 작열이었다. 뱃속으로 시커먼 연기가 찼다. 그러자 두려워졌다. 이대로 불길이 나를 좀먹을 것 같았다. 먼지 구덩이로 가득한 마음에 어떤 의심조차 남지 않을 것 같았다.
안 돼, 외치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는다. 말린 혀가 목구멍을 틀어막고 있었다. 그래서 죽음이 가까워졌음을 알았다. 이토록 쉽게 끝낼 수 있는 것이 생이었다. 이토록 별것도 아닌 것이, 이토록, 이토록….
‘사현아.’
목소리가 들린다.
‘나는 내 안락한 삶에 새삼스레 안도할 때가 있어.’
그러자 치밀던 설움이 거짓말처럼 그쳤다.
“…….”
눈이 뜨인다. 새카만 차 안, 지독한 탄내가 났다. 목 아래로는 아무 감각도 없었다. 눈을 깜빡여 맺혀 있던 눈물을 흘려보냈다. 가슴을 맴도는 목소리는 마지막 순간에 얻은 소망에 대한 답이라고 믿었다.
나는 태양계 밖으로 밀려난 행성, 평생 그림자 아래 떠돌 먼지 구덩이, 텔레비전 속의 불행, 성여준의 삶과 아무 관련 없이 끝날 머나먼 재난이다.
“선배.”
그러니 마지막 순간의, 평생 전해질 리 없는 혼잣말 한마디쯤은.
“…선배.”
토해 내고 죽어도 되지 않을까.
“…….”
사랑해요. 숨을 쉬는 모든 순간마다 사랑했어요.
“…….”
정말이에요.
불길이 인다. 내 뱃속을 태우고 과거를 태우고 재앙을 태울 불길이. 눈을 감은 채 나는, 부디 뼈 한 조각 남기지 않고 세상에서 사라지게 해 달라고 빌었다. 다시 깨어났을 때는 되도록 아주 크고 튼튼한 번견의 우리 안이었으면 했다. 무럭무럭 자라나 성여준의 집을 빈틈없이 지키는 커다란 개가 되고 싶었다.
불이 옮겨붙는다. 따뜻하다. 성여준과 함께 걸었던 뜨거운 여름날의 운동장이 발밑으로 돌아온 듯했다.
<2권에서 계속>